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탈피 (32/50)

6. 탈피

풍랑이 이는 배에 올라탄 것처럼 순간 땅이 흔들렸다. 에어리얼과 베이가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이전까지 이 세계에 없던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돌아왔나 보군.”

에어리얼은 에레즈가 추락한 장소로 걸어갔다.

“저건…. 흡!”

한편, 정체를 확인한 베이가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살이 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그녀가 있는 곳까지 실려 왔다. 한순간에 사라졌던 에레즈였으니, 이번에 돌아온 것도 그가 틀림없다. 그러나 베이가는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몸을 웅크린 저 형상은, 외관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새까맣게 타 버렸기 때문이다. 에레즈는 사람 모양의 숯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베이가는 성녀로 활동하며 부상자와 시체라면 질릴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도 이토록 끔찍한 모습은 극히 드물었다. 통째로 불에 타 버리다니…. 베이가 또한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검게 그을린 시체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에…레즈.”

베이가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그녀에게 에레즈 프리드웬이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애증의 존재였다. 유일한 혈육이자, 남보다도 못한 사이이며 원수보다도 원한이 깊다. 아들이라는 존재로 인해 그녀는 가진 힘을 전부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죽어야만 한다. 그의 죽음은 인류의 걸음을 늦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처참한 꼴로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왕자님.”

복잡한 심경이 담긴 베이가와 달리, 에어리얼의 목소리는 차갑기 이를 데가 없었다.

“왕자님?”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왕자님. 제가 부탁한 것은 가져오셨습니까?”

그는 대답할 리 없는 에레즈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흐음.”

에어리얼의 눈이 가늠이라도 하듯 가늘어졌다. 에레즈의 손으로 추정되는 부위에 유일하게 타지 않은 물건이 쥐여 있었다. 피가 묻은 칼날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붉은 눈도 함께 빛났다.

에어리얼은 조심성 없이 단검을 집어 갔다. 석탄처럼 변해 버린 에레즈의 손은 그 충격에 부러졌다. 땅에 떨어진 검은 손은 그대로 잿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은 에어리얼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해를 등지고 있었다. 칼리번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그림자가 숯덩어리를 덮었다. 무거운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몸은 조금씩 스러져 갔다. 이대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시체를 전부 쓸어 가 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끝내실 건가요?”

에어리얼은 땅에 침을 뱉듯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이걸로 만족하십니까?”

시체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한데도, 에어리얼은 무시를 당한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왕자님께서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야 하는 수 없지만…. 저희는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에어리얼은 한쪽 발을 들었다.

“죽지 않은 테니, 반드시 살아남아 달라고.”

그러고는 에레즈의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향해 발을 곧장 내리꽂았다.

“—!”

그 순간, 아무런 옷도, 장식도 걸치지 않은 매끈한 팔이 검게 타 버린 껍질을 찢고 튀어나왔다. 끈적한 체액과 금사로 엉킨 손은 에어리얼의 발을 움켜쥐었다.

“…이제야.”

가느다란 팔이었는데도 손아귀 힘이 대단했다. 에어리얼은 발로 하얀 팔을 짓누르려 했으나 그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진작 그랬어야지.”

에어리얼은 괜한 힘겨루기는 포기하고 순순히 발을 뒤로 뺐다.

“으, 흐으…. 아… 아악….”

하얀 손이 허공을 휘적거렸다. 찢어진 살점에서 점액이 흘러나왔다. 에어리얼은 일부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얀 팔은 소리가 난 쪽으로 풀썩 떨어졌다. 다섯 개의 손가락은 피와 재로 얼룩진 돌바닥을 짚더니, 뭉툭한 손끝으로 벅벅 긁어 댄다.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찌걱, 쩍—

검은 시체 안쪽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간신히 팔 하나는 나왔으나, 아직 몸의 대부분은 좁은 껍질 속에 남아 있었다. 검게 썩어 버린 껍질이 들썩거렸다. 안에 든 것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 몸 여기저기가 움푹 솟아오르고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잿가루가 흩어지고 부서질 부분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팔이 튀어나온 부분에서는 계속 체액이 흘러나왔다. 그 광경은 거대한 애벌레나 파충류가 탈피하는 과정과 흡사했다.

직, 찌이익, 껍질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팔이 밖으로 나왔다. 갓 생겨난 두 팔은 허물을 붙잡고는 좁은 구멍을 더 크게 찢어 내려 애썼다. 그 틈에서 금사가 양수처럼 주르륵 흘러나왔는데, 아직 피아가 분간되지 않는지 발작하듯 꿈틀거리기만 했다.

힘겨운 탈출은 일견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탈피 과정에는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 규칙은 애벌레를 위해서가 아니다. 괜히 도움을 주었다가 이쪽이 죽을 수도 있었다. 에어리얼은 팔짱을 끼고는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탈피를 지켜보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껍질을 찢고는 하얀 등과 체액에 푹 젖은 금빛 머리가 올라왔다. 길게 늘어진 금사는 갓 탈피를 마친 나비의 날개처럼 눅눅히 젖어 있었다. 껍질을 찢고 나온 괴물은, 어디 하나 모자랄 데 없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래.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그 대가로 전부 잊어버려.”

여태껏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본능만 남은 백치가 되어서… 칼리번만을 보는 거지.”

과거의 껍질로부터 기어 나오는 에레즈를 바라보며, 에어리얼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흐, 아아……. 하아….”

에레즈는 두 발로 서려다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몸이 무겁다. 그는 네발로 기며 본능적으로 태양을 피할 곳을 찾았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그늘에 몸을 숨긴 에레즈는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다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해를 등진 사내였다.

“…….”

바람이 버거운 에레즈는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텅 비어 버린 머리보다도, 체액에 뒤덮인 금사가 오메가를 먼저 알아채고는 꿈틀거렸다. 금사는 순식간에 에어리얼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의 뼈를 동시에 부러뜨렸다.

“크윽!”

위에서 낮은 신음이 튀어나오더니, 칼리번의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고통이 심한지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러나 에레즈는 미안함을 느끼지도, 그의 아픔에 공감하지도 못했다. 무릎을 꿇은 먹잇감에 손을 뻗을 뿐. 그는 체액과 피로 젖은 손으로 상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짙은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이… 괴로워하는 이목구비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점액에 절은 하얀 손가락이 잔뜩 찡그린 미간을 툭, 건드렸다.

그에게서 어딘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