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신자의 이름
알테르의 잔당이라 불리는 알파들에게도 현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인간들은 대부분 에레즈 프리드웬의 비호 아래 왕성에 모여 있었다. 그곳에 합류하지 못한 떨거지들은 땅굴 속에 숨어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메가가 새로 소환한 마물이 들끓으니 마물 혼혈들은 자신보다 강한 알파를 상대로 끊임없이 영역 다툼을 벌여야 했다.
이번 회담에 참여한 셰르밀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의 밑으로는 약 서른 명 정도의 무리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피의 날 이전부터 같은 용병대에서 함께해 온 전우였다.
회담 이후 그들은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 데릴만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릴만은 분열된 마물 혼혈을 한데 묶고, 왕성에 모인 인간들을 노예로 삼게 해 줄 것이다.
‘붉은 오메가님께서도 우리의 편에 섰으니, 데릴만 님께서 이기는 건 자명하지.’
이 지겨운 노숙 생활도 곧 끝이다. 셰르밀은 데릴만을 따라 왕성으로 진입할 날을 기대했다.
‘그건 그렇고…. 오메가님께서 마물은 어떻게 안 해 주시려나.’
명색이 마물의 왕이라 불리는데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마물은 잠잠해지기는커녕 더욱더 기승을 부렸다. 그날도 셰르밀과 동료들은 마물과 독기에 물든 짐승을 사냥했다. 노예로 삼은 인간들은 부지런히 뒷처리를 했다.
“느려 터진 녀석 같으니, 그것 하나도 똑바로 못 해?”
고된 사냥을 마친 후 휴식을 취하던 셰르밀은 근처에 있던 소녀를 발로 걷어찼다.
“아악!”
장작불이 몸에 닿자 소녀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술맛 떨어지게 어디서 계집이 큰 소리를 내!”
셰르밀은 마시던 술병을 던졌다.
“윽…! 죄, 죄송합니다….”
소녀는 다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황급히 사과했다. 그러고는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꼬챙이에 꿴 고깃덩어리를 쉬지 않고 돌렸다. 종일 불 가까이에 있던 소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숯 검댕이었다. 셰르밀의 눈엔 검댕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짐승만치 미개해 보였다.
‘하, 저딴 덜떨어진 것들이 도대체 뭐라고…. 우리는 왜 그동안 인간에게 쩔쩔매 왔던 거지?’
셰르밀은 혀를 차며 술로 목을 적셨다. 고통받은 것은 소녀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는 알파에게 붙잡힌 인간들이 강제로 노역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없어서 못 잡아먹는 형편이었기에 노예는 전부 여자였다. 드물게도 노역을 하지 않는 인간들은 울타리를 친 구역에 묶여 있었는데 그 처지가 소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정말로 가축과 다를 바가 없다. 마물 혼혈이 인간처럼 거들먹거리고 인간은 개가 된 세상이었다. 힘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아….”
셰르밀은 감상에 젖었다. 회담에서 인간 사내를 제공해 주던 녀석이 죽어 버린 바람에 아랫도리가 허전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독한 시기도 얼마 가지는 않을 것이다. 왕성으로만 진입할 수 있다면…….
그때였다.
“누구냐!”
셰르밀의 부하 중 한 명이 숲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셰르밀은 축 늘어진 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근처 구역의 알파가 도움을 청하는 일은 종종 있어 왔다. 대부분은 무시했지만….
셰르밀이 술 한 병을 다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기척이 난 곳으로 향했던 부하 두 명이 돌아왔다.
“뭔 일이냐?”
그들을 기다리던 다른 동료들이 물었다. 그러나 숲에 들어갈 때와는 반응이 달랐다. 간만의 휴식을 방해받아 잔뜩 짜증이 난 얼굴이었는데, 감정을 잃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돌아 나온 것이다.
“왜들 그래? 다들 유령이라도 본…. 크윽! 뭐, 뭐 하는 거야?!”
다른 동료가 숲에 다녀온 부하들의 어깨를 잡은 순간이었다. 축 늘어진 인형 같던 부하들이 불시에 동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에 피할 틈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미치기라도 한 거냐?! 갑자기 달려들어서는!”
소란에 관심을 두지 않던 알파들이 즉시 반응했다.
“아무래도 독이 있는 마물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셰르밀 대신 나선 부하가 외쳤다. 독이 있는 마물에게 당하면 정신 체계에 혼란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시찰을 다녀온 부하는 둘이었기에 근처의 알파들에게 빠르게 제압당했다. 그들은 다른 알파에게 짓눌리면서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듯이 버둥거렸다.
“독이 묻었는지 확인해 봐.”
셰르밀은 그때까지만 해도 건성으로 명령했다.
“음…. 딱히 공격을 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요.”
“뭐라고? 그럼 이 자식들이 단체로 미치기라도 했다는 거야?!”
“쓰읍,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들 떨떠름해 할 때였다.
“잠시만, 대장님…!”
후각이 예민한 알파가 부하들의 몸에서 풍기를 향기를 맡았다. 무언가가 ‘다르다’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깨달은 알파였으나, 곧 모두가 알게 되었다. 어느샌가 바람을 타고 향기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가슴 가득 향기를 들이마신 후였다.
“윽!”
눈앞이 핑 돌았다. 고개를 휘젓거나 손으로 눈을 벅벅 닦아 내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호흡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들 목구멍이 틀어막힌 듯한 신음만을 내뱉을 뿐, 뭔가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큭, 다, 당신은…?!”
처음 부하 두 명이 들어갔던 숲속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그는 체격에 맞지 않는 커다란 망토를 둘렀는데, 한쪽 팔로는 웬 고철 덩어리를 안고 있었다. 가는 실루엣과 달리 걸음걸이는 전사와도 같이 묵직하고 굳셌다.
“누… 누구냐,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건가? 그럼 당장 너희 대장의 이름을 밝….”
정체 모를 자는 대답 대신 셰르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람이 불어 커다란 망토가 흔들렸고 얼굴을 가려 주던 후드가 뒤로 넘어갔다.
“오메가님…?!”
누군가 그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창백한 안색의 사내가 셰르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은 무채색으로 도배된 숲에서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했다. 피에 길든 알파에게 붉은색이란 곧 자극이었다. 그러나 핏줄이 선 두 눈만은 밤처럼 까맸다.
아, 저 체취를 더 맡고 싶다.
그런 욕망이 이는 순간, 셰르밀은 지고 말았다. 피를 튀기는 알파 간의 전투에 비하면 매가리가 없을 정도로 빠른 패배였다.
“…….”
오메가는 아무런 말도, 명령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알파들을 향해 펼친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쥘 뿐이었다.
“윽…?!”
그 순간, 오메가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셰르밀은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오메가가 그의 목을 조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메가를 위해서 알파 스스로가 목구멍을 닫는 행위에 가까웠다. 오메가를 향한 욕망은 알파 자신의 생명보다 중요하고 컸기에.
“억…. 크, 커헉…!”
자신의 의지로 숨을 멈춘 셰르밀은 그대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아니, 오메가에게 기꺼이 자신의 이성을 맡기고 말았다. 비단 셰르밀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알파가 단 한 마리의 오메가에게 굴복했다.
오메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인간뿐이었다. 노예들은 갑자기 등장한 오메가와 돌처럼 굳어 버린 알파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겁먹은 소녀는 꼬챙이를 회전시키지 못했다. 불길에 고기의 살점이 검게 타들어 갔다.
* * *
칼리번은 인근 영역의 알파부터 차례대로 공략해 갔다. 그 움직임은 거침이 없어 포섭이라기보다는 정복 활동에 가까워 보일 정도였다. 육체의 한계로 인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행보와는 확연히 달랐다.
에레즈와의 전투를 겪은 후, 칼리번은 다수의 마물을 거리낌 없이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교를 하지 않아도 마물 혼혈을 일시적으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칼리번’이었을 때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깨닫지 못한 진실을 마주할수록 오메가의 힘은 강대해져만 갔다.
오메가. 낯설게만 느껴졌던 본성은 어느샌가 그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대개의 알파는 칼리번에게 쉽게 굴복했다. 오메가와의 교미가 그들의 존재 이유였으니 마다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드물게 센어르나 데릴만처럼 이성이 비죽 솟아오른 알파도 존재하긴 했다. 그런 자들은 마물을 이용해 보이는 족족 가차 없이 죽였다. 그러다 보니 칼리번이 예상치 못한 전력도 생겼다. 알파들이 소유하던 인간 노예들이었다. 그것들은 알파 군대만큼이나 차곡차곡 쌓여 갔다.
인간 노예는 대부분이 여자였다. 남자는 보이는 족족 번식에 사용되다 보니 왕성 밖에서는 그야말로 씨가 마르고 말았다. 예전의 칼리번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잡아 두었다. 이들 중 일부가 왕성으로 흘러 들어갈 수도 있었다. 자신이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데릴만과 왕성의 알파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에어리얼인 채로 죽겠다고 결심한 이상 어쩔 수 없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닿기 위해, 그의 주변에 산재한 위험을 처리하기 위해 대신 인간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왕자님이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칼,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죽여야만 한단다.>
다시금 떠오르는 것은, 양아버지가 해 주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칼리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끔찍한 괴물에 가깝습니다.
* * *
“크윽….”
알파들과 멀리 떨어져, 홀로 쉴 수 있게 된 후에서야 칼리번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물을 다루고 마물 혼혈을 지배할수록 칼리번의 육체에는 부담이 쌓여 갔다. 결국, 칼리번은 쓰러지고 말았다. 텅, 텅, 한쪽 팔로 안은 투구가 땅에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흐으….”
칼리번은 투구를 챙길 여력도 없이 어깨를 움켜쥔 채 몸을 떨었다. 어느샌가 그의 손이 붉게 물들어 갔다. 벌써 수일이 흘렀건만… 성검에 관통당한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멈추질 않았다.
“칼리번. 많이 아픈 겁니까?”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던 아스터가 간신히 기어 왔다. 투구 안에서 나온 백금사가 칼리번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하…지 마.”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스터에게 백금사가 부족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이상 백금사를 낭비하면 그의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통이 심각한 탓에 말을 늘리기가 어려웠다.
“하지 말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주먹으로 투구를 내리쳤다. 그제야 아스터가 치료를 멈추고 웅크린 그의 무릎으로 기어 올라왔다.
“하아…. 읏….”
오메가의 몸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을 주변에 들켜서는 안 된다. 칼리번은 손을 까닥여 정신이 흐트러져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마물을 일부러 불러들였다. 방 안은 물이 차오르듯 금세 마물로 채워졌다. 칼리번은 마물을 방패 삼아 자리를 잡았다.
“……하아.”
칼리번은 간신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짧게 잠든 사이에 아스터가 마물에게 잡아먹힐까 투구를 품에 안았다. 몸을 웅크리니 아스터는 그의 배에 닿았다. 마물로 인해 방 안이 온통 피 냄새로 진동했다.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집중했다.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어느 시절, 칼리번은 지금처럼 엄청난 고통과 함께 피를 흘렸었다. 그때 자신의 배를 어루만져 주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자신조차 자신을 놓아 버리거나 잊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도 버릴 수 없었던, 가장 나약한 존재였다.
“인기척이 들리면… 그때 깨워라.”
칼리번은 간신히 말하고는, 아스터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 * *
“네? 성녀님들께서 왕성에… 전염병을 퍼뜨렸단 말입니까?”
흡사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었다. 수색대와 함께 가장 늦게 귀환하게 된 로위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 밖으로 나선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왕자님께서 손수 그들을 만행을 저지하셨습니다.”
리론 후작 대신 로위나를 맞이한 오드론이 정중하게 설명했다. 그녀가 원치 않는 내용까지도 친절하게. 그 사건으로 인해 원로 성녀 여덟 명과 기사단의 장교 열 명이 죽었다고 한다. 운 좋게도 목숨은 부지한 인원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그녀의 아버지인 리론 후작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지금까지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고….
“아버지께서…?”
순식간에 전쟁 영웅에서 역적의 딸로 전락한 로위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관대하시기에, 성녀단의 꾐에 넘어간 기사들의 죄는 용서한다 하셨습니다. 특히나 수색대를 이끈 경의 충심과 용맹은 왕자님께서도 높이 평가하십니다. 경을 추궁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 점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알파에게 하대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돌리며 자신과 같은 인간을 찾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본성에는 알파들만이 가득했다.
“성녀단이 전염병을 퍼뜨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전쟁에서 그분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부상을 두려워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백성들 또한 안심하고 저희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로위나가 반박했으나 오드론은 기분 나쁜 미소로 대우할 뿐이었다. 그녀가 이를 갈며 검에 손을 대려던 순간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때, 에레즈가 로위나와 오드론 앞에 나타났다.
“왕자님…?”
로위나는 예를 표하지도 못하고 멍청하니 서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에레즈 프리드웬의 두 눈이었다. 프리드웬 왕실의 자랑인 보석안이 로위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원래는 왼쪽 눈이 비어 있고 커다란 흉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던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생채기 하나 없이 새하얗다.
오른팔 또한 그랬다. 형제와의 결투에서 잃은 팔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멀쩡했다. 마물 혼혈이 아닌 인간은 몸을 재생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로위나는 그 점에 대해 언급할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일이 그다음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성녀들은 부상자와 환자에게 시달린 나머지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대고 말았다. 더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병사와 백성들을 죽이기 위해 병을 퍼뜨린 것이지.”
에레즈는 평소와 달리 성녀들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위엄을 갖추기 위한 차가운 무표정도 어느 쪽의 편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억누르는 무표정도 아니었다. 인형 같은 얼굴 위로는 오직 인간에 대한 환멸만이 어려 있었다.
“그게 무슨…?”
로위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어안이벙벙했다. 그동안 보아 왔던 에레즈 프리드웬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왕자의 말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할 때였다.
“왕성을 덮은 보호막은 성녀들의 관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지요. 그런데 어떻게 마물 쥐가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단 말입니까? 성녀들이 작당하여 그것들을 안으로 들였다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오드론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에레즈의 혀가 되어 주었다.
“마, 마물을 들이다니요! 성녀님들은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자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행위를 할 리가…!”
로위나는 저보다 두 배는 큰 오드론을 무시하고는 에레즈만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 성녀들은 인간 중에서 가장 마물에 박식한 자들입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
“여자들이 그만 유혹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오드론은 수염 하나 자라지 않은 매끈한 얼굴을 로위나에게 들이댔다.
“여자로 태어났으면서 자식을 낳는 의무에서 벗어나, 남자와 다를 바 없이 지식을 추구한 무리입니다. 그런 이기적인 분들이시라면 병을 퍼뜨리는 마물을 찾아내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알파 주제에… 감히 그분들을 모욕하는 것이냐!”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성녀는 왕국 전역에서 힘써 왔다. 구호 활동뿐만 아니라 마물에 대한 조사 등, 프리드웬 가문의 후원 아래 다양한 활동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물을 쓰러뜨리기 위함이지, 인간을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로위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큼지막한 손이 쫓아와 로위나와 그녀의 검을 동시에 붙잡았다.
“경께서는 줄곧 왕성 밖에 계셔 모르시겠지만, 마물 쥐가 나타난 후 영문 모를 열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병자를 치료하는 성녀단에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지요.”
오드론의 손이었다. 로위나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은폐했습니다. 저희도 성녀단의 계략을 파악한 후, 치료소를 불시에 습격하여 빼앗은 자료를 확인한 후에서야 알았습니다. 왕자님께서 그 마녀들을 벌하지 않았다면 진실은 영영 어둠 속에 묻혔을 겁니다.”
“…그분들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로위나는 분노를 억지로 삭이며 오드론을 노려보았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압수한 물품을 제공하겠습니다. 그동안 성녀단이 저지른 죄와 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로위나의 얼굴은 죽은 자의 얼굴을 본떠 만든 데스마스크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수색대로 파견을 나가 본성의 사정에 무지한 그녀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왕자님…. 부디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니면 최소한 그들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서 그녀는, 한 줄기 구원을 바라며 왕자를 찾았다. 비록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지만, 이는 그저 착각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다독이면서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에레즈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
“오드론의 말대로다. 남은 성녀들도 모두 잡아들여 지하 감옥에 수감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런 마지막 기대마저도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왕자님…!”
로위나는 더는 오드론과 대거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좌절하고 말았다.
“리론 후작님께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심란하신 점 이해합니다. 하지만 진정하십시오. 이제 리론 가문을 이을… 귀하신 몸 아니십니까.”
오드론은 귀족 영애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몸에 익지 않아 엉성한 예법이었다. 그녀는 거칠게 뿌리쳤다.
“왕자님, 정말 이 모든 것들이… 왕자님께서 내리신 결론이란 말씀이십니까!”
로위나는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자신을 기사로서 인정해 주고, 아버지와의 갈등을 겪을 때 은연중에 편을 들어 주던 왕자의 모습은… 더는 없었다. 왕자는 마치 사람 자체가 변한 것 같았다.
‘왕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셨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알파들을 곁에 두시고 그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지…?’
지금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로위나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
“왕자님.”
로위나는 에레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형제, 알버트의 갑주가 덜그럭거렸다.
“성녀단에서 정말 부패를 저질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논의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하시는 것은… 그동안의 왕자님답지 않으십니다.”
“…….”
“성녀의 힘 없이는 왕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부디 왕자님만을 따르는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성녀단에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경이 충심을 유지하는 한, 백성을 지켜 줄 병사는 충분하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고저가 없었다.
“저의 충심은… 당연히 영원할 것입니다. 다만, 세 기둥이 똑같이 헌신했기에 저희는 약속된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시어….”
“이제 우리에게는 인간보다 강하며, 배신하지 않는 병사들이 있다. 그러니 경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왕자님?”
이질감을 느낀 로위나는 고개를 들었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병사들이….”
에레즈 프리드웬의 푸른 눈은 로위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거대한 알파들이 벽처럼 지키고 선 채였다.
* * *
단 하루 만에 성녀단과 기사단의 주축들이 모조리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왕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는 내부인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피의 숙청이 일었다는 것을….
그 후로 열흘 가까이 흘렀다. 짧다면 짧은 시간. 그사이 에레즈 프리드웬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 버리고 말았다.
5년 전, 그는 왕의 상징인 성검을 들고 사람들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 후로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존재는 인간들에게 있어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그 또한 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냈다. 그러나 이제 왕의 주변에는 알파들만이 그득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왕에게 접근하지조차 못했다. 아니,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만일 왕자가 몇몇 알파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었다면, 기사단이나 성녀단은 힘을 합쳐 간언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 자체가 달라져 버렸다. 흠집 하나 없는 눈부신 외모만큼이나 그는 인간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모두가 변화를 눈치챘는데도, 정작 에레즈 본인만은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현실을 인지하는 감각은 마비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더 이상 인간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알파들에게 관심이 쏠린 것도 아니다. 그저… 그 무엇도 더는 에레즈의 흥미를 돋우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회의를 마치고 응접실을 개조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칼리번’이 있었다. 그는 이제 본성 깊숙이에 감춰진 답답하고 작은 방에 숨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향기가 섞인 공기로 호흡했다. 바깥일로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칼리번만으로 가득 채워졌다.
칼리번은 회복을 위해 침대 위에 잠들어 있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서 그가 입은 상처가 전부 나은 것은 아니었다. 에레즈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는 팔을 괴었다. 몇 번이나 보는 칼리번의 모습이었지만, 새삼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가 에레즈는 돌연히, 그가 또다시 눈을 뜨지 못할까 두려워졌다. 몇 달간이나 잠든 모습만 지켜봐 왔기 때문에 조금만 오래 눈을 감고 있어도 불안이 피어올랐다.
“으, 윽….”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레즈의 조금씩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 손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 위로 금세 붉은 자국이 새겨지고, 입에서 쇠 맛이 났다. 그토록 시름이 깊은데도 에레즈는 감히 칼리번의 이름을 부르거나 흔들어 깨우지 못했다. 그럴 권리는 죄인에게 없었다.
그렇게 벌을 받는 아이처럼 우두커니 있을 때였다.
“오셨군요, 왕자님.”
한참 후에야,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에레즈를 올려다보았다.
“…칼.”
아, 드디어 눈을 떠 줬다. 에레즈의 푸른 눈이 안도감에 깊어졌다. 에어리얼이 부스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에레즈는 깜짝 놀라 만류했다.
“아직은 안 돼! 당신은… 좀 더 쉬어야 해.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극구 만류했으나 에어리얼이 상체를 일으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칼….”
에어리얼과 마주 보게 되자 에레즈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칼리번이 말을 하고 있다. 새빨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살아 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에 차올라 에레즈는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저에게 달리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입술이 떨리기까지 하는 에레즈와 달리, 에어리얼은 일말의 감정을 비치지 않고 사무적으로 물었다.
“아…. 그러니까…. 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성녀들을 구속하고 지하 감옥에 감금했어.”
“잘하셨습니다. 가슴이 아프시겠지만, 성녀단을 무너뜨려야 앞으로의 계획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가려는 길에 그들은 성가신 방해꾼밖에 더 되지 않을 테니까요. 고문을 해서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자백을 받아 낸 후, 빠른 시일 내에 처형하도록 하죠.”
‘칼리번’의 칭찬이었다. 에레즈에게 그보다 달콤한 포상은 없을 것이다.
“그… 그건….”
그런데도 에레즈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에어리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칼리번’이 불쾌해하는 모습은 에레즈에게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에레즈는 늘 깨어난 칼리번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 하지만… 죽이는 건……. 으, 윽…!”
에레즈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에레즈의 내부에서 정반대의 명령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킨 탓이었다.
에어리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에레즈를 세뇌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공을 들였다. 전쟁에 쓰이고 버려지는 마물 병사야 오메가의 향기로 행동을 지배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에레즈 프리드웬은 다르다. 그는 이 게임의 가르는 정하는 가장 중요한 패였다.
그러므로 에레즈는 단순히 조종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아군을 모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에어리얼에게 종속되어야만 했다. 마치 인간들이 만들어 낸 계급이나 종교처럼 말이다.
에어리얼은 믿고 의지하던 젠을 분리해 에레즈를 고립시키고, 칼리번의 기억을 보여 주어 그의 무력감과 죄책감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 사실은 자기 자신과 칼리번의 등에 칼을 꽂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에는 오직 ‘칼리번’만 남게끔.
그렇게 강력한 암시에 걸린 에레즈는 이성이 존재하되 뒤틀린 방향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그것은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꼭두각시처럼 이용당하는 마물이나 마물 혼혈보다도 위험했다. 그러나 아직은 세뇌가 완벽하지 않았는지 무조건 명령한 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 한들, 저항이 얼마나 가겠는가?
“제가 굳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에어리얼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괜히 저 때문에 왕자님께서 고통을 받으시는 것 같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저와 왕자님은 고작 수십 일을 함께했지만, 그들은 8년을 함께 싸워 온 전우일 테니까요. 저보다 소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네, 비록 그자들이 저를 죽이려 했을지라도….”
“그렇지 않아….”
에레즈는 그의 얼굴만큼이나 창백한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저를 죽이려 했던 자들은 성녀단뿐만 아니라 기사단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전부를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아끼시는 왕자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런데도 망설이시다니. 성녀단이 저지른 죄악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들이 마물을 성안으로 들여 저뿐만 아니라 모두를 역병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에어리얼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칼, 나는….”
에레즈는 혼란과 고통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몸을 웅크렸다.
“왕자님께서는 여전히 나약하시군요.”
“…….”
“기억나십니까? 8년 전, 저는 알테르 프리드웬의 손에 죽어 가던 왕자님을 구해서… 숲으로 도망쳤습니다.”
에레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저는 사실 당신을 구한 일을 후회했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줄이야…. 차라리 알테르 프리드웬의 편에 설 것을, 하고 말이죠.”
“…….”
“왕자님께서도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는 당연히 알고 계셨겠죠? 만약 제가 당신이었다면 마물에게 스스로 잡아먹혀 구차한 목숨을 끝냈을 겁니다. 그런데도 왕자님께서는…. 하아, 저의 피와 살을 뜯어 먹으며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사내의 배를 찢고 태어난 마물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퍼부어지는 악담에 에레즈의 푸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에어리얼은 보란 듯이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칼리번의 목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도끼로 몇 번이나 잘렸다가, 간신히 아문 상처였다. 에레즈의 떨리는 손이 상처에 닿으려 했다. 에어리얼은 모질게 그의 손길을 쳐 냈다.
“당신은 지금도 그때와 똑같습니다. 이 상처가 정말 보이시긴 합니까? 왕자님께서 저를 제대로 보호해 주셨다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을 겁니다.”
에레즈는 무릎을 꿇은 채로 칼리번 앞에 고개를 숙였다.
“흐, 읏…. 칼,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다만, 나는…. 평생 당신에게 속죄할 거야. 다시는 당신이 아파하지 않도록…. 이 진심만은… 제발, 받아 줘.”
“당연한 말을 왜 하십니까? 행동으로 보여 주셔야 합니다. 저는 왕자님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과 삶을 보상받아야 하니까요.”
“…인간과 당신 사이에서 잠시라도 방황했던 것을 후회해. 평생을 칼리번, 당신에게 속죄하면서 살겠어. 그러니… 그러니까….”
눈물이 먼지가 쌓은 바닥에 떨어지자 검은 자국이 되었다. 팔이 잘려 나가고, 눈이 뽑히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에레즈가 그 모든 고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칼리번과 함께 보냈던 시간 때문이었다. 힘들 때마다 그가 해 주었던 말을, 손길을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칼리번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니. 바닥으로 떨어진 손이 떨렸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저를 괴롭힌 성녀와 기사를 모두 죽이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때, 에레즈의 어깨에 에어리얼의 손길이 닿았다. 움찔, 에레즈는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저를 위해.”
눈물로 가득 찬 푸른 두 눈에는 오직 칼리번만이 담겨 있었다.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하셨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진짜 적’이 나타났을 때 왕자님께서 목숨을 걸고 그를 죽여 주십시오.”
에어리얼의 손길이 뺨에 닿았다. 그는 아이처럼 울고 있는 에레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에레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나타날 진정한 적에 비하면야, 성녀의 죄는 참작할 여지가 있지요. 알겠습니다. 나약한 왕자님께서 그들을 직접 죽이지 못하시겠다니…. 두고 보도록 합시다.”
“…두고 본다고?”
“네. 광장에 형틀을 설치해 죄수들을 매달아 두는 겁니다. 그리고 판단은 백성들에게 맡기는 거죠. 성녀들이 무고하다면 죽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죄가 깊다면 돌에 맞아 죽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
에레즈는 한참이나 돌처럼 굳어 있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간신히 성녀단은 처벌했지만, 언제 또 누군가가 저를 다시 죽이려 들지 모릅니다.”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니 왕자님께서는 오늘부터 밤에도, 낮에도 잠들지 말고 저를 보호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핥았다. 에레즈는 눈을 감았다.
“당연히… 당신이 말하기 전에 그렇게 해야 했는데. 그런 불안을 먼저 입에 올리게 해서 미안해.”
“알고 계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왕자님. 앞으로는 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십시오.”
“그럴게.”
“오직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에레즈의 눈물까지 빼앗은 에어리얼은 더 이상 그가 필요하지 않았다. 에어리얼은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에레즈는 그를 지키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홀로 남은 에어리얼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소매를 걷어 칼리번의 팔 안쪽을 살폈다. 에레즈가 오기 전에 미리 상처를 남겨 뒀었다.
“…….”
그러나 핏자국 외에는 상처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압박하면, 아무리 너라도 튀어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에어리얼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끓는 용암을 퍼 올린 것처럼, 그의 붉은 눈은 매섭게 이글댔다.
* * *
퍽, 돌멩이가 머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었다. 커다란 나무에 전신이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겨운 괴물 자식!>
<너 같은 마물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마물의 횡포에 시달리던 인간들은 비교적 약한 마물이나 마물 혼혈을 생포해 화풀이를 하곤 했다. 남자고 여자고, 노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돌을 던졌다. 곧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피가 그의 이마 위로 흘렀다.
칼리번은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 아니, 에어리얼의 기억이다.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몸에 동화됐기 때문일까. 에어리얼의 기억을 엿보다 보면 칼리번은 어느새 자신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에어리얼의 목적이나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필수거니와, 그의 육체에 갇힌 이상 거부할 수도 없었다.
억지로 맛보는 기억의 수프. 그 안은 거무튀튀한 피와 살점으로 채워져 있다. 입 안이 텁텁했다. 퉤, 붉은 머리의 소년은 피가 섞인 이빨을 토해 냈다.
팔다리가 부러진 채, 절벽 아래로 내던져진 붉은 머리의 소년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회복 과정에서 뼈가 잘못 붙었는지 다리를 절게 되었다. 동료가 있었다면 뼈를 다시 부러뜨리고 맞춰 주었을 테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여전히 인간에게도, 마물 혼혈에게도, 마물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굶주린 개에게 먹이를 줄지언정 그에게는 뼈다귀 한 점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얻어맞거나 쫓겨나기 일쑤였다.
자연의 법칙, 힘의 순리대로라면 태생적으로 나약한 존재는 진작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다. 붙잡히고, 죽도록 얻어맞았지만 도망치고 숨으며 살아남았다. 진창에 고인 빗물을 마시고 썩은 고기를 주워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잡았다, 이 도둑놈!>
어지러웠다. 몽둥이가 머리를 강타했다. 그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눈앞이 흔들리고 자신을 짓누르는 힘을 느꼈다. 발목이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사람들은 화풀이를 하고 돌을 던지기는 했어도 직접 잡아 죽이려 들지는 않았다. 제 손을 더럽힐 필요 없이 알아서 뒈질 테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살고 싶어 비명을 질렀다. 손발을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고, 꼴사납게 버둥거렸다.
<알파라더니 약해 빠졌군.>
제압할 수 있는 알파를 만난 것이 즐거운지 그들은 연신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땅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인간들에게는 오락이었다.
<버러지 주제에 귀한 식량을 훔쳐먹었겠다?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 제길, 가만히 좀 있어!>
인간들은 마구 할퀴어 대는 그의 손을 묶었다. 또다시 팔과 다리가 부러져서 강물에 던져질지도 모른다! 한 번 학습한 두려움이 몸을 지배했다. 그는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이봐, 뭘 하려는 거야? 저건 마물 혼혈이야, 기형 알파라고!>
<저 녀석 말이 맞아. 집어넣어! 이 도둑놈한테 무슨 병이 있을 줄 알고? 개보다도 더러운 꼴을 보고도 서냐?>
<뭐 어때? 얼굴은 제법 쓸 만한데. 이것 봐….>
엉망으로 자란 머리카락을 해치자 때로 꼬질꼬질한 얼굴이 드러났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짐승 소리를 내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그가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인간의 언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인간들은 풀어 주었을까?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처음 범한 상대가 알파가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그는 아직 오메가로 발현하지도 않았었다.
* * *
“성녀님들이 반역을 저질렀다고?”
“세상에나!”
“그분들이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도 마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데….”
존경스러운 성직자가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어 광장에 매달렸다. 처음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통치는 외면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응보를 받게 된다. 더구나 왕실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옛 시절도 아니었다. 수년간 무너진 왕실을 대신한 성녀단은 백성의 지지가 두터운 집단 중 하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장에 매달린 성녀를 멀뚱하니 올려다볼 뿐, 감히 야유하거나 돌을 던지지 못했다.
‘…그래. 왕자님께서 잘못 판단하신 게 틀림없다. 백성들의 반응도 부정적이고…. 우리도 계속해서 벌의 강도를 낮춰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곧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그 광경을 지켜보며 로위나는 성급하게나마 희망을 품었다. 왕자님께서 성녀단을 오해해 크게 노하셨다 해도, 그들이 그동안 바친 희생과 헌신을 곧 떠올리실 거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로위나의 판단은 옳았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성녀단이 자식도 남편도 없는 여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민의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기한걸. 어딜 가나 나타나던 쥐새끼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단 말이야….”
성녀들이 싹 잡혀 들어간 후, 왕성 내에서 창궐하던 쥐 떼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정말 성녀님들이 마물 쥐를 왕성으로 불러들인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분들이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벌여서 도대체 뭘 얻을 수 있는 건데?”
“이봐, 내 말 좀 들어 봐. 성녀단이 말이야…. 성안에 먹을 것이 없으니, 우리에게 쥐를 대신 먹이려고 보호막을 풀고 들인 거라고 하더군. 그러다 병이 퍼진 거고!”
할 일 없는 남자들은 멋대로 소문을 퍼뜨렸고 불화는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제기랄…. 본인들은 빵을 먹으면서 우리는 병든 쥐나 뜯어 먹으라고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야?”
“성녀단에는 잘난 여자들만 모여 있으니까 그렇지! 우리처럼 마물의 독기가 묻은 쥐 고기는 못 먹겠다는 거 아니겠어?”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늘어난 마물 쥐는 실제로 백성들의 요긴한 식사 거리가 되었다. 기사단과 성녀단에서는 그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지만, 배급이 줄었기에 사람들을 막을 명분이 적었다.
“이게 다 사람들이 왕성으로 너무 많이 모인 탓이래.”
“사람 수를 줄이려고 그런 짓을…? 마녀나 할 짓을….”
“그러고 보니 성녀들이 우리 같은 것들은 쓸모없다고 말하던 걸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마물 쥐를 잡아먹는 이들은 실재했으며, 그로 인해 영문 모를 병을 얻어 치료소로 들어간 경우도 없잖아 있었다. 단절된 공간에서 퍼지는 역병. 무지한 백성들이기에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으나, 은연중에 마물 쥐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누구나 안고 있었다.
“흐음… 따지고 보면 성녀란 가정의 의무를 저버리고 성녀단에 들어간 여자들이잖아?”
“아이와 남편이 없으니 아쉬울 게 없겠지. 아니, 오히려 치료소가 비어서 편해질걸?”
“그래…. 성력을 지닌 여자들은 성 밖으로 쫓겨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힘없는 우리만 쫓아내려고…!”
처음에는 형틀에 매달린 성녀들을 가엾게 여겨 몰래 음식을 먹여 주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성녀단을 향한 부정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하니 모두가 죄인에게 매정해졌다.
“그에 비하면 용병들은 대처 방식부터가 다르지. 봐, 마물이 들끓는 바깥으로 나가서 먹을 걸 구해 오잖아?”
그사이 왕성에는 새로운 영웅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몰락한 영웅과 새로운 영웅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용병님들 덕분에 내 아이들이 더는 더러운 쥐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어. 치료소 안에서 궁상이나 떠는 성녀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일이야. 감사할 따름이지!”
오메가 토벌을 위해 왕성 밖으로 떠난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병력이 안정된 신용병 연합은 왕자의 허락을 받고는 자진해서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마물로 가득 찬 숲에서 독기에 물든 짐승이나마 사냥해 왔다. 신용병 연합은 사냥감을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전부를 바쳤다. 에레즈는 왕성 내의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평하게 분배했다.
“전에는 겉모습만 인간과 비슷하지, 속은 완전히 마물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는데….”
그동안은 사람들은 마물의 피가 섞인 알파를 두려워하고 배척했다. 그러나 평판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빈곤과 전쟁 아래에서 평생을 시달리다 보면, 악마라도 숭상하게 되는 법이었다.
“알파기는 해도, 역시 남자라서 다르다니까. 믿음직해.”
더구나 알파의 겉모습은 튼튼한 사내이기도 했다. 여자들이 모든 일을 도맡은 탓에 기가 죽어 있던 인간 남자들은 알파에게 자신을 대입했다. 노팅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에, 오히려 마음 편히 알파의 편을 드는 여자들도 생겨났다.
“혹시 기억하나? 왕성에서 알파가 찢겨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지. 사실 그것도 성녀단에서 꾸민 짓이라더군.”
“권력을 뺏기는 게 두려워서 치졸한 짓을 벌인 거지.”
“뭐? 그런데도 알파들은 우리를 도와주는 건가?”
“이것 참, 그동안 멀리했던 게 미안해지는데….”
한 집단이 몰락하기가 이토록 쉬운가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이 같잖은 이야기보다 더욱 허무맹랑하곤 했다. 남자는 원래부터 여자를 증오했고 가끔은 여자도 같은 여자를 증오했다. 에어리얼이 남녀가 섞인 기사단이 아닌 성녀단을 먼저 무너뜨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 * *
세 기둥. 그들은 똑같이 왕국을 지탱했다. 그러나 사실 힘의 균형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인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물을 벨 수 있는 성검…. 왕자에게 그 검이 없었다면 인간과 알파가 한 공간 안에 공존하는 상황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에레즈 프리드웬이 용병 연합의 편이 되자 성녀단은 몰락하고 기사단은 발언권을 잃고 말았다. 성녀단은 순식간에 뿌리 뽑혔다. 그러나 폭풍을 모면한 기사단이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로위나는 갑작스럽게 왕실 재건 기사단을 이끌게 되었다. 리론 후작은 오늘내일하며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성녀단의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왕의 말에 복종할 것인지….
그러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남은 것들을 지켜야만 한다. 로위나는 신용병 연합과 부딪쳐 산화할 수도 있었다. 그간 의문스러운 죽음이 너무 많았다. 이 점을 들어 설득한다면 기사들도 자신을 따라 줄 것이다. 그러나 알파들이 에레즈 프리드웬을 겹겹이 감싸고 있었다. 성녀단의 편을 들다가는 기사단 자체의 존속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그만큼이나 알파의 권위가 강해졌다.
로위나는 왕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렸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성들조차 명예가 더럽혀진 성녀들에게 등을 돌렸다. 이제는 자진해서 오물과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로위나는 귀족의 재량으로 달이 뜬 밤, 성녀들에게 물을 먹이고 씹을 것을 입에 넣어 주었다.
“미안합니다. 당장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밖에….”
로위나는 직접 성녀를 도우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다 못해 사과하기도 했다.
“으… 으으….”
그럴 때면 손발이 묶인 채 광장에 걸린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의 마음이 돌아설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로위나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아… 아닙니다…. 이 또한 견뎌 내야 할 고난입니다. 왕자님, 께서… 간계에 빠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이런 때에…… 어째서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 버렸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성녀들은 한결같이 결백해 보였다. 로위나는 그녀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멋대로 흘리는 말에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제가 성을 비운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로위나는 침대 곁에 앉아 비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론 후작의 얼굴은 피 묻은 붕대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예전부터 얼굴을 천과 붕대로 가리고 다녔으나 지금은 그보다 더욱 끔찍한 상태가 되었다.
“…알…….”
그때, 리론 후작이 발작하듯이 중얼거렸다.
“…아버지?”
로위나의 두 눈에 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버트. 알버트….”
끝내 리론 후작은 ‘로위나’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았다.
“…….”
웅얼거리던 리론 후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에 빠져들었다. 로위나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을 묻었다.
* * *
사람들은 오랜만에 진실된 기쁨을 느꼈다. 바로 자신보다 고결하다고 인정받던 여자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하는 일에서였다. 쾌감은 왕성을 탈환했을 때의 감격에 준했다. 희생양을 통해 사람들은 낡은 빈곤을 잊고 쉽게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성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모두가 성녀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누구도 마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알파 중 누구도 성녀를 건들지 않았다. 그러나 성녀들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에레즈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보십시오. 제 말대로 백성들이 알아서 죄인을 벌하지 않습니까?”
에어리얼은 곁에 서서 보란 듯이 말했다.
“왕자님께서 자비롭게 그들을 처형하셨다면 저런 모욕을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왕자님 때문에 성녀들은 몇 배는 긴 고통을 받다 죽게 생겼군요.”
두 사람은 함께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전신은 오물투성이에 옷은 찢어지고, 두건 안에 가지런히 숨겼던 머리는 풀어 헤쳐졌다. 두 팔은 양편으로 묶여 있어 고개를 떨구는 것 외에는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에레즈는 당장에라도 그녀들을 땅으로 내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왕자님께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저보다 더한 폭동이 일어나겠죠.”
그럴 때면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가슴 깊숙이 숨겨져 있던 공포를 끄집어냈다. 무표정하던 에레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마 두렵습니까? …아직도 저들에게 마음이 남아 있으시군요.”
“나… 나는….”
에레즈는 혼란스러운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에레즈의 정신이 깨어나기 직전, 에어리얼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흔히들 마물에게는 본성이,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고 하죠. 하지만 그 말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러고는 금이 가기 시작하는 에레즈의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마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고, 옳은 것을 판단하는 능력…. 그것이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주장하다니, 참으로 오만하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자신과 다른 존재를 죽여 없애야 분이 풀리는 악성만이 심장에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더 끔찍한 악성으로 짓눌리고 나서야 안도하고 행복해합니다. 반대로 호의를 베풀고 상냥하게 대하면 도리어 살점을 파먹으려 들 겁니다. 그 증거가 저기, 광장에 걸려 있지 않습니까?”
“…….”
“저 대단한 악성은 인간의 가장 큰 무기이긴 합니다. 마물이 이 땅에 나타나기 전까지 세상의 왕으로 호령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아닌 것을 배척하고 분리해 낸 것을 보면 말입니다. 성 밖에 득실거리는 마물도, 인간의 피가 섞인 저희 같은 마물 혼혈조차도 저들의 악성에는 견주지 못하겠죠.”
에어리얼은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광장이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로 작았다. 그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안에서 허상의 인간들이 으스러졌다.
“왕자님께서는 저런 벌레들을 ‘칼리번’의 목숨과 저울질했던 겁니다.”
에레즈는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은 얼음처럼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에어리얼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먼저 움직이고, 허락하지 않는 이상 에레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누군가 광장에 매단 성녀를 몰래 풀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드론의 보고였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기사단에서 물밑으로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부터 성녀단을 해산시킨 것에 대한 불만이 컸으니….”
“하하! 그럴 리가 있겠어?”
에어리얼의 웃음소리는 도리어 주변의 공기를 긴장시켰다.
“병사를 풀어 반역자를 색출하도록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렇다면… 이대로 성녀들이 계속 도망치게 두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냥 내버려 둬. 형틀이 비면 지하 감옥에 감금해 둔 성녀를 새로 꺼내다 묶으라고. 우리 손에 아직 미끼가 많이 남아 있으니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해!”
그러려고 일부러 매달아 둔 거니까. 에어리얼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전부 도망쳐도 상관없어. 그깟 성녀, 백 명이 모여도 내 힘으로 제압 가능하니까.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건 단 한 명뿐이다. 그것만 빼앗기지 않으면 돼.”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오드론이 물러났다.
* * *
붉은 머리의 소년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모든 게 다 이 머리카락 때문이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은 인간과 마물 어느 쪽에도 섞여 들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눈에 띄기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몸에 난 털을 모조리 뽑아내고 싶었다.
신은 그에게 눈에 띄는 형상을 주었으나 그것을 감당할 능력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함께 할 가족도, 무리도 없다. 자연적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개체였다. 그러나 몇 해가 흘러도 그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염치없게도 그의 생존법은 인간 남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알파면서도 약해 빠졌지만, 재생 능력은 그래도 평범한 인간보다 나았다. 한번 ‘그런 일’을 겪으면 끙끙 앓았으나 대신 살점이 붙은 뼈다귀를 받을 수 있었다. 보통이라면 개에게나 던져 줬을 음식이나, 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과분했다.
<이봐,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러나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일을 치르던 중 어디선가 고함이 울려 퍼졌다.
<누구…. 크헉!>
몸을 짓누르던 사내가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는 넝마를 주워 입는 대신 눈 앞에 펼쳐진 괴상한 광경에 집중했다. 장정들이 볏짚처럼 풀썩 쓰러져 갔다. 그 광경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짜릿했으나 이대로는 자신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어서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먹질을 하는 그 사람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침내 붉은 머리 소년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모두 쓰러졌다. 그 사람은 마지막으로 남은 소년에게 다가왔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이런 데서 뭘 하는 거냐.>
붉은 머리의 소년에게 새로운 그림자가 덧발라졌다. 칼리번은 붉은 머리의 소년과 함께 구원자인지, 학살자인지 모를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색을 보면 이쪽인 것 같은데….>
그는….
<너 혹시… 여자냐?>
아니, 그가 아니었다. 그녀였다.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붉은 머리의 소년은 목을 붙잡혔다. 가느다란 몸이 순식간에 어둠 밖으로 끌려 나갔다. 갑자기 빛을 보게 되어 눈이 부셨다. 눈이 멀 것만 같았다.
<…뭐야, 여자도 인간도 아니잖아.>
붉은 머리의 소년은 쓰라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자신처럼 붉었으나 조금 더 옅었다.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시간, 석양과 어울리는 색이었다.
* * *
어둠이 세상을 차지한 시간이었다. 왕성 안은 고요했다. 붉은 눈을 빛내며 왕성을 돌아다니는 마물 쥐는 더는 없었으며 백성들은 깊이 잠들었다. 거리를 달리는 그림자는 어둠보다도 더욱 짙었다.
그림자는 광장에 매달린 형틀을 지나, 곳곳에 선 보초들을 피해, 재빠르게 본성으로 향했다. 왕성의 지리는 물론 기사단과 신용병 연합의 병사 배치에 훤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림자는 본성으로 잠입했다. 신용병 연합에서 차출된 알파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알파의 오감은 인간보다 예민하다. 그림자는 기척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동했다. 본성 안으로 침입한 후에는 오히려 쉬워졌다. 바깥보다 숨겨진 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점을 고려하고서라도 지나치게 수월한 감은 컸다.
‘각오했던 거에 비해 너무 쉬운데?’
마치 이리로 가라며 길을 터 준 것처럼…. 괜한 의심이 들 정도다. 아니, 쓸데없는 걱정은 삼가자. 그림자는 정신을 다잡았다. 본성을 지난 그림자는 중앙 탑으로 향했다. 중앙탑은 예로부터 중죄를 지은 왕족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왕족은커녕 귀족도 거의 살아남지 못한 현재는 아무도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앙탑은 본성과 달리 외길뿐이다. 계단을 오르는 것 외에는 외벽을 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림자는 어쩔 수 없이 탑의 입구를 지키던 병사를 암살하고 계단을 올랐다. 탑은 좁고 높다. 계단 또한 그랬다. 쉼 없이 오르는 동안,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헉, 헉….
어느새 돌계단을 밟는 걸음과 숨소리만이 탑을 가득 채웠다. 외벽에 난 좁은 창에서 때때로 달빛을 비춰 주었다. 그림자의 목적은 명확했다. 그래서인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눈에 띄는 방문 앞에서 헤매는 일이 없었다.
마침내 도달한 장소는 탑의 꼭대기였다. 그곳은 단 하나의 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조악한 잠금쇠가 전부로, 문 앞을 지키는 이조차 없었다. 철컥, 철컥, 쇳소리가 비밀을 깨고 어둠을 깨웠다.
덜그럭—
잠금쇠가 땅으로 떨어졌다. 묵직한 철문이었다. 두세 명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밀 무게였으나 그림자는 달랐다. 몸에 힘을 주자 단번에 철문이 밀려났다.
죄인의 방에는 낡은 침대와 의자, 그리고…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늦은 밤인데도 천을 짓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을 텐데도 미동조차 없다. 오직 자신이 하는 일— 혹은 해야만 하는 일에만 집중할 뿐.
하얀 쐐기풀로 엮은 천에는 성력이 깃들어 있지는 않았으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빛을 냈다.
“왕비님.”
그림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모시러 왔습니다.”
그리고는 왕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방은 창밖을 볼 수 있는 구조군요. 그렇다면 현 상황을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이젠 성녀들의 보호를 받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피신하셔야 합니다.”
“…….”
“붙잡힌 성녀 전부를 구하지 못했으나, 일부는 새로운 은신처로 피신시켜 두었습니다. 남은 성녀들에게도 위치를 알려 줬으니 차례로 탈출할 겁니다.”
그러나 왕비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긴말할 것 없이, 당장 저와 함께 가시죠.”
제 할 말을 마친 그림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은 익숙지 않아서…. 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싶지만, 한시가 급합니다. 무언은 허락으로 알겠습니다. 혹 불편하시다면 그때 말씀하십시오.”
그림자는 성미가 급한 편인지 왕비에게 척척 다가갔다. 그가 왕비를 두 팔로 안아 들려 할 때였다.
“거기까지다.”
싸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림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문 앞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림자를 향해 성검을 겨눈 채였다. 그의 창백한 인상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에레즈의 곁에는 빛보다는 어둠에 훨씬 잘 어울리는 사내가 서 있었는데, 팔짱을 끼고는 문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예상보다 늦었군. 언제쯤 오나 한참이나 기다렸다고, 젠?”
“…….”
“아니지…. 여기서는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으려나.”
호명을 당하자 그림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에어리얼은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웬.”
* * *
<인간을 꼬여 내는 기형 알파라….>
여자는 붉은 머리의 소년을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보며 평가했다. 서슬 퍼런 눈빛에 소년은 겁을 먹었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악마는 보자마자 죽여야 하는 게 원칙인데.>
그녀는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빈말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마을 여자들과는 달랐다. 마음만 먹는다면 나뭇가지를 꺾듯 사람의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죽인다.
나를, 죽인다.
허공에 뜬 발이 허우적거리며 그녀를 걷어차려 들었다.
<윽…. 이 자식 봐라?>
무의미한 반항에 어처구니가 없는지, 여자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우, 으… 으으!>
처음에는 두려움이 컸으나 점차 울분이 쌓여 갔다. 조금만 더 버티면 사흘 만에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데! 무식하게 힘만 센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모든 일을 망친 것이다.
죽인다, 죽는다는 말은 늘 들어 왔다. 이 흉악한 여자의 손아귀에서 도망친다 해도 먹이를 줄 인간이 없어졌으니 굶어 죽고 말 거다. 어차피 죽게 될 거, 마지막으로 배는 채워야겠다 싶었다.
<으, 죽어, 죽, 어, 으, 아아아…!>
붉은 머리의 소년은 그가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말을 외치며 두 손으로 여자를 마구 할퀴어 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여자의 팔을 물어뜯기까지 했다.
<아악! 날 물어?! 이거 진짜 지랄 맞네…. 씨발!>
강하지는 않으나 귀찮은 공격에 그녀는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을 땅에 내던져 버렸다. 소년은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자가 쥐어 팬 사내들에게 네발로 기어갔다. 그들은 원래의 형상을 잃어버릴 만큼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사내들의 몸과 짐가방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반쯤 썩은 빵조각을 발견했다. 괴물 같은 여자와의 몸싸움으로 인해 오물이 묻었으나 그마저도 어디냐 싶었다. 소년은 여자에게 뺏기기 전에, 썩은 빵 조각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여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년이 웩웩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하… 이것 참.>
한참 후, 등 뒤로 허탈한 한숨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붉은 머리의 소년은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언제 머리채를 잡혀 내동댕이쳐질지 모를 일이었다.
소년이 짧고 허기진 식사를 마쳤을 때,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
이때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붉은 머리의 소년은 멍하니 그 여자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자신이 아닌 인간 사내들을 때린 걸까? 음식이 목적이었다면 어째서 뺏어 가지 않을 거지?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기에, 작은 몸은 혼란에 빠졌다.
<오, 아직도 여기 있었네.>
영영 떠난 줄 알았는데…. 그녀가 돌아왔다. 어깨를 축 늘이고 멍하니 있었으면서 막상 여자가 돌아오자 붉은 머리의 소년은 잔뜩 긴장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얼른 도망칠걸, 하고…. 붉은 머리의 소년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여자를 노려볼 때였다.
<자.>
툭, 여자는 붉은 머리 소년의 발치에 무언가를 던졌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두 팔로 머리를 가렸다. 그러나 무릎에 닿은 건 돌이 아니었다.
<배가 고팠던 거지?>
커다란 빵이었다. 간신히 눈을 뜬 소년은 빵을 보자마자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살면서 온전한 빵 덩이를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은 빵을 재빨리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이를 박아 넣었다. 온전하다고 해 봤자 말라비틀어진 검은 빵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없이 보드랍고 고소했다.
<여자처럼 생긴 기형 알파가 사내를 홀린다는 소문이 있어서 와 봤는데. 띨띨한 게 그럴 머리는 아닐 것 같군.>
여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눈앞에 괴물 같은 여자가 있든 말든 정신없이 빵을 물어뜯었다. 이런 행운이 다시 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 소년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앞으로 이딴 짓은 하지 마라.>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붉은 머리 소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별 차이가 없는데도 소년은 이상하게 귀가 간지러웠다.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워도 그딴 짓으로 연명하지는 않아. 배가 고프면 뭐든 못 하겠느냐마는…. 땅을 파서 벌레라도 먹든가. 젠장, 쪼끄매 가지고는….>
<…….>
<정 먹고살 방법이 없으면….>
<…….>
<내가 더 줄 테니까.>
빵을 있는 대로 꾸역꾸역 밀어 넣다 보니 숨이 막히는지, 붉은 머리 소년의 얼굴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젖은 빵은 삼키기에 좋았다. 소년은 욱, 욱 소리를 내며 목 안으로 욱여넣었다. 목이 메고 콧물이 차올라 소년은 자꾸 훌쩍였다.
<…내 말 듣고 있냐?>
한쪽 팔로 턱을 괴던 여자는 검지로 소년의 미간 사이를 꾹 눌렀다.
<흐으, 아…!>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화들짝 놀라 벌러덩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소년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볼은 빵으로 가득 차 부풀었고 멍든 얼굴은 오물과 눈물로 범벅이었다. 소년은 울면서도 자신이 왜 우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생존 본능밖에 없는 무지한 괴물. 그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런데….
<큭…. 푸하하!>
그 꼴을 보고는, 저 여자가 웃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웃는 광경을 생전 처음 보았다.
<내 이름은 기네비어, 그웬이라고도 하지. 생긴 거랑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 대신 ‘덩치’라고 불리지만 말이야. 뭐, 그래도… 첫 만남에는 제대로 이름을 말하는 게 예의니까.>
여자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소년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릴 뿐 표정을 짓지 못하는 얼굴은 들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나랑 가자.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걸?>
<…….>
<너 거울 본 적 없지? 얼굴만 봐도 웃기니까 데리고 다녀야겠다.>
이번 일만 처리하고 떠나려 했는데, 졸지에 혹 하나 더 붙이게 생겼네. 그녀는 낄낄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가락 두 개를 간신히 움켜쥐었다.
젠은…. 아니, 그웬은 칼리번이 알고 있던 모습과 같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이름이 다르다든가, 외면적으로 서너 살 정도 어려 보인다든가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해지고 낡은 성녀복을 입고 있었다.
* * *
“기네비어. 저 백치 왕비에게 어울릴 법한 이름이지만, 당신의 것이지.”
에어리얼은 달빛 아래 드러난 존재에게 말했다.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졌기에 그림자는 거침없이 후드를 내렸다.
“너는 칼리번이 아니란 뜻이군.”
어둠 속에서도 석양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카락은,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젠은 제 몸으로 왕비를 가렸다. 어둠 속에서도 칼리번의 두 눈이 붉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흔해 빠진 추억 놀이는 굳이 할 필요 없겠지? 당신이라면, 이런 모습이 되었어도 내가 누군지 구별 못 할 리가 없을 테니까.”
에어리얼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지? 설마 우리가 왕성을 탈환했을 때부터 이미 칼리번의 몸을 뺏었던 거냐?”
“그래. 그것도 모른 채 당신들은 적이 남긴 선물을 중심부에 숨겨 두고 기밀을 줄줄 풀어놓았지.”
과거의 기억을 더듬은 것일까, 젠의 눈동자가 후회로 물들어 갔다.
“당신을 밖으로 쫓아내는 일이 제일 힘들었어. 내가 그럴듯하게 칼리번인 척한다 해도, 에레즈 프리드웬의 정신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감이 좋은 당신은 눈치를 챌 테니 말이야.”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힐끗 바라보았다. 에레즈는 성검을 젠에게 겨눈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해내지 못한, 이 멍청한 왕자와 당신은 달라. 당신은 아니다 싶으면 칼리번도, 에레즈 프리드웬도 그 손으로 죽일 여자니까.”
“…….”
“내가 칼리번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에레즈 프리드웬이 벌써 죽는 건 곤란하거든. 그래서 당신 앞에서는 죽은 듯 잠든 척했지. 북문에 마물을 소환하는 도박을 한번 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 도박은 성공했다. 피난민들이 공격당하자 에레즈 프리드웬은 예민해졌고, 왕성 안에는 붉은 오메가를 토벌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대신해 수색을 떠난 당신의 충성심, 감명 깊었어. …아니지. 그렇게까지 ‘붉은 오메가’가 죽이고 싶었던 건가?”
에어리얼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행운은 내 편이었던 것 같아. 왕성 밖으로 나간 당신은 실종되었으니까. 아마도 ‘나’를 만났겠지. 소감은 어땠어? 붉은 오메가가 뭐라고 하지는 않던?”
에어리얼의 빈정거림에 젠은 이를 악물었다. 뻣뻣한 목 위로 굵은 핏줄이 솟아올랐다.
* * *
그웬은 붉은 머리의 소년을 거뒀다. 사실 그보다는 ‘부하로 삼았다’라는 편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소년을 최소한의 인간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묵은 때를 벗겨 주고, 찢어지고 늘어진 것이 아닌 옷을 구해다 입혀 주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딱히 없네. 계속 야, 이 자식아, 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음, 어디 보자.>
그웬은 팔짱을 끼고는 고민에 빠졌다. 붉은 머리의 소년도 그녀를 따라 팔짱을 꼈다. 이 시기의 그는 무조건 그웬을 따라 하곤 했다.
<…에어리얼.>
<아…?>
<에어리얼, 어때?>
한참 후에 그럴듯한 답을 찾았는지, 구겨져 있던 그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성녀원에 있었을 때, 공기의 정령을 ‘에어리얼’이라고 부른다고 배웠거든. 에어리얼. 이제부터 그게 네 이름이다.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유롭게 가라는 뜻이야!>
<에우…리얼.>
붉은 머리의 소년은, 에어리얼은 그녀가 지어 준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직 말을 배우는 중이라 자꾸만 발음이 셌다. 이름을 똑바로 말하지 못하면 그웬은 그게 그렇게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에어리얼은 어딘지 오기가 솟아올라 밤새도록 연습했다. 그런 사소한 일상은 에어리얼에게 있어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그 후, 에어리얼은 그웬을 따라 왕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어디든 함께 다녔다. 에어리얼은 그웬의 예상보다 훨씬 영리했다. 1년을 붙어 다니니, 몇 단어 정도만 더듬거리던 것이 무색하게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됐다 싶었으나 곧 재앙으로 바뀌었다. 말문이 트자 시종일관 재잘거리는 탓이었다.
<당신은 인간 여자처럼 가슴이 달렸는데 왜 알파인 거야? 성녀는 다 그런 거야?>
<제발! 이제 제발 좀 자자….>
<마물 혼혈인 당신이 어떻게 성녀단에 들어갔는지도 말해 줘. 궁금해.>
<벌써 밤이야, 자자고!>
그웬은 귀를 틀어막았다. 자그마한 에어리얼은 산을 오르듯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궁금해. 듣고 싶어. 알려 줘!>
<아— 무거워—!>
시달리다 못한 그웬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몸 위에 있던 에어리얼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래, 인마! 다 말해 줄게! 난 여자고! 알파다! 나도 내가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났는지는 몰라! 난 그냥…. 씨발, 병신이야! 거기에 뭐 대단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냐? 뻔하지 뭐….>
<그래도 궁금한걸.>
어휴, 그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일찍 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내 모습을 좀 봐라. 지금도 상당한 미모지만, 어릴 때는 당연히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여자애였겠지?>
<…?>
<너도 알겠지만, 알파는 무조건 남자애잖냐.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숲에 버려진 나를 인간인 줄 알고 키워 줬거든? 근데 동년배에 비해서 두세 배는 빠르게 성장하고, 힘은 이상할 정도로 셌던 거지. 세상 사람들은 여자애한테 눈에 띄는 능력이 있으면 보통 성녀인 줄 알아. 그래서 성녀원에 들어가게 된 거야.>
나도 내가 성녀인 줄 알았지. 그웬은 자신의 낡은 성녀복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 냈다.
<근데 나한테는 그 뭣이냐, 성력이라는 것도 없고…. 그냥 무식하게 힘이 센 여자일 뿐이었거든. 그래서 성녀원에서 힘쓰는 일 좀 하다가…. 그, 사고를 좀 쳤거든?>
<사고?>
<어흠,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좀 그렇고…. 이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해 줄게. 하여간, 그러다 내가 본성을 드러내는 일까지 생기니, 그제야 다들 나를 붙잡고 실험을 좀 하더군.>
그웬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서야 나는 내가 잘못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잘못 태어나…? 아얏!>
에어리얼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젠은 손가락을 튕겨 자신을 귀찮게 하는 에어리얼의 이마를 쳤다.
<성녀님들은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구호 활동을 하잖아. 그러다 보니 이런 이상한 일에는 오히려 용병들보다 빠삭해. 근데도 나 같은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더군. 알파면서 여자라니….>
<하지만 당신은… 가슴이 달린 것만 빼면 완벽한 알파잖아.>
에어리얼은 입을 비죽거렸다. 그는 태생이 나약했기에 알파들이 거둬 주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더라고.>
그웬은 피식 웃었다.
<성녀단은 애매한 나를 받아 줬어, 그곳 생활은 나쁘지 않았지만, 결국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계속 성녀단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어. 세상에 나 같은 놈이 또 있을까 싶어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중인데, 지금까지 별다른 수확은 없더라. 이참에 용병대에 들어가려고 하곤 있지만 번번이 퇴짜 맞는 중이고. 그게 네가 알고 싶어 하는 내 전부다! 됐냐?>
이제 제발 자자! 털썩, 그웬은 다시 잠자리에 드러누웠다. 정말로 피곤했던 것인지 그녀는 머리를 땅에 붙이자마자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
그러나 에어리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붉은 눈동자에는 밤하늘의 별이 총총히 박혔다. 알파라기에는 부족하고, 인간이라기에도 어딘가 한구석이 틀린 우리는 비슷한 걸까? 완벽한 알파지만 여성인 그웬과 알파이지만 본성도 드러내지 못하고 약해 빠진 자신. 그웬과 자신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어느 무리에서도 배척당하는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은 울타리에 들어간 것이 그저 좋아서…. 에어리얼은 그웬의 팔을 베개 삼아 누운 채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로브 속에 숨겨 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는 즉시 에어리얼의…. 아니, 이제는 칼리번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달려들었다.
‘칼리번’의 몸은 그 자체로도 강인했다. 에어리얼은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굳이 젠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목숨을 내놓은 사람처럼 그녀를 향해 몸의 방향을 돌리기까지 했다.
챙!
칼날과 칼날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어두운 감옥 안에 울려 퍼졌다.
“에레즈…. 비켜라!”
젠은 에레즈와 검을 맞댄 채로 으르렁거렸다.
“정신 차려! 너도 네 귀로 직접 들었잖아, 저 녀석은 칼리번이 아니야! 아예 맛이 가 버린 거냐?”
젠은 에어리얼을 죽이겠다는, 성공 가능성이 낮은 시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에레즈와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달려든 것이었다.
“넌 지금 칼리번의 몸을 뺏은 녀석을 지키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에레즈에게는 젠의 처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푸른 보석안은 그 아름다움이 무색하게 깊은 어둠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쉽게 됐군, 젠. 여기서는 본성을 드러내지 못하겠지…. 좁은 공간에서 육체를 변형하면 저 계집이 죽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등 뒤에 숨어 비아냥거렸다. 젠이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왕자님. 왕자님께 바로 저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실을 말이죠. 저 여자가 숨겨 왔던 본성이 이제는 보이시겠죠?”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8년 전, 젠은 칼리번의 동료였고 지금은 왕자님의 스승이자 부하였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저 알파 계집의 밑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 여자는 당신이 아닌 왕비를 먼저 찾아온 것일까요?”
“그 입 닥쳐!”
젠은 다급히 외쳤다. 기긱, 긱, 맞닿은 검과 검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망토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팔근육이 에레즈의 힘을 버티기 위해 눈에 띄게 팽창했다. 그에 반해 에레즈는 여상하다 싶을 정도로 우아했다.
“왕자님께서 인간으로 인해 비탄에 빠졌다는 사실을 젠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왕자님이 아닌 인간의 편을 드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에레즈, 듣지 마라! 나는 널 포기한 게 아냐!”
어느덧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에어리얼은 에레즈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붉은 눈은 젠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젠은 알파이자 용병이기 전에 여자이자 성녀였습니다. 저 여자는 칼리번을 구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왕자님에게 충성을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이 자식…!”
“그저 성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부추기고, 인간 대신 희생시키려 이용한 겁니다.”
에레즈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닥쳐! 그렇지 않아, 나는…!”
성검에게 침식된 젠의 검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의 신뢰처럼.
“그렇다면 어째서 왕자님에게 칼을 들이미는 거지?”
“왕자가 붉은 오메가에게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하라면 왕을 위해 죽는 한이 있어도 복종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과 말이 부딪치는 순간, 젠의 검은 성검에 의해 완전히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젠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혹여나 왕비를 빼앗길까, 팔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저 늙은 계집은 용병입니다만, 왕자님께서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는 성녀로 활동했습니다. 용병이라는 직업은 알파 무리에 끼어들기 위한 위장일 뿐…. 지금까지도 건실한 성녀단의 일원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기형 알파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아 왔습니다. 오메가를 포함한… 자신과 같은 기형들을.”
젠은 쉰 목소리로 수도 없이 반박했다. 그러나 에레즈의 귀로는 칼리번의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들렸다.
“저 여자가 죽여야 하는 기형에는 저와 왕자님도 포함된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왕자님을 이용해 목적을 다 이루고 난 후에는 칼리번마저 죽이려 했을 겁니다.”
에어리얼은 에레즈의 머릿속을 주물렀다. 칼리번을 해친다는 말에, 푸른 두 눈에 증오가 번졌다.
* * *
겉모습만 보자면 한쪽은 여자고 한쪽은 남자다. 그런데 여자는 덩치가 산만 한 데다 근육질인데, 남자는 한참 작고 비리비리했다.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늘 두 눈을 의심하곤 했다. 마물 혼혈 때문에 세상이 잘못 돌아간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렇듯 두 사람은 어느 것 하나 비슷한 부분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전형적인 마물 혼혈과는 다르나 무작정 기형 마물이라 쫓아내기에는 인간의 형상을 그럭저럭 갖춘, 경계선에 선 이상한 녀석들이라는 점이다.
그 때문일까, 그들의 여정은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
<너와 나만 이상한 게 아니야. 난 그동안 왕국 전역을 돌아다녔거든? 기형 알파가 꽤 있었어.>
<기형 알파….>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런 단어를 썼었다. 그 뒤로 에어리얼은 젠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어째서인지 입을 열지 않았었다. 하지만 에어리얼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와 함께 다니다 보니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에어리얼이 보채지 않고 얌전히 있자, 젠은 이제는 슬슬 가르쳐 줘도 괜찮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마물의 짝은 오메가고, 인간의 짝은 여자잖아? 마물과 인간과의 교미는 있어서는 안 되는 비정상적인 결합이야.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물 혼혈 말고도 별 해괴한 것들이 태어나는 거지. 우리처럼. 그런 걸 ‘기형 알파’라고 해.>
이제는 나도 다 알고 있거든? 에어리얼은 속으로 비웃었으나 겉으로는 그웬의 말을 경청했다.
<보통 ‘마물 혼혈’이라고 하면 인간보다 강하고, 마물보다 오래 살잖냐. 대신 발정이 오면 오메가의 대체인 인간 남자에게 강력한 성욕을 느끼고.>
<…응.>
에어리얼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인간 남자에게 흥미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근데 기형 알파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물 혼혈과 달라. 대체로는 덜떨어졌지. 다치면 아예 회복되지 않는다거나, 신체 일부가 마물 형태로 굳어 버렸다거나…. 여자인 경우는 나 외에는 아직 못 만나 봤지만.>
<회복력은 괜찮은데 힘은 아이 수준인 경우도 있었고?>
<…아, 그래. 그런 경우도 있지.>
그웬은 에어리얼을 보면서 씩 웃었다. 그녀는 에어리얼의 곁에 벌렁 드러누웠다.
<남자가 아닌 여자한테 성욕을 느끼는 변태 같은 알파도 있고?>
<아픈 곳을 찌르는구만….>
에어리얼이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그웬은 쓰라린 실연을 떠올리고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아무리 기형 알파여도 여자한테 매달리는 건 말도 안 돼.>
에어리얼은 유독 그 부분을 집요하게 건드렸다.
<하하! 너나 나나 별종이거든? 내가 여자 좋아한다고 뭔 피해를 주냐. 어린놈이 못 하는 말이 없네.>
<그치만…. 말도 안 된다고! 알파는 남자한테만 반응한다고 당신이 그랬잖아! 오메가는 남성체니까!>
에어리얼은 빽 화를 냈다.
<내가 인간 남자한테 껄떡거리게 된다 해도 너 같은 꼬맹이는 관심 밖이다, 인마.>
그쯤 되면 짜증을 낼 법도 하건만, 그웬은 허허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럴수록 열이 오르는 것은 에어리얼 쪽이었다.
<뭐,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웬은 드러누운 채로 발을 까딱거렸고 에어리얼은 발끈해서 목청을 높였다.
<오늘만 해도 말이야— 마을에서 여자랑 대화 좀 하려 들면 눈이 뾰족해져 가지고, 집에 가자고 난리를 쳤으면서. 언제 우리가 집이 있었냐?!>
<그건… 당신이 우리가 쓸 돈을 모르는 여자한테 마구 써 버리니까!>
<물건을 샀으면 당연히 값을 치러야지.>
<쓸데없는 물건을 샀잖아!>
에어리얼은 벌컥 소리치더니 한 손에 쥐고 있던 목각 인형을 집어 던졌다. 인형은 정확히 그웬의 머리통에 명중했고, 사람의 머리에서 날 수 없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당연히 그웬에게서 보복이 돌아올 텐데 이상하게도 주변은 조용했다.
<저기… 괜찮아?>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나 크게 다친 것일까? 목각 인형은 나무보다 단단한 돌머리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채였다. 에어리얼이 쭈뼛대다 그웬의 근처로 다가간 순간이었다.
<아얏!>
죽은 척하던 그웬이 손을 뻗어 붉은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겼다. 에어리얼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얼굴은 여자처럼 예쁘긴 한데.>
그웬은 제 가슴으로 떨어진 에어리얼의 얼굴을 쥐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윽…!>
에어리얼의 얼굴이 제 머리카락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젠은 에어리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 누나가 어린애는 취향이 아니라서.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겠다. 미안하다!>
팍, 밀어 버렸다.
<무, 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괜히 걱정했다! 에어리얼은 씩씩거리며 마구 주먹질을 해 댔다. 그러나 그웬에게는 조금의 타격감도 없었다. 그녀는 낄낄거리며 웃다가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다. 생각을 고쳐먹을까? 뭐, 한 번만 상대해 달라고 간곡히 매달리면 이 누님이 힘을 못 쓸 것도 없지만 말이야….>
그웬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아니! 절대 아니야! 나는 알파라고! 당신처럼 못생기고 냄새나는 여자를 누가 좋아할 것 같아?!>
<그리고 넌 알파답지 않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으흐흐….>
<다… 다가오지 마! 이 변태! 인간 남자 빼고 다 발정하는 이상 성욕 알파!>
에어리얼은 그웬에게 배운 대로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에어리얼은 아주 약했으나, 어린애라도 주먹으로 코를 부수는 일은 가능했다.
<크으…. 당했다. 잘 배웠군…. 이 스승님은 감동했다. 이 정도 주먹이면 내가 없더라도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겠어….>
그웬은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움켜쥐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 발버둥을 친 탓에 에어리얼의 심장은 마구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 후로도 그웬은 에어리얼을 데리고 한참이나 장난을 쳤다. 에어리얼은 조그마한 일에도 펄펄 날뛰었고 혼자 방랑하던 그웬에게는 최고의 장난 상대였다.
<…그래서 나 같은 마물 혼혈을 찾고 싶은 거야.>
모닥불의 불꽃이 반쯤 사그라들었을 무렵, 그웬은 바람에 흘려보내듯 슬그머니 속내를 꺼내 보였다.
<난 내가 뭔지 모르겠어. 인간과 마물의 혼혈이면서도 여자인 녀석을 만나게 되면 내가 정말 잘못된 건지, 아니면 이게 원래 그런 건지…. 구별할 수 있을 테니까.>
그웬은 에어리얼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닥불의 불길이 그녀를 담요처럼 덮어 주었다.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뿐인 건….>
외롭고 무서우니까.
그웬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 삼킨 말을, 에어리얼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에어리얼은 외로움과 두려움의 이름을 모를 적부터 그것을 느껴 왔다. 마물, 인간, 마물 혼혈—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고독.
<…….>
그런데 어째서일까? 에어리얼은 자신을 구해 준 그웬을 동정하기보다는, 울컥 화가 났다. 만약 그웬이 동족을 찾게 된다면, 그 여자와 함께하겠다고 한다면, 남겨진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에어리얼은 그웬과 달랐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찾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그녀의 곁에 있고 싶을 뿐.
<당신 같은 마물 혼혈을 찾는 일. 내가 도와줄게.>
에어리얼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때 그웬은 이미 잠든 뒤였다. 상관없었다. 그리고 알고 있다. 자신이 돕는 것이 아니라 그웬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그웬에게 자신은 거추장스러운 혹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래도 곁에 있다 보면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목숨이 위급한 순간에 희생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에어리얼은 그웬과 함께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목적을 도왔다. 그웬은 용병조차 다니지 않는 산과 버려진 땅을 헤맸다. ‘괴물이 있다’라는 소문을 들으면 즉시 소문의 근원지로 향했다.
고단하고도 긴 여행이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그웬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혼자 짐승처럼 살 때보다 훨씬 행복했다.
인간보다 강한 몸. 마물보다 긴 생명. 인간과 마물을 오가는 불완전한 이성과 본성—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마물 혼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마물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는 마물 혼혈 중에서는 도저히 두 눈에 담을 수 없을 만치 끔찍하고 처참한 형상도 많았다.
그것이 바로 ‘기형 알파’, 잘못 태어난 것들이었다. 인간보다 약한 에어리얼과 알파면서 여성인 젠 또한 더 넓은 범위에서는 기형 알파라 볼 수 있었다. 그웬은 자력 생존이 불가능한 마물 혼혈의 경우 자신의 손으로 끝을 내주었다. 때로는 괴물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게 돈을 받고 처리해 주기도 했다.
에어리얼은 그것이 동족을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딘지 꺼림칙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고, 그웬의 말을 모두 옳다고 생각했기에 비판 없이 따랐다.
<보여? 저건 ‘검은 손자국’이라는 거야. 저게 한번 생기면 마계에서 마물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지. 저 마물들을 없애 주는 게 우리 같은 마물 혼혈 출신의 용병들이야. 그 전투를 방어전이라고 불러.>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이동하던 중, 에어리얼은 처음으로 검은 손자국을 보았다. 산 너머에서 본 ‘검은 손바닥’은 마치 한 장소에 검은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방어전을 치르기는 하지만, 용병들이 마물을 전부 없애지는 못해. 저 일대의 인간 사내들은 살아남은 마물에게 교미를 당하고 말지. 지금 가 보기에는 너한테 너무 위험하니까, 몇 달 후에 다시 들러 보자.>
그웬은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저렇게 태어난 거야?>
<…넌 너무 말이 많아.>
호기심이 많은 에어리얼은 그웬의 뒤를 따르면서도 또다시 물음표를 붙였다.
<그럼… 검은 손바닥은 왜 생겨나는 거야?>
<글쎄? 들은 말로는 저 검은 구멍은 마계에 있는 오메가가 연다고 하더라.>
마계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오메가는 에어리얼에게 멀게만 느껴졌다.
<왜 열까?>
에어리얼은 또다시 궁금해졌다. 그웬은 그걸 누가 알겠냐고 대답했다.
<그보다 이번에 가는 곳에는 용병소가 있을 거야. 우리를 받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자고.>
그웬은 에어리얼의 끝없는 호기심을 잠재우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 전략은 통했다. 에어리얼이 바짝 긴장한 것이다. 그들은 규모가 있는 영지를 방문할 때마다 그곳에 터를 잡은 용병소에 꼭 한 번씩 들렀다. 용병대에 입대하기 위해서였다. 그웬은 자신이 알파임을 깨닫고 성녀단을 나왔다. 벌어 먹고살기 위해서든, 기형 마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든 알파라면 용병 연합에 이름을 올려야만 했다.
<그웬? 방앗간에 가서 빵이나 굽지 그래. 미안하지만 너희 같은 별종들을 넣어 줄 용병대는 여기엔 없어. 일없으니 가 봐라!>
그러나 약해 빠진 알파와 생전 처음 보는 여자 알파를 받아 주는 용병대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들은 번번이 낙방했다. 에어리얼은 용병소에 다녀오면 늘 화가 났다. 자신이야 기준 미달이니 그렇다 쳐도, 그웬은 여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겉모습이 남들과 달라서 뽑아 주지 않는다니!
<돈을 가져오면 용병대를 만들게 해 주겠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용병 연합에서 일을 받아야 돈을 벌 수 있는데?!>
에어리얼은 씩씩거렸다. 그웬은 그 말의 속뜻을 모르는 에어리얼이 귀여운지 웃고 말았다. 기존 용병대에서는 받아 주지 않으니, 차라리 본인의 용병대를 꾸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인맥이 없는 상태에서는 용병대를 설립하기는 어려울뿐더러, 설립한다 한들 일을 받지 못해 돈만 새어 나갈 뿐…. 사실상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였다.
<뭘 네가 억울해하냐. 누가 보면 네가 더 용병이 되고 싶은 줄 알겠다.>
<그래도….>
<만든다고 해도 내가 만들어야 하는데.>
그웬은 이런 차별이 익숙한지 너털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있잖냐. 기형 마물을 찾아 떠돌아다니다 보니까 든 생각이 있어.>
그웬은 몸을 숙여 에어리얼의 어깨에 제 팔을 얹었다.
<…뭔데?>
<전에도 말했다시피 기형 마물 중에서도 너나 나처럼 꽤 쓸 만한 녀석들은 있단 말이지. 근데 용병대에서는 근육 빵빵한 알파 빼고는 전부 내쳐 버리잖아. 그러다 보니 쭉정이, 별종들은 반쯤 마물화 돼서 마물의 먹이가 되거나 인간들한테 죽는단 말이야….>
에어리얼은 그웬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돼지랑 같이 다니느라 음식값이 두 배 이상 들기는 하지만, 앞으로 몇 년 더 일하면 돈은 모일 테니까…. 우리처럼 이상한 놈들만 들어올 수 있는 용병대를 만드는 거야.>
<…뭐라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같은 놈들이 있으면 넣어 주자고. 어때?>
<어….>
에어리얼은 자신이 돼지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화를 낼 때를 놓치고 말았다.
<이름은 차차 정하고, 창립 대원은 허약한 놈이랑 여자인 놈으로 시작하자.>
그웬은 말 그대로, 되는대로 떠들었다. 평소였다면 바보 같은 소리라며 잔소리를 했을 에어리얼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웬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둘이서 용병대를 창설한다면, 어쩌면… 그웬이 동족을 만난 후에도 다 같이, 계속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웬은 가볍게 하는 소리겠지만, 에어리얼은 심장이 돌멩이가 될 정도로 무거운 진심을 품었다.
<그다음에 뭘 정해야 하나? 아, 그래! 나는 부대장을 할게. 네가 대장직을 맡아라.>
<응…. 응? 내가?>
멍하니 그웬의 헛소리를 듣던 에어리얼은 얼떨떨해하며 의문을 표했다. 용병 집단은 힘 하나만을 추구한다. 그것은 알파의 본능이기도 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순수한 힘으로만 서열을 정한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약했다. 약한 탓에 인간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알파들에게 외면받았다.
<넌 약하지만 대신 머리가 좋으니까.>
<…….>
<무리를 이끄는 건 힘만으로는 안 되거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뭔가가 더 있어야 하는데…. 굳세다고 해야 하나? 버틴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좀 단단해야 해.>
뜻밖의 칭찬에 에어리얼의 얼굴이 불긋해졌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열기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휙 돌렸다.
<뭐냐? 기껏 제일 좋은 자리를 줬더니 보란 듯이 무시하네.>
내가 대장 해 버린다? 등 뒤로 그웬의 야유가 들린다.
<그, 그렇게까지 원하면… 어쩔 수 없지. 해 주는, 수밖에….>
에어리얼은 꽉 눌린 목소리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괜히 헛기침을 해 댔다.
<정말로 용병대를 만들 거면, 그러면… 부대장한테는 부대장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어?>
<음?>
<용병다운 이름 말이야!>
둔감한 그웬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자, 에어리얼은 공연히 신경질을 부렸다.
<며칠 전에 용병소의 그 개자식도 당신 이름 가지고 놀렸고…. 당신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웬이라는 이름을 싫어했잖아.>
<아아…. 뭐, 그건 그렇지. 근데 갑자기 여기서 그 얘기를?>
<됐고!>
경험도 많고 벌어 둔 돈도 제법 있는 그웬과 달리 에어리얼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용병대의 대장 자리를 받을 때마저.
<…젠.>
원래는 그웬과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부유해지면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당신의 새로운 이름은 ‘젠’이야.>
보통 용병들의 이름은 별다른 뜻이 없는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에어리얼은 일부러 짧은 이름을 골랐다. 그녀는 그딴 멍청한 알파들과 달리 특별하니까.
자유로워지라는 축복이 담긴 이름에 비하면 부족할지도 모른다. 에어리얼은 괜히 말했나 싶었다. 하지만 이 순간, 에어리얼은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이 머리카락을 전부 잘라 주고 싶을 정도로….
<…….>
혹여나 비웃음을 살까, 에어리얼은 그웬에게 등을 졌으면서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웬이 그런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 좋은데.>
숨조차 제대로 못 쉬던 에어리얼이 간신히 마른침을 삼킨 순간, 산뜻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맙다. 신경 써 줘서.>
<……!>
<앞으로는 그 이름으로 살아야겠어. 용병으로 말이야.>
에어리얼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웬의, 아니, 젠의 웃음은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 한 점 구김살 없이 밝았다. 아직은 두 명뿐인 용병대였다. 그러나 평생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 작은 무리가 정식 용병대가 되고, ‘검은 어금니’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아주 먼 후일의… 에어리얼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 후의 일이었다.
* * *
부서진 칼날이 도처에 흩어졌다. 창살을 통해 내리쬔 달빛이 칼의 파편에 스며든다. 달빛을 머금은 칼날은 섬뜩하고도 희미한 빛을 냈다.
“그래.”
먼지로 뒤덮인 오래된 추억은, 아무리 닦아 내 보아도 전만큼 깨끗하지는 못했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고 많은 일을 겪었다. 내가 성녀임을 고백하지 않은 점은 부정하지는 않겠어. 미안하다, 에레즈.”
“…….”
“하지만 그 녀석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라. 나는 널 죽일 생각 따위 전혀 없으니까.”
모래를 삼킨 것처럼 탁하고 매캐한 목소리였다. 무기를 잃은 젠은 별다른 공격 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라고 해도 좋을 태도였다.
“에레즈. 너는 알테르 프리드웬과는 달라. 비록 너 또한 마물의 피를 물려받았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지만…. 성검은 너를 선택했어. 너는 칼리번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누구보다도 인간을 위해 애썼어. 네 힘으로 이뤄 온 노력을 진흙탕에 처박지 마라.”
에레즈는 흐릿한 눈으로 어둠을 볼 뿐이다. 부질없는 연설이었다.
“…오메가에게 이용당하지 마라!”
하지만 젠은 계속 에레즈를 향해 외쳤다.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것과 나에게 이용당하는 것,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무슨 차이가 있지?”
울려 퍼지는 것은 칼리번의 목소리였으나, 그 내용물은 더없이 증오에 어려 있었다.
“적어도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반면 여기까지 정체가 까발려졌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지.”
젠의 눈이 꿈틀거렸다. 에어리얼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말해 봐. 당신만을 오리 새끼처럼 따라다니던 오메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 * *
그 사람에게만 시선이 가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주먹 안이 숯덩어리를 쥔 것처럼 뜨겁게 느껴진 것은? 별것 아닌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 지나가는 한 번의 호흡까지 영혼에 새기게 된 것은?
처음부터였다.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 * *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힘이 세진다거나, 덩치가 커진다거나— 에어리얼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다만 몸 안에서 끊임없이 불꽃이 타올랐다. 열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오감, 그중에서도 후각이 가장 민감해졌다.
<이것 참, 열이 도통 가라앉지를 않네…. 괜찮은 거야?>
젠은 끙끙 앓기만 하는 에어리얼을 보며 혀를 찼다. 힘은 약했으나 마물 혼혈이었기에, 젠을 따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도 별다른 병치레는 하지 않았다. 그런 에어리얼이 갑자기 앓기 시작한 것이다. 병명조차 알지 못했으니 젠으로서는 난감했을 것이다.
<마을에 내려가서 뭐라도 좀 구해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알겠지?>
젠은 떠나기 전 에어리얼을 동굴에 꼭꼭 숨겨 두었다. 숲에서 공수한 이끼와 낙엽을 모아 에어리얼의 몸에 덮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지 마…. 에어리얼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젠에게는 닿지 못했다.
병든 알파를 데리고 다니다 역병이라고 오해를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에어리얼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떠나자 몸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지독하게 쓰라렸다.
<젠, 젠….>
에어리얼은 자신이 붙여 준 그녀의 이름을 약 대신 혀 위에서 녹였다.
<허억, 으으….>
에어리얼의 얼굴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게 익었으며 땀으로 흥건했다. 내장이 뒤틀릴 때면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뼈 마디마디가 녹아내리고, 몸 안의 배열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는 것만 같다. 하도 헐떡인 탓에 입 안은 마르다 못해 달았다.
고통도 고통이었으나 두려움이 더 컸다. 마지막 순간, 혼자뿐인 것은 싫었다. 그녀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게 다 젠 잘못이다.
<바보, 날 혼자 두지 마….>
어두운 동굴 속, 흐느끼는 소리가 작게 퍼졌다. 에어리얼은 소리를 줄이기 위해 낙엽 더미 속에 몸을 깊숙이 감췄다. 그러나 코를 훌쩍이는 소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에어리얼의 울음에 낯선 소리가 더해졌다.
<젠…. 당신이야…?>
두 눈이 짓무른 에어리얼은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낙엽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으윽, 역겨워…. 이게 뭐지?>
에어리얼의 첫 호흡에 침입자의 체취가 섞여 들었다. 썩은 살냄새였다. 그리고 그것은 에어리얼이 처음 맡은 알파의 냄새였다. 누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에어리얼은 젠이 만들어 준 낙엽 더미 안으로 도로 몸을 숨겼다.
<헉, 허억…….>
호흡마저 참자, 심장이 쿵쿵거리며 울린다. 몸 위로 덮인 낙엽마저 흔들릴 것 같았다. 그동안 에어리얼은 자신이 기형 알파 중에서도 가장 덜떨어진 족속이라고 믿어 왔다. 그 증거로 인간보다도 약했고, 젠처럼 마물의 본성을 드러내지도 못했으며, 몇 년이 지나도 알파 특유의 체취가 나지도 않고 맡지도 못했다.
물론 세상에는 인간보다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한 마물 혼혈도, 마물 본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마물 혼혈도, 알파 특유의 체취가 나지 않는 마물 혼혈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모든 특징을 다 버무린 약골은 또 없었다.
그런 에어리얼의 특성은 사냥과 전투에서는 최악이었으나, 반대로 도망치거나 숨을 때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유리했다. 젠을 만나기 전까지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방식이 통하리라 믿었다.
<아악! 저, 저리 가!>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어째서인지 침입자는 에어리얼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그뿐만 아니었다. 젠이 만들어 준 엄폐물마저 부숴 버리고는 단박에 그를 찾아냈다.
<힉, 으윽…!>
침입자는 마물 혼혈을 아니꼬워하는 인간도, 젠에게 일을 뺏겨 화가 난 마물 혼혈도 아니었다. 그건 마물이었다. 짐승이 여럿 뒤섞인 흉측한 모습에, 등 뒤로 촉수가 달린 마물은 에어리얼의 작은 몸을 쉽게 끌어당겼다.
<으, 아악…. 저리 꺼져!>
에어리얼의 비명이 동굴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겁에 질려 발버둥을 쳤다.
<아…!>
그러나 반항은 짧았다. 두려움에 지배된 몸이 잠시 고통을 잊고 있었다. 다시 아랫배가 쑤셔 왔다. 에어리얼은 두 팔로 배를 감싸 안고는 흐느꼈다. 아파서…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저 정도 크기의 마물이라면, 자신은 세 입이면 전부 먹힐 것이다. 아마 그녀가 돌아오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죽고 말겠지….
<…끄윽.>
죽기 일보 직전에 드는 생각이 고작 이것뿐이라니. 그리고 하필이면 이럴 때 젠이 곁에 없다니!
그 순간, 에어리얼은 자신이 숲에서 혼자 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젠의 탓이 아닌데도 괜히 억울하고 화가 났다. 에어리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붙잡힌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웅크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고통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흣…. 뭐, 뭐야…?!>
에어리얼은 당황했다. 촉수가 달린 마물은 그동안 겪었던 마물과는 달랐다. 촉수의 끝에서 괴상한 체액이 내뿜어지더니, 에어리얼이 걸친 옷을 녹인 것이다.
<싫어, 하지 마…!>
방식은 달랐으나 예전의 일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에어리얼은 도망치려 했으나 촉수에 몸이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마물에게서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은 면했으니 예전이었다면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몸을 낯선 알파의 체취와 체액이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젠의 만나기 전의 자신은 무슨 일을 겪든 아무렇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달라졌다.
만약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차라리….
<에어리얼!>
익숙한 외침과 함께 에어리얼의 귀가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시원스럽게 트였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쿵, 마물의 시체가 에어리얼의 몸 위로 쓰러졌다.
<젠장…. 주변에 딱히 마물은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
<괜찮아? 몸은 어때. 다치지는 않았고?>
젠은 곧바로 마물의 사체를 치웠다. 동굴 안으로 볕이 들지 않아 어두웠으나, 보지 않아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에어리얼의 몸속으로 안도감이 밀려 들어왔다.
<으, 응…. 이 정도야, 당연히 괜찮…….>
젠은 그 아래 깔려 있던 에어리얼을 품에 안았다. 순간, 젠의 향기가 에어리얼의 몸 위로 끼얹어졌다.
<힉—!>
허세 가득한 말과 달리 벌벌 떨던 에어리얼은 또 다른 알파의 향기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젠의 향기를 처음으로 느꼈다. 아니, 처음으로 느낀 것이 아니다. 그동안 늘 곁에 붙어 있어 알파의 향기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개화되고서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다른 알파의 체취에 뒤덮이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향기를, 그 차이를 알게 된 것이다.
<이, 이상해…. 당신한테서 향기가 나….>
젠은 종종 알파의 향기에 대해 말해 주곤 했다. 알파끼리 체취로 압박감을 느낀다든가, 위협을 한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향기 자체가 없던 에어리얼에게는 그 세계가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향기를 통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마물과 달리 젠의 체취는 더없이 안정적이고 편안했던 것이다. 에어리얼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을 움켜쥐었다.
<…제기랄.>
젠에게 온전히 기댄 에어리얼과 달리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갔다. 그녀 또한 마물의 체액과 피 냄새 사이로, 두려움 속에 피어오른 풋풋하고 여린 향기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 * *
<에어리얼. 너는 아마도… 오메가인 것 같다.>
동굴을 빠져나온 후에도 며칠 간이나 침묵을 지키던 젠은, 결국 에어리얼에게 고백했다.
<오메가?>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처음 만났을 때도 아니고 지금에 와서 오메가로 발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만….>
<…….>
<미안하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도무지 모르겠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젠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알파와 달리 오메가는 극히 드문 존재였다. 짧으면 30년, 길면 50년에 한 번 정도 나타난다고 했다. 젊은 알파에게 오메가 대한 지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내가…?>
에어리얼은 제 팔에 얼굴을 묻고는 킁킁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건 젠의 체취뿐이었다.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젠은 탄식했다. 주변의 공기는 더없이 무거웠고 분위기는 어두웠다. 에어리얼은 자기 자신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끔찍한 괴물이 된 것만 같았다. 자신을 먹이고 키워준 젠에게마저 부담을 주는… 그런 괴물.
<그… 오메가라는 거 말이야.>
에어리얼이 무거운 입을 간신히 뗐다.
<나쁜 거지? 마왕이잖아. 마계에서, 마물과 교미를 해서 새로운 마물을 낳는다고 했잖아. 검은 손자국을 열어서 인간계에 마물을 떨군다고도 하고….>
<…….>
<그래서… 만약 오메가를 발견하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규칙, 나도 전에 들었어. 안 그러면 마물이 점점 더 늘어날 테니까.>
<…….>
<정말 내가 오메가라면….>
죽어야 하는 거겠지? 에어리얼의 계획은, 앞에서 일부러 주절거리다 그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기였다.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내려니 말이 목에서 턱 걸려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죽게 된다면. 정말로 죽어야만 한다면—
에어리얼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석양에 물든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고통 없이 죽일 수 있는, 노련한 경험과 힘이 있다. 그런 여자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
우기는 아직 멀었다. 비는 오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그림자가 진 자리에는 물 자국이 가득했다. 에어리얼은 여태껏 젠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느새 에어리얼의 붉은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어디 한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자.>
해가 산 너머로 가라앉고 나서야 젠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거야. 거기까지 쫓아오는 마물을 없애며 살아간다면…. 그러면 오메가라도 문제없이 살 수 있을지 몰라.>
두 사람 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어렸고 젠은 젊었다. 에어리얼은 이번에도 젠이 내민 손을 잡았다. 어쩌면 운명을 거스를 수 있지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존재할 리 없는 낙원을 찾아 떠났다. 마물로 둘러싸인 숲속에서 끊임없이 원을 그렸던 칼리번과는 달랐으나, 놀랍도록 비슷하기도 했다.
<웩, 내 꼴 좀 봐! 숲에서 지낼 때보다 더 더러워질 수 있다니…. 적어도 그 시절에는 오물로 목욕을 하지는 않았는데!>
마물의 똥과 오물을 전신에 끼얹은 에어리얼은 울상을 지었다.
<어쩔 수 없잖냐. 네 체취보다 더 독한 냄새로 숨겨야 하니까.>
<…이거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거야?>
<그건…. 글쎄. 나도 처음이라.>
젠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당신은 성녀단에 있었잖아. 거기서 알려 준 건 없어?>
<누가 들으면 내가 거기서 백 년은 있었던 줄 알겠다.>
오메가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에, 두 사람은 무엇을 하든 일일이 부딪쳐 봐야만 했다. 에어리얼이 몸을 까맣게 물들이는 동안, 젠은 얼굴을 붕대로 칭칭 동여맸다.
<오물 냄새 때문에 코를 막은 거지? 치사해. 혼자만 깨끗하고…!>
에어리얼은 자신만 곤욕을 치르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얄미운 젠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오물을 뭉치던 차였다.
<그런 거 아냐.>
<그럼 어째서인데!>
<…나도 알파니까?>
뜻밖의 대답이었다.
<내 향기가… 당신한테도 영향을 줘?>
<왜. 여자라서 그쪽 기능이 떨어질 것 같아? 그야 당연하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그녀는 얼굴에 붕대를 세게 동여맸다.
<…….>
에어리얼은 하던 행동을 뚝 그쳤다. 진흙이 덧발라진 얼굴이 눈에 띈 정도로 붉어졌다.
<거짓말. 혼자 똥 냄새 안 맡으려고 그런 거면서.>
<…하하! 그 이유가 아예 없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는걸.>
<역시!>
에어리얼은 다시 진흙을 뭉쳐 젠을 향해 던졌다. 젠은 노련한 알파답게 에어리얼의 공격을 모조리 피했다.
<자, 진흙도 다 마른 것 같으니까 이동하자.>
그러나 막상 떠나야 할 때가 오면, 젠은 에어리얼을 아무렇지 않게 등에 멨다. 마물에게 본격적으로 쫓기게 되면서, 에어리얼은 젠의 등에 업히는 일이 잦아졌다. 에어리얼의 체력으로는 젠의 속도에 맞추는 일이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
에어리얼은 젠의 등에 뺨을 기댔다. 오메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당연히 그녀에게 버림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젠은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질 필요 없는 고생과 위험마저 자초했다. 에어리얼은 젠에게 미안했고… 그런 만큼 나약한 자기 자신이 싫었다.
처음 두 사람은, 최대한 마물을 피하고자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했다. 문제는 에어리얼의 향기가 강해지면서 생겼다. 마물이 떼를 지어 그들이 머무는 마을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인간을 싫어하는 에어리얼이라 해도, 애먼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젠이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을 들르지 않고 되도록 외진 산을 타며 이동하게 되었다. 식량이 필요할 때면 젠이 홀로 마을에 다녀왔다.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마물에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위험은 늘어 갔다. 갓 발현한 오메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알파를 끌어들였다. 에어리얼의 향기가 농밀해질수록 외모 또한 날카로움을 더해 갔고 알파의 본성을 자극하는 붉은 색은 나날이 짙어졌다. 결과적으로 젠은 에어리얼을 혼자 두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녀가 마을에 다녀오는 빈도도 줄게 되었다. 식량 수급은 채집과 사냥에 의존하게 되었다.
젠은 혼자서 2인분 이상을 해내야만 했다. 모든 상황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에어리얼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에어리얼. 언젠가 내가 이성을 잃고 너한테 달려들면… 이걸로 날 찔러. 망설이지 말고.>
어느 날, 젠은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던 단검을 에어리얼에게 주었다. 젠이 여성이라서인지, 아니면 에어리얼과 함께 지낸 기간이 길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알파치고는 오메가의 향기를 잘 버티는 편이었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인내심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싫어.>
그런 가정이 싫다. 에어리얼은 거부했다.
<내가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거야? 너처럼 약해 빠진 녀석이 휘둘러 봤자 조금 따끔할 뿐이야.>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죽이라는 게 아니잖아. …아니면, 설마 죽일 각오로 찌를 작정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에어리얼은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이딴 걸 쓸 바에는 차라리…. 차,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 본능이 원하는 대로….>
에어리얼은 자신이 말하고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단검은 땅으로 버려졌다. 도피 생활이 계속되면서, 에어리얼은 오메가의 향기로 인해 괴로워하는 젠의 모습을 몇 번이나 지켜봐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그녀를 위해 몸을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전과 달리, 거래 같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는… 이런 행위를 원할지도.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 다시는 하지 마.>
머리 위로 들리는 젠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한 번 더 그런 말을 지껄였다가는…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흡사 알파를 대하는 듯한 성난 태도에 에어리얼은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젠은 그동안 에어리얼을 위협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었다.
<주워.>
젠이 딱딱하게 명령했다. 에어리얼이 명령에 따르지 않자 그녀가 단검을 주워 억지로 쥐여 주었다. 에어리얼은 자신이 한 말이 딱히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화를 내는 걸까? 그의 가슴 안쪽이 너덜너덜해졌다.
두 사람의 여정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몸과 마음은 서서히 지쳐 갔다. 오메가의 향기를 맡은 마물을 낮이고 밤이고 따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젠은 종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젠,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해…. 아무리 당신이라도 마물의 독이 하룻밤 만에 나을 수는 없어.>
<…3년 전에 만났던 마물 기억 안 나? 억센 꼬리가 세 개 달렸던 녀석 말이야. 그 꼬리에 맞아서 갈비뼈가 부서졌던 거에 비하면야 이 정도는 별거 아냐.>
<하지만….>
<예정대로 내일 새벽에 출발할 거니까 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한시라도 더 자 둬.>
가혹한 운명은 에어리얼을 낚아채기 위해 바로 등 뒤에서 쉬지 않고 쫓아왔다.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채찍질 당하는 말처럼 헐떡였다. 도망치기로 정한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멈췄다가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릴 테니까.
<…왜 그런 표정이야? 너답지 않게. 걱정하지 마…. 다 잘될 테니까.>
에어리얼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젠을 위해서는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젠을 위해 떠나자.
매일 해가 뜨기 전 결심한다.
하지만 하루만, 하루만 더….
그런 같잖은 변명을 하며 그녀의 곁에 해가 질 때까지 붙어 있었다. 몰릴 대로 몰린 에어리얼은 차라리 젠이 어느 날 홀연히 제 곁을 떠나기를 바랐다. 참으로 이기적인 소원이었다. 에어리얼은 매일 밤 깊이 잠든 젠을 지켜보며 밤을 새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특이하게도, 용병대가 나타나 수십 마리의 마물에게 쫓기던 두 사람을 구해 주었다. 젠은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이동하고 있었으므로, 이 정도 규모의 용병대가 근방에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에어리얼은 참으로 오랜만에 마물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젠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
마냥 반가워만 하던 에어리얼에게도 금세 젠의 긴장이 전염되었다. 눈앞의 용병대는 그동안 보아 왔던 용병들과는 기세가 달랐다. 용병들은 대개 소규모로 방랑을 하는 집단이라 거칠고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사단처럼 엄격했으며 정연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 해치지 않을 테니 대화에 응해라.>
젠과 에어리얼이 도망치지도, 말을 걸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을 때였다. 용병대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커다란 사람은 누구야?>
에어리얼이 속삭였다. 알파로만 이루어진 군대임에도, 그 알파는 압도적으로 눈에 띄었다.
<데릴만. 용병 연합의 수장이 두 명인 건 알고 있지? 그중 한 명이야. 근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우리 같은 쭉정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위인은 아닌데….>
젠의 입에서 밝혀진 정체에 에어리얼은 눈동자만 굴렸다. 그렇게 대단한 용병이라면 마물보다 낫지 않을까? 그런데도 젠은 선뜻 데릴만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볼 일이 있는 건 여자 쪽이다. 대화에 응하면 붉은 머리는 건드리지 않겠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아니, 할 말이 있다면 여기서 해.>
젠은 용병대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알파만 수십 명이었다. 지금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에어리얼을 두고 자리를 비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 건방진 계집이군!>
데릴만은 껄껄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걸걸한지, 거리가 상당한데도 땅이 울릴 정도였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널 용병대에 받아 주겠다.>
<…뭐? 이제 와서?>
뜬금없는 제안에 놀란 것은 젠뿐만이 아니었다. 에어리얼의 붉은 눈도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동안 네가 저 붉은 머리를 데리고 입대하려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몰랐는걸…. 그 소문이 동부 용병 연합의 대장에게까지 전해지다니.>
<입대를 거부한 것은 네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성녀단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
에어리얼을 업은 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너희를 받아 주지. 현재 마물에게 쫓기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용병대에서 안전을 보장해 줄 뿐만 아니라 안락한 생활 또한 제공해 주겠다. 굳이 용병질로 입에 풀칠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야!>
데릴만의 제안은 이상할 정도로 젠과 에어리얼에게만 이득이라, 일견 허무맹랑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말을 실현시킬 힘이 있었다.
<그… 당신들에게 좋을 거 하나 없는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뭐냐!>
젠이 망설이다 외쳤다.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거기, 계집 알파! 네가 그 붉은 머리의 주인이겠지?>
<뭐라고? 주인이라니, 뭔 개소….>
에어리얼은 재빨리 욕을 뱉으려 하는 젠의 입을 가렸다.
<네 녀석은 앞으로 저 붉은 머리가 도망치지 않도록 곁에서 관리만 하면 된다. 이성을 잃지 않도록 말이지.>
<그 이상의 설명이 더 필요한가?>
그 말에는 단순히 젠뿐만 아니라, 에어리얼이 해야 할 일 또한 압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에어리얼의 몸이 두려움으로 딱딱하게 굳어 갔다. 에어리얼은 젠의 어깨 너머로, 데릴만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용병대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고 들었다! 그중 하나는 명부에 이름을 올린 동료를 팔아먹지 않는다, 아니었나? 설마 알파끼리 매춘을 하는 줄은 몰랐는데…. 그럴 거면 왕실과 러트가 올 때 인간 사내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계약은 왜 했지?>
젠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에어리얼에게 젠은 늘 강하고 멋진 알파였다. 그러나 수많은 알파 앞에 놓인 그녀는 구석에 몰려 있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기형 알파가 보통 알파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젠장.>
역시 그런 거였나…. 젠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용병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대신 왕국 전역을 돌아다닌다. 다른 의미로, 어디에든 있다는 뜻이다. 저들끼리의 연결로를 통해 동부 용병 연합에까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마물이 오메가의 흔적이 남은 마을이 습격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젠 혼자서만 마을을 오갔다. 도리어 그것이 추적을 용이하게 만들었을 줄이야….
<아니면 저 붉은 머리의 정체를 밝히고, 세간의 법대로 처리하는 방법도 있지. 하지만 그건 너도 원하지 않을 거다.>
데릴만은 시시각각 젠을 압박했다. 정적이 흘렀다. 적막한 공간으로 오메가의 향기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에어리얼로서는 막을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알파들의 시선이 점점 변해 가고 젠은 더욱 수세에 몰렸다.
<미안….>
에어리얼은 죄책감과 역겨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을 보니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하루의 시간을 주지. 설령 도망친다 해도 내일까지 잡지 않겠다. 단 하루다. 우리의 제안을 수락하면 너희는 동료가 되겠지만, 만약 도망친 후에 잡힌다면 너희를 노예로 취급하겠다.>
<…….>
<앞으로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네 선택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 너희가 자의로 우리에게 오기를 바란다.>
용병들은 별다른 해코지 없이 깔끔하게 물러났다. 데릴만이 보증한 대로였다. 그것은 더불어 데릴만이 얼마나 큰 권력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당장의 목숨을 위협하는 마물은 사라졌다. 오메가를 내놓으라며 쳐들어온 알파들도 떠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데릴만이라는 자의 말대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한참 후, 에어리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심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젠은 싸늘하게 에어리얼을 몰아세웠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 지치고 예민해진 기색이 역력했다.
<다, 당신은 전부터 용병대에 들어가고 싶어 했었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당신을 위한 용병대를 만들어 줄지도 몰라.>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하는 말이냐고.>
<…알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여정. 적은 마물만이 아니었다. 에어리얼의 향기에 이끌린 알파 중에는 마물 혼혈도 있었다.
<하지만 데릴만은 대단한 알파라며! 우리를 지켜 준다고 했어. 적어도 인간 형태인 쪽이 마물보다는 나을 거야.>
<…….>
<어차피 난… 그런 일에는 익숙해! 당신도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니, 오히려 더 좋은 대우를…!>
철썩,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에어리얼의 한쪽 뺨이 얼얼해졌다. 젠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왜…. 왜, 날…!>
한 번도 그녀에게 맞아 본 적 없는 에어리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팔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얻어맞은 적도 있었건만, 겨우 뺨 한 대 맞은 것이 그리도 아프고 쓰라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에어리얼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젠은 그런 에어리얼을 달래 주지 않았다.
<에어리얼.>
다만 한없이 낡은 목소리로 부를 뿐이다.
<내가… 너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을 것 같아?>
에어리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자신과 젠은 달랐다. 겉모습이 여자였기에 마을에서 길러졌고, 그 후에는 성녀로 지냈었지. 적어도 그녀는 인간과 함께 살아갔다. 혼자서, 어둠 속에 있었던 자신과는 달리….
<내 위로는 가슴이 달려 있고 아래로는 여성기가 달렸지. 아무리 알파라고 해도… 이 모습으로 사는 게 만만했을 것 같아?>
젠의 목소리는 쉬고 갈라져, 끝이 올라갔다. 에어리얼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데릴만은 에어리얼을 용병대에 받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젠은 인간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실하게 이해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네 말 안 들을 거니까. 우린 갈 거야.>
젠은 훌쩍거리며 우는 에어리얼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
어디로? 차마 물을 수 없었다. 파멸로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희망은 없다. 가진 것은 이 부질 없는 온기뿐이다. 그런데도 에어리얼은 그녀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옳은 선택이란 무엇일까? 우리 안에는 마물과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인간이기를 선택할수록 아래로 추락할 뿐이다. 차라리 마음 따위 없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누구의 아래에서 부서지고 짓이겨진다 해도 괴롭지 않을 텐데.
* * *
데릴만의 제안을 거절한 후로 더욱 고단하고 힘든 여정이 이어졌다. 하지만 끝은 보아야 할 것이다. 종착지가 없다면 종착지를 만들면 된다. 에어리얼은 이날의 일로 마음을 굳혔다. 한 번 마음을 정하자 오히려 편안해졌다. 하루에 한 시간은 잘까 싶을 정도로 지친 젠을 지켜보는 죄책감도 사라졌다.
<있잖아…. 당신은 왜 머리카락을 안 길러? 내가 본 여자들은 다 길었는데.>
젠의 등에 업혀 이동하던 에어리얼은 문득 물었다.
<이게 편하니까. 싸울 때 마물한테 머리카락 뽑힐 일 있냐. 용병은 머리가 짧아야 유리해.>
<그러니까 다들 가슴 달린 남자인 줄 알잖아.>
<머리가 길든 짧든 난 여자야. 내게 가슴이 있든 말든 마물 혼혈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까 남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단호하기까지 한 젠의 태도에 에어리얼은 어딘지 심통이 났다.
<…긴 머리일 때가 궁금해.>
<하하, 평생 궁금한 채로 살아야겠다? 그런 귀찮은 머리는 다시는 안 할 거니까.>
<그 말은… 전에는 길렀다는 거야?>
<성녀원에 있을 때야 어쩔 수 없이 길렀지. 그곳을 나오면서 박박 밀어 버렸지만.>
<쳇….>
에어리얼은 젠과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무수한 여인들을 떠올렸다. 젠이 그렇게 긴 머리카락을 묶고 다닌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흥, 우락부락한 당신한테는 하나도 안 어울릴 것 같아서 못 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게. 너처럼 어울렸으면 나도 백날 천날 기르고 다녔겠지?>
젠은 에어리얼의 짜증을 되레 능글맞게 받아쳤다.
<…그런 식으로 말 돌리지 마.>
<하하하!>
에어리얼은 부끄러워 괜히 투덜거렸다. 말로는 진 적이 거의 없었는데, 간만에 크게 한 방을 먹고 말았다. 젠을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가슴 달린 남자라고 말했지만, 사실 에어리얼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른 용병처럼 머리를 짧게 치고 갑옷으로 가슴팍을 가려도, 젠은 여전히 여자였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때로는 낙담했다. 젠이 여자인 이상, 동족을 계속 찾고 싶어 할 테니까.
하지만 내가 있으면 당신은 그 꿈을 이룰 수 없다.
<당신이 머리를 기른 모습은… 아마 평생 보지 못하겠지?>
에어리얼은 실없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꾸벅꾸벅 조는 젠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새겨 둘 수 있도록. 그는 젠의 몸에 쌓인 무수한 상처를 보았다. 빠른 회복력이 장점이 알파인데도, 회복력이 부상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적이 입힌 상처가 다가 아니다. 자해의 흔적도 있었다. 오메가의 향기로부터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
에어리얼은 그녀가 푹 쉴 수 있도록 남겨 두고는 동굴에서 나왔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맨몸으로 바람을 맞는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항상 온몸을 오물로 칠하고, 천으로 꽁꽁 싸맨 상태로 젠의 품에 안기거나 업혀서 이동했으니까.
숲을 따라 절벽으로 향하는 내내 에어리얼은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오메가가 홀로 걷고 있는데도 어째서인지 마물이 달려들지 않았다. 에어리얼은 오메가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으나, 그 순간만큼은 무의식적으로 마물을 억눌렀다.
절벽은 높았다. 아래에서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마른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죽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실수로 살아남지 않기 위해, 쓸 만한 장소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며 젠을 혹사시킨 보람이 있었다.
에어리얼은 한참이나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밤인 탓인지 아래는 새까만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
젠을…. 그웬을 만나기 전에는,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인간의 주변을 맴돌며 굶주린 개처럼 헐떡였다. 어둠뿐인 숲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두려워서, 빛 속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에어리얼은 깨달았다. 본능으로만 움직이던 허기진 영혼이, 숨을 쉴 수 없을 만치 한껏 찼다. 젠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모닥불 앞에 자리 잡은 외로운 등이다. 여태껏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유일할지도 모르는 기형 알파. 인간에게도, 용병에게도, 성녀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평생을 떠돌아야만 했던 여자.
내가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자신처럼 외로웠던 그녀의 짝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깊은 잠에 빠져서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에어리얼은 몸을 돌렸다. 바람이 붉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려 놓았다. 긴 머리카락이 보기 좋다고, 언젠가 젠이 말했었던 것 같은데…. 에어리얼은 실없는 생각을 했다.
<에어리얼!>
<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위험하니까 이리 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다.
<나는….>
날을 세웠던 각오가 뭉툭해진다. 매번 결심한 자살을 매번 실패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일단… 이리 와서 얘기해. 어서!>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젠이 한 걸음 다가오려는 순간, 에어리얼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윽…. 이 자식, 움직이지 마! 너, 너…! 거기 가만 서 있어! 꼼짝도 하지 마!>
젠은 안절부절못하며 외쳤다. 심각한 모습인데, 에어리얼은 왜인지 우습게 느껴져 킥킥거렸다.
<…당신은 나와 있으면 안 돼.>
에어리얼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이대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끝은 나지 않을 거야. 마물에게 잡혀가든, 용병들에게 끌려가든….>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멍청한 짓 그만두고, 이리로 오지 못해?!>
<아니, 전부 내 일이잖아.>
<……!>
<그러니까… 내가 정해야지.>
늘 고개를 숙이던 에어리얼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녀에게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젠은 가타부타할 것 없이, 에어리얼을 낚아채기 위해 달려들었다.
<젠.>
에어리얼은 비록 그녀보다 작고 약했지만, 두 걸음 뒤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일만큼은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내가 오메가가 된 건, 아마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젠을 보고 있었는데— 몸이 허공에 던져지며 붉은 두 눈에는 달이 가득 찼다. 달은 외눈박이 밤의 유일한 눈동자. 고된 하루가 지나고, 단둘이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는 밤하늘의 달을 보던 시절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는데…. 아쉽게도, 운명은 그것조차 허락해 주지 않았다.
* * *
“나는 당신 때문에 오메가가 되었어.”
에어리얼은 대중없이 말을 내뱉었다. 젠은 인상을 썼다. 목숨이 위태로운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칼리번이 에레즈 프리드웬을 만나 오메가로 발현했듯이. …아직도 모르겠어?”
그 말이 울려 퍼졌을 때, 밤하늘의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혔다. 그녀의 안의 혼란도 그러했다.
“…!”
번개처럼 내리치는 깨달음. 젠의 호흡이 멎었다. 인형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왕비의 손끝 또한, 그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을 만치 살짝 떨렸다.
“당시의 나는 순진해서 당신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지. 설마 당신이 입으로는 성녀단을 나왔다고 했으면서 뒤로는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거든. 내가 절벽에서 몸을 던진 후에 용병대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말이야.”
“그만해….”
“다른 이유도 아닌, 오메가와 생활한 적이 있으니 다음 오메가를 찾아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말이지.”
“……아니야!”
젠은 사실을 부정하듯 얕게 고개를 저었다. 에어리얼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기쁘게 웃었다.
“그 모든 시간이 오로지 나를 성녀단에 팔아넘기기 위한 연극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다정했어. 나한테 아무도 그 정도의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지. 그러니 당신의 행동, 말, 감정…. 전부 거짓은 아니었을 거야. 진심도 약간은 섞여 있었겠지.”
“에어리얼, 나는…!”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에어리얼은 젠에게는 반박할 권한조차 없다는 듯이 말을 막았다.
“난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유령이거든.”
당신이 준 그 이름은 마계 저 밑바닥에 가라앉은 시체가 가지고 있겠지. 에어리얼은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말이야, 착하게 굴지 말았어야 했어. 인간들이, 알파들이 그랬듯 나를 강간하고 죽였어야지. 그랬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 수 있었을 텐데. …당신조차 모르는 채로, 이 세상에 대한 미련 없이. 당신이 베푼 같잖은 친절로 인해 나는 짐승일 때보다 더욱 비참해졌어. 죽는 편이 나은 꼴로 그 지옥에서 살아가야만 했으니까. 덕분에 알 필요가 없었던 이 세상의 진리마저 깨닫게 되었지.”
숲속에 버려진, 말라비틀어진 짐승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진리를. 에어리얼은 쓰디쓴 뿌리를 씹은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따지고 보면 당신 처지도 참 불쌍해. 나름 정을 베풀었는데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당하다니…. 아마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난 원래 이런 놈이니까.”
하하, 에어리얼은 헛웃음을 뱉었다. 땅을 배로 기어 다니며 독을 심는 뱀. 에어리얼의 붉은 눈에서는 어느샌가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명 그의 겉모습은 칼리번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 맞다! 절벽 아래로 뛰어든 그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 당신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날 찾지 않았을 테니까.”
“…….”
“딱히 궁금하지도 않겠지만 들려줄게. 어차피 그리 긴 이야기도 아니거든.”
에어리얼은 제 뺨 위로 눈물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미소 지었다.
“나는 그 절벽에서 죽지 않았어. 아니, 죽지 못했지.”
* * *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에어리얼은 한탄했다. 완벽한 계획이 틀어진 것은 순전히 마물 탓이었다. 연약한 몸은 몇 번이고 바위에 부딪혀 쪼개지고 부서졌어야만 했다. 그러나 오메가의 향기를 쫓아온 마물은 그를 중간에 낚아챘다.
그러나 그마저도 온전치 못했다. 피 냄새를 맡은 마물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하이에나 떼처럼 몰려든 마물들은 반항이 불가능한 오메가를 뜯어먹기 위해 서로를 공격했다. 마물의 발톱에 살점이 뜯겨 나가며, 떨어지고 붙잡히기를 반복했다. 결국, 에어리얼의 몸은 절벽 아래로 흐르는 격류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즈음 에어리얼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대로 익사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일 테지. 마물에게 붙잡히느니 물고기 밥이나 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의 몸뚱이는 강 하류까지 흘러갔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격류는 그의 운명과 닮아 있었다.
에어리얼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물과 땅의 경계지에 쓰러져 있었다.
<우욱….>
에어리얼은 입 밖으로 물을 토해 냈다. 언제 다시 마물이 몰려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뼈가 여기저기 부러졌고 거친 물살에 피와 온기를 빼앗겨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에어리얼은 울먹였다. 평생 고통만 받았는데 심지어 죽음조차 편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통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며, 홀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사, 살려 줘….>
에어리얼은 죽음을 바랐으면서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각오를 다졌으면서도 혹여나 젠이 아닐까 하는 헛된 희망마저 들었다. 죽겠다고 절벽에서 뛰어내렸으면서 그 일 하나 제대로 못 해내다니…. 이 모습을 그녀가 보게 된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그래도 다시 보고 싶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각막이 손상된 탓에 눈앞이 흐릿했다. 에어리얼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숨을 쉴 때마다 부러진 뼈가 폐를 찔렀다. 설마, 데릴만이 보낸 용병들인가…. 에어리얼이 자책하던 차였다.
<죽은 건가?>
<음, 용케 숨은 쉬는 것 같은데….>
두런거리며 고기의 값을 매기는 소리가 들린다.
<빼 갈 만한 게 있는지 좀 살펴봐.>
그들은 검집으로 시체나 다를 바 없는 몸을 찔러 댔다. 딱딱한 검집 끝이 상처에 파고들 때마다 에어리얼은 괴상한 소리를 냈다. 에어리얼이 명백히 반응을 보이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치료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다만, 그를 코앞에 두고도 덤덤한 것을 보면 모두 인간인 것 같았다.
<쯧, 글렀군.>
누군가 혀를 찼다. 그들은 에어리얼에게서 쓸 만한 물건을 건지지 못했다.
제발, 나를 그녀에게…. 젠에게 데려다줘.
에어리얼은 입을 뻐끔거리며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 위로 물줄기가 흘렀다. 그러나 인간들은 떠날 채비를 했다.
<…잠깐 있어 봐.>
누군가의 목소리가 동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빼낼 게 없어도 한번 빼고는 가야지.>
인간의 언어인데 이상하게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어리얼은 물 밖에 나온 생선처럼 팔딱거렸다. 죽기 일보 직전인 자신은 몸이 뒤틀려 누가 봐도 온전치 못한 모습이었다.
인간은 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자에 대해 젠에게 몇 번이나 설명을 들었으나 에어리얼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마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하여간에, 마치 그 작자가 저주를 내린 것만 같다. 감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죄를 벌하기 위해서. 신의 능력이 마물의 피가 섞인 존재한테도 통용되는 건가?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어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에어리얼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리며,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어째서 오메가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걸까? 아니, 왜 이 세상에는 알파와 오메가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고…. 번식을 위해 둘로 갈라진 걸까. 어째서 선택할 수 없는 천형의 형태로 존재하는 걸까? 에어리얼은 젠을 떠올렸다.
번식이란 그토록 중요한 의식인가? 마물을 막아 주는 왕성의 웅장한 성벽도, 언젠가 멀리서 구경했던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결혼식도, 바퀴와 바늘, 파종과 추수. 그 모든 문명이— 결국 번식과 번성을 위한 보호막일 뿐이라면. 그리고 이 몸은 그 대단한 번식과 쾌락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면….
어째서 육체에는 영혼이라는 것이 기생하는 거지?
울고불고 싸우며, 젠과 엎치락뒤치락했던 나날이 무색할 정도로 에어리얼은 차분해졌다. 부서진 몸에 올라탄 인간 사내들은 그저, 넘쳐흐르기 직전에 더해진 마지막 한 방울이었을 뿐이다.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 보았다. 그러나 세상은, 본능은 기어이 도망치는 발목을 붙잡고 수렁으로 끌어당길 뿐.
<……후, 흐흐….>
거부하고, 분노하고, 도망치거나 변하려 해도, 부질없는 저항에 불과하다면….
<하아, 하하…….>
…받아들여야지. 뭘 어쩌겠어.
에어리얼은 교미하며 처음으로 웃었다. 그는 헐떡이며 손을 위로 뻗었다. 에어리얼은 순순히 사내를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그 정도 움직임은 아무도 거슬려 하지 않았다. 부러진 손은 의지와는 달리 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에어리얼은 뒤틀린 자신의 손이 우스웠다. 그래서 또 웃었다.
<하하하!>
그 순간, 하늘이 검게 갈라지며 에어리얼의 응답에 부응했다. 에어리얼의 몸 위에서 헐떡이던 장정들은 순식간에 피와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몸 위로 흩뿌려지는 핏물이 황홀했다. 그토록 두려웠고 증오스러웠던 마물이,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 줄이야.
이윽고, 에어리얼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한 번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에어리얼이라는, 그녀가 붙여 준 이름처럼. 드디어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전부 마물 덕분이었다.
젠은 본인이 본성을 완전히 드러내도 하늘 높이까지는 날지 못한다고 했었다.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에게 지금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은 젠이 발을 딛고 선 지상에서 멀어져 갈 뿐이었다. 비쩍 마른 몸은 하늘을 찢은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에어리얼이 사라지자 하늘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 *
“저 하늘 위에 ‘검은 손자국’이 새겨질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어?”
과거를 반추하는 붉은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광인의 눈이었다. 과거의 순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당신을 계속 부르고 있었는데….”
에어리얼이 감상을 물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붕 뜬 목소리였다.
“으음, 당신 성격이라면 쉬고 싶은데 일거리가 늘었다고 한탄했으려나? 아니면 돈을 벌 기회가 생겨서 기뻐했을까? …하지만 한 번도, 내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젠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하하, 그래! 당연히 전부 잊었겠지! 나 따위가 기억이 났겠어? 그토록 바라던 용병이 되었으니까! 내 자리에는 새파랗게 어린놈을 세워 놓고 말이야….”
“…….”
“설마 그 녀석까지 오메가였을 줄은 몰랐는데. 당신한테는 오메가를 찾아내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나 봐. 데릴만이 보는 눈 하나는 제대로란 말이지! 땅에 코를 박으며 충성하는 개다워!”
에어리얼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젠은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나는… 네가 그때 절벽에 떨어져 죽은 줄로만 알았다.”
수다쟁이였던 평소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힘겹게 내뱉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내가 속을 것 같아? 약해 빠지기는 했지만 나도 마물 혼혈이야! 고작 그 정도로…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잖아!”
에어리얼은 마치 젠에게 떠밀려 추락한 사람처럼 역정을 냈다.
“제기랄…. 그때 그 절벽의 높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 안 나?! 네 몸이 암벽에 부딪혔을 때 어떤 소리가 났는지도? 어찌 손쓸 틈도 없이 넌 급류에 떠내려 사라져 버렸어! 그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젠은 나이도 경험도 많은 알파였다. 목소리를 키워 싸울 때도 항상 어린애를 다그치는 투였고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그럼 왜 시체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지?”
“찾지 않은 게 아니야! 나도 찾아봤어! 절벽 아래로 내려가 주변을 다 찾아봤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을 뿐이야…!”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마치 시간이 몇십 년 전으로 흐른 듯 그녀는 불안정하고 궁지에 몰려 있었다. 도리어 그녀의 외침을 듣는 에어리얼이 더 냉정해 보였다.
“거짓말. 그걸 기회 삼아 날 포기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으면서.”
그리고 에어리얼은 보란 듯이 그녀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당신 마음 다 알아. 인간 쪽에도, 용병 쪽에도 끼지 못하던 자신보다 못한 존재를 만나고 얼마나 기뻤을까? 처음에야 빵 몇 덩어리와 옷가지로 대장 취급을 받을 수 있었으니 재밌었겠지. 하지만 슬슬 부담이 됐을 거야. 솔직히, 그때의 난 오메가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아무 데도 쓸데없는 혹이었잖아? 여태껏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한 게 있으니 구멍을 쓸 수도 없고….”
지하에서 수십 년 동안 갈고닦은 혀의 칼날이었다. 에어리얼의 얼굴에는 칼리번의 껍질로도 숨길 수 없는 여한이 서려 있었다.
“…….”
젠은 변명해 보려 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매일 밤, 날 두고 도망갈까, 말까 고민했을 거야. 실제로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잖아? 내가 알아서 죽어 주니 속으로는 잘됐다 싶지 않았어?”
그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차올랐다. 그녀의 상처받은 얼굴을 보니 에어리얼의 손이 저릿했다.
“결국, 당신한테 나는… 그 정도 존재였던 거겠지.”
젠은 에어리얼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음식과 옷을 주고, 보호해 주었다. 그녀가 못 해 준 것이라면 단 한 가지, 마지막 순간 떨어지는 에어리얼을 붙잡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에어리얼은 그 한 가지 죄로 젠을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미워라…. 차라리 처음부터 구해 주지 말지. 그러면 난 편하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자연의 섭리대로라면 진작 마물에게 뜯어먹혀 죽었을 기형 알파에 불과했으니까. 에어리얼은 쓴웃음을 지었다.
“흐, 후후…. 당신은 나를 포기하고 떠났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당신만 생각했어. 마물에게 끊임없이 범해지면서도 계속…. 마물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결되어서 더는 인간으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된 그 순간까지도.”
뼈로 된 코르셋으로 흉통을 조인 채 의자에 앉혀져, 인간계와는 다른 검은 하늘만을 올려다보며….
“나 대신 인간계로 향하는 마물들을 향해 외쳤지— 당장 젠을 찾아와. 찾아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 끌고 와. 왜냐면….”
에어리얼의 두 눈이 눈앞이 아닌 과거를 보는지 흐릿해졌다.
“왜냐면…!”
그에 따라 나긋하던 목소리는 점차 힘이 실리고, 씹어 삼킬 듯 딱딱해져 갔다. 수십 년간 쌓여 온 감정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혼자는 외롭고 무서우니까.”
그 모든 분노와 증오를 넘은 후 마주한 감정은 고독이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고독.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고독.
“그리고 그 감정을 가르쳐 준 건… 당신이었잖아.”
마지막에는 그렇게, 힘없이 중얼거렸다.
“…….”
쯧, 에어리얼은 감정이 격해진 자신을 비웃듯 혀를 찼다.
“…맞다. 나만큼이나 당신도 고독을 두려워하지?”
에어리얼은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어 나갔다.
“한 가지 예언을 해 주지. 당신은 과거에도 그래 왔듯 앞으로도 평생 혼자일 거야. 인간, 마물, 알파, 여자….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못하고 박쥐처럼 여기저기 붙어 다니다 외로이 죽을 거라고!”
“에어리얼, 내가 무엇을 해야 널…!”
“…왕자!”
젠이 외쳤으나 에어리얼은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저를 위해 저 계집 알파를 죽여 주십시오!”
“…….”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젠을 향한 칼끝은 떨리고 있었다.
“뭘 망설이고 계시죠? 설마… 못 하시겠다는 겁니까?”
하! 에어리얼은 헛웃음을 내뱉고는, 에레즈의 손을 제 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왕자님의 선의는 이번에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왕자님께서는 아직도…. 아직까지도 나약함을 버리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설마 저 여자가 당신의 스승이자 부하여서 망설이시는 겁니까? 정말로… 그녀와의 우정이 칼리번보다 소중한 겁니까?”
“…….”
“하지만 젠에 대해 잊으신 게 있군요.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붉은 오메가에 대한 정보를 모두 밝히지 않았습니다. 칼리번을 괴롭힌 붉은 오메가를, 제 손으로 키웠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던 거겠죠.”
“에어리얼!”
젠은 당장에라도 둘을 떼어 놓고 싶었으나, 에레즈의 성검 앞에 가로막혀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성녀가 과연 ‘붉은 오메가’만 죽일까요?”
“…….”
“이다음은 칼리번일 겁니다. 젠에게는 마물 혼혈을 도륙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저번에는 인간들이었기에 목이 붙어 있었지만, 과연 이번에도 제가 무사할 수 있을까요? 제가 왕자님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만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어.”
에레즈는 젠에게 시선을 떼고는 에어리얼을, 그의 붉은 눈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말만.”
에어리얼은 유약한 에레즈가 역겹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혐오 어린 칼리번의 얼굴에 에레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배신자가 저보다도 소중하다면, 차라리 그 성검으로 제 목을 베십시오. 저는 왕자님을 괴롭히고 싶지 않으니까요.”
“제…발, 부탁이야. 그런 말은….”
“왕자님은 겉으로만 절 중요하다 하실 뿐이죠. 사실 속으로는 ‘칼리번’을 버거운 짐으로 여기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왕성을 가득 채운 저 벌레 같은 인간과 박쥐 같은 배신자를, 저와 동급으로 여기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왕자님은 저들의 왕이 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에레즈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젠과 대치하며 흔들렸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다시 흐릿해졌다.
“그렇다면 증명하십시오.”
“…….”
“마침 젠은 약해 빠진 인간도 아니군요. 알파는 여태껏 수없이 베어 오셨으니, 죄책감도 덜하실 겁니다. 저 여자의 목을 저한테 선물로 주십시오. 그래야 ‘칼리번’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알겠어.”
망설이던 에레즈는 결국 자세를 고쳐 잡았다. 도망칠 여지를 주던 전과 달리, 상대를 베겠다는 태도의 변화가 느껴졌다. 그리고 에레즈에게 그 자세를 알려 준 것은 젠, 그녀 본인이었다.
“하는 수 없지.”
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산산조각이 난 검의 손잡이를 바닥에 던졌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어중간하게 몸을 변형해서는 성검의 제물이 될 뿐이다. 도망칠 곳 없는 탑에서 본성을 드러내게 되면…. 왕비의 목숨을 장담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이것밖에 답이 없다. 그녀가 눈을 감고 집중할 때였다.
“멈춰라.”
낯설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물결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사실상 처음 듣는 왕비의 목소리에 에레즈의 두 눈은 크게 뜨였다. 반면 에어리얼의 두 눈은 가늘어졌다.
세 사람이 설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던 왕비였다. 그녀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질문을 하고 회유나 협박을 해도 굳건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비로소 이 무대에 나섰다.
“칼을 내리거라.”
왕비는 에레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걸어 나왔다. 어쩌다 성녀단에 들어갔던 젠과 달리 왕비는 진짜 성녀였다.
“…….”
그래서일까, 에레즈는 왕비에게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에레즈는 영문 모를 감정에 혼란스러워했다.
“왕비님! 위험합니다. 물러나십시오.”
한편, 젠은 왕비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젠의 팔을 가볍게 쥐어 만류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붉은 오메가여, 거래를 제안하지.”
“왕자님 없이는 아무런 힘이 없는 저에게 말입니까?”
사실상 이 게임의 승자인 주제에, 에어리얼은 한없이 약한 척을 했다. 그러나 왕비는 굴하지 않았다.
“이 여자를 살려 보내라. 그럼 네가 원하는 걸 알려 주겠다.”
“왕비님! 오메가와 거래를 하시면 안 됩니다! 저 같은 것을 위해 그러실 필요는…!”
왕비의 제안에 젠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에어리얼은 보란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왕성의 모든 성녀를 죽게 만들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중요한 건 단 한 명뿐이다. 그것이 바로 눈앞의 왕비였다. 아니, 인간이 쌓아 올린 체계가 무너진 지금, 굳이 그런 가짜 직책으로 부를 필요가 있을까?
베이가 이주드 트리스트람.
성녀이자, 괴물의 가짜 아내이자, 괴물들의 어머니. 기만된 삶을 살았던 여자.
* * *
칼리번은 기억 속으로 추락했다. 에어리얼의 심상은 그야말로 햇볕 한 줌조차 닿지 않는 저주받은 불모지였다. 그래서 눈이 익기 전까지는 어디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칼리번은 평소보다 빨리 이곳이 지하 감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어둠의 농도, 습기, 감촉…. 잊으려 해도 영혼에 새겨져 결코 지울 수 없었으니까.
<우욱, 으웩…!>
쿨럭, 켁! 흡사 들개가 깨갱거리는 듯한 구역질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몸을 들썩이며 속을 게워 낼 때마다 입 밖으로 정체 모를 끈적한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에어리얼은 차가운 돌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신이었으나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수십 년간 덧칠된 마물의 피와 체액이 그의 몸을 뒤덮었고, 그 탓에 창백한 피부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아, 아…. 흐, 으윽…!>
에어리얼의 거친 숨소리는 두꺼운 벽에 부딪혀 지하 감옥 안에서 울려 퍼졌다. 숨이 섞이고 부딪치다 보니 마치 흐느낌처럼 들렸다.
<하아, 하아…….>
늘 마물과 결합한 상태였기에, 귓가에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이 얼마만의 고요인가? 에어리얼은 드디어 자신이 죽은 것인가 싶었다. 사람들은 마물 혼혈은 죽으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마계를 겪은 그로서는 차라리 인간의 지옥이 아늑해 보였다.
그런 에어리얼의 앞에는 정체 모를 사내가 서 있었다. 에어리얼은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 당장은 그의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 돌려보내지 말아 줘…. 으, 우욱…. 뭐든지 할 테니까.>
에어리얼은 고개를 조아리며 사내의 발에 매달렸다. 앞으로 이 사내가 어떤 고문을 한다 한들 마계에서 보낸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에어리얼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차였다.
<윽!>
사내는 에어리얼을 떼어 내고는 그의 머리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그 압력에 머릿속이 종이 친 것처럼 뎅, 뎅, 울렸다. 에어리얼은 두 팔로 땅을 짚고 머리를 빼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메가.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내는 에어리얼의 머리를 짓밟은 채로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평생을 누군가의 위에 군림한 사람처럼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하, 할게! 무엇이든 할 테니까….>
에어리얼은 짓눌린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붉은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혹시나 ‘그녀’가 아닐까 싶은 헛된 희망은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자신을 마계에서 인간계로 불러낸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순수한 호기심뿐이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저 사내는 도통 누구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기어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짙은 금발 외에는….
* * *
“칼리번? 그렇게나 심하게 아픈 겁니까?”
아스터의 목소리에 칼리번은 정신을 차렸다.
“아, 윽…! 젠장….”
칼리번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눈물이 아니었다. 몸의 주인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휘몰아치는 에어리얼의 기억에 머릿속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칼리번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제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의 고통과 동조한 주변의 마물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감정을 고통으로 전가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또 왜 그러는 겁니까?”
칼리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는 익숙해졌기에, 아스터는 백금사로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몸이 온전했던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밀어냈고 검은 투구는 데굴, 땅 위를 몇 바퀴나 굴러 버리고 말았다. 최종적으로는 투구의 정수리 부분이 땅에 안착했다. 아스터가 담긴 투구는 요람처럼 흔들거렸다.
“제길, 윽, 내 머릿속에서…. 꺼져…!”
그러나 두 눈에 핏줄이 선 칼리번은 몸이 뒤집힌 채 덜그럭거리는 아스터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깨져 버릴 것 같은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마물을 이용하기 위해 에어리얼의 몸에 자해를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혼을 에어리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에어리얼의 기억은 칼리번을 압사시킬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더구나 칼리번의 경험은 에어리얼의 기억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에어리얼이 느꼈을 고통을 칼리번만큼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통은 알파와 오메가의 육체를 이어 줄 뿐만 아니라, 오메가 간의 영혼을 이어주는 매개체기도 했던 것이다.
‘왕자님….’
이렇듯 에어리얼의 거대한 기억에 영혼이 빨려 들어갈 때면, 칼리번은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에레즈를 찾곤 했다. 그와 함께 보냈던 짧은 나날을. 열에 취한 몸을 식혀 주던 비의 감촉을.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마지막 선택을. 그로 인해 칼리번은 에어리얼과 분리될 수 있었고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오메가여서일까? 이번에는 ‘그런 기억’마저도 칼리번과 에어리얼은 서로 닮아 있었다.
“큭, 허윽….”
그렇다고 해서 나는 너를 동정하지 않는다…! 에어리얼의 몸을 붙잡은 채 치를 떨었으나 검은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메가가 되기 전의 기억도, 오메가가 된 후의 기억도 뗄 수 없을 만치 비슷하다면….
칼리번은 에어리얼과 몸이 바뀐 후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되짚었다.
‘왕자님….’
모든 것을 잃은 칼리번은 오직 에레즈에게서 답을 찾아야만 했다. 왕자님은, 에레즈 프리드웬은 지난 8년간 자신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간절히 찾아 헤맸다. 그 증거는 때로는 작은 돌멩이에 스며들었고, 때로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차이는 칼리번의 정신을 에어리얼의 기억에게서 간신히 떼어 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칼리번의 영혼에 새로운 금이 가게 했다.
칼리번은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몸을 떨었다.
“…이렇게 막 던져 버리면 투구 한가운데가 우그러든단 말입니다.”
그즈음, 아스터는 백금사를 이용해 투구를 원래 방향으로 뒤집는 데 성공했다. 그는 투구를 질질 끌며 칼리번에게로 다가갔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또다시 자해하면, 이번에는 밀리지 않고 백금사로 몸을 묶을 작정이었다.
멀쩡한 다리가 없는 탓에 아스터는 백금사를 지네 발처럼 늘어뜨려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발발거리며 다가오는 그는 전보다 훨씬 느렸다. 칼리번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아스터를 냉큼 낚아챘다.
“……뭡니까. 던져 버릴 때는 언제고 갑자기…. 허락 없이 에어리얼이 준 소중한 투구를 들었다 놨다 하지 좀 마십시오.”
아스터는 질색했다. 몸을 대부분 잃은 이후, 그는 작아진 자신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이동 당하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 칼리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를 똑 닮아 작고 약한 것이, 앞에서 알랑거리면 도저히 가만두고 볼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아스터를 강하게 붙잡았다.
“이럴 때는 에어리얼과 비슷하군요.”
한참 칼리번이 차가운 투구에 한창 손때를 묻히고 있을 때였다.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비슷해?”
칼리번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오메가와는 상관이 없는 아스터에게서, 여태껏 시달려 온 명제를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저리 꺼지라며 화를 내다가 또 어떨 때는 왜 곁에 없냐고 화를 내곤 했거든요.”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 그래서 몸을 반으로 분리해 두곤 했습니다. 한쪽은 꺼지고 한쪽은 남을 수 있게.”
아스터가 에어리얼에 대한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위아래로?”
칼리번은 문득 궁금해졌다.
“가끔은 색다르게, 좌우로 준비한 적도 있습니다.”
아스터는 백금사를 자랑하듯 슬쩍 내밀었다.
“그런가…. 지금은 한 부위뿐이라 나눌 수 없겠군.”
너무 큰 고통이 지나간 탓일까, 칼리번은 다소 멍청해졌다. 그는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검은 투구에 이마를 문질렀다. 아스터의 목소리는 누군가를 닮았다. 그런 아스터와 에어리얼에 대한 주제로 괴상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칼리번의 정신은 조금씩 진정되었다.
“당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에어리얼이 준 소중한 투구가 둘로 쪼개질지도 모르죠.”
“…앞으로는 조심하지.”
칼리번은 아스터의 투구를 쓱쓱 쓰다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물론 일어나기 전에 투구를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스터가 물었지만, 칼리번은 초소 밖으로 걸어 나왔다. 주변에는 무수한 알파의 향기가 혼재되어 있었다. 칼리번이 지배한 알파들로 꾸린 부대였다.
“오메가님.”
알파 중 한 명이 칼리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왕성에서 성녀 무리가 빠져나오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성녀들이?”
“네. 그 수가 상당했습니다. 왕성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직 전달받은 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데릴만 님께서 방해물을 내쫓고 계신 것 아닐까요.”
성녀 무리를 발견한 알파는 더불어 제 선에서 그들을 ‘처리’했다고 덧붙였다.
‘어째서지? 그러면 마물을 막을 수 없게 되는데….’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성녀는 성력을 사용해 왕성 주변을 보호막으로 감싼다. 그런 그들이 마물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성 밖으로 도망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러다 방어막이 완전히 풀리면, 숲에 자리 잡은 마물들이 왕성을 덮칠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에어리얼이 마물을 불러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왕성에 있는 에레즈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앞으로는 도망치는 성녀가 보이는 대로 잡아들여라. 고문을 해서라도 확인할 것이 있으니, 되도록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불길한 징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