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최후의 적 (35/50)

9. 최후의 적

목숨을 구했다. 목표도 정해졌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방어전이다. 칼리번과 젠은 성녀단과 헤어져 동쪽 성문으로 향했다.

“으윽!”

젠의 뒤를 따르던 칼리번은 돌연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이봐, 괜찮아?”

몇 걸음 앞서가던 젠이 칼리번의 팔을 훌쩍 잡아당겼다. 가벼운 몸은 단번에 일으켜졌다.

“하아…. 고맙다.”

“너…….”

“…왜 그러지?”

비틀거리던 칼리번은 젠의 표정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제길, 너… 얼굴이….”

젠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칼리번은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손바닥 위로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났다. 넘어지기는 했으나 얼굴을 부딪치지는 않았다. 피가 흐르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칼리번의 몸은 망가져 있었다. 죽을 위기를 겪은 탓일까? 끝이 올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안 되겠다. 업혀.”

제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칼리번에게 젠은 군말 없이 등을 내주었다.

“그 몸으로는 내 속도를 못 따라오잖아.”

“…면목 없군.”

예전의 몸이었다면 젠을 업으면 업었지 등을 빌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급박했다. 칼리번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거부감 없이 따랐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등에 매달리자 발생했다.

“…?”

칼리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영문 모를 감정이 파도가 되어 그를 덮친 탓이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칼리번은 혼란스러웠으나 말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에어리얼의 몸이 느끼는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게 바짝 매달려, 알겠지?”

“그건 걱정하지 마라.”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젠은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보자. 우리의 목적지가 내 예상대로라면 중간에 암벽을 타야 하니까….”

젠은 이것저것 재더니 칼리번의 허리와 자신의 허리를 끈으로 한데 동여맸다. 그렇게 준비를 맞추고 나서야 비로소 달리기 시작했다. 일련의 행위가 그녀에게는 몹시도 익숙해 보였다.

“…….”

젠과 함께 용병으로 지내 왔으나 이런 면모는 전혀 알지 못했다. 칼리번에게는 젠의 도움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어리얼과 몸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모른 채로 살았을 것이다. 젠은 허술해 보였으나 과거만은 철저히 숨겼고, 칼리번은 그 누구의 과거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성 전체를 내려다볼 만한 장소라면…. 동쪽 산 중턱에 절벽이 있는 걸로 아는데, 에어리얼이라면 분명 거기 있을 거다. 이 산은 우리도 종종 탔었잖아. 너도 기억나지?”

헐떡이는 숨결과 함께 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젠에게 업히니 확실히 속도가 빨라졌다. 그녀는 가파르고 거칠 산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단단한 알파의 몸은 지치기는커녕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한때 칼리번도 그와 같은 몸을 지녔고, 그녀와 함께 어떤 길이든 누볐다.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에 칼리번은 그리움과 동시에 박탈감을 느꼈다.

“…그건 그렇고 에어리얼이 미쳤다고 우리한테 져 주진 않을 텐데, 어떻게 상대할 셈이야? 헉, 허억…. 우리 둘만으로 안 될 것 같으면 말해. 왕성으로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아직까지는 어렵지 않으니까.”

칼리번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도 모른 채, 젠은 앞만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어느새 그녀는 암벽을 타고 있었다. 칼리번의 다리가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숲에 풀어 둔 마물을 이쪽으로 부를 거다.”

“흠. 지금 몸 상태로…. 읏샤, 괜찮겠어?”

“할 수 없지. 이 몸을 아낀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칼리번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의 계획을 전달했다. 그 점에 있어서 칼리번은 단호했다. 도리어 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리고는 싶지만 어쩔 수 없군. 대신 너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주마!”

젠은 호탕하게 외쳤다. 그녀의 전폭적인 신뢰와 도움 덕에 칼리번은 눈을 감고 마물을 부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잠재된 힘을 끌어 올리니 코와 귀에서 다시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메가가 피 냄새를 풍기자 젠은 잠시 움찔거렸다. 그러나 자제심이 강한 알파답게 이내 평상심을 되찾았다.

“그건 그렇고,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에어리얼이라면 이즈음에 마물을 깔아 뒀을 텐데….”

칼리번이 흘리는 피로 등이 축축해졌지만 젠은 애써 모른 척했다. 대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봐, 칼리번! 마물은 얼마나 끌어모을 수 있지?”

“…음. 하아……. 그리 많지는 않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부릴 수 있는 마물은 노쇠한 것들뿐이라, 녀석이 내 몸을 이용해서 전력으로 맞서기 시작하면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그래? 되도록 빨리 에어리얼을 끝장내야겠군. 마물들을 당장 여기까지 불러내긴 어려운 건가?”

“내 영향권 밖으로 흩어진 상태다. 시간이 좀 걸린다.”

에어리얼과 동문에서 맞부딪치기 전, 칼리번은 쓸 만한 마물을 일부러 풀어 주었다.

‘피를 미리 흘려 둬서 다행이군….’

죽음에 가까워진 탓인지 오메가의 체향은 옅어졌다. 대신 칼리번의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갔다. 마물들이 그 냄새를 놓칠 리가 없다. 물론, 이 방법을 쓰면 에어리얼이나 다른 알파들도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겠지만….

“…젠, 무슨 일이지?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다.”

가파른 암벽을 등반한 후, 어째서인지 젠의 움직임이 딱 그쳤다. 잠시 쉬는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이상함을 느낄 정도였다.

“으음…. 그게 말야. 아무래도 네가 좀 봐야 할 것 같다.”

젠이 그녀답지 않게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리번은 눈을 떴다.

“그게 무슨….”

젠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칼리번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들의 앞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얀 갑옷이 서 있었다. 백합이 새겨진 우아한 갑옷은 숲과는 어울리지 않게 창백한 빛을 뿜어냈다. 그 모습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유령처럼 느껴졌다.

“…아스터.”

칼리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것은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침입은 여기까지입니다. 물러나십시오.”

아스터의 목소리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더없이 가벼웠다. 그리고 덧없었다.

* * *

<지하 감옥에서 죽어 준다면 편하겠지만, 칼리번은 순순히 죽어 줄 인물이 아니야. 반드시 나를 막으러 올 거야.>

에어리얼은 느린 걸음으로 아스터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러니 네가 이 길목을 지켜. 의식에 접근하려는 녀석은 칼리번이든, 다른 누구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없애 버리는 거야. 알겠지?>

큼지막한 손이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아스터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칼리번을 잡아 오면 되는 겁니까?>

<아니, 확실하게 죽여.>

굳이 전리품을 챙겨 오겠다면야 목이나 심장 정도면 돼. 칼로 베어 낸 듯한 명령에 창백한 갑옷이 삐거덕거렸다.

<…하지만 에어리얼, 그건 당신의 몸입니다.>

<무슨 소리야? 이제 이게 내 몸인걸.>

에어리얼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아스터의 목소리에는 꺼림칙함이 담겨 있었다.

<뭘 망설이는 거지? 설마… 그 닳아 빠진 몸이 더 마음에 들었던 거야?>

확실히 이 몸이 예쁘장하지는 않지.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아무런 문제 없다는 거지?>

<…….>

<자, 어서 가. 네가 해야 할 일을 마치도록 해.>

에어리얼은 아스터를 떠나보내며, 그가 가장 원하는 말을 속삭였다.

<다녀와. 의식이 무사히 끝난 후에는 사랑해 줄 테니까. …널 낳아 준 이 몸으로.>

단단한 손이 그의 등을 가볍게 밀쳤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

짧은 회상을 마친 아스터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과연 에어리얼의 예상대로였다. 칼리번은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것도 쓸데없는 알파 하나와 함께.

“이 자식, 가만히 있어! 지금 네 몸 상태에 어딜 나서려고 하는 거야!”

“부탁이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내게 시간을 줘.”

“미쳤어? 저놈은 에어리얼이 부리는 알파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물러설 리가 없잖냐!”

젠과 칼리번은 의견이 맞지 않는지 아스터를 앞에 두고 티격태격하며 다툼을 벌였다.

“…….”

아스터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만둬, 칼리번!”

마침내 칼리번은 몸에 묶인 끈을 풀고는 자진해서 땅으로 내려왔다.

“…아스터.”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젠의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그녀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아스터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부탁이다. 길을 열어 줘.”

칼리번의 목소리는 다소 쉬어 있었다.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

그것은 적을 향한 회유나 권고, 선전포고라고 하기에는 더없이 초라했다. 젠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평소처럼 표정이 없었으나 감정이 없는 것과는 달랐다. 물결이 잔잔하게 이는 호수와도 같았으며 동시에 비바람에도 꿈쩍하지 않는 바위처럼도 보였다.

젠과 칼리번 사이에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신뢰가 있는 것처럼,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도 유대가 있었다. 칼리번은 외면했고 아스터는 어린 탓에 알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저희의 계약은 끝났습니다.”

아스터는 한참 후에 대답했다. 칼리번이 에레즈를 찾을 때까지, 그리고 아스터가 에어리얼을 만날 때까지 일시적으로 동맹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처음 맺은 계약이었다.

아스터는 답을 내렸다. 칼리번과 자신은 그 이상의,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라고.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이 이상 나아가려고 한다면…. 죽일 겁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망할 자식! 할 말이 고작 그것밖에 없냐? 아니면 이것도 에어리얼이 시켰어!?”

참다못한 젠이 뒤에서 소리쳤다.

“그건 당신 따위가 알 바 아닙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대할 때와 달리, 젠에게는 유독 싸늘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건 전적으로 제 의지입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남아 있던 작은 망설임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칼리번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져야만 했다.

“그런가.”

칼리번은 아스터의 대답을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목 끝까지 치솟는 뜨거움을 억누르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네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는 그 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감정을 다해 호소하거나, 반박하는 것. 그런 것들은 아스터나 칼리번, 두 사람 모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남은 것은 결투뿐이다. 칼리번은 배에 난 상처 위로 손톱을 세웠다. 고통을 이용해 마물을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젠과 암벽을 등반하면서, 이 숲에 머물던 마물 몇 마리를 붙잡아 두었다. 다만 그것은 에어리얼과 싸울 때 사용하려 간신히 비축해 둔 힘이었다. 그러나 아스터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그에게 닿을 수조차 없다. 칼리번이 간신히 아문 상처를 찢으려는 순간이었다.

“그건 아껴 둬라, 칼리번.”

젠이 칼리번의 팔을 붙잡았다.

“…젠.”

“새파랗게 어린놈 상대로 지금 마물을 쓰는 건 쓸데없는 낭비야. 부대장 뒀다가 뭐 하냐.”

젠은 칼리번의 팔을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다. 쿵, 쿵, 서로의 심장 박통이 피부를 통해 느껴질 정도로 세게. 칼리번과 달리 젠의 손은 굳은살투성이였다.

“하지만, 젠…. 너 또한 에어리얼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욱. 이제는 젠과 에어리얼의 관계를 안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에어리얼을 직접 죽이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누가 안 보겠대? 금방 따라갈 테니까 걱정 마. 설마 너까지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냐?”

두 사람이 맞닿은 것은 잠시였다. 이윽고 젠의 그림자가 칼리번을 뒤덮었다.

“일 대 일이라면 내가 나서는 게 맞겠지.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가라, 칼리번.”

그녀는 칼리번의 앞에 선 채로 돌아보지 않았다.

“…알겠다.”

칼리번은 젠에게 감사도, 사과도 표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단단한 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 앞은 지나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아스터가 칼리번을 제지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서 한눈을 팔아?”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젠이 아스터를 덮쳤다.

“큭…!”

아스터는 한 팔로 젠의 공격을 막아 냈다. 칼리번은 젠이 만들어 준 틈새로 빠져나갔다.

“하하! 저번에 봤을 때는 대가리밖에 없더니만, 이제는 제법 그럴듯해졌는데?”

젠은 아스터가 칼리번에게 신경 쓸 틈을 갖지 못하도록 마구잡이로 갑옷을 내리쳤다.

“목숨 줄이 달랑거릴 때는 칼리번 옆에 붙더니, 새로운 몸은 에어리얼에게 아부를 떨어서 받아 낸 건가? 박쥐처럼 여기저기 들러붙는 게 네 본성인가 보지?”

젠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다. 반면에 아스터는 둘로 갈라진 젠과 칼리번 모두를 신경 쓰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크읏…. 그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한테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아스터는 젠을 걷어찼다. 그녀의 몸이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아스터는 급히 방향을 틀었으나 칼리번은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푸하하, 꼴 좋다! 날 쓰러뜨릴 때까지는 딴 데 볼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을걸?”

젠은 아스터를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조롱했다.

“…….”

아스터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로써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갑옷으로 전신이 가려져 있음에도 조용한 분노가 느껴졌다. 한 마리의 토끼를 놓치고 말았으니, 사냥개는 이제 남은 토끼를 전력을 다해 도륙 낼 것이다.

“박쥐라면 쥐도 새도 아닌 짐승을 일컫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보다는 당신에게 어울리겠군요.”

아스터도 젠의 비아냥거림을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목소리로 대거리를 했다.

“…뭐라고?”

젠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당신이야말로 인간 사이에도, 알파 사이에도 끼지 못하는 괴물 아닙니까.”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알파와 달리 쉽게 분노에 지배되지는 않았다.

“에어리얼이 그렇게 말하던?”

헛웃음을 지을 뿐.

“글쎄요. 답이 알고 싶다면 저를 이기시면 됩니다.”

“그딴 건 하나도 안 궁금해, 이 새끼야!”

감히 나를 도발하려 들어? 뻔한 술수에 젠은 침을 뱉고는 거칠게 땅을 걷어찼다.

“칼리번 녀석 품에서 끽끽거리길래 봐줬더니만…. 어른도 몰라보고 말이야.”

땅 위로 비친 젠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녀의 신체 일부가 흉측한 마물로 변형되어 갔다.

“저는 봐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제가 당신이었다면 그때 미련 없이 죽였을 겁니다.”

“아아, 그러셔? 이참에 저번 전투의 결착을 지으면 되겠군.”

젠은 아스터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인간의 몸과 어울리지 않게 변형된 팔이 땅을 질질 끌었다.

“피차 잘된 일이군요. 저 또한 당신에게는 해묵은 원한이 있으니 말입니다.”

아스터 또한 전투 태세를 취했다.

“요즘 어린 것들은 영 재수가 없단 말이야.”

젠은 본성을 따라 변하기 시작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 * *

알파들, 아스터, 그리고 젠까지. 모든 것을 등 뒤에 버린 채 칼리번은 홀로 달렸다. 남은 목숨을 초에 비유하자면 그에게는 한 토막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금세 땅 위로 촛농이 흘러내렸다.

칼리번은 젠에게 업혀 갔을 때보다 더 자주 넘어졌다.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한번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기는 배로 힘들어졌다.

“헉, 허억, 하아…….”

칼리번은 주저앉은 채로 꽉 막힌 숨을 몰아쉬었다. 목숨을 태워 흐르는 촛농이 붉게 흔적을 남긴다. 더는 피를 닦을 여력도 없었다.

“후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수많은 이들이 칼리번에게 물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칼리번 자신이 수도 없이 물었다. 질문의 개수만큼의 답으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러나 생을 향한 본능은 번번이 칼리번의 발목을 붙잡고 자빠뜨린다. 살아 있는 것에게 제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그렇기에 메마른 혀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더욱 소중하고 안달이 난다.

“…크으윽!”

그렇기에 칼리번은 두 팔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장작처럼 가는 몸은 고작 이 정도를 뛰었다고 바들거리며 떨린다.

<저는 이것이 마물의 당연한 본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친 산길을 타며. 덜컹거리는 머릿속으로 아스터의 말이 어른거렸다.

<인간에게도, 마물에게도 없는 본능이라면 이 감정은 무엇이죠? 제가 에어리얼에게 느끼는 이 강력한, 구속은 도대체….>

새까맣게 물든 손으로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의 뿌리를 짓밟으며 나아갔다.

“흐으, 크으윽…!”

거친 숨결은 마치 울음을 토해 내는 것처럼 들렸다.

그에게 물려준 것. 너와 내 심장에 새겨져 있는 각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 보기 전까지는 그 글귀를 절대로 읽어 볼 수 없겠지.

‘미안하다…. 젠장! 미안하다, 젠…!’

칼리번은 그녀의 편만을 들 수 없는 자신을 벌하듯 달렸다. 눈앞을 나무로만 가득 채울 정도로 빽빽했던 숲을 허우적거리며 헤어 나왔다. 마침내 숲의 끝. 사람의 몸으로 따지자면 손가락의 끝. 황량한 절벽과 적막한 하늘이 칼리번을 맞았다. 바람을 막아 주는 나무는 더 이상 없었고 고스란히 칼리번의 작은 몸 위로 쏟아졌다. 이대로는 쓰러질 것만 같아 칼리번은 뒷걸음질을 쳤다. 날카로운 빛에 두 눈이 쓰라렸다.

“늦었네.”

쉬이 뜨지 못하는 눈을 강제로 열게 만든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벼랑 끝에는 에어리얼이 호위 하나 없이 혼자 서 있었다. 아니, 칼리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칼리번.”

빛 아래 서 있기 때문일까? 거구의 사내는 지하 감옥에서 마주했으면서도 마치 생전 처음 보는 것만 같다. 칼리번은 눈을 깜박였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까무잡잡한 피부. 보기만 해도 힘이 느껴지는 근육질의 몸. ‘칼리번’의 껍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

8년 전의 자신이 거기 서 있었다. 먼 과거의 자신은 후일이 이렇게 비루해질 줄 알았을까? 운명을 미리 보았다면 바꿀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을 잃고,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에레즈 프리드웬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을까? 목숨보다도 강력한 각인을…. 낙인을 무시한 채로?

에어리얼은 아무런 술수를 부리지 않았는데도, 칼리번으로 하여금 강렬한 후회를 불러일으킨다. 에어리얼은 그를 좌절시키기 위해 일부러 과거와 더욱 흡사한 환상을 빚은 것이다.

‘아니….’

그러나 칼리번은 그럴듯한 허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다.

‘어차피 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

원래 몸을 되찾는다 해도 저렇게 멀끔하지 못할 것이다. 재생할 때마다 잘려 나가 회복 자체가 불가능해진 몸. 에어리얼의 품에 안겨 지내던, 살아 있는 인형. 생존과 번식만이 가능할 수 있도록 간신히 숨만 붙여 놓았다. 칼리번은 차례로 떨어져 나간 몸의 기능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발도, 손도, 코도, 혀도, 눈도… 모두 잃었다. ‘칼리번’의 몸으로는 더는 에레즈에게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완연하게 성장한 모습을 두 눈으로 담을 수도, 이름조차 부를 수도 없다.

잃어버린 목소리 대신 피가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애초에 아스터가 널 죽일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설마 그 여자가 여기까지 방해할 줄은 몰랐지만….”

에어리얼은 붉은 눈으로 칼리번을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는 볼품없는 칼리번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 손을 들었다. 오메가의 피 냄새를 따라온 마물들이 부름에 응해 칼리번의 등 뒤로 몰려왔다. 그 기세가 대단해 숲이 기어 오는 것만 같았다.

젠이 준 마지막 기회였다. 앞으로 기회가 생길지라도 더는 몸이 받쳐 주지 못할 것이다.

“뭐야, 나와는 대화조차 나눌 가치도 없다는 거야?”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는 마물들을 보고도 에어리얼은 꽤나 여유로웠다. 이 정도 마물들은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는, 젊은 육신을 입은 노련한 오메가의 오만마저 엿보였다.

우득, 칼리번은 망설임 없이 주먹을 쥐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꿰뚫었다. 마물들이 일제히 칼리번을 지나, 에어리얼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칼리번은 마물이 되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굵은 어금니, 그리고 털로 뒤덮인 추악한 형상이 되어 에어리얼을 노려보았다.

번들거리는 알파의 눈 위로 ‘칼리번’의 모습이 일제히 떠오른다.

마물의 포효가 숲을 흔들었다. 괴수들이 에어리얼을 덮쳤다. 에어리얼은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으나 행동이 영 굼떴다. 칼리번이 에어리얼만큼 오메가의 힘을 다루지 못하는 것처럼, 그 또한 칼리번의 몸을 가졌을지언정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가서 죽여!’

칼리번으로써는 호재였다. 에어리얼이 마물의 통제권을 빼앗기 전에 끝을 내야 했다.

“크…으윽, 아아악!”

그는 우선 에어리얼이 도망칠 수 없도록 무릎뼈를 부러뜨렸다. 주저앉은 에어리얼의 어깨를 날카로운 이로 꿰뚫고, 비명을 지르는 머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마물들이 그의 배를 짓이겼다. 8년 전의 칼리번은 다른 이도 아닌 칼리번 자신의 손으로 부서져 갔다.

“끄윽, 허억…! 흐으, 흐흐…. 어때…. 칼리번, 자기 몸을 찢는 느낌이…?”

에어리얼은 피를 흘리면서도 칼리번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비수를 찔렀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물어뜯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감각은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크윽…. 아악, 으아아악! 하, 히이, 하하학!”

광기 어린 비명이 절벽 너머로 울려 퍼졌다. 에어리얼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갔으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욱….”

도리어 마물을 조종하는 칼리번이 더 상처 입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만 더…. 힘을…….’

움직여라, 움직여! 칼리번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길, 버텨…. 에어리얼의 명줄을 끊어 놓을 때까지만이라도…!’

심장이 조여들어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숨통이 조여 올 때마다 마물과의 연결이 잠시 끊어졌다. 칼리번이 승세를 잡았음에도 아직도 에어리얼을 죽이지 못한 이유였다.

“허억, 읍, 크읏……. 허억…!”

죽음이 가까워진 탓일까, 마물을 통제하는 힘과 섬세함마저 점점 떨어져 갔다.

“아, 아아, 하, 하하하! 아, 아아— 간지러워! 이거밖에 못 해?! 크엑, 켁…. 더, 좀 더 꿰뚫어 보라고!”

칼리번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에어리얼은 마물의 이빨에 온몸이 꿰뚫리면서도 그를 도발했다. 전투의 양상은 변질되어 갔다. 마치 토끼가 늑대를 쫓는 것처럼, 에어리얼이 자진해서 마물들에게 제 몸을 맡긴 모양새가 되었다.

‘설마, 피를 다량으로 흘려서 마물들의 통제권을 뺏어 갈 셈인가….’

타당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칼리번이 예상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아니, 에어리얼이 마물을 새로 불러오지 않는 한 내 쪽이 유리해!’

에어리얼을 공격하는 마물 중에는 ‘에어리얼’이 낳은 마물도 있었다. 직접 낳은 마물과 오메가의 결속은 다른 관계보다 훨씬 강하다. 칼리번이 지하 감옥에서 아스터를 붙잡지 못했던 것처럼.

마물이라는 종족은 필연적으로 오메가와의 근친교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어긋난 결합은 오메가를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낳았다. 교미의 방식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본성으로 고착되었다. 인간의 피가 섞인 마물 혼혈과 달리, 마물이 오메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이유기도 했다.

“윽….”

기력을 소진한 칼리번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메마른 땅 위로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크읍, 아, 좀 더 몸 안으로, 꿰뚫어…. 아, 흐윽, 아하하, 하아…!”

에어리얼은 비명 사이로 신음을 흘리며 마물을 흥분시키고 돋웠다. 그가 차지한 칼리번의 몸은 전성기 때의 상태였다. 그 덕에 마물들이 달려들어도 그런 여유를 부리며 버틸 수 있었다. 마물들에게 물어뜯기고, 꿰뚫리는 에어리얼의 모습은 범해지는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시작한 전투를 바라보는 칼리번의 검은 눈이 점차 흔들렸다. 구토감이 밀려왔다.

“윽, 우윽…!”

결국, 칼리번은 고개를 숙여 속에 든 것을 게워 냈다. 피가 섞인 위액이 쏟아져 내렸다. 목 안의 살이 한 겹 벗겨진 것처럼 쓰라렸다.

“하…아아…. 읏…….”

혀를 내밀어 굵은 핏덩어리를 뱉어 냈다.

‘뭔가… 이상하다.’

내장까지 토할 것만 같던 칼리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에어리얼을 죽이는 일이, 이렇게 쉬울 리가….’

에레즈를 다시 만나기 위한 여정에서 칼리번은 무수한 적들과 마주쳤다. 아무리 약해 빠진 마물이라 할지라도 반격조차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것. 죽음을 코앞에 둔 칼리번마저 순간순간 생존 본능에 흔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여태까지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칼리번’의 육신이 찢기는 모습을 보여, 상대방의 정신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그럴 리가 없었다. 칼리번이 혼란에 빠지자 마물의 공격도 주인을 따라 둔해졌다.

“똑바로 봐, 칼리번— 어서, 내 모습을, 날 보라고!”

그러자 에어리얼이 도리어 칼리번을 큰 소리로 부르며, 그를 향해 두 팔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물이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부러진 에어리얼의 팔을 뽑아내기 위해 잡아당기자, 상체가 뒤로 꺾였다.

“하아, 하아…….”

칼리번은 피가 묻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공격을 하는 것은 자신이고, 죽어 가는 것은 에어리얼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반대가 된 것 같다. 에어리얼의 저 과장된 행동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점점 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무언가 계략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멍청하긴! 뭘 하는 거야?! 설마 망설이기라도, 크, 컥…. 하는 거야?!”

목이 꿰뚫린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면서도, 에어리얼은 핏물을 끓인 목소리로 절절하게 외쳤다. 소리를 차단하려고 해도 칼리번 자신의 목소리였기에 손바닥을 뚫고 들어왔다.

“날 죽여, 칼리번! 어서!”

그러나 에어리얼이 무슨 술수를 썼는지 고민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칼리번은 머리가 나빴다. 그렇다면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에어리얼을 어떤 함정을 준비했든 간에, 그를 죽이면 시작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커헉, 이게 바로, 크흣……. 네가 원하는 거잖아?!”

질긴 천이 찢어지기 직전, 최대치까지 빳빳하게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마물들이 에어리얼의 두 팔을 사정없이 잡아 뜯고 있었다.

“히익, 히히…. 끄윽, 그래, 그렇게, 죽이는 거야……. 응? 어서…!”

에어리얼은 이런 상황에서도 숨을 꼴깍거리며 웃었다. ‘칼리번’ 자체의 근육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지, 그조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칼리번의 손짓 한 번이면 에어리얼의 팔과 다리가, 머리가 뜯겨 나갈 것이다. 남은 몸통만이 바닥에 굴러떨어지겠지.

“하아… 하아….”

칼리번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설령 뒤늦게 쫓아온 에어리얼의 마물들에게 같은 꼴을 당한다 해도, 칼리번에게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칼리번이 주먹을 쥐려는 순간이었다.

“그, 그만둬…!”

등 뒤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

칼리번은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카, 칼을 괴, 괴롭, 히지 마…!”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소년의 목소리였다….

“아스…터?”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다.

그 이름은 저 목소리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늘 예의 바른 어투를 유지하는 아스터보다도 훨씬 어린, 그리고 서툰 목소리였다. 바로 그랬기에 칼리번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

두 눈으로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게 되면 추락할 것만 같았다. 더는 기어 올라오지 못할 곳으로.

* * *

반복되는 나날에 묻혀 무의식 너머로 가라앉았으나, 이제는 똑똑히 기억한다. 에어리얼에 의해 같은 기억을 반복했으니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얼굴을 가린 자그마한 형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품 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바짝 긴장했는지 팔 안에서 떨다가, 마침내 안도하고는, 조금씩 몸을 기대 왔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 * *

바람이 일었다. 피가 엉겨 붙은 붉은 머리카락을 뒤에서부터 쓸어올린다. 마지막까지 눈을 감지 말라고 속삭이며….

분명 에레즈 프리드웬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는 혼자만 시간을 거꾸로 돌린 모습이었다. 에레즈는 에어리얼의 몸을 사용하는 칼리번보다도 작고 말랐다. 커다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촉촉이 젖었으며 금빛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있어 소녀 같았다.

서로가 처음 마주했던 그때, 에레즈는 성녀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몸에 맞지 않는 어른의 옷을 입고, 제 덩치만 한 성검을 조막만 한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다.

“왕자님….”

죽음에 몰린 에어리얼이 환각을 만들어 낸 것일까? 에레즈는 성검을 땅에 질질 끌며 다가왔다. 심지어는 옷자락을 잘못 밟아 그 자리에서 넘어지기까지 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카, 칼리번을, 괴, 괴롭히지 마…!”

자그마한 손이 칼리번을 밀쳤다. 미약한 힘이었다. 그런데도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말았다.

“칼…. 칼…!”

에레즈는 피를 흘리는 칼리번이 두려운지, 성검을 버리고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에어리얼은…. 아니, ‘칼리번’은 아직 마물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큭…!”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마물을 물렀다.

“칼….”

마물이 사라지자 처참한 형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팔다리가 뽑히기 직전에 멈춘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팔다리가 전부 잘린 모습을 보았다면 어린 에레즈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 아아….”

에레즈는 뚝뚝 울음을 흘리며 다가갔다. 하얀 옷자락은 금세 에어리얼의 피로 물들었다.

“카, 칼, 칼리번….”

칼리번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짖던 에레즈는 마침내 에어리얼을 품에 안았다. 어린 에레즈는 자그마해서, 무릎 위로 에어리얼의 머리를 기대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황금빛 비단처럼 에어리얼의 몸을 덮었다. 모든 것이 붉게, 에어리얼의 색으로 물드는 것도 망각한 채 에레즈는 눈을 감은 머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을 뿐이다. 푸른 두 눈 가득히 눈물이 맺혔다.

“아, 안 돼…. 주, 죽으면…. 칼, 칼….”

에레즈는 마물에게 물어뜯긴 얼굴을 쉴 새 없이 쓰다듬었다. 에어리얼을 향한 그의 손길은 애달프기 그지없었다. 소년이 보기에는 끔찍한 상태인데도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칼리번이 그토록 바라 왔던 모든 것이었다.

“…….”

그러나 칼리번은 그 마지막 순간조차 에어리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감히 강요할 수 없었으나 그에게는 마땅한 자격이 있었다. 에어리얼이 누운 바로 저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깨끗한 눈물로 피를 씻으며, 단 한 번도 편안하지 못했던 단잠을 누릴 자격이….

“왕…자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발로라도 기어가 어린아이에게 애원하고 싶었다. 그동안의 일을 구차하게 늘어놓으며 어설픈 동정심이라도 구하고 싶어졌다.

그사이, 에레즈의 눈물이 닿은 에어리얼의 몸에는 변화가 생겼다. 찢어진 상처가 아물고 부러진 뼈가 붙기 시작했다. 파괴와 달리 회복은 겸손하여 그 변화를 멀리 떨어진 칼리번이 단번에 눈치채기란 어려웠다. 마물에게 뜯겨 너덜거리던 팔이 붙어 갈 즈음에서야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하아.”

어느 순간, 에어리얼의 입에서 얕은 숨이 돌아왔다. 자신이 흘린 피로 웅덩이를 이루던 에어리얼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되찾은 것이다. 가까스로 쟁취해 낸 사투가 원상 복귀되는 광경을, 칼리번을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칼…! 다, 다행이야….”

에레즈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환히 웃었다. 에어리얼은 충성 어린 개를 대하듯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하얀 뺨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였다.

“…그런데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에어리얼은 질문했지만, 막상 그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칼리번의 그 커다란 손으로 에레즈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친 것이다.

“아앗!”

자그마한 몸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피로 물든 땅 위를 굴렀다.

“왕자님!”

빼앗긴 행복을 바라만 보던 칼리번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의 몸이 흔들렸다. 당장에라도 에어리얼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그런 칼리번을 멈춘 것은 그를 향해 내민 에어리얼의 손바닥이었다. 멈추라는 명령.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카, 칼……. 자, 잘못했어…….”

에레즈가 허겁지겁 변명했다. 하얗고 통통하던 뺨은 붉게 터져 있었다. 화를 내도 모자랄 상황이었으나 그는 비굴할 정도로 절실하게 사죄했다.

“저, 저 검을 쥐니까, 소, 손이 너무 아파서…. 미, 미안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에레즈는 급히 양손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손바닥은 껍질이 벗겨지고, 농이 차올라 보기 흉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정도 상처는 왕자님께는 별것 아니지 않습니까?”

에어리얼은 엄지로 그의 손바닥을 지그시 눌렀다.

“흐윽….”

에레즈는 고름이 터지는 고통에 훌쩍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둬라, 에어리얼…. 그 손 치우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그 광경에 머릿속이 하얗게 타 버렸다. 칼리번의 두 눈은 붉게 터진 뺨에 고정된 채였다. 에어리얼에 대한 증오는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불꽃을 키워 나간다. 칼리번의 감정에 동조된 마물들이 그르륵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지금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보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대단해. 널 알아보지도 못하는 머저리를 보고도 안달이 났군.”

아니면 여전한 건가? 에어리얼은 명령대로 손을 떼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에레즈의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칼리번.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모양인데…. 이 손으로 작은 머리통을 으깨는 건 얼마나 쉬울까?”

“…!”

“네 생각에는 이걸 부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잘 알 거 아냐, 원래 네 몸이었으니까.”

“카, 칼…. 잘못했어, 잘못…….”

에어리얼은 보란 듯이 금빛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에레즈의 몸이 끌려갔다.

“큭…!”

“지금 네가 날 협박할 때인지, 아니면 성의부터 보여야 할 때인지…. 한번 잘 생각해 봐.”

에어리얼은 칼리번에게 조언을 했다. 붉은 눈은 석상처럼 주변에 굳어 있는 마물들에게 향했다. 그것은 사실상 무언의 명령이었다.

“알…겠다. 더는 움직이지 않겠다. 그러니… 그분을 아프게 하지 마라.”

칼리번은 눈을 감고 마물을 조종했다. 숲과 절벽의 경계선에서 우글거리던 마물들이 숲의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제 됐겠지? 그분 놔줘.”

“…싫은데?”

에어리얼의 입에서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뭐라고?”

“이 손으로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난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예를 들면… 이런 것 말이야.”

“에어리얼!”

에어리얼은 쿡쿡 웃으며 에레즈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으응….”

“저는 왕자님이 꼴도 보기 싫습니다. 여기서 스스로 죽어 주세요.”

그는 에레즈의 귓가에 싸늘한 저주를 속삭였다.

“아….”

에레즈의 푸른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모습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요.”

에어리얼은 잔혹한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피가 묻은 단검을 내밀기에 이르렀다.

“우, 우윽…. 네, 네가 원한다면….”

에레즈는 두려움에 울먹거리면서도 그 단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자그맣고 하얀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차마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한없이 에어리얼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관대한 용서를 바라며….

“에어리얼! 그만둬라!”

“음? 영 부탁하는 자세가 아닌걸?”

칼리번의 외침을 들으며 에어리얼은 키득거렸다.

“제기랄!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

“우리 사이에 그리 많은 걸 바라겠어? 지금보다는 조금 더 공손하게 구는 것 정도?”

칼리번은 이미 무릎을 꿇은 채였다. 하지만 에어리얼에게는 부족했다.

“……큭.”

에어리얼의 의도를 파악한 칼리번은 잇몸이 내려앉을 듯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네발짐승처럼 두 팔로 땅을 짚고는 고개를 묻었다. 머리 위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카, 칼….”

그러거나 말거나 에레즈는 붉은 사내가 무서울 뿐이었다. 그는 에어리얼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칼리번은 최후의 적에게 완벽하게 항복했다.

나의 오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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