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수장 (34/50)

8. 수장

모든 일의 원흉인 붉은 오메가를 잡았다. 알테르 프리드웬으로 인해 두 갈래로 분열되었던 마물 혼혈들은 하나로 합쳐졌다. 백성들을 기만하던 성녀들은 성 밖에서 쫓겨났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붉은 오메가는 빠른 시일 내에 처형될 것이다.”

어느샌가 한 자리씩 맡은 알파들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연설을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형에 처하려 했으나 위험에 처한 오메가가 본능적으로 마물을 불러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수를 사용하며 수장시킬 계획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오메가였다. 그런데도 알파들은 집착하지 않고 반역자를 단호하게 척결하고자 했다. 그 태도에 처음 사람들은 안도하고 기뻐했다.

“왕국을 위협하는 적은 수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여자들은 칼을 들 이유가 없다. 손에 쥔 무기를 내려놓고, 각자의 처소에서 무기를 가져와 왕에게 반납해라. 오늘부터 바로 회수해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화살의 방향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사람들은 단상에 선 알파들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마물이 다시 습격해 온다면 그때는 무엇으로 싸웁니까?”

누군가가 사람들 사이에 숨어 물었다.

“그 점은 걱정 마라. 붉은 오메가가 죽으면 마물도 잠잠해질 테니.”

“하지만, 아직 성 밖에 마물이….”

“그때는 우리 알파가 마물로부터 너희 인간들을 보호하겠다. 검과 방패는 연약한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소 위화감을 느꼈으나… 수긍했다. 수긍해야만 했다. 계속된 마물의 습격으로 무너진 것은 성벽만이 아니었다. 마물 혼혈을 향한 혐오와 적개심도 함께 부서졌다. 그들의 위상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더는 배척해야 할 야만인이 아니었다. 성안의 질서를 바로잡는 존재였다.

물론, 무너진 건물을 세우고 다친 이들을 간호하는 등의 노역은 인간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영광은 거들먹거리며 왕성 곳곳을 순회하는 알파들에게 돌아갔다. 그 때문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쉽사리 반발하지 못했다.

“인간들은 더는 마물에게 위협받는 일 없이, 신께서 부여한 고귀한 임무에만 충실하면 된다. 바로 널리 번성하는 것이다.”

돌처럼 딱딱한 근육으로 감싸인 알파들은 여기저기서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 명령을 반복해서 듣는 왕국민 대부분은 볼이 패고 눈덩이는 퀭했다. 특히나 여자들은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가죽이 뼈에 들러붙을 정도로 비쩍 말랐다.

“왕국의 부흥을 위해 우리 알파는 인간들이 자식을 낳고 양육할 수 있도록 수호할 것이다. 왕자님께서 내린 방침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인간 남자는 무조건 여자 다섯을 부인으로 얻게 될 것이다. 사내들은 1년 안에 아내 모두에게서 자식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나름의 문화와 관습이 있었다. 그중 왕국을 지배하는 가장 오래된 관습은 일부일처제였다. 혼인은 신이 정해 준 신성한 결합이기에 오직 한 남자와 여자만이 가능했다. 비록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규율이 완화되기는 했으나, 그건 배우자가 사별했을 경우 재혼이 가능하다는 선에서였다.

“인간 남자의 수가 터무니없이 줄어든 탓에 고안되었다. 인간의 수가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처럼 적용할 것이다.”

사내들과 달리 여자들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인간 사회는 여성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왔다. 비록 얼마 남지 않은 남자들에게 의식주를 갖다 바치는 형태라 할지라도, 죽은 남자들의 빈자리를 채워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와 알파들이 무기를 뺏고, 애를 낳는 도구로 전락시키려 했다.

“용병님들에 비하면 저희는 약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도 전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전부 다 포기하라니, 말도 안 되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무작정 아이를 낳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이러다가는 모두 죽고 말 겁니다!”

왕성은 아직 재건되지도 않았다. 붉은 오메가가 잡혔다고는 하나 성 밖에서는 여전히 마물이 득실거렸고, 그 탓에 식량 수급도 원활하지 않았다. 더구나 오랜 전투를 치른 여자들은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대로는 아이를 가진다 해도 분명 산모의 반은 아이를 낳다가 죽을 것이고, 아이들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왕자님께서 내리신 명령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알파들은 여자들의 의견을 뭉개 버렸다.

“더불어, 자진해서 무기를 반납하는 사내부터 여자를 나눠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강요하지는 않겠다. 따르는 것은 너희의 몫이다.”

알파들은 인간에게 책임을 떠넘긴 채 떠났다. 사내들은 저들보다 강한 존재가 사라지자 득달같이 여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용병님들 말씀 들었지? 자, 검을 이리 줘! 이게 모두를 위한 길이야.”

십여 년 동안 여자들에게 시달리다가, 마침내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는 알파가 우리를 지켜 줄 테니,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사랑만 하면 되는 거라고…. 그러니 그 검을 이리 줘. 왕자님께서도 바라시는 바 아니겠어?”

“뭘 멍청하니 서 있어? 이리 내놔!”

“계집에게 갑옷은 과분하지!”

혀로 꾀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내는 여자의 손에서 철을 빼앗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지 않았다. 여태껏 그들을 지켜 준 여자들에게서 무기와 갑옷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세상을 지배한 이후, 싸우기를 포기한 사내들은 토굴에 숨어 여자들이 구해 오는 음식을 먹으며 근근이 살아남았다. 성안에 지금까지 남은 사내들은 대체로 그런 자들이었다. 당장 얻을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아내와 딸에게서 무기를 빼앗아 알파에게 바쳤다.

여자의 수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으나 물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무기를 넘겨주기를 거절하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계집이라 손가락질당했다. 남자들이 알파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처럼, 어떤 여자들은 남자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기껏 붉은 오메가의 위협에서 벗어났건만, 왕성 곳곳에서는 새로운 혼란이 일어났다. 그간 마물이란 재앙으로 인해 억눌려 있던, 인간 사이의 분열이….

그리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단장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한 병사가 물었다. 광장 한구석에 대기 중이던 로위나는 한참이나 군상을 노려볼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 이변을 깨달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 거대한 흐름을 멈추거나 바꿀 힘은 없었다.

“…사내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단장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여자들에게 무기를 빼앗은 사내들이, 더 많은 무기를 빼앗기 위해 기사단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검을 버리든, 싸우든…. 어떤 명령이든 좋습니다. 저희는 왕자님이 아닌 단장님께서 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병사들은 도망치지 않고 로위나의 뒤를 지켰다.

“…….”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기사의 본분이다. 그러나 왕자는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로 왕의 명령일까?

“우리는, 검을…….”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알파의 애를 밴 남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사내아이는 계속해서 태어나야만 했다. 여자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이를 낳는 건 여자니, 인간에게 줄 남자야 하나로도 충분하지.”

에어리얼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너희는 젊고 어린 수컷을 골라 가지기만 하면 돼.”

“읍, 흐읍…. 으응…!”

“여자들에게는 늙은 수컷 몇 마리만 던져 줘도 알아서 잘 번성할 테니까.”

“흐응, 흐아앙…!”

에어리얼이 입으로 뱉은 계획은 눈앞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제 갓 성년을 넘은 청년이 다리를 훤히 벌린 채 뒷구멍으로 알파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 예…. 후, 명령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아.”

오드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데릴만을 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모신 상을 받는 중이었다.

“흐욱, 흐으응…. 읏, 으읏, 흐아아앙…!”

한 청년이 오드론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몸과 긴 팔다리, 수려한 외모는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사내였으나 지금은 청년은 거대한 성기가 버거운지 버둥거릴 뿐이다. 오드론은 낭창한 허리를 두 팔로 쥐고는 위로, 아래로, 원하는 방향으로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의 몸속에 거침없이 밀어 넣는 성기와 달리, 번들거리는 눈은 오로지 오메가를 향해 있었다.

“더 큰 대가를 바란다면 그만한 일을 해내야겠지?”

에어리얼은 피하지 않고 오드론의 눈을 응시했다.

“물, 론입니다…. 앞으로도, 오메가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흐, 으응, 하으….”

“후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흡!”

“읍! 으읏, 흑…!”

절정에 다다른 오드론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허리를 붙잡은 두 팔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품 안에 갇힌 사내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액으로 흥건한 엉덩이 사이로 울퉁불퉁한 성기가 오가는 소리가 집무실을 안을 가득 채웠다.

“흐아앙—!”

오드론이 성기를 깊이 파묻자, 청년의 허리가 휘었다. 청년은 두 팔이 등 뒤에 묶인 채 꿰뚫린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배 속을 채우고도 남은 정액이 결합부 사이로 부글부글 터져 나왔다. 정액은 이미 흰 딱지가 눌어붙은 의자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후우…….”

오드론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사내를 고르는 위치까지 오른 그는 무작정 노팅을 맺고 싶지 않았다. 찌걱, 청년의 몸을 들어 올리자 끈적한 액이 성기에 휘저어지는 소리가 났다.

“으윽!”

쓸모가 없어진 사내는 그대로 땅에 내던져졌다. 의자 주변에는 그를 제외하고도 너덧 명의 사내가 손발이 묶인 채로 쓰러져 있었다. 엉덩이 사이로 오드론의 정액을 질질 흘리는 자도 있었고, 아직 손을 타지 않은 새것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부의 발치에 쌓인 물고기와도 같았다.

“좋아. 앞으로의 활약도 기대할게.”

에어리얼은 새로운 사내를 집어 드는 오드론을 두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인간들 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이후, 본성은 알파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 중 그 누구도 알파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힘의 차이란 이토록 안타까운 것이다.

집무실을 떠난 에어리얼이 도착한 곳은 무기고였다. 그는 근위병 하나 없이 무기의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부는 한낮에도 램프가 필요할 만큼 어둡고 공기가 탓했다. 천장 가까이에 드문드문 난 작은 창이 전부였다. 그렇지 않아도 미궁처럼 복잡한 장소인데, 인간들에게서 뺏어 온 무기가 쌓여 더욱 답답하고 복잡해져 있었다.

“아스터.”

에어리얼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흡사 욕조와도 같은 거대한 대야 앞에서였다.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창문에서 흘러들어 오는 빛이 그 안을 내리쬐고 있었다. 정체 모를 핏물로 가득 찬 대야에는 하얀 갑옷이 담겨 있었다. 다른 방은 무기를 더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높은 밀도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피가 담긴 대야 주변만은 텅 비어 있었다. 피에 절었음에도 갑옷은 여전히 백조처럼 하얀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몸은 어때?”

불러도 대답이 없자, 에어리얼은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훨씬 강해진 기분이 듭니다.”

하얀 갑옷이 한참 후에 대답했다. 평상심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역시 그렇지? 몸에 맞는다니 다행이야. 급조한 게 아니라는 건 네 몸이 더 잘 알겠지?”

“…….”

“그 갑옷 자체가 내가 널 잊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야, 아스터. 그런데도 너는 왜 불만스러워하는 거지?”

내 말도 제대로 안 듣고 말이야. 에어리얼은 흰 갑옷에게 다가갔다.

“새 갑옷이 익숙하지 않아서… 잘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아직 회복이 덜 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죠.”

아스터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흐음…. 그래?”

에어리얼은 흰 갑옷 바로 앞에 섰다. 그는 두 팔을 뻗어 하얀 투구를 꺼내 올렸다. 끼익, 하얀 투구의 덮개가 소리를 냈다.

“감옥에 두고 온 칼리번이 걱정되어서 그런 건 아니고?”

“…….”

“설마 그사이에 정이라도 든 건가? 여태까지 널 키운 입장으로서는 좀 서운한걸.”

에어리얼은 아스터의 머리를 든 채 물었다. 핏물이 대야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인데? 날 똑바로 보고 말해. 아스터.”

아스터를 만질수록 에어리얼의 손이 점점 피로 물들어 갔다.

“나한테 너만은 다르다 했었지. 마물들, 마물 혼혈들, 그리고 인간들과….”

“…….”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날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저한테는 여전히 당신뿐입니다, 에어리얼.”

“그럼 이 미적지근한 태도는 뭐란 말이야!”

“…….”

아스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유로웠던 에어리얼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더니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아, 그래! 결국, 너도 칼리번에게 끌리는 모양이지? 역시 낳아 준 오메가는 다른가 봐? 그러고 보니 감옥에서도 내가 몇 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았었지!”

“에어리얼….”

“때가 되면 너도 나한테 도망칠걸? 다들 그랬어. 필요할 때만 나를 쓰고 버렸지. 버리면 다행일까,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더군!”

“…….”

“거기다 넌 이제 나 말고 갈 곳도 생겼으니…. 하,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아스터가 불길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에어리얼의 분노는 말릴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떠날 거면 당장 떠나! 그 갑옷을 전부 부숴 버리기 전에…!”

에어리얼은 흰 갑옷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쿵, 칼리번의 몸이었기에 제법 큰 울림을 자아냈다.

“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닥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 솔직히 말해. 어차피 너도 날 버릴 거잖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지 못합니다.”

아스터의 두 팔이 핏물 속에서 삐걱거리더니, 대야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는 어설프게 에어리얼을 끌어안았다.

“…그래. 넌 절대로 날 못 버려.”

에어리얼은 피가 묻은 투구에 얼굴을 맞댄 채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이 몸은 칼리번이거든. 알파 주제에 낳아 준 오메가를 배신할 순 없으니까….”

이럴 때는 인간보다 알파가 더 멍청한 것 같아. 에어리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켰다. 아스터는 인형처럼 가만히 에어리얼을 안고 있었다.

“하하, 아스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에어리얼은 한결 경쾌해진 목소리로 외쳤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겠어.”

짜증과 분노가 사라진 에어리얼은 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사실 그 몸은 임시야. 네가 없는 동안 널 위해 훨씬 대단한 걸 준비해 놨거든.”

“임시…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아스터가 투구의 뚜껑을 까딱거렸다.

“어떤 갑옷을 준비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부서지고 말잖아? 그래서…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몸을 찾아냈어.”

“하지만 그런 몸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때 아스터는 살아 있는 몸을 껍질로 삼으려 한 적이 있었다. 에어리얼은 그를 위해 여러 종류의 몸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죽은 몸은 결국 썩고 만다. 살아 있는 몸은 아스터의 백금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혈관이 터져 찢어지고 말았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회복하고, 탈피를 하는 몸이라면 다르지.”

“…….”

“따라와, 보여 줄게.”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그가 비틀거리며 기어 나오자 쏴아아, 핏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에어리얼은 아스터를 무기고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아직 백금사를 증식시키지 못했는지, 갑옷의 관절 부위가 부드럽게 움직여지지 않고 자꾸만 삐거덕거렸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에어리얼은 그런 아스터를 두 손으로 잡아 주며 이끌었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 나지 않아? 네가 처음 갑옷을 입었을 때 말이야. 그때는 버거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는데….”

“…….”

“이제 이런 고생도 끝이야. 너에게 딱 맞춘 몸이니까…. 기대해도 좋아.”

에어리얼의 목소리는 아스터의 환심을 사려는 것처럼 억지로 즐거움을 꾸며 내고 있었다. 정작 그럴수록 아스터는 말을 잃고 소극적으로 변해 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본성에서도 가장 깊은 방이었다. 에어리얼은 아스터를 자꾸만 안으로 몰아세웠다. 하는 수 없이 아스터는 안쪽을 살펴보았다. 어둠뿐인 방에는… 무언가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모든 의식이 끝나면 네가 저 몸을 차지하는 거야. 어때, 기쁘지 않니?”

아이에게 커다란 선물을 준비한 사람처럼, 받는 쪽보다 주는 쪽이 더 들떠 있었다.

“이건 설마….”

그 정체를 확인한 아스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바로 에레즈 프리드웬이야. …네가 알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 * *

<망할 자식!>

에어리얼이 보석 상자를 내던지자 그 안에 담겨 있던 장신구가 내장처럼 쏟아졌다.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보석으로 치장된 드레스가 갈가리 찢기고, 고서들이 벽난로에 던져져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값비싼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프리드웬 왕실의 보물들은 한순간에 부서져 내렸다.

<제기랄! 그 계집만 족치면 모든 일이 단번에 해결되는데 감싸고 돌아!? 알파 주제에!>

씩씩거리던 에어리얼은 부서진 갑옷에서 다리를 뜯어 냈다. 그러고는 철로 된 다리로 방 안을 거리낌 없이 두들겼다. 장식용 접시, 화려한 조각과 그림, 옷감과 가구들이 그의 손에 부서졌고 그 파편은 사방으로 튀었다.

에어리얼의 파괴 행위는 시간이 지나도 멈출 줄 몰랐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체력이 다할 때까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던지고 으깨 버렸다.

<하아, 하아…. 날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 이어야지…! 젠장…. 헉, 허억….>

분을 못 이기고 비틀거리던 에어리얼은 결국 침대 위로 쓰러졌다. 하얀 맨발은 방 도자기가 깨진 방을 걸어 다닌 탓에 피로 물들어 있었다.

<……에어리얼.>

폭풍이 이제 막 가라앉은 차였다. 문 너머에서 어딘지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굳건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백금사가 열쇠 구멍을 통해 흘러왔다.

<하아, 하…. 혼자 있고 싶으니까 꺼져, 아스터.>

아스터의 기척을 눈치챈 에어리얼이 경고했다. 그러나 백금사는 고집스럽게 잠긴 문을 따 내고는 스르르 제 갑옷으로 돌아갔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어리얼은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아스터를 향해 난동의 잔해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워낙 근력이 약했기에 검은 갑옷에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체력의 한계로 잠시나마 가라앉았던 에어리얼의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파괴의 대상을 아스터로 돌렸다.

<너까지 말을 안 들을 셈이야? 꺼져! 당장 꺼지란 말이야! ……윽!>

아스터가 다가올수록 더욱 격렬해지던 에어리얼의 패악질이 갑작스럽게 멎었다. 그는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에어리얼…?>

<읏…….>

쿨럭, 쿨럭, 기침은 그치지 않고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계속되었다. 기침은 뱉을수록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폐가 찢어질 듯 난도질당할 뿐이다.

<에어리얼. 괜찮은 겁니까?>

한참이 지나도 기침은 멎을 태세가 아니었다. 아스터가 침대맡까지 빠르게 다가왔다. 속이 텅 빈 쇳덩어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신구와 깨진 그릇의 파편이 자각, 자각, 으스러졌다.

<무리한 탓입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쉬어야 합니다.>

에어리얼은 아스터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저리 꺼져.>

침대 위로 몸을 엎드리자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침대보에 가려진 목소리는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방법?>

<네. 제게 그 방법을 알려 준다면 무엇이든지 해 보겠습니다. >

<하….>

하하하, 하핫! 에어리얼은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네까짓 게 날 위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일 수나 있겠어?>

<원하신다면 당장 아버님과 싸우겠습니다.>

<……관둬. 내가 준 껍질이 없으면 흩어질 먼지에 불과한 주제에….>

에어리얼은 싸늘하게 거절했다.

<넌 아무것도 못 해. …아니, 너뿐만이 아니지. 그 누구도 날 구해 줄 수 없어.>

그러니까 꺼져. 에어리얼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만은 끝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아스터는 앵무새처럼 늘 하던 말을 반복했다.

<그래…. 넌 내 광대니까 계속 붙어 있어야지…. 그런데 어느 광대가 왕이 찾지 않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에어리얼….>

<부를 때나 제때 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알겠습니다.>

아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을 떠날 때까지도 에어리얼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방 안에는 완전한 고요가 감돌았다. 아스터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에어리얼은 몸을 일으켰다. 에어리얼의 입가는 피로 젖어 있었다. 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읍!>

에어리얼은 피로 젖은 손으로 다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간신히 참았던 기침을 다시 뱉어 내기 시작했다. 칼로 폐를 찢는 듯한 기침 소리는 멀쩡한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방 안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작은 어깨가 쉴새 없이 들썩였다. 입을 가린 손 아래로 미처 감추지 못한 피가 흘러내렸다.

<하아, 윽, 하아……. 아윽….>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난 후, 에어리얼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몸도 얼마 안 남았군.>

에어리얼은 피로 흥건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입은 옷과 침대보도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흐, 흐흐…. 죽고 싶을 때는 죽지도 않더니….>

일반적으로 오메가는 한 세대에 한 마리밖에 태어나지 않는다. 물론 에어리얼의 겉모습은 오메가로 자각한 순간부터 거의 성장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눈가림에 지나지 않았다. 내부는 오랜 시간 마물에게 범해져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란다고 순순히 갈 수는 없지.>

에어리얼은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재미없잖아…. 기껏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칼리번은 이번에도 꿈속 관객이 되어 에어리얼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이미 현실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런 판국에 그의 기억을 읽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영혼으로 스며드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우윽, 윽…. 아윽, 젠장…….>

에어리얼은 몸을 웅크리고 힘겹게 숨을 헐떡거렸다. 목 안 점막에 끈적한 피가 눌어붙은 탓인지, 그의 호흡은 폐병이 든 이처럼 거칠었다.

칼리번은 다음 순번을 안다. 기억의 파편을 보았으니, 이제 평소처럼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칼리번이 막연히 끝을 예상한 순간이었다. 에어리얼이 돌연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정확히 칼리번이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칼리번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이것은 진짜 에어리얼이 아닌, 과거의 에어리얼이다. 그가 자신을 마주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언제까지 꿈만 보고 있을 셈이야?>

그러나 붉은 눈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칼리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슬슬 눈을 뜨지 그래?>

에어리얼은 입가를 피로 물들인 채 눈웃음을 쳤다.

* * *

“허억!”

아무런 예고도 없이 꿈에서 현실로 등이 떠밀렸다. 칼리번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처럼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모든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쉽사리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주변을 정신없이 살폈다. 아스터를 빼앗긴 이후, 칼리번은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심지어 감옥을 지키던 간수들조차 사라졌다. 그로 인해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조차 얻지 못했고, 칼리번은 점점 기력을 잃어 갔다.

“꿈……. 꿈인가….”

갑자기 몸을 움직이자 눈앞이 핑핑 돌았다.

“……윽!”

칼리번이 모든 일을 꿈으로 치부하려는 순간, 딱딱한 무언가가 칼리번의 머리를 때렸다.

“먹어.”

철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명령은 환청처럼 느껴졌다. 칼리번은 벽을 보던 몸을 돌렸다.

“에어리얼…?”

그리고 그곳에는 자신의 몸을 빼앗은 에어리얼이 서 있었다. 이번에는 꿈도, 환각도 아니었다. 칼리번은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라는 것을 잊은 채 철창을 붙잡았다.

“에어리얼! 왕자님은 어디에 계시지? 큭…. 여기서 날 꺼내라, 에어리얼!”

칼리번이 철창을 흔들며 외쳤다.

“그런 부탁을 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어?”

에어리얼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을 뿐이었다. 칼리번은 처참한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어리얼은 무슨 배짱인지 부하 하나 붙이지 않은 채 지하 감옥까지 홀로 서 있었다.

“아스터…. 그 녀석은…….”

입을 뻐끔거리던 칼리번은, 말을 채 잇지도 못했다.

“그걸 왜 궁금해하지? 언제부터 네가 자식들에게 관심을 두는 훌륭한 오메가였다고?”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혼자만 애태우는 모습이 제법 안타깝네. 아스터는 까맣게 잊었는지 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던데.”

“죽이지는 않은 건가….”

에어리얼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으나, 칼리번은 안도할 따름이었다.

“하! 어처구니가 없군.”

칼리번의 얼굴이 누그러지자 에어리얼은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지금 네 목숨이 간당간당하는데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아스터나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렇게 찾아 헤매면서 정작 내 안부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거야? 조금은 아쉬운걸.”

너와 가장 오래 몸을 섞은 형제를 말이야. 에어리얼은 커다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은 칼리번과 눈을 맞췄다.

“내가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

“아스터의 근황을 알려 주러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아. …네 처분이 결정되었어.”

철창을 움켜쥔 칼리번의 손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사형이다. 그리고 사형 방식은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왕자님께서 직접 정하셨지.”

에어리얼의 선언에 칼리번의 검은 두 눈이 커졌다.

“말리려고도 해 봤는데…. 너도 알다시피, 붉은 오메가에 대한 에레즈 프리드웬의 증오는 상상 초월이라서 말이야. 뼛조각 하나 남지 않도록 찢어발겨야 한다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주장하더군. 그게 다가 아니야. 아무도 널 죽이겠다는 명령에 반대하지 않았어.”

에어리얼은 일부러 잔인한 말을 내뱉으며 칼리번의 표정을 살폈다.

“…….”

칼리번은 창살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로 고개를 떨궜다. 땅에 박을 듯 깊이.

“후후, 그야말로 쥐가 고양이를 걱정한 격이군. 인간을 죽이지 못해서 기껏 모은 병사를 포기하다니.”

“…….”

“멍청한 것도 정도껏이지. 아니면 설마, 네 희생을 보고 에레즈 프리드웬이 정신이라도 차릴 줄 알았나?”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뒷덜미와 가는 어깨가 눈에 띄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에어리얼의 붉은 눈에 묘한 빛이 돌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네 목숨 줄을 움켜쥔 건 나야.”

에어리얼은 창살 너머로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도 내게 울면서 빌어 봐. 또 모르잖아? 사형일이 언제인지 알려 줄지. 혹은… 그것보다 더 재밌는 걸 가르쳐 줄 수도 있어.”

짙은 색의 손가락이 어느새 하얀 뒷덜미를 지분거렸다.

“칼리번….”

“…….”

“나는 ‘의식’을 진행할 거야.”

붉은 시선은 더는 손이 닿지 않는 칼리번의 옷 안을 훑었다. 그의 눈빛은 어느샌가 손길이 되었다. 피부가 검게 죽은 어깨를 지나, 비쩍 마른 탓에 훤히 드러나는 척추의 길을 따라가더니 솟아오른 날개뼈를 어루만졌다.

“의식…이라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칼리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반응을 보이자 에어리얼의 손길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래! 의식은 동쪽 성문을 나와 보이는 첫 번째 산에서 진행될 거야. 너도 왕국을 떠돌아다니며 그 산을 지나 본 적이 있을 거야. 왕성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좋은 땅이 있지.”

에어리얼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의식일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거기까지는 알려 주진 않을래. 다시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보지 못한 채로,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는 편이 더 재밌으니까.”

칼리번을 농락하는 에어리얼은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

칼리번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예전부터 몸으로 때우는 쪽을 선호했다. 차라리 침을 뱉고 돌을 던지는 왕국민들이 나았다. 다른 이를 인질로 잡힌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일은… 고문보다도 괴로웠다.

“재미없기는. 뭐라도 좀 반응을 보이지 그래?”

“큭…!”

칼리번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에어리얼이 붉은 머리카락을 억지로 움켜쥐었다.

“어디 유언이라도 남겨 보라고. 이 꼴이 되고도 자살하지 않는 걸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칼리번의 손으로 에어리얼의 머리를 꺾는 일은, 어른과 아이의 싸움만큼이나 쉬웠다. 절망에 빠진 칼리번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에어리얼은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어리얼.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냐.”

잠자코 듣고만 있던 칼리번의 얼굴이 드러났다.

“뭐야, 멀쩡하잖아.”

칼리번은 보기 흉하게 울지도, 얼굴을 찡그린 채 분노하지도, 겁에 질려 있지도 않았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기대에 가득 차 있던 에어리얼이 싸늘해졌다.

“나는 그동안 너에 관한 기억을 읽었다. …아니, 강제로 주입 당했다. 그만큼 너에 관해서 알게 되었지. 그러나 네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만큼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칼리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차분함은 오랜 부상과 굶주림에서 오는 우울함과는 달랐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 농장을 세우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너는 이미 목적을 이뤘다. 내 몸을 뺏고, 몸의 주인인 나를 죽이고 싶을 뿐이라면…. 그것도 거의 다 이뤘다.”

칼리번은 예전과 같은 강한 몸도, 힘도 모두 잃었다. 그러나 피가 말라붙은 말간 얼굴에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네가 이겼다, 에어리얼. 너는 이제 알파도, 인간도 전부 지배하게 되었다. 왕자님과 아스터마저…. 그런데도 의식이라니. 여기서 뭘 더 하려는 거냐.”

검은 눈에서는 모든 것을 잃은 자 특유의 결연함마저 느껴졌다. 칼리번을 완벽하게 절망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던 에어리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실망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칼리번, 너만은 알아줄 거라 믿었는데.”

에어리얼의 손길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 정도 손짓만으로도 칼리번의 몸이 휘청였다.

“왕국에는 매년 긴 우기가 찾아오지. 이 지하 감옥은 홍수를 대비한 수로이기도 하고, 반대로 흉년을 버티기 위한 수조 역할을 하기도 해.”

“……!”

“알테르 프리드웬이 왕성을 지배했을 때는 무용했지만, 에레즈 프리드웬은 훌륭한 왕이라 착실히 모아 두었지. 다름 아닌 붉은 오메가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에어리얼의 발걸음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에어리얼…. 설마.”

칼리번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자님의 눈물 속에서 익사한다니 낭만적이군. 널 위해 준비된 교수대이니 당연히 행복하겠지, 칼리번?”

칼리번이 뒤늦게 창살을 흔들었으나 에어리얼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기다려라, 에어리얼!”

에어리얼의 등 뒤로 칼리번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에어리얼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볼일은 끝났다. 내일 새벽, 동이 틀 무렵부터 반대편 지하 감옥에 저장해 둔 우수를 이쪽으로 채워라.”

지하 감옥의 입구에는 에어리얼이 남겨 둔 병사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지나치며 명했다.

“죽이기 전에 충분히 공포를 맛보게 해 줘야지.”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이글거렸다. 명령을 받든 병사들은 지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철문을 닫았다. 빛 한점 들지 않는 가혹한 어둠이 찾아왔다.

* * *

지난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죽음의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칼리번은 미치지 않았다.

‘에어리얼은 도대체 어떤 의식을 치르려는 거지? 그곳에 가면… 왕자님께서도 계실까.’

도리어 칼리번은 더듬거리며 에어리얼이 던져두고 간 빵을 찾았다. 그러고는 거칠게 뜯어 먹기까지 했다. 물론 그 행위는 식사라기보다는 강제 주입에 가까웠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에어리얼의 몸은 죽이 아닌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퍽퍽한 빵 쪼가리를 넘길 때마다 속이 쓰렸다.

“욱!”

그러다 결국 캑캑거리며 피가 섞인 위액을 토해 내기도 했다.

“흡, 으읍….”

그런데도 칼리번은 다시 쑤셔 넣었다. 이 약해 빠진 몸을 마지막 순간까지 움직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쉴 수 있을 때 되도록 기력을 비축해야만 했다.

칼리번은 오직 그런 의지만으로 벽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까지 했다. 불안에 떨며 눈물로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그는 너무 오래 지옥에서 보냈다. 실제로, 칼리번은 얕은 잠이 드는 데까지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

발치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물이 벌써….”

에어리얼이 예고했던 대로, 감옥 안으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 수위는 발바닥을 적시는 정도에 불과했다. 문제는 창살을 통해 끊임없이 밀려든다는 점이었다. 창살은 약해 빠진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두었으나 물은 너무나 쉽게 통과시켰다.

‘무언가 수가 있을 거다. 이곳에 빠져나갈 방법이….’

칼리번은 창살을 쥐고 흔들어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두세 걸음 물러섰다가 어깨로 들이박았다. 그러나 몸에 옅은 멍만 추가될 뿐이었다.

“거기 아무도 없나?!”

칼리번의 목소리는 부질없이 감옥 안을 울려 퍼졌다.

“…….”

아스터가 탈출하자고 했을 때, 따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을까? 원치 않게도 본능이 자신을 탓한다.

‘아니, 그 녀석 생각대로 했어도 지금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거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냈다.

“…춥군.”

칼리번은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물 특유의 차가운 기운이 감옥을 뒤덮은 탓에 몸이 절로 떨렸다. 어느새 물은 칼리번의 발목을 건드리고 있었다. 지상이라면 모르나, 지하인 탓에 창도 따로 나 있지 않았다. 어딘가 배수구가 있을지 모르나 창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부질없는 공상이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감옥. 칼리번은 검은 물을 말없이 내려다보았으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시시각각 차오르는 물은 더욱 큰 공포로 다가왔다. 수위는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잠시 정신이 흐트러지면 한 뼘씩 자랐다. 꿀럭, 꿀럭, 물이 쌓이는 소리가 시체처럼 차갑다.

‘이렇게 죽는 건가?’

칼리번은 왼손으로 덜덜 떨리는 오른 손목을 붙잡았다. 떨리는 손으로 마찬가지로 떠는 손을 붙잡아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처음 몸이 떨리는 것은 추위 때문이었으나 조금씩 공포가 더해지고 있었다. 그가 목전에 둔 죽음은 머리가 잘리거나 심장이 뚫리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폐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다 죽겠지. 에어리얼다운 선택이었다.

수위가 머리까지 오르자 칼리번의 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몸을 두른 온기가 빠르게 물속으로 흩어진다. 이대로는 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칼리번이 서 있기만 한 사이에도 그의 몸은 천장으로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머리에 천장이 닿았다. 가득 차오른 물이 칼리번의 귓가에서 찰랑거렸다.

“…….”

칼리번은 얼마 남지 않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전신이 물에 잠기니 숨을 크게 삼키는 행위마저 버거웠다. 하지만 이토록 약해 빠진 몸이라 해도 마물의 피가 섞였다. 더구나 오메가의 몸은 ‘버티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다. 완전히 물에 잠긴다 해도, 인간보다는 오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한계가 오겠지.

“……하아.”

칼리번은 마지막 숨을 삼킨 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옥은 전부 물로 채워졌다. 더는 숨을 빌릴 공간이 없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으나 조금이라도 오래 숨을 참기 위해서는 진정해야만 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흔들거렸다.

<왕자님의 눈물 속에서 익사한다니 낭만적이군. 널 위해 준비된 교수대이니 당연히 행복하겠지?>

시각도 청각도 차단된 차가운 어둠 속, 에어리얼의 음성이 그의 내부를 울렸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비웃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울었던 건가?’

얼마나 오래 울었을까? 에레즈 프리드웬이 직접 내린 사형을 받고 있음에도 칼리번은 그를 걱정했다. 아니, 그의 슬픔을 갈구했다. 별을 쫓는 광인처럼, 닿지 못할 존재를 발이 부르트도록 쫓았다. 호수에 비친 별빛에 손을 대듯, 간혹 타인을 통해 흔적을 전해 받을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 속에서, 눈가만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칼리번은 그 열기로 물속에서 눈을 떴다.

흐릿해진 시선 끝에, 사람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 * *

<아직 귀가 안 잘렸으면 똑바로 들어! 네가 뭔데 혼자서 함정으로 기어들어 가? 난 분명히 무시하라고 했는데! 내 말이 우습냐? 너 때문에 우리 중에 몇 명이 휘말려서 뒤질 뻔한 줄 알아?!>

<하지만… 아이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습니다.>

<넌 우리가 자선사업 하는 줄 알아?! 내가 아주 성녀로 보이나 봐? 아니다, 너 하는 짓거리를 보니까 나보단 네가 성녀단에 더 잘 어울리겠다, 그치, 응?>

* * *

강한 힘이 칼리번의 팔을 끌어당겼다. 팔이 뽑힐 듯한 고통을 마지막으로, 숨이 부족해진 칼리번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우욱!”

배를 누르는 강한 힘에 배 속에 들어찬 물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물이 빠져나온 만큼 숨이 들어온다.

“허억…!”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 입 밖으로는 뜨뜻미지근한 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 여기는… 윽.”

칼리번은 간신히 뜬 눈을 도로 감았다. 지하 감옥에서 보낸 탓에 옅은 새벽녘의 빛에도 눈이 시렸다.

“야! 겨우 깨운 거니까 다시 기절하지 마!”

그러자 먹먹한 귓구멍으로 필사적인 외침이 들려온다. 이 목소리는….

“젠…?”

“그래, 인마. 나다!”

젠은 버럭 화를 내며 칼리번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입에서 더욱 많은 물이 빠져나왔다. 칼리번은 젠의 품에서 잠시 기침을 했다. 그 와중에도 주변 파악을 잊지 않았다. 지하 감옥의 입구는 물이 가득 차 넘실거리고 있었다. 자신처럼 물에 젖은 젠….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여자들…….

“전에도 멋대로 애새끼를 구하러 가다가 박살이 났었지. 젠장…. 그때 얘기를 꺼내서 설마 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무모할 줄이야….”

젠이 칼리번의 곁에 엉덩이를 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과 내쉼과 동시에 질색했다.

“하아……. 하아, 죽기 전에… 와 줘서 고맙다.”

칼리번은 헐떡이며 대답했다. 젊은 시절, 칼리번은 젠의 명령을 무시하고 사지에 혼자 뛰어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뒤처리는 젠의 몫이었다.

<이봐, 칼리번. 예전에 말이야, 너 한쪽 귀 잘렸을 때 기억나냐? 잘 붙지 않아서 손으로 붙이고 있었잖냐.>

<그거라면 기억하고 있다.>

<좋아. 그럼 그때 내가 열 받아서 너한테 했던 욕은 어때, 기억나? 이번에도 그렇게 굴 거냐?>

터무니없는 돌격과 뒷수습. 그들에게는 익숙한 전투 방식이었다. 칼리번이 계획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 아스터가 곁에 있어서였다. 아스터는 항상 에어리얼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었다. 만약 아스터가 계획을 알게 된다면 에어리얼에게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아, 하아…. 무사히 잠입한 거지….”

칼리번은 젠 하나만을 믿고서 여태까지 버텼으나, 반쯤은 포기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 혼자 어떻게 들어왔겠냐.”

젠이 영광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칼리번은 자신을 향하는 따끔따끔한 시선을 느꼈다. 그녀와 함께 떠났던 성녀들이 망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일부러 젠만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어. 성녀님들도, 성안의 여자들도…. 뭐, 당연한 일이지만. 붉은 오메가가 사실은 붉은 오메가가 아니라니, 누가 믿겠어? 나도 아직 얼떨떨한데.”

젠은 다른 성녀에게 건네받은 망토를 칼리번에게 둘러 주었다.

“왕성으로 잠입하는 시간보다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던 젠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전쟁에서 병사로 차출된 여자들을 죽이지 않고 항복했지.”

“…….”

“그 소식이 전해진 후부터는 다들 내 말을 믿고 따라줬어. 그제부터 일이 좀 풀리기 시작했지.”

“…그런가.”

칼리번은 젠의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껌뻑거렸다.

“넌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성안 분위기가 흉흉해졌더라고.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성안 여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지. 내부인이 전부 꼴통은 아니더라. 알고 보니까 성녀님들이 성 밖으로 쫓겨났을 때 이미 기사단 측과 말이 오갔었다고 하더군. 나중에라도 도움을 주겠다고.”

젠은 물에 젖은 앞머리를 괜히 쓸어 넘겼다.

“그동안 기사단을 지배했던 건 리론 후작이었는데 말이지. 그 귀족 나리가 오늘내일하게 되면서 지휘 권한이 단장에게 옮겨 갔거든. 그 아가씨 도움을 받아서 몰래 들어왔지. 다들 성녀복만 벗으면 평범한 여자와 다를 바가 없어지니까.”

자초지종을 풀어 낸 젠은 뜨거운 눈으로 칼리번을 보았다.

“이게 다 네가 화살받이가 되어서 관심을 끌어 준 덕분이야. 수고했다!”

“…욱!”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젠은 칼리번의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그 힘을 견디지 못한 칼리번의 몸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이쿠, 나도 모르게 그만….”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젠은 서둘러 칼리번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

칼리번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검은 눈과 마주친 성녀들의 잠시 움찔거렸으나 곧 긴장을 풀었다. 칼리번은 굳이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젠은 그런 칼리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곧 순찰병도 올 테니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순 없지. …그러면, 칼리번.”

“음.”

“이런 무식한 작전을 혼자 수행했으면 뭔가 얻어 온 거라도 있겠지?”

“그래…. 에어리얼과 대면했다.”

젠의 눈이 커졌다.

“그 녀석을 직접?”

칼리번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끄덕였다. 정신이 점점 맑아지면서, 해야 할 일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젠! 지금 이러고 이럴 때가 아니다.”

다급함에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야 인마, 가만 있어! 지금 네 몸으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

“에어리얼이 위험한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뭐, 의식?”

젠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칼리번의 몸을 붙잡았다. 축축한 천과 물에 빠져 차가워진 피부가 맞닿았다. 칼리번은 펄펄 열이 넘치는 젠에게서 작은 온기를 나눠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칼리번은 원인 모를 힘이 났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각이다. 이것은 젠과 만난 칼리번의 영혼이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에어리얼의 몸이 느끼는 것일까?

“자… 자세한 내막까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 거대한 일을 치르려는 것 같았다…. 막아야 해.”

그러나 칼리번은 그의 안에서 울려 퍼지는 또 다른 본능에 집중하기로 했다.

“제길….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더니만. 그럼 위치는? 어딘지는 들었어?”

다소 두서없는 설명이었으나 젠은 이해해 주었다.

“동쪽 성문 밖, 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에어리얼이 부하를 이끌고 ‘의식’이라는 것을 치를 만한 장소…. 젠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좋아. 어디로 갔을지 대충 알 것 같군. 혹시 언제쯤인지는 알고 있어?”

“그 부분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나를 죽인 후에 진행한다고 했다.”

“운이 나쁘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다는 뜻인데….”

젠은 곁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성녀와 말을 나눴다. 에어리얼의 행보에 대해 얻은 정보가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우리는 본성 안에는 오래 머물지 못하니 바로 움직이자. 어때, 몸은 움직일 수 있겠어?”

“괜찮….”

칼리번이 당연히 동의하려는 순간이었다.

“!”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땅이 흔들렸다. 주변의 흔들림이 눈에 뚜렷이 보일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 마물의 습격으로 허술해진 본성의 벽돌과 장식이 추락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칼리번은 심한 구역감을 느꼈다.

“뭐야…. 땅이 흔들리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젠은 칼리번을 품에 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성녀들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땅을 짚거나 주변인을 잡았다. 비틀거릴 정도의 큰 지진은 지나갔으나 여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쩌면 에어리얼이 의식이라는 것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서둘러야겠군.”

젠은 칼리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님. 붉은 오메가에게는 저와 칼리번이 가겠습니다.”

젠은 성녀들을 돌아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두 분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도 무리를 둘로 나눠서 지원하겠습니다.”

성녀들은 불안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아뇨,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저와 이 녀석이 쓰는 힘은 성녀님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라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칼리번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들은 성안의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지금은 이 정도에서 그쳤지만…. 앞으로 더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젠이 성녀들에게 지시하는 동안, 칼리번은 동쪽 성문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새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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