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우화 (36/50)

| 목 차 |

10. 우화

11. 파드되

12. 재회

13. 엇갈린 별의 연인들

14. 황금의 피

에필로그. 시작

10. 우화

“혹시 ‘진짜’를 만나면 세뇌가 풀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군.”

칼리번의 머리 위로 싸한 웃음이 안개처럼 퍼졌다.

“…….”

상대는 침을 뱉듯 칼리번을 모욕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땅에 이마를 박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어리얼의 곁에, 에레즈 프리드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자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그 검은 돌려주시죠.”

빈정거리기는 했으나 에어리얼은 최소한의 약속은 지켰다. 아니, 칼리번을 좀 더 효율적으로 농락하기 위해 에레즈를 챙겨 주었다. 칼리번의 몸을 한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한 팔로 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으응…. 고, 고마워. 칼…. 나, 나, 같은 걸, 요, 용서해 줘서….”

“아닙니다, 왕자님.”

머리 위에서 오가는 대화는, 마치 과거가 칼리번만 남겨 두고 저들끼리 놀아나는 것만 같다. 이런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몸이 고통스러운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 칼리번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어째서 에레즈 프리드웬이 어린아이가 된 건지 궁금하겠지.”

“…으, 큭…!”

“순식간에 날 낫게 한 것도. 그렇지?”

커다란 발이 칼리번의 뒤통수를 짓밟았다. 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지자 그의 입 안으로 피가 섞인 흙이 들어찼다.

“넌 여태껏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칼리번. 이 녀석은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선하지도, 약하지도 않거든.”

“크읏…!”

“너만 아직도 이 녀석의 본성을 모르는구나.”

가엾게도.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머리를 지그시 밟으며, 동시에 위선적인 목소리로 그를 동정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말이야, 육체가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탈피’라는 것을 해.”

진실은 예고도 없이 칼리번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크, 흐으…. 탈피, 라고…?”

칼리번은 흙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한번 잘 생각해 봐. 너한테도 이 녀석의 탈피가 낯설지 않을걸?”

에어리얼의 혀는 오직 모욕과 현혹만을 담는다. 그러므로 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코뼈가 부러지지 않도록 두 팔로 땅을 지지하는 칼리번에게 그의 목소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모, 모르겠어…. 갑자기…….>

칼리번의 머릿속으로 아득한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네, 네가, 혼자, 나가는 게, 시, 싫어서…. 저, 전보다 더 괴롭고, 스, 슬프고…. 모, 몸이 아파지더니….>

금빛 머리카락을 헤치면 드러나는 하얀 뒷덜미.

<하, 하지만… 네가… 네, 네가 다치길 원 한 건 저, 절대 아니었는데…….>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너덜거리던 껍질들….

…하지만 그때의 에레즈는 성장했지,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날 속이려는 속셈인가? 웃기지 마라…. 갑자기 몸이 자라는 거라면 몰라도…. 으윽,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건, 그런 건….”

영원을 산다는 말과도 같지 않은가?

“꿈만 같지.”

에어리얼은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결과로서 네 눈앞에 존재하고 있어. 그것마저 부정하지는 못할걸?”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머리에서 발을 치웠다. 칼리번은 엉망이 된 얼굴을 들었다.

“…….”

그럴 리가 없다. 왕자님이 모든 것을 잊고 아이로 돌아갔을 리가 없어. 칼리번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쫓기며 보고 들은 ‘에레즈 프리드웬’은 훌륭한 왕이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에어리얼이 만든 가짜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칼리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성년식에서 그를 처음 보았던 것처럼…. 심장이 멋대로 날뛰었다. 본능이 속삭였다.

저건 진짜라고.

“칼리번. 너도 왕국 곳곳을 누비면서 기형 알파들을 보았을 거야. 인간과 알파, 어느 쪽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 말이야.”

“…….”

“…그런데 말이야, 도대체 기형 알파와 마물 혼혈의 차이가 도대체 뭐지?”

에어리얼은 한 팔에 안은 에레즈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뭐가 중요한 거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에레즈 프리드웬이 있었다. 그리고 왕국의 존망이 걸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도, 마물도 되지 못한 부스러기 같은 존재를 입에 올리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중요하지 않겠어?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사실상 기형 알파…. 아니, 기형 그 자체이고, 그 존재가 지금 일어난 모든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데?”

“…….”

에어리얼은 미소를 지었다.

“기형 알파란 건 말이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물 혼혈답지 않은 것들’의 총칭이야. 어떨 때는 인간과 소통이 불가능한, 이성이 없는 마물 혼혈을 이르는 말이라면… 또 어떨 때는 덜떨어진 알파들을 부를 때 쓰기도 하지. 인간보다도 약해 빠진 것, 혹은 인간과 마물의 모습이 보기 흉하게 섞여 버린 것, 껍질조차 얻지 못한 것…. 기본적인 욕구와 감정조차 갖추지 못한 것…. 그런 것들 말이야. 그리고 과거의 너는 ‘용병 대장’으로서 그런 기형 알파들을 처리해 왔겠지. 칼리번.”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칼리번은 굳은 얼굴로 반박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얼굴에 들러붙은 흙이 떨어져 내렸다. 그랬다. 칼리번과 같은 용병들은 인간과 공생하기 위해서 자신과 비슷한 존재들을 제 손으로 죽여 왔다. 아직 사내의 배에서 태어나지 않은 새끼, 혹은 태어난 직후 산속에서 살아남아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기형 알파들…. 그런 것들은 죽일 수밖에 없다. 내버려 두면 마물의 식량이 되거나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칼리번…. 한결같이 머리가 나쁘구나.”

에어리얼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칼리번을 내려다보았다.

“넌 여기 있는 에레즈 프리드웬과 다를 바가 없어. 정신이 어린애 수준에 불과하지. …그저 프리드웬 왕실이, 성녀단이, 그리고 젠이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야.”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그림자를 발로 휘저었다.

“그렇게 인간의 기준에 따라, 기괴한 형태거나 위협적인 개체는 발견될 때마다 처분당했지. 그 결과 우리가 ‘알파’라고 부르는 마물 혼혈들은… 겉모습을 인간답게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그러면서도 마물의 힘이 강하게 발현된 존재가 되었어. ‘기형’이라고 낙인찍힌 것들은 번식의 기회도 없이 사라지고 말이야.”

붉은 눈이 흘끗 칼리번을 스쳤다.

“도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시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에어리얼의 혀에 말려들고 있었다.

“인간이 마물이 되어 가는 것인가, 아니면 마물이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인가…. 알테르 프리드웬이 자주 했던 말이지.”

에어리얼은 시를 읊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 혀, 형님은….”

‘알테르’라는 단어가 들리자 에레즈가 전전긍긍했다.

“두려워 마세요, 왕자님. 그자는 이미 목이 잘려 죽지 않았습니까?”

에어리얼은 커다란 손으로 에레즈의 얼굴을 덮고는 자랑하듯 다독였다.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하는 칼리번의 목울대가 울렸다.

“…알파가 점점 인간을 닮아 가면서, 마물의 순수한 번식욕마저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에레즈는 에어리얼의 가슴에 뺨을 기대고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그는 ‘칼리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따르면서도 정작 에어리얼의 길고 긴 독백만은 조금도 듣지 않았다. 아니,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칼리번의 절절한 눈빛조차도.

“인간은 교미를 번식만이 아니라 다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잖아? 가학, 집착, 굴욕, 고문, 기만과 증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오메가가 됐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에어리얼은 일부러 칼리번에게 물었다. 생략한 한 가지가, 앞서 언급한 끔찍한 말들과 동격이라는 듯이.

“…….”

칼리번은 반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검은 눈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니 인간의 피로 더럽혀진 알파의 성욕이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까지 옮겨 가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반응이 영 불성실한 구경꾼이었으나, 에어리얼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자…?”

그 단어는 칼리번의 입 안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래, 여자. 아직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화된 알파가 점차 여자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반대로, 알파와 인간 남자 사이에서 여자를 닮은 알파가 태어나기도 했지.”

“…….”

칼리번은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었다. 기형 취급을 하기에는 아슬아슬하게 정상의 범주인 알파를 모아 놓은 용병대. 그곳에 있었던 여자 알파….

“그런 의미에서 그 여자 알파는 상당히 운이 좋았어. 인간이 세운 규칙대로라면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시종일관 신경질적이던 에어리얼의 인상이 순간적으로 누그러졌다. 칼리번은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에 눈 깜박할 사이의 변화를 눈치챘다.

“아니, 운이라고 한다면 과소평가하는 건가. 어찌 보면 그 여자가 살아남은 방식이나, 에레즈 프리드웬이 불멸에 가까울 정도의 회복력은 기형 알파의 생존 의지일지도 모르겠네.”

하, 하하, 에어리얼은 웃음을 털어 내고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여자 알파가 태어나 이 세상을 걸어 다니더니…. 기어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가 알파를 낳고 말았어, 칼리번.”

에어리얼은 팔을 살짝 기울여 품 안의 아이를 칼리번에게 보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알파다. 정확히는, 알파와 성녀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이지.”

여자… 성녀. 그리고 알파.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이, 칼리번에게는 더없이 낯설게 들렸다.

“…….”

말을 들었는데 뜻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칼리번은 에레즈를 처음 본 순간 빛을 본 벌레처럼 이끌렸다. 그를 생각하며 고통스러웠던 지하 생활을 버티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레즈 프리드웬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먼 옛날, 남자의 몸에서 마물 혼혈이 처음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이러했을까? 마물은 오직 사내만을 탐한다. 그것이 바로 칼리번이 평생 보고 경험해 온,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그런 당연한 세상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 탄생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할 수 있겠어? 어쩌면 네가 아는 여자 알파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

“하지만 이번은 달라. 이건 용인된 선을 넘은 기형이야, 칼리번. 예언의 선행이자 여기까지 온 네 모든 희생과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존재지. 여자의 피와 프리드웬의 예언을 물려받은 이 괴물이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그래서 널리 번성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에어리얼이 물었다. 칼리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두려워서였다. 알지도 못하면서 두렵다. 칼리번은 이 감각을 알고 있다. 과거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에 느끼는 공포였다.

<다… 당신들은 알파라 우리와 다르게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에레즈와 젠을 보내고 홀로 남았을 때,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이 세상은 지옥이 되고 말 거다.”

이 순간, 에어리얼과 칼리번은 마치 한 몸처럼 같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오메가이기 때문이었다.

* * *

에어리얼과 칼리번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아스터는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단 하나뿐이었고, 그것을 완료하기 전까지는 에어리얼에게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죽든, 알파가 죽든 상관없다. 그에게는 에어리얼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스터의 투구가 목표물을 찾기 위해 돌아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젠이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하아, 하아……. 이봐.”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지, 젠은 속이 텅 빈 투구에게 말을 걸었다.

“널 닮은 사람을 알고 있어.”

“…….”

“그 망할 금사를 이용하는 방식 말이지….”

아스터의 백금사가 젠이 있는 장소로 뻗어 나갔다. 그녀는 백금사에게 다리가 질리기 전, 펄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났다.

“이런, 흥미가 없는 주제였나? 그래도 사람이 말을 하는데 끝까지 좀 듣지 그래.”

목표를 놓친 백금사는 곧장 방향을 바꿨다. 이번에는 젠의 목을 찌르려 들었다.

“그러면 이런 건 어때. 혹시 목소리가 누굴 닮았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어? 예를 들면…. 윽!”

아스터의 갑옷은 한발 늦게 백금사가 뻗어 나간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 소리로 현혹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제 아버님은 알테르 프리드웬이니까요.”

젠에게 성큼 가까워진 아스터가 반박했다. 드물게도 성난 음성이었다.

“하, 하하! 우리 같은 알파 중에 아비가 누군지 따지는 놈이 어딨어?”

“……!”

“겉으론 안 그런 척해도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본데?”

아스터의 공격이 닿을세라 젠은 나무 위로 도망쳤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전투에나 집중하십시오!”

아스터는 어딘지 분한 목소리로 젠을 나무랐다. 그녀는 보란 듯이 더 낄낄거렸다. 짧은 휴식은 끝났고 전투가 재개되었다. 장소는 좁고 거친 산악 지대였다. 젠은 저번 전투 때처럼 본성을 완벽하게 드러낼 수 없었다. 반면에 아스터에게는 형태가 없었기에 방해물이 많은 이곳의 지형이 유리했다.

그런데도 저번과 달리 싸움은 빠르게 끝나지 않았다. 아스터가 숲을 방황하는 동안 상당량의 금사를 유실한 탓이었다. 에어리얼이 새 갑옷을 주고 피를 듬뿍 먹였지만, 만회할 시간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젠장, 누굴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 같으니…!”

젠은 제 목숨이 간당거리는데도 싸우는 도중에도 자주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조카를 둔 중년과도 같은 태도였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그녀의 도발에 발끈하기만 하던 아스터가 이번에는 받아쳤다.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에어리얼에게 칼을 들이밀어서는 안 됐습니다.”

아스터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들어 본 적 없는 울분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당신만은…!”

“으윽!”

그 말과 동시에, 아스터의 백금사가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왼손으로 금사를 뽑아내자 피가 쏟아져 내렸다. 젠은 숲 안쪽으로 들어가 나무 뒤로 숨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에어리얼에게 당신의 머리를 가져다줄 겁니다.”

흰 갑옷 안에서 아스터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흐릿하게 번졌다. 그 탓에 젠은 목소리만으로 거리감이 잡기가 어려웠다.

“후우….”

젠은 다친 어깨를 마물의 형태로 변형시키며 이를 악물었다. 순간 이성이 흐릿해졌다. 마물화가 된 신체가 늘어난 탓이다. 젠은 이를 악물며 버텼다. 이래 봬도 호위 기사에 단장에, 지휘관에… 이것저것에, 검은 어금니의 부대장이었다. 앞뒤 못 가리는 어린 알파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에는 억울하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야만 했다. 칼리번이 에어리얼을 막을 때까지….

“…어린놈이 벌써부터 오메가에게 빠져 가지고는.”

이번에는 제대로 된 알파를 곁에 뒀구나, 에어리얼.

젠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칼리번으로서는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존재의 의의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는 인간을 대신해 마물과 싸우고 돈을 벌어 먹고사는, 그저 평범한 용병에 지나지 않았다. 종족이라든가, 세상이라든가, 변화라든가….

그런 어려운 문제는 평생 고민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젠’이라는 처음 보는 형태의 기형 알파를 마주했을 때도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기에 별생각 없이 넘겨 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칼리번은 달랐다. 그는 오메가였다. 그로 인해 알지 못했던, 알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너무 많이 깨우쳐 버렸다.

많은 정보가 바닷물처럼 단단한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것이 진실인지, 그렇다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니면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거짓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칼리번이 혼란에 빠진 그때, 에어리얼은 그의 무릎 앞에 무언가를 던졌다.

“이 검이 뭔지 알겠어?”

“…….”

물론 알고 있다. 8년 전, 에어리얼은 이 단검으로 에레즈를 죽이라고 종용했었고, 칼리번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에레즈에게 쥐여 주었다. 그때 사용하지 않았던 단검은 그사이 칼날이 새까맣게 녹이 슬어 있었다. 아니, 녹이 슨 것이 아니라….

“이건 단순한 검이 아니야. 가장 오래된 오메가의 피가 묻은 검이다.”

칼리번이 거절했던 운명이 검은 피를 묻힌 채 돌아온 것이다.

‘가장 오래된 오메가….’

칼리번은 속으로 되뇌었다. 운명을 상대하는 데 급급해,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번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 왕국이 세워지기도 전, 까마득한 옛날…. 한 어리석은 사내가 마계의 왕을 소환했다. 우리의 선조이기도 한 그것은 인간계로 와서 최초의 오메가가 되었지.”

“소환…되었다고?”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너도 그렇고, 인간들도 어느 날 갑자기 마물이 인간계에 들이닥친 줄 알고 있지. 하지만 실상은 정 반대야. 모두 속은 거지. 진실이 알려지면 혼란이 발생할 테니까. 네가 알고 있던 이 세계는 프리드웬 왕실과 기사단, 그리고 성녀단…. 인간의 우두머리들이 한데 모여 결탁한 결과야. 놀랍지 않아?”

“…….”

에어리얼이 물었으나 칼리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작 검 하나로, 칼리번은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숨겨 왔던 왕국 탄생의 편린을 알게 되었다.

더없이 쉽게, 덧없게….

이 이상 알아서는 안 된다. 칼리번의 돌덩이 같은 머리가 슬슬 진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그저 운 나쁘게 오메가의 자질을 갖췄을 뿐, 그 외에는 모든 면에서 범인에 불과했다. 오메가가 되기 전에도, 오메가가 된 후에도 그랬던 것처럼… 칼리번은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멍청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잔혹한 운명의 물결은 그가 익사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여기까지 온 게 가상하니 딱 한 번 기회를 주지.”

칼리번의 혼란을 꿰뚫었는지, 에어리얼은 8년 전과 같은 제안을 했다.

“네 손으로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여, 칼리번. 그러면 나도 의식을 멈춰 주지. 그 검이라면 탈피와 관계없이 저 괴물을 죽일 수 있을 거야.”

칼리번은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에어리얼은 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

“그야, 난 너의 형제이자 친구이니까.”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마음을 읽은 듯 대답했다.

“…….”

칼리번은 오직 에레즈 프리드웬을 구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당연히 헛소리로 치부하고 뿌리쳐야만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 검에 손을 댔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알파 몸에 가슴 달려 있어서 신기하냐?>

<네. 마물 혼혈 중에 여자는 처음 봅니다. 마물은 기본적으로 남자니까요.>

먼 과거의 기억이 절벽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칼리번의 머리를 스쳤다.

<근데 너 말이야, 혹시 백조 중에 검은 백조 본 적 있냐?>

<검은 백조는 세상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검은 백조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젠은 그녀 자신이 바로 검은 백조일 것이라고 했다. 칼리번은 뒤늦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그리고….

눈부신 백조라고 생각했던 에레즈 프리드웬의 몸속에는 사실, 누구보다도 새까만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모두에게 좋은 일이야. 네 손으로 이 녀석을 죽이면 아무도 괴롭지 않게 돼. 의식도 멈출 거고, 황금의 예언도 실현되지 않을 테니까.”

에어리얼의 눈이 요사스러운 빛을 발했다. 칼리번은 자신이 에어리얼에게 홀렸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쥐었다. 그것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처럼 손에 감겼다.

“도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어차피 이 멍청이는 어느 쪽이 진짜인지도 알아보지 못했잖아?”

에어리얼이 그를 고무시켰다. 칼리번의 까만 눈이 흔들렸다. 만약 이대로 에레즈 프리드웬을 찌른다면…. 정말로 벤다면. 에어리얼에게 동조한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 행위에는 아마도, 사람들이 질투라 부르는 감정도 개입했을 것이다. 여전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되어 도망가 버린 그를 향한….

“그래, 그렇지. 에레즈 프리드웬이 미울 거야, 칼리번….”

에어리얼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왜냐면 나도 그랬었거든.”

단검을 쥔 손이 떨렸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다. 목숨을 걸고, 동료를 포기하면서까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큼이나 밉다니.

‘모든 고통이 끝난다, 라….’

칼리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그답지 않게도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모든 고뇌와 고통을 끝내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은… 왕자님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찌르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칼리번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에어리얼. 나는 너한테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거다.”

8년 전에도 그러지 않았으므로.

칼리번은 목이 메어 잔뜩 쉰 목소리로 답을 내렸다. 단검은 칼리번의 손에서 헛돌다 결국 땅으로 추락했다. 그렇게 에레즈 프리드웬을 없애 평범했던 과거로, 아무것도 모르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환상에서 벗어났다.

“기어이.”

에어리얼은 어리석은 동족을 보며 혀를 찼다.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 텐데…. 아니, 느낄 텐데.”

“…….”

칼리번은 미동도 없이 에어리얼을 노려보기만 했다.

“심지어 널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에어리얼이 품에 안긴 에레즈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상관없다.”

대답과 달리, 단검을 쥐고 있던 칼리번의 손은 당장에라도 다시 뻗어 나갈 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설령 그분을 구한 후에 내 손으로 다시 죽여야 하는 결말이 온다 해도, 네 명령에 따르진 않을 거다.”

에어리얼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곧 불쾌함과 불편함을 가득 담을 표정으로 변했다.

“그럴 줄은 알았다만, 마지막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다니…. 멍청하긴.”

에어리얼은 코웃음을 치더니 천천히 몸을 숙여 단검을 주웠다.

“…….”

칼리번은 공격 기회만을 노리며 에어리얼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단검을 에어리얼의 머리나 심장 쪽으로 투척할 수도 있었으나 실패의 가능성이 너무 컸다. 더구나 그는 한 팔로 에레즈를 안고 있었다. 칼을 들이밀면 방패로 쓸 것이 분명했다.

“끝내 에레즈 프리드웬을 선택한 건 너야, 칼리번. 그러니 앞으로 벌어질 의식도 전부 네 탓이나 다름없어.”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탓하며 단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에레즈는 여전히 에어리얼의 팔 안에서 고이 잠들어 있었다.

“보석도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면 한낱 돌멩이에 불과하지.”

대검을 어렵지 않게 휘두르던 ‘칼리번’의 팔은, 단검 또한 깃털을 흔들듯 여유롭게 다뤘다.

“네가 포기한 이 검으로 내가 뭘 하는지….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에어리얼은 녹슨 단검을 휘둘렀다. 칼리번은 그가 자신을 죽이고, 의식이라는 것을 마저 치르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칼날의 방향은 안쪽으로 꺾였다.

“에어리얼…? 젠장!”

역시 왕자님을 죽이려는 것인가! 칼리번은 에어리얼에게서 에레즈를 빼앗기 위해 냅다 뛰어들었다.

“!”

그러나 에어리얼이 찌른 것은 에레즈가 아니었다. 바로 에어리얼 자신이었다. 충격에 칼리번의 움직임이 굳었다.

“윽…. 아, 흐윽…!”

에어리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칼리번이 다리에 매달린 탓에 칼은 에어리얼의 배에 비스듬히 꽂혔다. 에레즈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인지 에어리얼의 몸이 흔들려도 축 늘어진 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뭐… 뭘 하려는 거지?”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고통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로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나… 해!”

“윽!”

그는 가까워진 칼리번을 걷어찼다. 마른 몸은 속절없이 뒤로 굴렀다.

“크흐…. 읏…. 크으, 아아아악!”

에어리얼은 배에 꽂힌 칼을 단단히 쥐고는 서서히 위로 긁어 올렸다. 아직도 한 팔로 에레즈를 안고 있는 것이 기적 같았다. 그런 팔조차도 고통을 참기 위해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에레즈를 터뜨릴 것 같았다.

“흐으, 크으윽…!”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에어리얼의 미간 사이로 땀이 스며든다. 빠끔히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와 내장이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검은 구멍이 생겼다. 칼리번은 주저앉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어째서 에어리얼이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자해를 하는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칼리번이 굳어 있을 즈음, 과거의 기억 하나가 번개처럼 스쳤다.

피로 물들었던 결혼식.

에어리얼은 그때도 지금처럼 제 몸을 스스로 갈랐다. 그러나 상처를 찢고 나온 것은 내장이 아닌 마물이었다.

“…설마!”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검은 자국 외에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그를 고개를 치켜들었다. 검은 두 눈이 확장되었다. 에어리얼의 몸에 난 상처를 따라 하늘로 갈라졌다. 그가 칼질을 하면 할수록 마찬가지로 하늘도 길게 찢어져 갔다.

하늘에 남은 상흔은 간혹 발생했던 검은 손자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검은 손자국은, 오메가를 갈구하던 마물이 머리를 깨고 발톱을 부러뜨리며 간신히 낸 ‘구멍’에 가까웠다. 그러나 에어리얼이 찢은 일자 상처는 왕성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의 크기였다.

그 광경은 흡사 포도가 가득 담긴 자루와도 같았다. 날카로운 칼로 천을 찢어 내면 포도즙과도 같은 핏물과 포도 알 같은 마물이 바닥으로 후두득 쏟아져 내린다. 인간계와 마계를 가르는 경계가 그물처럼 한없이 늘어지며 마물을 받아 내고 있었으나, 그것도 곧 한계였다.

문제는 인간계로 추락하는 마물들이 에어리얼이나 칼리번과 같은, 인간의 피가 섞인 오메가에게서 태어난 불안정한 알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칼리번은 마계를 직접 겪었다.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수프 속에는 고대의 마물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는 그것들마저 인간계로 강림하게 된다.

“멈춰라, 에어리얼! 저것들이 모두 넘어오면 전부 죽고 만다!”

칼리번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순간, 에어리얼이 몸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흐…. 하아, 후후후…….”

가장 오래된 오메가의 피가 묻은 검에는 이제 에어리얼의 피마저 더해졌다. 할 일을 마친 단검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아, 하하하…. 윽…. 저건, 검은 손자국과는 달라……. 날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닫지 못해.”

에어리얼은 시궁쥐처럼 낮게 키득거린다.

“그리고 날 죽이려면… 그전에 에레즈 프리드웬부터 죽여야 할 거야.”

에어리얼은 피를 흘리며 에레즈를 양팔로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래서 말했잖아,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잔인한 웃음소리가 안개처럼 퍼졌다. 마침내 하늘의 그물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 담긴 오물은 부지불식간에 지상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 * *

“이리 내놓지 못해?!”

우악스러운 손이 여인에게서 무기를 갈취해 갔다.

“용병 나리들이 알아서 지켜 줄 텐데 감히 주제도 모르고 검을 들려고 해? 그런 약해 빠진 몸으로 나서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이게 다 왕자님을 향한 반역인 거 몰라?”

무기를 빼앗긴 여인은 사내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이게… 어딜 노려봐?!”

사내는 여인을 발로 걷어찼다. 마물과 대적할 때는 안간힘을 써도 나오지 않던 폭력성이 자신보다 약한 여자의 눈빛에는 너무나 쉽게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 그만둬요! 그러다 죽겠어요!”

뒤늦게 다른 여자들이 말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자질구레한 대화는 달라도 이와 비슷한 다툼이 왕성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화의 씨앗을 틔운 용병들은 에레즈 프리드웬을 핑계 삼아 발을 뺐다.

권력은 혀를 간신히 적실 정도였기에 더욱 달콤했다. 그 꿀을 더 먹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남자들은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마물은 성벽과 용병들이 완벽하게 지켜 주고 있다. 더는 여자에게 보호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이제 사내들은 방패로 삼았던 여자들을 본연의 용도였던 노예로 돌리고자 했다.

명분은 여러 가지였다. 용병님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왕자님께서 내린 명령이니까. 그러나 실상은, 무너진 자존심을 도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사내들은 큰 소리로 여자를 탓했다. 아직도 무기를 반납하지 않은 여자는 이기적이고 고집 센 추녀 취급을 당했다. 남자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무기에 집착하는 것이라며…. 자진해서 무기를 사내에게 넘긴 여자들은 내심 그렇다고 생각했다.

“퉤, 고집 센 계집을 누가 아내로 삼겠어?”

사내가 쓰러진 여인에게 침을 뱉은 그때, 땅이 대답이라도 하듯 흔들렸다.

“뭐, 뭐야…?!”

“지진인가?”

당황한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잠시 지나가고 마는 수준의 지진이 아니었다. 기둥이 흔들리고, 서 있던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넘어질 정도로 들썩였다.

“저… 저기 좀 봐!”

누군가 외쳤다. 손은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탄압하던 인간과 탄압당하던 인간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위를 보았다. 검은 선이 하늘을 반으로 가를 기세로 그어지더니, 상처가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 손자국이 생겨난 건가…?!”

“이, 이런 건 처음 봐…. 이건 ‘손자국’ 수준이 아닌데….”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에 모두가 경악했다.

“흐, 흐어억…. 도…… 도망쳐……!”

겁먹은 사내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졌다. 그들에게 얻어맞은 여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였다. 공포는 빠르게 전염되었다. 모두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뛰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개미에게 떨어지는 비 한 방울은 생사가 걸린 거대한 홍수로 다가온다. 그와 같이, 찢어진 하늘에서 마물들이 검게 썩어 끈적해진 고름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왕성 전체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뒤덮어 버릴 듯이.

* * *

그 시각, 로위나는 동쪽 성문에서 자신의 목을 베려는 알파를 힘겹게 밀쳐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검을 버리시죠.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드리겠습니다, 리론 영애. 하지만 제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이상 저를 자극하면… 이후에는 목숨을 구걸해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부하를 거느린 오드론이 로위나를 위협했다.

“허억, 허억…!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왕자님께서 직접 나타나 명하시지 않는 한…. 한낱 알파 따위의 말은 듣지 않겠다.”

로위나는 도발이라도 하듯 오드론을 향해 칼을 뻗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기사단이 붉은 오메가를 탈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장한 채로 반항까지? 반역자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지 않습니까!”

로위나를 위시한 왕실 재건 기사단은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왕실의 공인을 받은 기사단에서, 반역자 집단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더불어 반역자인 성녀들을 몰래 왕성으로 들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즉각 사형 처분이 내려졌다.

“왕자님을 어딘가에 숨겨 두고 왕성을 어지럽히는 너희들이야말로 진짜 반역자다!”

그에 로위나는 도리어 용병 길드를 반역자로 선포했다.

“왕자님께서는 나를 한 사람의 기사로서 인정해 주셨다, 그런 분께서 내게 검을 뺏어 갈 리가 없다.”

로위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 기백만은 여느 알파에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허울뿐인 기사단장으로 기사단의 실질적인 운영은 리론 후작이 맡아 왔다. 전 기사단장이었던 알버트 리론 못지않은 충성심과 실력이 있었으나 정작 후작만은 그녀를 신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불의의 사고로 의식을 잃게 되면서 비로소 그녀의 소관이 되었다.

“나와 왕실 재건 기사단은 왕자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결사 항쟁할 것이다!”

마침내 기사단의 실권을 쥐게 되었으나 시절이 좋지 못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두문불출하게 된 후로,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로위나는 기사단을 힘겹게 이끌며 인내하는 쪽을 선택했다. 마물이 언제 또 침입할지 모르는 상황에 되도록 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병든 아버지가 있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입김으로 기사단을 지휘했기에,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없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왕실의 명령을 거부하게 된 것은 성 밖으로 쫓겨났던 성녀들과의 밀담을 나눈 이후부터였다.

<저희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붉은 오메가가 다른 이의 몸을 빼앗아 왕성 안에 숨어 있었다니….>

<성녀단의 중책을 맡으신 성녀님들이 원인 모를 부상으로 목숨을 잃으시고, 실종되시는 바람에…. 저희도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밀을 들추려 한 대가로 붉은 오메가에게 보복을 당해 다들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신 겁니다. 단장님의 아버님이신 리론 후작님도 그중 한 분이셨죠.>

로위나는 붉은 오메가가 왕과 신용병 연합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로위나는 성녀들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이후 ‘붉은 오메가’가 자진해서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을 굳혔다. 왕자님과 아버지, 그리고 죽은 오라버니의 뜻을 이어 인간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기사는 검 없이는 싸울 수 없다. 그래서 로위나는 숨겨 둔 무기의 반만 반납했다. 그다음으로는 왕성의 아낙네로 분장한 성녀들에게 오메가의 처형 계획을 전했다. 젠이라는 여자 알파와 붉은 오메가가 지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붉은 오메가가 탈출한 것을 알게 된 용병들을 막는 중이었다.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겁니다, 로위나 영애. 사내보다도 못한 계집 따위가 감히 힘으로 알파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드론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비아냥거렸다.

“당장 당신만 해도 리론 후작의 후광이 아니었으면 단장 자리에는 오르지도 못했을, 약해 빠진 계집에 지나지 않습니까!”

“…….”

날 선 도발에 로위나의 눈빛이 변했다.

“언제 봐도 가문이란 계급은 참으로 신기하군요. 힘이 아닌 핏줄로 대장 자리를 맡다니. 우리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놈…. 감히 리론 가문을 모욕하다니!”

로위나는 고함을 지르며 오드론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오드론은 너무나 쉽게 그녀의 공격을 막아 냈다. 오드론과 대항하기 위해 기사 두엇이 그녀와 함께했다. 날카롭게 벼린 칼이 몇 번이고 오드론의 몸을 베어 댔으나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 저기… 하늘을 좀 보십시오, 단장님!”

그렇게 전투가 한창 치러지는 무렵, 병사 하나가 외쳤다. 목숨을 다투는 전투 중임에도 외칠 정도면,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거, 검은 손자국이 나타났습니다, 대장!”

병사의 외침은 인간뿐만 아니라 용병들에게도 전해졌다. 점차 인간과 알파들의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검은 손자국’은 이념이 다른 이들의 사투조차 가라앉히는 공포의 단어였다.

“저게 검은 손자국이라고?”

오드론과 칼을 주고받던 로위나조차 얼굴을 찌푸렸다. 하늘은 찢어져 너덜거리고, 그 상처에서 마물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아래에 놓인 왕성이란, 그야말로 짐승을 위해 차려 놓은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는 왕국으로….”

마물이 쏟아지고 만다. 로위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위급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버지였다. 그녀와 칼을 맞대던 오드론의 표정도 썩 밝지 못했다.

“붉은 오메가님께서 내리신 명령인가?”

오드론이 손에 잡히는 부하를 끌어당기더니 물었다.

“드… 들은 바 없습니다.”

갑자기 오드론에게 붙잡힌 용병이 고개를 저었다. 최측근인 오드론조차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했으니, 용병들이 어리둥절한 것이야 당연했다.

“…대장님, 그럼 왕성에 남은 동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인간 병사를 쓰러뜨리고 다가온 용병이 심각한 목소리로 묻었다. 오드론은 왕성만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왕성이 새빨갛게 불타오른다.

칼리번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는 가혹할 정도로 잔인했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희생당한 목숨이 한꺼번에 칼리번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마계의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마물은 인간계에서 쇠약해진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너와 내가 힘을 합쳐 마물을 부린다 해도 막지 못할걸?”

에어리얼은 왕성이 파괴되는 광경을 축제처럼 내려다보았다. 왕성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은 어찌나 강력한지, 왕성을 둘러싼 검은 숲이 흔들리고 절벽 아래의 호수는 붉게 물들었다.

“당장 멈춰라, 에어리얼! 이대로는… 제길, 이러다가는 모두 다 죽고 만다!”

이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칼리번은 목이 찢어질 정도로 거세게 외쳤다.

“이미 불러들인 걸 되돌릴 수는 없어. 말했잖아, 날 죽이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다고.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진즉 죽였어야지. 나도, 왕자님도.”

에어리얼의 대답에 칼리번의 온몸에서 핏기가 가셨다.

“크윽…. 이런 짓을 해서 도대체 뭘 얻을 수 있는 거냐! 너는 모든 걸 가졌다. 그런데 어째서 마물을 불러들여 왕국을 파괴하는 거지?”

칼리번은 도무지 에어리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존재에게 응집된 운명을 꼬집었다. 그다음으로는 칼리번 자신도 몰랐던 검고 어두운 마음을 걸고넘어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에어리얼 개인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저 칼리번을 부추기고 괴롭히기 위해 이 모든 참상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은가.

“역시 복수인 거냐?”

칼리번은 여기까지 오며 도출해 낸 답을 꺼냈다.

“복수?”

칼리번이 묻자 도리어 에어리얼이 의아해했다.

“그렇다. 널 죽이려 했던 인간들에게, 널 범했던 알파들에게…. 그리고 네 자리를 차지한 나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 아닌가!”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과거를 보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조차 지금 이 결과를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참담할 뿐, 조금의 통쾌함도 느끼지 못했다.

“…….”

유일한 이해자를 보는 에어리얼의 눈매가 깊어졌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마물을 이용해서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이건…. 이런 건…. 크윽…!”

필사적으로 항변하던 칼리번은 눈 앞에 펼쳐진 지옥에 넋을 잃고 말았다. 불길에 휩싸인 왕성은 그 자체로 지옥과도 같았다.

이건… 복수도, 화풀이도 아니었다. 그저 학살에 불과하다.

“에어리얼. 너는 나에게 네 과거를 보게 했고, 나는 원치 않아도 널 알게 되었다. 때로는 내 영혼이 네 육체에 좌지우지되기도 했지.”

칼리번은 절벽 너머에 눈을 고정한 채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심장은 아직도… 젠에게 흔들리고 있다.”

에어리얼의 몸이 된 후 칼리번은 같은 인물에게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칼리번의 몸이었을 때 본 젠과 에어리얼의 몸으로 보는 젠은 너무도 달라서 매번 혼란스러웠다.

“네가 벼랑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후, 젠은 너의 신변을 팔았다. 하지만 그건 배신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젠은… 너를 막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녀가 정말로 비겁한 배신자였다면 진작에 널 피해 멀리 도망쳤겠지.”

“…….”

“젠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너를 막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다.”

칼리번에게 젠은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달랐다. 그녀의 등에 업힐 때면 칼리번의 심장이 요동을 쳤다. 가끔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라 눈물이 날 뻔도 했다. 에어리얼은 분명 아직도 젠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자신이 왕자님을 포기하지 못하고 이곳까지 기어 올라온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런 여자를… 저 지옥 속에서 고통받다 죽게 만들 셈이냐.”

그렇기에, 그녀를 불태워 죽이는 이 행위는 에어리얼에게도 자해나 다름없었다.

“흐음…….”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설득이 인상적이었는지 생각에 잠겼다. 붉은 눈이 칼리번을 빤히 응시했다. 칼리번 자신의 얼굴임에도 에어리얼의 영혼이 깃든 모습은 어딘지 애처로워 보였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칼리번이 기대를 품을 때였다.

“하! 하하! 이제 와 젠을 언급하면 내가 마음을 바꿀 것 같아? 약해 빠진 몸을 끌고 다니느라 혀가 길어졌구나, 칼리번!”

에어리얼은 질 낮은 농담을 들었다는 듯 실소했다. 왕성을 태우는 불길에 어느덧 붉어진 칼리번의 눈이, 에어리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젠은 말이야, 오메가가 된 나를 업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즉시 팔아넘겼어야 했어. 아니면 죽이거나….”

그러나 비웃음을 금세 휘발되었고, 쓸쓸한 목소리가 빈 얼굴 자리를 채웠다.

“그 절벽에서 떨어진 후,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삶을 살았으니까.”

멍청한 여자. 성녀단을 따르면서 어딘가에 자신 같은 존재가 있을 거라고 믿다니. 에어리얼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멍청한 너라도 내 육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에어리얼이 말했다. 칼리번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내가 고작 몇 년을 더 살고 싶어서 네 몸을 빼앗았을 것 같아? 나 정도로 나이가 들면 말이야, 사는 거라면 지긋지긋해지거든. 근데 또 오메가로 살고 싶겠어?”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한쪽 팔로 앉은 채 낭떠러지의 끝에 섰다.

“이 몸으로 오래 살 생각은 없어. 하지만 아무도 날 모른 채, 젠에게도 잊힌 채…. 마계의 바다에 가라앉은 시체로 삶을 마무리하는 건, 어딘지 억울하잖아?”

그 모습은 당장에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설마 복수가 아니라… 네 무덤에 모두를 순장시키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는 거냐.”

한때는 자신이었던 등을 보며 칼리번은 짓씹듯 말을 뱉었다.

“순장이라니 서운하게. 이왕이면 동반 자살이라고 해 줘.”

에어리얼은 낮게 웃었다.

* * *

베이가는 아들을 죽이지 못했다. 아들의 손에 죽지도 못했다.

<오랜 시간 탑에 갇혀 지내느라 몸이 많이 상하셨을 겁니다, 왕비님.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현실을 외면하면서 편히 쉬시면 됩니다. 특별히 본성 내에서 왕성의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모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지켜보게 하겠다’라는 에어리얼이 선언대로 그녀는 다시 본성에 갇히게 되었다. 가장 초라한 결말이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베이가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입을 다물고 물레를 돌리거나 뜨개질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손이 떨려 전처럼 되지 않았다. 베이가는 제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녀는 태어났다. 여자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그녀는 살뜰하게 쓰였다. 가문을 위해 전장의 한복판에 끌려갔고, 상황에 따라 이름이 생겼다가, 빼앗겼다가, 도로 되찾기도 했다. 백성들을 속이기 위해 가짜 왕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는 괴물에게 범해졌고, 그렇게 태어난 아들에게 성력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남들이 보기에 베이가는 경건하고 고결했다. 귀족이었고, 성녀였으며 왕비였으니까. 하지만 성녀도, 왕비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운명에도 반항하지 않고 순응했다. 비록 세계를 바꿀 수는 없겠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항상 무언가를 해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세계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알테르 프리드웬의 목이 자신의 아들에게 베였을 때,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잊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미쳐 버리고 말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예전과 달리 손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다른 곳에 집중하지 않으면 생각이 끊이질 않게 된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여자로서 오를 수 있는 정점까지 끌려갔음에도 결국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한낱 계집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할수록 괴로웠으니까.

“…!”

베이가가 소리 없는 신음을 흘리던 때였다. 쿵, 땅이 크게 울렸다. 그녀의 무릎에 얹어져 있던 실과 바늘이 떨어졌다. 의자가 덜그럭거리며 베이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언제나 굳건할 것 같았던 땅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녀는 지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

무릎과 손을 땅에 댔는데도 몸이 기우뚱거렸다. 마치 본성 자체가 기울어진 것만 같았다. 왕성 전체를 뒤흔든 지진은 본성에도 여파가 갔는지, 굳건히 잠겨 있던 문이 열리고 말았다. 베이가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붉은 오메가는 베이가를 우습게 여겼는지 커다란 자물쇠만을 채워 두고 인간 병사마저도 세워 두지 않았다.

베이가는 창밖을 살폈다. 붉은 오메가가 장담했던 것처럼 그녀는 창 너머에서 왕성의 풍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본성 안에 대기 중이던 알파 용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와 마물과 싸우고 있었다.

“……하늘이.”

검게 찢어진 하늘을 본 베이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붉은 오메가가 드디어 무슨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이대로 이곳에 남으면 죽을 것이다.

‘죽음이 뭐가 두렵지? 어차피 나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데.’

베이가는 쓰러진 의자를 일으키고 다시 앉았다. 눈을 감은 채 겸허히 죽음을 기다렸다.

“…….”

지금은 문짝이 부서진 정도에 불과하지만, 한 번 더 공격을 당하면 그때는 분명 무너진 벽돌에 깔려 죽게 될 것이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 봤자 마물에게 사냥당할 뿐이다. 성력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버둥 쳐 봐야 다를 바가 없다면,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도와주세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할 때,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환청일까?

“제발, 누군가 있다면, 제발….”

베이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홀린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부서진 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여기….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

베이가가 방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이 그곳으로 추락했다. 방 안에는 그녀가 지어 낸 거친 천들이 가득했다. 부서진 창을 통해, 새하얀 천들이 너울거리며 퍼져 나갔다. 베이가는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돌아보지 않고 금방이라도 끊길 것처럼 가느다란 소리만을 따라갔다.

“거기, 아무도 없나요? 제발….”

복도에는 무너진 성의 잔해에 깔린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들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돌무더기에 막히기도 했다.

“여기예요…. 제발…….”

근원지로 다가갈수록 목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이미 베이가의 방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였다. …인간이 이 정도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사람을 부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마물이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 간절했기에 베이가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아, 사람이 있었군요….”

마침내 베이가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했다. 한 여인이 거대한 돌무더기 아래에 깔려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본성에 끌려와 잡일을 하는 노예 같았다. 그녀의 몸은 무너진 지붕의 잔해에 깔려 있어, 베이가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녀를 꺼내 줄 수 없었다.

“하아, 하…. 아, 으윽…. 이 아이를… 봐주세요…. 괜찮은지….”

베이가가 무릎을 꿇었다. 자세히 보니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여인의 품 안에 있었다. 두 팔로 감싸 잔해에 파묻히진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여인의 품에서 아이를 꺼낸 베이가는 상태를 살폈다.

“아, 아기는… 죽었나요?”

여인이 간절히 물었다. 기절하기는 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아닙니다. 무사합니다.”

명색이 왕비였으나 공손히 대답했다. 그녀가 성녀였던 시절에는 신분 여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존중하는 말투를 썼다.

“아아, 다행이다…. 갑자기, 성이 무너져서… 아무도 와 주지 않았어요….”

확실히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그러나 다른 장소였다 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파들은 여자 하나가 죽는 것은 개의치 않아 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기력이 떨어지면 버티지 못합니다.”

베이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제 옷을 뜯어 아이의 머리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생각이 닿기 전,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

그때, 또다시 본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 위로 돌무더기가 더 쌓였다.

“흐, 으윽…! 저, 저는 이미 늦었어요…. 어서… 아이와 함께, 이곳을 떠나세요….”

이 아이를 부탁드려요…. 여인은 헐떡이며 말했다. 잔해에 파묻힌 그녀는 기절한 아이의 뺨을 쓰다듬지도 못하고 한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성녀님들은 전부 쫓아낸 줄 알고 있었는데, 저희를 버리지 않고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성녀님….”

“…….”

“모든 걸 용서하시고, 제발…. 이 아이를….”

아이가 눈을 뜨길 바라며, 마지막까지 부탁하던 여인의 목숨이 끊겼다. 눈동자에서 총명한 빛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눈조차 감지 못했다.

“…….”

베이가는 성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성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쓸모가 없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네. 편히 잠드세요.”

베이가는 여인의 눈을 감겨 주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목 안쪽이 쓰라렸다.

“…….”

베이가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일어섰다. 혼자였다면 저 여인과 함께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새롭게 부여된 임무가 생겼다. 목숨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 여자가 아이 때문에 살아남는다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늘 궁금했다. 인간의 아이는 알파와는 달라…. 갓 태어난 인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약하지. 누군가의 도움 없이 금방 죽어 버릴 정도로.>

확실히 그러했다. 베이가는 품 안의 아이를 살폈다.

<그런데 어째서 너희는 불행의 근원을 죽여 없애지 않고 가축을 자처하는 것이지?>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지금 상황에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사내들은 제 몸에 씨를 심는 마물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 하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희 여자들이 갓 태어난 사내아이를 죽였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다. 아니, 모체와 같은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보다도 더욱 소중히 여기더군.>

그래. 그의 말대로, 그녀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이지 못했다.

<너희는 늘 고난을 자처하고 있다.>

죽은 알테르 프리드웬이 보기에 그녀는 여전히 우매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반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힘 앞에 고개를 숙인 노예.

“…….”

하지만 그녀가 여태껏 자살하지 않고 버틴 것 또한 오로지 책임감 때문이었다. 성녀일 때도, 왕비일 때도, 저버리지 않고 우직할 정도로 땅에 발을 디뎠던 힘. 혹은, 땅이 그녀를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끌어당기는 힘. 어쩌면 그녀가 하는 행동은 잘못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상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성녀의 사명은 치료와 구호이니까요.”

비록 성력은 잃었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베이가는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혼자서 대답했다. 그리고 짐 덩어리에 불과한 아이를 안고 본성을 나왔다.

<…다가오지 마라. 지금 내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왕자님의 임무가 마물 토벌이라면, 저의 임무는 병사의 치료와 구호입니다.>

<너는 내가 ‘무엇’인지 알 텐데.>

<왕자님께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한들, 제 임무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녀의 손목에는 알테르의 금사가 감겨 있었다.

* * *

의식을 멈추기 위해서는 에어리얼을, 자신의 몸을 죽여야만 한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등을 진 사이 조용히 몸에 상처를 냈다.

“…언젠가 프리드웬 가문에 황금 피를 지닌 소녀가 태어나 마물을 물리치리라. 이런 이야기, 어디선가 들어 보지 않았어?”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계획을 정말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천연덕스럽게 물을 뿐이었다.

“언뜻 듣기엔 예언 같지만 그건 저주야. 예언이자 저주…. ‘황금 피’라고 칭송받던 프리드웬 왕실은 사실은 최초로 죄를 지은 가문이었고 말이야.”

에어리얼은 마치 모닥불 앞에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음유시인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허심탄회했다.

“프리드웬 일족은 알파에게 강제로 범해져 태어난 마물 혼혈과는 달라. 그들은 스스로 오메가를 범해서 태어났지.”

“…….”

그것 또한 칼리번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은 왕성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그 저주가 프리드웬 가문에 국한된 일은 아니야. 프리드웬이란 그저… 모든 인간을 대표할 뿐이지. 인간들은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으니까.”

두 눈 가득 왕성의 불길을 닮은 에어리얼은 천천히 절벽에서 멀어졌다.

“칼리번. 너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마물의 본능은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해. 마물이 오메가가 없다고, 남자가 없다고 여자를 범하는 일은 없지. 하지만 마물의 피는 계속해서 인간에 의해 희석되고 있어. 아니, 더럽혀지고 있지. 결국, ‘순수한 마물’은 사라지고 인간의 피가 섞이기 시작한 알파들만 존재하겠지.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

“단순히 알파가 여자를 범하고, 알파 중에서 여자가 태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자해를 하던 칼리번의 손길이 뚝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한 번 흐르기 시작한 피는 멈추지 않았다. 에어리얼이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너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칼리번? 마물의 본성과는 다른 이성? 찬란한 용기?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선함? …성력? 신에게 부여받았다는 권력? 아니— 하나도 그렇지 않아! 선함과 악함의 차이가 어디 있겠어? 세상에 신이란 없고 모두가 똑같이 벌거벗은 짐승에 불과한데 말이야.”

칼리번에게서 뺏은 얼굴 위로 인간을 향한 노골적인 혐오와 증오가 번졌다. 그는 이 세상을 지긋지긋해하는 게 느껴졌다.

“인간의 본성은… 그러니까 악성은, 사랑이야. 칼리번.”

그럼에도, 에어리얼은 마지막 가장 낭만적인 단어를 꺼냈다.

“…….”

사랑. 그 한마디는 입 안에서 쓰게 녹았다. 이 모든 비극을 설명하는 근본 원리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또한 터무니없어서 헛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칼리번은 부정하거나 비웃지 못했다.

왜냐면 지금 그도,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이지 못했으니까.

“바로 사랑이야. 내 몸으로 알파들을 만나 봤을 거 아냐? 한번 잘 생각해 봐. 어땠어? 모두가 네 말을 순순히 따르던가?”

에어리얼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칼리번에게 물었다.

“네가 아무리 둔감하고 멍청하다 할지라도 ‘변화’를 느꼈겠지. 알파, 그중에서도 특히 마물 혼혈은 오메가인 우리의 지배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몸으로 겪었던 고난과 수난을 떠올렸다. 수많은 알파를, 마물과 마물 혼혈들을 만났다. 센어르와 데릴만처럼 알파인 주제에 감히 오메가의 뜻을 거스른 이들도 있었다. 칼리번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 죽음의 문턱까지 오갔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알파를 낳고, 여자 알파가 늘어나고…. 언젠가 여자 오메가까지 태어나기 시작하면 과연 어떻게 될 것 같아?”

에어리얼은 잔인한 질문을 했다.

“오메가가 과연 한 마리로 끝나기는 할까?! 칼리번, 어떻게 너와 내가 지금 공존하고 있지? 오메가는 극히 드문데 말이야!”

“……!”

칼리번의 숨이 턱 막혀 왔다. 에어리얼의 말은 칼날과도 같았다. 거대한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수한 전조를 동반한다.

인간의 피가 섞일수록 오메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알파들. 여자를 닮은 알파. 여자에게서 태어난 알파. 한 마리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오메가가 둘이 되고. 그리고….

“마물과 달리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수가 거의 비등해. 그리고 마물은 점점 인간을 닮아 가고 있지! 마물 혼혈이 인간을 대신하게 되면, 오메가의 수는 필연적으로 늘어나고 만다!”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점차 격렬해져 갔다.

“알파와 오메가가 남자와 여자처럼 되어 버리고 만다고, 칼리번! 그것도, 오메가가 알파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력을 잃은 채로 말이야!”

에어리얼의 등 뒤로 비치는 검붉은 연기는 마치 그를 태우는 불길 같았다.

“인간화된 알파는 거꾸로 오메가를 지배하려 들겠지! 인간들이 어떤 꼴로 살아가는지는 너도 질릴 만큼 보았잖아?!”

에어리얼이 숨을 깊게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그의 가슴이 크게 흔들렸다.

“이것 하나는 확실해— 머지않은 미래에, 결국 오메가는 알파를 조종할 수 없게 된다. 지배력을 잃은 오메가를 원하는 대로 범하고 구속하겠지. 하지만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메가는 알파에게 종속되는 것을 용납하고 용서할 거야. 왜냐고? ‘사랑’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더없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칼리번은 그 외침에 흡사 난도질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마물을 더럽히는 가장 끔찍한 악성이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문 채, 그 어떤 삶도 버티게 만드는…. 오로지 인간만이 가진 힘, 말이지. 흐흐, 하… 하하하!”

그 순간, 칼리번은 알 수 있었다. 에어리얼이 가장 경멸하고 증오하는 존재는….

“너와 내가 무엇 때문에 오메가가 되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인간의 악의를 우습게 보지 마, 칼리번.”

눈앞에 둔 ‘에어리얼’이라는 껍질, 그 자신이라는 것을.

“예언의 숨겨진 뜻을 파악한 성녀들은 인간과 마물의 피가 섞이고, 마물 혼혈이 계속해서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여자가 오메가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솎아 냈지….”

“…….”

“그 결과 ‘정상적인’ 마물 혼혈들은 오히려 인간을 더욱 닮아 갔다. 인간 남자를 소수만 남기고 전부 죽이지 않는 이상, 이 흐름은 결코 피할 수는 없거든! 하지만 인간들은 그러지 못하겠지. 왜냐면 저들의 세계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인간 남자들이니까…. 모든 것이 예언대로야. ‘예언의 소녀가 태어나면 마물을 물리쳐 줄 것이다.’ 그래, 마물은 사라지고 대신 인간과 섞이게 되겠지.”

“…….”

“여자이자 오메가인, 우리들의 첫 번째 후예는 아마도 높은 확률로… 프리드웬의 핏줄에게서 태어날 거다.”

칼리번의 시선이 에어리얼의 품에 안긴 에레즈에게로 향했다. 세상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눈을 감은 왕자님에게로.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식이, 혹은 그다음 자식이 여자아이일 수도 있다면….

‘아스터….’

칼리번은 젠과 함께 두고 온 하얀 갑옷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여자아이가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칼리번의 눈이 에어리얼과 마주쳤다. 에어리얼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찌푸린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지만 너와 나 같은 오메가는 마물에서 인간으로 넘어가는 중간 다리에 지나지 않아. 기어이 마물을 인간으로 전락시킬 때까지, 인간들은 같은 역사를 반복하겠지. 흐흐, 크큭…. 대단하지 않아? 인간은 악성만으로 마물 잡아먹고 있는 거야…. 하, 하하, 하하하…!”

에어리얼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소리 내어 웃었다.

저주받은 백조와 야수, 그리고 인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 속 수많은 괴물들이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인간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괴물을 인간으로 몰락시키는 것은 바로 인간들 자신이었다.

“마물의 껍질을 뒤집어쓴 인간은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악독한 형태로 진화하게 될 거야. 그럴 바에는 다 같이 죽는 편이 낫지 않겠어?”

에어리얼이 한결 부드러운 음색으로 죽음을 권유했다.

“칼리번. 네가 보기에 나는 미친 사람이겠지만, 나는 선지자들의 의지를 이어받았을 뿐이야. 예언을 막고자 했던 가엾은 성녀들과 진실을 깨달아 버린 알테르 프리드웬과 같은 이들 말이지…. 이런 나를 막는 너는, 너와 같은 오메가를 수도 없이 만들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어.”

“…….”

칼리번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말솜씨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너는 여태껏 네가 선한 쪽이라고 생각했겠지, 칼리번. 그동안 널 괴롭힌 악독한 에어리얼을 처단하고 붙잡힌 불쌍한 왕자님을 구하겠다고….”

에어리얼이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둘 중에 진짜로 악한 건 누구지? 과연 먼 후일에 오메가들은 어느 쪽을 증오할까?”

* * *

“대장님! 이건 기존의 검은 손자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몸을 반 이상 변형시킨 용병이 본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외친 말이었다. 왕성에서 거들먹거리던 용병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진 마물을 상대로 필사적인 항전 중이었다. 본성은 그런 그들의 마지막 항거지였다. 그러나 마물 혼혈의 힘으로 고대의 마물을 상대하기란 인간이 용병과 싸우는 것과 같은 부질없는 저항과 같았다.

“오드론 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느냐?! 어서 그분께 이 상황을 전해라!”

용병 대장은 위급한 와중에도 부하에게 오드론을 찾아오게 시켰다. 그러나 본성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드디어 우리 알파들이 왕성을 차지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는 수 없나….’

데릴만 때부터 품었던 비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목숨이 중요한 법이었다.

“이대로는 모두 죽고 만다. 모두 성 밖으로 대피해라!”

부하들과 본성을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용병 대장은 결국 후퇴 명령을 내렸다.

“큭…. 불가능합니다! 성문이 전부 막혀 있습니다.”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왕성을 살피고 온 다른 알파가 말했다.

“세 문은 기형 마물들로 쌓여 있어 나갈 수 없고…. 동쪽 성문은 마물들이 지키고 있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

용병들은 자신들에게 아직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종잇조각이 된 지 오래였던 것이다.

“……젠장.”

그때까지만 해도 알파들은 다소 낙관적이었다. 용병 대장은 오드론의 곁에 오메가가 있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오메가님의 계획이며 인간을 해칠지언정 동료인 자신들 앞에서는 싸우는 시늉만 하다 물러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오메가도, 오드론도 보이지 않는다.

왕성에 남은 알파들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마물의 제물에 인간뿐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포함될 수 있다고….

“오랜만에 방어전을 치르겠군.”

한참의 정적이 흐른 뒤, 용병 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인간 상대를 하느라 실력에 녹이 슨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본성 안에 집결 중이던 알파들은 짐승처럼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의기투합했다.

“인간들은 어떻게 할까요? 무기를 대부분 회수한 상황이라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다른 알파가 용병 대장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인간은 약해 빠졌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이라도 싸워 주는 편이 나았다.

“…하는 수 없군. 무기고를 열어라.”

* * *

마음 같아서는 에어리얼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입이 꿰매진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겪은 경험이, 누구보다도 에어리얼에게 동의하고 있었다. 만약 에어리얼이 말한 대로, 먼 후일 순수한 마물이 사라지고, 인간들처럼 알파와 오메가의 수가 비슷해지고, 오메가가 알파를 조종할 수 없게 된다면….

그렇다면….

“네… 주장대로라면, 더 이상 마물 혼혈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마물과 인간 사내는 되도록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칼리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는 마치 입술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너는 마계와 인간계를 이었다! 마물을 소환했어…. 지금 네가 벌이는 무차별한 살육으로 무엇이 바뀐다는 거지? 인간계로 내려온 마물은 마물 혼혈과 여자를 죽이고, 사내들을 범할 거다. 그렇다면 결국… 네가 말하는 그 주장을 가속시키는 것뿐 아닌가?”

칼리번은 피가 흐르는 두 주먹을 세게 쥔 채로 간신히 항변했다.

“……흐음.”

그때,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칼리번도 마물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신이 부른 마물이 오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왕성을 습격한 마물 일부가 오메가의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것이다.

“마침 잘됐어. 말보다는 보여 주는 쪽이 더 빠를 테니까.”

에어리얼이 기다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손짓했다.

“저 성검을 봐.”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손가락을 따라 땅에 꽂힌 성검을 바라보았다. 그는 에레즈를 한 손으로 안은 채로 성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왕자님. 일어나세요.”

에레즈의 긴 금발을 거두고는 귓가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칼리번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으응…. 칼.”

마법이 풀리듯,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에레즈가 반짝 눈을 떴다. 붉게 터져 있던 한쪽 뺨은 어느새 깨끗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에어리얼의 품 안에서 눈을 반짝이는 에레즈는 더없이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저길 보십시오.”

칼리번은 다시 한번 에레즈에게 시선을 빼앗겼으나, 에어리얼은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앗…!”

“보이시죠? 무서운 마물들이 저를 잡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절벽과 산을 타고 올라온 마물들이 세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 안 돼…. 카, 칼을 지킬 거야.”

에레즈는 세 사람 중 가장 작고 어리면서도 당당하게 외쳤다. 에어리얼은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를 위해 성검의 힘을 써 주실 수 있습니까?”

“아…. 으, 응…. 해, 해 볼게….”

에어리얼의 부탁에 에레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에레즈를 땅에 내려 주었다. 에레즈는 진짜 칼리번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침을 흘리는 마물들을 힐끗힐끗 쳐다본다.

“…읏.”

그러나 당당했던 선언과 달리, 막상 성검 앞에 서자 에레즈는 눈에 띄게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겁을 먹은 기색이 확연했다. 그들로부터 떨어진 위치에 있는 칼리번조차 느낄 정도였다.

“저… 저기, 나….”

결국, 에레즈는 눈물이 젖은 푸른 눈으로 에어리얼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죠? 제가 곁에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단호했다.

“으, 읏, 응….”

“아니면 왕자님께서는 제가 마물들에게 끔찍한 짓을 당해도 좋다는 겁니까?”

“그, 그, 그렇지 않아…! 저, 절대, 그렇지 않아….”

에레즈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긴 금발이 한발 늦게 흔들렸다. 그는 두 주먹을 움찔거리며 성검에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쟀다.

“…….”

무엇인가 이상하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성검을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성검은… 에레즈 프리드웬의 상징 같은 물건 아니던가?

“으으……!”

짧은 망설임 끝에, 마침내 에레즈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성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체구가 작은 소년이 휘두르기에는 몹시도 무겁고 큰 검이었다. 에레즈는 온몸을 이용해 성검을 휘둘렀다. 체구 탓에 성검은 땅에 비스듬히 꼽히고 말았다.

“으, 으……. 아, 아아아아아!”

그 순간, 푸른 전격이 자그마한 몸을 휘감았다.

“왕자님…?!”

소년의 비명이 절벽에 울려 퍼졌다. 칼리번의 입이 벌어지고, 두 눈이 확장되었다.

“카, 칼, 사, 사, 살려 줘! 흐, 끄윽, 아, 아파…. 너, 너무 아파…!”

에레즈는 높게 외치면서도 성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에레즈의 몸은, 정확히 성검이 닿은 부분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새하얗고 통통한 손이 순식간에 화상으로 뒤덮이고, 그다음으로는 검게 익어 버렸다. 검게 타 버린 몸에서는 희미한 연기마저 피어올랐다.

“욱—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당장 멈춰!”

칼리번은 참지 못하고 에레즈에게 달려들었다.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걸?”

그런 칼리번을 막은 것은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뭐라고…!?”

“지금 왕자에게 손을 대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해.”

에어리얼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리번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큭…! 이것 놔라!”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칼리번’의 몸을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얌전히 보기나 해. 왕자님을 구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의 힘에 휘말려 죽어서야 쓰겠어?”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귓가에 속삭였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손을 뻗어 보지만, 에레즈에게는 닿지 않았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왕자에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파, 아, 아아아악, 카, 칼, 너무 아파! 윽, 흐으윽……!”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말처럼 그가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에레즈의 화상은 이제 손등을 지나 팔로 옮겨붙고 있었다. 성검, 성검에 무슨 문제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성검에서 떼지 않았다. 아니, 감히 그러지 못했다.

“제기랄, 에어리얼! 왕자님께 무슨 짓을 시키는 거냐!”

“나한테 화내는 것보다는 주변을 먼저 둘러보는 게 어때?”

“…!”

에어리얼은 쿡쿡 웃으며 칼리번의 몸을 빙글 돌렸다. 온몸이 타오르는 에레즈에게 집중하느라 주변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그러나 성검에서 흘러나온 전격은 에레즈뿐만 아니라 마물들마저 착실히 불태우고 있었다. 성검의 힘을 바로 코앞에서 맞닥뜨린 마물들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스러져 갔다.

“설마… 왕자님을 이용하려는 거냐….”

그 광경을 본 칼리번의 몸이 분노로 떨렸다.

“제발, 제발 멈추게 해라…. 저러다가는, 왕자님께서…!”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에어리얼에게 간청했다. 에레즈 스스로 받아들인 고통임에도 칼리번 혼자만 애가 닳고 있었다.

“마물은 모두 죽었다! 이제 그만둬라!”

“부탁하는 주제에 말이 짧군.”

에어리얼이 지나가듯 가볍게 중얼거렸다. 칼리번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크으윽…! 에어, 리얼.”

“…….”

“제발……. 부탁이니… 저분을….”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에어리얼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겨우 말을 쥐어짰다. 에어리얼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부 끝났습니다, 왕자님. 이제 손을 떼셔도 좋습니다.”

에어리얼은 일부러 느릿하게 말했다. 칼리번은 참지 못하고 에어리얼의 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 으으…. 윽……!”

에어리얼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에레즈는 성검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털썩, 자그마한 몸이 땅 위로 쓰러졌다.

“제길…!”

칼리번은 단박에 에어리얼을 밀쳐 냈다.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순히 칼리번을 놓아주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에레즈는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그슬려 있었다. 그가 걸친 옷은 실오라기도 타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빠르게, 에어리얼이 먼저 접근했다.

“으, 으윽…….”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마구잡이로 안아 올렸다.

“아악! 아, 아아…. 으으……. 아파, 아, 아파……. 카, 칼…….”

둔탁한 손길이 닿자 에레즈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에어리얼은 그런 칭얼거림과 비명을 깡그리 무시한 채 에레즈를 품에 안고 흔들 뿐이었다.

“왕자님….”

그런데도… 에어리얼의 품에 안긴 에레즈의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지난 8년 동안 수도 없이 네 머릿속을 돌려 보았어.”

에어리얼은 자장가를 들려주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지. 에레즈 프리드웬이 지닌 ‘힘’이 자기 자신이 아닌 남에게 쓰이는 순간을 말이야.”

“……!”

에레즈에게 닿지 못한 칼리번의 손이 움찔, 떨렸다.

“목이 잘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생명력. 그리고 마물을 죽이고, 인간을 살리는 성력. 알파와 성녀 사이에서 태어난 이 녀석은 이질적인 힘을 동시에 지닌 괴물이다. 회복력은 마물 이상이고, 자신의 몸이 죽을 위기에 처할 때는 탈피를 해서 새로운 몸을 얻기까지 해. 하지만… 너와 있을 때는 달랐지.”

“윽, 아…. 카, 칼…….”

눈을 꾹 감은 에레즈는 에어리얼의 품 안에서도 칼리번을 찾았다.

“칼리번. 너와 있을 때만큼은 신기하게도…. 에레즈 프리드웬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그 회복력을 옮겨 줄 수 있더군. 네 손에 죽을 뻔한 내가 회복한 것도 바로 이 힘 덕분이야.”

“…….”

칼리번의 눈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지금은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옛날, 무투회에 참여했을 때 칼리번은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부상을 입었다.

<와, 왕자님…. 물러나십시오. 고귀한 손이 더러워지십니다.>

그때, 칼리번은 에레즈 프리드웬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회복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팔이 잘렸을 때도 그랬다.

“네가 에레즈 프리드웬으로 인해 오메가가 된 것처럼, 에레즈 프리드웬도 너와 만난 후 무언가가 변했다는 뜻이겠지.”

칼리번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일들이었다.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에어리얼에게는 다르게 보였고, 왕자를 지배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성력과 마력, 이 녀석의 몸 안에 잠들어 있는 두 가지 힘을 외부로 발산시키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한 모양이야. 예를 들면… 저 검처럼 말이지.”

에어리얼은 성검을 힐끗 바라보았다. 성검은 소년의 비명과 고통을 받고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물을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성검은 성력을 발산시켜 다수의 마물을 공격할 수 있는 모양이야. 다만, 마물을 멸하는 힘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몸도 다치게 돼. …네가 내 모습을 한 채로 북문으로 왔을 때 기억나?”

물론 똑똑히 기억난다. 칼리번 또한 에레즈의 힘에 의해 전신이 불타는 고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에레즈 프리드웬은 반신이 괴사했어.”

“……!”

에어리얼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칼리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우리의 왕자님께서는, 칼리번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단 말이지.”

“왕…자님….”

칼리번의 턱이 떨렸다. 에어리얼의 몸으로는 다가갈 수 없어 에레즈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칼리번은, 자신의 몸이 찢어지면서도 그저… 왕자님이 마물을 물리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칼리번’의 몸이 필요했던 거야. 내가 에레즈 프리드웬의 곁에서 굳이 네 몸을 고수한 이유지. 에레즈 프리드웬은 널 위해서라면 아무런 논리도, 이성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거든. 심지어 자기 자신이 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그뿐만 아니라 칼리번의 몸을 치유해 주기까지…. 이만한 방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지난 8년간 칼리번은 고깃덩어리가 된 채 매달려 있었다. 에어리얼은 그런 칼리번의 몸뿐만 아니라, 아무도 깨닫지 못했던 에레즈의 능력마저 훔쳐 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칼리번, 너는 이 거대한 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등 뒤에 숨기기에 바빴지. 하지만 나는 달라! 에레즈 프리드웬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거다.”

“윽, 으으…!”

에어리얼은 그렇게 말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에레즈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만둬. 그, 그런 힘을… 왕자님께서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칼리번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작 몇 마리의 마물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저 작은 몸은 죽음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다. 이런 식으로 성검을 반복해서 사용한다면…. 몸은 성력으로 회복될지 몰라도 정신이 무너지고 말 거다.

“그것까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

에어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은 서로 죽이고, 알파가 인간을 죽이고, 마물이 알파를 죽일 거다. 이 땅에 인간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는 성검의 힘으로 마물을 쓸어 버릴 거야. 그럼 마지막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겠지.”

“…….”

“세뇌가 풀린 다음 에레즈 프리드웬은 어떻게 될까? 자신이 모든 걸 없애 버린 후에, 칼리번이 사실은 진짜 칼리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야.”

“에어리얼….”

“아마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지 않을까? 차마 ‘칼리번’을 찔러 죽이지는 못할 테지. 비록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야. ”

“…어째서.”

칼리번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어째서 왕자님께…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구는 거냐. 나한테 그러는 건 상관없다. 너에게 난 꼴 보기 싫은 존재겠지. 하지만 왕자님은, 너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이고, 네 계획을 방해했을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죄가 있다면, 잘못 태어났다는 것뿐. 이런 짓을 당할 분은 아니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칼리번을 채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에어리얼을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강한 육체에서 나오는 순수한 힘도, 마물에게 빌릴 수 있는 힘도…. 그저 말로써 울분을 터뜨리는 것뿐.

“내가 너희에게만 가혹하게 구는 것처럼 보여?”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전혀 그렇지 않아. 너와 에레즈 프리드웬은 내가 선택한 도구일 뿐…. 그래, 너희는 내 목적을 위해 휘두르는 검과 방패에 불과해.”

목적을 위해 휘두르고, 찌르고, 누군가를 죽이는 검과 방패…. 부서진다고 한들 그 누가 탓하겠는가? 그것이 무기의 쓰임새인데.

“너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래! 날 범한 마물과 마물 혼혈들? 나를 괴롭힌 인간들? 젠을 이용한 왕족과 성녀들? 그리고 젠? 그들에 대한 복수만으로는 부족하지.”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딴 세상에 인간도, 마물도… 어느 쪽도 남아서는 안 돼!”

낮은 목소리가 천둥처럼 주변을 울렸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나약하고 아름다운 외양에 착각하기 쉬웠지만, 에어리얼은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오메가였다. 그 정신력이 칼리번의 육체와 만나자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로 재탄생했다.

“이제 내게 남은 소망은 단 하나뿐…. 모두 공평하게 죽는 거야. 그것도 마지막 단계만 남았지.”

그 말에서,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동안 에레즈 프리드웬을 속일 수 있도록 ‘에어리얼’인 척해 줘서 고마워, 칼리번. 늙은 오메가가 할 일은 여기까지야. 쓸모가 없어졌으니 슬슬 무대에서 물러나 주지 않겠어?”

처음 에어리얼은 선택권을 주었고, 칼리번은 에레즈 프리드웬을 선택했다. 그런데도 에어리얼 시간을 들여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흔해 빠진 마물로 널 죽이는 건 오랜 친구이자 형제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말을 마친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귓가에 무언가를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에어리얼의 품에 안겨 숨을 할딱거리던 작은 생명이 몸을 파르르 떨리더니, 감은 눈을 떴다.

“네 마지막 상대라면 역시 에레즈 프리드웬 아니겠어?”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뺨에 입술을 댄 채로 웃음을 흘렸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손에 죽어라, 칼리번. 에어리얼은 몸이 바뀐 칼리번에게 그와 같은 저주를 퍼부었었다. 지금 그 저주는 예언으로 탈바꿈했다. 칼리번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작은 생명에게 향했다. 푸른 보석안이 처음으로 칼리번을 응시하고 있었다. 형형한 빛을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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