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악몽의 끝
사람들은 에레즈가 그 빛나는 검으로 마무리를 지어 주길 바랐다. 왕성에 창궐한 마물 쥐를, 그것들이 몰고 온 역병을, 이유 없이 연달아 발생했던 살해 사건을.
그러나 모두의 바람과 달리 그가 성검을 쥐는 일은 없었다. 아니, 도리어 허리끈이 끊어져 검집은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덜그럭, 추락하면 응당 들려야 하는 소음은 나지 않았다. 방 전체에 깔린 융단 같은 무언가가 검집을 받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
어째서인지 시야가 평소보다 자유롭다. 아무래도 안대가 다시 풀린 모양이다. 큰일이었다. 이곳은 왕성이었다. 마물 혼혈처럼… 잃어버린 눈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에레즈는 서둘러 왼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러나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의 얼굴은 충분히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긴 금발이 얼굴 위로 사르르 흘러내렸다.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었던가…?
문득 든 의문에 에레즈는 두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보랏빛이 어린 푸른 보석안은 한쪽을 가릴 때보다 양쪽 모두를 드러냈을 때 훨씬 아름다웠다. 그동안은 시름에 잠겨 탁했다면,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아 비이성적으로 영롱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자랐다거나, 두 눈이 훤히 드러났다는 사실이 아니다. 에레즈는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를 떠올렸다.
“칼….”
에레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덮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걸음에 맞춰 스르륵 땅을 기었다. 에레즈의 왼손은 깨끗했고 그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찬란한 금발을 늘어뜨린 그의 모습은 흡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은 달랐다. 금빛은 붉게 변해 가다, 끝에 이르러서는 시꺼멓게 변할 정도로 피에 물들어 있었다.
“칼, 칼……리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에레즈는 허우적거리며 걸어갔다.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휘감긴 시체들이 주인의 움직임을 따라 덜그럭거려, 마치 에레즈의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보였다. 에레즈는 쥐와 인간의 시체를 밟으며 칼리번에게로 향했다.
“카, 칼….”
조각상처럼 완벽한 겉모습과 달리, 에레즈는 어린아이처럼 울먹였다. 칼리번의 상태는 끔찍했다. 팔이 없고 발이 없었다. 입은 천으로 틀어막혀 당장에라도 질식에 이를 것 같았다. 끊임없이 흐르는 피.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 아아….”
에레즈는 아연실색하여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피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는지 무릎에 피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칼리번의 팔은 어디에 있는지, 발은 어디에 있는지…. 에레즈는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나 어디에도 칼리번에게 맞는 팔과 다리는 없었다.
“칼….”
에레즈는 서둘러 그의 입에 쑤셔 넣은 천을 끄집어냈다. 단순히 입 안을 채운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목구멍까지 억지로 밀어 넣었는지 천의 끝부분에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다음으로는 가슴이었다. 심장이 자리 잡은 가슴 왼편에 칼이 꽂혀 있었다. 너무 깊이 박혀 있어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에레즈는 떨리는 손으로 검의 자루를 움켜쥐고는, 칼리번을 오랫동안 괴롭힌 가시를 뽑아냈다. 병의 마개가 뽑히는 것처럼 피가 터져 나와 에레즈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에레즈는 한쪽뿐인 손으로 그의 가슴을 세게 짓눌러 지혈을 하고는 고개를 숙여 칼리번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칼리번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 돼, 주, 죽으면….”
에레즈는 칼리번의 코와 입에 연신 얼굴을 맞붙이며 필사적으로 숨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고, 너무나 많은 살점을 잃었다. 비록 목이 잘리고 심장이 뽑힌 것은 아닐지라도, 죽음에 이르기에는 충분했다.
“칼…. 큭……. 누, 눈을 뜨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발, 숨을 쉬어 줘.”
에레즈는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한없이 길게 자라난 그의 금사가 침대 위에 수의처럼 늘어졌다. 그러나 굳게 눈을 감은 칼리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여태껏 에레즈는 잠든 칼리번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서운해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손끝을 움찔거린다거나, 입술을 달싹여 말 비슷한 호흡이라도 내뱉지 않아서. 그런 반응을 바라며 잠 못 드는 밤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지금, 에레즈는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뜨지 않아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것이었는데.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아, 아아……. 으…윽, 흑….”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응석을 받아 주지 못하고 칼리번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이렇게나 강해졌는데, 이제는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켜 줄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결말은 항상 같은 것일까?
“젠…. 어디에 있는 겁니까…. 제발, 돌아와서 저를 도와주세요….”
에레즈는 자신과 칼리번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를 애타게 찾아 헤맸다. 그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다. 성녀님, 기사님, 아니, 신이라도….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도움을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이 도움을 청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니, 도움을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유일무이한 것을 부숴 버렸다.
“또다시 이런 일이…. 나 때문에, 내가 어리석어서…. 당신이…….”
꽉 다물린 잇새 사이로 짓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미, 미안……. 미안, 미안해……. 내, 내가 도대체, 당신을 두고 무슨 짓을…….”
스승님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붉은 오메가를 향한 증오가 크든 간에 절대로 칼리번의 곁을 비워서는 안 됐었다.
“나,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을… 당신이 이런 일을 겪지는 아, 않았을 텐데……. 내, 내가, 어, 어째서…….”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에레즈는 증오와 질투에 미쳐 판단이 흐려진 자신을 원망했다. 목 아래까지 뜨거운 응어리가 가득 차올라 숨이 벅찼다. 눈앞이 흐려졌다.
“칼….”
나는 여전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구나. 에레즈는 그와 단둘이서 동굴에 갇혀 천천히 죽어 가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칼리번은 한쪽 팔이 잘린 채 자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점점 온기를 잃어 가는 몸. 에레즈는 울며,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 부탁을 들어줘.”
그때처럼, 죽음에 가까워진 칼리번의 얼굴을 위로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사람을 구해도, 인간을 흉내 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았으니까….”
에레즈는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기적처럼 칼리번이 깨어나고 그의 팔도 원래대로 돌아왔었다. 그때는 성녀님이, 신이 소원을 들어준 줄로만 알았다. 에레즈가 성녀들에게 존중을 표해 왔던 이유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칼리번에게 이토록 가혹하게 굴 리가 없었다. 바닥에 흩어진 시체가 신이 없음을 증명했다.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이 사람을 살려만 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누구라도…. 악마라도, 마왕이라도 좋으니….”
따스한 눈물은 칼리번의 뺨을 적시고 입가로 흘러들었다.
“…살려만 준다면, 괴물이 되어 버려도 상관없으니까….”
에레즈의 눈에서는 푸른 보석이 녹은 것처럼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에레즈는 칼리번을 잃은 후로 울지 않겠다 맹세했다. 고난 앞에 울기만 했던, 과거의 나약한 자신을 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애원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뿐….
아주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에레즈는 그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칼리번의 피가 에레즈의 몸을 붉게 물들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 함께 죽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태껏 목숨을 부지한 것도 칼리번을 위해서였을 뿐이니….
더는 백성들도, 병사들도, 성녀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처리해야만 하는 적도 머릿속에서 흐릿해져 간다. 행방불명된 스승님을 향한 죄책감도 없다. 그토록 증오했던 붉은 오메가조차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텅 비어 도리어 고요해졌다. 그 안에는 오직 칼리번뿐이었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칼리번만을 위하고, 그를 위해서만 행동해야 했다. 그렇다면 칼리번을 잃는 일도 없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곱씹을 뿐.
“…왕자님.”
환청일까?
“일어나세요, 왕자님.”
그러나 꿈이라기에는… 맞닿은 뺨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호흡이 느껴졌다. 에레즈는 무거운 눈을 떴다. 침대 위는 어느새 작은 둥지가 되어 있었다. 금사가 칼리번을 소중하게 감싸고 있었다. 칼리번의 몸이 멀쩡했다. 잘려 나간 칼리번 팔이, 다리를 떠나기 전 본 모습 그대로였다.
에레즈는 다시금 일어난 기적에… 멍청하게도 두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만이 다가 아니다. 오래도록 꿈꿔 온 사람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칼…?”
붉게 짓무른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목소리는 쉬고 갈라져 듣기에 흉했다. 에레즈는 부끄러웠다. 칼리번이 깨어난다면, 처음으로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해야 할지 그는 늘 고민해 왔다. 멋진 말을 해야지. 8년 전의 애송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칼…. 난……. 나는…….”
그러나 정작 현실로 맞닥뜨리자, 목이 메어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멍청함에 왈칵 울음이 솟아올랐다.
“네, 왕자님.”
칼리번은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8년 만에 듣는 음성이어서, 낯설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분명 칼리번이었다.
“……칼!”
너무나 오래 기다린 재회였다. 가혹한 통과 의례를 치러야 했지만 결국에는 되찾은 것이다! 에레즈는 참으로 오랜만에 활짝 웃고 말았다.
알테르에게 잘려 나간 오른쪽 팔이 돌아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는 두 팔로 칼리번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흐느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등을 쓸어내렸다.
에레즈에게는 이제 칼리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이기만 하면 그는 목숨을 바쳐 지킬 것이다. 전과는 달라진 붉은 눈조차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2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