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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함정 (24/50)

14. 함정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온통 신음과 비명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항상 칼리번의 곁에 있어야 하는데…. 성을, 지켜야….’

차가운 비가 에레즈의 전신을 적셨다. 먹구름이 드리워져 어두워진 주변은 그의 머릿속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맑게 개지 못한 채, 검고 찐득한 과거가 이성을 가리고 사고를 방해한다.

“나는 도대체….”

병사들은 부상자를 나무 그늘이 진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에레즈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선 자리에는 피 웅덩이가 고였다. 자신의 피가 아닌 적군의 피였다.

수많은 알파를 쓰러뜨리고 정체불명의 검은 갑옷과 칼을 맞대고 싸웠다. 온몸에 구멍이 나고 뼈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마물 혼혈이라 해도 비정상적인 회복 속도였다. 에레즈는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칼리번을 구하고 싶다고, 내게 울면서 매달리던 울보 꼬맹이라면 지휘관으로 참여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달랑 목숨 하나만 들고 가서 죽어 봐. 유익한 경험이 될 거다. …하지만 왕이라면 여기에 남아라.>

스승님의 충고는 에레즈를 끝끝내 왕성에 남게 했다. 그녀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보이지 않던 수족이 풀린 것만 같았다.

칼리번을 영원히 잠들게 만들고, 스승님마저 죽음으로 몰아간 붉은 오메가를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것이 여전히 살아남아서 숨을 쉰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분노와 증오로 뒤덮여 성을 뛰쳐나온 결과가 고작….

<제 이름을 알다니 신기한 일이군요.>

아스터. 칼리번이 보여 준 악몽에서 들었던 그 이름.

그것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악몽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에레즈는 그나마 붙잡고 있던 자그마한 이성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침착하지 못했지? 붉은 오메가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정신이 팔려서….’

붉은 오메가는 검은 갑옷을 방패 삼아 도망쳤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검은 갑옷으로부터 오메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그것을 파괴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칼리번을 고통스럽게 한 마물은 전부 없애 버려야 하니까.

‘정말로?’

진실로 그것이 칼리번을 고통에 빠뜨린 존재여서 격렬하게 반응했나? 에레즈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에레즈는 자신의 발아래에서 산산조각이 난 적을 떠올렸다. 분노가 자신을 잡아먹어, 기억은 드문드문했다. 기존에 겪었던 마물들과 달리 그것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검을 휘두르며 생명체를 죽인다기보다는 부수는 것에 가까운 감각을 느꼈다.

칼리번을 가장 괴롭힌 것은 무엇보다도 붉은 오메가다. 그 어떤 끔찍한 마물도, 칼리번을 범했던 배신자들마저 그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성 밖에서 활개를 치는 붉은 오메가를 붙잡지도 못했고, 성안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배신자를 축출하지도 못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마물의 독기에 물든 숲을 방황하며 마물 혼혈과 마물들을 베고, 또 베고…. 붉은 오메가의 부하 하나를 부숴 버린 것뿐.

도무지 그것의 존재를 견딜 수가 없었다.

왜냐면….

검은 갑옷의 공격은, 일전에 겪었던 알테르의 방식과 너무나 비슷했으니까.

<계속 이대로 이어져 있을 겁니다.>

에레즈의 속눈썹에서, 코끝에서, 턱에서, 손끝에서, 옷자락에서… 그가 더는 흡수하지 못해 흘러넘친 빗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게 다입니다.>

담담히 자신을 올려다보던 검은 눈을 떠올린다. 언제나 불안하고 불길한 자신과 달리 단단하고 한결같았던 사람을.

“…….”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더러운 감정이 입안에서 쩍쩍 달라붙는다. 칼리번과 알테르 프리드웬 사이에서 태어난 그것을 죽여 없애 버리고 싶었던 거다. 고작 그것이, 잠든 칼리번을 버리고, 백성들조차 내버려 두고 뛰쳐나온 왕이 한 일이다.

빗물에 단단한 땅은 진창이 되어 에레즈의 발목을 붙잡는다.

“왕자님,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보다 못한 부관이 에레즈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병사들의 대표이기도 했다. 마물을 상대하던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두려워, 이때까지 감히 말조차 걸지 못했던 것이다.

“…….”

에레즈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야 병사를 둘러보았다. 상태는 심각했다. 붉은 오메가가 도망쳤다고는 하나 이 근방에 있을 터였다. 서둘러 왕성으로 귀환해야 함이 옳았다. 물론 에레즈는 이들 궁수 부대가 없다고 해도, 이 숲을 떠도는 데 있어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알테르도 쓰러뜨린 그가 마물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이들을 모두 버리고 홀로 전진한다면, 혼자 남은 붉은 오메가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자님,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문득 시선이 마주치자, 나무에 몸을 기댄 병사는 피를 흘리면서도 사죄했다.

“…….”

에레즈의 호흡이 턱 막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기사단과 성녀단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성을 나왔을 때, 에레즈는 마지못해 궁수 부대를 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간’인 왕자가 혼자서 성 밖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신하뿐만 아니라 백성으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인간인 척하기 위한 장식물. 에레즈가 미친 사람처럼 숲을 헤매면서도 그들의 비호를 일절 바라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에레즈의 독단으로 궁수 부대는 마물 혼혈이 아닌 인간들로 구성되었다. 마물 혼혈이 인간보다 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같은 알파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모든 결정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이상하다는 자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에는 증오와 분노만이 몸과 영혼을 지배했다.

비록 겉치장에 불과한 부대였으나 에레즈는 최대한 그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알테르의 아들에게 혼이 팔려 이들을 무방비하게 내버려 둔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을….

‘칼리번은 그러지 않았어. 날 버리지 않았는데….’

목 안쪽이 꽉 메어 온다. 칼리번이 지금 보여 주는 악몽과 칼리번이 예전에 그에게 주었던 묵묵한 다정함은 시시때때로 부딪쳐 에레즈의 심장에 불꽃을 튀겼다. 에레즈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자주 헷갈렸다. 답을 구하며, 칼리번의 손을 쥐고 매달려 보기도 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왕성으로 귀환하겠다. 힘겹겠지만, 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상자를 운반하는 데 집중하도록. 나도 말을 포기하고 병사들과 똑같이 걷도록 하겠다.”

에레즈는 낮게 중얼거렸다. 푸른 보석안에 낀 어둠이 조금은 가신 것 같았다. 그는 천으로 다시 왼쪽 눈을 가렸다.

“부…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왕자님.”

부관은 에레즈의 명을 따랐다. 온전하게 나은 그의 두 눈을 불길하게 살피면서.

* * *

데릴만은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정체를 들키기 전에 급히 숲을 떠났다. 물론 그가 오메가를 그냥 내버려 두고 왔을 리는 없다. 뒷일을 붉은 오메가에게 맡긴 데릴만은, 왕성으로 이동하던 중 부하를 골라 검은 숲에 남겼다.

“너희는 나 대신 이곳에 남아 제 영역으로 떠난 알파들을 찾아가라. 제아무리 붉은 오메가라 할지라도 에레즈 프리드웬을 상대하고 무사하지는 못할 테지. 전투가 끝나면 주변 알파를 찾아가 몸을 의지하려 들 거다. 그때 너희가 오메가를 감시하도록 해라. 알겠나?”

“네, 대장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숲을 떠나기 전에도 붉은 오메가의 곁에 부하를 남겨 놓았지만,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곁에서 전쟁을 치러 온 데릴만은 처음부터 그들을 버리는 패로 낙점해 놨다.

‘흠…. 이참에 둘 다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이 따르지는 않겠지.’

데릴만은 내심 왕성이 탈환 당한 날, 붉은 오메가가 죽었기를 바랐다. 그에게 있어 알파를 유혹하고 정신을 지배하는 오메가는 성검을 지닌 왕자보다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제기랄, 그렇다면 여우의 도토리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하필이면 검은 오메가를 회수하기도 전에 붉은 오메가와 먼저 만나다니…. 쯧, 데릴만은 혀를 찼다. 설마 붉은 오메가가 검은 오메가를 따로 숨겨 놓은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검은 오메가까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속단은 금물이다. 아직 이쪽에도 가능성은 남아 있을 거다. 검은 오메가만 손에 넣는다면, 늙어 빠진 여우 따위는….’

데릴만은 이를 갈았다. 알테르가 대패하고 수십 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붉은 오메가는 그 명성이 무색하게 몹시나 초라했었다. 곁에는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종자 하나뿐이었고 도주 생활 중 크게 다친 것인지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웠다.

그 말인즉, 왕성이 탈환 당하던 날 제대로 된 준비를 마치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데릴만은 행방불명된 검은 오메가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조금도 붉은 오메가답지 않았다. 원래 그가 알고 있던 붉은 여우와는 달랐다.

‘검은 눈….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다시 만난 붉은 오메가의 눈은, ‘붉다’라는 이름과 달리 검게 변해 있었다. 모든 빛을 흡수할 뿐인 검은 눈동자는 줄곧 데릴만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며칠간 지켜봐 온 붉은 오메가의 태에서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설마 검은 오메가를 잡아먹은 건 아니겠지….’

데릴만은 혀를 찼다. ‘오메가’라는 존재는 극히 적은 탓에 습성이나 생태에 관한 정보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메가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답도 쉽사리 내릴 수 없었다.

‘일단 이쪽은 가장 나은 수를 뒀다. 다음은 이번 전투의 결과를 보고 생각해 봐야겠군.’

최소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의해 죽기를 바라는 수밖에. 둘 다 처리할 예정이었던 데릴만으로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이득이었다.

* * *

데릴만의 부대가 귀환했을 때, 왕성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왕자님께서 보이시지 않는군. 이번 수색에서 확인한 내용을 보고하고자 하는데 어디 계십니까?”

데릴만은 왕성의 동향을 알면서도 일부러 에레즈를 찾았다.

“…그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여러 일이 있었소. 상세한 내용은 그대의 부관인 오드론이 설명할 테니 굳이 이 자리에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허어, 그렇습니까?”

왕자 대신 그를 맞이한 리론 후작은 불만이 많아 보였다. 데릴만은 다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귀환이 늦었으면 밖에서 작당을 벌인다고 꼬투리를 잡을 셈이었겠지. 그걸 대비해 데릴만은 회담에 참여한 알파를 시켜 로위나 리론이 포함된 수색대의 속도를 늦췄다. 그 덕에 리론 후작이나 성녀단으로부터 꿍꿍이가 있어 가장 늦게 귀환했다는 공격은 면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측 지휘관은 어디에 있소?”

데릴만은 ‘부득이한 마물의 습격’을 받아 인간 병사들이 모두 전사했음을 알렸다.

“일부러 죽인 게 아니라?!”

리론 후작은 이를 갈았으나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든 데릴만에게 대놓고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감히 할 수가 없겠지. 수색대가 파견되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다. 인간들을 지켜 주는 왕자님이 없는 이상 그들은 고양이 앞의 쥐나 다름없었으니까.

“인간이 알파보다 나약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흐음, 아니지…. 마물이 들끓는 숲의 한 가운데다 보니 각자의 실력으로 알아서 살아남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연약한 인간 분들을 미처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데릴만은 리론 후작을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며 뻔뻔하게 말했다.

“뭐, 뭐라…?! 큭! 지휘관의 실책은 왕자님께서 돌아오시면 판단하실 것이오.”

리론 후작은 헛기침을 해 댔다. 처음에는 여느 사내처럼 맞받아치다가 조금씩 기세가 꺾인다. 그 과정이 데릴만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사내놈이 암만 잘난 척을 해 봤자 알파 앞에서는 쪽도 못 쓰지.’

데릴만은 간만에 웃으며 왕성으로 들어왔다. 알파들은 일전에 습격을 당했던 북문에 구역을 잡고 인간들과 따로 생활 중이었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예상보다 빨리 본성에서 나오셨군요.”

“흠, 리론 후작이 그동안 왕성에 있었던 일은 자네에게 들으라더군.”

“그렇겠지요. 대장님께서도 제 설명이 한결 편하실 겁니다.”

오드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데릴만은 오드론에게 검은 숲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고, 오드론은 그에게 근황을 보고했다. 왕성은 그가 떠났을 때보다 더욱 피폐해져 있었다. 북문에 마물이 쏟아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동안 데릴만은 검은 숲 곳곳을 누비며 알파들과 교섭을 했기에, 왕성에 대한 정보는 오드론이 급히 보냈던 전보가 다였다.

‘젠이 지휘하던 수색대가 격파되어 행방불명. 에레즈 프리드웬이 수색대를 새로 꾸려 나섰으니 빠른 귀환 요청.’

젠의 부대는 센어르의 구역에서 몰살되었다. 알파들의 집회가 있던 날, 센어르의 구역이 불에 타 완전히 소멸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은 터였다. 사내 노예의 공급을 맡은 센어르가 죽은 탓에 회담장이 분노로 들썩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떠난 후 알파들이 죽어 나가고 마물 쥐가 나타났다? 그것도 성 밖이 아닌 성안에서?”

오드론의 보고에서는 처음 듣는 내용도 있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이런 재밌는 일이 있었을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데릴만의 목소리에서는 웃음기마저 묻어 나왔다.

“그로 인해 고작 마물 쥐에게 저희 알파가 잡아먹힌 것은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 연관은 없습니다.”

“아니, 내가 웃은 건 그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순수한 마물이 성안에 존재하냐는 것이지.”

왕성을 감싼 보호막은 인간과 마물을 철저하게 분리했다. 마물의 피가 섞인 알파마저도 성문을 지날 때면 고통을 느낄 정도다. 그런 절대적인 보호가 마물, 그것도 약해 빠진 마물 쥐에게 뚫렸다는 것은 더는 성녀가 필요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녀단에서는 보호막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나름 조사해 보았으나 거짓말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는 말은….”

“네, 검은 오메가의 행방이 이 마물 쥐의 횡행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둔 양피지를 탁자에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왕성의 내부를 간략하게 그려져 있었다. 몇 군데가 특별하게 표시되어 있었고, 그것 중에는 또다시 X표가 처져 있기도 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결혼식 때도 붉은 오메가가 성안에서 마물을 직접 소환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저희는 그동안 마물 쥐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장소를 추려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소가 남았는데, 마침 대장님께서 귀환하셨습니다.”

“흐음…. 본성. 그것도 내부란 말이지.”

데릴만은 본성의 지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마지막 장소를 수색하기에는 적격이군. 인간들은 우리를 호의적으로 보지 않으니 말이야.”

데릴만은 당장 오늘 밤으로 수색 날짜를 잡았다. 오드론은 놀라워했지만, 곧 납득했다. 리론 후작이나 성녀단도 알파들의 우두머리가 이리도 빨리 다른 짓거리를 벌일 것이라 예상치 못할 것이다.

“급히 전보는 보냈습니다만, 왕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드론이 물었다.

“붉은 오메가가 상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메가에게 죽을 수도 있겠군요.”

“너는 에레즈 프리드웬이 죽기를 바라는가 보군.”

“…….”

오드론은 무언의 긍정을 표했다. 차라리 붉은 오메가가 에레즈 프리드웬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데릴만과는 정반대였다.

“대장님.”

데릴만이 비로소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오드론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더 보고할 것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데릴만이 시선이 한차례 오드론을 휘감았다. 오드론은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이 밀랍으로 봉인된 사람처럼 에레즈 프리드웬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보다 약한 알파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데릴만을 맞이한 후 그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다. 오드론이 데릴만에게 왕성에 있었던 모든 일을 보고하지 않은, 아니, 못 한 것도 그래서였다.

‘어차피 우리는 검은 오메가를 회수하면 왕성을 떠날 거다. 거기까지 패를 확인해 보고 보고를 드려도 늦지 않아. 그전에 에레즈 프리드웬이 죽기를 바라는 수밖에….’

오드론은 자신에게 변명했다. 그는 데릴만 이외에 그 어떤 알파에게도 짓눌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성검의 간택을 받은, 인간에 불과하다 여겼던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압도당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 수 없었다.

* * *

본성은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알파가 성 깊은 곳까지 진입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자리를 비워 기가 죽은 리론 후작이라 할지라도, 낮에 본성 안을 뒤지려 들었다면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데릴만과 오드론은 밤에 몰래 움직였다. 밤이라고는 하나, 부상자를 관리하는 성녀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으므로 마냥 자유롭지만은 못했다. 알파들은 그들답지 않게 인간의 시선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당당하게 굴자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마물 쥐의 소탕을 도와준다는 핑계를 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는 본성에 검은 오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하나 때문이었다.

밤늦게 왕성에 침입한 불한당의 수는 다섯이었다. 검은 오메가의 존재를 아는 알파는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알파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했다. 설령 검은 오메가가 소문대로 사지가 잘린 백치가 아니라, 붉은 오메가처럼 계략을 짜고 멀쩡히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해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데릴만과 부하들은 마지막 수색 장소로 향했다. 본성은 정화 작업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에 실사용 구역은 적은 편이었다. 부패한 시체는 그나마 치워 두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탈환 후와 별다른 바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본성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수록 마물 쥐의 기척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이것들은 약한 대신 떼를 지어 활동하는 습성이 있었다. 분명히 이 근처에 마물 쥐의 본거지가 있다. 은은하게 오메가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든다.

백전노장인 데릴만은 오메가를 죽이고 싶어 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오메가를 갈구했다. 오메가를 향한 이중적인 욕망을 품게 된 것은, 그가 알파 중에 가장 강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동족에게 사육당해 이지를 잃고, 신체 대부분도 유실된 오메가. 그것이야말로 데릴만이 가장 원하는 형태의 오메가였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둡고 더러운 석조 건물은 미로와도 같았다. 데릴만은 부하들을 찬찬히 살폈다.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새겨 뒀다. 만약 오늘 검은 오메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함께 온 동료는 모두 죽여야만 했으니 말이다.

가벼운 대화조차 없이 알파들은 역한 냄새와 마물의 기척을 따라 가장 안쪽의 방에 당도했다. 본성에 이런 숨겨진 공간이 있었나 신기할 정도였다.

“이곳인 것 같습니다. 대장님.”

“확실히 무언가가… 가득 찬 것 같군요.”

방문 앞에 이르자, 부하들도 평소와 다른 향취를 느낀 모양이었다. 데릴만은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노련한 용병들은 구차한 설명 없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몸 일부를 자연스럽게 변형시키고는 곧바로 방으로 달려들었다.

검은 오메가가 있을 방이라기엔 보안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치열했던 공성전에 비하면 검은 오메가의 방에 침입하는 일은 식은 수프를 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데릴만은 문 앞에 서서 부하들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마물의 배 속처럼 털로 뒤덮이고 끈적거렸으며 따뜻했다. 방 전체가 마물 쥐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이 원래는 벽돌과 나무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끼이이—!”

좁은 방 안, 저들끼리도 질식할 정도로 뭉쳐 있던 마물 쥐들은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등장에 잠자코 당하지만은 않았다. 개개로 흩어져 있을 때는 인간에게도 당할 정도로 약했으나, 한 덩이로 뭉쳐 있을 때는 달랐다. 수십, 수백 마리의 마물 쥐가 몸에 달라붙어 살을 뜯어 먹고 날카로운 앞니로 눈을 파먹는다. 피부가 질긴 알파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상대는 알파 용병이었다. 지루하고 고단한 살육전이 이어졌다. 마물 쥐들은 본거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주인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흠.”

부하들이 고생하는 사이 데릴만은 미리 준비해 둔 램프에 불을 붙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불이 댕겨지자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데릴만은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하들이 희생해서 길을 터 주었기에 굳이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침대로 보이는 장소에는 덩어리가 불룩 솟아 있었다. 데릴만은 굵고 큼지막한 손을 뻗었다. 마물 쥐로 뒤덮인 이불보를 움켜쥐자 그의 손에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침대를 뒤덮은 마물 쥐가 그의 팔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데릴만은 역겹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었던 오메가를 깨우기 위해….

데릴만이 쥐면 부스러질 정도로 낡아 빠진 천을 끄집어 당기자, 매달려 있던 마물 쥐들이 뾰족한 앞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몇 마리는 다른 마물의 몸뚱이 위로 나자빠지기도 했다.

예상대로 침대 위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데릴만의 두 눈에 환희에 가까운 빛을 감돌았으나, 아주 잠시였다. 사람은 맞았으나…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데릴만이 마주한 것은 부패한 시체였다. 백골이 드러날 정도로 예전에 죽은.

‘…검은 오메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는 건가?’

데릴만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아직은 눈앞의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지 램프를 시체에게 들이댔다. 시체의 텅 빈 눈구덩이와 벌어진 입에는 무엇인가가 잔뜩 채워져 있었다.

“이건…?”

데릴만은 의아해하면서도 시체의 입을 벌려 안에 든 것을 끄집어냈다. 두툼한 손바닥 위로 짧고 검은 풀이 올라왔다. 데릴만은 그것을 으스러질 듯 세게 움켜쥐었다.

이 감촉은… 머리카락이었다.

“하!”

어처구니가 없는지, 데릴만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하아, 으하하하!”

그는 작은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박장대소했다. 기를 쓰고 달려드는 마물 쥐를 집어 던지고 으깨며 대응하던 부하들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부하들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데릴만은 검은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댔다. 옅긴 했지만, 아직 오메가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데릴만은 껄껄 웃더니 그것을 미련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마물 쥐들이 흩뿌려진 머리카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크하하하! 아무래도 우리가 늙은 여우의 꾀에 넘어간 모양이다!”

데릴만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그 모습은 더없이 호탕했으나 부하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데릴만의 두 눈이 분노에 물들어 있어 조금도 웃는 낯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은 오메가는 죽지 않았어…. 틀림없이 본성 어딘가에 있다! 감히 내 손아귀에서 도망치다니, 어쩌면 밖을 떠도는 붉은 오메가와 한 패일지도 모르겠군.’

그가 바랐던 것과 달리, 검은 오메가는 붉은 오메가에게 놀아나는 도구는 아닌 모양이었다. 데릴만은 이를 갈며 아래를 노려보았다. 붉은 오메가는 검은 오메가가 이미 죽었다고 했다. 그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동료를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속이다니.

‘아니면 붉은 오메가 쪽이 검은 오메가를 위한 미끼였다든가….’

마물 쥐는 그의 발밑에 깔린 오메가의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집어 먹고 있었다. 큼직한 발이 서너 마리의 마물 쥐를 일시에 짓뭉갰다. 마물에게 화풀이를 하던 데릴만은 구역질처럼 한 가지 의문이 치밀어올랐다.

‘…그렇다면 이 왕성에서, 검은 오메가는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 * *

성녀단은 전염병과 마물 쥐, 그리고 본성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마물 쥐의 본거지에 대해 기사단에 알렸다. 리론 후작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 사실을 진즉 알리지 않았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데릴만에게 차마 하지 못한 화풀이였다. 그러나 기사단과 성녀단의 갈등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전염병의 증상은 전형적이었고, 마물 쥐의 등장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연이은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했으니, 성녀단으로서도 확실치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왕자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 고난이 연이어 발생하다니…. 하지만 마물 쥐의 본거지를 발견한 것은 큰 성과요. 마물 쥐 처리로 문제로 골치가 아프던 차였는데 잘된 일이지. 병사는 원하는 만큼 지원하겠소! 그것들을 일시에 소탕하고 더불어 역병도 끝내 버리도록 합시다.”

리론 후작으로서는 구겨진 자존심을 만회할 기회였다. 기사단에서는 본성 깊은 곳에 숨겨진 방을 철저히 감시했고 주변의 마물 쥐를 사냥했다.

며칠이 지나자 기사단과 성녀단의 협력은 성과를 보였다. 방 안에 한 걸음조차 디딜 수 없을 정도로 가득하던 마물 쥐의 수가 서서히 줄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에레즈가 돌아올 즈음에는 마물 쥐를 박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길 정도였다. 그에 따라 리론 후작의 자부심은 높아져만 갔다. 왕성으로 귀환한 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데릴만에 비하면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란 말인가! 리론 후작은 에레즈 없이 데릴만과 같은 용병들을 상대하며 심각한 자격지심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던 차였다.

마물 쥐의 수가 줄면서 방은 본래의 용도와 형태를 되찾아 갔다. 거칠고 비죽비죽한 털로 뒤덮인 벽과 가구들이 비로소 사람이 사는 방 같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기사단과 성녀단은 손끝도 댈 수 없었던 방의 주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침대 위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기사단과 성녀단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로 침대 주변을 빙 둘러쌌다. 이들 중 연륜이 깊은 자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 사내의 정체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8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모든 기록은 불탔고 노인과 현자는 모조리 죽고 말았다.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자면 20대의 사내였다. 그는 두 손을 침대에 편안하게 내려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훌륭한 체격으로 보건대 힘을 쓰는 일을 주로 했을 것 같았다. 짙은 피부와 그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 눈꺼풀이 굳건히 닫힌 탓에 눈동자의 색은 알지 못했으나 이곳에 서 있는 누구도 그 색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마물 쥐 아래에 잠들어 있다니….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처음에는 마물 쥐에게 당한 희생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사내의 탄탄한 가슴은 정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쉬고 있었다.

“마물 혼혈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기사단이나 성녀단 중 그 누구도 그를 마물이라 확실히 정의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내는 어느 한 곳도 변형되지 않은 인간의 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냥 사람인 것이 아니라,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상당히 잘생긴 청년이었던 것이다.

“—!”

모두가 침묵을 지키던 때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잠든 사내의 가슴이 크게 꿈틀거렸다. 병사와 성녀 모두 순간 당황하여 몸을 움찔거리거나 뒷걸음질을 쳤다.

“깨… 깨어나려는 건가?”

다들 잠든 사내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그의 상반신이 몇 차례 흔들리더니 대뜸 입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는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신음이나 비명… 혹은 언어가 아니었다.

마물 쥐였다.

그 순간, 인간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 * *

에레즈는 예정보다 늦게 귀환했다. 부상병을 추스르며 숲을 빠져나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를 잃었음에도 붉은 오메가를 놓친 탓에 부대의 사기는 참담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붉은 오메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그가 조종하던 마물을 처리한 것이 그나마의 업적이었다.

에레즈는 제 몫의 말도 부상병에게 양보한 채 직접 걸어서 이동했다. 병사들은 당황했으나 에레즈는 오히려 그편이 익숙했다. 지금에서야 왕족 대접을 받는 것이지, 그는 수년간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왕자가 말을 거부했는데 부하들이 당당하게 말을 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관들도 말에서 내렸다. 이동하는 내내 축축하게 비가 내렸고 밤이고 낮이고를 가릴 바 없이 모두가 젖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게 홀린 것 같군.’

긴 악몽에서 비로소 깨어난 기분이었다. 에레즈는 저 멀리 보이는 왕성의 윤곽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왕성에 있던 내내 머릿속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눈앞이 밝아진 기분이었다. 비록 왼쪽 눈은 다시 검은 천으로 가렸지만 말이다.

‘우리와 동맹을 맺은 알파들이 오점 하나 없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에레즈는 무수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진흙과 이끼로 미끄러운 땅을 거칠게 밟았다.

‘하지만 칼리번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심지어 접촉까지 했었음에도 그들은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어. 그것만은 간과할 수 없다.’

속이 끓어올랐다. 마음 같아서야 모든 알파를 왕성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었다. 왕성으로 돌아가면 당장 신용병 연합과 붉은 오메가에 대해 논의를 나눠야만 했다. 데릴만을 비롯한 알파들을 보며, 그들이 칼리번과 관계가 있었는지 아닌지를 의심하고 증오하면서도….

‘하지만 그들 없이 마물로부터 백성을 보호할 수 없어.’

그러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정을 유지해야만 하겠지. 그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승님이 곁에 있었다면 의논할 수 있었을 텐데. 에레즈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상대가 없었다. 기적을 바라며 뒤를 따르는 자들뿐. 에레즈는 왕성을 더는 볼 수 없어 대신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에 젖은 그의 모습은 주인 잃은 개나 다름없어 보였다.

비는 걸음을 더디게 하고 벌어진 상처를 악화시켰다. 붉은 오메가에 의해 마물이 왕국 전역을 뒤덮었고, 그로 인해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한 축복이었던 빗물마저도 조금씩 오염되고 있었다. 세상은 하늘이고 땅이고 나날이 색을 잃고 검게 물들어만 갔다. 모두가 말없이 왕성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은 지치고 노쇠한 네발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일컬어지던 시절과 달리, 약한 개체는 더는 살아남지 못했다. 이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인간에게는 각기 다른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같이 악독해지고,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한때 인간의 본성이라 일컬어지던 무언가를 잃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았다. 친절과 예의. 도덕과 정의. 고결과 강직. 우아함과 아름다움. 선. 그러한 것들.

마침내 에레즈의 부대가 왕성에 도착했을 때, 날씨는 더욱 악화 일로를 걸었다.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치고 빗줄기는 눈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굵어졌다. 성문에서 대기 중이던 성녀들이 부상자로 그득한 부대를 가장 먼저 맞이했다. 그녀들은 병자를 인도받는 한편, 몸이 성한 이들은 쉼터로 안내했다.

“왕자님!”

성녀 중 한 명이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려던 에레즈를 따로 불렀다. 그녀의 표정은 심각했으며, 자못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왕자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이동하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급한 문제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왕자님께서 해결해 주셔야만 합니다.”

성녀는 행여나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추고 빠른 속도로 말했다. 에레즈는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네가 대신 여기에 남아 병사들을 관리하도록 해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왕자님.”

에레즈는 다른 기사에게 자신의 역할을 맡기고는 성녀들이 준비한 말을 탔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아서일까, 왕성이 전보다 피비린내가 감도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본성에 도달한 에레즈는 성녀들의 안내를 받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급히 걸었다. 다들 에레즈가 귀환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가 본성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에레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비에 젖은 채로, 진흙으로 엉망이 된 부츠를 갈아신지도 못하고 걸었다. 그의 걸음걸음 물이 떨어져 내렸으나 그 어떤 부하도 휴식을 권하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병사와 성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동안의 일을 보고했다. 그 모습은 마치 두려움에 떠는 아이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역시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8년간 함께 싸워 오면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두려워하다니…. 에레즈는 안쓰러워 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후회했다. 인간들은 처음에는 순서를 지키며 조리 있게 말하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마구잡이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곧 시장통처럼 귀가 따가울 지경이 되었다.

“성안에 마물 쥐가 창궐해? …역병?”

에레즈는 드문드문 그들의 말에서 답을 찾아냈다. 하나하나가 믿기지 않는 소식들이었다. 어둠이 깔린 복도를 때때로 번개가 비추고 사라진다. 그때마다 에레즈는 인간의 온갖 감정을 마주했다. 목에 힘줄이 설 정도로 큰 소리로 떠벌리는 자. 하늘 향해 손가락질하는 자. 번쩍이는 번개에 인물화처럼 한순간 드러났다가, 금세 어둠이라는 커튼에 가려진다. 복도를 장식한 부서진 액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저희는 마물 쥐의 본거지를 찾아냈습니다. 왕자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저희 선에서 처리하려고 했으나…. 불가능했습니다.”

“처음에는 오메가에게 조종당한 불쌍한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놀라운 회복력이란! 인간이 아니라 마물 혼혈인 것 같습니다.”

“마물이기에 왕자님의 성검이 아니면 끝내지 못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에레즈는 곧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기시감이었다. 이끄는 길이… 더없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 걸음이 본성 안으로, 평소에는 기사단도 성녀단도 일절 사용하지도 않는 곳으로 자꾸만 향한다.

그럴 리가 없겠지. 그럴 리가….

에레즈는 속으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마물을 완벽하게 죽이는 방법은 목을 베거나 심장을 꿰뚫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목을 베려고 했습니다.”

“그 더러운 입에서 끊임없이 마물 쥐가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요!”

“도끼를 가져와 아무리 목을 내리쳐도 소용없었습니다. 마물의 회복력이 목뼈를 부러뜨리고 자르는 것보다 빨랐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심장을….”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아서…….”

에레즈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그의 망토가 땅에 끌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레즈가 멈추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파도에 떠밀려 자꾸만 원치 않는 길로 나아가야만 했다. 에레즈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의 손끝에서 빗물이 아닌 땀이 섞여 떨어져 내렸다. 뻣뻣하게 굳은 몸은 나무토막 같았다.

찌익, 어디서 쥐새끼의 소리가 난다. 에레즈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음 속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꺾었다. 어둠 속, 눈이 붉은 쥐가 에레즈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것이 마물 쥐라고 불리는 것인가?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하고 또 말하던.

“…….”

에레즈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그렇다는 말은, 이들의 주장이 환상이나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다.

마침내 소란스러운 무리는 작은 방 앞에 도달했다.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에레즈는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흥분한 사람들은 서둘러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혹여나 저것이 도망칠까, 움직이지 못하도록 처리를 해 두었습니다. 자꾸만 회복되는 통에 쉽지 않았습니다만….”

사람들은 그들의 왕을, 에레즈를 가장 앞에 세웠다. 그는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는 모두의 말대로 쥐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다.

“왕자님의 성검으로 저 마물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그리고 침대는… 피로 흥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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