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칼리번은 부서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황금의 비는 육체는 재생시켜 주었지만, 영혼을 원상복구 시켜 주지는 못했다. 산산조각이 난 영혼의 조각을 어떻게든 이어 붙였으나 아슬아슬한 형상은 여전히 금이 간 그대로였다. 아주 약간의 충격만 더해져도 다시 원래의 파편으로 돌아갈 터였다.
온종일 긴장한 상태로 버티다 보면 가끔은 해서는 안 될 생각이 들곤 했다.
‘이렇게 해서까지 살아 있을 필요가 있나?’
오메가란, 예외 없이 죽어야 하는 존재인데.
약속이 이루어지고 억압이 사라지자, 칼리번은 오히려 삶에 대한 의문을 느꼈다. 붉은 오메가는 죽었고 이제 그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니, 가치가 없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칼리번은 에레즈 프리드웬과 그의 왕국에 파멸을 불러일으킬 재앙이었다.
더 이상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용병님.”
그때, 누군가가 칼리번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 구역에 인간들만으로는 옮기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마물의 시체가 나와서 말입니다. 잠시 방문하셔서 옮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언뜻 들으면 지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가장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벽돌을 운반하는 일꾼에게 하는 말치고는 과하게 예의 바른 말투였다.
“…이 일을 끝낸 후 가겠습니다.”
이질감을 느낀 칼리번은 후드를 눌러쓴 상대를 흘끗 살폈다. 체격은 인간과 거의 비슷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주변의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칼리번은 후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잠시면 됩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주변을 살펴 에레즈, 혹은 에레즈가 심어 놓은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칼리번은 알파에게서 짐을 받은 후 함께 이동했다. 그들은 일부러 골목을 몇 군데 거쳐 인적이 드문 장소로 향했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거냐.”
오랜 걸음 끝에 상대가 멈추자, 칼리번이 먼저 물었다.
“본론부터 곧장 말씀드리죠. 오드론 님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후드를 쓴 알파는 칼리번을 불러냈을 때와 달리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날짜는 언제로 잡으시겠습니까? 편하실 대로 말씀해 달라는 오드론 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도 가능합니다.”
칼리번에게서 ‘거절’이라는 선택권을 지워 놓은 채였다.
“날짜도, 장소도 원하시는 대로 정하십시오. 오드론 님께서는 단 한 가지만 이쪽의 요구를 따라 주신다면 여자 알파와 함께 나오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지?”
“왕께서 이 만남에 대해 모르길 바라십니다.”
묘하게 업신여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칼리번은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알았다. 장소와 시기는 젠을 통해 전하지.”
한참의 고민 끝에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오드론 님께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알파는 눈앞에서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가 떠난 후에도 칼리번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바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니 숨어서 듣지 않아도 된다, 젠.”
칼리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자 무너진 건물의 잔해 뒤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왔다.
“이것 참, 역시 못 당하겠다니까.”
젠이었다. 오드론 측에서 보낸 부하도 젠이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오드론과 만나 볼 거냐.”
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칼리번은 몸을 돌렸다.
“그렇다.”
“나설 가치도 없는 일이니 무시해 버려. 거기다 넌 원래 협상에는 젬병이었잖아. 오드론은 영악한 놈이라고. 그러다가 말려들면 어쩌려고 그래?”
“어차피 한번은 부딪쳐야 할 상대다.”
왕성이 복구된 후에도 알파가 거주할 가능성이 컸다. 즉, 계속해서 부딪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에레즈가 왕성에 있는 이상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할 텐데, 뭘.”
“…과연 그럴까.”
칼리번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에레즈는 모두를 구하는 대가로 약해졌고 성검마저 잃고 말았다. 물론 망가진 것은 육신이었지, 힘 자체는 아니었으므로 다소 무리를 한다면 오드론 같은 알파 정도는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담이 가겠지.
차라리 탈피를 해서 새로운 몸을 얻는다면….
그러나 생명력이 대량으로 빠져나간 현 상태에서는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그래서 에레즈는 시간이 들여 현재의 육신을 천천히 회복하는 쪽을 택했다. 그 선택을 칼리번은 뒤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으며, 등 뒤에 숨으며 사는 것은 칼리번의 방식이 아니었다.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보호가 사라졌을 때 무기 하나 없이 맨살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칼리번은 그런 불안정한 상태를 원치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가 줬으면 한다.”
칼리번은 각오를 다졌다.
“그야 당연하지! 오드론이 무슨 함정을 설치했을 줄 알고 널 거기에 혼자 보내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야지.”
젠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는 듯 받아쳤다.
“…….”
칼리번은 순간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의 그였다면, 젠에게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그것 외에…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뭐지, 이 감정은….’
젠이 한 말이 어딘지 거슬렸다. 마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용병이 된 후 평생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키며 살아왔던 칼리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방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아니, 감시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이 일은 전하께 알려지지 않게 비밀로 해 줬으면 한다.”
그래서 칼리번은 부탁했다. 에레즈는 이미 짊어진 짐이 많았다. 그와 밤마다 대화를 나누며, 노고를 느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까지 괜히 알릴 필요는 없었다.
“뭐? 그건 좀….”
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8년 전이었다면야, 그녀는 당연히 칼리번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그는 에레즈의 스승 노릇을 했고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부탁이다. …정 어렵다면, 적어도 오드론과 만나기 전까지만 입을 다물어 주면 된다.”
“그럼 그 이후에는 알려도 된다는 뜻이야?”
젠이 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녀는 전부터 더는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고 공언해 왔던지라, 지금 상황이 퍽 곤란한 모양이었다.
“오드론이 만나고자 하는 의도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누구도 알지 못해. 내 선에서 정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묻고 지나가면 된다. …만약 좋지 않게 끝이 난다면 그때는 내가 스스로 알리겠다.”
“…….”
“전하께서는 앞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마물 혼혈도 왕성에 정착시키려 계획 중이시다. 그분이 불쾌할 만한 감정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한다.”
으음, 젠은 수염도 없는 턱을 쓸었다.
“흐으음…. 좋아. 우리 선에 끝낼 일이라면 굳이 에레즈를 싱숭생숭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녀가 고민 끝에 승낙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접선 날짜와 장소를 정했다. 혹시 모를 일이었기에, 알파나 인간이 주둔하는 구역이 아닌 성녀단의 구역으로 정했다. 젠이 직접 성녀단의 양해와 허락을 구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성녀단의 일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칼리번은 그녀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럼 그때 보자고.”
모든 대화를 마친 후, 젠은 생각보다 가볍게 등을 돌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젠.”
그때, 칼리번의 목소리가 떠나는 젠의 발목을 붙잡았다.
“음?”
“젠. 네가 오메가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건 에어리얼이 오메가로 변하는 과정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겠지?”
“아…. 그치. 아무래도 그렇지.”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주제인지, 말이 많은 편인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면… 에어리얼이 오메가로 발현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뭐?”
뜻밖의 질문에 불편한 화제를 좋게 넘기려던 젠이 몸을 돌렸다.
“그걸 왜 지금 묻는 거야? 설마, 몸에 문제라도 생겼어?”
젠의 표정이 예리해졌다.
“그건 아니다. 나는 8년 전에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나.”
“…….”
“그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면 사과하지.”
사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기억을 이미 보았다. 그러나 열에 시달리고, 막판에 가면 제대로 걷지 못해 젠의 등에 업혀 다녔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그 상태가 오랜 도망 생활로 인한 체력 고갈이 원인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스읍, 내 경험 중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오메가인 네가 원한다면야, 뭐라도 알려 주는 게 어디에든 도움이 되겠지.”
떠나려던 젠은 근처 바위에 주저앉았다.
“미리 말하지만, 나라고 오메가에 대해 박학다식한 건 아니야. 알파랑은 다르게 너희는 원체 드물잖아. 기이한 운 때문에 오메가 둘의 수발을 들었다만 그래도 여전히 모르겠어.”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젠이 본격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흔히 ‘오메가는 마물을 끌어들이니까 불길하다’고들 하잖아. 그 말대로 오메가의 향기를 맡고 알파가 달려들지. 하지만… 가끔은 반대기도 해.”
젠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처음에는 미열을 가라앉히고 냄새를 숨기는 정도면 일상생활이 가능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에어리얼에게도 알파의 러트 같은 발정이 발작처럼 찾아오더군.”
러트. 알파의 발정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름이 따로 붙을 정도로 그 현상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메가의 발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아니, 그 현상을 가리키는 단어조차 없었다. 인간은 그렇다 쳐도 알파 중에서도 오메가는 1년 내내 발정 상태이며 언제고 마물을 낳을 수 있다고 아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때부터 좀 힘들어지기 시작했어. 알파가 참기 힘든 향기를 뿜어내는 건 기본이었지. 가끔 나조차도 이성을 잃고 달려들 뻔했다니까. 그 후로 난 아예 동굴 입구에서 잠을 취하기로 했지. 그렇게 녀석을 혼자 뒀더니 몸이 열로 펄펄 끓더군. 밤이 되면 더욱 심해져서,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열에 지쳐 발버둥을 쳤어. …여기까지는 아마, 전에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었을 거야.”
“…….”
칼리번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젠이 칼을 들이밀며 자신을 죽이려 했을 때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일이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하아, 이다음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앞에서 입에 올리기는 조금 민망하다만….”
젠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뱉어 냈다. 입만 열면 음담패설을 하는 탓에, 에레즈의 러트를 보낼 때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던 그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태도였다.
“놀랍게도, 거기까지는 그래도 버틸 만했어! 알파가 많은 곳에 가지 않고 내가 녀석을 피하면 되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녀석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어. 마치 인격 자체가 변한 것처럼….”
“인격이 변해…?”
칼리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그때도 앙칼지고 재수 없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래도 겁도 많고 낯을 가리는 편이었거든. 마을에서 머물 때는 무슨 원숭이 새끼처럼 항상 내 등에 매달려 있었다니까. 마음에 안 들면 내 귓가에 바로 욕을 꽂으면서 말이야.”
내숭도 이런 내숭이 없더라니까. 그나마 추억이라고 불릴 만한 과거였는지, 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알파를 대할 때도 그랬지. 그 녀석, 오메가긴 했지만, 딱히 누군가와 관계를 맺길 원치 않았어. 오히려 방어적이었거든. 그런데 열이 들끓기 시작하고서는…. 온갖 더러운 말로 애원하더군. 이건 뭐, 네 앞에서 입 밖에 내기도 어려울 정도야. 한 번도 내게 말한 적 없는 그런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건, 내가 거두기 전에 이런 말을 어디선가 듣고 살았다는 뜻이겠지만…. 흠….”
이야기는 점점 어두워졌다. 그에 따라 그녀의 입에 걸린 미소도 바람처럼 흩어졌다.
“내 몸 위에 올라타서 조르는 건 뭐, 흔할 정도였고…. 그래도 내가 계속 거절하니까 제 발로 마물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어.”
그녀의 말을 듣는 칼리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기랄, 내가 기껏 그 녀석을 업고 도망치고 있었는데 말이야! 얘기만 들어도 미친 것 같지? 그래, 그 녀석은 완전히 미쳐 버리고 말았어!”
젠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녀석이 제정신이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지. 체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오메가로서의 본성이 녀석을 지배한 거야. 그래서… 그 뒤로는 묶어 두는 수밖에 없었지. 진짜 못 할 짓이었다. 이것도 지금 너한테도 최대한 걸러서 건전하게 말하는 거야. 실제로는… 더 추잡했거든.”
하아아, 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인 나도 그런데 본인은 어떻겠어? 원래의 자신과 발정이 나서 돌아 버린 자신 간의 차이를 견딜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거겠지. 젠이 무슨 말을 입 안으로 삼켰는지 칼리번은 알 것 같았다.
“…….”
“…그랬는데.”
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젠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칼리번을 향해 고갯짓했다.
“하하, 별 도움 안 되는 이야기였네! 하지만 넌 다르잖아. 스스로 향기를 조절할 수 있으니까.”
“…그래.”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론과의 만남을 에레즈에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몸 상태를 젠에게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젠….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뭐든.”
칼리번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붉은 오메가와 교미하지 않았던 거지? 어쩌면…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나.”
간신히 숨기고 있지만, 지금도 몸속에서 지글거리는 열기가 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안하다.”
칼리번은 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이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마치 에어리얼이 몸 안에 들어와 대신 질문을 한 것 같았다. …전부 변명이다. 에어리얼의 망령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과연 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한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땐 마물들이 우리를 쫓고 있었어! 내가 그 녀석을 안는다고 상황이 나아졌을 것 같아? 아, 잠시간의 괴로움은 달랠 수 있었겠지….”
젠의 외침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것은 칼리번이 아닌, 오메가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래서야 젠이 말했던 에어리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메가의 갈증은 그 정도로 해소되지 않아. 아니면 다른 알파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박고 있으라고? …그러다가는 녀석을 뺏기고 말 텐데?”
젠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실언…이었다.”
칼리번의 등 뒤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이러다가는 지금 자신도 과거의 에어리얼과 똑같다는 사실을 들킬지도 모른다.
“알아!”
젠은 괜히 성을 냈다. 분노를 참으려고 했지만 잘 갈무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니까….”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칼리번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내 가족이었다고. 제정신이 아닌 걸 알고 있는데,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런 건, 저 숲에 득시글거리는 마물과 다를 바가 없잖아.”
젠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보자.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기고 급히 자리를 떴다.
“…….”
칼리번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사람에게 못 할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에어리얼의 기억을 보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데도….
<사실은 젠이 아니라 왕자님한테 묻고 싶은 거였으면서.>
젠이 떠난 자리에는 에어리얼의 망령이 서 있었다.
“…….”
칼리번은 눈동자만 굴려 그곳을 노려보았다. 우습게도 그것은 젠이 있을 때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 과거는 잘 들었겠지? 너도 마찬가지야, 칼리번.>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훤한 대낮이었으나 망령은 때를 가리지 않았다.
<버텨 봤자 시간 문제야. 결국 너도 발가벗은 채로 알파한테 달려들고 말 거라고.>
속삭임은 저주와도 같았다.
* * *
신용병 연합을 이끌던 데릴만은 죽었다. 그 빈자리를 이은 것은 측근인 오드론이었다. 오드론은 좋게 말하면 신중파고, 젠의 표현으로는 짜증 나는 기회주의자였다. 데릴만은 모든 알파에게 한 명의 사내를 보급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전임자와는 달리 현실주의자이기도 해서 인간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그는 왕성에 남은 알파들과 용병 연합을 그럭저럭 꾸리고 있었다.
“그러니 별일은 없을 거야. 그놈은 겁쟁이니까.”
“…….”
“끽해야 앞으로 잘 지내자는 휴전 협정 정도겠지.”
젠은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칼리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과 칼리번은 함께 약속 장소에 나왔다. 오드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성녀단의 구역이었으나, 두 사람은 혹시나 함정을 설치해 놨을지 확인했다.
“그런데 말이야. 에레즈에게… 얘기해 봤냐?”
이곳저곳을 헤집어 보던 젠은 슬쩍 말을 얹었다.
“뭘 말하는 거냐.”
“그 녀석 말이야.”
“…….”
뒤늦게 눈치챈 칼리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답답해서 그래. 언제까지 숨길 셈이야. 설마 평생 비밀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젠은 어떤 알파가 이 세상에 존재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
칼리번은 젠을 보지 않고 묵묵히 건물의 잔해를 뒤집었다. 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젠이 말을 꺼낸 보람도 없이 대화가 끊어지나 싶을 무렵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묻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칼리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버티지 못하실 거다.”
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도 칼리번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너, 그 녀석을 어디까지 어린애 취급 하는 거냐? 이러다가 영영 모른 채로…!”
답답한 마음에 젠이 화를 내려는 차였다.
“…그분에게 내 입으로 말하라는 거냐.”
칼리번이 그녀의 말꼬리를 잘랐다.
“그 녀석의 절반 이상이, 성검에 파괴됐다고?”
매사에 덤덤한 그답지 않게, 잔뜩 짓눌린 목소리였다. 젠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칼리번, 너….”
“이런, 벌써 와 계셨을 줄은 몰랐군요.”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젠이 반박하려던 찰나, 오드론이 등장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순간에. 칼리번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오드론을 돌아보았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성녀님들에게 몇 가지 검문을 받느라 발이 붙잡힌 탓에….”
물론, 오드론은 자신이 와서는 안 될 때 도착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지어낸 듯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미리 논의한 대로 칼리번 일행과 수를 맞춰 수하 한 명만을 데리고 왔다.
“신수가 훤해 보이는 걸, 오드론.”
일단은 눈에 보이는 적부터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젠은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미뤄 두고는 칼리번을 대신해 대답했다.
“뭐 그리 좋을 일이 있겠습니까? 데릴만 님을 잃고, 오메가님도 잃었는데….”
오드론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칼리번이 들어도 속이 텅 빈말이었다.
“여기로 불러낸 이유가 뭐냐.”
칼리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데릴만의 측근인 오드론에게 지금처럼 함부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자신이 기형 알파인 줄 알았던 칼리번은 알파 간의 알력을 딱히 느끼지 못했다. 그런 그조차도 용병 연합 내부에 공고하게 자리매김한 서열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안부라든가, 근황이라든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좀 더 분위기가 무르익은 후에 본론에 들어가도 좋을 텐데요, 오메가님.”
“칼리번. 내 이름은 칼리번이다.”
“…칼리번 님.”
그러나 지금 상황은 8년 전과 정반대였다. 신용병 연합의 우두머리인 오드론이 칼리번에게 묘한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친목을 쌓을 생각은 없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당장 해라.”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다 보니 자연히 복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구역으로 가게 되었다. 성녀원의 부속 건물이었는데, 새하얀 대리석 건물은 지금은 전부 무너졌고 잡초로 뒤덮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이것 참….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하, 오드론은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그러나 칼리번과 젠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하지만 저희의 입장도 조금은 헤아려 주십시오. 저희는 말입니다, 의식이 끝난 후 오메가님께서 자취를 감추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설마… 알파인 척, 인간들과 섞여 고된 노역을 하고 계실 줄이야. 이야,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
“전하께서 보이신 기적 덕분에 오메가님께서 그런 자유를 누리시는 거겠지만…. 제가 알파들을 단속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처음에는 오드론을 노려보던 젠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점점 칼리번 쪽으로 이동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오드론. 이다음에 말하지 않겠다면 나와 젠은 떠날 거다.”
미묘하게 굽히고 들어가는 오드론도 오드론이었지만, 그를 상대로 당연하다는 듯이 위압적으로 구는 칼리번에게도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칼리번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오드론의 눈이 번들거렸다.
“사실 별것 아닙니다. 저희는 언제나 오메가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그 말을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오드론은 즉시 행동으로 보였다. 바로 칼리번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의 수하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지켜만 보던 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붉은 오메가님께 고초를 겪으셨기에, 그분에게 충성을 바친 저희가 아니꼬울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는 무슨…!”
“진정해라, 젠.”
칼리번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젠이 나서려 했으나 그가 팔을 뻗어 만류했다.
“이제 와서 나를 받들고 싶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오드론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어느 때도, 데릴만을 상대할 때조차도 이 정도로 비굴하게 군 적이 없던 사내였다. 심지어 칼리번은 그보다 직급도 낮았고 나이도 한참 어렸다.
더구나 젠은 오드론이 왕국의 다른 기둥들에게 어떻게 구는지를 에레즈의 곁에서 보아 왔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너희는 내가 붉은 오메가에게 붙잡혀 있을 때…. 전하께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았지.”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드론은 어찌 보면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감정의 변화 없이 덤덤했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때 저희로서는, 붉은 오메가님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지라….”
차라리 칼리번이 분노를 보였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의 태도에서 오드론은 어떤 답도 찾아내지 못했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시는군!”
보다 못한 젠이 한마디 뱉었다. 오드론은 한참 아래 서열인 젠에게 비아냥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 칼리번만 올려다보았다.
“오메가님. 이 점은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저희는 이미 왕국의 일부입니다. 만약 저희가 에레즈 프리드웬을 따르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리면 어떡하실 겁니까? …혹은, 그보다 더한 일을 벌인다면?”
오드론은 이 묵직한 오메가를 흔들기 위해 강수를 두었다.
“이 자식…!”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실현될 일 없는 가정일 뿐이니까요.”
젠이 울컥 화를 내자 오드론은 가는 눈을 더욱 실눈처럼 만들며 미소를 지었다.
“…….”
그러나 오드론의 도발에도 칼리번은 덤덤했다.
“분명 너희는 나를 따르고 싶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오메가님.”
“그런 협박까지 곁들여 가면서… 나한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솔직하게 말해라.”
칼리번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젠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윽….”
젠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칼리번에게서 거부하기 힘든 향기가 났다. 알파 중에서도 자제력이 강한 편인 그녀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칼리번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분노를 인지했는지, 오드론과 그의 부하는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지… 진정하십시오, 오메가님! 맹세컨대 저희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오메가님에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메가님께서 교미를 원하실 때 저희 중에서 선택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드론이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파를 필요로 하실 때가 올 겁니다. 붉은 오메가님께서는 그 가는 몸으로도 수십 명을 거뜬히 상대하셨습니다. 그분보다 강대하신 검은 오메가님이시라면 수백 마리의 알파도 부족하시겠지요. 오메가님의 여흥을 풀기 위한 상대를 저희 중에서 골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면 저희 쪽에서 오메가님을 만족시킬 만한 알파를 엄선해 바칠 수도 있습니다.”
“…….”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왕성의 모든 알파를 오메가님에게 무릎 꿇게 하겠습니다.”
오드론은 간청했다. 말투만 들으면 겸허하기까지만 바람이었다. 그러나 오메가를 자극하기 위해 알파의 향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윽….”
이 대화의 방관자일 뿐인 젠은 절로 욕지기가 났다. 좀 더 공손할 뿐이지, 그녀가 에어리얼을 데리고 도망쳤을 때와 모든 것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메가를 원하는 것은 알파의 한결같은 본능이다. 자신도 알파였기에 잘 알지만, 몇십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용병들의 태도에 신물이 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8년간 에어리얼과 내통하던 녀석 중 한 명이라도 진실을 전했다면, 훨씬 빠르게 칼리번을 구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파들은 이렇게까지 한통속인가 싶을 정도로 한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같은 알파이지만, 오메가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통속이 되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다.
“…젠.”
그때, 칼리번이 그녀를 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큭…. 아, 여기.”
8년의 공백이 있기는 했으나 두 사람은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 온 전우였다. 젠은 버릇처럼 가지고 있던 단검을 그에게 넘겼다.
“헉!”
어찌나 자연스러웠냐면, 단검을 넘기고 나서 젠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오메가님…?”
서로 무기를 챙겨 오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당연하게 약속을 어기는 칼리번의 모습에 오드론은 당혹스러워했다.
“내 이름은 칼리번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러나 칼리번은 아무렇지 않게 칼을 들었다.
“이런, 죄송…. 크윽!”
고작 단검으로는 알파에게 위협은커녕 생채기도 내지 못한다. 칼리번이 무슨 행동을 할지 읽어 냈는지, 오드론은 이를 악물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였다. 칼리번은 칼날로 제 팔을 그었다. 칼끝이 피부 위를 길게 지나자마자 붉은 선이 생기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허, 허윽…!”
피 냄새에 오드론은 숨을 참고 그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이미 오메가의 향기에 정신을 지배당한 알파가 등 뒤에서 오드론을 붙잡은 것이다. 다름 아닌 바로 오드론의 부하였다.
“오, 오메가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부하에게 양팔을 붙잡힌 오드론은 가슴과 목을 훤히 드러낸 채 자비를 구했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흔들리고 아랫도리가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오드론을 구속한 알파에게도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나마 정신력이 강한 녀석으로 골랐으나 오메가 앞에서는 헛수고였다.
“날 우습게 본 모양이군. 내가 붉은 오메가에게 지배당했었다고 해서 알파에게까지 굴복할 것 같나?”
칼리번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훅 끼치는 피 냄새에 오드론이 진땀을 흘리며 신음했다.
“흐읍…!”
오드론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곁에 있던 젠도 마찬가지였다. 벌어진 상처의 틈에서… 근육이라든가 뼈가 아닌 다른 것이 보였다. 시커먼 구멍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치 새까만 구멍이었으나 오드론도, 젠도 저 구멍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건… 마계와 이어지는 입구다.
“난 너와 달리 여러 번 말하지 않는다. 당장 선택해라. 이대로 이성을 잃고 네 부하와 싸우다 죽는 쪽을 선택할 테냐, 아니면… 내가 불러낸 마물에게 지금 당장 찢겨 죽을 거냐.”
“윽…. 크윽…!”
어느 쪽이고 오드론이 살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칼리번은 피를 흘리는 팔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검은 상처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듯, 팔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커헉, 허어……. 자,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감히, 오메가님께… 무례를…… 범……. 크흑…!”
판을 뒤집어 보려다 도리어 오메가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오드론은 무작정 빌었다. 부풀어 오른 그의 앞섶은 바지를 찢고 튀어 오를 기세였다.
“…….”
칼리번이 고개를 까딱이자 오드론을 붙잡았던 그의 부하가 힘을 풀었다. 일부러 오드론을 놓아준 것이다. 힘겨루기를 했던 두 알파는 네발짐승처럼 발과 팔을 땅에 댄 채 헐떡였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복종하는 것, 오로지 그뿐이다.”
“헉, 허억….”
칼리번의 피가 주저앉은 오드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분의 신하로서 충성하는 거다. 지금처럼만 하면 될 테니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오드론의 머리를 적신 피는 이윽고 이마와 코, 뺨을 지나 입술까지 흘러내렸다.
“아…. 하아…. 무, 물론입니다….”
오드론은 더 없이 굴복을 당했으면서도, 망설임 없이 혀를 내밀어 피를 핥았다. 오드론의 부하는 그마저도 누리지 못한 채 땅에 떨어지는 피를 흙과 함께 씹었다.
세 기둥 중 한 축인 오드론이 칼리번의 앞에서 개로 전락해 버렸다. 이 이상 두고 볼 가치도 없는, 일방적인 승리였다.
“…아직은 내가 한 수 위지.”
오드론을 내려다보며, 칼리번은 언젠가 들었던 말을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젠은 흐려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은 채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겼다. 맹세컨대 그녀는 칼리번의 편이었다. 자칫 반역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문제를 그가 명쾌하게 해결했다는 사실도 안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런데도 어딘지 꺼림칙했다. 그것은 알파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처음으로 칼리번이 동료가 아닌, 모르는 오메가로 느껴졌다.
* * *
접선을 마친 후, 칼리번은 젠을 두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고 각오를 다졌고, 결과는 역시나였다. 마물 혼혈들의 의도는 예상대로였고 약점 또한 그랬다. 영양가 없는 만남이었다.
하지만 이참에 어느 쪽이 위인지를 확인시켜 주었으니 한동안은 잠잠해지겠지. 감히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배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데릴만 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돼.’
지금은 외부의 적인 마물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치고 있으나, 마물 혼혈은 장차 에레즈 프리드웬이 맞닥뜨려야 할 문제였다. 데릴만과 같은 기회주의자들로 인해 에레즈 프리드웬뿐만 아니라 알테르 프리드웬과 같은 적진마저 피해를 보지 않았던가? 그것만은 막아야만 했다.
‘이 힘을 써서라도….’
칼리번은 아직도 피가 흐르는 검은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세게 움켜쥐었다.
“거기서, 칼리번!”
그때, 젠의 외침이 들려왔다. 망설임 없이 떠나는 칼리번을 뒤쫓다가 간신히 따라잡은 차였다.
“너 인마! 방금 뭔 짓을 한 거냐!”
그녀는 칼리번의 어깨를 붙잡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오늘 일은 전하께 알리지 마라. 절대로.”
간신히 자신을 억누른 채 젠에게 부탁만 할 뿐이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젠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오드론과 함께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녀는 득달같이 달려들어서는 마침내 칼리번과 마주했다.
“너…….”
그리고 당황했다. 칼리번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달린 것도 아닌데 어찌 된 일인지 호흡은 흐트러졌고 얼굴은 상기된 채였다.
“부탁이다….”
칼리번은 젠을 밀쳐 내더니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한번 드러난 향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젠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오메가라면 이골이 난 그녀로서도 버티기 힘든 정도의 향기였다.
“맹세해라, 젠. 그렇지 않으면 너한테도 같은 방법을 쓸 거다.”
칼리번은 피를 흘리는 손을 뻗으며 동료를 협박했다.
“큭! 너 진짜, 그걸 말이라고…!”
젠은 칼리번에게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상대가 농담 따위 할 줄 모르는 바위 같은 사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적이 대치하듯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은 8년 전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칼, 너… 정말 괜찮은 거냐?”
젠이 망설이다 물었다. 칼리번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굵은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