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오드론은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그 뒤로 칼리번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전하께 누가 되는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군.’
젠은 그래도 말은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재차 권했지만, 칼리번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이 잘 끝났는데, 자신이 다른 알파와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쓸데없는 걱정을 할 것이다.
칼리번은 파괴된 건축물의 잔해와 마물의 시체를 치우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막사로 돌아온 순간, 침구 근처로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윽…!”
칼리번의 시선이 잠시 팔로 향했다. 오드론 앞에서 그은 상처는 이미 아문 지 오래였다.
“하아, 흐읏….”
그러니 이건 부상 탓이 아니다. 그는 성급히 셔츠를 끌어 올렸다. 복근이 탄탄하게 자리 잡은 배가 훤히 드러났다. 아랫배에는 짧게 그어진 흉터가 하나가 있었는데, 건드리지도 않은 그곳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큭….”
‘의식’의 후유증이다. 검은 손자국은 마계와 인간계를 일시적으로 이어 주는 통로다. 한번 닫히면 다시 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알파가 몸을 불사르며 경계를 부숴야 하기 때문이었다.
왕국 전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많은 마물을 불러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검은 손자국보다 더 큰 입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에어리얼은 최초의 오메가를 이용했다. 가장 순수한 오메가의 피를 단검에 묻혀 칼리번의 배를 쑤신 것이다. 그것이 어떤 후폭풍을 불러일으킬지 당시의 칼리번은 알지 못했다. 아마 에어리얼 또한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 필요도 없었겠지. 그는 자신처럼 죽을 작정이었으니까….
황금의 비를 맞고서 몸뚱이밖에 남지 않았던 몸은 깨끗하게 회복되었지만, 배에 남은 흉터만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마치 낙인처럼.
가장 오래된 오메가의 피가 섞인 탓일까, 칼리번의 능력은 이전보다 강력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편이 낫다고 여기기도 했다. 강화된 능력 덕분에 오메가의 향기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그랬다. 칼리번은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은 에어리얼과 다를 것이다. 마물을 부려 인간을 공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계와 인간계를 직접 이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녔으나 그 문을 열 일도 평생 없었다.
그러나 능력이 강해진 만큼이나 반작용도 커졌다. 오감이 몇 배는 더 예민해지고 향기도 짙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다 믿었다. 왜냐면 에레즈 프리드웬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는 이보다 더한 악조건에서도 버텼기 때문이었다. 그는 헤맸을지언정 맞서 싸웠고, 나아갔다.
그런데….
지금 그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적은 에어리얼도, 마물도, 오드론과 같은 용병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 안에 자리 잡은… 본성이었다.
“윽….”
칼리번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손을 위로 옮겼다. 그리고는 단단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더욱 거친 자극을 바라며 주물렀다. 손아귀 힘은 알파에 비해 부족함이 없는데도 어쩐지 만족이 되질 않았다. 자기 자신의 손이기 때문이었다.
“아, 하아….”
어느덧 까만 눈은 흐려진 채 이성을 잃은 짐승이 되어 헐떡이기에 바빴다. 그는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자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멍청한 뇌가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오드론이 알파를 잔뜩 데려다가 노팅해 주겠다고 했잖아. 어째서 그를 따라가지 않은 거야?>
어느새 나타난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가슴을 간지럽히며 속삭였다.
“윽…. 크읏…….”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놀렸다. 그러자 귓가에 잔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무시하겠다는 건가?>
“흐읏….”
<눈물겨운 노력이야.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라고. 오메가인 주제에 자진해서 알파 한 마리에게 종속되려 하다니….>
“윽, 크읏…!”
<그 힘이 아깝군.>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목소리를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혼자 위로하는 횟수가 반복되고 길어질수록 몸은 내성이 쌓이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사정 없이도 그럭저럭 욕망을 가라앉혔으나 이제는 혼자만으로 만족이 되지 않았다. 칼리번은 이를 악문 채 아플 정도로 가슴과 성기를 세게 움켜쥐었지만,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
“젠장, 크윽…. 어째서…!”
곤란함과 두려움이 칼리번을 가득 채웠다. 손톱이 손바닥 안쪽으로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칼리번은 혼자서 우뚝 선 사내였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을지언정 도움이 필요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당혹스러웠다. 이대로 앞을 주무르고 뒤를 손가락으로 쑤셔 봤자, 아무것도 배출하지 못할 것임을 몇 번이나 몸으로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는 믿지 못하고 자꾸만 같은 상황을 반복했다.
더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알파가 없으면, 안 된다…. 칼리번은 눈앞의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미련하긴. 오드론이 싫은 거면, 좋아하는 알파한테 가면 되잖아?>
무너지기 직전,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넌 이성을 놓아 버리고 말 거야. 오드론에게 가 버리면 그게 더 큰 일 아니겠어?>
짐짓 염려하는 말투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동족으로 위하는 척을 하며.
“하아…. 하아…….”
칼리번은 굶주린 개처럼 입을 벌린 채 헐떡였다.
<여러 마리의 알파와 밤을 보내고 싶은 거라면 굳이 말리지 않겠지만….>
“아니야, 나는….”
<그럼 증명해.>
“증명…?”
유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대꾸하게 된다. 그리고 대화를 반복하다 보면….
<왕자님의 막사로 들어가는 거지.>
결국, 에어리얼의 승리다. 그는 웃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아, 그래….”
역시 그래야겠지. 다른 알파가 싫다면, 그분에게 가는 수밖에…. 정신이 느슨해진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유령에 홀린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이렇게 질질 흘리는 몸으로 가면 에레즈도 기뻐할 거야. 왕자님도 결국 알파잖아.>
차가운 밤바람도 칼리번의 정신을 맑게 해 주지 못했다. 칼리번은 비척거리며 어둠을 밟았다. 그의 가슴 위로 툭, 하고 빗줄기가 한 점 떨어졌다.
<…칫, 비 때문에 냄새가 가려지잖아.>
에어리얼이 혀를 찼다. 찝찝했던 날씨가 예언이라도 하듯 늦은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뜨거웠던 몸이 빗물에 조금씩 식어 갔다. 그러나 몸속의 열기까지 식혀 주지 못했다. 어느새 칼리번은 에레즈의 천막에 도착해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왕의 막사에는 불이 들어와 있어 찾기가 쉬웠다.
“……데 말이야.”
“그래서…….”
“더 필요…….”
…아무래도 먼저 온 손님이 있는 모양이다. 막사로 다가가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크흣…!”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뒤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로 들어가기는 아무래도 그른 모양이다.
<설마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지? 지금 돌아가면 오드론에게 노팅을 당할 텐데?>
“그건 안 돼….”
<드디어 우리가 마음이 통하네. 그래, 오메가는 원하는 알파와 교미를 해야지.>
“…….”
<오메가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
칼리번은 낡은 막사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손님이 떠나면 바로 들어가기 위해, 그는 염탐할 만한 틈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조심스러운 태도는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과도 같았다. 만약 손님이 오래 머문다면 에레즈와 함께 있는 그 누군가를 죽이고서라도 알파의 위에 올라탈 기세였다.
그때….
“…일종의 뇌물인 거지.”
익숙한 목소리에 칼리번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 늦은 시간까지 복구 작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건 부하를 너무 혹사시키는 거 아니냐…. 뇌물도 받았으니 이제 좀 나 좀 보내 주라.”
젠이었다.
“마물 혼혈은 며칠 정도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 그 말, 칼리번한테도 해 봤어? 제기랄, 내가 이래서 때려치운다는 거야!”
그녀는 에레즈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칼리번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발, 해 떠 있을 때만 일해라! 이것저것 다 아끼라고 하면서 왜 촛불만 안 아끼는데? 왕이라고 막 써도 되냐?”
“그럴 리가요. 아껴 뒀다 스승님께서 오실 때만 특별히 켜는 겁니다.”
“아하…. 마지막까지 날 쥐어 짜내 보겠다는 뜻이지?”
작은 빛으로 가득 채워진 천막 안은 새까만 칼리번과 달리 너무도 따스하고 밝아 보였다.
“…읏.”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잘됐네. 마침 알파가 둘이나 있잖아?>
에어리얼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여겼다.
<저 둘은 네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들이잖아. 굳이 점잔을 뺄 필요가 있어? 넌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걸 가졌어, 칼리번. 믿을 만한 알파와 교미를 하다니…. 이건 거의 기적이라고?>
젠이 있을 때는 사라지던 에어리얼이었으나 이번은 달랐다. 그는 칼리번이 벼랑 끝에 섰다고 생각했는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
잠시 흔들렸던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
<그래. 가서 사실대로 고백해. 망할 에어리얼이 몸을 망쳐 놔서 발정이 나 버렸다고. 둘이서 널 상대해 줄 거야…. 분명 편안하고 안정적인 교미가 되겠지.>
부러워라. 그런 거 나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에어리얼은 살살 달랬다. 칼리번은 비에 젖은 채로 천막에 난 구멍에 좀 더 몸을 기울였다.
“…이건 귀한 걸 구해 주시다니.”
그새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는지 에레즈의 환한 목소리가 들렸다.
“뇌물이라고는 했지만, 내가 구한 건 아냐. 리론 후작의 창고를 뒤지던 중에 발견한 거지.”
전과 달리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막사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칼리번이 알아볼 정도로 거대한 그 물건은….
“부디 이걸 보고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네요.”
사람의 몸집만큼이나 큼지막한 대검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제대로 된 선물 한번 주지 못했는데….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보다는 기사 단장에게 고마워해. 리론 가문의 후계자 아가씨 말이야. 리론 후작이 널 못 믿고 뒤로 빼 둔 무기를 찾아다가 전부 반납한 거라니까?”
“물론입니다. 따로 감사를 표할 겁니다.”
에레즈는 대검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마치 그 검이 앞으로 주인이 될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제 손으로 직접 구할 수 있는 다른 선물도 생각해 봤는데…. 역시 그 사람에게는 검이 가장 가장 필요하겠죠. 저 때문에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지만, 원래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멋진 용병이니까요.”
“음…. 몇 가지 부분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만, 검이 필요한 건 맞지. 그 녀석은 우리처럼 몸을 변형시키지 못하니까.”
젠은 뒤통수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스승님과 달리 그 사람이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네요.”
“그 녀석 무투회에도 나가지 않았던가? …아, 맞다. 거기서는 무기를 통일하지.”
“네. 8년 전에도, 지금도, 워낙 많은 일이 있었다 보니….”
에레즈가 아쉬워하며 미소 지었다.
“역시 가장 좋은 건 그 사람이…. 칼리번이, 검을 쓰지 않는 거겠지만요. 그러려면 제가 더 노력해서, 왕성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취급을 받으니까 도망치는 거지…. 내 신세야.”
칼리번과 있을 때와 달리, 젠과 대화를 나누는 에레즈는 훨씬 어른스러웠다. 낮에 일하면서도 그런 에레즈의 모습을 종종 보아 왔다. 그럴 때마다 칼리번은… 기분이 이상했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이 검이 칼리번의 성에 찰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 녀석이 원래 쓰던 것보다 더 좋은 검인데?”
“손에 익은 무기를 잃은 병사 중에 수족을 잃은 것처럼 힘들어하는 경우를… 보았거든요.”
좋은 검을 여러 개 구해서, 칼리번에게 선택할 수 있게 한다면 좋았을 텐데. 에레즈가 중얼거렸다.
“리론 후작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보기에 이 검도…. 그 사람이 쥐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사실 칼날에는 도금을 하고, 손잡이에는 보석을 박고 싶었습니다. 아직 왕국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아니, 절대 싫어할걸.”
“보석으로 장식을 못 한다면 하다못해 쌍검을….”
“이만한 검을 양손에 들고 다니면 앞이 분간되겠냐?”
“칼리번….”
“…너, 내 말 듣고는 있어?”
칼리번은 그들의 대화를 끝까지 듣지도 못한 채 그곳을 황급히 떠났다. 그러나 그의 종착지는 창고가 아니었다.
* * *
<자신이 음탕한 오메가라는 사실도 고백 못 하고…. 겁쟁이 같으니!>
“크윽, 흐으…. 내 머릿속에서, 꺼져…!”
철퍽, 철퍽, 진흙이 된 땅을 짓뭉개며 칼리번은 달렸다. 굵은 빗물기가 그의 몸을 때렸다.
<네가 겁이 많다는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내 발밑에서 아이처럼 울곤 했으니까. 에레즈도 그 사실을 알까?>
“제기랄, 닥쳐!”
<아아…. 알게 되면 상처받을 텐데. 자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변해 버렸다고 울고 말겠지.>
비는 무서울 정도로 내렸고 종종 번개까지 쳤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성 밖은 빗물로 땅이 물러 버렸다. 칼리번은 웅덩이에 발이 빠지기도 했고 반죽처럼 물컹한 지반을 잘못 밟아 휘청거리기도 했다.
환영이다, 환청이다! 칼리번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에어리얼은 이미 죽었다. 그 녀석과 함께…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크윽!”
그 순간, 칼리번은 발을 접질리고 말았다. 커다란 몸이 진흙 위를 한바탕 굴렀다.
<불쌍한 칼리번…. 본능을 왜 거부하려 드는 거지?>
“허억, 허억…!”
<손가락만 까딱해도 세상 모든 알파가 네 편이 될 텐데…. 넌 네 힘을 낭비하고 있어.>
“큭……. 그만, 그만해…. 좀 닥쳐…!”
<오메가가 발정을 참다니, 짐승이 어금니와 발톱을 뽑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칼리번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숲의 밤은 왕성보다 훨씬 검다. 자신이 어디까지 도망쳤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제발….”
빗물이 칼리번의 얼굴과 몸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가 힘겹게 일어났다. 그리고 다친 발을 끌며 걸었다. 멈추는 순간 다시 환청이 들려올 것 같았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피하고자 무슨 짓이든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에게 몰이를 당하는 양처럼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칼리번은 절뚝거리며 어둠 속을 방황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왕성과 달리 숲은 마물의 영역이기 때문에, 밤이 되면 달빛 외에는 의지할 만한 빛이 없었다. 특히나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밤에는 먹구름이 달을 가려 한 치 앞도 구별하기 어렵다. 굵은 장대비는 시야를 가리고 땅을 질척하게 만들어 발목을 붙잡는다.
그런데도 그는 광인처럼 가만 있지를 못했다. 마물이 보기에는 더없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일 것이다. 에어리얼의 ‘의식’이 실패한 이후, 인간들은 철저하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사냥감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칼리번의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쳤다. 어둠뿐이던 숲에 잠시나마 빛과 그림자로 구별되었다. 어둠에 가려졌던 짙은 몸과 새까만 머리카락이 훤히 드러났다. 동시에 숲에 숨어 있던 수십 개의 눈이 번갯불에 번뜩였다.
“하아…. 하아아….”
마물들은 입맛을 다셨다. 뒤뚝거리는 발소리로만 들리던 희생양은 인간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쿠쿵, 천둥이 뒤늦게 울렸다.
“으…윽…!”
열기를 빼기 위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던 칼리번은 줄이 끊어지듯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런 실수는 없을뿐더러 넘어지는 순간 나무를 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졸도한 사람처럼 진흙탕 위로 철퍽 떨어졌다.
“크윽! 하, 하아….”
차가운 비를 흠뻑 맞았으나 몸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벌린 입에서 입김이 절로 새어 나왔다. 흙탕물이 입 안에 들어가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으…. 큭….”
진흙과 섞인 돌, 잡초, 나무껍질 등의 감촉이 가슴과 배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움찔 떨렸다.
‘이대로, 기절하면… 위험해….’
칼리번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간신히 고개는 들었으나 눈앞이 어지러워 결국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칼리번이 엎드린 채로 비를 맞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 칼리번을 호시탐탐 노리던 마물들이 거리를 좁혀 왔다.
‘피해야… 하는데…….’
칼리번도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로는 판단이 섰으나,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아 진흙탕 위에서 팔다리를 까딱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아니, 머리와 달리 몸은 오히려…. 알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읏…….”
마침내 마물 한 마리가 칼리번에게 닿았다. 온 신경이 마물과 닿은 손끝에 집중되며, 쥐라도 날 듯이 긴장이 바짝 들었다. 칼리번은 엎드린 채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것이 그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전신이 회색 털로 뒤덮인 늑대 형상의 마물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늑대와 달리 앞발이 좀 더 길고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마치 거대한 유인원처럼….
마물은 칼리번의 몸에 코를 들이밀고는 곳곳의 냄새를 맡았다. 자꾸만 빗물에 씻겨 나가는 오메가의 향기를 좀 더 맡고 싶은 모양이었다. 축축한 코가 뒷덜미와 등을 지나 허리께를 뒤적거렸다. 잠자리에 들기 전 가볍게 차려입은 셔츠가 긴 주둥이에 밀려 올라갔다.
어깨와 엉덩이를 잇는 허리의 곡선이 마물 앞에 드러났다. 떡 벌어진 어깨와 팔근육, 말처럼 팽팽한 허벅지와 달리 허리 아래쪽은 비교적 가는 편이었고, 움푹 들어가 있었다. 다른 마물이 발 주변으로 다가와 칼리번의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엉덩이마저 드러나자 허리 위로 빗물이 고였다. 그러나 마물에게는 그리 중요치 않은 근육이었다.
“아, 읏….”
마물의 주둥이는 노골적으로 다리 사이만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빗물에 흠뻑 젖은 옷이 마물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하아…. 안 돼….”
칼리번은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풀어져 있었다. 말과 달리 몸은 옷을 거추장스러워하고 있었다. 몸을 짓누르는 젖은 천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빗물을 맨몸으로 맞고 싶었다. 마물과 더욱 밀접하게 접촉하고 싶었다.
그런 칼리번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물의 앞발이 칼리번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사람의 손과 비슷하지만, 손가락이 네 개뿐이었으며 칼리번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도 반이 남을 정도로 큼지막했다.
“하아, 흐윽…!”
마물이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인간처럼 섬세한 손이 없는 그것은 오메가의 몸을 가리는 천을 무참히 찢어 버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발가벗은 채로 왕성에 돌아가야 하는데도….
마물에게 옷이 벗겨지다 보니 엎드려 있던 칼리번은 어느새 바르게 누워 있었다. 몸에 진흙이 묻었으나 빗물에 금세 씻겨 내려갔다. 근육이 차오른 단단한 몸은 일반적인 마물 혼혈과 달리 체모가 적은 편이었다. 물론 그의 머리카락이나 다리 사이의 음모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가슴은 빨리기 좋게 깨끗했다.
마물의 젖은 털이 맨살 위를 오갔다. 비에 젖어도 뻣뻣한 것이 마치 몸 위로 솔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자극이 고통스럽기는커녕 더욱 몸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늑대를 닮은 마물은 횡재한 셈이었다. 거절하지 않는 오메가의 다리를 붙잡고 주둥이를 사타구니에 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마물은 유독 긴 혀로 회음부를 핥았다. 오메가의 구멍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윽…. 큿…!”
차가운 빗물과 대비되는 뜨겁고 축축한 감촉에 허리가 절로 곧추섰다. 발정 난 오메가의 몸에서는 이미 애액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물은 그것을 정신없이 핥아먹었다. 혀가 구멍 주변을 핥다가 구멍 안으로 파고들려 했다. 그럴 때마다 칼리번의 허리가 뒤틀리고, 허벅지가 움찔거리며 안쪽으로 오므라들었다.
“아, 아앗…. 그, 그만……둬…!”
오메가가 신음을 뱉으며 기뻐하자, 숨어 있던 다른 마물들도 하나둘씩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칼리번의 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파를 적극적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흐윽, 흐…읏…….”
아, 에어리얼의 망령이 속삭인 대로 진작에 왕이나 젠을, 아니면 그 둘을 전부 끌어들였어야 했던 것일까? 칼리번은 헐떡거리며 후회했다. 어둠 사이로 에어리얼의 환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안 돼….’
이런 상황에서도 칼리번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알파 앞에 다리를 활짝 벌리는 것이 오메가의 어찌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칼리번이 좋아하겠죠? 검이 없어서 아쉬워했으니까….>
견디지 못해 도망쳤으면서도, 막상 이런 상황에 이르자 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앗! 아, 앗…. 윽…!”
칼리번은 마지막 힘을 짜냈다. 이로 입술을 세게 깨물자 입가에 피가 고였다.
“크윽……. 물러, 나….”
그가 명령했다. 그러나 늑대 마물은 반응하지 않았다. 빗물이 끊임없이 그의 피와 향기를 씻어 내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아, 윽……!”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추위와 열기라는, 정반대의 감각으로 떠는 손으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끄윽…? 크으…. 크아아아악!”
그 순간, 칼리번의 몸 위에서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늑대 마물의 기세에 눌려 감히 오메가를 차지하지 못했던, 주변의 마물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늑대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마물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의 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살점과 핏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와 섞여 칼리번의 얼굴과 몸 위로 투둑, 툭 쏟아져 내렸다. 초점을 잃은 검은 눈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아…….”
몸을 뒤덮는 알파의 살점과 피… 아니, 알파의 향기가 더없이 황홀했다.
<그렇지?>
저 멀리서 에어리얼이 물었다.
“그래…….”
칼리번은 넋을 놓은 채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흠! 으흠, 흠….”
에레즈는 몇 번이고 헛기침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는 한 팔에 집채만 한 검을 안은 채 칼리번의 막사 앞에 서 있었다. 에레즈의 처소와 칼리번이 사용하는 창고는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에레즈는 과도하게 긴장한 나머지 바로 칼리번의 막사로 가지 않고 주변 거리를 돌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사람만 한 대검을 양피지 묶음처럼 가뿐히 안고 가는 왕의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그 검은 온통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가장 안 어울리는 두 가지를 한데 묶은 채 왕은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보다 놀라워하는 부분은 꽃처럼 가벼워 보이는 대검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이렇게 밝은 분이셨나?’
원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는 에레즈였으나 오늘은 특히나 그러했다. 수심에 찬 평소와 달리 뺨이 붉고 표정은 선명했다. 미인은 얼굴이 아니라 태도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에레즈는 키나 체격으로 보았을 때는 여타 알파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처연한 기색과 흘리는 분위기가 그를 색이 옅은 미인이라고, 단체로 착각에 빠뜨렸다.
사실 이전의 에레즈는 독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칼리번을 찾기 위해, 그리고 칼리번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항시 신경을 곤두세웠고 신용병 연합을 견제하기 위해 강한 사내의 모습을 추구했었다. 그러나 정신적 기둥인 칼리번이 곁에 있으니, 조금씩 본인의 성정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그런데 오늘은 위엄이 넘치지도 처연하지도 않았다. 그저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에레즈와 마주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였다.
‘비가 잠시 그쳐서 다행이야. 젖지 않은 채로 전해 줄 수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눈을 비비적거리거나 말거나 에레즈는 그저 칼리번 생각뿐이었다. 며칠째 비가 내렸으나 다행히도 오늘 오전은 개었다. 에레즈는 맑은 날씨에 선물을 줄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같은 길을 세 바퀴 정도 돈 후에 에레즈는 칼리번의 막사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세월을 보냈다. 감히 칼리번을 부를 자신이 없어서 그가 나올 때까지 서 있었다. 하지만 하나도 지겹지 않았다. 오히려 칼리번과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그렇게 반 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이었다.
‘이상하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지?’
평소에 칼리번은 에레즈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곧장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흠, 흐음…. 카, 칼…리번?”
에레즈는 헛기침하고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괜찮다면, 들어가도 괜찮을까?”
에레즈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제 말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드, 들어갈게….”
그러나 천막 너머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니, 아예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의 고요였다.
“……!”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꽃에 감싸인 거대한 칼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칼리번!”
에레즈는 망설이던 태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히 칼리번의 숙소로 들어갔다. 낡은 막사는 아무런 잠금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창고이기도 했고 칼리번이 원치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놔둔 것이 화근이었다.
“…칼! 어디 있는 거야?!”
칼리번답게 사람들을 도우러 갔거나 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그가 오늘 일터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근처에서도 칼리번의 검은 머리 한번 보지 못했다.
창고 뒤에 숨겨진 좁은 공간은 한번 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했다. 심지어 누군가 침입한 흔적조차 없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난 것도 아니었다. 마치 칼리번 한 사람만 증발한 것처럼, 그의 흔적만은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 *
칼리번이 사라졌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전하께서 찾으시는 알파의 이름도 모르는지라….”
에레즈는 칼리번이 일을 돕는 구역의 관리인과 백성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몇 번 말을 걸어 본 적은 있는데 딱히 대답을 없던 터라…. 행방은커녕 아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왕성 대부분이 파괴된 후로, 엄격하게 구별되었던 알파와 인간 간의 경계는 크게 허물어졌다. 구역을 나눠서 일하기는 하나 서로 섞이는 일도 잦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족 간의 대화도 늘게 되었다. 알파 중에는 인간 사내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시답잖은 대화를 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답게도 매일 묵묵하게 제 할 일만 했다. 예년에 비해 비가 불규칙하게 오다 보니, 후드를 쓰고 작업하기도 해서 알아보는 이는 더욱 적었다. 그마저도 더없이 칼리번다웠기에 에레즈는 더욱 초조해졌다.
“전하. 젠 단장님께서 신용병 연합에 면담을 요청했으니 그 결과를 기다려 보시지요.”
에레즈의 곁을 지키던 로위나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알겠다. …그래야겠지.”
에레즈는 평정을 가장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칼리번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감정이 드러나는 모양이다.
‘칼리번의 정체를 아는 알파들이 무단으로 침입했다든가….’
에레즈는 자꾸만 피어오르는 불길한 상상에 고개를 저었다. 이와 같은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용병 연합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왕성의 알파들은 분명 에레즈의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병은 여전히 신용병 연합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역시 내 정체를 드러내고 신용병 연합을 흡수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에레즈의 정체를 아는 이는 아직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는 아직 순수한 인간인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릴만의 반역도 그렇고, 용병들이 자신의 권한 밖에 있으니 이렇듯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의심만 커져만 갔다.
만일 이번 일이 가벼운 사건으로 끝난다면 이후로는 그들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신용병 연합에 영향력을 미칠 방도를 고려해 봐야겠다고 에레즈는 묵묵히 결심했다.
“…….”
한편, 곁에서 왕을 지켜만 봐야 하는 로위나의 심정 또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붉은 오메가로 인해 수난을 겪었던 로위나로서는 왕이 일개 알파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고 이토록 흔들리는 것이 불편했다. 비록 에레즈 덕분에 모두가 목숨을 건졌다지만, 리론 후작은 되살아난 후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전하를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는 심란함을 충성심으로 억눌렀다. 결국 마지막에 황금의 비를 내린 것은 왕이었으니까. 마지막까지 에레즈를 따랐던 기사답게 침묵으로 보필할 따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전하!”
그때, 젠이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막사로 돌아왔다. 꽤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럼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로위나는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어떻던가요, 스승님. 혹시 그쪽에서 발견되었습니까?”
에레즈는 로위나가 사라지자마자 젠에게 물었다.
“아니,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젠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푸른 보석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쪽에서 그 사람을 납치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찾아가셨다고 한들 행방을 알려 줄 리가 없겠죠.”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는 오드론이 칼리번에게 손을 댔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큭…….”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확실한 증거 없이 나선다면 어떤 반향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직 성밖에는 데릴만과 같은 반역자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에레즈는 신용병 연합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젠을 대신 보낸 것이다.
“진정해. 그건 아닐 거야.”
그러나 젠은 에레즈의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직접 대거리를 하고 왔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어. 오히려 놀라더군. 연기가 아니었어.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보증하지.”
젠은 에레즈를 진정시켰다. 왕에게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칼리번은 오드론을 완벽하게 굴복시켰다. 설령 납치를 당했다고 한들 그 정도 힘을 지녔다면 칼리번 스스로 헤쳐 나왔을 것이다.
“설마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젠이 물었다. 에레즈는 한참 후에서야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에레즈의 주먹 아래에는 낡은 지도가 있었다. 왕성 주변은 알파들로 득실거렸다. 자진해서 그곳으로 나갔을 리는 없지 않은가….
<칼리번 녀석, 떠나겠다는 헛소리를 하더라고….>
하지만 그가 그러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또 확신한단 말인가.
“…역시 칼리번은, 저와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웠던 걸까요?”
젠과 둘만 남게 되자 에레즈는 칼리번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던 본심을 털어놓았다.
“제가 마지막까지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서… 의지할 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서 떠나 버린 거라면…. 그렇다면….”
에레즈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히 붙잡아서는 안 되는 거겠죠.”
에레즈의 가장 큰 두려움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칼리번은 자신으로 인해 8년이나 끔찍한 공포를 겪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은 적에게 세뇌되어 그의 몸에 성검을 꽂았다. 에레즈는 그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고통의 원흉이자 붉은 오메가의 부역자와 함께 지내는 것조차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
“……큭.”
돌이켜 보면 칼리번에게는 미숙하고 바보 같은 모습만 보였다. 야생화 군락지에서 잔뜩 실수했는데도 칼리번은 특유의 단단함과 포용력으로 받아 주었다. 칼리번을 기쁘게 만들어 왕성에 머무르게 하고 싶었는데, 도리어 에레즈가 다시 한번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곱씹을수록 후회만이 쌓여 간다. 에레즈는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긴장된 나머지, 칼리번에게 지난 8년 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가끔 정적이 찾아왔을 때, 칼리번은 텅 빈 표정으로 앉아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것이 괴로워서 자신도 모르게 계속 지껄이기만 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말을 하다 보면 칼리번은, 투박하지만 온기가 담긴 위로를 건네주었기에….
정작 자신은 칼리번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 탓일까? 그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니 당혹스럽기만 할 뿐 어디로 갔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칼리번….”
에레즈는 쓰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자리를 비우더라도 너한테 말없이 사라질 녀석이 아니야.”
젠은 괴로워하는 에레즈를 보며 무거운 입을 뗐다. 그녀는 칼리번이 오드론을 상대하던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보았다. 칼리번이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기꺼이 무릎을 꿇은 알파에게 명령한 것은 오메가인 자신이 아닌 왕을 향한 복종이었다.
“그런 녀석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면 그건 본인이 뭘 숨기고 있다는 뜻일 거야.”
한참을 고민하던 젠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8년 전에 나한테 널 뜬금없이 던져 줬을 때도 그랬거든. 구린내가 나는 그 느낌이… 그때와 비슷해.”
그러고는 갑자기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에레즈의 외투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숨겼을까…. 그때는 너였지. 그러면 지금은….”
“스승님…?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에레즈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칼리번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실은 말이다, 에레즈. 음…. 지금 일과 얼마나 관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너한테 못한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래도 말해야겠다. 칼리번 녀석한테는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만.”
그녀는 에레즈에게 망토를 던져 주며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야. 내 예상이 맞다면 끝장을 봐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일 테니까.”
“…….”
“성안이든 밖이든, 감히 그 녀석한테 손댈 수 있는 존재는 너 말고 아무도 없거든.”
에레즈는 푸른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칼리번은 더는 비를 맞고 있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끊임없이 빗소리가 들려왔다.
“으, 흐윽….”
칼리번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멀리서 들리는 빗소리보다, 천장에서 똑, 똑,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렸다.
“여기는….”
동굴인 모양이었다. 깊은 동굴 안에는 마물이 터를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다행히도 칼리번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군.’
하긴, 마물이 있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윽….”
칼리번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균형감각이 무너진 것인지 가만히 있어도 어지러웠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에레즈에게서 도망치듯 왕성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는 결국 정욕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다. 오메가의 냄새를 맡은 알파들은 칼리번은 범하려 들었다. 당시 칼리번은 그것들과 싸울 기력조차 없었다.
‘알파를 부려서 이동한 건가…?’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랬다면 지금 즈음 그는 마물들에게 위아래로 노팅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 잠에서 깼을 때 들었던 의문과 같은 결론이다.
칼리번은 제 몸을 살폈다. 피부색이 짙고, 주변이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온몸이 욱신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멍이 올라올 것이다.
‘몸이 알아서 여기까지 기어 온 걸지도….’
정신을 잃고도 귀소본능을 발휘할 정도라면 그만큼이나 익숙한 장소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설마, 여기는….”
칼리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야광 이끼가 주변에 깔려 있어서인지 식별이 어렵지 않았다.
용병에게 집은 없다. 인간들은 마물의 피가 섞인 이들은 평생 한 곳에 뿌리내릴 수 없는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고는 했다. 운 좋게 인간들과 섞여 살았던 칼리번도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항상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칼리번은 괜히 야광 이끼를 손으로 뜯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하얀 조약돌 무더기와 커다란 돌멩이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에레즈의 흔적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쏴아아, 멀리서 거센 빗소리가 들렸다. 칼리번은 고개를 들어 뻥 뚫린 동굴 입구를 보았다.
“닫아야….”
지금은 운이 좋았으나 정신이 흐려지면 또 알파가 몰려올 것이다. 아니, 부를 것이다. 동굴 밖에는 예전에도 사용했던 거대한 돌이 있을 것이다. 그걸로 입구를 막는다면 비로소 쉴 수 있겠지. 칼리번이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크윽…!”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자빠지고 말았다. 턱과 얼굴이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입을 열기라도 했으면, 이빨이 부러졌을 수도 있었다.
“하아…아, 아윽…!”
정신을 돌아온 탓일까? 몸에… 다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뺨에 닿는 유독 동그란 감촉을 느꼈다. 먼 과거의 에레즈가 만들었을 작은 돌무덤을, 칼리번은 기어이 몸으로 부숴 버리고 말았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몸은 차가운 감촉을 갈구했다.
“하아, 흐읍….”
이걸 삼키면 배 속이 차가워질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발정이 나 버린 오메가라면 다르다. 그런 미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슴에 눌린 돌멩이의 감촉이 서늘했다. 하얗고 동그란 돌은 사람이 하나하나 고른 것이기에 닿아도 아프지 않았다. 마치 에레즈처럼.
어느새 칼리번은 이끼와 돌을 움켜쥐고는, 그것으로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몸에 축축한 이끼가 묻어났다. 작고 동그란 돌은 가슴 안쪽에 자리 잡은 유두를 자극하기에는 제격이었다.
“큭…. 으, 흐으….”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런 짓을 하길 원치 않았다. 그러나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가 시켜서 하는 거라고 변명하지는 못하겠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번의 손에서 돌멩이가 떨어져 내렸다.
“에어…리얼….”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어둠을 노려보았다. 붉은 망령이 히죽 웃었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도망쳤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귀엽고 멍청한 칼리번.>
다시 한번 환청이 들려왔다.
“저리 가….”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그를 밀어냈다.
<내가 언제 네 명령을 들었지? 명령을 듣는 건 항상 너였지.>
악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왔다. 오만한 주인의 귀환에 칼리번의 몸이 절로 떨렸다.
“윽, 크으…. 저리, 꺼져…!”
에어리얼은 이미 죽었다. 그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지만, 그는 칼리번의 머릿속에서 번번이 부활했다.
<슬슬 인정하지 그래. 너는 지난 8년이 즐겁고 행복했던 거야.>
왜냐면…. 부정하면서도 매번 에어리얼에게로 도망쳤으니까.
<붉은 오메가에게 강제로 끌려와서, 원치 않는 교미를 억지로 당한 거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었던 것뿐이야. 날 증오하기만 하면 욕망도 채우고 동시에 에레즈 프리드웬을 향한 충성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다리 사이에 선 채 말했다.
“아, 아니….”
그렇지 않다고, 칼리번은 반박하려 했다.
<수퇘지 주제에 어디서 감히 말대답이야? 옛날처럼 등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채찍질을 당해 봐야겠어? 아니면….>
에어리얼은 채찍보다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발을 들어 그의 사타구니를 으깨려 든 것이다. 사내라면 응당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집어야 정상이었다.
“아… 으윽….”
그러나 열기에 지배당한 칼리번은 그 행위를 바라는 사람처럼 벌벌 떨기만 할 뿐, 다리를 모으지 못했다.
<지금 네 꼴 좀 봐, 칼리번. 이래서야 누가 네 말을 믿겠어?>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아랫배에 발을 얹고는 혀를 차며 웃었다. 근육질의 커다란 사내가 가늘고 작은 소년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 하아….”
에어리얼의 비아냥이 귀에 박혀 들었다. 팔다리가 없을 적에는 방어할 수단이 없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칼리번에게는 에레즈가 만들어 준 새로운 몸이 있었다. 그런데도 과거의 기억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려면 적어도 앞뒤는 맞춰. 내가 없으니까 마물에게 다리나 벌리고 있었으면서.>
에어리얼은 싸늘한 눈매로 칼리번의 몸을 훑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은 식탁에 올라가기 위해 털을 뽑아낸 짐승같이 매끈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발정하는… 뭐 그런 기적이라도 바란 거야? 넌 오메가고, 본성은 의지로 이겨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눈을 깜박이니, 에어리얼은 어느새 그의 곁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설령 에레즈 프리드웬과 교미를 하게 돼도, 결국 네 몸은 매일매일 새로운 알파에게 박히길 원할걸? …그게 오메가의 천성이니까.>
“큭….”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저주를 쏟아 냈다. 망령이 주는 쾌락에 검은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아니, 야….”
칼리번은 자신의 본능을 부정했다.
<뭐? 그렇지 않다고?>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얼굴에 귀를 기울였다.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그 귀를 물어뜯고 싶었다.
<그럼 왜 젖을 질질 흘리고 있는 거야? 왕자님은 여기 없는데 누구 배를 불리고 싶어서… 이렇게.>
“흐, 아앗…!”
에어리얼은 뭉툭한 가슴 끝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형체가 없는데도,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랫동안 에어리얼에게 길들여진 탓이었다.
“…크, 으….”
굴욕감에 칼리번의 목울대가 울렸다. 더는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으니, 오메가가 발정했다는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흰 액체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알파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오메가인데, 고행을 자처하다니….>
에어리얼은 혀를 차며 칼리번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만, 큭….”
환영에게 희롱당하면서도 칼리번의 아랫배는 꽉 조여졌다. 그 정도로 오메가의 육체는 타인의 접촉을 갈구하고 있었다.
<발정이 한참 남았던데, 사이좋게 지내 보자고. 같은 오메가가 아니면 누가 이런 널 이해해 주겠어?>
칼리번을 놀리던 에어리얼은 돌연 태세를 바꿨다.
<가끔 짓궂게 굴기는 하지만, 나는 너의 형제이자 친구야. …때로는 연인이기도 했지.>
“읏…. 하아….”
<자, 그러니까 이제는 내게 맡겨. 어차피 거부해 봤자야. 넌 나한테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달콤한 목소리가 이제는 몸을 넘기라며 속삭인다. 에어리얼은 살아 있을 때도 자기 자신을 일컬어 ‘유령’이라고 칭하고는 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에어리얼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서로의 몸이 기묘한 공생 관계를 이루다 못해 바뀌기까지 했던 여파일까?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또 다른 심장이 되어 사고 일부를 대신했다.
<우선은 열부터 가라앉혀야겠어. 급한 대로 근처의 알파를 끌어들이자.>
에어리얼은 칼리번에게 형제처럼 권유했다.
<들키면 에레즈가 화를 내겠지만…. 뭐, 어때? 그래도 상관없어. 감히 오메가를 거부할 수 있는 알파는 없으니까….>
“안… 돼.”
칼리번은 온 힘을 쥐어짜, 간신히 에어리얼에게 저항했다. 어둠 속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릴만은 아직 기억하겠지, 칼리번. 오메가에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가장 추한 결말을 맞았던 알파 말이야.>
에어리얼은 아예 칼리번의 곁에 자리를 잡더니 한쪽 팔을 괴고 누웠다.
<그 자식 말이야, 오메가를 멀리하면서 자신은 모든 알파들에게 인간 사내를 하나씩 안겨 주는 것만이 목표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곤 했지. 하지만 난 그 말에 속지 않았어. 왜냐면 오메가를 멀리하는 알파일수록 누구보다도 오메가에게 천착하는 법이거든. 오메가에게 관심이 없는 알파? …그런 게 있을 리가.>
“흐으, 하아….”
<왜냐면 우리는 알파가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거든. 알파 따위, 오메가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살아있을 이유도 없는 찌꺼기잖아.>
칼리번은 눈이 풀린 채 어느새 에어리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 겁먹지 마. 오늘 일로 네가 음탕한 오메가라는 사실을 에레즈가 알게 되어도, 넌 충분히 그 녀석을 다룰 수 있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기억도 지울 수 있고….>
에어리얼의 말을 듣다 보니 오메가의 힘을 조절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지난날들이 우습게 여겨졌다.
<…아니다. 그런 수고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겠어? 처음부터 에레즈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면 되는 건데. 여긴 마물밖에 없는 숲이야. 아무도 모를 거야…. 마음에 드는 알파와 하고 싶은 만큼 원 없이 하면 되잖아? 에레즈가 걸리적거리면, 교미를 마친 후에 죽이면 끝이야.>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살살 달랬다. 본능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교미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쇳덩이 같던 칼리번의 몸이 열로 달궈졌다.
<그래…. 잘하고 있어. 그렇게 해서….>
정신을 놓은 칼리번을 보며 에어리얼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아스터를 한 번 더 만들어 보자.>
그러고는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
그 말에 흐릿했던 칼리번의 정신이 더없이 또렷해졌다. 초점이 맞지 않던 검은 눈이 에어리얼의 허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어리얼은 빙긋 웃었다.
<나와 함께 재가 되어 버린, 가엾고 사랑스러운 아스터 말이야.>
“크, 으… 아악!”
칼리번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에어리얼의 환영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에어리얼에게는 실체가 없었다. 동굴 벽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작은 조각들만이 칼리번의 주먹에 박혀 들었다.
* * *
들꽃이 만개한 들판에 도달했을 때, 칼리번은 에레즈가 자신에게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에어리얼은 그에게 모든 기억을 보여 줬다고 했지만, ‘그 녀석’까지는 보여 주지 않은 것이다. 젠과 대화를 하면서 의심은 확신으로 굳혀졌다. 아마도 직접 진실을 말하라는 의미이겠지. 그 잔인함마저도 에어리얼다웠다.
뚝, 뚝….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동굴 안쪽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였다. 칼리번의 몸에서도 비슷한 속도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핏물이었다.
“하아…. 하아….”
칼리번은 형체가 없는 에어리얼에게 달려든 대가로 얻은 것 없이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자해한 흔적도 있었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바위에 이마를 박기도 했다. 코에서 흐르던 피는 말라붙었는지 입가의 피부가 뻣뻣하게 땅겼다.
<왕국이 안정되면 에레즈 프리드웬을 떠나겠다고?>
에어리얼이 어둠 속에서 칼리번의 말을 따라 했다.
<넌 절대로 못 떠나.>
칼리번이 철저하게 패배했지만, 그는 머리카락 한 올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네 욕심에 모두가 희생당하더라도 그 녀석의 곁에 있을 거면서. 그래서 진실을 알려 준 날 죽인 거잖아?>
“닥쳐….”
칼리번은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매섭던 전과 달리 흐물흐물했다. 툭, 작은 파열음과 함께 바위에 주먹이 맞았다.
“크윽…!”
칼리번의 몸은 팔을 휘두르는 힘조차 감당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숨기고 싶은 그 심정이야 누구보다 잘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이 꼴로 네 곁에 남았잖아.>
유령이 되어서 말이야. 에어리얼은 쓰러진 칼리번의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칼리번의 눈동자가 에어리얼이 있는 어둠을 노려보았다.
<저길 봐.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너도 결국 저기서 끝날걸.>
에어리얼은 손가락으로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어두운 동굴 안과 달리 그곳에는 희미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바로 절벽이다.
<이번 시기는 운 좋게 넘겨도 같은 고통이 영원히 반복되겠지. 네가 포기할 때까지….>
에어리얼은 칼리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레즈의 곁에서 망설일 것이다. 그러다 불행을 몰고 올 것이고, 결국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겠지. 에어리얼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넌 언제쯤 뛰어내릴지 정말 기대 돼.>
허공을 휘적거리던 칼리번의 주먹이 에어리얼에게 닿지도 못하고 땅으로 픽 떨어졌다.
<그때는 지옥에서 마중 나가 주지.>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가슴을 발로 짓누르며 음산하게 웃었다.
“후욱, 윽…! 후우…….”
칼리번은 숨을 간신히 입 밖으로 밀어냈다. 정말 그가 숨통을 짓누른다는 실감이 들었다.
“하아, 아윽…!”
불행은 연속해서 찾아왔다. 눈앞이 핑 돌면서 몸이 열기로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적. 수백, 수천 번을 승리하더라도 단 한 번 패배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리번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빠르나, 늦으나 결국… 자신에게 패배하겠지.
칼리번의 눈에서 땀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렸다.
“흐…으….”
칼리번은 젖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에어리얼이 붉은 머리카락을 내리며 즐거워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랐다.
<꼴사나운 모습 하고는.>
에어리얼은 칼리번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 녀석은 언제나 그랬다. 사람을 넝마로 만들면서 본인도 그만큼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악마의 눈물에 속아서는 안 된다. 동질감을 느낀 순간, 그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테니까.
“크으, 흐으….”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배 위에 올라탄 채로 그를 사정없이 압박했다. 유령에게 무게가 있을 리가 없는데도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손님이 찾아왔군.>
에어리얼이 한창 칼리번의 정신을 농락하던 그때였다. 먼저 기척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누가 왔을까?>
에어리얼은 칼리번이 들으라는 듯이 소리 내 말했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으나 에어리얼이 말하니 정말로 들렸다. 마물과는 다른 사람의 발소리다. 눈조차 감지 못했던 칼리번의 손끝이 움찔 튀었다.
<멍청한 칼리번. 그러니까 진작에 끝냈어야지.>
몸이 풀리지 않은 칼리번 대신 에어리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칼리번은 내버려 두고 발소리의 주인이 있는 곳까지 뛰어갔다. 칼리번 외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기에 부리는 자만이었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어.>
에어리얼은 키득거리며 불길한 예언을 흘렸다. 계속해서 걸어오던 그림자가 에어리얼의 환영을 뚫고 지나갔다. 망령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칼리번만을 홀로 덩그러니 남겨 둔 채.
칼리번은 에어리얼처럼 상대가 누구인지 살펴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겉모습보다 향기가 더 빠르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빗물에 짙어진 향기가 어느덧 동굴을 채웠다. 칼리번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이었다.
* * *
다가오는 발걸음은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반격할 채비를 하는지 묵직했다. 물을 잔뜩 먹은 망토가 질척한 소리를 냈다. 푸른 눈은 흡사 마물을 마주한 것처럼 사납게 번뜩였다. 발정이 든 칼리번의 오감은 예민해져 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습득했다. 그래서 진이 빠져 있었음에도, 상대가 몹시 성이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그동안은 혼자였기에 개의치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푸른 눈길 아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제야 칼리번은 자신이 발가벗은 상태이며 가슴에서는 흐릿한 젖이, 다리 사이에서는 애액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누가 보아도 눈살을 찌푸릴 만한 광경이었으며 상대가 알파라면 위험해지기에 충분했다. 에레즈는 그래서 성이 난 것일지도 모른다. 알파의 분노와 성욕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흥분한 알파가 다가오고 있다….
“…….”
…아니다. 그것과는 달랐다. 칼리번은 앞서 오메가의 향기에 발정이 난 마물들을 접했었다. 그들과 에레즈는 무언가 달랐다. 알파가 오고 있으니 발정이 난 몸은 반겨야 정상인데, 그러나 그는 다가오는 에레즈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크읏…. 흐으….”
부질없는 반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몸을 일으켜 그와 멀어지려 했다. 조금이라도 더 떨어져야 그가 오메가의 영향을 덜 받게 된다. 그러나 의지와 달리, 힘이 풀린 몸은 제자리에서 무의미한 발버둥을 칠 뿐이었다.
그사이 에레즈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칼리번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칼….”
칼리번은 보물 같은 사내를 지켜보는 일을 일과에 넣어 둘 정도로 주시하곤 했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작은 새의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도 항시 귀 기울여 듣곤 했다. 헤어진 기간이 길었기에, 그 공백을 채우려는 듯 오감은 언제나 에레즈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 버릇이 지금에 와서는 악재가 되었다. 외면하고 싶은 이 순간에도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에레즈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으나 자신이 젖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입을 다물고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
흥분한 알파가 달려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서늘할 정도로 푸른 눈은 가슴이나 다리 사이가 아닌 다른 곳을 유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피….’
칼리번의 깨진 이마와 코피가 묻은 얼굴이었다. 알파에게 달려들려는 몸을 막기 위해 아무 데나 머리를 박아댄 탓이었다. 칼리번은 그의 시선에 닿지 않는 에어리얼의 환영과 싸우느라 터진 양손을 가렸다.
그 순간, 장갑을 낀 손이 칼리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당황한 칼리번이 고개를 숙이자 이번에는 턱을 감쌌다. 에레즈의 손은 빗물에 푹 젖어 축축했다. 열이 오른 피부에 닿은 손길은 오싹하리만치 차가웠다. 이어서 그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당신을 다치게 한 거지?”
매일 칼리번을 찾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조금이라도 더 눈을 맞추고 싶어 칼리번이 있는 쪽으로만 고개를 기울이던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와 동일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아무도….”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는 실존하지 않는 망령과 자신뿐이었다.
“죄송, 합니다…. 전하…. 하아, 윽….”
자신을 해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칼리번은 왜 자신이 에레즈를 두려워했는지를 뒤늦게 이해했다. 어리석게도, 그가 이토록 화를 낼 만한 상황을 자초했기 때문이리라.
“…….”
칼리번이 사과하자 에레즈는 분노를 삼키는지 목울대가 울렸다.
“칼, 혹시… 숨기는 게 있다면 솔직히 말해 줘.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이니까.”
에레즈는 한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평소의 목소리를 일부러 흉내 내고 있었다. 칼리번은 그가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칼리번은 그가 잘못된 오해를 하기 전에 해명할 필요를 느꼈다.
“…아닙니다. 제가….”
“…….”
“제가… 스스로…. 하아…. 윽!”
그러나 칼리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뱉어 냈다. 자신의 알파가 곁에 있었다. 몸이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칼리번이 기침하자 분노를 두르고 있던 알파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알겠어. 더는 묻지 않을게. 당신이 괴롭다면 무슨 일이든 간에 내가 잘못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당장에 사람을 죽일 것 같던 기세 또한 단번에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일단은… 회복에 집중하자.”
에레즈는 안절부절못하며 쓰러진 칼리번의 몸을 제 무릎 위로 올렸다. 칼리번이 물러나려 하니 기어이 품에 안았다.
“내 힘을 나눠 줄게.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윽, 아닙니다, 그럴, 필요는…. 흐윽….”
그래서는 안 된다. 에레즈는 많은 힘을 쓴 탓에 몸이 텅 빈 상태였다. 이제야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힘을 크게 다친 것도 아닌 자신에게 써서는 안 된다.
“전하….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 더는….”
칼리번은 벌벌 떨면서 에레즈의 팔을 밀어냈다. 알파의 향기는, 그것도 에레즈의 향기는, 그에게 지독하게 자극적이었다. 칼리번은 최대한 그와 멀어져야만 했다. 지금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언제 또 에어리얼이…. 아니, 자신의 본성이 다가와 속삭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정말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어떤 오메가인지를 보이고 말 것이다.
“제발….”
다정한 손길은 교미를 위해 달려드는 마물보다 더 고역이었다.
“안 돼.”
하지만 에레즈는 칼리번의 어깨를 붙잡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몸이 가까우니 눈치챘을 것이다. 칼리번이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발정이 났다는 사실을….
“하아…. 읏….”
장갑을 낀 손이 맨살에 스칠 때마다 배 안쪽이 저릿했다. 칼리번의 호흡이 더욱 가빠졌다. 허벅지의 근육이 절로 떨렸다. 검은 눈이 더 강한 자극을 바라며 흐릿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럭저럭,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에레즈의 곁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는 오메가가 아닌 ‘칼리번’이어야만 했다. 할 줄 아는 것은 힘쓰는 일밖에 모르는 용병 말이다. 하지만 오메가의 본성은 번번이 칼리번의 발목을 붙잡았다. 칼리번의 존재를 눈치챈 마물들은 왕성 주변을 배회했으며 오드론과 같은 마물 혼혈들은 협상을 빙자한 반역을 권유했다.
‘역시 왕성을 떠나거나 죽는 것밖에, 답이 없는 건가….’
하지만 칼리번은 계속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과거의 에어리얼과 8년 전의 자신이 마물에게 휩쓸렸던 것은 모두 오메가의 능력을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메가라는 특성을 지울 수 없다면, 차라리 그 힘을 조종하면 되지 않겠는가?
칼리번은 왕성으로 마물이 침입하지 않게끔 밤마다 에어리얼의 조롱을 들으며 마물끼리 싸우도록 조종했다. 쇠약해진 에레즈의 앞길을 방해하려 드는 알파의 콧대를 짓뭉개기도 했다. 칼리번은 파도처럼 몰아치는 운명에게 무력하게 휩쓸리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쌓아 온 노력이… 지금은 최악의 방향으로 틀어졌다.
‘물이….’
에레즈의 몸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느껴질 정도로, 칼리번의 몸은 예민해져 있었다. 갑자기 성장해 버려, 소년과 청년의 모습이 혼재했던 8년 전과 달랐다. 지금의 에레즈 프리드웬은 어엿한 사내의 몸을 갖추고 있었다.
“하아, 윽….”
칼리번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유혹이었다. 에레즈는 알파의 본능을 억누른 채 오직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오메가의 본성이… 아니, 자신이 자꾸만 그 순수함을 배반하려 든다. 걱정해 주는 그 입으로 가슴을 빨아 주기를 원했다. 가지런한 이로 몸에 자국을 새기고 혀로 간지럽히기를 바랐다.
칼리번은 매일 밤 에레즈를 생각하며 아래를 더듬었다. 그러나 오메가 혼자서는 배출할 수 없었고 그는 에레즈가 없이 밤새 홀로 앓아야만 했다.
“저… 전하….”
이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듣고 있어.”
칼리번의 속내도 모른 채, 에레즈는 몸을 바짝 붙인 채 무의미한 간호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저, 저를… 여기에 두고 떠나십시오….”
칼리번은 에레즈의 젖은 옷깃에 손가락을 걸며 부탁했다.
“……그럴 수는 없어.”
에레즈는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 몸은, 지금….”
“칼리번.”
에레즈는 칼리번의 말을 의도적으로 잘라 냈다.
“당신은 다친 거야.”
고압적인 어투는 흡사 명령을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두워서… 그래, 주변이 어두워서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야. 손도 심하게 다쳤고….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두고 떠나겠어.”
그는 어둠을 핑계 삼아 칼리번의 상태를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 마물에게 공격을 당해서 조금 피를 본 것뿐이야. 그러니까…. 상처를 치료한 후에, 함께… 다시 왕성으로 돌아가면 돼.”
“…….”
“비도 오고 밤이 늦었으니까 당장 떠나기는 어렵겠고…. 일단은 여기서 밤을 보내는 수밖에 없겠어.”
에레즈는 살짝 미소 지었으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지 살짝 떨렸다.
“해가 뜨고 날이 개면…. 전부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만약 몸 상태가 계속 안 좋아서 내일이 와도 걸을 수 없다면, 내가 다 나을 때까지 간호해 줄 테니까…. 당신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예민해진 오메가의 감각이 에레즈의 변화를 눈치챘다. 알파의 눈가가 불긋해지고, 숨은 점점 미세하게 떨렸다. 오메가의 향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훤한 상황인데도 이토록 모르는 척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칼리번이 자신의 상태를 직접 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기세가 꺾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단지… 무한히 참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에레즈는 다친 칼리번의 손목을 꼭 쥐고 있었다. 혹여나 칼리번이 손을 뺄까 한 시도 힘을 풀지 않은 채였다. 전과는 달리 단단한 뼈대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쉽게는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전하….”
만약 에레즈가 힘으로 강제하고 밀어붙였다면, 칼리번은 마물을 불러서라도 그를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간절함을 어떻게 밀어낸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리번 자신이….
“하아…. 그러면….”
칼리번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제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결국 에레즈에게 물러지고 말았다.
“응, 무엇이든 말해.”
“제, 팔다리를… 부러뜨려 주십시오…. 그, 그다음에는 입에 무엇이든 좋으니… 마, 말을 할 수 없도록 재갈…을 물려 주세요.”
칼리번은 마치 열병에 앓는 사람처럼 벌벌 떨었다.
“…어째서?”
무엇이든 말하라고 했지만 이런 부탁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에레즈는 살짝 넋을 놓았다.
“그… 그게, 방법입니다…. 저는 오메가라, 러트와는 다르지만….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칼리번은 더듬거렸다. 머릿속은 열기로 가득 차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서 에레즈의 눈매가 사나워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라고 했잖아.”
에레즈의 목소리에는 여태껏 억눌러 왔던 분노가 서려 있었다.
“러트가 오면, 직접 풀어 주는 거라고… 당신이 그랬었잖아.”
“…….”
칼리번은 에레즈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거짓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지금의 칼리번은 거짓말을 되풀이할 기력도, 머리를 굴릴 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아…. 아….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칼리번은 눈앞이 어지러웠다. 가만히 숨만 쉴 뿐인데도 젖이 흘러나와 유륜 안에 고였다.
“더, 더는……. 하아…. 아윽, 하아….”
이대로는 에레즈를 유혹…. 아니,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오메가로서 본격적으로 기능하게 된다면 한 마리의 알파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겠지. 숲에 모든 알파를 불러들이고 몇 날 며칠이고 교미만을 반복할 것이다. 거기까지 이르면 더는 ‘에어리얼에 의해서 강제로’ 하게 되었다는, 같잖은 변명은 붙이지 못하게 된다.
단 한 번이다. 한 번이라도 고삐가 풀리면 끝이다. 발정이 올 때마다 무너지고… 더 강한 알파를 받아들이고 싶어 마계에 잠든 알파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마계의 알파들이 알아서 찾아오겠지.
결국 검은 손자국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말 거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목숨을 바쳐 다시 만들어 준 몸이었다. 왕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부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절대로….’
칼리번은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기 위해서였다. 에어리얼의 말대로 같은 운명을 반복하는 것이다. 답은 그것뿐이다.
“안 돼, 칼리번….”
그러나 그 기세를 알아챈 에레즈가 칼리번을 옭아맸다.
“가지 마!”
칼리번에게는 그 어떤 밧줄보다도, 심지어는 금사보다도 강한 두 팔로….
“놔주십, 제발…. 허억, 놓아….”
붙잡혔는데도 앞으로만 나아가려던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깨에 자꾸만 턱이 부딪쳤다. 순수한 힘만으로 따지자면, 그는 당장에라도 왕을 뿌리치고 무릎으로 기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칼…. 칼….”
마찬가지로 헐떡이는 숨소리에는 자신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더없이 애달픈 목소리와 함께 알파의 향기가 몸을 뒤덮었다. 칼리번의 몸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어째서 매번… 혼자서만 짊어지려 하는 거야?”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서로의 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앞에 두고 두 눈이 흐릿해졌다. 알파의 향기에 너무 오래 노출되었다. 맞닿은 가슴이 눅눅해지는 것이 느껴질 즈음….
“한 번쯤은, 나에게도 기회를 줘도 되잖아…!”
에레즈의 외침이 칼리번의 몸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칼리번의 뺨을 어루만졌다. 장갑의 감촉이 칼리번에게는 조금도 거칠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태어나기를,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어. 그런 날 구해 준 건 당신뿐이었어. 나를 위해 목숨마저 포기한 사람은…! 크, 윽….”
칼리번은 피부가 벗겨지지 않았고 근육이나 뼈가 드러나지도 않았다. 전부 에레즈가 재생시켜 준 덕이다. 그런데도 그의 손길은 그때의 칼리번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치유하고 싶다고, 살리고 싶다고….”
에레즈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이… 괴물을 인간으로 만들어 줬어.”
칼리번의 상처를 치료해 주곤 하던 그 눈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까, 나도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하게 해 줘. 돌이킬 수 없다면 갚을 수 있게, 당신을 지킬 수 있게 해 줘.”
눈물은 열이 오른 피부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칼리번, 당신이 없으면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말 거야.”
고독과 외로움조차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홀로 영원히 살아갈 뿐인 괴물로. 에레즈는 도움을 주려 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간청했다.
“흐윽…. 큿, 제발, 날 두고 떠나지, 마. 버리지 마…. 혼자 두지 말아 줘. 피를 흘릴 정도로 괴롭다면 차라리 내 머릿속을 조종하고, 지배해!”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을 끌어다 억지로 제 얼굴을 만지게 했다. 그 피를 묻혀 조종하라는 듯이.
“전하….”
칼리번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덜 닿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아니면 분이 풀릴 때까지 내 몸을 할퀴고 상처입혀. 나는 회복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윽…. 당신도, 알고 있잖아.”
에레즈의 손은 칼리번처럼 뜨거웠다. 칼리번이 알파의 향기에 자극을 받는 것처럼, 에레즈 또한 그러했으니까.
“…….”
아무런 애원도 통하지 않자 에레즈는 말없이 울먹거렸다. 푸른 보석안에 맺힌 눈물이 눈물길을 타고 칼리번의 몸에 비를 내렸다.
연기를 가라앉히고 불길을 식혀 주던 비…. 칼리번은 죽음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았던 그 비를 떠올렸다.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황금의 비를 맞았지만, 사실 칼리번의 몸에 떨어진 빗방울은 그것들과 아주 조금 달랐다.
그 비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작고, 늙고, 약한 마물은 잡아먹힌다. 그것은 짐승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일생을 서로 절벽 아래로 밀고 떠밀리고, 죽이고 빼앗길 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버려지듯 태어난 이상 두 발로 땅을 딛고 머리로 하늘을 받쳐야 한다. 무너지지 않은 척 버텨야만 한다. 쓰러지는 순간 물어뜯기고 말 테니.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다 풀썩 쓰러져 죽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칼리번이 보아 온 세상이었다.
칼리번은 살면서 부족함을 거의 느껴 본 적 없는 강한 알파이자 사내였다. 간혹 도움을 주고받기는 했어도 일방적인 보호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에레즈는 칼리번을 더없이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굳건히 지켜 왔던 신념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칼리번은 두 팔로 자신을 받쳐 주는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던 연약한 소년이었는데…. 자신 없이 성장해 버린 모습에, 헤어진 시간이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에어리얼에게 몸을 뺏기고 정신마저 무너져갈 때, 자신을 ‘칼리번’으로 유지시켜 준 것은 그가 남긴 기억의 조각들이기도 했다.
“전하….”
칼리번은 손을 뻗어 에레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가락으로 닦아 내고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뺨을 감쌌다. 손 위로 새로운 눈물길이 새겨졌다. 칼리번은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안 돼…. 나, 난… 그저… 당신을 지키고 싶은 거야.”
입술이 닿으려 하자 에레즈는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움찔, 떨리는 손길이 피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아…. 윽….”
더는 말을 할 기력조차도 없었다.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에레즈를 응시하면서 장갑 위로 제 가슴을 문질렀다.
“…응.”
망설이던 에레즈가 그 순간을 기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리번에게 입술을 맞대 왔다.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굳건하게 닫혀 있던 입은 쉽게 벌어졌다.
“음….”
칼리번은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자신과 다른 온도를 지닌 혀가 밀려들어 왔다. 어느 쪽이 더 뜨거운지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칼리번을 붙잡던 에레즈의 팔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더는 가까워질 수 없을 만치 서로의 가슴과 배를 맞댔다.
“하아…. 으, 으음….”
8년 만의 입맞춤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 자꾸만 코가 부딪치고 에레즈의 이마에는 칼리번의 땀이, 칼리번의 뺨에는 에레즈의 눈물이 덧발라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얼굴이 더럽혀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혀가 섞이는 소리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한없이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자신을 붙잡아 주는 손이 있다. 예전의 칼리번은 그 손길을 미련 없이 밀어내곤 했다. 둘이 죽는 것보다는 혼자 죽는 편이 누가 보아도 낫기 때문이었다. 그 상대가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지금,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이토록 소중한 존재인데 함께 추락하게 만들다니, 멍청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전부 드러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이해라든가, 교류와 같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개념이 아니었다. 강압이자 의무에 가까웠다.
이 세상에 남기를 선택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벌이었다.
* * *
더없이 소중해서, 그리고 아쉬워서.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거나 서로의 손을 쥐기만 했다. 폭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폐허뿐인지라 살아남은 모든 것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그래서 칼리번은 에레즈와 함께 별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두 발로 에레즈의 왕국을 걷고 성벽을 쌓는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화려한 사치였다. 가끔 두 손으로, 열 개의 손가락으로 금빛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만약, 칼리번의 몸이 말썽을 일으키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그러했을 것이다.
“하아, 흐읏….”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음…!”
그 작은 소리마저 흘리고 싶지 않은지, 에레즈는 칼리번이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맞대 왔다. 지난 8년을 벌충하듯 두 사람은 입술과 혀로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다 해 보았다. 혀를 섞고, 점막을 핥고, 입술을 깨물고 맞댔다. 숨이 모자라다 못해, 서로의 숨을 막는 지경이 되어도 헤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아, 전하, 천천히….”
간신히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에레즈는 칼리번의 뺨에, 코에, 그리고 턱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 칼리번은 숨을 헐떡이며 쏟아지는 입맞춤을 받는 데만도 정신이 없었다. 부족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자 젖은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어정쩡하게 얹어진 에레즈의 손도 함께 움직였다.
“흣…!”
가슴이 살짝 눌렸을 뿐인데도 칼리번은 고통을 느꼈다.
“…칼?”
칼리번의 눈꺼풀 위로 입술을 맞대던 에레즈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칼리번의 가슴만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읏.”
칼리번은 다시 신음했다. 에레즈는 고통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가슴에 뭉친 열기를 빼내지 않은 탓이었다. 젖이 가득 찬 가슴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근육이 부푼 정도로만 보였다. 제삼자가 더 강해졌다고 오해하면 모를까 이상함을 눈치채기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막상 손을 대 보면 놀랄 만큼 딱딱하고 뜨거웠다. 원래 근육은 그 능력과 달리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에 반해 지금 칼리번의 가슴은 몸을 조이는 코르셋처럼 호흡을 방해하고 있었다.
“…….”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달리 에레즈에게는 이런 몸을 다뤄 본 경험이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입으로 물었다. 빗물에 젖은 장갑을 이로 물어 벗기자 화상으로 얼룩진 하얀 손이 드러났다. 성검을 쥐지 않는데도 그의 손은 상처로 가득했다.
“…….”
검은 눈동자가 그 상처에 꽂혔다. 그러나 에레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맨손으로 남은 장갑을 벗겼다. 에레즈의 손을 본뜬 장갑은 마치 뱀의 허물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윽…!”
에레즈는 한결 부드러워진 손으로 칼리번의 가슴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러자 칼리번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빼내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힘을 풀어 줘. 칼리번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자 에레즈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읏, 네…. 하아…. 네….”
대답은 했지만, 긴장을 푸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에레즈는 주변을 살폈다. 동굴 안은 거칠어 눕히거나 벽에 기대게 하기에는 마땅치 않았다. 망토를 깔아 눕히려 했으나 지금 하려는 행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칼, 잠시만….”
에레즈는 마주 보던 칼리번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전하?”
칼리번이 고개를 틀었다. 등 뒤에 있다고는 하나 마주 보지 못하니 불편했다.
“이 자세가 편할 것 같아서….”
에레즈는 그런 그의 등을 받쳐 주며 두 팔을 배에 감았다. 하지만 어찌 감히 에레즈에게 몸을 기댈 수 있단 말인가? 칼리번의 몸은 도리어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에레즈는 그런 칼리번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칼리번의 뒷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입술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은 마치 토끼가 핥아 주는 것만 같았다.
“전하….”
칼리번이 원치 않아도 숨을 쉴 때마다 알파의 체취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옅고 산뜻한 향기였다. 그제야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품 안의 몸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낀 에레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하얀 손이 짙은 색의 가슴 위에 나란히 놓였다. 칼리번의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8년 전, 칼리번은 오메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 탓에 가슴이 막힐 정도로 젖을 쌓아 두기만 했었다. 칼리번이 한쪽 팔을 잃어 어찌하지 못할 때, 어린 에레즈가 그를 도왔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과거에서 배운 바가 없는지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흐읏…. 으음….”
칼리번은 자신의 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8년 전과 달리 에레즈의 손은 칼리번만큼이나 자랐다. 크기는 서로 비슷했으나 에레즈의 손은 투박하고 거친 칼리번의 것과는 달랐다. 곧게 뻗은 손가락은 손톱 모양마저도 가지런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손에는 화상 자국이 꽃잎처럼 새겨져 있었다. 평소에는 장갑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으나 이토록 가까이 몸을 맞대면 알아볼 수밖에 없다.
“하아…. 읏….”
미끼에 홀린 물고기처럼 칼리번은 긴 손가락이 제 가슴 위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딱딱해진 가슴을 크게 움켜쥐거나 손바닥에 힘을 실어 누르면 주변의 살이 자연히 밀려 올라갔다. 때때로 하얀 손은 양편의 가슴을 한데 모으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가슴 사이의 골이 깊게 팼다. 긴 손가락이 무심히 유륜을 스칠 때마다 고통 사이로 미미한 쾌락이 스쳤다.
“아, 흐…!”
강한 힘으로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자 막혀 있던 젖이 어느덧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리번이 몸속에 갇힌 거대한 열기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뿌연 젖이 유륜에 송골송골 고였다. 에레즈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더니, 하얀 손가락이 유륜 안쪽을 파고들었다.
“윽, 전…하?”
칼리번이 저도 모르게 에레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미안…. 밖으로 빼 두는 편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아….”
“전에도, 그랬었던 것… 같은, 기억이.”
에레즈는 칼리번의 귓가에 입을 대고는 속삭였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 습…. 으, 흐읏….”
가슴 전체를 주무르던 손길은 칼리번의 허락하에 가장 민감하고 좁은 곳으로 국한되었다. 에레즈의 손가락이 움푹 들어간 유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숨어 있던 유두가 손끝에 문질러졌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레즈의 손목을 계속 움켜쥐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중에서도 옅은 살결이었다. 에레즈는 손가락을 굽혔다. 그러고는 튀어나온 지골로 길게 오므린 유륜을 문질렀다. 지골과 엄지손가락으로 유륜을 가볍게 꼬집기도 하며 유두를 자극했다. 흘러나온 젖 때문인지 그 부위는 유독 말랑했다. 에레즈의 손끝에서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읏…. 흐으….”
끈질길 정도로 가슴만 자극을 받자 기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에어리얼의 손아귀로 떨어진 후, 알파들에게 아플 만치 빨린 적은 있었으나 이토록 섬세하게 만져진 적은 없었다. 마물에게 젖을 내줘야 할 유두가 자꾸 안쪽으로 숨어드니, 에어리얼은 조치를 취했다. 퉁퉁 부은 그곳을 날카로운 바늘로 뚫고는 푸른 보석이 달린 고리를 단 것이다.
그 후로는 마물에게 가슴을 빨릴 때마다 그곳이 찢어질까 두려웠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공포를 눈치챘는지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잡아당기곤 했다. 그 당시를 기억하는 칼리번의 몸은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숨어 있는 유두를 억지로 빼내려 들지 않았다. 다만 뻣뻣해진 목에 입을 맞추며 공을 들일 뿐이었다. 강렬하지 않은 자극에 부족함을 느꼈는지, 안쪽에 유두가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아, 앗….”
유두가 솟아오르자 에레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칼리번의 가슴을 세게 주물렀다. 밖으로 젖을 빼내기 위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가슴을 모으고, 유두가 다시 들어가지 않게끔 검지와 엄지로 끝을 쥐기도 했다. 쉼 없이 어루만지는 손길에 가슴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꽉 차올랐다.
“흐윽…!”
팟, 마침내 가슴 끝에서 하얀 선을 그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젖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두 줄, 세 줄로 나올 때도 있었다. 에레즈의 손이, 그리고 야광 이끼와 암석이 하얗게 젖어 갔다.
“아, 아아…. 흐, 읏….”
칼리번이 힛, 힛, 짧게 숨을 끊어 내는 동안 귓가에는 안도의 한숨이 달라붙었다. 곧 열기가 가라앉으리라. 에레즈의 숨결에는 그런 믿음이 묻어났다. 그러나 칼리번의 몸은 8년간 에어리얼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 정도에서 진정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알파가 가슴을 정성껏 애무해 주니 다음 차례로 아래가 쑤셔 오기 시작했다.
“하아…. 아아….”
칼리번은 쥐고 있던 에레즈의 손목을 저도 모르게 아래로 당겼다.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피하려 그토록 노력했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그저 가슴 속 열기를 풀어 준 그 손이 이곳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미안…. 늦게 눈치채서.”
에레즈는 게걸스러운 오메가의 욕망에 질색하기는커녕, 칼리번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여기는 내 손만으로는 어려우니까…. 잠시만 다른 손을 빌릴게.”
칼리번은 채근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의 일이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에레즈의 손이 칼리번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커다란 체격만큼이나 긴 다리는 잘 관리된 말처럼 탄탄했으며 매끄러웠다. 도드라진 근육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름답다고 칭할 만했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 위로 어느 순간 금사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주인의 손길을 따라 칼리번의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아….”
칼리번은 무릎을 세워 다리를 접고는, 에레즈의 수족 같은 존재들이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사이를 벌렸다. 예상되는 고통과 그에 따를 쾌락에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뱀이 칼리번의 몸을 점점 뒤덮기 시작했다. 장미 넝쿨이 순식간에 자라나는 것 같기도 했다. 금사는 위로는 칼리번의 어깨를 타 넘고 팔을 휘감더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내려왔다. 아래로는 발목을 붙들고 허벅지를 감아올렸다. 그런 칼리번의 모습은 피를 옷으로 삼기 위해 금장식만 두른 채 전쟁에 나서는 고대의 전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흣….”
허벅지 안쪽으로 감긴 금사는 에레즈의 손과 함께 칼리번의 성기를 휘감았다. 그러고는 뱀의 머리처럼 높게 고개를 들었다. 금사는 알파 없이는 사정조차 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오메가의 성기를 향해 날카로운 가시를 세웠다. 칼리번은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흐, 윽…. 아악…!”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낮은 비명이 나왔다. 팔이 잘리고, 그보다 더한 고문도 견뎠으나 가느다란 금사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금사는 귀두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좁고 가는 요도를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전하, 아, 아읏…!”
“움직이면 안 돼, 칼….”
“읏, 으큿….”
“금방 괜찮아질 거야…. 당신도, 나도 알고 있잖아. 그렇지?”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다 알면서….”
에레즈가 괴로워하는 칼리번을 달래는 와중에도 금사는 더욱 깊이 들어갔다. 가느다랗지만 선명한 감각은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꼼짝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똑같다는 것만 되새길 뿐이다.
칼리번의 팔근육이 팽팽해지자 금사는 양을 늘려 칼리번을 더욱 단단하게 옭매었다. 팔과 허벅지 위로 피부색보다 짙은 밧줄 자국이 남았다.
“아, 아윽…. 크윽…!”
칼리번의 얼굴 위로 굵은 땀과 눈물이 맺혔다. 그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틀었다. 그러자 가슴을 주무르며 고통을 덜어 주던 에레즈의 팔이 그의 배를 감았다. 금사를 밀어내고 싶은 것인지 아랫배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움푹 들어간 배꼽과 굳은 복근을 더듬던 하얀 손길이 어느덧 상처 자국에까지 닿았다. 에레즈는 옅은 음각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흣, 으읏…!”
에레즈의 의도와 달리 탄탄한 아랫배는 힘을 풀지 못하고 자극에 움찔, 움찔 떨 뿐이었다. 고통이든, 쾌락이든 끝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에레즈는 조금 더 과감하게 칼리번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흐, 아, 아아…!”
안쪽과 바깥쪽에서 동시에 자극을 받게 되자 더는 견디기가 버거워졌다.
“그, 그만…. 멈춰….”
칼리번의 입에서 절로 항복의 말이 나왔다. 그는 자랑인 두 팔로 에레즈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금사에 붙잡힌 지 오래였다. 그를 뒤에서 받쳐주는 에레즈의 허벅지와 함께 묶인 것이다. 칼리번이 아무리 피하려 해 봤자 몸을 숙이는 정도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미안, 하지만….”
에레즈가 곤란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러나 그의 손과 금사는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들어갔어.”
“으윽, 크으…. 아, 앗…!”
“곧이야, 조금만 더 하면 돼.”
에레즈는 굵은 성기를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다는 편이 어울렸던 금사도 점점 수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기한 것인지 아닌지 모호하던 칼리번의 성기는 고통에 비례해 점점 단단해지고 위로 뻗기 시작했다. 용병의 체격에 걸맞은 큼지막한 성기였으나 그 안을 오가는 가느다란 금사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흐읏, 흐으…. 더, 더는…. 빼… 주…!”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한 거짓 울음이 아닌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이상 자극을 받으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에레즈는 칼리번을 끝까지 몰아붙였다. 배 속에 고여 있던 열기가 솟아오르자, 성기의 핏줄이 울룩불룩 불거지며 박동했다. 그러나 사정을 하지는 못했다.
“칼…?”
“아, 아읏, 제발….”
칼리번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최근 몇 년간 그는 거의 사정하지 못했다. 에어리얼은 집요했지만, 또한 변덕스러웠다. 칼리번의 몸을 한껏 발달시켜 놨으면서 나중에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막판에는 번식을 위한 최소한의 부위만을 남겨 놨다.
그리고 마물들은 칼리번을 몸 안에 노팅하기만을 원했지, 오메가의 쾌락을 신경 쓸 지능은 없었다. 에어리얼이 마계에서 공수해 온 거대한 알파들은 오메가의 몸이 열리기를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성기로 오메가의 몸속에 숨겨진 입구까지 단번에 꿰뚫고는, 원하는 만큼 정액을 쏟아붓기만 했다.
그로 인해 칼리번은 간혹 앞으로 물을 흘리기는 했으나 알파에게 박혀 뒤로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앞은 점점 쓰임을 잊고 말았다. 그 탓에 에레즈가 앞을 뚫어 주어도 정액이 금사를 밀어 올리지 못했다.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에레즈가 다급히 칼리번의 몸 안에 박인 금사를 쥐었다.
“아, 아, 어서….”
칼리번은 목이 조인 사람처럼 헐떡이면서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아, 악…!”
마침내 요도의 뿌리 부분까지 박혀 있던 금사가 뽑혀 나갔다. 금사가 빠져나가는 섬뜩한 고통은 물론, 정액이 요도를 타고 귀두 끝까지 차오르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막혀 있던 젖이 터져 나올 때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짙은 액체가 귀두 끝에서 흘러나왔다. 한번 분출되기 시작한 정액은 멈출 줄을 몰랐다.
“흐, 아, 아아…!”
칼리번의 몸이 경련했다. 저도 모르게 에레즈의 다리와 함께 묶인 두 팔을 버둥거렸다.
“미안, 큭…!”
에레즈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비명을 들으면서도 칼리번의 성기를 연신 쓸어 올렸다. 정액은 젖보다는 훨씬 무게감 있게 떨어져 내렸다. 앞을 막아 주는 둑이 무너지기라도 했는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정액은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마치 몸속에 든 액체를 전부 흘린 것만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칼리번이 쏟아 낸 정액으로 하얗게 덮이고 말았다.
“흐으…. 으…….”
에레즈의 품에서 온갖 추태를 보인 칼리번은 그대로 뒤로 늘어지고 말았다.
“…칼.”
에레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아, 흐아…. 네….”
칼리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입을 벌려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뜨거운 숨을 헐떡인 탓에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에레즈는 그곳을 부드럽게 적셔 주었다.
“예전에 썼던 방법으로 계속 빼내다 보면, 발정이 끝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입술을 맞댄 채로 에레즈가 숨결을 불어 넣었다.
“흐으, 하아…….”
“그런데 이렇게 아파할 줄은…. 내가 안일했어.”
에레즈는 쓰라린 표정으로 고백했다. 혀를 얽는 도중에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괴로웠던 모양이다.
“으, 읏….”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정신이 몽롱했다. 자신의 알파와 혀를 섞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손이 묶여 있어 눈앞의 과실을 끌어당길 수 없었다. 대신 목이 마른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로 에레즈의 타액을 삼키며 목울대를 울렸다. 에레즈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멈췄다.
“…음.”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입이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받쳐 주고, 위로해 주고, 염려해 준다. 에레즈가 안겨 주는 안정감은 녹아내릴 만큼 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고 불안했다. 칼리번은 한 번도 이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첫 경험은 두 사람 모두 너무나 미숙했고 그다음부터는….
칼리번이 겪은 대부분의 교미는 에어리얼이 가했던 고문과 결이 같았다. 알파는 노팅만 할 수 있다면 오메가의 몸이 어떤 상태든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훼손되어 있을수록 반항이 덜 하니 좋아했다.
칼리번은 열에 시달려 휘청거리면서도 강제로 몸을 벌리고 밀고 들어오는 알파와 끝없는 전투를 치러야 했다. 폭풍처럼 몰아친 후에 남는 것은 끔찍한 고통과 절망. 그리고… 본능적으로 피어오른 쾌락에 대한 경멸뿐이었다.
“흐음, 읏…. 전하….”
가슴을 부드럽게 매만지자 칼리번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에레즈의 도움으로 몸에 쌓인 열기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장의 고난을 해치우고 나니 근원적인 갈증이 드러났다. 이제 괴로움은 아랫배에 몰려 있었다. 그것은 가슴을 쥐어짜거나, 성기 안쪽을 쑤시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
“손… 풀어 주십시오.”
칼리번이 말했다. 더는 발버둥을 치지 않는데도 그의 두 팔은 여전히 금사에 묶여 있었다.
“아, 으응…. 아프게 해서 미안.”
에레즈는 순순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금사가 풀리자 칼리번은 저릿거리는 손을 살폈다. 금사가 묶은 방향대로 선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
칼리번은 열기가 잠시 가라앉은 척했으나 눈은 여전히 흐릿했다. 그는 에레즈가 이상을 눈치채고 다시 금사를 사용하기 전에 서둘러 하얀 손을 쥐었다.
“칼…? 지금 내 손은… 깨끗하지 못한데….”
에레즈는 손등을 덮는 손길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개의치 않고 체액으로 젖은 에레즈의 손을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하아…. 상관없습니다. 저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에 보이는 화상 자국도 더는 칼리번의 본성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흐읏….”
칼리번은 망설임 없이 에레즈의 손을 제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칼…!”
푸른 눈이 순간 당혹감에 반짝였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는….”
칼리번은 에레즈를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밀부는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을 기대하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칼, 여기는 안 돼…. 이 이상은… 나도 위험해져.”
뒷구멍에 닿은 하얀 손이 당황했는지 주먹을 쥐려 했다. 칼리번은 그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에레즈의 손바닥에 밀어 넣었다.
“당신을 지키면서 버틸 자신이 없어….”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가락을 꼭 쥔 채로 만류했다. 다른 알파였다면 진작 이성이 날아간 채 정신없이 칼리번에게 삽입했을 것이다. 인내심이라기보다는 가히 신앙심의 경지였다.
“전하…. 부탁입니다. 제발…….”
칼리번은 머릿속이 멍해서 자신이 무엇을 애걸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제 안에… 넣어 주십시오. 그… 전하의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어서 에레즈의 일부를 이 안에 삼키고 싶었다. 그것만으로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
“…알았어.”
오메가의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아찔해진 에레즈는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의 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흐윽!”
칼리번의 몸은 언제든 알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굳이 안을 벌릴 필요도 없었다. 질퍽한 소리가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하아….”
원하는 것을 얻은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긴 손가락이 천천히 안을 오가자 치켜든 그의 턱이 덜덜 떨렸다. 쾌감이라는 단어 외에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뜨겁고 좁은 내벽이 손가락을 빗어내기라도 하듯 쉼 없이 조여댔다.
“읏, 칼….”
반면 에레즈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칼리번은 제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조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손가락만이라도 몸 안에 넣으려는 모습은, 오메가의 향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알파의 자제력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데 말이다.
“흣…!”
에레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귀는 막을 수 없었다.
“아, 하아… 전하…. 읏….”
몸 안을 휘젓는 손가락이 늘어 갈수록 칼리번의 신음도 늘어 갔다. 칼리번을 달래기 위해서, 라는 변명으로 에레즈의 손길이 조금씩 다른 의도를 띄기 시작했다.
8년 만이었다. 8년…. 에레즈는 칼리번을 되찾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도 알파에 지나지 않았기에 주기적으로 러트에 시달렸다. 대부분 젠의 도움을 받거나 자해를 해서 해결하였으나 간혹… 손으로 꼽으라면 그럴 수 있을 만큼 가끔.
에레즈는 칼리번을 생각하며,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솟아오르는 쾌락을 손가락으로 틀어막아 보았지만 결국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에레즈는 죽고 싶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하아, 앗…. 윽!”
손가락이 안을 오갈 때마다 더욱 안으로 파고들더니 마침내 뿌리 끝까지 들어왔다. 고작 두 개의 손가락일 뿐인데 내벽이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에레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리번의 몸은 오랜 용병 생활로 다져져 있었다. 사람 몸집만 한 대검을 휘두르며 쌓아 온 근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붙잡는 힘에도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칼, 읏….”
저도 모르게 눈을 뜬 에레즈는 눈앞의 광경에 이를 악물었다. 하필이면 가슴 위에서 흘러내리는 젖이 칼리번의 짙은 몸을 희게 적시고 있었다. 하얀 선은 보기 좋게 갈라진 복근을 타고 사타구니까지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에레즈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을 품는 칼리번을 상상하게 되었다.
“전, 하…. 흣, 아윽…!”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가락이 점점 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움직임 또한 더욱 거칠어졌다. 그러나 괴롭기는커녕 더욱 바라는 자신이 있었다.
서로가 함께 있을수록 위험해진다. 칼리번의 예상대로, 에레즈의 우려대로였다. 서로에게 악영향을 주고 수렁으로 빠져든다. 추락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뛰어든 이상 어느 한쪽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큿…. 아, 아…!”
내벽을 쑤시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단번에 빠져나왔다. 칼리번은 고개를 돌려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아직은 몸이….
“전하…? 윽!”
돌연 칼리번의 몸이 젖혀지더니 에레즈가 그를 끌어안았다. 칼리번은 그를 안은 채로 버티려 했으나 미는 힘이 훨씬 강했다. 두 사람은 얽힌 채로 함께 동굴 바닥에 쓰러졌다. 에레즈가 벗어 두었던 젖은 망토가 등에 닿았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혹여나 칼리번이 다칠까, 두 팔로 그의 머리와 허리를 감싼 채였다.
“전하, 갑자기 무슨….”
칼리번이 상체를 일으키기도 전에 에레즈가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읍, 으음…!”
에레즈는 칼리번을 무작정 짓누른 채 입으로 입을 막았다. 그 어떤 비난도 거부하겠다는 듯이. 그런 그의 본능을 대변하듯 금사가 칼리번의 몸에 감겨 왔다. 예전의 금사는 칼리번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 속박하거나 뼈를 부러뜨리곤 했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오메가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금사는 귓가를 어루만지고, 흉통을 끌어안고, 갈비뼈 사이의 근육을 쓰다듬는 등 민감한 부위를 건드리며 오메가의 긴장을 풀게 했다.
“후읏, 하….”
칼리번에게는 이미 등에 닿는 젖은 천과 울퉁불퉁한 돌조차 자극이었다. 그는 두 다리로 기꺼이 에레즈의 허리를 감쌌다. 허벅지에 마물의 머리를 끼워 으깬 적은 있었으나 이런 식으로 스스로 매달린 적은 없었다. 딱딱하게 발기한 알파의 성기의 윤곽이 회음부에 닿았다. 그 위용에 바지는 쓸데없어 보였다.
“하, 하아….”
칼리번은 떨리는 손으로 에레즈의 웃옷을 끌어당겼다. 그가 자신을 대해 주듯 조심스럽게 벗겨 보려 했으나 손은 섬세함을 잃은 지 오래였다. 에레즈는 늘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있었기에 이런 상태로는 더욱 벗기기가 어려웠다. 이러다가는 왕의 옷을 다 찢어 버리게 생겼다.
“칼….”
그러자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을 끌어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니, 망설임 없이 앞섶을 뜯어 버렸다. 툭, 툭, 단추가 떨어지며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나를 믿어 줄 수 있어?”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목소리.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칼리번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보다 에레즈를 더 믿고 있었다. 그가 약속을 잊지 않고 자신을 구하러 왔을 때부터….
“…응.”
에레즈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이미 반쯤 뜯어진 셔츠를 망설임 없이 벗었다. 황금의 비를 내린 후로 에레즈는 자신의 몸을 고집스럽게 가리곤 했다. 칼리번조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8년 전의 소년과도 같던 몸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단련된 체격은 물론이거니와….
“…….”
칼리번은 열기에 달궈진 숨조차 감히 내뱉을 수 없었다.
황금의 비로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다. 절단된 육체를 되돌아오고, 상처에는 새살이 돋고, 흉터는 아물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눈앞의 사내였다. 번개가 핏줄을 뚫고 지나간 것처럼 몸 곳곳에 채찍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칼리번의 배에 남은 흉터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그의 가슴에도 아물지 않은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 새살이 돋은 흉터는 옅은 분홍빛을 띠게 마련이나 그 상처는 조금 달랐다. 심장을 향해 찔러 넣고, 다시 한번 길게 그은 두 개의 자상. 얇게 비치는 피막 너머로는 황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황금을 녹인 물이 그의 안에 가득 채워진 것만 같았다. 마치 성스러운 물을 담은 잔처럼….
“보기… 흉하지?”
칼리번의 시선을 따라가던 에레즈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자신 없이 어른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토록 많은 상처를 얻었다. 검 없이 방패가 홀로 버틴 탓이었다.
칼리번은 손을 뻗어 황금빛 상처를 가려 주었다.
“…….”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이대로 밤새도록 있어도 그저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만 할 것 같다. 손만 잡고 있기에는 칼리번도, 에레즈도 열이 잔뜩 올라 있었다.
“아…!”
다리가 벌어지고, 접히고, 에레즈가 그의 안으로 들어왔다.
“흐으, 윽!”
누구보다도 알파를 바랐으면서 막상 삽입의 순간이 오니 칼리번은 허리를 뒤틀었다. 그의 몸 아래에 깔린 망토가 마구 구겨졌다.
오메가의 향기로 인해 강제로 발정이 온 알파의 성기는 흉측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귀두 아래로 혹이 몇 개나 솟아오른 거대한 성기가 안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칼리번은 누구보다도 튼튼하고 강한 몸을 가졌지만, 그런 그조차 알파의 성기는 고통스러웠다. 몸에 힘을 풀려 노력하는지 커다란 몸이 벌벌 떨렸다. 몸은 버거워하면서도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다른 알파가 아닌 에레즈가 돌아와 자신의 안을 차지하기만을….
“흐악, 아, 아…!”
칼리번이 숨을 내뱉을수록 에레즈는 그에게 가까워졌다. 그만큼 몸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몸 위로 스르르 흘러내렸다.
칼리번의 각막 위로 과거가 덧발라졌다. 에레즈의 첫 러트를 치를 때도 이러했다. 먼 과거의 일이 어제 일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에레즈는 한 팔로 칼리번의 다리를 벌리고는, 체중을 실어 자신을 전부 파묻었다.
“히, 으윽…!”
부푼 혹이 입구를 벌리며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접합부에서 쿨쩍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아랫배가 빳빳하게 차오르고 내벽의 주름이 벌어졌다. 어느새 칼리번의 엉덩이 위로 옅은 색의 음모가 닿았다.
“읏…. 하아…. 칼….”
에레즈는 8년 만에 다시 느껴 보는 칼리번의 감촉에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아아…….”
“흐읏…!”
서로가 각기 다른 쾌감을 억누르다 그만 눈이 마주쳤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배 속에 품은 채로 숨을 내쉬었다. 에레즈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푸른 보석안은 공을 들여 닦은 보석처럼 평소보다 더욱 반짝였다.
8년 전에도 이렇게 오래 헤어질 줄 알았다면, 그 미숙하고 서툴렀던 첫 경험은 달랐을까? 욕망에 휩쓸려 함부로 대하지 않고… 좀 더 소중하게 대했을 텐데.
에레즈는 슬픔을 삼키고 대신 칼리번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몸속의 성기를 조르듯 쥐어짰다.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그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속을 스치는 불규칙한 혹 때문인지 칼리번의 허리가 들렸다. 인간 사내는 귀두 갓 아래의 기둥이 매끈한 반면에, 알파의 성기는 귀두 아래로도 혹이나 가시가 돋아 성교가 훨씬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편이었다. 인간 사내에게는 내장이 파괴되는 고통을 주었지만, 오메가에게는 아니었다. 그 혹과 가시들이 내벽을 긁어내리며 오메가의 성감을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아, 으읏…!”
그러나 에레즈를 받아들이는 칼리번의 얼굴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몸이 재생된 후로 처음으로 맺는 교미였다. 새로 생긴 팔과 다리는 부드러워서, 다시 굳은살이 박일 때까진 꽤 고통스러웠다. 몸 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몸은 이미 충분히 젖어 있었지만, 에레즈의 성기를 품는 일이… 아니, 이런 행위가 처음인 것처럼 힘겨웠다.
“크… 으윽… 흐으….”
아프다. 몸속에 길을 내는 움직임이 쓰라려서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8년 전 러트를 보냈을 때,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흉기를 지녔다고 생각했었다. 그 감상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흉악해진 것도 같다.
이 행위가 낯선 것은 알파인 에레즈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푼 성기를 강하게 조여 오는 감각에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알파의 성기는 내벽이 짓누르는 방식대로 핏줄이 꿈틀거리고 혹이 움찔거렸다. 조금이라도 더 오메가가 원하는 형태로 변하려 드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변형시키고 길들여 갔다.
“하아, 아… 아앗….”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칼리번은 에레즈와 양손을 얽은 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찔걱, 찔걱,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처럼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을 제 몸으로 때리기를 반복했다. 알파의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뒤가 빠듯하게 벌어졌다. 몸속 깊은 곳을 찌르던 성기가 비면 오메가의 내벽은 전처럼 오므라들었다. 그러나 한번 벌어지고 나니 원상태가 되어도 어딘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아프기만 하던 아랫배가 어째서인지 간지럽다.
다른 알파와 억지로 교미를 맺었을 때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쾌감이 그를 유순하게 만들었다. 에레즈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쾌감과 함께 결합부에서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둘이서 함께 만들어 낸 소리였다. 그런 사소한 깨달음마저 몸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었다.
“칼, 하아… 으읏….”
에레즈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뜨거운 내벽과 눈앞에 무르익은 육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근육이 발달한 두 팔은 힘없이 늘어진 채 에레즈의 손을 쥐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긴 두 다리는 파고들 때마다 부드럽게 벌어졌으며, 때로는 떠나지 말라는 듯 허리를 감싸기도 했다. 허리를 뒤로 뺄 때면 탄탄한 아랫배가 꽉 조이고 움푹 들어간 배꼽이 위로 당겨졌다. 알파를…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훤히 보였다. 에레즈의 눈가가 붉어졌다.
“으응…. 흐, 으읏, 저, 전하….”
칼리번은 다른 알파와의 교미에서는 한 번도 내 본 적 없는 소리를 냈다. 창백한 몸과 구릿빛의 몸이 겹쳐질 때마다 끈적한 유백색의 액체가 둘 사이에 줄을 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파는 벼린 칼날처럼 모양을 갖추고 오메가는 무두질한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은 어느덧 검과 검집처럼 맞아 들어갔다.
“하, 윽… 칼….”
오메가의 모든 것이 자신을 허락하고 있다. 아니, 허락 이상으로 원하고 있었다. 그저 발정이 와서 알파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수 없이 반복된 역사였건만 에레즈는 감히 이 순간만은 다르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칼….”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을 꼭 쥐었다.
“이름….”
“네…?”
흐릿해진 검은 눈이 뒤늦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으로, 불러 주지 않을래?”
“……아, 아….”
칼리번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에레즈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억나, 칼?”
“으읏…!”
퍽, 에레즈가 칼리번에게 말을 걸며 몸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처음 러트가 와서…. 하아…. 아…. 내가 무서워했을 때, 당신이, 흣…. 알려 줬어, 이름을….”
에레즈의 속도가 빨라졌다.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가슴이 흔들리다 어느덧 아래가 부딪치는 충격만으로 젖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칼리번, 이라고….”
“그… 그건…. 흑, 아, 아…! 흐읏……!”
“마치 당신의 이름을 받은 것 같아서….”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어. 다정한 목소리가 쾌감과 함께 섞여 몸속으로 들어왔다.
“아, 아윽…!”
칼리번은 에레즈는 전부 품은 채로 몸을 떨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안에 머무르고는 있으나 멈춘 것은 아니었다. 체중을 실어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부푼 성기가 내벽을 고루 자극했다.
“그렇게, 나도 불러 줬으면 해….”
에레즈는 칼리번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고는 세상 순진한 청년처럼 속삭였다. 그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내 이름을 가져가.”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칼리번의 뺨의 쓰다듬고, 가슴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흐…으읏….”
칼리번은 목을 뒤로 꺾은 채 다정한 위협에 몸을 떨었다. 네 이름을 기억해 주겠다, 그 말이 금화 주머니보다 묵직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에레즈 프리드웬은 별처럼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에레즈의 러트를 해결하던 중, 그가 이성을 잃고 칼리번에게 달려든 적이 있었다. 그때 칼리번은 감히 허락받지 못한 왕의 이름을 불렀었다. 이름을 불러 주자 그는 괴물에서 다시 겁많은 소년으로 돌아왔었다.
그렇게 길고 험난한 세월이 흘러 눈물이 많았던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강요한다. 자신의 이름을 가져가라고…. 근원과 과정, 결말조차 죄악인 오메가와 알파의 교미에서, 당신만은 더럽혀지지 말라고.
그래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 그저… 열이 오른 성기 간의 결합에 불과하다. 그래도….
“에… 에레즈 님.”
한참 후에야 칼리번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존칭을 붙인 것은 그 나름의 타협이었다.
“응, 칼….”
그러자 에레즈는 젖은 얼굴로 웃었다.
“…….”
이상한 일이다. 비에 젖고 땀을 흘려 엉망인데도 이토록 아름답다니.
“좀 더….”
“…으윽?!”
“불러 줘.”
에레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아, 아…. 에, 에레즈 님, 아앗…!”
에레즈는 이제야 8년 전의 기억이 돌아왔는지 능숙하게 칼리번의 몸을 꿰뚫었다. 칼리번은 말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어설프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쉼 없이 추삽질을 하던 에레즈는 얼굴을 찡그리며 토정 했다. 오랜 시간 서로 헤맨 만큼 긴 사정이었다. 칼리번의 몸속으로 뜨거운 것이 퍼졌다. 까만 눈이 첫 사정을 하는 에레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만약 나중에 헤어진다해도 잊지 않게끔.
“하아….”
자신을 전부 쏟아 낸 에레즈는 스르륵 칼리번의 품에 안겼다. 칼리번은 숨을 쉬기가 버거웠지만, 기꺼이 받아 주었다. 8년 전에 비하면 묵직해진 에레즈가 그저 신기했다.
“…칼.”
그러나 잠시간의 평화였다. 에레즈는 두 팔로 땅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읏….”
칼리번이 얕게 신음했다. 여전히 아래는 연결된 채였다. 한차례 사정을 마쳤지만,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한 불씨가 피어올랐다.
“…….”
에레즈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숙여 칼리번에게 입을 맞췄을 뿐.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칼리번의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의 귀에는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앗…. 에레, 즈… 님…. 처, 천천히…!”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에레즈가 몸속을 오갈 때마다 유독 질은 소리가 났다. 정사가 반복되며 윤활제가 생겨난 탓이다. 귀두와 혹이 긁어내린 정액은 접합부에서 부글부글 피어올랐다.
어둠 속에서 몇 번이고 몸을 겹쳤다. 쾌감에 망가진 머리는 때때로 말하는 법마저 잊고 말았다.
“칼….”
자기 자신마저 잊을 것 같은 순간,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렇게 이성을 놓을 것 같을 때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이 행위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하는 애틋한 정사 정도에서 그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오메가의 발정은 그리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틀이 꼬박 지났음에도 알파의 교미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오메가의 몸속에 자리 잡은 입구는 열리지 않았고, 알파는 노팅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아, 읏…!”
벌써 수차례나 칼리번의 몸속에 사정했는데도 에레즈의 성기는 가라앉질 않았다. 오히려 욱신거리며 더욱 크기를 키웠다. 평상시라면 활동하는 것 자체가 불편할 정도의 크기였다. 오메가의 향기에 취해 강제로 발정에 들어선 탓에 이렇게 흉측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에, 레즈, 님…. 으, 으응…흣…!”
칼리번의 신음은 발음이 흐릿해졌다. 단번에 꿰뚫는 성기에 몸이 뻣뻣하게 굳고 허벅지에서는 경련이 일어났다. 두려울 정도의 쾌감에 칼리번이 저도 모르게 에레즈에게서 도망치려 하면 금사가 발목을 붙잡고는 몸을 활짝 벌렸다.
“칼…. 흐윽…!”
에레즈는 칼리번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다른 알파에게 이 몸을 느낄 기회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한시도 쉬지 않고 오메가의 몸에 닥친 열기를 빼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몸을 쉼 없이 들쑤시는 에레즈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는 오메가의 입구를 여는 데에 치중한 알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부딪치고 마찰할수록 몸과 정신은 자꾸만 뭉그러졌다. 연결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어디까지가 마물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인지, 그 경계가 자꾸만 흐트러졌다.
“흣, 칼…. 하아, 칼….”
에레즈는 자신을 칼리번의 몸 안에 깊숙이 묻고는 허리를 치댔다. 여태껏 평정을 유지한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칼리번의 몸속을 거칠게 탐했다. 땀이 배어 나온 피부는 서로 부딪치고, 결합부에서는 정액과 애액이 섞였다. 서로의 향기가 섞이며 오직 두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최음 향이 되었다.
알파들은 오메가의 피나 정액에서 나오는 체취에 대해 종종 언급하고는 했다. 주로 그 향기가 주는 쾌락과 복종을 강요하는 힘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칼리번은 자신의 체취를 느끼지 못했다.
“아, 아앗…!”
그런데 지금, 에레즈의 산뜻한 체취가 무언가와 엉켜 이전과는 다른 향기를 냈다. 자신의 향기와 섞인 것이다. 숨을 가득 삼킬 때마다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향기에 취할수록 정신이 몽롱해지고 교미를 더욱 갈구하게 되었다. 쾌감의 연쇄는 도통 줄거나 멈추질 않고 크기를 키워나가기만 했다.
“큭, 칼…. 그렇게, 조이면….”
안 돼. 안 돼….
에레즈는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내려 준 금실을 걸친 채, 조금이라도 더 깊게 이어지기 위해 내벽에 성기의 음각이 찍힐 정도로 쥐어짰다. 그 탓인지 때때로 에레즈가 허리를 뒤로 물려도 빠지지 않을 만큼 서로가 꽉 맞물렸다. 기쁨은 두 사람 사이에서 하얗게 흘러내렸다.
지친 두 사람과 달리, 알파와 오메가는 끊임없이 갈구했다. 칼리번의 의식이 나가떨어지자 오메가의 본성이 대신 육체를 차지했다. 검은 오메가는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적은 칼리번과 달리 애착이 깊고 매달리는 성미였다.
“아…앗…!”
칼리번은 가슴을 주무르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더 세게, 더 아프게…. 그리고 동시에 안을 쑤셔 줬으면…. 본성은 강직하고 둔탁한 정신과는 전혀 달랐다.
에레즈는 그의 가슴에 가볍게 입을 맞췄으나 절대로 젖을 빨지는 않았다. 오메가의 젖은 이 자리를 차지한 알파를 위한 식사였지만, 동시에 최음제이기도 했다. 이 이상 알파로서의 본성에 눈을 뜨면 우려할 만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에레즈는 그 점을 경계했다.
“흣…!”
칼리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다정함을 이해하지만, 가슴이 비는 것은 싫었다. 자신의 알파를 위한 젖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반복되는 교미에 머릿속이 점점 멍청해져 갔다.
그럴수록 몸 안에 자리 잡은 입구는 조금씩 열렸다. 대부분의 알파는 칼리번의 몸이 상처를 입든 말든 입구를 찾으면 무작정 찢고 파고들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입구 주변을 오가면서도, 그곳만은 닿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흐읏…. 님, 더….”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추삽질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에레즈가 더욱 깊이 들어오기를 바랐다. 몸이 열릴수록 칼리번의 의식은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에레즈가 몇 번이나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어도, 결국에는 알파가 노팅해 주기를 바라는 오메가가 되어 갈 뿐이었다.
“아, 앗, 제 안에….”
칼리번이 노팅을 애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스터를 다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붉은 망령이 속삭이던 말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아.”
칼리번은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하얗게 비워지던 머릿속에 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왔다고 해서 몸의 열기가 전부 빠진 것은 아니었다.
“하….”
그저 에레즈의 아래에서 흔들리며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어느새 붉게 충혈된 눈가 위로 물이 고였다.
“흣…!”
그때, 돌연 에레즈가 성기를 뽑아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칼리번이 에레즈의 팔을 붙잡았다.
“아….”
아스터….
칼리번은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으나, 그 이름은 완성된 단어가 되지는 못했다.
“하아, 하아….”
에레즈는 그런 칼리번은 흐려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칼리번의 안에서 몇 번이나 사정과 추삽질을 반복했으나 그는 성기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에레즈는 뽑아낸 성기를 칼리번의 성기 위로 걸쳤다. 그가 몸을 숙이자 성기끼리 부딪쳤다. 앞으로 느껴지는 자극에 방금까지 알파를 품고 있던 구멍이 움찔거리며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에레즈는 다시 삽입하지 않았다.
“윽….”
대신 그는 제 손으로 성기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흉흉한 살덩어리는 에레즈와는 별개의 마물인 것처럼 하얀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에레즈를 바라보던 칼리번의 눈이 커졌다.
“흐읏…!”
에레즈의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손을 놀렸다. 알파의 성기가 칼리번의 배 위에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정을 위해 꿈틀거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
칼리번은, 원래대로라면 제 배 속에서 일어날 일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칼리번의 성기와 에레즈의 성기는 마치 다른 종족처럼 달랐다. 물론 칼리번의 것은 그의 체격에 걸맞게 우람했으나 인간 사내의 성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화살촉 모양의 귀두는 두툼했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기둥은 곧은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그에 반해 에레즈의 성기는 내장을 헤집는 용도의 고문 기구 같았다. 진정시키려는 듯, 한 손으로 쥐었으나 부푼 성기는 곱절로 튀어나왔다. 오메가의 몸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크기를 키운 것이다.
“에, 레즈 님….”
정욕에 흐릿해졌던 칼리번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의 목울대가 울렸다. 에레즈가 손을 쓸어내릴수록 성기가 솟아오르고, 혹이 내벽을 찾듯 꿈틀거렸다.
그가 자신의 배 위에서 노팅을 맺고 있었다.
“하아…. 아아, 크윽…!”
에레즈는 칼리번의 어깨 위로 시름을 토해 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푼 성기는 흡사 구역질하는 짐승처럼 아래에서부터 위로 꿀렁거렸다. 마치 작은 마물의 머리처럼 귀두가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정액을 내뿜었다.
꾸덕꾸덕한 정액이 칼리번의 배와 가슴 위로 후드득 쏟아졌다. 칼리번의 아랫배에 가득 찬 정액은 인간 사내의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농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달랐다. 물을 섞은 진흙처럼 훨씬 질었다. 노팅이 끝난 후에도 오메가의 몸속에서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그 양은 칼리번의 복근 위로 여러 개의 작은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엄청났다.
“윽, 크으….”
에레즈의 목 안쪽에서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 자리 잡은 푸른 보석안이 순간적으로 금빛으로 번뜩거렸다.
“…….”
그 광경에 칼리번은 눈조차 깜박이지 못했다. 금과 청금석을 액체로 녹여 섞은 듯한 눈동자에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긴 사정을 마치자 알파의 성기는 오메가의 몸에 오래 머물기 위해 귀두 아래의 혹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좁고 뜨거운 내벽에 감싸인 것이 아니었기에, 칼리번의 성기 위에서 이리저리 구부러졌다.
“…미안.”
칼리번과 시선이 맞자, 진땀을 흘리던 에레즈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괴물, 같지…. 내 모습…….”
그는 흉한 자신을 가리고 싶은지 한 손으로 자꾸만 부푸는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전부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괴물은 자신이다. 그를 강제로 이렇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몸 안에 품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칼리번은 손을 아래로 뻗어 부푼 살덩어리를 감쌌다. 성기를 훑는 손길에 에레즈는 괴로워했지만, 감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곧 두 개의 다른 손이 한 사람의 양손인 것처럼 엉켰다. 칼리번은 고개를 내밀었다. 에레즈는 기꺼이 몸을 낮췄다. 코가 닿고, 입술이 닿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입맞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유일한 안정제였다.
* * *
오메가를 독차지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으나 동시에 고작 한 마리의 알파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저주이기도 했다.
에레즈는 벌써 며칠째 젖을 취하지 않았고 오메가의 안에 노팅을 맺지도 못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메가가 원하는 부분만 남겨 둔 채 깔끔하게 거세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레즈는 그런 꼴이 되어서라도 칼리번의 품 안에서 머물기를 택했다.
“아….”
칼리번은 종일 알파와 교미를 맺다가 가끔 기절하듯 짧은 잠을 취했다. 그러다 눈을 뜨면 언제나 에레즈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럴 때면 모르는 알파와 교미 중인 줄 알고 몸부림을 치던 칼리번은 곧바로 온순해졌다.
두 사람은 연결된 채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 몸으로 묶인 지가 오래되어 이제는 떨어지는 것이 어색할 정도였다. 에레즈는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몸이 기울어지자 칼리번의 배 속으로 알파의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칼리번이 잠드는 동안에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인 모양이었다.
“에레즈… 님.”
칼리번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더듬더듬 에레즈에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 안에 아름다운 얼굴이 담겼다. 달을 손에 넣으면 이런 느낌일까? 칼리번은 어둠 속에서 눈에 띄는 금빛 머리카락을 만지기도 하고 하얀 뺨을 손가락으로 쓸기도 하며 그를 정성껏 쓰다듬었다. 에레즈는 파란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손길을 받기만 했다.
이렇듯 화려한 겉모습에 현혹되어 버리지만, 사실 에레즈는 교미를 시작하기 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윽….”
우려했던 상황은 마침내 오고 말았다. 낮은 신음과 함께 칼리번의 가슴 위로 무언가가 투둑, 떨어져 내린 것이다.
“…!”
칼리번은 에레즈를 올려다보았다. 피였다. 그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즈음 두 사람은 진이 빠질 대로 빠져서 그저 열기가 따르는 대로 교미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더는 말을 할 기력도 없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오직 신음과 숨소리뿐이었다. 자신과 에레즈가 토해 낸 정액이 가슴과 배에 고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칼리번의 몸은 원래의 색을 잃을 정도로 유백색의 액체에 흠뻑 물들어 있었는데, 그런 몸이 빠른 속도로 붉게 변해 갔다. 에레즈는 어느덧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에레즈 님…!”
칼리번은 그것이 위험 신호임을 직감했다. 에레즈는 오메가의 향기에 휩싸인 채 오메가의 안에 며칠을 머물렀다. 그러나 정작 결실만을 맛보지 못했다. 이 이상 계속한다면 에레즈는 끊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이대로는….”
칼리번은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가 흘린 피가 칼리번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 아…. 이 정도는… 금방…….”
에레즈는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리고는 웃어 보였다. 그 어떤 부상도 회복할 수 있으며 목숨을 잃기 직전에는 탈피가 가능한, 그야말로 신과도 같은 능력을 지녔던 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망가진 인형 같았다. 다름 아닌 칼리번 자신 때문에.
“큭…!”
칼리번은 급히 두 손을 뻗어 에레즈의 손을 떼어 내고 피를 닦아 주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에레즈는 피하려 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서로에게 멀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멈추질 않았다. 붉은 피가 칼리번의 가슴 위로 새로운 자국을 남겼다. 에레즈는 가만히 칼리번의 손길을 받기만 했다. 창백한 얼굴이 핏자국으로 얼룩졌다.
“…전하.”
칼리번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두 손으로 에레즈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칼…? 아…!”
에레즈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칼리번 자신 또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입을 맞추는 것은 아니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흘리는 피를 직접 혀로 핥았다. 비릿한 쇠 맛이 입 안으로 퍼졌다.
“안 돼…. 더러, 워….”
에레즈가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칼리번의 두 손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항은 짧았고 그는 곧 순응했다. 칼리번은 상처를 핥아 주는 짐승처럼 피를 삼켰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피가 멎어 갔다. 그제야 칼리번은 에레즈를 놔주었다. 그의 입가는 에레즈만큼이나 붉게 얼룩져 있었다. 피는 간신히 그쳤지만, 에레즈는 여전히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8년 전의 에레즈 프리드웬은 칼리번을 금사로 옭아맬 정도로 힘이 넘쳐흘렀다. 비록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하나 한창때의 알파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과거보다도 훨씬 지쳐 보였다.
어째서….
괴로워하던 칼리번은 그가 아주 오래 굶주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에레즈 님….”
완벽한 답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칼리번이 그를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아, 안 돼…!”
에레즈는 고개를 돌리고는 칼리번을 거부했다.
“그… 그곳에 입을 대면 정신이 흐려져…. 그러다 나도 모르게… 당신을 해치기라도 하면….”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에 뺨을 기댄 채 거부했다. 필사적으로 칼리번을 밀어내고 있으나 본성은 벌써 굶주린 개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칼리번의 가슴 위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에레즈 님.”
“하아…. 윽…….”
“제발….”
애원과 함께 큼지막한 손이 하얀 얼굴을 감쌌다. 에레즈는 더는 버틸 힘 없이 눈을 감았다. 칼리번은 제 손가락으로 유두를 비틀어 부풀어 오르게 하고는 에레즈의 입에 물렸다.
“읏, 음….”
에레즈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바위 같아 보이는 몸과 달리 말랑한 유두가 혀에 닿자, 에레즈는 언제 피했냐는 듯 굶주린 아이처럼 성급히 젖을 삼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수 있으니…. 천천히, 흐읏, 드십시오….”
그렇게 칼리번은 아래로는 에레즈의 성기를 품고, 위로는 그에게 젖을 먹였다. 그제야 칼리번은 비로소 에레즈의 몸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에레즈의 몸 곳곳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금사로 자해를 한 후 회복한 흔적이었다.
교미가 지속되면서 에레즈는 몇 차례 칼리번의 몸에 노팅을 하려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칼리번의 몸 안에서 제 성기를 뽑아냈다. 별것 아닌 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오메가의 향기에 뒤덮일 대로 뒤덮인 알파의 행동이었다. 번식이 존재의 이유인 알파가 눈앞의 오메가를 두고 노팅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에레즈 자신이 그 행위를 원치 않더라도 몸이 알아서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마물의 번식욕은 인간의 성욕과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절박했다. 마물들이 칼리번의 손에 죽는 순간까지 좆을 빼지 못했던 이유기도 했다.
그야말로 극한으로 굶주린 병자의 입에 온갖 귀한 음식을 물리게만 한 후 뱉게 한 것과 다름없었으며 갈증을 느끼는 아이에게 물을 보게만 한 것과 같았다.
“에레즈 님…. 이제 됐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저는… 충분합니다. 괜찮습니다.”
칼리번이 에레즈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실상은 달랐다. 칼리번의 몸은 여전히 열기로 들끓었고, 에레즈를 쥐어짜고 싶어 안달이 나다 못해 다른 알파를 끌어들일 용의가 만만했다. 지금도 간신히 힘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이러다가는… 하아…. 전하께서 먼저 망가지고 마실 겁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토록 오래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충분했다. 남은 동안은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번은 그렇게 자신을 속였다.
“시… 싫어….”
그 말에 정신없이 칼리번의 가슴을 빨던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몹시도 지친 얼굴은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어온 발정 난 알파라기보다는, 굶어 죽어 가는 가여운 짐승 같았다.
“칼, 당신이 다른 알파…에게 고통받는 것도 싫지만, 무엇보다… 당신을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
에레즈는 8년 전의 소년처럼 훌쩍이고는 칼리번은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금사가 칼리번의 몸에 감겨 두 사람을 한데 묶었다.
“흐읏…!”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넘쳐흐르는지, 그 탓에 결합 부위가 틀어지고 칼리번은 앓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하필이면 그는 칼리번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몸으로나, 정신으로나….
“하지만….”
“…칼.”
에레즈는 칼리번이 밀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있지…. 매일 밤 당신의 꿈을 꿔.”
대신 그는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꿈을… 말입니까?”
이런 대화로는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대답했다.
“응. 내 품 안에 안겨 있는 당신의 모습을….”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 위에 늘어진 채로 중얼거렸다.
“꿈속에서 당신은 말이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잠들어 있어.”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칼리번의 몸이 그 순간을 기억하는지 뻣뻣하게 굳었다.
“깨우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더 큰 고통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평안하게.”
부드러운 호숫물은 소리 없이 몸에 부딪히고 멀리서는 망국의 한탄이 연기로 피어올랐다. 가까이에는 낙원이, 저 멀리에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에레즈의 두 팔 안에 안긴 칼리번은 신체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모습은 여태껏 에레즈가 보아 온 칼리번의 모습 중에서 가장….
“…….”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가슴이 뜨거웠다. 발정 탓이 아니었다.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한 물방울이 촛농처럼 가슴 위로 흘러내린 탓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그대로 잠들고 싶었을지도 몰라. 단 한 번도 당신을 구하지 못한 내가 지긋지긋하겠지. 그런데도 결국 난 당신을 살렸어. 살려서…. 이런 고통을 겪게 하고 있어. 그런 내가… 어떻게, 당신을 혼자 두고 떠날 수 있겠어?”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칼리번의 목울대가 울렸다.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레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모두가 그랬다. 기적처럼 살아났다지만,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밤이 오면 다들 저마다의 악몽을 꾼다.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도 못하고….
“아닙니다, 저는….”
어째서인지 목이 메었다.
“전하께서, 저를 되살려 주셔서….”
그는 쉰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에레즈를 품에 안은 버거운 자세였지만, 고개를 숙여 이마를 그의 머리에 기댔다.
“…에레즈 님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러고는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저어 치댔다. 금빛과 흑빛, 서로 다른 머리카락이 엉켜 들었다.
* * *
<…에레즈 님?>
분명 한 몸처럼 얽혀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그가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곳이 어딘지 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레즈를 찾으려던 칼리번은 뜻밖에도 첫걸음부터 막히고 말았다. 뭔가를 발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돌처럼 단단한 몸을 지닌 그였지만, 엄지발가락이 쇳덩어리에 정통으로 부딪치니 꽤 욱신거렸다. 칼리번은 성질 고약한 물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
이럴 수가. 그의 발 앞에는 웬 투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몸뚱이는 어디 가고 머리만 덩그러니 남았는지…. 마치 적장의 머리를 잘라 놓은 것도 같았다.
<흠….>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선 채로 그것과 오래도록 눈싸움을 했다. 두 개의 눈구덩이를 노려보았으나 어둠 속에서 안광이 번뜩이는 일은 없었다.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별것 아닌가 싶어 칼리번이 등을 돌리려던 때였다. 이때다 싶었는지 투구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꼬락서니가 영락없는 게다.
<이 녀석.>
칼리번은 최선을 다하나 더없이 느린 속도로 이동하는 검은 투구를 한 손으로 덥석 쥐었다. 사람 머리 정도는 쉽게 쥘 수 있는 그답게 한 손으로 투구를 들어 올렸다. 투구 아래에서 발발거리던 금사들은 저항을 포기했는지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이 혀를 쭉 내민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꼴로 어딜 가는 거냐.>
물었으나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칼리번은 투구가 도망갈 수 없게끔 두 손으로 쥐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칼리번은 다 들켰으면서도 여전히 죽은 척하는 투구를 실없이 만지작거렸다. 용병으로 일하며 수도 없이 보는 것이 바로 투구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반가웠다. 원래 몸으로 만지는 것이 처음이라서일까? 커다란 양손에 손쉽게 가려지는 투구는 에어리얼 시선으로 볼 때와 달리 너무나 작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제외하면 이런 감상을 느낀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아스터.>
다시 살아난 후 그 이름을 처음 불러본다. 그간 수도 없이 그 이름을 외치고 명령했었는데, 막상 원래 몸이 되어 불러 보니 더없이 어색했다.
<어떻게 하면 네 갑옷을 다시 만들 수 있을지… 계속 알아보았다. 그래 봤자 에어리얼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칼리번은 꾹 억눌린 목소리로 평소보다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가슴 깊은 곳에 숨기고 남몰래 방법을 찾아 헤맸을 뿐,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끝까지 에어리얼의 편을 서다 죽은 반역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잘되지 않았다. 원래 몸으로 돌아온 탓인지, 에어리얼이 사라진 탓인지… 더는 기억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스터에 대해서 입에 올리면 올릴수록, 결국에는 한 가지 답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결론 말이다.
<그래서…….>
더듬더듬 설명하던 칼리번의 목소리가 그쳤다. 그런 칼리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투구는 손길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
그는 무언가 말을 더해 보려 했다. 그러나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문이 막히는 것도, 말솜씨가 부족한 탓일까….
<…죽은 자의 기억에 집착하는 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때였다.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아스터가 드디어 기척을 드러냈다.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었던 그 목소리를 한참 만에 다시 듣자, 어째서인지 칼리번의 가슴이 일렁였다. 이전에는 말 좀 그만하라고 주먹질을 한 적도 있는데 말이다.
<에어리얼이 만들어 준 제 몸은 평범한 갑옷이 아닙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인간의 갑옷과 마물의 시체와 마계의 바닥을 기어 다니며 주운 것들을 어떻게 조합했다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마물의 시체라는 게…. 뿔이라거나 내장 같은, 정확히 어떤 부위인지 알려 줄 수는 없는 건가?>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안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재료가 갖춰져도 똑같이 만들지 못할 겁니다. 에어리얼과 당신은 살아온 세월도, 경험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아스터는 한번 목소리가 트이자 칼리번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저 하고픈 말만 했다.
<하지만….>
칼리번도 터무니없는 억지임을 알고 있다. 예전의 그였다면 가망 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집착하다 보면 결국 에어리얼의 망령에 사로잡히게 될 겁니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칼리번과 달리, 아스터는 예전처럼 맹랑하게 떠들어 댔다.
<당신이 여태 쥐고 있는 그건… 이제는 그저 시체의 털에 불과합니다. 운 좋게 갑옷을 만든다고 해도 제가 되살아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칼리번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스터는 투구 속에서 금사를 쭉 뽑아냈다. 그러고는 칼리번의 손목에 감았다. 마치 그것을 펴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
칼리번의 손이 떨렸다. 펼쳐진 손안에는 작게 말아 놓은 백금사가 조금, 아주 조금 있었다.
<…왜냐면 저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아스터는 칼리번이 쥔 백금사를 가소롭다는 듯 툭 쳐 냈다. 누굴 닮았는지 단호하기 그지없는 몸짓이었다. 땅에 떨어진 백금사 뭉치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어리얼의 몸일 적, 아스터가 칼리번의 하얀 조약돌을 먼저 던져 버린 적이 있다. 그때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그 돌을 찾아 헤매었다.
지금 칼리번은 빈 주먹을 쥐었다 펼 뿐이다.
<네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지?>
칼리번은 이 불가해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을 엿본 것이 아니라…. 마치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숨어 있다 돌아온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듯이….
<글쎄요. 아무리 돌대가리라도 이 정도면 슬슬 눈치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스터는 칼리번의 한쪽 무릎 위에 걸쳐진 채 금사를 꼼지락거렸다. 그랬다. 칼리번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건 꿈인가.>
칼리번은 목이 메어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너의 꿈이 아니라?>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스터는 더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 칼리번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 공간도, 저도 전부 당신이 만든 개꿈에 불과합니다. 왜냐면….>
아스터는 칼리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새겨 두려는 듯, 오래도록.
<저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고는 칼리번을 내버려 두고 투구 하나만을 쓴 채 의젓하게 떠나갔다. 칼리번은 손을 뻗어 잡으려 했으나 이번만은 잡히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자신의 꿈이라면 어째서 붙잡을 수 없단 말인가? 돌이킬 수 없단 말인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희망. 머릿속에서 주조된 망상. 잠시간의 위안.
꿈만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거나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설령 꿈속의 그 사람조차 자신을 잊었을지라도 이렇듯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것을, 이제 칼리번은 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거쳐 간신히… 배우게 되었다.
* * *
눈을 떴는데도 시야가 흐릿했다. 마치 물에 빠진 것만 같다. 어쩌면 정말로 침몰한 채일지도 모른다. 늪처럼 붉은 핏물 혹은 황금빛 호수, 어느 쪽이든.
“…아!”
그러나 그 순간, 뜨겁고 아픈 돌기를 지닌 살덩어리가 칼리번의 몸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칼리번은 헉,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정신을 차렸다.
“흐아, 앗…. 와… 왕자님….”
칼리번은 머리가 상대를 인지하기도 전에 그를 찾았다. 발정에 시달리는 내내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탓에 몸이 자극을 받으면 저도 모르게 에레즈를 부르게 되었다.
“응, 칼…. 나 여기 있어…. 바로, 곁에 있어.”
다급히 부르는 음성에 에레즈가 곧바로 응했다. 그의 음색은 평소보다 살짝 쉬어 있었으나 여전히 녹아내릴 듯 다정했다. 왕으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와는 달랐다. 그 누구도 이토록 절절하게 불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차이가 칼리번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칼리번이 얕은 잠에서 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기절하듯 잠든 사이에도 몸 안을 오가며 천천히 흔든 탓이었다.
“왕자님…. 왕자님….”
칼리번은 두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은 느껴졌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물 아래에 있었다. 그나마 몸이 에레즈의 두 팔에, 금사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오직 그만이 자꾸만 가라앉는 칼리번을 끌어당겼다.
“칼…?”
칼리번이 에레즈 님, 혹은, 전하라 부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왕자님만을 부르자 그는 슬슬 이상함을 눈치챘다.
“왕자님…!”
금사가 풀렸다. 칼리번의 팔이 에레즈의 등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칼리번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가도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에레즈와 단둘이 연결된 채 부둥켜안고 있는 지금조차도 그랬다.
눈을 뜨면 여전히 팔다리가 잘린 모습으로 차가운 벽에 매달려 있고, 자신의 머릿속을 뒤지던 에어리얼은 픽 하고 웃는 거다. 그동안 겪었던 전쟁과 전투들도, 적과 아군도, 에레즈도, 젠도, 아스터도… 전부 에어리얼이 만든 환상인 것이다. 칼리번이 실제라고 믿을수록 빼앗겼을 때의 고통은 클 것이고, 그러면 에어리얼의 기쁨도 증가할 테니까.
“칼…?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에레즈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가 다정할수록 두렵다. 젠이 염려해 줄수록 무섭다. 이런 편안하고 달콤한 세상이 현실일 리가 없으니까.
“나를 봐, 칼리번…. 제발 정신 차려…!”
에레즈는 칼리번과 몸이 연결된 채로 다급히 불렀다. 그러나 먼 허공을 보는 칼리번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 앗…!”
그러더니 칼리번이 돌연 몸을 떨었다. 에레즈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
아무런 기미도 없었는데 칼리번이 갑자기 사정하고 말았다. 묽은 정액이 두 사람 사이를 적셨다.
“하아, 아, 아앗….”
칼리번은 쾌락을 토해 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배 위가 뜨뜻해졌다. 그 모습에 에레즈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칼, 칼리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어루만질 뿐.
“와… 왕자님, 가지 마세요…!”
에레즈가 성기를 빼내려 하자 칼리번은 단단한 두 팔로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금빛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뺨에 스치고 몸 안에 칼처럼 박힌 성기가 꿈틀거리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좀 더…. 윽, 흐으….”
칼리번은 스스로 에레즈의 성기를 안에 품었다. 더는 헤어지지 않도록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박아 넣었다. 발정에 든 알파의 성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칼리번은 고통에 꺽꺽거리면서도 그를 품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자꾸만 에레즈를 졸랐다.
“더, 더해 주세요…. 제발…….”
만약 이 순간이 환상이라면 에레즈는 교미가 끝나면 사라질 것이다. 환상이라도 좋으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에어리얼이 원하는 반응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식으로 칼리번의 머리를 조종해 다른 알파와 교미하게 했으니까. 하지만 칼리번의 영혼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정도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흣…. 으….”
칼리번은 아래에서 에레즈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에레즈의 성기를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자신을 꿰뚫은 존재를 놓치면 영영 가라앉을 것처럼.
8년 전의 칼리번은 이 행위가 어설프기 그지없었고, 그저 곤란에 빠진 에레즈를 도와주기 위한 봉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이제는 할 줄 알았다.
“하아, 칼…. 읏…!”
에레즈는 이를 악물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이 칼리번을 위한 길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칼리번은 이토록 간절하게 매달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칼리번이 지금 이런 행동을 보인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알았어, 칼….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에레즈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움직임은 종종 더욱 깊은 마찰을 빚어냈다. 그럴 때마다 절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쾌감이 짙어졌다.
에레즈가 단단한 몸에 부딪힐 때마다 접합부에서 철썩, 살 소리가 났다. 성기를 품은 구멍 주변은 정액과 애액이 섞인 채 눌어붙어 끈적했다. 칼리번의 아랫배는 에레즈의 정액으로 가득 차 성기가 오갈 때마다 흘러나오게 된 지 오래였다.
“아, 아앗, 흐으…응, 으응…!”
칼리번은 정신없이 신음을 내뱉었다. 교미는 그에게 천형이었지만, 에레즈와 몸을 겹치는 것만은 좋았다. 수많은 마물을 물리치고, 형제의 목을 베고,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고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 붉은 오메가를 죽이고, 자신을 구하러 와 줄 것만 같았다. 몸을 섞는다는 행위는 그런 허튼 희망을 품게 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 윽…. 하아….”
자꾸만 끌어당기는 손길은 알파에게 흥분 이상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칼리번의 몸속을 오가는 속도가 짧아지고 잦아졌다.
“히윽, 읏, 앗, 아앗…!”
에레즈는 성기를 반 이상 묻은 채 허리를 놀렸다. 그것이 바로 칼리번이 원하는 바였다. 숨이 부족해지자 정신이 흐릿해지고 더는 사고하기가 어려워졌다. 벌써 몇 번이나 같은 행위를 반복했는데도 마치 처음 짝짓기를 하는 짐승처럼 오가는 쾌락에 빠져들었다.
칼리번의 배 속은 알파의 정액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과즙이 터지듯 그만치의 정액이 흘러나왔다. 다리 사이가 어느새 흥건해졌다.
“아, 앗…!”
동굴 안에 울려 퍼지는 신음은 평소보다 높고 흐려서 마치 칼리번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모르는 알파와 오메가의 난잡한 교미 같았다. 엉덩이 위로는 멍이 피어올라 있었고 그 위에 새로운 자국이 계속해서 덧대졌다. 마찰열에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느덧 칼리번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
“히, 흐읏, 아…!”
배 위에서 혼자 부푼 성기가 꿈틀거리더니, 칼리번이 먼저 정액을 흘렸다. 처음에는 제법 짙었으나 사정이 반복되면서 어느덧 묽은 물만 토해 내게 되었다. 매번 엄청난 양의 정액을 쏟아 내는 알파와는 다른 점이었다.
“하아…….”
절정을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시야가 트였다. 반쯤 뒤집혀 있던 칼리번의 눈이 돌아왔다.
“…에레즈 님?”
이제야 에레즈의 얼굴이 보였다. 칼리번과 달리 에레즈는 사정하지 않고 그저 그의 몸 안에 머물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직 환상은 끝나지 않았다. 칼리번은 안도했다.
“울지 마, 칼….”
그런데 시선이 마주치자, 에레즈가 뜻밖의 말을 했다.
“…네?”
칼리번은 그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우는 것이 아니라….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에레즈의 손길이 칼리번의 뺨을 스쳤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축축한 물길이 느껴졌다.
“…….”
칼리번은 울고 있었다.
“…으윽.”
그 사실을 깨닫자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부지불식으로 눈물이 늘어 갔다.
“크으…. 흐으….”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울음이 목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8년을, 기약이 없는 어둠 속에 있었다. 물속에 잠겨 있었다. 너무 많은 가정과 환상이 칼리번의 머릿속에서 반복되었고 하나같이 절망적인 결말을 맞았다. 그래서 마침내 숙원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왕성을 떠나야 하지만 에레즈 프리드웬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 알파를 가까이해서는 안 되지만 이어지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지만 살고 싶다.
수많은 모순이 부딪칠 때마다 원래도 멍청이였지만, 한층 더한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왜냐면, 예전에는 비록 틀린 답이었어도 답을 내렸지만, 지금은 어찌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와… 왕자님, 아니, …에, 에레즈…… 님….”
칼리번은 에레즈가 다시 만들어 준 두 팔로 그를 가득 끌어안았다.
“사랑합니다….”
칼리번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백했다. 이 모든 행위를 사랑이라 이름을 붙인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처럼. 에레즈의 두 눈이 커졌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래서….”
칼리번은 말을 막 배운 아이처럼 더듬거렸다.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단단히 쌓아 올렸던 벽이, 언제나 모두가 의지할 수 있었던 높고 단단한 그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칼리번은 벽 너머에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벽이 아니라 둑이었던 모양이다. 감정이라는 액체가 두 눈 밖으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혼자 남겨지고, 무서워서….”
칼리번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이성도 논리도 갖추지 못했다. 그답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설프고 투박한 고백을 듣던 에레즈의 눈에 눈물이 서서히 고여 갔다.
“으윽……. 으, 아아….”
칼리번은 이를 악문 채로 고개를 저었다.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억지로 삼켰다. 목 안쪽의 살이 벗겨지기라도 한 듯 쓰라렸다.
“아, 아아…. 흐으, 아…. 으윽….”
사실 저희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몸도 얻지 못했고,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칼리번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울음만 토해 냈다.
그 녀석이 마지막까지 에어리얼을 선택한 것처럼, 칼리번 또한 에레즈를 선택했다. 그 당시에는 그 선택을 수긍했으면서, 어째서 모든 일이 끝난 후에서야 무너지는지 칼리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망할 녀석과 전우가 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토록 슬프지 않았을까? …아무렇지 않았을까? 다른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은 멍청하니까.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 무력하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 더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어째서 이토록 나약한 겁쟁이가 되고 만 건가. 누군가는 살아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성장하는데, 왜 다른 누군가는 부서지고 뒷걸음질 치고 마는가? 이렇게 비참한데도, 어째서 지켜줘야 할 이의 품 안에 숨어 안도하게 되는가….
“흐으, 하아….”
칼리번은 눈물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에레즈는 그런 그의 가슴 위로 투명한 눈물을 떨굴 뿐이었다. 그 모습에 칼리번은 이상할 정도로 애욕이 들끓어 올랐다. 오메가가 겪는 발정과는 달랐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이 몸처럼 채워지길 원하고 있었다.
“에레즈 님….”
칼리번은 채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으면서 먼저 매달렸다. 전부 잊고 싶었다. 에레즈는 완전히 무력화되어 고개를 저었으나 칼리번이 그런 그를 아래로 눕혔다. 에레즈의 몸 위에 올라탄 채로 스스로 움직였다. 몸속에 가득 고인 정액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접합부에서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아, 에레즈 님…. 하아….”
칼리번은 제 몸속으로 알파의 성기를 박아 넣으며 헐떡였다. 희게 젖은 가슴이 충격에 흔들리고, 다리 사이에 늘어져 있던 성기가 에레즈의 배 위로 부딪쳤다.
“칼….”
쓰러져 있던 에레즈는 몸을 일으켜 칼리번을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금사가 두 사람의 몸 위로 장미 넝쿨처럼 엉겼다. 에레즈는 아이처럼 칼리번의 가슴을 입에 물고는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이 파묻힐 만큼 강하게 주물렀다. 위로는 젖을 빠는 소리가, 그리고 이어진 아래에서는 살이 부딪치는 음탕한 소리가 났다. 이제는 어느 쪽이 움직이는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매달렸다.
이미 녹초가 될 대로 엉켜 있던 두 사람이었다. 몸이 연결된 채로 녹고 무너져 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반고체의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정말로 녹아 버렸으면 좋겠다. 다시는, 그 누구도 떼어 낼 수 없게끔.
어느 시점에 이르자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의 정욕이 아닌, 서로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생욕이 되었다.
“흐음, 으응….”
칼리번은 에레즈의 배 위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했다. 묽은 정액이 배를 더럽혔으나 에레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탄탄한 엉덩이를 두 손으로 벌리고 버거울 정도로 두툼해진 성기를 밀어 넣을 뿐이었다. 피부색이 짙은 탓에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몸은 온통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 하아….”
어느 순간, 에레즈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칼리번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는 제지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말하기도 전에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눈치챘다. 내벽에 푹 감싸인 알파의 성기가 무언가를 토해 낼 듯 꿈틀거렸다. 알파의 성기가 점점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 싫어…. 읏…. 빼지, 마….”
칼리번은 그답지 않게 보채며 에레즈를 붙잡았다. 그러나 에레즈는 허리를 내려 성기를 다시 품으려 드는 칼리번을 완강히 거부했다.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칼리번은 대신 아래로 손을 뻗었다. 멋대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에레즈의 성기를 붙잡았다.
“계속….”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헐떡였다. 마지막까지 에레즈를 품고 싶었다. 쾌감이 줄어들면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다시 덮칠 것이다. 또다시 헤어지고, 빼앗기고 말 것이다.
“칼, 제발…. 부탁이야. 더는… 안 돼….”
에레즈는 나약하게 애원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허리를 틀며 어떻게든 성기를 더 집어삼키려 애썼다.
“큿…!”
하는 수 없이 에레즈는….
“…미안.”
칼리번의 가슴에 뜨거운 숨을 내뱉던 그가 어째서인지 사과를 했다. 에레즈가 두 팔에 힘을 풀자, 무릎을 세우고 있던 칼리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흐읏…. 큭!”
마침내 칼리번이 간절히 바랐던 살덩어리가 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마치 화살이 몸에 박히는 것처럼 알파의 성기는 내벽을 벌리고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몸 안에 숨겨진 입구로 두툼한 귀두가 닿았다. 금방이라도 꿰뚫을 기세였다.
“하아…. 윽…!”
그 순간, 에레즈는 괴로운 신음을 토해 내며 칼리번을 눕혔다. 칼리번의 몸이 뒤로 넘어가자 성기가 꿰뚫는 방향도 틀어지게 되었다.
“흐윽, 아, 아악…!”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귀두가 몸속 입구가 아닌 결장으로 우악스럽게 파고든 것이다.
거기, 가 아니라….
칼리번은 몸을 다시 맞추기 위해 허리를 놀렸다. 그러나 자리를 잡고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그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내벽이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칼리번은 반항은커녕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전신의 근육이 빳빳하게 부풀었으나 몸 안의 성기를 강하게 조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아, 하아…. 흐윽, 후…….”
한편,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 위에 자신을 겹친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메가의 젖을 취한 탓에 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흥분한 성기를 몸속에 자리 잡은 입구에 밀어 넣지 않은 것은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으……. 아, 아파…. 앗….”
성기와 함께 부푼 혹들이 여린 내벽에 박혀 들었다. 마치 매듭이 묶인 것처럼, 외부에서 누군가 두 사람을 떨어뜨리려 해도 빠지지 않게끔 단단히 고정되었다.
“아윽, 크윽…!”
곧이어 몸속에 자리 잡은 좁은 아기집이 아닌, 내장으로 알파의 정액이 들이부어졌다. 두 공간 사이에는 내벽 하나를 두고 있을 뿐이라, 성기가 부풀며 주변까지 함께 짓눌렀다.
“읏, 으응…. 거기, 는…. 앗! 아, 아…!”
칼리번은 앓듯이 끙끙거리며 에레즈의 등을 긁어내렸다. 그의 몸에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각이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고통을 닮아 있었지만, 고통을 넘어서는 쾌감이었다.
“힉, 흐읏…!”
칼리번은 절정을 맞이했다. 에레즈의 몸이 자리 잡은 만큼 벌어진 다리가 벌벌 떨렸다.
“괜찮아, 칼…. 하아…. 이제 괜찮을 거야….”
에레즈는 칼리번을 강하게 끌어안은 채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도 칼리번만큼이나 떨고 있었다. 칼리번의 손과 시선이 닿지 않는 에레즈의 몸에는 금사가 화살처럼, 창처럼 꽂혀 있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 간신히 이성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렇게 모두가 저마다 상처를 숨긴 채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 * *
신음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에 묻혔던 빗소리가 드디어 들려왔다. 세상 무엇보다 무른 물은 암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딪쳐 부서졌다. 타닥, 타닥, 무수한 물방울들이 땅으로 추락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칼리번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 으음….”
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멍하니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흐릿했다.
“…….”
귓가를 채우는 빗소리가 시원했다. 가만히 빗소리를 듣던 칼리번은 문득 갈증이 일었다.
“물….”
물을 마시고 싶다. 열기가 빠져나간 몸에서 처음으로 든, 다른 욕망이었다.
“윽…?”
그러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짧기는 하나 수면을 취한 상태였으니 지친 탓은 아닐 것이다. 억지로 팔을 당기자 익숙하기까지 한 감촉이 느껴졌다. 칼리번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금사다. 금사가 칼리번의 전신에 감겨 있었다. 그는 머리만 쑥 내민 채 황금빛 고치 속에서 바른 자체로 누워 있었다.
‘전하…. 아니, 에레즈 님이?’
그러나 정작 금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칭칭 감긴 금사는 혹여나 자신이 다른 알파를 찾아 떠나거나, 반대로 모르는 알파가 침입했을 때를 대비한 것일 테고….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것을 보니 멀리 가지는 않았겠지. 일순 불안했던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목이 마르군….’
툭 튀어나온 칼리번의 목울대가 꼴깍, 꼴깍 울렸다. 몸속은 바짝 타는 반면에 몸 밖은 과할 정도로 체액에 젖어 있었다.
물을 마시고 싶다. 몸을 닦아 내고 싶다. 그러나 금사를 떼어 낼 기력이 없었다. 과로를 한 것 이상으로 본능 자체가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노팅을 맺지는 못했으나 알파의 정액을 가득 채운 몸은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
그러나 졸음을 이겨 낸 것은 간절한 욕망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다,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하던 칼리번은 역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금사를 풀어내려 느릿느릿 몸을 휘적일 때였다.
“칼…. 일어났구나.”
저 멀리서 에레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눈동자가 데굴 굴렀다. 동굴 입구에 에레즈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금사를 통해 칼리번의 움직임을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에레즈의 그림자 너머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에레즈 님…?”
칼리번이 힘없이 대답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에레즈가 조금씩 다가왔다.
“많이 불편하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에레즈는 머쓱한 듯 변명했다. 칼리번은 충분히 이해했기에 황금 고치가 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레즈 님, 그건….”
칼리번의 시선이 문득 아래로 향했다. 에레즈는 한 손에 정체 모를 것을 쥐고 있었는데, 어딘지 익숙한 감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칼리번의 옷이었다.
“아, 이건….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서 찾다가 숲 한가운데서 발견했어. 빗물과 마물의 피를 흠뻑 머금은 채 갈가리 찢겨 있더라고….”
에레즈는 더는 옷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천 뭉치를 만지작거렸다.
“혹여나 마물에게 잡혀갔을까, 이 동굴에 오기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죄송합니다.”
“…탓하려는 게 아니야.”
에레즈는 고개를 젓고는 칼리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칼리번의 몸에서 금사가 스르르 물러났다. 에레즈는 화상으로 얼룩진 손등으로 칼리번의 뺨을 쓸었다. 촉촉한 손길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열은 거의 가라앉은 것 같네. 다행이다.”
에레즈는 한때 칼리번의 옷이었던 천으로 얼굴을 정성껏 닦아 주었다. 천을 빗물에 적시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스스로 하겠습니다.”
“아니, 나한테 맡겨.”
“그렇지만…. 으읍….”
에레즈는 칼리번이 더는 말할 수 없도록 입가를 뽀득뽀득 닦아 주었다.
“읏, 알겠…습니다…. 으븝, 그러니… 입은, 이제, 그만….”
“아, 미안.”
에레즈는 슬쩍 웃으며 천으로 칼리번의 뺨을 문질렀다.
“…….”
칼리번은 입술에 묻은 물기를 급히 핥았다. 결국, 그는 에레즈가 하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칼리번의 몸은 큼지막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다루기 버거울 법도 했으나 에레즈는 희뿌연 체액으로 인해 흐릿해진 몸을 척척 닦아 냈다.
제아무리 에레즈 프리드웬이 죽은 사람도 살리는 황금 피를 지녔다지만, 몸에 묻은 피와 먼지를 단번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누군가 닦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허드렛일을 맡기는 것이 편치 않았다. 8년 전에는 혼자서 열매껍질도 벗기지 못하던 왕자님 아니던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보다 훨씬 전에, 자그마한 성녀님이 더러워진 갑옷을 닦아 준 적이 있었다.
‘그랬었지. 당시에는 전하인 줄 몰랐지만….’
더는 작지도, 어리지도 않은 에레즈를 보던 칼리번의 눈매가 깊어졌다.
“…읏.”
그러나 과거를 반추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차가운 감촉이 몸에 닿으면 어쩔 수 없이 허리가 떨렸다. 알파에게 내내 젖을 빨리고 물린 가슴은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에레즈는 유륜과 유두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손길과 피부 사이에는 천이 가로막고 있었으나, 칼리번에게는 그의 손가락이 직접 어루만지는 것과 같았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안으로 숨으려 드는 유두를 집요하게 문지르던 손길을 떠올렸다.
“…….”
칼리번의 눈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그렇지 않아도 갈증을 느끼는 목 안쪽이 바짝 조여졌다. 오메가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도 모른 채, 에레즈는 천이 더러워지면 팔랑거리며 걸어 나가 빗물에 적시고 돌아와 닦아 내기를 반복했다.
체액에 얼룩졌던 칼리번은 몸이 한결 깨끗해지면서 흔적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짙은 피부 위로도 멍이 보일 정도로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특히나 가슴과 목덜미는 말도 아니었다. 노팅이 막힌 채 굶주린 에레즈가 게걸스럽게 물어뜯은 탓이었다.
“아팠지….”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 내던 에레즈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쓸어내렸다.
“아….”
칼리번의 숨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발정은 지난 것 같은데, 에레즈의 손길에 다시 자극을 받은 것일까? 불길함에 가슴 안쪽이 울렁거렸다.
“안쪽….”
허벅지 안쪽을 닦아 내던 에레즈가 중얼거렸다. 그는도 아직 칼리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칼리번을 돌보는 일에 푹 빠져 있었다.
“노팅을 하지는 않았지만, 빼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렇듯 의사를 묻지만, 관계 중에는 에레즈가 제정신일 때마다 알아서 정액을 빼 주곤 했다. 그래도 배 속이 더부룩해질 정도로 쌓여 버렸지만….
“네…. 네, 에레즈 님.”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락이 떨어지자 에레즈의 손이 능숙하게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쑤시고, 자극을 주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빼내기 위해서, 몸속에서 원을 그리며 헤집었다. 꽉 닫힌 입구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던 알파의 정액이 왈칵 흘러나왔다.
“좀 더 참았어야 했는데,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 버렸어. …미안해.”
에레즈가 손가락으로 몸 안쪽을 긁어내리며 사과했다.
“아닙니다…. 충분히, 참으셨…. 흐, 음….”
칼리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해 대신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는 이성을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에레즈는 최대한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배려마저도 칼리번에게는….
“…으, 응….”
결국,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에레즈가 안을 쑤실 때마다 그런 소리를 내는 데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큭….”
그러나 반쯤 넋이 나가 있었던 전과 달리 머리가 차가워진 지금은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칼리번은 제 팔로 입을 가렸다. 찔걱, 찔걱, 손가락이 안을 헤집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에레즈는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귀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아…. 하아….”
팔을 깨물며 내뱉는 숨은 더없이 건조했다. 목 안쪽이 바짝 마른 탓이었다. 그리고 에레즈는…. 빗물을 머금은 꽃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허벅지를 누르는 젖은 손 하며, 머리카락 끝에서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이었다.
검은 두 눈 위로 갈증이 일었다. 전부 삼켜 버리고 싶었다. 칼리번은 어느새 에레즈의 손을 입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칼…?”
에레즈의 목소리에 옅은 당혹감이 새겨져 있었다. 화상에 물든 손가락이 칼리번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칼리번은 그의 손에 묻은 빗물을 정성껏 핥았다.
‘좀 더….’
마시고 싶다. 물을 달라고 요청하면, 이 다감한 사내는 분명 양손 가득 빗물을 받아다가 동굴 안쪽까지 조심조심하며 옮겨 올 것이다. 그리고 갈증이 충족될 때까지 그런 시중을 몇 번이나 들어 주겠지. 하지만 칼리번은 왕에게 감히 그런 것을 부탁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사실 이런 빗물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칼리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에레즈의 다리 사이로 머리를 묻었다.
“카, 칼리번? 잠깐…. 흣…!”
뜨거운 입 안으로 성기가 삼켜지자 에레즈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읍, 으음….”
칼리번은 고개를 숙여 에레즈의 성기를 빨았다. 에레즈가 물러서려 하자 큼지막한 손이 그의 허벅지를 짚었다. 오메가에 의해 강제로 발정이 났으나 탈진 직전까지 정액을 뽑힌 탓인지 흉측한 혹이 가라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발기하지 않은 에레즈의 성기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과도한 크기나 굵기만 제외하면 전형적인 수컷의 모양새였다. 그러나 오메가에게 다시 자극을 받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변화가 혀를 통해 느껴질 정도였다.
“하아, 칼…. 그만….”
짓눌린 목소리에서 에레즈의 인내심이 느껴졌다. 칼리번은 자신이 이토록 게걸스러웠나 싶었다. 예전에는 에레즈의 성기를 앞에 두고 어떻게 삼켜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구멍으로 그를 품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하아, 으읏….”
에레즈는 감히 칼리번에게 손도 대지 못하고 두 손으로 가슴을 짚은 채 괴로워했다. 혹이 없어도 크기가 크기인지라 딱딱해지기 시작하니 턱이 아팠다. 하지만 칼리번은 혀로 기둥을 핥고, 점막으로 품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성기가 목구멍 안을 찌를 때마다 마치 배 속을 꿰뚫는 것처럼 아랫배가 절로 울렸기 때문이었다.
“큭…. 칼…. 제발……!”
에레즈의 숨결은 당장에라도 끊길 것처럼 거칠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액이 칼리번의 목 안으로 쏟아졌다. 알파의 성기였으나 발정이 왔을 때처럼 목 안에서 흉측하게 부풀어 오르지도 않았고, 정액의 점도도 묽은 편이었다.
“으음….”
칼리번은 거리낌 없이 알파의 정액을 마셨다.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에레즈가 내준 액체는 목 안을 적시고 배 속을 따뜻하게 채웠다.
“하아…….”
한참 후, 칼리번은 배부른 자 특유의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목 안쪽의 가뭄이 해소되는 것만 같았다. 대신 몸은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부족해….’
칼리번은 에레즈가 자신을 모두 털어 넣은 후로도 목 안으로 성기를 몇 차례 더 품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빠져나온 귀두가 입 안의 점막을 훑었다. 고개를 든 후에도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온 성기의 끝부분을 아쉽게 핥았다. 그렇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알파의 성기를 괴롭히다가….
“……아.”
칼리번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입 안에 남은 정액을 꿀꺽 삼키고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개처럼 고개를 땅 쪽으로 숙인 채였다. 차마 에레즈와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 합니다.”
칼리번은 두 팔로 땅을 짚은 채로 말했다. 목 안쪽까지 성기를 품은 탓에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
에레즈에게는 이미 지난 8년 동안 어떤 알파와 어떤 자세로 교미를 나눴는지까지 전부 보여 버렸지만…. 그래도 이토록 간절히 알파를 원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교미에 능숙하다든가, 발정이 난 모습이 더럽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안일한 혐오에 빠지기에는, 칼리번은 그보다 훨씬 추악한 짓을 많이 저질러 왔다.
그저 에레즈가 사람들을 이끌고, 보살피고, 업적을 이룬 세월 동안 자신은 달라져 버렸다는 것이… 칼리번 스스로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다시 살아난 후에는 전혀 검을 찾지 않았군….’
예전에는 그야말로 한 몸처럼 여겼었는데 이제는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사실조차도 에레즈가 자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할 때 깨달았다. 재생된 손에는 어느샌가 대검을 휘둘렀을 적과는 다른 종류의 굳은살이 박였다.
“…칼.”
에레즈는 머뭇거리다, 짐승처럼 네발로 엎드린 칼리번을 자리에 앉혔다. 칼리번이 엉거주춤 그 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자 이번에는 곰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부드럽게 눕혔다.
“말했잖아. 당신은 열병에 걸린 거라고….”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 위에 올라타며 속삭였다.
“에레즈 님….”
넋을 놓고 있던 칼리번이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병이 다 나을 때까지 아픈 백성을 돌보는 건 왕의 역할이지.”
에레즈는 칼리번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봐. 몸이 아직 뜨거운데 벌써 끝난 줄 알았다니…. 나를 이렇게 원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렇지?”
그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구호는 성녀의 역할이 아니던가? 칼리번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왕의 말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하고 납득했다.
빗속에서도 청량한 알파의 향기는 열에 들뜬 몸을 더욱 고조시켰다. 현실을 깨닫고 흔들리던 까만 눈이 다시 흐릿해졌다. 칼리번은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 * *
칼리번은 간신히 붙잡은 빗소리를 다시 잊었다. 기껏 닦아 준 몸은 전보다 훨씬 더럽혀졌고 빼내고 비워 낸 몸은 에레즈의 정액으로 가득 채워졌다.
“읏, 으응…. 아아, 하앗…!”
칼리번은 무릎과 두 손으로 땅을 딛고 짐승처럼 뒤로 에레즈를 받아 냈다. 조금이라도 상대가 편하기를 바라는 그 나름의 배려였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허리를 붙잡은 채 쉬지 않고 내리쳤다. 등 위로 솟은 근육들은 내벽을 찌르는 고통에 어찌 저항도 못 하고 꿈틀거리기만 했다.
에레즈가 뿌리 끝까지 들어올 때마다 땅을 짚은 두 손은 쾌감에 움찔거리며 금사를 쥐었다. 길게 자라난 금사는 몸을 누일 수 있는 융단이 되어 주기도 했고, 가끔은 고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촉수처럼 뻗어 나와 흔들거리는 칼리번의 앞을 정성껏 만져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가시넝쿨로 된 가느다란 금 장신구를 전신에 걸친 것만 같았다.
앞과 뒤, 그리고 유두까지, 어느 곳 하나 에레즈로 채워지지 않은 데가 없었다. 쉼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헐떡거리는 입을 제외하고는…. 허벅지 위로 흘러내리는 정액이 어느덧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윽…?!”
그때였다. 허리를 놀리던 에레즈가 돌연 칼리번의 허벅지를 쥐고는 뒤로 잡아당겼다. 지지대를 잃은 칼리번은 깊게 연결된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 흐읏…!”
앞으로 고꾸라진 칼리번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튼튼한 두 팔이 있었거니와 금사가 깔려 있었기에 다치지는 않았으나, 에레즈가 따라서 몸을 숙였기 때문이었다. 무게가 실리자 알파의 성기가 더욱 깊이 칼리번의 몸을 꿰뚫었다.
“흐윽! 하아….”
칼리번은 가슴이 땅에 짓눌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수없이 빨리고 물어뜯긴 탓에 약해진 피부 위로 닿는 금사의 감촉이 선명했다.
“…….”
에레즈는 칼리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두 팔로 허리를 안았다. 그러고는 칼리번의 몸을 옆으로 뒤집었다.
“읏…!”
고개를 땅에 박고 있던 칼리번의 몸이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반쯤 누운 채로, 등을 에레즈에게 기대고 배를 보이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칼리번의 한쪽 다리는 에레즈의 허벅지 위까지 크게 벌어져, 고개를 숙이기만 해도 칼리번의 성기와 연결 부위가 훤히 보이게 되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결합부로 시선을 옮겼다. 자세를 바꾸느라고 칼리번의 몸에서 성기가 반쯤 빠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구가 오물거리며 에레즈의 성기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칼리번은 몸을 다시 엎드리려 했다. 그러나 허리를 끌어안은 단단한 두 팔이 가로막았다. 그가 에레즈의 몸에 얹힌 다리를 내리려는 순간, 성기가 무섭도록 깊이 파고들었다.
“아아… 윽!”
에레즈는 한쪽 팔을 내려 칼리번의 허벅다리를 움켜쥐었다. 금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의 다리를 한데 묶었다. 결국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에레즈가 움직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흣, 으응…. 아, 아! 아흣, 윽…!”
에레즈가 몸속을 오갈 때마다 두툼한 성기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반복된 정사로 칼리번의 성기는 더 이상 금사로 뚫어 주지 않아도 알아서 물을 흘렸다. 훤히 드러난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에레즈가 그의 몸에 박을 때마다 탄탄한 가슴 근육 위로 자잘한 물결이 일었다. 배를 감싸던 에레즈의 손이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향했다.
“칼, 칼….”
에레즈는 애처롭게 헐떡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앗, 네, 흣, 전, 하……. 에, 에레즈 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칼리번을 찾을 때마다, 그는 기꺼이 에레즈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어둠 속에 갇힌 사람이 한 사람에서 두 사람으로 늘어 봤자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더 나아질 것처럼. 그러나 여기 있어요, 여기 있습니다, 라고 침착하게 말할 여유까지는 없었다.
쩍, 쩌억, 단단해진 살덩어리가 몸을 꿰뚫을 때마다 손은 가슴 위로 짙은 손자국을 남기고, 손가락은 안쪽으로 숨으려 드는 유두를 문질렀다.
“아…. 아윽….”
뒤에서 사정없이 밀어붙이는 허릿심과, 허벅지를 붙잡는 힘에 칼리번의 배가 앞으로 밀려났다. 그런데도 좀 더 안으로 파고들려는 듯, 옅은 색의 체모가 탄탄한 엉덩이 위를 긁었다.
“으흐, 아, 아아…!”
에레즈의 떨림이 등과, 얽힌 다리를 통해 전해지더니 뜨거운 것이 몸 안으로 퍼졌다. 머무를 곳을 찾듯 쑤걱쑤걱 칼리번의 몸에 길을 내던 성기가 마침내 정액을 토해 낸 것이다. 칼리번은 짓눌리는 쾌감이 버거워 허리를 틀었다. 성기의 크기만큼 벌어진 것을 제외하면 근육으로 짜여 옆이 움푹 팬 엉덩이 위로 정액이 밀려 올라왔다.
“흐, 아, 아아….”
에레즈가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박은 채로 짓누르자, 곧 칼리번의 성기에서도 묽은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정 직전까지 몰려 뻣뻣해진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려 갔다.
“하아… 아아….”
칼리번은 에레즈의 몸에 등을 완전히 기댄 채로 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에레즈… 님, 이제… 빼… 주십시오….”
칼리번은 에레즈의 성기를 품은 채로 어물거렸다. 이제 와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에레즈를 버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레즈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잠시라도 편한 자세로 머물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스로 몸을 추스를 기력은 없었다.
“으응, 괜찮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뒷덜미에 입술을 댄 채로 대답했다. 칼리번의 바람과 달리 에레즈는 사정을 마친 후에도 추삽질을 하거나 손을 놀리는 일 없어, 그저 몸 안에 머물렀다.
칼리번의 눈에 에레즈는 아직도 과도하게 아름답고 처연하고 연약해 보였다. 관계 도중에 피를 흘리고 탈진 직전까지 갔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왜곡된 시각과 달리 에레즈에게는 제 오메가를 무리 없이 받쳐 줄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다.
“흐으…읏….”
그러나 칼리번은 에레즈를 몸으로 짓뭉개고 싶지 않았기에 스스로 성기를 빼내 보려 했다. 그러나 지친 탓인지 실패하고 말았다. 등 뒤에서 쿡쿡거리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칼…. 여기 봐.”
칼리번이 고개를 돌려 충실히 명령을 따르자, 그가 상으로 입을 맞춰 왔다.
“…하아, 읏….”
에레즈는 칼리번의 입 안을 적셔 주었다. 자세가 편하지 못했기에 입맞춤은 드문드문했지만, 구름을 입에 문 것처럼 더없이 부드러웠다.
“하아….”
하늘을 나는 것만 같은 입맞춤이 끝난 후,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에레즈 프리드웬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는 어른이 되었다고 몇 번이고 되새겨 보지만,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
아마도… 시간이 지나야 더 지나야 간신히 익숙해지겠지.
신음으로 가득 채워졌던 동굴 안은 고요해졌지만, 빗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동굴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간혹 울려 퍼질 뿐…. 비는 거의 멎은 것 같았다.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는 어딘지 사람을 안정시켰다. …아니, 아니다. 에레즈 프리드웬과 함께라서 품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거겠지. 칼리번은 속마음일 뿐인데도 우직하게 잘못된 생각을 정정했다. 축축한 습기와 섞인 온기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칼리번의 눈이 반쯤 감겼을 무렵이었다.
“8년 전에… 당신이 내 러트를 가라앉혀 준 후에 말이야.”
몸을 맞대고 있던 에레즈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까 당신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었어.”
에레즈가 숨을 내쉴 때마다 칼리번의 등도 함께 오르내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동굴 밖에서 홀로 비를 맞고 있더라고.”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난다. 에레즈의 러트가 끝난 후, 칼리번은 더듬더듬 동굴 밖을 기어 나왔었다. 목이 말라서, 비를 맞고 싶어서….
“당신이 돌아볼 때까지 뒤에서 무작정 지켜보기만 했었지.”
그리고 에레즈는… 그런 칼리번을 몰래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 들켜 버렸지만.
“그때 사실은, 당신이 날 버리고 떠난 줄 알았어.”
“…왜 그런 생각을.”
“그야, 내 본 모습을 봤으니까…. …끔찍하잖아.”
에레즈 대신 금사가 칼리번의 뺨을 쓸어내렸다. 오메가를 노리던 알파는 마침내 원하는 바를 쟁취했다. 러트 내내 오메가를 독점하고 수차례나 노팅을 맺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알파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곁이 비어 있으니 서운하고 서러웠다. 칼리번이 돌아와 물을 나눠 주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안도했다.
“그때 저는… 음,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져, 조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칼리번의 갈라진 목소리로 그때의 감상을 솔직하게 말했다. 수일을 동굴 속에서 알파를 받아 내다가 마침내 밖으로 나왔을 때, 칼리번은 온몸의 껍질이 벗겨지고 새로운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싫지는 않았어? 많이 아파했잖아.”
“…하지만 에레즈 님께서도 이런 저를 받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에레즈는 할 말이 없어져 살포시 웃고 말았다.
“칼….”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왕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동안 열기에 밀려 마비되었던 피로가 칼리번의 몸에 한꺼번에 몰려왔다. 칼리번은 잠을 이겨 내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빠져들었다.
“칼리번…?”
칼리번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 그가 무어라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뜻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뺨을 맞댈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데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칼리번은 어물어물 대답했다. 에레즈는 감긴 눈꺼풀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허락을 받은 칼리번은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편히 쉬어.”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피곤했는지 에레즈도 사르르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근 열흘 만에 처음으로 함께 잠들었다. 두 사람만의 둥지에서 비로소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