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붉은 오메가가 일으킨 ‘의식’으로 왕성 일대는 초토화되었다. 황금의 비로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그뿐이었다. 인류는 의식주 모든 부분에서 이전보다 훨씬 퇴보하고 말았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대관식이었다. 그동안 에레즈 프리드웬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를 미뤄 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왕성을 탈환하기 전까지, 붉은 오메가를 토벌하기 전까지, 왕성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에레즈는 더는 물러서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류의 방패가 되어 파괴된 왕성을 복원하고, 마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다.
대관식은 폐허 위에서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왕홀이나 보주는 알테르 프리드웬에 의해 파괴된 지 오래였고, 보검을 대신할 성검은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관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왕관조차 없었다.
하지만 에레즈에게는 보주를 대신할 푸른 보석안과 왕홀과 성검을 대신할 오른팔이 있었다. 그리고 황금의 비가 내린 후로 마물의 피로 죽은 땅에서 싹이 트고 고목에서 잎이 돋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새로 피어난 잎사귀와 유연한 나뭇가지를 엮어 왕을 위한 풀잎 관을 만들었다. 에레즈는 태양 아래에서 더욱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기에 초록빛 왕관은 오히려 보석으로 치장된 왕관보다 더욱 그를 돋보이게 했다.
왕비, 이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태후가 된 베이가가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왕의 오른편에는 왕실 재건 기사단이, 왼편에는 신용병 연합이 자리를 잡았으며 성녀단은 태후의 곁에 머물렀다.
“에레즈 전하 만세!”
“만세!”
왕과 신하들 앞에 모여든 백성들이 연신 환호했다. 왕은 단상이나 성벽에 오르지 않았기에 모두의 눈높이가 같았다. 왕국 역사상 가장 소박하고 조촐한 대관식이었다. 하지만 에레즈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다만, 이 영광된 자리에 왕비 없이 홀로 서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 * *
알테르 프리드웬에게서 왕성을 탈환한 후 처음 열렸던 회의는 본성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붉은 오메가를 물리친 지금은 임시로 올린 천막 안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과 세 기둥의 대표들은 반쯤 부서진 탁자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현재 네 곳의 성문 중 세 곳이 무너졌고, 동쪽 성문만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보호막만은 간신히 작동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본성조차 붉은 오메가가 마계에서 불러낸 마물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때문에 살아남은 자들은 일단 동쪽 성문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명령하신 대로 거주가 가능한 영역을 늘리기 위해 정화 작업에 정진하고 있으나, 왕성으로 복귀한 성녀의 수가 적다 보니 난항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흩어졌던 성녀들이 조금씩 귀환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화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로 성녀가 먼저 보고했다. 새하얀 성녀복은 회색빛이 된 지 오래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그 자리에서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
“왕성에 갇혀 있었던 부상자는 대부분 구출된 상태입니다. 현재는 신용병 연합 측과 인원을 나눠 동쪽 성문 주변의 잔해와 마물의 시체를 제거 중입니다. 우기가 지났음에도 비가 자주 내리고 있어 작업 진척도는 더딘 편입니다. 하지만 비 덕분에 왕성 곳곳에 핀 불길을 잡을 수 있었고, 어려움 없이 식수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불만을 표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다음 보고는 몹시 지친 얼굴의 로위나가 이어받았다.
“작업이 끝나면 재사용이 가능한 석재로 전하께서 머무실 새로운 거처를 짓고자 합니다.”
그녀의 갑옷은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고 표면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 갑옷을 입은 형제가 죽고, 자신도 한번 죽다 살아났으나 로위나는 여전히 같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무너진 성문의 복원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군.”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용병 측으로 향했다.
“저희 신용병 연합에서 정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북문, 남문, 서문 세 곳의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만, 마물의 침입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녀님들께서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덕분이겠지요.”
오드론은 비교적 간단하게 보고를 마쳤다. 용병이란 대개 험한 일을 도맡다 보니 거칠기 마련이나 오드론은 그중에서도 제법 깔끔을 떠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였다. 결국 오드론마저 턱에 수염이 드문드문 나고 말았다.
“성벽도 중요하나 치료소 증설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곧 비가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나, 만약 겨울까지 날씨가 계속 이렇다면… 부상자의 수용이 버거울 테니까요.”
에레즈의 곁에 앉아 있던 베이가가 조용히 말을 얹었다.
“그 부분도 고려하겠습니다.”
에레즈는 베이가와 시선을 맞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단벌 신사였고 왕의 어머니는 기워 입은 흔적이 역력한 검은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인간이고 알파고 가릴 것 없이 때와 먼지투성이였다. 모두가 지저분했고, 너덜너덜했다. 세탁은커녕 식수조차 부족한 판국이었다. 비가 내릴 때나 간신히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했다. 그나마 이들은 권력의 상층부였기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간단히 보고를 마친 후, 그들은 왕성 내 백성들의 거주지 배치에 관해 논의했다. 붉은 오메가가 벌인 ‘의식’으로 인해 왕성 대부분이 오염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일단 동문 주변에 자리를 잡고, 조금씩 활동 구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본성에서 거주하던 에레즈 프리드웬조차도 임시로 막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거주할 수 있는 땅이 적다 보니….”
“알파와 인간 간의 갈등이….”
이렇듯 안전한 땅이 적다 보니, 인간과 알파 간의 갈등이 깊어졌다. 인간들은 인간들대로 강한 알파들이 오염 지역에서 지내길 바랐고, 알파들은 알파들대로 자신보다 약한 인간들에게 양질의 땅을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에레즈가 중간에서 조율에 난항을 겪던 차였다. 천막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어둠이 회의장을 덮쳤다.
“으윽, 이게 무슨 일이야!”
“검은 손자국? 마물의 습격인가…?”
“알테르 잔당이 남아 있다고?”
“…이런 제기랄, 붉은 오메가는 죽었을 텐데!”
하필이면 예민한 사안을 다루던 중에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시야가 차단되자 다들 긴장했는지,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설마, 구역을 나눠 주기 싫다고 이런 짓을 벌여…?!”
자칫 잘못하면 내분까지 일어나려던 찰나.
“다들 진정해라. 아무래도 오늘내일하던 천막의 기둥이 무너져 내린 것 같군.”
천막을 뒤집어쓴 채로 에레즈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주변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이 회의장에 참석한 이들은 세 기둥의 우두머리였다. 평소였다면 이런 일에 과민 반응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이은 전쟁과 일반적 상식으로는 납득 불가능한 거대한 재앙을 겪은 후로는 다들 작은 일에도 예민해져 공격적으로 굴고 말았다.
“이런, 성가신…!”
오드론이 짜증을 내며 천막을 찢으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귀중한 재화입니다! 함부로 찢으면 안 됩니다!”
용병 중 한 명이 성질을 부리자 근처에 있던 성녀가 급히 주의를 줬다. 씩씩거리던 용병의 체격이 급격히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주변에서 터전을 가꾸던 사람들이 처참한 광경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천막을 거둬 주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엉망이 된 이들 위로 햇살이 내리쬐었다. 어디선가 쉬지 않고 기침 소리가 났다. 에레즈에게서였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에레즈가 모든 이들에게 권했다. 재난의 손길이 스친 다른 이들과 달리 에레즈는 낡은 옷을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깨끗한 상태였다. 그러나 천막의 공격으로 인해 길고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정전기가 올라 붕 떠올라 있었다.
“알겠습니다.”
“따, 따르겠습니다…. 전하!”
“음…. 어쩔 수 없군요.”
다들 별말 없이 왕의 의견을 따랐다. 베이가만이 말없이 에레즈의 머리에 천을 둘러 주었을 뿐이다.
* * *
붉은 오메가는 왕성에 숨어들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의식’을 치렀다. 그로 인해 왕성 바로 위로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거대한 통로가 생기고 수많은 마물이 강림했다. 인간과 알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힘을 합쳐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국의 멸망이 다가오던 그때, 마물들은 땅에서 벼락을 맞고 재가 되었다. 죽음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다시 눈을 떴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날의 전투에 참여하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던 이들이 공통으로 본 광경이 하나 있다.
바로 황금의 비였다.
비는 종족이나 성별도, 신분이나 나이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렸다. 아래로, 계속해서 아래로 흘러 ‘의식’으로 인해 죽어 간 모든 이들을 살렸다. 그 비를 누가 내렸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로부터 내려오던 예언, 그 피를 지닌 왕족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기적을 일으킨 왕은 왕성 남문에 떨어진 작은 호수에 있었다. 후일, 그곳에 당도한 병사들은 모두가 동일하게 증언했다. 황금을 녹여 만든 호수를 보았다고….
사람들은 물 위에 뜬 백조를 보았다. 아니, 그것은 눈의 착각이었다. 고요한 호수 한가운데에는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사내가….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는 것은 그림자처럼 짙은 사내가 아니었다. 호수 위로 퍼진 길고 아름다운 금발과 마찬가지로 금빛인 눈동자는 인간이 아닌 듯했다.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한 병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화, 황금 피….>
그 거짓 없는 감탄이야말로 에레즈 프리드웬이 ‘황금 피’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증거였다.
이 시대에 새로 생겨난 전설이었다.
“…몇 번을 들었지만, 역시 과장이 심하군요.”
정작 황금빛 전설의 주인공은 민망하고 머쓱한 듯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평가절하 했다.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는데 어쩌겠냐. 입 꾹 다물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퍼진 소문을 긁어다 준 전달자도 간지러운 건 매한가지였나 보다. 젠은 제 몸을 벅벅 긁었다.
“뭐, 왕실을 향한 찬가는 터무니없을수록 좋지. 지금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희망이니까.”
젠이 덧붙인 말에 에레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중천에 뜬 탓에 그림자가 짤막해졌다. 평소였다면 각자의 분야에서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고 있을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산 중턱에 올랐다.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다름 아닌 붉은 오메가가 ‘의식’을 치렀던 장소였다. 젠과 에레즈는 혹여나 붉은 오메가가 남긴 함정이나 봉인은 없는지 시간과 공을 들여 살폈다. 후환의 조짐이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물의 피가 섞인 이들은 인간보다 시력이 좋았기에, 동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동선이 눈에 들어왔다. 황금의 피로 죽은 이들이 부활하고, 상처가 재생된 사람들은 서로를 찾아 헤맸다. 그로 인해 아직도 미미한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면, 다른 세 곳의 성문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붉은 오메가는 일부러 기형 알파를 쌓아 성벽을 대신했다. 살아있는 벽은 의식 중에 무너져 내렸고, 그것들이 흘린 피와 체액은 인간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그 탓에 지금까지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봉쇄되어 있었다. 정화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붉은 오메가는 죽고 나서도 지옥을 선사한 것이다.
“…….”
젠은 말없이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황금의 비는 의식에 휘말린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살렸다. 젠 또한 그 수혜를 입은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식 전에 죽거나 이 땅에 육체를 남기지 않은 사람은 살아나지 못했다.
되살아난 젠은 칼리번과 에레즈, 각각의 증언을 합쳐 당시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그 후 그녀는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를 붉은 오메가의 행방을 찾았다. 겸사겸사 칼리번이 외면한 어떤 존재의 흔적도 함께 수색해 보았다.
왕국을 파멸로 몬 반역자 둘을 찾아다니다니, 호구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나 젠의 의중은 전혀 달랐다. 만일 그들이 살아 있다면 이 손으로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다. 칼리번도, 에레즈도 돌대가리라서 혹여나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만 내려갈까?”
젠이 먼저 제안했다.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라, 넘어지지 말고.”
“제가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산행 정도는 거뜬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웃으며 대답하지만, 젠이 보기에 에레즈는 어느 순간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젠은 앞장서서 그를 호위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제 피로 왕국 전체를 적셨다. 오직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까? 그 후로 그는 신체적인 능력이 다소 둔화되고 말았다. 알파로서의 힘이라든가, 특유의 회복력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거대한 힘을 감싸는 껍질 쪽이 약해졌다는 편이 옳았다.
<이편이 나을지도 모르죠. 박약한 괴물에게는….>
에레즈는 활기가 줄고 때때로 지쳐 보였으나 전과 달리 더는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힘으로만 따지자면 이전의 에레즈가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사람들은 공통으로 지금의 왕에게 더 큰 안정감과 포용력을 느꼈다. 왕이 이젠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느끼기 때문이겠지.
에레즈는 알테르 프리드웬 같은 폭군은 아니겠지만, 에인레드 프리드웬 같은 성군도 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다시는 암군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잡을 뿐이다.
“…….”
길었던 전쟁이 끝을 맺었으니, 앞으로는 이런 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 젠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의식을 치렀다는 장소를 보았다. 그 당시 그녀는 강적에게 막혀 이곳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젠장, 나도 다 늙었군. 새파란 알파한테 두 번이나 지다니….’
젠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때 어린 알파의 콧대를 꺾어 줬더라면, 지금쯤 이 세상에서 형태도 없이 사라진 것은 붉은 오메가…. 아니, 에어리얼과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배은망덕한 꼬맹이지만, 죽기 전 울면서 매달렸다면 홀라당 넘어가 버렸을지도? 젠은 자기 자신마저 못 미더웠다.
‘…아니, 나는 좀 더 살 거야.’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다. 반드시 끝까지 살아남아서, 언젠가 나와 같은 존재를 찾으리라. 평생 에어리얼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녀의 신념이었다.
‘저지른 죄가 많으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잘 가라.’
젠은 허공에 마지막 인사를 남긴 후, 미련 없이 산에서 내려왔다.
“어제까지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웬일로 날씨가 좋네.”
“그렇군요.”
“도대체 언제까지 내리게 할 셈이냐?”
“하하,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로는 제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반묶음을 한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듯 흔들고 젠의 뺨을 스쳤다.
또 비가 올 기세였다.
“…….”
평범한 사람들에게 ‘의식’의 진상을 알리기에는 득보다 실이 더 컸다. 그리하여 사건의 전말은 붉은 오메가가 알테르 프리드웬의 사주를 받아 멋대로 의식을 저지른 것이라 일단락지었다. 사람들은 에인레드 프리드웬의 전설과 황금 피의 예언을 믿듯 그 이야기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설령 에레즈 프리드웬이 붉은 오메가에게 농락당한 탓에 이토록 영토가 줄고 문명이 퇴보했다고 한들, 그 누가 에레즈 프리드웬에게서 왕의 자격을 묻고 죗값을 치르게 하겠는가?
백성들은 성녀를 버렸고 성녀는 백성들을 속였으며 마물 혼혈은 인간을 지배하려 했다. 과거를 끌어온다면 공멸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를 따지기보다는 왕성 재건에 몰두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되어 있었던 마물 혼혈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지는 장관을 낳기까지 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좋게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보기에는.
* * *
알파고, 인간이고 구별할 것 없이 왕성 재건에 여념이 없었다. 왕국 안정은 모두에게 공통된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바쁜 건 성녀들이었다. 마물의 피로 더럽혀진 지역의 정화와 부상자 치료에 여념이 없었다. 힘이 좋은 마물 혼혈들은 무너진 건물을 복구하는 데 인력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그 외의 평범한 인간들은 수가 가장 많았기에 성녀와 알파의 사이에서 일손을 도왔다.
계급이라든가, 종족, 성별이 다르다 해서 예외는 없었다. 그만큼 모든 것이 부족했다. 황금의 비가 내린 후로 마물은 숲으로 숨어들었으나 언제 또 침입할지 모를 일이다.
어느 정도로 다 같이 열심이냐면, 인간들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건축 자재를 운반하는 칼리번을 발견할 정도였다.
“…어?”
젠은 알파였지만, 왕의 오른팔인 탓에 성미에 맞지 않는 관리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 탓에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젠의 곁에서 현 구역의 작업 진척도를 전하던 작업반장이 물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라. 전날에 잠을 잘못 자서 그래.”
말과 달리 젠은 더욱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인상을 뜨며 눈을 벅벅 닦아 냈다. …환각인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서 건축물의 잔해를 옮기던 칼리번이 이번에는 저기서 쓰러진 기둥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마리밖에 없을 정도로 드문 데다가 왕국을 이 꼴로 만든 오메가가 인간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다니…. 미친 건가?’
물론 성을 이 꼴로 만든 건 저 녀석이 아니라 몸을 뺏은 에어리얼이지만 말이다.
‘…이 망할 자식, 한동안은 죽은 듯이 숨어 있으라고 했을 텐데.’
물론, 그 체격과 힘을 그냥 놀리기에는 국가적 손실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젠이 작업반장이라 하더라도 앞에서 칼리번과 같은 존재가 어슬렁거리면 붙잡고 싶을 테니까.
“그러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아, 하하…. 그럴 리가. 딱 봐도 다들 엄청나게 잘하고 있네. 이 구역은 성녀단 측에서 예상한 시일보다 더 빠르게 끝날 것 같다니까?”
젠은 무시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겉으로는 작업반장과 대화를 하면서도 정신은 자꾸만 벽돌을 한가득 진 칼리번에게 곤두서 있었다.
“단장님. 혹시… 저 알파 때문입니까?”
눈썰미가 좋은 작업반장은 젠이 뚫어져라 쳐다본 장소에 시선을 던지더니, 곧바로 의중을 파악했다. 아니, 그녀가 눈치가 좋은 것이 아니다. 인간 여자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덩치는 누구라도 신경 쓰일 것이다.
“어어, 아. 그래…. 저 녀석은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여기 있나 싶어서.”
젠은 남 일처럼 물었다. 표면적으로 젠과 칼리번은 모르는 사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판국에 8년 전에 실종된 알파를 누가 기억하랴?
“네? 저희는 젠 대장님께서 보내 주신 알파인 줄 알았습니다만…. 아닙니까?”
놀랍게도 작업반장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묻어나 있었다. 순간 젠은 심장이 철렁했다.
“어, 어어…. 맞다! 내가 보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차 싶은 젠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끝을 흐렸다.
‘에레즈 녀석이 파견했나 싶었는데, 설마 나를 팔아먹은 거였냐?’
젠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으음, 그래서 어때? 저 녀석 일은 제법 하나? 내가 직접 꽂은 녀석인데 민폐를 끼치고 있을까 은근히 신경 쓰여서 말이야.”
“아, 역시 그러셨군요.”
젠은 일부러 질문을 해서 작업반장이 대답하도록 했다.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젠 단장님께서 보내시긴 했으나 따로 언질을 주신 바는 없어 긴가민가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태도가 진지하기도 했고…. 아시다시피 이 구역은 일꾼 대부분이 여자이지 않습니까? 저희로서는 힘을 쓸 줄 아는 알파가 있어서 나쁠 건 없지요.”
어느덧 두 사람의 고개는 덩치 큰 사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알파는 알파지 않습니까? 지금은 저희 구역으로 와 줘서 고마울 정도입니다. 혼자 여자 스무 명분의 몫을 하는지라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작업반장은 장터에서 새로 들어온 품질 좋은 황소를 말하듯 평했다.
“그, 그래…? 그것참 잘된 일이네.”
외양간에 있어야 할 자신의 황소가 어느 틈엔가 시장으로 기어 나와 여기저기서 칭찬받고 있는 모습에 젠은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확실히 인간들만 맡은 구역과 신용병 연합에서 맡은 구역은 진척도부터 다르기는 하지.’
칼리번이 앞에서 오락가락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한 한편, 눈에 확연한 인간과 알파 간의 차이에 골치가 아파지기도 했다.
성문 세 곳이 마물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기형 알파로 다시 성벽이 세워졌을 무렵, 알파가 잠시나마 인간을 도와주는 척하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붉은 오메가의 지침이었던 것일까? 의식이 끝난 지금, 신용병 연합은 예전의 태도로 돌아왔다.
데릴만이라는 압도적인 우두머리가 죽은 이후, 그 자리를 물려받은 오드론은 에레즈와의 협상에 있어 대장의 대리인이었을 때만큼이나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새로운 우두머리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래도 알파와 함께 작업을 하다 보면 그쪽에서 저희를 얕보는 경향이 있지 말입니다. 그런데 저 알파는 할 일만 하고 바로 떠나더군요.”
“어….”
젠이 귀 기울여 듣고 있다고 여겼는지 작업반장은 계속해서 칼리번에 대한 평가를 이어 갔다.
“아무리 물어도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던데, 확실히 다른 알파들과는 다르다고 할까요.”
“…그래?”
그야 당연히 다르겠지…. 알파가 아니라 오메가니까. 젠은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간신히 억눌렀다.
“네. 심지어는 식사 시간에도 자리를 뜬다고 하더군요. 따로 요구하는 바는 없고 일은 묵묵히 몇 배는 해 주고…. 그러다 보니 고맙게 생각하는 작업자들이 많습니다. 역시 단장님께서 보내 주신 알파라 다른 것 같습니다.”
때마침 칼리번은 대여섯 명이 힘겹게 옮기던 석재를 자진해서 받아 들고 있었다. 작업반장의 눈에서 짙은 감명이 묻어났다.
“하…하하! 그래. 다른 알파와 달리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니 거참 다행이다. 직접 고른 녀석을 보낸 보람이 있구먼그래!”
젠은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를 썼지만, 목과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아오르는 건 차마 숨기지 못했다.
* * *
왕성의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칼리번 또한 황금의 비를 맞고 되살아났다. 그러나 칼리번의 존재는 알파와 인간 모두에게 위협적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왕의 숙소 뒤편, ‘창고’라는 이름이 붙은 막사에 숨어 지내야 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왜냐면 그는 며칠 동안 내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몸을 추스른 칼리번은 문제를 일으켰다. 젠과 에레즈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왕성 재건 작업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섞인 칼리번을 오늘에서야 처음 본 젠은 그야말로 입 밖으로 심장을 토할 뻔했다. 그러나 낮에는 보는 눈이 많았고, 그녀도 일이 밀렸던 터라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따질 수 있었다.
“칼리번!”
젠은 막사의 천막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쳤다. 늦은 밤이었으나 칼리번은 그녀가 올 줄 알고 있었는지 여전히 깨어 있었다.
“너 미쳤어?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뭔 짓을 하는 거냐?!”
“…….”
“대답해!”
칼리번과 마주치고 꽤 시간이 지났으나 그녀의 분노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몇 배는 더 불어난 것 같았다.
“몸이 멀쩡한데 혼자서만 놀고 있을 수는 없다.”
칼리번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놀라울 정도로 칼리번다운 답변이었다. 젠은 ‘녀석…. 정말 내가 알던 칼리번이 맞구나.’ 하고 잠시 여운에 젖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야! 누가 놀라고 숨겨 둔 줄 알아?! 넌 오메가잖아! 검은 오메가! 이러다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 그래! 사람 많은 데서 들키면 에레즈도 널 못 지켜 줘, 이 돌대가리야!”
젠은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봐주는 게 아니었다. 저 몸은 워낙 튼튼해서, 이쪽 주먹만 아프기 때문이었다.
“내 정체를 아는 알파나 인간은 거의 없다고 젠이 알려 주지 않았나. 데릴만은 죽었고….”
“거의 없다고 했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 건 아니잖아!”
젠은 칼리번이 있는 곳으로 척척 걸어갔다. 왕성 복원 작업을 하며 쓸 만한 물건은 이곳에 전부 옮겨 둔 터라, 주변에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 누군가 우연히 이곳에 들어왔을 때 ‘창고’로 보여야 했기에 더욱 부산스러운 감이 있었다. 칼리번의 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구석에 둔 베개와 이불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일부러 인간들이 작업하는 구역으로 갔다.”
“오, 제법 머리를 쓴……다고 칭찬이라도 해 줄 줄 알았냐?!”
참다못한 젠은 결국 제 어깨를 칼리번의 가슴에 퍽 부딪쳤다. 물론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체를 아는 사람이 적다고 해도 넌 오메가라고! 근처를 지나가던 알파가 네 냄새를 맡고 돌아 버리면 어쩌려고?!”
목 아래로 핏줄이 설 정도로 성질이 난 젠은 칼리번의 턱이라도 들이받을 기세였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라.”
칼리번은 고개를 숙여 젠과 마주 보았다.
“걱정을 안 하게 생겼냐?!”
젠이 성을 내며 잔소리를 더 하려 할 때였다.
“알파들은, 음…. 그러니까 용병들은, 절대로 날 건들지 못할 거다.”
뜻밖에도 칼리번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인 소리를 했다.
“…뭐라고?”
막사에 들어온 순간부터 화만 내던 젠은 순간 벙 찌고 말았다.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협의가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무작정 괜찮을 거라니.
“…….”
그런데 어째서일까, 젠은 밀랍이라도 바른 것처럼 입이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몸도 땅에 붙박인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뭐지? 왜 몸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거야.’
젠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 현상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녀 또한 알파이기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칼리번에게 있었다. 당황한 그녀와 달리 칼리번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새벽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이제 막 일을 끝낸 사람처럼 셔츠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렇다면 오메가의 향기가 짙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칼리번에게서는 마물의 피나 똥 냄새는 물론, 옅은 체취조차 나지 않았다. 마치 아주 오래전, 용병일 적의 칼리번처럼 말이다.
“윽…. 너, 설마…. 내가 모르는 요상한 힘을 쓰는 건 아니겠지?”
젠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간신히 입을 뗐다. 칼리번은 대답 대신 한 걸음 물러났다. 칼리번과 시선이 틀어지자 비로소 젠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젠은 괜히 숨을 크게 헐떡였다.
“8년 전과는 다르다.”
“헉, 허억…. 뭐?”
“나는 이제 내 몸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걱정하지 마라. 칼리번은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말도 안 돼….”
8년 전, 그리고 수십 년 전, 젠은 오메가의 체취를 숨기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사서 했다. 그런데 칼리번은 ‘이제는 괜찮다’라는 말 한마디로 오메가의 고질적인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한 것이다.
“정말이다.”
젠을 바라보는 검은 눈은 빈틈 없이 고요했다.
“윽….”
오메가의 약점을 숨길 수 있게 됐다니 다행인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젠은 안도는커녕 바짝 긴장한 채였다. 목숨으로 장사를 하는 용병에게 있어 직감이란 무시 못 할 무기였다.
도대체 이 불안감을 무엇이란 말인가?
8년 만에 원래의 몸으로 마주한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몸이었을 때보다도 멀게만 느껴졌다.
* * *
칼리번이 오메가의 향기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잘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젠은 언짢았다. 그 옛날 에어리얼 때도 그렇고, 비교적 최근인 칼리번 때도 오메가의 향기를 감추지 못해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칼리번의 변화가 괜스레 마음에 걸린다면 그것은 경험 많은 알파의 직감일까, 아니면 늙은 알파가 공연히 느끼는 박탈감에 불과할까?
그러나 오메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된 이상, 젠은 칼리번에게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자.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에레즈가 허락은 해? 아니, 알고는 있어?>
그래서 그녀는 칼리번이 신경 쓸 만한 존재를 들먹여 보였다.
<…….>
칼리번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젠은 그 몸짓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설마 에레즈 녀석이 모르는 건 아니겠지? 칼리번이 눈을 뜨기 전까지 뻔질나게 창고를 오갔으니 당연히 얘기는 해 봤을 것 같은데…. 내가 한번 말을 꺼내 봐?’
젠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젠장…. 에레즈 앞에서 ‘칼’ 자만 꺼내도 칼리번 찬가를 100번 듣게 될 텐데…. 이거 곤란한걸.’
젠으로서는 이 문제에 섣부르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칼리번과 에레즈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용병대 부대장일 때, 그리고 왕실 재건 기사단 호위 부대의 단장일 때, 칼리번과 에레즈를 각각 따로 경험한 탓이다.
에레즈에게 있어 칼리번이란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이다 못해 열렬한 구애 대상이었다. 젠은 그런 에레즈를 가볍게 놀리며 돈을 갈취하기도 했다. 왜냐면 칼리번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어린 에레즈라면 그를 우상화하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 있어 에레즈는…?
‘처음에는 감히 용병에게 꽃을 준 원수였지, 아마.’
젠은 칼리번이 에레즈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용병 숙소 주변 나무를 초토화시켰던 시절을 떠올렸다.
‘피의 날 이후 다시 만났을 때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을 다하더니….’
이즈음에서 젠은 머리가 아파 왔다. 왕성에 잠들어 있는 칼리번이 에어리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가까스로 재회한 진짜 칼리번은 어딘지 변해 있었다. 물론 겉모습은 에어리얼의 모습이기는 했다. 그러나 젠이 말하고 싶은 것은 외관이 아니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너도 알 거다, 젠. 너는 왕자님보다도, 나보다도 훨씬 경험이 많은 용병이다. 너라면 왕자님께서 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충분히 말릴 수 있었을 거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보다도 왕성에 홀로 남은 왕자를 걱정하는 모습은, 그동안 젠이 알던 무감정하고 멍청한 용병이 아니었다. 그의 변화에 아쉬움보다도 놀라움이 컸다.
거기다….
‘검은 갑옷 녀석까지 더해 보자면….’
젠은 사고하기를 그만뒀다.
‘제기랄, 더 이상은 이 문제에 다가가고 싶지 않다. 나, 나는, 씨발, 아무것도 모른다….’
복잡하다, 복잡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젠은 칼리번을 12살 때부터 데리고 다녔다. 또한 성년이기는 하나 약해 빠진 에레즈를 거의 처음부터 키우지 않았던가? 칼리번과 관련되기만 하면 말을 더듬거리는 에레즈를 자주 놀리기는 했으나 설마 진짜로, 그 둘이서… 끝내주는 뽀뽀 이상의 무언가를…….
했을 줄은…….
“단장님?”
“…아. 잠깐 딴 데 신경을 썼네. 미안하다.”
작업반장의 부름에 젠은 제 이마를 손으로 가볍게 후려쳤다. 정신 차려야지.
“그 알파는 일 잘하고 있냐? 농땡이 치지는 않고?”
젠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작업반장에게 칼리번의 근황을 물었다. 혹시 모를 사건을 대비해 그녀는 칼리번이 일하는 구역에 좀 더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아, 예에! 그 알파야 오늘도 소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해당 구역을 담당하는 작업반장은 나날이 피곤해졌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오늘은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보다, 단장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젠을 보면 얼굴에 ‘또 왔냐’라는 글씨가 표정에서 읽힐 정도였는데, 평소보다 훨씬 흥분한 것이다.
“전하께서 이곳으로 감찰을 오신 것 같습니다!”
작업반장이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뭐? 왕께서?”
설마 칼리번을 보러 온 건가? 젠은 이 녀석들이 이렇게나 공과 사를 구별 못 하나 싶었다.
“저, 저희 구역이 인간들이 맡은 곳 중에서는 가장 작업 진척이 빠르지 않습니까? 그 점을 보고하면 전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흠, 흐음! 하, 한번 해 본 말입니다!”
작업반장이 넌지시 제안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왕의 오른팔인 젠이 자신의 업적을 알려 주길 바라는 마음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아! 그야 당연히 좋아하겠지. 이참에 한번 입 좀 시원하게 털어 볼까?”
위대한 용병이자 기사이자 성녀인 젠이 거들먹거렸다. 앞으로도 칼리번 일로 신세를 자주 질 것 같으니, 한 번쯤은 고생하는 작업반장을 추켜세워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아…. 아하하! 역시 단장님이십니다! 전하께서 어디쯤 오셨는지는 이미 전달받았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가시죠!”
작업반장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어디서 힘이 솟는지 무려 알파인 젠을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젠이 작업반장과 칼리번이 일하는 구역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 에레즈는 새로 조성된 길목을 걷고 있었다. 그는 서너 명의 성녀들과 함께였다. 정화 작업 중인 구역을 성녀단과 함께 살피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성녀는 모두 같은 의복을 걸치기에 눈에 띄는 특징이 없으면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보이곤 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이 보기에도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왕의 바로 곁에 있었다.
‘이런, 태후 전하시잖아.’
에레즈에게 아는 척을 하려던 젠은 걸음을 멈췄다. 작업반장은 에레즈가 이대로 그녀가 맡은 구역을 지나가 버릴까 초조해했지만, 젠은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탑 위의 왕비님. 예배당에서 백성들과 함께 몰살당한 베이가 또한 황금의 비를 맞았다. 명망 높은 성녀님들이 ‘피의 날’에 한꺼번에 살해당한 지금, 그녀는 에레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에레즈에게 말을 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성녀단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에게 다가가는 일에는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젠 답지 않게 태도의 차이가 생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진 그녀였지만, 어릴 적부터 활동해 온 성녀단을 근본적인 정체성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으아, 알겠어! 알겠다니까! 가만히 좀…. 전하!”
망설이던 젠이 작업반장의 성화에 못 이겨 에레즈에게 다가가려던 차였다.
“피, 피하십시오!”
무너진 건물 위에서 작업 중이던 인부들이 갑자기 외쳤다. 그들은 건축물에 들러붙은 채로 석화된 마물을 제거하던 중이었다. 하필이면 에레즈가 지나가는 순간, 마물의 시체와 건축물의 잔해가 함께 무너져 내린 것이다.
“—!”
에레즈와 태후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젠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달렸으나 주변에 작업반장을 비롯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하나하나 헤치며 나아가니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위험해!”
에레즈는 곧바로 태후와 성녀들을 감쌌다. 베이가와 성녀들은 에레즈보다 체격이 가냘파 그의 품에 가려졌지만, 문제는 에레즈 자신이었다.
‘젠장, 에레즈 녀석은 약해졌는데…!’
알파가 이 정도 일로 죽지는 않겠지만, 에레즈라면 또 모를 일이었다. 젠은 전신의 근육을 부풀리며 날다시피 뛰어갔다. 그러나….
쿠웅!
마물의 시체는 해일처럼 에레즈와 성녀들을 덮쳤다. 누가 어찌할 틈도 없이 주변에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이, 이럴 수가…! 전하!”
“태, 태후 전하!”
“전하, 무사하십니까?!”
“누구라도 좋으니 어서 이리 와서 마물의 시체를 치워!”
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때마침 인간들의 작업 구역을 지나가던 알파들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 인간들이 다치든 말든 콧방귀를 뀌던 알파들조차 그 순간은 당황했는지, 서둘러 마물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저… 전하께서는 무사하시냐!”
“다들 뭣들 하는 거야! 하던 일을 중단하고 당장 전하와 태후 전하를 꺼내도록 해라!”
젠과 작업반장이 달려오며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굳어 있던 사람들도 알파와 힘을 합쳐 마물의 시체를 거둬 냈다. 마물의 시체는 마물 모양의 조각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이 땅에 부딪히며 그 충격으로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그 탓에 주변에 흙먼지가 자욱했다.
간신히 들어 올린 마물의 시체 아래에서, 사람들의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넓고 단단한 등이었다. 물론 에레즈 프리드웬도 그처럼 너른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팔근육이 훨씬 발달하였으며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짙었다.
‘으악, 칼리번!’
젠은 이번에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번만은 감사의 의미였다!
“후우….”
칼리번은 두 팔로 마물의 시체를 지지한 채, 모래 연기를 길게 뱉어 내고 있었다. 그가 온몸으로 막아 준 덕에 마물의 시체와 땅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그 덕분에 에레즈와 베이가, 그리고 성녀들은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렸을 뿐 모두 무사했다.
알파와 인간들이 마물의 시체 아래에 갇힌 성녀들을 빼내는 동안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우직하게 버텼다. 두 팔의 근육은 팽팽하게 부풀었고 상의에 가려진 등 또한 그림자가 두드러졌다.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알파들과 힘을 모아 마물의 시체를 빈 길목에 굴렸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칼리번이 이고 있던 마물의 시체가 땅에 떨어졌다.
두 사람에게 아무런 상처가 없음을 확인한 칼리번은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냈다. 흙먼지가 하얀 탓에 얼굴이고 몸이고 얼룩덜룩했다. 한편, 에레즈는 태후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무려 왕의 목숨을 구한 알파라니! 사람들도, 알파들도 이 정체 모를 까무잡잡한 사내와 하얀 왕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궁금해했다.
‘모르는 척해! 모르는 척해! 서로 모르는 척해!’
젠은 표정으로 마음을 전하고 있었으나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 칼리번에게도, 에레즈에게도 닿지 않았다.
“무사하십니까, 전하.”
그러나 다행히도, 정말이지, 천만다행히도 칼리번은 평범한 알파 용병처럼 굴었다. 에레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한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람들 앞에서 너희가 아는 사이라는 걸 알릴 필요는 없지!’
젠은 칼리번이 극히 드물게도 눈치라는 것을 갖춘 것에 절로 감탄했다.
“…….”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왕으로서, 위급한 상황에 몸을 내던진 알파의 용기를 칭찬해야 마땅했다.
“…….”
그런데 어째서인지, 한참이 지나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구경꾼들도 점차 이상함을 느꼈다.
‘왜 전하께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지?’
‘혹시 마물의 파편에 어디가 부딪치셨나?’
에레즈가 몇 마디만 치하하면 금방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덩치 큰 알파와 왕 사이에 침묵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겉으로 보기에 에레즈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제기랄, 이거 큰일 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랜 시간 에레즈를 가르쳤던 젠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지금…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전하와 성녀들을 위험에서 구해 줘서 고맙구나.”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보답은 전하와 논의하여 차후 내릴 것이니 그대는 이만 자리를 떠나도 좋다. …그렇지요, 전하?”
태후가 젠이 느낀 것과 같은 낭패감을 느꼈는지는 모를 일이나, 칼리번에게 먼저 말을 걸어 상황을 원만하게 마무리 지은 것이다. 베이가는 말꼬리를 에레즈에게 돌렸고 에레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태후 전하.”
태후의 허락을 받은 칼리번은 그제야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역시 전하께서는 알파를 멀리하시군.’
‘하긴, 붉은 오메가에게 충성했다는 알파가 뻔뻔하게 왕성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알파에게 도움을 받은 것을 불편해한다고 여겼다.
‘역시 입만 산 인간 나부랭이들과는 다르다니까.’
‘결국 중요한 일은 알파가 다 처리한단 말이지.’
한편, 알파들은 칼리번의 임기응변을 자신들이 해낸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 자! 다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여기는 성녀들에게 맡기고 어서 마저 일하자고!”
이제는 젠이 나서야 할 때였다. 그녀는 큰소리로 주변을 환기시켰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심심한 마무리였기에 사람들은 금세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작업반장만이 상황이 상황인지라 눈물을 삼킬 뿐.
에레즈 일행이 떠나고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느라 부산스럽게 웅성대는 사이, 칼리번의 모습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뭔가 이상해….’
젠의 시선은 칼리번과 에레즈가 있었던 장소에 한참을 박혀 있었다.
* * *
솔직히 고백하자면, 젠은 더는 보모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다. 에레즈는 ‘스승님’이라고 간지럽게 부르지만, 허울 좋은 호칭일 뿐이다. 하나하나 따지고, 캐묻고, 뭘 어떻게 했는지 확인하고, 엉덩이를 걷어차 가며 가르치는 일은 이제 질색이다.
더구나 이다음으로는 젠이 손대기 힘든 영역이었다. 한 알파와 한 오메가 간의 사연이었다. 8년의 세월은 길다. 특히나 마물 혼혈에게는 더욱. 알파 한 마리가 핏덩이에서 성인이 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칼리번은 그녀가 알던 돌대가리가 아니었다. 여전히 멍청하고 목석같지만 어딘가가 변했다. 그의 옆자리는 더는 젠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이제는 에레즈 프리드웬의 자리다.
…하지만 둘이서 손만 잡고 잠드는 것보다도 못한 상황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
갑작스럽게 겪은 사고 외에도 여러 일로 다들 정신이 없었으나, 젠은 에레즈를 따로 불러냈다.
“오늘 겪으신 불우한 사고와 관련된 보고인지라, 따로 전달드리고 싶습니다.”
베이가가 있을 때는 어지간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젠이었으나, 오늘만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알겠다. 함께 나가도록 하지.”
에레즈는 태후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젠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에레즈를 뒤따라갔다.
“이봐, 에레즈.”
“…….”
마침내 단둘이 있게 되자, 두 사람의 관계는 정반대가 되었다. 에레즈는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위엄이 무색하게 어딘지 움츠러들어 있었다.
“너 혹시, 칼리번이 밖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 몰랐어?”
“…….”
“그래서 당황했던 거라면, 미리 말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어. 그건 사과하마. 그런데 말이야….”
젠은 제 턱을 쓸어내리며 어영부영 사과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젠이 던진 가정이 맞다면, 에레즈는 화를 내거나 하소연을 했어야 정상이다. 어떻게 칼리번을 일하게 내버려 둘 수 있느냐, 혹은,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았냐, 등등. 그러나 에레즈는 이상할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기껏 8년 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된 게 남보다도 데면데면해?”
젠은 툭 하니 던졌다. 그러자 에레즈의 등이 움찔 떨렸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해 봐라.”
모른 척이라도 하게. 젠으로서는 에레즈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 8년간 그녀만큼이나 칼리번 신봉자에게 시달린 사람은 또 없었으니 당연했다. 차라리 칼리번이 낮에 밖을 활보하는 모습에 놀라서 목소리를 잃은 것이라면 이해라도 하겠다. 근데 남들이랑 있을 때는 잘만 말하고 있잖아?
그런데 정작 칼리번과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다니? 심지어 그때의 칼리번은 알파인 척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오히려 에레즈가 그를 피했다!
“붉은 오메가에게 조종당하고 나니 이제는 칼리번을 보기만 해도 무서운 거냐? 이렇게까지 겁쟁이일 줄은 몰랐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그렇게 처음 보는 것처럼 구는….”
에레즈가 대답은커녕 꼼짝도 하지 않자 젠은 버릇처럼 주절거렸다. 그러던 중 그녀의 시선이 문득 에레즈의 귀를 향했다. 그곳이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귓등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으니까.
‘설마….’
불길하고도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젠은 다짜고짜 에레즈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스, 스승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가는 한바탕 운 사람처럼 불긋했으며, 흰자위는 살짝 충혈되어 있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달아올랐냐 하면…. 젠은 지난 8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벅차올라서 숨을 쉬기가 버겁기 때문이었다.
“그, 그, 그러니까…! …흡!”
에레즈는 말을 내뱉고는, 버릇처럼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시, 실제로, 카, 칼을 보니까……. 무, 무… 무슨 말부터, 해, 해야…. 해야 할지…. 아아…. 부, 부끄러워서….”
“…….”
“도, 도무지, 마, 말이… 입이, 떨어지질….”
세상에. 젠은 골이 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