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수치플
쿵―.
“이런…….”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나를 보며 남자가 던진 첫 마디였다.
“많이 아파요?”
대답 대신 남자의 손에 들린 물수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 내 머리에서 떼어 낸 것이었는데 바짝 메말라 있었다.
그만큼 내 몸에 열이 올랐다는 거겠지. 지금은 멀쩡한 걸 보면 자는 동안 식은땀이라도 계속 흘렸던 걸까.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딴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를 바로 앉힌 남자가 밥을 떠 주는 것을 잠자코 받아먹으며 주변을 살폈다. 남자에게 범해졌던 어제와는 다른 공간이었는지 침대의 색이 푸른빛이었고 크기도 더욱 컸다. 엉거주춤 침대 맡에 등을 기댄 내 옆에서 밥을 먹여 주는 남자가 여유롭게 앉아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그러다 창밖으로 시선이 갔다. 아침이 아닌 건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거로 보아 2, 3시쯤은 되는 듯했다. 이윽고 탁자에 놓인 낯선 휴대폰에 눈길이 갔다. 오후 1시 43분. 예상했던 것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어, 잠깐.
“내 휴대폰은요?”
왜 탁자에는 남자의 것만 놓여 있는지. 의아함을 품고 물어봤으나 돌아온 답은 아주 매정했다.
“버렸어요.”
“왜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연락처가 있으니까요.”
“아니……. 저기ㅇ…… 아니! 한율 씨!”
유독 호칭에 예민한 남자의 얼굴이 다시 구겨지는 것을 보며 급히 이름을 외쳤다. 그제야 주름졌던 미간이 팽팽함을 되찾았다.
“하아, 그러니까 제 휴대폰에 다른 연락처들이 많아서 버렸다는 건가요.”
“작가님 곁에는 저만 있으면 되잖아요.”
“…….”
제발 사람 말 좀 제대로 쳐 들으라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심호흡을 하며 참아 냈다. 감정적으로 나갔다가는 남자가 다시 나를 의심하고 말 테니까. 하아, 탈출보다 화병으로 먼저 죽어 버릴 것 같다.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화를 힘겹게 눌러 내며 멀어져 가던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개 같은 소리만 골라 뱉는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불편한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꺼내야 했다. 하다못해 설득이라도 할 수 있도록.
“저는 한율 씨와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요.”
“작가님도 저와 같은…….”
“그렇지만.”
“…….”
“저희를 더욱 행복하게 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겠죠?”
되는 대로 뱉어 버렸으니 이제 뒷말을 이을 마땅한 이유가 필요했다. 원래는 천천히 남자의 반응을 보며 지어내려고 했다만, 내 발목을 쥐어 보며 평생 묶어 둬도 볼만하겠다는 중얼거림을 듣고 나니 마음이 다급해져 버렸다.
나는 소설로 대박 친 작가니까. 이딴 개소리에도 이을 수 있는 말이 마구 떠오르겠지.
“뭐가 필요한데요?”
“……그게.”
내가 간과한 것은, 내 자신이 평범한 소설이 아닌 수갑플, 촉수플, 산란플 등 29금 소설로 대박을 낸 작가라는 거겠지. 머릿속에 음란물만 가득해서는 평범한 단어를 못 고르겠다.
게다가 남자 역시도 평범한 것보다는 그러한 분야를 좋아하기에 내 팬이 된 걸 테니까. 감동해서 내 말을 따르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역시 지어내신 거죠. 그깟 핸드폰이 뭐라고 제게 거짓말을……. 하아, 화가 나려고 ㅎ…….”
“성생활에 기쁨을 주는 것들이요.”
주먹을 불끈 쥐는 남자를 보니 멋대로 말이 흘렀다. 나를 어떻게 보든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가면 거짓말보다는 어딘가 미쳐 있거나 모자란 사람 취급이라도 해 주겠지. 진심으로 내뱉는 개소리라는 것과 그로 인해 휴대폰이 꼭 필요하다는 것만 납득시키면 되는 일이다.
여전히 뜻 모를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털어 보기로 했다.
“제 취향대로 글을 쓰다 보면 독자님들께서 여러 의견을 제시해 주시거든요. 촉수플에서 이게 더 추가되면 더 재밌겠어요. 산란플에서 이 도구를 같이 사용한다면 사정감도 배로 느끼지 않을까, 뭐 이런…… 거?”
“좋네요.”
“네, 맞아요. 이게 참 좋아요. ……좋다고요?”
“네. 좋은데요? 작가님께서 저와의 행복한 성생활을 위해 노력해 주신다는 거잖아요! 얼마나 기특하고 또…….”
“…….”
“귀여운데요.”
남자가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미친 사람 앞에서 미친 소리를 뱉어 버리면 그게 진실이 되는 건가. 덩달아 미쳐 버리는 기분이었지만, 휴대폰을 받기 전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기에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니 얼른 주세요.”
“작가님께서 또 도망플을 시전하시면요?”
“……제가요? 그럴 리가요. 도망플을 하려면 지난번처럼 먼저 말해 줄게요.”
“이제 도망플은 안 돼요. 찾아다닐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작가님의 좆을 빨 수 있고 뒷구멍에 좆질도 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니 너무 아까웠단 말이에요.”
음담패설을 듣는데 마치 뒤가 쑤셔지는 것처럼 저릿했다. 안 그래도 퉁퉁 부어서 욱신거리는 게 느껴지는 뒷구멍에 뭘 또 박겠다고? 마음 같아서는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자를 걷어차고 밖으로 나가서 신고를 하고 싶었으나, 이 몸으로 그 모든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저 이 넓은 집 안을 달려 나가기 전에 매서운 손길에 머리가 잡힌 채로 질질 끌려갈 내 모습이 그려졌다.
이제 막 빛을 보게 된 내 인생을 그따위로 만들 수는 없지.
지금은 이 감정을 눌러 내고 최대한 남자를 안심시킨 다음, 기회를 봐서 탈출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도망플은 절대 안 할게요.”
“하나 더, 휴대폰은 제가 있을 때만 사용하실 수 있어요.”
“……네.”
“또 하나 조건이 있어요.”
내 휴대폰을 다른 이가 멋대로 쥐고 흔든다는 것도 열받는 일이었다. 그런 주제에 조건까지 하나가 더 있다니. 화가 났으나 화를 내서는 안 됐기에 고개를 숙여 버렸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는데 남자는 숙인 내 정수리를 향해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저와 나눈 사랑의 이야기들을 글로 써 주세요.”
“……한율 씨가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주자면, 나는 지금 내 소설도 못 쓰고 있어요.”
“그 소설들은 제가 다 이뤄 드릴게요. 어차피 작가님께서 하고 싶은 섹스에 대해 쓰시는 거잖아요? 말만 하면 제가 다 해 드릴 테니 그건 쓸 필요가 없어요.”
“소설 쓰는 건 나만의 취미 생활이기도 해요.”
“저와 한 침대에 누워 관계를 맺는 일보다 더 소중한가요? 저와의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더 소중하신 거라면 말해 주세요.”
말하면 목이라도 따 버릴 표정이면서 말투는 세상 부드러웠다.
“……생각해 보니까 한율 씨와의 사랑 이야기가 더 끌리네요.”
“역시 그렇죠?”
남자가 다시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저 웃음이 가짜인지 서슬 퍼런 눈빛이 가짜인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선호의 집에서 연재에 대한 공지 사항을 올려 뒀으니 당분간은…….
……미친.
남자에게 휩쓸려 가장 중요한 존재를 잊고 있었다. 짐을 싸 들고 와도 반갑게 맞이해 주던 친구가 잘못됐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휴대폰 이야기부터 시작하다니. 내가 진짜 제정신이 아닌가. 어째서 그걸 까먹었지?
“한율 씨.”
“바라는 게 있나요?”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남자는 즉각 대답을 해 왔다. 대화를 안 할 때도 내 표정이나 몸짓을 살펴보는 건 음흉한 목적뿐 아니라 나의 속내까지도 완벽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휴대폰은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됐다 치고.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선호의 이름을 꺼내야 한다. 29금 집착광공의 감금물까지도 써 봤던 경험상, 지금 이 순간을 어떤 식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지 천천히 따져 봤다.
질투심이 많은 남자. 이걸 자극해서는 안 되니까 내 친구는 어떻게 됐나요, 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했나요, 등 괜히 수갑을 차게 될 말들은 패스. 그렇다면…….
“저랑 같이 있던 사람은 그때 왜 거기서…….”
“사람?”
“네?”
“‘사람’은 거기 없었잖아요.”
미친 새끼.
없던 정나미도 떨어지는 말이었지만, 정확히 사람이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는 걸 보며 주어를 고쳐 보기로 했다.
“저랑 있던 거요.”
“아, 그거요? 안 그래도 눈엣가시라 찾아갔었는데…….”
잠시 숨을 고른 남자가 혀를 차며 말을 꺼냈다.
“술에 취해서는 길도 못 찾고 돌아다니길래 손쉽게 처리하겠다 싶었죠.”
“……그 뒤는요?”
“인적 드문 공원으로 데려갔더니 제 발에 걸려서는 돌부리에 머리를 박고 기절하더라고요. 그대로 끌고 가 볼까 했더니 작가님 발소리가 들리기에 잠깐 멈추고 있었던 거예요.”
공원에만 사람이 없었지 길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내 발걸음 소리를 아는 것도 충격적인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 발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건 더 충격적이었다.
“그거는 아직…… 거기에 있는 거예요?”
하지만 다른 주제를 꺼냈다가는 처음으로 돌아가 버릴 게 뻔했기에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겨우 뱉어 낸 나의 질문을 침묵으로 대하던 남자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제 앞에서 다른 게 궁금하세요?”
“……그럴 리가요.”
“걱정돼서 물어본 거잖아요.”
“절대로 아니에요.”
“거짓말.”
잇새로 욕을 짓이긴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 눈을 감을 때도 뜰 때도 하염없이 붙어 있던 남자가 나가 버린 것에 자유를 느껴 보려 했으나 단 몇 초 만에 다시 방문이 열렸다.
남자는 꾹 쥐고 온 무언가를 침대로 던졌는데, 바로 어제, 나를 수차례 괴롭히던 기구와도 닮아 있었다. 내 안에 들어와 거세게 흔들리던 그것.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는 길게 이어진 줄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방심한 사이, 시트로 얼굴을 박게 했다. 뒤로 손을 뻗어 봤으나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온 기구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이전에 사용된 것은 무자비하게 안을 찌르고 헤집기만 했다면, 지금 내 안을 채운 건 정확히 한 지점만을 누르고 쑤셔 댔다. 강도가 너무 강해서 이건 아무리 힘을 줘도 밀려나지 않았다. 도리어 퉁퉁 부어 버린 내벽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탓에 눈물까지 맺혀 버린 나를 안쓰럽게 내려다보는 남자와 마주했다.
감정이라는 게 없나. 해사한 미소를 보인 남자가 제 휴대폰을 몇 번 두들기니 진동이 시작됐다.
“아흑!”
“우리 영화 보러 가요.”
“……뭐, 무슨……!”
“영화관에서 수치플을 하는 거예요!”
“미, 미쳤…… 흐아……!”
“두 번째 작품 82회 차라니 너무 설레지 않아요?”
개소리를 내뱉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한 단계 높아진 진동을 감내하며 옷을 꿰입어야 했다.
* * *
내가 얌전히 옷을 꿰입고 자신을 따르는데도 남자는 영화관으로 향하는 내내 불안해했다. 자신의 차를 타고 이동하던 내가 뛰어내릴까 봐 걱정이라며 문까지 잠그는 것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집착광공들의 모습은 애교에 불과할 것이라고.
남자는 차창 밖의 풍경을 보는 것마저 질투하는 이였는데, 신호가 멈출 때는 자신과 반드시 눈을 맞추고 있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차라리 일찍 도착했으면 좋겠지만 남자의 집은 인적 드문 곳에 있었기에 정작 30분을 달린 뒤에야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창밖을 바라볼 수 없고 신호가 걸리면 무조건적으로 남자와 눈을 맞춰야 하는 내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대기 의자에 앉은 나를 초에 한 번씩은 꼭 돌아보며 줄을 서고 있었다. 팝콘을 안 먹는다고 해도 제 로망이 그렇다며 꼭 먹으란다. 도대체가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게 맞는지, 아니면 연애를 하고 싶었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재수 없게도 내가 눈에 띄어 버린 건지.
“하…….”
다 모르겠고 그냥 이대로 튀어 버리고 싶었다.
윙―!
“흐! ㅇ……!”
그러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입을 틀어막은 채 주변을 살폈다. 하도 기가 빨려서 뒷구멍에 쑤셔 박힌 존재를 잊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할 때까지는 동작을 멈춰 준다고 해 놓고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데. 전립선 부근을 뭉근하게 눌러 오는 탓에 신음을 꾸역꾸역 삼켜 내며 앞으로 걸어온 남자를 노려봤다.
“눈빛이 왜 그래요? 더 세게 해 줘요?”
“흐으…… 아, 아니…… 아니에요…… 흡, 왜, 왜…….”
“다른 곳을 봤잖아요.”
이 씨발 새끼가.
초마다 돌아보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다가 아주 잠깐, 0.0001초 정도 다른 걸 보다가 빠르게 다시 돌렸는데 그 시간조차 화가 나는 모양이다.
“읍, 흡……!”
“잘못했죠?”
남자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진동 세기가 강렬해졌다. 앓는 소리가 자꾸만 터져 나와서 입을 틀어막고는 고개만 미친 듯이 끄덕이자, 조금 화가 풀렸는지 버튼을 꾹 누르는 게 보였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기계가 작동을 멈췄다. 늘어지려는 내 몸을 지탱해 준 남자가 대뜸 손을 잡아당겨서는 팝콘 줄에 서게 했다.
“함께 있어요.”
기진맥진한 나를 뒤에서 끌어안듯 서 있는 남자의 행동에 함께 줄을 서던 이들과 주변을 지나던 이들이 자꾸만 흘긋거렸다. 간혹 그들의 이야기가 들렸는데, 얼굴이 잘생기면 게이라는 말도 있었다. 당연히 그건 남자를 향한 말이겠지.
“작가님은 무슨 맛이 좋으세요?”
“아무거나요.”
“그런 맛은 없는데.”
“그럼 카라ㅁ…….”
캐러멜을 가리키자마자 남자의 뒤로 밀려났다. 나를 숨기듯 제 등 뒤로 감춰 버렸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나와 눈을 맞춘 직원에게 화가 났거나, 제가 아닌 카라멜 팝콘을 보는 내게 짜증이 났거나.
“작가님은 너무 매력적이에요.”
영화관으로 이동하던 내게 들려온 말이었다.
“네? 제가 왜…….”
“모두가 쳐다보게 만들잖아요.”
“그건 내가 아니라 한율 씨 같은데요.”
지금도 그랬다. 내게 기대어 속삭이듯 말해 오는 남자의 뒤에서 얼굴을 붉힌 채 서 있는 이들이 몇몇 보였다.
“다들 작가님을 보는 거예요.”
남자는 꿋꿋하게 속삭여 왔다.
“제 생각에는 한율 씨를…….”
“작가님이에요.”
“…….”
“작가님을 보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역시 그랬어. 작가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아, 다른 놈들이 안 보게 하려면 얼굴에 큰 흉이라도 만들어 줘야 할까요?”
“무, 무슨!”
“아니에요. 흉이 있어도 사랑스러울 테니까 다리를 하나 부러트려야…… 아니다, 작가님은 다리를 절면 온종일 좆질 당한 것처럼 보여서 남들에게 색스러워 보이겠죠?”
공공장소에서 음담패설이라니. 아무리 조용하게 말을 하더라도 승강기 안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제 할 말만을 고집했다.
“영화관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요. 침실에만 두고 평생을 섹스만…….”
띵―!
-10층입니다.
수치심과 억울함에 괜한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안내음과 함께 승강기의 문이 열렸고 함께 타 있던 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그중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난 그들의 표정을 확인할 새도 없이 영화관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렇게 모든 불빛이 꺼지고 구석 자리.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커플석에 앉았다. 불편하고 숨 막히는 시간. 불안감과 긴장감에 손톱을 깨물며 애꿎은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바지 속으로 들어오는 농염한 손길에 위험 신호가 반짝였다.
“흐……. 으, 으…….”
어두워진 상영관에서 바지를 벗고 성기가 잡혀 흔들릴 거라는 예상 따위 하지 못했다.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참아 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버튼을 눌러 댄 남자 때문에 전율이 타고 올라왔다.
조만간 소리를 낼 것만 같아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뒤 커플석에서 남녀 한 쌍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튀는 행동을 한다면 금방 발각이 날 듯한 아슬아슬한 거리였기에 입술이 뜯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신음을 참아 내리라 다짐했지만, 성기 끝을 문지르는 물컹한 촉감에 몸부림치다 앞좌석으로 머리를 박았다. 앞에 앉은 이들이 뒤를 돌까 급히 숨을 죽였으나 다행히 영화관에 앉은 모두가 웃음을 쏟을 장면이었기에 요란스러운 몸짓이 묻힐 수 있었다.
쭙― 쭙― 일부러 더 소리를 내려는 남자의 어깨를 붙들었지만, 행동을 부추기는 꼴이 되었는지, 양손으로 내 허벅지를 누르며 더욱 깊게 빨아들였다. 드디어 나도 정신이 나가 버린 건가. 남자의 볼이 볼록해지는 장면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쾅쾅 울려 대는 영화의 장면보다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밝은 장면이 나왔을 땐 빛에 반사된 날카로운 턱선이 보였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볼록하게 튀어나오는 뺨과 번들거리는 입술까지도.
“흑, 으, 으읏!”
방심하던 찰나 밀려드는 사정감에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와 동시에 여태 참아 온 것을 분출해 내며 머리를 젖히자 어두컴컴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내가 지금 영화관에서 같은 남자에게 빨리며 느끼고 사정까지 해 버렸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앞에서 무슨 소리 안 나?”
“남자 둘 같은ㄷ…….”
뒤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옆을 돌아보니 남자가 여전히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아래를, 여전히 진동을 울리는 다리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 대체…….”
“진동 세기가 많이 약해졌죠?”
“하지ㅁ…… ㅎ……!”
남자는 분명 내 뜻을 알아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단계를 서서히 올렸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틀게 됐는데, 그 탓인지 뒷좌석에서 무언가 대화를 시도하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숙이자마자 남자의 손이 허리께로 닿았다.
“나갈까요?”
“흐읍, 네…… 나가요…….”
“나는 음료를 치우고 갈게요.”
절대로 나를 혼자 보낼 리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자꾸만 기웃거리는 뒷좌석의 사람들이 더욱 신경이 쓰였다. 무작정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상체를 숙인 채 영화관을 벗어났다. 뒷좌석에 있던 이와 언뜻 눈이 마주쳤으나 사이를 가로막은 남자가 어서 나가라며 눈짓했다. 상황이 어떻든 우선은 여기를 벗어나야 했기에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갔다.
“씨발!”
미친 듯이 움직여 대는 기계를 빼내어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식은땀을 닦아 내고 나니 그제야 상황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이 꼬락서니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공공장소라면 남자도 멋대로 행동하지는 못할 텐데 말이다.
찬물로 세수를 한 뒤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벗어나며 주변을 살폈다. 뒷좌석의 이들에게 다가가던 남자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인지 아무리 둘러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더 키가 컸기에 이곳에 나와 있었다면 분명 눈에 띄었을 터. 드디어 기회가 생긴 것이다.
“대체 왜 안 올라와!”
1층에 머물러 있는 승강기를 하염없이 노려보다가 결국엔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라리 잘된 건가. 승강기를 타고 여유롭게 내려가는 것보다는 비상구로 빠르게 달려 나가는 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혹사당했던 허리가 통증을 호소했으나 어금니를 꽉 깨물며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이곳에는 벽면에 층수가 표기되지 않았기에 내가 얼마나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로에 빠진 듯한 느낌에 아무 문이나 열어 보려던 찰나, 드디어 계단이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놓인 문을 반갑게 열었으나 내 기대와는 달리 자동차가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바로 앞 기둥에 박혀 있는 B1 로고. 내가 원하던 1층보다 한 층 더 밑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앞에 남자의 차가 서 있는 탓에 심장이 철렁했으나 다행히도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그래, 차라리 어딘가에 숨어서 남자가 이곳을 완벽히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게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이건 남자 역시도 예상하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기에 기둥 사이로 몸을 숨기려던 순간이었다.
<전화 왔떠욤!>
내 몸 어딘가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남자와 함께 있다는 이유로 휴대폰을 받아 내는 것에 성공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당시 이딴 게 나와 어울리는 벨소리라며 억지로 변경해 버린 남자에게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것까지도.
“받아요.”
중저음의 목소리. 떨리는 시선을 뒤로하니 먼 거리에서 남자가 제 귀에 붙인 휴대폰을 두들기고 있었다. 거리가 꽤 있었는데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난 도망가지 못한 채 휴대폰을 꺼냈고, 선명하게 박혀 있는 남자의 이름을 확인하며 전화를 받았다.
-내 차 여기 있는데.
“아…… 거, 거기 있었어요? 나는 또 더 멀리 있는 줄 알ㄱ…….”
-뭐, 못 볼 수도 있죠.
“네…….”
-그렇지만 이곳에서 제일 사이즈가 크고 검은 차들 사이에서 혼자 새빨간 제 차를 못 보시는 건 너무했어요.
“…….”
-음, 솔직하면 봐주려고 했는데.
“저, 저기!”
-못 봐주겠네요.
남자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달려오는 이를 피해 돌아섰을 땐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목뒤가 세게 붙들린다 싶더니 귓가로 작은 속삭임이 닿았다.
“따끔~”
아주 가벼운 것을 전하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였다. 이윽고 목을 찔러 오는 서늘한 감촉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기절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나 남자를 만난 이래로 벌써 몇 차례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