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성역에서 (31/50)

5. 성역에서

에레즈는 에어리얼에게 낡은 단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제가 드린 단검을 소중히 보관하고 계셨군요.”

칼리번의 머릿속을 샅샅이 읽은 에어리얼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응.”

에레즈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잃어버리지 않으셨다니….”

“칼…. 당신이 남긴 유일한 물건인데.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네, 그래서 기쁩니다.”

에어리얼은 무표정으로 대답하며 단검을 받아 들었다. 어린 에레즈의 금사가 묶인 낡은 검. 8년 전, 칼리번은 헤어지기 직전 에레즈에게 스스로 몸을 지키라며 쥐여 준 유일한 무기.

검이란 베고, 찌르고, 자르는 물건이다. 그러나 이 단검은 오랜 시간 동안 원래의 용도로 사용되지 못했다. 단검에는 에레즈가 살뜰히 정을 쏟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일단 검집부터가 그러했다. 에레즈는 정성 어린 검집을 새로 만들어 보관한 것이다. 원래는 에레즈 본인을 죽이기 위한 검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역시 이 검을 쓰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걸 이용해서, 제가 부탁한 것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검집을 열어 검날을 확인하던 에어리얼이 말했다. 아직 쓸 만했다.

“응….”

에레즈는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정히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곁에는, 창백하게 질린 여인이 차가운 돌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에어리얼은 에레즈는 세워 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 이제 슬슬 불어. 성역은 어디에 있지?”

“…….”

왕비, 베이가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이러면 곤란해.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성녀들을 모두 왕성 밖으로 내보내 주고, 알파 계집도 살려 줬어. 명색이 왕비라면 약속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아? 기껏 알테르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면서 말이야.”

흡사 칼로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다. 베이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당신도 눈이 있다면 마물이 왕성을 습격하는 광경을 보았겠지? 계속 고집을 부리겠다면, 알려줄 때까지 계속 반복할 거야.”

“…….”

“아, 이러다 인간들이 전부 죽어 버리면 비밀을 지키는 의미도 없어지지 않나?”

에어리얼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테르를 죽인 인간들에게 앙갚음하고 싶다면야…. 뭐,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도 상관없지만서도.”

에어리얼은 그녀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위협했다.

“…….”

베이가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으나 날카로운 목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안색만큼이나 흰옷 위로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에레즈에게 공격을 당한 후 회복이 덜 된 상태였다. 지금도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나 맨발로 끌려오고 말았다.

“왕성.”

에어리얼에게 한참을 시달린 베이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흰 얼굴 위로 가는 선을 그었다.

“왕성… 전체가 곧 성역이다. 그리고, 검…. 성검이… 성역을 여는 열쇠지. 그러니 이제 제발, 그만두거라….”

“흐응, 이거 완전 발아래였잖아? 알테르 녀석…. 모른 척 내숭을 부렸겠다?”

에어리얼은 오랫동안 기다린 답이 흥미로운지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다면 성역에 들어가는 방법은?”

“…….”

“어차피 이제 와 돌이킬 수 없어. 말해.”

에어리얼은 오만하게 명령했다.

“…인식.”

“인식?”

“성역에 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몸과 정신, 그리고 열쇠가 필요하다. 몸은 순수한 프리드웬의 피를 뜻하며, 열쇠는 성검을 뜻하지. 그리고 정신이란… 성역이 왕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베이가는 창백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제 왕자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원한다면 그 문을 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하지만?”

“그곳으로 더는… 누구도 갈 수 없다.”

베이가가 비교적 순순히 고백한 이유기도 했다. 그 누구도 성역을 들어갈 수 없다는 믿음은 그녀를 받치는 마지막 지지대였다.

“과연 그럴까?”

에어리얼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미 오래전, 알테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왕자님. 들으셨습니까? 왕자님께서 바로 성역으로 향하십시오.”

베이가는 제 귀로 흘러드는 소리가 믿기지 않았다.

“그만둬…! 그곳에는 아무도 갈 수 없다는 내 말이 들리지 않았나? 마물에게 더럽혀진 피로는 넘쳐흐르는 성스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이대로 성역에 진입하면 왕자는 버티지 못해. 죽고 말 거다!”

하하, 에어리얼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격렬한 반응일 줄은 몰랐는걸.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인 존재여도 결국 아들이라는 건가? 여자의 모성애란 대단하군.”

“…큭. 네가 감히….”

베이가는 이를 악물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비 전하.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당신에게 물려받은 성력이 있으니 말이죠. 어머니의 사랑이 아들을 지켜 줄 겁니다.”

에어리얼은 광대처럼 익살을 부렸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물론 잘 알고 있지. 죽지는 않을 거야.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겠지만.”

“에레즈!”

베이가는 에어리얼을 막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상처가 벌어져 피를 흘리는데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에레즈를 붙잡기 위해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윽…. 그곳에는 가면 안 돼, 멈춰라…. 에레즈!”

성역에 가는 일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녀의 눈에 에레즈의 모습이 둘, 셋으로 흔들려 보였다. 그러나 베이가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에레즈는 성검을 높이 들어 올릴 뿐이었다.

“…….”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에레즈는 검은 호수에 뛰어들었다. 헤엄을 쳐 호수 속 깊이 잠든 성검을 찾아갔다. 시시각각 숨이 줄어드는 가운데, 성검으로부터 예언을 들은 그는 바위에 깊이 박힌 검을 뽑아냈다. 지금 그의 움직임은 마치 그 행위를 거꾸로 돌린 것만 같았다.

베이가가 에레즈를 향해 팔을 뻗은 순간, 그는 성검을 땅속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 순간, 눈앞을 흐리는 빛이 왕성 전체에 번쩍였다.

“에레즈…!”

빈자리를 처절한 외침이 대신했다. 베이가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땅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 * *

성검을 내리꽂은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환청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적막감에 에레즈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왕성의 풍경이다.

“…칼?”

에레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칼리번과 왕비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가축도 없었다. 왕성 내에 가득 쌓인 시체들도.

똑같은 장소지만, 달랐다.

“…….”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에 에레즈의 미간에 찌푸려졌다. 성검을 쥔 탓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오른손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장소에 홀로 떨어진 순간부터… 전신이 불에 달궈지는 듯했다. 고개를 숙이니 몸이 촛불이라도 되는 양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타들어 가다가, 에레즈가 지닌 회복력으로 인해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

에레즈는 낮게 탄식했다.

이 장소는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회복력으로 그나마 버텨 내고 있으나 오래 머물수록 불리하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에레즈는 새까맣게 타 버린 자신의 미래가 훤히 보였다.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칼리번이….’

칼리번이 이 성역에서 ‘그것’을 구해 오길 바라니까.

에레즈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왕성을 걷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고요였다. 처음에는 이곳이 왕성과 똑같은 장소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장소가 아님을 실감한다. 마물의 습격으로 무너졌어야 할 성벽과 건물들이 온전했다.

마물과 인간의 피로 얼룩졌을 성벽은 갓 지어진 것처럼 새하얗다. 세속의 먼지가 묻지 않은 왕성은 마치 신이 머무는 신전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동시에, 생동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왕성은… 아니, 성역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누구의 무덤인가?

“이건….”

왕성을 거닐던 에레즈는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보지 못한 흉물스러운 조각을 발견했다. 네 군데의 성문에, 그리고 왕성 곳곳에 거대한 마물의 신체가 토막이 난 채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허벅지이기도 했고, 팔이기도 했으며, 잘린 날개이기도 했다. 또는, 도통 어느 부분인지 구별되지 않는 거대한 살덩어리가….

본성을 돌아다니며 어떤 마물의 토막을 확인하던 에레즈는 일순 현기증이 일었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에 지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에레즈는 끊임없이 육체의 붕괴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벽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광장에는, 마물의 거대한 머리가 입을 뻐금히 벌린 채로 박혀 있었다. 머리의 절반은 물에 잠긴 것처럼 땅 밑에 가라앉아 있었고, 절반만이 드러나 있었다. 왕성 곳곳에 박힌 토막이 바로 저 마물의 것이리라.

에레즈는 저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하아…….”

왕성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에레즈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전보다 배는 무거워졌다. 이 감각이 착각인지, 사실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무게감에 팔이 늘어지자 성검이 잘 정비된 포석을 긁었다. 가각, 가각, 금속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가 가는 길마다 울렸다.

‘그림자의 방향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

에레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태양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빛을 내리쬔다. 그것은 마치 기계 장치로 만들어진 태양 같았다. 햇살은 따사롭다기보다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릴 것처럼 가혹했다.

“하아, 으윽…. 칼….”

에레즈는 칼리번이 바라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부탁을 들어주고 싶을 뿐.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칼리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편해진다.

“하아…….”

에레즈는 결국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땀이라고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으나, 그는 병자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에레즈는 무릎으로 기었다. 무릎이 다른 신체보다 빠르게 타들어 갔다. 그가 고행을 자처하는 사이 허리에 매인 성검은 경고라도 하듯 우웅, 울렸다.

그렇게 에레즈는 광장에 도착했다. 마물의 머리는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흉측하고 컸다. 비늘로 뒤덮인 마물의 머리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주둥이는 길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이빨은 하나하나가 사람 한 명에 필적할 정도로 크고 날카로웠다.

“…….”

에레즈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필시 예전에는 왕성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마물이었을 것이다. 여태껏 수많은 마물을 상대했던 에레즈조차 본 적 없는 크기의….

어째서 마물이 성역에 잠들어 있단 말인가? 마물의 피와 성력이 뒤섞인 에레즈조차 용납받지 못하고 몸이 타들어 가는 이 땅에?

멍하니 마물의 머리를 보던 에레즈는 그 답이 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찾아냈다. 마물의 머리 아래에 한 소녀가 쓰러져 있다. 분명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을 텐데도 소녀의 시체에는 부패도, 풍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소녀는 막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에레즈가 소녀에게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그 이상 손을 대면 위험해.>

어디선가 들려오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에레즈의 행동을 멈췄다.

‘적인가?’

에레즈는 즉시 검을 겨누었다.

“…당신은.”

텅 빈 왕성에는 에레즈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는 대범하게도 메마른 분수대 위에 앉아 관망하고 있었다.

“…….”

에레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푸른 보석안이 깜박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푸른 눈이 눈인사라도 하듯 휘어졌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청년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에레즈를 진정시켰다. 그 태도는 흡사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와도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겠나?>

성역에서 마주친 인물은 뜻밖의 존재였다. 그는 에레즈와 마찬가지로 눈부신 금발과 푸른 보석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그에게는 프리드웬 왕실에서 태어난 수많은 알파와는 다른 위엄과 기품이 있었다. 이 장소에서 처음 만났음에도 에레즈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에인레드 프리드웬…?”

에레즈는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에인레드 프리드웬. 혼란스러운 땅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킨 후, 프리드웬 왕실을 세운 전설적인 왕이었다. 그 이름은 왕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당도한 후손은 네가 처음이군. 흐음…. 축하라도 해야 하나?>

에인레드는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에인레드 프리드웬의 초상은 대개 전성기인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성역에서 마주한 그는 전혀 달랐다. 그는 에레즈와 친구라 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젊었다. 프리드웬 가문의 시조이나 후손들과 달리 마물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평범한 인간. 금사가 아닌 머리카락은 짧았으며, 체격은 에레즈보다는 작으나 인간 사내와 비교하면 훤칠한 편이었다.

<‘이 모습’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군.>

에인레드는 한 손으로 연신 턱을 쓰다듬으며, 에레즈가 신기하다는 듯 살폈다.

“그 말은…….”

에레즈는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성검이 변함없이 그의 손을 태우고 있었다.

<저 성검이 수시로 네 몸을 태우고 있지?>

“…….”

<네 몸에 좋지 않으니 쓰지 말라 나름 위협도 했는데, 통 들어먹질 않더군. 마음 같아서야 이 모습으로 호통을 치고 싶지만, 오래전에 죽은 존재가 경계를 넘는 건 쉬운 말처럼 일이 아니라서….>

에인레드는 머쓱한지 웃음을 터뜨렸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적막한 왕성을 울렸다. 그동안 성검에서 느껴졌던 ‘의지’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는 어떠한 놀라움도, 기쁨도 들지 않았다.

<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건가. 알겠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

<지금 네 모습을 봐라, 에레즈.>

에인레드는 손가락으로 에레즈의 심장을 가리켰다.

<이대로는 얼마 안 있어 네 몸은 재가 되고 말 거다. 넌 이곳에 오래 있어서는 안 돼. 이것 참….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용케 버티는군.>

에인레드의 말대로다. 슬슬 에레즈의 몸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검게 변하는 부위가 늘어나고 있었다.

<서둘러 성역을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렴.>

손자를 걱정하듯 다정하고도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레즈는 선조의 말보다도 가슴 속에 품은 단검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 전혀 들어먹질 않는군!>

에인레드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생전에도 제법 쾌활한 성정인 듯했다.

“왕이시여….”

옅은 눈꺼풀은 숨을 내뱉을 때마다 파르르 떨렸다. 에레즈는 에어리얼과 함께 있던 내내 짙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세뇌는 지금도 변치 않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선조와 마주한 이 상황이, 에레즈의 무의식에 잠겨 있던 어떤 감정을 일깨웠다.

“어째서… 당신과 마물이 이 장소에 있는 겁니까? 그리고 저 소녀는 누구입니까?”

에레즈는 선조에게 물었다.

<…….>

에레즈의 질문에 에인레드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웃을 때는 더없이 사람 좋은 인상이었는데, 무표정일 때는 알테르처럼 싸늘했다.

<으음, 그래! 당연히 궁금하겠지! 이해한다. 먼 후손인 네가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믿고 답해 주마.>

에인레드는 에레즈를 지나쳐, 소녀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우선, 저것은 최초의 오메가다.>

에인레드는 거대한 마물의 머리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이 아이는…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지.>

몸을 웅크린 채 영원한 잠에 빠져 버린 소녀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긴 손가락이 흐릿해진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러나 에인레드의 손은 형체가 없어 소녀의 머리카락을 통과했다.

<내 피붙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대단한 여자였단다. 나는 언제나 나만의 작은 여신을 숭배하고 존경했지.>

소녀를 바라보는 에인레드의 눈매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미혹에 빠진 에레즈조차, 에인레드가 이 소녀를 특별히 여기고 있음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인해 이 아이는 평생 잠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평생 그녀에게 평생 닿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하는 형벌을 지게 되었지.>

에인레드는 더없이 쓰라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성역에 무모하게 발을 들였다는 것은 성녀가 너에게 역사 이상의 비밀을 알려 주었다는 뜻이겠지?>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의 먼 후손이여. 이곳 성역은 최초의 오메가를 봉인하기 위한 장소란다. 그리고 이 성역과 성검은 인간으로부터 오메가를 분리하고 봉인하기 위해 내 동생이 만든 것이지.>

발아래로 그림자가 없는 땅. 변하지 않는 햇살만이 끊임없이 그들을 비췄다.

“…프리드웬 왕실의 선조가 둘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에레즈는 몸을 뒤덮는 화마를 참아 내며 힘겹게 말을 뱉어 냈다.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살아가던 세상은 험난한 시대였다. 여자에게는 더더욱. 지금은 ‘성녀’라 불리며 제법 대우를 받는 것 같다만, 그 당시에 특별한 힘이 있는 소녀는 마녀로 몰려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단다. 그리고 내 동생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힘을 지닌 아이였지. 내가 없었다면 이 아이는 10살이 되지 못하고 불에 타서 죽고 말았을 거다.>

“…….”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에레즈는 검을 내린 채 듣기만 했다.

<나는 그저… 내 동생을 지키고 싶었다. 영민하고 아름다운 동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에, 이 아이를 위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지. 언젠가는 이 아이도 힘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말이야. 고맙게도 동생은 그런 나의 꿈에 동조해 주었다.>

에인레드는 어린 시절을 반추했는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의 힘이 방패라면 내 힘은 검이었다. 나는 가엾은 동생을 내 등 뒤에 숨기고 항상 앞장서서 싸웠지. 내 검으로 적을 무찌르고 죽이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단다. 이대로는 동생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는커녕, 다음 대에도 대업을 달성하기는 어려웠지.>

지글거리는 태양만이 그들을 정수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녀의 힘은 마물에게 대항할 수 있으나 그 당시에는 마물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단다. 그저 다친 이를 치료하고, 약초를 더 잘 자라게 하는 정도라고만 알려져 있었지. 이들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한 자들은 마녀들이 독초를 키워 먹였다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지만…. 동생은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에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단다. 네가 사는 시대의 성녀들조차 내 동생을 따라오진 못할 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방패가 아닌 검이었다. 주변 영지를 굴복시키고 땅을 넓혀 나갈 수 있는 강력한 힘, 말이지.>

그 후로 에인레드는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바람으로 인해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에인레드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나는 악마에게 유혹을 당한 것인가? 아니면 자의였단 말인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은 흐릿하군…. 하지만 당시에는 상대가 악마라도 좋았다. 이 몸이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올라도 좋으니,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싶었다. 하나뿐인 존재를 위해 악마라도 되겠다는 그 각오를… 이해할 수 있겠나?>

“…….”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보석안에 에레즈를 응시했다. 같은 눈을 지닌 에레즈가 흔들렸다. 알고 있다. 그는 지금도 전신을 불태우는 고통조차 감내하고 있었으니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그러나 소환된 것은 악마도, 마왕도 아니었다. 부름에 응한 것은 거대하고 흉측할 뿐인 마물에 불과했지! 차라리 이것이 이를 드러내어 불을 내뿜고, 하늘을 날 수 있었다면 전세가 나아졌을 텐데…!>

에인레드는 한탄했다.

<마음 같아서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단다. 그렇다면 죽여야겠지! 저 괴물…. 아니지, 이제는 마물이라 불리던가? 그래, 이 마물이란 것은 인간보다 회복력이 뛰어나지. 나와 내 동료들이 온 힘을 다해 저것을 죽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단다. 그런 와중에… 저 괴물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에레즈는 에인레드와 함께 오메가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크기에, 절로 목이 뒤로 젖혀졌다.

“하지만 오메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고….”

에레즈는 베이가를 통해 들은 증언을 중얼거렸다. 눈앞의 마물은 여태껏 상대해 온 적보다도 훨씬 크고 강해 보였다. 성녀들을 대를 이어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정보가 섞인 것일까? 우리가 봐 왔던 오메가는 인간의 피가 섞여 약해진 것인가?

<분명 오메가는 쓸모없는 짐 덩어리였지만, 저것 자체의 덩치에서 나오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저런 거대한 마물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땅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짓밟혀 죽고 마니까.>

불타오르는 도시. 비명과 죽음. 인간들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 더 큰 재앙이 되고 말았다….

<더는 저 오메가를 감당할 수 없었단다. 나와 뜻을 함께한 기사들이 칠일 밤낮을 상대했고, 간신히 오메가를 여덟 갈래로 조각냈단다. 그러나 오메가가 언제 또 부활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오메가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함께 봉인되기를 선택한 거다. 내 부탁으로 동생이 성역을 열었지.>

에인레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우리 남매와 오메가가 이곳에 잠든 이유란다, 나의 먼 후손이여. 불청객으로 인해 최초의 오메가가 눈을 뜰지도 모른다. 네게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니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도록 하거라.>

에인레드는 슬퍼하며, 분노하며, 그리고 마지막에는 후회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그의 일대기는 동시에 에레즈의 미래이기도 했다. 에레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이 뜨겁게 타들어 갔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예전의 에레즈였다면 에인레드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달랐다. 에레즈에게 있어 인간이라 믿었던 부분은 발가벗겨지고, 무너지고 말았다. 근본부터가 잘못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그에게는 더 이상 믿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떠나기 전, 한 가지 더 질문을….”

공허한 가슴 속에 남은 것은 망집과 몸속에 흐르는 피에 대한 원망뿐.

“저 소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에레즈는 몸을 태우는 고통을 참으며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한다는 질문이…… 고작 그런 것인가? 왕국을 세우고 프리드웬 왕실을 창립한 시초와 마주 볼 기회는 다시 없을 텐데.>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에인레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푸른 두 눈은 머리 위로 솟아오른 태양만큼이나 눈이 부셨다.

“저분의 이름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알고 싶습니다.”

에레즈는 저 소녀를 처음 보았다. 단순히 그의 지식이 미천해서가 아니다. 기사단이나 성녀단 중에서도, 심지어 왕비마저도 잠들어 있는 저 소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아니었다. 정말 아무도… 에인레드의 뒤에 숨겨진 소녀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위대함에 비하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에인레드는 소녀를 다정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동생을… 존경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동생을 향한 사랑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흐름 지금도 변치 않았지.>

“이름이 없으면….”

몸을 태우는 불길은 이 순간에도 파도처럼 에레즈의 얼굴 위를 덮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름이, 없으면… 그 사람을 찾지 못합니다. 부를 수 없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

“전하의 이름은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데.”

칼…. 에레즈는 눈을 감고는 칼리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죽음이 흔한 세계. 흔해 빠진 용병은 금세 잊히고 말았다. 따라서 에레즈에게 그의 이름은 경전이었다. 결코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또한 기도이기도 했다. 만약 자신이 칼리번의 이름을 몰랐다면, 슬프거나 외로울 때, 화가 나거나 두려울 때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위안을 찾는단 말인가?

에인레드가 소녀에게 느끼는 감정과 에레즈가 칼리번에게 느끼는 감정은 소름이 돋을 만치 닮아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당신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에인레드의 말은 허풍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더는 당신을 믿지 못하겠으니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비키십시오.”

에레즈는 위대한 왕에게 성검을 겨누었다.

<내 검으로 나를 겨누다니….>

에인레드는 드문드문 너털웃음을 짓더니, 얼마 가지 않아 박장대소로 이어졌다.

<우습구만, 우스워! 저건 고작해야 계집아이다! 나와 함께 프리드웬 왕실의 거름이 되었지. 계집에게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단 말이냐?>

기괴할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공허한 성역을 가득 채웠다.

* * *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지?”

베이가는 에레즈가 있었던 자리에 주저앉은 채였다. 거미 다리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이 빈자리를 부질없이 헤집었다. 에레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에어리얼은 영문 모를 콧노래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오메가…. 너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어째서 성역을 더럽히고자 하는 것이냐?”

베이가는 오랫동안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본심을 입에 올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왕국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성녀로서, 왕비로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다르다. 왕국은 무너져 가고 있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이런 일을 벌여서 네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이냐. 너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으윽!”

베이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손으로 베이가의 어깨를 붙잡은 탓이었다. 베이가의 몸은 강제로 일으켜졌다. 몸이 흔들리자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 몸은 역시 좋아. 원래 몸이었다면 못 했을 일도 척척 해내거든.”

에어리얼은 감회가 새로운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너희와 비슷하다고?”

“으… 으윽…!”

그러나 시선이 베이가를 향하는 순간, 에어리얼의 표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너희 성녀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해 왔는지 모를 것 같아? 나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왕국 곳곳에 성녀를 뿌리고 기형 알파들을 처리해 왔잖아.”

“아, 윽—!”

“그랬으면서, 이제 와서 동정을 구하는 거야?”

“그만둬…. 아아악!”

에어리얼은 베이가를 비웃으며, 그녀의 어깨와 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우드득, 가는 빗장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네가 오메가가 아닌 것처럼 나도 여자가 아니지.”

붉은 눈은 괴로워하는 베이가를 샅샅이 살폈다.

“오메가는 적어도 마물을 부릴 수 있어. 너희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

“으윽….”

“평생 짓밟힐 뿐 아닌가? 최하층 노예인 주제에 날 두려워하고 역겨워하고…. 하하, 가끔은 가엾게도 여겼지. ‘불쌍하게도’ 마물에게 범해지고, 마물을 낳는다면서 말이야. 너희 인간들의 교미에는 마물과는 다른 ‘고귀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으면서….”

잔뜩 일그러진 베이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서 미치는, 사랑 같은 거 말이야.”

허공에 들린 베이가의 몸 아래로 피가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어리얼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는 제법 공손히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알파는 남자의 업보야. 그건 누구라도 유추할 수 있는 진실이지.”

“하아, 하….”

“그럼 오메가는 뭘까? 나 같은 존재는 어째서 태어난 거지?”

에어리얼의 얼굴은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표정을 분간할 수 없었다.

“최초의 오메가처럼 끊임없이 알파와 번식하기 위해? 아아, 그렇다면 내게 이성을 허락하지 말았어야지. …아니,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어야 해. 정말로 이 세상에 신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어깨를 쥔 채 숨을 헐떡이는 베이가의 주변에서는 피가 흥건했다. 에어리얼은 자신의 눈처럼 붉은 그 액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너희 여자들의 베푼 용서에서 태어났다.”

에어리얼이 핏자국을 발로 짓이겼다.

“그러니까 끝까지 지켜보도록 해. 그게 널 죽이지 않고 살려 두는 이유니까.”

* * *

에레즈 프리드웬은 죽어야만 한다. 그의 탄생에는 어머니의 눈물이 있었다. 진짜 모습은 기억을 왜곡하고 망각할 정도로 무례하며,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괴물일 뿐이었다.

칼리번을 향한 벅차오르는 감정, 쿵쿵 뛰는 심장 소리, 어쩔 줄 몰라 했던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거짓이었다. 오메가를 향한 알파의 본능적인 구애에 불과했다.

<자고로 영광은 재산과도 같아서 나눌수록 흩어지기 마련이지. 마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 사내들이 내게로 모였을 것 같나? 당장 자네가 마물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떠든다면, 백성들이 따랐을까? 수백 년이 흘러도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다.>

가장 위대한 것은 가장 더러운 것.

<대업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나의 먼 후손이여!>

사람들에게 칭송받던 프리드웬 왕실은 추악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마물에게 더럽혀지지 않은 프리드웬마저도, 에레즈가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된다는 정당성이 되어 주지 못했다. 검게 타들어 가는 것은 에레즈의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그보다 더욱 빠르게, 위태롭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째서 저 오메가를… 범한 겁니까?”

에레즈는 힘없이 물었다. 사실 에인레드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아무 쓸데도 없는 오메가를, 어째서…. 분명, 힘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오메가를 잘못 소환했다고 말했으면서.”

에레즈는 붉어진 눈으로 에인레드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심지어 당신은, 오메가의 향기에 휩쓸리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최초의 오메가는 거대하고 흉측한 마물로, 인간과 닮은 면모가 조금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군.>

열렬히 항변하던 에인레드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나 에레즈에게 이 대화는 한결같이 한 가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뿐, 조금도 틀어지지 않았다.

<오메가에서 마물의 힘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너희는 그 이득이 보았지 않느냐?>

에인레드는 자신이 커다란 희생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에레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시절의 당신은 오메가가 무엇인지도,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에레즈의 목소리는 목이 조이기라도 한 듯 잔뜩 쉬어 있었다. 그가 괴로워할수록, 그의 몸에 붙는 불길도 더욱 거세져 갔다.

<도대체 언제까지 추궁할 셈이지? 우리는 같은 사내 아니던가?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추락하길 바라는 게냐!>

에인레드는 참다못해 에레즈에게 일갈했다.

<아아, 그래! 어디 한번 솔직해져 보자고.>

에인레드는 두 팔을 펼쳐 보였다. 에레즈는 어째서 에인레드가 시종일관 당당한지, 도리어 묻기만 하는 죄인 같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끔찍한 괴물과 하룻밤을 보낸 것은…. 겉보기에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또 몰랐을 일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에레즈가 미간을 찌푸렸다. 평범한 인간이 마물과 교미를 한 데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사건은 모든 비극의 단초였다. 에레즈는 교묘하게 거짓을 섞는 왕에게서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것마저 얼룩져 있다면, 나는….

<흠….>

에레즈의 태도에 에인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이런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에레즈가 더없이 어리숙한 소년으로 보인다는 듯이.

그리고 에인레드가 털어놓았다.

<하고 싶었을 뿐이다.>

모든 사내가 공유하고 있으나 결코 입밖에는 털어놓지 않는 진실을.

“…….”

왕국의 운명이 틀어지게 된 엄청난 사건. 위대한 왕이 최초의 오메가에게 저지른 어떤 행위는 거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마물의 힘을 탈취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아니, 생각이란 것이 없었다. 그냥 한 것뿐이다. 그에게는 성기가 있었고 마물에게는 구멍이 있었으니까.

아름다운 꽃나무로 꾸며진 정원을 들어내고, 화려하게 반짝이는 장식을 뜯어내고, 땅마저 파헤친 끝에 에레즈가 마주한 진실은 눈부신 신념도, 정의도, 강철같은 의지도 아니었다. 아랫도리의 욕망이 다였다. 그리고 에레즈 자신의 내부에도 있는 바로 그 욕망….

사람들은 위대하고 뛰어난 사내가 그럴 리가 없을 거라며, 허물을 가리고 또 꾸며 주었다. 그 사이 그의 누이는 아무도 모르는 공간 속에 잠들어 잊혀졌다.

‘칼리번….’

에레즈는 신을 찾듯 그의 이름을 속으로 읊었지만, 이 잔인한 세계에 그는 없었다. 눈물이 뺨 위로 흐를 수 있다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몸을 검게 태우는 불길은 눈물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너는 아무 노력 없이 강대한 힘을 얻지 않았나? 아니,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의 너는 존재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고마워하라는 것인가?

“이런 괴물 따위, 되고 싶지 않았어….”

마물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인간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원래 가진 자는 그 가치를 모르는 법이지.>

에레즈는 환멸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에인레드의 시선은 달랐다. 보석을 보는 것처럼 욕망에 가득 차 있었다.

<직접 보니 더욱 대단하군. 인간보다 더 오래 살면서도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고, 잘 늙지도 않는 몸이라니….>

에인레드의 손이 다가와 에레즈의 얼굴을 스쳤다.

<그뿐일까? 그 금발과 푸른 눈은 어떻고? 누구든 동경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만 말해.”

<내가 죽은 이후로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프리드웬은 퇴색하기는커녕 더욱 빛을 발하고 있군. 네 존재가 바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바람이 불지 않는 땅임에도 순간, 에레즈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프리드웬 가문이 이토록 번성하다니 감격스럽구나. 수백 년 후의 결과물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인류의 역사에서 나밖에 없을 거다.>

“…그만.”

<그러니 더는 멍청한 소리 말고 모두의 환심을 사는 외모를, 그리고 가장 순결한 마물의 피를 물려준 내게 감사히 여겨라. 그렇지 않았다면 너같이 덜떨어진 것이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그만…. 닥쳐!”

에레즈는 성검을 겨눈 채로 에인레드에게 한발 다가갔다.

“흐음…!”

그 기백에 에인레드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형체 없는 발이 영면에 든 소녀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았다.

“고작……. 고작 그딴 이유로……. 큭, 윽……. 흐으….”

에레즈는 몸을 떨며 끊어질 듯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에인레드가 에레즈의 아름다움과 힘을 칭송할수록 그는 심장이 난도질당하고, 머리를 곤봉으로 흠씬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인간이잖아…. 마물이 아니면서……. 마물의 피가 섞인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도…….”

에레즈는 광인처럼 중얼거렸다. 눈앞에 서 있는 저것을 당장에라도 없애 버리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저것의 후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사용하던 성검에 꿰뚫리게 될 줄이야…. 재밌군.>

에레즈의 눈을 본 에인레드는 금세 자신의 운명을 읽어 냈다. 과연 죽은 자는 다시 한번 죽을 수 있을 것인가?

<발광해 봤자 너도 나와 같은 수컷이다. 머릿속이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하군. 더욱 번성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멍청해지는 편이…. 크윽!>

에레즈는 그 이상 에인레드가 멋들어진 말로 속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으, 으, 으아아!>

에레즈는 고함을 내지르며 에인레드의 가슴을 성검으로 꿰뚫었다. 왕에게는 형체가 없었으나 성검에는 반응했다.

<크, 허억…. 에레즈…. 에레즈, 프리드웬.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너는 나의 후손이다. 저 계집이 아니라.>

하하, 에인레드는 두 눈을 부릅뜨며 크게 웃었다.

<내 동생은 안타깝게도 자식을 두지 못했거든.>

에레즈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이긴 것이다!>

마지막 외침과 함께 망령은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비웃음은 오래도록 남아 에레즈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왕이 사라지자 왕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모든 것을 태우기만 하는 태양 아래로 기울고 땅에서는 검은 잿가루가 날렸다. 왕성 이곳저곳에 나뉘어 있던 마물의 토막이 왕의 망령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소녀만은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곁에는…. 들개만 한 마물 한 마리가 소녀의 이마에 머리를 맞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하, 하아….”

홀로 남은 에레즈는 비틀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태초의 오메가는 거대하고 흉측한 괴물이 아니었다. 에레즈는 수많은 마물을, 본성을 드러낸 마물 혼혈을 보아 왔다. 그들과 비교하자면 이 오메가는 너무나 작고… 나약해 보였다.

최후까지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이 소녀는 다른 세계에서 끌려온 마물을 가엾게 여긴 것일까?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선 존재일 뿐인데도?

“…나, 는.”

여기서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에레즈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니, 무너져 내렸다는 편이 옳았다. 두 다리가 더는 버티지 못한 것이다. 산 채로 불에 달궈지는 고통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에레즈는 몸을 웅크린 채 찢어지는 비명을 내뱉었다.

눈물조차도 순식간에 증발된다. 살은 익고, 뼈는 녹고, 핏줄은 말라붙는다. 육체를 잃어 가는 에레즈를 붙잡는 것은 헛된 망집뿐이다.

<왕자님.>

먼 기억 속, 그 사람이 부르는 소리….

<으, 응?>

<받으십시오.>

<이, 이건…? 이, 이걸 왜…. 나, 나한테?>

<앞으로는 왕자님께서 가지고 계십시오.>

그는 유일한 무기를 건네주었다.

<하, 하지만….>

<앞으로는 길이 험난하니, 제가 없을 때도 혼자서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 속 칼리번의 얼굴이… 흐릿하다. 아마도 그때의 칼리번은, 본인이 살아남지 못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보 같은 자신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흔한 들꽃 한 송이뿐. 칼리번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는데….

그러니 죽을 수 없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받기만 했을 뿐, 당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으니까.

“…하아, 하, 윽….”

에레즈는 소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그의 손은 장작처럼 검게 타 버린 지 오래였다.

“크, 으읏….”

더는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각막마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몸이 버티지 못한다. 에레즈는 급히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숯덩이가 된 열 개의 손가락은 힘을 줄 때마다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이걸 사용해서, 제가 부탁한 것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붉은 눈을 한 칼리번이 남긴 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부탁한 것, 그건….

<오메가의 피를.>

에레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검으로 오메가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 으윽!”

우득, 그와 동시에 에레즈의 팔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전신이 새까맣게 타 버린 에레즈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검은 몸은 충격에 몇 갈래로 부스러졌다.

오메가의 심장에 남아 있던 피는 천천히, 단검의 날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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