-공금&갠소-
<설탕으로 만든 과자>
노예가 된 사실을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다.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숲을 지나 산맥을 건너 평야로 향했을 때,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지쳐 쓰러진 그 순간 아케론은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질적인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더욱 깊고 뿌리 깊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혼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노예가 된 운명에 반항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쇠사슬에 묶여 있는 몸을 발견하고도 반항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유를 빼앗기고도 저항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자유를 박탈당해 노예가 되어 쇠고랑을 찼다. 사슬에 이끌려 가던 그 순간 귓가에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네 생존을 원한다, 게르마니쿠스.’
그날로부터 7년 후, 아케론은 노예가 된 이후 처음으로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 아케론은 지금껏 무시했던 그 목소리를 향해 되물었다.
“너는 정말 이러한 결말을 바랐나?”
죽어가는 사내는 그저 웃을 뿐이었고, 아케론은 그에게서 답을 받지 못했다.
*
바람과 함께 눈앞을 스쳐 지나는 지난한 옛날의 추억.
아케론의 푸른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지러이 흩어지는 화려한 금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스스로를 버티게 한 말이 귓가에 울렸다.
‘살아라.’
지금껏 그 말로 인해 살아왔다.
오직 의무감 때문에 살아왔다. 제가 저지른 불명예를 덮기 위해, 적어도 마지막 남은 긍지만큼은 지키기 위해 그 약속 하나만큼은 수호코자 했으므로. 죄책감은 짐이 되어 어깨 위에 얹어졌으니, 그 무게에 괴로워하였음에도 아케론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짊어질 의무 때문에 부질없는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통의 나날들은 시작되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명예스럽게 살아가는 패배자의 삶이 고될 뿐이지.1)
그것은 매일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길이었고, 아케론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죽어가고 있었다. 불명예스러운 노예의 굴레에 얽혀, 자유를 잃은 채 타인의 유흥을 위해 목숨을 거는 천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러나 신의 심판대에 저를 바쳤음에도, 아케론은 제 운명의 끝을 보지 못했다.
죽음은 생각보다 멀었고, 삶은 길게 이어졌다.
그리 살지도 죽지도 않은 채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살아오며 그리고 아케론은 서서히, 서서히 무뎌져 가고 있었다.
죽음을 바라며 견디는 삶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의 몰락을 느끼며 아케론은 어느 순간부터 제가 맞이할 최후를 예견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살아, 아무것도 아닌 자로 죽어, 그렇게 노예 아케론으로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것.
그런데 어째서 저는 이 순간 일찍이 받아들였던 현재의 삶을, 그 이후의 미래를 이토록 부정하고 싶어 하나.
창문 밖을 응시하는 군청색 두 눈에 반항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모멸감!
그것은 7년간 제 엇나간 운명에 순응했던, 아니 스스로를 방관했던 저 자신이 느끼지 못한 로마 시민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오늘 오후 각성한 감정이었고.
찬바람을 맞으며 마음속 화기를 다스리고, 또 엉킨 듯한 머리 안의 고민을 날려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아케론이 슬쩍 고개를 돌려 무뚝뚝한 얼굴로 문가를 바라본다. 살짝 열려진 문 사이로 그리스인 노예가 자리하고 있었다. 첫날에 욕탕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 이후 줄곧 아케론을 담당했던 노예였다.
공손히 말을 기다리는 노예를 바라보며 아케론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행동에 서린 답변을 놓치지 않고 읽어낸 노예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케론이 행거에 놓인 짙은 녹색 팔리움을 꺼내 들었다.
“늦었군.”
식당에 들어서자 들려온 느긋한 목소리. 그에 아케론은 반응하지 않았다.
딱딱하고 고소한 빵에 잼을 바르던 루키우스가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케론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무뚝뚝한 얼굴로 제가 앉을 자리를 찾았다. 루키우스 바로 옆에 자리한 트리클리니움 위에 털썩 걸터앉은 아케론이 저 앞에 자리한 무화과 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식사는 여느 때와 비슷하게 훌륭했으나 자리는 제법 정적이었다.
평소에 루키우스는 식사 동안 나긋한 목소리로 아케론에게 말을 걸어 분위기를 적당히 풀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지금 이유 모를 침묵을 지켰고, 그에 그날 코나는 꽤나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오늘은 그냥 잠자리에 들어도 된다.”
유자청을 올린 요구르트를 스푼으로 떠먹으며 하는 말이었다.
식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었다. 향수를 넣은 물로 손을 씻던 중 아케론이 몸을 멈칫하고 루키우스를 흘끗 바라본다. 루키우스는 아래로 짙은 금빛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었다.
“피곤하구나.”
그리 말을 내뱉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무던하기 그지없었다.
식사가 완전히 끝나고 루키우스는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루키우스는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으나, 아케론은 그의 행동에서 미묘한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진하늘색 외투를 살랑거리며 식당을 빠져나가는 루키우스를 잠시간 바라보던 아케론이 고개를 돌려 다시금 호두를 까는 일에 집중했다.
딱딱한 과자 위에 조금 남은 꿀에 호두를 적시는 그의 눈이 시리도록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일정 또한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욕탕의 물을 더 뜨겁게 할 수 있나?”
“평소보다 말입니까?”
“그래, 완전히 몸이 익을 정도로.”
달이 뜬 밤, 아케론은 일과의 마지막으로 욕탕에 굳은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
사실은 목욕을 하기엔 늦은 시간이었으나, 아케론은 처음 저택에 온 날처럼 루키우스와 마주하기 싫어 그가 씻을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경험상 게으르게 보였던 루키우스의 일과는 의외로 루틴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각을 피해 기다리곤 아케론은 굳이 저를 담당하는 노예를 시켜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욕탕의 물을 데웠던 것이다. 충실한 노예는 같은 노예의 명령을 따랐고, 아케론은 열탕 안에 자리할 수 있었다.
‘피곤해….’
하루 씻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피로가 몹시 쌓여 따뜻한 물이 그리웠다. 열탕에 피로에 쌓인 몸을 녹이는 것은 나라를 초월한 민간요법이다.
그리하여 노예에게 굳이 밤중에 열탕을 준비시킨 아케론은, 지금 이 순간 뜨거운 물에 원하는 대로 뭉친 근육을 녹이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수증기가 가득 찬 뿌연 허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목욕 내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늘어져야만 했다.
루키우스가 피곤하다 말을 했으나, 사실 그것은 아케론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딱히 무얼 한 일이 없는데 아케론은 그날 경기를 치른 것만 같은 피로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연유로 아케론은 라벤더 냄새가 진동하는 열탕에 한참을 몸을 담근 채 피로를 녹여야만 했다.
욕탕을 빠져나온 그가 수증기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어쩐지 휘둘리는 기분이군.’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느낌은 아케론의 몸에서 기력을 마치 수건에 물을 짜듯이 앗아 갔다.
기진맥진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 아케론이 새하얀 튜니카를 옷에 거의 걸친 수준으로 둘렀다. 그러곤 그는 힘없이 너털거리는 걸음으로 욕탕을 빠져나왔다. 두통이 진해지는 기분이다. 미간을 누르던 그는 오히려 더 부산스러움을 느끼곤 욕설을 흘리며 손을 내렸다.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사이로 찬바람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 뜨거운 물에 푹 익힌 몸에 서늘한 바람이 닿아 살점이 칼에 저민 것처럼 화끈거렸다. 대충 수건으로 닦아낸 머리가 얼어 고드름이 언 듯하다. 아무리 노예와 다른 취급을 받는 주인의 정부라지만 그렇다고 머리를 말려 줄 노예를 제공받는 것은 아니다.
무딘 성격이라 평소에도 머리를 잘 말리지 않았던 아케론은,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한기에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욕탕으로 돌아가기 뭣해 그는 찬바람을 피하려 보폭을 넓게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
별채 근처에서 아케론이 걸음을 늦추었다.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내원을 감싼 회랑에는 보통 노예의 숙소가 있었지만, 아케론은 페리스타일 중간에 있는 별채에 살았다. 이 시각에 노예가 오갈 리는 없었다. 애초에 동선도 다른 곳이었으니까.
그러니 아케론은 뜬금없이 별채 앞을 서성거리는 누군가에 의문할 수밖에 없었다.
미간을 좁히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에는 니코마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품 안에 반쯤 열린 궤짝을 들고 방문을 서성거리는 사내를 마주하며 아케론은 눈썹이 꿈틀거리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제법 일은 잘한다지만, 지나치게 겁이 많은 그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무표정하던 얼굴 위에는 언뜻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탐탁잖은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아케론이 별채로 향하는 발걸음을 다시 이어 나갔다.
사부작, 풀 밟는 소리에 인기척을 눈치챈 니코마티스가 그제야 아 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케론 님.”
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는 일이 어지간히 고역이었던지, 본디 아케론을 무서워했던 니코는 그의 등장에 반색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니코마티스는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어색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아케론이 그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우물쭈물하던 니코마티스를 무시하던 아케론이 별채의 문손잡이를 잡고 몸을 멈칫한다. 침묵 끝에 짜증 섞인 말이 흘렀다.
“뭐지?”
그리곤 그는 몸을 돌려 니코마티스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니코마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선물하셨습니다. 이제 곧 가을인데 팔라온의 색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물?”
아케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니코마티스의 품 안에 자리한 커다란 궤짝을 응시하곤 그는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궤짝에 한눈에 보아도 귀중해 보이는 매끄러운 비단이 제각각의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아케론의 주의를 얻은 니코마티스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주인님께서 아케론 님은 골격이 커다랗고 어깨가 각이 져, 진한 색이 어울리신다 하셨습니다. 저택의 분위기에는 짙푸른 색이 어울리지만 아케론 님은 머리색이 따뜻한 계열이라 붉은색이 더 어울린다고 하셨습니다. 색이 진한 건 아니지만, 새하얀 튜니카 위엔2) 유백색도 우아해 보인다고….”
아케론이 실소를 흘렸다.
니코마티스는 아케론의 이상한 기색을 깨닫지 못한 채 즐겁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오늘 오후 세레스3)에서 들어온 비단을 내리셨습니다. 아버지가 상단에서 구매한 물품을 정리하고 주인님께 조금 전에 보고드렸습니다. 주인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오는 길입… 아케론 님?”
공손히 말을 내뱉던 니코마티스의 얼굴에 어느 순간 동요가 스친다. 신나게 주인의 명령을 따르던 그의 말이 끊긴 순간 아케론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차게 식어 있었다.
그 서늘한 얼굴 뒤에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감정이 있었다. 니코마티스가 예상 못 했던 강렬한 분노와 또 모욕감이 말이다.
그를 깨달은 니코마티스는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이었다.
말없이 궤짝을 바라보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네 주인은….”
삭막하고 건조한 목소리에 니코마티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원래부터 이랬나?”
니코마티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원래 제멋대로이신 분이긴 한데…… 그래도 주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잖습니까? 동생같이 귀엽기도 하고.”
그 순간 아케론이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그제야 제 말실수를 깨달은 니코마티스가 아차 하여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런 그를 시퍼런 눈으로 바라보며 아케론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입을 조심하는 게 좋겠군…….”
아케론은 먹잇감을 노리는 승냥이처럼 니코마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듯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리는 불쌍한 노예를 향해 서늘한 말이 내려앉았다.
“…니코.”
군청색 눈이 밤의 깊은 어둠을 뚫고 짐승의 것처럼 푸르게 빛났다. 그 눈과 마주하고 니코마티스는 얼이 나간 멍청이처럼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네, 네.”
그는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그,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등 뒤로 넘어온 말에 아케론은 굳이 답변하지 않았다.
*
아케론이 조소했다.
‘토라진 정부를 귀물로 달래려 드는 주인이라….’
노예에게 받은 궤짝은 꼴도 보기 싫어 방 한편에 놔뒀다. 그는 그것을 보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불현듯 화가 솟았다.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려 아케론은 다른 일을 하려 했다. 의자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간단한 일지를 쓰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사실 그건 아케론 하루 일과의 일부이기도 했다.
일기라기엔 지나치게 담백한 글은 수사의 힘을 빌리지 않아 문학적인 요소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 기록에 가까운 일지를 아케론은 노예로 팔리기 전부터 습관적으로 작성하곤 했던 것이다. 비록 파피루스를 구할 위치도 못 돼 진흙 벽 구석에 새기는 정도였으나, 아케론은 지금껏 하루도 빠짐없이 일지를 써내려 왔다.
하루의 일을 복기하는 일은 습관에 가까웠다. 진흙 벽에 새겨진 일지를 보관할 수 없더라도 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그는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루의 일을 기록을 하면 제가 그날 저지른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러면 더 나은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 익숙해진 일은 사실 평생의 습관이 되었고, 아케론은 이제는 그리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조소하면서도, 그리하고 있었다.
‘뭘 기대하는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환경.
손에 감기는 안정감 있는 갈잎 펜을 움직여 마지막 획을 파피루스 위에 새긴 아케론이, 잠시간 호박색 등불 아래 놓인 전문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냄새가 나지 않는 좋은 기름을 쓴 등불을 바라보다가, 책상 귀퉁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쓴 일지들이 뭉텅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일지의 보관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조약돌만을 위에 얹은 채, 누가 보든 상관없다는 듯 책상 위에 뻔뻔하게 자리했으니까.
사실 아케론은 그것이 없어지든 상관이 없었다.
아케론이 일지를 지금껏 써온 이유는 그것을 보관하여 전기를 만들려는 용도가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도 없게 그의 일지에는 사감이 적혀 있지 않았고, 단지 행동의 나열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끔 마음의 파편이 빠져나온 듯한 구절이 엿보였긴 했지만.
[무가치한 삶은 어째서 계속되어야 하는가?]
문득 눈길이 닿은 곳에 쓰여 있던 구절이었다.
속담인가? 아니면 철학가의 문구인가?
어쩐지 마음을 사로잡는 문구를 잠시 바라보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실소를 흘렸다.
‘무가치하다라….’
입 안이 쓰다.
가라앉은 얼굴로 창문을 바라보던 아케론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운다. 그것은 차츰 수면 아래로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깊어져, 어느 순간부터는 까마득할 지경에 이르렀다. 수면에 허우적거리는 듯한 기분에 그가 함몰되던 그 순간이었다.
“아케론.”
돌연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에 사내의 양어깨가 뻣뻣이 굳어졌다.
깊은 침묵 끝, 아케론은 결국 목구멍 밖으로 새어 나오는 깊은 한숨을 막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창백한 얼굴에 일순간 아득한 빛이 스쳤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바로 숲에서 보았던 새하얀 달이었다.
*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저를 방문할 일이 무에 있을까?
다만 뜻밖인 점은 루키우스가 오후에 내뱉었던 제 말을 어기고 별채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적어도 내뱉은 말을 어기는 인물은 아니기에, 아케론은 잠시간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을 연 아케론은, 제 뺨을 바로 움켜쥐는 손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의도가 아닐 리가 없지.
아니나 다를까, 루키우스는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굴었다.
“으응, 아케론.”
우유로 만들어진 듯한 부드러운 손이 홀쭉한 뺨을 부여잡고 선명한 광대뼈를 더듬었다.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는 사내에게 달라붙어 루키우스는 홀린 사람처럼 그의 얼굴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만지작거렸던 것이다. 까치발을 들며 강인한 턱에 입을 맞추려 드는 루키우스를 향해 아케론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케론, 하악, 아케….”
숨결을 흘리는 루키우스가 돌연 제 몸을 부드럽게 미는 손에 눈을 크게 뜨며 멍하게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그 간단한 손길이 뭐라고 그리도 충격에 물든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지.
사내는 그를 삭막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이제 제법 춥습니다.”
루키우스는 거부당한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팔라움을 여며 주는 사내의 손길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루키우스의 분홍색 입술이 달싹였다.
“날 안아.”
바람과도 같은 말이 달콤하게 흘렀다.
“날 안아다오, 아케론.”
아케론은 뜻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아니라 하셨잖습니까?”
루키우스는 숱 많은 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하지만 참기 힘들어서….”
마치 닳고 닳은 창부처럼 말하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무뚝뚝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무심함에 루키우스는 몸이 달아오른 듯 행동했다.
“아, 아케론!”
팔리움을 움켜쥔 아케론의 손을 쳐내고 루키우스는 그의 멱살을 잡아 쥔 채 까치발을 들었다. 새끼 토끼 같은 힘에 아케론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이끌려 갔다. 그에게 얼굴을 내어주었다. 발뒤꿈치를 양껏 든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턱을 앙 물곤 작은 혀로 살을 핥으려 들었다.
면도를 한 사내의 날카로운 턱에 타액이 묻어나는 길이 생긴다. 아케론은 말캉한 감촉이 살에 닿는 순간 슬쩍 얼굴을 찌푸리고 루키우스를 노려보였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굳어진 때였다.
“왜…?”
아케론의 손길에 밀려난 루키우스가 흔들리는 자안으로 아케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루키우스가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루키우스의 작은 입술이 앙다물리고, 잘근 아랫입술을 씹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분기가 스치고 있었다. 그는 몹시나 억울한 눈으로 아케론을 빤히 바라보았고, 아케론은 그에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삼켜야만 했다.
“왜 날 피하는 거냐.”
그는 분기를 참지 못해, 새하얀 얼굴을 발그스레 물들이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응? 왜 나를 피하는 거야?”
그 화가 난 얼굴에서 아케론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왜, 날 피해?”
루키우스는 마치 연인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튜니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발을 동동 구르는 루키우스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마치 손을 대면 톡 눈물을 쏟아낼 것같이 가여웠다.
“아케론, 아, 아케론.”
아케론은 결국에 입술을 열고야 말았다.
“안아드리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연인을 연기하는 루키우스에게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몸을 섞는 게 낫다….
그리하여 아케론은 루키우스을 흉광이 스치는 눈으로 노려보며 손을 뻗었던 것이다.
쾅!
나무문을 큰 소리가 나게 열어젖히곤 아케론이 화를 억누른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니 그런 표정 말고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제발.”
*
아케론이 분노를 삼켰다. 속으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왜지?’
왜 삶을 포기한 주제에 이따위 자그마한 일에 굴욕을 느끼는 건가. 쇠스랑을 차고 가축처럼 대해지던 때에도 이토록 분노한 적이 없었건만….
‘이렇게 과민 반응할 필요가 없건만.’
그러나 다짐과 다르게 번뜩 튀기는 부싯돌의 빛과 같은 눈은 허공을 감정을 담아 노려보고 있었다. 명확한 분노가 들끓는 두 눈이었다.
“으응.”
은은한 달빛이 적막이 자리한 방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아케론은 침상 위에 누워 루키우스의 금발을 손에 감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중이었고.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아케론은 몸을 더듬는 손길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돌리고야 말았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겨드랑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순수한 얼굴을 바라보던 아케론이 몸을 멈칫한다. 다리를 얽는 다리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아케론의 턱을 말랑한 입술이 깨물고, 그 순간 어린 식물의 잎처럼 여린 손이 강철처럼 강인한 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케론…….”
그 아련한 목소리. 아랫가슴을 더듬는 손길에 아케론은 그 순간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삼켜야만 했다. 그는 이윽고 제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드는 손에 결국 참지 못해 손을 뻗고야 말았다.
“왜…?”
연한 손을 붙잡은 순간 루키우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철처럼 강인한 가슴은 여린 숨결 하나를 막지 못했다. 아케론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그 손을 침상 위에 얹고 그 위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덮어 눌렀다. 얇은 손목에 흉이 남을까 두려워, 힘 조절을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쓸모없었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아랫배의 고랑을 손으로 쓰다듬었고,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디 이것 또한 어찌하는지 보겠어.’
그리 말을 하는 듯한 도발적인 시선에 아케론은 미간을 꿈틀거리고야 말았다.
손은 수풀이 자리한 아랫배를 살살 긁고 배꼽 주변 갈라진 틈을 손톱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시선을 내려 그를 보았을 땐 루키우스의 사랑스러운 얼굴 위에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내가 아름답다 했지 않았어?”
그리 말을 내뱉은 루키우스는 고개를 숙여 아케론의 가슴에 키스를 했다. 아케론의 숨이 멈춘다. 일그러진 얼굴로 아래를 보니 그는 고양이 같은 분홍색 혀로 갈비뼈 위에 자리한 긴 창상을 길게 핥고 있었다.
황금색 짙은 눈썹을 내리깔고 상처를 핥는 루키우스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다. 그는 달이 뜨는 날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님프와 같았다. 순간 경직된 사내의 몸을 루키우스는 얼음을 핥는 개처럼 작은 혀로 한참을 녹여 먹었다.
숨을 억누르며 그를 방관하던 아케론은 어느 순간 돌연 루키우스의 작은 손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미간을 찡그린 루키우스가 그를 항의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심통이 난 말이 흘렀다.
“대체 왜 그래? 아케론.”
아케론이 그를 노려보며 억누른 말을 내뱉었다.
“품에 안고 달래 주기를 바랐지 않습니까?”
“아니, 오늘은…….”
다급히 말을 막은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아케론은 새끼 강아지처럼 제 아랫입술을 빨고 핥는 루키우스의 시도를 막지 않았다. 시리도록 새파란 눈은 입술이 탐해지는 와중에 루키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은 날 네 마음대로 하거라.”
입술을 거두며 속삭거리는 바람 같은 말에 아케론은 얼굴을 순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날 네 마음대로 해, 아케론.”
아케론의 입술 밖으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정말 자기 멋대로 하는군.’
아침에는 노예를 대하듯 명령을 내리고, 밤에는 주인을 대하듯 애원을 하는 루키우스의 모습이 거슬렸다. 그러나 루키우스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에 눈썹을 꺾으며 불쾌함을 드러내던 아케론은 제 목을 껴안는 팔에 모든 것을 잊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입술을 탐하고야 말았다.
고깃덩이를 맛본 개는 주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두꺼운 팔이 얄팍한 허리를 잡아당겼다. 루키우스는 개박하에 홀린 고양이처럼 아케론의 몸에 매달리곤 본격적으로 그를 탐하려 들었다. 두 손으로 아케론의 얼굴을 더듬으며 루키우스가 새하얀 얼굴에 황홀한 빛을 띠었다. 콧등으로 뺨과 턱선을 비비면서 루키우스는 신비로운 빛의 자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은 몽혼히 흐려진 얼굴을 마주하고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아케, 하악… 아케로온….”
그날 밤에 보았던 진중함이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다.
아케론에게 명령을 할 때의 고압적인 모습 또한.
그곳엔 그저 사내에 혼이 팔린 천박한 창부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루키우스는 마치 발정 난 개처럼 굴고 있었다.
차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케론이 돌연 정색하며 루키우스의 엉덩이를 잡아 비틀었다.
“아!”
손에 감기는 녹진한 살을 한 움큼 쥐자 시원한 신음이 흘렀다. 아케론의 몸에 닿은 루키우스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쾌감에 절여진 얼굴을 도리질 치는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아케론은 아랫배가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한숨.
커다란 손이 작은 엉덩이를 살을 으깨듯이 비틀었다. 아케론은 부드러운 밀반죽을 쥐어짜듯 했고, 그에 루키우스는 입술 밖으로 가는 신음을 흘리며 헐떡거렸다.
아케론이 고개를 숙였다. 루키우스는 고혹적인 눈을 깜빡거리며 아케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력적인 얼굴을 불타는 얼음 같은 눈으로 노려보며 아케론은 매끄러운 살결에 손을 미끄러트렸다.
“아…….”
신음이 흐른 순간 굳은살이 박인 손이 움푹 파인 골 사이를 파헤치고 있었다.
밀부는 향유로 적셔져 있었다.
루키우스가 눈을 감으며 창백한 얼굴 위에 체념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 명백한 순응의 태도는 사내의 가학심을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얼굴, 잠자리가 버거운 듯 금빛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고 잘게 떠는 순진무구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 루키우스는 사내의 마음을 홀리려 든다.
낮과 다른 모습을 한 루키우스를 노려보며 아케론이 숨을 멈췄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구멍 주위를 누비는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가는 신음이 흐르고, 향유가 적셔진 구멍이 부드럽게 풀린다. 손톱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던 뻑뻑한 밀부가 느슨해질 때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침대에 눕히고 그의 위를 타고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음란한 것.
새하얀 이불보 위 루키우스의 나신이 달빛 아래 썩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물체는 보는 이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케론은 굳이 그 아름다움을 말로 찬양할 생각이 없었다.
희고 보드라운 도톰한 둔부는 갓 구운 빵과 같았다. 징이 박힌 듯 두툼하고 거친 손이 그것을 거칠게 벌렸다. 밀부가 벌려진 순간 루키우스는 몸을 움찔거리며 얼굴 위에 수치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밀부는 처음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연한 분홍빛을 띠곤 어여쁘게 다물려져 있던 그것은, 저택에 온 이후로 이어진 문란한 생활로 모양이 변해 있었다. 체리색으로 살짝 부푼 밀부가 폭신했다. 손가락 하나가 들어가는 것도 버거웠던 그곳은, 지금 완전히 다물리지 않아 작은 틈을 보이고 있었다.
밀부는 검지를 우물거리며 받아먹었다.
그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애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전쟁에 나가기 직전,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느끼는 흥분과도 같았다.
아케론이 손가락 사이로 음액처럼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게 안길 상상을 하면서 향유를 항문에 집어넣었을 루키우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둔덕을 파헤치고 신음을 흘렸을 그 음란한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잠시간 그 즐거운 상상을 즐겼던 아케론은, 돌연 어느 생각에 이르러 몸을 굳히고야 말았다.
‘내게 안길 상상을 한 것이 아니지….’
열정이 스쳤던 얼굴이 다시금 무뚝뚝하게 굳어져 간다.
루키우스가 품은 상상의 대상은 저가 아니라, 은밀한 정인이리라.
“아, 아케론… 아케론.”
정신을 차린 아케론이 현실로 돌아왔다.
루키우스가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촉촉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저를 올려다보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건조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외딴 절벽 위에 저택을 홀로 짓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탕자, 창부, 그리고…. 생각은 그곳에서 끊겼다.
“……!”
아케론이 돌연 충동에 이끌려 행동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허리를 비틀어 제 밀부를 구경하는 사내를 부끄러움이 드러난 얼굴로 올려다보던 루키우스. 그의 몸을 침상 위에 짓누르고 아케론은 부드러운 살 둔덕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루키우스의 입술에 비명이 서린 순간이었다. 그는 몸을 버둥거렸으나, 아케론은 반항을 제 가슴으로 짓눌러 무력화시켰다.
“아, 아케론!”
목소리는 당혹성이 섞여 있었다. 아케론은 얄쌍한 허벅지를 양손으로 꽉 부여잡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 시야가 어둠이 되고, 이목구비에 젖은 살이 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케론은 얄팍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들이마시는 숨에는 습기가 섞여 있었다. 마치 장미무더기에 얼굴을 묻는 것만 같이 강렬한 향유의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얼굴을 감싸는 살은 그 어느 침구보다 부드러웠다.
식욕을 느끼며 아케론이 혀를 뻗었다. 밀부에 혓바닥이 스치는 순간 루키우스는 경기를 일으켰다.
“그건 됐다, 아케론… 아니야, 그건…….”
평소에 어떤 수치스러운 자세도 마다하지 않던 루키우스는 뜻밖에도 그 순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며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건 됐어, 아케론…… 그건 됐으니 그냥, 그냥.”
그는 시트 위를 손으로 더듬으며 아케론의 품을 빠져나가려 들었다.
아케론은 제 품을 빠져나가려는 루키우스의 행동을 허리를 끌어당기며 가볍게 제압했다. 윽 소리를 흘리는 루키우스의 하체를 위로 뻗게 하곤 아케론이 다시금 밀부 위를 혀로 핥았다.
“아, 제발…!”
루키우스는 마치 죽음을 맞이한 사람처럼 흐느꼈다.
처절한 목소리로 간원하며 그는 시트를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아케론은 그의 탄원을 듣지 못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오므라들었다 펴지는 그 은밀한 비처뿐이었으므로.
귀에 감기는 신음은 오히려 욕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이것이 쾌락인지, 분노인지, 흥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케론의 심장은 지금 이 순간 빠르게 뛰었고, 그는 무슨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이 고조된 상태였다.
“그만, 그만해. 명령…….”
말을 듣지 않는 게 아니었다.
들리지 않은 것이었지.
혓바닥은 밀부를 느릿하게 핥았고, 루키우스는 그에 몸을 퍼드덕 떨었다. 그, 그만! 그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으나 아케론의 손에 단단히 붙들린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이, 이건….”
무어라 반항하려던 루키우스는 이윽고 비처 위를 스치는 뜨거운 숨결에 하윽!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무너트리고야 말았다. 부드럽고 뜨거운 혀가 밀부를 파고든 탓이었다. 시트를 손으로 뜯으며 루키우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하, 악! 안 돼!”
아케론은 버둥거리는 몸을 억세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안 돼, 안…….”
여유가 무너진 루키우스가 애처롭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에 기이한 만족감을 느끼며 아케론은 질척하게 젖은 밀부를 혓바닥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었으나, 단단히 고정된 둔부에 작은 들썩거림만이 허용될 뿐이었다.
아 윽. 죽어가는 신음이 흐르고, 연이어 게걸스러운 소리가 이어진다. 비좁은 밀지에 얼굴을 처박고 아케론이 턱을 움직였다.
두꺼운 혀는 틈새를 파고들어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움직였다.
숨을 거칠게 들이켜며, 아케론이 서서히 행위에 젖어들어 갔다. 향유가 번들거리는 뺨은 어느 순간부터 축축이 젖어 있었고, 턱에는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케론의 얼굴이 서서히 열기에 젖어갔다. 떨리는 턱선. 그 순간 사내는 해소되지 않는 굶주림을 느꼈다.
혀는 발갛게 무르익은 살을 헤집고 루키우스는 창에 찔린 자의 신음을 흘렸다. 억세게 구멍을 빨아당기고 또 안을 헤집는 혀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운 숨이 흘렀다.
혀로 뒤를 파헤치던 와중의 일이었다. 아케론은 어느 순간 루키우스의 몸이 축 늘어진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아케론이 향유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살 둔덕에서 느릿하게 떼어내고 터질 듯이 부푼 성기를 움켜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루키우스의 아래 이불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후욱.”
루키우스는 정신을 잃은 듯 침상에 얼굴을 묻은 채 할딱거리고 있었다.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몸 위로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귓가에 들려온 작은 흐느낌.
아케론이 순간 이를 악물고야 만다. 루키우스는 울고 있었다.
엎어진 몸이 가늘게 떨려온다. 아케론의 거칠어진 숨결에는 뜨거운 열기가 묻어 나왔다. 숨결은 불규칙적이었고,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몸을 굳혔던 아케론이 몸을 움직였다.
루키우스의 가늘게 떨리는 몸에 손이 닿는 순간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루키우스가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희롱은 그만하고, 넣어줘.”
그리 말하며 루키우스는 침상에 묻었던 얼굴을 흘끗 들어 아케론을 응시했다. 보라색 눈은 사내를 꾀는 것이었고, 그와 마주한 아케론은 배수구에 물이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장의 북소리와 같이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고조된 얼굴로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열정에 휘말린 채였다.
“아!”
가는 허리에 팔을 감으며 아케론은 그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쳤다.
“하흐윽!”
아케론의 몸을 어루만지고 그를 도발하던 루키우스는 더 이상 여유롭지 못했다. 가는 허리를 부여잡고 아케론이 고개를 떨궜다. 루키우스는 어지러운 금발을 몸 위에 흩뿌린 채 상체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작은 엉덩이로 흉기를 받으며, 그는 제 뒤를 꿰뚫는 물건이 버거운 듯 숨을 허덕거리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새하얀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두 눈을 번뜩거렸다.
“아케, 하악, 케론!”
억센 손으로 루키우스의 골반을 잡아당기곤 아케론이 성기를 꽂아 내렸다. 허억, 비명이 귓가에 흐르고, 아케론은 이어지는 달콤한 울음소리에 더욱 성기를 키우며 숨을 허덕거렸다.
두 눈에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기를 조이는 밀부. 그에 고통과 쾌락 그 어드메의 감각에 휘말리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짙은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작은 입술이 벌어져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고통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고 루키우스는 척추가 도드라지게 몸을 웅크리며, 성교 내내 학학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흐윽.”
아케론의 정신이 정사에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첨단 끝의 쾌락이 뇌를 들끓게 만드는 듯하다.
또다시 아케론은 이전의 정사와 같은 수순으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것!
확장된 동공. 푸른 불꽃이 튀기는 눈으로 작게 웅크린 몸을 노려보던 아케론이 돌연 손을 뻗어 눈앞에 아른거리는 화려한 금발을 잡아당겼다.
“아!”
루키우스의 입에서는 녹아내리는 교성이 흘렀다. 그 순간 아케론은 하늘 높게 고조되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고야 말았다.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사냥에 나선 늑대의 것처럼 번뜩거리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동, 분노, 격정에 휘말려 아케론은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허릿짓은 거칠어져 있었다. 태양 볕에 그을린 거칠고 두꺼운 몸이 버둥거리는 새하얗고 부드러운 몸을 뭉갠다. 살 오른 둔덕에 성기를 꿰뚫는 허릿짓은 불규칙적이고, 또 조급했다.
아케론이 문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한순간 세상이 암흑으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울화에 휩싸여 사내는 마치 창에 꽂힌 짐승처럼 굴고 있었다. 사냥을 당하기 직전, 몰이꾼에 몰려 위기를 직감한 그런 애처롭고도 맹렬한 짐승의 발악처럼 아케론은 거세게 날뛰고 있던 것이었다.
“아아!”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눈꼬리에 눈물을 흘리며 발을 휘젓는 그의 몸을 근육이 단단히 박힌 몸으로 짓누르며 아케론이 숨을 헐떡거렸다.
가학심이 섞인 얼굴.
군청색 눈에는 초점이 흐릿했다.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새에 흥분을 하고 있었다. 쾌락과 만족감이 스치는 얼굴로 아케론이 비명을 내지르는 입술을 입술로 머금다가, 다시 작은 머리통을 침대 위에 처박았다.
“학, 악, 흑, 읏, 아, 아케, 힉!”
흔들리는 가냘픈 몸.
아케론은 그의 골반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루키우스의 몸에 체중을 실었고, 루키우스는 저를 짓누르는 몸에 짓눌려 끙끙 앓았다. 다 죽어가는 병자의 신음을 흘리며, 가는 다리를 부들거리며 체구에 맞지 않게 커다란 성기를 받는 루키우스의 모습은 타인에게 동정을 살 만한 모습이었다.
“아, 윽, 학!”
퍼런 핏줄이 도드라진 두꺼운 성기는 새하얀 살 둔덕을 꿰뚫었고, 그럴 때마다 루키우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한참을 가로질렀다. 사내의 커다란 손에 휘감긴 금발이 부스러지는 달빛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고, 끈적한 땀으로 젖은 사내의 몸이 욕망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몸에선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케론의 동공이 흔들렸다.
금빛 파도가 눈앞에 물결치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입 안에 퍼지는 비릿한 혈향을 느끼며 그는 억눌린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돌연 거친 숨이 흘렀다. 어지럽던 시야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귓가에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흘렀다.
“흐윽…….”
순간 아케론은 새하얘진 얼굴로 몸을 뻣뻣이 굳힐 수밖에 없었다.
‘눈물?’
루키우스는 울고 있었다.
“왜….”
어지러운 금발이 얼굴을 가리고, 루키우스의 눈물에 젖은 눈이 드러난 순간, 아케론은 그 순간 심장에 칼이 꽂히는 충격을 느끼고야 말았다.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치는 충격을 느꼈다.
아름다운 두 눈.
“왜…?”
느릿한 숨을 내뱉으며 아케론이 손을 움직였다. 떨리는 손으로 젖은 금발을 조심스럽게 쓸고 아케론은 잠시간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신물을 삼켰다.
“왜 난폭하게…… 굴어.”
루키우스는 울음을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흐윽!”
아케론은 그게 신경이 쓰였다.
‘아, 제기랄.’
루키우스의 눈물이 어느 정도 잦아들 때 아케론은 또다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흥분되고야 말았다. 눈물에 젖은 순수한 창부의 얼굴에 이끌리고야 말았다. 육중한 몸이 움직일 때 루키우스는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린 채 힉 소리를 흘렸다.
“후욱…!”
그것은 아까보다는 한층 더 부드러운 정사였다.
‘제기랄….’
단단히 잡지 않으면 무너지는 몸을 시뻘건 손자국이 남도록 움켜쥐어 당기며, 아케론이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의 눈이 충혈되어 실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새하얀 둔부를 가르는 남근이 터질 듯 부푼 시점, 아케론은 그의 동근 어깨를 깨물고 싶은 욕망을 삼키려 애를 썼다.
‘제길, 아, 이건….’
고통에 질린 루키우스의 얼굴이 새하얗다. 울먹거리는 얼굴에 매력을 느끼며 아케론은 돌연 배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길에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기도가 화상을 입은 것만 같았다. 뇌수가 들끓는 것만 같았다.
전장에 돌입했을 때보다 더한 흥분감, 고조를 느끼고 있었다.
불에 들끓는 주전자처럼 아케론은 몸이 불타오르는 작열감을 느끼며 숨을 떨고 있었다.
고통에 바들거렸던 루키우스는 어느 순간부터 침상 위에 올려놓은 새하얀 발을 꿈틀거리며 끈적한 소리를 흘렸다.
“아, 아아!”
동근 이마를 가리는 달콤한 금발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눈물에 젖은 루키우스의 얼굴이 드러난다. 아케론은 더 이상 폭력적으로 그를 짓이기지 않았으나, 루키우스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나, 나……. 왜…?”
아케론은 흘러내린 금발 사이, 원망에 젖은 자안에서 도저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흑, 왜 또 그래….”
그 순간 아케론은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루키우스.”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내가….”
“…….”
“너를 원한다.”
그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네가 원하는 것처럼.”
아케론은 오시하는 사람처럼 제 아래 몸을 떠는 루키우스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날개뼈가 도드라진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긴 시간 입술을 열지 않았다. 아니, 그는 몸을 굳힌 채 그렇게 얼음 동상이 되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차분히 내려다보는 사내의 얼굴에 눈이 강렬히 불타고 있었다.
“…….”
루키우스는 돌연 침대에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치렁한 금발을 폭포수처럼 떨어트린 채 숨을 헐떡거리는 루키우스를 뜨거운 시선이 쓸었다. 새하얀 얼굴에는 감정이 식어 있었다. 그는 거짓말처럼 조금 전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우고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침묵이 계속될 그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비켜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루키우스가 중얼거렸다.
“내 몸에서 떨어져.”
루키우스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를 아케론은 마주 닿은 살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서 늘어진 성기를 완전히 빼어내고 루키우스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저를 부축하려는 손마저 차갑게 물리곤 루키우스는 건조한 눈으로 아케론을 응시했다.
“너는….”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건방지구나.”
동정을 바라던 애처로운 눈이 서늘하게 식고 눈가에는 분노가 일렁거린다. 손을 뻗어 튜니카, 얇은 한 장의 천을 잡아챈 루키우스가 엉망진창이 된 몸에 그것을 두르곤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옷을 갈아입는 루키우스를 빤히 바라보던 아케론이 그 순간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습니까?”
충동에 내뱉은 말의 어감은 사뭇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분노가 물결친 순간, 아케론은 제가 폭주하고 있음을 깨달았으나 스스로를 도저히 다잡지 못했다.
“꺼져.”
“내게서 그 사내를 보고 있었잖습니까.”
내가 왜 네게 이렇게 휘둘려야 하는 거지?
“꺼지라고.”
“제가 부족했다면 앞으로 더….”
이죽거리며 내뱉는 조롱하는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흉흉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루키우스가 탁상 위의 잉크병을 잡아채어 아케론을 향해 던진 것이었다.
“내 눈앞에서 당장 꺼지라고 했어!!”
타앙!
벽에 부딪힌 잉크병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된다. 유리가 꽃이 피어나듯 부스러지는 그 순간에도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군청색 눈은 그저 서늘하게 루키우스를 좌시할 뿐이었다. 차가운 두 눈은 어느 순간 섬찟한 빛을 흘렸다.
“당장 나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리고 그 순간 아케론의 손이 흥분에 날뛰는 청년을 향해 뻗어져 나아갔다.
“이, 건방진… 악!”
자안이 크게 떠진다.
찬란한 금발이 허공에 물결친 순간이었다.
두피가 당겨지는 고통을 느낀 루키우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홱 꺾는다. 단단한 손에 머리채가 부여잡혀 루키우스는 경악으로 얼굴을 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마주한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이 그는 두 눈을 흔들며 저를 거칠게 휘두른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떨리는 숨이 흐르고, 그 순간 스산한 목소리가 차디찬 공기를 꿰뚫었다.
“언제까지 네 멋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루키우스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언제까지 네 멋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채찍으로 날 다스릴 건가? 노예시장에 팔아 버린다 겁을 줄 겁니까?”
부드러운 금발을 단단히 움켜쥔 채 사내는 말을 이었다.
“이, 이거 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키우스가 몸을 버둥거리며 반항을 한다. 그는 이를 악물며 아케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몸부림에도 단단한 손은 풀릴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억세질 뿐이었다.
“놔, 놓으라고!”
아케론의 손을 긁으며 몸부림을 치던 루키우스가 뒤늦게 제가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를 표독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낭패에 젖은 얼굴을 아케론이 얼음장 같은 눈으로 내려다본다. 으득, 이를 악문 루키우스가 치기에 물든 얼굴로 아케론을 향해 쏘아붙이듯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노예 주제에… 감히!”
아케론의 입술 끝이 그 순간 비틀렸다.
“내 목숨을 거둔다 협박이라도 하고 싶습니까?”
루키우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걸로 절 당신의 손아귀에 움켜쥐고 싶습니까?”
“…….”
“저를 그렇게 저택에 있는 한낱 노예처럼 그리 마음대로 다루고 싶습니까?”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기세가 수그러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 부딪치고, 잘게 떨리는 동공을 노려보며 아케론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걸 원합니까?”
답변은 없었다. 아케론의 입가에 헛바람이 흐른 순간이었다.
“아흑!”
“착각하지 마십시오. 루키우스.”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애처로운 신음이 흘렀다. 루키우스가 아름다운 눈매에 눈물을 아롱 매달고 아케론을 노려보았다. 그는 위협에 결국 완전히 굴복을 하지 않았다. 꺾을 수 없는 높은 자존심이 드러나는 얼굴에 아케론은 기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명령을 거부할 자유도, 권리도 없는 노예이지만……. 마음이 없는 물건은 아니지”
이끌리고 있었다.
“……내가 네 목을 비틀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다 생각해?”
“…….”
“나를 도발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아케론은 머리채를 쥔 손을 당겼다. 너무나도 쉬이 흔들리는 몸이 침상 위에 내팽개쳐졌다. 풀썩, 이불 위에 맥없이 쓰러지는 몸을 뒤로하곤, 아케론은 널브러진 팔리움을 주워 들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방 안은 적막이 가득 찼고, 루키우스는 한참을 침상 위에서 엎어진 채 몸을 다잡지 못했다.
*
밖으로 나선 아케론이 향한 곳은 발코니였다. 오랜 시간 발코니에 처박혀 아케론은 머리까지 치밀어 오른 열기를 식히려 들었고, 새벽 별이 뜰 즈음에서야 별채로 귀환했다.
돌아오니 루키우스는 보이지 않았다. 침상에는 온기마저 느껴지지 않았고. 구겨지고 더러워진 이부자리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아케론은 문득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물체에 손을 뻗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손에 걸리는 화려한 금발을 발견하고 미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루키우스.’
그의 금발은 아케론이 알고 있는 이들의 것 중 가장 화려한 것이었다….
순도 높은 금을 녹여 실로 뽑은 듯한 머리카락을 잠시간 바라보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얼굴 위에 미묘한 열망을 드러냈다.
물기를 머금은 제비꽃 색 자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내의 두 눈이 어둠 속 새파랗게 반짝였다.
‘무가치한 삶이라면…… 분노 또한 필요가 없을 텐데.’
복잡함이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금발을 거머쥔 손을 주먹 쥐며 사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째서 나는 그의 앞에서 나를 잃는가…… 아니, 잃는 게 아니라 사실 그 반대가…….’
그날 밤 아케론은 해가 뜰 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
새하얀 햇볕이 저택 위의 로마식 저택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은 서향으로 트인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햇살은 우묵한 눈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눈썹 위로 칼날 같은 햇볕이 내리쬈다. 아케론이 희미한 신음을 흘릴 무렵에 그의 귓가에는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말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님.”
평소라면 노예가 오기 전에 정신을 차렸을 아케론은, 푹신한 베개를 접어 귀를 막고야 말았다.
“…론님…… 케론 님.”
몸을 웅크리는 아케론이 다시 달콤한 잠에 젖어들려고 할 순간이었다.
문득 귓가에 울리는 고함에 아케론은 순간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아케론 님!”
새파란 눈이 거짓말처럼 허공에 드러났다.
“…….”
정적이 짧게 흐르고,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갔다.
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것이었다.
‘아, 젠….’
순간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설을 이를 악물어 참아 내곤 아케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케론이 잔뜩 인상을 썼다. 허공 어느 한 곳을 노려보는 군청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 순간 손에 휘감기는 화려한 금발을 떠올리고 있었다. 입이 바짝 말라 마른침을 삼키며 아케론이 흉흉히 얼굴을 구길 때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정적 속 들려온 말에 아케론이 침묵 끝에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
듣기에도 몹시 고역스러운 목소리는 아케론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아케론이 착잡해하며 침상 아래에 발을 디뎠다.
그때였다.
“잠이 부족하면 더 주무셔도 됩니다. 주인님께서, 당분간은 주인님이 식사를 하신 후에 식당에 드시라 전하시라고….”
‘…뭐?’
아케론이 바닥에 발을 댄 자세 그대로 우뚝 선 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서서히 균열이 번져 나갔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 불길함에 이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아케론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장 아트리움으로 가겠다.”
이어진 말에 아케론은 와그작 얼굴을 완전히 구기고야 말았다.
“아니요, 아케론 님. 주인님께서는 이제 그곳에 몸을 들이실 필요가 없다 하십니다.”
그날 이후로 루키우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충동적으로 그를 겁박한 후에, 아케론은 처음에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그는 발코니로 나아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흥분을 삭일 뿐이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저를 노려보는 그 얼굴이 입 안을 바싹 마르게 하고, 배꼽 아래 불길을 들끓게 해서.
아케론은 찬바람에 저를 내놓은 채 한참을 정사 후의 열기와 뒤섞인 그 흥분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그 순간 아케론은 그저 방황할 뿐 후회하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으나, 항상 여유롭고 나른한 모습으로 저를 손아귀에 주무르던 루키우스의 무너진 모습을 본 것이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앙칼지게 눈을 뜨며 분기에 차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썩 마음에 들었다.
루키우스가 저를 채찍질한들, 혹은 노예시장에 팔아버린들, 혹은 칼로 썰어버리든 후회하지 않으리라.
사실은 그건 오기에 가까운 행동일지도 몰랐다.
나약하고 어린 것에 휘둘리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반항심이 치솟아, 현실을 외면하고야 마는 그런 것에 가까울지도.
그러나 아케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출입하시면 안 됩니다.”
“뭐?”
뜻밖에도 루키우스가 칩거를 이어 나갔던 것이었다.
혹독한 대가를 예상하고 있었다.
노예가 주인을 겁박한 일이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할 것이 분명했으며, 심지어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를 알면서 루키우스를 협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심 벌을 받는 와중에도 루키우스를 조롱할 생각을 했던 아케론이다. 그리하여 그의 붉어진 얼굴을 또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던 그는 루키우스의 뜻밖의 반응에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안 듣는 노예에 대한 체벌은 매질이지 이런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력하게 쓰러져 내린 루키우스의 몸이 자꾸만 떠올랐다. 달빛에 희미하게 빛나는 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분기에 찬 얼굴로 아케론을 올려다보았고, 아케론은 그때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조소를 흘렸었다.
‘……그러지 말걸.’
그런데 뒤늦게 그의 연약함이 신경 쓰이고야 마니.
아케론은 초조함을 느꼈다.
혹여 그날 제 손에 그가 해를 입었나? 충격이 심해 저를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보름이 넘게 루키우스가 제 몸을 보여 주지 않았으니, 아케론은 그에 더욱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칩거가 길어지고 참지 못해 루키우스를 찾았으나, 아케론은 번번이 집사에게 매정한 말을 들어야 했다.
“아트리움엔 출입을 삼가시라는 말씀입니다.”
단호한 거절의 말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아케론은 이어진 말에 벌리려던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답변은 드리지 말라는 명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아케론은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루키우스의 수족 같은 자요, 단호한 사내란 것을.
일고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집사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아케론이 무거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별채로 다시금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희미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 온 날부터 함께했던 식사는 아케론 혼자만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음식은 여전히 풍족했고, 노예들은 공손했다.
이도시우스는 루키우스의 명을 받아 그가 선호하는 음식을 만들어 주겠노라 말을 했고 단 한 가지 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것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아케론은 그 시간을 도무지 참을 수 없어 했다.
루키우스와 몸을 섞을 때와 달라진 것이 딱히 없었음에도.
대접은 예전과 같다. 아케론은 노예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유한 생활을 여전히 누렸고, 노예들은 같은 노예에게 존대를 했다. 단지 루키우스만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시간 동안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휘말려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홀로 하는 식사에 불안을 느끼고, 그가 혹여 저를 부르지는 않는지 노예가 제게 말을 물을 때마다 긴장했다. 아트리움을 잠시 바라보는 일이 있었고, 또 가끔씩 루키우스를 만날 때마다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긴장을 드러냈다.
아무리 큰 저택이라 할지언정 집 안에서 마주치는 일이 아예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아트리움이 가장의 공간이어도 페리스타일에는 식당이 있고, 휴식 공간이 있으며, 연회장이 있다. 아케론은 종종 식당을 나오는 루키우스를 마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상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한 것은.
꿀빛 금발이 태양 볕 아래 반짝거릴 때마다, 아케론은 가끔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홀린 듯 바라보곤 했다. 가는 다리로 페리스타일을 가로지르는 금발의 청년을 가라앉은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가끔은 그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주인….”
“비켜라.”
그리고 그럴 때마다 루키우스는 멸시에 찬 눈으로 아케론을 노려보며 말을 끊었다. 제 앞을 가로막는 태산 같은 사내의 얼굴을 루키우스가 싸늘하게 응시한다. 그날 두려움에 희게 질린 얼굴로 떨었던 여린 청년은 그곳에 없었다. 냉막한 얼굴로 빠르게 제 옆을 지나치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그저 굳어진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기나긴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아케론은 몸을 돌려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리석으로 만든 우아한 식당을 떠났다.
요즈음 그는 발코니를 자주 방문하곤 했다. 기온이 따스한 지중해라 한들 밤바람, 그것도 해안의 절벽에서 부는 바람은 제법 차다. 그 바람에 빌어 아케론은 고민을 날려 보내려 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그게 효과가 있었다.
지긋지긋한 마음의 족쇄, 하루도 빠짐없이 저를 괴롭혔던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기억을 세찬 바람은 어느 정도 몰아냈기에. 그러나 요즘 발코니는 별로 쓸모가 없어졌다. 거친 바닷바람에도 아케론은 복잡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했고, 발코니를 빠져나올 때 그의 얼굴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이게 말을 안 듣는 노예를 길들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것이 내 성질을 길들이려는 계략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쩌면….
무수히 많은 의심을 품고야 말았다. 허나 아케론은 항상 생각 끝에 한 가지 결론에 귀결되고야 말았다.
‘그런 거라도 그를 보고 싶어.’
그리고 그러던 와중의 일이었다.
그렇게 그가 혼란과 불안에 휩싸일 때.
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제가 겁박한 어린것에 대한 미안함을 희미하게 느낄 때.
그러던 와중 일어난 뜻하지 않은 사건.
“아케론!”
오후의 페리스타일, 연회장 근처에서 이루어진 뜻밖의 만남이었다.
*
루키우스가 저를 방치하고 있는 시간에, 아케론은 제가 마땅히 할 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딱히 책을 읽는 것을 선호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페리스타일이 양성소처럼 몸을 단련할 만한 분위기도 아니다. 저택의 노예들은 용모만큼 행동거지도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아케론은 고풍스러운 그리스식 문화가 깊게 물든 이들 사이에서 목검을 휘두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것참 참으로 보기 좋은 구경거리겠군.’
엘리시온4)같이 아름답고도 지루한 곳에서 검을 잡고 휘두르는 게 보통 우스운 꼴이랴. 그를 알기에 아케론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묵상을 하거나 발코니에서 바람을 맞은 채 흘려보냈던 것이다. 또는 페리스타일을 산책했고, 가끔은 그곳에서 일지를 쓰곤 했다.
그날도 아케론은 비슷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후원 정자에 앉아 일지를 쓰던 그는 낮아지는 기온에 저녁이 찾아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8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추위를 느낀 아케론이 일찍 별채로 돌아가려 몸을 일으키고 찌뿌드드한 어깨를 돌렸다.
그가 회랑을 걷던 와중의 일이었다.
문제의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케론!”
목소리는 쾌활했다. 아케론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야 말았다.
정적이 흘렀고, 그 끝에 아케론이 무겁게 몸을 돌려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햇빛 아래 청색으로 빛나는 짧은 흑발의 사내였다.
그는 비정하게 보이기까지 한 냉정한 푸른 눈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항상 튜니카를 입는 루키우스와 다르게 사내는 은사로 월계수를 수놓은 파란색 고가의 토가를 걸치고 있었다. 서른의 사내. 은을 조각한 듯한 얼굴은 고귀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 그는 혈통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을 드러내며 작게 웃고 있었다.
그 사내와 눈을 마주한 아케론은 그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토가를 착용하는 것은 지배 계층만이 소유한 특별한 권한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특정한 색은 개중에서도 특권을 지니곤 했다.
황제가 사용하는 보라색 토가만큼 고귀하진 않지만, 짙푸른 색 토가 또한 쓸 수 있는 계층이 제한된 것이었다. 이스카리아에서는 관직을 나간 이만이 짙푸른 색 토가를 입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그리고 월계수를 수놓은 토가는 관습적으로 단 한 명에게 허용된 것이었다.
“마르쿠스 님.”
그것은 이스카리아섬의 집정관에게 한정된 권리였다.
마르쿠스 헤르티우스. 대검투장의 소유주이자 그의 주인에게 말이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뜻밖의 만남에 아케론이 희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만다. 떨떠름한 기색이 드러나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아케론을 향해 마르쿠스가 환히 미소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신수가 아주 훤해졌군! 그동안 잘 지냈나 보지?”
마르쿠스는 실로 반가운 얼굴로 아케론을 대했으나, 제게 친근한 얼굴로 다가오는 사내에 대한 그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저 새끼가 왜 여기에 있어?’
제 팔뚝을 한 번 부여잡고 놓는 손을 흘끗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썩 탐탁지 않았다. 이 젊고 유능한 귀족 사내는 그간 아케론이 경험했던 주인들 중에서는 너그러운 편에 속했으나, 아케론은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쿠스가 가혹한 주인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검투사들에게 가끔씩 썩 질이 괜찮은 고기와 빵을 베풀었고, 아주 드물게 창녀를 숙소에 넣어주었다. 그는 확실히 노예에게 너그러운 주인이었다.
그러나 아케론은 마르쿠스에게 팔린 후로부터 그를 줄곧 싫어하였다.
‘능구렁이.’
아케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르쿠스를 쓸어내리는 시선이 건조했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저 여유로운 얼굴의 사내는 휘하 검투사에게 베푸는 은혜로 양성소에서 인기가 많았다. 허나 군적에 몸을 담았던 아케론은 그런 마르쿠스에게서 어딘가 싸한 구석을 느끼곤 했다.
정말로 자애로운 주인이라면, 그렇게 노예들을 학대해 죽일 리가 없지 않나?
로마의 검투장에 비견될 만큼 ‘특출하다’는 이스카리아 대검투장을 떠올리면 그는 조소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스카리아섬을 검투 경기로 유명하게 만든 그 잔혹하고도 화려한 경기는 모두 마르쿠스 개인의 작품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유행하는 처형법을 들여왔고, 노련하게 검투사를 조련하여 훌륭한 경기를 선보였다. 그렇게 피로 물든 사업을 번창시켰고, 젊은 나이에 출세한 것이다.
마르쿠스의 사람을 조련하는 방법은 세련되기 그지없었고, 아케론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열악한 숙소에 잔인한 매질로 검투사를 한계에 몰아붙이곤 그들이 지옥에 이를 때 구원의 동아줄을 내린다. 그들이 감동하는 건 당연지사인 일이었다. 제게 고통을 준 사내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검투사는 목숨을 다해 사투를 벌였다.
사실 그건 아케론이 꽤나 자주 보던 수법이었다. 실제로 행하기도 한 것이기도 했고.
바로 군대에서 쓰는 방법이다.
당근과 채찍이란 유능한 사령관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수법이다.
“검투장은 그립지 않나? 전사는 좋은 잠자리가 몸에 배기는 법이지.”
그리고 그는 그런 의미에서 아케론이 싫어할 법할 이유가 충분한 인간 군상이었다.
아케론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응? 나야 자네가 보고 싶어서 왔지.”
“…….”
“거짓말같이 들리나 보군.”
마르쿠스가 픽 잔웃음을 흘렸다.
“아니, 나는 자네를 아주 많이 그리워했어. 네가 얼마나 많은 밤 동안 내 꿈에 나왔는지 모를 거다. 단 한시라도 자네를 잊은 적이 없지. 이스카리아의 왕……. 글라디우사 아르젠투미아의 전설!”
아케론은 그의 말을 듣기 싫어했으나, 신분에 억눌려 억지로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집정관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단 한 번도 나는 내 프로모터로서의 정체성을 잊은 적이 없어. 그건 내 소명이고, 나에게 부를 안겨 준 천직이다. 정치가로서의 내 업적이 수많은 검투사를 배출해 낸 명예에 비견할 것 같으냐?”
순간 아케론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를 판 내 결정을 가끔 후회하고 있다. 전설이 될 너를 녹슨 칼로 만들어 버린 내 자신을 가끔 경멸하곤 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난 널 절대로 내 손아귀에서 놓아주지 않을 거야.”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정신 상태에 어이가 없어, 결국 아케론은 헛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는 수많은 검투사를 학살하곤 그것을 명예라 칭하는가? 내게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안겼으면서?
‘길 가다가 딱 칼 맞아 죽기 쉬운 성격이군.’
죽어간 이들이 들으면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죽지 않은 이들 또한 비슷하게 생각할 일이었고.
“표정이 왜 이렇지? 소태 씹은 사람인 양.”
그러나 마르쿠스는 아케론이 지은 냉소의 의미를 진정 모르는 듯했다.
“저는 주인님께 팔린 몸입니다.”
침묵하던 아케론이 재촉을 이기지 못해 말을 내뱉었다. 나직한 말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분명 그를 모를 리 없는 유망한 정치인은 그를 못 본 척 말을 이을 뿐이었다.
“마치 정절을 지키는 귀부인처럼 말하는구나.”
마르쿠스가 낄낄 웃었다. 아케론은 높으신 집정관의 말을 마치 개 짖는 소리를 듣는 듯 흘리고 있었다.
“그래! 그자가 나를 어마어마한 황금으로 유혹했고, 난 너를 팔았지. 하지만 널 가끔 빌릴 수는 있는 거 아냐?”
그 대목에 이르러 아케론의 눈썹이 산처럼 꺾였다.
‘빌려?’
아케론이 제 앞에 자리한 젊은 집정관의 얼굴을 안광이 번뜩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제야 제게 관심을 가지는 사내에 마르쿠스는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나를 아직 원망하나? 아케론.”
돌아온 것은 답변이 아닌 물음이었다.
“저를 빌리겠다 말씀을 드렸습니까?”
마르쿠스의 얼굴에 순간 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래.”
“주인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리고였다.
마르쿠스가 돌연 완전히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아케론을 쏘아본 것은.
“너…….”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아케론의 미간이 슬쩍 좁혀지고야 만다. 마르쿠스는 능글맞은 미소를 완전히 지우고 의뭉스러운 눈으로 아케론을 훑고 있었다.
제 몸을 살점 하나하나 해체하듯 바라보는 시선이 불쾌하다.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고 무표정한 얼굴로 마르쿠스를 응시하던 아케론은, 그리고 연이은 그의 말에 몸을 뻣뻣이 굳힐 수밖에 없었다.
“너, 예전과 많이 달라졌군.”
묘한 어감을 지닌 말이었다.
희미한 짜증이 드러나던 아케론의 얼굴이 굳어지고야 만다. 군청색 두 눈이 흔들린 그 순간 뱀 같은 시선이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처음 노예시장에서 너를 사 왔을 때, 나는 네 강인한 몸을 보고 흔쾌히 그 거금을 낸 게 아니야.”
그는 한층 더 내리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네 눈은 죽은 개눈깔처럼 죽어 있었고, 채찍질을 당하고도 분노를 내보이지 않았지.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그렇게 넌 삶을 향한 애착을 보이지 않았어.”
“…….”
“그럼에도 너는 그 음식물 쓰레기 같은 역겨운 톱밥 섞인 죽을 퍼먹었고, 네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그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
마르쿠스의 말은 뒤로 갈수록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ડχ
“그런 네게 흥미를 안고 거금을 주고 널 사 왔다! 그리고 검투장에 올라간 너를 보는 순간 난 그 한 경기로 알아차릴 수 있었어. 네가 영웅의 피를 타고난 것을.”
“…….”
“네 그 무심한 눈에는 폭발하는 분노가 가려져 있던 거다…….”
그 대목에서 마르쿠스는 숨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아케론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리고 이어진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어 내뱉은 말들이었다.
“넌 단지 지쳤을 뿐이었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너는 무뎌진 검처럼 의욕을 잃고, 그리 닳고 닳아가고 있던 것이었지.”
아케론은 허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널 발견한 게 내 최고의 업적이었다, 아케론. 내 자랑스러운 영웅이여! 그동안 네 그 무기력함을 사력을 다해 없애려 했다. 웬만한 귀족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고가의 헤타이라를 네 방에 넣어주고, 네게 극상의 쾌락을 주려 했지! 널 연회에 끌고 가고,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식을 베풀었어. 허나 넌 내 모든 호의를 거절했지!”
마르쿠스는 아케론의 어깨를 손으로 꽉 쥐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한사코 내 호의를 거부하고, 지극히 금욕적이고, 재미없는 삶을 살았다. 마치 삶이 지루한 사람처럼, 그렇게 감흥 없이 인생을 낭비하고 말이야.”
짧은 침묵이 흐르고, 음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런 네가 어째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아케론이 고개를 들어 올려 마르쿠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귀한 혈통을 지닌 사내의 얼굴은 지중해를 뭉쳐 만든 보석을 깎은 듯했다. 투명한 물을 보는 듯 차갑고도 깨끗한 얼굴은 사람들의 신뢰를 쉽게 사는 고결한 인상을 주었으나, 지금 이 순간 아케론은 그 깨끗한 물 아래의 어둠을 직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그의 외양대로만 살아간다면 인생이 이리 복잡하진 않겠지.
아케론이 고저 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마르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아케론!”
그는 광희했다.
“으하하하!”
제 어깨를 내리치는 손을 아케론은 흘깃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웃음은 뒤로 갈수록 진해졌고, 종국에는 페리스타일을 쩌렁하게 울렸다.
눈물을 흘리며 광소를 내뱉으며 마르쿠스가 두 눈을 빛낸다.
“아케론, 아케론! 하하, 거울을 좀 보거라! 네 얼굴에 감정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걸. 무뚝뚝한 표정을 짓는다고 마음을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야, 이 나무토막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주인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네게 좋은 음식과 잠자리를 줬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더한 걸 줬나? 굶주린 개에게 가장 필요한 먹이를 그는 바로 알아챈 것 같군.”
웃음을 흘리는 마르쿠스를 잠자코 응시하며, 아케론은 그리고 그 순간 두 눈에 섬뜩한 살광을 빛냈다.
왜 자꾸 그는 선을 넘을까?
강인한 턱이 움직이고 시퍼런 눈이 차갑게 가라앉고야 만다. 우묵한 눈이 제 앞에 자리한 멀끔한 귀족 사내의 얼굴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케론의 얼굴은 침착했으나, 그 평온한 수면 아래는 들끓는 살의가 감추어져 있었다.
제발 그 입을 닥쳐 줬으면 좋겠어.
저택에서 지낸 시간 동안 아케론은 충분히 많은 순간을 참아 왔다. 휘둘리는 기분에 시달리며. 루키우스의 손아귀에서 주물러졌다. 더 이상은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청색 눈은 서서히 살기를 품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집정관이란 고위 관직에 오른 정치인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너….”
마르쿠스가 입술에 미소를 머금으며 아케론을 빤히 응시했다. 살의에 찬 사내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 마르쿠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제 아랫입술을 검지로 쓸었다. 살기를 흩뿌리는 아케론의 얼굴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고깃덩이가 어지간히 맛있었나 보지?”
아케론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열었다.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르쿠스 헤르티우스 집정관님.”
“……그래?”
그 순간 마르쿠스의 두 눈에 묘한 섬광이 번뜩거렸다.
구름이 퍼진 하늘색을 닮은 두 눈은 온화할 때는 루키우스의 것처럼 여유를 품고, 깊어질 때 잔인함을 드러내곤 한다.
마치 벌레를 잡아 해체하는 어린아이와 닮아 있는 것.
그 아무렇지 않은, 목적 없는 악의를 지금껏 아케론은 경계해 왔다.
아케론의 전신에 근육이 도드라졌다. 한층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케론이 마르쿠스를 노려보았다. 마르쿠스는 살벌한 그의 얼굴을 차가운 눈으로 마주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입술 끝을 비틀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툭 말을 내뱉었다.
“네 주인, 아름답더군.”
아케론은 몸을 우뚝 굳히고야 말았다.
“나도 처음에 봤을 때 놀랐다. 저택의 주인이 그런 대단한 미소년이라니……. 조금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그런 외모라면 딱히 상관은 없지.”
회상을 하는 듯 수면에 잠긴 마르쿠스의 얼굴엔 감탄이 희미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정적은 한층 더 살벌한 기색을 품고 있었고, 아케론은 순간 뱀이 발목을 휘감고 몸을 타오르는 듯한 불쾌함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살벌하게 굳어져 가고 있었다.
‘저 새끼가….’
아무리 그가 검투사 시절 타인과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한들, 3년 동안 주인에 대한 사소한 소문을 듣지 못할 리는 없다. 아케론은 젊은 나이에 출세한 마르쿠스가 사교를 즐긴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귀족들의 향응에 빠져 있었고. 소년애 또한 사랑했다.
아케론의 숨이 불규칙적으로 변모한다.
그는 젊은 집정관이 연회에서 옆구리에 호리호리한 미소년을 끼고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굽이치는 금발이 인상적인 소년의 입술에 술을 묻히고 그것을 핥아먹는 선정적인 장면을. 소년은 창백한 얼굴로 마르쿠스의 가슴을 밀었으나, 그는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튜니카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뻗어 나갔다.
그저 혐오스러웠던 그 장면이 지금에 와서 더욱 역겨웠다.
“로마인 중에서 그렇게 선명한 금발은 흔치 않아. 하늘 아래 파도처럼 물결치는 금발이란, 보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밝고 빛나는 금발이라니…….”
“…….”
“우유를 바른 것처럼 새하얀 피부…. 단내가 날 것 같더군. 향유로 곱게 관리한 부드러운 몸이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입에 머금으면 당장 녹아버릴 거다.”
마르쿠스가 이죽거렸다.
“버드나무같이 낭창한 몸은 유연하게 휘어지겠지.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달콤하게 울음을 흘리겠고 속살은 오붓하게 성기를 조이며 사내의 애간장을 녹일 거야. 울음을 터뜨리면 당장에 심장이 떨어지겠지. 안 된다, 싫다 버둥거리면 그 가는 발목을 손으로 움켜쥐고 벌리는 맛이 있지.”
아케론은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굴었다. 그의 앞에서 마르쿠스는 연극배우처럼 말을 이어 나갔고.
“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소문이 쟁쟁한 벼랑 위 저택의 주인이 그렇게 달콤한 미소년일 줄이야!”
아케론은 마르쿠스가 저를 도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화를 내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는 사실도.
그런 방식으론 마르쿠스에게 이끌려갈 뿐이리라.
“그가 너를 거금을 들여 구매한다 했을 때, 정작 나는 네 값은 얼마냐, 흥정하는 말을 간신히 목구멍에 욱여넣고 있었다. 아까워, 내게 돈이 충분하다면 당장에….”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나 아케론은 저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무얼 원하십니까?”
마르쿠스가 몸을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감정이 거세된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하고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이런.”
마르쿠스의 매끄러운 얼굴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건지 마르쿠스의 얼굴에는 희열에 가까운 감정이 스치고 있었다.
아케론이 피로에 찬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담담한 말이 연이어 내려앉았다.
“내게 화를 내고 있군.”
“…….”
“이스카리아에서 내로라하는 고급 창부들을 마다하더니, 취향이 그런 쪽이었나? 진즉 내게 말을 하지 그랬나. 아무리 비싼 노예라 한들 너를 위해선 거금을 지출할 수 있는데.”
어느새 마르쿠스의 몸이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케론…? 명심해야지. 주인 된 입장에서 달콤한 입술을 빠는 것과 노예 된 자로서 주인의 쾌락을 위해 몸을 제공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아케론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수치를 알아라. 아케론. 네가 어째서 이렇게 무뎌진 거지? 어째서 질 좋은 먹이에 길들여져 본능을 잃고야 만 거야? 너는 이스카리아의 왕이었다, 아케론.”
대치는 길게 이어졌다.
그 끝에 마르쿠스는 마지막으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부디 너 자신을 잊지 말길, 이스카리아의 왕이여.”
짙푸른 색 토가를 휘날리며 사라지는 마르쿠스를 아케론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멀거니 바라보았다.
*
마르쿠스는 섬의 유지라 루키우스조차 교류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아주 가끔씩 저택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그에 더해 아케론을 구매하기 위해 그와의 친분을 이어 나갈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변명하는 집사의 말을 묵묵히 듣던 아케론은 그가 저를 빌리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입술 끝을 슬쩍 틀어 조소를 흘렸다.
뱀 같은 사내.
“안심하십시오. 주인님은 그대를 빌려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 변덕스러운 자의 생각을 어찌 확언하나?
그러나 아케론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가 차분히 저를 바라보는 집사를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아케론은 더 이상 신성한 아트리움을 밟지 못하는 신분이었으므로. 루키우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킨 채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유독 그날따라 마음이 번잡했다.
“술.”
감정은 아폴로의 영역이 아니다. 아케론은 그의 힘을 빌릴 수 없었고, 다른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혼돈에 빠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은 바쿠스였다.
“술을 내와, 팔레르눔5)이든 로라6)든 상관없으니. 당장!”
평소에 술을 절제하던 아케론이었으나, 그는 마르쿠스와의 만남에 격동하여 그날 이성을 다잡지 못했다.
그날 저녁 아케론은 식사에 술을 곁들이는 것이 아니라 술에 식사를 곁들이는 수준으로 과음하고야 말았다. 마실 수 있는 주량 이상의 와인을 몇 병이나 비우는 아케론에 주방을 책임지던 이도시우스가 식당에 나와 그의 안색을 살피기도 했다.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무서운 얼굴로 술을 들이켜는 아케론은 한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지나친 음주 행각에 그를 말릴까 잠시간 망설이던 이도시우스는 그러나 결국 아케론을 말리지 못하고 돌아서고야 말았다. 전직 검투사의 기세가 워낙 거칠었던 탓이었다.
아케론은 음주 내내 복잡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앓아야만 했다.
7년 전 그날에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고 죄인이 되어 무기력하게 살아온 삶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기를 몇 번이고 치르면서도 아케론은 차라리 이 힘든 여정의 끝을 보길 원했다.
그런 제게 무엇이 감흥을 줄 수 있겠는가?
세상은 무채색이었고, 희로애락은 먼 옛날의 잔상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성을 잃고 술을 붓고 있었다.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고, 강렬한 감정은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더욱 기분이 더러운 이유는 이 격렬한 감정의 이름을 그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에 들려온 마르쿠스의 목소리.
‘너…… 고깃덩이가 어지간히 맛있었나 보지?’
그것은 들은 순간 아케론의 목을 콱 막히게 만든 말이었다.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거라고? 내가 육욕에 휩싸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아니,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케론은 항상 그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노예가 된 이후로도 단 한 번도 남에게 제 목의 목줄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 허나 그는 서서히 루키우스에게 굴복하여 마침내 목줄 매인 개처럼 굴고야 만 것이다. 그가 지나간 자리를 시선으로 좇으며, 그의 관심을 갈망하면서 말이다.
영혼만큼은 누구에게도 굴복할 생각이 없었는데.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그것만큼은 허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에 어른거리는 우윳빛 살결. 살갗을 타고 번지는 따스한 사람의 온기.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맑은 웃음. 가슴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
아케론의 얼굴에 격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루키우스는 더럽고…… 천박한 탕부지.
그리고 저는 그를 알면서도, 그의 연극에 휘둘리고야 마는 한심한 작자였다……. 영광이란 눈곱만치도 모르는, 예전의 이름을 잃은 아케론은.
그는 쾌락을 자제하지 못하고 고작 어린 청년을 협박하는 데 인생에 유일한 감정을 드러내는 하찮은 작자다.
아케론은 그 순간 모든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꽃과 같은 감정의 연쇄였다.
‘이게 네 모습이야! 나약하고 어린 소년의 머리채를 잡아 분노를 터뜨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지. 스스로를 절제하지도 못해. 더 나은 내일을 바라지도 않지. 스스로 일지를 쓰는 이유조차 모른 채 과거의 감옥에만 사로잡혀 죄수로 영원을 살아가고자 하고 있어.’
아케론은 어느 순간부터 그 목소리가 저의 것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널 노예로 만든 건 노예상인이 아닌 너 자신이다!’
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닥쳐, 닥쳐! 닥치라고! 입 다물라고!’
저녁 식사는 홀로 진행되는 향연이 되어 길게 흘렀다.
아케론은 도피를 했고, 목소리는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
‘수치스러운 자! 영혼마저 쇠스랑에 묶인 놈…!’
만취한 사내는 값비싼 팔레르눔 와인을 희석하지 않고 병째 처마시기에 이르렀으니.
‘명예를 회복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거냐? 그가 널 살리려 한 이유를 정녕 몰라서…….’
거의 폭주하다시피 하던 아케론의 결말은 대취하여 길쭉한 의자에 엎드려 잠을 자는 것이었다.
대취한 그가 잠에서 깨어난 때는 저녁별이 뜰 즈음이었다.
‘이거 놔…!’
정신을 차린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날에 저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던 물기 어린 눈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아케론이 몸을 일으킨다.
숙취에 미간을 찌푸리는 아케론이 제 몸을 덮는 별빛에 순간 멈칫했다. 아름다운 내원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된 식당에선 밤바다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든 아케론은 밤하늘에 초롱거리며 빛나는 별을 보고 어이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사내의 귓가에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맑은 바람과도 같은 웃음과 함께 흐른 청아한 목소리였다.
‘하인들이 너를 무서워하는 것 아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의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인상 좀 풀고 다녀. 너는 숨이 막히도록 잘생겼지만 그다지 선량한 인상은 아니잖나.’
그렇다고 이 밤이 되도록 깨우지를 않아?
깨질 것만 같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억누르며 아케론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일어났다. 쓴웃음을 머금은 사내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은 나발이고, 식사를 하자마자 술을 퍼먹고 쓰러져 처 잠을 잤다. 방탕에 빠져 밤에서야 몸을 일으킨 상황에서 아케론은 더 이상 제 자신에게서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완전히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 때나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을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게 개돼지지 어디 사람인가?
사람이라도 그건 가축과 다를 바가 없다.
무거운 얼굴로 아케론이 깨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두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아케론이 식당을 빠져나가 향한 곳은 바로 야밤의 페리스타일, 그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그리고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밤 정원에서 아케론이 오랫동안 보기를 원했던 얼굴을 마주한 것은.
그건 사실 이뤄지지 말았어야 할 만남이었다.
아케론은 만취해 있었고, 평소보다 지나치게 넘은 주량은 그를 점령한 지 오래였다. 그는 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쿠스의 힘을 빌렸으나, 사실 그 신의 문제 해결 방법은 지나치게 과격했다. 바쿠스는 경계에 선 사람을 완전히 혼돈 속으로 밀어 넣어 문제 자체를 아예 박살 내는 신이었으므로.
그날의 사건도 그러했다.
마르쿠스에게 도발당한 일, 계속된 루키우스의 외면, 혼란스러운 마음, 지나친 취기, 깨어진 루틴으로 인한 스트레스. 그 모든 게 합쳐진 상황 속, 아케론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정원을 헤쳐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걸음걸이는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삭월에 눈앞은 보이지 않았고, 아케론은 그저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코앞의 땅을 밟는 일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것들의 대부분은 평소에도 품었던 것이었으나 그날따라 그는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생에서 강렬했던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교차되어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흘렀다. 아케론은 어느 순간부터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치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숨을 붙이고 구차하게 살아 있어? 왜 넌 지금 여기에 있어?’
새하얀 달이 떴던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숲!
‘도대체 네가 왜?’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검을 쥐었던 오만했던 사내의 기억.
‘……나는 모든 것을 잃었지.’
절벽에 매달려 생존을 바랐던 때 죽음 앞에 담담했던 지우의 입가에 띤 희디흰 미소.
‘잃어야만 했고.’
그리고 그 순간 아케론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런데 네가 왜 지금껏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있는 거냐.’
아버지의 지리멸렬한 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로마인으로서의 긍지를 지켜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코 패배해선 안 된다. 자랑스러운 로마의 일원으로서의 너를 잊지 마라. 결코 네 긍지를 잊지 마!’
아케론이 서느런 웃음과 함께 답했다.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아버지!
‘긍지…… 긍지라.’
이미 더럽혀진 이름을 보았고, 무너져 내린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그 어느 까닭으로 실패한 아비의 말을 맹종하며 따라야 할까?
이제 로마란 없었다. 아직도 이 변방에서는 ‘SPQR’의 붉은 깃발7)이 휘날리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는 그것은 없는 것에 가까웠다. 하늘 높이 펄럭거렸던 깃발을 아케론은 줄곧 증오하고 있었다. 그 불명예의 기억을 말이지.
제국을 잃은 날을 아직까지 기억했다.
‘로마는 없다.’
사내는 홀린 듯 걸음을 걷고 있었다, 아니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 내 안에 로마는 없어…….’
평소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헤치고 나왔을 정원은 만취한 사내의 눈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동서남북의 방향도 잡지 못해, 아케론은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찾는 방랑자처럼 한참을 내원의 어두운 숲길을 헤매야만 했다.
그가 그렇게 내원을 헤맬 때, 아니 과거의 미로에 갇혀 방황할 때 그의 귓가에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였다.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아케론이 고개를 퍼뜩 들고 눈을 반짝거렸다. 코끝에 스치는 물비린내를 맡고 아케론은 제가 분수대 근처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드리운 호수 근처. 그리고 아케론은 그 순간 그림자를 내리는 존재를 발견하고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찬란한 금발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또 존재할까?
그것은 아케론이 본 것 중 가장 빛나는 물체였다.
어둠 속에 광휘를 흘리는 자의 그 모습. 아케론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루키우스.’
목덜미 아래로 내려오는 벌꿀색 머리카락이 달빛에 은은히 빛나고 있다. 그 벌꿀을 닮은 색의 금발은 달빛 아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으로 빛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달빛이 흐르는 부드러운 뺨은 루키우스를 핥으면 단맛이 날 것만 같은 달콤한 외모로 보이게 만들었고. 새하얀 팔은 달빛 아래 은색으로 빛나며 묘한 매력을 흘리고 있었다.
사내의 목젖이 잘게 떨리고야 만다.
시선은 팔다리가 늘씬하게 뻗은 몸에, 팔뚝과 허벅지에, 가는 발목에 이르렀다.
로마인에게 보기 드문 선명한 보라색 두 눈이 어둠 속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햇볕 아래서 사람을 홀리며 빛나는 두 눈은 달빛 아래에서는 월광이 비친 제비꽃처럼 신비로운 매력을 풍겼다.
그리고 그 두 눈은 지금 아케론을 차분한 시선으로 담으며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내의 입술 밖으로 침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이건.’
신성한 모습.
떨리는 목소리가 밤이슬을 머금은 촉촉한 정원에 내려앉았다.
“루키우스.”
고요한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가려 들었다. 매정한 그의 거부에 아케론의 얼굴에 순간 초조함이 스쳤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건 취기에 벌인 충동적인 일이었다. 불현듯 든 충동에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몸을 움직이고야 만 것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아케론이 가는 손목을 잡아챘다.
금발이 허공에 흐트러지고, 루키우스가 놀란 얼굴로 아케론을 바라본다.
아케론이 험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를 피하지 마시오!”
루키우스의 얼굴의 동요는 빠르게 사라졌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남은 것은 냉소였다.
“이거 놔.”
루키우스는 거친 손에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아케론의 손은 굳건했고, 루키우스는 발버둥을 칠 뿐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손목에 멍울을 내게 한 순간이었다. 잠시간 반항 끝에 저항을 포기하곤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눈을 화가 치민 얼굴로 노려보았다.
감정이 거세된 서늘한 눈이 사내를 노려보고, 이윽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나는 네게 내 손을 놓으라 했다!”
굳은살이 박인 울퉁불퉁한 손은 시뻘건 손자국을 눈처럼 새하얀 살결에 남기고 있었다. 아케론은 평소와 달리 루키우스의 여린 몸을 생각하지 못하고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왜 너는 나를 이토록 흔들려 하지?
“내가 언제까지 네 거만함을 봐줘야 하지? 천한 잠자리 노예 따위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주인 노릇을 하려 들어?”
아케론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져 간다.
“남근을 처박고 우월감을 느꼈던 자라 내가 우습나? 지금 사내랍시고 내게 자존심을 세우는 거야?”
자안은 냉혹하게 빛났고, 유려한 얼굴엔 멸시가 스쳤다.
“이거 놔! 난 네 정부가 아니다! 넌 날 휘두를 수 없어! 내가 네 여자가 된 거라 착각하지 마라!”
푸른 눈에 불길이 튄 순간이었다.
“당신은 항상 당신 멋대로 합니까?”
푸른 핏줄이 돋보이도록 손에 힘을 준 채 아케론이 억누른 말을 내뱉는다. 목구멍에 튀어나오려는 수많은 말들을 삼키곤 가까스로 내뱉은 가장 온건한 말이었다. 불꽃이 튀는 눈이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저는 당신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루키우스는 그런 그를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노려보았다.
“나는 네게 이 손 놓으라 명령했다!”
그렇게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나를 거금을 주고 사와 당신의 정부로 삼더니, 이젠 내게 흥미가 떨어지셨습니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긴 아나?”
“또 다른 노예를 사와 찾아올 겨울을 견디실 겁니까? 여름에도 그리 추위를 타시던 분인데 어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택의 노예로 잠자리를 덥히시려 합니까?”
“그렇다면 어쩔 거지? 내가 노예를 사와 관계를 하든 내 저택의 마구간지기와 몸을 섞든 그게 너와 뭔 상관이야? 응?”
아케론의 얼굴이 그 순간 일그러졌다.
‘이런 개 같은!’
그 대목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돌이킬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런 연유로 아케론은 충동에 휩싸여 행동한 것이었다. 굳었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지고, 거친 손이 동근 어깨를 거칠게 부여잡아 당겼다. 얄팍한 신음이 연분홍색 입술 사이로 흐르고 루키우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아윽!”
고통에 일그러진 루키우스의 뺨을 커다란 손이 억세게 움켜쥐어 당겼다.
“너 지금…?!”
지금 노예가 주인의 뺨을 움켜쥐었나?
루키우스가 경악의 시선으로 아케론을 올려다본다. 손아귀에 하관이 잡힌 자그마한 청년을 아케론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조한 입술이 열렸다.
“굶주린 개에게 먹이를 줬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내 먹이를 왜 다른 개새끼에게 준다는 겁니까?”
그의 얼굴은 상처 입은 짐승의 것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 몸뚱이를 함부로 굴리겠다고?”
또 배반당한 사내와 같았지.
루키우스가 숨을 헐떡거리다가, 문득 비소를 흘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단단한 사내의 몸을 거세게 밀치며 루키우스가 소리쳤다.
“감히 노예 주제에 로마 귀족을 겁박해?”
아케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져 나갔다.
“내가 네게 너무 관대했군, 아케론. 그리고 너무 네 이성을 고평가했고.”
아케론을 조롱하는 얼굴에는 귀족 특유의 오만함이 물들어 있었다.
“자숙하는 동안 머리를 식히고 반성할 줄 알았는데 이게 네가 내린 결론인가? 고작 한낱 노예에게 관대한 방식으로 가르침을 내린 주인을 탓하는 것? 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 아케론. 지나치게 졸렬하고…… 또 건방져.”
그 말을 내뱉을 때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불쾌함과 경멸이 짙게 묻어 나와 있었다. 아케론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균열이 깊어진 얼굴에는 분노와 증오가 물결쳤다. 루키우스는 비소를 흘렸고,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내게 그리 말하지 마시오.”
감정이 꾸역꾸역 억눌린 아슬한 목소리. 그에 루키우스가 고소를 터뜨렸다.
“내가 네게 말하지 못할 게 무어지?”
“……내게 가해지는 마땅한 비난을 피할 생각은 없어.”
아케론의 얼굴은 순간 절망에 이르고 있었다.
그를 겁박하고 있지만, 차라리 빌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발, 제발 날 도발하지 마. 터져 나가는 비명을 목구멍에 밀어 넣으며, 아케론이 이를 악무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허나 나는 적어도 네게 모독당할 일을 저지르지 않았지.”
어둡게 가라앉은 사내의 얼굴에 우울함이 산재하고 있었다. 커다란 손은 억세게 루키우스의 얼굴을 쥐어 잡은 채 잘게 떨리고 있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렀다.
“너는 나에 대해서 무얼 알지?”
무리에서 배제된 늙은 사자처럼, 상처를 입은 맹수처럼 아케론은 지치고 처절한 모습으로 말을 내뱉고 있다. 공허한 시선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제발 그만해, 나를 모욕하지 마라.
“나는, 네게, 모욕당할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흐르는 냇물처럼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케론, 아케론!”
조롱의 말이 연이어 흘렀다.
“너는 네가 얼마나 웃기는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구나.”
시야가 까마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케론은 그 순간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너는 내 충직한 노예이고 이건 내 훈계일 뿐이다. 내가 주제를 알라 하지 않았나.”
귓가에는 이명이 울리고 있었고, 아케론은 그 순간 불길한 전조를 느끼고 몸을 떨고 있었다.
“착각하지 마라.”
그 순간 루키우스의 얼굴에 자리했던 조롱하던 웃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내렸다. 아케론이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는 감정을 알 수 없는 건조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아케론은 그 순간 절망의 날의 기억을 마주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소유할 수 없어.”
지옥 그 아래로 추락한 날의 기억.
“심지어 네 자신조차 너는 소유하지 못했지 않아?”
모든 가치가 부서지고, 제가 지켜 왔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로 변한 순간 아케론은 아케론이 되어 제 자신의 운명을 그날의 숲에 던져 버리고 도망쳤었다.
“주제를 알아라.”
삭막한 목소리가 과거를 일깨우고, 아케론은 피로 물든 글라디우스와 무너지는 사내의 몸을 직시하며 아득함을 느끼고야 말았다.
새하얀 달빛 아래, 그보다 더 새하얗게 빛나는 청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권리를 잃었고, 그 책임을 지고 있지.”
고요한 눈이 무섭게 굳어진 사내의 얼굴을 응시하고, 누군가의 숨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달빛이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창백한 푸른 달빛을 받으며 루키우스는 짧은 침묵 끝에 느릿하게 입술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계시와 같은 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케론의 얼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진실로 평온을 되찾은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임계점을 넘은 불꽃이 차갑게 불타는 것에 가까웠다.
느릿한 숨결이 흘렀고, 아케론은 다른 손을 뻗었다.
가는 손목이 틀어 잡혀 루키우스가 신음을 흘린다. 들끓던 분노는 어느 순간부터 차갑게 식어 평평한 수면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케론은 계시를 따르는 신도처럼 몸을 움직였다.
“이제 이 손 놓, 읏…?!”
새하얀 달빛 아래 시리도록 푸른 눈에 섬광이 스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케론?”
손목이 틀어 잡힌 루키우스가 화를 내려다가 가냘픈 신음을 흘리며 황금색 속눈썹을 잘게 떨고야 만다. 화가 난 듯 앙칼지게 눈을 뜨고 아케론의 얼굴을 올려다본 루키우스는 그 순간 그 얼굴에 서린 깊은 적막을 깨닫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엿보이지 않는 호수를, 감정이 거세된 무심한 눈과 마주한 루키우스의 얼굴에 빠르게 핏기가 가시셨다.
“…너?”
부여잡힌 몸이 얼어붙고, 루키우스의 얼굴에 불안이 스친다.
“이, 이거 놔.”
더듬거리는 말을 받은 것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난 네게 모든 것을 맞춰 줬지.”
그 순간 루키우스의 얼굴은 빠르게 공포로 잠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넌 날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한 것으로 다루었고.”
조용한 밤, 페리스타일에 차분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렀어.”
그 대목에 이르러 아케론은 숨을 멈추고, 루키우스를 고요한 눈으로 응시했다.
“내가 더 인내심을 보여야 할까?”
루키우스는 순간 얼어붙어 한참을 입술을 열지 못했다. 그가 말을 내뱉은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널, 널 벌할 거다.”
겁에 질린 청년의 얼굴을 아케론은 고요한, 아니 깊은 심해를 품은 군청색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바람에 날아갈 듯한 웃음을 흘렸다.
바닥을 긁는 듯 갈라지고 또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채찍으로 나를 길들여 봐.”
우악스러운 손이 루키우스의 몸을 풀숲을 향해 거칠게 밀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