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성녀와 마물 (28/50)

2. 성녀와 마물

젠은 왕비의 명령을 받들어 성녀들을 데리고 왕성 밖으로 도망쳤다.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후퇴였다. 왕비는 에어리얼에게 몇 가지를 더 요구했다. 젠과 성녀들이 성 밖으로 도망칠 때까지 공격하지 말 것. 성안에 남은 다른 성녀들이 피신하기를 원한다면, 그녀들의 안전 또한 보장할 것….

“시간을 벌 셈이군.”

에어리얼은 왕비의 속내를 간파했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 무사할 줄 아나 본데, 그래 봤자 마물의 먹이밖에 더 되지 않겠어?”

말은 그렇게 했으나 에어리얼은 충실히 약속을 이행했다. 약간은 즐거워하는 듯도 했다.

“너무 쉬우면 재미없으니까.”

그것이 이유였다. 어차피 그는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왕의 말을 움켜쥔 승자였다. 사실상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에어리얼이 장악한 판을 뒤집을 절호의 수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약속대로 왕비가 에어리얼에게 성소의 위치를 알려줘야 할 때가 왔다.

“…….”

왕비는 탑을 나와 성벽 위에 섰다. 그녀는 지난 8년을 탑에 갇혀 있었다. 아니, 그 이전의 삶까지 포함한다면 더 긴 세월을 두문불출했다.

프리드웬 왕실과 연을 맺은 역대 왕비들은 대대로 장막에 가려진 채였다. 그녀 또한 다를 바 없는 운명이었다. 선대 왕 에르휜 프리드웬과 혼인 후, 초반에는 연례행사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에르휜이 서거한 후에는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마저 왕과 함께 무덤에 묻힌 것처럼.

그러니 이 얼마만의 외출인가? 왕비는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았다. 오랜 감금 생활로 쇠약해진 몸은 거센 바람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시린 눈을 간신히 떴다. 성벽 너머로, 조금씩 동이 터 오고 있다.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다가오는 것이다.

어둠에 묻힌 풍경이 햇살에 조금씩 눈에 드러났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당연히도 성벽에 걸려 있던 역적의 머리였다. 왕비는 한 걸음 다가갔다. 성벽 한가운데에 알테르 프리드웬의 잘린 머리가 걸려 있었다. 흰 쐐기풀로 만든 천은 그녀의 손안에서 끝없이 너풀거렸다. 손가락이 붉게 변할 될 정도로 그녀는 내내 이 천을 짜내는 데에만 몰두했다. 마물에게 붙잡혀 있을 때도, 인간에게 붙잡혀 있을 때도.

왕비는 얇고 하얀 천으로 잘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성검에 의해 잘린 알테르의 머리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그 어떤 풍화도 없이 생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마땅히 사람들에게 모욕당해야 할 적의 수급을 수의로 추스르고는, 그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끌어안았다.

“왕비여. 당신이 요구 사항은 모두 들어주었다.”

왕비의 등 뒤로 싸늘한 경고가 들렸다. 그녀 말고도 이곳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에어리얼은 팔짱을 낀 채로 왕비를 한심하게 쳐다보았고, 에레즈는 혹여나 도망칠지도 모르는 왕비를 향해 성검을 겨누고 있었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왕비신데 약속은 지키겠지? 자, 어서 성소의 위치를 말해.”

에어리얼은 왕비를 싸늘하게 몰아붙였다.

“…….”

당장에라도 왕비를 성벽 아래로 밀어 버릴 것만 같은 에어리얼과 달리, 에레즈는 어째서인지 그녀의 작은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깟 것, 얼마든지 알려 주겠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후, 왕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럴 줄 몰랐는데, 욕심이 많은 여자군. 배신자를 눈앞에서 놓아줬고, 지하 감옥에 가둔 성녀들을 모조리 풀어 주기까지 했지. 심지어 역적의 수급을 넘겨주기까지 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

에어리얼은 힐끗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왕자님께서 아무리 관대하시더라도 이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긴 힘들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왕자님?”

“아…. 그래. 칼, 당신의 말이 맞아.”

에레즈는 무비판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오메가에게 종속되어 버렸구나.”

왕비는 알테르의 머리를 두 팔로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해를 등진 왕비의 모습은, 그녀가 혼인 전에 성녀였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고결함이 느껴졌다. 책망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그것이 전부만은 아닌….

“에레즈.”

“……!”

“이름으로 불러 보는 건 처음…이군.”

왕비는 에레즈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성녀였던 자가 무언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하! 이제 와서 동정심에 기대려는 건가? 허튼 짓거리는 그만둬.”

이상한 낌새를 에어리얼이 에레즈의 앞을 막았다.

“아니, 나는 더 이상 성력을 사용할 수 없다. 내게 남은 것은 전부 불타 재가 되어 버린 과거와… 그것을 전할 혀뿐이지.”

바람이 거친 탓인지, 우연인지, 왕비의 머리를 고정하던 끈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의지를 잃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마음과도 같았다.

“붉은 오메가여. 네가 막는다면 하는 수 없다만, 성역을 열기 전에 치러야 하는 과정이다. 그곳은 왕의 무덤이니까…. 즉, 프리드웬 왕실에 얽힌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그 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대대로 왕비에 추대되었던 성녀의 역할이다.”

에어리얼이 픽 웃었다.

“아아, 그래? 뭔가 다른 꿍꿍이도 있는 것 같지만, 한 번쯤은 속아 주지.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절대로 닿지 않을 테니까.”

에어리얼은 왕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곁에서 듣는 에레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왕자님, 왕비로부터 성역의 위치와 그곳에 가는 법에 대해 알아내십시오. 저는 프리드웬 왕실과 얽힌 자가 아니니, 아래에 내려가 있겠습니다.”

“…칼.”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일 없을 겁니다. 저는 왕자님만을 믿으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흉내를 내며 에레즈를 안심시켰다. 에어리얼이 욕심을 부린다면 이 자리에 그대로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쪽을 택했다.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이제 성벽 위에는 에레즈와 왕비, 단둘만 남게 되었다. 칼리번이 사라지자 에레즈는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눈앞에는 체구가 작은 여성뿐인데도 그녀가 무서웠고, 어서 그의 곁에 돌아가고 싶었다. 칼리번이 깨어난 후로 점점 심해지는 증상이었다.

“왕자님, 저를 보세요.”

에어리얼이 사라지자 왕비는 에레즈에게 격식을 갖춰 대했다. 까닭 없이 전전긍긍하던 에레즈는 간신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저는 이제부터 왕자님께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 겁니다. 하지만 이건 동시에 당신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

“저 오메가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나 왕자님의 정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지신 것 같군요. 만약 제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나마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왕비의 시선이 잠시 성검에 닿았다. 새벽녘의 옅은 빛을 받은 검신이 새하얗게 빛났다.

“마물의 피가 섞인 모든 존재를 벨 수 있는 그 검으로… 자결하십시오.”

* * *

이것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여자의 이야기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성녀단에 들어가는 자는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히 재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그러한 사회적 지위마저도 포기해야 하며 이름마저도 지워진다.

모든 성녀가 동등하게 ‘성녀’라고만 불릴 뿐이며, 구별을 위해 약간의 존칭이나 특징을 붙이는 것만이 허용된다. 설령 예전에 아는 사이였다 할지라도, 더는 성녀의 성과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본인조차 자기 자신을 잊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카락을 가리는 두건과 장식 하나 없는 수수한 성녀복을 받은 후에도 잊지 않았다.

베이가 이주드 트리스트람.

불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없을 때마다 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뇌곤 했다.

* * *

귀족 영애의 삶이란 뻔하다.

결혼 동맹을 위해 성년이 되기도 전에 약혼을 맺고, 성년이 지나면 다른 가문에 넘어가 후계자를 낳아야만 한다. 그러나 트리스트람 가문의 장녀로 태어난 베이가의 삶은 보통의 귀족 영애와는 달랐다. 손끝에 성력이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성력’이란 여성에게만 드물게 발현되는 회복과 보호의 힘으로, 마물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신의 은총이었다. 그러나 평생 칼 한 자루 쥐어 본 적 없는 가녀린 여성에게는 저주나 다름없었다. 사내로부터, 마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전쟁터로 보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귀족 가문에서는 성력이 드러난 여식을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트리스트람 가문은 제 딸을 기꺼이 왕국에 바쳤다. 한 가문에서 성녀가 나오면, 그 가문의 영윤은 마물 토벌에서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베이가는 하루아침에 수를 놓고 드레스를 고르는 귀족 영애에서 성녀가 되었다. 왕국 전역의 격전지에 파견되었고, 생전 해 본 적 없는 노동에, 전투에, 치료에, 구호 활동까지…. 마물에게 당해 죽는 것이 아닌, 피로 누적으로 죽는 것이 아닌가 싶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이런 지옥에서는 절대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흘 안에 죽고 말 거라고.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베이가는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일에 익숙해졌다. 자신을 찢어 죽이려 으르렁거리는 마물에게 두 팔을 내밀고 방어막을 만드는 일도, 두세 명의 환자에게 동시에 성력을 불어넣는 일에도…. 베이가는 주어진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두 손에 피를 묻힌 채로 나아갔다. 죽음이 익숙해지는 나날이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대상은 ‘뒤처리’를 맡는 성녀들이 아닌 마물과 직접 싸우는 용맹한 기사단이었다. 마물 앞에서 여자는 고작 해야 목숨을 잃고 끝나지만, 남자는 거기에 더해져 모욕까지 당한다. 그러니 싸우고자 하는 남성은 모두에게 칭송받아야 함이 마땅했다. 그 사실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토벌을 마치고 왕성으로 귀환하는 기사단의 긴 행렬. 그 선두에는 언제나 ‘그 남자’가 있었다. 베이가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그의 위광을 멀리서만 바라보곤 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뒷모습….

프리드웬 왕실의 후계자,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15세의 소년임에도 무수한 무용담을 지닌 왕자님. 인류의 구원자였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두고 예언의 소녀가 소년으로 태어났다며, 진정한 ‘황금 피’라 칭송했다.

<저런 어린 분이 황금 피라니….>

베이가가 귀족 영애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한 번쯤은 연회에서 춤을 추는 영광을 누려 볼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름 없는 성녀 중 하나에 불과했다. 전쟁터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 전까지는….

<이 앞, 하이오덴의 숲은 왕자님께서 지원병이 올 때까지 막고 계신다. 그러니 우리는 부상자의 치료에 전념한다. 왕자님께서 따로 명을 내리시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대기할 것이다.>

통솔을 맡은 성녀가 명령했다.

<하지만, 숲 안에도 부상자가 남아 있습니다! 데려와야 합니다, 그들을 내버려 둘 순 없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성녀들로는 치료만으로도 부족해, 지원군으로 전환할 순 없다. 어린 성녀야, 우리가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왕자님께서 홀로 마물을 막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다행히 여겨야 하는 상황이다.>

<…….>

<포기하는 것 또한… 용기다.>

다른 성녀의 명령에 순응하기에 베이가는 아직 어렸고, 혈기 왕성했다.

<…그렇다면 저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혹여나 왕자님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가서 보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만둬! 왕명을 어길 셈이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무시한 채, 베이가는 독단적으로 숲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깔린 숲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성안까지 마물을 들이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병사들이 죽음을 불사했기 때문이었다. 걸음마다 인간과 마물의 시체가 즐비했다.

별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밤이다. 기댈 것은 달 하나뿐이건만, 그마저도 구름에 가려졌다. 베이가는 빽빽이 들어찬 나무를 헤치며 나아가다, 마른 풀만 자리 잡은 빈 땅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

붉은 피를 뒤집어쓴 사내는 시커멨다. 얼굴도, 옷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누군지 베이가는 알 것 같았다.

알테르 프리드웬….

병사와 마물들의 시체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혼자서 마물을 상대한다는 무용담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안도해야 옳으나 베이가는 여전히 몸을 굳혔다. 어둠 이곳저곳에서 기괴한 금빛이 반짝였다. 처음에는 번뜩이는 짐승의 눈동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니 그것은 줄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황금빛 금사가 주변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숲 전체가 거대한 거미줄이 된 것처럼….

그 근원을 눈으로 좇으니, 한 사내의 머리카락이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언제나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 올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풀어 헤친 채였다. 전투 중에 끈이 잘린 것일 수도 있으나…. 평범한 사람의 머리가 갑자기, 숲 주변을 뒤덮을 정도로 자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 사내가 거대한 거미라는 뜻이었다.

인간이… 아니다.

파삭.

깨달음의 순간, 하필이면 베이가는 나뭇가지를 밟았다. 그 작은 소리가 알테르 프리드웬에게까지 전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베이가가 숲 전체에 퍼진 금사를 밟고 말았다는 점이다.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금사는 발목을 휘감았고 그녀는 강하게 당기는 힘에 의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베이가는 비명을 질러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금사는 그보다 빠르게, 넝쿨처럼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베이가는 땅을 두 손으로 짚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조차 금사뿐이었다.

첫째 왕자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베이가는 어느새 코앞에서 왕자를 마주 보게 되었다. 물론 거꾸로 뒤집힌 채로. 거미의 먹이처럼 전신이 금사에 칭칭 감겨 치마가 아래로 쏟아지지는 않았다.

<하아…!>

입을 막은 금사는 스르르 사라졌다. 그러나 베이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헉, 헉, 짧을 숨만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피가 들러붙은 피부는 그 자체가 붉은 것만 같다. 왕실의 자랑인 푸른 보석안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베이가는 알테르 프리드웬이 인간이 아님을 직감했다.

<내 모습을 보았구나.>

어둠 속에서 알테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작은 벌레를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꾹 눌러 죽이는 것처럼. 베이가는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이 그 작은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와… 왕자님께서 전부 죽이신 겁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수많은 전쟁터를 오갔던 ‘성녀’였다.

<마물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병사들도, 성녀들도, 백성들도, 전부?>

베이가의 목소리에 점점 분노가 실렸다. 그야말로 마물이나 할 짓이었다. 어째서 모두에게 존경받는 왕자님께서 마물과 같은 힘을 쓰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마물이 왕자를 잡아먹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까지 따질 시간은 없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살려달라 외치지 않는 성녀가 흥미롭다는 듯, 알테르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남은 너도 잡아먹을 거다.>

그때, 구름에 가리어진 달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

고작 달빛이었으나, 주변이 워낙 어두웠기에 그 빛은 햇살처럼 모든 광경을 비춰 주었다. 베이가는 주변의 전경을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금사에 휘감겨 고깃덩어리가 된 마물들, 마물 혼혈들, 인간들…. 그리고 알테르 프리드웬의 얼굴 또한.

피에 물든 그 얼굴은….

<죄송…. 죄송합니다, 왕자님.>

베이가는 두 눈에 알테르 프리드웬의 모습을 담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제 와 목숨을 구걸하다니. 그런다고 내 비밀을 알게 된 너를 순순히 살려 보낼 것 같나?>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조각처럼 우아한 얼굴 위에는 누군가에게 배운 듯한 미소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베이가는 저도 모르게 알테르의 눈가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피어올랐다.

<이따위 공격이 내게 통할 것 같으….>

알테르는 성녀의 마지막 반항을 비웃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고통을 느꼈는지 얼굴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아닙니다…. 공격이 아니라, 치료를 해 드린 겁니다.>

베이가가 급히 덧붙였다. 성녀의 힘은 인간에게는 회복과 보호이나, 마물에게는 방해물이자 고통일 뿐이다. 이런 연유로 마물과 인간의 피가 섞인 존재는 성녀의 힘에 고통을 느끼며 동시에 회복이 된다.

<아무래도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심각하신 것 같기에.>

처음에는 피로 뒤덮여 있어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달빛 아래에서 다시 보니 그의 두 눈은 훼손되어 있었다. 이런 심각한 부상을 얻으면서까지 인간과 마물 모두를 잡아먹고자 할 리가 없었다.

* * *

베이가는 살아남았다. 적이 아닌 아군의 손에 살아남았다는 것은 어딘지 우스운 표현이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이 만남으로 인해 베이가의 운명은 약간,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다. 원로 성녀 중 한 분과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이다. 성녀복을 입은 지 고작 2, 3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성녀가 원로 성녀를 직접 독대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프리드웬 왕실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더는 예전으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직 어리건만, 이곳까지 발을 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안타깝지만 앞으로 네 일생은 네 의사와는 상관없이 흐를 것이다. …미안하구나. 하나 거부하겠다면 네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다.>

빳빳한 성녀복 너머로 드러난 원로 성녀의 손은 유독 가늘고 주름져 있었다. ‘성녀’가 이토록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녀가 몹시도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성력이든, 정치력이든, 무엇이든 간에.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숙명 앞에 베이가는 고개를 숙였다. 따지고 보면, 베이가의 삶은 한 번도 뜻대로인 적이 없었다. 그저 귀족 영애였다가 성녀로, 수식어가 달라졌을 뿐이었다.

<순종하겠다니 다행이구나. 잘 선택했다. 앞으로 너는 왕자님의 직속 기사단에 편입될 것이다. 그 전에 프리드웬 왕실에 관한 비밀을, 지금의 네게 필요한 만큼만 알려 주마.>

노인의 목소리란 대개 그렇지만, 원로 성녀는 장하다는 듯, 혹은 어딘지 슬픈 듯이 말했다. 원로 성녀는 외부인을 차단하기 위해 베이가를 성녀원에 자리 잡은 안뜰로 이끌었다.

<프리드웬 왕실은 아주 오래전에 마물에게 더럽혀지고 말았단다. 그 뒤로 왕실에서는 아들만이 태어나게 되었고…. 너도 알겠지만, 인간에게 마물의 피가 섞이면 그리되지.>

왕실의 비밀을 이미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국의 정점인 왕족에게 마물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은, 눈앞을 깜깜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렇다면, 여태껏 추대되었던 왕비님들은…?>

베이가는 성녀였기에 아무래도 그 점이 가장 궁금했다.

<그들은 프리드웬 왕실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왕비가 되었다. 그렇기에 모두 죽는 순간까지 순결했단다.>

<그 말은… 왕실은 계속 사내에게서 자식을 보았다는 뜻입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

베이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반박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태어나실 때마다 왕비님은 분명 임신을 하셨습니다. 배가 부른 모습을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 주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옷 안에 천을 덧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단다.>

<…!>

마물은 남자를 범한다. 마물로부터 남자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던가? 마물 혼혈이 모여 만든 용병 연합이라는 단체를 허용하고, 그들에게 인간과 함께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대신 사내를 범하지 말라는 규약을 체결한 것이 고작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왕실에서는 무법 시대의 알파와 같이 굴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드웬 왕실의 비밀을 지키고 수호하는 것은 단순히 왕실을 옹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란다. 프리드웬 왕실이 대대로 인간을 지키기 위해 마물과 전쟁을 벌였다는 걸 너도 알고 있을 게다. 이율배반적이다만, 마물의 피를 가졌기에 마물로부터 인간을 지킬 힘을 지니기도 한 것이란다.>

<…….>

<어린 성녀야. 인간에는 희망이 필요하단다. 만약 이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고, 프리드웬 왕실이 무너진다면…. 앞으로 누가 우리를 마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겠느냐.>

베이가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날… 똑똑히 보았습니다. 알테르 프리드웬 왕자님께서 마물뿐만 아니라 용병과 병사마저 구별하지 못하고 죽인 것을….>

주먹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눈을 다쳤으나 적과 아군을 모두 살해하다니…. 그것은 괴물 아니던가? 베이가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했으나 돌이켜 보면 등골이 서늘했다.

<네가 잘못 본 게다. 마물이 인간을 죽였고 왕자님께서는 그 마물들을 처리한 게야. 너는 그걸 뒤늦게 본 것뿐이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프리드웬 왕실이, 왕자님께서, 앞으로도 인간의 편을 들지 어떻게 아나요? 알파는 여자를 가소롭게 여기고 여자에게서 남자를 빼앗고 싶어 해요. 만약 왕자님께서 알파이기를 선택한다면, 결국 저희는 왕국을 마물에게 헌사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지 않습니까?>

<그걸 길들여 막는 것이 우리의 역할 아니겠느냐.>

원로 성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신께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으시며 이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사용할 권리를 주셨단다. 마물…. 마물의 피가 섞인 인간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이다.>

<…….>

<비록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뜰을 걷던 베이가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설마… 원로 성녀님께서는 알테르 프리드웬 같은 왕족마저 인간이 부리는 짐승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건가? 지금 하신 말씀을 다른 누군가 들었다면, 아무리 원로 성녀님이라 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네가 앞으로 첫째 왕자님을,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는 다른 왕자님들도 잘 보필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인간의 정점에 군림하면서도 마물의 본성을 지니고 계시니 그 속은 늘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혼란스러울 게야.>

<…….>

<선대 왕들께서 그러했듯 이번 대의 왕자님들도 마물의 본성이 아닌 인간의 이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성심성의껏 돕자꾸나. 인간이든 아니든 사내란 모두 똑같다. 항상 여인이 보필해야 하는 법이야.>

베이가는 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교에 귀한 그녀에게는 순응밖에 선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워, 원로 성녀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알려 주십시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속에서 울컥 치솟는 용암 덩어리가 남아 있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주 오래된 예언을 들어 왔습니다. 프리드웬 왕실에서 언젠가 황금 피를 이어받은 여자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지만 왕실에 마물의 피가 섞인 이상 여자아이는 결코 태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

원로 성녀는 베이가가 멈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천히 걸어갈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거짓말인 겁니까?>

베이가는 원로 성녀의 등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는 이 늙은이가 너처럼 어릴 적어도 들었던 예언이었지. 나도 그것만은 거짓이라고 믿고 싶지 않구나.>

원로 성녀는 그녀가 지닌 주름만큼이나 오래되고 많은 비밀을 짊어졌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원로 성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지쳐 보였다.

<이것 한 가지만은 거짓 없이 말해 주마. 황금의 피는 프리드웬에게서 프리드웬에게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단다.>

* * *

원로 성녀의 말대로 베이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로 배정되었다.

<또 보게 되었군.>

베이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먼발치에서 알테르 프리드웬의 모습을 보곤 했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네가 이 부대에 배속된 이유는 알겠지?>

<…….>

<지금의 네 자리에 있던 성녀가 지난 전투에 죽은 탓이다. 안타깝게도 마물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지.>

죽은 성녀와 다를 바 없는 처지인 베이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알테르의 말이 그녀에게는 여차하면 자신도 그렇게 죽이겠다는 협박으로밖에 안 들렸다.

<내가 맡은 일은 마물 토벌뿐이니, 네가 위기에 빠진다 해도 구해 주지 않을 거다. 이는 여기 있는 자들도 모두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앞으로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챙기도록.>

<…알겠습니다.>

그 말인즉, 이곳의 기사들과 성녀들은 모두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일까? 베이가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베이가는 말도 없이 떠나가는 왕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금발을 보았지만, 높게 묶어 올린 저 머리카락은 확실히 달랐다.

그렇게 베이가는 알테프 프리드웬의 뒤를 따라다녔다. 누군가는 베이가에게 ‘진급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기는 했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기사단은 부상자가 적기로 유명한 부대였다. ‘황금 피’라 불리는 명성에 걸맞게, 알테르 프리드웬 대부분 혼자서 전투를 끝내고 왔다. 기사단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괜히 알테르 프리드웬의 전투에 간섭해 봤자 목숨을 잃을 뿐이라는 것을….

덕분에 베이가는 일이 많이 줄었다. 전쟁터에 투입되는 일도 없으니 목숨의 위협도 없다시피 했다. 잘된 일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고개를 숙이며 살면 된다.

그렇게, 되도록 알테르 프리드웬과는 조금도 엮이지 않으려 했던 베이가였다. 그러나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기사단의 현실에 그녀는 괜스레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무서운 괴물이라 한들 알테르의 겉모습은 고작 해야 열다섯이었던 것이다.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되지만, 소년이 매일 피를 뒤집어쓰고 돌아오는데 정작 어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니…. 겁 없이 하이오덴숲으로 뛰어 들어갔던 것처럼, 베이가의 천성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멋대로 날뛰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날도 홀로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는 첫째 왕자에게, 베이가는 명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다가갔다.

<다가오지 마라. 지금 내게는 아무도 필요 없다.>

알테르는 손을 들어 접근을 막았다.

<왕자님의 임무가 마물 토벌이라면, 저의 임무는 병사의 치료와 구호입니다.>

그러나 베이가는 구급 용품을 들고 씩씩하게 다가갔다.

<너는 내가 ‘무엇’인지 알 텐데…?>

알테르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설령 왕자님께서 그렇다 한들 제 임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베이가는 속으로 괜히 나섰다는 말을 백번 반복했으나 겉으로는 의연하게 굴었다.

<…이 정도 부상은 바로 회복된다. 봐라.>

알테르는 팔을 보였다. 잘리기 직전의 부상이었음에도, 그의 팔은 저절로 들러붙고 있었다.

<보았겠지? 내게는 네 힘이 무의미하다. 성력을 그렇게도 자랑하고 싶다면 시간을 줄 테니 다친 백성들을 돕…. 윽!>

베이가는 알테르가 방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 손을 뻗어 망설임 없이 상처 부위에 성력을 들이부었다.

<와… 왕자님께서는 매일 전투에 나서시니, 다소 고통스럽다 해도 빨리 회복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회복하는 시간을 버는 만큼 휴식을 취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감히 왕자에게 대들다니 내일쯤 죽을지도 모른다. 베이가는 쓰라리게 후회했지만, 입에서는 바른말이 술술 나왔다. 이게 다 성녀가 되자마자 산전초고를 겪은 탓이었다. 몸이 편한 상태가 되면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괜한 일을 자진해서 만들고 있었다.

<성가신 계집이군.>

알테르는 혀를 찼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베이가 자신도 동의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제 성력을 그에게 불어넣었다. 베이가는 그저 홀로 모든 전투를 끝내고 온 후, 비틀거리며 막사로 들어가는 소년의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을 뿐이다. 알파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후로 베이가는 알테르가 귀환할 때면 허겁지겁 다가가 상처 부위에 성력을 들이부었다. 튼튼한 용병조차 성력이 깃든 성수를 바르기만 해도 비명을 지른다. 성력을 직접 부어 넣는 것은 마물 혼혈에게 있어 생살을 바느질하는 것과 맞먹는 고통이었다. 어쩌면 알테르의 주장대로, 서서히 회복되는 편이 그에게는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베이가는 인간이었기에 알파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는 몰랐다. 왜냐면 알테르의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이러고 있는 편이 좀 더 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겠군.>

어느 날, 알테르가 중얼거렸다. 푸른 보석안이 주변의 사람들을 무심하게 훑고 있었다. 베이가는 드디어 그에게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 * *

그날은 유독 첫째 왕자의 부상이 심했다. 베이가는 알테르의 막사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었다. 막사 안은 다양한 서적과 양피지로 그득했다. 이 지역에는 잠시 머무는 것임에도 그는 늘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치료를 받는 중에도 알테르는 베이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책에만 집중했다. 이번 치료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혹시 왕자님께서는… 성장이 멈추신 겁니까?>

베이가는 침묵에 짓눌린 나머지 그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토해 내고 말았다.

<어째서 그딴 것을 묻는 거지?>

아차 싶었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 그것이…. 왕자님과 같은 존재는 인간보다 훨씬 성장이 빠르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왕자님께서는 용병들과 달리 저보다 키도 작고…. 물론 아주 작으신 건 아니지만….>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 텐데, 베이가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지껄였다. 마물 혼혈은 인간보다 두세 배 빠르게 성장한 뒤, 이후로는 10년에 1살 정도의 나이를 먹는다 들었다. 알파의 기준대로라면 열다섯의 알테르는 성장을 마친 건장한 사내였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의 기준에 맞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인간 사내 말이다.>

<네?>

<예전에는 체격이 훨씬 크고 강했다고 하더군.>

<…네?>

알테르 프리드웬은 베이가의 질문에 대답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여기서 ‘예전’이라는 건 수백 년 전을 가리킨다. 마물 혼혈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 인간 여자보다야 크다지만, 예전에 비하면 비교적 체격이 작은 인간 남성만이 남았다고 볼 수 있지.>

<…….>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인데, 왕실에는 그런 것들이 소상히 기록된 문서들이 남아 있거든. 마물이 인간 사내를 범하기 시작한 이후로 아마도 성녀단에서 대대로 기록을 남겨 둔 듯해. 그들은 왕국 전역에 퍼져서 봉사하니까.>

<그렇군요….>

어째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베이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라워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이제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베이가의 솔직한 대답에 알테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즉, 여자와 비슷한 체격인 남자만이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사내들이 살아남기 위해 여자와 비슷한 체격으로 변해 간다고 볼 수도 있지. 그런 것처럼, 프리드웬 왕실에서 태어난 자들도 일반적인 마물 혼혈과는 성장 방식이 다르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외관이 천천히 자란다. 마치….>

유수와 같이 말을 하던 알테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베이가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강력한 성력을 쏟아 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인간을 흉내 내려는 것처럼 말이야. 다른 형제들도 그러했다.>

<그래서였군요.>

베이가는 자신을 미물 보듯 하던 첫째 왕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 준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즈음, 치료가 끝을 맺었다.

<혹시, 그 문서에… 저와 같은 여자의 체격은 어떻게 변했다고 적혀 있습니까?>

베이가는 저도 모르게 알테르에게 물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알테르는 베이가를 이상하리만치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인간 여자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록으로 남길 만큼 중요하지 않아서겠지. 알테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까지가 고통뿐인 치료에 대한 대가다.>

알테르는 아쉬워하는 베이가를 싸늘하게 내려다보고는 떠났다.

<딱히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닌데….>

홀로 남은 베이가는 들어 줄 이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 * *

“부르셨습니까, 오메가님.”

성벽 아래에서 기다리던 에어리얼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에어리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인적이 드문 이곳까지 달려온 이는 데릴만의 부하였다. 아니, 이제는 에어리얼의 부하였다.

“왕성의 보호막을 관리하는 성녀들은 아직 남아 있겠지?”

에어리얼이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알파가 대답했다. 며칠 전, 왕비의 부탁으로 젠을 풀어 주었다. 더불어 젠이 성녀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막지 않았다. 그 결과로 왕성에는 형틀에 매달 만한 성녀가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왕성을 탈환했을 적부터 왕성의 보호막을 관리하는 성녀들. 그들은 더없이 중요했다. 이 때문에 성녀들이 차례로 광장에 매달리고 모욕을 당하는 상황에도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젠은 아마도 그 성녀들도 함께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책임감인지 우둔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태껏 남은 모양이었다. 성녀들이 모조리 도망쳤을 때, 백성들은 분개했다. 그러나 왕성의 보호막을 수호하는 성녀들이 여전히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술렁였다. 광기는 쉽게 전염되나 반대로 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가라앉기도 하는 편이다. 에어리얼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흐름이었다.

“부하를 풀어서 그들을 모조리 죽여라. 시체가 눈에 띄지 않게 숨겨야 함은 당연하고. 인간들의 눈에는 도망친 걸로 보이게 말이야.”

“하지만,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마물이 습격했을 때 저희도 무사하지…. 아.”

의문을 제기하려던 알파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마물을 자유로이 부릴 수 있는 오메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 * *

언뜻 보기에 무의미한 치료는 계속되었다. 기사단의 최측근들은 ‘황금 피’인 알테르 프리드웬을 존경하면서도 그와 자칫 잘못 얽혀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다. 겁도 없이 접촉해 대는 존재는 베이가가 유일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자비로운 성녀가 왕자를 헌신적으로 보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베이가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괴물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성녀와 마물의 관계였다.

과거, 먼발치에서 보던 알테르 프리드웬과 전쟁터의 그는 전혀 달랐다. 겉모습은 똑같이 머리를 올려 묶은 소년에 불과했으나, 그 속에는 잔혹한 마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왕자님, 영지민들을 모두 죽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희가 잠시간 방패가 되어 주었다면 그들은 충분히 도망쳤을 겁니다.>

알테르는 앞장서서 마물을 도륙했으나 자신의 정체가 조금이라도 발각될 것 같으면 인간 또한 망설임 없이 죽였다.

<마물의 습격으로 고든펠 영지는 완전히 무너졌다. 당장은 목숨을 구했을지라도, 다른 영지로 도망치는 중 마물에게 범해져 괴물을 낳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병력으로는 그들을 안전한 영지까지 이동시키고, 완전히 먹여 살릴 수 없었지. 이게 최선이다.>

<하지만…!>

알테르는 손에서 놓지 않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백성을 보호하고 마물이 더는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너희 인간들이 원하는 바 아니던가.>

짜증이 뚝뚝 묻어나는 알테르의 목소리에는 백성을 향한 애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테르의 칼은 마물 앞에서든, 인간 앞에서든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빼앗기지 않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왕자님.>

<나는 무수히 많은 병법서와 역사서를 보았다. 거기에 계집의 말은 적혀 있지 않던데.>

알테르는 의견이 틀어진다 싶으면 베이가의 말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막사 안에 가득 쌓인 고서와 문서는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고대로부터 전사들은 전쟁을 떠나기 전, 아내와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전쟁에서 질 경우 전리품으로 끌려가서 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 침략한 땅의 핏줄을 말살시키기 위해 침략자들은 그 땅의 아이를 몰살시키고 여인을 끌고 가 침략자의 피를 잇게 하기도 했다. 번식은 식량과 함께 전쟁이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내들은 여인을 약탈해 번식했고 그런 식으로 세를 불려 왔지.>

막사를 둘러싼 기록물들은 베이가의 무른 심성을 탓하는 듯했다.

<마물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성현의 가르침을 참고하여 그대로 적용한 것뿐인데, 어찌 반박하는 것이냐. 계집이란 역시 어리석군. 일생을 가축처럼 다뤄져 몸에 밴 건가? 너희를 부리던 사내가 같은 취급을 당한다고 그렇게 안쓰럽게 여기다니.>

<…….>

<훗…. 꽤 재밌는 표정을 짓는구나. 여자는 여자인지라 사실을 언급해도 불쾌한가 보군. 내 말에 불만이 있다면 당장 막사를 떠나라. 어차피 쓸데없는 치료였으니.>

말을 마친 알테르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떠나지 않습니다.>

베이가는 모욕적이었으나 꿋꿋이 그의 곁을 지켰다. 왕자를 감시하는 것이 성녀의 의무라지만, 그보다 앞서는 의무는 바로 병자를 돌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의 치료가 필요 없고 재수 없는 알파라 해도 그 원칙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물의 피가 섞인 저 존재에게 과연 인간은 언제까지 의지할 수 있을까? 종종 용병대와 협업하기는 했으나 알파와 동고동락한 적은 처음이었다. 베이가는 알테르가 인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일 때면 실망과 회의감을 느꼈다.

<넌… 여태 본 적 없는 이상한 계집이군.>

한편, 알테르의 눈에는 기묘한 빛이 돌았다. 그러나 치료에 집중한 베이가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 * *

알테르 프리드웬의 밑에 들어간 지 어언 반년, 베이가는 그의 소년 같은 외모와 높게 묶은 금발에 깜박 속고 말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테르 프리드웬을 안쓰럽다 여긴 것은 그야말로 쥐가 고양이를 동정하는 격이었다. 알테르의 측근들이 멀리서 지켜만 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알테르는 인간 자체를 개미처럼 여겼지만, 여자에게는 더욱 박했다. 사내의 몸을 빌려 번식하는 알파에게 있어 여자란 쓸모없는 존재다. 기껏해야 그들이 필요한 사내를 생산하는 존재 정도일까? 성녀단이 왕국 전역에서 활동 가능한 이유에는 마물과 마물 혼혈들이 탐내지 않아서도 있었다. 대부분의 알파가 그러하듯 알테르 또한 베이가를 무생물 보듯 했다. 남자보다 쓸 데가 없으면서, 남자보다 약한 존재로.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베이가를 자극했다.

<내가 본 모든 글에서는 여자란 비겁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쓰여 있었다. 그 때문에 항상 사내들이 단속하고 지켜야만 한다고…. 마물과 맞서 싸우며 실제로 나약한 여자들을 보았다. 마물 앞에서 아무 대처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며 도망친 겁쟁이투성이였지.>

단순히 베이가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집요함마저 보였다.

<으음…. 저는 아녀자를 버리고 도망친 사내를 훨씬 많이 보았는데 이상한 일이군요. 그리고 성녀단에는 저보다 더 대단한 분들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쯤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사기가 크게 오를 겁니다.>

처음에는 묵묵부답이던 베이가였으나, 어느 시점에서는 참지 못하고 대담하게 받아치기도 했다. 이곳이 왕성이었다면 견고한 계급 사회가 그녀를 강제로 고개 숙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전쟁터였기에 감히 왕족에게 말대답을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흐음.>

애초에 알테르가 이런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입을 다물라 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베이가가 마음껏 말대꾸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베이가를 노려보았으며, 때에 따라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끄덕이기도 했다.

<?>

베이가는 그런 알테르의 반응을 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치료를 반복할수록 베이가는 알테르의 가정교사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너희 여자는 남자의 일부로 만들어졌다고 하더군.>

알테르가 먼저 대답을 바라며 말을 거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그 주제는 전술이기도 했고, 사회적 현상이기도 했고, 종교이기도 했고…. 굉장히 다양했다. 그것은 가득 쌓인 지식이 억눌리다 못해,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현상과도 같았다.

<사내의 뼈에서 빚어졌다고도 하고, 흙이나 거품에서 태어났다고도 하지. 고서에는 사내가 사내를 낳았다 적혀 있었다. 대를 잇는 이름은 전부 남성이었지. 그래서 알파가 사내에게서 태어나듯, 여자 또한 사내에게서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더군.>

<…….>

<그렇다면, 먼 옛날에는 남자가 여자를 낳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인가?>

<…네?>

얌전히 왕자의 설교를 듣던 베이가는 그가 내린 결론에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 반응은 뭐지?>

바보 취급에는 누구나 예민하기 마련이다. 알테르는 인상을 썼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정말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내용이 꾸준하게 기록으로 남을 리가 없다.>

농담인 줄 알았으나 알테르는 더없이 진지했다. 아무리 마물로 인해 자연의 순리가 어그러졌다고는 하나 남자가 여자를 낳는 일은 없다. 베이가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숨을 골랐다.

<…왕자님께서는 전 왕비님과 이런 대화를 나눠 보시지 않으셨나요?>

그 김에 베이가는 오랫동안 망설이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게 무슨 의미지?>

알테르에게 있어서는 예상치 못한 질문인 모양이었다. 그가 얼굴을 굳혔다.

<전 왕비님께서는 그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헌신적인 성녀님이라 들었습니다. 저 같은 것보다도 훨씬… 말이죠. 제가 아닌 왕비님께 질문하셨다면 현명한 답을 알려 주셨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현재 왕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몇 년 전에 넷째 왕자의 출산 후, 산욕열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베이가로서는 알 수 없다.

<……그 여자는 가짜였다.>

알테르는 한층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라 하나, 왕자님께는 여전히 어머니 되시는 분 아닙니까? 그러니 잠시라도 함께하는 시간을….>

<난 그 여자가 죽기 전까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베이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알테르는 불쾌해졌는지 치료를 받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었지. 나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너희 여자의 열등함은 조금도 물려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 거다.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다.>

<…….>

<네 말을 듣는 것은…. 그래,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가끔 귀를 기울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보다 약한 자는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반박하는 알테르의 목소리는 딱히 당당해 보이지도 않았다.

<…네. 제가 왕자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혼자서 마물을 토벌하실 정도로 강하신 분이니까요.>

베이가는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프리드웬 왕실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하지만… 힘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왕자님께서 제시하신 기준대로라면 이 세상에는 오로지 힘이 센 존재만이 살아남겠죠. 그래서일까요? 마물은 인간처럼 무리를 이루지 않죠. 모두가 마물처럼 살아간다면 아이와 노인은 죽을 것이고, 여자도 범해지고 살해당할 겁니다. 힘의 논리로는 아무것도 쌓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마물에게 없는, 눈부신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물과 인간의 차이입니다.>

<…….>

<저는 마물이 들끓는 땅보다는 인간들이 일궈 낸 영지에서 살고 싶습니다. 왕자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왕자님께서도, 마물에게서 인간을 지키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착각하지 마라.>

알테르는 베이가에게 등을 진 채로 비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건 단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업이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가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면 왕자님께서는 마물을 토벌하신 후 왕성으로 귀환할 때,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 일을 싫어하시나요?>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알테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러니 그런 실없는 소리나 하는 거겠지.>

* * *

인간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자가 방패가 되어 인간을 지키고 있다니, 이상했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모순투성이였다. 베이가는 고대의 문서를 해석하는 학자처럼 그를 꼼꼼히 관찰하며 나름의 논리를 찾아보려 했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그는 결국 미지 속 괴물로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베이가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게 된 것은, 사소한 사건이 계기였다.

<성녀님, 한동안 왕자님과의 접촉은 자제해 주십시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동안 성녀단에서 파견된 성녀들과 여기사들이 왕자님의 초소에서 경비를 설 예정입니다.>

그날도 알테르의 상처에 고통 어린 치료를 쏟아부으려던 베이가는 입구에서부터 거절을 당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알테르는 치료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했을지언정 한 번도 베이가를 거절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의아했다.

<왕자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자세한 이유를 물어도 상대는 그렇게만 답할 뿐이다.

<그렇다면 성녀인 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마물 혼혈에게는 얼마나 통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시기’에 들어섰습니다. 저희 중 아무도 왕자님께 도움이 될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최대한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기사는 완곡하게 표현했다. 눈치가 없는 베이가라고 해도 그 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 시기. 아마도 알파의 발정기를 의미하는 것일 테지.

몸이 성숙한 알파는 마치 짐승처럼 특정 시기에 발정한다. 폭력성이 증가하며 본능에 이성이 지배되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사내를 범한다. 인간과 흡사한 외관을 지닌 마물 혼혈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용병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유기도 했다.

<왕자님께 적절한 조치는 취해졌습니까?>

베이가가 물었다. 용병들은 스스로 몸을 부러뜨려 그 시기를 넘긴다고 들었다.

<감히 왕족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직은 홀로 버티고 계십니다. 그러니 최대한 그분을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가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저도 함께 경비를 서겠습니다.>

<왕자님께서 거부하셨습니다.>

<네?>

<그것이… 말이 많은 여자가 주변에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나신다고 하셨습니다.>

<…….>

그 후, 성녀들과 여기사들은 돌아가며 초소 주변의 경비를 섰다. 남기사는 알파를 자극할 뿐이었다. 베이가는 성녀들이 머무르는 막사에서 대기했다. 그녀는 알테르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인간의 껍질을 벗고 괴물이 되었을까? 베이가는 하이오덴 숲에서의 만남을 떠올렸다. 달빛을 머금은 금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기에 그만큼이나 두려웠다.

그렇게 왕자가 베이가를 멀리한 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밤늦게까지 기도를 올리던 베이가는 작은 비명을 들었다. 베이가는 준비된 자처럼 빠르게 왕자의 막사로 달려갔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병사들 너머로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거침없이 숲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왕자님!>

베이가는 망설임 없이 알테르로 추정되는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적도, 아군도 관계없이 죽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살육을 저지를까? 본성이 이성을 짓누르고 있다면, 수없이 보았던 마물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막아야 한다. 성녀는 기묘한 정의감이 솟았다. 아니, 단순히 정의감만은 아니었다.

어두운 밤은 까만 장막이 되어 그들을 다른 무대로 이끌었다. 어둠과 그림자의 색은 거의 비슷했다. 베이가는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왕자님!>

베이가는 표적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를 불렀다. 그러나 답이 없었다.

<…아.>

그러던 중 베이가는 발밑에서 반짝이는 실오라기를 발견했다. 달빛이 땅을 비추었고 알테르가 도망친 길을 따라 황금빛 선이 드문드문 드러났다. 마치 금사가 길을 내어 주는 것만 같았다. 베이가는 금빛 흔적을 더듬거리며 따라갔다.

눈에 띄는 나무와 바위에는 모두 금사가 걸려 있다. 검은 하늘은 금사를 따라 여러 갈래로 조각이 나 있었다. 그 광경은 끔찍했던 살육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부디 희생자가 없기를 바라며 베이가는 달렸다.

길고 긴 금실의 끝에는… 그 주인이 있었다.

<—!>

알테르의 팔과 다리, 목에는 금사가 팽팽하게 감긴 채였다. 스스로를 옭아맨 형상은 거미줄에 잡힌 나비와도 같았다. 머리카락을 거미줄처럼 늘어뜨려, 적과 아군의 숨통을 모두 조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왕자님….>

베이가는 차분히 그의 곁까지 다가갔다. 몇 번이고 금사를 밟거나 건드렸지만, 전처럼 금사가 그녀의 목숨줄을 잘라 내려 들지 않았다.

<…왜? 내가 외간 남자라도 끌고 와 범하고 있었을 것 같나?>

베이가가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이가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다르다. 스스로 버틸 수 있다. 이딴 정욕은 날 지배하지 못한다.>

알테르는 땀을 비처럼 흘리면서도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요.>

베이가는 선선히 대답했다.

<알았으면, 이제 나를 홀로 내버려 둬….>

알테르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은 평소와 달리 열이 올라 있었다. 그는 수많은 마물을 죽일 때보다 더 지쳐 보였다.

<어차피 저는 알파에게는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하는 계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잠시 왕자님의 곁에 있어도 별문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왕자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묶어 두셨으니, 절 해치지 않으실 테고요.>

베이가는 고집스레 말했다. 하아, 어디선가 짜증 섞인 한숨을 들려왔다. 소란이 가라앉자 숲은 원래의 평화를 되찾았다. 찌르르, 겁먹었던 벌레 울음이 다시 들렸다. 얼마 전, 우기가 시작되어 숲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빗물을 먹은 흙과 풀 냄새가 유달리 짙다.

베이가에게 그 이상의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껏 자극을 받은 알파의 감상은 또 다를 것이다. 병영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것도 그래서겠지.

<……왕실 서고에는 서적이 쌓여 있다.>

밤의 고요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알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을 읽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많은….>

알테르는 약에 취한 사람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글을 보았어….>

<그러셨습니까?>

베이가는 땀이 밴 그의 이마를 소매로 닦아주었다.

<그것만이 내게 유일하게 허락된 유희였다. 이런 몸으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까.>

베이가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평민에 비하면 교양이 나름 쌓인 편이었다. 그러나 알테르는 그런 그녀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말을 간혹 했다.

<인간들이 대를 이어 전수한 지식에는… 여자는 하나같이 열등하다고 적혀 있었다. 감정적이어서 실수를 저지르기 일쑤고, 천박하여 남자를 유혹하고, 이성이 존재하지 않아 악마에게 속아 넘어가는 존재이니, 두꺼운 옷과 두건으로 몸을 가리게 하거나 가축처럼 매질로 다스려야 한다고….>

알테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성 밖을 나와 토벌을 나서기 전까지… 내가 성안에서 본 여자는 감시자뿐이었다. 하지만 머리카락과 몸을 엉겅퀴 풀로 가린 그것들은… 여자가 아니었다. 아닌 줄 알았지….>

열에 젖어 지친 얼굴은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너는 조금 다르더군. 책에서 본 여자와도, 성녀와도….>

베이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멈췄다. 찌르르, 찌르르… 벌레 우는 소리가 빈 곳을 채웠다.

<이… 읽은 글은 고작 그런 것뿐이셨습니까?>

<…?>

<재미없는 이야기를 읽으신 것 같아서요. 어릴 적부터 그런 글만 읽으셨다면… 성정이 괴팍해지실 만합니다.>

알테르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힐난하듯 베이가를 노려보았다.

<왕자님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처음부터 시작하죠. 당장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도 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거위 부인 이야기부터….>

<누굴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베이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유달리 바보 같은 소리만 하는 것 같다.

<…그런 흔해 빠진 동화는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뗐다.>

<그러시군요.>

베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늘 손에서 책을 떼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할 법도 했다.

<저주를 받아 괴물이 된 인간의 이야기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괴물의 이야기를… 혹시 들어 본 적 있나?>

어둠에 얼굴을 가리고, 달빛에 기대어 문득 꺼내는 본심이 있다.

<어릴 적 자주 들었습니다.>

그 본심을 모른 척 베이가는 말을 맞춰 준다.

<…우습더군. 어째서 인간들은… 괴물이 인간이 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자조적이었다.

<인간 따위, 다시 태어난다 해도 되고 싶을 리가 없는데….>

* * *

시간은 켜켜이 쌓여 갔다. 두 사람은 부딪치며 서로를 변화시켰다. 베이가는 알테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마물 혼혈에 대해서 깊이 고찰해 본 적이 없었다. 마물과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 이들에게 아비는 지성이 없는 괴물이요, 어미는 그들이 태어난 순간 죽는다. 물려받은 것은 불완전한 이성과 어두운 밤과 같은 본성뿐. 선이 아닌 점과 같은 흩어진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만약 신께서 강림하시어 마물에 관한 생각을 묻는다면, 베이가는 종종 가정해 보았다. 알테르 프리드웬과 말다툼을 하기도 했던 유려한 혀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길을 잃곤 했다.

<너희가 믿는 신은 아무래도 마물보다도 못한 것 같군. 그 힘을 이어받은 너희 여자들이 알파보다 약하니 말이다.>

우기는 지난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소리가 빗소리에 잡아먹히던 어느 날, 알테르는 그런 말을 툭 내뱉었다.

<…저희를, 알파처럼 보시는 겁니까?>

베이가는 한 번도 상상치 못한 발언에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다면 그 힘의 근원은 어디에서 왔겠느냐.>

가끔 알테르는 베이가의 상식을 넘어서는 말을 하곤 했다. 성녀단은 가장 오래되고 정체된 집단이었다. 그곳의 일원인 베이가는 종종 알테르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왕자님, 신은 마물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괴물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베이가는 미신과도 같은 그의 상상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럴 때면 알테르는 공허한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어찌 보면 너희의 신이 마물보다도 더 잔인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이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럴 때면 알테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미소 지었다.

<내가 보기에, 이 부분에 있어서만은 너와 나는 비슷하다.>

<네? 그게 무슨….>

<붙잡힌 채 묘기를 부리는 짐승이지.>

베이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상처뿐인 손은 자랑이다. 성녀복과 머리카락을 가리는 두툼한 두건 또한 자신을 지키는 갑옷이었다. 종교가 있었기에 그녀와 그녀의 가문은 보호받을 수 있었다. 아니, 이제는 그녀가 종교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자님께서 지금처럼 옳은 길을 걸으신다면… 분명 신께서도 알아주실 겁니다.>

베이가는 평소처럼 말씨름을 하지 않고 한발 물러났다. 알테르도 그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오늘 들은 말은 전부 잊어라.>

알테르는 베이가를 홀로 두고 막사 밖으로 나섰다. 그 막사가 자신의 처소였는데도.

<…….>

그 후로 베이가는 종종 알테르 프리드웬을 위해 기도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알테르는 완연한 청년이 되었고, 베이가는 혼인 적령기가 완전히 지난, 노련한 성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겉모습이나 의복은 다소 변했으나 마물을 위해 왕국 전역을 순회한다는 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사이 알테르 아래의 두 형제도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 마물 토벌에 나섰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곁에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베이가는 인정받는 성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이가는 성녀단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알테르의 기사단이 귀환할 때 보고를 위해 방문하는 것 외에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왕비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었다. 왕자님들이 마물 토벌을 통해 불안한 서쪽 영지를 안정시켰으니, 마땅히 빈 자리를 채워야 할 때로구나.>

어째서 그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그 뜻을 헤아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받들겠습니다.>

베이가는 숙인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처음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이 있습니다.>

베이가는 알테르 프리드웬의 곁에서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을 꺼내 보였다.

<허락하마.>

<전 왕비님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그 질문에 원로 성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는 주름진 손으로 지팡이를 세게 쥐었다. 그 손등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원로 성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성벽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

* * *

왕성 밖으로 떠나는 성녀의 수는 상당했다. 도망이 아닌 탈출이라 봐야 할 정도였다. 칼리번이 알파들에게 보이는 족족 성녀를 잡아들이라 한 것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대로는 마물이나 칼리번이 끌어들이지 못한 마물 혼혈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럴 바에는 적의 가면을 쓴 자신이 감금해 두는 편이 낫다.

그러나 잡아들이는 성녀의 수가 늘면서 알파들이 슬슬 이 행위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새로운 변명거리를 고민하던 중, 일은 칼리번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풀리게 되었다.

“역시 오메가님다우십니다. 성녀 사이에 숨어 있던 배신자를 찾았습니다.”

“배신자?”

“에레즈 프리드웬의 곁에 늘 붙어 있던 계집 알파 말입니다.”

“…나를 그 계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칼리번이 던진 그물에 젠이 잡혀 든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어째서 젠이 성녀들과 함께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기억을 읽은 지금은 달랐다.

칼리번은 부하를 시켜 젠을 따로 감금했다. 그녀와는 일전에 에어리얼의 몸으로 재회한 적이 있으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젠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녀를 만나기 전에 준비할 것이 있었다.

“이번에도 내 명령 없이 멋대로 젠을 죽이려 든다면, 그때는 봐주지 않을 거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두 팔로 들고는 단단히 단속시켰다. 두고 갈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아스터는 약해진 상태였다. 혼자 내버려 뒀다가 괜히 다른 알파에게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 제힘으로는 그 여자를 이기지 못합니다.”

아스터는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몸이 되어서 처음으로 잘된 일이군.”

칼리번은 아스터와 함께 젠을 가둬 둔 막사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주변의 알파들을 물렸다. 감히 칼리번의 말에 거역할 자는 없었다.

천막 안에는 체격이 좋은 여자 하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두 다리는 부러졌고 두 팔은 이중 삼중으로 속박되었다. 입에는 나무로 재갈을 물린 탓에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따뜻한 밤색 눈은 어둠 속에서 붉게 보였다.

“…….”

칼리번은 입안이 썼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이 여자는 위험하니, 재갈을 빼내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아스터는 젠에게 다가가려는 칼리번의 행동을 저지하더니 투구에서 백금사를 쭉 뽑아냈다. 재갈을 묶은 끈을 잘라 내자 젠은 알아서 나무 막대를 퉤, 뱉어 냈다.

“…젠.”

한참이나 캑캑거리며 헛구역질을 하는 젠을 칼리번은 멍청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화술로 과연 어떻게 설득을 시작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항상 몸이 아닌 머리가 문제였다. 그러나….

“……번.”

“—!”

“너, 윽, 칼리번… 맞는 거지?”

허를 찌른 것은 젠이었다. 예상치 못한 호명에 칼리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젠은 매타작을 당해 부어오른 얼굴로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널 다시 보려고 일부러 잡혀 왔다, 새끼야. 적당히 좀 하지…. 큭….”

젠은 간신히 그 말을 꺼내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먼저 자신을 알아보다니. 심지어 찾아온 것이었다니. 칼리번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돌처럼 굳어 있기만 했다.

“……미안하다…. 이제야 알아봐서.”

앞서 너스레를 떤 것이 무색하게, 젠은 어렵게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칼리번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칼리번은 기쁘기는커녕, 두려움을 느꼈다. 젠은 에어리얼과 아는 사이였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에어리얼에게 지배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투구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의 불안을 아스터가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런 걸 설명할 시간이 없어! 칼리번…. 네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당장, 네게 알려야 할 게 있다!”

개처럼 네발로 땅을 딛던 젠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스터의 백금사가 칼리번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칼리번 몰래 젠을 공격하려는 찰나,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에어리얼…. 붉은 오메가에게, 에레즈를 빼앗겼다.”

* * *

베이가 이주드 트리스트람.

성녀는 이름을 되찾았다. 아버지에 의해 잃어버렸던 그 이름, 그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을 그 이름은 결혼으로 인해 복원되었다.

그리고 다시 잃었다.

베이가 이주드 프리드웬.

이번에도 아버지가 힘을 쓴 결과라는 것을 안다. 전쟁터를 오가는 여식을 걱정해서가 아닌, 가문의 위치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도.

그녀의 이름은 필요할 때마다 남의 손에 의해 붙었다 떼어졌다. 성녀가 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은 금기. 금기를 어긴 것은 그녀 자신의 의지였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금기를 어긴 것조차 쉬웠다. 무력감과 분노를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베이가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국혼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무수하게 흩뿌려지는 꽃도, 왕성 전역을 채우는 함성도 없었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장례식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왕은 병을 이유로 두문불출했기 때문이었다. 왕 대신 왕자들이 마물을 토벌하기에 그나마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은 것일 뿐.

홀로 예식을 치른 베이가는 신방에 홀로 앉아 전 왕비에 대해 생각했다. 왕비는 대대로 성녀 출신이었다. 그런데 전쟁터를 누비며 온갖 경험을 한 성녀가 자살했다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전 왕비님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일까.’

그리고 자신은… 그녀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국혼은 형식에 불과했다. 오늘이 초야라고는 하나 알파에게 여자란 그런 대상이 아니다. 평생 본성에서 나오지 않으셨다니 앞으로도 그분과 독대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전 왕비님에 대해, 그리고 왕께서 만들어 낸 자식들에 대해….

그래서 베이가는 편히 잠들라는 원로 성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침대 위에서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았다. 밤은 깊어 갔다. 왕성의 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푹신한 침대가 낯설다. 기사단과 함께 이동하며 천막을 치고 거친 잠자리에서 쪽잠을 자던 베이가에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풀벌레와 짐승이 우는 소리가 익숙해진 귀는 도리어 침묵에 불안함을 느꼈다.

베이가는 긴 밤을 버티기 위해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올리려 했다.

‘…내가 아니면 다친 그분을 치료해 줄 사람이 없을 텐데.’

그러나 눈을 감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국혼이 일방적으로 결정된 후, 베이가는 혼인 준비를 위해 기사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도에 머물렀다. 그래서 첫째 왕자님께 이 사실을 직접 전하지 못했다.

‘아니지. 어쩌면 왕자님은 나보다 더 먼저 국혼에 관해 알고 계셨을지도….’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왕께서는 아들인 왕자들과도 거의 교류가 없는 것 같았다. 부자간에도 저리 소홀한데 마물 혼혈인 왕자님이 자신을 신경 쓸 리가 없지. 그 증거로 국혼 날인 오늘도 알테르는 왕국 최남단에서 마물과 싸우고 있었다.

<…….>

그 사실에 베이가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첫째 왕자님이 국혼식에 참석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왕자와 성녀가 아닌, 아들과 새어머니의 관계가 된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씨로 그분을 대해야 할까?

무려 왕과의 초야에, 감히 그의 아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일렁일 때였다.

스륵—

흡사 발이 많은 벌레가 비단 위를 걷는 듯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베이가는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고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은 이미 어둠에 익숙한 상태였다.

<전하…?>

베이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

스슥—

한번 그 소리를 인식하니, 거슬리기 이를 데가 없었다. 베이가는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인간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전하, 혹시 방 안에 계신다면 대답해 주십시오.>

베이가는 기다리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신방을 걸어 다녔다. 그러던 중 그녀는 버석한 뭉치를 발로 밟고 말았다.

<이건….>

실타래…?

아니, 사람의 머리카락이다. 베이가에게는 그와 비슷한 머리카락에 몸이 묶여 끌려간 전적이 있었다. 베이가에게 정체를 들키자 머리카락 뭉치는 그녀의 발아래에서 빠져나가, 침대 밑으로 급히 숨어들었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베이가는 무릎을 꿇고 침대 아래를 살폈다.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금사 한 뭉치를 발견했다. 금사, 라고 하기에는 빛이 많이 빠져 있었다. 구름이 달을 가린 밤에도 희미한 빛을 내던 알테르의 금사와는 달랐다. 그래서 빨리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전하. 저는 이미 왕실의 내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모습을 편히 드러내셔도 괜찮습니다.>

자꾸만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금사 뭉치가 겁먹은 쥐처럼 느껴졌다. 베이가는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말하며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상체가 거의 침대 밑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금사에게 손이 닿을 수 있었다. 색이 바랜 금사는 우물쭈물하더니 베이가의 손에 감겨들었다. 베이가가 그것을 쥔 채 침대 아래에서 몸을 빼냈다. 한참이나 가슴이 짓눌린 탓에 이제야 제대로 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

…뭔가가 이상했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융단의 감촉이 평소와 달랐다. 미끄럽고 소름이 돋는 것이 마치 뱀의 긴 몸체 같았다. 베이가는 자신이 무릎을 꿇은 융단의 문양이 금사로 짜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구불거리는 실뱀들의 움직임에 베이가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들었다.

<윽…!>

베이가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손에 쥔 금사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뿌리치려 했으나 손에 감긴 금사가 떨어지지 않았다. 베이가의 손은 순식간에 침대의 발판에 묶이게 되었다.

<…전하?!>

베이가가 당혹감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의 구조와 가구는 처음 신방에 들어섰을 때와 바뀐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짧은 사이에, 방 안은 온통 색이 바랜 금사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방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괴물의 배 속에 통째로 집어삼켜진 것만 같다. 베이가는 왕이 작은 금사 뭉치라고 생각했으나 정반대였다. 자신이 금사로 이루어진 방에 들어온 것이다.

<저, 전하…! 놓아주십시오….>

바닥에서 구불거리는 실뱀들은 이제 베이가의 발목마저 붙잡았다. 방 안의 금사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과 속도로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벌레가 온갖 방향으로 꿈틀거리는 듯한 광경에 베이가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성녀로 살아오며 수많은 마물을 보아 왔다. 인간의 모습이었다가, 전투 시에는 본성을 드러내는 알파 용병들도 자주 봤다. 그러나 왕은 달랐다. 그에게는 형태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마물은 처음이었다.

베이가는 몇 차례나 더 대화를 시도했으나 속박만 더 강해질 뿐이었다. 어느샌가 베이가의 신체도 방 안의 가구처럼 대부분이 금사로 뒤덮였다. 목과 머리만이 간신히 드러내어 숨을 쉬고 있을 뿐. 만약 금사가 얼굴까지 덮는다면…. 그 이상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헉, 허억…. 저는… 전하께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베이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에 빠져 울거나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어디를 향해서,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상대의 눈이, 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금사가 코르셋처럼 몸을 조이는 통에 전신에서 열이 오르고,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괴물의 배 속에서 조금씩 소화가 되는 감각. 전 왕비님께서는 어쩌면 자살이 아니라 살해를 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베이가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떨 때였다.

<…?>

베이가의 무릎 위로 딱딱한 물체가 툭, 떨어졌다. 벌써 목까지 금사에 칭칭 묶인 베이가는 고개를 숙일 수도 없어서, 간신히 눈동자를 굴렸다. 어둠 속이었으나 금가루를 묻힌 동화책의 제목은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이건….>

저주에 걸려 백조가 된 아가씨의 이야기.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펼쳐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장정이었다.

툭, 또 다른 책이 이번에는 베이가의 어깨 위로 던져졌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책은 아무렇게나 펼쳐졌다. 양면에 걸쳐 바닷가의 거친 바위 위에 앉은 반 나신의 여성이 몹시 세밀하고 아름답게 채워져 있었다.

베이가는 이 이야기 또한 알고 있었다. 인간을 사랑하게 된 바닷속 괴물의 이야기였다. 비슷한 행위는 계속 반복되었다. 당장에라도 금사에 전신이 졸려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의 끝에서, 이 책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금사는 책을 베이가의 가슴께까지 끌어 올리고는 어서 보라는 듯이 펼치기 시작했다. 금사는 너덜너덜할 정도로 낡은 종이 위의 글자를 두드렸다.

<사…람……. 사람이 되고 싶다…?>

베이가는 금사가 강요하는 글씨를 읽었다. 금사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억지로 그녀의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게 했다. 그러고는 다른 책을 열어 보였다. 손이 없는 미끈한 금사에게는 책을 펼치고, 넘기는 그 행위가 몹시 어려워 보였다. 노력 끝에 낡은 금사는 원하는 글씨를 찾아냈다.

<오직, 진실되고 간절한 사랑만이….>

베이가는 그의 입이 되어 대신 읊어 주었다.

<저주를….>

괴물은 인간에게 애원했다.

<…풀 수 있다.>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 * *

<어째서 전하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왕비님께서 묻지 않으신다면 저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로 성녀는 왕비가 된 베이가에게 공손히 대했다. 그러나 그 태도는 조금도 공손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전하의 상태에 대해 알려 주십시오. 프리드웬 왕실의 자손은 모두 그런 형태인 겁니까?>

베이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알테르 프리드웬 왕자님처럼 대부분은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몇 대에 걸쳐 한 번 정도, 인간이나 마물, 어느 쪽의 모습도 갖추지 못한 채 태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래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거였군요….>

베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안색은 퍽 어두웠다. 그날 본 검고 회오리치는 방은 아직도 베이가에게 두려움으로 남았다. 그런 방안에서 외부 활동이 전적으로 차단된 채 지내야 한다면… 그 어떤 성녀라 할지라도 정신이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 전하께서 왕비님을 해치려 들지 않았습니까?>

베이가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지 않으니 원로 성녀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우려하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전하께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베이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그분께서 직접…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원로 성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책에 쓰인 글씨를 가리켜서 의사를 표현하셨습니다.>

그제야 원로 성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나 다른 성녀들도 전하의 모습을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무너진 형태를 들키는 것을 싫어하시기에 항상 성 어딘가에 숨어 계시거든요. 전 왕비님에게도 1년이 지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내셨기에…. 왕비님에게 이리도 이르게 모습을 드러내실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원로 성녀는 뜻밖의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항상 숨어 지내는, 모습이 무너진 존재…. 베이가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그녀가 왕을 만나기 전에 알테르 프리드웬을 먼저 만나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전하께서는 아주 어릴 적부터 당신의 모습을 증오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현재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임에도 한결같이 바라고 계시죠.>

말을 마친 원로 성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낡은 지팡이가 종종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왕비님께서는 전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긴 고요 후, 원로 성녀는 베이가에게 물었다.

<저는 이미 왕비가 된 몸입니다. 그런데도 제 의사가 중요합니까?>

<중요하지요. 이미 전례가 있었으니까요.>

<…저는.>

왕이 보여 준 동화책. 거기에 쓰인 이야기는 베이가도 잘 알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도 잘 알고 있다. 괴물이 되어 버린 남자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여, 그를 인간으로 탈 바꿔 주는 이야기라든가….

<제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지만…. 비록 겉모습은 무너지셨더라도 마음만큼은 인간에 가까우신 것 같습니다.>

그날 겪은 속박과 공포도 인간과 마물이라는 차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그분이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목숨을 위협당했으면서도 베이가는 왕의 처지가 안쓰럽다는, 동정심이 들고 말았다.

<…그렇군요.>

베이가의 말을 들은 원로 성녀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괴물을 두려워하지 말 것. 괴물을 가엾이 여길 것. 비록 괴물일지라도 자애롭고 현명하게 대처할 것. 원로 성녀가 베이가에게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대대로 여자아이에게 강요되는 미덕이기도 했다. 베이가는 귀족 가문의 영애로서 안주인이 될 교육을 미리 받았고 성녀가 된 후에는 봉사할 것을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상대가 사내가 아닌 괴물이라고 해서 달라질 리가 없었다.

<저 자신은 일천하나 전하를 떠받칠 수 있도록 곁에서 보좌하겠습니다.>

베이가는 자신의 의지로 그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대한 세상의 의지에 짓눌려 강제로 대답하는 것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그 각오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왕비님. 오늘의 다짐처럼만 전하를 모신다면 저희도 왕비님의 권속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베이가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얻어 낸 원로 성녀는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 * *

국혼 이후 왕은 베이가에게만 본모습을 드러냈다. 겉모습은 무너지고 흉측했으나 행동은 아이와도 같았다. 실제로 살아온 날만 보면 베이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텐데도 말이다.

왕은 작은 금사로 나타나 베이가의 무릎 안에서 똬리를 트는가 하면, 반대로 거대한 똬리를 틀고는 그 한가운데에 베이가를 집어넣어 꽁꽁 싸매기도 했다. 어느 방식으로든 베이가는 사지가 결박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왕을 위해 밤새도록 동화책을 읽어야만 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항상 ‘그리하여 행복했습니다’로 끝을 맺었다. 같은 글씨, 같은 내용을 읽고 또 읽어 베이가는 책을 보지 않고도 외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책들은 그동안 많이 보셨으니 이번에는 다른 책을 읽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래, 라는 글씨를 보여 주시면 제가 마음에 드실 만한 책을 찾아보겠습니다.>

베이가는 조심스럽게 권유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은 고집이 셌다. 그는 책에서 ‘아니’, ‘싫어’라는 말만 뜯어 베이가에게 주었다.

왕은 오직 인간이 된 괴물의 이야기에만 매료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라고 여겨서일까? 뱀에게 붙잡힌 쥐의 처지나 다를 바 없으나, 베이가가 왕을 보며 ‘가엾다’라고 느끼는 것은 불가능한 동조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제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간이 되길 원하는 짐승이나 괴물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내곤 했으니까. 아니, 신의 이야기조차 만들어 내곤 했으니까.

<전하께서는 참 아이 같으시군요….>

어느새 베이가는 왕의 색바랜 금사를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견 순진해 보이는 태도에 속지 마십시오.>

바뀔 수 없는 현실에 안주할 즈음, 누군가 베이가에게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국혼 후 처음으로 뵙습니다, 왕비님.>

마물 토벌을 마치고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온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몇 달 만의 재회였으나 눈물겨운 상봉은 없었다.

<못난 자식들을 위해 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테르는 베이가에게 거리낌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건, 전하께서 할 일을 대신한 것뿐입니다….>

베이가도 서둘러 예를 표했다. 그동안 베이가는 왕자인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법도에 따라 베이가가 먼저 자리에 앉고 그가 뒤따라 의자에 앉았다. 전쟁터가 아닌 장소에서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오랜 시간 성녀로 활약한 탓에 예법에 익숙하지 않아 버벅거리는 한편, 알테르는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버지께서 어떤 분인지는 두 눈으로 직접 보셨겠지요.>

전쟁터에서 보아 온 알테르는 늘 피에 더럽혀져 있었다. 그 탓인지 성으로 들어와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분은 그늘진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계시죠. 육체에는 한계가 없어서 본성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저희의 대화를 듣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알테르는 어딘지 불쾌하다는 듯 말하며,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런 식으로 경계를 하는 것이 더없이 익숙해 보였다. 그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전하께서 저희의 대화를 듣는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베이가의 답변에 알테르는 평소에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지려 할 때마다 그분께서 자식을 몇이나 보았는지 세 보십시오. …저를 포함해서.>

<…….>

<그러셔야 당신께서 다치지 않습니다. 어머니.>

왕비가 된 베이가에게 축하가 아닌 날 선 경고를 하는 것은 그가 유일했다.

베이가는 알테르 프리드웬과 형제들이 수도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어딘지 붕 떠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말부터 할지 고민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말을 들으니 심장 한구석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우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선한 분이십니다. 비록 아이 같은 면이 있기는 하지만….>

베이가는 뒤늦게 입을 뗐다. 자신을 위한 조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눈뜨고 싶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어두워진 베이가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 후로 알테르는 몇몇 전투에서 얻은 업적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할 말을 마친 알테르는 가볍게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떠나시는 겁니까? 전하를 알현하시지는….>

<제 동생들이 이미 보고를 마쳤을 겁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기도 하고.>

알테르는 성을 떠났고 베이가는 붙잡지 못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육체가 본성에 묶여 있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이제 왕가의 일원이 되셨으니 왕실 서고를 자유로이 오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바다만큼 깊게, 산처럼 높게 쌓여 있습니다. 시간이 어깨를 짓누를 때 한번 들러 보십시오. 버거움을 견디실 수 있을 겁니다.>

알테르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겼다. 처음에는 그 말이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베이가가 그곳으로 도망치듯 밀려날 시기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 *

왕비가 된 베이가는 이제 성녀 때처럼 두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쟁터 근처를 오가며 무수히 마주치는 죽음의 위험에서도 벗어났다. 인형처럼 그저 아름답게만 꾸며진 베이가를 보며 트리스트람 가문의 가주는 가문을 부유하게 만들었을뿐더러, 귀족 영애를 전쟁으로 떠밀었다는 미약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두고 잘됐다고 했다. 버겁고 험한 일에서 벗어나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잘된 일일까?

분명 베이가는 분에 넘치는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왕국에서 가장 귀한 여성으로 대우받았으며 트리스트람 가문의 영애였을 때보다 더욱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을 걸쳤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왕을 대신해 종종 백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일전에 성녀로서 활약했다는 자애로운 새 왕비에게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그 일은 왕비 자리에 오른 여자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었다. 왕비가 되기 전 베이가는 사람을 구했다. 왕국 전역을 두 발로 뛰어다니며, 두 손에 피가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흙탕물에 치마가 더럽혀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신에게 부여받은 성력이 있었다.

성안에서 베이가는 성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왕이 빛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쌓은 뛰어난 의학 지식은 사장되었다. 왕과는 동화책 외에는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국의 어머니이자 왕의 부인. 그것은 분명 성스러운 임무였다. 너무나 성스럽고 귀한 탓에 그녀는 성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지금 목에 걸친 보석과 자신은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나보다는 전하께서 더 가여우신 분이야. 그분은 평생을 어둠 속에 갇혀 계셨지…. 그런 그분의 곁에 있어 드리는 것이 새로운 임무라고 여기자.’

어둡고 우울한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들 때면, 베이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인간이 되길 애타게 바라는 괴물을 돕고 동정해야 한다고, 그녀는 매일 밤 읽는 동화책처럼 중얼거렸다.

<…….>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베이가는 어느샌가 왕실 서고로 향하고 있었다. 서고에 들어앉아 시간을 보내겠다는 그녀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고는 깊고 어두웠다. 베이가는 하염없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비록 몸은 성에 묶였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전처럼 온갖 장소를 누빌 수 있었다.

‘책을 읽은 것은 내게 유일하게 허락된 유희였다. 이런 몸으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까….’

이 막막함을 어린 시절의 그도 느꼈던 걸까? 베이가는 책 무더기에 머리를 기댄 채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 후로도 베이가는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태양과 고독을 흘려보냈다. 괴물을 인간으로 만드는 법이 혹여나 있지는 않을까—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꽤 많은 시간을 그 방법을 찾는 데 몰두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 누적된 무수한 지식이 베이가의 머릿속 바다를 거쳤다. 그러나 인식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많지 않았다.

<…아, 그런 건가.>

오히려 베이가는 책에 적혀 있지 않은 어떤 사실 하나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거대한 고대의 뱃속 같은 왕실 서고. 그 안에 담긴 수백, 수천 권의 책은 전부 사내가 썼다. 사내들이 나누고, 고민하고, 계획한 것들만이 진리로 채택되어 담겨 있었다. 남자들은 남자에 대해서만 적어 놓았다. 남자가 얼마나 이성적이고 아름다우며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해. 간혹 적힌 여자는 남자를 돋보이기 위한 도구였다. 남자를 유혹하며, 한편으로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며, 이기적이고 어리석다고 쓰여 있었다.

만일 인간계를 모르는 외부의 존재가 이 지식의 보고를 요람 삼아 자라난다면, 여자란 멍청하며 감정적이어서 누군가의 지배가 필요한 가축이라 배울 것이다. 오직 남자만이 유일하게 이성을 지녔으며, 진리를 깨우치고 성장할 자격이 있고, 다양한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진정한 ‘인간’이라 여기겠지.

<그래서 왕자님께서는….>

그토록 여자를 증오했던 것인가? 부서진 그릇의 조각을 맞춘 것처럼 그동안 품었던 의문은 답을 찾았다. 베이가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서고에만 박혀 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이야기를 쓰자.

왕실이 얽혀 있기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적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동화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검과 방패를 든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어떨까? 그걸 본다면 왕자님도 생각을 조금은 달리하시지 않을까? 동화책이라면 전하께도 들려드릴 수 있을 것이고….

물론, 그 누구도 여자의 이야기 따위 보고 싶지 않겠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부질없는 망상에 열을 올린 베이가는 급격히 피로해졌다. 그녀는 책 무더기 위에서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고 안으로 얇고 가는 뱀이 소리 없이 기어들어 왔다. 색이 빠진 낡은 금사는 낮에도 항상 베이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훔쳐보기만 할 뿐,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았다. 전 왕비도 이 모습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왕은 베이가를 찾아 왕실 이곳저곳을 쥐새끼처럼 찾아 헤매다가, 서고에 흘러들었다.

그런데, 서고에는 베이가 한 사람만 있지 않았다. 잠든 왕비의 곁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을 한데 틀어 올린 청년의 뒷덜미는 어딘지 익숙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왕은 알테르를 피해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그가 왕비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커다란 손이 왕비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의 손은 왕비의 목을 조르려는 듯 갈퀴처럼 꿈틀거렸다. 마물의 피가 섞인 존재가 본성 때문에 인간을 해치는 일은 흔했다. 특히나 알파가 예민해지는 발정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

그러나 왕의 예상과 달리, 그 손은 끝내 그 일을 마치지 못했다.

* * *

<회임을 경축드립니다, 왕비님. 그리고… 이번 회임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그 말을 듣고는 베이가는 저도 모르게 제 배를 만져 보았다. 왕은 알파였다. 당연히 그녀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신에게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아이가 생길 리가 없었다.

베이가는 두려움과 의문을 품은 채 원로 성녀를 따랐다. 본성 깊숙이 숨겨진 작은 방에는 한 사내가 유폐되어 있었다. 침대에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누운 사내는 배만이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다. 사내의 모든 생명력이 한곳으로 응집된 것만 같았다.

베이가는 그뿐만 아니라 사내의 몸이 심각하게 망가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알파와 교미한 사내에게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흔적 중 하나였다. 러트가 온 알파는 상대의 몸을 부러뜨리거나 찢는다. 상대가 오메가라면 노팅을 하는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베이가는 참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를 위해 부족하나마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읍!>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베이가는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진정하십시오. 앞으로 왕비님께서는 아이를 가지신 척 연기를 하셔야 합니다.>

주저앉은 베이가의 곁에서 원로 성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 * *

나는 지금 누구를 보필하고 있는 것인가? 왕을? …아니면 괴물을?

베이가는 동화책을 내미는 금사를 밀어냈다. 색이 빠진 금사는 그녀가 말을 듣지 않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저항하는 베이가의 두 팔을 등 뒤로 묶고는 책 무더기를 다시 내밀었다. 그의 집착은 탐욕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베이가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결국 토해 내고 말았다. 그러나 왕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베이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것이 화가 날 뿐.

버티다 탈진한 그녀가 몸을 숙이면, 왕은 화가 난 아이처럼 베이가의 몸을 강하게 조여 허리를 세우게 했다.

<…어째서 제 동생을 범하신 겁니까?>

베이가는 금사에 휘감긴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왕은 베이가에게 한 뭉치의 종이 다발을 건넸다.

사랑.

각기 다른 책마다 뜯어낸 탓에, 모양도, 글씨체도, 종이의 질도 달랐다.

<어디서 이런 것들을 다….>

베이가는 깃털처럼 가벼운 종이 뭉치에서 다른 단어를 찾아보려 했으나 오직 그것뿐이었다. 이 많은 단어를 찾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책을 뒤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책을 읽으며 슬퍼했던 베이가와 달리 왕은 사랑, 이라는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전하.>

베이가는 한때나마 왕이 순수한 아이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착각에 불과했다.

<사내를 범하는 건 욕망일 뿐, 사람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그, 그런 건… 괴물의 추악한 본능일 뿐입니다!>

참다못한 베이가가 외쳤다. 처음으로 듣는 훈계에 왕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방을 가득 채운 무늬가 흉측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범하신 자가 제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이가가 울음 섞인 외침을 토해 냈다. 그녀는 오직 동생의 안위를 위해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끌려갔다. 그로 인해 남동생과 인연이 깊지 못했다. 좋아하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 동생 말고도,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들, 형제였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신다면, 결코 사람이 되실 수 없…. 으윽!>

베이가는 쉴 새 없이 소리쳤다. 그리고 왕은 크고 높은 소리를 싫어했다. 금사가 베이가의 목을 졸랐다.

<저, 전하……!>

그동안 베이가의 몸을 속박하기는 했으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베이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방 전체가 왕의 금사로 뒤덮여 있었다. 헛된 발버둥에 불과했다.

<컥, 허억, 그만….>

베이가는 처음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왕은 숨을 들이쉬기 위해 벌린 베이가의 입에 사랑이 적힌 종잇조각을 쑤셔 넣었다. 어느덧 혀가 검게 변하고 목구멍에서 잉크의 맛이 났다. 눈이 뒤집히며 기절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베이가는 숨을 되찾았다. 여인은 목에 가득 찬 종잇조각을 바닥으로 쏟아 냈다.

사랑, 사랑, 사랑….

질식할 정도로 가득 채워졌다가 땅으로 팔랑팔랑 떨어지는 사랑을.

<어째서…. 어째서! 저의 순종을 짓밟으시는 겁니까….>

베이가는 금사에 묶여 웅크린 채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금사 위에서 피처럼 퍼졌다.

비록 강요당한 인생이나, 자신의 의지로 개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는 반영되지 못했다. 저항해도 벗어날 수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짊어질 수 있다고 세뇌했을 뿐이었다.

* * *

베이가는 부푼 배를 두 손으로 안았다. 옷 안에 천을 밀어 넣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끈으로 묶었다. 왕비의 임신 소식은 왕국에 널리 퍼졌다. 덕분에 그녀가 밖으로 나서는 일은 더욱 줄게 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곧 태어날 왕자의 태교를 위해서였다.

가짜로 만든 배가 부풀수록 마물의 새끼를 품은 동생을 나날이 죽음에 가까워졌다. 한때 베이가는 왕을 제 남동생처럼 여겼으나, 이제는 한없이 징그럽고 두렵기만 했다.

‘참으로 얄팍한 동정심이었구나….’

정신이 삐걱거리며 무너져 간다. 분노로 베이가를 죽일 뻔한 왕은 그 후로 모습을 감췄다. 베이가는 굳이 그를 찾지 않았다. 그것 외에도 왕비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몇 달 후, 프리드웬 왕실의 영광스러운 아이가 태어났다. 동생을 닮은 부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금발 벽안의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마물의 아이는 인간보다 산달이 일렀다. 석 달이 지난 후, 베이가는 여러 귀족 앞에서 산고를 겪는 여인의 흉내를 내야만 했다.

트리스트람 가문에서는 뒤늦은 장례식이 열렸다.

* * *

베이가는 태양 바로 아래 있어 그림자 하나 고이지 않는 정원으로 도망쳤다. 제아무리 본성 전체가 왕의 금사로 채워져 있다 한들, 햇살이 무자비하게 내리쬐는 이곳까지는 당도할 수 없으리라. 그림자가 두려워 그녀는 양산조차 쓰지 않았다. 햇살은 망토를 뚫고 그 아래 피부마저 태울 것처럼 뜨거웠다.

<……!>

도망쳐 온 정원에는 그녀 말고도 선객이 있었다. 뜨거운 공기가 일렁거려 상대방의 모습은 흐릿했다. 그래서 환영인가 싶었다.

<왕비님.>

그러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환영이 아니었다. 베이가는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만 보았다. 새로운 동생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수도로 귀환한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아마도 그의 밑에 있는 두 형제도 근처에 있을 것이다.

<왕비님께서는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하셔야 합니다. 이런 곳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알테르는 그렇게 조언하면서도 주변에 감시의 시선이 있는지 살폈다.

<일단은 이곳을 떠나……. 성녀에게…….>

당장 눈앞이 흔들거리는 베이가에게는 그 충고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운 왕자가 태어날 때까지 성안에 갇혀 있던 그녀는 모든 욕구가 사라진 사람처럼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쇠약해진 상태였다.

<…어머니.>

알테르는 쓰러지는 베이가를 한쪽 팔로 받아 냈다. 그러고는 검은 망토로 그녀를 감싸 가혹한 태양으로부터 가려 주었다. 베이가는 태양 아래에 있었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창백했다.

<새로 태어난 마물이 두려운 겁니까? 아니면 그로 인해 죽게 된 사내가 불쌍해서 우는 겁니까?>

알테르가 물었다. 베이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 쪽이 답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그간 전쟁터를 오가며, 아이를 낳다 죽은 여자를 보았습니다. 마물에게 공격당해 죽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주.>

그녀를 지켜보던 알테르는 망토 속으로 속삭였다. 베이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며 숭고한 숙명이라고 하더군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어찌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영광스러워해야 한다고. …그런데 동생이 같은 취급을 받게 되니 대단히도 슬퍼하시는군요. 당신이란 사람은.>

<…….>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트리스트람 소공작은 죽은 왕비님을 위해 이토록 슬퍼했을까요?>

알파와 인간은 다릅니다. 마물은 이 세상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이며 사내의 임신은 섭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베이가라면 그렇게 반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이 위로로 들린다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일까?

<인간들이 버티기를 포기한다면 당신이 이곳에 계속 갇혀 있을 필요도 없을 텐데.>

알테르는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베이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 짜냈다.

<신께서 세상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말을 들어 보셨겠지요. 당신 인간들의 교리이니.>

<…….>

<그 논리로 왕은 신하를 지배하고, 아버지는 다른 가족의 우위에 섰습니다. 왕비님께서도 결국 여자이기 때문에 트리스트람 공작과 성녀단, 그리고 왕에게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제 의지였습니다.>

베이가는 스스로 말했으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물 자체에는 아무런 지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물이 인간을 범해 태어난 존재들은 인간과 같은 이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보다 강하며, 인간보다 오래 살기까지 하죠. …그렇다면 마물 혼혈이야말로 신이 내려준 새로운 지배자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테르는 그녀의 귓가에 위험한 말을 속삭였다.

<수많은 역사서를 보았습니다. 인간 남자들은 자신이 가장 강했을 때는 그 강함을 지배의 근거로 사용해 왔더군요. 그런데 어째서 자신들보다 더 강한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까? 그 흐름을 반박하는 순간 인간이 쌓아 온 종교와 철학, 인간에 대한 찬가는 무너지고 말 텐데요.>

<…….>

알테르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자신은 마치 지킬 필요가 없는 가치를 떠받들고 있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든다. 심장이 한없이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인간인 당신에게 제 말은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하지만 당신과 같은 여자는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

알테르는 일그러진 베이가의 얼굴을 살피더니, 손을 뻗었다.

<저는 왜 매번 당신에게, 가축의 주인이 아닌 가축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까요?>

베이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을 가축처럼 생각한다는 사내에게 목이 졸려 죽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는 왕에게 목이 졸려 죽을 뻔한 전적이 있었다.

<…나에게 여자란 인간보다도, 마물보다도 미지의 존재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알테르의 손끝은 이마에 살짝 닿을 뿐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궁금하다는 듯이.

<늘 궁금했다. 인간의 아이는 알파와는 다르다. 갓 태어난 인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약하지. 누군가의 도움 없이 금방 죽어 버릴 정도로…. 그런데 너희 여자들은 어째서, 불행의 근원을 죽여 없애지 않고 가축을 자처하는 거지?>

알테르의 말투는 어느샌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 왕자와 성녀로 있었던 때처럼.

<제 배로 낳은 자식을… 어미의 손으로 죽이라는 겁니까?>

베이가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그래. 솎아 내는 거다. 사내가 굴복할 때까지.>

<무슨 말을….>

베이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내 말이 무엇이 이상하지? 실제로 인간이 알파에게 하고 있는 것 아니더냐. 사내들은 제 몸에 씨를 심은 마물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 하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희 여자들이 갓 태어난 사내아이를 죽였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모체와 같은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보다도 더욱 소중히 여기더군.>

푸른 눈이 기이한 빛을 내며 베이가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늘 고생과 고난을 자처하고 있어.>

인간과는 먼, 괴물의 질문에 베이가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에게 동조할 뻔도 했다. 그러나….

<과연… 마물의 피를 이은 분다운, 생각이군요.>

베이가는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을 참아 내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의미냐.>

알테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왕자님께서는 사랑을 모르지 않습니까.>

인간을 대표해 말하면서도 베이가의 입매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식을 전쟁터에 내몬 사랑. 아무런 명예도, 영광도 얻지 못하면서도 무조건적인 봉사를 요구하는 사랑. 질식 직전까지 먹었던 사랑…. 베이가 자신이 경험한 사랑은 이런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유독 운이 나빴을 뿐이지, 인류 보편적인 사랑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배워 왔다.

<……사랑.>

알테르는 그보다 우스운 단어는 없을 것이라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물과 인간은… 다릅니다. 마물은 무차별적으로 사내를 범하지만, 인간은 결혼을 통해 아이를 갖는 겁니다. 더구나 어미는 제 배를 찢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니 어리석다 하셔도 어미는 아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베이가는 한 번도 아이를 가진 적이 없지만, 대대로 세뇌되듯 배운 모성애가 있었다.

<글쎄. 내게는 마물의 교미와 인간의 결혼, 그 둘이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

<사랑이라…. 그 단어만은 몇 번을 들어도 뜻을 모르겠군. 너희 여자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이야. 치료 따위 필요하지 않은 나에게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 것도 그렇고 말이지.>

베이가는 알테르의 푸른 눈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이렇게나 무력한가 싶을 정도로 인간의 편을 드는 자신은 약해 보였다.

<…트리스트람 소후작의 일은 유감입니다. 대신 트리스트람 가문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입니다. 왕비님께서는 이제 왕실의 사람이니 과도한 슬픔에 자신을 잃지 마십시오.>

알테르의 말투는 어느새 자리에 맞게 돌아와 있었다. 그는 베이가를 홀로 설 수 있도록 품에서 일으켜 주었다.

<마물에게는 어머니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저와 당신의 차이일지도 모르겠군요…. 어머니.>

<…….>

붙잡힌 채 묘기를 부리는 짐승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다고, 언젠가 알테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메가에게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끝없이 범해야 하는 짝일 뿐이라서 말입니다.>

알테르는 이마 위로 흐트러진 베이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자 푸른 눈동자가 반쯤 접혔다.

<인간들은 저와 같은 존재를 괴물이라 부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모든 고난을 자처하고 감내하는 당신들이 더한 괴물로 보입니다.>

싸늘한 말과 달리 그의 손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태생에 다정함은 없었다. 다만 한없이 강한 존재가 저보다 약한 존재를 부서질까 조심하며 만지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본성의 창문에 들러붙어, 그 광경을 지켜보는 괴물이 있었다.

* * *

왕이 모습을 감춘 후로 베이가는 밤마다 시달리는 일 없이 홀로 잠들곤 했다. 왕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나 일말의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베이가는 그런 자신을 다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진실한 사랑만이 괴물을 인간으로 만든다….>

사랑. 그것은 여인을 붙잡는 가장 달콤한 과실. 인간의 근원이자, 예로부터 인간을 번성하게 만드는 아랫불. 트리스트람 가문의 영애 베이가는 아버지와 형제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들을 대신해 성녀단에 들어갔다. 성녀단의 이름 없는 성녀들은 마물에게 희생당하는 사내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들을 마물에게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봉사했다. 그리하여, 베이가는 왕을 사랑해서 왕비가 되었다. 이 모든 문장은 진실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랑이 들어간 이 모든 문장은 누가 읽기 좋으라고 쓰인 것인가?

깊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삐거덕거렸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

베이가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알테르에게서 들은 말은 마치 독처럼 그녀의 가슴 속에 검게 퍼져 나갔다.

사랑은 인간과 마물을 가르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다. 마물은 사랑을 모른다. 그래야만 한다. 왜냐면, 그래야지만 인간이 위대해지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것이 세상 모든 괴물들이 탐낼 정도로 아름답고 귀하지 않다면, 인간과 알파를 구별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척에 베이가는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형상을 살폈다. 어딘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왕자…님?>

베이가의 부름에 높게 묶은 긴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틀림없었다.

<오늘 수도를 떠나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이곳은….>

왕비의 침실인데.

베이가가 물었으나 알테르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조금씩 다가올 뿐이었다. 술을 먹은 사람처럼 그의 걸음은 어딘지 불안정하고 비틀거렸다. 베이가는 당장에라도 쓰러지려 하는 그를 두 팔로 받았다. 그러나 짚을 엮어 만든 인형처럼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이상함을 느낀 순간, 알테르 프리드웬은 돌덩이처럼 무겁게 변했고 베이가의 몸은 그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흐읍!>

베이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몸을 짓누른 것은 알테르 프리드웬이 아니었다. 이건, 왕자의 겉모습을 흉내 낸….

<베…이가…….>

괴물이었다.

눈도, 코도, 귀도 없다. 수백 마리의 금사가 모이고 엮여 간신히 사람의 모양을 따라 했을 뿐. 입과 혀는 어디에서 훔쳐 왔는지, 한 번도 소리를 내 본 적 없는 괴물은 뒤틀린 울음을 틔웠다. 간신히 입이 생겼음에도 그가 정확히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왕비의 이름뿐이었다. 그 외에는 괴상한 울음이 다였다.

<…줘….>

인간의 형상을 이루던 금사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더니, 베이가의 몸에 들불처럼 옮겨붙었다. 흩어진 금사는 빠르게 베이가를 옭아맸다.

<사랑… 줘….>

불이 붙은 사람처럼 베이가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인간이 될 수 있게….>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 * *

왕과 왕비가 동침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밤이 지난 후였다. 해가 떴음에도 베이가는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은 채였다. 처음 시녀들은 그녀가 깊은 잠이 든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베이가는 눈을 뜨지 못했다.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린 성녀들은 정신을 잃은 베이가를 간호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며칠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다. 그사이 베이가의 몸 안에서는 괴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알파가 자라는 속도는 인간의 아이보다 빨랐다.

마물에게 범해진 사내를 보아 왔던 성녀들은 베이가의 몸속에 같은 마물의 씨가 자라고 있음을 눈치챘다. 다섯 번째 왕자를 품은 트리스트람 소후작이 그러했듯이, 베이가 또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왕성 깊숙한 방으로 옮겨졌다. 이 사실은 극소수에게만 알려졌으며, 그중에는 알테르 프리드웬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본성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병사가 나서서 불을 끄기 위해 종횡무진으로 움직였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마는 본성 전체를 전소시켜야 성이 풀린다는 듯, 한 곳이 가라앉을 즈음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붙었다.

다행히 불은 왕성 전체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흘 넘게 밤낮으로 불타오르는 본성의 모습은 사람들의 불안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인원 외에는 왕비조차도 성녀들에게 업혀 본성에서 대피했다. 그러나 본성에는 뿌리를 내린 지 너무 오래되어 그곳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아직 남아 있었다.

<……!>

뜨거운 불길 앞에 금사는 몸을 마구 뒤틀었다. 성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롭고 무서웠다. 매서운 불길에 거친 머리카락으로 된 몸이 타올랐다. 어디로 숨어들어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색이 바랜 금사는 공기 대신 검은 연기를 마시며 꿈틀거렸다.

<—!>

배로 기며, 불길을 피하 지하로 숨어들려던 금사는 거친 구둣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금빛 뱀은 누군가의 발아래에서 꿈틀거렸다. 그사이 불길이 금사의 끝부분에 옮겨붙었다. 며칠 동안 계속되는 화재로 몸 대부분을 잃어, 이제는 불길에도 평범한 머리카락처럼 버티지 못하고 타들어 갔다.

<…….>

빛바랜 금사를 짓밟은 사내는 그것이 고통스러워하며 잿더미가 때까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검은 연기로 자욱한 와중에도 훤칠한 사내의 미모는 눈에 띄었다. 높게 틀어 올리던 황금빛 머리카락은 평소와 달리 풀어 헤쳐져 있었다. 프리드웬 가문 특유의 푸른 보석안은 불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항상 인간이 되길 바랐던 괴물이, 증오하고 또한 부러워 마지 않던 아름다운 존재. 자신을 짓밟은 존재의 정체를 파악한 금사가 더욱 크게 발광한다. 빛바랜 금사는 죽어 가면서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액을 짜냈다. 그러나 반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을 맺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검은 재를 발로 짓이겨 흩트리고는 불에 잡아먹힌 성안을 배회했다.

<아버지의 금사는 대부분 처리했습니다, 형님.>

알테르 프리드웬의 곁에 두 명의 왕자가 다가왔다.

<이제는 성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저희라 해도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마물의 피를 이어받은 알파라고는 하나 어느 정도의 상성은 존재한다. 불을 가까이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너희는 이만 물러나라. 남은 찌꺼기는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

두 동생은 더 이상의 반박 없이 물러났다. 아무런 이유 없이, 여태껏 내버려 두었던 아버지를 절멸시키겠다고 정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홀로 남은 알테르는 불길뿐인 성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성을 배회하는 유령처럼 보였다.

* * *

열흘이 지나고서야 불길은 간신히 멎었다. 성안에는 빠지지 못한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찼고, 성벽에는 그을음이 눌어붙었다. 시녀와 병사뿐만 아니라 성안에서 집무를 보던 일부 대신과 기사들은 화마를 피하지 못하고 검은 시체가 되었다. 성안에 찬 연기를 빼내고 시체를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만도 장장 반년은 걸릴 일이었다.

<으아악—!>

지상에서 복구 작업이 한창이 와중, 기사들의 비명이 어두운 지하에 울려 퍼졌다.

<와, 왕자님…! 진정하십시…. 윽, 으으윽!>

알테르는 피를 흘리는 성녀를 한 손으로 들어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성녀는 침대에 등을 부딪치고는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성녀의 피가 묻은 침대 위에는 왕비가 잠들어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헐떡이는 그녀는 고작 한 달 사이에 병자처럼 쇠약해져 있었다. 드러난 손목은 뼈와 가죽이 붙을 정도로 비쩍 말랐고, 창백한 얼굴은 핏기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배만이 둥글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왕비의 배 속에 든 걸 없애라.>

<부, 불, 불가능합니다…. 히익!>

알테르는 칼을 성녀에게 겨누며 명령했다.

<너희는 인간의 상처라면 무엇이든 고치지 않나? 배 속에 든 걸 죽인 후 성력을 불어넣으면 될 터. …성력이 부족한 건가? 그러면 성녀를 더 데려오지.>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왕자님! 제가 어찌 감히 왕비님의 몸에…!>

<왕자님, 멈추십시오!>

중년의 성녀가 파들파들 떠는 사이, 원로 성녀를 비롯한 성녀들이 들이닥쳤다.

<왕자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의 힘으로 인간의 몸에서 알파를 분리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왕비님마저 죽고 말 겁니다.>

원로 성녀는 알테르를 만류했다. 그제야 알테르는 칼을 거두었다. 중년의 성녀는 다친 팔을 움켜쥐고는 벌벌 떨며 성녀들이 모인 쪽으로 도망쳤다.

<모두 물러나라.>

<왕자님….>

<물러나라고 했다.>

성녀들은 망설였다.

<너희는 다친 아이를 데리고 물러나 있거라. 내가 여기 남겠다.>

알테르의 표정을 살핀 원로 성녀가 말을 덧붙였다. 성녀들은 침통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알테르의 검에 스러진 기사들의 시체를 거두었다.

<왕자님.>

원로 성녀는 모두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서야 입을 열었다.

<프리드웬 가문에는 이미 다섯 분의 왕자님이 계십니다. 마지막 왕자님은… 처리하셔도 무방합니다.>

<이 순간마저 너희의 운명을 내 손에 맡기겠다는 건가?>

알테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맡기는 것이 아니라,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원로 성녀는 지팡이를 짚으며 알테르를 지나, 왕비의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담으로 왕비의 팔을 그었다.

<현재 왕비님께서는 모든 생명력을 배 속에 든 마물에게 빼앗기고 계십니다. 반면, 외상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회복되고 있죠. 이 힘은 성녀의 성력이나 마물의 회복력과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마치… 그 둘을 합친 것처럼 말입니다.>

단검으로 그은 상처는 핏방울이 맺히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모체의 성력이 아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배 속에 든 아이가 모체를 지키는 것 같더군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네 말대로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한다 한들 왕비는 죽지 않겠군.>

무거운 침묵이 작은 방을 짓눌렀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 같은 왕비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왕비님에게서 어떤 존재가 태어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나….>

원로 성녀는 고심 끝에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왕자님. 아무래도 예언의 때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무엇이 태어날지, 혹은 태어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으나, 여기까지 왔으니… 적어도 근접했다 볼 수 있을 겁니다.>

<…….>

<결국은 이리되는군요….>

그러나 알테르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 인간들의 운명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다.>

<왕자님….>

<…떠나라. 더는 피가 보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알테르는 홀로 남았다. 알테르의 그림자는 잠든 베이가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푸른 보석안은 꿰뚫기라도 하듯 그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어째서지?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아버지의 아이를 가진 것이냐.>

숨 막힐 듯한 고요 속에서, 알테르가 원망하듯 말을 뱉어 냈다.

<알파는 인간 여자에게 아무런 욕망이 들지 않는다.>

알테르는 그녀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보아라, 나는 널 봐도 아무런 욕구가 들지 않는다. 나와는 전혀 다른 네 몸뚱이 따위는…. 조금의 유혹도 되지 못한다.>

창백한 얼굴, 나약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어깨와 등, 가슴과 엉덩이. 허벅지와 다리, 입술과 눈, 마른 손목과 발… 그 무엇도.

<지금 네가 걸친 옷을 전부 찢어 벗겨 볼까? 네가 발가벗는다 해도 나에게는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아.>

알테르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베이가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죽어 가나, 죽지 못하는 여인의 맥박이 뛰었다.

<발정기가 아닌 알파는 오메가의 향기를 맡은 것이 아닌 이상 러트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는 너와 교미한 것이지?>

<…….>

아무리 물어도 그녀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자는 늘 인간이 되길 원했지…. 설마 이딴 행위가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냐? 번식욕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성기를 세우고 범하는 것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 알테르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은 더는 존재할 필요가 없겠군. 그렇지 않나? 대답…해 보아라, 베이가.>

숨이 부족해진 베이가는 알테르의 손안에서 컥, 컥,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이대로 둔다면 질식해서 죽게 될 것이다.

<너는, 내가 물을 때는 언제나 대답하지 않았더냐.>

푸른 눈이 기묘한 빛을 띠며 번들거렸다. 이대로 목을 부러뜨린다면, 이 약해 빠진 여인의 배 속에 든 마물은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그래. 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지….>

그러나 알테르는 행하지 않았다. 목을 움켜쥔 손이 떠나자 베이가의 숨이 조금씩 트였다.

<우습군.>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순간조차 널 안고 싶은 마음은 한 치도 들지 않는데, 네 배 속에 있는 것만은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것이….>

* * *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베이가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배 속에 정체 모를 괴물이 자리 잡았음을 깨달았다.

<…헉… 허억…!>

끔찍한 현실 앞에 베이가는 헐떡이기만 했다.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가운데 배만이 커다랗게 부풀어 있는 모습이 괴상했다. 베이가는 벌벌 떨다 저도 모르게 경기를 일으켰다.

<와, 왕비님! 지금 정신을 놓으시면 위험합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침착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직접 왕비의 간호를 하던 원로 성녀가 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체력이 떨어진 탓에 미미한 발버둥은 금세 멎었다.

<제 몸은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전하께서는…?>

베이가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일련의 사건이 지나가도 한참은 지난 후였다. 말을 더듬거리는 그녀에게 원로 성녀는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왕성에 화재가 일어 전하께서는 돌아가셨고…. 저는 전하의 아이를 가졌단 말입니까?>

믿기지 않았다. 왕비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면 베이가는 여자고 왕은 알파였으니까.

그러나 불가능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베이가는 충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흐느꼈다. 원로 성녀는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물과 죽을 먹였다.

<왕비님. 왕비님께서도 성녀로 활동하셨기에 아시겠지만, 배 속의 마물만을 없애는 일은 저희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 그럼 저는 죽는 겁니까? 마물의 아이를 가졌던… 사내들처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최대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원로 성녀는 대야에서 수건을 적셔 눈물로 얼룩진 베이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베이가는 몸을 떨었다. 극도의 무력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이대로 전 왕비처럼 성벽 아래에서 뛰어내려 버릴까? 어차피 그렇게 죽는 것이나, 배 속에서 자신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마물을 낳다 죽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그녀는….

<저는… 제 몸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아야겠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얽힌, 커다란 의문에 등을 돌린 채 성벽 위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었다.

<프리드웬 가문은 다른 알파와… 무엇이 다른 겁니까?!>

설사 죽더라도, 그전에 그녀는 알아야만 했다.

<…그러시겠죠. 당연히 궁금하실 겁니다.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더는 진실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왕비의 물음에 원로 성녀는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까마득히 먼 옛날, 세상이 인간과 인간 간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의 일입니다.>

원로 성녀는 차마 글로 남길 수 없어, 대를 이어 목소리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나의 왕국이 아닌, 수십 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있던 시절…. 프리드웬 가문의 시조인 에인레드 프리드웬 님께서는 난립한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통일된 왕국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영웅이라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 대업이었지요. 어쩌면 몇 대가 걸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에인레드 님께서는 백성들이 그토록 오래 고통을 받길 원치 않았습니다. 방법을 찾다 결국, 인간을 압도할 힘을 얻기 위해 고대의 마법에 손을 대고 마셨습니다.>

<고대의… 마법?>

<네. 인간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여 그곳의 왕을 소환한 것이지요…. 악마와 계약을 해서라도 주변국보다 강한 힘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계가 다르면 개념 또한 다르다는 사실을 모두가 몰랐습니다. ‘왕’의 기준이, 인간과는 달랐던 것이 문제였지요.>

그것은 오랜 시간을 서고에 머물던 베이가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수많은 역사와 철학이 왕실 서고에 가득 쌓여 있는데도, 왕실의 과실과 치부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분의 부름에 소환된 것은 마물 중 가장 강한 알파가 아닌, 오메가였습니다. 그러나 왕비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오메가에게는 끝없이 마물을 생산하는 능력이 있을 뿐, 그 자체로는 강력한 힘이 없었습니다. 다만….>

원로 성녀는 이상하게도 말끝을 끌었다. 마치 저주를 내뱉기 전 머뭇거리는 것처럼 그다음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인간계로 처음 소환된 오메가는… 이질적이고도 순수했지요.>

원로 성녀의 태도에 기분 나쁜 예감이 검은 뱀처럼 베이가의 뒷덜미를 타고 올라갔다.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그 오메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께서 그 괴물을 손수 죽여 없앴습니까?>

더는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확인해야만 했다. 베이가는 강하게 채근했다.

<그 오메가는… 왕의 자손을 낳았습니다.>

<…욱!>

그 말을 듣는 순간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베이가는 입을 가리고 구역질을 했다. 원로 성녀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구역질이 진정될 때까지 시중을 들어 주었다.

<프리드웬 왕실에 마물의 피가 섞이게 된 계기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다 벌어진 사고라 하지 않았습니까?>

베이가는 헐떡이면서도 원성을 높였다. 원로 성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떨 때는 숨조차 편히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입술에 밀랍이 발린 것처럼 입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윽…. 왕실이 모든 백성을 속이고 있었던 겁니까?>

아, 너무나 자주 반복되어 이제는 예상할 법도 되었는데…. 막상 머나먼 과거로 올라가니 설마 싶었던 것이다. 원로 성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 이미 일어난 일을 그저 전하는 처지일 뿐인데도 베이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 후, 프리드웬 가문에서는 대대로 마물의 피가 섞인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다른 사내보다 몇 배는 강했고, 체격이 좋았으며, 백 명이 할 일을 능히 해내는 초인이었습니다. 그 초월적인 능력 덕분에 프리드웬 가문은 혼란을 종식하고 오늘날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되었지요.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에 인간들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영원히….>

그렇게 행복한 결말을 맺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아니, 간과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는 아직 몰랐던 것에 가깝겠군요.>

인간계와 달리, 마계에서 오메가는 단 한 마리뿐이라는 것.

<오메가를 소환한 고대의 마법은 인간계와 마계를 불완전하게 잇고 말았고, 마물들이 오메가를 찾아 인간계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오메가는 이미 죽은 후였죠. 마물들은 오메가를 대신할 것을 찾아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죽이고 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인지 그것들은 여자가 아닌 남자만을 교미의 대상으로 삼았지요. 자신들과 그리고 오메가와 비슷한 형상인 인간 사내를 착각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역사서에는 종류를 막론하고 ‘어느 날 갑자기, 천재지변처럼 마물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라고 쓰여 있었다. 프리드웬 왕실은 죄 없이 고통받는 인간들을 마물로부터 지켰다고….

그러나 진실은, 베이가가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다. 프리드웬 왕실은 조금도 정의롭지 않았으며 인간은 조금도 무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극을 자초했다는 겁니까?>

끝없는 전쟁을 막아 보고자 했던 것이 도리어 더 큰 악마를 불러들인 것이다. 베이가는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중얼거렸다.

<우리의 잘못? 잘못이라…. 과연 저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베이가의 한탄에 원로 성녀는 끌끌거리며 웃었다. 한없이 지치고 고된 모습으로.

<성녀에게 아무런 직책이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왕비님?>

<모릅니다….>

실소 끝에 나온 노인의 목소리는 어딘지 구슬펐다.

<그전까지는 오직 사내만이 신을 모실 자격을 지녔습니다. 여자란 성직자를 위한 노동과 제물을 제공할 뿐…. 신을 직접 모실 수 있는 위치까지 결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에게는 아무런 이름이 없는 겁니다.>

<…….>

<왕국이 세워지기 전…. 그보다도 더 먼 옛날, 왕비님과 저 같은 존재는 성녀가 아닌 마녀라고 불렸습니다. 마을에서 쫓겨나 거친 숲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지요. 사람들은 마녀가 지닌 치유의 힘을 경외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숨어 지내다 마물이 나타난 후, 마녀가 괴물에게 미약하게나마 대응할 힘을 지녔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마녀를 잡아다 협박하고 추앙하기 시작했지요. 그것이 성녀의 시초입니다.>

원로 성녀는 그녀조차 겪은 적 없는 까마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원로 성녀도, 베이가도 지금 자신이 겪는 이야기 같았다.

<…그렇다면, 신을 모셨다던 사내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여신도들의 봉양을 받으며 신의 말씀을 설파하던 사내들은 마물이 들이닥치자 가장 먼저 도망쳤지요. 개중 신앙심 깊은 자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끝은 비슷했다고 합니다. 뒷일을 우리에게 전부 맡긴 채….>

베이가는 목구멍에 마개를 끼운 듯 가슴이 꽉 막혀 왔다.

<원로 성녀님의 말씀대로라면 어째서, 성녀들은 이토록 철저하게 왕국에 봉사하고 있는 겁니까?>

베이가는 자연스러운 의문을 터뜨렸다.

<그것은 바로 ‘예언’ 때문입니다.>

<…예언?>

예상치 못한 발언에 베이가는 얼굴을 찌푸렸다. 프리드웬 가문에서 황금 피를 물려받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를 구원하리라. 왕국민이라면 어린아이조차 아는 그 예언을 말하는 것인가?

<그 예언은 에인레드 프리드웬 님께서 최초의 오메가를 죽였을 때, 그분이 사용한 성검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그 후, 오메가의 피에 오염된 성검은 정화를 위해, 아무도 모르는 호수에 잠들었지요.>

<…….>

베이가는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진실을 알게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예언은 말이 되지 않았다. 프리드웬 가문에는 마물의 피가 섞여 들어 결코 여자아이가 태어날 수 없었다. 마물과 사내와의 결합, 그 어디에서도 ‘여자아이’가 나올 틈은 없었으니까.

<비록 에인레드 프리드웬 님께서는 인간에게 크나큰 시련을 불러들이기는 했으나, 인간과 프리드웬 가문은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소수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프리드웬 가문을 계속해서 번식시켰습니다. 마치 쓸모 있는 짐승을 얻기 위해 개량을 시키듯 말입니다.>

쓸모 있는 짐승을 얻기 위해…. 베이가는 이런 와중에도 알테르 프리드웬을 떠올렸다.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군. 예전에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던 모습이었다. 알테르는 이 비밀을… 진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전부? 그래서 인간도, 마물도 아닌 자신에게 의문을 느끼면서도 마물을 향해 칼날을 내밀었던 것일까. 선조의 죄를 갚기 위해서?

<왕비님…. 왕비님께서도 성녀로 몇 년을 왕국 전역을 누비셨으니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알파, 마물 혼혈들이 인간을 닮은 형태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보통 마물 혼혈이라 하면, 마물의 본성을 지녔으나 인간의 껍데기를 가진 용병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반적인 모습을 가진 알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형 알파….>

베이가는 작게 중얼거렸다. 인간과 마물의 결합 중에서는 알파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괴물도 많았다. 왕국 전역을 돌며 그런 괴물을 없애는 것 또한 성녀의 임무 중 하나였다.

<마물이 인간 사내를 범하며, 끊임없이 번식해 온 지가 수백 년…. 마물 혼혈들은 벌레처럼 갖가지 다양한 형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자와 비슷해 보이는 알파도 나타났지요. 실제로 삼십여 년 전, 성녀단에서는 첫 여성 알파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전에는 없었던, 아니…. 그전에 존재했을지라도 성체까지 살아남은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설마.>

눈앞이 흐릿하다. 너무나 많은 정보를 접한 머릿속은 당장에라도 깨질 것 같았다. 차라리 잠들고 싶었다. 이대로 영영 깨지 않고 싶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은 마물을, 마물은 인간을 닮아 가고 있는 겁니다.>

사랑을 줘. 인간이 되고 싶다.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을 흉내 낸 왕의 글씨는 아직도 그녀를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즉, 프리드웬 가문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곧…. 사내뿐만 아니라 여자도 알파로…. 그리고 더 나아가 오메가로 태어나는 시기가 도래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언이란, 돌이켜 보면 당연한 결과이나 실현되기 전까지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기도 했다.

<여자가 알파로 태어나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이나,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오메가입니다. 만약 여자가 오메가로 태어난다면, 그때는….>

오메가는 마물을 낳아도 죽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들이 모를까?

<그 때문에 고대로부터 예언을 지켜 왔던 성녀들은 그 미래를 막아 보려 무수히 노력해 왔습니다. 언젠가 나타날 성녀단은 ‘여자로 태어난 오메가’를 찾아 죽이려 했던 겁니다. 왕비의 자리에 성녀를 임명한 것도 혹시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프리드웬 왕실에서 오메가인 여자아이가 나타난다면 빠르게 제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원로 성녀는 말을 잇다 말고 몸을 떨었다.

<설마 예언이… 아니, 저주가 이런 방식으로… 저희에게 보복을 하듯 찾아올 줄이야….>

수백 년에 걸쳐져 쌓여 온 거대한 공포가 노인을 짓눌렀다.

<아무래도 고작 저희의 힘으로는, 결국 운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막을 수는 없었던 듯합니다….>

노인의 시선이 베이가의 배로 향했다.

<…….>

베이가는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먹고 있는 정체 모를 존재를 손으로 짚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품고 있는 것인가. 마물? 인간을 향한 거대한 저주? 그것도 아니면, 가장 보편적이며 흔해 빠진… 인간의 아이?

베이가는 백 년을 산 사람처럼 지치고 말았다.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여든에 가까운 원로에게서 그런 나약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원로 성녀는 무너지듯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자의 몸에서 마물의 피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저희는 마물에게 순수하게 살해당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이 세상에 남자와 여자밖에 없었던, 그와 같은 지옥에서 살아가게 되겠죠.>

원로 성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지옥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인간 사내뿐만 아니라, 마물까지 저희를 노도처럼 덮칠 테니….>

* * *

그로부터 수개월이 흘렀다. 베이가는 죽으려 했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에르휜 프리드웬은 죽어서까지 베이가를 속박했다.

베이가의 목숨을 좀먹으며 성장한 생명은 점점 커졌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들었다. 여인의 비명이 천둥처럼 성안을 울렸다. 우기가 한창이었고, 먹구름은 달마저 가렸다. 지붕이 있건만 베이가는 비를 맞은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목이 찢어질 듯한 마지막 비명과 함께 베이가는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다.

성녀들이 갓 태어난 아이를 받았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첫 아이가 마물의 형상일까 우려했으나, 걱정과 달리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그럴듯한.

그녀가 낳은 것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사내아이였다.

그것은 안도해야 하는 일인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일인가?

<…….>

정작 당사자인 베이가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녀는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영민한, 일견 당돌하기까지 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천에 감싼 아이를 돌보듯 바라보기만 했다. 호기심과 호의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은 전부 타버린 재처럼 죽어 있었다.

아기는 인간과 달리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쭈글쭈글하지 않고 한 살 정도의 모습으로 성장해 있었다. 동그란 이마와 뽀얀 볼, 벌써 길게 자란 반짝이는 금발. 커다란 눈망울은 물기에 젖어 유독 반짝였다.

화재 이후 완전히 모습을 감춘 왕은 인간다운 형상을 갖추지 못했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프리드웬 가문의 사내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유약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띠게 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베이가에게는 한껏 인간을 흉내를 낸 그 모습이 두렵기만 했다.

<…….>

베이가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출산 후로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신을 향한 믿음과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성력마저도. 베이가의 정수는 모두 아들에게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프리드웬 왕실에서 가장 정당한 존재였다. 최초로 여자에게서 태어난 마물이었다.

<지금 왕비님의 처소에 들어가셔서는 안 됩니다, 왕자님! 제발 물러나 주십시오!>

문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고, 알테르 프리드웬과 그를 말리는 성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용케도 죽지 않았군.>

푹신한 베개를 여러 개 겹쳐, 상체를 기댄 베이가의 침상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베이가는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

알테르는 천에 감싼 아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대적자를 깨달았는지 자지러질 듯 울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네 아이를 죽일 거다.>

알테르는 선언했다.

<…너희가 바라는 바기도 하겠지.>

그러고는 주변의 성녀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

베이가는 그가 아이를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미는 아이를 본능적으로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군.>

그녀의 무반응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는지, 알테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미소 지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울음은 알테르가 방을 나가자 점점 멀어져 갔다.

* * *

긴 이야기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저는 제가 내뱉은 말에 속박되고 말았습니다. 제 몸으로 낳았으나, 결코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뒷걸음질을 치기까지 했다.

“왕자님.”

“…….”

“제가,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더없이 차분하고 덤덤하게 다가올 뿐이다.

“…아시겠습니까? 당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다행히 왕자님께서는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다음 대는 모를 일입니다. 당신이 존재함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받게 될 겁니다.”

간신히 되찾은 칼리번만이 중요해서, 정작 왕비에게는 소홀했던 에레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에 갇힌 왕비를 처음 본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저는 인간의 몸으로 마물을 낳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오랜 세월 제 내부로 천착하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알테르 프리드웬은 마물을 끌어들여 왕국을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성을 빼앗긴 후 선대 원로 성녀님께서도 목숨을 잃고 말았죠. 이 이야기를 전할 자는 저밖에 남지 않았기에, 자살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당신이 알테르에게 살해당하거나 혹은… 당신이 그를 죽이고 제게로 돌아올 때까지.”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잡혀 있던 가엾은 여인, 혹은 인간을 버리고 마물의 편을 든 마녀. 상반된 평가로 불리는 그녀였다. 그러나 실상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평범한 여인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어째서인지 작고 마른 여인에게 두려움을 느꼈었다. 양편에 기사단과 성녀단, 그리고 등 뒤에 용병 연합을 두고 한 손에는 성검까지 들었는데도.

“저는 당신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나의 이름, 성력, 명예, 인간성…. 아들들마저도.”

베이가는 한쪽 팔로 알테르 프리드웬의 머리를 안은 채로, 자신의 배로 낳은 진짜 아들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일들은… 내 잘못이 아니야….”

에어리얼에게서 벗어난 에레즈의 푸른 눈은 간신히 빛을 되찾았으나, 그랬기에 도리어 고통스러웠다.

“당신이… 그렇게 된 건, 나 때문이 아니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에레즈는 8년 전, 알테르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던 아이처럼 떨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베이가를 거부했다. 그러나 두 발은 수많은 손에 붙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자식이 어머니 앞에서 그러하듯.

“망각과 거짓말까지…. 당신은 닮아서는 안 되는 인간의 특징마저 그대로 물려받고 말았군요.”

베이가의 손이 에레즈의 뺨에 닿았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흠칫 떨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알테르 프리드웬의 피가 자연히 그의 뺨에 묻었다. 베이가의 온기가 더해진 그 피는, 마치 아직도 그가 살아 있는 것만 같다는 착각을 안겨 주었다.

“…….”

푸른 눈동자 속 동공이 꽉 조여들며 베이가만을 응시했다. 에레즈 안에 내재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죽으십시오, 왕자님.”

두 눈에 베이가를 가득 담은 채로, 에레즈의 뇌는 무의식의 저편에 묻어 두었던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당신은 붉은 눈의 오메가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인간이나 마물이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당신은 알테르 프리드웬과 같은 꼭두각시가 될 겁니다. 그것만은…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에레즈의 두 눈이 흐려질수록, 베이가의 눈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형형히 빛을 냈다.

“제가 당신과 죽어 드리겠습니다. 함께라면 억울하지도, 무섭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는 에레즈의 목을 온 힘을 다해 움켜쥐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비록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만…. 그것만이 어머니로서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니까요.

바닥에 눌어붙은 독을 닥닥 긁어내어, 삼키는 것만 같다.

나의 오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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