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으로 만든 과자>
눈부신 황금빛 볕이 새하얀 대리석 위를 가로질렀다.
따사로운 햇살은 새하얀 이마 위 흐르는 땀방울을 반짝거리게 했다. 황금색 물결은 발코니에 자리한 두 사람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하윽, 하…!”
새된 소리가 흘렀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흐느끼는 소리는, 발코니의 난간에 등을 댄 아슬한 자세로 루키우스가 흘린 것이었다.
“흑, 학…!”
거의 난간 밖으로 몸을 떨어트릴 듯한 아슬한 자세로 루키우스가 두툼한 성기를 받고 있었다. 짐승의 것에 비유하는 게 옳을 육중한 성기가 아담한 엉덩이 사이를 꿰뚫을 때, 작은 몸은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새된 비명은 뒤를 이었다.
사내의 허리에 감긴 다리는 어느 순간부터 힘이 서서히 풀려 갔다. 힘이 풀린 오른 다리가 난간 아래 늘어져 발끝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다른 하나의 다리는 아케론의 손에 붙잡혀 그의 단단한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런 불안한 자세로, 달콤한 금발의 청년은 꿰뚫리며 금방이라도 대리석 아래 절벽 아래로 추락할 듯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 아프, 학!”
땀과 눈물, 혹은 그 무엇인지 모를 액체로 젖은 얼굴에 드러나는 공포심.
잠시간 새하얗게 질린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숙이곤 무게중심을 앞으로 했다. 청년의 몸이 더욱 난간에 기울어진 순간,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아, 아! 하읏! 아, 아케론!”
두려움이 폭발한 듯 흐느끼는 루키우스의 얼굴에 깊게 입술을 묻으며 아케론은 허리를 능숙히 움직였다.
“흑, 흐윽.”
마치 유영하는 물고기 같은 움직임. 그에 발코니에 울려 퍼지는 신음이 더욱 커져 나갔다. 부드러운 둔부를 꽉 틀어쥐던 손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손은 타액이 흐르는 입술로 향했다. 굵은 손가락은 벌어진 젖은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혀를 가지고 놀았다.
“악케, 아흐, 학……. 이, 이렁 건….”
아케론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갈수록 진해지는 신음을 들으며, 아케론이 더운 숨을 헐떡거리며 문득 고개를 위로 꺾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가장 윗부분은 새파랗고, 그 아래는 주홍빛이었다. 가장 아래에 깔린 색은 붉은빛이었고.
‘……석양.’
코끝에 스치는 짭짤한 소금 냄새, 이제는 익숙해진 바닷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아케론이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 저녁이 되었지?’
루키우스의 혀를 놀리던 손가락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은빛 실이 길게 이어지다가 끊어지고, 아케론은 숨 가쁘게 할딱거리는 루키우스의 입술을 깨물곤 입술 끝을 뒤틀었다.
울음을 목구멍 안으로 빨아들이며 아케론이 허릿짓을 빠르게 했다.
“흐읍!”
뜨거운 숨이 아케론의 입술 밖으로 흐르고, 루키우스의 입술 안으로 사라진다.
마주 닿는 뺨에서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저 작은 몸 하나를 놓칠 일은 없는데, 루키우스는 낙상의 두려움에 정사 내내 덜덜 떨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문득 아케론은 그리 생각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이 가지 않을 그런 미소였다.
“아케, 흑, 아케론…… 놓지.”
어느 순간부터 아케론의 얼굴은 한층 더 진중해져 있었다.
겁에 잔뜩 질린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목에 두른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그러곤 얼굴을 눈물범벅으로 물들인 채 정사 내내 아케론에게 매달렸다.
“놓지, 흣, 놓지, 하악, 놓지, 마…… 아케론, 절대, 절대, 놓지, 읏!”
발코니 밖으로 거의 넘어가 흔들거리는 아슬아슬한 몸.
널찍한 어깨 위에 걸쳐진 다리가 덜렁거리고, 다른 한 다리는 허공에 띄워져 간신히 발끝만을 발코니 바닥에 간간이 스치고 있다.
아케론은 울먹거리는 루키우스의 얼굴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볼 뿐 답을 주지 않았다.
“아, 아앙아!”
비음 섞인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떠는 루키우스의 안에 성기를 깊게 파묻으며, 그는 땀이 범벅된 얼굴을 찡그리며 희미한 불쾌함을 드러냈다.
‘……더워.’
제법 선선해진 날씨인데 색욕에 들뜬 몸은 마치 불가마에 있는 것만 같았다. 무심하던 얼굴에 짜증이 일견 스치고, 커다란 몸이 웅크려져 루키우스의 몸을 으스러지듯 껴안았다. 새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 순간 어지러운 정신 속 아케론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기랄….’
참을 수 없는 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그 작열감을 참지 못한 아케론이 고개를 든 순간, 그는 더위를 잠시간 해소해 줄 만치 시원한 풍경을 마주하고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너른 바다가 있었다.
눈이 아프게 쬐는 햇볕은 하늘에서 내리쬔 게 아닌 푸르른 이스카리아의 바다에서 반사된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홀린 채 시선을 주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시선을 흘끗 돌렸다. 해 질 녘의 석양이 저편에 걸린, 보석을 흩뿌린 듯 반짝거리는 바다에서 그는 잠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새하얗고 붉고 푸른 돛을 매단 배들이 유유히 물 위를 흐르는 모습이 마치 장난감 같았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잠시간 바다에 시선을 주던 아케론은, 어느 순간 들려온 흐느낌에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흑, 흐윽….”
아케론의 멍한 얼굴에 다시 빛이 돌아온다.
‘……아.’
그제야 그는 제 아래 엉망진창이 된 채 울음을 터뜨리는 루키우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장, 아흣, 장군… 아, 절…….”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고개를 숙여 루키우스의 입술을 머금었다.
절벽에 파도가 부딪치는 시원한 소리는 지금 그의 몸을 잠식한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머리까지 뻗은 열기에 휘말려 그는 충동적으로 몸을 웅크리고야 말았다. 루키우스의 흰 목을 으적 깨물며 그는 가시지 않는 더위가 주는 고통을 해소하려 했다.
“하, 힉!”
입술 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온 순간, 거친 손이 버둥거리는 루키우스의 허리를 꽉 부여잡아 제압했다. 사내의 뜨거운 이마 위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군 구리처럼 벌겋게 익은 몸이 끈적한 땀으로 번들거렸다.
루키우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사지를 비틀거렸고, 아케론은 그런 그의 허리를 부여잡아 당겼다.
작은 몸으로 하는 반항은 무색하다. 아케론은 굳건한 바위와 같았고, 버둥거리는 몸짓은 그에 부딪쳐 흐트러졌으므로.
무섭도록 시퍼런 눈이 허공에 빛을 휘날렸다. 거친 손은 새빨간 자국이 남은 둔부를 꽉 부여잡은 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정욕을 해소하는 것보다 성욕을 쏟아 내는 것에 가까웠다.
“악, 윽, 흑!”
괴로워하는 루키우스의 손톱이 사내의 근육이 도드라진 등을 파고든다. 땀에 젖은 아케론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침내 성기의 끝이 그의 깊은 곳을 찌른 순간 길고 높은 울음소리가 아케론의 고막을 때려댔다. 새하얀 몸이 유연하게 휘어지며 충격을 드러냈다.
바닷바람에 섞인 비린내와 짠내를 맡은 채로, 아케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런 그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안에 정액을 쏟아낸 채로.
“헉, 허억.”
깊고 뜨거운 숨결이 사내의 입술 사이로 흐르고, 바다 저 너머를 노려보는 군청색 눈은 마치 짐승의 것처럼 번뜩 빛난다.
뜨거운 햇살이 눈앞을 어지러이 교란시키고 있었다.
열상이 새겨진 듯 찢어질 것만 같은 살갗.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맞대고, 그 축축하고 뜨거운 몸과 몸을 부둥켜안으며 아케론은 그 상태 그대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무지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찐득한 살갗이 맞물리는 불쾌감에도 몸을 물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루키우스를 놓아준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아읏!”
새하얀 허벅지에 농밀한 정액이 흘렀다. 성기가 빠져나온 순간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빼고 몸을 물렸다. 몸을 지탱한 손이 거두어지는 순간 루키우스의 몸은 털썩 대리석 바닥에 바로 쓰러져 내렸다.
풀린 다리를 부여잡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바닥에 엎어진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사의 열기로 달아오른 몸은 만지면 화들짝 놀랄 만큼 뜨거운데, 군청색 눈은 한겨울의 얼음처럼 시릴 뿐이다.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른 대리석 바닥에 다리를 오므리고 주저앉은 루키우스가 밭은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는 아케론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눈처럼 흰 살결에 붉고 푸른 꽃을 새긴 채. 희고 끈적한 액체를 골짜기 사이로 뚝뚝 흘리면서.
그는 저를 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아, 하악….”
숨결이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케론의 눈이 어느 순간 흔들거렸다.
진주홍색 노을이 루키우스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이었다. 몽혼한 얼굴을 가로지른 햇빛은 그의 머리에 이르러 마치 장신구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이 주춤거릴 그 무렵 루키우스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케론은 그의 얼굴이 순수하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노을이 물들듯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귓가에 닿는 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케론이 느릿한 숨을 내뱉었다. 얼굴에 일렁거리던 감정의 파동을 완전히 지운 채, 아케론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루키우스가 지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안아 줘.”
그리 말하며 손을 뻗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두꺼운 팔이 가는 허리를 휘어 감고 루키우스를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루키우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케론의 목에 팔을 감고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에 파고들었다.
제 가슴에 이마를 기대곤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을 짓는 루키우스에 아케론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진다. 마치 침대 위에 누운 듯한 편안한 모습에 눈썹을 꺾은 그는, 그러나 그 어이없는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본디의 무심한 표정을 되찾고 발걸음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정사 후 녹초가 되어 말도 잘 내뱉지 못하던 첫날밤의 모습은 역시나 연기였던지. 루키우스는 그날 이후 이어진 정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사 후 아케론에게 엉겨 붙고 꼬리를 살랑대는 고양이처럼 갸릉거리는 루키우스가 익숙하다.
루키우스는 그가 기르는 애완 고양이 같이 애교를 부렸고, 아케론은 그런 루키우스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별수 없이 휘둘리고야 말았다.
노예로서 주인에게 뭐라 말할 수 없어, 그저 그는 예의 무뚝뚝한 얼굴을 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음.”
“…….”
“……좋은 냄새.”
묵묵히 걷던 아케론의 눈썹이 순간 꺾인다.
좋은 냄새가 날 게 뭐가 있어?
8월의 태양 볕 아래 대리석 발코니 위에서 나눈 정사는 아케론의 몸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다. 차라리 루키우스의 관리된 몸에서 몰약의 향기로운 냄새가 나겠지. 그러나 루키우스는 정말로 황홀한 냄새를 맡은 듯 단단한 사내의 가슴에 뺨을 비비고 있었다.
그는 애정이 충만한 고양이 같았다.
그런 루키우스의 애정 공세를 아케론은 무뚝뚝한 얼굴로 튕겨 내며 걸음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케론이 회랑을 건너, 정원을 지나, 아트리움에 다다를 때의 일이었다.
짙푸른 남색 커튼을 걷고 아케론이 방 안에 들어서려던 와중이었다. 그는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몸을 멈칫한 아케론이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한다.
그는 스물 초중반으로 보이는 성실한 인상의 그리스인 노예였다. 초야에 그의 축객령을 받았던 니코마티스. 그의 손에 들린 대야와 수건을 깨달은 아케론이 바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니코는 루키우스의 시중을 드는 노예였다. 그는 항상 주인의 방 근처에 대기했고, 그의 명령을 바로 받았다. 그리고 아케론은 그런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루키우스를 품에 안은 채 아케론이 성큼거리는 걸음걸이로 방 안을 향했다.
“아케론 님, 저기….”
등 너머의 말을 무시한 채 아케론은 힘없이 늘어진 루키우스의 몸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을 뿐이었다.
모기처럼 귓가에 앵앵거리는 목소리에 아케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것을….”
저것이 주인에 대한 깊은 충성심이라면 갸륵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대야를 내보이며 제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입증하려 드는 충직한 노예를 아케론은 한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입술을 열었다.
“나가도 된다.”
그것은 차라리 경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니코마티스가 움찔하여 그를 보았을 때, 아케론은 살점을 저밀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코마티스가 반박했다.
“하, 하지…!”
“나가.”
그러나 돌아온 칼날로 밧줄을 내리치는 듯한 목소리에 니코마티스는 두려움을 느끼고 굴복하고야 말았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가는 사내의 등을 오한이 들 만큼 서늘한 눈이 노려보았다. 그것은 번뜩거리는 섬광을 품었다가 다시금 잠잠한 빛을 되찾았다. 짙은 남푸른색 천막을 노려보던 아케론이 고개를 돌려 루키우스가 늘어진 침대를 응시했다.
밤하늘을 담은 호수 같은 눈과 마주한 순간 아케론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의 얼굴에 감정이 물밀려 나가듯 빠져나가고, 긴 시간이 흘러 그는 몸을 움직였다. 대야를 손에 쥐고 아케론이 루키우스를 향해 다가섰다.
그는 루키우스의 엉망진창이 된 몸을 정리했다. 수건으로 매끄러운 몸을 닦고, 엉망이 된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면서.
정액을 파내는 손길에 루키우스가 몸을 떨며 으응 비음을 흘렸다. 아케론은 귓가에 들려온 달큼한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손을 놀릴 뿐이었다. 빳빳하던 물수건이 물을 먹어 흐물해질 때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몸을 정리하는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케론이 가느다란 발목에 묻은 정액을 닦아 내렸다. 커다란 손으로 제 발목을 섬세히 닦는 그를 루키우스는 빤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케론은 꿋꿋이 그 시선을 무시할 뿐이었고.
그가 마침내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손을 물릴 때였다.
몸을 돌려 침대 아래에 놓은 대야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아케론이 몸을 멈칫거린다. 그의 옷깃을 루키우스가 돌연 잡아당긴 것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두 팔이 뻗어졌다.
“아케론.”
후욱 코끝을 스치는 살 내음에 아케론은 그 순간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아….’
그의 예상대로 루키우스에게선 매혹적인 향이 났다.
로마의 부유한 귀족은 장미꽃을 띄운 물로 목욕을 하고, 때때로 와인으로 몸을 씻고, 때때로 우유에 몸을 담근다. 아케론은 형용할 수 없이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루키우스가 오늘 몸을 씻으려 선택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유구나.’
연이어 입술에 닿는 보드랍고 말랑한 감촉. 아케론이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청년의 입술에 달콤한 미소가 흐르고, 정적이 이어졌다.
푸른 벼락같은 눈이 아래로 내리깔려 루키우스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느릿하게 입술을 뗀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사내가 이윽고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갈라진 목소리.
“너야말로.”
관능적인 웃음을 흘리며 루키우스는 여유롭게 답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지?”
땀에 젖은 미청년의 얼굴은 호박색 촛불의 빛 아래 묘한 매력을 흘리고 있었다. 힘이 없어 지친 얼굴을 하면서도 루키우스는 저보다 두세 배는 큰 사내의 위협에 겁을 먹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산양젖 치즈를 건포도와 와인에 섞어 훈제시킬 거다. 이도시우스에게 신선한 굴에 파슬리와 박하를 넣어 꿀에 절여 내오라 명했다.”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종달새와 같았다.
즐겁게 웃는 루키우스의 얼굴에서 아케론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넌 굴을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게 또 뭐 있지?”
그리 말한 후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볼을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살짝 긁었다. 아케론의 몸이 경직되는 순간 루키우스는 그를 향해 빙긋 다정한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실로 사랑스러웠고, 아케론은 그에 견디지 못했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고역감을 참지 못한 채 아케론이 짤막히 말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루키우스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답변하지 않았고, 그에 아케론은 더욱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푸른 핏줄이 솟은 관자놀이를 말없이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눈을 감았다.
아케론은 그런 그를 잠시간 노려보다가 뛰쳐나가듯 방을 벗어났다.
*
해변의 밤바람은 제법 거세고 매서웠다.
이른 저녁 식사 후, 루키우스의 뜻에 따라 발코니에서 그와 몸을 섞어야 했던 아케론은, 어느새 노을이 가시고 어둑해진 하늘을 마주하고 있었다.
보라색 하늘.
그에 시선을 빼앗기던 사내의 얼굴에 서서히 균열이 번져 나갔다. 이제는 보라색을 보노라면 존귀함은커녕 천박함만을 느끼고야 만다.35)
느린 한숨을 내뱉으며 사내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고 복도를 걸었다.
분수대에 맑게 물이 흐르는 회랑을 지나 별채로 들어서기까지 아케론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끼익, 소리를 흘리는 나무문을 열며 별채 안으로 들어설 때쯤 그의 얼굴은 짙은 피로에 적셔져 있었다.
차라리 경기에 출전하는 게 나을 것만 같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아케론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가 꺼려 했던 보랏빛 밤하늘은 어느새 새까만 잉크로 몸을 물들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눈을 깜빡이고 있는 하늘은 별빛이 선명했다. 맑은 날씨에 별빛이 유독 빛나는 밤이었다.
아케론은 어느 순간 눈을 떠 고요한 시선으로 그 하늘을 응시했다.
아니, 사실 하늘을 응시한 게 아니다.
경이로울 만치 선명한 푸른 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종달새처럼 말을 걸었던 루키우스의 얼굴이었다.
‘자아, 아케론.’
그리 말하면서 살포시 웃는 사랑스러운 어린 청년.
가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에 과자를 넣어주는 루키우스의 입가에 서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생각하며 아케론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것은 사내든 여인이든 눈을 떼지 못할 미소였다.
묵묵히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손으로 하관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웃음은 뒤로 갈수록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며들었다.
저택에 온 이후로, 거의 하루건너 한 번 루키우스의 부름을 받고 그를 품에 안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밤마다’라는 말을 썼지만 그의 병약한 신체 탓에 그 정도가 한계였으므로, 아케론은 그의 몸이 허하는 날이면 매일 같이 그와 몸을 섞었다.
역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껏 결코 남색을 즐긴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쾌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과거에 아케론은 흔한 정부조차 들이지 않았고 ‘술과 향응이 사내를 망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맹종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미묘하다.
해변의 밤바람을 맞는 아케론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어린 주인에 대한 경계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사내에게 익숙한 이였다.
나른한 어투나, 느릿느릿한 손짓. 어느 순간 고개를 돌리면 마주치는 웃음기를 머금은 자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아케론이 조소했다.
하나같이 사내를 꾀어내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저는 그에 휘둘리고 있었다…….
아케론의 입술 밖으로 느릿한 숨이 흐른다.
아직 제가 해야 하는 일, 타락한 로마인의 유흥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하는 현실에 거북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뼛속까지 로마인이었기에 사소한 행동으로도 저를 흔드는 이를 불쾌해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아케론이 버리지 못한 태생적인, 그리고 관습적인 본능이었다.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노예로 굴러도, 3년간 이민족의 문화가 깊게 물든 외딴 섬에 살았어도, 심지어 저 자신의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증오하면서도, 그의 몸에서 벗겨지지 않은 그 끈질긴 로마스러움 말이다.
로마인은 쾌락에 무뎌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즈음 그는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런 로마스러움을 버리고 있었다.
그의 어둑한 눈이 수면 아래로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냉소가 스치던 그 어느 순간이었다.
바스락.
문득 들려온 인기척에 아케론이 고개를 빠르게 돌려 문을 노려본다. 번뜩 빛나는 군청색 눈이 확장되어 있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정제된 살기가 스치고, 아케론은 문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쾅!
그때였다.
“힉!”
그 순간 아케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
긴 머리카락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야밤의 불청객은 아케론의 눈치를 살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던 아케론은 순간 당황하여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울렸다.
“아, 아케론 님.”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여인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사건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저 여인은 야밤에 기척을 죽이고 별채로 다가왔다. 아케론의 별채는 가장이 자리한 공간과 가까워 노예들이 지나갈 이유가 없었음에도.
아케론은 침묵했고, 여인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지나치게 어리숙한 여인의 행동. 그를 주의 깊게 살피던 아케론은 어느 순간 불청객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얼굴.’
양성소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이것은.
발그스레 달아오른 뺨.
정처 없이 흔들리는 몽혼한 눈.
아케론은 저것과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몇 번 더 있었다. 아케론의 눈썹이 슬쩍 일그러진다. 사랑에 빠진 여인이 얼마나 정열적인지는 이미 질리도록 경험한 바였고, 이런 일에 대처하는 것도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다.
“제가, 제가 감히 아케론 님의 시간을, 뺏을 수 있을까요?”
그 짧은 말이 그리도 힘든지, 말을 마칠 무렵에 여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핏기가 싹 가신 여인의 얼굴을 아케론은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가물가물하게 떠오르는 여인의 정체를 추적하고 있었다.
“저는……. 저는…… 제 주제를 잘 알지만,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저 얼굴이 익숙했다.
회랑을 지나갈 때에 저 여자와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제 얼굴을 흘깃 훔쳐보던 여인을, 아케론은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른 뺨만 보아도 그녀가 저를 어찌 생각할지 뻔한 걸.
아케론은 만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제게 연심을 가진 이의 눈길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나를 좋아하는 여인.’
그리고 그 순간 아케론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그렇지만 당신의 눈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말은 귓바퀴로 스쳐 지나간다. 여인이 알지 못하는 사실은, 아케론이 그녀의 고백에 전혀 집중을 하지 않고 있단 것이었다. 아케론은 다른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달밤에 빛나는 여인의 얼굴은 모두가 미남 미녀인 ‘최상 품질의 노예’답게 몹시 아름답다. 달빛은 장신구가 되듯 새하얀 이마를 빛냈고, 보기 좋게 살이 오른팔이 하늘하늘한 튜니카 사이로 돋보였다. 혈색이 좋은 부드러운 뺨은 장밋빛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허리까지 오는 곱슬기가 약간 있는 연갈색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땋아 오른쪽 어깨 위에 얹혀져 있었다.
사내라면 모두가 좋아할 듯한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문득 마르고 앙상한 소년의 몸을 떠올리고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대, 대검투장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였다.
“이름.”
더듬더듬 수줍은 마음을 고백하던 여인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네?”
여인의 얼굴이 물에 흩어지는 포도주처럼 발그스레하게 물들었다.
당황하여 말조차 하지 못하는 여인이 고개를 들어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법한 사랑스러운 외모의 여인은 얼굴 위에 수줍음을 동동 띄우고 있었다. 잠시간 그녀를 어둑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케론이 문턱에 댄 팔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다시금 나직한 목소리로 되묻길.
“이름은?”
여인은 더듬거리며 답했다.
“폴, 폴릭세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케론은 여인의 턱을 손으로 잡아 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폴릭세네의 두 눈을 크게 뜨이게 한 행동이었다. 여인의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물든다.
“아.”
시리도록 푸른 눈과 마주하곤 폴릭세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입술을 벌리고야 말았다. 턱을 틀어쥔 단단한 손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 무심함으로 이름이 높던 사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녀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붉은 입술을 열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가 어른거리던 폴릭세네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문 어린 것으로 변하고야 말았다.
“아, 아케론 님?”
입술에 닿을 부드러운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슬그머니 눈을 뜬 폴릭세네는, 슬쩍 찌푸려진 그의 얼굴을 목격하곤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차가운 달빛 아래 아케론의 얼굴이 어쩐지 무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폴릭세네가 불안에 떨 때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부여잡은 손이 느릿하게 물러나고, 어안이 벙벙한 여인의 얼굴을 향해 건조한 시선이 떨어져 내렸다.
“다시는 이곳을 밟지 말거라.”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차마 폴릭세네가 무어라 항의하지 못할 만큼의 위압감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방 안으로 사라지는 아케론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아케론은 태생이 성실한 자였다.
결코 나약해지지 마라, 누가 보는 일이 없더라도 무능한 나귀처럼 굴지 마라. 저를 엄히 훈육하던 아버지의 말이 없어도 그는 본디 제 자신을 통제하는 일에 익숙했다. 절제하는 삶이 익숙하다. 가끔 유혹에 져 과식을 하거나 숙제를 게을리하는 날이면, 그는 제 자신이 도태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인 지금이야 그런 강박을 어느 정도 버렸지만, 그 잔재는 아케론의 안에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 같은 몸에 밴 습관 말이다.
“주인님, 주인님!”
그러니 누군가의 울부짖는 소리에 평소보다 이르게 잠에서 깨어난 아케론은, 부스스한 눈을 뜨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함에 휘말려야만 했다. 처절하게 주인을 부르짖는 여인의 음성은 다급하여 별채를 쩌렁하게 울렸으므로.
그 목소리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으나, 잠에서 덜 깬 아케론은 목소리의 주인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본디 규칙적인 생활 패턴에 익숙한 몸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마구잡이로 소리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찡하다.
미간을 찌푸린 아케론은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둔 물로 목을 축이고 나서야 어느 정도 잠기운을 떨쳐 낼 수 있었다. 그러곤 그때가 돼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아! 제발, 제발 저를 팔지 마세, 주인님!”
“입 다물어라! 주인님이 네게 자비를 베푸신 걸 모르느냐?”
군청색 눈이 크게 떠진다.
‘…폴릭세네?’
그것은 밤을 틈타 제 처소로 숨어들었던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갈색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뒤로 묶은 여인의 수줍은 얼굴을 떠올린 아케론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만다.
폐부에서 흘러나오는 처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이어졌다.
“주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주인님의 것에 손을 대지 않을 테니……. 저를 노예시장으로 데려가지 마세요!”
목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아케론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나 그녀의 얼굴을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서서히 그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주인님의 것을 탐내고도 그리 뻔뻔하게 말할 생각을 해? 이 도둑고양이 같은 것! 은혜도 모르는 것은 이 저택에 있을 필요가 없어. 니코! 뭐 하지? 당장 그녀를 마차에 집어넣어!”
“싫어! 아악! 거긴 이제 싫어!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방 안에는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굳은 얼굴로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아케론이 문득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처절한 폴릭세네의 목소리가 그에게 알리고 있었다.
너는 함부로 행동할 자유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
아침부터 기분이 몹시 저조해져 아케론은 저를 식당으로 부르는 노예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노예는 언제나와 같이 그를 불렀고, 아케론은 불쾌한 기분을 억누른 채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생긋 웃는 루키우스와 마주했다.
“잠은 잘 잤어?”
루키우스는 변명을 할 의무가 없었다.
봄바람 같이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루키우스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아케론은 의자에 앉았다.
그날의 식사는 평소처럼 훌륭했다.
로마 귀족들은 본디 저녁을 든든히 먹고 다른 끼니는 대충 때우곤 한다. 이른 저녁에 시작되는 케나36)에서 새벽까지 진행되는 향연 코미사티오37)까지의 저녁 식사는 사교의 일종이었으므로, 귀족들은 그때를 위해 아침, 점심은 대충 끼니를 때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저택에서만큼은 세끼에 올라오는 식사가 항상 풍족했다. 폐쇄적인 성격의 루키우스는 사교활동을 벌이지 않아 향연을 열지 않으므로, 세끼는 고루 화려한 요리들로 채워졌던 것이다.
저택의 아침은 항상 화려했고,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로 산양젖 치즈였다. 절벽이 많은 오라니움 지방에서 공수해 온 치즈는 큼지막한 덩어리째 식탁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아케론은 제 앞에 있는 황금빛의 반투명한 와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파우스티안 팔레르눔. 네오폴리스 팔레르누스산 중턱에서 자생하는 특별한 포도를 으깨 만든 이 와인은, 역대 로마 황제들이 즐겨 마셨던 최고급의 술이다.
루키우스가 단언했던 신선한 굴 또한 먹음직스러웠다. 이스카리아는 섬이었으므로 해산물이 자연 싱싱할 수밖에 없었다. 파슬리와 박하를 넣고 꿀에 절인 통통한 굴은 미식가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미식임이 틀림없었다.
그 밖에도 허브를 섞은 반죽으로 만든 딱딱한 빵, 빵을 적셔 먹는 용도의 향료를 넣은 우유, 와인을 넣어 졸인 토끼 고기, 셀러리와 파슬리와 바질로 만든 페이스트를 곁들인 산쥐 구이, 작은 유리병에 넣은 커스터드푸딩, 산미가 강한 요구르트까지.
육류는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웬만한 케나보다 더한 정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딱히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눈이 돌아갈 법한 상을 눈앞에 두고, 그러나 아케론은 식욕을 느끼지 못한 채 식사를 망설이고야 말았다.
비참하게 쫓겨난 여인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다지 동정심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케론은 노예시장에서의 굴욕을 끔찍하게 여겼고, 그에 죄책감에 시달려 도무지 편안한 마음으로 그 미식을 제 목구멍에 밀어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루키우스의 말처럼 한자리에서 한 무더기를 까먹을 만치 선호하던 굴조차 질기고 역겨울 지경이었으니, 아케론은 그저 형식적으로 굴 껍데기를 긁을 뿐이었다.
비린내에 둔감하던 혀가 민감해진 것만 같다.
아케론의 식사 태도는 몹시나 소극적이었고, 보는 이의 입맛을 저절로 뚝 떨어지게 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섬세한 루키우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치챌 수 있었다.
루키우스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왜 이리 먹는 게 시원찮지?”
아케론이 빵을 뜯던 중 손을 멈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달걀 푸딩을 스푼으로 휘젓고 있는 루키우스가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멈칫한 아케론의 귓가로 연이어 말이 흘렀다.
“주방장의 잘못은 아닌 듯한데, 굴도 신선하고 비리지 않아. 하룻밤 사이에 굴을 싫어하게 된 건 아닐 테고…… 꿀이 입에 안 맞나?”
스푼을 빨며 하는 말이었다.
“음, 밤꿀의 향이 독특하긴 하지.”
아케론은 결국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뭐?”
한 여자의 인생을 망치고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한 뻔뻔한 태도에 아케론은 억눌렸던 화를 다시 폭발시키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루키우스가 폴릭세네에게 좋은 주인이란 것을 잘 알았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으니 희롱당할 걱정도 없고, 저택은 부유하여 노예들은 어느 평민보다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녀가 그런 좋은 주인을 두 번 더 만날 수 있을까?
폴릭세네가 저택을 떠난 일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비극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 때문이다.’
아케론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져 있었다.
처절한 비명이 귓가에 지워지지 않았다.
아케론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영혼의 훼손을 알고 있었다. 노예시장에 두 번 다시 가야 한다면, 차라리 탈주를 꾀하리라.
“제 잘못입니다.”
긴 의자 위 팔꿈치를 대고 몸을 기댄 루키우스의 얼굴을 아케론은 암울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에 잠시간 침묵하다가 말을 내뱉었다.
“솔론! 이도시우스에게 밤꿀 말고 석청을 내오라 해라. 굴 요리에는 밤꿀은 맞지 않는 것 같군. 여기 있는 굴은 버리고 당장 아케론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다시 올리라 해. 또다시 이런다면….”
아케론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제가 굴이 비려서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루키우스의 몸이 멈칫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허공에 시원하게 뻗은 팔이 느릿하게 아래로 향했다. 루키우스는 느릿느릿하게 몸을 돌려 아케론을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느냐, 말하는 듯한 의아함이 서린 얼굴. 그를 바라보며 아케론은 건조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와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짓씹는 말에 루키우스는 그 순간 빙그레 웃음을 흘렸다.
“아, 그 얘기였나?”
아케론의 굵은 눈썹이 꺾이고야 만다. 루키우스는 흉흉한 시선을 웃음으로 흘리고 있었다. 아케론이 숨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노예시장에 폴릭세네를 파는 것은 부당합니다. 마르스에게 맹세코 저는 그녀와….”
“내가 그걸 꼭 알아야 하나?”
그러나 그의 말은 냉소적인 말에 끊기고야 말았다.
아케론의 몸이 멈칫하고, 여유롭기에 더욱 서늘하게 들리는 말이 이어졌다.
“응? 아케론. 내가 그녀와 네가 정말 배를 맞댔는지 알아야 해?”
손에 쥔 석류를 내려놓고 루키우스는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혀를 놀렸는지 내가 그런 하찮은 사실 따위를 알아서 뭐에 써먹을 거냐. 이런, 아케론. 왜 이리 어리석게 구는 거야?”
비웃음을 흘리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중요한 건 노예가 감히 주인의 것을 탐했다는 사실이지. 다른 게 아니잖나. 폴릭세네가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지른 걸 아직도 모르고 있는 거냐?”
순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감히 주인의 것에 눈을 들였어. 채찍질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는 자비를 베푼 거야.”
그 또한 로마인이다….
“그걸 모르겠니? 아케론.”
루키우스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케론은 그 논리에 굴복할 수 없었다.
“저는 저 자신의 것입니다.”
7년간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무기력하게 굴종했으면서, 제 삶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살아왔으면서. 고작 검을 잡아본 적도 없을 애송이의 한마디 말에 노여움을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밧줄에 휘감긴 짐승의 눈을 하곤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래?”
루키우스는 손에 쥔 포도주 잔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희미한 웃음을 띤 얼굴에는 말할 것도 없이 아케론을 측은히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여유로운 얼굴에 불쾌함을 삼키던 아케론은, 그리고 이어진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나를 저 식탁 위에 쓰러트리고 범하라 네게 명령한다면……, 넌 반항할 수 있나?”
그것은 몸을 기울여,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속삭인… 도발이었다.
‘뭐?’
고개를 든 아케론의 시야에 그를 바라보는 루키우스의 입가에 스치는 조소가 똑똑히 보인다. 달콤한 자안에는, 그를 가소롭게 여기는 기색이 가득했다. 순간 무너져 내리는 사내의 얼굴을 루키우스는 얕보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노래하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내 것이지. 안 그래? 아케론?”
그는 석상처럼 굳어진 사내의 뺨을 강아지나 고양이를 어르듯 쓰다듬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여유롭게 웃었고, 그에 순간 아케론의 눈에 화염이 튀었다. 감정이 억눌린 사내의 턱이 떨려온다. 그를 검지로 더듬으며 루키우스는 나른한 말을 흘렸다.
“너는 반항할 수 없다.”
지극히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지극히도 냉정한 말이었다.
“넌 네 자신의 것이 아닌, 그저 나의 노예일 뿐이니까.”
그게 아케론의 한계였다.
“그러니… 읏?!”
짜악! 살갗을 후려치는 매서운 소리가 울렸다.
사내를 품 안의 개를 다루듯 어르던 손이 허공을 허망하게 맴돌고, 루키우스는 얻어맞은 손을 감싼 채 멍한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정적이 흐르는 식당 안, 들끓는 목소리가 뒤이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이 더러운…….”
“…….”
“……암캐 따위가, 감히.”
루키우스를 내려다보는 군청색 눈에는 살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주인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저택에 오기 전까지 보였던 권태로운 눈이 아니었다. 자안은 번개가 튀는 두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케론의 얼굴은 마치 제 앞에 자리한 이를 짓씹어 먹어 버리고 싶어 하는 듯 살벌했다.
그러나 아케론의 성벽처럼 강인한 얼굴에는 틈이 생기고야 말았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물에 탄 잉크처럼 퍼져 나갔던 것이다. 아케론의 코앞에 자리한 얼굴, 그것이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미소를 띤 순간 아케론은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시선이 무섭지도 않은 것인지. 제 배는 될 법한 사내가 두렵지도 않은 것인지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살벌한 시선에도 나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도발도 허세도 아닌, 진실한 평온함을 지닌 자연스러운 미소를 마주하며 아케론은 그 순간 얼이 나가고야 말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분노를 터뜨렸으나, 이 상황은 사뭇 예상하지 못했다.
침묵 끝에 루키우스가 선분홍색 입술을 열었다.
“그래, 아케론.”
“…….”
“나는 더러운 암캐고…… 넌 그 암캐의 노예지.”
“…….”
“그러니 너는 닥치고 날 안으면 되는 거다. 아무런 생각 없이….”
“…….”
“……내 명령에 따르면 된다.”
사내의 두드러진 목젖이 잘게 떨린다.
“이스카리아의 아케론.”
마치 꿈속에서 들려온 것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게 네 노예로서의 의무다…… 알겠나?”
그러곤 루키우스는 포도주를 머금었고, 아케론은 붉은 액체로 젖어가는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꿀빛 금발이 새하얀 얼굴을 쓸었다. 루키우스가 제비꽃 같은 눈으로 저를 바라볼 때 아케론은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 순간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화를 풀어라, 아케론. 식사 중에 이게 무슨 일이야?”
그를 어떻게 대할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고.
머뭇거리던 아케론이 그 순간 팔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네가 기뻐할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 그런 얼굴을 보이지 말아다오.”
그곳에는 아케론의 두툼한 팔을 잡고 애교를 부리는 루키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이는 언뜻 처연한 얼굴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에 순간 마음속에 자리한 미움과 껄끄러움을 완전히 지우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야 말았다.
반응 없는 아케론의 모습에 루키우스는 안절부절못했다. 식탁 위를 힐끗 바라본 루키우스가 손을 뻗어 화병 위에 놓인 설탕으로 만든 과자를 집었다.
그것은 베리를 넣어 굳힌 듯 붉은색을 띤 설탕 과자였다.
정교하게 세공되어 보기에 아름다운 그 과자는, 얇고 긴 손가락 위에서 마치 장신구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입술을 향해 손을 뻗으며, 선분홍색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말랑한 입술은 작고 여리다. 틈을 보이는 그 입술 사이에 고른 이와, 분홍색 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라즈베리를 사탕수수 즙에 녹여서 사과 모양으로 세공했지. 사과 안은 버터와 밀가루를 진득하게 볶은 루를 넣었고. 이도시우스는 훌륭한 요리사지만 사실 디저트를 가장 잘 만든단다.”
순간 아케론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혀가 녹을 만큼 달콤할 거야.”
“…….”
“입을 벌려, 응?”
돌처럼 굳어진 사내의 몸. 루키우스는 그의 튜니카를 잡아당겨 그를 졸랐다.
“응? 아케론.”
두 눈을 반짝거리며 제 앞에서 칭얼거리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잠시간 묵묵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케론이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뜨겁고 건조한 입술에 새하얀 손가락이 스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속에 쏙 들어오는 설탕 과자를 으적 씹으며 그는 그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삭막한 아케론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그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스며든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설탕으로 만든 과자와 같다.
입 안에서 부스러지는 설탕 파편을 으적거리며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빨면 달콤한 맛이 날 듯한 사랑스러운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입 안에 퍼져 나가는 혀를 마비시킬 듯한 아릿한 단맛을 몸에 새기고 있었다.
*
그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날 이후, 답답함을 도무지 참을 수 없어, 도저히 알 길이 없는 그의 속내가 궁금해서 아케론은 무심한 성격에 말을 걸지 않았던 노예들에게 말을 묻고 다녔다.
“저도 중간에 팔려 온 입장이라 모르겠습니다. 아, 니코라면 대충 알 수도? 주인님이 이스카리아섬에 도착할 때 니코와 함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예? 저도 네오폴리스에서 팔려 왔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로마 본토에서 오신 귀족이라는 말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제가 모른다면 저택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를 겁니다.”
“몰라요, 저는 몰라!”
“왜 자꾸 말을 거는 거예요? 당신과 가까이하기 싫습니다, 저는!”
저택에 머물게 된 지 어언 한 달째, 제법 많은 밤을 그와 살을 맞대며 보냈음에도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알지 못했다. 신비로운 보랏빛 눈이 인상적인 그 어린 로마 귀족은 알면 알수록 더욱더 모를 이였다.
아케론은 그의 가장 은밀한 곳, 타인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 되는 비밀스러운 곳을 보았으나 정작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알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할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알지 못했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자랐고, 이름은 무엇이며, 또 왜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
그를 볼 때마다 아케론은 미궁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미지의 영역을 캐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가 숨기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하나도 숨김없이 파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를 더 알고 싶었다.
“주인님은 너그럽고, 이 저택은 아름다워요. 식사는 풍족하고 옷감과 침구도 부드럽고요. 주인님께는 가족이 없으니 모실 사람은 없고 일손도 부족하지 않으니 노예에게 이곳은 지상낙원 같은 곳인데 왜 저를 폴릭세네처럼 저택에서 쫓아내려 하시나요?”
도대체 그자는 왜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수도에서 오신 분들을 피하시는 것 같긴 합니다. 사정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노예가 주인의 사정을 캐물을 순 없어서….”
무슨 사연을 품었길래, 그는 그리 저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나.
“가끔 저택을 방문하는 손님은 있긴 한데, 그분이 누군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1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하니….”
그러나 그의 과거를 숨기는 듯, 혹은 진실로 알지 못하는 듯 저택의 노예들은 아케론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아케론님. 죄송하지만 저택의 노예들에게 지나치게 다가가지 않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들 너무 불안해합니다. 아시잖습니까? 로마인에게 가장의 권위가 어떤지.38) 저희는 모두 이곳을 좋아합니다. 주인에게도 충성하고요…… 불필요한 오해는 사고 싶지 않습니다.”
노예 중 유일한 중년인,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가 내뱉은 말에 아케론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헤이즐넛색 눈이 인상적인 사내는 아케론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그의 시선에는 책망이 서려 있었다.
아케론이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폴릭세네의 비참한 결말을 떠올리며 아케론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힘겹게 저택 안에 기거하는 모든 노예들에게 말을 물어보았다.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그들은 추궁에 성실히 답변을 했으나 아케론은 결국 제가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저택에서 가장 오래 일했던 니코마티스와 그의 아비이자 저택의 집사인 솔론 또한 아카이아 출신이었고, 네오폴리스에서 팔려온 이들이었다. 연륜이 있는 솔론은 말을 돌리는 듯했으나, 아케론은 적어도 니코마티스에게서는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까이 루키우스를 모시는 두 측근마저 그의 연원을 모르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저택에 자리한 이들은 로마 밖에서 구매한 노예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 있는 로마 출신마저 모두 네아폴리스의 노예시장을 거친 이들이었다. 그 많은 저택의 노예 중 로마 본토와 연관이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저택에는, 노예 이외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교를 나누는 이는 단연 없고, 클리엔테스39)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요리사마저 직업 요리사(마기루스)40)가 아닌 노예를 사용했으니, 아케론은 그를 깨닫고 루키우스의 철저함을 알 수 있었다.
‘단서를 정말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아직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외견과 다른 노회함에 아케론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지.’
그저 본토에서 추방당했다기엔 지나치게 은폐된 과거. 로마 귀족으로서 필수적인 사교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정말로 유배당한 사람 같다. 노예만을 끼고 저택에 은거하는 루키우스가 몹시 이상했다. 아케론 또한 로마와의 연을 끊어 본토 사람과 접촉하기를 꺼려 했지만, 그것은 예전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으로 인한 환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작 성인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된 애송이였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죄인처럼 과거를 숨길 일이 무어 있어?
‘도대체 어떤 사연을 품고 이 섬에 온 건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는 이런 화려한 저택을 지을 만치의 부를 누리고 이런 벽촌에서까지 사람을 피해 다니는가.
아무리 캐어내도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 그의 은밀한 과거가, 그의 정체가 궁금하다. 모든 것은 미궁 속에 있었고 그는 심지어 실타래조차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답답함이 치밀어 올라, 별채로 돌아온 아케론은 널찍한 창문 앞 책상에 앉아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시린 바람을 맞으며 꽉 막힌 마음을 풀려는 의도였으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우수수 낙엽이 흩날리는 소리를 듣던 중 돌연 나지막한 신음이 방을 울렸다.
머릿속에 의문이 엉켜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바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지의 미궁 속을 헤매는 기분에 그는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루키우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정확한 나이도, 이름도, 연고지도, 직업도,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 그의 모든 과거는 미궁에 빠졌다.
‘그리고….’
아케론의 얼굴에 그리고 어느 순간 냉소가 감돌았다.
‘……그 장군이라는 자의 정체.’
페리스타일을 바라보던 흐릿한 얼굴에 희미한 불쾌함이 떠오르고야 만다. 아케론은 그 순간 목구멍에 치민 말을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었다. 그 어떤 불유쾌한 기억을 떠올려, 아케론은 예민해진 신경에 귓가에 스치는 낙엽 소리마저 거슬려 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군청색 눈이 과거를 헤치고, 그 순간 아케론의 얼굴이 차갑게 식는다. 밤마다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성을 잃고 날뛰던 밤에, 그러니까 흥분이 고조될 때 아케론의 머리에 찬물을 뿌리는 말이었다.
‘장군, 아, 제발.’
아케론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무섭도록 싸늘해져 있었다.
창부의 뒤를 닦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도, 이건 기분이 더 더럽다. 누군가의 대체품이 된 기분. 그에 아케론은 짜증을 느끼며 루키우스에게 더욱 거칠게 대하곤 했다. 괴로워하며 제 아래에서 버둥거리는 그의 가녀린 팔을 힘껏 움켜쥐고 그의 안 깊은 곳까지 파고들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 목소리를 막으려 해도, 거칠게 그의 몸을 탐해도 오히려 고통 속 희미한 미소를 드러내는 루키우스의 얼굴과 마주하고 아케론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들끓는 성욕 외에 마음이 추호도 없다 한들, 그의 유혹을 거부하려 발버둥 치고 있다 한들 그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저가 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그저 몸을 파는 상황 그 이상의 모멸감을 안겨 주는 일이었으니까.
짐승도 제 암컷이 다른 수컷에게 눈을 돌리면 눈이 돌아간다.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주인이라 하지만 저와 몸을 섞는 것이 저 아닌 다른 사내에게 눈을 돌리는 일은 마땅히 사내를 분노하게 만들고, 날뛰게 만들 일이지.
그래서 그런 것이리라.
그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 사내를 부를 때마다 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것은.
그 순간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던 아케론의 얼굴에 음울한 빛이 스쳤다.
요즘 루키우스가 자그마한 입술로 다른 사내를 부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장군, 아, 장군.’
저를 타인에 투영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품은 즐거운 상상.
그것은 바로 겁도 모르게 날뛰는 어린것의 배를 터뜨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제 정을 꾸역꾸역 그 안에 채워 넣어 그 납작한 배를 부르게 만들고 싶은 충동.
충동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 음습한 망상이 된 지 오래였다.
다른 사내를 생각하지 못하게 그 청년에게 고통을 주고, 쾌락을 주고 싶다. 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며, 그러면서도 미소 짓게 만들며, 입술 밖으로 비명이 쏟아지게 하면서도, 교태가 섞인 신음을 흘리게 만들고 싶다.
루키우스의 얼굴은 그 음란한 속내와 다르게 순진무구했고, 그것은 사내의 가학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사내의 얼굴을 창문 밖에서 흘러들어온 선선한 바람이 쓸었다. 과일나무가 가득한 저택의 내원에서는 바람이 흩날릴 때마다 과실 향기가 방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 무르익은 과일의 달콤한 내음을 맡으며, 아케론은 은밀한 생각의 과실을 무르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아케론은 문득 군청색 눈을 크게 뜨며 일견 당혹감이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음탕하고 천박한 상상을 품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지금 내가 무슨?’
방 안의 공기가 식어 갔다.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는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린 아케론이 깊고 아득한 숨을 내뱉었다.
순결한 눈발을 마구잡이로 짓밟고 싶어 하는 그런 악의 어린 충동을 느꼈다. 가냘프고 여린 것을 울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상이 아닌 생각이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아케론의 얼굴에 허탈함이 퍼져나갔다.
‘내가 흔들리고 있나?’
그래, 그런 것이다!
그날 이후로 영혼은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야 말았건만. 기치로 품어 온 로마인으로서의 자긍심이 무너진 그날 이후 욕망은 거세되었고, 감정을 느끼지 못했건만. 그저 기나긴 시간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는데 이리 굴고야 만다.
이제껏 죽음을 원하는지, 삶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심판대에 서듯 투기장에 올랐을 뿐이다. 목숨을 신의 재판장에 던지고 물 흐르듯 운명에 몸을 맡기던 날의 연속이었다.
죽거나 혹은 살거나.
마땅히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목숨마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타자의 소유인 듯 대했던 나날들을 보냈다.
이 늦은 시간에 저가 이리 심력을 소모했던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를 강렬히 생각하거나, 혼란스러워했던 적이 있던가?
무언가에 몰입한 적이?
아니, 없다.
그런데 완전히 무뎌진 줄로만 알았던 감각이 회복되고 있다.
오래전에 이런 종류의 자극을 잊었다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전에 마모되고 닳아 버려, 더 이상 무엇을 욕망할 수도 이리 강렬한 욕망을 느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루키우스의 앞에서 석유 위 불씨를 던진 것만 같이 폭발하는 충동을 느꼈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솟아오른 화산재에 뒤덮인 도시 같이 감각이 죽었던 몸을 그리 자극시키는 그 청년을, 아케론은 그러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잃어만 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것이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과일 향이 코끝을 스쳤다. 파도에도 묻어지지 않는 그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아케론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헤어날 수 없는 혼란 속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암담함에 빠져 과거를 생각하고, 또 성욕에 휘둘리는 저 자신을 모욕하며 답답함이 치민 마음을 해소하려 했다.
“……아케론.”
그리고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그 목소리는 들려왔다.
‘루키우스?’
계시처럼 내려온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 아케론이 눈을 크게 뜨던 그 순간 희미한 공포가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연이어 내려앉았다.
“아케론… 아, 아케론.”
문을 열어 줘.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스며들 때, 그러나 아케론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한참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고요한 수면 위로 풀잎이 내려앉는 듯 그의 얼굴에는 파동이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
“아케론.”
그것은 물속에 깊이 잠긴 듯한 목소리였다.
아케론은 잠시간 의자에 멀거니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몸을 일으키고 문을 향해 나아갔다.
문손잡이를 잡고 머뭇거리던 그는,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문고리를 열었다.
“아, 아케론.”
손잡이를 손에 쥔 채 우두커니 서서 아케론은 눈앞에 자리한 루키우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튜니카를 움켜쥐고 벌벌 떠는 루키우스는 병아리같이 작고 가냘파 보였다. 두려움에 물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잠시간 망설였다.
“나는, 나는….”
혼란이 스며든 자안이 간절함을 담았다. 작은 새처럼 루키우스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애처로운 말을 내뱉었다.
“…네가 필요해.”
루키우스는 아침처럼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습기가 가득한 눈으로 아케론을 응시하던 그는, 그리고 어느 순간 돌연 팔을 뻗었다.
허공에 파도처럼 금을 녹인 듯한 머리칼이 물결치고, 아케론이 신음을 흘렸다.
새하얀 팔이 아케론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부드러운 뺨이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아케론은 몸을 뒤로 젖혀 저를 향해 뛰어드는 루키우스를 받았다. 제게 몸을 기울인 루키우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아케론은 그 순간 후욱 코끝을 찌르는 부드러운 향유 냄새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
마구잡이로 날뛰는 흉포한 마음속 들개를 달래고, 아케론이 낮게 긁는 목소리로 경고한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에 아랑곳 않고 아케론의 뺨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아케론, 아케론.”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루키우스는 항상 얄미울 만치 여유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어떨 때는 차라리 아케론이 어린애로 보일 만큼, 그 나이답지 않은 완숙함을 보였다. 그러나 지금 루키우스는 어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매달고 있었고, 그런 그를 보며 아케론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제 목을 끌어안고 울먹거리는 루키우스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아케론은 그 순간 머뭇거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 아케론.”
눈물이 맺힌 눈꼬리를 바라보며 아케론은 순간 루키우스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달빛이 흐르는 루키우스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적셔져 있었고, 그건 퍽 가여워 보였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망설이던 와중에 들려온 말.
“아… 장군.”
선분홍색 입술 사이로 더듬거리며 튀어나온 그 한마디 말은, 루키우스를 가여워하는 마음을 싹 가시게 했다.
루키우스의 눈가를 닦아 주려 손을 올리던 아케론이,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뼛속까지 침투하는 한기를 느끼며 그는 거짓말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저는, 전….”
제 몸에 매달린 것을 아케론은 뼈가 얼어붙는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난…… 나는 정말로…….”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정말 그댈….”
“그만하라 하지 않았나?”
결국엔 아케론은 서느런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눈물이 물든 루키우스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화가 솟구쳤다. 아케론이 손을 뻗어 루키우스의 어깨를 억세게 부여잡았다. 읏, 소리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루키우스의 습한 자안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고개를 숙였다.
이성을 부여잡을 수 없었던 지난날의 저를. 그리고 그를 깨닫는 순간 아케론의 손은 루키우스의 뺨을 부여잡아 당기고 있었고, 팔은 얇은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
겁에 질린 듯 몸을 움츠린 루키우스의 입술을 탐했다. 눈물 젖은 눈이 파르르 떨리는 순간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뺨을 거세게 틀어쥔 채 그의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루키우스의 뺨과 귀를 덮었다. 루키우스의 자안이 크게 뜨이고, 팔랑거리는 몸이 종잇장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 아케론은 그의 입술에 흐르는 피를 핥으며 루키우스를 어둠 속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으, 으음.”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흐르는 비음 섞인 신음. 그를 들으며 아케론은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작은 몸을 거세게 끌어안고, 게걸스럽게 입술을 탐했다.
“하악!”
까치발을 든 채 루키우스가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입 안을 유린당하며 그는 허공에 팔을 애처롭게 방황했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는 내내 속으로 격한 욕설을 삼켜야만 했다.
음란하고, 음탕한 자.
얇은 신음을 흘리는 목구멍에 혀를 밀어 넣은 채 아케론이 거칠게 루키우스의 숨을 빨아들였다. 뺨이 홀쭉해질 때까지 목구멍 깊은 곳에 숨겨진 숨을 빨아들이며, 그는 루키우스의 혀뿌리를 혀로 휘감았다.
거부하려 해도 그럴 수 없지….
들끓는 쇳덩어리를 배 속에 삼킨 듯했다. 그것이 식지 않고 뜨거운 증기를 내뿜어 목구멍을 뜨겁게 만들고 열화에 휩싸이게 하는 듯했다.
깊은 입맞춤에 타액을 질질 흘리며 루키우스가 손을 휘적거린다. 루키우스가 부여 잡힌 아케론의 팔을 손에 꼭 쥐며 가쁜 숨을 내뱉곤 몸을 떨었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뺨을 잡아 든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몸을 허공에 들어 올리고 있었다. 뺨과 귀를 덮는 손에 몸이 부유하여 루키우스는 발뒤꿈치가 허공에 떼어진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키스하는 동안에 그는 아슬한 자세에 발끝을 버둥거리며 간신히 몸을 지탱하려 들었다.
격정적인 키스는 아케론의 가슴을 밀치는 손길에 마무리되었다.
“하악!”
제 어깨를 밀치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루키우스의 반항을 무시하던 아케론이 돌연 입술 끝을 비틀어 차디찬 냉소를 짓고 그의 몸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거친 손에서 풀려난 루키우스의 몸이 무너져 내리고야 만다. 루키우스의 몸을 팔로 받아내며, 아케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뺨 위로 부스러지는 보석처럼 반짝 빛나는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그는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걸 원하십니까?”
루키우스는 탁월한 배우였고, 창부였다.
언제는 농염한 창부처럼 나신을 보이며 아케론을 유혹하려 들고, 언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년처럼 서투르게 입술을 맞추며 사내를 흥분시킨다. 사내 경험이 없는 것처럼 흐느끼며 애원하는 반면, 대범하게도 대낮의 발코니에서 그의 앞에 무릎 꿇고 튜니카를 들추어 펠라티오를 시도했다.
만약 루키우스가 윤락가에 몸을 담았다면, 진즉 떼돈을 벌 수 있었겠지.
부드러운 뺨을 거친 손으로 비비며 아케론이 우묵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겁에 질린 듯 떨었으나. 저런 순수한 얼굴로 그가 제게 원하는 건 지리멸렬한 연극의 상대이리라.
바로 그 장군이란 자의 대역.
배 속에서 들끓는 불길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가 침묵 끝에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주인이 연극의 상대를 원하니 노예는 명령에 따라 어울려 줄 뿐이다. 우스꽝스러운 희곡 속에서 그는 루키우스가 은밀히 품은 연심의 상대가 되어야 했다.
‘장군이라…… 그가 되길 원한다면 그리되어야겠지.’
어느 순간부터 서늘하게 식은 얼굴에 냉랭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밤이 춥습니다. 밖에서 몸을 섞길 원하신다면 따르겠지만…… 안에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 말을 하곤 아케론은 머뭇거리는 루키우스의 팔을 부여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가 오늘 어떤 각본을 짰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연극의 무대가 저 정원이 되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비록 노예일지라도 아케론은 최소한의 존엄은 지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의 팔뚝을 움켜쥐려던 아케론은, 그 순간 제 손아귀를 뿌리치는 손길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움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게 아니야!”
루키우스가 팔뚝을 틀어쥐려는 손을 거세게 뿌리치며 격렬히 저항했던 것이다.
“이게, 이게 아니야!”
게으른 고양이 같던 이는 발작하듯 소리치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는 자안과 마주하며 아케론이 입술 끝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이걸 원하는 게 아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는 루키우스의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다. 루키우스는 그 말만을 하염없이 반복하며 아케론을 읍소하듯 올려다보았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안개처럼 귓가에 흐려진다.
루키우스는 몹시도 혼란에 휩싸인 듯 보였다.
“이, 이걸 원하는 게 아니야.”
아케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여유를 잃은 초조한 얼굴 위를 건조한 시선이 훑고 있었다.
침묵 끝에 아케론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에 루키우스는 눈을 감고 몸을 움츠리고야 말았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루키우스가 몸을 잘게 떨다가 문득 슬그머니 눈을 뜬다. 시간이 흘러도 제 몸에 그의 손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눈을 뜬 루키우스는 그리고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는 제 흐트러진 튜니카를 여며 주는 아케론이 있었다. ડχ
무심한 얼굴이나 옷을 여며 주는 손길은 퍽 섬세했다. 그게 당혹스러운 듯 루키우스는 잠시간 혼란스러운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어쩔 줄 모르는 듯 머뭇거리는 루키우스의 머리 위로 이윽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내게 그런 차림으로 달려와 놓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푸른 달빛 아래에 선 아케론의 얼굴이 신상의 것처럼 서늘하고 고압적이었다.
아케론의 두 눈은 냉엄했다.
튜니카를 고정했던 장신구는 내팽개치고, 새하얀 튜니카를 흐트러트린 채 루키우스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은 허공에 드러난 어깨 능선과 새하얀 허벅지를 훑었다. 두 눈에는 성애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조소와 짜증을 담고 있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제게 무얼 원합니까?”
헐벗은 옷차림으로, 달빛이 그윽한 야밤에 찾아와 루키우스는 제게 안아 달라 떼를 썼다. 희미한 물기가 어린 자색 눈을 아케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알 법한 저런 뻔한 수작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안아 줘.”
침묵 끝에 말은 흘렀다.
“안아다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간절히 속삭이고 있었다. 아케론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의 얼굴에 모멸감이 스치고 있었다. 수치심에 몸을 떨며 루키우스는 애원을 이어 나갔다.
“그냥, 그냥 안아다오. 날 품지 말고, 그냥, 그냥….”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루키우스의 희고 보드라운 뺨이 새하얀 달빛 아래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꿀빛 머리카락은 달빛 아래 찬란히 빛나고, 사내라면 응당 홀릴 만한 미모를 지닌 미청년은 그의 앞에서 간절히 애원하며 옷자락을 잡아당기기며, 말을 이었다.
“그냥 오늘 밤은…….”
울먹거리며 무어라 말을 잇던 루키우스는, 그리고 어느 순간 입술을 꾹 다물며 아케론의 옷자락을 당기던 손을 멈추었다.
조급함이 자리했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
패닉에 휩싸였던 보라색 두 눈에 폭풍이 잦아들고 고요한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 아케론이 불쾌함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그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명령이다.”
“…….”
“나를 오늘 밤 안아라. 내가 잠이 들 때까지, 네 품에 껴안고 체온으로 몸을 데워, 아케론.”
차분히 가라앉은 보라색 눈이 담고 있는 것은 바로 무언의 명령이었다. 잠시간 그를 빤히 응시하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문턱에 댄 팔뚝을 떼어 내고 방 안을 향해 슬쩍 턱짓을 했다.
“원한다면.”
*
해변의 밤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여름의 햇살이 남긴 온기가 떠난 대지가 찬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온기를 그리워할 시각. 그쯤에 방문한 설화 속에 나올 법한 미청년을 품에 안고 있었다. 제 품을 파고드는 어리고 연약한 것을 내려다보며 아케론이 문득 생각했다.
그는 마치 설탕으로 만든 과자 같다.
“추워.”
아케론의 품을 파고들며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금발을 손으로 매만지며 아케론이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바람은 싸늘했고, 품에 안긴 것은 몹시도 따뜻했다.
그 상황에서 맞닿은 가슴을 타고 들려오는 심장 소리는 아케론에게 희미한 감동을 안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너무 추워.”
그리 말하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마치 병자처럼 창백했다.
사람의 동정을 절로 사는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아케론이 밤바람에 차갑게 식은 몸을 말없이 끌어안았다. 가늘고 연약한 몸은 고작 외출 한 번에 타격을 입고 잘게 떨렸다. 서늘한 살갗을 손으로 쓸던 아케론이 뼈가 도드라지는 몸에 얄팍한 신음을 삼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연약하다.
“세게…… 더 세게 나를 안아다오…. 응?”
루키우스가 제 몸을 파고들 때, 아케론은 그가 손에 쥐면 부스러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단 내.’
코끝에 감도는 달큼한 향을 맡으며 아케론이 살갗으로 퍼져 나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마치 대장간의 철을 제련하는 소리처럼 빠르게 뛰는 소리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느릿한 소리가 엉켜 있다.
‘정확히 몇 살일까?’
뜨거운 숨결이 가슴께를 스칠 때 아케론은 제 몸을 파고든 그를 껴안는 손에 힘을 주고야 말았다. 고개를 숙여 보니 황금색 금발이 물결치듯 새하얀 뺨 위를 가리고 있었다. 달빛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의 깨끗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또다시 의문하고야 말았다.
너는 도대체 누구지?
고개를 숙여 루키우스의 목과 뺨 위에 얼굴을 얹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네가 누군지 궁금해.’
그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루키우스는 그의 품에 더욱 깊게 파고들며 연신 중얼거렸다. 추워, 추워. 그는 거의 흐느끼듯이 말을 했고 아케론은 그런 그를 가여워하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루키우스는 헤프고 방탕한 이다. 그를 수없이 상기하려 했으나, 아케론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작은 몸을 안타까워하고야 말았다. 연약한 살결 곳곳에 뺨과 코끝을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살결에서 흐르는 달콤한 냄새에 아찔함을 느끼면서, 아케론은 그를 보듬고야 말았다.
그러곤 아찔함을 느끼고 있었다.
부드러운 숨결이 가슴께에 닿을 때, 투명한 손이 제 날개뼈를 쓸고 가슴을 더듬을 때 아케론은 몸을 잘게 떨고야 말았다. 까딱하면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아 몸을 뒤척였으나. 겨드랑이 아래를 파고드는 루키우스의 몸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를 피하려는 시도는 요원치 않았다.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모르는 달콤한 향을 맡으며 아케론은 결국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빨라지는 심장. 어지러워지는 머릿속.
속이 매스꺼워 제게 달라붙는 루키우스를 당장에 떼어내고 싶었으나 아케론은 그리하지 못했다. 설탕으로 정교하게 만든 과자같이, 자칫하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몸이 두려워 그는 그저 고개를 돌린 채 아찔함을 삼킬 뿐이었다.
그는 언젠가 나를 파멸로 이끌 것만 같다.
욕망에 빠져드는 저 자신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를, 스스로를 통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루키우스를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케론은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명령 때문이 아니다.
아케론은 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이리 그를 보듬는 것은 그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을 껴안는 손은 그를 해칠까 두려워한 탓에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크리스털로 만든 인형처럼 그를 다루는 손길은, 그의 연약한 몸을 배려하는 손길은 주인을 위하는 노예의 마음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저는 그를 연민하고 있었다.
대범하게 제게 밤시중을 들라 명하고, 잔인하게 한 여인의 인생을 망친 루키우스를 그는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 루키우스는 종종 아케론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연약함을 내보였으므로. 아케론은 제 앞에서 덜덜 떠는 아기 새처럼 구는 그를 향해 부정할 수 없이 동정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케론이 평상시에 느꼈던 모순과 닿아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수한 눈발 같은 그를 짓밟으면서도, 결국 루키우스의 몸을 부둥켜안고야 만다.
그것은 차라리 본성에 가까웠다. 손을 대면 부스러질 것만 같이 나약한 것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관련된 것.
그 순간 그 어느 생각에 이르러 아케론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뿌리 깊은 기억. 어린 시절 머릿속에 각인된 어리고 연약한 것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 순간 누구보다 명예로운 로마인이었던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약한 것은 동정할 가치가 없노라고.
아주 어린 시절, 아케론이 가문의 영광으로 낙점되었을 당시의 일이다, 그것은.
어린 소년이 발목이 부러진 참새를 주워와 리본으로 다리를 묶어 준 적이 있다. 그때 소년의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굵은 나뭇가지로 자식의 어깨를 때리며 호되게 꾸중했다. 누구보다 용맹해야 할 나의 아들이 계집애처럼 나약한 마음을 지녔노라고.
그렇게 하등 가치 없는 축생을 동정하는 아들을 혼내며 아케론의 아비는 제 자식을 강인한 사내로 이끌려 들었다.
로마의 사내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강인해야 한다. 모든 것을 군홧발로 짓밟고 잿더미를 만들며 스스로의 강인함을 증명하는 게 너의 숙명이다. 그리 말을 하는 아버지의 말을, 아케론은 7년 전 그날까지 맹종하며 따라왔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신에게 부여받은 본성이 있는 법이다.
아, 그래! 7년 전 그날에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탈영하던 날의 기억이었다.
아케론은 그날 피로 물든 혼잡한 궁전 한가운데에 서서 깨달을 수 있었다. 검과 방패, 묵중한 갑옷에 숨겨 두었던 저 자신의 나약함. 약해빠진 본성.
핏물을 뒤집어쓰고 밤중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숲을 건너며 아케론은 제 자신이 외면했던 저의 본질을 마주하고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실 손에 닿으면 쓰러질 듯 숨이 넘어갈 듯한 나약한 것들이 가여웠다…….
전쟁이 시작되면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솜털이 보송한 여린 소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남편과 자식을 잃고 우짖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부모를 잃고 떠도는 고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사실은 감흥 없어 하지 않았다. 목이 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아, 아니 말을 내뱉지 못해 외면했을 뿐이었다.
숨을 멈추고 그 순간 아케론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그날에 깨닫게 되었지. 어리석게도 연약한 것에 마음이 가는 태생부터 글러 먹은 저 자신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품에 안긴 이 햇병아리같이 작고 연약한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아케론은 그저 허무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그를 가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아케론이 본 이 중 가장 여린 존재였다. 여리고 연약한 것은 제 품을 파고들며 파들파들 몸을 떨고 있었다. 뿌리 깊게 아케론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죄책감은 그를 충동질하여, 루키우스를 결코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제게 손길을 애걸하는 처연한 눈을 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야 말았다.
그 연약함에 가여움을 느끼고, 제게 손길을 달라 관심을 달라 청하는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것이 뻔한 유혹인 줄 알면서도, 동정에 휘둘리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아케론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와 주인.
그 관계를 모르지 않는다. 루키우스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알았다. 또 저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것을. 그런 상황에서 처연한 얼굴에 약해지고야 마는 저 자신을 마주하곤 아케론은……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무너지는 게 두려웠다.
숨길이 거칠어진 순간, 루키우스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더, 세게….”
얄팍한 신음이 흐르고야 만다.
아케론이 숨을 멈췄다. 제 가슴 위로 뺨을 누른 채 저를 흘끗 올려다보는 루키우스의 자안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루키우스는 그저 그 말 하나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더 세게 안아 줘.”
아케론은 그 말에 복종했다.
루키우스의 몸이 으스러질 만치 그를 부둥켜안으며 아케론이 눈을 감는다. 품에 안긴 작은 몸을 끌어안고, 그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온기가 몹시도 당혹스럽다고.
*
“펠라티오를 하고 싶어.”
그것은 때로는 순수한 얼굴로, 때로는 탕부와 같은 얼굴로 아케론을 흔들었다. 때때로는 두 개의 얼굴을 동시에 내보였다.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이마에 송골 맺힌 땀이 어느새 턱에 매달려 있다.
달콤한 목소리에 아케론이 음울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기진맥진한 채 숨을 헐떡거리는 금발의 청년이 아케론의 무릎을 부여잡고 매달리고 있었다.
“아케론, 아케론.”
간절히 애원하는 그는 한 차례의 사정을 경험한 후였다.
고작 손가락으로 몸을 조금 가지고 논 것만으로도 루키우스는 절명할 사람처럼 흐느끼다가 절정을 맞이했다. 자그마한 유두를 괴롭히고 비좁은 구멍을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 음란한 몸은 끝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온몸을 비비 꼬며 숨을 할딱이다가 결국 시트 위에 정을 터뜨린 루키우스는,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또다시 그런 음탕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케론, 내 입에 네 걸을 물려줘…… 응?”
튜니카 자락을 잡아당기며 웅얼거리는 루키우스를 내려다보며 아케론은 순간 생각하고 있었다.
“네 건장한 물건을 먹고 싶어…. 아케론. 내 입에 네 걸 넣어다오, 응? 제발.”
도저히 그를 알 수가 없구나.
“제발, 아케론….”
안달이 난 듯 조급하게 말을 내뱉는 루키우스의 간절한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그는 손을 뻗어 아케론의 허벅지를 더듬고 그의 튜니카를 잡아당기며 보채고 있었다.
“아케론, 왜 날 보기만 하는 거야.”
애원하는 말이 몇 번 더 흐르고,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던 아케론의 푸른 눈이 어느 순간 섬전처럼 시퍼렇게 번뜩거렸다.
“아케, 하악…!”
거칠고 우악한 손이 화려한 금발을 잡아채고야 만다.
루키우스의 입에서 애원이 그친 순간 아케론은 그의 턱을 부여잡고 그의 입술을 벌리고 있었다. 작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아슬한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손에 낚아챈 부드러운 금발을 잡아당겼다. 고개가 꺾인 루키우스가 입술을 벌릴 때 아케론은 그의 입술에 깊게 입술을 맞추며 그의 숨을 빨아당겼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키스였다.
“아, 하악, 학…!”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루키우스가 강인한 몸을 손톱으로 미친 듯이 긁어댔다. 그는 후드득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연약한 몸. 루키우스의 머리채를 손으로 단단히 틀어쥐어 제압한 채로, 아케론은 그의 얼굴이 희게 질리도록 부드러운 입술을 폭력적으로 물어뜯고 있었다.
혀는 구석구석을 누볐고, 숨을 빨아들였다.
긴 입맞춤이 끝난 것은 루키우스의 손이 아케론의 몸 위로 미끄러질 때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그의 혀를 깊게 빨곤, 아케론은 느릿하게 입술을 물리며 건조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맥없이 쓰러지는 몸이 머리카락을 잡아챈 손에 틀어 막혔다. 허공에 흔들리는 연약한 몸을, 아케론은 그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움직였다. 루키우스는 어린아이 손에 들린 장난감처럼 그의 손에 휘둘리고 있었다.
나약한 자.
희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숨결이 섞이는 거리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디까지 천박하게 굴 생각입니까?”
음산한 시선이 아름다운 얼굴을 쓸고 있었다.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 듯, 혹은 거친 입맞춤에 흥분을 느낀 듯 루키우스는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악 거친 숨을 내뱉은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결국 흐느끼는 목소리가 흘렸다.
“제발…… 아케론.”
울먹거리는 청년의 손이 아케론의 몸을 더듬었다.
공황에 찬 듯, 혹은 간절함이 치밀어 오른 듯 그는 눈물이 고인 자안으로 아케론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그 탕부의 눈.
침묵 끝에 아케론의 입 사이로 말이 흘렀다.
“애원해.”
사포에 긁은 듯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럼 내게 애원해, 네가 원하는 걸 이뤄 달라 빌어.”
그리 말을 내뱉곤 아케론이 머리채를 틀어쥔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루키우스의 입술을 거칠게 더듬는다. 손에 닿는 순간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지며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네 몸에 손을 댈 마음이 생길 만큼, 공손하게 애원해 봐.”
입술을 비비는 손길은 결코 자상하지 않았고, 거친 손은 루키우스의 살결을 고통스럽게 쓸고 있었다.
“아, 응….”
그리고 루키우스는 그 고통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길에 입술을 벌리며 루키우스가 아슬아슬한 한숨을 내뱉는다. 쾌락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입술 끝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 머리채를 쥐어 잡힌 채 모욕적인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숨결이 손에 스칠 때 오소소 온몸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끼고야 만다.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에 휩싸인 아케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루키우스의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헉!”
고개를 뒤로 양껏 꺾은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숨이 멎는 소리가 흘렀다. 아케론이 그를 새파란 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내게 말해 봐.”
답변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루키우스가 입술을 열었다.
“당장.”
흐느끼듯 내뱉는 말은 아케론의 심장을 떨어트리기 충분한 것이었다.
“당장 내 입술에 남근을 넣어주세요…….”
그 말을 내뱉곤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애처롭게 응시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한 순간 루키우스는 눈물이 고인 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희미한 목소리로 웅얼거리길.
“주인님…….”
그 말이 끝이었다.
고작 그 한 마디가 사람을 이리도 동요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이지?
스스로를 비웃었으나 아케론은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도저히 이성을 틀어쥐지 못했다. 단숨에 손을 움직인 아케론이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하윽!”
고통 어린 신음이 들려오는 순간 아케론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아. 미칠 것만 같아.
손아귀에 쥐고 있던 실낱같은 이성의 끈마저 놓아 버리며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원하는 건 저 자신이었나?
피 묻은 입술을 떼곤 망설임 없이 루키우스의 몸을 침대에 던지고야 만다. 등을 보이며 침대에 널브러진 루키우스의 몸 위로 올라타며 아케론은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루키우스는 경멸스러우면서도, 부정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학!”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원하는 대로 했다.
어여쁜 분홍색 입술에 성기를 처박고 거품을 흘려낼 때까지 성난 물건을 움직였다. 괴로워하는 그의 목구멍을 범하고, 결국엔 목구멍 안 깊은 곳, 식도에 정을 흘렸다. 컥컥 숨을 거칠게 토하며 루키우스가 눈물을 뚝뚝 흘릴 때 아케론은 욕망을 더욱 불태우며 행동하고 있었다. 제 몸뚱이를 필사적으로 긁는 손을 무시하며 그는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고야 말았다.
이걸로는 모자라다.
진득한 정액이 헛구역질을 하는 루키우스의 목을 채우고, 아케론은 기진맥진한 그의 입 구멍에 늘어진 성기를 왕복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끈적한 액체로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더듬곤, 숨결이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입술을 벌리며 길고 느릿한 숨을 흘린다.
“하악, 학…….”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루키우스의 얼굴을 그리 거칠게 밀고 쓰다듬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그의 앙상한 다리를 벌리곤 그 사이로 몸을 들이민다. 핏줄이 불거진 흉흉한 성기가 부드러운 살을 꿰뚫었다. 비명이 이어지고, 루키우스는 괴로워했다.
“흐, 아, 읏…!”
부드러운 육벽에 성기 끄트머리가 닿는 순간 아케론은 아찔함을 느끼고 이를 꽉 물어야만 했다. 그 고깃덩어리 같은 것을 성기로 가로지르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홀한 것이다.
성기가 마주 닿은 끈적한 살을 두 덩이로 나누고, 평평하던 배가 울룩불룩 솟아 나올 때 아케론은 지극한 쾌감에 휘말려 숨을 헐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윽, 학! 아케, 힉!”
루키우스가 버둥거리며 그의 허리를 치며 울고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젖은 얼굴이 가여워, 그러나 동시에 드는 미묘한 가학심에 휘말려 아케론은 허공을 방황하는 다리를 잡아당기고야 말았다.
경악에 휘말린 자안이 크게 뜨여진다. 아케론이 루키우스의 몸을 연결된 자세 그대로 돌린 탓이었다.
“그, 그만, 아악!”
비명이 귓가에 닿은 그 순간 아케론은 잇새로 짓씹은 아슬한 한숨을 목구멍에 밀어 넣고야 말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음란하고 자극적인 것을 모아 하나로 뭉친 듯하다.
“아악! 제발…… 제발……!”
연결된 상태에서 몸이 뒤집어질 때 루키우스는 길고 처절한 울음을 흘리며 빌었다. 마침내 그의 얼굴이 이불보에 처박힐 때 루키우스는 불그스레한 성기가 처박힌 봉긋한 엉덩이를 하늘에 치켜뜬 채 몸을 떨고 있었다. 힉힉 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술에 타액이 흐르고,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입가를 거친 손으로 훔쳐 침을 닦아 주었다. 그러곤 그의 골반을 잡아당겨 무너지는 몸을 손아귀에 넣곤 허리를 움직였다.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길고 애처로운 울음이 터져 나오고 아케론은 뜨거운 숨을 헐떡거리며 얼굴을 희열로 물들이고야 말았다.
“헉, 허억….”
루키우스의 머리를 침대에 처박은 채 추삽질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처량한 울음이 흘렀다. 머리 위로 솟구치는 쾌감에 정복당해 허리를 털며 아케론이 손에 감긴 달콤한 금발을 단단히 움켜쥐곤 그의 머리를 눌렀다.
거친 정사 속에서, 루키우스는 가련히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가학심을 부추겼다.
“아, 아케론, 아앙, 그, 그만… 아니, 아, 더…… 아아아!”
귀에 감기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참다못한 아케론이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루키우스의 고개를 들어 올릴 때 그의 얼굴에는 야릇한 기운이 희미하게 스치고 있었다. 사내를 홀리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아, 흐윽….”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잠시간 노려보다가 아케론이 고개를 숙였다.
루키우스는 입술 밖으로 얇은 신음을 흘렸으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이 틀어막혀 그는 끊기고야 말았다. 아케론이 타액이 흐르는 입술을 머금을 때, 루키우스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금색 속눈썹이 물기로 젖어 있다.
정사는 시간이 갈수록 야만의 모습을 띠었다.
아케론은 이성을 잃었고, 정사는 가혹했다. 루키우스는 엉덩이를 치켜뜨고 성이 난 남근을 받아내는 내내 울음을 터뜨렸다. 시원하고 달콤한 울음은 사내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짐승이 교접하듯이, 아케론은 땀에 젖은 몸을 마주 대며 루키우스의 몸 위에 체중을 싣고 거칠게 허릿짓을 이어 나갔다.
허벅지에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굵직한 성기가 통통한 둔부 사이를 왕복하고, 정사 내내 루키우스는 시트에 처박은 뺨을 비비며 짐승의 것 같은 애처로운 울음을 흘렀다.
“아케론, 아케론… 아, 아…!”
달콤한 소리에 사내의 얼굴은 흥분에 물들어 있었다.
어느새 완전히 무너진 몸이 침대에 구깃하게 박혀 있다. 골반을 틀어쥔 단단한 손에 휘둘리는 가냘픈 몸. 성이 난 남근이 거품이 이는 구멍에 처박힐 때, 루키우스는 새된 소리를 흘리며 버거워했다.
날개뼈가 도드라지게 움츠린 몸은 평소보다 더욱 작게 보여, 조금만 힘을 주면 손으로 찢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연약함에 아케론은 동요하면서도 동시에 강렬한 성욕을 느꼈다.
“아, 제발… 제발….”
루키우스가 흐느끼며 새하얀 이불보 위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아케론이 작은 엉덩이를 손으로 벌려 시뻘겋게 부은 구멍을 노려보았다. 처음에 오붓하게 다물렸던 그 분홍색 구멍은 계속되는 잠자리에 상흔을 입은 흔적이 가득했다.
잔뜩 부풀고, 붉어진 밀문.
그것은 그에게 어울리는 모양새를 뒤늦게 찾은 후였다.
침이 고이는 느낌을 받으며 아케론이 느릿하게 숨을 내뱉는다.
그러던 와중의 일이었다.
“장군, 학, 장… 흣!”
갑작스럽게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흐느끼는 울음.
귓가에 감도는 달콤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 그를 들은 아케론은 그 순간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화려한 금발을 돌연 잡아당겼다.
“악!”
머리채가 휘어 잡혀 허리가 뒤로 꺾인 루키우스가 몸을 버둥거렸다. 둔부를 짓누르는 대퇴부와 거칠어지는 허릿짓. 몸이 들썩거리며 루키우스는 뒤늦게 아케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인, 아아…… 주인님, 제발 자비… 아……!”
울부짖는 목소리는 자비를 원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케론의 눈은 이미 동공이 수축되어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후였다. 울음은 귓가에 들리지 않았으니, 아케론은 그저 가는 팔목을 잡아 누르곤 거친 허릿짓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아흐으윽…!”
어느 순간 아케론이 고개를 숙여 비명이 흐르는 입술에 입술을 겹친다.
윽윽 흐르는 소리마저 빨아들여 목 안으로 삼키곤 아케론이 허탈하게 웃는다. 시퍼렇게 빛나는 두 눈에 사냥꾼의 앞에 선 사슴처럼 몸을 떠는 루키우스가 보였다.
물기 어린 자안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입 안에 번지는 피비린내를 삼켰다.
이어진 정사에 루키우스는 음탕함을 숨기지 않았고, 아케론은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
쾌락에 무뎌지는 걸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무뎌지는 내가 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지나치게 자극적인 날들이 연속되고 아케론은 문득 궁금해했다.
‘난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던 거지?’
전자라 생각을 해 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후자에 가까운 것만 같았다.
정사 후의 시간이었다. 그는 창밖에 있는 새하얀 달을 보며 상념하는 중이었다. 아케론이 느릿한 숨을 내뱉을 무렵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내가 죽을 때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밤하늘에 박힌 보석 같은 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루키우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 끝에 말이 흘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키우스는 희미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고개를 돌린 청년이 창틀에 몸을 기댄 채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달을 등진 그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 여신의 사랑을 받은 양치기 같았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모습.
아케론은 그에게서 한참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그의 귓가로 들려온 목소리는 담담하기에 더욱 가슴에 각인되는 것이었다.
“그때만큼은 혼자이긴 싫구나. 그저 투정에 지나지 않은 말이지만…… 너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케론은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을 받고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창밖을 빤히 바라보는 루키우스의 옆모습을 노려보며, 그는 입술 밖으로 흐르는 말을 삼키고 있었다.
‘내게 왜 그런 말을 합니까?’
그 순간 아케론이 떠올린 것은 클라데스 바이아나, 그 암담한 숲을 지나치던 당시 기억에 새겨졌던 비현실적일 만치 커다란 새하얀 달이었다.
*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살아라.’
그것은 울컥 피를 토해 내는 사내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격분을 참지 못해 아케론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