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엇갈린 별의 연인들
에레즈의 팔이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성검이 에어리얼의 몸 밖으로 뽑혔다.
“허억, 크으윽…!”
에어리얼은 한 손으로 상처 부위를 가렸으나 숨을 몰아쉴 때마다 피가 쏟아져 나왔다. 성검은 마물의 회복력으로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것이다. 검은 손이 붉은 피로 젖어 갔다.
“어…떻게…….”
에어리얼은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이 도통 믿기지 않는 듯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칼리번’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멍청한 놈! 공격해야 하는 게 어느 쪽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거야?!”
에어리얼은 피를 토해 내면서도 에레즈를 향해 나무랐다. 그는 왕자가 성검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정신이 망가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똑바로 봐, 네 주인이 누구인지!”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목소리로 명령했다. 피를 흘리는 ‘칼리번’의 모습은 에레즈에게 충분히 고통스러운 광경일 것이다. 에어리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에게는 아직 에레즈 프리드웬이 필요했다. 학살을 방관하는 방주이자 ‘칼리번’만을 지키는 방패가.
“…….”
그러나 에어리얼의 예상과 달리, 에레즈는 말없이 성검을 고쳐 쥘 뿐이었다. 한없이 과거로만 침잠하던 푸른 눈은 어찌 된 일인지 총기가 돌아와 있었다.
“설마… 제정신으로 이런 짓을…?”
말도 안 돼. 붉은 눈이 번들거렸다.
“하, 하하…. 하하하!”
에어리얼은 다가오는 에레즈를 피해 힘겹게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헉, 허억…! 이… 모습을… 똑바로 봐, 에레즈 프리드웬! 이게 누구의 몸인 줄 알고 검을 들이대는 거지?”
“…….”
“이, 이건 칼리번의 몸이야. 칼리번! 네가 그렇게 되찾고 싶어 마지않던, 바로 그 녀석의 몸이라고!”
에어리얼은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혀를 놀렸다. 그러나 에레즈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는 착실하게 좁혀져 갔다.
“아둔하기는! 이런다고 저 녀석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아?! 이 몸이 없으면 칼리번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해— 내가 죽으면 칼리번도 죽는다고!”
목이 찢어져라 외치는 소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칼리번의 것이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이를 악물고는 에어리얼에게 달려들었다.
“아하하…, 하아…! 칼리번…. 결국 내 발목을 잡았구나…!”
마지막 순간, 에어리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작고 노쇠한 몸에 갇힌 칼리번은 저 멀리에 쓰러져 있었으나, 그의 의지는 에레즈와 함께하고 있었다.
“우, 으윽…!”
에레즈는 다시 한번 칼리번의 몸에 성검을 찔러 넣었다. 첫 번째 공격을 받고도 버티던 에어리얼은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에레즈는 에어리얼의 몸을 붙잡고는 그의 추락을 끈질기게 따라갔다. 두 사람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알아.”
이 행위로 인해 칼리번과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될 것을. 에레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커, 허억…!”
“당신보다도 절실히.”
후회의 눈물이 에어리얼의…. 아니, 칼리번의 뺨 위로 떨어졌다.
“제… 젠장….”
에어리얼은 욕을 내뱉고는 에레즈의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피를 토해 냈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에레즈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나 전과 달리 몸은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인격을 되찾은 에레즈는 더는 괴물도, 도구도 아니었다.
“칼리번이…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죽음을 직감한 에어리얼은 자조했다.
“넌, 네가 한 선택을…. 후, 후회하게 될 거야, 에레즈 프리드웬….”
반드시…! 에어리얼은 검붉은 피를 토해 내며 에레즈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는 말을 할 여력조차도 남지 않았다.
“허, 허억, 으……. 크윽……!”
에어리얼은 피가 솟아오르는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로 헐떡거리기에 바빴다. 상처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성검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
에레즈는 죽어 가는 칼리번의 육체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이런 상태로는 마물을 불러들이지도 못할 것이다. 목까지 자르지 않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겠지.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아래로는 두 오메가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에레즈는… 그들의 피를 묻힌 채 홀로 서 있었다.
“윽…. 크, 흑….”
에레즈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 순간에도 성검은 그의 손을 태우고 있었으나 거대한 슬픔에 짓눌려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에레즈는 홀로 눈 앞에 펼쳐진 현실과 마주했다. 절벽 위에서는 지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광경이 한눈에 보였다. 검붉은 불길은 왕성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수많은 생명을 먹어 치운 불은 이미 한참 전에 소화를 마치고는 거대한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푸른 하늘은 원래의 색을 잃고 마계의 심해와 연결되어 검게 물든 채였다. 지상으로 하강한 마물들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마물 혼혈 또한 도륙하고 심지어 늙고 약한 마물마저도 잡아먹었다.
“……아.”
하아, 간신히 내뱉은 숨결이 흔들렸다. 눈앞이 아찔했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이것이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대가. 좌절하고, 증오하고, 포기한 결과였다.
“아니야…. 나는…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어….”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마주한 에레즈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그는 왕좌도, 금화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칼리번을 되찾고 싶었을 뿐. 그런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빼앗은 인간들이 미웠다. 칼리번과 그들을 저울질하며 고민했던 순간들을 후회했다. 그래서 자신이 칼리번을 잃고 슬퍼하는 만큼, 인간들도 당하길 바랐다. 마물도, 인간도, 마물 혼혈도 추악하다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위대하다고 존경받던 선조조차 더럽다면. 그렇다면…. 이런 세상 따위는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손으로 직접 지옥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윽…!”
제아무리 결백을 호소해 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모두가 힘을 모아 가꾸었던 왕성은 불바다가 되었고,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가장 끔찍하게 죽었으며, 구하고자 했던 소중한 이의 영혼과 몸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을 뿐.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이 죄는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아, 아아……. 흐윽…….”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에레즈는 숨을 얕게 헐떡이다가 눈을 감고 말았다. 에어리얼과 칼리번을 등진 그는 본능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금빛 머리카락은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렸다.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은 당장에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조금만 더 앞으로 걸어간다면, 혹은 더 쉽게, 성검의 방향을 안쪽으로 바꾼다면— 에레즈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모든 책임과 원망, 과거로부터.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뒤집어쓴 죄와 네발로 기며 지은 죄, 그리고 두 발로 선 채로 저지른 죄까지….
하지만….
“칼….”
에레즈는 깊게,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8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에레즈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언제나 그와의 약속이었다. 영원히 회귀를 반복하는 몸보다도 무거운 마음이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그 업보를, 괴물이라 해서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에레즈는 성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던 눈을 떴다. 성검에 흐르는 성력으로 인해 두 손은 반쯤 녹아 들러붙을 기세였다. 그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검의 손잡이에 맞추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
무언의 외침과 함께, 성검이 땅에 꽂혔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친 땅은 어지간한 쇠붙이는 튕겨 내다 못해 부러뜨렸다. 그러나 에레즈의 성검은 부드럽게, 그리고 깊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큭……!”
에레즈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성력을 성검에 불어넣었다.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인 자세는 기도하는 성녀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크, 으…아…. 아아, 아아아!”
거대하고 순수한, 그렇기에 가장 강력한 성력 앞에 에레즈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물의 피가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성검을 쥔 손끝에서부터 전류가 일기 시작했다. 마물의 피를 장작으로 삼은 성검은 성자의 몸을 매개체로 삼았다. 성력이 그의 몸을 타고 땅 아래로 흘러내렸고, 번개처럼 빠르게 퍼졌다.
성검의 힘은 흙과 나무뿌리, 지천으로 널린 시체를 타고 왕국 전역으로 퍼졌으나 그 어떤 것도 해치지 않았다. 흙도, 나무도, 여린 나뭇잎조차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힘은 오직 검붉은 피를 뒤덮은 마물과 마물의 피를 이은 자들만을 멸했다.
처음에는 에레즈의 몸 위로 핏줄과도 같은 채찍 자국이 피부 위로 새겨졌다. 그가 성검에 성력을 더욱 불어 넣자 이윽고 피부 전체가 새까맣게 타기 시작했다. 마물 특유의 회복력은 검게 변해 가는 피부를 원래의 모습으로 재생시키며 성검의 힘을 억누르려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자 마물의 피는 성검을 이겨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팔과 어깨, 가슴, 배와 다리…. 이제는 턱과 뺨마저 검게 타들어 가고, 몸에서는 살이 익는 악취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레즈의 두 눈의 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붉게 변하고, 잇몸이 내려앉을 정도로 이를 악문 탓에 입 밖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왕성을 뒤덮은 마물들이 검게 불타 버릴 때까지, 울음과 비명이 절벽에서 울려 퍼졌다.
* * *
“그만둬…. 그만두란 말이야….”
여인은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마물에게 덤벼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묘하게 풀려 있었고 두 눈 또한 흐릿했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광기였다. 계속되는 살육을 목도하고는 그만 미쳐 버리고 만 것이다. 여인이 손에 잡히는 대로 무작정 집어 던지자, 시체를 먹어 치우던 마물이 피가 묻은 주둥이를 돌렸다.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두 눈이 번들거렸다.
“아… 아아악…….”
여인은 마물이 입을 뗀 시체에게 달려가 훼손된 몸을 제 몸으로 덮었다. 그것은 이 지옥에서 가장 서글픈 포옹이었다.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나도……. 이 사람도….”
여인은 눈도 감지 못한 시체의 얼굴을 제 가슴에 묻었다. 마물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간신히 의지하게 된 친우였다. 잠을 아껴 가며 서로를 지켜 주고 먹을 것이 없어도 반으로 나눠 먹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죽은 이 또한 남편을 잃고 질긴 목숨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왕성에서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오지 말 것을. 토굴 속에서 햇빛 한번 보지 못하더라도, 나무뿌리를 씹으며 그렇게 두더지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마물은 제 발로 달려와 준 먹잇감을 망설임 없이 물어뜯었다. 마물이 보기에 여인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여인은 또 다른 시체가 되어 쌓였다.
붉은 오메가가 ‘의식’을 통해 마물을 소환하자, 기사단은 예배당 일대를 본거지로 삼고 항전했다. 그러나 결국 전멸에 이르고 말았다. 에어리얼이 무기를 강탈해 간 탓에 화력이 부족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컸다. 죽음을 각오하고 왕성으로 잠입한 성녀들의 운명 또한 같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인간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 아래에 숨을 죽인 채 숨어 있기 바빴다.
“으, 으으…. 으아아! 시, 싫어, 살려 줘!”
생존을 향한 그런 노력마저도 마물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마물들은 쥐를 쫓는 고양이처럼 잔해를 샅샅이 뒤지며 인간을 빼먹고 사내를 끌고 가 범하기에 바빴다. 마물의 거대한 몸뚱이 아래 짓눌린 사내들의 신음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
그때였다. 몸을 움직이던 마물이 돌연 구토를 했다. 사내의 얼굴과 몸 위로 토사물이 쏟아졌다.
“히, 히익…. 오, 지마…. 으아아악!”
쿵, 마물은 거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사내를 짓뭉갰다. 사내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와 같은 현상은 한 마리의 마물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다른 마물은 두 눈을 까뒤집고 긴 혀를 내뺀 채 진흙탕 위에서 꿈틀거렸다. 날개가 달린 마물만이 무형의 힘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하늘로 날아오를 뿐이었다.
“무, 무슨 일이….”
왕성에 발을 디딘 마물들이 갑작스럽게 죽어 가자, 마물을 피해 숨어 있던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선뜻 밖으로 나서지는 못했지만, 두 눈을 부릅뜬 채 마물들이 재가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었기에 지원군은 없었다. 마물 혼혈들이 이제 와 구해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쉽사리 신의 기적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신만은 아닐 것이다. 무너진 예배당은 이미 수십 명의 시체를 품은 거대한 무덤이 되어 있었다.
* * *
한편, 희비는 인간과 마물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갈렸다. 전멸한 인간들과 달리 아직도 적극적으로 마물과 대치 중이던 마물 혼혈들 또한 성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이건…!”
인간의 피가 섞였기에, 그들은 마물처럼 그 자리에서 바로 몸이 타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도만 다를 뿐이지, 몸이 서서히 달궈지고, 마비되는 것은 동일했다.
“…왕자, 에레즈 프리드웬의 힘이다…!”
알파들은 온몸을 타고 흐르는 성력에 괴로워하면서도 어딘지 놀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거대하고 잔인한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적이었던 자도, 아군이었던 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투를 치르다 보면 한 번쯤은 에레즈의 힘을 경험해 보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자가….”
오드론은 간신히 고개를 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우악스럽게 벌려 왕성을 집어삼키려 들었던 마계의 입구가, 어느새 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 * *
에레즈는 전신이 숯으로 변하기 직전에 성검에서 손을 뗐다.
이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살에 불과할 뿐이다. 에레즈는 감히 죽음을 허락받지 못했다. 아직 왕성에는 마물이 남아 있었고,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자국도 완벽히 닫지 않았다. 그러니 끝나지 않았다.
아직, 약속을 다 지키지 못했으니까….
“으윽!”
성검이라는 지지대를 잃자 에레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아…. 으, 흐으……. 크윽….”
무너진 것은 외관뿐만이 아니었다. 내장 또한 녹아 버렸다. 폐는 전부 말라붙어, 숨을 쉬는 것조차 칼날을 삼키는 것처럼 괴로웠다.
“아……. 하아…….”
하지만 쉴 수 없다. 몸을 다시 회복시켜야만 한다. 회복시켜서… 다시 한번 성검을 사용해야만…. 에레즈는 속으로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흐, 흐흐…. 그런다고 미래가 바뀔 것 같아…?”
그때였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오메, 가?”
에레즈의 목이 천천히 꺾였다. 비웃음과 비아냥. 방금 그가 들은 것은 분명 ‘붉은 오메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붉은 오메가의 몸은 칼리번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
흰자위가 붉어진 에레즈의 두 눈이 확장되었다. 에어리얼은 지금, 칼리번의 모습이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에레즈가 성검에 힘을 쏟는 사이 에어리얼이 변태한 것이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은 어느새 가늘고 붉어졌으며, 구릿빛의 피부는 창백하게 변해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하고, 바위처럼 단단했던 몸은 어느새….
“욱, 우윽…. 크, 흐으…. 흐흐,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을…. 커헉, 허억…. 텐데…?”
에어리얼은 지독하게 버티고 있었다. 두 오메가의 몸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이제 와 몸을 바꿔도 상처를 안고 죽어 간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하아, 하하…!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라고!”
“…설마.”
에레즈는 그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 * *
누군가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것만 같았다. 칼리번 몸은 불꽃을 틔우는 심지가 되었다. 이 불을 꺼 달라고, 아니면 차라리 껍질을 벗겨 달라고, 전신이 비명을 지른다. 칼리번을 한 줌의 재로 만들 것만 같은 이 고통은 한편으로는 어딘지 익숙했다. 무수한 시련에 무뎌진 칼리번이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이 감각은….
“…하아…. 흐…윽, 커헉…!”
잠시 정신을 잃었던 칼리번은 피와 함께 숨을 토해 냈다. 숨과 함께 검붉은 핏덩어리가 흘러나왔다. 눈알은 눈꺼풀 안에서 멋대로 굴렀다. 이대로 눈을 뜨면 눈알이 밖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을 떠야만 했다.
칼리번은 한쪽 눈을 간신히, 반쯤 떴다. 시야가 어지럽다. 흐릿해졌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하고, 바로 앞을 보다가 어떨 때는 전혀 다른 풍경을 비췄다가, 자신의 눈 뒤쪽의 피막을 비추기도 했다.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 자신의 피로 물든 땅, 몰아치는 바람에 경기를 일으키는 나뭇가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흔들리는 시야에 한순간, 에레즈의 모습이 담겼다.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은 채로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이.
“윽, 아아…!”
손. 눈앞에는 피 웅덩이에 잠긴 손이 있다. 더는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뻗어 보려 했지만, 도통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
그런데도 억지로 힘을 주자, 칼리번의 팔이 한없이 늘어지더니 땅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아…. 하아, 크, 크으윽…!”
칼리번을 입을 벌렸다. 그러나 목구멍이 핏물에 틀어막혔는지 제대로 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떨어진 손은 멋대로 변형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손톱은 떨어지고 새하얀 피부의 껍질이 벗겨졌다. 근육이 찢어지고, 근육에 붙어 있던 핏줄은 팽팽하게 벌어지다 결국 터지고 말았다. 붉은 살점 사이로 드러난 백골은 꺾이고 으스러진다.
순식간에 썩어 버린 칼리번의 팔은, 이번에는 반대로 흘러갔다. 딱딱한 뼈가 다각거리며 흔들리자 그 위를 근육과 핏줄이 새로이 덮었다. 핏줄 다발은 저마다 가는 피를 쏟아 내며 칼리번의 잘린 팔의 단면으로 뻗어 왔다. 핏줄이 도로 이어지자 고통 또한 전이되었다. 근육과 살점이 얇은 뼈대 위로 버섯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붉은 살점 위로 덮이는 피부의 색은… 에어리얼의 것보다 훨씬 짙었다.
“—!”
몸이, 돌아오고 있었다. 변형은 잘린 팔뿐만 아니라, 칼리번의 전신에 거쳐 이루어지고 있었다.
‘안 돼….’
그러나 안도보다는 두려움이 먼저 솟아올랐다. 재생에 따르는 끔찍한 고통 때문이 아니다. 칼리번은 ‘진정한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에어리얼이 선사하는 마지막 저주라는 사실도—
액체처럼 눈두덩이 속에서 출렁이는 눈동자가 쓰러진 에어리얼을 담았다. 그가 죽어 간다, 자신처럼.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더는 에어리얼이라는 공생체가 없으니,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자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이 모습을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내보일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이 초라하고 구차한 집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나고 시체는 살아남은 자들의 유산이라지만, 칼리번은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잘린 고깃덩어리를 목도할 그의 눈물이 염려스러워서인지,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품에 안길 너덜너덜한 육체가 추악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러니 아직 몸과 의지가 남아 있을 때, 마무리를 지어야만 한다.
“흐으…. 아악…!”
칼리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이미 땅에 파묻힌 것이나 다름없는 큼지막한 몸을 일으켰다.
“큭!”
섰다 싶은 순간, 몸이 휘청였다. 고작 두 발로 지탱했을 뿐인데 왼쪽 다리가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걸을 수 있다. 칼리번은 삐거덕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뗐다. 칼리번의 걸음에는 발자국이 또렷이 남지 못했다. 그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긴 핏자국이 이어질 뿐이었다.
“하아, 하아….”
에어리얼로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일까, 무너져만 가는 몸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
고작 몇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그사이 한쪽 눈이 녹아내렸다. 어느 쪽이 절벽인지조차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칼리번은 개의치 않았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르면 되니까.
툭, 바람이 강하게 불자 갑옷이 벗겨지듯 그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몸은 더욱 균형을 잃었다. 당장에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으나 칼리번은 의지 하나만으로 경이로울 정도로 버텨 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더는 힘을 쓸 필요도 없이 바람에 몸을 맡기면 된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추락할 것이다. 마지막을 향한 집념만으로 나아가던 칼리번에게, 작은 부름이 바람에 섞여 들었다.
<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에 십상인, 연약한 목소리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런 이야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어 왔다. 사람들은 자신은 절대로 당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가장 달콤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은 언제나 그렇듯.
‘…왕자님?’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칼리번!”
그 순간, 칼리번의 귓가에 어른거리던 유약한 목소리는 낮고 거칠어진 목소리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
안 돼. 그것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대로 그 목소리에 붙잡히고 싶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치유의 힘이 있다. 거기다 놀랍게도 그 힘은 본인뿐만 아니라 반려인 오메가에게까지 미치는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마물에게 물어 뜯겨 죽어 가던 에어리얼을 살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다. 이대로 몸을 돌려 그에게 매달리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함정 앞에 흔들렸다.
하지만 더는… 몸이 버티지 못한다. 칼리번은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마물 혼혈임에도 상처가 재생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손상된 지 오래였다. 에어리얼과 연결되지 않은 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 어떤 강대한 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에레즈 프리드웬의 품에서 보내는 마지막은 편안할 것이라고, 8년을 버틴 보상일 것이라고— 갈망이 속삭인다.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 칼리번이 여기까지 견딘 것은, 값을 치르면 무엇이든 하는 용병이어서가 아니었다. 왕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라야만 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 그러면 저도 죽지 않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상투적인 약속. 유일한 유대…. 사실 그것은 떠나지 않으려 하는 에레즈를 위해 꾸며 낸 임시방편으로, 그 자리에서 지어낸 엉터리 말장난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아이를 달래기 위한 약속은 도리어 칼리번을 지하에서 악착같이 버티게 해 주었다.
북부로 무사히 도망친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면 죽은 것이 확실한 존재와의 약속 따위 잊어도 그만일 것이다.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가혹한 세계에서 그러한 약속은 쉽게 깨어지곤 했고, 그런다고 한들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속을 지켜 주었다. 황폐한 세계에서 살아남아 주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구하러 와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는 더 많은 이들을 살게 할 것이다. 그러니 떠나야 할 자는 떠나야만 한다.
어쩌면 이 또한 얄팍한 자존심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작고 어린 왕자님이 의지할 만한, 듬직한 용병으로 남고 싶은.
“…….”
눈꺼풀 안에 동그랗게 자리 잡았던 두 눈도 이제는 녹아버려 에레즈의 모습조차 희미하다. 하지만 칼리번은 눈이 없어도 훤히 보였다. 그에게는 작은 왕자님과 함께했던 과거와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푸른 눈을 녹여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리겠지. 아니, 어쩌면 이번만은 울지 않을지도 모른다. 못 본 사이 그는 훨씬 강해졌으니까.
8년 전처럼 작별의 말이라도 전하면 좋으련만, 칼리번에게는 혀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손과 발이 없어도 닿을 수 있는, 목소리와 눈빛이 없어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를 아니까.
“…….”
더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력하지 않아도, 칼리번은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자비롭게도 고된 여정을 치른 몸을 절벽 너머로 밀어 주었다. 칼리번은 대부분의 세월을 무겁고 커다란 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치 새라도 된 듯 가벼이….
“안 돼……. 칼리번!”
에레즈는 성검을 그 자리에서 내던지고는,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 * *
에어리얼은 꿈을 꾸었다. 모든 것을 손에 쥐었으나 단 하나만은 얻지 못한, 덧없는 꿈이었다.
‘…아, 꿈인가.’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젠의 넓은 등에 업힌 채 이동하고 있었다.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다. 에어리얼은 그녀의 박동을 느꼈다. 오랜 시간을 달렸는지 호흡이 제법 거칠었다.
에어리얼은 여기가 어디인지, 그녀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부 기억이 났다. 우리는 도망치는 중이었다. 너무 많은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있어 이루 셀 수도 없었다. 불길한 오메가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 오메가에게 눈이 벌게져서 달려드는 마물과 용병들….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 탓에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에어리얼은 젠보다 몸집이 작고 체력이 약하다 보니, 아무래도 먼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무슨 꿈을 꾸었더라….’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꿈은 벌써 대부분 휘발되고 말았다. 에어리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깟 꿈이 뭐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에어리얼로서는 그 꿈을 쉬이 놓을 수가 없었다. 약해 빠진 인간에게조차 당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힘을 갖는 꿈이었다. 다만, 힘은 얻었으나 수명 또한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은….
‘난, 뭘 했지….’
악몽인지, 길몽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달콤하다는 점은 같았다.
<…으으.>
깊게 몰두하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아무리 달콤해 봤자, 꿈은 깨면 끝나 버린다. 그리고 현실로 내던져진 ‘진짜 자신’은 여전히 약하고 가진 것 하나 없다. 그렇기에, 꿈을 꾸고 나면 더욱 깊은 수렁에 잠기게 된다.
<…….>
에어리얼은 어째서인지 불안해졌다.
<젠!>
에어리얼은 급히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숨이 벅차기에 대답을 넘기는 일이 흔했다.
<젠…?>
그런데도 에어리얼은 초조했다.
<…그웬.>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그 이름을 꺼낼 정도로.
분명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는데 도착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없이 달리기만 할 것 같아서… 그녀가 영원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 우리 대장님께서 웬일로 날 그 이름으로 부르시나?>
그런 에어리얼의 불안을 비웃듯, 앞에서 꽤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왜 대답을 안 하는 건데.>
젠의 목소리에 가슴 속 앙금이 가셨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툴툴거렸다.
<하, 그야, 허억…. 등에 돌덩이 하나 이고 달리니까 그렇지!>
여태까지 속 편히 자고 있었으면서 화를 내는 거야? 젠은 숨결과 함께 하, 하, 헛웃음을 토해 냈다.
‘다행이다.’
원하는 답변을 얻어 낸 에어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바짝 솟은 긴장이 풀리자 몸이 늘어졌다. 젠의 어깨 너머로 해가 걸려 있다. 해가 완전히 저물면 곧 밤이 올 것이다.
…어둠은 싫다. 살면서 다음 날 해를 보지 못할까 두려워한 나날이 많았기에, 버릇처럼 미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양은 좋아한다. 왜냐면 젠의 머리카락이 자신처럼 붉게 물드니까. 젠은 늘 제 머리카락이 붉은색이 아닌 주홍색이라 주장하곤 했다. 죽어 가는 태양은 그런 젠의 머리카락을 반박할 여지도 없이 빨갛게 적신다.
<젠….>
…이 멍청하고 미련한 알파.
<헉, 허억…. 왜 자꾸 불러? 힘들어 죽겠는데…. 혹시 배고파?>
아니면 오줌이라도 눌래? 젠은 뒤를 돌아보지 못하기에 마구잡이로 추측할 뿐이다.
<그런 게 아니야.>
섬세하지 못한 젠의 질문에 에어리얼은 괜히 짜증을 부렸다. 젠의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초조함은 여전했다. 곧 밤이 오기 때문일까? 더는 숲을 헤매며 짐승 같은 삶을 살던 자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리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말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가 일었다.
이 대화가, 젠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젠, 어째서 나 같은 걸 계속 데리고 다니는 거야?>
에어리얼이 그녀의 등에 얼굴을 가린 채로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젠이 되묻는다.
<그야, 나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약해 빠졌잖아. 하지만 당신은 나 없이도 살 수 있어. 아니 오히려….>
…더 편하고 자유롭겠지. 얼굴을 마주 보지 않기에 비로소 꺼낼 수 있는 속내였다. 에어리얼에게도 나름의 ‘쓸모’는 있었다. 그러나 젠은 한 번도 그런 용도로 에어리얼을 사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에어리얼은 식량과 식수를 축내는 짐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만 해도, 나 때문에 당신까지 쫓기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도 어째서….>
설령 젠이 이 자리에서 자신을 버린다 해도 아무도 그녀에게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다. 생존이 미덕이 된 지 오래인 세상이었다. 젠은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에게 이미 넘칠 만큼 해 주었다.
<아, 그러게? 아무 마을에나 놓고 갔으면 이런 생고생은 안 해도 되는데 말이지?>
하! 젠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에어리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너란 녀석은 말이야, 하아, 도대체가 고맙단 말을 할 줄 모르냐? 찔리는 게 있으면 차라리 감사와 존경을 표해 봐라. 그런 말로 죽어라 달리는 사람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젠은 말을 하느라 삼키지 못한 만큼 깊은숨을 내쉬었다.
<…….>
그러나 에어리얼은 빈말로라도 그녀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아니,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그저 젠이 바보 같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젠은 생명체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본능을 무시하고, 마치 자신이 성녀라도 된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희생하고 있다.
하지만 젠과 오래 지낸 에어리얼은 알고 있다. 그녀는 성녀 무리에서도, 용병 무리에서도 완전히 융합되지 못하는 외톨이라는 것을….
자신처럼.
<…내가 성녀였다고 이렇게까지 하겠냐.>
그때, 한참을 달리기만 하던 젠이 입을 열었다.
<널 만나기 전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많았어. 그런 걸 외면한 적도 많고…. 내 손으로 죽인 녀석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지.>
<…….>
몇 날 며칠을 달리며,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헐떡인 탓에 잔뜩 쉰 목소리였다.
<아— 제기랄! 그러게 왜 널 주웠을까? 이렇게 고생할 게 한눈에 보였는데….>
젠은 에어리얼이 매달린 어깨를 들썩이며 과장되게 진저리를 쳤다. 울컥 화가 치민 에어리얼이 그녀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치려 할 때였다.
<…어쩌면 날 도와주었던 사람처럼 굴고 싶어서였을지도.>
그녀는 흘러가듯 말했다. 하마터면 에어리얼은 그 말을 놓칠 뻔했다.
<아니면… 저딴 놈들처럼은 살지 말아야겠다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젠은 익살스러운 말투로 마무리를 지었다.
<…….>
인간처럼 되고 싶어서, 혹은 인간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정반대의 말을, 어떻게 같다는 듯이 쓸 수 있을까?
에어리얼은 쏟아지는 석양 아래 한없이 붉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이윽고 해가 지고, 그녀의 등이 어둠에 묻혀 사라져 갔다.
“큭…. 커헉!”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진, 그녀의 뒷모습만치 붉은 피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에어리얼의 작은 몸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치 많은 양이 피가 터져 나왔다. 피는 그 색만큼 온기를 지닌 모양이다. 피를 잃은 에어리얼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헉, 허억…. 윽……. 젠, 장….”
피로 붉어진 입술이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게 만들고, 칼리번에게 제 껍질을 씌워 의심을 거두고, 마침내 에레즈 프리드웬을 손에 넣어서…. 거의 다 도달했는데. 마지막 의식만을 남겨 두고 있었는데….
“흐, 흐흐…….”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아 에어리얼은 자조했다. 그는 쓰러진 채로 에레즈 프리드웬이 의식을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
그래 봤자 이미 늦었어— 에어리얼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제 와 마물을 쫓아내고 마계와 인간계의 연결을 끊는다 한들 죽은 목숨이 돌아오지는 못한다. 마물과 마물 혼혈들까지 끝장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으나 인간들, 에레즈 프리드웬의 백성들은 대부분이 죽었을 것이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살아남은 알파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칼리번은 죽는다는 것이다. 훼손된 시체를 보고 에레즈 프리드웬이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운이 좋다면… 정신이 무너진 에레즈 프리드웬이 남은 알파들을 처단할지도 모르지. 계획대로 흘러가 준다면야 기쁘지만, 아쉽게도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아 마지막까지 지켜보지는 못할 듯하다.
“…하아, 윽!”
땅에 얼굴을 박고 있던 에어리얼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몸을 뒤집었다. 가슴이 하늘을 향하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칼리번이나 에어리얼이나 죽어 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신이 망가진 칼리번에 비하면 그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모든 것들을 비웃을 여유 정도는….
에어리얼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
저 멀리 숲 쪽에서 작은 형상이 어른거린다. 작은 형상은 환각이 아닌지 점점 크기를 키워 간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하아, 흐으….”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숲은 젠과 칼리번 외에는 침입할 수 없도록 막아 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설마….
“…젠?”
에어리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윽, 허억…! …큭….”
허튼 기대는 죽음을 가속시킬 뿐이다. 에어리얼은 쿨럭거리며 피를 토해 냈다. 에어리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자신에게 올 리가 없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이 아닌 칼리번을 택했다.
하지만, 하지만…!
에어리얼은 눈도 깜박이지도 않은 채, 가까워지는 어떤 형상에게 고정되었다.
“하아, 하아…….”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뜬 붉은 눈 위로 비치는 것은— 석양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가 아니었다. 부서져 가는 갑옷이었다.
“에어…리얼….”
백조와도 같이 하얗던 갑옷은 검붉은 피가 뒤덮여 기괴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당했는지 갑옷은 반절 이상 부서져 있었다. 그 갑옷은 마치 유령처럼, 파괴된 부위 안쪽으로 근육이나 피부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텅 빈 어둠뿐이었다. 몸이라는 뼈대가 없는 갑옷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연신 비틀거렸다.
“…….”
덜그럭, 갑옷이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에어리얼은 떨리는 숨을 힘겹게 내뱉고는 눈을 감았다. 더는 볼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갑옷은 관객의 시선이 거둬지면 의미를 잃고 마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휘청이면서도 기어이 몸을 일으켜, 마침내 에어리얼의 곁으로 다가왔다. 갑옷이 무릎을 꿇었다. 사실 무릎을 꿇었다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 것에 가까웠다. 갑옷 사이사이의 연결구가 부서지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아스터.”
에어리얼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어서… 아쉽습니까?”
텅 빈 갑옷 안에서 어린 목소리가 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에어리얼은 그렇게 짜증을 부리더니 피가 섞인 기침을 했다. 갑옷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에어…리얼, 당신의 명령대로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준, 갑옷이 부서져 버렸지만……. 그 여자도… 살아남진 못할 겁니다.”
“…그래.”
에어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반응과는 반대로 그의 턱이 미묘하게 떨렸다.
“아스터…. 보면 알겠지? 다 끝났어. 결국 이 꼴이야….”
에어리얼의 목소리는 쉭쉭 거리는 숨소리에 섞여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냐.”
에어리얼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절벽 너머로 굴렀다.
“저리로… 가. 허억, 윽…! 아, 하아……. 더는, 네 말 상대가 되어 줄 상태가… 아니라서…. 이젠 네 몸을 만들어 주진 못하겠네……. 하지만… 에레즈 프리드웬의 몸을, 뺏으면. 으, 으윽…….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다….”
에어리얼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중얼거렸다. 입 안에 피가 가득 들어차 있어 발음은 불분명했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왜냐면… 너는 저들의….”
에어리얼이 오래되고 식상한 진실을 고백하려는 찰나였다.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스터가 그의 말을 잘라 냈다.
“뭐……?”
에어리얼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부풀어 있어 더는 아름답지 않았다.
“에어리얼…. 절 데려가십시오.”
투둑, 툭—
이 와중에도 갑옷은 파편이 되어 에어리얼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스터의 갑옷은 일반적인 철갑옷과 달랐다. 그래서 강한 충격에 우그러지고 뜯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시간을 붙잡은 물건이 갑자기 부식되는 것처럼, 재가 되어 부스러졌다.
“하…. 웃기지 마. 죽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해…. 뭐가 좋다고 널 데려가겠어?”
이제야 간신히 혼자가 되었는데 또 알파를 데리고 가라고? 평생을 알파에게 시달린 에어리얼로서는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아, 으윽…! 하아, 멍청한 녀석…. 쓸데없는 의리를 지킬 필요 없어. 네 정체를 알게 되면… 에레즈 프리드웬은 순순히 몸을 내줄 거다…. 뭐……. 에레즈 프리드웬이 칼리번 없이도 살려고 든다면야, 그때는 너도 죽겠지만…. ……정 죽고 싶으면 그때 가서 혼자 죽어.”
에레즈 프리드웬은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던 이기적인 생물이었다. 칼리번이라는 예외적인 존재로 인해 인간 흉내를 내고는 있으나, 또 모를 일이었다. 무한히 회복하는 육체와 달리 정신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언제고 괴물로 회귀할지도.
“…아니, 그리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스터는 부스러진 팔과 손으로 투구를 벗었다. 투구를 벗자 아스터의 몸을 가려 주던 갑옷이 함께 무너져 내렸다. 어느 금사보다도 긴 백금사가 에어리얼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왜냐면 저는 당신의 것이니까요.”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스터는 세상 밖에 백금사의 모습이 아닌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검은 오메가의 배 속에서 죽어 가던 나를 살려줬을 때부터.”
그는 평생을 그늘에서 살아온 식물처럼 모든 것이 옅었다. 은발에 가까울 정도로 금빛이 휘발된 백금사는 물론이거니와 피부는 창백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지자, 항상 가려 왔던 얼굴이 비로소 에어리얼을 마주했다.
유약하지만 섬세한 이목구비는 한눈에 보아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프리드웬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스터는 모든 것이 제 아비를 닮았다.
다만, 단 한 가지만은 달랐다. 아스터의 눈은 푸른 보석안이 아니었다. 그는 밤처럼 까만 눈을 지니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제가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아스터는 자신만큼이나 에어리얼에게도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백금사가 에어리얼의 몸이 감겨들었다.
“…그 무서운 곳에, 당신을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데려가십시오. 아스터는 하얀 두 팔로 에어리얼의 몸을 받쳤다.
“하, 하하……. 하하….”
에어리얼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허망한 웃음을 뱉어 냈다. 그렇지 않아도 껍질을 잃어 가고 있었는데…. 갑옷을 벗은 아스터는 인간계의 공기에 더없이 취약하다. 자신과 함께 목숨을 끝내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리가!
“하……. 흐흐…. 가관이군, 너한테 동정을 다 받다니…. 으…아아, 크윽…!”
마구 비웃던 에어리얼은 괴롭게 기침을 했다. 에어리얼의 눈가에 피와 눈물이 함께 고였다. 아스터는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길고 흐릿한 머리카락은 모래처럼 끊겨 툭툭 떨어져 내렸다.
“하아, 하아……. 그딴 말은…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에어리얼이 물었다. 아스터가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 말은 평생 가르치지 않았다.
“저의….”
아스터의 시선이 잠시 절벽 너머를 스쳤다.
“…어머니께서 가르쳐 준 겁니다.”
딱딱한 말투와 달리 아스터의 생김새와 목소리, 태도는 몹시도 어렸다. 아니, 어둠 속에서 길러졌기에 느리게 자랐다는 편이 어울렸다. 그렇기에… 죽기에는 너무 일러 보였다.
“바보 같긴…. 누가, 어머니라는 거야…? 우린 인간이 아니야….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어머니란 아이를 낳은 인간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에어리얼은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죽기 전까지 재밌게 해 주는 광대 같은 녀석이다.
“그렇군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조차도 가져 본 적이 없는데. 에어리얼은 힘없이 대답하고는 눈을 감았다.
“에어리얼….”
하지만 아스터는 에어리얼을 쉽게 보내 주지 않았다.
“저는 껍질이 없기에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은 겁니까?”
아스터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마계의 심해에 가려진 하늘, 공기 중에 떠다니는 흐린 햇볕조차 아스터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뜨거웠다. 아스터의 까만 눈이 점점 흐려져 갔다.
“흐…. 바보 같기는…. …왜겠어? 이용하려 한 거지….”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난 그저 기적이자 저주의 탄생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여자애가 태어날 줄 알았지. 하지만 실패작이더군.”
“그렇군요….”
아스터는 퍽 덤덤했다. 갑옷이 부서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스터의 몸은 빠르게 스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러지는 것은 아스터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터의 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불꽃과도 같았다. 품에 안은 에어리얼의 몸을 함께 녹이고 불태웠다.
“왜? 실망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가 버려…. 에어리얼은 힘없이 덧붙였다. 그러나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째서 실패작을 버리지 않았나요?”
아스터의 형상이 무너져 내린다. 살점이 흘러내리고 그의 눈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징그럽다기보다는 그저 모래처럼 안타깝고 덧없었다.
“당신은 그동안… 수많은 마물을 만들었죠. 금사를 쓰는 마물이 필요했다면, 알테르 프리드웬과 칼리번을 통해 새로운 마물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성공작을….”
모래는 빛을 받으면 아주 잠시 반짝이곤 한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금인 것처럼….
“그런데도 왜 계속, 저를 곁에 둔 겁니까?”
아스터가 물었다. 끊어지고 스러지는 백금사는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처럼 덧없었다.
“…….”
항상 생각해 왔던 거지만, 정말 귀찮은 녀석이었다. 스스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기에 멍청했고 그만큼 순수했다. 그래서 에어리얼은 아스터로 인해 늘 골치가 아팠다. 잠시나마 칼리번에게 맡겨서 편했었는데….
“그건…….”
그러나 에어리얼은 대답을 마치지 못했다. 붉은 눈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던 빛이 사라졌다.
“…….”
아스터는 무표정과 구별이 되지 않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어…리얼…. 당신은, 자신이 오메가인 걸 저주했지만….”
…당신은 내 오메가야.
왜냐면, 내가 당신의 알파이니까.
아스터는 분명 실패작이었다. 그에게 황금 피는 없었고 평생 이용당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화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새에 시작된다. 설령 당장은 이해 불가능하더라도. 아스터는 마물의 본성만큼이나 이기적이고, 인간의 사랑만큼이나 악한 것을 처음으로 물려받았다.
각인을….
그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지, 한 개체에서 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이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스터는 에어리얼을 안은 채로 무너져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붉고 옅은 재가 되었고 한데 섞였다.
숲에서 절벽으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재와 먼지는 하늘로 흩어져 더는 형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무엇도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마침내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