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 세상에는 8년이나 생이별을 했음에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힘을 합쳐 멸망의 위기에 놓인 왕국을 구하고는 정작 그 후에는 제대로 된 대화 한 번도 나누지 못한, 별 괴상한 관계도 다 있다.
에레즈는 칼리번과 무려 8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함께한 시간은 한 줌에 불과했다. 그 탓인지, 서로를 향한 마음은 오랜 시간도, 역경도 뛰어넘었으나 정작 사소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마, 말이, 흠, 흐음…! 자, 자, 자꾸만… 떠, 떨려서….”
에레즈의 주장은 이렇다. 칼리번을 마주하면, 예전의 나약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얼굴과 눈가가 붉어지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손이 덜덜 떨렸으며,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심지어 눈가에는 감격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눈물마저 고인다고….
“그래서… 칼리번이 깨어난 후로 여태까지, 단 한마디도, 섞지, 못했다?”
젠은 에레즈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회의의 주제는 ‘다 좋게 끝났는데 왜 인제 와서 속을 뒤집는가’였다.
“저, 저라고… 아, 아무것도 하지 아, 않은 건 아닙니다…! 제가… 말을 더, 더듬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건,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잘 안다. 그래서 에레즈는 왕성 탈환 후, 잠든 칼리번의 곁에서 부단히도 말을 걸어 댔다. 물론 잠든 칼리번 안에는 진짜 칼리번이 아닌 에어리얼이 들어 있었지만 말이다.
“흠….”
젠은 에레즈의 변명을 들으며 나뭇가지로 쓱쓱 에레즈와 칼리번의 얼굴을 그렸다.
“저, 저기, 이, 있는 게… 지, 진짜… 카, 칼리번이라고 생각하니…. 하아…. 살아서 움직이고…. 말도 하고…. 시, 식사도 하고…. 하아, 하아….”
칼리번이 숨만 쉬어도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에레즈는 숨이 벅찬지 장갑을 낀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성검을 마지막 전투로 잃었는데도 그는 꿋꿋이 장갑을 고집하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간호했으면서 본전도 못 찾다니. 멍청한 놈.’
젠은 어처구니가 없어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영혼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충격 때문일까? 몸이 재생된 후, 칼리번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계속 잠에만 빠져 있었다. 그때 곁에서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것이 바로 에레즈였다. 그 모습이 하도 간절하기에, 젠은 끔찍한 반면 한편으로는 앞으로 두 사람이 알아서 해 나갈 것 같아 안도했었다.
그런데 건강을 되찾은 칼리번과 대화는커녕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젠은 에레즈를 그린 낙서 옆에 ‘바보’라고 써 두었다. 칼리번은 처음 그려졌을 때부터 이마에 ‘돌’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아…. 그래서… 다, 다른, 수단을, 떠,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닌데…. 다, 다…시, 실패, 해, 해서…….”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건넬 인사를 편지로 따로 적어 두기까지 했다. 물자가 귀해진 현 상황에서 한 장의 양피지와 잉크는 굉장한 사치품이었다. 에레즈는 그 한 장을 앞뒤로 꽉꽉 채웠다. 그러나 칼리번이 문맹이어서 헛수고였다.
“어째서 이렇게나, 하아…. 진정이 되지 않는 걸까요….”
칼리번 이야기에 한참이나 흥분하던 에레즈가 돌연 침울해졌다. 서글픈 미인은 동정을 사기 쉽다. 에레즈가 왕이 아니었어도 사람들은 분명 짠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지난 8년 동안 네가 칼리번을 전쟁의 수호신이자 평화의 상징이자 검의 화신이자…. 뭐 그런 온갖 걸로 칭송해가며 숭배해서 그런 거 아니겠냐. 스스로 기준을 높여놨으니까 긴장한 거지. 나라도 암흑으로 치장한 전쟁의 신 앞에서는 떨겠다.”
그러나 에레즈에게 8년이나 시달려 온 젠으로서는 전혀 아니올시다, 였다.
“아무래도…. 칼리번이 볼품없는 저에 비해 강하고, 멋있는 사람이라…. 그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에레즈가 머릿속에서 혼자 내린 결론에 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어쩌면 그가 오메가라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오메가보다도 강한 오메가라서, 저를 사로잡고, 꼼짝도 못 하게 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젠은 에레즈의 헛소리를 단호하게 잘라 냈다. 오메가가 알파를 지배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 수준의 숭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오메가의 카리스마와 군신에 비견할 만한 강한 몸과 의지력….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결과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힘이….”
이쯤 되면 알파와 오메가라는 개념은 에레즈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네가 저 녀석한테 항상 발정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평범한 말은 에레즈의 머리에 꽂히지 않는 모양이다. 무시당하던 젠이 거칠게 내뱉은 말에 에레즈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그럴 리가요! 저는 그저 카, 칼리번을… 지키고 싶은 마음뿐인데….”
“…….”
진짜 짜증 난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젠 자신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청초한 태도 하며 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저놈이 알파만 아니었다면 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레즈를 8년이나 돌본 데다가 최근 온갖 일을 다 겪은 젠으로는 그 모습이 참으로 갸륵하고 가증스러웠다.
“너 말이야, 고작 그런 이유로 칼리번을 무시한 거야? 저 녀석이 멋대로 나돌아다니게 놔두고?”
하아, 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번이 육체노동을 하는데도 별말이 없는 것이 용하다 싶었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었다니.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가, 감히… 칼리번이 하, 하겠다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에레즈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역시 알고 있었군.”
“…네.”
“하지만 넌 왕이잖아. 저 녀석은 오메가고. 누가 봐도 막을 이유는 충분한데?”
무엇보다 칼리번이라면 에레즈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하다못해 젠도 아는 사실이었다.
“아뇨, 저한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에레즈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는 무거운 죄책감을 감추기 위한 어색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왜냐면 저가 어리석었던 탓에 칼리번은….”
“…….”
“그런 고통을….”
에레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조개처럼 꾹 닫고 말았다. 푸른 눈은 입 밖으로 꺼낸 몇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가 음산해졌다. 젠은 갑자기 자신의 두 눈이 캄캄해졌나 싶을 정도였다.
‘어… 음, 이건 내가 끼어들 만한 수준의 일이 아닌데.’
두 사람의 사연이 너무 깊게 엉켜 있어, 젠이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아니, 감히 끼어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그리고… 무, 무시한 건 아닙니다! 저 나름대로 노력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카, 칼리번에게… 이런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는….”
에레즈는 제 양손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예상치 못하게 흘러나왔던 본심을 없던 일로 치부하기 위해서였다.
“흠, 크흠…. 뭘… 그렇게 신경 쓰는 거냐! 네가 말을 더듬는 걸 모를 녀석도 아니고, 그거 가지고 뭐라 그럴 성격도 아니잖아?”
젠 또한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떨쳐 내기 위해 괜히 강하게 말했다. 그녀가 아는 칼리번은 세상 모든 것에 둔감한 바보였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내나 보석을 보아도 평생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고정관념이 아직도 통용되는지는 살짝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평생 그 사람의 도움만 받았으니, 이제는 의지할 만한 왕으로 보이고 싶어서….”
에레즈 어깨 너머로 늘어뜨린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고백했다.
“…이제 와서?”
젠은 저도 모르게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뱉고 말았다. 에레즈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흘겨보았다. 흐음, 흠! 젠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네 결심이 정 그렇다면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겠다만…. 그래도 적당히 도망치고 얼른 대화라도 나눠 봐. 네가 기다린 만큼 그 녀석도 기다리지 않겠냐.”
젠장, 자꾸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너희들끼리 알아서 풀라고! 젠은 그런 속내를 성녀 출신다운 우아한 말씨로 풀어냈다. 다 큰 사내놈한테 이런 조언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닭살이 돋았다.
“네. 알겠습니다….”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 피의 프리드웬답지 않게 그 모습은 비를 쫄딱 맞은 고양이 같았다. 이제 와 에레즈에게 동정을 느낄 사이는 아니었다만, 젠은 순간 특유의 성미가 발동하고 말았다. 애 돌보기는 질색이라고 하지만 결국 손을 내밀고 마는, 그런 성정 말이다.
“뭐….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도와주고. 말 정도는 전해 줄 수 있지. 그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그래서 젠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정말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우울해하던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아, 젠장….’
젠은 순간, ‘잘못 걸렸다’ 싶었다.
“그러면 스승님…. 괜찮다면 저 대신 이걸 칼…에게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기랄, 벌써 부탁하는 거냐?”
젠은 제 입으로 뱉은 말을 무르지도 못하고 괜히 성질만 냈다.
“왕성을 돌아보던 중에 우연히 발견해서….”
에레즈는 허리에 매단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새삼스럽지만, 명색이 한 왕국의 왕인데 그 행색은 꼭 먼 옛날에나 존재했다는 수도사 같았다. 왕국이 언제 풀썩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왕은 비단은커녕 검고 허름한 옷을 걸치곤 했다. 다만, 조금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천이 손등을 덮고, 목 끝까지 올라올 정도로 엄격한 의복만 입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더 성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일지도.
“이건…!”
그런 에레즈가 준비한 선물에 젠은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그가 내민 것은 꽃 한 송이였는데, 금빛 실이 감겨 있었다. …아니, 실이 아니라 금사였다. 본체와 떨어져 있음에도 꿈틀거리는 것이 매우 기분 나빴다. 젠의 얼굴이 구깃구깃해졌다.
“금사에 다, 다른 의미는 없고……. 일정 시간 동안 버틸 수 있다 보니……. 호,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카, 칼리번을 지키고 싶어서….”
에레즈는 한껏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칼리번이 대화의 화제로 오르자 그는 다시 말을 더듬었다.
“…….”
꽃을 받아 든 젠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칼리번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꽃 아니던가!
* * *
그렇게 젠은 팔자에도 없는 심부름꾼 노릇을 하게 되었다. 에레즈를 혼내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창고로 향했을 때는 어느덧 달이 떠 있었다.
‘저 멍청이들이 엇나가지 않게 하려면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금사는 어딘지 징그러워서 그 자리에서 버리고, 꽃은 가는 길에 씹어 먹었다. 이딴 선물을 줬다가는 에레즈는 그날로 칼리번의 손에 장작이 되고 말 거다. 아무리 칼리번과 에레즈가 그런… 관계라 할지라도 말이다. 양손만큼이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젠은 창고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니, 젠장! 저 둘 처소가 이렇게 가까운데 내가 왜 가야 해?’
걷다 보니 젠은 새삼 울적해졌다. 에레즈의 막사 바로 뒤가 칼리번의 창고인데 말이다.
“이봐, 칼리번! …뭐야. 없잖아?”
다들 배급받은 식사를 마치고 코를 골며 잘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젠도 당장 돌아가 자고 싶었으나 곰 같은 칼리번과 토끼 같은 에레즈를 생각하며 창고 주변을 배회했다. 꼼꼼히 살펴도 보이지 않아 이 밤중에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뜻밖에도, 그녀는 동문 외곽 지역에서 칼리번을 발견했다. 그것도 젠이 가장 걱정했던 모습으로….
퍽! 퍼억, 퍽…!
젠은 누군가 신명 나게 주먹질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사이로 우두둑, 단단한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마저 울려 퍼졌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지?’
칼리번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젠은 걸음을 빨리했다. 어딘지 익숙하면서, 그립기까지 한 이 소리는….
“하아, 하앗…!”
바로 칼리번이 애먼 나무에게 화풀이를 하는 소리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주먹질을 해 댄 것인지 벌써 세 그루나 부러져 있었다. 이 가엾은 나무들은 지난 8년을 마물의 피와 전쟁, 화재에서도 살아남았으나 이름 없는 용병을 잘못 만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안 자고 뭐 하냐….”
젠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8년 전에도 칼리번이 그답지 않게 복수를 다짐하며 수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에레즈에게 꽃을 받은 후부터였다.
‘근데 뭐 때문에 애먼 나무들을 예전의 에레즈 패듯 패고 있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었어? 설마… 에레즈 녀석이 꽃을 줬다는 사실을 벌써 들켰나?’
에레즈가 준 꽃을 중간에 먹어 버려서 다행이다. 잠자는 용병의 코털을 8년 만에 또 뽑을 필요는 없지. 젠은 속으로 자신의 탁월한 판단력에 감탄했다.
“헉, 허억…. 젠…? 너였군.”
그때, 젠의 기척을 알아챈 칼리번이 거목을 향한 일방적인 폭력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는 젠이 전에 창고에 들렀을 때처럼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하. 그래서 그때도 옷이 젖어 있었던 거군.’
에레즈를 향한 화풀이가 아니라면, 몸이 회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찌뿌둥해진 몸을 풀기 위한 운동일지도 모른다. 하지 않아도 되는 궂은일을 자진해서 하는 녀석이었으니 그럴 법했다. 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칼리번에게 휘적휘적 다가갔다.
“되도록 땀이나 피는 흘리지 말라고 했잖냐. 기억 안 나?”
“…아, 그랬지.”
칼리번은 이마에 고인 땀을 닦았다. 그러나 젠이 보기에 닦아야 할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잠자리에 들 계획은 있었는지 누덕누덕한 그는 셔츠 한 장과 바지를 걸치고 있었는데, 땀에 절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누가 본다면 물에 빠지거나 비를 맞은 줄 알았을 것이다.
“뭐, 이제는 향기를 혼자서 조절할 수 있다니 상관없겠지만 말이야.”
더는 필요 없는 잔소리를 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젠이 덧붙였다. 어딘지 허탈한 심정으로.
“이 시간엔 무슨 일이지? 왕자님…. 아니, 전하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여전히 숨이 거칠어서 넓은 어깨와 흉부가 들썩거렸다. 그는 아직 새로운 호칭이 입에 붙지 않은 모양이다. 대관식 때 정신을 잃은 채 잠들어 있었던 탓도 클 것이다.
“뭐, 가타부타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너희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 이 불쌍하고 늙은 알파를 중간에서 부려 먹지 말고.”
나도 죽다 살아나서 복잡해. 고민할 거리가 상당하거든? 젠은 다짜고짜 명령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칼리번이 다가왔다. 젠은 저도 모르게 오메가의 향기를 예상하고 질끈 인상을 썼다.
‘젠장, 이젠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자꾸 이러네….’
이러니까 괜히 쫀 것 같잖아. 젠은 찔끔 눈을 뜨며 속으로 되뇌었다.
“젠?”
“아…. 아냐, 아냐.”
젠은 고개를 휘휘 털었다.
“그보다 너, 되살아난 이후로 에레즈 녀석이랑 대화 한번 안 해 봤다며.”
젠은 당혹스러운 속내를 숨기고 툭 하니 물었다.
“그걸 어떻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칼리번의 두 눈이 확장되었다. 더없이 멍청한 모습에 젠은 짜증이 치밀었다.
“이 돌대가리가…! 왜 진작 말을 안 했냐. 너희가 내외하는 것 때문에 내가 다 곤란하다고!”
“어째서 젠이 곤란해지는 거지.”
“그야, 에레즈가 시도 때도 없이 날 잡고 징징거리니까 그렇지!”
“아….”
젠의 외침에 칼리번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오, 벌써 말이 통한 건가? 돌대가리가 이렇게 눈치가 빠르다니, 의왼데?’
젠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래, 이제 깨달았으니 당장이라도 에레즈의 막사로 가서 깊은 대화를 나눠라. 애먼 나무 괴롭히지 말고. 젠은 생각보다 빨리 쉴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그런데….
“…알겠다. 젠, 본의 아니게 네게 폐를 끼치게 되었군.”
“맞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전하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겠다.”
“그래, 그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말…. 뭐?”
그러나 대화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잠깐만. 왜 갑자기 그따위로 말하는 건데?”
젠은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젠이 방금 말하지 않았나, 내 일로 곤란하게 되었다고. 아마 작업장에서 생긴 일 때문이겠지. 되도록 모습을 숨기려고 했는데 그날, 전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때 불쾌하셨던 심정을… 젠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하는 것 아닌가.”
“맞는 말이기는 한데, 전혀 달라. 결론이 뭐 이래?”
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칼리번이 하는 말이 뭔 소리인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왕자님…. 아니, 전하께서 날 꺼리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왜?”
젠은 어디 한번 끝까지 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건….”
칼리번은 가만히 어둠을 응시했다. 밤처럼 까만 눈은 8년 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예전보다 더욱 침잠해 있었다.
“…젠, 너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만.”
칼리번은 한참 후에 입을 뗐다.
“전하께서는 내 과거를 보았다. 지난 8년간의 기억을…. 에어리얼이 보여 주었다고 하더군.”
칼리번은 아예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젠은 머릿속이 텅 비고 말았다. 아둔한 친구를 향한 짜증과 답답함은 한순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를 더럽다 여기셔도 내 쪽에서 할 말은 없지. 결과적으로, 이 몸으로 만든 마물들이 왕성을 무너뜨렸으니 말이다.”
칼리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젠은 듣기만 했다. 에어리얼이 무슨 기억을 에레즈에게 보여 줬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며…. 동시에 알 것도 같았다. 아마도 양쪽 모두의 상처를 헤집을 만한 기억으로 엄선했겠지. 그 녀석은 원래 그런 성미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8년 전의 약속을 지켜 주셨다. 나를 다시 살려 주시기까지 했다. 그 이상의 호의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칼리번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덤덤했다.
“전하께서 지키는 왕국과 오메가는 상극이다. 혼자 조용히 떠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전하는… 황금의 비를 내리신 후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적어도 그분께서 회복하실 때까지는 곁에 있고자 했던 거다.”
몸이 멀쩡한데 식량만 축내는 것도 그리 보기 좋은 일은 아니고. 칼리번은 팔을 가볍게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어….”
칼리번의 속내를 알게 된 젠은 일단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것 같은데.”
함부로 말을 얹었다가는 도리어 일을 그르칠 것만 같았다. 이래서 남의 싸움에는 끼어들면 안 되는 것이거늘.
“…너희는 아무래도 단둘이서 심도 있는 대화를 좀 나눌 필요가 있어 보인다.”
뭔가 말해 보려던 젠은 재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봐, 칼. 약속이라도 잡아 줄까? 아무도 끼어들 수 없도록 한 자리 마련해 줄게.”
“괜찮다.”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지금 당장 에레즈 녀석을 데려와야….”
젠이 칼리번의 만류를 떨쳐 버리고 빙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젠. 난 전하와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이지, 만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칼리번이 뜻밖의 소리를 했다.
“…뭐라고?”
젠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의문을 토해 냈다.
“전하께서는 이곳에 종종 찾아오신다.”
젠의 두 눈은 거의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분명 부끄러워서 말도 못 걸었다고 들었는데?
“뭐야! 그 말을 왜 지금 하는 건데?!”
젠은 벌컥 외쳤다. 이미 둘이서 밀회를 하고 있었다면, 자신이 괜히 끼어든 것밖에 더 되지 않는가!
“하지만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엥…?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야?”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보통 저쯤에 서 계시곤 한다.”
칼리번은 손가락으로 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젠은 고개를 돌렸다. 칼리번이 무수히 많은 나무를 파괴했으나 여전히 나무로 빽빽했다.
“나무 뒤에서 고개를 반쯤 내밀고 계시더군. 창고에서 쉴 때도 그 정도 거리를 유지하신다. 처음에는 구역을 시찰하시다 이 주변에 들른 것인가 싶었는데, 보다시피 주변에 다른 숙소는 없지 않나.”
“…그래, 없지.”
젠의 목소리에 생기가 사라져 갔다.
“계속 서 계시기에 먼저 돌아가시기를 기다려 봤다. 그랬더니….”
“…그랬더니?”
“아침이 될 때까지 서 계시더군.”
이제 젠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고 더없이 차가워졌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니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나 싶어 다가가 보기도 했다.”
“…다가갔는데?”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
놀라운 속도였다. 그야말로 숲을 달리는 우아한 사슴같이…. 칼리번이 덧붙인 말은 젠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알아서 차단되었다.
“내가 여기 오래 있으면 전하께서도 떠나시지 않을 것 같아, 그 뒤로는 전하께서 들르시면 먼저 창고로 돌아갔다.”
“아아…. 그랬단 말이지?”
젠의 목소리에 살기가 설핏 어렸다.
“전하께서는 역시 내가 불편하신 거겠지.”
에레즈 녀석, 어떻게 칼리번의 행적을 아나 싶었더니만…. 젠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그랬구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징그러운 놈들! 난 진짜 모르겠다!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
젠은 이쯤에서 두 사람의 일에 손을 털었다. 어디 한번 평생 답답해하다가 속 터져서 죽어 보라지.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녀가 서둘러 칼리번에게서 떠나려 할 때였다.
“…젠, 가기 전에 이걸 가져가라.”
젠이 거절하기도 전에, 칼리번은 산더미 같은 장작을 안겼다.
“이게 뭐야?”
“장작이다.”
“그건 보면 알아. 뭐 어쩌라고.”
“전하께 전해 줬으면 한다. 과도하게 힘을 쓰셔서 몸이 많이 약해지셨으니….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
내 건 하나도 없고 말이지. 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칼리번은 꽃을 받지도 않았는데 아직 분이 덜 풀렸는지 또다시 나무를 학살하러 갔다.
* * *
젠은 이대로 왕성 밖으로 도망칠까 하다가 성녀단의 가르침을 따라 인내를 갖기로 했다. 그녀는 에레즈에게 전날 밤 칼리번과 나눈 대화를 전했다. 산더미 같은 장작더미와 함께 말이다.
솔직히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몹시도 정직하고 훌륭하고 뛰어난 인품을 지녔기에 사실대로 전했다. …실은 빨리 해결을 봐서, 이 둘 사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서, 설마… 칼리번이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에레즈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는 괴로워했다.
‘내가 칼리번이어도 한 나라의 왕이라는 녀석이 나무 뒤에 숨어서 몇 시간이고 쳐다만 보고 있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고민할 것 같은데….’
젠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딱 하나다.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야.”
“대, 대화…?”
“그래.”
“제, 제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요….”
에레즈는 벌써 숨을 헐떡였다. 알테르 프리드웬과 싸우기 전에도 이 정도로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 칼리번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 대화할 자신이….”
결국, 에레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냐? 엄청 쉬워. 평소에 네가 나한테 하던 말을 그대로 칼리번에게 하기만 하면 돼!”
젠은 필사적으로 에레즈를 설득했다.
“그, 그건…!”
“설마 못 하겠다는 건 아니지? 또 8년을 썩히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에레즈의 얼굴이 불긋해졌다. 그는 윤기 도는 금빛 머리카락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이 자식은 왜 자꾸 빨개지는 거야, 기분 더럽게.’
같은 알파가 발긋발긋해지니 젠은 괜스레 짜증이 났다. 그러고 보니 여태 에레즈가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더라? 젠은 두 사람에게 말려든 나머지 회수해야 할 금화조차 미처 수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업료 겸 금화를 한 주머니 정도 챙길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돈을 받았다가는 그걸 빌미로 끔찍한 심부름을 영원히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난 여기까지만 끼어들고 앞으로는 손 뗄 거야.”
그래서 그녀는 먼저 선언했다.
“스… 스승님!”
“내가 아무리 네 스승이라도 고백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잖아! 이러다 청혼까지 해 주게 생겼네. 이 이상은 내가 간섭할 수 없어.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그, 그건 그렇지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에레즈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은 상당히 길어서 젠의 인내심이 슬슬 꺼져 가려던 차였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말이 옳으십니다. 언제까지고 그 사람을 멀리서 바라만 볼 수는 없으니까요.”
에레즈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 칼리번은 붉은 오메가로부터 저를 해방시켜 준 영웅이고…. 머, 멋있고…. 또… 제가 본 이들 중에 가, 가장… 자, 잘생겼고, 근사하다고…. 진심을 전하겠습니다.”
“…….”
“그리고 칼리번의 기억은… 그런 제 마음을 조금도 변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도….”
에레즈는 계획을 말했을 뿐인데도 마치 당사자에게 고백한 것처럼 벌써 바짝 긴장한 채였다.
“좋아.”
젠은 에레즈의 결단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깨를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쳤다. 에레즈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괜히 민망해했다.
“그런데 부탁드린 꽃은… 칼리번이 좋아하던가요?”
쑥스러워하던 에레즈가 넌지시 물었다. 젠은 딴청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