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황금의 피
왕성 위로 마계가 열리고 마물이 하강할 때, 가장 먼저 파괴당한 것은 높이 솟은 성과 탑, 그리고 건축물들이었다. 특히나 본성은 반 이상이 무너져 내렸다. 파괴된 장소 중에는 왕비가 감금되었던 탑도 있었다. 창문과 벽이 무너지자 내장을 비추듯 소박하고 황폐한 방 풍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강한 돌풍에 그녀가 끝없이 자아냈던 흰 쐐기풀 천이 밖으로 쏟아졌다.
아무도 그녀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으나 왕비는 형벌을 자진해서 받았다. 손이 부르트도록 밤낮으로 천을 짜내곤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수백 수천 마리가 백조가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세상 밖으로 흩어지는 천은 눈이 부실 정도로 흰 빛깔이었다.
천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걸리고 짓눌렸다. 혹은 부러진 깃발에 걸려 찢겼다. 그렇게 대부분은 본성 밖으로 빠져나가지조차 못했다. 비교적 운이 좋은 것들의 운명도 비슷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바람이 약해지면, 얇은 한 겹의 천으로 만들어진 백조들은 버티지 못하고 광장과 거리 위로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천들은 세진에 쉽게 더럽혀졌다. 날카로운 단면에 찢어진 천은 너덜거렸다. 마물과 마물 혼혈, 인간을 가리지 않은 무수한 시체 위로 덮이기도 했다. 피로 물든 천은 무거워지거나 빳빳해져 바람이 다시 불어도 날지 못했다. 어떤 것들은 앞선 불행들을 피하기도 했으나 결국 날개에 불이 옮겨붙었다. 천은 까맣게 타들어 가 형태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죽은 이들의 눈에 그것들은 마치 날아오르려는 백조와도 같았으나 현실은 얇은 천에 불과했고 왕성에 닥친 비극을 가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한 그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날고자 했다. 불에 그슬려 너덜너덜해져도, 몸이 찢겨 조각이 나도, 오물과 피에 절어 더럽혀질지라도, 심지어는 한 줌의 재가 되어서까지 바람을 타며 왕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절벽 아래, 작은 호수로까지….
* * *
“칼….”
한 사내가 호수를 헤매고 있다. 호수의 표면에는 불과 연기로 뒤덮인 왕성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그러나 두 팔이 허우적거리며 그 광경을 금세 지웠다.
“카, 칼리, 번…….”
그가 찾는 것은 단 하나뿐….
모든 것을 잃고 성검조차 버린 왕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상으로 얼룩진 몸, 비뚤배뚤하게 끊긴 금빛 머리카락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흠뻑 젖기까지 했다.
칼리번과 젠이 의식을 막는 사이, 왕성을 잡아먹은 불은 이곳 숲까지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탁한 연기가 호수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맑은 공기가 아닌, 연기가 폐에 차올랐다.
“…칼, 리번….”
에레즈는 호수를 두리번거리며 한 사람의 이름만을 반복했다. 푸른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불타는 숲도, 자신이 망친 왕성도….
칼리번은— 원래의 그는 커다랗고 강하다. 그러니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작은 조약돌이 빠진 것처럼 그의 모습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이 또한 에어리얼의 술수일까? 칼리번은 따로 숨겨 놓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찾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체계 없이, 그저 급급하게 칼리번을 찾아 헤매던 에레즈는 어느덧 허리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하아, 하아…….”
그때, 어떤 형상이 호수 한가운데에 불룩 솟아올랐다.
“…칼리번!”
에레즈는 급히 달려갔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에레즈의 움직임에 호수에 뜬 그것은 부표처럼 흔들렸다. 허우적거리는 움직임은 없었으나 천천히 에레즈에게로 흘러갔다. 마치 그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듯….
“…하아, 하아…. 칼리번…. 칼리번…!”
에레즈는 칼리번으로 추정되는, 물에 잠긴 형상을 단번에 안아 들었다. 그는 비로소 칼리번을 되찾게 되었다.
“아….”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가벼울까?
“…….”
이번에도 에어리얼이 만든 환각일지도 모른다. 그간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모욕하고 비웃기 위해 칼리번을 닮은 마물을 보내곤 했다. 어린 에레즈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적의 함정에 뛰어들었다가 몇 차례나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가서는 칼리번의 닮은 마물도 아무렇지 않게 베었으나….
“칼….”
숲이 불타면서 발생하는 자욱한 연기가 눈 앞을 가려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칼리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그 탓이다. 분명히, 그 탓….
에레즈는 어린 자신을 안아 주었던 근육질의 팔과, 튼튼한 두 다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칼리번에게는 그것들이 없었다. 몸뚱이밖에 남지 않은 그는 작은 물살도 버티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렸다. 에레즈는 고개를 기울이며 칼리번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고는 숨을 편히 쉴 수 있도록 다른 팔로 그의 목을 받쳐 주었다.
“…?”
눈앞의 광경이 의아하다는 듯, 에레즈의 눈썹이 아래로 쳐졌다. 칼리번의 눈꺼풀은 고요히 감긴 채였는데…. 그 안에 담긴 눈은 누군가 뽑아 갔는지 눈두덩이가 움푹 패어 있었다.
먼 옛날, 에레즈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와 서로 코를 맞댔었다. 그 우뚝 솟은 콧대는 잘려 나가 얼굴 가운데가 밋밋했다. 이래서는 해골과 다를 바가 없는데…. 넋이 나간 에레즈는 경악보다도 거대한 의문에 빠졌으나, 금세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왜냐면 그동안 수많은 병사가 죽는 것을 보았고, 이 정도 상처는……. 충분히 괜찮다고……. 괜찮다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물고기처럼 벌어진 입 안에는 이와 혀가 보이지 않았다. 사냥개처럼 날렵하고 단단하던 두 귀도 살점과 연골은 떨어져 나가고 안쪽으로 뚫린 구멍만이 남은 채였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대부분은 벗겨져 있었고 까마귀의 깃털처럼 뻣뻣하고 까맣던 머리카락은 두피 일부가 벗겨졌을 정도로 밀렸다. 시체나 다를 바 없는 이 고깃덩어리는 칼리번만의 고유한 흔적을 모두 제거해 놓았다. 아무리 잔혹한 광경에 익숙한 에레즈라 할지라도 두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
아무래도…. 아니, 역시나 이번에도, 붉은 오메가가 수를 쓴 것 같다. 에레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악독한 붉은 오메가가… 자신에게 마지막 복수를 하려는 거다.
“…….”
어서… 칼리번을 찾으러 가야 해. 가야 하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지? 알테르 프리드웬도, 붉은 오메가도 모두 죽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칼리번을 찾아야 하지?
푸른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에레즈는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다. 아니, 너무 늦게 깨달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재가 되었다. 더는 갈 곳이 없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것이 탈피를 거듭하며 생존만을 반복하던 괴물의 말로였다.
“…….”
그러니까…. 에레즈는 칼리번을 닮은 시체를 끌어안고는 지난 8년간, 몇 번이고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칼리번은… 젠보다도 강한 용병이니까. 데릴만과 그의 부하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무력을 확인해 보았는데…. 제아무리 강하다고 소문난 용병을 보아도 칼리번보다는 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당신은 에어리얼과 알테르로부터 도망쳐서, 어딘가에 홀로 숨어 있을지도 몰라. 나를 기다리면서….
이런 비참한 몰골로, 이토록 쉽게 죽었을 리가 없다.
…분명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에레즈는 칼리번을 닮은 시체에게 보란 듯이 물었다.
“…….”
에레즈의 입술이 떨렸다. 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에 눈물이 맺혔다. 눈물은 피부가 벗겨진 뺨 위로 떨어졌다.
안 돼. 소금기가 어린 눈물은 그에게 따가울 텐데….
에레즈는 늘어 가기 시작하는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칼…….”
에레즈는 이를 악문 채로 흐느꼈다. 에어리얼이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가짜를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릴 리가 없었다.
붉은 오메가가 칼리번을 멀쩡히 살려 둘 리가 없었다. 포로를 멀쩡히 살려 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젠은 차라리 칼리번이 죽었다고 여기라 했다. 어느 시대건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는 죽고 여자는 범해졌다고. 칼리번은 오메가이니, 후자의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후, 후후.”
눈물을 떨구던 에레즈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하…….”
어째서인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이가 이런 꼴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인간이 아니라 마물의 피가 섞여 그런 모양이다.
“하하하, 하, 하하하…!”
에레즈의 어깨가 떨릴 때마다 봉선화가 터지듯 눈물이 떨어지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눈물은 잘게 떠는 호수 위로 작고 일그러진 동심원을 그렸다.
눈앞의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레즈는 에어리얼의 함정에 걸리고 만 것이다. 지하 감옥에서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칼리번을 진짜 칼리번이라고 믿은 것이다. 믿고 싶었던 것이다. 너무나 쉽게 그를 되찾고 싶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이렇게, 자신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칼리번을 품에 안고 한없이, 한없이 후회할 뿐인 결말….
도리어 미래를 바꾼 것은 칼리번이었다. 에어리얼의 계획대로라면 자신은 모든 것을 파괴한 후에야 눈을 떴을 것이다. 그는 어리석은 자신을 일깨워 주었다.
“당신은, 항상…….”
나를 지켜 줘. 에레즈는 목소리가 잠겨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정작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는데….
칼리번은 강함은 커다란 몸과 근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대가가 없었다. 그래서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끌리면서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에레즈는 왕자였지만, 정작 피난민보다도 메마르고 가난한 자였다. 형제의 손에 매번 죽음을 맞이하는 그를 구해 주는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게는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었으므로. 세상에 구호를 베푼다는 성녀님조차도 그가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어째서… 나 같은 것한테…….”
에레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가 이토록 슬퍼하는 것은, 칼리번이라는 용병이 자신을 위해 희생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희생이 헛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8년 전, 에레즈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붉은 오메가가 그들을 쫓는 것은 칼리번이 아니라 자신을 잡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테르 프리드웬이 자신을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 붉은 오메가를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에레즈는 젠에게조차 사실대로 고백하지 못했다.
알파는 오메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것은 그리 달콤한 의미가 아니다. 교미와 번식만 충족된다면 그 몸뚱이의 목적은 완료한 것이니 더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능밖에 없다며 손가락질하는 마물도 당연하게 하는 일조차….
“…나는….”
하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자신은 마물보다도 추악한 존재였다.
칼리번의 손에 기절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숲에서는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후였다. 칼리번이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가장 늦게 깨달았다.
“…….”
함께 숲에 떨어졌을 때, 자신에 대해 전부 말했다면 좋았을까? 나는 당신이 지켜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윽…….”
하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당신의 곁에 있을 때면, 나는 마치 사람의 아이가 된 것 같았어. 생전 처음 받아 본 손길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머리만 가리면 완벽히 도망쳤다고 믿는 미련한 짐승처럼, 가혹한 현실을 외면한 채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괴물의 본능은 칼리번의 짝이 되고 싶어 했지만, 가슴 속 무언가는 그만큼이나 간절히 그의 아이가 되길 바랐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고, 자신을 꼭 끌어안아 줬으면 좋겠고… 걸을 때는 손을 잡고 걷고, 잘 때는 그의 품 안에서 잠들고…….
“이런 모습으로 만나길 바랐던 게 아니야……. 눈조차 뜨지 못하는, 손조차 쥘 수 없는…. 이런…. 이런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았어…….”
에레즈는 칼리번의 뺨을, 그에게 얼마 남지 않은 피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다시는 아이처럼 매달리지 않을게…. 울지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나에게 기회를 줘.”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만큼 돌려줄 수 있는 기회를….
차갑다. 단순히 물에 젖어서가 아니었다. 모든 온기를 잃어버린 몸은, 아무리 에레즈가 열기를 전하려 해도 그저 호수로 흘려보낼 뿐이다.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정말이야…. 이제는 내가, 당신을 지켜 줄 수 있는데, 어째서…!”
재회하게 된다면— 지난 8년간 에레즈는 고심했고, 칼리번에게 해 주고 싶은 목록이 터무니없이 쌓이고 말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자신 주체에 감히 기사의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마땅히 예우를 받아야 했으므로.
아…. 그랬다. 진실로 그러했다. 에레즈는 왕국 제일의 용병이자 기사이자 전사인 그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손가락마다 흘러넘치도록 반지를 끼우고, 목걸이를 턱을 가릴 만치 겹겹이 씌우고, 왕실의 보관이 남아 있다면 자신 대신 그의 머리에 올리고…. 그로 인해 백성의 고혈을 짜는 폭군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그러나 칼리번은 이번에도 그다웠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만큼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약속…했잖아! 살아 있으면, 죽지 않겠다고……!”
에레즈는 참지 못하고 칼리번에게 아이처럼 매달리고 말았다. 칼리번이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그간의 결심이 무색해졌다.
“다… 당신을 잃고서야 나는 비로소 죽고 싶어졌어. 형님께서 날 죽일 때도,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해도, 나는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칼리번을 지켜 주고, 그의 손을 잡고 이끌고, 그를 품에 안아 편히 쉬게 하고 싶었는데….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를… 내 안의 마물과 인간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었어.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게 편할 정도로 괴로웠어……. 하지만 어딘가에 당신이 살아 있을 테니까…. 당신이 나보다 더 괴로울 테니까 죽지 않았던 거야.”
에레즈는 간절히 고백했으나, 칼리번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
에레즈의 품 안에 안긴 칼리번은,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딘지 고요하다. 심지어 평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윽…….”
자신을 이 세상에 홀로 남겨 두고 평화롭다니….
에레즈는 이를 악물었다. 잔인하다. 참으로 잔인하다. 붉은 오메가도, 알테르 프리드웬도 이토록 잔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멋대로 죽어 버린 칼리번보다는….
시체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전해지지 않고, 무엇을 주어도 의미가 없다. 칼리번의 시체를 안고 무너진 성으로 들어가 그의 몸을 비단으로 가리고, 보석으로 치장해도…. 기뻐할 당신은 이미 육체를 떠났다.
“미안해, 너무 늦어서, 미안해…….”
에레즈는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사과였다. 남은 자는 그저 모든 것이 미안할 뿐이다. 잠든 이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잘못이라면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
에레즈의 눈물은 칼리번의 지친 몸 위로 떨어졌다. 붉은 오메가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두 가지 방법으로 이용하기 위해 세뇌시켰다. 마물과 인간을 죽이기 위해, 그리고 빼앗은 칼리번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진심 어린 고백이, 상대를 향한 간절함이, 심장을 녹여 흘려보내는 눈물이, 죽은 이를 되살리는 기적을.
그러나….
조용한 호수 안, 얕은 파고가 시체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릴 뿐.
“…….”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의 힘은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지, 부활시키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건 탈피하는 자신뿐이다.
에레즈 이전에도 둘도 없는 비극과 비통한 죽음은 널려 있었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 시체가 부활할 수 있다면, 지금쯤 왕성 안의 모든 이들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비겁하고 어리석은 왕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
차라리 에레즈는 이대로 칼리번과 물에 잠기려 했다. 포기하지 말라고, 왕의 본분을 다하라고 칼리번은 자신의 목숨을 불태워 전했지만, 에레즈에게는 더는 살 의미가 없었다.
함께 살아가지 못한다면 적어도 함께 죽자.
에레즈가 칼리번의 몸을 넝쿨처럼 휘감고 영원한 잠에 빠지려 할 때였다. 호수 밑바닥에서부터 그의 곁으로, 부드럽게 솟아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검의 형태를 지녔으나 마치 꽃잎처럼 물 위로 떠 오르는 그것은….
“이게, 어떻게 여기에….”
성검이었다.
에레즈는 자신의 곁으로 흘러오는 성검을 붉어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칼리번을 따라 성검마저 내버리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었다. 절벽 어딘가에 방치돼 있어야 할 검이, 어느새 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검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도착했으나 아직 오지 않은 자, 그대보다 성스럽지 못하나 그대보다 더 성스러운 자를 위한 것….>
그 검은 에드란느 호수 바닥, 가장 낮은 곳에 잠겨 있었다.
<…그대는 성스러움과 폭력이 뒤섞인 혼란한 존재….>
죽음을 각오하고 호수 아래까지 내려갔을 때, 성검은 에레즈에게 힘을 빌려주며 뜻 모를 예언을 남겼었다.
<그대 안에는 언제나 그 둘이 함께하니— 성스러움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지키고, 폭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벌할 것이다.>
그 당시 성검이 말은 전달되었으나 그 목소리만은 마치 먹구름이 낀 것처럼 아이의 것인지, 노인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대는 잇는 자, 전달하는 자이니…. 성검의 주인에게 둘 중 어느 쪽을 물려줄지는 전적으로 그대의 의지에 따를 것이다.>
그런데 귀가 뜨인 사람처럼, 에레즈는 비로소 성검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그대가 물려받은 것처럼….>
그것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내일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영원히 잠든 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아.”
이 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에레즈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둥실 떠오른 성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검은 마물을 베기 위한 검이 아니었던 거야. 칼….”
에레즈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칼리번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 말의 의미… 알겠어?”
에레즈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안개와 연기가 조금은 걷히는 기분이었다.
폭력과 성스러움. 성검의 전언을 들었을 때, 에레즈는 그것이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마물과 인간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폭력을 행하는 마물, 성스러운 인간…. 그래서 에레즈는 검을 앞으로 내밀고 마물을 베어 나갔다. 성검이 자신을 거부하고, 맞닿은 살을 불태우는 이유는 몸 안에 남아 있는 마물의 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마물은 그저 인간을 변화하게 만드는 계기에 불과할 뿐. 폭력과 성스러움, 그 모두가 인간인 것이다.
“칼리번……. 당신은 이렇게 죽어서는 안 돼.”
마침내 답을 찾은 에레즈는 희미하게 웃었다.
“부탁이니 나에게도 기회를 줘. 이런 괴물일지라도…. 당신에게 한 가지 정도는 나눠 줄 수 있을 거야.”
에레즈의 의지가 전해진 것일까? 그의 손에 단단히 잡힌 성검의 형태가 변화했다. 마물을 벨 수 있는 장검이 아닌 단검의 모습으로.
검을 들어 올리자 물이 피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검날의 방향은 적이 아닌 자신을 향했다. 에레즈는 망설임 없이 성검으로 제 가슴을 찔렀다. 순식간에 차가운 칼날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흡사 심장이 얼어붙는 고통에 비명조차 나오지 못했다.
“……윽, 크으…….”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를 악문 턱이 떨리고 검을 쥔 손등 위로 힘줄이 솟아올랐다. 으득, 몸 안쪽의 근육과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한 치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나서야 에레즈는 성검을 뽑아냈다.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백조의 깃털처럼 하얗고 작은 성검은 추락하고 말았다. 에레즈의 피를 머금은 성검은 다시 물 위로 떠 오르지 못하고 호수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다.
꿰뚫린 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흘러내리는 피는 칼리번의 몸 위로, 그리고 호수로 퍼져 갔다. 형제들에게 팔이 잘리고 눈이 꿰뚫렸을 때 에레즈의 피는 붉은색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베어 낸 피는 붉지 않았다.
그 피는… 칼리번을 황금빛으로 적셨다.
* * *
아주 먼 옛날, 한 남매가 있었다.
동생인 소녀에게는 성스러운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힘에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마녀라 경원시하고 박해했다. 오라버니인 사내가 왕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여느 사내가 그랬듯 힘과 권력을 얻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주장대로, 단순히 제 동생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사내에게는 뜻이 있었으나 사람들을 끌어모을 힘은 없었다. 소녀는 오라버니를 위해 제힘을 나눠 아름다운 검을 만들어 주었다. 백조와도 같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검을.
성력이나 성검은 똑같은 힘에 불과했다. 그러나 타인을 치유하는 힘이 검의 형태로 바뀌고 그 검을 남자가 들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첫째를 따르고 그를 왕으로 추앙했다. 그러나 성검은 인간을 처벌하거나 멸하는 힘이 아니었기에 한낱 사내의 손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장식에 불과했다. 결국 사내는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금기를 범하고 말았으며 그 죄가 오늘날까지 이르는 저주를 낳았다. 사내는 오메가에게서 자식을 보았다. 그로 인해 사내의 자손은 그 어느 인간보다 강해졌으나 동시에 다른 세계의 마물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소녀는 오메가와 함께 영원히 잠들기 전, 예언을 남겼다. 오라버니의 힘이 저주라는 사실이 들키면 자신과 자신의 이름처럼 묻혀 사라질 것을 알았기에, 저주는 모두에게 희망이 될 예언으로 둔갑했다.
<프리드웬에게는 황금의 피가 흐르니, 언젠가 왕실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마물을 멸할 것이다.>
사람들은 프리드웬 왕실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녀의 유지를 이은 성녀들은 예언의 이면을 파악하고 있었다. 알파만이 태어나는 프리드웬 가문에서 여자아이가 나온다는 것은, 마물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마물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제 와 프리드웬 왕실을 버릴 수는 없었다. 백성들에게 있어 그들은 황금 피였고, 마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방패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프리드웬 가문의 왕과 왕자들이 본성에 지배되어 사내와 결합을 반복하는 동안, 겉으로는 가짜 왕비를 세워 사람들을 속였다.
마물은 여자를 잡아먹고 남자의 몸을 통해 번식했다. 인간들은 알파를 멀리하고 오메가가 보이는 족족 잡아 죽였다. 성녀들은 왕국 전역에 퍼져 인간들을 구호하고 더불어 마물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와 마물을 밴 여자를 제 손으로 없앴다.
그렇게 서로를 죽였으나 운명의 뱃머리를 틀 수는 없었다. 그늘 속에서 인간과 마물 사이에서는 수많은 변형이 태어났다. 그중에서는 운 좋게 살아남은 여자이자 알파도 있었고, 그것은 예언이 다가오고 있다는 지표가 되어 비밀을 아는 이들을 두렵게 했다.
마물 혼혈들이 가지치기를 당하고 뿌리가 뽑히기도 했으나 프리드웬이라는 식충 나무만은 인간의 비호를 받으며 널리 자랐다. 프리드웬의 후예들은 점점 더 인간을 추구하고, 흉내 내고, 닮아 갔다. 그리고 그만큼 좌절했다.
마침내 그들 중 하나는 마물의 성욕이 아닌 인간의 지배욕이 발현되었고 여자에게 손을 뻗기에 이르렀다. 규율대로라면 알파의 아이를 밴 여인은 동족의 손에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을 수호하면서도 인간을 증오하는 한 왕자가 처형을 방해했다.
그렇게 우연이라는 씨줄과 운명이라는 날줄이 수도 없이 얽혀, 마침내 죽어도 죽지 않는 괴물이 태어나고 말았다. 마물을 베던 칼날을 인간에게로 돌린 왕자는 왕비를 가두고, 그들의 선조가 사용했던 금기를 범해 오메가를 소환하였고, 귀족들을 전부 죽였다. 탑에 갇힌 왕비는 끝없이 천을 자아냈다. 괴물 또한 그때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괴물은 죽지 않았다.
모든 일은 언제나 의도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법이었다. 괴물의 운명을 아는 붉은 오메가 말고도, 우연히 괴물을 사랑하게 된 오메가가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까.
어떤 멍청한 오메가가 있었다. 그는 괴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것을 구했다.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지켜주었다. 평생 길들여지지 않았던 괴물의 발목에 약속이라는 족쇄를 채워 주었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괴물 또한 본능뿐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고 번식만이 중요했다. 그러나 오메가의 사랑은 괴물을 변하게 했다. 인간이 마물로 인해 마물 혼혈로 변해 갔듯이….
괴물은 더 이상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왕비는 평생을 쉼 없이 짜냈으나 아직 천은 완성되지 않았다. 괴물은 대를 이어 내려온 원죄의 날줄과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죄의 씨줄을 넘겨받았다. 황금의 천을 직조할 아름다운 금사와 함께….
이것은 어느 작은 세계를 세로 지르는 역사.
하지만 동시에 모든 세계를 가로지르는 우화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중간자일 뿐 예언의 주인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천을 완성하지 않고 찢는다는 선택지는 있었다. 완성된 천 위로 어떤 미래가 그려질지는 눈에 훤하다. 미래란 결국 과거의 반복일 뿐이니까. 그동안 짜 낸 천을 들고,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판단은 충분히….
교미와 번식을 위해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알파가 남자를 지배해 왔다. 알파를 지배할 수 없는 오메가가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 마물의 폭력 앞에 성녀의 성력이란 얼마나 보잘것없고 연약한가?
알테르 프리드웬의 말이 옳다. 붉은 오메가의 울분에 찬 외침이 이해된다. 하지만 선지자와 혁명가를 전부 쓰러뜨리고, 베어 낸 것은 다름 아닌….
가장 더럽고 야만적인 조상의 후손이자 어머니의 고통과 눈물 속에서 태어나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들을 죽였으며, 그저 본능만으로 살아가던 괴물이었다.
그러니 마계가 아닌 이 세상이야말로 지옥일 것이다.
“…하지만, 칼.”
에레즈는 작게 속삭이며 칼리번에게 몸을 숙였다. 황금의 피는 칼리번의 얼굴 위로 떨어져, 폭력으로 파내어진 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어느샌가 잿빛 호수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살릴 거야.”
에레즈는 잠든 칼리번을 위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성검에 의해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몸은 멋대로 회복하려 들었다. 본능은 탈피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칼리번을 깨우기 위해서는 몸에서 떨어지는 피로도, 호수로도 부족하다. 새하얀 천으로 가리지 못한, 피로 물든 이 세상을 덮어 가리기 위해서는 황금이 더 필요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모두를 살려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그리하여 먼 후일, 수많은 이들이 에레즈 프리드웬을 저주할 것이다. 그는 선지자들이 막고자 했던 운명을, 끔찍한 미래를 멈출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작 한 명을 지키기 위해 모두를 나락에 빠뜨리는 길을 선택했다.
“…….”
칼리번이 깨어나면, 이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이유를 묻겠지. 그때가 오면 에레즈는 그가 해 주었던 말을 돌려줄 작정이었다. 사실은 8년 전, 헤어졌을 때 전하고 싶었던 그 말을….
“…사랑해.”
금빛으로 얼룩진 칼리번의 얼굴 위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 눈물은 한 방울에서 그치지 않았다. 점점 늘어나더니,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던 호수를 적시는 비가 되었다.
“오래전 일이라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알에서 갓 깨어난 새처럼 첫눈에 새겨지고 말았다. 어쩌면 이 감정조차도, 내 안에 새겨진 본능에 불과할지도 몰라 두려웠다. 당신의 육체를 탐하고 그 몸속에 씨를 심는 일만이 최우선인, 그런 본성….
“나는, 당신만을… 사랑해 왔어.”
하지만 아니야. 당신이 그 의미를 다시 가르쳐 주었으니까.
칼날의 방향을 돌려, 그저 생존만을 반복하던 이 외로운 힘을 당신에게로,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로 나눠 주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을 널리 번성하게 만든 이 지독한 악성은 또다시 원치 않는 진실과 정의로부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아닌 알파와 오메가로 나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벌어지고, 달리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책임과 무게를 지게 되겠지.
누군가는 그저 힘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억압하고, 또 누군가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억압당할 것이다. 이 진실을 가리기 위해 이 이야기는 가공되고 오독될 것이다. 완벽한 결말이라며 타인을, 자신을 속일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이 발생하는 불균형. 부조리와 폭력, 차별과 박해…. 겉모습이 몇 번이고 변할지라도, 우리가 인간인 한 이 모든 모순은 사랑이라는 낙인하에 영영 사랑받을 것이다.
* * *
비가 내렸다. 그 비는 무색인 보통의 빗물과 달랐다. 금을 녹인 듯 반짝였으며 또한 따스했다. 황금의 비는 성검의 빛처럼 마물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그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앞선 왕자의 공격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던 마물들은 다시금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문이 되어 주었던 오메가가 죽음으로써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연결은 닫혀 가고 있었다. 날개가 달린 마물들은 두 번째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높이 날아올라 마계로 돌아갔다. 날개가 없는 것들은 몸을 뒤틀며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기 위해 왕성을 빠져나와 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황금의 비는 마물을 쫓아내고 기형 알파로 이루어진 성벽을 무너뜨렸다. 왕성을 집어삼킨 불을 끄고 불길에서 피어난 연기를 가라앉혔다. 비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왕국 전역에 내렸으며, 고인 빗물은 더 낮은 곳으로 흘러내렸다.
마지막까지 사람을 구하려 했던 성녀에게도, 일생이 외로웠던 어느 용병에게도, 나란히 목숨을 잃은 부녀에게도, 죽어서까지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친우에게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비참하게 스러진 시체들 위에도 차별 없이 내렸다. 성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처절하게 싸우다 죽은 알파와 가족과 동지를 버리고 도망친 겁쟁이에게도, 혼란을 틈타 이득을 노리려 했던 기회주의자들의 시체 또한 적셨다.
무구한 아이와 살인자,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던 기사와 강간범, 가장 먼저 목숨을 잃은 노인과 그 시체를 터는 도둑…. 여자와 남자, 알파와 오메가, 인간과 마물의 혼혈…. 황금의 비는 인간의 후예라면 그 누구도 가리지 않았다. 재가 되어 흩어져 버린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공평하게, 어느 한 명 빠지는 일 없이 모두가 황금의 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