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시작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칼리번은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짐승의 내장과 오물이 담긴 들통 속에서 태어났다. 아니, 태어나자마자 그곳에 버려졌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아니면 두려웠는지, 칼리번을 버린 여인은 아이의 배꼽에 붙은 탯줄조차 끊지 않고 도망쳤다. 아기의 이마에 세 방울의 세례를 남긴 채로….
갓난아기는 아직 눈도 뜨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린 존재를 미처 보지 못했다. 몸을 감싸는 뜨끈한 핏물과 뭉클한 내장의 감각만이 선명했다. 늪에 빠진 새처럼, 그는 오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칼리번은 울음을 터뜨려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릴 수도 있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생명체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피로 가득 찬 들통에 잠겨 바로 죽는 것과 살아남아 세상 모든 고뇌와 고통을 겪은 후 죽는 것. 이 둘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칼리번은 아직 삶을 시작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된 폭력과 용서, 그 틈을 메워 주는 사랑이라는 기만. 회귀와 다를 바 없는 대물림 끝에 생을 향한 환멸이 피에 새겨지고 말았다.
더구나 이제는 해야 할 일마저 모두 마친 후였다. 그렇기에 그는 침묵을 지킨 채 가라앉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어째서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나요?’
아무런 쓸모도 없고, 곁에 둬 봤자 거치적거릴 뿐이고, 방해만 되는 나를….
이 세상에는 몇 번이고 반복된 물음이 있다. 먼 옛날 에레즈가 그렇게 물었을 때, 칼리번은 꽃을 대가로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었다. 다시금 에레즈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그는….
그러고 보니 칼리번은 미처 묻지 못했다. 어째서 양부모님은 자신을 살렸는지, 마물의 혼혈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않았는지. 수많은 이들이 갈등을 겪고, 헤어지고, 죽고, 배신당하는 세상에서 어째서 당신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선택하고 울타리 안에 넣어 주었는지.
어째서 이제 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일까….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칼리번은 양부모가 죽은 후로 한 번도 그들을 추모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들이 그리워졌다. 비로소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들통에 빠져 죽어 가던 아이가 울자 누군가 달려왔다. 한없이 아래로만 잠기던 그를 누군가가 받쳐 주었다.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하는 무력한 몸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품에 안았다. 눈가에 입을 맞추고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살릴 거야.>
생명을 녹인 물이 칼리번의 몸에 떨어졌다. 황금의 피가 입 안으로 흘러들자 칼리번의 입가에 숨결이 돌아왔다. 조금씩 훼손된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황금은 잃어버렸던 것과 빼앗긴 것들을 대신해 주고, 사라지고 빈 곳은 채워 주었다.
몸 위로 부딪치는 물방울은 온기를 품고 있어, 칼리번은 누군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니 아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이 칼리번의 뺨에 부딪혔다. 물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빗물은 짙은 피부 위로 타닥, 타닥 어딘지 쓸쓸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칼리번은 오랫동안 떠돌던 영혼이 고향으로 귀환했음을 깨달았다. 부상이 끊이질 않았던 몸은 더는 아프지 않았으며 외롭지도 않았다. 어느 곳 하나 부족함 없이 가득 채워져 온전했다.
“…….”
칼리번은 눈을 떴다. 눈앞은 불투명한 막이 낀 듯 흐릿했다. 그러나 여러 번 깜박이자 조금씩 시력이 돌아왔다. 이제 막 먹구름이 걷힌 하늘의 틈으로 빛이 길을 내고 있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금빛 호수에는 따스한 비가 내렸다. 모두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내릴 황금의 비를.
검은 두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리운 이의 모습이었다. 흐릿해진 금빛 머리카락은 호수를 덮고 칼리번의 몸을 가려 주었다. 얼굴은 화상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칼리번에게는 여전히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황금빛이 섞인 푸른 두 눈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으나, 칼리번과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는 급격하게 변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뜨였다. 살짝 일그러지다가, 눈물이 가득 고였다. 미소를 지으려 애를 썼으나 잘되지 않는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감자, 칼리번의 얼굴 위로 눈물 세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우는 모습이 칼리번은 몹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칼리번은 팔을 물 위로 뻗었다. 근육으로 다져진 단단한 팔은 몸을 잃기 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익숙하지 않은 무기를 다루는 것처럼 삐거덕거렸다. 눈물을 닦아 주려던 칼리번은 감히 투박한 손을 대기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칼리번이 말릴 새도 없이 그가 먼저 손을 붙잡고는 뺨을 기대 왔다.
“…….”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으나 어느 쪽도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애당초 칼리번이나 그나 말솜씨에 있어서는 끔찍할 정도로 부족했던 것이다. 빗물로 채워지는 이 순간이 그저 소중했다.
꿈을 꾸었다. 다시 만나는 것인지, 헤어지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멀고도 긴 꿈을….
기나긴 꿈의 끝은 당신의 곁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칼리번의 눈가도 젖어 갔다. 눈물은 호수의 물과 섞여 조용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3부, 나의 오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