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5/50)

03

칼리번에게 무엇을 줄지 고민하던 에레즈는, 그에게 아름다운 꽃을 한가득 안겨 주기로 했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줄 수 있는 것이 똑같다니….’

에레즈는 잔뜩 쌓인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씁쓸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왕국 곳곳에 칼리번의 동상을 세우고, 그를 금은보화로 치장해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재정이 받쳐 주질 못했다.

오랜 전쟁과 마계에서 유입된 마물로 인해 농토는 황폐해진 지 오래였다. 알테르가 인간 농장 주변에 조성해 둔 농토 외에는 노지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명이 알테르의 반란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에는 8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들 것이다. 어쩌면 20년, 30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못할지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금의 비가 사람만이 아니라 땅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계절감이 흐트러졌다. 여름이 한참 지났음에도 봄처럼 꽃이 피고 새싹이 돋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올해 겨울은 비교적 따뜻하게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왕성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성 밖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과도하게 확장된 숲을 개간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 에레즈는 틈틈이 왕성 밖을 혼자서 수색하곤 했다.

그러던 중 왕성 근처의 숲에서 야생화 군락을 발견한 것이다.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에레즈가 첫 발견자였다. 그곳엔 별을 닮은 꽃이 계절을 잊고 잔뜩 피어 있었다. 칼리번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곳에서 진심을 고백하는 거야.’

에레즈는 젠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아무도 모르게, 칼리번도 모르게 이곳까지 데려와 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뭐, 그 정도야 도와줄 수 있지!>

젠은 흔쾌하게 수락했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그녀 또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젠은 에레즈가 말한 장소에 꽃이 가득 피었다는 사실만은 몰랐다.

<좋아. 칼리번을 후딱 이곳으로 보낸 다음에 잽싸게 사라져 주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니까 잘 해결해, 알겠어?>

<네, 스승님…!>

젠은 자꾸만 등을 때리는 젠의 행동에 에레즈의 또다시 얼굴이 불긋해졌다.

“흠, 흐음…!”

그리하여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 흐음!”

에레즈는 괜히 목청을 다지며 평소보다 이르게 자리를 떴다. 그러나 왕을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은 남들보다 몇 배 더 일하기 때문이었다. 뭐, 하루 정도는 편히 쉬고 싶으실 것이리라. 다들 그렇게 여긴 모양이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에레즈가 떠나려던 그때였다. 로위나가 급히 막사의 입구로 뛰어 들어왔다.

“동쪽 성문 주변에 마물 혼혈들로 구성된 도적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의 식량을 훔치려는 것 같습니다! 용병들이 막고 있으나 생각보다 그 수가 많아서…!”

“…!”

에레즈는 그 말을 들은 즉시 검을 쥐었다. 더는 성검이 없는데도 그의 손은 버릇처럼 고통을 예감하고는 손잡이 위에서 움찔거렸다. 순간 칼리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알겠다,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라.”

망설이던 에레즈는 검의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로위나와 함께 동쪽 성문으로 향했다.

* * *

에레즈는 약속한 장소로 가기 전까지 세 번이나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아니, 그 표현은 마치 백성들을 짐으로 느끼는 것 같아 거북했다. 백성을 지키는 것은 왕의 당연한 의무였으니까. 로위나와 함께 도적들의 습격을 막아 낸 후, 에레즈는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자신을 안심시키면서.

<전하!>

그런 그를 성녀가 다급히 불렀다. 도적들이 도망치면서 독을 품은 마물의 피를 도처에 뿌리고 기껏 쌓은 성벽 일부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에레즈는 부상자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용병과 병사들을 지휘했다. 본성을 드러낼 수 없는 탓에 시간을 더욱 끌게 되었다.

<전하, 부상자들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성녀들이 최대한 성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땅 자체가 독에 오염된 탓에 감염자의 수가 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성녀들마저 쓰러지고 말 겁니다.>

간신히 적을 물리쳤지만, 끙끙 앓으며 업혀 가는 부상자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함께 치료소 가지. 내가 돕겠다.>

에레즈는 치료소로 향했다. 그의 내부에는 두 가지의 힘이 충돌하고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인 알파의 힘이, 그리고 하나는 성녀인 어머니의 힘이었다. 그 두 힘이 유일하게 합치되는 때는 오직 ‘에레즈 자신의 생명을 살릴 때’뿐이었다.

반면에 다른 이를 살리는 데 사용할 때는 그만큼 에레즈 본인에게 해가 갔다. 젠은 한동안은 그 힘을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에레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사용하곤 했다.

‘이건 내 힘이 아니라, 어머니의 힘이니까.’

에레즈는 부상자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피로 얼룩져 갔다. 에레즈는 지친 성녀들을 치료소에 두고 독이 퍼진 땅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피를 흘려 정화를 시도했으나 그즈음에는 에레즈도 진이 빠져 완벽하게 복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제 땅을 밟는 것만으로 독에 감염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다음은 차후 천천히 정화 작업을 이어 나가면 된다.

…그렇게 눈앞의 생명에 집중하다 보니, 모든 일이 안정에 이르렀을 때는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쪽 산을 향해 침몰하고 있었다.

‘맞다, 칼리번…!’

오염된 땅에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숨만 헐떡이던 에레즈는 그제야 약속을 떠올렸다. 약속 시간에서 벌써 반나절 가까이 흘렀다. 에레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하! 어딜 급히 가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성녀들과 병사들이 붙잡았으나 에레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를 어쩐다….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이 시간까지는 붙잡지 못하셨을 텐데….’

에레즈는 안절부절못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전하! 식량 배급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어찌 해결하면 좋을까요!”

“어머니에게 가 보거라. 지금이면 아마 광장에 계실 것이다. 배급 문제에 관해 조율해 주실 것이다!”

“전하, 복구 작업 중 병사들과 용병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해당 구역의 작업반장에게 맡기거라! 돌아와서 확인해 보겠다.”

곳곳에서 에레즈를 발견할 때마다 붙잡았다. 다행히도 앞서 발생한 도적들의 침입과 달리 당장 목숨이 걸린 일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일을 맡길 수 있는 이의 이름을 대며 나아갔다.

마침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성 밖으로 나왔을 때 에레즈는 거의 쓰러질 기세였다. 평소라면 이 정도 일정은 거뜬히 소화했겠지만, 도적들이 끌고 온 마물을 상대한 데다가 자신의 생명력을 부상자들에게 나눠 준 것이 육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약속 장소는 의식이 벌어졌던 절벽 근처였으나 그보다는 훨씬 낮은 지대에 위치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인간들이 동쪽 성문에 터를 잡은 탓에 이 일대의 마물의 수도 현저히 줄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또 모를 일이다. 에레즈는 칼리번을 걱정했다.

“하아, 하….”

산은 보통 푸르렀지만, 지금은 노을에 물들어 온통 붉었다. 에레즈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마치 8년 전처럼 나약해지고 작아진 것만 같았다.

“하아, 미안, 칼….”

에레즈는 산을 오르며 중얼거렸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용기를 내지 못한 벌일까? 일부러 불러 놓고 오지 않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에레즈는 가슴이 절절 끓었다. 하필이면 야생화 군락지는 외진 곳에 있었다. 인적이 드문 장소기에 그토록 아름답게 잔뜩 필 수 있었던 거겠지만, 지금처럼 한시가 급한 입장에서는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하아, 하아….”

에레즈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얼굴은 파리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기적을 일으킨 대가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그것이 에레즈의 안에 자리 잡은 마물의 본성을 가라앉히는, 뜻밖의 효과를 낳기도 했으나 이럴 때는 한없이 아쉽기만 하다.

그렇게 에레즈는 노을빛을 붉은 망토처럼 걸친 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사방에 피운 오밀조밀한 꽃들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원래의 색을 온전히 알아보기 어려웠다.

“…스승님?”

에레즈는 혹시나 싶어 불렀으나 역시 젠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모두 떠났을까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염려였다. 커다란 덩치와 넓은 어깨를 지닌 사내는 너무나 쉽게 눈에 들었다.

“카… 칼.”

에레즈는 무작정 그를 부르고 말았다. 더는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는데! 에레즈는 버릇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지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닿지 않았으면….

그러나 칼리번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하?”

그가 돌아보았다. 까만 머리도, 짙은 피부도 붉은빛으로 평소보다 따스하게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던 것일까?

누군가는 듬직한 체격의 사내가 꽃밭에 서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푸른 보석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반짝거리기 보기라도 하는지, 꽃과 그가 똑같이 보였다.

‘칼…. 진짜 칼리번이야….’

부르면, 칼리번이 돌아본다. 그런 사소한 행동에도 에레즈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헤어진 기간이 오래된 탓인지 에레즈는 칼리번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다. 가뜩이나 쿵쿵거리던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밤늦게까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에레즈였다. 오늘은 가뜩이나 힘을 과도하게 쓴 데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 탓에 그만….

“윽…!”

에레즈는 고작 한 걸음을 내딛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왕자님…. 전하!”

칼리번의 외침이 멀리서 들려왔다. 에레즈조차 그가 몹시도 놀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이런 모습을….’

에레즈는 오밀조밀하게 피어오른 꽃밭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차라리 이게 전부 꿈이길 바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그렇다면 좀 더 멋진 첫인상을… 보여 줄 수 있을 텐데.

“하아아….”

그러나 아쉽게도,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이는 프리드웬이었으나 시간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역시… 나 같은 건… 아무 쓸모도 없어….’

에레즈는 속으로 울먹이며 쓰러진 그 자세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히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에레즈는 그리 오래 슬픔에 빠져 있지 못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칼리번이 쓰러진 그를 붙잡고는 곧바로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출혈은 없어 보입니다. 혹시 다리를 다치셨나요?”

에레즈는 더는 나무 위에서 떨어진 꼬마 성녀님이 아니었다. 그러나 용병이었던 사내는 여전히 그를 어린애 다루듯 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마주 보게 되었다.

“그게…. 윽….”

무언가 말하려던 에레즈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엔 흙이 얹혀 있었다. 속눈썹뿐만이 아니라, 얼굴은 온통 흙투성이였고 딸려온 잎사귀와 꽃잎이 몸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에레즈는 털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두 주먹을 꼭 쥔 채 가만히 있었다.

“급하신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이렇게 엉망이 되셔서는….”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묻은 꽃잎을 떼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리번의 손이 닿다니,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

그러자 칼리번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푸른 보석안이 그 손길에 꽂혔다. 에레즈는 자신을 돌봐 주지 않는 칼리번의 묵묵함에 순간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칼리번 녀석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네가 자기를 더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나?>

에레즈의 머릿속으로 젠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칼리번이 망설이는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정말로 말해야 해.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더럽다고 생각한 적 없다고…!’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자신이었다. 칼리번을 지하에서 8년이나 고통받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눈앞에 있는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던 어리석은 자신.

그러나 한번 기회를 놓치니 다시 입을 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태껏 칼리번을 피했는데 지금 와서 말을 더듬거린다면 앞선 망설임이 쓸데없는 헛짓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매몰된 시간이 도리어 에레즈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에레즈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그는 용기를 내려 했고, 그 의지가 과했는지 몸이 그만 칼리번을 향해 기울고 말았다. 결국 흙투성이 얼굴이 칼리번의 가슴에 폭 묻히고 말았다.

“…….”

그렇게 에레즈는, 칼리번에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거친 숨을 내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에레즈가 혼란에 빠진 그때였다. 허공에서 어물거리던 칼리번의 손이 에레즈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날 떼어 내려나 봐! 이대로 물러나선 안 돼…!’

에레즈는 눈을 질끈 감고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칼리번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필사의 각오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레즈의 마음은 더없이 순수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 없이, 겉으로 보기에는 남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비벼 대는 파렴치한에 불과했다.

“전하…?”

당황한 칼리번의 손이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아… 안 돼!’

이대로 팔을 놓으면 칼리번의 손은 떠나갈 것이다! 당황한 에레즈는 이제 안 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물러나려는 칼리번의 손목마저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제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비벼 대다 상대의 만류마저 막는, 전보다 더한 폭군이 되고 말았다.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데, 이마저도 놓치면….’

겁쟁이인 자신은 전과 다를 바 없이 도망치게 될 것이다. 에레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에레즈는 고개를 들고는 칼리번의 손바닥을 제 뺨으로 끌어당겼다.

“…….”

두 눈을 질끈 감은 에레즈는 보지 못했지만, 칼리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에레즈의 얼굴에 묻은 흙과 꽃이 칼리번이라는 손을 만나 땅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돌처럼 굳어 있던 칼리번의 손길이 조금씩 풀어지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굵고 긴 손가락이 서투르지만 조심스럽게 에레즈의 콧등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재생된 칼리번의 손가락은 부드러웠으나, 궂은일을 도맡은 탓에 새로 굳은살이 박이고 있었다. 미묘한 까끌까끌함이 기분 좋았다.

에레즈는 억지로 붙잡고 있던 칼리번의 팔을 놔주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멀어지지 않고 에레즈를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어깨를 털어 주고, 머리카락에 묻은 꽃잎을 떼어 내 주고….

“……칼….”

에레즈는 눈동자를 굴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보석안은 석양으로 인해 그의 뺨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네, 전하.”

칼리번은 머리카락에 묻은 꽃잎을 털어 내며 대답했다. 담담하고 나지막한, 8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읏…. 미……안.”

에레즈는 간신히 말을 짜냈다. 더듬지 않고 그 말을 내뱉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네?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칼리번은 에레즈의 말을 더욱 잘 듣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으, 그… 그게….”

에레즈가 칼리번을 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젠에게 말했던 것처럼 ‘진짜 칼리번’을 보면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기 때문이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하….”

8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칼리번의 모습을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몰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느… 늦어서…….”

에레즈는 차마 칼리번을 바라보지 못하고 말했다.

“또, 늦어… 버, 버려서…….”

더듬는 데다가 울기까지 하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토록 나약하고 멍청한 존재라는 것을 칼리번은 이미 알고 있다. 어리석게도 붉은 오메가에게 조종당했을 때, 날것의 모습으로 재회했었으니까.

설령 추악한 괴물의 면면을 보았다고 해도, 그래도… 마음에 둔 상대에게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아닙니다. 그리 늦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차라리 화를 내 주면 좋을 텐데. 무심함 속에 담긴 다정함이 에레즈를 더욱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전하께서 몸이 서너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멀리 있는 저한테도 말이 들려올 정도인걸요.”

이제 칼리번은 에레즈의 꽃잎을 떼어주는 것이 아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칼…. 있잖아, 나….”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지금은 국고가 바닥난 상황이라 보석을 안겨 주지는 못하지만, 대신 약속할 생각이었다.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면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새로운 약속을….

“다, 당신을… 하, 한 번도…… 없어.”

“네?”

에레즈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칼리번이 되물었다.

“더, 더럽다고 새, 생각한 적… 어, 없어!”

에레즈의 외침은 끝이 갈라져 있었다.

“…네?”

갑작스러운 선언에 칼리번의 손길이 멎었다.

“다, 다, 당신은 내, 내게 있어서, 그, 그러니까… 저, 저… 전쟁, 이야!”

칼리번 당신은 전쟁의 신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멋지고 강하고 믿음직하며, 당신을 찾기 위해 알테르와 싸울 때마다 전쟁의 신 대신 당신의 이름을 되뇌어 왔어.

…에레즈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러했다.

“네?”

칼리번이 반문하자 에레즈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 으, 그게 아니라…. 그, 당신, 당신은… 내게… 시… 신이야!”

마물과 싸울 때마다 승리의 신으로 여길 정도로 마음속 깊이 소중히 여겨 왔다. 그러니 당신이 더럽다고 생각할 리가 없잖아.

…에레즈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일단은… 진정하십시오, 전하.”

앉은 자리에서 전쟁이자 신이 된 칼리번이 차분히 대답했다. 에레즈는 멋진 말로 칼리번을 감동을 주겠다는 계획을 접었다.

“으윽…. 그, 그게…! 다, 당신 앞에, 만, 서, 서면…… 기, 긴장되어서…… 마, 말을…… 자, 잘, 못 하겠어서… 그, 그랬, 던 거야….”

에레즈는 양손으로 칼리번의 오른손을 꼭 감쌌다.

“시, 실은…… 하, 하고 싶은, 말…… 너, 너무 많은데……. 이, 이런, 상태로는….”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반면에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에레즈에게 붙잡힌 칼리번의 손도 함께 젖어 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칼…. 부, 부탁이야, 떠, 떠나, 지 말아 줘…. 제발….”

능변으로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내뱉고 있었다. 에레즈의 처절한 애원에 칼리번은 까만 눈을 끔벅거리기만 했다.

“으, 으으……. 하아….”

결국, 에레즈는 제풀에 지쳐 버렸다. 그는 두 팔로 땅을 짚은 채 더운 숨을 깊이 내쉬었다. 뺨이 뜨끈뜨끈해지다 못해 눈가가 불긋해졌다.

‘바보 같아.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 칼리번이 깨어났을 때 도망치지 말 걸 그랬어.’

에레즈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제법 왕 노릇을 했다. 그러나 칼리번 앞에서는 칼리번의 흉내를 내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의 앞에만 서면, 유독 나약하고 어렸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서투른 말로는 도통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에레즈가 끝없는 자책의 늪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건…?’

풋풋한 풀꽃 냄새 사이로 옅은 향기가 났다. 평범한 사람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겠지만, 에레즈는 알파였다.

“아….”

에레즈는 슬픔조차 잊고 향기의 근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감정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다니,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예민한 에레즈조차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옅었던 오메가의 향기가 짙어졌다. 알파라면 누구나 속수무책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칼리번의 향기….’

그리운 향기에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

에레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칼리번 본인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칼…!”

에레즈가 칼리번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에레즈에게서 멀어졌다.

“카, 칼…. 기, 기다려 줘!”

에레즈는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칼리번을 따라갔다. 몸에 힘이 없어 다시 넘어질 것 같았으나 다시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칼, 제발….”

에레즈는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으로 도망치려는 그를 간신히 붙잡았다. 예전에는 칼리번이 뿌리치면 데구루루 구를 정도로 나약했으나, 이제 그도 만만치 않은 알파가 되었다.

“놓아…주십시오.”

칼리번은 감히 에레즈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였다. 나무 그늘이 그들을 석양으로부터 가려 주었다.

“이, 이런 내가, 시, 싫겠지….”

그사이 칼리번의 향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에레즈는 약한 소리를 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칼리번은 한사코 멀어지려고 했다. 에레즈는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겨, 곁에 있어 줘….”

“안 됩니다.”

“어째서?”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칼리번은 더는 도망치지 않고, 에레즈를 등진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레즈는 그가 망설이는 틈에 성큼 다가갔다.

‘설마… 내가 칼리번을 두렵게 만든 건가?’

에레즈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알파였다. 그런데도 문득 겁이 들었다. 에레즈가 쉽사리 칼리번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는 칼리번의 추측대로, 그의 기억을 보았기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칼리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반대로….

‘칼리번은 원래 몸을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알파는, 특히 나 같은 괴물은… 더욱 꺼리겠지.’

알파가 더럽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 손을 떼고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전에 이 말만은 전할 것이다. 에레즈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조, 좋아해…!”

에레즈는 용기를 내서 외쳤다. 그 기백에 칼리번의 몸이 순간 떨리는 것도 같았다.

“카, 칼…! 다, 당신을… 조, 좋아, 해…!”

에레즈는 이미 망했다. 멋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고백도 실패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금이라도 모두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처, 처음 본… 수, 순간부터…! 나, 나는, 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욱!”

켈룩, 에레즈는 혀가 꼬이다 못해 기침을 하고 말았다. 폭풍 같은 고백이 지나간 후, 아니, 폭풍보다 더욱 긴 기침이 그친 후, 에레즈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감탄했다. 칼리번의 향기가 조금 더 짙어진 것이다. 머릿속이 어질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기였다. 험악한 용병에게서 이런 향기가 난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못할 정도로.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않은 에레즈는 오메가의 향기 앞에 물리적으로 흔들렸다. 여전히 칼리번은 저를 등진 채였으나 에레즈는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고 알파의 본성이 속삭였다.

‘안 돼….’

하지만 에레즈는 꾹 참아 냈다. 어쩌면 알파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직 칼리번에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제발, 나를, 봐줘….”

그러니까…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함부로 다가서지 않을 거야.

에레즈는 마음을 다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칼리번을 기다렸다. 그런 열의에 답한 것일까, 칼리번은 향기보다 한참 늦게 에레즈를 돌아보았다.

“흐음…….”

칼리번이 헛기침을 하자 에레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칼리번은 괜히 눈동자를 굴렸다. 까만 그에게서 유일하게 흰, 눈가가 붉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 여기서… 더… 다, 다, 다가가면… 시, 싫겠지…?”

에레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칼리번은 오메가라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알파를 증오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칼리번의 가슴은 평소보다 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주변에… 없습니다.”

“어, 없어? 뭐가…?”

에레즈는 자신 안의 혼란도 잠재우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

칼리번은 괴롭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칼리번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던 에레즈의 시선이 그제야 아래로 향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달리 칼리번은 숨이 거칠어지고, 몸이 부풀었으며 팔 위로는 굵은 핏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당장이라도 마물을 주먹으로 때려잡을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참고 있지만…. 주변에 대신 삼을 만한 것이 없어서, 이대로는 실수로 전하를 칠지도 모릅니다.”

“쳐…?”

“…네.”

칼리번은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먹을 쥐었다. 에레즈의 얼굴에서 저도 모르게 핏기가 가셨다. 설마… 자신을 마구 때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단 말인가?

“사, 상관없어! 아, 아니 오히려 조, 좋을지도…!”

에레즈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네?”

“나, 나 때문에 힘들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내가 칼, 당신을 위해… 뭐, 뭐든 하겠어…!”

에레즈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얼마든지 맞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다소 약해지기는 했지만, 자신에게는 엄청난 회복력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겪었던 고통을 나눌 수 있다면야…!

톡. 그러나 뺨에 닿은 것은 돌도 부수는 주먹이 아닌 따뜻한 손바닥이었다.

“…응?”

에레즈는 슬쩍 한쪽 눈을 떴다. 큼지막한 손이 하얀 뺨을 이마를 문질렀다. 칼리번의 손은 그렇게 한참이나 에레즈의 뺨을 쓰다듬다가 주무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손가락에는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

잔뜩 긴장했던 에레즈의 눈매가 스르르 풀어졌다. 아프지 않은 손길은 기분 좋았다. 저 커다란 사내가 자신을 깨지기 쉬운 물건처럼 조심조심 대하고 있었다. 8년 전, 그저 보호받기만 하던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에레즈가 푸른 보석안을 반짝이며 바라만 보자, 칼리번은 정신을 차렸다.

“제가 어떻게 감히 전하께 손찌검을 하겠습니까.”

칼리번은 그답지 않게 힘없이 말하고는, 에레즈에게서 손을 뗐다.

“칼….”

감격했는지, 칼리번을 부르는 에레즈의 목소리는 물에 녹는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마법의 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칼리번을 바라보는 푸른 보석안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이 세상 어떤 보석도 담지 못할 아름다움에 칼리번은 혼란스러운지 눈가를 찡그리며 깜박일 정도였다.

“나, 말로는 전하지 못하겠어…. 그, 그러니까. 당신에게… 입 맞추고 싶어.”

“네…. …네?”

그래서 칼리번은 자신도 모르게 허락하고 말았다.

“그 영광을 내게, 주, 줄 수 있겠어…?”

에레즈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욱 대담한 제안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머쓱한지 불긋한 눈가가 살짝 휘었다. 에레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칼리번에게 눈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네…. 네….”

칼리번은 에레즈처럼 삐거덕거리다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귓가에 심장이 생겼는지 쿵쿵거리는 박동이 시끄러울 정도였다.

“저…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사람도, 마물 혼혈도 아니었다. 한 쌍의 목각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굉장히 엉성하게 만들어진. 이렇게 어색하고 쉴 새 없이 삐걱거릴 수가 없었다.

“고, 고마워….”

에레즈는 흐릿하게 외치고는, 장갑을 낀 손으로 칼리번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

손등에….

기울어진 턱 위로 금빛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입술은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어떠한 성애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존경과 경애가 가득했을 뿐이었다. 굳어 있던 칼리번의 몸이 조금 누그러졌다.

“기, 기사가…… 하는….”

에레즈는 살며시 미소를 띠고는 굳이 설명했다. 촉촉하게 젖은 보석안이 석양빛에 반짝였다. 고개를 숙이고 손등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기사가 귀족 영애나 귀부인에게 인사를 올릴 때 하는 인사였다. 그 의미를 모르는 이는 이 왕국에서 아무도 없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가장 먼저 기사의 키스를 바치고 싶었다.

“…….”

칼리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에레즈를, 그리고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향기가 훨씬 온화해진 것을 느꼈다.

에레즈는 장갑을 낀 손으로 칼리번의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여전히 실수투성이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기사다워 보이지 않을까? 에레즈는 부디 칼리번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랐다.

‘조금 더… 닿고 싶어.’

에레즈는 자신이 여전히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괴물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시체 일부라도 찾기를 원했다. 생사만 확인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기세였다. 칼리번을 되찾은 후에는 눈을 뜨기를, 그가 깨어난 후에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를 바랐다. 부디 그에게 용서받고 기사의 키스를 전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제는….

‘한 걸음만 더 다가가서… 손뿐만 아니라….’

그의 뺨에, 목에, 그리고 입술에….

‘…안 돼. 칼리번이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감히….’

장갑을 낀 손으로 쥐었을 뿐인데도, 얇은 가죽 너머로 상대의 피부가 닿는 것이 더없이 기뻤다.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것이…. 칼리번에게서 나는 향기가 짙어질수록 에레즈를 더욱 애달프게 했다. 에레즈는 오메가의 향기를 이겨 내려, 아니, 알파의 어두운 욕망에서 벗어나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가는 칼리번에게 함부로 손을 댈지도 모른다.

“…미안!”

에레즈는 칼리번에게서 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 그게…. 나… 이런 순간에도 당신에게 가까워지고… 좀 더 닿고 싶어져서.”

“…!”

“이러다가는… 멋대로 굴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헤, 헤어지는 편이….”

에레즈는 서둘러 덧붙였다. 칼리번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남김없이 고백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배운 차였다.

‘부끄러워….’

그래도 역시 민망한 것은 민망한 것이다. 에레즈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때, 멀리서 칼리번이 대답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다, 다치기라도 하면….”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전하께서 원하시는 만큼 저도 원하고 있으니까요.”

“……!”

칼리번의 말은 그야말로 마법 같았다.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어두웠던 에레즈의 눈앞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제 상태를 눈치채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에레즈는 석양 아래 감춰진 칼리번의 얼굴도 붉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앞서 했던 말의 의미도.

“…….”

에레즈가 다가갔다. 더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턱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아니, 감쌌다. 그렇게 입술이 닿았다. 수 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에레즈는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에레즈가 흔들리자 이번에는 칼리번이 먼저 입을 맞춰 왔다. 하얀 손에 붙잡힌 채로 먼저 입술을 맞대는 모습은 점잖은 말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만큼 자신도 원하고 있다고, 마치 그 말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아니, 달라.”

무려 칼리번에게 입맞춤을 선물 받았는데도, 에레즈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칼, 당신이 나를 아껴 주는 것과… 내가 당신에게 품은 마음은… 달라.”

에레즈는 어물거리며 간신히 말을 쥐어 짜냈다.

“나는, 좀 더….”

그는 결국 알파였다. 에레즈는 칼리번을 젠의 앞에서는 지켜 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무수한 죄책감을 품고 있었지만, 사실은 당장에라도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얼마든지 받아 주는 그의 몸속으로. 단 한 번 몸을 나눈 후, 그들은 너무나 오래 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칼리번은 지난 8년간 수많은 알파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다. 자신마저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 설령 다정하고 강하고 굳건한 그가 받아 준다 해도….

훌쩍, 에레즈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칼리번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만 골라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더없이 강하고 믿음직한 이 용병은, 그런 에레즈를 탓하기는커녕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에레즈는 칼리번과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고, 감사했다.

분명 이렇게나 행복한데….

“이것 봐, 어느새….”

에레즈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장미 넝쿨처럼 금사가 칼리번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미, 미안….”

에레즈는 사과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였다.

“…….”

칼리번은 서로를 얽은 금사를 내려다보았다. 당장에라도 몸을 찌르려 드는 것이 마치 가시넝쿨 같았다.

“괜찮습니다. 얽힌 건 다시 풀면 되는 것이니까요.”

칼리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황금빛 밧줄은 보란 듯이 칼리번의 두 팔을 등 뒤로 묶었다.

“…미안해.”

에레즈가 새빨개진 채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떻게든… 될 겁니다….”

칼리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감금을 보고도 다시 한번 말했다.

“다, 당신은 이런 내가 지… 징그럽지 않아?”

에레즈가 눈물을 글썽인 채로 물었다.

“…그럴 리가요.”

칼리번은 손을 쓰지 못하기에 대신 에레즈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맞댔다.

“칼….”

이 자리에서 칼리번을 강제로 취한다 해도, 그는 아마도 받아 줄 것이다. 본성이 자신을 지배했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 척 굴면, 강하고 다정한 그는 금세 용서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에레즈는 8년 전의 미숙한 소년이 아니었다.

“…….”

에레즈는 호흡을 정리하며 의지를 다졌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에서 자신을 떼어 내기 위해 허리춤에 찬 단검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금사가 에레즈를 방해했다.

“으윽…!”

에레즈는 칼리번의 앞에서 자기 자신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꼬리를 물기 위해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레즈는 바빠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모습을 코앞에서 본 칼리번의 몸은 앞서 에레즈를 칠 뻔했던 바로 그 정체 모를 폭력성으로 단단해졌다.

“헉, 하아….”

한참 후에서야 에레즈는 자신의 본성과 싸워 이겼다. 박수를 칠 수 없는 칼리번은 대신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무언의 응원에 힘을 얻은 에레즈는 전리품을 탈취하듯 단검으로 금사를 용맹하게 잘라 냈다.

“이제는 능숙해 보이시는군요.”

금사에 꽁꽁 묶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칼리번이 감상을 말했다.

“…그, 금사와 싸우는 게?”

에레즈는 제 금사를 원수 대하듯 서걱서걱 썰어 내며 되물었다.

“그게 아니라, 머리카락을 자르시는 모습 말입니다.”

“아…. 아무래도 자라면, 스, 스스로 잘라야 했으니까.”

에레즈는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칼리번과 헤어진 후 에레즈는 성녀들이 붙어 감시하던 괴물도, 왕자도 아니었다. 젠에게 구박을 받으며 혼자서 불도 때고, 옷도 빨고, 장작도 패야 했다. 칼리번과 함께 숲에서 헤매던 시기에는, 에레즈는 밖으로 도망쳐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불안해했었다. 그러나 막상 닥치니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칼리번에게는 그 또한 처음 보는 모습이리라. 한 손이 자유로워진 칼리번은 에레즈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걸었다. 금빛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예전에 제가 잘라 드렸을 때는, 실력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칼리번은 8년이나 늦은 사과를 했다.

“아, 아니…. 나는, 좋았어….”

에레즈는 쑥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바라며 단검을 칼리번에게 넘겼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돕지 않아도, 이제 전하께서는 스스로 잘하시지 않습니까.”

에레즈는 머리를 엉망으로 자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러면 잘라 줬을지도 모르는데…. 칼리번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멋있게 보여야 한다는 결심과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보호를 받고 싶다는 욕망은 수시로 부딪혔다.

“실은, 이건 익숙해도… 사실 땋는 건 잘못하는데….”

에레즈는 슬쩍 말을 흘린 그때였다. 칼리번의 손등 위로 물방울이 자국을 남겼다.

“비가….”

에레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기가 지났는데도 비가 자주 오는군요.”

칼리번이 말했다. 황금 비가 내린 후유증일까? 올해는 우기가 지난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하늘은 잊을 만하면 비를 내리곤 했다.

“…돌아가야 해.”

에레즈가 이마로 톡, 톡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비를 피했지만, 비가 길어지면 쫄딱 젖을 수도 있었다.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 그럼…! 나도 여기 있을게.”

그러나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여기 오셨을 때도 이미 피곤해 보이셨습니다.”

“아, 아니! 나, 나는 괜찮아!”

들키고 말았나 보다. 에레즈는 애써 큰소리를 내며 부인했다.

“아닙니다.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전하께서는 몸을 챙기셔야 합니다.”

“…….”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 먼저 내려가십시오.”

그 말에 에레즈는 칼리번을 만나기 위해 제쳐 뒀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알겠어.”

그는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을 정했음에도 걸음은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칼리번은 그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에레즈가 몇 번이나 뒤돌아봤기 때문이었다.

결국, 에레즈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칼리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왕자님…. 아니, 전하.”

“함께 내려가고 싶었는데, 미안….”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었다. 늦어진 만큼 에레즈는 서둘러 돌아갔다. 칼리번은 조금은 놀란 모습으로, 한참이나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에레즈가 떠나자 비는 점점 늘어갔다. 더는 나무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칼리번은 부디 왕께서 이 비를 맞지 않고 무사히 왕성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에레즈가 떠난 방향만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우.”

비로소 혼자라는 자각이 들자, 칼리번은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윽….”

칼리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나무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에레즈의 입술이 닿았던 손이 가슴 위로 올라왔다. 마치 주먹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지끈거리며 쑤셔 왔다. 옷 안으로 손을 넣자 곧 손이 축축해졌다. …비 때문이 아니다.

<어째서 숨긴 거야?>

누군가 귓가에 속삭인다. 분명 에레즈와 칼리번, 둘밖에 없는 장소였는데 말이다. 검은 눈동자가 데굴 굴렀다. 나무 뒤의 스산한 어둠을 응시한다.

<네가 지금 어떤 꼴인지 보여 줬어야지.>

에어리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칼리번의 머리에서 기어 나온 에어리얼의 망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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