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프롤로그. 갈림길 (26/50)

| 목 차 |

3부

프롤로그. 갈림길

1. 배신자의 이름

2. 성녀와 마물

프롤로그. 갈림길

저주를 받아 바위가 된 것처럼, 칼리번은 무릎을 꿇은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바위라기에는 너무 작고 붉었다. 그의 몸은 붉은 머리카락과 피로 뒤덮여 있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피는 땅으로 흘러내렸다. 칼리번이 방패가 되어 준 덕분에, 검은 투구 위로는 붉은 물방울만 간혹 떨어질 뿐이었다.

평생 그렇게 있을 것 같았던 칼리번은 홀연히 일어섰다. 칼리번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비를 피하지 않고, 근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은… 아니, 에어리얼의 몸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성검에 당한 상처는 일반적인 상처와는 다릅니다.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겁니다. 갑옷이 전부 부서져 제 안에 당신을 보호할 수도 없으니, 어딘가 숨어서 회복을 기다리는 편이….”

아스터가 말했다.

“아니, 이제 쉴 틈은 없을 거다.”

칼리번은 여전히 먼 곳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는 아스터를 땅에 내려놓고 대신 전투의 흔적을 하나 주웠다. 에레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아스터의 갑옷 조각이었다.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거지만…. 그 조각을 모아 이어 붙인다 해도 예전처럼 제 몸을 보호해 주지는 못할 겁니다.”

“…….”

“이미 부서져 버렸으니까요.”

아스터가 금사로 투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온전한 갑옷이었을 때는 에어리얼의 몸보다 컸으나, 지금은 종아리 정도의 크기에 그쳤다. 작아진 아스터가 금사를 이용해 간신히 칼리번을 올려다볼 때였다. 투구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사뿐히 떨어졌다.

“당신…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아스터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멈추지 않고 묵묵히 붉은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

예전의 아스터였다면 칼리번의 행동을 진작에 저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통밖에 남지 않은 지금은, 에어리얼의 붉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줄어드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칼리번의 주변으로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덕분에 아스터의 투구에도 붉은 깃이 꽂혔다. 아스터는 뒤늦게 투구를 칼리번의 종아리에 투구를 쿵, 쿵 부딪쳤다.

“이건 당신의 몸이 아니라 에어리얼의 몸입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십시오. 에어리얼의 머리카락은 늘 길었습니다. 여기서 외양이 더 달라지면, 아무도 당신이 에어리얼이라고 믿지 않을 겁니다!”

아스터가 항의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에어리얼의 겉모습은 그간 칼리번에 의해 몇 번이나 부서지고 망가졌다. 그랬기에 아스터의 주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스터에게는 길고 붉은 머리카락이 에어리얼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았다.

“상관없다.”

“무엇이 말이죠?”

“내가 에어리얼인지 아닌지를… 누가 의심하든 더는 의미가 없단 뜻이다.”

할 말을 마친 칼리번은 쓸모없어진 갑옷 조각을 땅에 던졌다. 파편이 아스터의 투구에 부딪혀 퉁,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칼리번은 몸을 숙여 발치에 놓인 아스터를 번쩍 들어 올렸다.

“!”

순간 놀랐는지, 투구 아래로 튀어나온 백금사가 흔들거렸다. 아스터는 그제야 비로소 칼리번과 마주 보았다. 빗물 탓에 여전히 붉은 실이 투구에 들러붙은 채로.

어깨를 넘었던 에어리얼의 머리카락은 이제 뒷덜미만 겨우 덮을 정도로 짧아졌다. 비추어 볼 거울도 없이 엉성하게 자른 탓에 영 비뚤배뚤했다. 그러나 우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파에게 에어리얼의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에어리얼만큼 힘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일 뿐이다.”

칼리번은 아스터의 투구에 들러붙은 붉은 머리카락을 탁탁 털어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오메가로서 힘을 제대로 쓸 줄 몰랐기에 에어리얼인 척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칼리번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스터는 칼리번과 마주 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등 너머를 볼 수 있었다. 마물이 그득했다. 칼리번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으니 교미를 하기에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에어리얼만큼은 다룰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감히 칼리번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내가 에어리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켜도 그 누구도 날 구속하지 못할 거다.”

허풍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칼리번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에레즈 프리드웬을 막기 위해 힘을 쓰면서, 그리고 인간을 죽이면서 그는 어떤 한계를 넘어 버리고 말았다. 다만, 힘의 대가인지 칼리번의 영혼에도 그만한 흠집이 갔다.

“…….”

아스터는 반항하지 않고 칼리번의 손안에서 얌전히 대롱거렸다. 아스터의 투구 아래로는 미처 숨기지 못한 백금사가 문어의 다리처럼 축 처져 있었다.

“데릴만과 동맹을 맺은 알파 무리들이 어느 곳에 분포했는지 파악해뒀다. 데릴만은 나를…. 아니, ‘에어리얼’을 두려워해 무리를 곧바로 해산시켰지만, 이제는 그들을 찾아가 내 것으로 만들 거다.”

센어르와 데릴만을 겪으며 칼리번은 깨닫게 되었다. 회담에 모인 알파들을 몰살하는 것만으로는 절반의 성공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왜냐면 왕자님의 적은 성안에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 밖의 알파들을 차지한 후에 왕성에 주둔하는 알파들과 전쟁을 치를 거다. 그 정도 규모의 전쟁이라면 에어리얼도 더는 숨지만은 않겠지.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상대할 것이고, 아니면….”

“적어도 데릴만이 양쪽으로 부리고 있던 알파들은 전부 말소되겠군요.”

“…그래.”

“그 과정에서 당신은 인간을 죽여야 할 겁니다.”

“…….”

“…당신은 그게 싫어서, 일부러 고생을 자처하지 않았습니까?”

아스터는 센어르의 일을 돌려 말했다.

“그래도 해야겠지.”

이번 전투로 그의 내부에 남아 있던 안일한 망설임은 마침내 닳아 버렸다. 이 무대에 악역으로 서겠다고 각오한 이상, 어설픈 연기는 그만둬야 할 것이다.

“에어리얼의 몸이 위험에 빠질 것이 뻔한데, 제가 허락할 것 같습니까? 이번 전투만 해도 이 정도인데, 작정하고 전쟁을 벌이면 에레즈 프리드웬은 정말 당신을 죽이려 달려들 겁니다. …아, 이런 식으로 말하면 당신은 오히려 좋아하겠죠.”

남은 것이라고는 목소리밖에 없는 아스터가 투덜거렸다.

“그리고… 당신과 에레즈 프리드웬의 병력이 모두 소진된 후에 진짜 에어리얼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쩌려고 그런 무모한 작전을 세우는 겁니까?”

그간 아스터는 무슨 짓을 해서든 에어리얼을 만나길 원했고, 칼리번은 되도록 인간을 죽이지 않으며 나아가길 원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상황이 변했다.

“너도 봤지 않나. 그분은 충분히 강하다. 내가 불온한 알파들을 모두 잘라 낸다면, 그 후에는 혼자서도 능히 에어리얼을 처리하실 거다.”

“그럼 당신은 정말로 ‘에어리얼’이 되어 버릴 텐데요.”

“…….”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아스터는 칼리번이 애써 모른 척한 부분을 건드렸다.

“네가 찾던 에어리얼의 껍질을 끝까지 쓰게 된 건 미안하다. 하지만 그건 죽었는지, 숨었는지 모를 진짜 에어리얼을 탓해라.”

“그런 의미가 아니라….”

반박하려던 아스터는 칼리번의 표정을 보았다.

“…….”

그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빗소리만이 들렸다. 칼리번은 이미 죽었어도 모자람이 없는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진짜 몸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에어리얼의 몸도. 그런데도 그는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해서, 마치 죽음을 초월한 것 같았다. 아니, 초월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버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자.”

칼리번은 어딘지 짓눌린 목소리로 아스터에게 말했다. 그 소리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에 젖어 금세 눅눅해지고 말았다.

“저도 데리고 가는 겁니까?”

아스터가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절… 죽이거나 버리지 않는 겁니까? 당신은 이제 에어리얼만큼 강해졌다고 했고, 저는 전보다 약해졌으니 절호의 기회일 텐데요.”

칼리번은 아스터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저것은 금사와 껍질을 대부분 잃은 상태였다. 이대로는 마물을 상대하지도, 아니, 당장 칼리번이 뛰어간다면 쫓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함께 가기 싫은 건가? 강제하지는 않겠다. 지금 네 상태를 보자면 어딘가에 숨어 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처음부터 말했다시피 저는 에어리얼의 몸을 보호할 겁니다.”

“…그래.”

칼리번은 군말 없이 아스터를 옆구리에 끼웠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세운 계획은 늘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아스터가 물었다.

“…글쎄, 이번에도 쉽지는 않을 거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직도 에어리얼이 어딨는지 찾지 못했으니까.”

“…….”

“아마도 그자는 내가 죽기를 기다리며 숨어 있을지도…. 그렇다면 나는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겠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는… 뭐, 어쩔 수 없었다. 칼리번은 애초에 머리를 쓰는 인물은 아니었다. 부족한 지성을 몸으로 때우는 편이었지.

“미리 말해 두지. 앞으로 에어리얼의 온전히 몸을 보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거다.”

떠나기 전 칼리번은 미리 엄포를 놓았다. 갑옷을 잃은 아스터로서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으리라. 칼리번이 당장 그를 버리고 떠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

예상대로 아스터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안겨 있었다. 종알거리던 녀석의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칼리번은 비척거리며 마물이 득실거리는 숲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혹시나 싶었지만… 왕자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에레즈 프리드웬. 젠. 그리고 다시 에레즈 프리드웬. 세 번째 겪는 재회였다. 역시나 기적이란 없었다.

차가운 빗물에 의해 창백해진 몸은 금세 숲의 어둠에 삼켜졌다.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는 마물들이 그를 반겼다. 칼리번은 그것들에게 손을 뻗었다. 마물은 칼리번을 삼켰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칼리번의 의지대로 이동하기 위해서.

* * *

데릴만은 검은 오메가의 터럭밖에 얻지 못했다. 그것의 행방을 고민하는 사이 왕자가 귀환했다. 신용병 연합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애타게 기다린 인물임에도, 그가 돌아온 다음 날 아침은 유독 고요했다. 데릴만은 숲을 수색하며 모은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해야만 했다. 원하는 것을 눈앞에서 놓쳤음에도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피해 가는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도 같은 흥분을 보였다.

‘역시 도토리는 늙은 여우보다 약한 모양이군.’

오드론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까지 왕성 안에 나타난 마물은 ‘쥐’의 형태뿐이었다. 쥐의 특징은 체구가 작고 민첩하다는 데에 있다. 붉은 오메가였다면 진작 거대하고 강력한 마물을 불러내어 인간을 모두 쓸어 버렸겠지. 이는 검은 오메가가 자유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뜻일 것이다.

데릴만은 마침내 검은 오메가를 찾아내, 그것의 검은 머리채를 움켜쥘 미래를 떠올렸다. 붉은 오메가와는 달리 무력하고 훼손당한 그 몸을….

“…그건 그렇고, 왕자님께서 늦으시는군. 회의가 열릴 예정이긴 한가? 아무래도 시간이 잘못 전달된 것 같은데.”

데릴만은 곁에 선 오드론에게 물었다. 회의장에는 신용병 연합의 알파들뿐이었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옴에도 양쪽이 텅 비어 있으니 인간을 싫어하는 데릴만이라고 해도 의문을 품을 법했다.

“전달받은 그대로입니다.”

한 번쯤 의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오드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흠…. 알겠다.”

데릴만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에레프 프리드웬이 늙은 여우를 혼내 주고, 또 그만큼 부상을 입었을 테니 약간의 지각은 관대하게 봐줘야겠지.’

데릴만은 목 안쪽으로 웃었다. 성검을 지닌 왕자는 데릴만에게 있어 늘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붉은 오메가를 대신 처리해 준 고마운 상대였다.

일반적으로 알파는 ‘적’이라고 인식한 상대를 살려 두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끝장을 봐야만 했다. 같은 알파의 수를 줄여야지만 결과적으로 오메가와 교미를 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알파의 피에 새겨진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그러나 마물 혼혈들은 달랐다. 그들은 마물과 달리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서열을 나누며 살아간다. 그것은 수컷들이 서로 싸울 힘을 합쳐 암컷을 지배하고 분배하는, 인간의 방식에 가까웠다. 데릴만은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알파이면서도 또한 더없이 인간다운 사내였다. 적과 적을 이용하여 이득을 볼 줄 알았다. 과연 용병 연합의 우두머리에 설 만한 인물이었다.

“대장님. 왕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때, 오드론의 언질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이어서 에레즈 프리드웬이 회담장으로 들어왔다. 검은 망토를 두른 왕자는 익히 보아 온 모습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었다. 데릴만이 수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에레즈는 왼쪽 눈을 잃은 흉터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검은 천으로 왼쪽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왕자님.”

데릴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그러나 주름이 잡힌 두 눈은 무례하게도, 에레즈 프리드웬이 어떤 부상을 입었을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흠, 얼굴을 가린 걸 보니 붉은 오메가에게 입은 상처가 컸던 모양이지? 그래도 영 심심하군. 붉은 오메가가 다리 하나 정도는 떼어 냈을 줄 알았는데…. 늙은 여우라 기량이 떨어진 건가? 이래서야 알테르 프리드웬만도 못하군.’

데릴만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겉모습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멀끔했던 것이다. 게다가 왼쪽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탓일까? 수색대를 떠나기 전보다 더욱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외모에 대한 흥미는 금세 떨어졌다. 오메가가 아닌 이상 아름다워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점이 더 궁금했다.

“오늘 회의에 다른 두 기둥에서는 참석하지 않는 겁니까?”

데릴만은 왕자가 성녀단과 기사단을 이끌고 함께 올 줄 알았다. 인간의 편을 드는 그의 성격상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레즈 프리드웬은 왕자라는 직책에 맞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기사들도 대동치 않고 홀몸으로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뒤로 한 남자가 따라붙기는 했다. …우뚝한 사내를 발견한 데릴만의 주름진 눈이 조금 커졌다.

“…왕자님. 뒤에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데릴만이 물었다. 에레즈의 뒤에 선 사내는 키가 훤칠했으며 체격이 아주 좋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갑옷으로 중무장하는 인간과 달리, 그는 알파처럼 최소한의 보호구만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동류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피부색이었다. 구릿빛 피부는 사내를 더욱 튼튼하고 건장하게 보이게끔 했다. 이마를 간신히 덮을 정도의 머리카락은 그보다 더 짙어, 밤처럼 검은빛이었다. 누구나 겁을 먹을 법한 무뚝뚝한 인상이었으나 우락부락한 용병들로만 가득한 이 회의장에서는 도리어 미남자로 느껴졌다.

검은 사내는 에레즈의 뒤에 서 있었다. 기름을 먹인 호두목처럼 짙고 검다. 어느새 회의장의 시선은 전부 그를 향하고 있었다. 데릴만 또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 그는….”

에레즈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칼…리번. 앞으로… 젠의 빈자리를 대신할 자다.”

평소와 달리, 에레즈의 목소리에는 이지가 느껴지지 않고 흐리멍덩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았다. 검은 사내에게 시선이 빼앗겼던 데릴만은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왕자님. 젠은 왕자님의 호위 기사이자, 왕실 재건 기사단의 단장이자, 용병 연합 소속 용병대의 부대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중요한 자리를 이렇게 갑자기 모르는 자에게 넘기시다니…. 기사단과 성녀단의 검증을 거친, 신뢰할 만한 인물입니까?”

데릴만이 물었으나 에레즈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데릴만이 기다리다 못해 한 번 더 입을 열려던 차였다.

“그의 신원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하지. 음…. 그래….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투명한 막에 감싸인 사람처럼, 그는 모든 자극에 한 박자씩 늦게 반응했다.

“왕자님! 이 이야기는 세 기둥이 모두 모였을 때 다시 한번 나누도록 하지요. 그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는 저희밖에 없는데 리론 후작님과 원로 성녀님들께서는….”

에레즈의 상태는 오드론에게도 들은 바가 없는 일이었다. 데릴만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내 앞에서 그 더러운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그 순간, 꿈에서 덜 깨어난 사람처럼 굴던 에레즈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더니 버럭 화를 냈다. 에레즈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푸른 눈에는 노기가 비쳤다.

“…….”

회의장을 가득 채우는 외침에 데릴만의 표정이 굳었다.

“…왕자님?”

데릴만이 아는 에레즈 프리드웬은 붉은 오메가를 향한 분노를 제외하고는 온화한 자였다. 인간에게 이런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가 이끄는 왕실 재건 기사단과 성녀단, 신용병 연합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고 그로 인해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중간에서 세 무리를 중재하곤 했었다.

“진정하세요, 왕자님. 저 이가 그간의 사정을 알고 감히 말을 꺼냈겠습니까? 왕성 물정에 어두워 실언을 한 것이겠죠. 왕자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왕성을 오래 비운 탓이니 이번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에레즈의 뒤에 서 있기만 하던 ‘칼리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잘 들으셨겠죠, 데릴만 대장님? 앞으로는 배신자들을 언급해 왕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배신자?”

“네. 왕실 재건 기사단과 성녀단의 주요 인사들이 왕자님을 기만하고, 백성들을 더 큰 고통에 빠뜨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로 인해 왕성은 마물로 들끓는 지옥이 되고 말았고요. 왕성 귀환 후 진실을 깨달은 왕자님께서 손수 그들을 처단하셨습니다.”

“…….”

기사단과 성녀단을 적으로 여기고는 있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닌 에레즈의 손으로 없어지다니. 데릴만은 상황의 흐름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왕좌를 뒤엎을 계획을 세우며 귀환한 쪽은… 오히려 데릴만,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너를 포함해서 말이지.”

그런 데릴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칼리번이라는 사내가 덧붙였다.

“뭐…. 크윽!”

그 말에 의문을 품기도 전, 날카로운 통증이 허리를 파고들었다. 등이 이상하게 뜨끈했다. 데릴만은 두 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이건… 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범인은 오드론이었다. 데릴만은 씹어 먹을 듯이 제 부하를 노려보았다.

“커헉, 어, 어째서…?!”

회의장까지 동행하면서, 심지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데릴만은 오드론에게서 어떠한 악의나 살기도 느끼지 못했다. 오드론 또한, 데릴만의 등에 단검을 밀어 넣었으면서도 죄악감과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 부하들은 왕자님에게 굴복했다. 내가 이분의 곁에 있는데 늙어 빠진 알파의 명령을 따를 이유는 하나도 없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데릴만의 머릿속에 가득 찬 의문에 답을 해 주었다. 쿵, 거대한 데릴만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큭, 허억…!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이게 무슨….”

“당신은 너무 오래 우두머리로 있었어. 부하의 손으로 적을 처리해 왔으니, 강한 알파에게 압도당하는 불쾌한 감각을 오랫동안 겪지 않았겠지.”

“흐으, 크……!”

“알파 주제에 힘이 아니라 머리를 쓰니까 본능에 녹이 슬어 버렸다고, 살만 뒤룩뒤룩 찐 돼지 새끼야!”

“크윽, 웃기지 마라….”

데릴만은 떨리는 손으로 몸 안에 박힌 단검을 잡아 뽑아냈다. 바닥에 쇳소리가 울리고, 피 묻은 검이 떨어졌다. 데릴만의 굵직한 흉통이 부풀어 오르기를 반복할 때마다 핏물이 몸 밖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비록 독이 발린 검이기는 했으나, 단검 하나로 데릴만을 죽이기에는 부족했다. 그것은 애초에 죽일 의도가 아니라는 의미기도 했다. 데릴만으로서는 더욱 치욕스러웠다.

“고집을 피워 봤자…. 하하! 인정해야지, 별수 있겠어? 이제는 에레즈 프리드웬이 너보다 강한 알파란 말이야.”

“알파…?”

으득, 데릴만은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에레즈는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풀었다.

“커헉, 이, 이럴 수가…!”

데릴만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흉터는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분명 제 형제에게 뽑혔던 왼쪽 눈이 오른쪽 눈과 다를 바 없이 오묘한 빛을 내는 것이었다.

“안타깝게 되었군, 데릴만. 알테르 프리드웬을 혼자서 없애지 못할 것 같아서 인간을 끌어들였는데, 그 또한 알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시했지. 아니면 에레즈 프리드웬 정도는 본인 실력으로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크으……. 너는, 설마….”

갑자기 칼리번이라는 사내에게서 향기가 났다. 그것은 잘린 머리카락을 통해 힘껏 들이마셨던 그 향기보다 훨씬 짙고 자극적이었다. 겉모습과 향기는 데릴만이 그간 들어 왔던 ‘검은 오메가’에 완벽히 부합했다. 하지만 데릴만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정하지 못했다. 검은 오메가가 이토록 교묘하게 움직일 수 있을 리가….

“늙으면 아집에 빠진다는 건, 인간이나 마물 혼혈이나 다를 바가 없다니까.”

그러한 늙은 알파의 마지막 믿음을 배신하며, 칼리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별 하나 없는 밤처럼 새까맣던 눈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부… 붉은 오메가…!”

허억, 데릴만은 크게 숨을 삼켰다.

“오랜만이군. 아니, 이 모습으로는 처음인 게 맞으려나?”

칼리번은, 아니, 에어리얼은 보란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붉은 오메가와는 전혀 다른 몸,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그러나 특유의 냉혹함과 비열함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가 에어리얼임을 증명했다.

‘그렇다는 말은, 숲에 있던 붉은 오메가는—!’

그 순간, 모든 조각이 맞춰지며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짝을 모두 맞춘 후에는 그동안 헤맨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별것 아니었으나, 완성되기 전까지는 불안과 의심으로 인해 헛맞추기만 하는 그 그림을.

데릴만이 찾고자 했던 것은 두 오메가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둘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사실까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덜떨어지는 알파에게 교미의 기회를 줬지만, 너한테는 일부러 검은 오메가를 보여 주지 않았지.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거야. …그렇지?”

“크으, 이, 개자식이…!”

데릴만이 씩씩거리며 으르렁댔다.

“이 내가 당신의 속내를 읽지 못했을 것 같아? 오메가의 힘을 다룰 줄 모르는 내 형제를 훔쳐다가… 지배할 작정이었겠지. 그 사이에서 새로운 오메가가 자식으로 태어나면 두 번째 아내로 삼으면서 말이야. 훤히 보인다고?”

“커헉…!”

가슴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던 응어리가 결국 목구멍까지 치솟았고, 데릴만은 핏덩어리를 토해 냈다. 늙은 알파를 유혹하는 향기는 도처에 퍼진 지 오래였다. 데릴만은 토해 낸 제 피로 손을 적셔 얼굴을 덮었으나 오메가의 향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자, 선택해. 여기서 수족 같던 부하의 손에 죽을 것인지…. 아니면 내게 굴복할 것인지.”

데릴만으로서는 죽음보다도 치욕스러운 선택의 순간이었다.

“모든 알파를 포섭했다고 믿으며, 의기양양하게 왕성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너는 내 손바닥 안이었어.”

“…….”

“그런데도 여태 굳이 살려 둔 이유… 아직도 모르겠어?”

이대로는 양쪽의 폐가 전부 오메가의 향기로 채워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마저도, 데릴만이 그간 알파들의 우위를 섭렵했던 바로 그 이유인 이성마저도 곧 마비될 것이다. 차라리 숨을 멈춰 죽어 버릴까? 그러나 생명으로서의 본능이 의지를 따라와 주지 않았다.

“넌 죽는 것보다 이런 꼴이 되는 걸 더 싫어했으니까.”

에어리얼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 시선의 끝에는 에레즈가 있었다. 눈앞에서 반역자와 오메가가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그는 얌전히 서 있기만 했다. 인형처럼 표정이 없었으며 총기로 반짝이던 보석안은 흔해 빠진 돌멩이처럼 탁해져 있었다.

“제길…. 큭, 흐으…!”

늙은 여우가 새로운 몸을 얻고 더욱 강해졌다. 이보다 위험한 일이 어디 있을까? 거기다… 데릴만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오드론마저 조종을 당할 정도이니, 왕성에 남아 있던 부하들은 대부분 오메가에게 넘어갔으리라. 더구나 성검을 든 에레즈 프리드웬은 인간이 아닌 에어리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건… 알테르 프리드웬 때보다 더 최악이군.’

데릴만은 주위로 한때는 부하였던 알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데릴만의 머리를 짓눌러 억지로 땅에 박았다. 그 모습은 마치 에어리얼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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