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재회
<에레즈 녀석이랑 에어리얼을 만난 후에는 어떻게 상대할 셈이야?>
에어리얼을 막기 위해 함께 동쪽 성문을 나와 산을 오를 무렵, 젠이 물었다.
<그 녀석은 에어리얼에게 단단히 홀려 있어. 이 스승의 말도 들어 먹질 않았다고. 그런데 에어리얼의 모습을 한 채로 ‘내가 원래 칼리번이다’라고 주장해 봤자 들어 주겠어? …하다못해 나도 널 못 믿었었는데.>
에레즈에 대한 험담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귀 기울여보면 칼리번에 대한 걱정도 담겨 있었다.
<……에어리얼이 내게 썼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할 거다.>
칼리번은 젠의 등에 매달린 채로 대답했다.
<에어리얼이 썼던 방법이라고?>
젠이 되물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번’의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실패를 겪은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에어리얼만큼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
칼리번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 * *
칼리번은 어둠 속에 있었다. 앞도, 뒤도 구별할 수 없는 막막한 어둠. 그러나 몇 번이나 에어리얼의 기억을 보았던 그에게 이 상황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인내를 가지자 곧 그는 빛과 마주했다. 눈부시도록 밝은 빛이 아닌, 안개에 가려진 어스름한 빛이었다. 칼리번은 빛을 향해 걸었다. 그가 나아갈수록 어둠은 메마른 땅으로 변하고, 앙상한 나무줄기가 되었으며, 황량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뭐?! 이 오두막에서 나가겠다고?>
칼리번은 빛 다음으로 성난 음성을 들었다. 걸걸하고 저음이기는 했으나 여자의 목소리였다.
칼리번은 낡은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이미 오래전에 버려진 집인지 창문은 부서졌고 나무판자가 겹쳐진 벽은 여기저기 뜯겨 나가 있었다. 칼리번은 벽의 틈새를 통해 어렵지 않게 안을 살필 수 있었다.
<이거 제대로 돌았군. 정신이 나갔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젠이었다. 그녀는 오두막의 문을 막고 서 있었다. 허름한 오두막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고함과 달리, 젠의 겉모습은 그만큼 강해 보이지 않았다. 회복이 빠른 알파임에도 그녀의 몸 곳곳에는 부상이 남아 있었다. 근육도 평소보다 줄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몇 주 가까이 굶으며 강행군을 했다는 의미기도 했다. 칼리번은 젠이 몹시도 고된 여정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 하지만…. 카, 칼이… 자… 잡혀 있는데…!>
거친 음색 사이로 가늘고 희미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구, 구… 구하러, 가, 가야….>
칼리번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젠의 등에 가려져 무슨 짓을 해도 상대방이 보이지 않았다.
<구하겠다고? 하, 대단한 용사 나셨네! 제기랄…. 누군 동료를 버리고 싶어서 도망친 줄 알아?>
비록 버림받기는 했으나 에레즈 프리드웬은 이래 봬도 어엿한 왕자였다. 그러나 젠의 태도에서 왕족에 대한 예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왕성에서 좀 멀어지니까 나불거리나 본데….>
<그, 그런 거, 아, 아… 아니야!>
<웃기지 마!>
<아, 으으….>
젠이 윽박지르자 에레즈는 금세 기가 죽어 버렸다.
<마물은 어디에든 널려 있어. 우린 아직 붉은 오메가의 손아귀 안이라고!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붉은 오메가와 알테르 프리드웬이 네 멱을 따러 올 텐데, 그 번쩍번쩍한 금발을 살랑거리면서 밖에 나돌아다니겠다고?>
<……우, 윽…!>
‘알테르 프리드웬’이라는 단어를 듣자 에레즈는 그만 히끅,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뭐야? 이 겁쟁이는….>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켜서 너만 죽으면 상관없지. 너와 난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근데 널 업고 뛴 나라고 살려 주겠냐?>
<…히, 힉! …우윽….>
<알테르 프리드웬이 무서워서 딸꾹질이나 해 대는 꼬맹이 하나 때문에 나까지 죽으라고? 그건 싫거든?>
젠은 괜히 어린애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에레즈의 전의를 깎아 내기 일부러 모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좋으나 싫으나 너와 나는 한배를 탄 몸이야. 난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쥐 죽은 듯이 지낼 거다! 그리고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넌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가. 알겠어?>
그녀가 정말로 에레즈가 싫었다면 굳이 머나먼 북부 땅까지 업고 와 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칼리번은 멀리서 지켜보기에 알 수 있었다.
<시, 싫어…! 도, 도…… 돌아갈, 거야.>
하지만 칼리번과 달리 에레즈는 그녀와 초면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
<내가 안 된다는데 무슨 수로?>
<…하… 할 거야. …호, 혼자서라도!>
에레즈는 그녀에게 전력으로 반박했다.
<뭐? 네가, 혼자서? 크……하하, 푸, 하하하하핫!>
젠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오두막 안을 채웠다. 배를 움켜쥐는지 그녀의 등이 굽혀졌다.
<하…. 약해 빠진 도련님이 뭘 할 수 있다고? 네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칼리번이 그런 개죽음을 당하진 않았겠지.>
젠은 에레즈의 마지막 희망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끝장내 버렸다.
<아, 아니야! 주, 죽, 죽지 않았어…! 카, 카… 칼은…! 칼, 은…!>
<그 녀석은 죽었어.>
점점 더 심하게 말을 더듬는 에레즈와 달리, 젠의 목소리는 더욱 냉철해졌다.
<붉은 오메가가 마물을 끌고 왔어. 한 마리도 아니고…. 그 수를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냐.>
<흐윽, 그, 그렇지 않, 아……. 카, 칼은… 가, 강해……. 어, 엄, 청, 가, 강해서…!>
<칼리번이 무지막지한 녀석이기는 해도 마물 군단을 이기지는 못해. 그게 가능하면 용병들이 혼자서 돈을 벌지, 왜 무리를 지어서 다니겠어? …인간의 피가 섞인 이상 순수한 마물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그런 거지.>
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스로 말하고서도 자괴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 아니야, 으…윽, 흐으….>
에레즈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낡은 오두막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내자식이 질질 짜기는…. 쯧,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읏….>
<그 녀석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거야.>
젠은 동료의 죽음을 선고했고 구슬픈 울음이 이어졌다. 칼리번과 달리 그녀는 우는 에레즈를 안아 주거나 다독여 주지 않았다. 다만 벽에 걸린 낡은 물건을 만지작거리거나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에레즈가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포기한 것일까? 에레즈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구차하기는 하다만, 뭐, 칼리번 녀석이 살려 준 목숨이니까 최대한 부지해 봐야지. 일단 1년 정도는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윽! 뭐야?>
젠이 앞으로의 생활을 논할 때였다. 에레즈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칼리번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둠 속에서 순간 금빛이 일렁였다.
<이, 개자식…! 내 말 귓등으로 들었냐? 어딜 가려고?!>
에레즈는 젠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문밖으로 뛰쳐나가려 들었다. 갑작스러웠으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습격을, 젠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에레즈를 원래 자리로 내던졌다.
<아앗…!>
<어딜 도망치려 들어?! 칼리번이 어지간히 봐줬나 본데, 나는 달라! 여기서는 네가 왕자든 알테르 프리드웬이든 하나도 안 통한다!>
젠은 먼지가 이는 탁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의 어깨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 나는, 가, 갈 거야…!>
그런데도 에레즈는 오두막의 문지기인 젠을 향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제기랄! 너도 돌대가리냐?! 내 말 못 들었어? 안 된다고 했잖아!>
에레즈만큼이나 젠 또한 그에 대해서 잘 몰랐다. 아, 이참에 한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에레즈 프리드웬이 칼리번만큼이나 말이 통하지 않는 돌대가리라는 점이었다.
<보, 보내 줘…!>
에레즈는 그녀와 몸싸움을 벌였다. 말로는 이미 그녀에게 설득당했지만, 에레즈의 심장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 덤벼라! 차라리 그편이 속 시원하니까!>
처음에는 건성으로 밀어내기만 하던 젠이었으나 에레즈가 포기하지 않자 자세를 바꿨다. 아예 나서서 에레즈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이다.
<너만 힘든 줄 알아? 너만 돌아가고 싶은 줄 아냐고?!>
<윽, 흐윽…!>
<너 혼자 가 봤자 어차피 개죽음일 텐데, 씨발, 그럴 바에는 내 손으로 보내 주는 쪽을 죽은 칼리번도 바라겠지!>
<아, 아, 안…. 안, 죽었어—!>
그녀는 분명 경험 많은 용병이기는 했다. 그러나 남은 것이 아무 데도 쓸데없는 어린애 하나뿐이라는 현실에 짜증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이기도 했다.
“…….”
기억 속 관객에 불과한 칼리번은 그 난장판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칼리번이었다면 에레즈가 다칠 것을 우려해 그를 꽁꽁 묶어 놨을 것이다. 쓸 만한 밧줄이 없다면 그를 꽉 끌어안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몸에 화풀이를 얼마나 하든 상관없이.
그러나 젠은 칼리번과 달랐다. 같은 알파에게, 그것도 상당히 덜떨어진 알파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한쪽의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레즈로 추정되는 검은 형체가 젠의 발아래에서 웅크린 채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나한테도 못 이기면서 마물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반면, 젠의 얼굴에는 땀조차 맺히지 않았다.
<이렇게 약해 빠져서는 칼리번을 구하기는커녕, 그 녀석 유골도 추스르지 못할 거다.>
젠은 거침없이 에레즈를 걷어찼다. 작은 형체가 악, 소리를 내며 오두막 구석으로 굴렀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 걸리면 그때는 자리를 비울 때마다 다리뼈를 부러뜨려 놓을 테니까. …알겠어?!>
젠이 오두막 구석을 향해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손가락질을 했다. 멀리서 대답 대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젠은 으르렁거리고는 문이 부서져라 거칠게 닫았다.
<성에서 봤을 때는 저 정도로 반푼이에 머저리일 줄은 몰랐는데.>
오두막을 나온 젠은 혀를 찼다.
<칼리번은 저게 뭐라고….>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할 듯 허탈해 보였으나, 에레즈가 도망치지 못하게 문밖에서 빗장을 거는 일은 잊지 않았다. 칼리번은 떠나는 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8년 전, 에레즈의 기억 속 젠은 지금과 거의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
자신과 헤어진 후에도 그녀는 충실하게 약속을 지켜 주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만일 그녀가 진심으로 에레즈를 상대했다면 이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맙다, 젠.”
칼리번은 전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젠이 에레즈를 보호하는 이유는 위급한 순간에 떠밀리듯 강요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그녀는, 이전에 지키지 못했던 누군가를 에레즈에게 투영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뒷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젠은 마지막 순간까지 칼리번을 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닌 에레즈 프리드웬의 기억에 불과하니까.
“…….”
칼리번은 문에 손을 댔다. 그의 손은 하얗고 가늘지 않았다. 짙고 굵었다. 그간 칼리번은 주로 ‘에어리얼’의 역할을 맡았고 에어리얼의 모습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기억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기억에 침입하고 있었다. 그 덕일까? 그의 영혼은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물질이 아닌 정신의 세계였다. 칼리번은 빗장을 열 필요 없이 스르륵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흑, 으윽……. 윽, 칼, 카, 칼리…번…….>
오두막 안은 비통한 울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도 울어서 숨이 부족한지 에레즈는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끅끅거렸다.
<흐으으, 아, 윽…!>
그리고 울음 사이에는 고통 어린 신음도 섞여 있었다. 젠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탓일까? 칼리번은 꿈틀거리는 어둠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 안 돼……!>
어둠 속에서 소스라치는 비명이 들렸다. 칼리번은 벌써 자신을 들킨 것인지 의심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악, 아, 아아…. 시…. 큭…….>
젠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에레즈는 틈새 사이로 스미는 희미한 빛 아래로 기어 나왔다. 그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연신 몸을 떨며 헐떡였다.
<흐읏……. 시, 싫… 싫어…….>
에레즈는 머리를 땅에 묻은 채로 연신 흔들었다.
<아, 아, 아파…! 무, 무서워……. 카, 칼…. 흑, 흐윽…….>
에레즈가 괴로워할 때마다 몸이 뒤틀리고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가 힘겨워하는 이유는 젠에게 맞은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껍질을 벗으려 드는 마물의 본성 때문이었다.
“…….”
칼리번은 탈피를 하려 드는 에레즈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비밀의 답은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에어리얼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나약함을 무기로 삼은 괴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칼리번은 탈피를 마친 그를 목격하기도 했다. 갑자기 성큼 성장해 버린 왕자님은 피아 구별을 하지 못하는 마물처럼, 무작정 다리를 부러뜨렸었다.
<시, 싫어…. 흐윽, 더, 더는, 주, 죽고 싶지, 아, 않아…. 아흑…!>
“…….”
그와 같은 일이, 여기서 다시금 일어나는 것일까?
<카알, 카, 칼…!>
그러나 에레즈는 치료제를 찾는 병자처럼 연신 칼리번의 이름을 불렀다.
<흐윽…. 미, 미안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
<나, 나 따위를……. 윽, 흐으….>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렸으나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레즈는 괴로워하고 있다. 본능에 몸을 맡기면 편해질 텐데, 그는 칼리번의 이름을 부르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탈피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탈피란 분명 생물체로서는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칼리번은 탈피한 에레즈가 성장하고, 이전의 상처가 모두 없어지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에레즈는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탈피를 하면… 무엇을 잃기에?
칼리번은 땅을 긁어내리는 하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약지에 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칼리번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와 같은 자국이 그의 손에도 남아 있었다.
에레즈와 러트를 보낸 후 칼리번의 몸에는 많은 자국이 남았다. 그중에는 채찍을 맞은 것처럼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무수한 흉터들과 함께 자리 잡은 자국들도 있었다.
<칼, 칼….>
누군가 서투르게 잘라 준 금빛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창백한 뺨. 그 위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왕자님.”
칼리번은 에레즈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메가는 향기로 알파를 끌어들인다. 더 나아가 알파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까지 가능하다.
노련한 에어리얼은 그런 능력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같은 오메가인 칼리번의 머릿속마저 주무르곤 했다. 심지어, 에어리얼이 남긴 기억 속에서조차 칼리번은 휘둘리기에 바빴다. 기억의 어느 한 부분도 바꿀 수 없었고, 도리어 칼리번이 휩쓸려 영혼이 무너질 뻔하기까지 했다.
‘닿을 수 있을까?’
칼리번의 손이 에레즈의 등으로 향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영혼이 부디 에레즈 프리드웬의 일그러진 영혼에 닿을 수 있기를.
머리가 나쁘기는 해도 칼리번도 일단 오메가이기는 했다. 에어리얼에게 죽도록 당해 오면서 칼리번은 그의 능력을 일부 흡수하기도 했다. 에어리얼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
움찔, 작은 몸이 떨렸다. 칼리번의 손길이 오두막의 문을 지날 때처럼 통과되지 않고 에레즈의 등에 무사히 닿았다.
화들짝 놀란 에레즈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에레즈의 두 눈이 더욱 크게 확장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보석안은 칼리번에게는 마치 등대와도 같이 느껴졌다.
“왕자님….”
어둠과 희미한 안개빛이 섞인 오두막 안, 칼리번은 그와 재회했다.
<…….>
칼리번과 마주한 푸른 눈에 이내 눈물이 고였다. 칼리번은 그 모습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겼다.
<아, 아….>
에레즈는 차마 말을 떼지 못했다. 그러더니 대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칼리번을 등졌다.
“…왕자님?”
에레즈에게 칼리번이란, 젠에게 곤죽이 되면서까지 다시 만나고 싶은 상대였다. 그런데 막상 칼리번이 눈앞에 있는데도 외면하기에 바빴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꾸, 꿈이야!>
에레즈는 칼리번의 망령을 떼어 내기 위해 외쳤다. 괴상하게 튀어 오른 목소리는 마치 불이 났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 이건 전, 부 다…. 꾸, 꿈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레즈는 칼리번의 망령이나마 보고 싶은지 몸을 가만히 있지 못했다.
“…….”
그 모습에 칼리번의 목울대가 울렸다.
<나, 나, 나 혼자… 마, 만족하기 위한, 꿈…. 하, 하지만, 안 돼!>
에레즈는 욕심이 많은 자신을 혼내듯 붕붕 고개를 저었다.
<카, 칼은 지금… 마, 마물, 에게, 자, 잡혀 있는데…….>
혼자만, 행복해져서는 안 돼…. 에레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에레즈에게 칼리번은 정말 유령밖에 더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욕심을 내도 괜찮을 텐데…. 불 속에 달궈 지글거리는 돌멩이를 가슴에 넣은 듯, 칼리번의 속이 울렁거렸다.
“…꿈이 아닙니다.”
칼리번은 참지 못하고 에레즈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힉…!>
칼리번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자, 에레즈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동안 에레즈는 수없이 칼리번과 재회하는 꿈을 꿨다. 그러나 감촉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 주었다. 일렁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물끄러미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꾸, 꿈이… 아니야?>
“네.”
어찌 보면 꿈과 비슷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칼리번은 간신히 찰나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그렇게 대단치 못했다. 에레즈와의 연결이 언제 깨질지 모를 일이었다.
<…카, 칼…? 저, 정말로… 다… 당신이야?>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다가, 불쑥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젠과 우격다짐을 하느라 엉망이 되기도 했던 손은, 그사이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칼리번의 뺨에 얹어진 하얀 손가락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 떨림은 작은 새의 심장박동처럼 쉴 새 없어서, 둔탁한 칼리번에게도 여과 없이 전해질 정도였다.
<카, 칼…리…번.>
칼리번은 바위처럼 커다랗고 단단했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감히 그를 쥐지도, 끌어안지도 못했다.
“…….”
칼리번은 에레즈를 제외하면 그런 조심스러운 손길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간질간질한 감촉에 어째서인지 칼리번의 눈썹이 아래로 쳐졌다.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에레즈를 제 품에 넣었다.
<앗!>
퍽, 터질 것만 같은 포옹에 에레즈는 입을 벌렸다.
“왕자님…!”
옷도, 털도, 껍질도, 근육도, 뼈도, 핏줄도 하나 없이, 그저 영혼과 영혼이 맞닿았다. 영혼에도 체온이 있을까?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칼리번은 온기를 느꼈다.
<흐으, 으, 으……!>
에레즈는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칼리번은 한없이 그의 등과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에레즈가 마침내 그의 등을 세게 움켜쥐었다.
<카, 칼…!>
“네….”
<칼, 칼…. 흐, 흐아아, 아, 으으…. 아아아!>
훌쩍거리던 에레즈는 결국 칼리번의 품 안에서 목놓아 울었다.
<카, 칼…! 칼…. 보, 보고… 너, 너무, 보, 보고…… 싶…. 윽! 흐윽! 으으, 아…. 아아…….>
죽은 줄 알았던 이와의 재회이기는 했으나 에레즈의 반응은 과도했다. 하지만 곧 이해했다. 겉모습은 여전히 어렸지만, 그는 더 이상 갓 칼리번을 잃은 나약한 에레즈가 아니었다. 그의 울음에는 8년의 세월이 녹아 있었다.
<나… 나아…. 무, 무, 무서웠어…! 내, 내가 도달하기 전에, 다, 당신이… 주, 죽어…. 크흑, 죽었, 을까 봐….>
에레즈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설움을 토해냈다.
<아, 아… 아팠어, 너, 너무, 아, 아팠어! 파, 팔도 아, 아프고… 누, 눈도… 하, 하지만, 다, 당신이, 당신, 은… 나, 나보다도, 더…. 더어….>
칼리번의 품 안에서 에레즈의 몸은 점점 작아져 갔다.
<우, 으윽, 흐으…. 와… 왕 따위는, 되,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 그 자리는… 나, 나한테는 어, 욱, 울리지, 않아…! 피, 필요하지도 아, 않았어! 흐으, 흐……. 하…지만, 나, 나한테는 아무런 힘이 어, 없어서…. 다, 당신을 되찾으려면…. 그, 그러려면……!>
그는 계속 작아졌다. 이러다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품 안에 파고드는 에레즈를 안고 또 안았다.
<서, 성검도, 인간, 도, 아, 알파도…. 저, 전부, 피, 필요 없어! 다, 당신뿐이야, 당신, 밖에…. 나, 나는…!>
젠을 상대할 때만 해도 유약하나마 청년다웠던 에레즈는 어느새 아이로 돌아가 버렸다.
“…….”
그러나 칼리번은 그 변화에 놀라지도, 끝없이 털어놓는 에레즈의 넋두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알아듣기 힘든 에레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뿐. 혼자 집으로 돌아온 아이를 칭찬하듯이 그의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히, 힘들, 어…. 너, 너무, 힘들어서…. 주, 죽고 싶어서…! 하, 하지만…! 야, 약속, 했으니까, 내, 내가 살아, 있으면, 죽, 지…. 흐으, 않겠다고…. 히, 윽…. 그랬, 잖아…. 그… 그렇지?>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도 함께 끄덕이며 칼리번의 가슴에 눈물을 털어 냈다.
<그, 그래서……. 노, 노력했어…. 나, 나… 같은 건, 다, 당신처럼은 못, 되지만, 다, 당신처럼 해 보려고…! 여, 여기까지, 당신… 겨, 곁까지, 오려고…. 흐읍!>
“네.”
칼리번은 에레즈가 더는 말을 할 수도 없을 만치 거세게 끌어안았다.
“네, 왕자님….”
다 알고 있습니다. 칼리번은 그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가는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흐으, 으읍…. 칼, 흐으으……!>
에레즈 또한 칼리번과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영혼에게 숨이 필요할 리가 없지만, 칼리번은 버릇처럼 그의 향기를 호흡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당신을…….”
에레즈만큼이나 칼리번도 그랬다. 에레즈가 되찾기를 바랐던 만큼, 칼리번 또한 그가 와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모두에게 잊힌 채, 더는 두 발로 걷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린 몸으로…. 다름 아닌 그가 자신을 구덩이로 떨어뜨린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끔찍한 지하 생활에서 위안은 오직 당신뿐이었다. 적의 몸을 한 채로 쫓기고 도망치며, 당신 또한 나만큼이나 지옥을 살아왔다는 걸 알았다. 칼리번은 그걸로 족했다. 이 이상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죽어 가는 인간들을 내버려 두고, 이곳까지 오게 도움을 준 자들도 포기하고, 젠조차도 잊고, 이대로 영원이 되어도 좋을 만큼.
그래서….
“왕자님.”
칼리번은 간신히 그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의 가슴에 파묻어 헐떡이던 에레즈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었다.
“왕자님께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왕자님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고, 그래서 반드시 왕자님께서 끝내셔야 하는 일입니다.”
<으, 응…? 그, 그게 뭔데…?>
에레즈는 불안한지 두 눈을 연신 깜박였다.
“그건….”
이미 오래전에 각오를 마친 칼리번이었으나, 막상 에레즈를 마주한 채로 말하려니 도통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의 굵은 목울대가 망설임에 흔들렸다.
“…성검으로 저를 죽이십시오, 왕자님.”
칼리번은 나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고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쉬어 있었다.
<뭐…?>
예상치 못한 부탁에 에레즈의 눈이 확장되었다. 눈물을 쏟아 낸 탓인지 눈가가 붉었다. 칼리번은 죽음을 앞뒀으면서도 그 작은 흉이 눈에 밟혔다.
“왕자님. 제 말을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칼리번은 손으로 넋을 놓은 에레즈의 뺨을 감쌌다.
“제 몸을 에어리얼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다시 눈을 뜨시면 칼리번의 모습을 한 에어리얼이 저로 보이겠지만, 사실 그건 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는 성검으로 저를… 아니, 제 몸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모, 모르겠어….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거야?>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어, 어째서?! 나, 나는, 그, 그런 일 할 수 없어…. 다, 당신만은 다치게 하, 하고 싶지 않아, 저, 절대로….>
칼리번은 에레즈가 도망칠 수 없도록 그의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에어리얼이 제 몸을 제물로 삼아 마계와 인간계를 연결했습니다.”
<…!>
칼리번은 단호하게 진실만을 고백했다. 얼버무리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칼리번의 성미가 아니었다.
“8년 전, 왕자님의 결혼식이 있던 날…. 그때 에어리얼이 자신의 몸으로 마물을 소환하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그랬던 것처럼, 붉은 오메가가 이번에는 제 몸을 사용한 겁니다.”
“읏…!”
에레즈는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칼리번의 손에 막혀 불가능했다. 그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저는 에어리얼보다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몸을 원래대로 바꾸는 방법도, 마계와 인간계의 연결을 끊는 방법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사과를 덧붙였다. 지금 에레즈와 닿을 수 있었던 것도, 칼리번이 에어리얼에게 수년간 시달리고 시달린 끝에 간신히 터득한 것에 불과했다.
“에어리얼…. 그 붉은 오메가를 멈추기 위해서는, 저와 그자 둘 다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말은 퍽 덤덤하기까지 했다.
“…….”
에레즈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할 말이 없어진 칼리번은 잠시 어물거렸다. 에어리얼과 마주하기 전, 칼리번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것은 에레즈의 손에 죽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왕 죽는다면, 에어리얼과 지옥으로 가는 길동무가 될 작정이었다.
<시, 싫어…!>
에레즈가 덜덜 떨기만 하다 간신히 외쳤다.
“하셔야 합니다.”
<싫어!>
에레즈는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처럼 몸을 곤두세우고, 비명을 질렀다.
“제 몸을 없애지 않으면 하늘에 난 거대한 검은 손자국도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겁니다.”
<너, 너는… 카, 칼리번이 아니야!>
“—!”
칼리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에레즈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바로, 눈앞의 칼리번을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읏, 또, 나, 나를 속이는 거지? 카, 칼리번을 내, 내 손으로, 죽이게 하려고…!>
“아닙니다. 제가….”
예상치 못한 반박이었다. 칼리번이 그를 설득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에레즈는 주먹으로 칼리번의 어깨를 내리쳤다.
<네, 네가, 카, 칼리번일 리가 없어…! 카, 칼리번은, 칼리번은…! 나, 나한테 그, 그런… 자기를 죽이라고… 하지 않…….>
처음 기세와 달리 에레즈의 주먹질은 점점 약해져 갔다.
<으, 아니야……. 윽, 흐윽…….>
말문이 막힌 에레즈는 칼리번을 밀어냈다. 그러나 에레즈의 영혼은 칼리번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나약했다. 8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칼리번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왕자님께서도 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칼리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시, 싫어…. 싫, 어…! 카, 칼, 을 다, 다치게 하지 않, 아……. 다, 다시는 당신을, 이, 잃지 않을 거야!>
에레즈가 고개를 치켜들고는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럼, 이, 이대로 있어!>
그가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외쳤다.
“이대로… 말입니까?”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리광을 한없이 받아 주기만 했다.
<나, 나는… 카, 칼이 어떤, 모, 모습이든 상관없어. 워, 원래의… 몸을, 되, 되찾을 수 없다면…. 차, 차라리 부, 붉은 오메가의 모습인 채로…. 이, 있어…!>
에레즈의 외침은 어딘지 익숙했다. 8년 전, 검은 숲에서 함께 헤매던 때가 떠올랐다. 칼리번이 마물에게 당해 겉과 속이 모두 너덜너덜해지자, 에레즈는 지금처럼 매달렸었다. 숲 밖으로 나가지 말자며,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동굴에서 머물러도 좋다고. …이대로 함께 죽어도 좋다며.
이 세상을 포기하자. 에어리얼이 칼리번에게 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동안 칼리번은 무수히 많은 것들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면 역설적이게도, 에레즈에게서 바로 그 말을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포기했으면서도 에레즈가 그 자신을 버리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붉은 오메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저도 그 몸을 따라 곧 죽게 될 겁니다.”
<……!>
에레즈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제 원래 몸이라 해서 크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에어리얼의 힘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윽.”
목이 메어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에레즈의 푸른 눈이 검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니,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칼리번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말을 마무리했다. 에레즈의 내부에 숨겨진 어떤 힘이, 제 오메가를 치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가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현혹되지 않도록.
어차피 칼리번이 살 가망은 없다. 이 순간조차도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힘에 의지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몸으로 더 오래 살기를 원했다면, 의식을 치를 리가 없다. 에어리얼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거대한 잿더미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
결국, 그와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끝을 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칼리번은 어린 에레즈에게 칼자루를 쥐여 주게 되어 미안할 따름이었다.
<다, 당신을 되찾기 위해…. 여, 여기까지 왔어.>
에레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런데 어, 어떻게, 내, 내 손으로 당신을…. 그, 그런 일을, 하,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분노와 함께 에레즈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칼리번은 굵은 손가락을 접어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둠 속 두 개의 영혼은 마치 램프에 갇힌 불빛처럼, 조그만 바람에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이 흔들렸다.
<지, 지하에서 발견한 당신은….>
에레즈가 입을 뗐다.
<피, 피와 오물로… 뒤, 뒤덮인 채 잠들어, 있었어….>
그랬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목을 벤 에레즈는 칼리번을 찾아 헤맸다. 붉은 오메가를 코앞에서 놓쳤으나 대신 그가 급히 도망치느라 두고 간 칼리번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누, 눈을 감은 채로……. 다, 당신을 버, 버리고 도망친, 비, 비겁, 한 나, 나를 기다리면서….>
그것은 붉은 오메가가 차려 놓은 달콤한 덫이었다. 상처를 군데군데 입기는 했으나, 칼리번은 잃어버린 신체 부위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붉은 오메가가 칼리번을 멀쩡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레즈는 인정하지 못하고 칼리번을 왕성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그때 이미 덫에 걸려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잠든 칼리번의 목을 벴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왕성에 마물이 출몰하고 역병이 돌았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이성과 논리, 의심과 추측은 단 하나만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레즈는 그를 놓을 수 없었다. 결국, 칼리번의 몸을 차지한 붉은 오메가에게 정신을 지배당했다. 에레즈는 그의 종이 되어 착실히 왕국을 파멸로 이끌어 갔다. 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에레즈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망, 가진 왕국보다도, 더, 더러운 나 자신보다도…. 당신…. 다, 당신 하나가 더 중요해.>
“…….”
<왜, 왜냐면…. 당신, 만이, 괴, 괴물인 나를… 괴, 괴물이, 아, 아니게 해, 주니까!>
“왕자님께서는 괴물이 아닙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을 쥐었다.
<아, 아니…. 그, 그렇지, 않아! 나, 나는…. 마물 혼혈들과도… 다, 당신과도 다, 달라.>
“…….”
<조, 존재해서는 안 될…. 그런, 괴물이야. 마, 마물보다도 더 끔찍한… 괴물….>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미끄러지듯 칼리번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그동안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 아니, 말하지 못했어. 무서워서… 숨기고 있었어….>
에레즈는 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더듬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8년 전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까마득한 옛날…. 물론 그때의 날, 당신은 기억조차 못 하겠지만….>
너무 오래 거짓말을 해서, 매사에 지쳐 버린 목소리였다.
“…….”
에레즈는 갑작스럽게 변해 버렸다. 그 변화에 칼리번은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곧잘 눈물을 보이던 어리숙한 왕자님, 짐승처럼 표정이 없고 본능만을 따르던 알파— 그간 칼리번이 알던 여섯째 왕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회의와 환멸로 가득 찬…. 창백한 사내가 있다. 칼리번 없이 보낸 8년. 그는 모두를 속이며 더럽혀지고 왕의 책임에 짓눌려 무너져 있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에레즈 프리드웬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 전부가 그인 거겠지….
“…….”
칼리번의 검은 눈이 바닥을 훑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어느새 바닥을 뒤덮을 정도로 길게 자라있었다. 그것은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체격 또한 그랬다. 칼리번만치 자란 에레즈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였다.
<칼리번, 프리드웬 왕실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럽고 추잡해. 그 기원과 과정, 결과까지. 무엇 하나 깨끗한 부분이 없을 정도로.>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에레즈는 기괴하고 음산한 울음을 흘리는 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나는… 여자한테서 태어났어.>
괴물이 마침내 고백했다.
<그분은… 나를 갖길 원하지 않았어. 전부 기억나. 내가 배 속에 있는 동안, 아주 많이 울었지…. 그뿐만이 아니야. 그분은 나에게 성력마저 전부 빼앗기고 말았어. ……나는 그 과거를 지워 버리고 싶어서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인 거야.>
“…….”
에레즈는 칼리번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쏟아 냈다. 하지만 칼리번은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도 내가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형님의 말대로야. 그가 옳았어. 나 같은 건 진작에 죽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에레즈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칼리번을 바라보려다, 두려움에 흠칫 몸을 돌렸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어. 나는…… 계속, 살고 싶었어….>
에레즈 프리드웬은 ‘생존’이라는 목적밖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살고 싶어서, 그저 살고만 싶어서. 알테르 프리드웬이 그의 숨통을 조이고 심장을 꿰뚫을 때마다 껍질을 찢고 기어 나왔다. 괴물에게 이전의 껍질에 대한 미련이란 없었다. 탈피로 인해 기억을 잃고, 인격을 잃어도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괴물이라 나 자신 외에는 알지 못했지. 그러다 처음으로… 나의 오메가를 만나게 된 거야.>
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 탓인지 에레즈의 목소리가 더욱 낮고 음산하게 들렸다.
<오메가를 만나서, 알파의 본능대로 오메가를 원하게 되었고…. 당신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인간 흉내를 냈어. 이 껍질도, 말하는 방식도, 인격도……. 어쩌면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진짜 내가 아닐지도 몰라. 내 본성은 이보다 더 추악하고 흉측한 형태일지도….>
에레즈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다섯 개의 손가락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 같았다.
<알파인 나에게는 당신뿐이야, 칼리번. 그러니 당신이 죽어야 한다면…. 이 세상의 다른 것들이 살아 있을 필요는 없겠지.>
“…….”
<나조차도….>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왕자님.”
침묵을 지키던 칼리번은 에레즈의 긴 머리카락을 거두었다. 여태껏 칼리번을 향해 소리치고, 매달리던 모습과 달리 에레즈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당신도, 이런 내가 징그럽겠지…?>
시선이 마주치자 에레즈의 입매가 흐릿하게 구부러졌다.
“…….”
칼리번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8년간 왕자님께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전부는 아니지만, 이 몸으로 보았습니다.”
칼리번은 커다란 손으로 에레즈의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마물에게 가축처럼 길러지던 인간들을 구하셨잖습니까? 노예였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고아를 지켜 주셨죠. 그리고 그들을 모아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대항하신 것까지…. 저는 보았습니다.”
<틀려!>
에레즈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건, 그딴 건 그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병사가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이 취한 전략에 불과해!>
“하지만… 마물로부터 성문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몸이 망가지면서까지….”
<…!>
무표정하던 에레즈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 그건….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당신 흉내를 낸 것밖에….>
왕의 정체도 모르면서 황금 피라 믿고 따르는 백성들, 무기를 들고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던 여인들, 손을 내미는 무구하고 자그마한 아이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노력해도 당신처럼 될 수 없었어…. 나는, 결국 전부를….>
그런 백성들을 전부 버렸다. 에레즈의 턱이 떨렸다. 자신은 애초에 왕의 재목이 아니었다. 지략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냉철한 판단력을 지니지도 못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또한 없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에레즈는 그들을 속이기 위해 크고 작은 거짓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같이 가라앉아 가는 배에 타고 있었을 뿐이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런 에레즈에게 칼리번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 끝났어! 내가 망쳐 버렸으니까, 알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을 떼어 냈다. 그는 자꾸만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붉은 오메가가 무엇을 하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어…. 인간들은 당신을 다치게 했는걸. 그들이 고통스럽다면 그건 오메가가 내리는 벌이야. 당신의 목을 내리치고, 심장에 칼을 찌른 벌!>
“…….”
<나를 배신한 벌….>
에레즈는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왕은 백성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인간들은 알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다. 이상하게도 그 두 가지 죄는 서로 상쇄가 되질 않았다. 에레즈는 그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지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을 증오했다. 후회하기를 원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이 얼마나, 인간 같은가….
“설령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왕자님께서는 그들을 지키셔야 합니다.”
칼리번 또한 이 절망 속에서 기묘한 위안을 얻고 있었다. 바로 에레즈가 그 무엇보다 자신을 우선시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뛴 것이다. 손끝이 절로 떨렸다. 하지만 덤덤히 그를 설득했다.
<어째서? 그것들은 살 가치가 없어… 나처럼!>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이 칼리번을 향했다.
“왕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늘 그랬듯 물러섬이 없었다. 에레즈의 얼굴이 잔뜩 약이 오른 어린애처럼 붉어졌다.
<아니, 나는 왕이 아니야! 나 따위가 왕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나한테는 오직 당신뿐이야! 칼리번, 당신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에레즈는 칼리번을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한텐 당신밖에…. 당신만 있으면 돼….>
전과는 반대로, 에레즈는 칼리번의 품 안에서 빠르게 자라났다. 칼리번은 원래의 모습임에도 에레즈를 끌어안기에도 빠듯할 정도였다.
“왕자님….”
에레즈에게 이렇게 푹 안기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에레즈에게서 짐승 같은 힘이 들끓었다. 그가 조금만 더 흉포해지면, 칼리번이라 할지라도 더는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돼 버릴 것 같았다.
“왕자님…….”
칼리번은 눈을 감고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가슴 속에 생겼다. 이 세상보다도 자신이, 자신만이 소중하다는 그 말…. 칼리번에게 있어서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에레즈가 걸렸던 덫만큼이나 달콤하고,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레즈 프리드웬이 이렇게 된 만큼이나, 칼리번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
“…예전에, 숲을 나갈 수 있게 된다면 기사나 용병이 되고 싶다고 하셨죠.”
칼리번은 에레즈를 달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칼리번을 가둘 것 같았던 에레즈의 몸이 순간 떨렸다.
“오랜만에 숲으로 돌아왔더니, 왕자님께서는 그때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 되셨더군요.”
칼리번의 목소리는 어딘지 짓눌려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모두를 지키는 훌륭한 왕이….”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던 작은 왕자님을, 이제는 모두에게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워서. 칼리번은 먼 옛날, 누이를 돌보듯 서툴지만 천천히 에레즈의 등을 토닥였다.
<…….>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 결국 암군이 되고 말았다. 왕국은 불과 마물로 뒤덮여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왕이라고 말해 주었다.
<어째서….>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칼리번의 시체 말고는, 에레즈에게는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째서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힘이 빠진 에레즈는 칼리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짐승이 자신의 냄새를 묻히듯 훌쩍이며 눈가를 비볐다. 길고 화려한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등을 덮었다.
“난 괴물이야. 당신마저 잡아먹을 괴물…. 그런데 왜, 당신은 항상 나를 지켜 주는 거지?”
8년 전에도 들었던 질문이었다. 그건 오히려 칼리번이 묻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신을 향해?
‘어째서 사람들은 짐승을 죽이고 먹으면서, 마물은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그것은 칼리번이 가진 최초의 의문이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무언가를 죽일 수밖에 없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란다.’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지만, 양아버지는 어딘지 모호한 변명을 했다. 자신과 같은 변종이 태어났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일에 별 관심도 없고, 남에게도 무심한 칼리번이었으나 이미 피부로 깨닫고 있었다.
인간의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망가져 버렸다. 질서를 위해 세운 법칙과 규율은 인간 자신들끼리 계급을 나눠 착취하는 용도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세상을 지배해 왔던 인간들이 반대로 마물에게 도륙당하게 된다면, 인간은 마땅히 힘의 순리를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발버둥을 쳤다. 인간은 힘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을 지배하면서, 자신들보다 더욱 강한 마물은 ‘악’이라고 규정한다. 숭고함과 용기로 자신들을 치장하면서.
칼리번은 인간이란 어리석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에어리얼의 말대로 그들이 멸망해도 어쩔 수 없다 여겼다.
그리고 지금, 칼리번은 인류와 같은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순리를 무시하고, 모든 규칙과 법칙을 어겨서라도… 당신만은 살아가기를 바라는. 살기 위해 모순을 정당화하면서도, 남을 살리기 위해 또 다른 모순을 저지르는 인간들처럼….
“…그 당시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여기까지 온 것은 용병으로서 꽃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메가가 본능적으로 알파를 찾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온건하고 타당한 이유만으로는 이 모든 행위가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모순을 무력화하고, 정당화하고,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다시 말하자면, 둔감하고 커다란 사내를 하루아침에 오메가로 발현시키는… 인간의 악성이 아니라면.
“사랑합니다, 왕자님.”
칼리번은 은인을 배신하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가족의 목을 부러뜨리고, 심지어 스스로 심장마저 찌르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말을 속삭였다.
“…….”
예상치 못한 고백에 에레즈의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떨구고는 사과했다. 자신만큼이나 에레즈도 괴로울 것이다. 칼리번의 시선이 닿는 바닥에는 어느덧 비가 내려 검은 점이 쌓여 갔다. 어둠에 쉽게 잠식당하는 칼리번의 손을 어느새 하얀 손이 덮고, 칼리번의 이마에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상대방의 이마가 닿았다.
“…흥.”
나빴어. 정말로….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위로, 행복하고도 아픈 미소가 번졌다.
* * *
재회로부터 눈을 뜨면, 그저 찰나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칼리번의 몸에서 성검이 뽑혀 나갔다. 에레즈는 끝장낸 사냥감을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땅으로 떨어진 작은 몸은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며 꿈틀거렸다.
“너를 보면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아, 칼리번.”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에어리얼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혀 다르지. 너는 축복받았고 나는 저주받았으니까.”
칼리번은 에어리얼에 의해 원치 않는 게임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두 오메가는 서로의 기억을 보았다.
에어리얼은 혼자서 살아남아야만 했고, 칼리번은 인간에게 구해졌다. 에어리얼은 숲에서 목숨을 위협받으며 마을 주변을 배회했다. 칼리번은 배척당했을지언정 마을 안에서 지냈다. 두 오메가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포기했다. 에어리얼은 마계의 바다에 버려져 아무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그를 간절히 찾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죽이고 싶어져.”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보며,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웃었다.
“…….”
임무를 마친 에레즈는 칼리번을 한번 돌아보는 일 없이 곧바로 에어리얼에게 향했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시선은 오직 죽어 가는 칼리번에게 꽂혀 있을 뿐, 에레즈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칼리번을 괴롭히기 위한 미끼이자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에 대한 흥미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끝인가? 그럼 성검은 원래 자리에 둔 채로 대기하고 있…. 윽?!”
에레즈를 보지도 않은 채 명령을 내리던 그때, 에어리얼의 얼굴이 무너져내렸다.
“…크…으윽!”
에어리얼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째서인지 에레즈의 성검이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에어리얼이 뒤로 물러나려 하자 에레즈는 그의 목을 쥐고는 더욱 깊이 검을 쑤셔 넣었다.
“마, 말도 안 돼…. 어째서, 이런…!”
붉은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에레즈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에레즈는 핏줄이 선 푸른 눈은 이전과 달리 스스로 의지를 갖고 적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으며… 또한, 옅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