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인류를 위협하던 사악한 오메가는 죽었다. 마물 혼혈들은 인간을 배신하고, 인간은 굴복하고 분열되었다. 그러나 서로를 배제할 수 없었기에 진실을 땅에 묻고, 얼버무리며 외면했다. 전쟁의 막바지에서, ‘일부’의 알파들은 인간의 편에 섰다며 타협을 이루었다.
역사는 그렇게 쓰였다.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할 또 다른 오메가가 살아남고 말았다는 사실을 누락시킨 채.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앞서 죽은 오메가가 어깨에 매달려 저주를 속삭인다. 오메가에게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어떤 식으로 발버둥 치든 간에, 마지막에는 광인이 되어 마계의 바다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이 땅에서 태어난 한 마리도 빠짐없이 이와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붉은 오메가가 죽었다. 그러니 이제는 칼리번이 미쳐야 할 차례였다.
* * *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의식’을 막았다. 오직 에레즈 프리드웬 한 사람을 되찾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인간들도, 젠도, 아스터도 죽게 했으니 자신이 살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치 않았다.
그러니 칼리번은 에어리얼과 함께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운명은 항상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그는 살았다.
…아니, 에레즈 프리드웬이 모두를 살려 주었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광경은 그리운 이의 모습이었다. 물안개가 낀 새벽.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건져 올린 이의 눈물. 피와 오물로 뒤덮였던 칼리번에게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죽기 직전에 본다는 환상처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이후로도 산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만 했다. 칼리번이 다시 잠든 사이 에레즈 프리드웬은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왕으로서 외부의 마물을 막고, 종족 간의 내부 갈등을 조율하고, 무너진 왕성을 복구하는 데 총력을 다했다. 그를 보좌하는 젠 또한 바쁘기로는 못지않았다. 에레즈를 보필하는 인간들도, 다소 적대적이기는 하나 명령을 따르는 마물 혼혈들도 마찬가지였다.
칼리번만이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젠과 에레즈는 창고를 숙소로 개조한 후 그곳에 칼리번을 격리 시켰다. 사람들에게 오메가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몸을 추스른 칼리번이 몰래 밖으로 나왔을 때, 왕성에서 마주치는 인간이나 마물 혼혈은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8년간 많이 이들이 죽었다. 칼리번만이 8년 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니, 멈춰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실상은 뒷걸음질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
젠은 막사 안에 죽은 듯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혼자 있으면 잡념이 자꾸만 그를 붙잡았다. 이럴 때는 몸을 쓰는 일이 적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칼리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해 보려 했다.
용병 일은… 더는 못 하겠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아는 알파가 아직 남았을 테니. 신용병 연합은 에레즈가 두려운지, 아니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인지 아직 칼리번에게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인간과 섞여 있는 쪽을 택했다. 용병이 되기 전까지는 인간과 함께 지냈기에 힘 조절을 할 줄 알았다. 그들과 협력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칼리번과 같은 마물 혼혈을 꺼리기는 했으나, ‘마물’이라는 위협이 밖에 있는 탓인지 8년 전처럼 노골적으로 밀어내지는 않았다.
“벽돌을 옮겨 주세요!”
“거기, 그렇게 험하게 다니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쪽이 알아서 조심하면 되잖아!”
인간과 알파는 구역을 나눠서 복구 작업을 진행했으나 협업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인간과 마물 혼혈이 왕성 안에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은, 칼리번에게 아직 낯설었다.
<봐, 모든 것이 내 말대로 흘러가고 있지?>
그렇게 칼리번이 세상과 유리될 때면, ‘그것’이 불쑥 말을 건다.
<네 덕분에 마물과 인간은 점점 더 섞이게 될 거야.>
“…….”
<예언의 아이가 태어날 날이 머지않았어, 칼리번….>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을 무시하기 위해 칼리번은 몸을 혹사했다. 그러나 회복력이 뛰어난 마물 혼혈의 몸은 인간들의 몇 배나 되는 일을 해치우고서도 펄펄 끓었다.
일꾼들은 처음에는 필요한 때 외에는 칼리번 주변을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덩치는 크고, 생긴 것은 무서운데 말까지 없으니 겁을 먹을 만도 했다. 그러나 알파가 일을 척척 해 주니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우기가 지난 지 한참인데 비가 계속 와서 걱정이야.”
“혹시나 비를 맞고 마물의 시체가 다시 살아날까 종종 잠도 설쳐, 나는.”
“에이, 그런 기적이 또 오겠나?”
“으…! 힘들다, 힘들어!”
“그래도 왕성이 남아 있는 게 어디야. 전하께서 붉은 오메가를 물리쳐 주셔서 그나마 이 정도인 거겠지.”
“역시 그렇지?”
칼리번의 휴식은 몸을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에레즈의 업적을 칭송할 때면 평소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무너진 기둥을 혼자 등에 이고 옮기는 모습에 사람들이 기겁하기도 했다.
“이것 봐, 전하께서 시찰을 도시는 모양이야.”
“우리 구역인가?”
“아니, 우리 바로 옆이던데….”
“그럼 잠시 일은 쉬자고!”
간혹 칼리번이 일하는 근처까지 시찰을 도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그 주변 구역의 사람들까지 몰려가곤 했다. 그럴 때면 칼리번도 그들에게 섞여 들었다. 여인들보다 커다란 덩치는 눈에 띌 수밖에 없기에, 무너진 건축물 뒤에 숨어야 했지만 말이다.
젠만 해도 자신이 밖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펄펄 뛰었는데, 왕마저 알게 되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칼리번은 이제 막 일에 재미를 붙이던 차였다.
‘왕자님이시다. …아니, 이제는 전하시지.’
칼리번은 저 멀리 보이는 에레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에레즈 프리드웬 만세!”
에레즈의 등장에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었다. 왕의 주변에는 성녀와 기사들이 함께였다. 예전에는 왕성 재건 기사단의 핵심 인물들은 리론 후작 등의 사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로위나를 필두로 한 여성진들로 교체되어 있었다.
에레즈는 왕실 재건 기사단의 단장, 로위나 리론과 함께였다. 젠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고, 곁에 있는 성녀들보다도 조금 체격이 작은 편이었으나 그를 만회하듯 튼튼한 철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로위나 리론은 ‘의식’이 벌어지던 중, 아버지인 리론 후작을 구하다 전사하고 말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부녀도 황금의 비를 맞고 살아났다. 그 후로도 로위나는 에레즈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저것 봐, 전하 곁에 리론 단장님도 계시잖아!”
“역시 차기 왕비님이셔서 그런가, 위상이 다르군.”
“왕비님? 하지만, 왕비의 자리에는 항상 성녀님께서 앉으셨는데…?”
“그게 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리론 단장님은 마지막까지 왕성에 남아 마물과 싸워 주신 분 아니던가. 당연히 왕비님이 될 자격이 있으시지!”
유독 사람들이 와글와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칼리번 주변의 사람들이 에레즈와 로위나를 보고 한마디씩 던졌다. 차기 왕비가 누가 될지는, 백성들이 즐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유독 남녀 짝을 지어 주는 행위를 좋아했다. 본인들이 하는 교미도 아닌데 말이다.
“…….”
하지만 칼리번도 이번만은 그들에게 공감했다. 황금 비가 내린 후, 사람들은 에레즈 프리드웬을 절대적으로 숭배했다. 그러니 새로운 왕비는 모두의 앞에 나설 수 있고 왕과 함께 무너져 가는 왕국을 받치는 기둥 같은 존재가 되어야 마땅했다. 로위나 리론은 그 자리에 어울리는, 명예로운 기사였다.
<거짓말.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거면서.>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에 칼리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 사이에 유독 붉은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다.
“에….”
에어리얼이다. 환청으로만 들려오던 목소리가 어느새 형태를 갖춘 것이다.
“!”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사람을 헤치고 에어리얼을 붙잡았다. 칼리번이 난동을 부리자, 작고 마른 여자들은 그 자리에서 넘어지기까지 했다.
“으, 으아악!”
그러나 눈의 착각이었다.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칼리번을 정신을 차렸다.
“왜…. 저한테 왜 그러시나요?!”
조금 붉기는 했으나 밝은 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이었다. 갑자기 마물 혼혈이 달려드니, 그녀는 당장에라도 울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짧은 사과를 던지고는 뒷걸음질 쳤다. 알파가 소란을 부리자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여기서 일이 더 커지면 에레즈에게 정체를 들킬 수도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급히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 * *
“아, 평생 대장 자리는 앉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어떤 돌대가리가 어린애를 던져 놓고 가서 결국 이렇게 됐다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니까 책임져라.”
늦은 밤이었다. 젠은 종종 칼리번을 찾아와 상태를 확인하고 안부를 물었다. 물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칼리번은 귀한 손님을 위해 모닥불을 피웠다.
“그래서 말이야, 에레즈 녀석이 또 산더미같이 일거리를 만들어 왔다니까?”
젠은 칼리번에게 자신이 에레즈 아래에서 얼마나 혹사를 당하는지 한탄을 늘어놓았다. 칼리번에게는 원죄가 있었기 때문에 얌전히 듣기만 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내 처지 좀 봐라. 어떤 의미로는 네가 부럽다.”
젠은 칼리번에게 신분을 바꾸자고 애걸하기도 했다. 그녀는 기사단에, 성녀단에 가끔은 신용병 연합과의 조율까지. 여기저기 발을 걸치고 있어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법했다.
“그런 의미에서 칼리번, 넌 진짜 이상한 놈이다. 나는 일하기 싫어서 안달인데, 넌 하지 말라고 해도 달려드니 말이야.”
한참이나 한탄하던 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원래 그녀는 칼리번이 창고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칼리번이 체취를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사람들과 섞여 일을 돕는 것까지는 인정해 주었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던 젠이 슬쩍 운을 띄웠다.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사라졌더라고.”
불쑥 꺼낸 말인데도 칼리번은 묻지 않았다.
“…그런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 대신 알아봐 줘서 고맙다.”
예상했던 결과여서일까? 칼리번의 반응은 심심할 정도였다.
“뭘. 나도 한번은 확인해 봐야 하는 거였으니까.”
젠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없는 술을 찾았다.
“제길! 먹을 게 없어, 먹을게….”
당장 먹을 죽도 없는 상황에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젠은 땅에 괜히 헛발질을 하며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너 정말 괜찮은 거냐?”
한참 뒤에야 젠이 물었다. 그것이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이리라.
“…….”
그러나 칼리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젠의 입장에서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무시하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 녀석 말이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거.”
젠은 칼리번이 멍청하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한번 말했다.
“…젠, 너야말로 괜찮은 건가? 에어리얼과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로 알고 있는데.”
칼리번은 모닥불을 나뭇가지로 쑤석거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절벽을 수색한 건, 부활의 흔적을 찾기 위한 거였어. 만약에 그 녀석이 살아 있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내 손으로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서 말이지.”
“…….”
“하지만 넌 다르잖아. 그 뭐냐, 그 녀석은 네….”
젠이 그녀답지 않게 말하기를 망설였다.
“다 끝난 일이다.”
칼리번은 일말의 여지없이 ‘그것’과 관련된 모든 논의를 차단했다. 마지막으로 나눈 협상은 결렬되었고 칼리번은 녀석에게, 녀석은 칼리번에게 칼날을 내밀었다. 그때 결판이 난 것이다. 파삭, 불길에 까맣게 타 버린 나무가 부스러졌다.
“…….”
칼리번이 불길만을 쳐다보았고 젠도 더는 묻지 않았다. 칼리번의 눈동자는 까만색으로 채워져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텅 빈 것 같았다. 그 눈동자가 데굴 구르더니,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아직도 잊지 못했으면서.>
예상대로, 불청객은 칼리번의 한쪽 무릎에 두 팔을 포갠 채 관심을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붉은 눈은 익숙한 핏빛이었다. 장작을 태우는 불길처럼.
“…….”
젠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던 칼리번이었으나 이번만은 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하지 않는 몸을 지녔으면서도 말이다.
* * *
칼리번은 그런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가끔 에어리얼의 망령이 나타나 그를 시험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직 광기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왕은… 어째서인지 꽃밭에서 마음을 터놓은 후에도 며칠 간은 나무 뒤에 숨어서 사슴처럼 빤히 지켜보곤 했다. 그래도 무작정 도망가던 때와 달리, 칼리번이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꽃밭을 다녀온 이후, 어찌 된 일인지 젠이 방문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랬기에 칼리번으로서는 이 낯가리는 손님이 더욱 반가웠다.
“…칼.”
에레즈는 워낙 바빴기에 칼리번의 천막에 자주 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번 만나면, 그때는 달이 지고 새벽이 될 때까지 오래도록 함께 시간을 보냈다. 주로 하는 일은… 칼리번이 부러뜨린 통나무 위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전하. 오늘 태후 전하께서 제가 일하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날은 드물게도 칼리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네. 상을 주셨습니다.”
“아…. 내가 미리 챙겼어야 하는데, 번거롭게 만들어 버렸네.”
“그렇지 않습니다.”
일전에 칼리번은 몸을 바쳐 에레즈와 베이가를 구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에레즈는 칼리번이 밖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칼리번이 갑자기 등장하자 놀란 새끼 염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베이가가 칼리번은 찾아온 것이다.
“괘… 괜찮았어? 혹시 불편했다든가….”
“아닙니다.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래?”
에레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칼리번은 태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후는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일터까지 찾아와 상을 건네주었다. 상은 다름 아닌 큼지막한 빵 다섯 덩어리였다.
<금이나 보석도 좋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것만 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 없겠지.>
칼리번은 작업반장을 통해 자신이 일하는 구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태후의 선물을 나눠 주었다.
<감사합니다, 태후 전하.>
칼리번은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유독 칼리번의 눈을 살폈다. 칼리번은 높으신 분과 눈을 맞추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끔벅끔벅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군.>
한참 뒤, 태후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
칼리번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후가 단순히 상을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러 왔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베이가 프리드웬. 그녀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세워 놓은 역대 왕비들과 달리 에레즈의 친어머니였다. 화사한 외모의 에레즈에 비하면 그녀는 진주와도 같아서 외관상으로 닮은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어딘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시선을 끄는 우아함이라든가, 차분하고 처연한 분위기 같은 것들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에 잠겼던 칼리번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응, 뭐든 말해.”
에레즈는 칼리번이 자신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이 감격스러운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번은 그 모습이 참으로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태후 전하께서… 팔에 금사를 두르고 계시더군요.”
베이가가 건네주는 커다란 빵을 받다가 우연히 손이 스쳤다. 그때 칼리번은 가녀린 손목 안쪽의 반짝거림을 보았다. 보통 사람은 장신구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칼리번은 알 수 있었다. 그건 금붙이가 아니라… 프리드웬의 금빛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을.
“아, 그건….”
에레즈는 칼리번의 질문에 조금 놀란 듯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내 것이 아니야. 아마도… 형님의 금사겠지.”
하지만 칼리번에게 더는 숨기지 않겠다 결심한 차였다. 에레즈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는 밤마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태후와 알테르 프리드웬과의 관계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금사가… 그렇게나 오래 남아 있을 줄 몰랐습니다.”
칼리번은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프리드웬의 피가 흐르는 알파들은 대부분 금사가 무기다 보니 몸에서 떨어져 나와도 제법 버티는 모양이야.”
에레즈는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금사의 위력은 칼리번도 익히 경험해서 잘 알고 있다. 8년 전, 어린 에레즈와 숲에서 헤맬 때, 그가 잘라 준 금사가 피부에 파고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센어르를 물리칠 때, 백금사를 입에 머금은 채 활동한 적도 있었다. 에레즈 외에 다른 금사가 자연스럽게 떠 오르자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렇다면, 태워야 하지 않을까요.”
“응?”
“태후 전하께서 지니신 금사 말입니다.”
에레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면 알테르 프리드웬이 그 금사를 기반으로 부활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돼, 칼리번.”
칼리번의 말을 유심히 듣던 에레즈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금사는 잘라 내고 나서도 신체의 일부처럼 움직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보통의 머리카락과 다를 바 없어지거든.”
“황금의 피가 묻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 내는 기적이었으니, 어쩌면….”
“내 몸의 일부도 금사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누구보다도 잘 알아. 걱정해 주는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어머니께 그것마저 빼앗고 싶지는 않아.”
언제나 칼리번의 의견을 따르는 에레즈였지만 이번만은 고개를 저었다.
“…….”
칼리번은 잠시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에레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칼?”
에레즈가 의아함을 느끼던 그때,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 후로 칼리번은 에레즈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그에게 집중했다. 칼리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에레즈가 품었던 작은 의문은 곧 사라졌다.
* * *
칼리번과 에레즈는 늦은 밤마다 밀회를 가졌다. 덕분에 젠은 죄책감을 덜었다. 에레즈의 부탁으로 칼리번을 꽃이 가득 핀 약속 장소로 데려다주었을 때만 해도, 이번에야말로 에레즈가 장작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젠의 오해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칼리번은 에레즈와 함께하는 시간에 만족했다. 주로 에레즈가 말을 하고 칼리번은 들어 주는 쪽이었다.
처음 에레즈는 칼리번 앞에서 심하게 말을 더듬었었다. 그러나 만남이 반복되자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이제는 갑자기 놀라지 않는 이상 어려움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8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스승님께서는 아무래도 일하시는 걸 즐기는 것 같아. 원래 말이 거치신 분이니까. 속내는 그렇지 않은 거지.”
“그런가요?”
“응. 그래서 조만간 새로운 일을 맡게 되실 거야.”
“흠. 그렇군요….”
자신감을 되찾은 에레즈는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사내였다.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미소를 지을 때면 어두운 밤인데도 태양을 본 듯 눈이 시렸다. 에레즈 자체는 금빛과 푸른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호수의 요정 같은 반면, 그가 걸친 옷은 진중한 색감에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엄격한 형태였다. 그 대비가 특유의 예민함과 왕의 위엄을 동시에 살려 주었다.
‘이 모습이 진짜 에레즈 프리드웬, 인 거겠지.’
그런 자각이 들 때면 칼리번은 기분이 묘해졌다. 자신이 변하지 않았는데, 에레즈만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헤어짐은 참으로 길었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고군분투할 당시에는 실감이 되지 않았으나, 고난이 끝을 맺게 되니 새삼 와닿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헤어져 있는 시간 동안 에레즈가 어떻게 지내 왔고,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어떻게 자랐는지를 매일 조금씩 배워 갔다.
사실 칼리번도 그렇고 에레즈도 그리 말을 잘하거나 많이 하는 분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칼리번을 위해, 에레즈는 안쓰러울 정도로 필사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 그의 노력은 조금씩 빛을 발했다. 처음 두 사람은 통나무의 양 끝에 앉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것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이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성벽이 복구되고 왕성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면, 구호 활동을 위해 떠나고 싶다 하셨어. 물론 나는 그 부탁을 들어드릴 거고.”
아직 아무한테도 못한 말인데…. 그렇게 운을 떼며, 에레즈가 칼리번에게만 고백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야. 알테르 프리드웬은 인간을 박해했지만, 나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어. 형님을 죽인 데다가 그분의 힘을 다 빼앗아 갔으니까…. 그분 처지에서는 어느 쪽에도 마음을 두실 수 없겠지. 복잡하실 거야. 그래도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고 싶다고 하셔서 감사할 따름이지.”
에레즈는 버릇처럼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들…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이 어째서인지 사무쳤다.
“…….”
칼리번은 말없이 에레즈의 손을 쥐었다. 장갑을 낀 탓에 거친 감촉이 칼리번의 손바닥에 닿았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 질긴 천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온기는 통했다.
저는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둔감한 칼리번이었지만 그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붉은 눈의 망령이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전하.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 주셔도 좋습니다.”
칼리번은 대신 다른 말로 그를 위로했다.
“응….”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은 손을 칼리번의 손 위에 얹었다. 칼리번의 손이 에레즈의 손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맨살에 덮인 장갑의 감촉이 어딘지 독특했다.
“후후….”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을 꼭 쥔 채로, 어딘지 쓸쓸함이 묻어 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가까워지는 것조차 버거웠으나 어느 샌가부터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쥐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밤은 길었다. 칼리번과 에레즈는 점차 대화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 손을 뻗기도 했다. 이를테면, 칼리번은 에레즈의 머리를 땋아 주거나 묶어 주기도 했다. 에레즈는 칼리번을 위해 종종 꽃을 따 왔는데, 칼리번은 슬쩍 땋은 머리카락에 찔러 넣었다. 어릴 적 알리샤가 원해서 그런 머리를 해 준 적이 있었다.
“내, 내가 쓸려고 따 온 게 아닌데…!”
꽃으로 머리가 장식된 에레즈는 몹시 곤란해했다.
“이대로는 왕의 권위가…. 흐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에레즈는 머리카락을 응시한 채로 계속 만지작거렸다.
“아, 벌써 해가….”
그렇게 대화와 침묵 사이를 오가다 보면, 두 사람은 어느새 밤을 새우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무너진 성벽 너머로 해가 뜨고 있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에레즈는 얕은 하품을 하면서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애도 아니고, 정말 싫었다면 떼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땋은 머리에 꽃을 단 채였다.
“아닙니다. 저보다 전하께서 더 피곤하실 겁니다.”
“난 괜찮아. 그보다는 당신이 걱정이야.”
칼리번은 옅게 웃는 에레즈를 볼 때면 심장이 아팠다. 아름다워서도 있지만, 안쓰러움도 있었다. 황금의 비를 내린 후, 에레즈는 전보다 많이 약해졌다. 물론 그는 여전히 강했고, 성 밖의 알파들이 침략할 때면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생명력과 근력은 다른 힘이다. 칼리번이 아무리 힘이 좋아도 칼에 심장이 꿰뚫리거나 지나치게 오래 굶주리면 죽는 것처럼 말이다. 에레즈는 생명력이 떨어진 것에 가까웠다.
“…사실, 나는 당신이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레즈는 떠나기 전 불쑥 칼리번을 공격했다.
“당신의 의지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냥, 내 생각에는… 좀 더 쉬었으면 해서.”
에레즈는 말하면서도 칼리번의 눈치를 몹시 살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에레즈는 종종 그런 말을 꺼내고는 했다.
“모두가 왕국 재건을 위해 일하는데 저만 쉴 수는 없습니다.”
에레즈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칼리번이었으나 이럴 때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적어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저보다는 전하께서 쉬십시오.”
매번 에레즈가 먼저 꺼내지만, 항상 에레즈가 지고 마는 대화거리였다.
“…흥.”
칼리번이 한번 고집을 부리면, 에레즈는 영 이기질 못했다.
“…….”
두 사람은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조금이라도 말을 쉬면, 이렇듯 어색해지기 십상이었다.
“그럼….”
그래도, 헤어지기 전에는 반드시 입술을 나눴다. 에레즈가 다가왔다. 그저 가볍게 맞닿기만 하는 입맞춤이었다. 새벽녘의 햇살처럼 차갑고 산뜻했다. 짧은 순간 닿았다가 떨어지고는,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한참 마주 보기만 했다. 뺨에 닿는 상대의 숨결이 더없이 간지러웠다.
“…갈게.”
에레즈는 두 팔을 등 뒤로 숨기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쉽게 떠나지 못하고 어물거리기 일쑤였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일터로 향했다. 자신으로 인해 한숨도 잠들지 못한 왕을 걱정하면서….
그런 나날의 반복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일 것이다.
에레즈와 헤어진 후, 충실히 일을 마친 칼리번은 멍하니 석양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젠이나 에레즈와 대화를 나누고…. 에레즈 치하의 평범한 백성으로, 인간과 섞여, 소박하지만 정착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다.
<오메가 주제에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방심할 때면, 바늘로 찌르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오곤 한다.
“헉…!”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는 일이건만, 칼리번은 매번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검은 눈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나무 외에는….
<으응, 절대로 안 되지.>
칼리번이 억지로 긴장을 풀고 뒤돌아서면 그것은 다시 혀를 찬다.
“젠장, 어디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외쳤다.
<인간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네 몸이 도와주지 않을걸?>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하얀 형상이 어른거린다.
…에어리얼이다. 칼리번은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산다. 그리고 그 일과에는 에어리얼의 망령이 보는 것도 포함된다.
<곧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잖아. 고작 입맞춤 가지고 버틸 수 있겠어?>
어느새 다가온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알파의 좆으로 뿌리 끝까지 받아 달라고 매달렸어야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질질 흘리고 있으면서….>
“큭…!”
칼리번은 어깨를 짓누르는 에어리얼을 밀쳐내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실체는 없었다. 애초에 자신보다 작은 에레즈가 서 있는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다는 행동이 불가능한데….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이것 봐, 에레즈가 옆에 있으니까 구멍이 근질거리잖아.>
연기처럼 흩어졌던 에어리얼은 어느새 다시 형체를 갖췄다. 그가 칼리번의 엉덩이에 손을 대고는 지분거렸다.
“저리 꺼져!”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있는 곳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주먹에 박혀 드는 것은 살과 뼈가 아닌 단단한 나무의 감촉이었다.
칼리번은 그렇게 지쳐 쓰러질 때까지 유령과 대거리를 했다. 만약 타인이 이 광경을 본다면, 칼리번이 괜한 나무에게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하하하, 멍청이! 유령을 상대하려면 각오를 다졌어야지!>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분명 보였다. 귓가에는 에어리얼의 웃음소리가 선명했다.
“큭, 이 개자식…!”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불면증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밤낮으로 움직여 땀도 빼 보았지만, 망령은 여전히 칼리번을 붙잡고 있었다.
“헉, 허억…!”
한참이나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주변의 나무를 부러뜨리던 칼리번이 에어리얼보다 먼저 주저앉았다. 몸이 어찌나 긴장했는지 근육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칼리번이 느끼는 감각은 흡사 방어전을 치를 때와 같은 정도의 긴장이었다.
<그런 몸으로 무리해도 되겠어? 조금이라도 이성이 흐트러지면 주변 알파들이 네 상태를 다 알게 될 텐데.>
칼리번이 수없이 주먹질해도, 이미 죽은 존재를 다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는 주저앉은 칼리번의 등에 아이처럼 매달리며 말했다.
<더는 내가 안아 줄 수도, 다른 알파를 시켜 박아 줄 수도 없는데 어쩌려고?>
헉, 헉, 숨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검은 눈이 흔들렸다.
“크흐, 윽….”
칼리번은 이마를 나무에 쿵, 쿵 박았다.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 향기가 되어 주변으로 퍼지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이대로는….
<이를 어쩌면 좋아? 어서 해결하지 않으면 여기서 난교가 벌어질 텐데….>
에어리얼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알고 있으니까, 닥쳐…. 허억…!”
칼리번은 무릎으로 기어 제 몸을 어둠 속으로 숨겼다. 칼리번은 결국 셔츠를 벌리고, 급히 바지를 내렸다. 지난 8년간 그는 알파의 체액과 털 외에는 걸친 것이 없었다. 차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나, 오랜만에 걸친 인간의 옷은 낯설기 그지없었고 몸을 속박하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근육이 팽창하면서 갑갑해진 감도 있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꽉 차오른 가슴이 불룩 튀어나왔다. 근육으로 감싸인 두툼한 허벅지는 당장에라도 오줌을 눌 것처럼 경련했다. 땀으로 젖은 몸은 더욱 짙은 향기를 뿜어냈다.
“윽….”
칼리번은 급히 제 것을 움켜쥐었다. 한쪽 팔로는 나무를 끌어안은 채로 반쯤 선 성기를 성급히 쓸어내렸다. 칼리번은 스스로 제 몸을 위로한 적이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원할 때마다 수많은 알파와 교미를 하면 해결될 일이었으니까.
“하, 하아…. 아윽…!”
그 손짓은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처럼 다급했다. 아랫배가 꽉 조여들고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에라도 토해 낼 것 같은데, 성기만 딱딱해질 뿐 정액은 나오질 않았다. 몸 안을 가득 채운 열기는 조금도 발산되지 않았다. 눈앞이 핑 돌았다. 입 안이 말라붙어 나오는 숨은 뜨겁고, 건조했다. 개처럼 숨을 헐떡여도 모자랐다.
“큽, 크읏….”
괴롭다. 그리고 뜨겁다. 거칠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몸이 흔들렸고,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은 나무껍질에 부딪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아직 옷 아래에 숨겨진 부드러운 살결을 고목에 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거기가 아니잖아.>
에어리얼이 등 뒤에서 조언했다.
<넌 오메가니까 뒤를 써야지.>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저것은 조언이 아닌 예언이다. 결국, 본능에 굴복해 에어리얼이 말하는 대로 실행하고 말 것이다.
“으윽….”
예상대로 굳은 의지는 무너지고 말았다. 칼리번은 뒤로 손을 뻗었다. 알파를 받아 내는 데 익숙해진 몸은 어느새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칼리번의 몸은 그의 의지를 거역하고, 알파만을 바라고 있었다.
“흣….”
칼리번은 잠시 망설였다. 스스로 그곳을 쑤신다는 행위가 더없이 낯설었다. 그러나 치솟는 욕망을 버티지 못하고 손가락이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칼리번의 손은 그의 체격만큼이나 길고 굵었다. 찌걱, 억지로 벌리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몸속을 오갔다. 손가락이 들어가자 내벽이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삽입하고, 삽입을 당하는 감각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이 그를 더욱 좌절하게 했다.
칼리번은 오직 사정하기 위해, 서툴지만 반복적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나 그래 봤자 손가락에 지나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크기의 성기만을 받아 왔던 몸은 만족하기는커녕 오히려 안달이 났다.
“아, 하앗…!”
자신도 모르게 찌른 성감대에, 칼리번은 소리를 높였다. 어느새 다른 손은 가슴을 쥐고 있었다. 알파가 삽입하면, 가슴을 쥐어짜거나 빠는 것이 당연히 따라오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개 추삽질과 가슴을 주무르는 속도는 비슷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알파들이 자신에게 한 것처럼 손을 놀리고 있었다.
“흣…. 아읏….”
알파의 좆을 품고 싶어 안달이 난 목울대가 울렸다. 평소와는 나직한 목소리와 다른, 앓는 소리가 났다. 그사이 손가락이 늘어 갔다. 늘어난 손가락이 몸속에서 얽히며 휘저어 댔다. 알파가 만져 주지 않아 딱딱하게 굳은 가슴에서는 젖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혼자서라도 매일 주물러 주었다면 상태가 조금 나았을 텐데, 칼리번은 애써 자신의 상태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처럼 발정이 몰아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멍청한 돌대가리답게, 수없이 알파에게 꿰뚫렸으면서도 이런 점에서는 더없이 무지했다. 아니, 그 누구도 해박해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위 따위….
“…흐읏!”
손가락이 뿌리까지 파고든 순간, 칼리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아악….”
칼리번은 입을 크게 벌린 채 뻐끔거렸다. 사정을 간절히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오질, 않아….’
뒤는 손가락으로 만든 좆이 부족한지 뻐끔거리며 게걸스럽게 조여 댔다. 에어리얼의 아래에 있었을 때라면 스스로 뒤를 쑤실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에어리얼은 하루도 빠짐없이 칼리번을 채워 줬으니까.
“크윽…! 흐, 흐으….”
칼리번은 괴로운 신음을 토해 냈다. 평소보다 심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가 알파에게 굶주린 탓이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에레즈와 접촉이 잦아진 탓도 있었다. 결국, 그는 몸 안에 모호한 열기를 남긴 채 스르륵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상의는 어느새 젖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바지는 벗겨진 지 오래였다.
<오메가 체면에 이게 무슨 망신이람? 곳곳에 알파가 있는데 혼자서 낑낑대다니.>
에어리얼은 그런 칼리번을 내려다보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지금 이 모습을 에레즈 프리드웬이 보면 뭐라고 할까?>
그 환청에 칼리번의 몸이 빳빳하게 긴장했다.
‘숨겨…. 숨겨야 해.’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왕성에 주둔하는 다른 알파보다도, 에레즈에게 이 모습을 들킬 것이 두려웠다.
<도대체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이런 음탕한 오메가라는 건 알파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
“…닥쳐!”
칼리번은 이마를 머리에 박으며 외쳤다. 다르다! 이것과 그것은 달랐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에어리얼 때문에 억지로 당했다고…. 칼리번은 최소한의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유였다. 그 누구도 칼리번에게 교미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이 멋대로 원하고 있었다. 심지어, 에어리얼에게 지배당하기 전보다도 더욱 강하게….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건, 에레즈 프리드웬이 만든 기적을 더럽히는 짓이다. 그를 더럽히는 짓이야…. 칼리번은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이성과 달리 본능은 칼리번은 자신의 손을 소중하게 쥐던 에레즈를 떠올렸다. 어느새 자라 버린 손의 감촉이 선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하는 애처로운 모습도, 가볍게 닿을 뿐인 부드러운 입술도….
<나한테서 벗어나면 다 해결될 줄 알았겠지?>
“하아…. 하아….”
<어림없는 소리, 이제부터 시작이야. 어디 한번 혼자서 감당해 보라고!>
주저앉은 칼리번을 두고 에어리얼의 비웃음이 이어졌다. 새까만 나뭇잎이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왕성 내의 알파들은 이 냄새를 다 맡았을 거야. 네가 굶주렸다는 걸 눈치채고 있을걸?>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뒤처리를 했다. 흙 위로 떨어진 체액을 흙으로 덮던 중, 그는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
칼리번이 흘린 젖이 묻고, 무릎에 짓뭉개진 꽃 한 송이였다. 주변에 산재한 잡초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오밀조밀한 꽃송이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에레즈가 찾아올 때마다 그에게 안겨주는 흔한 들꽃이었다. 칼리번이 종종 그의 머리카락에 꽃을 꽂아 주었는데, 이번에는 에레즈가 몰래 옷 어딘가에 끼워 둔 모양이었다.
“…….”
칼리번은 새카만 눈으로 하염없이, 자신이 발버둥을 치느라 으깨진 꽃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처럼 사이가 가까워지기 전, 두 사람은 나무들을 사이에 두고 눈싸움만 했다. 그걸 보다 못한 젠이 징검다리를 자처하여 칼리번을 어느 장소에 데려다주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에레즈가 남몰래 발견한 꽃밭이었다. 한 종류의 꽃만이 잔뜩 핀….
수수하고 자그마한 그 꽃은, 왕국 전역에 피는 흔해 빠진 들꽃이었다. 그래서 8년 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해 말라 버린 어린 에레즈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주었던 꽃이기도 했다.
지난 8년간, 알테르의 폭정에 왕성 주변의 땅은 새까맣게 죽고 말았다. 그러나 에레즈가 기적을 일으킨 덕에 꽃이 피는 땅으로 바뀌고 있었다. 세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꽃밭에 서서 석양이 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었다. 왕이 뒤늦게 도착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남이 볼 때는 그저 서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사실 그는 두 눈을 뜨고 두 발로 선 채 기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면, 그 꽃은….
<아스터가 항상 곁에 있어 주니 기쁘겠어, 칼리번.>
에어리얼이 귓가에 바로 속삭였다.
“욱, 으웩…!”
칼리번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구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