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빈사의 백조
젠은 성녀들과 함께 떠났다. 동요한 알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칼리번은 피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칼리번은 언덕에 올라, 양 손바닥을 칼로 그었다. 피는 땅으로 떨어졌고 비릿한 향기는 바람을 따라 퍼졌다. 노예가 사라지자 흥분한 알파들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
양손이 절로 떨렸다. 뻐끔 벌어진 상처에서는 칼리번의 마음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피가 계속 흘렀다. 에어리얼이 에레즈에게 사용했다는 세뇌가 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봤잖냐. 성벽의 모습이 바뀌었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떠나기 전, 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알파들을 버리고 나랑 가자. 최대한 숨는 편이 에어리얼의 속을 긁는 데는 효과적일지도 몰라.>
그럴 수는 없었다. 설령 에어리얼이 의도대로 흐른다 해도, 칼리번은 갈 수밖에 없었다. 이다음으로 에어리얼이 부수는 것은 두 개의 성벽이 아닌 에레즈일지도 모르니까.
알파들을 진정시킨 칼리번은 전열을 정비하고 왕성으로 향했다. 칼리번과 아스터는 거대한 마물의 등을 빌려 탔다. 알파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쿵, 쿵, 숲 전체가 흔들렸다.
‘전쟁인 이상, 다소의 희생은 발생할 수밖에 없겠지.’
칼리번은 점차 가까워지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각오한 일이었으나 씁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이미 알테르 프리드웬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그런데도 에레즈 한 명의 목숨이 이 전쟁으로 희생될 무수한 목숨보다 중요한가? 의도적으로 무시해 온 마음의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비록 에어리얼에게 세뇌를 당하셨지만, 왕자님은 모두의 구심점이다. 그분이 죽는다면 인간은 인간들대로, 알파는 알파들대로 분열되고 다시 끝없는 전쟁이 반복되겠지. 하지만 왕자님께서 정신만 차리신다면….’
분명 무언가가 달라질 거다.
무언가가….
‘하지만 어떻게?’
칼리번은 무슨 수를 써서든 에레즈를 에어리얼의 마수에서 구해 낼 것이다. 하지만 몸을 되찾는다 해도, 안개 속에 갇힌 정신은 어떻게 깨워야 할까? 칼리번이 지금의 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거기까지는 해결할 수 없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와 마주했던 두 번의 기억을 떠올렸다. 단 한 번도 그는 자신이 칼리번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더군다나 젠의 증언으로는 에어리얼을 완벽하게 ‘칼리번’으로 믿고 있다고 했다.
“윽….”
그때였다. 툭, 검은 투구 위로 피가 떨어졌다. 코피였다. 손바닥에 난 상처는 아스터가 금사를 둘러 지혈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손으로 피를 닦아 낼 여력이 없었다.
“칼리번. 괜찮은 겁니까?”
칼리번이 휘청거리자, 투구의 뚫린 눈 부분에서 금사 두 줄기가 튀어나왔다.
“…별일 아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출혈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그가 간헐적으로 기침을 할 때마다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어느새 옷을 적실 정도였다.
“에어리얼만큼 힘을 쓸 수 없는 주제에 피를 써서 무리를 하니까 그런 겁니다. 이렇게나 많은 수의 알파를 조종하고 있으니…. 에어리얼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몇 번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스터가 투덜거렸다. 마물보다 마물 혼혈을 다루는 데 더 많은 힘이 소요된다. 문제는 그렇게 힘을 써도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흩어져 버리고 만다. 이성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아…. 그랬지. 갑자기 많은 힘을 써서 그런 것 같다.”
칼리번은 대충 동의했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을 직접 사용하는 칼리번은 알고 있었다. 단순히 힘을 많이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이 서서히 삐걱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까지 아스터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전에는 약점을 알리기 싫어서였다면, 지금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아스터가 에어리얼의 낡은 몸과 함께 버려졌다는 현실을 굳이 일깨워 주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아스터의 투구는 빠른 속도로 녹이 슬고 가장자리부터 부스러져 가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과 같이.
“도대체 언제까지 에어리얼의 피를 낭비할 겁니까?”
그 말과 함께 아스터의 금사가 칼리번의 얼굴에 닿았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두 갈래의 금사는 피가 줄줄 흐르는 칼리번의 턱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품에 안긴 아이가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기려 들 듯이. 그러나 아쉽게도 에어리얼의 몸을 한 칼리번에게 멋들어진 수염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것이 일종의 식사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럽지 않나?”
칼리번이 물었다. 피를 잔뜩 묻힌 금사는 투구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 모습이 꼭 게 같았다.
“그래도 에어리얼의 피입니다. 저는 그의 피를 먹고 자랐으니까요.”
아스터는 에어리얼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상처를 입었을 때 피를 좀 달라고 하지 그랬나.”
그동안의 여정을 떠올린 칼리번이 말했다.
“안 그래도 몰래 먹었습니다.”
“…언제?”
“주로 당신이 기절해 있을 때.”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아스터는 금사로 지혈을 해 주고는 했다. 오로지 에어리얼의 몸을 지키기 위한 행위…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은 칼리번이 깨닫지 못할 정도로 은밀히 행했는데, 이제는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여서인지 제법 대담해졌다. 더불어 이런 피마저 먹어야 할 만큼 아스터의 갑옷이 쇠약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스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처지인 칼리번은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칼리번.”
“음.”
칼리번은 아스터를 보지 않고 괜히 병사들을 살폈다.
“알파 여자와 나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같이 있었으니 당연히 그랬겠지.”
“에어리얼은 모든 걸 가졌습니다. 알파 여자도 성녀들을 데리고 떠났잖습니까? 이제 당신에게 남은 건 적은 수의 알파와 저뿐입니다. 저희가 이길 가능성은 적습니다. 멍청한 당신과 달리 에어리얼은 똑똑하고 우수한 책략가니까요.”
아스터는 한결같이 남의 편이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도리어 마음이 가벼워졌다.
“에어리얼이 정말로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알파 여자의 말대로 도망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
뜻밖의 제안이었다. 전열을 살피던 칼리번은 조금 놀라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칼리번의 턱을 쓰다듬던 금사가 투구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슬슬 아픈 건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투구를 자신의 얼굴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폈다. 아스터의 투구는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이곳저곳에 금이 가 있었지만, 그 외에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딱히 이상한 음식을 주워 먹지도 않았는데….
‘코피 같은 걸 먹어서 그런가?’
투구 정면에 뚫린 두 개의 눈구멍. 칼리번은 두 개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헤아려 봐도 새까만 어둠뿐, 푸른 보석안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녀석은 형체 없는 괴물이니. 그런데도 자신은 그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단 말인가.
“이 몸은 에어리얼의 것이다. …네가 하루에 열 번도 넘게 하는 말이지.”
“…….”
“그 때문에 날 지켰던 것 아닌가? 내가 정말로 도망친다면 가만 있지 않을 거면서.”
아스터는 머리만 남은 후로 참으로 오랜만에 칼리번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당신이 남은 알파를 데리고 항복한다면….”
아스터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에어리얼이 당신을 받아 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번에 칼리번은 귀를 의심했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의 다친 양손을 감싼 금사가 유달리 구불구불했다.
“목숨을 구걸하고 싶다면 혼자 돌아가라.”
더는 싸울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아스터에게 이전과 같은 보호를 기대하지 않는다. 인질로 삼기에도 부족했다. 에어리얼의 기억을 상당량 훔쳐보았으나, 아스터에 대한 에어리얼의 감정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풀어 줘도 괜찮겠지.
“…나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칼리번은 코와 뺨, 턱이 온통 피로 얼룩진 얼굴로 대답했다. 어떠한 가능성을 단박에 잘라 냈다.
“제가 에어리얼에게 부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스터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대화의 끄트머리를 억지로 붙잡았다.
“교미를 덜 하게 해 달라고?”
“…….”
“녀석과 내가 양립할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정말로 넌 이제 여기를 떠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저희가 맺은 계약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에어리얼의 몸을 끝까지 지킬 겁니다.”
“나는 에어리얼을 죽일 거다. 곁에서 지켜볼 건가?”
처음 동맹을 맺었을 때 나눈 대화였다. 지금에 와서는 서로에게 그 약속을 미루는 것 같았다.
“계약은 그대로지만 상황은 정반대가 됐다. 나는 오메가의 힘을 어느 정도 습득했지만, 넌 약해졌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아. 전쟁 중에는 섬세한 조종이 불가능하다. 에어리얼을 죽이려 드는 나를, 네가 막으려 한다면….”
“…….”
“넌 아마 내 손에 죽겠지.”
아스터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는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고목의 구멍 속에라도 숨어 있는 편이 낫지 않나.”
금사에 잡힌 탓에 양손을 쓸 수 없는 칼리번은 검은 투구에 이마를 툭 부딪쳤다. 박치기는 ‘칼리번’일 때 잘 쓰는 기술이기도 했다. 원래의 몸이었을 때 칼리번은 그야말로 돌처럼 단단했었다. 지금 그 기술을 함부로 시도했다가는 이쪽 대가리가 다 깨져 버리겠지.
“이 투구가 산산조각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에어리얼의 몸을 두고 떠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알아듣게 설명했음에도 아스터는 고집불통이었다.
“당신이야말로, 제 제안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는 감히 칼리번의 앞날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
그러나 칼리번은 크게 한숨을 내쉴 뿐, 딱히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젠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양어머니께서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칼리번은 두 눈을 껌벅거렸다.
“…….”
알파에게는 부모가 없다. 그러나 칼리번은 운 좋게 양부모 밑에서 길러졌고 천성이 무던한 탓에 한동안 마을에서 쫓겨나지도 않았다. 젠이나 에어리얼에 비하면 은혜를 누릴 대로 누린 셈이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가족에게, 마을 사람들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칼을 쓰는 법을 알려 준 아버지 곁에서도,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했던 양어머니의 등 뒤에서도, 영원한 헤어짐을 직감한 누이의 눈물 앞에서도.
그런 감정들은 마물의 피에 새겨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감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그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였다.
항상 모든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망할 돌대가리 같으니.”
칼리번은 대뜸 아스터에게 욕을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 껍질은 돌이 아닙니다. 비록 투구밖에 남지 않았지만, 어엿한 갑옷입니다.”
“용병대에서 일하던 시절에 꼭 너 같은 녀석이 있었다.”
“그래서요?”
“돌대가리라고 불리곤 했지. 네 모습이 그 녀석과 똑같군.”
투구의 눈구멍에서 금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하필이면 머리가 돌이라니, 굉장히 멍청할 것 같단 말입니다.”
흔들거리던 평소와 달리 가시처럼 비죽 선 것이 명백한 반항의 표시였다.
“…….”
이제는 아스터가 말없이 금사만 휘둘러도 무엇을 표현하는지 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아스터는 금사로 작은 창을 만들어 칼리번의 팔을 쿡쿡 찔렀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돌대가리 녀석, 성질머리하고는.’
칼리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또한 욕은 아니었다. 이 모습으로 처음 대면했을 때는 아스터는 자신을 죽이려 들었고, 자신은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그때는 이렇게 계속 함께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작은 돌….
문득 든 생각에, 칼리번은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에어리얼의 몸을 한 자신의 품에 안겨 다닐 정도로 깎여 나간 후에야 비로소 보였다.
* * *
마물의 뼈와 살로 세워진 세 곳의 성문은 벽뿐이었다. 이곳을 파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역시 답은 동문밖에 없는 건가.’
칼리번은 여러 가지 전술을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전력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현 상태에서는 무엇을 선택하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비 측이 유리한 공성전이었다. 하지만 칼리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동쪽 성문으로 향했다. 알파 병사들은 에어리얼의 껍질을 한 칼리번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이들 중 과연 몇이나 에어리얼의 영역에 들어간 후에도 명령을 따를지….’
항복하라는 아스터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에어리얼에게 남은 알파를 바치러 가는 꼴이나 다름없다. 젠뿐만 아니라 적의 부하인 아스터가 말릴 정도니 전황이 불리함은 눈에 보듯 뻔했다.
전쟁의 승패는, 몸을 빼앗긴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스스로 버티고 이겨 낸 역경들이 전부 에어리얼의 계략이고, 자신은 끝까지 이용당하는 것뿐이라면….
적은 보이지 않고 또 들리지 않으니 의심만 깊어져 갔다. 하지만 칼리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연명하기 위해 도망치거나 숨는다고 한들, 이 몸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에레즈만이라도 에어리얼에게서 분리해, 젠에게 넘길 수 있다면— 지금 칼리번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희망적인 결말이었다.
“붉은 오메가님. 전방에 병사들이 대기 중입니다.”
그때, 알파 하나가 칼리번과 아스터의 곁으로 가뿐하게 올라왔다.
“알겠다. 확인해 보지.”
예상한 일이었다. 칼리번은 적군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비행이 가능한 마물의 눈을 빌렸다.
“…잠깐.”
하늘 위에서 동문을 살피던 칼리번은 하얗게 질렸다. 보고대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도 왕성 내의 인원을 거의 총동원한 어마어마한 수가.
“무슨 일입니까, 칼리번.”
아스터는 참다못해 칼리번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 금사를 뻗어 주변의 나뭇가지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 위로 훌쩍 올라섰다. 눈 앞을 가리던 덩치 큰 마물이 사라지자 시야가 확 트였다.
“……!”
그리고 아스터도 칼리번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칼리번이 예상한 전쟁은, 에어리얼이 불러낸 마물과 왕성 내의 알파들을 상대하는 공성전이었다. 그러나 동문 밖에 배치된 병사들은 전부 인간군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여하기 힘든 아이와 노인까지도 나와 있었다.
‘설마 성 밖으로 쫓겨난 건가?’
더는 인간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인간들은 동쪽 문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름의 대열을 이루며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섰다. 대부분이 갑옷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변변찮은 무기 하나 없이 맨손인 경우도 많았다. 전방에는 여자가 후방에는 아이와 노인, 부상자로 채워져 있다. 활이나 돌을 든 용병들은 성벽에서 지원 공격을 준비하였고 인간 사내들은 성안에 있었다.
* * *
한편, 에어리얼은 측근들과 함께 안전한 본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런 부실한 병사들로 전투를 시작할 수나 있을까요?”
에어리얼의 명령대로 따르기는 했으나 오드론은 의문이 들었다. 인간군의 장점은 수가 많다는 것이 전부였다. 힘이나 속도는 마물 혼혈보다 떨어지고, 마물에 비교하자면 더욱 약해 빠졌다. 저들 전부보다 마물 몇십 마리가 화력의 측면에서는 훨씬 압도적일 것이다.
“하하, 설마 오메가들끼리 엄청난 두뇌 싸움이라도 벌일 줄 알았어?”
에어리얼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쪽은 돌대가리고, 한쪽은 평생을 지하에서 굴러먹었는데 그런 걸 구사할 머리가 어딨겠어? 아니면 인간 밑에서 설설 기던 시절처럼 치열한 방어전이라도 치를 생각이었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이대로는 저희 측이 불리해 보이는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오드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전투였기에 숨겨진 또 다른 계획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알 것 같습니다.”
오드론은 마침내 깨달았다.
“혹시 왕자님께서 전투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오드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예전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때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도 알파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의 힘만은 단순한 알파 그 이상이었다.
“안타깝지만 에레즈는 지금 자고 있어.”
“네?”
“힘을 과도하게 써서인지, 잠이 부쩍 늘었거든.”
오드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에레즈 프리드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덥지 않겠지만, 일단은 두고 보도록 해. 정 안 되면 내 힘으로 쓸어 버릴 테니. 기왕이면 순순히 돌려받고 싶은 게 있거든.”
“하… 하하, 제가 오메가님을 믿지 않을 리가….”
오드론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속으로 비웃고 있는 거 다 알아. 뭐, 전략이니, 전술이니 뼈가 굵은 너희가 보기에는 터무니없어 보이겠지만….”
에어리얼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 나갔다. 오드론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이게 전쟁의 본질이잖아?”
에어리얼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인간 사내들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 * *
<저희는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도착한 용병대, 검은 어금니입니다. 이곳에는 여성들만 거주합니까?>
그 시절, 칼리번은 용병대 ‘검은 어금니’의 대장이었다. 지금과는 정반대로 짙은 피부와 바위처럼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마, 마을 사내들은 전부 산으로 보냈습니다. 저희의 결심은 확고합니다. 남편과 아들이 마물에게 끌려가 강간당하느니, 저희가 죽어서 끝나는 것이 낫습니다.>
그때의 칼리번은 ‘가엾은 여자들을 구해 주는 용병’이었다.
<다… 당신들은 우리와 다르게 강간당할 일이 없고, 살해당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썼고 인간처럼 굴었지만, 단 한 번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왕자님! 이리로,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칼리번은 자신의 알파를 만나게 되었다. 칼리번이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더없이 나약하고 눈물이 많은 알파였다.
<왕자님, 왕자님께서는 젠과 함께 이곳을 떠나십시오. 저는 마물이 뒤쫓아오지 못하도록 남겠습니다.>
칼리번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의 용병대뿐만 아니라 알파 사이에 묻혀 지낼 수 있었던 평범함마저도. 종국에는 젠도, 자신의 알파도 떠나보낸 채 홀로 남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모든 힘을 잃고 말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손에 죽어라, 칼리번.>
육체마저도 빼앗긴 채.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되어 숲을 헤매었다. 혼자 힘으로는 생존조차 불가능한 나약한 오메가. 그 몸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한 칼리번은 집착을 놓지 못하고, 에레즈가 조심스럽게 놓아둔 조약돌을 주워 모을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내는 에레즈의 기억은 죽어 가는 칼리번을 안내하듯 왕성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 칼리번은 자신을 향한 쇠붙이들을 응시했다. 이제 그는 가엾은 인간을 습격하는 오메가가 되었다.
* * *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각오했다. 아스터를 구하기 위해 왕자님을, 그리고 왕자님의 인간 병사들을 공격했을 때부터.
하지만… 이건 다르다. 칼리번은 헤매었을지언정 계속해서 나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반대의 모습이 되어 처음으로 되돌아왔을 뿐이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티벨 마을의 방어전. 그리고 검은 숲에서 수많은 마물을 상대로 홀로 치렀던 방어전.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적과 서로 모습을 바꿨을 뿐이다. ‘칼리번’은 인간을 죽이고 범하려 드는 마물이 되었고, ‘마물’은 성안에서 칼리번이 되고 말았다.
만일, 예정대로 칼리번이 적을 공격한다면.
“에어리얼이 이런 악수를 두다니 믿기지 않지만, 덕분에 동문을 뚫기는 쉽겠군요.”
아스터는 커다란 나무 위에서 적군의 전력을 확인한 후 곧바로 칼리번의 품으로 돌아왔다.
“에어리얼도 당신을 무작정 죽일 작정은 아닌 모양입니다. 어쩌면 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도 모르죠. 잘하면 협상의 가능성도 있을 듯하군요.”
아스터는 조금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에어리얼이 전력을 쏟아부었다면, 전투는 시작도 전에 처참하게 밀렸을 것이다.
“…….”
그러나 칼리번은 적 진영을 노려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추측에 불과하니…. 아직은 에어리얼의 깊은 뜻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군요. 일단은 눈앞에 보이는 적을 쓸어 버리죠. 에어리얼의 몸에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격파한 후, 왕성 안으로 진입합시다.”
“…….”
“그 알파 여자가 말한 대로라면 에어리얼과 에레즈 프리드웬은 같이 있을 겁니다. 최소한 거기까지는 함께 싸우도록 하죠. 에어리얼의 피를 좀 먹었으니 저도 한동안은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아스터는 투구 밖으로 금사를 내밀더니 주먹질을 하듯 흔들어 보였다. 칼리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리번?”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아스터가 투구를 덜그럭거렸다. 칼리번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 에어리얼이 마음을 바꿔 알파를 풀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서둘러 들어가야 합니다. 성벽에 용병을 세워 놓은 것을 보니, 분명 ‘진짜 병사’들은 안에서 대기 중일 겁니다. 그때는 마물끼리 싸우게 하고, 에어리얼과 에레즈 프리드웬을 찾으러 가면 됩니다. 저희 측의 화력이 부족해도 잠시간은 버텨 줄 겁니다.”
“…….”
“…에레즈 프리드웬을 구하러 가는 것 아닙니까?”
아스터는 칼리번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그가 가장 반응할 법한 단어, ‘에레즈 프리드웬’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쟁이 촉발하기 직전이었다. 에어리얼이 코앞에 있었다. 아스터는 초조해져 자꾸만 칼리번을 괴롭혔다.
“칼리번, 가만히 있지만 말고 다른 명령이라도 내…. 읏?!”
칼리번을 재촉하던 아스터는 갑작스러운 진동을 느꼈다. 칼리번과 아스터를 태운 마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움직이기 전에는 말을 좀 하십시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터는 무언가 일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리번과 아스터를 태운 마물만이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어째서 저희만 가는 겁니까?”
병사들은 제자리를 굳건히 지킨 채, 우두머리가 진영을 이탈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마물이라고는 하나 오메가가 떠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표정이 흐릿한 것이, 상위의 존재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칼리번, 칼리번?!”
그제야 아스터가 다급하게 칼리번을 불렀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병사들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
“멈추십시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이러다가는 금방 적의 범위 안에 들어가고 맙니다.”
아스터는 금사로 칼리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과 에어리얼은 서로 돌아가면서 불리한 짓을 하는 겁니까? 이대로는 에어리얼의 몸이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도통 반응이 없자 아스터의 금사가 칼리번의 목을 휘감았다. 그답지 않은 다급한 행위였다. 그러나 칼리번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인간 병사들은 몰라도 성벽에서 대기 중인 알파들은 다릅니다. 우리가 탄 마물 한 마리에 겁을 먹을 작자들이 아닙니다!”
아스터의 목소리는 점점 빨라졌고,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설마,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 성벽에 마물을 들이받아 죽을 생각입니까? 싸우려 준비했던 건 전부 거짓말이고, 애초부터 이러기로 그 알파 여자와 작당했던 겁니까?”
그 순간, 두 사람을 태운 거대한 마물이 적군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갔다.
“쏴라!”
성벽에서 외치는 소리와 함께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활을 겨누었다.
“위험합니다!”
아스터가 칼리번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화살은 체격이 작은 칼리번과 아스터가 아닌 마물의 몸에 맞았다. 거대한 마물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땅 위로 굴렀다.
“칼리번!”
둘은 함께 마물의 몸통에서 떨어져 내렸다. 간발의 차로 마물의 몸에 깔리지 않고 거친 땅 위를 굴렀다.
“칼리번….”
아스터는 흙먼지 속에서 칼리번을 찾았다. 검은 투구는 뒤집힌 채였다. 매캐한 먼지 속에서 나타난 칼리번이 그를 집어 들고는 옆구리에 단단히 끼웠다.
“가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아스터가 칼리번의 팔을 잡아끌며 외쳤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의 말을 반대로 따르기라도 하듯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칼리번, 제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겁니까?”
칼리번이 다가갈수록 인간 병사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나 흙과 오물이 묻은 칼리번은 초라하면 초라했지, 마물을 이끌고 인간을 공격하러 온 오메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 칼리번. 칼리번!”
아스터가 이제는 애처로울 정도로 간절하게 칼리번을 불렀다.
“왜 그렇게까지 인간만을 불쌍하게 여깁니까? 그런다고 저들이 우리를 봐줄 것 같습니까?”
고대로부터 무수한 별처럼 지성으로 반짝이는 학자들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했다.
“아니.”
짐승과 벌레로부터 인간을 분리하기 위해서. 마물에게 강자의 위치를 빼앗긴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럼 어째서, 싸우기도 전에 포기하는 겁니까?”
어떤 철학자는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떤 신관은 오직 인간만이 신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했다. 어떤 왕은 오직 인간만이 사회를 이루고 군대를 이루고 가족을 이룬다고 했다. 어떤 학자는 인간만이 글자와 도구를 만들고 쓸 줄 안다고 했다. 어떤 시인은 오직 인간만이 노래를 하고 사랑을 느낀다고 했다….
“난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럼 지금… 이게 싸우고 있는 겁니까?”
진정한 인간의 특성은 자신이 어떤 일을 행하든 옳으며 결백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악행이든, 선행이든, 혹은 미련한 짓거리든 상관없이.
“그래.”
그렇기에 인간은 미워하는 이를 사랑하기도 하며, 손바닥 뒤집듯 한순간에 정반대의 신념을 따르기도 한다. 여전히 자기 자신은 옳고 가엾다 믿기에.
<칼,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죽여야만 한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란다.>
언젠가 양아버지가 들려준 말은 인간의 변명이었다. 칼리번은 그저 거대한 운명의 흐름에 휘말려 버렸을 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이미 오래전에 에레즈 프리드웬을 지키기 위해 손상되었다. 그러니 칼리번이 마물 군대를 몰아 인간들을 전부 죽인다 한들,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편은 다르다. 그들은 평생을 마물에게 시달려 오다 간신히 쉼터를 얻었다. 유일한 휴식처를 붉은 오메가에게 빼앗기기 직전이다. 그 악마를 칼로 찌르고 사지를 찢어 버린다 한들 누가 그들을 욕하겠는가?
저들은 저들의 논리대로, 칼리번은 칼리번의 의지대로 부딪치고, 패배자는 사라지고 승자는 관철해 나가면 된다.
<있잖아, 그 녀석도 너만큼이나 변했어.>
하지만….
<결국 그 녀석은… 너처럼 변하고 만 거지. 자신을 구원자처럼 떠받들며 따르는 인간들에게 마음을 품게 된 거야. 그때부터 알테르를 향한 칼날은 동시에 에레즈 자신의 목을 찌르는 칼날이 되고 말았어.>
쉬지 않고 걷던 칼리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인간 병사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칼리번과 대치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너희 모두를 이곳에서 구출하겠다. 앞으로 너희는 내게 목숨을 빚지게 되는 것이지. 하지만… 그에 대한 값을 치를 필요는 없다.>
칼리번은 죽어 가는 이의 기억 속에서 에레즈를 보았다.
<만일 오메가가 부리는 마물이, 알테르 프리드웬이 소유한 마물 혼혈들이 너희를 다시 잡으려 든다면…. 내가 막아 주겠다. 고향이 없어졌다면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주겠다. 가족과 친구를 잃어 혼자라면, 내가 그대들의 가족이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지. 아마도 모두가 내 말을 의심할 것이다. 여태껏 지키고자 한 자들은 죽었고, 알파들에게 빼앗기기만 했을 테니….>
8년을 잃어버린 칼리번은 모르는 낯선 청년을.
<하지만 너희가 살아남겠다고, 이 자리에서 약속해 준다면…. 맹세하지. 나 또한 그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절대로 죽지 않겠다.>
그는 자신과 나눴던 약속을 다른 많은 이들과 공유했다. 그렇다면 자신과도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에어리얼의 계략이란 뻔하다. 이 손으로 직접 에레즈가 이룬 것들을 부수게 하고, 에레즈의 손으로 자신을 죽이게 하려는 것이겠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그딴 얕은수에 놀아날까 보냐.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살점을 짓씹듯이 이를 갈았다.
“고, 공격할까요…?”
칼리번과 마주한 병사들은 경계 태세를 취했다. 위협을 하듯 칼리번을 향해 무기를 들이밀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오메가는 무방비로 서 있기만 했다. 창백하고 마른 몸,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 두려울 정도로 시선을 뺏는 외모. 마물을 두르지 않은 오메가는 어지간한 인간이 보기에도 약해 빠져 보였다.
“…….”
“…….”
병사들은 눈길을 나눈 후 조심스럽게 공격 태세에 들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무기를 갖춘 여인이 칼리번에게 칼을 휘둘렀다.
“—!”
칼리번은 저항하지 않았으나 아스터가 재빠르게 반응했다. 칼날이 칼리번의 어깨를 가르기 전에, 금사가 막아냈다.
“내버려 둬라, 아스터.”
칼리번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단호하게 아스터를 제재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상대는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당신의 힘이 통하지 않습니다! 설마 에어리얼의 몸을 가진 채로 자살을 하려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당신이 뭐라고 하든,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그만둬…. 윽!”
“칼리번!”
칼리번이 아스터의 금사를 흔들어 검을 간신히 떨군 순간, 밧줄이 날아왔다. 굵은 밧줄은 너무도 쉽게 칼리번의 목을 낚아챘다. 칼리번은 목이 졸린 채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스터가 금사로 목줄을 잘라 내려 한 순간, 칼리번이 몸으로 투구를 짓눌렀다.
“칼리번…?! 돕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지, 마. 힘을… 아껴 둬라.”
“지금 절 걱정할 때입니까?”
아스터가 뭐라고 하든, 칼리번은 막으려 들 뿐이었다. 칼리번의 몸 위로 그물이 던져졌다. 칼리번은 아스터와 함께 꽁꽁 묶여 버리고 말았다.
“자, 잡은 건가…?”
“해냈다…….”
“오… 오메가를 잡았다!”
거저 얻은 승리에 병사들은 얼떨떨해하며 외쳤다. 칼리번이 완전히 굴복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성문이 열렸다.
“물러나라! 산 채로 끌고 들어오라는 왕자님의 명령이다!”
안에서 대기 중이던 용병들이 인간군을 밀쳐내며 다가왔다.
“…이럴 거면 제가 처음 제안한 대로 에어리얼과 거래를 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아스터가 칼리번을 탓했다.
“이건 그것보다도 못한 처지이지 않습니까.”
칼리번은 투구를 배 아래에 깔아뭉갠 채로, 얼굴을 흙먼지가 이는 땅에 박을 뿐이었다.
“저는 도저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칼리번.”
품 안의 아스터는 털을 잔뜩 세운 짐승처럼 그르렁거렸다.
* * *
두 번이나 왕성을 공격당했다. 지난 전투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시점에 붉은 오메가는 직접 전장의 선두에 서기까지 했다. 공포와 혼란이 왕성을, 이 작은 세계를 지배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전생의 양상은 그들의 예상과 크게 어긋났다. 붉은 오메가는 허무할 정도로 금세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제 발로 기어 와 항복한 것이다. 붉은 오메가가 끌고 온 마물과 알테르의 잔당들은 주인을 잃고 흩어졌다.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던 왕국민은 누구 하나 다치거나 죽는 일 없이 왕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의도에서인지, 용병들은 붉은 오메가를 바로 죽이지 않고 밧줄로 묶어 끌고 갔다.
“저게 오메가…?”
“저런 말라 빠진 꼬맹이가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붉은 오메가라고?”
“겉모습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고작 해 봐야 어린애잖아?”
소수밖에 몰랐던 붉은 오메가의 정체가 모두에게 탄로 나는 순간이었다. 진귀한 생물을 구경시키듯 오메가는 왕성 여기저기에 끌려다녔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악마의 정체를 확인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붉은 오메가는 앞뒤로 긴 줄에 연결된 채 이동했다.
“어쩌면 저건 가짜 오메가일지도 몰라.”
두 눈으로 직접 오메가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꺼내며 웅성거렸다. 어른이 되기 전에 성장을 멈춰 버린 몸. 마물보다는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날카로운 미모. 앞뒤로 오메가를 끌고 가는 용병들에 비하자면 이 얼마나 나약하단 말인가? 용병들에게 거칠게 끌려다녀서인지 그 행색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아니, 저 녀석이 붉은 오메가다! 전쟁터에서 본 적이 있어, 저 얼굴이 확실해!”
“나, 나도 봤어…!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마물을 부려서 내 아이를… 죽이는걸….”
“저 붉은 머리는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다더니….”
그러나 이질적인 적발과 적안은 괴물을 보증했다. 수백, 수천 개의 눈이 끌려가는 칼리번을 노려보았다. 노골적인 적의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칼리번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붉은 오메가’라는 이름에서 오는 위세가 두려웠는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오메가는 창녀처럼 알파를 유혹한다고 들었는데…. 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거지?”
그때,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붉은 오메가가 미쳤다고 항복할 리가 없잖아?”
“성까지 당당하게 걸어온 건, 왕성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있는 용병님들을 홀려 자기편으로 만들 위해서 아냐?”
“그렇게 되기 전에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해….”
공포의 땅에서 정의감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적이 시들고 나서야 복수심이 솟았다.
휙—
“!”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칼리번의 머리를 맞추지 못하고 빗나갔으나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각기 다른 감상을 품던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겹쳐졌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원흉에게 돌을 던졌다. 겁 많은 개인을 용감하게 만드는 것은 정의감, 그리고 집단을 위한다는 충성심이었다. 그런 종류의 용기는 옳다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으나 대개 개인일 때는 발현되지 않았다.
“윽…!”
묶인 채로 돌무더기를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돌과 오물이 칼리번의 몸을 스치고, 어떨 때는 제대로 들어맞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칼리번의 몸이 피를 흘리고 부서져 갔다.
“칼리번….”
그때, 아래에서 쥐처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번, 절 놔주십시오. 지금 당장 묶인 줄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아스터였다. 칼리번의 두 손은 묶여 있었지만, 용케도 낡은 투구를 쥐고 있었다. 에어리얼에게서 따로 명령을 들은 것인지 아스터만은 뺏어 가지 않았다.
“괜한 짓 하지 마….”
칼리번은 주변의 눈에 들키지 않도록 짧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에어리얼의 몸이 상하고 맙니다.”
검은 투구에서 백금사가 살짝 튀어나왔다. 아스터가 무슨 말을 해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칼리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제길— 얌전히 있어!”
칼리번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쉰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여기서 정체가 탄로 나면 흥분한 인간들이 널 빼앗아 갈 거다. 그때는 널 도와줄 수 없어. 그러니 죽은 듯 있으란 말이다.”
“어째서 우리가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거죠? 여기 있는 인간 정도는 지금 제힘으로도 전부 죽일 수 있습니다.”
아스터는 지지 않고 맞섰다.
“멍청한— 우윽!”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일까? 그 순간, 큼지막한 돌멩이가 칼리번의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하아…. 읏….”
충격이 꽤 컸는지, 흘러내리는 뜨끈한 피와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칼리번은 한두 걸음을 간신히 내딛고는 결국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마물의 왕이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칼리번은 배 아래에 투구를 감췄다. 움직이던 사냥감이 정지하자 형벌은 더욱 가혹해졌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등 위로 돌이 날아들었다. 거침없는 돌팔매질에 약해 빠진 몸은 금세 살점이 벗겨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칼리번…!”
아스터가 빠져나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르작거렸다. 칼리번은 묶인 채로 그를 필사적으로 제지하느라 애를 먹었다.
“커헉!”
칼리번은 목이 조여 컥컥거렸다. 한참을 웅크리고만 있자, 기다리던 용병이 목에 감긴 밧줄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칼리번의 몸이 압도적인 힘에 의해 강제로 일어섰다. 그때, 비틀거리는 칼리번의 머리를 무언가가 감쌌다.
“하지 마라, 아스터….”
아스터의 투구였다.
“인간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이것만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칼리번의 머리를 삼킨 아스터가 말했다. 평소 아스터의 목소리는 투구 안에서 부딪치는 탓에 부정확하고 울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투구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는 훨씬 더, 누군가를 닮아서….
“그만둬라. 이 이상 눈에 띄는 짓을 해서는 안 돼…!”
이미 사람들은 투구의 존재를 눈치채고, 한낱 포로가 갑옷을 들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무도 절 떼어 내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겠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아스터는 끝끝내 고집을 피웠다.
“그만둬….”
칼리번이 묶인 손을 써서라도 투구를 벗겨 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아스터의 백금사가 거미줄처럼 칼리번의 얼굴과 머리를 휘감은 것이다. 지금도 숨을 쉬기 힘을 정도로 꽉 조인 밧줄과 달리, 어린아이가 온 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처럼 필사적이었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이대로는 투구가… 견디지 못할 거다.”
목소리에서도 피가 흐르는지, 칼리번의 음성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얼굴을 감싼 백금사에게서 심장 박동을 느꼈다. 어디에 심장이 있고, 어디에 존재가 있는지 알기 힘든 금사에게서….
“절 얕보시는 겁니까? 무려 에어리얼이 만들어 준 갑옷입니다.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에어리얼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 와중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돌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아스터의 투구가 대신 맞아 퉁, 퉁, 쇳소리가 났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저 악마가 걸친 갑옷을 벗겨라!”
사방팔방에서 칼리번을 질책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그러나 아스터의 투구 덕분에 약간이나마 차단이 되었다. 피를 흘려 훌쩍거리고 헐떡이는 자신의 숨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어서 움직여라!”
사람들의 불만이 넘쳐났지만, 알파들은 칼리번의 투구를 벗기지 않았다. 칼리번의 팔을 묶은 밧줄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어느새 옷이 젖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게 발자국이 남았다.
적의 수장이 괴물보다는 인간을 더 닮았으며 나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사람들의 분노는 가시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당신은 저들을 죽이지 않았는데… 보답이 형편없군요.”
아스터가 칼리번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불만스러운 아스터와 달리 칼리번에게는 익숙했다. 인간과의 거래는 언제나 밑지는 장사였으니까.
* * *
고대 마법의 표식은 지하 감옥의 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왕국을 세운 초대 왕이자 프리드웬 가문의 시조인, 에인레드 프리드웬이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 마법의 존재와 사용법을 아는 이는 손에 꼽은 정도로 적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그것을 이용해 마계에 붙들린 오메가를 인간계로 소환해냈다. 연약한 겉모습과 달리, 수십 년간 마물에게 범해지며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뱀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알파인데도 여자인… 이상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혹시 아직 살아 있어?>
에어리얼은 몸을 숙이고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당시의 에어리얼은 알테르를 완전히 지배하기 전이었는지 노골적으로 저자세를 취했다.
<그 알파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궁금해. 나는 당신의 종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고, 말조차 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단지 소식만이라도 듣고 싶을 뿐이야….>
에어리얼은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을 마계에 보낸 탓에 미소보다는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무엇이든 따를 거야…. 그러니 작은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에어리얼이 찾는 그 알파를 찾는 일은 알테르에게 있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연히 태어나는 기형 알파들은 대부분 인간의 손에 솎아진다. 남성형에서 벗어난 경우에는 특히나. 그 탓에 용병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여성 알파는 아직도 한 명뿐이었다.
알테르는 ‘검은 어금니’를 포함한 용병대 여럿을 왕성으로 불러들였다. 여자 알파만 불러내는 것은 남들 보기에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실 공인 용병대를 뽑는다’가 용병들을 본성으로 불러들인 표면적인 이유였다.
각 용병대의 대표들이 본성을 서성였다. 에어리얼은 용병들이 가장 잘 보이는, 근처의 저택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변장을 해서라도 가까이에 가고 싶었으나 거기까지만 알테르에게 허락받았다.
<……!>
한참이나 창문에 붙어 관찰하던 에어리얼의 눈에 마침내 목표가 들어왔다. 에어리얼과 비슷한 붉은 머리였으나, 서늘한 핏빛이 아닌 태양을 닮은 따스한 주홍빛이었다. 우락부락한 사내들 사이에 낀 여자 알파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저게 바로 네가 찾던 계집 알파겠지. 용병대를 전전하다가 지금은 검은 어금니의 부대장이더군.>
뒤에서 에어리얼을 감시하던 알테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옆에 있는 건?>
정신없이 창문에 매달리던 에어리얼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게끔, 억지로 꾸며 낸 목소리로.
이 극중극의 관객인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보았다. 젠은 자신에게 너스레를 떨기도 하며 별 시답잖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저 시절의 광경이 이토록 평화롭고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지….
<까무잡잡한 알파 말인가? 같은 용병대의 대장이라 하더군.>
<대장…. 아아.>
에어리얼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붉은 시선이 ‘칼리번’에게 꽂혔다.
<그래…?>
에어리얼은 한참을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눈가가 제 눈동자만큼 붉어져 갔다.
<여기서 더 구경하길 원한다면 임명식을 늦춰 주도록 하지.>
<…….>
에어리얼의 뒤통수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칼리번은 이후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고 있다. 왕실 공인 용병대를 위한 보상과 지원이 늦어질 것이고, 젠은 다른 용병들과 도박판을 벌일 것이며, 칼리번은 잠시 머리를 식힌다고 자리를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 * *
“칼리번. 당신은 돌대가리입니다.”
그 말과 함께 칼리번은 차가운 지하 감옥의 바닥에서 눈을 떴다.
“당신이야말로 진짜 돌대가리란 말입니다.”
아스터는 배운 지 얼마 안 된 단어를 바로 갚아 주었다.
“…….”
칼리번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머리를 흔들어 딱딱하게 들러붙은 오물을 털어 냈다.
“윽….”
그 정도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칼리번은 앓는 소리를 내며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아스터가 덜그럭거리며 다가와 그의 무릎에 투구를 올렸다.
돌팔매질을 당하며 왕성을 순례한 후, 최종 도착지는 지하 감옥이었다. 돌고 돌아 이곳. 칼리번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 갇혔던 감옥은 훨씬 깊고 어두웠다. 그에 비하면, 현재 칼리번과 아스터가 갇힌 방은 비교적 지상과 가까운 편이었다.
“간수는 전부 인간인가….”
칼리번은 주변을 최대한 살폈다. 그러고는 아스터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구석에 몸을 숨기고 속삭였다. 놀랍게도 칼리번은 두 손도, 두 발도 묶여 있지 않았다. 에어리얼이 그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는지 알려 주는 부분이었다.
“네, 당신이 조종할 수 없는 약해 빠진 인간들입니다.”
“…….”
“…물론 저는 이 상황에서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기절하기 전에 ‘인간을 공격하거나 탈출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아스터는 착실하게 대답했으나 어딘지 부루퉁한 목소리였다.
“고맙다.”
칼리번은 그늘 속에서 검은 투구를 쓱쓱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왕성에 끌려오기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금이 많이 갔으며 훨씬 거칠어졌다.
“…….”
칼리번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을 억눌렀다. 마음 대신 손이 한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처음에는 얌전하던 아스터였으나 귀찮아졌는지 몸을 덜그럭거려 칼리번의 손길을 떼어 냈다.
“칼리번.”
“음.”
“당신은 정말로 멍청합니다. 기껏 모은 병사들을 버리고 자진해서 적진으로 뛰어들다니….”
아스터는 질색하며 칼리번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그 상황에서 전쟁을 벌이든, 협상을 하든, 어차피 곁과는 같았을 거다.”
“…같다고요?”
“네가 말하지 않았나. 에어리얼이 절대적으로 승기를 잡은 상황이라고.”
“…….”
“그래서… 이게 최선이었다.”
왕자님께서 지키고자 했던 것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족한 칼리번의 판단으로는.
“당신이 부리던 마물 혼혈은 에어리얼에게 흡수되었고, 마물은 다시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뭐 하나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돌 세례를 맞았고요. 그런데도 이게 최선이란 말씀이십니까?”
아스터는 당장에라도 백금사를 뽑아내어 칼리번의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 알파 여자 말대로 도망치는 편이 나았습니다.”
아스터는 칼리번과 일부러 멀리 떨어졌다. 두 사람은 각자 구석에 몸을 기댔다. 정적이 흐르니 자연스럽게 정신이 몸의 고통으로 향했다. 에어리얼의 한쪽 어깨는 성검에 꿰뚫려 검게 죽어 있었다. 그런 하얀 피부 위로 푸르고 붉은 멍이 새롭게 올라오고, 뼈가 부러졌는지 괴상할 정도로 부어오른 곳도 있었다. 칼리번은 차라리 계속 기절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쪽의 어둠 속에서, 아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에레즈 프리드웬을 구하려 하는 겁니까?”
칼리번은 부어오른 눈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에어리얼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곁에서 지켜봐 왔습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한 번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당신을 여러 번 상처입혔고, 죽이려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는 이토록 잔인하게 자신을 몰아세운다.
“오직 당신만이 에레즈 프리드웬을 구하고 싶어 고생을 자처했죠.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알파들이 오메가에게 목숨을 거는 건 흔한 일이지만…. 당신은 오메가이고, 그는 수많은 알파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상했다. 자신을 미련한 자로 여기고 있었으나 칼리번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겁니까?”
아스터의 질문이 자신이 아닌, 아스터 본인에게 던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
칼리번은 숨을 내쉬었다. 몸속 어딘가가 부서진 것일까, 내뱉는 숨마저도 온전치 못했다.
<왜, 왜…. 나, 나 같은 걸 사. 살려 주고, 계, 계속 돌, 봐 주고…. 버, 버리지 아, 않는 거야?>
칼리번은 이와 같은 목소리로,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다.
<나, 나는……. 난, 아, 아무 데도 쓰, 쓸데없고……. 마, 말이나 더, 더듬고……. 보, 보잘것없는데….>
“아주 오래전, 나는 용병이었다.”
아이에게 낡고 오래된 자장가를 들려주듯 덤덤한 목소리였다.
“용병? 오메가인데 말입니까?”
어둠 속에서 소년과도 같은 목소리가 물었다.
“그때 나는 내가 오메가인 줄도 몰랐다. 그리고 용병은 대가를 받으면 그만큼의 일을 해야만 했지.”
“그럼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대가를 치르기 위해 지금까지 일한 겁니까?”
칼리번은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단한 보물을 대가로 받은 모양이군요.”
물론 그랬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무려, 꽃 한 송이를 받았으니까.
<왕자님께서… 제게 꽃을 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의 자신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래, 엄청난 걸 받았지.”
칼리번은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아스터를 찾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칼리번은 아스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두 발로 걸을 수 없어 짐승처럼 네발로 기었다. 아스터가 도망치려 했으나 칼리번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아스터를 잡아 이제는 버릇처럼 두 팔 안에 가뒀다.
“그러면?”
아스터가 칼리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없단 말입니까?”
아스터의 목소리에서 어딘지 허탈함이 느껴졌다.
“그래.”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몇 번이나 부서지고 목숨의 위협을 당했으면서도, 칼리번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분을… 그 무서운 곳에 혼자 둘 수는 없었으니까.”
홀로 있을 당신을 그 무서운 곳에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저 그뿐이었다.
8년 전 그때도 이렇게 대답했다면 좋았을까?
* * *
칼리번은 때때로 간수에게 에레즈 프리드웬을 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따로 받은 명령이 있는지 칼리번이 무슨 말을 하든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공기의 흐름조차 멈춘 공간이었다. 그 탓인지 시간의 흐름이 유독 더디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 어떻게 왕성에 진입하긴 했잖습니까. 그러면 부탁을 할 게 아니라 에어리얼이 있는 곳까지 몰래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스터는 자신이 간수를 공격할 테니 탈출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인간들이야 지금 네 힘으로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겠지. 하지만 결국 왕성에 산재한 알파들에게 잡힐 거다.”
“…….”
“때를 기다려라.”
“흥, 그놈의 때는 언제 오는 겁니까?”
아스터는 말문이 막히자 투덜거렸다.
“…….”
사실 칼리번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스터의 주장대로 행동하면 탈출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에어리얼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탈출은 의미가 없다.
“도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합니까? 열 밤, 스무 밤?”
아스터는 금사로 감옥 벽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따로 배웠는지, 아니면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흉내를 내는 것인지, 세로로 네 줄을 긋고 가로로 한 줄을 그었다. 그렇게 오십 개 정도까지 긋더니, 벌써 질렸는지 도로 칼리번에게 기어 왔다. 그러더니 칼리번을 못살게 굴었다. 정말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결같이 성가신 녀석이었다. 칼리번은 그에게 시달리다가 때때로 피를 나눠 주며 시간을 보냈다.
툴툴거리던 초반과 달리 며칠이 지나자 아스터는 빠르게 기력을 잃어 갔다. 피를 먹일 때만 활동성을 보일 뿐 조개처럼 투구 안에 숨은 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투구를 두드려도 쇳소리만 날 뿐 반응이 없었다. 유일한 감옥 동료가 쥐 죽은 듯 있으니 칼리번도 슬슬 이상함을 느꼈다.
“…아스터?”
칼리번은 상체를 숙여 투구와 마주 보았다.
“왜 그러지, 피가 부족한 건가?”
칼리번이 얼굴을 들이밀자 아스터는 백금사로 칼리번의 얼굴을 툭 치고는 투구 안으로 쏙 숨어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아프진 않은 것 같다만….
“설마 감옥이 무서운 건가?”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 질문은 차마 무시하지 못하겠는지, 한참 후에 짜증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저는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서울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 왜 곧 죽을 것처럼 빌빌거리는 거냐.”
“그야….”
아스터는 말을 할 듯하더니 더 잇지 않았다. 칼리번이 투구를 툭툭 주먹으로 두드렸다.
“잠든 거 아니니 그만하십시오.”
아스터의 백금사가 칼리번의 주먹을 밀어냈다.
“…그거야 벌써 며칠이 지난 것 같은데, 에어리얼이 오지 않으니까요.”
이리저리 굴린 후에야 아스터가 비로소 본심을 드러냈다.
“알파를 전부 뺏은 데다가 저희를 가두기까지 했으니, 에어리얼이 굳이 저를 만날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칼리번이 에레즈를 위해 이 고생을 한 것처럼, 아스터도 오직 에어리얼을 다시 만나겠다는 목표만으로 여기까지 버텼다. 아스터의 갑옷은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평소 아스터가 충성하는 반만큼이라도 에어리얼도 마음이 있다면, 진작 아스터를 보러 왔어야 했다. 그런데도 아스터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모두가 아는 그 진실을, 어느 쪽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너는 다른 마물과 달리 항상 에어리얼의 곁에 있었다고 했지. 그래서 여기까지 나와 함께한 것 아닌가?”
“그건… 맞습니다. 당신이 차지한 에어리얼의 몸을 지키기 위함이었죠.”
“그렇다면 에어리얼이 이 몸과 너를 회수하러 오겠지. 그렇지 않나?”
“…….”
“그러니까 걱정 말아라. 에어리얼은 반드시 올 테니.”
이상한 위로였다. 아스터는 적이고, 아스터에게 좋은 일이 칼리번에게 좋은 일일 리가 없었다.
“……흥.”
적의 위로에 도리어 아스터는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말 상대가 없어진 칼리번은 투구에 팔을 올린 채로 턱을 괴었다.
‘아니. 에어리얼은 분명 올 거다. …어쩌면 왕자님과 함께.’
아스터와 달리 칼리번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에어리얼이 자신을 죽일지라도, 흔한 인간이나 알파의 손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전쟁이나 협상보다, 포로가 되는 편이 온전히 그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아스터는 에어리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반드시.
‘마지막 수단이 통한다면 좋겠군….’
칼리번은 상심에 빠진 검은 투구를 만지작거렸다.
‘에어리얼이나, 왕자님. 어느 쪽에게든….’
더 늦기 전에.
그런 칼리번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어리얼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문은커녕 기별조차 받지 못했는데도, 칼리번은 지독한 악의를 느꼈다.
* * *
칼리번은 검은 투구를 머리를 베개로 삼은 채 잠들어 있었다. 지하에서는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았으나, 간수들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니 밤인 것 같았다.
“우욱!”
그때, 어디선가 신음이 들려왔다. 깊은 잠에 빠졌다면 간과했을 정도로 짧고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칼리번은 소음을 놓치지 않았다. 곧 어둠 속에서 흰자위와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침입자는 상당한 실력자인지, 경비병들을 해치우는 것이 다가 아니라 비명이나 쓰러지는 소리마저 지워 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인지하기 시작하니 정적 속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뭐지? 암살자인가?’
칼리번은 아스터를 품에 안은 채 감옥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작고 마른 몸은 이럴 때는 쓸모가 있었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면 설마 왕자님이….’
칼리번이 애써 허튼 희망을 억누를 때였다. 칼리번과 아스터가 갇힌 감옥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정체를 밝혀라!”
“누구냐!”
침입자는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않았고, 감옥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그림자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으윽!”
“크, 으아악!”
허망할 정도로 짧은 전투였다. 아니, 노골적인 살인이었다.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벽에 피가 흩뿌려졌다. 침입자가 여기까지 잠입했다는 것은 감옥 밖의 알파들도 상대했다는 의미였다. 인간 병사쯤이야 한 손으로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번의 심장이 날뛰었다.
“…….”
칼리번은 숨을 죽이고 최대한 어둠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스터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적이라면 이대로 지나치기를. 아군이라면 모습을 드러내기를.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체 모를 침입자는 칼리번이 있는 감옥을 지나치지 않고 문을 부쉈다. 그러고는 커다란 몸을 숙이고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너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 하하…. 피차 꼴이 우습게 됐군그래.”
암살자는 칼리번을 보고는 다짜고짜 웃음을 터뜨렸다. 뒷걸음질을 치던 칼리번의 등이 차가운 벽에 달라붙었다.
“…데릴만.”
알파에 걸맞은 거대한 체격.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용병을 거느린 우두머리에게 어울리는, 흉터와 수염으로 가득한 거친 얼굴. 성 밖의 알파들과 회담을 마치고 왕성으로 떠났던 그 데릴만이었다. 에어리얼이 왕성의 모든 알파를 장악하게 되면서 그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이후 젠의 이야기를 들은 칼리번은 데릴만이 당연히 에어리얼의 손에 죽은 줄로만 알았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붉은 오메가님…. 아니지.”
데릴만은 다잡은 사냥감을 위협하듯 일부러 느릿하게 걸어왔다.
“검은 오메가.”
데릴만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는 다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위협적인 알파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나 우두머리답지 않게 행색이 더러웠으며 수십 일을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눈 밑이 어둡고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붉은 오메가가 아닌 검은 오메가이시니, 처음부터 다시 인사를 해야 하나?”
아무래도 데릴만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그를 피하고 싶었으나 더는 뒷걸음질 칠 공간이 없었다. 등에 벽이 닿았다.
“망할 오메가 같으니, 감히 나를 속였겠다?”
“윽!”
데릴만은 칼리번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칼리번은 몸을 숙여 피하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텅! 쇳소리와 함께 손에서 검은 투구가 떨어졌다. 칼리번은 순식간에 데릴만의 코앞까지 끌려갔다.
“그만둬라, 데릴만…!”
칼리번은 인상을 쓴 채로 버둥거렸다.
“후, 후흐흐…. 크하하하!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감쪽같이 속다니.”
데릴만은 칼리번이 도망칠 수 없도록 두 팔로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그에게서는 썩은 피와 오물이 뒤섞인,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났다.
“약해 빠진 오메가가 내 앞에서 살랑거리고 있었는데 눈이 멀었지….”
피가 묻어 검게 변한 손이 칼리번의 얼굴을 멋대로 만지작거렸다.
“그때 너를 데리고 왕성에서는 최대한 멀리 도망쳤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굴욕을 겪지는 않았을 거다…!”
데릴만은 겉모습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물 혼혈 중에서도 눈에 띄는 자였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과 카리스마를 지녔고 그랬기에 용병들은 그를 기점으로 무리를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눈앞에 오메가를 범하는 것보다 고차원적인 욕망을 추구하기도 했다. 여타 알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오메가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닌, 오메가를 무력화시켜 지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데릴만이 꿈꾸는 궁극적인 목표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과 같은 체계를 적용해, 모든 알파들에게 인간 사내를 골고루 분배하고자 했다.
“제기랄…. 너희 오메가들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가족도, 일생의 꿈이었던 알파들을 위한 왕국도!”
“윽, 큭, 허억…!”
“하, 하아, 하하…. 내가 미쳤지. 그딴 건 다 부질없는 것이었는데. 한번 박으면 뒤져 버리는 약해 빠진 사내새끼들도, 멍청한 알파들도 이쪽에서 사양하마…. 나한테는 오메가, 하, 하아, 너만 있으면 되니까.”
모든 기반을 잃은 알파에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너만 있으면…. 나도 인간처럼 가족을…. 가문을 만들 수 있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데릴만은 칼리번을 바닥에 내던졌다. 칼리번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데릴만이 그의 팔다리를 짓눌렀다.
“헉, 허억…!”
육중한 체격의 알파가 몸 위로 올라탄 것만으로도 칼리번은 금세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오메가만 있으면, 그래…. 내 피를 이은 순수하고 강한 아들을 몇 번이고 생산할 수 있지.”
“윽…!”
“이 몸으로 내 아들을 낳고, 내 아들의 아들을 낳게 해서…. 내 이름을 딴 거대한 가문을 꾸릴 거다.”
데릴만은 칼리번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아니, 손에 닿는 대로 마구잡이로 찢어발겼다.
“이 세상에서 처음 탄생하는 알파 가문을 위해 성씨도 새로 지어야겠지…. 크흐흐, 흐흐…. 무엇이 좋을까? 프리드웬?”
서늘한 감촉과 함께 칼리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큭, 멈춰라…. 데릴만, 이런 짓은…!”
칼리번은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반항했다. 데릴만은 일반적인 마물 혼혈보다도 훨씬 정신력이 강했다. 지금 당장 피를 흘려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남은 방법은 교미뿐이다. 쾌락을 통해 데릴만의 정신을 흩트려 놓으면 조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팔다리를 휘두르며 거대한 알파를 밀어내려 들었다.
“트리스트람? 리론? 제기랄, 인간 놈들 성씨밖에 모르겠군….”
데릴만에게 있어 칼리번의 공격은 어린아이의 주먹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작은 반항마저 성가신 모양이었다.
“닥치고 얌전히 있어!”
데릴만은 칼리번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자연스럽게 칼리번의 상체가 젖혀져 가슴과 배가 훤히 드러났다. 그 위로 거대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커헉!”
배에 가해지는 충격과 함께 칼리번의 입에서 역류한 위액이 튀어나왔다. 데릴만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몇 차례 더 칼리번의 배를 가격했다. 팔다리를 휘적거리던 칼리번의 반항이 멈추고 시체처럼 꿈틀거릴 때까지.
“욱, 우윽….”
칼리번의 검은 눈과 입에서 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전의 몸이었다면 이 정도로 타격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고 약한 몸이 버티기에는, 죽음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거대한 고통이었다.
“앞으로는 반항할 때마다 팔다리를 하나씩 자를 거다. 알겠나?”
칼리번의 몸이 꿈틀거렸다. 반항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화된 상태였다.
“대답하지 못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데릴만은 칼리번의 뺨을 두툼한 손으로 내리쳤다. 짝, 짜악, 뺨이 터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으, 흐으….”
그 탓에 칼리번은 신음 외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면 사지가 잘리는 편이 익숙하려나, 검은 오메가?”
마침내 칼리번은 데릴만이 바랐던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데릴만은 칼리번의 허벅지를 쥐고는 제게로 끌어당겼다. 칼리번은 하체가 들린 채로 질질 끌려갔다. 그 탓에 등과 뒤통수의 살이 벗겨진 듯 따끔거렸다. 데릴만은 칼리번의 다리를 크게 벌리고는 그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었다.
“욱…!”
몸이 억지로 접히자 배 속에 남아 있던 체액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목이 타들어 가듯 아팠다. 데릴만의 몸이 가까워진 만큼 그에서 나는 역겨운 체취가 더욱 진해졌다.
“흑…. 끄윽…!”
머릿속도, 눈앞도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어지러웠다. 데릴만의 몸에 걸쳐진 하얗고 가는 두 다리만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본성을 드러내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라.”
데릴만은 마치 큰 아량을 베푼다는 듯 눈만 끔뻑거리는 칼리번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칼리번은 숨을 짧게 끊어 내며 헐떡이기에 바빴다.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아팠다. 내장 어느 곳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의 배는 주먹 모양으로 시뻘겋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데릴만은 오물이 들러붙어 딱딱해진 바지를 끌어 내렸다. 거대한 성기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은 씻지 않았는지 더럽고 축축한 성기가 하얀 허벅지 위에 늘어졌다. 뜨끈한 샅의 감촉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굵게 솟아오른 핏줄이 차가운 피부에 닿자 꿈틀거리며 딱딱해진다.
“하……지 마….”
칼리번은 입 밖으로 체액을 뱉어 내며 간신히 중얼거렸다. 입뿐만 아니라 코에서도 피가 흐르는지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일반적인 알파라면 지금쯤 칼리번의 지배하에 들어갔어야만 했다. 그러나 데릴만은 달랐다. 체취에 쉽게 조종당하는 다른 알파와 달리 그에게는 본성을 억누르는 자제력이 있었다.
즉, 이 교미는 향기와 번식욕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노, 복수심, 증오, 자격지심……. 그저 화풀이를 위한 폭력에 불과했다. 이것은 마치… 마물의 교미가 아니라….
인간의 그것과도 같지 않은가.
“한 번만 더 반항하면 팔다리를 자른다고 했지?”
머리 위에서 노성이 들린다. 자존심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알파에게는 사그라드는 불꽃처럼 작은 반항조차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거친 손이 가는 팔을 움켜쥐었다.
“…크으…!”
칼리번이 다가올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눈앞이 깜깜한 와중에도, 익숙한 그 목소리는 한 줄기 빛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샌가 검은 투구가 데릴만의 어깨에 올라타 있었다.
“개새끼를 옆구리에 붙여 두고 있었다니!”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데릴만의 반응속도는 빨랐다. 그는 칼리번의 팔을 움켜쥐던 손을 재빠르게 제 어깨로 돌렸다.
“피…해…. 컥, 허억….”
칼리번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검은 투구는 너무나 쉽게 데릴만에게 붙잡혔으나, 갑옷은 아스터에게 있어 집이었지 무기가 아니었다. 사람 머리만 한 공간에 응집되어 있던 백금사가 쏟아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데릴만의 머리와 몸을 휘감았다.
“크하하! 고작 이따위 속임수로 나에게 덤비겠다는 거냐?!”
그러나 데릴만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피부가 바위처럼 색이 변하고 단단해졌다.
“아스터…!”
아스터의 도움 덕분에 칼리번은 간신히 거대한 알파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숨을 몰아쉰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장 먼저 아스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 백금사가 이따금 빛을 반사했다.
언뜻 보기에는, 데릴만 혼자서 감옥 한구석에서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살점과 피가 섞여 찐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살피면 백금사가 데릴만의 몸을 잘라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데릴만은 백금사를 버티기 위해 목 주변의 피부를 최대한 강화시킨 상태였으나, 서서히 잘려 나가고 있었다. 백금사를 한 손으로 움켜쥐기도 했으나 손가락이 뭉텅 썰려 나갈 뿐이었다.
아스터의 전투 방식을 잘 아는 칼리번은 쉽사리 싸움에 끼어들 수 없었다.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몸을 중요시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데릴만에 붙잡혀 인질이 될 수도 있었다. 대신 칼리번은 다른 것을 찾았다. 바로 검은 투구의 행방이었다.
검은 투구는 데릴만의 한쪽 손에 붙잡혀 있었다. 칼리번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저것은 얼마 남지 않은 아스터의 껍질이었다. 칼리번은 인질이고 뭐고 다 잊은 채 구역질을 참으며 데릴만의 팔에 달려들었다.
“이, 이 자식들…. 크흐으윽!”
데릴만은 목이 잘려 나가는 중임에도 검은 투구를 놓지 않고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검은 투구는 알파의 엄청난 악력을 버티며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부서져 버릴 듯 아슬아슬했다. 칼리번은 그 손에서 빼내려 했으나 ‘에어리얼’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스터! 팔이다, 목이 아니라 왼팔을 잘라!”
칼리번이 명령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이미 데릴만의 목에 파고든 상태였다. 두꺼운 목에서 붉은 목걸이를 두른 것처럼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 이제 곧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아스터도, 데릴만도 같은 생각이었다.
“안 돼, 이대로는…. 아스터!”
칼리번은 데릴만의 손에 제 팔을 밀어 넣으려 애쓰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데릴만의 목이 잘려 나간 순간, 그의 손안에서 검은 투구가 산산조각이 났다.
* * *
머리가 잘린 거구가 땅으로 쓰러졌다.
쿵, 감옥 안에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데릴만의 몸에서 뛰어내린 아스터는 투구의 잔해가 있는 곳으로 뱀처럼 기어갔다. 검은 투구는 무수한 파편이 되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
아스터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뱀처럼 길게 늘어진 백금사로 잔해를 그러모았다. 이전의 빛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백금사는 멀리서 보면 땅에 떨어진 별 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스터….”
칼리번은 쓰러질 듯 위태롭게 다가갔다. 데릴만이 감옥을 부수고 간수를 죽인 탓에 어려움 없이 지하 감옥을 도망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탈출을 생각지 않았다.
“…….”
아스터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나, 그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번 부서진 투구는 암만 애를 써도 원래의 형태를 찾지 못했다. 아스터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지금은 전보다도 훨씬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기… 기다려라. 당장 쓸 만한 투구를 찾아 주마.”
칼리번은 서둘러 감옥 밖으로 기어 나갔다. 데릴만이 쓰러뜨린 간수에게서 다짜고짜 투구를 벗겨 냈다. 인간 병사가 사용하는 갑옷이다 보니 철로 만들어진 것이 감사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스터, 이리로 들어와라.”
칼리번이 돌아왔을 때, 아스터는 껍질이 벗겨진 뱀처럼 검은 투구의 잔해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간계의 공기가 전신을 감싸는 것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어서!”
칼리번은 무릎을 꿇고 앉아 백금사가 손에 잡히는 대로 투구 안으로 쑤셔 넣었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칼리번은 무릎과 종아리에 투구의 파편이 박혀 피가 흐르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칼리번….”
그때, 투구 안에서 간신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아스터…. 말해라. 뭐든…. 뭐든 좋으니 말을 해라.”
칼리번은 목이 조여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어리얼이 만들어 준 갑옷이 아니면 제 몸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투구를…. 데릴만의 목에 씌워 주십시오.”
“…알겠다. 그렇게 해 주마.”
칼리번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아스터의 백금사는 그사이에 바스러져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칼리번은 근처에 쓰러진 데릴만의 시체로 다가갔다. 잘린 목의 단면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칼리번은 떨리는 손으로 낡은 투구를 목에 끼워 넣었다.
“하아, 하아….”
잘린 몸에 투구를 붙여 봤자 이어질 리가 없었다. 칼리번은 데릴만의 가슴 위에 올라타고서는, 투구와 데릴만의 목을 동시에 두 팔로 끌어안았다. 칼리번의 얼굴과 몸이 투구에서 흘러나오는 데릴만의 피로 젖어 갔다. 데릴만의 몸과 작고 낡은 투구의 결합은 마치 각기 다른 신체를 합쳐놓은 것처럼 괴상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놓지 못하고 매달리는 칼리번의 모습 또한 그랬다.
“이걸로…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칼리번의 품에 안긴 아스터가 말했다. 아까보다는 조금은 기력을 찾은 것 같았다.
“데릴만의 몸 안으로는 파고들 수 없는 건가.”
칼리번이 물었다. 데릴만의 몸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죽은 몸에는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칼리번은 잠시 말을 망설였다.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일렁였다.
“내 몸으로 들어와라.”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몸을 갖게 된 후, 그의 기억을 여럿 들여다보았다. 그중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은 백금사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예전에 에어리얼의 몸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 그때처럼 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되지 않나.”
칼리번은 자신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 겁니까?”
“…….”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요.”
아스터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으나 금세 수긍했다. 죽음을 앞둔 탓인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이해심이 깊었다.
“싫습니다.”
그러나 누굴 닮았는지 모를 고집은 여전했다.
“제기랄! 이런 상황에서 그딴 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칼리번은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야 알파의 피에 절은 백금사를 한 움큼 집어다가 몸 안으로 집어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칼리번…. 그때 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에어리얼의 몸에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비록 금사를 많이 잃기는 했지만…. 당신의 몸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뭐든 해 봐야 아는 것 아닌가?”
“에어리얼의 몸이 다치는 건 싫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에어리얼이 아닌 당신 안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
“왜냐면, 당신은…….”
아스터의 목소리가 끊겼다. 감옥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칼리번은 잃어버린 말 대신, 피에 젖은 엄지손가락으로 투구를 쓸어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칼리번의 몸에 묻은 피가 말라붙으며 피부를 잡아당기고, 찢어진 옷이 풀을 먹인 것처럼 뻣뻣해졌다.
“에어리얼은 처음부터 너를 버린 거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처음 본 순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내 몸을 빼앗은 것처럼, 그자는 널 도구처럼 쓰다 버렸단 말이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에어리얼의 몸을 옮기는 운반책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칼리번 또한 살아남기 위해 에어리얼을 향한 아스터의 집착을 어느 정도 이용한 바가 있다. 거기까지가 서로의 이해관계다. 이제 와 칼리번은 선을 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
아스터에게서 흘러나온 답변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서, 칼리번은 턱 숨이 막혀 왔다.
“…하지만 에어리얼은 죽어 가는 저를 살려 주었고 인간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껍질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그의 곁에 끝까지 있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평소라면 ‘감히 에어리얼을 모독하지 마십시오’라고 화를 냈을 아스터였으나, 이번에는 담담하기만 했다.
“이것도… 알파라서 그런 건가?”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알파는 오메가에게 얽매인다. 오메가의 향기에 의해 조종당하고. 인간의 피가 섞인 마물 혼혈이라고 할지라도 그 향기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아니면 온전한 알파가 아니라서 그런 건가….”
칼리번은 정정했다. 그가 여태껏 만나 온 알파들은 아스터와는 달랐다. 본능에 사로잡혀 조종당할 뿐, 오메가의 힘이 조금이라도 부족해지면 금세 범하거나 지배하려 들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에어리얼에게서 태어난 마물도 아니고, 떨어진 지도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에어리얼을 향한 네 충성심은 인간과도, 마물과도 다르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칼리번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그것은 처음으로 에레즈 프리드웬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괴로움이었다. 그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는, 불쾌한 감정이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당신도 모르는 걸 제 입으로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죠.”
“…….”
괴로워하는 칼리번과 달리, 아스터는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조용하고 차분해졌다.
“저는 이것이 알파의 당연한 본성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의 반응을 보니 아닌 아무래도 아닌 모양입니다.”
아스터는 어딘가 억울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인간에도, 마물에도 없는 본능이라면 이 감정은 무엇이죠? 당신이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제가 에어리얼에게 느끼는 강렬한 구속감은 도대체….”
밤은 검고 깊은 강처럼 소리 없이 흐른다. 데릴만의 시체는 점점 식어 갔고, 투구와 시체를 지탱하는 칼리번의 두 팔은 경련을 일으켰다.
“에어리얼을 처음 본 순간. 반드시 이 사람이어야 한다고, 저에게는 오직 그뿐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
“에어리얼이 수많은 인간 사내를 전리품으로 주어도, 다른 오메가를 보아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제게는 그저 고깃덩어리로 보일 뿐….”
그 사람이 첫인상과 전혀 다른 존재임을 알면서도,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버려 돌이킬 수가 없었다.
“에어리얼이 위험하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한 불꽃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다는 것도. 그의 곁에 있다가는 제 몸도 함께 타버리고 말 겁니다. 하지만….”
그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칼리번 또한, 결국 자신이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으니까.
이제 막 태어나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어떤 강력한 본능이 있다. 아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칼리번 또한 상대를 착각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에레즈 프리드웬은 아름답지 못하고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영혼에 새겨진 절대적인 명령은 지워지지 않고 더욱 뚜렷해지기만 했다. 몇 번이고 지우고, 부수고, 다시 고쳐보아도, 닳을지언정 없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이라는 것, 그 자체가… 예정되어버린 운명처럼. 혹은 영혼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각인인 것처럼.
칼리번은 자신보다 더욱 강력한 약속에 의해 속박된 이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저주가 생겨났던 말인가?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혀 다른 두 가지가 섞여야만 한다. 그 사람만은 다를 것이라는 착각. 헛된 희망에서 비롯된 감정의 발화. 칼리번이 가진 재료들만으로는 이러한 저주는 태어날 수 없었다. 분명… 나머지는 다른 이에게 물려받았겠지.
죽지 않겠다는 집념만큼이나 맹목적인, 되찾겠다는 집착을.
“아침이 오면 에어리얼도 무언가 조치를 취할 거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텨라.”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요.”
* * *
칼리번은 아스터와 시체를 끌어안은 채로 얕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기절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감옥 밖에서는 새벽녘의 창백한 빛이 뒤덮였다. 미묘하게 변한 공기에 칼리번은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잠든 와중에도 칼리번은 투구를 놓지 않은 채였다. 두들겨 맞은 채로 불편한 자세를 오래 유지한 탓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가장 혹사당한 두 팔에서는 더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스터….”
가장 먼저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아스터를 불렀다.
“…아스터?”
어딘지 불길한 예감에, 칼리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차려라, 아스터.”
투구를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스터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설마….”
말을, 아니, 숨을 내뱉기가 버겁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잠든 와중에 위기가 왔다면 아스터가 무언가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시체는 식다 못해 사후 경직이 온 지 오래였다.
“아스터, 뭐라도 좋으니까…. 말, 을….”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투구를 두드려도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다. 속은 텅 비어 있었다.
“…….”
칼리번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뚫어져라 내려다보기만 할 때였다.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의. 그러나 칼리번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칼리번.”
칼리번은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닌 칼리번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는 검은 눈동자를 굴려 소리가 들리는 창살 쪽을 노려보았다.
“제발 날 좀 불러 달라고 간수를 괴롭혔다며? 그래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에어리얼이었다. 철창 너머에 서 있는 사내는 칼리번 그 자체였다. 그러나 칼리번이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과는 달랐다. 몸을 빼앗기기 직전, 칼리번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팔도, 다리도, 눈과 코, 혀, 이빨…. 에어리얼이 남겨 둔 것은 오로지 생존과 번식에 관련된 기관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달랐다. 검은 머리카락, 단호한 이목구비. 붉게 변한 눈동자를 제외하면, 전성기 시절의 칼리번이었다. 타인에게서 아무런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못했던 용병대의 대장….
마치 과거가 자신을 비웃기 위해 찾아온 것만 같다.
“에어리얼….”
저건 내가 아니다. 에어리얼이다. 칼리번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속지 않기 위해 저주스러운 이름을 중얼거렸다.
“고작 며칠 기다렸다고 이를 가는 거야?”
에어리얼이 차지한 칼리번은 이전의 그에게서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의 얼굴이지만, 지독히도 증오스럽다.
“못 본 사이 인내심이 제법 줄어들었나 봐. 내가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네가 여기서 보낸 날들은 하룻밤에 불과한데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야. 네가 언제쯤 돌아오나 세고 있었거든. 바로 여기, 본성에서 말이야.”
에어리얼은 칼리번 너머의 시체를 흘끗 살펴보았다.
“꽤 격렬한 밤을 보냈나 봐? 설마 감옥에까지 알파를 끌어들이다니, 역시 오메가는 어쩔 수 없다니까.”
데릴만이 지하 감옥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에어리얼이 모를 리가 없었다.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된 비웃음이 칼리번의 몸 위로 끼얹어졌다. 뿌득, 투구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우그러들었다.
“…….”
투구….
칼리번은 분노를 씹어 삼켰다. 당장 급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었다. 그는 철창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공손해진 태도에 에어리얼의 눈빛이 변했다.
“사… 살…려 줘.”
칼리번은 데릴만이 부순 감옥의 틈으로 투구를 내밀었다. 처음 에어리얼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네가 날 감시하기 위해 붙여 뒀던 알파다.”
지하 감옥에서 무작정 갇혀 있는 동안, 그는 에어리얼과 다시 마주하게 될 때를 대비했다. 왕자님을 대동한 경우, 혼자 온 경우…. 칼리번은 자신의 몸과 아스터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에어리얼에게 손상을 입히려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오니 준비한 계획은 무용해지고, 칼리번은 또다시 잃고 말았다. 이 이상 잃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이 쓰던 갑옷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되돌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너라면 새로운 갑옷을……. 몸을 줄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목구멍 안에 끈적한 진흙이 채워지기라도 했는지,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일이 그토록 버거울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자꾸만 다급해지고 표정은 무너져 내렸다.
“제발, 부탁한다….”
모든 것은 예상과 달랐다. 칼리번은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린 장본인에게 비굴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이것이 에어리얼이 원하던 바였을까? 그래서 처음부터 아스터를 곁에 붙여 둔 것인가?
이제 와 고민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에게 이리저리 이용당하다, 완벽하게 패배했을 뿐이다.
“이게 아스터라고?”
에어리얼은 일부러 그러는지,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 투구를 가져갔다.
“흠, 이상하다? 내가 알던 아스터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그는 아스터가 담긴 투구를 정체 모를 장식품이라도 된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기만 했다. 그럴수록 칼리번의 속만 바짝 타들어 갔다.
“제발…! 날 모욕하고 싶다면 나중에 얼마든지 해라. 이제는 정말…. 더는, 시간이……!”
아스터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제 목숨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칼리번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댔다.
“기껏 아들과 함께하게 해 줬는데 이런 꼴로 돌려보내다니. 너는 정말 육아에는 소질이 없어, 칼리번. 그러니 전부 뺏기지.”
“…….”
“이 녀석도…. 에레즈 프리드웬도.”
칼리번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에어리얼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스터, 그동안 고생 많았다. 널 데리러 왔어.”
에어리얼은 투구에 이마를 기댄 채 속삭였다.
“왜 그래. 너도 내가 보고 싶었잖아. …설마 화나서 숨은 거니?”
그러나 투구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아스터가 에어리얼을 의도적으로 무시할 리가 없었다. 그저 텅 빈 조개껍데기일 뿐이었다.
“봐, 네 새로운 갑옷도 준비해 왔다고.”
하지만 에어리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주변에 늘어선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병사들은 서둘러 갑옷을 들고 왔다.
처음에는 백조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 정체는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도 창백한 빛을 내는 흰 갑옷이었다. 견갑과 흉갑에 걸쳐 백합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만 보아도 전투용이 아닌 의식용 갑옷임을 알 수 있었다.
“…윽.”
오랜 시간 지하에 있었던 칼리번은 갑옷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렸다. 흰 갑옷은 쇠 구두부터 투구까지 완벽하게 조립되어 있었다. 칼리번이 급하게 마련한 투구는 그 위용에 눌려 더욱 조잡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는 에어리얼이 흰 갑옷에 낡은 투구를 들이미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뭐야, 설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당장 들어가지 않으면 죽을 텐데?”
에어리얼은 낡은 투구를 흔들었다. 그러나 안에 고인 핏물이 떨어질 뿐, 아스터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칼리번이 보기에는, 아스터가 정말로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반항해 봤자 소용없어.”
그러나 에어리얼은 아직도 아스터의 침묵을 장난으로 여겼다.
“앙탈도 적당히 부려야지. 더는 내 말을 거부하지 못할걸? 널 낳은 건 ‘칼리번’의 몸이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어리얼은 제 검지를 세게 깨물었다. 단단한 손가락을 문 잇새로 어렵지 않게 피가 났다. 에어리얼은 그 손가락을 낡은 투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칼리번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구 속에서 백금사가 끽, 끽,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 것이다.
“아스터!”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철창을 붙잡았다. 전날 밤, 칼리번이 정신없이 투구 속으로 밀어 넣었던 백금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크기가 줄어들어 있었다.
“산 채로 불에 태워 버리기 전에 들어가.”
에어리얼은 발로 땅을 찼다.
“어서.”
피를 뒤집어쓴 채 버둥거리는 백금사 위로 흙이 뿌려졌다. 아스터는 견디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었다. 빛을 잃은 백금사가 흰 갑옷으로 흡수되듯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검은 두 눈이 똑똑히 지켜보았다.
“갑옷을 본성 안으로 옮겨라.”
에어리얼이 명령했다. 그에 반하듯 흰 갑옷이 조금씩 들썩이기는 했으나, 아직 제대로 몸을 가누지는 못했다.
“…합니다….”
미안합니다.
주의가 흐트러졌다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 그것이 아스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병사들은 흰 갑옷을 지하 감옥 밖으로 옮겼다.
“좋아. 이제 부서진 감옥 안의 시체를 치우고, 붉은 오메가는 다른 감옥으로 옮겨.”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칼리번은 반항할 틈도 없이 병사에게 붙잡혔다. 병사 한 명이 감옥 밖으로 끌려 나온 칼리번에게 횃불을 들이밀었다. 피로 얼룩진 악마의 모습이 모두에게 훤히 드러났다. 더없이 초라하고, 지친 모습의 악마였다.
“네가 도와준 덕분에 모든 준비가 끝났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아스터를 붙여 두기는 했지만… 너라면 내가 뿌려 둔 기억을 따라 여기까지 와 줄 줄 알았지.”
에어리얼의 손이 칼리번의 뺨에 닿았다. 그 손가락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에레즈에게, 그리고 알파들에게 쫓겨 다니며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똑똑히 확인했겠지. 너는 내가 전부 부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 절반은 네가 해낸 일이야.”
“뭐…라고…?”
칼리번은 힘없이 중얼거릴 뿐 에어리얼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지난밤, 버거운 일을 연달아 겪은 탓에 그의 머릿속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인간을 습격한 마물은 네가 낳은 것들이야. 남문과 북문, 서문을 채운 벽돌들은 대부분이 인간에게서 태어난 기형 알파지만…. 그중에는 네 작품도 있지.”
칼리번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뿐만이 아니야. 잘 생각해 봐. 네가 내 모습으로 성 밖에서 날뛰어 준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어. 왕국의 백성뿐만 아니라 알파들마저 감쪽같이 속고 말았지. 가장 큰 고비라고 생각했던 에레즈 프리드웬과 젠까지 말이야.”
“큭…. 이 자식!”
에어리얼의 도발에 칼리번은 제 몸을 붙잡은 병사를 밀치고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약해 빠진 몸은 반항은커녕 꿈쩍도 하지 못했다. 분노로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불티에 닿아 검게 타들어 갈 뿐.
“고마워, 칼리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줘서. ‘에어리얼’의 모습을 한 채로 말이지.”
“닥쳐…!”
칼리번의 몸이 떨렸다. 왕자님과 나눈 약속은, 감히 그 입으로 농락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악물어도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화가 삼켜지질 않는다. 구역질처럼 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너와 내가 함께 해낸 일이잖아? 좀 더 기뻐해야지.”
“그 입 닥쳐라, 에어리얼!”
“그래, 그렇게!”
칼리번이 결국 자신을 잃고 분노를 토해 낸 순간, 에어리얼이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읍…!”
피할 새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크고 단단한 손이 뒤통수를 덮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칼리번은 입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짓씹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에게는 칼리번과 나누는 고통스러운 입맞춤이 익숙했다.
잠시 후, 에어리얼은 땅에 피를 뱉었다.
“…널 보면 알파들이 왜 오메가에게 박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
에어리얼이 자신이 내뱉은 말이 우스운지 혼자서 키득거렸다. 칼리번은 제 얼굴이 저렇게 끔찍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곤란해. 몸 안쪽이 욱신거려서, 전처럼 하고 싶어지잖아.”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노려보며 피가 섞인 호흡을 헐떡였다.
“나 자신을 강간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지만…. 칼리번, 그 안에 네가 들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거든.”
붉은 눈과 검은 눈이 한참이나 서로를 응시했다. 지난 8년간 에어리얼은 칼리번에게 세뇌시켰다. 자신이야말로 유일한 형제이자 친구, 그리고 연인이라고.
그리고 실로 그러했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제외하면 유일한 오메가였으며, 지하 생활에서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존재였다. 그리고 교미가 아닌 목적으로 관계한 상대였다.
“역시 오메가한테도 오메가가 필요하다니까.”
그렇기에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칼리번을 가지고 놀 대로 가지고 논 에어리얼은 병사들을 데리고 떠났다. 칼리번은 더 안쪽의 감옥에 내던져졌다. 피로 물든 붉은 몸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