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13)

-공금&갠소-

<이스카리아의 왕>

8월의 햇볕은 유독 관능적이었다.

들끓는 열기를 품은 진주홍색 햇볕이 이스카리아 섬의 대검투장에 내리쬈으나 사람들은 한여름 지중해의 더위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무대에 열광할 뿐이었다.

“프로보카토르1)(Provocator)! 프로보카토르, 아케론!”

“빅토리아2)(Victoria)! 빅토리우스3)(Victorius), 프로보카토르!”

“승리의 여신이 그의 머리 위에!”

“프로보카토르! 아케론이 승리한다! 아케론 빅토리우스!”

피 터져라 소리치는 이들의 눈이 흥분에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쪽 팔을 뻗어 고조된 목소리로 승리의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때때론 악을 쓰곤 제가 앉은 자리를 두들기며 흥분을 표하기도 했다.

관중은 경기장 위에 선 검투사를 격렬히 응원하는 중이었다.

모래 바닥 위에는 여러 명의 검투사가 자리했고, 관중들은 각자가 우승을 점친 검투사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응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로 통일되었다.

“아케론! 아케론!”

이름의 주인은 이스카리아의 왕이라 불리는 사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짙은 군청색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다.

끝이 뾰족한 로마식 검, 글라디우스4)를 쥔 사내는 프로보카토르라 불렸으나 사실 용병에 가까워 보이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갑옷을 입지 않고 투구마저 벗고 있는 모양새는 로마 중보병이라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아니, 사실 그는 차라리 무장을 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검투사답지 않은 방만한 차림으로 사내는 제 앞에 자리한 무리를 바라보며 무대 위에 굳건히 서 있었던 것이다.

여러 명의 검투사들은 제각각의 무기를 든 채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각자 손에 그물을 들고 있거나, 혹은 창을 들고 있거나, 검을 들거나 한 채로.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

“아케론의 목을 베! 이 얼빠진 놈들! 네놈들이 몇 명인데 고작 무장하지 않은 프로보카토르 하나를 못 이기는 거야? 갑옷이 아깝다!”

응원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왕의 추락을 바라는 자도 있기 마련.

걸린 돈을 놓고 초조해하는 이들이 목청이 찢어져라 부르짖었다.

“당장에 움직이지 못해?!”

모름지기 검투사의 목숨을 결정하는 것은 돈을 낸 관객이기 마련이다.

경기의 승자든 패자든 그들의 손짓에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 검투사들은 그들의 유흥에 최대한 협조할 의무가 있었다. 기나긴 탐색을 멈추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야!”

눈치를 보던 검투사 하나가 아케론을 향해 그물을 세차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그물이 아케론의 정수리 위에 닿는 듯하던 그 순간이었다.

“잡아!”

아케론을 견제하던 검투사 하나가 다급히 손에 든 창을 던졌다.

그물을 던지고 창을 찌르는 것은 짐승을 잡을 때나 쓰는 방식. 누가 보아도 너무한 장비의 치중은 배율을 맞추려는 도박사들의 압박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챔피온의 정수리에 그물이 닿으려는 순간 그의 손이 그것을 잡아챘다.

아케론이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허억!”

그를 노린 창이 엉킨 그물 속으로 빨려들 듯이 휘감기고, 그 순간 비명이 흘렀다.

마치 결 부드러운 비단을 찢듯 그물을 잡아 뜯으며 아케론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에 다급한 표정으로 삼니움식 갑옷을 입은 이가 몸을 움직였다.

호응하듯 서넛의 검투사가 검과 삼지창을 들고 달려들어 각자의 무기를 내질렀다.

“목! 목을 찌르란 말이야!”

“아니야, 하단부! 허벅지를 먼저 찔러서 상처를 내!”

“이 답답이들아! 일흔 살 먹은 우리 집 집사가 너희들보다 잘 싸우겠다!”

모름지기 남의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법.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반푼이들을 향하는 관객들의 아우성은 가혹했다.

“죽여, 죽여!”

삼지창을 든 검투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밝은 태양빛 아래, 아케론의 글라디우스가 반짝 빛났다.

검이 비틀린 순간 반사된 빛이 삼지창을 든 사내의 눈을 찔렀다.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비틀거리는 그의 빈틈을 아케론은 놓치지 않았다.

검이 갑옷 끈을 단숨에 자르고 검봉이 그의 목젖을 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달려드는 맨손의 검투사, 그물을 던졌던 사내의 명치를 발로 후려치고 제 몸을 노리는 창을 잡아당겨 창수의 배를 주먹으로 치기까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전투사가 쓰러져 바닥을 굴렀다.

“우우우!”

야유가 퍼져 나가는 관중 사이, 요요한 자안이 번뜩 빛났다.

‘게르마니쿠스.’

차분히 가라앉은 눈이 태양을 등진 사내의 무심한 얼굴을 쓸다가, 문득 기이한 파동을 일으켰다. 팔리움을 푹 눌러쓴 이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아케론! 아케론!”

경기는 전지적인 아케론의 입장에서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관객들의 야유에 평정심을 잃은 삼니움인 검투사 두 명이 아케론을 향해 달려들다가 그물에 걸려 몸을 비틀거렸다. 방패로 얻어맞은 삼니움 갑옷의 검투사 하나가 쓰러져 내렸고.

또 다른 검투사 하나가 단검으로 아케론의 발을 찌르려다 도리어 걷어차이고, 그 순간 관중들은 승기가 완전히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 우우!”

야유가 퍼지는 무대를 바라보며, 검투장 상석에 앉은 한 흑발의 사내가 혀를 찼다.

“끝났군.”

8대1이면 몰라도 3대1이면 일반 검투사들도 운에 따라 승리를 거둘 만한 조건이다.

게다가 그 상대가 이스카리아의 왕이면…… 거의 다 끝난 일과 다름없지 않나?

‘이기는 건 다 좋은데, 저놈 때문에 큰 수익을 못 벌어들여.’

돈 계산을 하던 사내가 문득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얼음 같은 두 눈으로 무대를 말없이 응시했다.

‘하기야,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지.’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고르고스! 고르고스! 고르고스!”

하마처럼 커다란 덩치를 지닌 사내가 괴성을 내지르며 철퇴를 휘두른 순간, 검투장 안에 비명이 비산했다.

아케론의 양 옆구리를 노리는 두 개의 칼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또 환호하는 순간 아케론은 몸을 뒤로 꺾고, 발뒤꿈치로 흙바닥을 박찼다.

땅에 뒹굴듯 허공을 비상하는 사내의 몸에 사람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고함을 지르며 반응했다.

“우어어어!”

허공에서 흐트러지는 자세를 놓치지 않고, 철퇴를 든 사내가 팔을 크게 움직였다. 쨍쨍한 태양 빛을 등진 철퇴가 번뜩이며 아래로 수직낙하한 때 허공에서 무섭게 빛나는 군청색 눈동자가 철퇴를 노려보았다.

“미친!”

승패는 찰나에 갈렸다.

쾅!

철퇴는 사람이 아닌 흙바닥을 둔중하게 내리찍었다. 아케론이 바닥을 굴러 그의 종아리를 깊게 벤 것이었다.

철퇴를 든 거구의 검투사가 으악 소리를 내지르고, 아케론은 바닥을 향해 허둥지둥 내리찍히는 단검을 맨손으로 붙잡아 당겼다. 몸을 돌린 아케론이 제 등을 기습적으로 찌르는 검을 늘어진 검투사를 밀어트려 막곤 방패를 들었다.

콰앙!

“……!”

사람들의 환호성이 거세진 때였다.

“아케론, 아케론이 승리했다!”

군청색 눈에 순간 스치는 섬광!

“와아아아아아!”

8대1의 싸움은 여섯 명이 전투 불능이 되고, 두 명이 중상을 입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 인간 방패가 되어 아케론 대신 검을 맞은 쌍검잡이와 종아리를 베인 철퇴사를 제외하고는 유혈이 크게 일어나지 않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다.

“아케로오오온!”

승자는 더운 피를 덮어쓰곤 그들의 환호성을 묵묵히 흘렸다. 그러곤 어느 순간 그는 차분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피로 적셔진 무심한 얼굴에 햇볕이 쬐어졌으나, 눈이 따갑지도 않은지 사내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곤 고개를 돌려 관중을 오시했다.

그러곤 검을 짧게 휘둘러 핏방울을 허공에 튀겼다.

“아케론, 이스카리아의 왕이 승리했다!”

“살려! 승자를 살리시오!”

“프로보카토르를 살리시오! 우리의 왕을 살리시오!”

8대1의 승부다.

경갑옷을 입고, 보호구를 찬 검투사를 상대로 맨몸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그물을 던지는 레티아리5)(Retiari)도, 삼니움족의 갑옷을 걸친 삼니테6)(Samnite)도, 끝이 구부러진 곡도를 든 트라케스7)(Thraces)도 그의 연승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에 이스카리아의 왕은 3년 동안 연승을 거두었다.

“아케론을 살려! 당장 그를 살려!”

이런 그를 죽이려 할 이는 없으리라.

도박에 돈을 뺏긴 이들이라 할지언정 그에는 동감하지 않을 것이다.

심판은 관중의 환호에 기꺼이 응답했고, 투기장의 주인은 그를 받아들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검투장의 주인의 눈치를 살핀 심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그의 뜻에 따라 엄지를 치켜뜨고 부르짖었다.

“빅토리우스! 빅토리우스 아케론!”

“우와아아아!”

귀청이 울릴 만치 커다란 함성이 무대를 채웠다. 제 목숨이 오가는 순간이었음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 듯 아케론의 얼굴은 그 순간에도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눈이 마주친 심판을 잠시간 바라보던 아케론은 고개를 돌리고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검투장 안은 열렬한 함성에 잠겨 마비가 되어 있었다.

심판은 환호성에 억눌려 이어진 일을 진행하지 못했고, 꽤나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함성이 잦아들 때가 되어서야 제 일을 다할 수 있었다.

“조용, 조용히 해 주십시오!”

그건 어찌 보면 검투 경기 중 가장 중요한 클라이맥스였다.

관객들이 기대하고도 기대하던 대목.

“패자의 거취를 물을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심판은 시선을 돌려, 공포에 질린 패배자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패배한 이들에게 닿은 순간, 또 다른 종류의 함성이 검투장 안을 메울 듯이 쏟아진다.

“패배자를 죽여라!”

“저놈은 죽어도 싸! 저놈들은 살 가치가 없다!”

패자들로 인해 크게 돈을 잃은 이들, 패배자는 살 가치가 없다 생각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군국주의자들, 유혈이 가득한 유흥을 원하는 이들.

이 모두가 하나같이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죽여라! 죽여! 사자 밥으로 던져 줘! 불에 태워 버려!”

“살려줘! 난, 난 죽기 싫어!”

“패자들을 죽여라! 패자를 죽여!”

관중들의 유흥을 목적으로 이뤄지는 경기에서 검투사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여론뿐이었다.

“그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오!”

심판의 단호한 말에 우와아! 환호가 하늘을 찔렀다. 패자들의 울부짖음을 덮을 만큼 우렁찬 함성이 이스카리아 대검투장을 흔든 순간, 투기장 밖에 자리한 승자의 얼굴에는 경멸 어린 조소가 스치고 있었다.

*

아악!

비명을 뒤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아케론이 수건으로 피에 젖은 얼굴을 닦았다. 그가 있었던 경기장은 이미 끔찍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무대가 된 지 오래였다. 치열한 결투가 차라리 성스럽게 보일 만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은 처참했다.

“로마에서 이상한 걸 배워 왔어.”

무대의 그늘 아래 투덜거리는 그 어느 검투사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무대 위 살육을 당하는 배우를 연민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그저 익숙한 일을 당하는 이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로 핀잔을 내던질 뿐이었다.

검투사의 생존 확률은 반이 안 된다.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유혈 행위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한 듯 보였고, 그들은 날이 갈수록 자극적인 여흥을 추구했던 것이다.

‘교양이 높고 박식한’ 로마 본토인들은, 그러한 자극을 아주 고풍스러운 방식으로 포장해 내는 데 재주가 있었다.

“저것 봐.”

누군가의 홀린 듯한 말에 이목이 집중된다.

“이카루스8)야.”

탑 위에서 비상하는 검투사의 울음이 무대 위를 높게 울리고 있었다.

터엉! 묵직한 무게의 물건이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울린다. 웃음과 박수 소리가 뒤를 이었고 환호성 또한 이어졌다.

무대 위를 넋을 잃고 지켜보던 검투사들의 얼굴에 감탄과 씁쓸함이 스치고 있었다.

“빌어먹게 우아하군.”

이 고풍스러운 연극은 죄인에게 이뤄지는 형벌로써 만들어졌다.

특히나 경기의 내용이 잔인한 로마에서는 대부분의 검투사는 죄인이다. 그들을 형벌하는 방식이 로마 시민의 유흥이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빌어먹게 우아한’ 로마 시민들은 어느 순간부터 검투 경기 중간에 색다른 유희를 즐겼다. 그것이 바로 지금 무대 위에 펼쳐지고 있는 연극, 신화의 한 장면을 따라 한 처형이었다.

무대 위에 오른 검투사들은 하늘을 날다가 떨어졌다는 이카루스를 본떠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입고 높은 탑 위에서 뛰어내렸다. 누군가는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신도에게 살해당한 오르페우스처럼 사지가 찢겨 죽었고, 누군가는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타죽은 아스클레피오스처럼 분살당했다.

<몽둥이에 얻어맞을지언정, 뜨거운 불에 타오를지언정, 무거운 사슬에 속박될지언정, 비정한 검에 찔린다 할지언정 복종하겠노라>

검투사들이라면 의당 작성해야만 하는 계약서의 마지막 구절은 멋을 위한 말이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첫 경기에서 목숨을 잃었고, 개중에서도 1년을 버티는 이들은 드물었던 것이다.

아무리 강한 검투사라 한들 경기 전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항상 아케론은 살아남았다. 이스카리아 섬에 팔려온 지 3년. 그리고 그 전에 검투사로 살아온 4년 동안, 근육이 찢기고 뼈가 드러나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와 같이 팔려온 이들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러니까 이스카리아의 왕은 명실상부한 검투사들의 신이었다.

무대 밖.

“아케론, 아케론! 여길 봐요!”

“오만한 놈….”

“또 그가 살아남았어? 제기랄, 누구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걸어가는 아케론을 향해 무수히 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아케론은 성화에 반응하지 않았고, 빠르게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런 그를 막는 이는 없었다.

열등감에 찬 이도, 그를 존경하는 이도, 부러워하는 이도 막상 아케론의 앞에 서면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 채 자리를 비켰으니.

아케론이 마른침을 삼켰다.

‘물.’

더운 피가 8월 지중해의 햇살에 닿아 후덥지근하게 아케론을 달구고 있었다. 목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고. 천으로 뺨을 닦았지만 비릿한 냄새는 가시지 않고 땀에 젖은 몸은 찝찝하기 그지없다.

욕탕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시원한 물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욕망에 휩싸여 아케론은 눈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걸음을 더욱 빨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런 그의 발걸음을 막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케론.”

아케론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리라에 어울릴 것만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아? 내가 몇 번을 널 부른지 아느냐.”

그를 붙잡은 이는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흑발의 사내였다.

고개를 돌린 아케론이 차가운 시선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월계수 잎사귀 브롯지로 길고 치렁한 진녹색 토가를 고정시킨 우아한 차림새의 사내. 차갑고 이지적인 눈빛이 인상적인 이는 고귀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곤, 아케론의 것보다 더 차갑고 깔끔한 색의 벽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르쿠스 님.”

아케론이 짜증을 삼키곤 중얼거렸다.

“피를 닦고 찾아뵙겠습니다.”

마르쿠스는 그 말에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아니, 양성소로 갈 필요가 없어.”

아케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르쿠스가 시끄러운 주변에 미간을 찌푸리곤 언성을 높였다.

“그대는 이제 내 소유의 검투사가 아니야. 자네는 팔렸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절벽 위 로마식 저택의 주인이 널 샀다, 아케론. 당장 마차 위에 오르도록. 이제 너는 검투사가 아니라 로마 시민의 개인 노예다.”

<이스카리아의 섬,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위 저택의 주인>

“지중해의 보석은 시켈리아9)가 아니라 네아폴리스10)다!”

암암리 도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네아폴리스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지중해 푸른 바다에 자리한 이 도시는 꽤나 독특한 역사를 지녔다. 본디 그리스 문명권의 도시였으나 지금은 로마 제국에 속했던 것이다. 섬은 로마의 속주가 아닌 지역이면서도 그 본토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지녔다.

그러니까 네아폴리스 시민들은 로마인보다는 그리스인을 더 닮아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넵튠이 아닌 포세이돈을 모셨고11)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혼용해서 썼지만, 회화에서는 그리스어가 더욱 널리 쓰였다.

그리고 이 네아폴리스의 앞바다에는 그와 비슷한 문화를 지닌 섬이 하나 있었다. 바로 새하얀 해변과 풍경으로 유명한 이스카리아 섬이었다.

이스카리아 섬은 카프리섬 같은 다른 지중해의 휴양지와 다르게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충분한 내실을 갖추고 있었다. 네아폴리스와 행정구역을 구분할 만큼 섬의 면적이 커 내부적으로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섬의 크기는 지중해 최대의 섬인 시켈리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로마 귀족의 휴양지로 유명한 카프리섬의 대여섯 배는 되고, 네아폴리스의 반절 될 정도였다.

뭍과 구역이 구분된 이 이스카리아 섬은, 로마 제국 건국 이후 2백 년 가까이 네아폴리스와는 사뭇 다른 폐쇄적인 문화를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서서히 로마 문화에 젖어가는 뭍과 다르게 이스카리아 시민들은 그리스식 문화를 지켰던 것이다.

폐쇄된 섬이라는 환경이 그들의 전통을 보존시킨 까닭으로 이스카리아의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식 연회를 즐겼고, 그리스식 음식을 먹곤 했다. 그들은 자신의 그리스인 선조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들이 로마의 문화를 아예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분명 그들에게도 로마인으로서의 특성은 남아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유혈과 유희를 좋아하는, 더 나아가서 두 개의 결합된 형태에 흥분하는 성질이었던 것이다.

이스카리아의 섬민들은 격조 높은 로마의 오래된 여흥만큼은 제법 좋아했다. 전통적인 로마의 유흥, 검투 경기 말이다. 심지어 이스카리아의 사람들은 네아폴리스 사람보다 더욱 검투 경기를 즐겼고 검투장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곤 했다.

그 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져, 사람들은 육지에서 검투사를 수입하기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들은 유혈이 낭자한 경기를 즐겼고, 검투 경기는 서서히 이스카리아 문화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시점에는, 이스카리아에 세 곳의 검투사 양성소가 생기고, 경기의 수준이 로마와 비슷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검투 경기는 지중해 바다를 낀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이스카리아 섬을 대표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 연유로 이스카리아 섬에는 검투사와 아레나가 많았다. 유명한 검투사 또한 많이 배출되었고. 개중에서 가장 유명한 검투사가 바로 ‘이스카리아의 왕’이었다.

이스카리아의 왕!

그것은 검투사의 성지 이스카리아에서 3년간 연승을 거둔 전설적인 무패의 검투사를 의미했다.

“아케론이야 로마의 카르테스나 푸실리우스 정도는 가뿐히 물리칠 수 있지 않겠어?”

“그들은 은퇴를 했으니 비교는 할 수 없지. 하지만 아케론의 경력이 더 화려한 걸 부정할 수가 있나?”

“아케론이 이스카리아섬뿐만 아닌 세계 제일의 검투사일 거란 사실에 난 내 전 재산의 반을 걸겠어.”

로마에서도 3년 동안 연승을 거둔 검투사는 흔치 않다.

로마에서 뛰어난 검투사는 정상에 오르면 루디스12)를 수여 받아 은퇴했으므로. 아케론이 거둔 7년의 연승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아케론은 명실상부한 이스카리아섬의 자랑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설 속 영웅의 재림’이라 평했고, 아케론은 이스카리아인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한 인기를 얻었다. 로마인은 무를 숭상했고, 그건 이스카리아섬의 풍토이기도 했으므로. 뛰어난 검투사인 그가 존경을 받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케론의 외모에 그들은 더욱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귀족적인 얼굴. 선이 굵은 뚜렷한 이목구비. 경이롭기까지 한 잘 단련된 몸, 콧대가 높고 눈썹뼈가 도드라진 귀족적인 용모. 그러니까 아케론은 명실상부한 미남이었다. 사람들은 군청색 서늘한 눈동자가 관중을 무심하게 바라볼 때, 그에게서 노예답지 않은 위엄을 느끼고 전율했던 것이다.

이스카리아의 왕은 노예이면서 저리도 위풍당당하다.

섬민들은 그에 불편해하기는커녕 감탄하며 그에게 호의를 내보였다. 심지어 그를 애인으로 삼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이들 또한 많았다. 실제로 행동하는 이들 또한 있었고.

“나는 당신에게 보리가 아닌 플라밍고의 혀를 줄 수 있어요, 아케론!13)”

“내 정부가 된다면 그 더러운 돼지우리 같은 양성소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어, 아케론. 도대체 언제까지 그리 거만하게 굴 거지?”

“아, 제발 나를 한번 그 손으로 때려 줘.”

검투사가 스폰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케론은 그 제안을 일고의 망설임 없이 쳐냈다.

그의 그런 뻣뻣한 태도에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이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3년 연승의 기적을 이룬 검투사가 그런 거만함을 부리는 건 이해할 만하다 본 것이다.

자유 시민의 존중을 받는 유일한 노예. 아케론은 제 건방짐을 용서받을 만큼의 업적을 쌓아갔고, 이스카리아에서 그의 명성은 나날이 드높아져 갔다.

그런 그를 구매하려 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그의 주인 이스카리아의 유지 출신의 거부, 마르쿠스 헤르티우스는 제안을 단칼에 쳐낼 뿐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마르쿠스는 영리한 자였고, 아케론의 명성을 이용해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그 돈을 기반으로 젊은 나이에 집정관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고, 그 후에도 제안을 일괄적으로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스카리아섬에는 아케론 말고도 유명세를 날리는 명소가 있다.

바로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위 로마식 저택을 이름이었다.

로마 본토 양식의 별장이 절벽 위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크고 모양새가 화려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져 햇볕이 쨍쨍한 날 화사한 빛을 흘리는 저택. 한적하고 울창한 올리브 나무숲을 곁에 둔 그것은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 낼 만큼 아름답다. 저택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아한 저택의 풍광에 저마다 감탄하는 말을 내뱉을 정도였다.

모름지기 아름다움이란 그에 걸맞은 부유함을 필요로 하는 법이리라.

사람들은 그곳이 아마 로마 출신의 손꼽히는 부자의 별장이라는 추측했다.

그 추측이 사실이란 것을 증명하듯 로마식 저택 안으로는 와인과 비단, 식재료를 실은 마차들이 들어섰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화려한 정원이 저택 안에 있노라는 증언 또한 이어졌고.

당연지사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그 부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주인의 뿌리는 무언가?

그러나 그 저택의 주인은 사교를 중시하는 로마인답지 않게 은둔생활을 했고. 사람들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알지 못했다.

그곳의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애인지 노인인지, 과부인지 고아인지조차 알지 못한 상황. 그에 이스카리아섬에선 어느 순간부터 무성한 소문이 뻗어 나갔던 것이다.

“로마 정계에서 밀려난 귀족의 은신처라는데?”

“무슨 소리. 내가 알 만한 사람한테 들었는데, 거물 공화주의자가 근래에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들었어. 네오폴리스로 가는 항구에서 봤다는데 설마 이곳으로….”

“아니야, 로마 황제의 애첩의 별장이라던데? 아우구스타가 질투해서 이리로 피신했다고….”

그런 와중에 들려온 아케론의 소식은 사람들을 까무러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뭐? 로마식 저택에 이스카리아의 왕이 팔려?”

그들은 아케론이 검투장에서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그의 주인인 마르쿠스는 아케론을 통해 번 정치자금으로 서른 살이란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집정관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런 연유로 마르쿠스는 아케론을 팔려 하지 않았다. 아케론을 탐내는 이들이 아무리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시해도, 심지어 로마의 거부가 아케론에게서 돈 냄새를 맡고 천문학적인 금액을 불러도 마르쿠스는 꿈쩍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액수를 불렀길래 로마에서 내로라하는 거부가 제시한 돈에도 꿈쩍 않던 마르쿠스의 콧대를 꺾었나?

그리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쟁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대체 뭣 때문에 그를 사?”

뜬금없이 저택에 처박혀 그 정체를 아는 이가 없는 은둔자가 이스카리아의 왕을 사다니?

“그 작자, 잘생기긴 기가 막히게 잘생겼지 않나? 내가 말했지. 로마 원로원 귀족 가문에서 음탕한 딸을 변방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아케론은 좋겠군. 매일 밤 로마 미녀와 질펀한 밤을 보낼 수 있어서.”

“미녀인 걸 어떻게 알아?”

“로마 안 가봤어? 로마 여자들은 다 아름다워.”

“음, 친구여. 소문의 무색함을 말하자면 흔히들 이스카리아섬의 사내들이 건장하고 잘생겼다 하네……. 자네도 거울은 보고 살겠지?”

“뭐 이 새끼야?”

그러는 한편 참신한 추측을 내는 이도 있었다.

“왜 꼭 여자라고 생각해. 전통적으로 우리 아카이아인은 잘생긴 사내를 가리지 않고 사랑했다고?14)”

“천 년 전에 선조들이 이스카리아에 정착했다. 우린 로마인이야, 이 역적 놈아. 널 카이사르15)에게 고발하겠어.”

물론 아케론에게 구애를 하는 청년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렴 그런 목적으로 그 비싼 몸값을 냈을까?

그저 호사가들이 재미 삼아 하는 말이고, 그저 흥미 본위의 음담패설에 불과한 것이다.

막상 저택으로 팔린 아케론도 그런 말을 믿지 않고 그 주인의 정체와 저를 구매한 목적을 궁금해했으니까.

“그러니까.”

다만, 뜻밖인 일은…,

“오늘부로 내 밤시중을 들면 된다.”

무척 유감스럽게도, 그런 근거 없는 추측이 사실이란 것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늘부터,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날 안으라고.”

*

쏴아아 세찬 소리가 울렸다.

절벽 위로 새하얀 거품을 이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소문 속 로마식 저택에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택은 항상 한적하고 고요했으나, 오늘은 좀 달랐다.

해가 머리 위로 솟구칠 무렵, 외부인이 그 미지의 장소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인은 군인처럼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카락과 군청색 두 눈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타인보다 얼굴 한 개 반은 더 큰 건장한 체격이 도드라진다. 굵은 눈썹, 각진 턱. 강인한 인상의 사내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얼굴은 무심했다. 새하얀 튜니카를 입고, 그 사이로 바위같이 단단하고 두꺼운 몸을 드러낸 사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움직임이 도드라졌다.

옷자락 밖으로 드러난 짙게 그을린 살 위에는 이곳저곳에 흉측한 상처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내는 바로 이스카리아의 왕이라 불리는 검투사, 아케론이었다.

이스카리아의 집정관 마르쿠스의 손에서 팔린 그가 저택에 들어온 날이었다.

사내는 소문이 무성한 새 주인을 처음으로 알현하려 대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노예를 따라 현관을 밟자마자 저택이 명성답게 우아하고 또 아름다운 곳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을 밟는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은은한 리라 소리. 코끝을 스치는 달큼한 냄새는 향기로운 정원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흘끗 본 저택 주위의 외정은 눈이 멀 듯한 찬란한 꽃들로 조성되어 있었고 그는 그 아름다움에서 주인의 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로마 귀족이라.’

중얼거리는 아케론의 눈에 일순간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노예의 안내를 받으며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밟은 아케론이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아트리움16) 한가운데 자리한 상석의 긴 의자였다.

인공연못 바로 옆에 자리한 그 긴 의자 위에는 새하얀 고양이를 가지고 노는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예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향한 아케론은 의자를 뒹구는, 아마 그의 주인으로 추정될 이를 마주한 순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냐옹냐옹.

“쉬이.”

기다란 의자에 누운 채 털이 복슬복슬한 하얀 고양이를 쓰다듬는 금발의 어린 청년이 그곳에 있었다.

물을 긷는 님프 석상이 장식된 네모난 인공 연못. 그를 앞에 두곤, 청년은 열린 천장 아래 뜨거운 태양 볕을 맡으며 늘어져 있었다. 하품을 하는 그 한가로운 모습에 아케론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포르투나, 그만 물어.”

냐아.

그건 마치 깃털이 살랑이는 듯한, 분수대에서 물이 쏟아지는 듯한 청량한 목소리였다.

청년은 그에게 시선조차 보내지 않은 채 그저 한가로이 고양이의 발바닥을 만지고 있었다. 목덜미를 덮는 꿀색 금발에 시선이 갔다. 냐옹거리는 흰색 고양이의 코를 톡 치며 장난을 거는 청년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권태로웠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볕을 받은 금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빛의 물결이 눈을 어지럽히고, 그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마주한 순간 아케론이 속으로 생각했다.

‘날 호위로 들인 건가?’

연약한 팔다리, 꿀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가는 목덜미를 바라보면서 가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이었고, 아케론의 용도를 확인시켜 줄 그의 주인은 야옹야옹 울어대는 눈처럼 새하얀 고양이를 가지고 놀 뿐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인내심이 강한 아케론마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불쾌함을 드러낼 즈음이었다.

“저택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정적을 깨고 느릿하게 흘러나온 말에 아케론이 몸을 멈칫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아케론이 이어진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아케론…….”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오늘부로 내 밤시중을 들면 된다.”

아케론은 꽤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말을 내뱉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오늘부터,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날 안으라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해 줘? 내 밤시중을 들라 했는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내가 그대에게 ‘안다’나 ‘밤시중’이라는 말에 함유된 의미를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케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였다.

“이봐, 아케론!”

청년의 아름다운 미간이 찌푸려지고, 그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슬피 우는 고양이의 앞발을 가지고 놀던 청년은, 애완동물에게서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만 회피해 주겠나? 나는 내 말을 물릴 생각이 없어. 나는 그런 종달새 같은 답변을 들으러 너를 사 온 게 아니다. 아케론 ‘이스카리쿠스17)’ 빅토리우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케론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지금 들은 것이 농담이 아니다.

그를 깨달은 순간 아케론의 목구멍에는 ‘자유 로마인이 사내를 아래서 받는 일은 사회적인 자살과 같다’란 말이 치밀어 올랐다. ‘죽을 때까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추궁하는 말도, 그런 것을 다 떠나서 그 둘이 오늘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상황이란 지적 또한.

청년은 다시금 나른한 자세를 취한 채 고양이를 가지고 놀았고 아케론은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한동안 노려보았다.

“이리 온.”

자상한 손길로 털이 흰 고양이의 두 쫑긋한 귀 사이를 쓰다듬는 모습이 지극히 평온하다.

“손. 손을 주면 오늘은 정어리를 두 덩어리 주겠어.”

그를 마주하며 아케론은 깨닫고 있었다.

저택이 어째서 인적이 드문 비밀스러운 공간에 지어졌는지. 왜 저택의 주인이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무뚝뚝한 얼굴 위로 경멸이 희미하게 스친다.

아케론이 다시 청년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아케론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또 신비로운 눈.

다시금 고요함을 되찾은 아케론의 얼굴은 평소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미궁과 같았다. 꿀빛의 금발.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형의 청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아케론의 말을 기다렸다.

수면 아래로 잠긴 듯한 목소리가 방 안을 느릿하게 울렸다.

“명령이라면 따릅니다.”

큐피드를 닮은 청년이 그 순간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을 멈추고 말없이 웃었다.

인상적인 자수정색 두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살랑거리는 고수머리가 장밋빛 뺨을 가리며 햇살 아래 따사롭게 빛나고 있었다.

물에 닿으면 녹을 듯한 사랑스러운 청년이 분홍색 입술을 달싹거리며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 이름은 루키우스다.”

희미하게 굳어져 가는 아케론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오늘 밤부터 당장 내 방을 찾아오거라. 내게는 더 기다릴 인내심도, 시간도 남지 않았으니.”

천박하다.

목구멍에 걸리는 말을 삼키며 아케론이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 말 알아들었나…?”

“예.”

*

저택의 구조는 빌라18)가 아닌 도무스19)였다.

신화를 주제로 한 벽화가 인상적인 현관. 그에 들어설 때부터 아케론은 아트리움을 눈여겨보았다. 지붕이 뚫리고 인공 연못이 자리한 웅장한 거실은 완전한 로마식이었다. 그는 서재를 지나 회랑으로 둘러싸인 페리스타일20)을 건너며 그의 주인이 로마 귀족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택은 완벽한 로마식이었고,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로마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로마식 저택이 붉은색을 즐겨 쓰는 반면 이 건물은 조금 더 지중해 연안에 어울리는 푸른색을 사용했단 점이었다.

햇볕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대리석으로 만든 복도를 지나며 아케론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로마 귀족이라.

8월이라 이파리가 푸릇푸릇한 내원을 지나 그가 도착한 곳은 도저히 노예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멀쩡한 처소였다.

“저택의 노예들이 모두 이런 곳에서 자나?”

아트리움 양면에 두꺼운 천막으로 가려진 방들은 주인이 잠을 자는 장소였다. 그 안쪽에 자리한 페리스타일 쪽 안채에는 어린아이나 여인, 혹은 노예가 거주했고.

그를 잘 아는 아케론은 제가 페리스타일 안에 자리한 노예의 처소로 안내받고 있노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다르게, 도착한 곳은 단칸이었으나 규모가 상당한 방이었다. 햇볕이 잘 들어오고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처소.

“이곳은 별채입니다. 당신이 특별한 겁니다.”

아케론의 짐을 대신 들고 와 처소에 풀던 남자 노예가 짤막한 말로 그 말에 답하곤 다시 손을 놀렸다. 그 말에 멈칫한 아케론이 쓴웃음을 흘렸다.

제게 공손히 말을 하는 노예의 모습에서 무언가의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주인의 정부라 이건가.’

아케론이 조소를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이제는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제가 기거할 곳을 탐색하려는 습관에 움직인 것이었다.

처소를 탐색하던 아케론의 얼굴에,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기색이 언뜻 스쳤다.

‘이건….’

별채의 구조에 당황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다.

처소는 가구가 단출하면서도 양성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깔끔했으니까. 베개는 오리 깃털을 넣은 듯 푹신했고, 이불은 고급 리넨을 써 촉감이 좋았다.

단칸의 방치고 크게 트인 창문으로 따뜻한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페리스타일이 언뜻 보이는 전경 또한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늘어져 아름다웠다.

창문 앞에는 기름을 먹인 참나무로 만든 탁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잉크와 양피지가 구비되어 있다. 옷장 또한 크고 넉넉했고, 서랍장 또한 구비되어 있었다.

옷장의 문을 연 아케론이 그 순간 음, 침음을 흘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튜니카21)와 팔리움22). 옷장 아래 서랍 칸에 자리한 세공이 섬세한 브롯지를 발견한 아케론은 그 자리에서 잠시간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그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옷장의 문을 닫고 몸을 돌려 방 안을 다시 살폈다.

별채를 둘러보는 시선에 교차된 감정이 묻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너그러운 주인에게 하사받은 방은 그의 취향에 무서울 정도로 걸맞았던 것이다.

새하얀 단색 튜니카와 그 사이 가끔 보이는 붉은색 옷이 그러했고, 단출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가 그러했다. 창문 앞에 자리한 탁상이 그러했고, 심지어 침상의 높이까지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잠시 어두운 눈으로 방 안을 살피던 아케론이 탁상 위에 자리한 잉크병을 힐끗 보다가 시선을 올려 창문 위 벽에 걸린 나무판을 응시했다.

[Ignoramus et Ignorabimus]23)

정적이 흐르고, 어느 순간 아케론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훗.’

얼음장 같은 눈으로 오후의 햇볕이 들어오는 방 안을 응시하던 아케론은 그리고 몸을 돌려 별채 밖으로 나섰다.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위에 자리한 로마식 저택은, 과연 소문 이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현관에 들어설 때부터 그 비범함을 눈치챘던 아케론이다. 그리고 그는 외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아한 저택의 내부를 마주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외적인 아름다움에 민감하지 않은 그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을 만큼 저택의 화려함은 상당했던 것이다.

저택은 마치 신전처럼 그 전체가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인세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고아한 분위기를 흘렸다. 내부의 벽들은 새파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곳곳에는 우아한 장식물들이 가득하다.

회랑 한편에 자리한 별채에서 나온 아케론이 페리스타일을 둘러싼 긴 회랑을 가로질러 그가 들어온 곳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절벽이 있는 쪽이었다.

기둥이 늘어선 장소(포티코)24)를 지난 아케론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지중해가 펼쳐진 새하얀 발코니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발코니 밖으로 삭막한 사내의 마음을 흔들 만치 특별한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군청색 눈이 그의 눈만큼 깊은 색의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았다. 난간 밖 버드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발코니에 선 아케론은 저 멀리 금빛으로 타오르는 태양 볕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햇볕 아래 대리석으로 만든 저택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절벽 아래 늘어진 하얀색 모래사장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귓가에는 쏴아아 파도가 절벽을 치는 소리가 시원하게 몰아치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댈 때 느티나무가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바다의 보석이라 불리는 카프리에 비견되는 천혜의 경관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 아름다움을 그동안 실감하지 못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야 아케론은 제가 그 명성이 자자한 이스카리아섬에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유유히 움직이는 놀잇배를 바라보며 그는 한참을 발코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뜨거운 태양 볕에 달아오른 대리석 난간을 부여잡으며, 아케론은 손이 익어가는 것조차 모른 채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가 몸을 돌려 발코니를 떠나 제가 왔던 길을 되돌아오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저택.’

긴 회랑을 지나가며 아케론은 생각에 잠겨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재력가의 자식이길래 이런 저택을 변방에 짓지?’

라티움에서도 이런 저택을 소유할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터인데?

이스카리아 촌벽에 자리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화려한 저택에 아케론은 의문을 가져야만 했다.

루키우스.

혀 안에 파도처럼 스러지는 이름을 잠시간 되뇌던 아케론은 문득 어느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좁히고야 말았다.

‘가명만 알려 주다니….’

프라이노멘25)만을, 그것도 가명 같은 이름을 알려 주고 있다.

저명한 가문의 일원이라면 위대한 선조의 이름을 따거나, 영웅의 이름을 따서 프라이노멘을 지었다. 루키우스라는 이름은 비록 평민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전통적인 로마식 이름이었으나, 로마 귀족 가문에서는 인기가 그다지 없었다.

‘정말로 은거하는 공화주의자 가문의 후손인가? 아니면….’

소문을 떠올리던 아케론이 문득 제게 이름을 말하던 루키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그 이름이 거짓이 아닐 또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아니면 버려진 걸 수도 있겠군.’

아케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사실 처음 보는 순간 눈길이 갔던 가는 목덜미에서 읽어 낸 가정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 청년에게선…… 화려한 외양으로 감출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뺨은 핏기가 하나 없이 창백해 파란 핏줄이 보였고, 눈초리가 긴 눈매는 그 아래 그늘이 짙게 지어 병색이 완연했다. 심지어 그는 웃을 때조차 고통스러운 기색을 희미하게 드러냈으니, 아케론은 부드러우나 힘이 없이 늘어지는 어투만 보아도 그의 연약함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면 아래 잠긴 듯 웅얼거리며 말을 하다가 중간중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 루키우스는 한눈에 보아도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키는 아케론의 쇄골 언저리에 올 만큼 자그마하고, 몸통은 그의 반이 될 만큼 납작하다. 팔다리는 사슴처럼 가늘고 길쭉하여 손이 닿으면 부러질 것만 같았고, 튜니카 사이로 드러나는 가녀린 목덜미는 우아했으나 동시에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무릎, 복사뼈와 같은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앙상한 몸은 옷을 걸치기도 힘들 것만 같이 안쓰러워 보였으니, 그 여린 몸은 건강을 중요시하는 로마인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케론은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병약한 자식을 홀대하는 귀족은 많다.

로마 귀족 중에서 병약한 자식을 수치스러워하는 이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케론은 혈통의 오점을 용납 못 해 친자식을 죽이려 드는 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 옛날 스파르타인과 같은 관습적인 일은 아니지만, 로마인 중에서도 ‘솎아내기’를 시도하는 이들은 많았던 것이다.

병약하여 부모에게 버려지고, 성의 없는 이름을 받고, 그에 더해 이상 성벽으로 변방으로 쫓겨난 명문가의 수치, 오점….

그런 사정을 추측하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고개를 절레 저었다.

언제부터 남에게 이리 관심이 많았다고?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헛웃음을 띠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에 대한 관심을 끊은 채 살아오지 않았나. 오늘 죽으면 오늘 죽은 거고, 내일 죽는다면 내일 죽는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고작 새 주인의 이름 따위로 고민하고 머리를 굴리다니.

‘제안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군.’

밤시중을 들라는 말을 수긍했어도, 내심 그 말에 크게 흔들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사실 루키우스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그저 회피하고 있었던 것뿐이지.

어느 부잣집 방탕한 도련님을 만족시키는. 침대 위에서 허리를 놀리는 것으로 하루 이틀을 벌어 먹고사는 천한 존재가 되고야 말았으니. 아케론은 사실 그때 서늘한 바람이 마음에 불고 피가 식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뭘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는 로마 시민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유를 잃은 지 오래였으므로, 아케론에게 남은 길은 노예로서 수치스럽게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건 바로 그날에 아케론이 선택한 길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대를 게르마니쿠스로 부를 것이오.’

그 순간 아케론의 눈앞을 스치는 장면과 귓가에 들리는 환청이 있었다.

피비린내가 튀기고 비명과 고성이 오갔던 자리에서의 일이었다.

검투장의 광기를 품은, 훈련소의 애절한 집념을 그리는, 또 군인의 불명예를 품은 기억.

7년 전 숲속에서 벌어졌던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바로 그의 불명예와 관련된 기억을.

그때였다.

“아케론.”

문득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의식을 깨웠다.

귀가 아닌 살갗으로 스며드는 듯한 목소리. 절벽 아래 몰아치는 파도 소리만큼 청아한 목소리는 아케론을 상념에서 끄집어 내기에 충분했다. 사내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 순간 말을 내뱉은 이를 응시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이가 복도에 선 채 아케론을 물기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 있었군.”

아케론은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복사뼈가 드러나는 아이보리색 튜니카, 수수한 색의 옷을 입고 있는 청년이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튜니카가 무겁게 보일 만큼 가냘픈 이는 그가 품은 애처로움으로 아케론의 시선을 앗고 있었다. ડχ

꿀벌색 고수머리는 살짝 야윈 얼굴형을 가렸으나 그 창백한 혈색만큼은 가리지 못했다. 팔꿈치가 날카롭게 도드라진 앙상한 팔도, 가는 팔목도, 일자에 가까운 다리도 모두 그의 병약함을 알리고 있었다.

교묘한 침묵을 깨고 나른한 목소리가 흘렀다.

“하인이 네가 방을 나섰다길래 어딜 갔나 했더니. 저택을 구경하고 있었던 건가?”

“…….”

“빠르게 적응하는 모양이구나.”

담담히 말을 내뱉으며 루키우스는 작게 웃었고, 그 순간 아케론은 미간을 좁히고야 말았다.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답변은 없었으나 루키우스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아케론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을 했다.

“안뜰이 아름다워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루키우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안뜰의 정원, 페리스타일을 살폈고, 아케론 또한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햇볕에 빛나는 아름다운 정원을 응시했다.

그의 말대로 그리스식이 가미된 로마식 저택의 정원은 몹시나 아름답다.

꽃이 거의 저물어가는 여름이었으나 그 녹음이 우거진 정원은 시원한 맛이 있었다. 인공으로 만든 호수는 맑고 투명한 물이 흘렀고, 그 주위는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풀밭에는 새하얗고 작은 이름 모를 꽃들이 드문드문하게 보였고, 무늬를 띤 나비가 우아하게 팔랑거리며 그 사이를 노니고 있었다.

잠시간 호수를 응시하던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같이 식사를 하지.”

고개를 돌린 아케론이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녁에 무화과를 배에 밴 염소 요리가 올라올 거야. 시켈리아산 포도주에 계피를 넣을 셈이지…… 네게 대접하고 싶은데.”

루키우스는 게으른 나귀같이 느릿하게 말을 했다.

“기대해도 좋아, 아케론.”

그의 말이 끝나고, 아케론은 그와 비슷할 만치 느릿한 목소리로 답변을 내뱉었다.

“저는 노예입니다.”

돌려 말하는 거절의 말에 루키우스는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는 주인이지.”

돌려 말하는 명령의 말에 아케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

식사는 루키우스가 장담한 대로 화려했다.

‘대단하군.’

저택에는 무화과나무가 풍성하게 자라고, 장미꽃이 장식된 페리스타일에는 인공으로 된 호수가 조성되어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별장 속 별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전경이 잘 보이는 곳에는 멀리 동쪽에서 넘어온 도자기를 식기로 쓰는 식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옮기는 노예들은 모두 미남미녀였고, 몸 상태가 건강하고 말수가 없었다. 잘 교육된 듯한 이들은 로마 귀족의 일가를 보는 듯 예법에 능했고 또 영리했다.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복도를 걸으며 내뱉었던 ‘내 저택의 욕탕이 로마의 대중욕탕에 견줄 만큼 근사하니 저녁에 그곳에서 몸을 풀기 바란다’는 말을 떠올리며 헛웃음 짓고야 말았다.

로마의 대중욕탕은 로마 건축 예술 그 자체다.

그런 로마 욕탕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도대체 이 저택의 주인의 정체는 무어란 말이지?

그저 그런 귀족가의 일원이기라기엔 너무나도 호화스러운 저택을 봐도 그랬다. 그러니 그는 의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가문이 고작 방탕한 어린 청년에게 이런 저택을 내줄 수가 있지?’

아케론이 알기로는, 그럴 만한 재력이 되는 가문은 제실(帝室)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가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유니우스 가문 정도였다.

모두가 로마의 뿌리 깊은 명문가였고, 황실과 피를 섞은 곳.

그리고 루키우스는,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그런 가문의 격에 걸맞은 품위를 보였다. 그는 ‘겉껍데기’만큼은 방탕하거나 음란한 로마 귀족 같지 않게 훌륭했으니까.

사실 겉보기에 그는 혈통이 좋은 귀한 집안의 자손 같았고, 예절 또한 완벽했다. 조근하게 말을 할 때의 발음은 몹시 우아하여 듣기에 좋았고, 행동거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그는 위대한 가문의 일원인가?’

그때였다.

“음식이 맛이 없나?”

불현 듯 명랑한 목소리가 아케론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멈칫한 아케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혀를 차는 거지?”

목덜미에 닿는 금발을 느슨하게 묶은 루키우스가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아이보리색 튜닉 사이로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 그나마 살이 조금 붙은 도톰한 허벅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청년은 고양이 같은 눈을 반짝거리며 아케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방만한 모습에 아케론은 그 순간 얼굴을 희미하게 찌푸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무표정한 표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닙니다.”

루키우스의 호의에 아케론은 노예로서 파격적이게도 긴 의자, 트리클리니움26)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아예 몸을 누인 루키우스와 다르게 한쪽 다리를 굽힌 불편한 자세를 취하곤 아케론은 딱딱한 빵을 씹고 있었다.

그런 아케론을 향해 루키우스는 사슴 다리가 올려진 접시를 내밀며 유혹하려 들었다.

“염소가 별로라면 사슴졸임을 먹어봐, 맛이 괜찮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치에 방만해지고 싶지 않아 지나치게 호화로운 식사를 꺼리고 있던 아케론은, 순간 루키우스가 내미는 사슴 다리에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검투사 때보다 몸은 편안할지언정 아케론은 스스로가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의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목줄에 매인 개가 고깃덩어리에 길들여지면 더 위험한 법이지 않은가?

그것을 아케론은 잘 알기에, 제가 경계를 푼 이후의 일을 걱정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단단하던 아케론의 얼굴에 슬쩍 동요가 엿보인다.

루키우스가 내민 접시를 손에 쥔 아케론이 잠시간 망설이다가, 갈색 진득한 소스가 묻어나는 사슴졸임에 손을 댔다. 리쿠아멘(로마식 피쉬소스)이 뚝 떨어지려는 손가락을 핥으며 아케론이 부드러운 살점을 어금니로 씹었다.

리쿠아멘의 진한 풍미가 먼저 입 안에 감돌았고, 녹을 듯이 부드러운 사슴졸임살의 고소한 맛이 돌았다. 사슴 고기도 리쿠아멘도 감칠맛이 제법인 재료인지라, 그의 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찌르르 울리며 다음 살점을 원하게 되었다.

“어떠냐?”

그 순간 아케론의 얼굴이 복잡한 빛으로 감돌았다. 슬쩍 식탁을 바라보던 아케론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괜찮, 아니….”

사치가 사람을 나약함에 물들게 한다는 스파르타인의 무식한 사상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치에 길들여지는 걸 어느 정도 경계하고 있었다.

“맛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그런 마음으로 무시하기는 너무나도 호화로운 만찬이었다.

아케론의 얼굴이 무너져 내리고야 만다.

무화과를 품은 염소, 버터를 발라 노릇하게 구운 병아리 구이, 계피를 탄 시켈리아산 적포도주와 리쿠아멘을 얹은 사슴졸임, 어린 돼지의 뱃살을 저민 베이컨 등이 주식이었고 신선한 양젖치즈와 석청, 무화과 파이, 버찌, 복숭아, 아몬드 등은 부식이었다.

로마인은 미식을 즐기고 저녁 식사는 그들의 얼굴과 같다.

주인의 품격을 드러내는 저녁 만찬은 호화로운 저택에 결코 뒤지지 않게 화려했던 것이다.

착잡한 얼굴로 사슴졸임을 입에 털어 넣으며 아케론이 속으로 헛웃음 지었다.

‘배부른 돼지가 될 생각이군.’

그러나 음식은 몹시 맛있었고, 그는 도저히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부드러운 사슴살이 짭짤한 맛과 그윽한 풍미를 남기며 목구멍 안으로 넘어갈 때의 느낌이 황홀하다.

포도주의 그윽한 향기와 몸을 데우는 부드러운 열기는 마음을 저절로 풀게 만든다. 하나둘씩 음식을 목구멍 뒤로 넘기던 아케론은 어느 순간부터 자포자기하곤 음식에 마구잡이로 손을 대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오기 전 마음가짐은 어디 갔는지, 그는 먹지 않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했던 것이다.

‘이런 거에도 하나하나 걱정하며 살아야 하나?’

환멸이 들었다.

이미 떨어질 데조차 없는 밑바닥. 고작 먹을 것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삶이라면 끊어져도 상관없지 않나.

아니, 애초에 당근과 채찍으로 길들여졌을 거면, 검투사 시절 애저녁에 굴복했을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당근보다는 채찍에 약한 법이니.

제게 채찍을 휘두르던 첫 주인과 노예상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케론이 비웃었다.

생각해 보면, 이깟 음식 따위에 길들여질 수 있는 운명이라면 그냥 뒈져 버리는 게 낫다.

옆에 자리한 염소의 다리를 뜯으며 그는 그렇게 마음속 마지막 남은 껄끄러움마저 떨쳤던 것이다.

거위 간 파테를 빵에 바르던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폭주를 눈치챘을 때, 그는 계피를 넣은 포도주를 마시며 뼈가 드러난 염소의 마지막 살점을 뜯고 있었다.

그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은 루키우스가 잠시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 먹는구나. 보기 좋아.”

바람 같은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 아케론이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루키우스는 청명한 바람 같은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를 홀짝거리다 느긋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기름진 음식이 몸에 받지 않아 조금만 많이 먹으면 토를 하고 드러눕게 돼. 구토제는 상상도 하지 못하지.27) 미식을 즐기기엔 그른 몸이야.”

담담히 말을 내뱉은 루키우스가 그러곤 팔을 장난스럽게 허공에 흔들어 보여 주었다. 아케론은 그의 얇은 팔다리에 시선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튜닉 아래로 훤히 드러난 종아리는 굴곡이 도드라진 것이다. 발목은 실로 얇아 플라밍고와 같아 보였다. 복사뼈는 도드라졌는데, 분홍색으로 달아올라 제법 귀여워 보였고 발은 부드러워 보였다.

루키우스의 몸은 아케론이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이었고, 그에 그는 한참을 그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던 것이다.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맑은 웃음이 흐르자, 아케론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다.

미식에 흐려졌던 이성이 돌아오고, 다시금 냉정함을 되찾은 사내가 표정을 가다듬는다. 루키우스는 뜨거운 시선이 닿았던 발을 까딱거리며 음식에 손을 뻗었다.

“이것도 먹어 봐라. 단순히 병아리 요리가 아니야. 우유에 불린 곡식을 먹여 기르고, 버터에 크랜베리를 섞어 발라 구웠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루키우스가 손을 뻗어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를 쥔 뼈마디만 남은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던 아케론이 어색하게 접시를 움켜쥔다. 루키우스는 제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케론이 마음에 든 듯 미소를 지었다.

“이건 겉을 바삭하게 태운 무화과 파이. 정원에 있는 무화과를 쓴 게 아니야. 파르티아산 무화과가 이번에 과육이 달콤하더군. 나는 단 걸 좋아해서 파이 위에 벌집째 석청을 올렸다.”

“네아폴리스에서 직접 거둔 청포도야. 식감이 아삭하고 맛이 청량하다.”

“꿀 치즈케이크. 몽글한 식감의 치즈를 꿀과 버무려 모양을 잡았지. 그리스인이 신전에 바치는 신성한 음식이다.”

그리곤 루키우스는 길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잎사귀에 만 치즈케이크를 잡아 아케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저는 그냥….”

눈앞에 자리한 섬세한 손가락을 바라본 아케론이 몸을 멈칫했다. 그러곤 그는 입술을 딱딱하게 굳히며 그 손길을 회피하려 들었다.

음식을 직접 권유하려는지 루키우스는 그를 향해 몸을 한껏 기울이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하고 달콤한 과일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젓던 아케론은 그 순간 제 앞에 자리한 청년의 얼굴을 마주하곤 얼어붙고야 말았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청년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꿀처럼 감돌고 있었다. 유독 눈에 띄는 밝은 금발은 애처로운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리며 빛났다.

“자아, 아케론.”

연분홍색 입술이 작게 달싹이는 순간 아케론은 등골에서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며 숨을 죽이고야 말았다.

“어서.”

루키우스는 끝까지 손을 물리지 않았다.

억눌린 한숨이 흐르고, 체념을 한 듯 아케론이 어느 순간 몸을 움직였다.

가는 손가락 끝에 매달리듯 걸린 치즈케이크를 물어 채는 아케론의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연하게 웃는 루키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입술 끝에 슬쩍 스쳤던 손가락의 서늘한 감촉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탕부.’

아주 슬쩍 스쳐 지나간 것임에도 화인처럼 상처가 입술에 새겨진 것만 같아,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지고야 말았다.

부드러운 치즈 덩어리가 혀에 퍼져 나가고, 아케론이 농염하게 웃는 청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 후 식사는 정적 속에서 이루어졌다.

*

[Ignoramus et Ignorabimus]

식당에서 별채로 돌아온 아케론이 창문 위에 걸린 목판을 바라보았다.

저 소년은 저 말의 뜻을 알고 목판을 걸어 놓은 것일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 소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격언. 7년이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로마인의 그 고상한 허세에 아케론은 그저 웃을 뿐이다.

옷장을 연 아케론이 허벅지를 가리는 얇은 튜니카를 꺼내 들었다. 붉은색 실과 금사로 소매 끝과 옷깃 주위를 수놓은 튜니카는 아케론이 지금 입고 있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배급받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옷을 손에 든 아케론이 인기척에 문밖을 나섰을 때 그곳엔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흑발의 남성 노예가 공손히 자리하고 있었다.

저택의 노예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또 준수한 생김새였고, 그리스인으로 보이는 그 노예 또한 구불거리는 고수머리와 올리브색 눈이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욕탕으로 안내하시라는 명령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아케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곳입니다.”

마침 따뜻한 물소리가 들리는 건물 앞에 당도한 노예가 아케론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루키우스의 명령이 따로 있었는지 그는 같은 노예이면서도 존대를 하면서 정중히 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그 그리스인을 힐끗거린 아케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고맙군.”

노예는 그 익숙한 하대의 말을 듣곤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한 아케론의 눈이 흔들렸다.

아케론이 특별한 취급을 받아도 그들은 같은 노예다. 아무리 루키우스의 명이 있다 한들 그 둘의 관계가 자연스러운 치하의 말이 오고 갈 만한 것은 아닐 터.

그리스인의 묘한 시선에 당황하던 아케론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원래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시선을 외면한 아케론이 무뚝뚝한 표정을 다시 되찾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당황할 때 말을 길게 할수록 더욱 곤란함을 겪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기를 선택했고, 다행히도 그리스인 노예는 아케론에게 작은 묵례를 남기곤 욕탕을 빠져나가 그를 작은 위기에서 구제해 주었다.

‘정신을 어디 팔고.’

한숨을 내뱉은 아케론이 목을 뒤로 젖히며 욕탕을 둘러보았다. 작은 소동이 무마되고 피로를 느끼던 그는 이윽고 화려한 욕탕을 살피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릴 만큼 욕탕은 크고 또 웅장했다.

욕탕의 천장은 푸른 칠이 되어 있었고 그 위에 금박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로마군과 싸우는 이민족의 벽화는 갈리아 정복기의 한 장면이었고, 그것은 로마에서 특히 벽화로 그리길 좋아하는 주제였다.

벽화가 그려진 천장은 중간에 네모난 구멍이 있어 환기가 되는 구조였는데,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 바로 위가 뚫려 있어 모락모락한 김이 어느 정도는 그 사이로 빠져나갔다.

로마와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는 화려한 욕실.

욕탕 내부를 살피던 아케론은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몸을 움직였다. 튜니카가 바닥에 떨어지고, 견고한 사내의 몸이 드러나는 순간 아케론이 뜨거운 물이 채워진 욕조로 걸어 나갔다.

뜨거울 정도로 덥혀진 물이 차오른 욕조에 몸을 담근 순간 아케론은 발끝에서 퍼져 나가는 노곤함에 입술 밖으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욕탕에 깊게 몸을 묻으며 그가 탄식했다.

수증기가 눈앞을 옅게 가리고, 따뜻한 물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물에 닿는 순간 몸을 해일처럼 덮치는 나른한 감각에, 아케론은 저항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수몰되고야 말았다.

오랜만에 즐기는 호화스러운 목욕은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과 함께 불신을 안겨 주고 있었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실로 꿈만 같은 일이다.

양성소에서 그는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모여 미지근한 물로 피로 더러워진 몸을 씻어야만 했다. 진흙탕에 맨발로 선 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앞에 벌거벗어야만 했고, 그렇게 몸을 닦고 나면 낡은 천으로 몸을 휘감고 공동 숙소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곤 했다.

사실상 짐승과 다름없는 생활. 그런 삶을 살다가 죽을 거로만 생각했는데….

그러나 지금, 그는 향유의 달큼한 내음이 코의 점막을 자극하고, 근육이 융해되는 감각이 뇌를 녹게 만드는 호화스러운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화려한 식사보다 이것은 더욱 황홀한 일이었다.

그 쾌락은 미식과 그 어느 호화스러운 숙소보다 더 진하여, 아케론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이 일상이 제가 창부처럼 몸을 팔아 얻어 낸 ‘대가’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어지러운 수증기 사이로 눈부시도록 새파란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그 순간 아케론의 머릿속에, 뜨거운 김 사이로 지나간 것은, 바로 손을 툭 대면 당장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병약한 청년이었다.

허벅지 반을 드러내는 새하얀 튜니카를 입고, 금색 질 좋은 천으로 만든 허리띠를 찬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을 아케론은 복잡한 심경을 품은 채 떠올리고 있었다.

그간 금욕적인 삶을 살던 아케론이다.

관대한 주인인 마르쿠스가 ‘사기증진’을 위해 검투사들이 머무는 숙소에 창녀들을 밀어 넣을 때마다 아케론은 제 목을 휘감는 팔을 풀며 그들을 한사코 거부할 뿐이었으니까.

스폰을 제의하는 귀족 여성들 또한 마찬가지로 피해 다녔으니 검투사로 살던 7년의 시간 동안 그는 베스타를 모시는 신녀28)처럼 금욕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잠깐이나마 루키우스에게 보였던 관심은 이질적이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육욕에 휘둘린 자신을 책망하던 아케론은 그러나 스스로를 되잡길 포기하고 난간에 기댄 몸에 힘을 풀고야 말았다.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몸을 녹이는 나른한 감각에 푹 퍼져 안일한 마음이 든 것이다. 이미 그의 몸은 향응에 젖어 나태해진 후였고, 아케론은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싫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이미 답이 없었다.

저의 인생은 저의 것이 아닌데, 그리 한탄해 보았자 무엇이 남을까.

7년이라는 믿기지 않은 긴 시간 동안 목숨을 연명했으나 이제 머지않아 그는 제 시간이 끝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검투사는 대개 2년 안에 숨을 마감하는 위험한 직업이다. 아케론 또한 그동안 무수히 많은 부상을 입고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많았다.

불운인지 행운인지 지금까지 장애를 입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7년 동안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카리아의 간판 전투사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아케론은 언젠가 제게도 해가 질 날이 온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운명을 벗어날 줄은 몰랐지만… 하여간 아케론은 제 삶을 던지고 있었다.

어린 귀족의 잠자리 놀잇감으로 전락하는 수치가 검투사로서 겪을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일보다 더 지독할까?

아니, 아케론은 현실을 알고 있었다.

‘무슨 개소리를….’

노예 중에서 가장 비천하다는 검투사가 된 것부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일이다.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그는 지금껏 온갖 불명예스러운 짓을 저질러 왔다.

양성소에서 제게 친근히 말을 걸었던 선배 검투사의 급소를 끊어 죽였고, 같이 목검을 맞댔던 무수히 많은 동료의 피를 묻혔다. 살려 달라 외치는 이의 절규를 무시하고 목숨을 끊었다.

비록 그들의 삶이 죽음보다 비참할 것을 알고 저지른 행동이었으나, 아직도 아케론은 뇌리에서 절박한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이미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아래로, 또 아래로 향할 뿐이리라.

아케론이 무덤덤한 얼굴로 자학 어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생각을 해 보면 차라리 영혼마저 노예가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군.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일이고, 이미 내 인생은 밑바닥 너머로 수직하락하고 있으니.’

그때였다.

“기다렸는데, 나오지 않더군.”

않더군, 더군, 더군, 군….

기둥에 몸을 세차게 부딪치며 넓은 욕탕에 울려 퍼지는 말에 아케론이 몸을 멈칫했다. 그의 등 뒤로 옷자락이 사락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귓가로 연이어 부드러운 말이 내려앉았다.

“욕탕은 하나뿐이니…… 실례하지.”

나른한 목소리에 아케론이 신음을 흘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루키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마치 대리석을 깎은 듯한 낭창한 몸이 구름 같은 연기 속 드문드문하게 눈에 보인다. 팔에 걸린 튜니카를 벗어내려, 발목에 걸린 새하얀 옷자락마저 밟아 완전한 알몸을 드러낸 루키우스가 욕조를 향해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대리석을 정교하게 세공한 듯한 우아한 발이 맑은 수면 위에 닿는 순간, 아케론은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잘록한 발목과 선이 유려한 얄팍한 종아리는 조각과 같았다. 아케론은 무심코 시선을 위로 올려 뿌연 수증기 사이의 몸을 바로 보았다.

더운 김에 발갛게 달아올라 평소보다 혈색이 도는 부드러운 몸. 물기에 젖은 밝고 진한 색의 금발이 달라붙은 발간 뺨. 붉게 달아오른 입술.

그 순간 아케론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탕부의 얼굴.’

그때였다.

“음.”

돌연 자그마한 신음이 욕탕 안을 희미하게 울린다.

아케론이 몸을 멈칫한 때였다. 그는 뒤늦게 욕탕의 물이 아직 몹시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뜻 보았던 루키우스의 여린 살결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그의 안전을 살피고야 말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아케론은 그리고 그 순간 고온의 물에 몸을 완전히 담근 루키우스를 마주하곤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에는 작은 이슬이 방울져 있었고, 두 눈에는 나른함이 퍼지고 있었다.

그 순간 아케론은 욕탕의 뜨거운 물이 제 가슴이 아닌 목까지 잠식하고 있노라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목이 턱 멜 듯한 답답함에 휘말려 아케론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곤혹스러운 마음이 들어 아케론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야 만다.

그때였다.

“역겹나?”

아케론은 시간을 두고선 답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식사 내내 표정이 어둡더군.”

루키우스가 욕탕 난간에 머리를 대며 고양이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아케론은 그 장난기 어린 모습에 미간을 슬쩍 좁혔다. 루키우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소년애는 사교에 필수적인 소양이라 불러도 될 법한데.”

아케론이 느릿하게 물었다.

“소년입니까?”

건조한 눈빛과 성숙한 분위기가 그가 성인식29)을 치렀을 것이란 추측을 주는 반면에,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과 튜니카를 입은 모습30)이 걸린다. 그런 까닭에 아케론은 그의 나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성인으로 보이지 않나 보군. 3년 전에 성년식을 치렀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물음에 짧은 웃음과 함께 답했다. 잘박 물 위로 얇은 팔을 드러내며 루키우스는 이윽고 독백하는 듯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생겨서 오해받는 일이 잦아. 팔다리도 가늘고, 허약한 생김새지.”

매끄러운 살갗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다.

루키우스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새 뚫린 천장 사이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했고, 보랏빛 색으로 물든 장막 위에는 해변가에 반짝거리는 모래알 같은 별이 가득했다. 우아한 빛을 흘리는 금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하얀 팔은 달빛 아래 은빛으로 빛났고, 금발은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채 황홀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별빛이 자그마한 창문을 가로질러 욕조를 가로지르는 때, 손바닥에 감도는 별빛을 만지듯 손을 부드럽게 비빈 루키우스가 다시금 몸을 바로 하고 아케론을 차분히 응시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윽고 욕탕 안을 울린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어도 별반 다를 건 없지 않나? 한눈에 보아도 건장한 성인 사내인 연상의 네가 나약하고 부족한 연하의 나를 품에 안고 지도하는 건 똑같은 일 아니야?”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년애는 청년을 망치는 삿된 풍습입니다…….”

그 순간 아케론의 얼굴에는 경멸이 스치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입에 자그마한 웃음이 서렸다. 불쾌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아케론의 얼굴에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그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중을 하지 않으면 흘려들을 만큼 자그마한 목소리가 욕탕을 울렸다.

“너는 싫어하는 거야?”

아케론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말은 적나라한 혐오와 멸시를 담고 있었다. 군청색 시린 두 눈이 경멸을 담곤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인과 함께 욕탕을 나눠 쓰는 이 상황의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에 루키우스를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그가 원하던 밤도 되지 않았는데 이리 노골적으로 행동하는가?

차가운 시선이 루키우스의 얼굴을 쓸고, 루키우스는 적나라한 혐오의 시선을 받으며 살풋 웃음을 흘렸다.

“그런 짓?”

그는 비웃는 듯,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속내를 감추지 못해서 어쩌자는 거야? 이 세상에 교활하고 뒤틀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케론이 순간 얼굴을 구겼다.

성년이 된 지 3년밖에 되지 않는 어린 청년이 제게 그런 말을 하는가?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책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고, 걱정 어린 한숨을 흘렸다.

그러곤 돌연 손을 뻗어 아케론의 두꺼운 팔뚝을 만졌다.

아케론을 기겁하게 만든 행동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그의 손목을 단숨에 잡아챈 아케론이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의 눈에는 일렁거리는 분노가 엿보인다. 그러나 위협적인 사내의 시선을 앞에 두고 루키우스는 순수한 웃음을 흘리며 반응할 뿐이었다. 그런 루키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케론은 더욱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음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짓이냐 물었습니다.”

“놓아라.”

그러나 루키우스는 노예의 말에 굴하지 않았다.

“명령이다, 아케론.”

아케론은 죽일 듯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으나 손에 준 힘을 풀고야 말았다.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그가 루키우스의 손을 떨구어 냈다. 보석을 세공한 듯 희고 투명한 손에는 붉은 손자국이 장신구처럼 둘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멍울이 들 것만 같은 흔적이다, 더 했으면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그를 본 아케론은 저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한 것을 깨닫곤 잠시간 후회했으나, 그 감정을 잊게 만드는 당혹스러운 일에 휘말려 얼어붙고야 말았다.

얼음으로 만든 듯한 아름다운 손이 그의 가슴을 더듬었던 것이다.

“강건하군.”

느릿느릿한 미성이 욕탕 안을 울린다.

아케론은 그를 밀치려 했으나, 자그마한 뒤통수에 뻗어진 손은 주먹 쥐어져 잠시 핏줄을 세운 채 부들거리다가 물려졌다.

아케론이 억눌린 한숨을 내뱉었다. 욕조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몸에 힘을 푼 그는 마치 체념한 사람과 같아 보였다.

“으음.”

그런 아케론의 방관하에, 루키우스의 손은 미끄러지듯 살결을 내려가 견고한 성벽 같이 짜인 몸을 섬세하게 살피고 대담하게 이곳저곳을 누볐다. 부드러운 손은 아케론의 몸 구석구석을 쓸고, 소중히 어루만지고, 꾹 눌러댔다. 그때마다 아케론의 감긴 속눈썹은 희미하게 떨며 동요를 드러냈으나 그는 더 이상 반항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반항이란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실크로 짜인 장갑을 낀 듯한 부드러운 손이 상체를 매만지는 행위는 마치 진한 애무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하복부에 몰리는 혈액을 느끼며, 그는 그곳에서 퍼져 나가는 욕망을 억누르려 숨을 죽였다.

“사람의 살 같지가 않구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무리 손가락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다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릴 때 루키우스의 손은 가슴 위를 쓰다듬고 있었다.

상체 중 가장 두툼한 부위에서 그의 손은 잠시간 머무른다. 손끝이 살갗을 스치듯 쓸 때 아케론의 목젖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손은 어느 순간 가슴에서 물러나 다시금 아케론의 팔뚝 위로 닿았다. 찰흙을 가지고 놀듯 쇳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을 만지작거리던 루키우스는 어느 순간 다른 한 손마저 그 위에 올리곤 둘레를 가늠하듯 그것을 움켜쥐었다. 마치 장인이 조각상을 만지는 듯한 섬세한 손길이다.

잠시간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루키우스는 고개를 들어 순진한 얼굴로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였다.

“이 팔뚝으로 내 머리통을 조이면 단숨에 으깨지겠지?”

감겨있던 아케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뭐?’

몸을 뒤로 젖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아케론이 고개를 바로 들고야 만다. 그는 연기 사이에서도 선명하게 눈을 빛내며 루키우스를 흉흉한 얼굴로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놀리는 건지, 혹은 돌아버린 건지. 경악스러운 말에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격렬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던 것이다. 시리도록 새파랗게 빛나는 눈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손이 커다랗고 거칠어….”

그리 말할 때 루키우스의 손은 팔뚝에서 거두어져 아케론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이 숨을 죽인다. 그는 벌건 손자국이 난 도자기 인형 같은 예쁘장한 손이 보기에 사뭇 끔찍한 손을 더듬는 것을 바라보며 미간을 슬쩍 좁힐 수밖에 없었다. 울퉁불퉁한 손은 손톱이 다 갈라지고 손바닥에 허연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못생긴 손.

아케론의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으나, 그의 반응을 모르는 듯 루키우스는 태연스레 그의 손을 장난감을 만지듯 주물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 손으로 죽였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케론은 얼굴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혔다.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안이 금성처럼 은은하게 빛나며 싸늘한 군청색 눈과 마주한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또 짐을 짊어졌던 사내의 얼굴이 냉혹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어둑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책망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죽음이란…… 저 어린애가 쉬이 말을 담을 만한 것이 아니지 않나?

그 순간 그의 눈앞에 흩뿌려지는 붉은 핏방울.

7년이 지나고도 놓지 못했던 끔찍하고도 영광스러운 과거의 날들을 떠올리며 아케론이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귓가에 이어지는 잔혹한 비명들은 그를 그간 고통스럽게 만든 죄의 굴레였다.

루키우스의 말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어떤 자격으로 검을 들지 않은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하는가.

싸늘하게 기온이 얼어붙던 그 순간이었다.

“역시 한 손에 들어가는군.”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차가운 분노를 태우던 아케론은 순간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각에 놀라 경악에 두 눈을 부릅뜨고야 말았다.

“……!”

그 순간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안개처럼 아스라이 돌아다니는 수증기 사이로 아주 작은 번개가 번뜩거리다가 사라진 듯하다.

아케론의 손목을 끌어, 그의 두 손을 제 목으로 가져온 루키우스가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아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그와 마주하고, 아케론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의 사슴처럼 가녀린 목을 덮은 제 손을 바라보며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건만 피는 식어가는 듯하고 습기 찬 욕탕 안에 있건만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그저 움켜쥔 것만으로도 울긋불긋해진 손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얇은 목은, 조금만 손을 주어 비튼다면 사탕수수처럼 체액을 흘리며 무참히 꺾이고야 말 것이리라.

“……기이하구나.”

그런데 어째서 그는 저리 여유로운 건가?

제 손에 목을 내어 준 루키우스는 너무나도 가녀려 보여, 아케론은 덜컥 겁을 먹었으나 루키우스는 태연했다. 거칠게 흔들리는 푸른 눈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그의 손아귀에 제 목을 무기력하게 내준 채 나른히 말을 이어 나갔다.

“기분이 이상해…….”

물기에 젖은 연분홍색 입술이 달싹이며 습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 나른한,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아케론의 귓바퀴에 웅웅 감돌아 귀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케론은 꽤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부득 이를 악문 아케론이,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 서슬 퍼런 얼굴로 루키우스의 손을 쳐냈다. 비틀거리는 루키우스가 삼삼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볼 때, 아케론의 얼굴은 이미 흉악하게 일그러진 후였다.

노예는 살기를 품은 눈으로 철없는 주인을 노려보았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화를 꾸역꾸역 누른 말이 흐르고, 루키우스가 연분홍색 입술 끝을 비틀어 웃으며 말했다.

“나를 안는 게 싫나?”

벽에 걸린 촛불이 호박색 희미한 불꽃을 드리우고, 천장 위에 쏟아져 내리는 별빛을 받으며 루키우스는 살포시 웃었다.

살결에 느껴지는 달콤한 숨결에 아케론의 숨이 뜨거워진다. 루키우스는 어느새 아케론의 다리 위에 앉아 그를 향해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를 바라본 채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지독히 갈라진 음성이 흘렀다.

아케론은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몸을 벌떡 일으키곤 욕탕을 빠져나갔다. 아케론의 등 아래로 폭포수처럼 물이 쏟아져 내렸다.

흉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등을 루키우스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빠른 걸음으로 욕탕 밖으로 빠져나가는 아케론을, 루키우스는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 빛나는 자안에 뜨거운 물에 익어 벌겋게 달아오르는 몸이 비춰져 있다.

불그스레 익은 몸을 바닥에 놓인 바구니에 있던 수건으로 한 번에 감싸고, 아케론은 깊게 숨을 내뱉곤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더러운 창부 따위가.’

이마는 물속에 담그지 않았음에도 뜨겁게 달아올라 주전자를 놓으면 물이 끓어오를 듯하다. 불쾌함과 분노가 들끓는 마음. 그를 다스리려 그는 빠르게 욕탕의 문을 향해 걸어 나가며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케론, 왜 그대는 이름을 그리 지었지?”

등 뒤로 들려온 뚜렷한 목소리에 아케론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을 밀어젖히려던 손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말은 심장을 송곳으로 찔렀다. 그는 문 앞에 석상처럼 우두커니 선 채 한참을 침묵을 지켰고, 그런 그를 루키우스는 지긋한 시선으로 바라본 채 말을 기다렸다.

“검투사의 이름이라면 예명이겠지.”

물에 젖어 길어진 금발을 뒤로 넘겨 이마를 훤히 드러낸 채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아케론은 침묵 끝에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슬퍼서.”

몸을 돌리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다.

“너무 비통해서.”

잎사귀가 물 위에 내려앉는 것처럼, 루키우스의 시선이 아케론의 등에 사뿐히 닿았다.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케론이 고개를 돌려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의 입술에 감돌던 달콤한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

지중해의 여름밤은 서늘했다.

어느덧 밤이 자리한 시간. 아케론은 넓게 트인 창문 앞에 선 채 말없이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흘렀다. 사과나무의 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케론은 고요한 눈으로 남보라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로 떠오르는 베누스의 마차31)를 바라보던 아케론이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제 어린 주인의 눈을 닮은 별.

그 순간 그의 귓가로 나른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달이 머리 위에 뜨면 나를 찾아와….’

그리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루키우스는 욕탕에 몸을 깊게 묻고 눈을 감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청년의 발간 뺨을 애써 지우며, 아케론이 굳건히 부동자세를 취하던 몸을 돌려 방을 떠났다.

문을 여는 사내의 등에 새하얀 달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케론은 저승을 둘러싼 강의 이름이었다.

강을 지나는 사람들이 통곡을 흘린다는 슬픔의 강. 그를 제 새로운 이름으로 삼은 것은, 그 당시 아케론이 분노조차 이기는 고통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게르마니쿠스. 그대를 믿네.’

어둑한 회랑을 걷는 사내의 얼굴이 고요함에 휩싸여 있다. 어스름한 달빛을 흘리는 초승달이 박힌 남보랏빛 하늘 아래. 사과나무가 우수수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시원한 소리를 흘리던 때였다.

과거의 환영은 밤의 몽혼함을 힘입어 또다시 그의 눈앞에 흩어졌다. 그 순간 아케론은 또다시 제 이름처럼 지나친 비통함을 삼킨 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가끔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아도 마음을 이해할 때가 있지.’

찬란한 과거의 영광도, 훼손된 명예도 모두 한자리에 있다.

‘그대는 나의 가장 훌륭한 맞수였네, 친애하는 적이여.’

너무나도 끔찍했던 날의 기억들.

‘언젠가는 부디 다시 만나 술잔을 부딪칠 날이 있기를.’

돌아가고 싶다, 되돌리고 싶다 수천 번을 기원하고 또 바랐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지.’

아케론은 기적을 바라는 어리석은 광신도가 아니었다.

그는 어리석지 않기에 오로지 절망할 뿐이었다.

‘친애하는 벗이여.’

등불을 손에 쥔 아케론이 차분히 긴 회랑을 걷고 있었다. 어둠 속을 고요히 바라보는 그의 눈이 기억 저 너머의 어느 날을 향하고 있다.

맑은 소리를 내며 후드득 연못으로 떨어지는 분수를 지나 아케론이 마침내 푸른 벽화와 새하얀 대리석, 금을 세공한 장식으로 가득한 아트리움, 방이 늘어선 거실로 들어섰다.

저벅,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밟는 순간 묵직하고 또 명료한 소리가 흘렀다. 정원의 신선한 냄새로 가득 찼던 점심때와 다르게, 밤의 아트리움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몰약이 섞인 이름 모를 향으로 채워져 아케론의 코끝을 유린하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인 냄새.

아트리움 한가운데 위치한 연못을 지나쳐 아케론이 하늘하늘한 천들이 늘어선 방 앞에 섰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아케론은 그가 자리한 곳을 알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향이 흘러나오는, 가장 가운데, 다른 방과 달리 계단으로 반 층이 더 높은 자리에 있는 방.

남보랏빛 커튼을 걷고, 아케론이 그의 주인이 자리한 방으로 들어섰다. 천막을 여는 순간 후욱 매혹적인 몰약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은은한 향은 창에서 불어오는 촉촉한 이슬 젖은 바람 냄새에 섞여 아케론의 마음을 부드럽게 풀었다.

방에 들어선 아케론은 제 이마를 부슬 쓸어가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방 안에 자리한 청년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루키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창가 앞에 자리한 긴 침대에 앉은 금발의 어린 청년. 그는 인기척에도 차분하게 책을 읽으며 아케론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등불의 어스름한 빛이 달빛과 섞여 그의 새하얀 얼굴 위를 어지럽혔고, 그것은 그의 용모를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닌 매력적인 것으로 꾸며 주었다.

묵묵히 말을 기다리던 아케론이 그의 답변을 받은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왔어?”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케론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야 만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돌려 밤에 특히나 매력적인 눈을 반짝이며 그를 보았다.

아케론의 목구멍 사이로 낮은 침음이 흘렀다.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어느 순간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아색 달빛 아래 청년의 미소가 마치 새벽녘 호수 위 운무같이 흐트러졌다. 한 장의 얇은 튜닉 아래는 시원하게 쭉 뻗은 다리가 있었다. 사내의 것만 같지 않은, 여인에게서도 보기 힘든 희고 얇은 다리였다.

그 순간 아케론의 귓가에 사륵 부드러운 천이 그보다 더 매끄러운 살결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쓸어내리며 떨어지는 순백의 튜니카를 바라보며 아케론은 그 순간 숨을 멈춰야만 했다.

한 손에 잡힐 듯한 발목에 새하얀 튜니카가 걸려 있었다.

달빛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아케론의 귓가에 울렸다.

“볼품없는 몸이라 생각하나?”

“…….”

아케론은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몸을 바라보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목젖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한 은은한 몸은 욕탕에서 볼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루키우스는 제 몸을 관음하는 아케론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열었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군.”

“…….”

“내가 아름다워?”

아케론은 코끝에 몰약 냄새가 스칠 때가 되어서야 루키우스가 어느새 제 코앞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입술 밖으로 침음을 흘리고야 마는 아케론을 향해 루키우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게 키스를 해 줘, 아케론.”

그 말에 아케론은 홀린 듯 행동했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뺨을 부여잡은 아케론이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루키우스의 발뒤꿈치가 바닥 위로 들어 올려진 순간 비틀거리는 몸이 강인한 품에 떨어져 내렸다.

두터운 혀가 입술을 파고들 때 루키우스는 고양이 같은 소리를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무너지는 몸을 굵은 팔로 허리를 끌어안아 지탱한 아케론이 그의 작은 입술 사이를 탐하듯 거칠게 헤집으며 몸을 움직였다. 침대 위로 털썩 쓰러지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오후와 다르게 분홍색 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다.

“나를, 나를 안아 줘…… 날 거칠게 안아 줘, 아케론…….”

아케론은 튜니카를 거칠게 벗어 던지는 것으로 답했다.

*

이율배반적인 마음이다.

제게 다가와 창부처럼 살랑거리는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부정할 수 없이 이끌리고 있었다. 그가 저녁 어스름의 하늘을 닮은 눈으로 저를 빤히 바라볼 때, 아케론은 그의 작은 입술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리고 결국 아케론은 욕망에 굴복했다.

그는 루키우스의 입술을 으적으적 씹으며 손을 놀리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손아귀에 들어오는 둔부를 비틀자 야트막한 신음이 흘렀다.

“……불에 달아오른 구리 같아.”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면서, 루키우스는 그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길고 유려한 선의 목덜미를 죽죽 빨던 아케론이 제 가슴과 배를 더듬는 손길에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루키우스는 마치 마법에 홀린 사람처럼 안개 낀 몽혼한 얼굴로 아케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몸은 어떻게 이리 아름답지?”

아케론은 어리석은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 읏.”

창백한 살갗은 지나치게 여려 힘을 주어 빨 때마다 시뻘건 멍울이 남았다. 코끝을 스치는 몰약 향에 홀려 아케론은 제 손을 둔부 사이로 미끄러트렸다.

“아…… 잠깐, 아케론.”

루키우스가 듣는 이의 귀를 노곤하게 녹이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쇄골 위에 입술을 들이대던 아케론의 눈이 시퍼런 빛을 띠고 있었다.

아케론의 손목을 파들거리는 손으로 부여잡고, 루키우스는 애원하는 사람처럼 나약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 채 말을 이었다.

“향유로 풀어야 해.”

조곤조곤한 말에는 아케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게 자비를 베풀어다오…… 아케론.”

험악하게 굳어져 있던 아케론의 얼굴은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서서히 풀렸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했고, 아케론은 그에 정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애처로운 손길에 잡힌 손을 느릿하게 빼내곤, 아케론이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어디 있습니까?”

루키우스는 침을 삼키고 손을 뻗어 창틀에 놓여 있던 작은 유리병을 움켜쥐었다.

유리병의 마개가 열린 순간 달큼한 장미유 냄새가 아케론의 코끝을 스쳤다. 아직까지 무뚝뚝한 얼굴을 잃지 않은 아케론 앞에서, 루키우스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몸을 세운 채로 장미유에 젖은 손을 미끄러트렸다. 둔부를 벌리고, 골 사이로 향한 손이 움직이고, 비음이 이어졌다.

아케론은 상체를 뒤로 젖힌 채 루키우스가 손가락을 놀리는 장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질척한 소리가 잠시 흐르고, 루키우스의 창백하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붉어져 갔다. 포도주에 물을 탄 게 아닌, 물에 포도주를 탄 것처럼32) 싱그러운 장밋빛 물이 드는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서서히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아…… 음….”

아케론의 숨결이 조금씩 가쁘게 흘렀다.

그는 무너지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려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에 희미하게 섞인 청년의 신음.

그것은 윤락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적나라한 비음이 아니다. 루키우스는 오히려 신음을 죽이려는 듯 입술을 꼭 다물었고, 간간이 삐져나온 소리 또한 잔뜩 억눌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오히려 더 아케론의 머리에 깊게 남아 진한 여운을 남겼다.

머리에 피가 몰리고, 하복부에 뻐근한 느낌이 강해진다. 작은 입술 새 작게 새어 나오는 가쁜 숨소리를 듣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음울한 두 눈으로 루키우스를 노려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그는 손을 뻗어 발갛게 달아오른 몸을 밀어트렸다.

“아, 아케론?”

차라리 제가 하는 게 나은 것 같아.

그런 마음으로 아케론은 얇은 손목을 당겨 루키우스를 침대 위로 엎어트린 것이다. 루키우스의 몸은 너무나도 쉽게 침대 위로 털썩 무너져 내렸다.

베개 위로 얼굴이 떨어진 순간, 루키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 위로 의아한 빛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반항하지 않고 침대 위로 순순히 몸을 늘어트렸다.

침대 위로 올라온 아케론이 커다란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열었다.

“아….”

루키우스는 능숙하게 손길을 받으며, 맞물린 허벅다리를 비볐다. 뺨에 닿는 부드러운 깃털 베개에 얼굴을 뭉갠 채 신음을 흘리면서.

희미한 비음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연이어 흘렀다.

“아, 응…….”

마른 몸에도 둔부엔 손에 녹을 듯 기름진 살이 있다.

부드러운 살집을 벌리며 아케론은 향유에 촉촉이 젖은 골 사이의 선분홍색 작은 틈을 볼 수 있었다. 슬쩍 벌려져 있던 곳은 시선이 닿자마자 곧 다물려 비밀스러운 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 연한 분홍색 구멍은 아케론의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작고, 또 부드러워 보였다.

그 순간 조급한 마음이 든 아케론이 향유가 번들거리는 장소를 향해 손을 뻗고 다물리는 구멍 위를 매만졌다.

“읏…….”

루키우스의 입술 사이로 얄팍한 신음이 흐른 그 순간이었다. 비좁은 틈 위를 두꺼운 손가락이 더듬은 건.

“아, 읏….”

비좁은 틈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향유의 도움을 빌려 작디작은 구멍에 진입했다. 아케론은 그 순간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짜증 섞인 한숨을 삼키고야 말았다.

‘여기로 뭘 어떻게 즐기겠다고….’

작고 뻑뻑하다.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끼며 아케론은 한 마디를 꽂아 넣은 검지를 움직이며 그 뻑뻑한 내벽을 부드럽게 무두질하려 했다.

질꺽 소리를 내는 작은 구멍을 헤집으며 그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닳고 닳은 탕자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좁았다. 넣으면 불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예측을 할 만큼.

열기를 띤 시간이 잠시간 이어지고, 밀부의 안이 충분히 젖었을 때 굵은 손가락이 밀부를 스륵 빠져나왔다. 분홍색 살이 휘감겨 있었다. 새하얀 엉덩이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핏기 하나 없었던 루키우스의 몸 일부가 어느 순간부터 분홍색으로 은근히 달아올라 있었다.

숨을 헐떡거린 아케론이 무심코 녹을 듯이 부드러운 둔부의 살을 손으로 슬쩍 밀어 구멍을 확인했다. 찌그러져 모양새를 상실한 구멍에서 투명한 물이 울컥 솟고 있었다.

아케론의 몸이 순간 멈칫하고, 루키우스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왜 자꾸 보는 거야?”

무심코 아케론이 시선을 위로 돌렸을 때, 루키우스는 수치심이 희미하게 스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이불을 질끈 쥐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로.

그 일견 순진무구해 보이는 얼굴에 아케론은 그 순간 내벽 안을 노닐던 손가락을 굳혀야 했다. 얼어붙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는 잠시간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방식인가?’

열락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순진해 보이는 얼굴은, 보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야 마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소년의 얼굴을 가장하며 탕부는 몸을 비틀곤 이불보 밖으로 얼굴을 꺼내고 있었다.

시트에 손가락을 닦곤 아케론이 어금니 사이로 억센 신음을 짓씹었다.

어느 순간부터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루키우스의 몸이 그제야 시선에 닿고 있었다.

뻔한 방식이란 걸 알고 있다. 루키우스가 이런 일에 수줍어할 리가 없단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저 유혹이란 걸, 아케론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허나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은은한 호박색 촛불 아래 그 몸은 유독 관능적으로 보였다. 무른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 비례에 걸맞게 아름다우면서도, 색조를 띤 몸은 조각상과 달리 생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케론은 불가항력적으로 그 몸을 노려보고야 말았고, 유혹에 휘말려 정염을 느끼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도….”

귓가에 들려온 자그마한 목소리에 아케론이 상념을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저를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루키우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사랑스러운 청년이 반짝거리는 눈을 빛내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나도 만지게 해다오.”

그리고 아케론은 군청색 눈을 크게 뜨며 경악하고야 말았다.

“…!”

온몸의 근육이 도드라진다. 숨이 멈춰진다. 비단같이 부드러운 손이 아케론의 신체 일부에 닿고 있었다.

돌연 아케론을 향해 손을 뻗은 루키우스가, 언제부터인지 흉흉하게 불거져 있던 그의 성기를 부드러운 손으로 감쌌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접촉으로 아케론을 실로 동요하게 만든 그 손은, 부드럽게 그의 성기를 주물렀다.

그 순간 첨단 끝에서 전해지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감촉.

아케론이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나름 각오하고 있었지만, 네 건…… 내 생각보다도 크구나.”

한 번도 무구를 잡아 본 적이 없어 보이는 손바닥은 몹시 부드러웠다. 아케론은 그 부드러운 손이 제 끝을 문지르는 느낌을 견디지 못했다.

“손…… 놓으십시오.”

아케론의 숨이 떨려오고, 얼굴이 뒤틀릴 그 순간,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굵은 허벅지 사이로 손을 밀어넣고 있었다.

“싫어.”

손으로 눌러도 움푹해지지 않는 강인한 아케론의 몸. 그것은 그의 성기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잔뜩 성이 난 성기는 붉은 구리처럼 달아올라 있었고, 부드러운 부분이 엿보이지 않았다. 첨단 끝에 맑은 물을 흘리는 남근을 루키우스는 샘물처럼 살랑거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러곤 그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핏줄도 불거졌고, 성이 난 것처럼 생겼어……, 그러면서 네 몸처럼 강철처럼 단단하고, 불같이 뜨거워……. 정마저 이렇게 뜨거운 것은 아니겠지?”

아케론이 숨을 삼키곤 짓씹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놓으라 했습니다.”

루키우스는 물론 말을 듣지 않았다.

“음, 버겁겠군.”

아케론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서고 숨이 거칠어졌다.

“조금은 작았어도 좋으련만…. 하지만 네게 어울려. 아케론. 한 치의 자비도 없을 것만 같은 게……. 용맹한 너와 비슷하구나.”

“지금…. 윽!”

“끝이 약간 휘어졌는걸? 아케론, 정말 날 죽일 생각이구나.”

첨단 끄트머리 틈새를 손톱으로 슬쩍 누르는 행위에 아케론이 몸을 뻣뻣이 굳혔다.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 흉측한 크기의 물건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피며, 루키우스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를 까득 악문 아케론이 거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손, 당장, 떼십시오.”

아케론의 이마에 혈관이 두드러지고,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손 당장 거두라 했습니다, 지금, 무슨…?!”

루키우스는 그의 말을 정말 듣지 않았다.

“너……!”

불그죽죽한 얼굴에 살벌한 기색이 엿보인다. 목에는 핏대가 서 있고,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작은 입술을 양껏 벌려 성기 끝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아케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귀족이면서 헤타이라33)도 기피하는 행위를 시도하는가?

그는 사창가에서 토큰을 받고 몸을 파는 매춘부처럼 사내를 위해 입을 벌려 봉사를 하고 있었다. 분홍색 입술을 벌리며 성기를 머금는 루키우스의 웃음기 띤 얼굴에 아케론이 숨을 헐떡거렸다.

‘펠라티오라니?’

루키우스는 수치라는 단어를 완전히 모르는 사람처럼 행했다. 삽입이 되어서는 안 될 존재인 로마 시민은 지금 열심히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의 성기를 미식을 즐기듯 핥고 있었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케론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입술이 축축이 젖을 만치 성의껏 입을 놀리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열의에 젖어 발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진실로 즐거워하는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 또한 어느 순간부터 굳은 얼굴 위로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아케론이 깨달은 사실은, 제가 능숙한 창녀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 제기랄.’

루키우스의 펠라티오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몹시 형편없었다.

그의 입은 체구에 비해서도 몹시 작았으며, 성기를 감싸 줄 혓바닥 또한 고양이 혀처럼 가늘고 또 작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성기 끝만을 담근 채 어영부영 엉성하게 혀를 놀리고 있었고, 그것은 성욕을 풀기엔 지나치게 형편없는 놀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케론은 그 애들 장난 같은 혀 놀림에 흥분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교의 능숙함과 물리적인 자극과는 별개의 이유다.

아케론은 저를 위해 봉사하는 이의 순진한 얼굴을 보는 순간 희열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겉으로 볼 때는 그저 순진무구한 그가 힘겨워하며 성기를 제 목구멍 안에 밀어넣는 게 실로 자극적이다. 순수한 얼굴에 이끌리고야 만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얼굴이 열기로 물드는 게 자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투른 혀 놀림은 오히려 기쁨이 될 뿐이었고, 버거운 숨소리는 미약이 될 뿐이었다.

그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며 사내는 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은 어느새 끈적한 액체로 젖어 더러워져 있었다. 귀두 부분을 물었다가 입술 끝이 찢어지는 고통에 뱉어 내고 다시 물기를 반복한 탓이었다.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와 타액이 그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었다.

“…큭.”

아케론의 손이 루키우스의 둥근 뒤통수를 더듬었다. 금발은 촉촉하고 부드러웠고 아케론은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황홀함을 느꼈다.

“하악!”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성기를 뱉어낸 루키우스의 볼에 홍조가 가득하다.

벌어진 입술로 숨을 몰아쉬는 그는 아쉬운 눈으로 그의 콧등을 치며 발기한 코앞의 성기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 순종하는 얼굴이, 그 멍한 얼굴이 아케론의 목 뒤를 뻣뻣하게 만들고 있었다.

“턱이 아파…….”

말랑한 선분홍색 입술을 물 흘리는 성기를 대고 눈을 깜빡거리는 루키우스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 같으면서도 사람을 홀리는 데 능숙한 닳고 닳은 사창가의 창부 같았다.

축축한 얼굴로 입술을 성기에 비비며 루키우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이 슬쩍 꺾일 때 아케론은 얼굴을 무섭도록 굳히고야 말았다. 그가 다시 입술을 열고 머리를 움직일 때 아케론은 입술 밖으로 앓는 소리를 흘리고야 말았다.

“그, 그만.”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아케론은 또다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펠라티오는 이어졌다.

루키우스의 입 안은 뜨겁고 또 비좁았으며, 또 몹시 부드러웠다.

그가 입술을 우물거릴 때 토끼 같은 이가 성기를 스쳤고, 아케론은 자연스레 그 작은 입술이 기침을 하다가 제 성기를 자를까 두려워하면서도 기이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의 흐릿한 눈과, 타액과 선액으로 젖은 얼굴을 바라보며 그 순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숱 많은 금빛 속눈썹이 깜빡이고, 그리고 아케론은 돌연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른 강렬한 충동에 지배되어 몸을 움직이고야 말았다.

군청색 눈에 섬광이 번뜩 튄 순간이었다.

허공을 방황하던 손이 돌연 루키우스를 향해 뻗어져 갔다.

결국 아케론은 쾌락에 굴복했다.

“으읍?!”

커다란 손은 그의 귀를 덮고 작은 머리통을 손안에 넣었고, 그것을 당겼다. 놀란 루키우스가 두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두꺼운 손은 작은 머리통을 단단히 틀어쥐어 당겼고, 핏줄이 불거진 채 성이 나 있던 성기는 작은 입에 처박혔다.

컥, 커헉 숨을 토해 내는 그의 입술에 아케론은 이윽고 거칠게 욕망을 풀었다.

루키우스의 입 안에 성기를 쑤셔 넣고 작은 머리통을 흔들었던 것이다.

작은 입에서는 욱욱 소리가 흘렀다. 고통이 섞인 가래 끓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으나 아케론은 그를 돌봐주려 하지 않았다.

젖은 숨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꿉, 끅….”

퍼런 핏줄이 돋은 성기를 받아들이는 루키우스의 입술 끝에 피가 송골 맺혀 있다. 허공을 배회하며 허우적거리는 손은 두꺼운 허벅지 위로 간신히 안착해 그 질긴 살갗을 긁었으나, 상흔조차 내지 못한 채 그 위를 미끄러졌다.

손은 꺼끌꺼끌한 음모가 그의 코에 닿을 때까지 머리통을 잡아당겼고, 루키우스는 그에 고통을 느끼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머리를 움직여 자위하던 아케론이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루키우스는 숨이 막힌 듯 그의 허벅지를 손톱으로 긁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초점이 나간 두 눈. 발버둥 치는 그의 턱에는, 타액인지 무엇인지 점성 있는 끈적한 액체가 덩어리째 떨어져 내리고 있다.

가는 목은 성기가 삽입될 때마다 그 윤곽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루키우스는 가냘픈 몸을 퍼득 떨며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에 상식적으로라면 정신을 차리는 게 맞을 텐데, 아케론은 어쩐지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기이한 욕망을 느끼고 숨을 헐떡거리고야 말았다.

어느 순간 아케론의 허벅지를 더듬던 손이 축 늘어지고야 만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혓바닥이 풀린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케론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쾌감을 느끼며 깊고 또 녹진한 목구멍 속에 파정하고야 말았다.

깊고 또 따뜻하고, 또 끈적한 내벽에 정을 터뜨리는 느낌이란 형용할 수 없을 만치 황홀한 것이었다.

그의 목구멍 안으로 정이 흐를 때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허벅지에 손을 올린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파정 직후 늘어진 성기가 숨구멍을 막은 듯, 그는 콜록거리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끝이 슬쩍 올라간 눈매에 눈물을 매달고 그는 한참 동안 그리 멍하니 남근을 입에 문 채 몸을 떨 뿐이었다.

잠시간 여운을 즐기던 아케론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그런 루키우스를 깨달을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단단히 부여잡고 있던 루키우스의 머리통을 놓아주곤 아케론이 마른침을 삼킨다.

남근이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루키우스의 입에서 투명한 액이 울컥 떨어져내렸다.

연이어 들려오는 숨 가쁜 신음.

“힉…… 힉.”

주인의 쾌락을 위해야 할 노예가 반대로 주인의 몸에 쾌락을 쏟아부은 상황이었다. 나른한 모습으로 그를 약 올렸던 루키우스는 평소의 여유로움을 깨끗이 상실한 채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울고 있었다. 숨을 학학대며 후드득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유린을 당한 사람의 것이었다. 화려한 금발은 잔뜩 흐트러지고 뺨에는 붉은 손자국이 나 있다.

그를 마주한 순간 아케론은 혀를 씹을 수밖에 없었다.

얼어붙은 정적이 잠시간 흘렀다.

“하아, 하악….”

침대에 무릎 꿇은 채 숨을 가쁘게 내뱉던 루키우스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비비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서서히 고개를 든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올려다보았다. 저녁 하늘을 닮은 자안과 마주한 순간 아케론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매혹적인 눈이 휘어진 순간 영혼이 빨려들어 가는 느낌을 받고야 만다.

아케론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왜 지금 그는 웃는 거지?

“……아파.”

핏방울이 송골 맺힌 입꼬리를 더듬으며 루키우스는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의 굳은 시선이 그를 쓸고 있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루키우스가 검지에 맺힌 핏방울을 핥으며 느릿한 한숨을 내뱉었다.

“더…… 날 아프게 해 주겠나? 아케론…… 생각보다 버거웠지만, 이건 역시 기분이 몹시 좋구나.”

루키우스는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고, 아케론은 성기의 명령을 더 이상 무시하지 못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 채 그는 루키우스의 몸에 손을 뻗고야 말았다.

“아흑!”

두꺼운 사내의 몸이 루키우스의 몸을 침대 위로 짓누르고 있었다.

야트막한 신음이 그의 아래서 흘러나왔다. 얇은 양 발목을 손으로 붙잡아 거칠게 벌리며 아케론은 그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루키우스는 그를 말리지 않고 잘게 몸을 떨었다.

거친 손이 새하얀 둔부를 열어 루키우스의 수치스러운 부위를 허공에 드러냈다. 욕설이 섞인 신음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타액과 향유가 섞여 뚝뚝 떨어지는 분홍색 틈새가 사내를 유혹하고 있었다.

아케론은 당장 그 구멍에 성기를 쑤셔 넣고 싶었다. 부드러운 고기의 맛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삽입을 할 기세로 움직이던 그의 몸은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입술 사이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안에 들어와.”

그러나 아케론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훨씬 큰 아케론과 갓 성인이 된 그와의 체격 차이는 잠자리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둔부에 가져다 댄 성기는 도저히 루키우스의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다. 작은 구멍은 다물려 있었고, 그나마 살이 붙은 둔부와 허벅다리 또한 가져다 댄 성기와 비교하면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배꼽에 물을 흘리며 발기한 성기가 꺼떡거리고 있었으나 아케론은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빨리, 아케론.”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듯 행동했다. 그는 다리를 벌려 치부를 적나라하게 내보인 채 사탕을 달라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떼를 썼다.

“빨리 널 내 안에 품고 싶어…….”

응석을 버리는 청년의 애타는 눈이 아케론을 품고 있었다.

“어서.”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 순간 아케론은 어지러움을 느끼고야 말았다.

“내 안에 널 넣어다오.”

물빛 자안은 갈증이 난 사람의 것처럼 애처롭다.

“……이리 날 애태울 건가?”

희고 부드러운 손이 불에 달군 구리처럼 붉게 물든 강인한 가슴을 내렸다. 비단 같은 손길이 갈비뼈 아래를 더듬는 순간. 아케론은 선량한 마음을 완전히 벗어던지고야 말았다.

“아케… 읏!”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다!

아케론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루키우스의 가는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신음을 흘리는 루키우스의 발목을 양옆으로 잡아 벌리곤 그는 조각을 한 듯 아름다운 둔부에 성기를 박아 넣었다.

짐승이 보지 않아도 저가 교합할 곳을 찾는 듯,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눈을 바라본 채로 삽입을 시도했던 것이다.

바다처럼 새파란 군청색 눈이 불타는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자안은 그를 홀린 듯 마주하며 깜빡거리고. 아케론의 심장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잠겨 들어갔다.

그건 이슈타르의 눈이었다.

눈을 마주하는 순간 사람의 영혼을 앗는다는 이국의 여신의 이름을 떠올리고 만다. 홀린 듯이 아케론이 고개를 숙여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입술을 찾았다.

입술과 입술이 겹친 순간, 괴로워하던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살갗과 살갗이 맞부딪치는 순간, 아케론은 루키우스 사이로 길고 깊은 숨을 긴 시간 불어넣고 입술 끝을 비틀었다. 여유로운 얼굴에 고통이 희미하게 스치는 것을 마주하며, 아케론은 끊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으려 했다.

천천히, 그를 죽이지 않게.

그러나 아케론의 그런 배려에도, 결국 루키우스는 사지를 뒤틀었다.

“아…… 끅!”

부들 떨리는 몸은 몹시 애처로웠으나 아케론은 삽입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뒤틀리는 몸은 두 손목을 손으로 잡아 눌러 제압하고 아케론은 눈물에 젖은 루키우스의 뺨을 핥고 있었다. 속으로 이 뺨에서 단맛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노라 생각하고 있었다.

뜨거운 내벽은 성기를 자를 듯 조였고, 아케론은 제 안에 존재하는 인내심을 밑바닥까지 긁어모으는 중이었다. 아케론은 작은 엉덩이에 단숨에 제 물건을 박아 넣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있었으나, 귓가에 스치는 루키우스의 가냘픈 숨소리에 간신히 저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런 젠….’

고개를 숙이니 루키우스의 마르고 평평한 뱃가죽 끝이 살짝 불룩 튀어나와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 내며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시신같이 창백한 얼굴, 마른 땀에 범벅이 된 얼굴을 바라보며 그 순간 아케론은 덜컥 두려움을 느끼고야 말았다.

긴장에 더욱 얼굴을 굳히며 아케론이 낮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힘을 푸십시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저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절명을 할 사람 같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닦아 주며 아케론이 입술 밖으로 길고 낮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후욱.”

끄트머리가 살짝 담긴 성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입구는 좁다 못해 바늘구멍인 것만 같았고, 그에 아케론은 쾌락이 아닌 고통만을 느끼고 있었다.

‘제기랄, 제기랄….’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의 주인은 너무 작고 연약했으며, 아케론은 그 여린 몸에 좌절해야만 했다. 숨통이 막힌 듯 꺽꺽대는 루키우스를 노려보며 아케론이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에 이를 악물었다.

‘이런 몸으로 뭘 하겠다고?’

순간 그의 탐욕을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삽입조차 버거워하는 몸으로 내게 밤시중을 들라 한 건가?’

루키우스는 제 주제를 몰랐다. 책임을 지지 못할 일은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지. 온갖 교태를 부리며 저를 유혹해 놓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사람처럼 흐느끼는 그를, 아케론은 분노 서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에 잠시간 망설였으나 아케론은 결국 몸을 움직이고야 말았다. 끅끅 소리가 흐르고,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성기가 완전히 삽입되었을 때, 아케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고개를 숙인 아케론은 새하얀 거품을 입술 밖으로 흘리는 루키우스를 발견하고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아케론이 다급히 루키우스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을 때 그의 혀는 이미 말려 기도에 들어간 후였다. 말랑한 혀뿌리를 눌러 숨통을 트며 아케론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그의 입에서 전력으로 질주를 한 듯한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핏기가 가신 새하얀 얼굴로 루키우스를 바라보던 아케론이 성기를 조이는 내벽에 신음하고야 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우두커니 서 있을 때였다.

루키우스는 조금의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시금 초점을 되찾은 눈으로 멍하게 아케론을 올려다보다가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케론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행동하고야 말았다. 홀린 듯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에 입술을 대고야 만다. 땀이 젖은 살갗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아케론은 억눌린 한숨을 입술 밖으로 흘렸다.

아찔함을 느끼며 숨을 헐떡거리던 아케론이 어두운 두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힘없이 아케론을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느릿하게 추삽질은 시작되었다.

성기의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줄어들었으나, 아케론은 반대급부로 서서히 달아오르는 몸에 어이할 바를 모른 채 뜨거운 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루키우스의 안은 지독히 좁아 아케론의 성기를 괴롭게 물고 있었고, 그 자극은 아케론을 미치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으므로. 고통과 뒤섞인 쾌락에, 아케론은 그의 위에서 개처럼 허리를 흔들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조금만.”

거칠게 쉰 목소리.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은 아케론이 루키우스의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속삭였다.

“조금만 힘을 푸십시오.”

갈라진 목소리에, 루키우스는 정신이 서서히 드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눈과 마주하고 아케론이 그 순간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성기는 거의 작은 몸에 파묻힌 후였고, 루키우스의 마른 뱃가죽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도드라지는 윤곽에 아케론은 그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온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고통을 겪고 있겠지. 분명 대단할 고통일 것이 뻔한데, 이런 일을 자처하는 마음이 이해 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는 아케론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그 순간 입술 끝을 슬쩍 올려 힘겨운 웃음을 흘렸다.

“……참을 필요 없다, 아케론.”

그리고 흘러나온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말이었다.

아케론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봐.”

귓가에 바람처럼 살랑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은 힘이 없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었으나, 아케론은 그 희미한 소리를 듣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고야 말았다. 돌연 손을 뻗은 루키우스가 그의 목에 양팔을 휘감았다.

그의 목을 껴안은 루키우스가 상체를 일으키고 아케론의 강인한 턱 끝에 입술을 가볍게 비비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그는 달콤한 시선으로 아케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탓에 루키우스의 둔부가 아케론의 허벅지에 더욱 밀착되어 있었다. 성기가 더욱 깊은 곳에 파묻혀, 분명 더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떨어질 듯한 창백한 얼굴을 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날 죽여도 좋으니……. 네 마음대로 해.”

아케론은 결국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입술 밖으로 들끓는 소리를 흘리며 아케론이 몸을 움직였다.

분노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화염에 휩싸여 아케론은 작은 엉덩이 안에 성기를 쑤셔 넣었다.

“하악!”

루키우스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그를 처박곤 아케론이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단단한 허벅지가 그의 둔부를 억세게 짓누르고, 불에 타오르는 듯한 기둥이 루키우스의 안을 침범한다.

“아, 아파!”

루키우스의 몸이 경련이 일으켰다.

“아, 아학!”

비명이 솟구치고, 풍요롭게 핀 장미가 흘릴 법한 향기가 방 안에 차올랐다. 둔부 사이로 흐르는 달큼한 향유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악, 아!”

애처롭게 흔들리는 가슴을 철처럼 단단한 가슴으로 짓누르며 아케론은 젖비린내가 날 것만 같은 그의 뺨을 길게 핥았다. 가는 신음이 먼저 흘러나오고, 앓는 소리가 뒤이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다.

“아, 아케… 아악!”

“헉, 허억….”

아케론은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삽입한 그의 안은 몹시도 뜨겁고 질척거렸고, 녹듯이 달콤하게 성기를 애무했다.

그는 이성을 되잡지 못했다.

‘빌어먹을.’

뜨거운 숨은 거칠게 흘렀으나, 욕설은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가고 있다.

정사는 뒤로 갈수록 무르익어 진득한 소리를 흘렸고, 가냘픈 몸은 구깃구깃해져 갔다. 성기는 내장 깊은 곳을 범했고, 그것은 둔부에 파묻힐 때마다 살벌한 소리를 흘렸다.

“아, 하윽…….”

얇은 다리가 종이 쪼가리처럼 덜렁거리고, 루키우스의 입에서 가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육벽이 성기를 꾹꾹 조이고 주무르며 애무하는 상황에서 아케론은 두 눈에 흉광을 빛내며 몸을 욕망에 맡길 뿐이었다.

‘이건 네가 시작한 일이야.’

끼익, 끽. 부서질 듯 요란하게 울리는 침대 소리.

루키우스의 벌어진 입술 사이 새하얀 이 사이로 풀린 혀가 보였다. 그는 무어라 웅얼거리며 말을 내뱉었으나, 아케론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 단어는 아케론이 고개를 숙여 입술에 입술을 겹치는 것으로 완전히 미지의 것이 되어 버렸으므로.

“……아…… 응…….”

아케론은 가쁘게 할딱거리는 입술을 완전히 삼키려는 듯 물고, 혀를 깊게 빨아들였다. 두꺼운 혀는 그의 작은 혀를 유린하고 단단한 입천장을 쓸었으며, 어금니 안쪽을 문지르곤 목구멍 안까지 범하려 들었다.

키스는 길게 이어져, 숨이 막힌 루키우스가 흰자위를 보이며 부르르 몸을 떨 때가 되어서야 끝을 보였다.

아케론은 굶주린 눈으로 루키우스의 창백한 얼굴을 흘끗 보다가 입술을 물렸고, 고개를 들어서도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루키우스는 초점이 흐릿해진 눈을 크게 뜨며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여린 새처럼 몸을 떨며 입술 밖으로 작고 애처로운 신음을 흘리면서.

‘……이건.’

가엾고, 가엾은 모습.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의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상반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무뚝뚝한 사내의 얼굴에 당황이 스치고야 만다. 아케론은 저 어린 청년을 몹시 가여워하는 마음과, 더욱 괴롭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끼는 저 자신을 깨닫고 망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잔뜩 쉬어빠진 목소리가 숨소리와 섞여 흘렀다.

“이걸 원했습니까?”

귀족의 체면을 잃은 그의 얼굴을 손으로 닦으며 그가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흘린다.

루키우스는 답을 주지 않았다.

기대조차 안 했던 일.

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케론이 조소를 흘린다. 그는 허리를 다시 움직였고, 루키우스는 마치 종잇장처럼 나풀거리며 흔들었다.

아케론은 성기의 절반을 느릿하게 빼었다가, 루키우스의 몸이 들썩이게 거칠게 성기를 그의 안에 쑤셔 넣었다. 제 몸을 루키우스의 안에 욱여넣고 싶은 사람처럼 거센 허릿짓이었다. 반쯤 정신을 잃은 루키우스의 입술을 빨며 아케론은 깊고 농밀한 정사를 이어 나갔다.

“……허억.”

깊은 허릿짓에 그의 고환과 굵은 허벅지가 루키우스의 젖은 엉덩이에 부딪치고. 루키우스의 눈처럼 희고 보드라웠던 엉덩이는 흰색을 찾아볼 수 없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벌려진 작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앓는 소리뿐이다.

어느 순간 아케론이 고개를 숙여 루키우스의 터진 입술을 핥았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핥으며 그는 갈증을 채우고 있었다.

‘…비릿한 맛.’

젖은 입술을 빨며 아케론이 더운 숨을 내뱉었다.

성교는 자극적이고,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몸 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아케론은 정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아래에서 음탕한 유혹을 했던 루키우스는 뜻밖에도 죽어가는 신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사내를 처음 경험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모습. 그 애처로운 모습에 기이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가여움.

그리고 가증스러움.

“헉….”

성욕이 고조된 사내의 얼굴에 희열이 스치고, 입술 밖으로 거친 숨소리가 흐른다.

이성은 저 멀리 나아간 후였다.

“윽, 으윽.”

향유가 질척대는 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렸다. 굵은 허벅지에 핏줄이 도드라지고, 벌꿀색의 피부는 구리가 달아오르듯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전직 검투사의 몸은 진득한 땀으로 젖어 번들거려 그 근육의 움직임이 섬세하게 보였다. 긴장과 두려움, 흥분과 욕구로 범벅된 그의 눈에는 붉은 혈관이 적나라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축축한 혓바닥을 내밀어 루키우스의 말랑한 가슴을 핥을 때, 루키우스의 몸은 고양이처럼 말렸다.

“흐, 흐윽.”

고조되는 흥분에 이끌려 루키우스의 가슴을 짓누르곤 아케론이 허릿짓에 체중을 실었다. 마주치는 살결이 축축하다. 아득한 정신 속 그는 뜨거운 숨을 헐떡거리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뜨거운 땀이 찡그려진 이마를 타고 떨어질 때,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흉흉한 기색을 내보였다.

허릿짓은 서서히 빨라져 갔고 그때마다 숨이 넘어가던 소리를 흘리던 루키우스는, 어느 순간부터 입술에서 가르릉 가래 끓는 듯한 숨소리를 흘리며 눈을 풀고 있었다.

“……숨 쉬어.”

그를 알아챈 아케론이 커다란 손으로 루키우스의 하관을 부여잡았다. 그러곤 그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타액으로 더러워진 작은 입술을 벌리며 그는 명령하듯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숨, 내뱉으라고.”

루키우스는 그 말에 미약한 숨을 흘릴 뿐 답을 내뱉지 못했다.

제기랄. 입술을 짓씹으며 아케론이 그를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가 억눌린 한숨을 길게 내뱉고 고개를 숙였다. 아슬아슬함을 느낀 채 그는 벌려진 루키우스의 입술에 입술을 겹치며 마른 입 안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곤 느릿하게 허릿짓을 이어 나갔다.

숨결은 뜨거웠다.

“……흑.”

숨통을 트기 위한 행위는 루키우스가 작게 기침을 할 때 끝이 났다. 콜록거리는 소리. 그를 들은 아케론은 그 순간 눈을 번뜩이며 두 뺨이 홀쭉해질 만치 그의 입술을 빨아들이곤 미간을 좁혔다.

“하, 학!”

마치 괴로워하는 듯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축 늘어진 혀를 짓씹었다.

루키우스가 몸을 푸드덕 떨며 날개뼈를 움직인다. 온몸이 너절한 걸레짝이 된 듯한 루키우스의 몸 위로 아케론이 체중을 싣곤 몸을 움직였다.

난폭하기까지 한 움직임에 루키우스는 기절을 한 것인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맥없이 흔들리는 얼굴을 뺨을 부여잡아 고정시키곤 아케론이 그의 입술을 죽 빨았다.

아직 모자라다. 젖은 입술을 느릿하게 떼자 루키우스는 입술 사이로 무어라 해석할 수 없는 미지의 말을 흘렸다. 아케론은 숨결이 섞이는 거리에서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별빛을 담은 자안에 흥분을 느끼던 그 어느 순간.

하복부가 당겨지는 느낌을 받은 아케론이 날개뼈가 도드라지게 몸을 움츠리고 숨을 멈췄다.

“……!”

무기력하게 흔들거리는 다리를 잡아채어 제 몸을 향해 당기곤 그는 깊게, 아주 깊은 곳에 성기를 묻었다.

루키우스의 만신창이가 된 몸을 노려보는 채였다. 끈적하고 녹진한 속살에 정을 터뜨리고 있었다. 점멸된 시야 속 꽃 모양의 번개가 피었다 사그라들고. 뜨거운 정액은 꿈틀거리는 내벽에 깊게 퍼져 나간다.

얇은 다리를 강제로 잡아 벌린 채 아케론은 눈앞이 점멸되는 사정을 즐겼다.

나른하게 풀리는 근육. 순식간에 녹진해지는 몸.

마지막 한 방울의 정마저 작은 몸에 내어내곤 아케론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아래를 보았다.

“…….”

그곳에는 정신을 잃은 듯 입술을 벌린 채 경련을 일으키는 루키우스가 있었다. 성기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른 배가 붉게 달아올라 있다. 잠시간 그를 바라보던 아케론이 손을 뻗어 루키우스의 납작한 배를 더듬었다.

커다란 손이 잠시간 뱃가죽 위를 더듬다가 성기의 윤곽이 도드라진 부분을 꾹 눌렀다. 아케론은 그 순간 푸득 떨려온 몸에 느릿하게 손을 거두고, 루키우스의 얼굴을 살피려 들었다.

잠시간 그를 지켜보던 아케론은 그리고 어느 순간 고개를 숙여 루키우스의 눈물이 마른 뺨을 길게 핥았다.

혓바닥은 루키우스의 온 얼굴을 느리게 누볐다.

눈물과 타액으로 얼룩진 입술을 핥고, 가느다란 턱선을 핥고, 오뚝한 코를 핥고, 작은 입술을 핥으면서. 아케론은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조차 알지 못하는 탐욕적인 얼굴.

말캉한 혓바닥이 그의 얼굴 구석구석을 핥고, 또 간지럽히던 중에 그 목소리는 들려왔다.

“……군.”

희미한 웅얼거림에 아케론이 몸을 멈칫한다.

“장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루키우스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듯 웅얼거리던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유일하게 또렷이 흘러나온 말은, 정사에 심취했던 사내의 몸을 굳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오직, 그댈…….”

아케론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

그날의 성교는 마치 약탈과도 같았다.

검투사의 육중한 몸이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몸을 깔아뭉개고 두툼한 흉기가 작은 엉덩이 사이를 쑤셔 발기는 모습이란, 보는 이의 가슴을 철렁 가라앉게 만드는 폭력적인 것이리라.

아케론은 이성을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정사가 깊어질수록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 제 아래서 투명한 눈물을 흘리는 그에 지독한 충동을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헛구역질을 하며 눈물을 흘리던 루키우스는 결국 정사 중간에 혼절을 했고, 그럼에도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사슴 같은 목을 빨며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경멸스러운 귀족의 향응은 아케론에게 지나친 쾌락을 안겨 주었고, 그는 저 자신을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볼품없는 몸이라 생각했던 그의 마른 가슴에서, 그 부드러운 살결에서 향유 냄새를 맡은 순간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뼈가 도드라진 적은 지방질의 몸은 아케론을 애태우게 만들었고, 그의 입에서 가끔씩 흐르는 버거운 신음은 머리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

눈물과 타액으로 젖은 그 가여운 뺨에 입술을 맞추니 귓가에 아주 희미한 숨결이 들렸다. 초점이 흐릿한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니 아래서는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예민한 살결은 힘을 세게 주지 않아도 얼룩이 물들었고, 얇은 뱃가죽은 삽입을 할 때마다 윤곽이 보였다. 사슴같이 여린 목을 빨면 그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가냘픈 신음을 흘리며 아케론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그의 안은 뜨겁고 몹시 좁았고, 그에 흥분한 아케론이 조금 거칠게 할라치면 루키우스는 후드득 눈물을 흘리며 그야말로 죽어가는 자처럼 창백한 얼굴로 몸을 늘어트렸다.

도저히 저 자신을 다잡을 수 없었다.

아케론은 머리 위에 있던 달이 기울에 방 안에 빛이 가득 쬐는 순간에도 루키우스의 긴 목을 빨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의 턱을 핥곤, 부드러운 뺨을 핥으며 몽혼한 머리로 생각하기를.

‘이상하다, 왜 단맛이 나지 않지?’

아케론이 그의 탐욕을 거둔 것은 루키우스의 몸이 축 늘어졌을 때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무기력하게 덜렁거리는 팔을 부여잡아 들곤, 아케론은 그의 갈비뼈와 겨드랑이 부근을 핥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흰자위가 보이는 눈에 아케론은 짧은 욕설을 흘리며 루키우스의 팔을 내려놓았다.

툭 힘없이 침대 위로 늘어진 팔.

돌아간 루키우스의 뺨은 별빛이 이지러져 새하얀 색으로 빛나고 있다.

어둑한 눈으로 아케론이 루키우스를 응시했다.

작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맑은 타액이 흐르고, 두 눈은 초점이 흐려져 흰자위가 아래로 드문드문하게 보였다.

마음에 든다.

타액을 흘리는 추한 모습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눈을 까뒤집은 채라도, 저를 유혹하던 때의 얼굴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아케론이 강제로 벌린 루키우스의 얇은 두 다리를 제 오른쪽 어깨에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축축이 젖은 루키우스의 입술을 파고드는 사내의 목구멍에서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 아케론은 두 눈을 번쩍 떠 싸늘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달콤한 목소리. 잠자리 내내 장군을 부르짖으며 울어 젖혔던 청년의 물기를 머금은 신음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역이었나.’

*

휘이잉.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고 집요했던 정사가 끝난 후 언제 엉겨 붙었냐는 듯이 두 사람은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케론이 그에게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더위에 어질러진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마치 뇌수가 끓고 뇌가 익은 것만 같은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 긴 한숨을 내뱉은 그가 관자놀이를 창틀에 대며 눈을 감았다. 평소에 무심하던 얼굴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조금 전 일이 머릿속에 맴돈 탓이었다.

루키우스는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른 사람처럼 괴로워했고, 아케론은 그런 그를 ‘노예답게’ 배려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행동했다. 마땅히 주인의 쾌락을 위해야 하는 노예는 제 본분을 잃고 오히려 제 쾌락을 주인에게 쏟아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조금 전 정사는 오히려 루키우스가 노예 같고, 아케론이 주인과 같았다.

침대 위에서 기절한 듯 숨을 헐떡거리는 청년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처참한 모습에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시선은 푸르고 붉게 물든 몸을 천천히 쓸었다. 피멍이 잘 안 빠지는 몸인지 그의 살갗은 정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 그는 이전과 달리 매로 온몸을 맞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 순간 허탈하게 웃고야 말았다.

‘내가 저렇게 탐욕적이었다고?’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화끈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조금 전의 일을 더듬던 아케론은 결국 또다시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누가 더 음탕한 자인가?

심지어 지금 이 순간도 뜨거운 피를 식히기 위해 창문 옆에 서 있었다. 쌓인 성욕이 폭발한 건지, 아니면 제가 그리스인의 음탕한 문화에 물들었든지. 자제를 잃고 욕망을 느끼는 스스로가 낯설어 아케론은 어색하고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리를 식히려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바람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도무지 쉽지 않았다.

잠시간 시간이 흘렀다.

달빛이 부스러져 루키우스의 나신 위를 노닐고 있었다. 창틀에 관자놀이를 댄 채 머리를 식히며 아케론은 침대 위에 늘어진 루키우스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니, 분명 그런 마음으로 루키우스를 보았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기이한 마음에 휩싸이고야 말았다. 아케론이 미간을 좁히며 불편한 기색을 얼굴 위로 드러낸다.

마치 달맞이꽃처럼 그는 달빛 아래에서 더 빛나는 듯해. 분홍색 입술 사이로 색색 고른 숨을 내뱉는 루키우스가 기이하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공교롭게도 그 순간 루키우스의 감겼던 눈이 스륵 열렸다.

루키우스는 입술에 희미한 웃음을 띠었고, 그를 마주하며 아케론은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수줍고 사랑스러운 미소가 불편하다.

어째서 그는 건방지게 군 노예에게 저런 미소를 짓는 거지?

그리고 생각은 어느 한 단어에 이르러 아케론의 머리를 식게 만들었다.

‘장군이라.’

아케론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리고야 만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고조된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성을 되찾은 사내가 차분해진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고난을 당한 듯 애처롭게 늘어진 소년에게, 아케론은 조금 전과 달리 후회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몸을 섞은 자가 보내는 것이라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서느런 얼굴.

그 위에는 다시금 조롱과 멸시의 감정이 스치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루키우스가 그저 그냥 색을 탐하는 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마음속에 점지해 둔 일생의 연인이 있었던 것이다.

애처롭게 그가 부르짖었던 이름을 떠올리고 다시 본 루키우스의 얼굴은 예전처럼 매혹적이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처럼 저를 바라보는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케론은 그가 제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정부나 대역이나 다를 건 없지.’

그러나 아케론은 전과 달리 정사 중 저를 흥분케 했던 그의 묘한 빛의 자안을 지금 몹시 짜증 난다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이 찾아든 시간, 루키우스는 침대에 늘어진 자세 그대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니코마티스.”

가냘픈 목소리로 부른 이름의 주인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케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옆방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대야를 든 노예가 천막을 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스물 초반쯤으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노예는 아니나 다를까 윤곽이 뚜렷하고 선이 굵은 인상의 미남이었다.

아케론은 방 안에 들어서는 그를 서느런 눈으로 잠시간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치 있는 정원의 풍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절로 부드럽게 만들 만치 아름다웠으나, 아케론은 차가운 마음을 풀지 못해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결국 고개를 돌린 아케론의 시야로, 반쯤 기절한 루키우스에게 다가가는 노예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에 든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은 노예가 루키우스의 몸을 부여잡고 말을 내뱉었다. ડχ

“주인님.”

창문 옆에 서서 창틀에 머리를 댄 채 아케론은 그가 루키우스의 어깨를 흔드는 것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몸에 손을 대겠습니다.”

루키우스는 노예가 몸을 흔들며 내뱉은 말에 답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초점이 흐릿한 눈은 그의 정신이 아직도 온전치 못한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가 허공에 애처롭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두 눈을 힘없이 깜빡이는 모습이 사뭇 처연하다.

귓가로 이윽고 간헐적으로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케론은 그 순간 얼굴을 굳히고야 말았다.

조금 전에 있었던 황홀한 시간들.

죽어가는 자가 흘릴 법한 신음을 흘리며 루키우스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순간들, 맑은 자안으로 저를 바라보던 때를 떠올리며 그는 저도 모르게 밭은 숨을 흘리고야 말았다.

고개를 돌린 아케론이 루키우스의 몸을 건드는 노예를 바라보았다. 그가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손을 뻗는 순간 아케론이 무섭도록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비켜라.”

노예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아케론은 설명하지 않았다.

“대야.”

고압적인 말에 노예가 몸을 주춤거렸다. 아케론은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당장 내려놓고 나가.”

노예는 그 말을 따랐다.

“예, 예.”

두려움에 질린 노예가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천막이 사륵 소리를 내며 다시 제자리를 되찾고 다시금 방 안에 정적이 자리한다.

침묵을 즐기던 아케론이 말없이 시선을 돌려 침대에 늘어진 애처로운 청년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복잡했다.

“아케론….”

물기 어린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루키우스를 잠시간 바라보던 아케론이 몸이 움직였다.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바로 조금 전까지 노예가 있던 장소였다.

몸을 숙여 그가 내려놓은 대야를 주워 든 아케론이 루키우스가 자리한 침대로 향했다.

그러곤 그는 대야에 자리한 수건으로 루키우스의 온몸을 닦고 정사 후의 뒷정리를 시도했다.

처음으로 가졌던 동성과의 잠자리. 지식은 부족했고, 손길은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의 손길이 제법 기분 좋은 듯 정리하는 시간 동안 그를 살랑거리는 눈썹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니코는 왜 내보낸 거야?”

그리고 문득 들려온 자그마한 목소리에 아케론은 미간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젖은 수건이 루키우스의 붉은 꽃이 핀 다리 사이를 닦아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 저도 이런 일을 경험할 것 아닙니까?”

아케론의 얼굴은 감정 없이 무뚝뚝했다.

“주제를 잊지 않으려 합니다.”

루키우스는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내가….”

그러나 무어라 말을 하려던 그는 마음이 바뀐 듯 입술을 꼭 다물곤 침상 위로 몸을 늘어트린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케론은 자연 서늘해지는 얼굴을 애써 수습하며 제가 할 일에 집중을 하려 했다.

손은 가랑이 사이 샅 안을 꼼꼼히 젖은 수건으로 닦고 정액을 훔쳤다. 손길은 서툴렀으나 나름 아케론은 최선을 다했고, 루키우스는 그에 만족한 듯 침대에 늘어져 가릉거렸다.

그의 손이 새하얀 둔덕 사이를 누빌 때였다.

“읏!”

돌연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신음이 흘렀다. 아케론이 손을 멈추고 그를 보았을 때, 루키우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제 입술을 손등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봉선화처럼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이 수치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순진한 얼굴과 마주하고 아케론은 그 순간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그만.”

루키우스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꾹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아케론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한 몸짓은 사뭇 유혹적이었다. 루키우스를 바라보는 시선에 불쾌함이 스며들고야 만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사내를 홀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내를 거쳤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저택의 노예가 이 위에서 저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날뛰었을지 모르겠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교성을 내지르며 사내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 루키우스였다. 순진무구한 얼굴 위 볼을 붉히며 사내의 남근을 빠는 청년의 모습 또한.

‘음란한 자.’

그 순간 돌연 울컥 치밀어 오른 화를 간신히 억누르곤 아케론이 꼭 맞물린 루키우스의 허벅지를 거칠게 떼어냈다. 당황했는지 파닥거리는 루키우스의 허벅지를 위로 꾹 밀어 배 위로 고정시키곤, 그는 둔부로 손을 가져다대며 살을 열었다.

그리고 아케론은 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으읏!”

아케론의 두 눈이 흔들린 때였다.

꽉 다물렸던 구멍은 살짝 벌어져 그 입구가 부풀어 있었다.

새끼손가락만큼 부어오른 주름은 우윳빛 정이 흐르는 구멍 주위에 도드라져 있었고, 한눈에 보아도 열상을 입은 듯 분홍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 참혹한 모습에 아케론은 제가 품은 화나 멸시조차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득 파르르 떨리는 루키우스의 몸에 시선을 위로 올리곤, 또다시 숨을 죽이고야 말았다.

“흑.”

그곳에는 제 얼굴을 이불보에 깊게 묻곤 몸을 잘게 떠는 루키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새하얀 이불 밖으로 슬쩍 드러나는 붉은 귀에 아케론은 그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는 다시 몸을 움직여 푸르고 붉은 멍이 든 둔덕을 억센 손으로 벌리고 몸을 숙였다.

정액을 줄줄 흘리는 밀부에 중지를 꽂아 넣고 아케론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는 루키우스의 안에 들어간 손가락을 구부렸다.

“……!”

벌벌 떨리는 그의 몸을 허벅지를 움켜쥔 손바닥으로 느낄 수 있었으나, 그는 모른 척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뜨거운, 마치 화상을 입을 듯한 내벽을 파고들며 손가락은 안에 고인 정액을 밖으로 파냈다. 왈칵 쏟아지는 끈적한 덩어리가 둔부를 적시고 이불에 떨어져 내린다. 입술을 짓씹으며 손길을 참던 루키우스를 애써 무시하며 아케론은 그가 헤집고 있는 밀부에 집중할 뿐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구멍에서 꿀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액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내벽을 파고든 손가락이 구부러져 손톱으로 여린 살을 슬쩍 긁었다.

“힉!”

높고 떨리는 신음이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흘렀다. 귓가에 부드럽게 감기는 목소리가 달콤하다. 아케론은 그 순간 몸을 움질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루키우스의 얼굴을 살펴보니 찡그려진 미간에 참기 힘든 쾌락이 엿보였다.

묘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킨 아케론이 중지를 꾸물거리며 그의 안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가는 신음이 연이어 귓가를 울렸다. 애써 루키우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으나 초조함은 몸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마른 몸에서 유일하게 부드럽고 살이 도톰한 부위는 손바닥에 허옇게 짓눌려져 있었다. 귓가에는 자극적인 소리가 흘렀고.

“아, 응… 흣…… 천, 천천히….”

끈적하고 음탕한 소리가 귓가를 헤맨다. 바람에 실려 방 안에 스며든 소리에 루키우스가 몸을 파르르 떨며 붉어진 얼굴을 도리질했다.

“……케론… 아케론… 훗…… 부드럽… 힉!”

수치심에 죽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곤 그는 울먹거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의 그런 나약한 모습에 이를 악물고 부러 무뚝뚝한 얼굴로 행위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찔꺽한 소리가 흘렀다.

손가락은 둔부 안을 거칠게 헤집으며 루키우스의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중지만이 들어갔던 밀부는 어느 순간부터 그 입구를 서성이던 검지에게도 그 안을 허용했고, 루키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펄떡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의 손가락은 뜨겁고 비좁은 육벽 안에서 현을 놀리듯 유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제발…… 흐윽.”

결국 참지 못한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두꺼운 손목을 부여잡고 흐느끼고야 만다. 눈물로 흐려진 루키우스의 눈이 간절히 아케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 그를 노려보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나른하게 숨을 내뱉으며 둔부 아래를 받치던 손을 쳐올렸다. 내벽을 손톱으로 긁을 때 루키우스의 입에서는 천장 위로 솟는 높고 처절한 울음이 흘렀다.

마치 칼에 찔린 사람의 것 같은 비명이었다.

그러나 아케론은 내벽을 헤집는 손을 멈추지 않았고, 도리어 루키우스를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정액을 제거하기 위한 행위는 변질되어 그는 루키우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몽혼하게 흐려진 두 눈을 바라보며 둔부를 짓누르는 손바닥에 힘을 가하고 있다.

“잠깐, 싫어! 아악!”

괴로움에 찬 비명이 울리고 그 어느 순간의 일.

“……!”

루키우스의 몸이 돌연 뒤틀리며 부들부들 떨렸다. 꺽꺽거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불쌍한 청년은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며 몸을 뒤틀었고 결국에는 처참한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아, 아아악……!”

그때였다.

아케론은 제 가슴과 턱에 후드득 튀는 액체를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루키우스의 성기에서는 맑은 물이 죽죽 흘렀고, 그는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아케론은 제 얼굴에 튄 그 소변 같은 액체가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한 채 몸을 굳히고 잠시간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아…… 흐… 안……!”

얼이 나간 아케론의 앞에서 루키우스는 벌려진 다리를 오므린 채 흐느낄 뿐이었다.

완전히 젖어 해초처럼 흐물거리는 옅은 금색 음모 속, 연분홍색 성기가 투명한 물을 줄줄 흘리며 가냘픈 몸을 적시고 있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루키우스의 모습에선 아케론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을 했던 오전의 당당한 귀족의 기품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허벅지를 오므리며 수치심에 물든 말을 두서없이 내뱉고 있었다.

“안 돼, 아…… 싫, 싫…….”

“…….”

“보지…… 흑, 보, 보지 마…… 안…… 아, 안 돼…!”

루키우스는 아케론에게 저를 보지 말라 처절하게 애원했으나, 막상 아케론은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이성을 가다듬은 아케론이 손에 있는 액체를 수건으로 닦아 내고 그를 확인했다. 불쾌감이 희미하게 미간을 스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맑은 액체에 그것이 소변이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깨달은 아케론은 그 순간 눈썹 끝을 꿈틀거리고야 말았다. 여인처럼 사내와의 교접에 쾌락을 느낀다고 해서, 똑같이 생리적인 반응을 할 줄은 몰랐다.

“흑, 흐으윽…….”

마치 겁간을 당한 사람처럼 하염없이 우는 루키우스를 잠시 보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고작 이런 손길에 느끼십니까?”

눈물을 줄줄 흘리는 눈이 아케론을 원망스레 노려보다가 이윽고 허공을 응시했다.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허공을 노려보는 루키우스의 모습에 아케론이 마른침을 삼켰다.

입 안이 쩍 갈라지는 느낌을 받은 아케론이 마른 입술을 혀로 쓸고 다시금 말을 내뱉었다.

“음란하군요.”

“…….”

“그저 이런 장난 같은 손길에 휘둘려 정을 터뜨립니까?”

목소리는 흥분을 삼키려 도리어 더욱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금발이 사륵 아래로 흘러 창백한 뺨을 가렸다.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대답을 하지 않는 루키우스의 모습에 아케론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문득 얼굴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내를 거친 겁니까?”

그의 싸늘한 말을 들은 루키우스는 입술 밖으로 힘없는 기침을 흘리고 아케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피가 흐르는 입술이 열리고 선율과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셀 수도 없이 많이.”

루키우스는 웃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휘어지는 순간 삭막하고 무심했던 인상은 거짓말처럼 사랑스러운 것이 되고야 만다.

아케론은 그런 그를 음울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침묵 끝에 무뚝뚝한 말이 흘렀다.

“천박하군.”

루키우스는 그 말에 나른한 한숨을 내뱉곤 답했다.

“너는 건방지구나.”

그러곤 그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아케론을 향해 팔을 뻗었고, 아케론은 제 목을 감는 손길에 응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모이를 먹는 새처럼 입을 벌려 루키우스의 입술을 받아들였고, 농밀하고 진한 입맞춤이 이어져 나갔다.

피가 터지고 갈라진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며 아케론은 느릿한 숨을 그 사이로 불어넣었다. 루키우스는 제 고양이처럼 갸릉거리는 소리를 흘리며 제가 할 수 있는 양껏 입술을 벌리고 그의 혀를 받았다.

숨이 막힌 듯 중간중간 잘게 떨리는 몸을 아케론은 그의 허리를 휘감아 제 품에 가두었다.

어느 순간 아케론이 내리깔던 눈을 뜨고, 서늘한 시선이 루키우스의 얼굴을 쓸 때였다.

간절한 얼굴로 키스에 집중하는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아케론이 혓바닥에 감긴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를 이로 짓씹었다.

흐윽, 소리를 흘리며 몸을 파르르 떠는 루키우스의 모습에 입가에 음울한 미소를 띠며 아케론이 몸을 웅크렸다.

루키우스를 침대 위로 짓누르며 그의 몸 위로 타고 올라간 아케론의 얼굴에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볼 수 있는 희미한 불꽃이 스치고 있었다.

*

“그 장군이란 자와는…… 몸을 섞었습니까?”

아케론은 침대 머리맡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댄 채 품 안에 루키우스를 안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이 저를 껴안고 밤을 보내길 원했고, 아케론은 그의 말을 따르는 중이었다.

노예는 주인의 말에 복종했다.

창밖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 이마에 송골 맺힌 식은땀을 식혔다. 군청색 눈이 창밖을 응시하며 그 위에 은은하게 뜬 디아나의 달34)을 노려보았다.

침묵 끝에 느릿한 목소리가 흘렀다.

“아니.”

단단한 가슴에 뺨을 기대며 루키우스는 중얼거렸다.

“그는 나를 모르고 있지.”

그 말을 들은 아케론이 시선을 돌려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제 품에 안겨 꿈을 꾸는 몽혼한 표정을 짓는 청년을 바라본 순간 그는 얼굴을 무섭게 굳히고야 말았다. 작은 머리통을 감싼 손으로 부드러운 금발을 손에 걸어 놀던 아케론이 침묵 끝에 건조한 입술을 열었다.

“불쌍하군요.”

삭막한 시선이 청년의 얼굴을 쓸고 있었다.

“천한 검투사에게나 이리 매달리는 꼴이라니.”

경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말이었다.

“마음을 이룰 수 없다고 아예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겁니까?”

루키우스가 그의 가슴에 대었던 뺨을 슬쩍 떼고,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아케론의 얼굴을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본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웃음소리가 작게 흘렀다.

아케론은 제 입술에 닿는 검지에 숨을 멈추고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아케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 루키우스가 눈가를 휘며 작게 중얼거렸다.

“불쌍한 아케론아……. 그대는 사랑을 모르는구나.”

그 말에는 진실로 그를 동정하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입술을 타고 느껴지는 부드러운 온기에 아케론은 그 순간 멈췄던 숨을 깊고 느릿하게 내뱉고야 말았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자는 마음속 불꽃을 태우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법이란다.”

눈앞에 자리한 어린 로마 귀족의 얼굴은 달빛을 맞아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은 그의 창백한 뺨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담담히 흐른 말에, 일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에 휘말려 아케론은 혀로 입천장을 쓸고야 말았다. 입 안에 씁쓸한 맛이 돌았다. 혈관이 확장되고 수축하는 것처럼 팔뚝이 아려 왔고.

온통 감각이 예민해서 견딜 수가 없어, 어느 순간부터 아케론의 바다색 눈은 불꽃처럼 들끓어 루키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손에 닿으면 부러질 듯한 마르고 가녀린 몸을 아케론의 가슴에 기댄 채 희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웃음에 담긴 마력이란….

침을 삼키는 그의 귓가로 귀에 감기는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케론.”

저승의 비통한 강물 아래에 가라앉는 것처럼, 그 이름은 목소리 속으로 침잠되고 또 침잠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