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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파드되 (37/50)

11. 파드되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조막만 한 맨발이 땅에 닿았다. 성검을 쥔 대가로 입은 화상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한한 회복력이란 겉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의외의 불편함도 있었다. 칼리번은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달았다. 굳은살 하나 없는 새하얀 발은 거친 땅을 두세 걸음만 걸어도 금세 생채기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

최후의 적은, 그동안 상대했던 모든 적보다 작고 연약했으며 눈물은 훨씬 많았으며…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왜 도망쳐? 그토록 바라던 에레즈 프리드웬과의 대면 아닌가?”

에어리얼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왕자님! 왕자님께서 지난 8년간 침묵하시는 동안, 저는 지하에서 수천, 수백 번을 죽었습니다.”

에어리얼이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특유의 저음은 꾸밈없는 진중함으로 다가왔다. 에레즈의 어깨가 떨렸다.

“저를 지켜 주겠다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더는 에어리얼에게 고통받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붉은 오메가를 죽여 저를 안심시켜 주십시오. …설령 왕자님께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닥쳐라.”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에어리얼의 혀를 자르고 싶었다.

“으, 응…!”

그러나 에레즈는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어리얼의 말만 듣고, 그의 명령대로 따르는 인형. 그러나 그 인형은 허약한 ‘에어리얼’의 몸보다도 작은 소년에 불과했다.

저 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야, 칼리번! 달려가서 간절하게 애원이라도 해 보라고! 어쩌면 네가 진짜라는 걸 알아차릴지도 모르잖아?”

에어리얼은 한 손에 술병을 든 구경꾼처럼 두 사람의 전투를 부추겼다.

“왕자님….”

칼리번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젠과 함께 이동하면서 불렀던 마물들은 성검에 의해 한 줌의 재로 스러지고 말았다. 새로운 마물이 올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칼리번이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왕자님.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칼리번입니다.”

에레즈를 상처입히지 않고 시간을 끌기 위해, 칼리번은 가장 자신 없는 무기를 들었다. 바로 대화였다.

“저자는 가짜입니다. 왕자님을 이용해서 왕국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칼리번은 이런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오랫동안 바라왔다.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물론 단둘도 아니었고, 무기를 완전히 내려놓은 것도 아니었지만.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는… 왕자님께서 지키려 했던 백성들뿐만 아니라 젠도, 왕자님 당신께서도 고통 속에서 죽고 말 겁니다.”

칼리번은 몇 번이나 좌절하면서도, 어쩌면 다음에는 눈을 떠 줄지도 모른다는 허튼 희망을 품기도 했다. 아스터의 곁에서 얕은 잠에서 깨어나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투박한 언행은 화려한 화술을 지닌 에어리얼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무시하기 힘든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을 뜨십시오….”

칼리번은 그를 향해 피를 흘리는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토록 바랐던 재회였으나 막상 꺼낼 말이 많지 않았다. 칼리번 자신이 원체 말솜씨가 없거니와, 젠과 숲에서 마주했을 때 ‘이 모습’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큭.”

목구멍이 부어오른 듯 막혔다. 서툰 말보다 앞서는 감정들이 그를 뒤덮은 탓이었다. 칼리번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목소리를 쥐어 짜내기 위해 억지로 주물러 보았으나 도통 말이 나오질 않았다.

“왕자…님.”

칼리번은 알고 있다. 자신이 에레즈를 떠올린 만큼이나 그 또한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 헤맸다는 사실을. 재회를 바라던 두 사람이 마침내 만났으니,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끝이 나지 않는 것일까?

“제발….”

진실한 고백에 저주가 깨진다거나, 눈동자에 박혀 있던 차가운 눈 조각이 떨어진다는…. 그런 터무니 없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려워 보지 못했던 현실을 직면했다.

“…….”

칼리번이 젠에게 이와 비슷한 고백을 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을지언정 조금이나마 의아해하긴 했다. 감히 연기를 하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에레즈 프리드웬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에레즈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는 아름답게 빛났다. 조금의 어둠도 비치지 않았다. 그랬기에, 칼리번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반사할 뿐이었다.

“한두 마디 고백으로 깨어날 줄 알았어?”

에어리얼이 에레즈를 대신해서 반박했다.

“이 녀석에게 건 세뇌는 알파들에게 거는 것과는 달라.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형태지. 마물도 간신히 부리는 네가 깨뜨리는 건 불가능해.”

오메가가 알파들을 지배할 때 자극하는 욕망은 성욕이었다. 그들은 하나뿐인 오메가와 교미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달랐다. 지금 그를 지배하는 것은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칼리번’을 지키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옳음으로 포장된 믿음. 그것들은… 마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가까웠다.

“왜 그러시죠, 왕자님? 설마 에어리얼의 계략에 또 속으신 겁니까?”

에어리얼은 보란 듯이 에레즈를 흔들었다.

“그동안 저자 말고도 수많은 칼리번이 있지 않았습니까? 에어리얼이 왕자님과 저를 모욕하기 위해 보냈었죠….”

모든 것을 반사할 뿐인 에레즈의 눈이 그 말을 듣자 분노로 번뜩였다.

“…다, 다시는 속지 않아.”

고지대에 불어오는 바람이 쉴 새 없이 에레즈의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왕자님….”

칼리번이 언제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비단과도 같던 머리카락은 칼리번을 꿰뚫은 무기로 바뀌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머리카락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지 않고 허공에 떠 있었다.

“—!”

칼리번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금사가 꿰뚫었다. 목표를 놓친 금사는 애먼 땅에 부딪혔다. 칼리번이 소리 없는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스터를 겪으면서 금사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칼…. 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 할 거야.”

에레즈는 칼리번을 노려보며 결심을 다졌다. 이번에야말로 ‘칼리번’을 지키기 위해.

* * *

그야말로 쥐와 고양이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칼리번에게는 여전히 불리했다. ‘에어리얼’의 몸이 약해 빠졌다거나, 더는 마물이라는 무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의 차이였다.

에레즈에게 칼리번이란,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적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달랐다. 그가 감히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윽…!”

칼리번은 매번 가까스로 금사를 피했다. 용병으로 살았던 경험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을 피하고 있으나 자잘한 상처는 늘어만 갔다. 전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도 에어리얼의 몸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왕자님!”

에레즈의 공격을 피해 암벽 위를 구르며 칼리번이 외쳤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목소리는 자꾸만 튀어나왔다.

“으, 으으…!”

반면, ‘에어리얼’을 빠르게 죽이지 못하자 어린 에레즈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아직 몸이 미성숙했기에 금사만을 이용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탈피한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금사로만 조준을 하려니 아무래도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멈춰, 부, 붉은 오메가…!”

에레즈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에어리얼을 죽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끔찍한 오메가는 칼리번에게 고통을 주고, 지금까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존재였다.

“진정하세요, 왕자님.”

에레즈가 참지 못하고 칼리번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면, 그때마다 에어리얼이 말렸다. 무게감 있는 ‘칼리번’의 목소리 덕분에 에레즈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제길, 거리가 좁혀들질 않아…. 이대로는….’

칼리번은 눈동자를 굴려 힐끗 뒤를 살폈다. 그는 점점 절벽 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에레즈는 금사를 이용해 창으로 찌르듯 칼리번의 몸을 꿰뚫으려 들었다. 범위가 넓은 공격에 칼리번은 점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시 한번 금사가 칼리번의 목을 꿰뚫기 위해 빠른 속도로 뻗어 나왔다.

“……!”

그러나 칼리번의 바로 코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더는 에레즈의 금사가 닿지 못하는 거리였던 것이다.

“하, 하아….”

칼리번으로서는 한숨 돌릴 기회였다.

‘최대한 왕자님께 접근하면서, 저 둘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칼리번은 손안의 굵은 돌멩이를 힘있게 쥐었다. 에레즈의 공격을 피하면서 운 좋게 주운 무기였다. 에레즈는 몸이 작아지며 사고도 퇴화한 것인지 돌이라든가, 부서진 나뭇가지 같은 도구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번이 자극을 준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즉, 기회가 한 번밖에 없다는 뜻이다.

“거… 거기, 꼬, 꼼짝 마…!”

에레즈가 칼리번을 공격하기 위해 직접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에 늘어진 제 머리카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나의 가지에 꽃이 무수하게 자란 것처럼 버거워하는 모습은 어딘지 익숙했다. 8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칼리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그 추진력을 이용해 돌을 던졌다. 에레즈가 아닌, 에어리얼을 향해.

“…아, 안 돼!”

에레즈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금사를 이용해 돌을 붙잡았다.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에레즈와 가까워진 칼리번은 모래를 쥐어 에레즈의 얼굴에 뿌렸다.

“앗…!”

에레즈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칼리번은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레즈에게 몸을 최대한 가까이 붙이고는 한쪽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으, 아으…!”

칼리번은 그의 목을 조른 채 절벽 쪽으로 질질 끌었다. 에레즈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끌려갔다. 칼리번이 본체를 끌어안은 탓에 금사도 감히 공격할 수 없었다. 어린 에레즈의 조준력과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칼리번은 몇 번의 공격으로 파악해 둔 터였다. 어린 알파는 본능에 솔직해서 고통을 두려워했다. 금사는 그 본능에 따라 칼리번과 함께 몸을 꿰뚫지 못했다.

슬슬 에어리얼이 간섭할 법도 했으나 그는 이 모든 광경이 재밌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로 구경할 뿐이었다. 확실히 그에게 이만한 오락은 또 없을 것이다. 칼리번이 에레즈를 죽이거나, 반대로 에레즈가 칼리번을 죽이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놀이는….

“하아…. 흐읍!”

칼리번은 에레즈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는 손톱을 세웠다. 제아무리 에레즈의 회복력이 넘쳐흐른다 해도 곧바로 재생되지는 못한다. 비록 에어리얼의 몸이었지만 칼리번은 큰 힘을 쓰지 않아도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목에 흐르는 경동맥을 끊거나…. 아니, 그보다는 눈을 찔러 터뜨리는 편이 빨랐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칼리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맹세컨대 그는 에레즈를 죽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직 에어리얼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만, 잠시만 행동 불능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아, 아파….”

그때, 칼리번의 팔을 쥐어뜯던 에레즈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칼리번의 품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푸른 보석안이 눈물에 젖어 더욱 반짝였다.

“…….”

칼리번의 손그림자 아래에서도, 반짝였다. 에레즈는 고통스럽다는 듯,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건… 더 큰 비극을 멈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칼리번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설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카, 칼….”

그 부름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

두 눈을 터뜨리기 위해 뾰족하게 세운 손끝이 안쪽으로 움츠러들었다. 에레즈는 커다란 눈으로 칼리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영락없는 ‘에어리얼’이었다. 그리고 칼리번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밧줄이 자신의 목을 감는 것을 느꼈다.

“윽—?! 크으윽!”

에레즈는 눈물을 흘린 것이 언제냐는 듯 무표정으로 칼리번을 노려보기만 했다. 금사가 뒤로 잡아당기자 칼리번의 목이 꺾였다.

“커, 커헉…!”

에레즈의 몸에서 버티던 칼리번의 팔이 기어이 떨어져 나갔다. 칼리번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에레즈의 금사가 그의 목을 감고서는 땅 위로 질질 끌어당겼다. 그렇게 에레즈는 칼리번과 싸우며 그의 방식을 고스란히 배워 갔다.

“큭, 윽— 허, 어흑…!”

금사가 칼리번의 목을 허공으로 끌어당기더니 크게 휘둘렀다. 칼리번의 가벼운 몸이 몇 차례 바닥에 처박혔다. 그때마다 피와 비명이 섞여 나왔다. 작은 몸을 금사로 꿰뚫는 것이 어려워서 선택한 방식인 것 같았다. 그러나 조종도 썩 능숙하지는 못했다. 칼리번의 몸이 절벽 너머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아…!”

놓쳐 버렸다. 에레즈는 머뭇거리며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잠시만. 움직이지 마십시오, 왕자님.”

칼리번이 무대 너머로 사라지자, 관람 중이던 에어리얼도 드물게 반응을 보였다.

“흐응, 뭐야….”

여기까지 버틴 고난과 역경에 비하자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저런 약해 빠진 몸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설마, 이따위로….”

에어리얼은 어딘지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여전히 절벽 너머로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끝인가….”

하는 수 없이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안아 들어서 회수했다. 그가 헛웃음을 짓고는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쿠웅, 땅이 울렸다.

“아앗…!”

그 즉시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땅에 내던지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

에어리얼의 두 눈에 비치는 광경은 절벽 너머로 불타오르는 왕성이 아니었다. 거대한 마물이 왕성을 가리며 절벽 위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의 등에는 칼리번이 매달려 있었다. 마물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칼리번을 따라 수 마리의 마물들이 끊임없이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하…!”

자신을 노려보는 검은 눈빛에, 에어리얼의 얼굴이 더 없는 쾌락으로 물들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에어리얼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보이시나요, 왕자님?”

“어, 어……. 아, 카, 칼….”

에어리얼은 쓰러진 에레즈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붉은 오메가가 저를 사칭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물까지 불러들였군요.”

“아…!”

에레즈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왕자님께서 붉은 오메가를 없애 주시지 않으면, 저는 또다시 지하로 끌려가서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겁니다. 왕자님께서는 그래도 좋으신 겁니까?”

“그, 그럴 리가…. 아— 아니야!”

에레즈는 고개를 저으며 전의를 다졌다.

“그럼… 도대체 언제까지 아이로 계실 건가요.”

에어리얼이 에레즈의 어깨를 쥐었다. 손톱을 세워 긋자 천이 찢어지고 피부에 긴 자상을 남겼다. 피부가 찢어졌음에도 에레즈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올라오지 않았다. 한 꺼풀 벗겨야만 하는 껍질처럼 너덜거릴 뿐이었다.

* * *

“으, 으음….”

리론 후작은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라는 것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눈이 붕대로 감겨 있어 앞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으윽…?!”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는 전신을 아우르는 고통과 마주했다. 팔과 다리가 몸에 붙어 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괴로웠고, 목이 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바짝 마른 목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무, 물… 물을 다오….”

리론 후작은 마른침을 꼴깍거리며 삼켰다. 손을 허우적거려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싶었으나 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인가, 자신은 어째서 이런 꼴이 되었나? 뒤늦게 물음이 몰려온다.

정신을 잃기 전, 그는 왕성에 쥐 마물을 퍼뜨리는 괴물을 발견했다. 그간 들어왔던 ‘붉은 오메가’와는 생김새도, 체격도 달랐다. 그러나 마물을 생산하는 것을 보아 그 괴물은 오메가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오메가의 생명력은 엄청났기에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죽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물을 죽일 수 있는 검을 지닌 에레즈 프리드웬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왕자를 괴물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그다음에는….

툭.

“……으, 으…?”

축축한 액체가 리론 후작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오오……. 물인가, 장난치지 말고, 어, 어서 물을 다오….”

그러자 이번에는 눈두덩이 위로 액체가 떨어졌다. 갈증에 시달리던 리론 후작은 애가 타서 숨을 헐떡였다.

“어서…!”

툭.

성녀인지, 병사인지는 모르나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다. 간신히 액체가 입가로 떨어졌다. 리론 후작은 입 안을 채우는 정체 모를 액체를 기꺼이 삼켰다.

“으음…. 으, 윽…?! …우욱…!”

기껏 명령했으면서 리론 후작은 입 안에 든 것을 그대로 뱉어 내고 말았다. 물이라고 하기에는 끈적거렸고, 꿀이라고 보기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릿했다.

“욱, 크윽, 누구냐…. 누가 지금, 이 몸에게 이따위 장난질을…!”

리론 후작은 짜증 섞인 호통을 쳤다. 그는 귀족이었으며, 병사를 통솔하여 에레즈 프리드웬의 승리에 기여한 지휘관이었으며, 왕실 재건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가만두지 않을…. 윽, 허억, 허억…!”

리론 후작은 성을 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친 숨을 헐떡였다. 그가 로위나를 부르려던 때였다. 그르르…. 낮은 울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뒤늦은 대답은 천장에서 들려왔다. 리론 후작의 숨이 멎고 말았다. 한순간에 온몸이 긴장감이 돌며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인간이 아니다.

마물… 마물이다.

“하, 하아…. 허억, 헉….”

침상 위에 누워 있을 뿐인데도 그의 숨이 가쁘게 헐떡였다. 상대의 정체를 깨닫자 엄청난 압박감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거, 거, 거기, 거기…. 아, 아무도 없느냐….”

다급히 병사를 불러 보지만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물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면, 병사들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 어째서……. 어째서 마물이…….”

리론 후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은 왕성 안에 있다. 그런데 어째서 마물이 떡하니 들어와 있단 말인가?! 분명 왕성은 성녀들의 보호를 받고 있을 텐데….

“—!”

그때, 기다란 혀가 위에서 내려와 후작의 얼굴을 핥았다.

“흐… 히, 히익…!”

중년의 사내였건만 그의 입에서는 괴상한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물의 촉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세 개의 촉수가 탐사라도 하듯, 붕대로 가려진 리론 후작의 얼굴을 구석구석 빨았다. 평소 그는 잠들 때도 얼굴을 천으로 가릴 정도로 철저했으나 지금은 눈가에 붕대만 감은 상태였다. 마침내 드러난 뺨에는 칼로 새긴 듯한 글씨가 남아 있었는데, 흉터 위로 새로 칼질을 한 탓에 정확히 무어라 적혔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촉수는 감촉이 신기했는지 그 흉터를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흐, 읍, 으읍…!”

입 안으로 긴 혀가 들어왔지만, 리론 후작은 혀를 깨무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공포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다른 촉수들이 양쪽의 귓구멍을 지분거렸다. 비쩍 마른 중년 사내의 몸이 날 선 쾌락에 움찔, 움찔, 떨었다.

“음, 으으…. 으흐읏!”

찔걱, 찔걱…. 혀처럼 짧은 대신 두툼한 촉수는 귓바퀴를 주무르고, 귓구멍으로 얕게 파고들었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마물이 뇌를 빼 먹으려나 보다.

리론 후작은 또 다른 촉수에 목구멍이 막혀 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물기 어린 촉수들이 양쪽 귓구멍에서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귀를 핥는 소리는 그 어느 접합음보다 가까이에서 들렸다.

“웁— 큭, 푸웃…!”

얌전히 촉수를 빨던 리론 후작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귀와 입 안으로 왈칵 액체가 흘러들었다. 양쪽 귀가 먹먹했다. 후작은 사내였기에, 뜨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피가 아닌 정액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챘다.

“끅, 웁, 흐…!”

온몸이 망가져 꼼짝도 할 수 없었으나, 혐오감과 공포에 리론 후작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 영향으로 붕대가 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야가 트였다.

“으굽, 큽…. 흐으…!?”

리론 후작은 마물의 촉수를 입에 문 채로 덜덜 떨었다. 드러난 눈가에는 누군가 난도질을 한 것처럼 날카로운 자상이 남은 채였다. 조개처럼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인 마물이 천장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 크기는 어지간한 사내보다도 컸다.

그것은 입을 빠끔히 벌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촉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개라면 관자가 있어야 하지만, 그 안에는 대신 거대한 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론 후작이 처음 맛보았던 액체는 바로 마물의 눈물이자 체액이었던 것이다.

“으, 흐으, 으으…!”

리론 후작은 필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왕성민들이 거주할 법한 낡고 허름한 방이었다. 서너 명의 병사들이 있었으나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제야 피 냄새가 진동했다. 리론 후작은 자신이 이 방에서 유일한 사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 하아, 아, 으으….”

조개 마물의 눈동자와 마주친 리론 후작은 그저 떨기만 했다. 거대한 외눈이 깜빡거리더니 빠끔히 벌어진 껍질 속에서 또 다른 촉수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입과 귀를 더럽혔던 것보다 훨씬 크고 굵었다. 빨판 같은 혹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새는 마물의 성기가 틀림없었다.

성기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리론 후작의 아래를 더듬었다. 입과 귀를 쑤셔 본 마물이 본능적으로 다른 구멍을 찾는 것이다. 그는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마다 귀에서 마물의 정액이 흘러내렸다.

“시, 싫어! 하, 하지 마…!”

마물의 성기가 옷을 헤집고 다리 사이로 파고들자, 중년의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으흐, 흐으…. 부탁…. 부탁이다, 뭐든지 할 테니, 거, 거기만은…!”

리론 후작은 입에서 마물의 촉수를 뱉어 내고는 애원했다. 알파와 말싸움을 벌이던 오만한 귀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몰락이었다.

“아악! 히, 히, 으윽…!”

그러나 물컹한 성기는 예고도 없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마물의 촉수는 체액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고 그 덕분에 쉽게 파고들 수 있었다.

“아, 아아악!”

몸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성기는 제 본체의 껍질처럼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몸 안쪽이 벌어지자 그만큼이나 리론 후작의 입이 벌어지고,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흐아, 하, 아…!”

굵직한 마물의 성기가 안을 쑤석거렸다. 비쩍 마른, 볼품없는 중년의 몸이었다. 그러나 알파 경험이 적은 내벽은 달랐다. 좁고 깊은 몸은 기다란 성기와 상성이 좋았다. 후작은 공포에 질려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이기만 했다.

“히익, 으, 으…! 거, 거기까지 들어가면, 흐으, 주, 죽… 죽어, 죽는다고…. 그만, 윽, 아아…!”

‘인간 남자’를 대표하는, 여인에게서 자식을 둘이나 보기도 했던 이 사내는 한 번도 알파의 성기를 받아 보지 못했을 것 같으나 놀랍게도, 그는 이미 알파 경험이 있었다. 그것은 리론 후작이 마물뿐만 아니라 마물 혼혈까지도 적극적으로 차별하고 증오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5년 전, 리론 후작이 한창 알테르의 군대와 싸우던 시절이었다. 그는 사내로서 본을 보이기 위해 전장에서 항상 앞장서곤 했다.

<위험합니다, 아버지! 병사들은 제가 이끌겠습니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장남인 알버트는 겁 없이 전쟁에 나서는 아버지를 만류하곤 했다.

<늙은 이 몸보다는 젊은 너를 더 걱정하거라. 이런 늙은이는 마물도 알아서 피해 갈 거다!>

그러나 리론 후작은 알버트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인간 사내가 한 명쯤은 나서서 본을 보여야 한다. 그야 인간들의 면이 서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알버트가 아닌 자신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물은 젊은 사내를 좋아했고 그는 아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렇게, 리론 후작은 방심하고 말았다.

<흐, 흐아아아악!>

리론 후작은 과욕을 부리다 마물 군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더러운 마물 놈들,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나, 나는, 아내와 처자식이 있는…. 으악, 아아악!>

번식욕에 번뜩이는 마물들이 중년의 사내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마물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뺨에 주인 될 알파의 이름을 새기더니, 거침없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아악…. 그만, 그만…. 배가…!>

이대로는 마물의 새끼를 배서 죽고 만다. 그는 자신이 백성들을 이끄는 귀족이자 사내라는 것조차 잊은 채 알파의 성기에 꿰뚫려 마구 흐느꼈다. 마물에게 범해지면서도 두려움에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알파에게 수도 없이 범해지던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지. 아버지! 정신 차리십시오.>

<으… 으으….>

<저희가 구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그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

<아아, 알버트….>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는 리론 후작은 안도했다. 알버트가 자신을 위해 병사를 이끌고 와 준 것이다. 이제 됐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후작이 아들의 등에 업혀 정신없이 도망칠 때였다.

<다들 후작님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라. 여기는 내가 막겠다.>

마물에게 쫓기던 알버트는 결단을 내렸다.

<아— 알버트! 그게 무슨 소리냐…. 함께, 가야…. 윽!>

<간신히 여기까지 왔지만…. 제 힘이 부족한 탓인지 수세에 몰렸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누구 하나는 반드시 미끼가 되어야 합니다.>

알버트는 리론 후작을 구할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했는지,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된다! 그게 반드시 네가 될 필요는 없단 말이다! 커헉…!>

컥, 컥, 리론 후작은 정액이 섞인 피를 토해 냈다.

<제 독단으로 많은 병사가 죽었습니다. 더는 그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알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욕망으로 어리석은 기사는 수많은 병사를 사지로 몰았다. 이 결정은 후대에 비난을 받을 것이다.

<…로위나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버트는 투구를 닫았다. 리론 후작은 이것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미처 아들의 얼굴을 담지도 못했는데…. 그리고 그는 혼자 몸으로 마물들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리론 후작이 본 아들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그는 알버트를 되찾기 위해 마물과의 전투에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좋은 남자는 일찍 죽는다— 누군가 그런 말로 위로했다. 잘생긴 남자는 결국 알파 소유가 되더군— 천박한 용병의 도발에 칼을 뽑은 적도 있었다.

또다시 3년이 지나, 리론 후작이 간신히 찾아낸 것은 땅에 반쯤 묻힌 알버트의 갑옷뿐이었다. 갑옷 따위, 마물에게는 필요하지 않겠지….

알버트는 마물에게 잡혀가, 범해져, 마물의 새끼를 낳고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리론 후작은 살았지만 산 사람이 아니었다. 마물을 볼 때마다, 마물 혼혈을 볼 때마다 저것이 알버트를 죽이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매번 의심과 증오를 불태웠다. 가슴 속은 죄책감으로 새까맣게 타곤 했다.

“가, 감히 인간 주제에 마물에게 대들, 어서, 죄, 죄송합니다…. 히익, 아, 아아…! 요, 용서를…!”

그리고 지금, 리론 후작은 정신을 놓고 개처럼 빌었다. 눈동자는 반쯤 뒤집힌 채 눈물을 줄줄 흘렸고 입 밖으로 거품이 새어 나왔다. 벌을 받는 거다. 아들을 희생시키고 여태껏 살아남은 벌을.

리론 후작은 빠르게 붕괴했다. 그에게 아들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 알버트를 잃었으니 이제 그를 구해 줄 사람은 없었다. 성검으로 모두를 이끌었던 왕자는, 잠든 오메가를 보고는 돌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곳에 있던 성녀들, 귀족들이 모두 금빛을 두른 밧줄에 목이 묶이거나 꿰뚫려 죽고 말았다.

“히익, 아, 아악, 아아…!”

리론 후작이 울부짖거나 말거나, 마물의 성기는 봐주는 것 하나 없이 우악스럽게 파고들 뿐이다. 피와 정액이 성기를 뒤덮었고 그 덕에 고약한 성미만큼이나 뻣뻣했던 배 속이 느슨해져 갔다. 마물이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늙은 몸에 제 씨를 남기려 할 때였다.

“끄으, 끼이이익—!”

별안간 마물이 비명을 질렀다. 벌어진 껍질 사이로 화살 하나가 맹렬하게 파고든 탓이었다. 그 한 발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수히 많은 화살이 마물을 공격했다. 화살 대부분은 단단한 껍질에 튕겨 나갔으나, 몇 발은 성공했다. 껍질 안에 숨겨진 눈동자가 화살에 꿰뚫려 피를 흘렸다.

“끼이이, 꾸에엑…!”

마물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리론 후작의 몸에서 마물의 성기가 줄줄 빠져나왔다.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긴 성기는 껍질 안으로 숨어들었다.

“히, 히이, 이…….”

마물이 사정하기 직전에 풀려난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마물의 부푼 성기가 오간 뒷구멍은 그 크기에 맞게 벌어져 뻐끔거렸다.

한순간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병사들이 쉴새 없이 마물을 공격하는 사이, 누군가 리론 후작을 침대 아래로 끌어당겼다. 리론 후작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은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은인은 뜻밖에도, 리론 가문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은빛 갑옷. 그리고 투구에 새겨진 리론 가문의 문양….

그 갑옷의 유일한 주인은….

“아… 알버트!”

리론 후작은 눈물과 마물의 체액으로 범벅이 된 채로 환히 웃었다.

알버트, 나의 알버트가…. 리론 가문의 유일한 적장자가 살아 돌아온 것이다! 네가 이리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럴 줄 알고 갑옷을 그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 ………!”

암, 그렇고말고….

알버트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양 귀에 정액이 그득 들어찬 탓에 리론 후작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마물의 정액으로 인해 귀 일부가 녹아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알버트…. 알버트, 네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좁은 어깨에 업히자, 리론 후작은 완벽하게 안도했다. 리론 후작을 회수한 병사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 * *

운이 좋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마물의 품에서 내리면서 칼리번은 숨을 가다듬었다. 어린 에레즈에게 집어 던져진 몸 상태는 말도 아니었다. 죽었어도 이미 열 번은 죽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는 오직 에레즈 프리드웬을 되찾겠다는, 에어리얼과 결착을 내겠다는 의지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앞으로 그가 이기든, 지든 간에 이 전투가 끝나고 나면 위태롭게 흔들리던 촛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칼리번은 마물을 부리기 직전, 에레즈를 보며 속으로 사과했다. 도저히 제 손으로는 어린 왕자를 해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어리얼을 잡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의 발을 묶어 놓아야만 했다. 그 눈짓을 마지막으로 칼리번은 마물에게 집중했다. 걸음 한번이 절벽을 흔들 정도로 거대한 마물이 에레즈에게 덤벼들었다.

“흥, 제법 마물 부리는 법을 익혔나 본데….”

에어리얼은 비죽 웃고는 에레즈의 등을 밀었다. 소년의 몸으로 어른의 옷을 꿰입은, 왕자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기우뚱거리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긴 옷자락을 밟고 넘어질 것만 같다.

“아, 으…. 으으으!”

에레즈는 마물의 발톱이 닿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고통 어린 비명을 질렀다. 그는 목을 뒤로 꺾은 채 왼손으로 오른팔을 쥐었다. 휘청,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 아아아…!”

그러나 에레즈는 넘어지지 않았다.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부푼 오른팔이 땅을 짚은 것이다.

‘왕자님의 팔이…!’

에레즈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칼리번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왼팔과 오른팔의 크기가 달랐다. 한쪽 팔만이 훌쩍 자라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은 마물 혼혈들이 본성을 드러내는 방식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마물 혼혈은 숨겨 둔 자신의 원래 모습을 꺼내는 것이지만, 에레즈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으, 으윽, 아아, 하아…!”

갑작스러운 성장에는 그만한 고통이 따르는 모양이었다. 혼자 길어진 팔은 부러진 것처럼 땅 위에 늘어져 있었다. 에레즈는 엎드린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고 싶은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손을 흔들었다. 마물이 작은 몸을 덮쳤다. 칼리번의 공격에, 금사가 다른 인격을 지닌 것처럼 튀어나와 마물의 팔을 잘라 냈다. 팔을 잃은 마물이 비명을 질렀다.

“으, 후으….”

에레즈는 비대칭적으로 거대해진 팔로 땅을 짚고는 마물을 노려보았다. 번뜩이는 푸른 눈은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가 방금 찢어 죽인 마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큭…!”

팔이 잘린 마물과의 연결이 끊기자 그 고통은 고스란히 칼리번의 몫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닌 두세 마리의 마물을 동시에 보냈다. 처음 에레즈는 각기 다른 마물들의 움직임에 막혀 완벽히 포획된 듯했다. 그러나….

“으, 아, 아, 아아…!”

찌이익, 생살이 찢어지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에레즈의 몸이 뒤틀렸다.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위로 몸속의 뼈가 울룩불룩 솟아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순식간에 자라나는 몸을 따라 금사 또한 더욱 길어졌다. 네발로 엎드린 에레즈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처럼, 금사를 늘어뜨린 채로 여러 마물을 동시에 상대했다. 성검 없이 맨손으로 마물의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뽑고, 심장을 꿰뚫는다. 그에 따라 마물의 피로 물든 옷이 점점 에레즈의 몸에 맞게 변해 갔다. 아니, 몸이 옷에 맞게 자라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 짧은 사이에 에레즈 프리드웬의 몸은 소년기를 지나 청년의 것으로 교체되었다. 에어리얼의 몸에 갇힌 칼리번의 목을 조르던 그 청년의 모습으로….

그때의 왕자는 한쪽 팔이 없고, 상처투성이였으며, 한쪽 눈마저 잃은 상태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에레즈는 피로 물들어 있을 뿐, 흉터 하나 없이 하얗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에레즈 프리드웬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저 마물의 본성에 지배당한 괴물에 불과했다.

“하아, 후으……. 하아…….”

어느새 훌쩍 커진 에레즈는 칼리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눌하고 빈틈이 많았던 아이 모습일 때와는 풍기는 위압감이 달랐다.

“큭…!”

궁지에 몰린 칼리번은 남은 마물을 모두 사용했다. 에레즈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을 죽이지 못하도록.

결과적으로 그 결정은 에레즈를 성장시키고 강화시키는 훈련이 되고 말았다. 칼리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에레즈가 마물을 한 마리씩 없앨 때마다 칼리번은 선 채로 상처를 입었다.

“하아, 윽….”

칼리번은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를 닦을 기력도 없이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모든 마물을 처리한 에레즈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읏, 흐으….”

등 뒤에 절벽을 둔 칼리번이 비틀거렸다. 에레즈의 손에 죽기 전에 쓰러져 추락할 기세였다. 결국,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칼리번이 절벽 너머로 쓰러지는 순간, 에레즈는 그런 그를 한 손으로 받아 냈다.

“…왕자님?”

뜻밖의 상황에 칼리번은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눈길이 마주쳤다. 증오 외에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푸른 눈동자.

혹시나… 하는 기대.

멍청하다는 소리는 수도 없이 들어왔으나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이야. 칼리번은 자신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다. 그가 떨리는 손을 에레즈에게 뻗었다.

“커헉!”

그러나 닿지 못했다. 에레즈는 앞서 그랬듯이, 망설임 없이 칼리번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금사가 아니라 단단하게 자란 그 손으로.

“큿…!”

목이 조여들자 두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압박이 가해졌다.

“허억, 윽…. 으윽…!”

한 손에 잡힌 목이 부러질 듯 조여 온다. 숨이 부족해지자 자연히 눈앞이 흐릿해졌다. 피로 얼룩진 발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왕자님.”

칼리번이 정신을 잃기 직전,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어 가는 칼리번의 모습을 무심히 반사하기만 하던 푸른 눈이 휙 돌아갔다.

“붉은 오메가를 이렇게 쉽게 보내는 건 어딘지 아쉽습니다.”

에어리얼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럼?”

에레즈는 더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에게 답을 구했다.

“저 오메가가 좀 더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지하에서 보낸 세월에 비하면 죽음은 한순간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에레즈는 고개를 기울였다. 에어리얼이 웃으며 다가오더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에 힘을 푸십시오, 왕자님.”

“하지만, 이 손을 놓으면….”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응.”

에레즈는 납득하지 못했지만, 에어리얼의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 그와 동시에 칼리번의 몸이 땅 위로 떨어졌다.

“허억! 크, 후으, 하아, 하아…….”

간신히 숨통이 트인 칼리번은 허기진 사람처럼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대는 호흡은 마치 노인의 기침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니 바로 죽이지 말고, 끝에서부터 부러뜨리면서 가지고 노세요.”

칼리번이 간신히 주변을 분간할 수 있게 될 즈음, 잔인한 말이 그의 몸을 덮었다.

* * *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 오른쪽으로 도망치면 마물이, 왼쪽으로 피하면 불길이 막았다. 뒤로는 당연히 물러날 수 없다. 그리고 눈앞에는 무너진 건물에 깔린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다. 구원을 바라며 하늘을 올려보았다가는,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 광인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마물에게 둘러싸인 왕성은 그야말로 거대한 냄비였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은 요리 재료일 것이다. 불길이 쉼 없이 스튜를 달군다. 이대로 온갖 방법으로 삶아진 뒤, 마물의 접시 위에 얹어지겠지….

“아아악!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한 사내가 여인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물에게 잡히면 곱게는 못 죽을 텐데, 그 전에 한번 하고 죽자는 게 뭐 어떻다는 거야?”

“흐으읍!”

사내는 여인을 겁박하며 윽박질렀다. 번들거리는 두 눈이 진작에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순간, 본성이 솟아오른 것이다.

여인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으나 상대는 평소보다 몇 배는 강해진 상태였다. 몸을 짓뭉개는 힘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내가 여인의 옷을 찢으며 범하려던 순간이었다. 사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그림자가 여인을, 아니 두 사람을 뒤덮었다. 마물이 연기와 시체 타는 악취 사이에서도 남자 냄새를 맡고 다가오고 있었다.

“읍, 읍— 흐으읍!”

그 사실을 먼저 깨달은 여인은 미친 듯이 사내의 어깨를 때리고 밀어냈다. 그러나 남자는 정욕에 지배당해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를 챘어도 바지춤을 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젠장, 좀 가만히 있— 윽! …으윽? 으아아악!”

소의 뿔과 머리를 지닌 마물이 발톱으로 사내를 낚아챘다. 사내가 퍼덕거렸으나,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보다 훨씬 큰 마물에게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마물은 더욱 짙어진 사내 냄새를 맡고는 침을 질질 흘렸다. 끈적하고 불투명한 액체가 사내의 얼굴을 적셨다.

“히, 이이익…! 그, 그만, 그만둬!”

여인의 눈앞에서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람이 너무 두려우면 몸이 굳는다고 하던가? 그녀는 눈조차 깜박이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대 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바지를 벗고 있었다. 그 덕에 마물은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으, 으… 으아아악! 아악!”

거대한 소의 성기가 안을 비집고 들어오자 그는 비명을 질렀다. 소 마물보다 작은 마물들이 기회를 노리고 몰려들었다. 소 마물은 제 몸 위를 올라타는 작은 마물들을 꼬리로 쳐 내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흐읍, 읏…!”

여인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물이 성욕을 채우고 나면 다음으로는 식욕을 채우려 들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마물들은 벌써 여인에게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추스르고는 네발로 기었다. 건물의 잔해를 필사적으로 기어 나와,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으나….

“흐으, 아… 안 돼!”

마물에게 긴 머리카락을 붙잡힌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는 날카로운 이빨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마물들에게 살과 내장을 파먹힐 것이다.

힘으로 뿌리칠 수 없기에, 몸에 마물이 들러붙은 여인은 붙은 땅 위를 마구 굴렀다. 불에 그슬린 마물이 끼긱거리며 떨어져 나갔으나, 동시에 여인의 머리카락에도 불이 붙고 몸에는 화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녀가 고통에 움직임을 멈추자 마물들이 다시 살점을 뜯어먹으려 달려들었다.

“아아악! 제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여인은 도움을 구하며 비명을 질렀다. 제 목숨도 챙기기 어려운 참상의 한가운데에서 응답해 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 응했다.

“아… 아아!”

어찌 된 일인지 몸에 들러붙은 마물이 제 발로 떨어져 나갔다. 물론 마물은 이를 갈며 여인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형의 방패에 튕겨 나갔다.

“하, 흐으으….”

여인은 전신이 불과 재로 얼룩져 숨만 까딱거렸다. 그런 여인을 정체 모를 사람들이 일으키고 등에 업었다.

“다행히 목숨은 무사합니다. 저 여인을 데리고 어서 예배당으로 피하십시오. 아직 거기는 점령당하지 않았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성녀님도 함께 가시죠.”

“아닙니다. 아직… 길을 잃은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간신히 숨만 할딱거리는 여인을 두고 사람들이 대화를 나눴다. 안도한 여인이 정신을 잃자, 목소리들은 점점 작아져 갔다.

* * *

인간들은 어설프게나마 방어 전선을 구축했다.

왕성 위로 검은 손자국이 생기자마자 전멸당하지 않은 것은 인간 측으로서는 굉장한 행운이 몇 가지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는 왕성 밖으로 쫓겨났던 성녀들이 몰래 돌아온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기사 단장이 무기를 반납하지 않고 숨겨 둔 것이었다.

진지를 구축했다고는 하나 안심할 수준은 아니었다. 상대는 마물이었다. 안 그래도 힘에서부터 월등한 차이가 나는데, 무기마저 턱없이 부족했다. 죽은 병사의 무기를 주워 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빌어먹을, 마물이 끝이 없군!”

끼이익, 병사들은 다 죽어 가는 인간 몇을 어깨에 이고 본성 외곽에 자리한 예배당에 들어섰다. 예배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병사들이 모두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 급히 빗장을 걸었다.

“거기, 단장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돌아오셨나?”

피로 범벅이 된 기사는 아무 병사나 붙잡고 물었다.

“아닙니다! 아직 귀환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길….”

급히 왕성으로 돌아온 로위나는 병사를 이끌고 마물이 직격으로 쏟아진 장소로 떠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왕성민들을 구출하기 위해서였으나 실상은 그곳에 고립된 리론 후작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살이나 다를 바 없는 행위를 차마 말릴 수 없었던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피난민을 이끌고 귀환하는 중에 대부분의 무기가 파괴됐다. 여기에 무기는 얼마나 남았지?”

예배당을 지키던 병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예배당이 파괴되었을 경우 대항하기 위해 남겨 둔 최소한의 무기가 남은 전부였다.

“젠장! 이대로는 더는 대항할 수단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기사는 그 자리에서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예배당의 문을 두드렸다. 쿵, 쿵쿵…. 울림은 일정했다. 마물이 인간의 시체를 집어 던지는, 우연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 누구냐…!”

기사 한 명이 망설이다 외쳤다.

“설마 단장님께서 돌아오신 건가?”

“마물이 문을 저렇게 두드릴 리는 없는데….”

“그냥 모른 척해! 어쩌면 마물을 뒤에 달고 도망쳐 오는 중일지도 모르잖아! 여기는 이미 만석이야, 늦었어!”

“흐으, 흐으윽….”

예배당 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로위나 단장이 이끄는 부대 외에는 더는 귀환할 동료가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성녀들과 병사들이 함께 문 앞에 섰다. 마물에게는 인간을 흉내 낼 수 있는 지성이 없었다. 동료라면 서둘러야만 했다. 혹시 마물에게 쫓기는 중이라면 이미 반쯤 먹혔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병사들이 고민 끝에 빗장을 열고 묵직한 문을 밀어냈다.

“느려 터졌군그래! 이러니 마물에게 족족 잡아먹히지.”

문이 어느 정도 열리자, 손님은 참지 못하고 예배당 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당신은…?!”

그 정체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병사보다 두 배는 더 거대하고 일그러진 형상은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마물도 아니었다. 신체의 절반만이 마물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 용병이잖아!”

“설마 알파님께서 우리를 구해 주러 온 건가?”

“아니, 그 작자들은 우리를 진작에 버렸어!”

“그럼 어째서, 여기까지….”

마물 혼혈의 등장에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신임을 전적으로 받는 알파들은 성녀를 대신할 새로운 구세주였다. 그러나 마물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자, 백성들의 기대와 달리 그들은 인간을 지켜 주지 않았다. 저들끼리 전선을 구축하고 접근하는 마물을 처리할 뿐…. 그 때문에 살아남은 인간 중에서는 저들이 거대한 검은 손자국을 연 주동자라고까지 믿는 이도 있었다.

“여긴 왜 온 겁니까! 설마… 도, 도움이라도 구하러 온 겁니까?”

문을 연 기사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뭐, 도움을 구해? 누가 누굴?”

표정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 물든 용병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신체의 절반은 이미 마물화가 되어 일그러져 있었지만, 명백한 비웃음임을 알 수 있었다.

“웃기지 마. 여기까지 온 건 명령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용병은 거대한 자루를 등에 메고 있었다. 인간 혼자서는 결코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 자루를 땅에 내려놓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주뼛거리면서도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혹여나 자루 안에 마물이 가득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건…!”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안에 가득 든 것은 칼과 화살 같은 무기였다. 지금 병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었다.

“나 말고도 다른 녀석들이 예배당 근처에 몇 자루를 더 옮겨 놓을 거다. 주워 가서 쓰든 말든 알아서 해라. 우리야 무기는 따로 필요 없으니.”

용병은 인간들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가 뭡니까.”

기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애초에 무기를 빼앗아 간 건 당신들… 알파이지 않습니까.”

침묵을 지키던 성녀들 쪽에서 말이 나왔다. 무장해제를 한 탓에 초반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마물에게 범해지고 죽었던가? 알파에게 받은 무기를 병사들에게 나눠 주면서도, 사람들은 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나야 너희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만, 대장의 명령이라.”

용병은 이마에도 눈이 나 있었다. 세로로 뜬 눈동자가 온갖 방향으로 돌아가며 예배당 안의 사람들을 훑었다. 포식자의 눈을 피해 사내들이 몸을 감췄다. 용병은 그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알려 주지. 네 곳의 성문을 모두 확인해 봤지만 도망칠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우리조차도 뚫을 수 없더군.”

선심이라도 쓰듯 용병이 진실을 고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예배당에 모이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그들보다 강한 용병들은 달랐다. 진작 탈출 경로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그 누구도 그 말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희망마저 사라졌다는 의미니까.

“뭐, 쉽잖냐? 성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거다. 그렇게 똑똑한 척을 해 댔으면서 이럴 땐 나보다도 멍청하군!”

침묵을 견디다 못한 용병이 대신 말을 끝맺었다.

“…너희나 우리나 덫에 잡힌 쥐 처지라는 거겠지.”

입 안이 쓴지 용병은 카악, 침을 뱉었다. 마물로부터 인간을 지켜 주는 일이라면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방어전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 * *

검은 손자국에서 지상으로 하강하는 마물의 모습은 사람들이 말하곤 하던 천사의 강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검은 천사가 추락하니 왕성은 붉게 타올랐다.

툭, 투둑….

그리고… 배에 가해지는 충격과 함께 칼리번은 피를 토해 냈다. 완전히 뒤로 넘어간 그를 붙잡은 것은 밧줄과도 같은 금사였다. 허리에 감긴 금사 탓에 칼리번은 두 팔이 뒤로 늘어진 채로 서 있었다. 그야말로 거미줄에 붙잡힌 나비의 꼴이었다.

“하, 하아….”

칼리번은 피가 섞인 호흡을 헐떡였다. 에어리얼의 말 한마디에 목숨은 연장되었으나 대신 그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어린아이가 나비의 날개를 뜯으며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듯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철저히 놀잇감으로 삼았다. 칼리번은 검투사와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삶도, 죽음도 왕의 손가락을 따라 정해지게 되었다.

“윽…!”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칼리번은 무작정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몸에 충격이 가해졌다. 칼리번에게 맨손 격투는 익숙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육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칼리번이 원래의 몸이고 에레즈는 어린 상태였다고 한들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허억…….”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두덩이가 부어올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것 참 눈물겨운 광경이군. 네가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망설이는 동안, 인간의 절반이 사라졌잖아? …아, 네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말이야.”

에어리얼이 한쪽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는 마물의 눈을 빌려 왕성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

칼리번은 부어오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일깨우자 그의 어깨는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칼리번이 에레즈를 상대로 무의미한 패배를 반복하는 동안, 성안의 사람들은 착실히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야, 마물이 무서워서 서로 힘을 합치기 시작했어. 심지어 마물 혼혈과도 손을 잡았더군.”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하는 결투는 황제에게 재미를 안겨 주지 못했다. 에어리얼은 싸움을 붙이려고 일부러 칼리번의 신경 줄을 긁어 댔다.

“…한 마리의 오메가에게는 그렇게도 잔인하더니만, 반대로 자신들이 같은 처지에 이르니 더없이 진지해지는 꼴이란.”

다른 때와는 달리 웃음기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에어리얼은 잔혹한 광경을 목도하고도 일말의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

“인간이 잔인한 이유는 오직 자신에게만 용기와 숭고함이 있다고 믿어서야.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런 걸 줄 수 있는 신도 없는데 말이야….”

웃음과 분노로 치장한 것이 아닌, 그런 무표정이 에어리얼의 본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더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에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시체의 모습 말이다.

“칼리번. 너는 내 몸으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지. 내 몸으로 본 세상은 어땠지?”

에어리얼이 물었다.

“그렇게까지 버텨서라도 에레즈 프리드웬과 인간은 지킬 가치가 있었나?”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모른다.”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잘라 냈다.

“아니, 다 알고 있는 얼굴인데?”

에어리얼은 웃음으로 얼굴을 치장하고는 이죽댔다.

“…….”

칼리번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에어리얼에게 놀아날 뿐이다.

“아무리 멍청한 너라지만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옳다는 것을.”

에어리얼은 완벽한 승리를 선언했다. 칼리번은 왕성도, 절벽도 차지하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승세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승리는 눈에 보이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네가 오메가인 이상 날 굴복시킬 논리나 명분은 없어. ‘에레즈 프리드웬을 위해서’라는 목표조차 이제는 관성 아니야?”

그 말에 칼리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금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네가 내 기억을 읽는 동안 나도 네 기억을 읽었거든.”

“닥쳐….”

칼리번은 후들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세우며 핏물과 함께 그 말을 뱉어 냈다.

“난 네 진심을 알아.”

그 이상 에어리얼이 지껄이게 둬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온몸이 금사에 묶여있어 그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 그 안에 담긴 것은….

“넌 감정이 없는 게 아냐, 칼리번. 사실 너도 나만큼이나 인간을…. 아니지, 이 세상을 증오하잖아?”

에어리얼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칼리번의 시꺼먼 진심을 지상 위로 끌어 올렸다. 한번 불을 붙이면 그 무엇보다도 뜨겁게, 오래 타오를 감정을.

“…….”

칼리번은 피에 젖은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에어리얼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마 반박할 수 없을걸?”

에어리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8년 전,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나겠지? 우리 오메가는 어떤 식으로 발현하는지 알려줬었잖아.”

그랬다. 그때 에어리얼은 강제로 자신의 기억을 칼리번에게 주입시켰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바치지 않으면 어떤 꼴을 당할지 보여 주기 위해…. 그리고 그가 했던 말들….

<아마도 너는, 태어났을 땐 감정이 거의 제거되다시피 메말랐을 거야.>

<그건 일종의 생존법이야.>

<그렇게 인간과 마물 사이에서 섞여 지내다가…. 어느 순간, 발현하는 거야. 무수하게 많은 알파 중 단 하나에게, 강렬한 교미의 욕구를 느낄 때 말이지.>

그 말대로 칼리번은 태어날 적부터 무디고 둔했다. 아이인데도 울지 않고 늘 무표정이라 마을 사람들이 불길하다며 꺼릴 정도였다. 세상에는 칼리번 말고도 수많은 기형 마물이 존재했다. 그들은 일그러졌어도 생명이었기에 이상 한결같이 본능에 충실했다. 그에 비하면 칼리번은 무생물에 가까웠다.

그래서 칼리번은, 에어리얼에게서 무감정이 오메가의 천성이라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자신이 왜 다른 알파들과도 다른지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감정이 부족한 것은, 알맞은 알파를 만날 때까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우리는 감정 없이 태어난 게 아니야. 칼리번. 오히려 넘쳐나는 거지. 넘쳐나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질려버리고 만 거야.”

“…….”

“환멸이지.”

말이 화살이 되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진실에 꿰뚫린 칼리번은 무언가를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피는 아니었다. 몸속에 숨겨져 있다가 마침내 밖으로 흐르는 것은….

알파에게 폭력성과 번식 욕망이 태생적인 본능이듯, 오메가 또한 환멸을 안고 태어난다. 무수한 체념과 용서로부터 태어난 존재가 이 세상을 증오하지 않을 리가 없다.

환멸은 무심과 닮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느끼지 않는 것 같고, 아파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르다. 그 둘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포기했을 뿐.

<네가 뭔데 함정에 기어들어 가? 난 분명히 무시하라고 명령했을 텐데! 내 말이 우습냐? 너 하나 때문에 몇 명이 뒤질 뻔한 줄 알아?!>

<대장, 대장은 우리가 기사라도 되는 줄 알아?>

<카, 칼…. 너, 너는… 어, 어째서 나, 나를 구, 구, 구해 준 거야?>

<…그래서요? 구하기라도 할 겁니까? 저희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겁니까? 아니면 알량한 정의감입니까? 이길 가망이 없는 전투에서 인간들이 그것 때문에 죽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인간만을 불쌍하게 여깁니까? 그런다고 저들이 우리를 봐줄 것 같습니까? 어째서, 싸우기도 전에 포기하는 겁니까?>

정말로 감정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칼리번은 계속해서 부딪치고 나아갔다. 자신보다 약한 것을 포기하지 못했고 고통받았다.

“애초에 감정이 없다면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끌릴 리가 없지. 더럽혀지지 않은 무구한 존재에게 황금의 기적을 바란 거잖아? 그렇게 믿다가 녀석이 기적은커녕 한 사람의 몫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실망했으면서.”

“…….”

칼리번은 에어리얼에게 붙잡혀 발가벗겨지고, 피부가 벗겨져 핏줄과 근육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때보다도 더욱 날것이 된 것만 같았다.

에어리얼의 말대로다. 그와 자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다. 어쩌면 자신 또한 그만큼이나 인간을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에어리얼의 몸이 되어, 알파와 인간들에게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 태어난 그 순간부터….

<칼,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죽여야만 한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란다.>

…어린 시절, 양아버지의 변명을 듣고 시작되었던 의문. 어째서 동물이나 마물은, 인간을 닮은 마물 혼혈은 죽여도 괜찮으나 인간만은 살려야만 하는가? 어째서 인간만이 특별한가? 인간만이, 용서받는가.

“인간들은 까마귀처럼 그럴듯한 가치관과 관념으로 자신을 치장하지만, 쓸모가 다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정하고 짓밟곤 하지. 넌 그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잖아.”

에어리얼이 말한다. 마치 거울을 보고 대화하는 것만 같다. 그가 품었던 의문은 지금 에어리얼이 내린 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마물 혼혈이란 조금도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저 인간의 좀 더 끔찍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숙명은, 그들의 비극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새로운 껍질을 쓰고 이 땅 위에서 되풀이될 것이다. 마물은 인간을 닮아 가고 있으니까….

“지금의 널 붙잡고 있는 건 과거의 추억이 전부겠지. …하지만 큰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쓰라려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속내를 전부 안다는 듯이 말했다. 그 또한 과거의 눈부신 추억을 산 중턱에 죽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에어리얼의 말은 한번 들으면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말솜씨가 뛰어난 탓도 있겠지만, 에어리얼이란 결국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설득도, 미래의 실패한 자신이 하는 설득보다 강할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내게 무릎을 꿇는다면, 적어도 마지막 순간까지는 살려 주지.”

에어리얼의 손짓을 따라 금사가 세게 당겨졌다. 칼리번의 몸이 휘청였다.

“나와 함께 이 세계의 끝을 보자.”

따지고 보면 너는 이 녀석보다 나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 왔잖아? 에어리얼이 덧붙였다. 그는 언제나 잔혹하면서도 마지막은 달콤하리 만치 다정했다. 그래서 그를 거부하는 일은 더욱 괴로웠다.

“…….”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미모가 사라질 정도로 부풀어 오른 얼굴로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에어리얼은 옳다. 그리고 자신과 같다. 그들은 세상을 향한 환멸을 공유하고 있다. 그랬기에 칼리번은 자신보다 약한 자를 돌보고 지켰으나 그 이상을 하지 않았다.

칼리번은 양어머니와 함께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혹은, 마을에서 배척당할지라도 누이이자 여동생의 곁에 남아 그녀의 가족을 지키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용병이었던 시절, 젠의 과거를 묻고 그녀를 도울 수 있었음에도 알려 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과 다른 에레즈 프리드웬의 정체를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다.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음을, 악착같이 매달려야 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에어리얼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지하로 추락한 때가 아니었다. 다시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후였다.

에어리얼의 계획에 속아 숲을 헤맸지만, 그것은 또한 되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시간만큼은 온전한 칼리번만의 경험이자 기억이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작은 돌멩이를 모아 갔다. 그리하여 지금, 칼리번은 인간을 포기하고, 본인이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간 겪었던 고문과 학대보다도 쓰라리게, 에레즈 프리드웬의 외면으로부터….

칼리번의 검은 눈은 에레즈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에어리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를 봐!”

에어리얼은 귀가 얼얼하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에레즈의 금사가 칼리번의 팔을 부러뜨렸다.

“욱…!”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에어리얼이 바라던 대로, 검은 눈이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개자식. 넌 항상 나를 보지 않아.”

“…….”

“내 발밑에 구르고 있었으면서도,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에어리얼의 감정에 반응한 금사가 당장에라도 칼리번의 눈을 쑤실 듯 코앞까지 날을 세웠다. 그러나 칼리번은 눈을 감지 않았다.

“제길! 널 이해 못 하겠어, 칼리번. 가장 낮은 곳에서 너와 고통을 함께한 나한테는 적대적이면서, 이딴 걸 왜 목숨처럼 아끼는 걸까? 고작 몇 번 마주쳤을 뿐이면서!”

“으, 으윽…!”

에어리얼은 금사로 칼리번의 눈을 파내는 대신 부러진 팔을 더욱 옭아맸다. 에어리얼이 손이 주먹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만치 칼리번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하하, 누가 보면 직접 낳은 자식인 줄 알겠어? 정작 네가 낳은 마물은 소중히 대하지 않았으면서 말이지.”

“커헉, 큭…….”

에어리얼이 누구를 의도하고 꺼낸 모욕인지 칼리번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로 숨을 헐떡이던 에어리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 파악이 덜 되었나 본데, 에레즈 프리드웬은 네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원래 어떤 녀석인지 알게 되면 깜짝 놀랄걸?”

에어리얼은 마침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 녀석은 비겁하고 야비한 거짓말쟁이야. 다른 알파와 다를 바 없어. 아니, 그보다 더 영악하지. 오메가에게 노팅을 하고 싶어서 제 본성을 숨겨 왔거든.”

“……!”

“본성을 숨기는 알파라니…. 오메가를 무력화시키려는 알파는 하나둘씩 보여서 그러려니 해도, 이런 음습한 알파는 또 처음이란 말이지. 역시 프리드웬이야. 다른 알파들보다 한 걸음 빠르다니까.”

여태껏 숨겨 왔던 비밀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에어리얼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에레즈는 말이야, ‘칼리번’의 몸을 정말로 좋아하더군.”

팔이 부러진 고통에 숨을 간신히 내뱉던 칼리번의 몸이 떨렸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몇 번이고 이 몸 안에서 좆을 부풀리고 젖을 빨았지. 성장하기 전의 그 작은 몸으로도…. 제법이지?”

“…….”

죽은 사람처럼 굳은 눈이 에어리얼을 올려다본다. 에어리얼은 짧은 머리카락을 버릇처럼 쓸어 올리며 비죽 웃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너야말로 여태껏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알파와 즐겼잖아? 설마 저 알파가 너만 알기를 바라는 못된 심보를 지닌 건 아니겠지?”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일까? 에어리얼이 얼굴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그에 따라 그의 목소리도 여러 번 겹쳐졌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구별한 능력은… 없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에레즈는 네 과거를 봤어.”

비틀거리는 칼리번의 귀에 칼날 같은 말이 꽂혔다.

“과…거?”

칼리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래, ‘칼리번’의 과거. 칼리번이 울부짖으며 알파의 좆을 받아들이고, 입으로 빨고, 배가 부르고, 마물을 낳는 모습을 말이야.”

칼리번의 검은 두 눈이 확장되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자신이 며칠밖에 쓰지 못한 오메가를 장장 8년 동안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했지. 칼리번의 몸을 찾자마자 바로 노팅부터 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에레즈 프리드웬의 정신을 빼앗을 수 있었겠어?”

칼리번이 반응을 보이자 에어리얼은 신이 났다. 에레즈가 칼리번의 몸을 부수는 사이, 에어리얼이 그의 정신을 혼란에 빠뜨렸다. 회유와 모욕을 반복하며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때. 이제는 좀 정신이 들려나?”

에어리얼은 에레즈와의 모든 승부에서 기권만 해 왔던 칼리번을 향해 이죽거렸다.

“…….”

칼리번의 입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뜨겁게 녹인 검은 타르가 흘러들어 오는 것만 같다.

“이 이야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전부 네 잘못이야, 칼리번. 네가 도통 포기하질 않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껍질을 빼앗은 오메가다. 그가 자신의 몸으로 무슨 짓을 벌였을지 어떻게 아는가?

거기다 에레즈는 알파였다. 그동안 무수히 보아 온 알파….

“이제야 좀 볼 만한 표정이 되었잖아.”

나랑 똑같은 얼굴 말이야, 에어리얼이 중얼거렸다.

* * *

마물의 공격에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예배당은 요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촛불 하나 켜지 못해 어둑한 예배당 안은 부상자의 신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서로를 부둥켜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진 신의 형상이 그런 인간들을 내려다볼 뿐이다.

왕성에 당도하기 전, 마물이 지배하는 세상을 버텨 오며 수많은 시체와 마주했다. 그러나 방금까지 살아서 대화를 나누던 상대가 시체가 되어 바로 곁에서 나뒹구는 것은 다르다. 자신도 곧 그와 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오염되고 피로 얼룩져 갔으나, 그 영혼만큼은 더욱 순수해졌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그렇게 애틋하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재해와도 같은 거대한 힘 앞에서 분열과 싸움은 사지고 한마음이 되었다. 사람들은 한데 모여 기도를 올렸다.

그 가운데에는 베이가도 있었다. 오랜 세월 유폐된 왕비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인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전쟁터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섞여 부상자들의 치료를 도왔다.

“저와 교대하시죠. 밤을 버티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쉬시는 게 좋습니다. 거기다 돌봐야 할 아이도 있으시니….”

그때, 한 여인이 베이가를 붙잡았다. 마음이 어지러웠으나 그녀의 말이 옳았다. 베이가는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를 받아 들고는 먼지 낀 벽 한구석에 등을 기댔다. 텁텁한 습기와 어둠, 소음.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든 환경일 텐데도 아기는 칭얼거리거나 울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었으나, 아기가 보기 드물게 의젓한 탓이라기보다는….

“이게 그렇게 마음에 드니?”

일렁이는 금빛에 현혹된 탓이 커 보였다. 금사 뭉치를 손에 쥔 아기를 보며, 베이가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알테르에게서 잘라 낸 금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빛이 신기했는지, 아니면 그 때문이라는 변명거리가 필요했는지, 베이가의 주변으로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베이가는 누구보다도 공포에 질렸을 아이들에게 곁을 내주었다.

쿠궁, 쿵—

소음과 지진은 예배당의 벽을 한 차례 거쳐 전해졌다. 이제는 익숙해졌나 싶으면 불쑥, 사람을 다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나가기를, 폭풍이 이대로 지나가기를….

그때였다.

“마, 마물이다—! 모두 피해!”

예고도 없이 예배당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지붕에 난 구멍을 통해 마물들이 들어오자, 그 잔해가 사람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예배당 안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마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마물은 벌써 인간을 덮치고 있었다. 서로를 의지하며 간신히 진정하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빗장을 걸어 둔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열면 안 됩니다! 지붕을 막고 버텨야 합니다!”

“시, 싫어! 살려줘!”

“저리 꺼져— 으, 으아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배당 안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빗장을 차마 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피가 문을 붉게 적셨다.

“…모두 내 뒤에 숨거라.”

베이가는 결연히 검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무너진 지붕 아래로 걸어 나가자, 희미한 빛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구멍 난 지붕 위로 보이는 하늘은 밤보다도 탁하고 컴컴했다.

* * *

알버트가 돌아왔다!

비록 마물에게 범해지는 추태를 보이기는 했으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과 재회한 리론 후작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눈물과 콧물, 정액으로 얼룩져 추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자꾸만 웃었다.

안타깝게도 부자가 기쁨을 나눌 시간은 없었다. 마물이 이상하리 만치 강했다.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을 까마득히 넘는 거대한 존재를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상, 전투가 아닌 도망에 가까웠다.

어부의 그물을 뚫고자 버둥거리는 물고기처럼 날카로운 실은 비늘을 뚫고, 사냥꾼의 화살을 피하고자 하는 사슴처럼 화살촉은 뿔을 부러뜨린다. 설령 살을 잃고 뼈가 부러질지라도 목숨을 남기기 위해서는 달려야만 했다. 알버트를 뒤따르던 병사의 수는 점점 줄어 갔다.

“알버트…. 아아, 알버트….”

그러나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리론 후작은 제 아들의 이름만을 한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 아들, 알버트….”

소중하기 그지없는 나의 아들. 가문의 후계자. 알버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못 할까!

퍽!

그때, 마물이 던진 기둥에 순식간에 병사 둘이 깔려 죽었다. 그들 바로 곁에서 달리던 알버트는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는 있었으나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알버트와 리론 후작은 서로 끌어안은 채로 땅 위를 굴렀다. 시체와 무너진 건물의 잔해 위를 구르자 리론 후작은 온몸을 흠씬 얻어맞는 것만 같았다.

“아, 아아….”

후작은 네 발로 엎드린 채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그러나 여의치가 않았다. 병상에 오래 머무른 탓에 극도로 쇠약해진 탓이었다. 그렇게 알버트와 리론 후작은 부대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병사들이 돌아와 주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갑옷을 입은 탓에 부상이 덜한 알버트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마물들이 개떼처럼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칼로 마물들을 위협하며 리론 후작을 제 등 뒤로 숨겼다.

“……, ……!”

알버트는 마물 한 마리, 한 마리를 힘겹게 막아 내며, 리론 후작을 향해 무어라 외쳐 댔다.

“아, 알버트…?”

“…! ……, ……!”

“뭐라고…. 도대체 뭐라고 하는 것이냐….”

리론 후작은 총기를 잃은 눈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잔해 사이로 몸을 기민하게 숨기거나, 시체에서 무기를 뺏어 함께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쇠약해진 탓일까, 아니면 마물에게 희롱당한 탓일까? 멍청하니 주저앉아 몰려드는 마물과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왕성이… 어째서 이렇게…….”

왕성은 리론 후작이 기억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악마의 혀처럼 새빨간 불길에 건물과 사람들이 잡아먹히고 있다.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 기둥이 세워졌는데, 하늘은 그보다도 더 새까맣다. 마치 지옥의 신전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만 같았다.

…아아, 그래, 그랬다. 모든 것이 뒤집혔다. 인간들이 마물에게 사냥당하고, 그 결과로 잡아먹히거나 범해지는 것처럼….

“…, …!”

알버트는 용맹했으나, 그 용기에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알버트는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물들은 갑옷째로 그의 몸을 뜯어먹었다. 멍하니 검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리론 후작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놈들…! 감히 내 아들에게 뭣 하는 짓이냐…!”

리론 후작은 새까맣게 탄 시체의 손에서 검을 뺏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전과 같은 힘도, 기력도 남지 않았다. 리론 후작이 휘청거리자, 마물들은 쓰러뜨리기 쉬운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히, 히이…!”

마물에게 범해지던 기억이 떠오르자 리론 후작은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물의 날 선 발톱이 그의 목을 향한 순간이었다.

“알버트!”

피로 물든 은빛 갑옷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 물러나거라! 이 아비는 괜찮다…! 널 지킬 수만 있다면, 이 몸 따위는…!”

리론 후작이 외쳤다. 그러나 알버트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마물의 뿔이, 발톱이, 그리고 촉수가 알버트의 몸을 꿰뚫었다.

“알버트!”

알버트의 왼쪽 가슴이 꿰뚫렸다. 곧바로 리론 후작의 얼굴 위로 뜨거운 피가 끼얹어졌다. 알버트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지키겠다는 듯, 리론 후작의 몸 위로 쓰러져 그를 가려주었다.

“아, 아아, 알버트…. 알버트……!”

아들의 시체를 받아 든 리론 후작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똑같은 방식으로 알버트를 또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피가 갑옷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 대답하거라! 알버트, 이 아비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알버트…!”

뭐라도 좋으니 한마디라도…! 리론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투구를 벗겼다. 무거운 책임으로 제련된 투구가 땅으로 떨어지자 백합처럼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가는 머리카락과 얼굴은 온통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코와 입에서는 피를 흘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놀라울 정도로 그 모습은 정갈했다.

“……?”

리론 후작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이 기막힌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로위나, 네가, 어째서……. 여기에….”

알버트인 줄 알았을 때는 한없이 넓어 보였던 그 어깨가, 늙은 자신보다 작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팔도, 손도, 다리도…. 모든 것이.

품에 안은 시체는 몇 년 전에 죽은 알버트가 아닌, 그의 딸 로위나였다.

<감히 네 오라비의 검을 들다니!>

이 순간 떠오르는 기억은— 딸의 뺨을 거침없이 내리치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께서 제게 검을 허락하지 않으시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여자라고 뒤로 물러서라는 건… 알테르 프리드웬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나 통하던 말입니다.>

<뭐라고?!>

<지금은 다들 검과 창을 들고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리론 후작이 고개를 저을 때마다 정액이 흘러내린다. 청량한 로위나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건 사내들이 대부분 죽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 하지만 너는 다르다. 로위나! 너는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딸이자 우리 가문의 하나뿐인 영애 아니더냐? 이대로 왕자님께서 무사히 왕성을 탈환하게 된다면, 너는 마땅히 왕비 자리에 앉게 될 거다. 그러니 넌 잠자코 이 아비가 하라는 대로 따르면 된다!>

<왕비 자리는 탐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저한테는 성녀의 자질도 없는걸요.>

<이 아둔한 것!>

딸은 고개를 저었고 아버지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아 분노했다.

“이, 이 미련한…. 내게서… 알버트뿐만 아니라 너마저 잃게 할 셈이냐?”

끝내 아비의 뜻을 따르지 않고…. 리론 후작의 두 눈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로위나….”

왕성을 되찾고 평화가 돌아오면, 리론 후작은 이전처럼 로위나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구두를 신기고 싶었다. 하얀 손에 어울리는 것은 검이 아닌 꽃이었으므로.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갑옷을 입은 딸의 시체가 아니었다. 더는 지켜 줄 사람이 없는 리론 후작에게 마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전의를 잃은 지 오래였다.

* * *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향해 달렸으나 금사가 팽팽하게 붙잡았다. 힘의 반작용으로 인해 가벼운 몸은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부러진 팔은 몸을 지탱해 주지 못했다.

“하, 하하하! 전부 봤다고, 전부! 화풀이를 하려면 내가 아니라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해야지!”

그 우스운 꼬락서니를 보고는 에어리얼이 폭소했다.

“에어, 리얼…!”

칼리번은 다시 한번 에어리얼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를 에레즈 프리드웬이 가로막았다.

“큭…!”

칼리번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금사는 칼리번에게 따라붙었다. 엉거주춤 금사를 피하던 칼리번은 그만 절벽 너머로 쓰러지고 말았다.

“허억, 헉—!”

아래로 추락하기 직전, 간신히 두 손으로 절벽 끝에 매달렸다. 부러진 팔이 비명을 질렀다. 메마른 몸은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으로도 크게 휘청였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도움을 바라며 위를 바라보았다.

“…….”

에레즈 프리드웬이 여유롭게 칼리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님.”

칼리번이 중얼거린 순간— 에레즈의 발이 그의 손가락을 지그시 밟았다.

“!”

손가락이 부러지는 고통에 칼리번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손을 빼내려 했지만, 못이 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가느다란 금사가 칼리번의 팔에 감겨들었다. 칼리번의 몸이 다시 절벽 위로 끌려왔다.

“헉, 허억….”

에어리얼의 허락 없이는, 칼리번은 죽을 수조차 없었다. 일방적인 폭력은 계속되었다. 어지러웠다. 칼리번은 더는 자신의 의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에레즈의 주먹과 발길질에 흔들리는 부표와도 같았다.

“크, 으으윽…!”

힘의 차이가 워낙 큰 탓에, 멀리서 보면 그 광경은 전투가 아니라 춤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아, 으으……. 하아, 하아…….”

비틀거리던 칼리번은 결국 에레즈에게 매달렸다. 에레즈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안겨 오는 칼리번을 걷어차지 않았다. 아직은 죽이지 말라는 에어리얼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왕자님…. 왕자, 님….”

칼리번은 혼잣말을 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분명 똑바로 서 있는데도 에레즈 프리드웬이 배 위에 선 것처럼 흔들거렸다. 사실은, 칼리번의 머리가 자꾸만 흔들거리는 탓이었다.

“…멍청한 칼리번. 내가 네 계획을 모를 것 같아?”

에어리얼은 팔짱을 낀 채 맞아 죽어 가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에레즈 프리드웬만 정신 차리게 하면 된다고, 그러면 다 해결될 거라고 믿는 거겠지? 내가 그 대비를 안 해 뒀을 것 같아?”

“크으…. 하아….”

얼굴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부풀었고 시간이 지나자 하얀 얼굴 위로는 붉고 푸른 멍이 올라왔다.

“이건 세뇌가 아니야. 에레즈 프리드웬이 하는 행동은 전부 그가 직접 내린 결단이다. 프리드웬 왕실의 유구한 역사와 왕성의 백성들, 그리고 너의 과거를 보고 말이지.”

에레즈는 한 걸음 물러섰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칼리번의 몸은 균형을 잃고 그대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아, 하…. 하아…….”

다른 사람과는 다른 중력이 적용되기라도 하듯, 칼리번은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모든 것을 보고 말았다.

자신의 과거를.

자신이, 지하에서 무슨 짓을 당했는지….

칼리번은 지하에서 겪은 ‘그 일’을 칼에 찔리거나, 팔이 잘린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레즈가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어째서 직접 겪은 고난보다도 에레즈 프리드웬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더 고통스러운지, 칼리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난도질을 당한 것처럼 너덜거렸다….

“8년 전, 너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몇 번이나 그 기회를 걷어찼지? 에레즈 프리드웬도 마찬가지야. 네 모든 기억을 봤으면서도 이 녀석도 끝끝내 네 목을 베지 못했어.”

에어리얼은 손가락으로 제 손을 가리켰다.

“차라리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면 이런 간단한 술수에 놀아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에어리얼이 목을 만지던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에레즈는 칼리번의 곁을 떠나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녀석은 네 기억 속의 모습처럼 마냥 아름답지 않다고. 훨씬 징그럽고… 음험한 생명체지.”

에어리얼의 곁에 선 에레즈는 보답을 바랐다. 에어리얼은 건성으로 그의 뺨을 탁, 탁, 두드렸다.

“설마 이 녀석이 우리의 대화를 못 듣는 것 같아? 그럴 리가! 전부 듣고 있을걸? 왕성이 저 꼴이 된 것도 다 알고 있을 거야. 모른 척할 뿐이지.”

“……!”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비극에 치달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칼리번의 시선이 황급히 에레즈를 향했으나, 인형 같은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하하, 하나같이 멍청하다니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우리의 ‘칼리번’이 여기까지 친히 당도해 주셨는데, 백성과 동료를 배신하고 선택한 이 ‘껍데기’밖에 보지 못하다니 말이야.”

에어리얼은 자신이 뺏은 칼리번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이 몸뚱이마저 잃을까 두려운가 봐. 설령 그게 악몽이라도 말이지.”

눈의 착각일까?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고 또 보았다. 에어리얼의 말을 듣고 나니 내내 무표정이라도 생각했던 에레즈의 얼굴이 서러워 보였다.

“…구경도 슬슬 지겹군요. 이제 끝내도록 하죠.”

에어리얼이 명령했고,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움직이려 한 순간, 에어리얼이 멈춰 세웠다.

“다시는 붉은 오메가가 육체를 재생할 수 없도록 성검으로 끝을 내십시오.”

그 말을 들은 에레즈는 방향을 바꿔 성검을 뽑아 들었다. 검의 손잡이를 쥐자 그의 손에서 가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물의 피가 섞인 존재는 그 누구든 공평히 불태우는 검. 그 때문에 어린 에레즈는 성검을 쥐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의 에레즈는 몸을 태우는 고통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칼을 바닥에 끌며, 칼리번에게 걸어갔다.

“왕자님….”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입안에 피가 가득 고여 더는 말을 하기도 어려웠으나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말로 설득한다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저를 보십시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칼리번은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으로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레즈는 칼리번을 보지 않았다. 보지 못했다. 칼리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에레즈와 가까워졌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까마득히 떨어져 있을 때보다도 멀게만 느껴진다.

단순히 오메가의 향기에 세뇌당한 것이라면 모르나, 굳건한 믿음을 바꿀 수는 없다. 더구나 칼리번을 구하겠다는 신념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수년간 굳건하게 지켜 온 마음이었다. 잔인하게도, 에어리얼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도 괴로우셨습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마저 남에게 맡겨 버릴 정도로?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물었다. 끝없이 아래로만 추락하는 감각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멀리하고픈 감정을, 칼리번은 알고 있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만나기 전까지의 자신이었으니까.

지직, 직,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땅에 끌리던 성검이 위를 향했다. 절대로 녹슬지 않는 성검의 칼날은 칼리번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부러진 손을 간신히 내밀었다.

“으윽!”

성검은 얇은 손등을 너무나 쉽게 꿰뚫었다. 칼리번의 손이 꿈틀거렸다. 성검은 이윽고 그의 몸으로 박혀 들었다.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화상이 몸에 새겨졌다.

칼리번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에레즈가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에레즈는 한쪽 팔로 칼리번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두 발은 금세 땅에서 떨어졌다.

“크으, 흐, 윽…!”

에레즈의 품에 안기자 검은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치 차가운 불꽃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는 다정하기 그지없는 연인의 포옹으로 보였다. 성검은 칼리번의 몸을 꿰뚫고는 다시 밖으로 튀어나왔다. 칼리번의 피가 검날을 따라 흐르다가 끝에서 맺혀 떨어져 내렸다.

“크, 허억…!”

칼리번의 입에서 울컥 피가 솟아올랐다. 붉은 피가 에레즈의 옷을 더럽혔다.

“하아, 하아…….”

칼리번은 성검에 꿰뚫린 손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에레즈의 몸에는 닿지 않았다.

“왕자님….”

눈앞이 점점 흐릿해져 간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었고, 두 눈은 부릅떠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에어리얼’의 아름다운 외모는 거대한 폭력 앞에 형편없이 뭉그러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프지가 않았다. 마침내 목숨이라는 초가 다 타들어 끝나 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 한 부분이 죽고 만 것일까? 기나긴 고난 끝에 맞이한 마지막은 오히려 가뿐하고 시원할 정도였다. 칼리번은 이대로 에레즈의 손에 밀려나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랬다.

‘이 정도… 거리라면.’

허공에서 덜렁거리던 칼리번의 손이 간신히 위로 올라와, 에레즈의 뺨에 닿았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처음 재회했을 때, 칼리번은 꼭 한번 그에게 닿고 싶었다. 이렇게 만지고 싶었다.

<너로 인해 난 전부를 잃어버렸어. 내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을…. 너는 그걸 이용할 뿐이었지.>

칼리번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사내가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해. 너만은 반드시… 이 손으로 죽여 주마.>

한쪽 눈과 팔을 잃은 지친 사내가 에어리얼이 만든 환각이라든가, 알테르 프리드웬이 아닌…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사실을.

칼리번은 자신 없이 어른이 되어 버린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목이 조여 죽음에 이르면서도 기뻤다. 그러나 지금의 에레즈는 칼리번을, 엉망이 된 에어리얼의 모습을 반사할 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

이대로는 아쉬워서 칼리번은 휘파람을 불었다. 원래 몸이 아니라 에어리얼의 몸인 데다가, 입 안이 피로 가득 차 있어 솜씨가 영 좋지 못했다.

“……?”

그러자 에레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에서 나는 소리가 신기한지 칼리번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님.”

작은 짐승 같은 그 행동 하나가 뭐라고…. 칼리번의 눈가가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왕자님….”

칼리번은 에레즈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는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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