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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플&하드코어 (3/11)

도망플&하드코어

“씻겨 드릴게요.”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어느새 욕조에 눕혀져 강제적으로 몸이 씻겨지는 와중에 든 생각이었다. 너무 빠르게 지나간 일들인지라 현실성이 없었다.

샤워 볼을 정성스레 문질러 거품을 내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벙쪄 있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끈적해진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기까지 했다. 땀에 젖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머리 역시도 빠르게 감겨 냈다.

“흣, 어디를…!”

“안 빼면 배 아파요.”

방심한 사이 엉덩이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살살 긁어내는 감각에 힘을 줘 봤으나 남자에게는 미약한 반항이었다. 하긴, 이미 다 보여 주고 내준 마당에 민망함을 느끼는 게 더 우스웠다. 그러한 생각을 하니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남자가 느슨해진 주름을 더욱 벌리며 안쪽에 붙은 정액까지 모두 긁어냈다.

그 후로는 물기가 닦인 채 내가 있었던 곳과는 다른 방으로 오게 됐는데, 관계가 이어졌던 공간과는 달랐다. 남자는 고급스러운 옷장을 열더니 부드러운 재질의 잠옷을 가져와 인형 놀이를 하듯 내게 입혀 줬다.

“이만 잘까요?”

자연스레 불까지 끄고는 나와 한 이불 속으로 들어온 남자가 꺼낸 말이었다. 답을 주지 않고 무작정 일어나려 했으나 가슴을 누르는 힘이 너무 강해서 바르작거린 꼴이 됐다.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거죠?”

체념하듯 힘을 쭉 빼며 남자를 향해 물었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부여잡은 채 남자에게 욕을 짓이기고 뺨을 내리치고 싶었지만 숨을 고르며 겨우 마음을 달랜 것이다. 우선은 이 미친놈을 잘 달래서 밖으로 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그 이후에, 안전성을 확보한 후에 이 남자를 신고하거나 사람을 시켜 똑같은 일을 당하도록 하는 게 맞았다.

“당연히 좋아하죠.”

달콤한 사탕을 머금은 듯 남자의 두 눈과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달빛이 닿지 않은 남자의 내면이 어떨지는 몰라도 내게 보이는 모습은 그러했다.

그렇다면 베팅을 해 보자.

“그럼 나랑 연애해요.”

남자의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연애. 그 단어를 듣자마자 눈물이 맺힌 남자가 내 손을 뿌리치고는 몸 자체를 세게 끌어안았다. 몇 초, 아니 몇 분가량을 놓아주지 않아서 어깨를 두들기니 그제야 틈을 벌려 줬다. 그러나 내 몸을 붙든 단단한 팔은 거둬지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도록 둘러놓은 거미줄 같았다.

“하아. 저 너무 좋아요……. 산란플? 야외플? 수치플?”

“아니, 제 말은…….”

“작가님이 바라시던 걸 제가 다 해 드릴게요. 손이나 발 쓸 필요가 없게 밥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제가 다 해 드리고, 배설까지도 제가 도와…….”

“말 좀 들어 봐요!”

자꾸만 허리를 비벼 오는 남자에게서 조금 떨어졌으나 그 이상의 거리를 좁혀 오기에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지금 사귀자는 게 아, 아니에요.”

방법이 잘못됐나. 달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이 너무 서늘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 제가 나가서! 나간 뒤에…… 찾아오시면 그때 해요. 지금 이렇게 강제적으로 데려와서 당신을 만나기에는…….”

“왜 그래야 해요?”

“……나 좋아한다면서요.”

“좋아해서 데려온 거예요. 서로가 원하는 플레이로 사랑까지 나눈 마당에 왜 돌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평생 잡아 두면 연애도 하는 거 아닌가?”

뭐야, 왜 말을 놓지? 아무튼 지금은 이것보다 달라진 남자의 태도를 중심으로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어요. 그렇지만 제 로망이 밖에서 운명적으로 만나는 거라서요……. 그 부탁을 들어준다면 정말 기쁘게 만날 수 있을…….”

“밖에서 만났잖아요. 제가 모시고 오기까지 했는데 왜 기억을 못 해요? 진짜 서운하다…….”

“하하. 그게 저희가 만난 거라니 제가 더 서운……. 그래요. 그건 내가 미안해요.”

대체 왜 방마다 이상한 것들을 구비해 두는지. 어느새 서랍에서 수갑을 꺼내어 내 손목과 번갈아 보는 남자의 말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그건 정말 미안한데……. 제가 원하는 만남은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제게 말을 걸어오는, 그런?”

“작가님 정말 왜 이래요. 일상 보내시는 중에 제가 찾아갔고 말도 걸었잖아요…….”

[작가님이시죠?]

[데리러 왔어요.]

이 두 마디 끝에 대뜸 나를 기절시켜서 납치해 온 남자의 말이었다.

“그쪽 가치관이랑 제가 조금 다른…….”

“그쪽 아니라 이한율.”

“……네, 이름 정말 이쁘시네요.”

“작가님도 예뻐요. 눈도 코도 입도 가슴도 골반도, 그 아래 고ㅊ…….”

“아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말하고 다시 본론으로 가서!”

아래를 꽉 쥐는 남자의 손을 겨우 잡아 올리며 잊힌 본론을 꺼냈다.

“다 알았으니까, 그럼 집에라도 잠시 보내 줄래요?”

“왜요?”

“내 통장이나 카드가 다 거기 있어서요.”

“돈 필요해요?”

“살기 위해서는 필요하죠……?”

“내가 줄게요.”

어디서 이런 가오충이 나타났나 싶다가도 긴 복도를 지닌 집 구조를 떠올리니 수긍이 된다. 아니, 아니지. 이 방법도 저 방법도 다 안 되면 어쩌라는 건데!

“그냥 좀 보내 줘요!”

“왜 계속 떠나려고 해요?”

“떠나는 게 아니라…….”

“짜증 나네.”

입을 막아 버려야 하나.

남자가 욕설을 짓이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빛이 비추는 곳 외에는 다 캄캄하게 보이는 나와는 시력부터가 달랐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 뭔가를 열고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다시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구슬이 달린 입마개를 들고 있었다. 매섭게 다가오는 손을 겨우 피해 내며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입이 막히면 타협이고 뭐고 모든 게 끝이었다.

“미안해요!”

“떠나는 건 절대 용서 못 해요.”

“안 떠나요! 안 떠난다니까요? 나는 그냥 집에 다녀오는 것뿐이에요!”

“절대 안 돼요.”

“제발 내 말을 좀 들어 봐요. 내가 집을 가는 건 돈을…… 가져오는 거였는데 해결해 준다고 하고. 음 또…… 맞아. 운명적인 만남을 바랐……지만, 이미 이뤄진 것 같고.”

수틀리는 말을 던질 때마다 내 볼을 꽉 눌러 오기에 매초마다 말을 바꿔야 했다. 적절한 대답. 남자가 납득할 만한 그런 말을 꺼내야 하는데…….

“선물이 있어요!”

만날 줄도 몰랐는데 선물 따위 있을 리가. 삼켜 내지 못할 말을 뱉어 버렸기에 이제 다 포기하자는 심산이었으나,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뒤로 물러났다.

“저를…… 위해서요?”

“……네?”

“선물이라고 하셨잖아요……?”

“아, 아…… 맞아요! 그, 선물이 있어요. 운명처럼 다가올 당신 같은 사람을 기다리며…… 제가 직접 만든…… 어……. 아무튼 선물이랍니다?”

“아, 너무 좋아.”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밝은 데서 보니 남자의 두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이걸 믿는다고?

일단 질러 보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집으로 가도 문제였다. 분명 나 혼자 보내지는 않을 거고, 이 정도의 집착이면 집 안까지도 들어올 수 있으니까. 신고를 하기 위해서는 남자에게 말한 대로 선물을 쥐여 주며 잠시 밖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냥 선물을 언급했다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줄 수 있다지만 ‘직접 만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다니. 돌이키기에는 이미 멀리 와 버린 뒤였다.

“작가님 집에서는 강도플을 할까요? 작가님 두 번째 작품 23회 차에 나온 대로 문 여는 순간 뒤에서 덮친 다음, 그대로 묶어 놓고…… 아.”

“……?”

“……섰어요.”

절대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이 남자를 데려갔다가는 나도 기억 안 나는 두 번째 작품 23회 차의 주인공이 되어 버릴 것이다.

“저기…….”

“이한율이요.”

“이한율…….”

“한율이라고 해요.”

“한율 씨, 제가 고민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혼자 다녀와야겠…… 어? 타임! 타임이요!”

두 손을 결박해서 끌어당기는 남자의 행동에 다급히 타임을 외쳤다. 어디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찡그리는 상대에게 최대한 온순하면서도 부드럽고, 애절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아니이……. 선물은 서프라이즈잖아요? 몰래 들고 와서 주고 싶은데…….”

“이미 선물 있다는 걸 내가 알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저한테는 두 번째 작품 23회 차도 중요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저기에서 벽고물을 해야 되니까 시간이 별로 없는걸요.”

아니, 내가 또 뭘 들은 건데.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가 하마터면 아는 욕을 다 쏟아 낼 뻔했다. 정신없어서 제대로 못 봤었는데 복도의 끝에는 구멍 뚫린 벽이 있었다.

“기쁘죠? 저도 그래요! 강도플을 하자마자 바로 와서 28회 차의 벽고물까지 하다니!”

이 정도면 기억력에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이건 나뿐 아니라 어느 작가라도 회차별 내용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100화를 기본으로 넘기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아, 설렌다. 제가 앞장설까요?”

“제발…… 제발 내 마지막 말을 들어 주세요…….”

열기가 오른다며 다급해하는 남자의 가슴에 체념하듯 이마를 기대며 마지막 대안을 제시했다.

“도망플 해요, 우리.”

“42회 차쯤에 나오는 거요?”

“몰라, 그딴 거 몰라요. 몇 회차인지는 모르고 그냥…… 해요. 도망플 해요. 나 지금부터 도망갈 거니까…….”

하아, 내가 뭐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딱 한 시간 드릴게요.”

웃음기를 머금은 남자가 꽉 잡고 있던 두 손을 놓아줬다. 자유를 얻었음에도 여전히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손목을 문지르고 있으니 남자가 대뜸 현관을 열어 줬다. 열기 전의 행동을 보니 지문을 찍어야만 열리는 구조였다.

“자, 택시도 타야 하니까요.”

현금 다발까지 쥐여 준 남자.

“고, 고마워요.”

뒤바뀐 태도를 의심하며 멈칫하던 나는.

“잡히면 다신 못 나갈 거예요.”

이어진 남자의 말에 미친 듯이 달려 나가야 했다.

남자의 집은 외딴곳. 그 표현이 딱 적합했는데, 일반적이라면 집을 나섰을 때 골목이나 평범한 도로가 나와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왜 이리 휑하기만 한지. 어디로 향하는 건지도 모른 채 그저 풀이 덜 자란 방향으로 10분가량을 달려가고 나서야 길이라는 게 보였던 것 같다.

바람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릴 정도로 적막한 공간. 저 멀리서 달려오는 택시 한 대는 마치 어둠 속 빛줄기와도 같았다. 택시 기사는 대뜸 달려들어 손을 흔드는 내게 뭐라 화를 내다가도 현금 다발을 보고는 묵묵히 뒷문을 열어 주었다.

집 주소를 말하고 나니 도착 예정 시간이라는 게 떴는데 놀랍게도 고작 20분 거리였다. 멀리까지 납치해 왔을까 봐 내심 겁먹고 있었는데, 20분이라면 집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짐을 챙겨 들고 도망칠 시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신호가 걸릴 때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길이 막히지는 않아서 20분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나온 금액보다 조금 더 지급한 뒤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왔을 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이끌어 커다란 짐 가방을 꺼냈다.

그런데 막상 짐을 챙기려 드니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 내가 왜 집을 놔두고 도망가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신고. 남자를 신고하겠다는 마음은 사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경찰에게 말할 범죄 동기가 조금 난감하니까.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그 팬인 남자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하면 그에 따른 증거가 필요할 텐데, 댓글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작품까지도 공개해야 할 터. 가장 중요한 건 댓글만 보면 강제적으로 잡혀간 게 아닌 나 또한 원해서 벌어진 일로 퉁쳐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왜 댓글을 그따위로 단 거야!”

지금 후회해 봤자 너무 늦어 버렸다. 댓글을 그렇게 달지 않았더라도 작품을 공개할 수는 없겠지. 29금 BL 소설을 쓰다가 남자에게 납치당해서 뒤를 따였다는 진술을 했을 시, 따라올 시선이 꽤나 두려웠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분이 더 지나 있었다. 남은 건 대략 30분.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기에 꼭 필요한 것들만 가방에 챙긴 뒤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잡았다.

띠링―.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알림 소리에 괜스레 침을 삼키게 됐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내게 문자를 보내온 이가 누군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벌써 보고 싶어요>

그 한 줄에 속이 더부룩해졌다. 더러운 놈. 같은 남자 뒤를 따먹으면서 환상 따위를 느끼는 변태 같은 놈. 시간을 지체한다면 집에 찾아온 남자에게 강도플이라는 개떡 같은 행위를 당하게 되겠지.

띠릭―.

전원을 끈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넣어 둔 채 무작정 밖을 나섰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멀리 나아가는 것만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방법 같았다.

그렇게 문을 나서자마자 문득 생각이 든 건 다소 먼 지역이었지만 홀로 사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했기에 서로가 연락 없이 집으로 쳐들어와도 반겨 주는 사이. 그러니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문 앞을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검은 세단에 몇 걸음 뒤로 후퇴하고 말았다. 허름한 집, 허름한 골목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꽤 오래 살았던 집이기에 저런 차를 가진 이웃 주민이 있었다면 진즉 알았을 터. 저 차는 높은 확률로 남자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건물 뒤로 돌아가 담벼락을 짚었다. 가방이 무거웠으나 나름대로 운동 신경이 있는 편이었기에 손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발을 디뎠을 땐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탁, 안정적인 착지를 했으나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늦었네요.”

“…….”

“오래 기다렸어요.”

“……당신이 왜.”

“보고 싶어서요.”

문자 안 봤어요? 읽었다고 뜨던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 걸음씩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바라보던 남자의 입매가 씰룩이는 듯싶더니 금세 어깨가 붙잡혔다. 바로 뿌리치려 했으나 작정하고 잡아 오는 악력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여기에도 벽이 있네요?”

내 어깨를 잡은 손등에는 굵은 힘줄이 서 있는데, 남자의 표정은 그 손과는 달리 잔잔하면서도 나와는 아무것도 관련 없는 사람 같았다. 화사하기까지 한 얼굴로 가리킨 곳은 등에 닿은 단단한 벽이었다.

“여기에 구멍을 낼까요? 여기에서 하면 야외플까지 할 수 있으니까 더 좋을 거예요. 한 번에 두 가지 플레이를 겪을 수 있는…….”

“한 시간 주겠다면서 왜 벌써 따라왔어요.”

“따라온 게 아니라 여기서 기다리고 싶어서요.”

“…….”

기분이 영 더러웠지만,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이 확실하다면 더는 쫓아오지 않겠지. 멋대로 집 앞에 와서 대기를 탄다는 사람에게 화도 크게 못 내는 내 처지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기에 잡다한 생각들은 잠시 뒤로하고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문득, 떠오른 질문에 거리를 조금 벌리다가 뒤를 돌았다. 남자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보는 내게 환한 미소까지 보였다.

“작가님께서 먼저 돌아봐 주다니 감동했어요!”

“……저기요. 한 시간 뒤에 저를 쫓아온다고 했잖아요. 언제까지 쫓을 건데요?”

그래, 가장 궁금한 건 이 부분이었다. 평생토록 따라다니겠다는 건지, 일정 기간 이후에는 포기를 해 주는 건지.

“도망플은 잡힐 때까지 계속이죠!”

대답이 너무 해맑아서 혀를 깨물 뻔했다. 이런 미친 자에게 평생을 쫓기는 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는지. 상대의 재력이 너무 좋아서 한번 갇힌다면 다시는 밖을 못 나갈 거란 예감이 들었다. 맨 처음 집을 벗어날 때, 다시는 나가지 못할 거라는 남자의 경고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럼…… 규칙 하나를 추가합시다.”

이 경기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를 위한 핸디캡을 얻어 내자는 심산이었다. 의아한 빛을 띠는 남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원하는 바를 제시했다.

“일주일 내로 당신에게 잡히지 않는다면 이후, 나를 보게 되더라도 평생 가두거나 묶어 놓는다는 이상한 말과 행동은 하지 않기로 해요.”

“와. 그거 너무 큰 핸디캡이잖아요.”

“그 정도는 해야…….”

“그럼 일주일 내로 잡히면요?”

“…….”

“그땐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건가요?”

남자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험한 말을 하면서도 밝은 미소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핸디캡을 받아 내려다가 뭔가 더 꼬여 버린 기분이었지만,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답은 하나뿐이었기에 긍정을 표해야만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도망쳐 볼게요.

뒷말을 삼켜 버린 채 다시 내 길을 나아가려는데 금방 다시 어깨가 붙들렸다. 뒤에서부터 나를 미는 남자의 힘에 밀려 벽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옆구리 사이로 들어온 두 손이 내 골반을 틀어쥔 채 뒤로 당겼다. 묵직한 남자의 아래가 엉덩이를 누르니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조금 더 후에 찾으러 갈게요. 10분이든 20분이든 더 줄 테니까, 조금만 있어 봐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몸을 비비는 끈적함이 더해지니 주변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담벼락 뒤는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기에 웬만해서는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간에 쓰레기를 버리러 오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점차 조급해졌다.

내 사정 따위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한들 이해해 줄 리 없는 남자의 손이 상의를 비집고 들어왔다. 가슴골을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막아 내려 하면 엉덩이를 눌러 오는 힘 또한 더해졌기에 애꿎은 벽만 짚어야만 했다. 손끝이 아려 올 정도로 손톱을 세우며 이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 바지 속까지 침범해 오는 손에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쳐 냈다.

방심하고 있었는지 한 번에 밀려난 남자는 미소를 거둬 낸 채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아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왜 거부해요? 작가님도 좋아하셨잖아요. 아까만 해도 좋다고, 더 해 달라고, 더 들어와 달라고 울면서…….”

“나, 난 그런 적 없어요.”

“맞아요, 이건 내가 지어낸 거예요. 그렇지만 내게 박히면서 좋다고 울던 작가님의 얼굴과 안을 찔러 줄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앙앙 소리 지르던 작가님의 목소리는 사실이잖…….”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내 몸이 표정이 어떠했든 당신 착각이에요. 도망플, 강도플 뭐 이딴 개 같은 것들도 소설일 뿐이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고!”

“거짓말.”

나름대로 크게 소리치며 화를 낸 거였는데 남자에게는 아무런 데미지가 없었나 보다. 도리어 본인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따지듯 내게 물어왔다.

“싫어한다면 반응하지 말았어야죠. 도망플도 작가님이 하고 싶다고 먼저 꺼낸 거면서 왜 이래요? 거짓말만…… 아, 혹시 수치플? 아! 수치플이구나! 싫어하는 척하면서 다 즐기고 있는 거죠? 아아, 역시 작가님은…….”

완벽해요!

우렁찬 외침과 함께 얼굴을 붉힌 남자가 재차 내 허리를 잡아 오려 했다. 빠르게 그것을 간파하고 옆으로 피해 버리니 또 한 번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돌려 말하는 거 아니고 진짜예요. 내가 지금 뱉어 내는 말들이 다 진짜라니까요!”

“찌르지 않았잖아요.”

“……그게 무슨.”

한순간 손이 붙들린다 싶더니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펴 보니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가위가 살포시 놓여 있었다.

남자와 강압적인 관계를 갖게 됐던 날 침대 밑에 숨겨 둔 것이었다. 저렇듯 묻는다는 건 내가 자신을 찌르기 위해 가위를 숨겼다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이어 갔다는 걸까. 깊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검은 두 눈동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남자,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당황해서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남자의 표정을 보니 꽤 긍정적인 방향인 듯했다.

“기회가 많았는데도 찌르지 않았어요. 함께 누워 있느라 제가 방심했을 때도 끝까지 꺼내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이딴 소리를 내뱉고 있지.

어째서 저따위로 해석된 것인지는 몰라도 ‘남자를 찌르지 않았다’기보다는 ‘못 찔렀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제대로 싸워 본 적 없는 내가 가위 하나를 휘두른다고 해서 남자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고, 쉬지 않고 내 몸을 뒤집어 가며 몰아붙이는 남자 탓에 뭔가를 해 볼 틈이 없었다.

“작가님도 제가 마음에 드신 거죠?”

“난…….”

혼자만 행복해지는 상상으로 내게 읊조리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검은 두 눈동자 속, 일그러진 내 얼굴을 마주하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런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니까. 억지로라도 저 장단에 맞춰 줘야 한다.

“맞아요. 당신을 찌르려고 했지만 그 짧은 사이에 감정이 생겨 버려서요.”

“역시 그런 거죠? 정말…… 아, 이제는 감동이란 말로도 너무 모자란 거 있죠…….”

여기서 더 붉어질 수가 있나 의문이었지만 볼 때마다 더 새빨개져 있는 남자를 보며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그럼 전 이만 다시 도망을…….”

“힘 빠지게 너무 멀리 가지는 마세요. 어차피 한 시간 뒤에는 제가 찾아낼 거니까요!”

당당한 목소리를 뒤로하며 재빠르게 발을 놀렸다. 내 친구가 사는 지역을 알 수는 없을 테니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해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안해서 이따금 뒤를 돌아봤으나,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간혹 돌아보는 내게 감동했다며 소리를 지르기는 했어도 따라오는 움직임은 없었기에 숨을 고르며 서서히, 그럼에도 너무 느려지지는 않도록 속도를 유지하며 걸었다.

버스를 탔을 때도 뒤를 확인했지만 검은 세단이나 누군가의 그림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20분가량을 달리고, 지하철로 갈아타는 동안에도. 뒤를 쫓거나 앞을 막는 건 없었으나 상황이 이래서인지 자꾸만 불안해졌다.

치링―.

장장 두 시간.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나서야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벨이 울리는데도 답이 없기에 설마, 여행이라도 간 걸까 불안해하는 도중 반갑게도 문이 열렸다. 그냥 찾아온 적은 많아도 짐까지 다 챙겨 들고 온 적은 없는데 뭐라 설명을 해야 하나. 그런 내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입이 먼저 열렸다.

“김도윤!”

“어어, 오랜만이다. 내가…… 막 찾아온 적은 있어도 짐 들고 온 적은 없었지?”

“오래 지내다 갈 거야? 야, 그럼 인테리어 좀 도와. 이번에 싹 갈아엎으려는데 혼자 하려니까 빡세.”

“너는 아무렇지도 않냐……?”

무작정 내 팔을 잡아끌던 이선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뭐가?”

“아니, 갑자기 짐 싸 들고 왔잖아. 오래 머무르면 너희 집 수도세나 전기세도 더 나올 거고 라면 같은 것들도 멋대로 꺼내 먹을 수 있는데 너무 막 받아 주잖아.”

“누가 공짜로 받아 준댔냐. 너 여기서 지내는 동안 물 쓰고 전기 쓰고 뭐라도 입에 넣으면, 언젠가는 일 구해서 꼭 갚아야지. 그런 생각으로 온 거 아니면 그냥 가라.”

“당연히 갚지! 그런데… 이유는 왜 안 물어봐?”

“그것도 언젠가는 말해 주겠지.”

“참나.”

‘언젠가’라는 말은 기한 없이 나를 기다려 준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괜히 머쓱해져서 무겁지도 않은 짐을 두 손으로 내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신발장에 대충 내려놨던 건데, 이선호는 스스럼없이 그것을 들고는 안쪽 방으로 던지듯 넣어 버렸다.

“뭐야, 저 방…….”

“애인이랑 이제 동거 안 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인과 알콩달콩 동거하고 있다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혼자가 됐다는데 머물 공간이 생겨서 다행이란 생각부터 들다니. 밀려드는 죄책감을 꾸역꾸역 삼켜 내며 배를 문질렀다.

“떠나갔으면 인연이 아닌 거겠지. 네가 더 아까웠어, 인마! 저녁에 술이나 먹자.”

“울면 재워 주냐.”

“방에는 던져 줄게.”

“참나.”

그 후로도 평범하면서도 소소한, 어떻게 보면 정말 쓸데없는 말로 티격태격하면서 인테리어를 돕다가 편의점에서 술을 사 왔다. 둘 다 주량은 센 편이었으나 하나는 이별을 당했고 하나는 무자비하게 아래가 뚫려 지쳐 있던 상태였기에 두 시간 정도 달리다가 거의 동시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베이지색 천장을 보며 바다가 보인다느니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느니 쓸데없는 대화를 하다가 잠시 잠들었는데.

“선호야.”

눈을 떠 보니 옆자리가 너무 허전했다. 이름을 불렀는데도 영 대답이 없길래 어딘가에 뻗어 있을 거란 태연한 추측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술에 취한 녀석이 화장실에서 넘어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야, 이선호.”

그러나 욕실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선호를 발견하지 못했다. 시야가 어지러워서 잘못 본 건가. 찬물로 세수를 하며 다시 집 안을 둘러봤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음?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선반 위, 이선호의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텅 비어 버린 소주병을 보고는 서로에게 사 오라며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미동 없는 나를 대신해서 편의점에 가 준 건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이선호는 술이라면 끝을 모르고 즐기는 듯했다. 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어지러운 시야를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누워 버렸다.

술을 사 온다면 나를 깨울 테니 그때까지만 자자. 그 뒤로는 더 자고 싶어도 술 먹느라 못 ㅈ…….

…….

…….

…….

……어?

잠에 빠지기 직전, 가늘게 뜬 눈에 보이는 게 있었다. 주방 바닥에 떨어진 갈색 지갑. 이선호의 지갑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는 건, 뭔가를 사러 나간 게 아니라는 거잖아.

그때부터는 거짓말처럼 시야가 또렷해졌고 지끈거리던 두통까지도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술이 확 깨 버렸다는 말이 더욱 맞을 것이다.

차오르는 불안감. 서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더 살펴보니 문도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아서 현관문 틈새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게다가 현관에 가지런히 놓였던 두 개의 신발이 그대로라는 점. 그것 또한 의문이었다. 술에 취하기 전에 벗어 놓았던 내 신발과 이선호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뒤부터는 테이블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쳐 가면서 정신없이 이선호의 휴대폰을 찾아 나섰다. 휴대폰만큼은 챙겨 간 건지 욕실부터 방 안, 주방, 창고에 가 봤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신경이 쓰여서 휴대폰을 꺼 뒀는데, 연락을 하려면 다시 켜야만 한다. 이선호뿐만 아니라 내 소설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도 연재를 잠시 쉰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안 그러면 말없이 잠적하는 작가가 되어 신뢰를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휴대폰을 잠깐만 켜서 빠르게 안내문을 올리고, 이선호에게도 전화를 해 보자. 친구의 걱정보다 공지를 올리는 게 우선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부분이 크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헉…….”

그런 다짐을 하며 휴대폰을 켰더니 부재중 전화가 100통가량 찍혀 있었다. 도망치기 전에 껐으니 그때부터 시작됐다는 건데, 이외에도 문자만 수백 통이었다. 전화와 문자. 이 모든 것의 발신인이 전부 그 남자라는 것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공지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물질이 더 우선이었던 본능은 두려운 와중에도 손을 움직여 공지를 등록했고, 이어서 이선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대체 이 밤중에 어디를 간 건데.”

안내음으로 넘어가는 순간 신경질적으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최대한 밖에 나가지 않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짐까지 챙겨 온 나를 스스럼없이 받아 준 친구를 찾지 않을 정도로 매정하지는 못했다.

어쩌지.

진짜 나가 봐야 하나.

그러다 남자를 마주치면?

아니야, 멀리 왔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하지만 집 주소도 알아냈는데 여기는 금방…….

거기까지 생각해 보던 나는 조금의 현금과 휴대폰을 든 채 밖을 나서 보기로 했다. 사는 집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꽤 있으니 추적을 한다고 해도 아직은 모를 터. 이미 이곳까지 알아챘을 정도로 추적이 끝난 후라면 열려 있는 현관을 두고 안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동네만 조금 돌아다니다가 어딘가에 뻗어 있는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된다면 택시라도 불러서 빨리 돌아오리라. 그런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문을 나섰다. 가벼운 생각으로 임해야 결과 또한 좋다는 것을 믿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믿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때에 따라 깊게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당신…….”

“한율이라니까.”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나는 분명 공원까지만 보고 돌아가려고 했다. 안쪽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풀숲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가 이선호와도 너무 닮아서 홀린 듯 걸음을 옮기게 됐다.

그러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입을 틀어막은 채 건물과는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힘이 얼마나 좋은지. 나름 친구들 사이에서 키가 큰 편에 속하는 내가 발버둥을 치고 팔꿈치로 배를 쳐 보려고 해도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발을 세게 밟아 봐도 아픔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끈질기게 나를 끌고 갔다.

상가나 큰길가와는 꽤 떨어진, 빛이 닿지 않는 어둑한 곳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입을 막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코로만 숨 쉬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숨을 크게 들이쉬다가 뒤늦게 뒤를 돌아봤다.

가로등조차 없는 길이라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손에 닿은 상대의 손이 젖어 있었다. 아니, 조금은 끈적하다고 해야 할까. 놀라서 손을 떼니 비릿한 쇠 냄새가 풍겼다.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내게 들려온 나직한 음성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름을 불러 달라며 칭얼거리기에 입을 꾹 다물었으나 곧장 얼굴이 붙들렸다. 그대로 당겨 대는 탓에 까치발을 들어 겨우 시선을 마주하게 됐는데,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희미하게나마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찾았다.”

기이하게 입꼬리를 올려 낸 남자의 새하얀 얼굴에는 그와 대조적인, 붉은색 얼룩이 가득했다.

* * *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를 본 뒤에는 어떻게 됐더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차근차근 되돌아봤다.

아, 생각났다.

다시 도망가려는 내 목뒤를 잡아 누른 남자가 뾰족한 무언가를 꽂았다. 아마 그건 주삿바늘이었으리라. 빠르게 점멸해 가는 세상을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줘 봤지만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나 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방이 캄캄한 곳에 갇힌 뒤였다. 옷 한 벌 없는 알몸인 채로. 어딘지 모를 곳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남자에게 뒤집혀져 강제로 엉덩이가 벌어졌다.

“흐아, 아! 아아!”

아래서부터 쳐올리는 강렬한 통증에 절로 비명이 쏟아졌다. 남자는 처음과 달리 아무런 애무 따위 해 주지 않고 수없이 나를 범했다. 울며 소리치는 내 귓가로 이따금 벌을 주는 거라며 속삭이는 엿 같은 소리도 함께였다.

강도플이고 뭐고 내게 벌을 주겠다는 남자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어서 뭐라 대꾸할 수조차 없었다. 내장을 짓이기듯 거세게 들어와 헤집어 대던 것이 나갔을 땐 차가우면서도 딱딱한 이질감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길게 이어진 전선 끝에는 남자의 손이 보였는데, 무슨 버튼을 쥐고 있는 듯했다.

윙―!

“아, 아흐으……!”

버튼을 누른 순간, 진동음이 세차게 울렸다. 남자가 치고 나갈 때와는 다른 생소한 감각이었다. 배가 아프면서도 간지러운, 묘한 감각에 발끝을 움츠렸다. 그러다 자연스레 배로 힘이 들어갔고, 입구에 걸려 있던 기구가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흣!”

툭―.

멋대로 빼냈다며 다시 무자비하게 넣어 버릴 거란 예상을 했으나, 남자는 그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유 모를 허탈감이 몰려왔지만 티 내지 않고 주변을 살펴봤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는 벽면에 붙은 창문과 그 아래 놓인 검은 침대가 보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좁은 방.

“잡혔으니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잖아요.”

무자비하게 내 아래를 헤집던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해맑았다. 그럼에도 그늘이 져 있는 얼굴에는 무언가의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당신…….”

“이름 또 안 부르네.”

“하, 한율 씨. 제가…….”

“늦었어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줄게요.

섬뜩한 말을 뱉어 낸 남자가 대뜸 병 하나를 가져오더니 뚜껑을 던져 냈다. 훅, 파고드는 장미 향. 성인이라면, 더군다나 29금 소설을 쓰는 나라면 절대 모를 리 없는 러브 젤이었다. 그것을 제 손에 덕지덕지 바르고는 거센 힘으로 내 다리를 벌려 낸 뒤 스스럼없이 안을 파고들었다.

“아흑!”

다른 손으로는 쥐어짜듯 성기를 잡고 잡아당기는 탓에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사정으로 인해 늘어져 있던 성기는 억센 손길을 따라 주름이 팽팽해지도록 당겨졌다가 붉어진 살이 보일 정도로 밑까지 내려갔다. 생리적인 고통과 본능적으로 느끼는 쾌락을 버티려 발끝에 힘을 줘 봤으나 몸은 착실하게 반응하여 액을 줄줄 흘려 대고 있으니 미칠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소리가 참아지기는커녕 짐승 같은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그, 그만……. 내가 잘못!…… 흐으, 읏! 아아! 자, 못했어요! 잘못……. 흑, 흐아! 잘못했, 아아!”

요도 구멍을 쑤셔 버릴 기세로 손톱을 눌러 대는 순간 미약하게 남아 있던 자존심을 전부 버리기로 했다. 눈물까지 질질 흘려 대며 사과를 했는데도 남자는 물러나 주지 않았다. 오히려 절정까지 얼마 안 남은 때를 노려 요도구에 뾰족한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인위적인 조임에 얼굴을 내리니 큐빅이 박힌 요상한 막대가 끼워져 있었다.

“이, 이건 아니야…… 이거는, 아픈, 아파, 아파……. 아파…….”

“이렇게 액을 흘려 대면서 아프다고 하면, 믿어 드릴 수가 없잖아요.”

금방이라도 눈을 뒤집을 듯 떨어 대는 나를 보면서도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흐윽……!”

“작가님은 제가 좋아요?”

터질 듯한 성기를 잡은 남자는 내게 질문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구멍을 자극했다. 눌리고 쓸려 따가울 정도가 되었을 무렵에는 분출하지 못한 통증까지 더해져 고통이 배로 느껴졌다.

“좋아요! 좋아…… 당신, 아니……한율 씨가 좋아요!”

원하는 대답 따위 해 주고 싶지 않았으나 일단은 살아야 했다.

“아아, 작가님은 역시…… 이런 사랑을 바라고 바랐던 거죠? 저도예요.”

“하악!”

“너무 예쁘다…….”

“흐으윽! 아, 흑……!”

갑작스럽게 무릎을 굽힌 남자의 입으로 성기가 반쯤 가려졌다. 남자는 막대가 박힌 부분을 혀로 누르며 깊게 빨아들이고는 고환까지 핥아 내렸다. 뇌를 때리는 듯한 아찔한 전율에 허리가 절로 휘어졌고, 열린 목구멍에서는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소리가 쏟아졌다. 마치 내 목소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아아!”

갑작스럽게 가슴을 잡아 온 남자가 손톱을 세웠다. 몸이 뒤틀릴 정도로 세게 잡힌 살에는 손톱자국이 또렷하게 나 있었다.

“흐어, 흐, 아아, 그, 그만……. 흑, 흐아아!”

“좋은 거죠?”

“아학……!”

“대답해 줘요.”

“흐으, 좋아. 좋으니까 이제 그만…….”

머리를 쥐고 흔드는 끝없는 전율로 인해 눈물을 쏟아 내 시야가 흐려졌음에도 남자의 얼굴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두 눈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오로지 나만을 담아낸 그 눈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리라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 잘못했어요…… 끄흑, 흑……. 아래 좀…… 풀어 줘요…… 주세요…….”

“원해요?”

“제발…….”

“귀여우니까 봐줄게요.”

막대가 뽑혀 나가자마자 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은 쾌락만을 좇아 부르르 떨어 댔다. 참았던 사정을 끝낸 성기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남자에게 다리가 잡힌 채 위로 들리는 중에도 나른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몸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악!”

살짝 벌어진 틈으로 끝까지 파고든 성기에 입이 벌어졌다. 엉덩이에 닿는 음모로 단 한 번에 성기를 모두 삼켜 냈음을 알 수 있었다. 풀리지도 않은 곳으로 한 번에 받아들이려니 숨이 가빠 와 가슴을 두들겨 봐도 소용이 없었고, 남자를 밀어내려 해 봐도 단단한 몸은 밀리지 않았다. 밀어낼 수 없어 포기한 손을 바닥으로 내리자 내 행동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쌌는데도 또 서고 있어요.”

“그런, 게…….”

“제가 얼마나 좋으시면 안에 들어가기만 했는데도 꽉 조이시는 걸까요?”

“끄읍, 흑, 흐으……. 아!”

“이런 몸을 하고 어디를 가겠다는 건지,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못 견디겠어요.”

남자에게 잡힌 두 다리가 더욱 위로 올라갔다. 단단한 어깨에 걸쳐졌을 땐 끝이라고 생각했던 성기가 더욱 깊숙하게 밀고 들어왔다. 아래로 숨을 쉬는 것도 아닌데 꽉 막혀 있다고 산소가 모자라듯 목이 턱 막혀 오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앗! 아! 아흐! 으읏, 아!”

“제가, 응? 이렇게나, 후우, 사랑해 주잖아요.”

“아아, 악! 아흑!”

“질투 나게, 다른 놈에게, 웃어 주기나 하고!”

“……하윽!”

멋대로 튕겨 나가는 허리를 꽉 잡아 세운 남자는 더 들어올 곳도 없는 공간을 찢어 내기라도 하듯, 안을 쾅쾅 찍어 댔다. 그럴 때마다 아랫배가 욱신거려 와 배를 눌러 봤으나 금방 손이 붙들렸다. 마찰 소리가 커질수록 눈앞에는 불꽃이 튀었다. 한껏 올라간 엉덩이와 허리는 감각이 사라져 느낌조차 없었으며, 오직 마찰하는 구멍 안쪽만이 간지러움을 동반하며 날 원하지 않는 쾌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서로의 배가 끈적일 정도로 길게 이어진 정사에 이제는 손까지 떨려 왔다. 그 상태로 다시 내 안을 파고들려는 남자를 바라보던 중,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작가님?”

배에 묻은 정액을 긁어 와 제 성기에 바르던 한율은 기절하듯 잠이 든 도윤의 다리를 당겼다. 끌려오는 하얀 몸을 따라 시트가 구겨졌으나 삽입을 시도하는 그에게 걸릴 것은 없었다.

“……하아.”

도윤의 안은 몇 번을 파고들었음에도 처음인 것처럼 성기를 조여 왔다. 나른함에 눈을 감은 한율은 거의 다 들어가던 성기를 조금 빼내고는 손가락을 붙여 다시 출입을 시도했다. 기절한 몸의 주인은 반항 없이 그의 손길을 따라 조금씩 다리를 벌렸다. 굵은 성기와 딱 붙은 손가락은 분홍빛 속살을 비집으며 서서히 안을 파고들었다.

두툼한 성기가 같은 곳을 누를 때마다 그 안에 고여 있던 탁한 액들이 빠져나와 음모를 젖게 했다. 늘어진 도윤의 몸이 자꾸만 위로 밀리자, 동그란 어깨에 손을 올려 움직임을 차단하고는 마음 편히 허리를 쳐올렸다. 관계를 맺는 동안 피가 날 정도로 깨물어 댄 도윤의 가슴에 다시 한번 이를 세워 본 한율은 아물던 상처를 벌리며 비릿함을 삼켜 냈다.

“작가님은 피조차 아름다워요.”

더하고 싶지만 아직은 힘드실 테니까.

마지막 사정을 마치고서야 몸을 물린 한율이 벌어진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벌리더니, 예상대로 헐어 버린 내벽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 미련이 남았다. 상처만 나지 않게 아주 살짝만 더 누려도 되지 않을까. 안을 들여다보며 눈을 빛내던 그는 이윽고 제 성기를 붙잡았다.

“예쁘게 태어난 게 잘못이죠.”

그 후 촉감마저 부드러운 도윤의 두 다리를 당겨 제 허리로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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