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꽃점
왕자는 성을 떠났다. 왕실 재건 기사단과 성녀단에서는 강경하게 반대했으나, 에레즈 프리드웬의 결심은 확고했다. 젠은 에레즈가 사람들 앞에 두각을 드러냈을 적부터 함께하던 충신이었다. 그런 그녀의 부대가 붉은 오메가에게 대파되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이리라.
에레즈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도 되는 일개 백성이 아니었다. 알파와 인간을 조율하는 유일한 존재가 왕성을 떠난다면, 고양이와 쥐를 한 장소에 놔둔 것과 다름없게 된다. 그래서인지 리론 후작은 왕자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왕자님! 곧 수색대가 돌아올 겁니다. 시간이 다소 걸릴지라도, 재정비 후 부대가 격파된 장소로 새로 병사를 파견하는 것이 옳은 순서입니다. 왕성에는 왕자님만을 믿고 온 백성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자님께서 자리를 비우신다면, 누가 마물로부터 백성을 지켜 줄 수 있겠습니까?>
<붉은 오메가를 죽이면 마물도 더는 침입하지 않겠지. 그러나 이대로 저들을 내버려 둔다면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게 될 거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오나…!>
<마물에게 둘러싸인 오메가에게 도달할 수 있는 건 이 성검뿐이다. 오직 나만이… 붉은 오메가를 처단할 수 있다.>
절절 끓는 리론 후작의 목소리와 달리, 에레즈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차갑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수많은 이들의 염려와 걱정을 한 가지의 주장으로 일축했다. 붉은 오메가를 죽이면 해결된다고.
그렇게 왕은 모두를 버리고 떠났다.
‘붉은 오메가에게 측근을 잃은 분노 때문이겠지만…. 이전의 왕자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이성을 잃으신 모습이었어. 도대체 무엇이 이분을 이토록 맹목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날의 회의를 되새기던 세로덴드의 성녀는 상심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바뀐 것은 성정뿐만이 아니었다. 왕자님의 외관 또한 깔끔해지시긴 했다. 전투가 줄면서, 아물 새도 없이 새로 생기던 흉터가 가라앉은 덕이었다. 그저, 그뿐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모습은 마치….
‘알테르 프리드웬…?’
세로덴드의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인물을 떠올렸다.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생각을!’
성녀는 고개를 저어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세로덴드의 성녀님.”
그때, 누군가 그녀를 찾았다. 치료소에서 병자들을 간호하던 어린 성녀였다.
“무슨 일이지?”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쪽’ 병자의 치료와 관련된 일입니다.”
세로덴드의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성녀가 늦은 밤, 이런 식으로 나타낼 때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세로덴드의 성녀는 별말 없이 어린 성녀와 함께 막사를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염병에 걸린 환자의 수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점점 비밀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갔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왕성을 떠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성밖에는, 인간을 잡아먹고 강간하는 마물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알고 계시면서도 왕성을 떠나시다니….’
세로덴드의 성녀는 울적해졌다. 현 상황에서 전염병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성녀단과 왕자밖에 없었다.
성녀들은 정식으로 설치된 치료소를 지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낡은 막사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열병으로 의식을 잃은 병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병이 옮을 수 있으니 여럿이 모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무슨 일에서인지 치료소에서 환자들을 관리해야 할 성녀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새로 들어온 환자를 보여 주려는 줄 알았던 세로덴드의 성녀로서는 다소 놀랐다.
“성녀님의 말씀을 어기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두의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모이게 되었습니다.”
어린 성녀는 세로덴드의 성녀와 함께 무리를 헤치고 중심으로 들어섰다. 무리 가운데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주먹만 한 회색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 발병한 병자의 집을 정리하다 발견한 겁니다.”
“이건 도대체… 무엇이냐?”
세로덴드의 성녀가 되물었다. 다른 성녀들도 고개를 저을 뿐이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회색 돌멩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돌에 털이 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쥐 같기도 하고, 귀가 없는 토끼 같기도 한 것이 정확히 정의 내리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끼가 낀 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해부해 보니, 안에는 내장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마물입니다.”
성녀 중 누군가가 말했다. 세로덴드의 성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자그맣고 위협적이지는 않았으나, 일반적인 쥐와는 확실히 달랐다.
“우연이 아닙니다. 최근 병자가 발생한 세 곳에서 모두 발견되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환자들의 몸을 면밀히 살펴보았는데… 이것 좀 보십시오.”
성녀는 죽은 쥐 마물의 얼굴 가죽을 들어 앞니를 보여 주었다. 보통의 쥐보다 훨씬 길고 뾰족한 앞니가 입 안에 수납되어 있었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의 몸에, 딱 이 마물의 앞니만 한 작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발견했습니다. 잇자국이 아주 작기도 하고 오랜 전쟁으로 몸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다 보니,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이 쥐 마물이 병을 옮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새로운 발견에 성녀들은 동요했는지 웅성거렸다. 누군가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시키자 그제야 입과 코를 가린 천을 다시금 조정했다.
“…전염병 환자는 왕성 밖에서 전쟁을 벌일 당시에도 종종 발견되었으니, 그 주장대로라면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그때는 마물을 막을 수단이 없었으니 그렇다 쳐도, 마물이 어떻게 지금 성안으로 침입할 수 있는 거죠?”
누군가가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왕성을 뒤덮은 무색 무형의 보호막은 항시 성녀들의 통제하에 있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심지어 북문이 습격을 당했을 때조차 마물만은 톡톡히 막아 냈던 것이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만일 배신자가 있어서 마물을 몰래 들여온다고 해도, 보호막에 걸려 튕겨 나갔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기가 이상했다. 알테르의 목을 벤 후, 성안의 마물은 철저하게 제거, 분리했다. 지하에 갇힌 기형 마물 중에는 이런 형태가 없다. 성녀들이 불안이 커져 갔다.
“모두 진정하세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요. 섣부르게 접근할 일이 아닙니다. 왕자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금, 작은 혼란에도 백성들은 쉽게 동요할 겁니다. 보호막이 망가졌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로덴드의 성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어서 왕자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성을 비우시다니….”
성녀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드디어 병의 전파원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마물의 형태이니, 왕실 재건 기사단이나 신용병 연합에게 협조를 요청한다면 어렵지 않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성녀들도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많은 부분이 의문투성이였으나 적어도 앞으로는 전염병이 더 퍼지지 않게 될 것이다. 희망이 생기자 딱딱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완화되어 갔다. 그러나 세로덴드의 성녀도 내심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은 환자가 머문 공간을 샅샅이 뒤져도, 쥐 마물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왕자님이 토벌을 나서자마자 보란 듯이 나타나다니….
* * *
칼리번은 꿈을 꾸었다. 그것은 에어리얼의 기억도, 끔찍했던 8년간의 고통도, 왕자님에 대한 추억도 아니었다. 칼리번이 본 것은… 그저 한 여자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였다. 몸이 퉁퉁 부은 여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칼, 신기하니?>
누군가가 묻는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인사를 해 보는 건 어떠니?>
칼리번은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대신 권유한 사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칼리번의 어머니였다.
<아마 저는 안 될 거예요.>
어린 칼리번은 대답했다. 말만 들어서는 아쉬워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소년의 얼굴 위로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왜냐면 저는 인간이 아니니까요.>
그렇다. 마물 혼혈에게는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칼리번은, 알파로서는 특이하게도 길러 주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 갓 태어난 알파의 시체가 전시된 판국에, 보호자가 있다는 것은 극히 드문 행운이었다. 생존이 보장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러나 칼리번은 양부모님이 자신을 거둬 준 탓에 마을에서 입지가 좁아졌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칼리번보다 누이였지만, 어느새 작아진 알리샤 또한 마을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집에 괴물을 두고 키운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신으로 인해 한 가족이 불행을 겪고 있건만, 칼리번은 아무렇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양어머니는 칼리번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칼리번은 그 힘에 떠밀려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칼리번은 아기를 쉽게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당연히 꺼지라는 욕설을 들을 줄 알았는데.
칼리번은 태어난 지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체구는 10살 아이 못지않았다. 마물의 피가 섞인 탓이었다. 반면 갓 태어난 인간은 부서질 듯 작고 나약했다. 태어나고 몇 시간이 지나면 걸어 다니고, 벌레나마 주워 먹을 수 있는 마물 혼혈과는 달랐다. 이 아기를 숲에 버려둔다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왜 이렇게나 연약한 건가요.>
칼리번이 물었다. 알리샤만 해도 그렇다. 처음 칼리번이 웰미턴 부부의 집에 들어왔을 때는 그녀가 훨씬 컸다. 그러나 칼리번은 고작 1년 새에 누이의 체격을 넘어서고 말았다. 인간은 이토록 나약하고 느리다. 성체가 되는 데 15년은 훌쩍 걸린다. 인간들이 마물 혼혈을 멀리하고 꺼리는 것은 그들이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스럽잖니.>
그 대답에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분명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혼자뿐이었다.
<…?>
약한 것이 사랑스럽다니,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다른 것을 어쩔 수 없이 죽일 수밖에 없다는, 언젠가 양아버지가 했던 말 만큼이나.
강한 개체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크며,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이 세계에 통용되는 유일무이한 법칙이다. 마물이고, 마물 혼혈이고, 인간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본능적으로 힘을 추구한다. 약함도 사랑도 칼리번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양어머니의 대답은 거짓말이나 변명처럼 들렸다.
<…….>
만약 나약하기에 사랑스럽다면… 사랑이란 약해지는 과정일 뿐인가? 칼리번은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저기 봐, 여섯째 왕자다. 와, 엄청난 미인인데? 왜 여태 동안 숨겨 놓고 있었대? 괜한 소문만 돌게….>
이번에는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아련한 추억이었다. 칼리번은 그때가 첫 만남인 줄로만 알았다. 어찌할 새도 없이 격렬한 물결에 휘말리듯 세상에서 처음 본 아름다운 존재에게 빠져들었다.
처음 칼리번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아름답고도 강한, 깨지지 않는 보석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다. 알고 보니 그는 혼자 내버려 두면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였다. 나약한 인간은 에레즈 프리드웬 이전에도,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어째서 그만이 달랐던 것일까? 왜 그 사람만이 그토록…. 의심 없이 지켜 온 삶의 방식을 어그러뜨리고 당연하게 여겼던 자연의 법칙을 망설이게 하는 것일까.
칼리번의 품 안에는 여전히 아이가 있다. 황금빛 머리카락은 매끄러웠고 하얀 뺨은 따스했다. 어디 하나 부족함 없는 예쁜 얼굴은 하루에 절반 정도는 눈물에 젖어 있었는데, 코를 훌쩍이고 눈가가 붉게 짓물러도 어째서인지 하나도 흉하지 않았다.
칼리번이 두 팔로 끌어안으면 품에 딱 맞게 안겨 왔고, 때로는 콩콩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왕자는 마치 먼 옛날,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와도 같았다. 이 작은 새를 품에 안은 대가로 그는 꾸려 왔던 삶을 잃고, 가진 전부를 잃고, 이제는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칼리번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체격이 커다랗고,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머리카락은 그보다 훨씬 검은 사내를. 그는 제 몸집만큼이나 크고 단단한 대검을 매고 다닌다. 그는 평생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감정의 고저가 없다시피 했다.
때로는 육체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강했다. 마물 혼혈의 젊음은 긴 편이니, 앞으로 먹고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리라. 지장이 있다면 또 어떠랴! 그전에 마물에게 뜯어 먹힐 텐데. 그런 삶은 좋지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은 어떠한가? 자그마한 체구에 가벼운 몸.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하는 가는 팔. 조금만 오래 걸어도 후들거리는 다리. 약해 빠진 몸뚱이는 날이 갈수록 죽음에 가까워져 갈 뿐이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그는 더는 품에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났다. 이제 왕자님은 본인처럼 아름다운 성검을 쥔다. 칼리번이라는 크고 미련한 검은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 쓸모없는 이 몸으로 계속 나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무의식과 비논리, 무지와 몰이해. 칼리번은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했다. 덜렁거리며 떨어지고, 너덜거리는 몸으로 기어갈 뿐이다.
<어, 어째서 나, 나를 버… 버, 버리지 않, 은 거야? 나, 나는… 아무런 쓸모, 도 어, 없는데….>
모든 질문에 대답을 미루며. 에레즈 프리드웬과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는 답을 내려야 할 것이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비가 내린다.
“일어나셨습니까?”
칼리번이 몸을 움찔거리자 아스터가 바로 반응했다. 칼리번은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평소보다 더 울려 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동굴에 들어온 것처럼 메아리가 치기까지 해서, 머리가 쑤셨다.
“으음….”
칼리번은 신음하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앞이 새까맣다. 정말로 동굴에라도 들어온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빗소리가 지나치게 가깝게 들린다. 마치 로브를 두르고 비를 맞으며 걷는 것처럼….
…로브.
혹은 갑옷.
“…아스터? 이게 도대체…. 윽!”
칼리번이 몸을 움직이려 한 순간, 그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여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신음이 벽에 부딪혀 다시 돌아온다. 칼리번은 머리를 깨뜨릴 것 같은 소음에 인상을 썼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갑옷 안에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조언을 하자면, 큰 소리로 말하면 목소리가 울려서 더 머리가 아플 겁니다.”
아스터가 조곤조곤 잔소리를 했다. 그제야 칼리번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온몸을 꽁꽁 묶은 것은 밧줄이 아니라 아스터의 백금사였던 것이다.
“왜 이런 짓을….”
칼리번은 아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특히나 가슴과 배가 백금사로 꽉 조여 있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출혈이 심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보호하는 데 있어 이보다 안전한 장소도 없고요.”
아스터가 부연 설명을 했다. 갑옷 중 어느 부위에서 저 목소리가 나오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기절한 후로 얼마나 지났지?”
“이제 막 아침이 되었을 뿐입니다.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칼리번은 몸의 긴장을 풀었다. 꽉 조여들던 백금사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칼리번은, 아스터의 갑옷 안에 몸을 넣은 채로 나무 아래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아스터의 첨언으로는 갑옷 위에 주변의 흙과 수풀을 덮어 위장했으니 안심이란다. 그렇군. 누가 지나가다 아스터를 발견해도 전투로 죽은 병사의 저주받은 갑옷 정도로 보일 것이다.
‘이게 평소 녀석의 시야인 거군.’
칼리번은 갑옷 안에서 멍하니 넋을 놓았다. 어떤 공격도 막게끔 설계되었기에 갑옷 안은 세상과 차단되어 있었다. 갑옷의 부위를 이으면서 생긴 틈새만이 빛과 공기가 들어오는 얼마 안 되는 창구였다.
유일한 창문은 투구에 뚫린 구멍뿐이다. 이 좁은 틈으로 보는 세계가 아스터의 시야 전부였다. 마치 땅에 묻힌 것처럼 어둡고 축축하고 텁텁하다. 물론 녀석은 때때로 백금사를 이용해 갑옷 밖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톡, 토독…. 나뭇가지와 잎사귀로도 막지 못한 빗물이 갑옷 위로 떨어졌다. 빗소리는 굉장히 쓸쓸했다. 빗물은 투구를 타고 들어와 칼리번의 얼굴로 흘러들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이 안에 있었던 건가….”
빗소리를 한참 듣고만 있다가,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네. 에어리얼이 준 몸입니다. 여태껏 한 번도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마물의 껍질보다도 강하다고 볼 수 있죠.”
아스터는 칼리번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에어리얼이 준 갑옷을 자랑했다. 어둡고 딱딱한 껍질이 익숙하다 못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군.”
그 뒤로는 칼리번도, 아스터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허는 갑옷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대신 채워 주었다. 백금사는 꼬물거리며 칼리번의 상처에서 피가 나오지 않도록 지혈을 했다.
<저, 전보다 더… 괴, 괴롭고… 스, 슬프고…… 자, 자꾸만 모, 몸이 아, 아파져서…. 하, 하지만! 네, 네가 다, 다치길 원한 건, 겨, 결코 아닌데…. 어, 어째서 이렇게….>
이런 속박은 어딘지 익숙하다. 칼리번은 어째서 꿈에서 왕자님을 보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해의 이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빗물처럼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칼리번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부식되는 바위처럼 누워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주 작고 쉰 목소리라 분명 듣지 못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안다니 다행이군요. 회담이 열리는 장소까지는 제가 알아서 이동할 테니 당신은 에어리얼의 몸을 회복시키는 데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나 잘 듣고 있던 모양이다. 칼리번의 몸을 감싸는 백금사 외에, 또 다른 실뭉치가 어디선가 나타나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런 게 아니라….”
에어리얼의 몸을 망가뜨려서 한 말이 아니었다.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말에, 아스터는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그러면? 혹시 제가 모르는 부위에 상처가 더 있기라도 한 겁니까?”
소중한 에어리얼의 몸이 이 이상 더 망가지기 전에 어서 고백하십시오. 아스터는 칼리번의 코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그 행동이 실뱀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막상 물으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아스터는 콧등을 몇 번 더 두드려 보았으나 칼리번의 침묵은 굳건했다. 그러자 흥미를 잃었는지, 아니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목에서 스르륵 물러났다.
“…….”
아스터에게 무엇이 미안한지, 그 말을 내뱉은 칼리번조차 알지 못했다.
* * *
비가 내리고 난 후의 숲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땅은 진흙탕이 되어 걸음을 뗄 때마다 찐득거리고, 발자국이 남아 마물에게 공격당하기도 쉽다. 나뭇잎에 고인 물은 예고도 없이 후드득 떨어져 머리를 적신다. 빗물로 인해 기온은 더 낮아져 부상자에게는 최악이다.
피를 흘리는 칼리번과 껍질이 갑옷인 아스터에게 우기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큰 계절이었다. 칼리번은 체온이 낮아지고, 아스터는 갑옷 여기저기에 진흙이 달라붙은 탓에 움직임이 굼떠진 것이다.
“잠시 쉬자.”
작은 호수를 발견한 칼리번이 먼저 제안했다. 아스터는 동의했는지 호숫가까지 삐걱거리며 걸어갔다.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부탁해서 갑옷에서 나왔다. 상처는 간신히 아문 상태였다. 물론, 조금만 거칠게 움직여도 다시 터지겠지만….
칼리번은 이동 중에 발견한 시체에서 뺏어 온 옷을 찢었다. 배를 감싼 금사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너도 좀 씻어야겠다.”
응급 처치를 마친 칼리번은 아스터의 갑옷을 보았다. 갑옷 전신에 들러붙은 진흙과 오물이 마르면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리 와.”
“…싫습니다.”
붕대를 만든 후 남은 천을 호수에 적시자 아스터는 뒤로 물러났다. 뭘 할지 알고?
“순순히 따라라. 그런 꼴로 다니다 자빠지면 일어나지도 못하게 된다.”
용병이었을 적 칼리번은 왕성을 오가며 기사들과 마주쳤었고, 때로는 방어전을 함께 치르기도 했다. 아스터의 갑옷은 귀족 자제들이 입는 것과 거의 유사했다. 이런 류의 갑옷은 워낙 무거운 탓에, 말에서 떨어지거나 갑옷에 진흙이 묻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마물은 일어서지 못해 버둥거리는 기사를 조개 까먹듯 벗겨 내고는 내용물만 쏙쏙 빼 가곤 했었다.
“상관없습니다. 저는 인간과 달라서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갑옷의 틈새에서 백금사가 보란 듯이 튀어나왔다. 칼리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는 곧 회담장에 도착할 거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편이 나을 거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요.”
아스터는 마지못해 칼리번이 있는 호숫가까지 다가왔다. 칼리번은 물이 줄줄 떨어지는 천을 갑옷에 철퍼덕 던지고는 문질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스터의 껍질은 비교적 깨끗했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써도 금세 윤기가 도는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왕성 주변을 배회하며, 방랑이 계속되자 아스터는 점차 꼬질꼬질해졌다.
오물이 묻고, 굳고, 묻기를 반복하다 보니 갑옷과 거의 한 몸처럼 엉켜 있었다. 말이 오물이지, 숲을 차지한 마물의 배설물과 피가 주재료다. 칼리번은 따개비처럼 딱딱하게 들러붙은 부분은 아스터를 시켜 떼어 냈고, 무른 부분은 제 손으로 벅벅 닦아 주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호숫가에서 몇 시간을 소요했다. 에어리얼의 몸 자체가 약해 빠졌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칼리번은 근처에서 쉬고 백금사로 하여금 스스로 갑옷을 닦게 시켰다.
‘눈 색이… 변했다.’
칼리번은 물의 표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에어리얼의 몸에 생긴 변화를 뒤늦게 눈치채게 되었다. 까맣게 타 버린 재와 같은 눈. 그것은 원래 칼리번의 색이었다.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말로 영원히,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에어리얼도 나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을까?’
무의식중에 떠오른 의문을 잊기 위해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배운 대로 갑옷을 닦는 아스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은 갑옷은 종아리까지 호수에 잠긴 채였다. 제법 열심히 하는 척을 하더니, 칼리번이 더는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스터는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
칼리번은 아스터가 무엇을 하나 관찰했다. 커다란 갑옷은 물의 표면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부동자세라 칼리번은 불현듯 의심이 들었다. 혹시나 백금사가 물에 닿으면 녹는 것인가?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첨벙!
아스터는 두 손을 쫙 펼치고는 물의 표면을 두드렸다. 칼리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 번이나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던 아스터의 갑옷에서 백금사가 비죽비죽 기어 나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갑옷이 아닌 백금사가 물을 두들기며 물장구를 쳤다. 흡사 그 모습은….
“…….”
지켜보던 칼리번은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지하 감옥에서 보냈던 시간은 대체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이 절망하고 울부짖는 것을 즐거워했고, 그를 괴롭힐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했다. 칼리번은 잃어 가는 육체만큼이나 정신 또한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교미를 나누는 모든 마물이 에레즈로 보이기까지 했다. 강한 마물을 원활하게 수급하기 위해 에어리얼이 정신을 주무른 결과였다. 에레즈는 매번 칼리번을 범하면서도 지하 감옥에서 구해 주지만은 않았다.
‘마물과 교미를 하느라 왕자님의 소중한 아이를 잃었으니 당연한 거 아냐? 이번에는 제대로 키워야지. 그래야 왕자님도 널 이곳에서 구해 줄 거야.’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암시였다. 그러나 뇌가 주물러진 칼리번은 그 모순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물을 낳으면, 에레즈와의 결합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끔찍한 형상에 구토하곤 했다.
<제 아버지는 알테르 프리드웬입니다.>
아스터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 에어리얼이 멋대로 머릿속을 뒤진 탓에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언제였던가…. 칼리번은 자신이 에레즈의 새끼를 품었다고 생각해서, 저항하지 않고 배 속의 괴물이 제 몸의 양분을 먹고 자라나게 내버려 둔 적이 있었다.
몸속에 자리 잡은 혈관 하나하나가 배 속의 괴물과 이어진 것 같은 감각. 칼리번은 에레즈의 아이를 완벽하게 자라나게 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었다. 어차피 그 당시의 자신은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보지도 못했고 말도 할 수도 없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반복되는 교미로 인해 극도로 민감해진 성감뿐이었다. ‘배 속의 에레즈의 아이를 키운다’라는 의지 또한 에어리얼의 세뇌이리라.
그렇게 정체 모를 괴물에게 생명력을 빨려 가던 칼리번은 에레즈의 금사와 비슷한, 부드러우면서도 간지러운 감촉을 느꼈다. 금사는 지하 감옥 전체에 내려앉았는지 어느샌가 칼리번의 전신을 휘감았다.
<…아쉽게 여기지 마라. 이런 결과는 너도 원하지 않았을 테니.>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고통이 복부를 급습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짧지만 선연했던 그 순간….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에어리얼의 암시로 인해 그때의 기억은 무의식의 저편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나 지하 감옥에서 도망친 후, 칼리번의 내부에서 조금씩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배 속에 든 것이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의 괴물이라면. 애써 부정했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에어리얼은 강한 마물을 갖고 싶어 했다. 알테르는 인간들에게 ‘황금 피’라고 찬양받을 정도로 강한 알파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나….’
아스터의 별것 아닌 목소리, 사소한 행동이 매번 심장을 뒤흔드는 것일까? 같은 고통이라면 칼리번은 차라리 복부를 관통한 상처에 집중하고 싶었다. 칼리번이 느끼는 혼란은 사내의 배를 찢으며 태어나는 일반적인 마물 혼혈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였다. 그가 양부모를 밑에서 자라면서도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인간의 그 감정….
뚝.
얼굴을 가린 칼리번의 손등 위로 핏물이 떨어졌다. 칼리번은 손가락이 벌어진 틈새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떨어진 것은 핏물이 아닌 평범한 물이었고….
“오늘 에어리얼의 몸이 섭취할 식량입니다.”
백금사를 이용해서 호숫가의 물고기를 잡아 온 아스터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마물의 독기에 영향을 받은 물고기는 기괴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 * *
칼리번은 아스터는 회담장으로 향했다. 말이 회담장이지 검은 숲의 한가운데였다. 회담 장소에 가까워지며 조금씩 알파들이 오간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빼어난 미인과 반들반들해진 갑옷은 흉흉한 알파들 사이에서 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은 몸을 가리고 회담장에 섞여 들기로 정했다. 아스터는 회담장으로 향하는 알파를 습격해 로브를 빌렸다. 칼리번에게는 땅에 끌릴 정도로 컸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성채 도시와 달리 숲에는 표식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간단한 칼자국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칼리번은 강제로 탈취한 센어르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센어르가 다른 용병을 통해 받은 전언에서는, 사흘 후 회담이 열리고 서쪽에 위치한 코렐 영지로 가는 길에 ‘표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호한 표현이었으나 의외로 칼리번은 표식을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생긴 나무에 마물의 뼈가 걸려 있었다.
“이 방향을 따르면 될 것 같군.”
칼리번은 마물의 뼈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같은 마물끼리도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시’는 이성을 가진 존재밖에 하지 않는다. 거대한 숲 안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마물 혼혈들은 이런 식으로 흔적을 따라 회담장으로 모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규모일지도….’
후드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칼리번은 기세등등한 용병들을 힐끗거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곳에 모인 전부가 마물의 피를 이어받은 알파였으며 또한 인간의 피를 이은 사내였다. 칼리번이 용병이었을 적, 다른 용병대의 대장들과 만나는 일은 드물게나마 있었다. 그럴 때는 젠이 늘 함께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큰 규모는 한 번도 없었다. 왕국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서 마물을 상대하는 용병의 특성상, 한 장소에 동시에 모이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이 우연히 이곳에 흘러들었다면, 진작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렸을 것이다. 칼리번조차도 커다란 알파들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 근처에서 진동하는 알파 냄새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예전에 젠이 알려 준 대로 알파의 피와 오물을 몸에 발라 두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알파들에게 정체를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이봐!”
그때, 누군가가 칼리번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혹시나 오물 냄새가 사라진 것인가 싶어 칼리번은 급히 제 팔에 코를 묻었다.
“처음 보는 녀석들인데 어느 용병대 소속이야?”
알파 하나가 다가와 그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다른 용병들은 출신에 따라 저들끼리 무리를 이루는 반면, 칼리번과 아스터는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 점이 의심을 산 모양이었다.
‘…오메가의 체취 때문은 아닌가 보군.’
안도한 칼리번은 아스터의 옆구리를 툭 쳤다. 퉁, 하는 소리가 나며 아스터가 반응했다.
“저희는 센어르 님의 소속입니다. 이건 증표입니다.”
아스터는 로브 안을 뒤적거리는 척하더니, 센어르의 본거지를 불태우며 가져온 목걸이를 내밀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용병대는 용병 대장이 정한 표식을 가죽이나 쇠붙이에 칼로 새기거나 나무로 모양을 새겨 들고 다니곤 했다.
“아, 센어르인가.”
표식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용병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나무패를 대충 확인하고는 아스터에게 도로 휙 던졌다.
“목소리가 어린 걸 보니 신입인 것 같은데 다들 어디 가고 너희 둘만 먼저 와 있는 거냐? 센어르 녀석은 허구한 날 몰려다니는데 말이야.”
“짐이 많다 보니 대장님께서 미리 도착해 자리를 잡아 두라 하셨습니다.”
“아아…. 그건 잘 알고 있지. 나한테도 남자 하나를 빼 주기로 했었는데 말이야.”
“그러시군요.”
“타이넨이 잘 좀 봐 달라 했다고 전해 줘. 금방 안 죽는 튼튼하고 실한 녀석으로. 누누이 부탁하는데도 매번 비리비리한 녀석만 보낸단 말이다, 너희 대장은.”
“네에.”
아스터는 칼리번을 대신해 용병과 대화를 나눴다. 아스터를 보며 칼리번은 예전의 자신을 떠올랐다. 자신도 저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설마 이 녀석이 내 몫인가?”
“!”
갑작스럽게 끌어당기는 손길에 칼리번은 몸을 뒤로 당겼다. 그러나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어서 뿌리치지도 못하고 몸이 끌려갔다.
“아뇨.”
우악스러운 손길에 로브가 벗겨지려는 찰나, 아스터가 앞을 막아섰다.
“이 몸은 제 것입니다.”
아스터는 아직도 칼리번을 붙잡은 용병의 손을 거칠게 떼어 내며 말했다.
“푸하하, 그러냐? 회담에 사내를 들이는 건 금지지만…. 뭐, 받은 게 있으니 이번은 그냥 지나가 주지. 어차피 밤이 되면 너희 대장이 준비한 사내들로 바글바글해질 테니 말이야.”
용병은 어린 알파에게서 영문 모를 압박감을 느끼고는 바로 칼리번을 포기했다.
“센어르에게 잘 전해 달라고!”
그는 떨떠름해하면서도 아스터에게 허세를 부리곤 떠났다.
“그럴 때는 동료라고 해야지.”
졸지에 회담장에 끌려온 노예가 되어 버렸다. 칼리번이 뒤늦게 아스터의 발언에 반기를 들었다. 아스터가 나선 탓에 계속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 갑옷 안에 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스터가 투덜거렸다. 최근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과보호를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알겠다. 같은 일이 또 발생하지 않게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기자.”
노출이 되면 될수록 알파들은 아스터와 칼리번에게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칼리번은 더는 아스터를 데리고 거대한 나무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건 그렇고, 숲 한가운데에 이토록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터가 있다니. 칼리번은 일전에 이곳에서 큰 전투가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그에게 이 장소가 낯선 것을 보니 아마도 지난 8년 사이에 생긴 공간이겠지. 마물의 독기에 멋대로 자란 기형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다.
원형의 공간. 우두머리급일수록 중심부에 앉았고 그 뒤로 급이 떨어지는 알파들이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았다. 칼리번과 아스터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은 밀리고 또 밀려 빽빽한 나무 주변이나 나뭇가지에 앉게 되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많군.’
실상 칼리번이 놀란 부분은 알파의 숫자 자체가 아니었다. 성향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자들이… 알테르의 편을 들고 있다가 숲으로 쫓겨난 것이다.
‘여기 있는 모두가 왕자님의 적인 거다.’
젠과의 전투를 겪은 후, 에레즈 프리드웬과 함께 싸운 용병들조차 사실 그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리번이 위험을 무릅쓰고 알파들의 소굴에 자진해서 향한 이유이기도 했다.
칼리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왕성으로 가서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칼리번’임을 밝히고,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모든 진실을 알리는 것. 혹은, 계속 ‘에어리얼’의 흉내를 내면서 적을 조종하고 자멸시키는 것.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 성공할 가능성은 적었다. 칼리번은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에어리얼의 계략을 왕자에게 알리고 싶었다. 아스터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운명은 칼리번을 칼리번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했다. 젠조차 자신이 칼리번임을 믿지 않는데 왕자님이라고 해서 믿을까? 겉모습이 달라져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그런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 에어리얼의 몸을 뒤집어쓴 채로 재회했을 때, 운명은 이 방향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의 마음은 자꾸만 에레즈가 있는 왕성을 향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에레즈는 이제 인간들의 구원자이자 새로운 왕이었다. 이제는 8년 전의 칼리번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설령 에어리얼이 목숨을 노린다고 해도 성검이 그를 지켜 줄 것이다. 왕성을 탈출하고 시간이 꽤 흘렀으나 부고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왕자님은 자신 없이도 잘해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을 잃고, 발을 잃고, 눈과 코와 혀를 잃은 칼리번은 괴물이 되어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에어리얼에게 몸을 빼앗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람이 왕자님을 다시 만나는 것뿐이라면, 지금이라도 왕성으로 돌아가 투항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목이 베여 성벽에 걸리겠지.
‘하지만, 왕자님은 나를….’
칼리번은 자그맣고 하얀 돌을 손안에서 굴렸다. 그는 회담장으로 오며 마음을 굳혔다. 진실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에어리얼을 죽여야 한다고. 설령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은 ‘칼리번을 죽인 에어리얼’로 남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텅 빈 공간이 용병들로 가득 차차 어느새 회담장은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체격 좋은 용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보니 시비가 붙기도 했다.
“다들 조용히 해라.”
그때,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은 소음이 누군가의 한마디에 일순 정리되었다. 쭈뼛, 칼리번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회담장이 조용해지자 한 사내가 부러진 나무로 만든 단상에 섰다. 그는 알파들 사이에서도 유독 체격이 컸고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띌 만큼 짙은 수염이 숭숭 돋아 있었다. 서슬 퍼런 두 눈은 마주치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데릴만…. 저자가 우두머리라고?”
칼리번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유명한 자입니까?”
“그래…. 보통 유명한 정도가 아니지.”
아스터가 묻자 그는 끄덕였다. 8년간의 공백이 있는 칼리번조차 데릴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데릴만은 과거 동부 용병 연합의 장이었다. 그 말인즉, 왕국 전체 용병의 절반을 대표하는 우두머리였다는 뜻이다. 킬르넨 없이 데릴만 혼자만 있는 것을 보니, 남부 용병 연합은 와해되거나 동부에 흡수당한 모양이었다.
“자,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데릴만은 젠보다도 훨씬 오래 산, 노장 중의 노장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성장하고 오랜 전성기를 누리는 마물 혼혈의 특성상, 겉으로 보기에는 풍채 좋은 중년의 모습이었다.
“우리 마물 혼혈은 언제나 인간의 편이었다.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개처럼 인간을 마물로부터 보호해 왔지. 그러나 우리는 개보다도 사정이 나빴다. 개는 울타리 안에라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우리는 땅 한 조각 얻지 못한 채 떠돌아야만 했으니 말이다.”
데릴만의 차가운 농담에 다들 한 번씩 쓴웃음을 토했다.
“왕족일지라도 평생 전쟁에 끌려다녔던 알테르 프리드웬도 우리와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왕좌가 코앞임에도 반역을 저지른 것이겠지. 그는 최초로 자신을 ‘알파’라 공언한 왕이었다. 8년 전, 나와 킬르넨은 이견 없이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사실, 건국 이래 동부와 남부 연합이 싸우지 않고 힘을 합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회담장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테르 프리드웬라면 우리에게도 ‘평등하게’ 한 명의 알파당 한 명의 사내를 배당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지. 실제로 초반에 그는 그런 척을 했다. 어떤 알파도 결혼을 통해 평등하게 사내를 얻을 수 있고 대를 이을 것이라고 주장했지. 그런데 설마, 그자가 동족을 배신할 줄이야.”
데릴만의 우람한 목소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힘이 실려 갔다.
“우리는 알테르 프리드웬의 왕국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알파 왕의 왕국조차도 우리를 성벽을 지키는 개로 취급했다! 비열한 알테르 프리드웬은 인간 사내를 독점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거나 강한 알파에게만 상으로 배당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 나름의 변명의 여지는 있었지. 오직 강한 개체만이 번식할 권리가 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하나, 이는 공평하지 못하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데릴만에게 동조했다. 그의 거대한 흉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목소리는 회담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정도로 우렁찼다.
“나는 분노했다! 우리보다 못한 인간 사내조차도 계집을 끼고 정부까지 두는데,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그러나 어리석은 킬르넨과 남부 연합의 알파들은 우리의 정당한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폄하했다. ‘인간 사내의 수가 알파보다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차등 배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또, ‘붉은 오메가가 알테르 프리드웬을 조종한 탓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 실제로 최근 1, 2년간은 알테르 프리드웬에게서 그런 낌새가 보이기는 했지. 그러나 나는 목이 잘린 알테르 프리드웬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부터 그는, 우리 모두에게 사내를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데릴만은 도저히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부하가 목을 축이라며 내민 잔을 그 자리에서 패대기쳤다. 그는 산산조각이 난 잔을 거대한 발로 짓밟으며 연설을 이어 나갔다.
“킬르넨을 비롯한, 순진하고 어리석은 우리의 동족들은 알테르 프리드웬의 밑에서 개처럼 일하고 또 일해 왔다. 언젠가는 제 몫의 사내를 받을 날을 믿으며 말이다! 나조차 한때는 그랬지. 그러나 나는 분연히 일어섰다. 맹세컨대 그것은 결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알 것이다. 나의 지위면 사내는 어렵지 않게 배당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 아니, 셋은 받았겠지.”
데릴만은 목에 핏줄이 서도록 크게 외쳤다.
“나는, 사내 없이 러트를 버텨야만 하는 나의 동족들을, 부하들을, 모든 알파를 더는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 동족 간의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나는 알테르가 숨겨 놓은 빵을 모두와 나누고 싶었다…!”
알파들은 데릴만의 주장에 열렬히 호응했다. 심지어는 짐승처럼 하울링을 하는 자도 있었다.
“커흠! 고맙게도, 부족한 내 의견에 공감하는 동족들 덕분에 상황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형제인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목이 잘렸고 인간은 가장 강력한 알파에게서 해방되었다. 도망친 붉은 오메가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다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오메가가 아닌 여기 있는 모든 알파를 만족시켜 줄 사내들일 것이다. 새로운 왕, 에레즈 프리드웬은 우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없었다면 알테르 프리드웬과 붉은 오메가가 부리는 마물과 어떻게 싸워 이길 수 있었겠나!”
그가 노골적으로 알파들의 노고를 치하하자 용병들은 전보다 더욱 큰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알파들이 활개를 칠수록 반대로, 칼리번의 몸은 본능적으로 무거워졌다.
“…아스터.”
“네.”
“기사단? 쓸모없는 계집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 집단이다. 그것들이 이번 전쟁에서 싸우는 광경을 보았겠지! 수십 명이 달려들어야 마물 하나와 간신히 싸우는 그 가엾은 광경을!”
보았다, 보았다! 알파들이 꽥꽥거리며 외쳤다.
“아…. 성녀가 있다고? 그래, 그것들에겐 고대부터 내려오는 같잖은 마법이 있지. 인정한다. 하지만 그 힘으로 왕성을 지킬지언정 마물을 베지는 못한다! 스스로 회복하는 우리에게 치료 마법은 있으나 마나 한 힘에 불과하지 않나!”
동고동락한 전우를 모욕하고 힐난하자 용병들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환호했다.
“…아스터, 날 단상까지 데려가라. 내 힘만으로는 알파들을 뚫고 나갈 수가 없다.”
“설마 저들 앞에 나서겠다는 겁니까?”
아스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준 우리와 인간을 똑같이 대우하려 했다. 이는 조금도 공평하지 못한 대우다! 인간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며 알파의 힘에 기대 사는 벌레에 불과하지 않나!”
“벌레, 벌레다!”
“맞다! 벌레는 우리가 아니라 그쪽이지!”
“에레즈 프리드웬은 알테르 프리드웬의 형제 아니랄까 봐 우리의 평화적이고도 정중한 요청을, 알파 모두에게 사내를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거절했다. 그때 그가 내게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궁금하나?”
데릴만이 일부러 말을 끌자 알파들은 발을 구르며 호응했다.
“앞으로 성씨를 계집들에게 물려준다더군! 하, 하하! 크하하하하!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싸워 왔나? 마물처럼 살지 않고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 아니었나?!”
“……그래.”
알파들의 들끓는 분노 사이로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항상 평화를 제안했다. 거절해 온 것은 인간들이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라!”
“저는 싫습니다. 이들은 모두 알파입니다. 아무리 당신이 오메가라고 해도…. 에어리얼처럼 저들 모두를 현혹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인내는 여기까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성검을 제외하면 알테르 프리드웬보다도 덜떨어진 인간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기형 마물이겠지. 알테르 프리드웬이 없는 이상, 우리가 프리드웬의 눈치를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스터가 거절하자 칼리번은 무작정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스터가 잡기 전에 그는 무수한 용병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칼리번!”
아스터는 작은 소리로 외쳤지만, 알파들의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칼리번의 뒤를 따랐다.
“이제 그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나? 알테르 프리드웬도, 그에게 고기 한 점 얻어먹기를 바라던 수치스러운 배신자들도 이제는 없다!”
칼리번은 알파들과 부딪치며 나아갔다. 조금씩, 단상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이 엉망으로 뛰었다. 귓가에 심장 박동이 들릴 정도였다.
“에레즈 프리드웬만 죽이고 나면,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될 것이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용병들을 밀어내느라 낑낑거리는 칼리번을 등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몸에 닿는 딱딱한 감촉에, 칼리번은 그 정체가 아스터임을 바로 알았다.
“놔라.”
“싫습니다.”
“만약 놓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로브를 벗고 정체를 밝힐 거다.”
“…….”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물러설 수 없어. 어설프게 들켜서 센어르 때와 같은 꼴이 되느니, 차라리 우두머리와 교섭하는 편이…. 그의 정신을 지배할 가능성이 더 크다.”
아스터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말없이 앞장을 섰다. 괜히 다른 곳에 화풀이를 하는지 칼리번이 보기에도 거칠게 덩치 좋은 용병들을 밀어냈다. 모두가 데릴만의 연설에 집중한 탓에 버릇없는 아스터를 향해 욕설을 내뱉기는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왕성에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동족들과 우리의 아내가 될 사내들, 그리고 계집들뿐이다. 계집은 약하다! 주먹 한 방이면 쓰러질 계집들은 우리에게 어린 사내를 공급해 줄 노예가 될 것이다. 이제 왕성을 차지하고, 사내는 아내로 삼고, 텅 빈 인간 농장은 여자로 채우자!”
데릴만이 한쪽 팔을 들었다. 흥분한 알파들이 그를 따라 하며 짐승처럼 소리쳤다. 함성은 겹치고 더해져 숲이 떠나갈 정도로 가득해졌다. 이 소리를 듣고 마물이 몰려들지는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칼리번이 알파로 된 마지막 벽을 뚫을 때였다.
“이 자식! 감히 어디를 가려 하는 거냐!”
큼지막한 손이 칼리번을 머리를 붙잡았다. 아스터가 막기도 전에 칼리번의 얼굴을 가리던 후드가 훌렁 벗겨졌다. 순식간에 드러난 붉은 머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데릴만의 시선을 샀다.
“다, 당신은…!”
칼리번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시비를 건 알파는 즉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붉은 머리카락은 가는 목 위로 흘러내리고 섬세한 이목구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칼리번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데릴만이 이쪽을 보고 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바로 무대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유감이군, 데릴만. 아직… 한 가지 위협이 더 남아 있겠지!”
칼리번은 데릴만이 선 단상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오메가의 등장에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럽던 알파들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만약 붉은 오메가가 에레즈 프리드웬의 편을 든다면…. 데릴만, 넌 어쩔 셈이지?”
칼리번은 단상 앞에 서서 데릴만을 올려다보았다. 숲을 가득 채운 알파들이 이목이 오직 한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에어리얼….’
칼리번은 불편한 시선들을 이겨 내기 위해 속으로 원수의 이름을 되뇌었다.
‘난 네 뜻대로 놀아나지는 않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왕자님을 해치지 못하게 막을 거다. 이 증오스러운 몸뚱이를 이용해서라도.’
발아래가 아득하다. 칼리번은 더는 발을 뺄 수 없는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누가 더 멀리 가는지를 따지는 싸움이 아니었다. 누가 더 깊이 추락하는지에 대한 싸움이었다.
이 이상 가라앉으면 더는 물 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헤엄쳐 수면으로 고개를 들이밀기 전에 질식해서 죽고 말 것이다. 가라앉은 시체는 물거품이 되고 말겠지.
“…….”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상관없다. 놀랍게도 칼리번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가 살아남겠다고, 이 자리에서 나와 약속해 준다면…. 맹세하지. 나 또한 그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절대로 죽지 않겠다.>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 그럼 저도 죽지 않겠습니다.
‘왕자님은 나를 잊지 않았다.’
지옥에서 보낸 8년. 내가 그분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분도 나를 잊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대답해라, 데릴만!”
칼리번은 검은 눈으로 데릴만을 똑바로 응시했다. 용병으로 살며 도망치는 건 한 번도 배우지 못했다. 정면으로 맞설 뿐이다.
* * *
왕이 떠난 수도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항해사를 잃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 그 누구도 등 뒤로 폭풍이 오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세 기둥은 그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다. 성녀단은 부상자를 돌보고, 기사단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용병 연합은 마물로부터 인간들을 지킨다. 백성들은 왕성 복구 작업에 열심이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왕좌를 비운 후, 마물 혼혈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기묘한 우연이 겹친 것일까? 그러나 그 누구도 왕자와 살해 사건 간에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틈도 없이 마물 쥐가 왕성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마물 쥐’라고 불리는 이 존재는 이름 그대로 쥐라는 생물의 습성과 번식력을 고스란히 닮았다. 이것의 존재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성녀단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들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정도로 그 수가 불어났다.
그로 인해 왕실 재건 기사단의 업무가 늘게 되었다. 왕성을 순찰하던 병사들은 해가 질 때까지 성 곳곳에서 나타나는 마물 쥐를 사냥해야만 했다. 신용병 연합 또한 이번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왕성을 떠난 이후, 오드론은 이상하게도 기세가 한풀 꺾여 먼저 기사단의 비위를 맞추곤 했다. 그의 명령으로 용병들 또한 인간과 함께 마물 쥐를 잡으러 다녔다.
“아침마다 오체분시 된 시체를 보는 것보다는 쥐새끼를 때려잡는 편이 낫긴 하지.”
병사 하나가 말했다. 그녀의 두 손에는 오늘 사냥한 마물 쥐가 가득했다.
“그러게요. 그쪽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던데요. 이 녀석이 살해 사건과 연관이 있었던 걸지도요?”
부하가 마물 쥐의 사체가 든 자루를 등에 멘 채로 의견을 제시했다. 마물 쥐를 사냥하는 자라면 누구나 해 볼 법한, 타당한 의심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쥐 새끼는 우리도 잡을 수 있을 정도야. 알파가 이런 거에 당할 리가 없잖아?”
병사는 쥐꼬리 뭉치를 얼굴까지 들어 올렸다. 사내 주먹만 한 크기의 마물이 저들끼리 부딪쳐 덜렁거렸다.
“…….”
“…….”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병사들은 답을 구하기라도 하듯 근처의 알파 무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 * *
“어쩌면 지하 감옥에 수용된 기형 마물 중 한 마리가 아니었을까요? 이 마물 쥐 말이에요.”
한편, 치료소에서 병자들을 돌보던 성녀들도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죽은 알파 중에 지하 감옥의 간수도 있었잖아요? …와, 이러니까 앞뒤가 딱 맞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물 쥐가 지하에서 알파를 공격했다가, 땅 위까지 탈출해서 인간을 습격하기 시작했다든가…!”
말이 많은 성녀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는 듯 쉼 없이 떠들었다.
“용병 연합은 왕성 여기저기에 알파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동안에도 내내 비협조적이었죠. 이제야 도움을 주는 것도 그래서인 걸지도 몰라요! 자신들이 제어하지 못한 마물 쥐가 지하 감옥에서 뛰쳐나온 사실을 숨기려고…!”
적군의 옷을 세탁해 붕대를 만들던 성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에는 이게 웬 헛소리인가 싶었지만, 제법 그럴듯하지 않은가?
* * *
“저 괴물들을 싹 다 수장시켜 버려야 하는데!”
부서진 성벽의 보수 작업 중이던 백성들은 자연스레 왕자가 떠난 본성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해 가둬 둔다지만, 이제는 제법 빗물이 쌓였다. 왕자가 토벌에서 돌아오면 그가 없는 사이 왕성에 일어난 이 난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집행이 이루어지겠지!
“누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알파 놈들이 이 망할 마물을 몰래 성안에 풀었다나 봐.”
“…아니, 왜 그런 짓을?”
성벽 작업자 중 하나가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기울였다.
“아, 그야… 당연히 우리를 여기서 쫓아내기 위해서지! 그 있잖아, 왼쪽 다리를 저는 기엘이라고…. 알아?”
“알지!”
“그 녀석이 말이야, 알파들과도 친분이 좀 있는데…. 글쎄 알파 녀석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밤마다 몰래 죽였다고 믿는다더라고! 그 복수를 이런 치사한 방식으로 하려는 거지.”
“뭐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힘으로 어떻게 알파를 죽이겠나? 그게 가능하면 왕자님께서 저 녀석들이랑 손을 잡았을 리가 있겠나!”
“근데, 그게 말이야….”
성벽 보수 작업자들은 본격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수군댔다. 알파와 최대한 부딪치지 않아 안전한 성벽 보수 작업은 대체로 사내들이 맡고 있었다.
“들은 말로는… 뜻있는 사내들이 모여서 밤마다 알파를 죽였다고 하더라고!”
“뭐, 뭐라고?! 그게… 정말로 가능은 한 거야?”
“지금은 시절이 수상해서 우리가 계집들의 보호를 받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가 힘이 없는 건 아니잖아? 머릿수만 많다면, 뭐….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더 대단한 일은 무엇인 줄 아나? 그 배후에…… 무려… 리론 후작님께서 있다더군!”
“호오…. 하긴! 그분은 알파에 대한 증오가 남다르니….”
사내들은 하던 일마저 내려놓고 수다에만 집중했다. 사람의 입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어, 쉿! 조용히 해! …온다.”
누군가 끊임없이 이어져 갈 것 같은 이야기를 끊어 냈다. 사내들은 재빨리 도구를 들고 할 일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파들이 인부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인간 병사들처럼 양손에 두툼한 쥐꼬리를 가득 쥐고 있었다.
* * *
순찰을 다녀온 알파들은 마물 쥐를 오드론에게 바쳤다. 발견하는 즉시 죽이는 것으로 왕실 재건 기사단과 협의를 본 상태였으나, 오드론의 앞에 놓인 마물은 아직 살아 있었다. 다만 네 다리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 그것이 마물 특유의 생명력으로 회복할 때마다 오드론의 부하들은 다시 발을 부러뜨렸다.
“흠….”
오드론은 두 손가락으로 마물 쥐의 꼬리를 들었다. 허공에 뜬 마물 쥐는 툽툽한 몸을 뒤틀며 끽끽, 괴로운 소리를 낸다. 마물 중에서도 가장 약해 빠진 종류였다. 인간 계집이라 할지라도 무기가 있다면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최근 인간들 사이에서는 ‘지하 감옥에서 쥐 마물이 기어 올라온다’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나타난 시기와 살해 사건이 사라진 시기가 겹치다 보니, 최소한 저희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부하의 보고에 오드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하 감옥은 철저하게 관리 중이다. 그곳에 갇힌 기형 알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데릴만조차도 조종하지 못한다. 붉은 오메가가 만들어 낸 실패작이었으니까.
이 사실을 솔직하게 알린다면 어처구니없는 소문은 종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드론은 전면에 나서서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두려워하게 두는 편이 나았다. 오드론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대화하여 소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확실히 신기한 일이긴 하군. 이런 순수한 마물은 성안으로 침입하지 못할 텐데….”
오드론은 단검으로 무심히 마물 쥐를 찌르며 생각에 잠겼다. 책상 위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확신하건대 진원지는 지하가 아니다. 인간들보다 정보가 하나 더 있는 오드론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틀었다.
그렇다면 이것의 ‘진짜’ 진원지는 어디일까?
<여우라면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왕성 어딘가에 숨겨 놨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경비에 소홀하지 말도록.>
오드론은 데릴만이 왕성을 떠나면서 남긴 또 다른 임무를 떠올렸다. 그는 넝마가 된 마물 쥐를 책상 위에 던졌다.
“…지금처럼 기사단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이 성가신 마물이 자주 등장하는 장소를 추려 봐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마물의 심장을 단검으로 찍어 누르면서도, 오드론의 가는 눈은 죽어 가는 마물을 보고 있지 않았다.
* * *
갑작스러운 붉은 오메가의 등장에 회담장은 일순 소란스러워졌다. 데릴만은 즉시 연설을 중지하고 단상에서 훌쩍 내려왔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메가님.”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은 따로 자리를 갖기로 무언의 합의를 거쳤다. 그들은 회담장에 임시로 차려진 막사로 향했다. 아스터가 칼리번의 뒤를 따랐으나 막사의 입구에서 데릴만의 부하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아스터는 그들을 죽이고서라도 따라가려 들었다. 칼리번은 아스터의 몸에서 백금사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기다려.”
칼리번은 덩치 큰 갑옷을 꾹 눌렀다. 손을 덮을 정도로 긴 로브의 소매가 훌렁 내려갔고, 가는 손과 손목이 드러났다. 알파들의 시선이 그 얄팍한 손목에 고정되었다.
“당신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아스터는 막무가내였다.
“상대도 혼자 들어가니 괜찮아.”
“하지만.”
“…괜찮을 거다.”
아스터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안다. 연기력이 끔찍하게 부족한 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 심정이겠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도움을 바랄 수는 없다. 더구나 그의 능력은 알테르 프리드웬을 닮았다. 알테르를 배신한 알파들 앞에 그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바짝 붙어 진정이라도 시키듯 갑옷을 탁, 탁 두들겼다.
“…….”
아스터는 불만이 많아 보였으나 일단은 알겠다는 듯 한걸음 물러섰다. 그 모습에서 칼리번은 불현듯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스터는 철커덕거리며 걸어가더니, 막사의 입구 곁에서 장식용 갑옷처럼 우뚝 섰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혼자 남겨 두고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임시로 지어진 탓에 막사는 습하고 탁했다. 안에는 기본적인 책상과 의자조차도 없었다. 데릴만의 억센 인상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 문서들만이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중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묶인 명부가 있었는데, 저것이 무엇인지 칼리번은 알고 있었다. 이번은 에어리얼의 기억에서 나온 정보가 아닌, 칼리번 자신의 기억에서 파악한 정보였다.
저것은 용병 명부다. 칼리번의 이름도 저기에 올라가 있었다. 지금은 지워졌겠지만….
“오메가님. 그동안 행방이 묘연하여 걱정했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데릴만은 흉흉한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제법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막사 입구에 몸을 욱여넣어야 할 정도로 체격이 큰 데릴만이 작고 마른 오메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어딘지 우스꽝스러웠다.
“…….”
칼리번은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것은 칼리번이 꾸며 낸 행동이 아니었다. 에어리얼의 몸이 알아서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에어리얼의 몸이, 데릴만을 알아본다. 에어리얼의 기억이 편편이 칼리번의 영혼에 스며들었다.
데릴만.
처음에는 모든 알파가 그러했듯 그 또한 알테르와 에어리얼의 편에 섰다. 그러나 인간 사내를 모든 알파에게 제공하지 않는 알테르의 정책에 반발하여 척을 지게 되었다.
동부 용병 연합의 수장인 그를 따라나선 알파는 적지 않았고 알테르가 패배하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동시에 에레즈에게는 압도적으로 불리했던 전세를 뒤엎을 수 있었던 든든한 아군이었다. 데릴만이 없었다면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성검이 있다 할지라도 제 형을 이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데릴만과 에어리얼의 관계는 적대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는 한낱 인간의 사고관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알파는 오메가를 원한다.
생존. 그리고 파멸의 순간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번식. 그것이 알파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칼리번은 센어르를 떠올렸다. 칼리번은 백금사를 이용하여 그의 전신을 찢어놓고, 그가 여태껏 꾸린 본거지를 망치고, 노예를 탈출시키려 했다. 그런데도 센어르는 끝내 칼리번을 죽이지 못했다. 8년 전 마주한 마물들이 칼리번의 손에 죽어 가는 순간까지 교미를 시도했듯, 센어르 또한 오메가를 향한 욕망을 놓지 못해 죽고 말았다.
“눈이 변하셨군요. 예전에는 머리카락만큼 붉은 눈동자셨는데.”
데릴만은 걸걸한 목소리와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 언뜻 들으면 다정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겉모습만 놓고 보자면 그들은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칼리번은 최대한 간소하게 대답했다. 검은 눈동자는 데릴만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데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오메가님께서 어떤 심정이실지 압니다. 저를 죽이고 싶으실 겁니다.”
데릴만의 손이 불쑥 다가왔다. 방패처럼 큼지막한 손은 에어리얼의 작은 머리를 쥐고 당장이라도 으깨 버릴 듯했으나, 실상은 손등으로 뺨을 쓰다듬을 뿐이다.
“알테르와의 갈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칼을 들이대야 했으나, 저는 오메가님을 단 한 번도 적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그건 제 부하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칼리번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표정한 겉모습과 달리 그의 몸은 압박감으로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이제는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해묵은 증오는 벗으시고 저희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솔직히 칼리번은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데릴만이 교미를 하려 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노골적으로 아첨을 떨던 센어르와 달리 태도가 퍽 담백했다. 의외였다. 머리보다는 몸을 주로 썼던 ‘칼리번’이 보기에 동맹 외에는 별다른 속셈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은 피가 빠르게 돌며 한껏 긴장했다. 토끼와 같은 작고 연약한 초식동물은 육식동물보다 훨씬 민감하고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
칼리번은 말을 하기 전에 숨을 골랐다. 센어르에게 했던 어색한 연기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칼리번은 한 손을 자신의 허리에 올렸다. 에어리얼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라면 그것은 바로 고통이다. 고통은 필연적으로 증오를 낳는다. 칼리번은 제 허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나는 그 누구보다도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이고 싶다. 하지만 너에 대한 증오도 그에 못지않아. 넌 이미 알테르를 배신했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널 믿어야 하지?”
칼리번은 고통으로 인해 살짝 쉰 목소리로 에어리얼이 할 법한 대사를 했다. 아스터의 갑옷 속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그리고 회담장으로 향하는 내내,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과거에 했던 말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8년. 언젠가 에어리얼이 했던 말처럼 칼리번은 그와 형제처럼 함께했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반응을 유도했다. 에어리얼의 말투와 행동은 이미 익숙했다. 과거에 마주하기를 두려워했던 칼리번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그러나 센어르 때도 그랬지만, ‘완벽한 연기’는 칼리번의 영역이 아니었다. 데릴만은 알파의 수장이었고, 에어리얼과는 갈라서기 전에도 자주 만났을 것이다. 데릴만보다 경험이 적고 에어리얼보다 멍청한 칼리번이 그를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젠을 만난 이후 에어리얼의 기억이 조금씩이나마 스며들고 있었기에, 그나마 에어리얼 흉내가 나아진 것이다. 전보다는 수월하게 태도나 말투를 조금씩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만큼 자신의 영혼이 사라져 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알파가 오메가를 어떻게 배신하겠습니까?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는 사내와 계집 간과는 다릅니다.”
“그래?”
“네, 오메가님. 절대 당신만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데릴만은 본능 하나만을 무기 삼아 밀어붙였다. 용병 간에 거래할 때도 이딴 식으로 굴면 파기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칼리번은 데릴만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메가를 향한 알파의 역겨운 본능. 그것이 칼리번의 유일한 무기였다.
“알파는 오메가를 배신하지 않는다…. 네 말을 전부 믿지는 못하지만, 그 말만은 마음에 드는군.”
칼리번은 데릴만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뜻밖에도 데릴만의 손길이 떨어졌다. 칼리번은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에어리얼의 흉내를 완벽하게 낼 수 없는 그가 적진의 한 가운데까지 밀고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럼 나와 교미해라, 데릴만.”
연기는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데릴만과 교미를 하기 전까지만 넘길 수 있으면 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공동의 적을 두는 것보다 확실한 동맹을 맺자.”
지하에서 보낸 8년은, 새까맣다. 칼리번에게는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러나 더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알면서도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과도 같았다. 교미를 통해 데릴만의 머릿속을 점령할 작정이었다. 알파의 우두머리인 데릴만을 조종할 수 있다면 이곳의 모든 알파를 자멸시킬 수 있다.
“…….”
시간이 흘렀다. 확실히 데릴만은 센어르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먼저 몸을 허락한 오메가를 향해 게걸스럽게 달려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지?”
칼리번은 고개를 기울였다. 데릴만의 이성과 달리 마물의 본성은 온통 눈앞의 오메가를 향하고 있었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얼굴이 당장이라도 변화할 듯 불그죽죽 일그러지며, 아랫도리도 빳빳해진다.
“크으…. 허어, 허억…….”
데릴만 같은 사내도 오메가를 참지 못하고 개처럼 헐떡였다. 숨소리가 거친 것을 보니 입가에 침이 고이는 모양이었다. 데릴만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당장에라도 칼리번을 쓰러뜨리고 올라탈 기세였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데릴만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였다. 퍽! 그는 돌연 무릎을 꿇더니 제 머리를 땅에 들이받았다. 그는 황소처럼 머리를 땅에 받은 채 씩씩거렸다.
“읏…!”
그 순간, 칼리번 머리가 쑤셔 오면서 짧은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에어리얼과 그의 부하가 교미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데릴만의 모습이었다. 데릴만은 언제든 에어리얼에게 추삽질을 하는 알파를 떼어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러지 않았다. 알파가 오메가를 앞에 두고도….
그것은 데릴만이 오메가를, 에어리얼을 지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칼리번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저절로 열렸다.
“넌 오메가를 두려워하고 있군.”
정확히는 머릿속이 읽히고 조종당하는 것을.
“허억, 커헉……. 크학, 허억……. 퉤!”
데릴만은 제 입에 처박힌 흙을 씹어 삼켰다. 그러다 가래가 끓는 소리가 나더니 입 안에 있는 것을 땅에 뱉었다.
“하, 하하….”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에어리얼처럼 웃고 있었다. 아마 일전에도 에어리얼은 이런 식으로 그를 비웃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은 여전하군. 좋아.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이겠다는 목적은 같으니 한동안은 협력하도록 하지.”
칼리번의 태도는 센어르를 대했을 때와 같은 인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곳에 아스터가 있었다면 놀랐을 것이다.
* * *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칼리번은 막사를 나왔다. 아스터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한 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끝났습니까?”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데릴만이 나왔다. 아스터가 말을 걸기도 전에, 칼리번은 데릴만과 함께 단상에 섰다.
“칼…….”
“모두 여기를 보아라!”
아스터의 목소리는 데릴만의 쩌렁쩌렁한 음성에 묻혀 버렸다.
“붉은 오메가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로 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데릴만은 전보다 더 힘찬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 나갔다. 붉은 오메가가 힘을 보태기로 했으며 곧 알파가 왕성을 차지할 것이라고.
“…….”
칼리번이 따로 부르지 않았기에 아스터는 다른 알파들과 다를 바 없이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데릴만의 곁에 선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흉내를 제법 잘 냈다. 그동안 아스터가 투덜거리며 잔소리를 한 효과인가 싶을 정도로. 심지어 아스터가 알려 주지 않았던,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를 배제하고 홀대하는 모습까지도 말이다.
“…흐응.”
에어리얼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아스터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왕성에는 지난한 고난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기가 이어지며 왕성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졌다. 그런 와중에 마물 쥐는 마물보다는 짐승을 더 닮아 있었다. 백성들 사이에서 마물 쥐를 잡아먹으려는 움직임이 점점 보였다. 성녀단은 그 행위만은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그들이 백성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날도 푸른 눈의 성녀는 신이 맡긴 숭고한 임무를 해치우고 있었다. 병자들을 돌보는 일은 성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은 성녀의 몫. 어리고 경험이 적은 성녀가 맡을 만한 임무는 바로, 왕성을 돌면서 치료소에서 산더미처럼 나오는 침구와 옷을 세탁하는 일이었다.
“허억, 헉….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네….”
푸른 눈의 성녀는 제 덩치만큼 거대한 세탁물을 등에 지고 옆구리에 끼기도 하면서 걸었다.
“응? 저게 뭐지?”
낑낑거리며 짐을 옮기던 성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쥐인 줄 알았다. 멀리서 보기에는 덩치가 큰 쥐로 보이지만, 가까이 관찰하면 짐승과는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저건… 마물 쥐잖아?”
어떻게 마물 쥐가 본성 안까지 들어온 거지?
푸른 눈의 성녀는 아연실색했다. 감히 마물 쥐가 인간의 거점인 본성에서 활개를 치다니!
‘다른 성녀님 말처럼, 정말로 지하 감옥에서 마물 쥐가 올라오는 건가 봐.’
이즈음에서 푸른 눈의 성녀는 산더미 같은 세탁물을 내려놓고는 세탁 바구니 안에서 나무 몽둥이를 꺼냈다. 전쟁 중에는 유용한 무기였으나 지금은 빨래를 하거나 먼지를 터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이 녀석!”
푸른 눈의 성녀는 몸을 낮추고 마물 쥐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물 쥐는 마물이지만 굉장히 약하므로, 쉽게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잡을 만하면 놓치고, 또 놓치고…. 몽둥이를 휘두를 때면 기가 막힌 움직임으로 성녀를 피해 갔다.
“이, 이게?! 죽어라, 더러운 마물!”
마물 쥐로 인해 왕성을 지키는 기사들에게까지 전염병이 퍼져서는 안 된다! 푸른 눈의 성녀는 곤봉을 힘차게 내리쳤다. 그러나 나무 몽둥이는 깡, 소리를 내며 텅 빈 벽과 바닥에 부딪힐 뿐이었다. 푸른 눈의 성녀는 더욱 다급해졌다.
거기다… 눈의 착각일까? 마물 쥐는 성녀의 공격을 세 번이나 피했음에도, 도망치기는커녕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신경을 자극했다. 마치 푸른 눈의 성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설마… 마물에게 지성이 있을 리가.’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저 녀석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푸른 눈의 성녀는 온 힘을 다해 마물 쥐를 쫓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점점 더 성 깊은 곳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본성은 왕성의 다른 구역에 비해 비교적 덜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마물의 영역이었으며 알테르 프리드웬의 본거지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물의 독기에 오염된 장소가 상당히 많았다.
본성 내부는 흡사 미로와도 같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은 더욱 어두워지고, 정화되지 못한 오염 지대에서 독기가 피어올랐다. 푸른 눈의 성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어느 순간 쫓던 마물 쥐를 놓치고 말았다.
“아, 내가 너무 깊이 들어온 건가….”
성력을 지녔다지만 성녀도 인간이었다. 마물이거나 마물 혼혈이 아닌 이상 독기에 노출되면 위험한 것은 동일했다. 푸른 눈의 성녀가 비틀거렸다. 끽, 끽끽, 여기저기서 마물 쥐의 울음이 들려왔다.
‘한 마리가 아니야. 이곳 어딘가에… 이 녀석들의 둥지가 있는 걸지도 몰라.’
마물 쥐는 소문처럼 지하 감옥이 아니라, 본성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걸까? 전쟁 중에는 숨어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먹이를 찾기 위해 왕성을 돌아다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본성 정화 작업을 늦춘 것이 오히려 이 마물 쥐를 번식하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었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끔찍한 알테르가 순순히 죽었을 리가 없지. 일부러 이런 장소에 마물 쥐를 숨겨 둔 거라면…. 나 혼자 감당할 일이 못 돼.’
푸른 눈의 성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곤봉을 꾹 움켜쥐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리고 성녀단에 본성 내부를 적극 수색하자고 건의하는 거야. 그렇게 판단한 순간, 푸른 눈의 성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복도 가장 안쪽의 방에 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는데, 그 틈새로 마물 쥐가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방인데도 잠금장치가 여럿 달려 있었으나 전부 해제된 채였다.
“…….”
어린 성녀로서는 눈앞의 유혹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저기만 확인해 보자.’
푸른 눈의 성녀는 마물 쥐를 살금살금 쫓아갔다. 방 안에 들어갔으니 더는 도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열린 문의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방이었기에 당연히도 어두웠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푸른 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
푸른 눈의 성녀는 공포에 뒤로 물러나다가, 잔해에 발이 걸려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가 나고 바닥에 깔린 먼지가 주변에 안개처럼 퍼졌다.
“허, 허억…!”
성녀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다른 방과 달리 이곳은 깨끗했다. 단출한 방이었는데…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았으니 회수하지 못한 적의 시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곳곳에서 모여든 마물 쥐가 그 사내의 몸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른 눈의 성녀는 어리기는 했지만, 성녀단에 들어간 후로 온갖 전쟁터를 다 쫓아다녔다. 마물과 알파들에게 당해 끔찍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도 지켜봐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해…!”
푸른 눈의 성녀는 그 방에서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녀 대신 남겨진 곤봉을 마물 쥐들이 뒤덮었다.
* * *
예정대로라면 회담장에 모인 알파들은 결의를 다지고, 센어르가 준비한 사내 노예들과 쾌락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뜻밖의 손님이 등장했다. 백 명의 사내도 마다할 만한 특별한 손님이었다.
그 존재감 때문일까? 데릴만은 다음을 기약하며 회담을 급하게 마무리 지었다. 알파들은 각자의 목표를 안고 자신의 구역으로 흩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사내 노예를 배급받지 못했으나 어떤 알파도 감히 불만을 품지 못했다. 센어르의 부재를 입에 담는 이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데릴만의 곁에 남아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이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며칠 간은 살얼음 같은 평화가 이어졌다. 알파의 우두머리가 정중했기에 부하들도 감히 칼리번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 이전에, 에어리얼의 악명이 자자했기에 섣불리 손대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칼리번으로서는 시간을 끌수록 좋지 않았다.
‘설마 데릴만이 오메가를 거부할 줄이야….’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다. 물론 칼리번이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교미는 가능할 것이다. 대신 의심을 사겠지. 더구나 센어르에게 입은 상처는 아직도 아무는 중이었다.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다.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들키는 순간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어떻게 해야 데릴만을 지배하고 그의 무리를 넘겨받을 수 있을까….
“저는 일단 예정대로 돌아가서 왕성의 상태를 살피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는 동족들에게 달라진 저희의 상황을 알리겠습니다.”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던 즈음, 데릴만은 그 어떤 알파도 하지 못할 제안을 했다.
“오메가님께서 저희의 곁에 계시니, 더는 때를 기다릴 일 필요가 없습니다. 시일을 정해 안팎에서 왕성을 점령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했던 방식처럼 말입니다.”
바로, 오메가를 두고 떠나겠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반역자 데릴만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편성한 수색대의 지휘관이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물 수만은 없었다.
“바라던 바다. 네가 안에서 힘쓰는 동안 왕성 밖의 알파들은 내가 관리하도록 하지.”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릴만이 별다른 의심 없이 칼리번을 곁에 둔 덕분에, 그는 숲 곳곳에 자리를 잡은 알파 무리를 파악해 둔 상태였다. 이대로 데릴만이 왕성으로 떠나면 마물을 이용해 흩어진 알파들을 하나하나 쓸어 버릴 작정이었다. 데릴만이 왕성을 다녀온 후에는 세력이 크게 약화될 것이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릴만은 의심 없이 칼리번을 믿었다. 오만함에서 비롯한 신뢰였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알파가 전부 데릴만의 것이었고 마물은 전부 칼리번의 것이었다. 인간들만 사정을 모를 뿐, 왕성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오메가님.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칼리번이 알파의 세력권이 적힌 지도를 유심히 살피던 그때, 데릴만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지?”
칼리번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되물었다.
“오메가님께서 소유하신, 또 다른 오메가에 대해서입니다.”
그 순간, 칼리번의 숨이 덜컥 멎었다.
“…….”
설마 자신의 몸뚱이가 화제에 오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분명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외부인과 몇 차례 교미를 시켰었다. 칼리번은 한때는 동료였던 이들에게 간절히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바깥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아니, 없는 존재가 되었다.
“혹시 그것은 죽은 겁니까?”
분명 그렇다고… 여겼었는데. 데릴만은 ‘칼리번’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위치에 선 알파니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발아래가 까맣게 물들어 가는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이 기분은 무엇일까….
“…….”
데릴만은 왕자님의 측근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데릴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그에게 전해졌더라면….
……의미 없는 가정.
“쓸데없는 것을… 궁금해하는군.”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오메가님, 감히 그것의 존재를 먼저 입에 올려 죄송합니다. 맹세컨대 불순한 의도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메가는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땅에 태양이 둘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것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붉은 오메가님께서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의 행방을 묻는 것입니다. 혹여 아직 살아 있다면 행방을 알려 주십시오. 오메가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가 없도록 제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칼리번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판단했는지, 데릴만은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막상 칼리번은 다른 생각에 잠겼다.
‘데릴만은 왕자님의 곁에 있던 자다. 그런 그가 내 몸이 왕성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만약 에어리얼이 칼리번인 척 왕자님을 속이고 있었다면, 데릴만이 굳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에어리얼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렇다면 왕자님은 아직….’
괜찮다는 뜻이다. 마계의 구멍처럼 어둡던 발아래가, 다시 원래대로 평범한 흙으로 돌아왔다.
‘에어리얼….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일단은 왕자님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하게 된다. 몸이 바뀌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아직도 에어리얼의 행방을 몰랐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요행을 바라게 된다.
“그것은 죽었다.”
칼리번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오메가님.”
데릴만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음에도 쉽게 물러섰다. 그러나 말과 달리 욕망은 숨기려 할수록 더욱 드러난다. 데릴만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칼리번이 짧은 시간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갔기에, 그 눈빛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칼리번의 한쪽 팔에 끼워진 아스터의 그리브를 제외하고는. 데릴만과 칼리번이 독대하는 동안은 어떤 알파도 막사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그는 몸을 분리할 수 있다는 특성과 칼리번이 걸친 로브가 과도하게 크다는 이점을 이용해 잔꾀를 부렸다.
“…….”
백금사는 소매 밖까지 몰래 빠져나왔다가, 다시 칼리번이 낀 그리브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럼 이후의 계획은 왕성을 다녀온 후 찬찬히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요.”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막사를 나오며 데릴만이 말했다. 칼리번도 동의했다.
“대장님!”
그때였다. 막사 안으로 용병 하나가 허락도 없이 뛰어들었다. 그는 평소에 데릴만이 데리고 다니던 부하들과는 다른 차림새였다.
“무슨 일이냐?”
데릴만은 무엇인가를 직감했는지 부하에게 다가갔다. 부하에게 소식을 듣는 데릴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뭐지?’
칼리번은 아스터와 함께 데릴만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에레즈 프리드웬이 이 근방에 있다고 합니다.”
흘러나온 말을 주워들은 순간, 칼리번은 빗속에서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손안에 아스터의 백금사가 강하게 감겨들었다.
‘왕자님이…?’
칼리번의 심장이 의지와 상관없이 뛰었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혈관이 꿈틀거린다. 칼리번의 팔에 감겨든 아스터는 평소와 다르게 뛰는 박동을 느꼈다.
‘이 감정은….’
멍청한 칼리번이었지만, 이 감각을 잊지 않았다. 그 먼 옛날, 작고 연약한 왕자님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심박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그 당시의 왕자님을 떠올리면, 칼리번은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온몸에 힘이 솟아오르고 무엇이든 부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몇 시간 동안 땀을 빼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을 정도로 전의가 고양되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감정의 이름을… 지금은 안다.
이건… 기쁨이다.
‘어째서 지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도처에 적이 깔려 있다. 이곳에 왕자님이 오면 위험하다. 절대로 기뻐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신은 ‘칼리번’조차 아니었다. 멋모르던 예전과는 다르다. 자신은 바뀌었고, 그도 달라졌다. 이번에도 그는 ‘에어리얼’을 죽이려 들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사소한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알파들이 제 구역으로 돌아갔지만, 이곳에는 아직 데릴만의 부대가 남아 있다.’
에레즈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던 칼리번은 간신히 정신을 바로잡았다. 지금 자신은 에어리얼이다. 에어리얼이 할 법한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흠, 곤란하게 됐군. 하필이면 떠나려던 차에 동선이 이렇게 꼬이게 될 줄이야.”
한편, 데릴만은 부하의 보고에 혀를 찼다.
‘기껏해야 주변만 돌다 돌아갈 줄 알았는데…. 어린 녀석치고 제법 감이 좋군.’
사실 그는 오드론이 앞서 보낸 병사를 통해 에레즈 프리드웬이 직접 후발대를 꾸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드론은 왕성에서 기묘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고 있으며, 아무래도 에레즈 프리드웬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내용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에레즈를 지켜봐 온 데릴만은 오드론의 전언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수색대가 파견된 지 고작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이 갑자기 바뀔 리가 없다 여긴 것이다.
“오메가님. 아무래도 에레즈 프리드웬이 수색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나선 것 같습니다. 전갈에 따르면, 다른 수색대가 그 구역의 알파에게 대패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왕자가 밖으로 나오게 된 원인으로 보입니다.”
데릴만은 오드론이 보낸 소식을 칼리번에게 간략하게 전했다. 칼리번의 두 눈이 뜨였다. ‘다른 수색대가 그 구역의 알파에게 대패’, 다름 아닌 칼리번이 그 전투의 당사자였다.
‘왕자님께서 밖으로 나오시다니…. 정말로 젠은 죽은 건가?’
절벽에서 보았던 젠의 마지막 모습이 불쑥 솟아오른다. 그녀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아 왕국으로 돌아갔으리라 믿었다. 제삼자의 입을 통해 확정된 동료의 죽음에, 제아무리 단단한 칼리번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자 칼리번의 로브 소매 속에 숨어 있는 아스터가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왕성에… 박혀 있던 에레즈 프리드웬이 손수 병사를 이끌고 나왔다라….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지 않나?”
칼리번은 정신을 다잡고는 데릴만의 앞에서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말씀은….”
“아쉽게도 알파들이 제 구역으로 떠난 상태지만, 아직 쓸 만한 것들이 남아 있긴 해. 이 기회에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이는 거지.”
알테르를 잃고 왕성을 빼앗긴 에어리얼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칼리번은 대담하게도 데릴만에게 먼저 습격을 제안했다. ‘에어리얼’로 보이기 위해서는 에레즈 프리드웬에 대한 증오를 꾸준히 드러내면서 동시에 계획을 주도해야만 했다. 남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은 에어리얼과 어울리지 않는다. 머리가 나빠 대체로 젠의 전략을 따랐던 칼리번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수색대의 지휘관으로 다른 녀석이 파견됐다면 모를까, 상대가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면… 지금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데릴만은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지?”
“오메가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성검이 있습니다.”
“아아….”
칼리번은 간신히 고비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와중에도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용병 칼리번’에게 데릴만은 까마득히 먼, 높은 서열이었다. 그런 그가 왕자의 힘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들다니….
“에레즈 프리드웬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왕성에서 전투를 벌여야만 합니다. 다수의 인간을 인질로 잡으면 함부로 성검의 힘을 사용하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데릴만이 뻗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성검을 ‘어떤 마물도 벨 수 있는 검’으로만 본다면, 무기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성검의 진정한 위력은 ‘다수의 마물’을 향할 때 발휘된다. 왕성 세력의 절반을 잡아먹은 데릴만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기도 했다.
“왕성을 완벽히 장악하기 전까지는 네 정체가 들키면 안 된다는 뜻이군.”
이즈음에서 칼리번은 큰 고민을 하는 척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계략이란 범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으나, 일단은 에어리얼처럼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다면 데릴만, 너는 당장 이곳을 떠나라.”
잠시 후, 칼리번은 굉장한 계략을 짜냈다는 듯 명령했다.
“설마… 오메가님께서 직접 에레즈 프리드웬을 상대하시려는 겁니까?”
이 상황에서는 누구나 할 만한 말이었음에도 데릴만이 드물게 놀라워했다.
“그래.”
이게 다 에어리얼이 쌓은 악업 덕분이었다. 물론 고마워할 생각은 없었다. 지난 8년 동안 수많은 인간을 죽여 왔다는 뜻이니 말이다.
“너희 부대가 떠날 때까지 내가 시간을 벌도록 하지. 내가 마물을 불러 에레즈 프리드웬을 공격하면, 이곳에 알파들이 모였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거다. 운이 좋다면 그놈을 죽일 수도 있겠고.”
이 정도면 에어리얼이 할 법한 계획 같겠지. 칼리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데릴만을 지켜보았다.
“흠…. 과연, 일리가 있군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부하 몇을 이곳에 두고 가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노출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모든 계획이 칼리번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지금도 달랑 부하 하나만 데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신임하는 부하들이니 위급한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이편이 에레즈 프리드웬의 눈에도 알테르의 잔당을 흡수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데릴만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전의 앙금을 잊고 붉은 오메가와 동맹을 맺기는 했으나 그가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른다. 데릴만이 심은 부하는 오메가를 지키는 보호자이자 감시자가 될 것이다.
“알…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 주니 편하군.”
머리가 나쁜 칼리번은 거절할 근거를 찾지 못했고,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 *
하얀 손목 위로 피가 흐른다.
“…….”
칼리번은 오염된 땅 위로 떨어지는 피를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데릴만은 에레즈의 이동 방향과 속도를 알려 준 후 떠났다. 왕자와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이쪽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하루 정도 걸릴 것이고, 이쪽에서 먼저 습격한다면 당장 오늘 안에도 마주칠 것이다. 순수한 재회가 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양 끝에서부터 좁혀져 가는 거리를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하루. 하루에서 조금 이른. 반나절. 이제 곧….
“저보다 당신이 먼저 이루었군요.”
등 뒤에서 익숙하면서도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스터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보다, 알파가 있는 곳에서는 말을 아끼라 했을 텐데.”
“데릴만도 이제 떠나지 않았습니까?”
“아직 그의 부하가 남아 있다.”
숲 주변에 잠든 마물을 불러들이던 칼리번은 집중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데릴만과 회의 중일 때는 칼리번의 손에 장갑으로 들러붙던 아스터였으나, 이번에는 제대로 된 갑옷 차림이었다.
“저희의 계약 말입니다. 저는 에어리얼을, 당신을 에레즈 프리드웬을 만날 때까지만 동맹을 맺기로 했던 것… 기억하시겠지요?”
“…그래.”
칼리번은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 약속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굉장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기쁘겠군요.”
백금사는 칼리번의 팔에 숨어 박동을 읽은 지 오래였다.
“그렇다. 그분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럼 앞으로 저희는—”
아스터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막상 이 순간이 오니…. 잘 모르겠군.”
칼리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나도 모르겠다.”
벌레처럼 들끓는 알파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알파를, 에레즈 프리드웬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본능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짧은 기쁨은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죽이기 위해, 에레즈를 포기했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레즈를 만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왕자님 앞에서 과연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에어리얼의 몸이 젠을 보자마자 그러했듯, 자신도 감정이란 것을 터뜨리며 매달리게 되지 않을까? 그분을 위한 모든 계획을 망칠까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스터, 부탁이 있다.”
“또 부탁입니까? 싫습니다.”
어느덧 아스터는 거절의 달인이 되었다. 칼리번이 입만 열면 싫다고 하기 일쑤였다. 물론 아스터가 칼리번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당신은 에어리얼의 몸을 멋대로 사용하면서, 저를 부려 먹기만 하지 않습니까?”
아스터의 투구가 덜컥거린다. 그는 칼리번만 목표를 이룬 것이 내심 샘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부려 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거짓말쟁이.”
“곧 왕자님과 전투를 치르게 될 거다. 만약 왕자님을 만나게 되면….”
칼리번은 아스터의 불만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말했다.
“절대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마라. 설령 내가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패배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때는 내가 알아서 빠져나가마.”
칼리번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일까, 목 안쪽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왕자님이 이 녀석에 대해 알게 되면 분노할까 봐? 아니면 반대로… 슬퍼할 것 같아서?
“흐응, 저에게 에레즈 프리드웬의 상대를 맡길 줄 알았습니다. 적당히 상대하다 이 구역 밖으로 쫓아내라고 할 줄 알았죠.”
유독 누군가를 닮은 목소리는 의외라는 듯 대답했다.
“…….”
“혹시 젠이란 알파 때문입니까?”
“…음?”
칼리번이 선뜻 대답을 못 하던 때였다. 아스터에게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제가 당신과 그 여자와의 재회를 망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랬지.”
설마 그때 일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평소 아스터는 칼리번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칼리번이 아스터가 언급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칼리번은 온통… 에레즈 프리드웬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레즈와 아스터가 만나서는 안 되는 이유에 사로잡혀서….
“그래. 그래서 그런 거니까 아무 짓도 하지 마라.”
칼리번은 쓸데없는 생각을 관두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군요. 당신이 에어리얼의 몸을 다치지 않게 한다는 전제 조건하에서 말이죠.”
아스터는 별다른 꼬투리를 잡지 않고 칼리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의외였다. 칼리번이 서먹하게 그에게 눈빛을 던질 때였다. 아스터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여기서 기다릴 겁니까, 아니면 에레즈 프리드웬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겁니까?”
물어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야, 당연히….”
바람이 붙었다. 아니, 오메가의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온 마물의 움직임에 숲이 흔들린 것이었다. 마치 숲 자체가 거대한 괴물이 된 것 같았다.
“내가 그분에게 간다.”
칼리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두 발을 잃은 채 지하에 있었다. 비록 원수의 몸뚱이라 할지라도 두 다리를 되찾았으니, 그분을 맞이하러 가야겠지.
“…….”
아스터는 그런 칼리번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에어리얼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칼리번을 묶어 뒀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에레즈 프리드웬이었다. 칼리번이라면 그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가 성검에 찔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스터는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붉었을 때도, 까맣게 타 버린 후에도 침잠해 있던 두 눈이 드물게도 반짝이고 있었다. 피난민들의 대화를 들을 적에도 그는 그런 눈을 했었다. 지금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몸을 보존하기 위한 도구도, 벽에 걸린 고깃덩어리도 아니었다.
“…흥.”
그래서 아스터는 말릴 수 없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쓸데없는 정보가 너무 많이 갑옷 안에 쌓여 버린 탓이었다.
* * *
마물 쥐의 주 서식지가 본성 안의 작은 방이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마물 쥐가 그득하게 들어찬, 오염된 방에는… 한 사내가 잠들어 있었다. 썩지도, 상처도 입지도 않은 채.
푸른 눈의 성녀에게 보고를 받은 성녀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다른 곳도 아닌, 성 한가운데에 이런 불길한 장소가… 이래서야 저희가 마물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군요!”
본성은 지금도 성녀와 기사들이 바삐 누비고 있었다. 이성이 없는 마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담한 판단이었다.
“왕자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일단은 오염된 구역을 정화하는 데 성녀들을 투입하는 정도로 진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치료소에 환자가 넘쳐 다들 쉴 틈 없이 바쁜 상황입니다. 본성 내부의 정화 작업에 힘을 쏟는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쪽은 포기해야 합니다.”
“정화 작업은 시간과 인력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그곳에 자리 잡은 원흉을 제거하면 해결될 일로 보입니다. 그 방에 있는 사내…. 아니, 마물이 아직 살아 있기에 거기서 마물 쥐가 들끓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당장에라도 그것을 목을 베어 버려야 합니다.”
“저희라고 시도를 안 해 본 것이 아닙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성력이 뛰어난 성녀님들을 투입했으나…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백성의 손에도 쉽게 잡히던 마물 쥐였으나 그 방에서는 이상하게도 강했다. 그뿐만 아니라,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성녀들의 목을 물어뜯기까지 한 것이다. 그 후로 성녀들은 혹여나 전염병이 옮을까 그 방 안에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방 안에 잠든 정체 모를 사내를 없애기 위해서는 방 안에 가득 들어찬 마물 쥐를 먼저 해치워야 했다. 그러나 사내를 죽이기 전까지 마물 쥐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어디부터 끊어 내야 악의 근원을 완벽히 처단할 수 있을까?
“그렇군요. 저희만으로는 어려움이 있으니, 기사단에 도움을 청해 함께 퇴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사단이 마물 쥐를 상대하는 동안 저희가 마물을 퇴치하는 겁니다.”
원로 성녀가 결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전염병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기사단에서는 마물 쥐로 인해 경비병을 늘려야 했기에 부담을 느껴 왔을 겁니다. 그러니 마물 쥐의 소굴을 발견했다는 점만 알려도 충분히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잠든 사람…일지 괴물일지 모를 그자가 깨어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요? 진실을 알려 주지 않은 채 전투에 보내는 것은 무기 없이 전장에 보내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다 방심한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이는 신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다른 진영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주장에 성녀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성녀단은 의견이 만장일치로 통일될 때까지 한곳에 모여 끝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다.
그렇게 오랜 토론 끝에 성녀단은 기사단에도 진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로 의견을 맞췄다.
“…그럼 다들 의견이 일치하니 기사단에 바로 알리러 가겠습니다.”
횃불을 든 성녀가 기사단에 그동안의 일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러 떠나려 할 때였다.
“이참에 신용병 연합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어떨까요? 역병은 평범한 인간들만 걸리고 있잖습니까? 알파가 나서서 해치워 준다면….”
누군가 말했다.
“그건 안 될 일입니다. 설마 인간이 아닌 것을 믿는 겁니까? 알파들은 사내를 아내로 달라 공공연히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이 마물 쥐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여자를 제거하는 데 쓸 것이 눈에 훤합니다.”
원로 성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섣불리 의견을 제시한 성녀도 그에 따르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 *
접전지로 예상되는 지역에 자리를 잡은 칼리번은 에레즈를 기다리다 짧은 선잠에 빠졌다. 눈을 감으면, 에어리얼의 기억이 눈꺼풀 위로 덧그려진다.
꿈속의 에어리얼은 다름 아닌 칼리번의 등을 보고 있었다. 이번 꿈은 칼리번과 에어리얼이 공유한, 중첩된 기억인 모양이었다. 칼리번일 때 겪은 일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보니, 자기 자신의 모습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칼리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했었다. 그러나 지하에 끌려간 후, 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뒷덜미를 덮을 정도로 자라났다. 예전부터 칼리번은 육체의 재생력에 비해 체모는 느리게 자라는 편이었다. 하룻밤 만에 동굴을 뒤덮을 정도로 빠르게 자랐던 에레즈와는 달리 말이다. 다른 알파처럼 온몸에 털이 덥수룩하게 자라지 않은 것은, 그저 자신이 모자란 알파, 기형 알파라서 그런 탓이라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어쩌면 오메가의 특징은 아닐까 싶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날 선 빛을 내는 단검이 칼리번의 목에 닿았다. 하얀 손이 머리를 움켜쥐더니 거침없이 검은 머리카락을 베어 냈다. 칼리번의 머리카락은 곧 전성기 시절처럼 짧아졌다. 아니, 그보다는 훨씬 보기 흉하게 잘렸다. 칼리번의 머리가 많이 자라기는 했으나, 어깨를 넘은 에어리얼만큼 길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발을 마치고 난 에어리얼의 손에는 검고 뻣뻣한 머리카락 한 움큼이 다였다.
에어리얼은 그것을 쥐고 지하 감옥을 나왔다. 한 손에는 칼리번의 머리카락이, 다른 한 손에는 짐승의 사체가 들려 있었다. 에어리얼은 마물들에게 그것을 섞여 먹였다. 마물은 오메가의 체취가 듬뿍 묻은 머리칼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에어리얼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번졌다.
눈꺼풀이 감기듯 검은 융단이 시야를 가렸다. 에어리얼의 시각이 다시 돌아왔을 때, 눈앞은 한 치 앞도 예상치 못하는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다음 순간 살지 죽을지 모르는 잔인한 세계에서 에어리얼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언제나 마물에게 보호받았다.
에어리얼은 언제나 그랬듯, 팔짱을 낀 채로 살육의 현장을 놀이처럼 내려다보았다. 칼리번은 지하에 있었으므로, 지난 8년간 에어리얼이 바깥에서 어떤 식으로 활동을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에어리얼의 육체는 일부러 이 기억을 보여 주는 것만 같다. 꿈에서 깨어나면 시작된 전투에서 이렇게 행동하라며.
피아조차 구별하기 힘든 전쟁터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피를 뒤집어쓴 금발이다. 구름이 낀 희미한 햇살 아래에서도 그 색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에어리얼이 그에게 눈을 떼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금발의 사내는 자신보다 서너 배는 커다란 마물을 베어 냈다. 그 과정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물의 피로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가 쥔 성검만은 하얗게 빛을 냈다. 단 한 번도 더러운 피에 물들지 않았다는 듯이….
사내는 빠르게 마물을 베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음 적수를 상대하러 떠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미 죽은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정결한 성검이 더러운 마물의 배를 찢었다. 그 순간 마물의 체액이 그에게 끼얹어졌다.
산성을 띠는 체액은 사내의 창백한 피부 위에 화상을 남기고 금빛 머리카락을 태워 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물러나기는커녕 마물에게 더욱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시체를 도륙하고 또 도륙하는 모습은 흡사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난도질을 하던 사내는 마물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소화액에 녹은 뼈와…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고작 그것을 건져내기 위해 마물에게 파고든 것이다. 그로 인해 그의 왼손은 거의 녹다시피 했다.
그는 소화되다 남은 찌꺼기가 무엇이 그렇게 괴롭고 소중한지, 주먹을 쥐다 못해 가슴에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찌꺼기는 공기에 닿자 금세 녹아내렸다.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그의 몸이 벌벌 떨렸다. 사내는 텅 비어 버린 손을 끊임없이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물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사내의 목을 베기 위해 달려들었다. 알테르의 병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금발의 사내를, 에레즈 프리드웬의 목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평생 원하는 사내를 가득 품으며 살 수 있다.
그들은 에레즈의 손에 죽은 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면서도 달려들었다. 에레즈는 아무런 공격도, 방어도 하지 않았다. 다만 두 손을 위로 뻗어 올랐다. 그는 시체 위에 박혀 있던 성검을 마치 기도하듯이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전격이 파직거리며 일어나더니, 주변의 마물이 일시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에레즈의 몸에도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어리얼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에레즈는 이를 악문 채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에어리얼이 있는 곳을. 에어리얼과 마주하자 그의 얼굴이 붉은 분노로 물들고, 이어서 빠르게 검은 증오로 뒤덮였다. 분노와 증오로 뒤덮인 그 얼굴을, 칼리번은 이미 본 바 있었다.
“오메가님!”
칼리번은 에레즈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끼며, 감았던 눈을 떴다. 알파들의 부름이 귓가를 시끄럽게 때렸다. 자리를 잡았을 때는 늦은 오후였는데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부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고 있다.
* * *
에레즈는 ‘에어리얼’과 전쟁터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다. 이곳에 남은 데릴만의 병사 중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대로 선두에 마물 군단을 세우고, 그 뒤에 마물 혼혈을 배치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가장 후열에 숨어 알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형태다.
에어리얼의 전투 방식은 칼리번과는 정반대였다. 강한 육체를 가진 칼리번은 언제나 선두에 섰다. 그와 달리,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에어리얼은 부하를 겹겹이 두르고는 적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숨는다. 즉, 왕자님과는 직접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칼리번은 아쉬운 한편, 차라리 이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칼리번이 예전처럼 직접 그를 상대해야 했다면…. 결국 검을 휘두르지 못할 테니까.
칼리번은 잎이 무성한 나무줄기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 전투는 다소 까다롭다. 혹여나 에레즈가 아군에게 당하지 않게 보호하면서도, 또한 적당한 부상을 입혀 후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일절 쓰지 않고 대검을 호탕하게 휘두르던 칼리번으로서는 고려할 요소가 많아 골치 아팠다.
칼리번이 이번 전투에 아스터를 참여시키지 않은 것도 이러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신경 쓸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아스터에게는 전투가 끝난 후, 지친 데릴만의 부하들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은 에레즈 프리드웬을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이군요. 저 없이 에어리얼의 몸을 다치지 않게 할 자신은 있습니까?>
<데릴만이 확인한바, 왕자님께서는 소수의 병사로 부대를 꾸리셨다고 했다. 마물을 통해 확인한 결과도 같았다. 그 정도 수라면… 너까지 나설 필요 없이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다.>
아스터는 의문을 제기했으나 칼리번은 제 의견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칼리번의 가장 약한 근육인 두뇌는 에레즈를 신경 쓰고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완전히 몸을 숨겼다고 판단한 칼리번은 손으로 붕대로 감아 둔 상처를 휘저었다.
“읏….”
칼리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간신히 아문 상처를 헤집으니 날카로운 고통이 신경을 타고 흘렀다. 그 상태에서 눈을 감자, 전방에 배치한 마물과 시력이 연결되었다.
칼리번은 마물의 눈으로 주변 지형을 살폈다. 오메가의 향기에 취한 마물들은 에레즈에게 목숨을 내놓기 위해 얌전히 서 있었다. 그중에서 칼리번이 선택한 마물은, 힘은 좀 떨어지지만 대신 무리 중 가장 움직임이 빨랐다.
칼리번은 마물 전체에게 ‘에레즈를 공격한다’ 정도의 명령을 내릴 수는 있어도, 행동거지를 일일이 조종하지는 못했다. 전투가 격화되어 에레즈가 위험에 빠지면 그때는 이 녀석을 희생시킬 작정이었다. 칼리번은 일부러 체격이 큰 마물을 가장 앞에 배치했다. 그것은 마지막 경고였다. 부디 돌아가 주기를 바라며….
그러나 에레즈는 후퇴하지 않았다. 저 멀리 검은 점들이 보인다. 마물의 붉은 눈알은 멀리 떨어진 칼리번을 대신해 선두에 선 사내를 비춘다.
‘왕자님.’
칼리번은 에레즈가 분노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에어리얼의 기억에서 본 것처럼 말이다.
‘왕자님…?’
그러나 검은 천으로 왼쪽 눈을 가린 에레즈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것이 한 점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무줄기를 짚은 칼리번의 손이 순간 움찔거렸다.
‘저 사람은… 왕자님이 맞는 건가?’
칼리번도 저도 모르게 물었다. 몰라보게 성장한 에레즈를 몰라본 것이 아니다. 짧은 금발과 오른쪽에서 빛나는 푸른 보석안. 왕성 지하에서 마주했던 모습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 본 듯…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잘린 오른팔은 망토에 가려졌고 잃어버린 왼쪽 눈은 검은 천을 두른 탓일까?
전방의 마물 부대를 확인한 에레즈의 병사들은 걸음을 멈췄다. 오직 에레즈만이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에레즈의 병사들은 부대라기보다는 관객에 가까워 보였다.
“…….”
에레즈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훑는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만 같다. 칼리번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에어리얼을 찾으시는 거다.’
나를….
칼리번의 목젖이 크게 울렸다. 그 순간, 에레즈의 푸른 눈이 붉은 눈의 마물과 마주쳤다. 에레즈의 시선은 칼리번과 정신이 연결된 마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칼리번은 마치 정체가 들킨 것만 같았다.
“……!”
그때였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칼리번은 당연히 에레즈가 선전포고할 줄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랐다. 에레즈는 시선을 고정한 마물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는 후위에 선 병사들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조차 내리지 않고는 곧장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으윽!”
칼리번이 어찌할 새도 없이, 심장이 꿰뚫리는 고통과 함께 마물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실제로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니었으나 고통은 그대로 에어리얼의 몸에 적재된다. 당황한 칼리번은 서둘러 다음 마물을 골랐다. 연결이 끊어진 그 짧은 사이, 에레즈는 다른 마물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공격해!”
붉은 오메가가 조종하는 마물이 쓰러지자, 위기감을 느낀 데릴만의 부하들이 전투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윽….”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놀랍게도 에레즈는 혼자 몸으로 마물과 용병을 상대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오른팔을 잃었음에도 그의 손에 잡힌 성검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젠장, 전쟁터에서의 왕자님은 이 정도였단 말인가….’
공격하는 척 적당히 에레즈를 쫓아내려 했던 칼리번은 적잖이 당황했다. 성검으로 마물의 심장을 뚫고 목을 친다. 그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없었다. 성검에는 한계가 없었다. 평범한 무기는 부러지고 마는 단단한 피부를 지닌 마물도 속수무책이었다.
처음에는 ‘에어리얼’인 척하기 위해 에레즈를 상대했다면, 어느새 칼리번은 방어하는 데 급급해졌다. 그러던 중 칼리번이 조종하던 마물의 다리가 성검에 베였다. 육중한 덩치의 마물이 진창으로 쓰러졌다. 에레즈는 마물의 등 위로 가볍게 올라탔다. 높게 치솟은 성검은—
“읍, 크윽…!”
나무줄기 위에 서 있던 칼리번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무릎을 꿇었다. 마물이 에레즈의 검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때마다 에어리얼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 또한 늘어만 갔다.
“하아, 윽, 하아….”
칼리번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마물이 차례차례 쓰러지자, 데릴만의 부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에레즈를 상대했다. 에레즈는 외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검술에 부족함이 없었다.
홀로 수많은 알파를 상대하는 와중에도, 에레즈의 푸른 눈동자는 흔들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뒤에서 달려드는 데릴만의 부하에게 검을 꽂으면서도 에레즈의 시선이 전혀 다른 방향을 노려본다. 정확히는, 에어리얼의 몸이 숨겨진 곳으로….
‘들켰다!’
칼리번은 마물과의 연결을 끊고 두 눈을 부릅떴다. 평범한 사람의 시야에는 닿지 않는 먼 거리였으나,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알파들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붉은 오메가를 보호하려는 기색을 띠었고, 숨기려 했던 에어리얼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에레즈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홀로 알파들을 압박한 것이다.
‘제길…. 한곳에 은신하지 말고 계속 이동하면서 마물을 조종했어야 했나.’
칼리번은 위치를 들키고 나서야 후회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능력은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일찍 깨달았다고 한들 계획이 크게 바뀌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발 늦기는 했으나 칼리번이 은신했던 장소에서 도망치려 한 순간이었다. 에레즈의 푸른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쓰러진 알파의 가슴에서 성검을 뽑아냈다. 뒤로 물러난 왼팔의 근육이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꿈틀거렸다. 그다음으로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에레즈가 유일한 무기인 성검을… 창처럼 투척했다.
“—!”
칼리번은 두 눈을 의심했다. 평범한 검이라면 닿지 못할 거리였다. 그러나 에레즈의 힘에 성검 자체의 힘이 더해져, 폭발적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새하얀 검은 에레즈와 칼리번 사이의 마물들을 꿰뚫으며 나아갔으나 그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아악!”
피할 새도 없이, 성검은 그대로 칼리번의 어깨에 박혀 들었다.
“크흐, 윽…. 아악…!”
성검은 칼리번의 몸을 꿰뚫고도 반 이상이 굵은 나무줄기에 박혀 들었다. 칼리번은 칼에 어깨가 꿰뚫린 채로 신음했다.
“흐으, 흐……. 큿….”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으나 어깨에 성검이 박혀 있어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성검이 코앞까지 날아온 순간,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심장이 아닌 어깨에 맞았다. 조금이라도 판단이 늦었다면 그대로 심장이 터져 죽었을 것이다.
성검은 마물을 태운다. 칼리번의 어깨를 중심으로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함께 성검에 꿰뚫린 나무줄기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윽……. 크으윽…!”
칼리번은 손을 뻗어 창백한 검을 뽑아 보려 애썼다. 그러나 성검의 손잡이를 쥐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붉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아, 윽….”
칼리번이 버둥거리는 사이, 오메가의 도망을 저지한 에레즈는 주변의 알파를 상대했다. 적의 몸을 맨손으로 꿰뚫고, 다가온 다른 적의 공격을 그 시체로 막는다. 그러고는 적들의 무기를 뺏어 그들을 도륙하기 위해 휘둘렀다.
알파들의 검이나 창은 장식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에레즈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한두 차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부서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에레즈는 개의치 않고 또다시 무기를 뺏어 상대했다. 에레즈의 몸은 마물의 피로 물들어 갔다. 공포를 포함한 모든 감정 또한 까맣게 물들어 가는 것만 같다. 그 모습은 마물보다도 더한 괴물, 그 자체였다.
에레즈의 전투에 두려움을 느낀 것은 적뿐만이 아니었다. 후열에서 활을 겨눈 채 대기 중이던 아군조차 에레즈를 두려워했다. 그들의 왕은 원래 이렇지 않았다. 전과 달라진 전투 방식은 어딘지…. 8년 전에는 마물을 죽이고 그 후로는 같은 방식으로 인간을 죽이던, 알테르 프리드웬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에레즈는 적들을 베어가며 칼리번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성검이 안겨 준 고통으로 인해 칼리번의 능력은 순식간에 능력이 조금 더 개화되었다.
“아, 아아…. 윽……!”
칼리번은 자각도 하지 못한 채로 서너 마리의 마물을 동시에 조종하기에 이르렀다. 칼리번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마물을 벽으로 세웠으나, 에레즈의 앞에서는 떨어지는 낙엽에 불과했다. 칼리번은 차라리 몸을 움직여 성검으로 팔을 잘라 내려 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는지, 적을 상대하던 에레즈는 칼리번이 있는 방향을 향해 손짓했다.
“바… 발사해라!”
그 신호에, 왕의 전투를 지켜보던 부대가 일제히 활을 쏘았다. 에레즈는 방패 대신 제 몸집의 서너 배는 되는 거대한 마물의 시체를 집어 들었다.
“젠장…!”
칼리번은 수십 개의 활이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결국 제 팔을 잘라 내지 못하고 그대로 화살받이가 되기 직전이었다.
화살촉이 단단한 갑옷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스터!”
그 소리에 칼리번은 무엇이 자신을 막아 주었는지 직감했다.
“후방에서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크윽…!”
칼리번은 감사는커녕,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아스터를 한쪽 팔로 밀어냈다.
“지금 상황에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 말을 따르는 건 언제나… 에어리얼의 몸이 상하지 않는 조건에서라고 했을 텐데요.”
아스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칼리번의 어깨를 살폈다. 성검에 꿰뚫린 두꺼운 로브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물러나 있어!”
칼리번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아스터는 칼리번의 어깨와 나무를 동시에 꿰뚫은 성검에 손을 댔다.
“…!”
아스터는 곧 무언가를 깨닫고, 손을 물렸다. 곧 갑옷 사이로 백금사가 새어 나왔다. 백금사가 손잡이에 감기더니 칼리번의 몸에서 성검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으윽— 아, 아악!”
검이 뽑히는 순간은 꽂힐 때보다도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섬뜩하기까지 했다. 검이 뽑혀 나가는 반작용으로 칼리번의 몸이 휘청였다. 앞으로 쓰러지는 칼리번을 아스터가 받았다. 성검은 하얀 깃털이 되어 나무 아래로, 땅으로 떨어졌다.
“헉, 허억….”
칼리번은 아스터의 품 안에서 숨을 헐떡였다. 성검을 만진 백금사는 시커멓게 변해,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역시 보통 검이 아니군요.”
새까맣게 타 버린 백금사를 바라보며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여러 생각이 드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스터는 더는 회복이 불가능해진 백금사를 망설임 없이 잘라 냈다. 잘려 나간 백금사는 주인의 마지막 명령을 담고, 깃털이 된 성검을 끌어안고 도망쳤다. 에레즈에게서 성검을 되도록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
칼리번의 검은 눈이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원래 아스터의 백금사는 공기 중에 오래 노출되면 스러진다. 그러나 지금처럼 검게 타 버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칼리번은 성검에 베어 쓰러진 마물들을 떠올렸다.
‘데릴만…. 설마 왕자님의 힘이 이 정도인 것을 알고서 도망친 건가?’
자신이 여기서, 에레즈의 손에 죽으리라고 판단해서? 칼리번은 그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심장이 공포로 뛰기 시작했다.
“일단, 최대한 저 검에서 멀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사이 궁수들이 장전을 마쳤는지 또다시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품에 안고 뛰어올랐다. 간발의 차로 화살은 아스터와 칼리번이 아닌, 에레즈의 손에 도륙된 시체들에게 꽂혔다. 그러나 곧 검의 주인이 올 테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주인은 칼리번과 달리 이 전투에 진심이었다.
“아스터, 저번처럼 이걸로 날 속박하려고 들면 용서하지 않는다.”
에레즈에게서 도망치는 중인데도, 아스터의 백금사는 여유가 있는지 칼리번의 몸에 감겨들고 있었다.
“압니다.”
아스터의 백금사는 칼리번의 어깨를 강하게 동여맸다. 이 방식은 전에 경험한 바가 있다. 지혈이었다. 정말로 그 이상의 속박은 가하지 않았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두 팔로 안은 채로 빠르게 이동했다.
‘젠장, 나의 패착이다.’
칼리번은 숨을 헐떡였다. 에레즈가 어엿한 왕이 된 줄은 알았다. 그러나 설마 이 정도로 무력의 차이가 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비록 데릴만을 비롯한 알파의 힘을 빌렸으나, 에레즈 프리드웬은 압도적으로 약한 인간을 데리고 마물에게 승리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하지만 이대로… 도망치는 것으로 끝인가? 정말 이걸로 괜찮을까?’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가쁜 숨을 씩씩거렸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왕자의 상태가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지금 에레즈의 모습은… 조종당하는 마물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 말없이 도망치던 아스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스터?”
칼리번이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아스터는 나무를 훌쩍 타고 올라가더니 굵은 나무줄기 위에 그를 내려놓았다. 에어리얼의 작은 몸이 나뭇가지 사이로 숨겨졌다.
“여기서 둘로 갈라집시다.”
아스터가 말했다. 나뭇잎의 그늘에 젖은 검은 갑옷은 마치 칼리번의 그림자 같았다.
“뭐, 라고…. 으윽….”
“에레즈 프리드웬은 제가 유인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사이에 다시 마물을 불러서,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치십시오.”
“……!”
뜻밖의 말에 칼리번은 검은 두 눈을 부릅떴다.
“…딱히 당신을 구해 주고 싶어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어리얼의 몸을 최대한 보호하란 뜻입니다.”
아스터는 굽힌 상체를 일으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큭,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가지 마라!”
칼리번이 자신의 몸을 가린 나무줄기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부상이 심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제가 그를 죽일까 걱정이 드는 겁니까?”
“그게 아니…….”
“한번 약속했으니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당신도 에어리얼의 몸을 죽게 두지 마십시오.”
칼리번이 손을 뻗기도 전에 아스터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물러났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아스터!”
칼리번은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연이은 전투에서 얻은 부상에 그는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나뭇가지가 가벼운 에어리얼의 몸을 받쳤다. 이런 몸으로는 스스로 걸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크윽…. 젠장!”
칼리번은 다친 어깨를 세게 움켜쥐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나뭇가지를 적시고, 이어서 땅으로 떨어진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피는 가는 실 가닥과 다를 바 없어지고, 이 땅을 밟은 마물에게 이어진다.
당장 마물을 시켜 아스터의 걸음을 막으려 해도, 에레즈가 마물을 전부 도륙한 탓에 사용할 녀석이 없었다. 아스터의 말대로 새로운 마물을 불러야만 했다.
“윽, 흐윽, 으….”
칼리번은 붉게 변한 나뭇가지를 세게 움켜쥐었다. 왕자님의 힘을 간과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러니 책임도 자신이 져야만 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아니, 얹혀 있던 칼리번의 몸이 휘청이더니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부딪치는 나뭇가지에 작은 몸이 엉망으로 스쳤다. 퍽, 가벼운 몸이 땅에 추락했다.
“하아, 크윽….”
칼리번은 한쪽 팔과 두 다리로 땅 위에서 꿈틀거렸다. 그의 몸에서 피에 흘러나와 흙을 적셨다.
‘너희가 원하는 대로… 여기에 고통이 가득 차 있다.’
흘러넘치다 못해 붉게 새어 나올 정도로.
‘그러니 당장 내게로 와라!’
피로 물든 손이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당장 사용할 마물을 내놓으라며.
“우윽…!”
마물과 불러내려던 칼리번은 도리어 피를 왈칵 토했다. 마물을 직접 조종한 상태에서 에레즈에게 당한 충격이 내장에 축적된 탓이었다.
“하아, 하아….”
코와 입에서 쏟아진 검붉은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하아…….”
환각일까? 마물의 피로 더럽혀진 땅에, 더는 존재할 리 없는 꽃이 보인다.
<카, 칼…. 너는… 어, 어째서 나, 나를 구… 구해 준 거야?>
8년 전, 칼리번은 왕자를 데리고 약속된 장소까지 이동했다. 오랜 고립 생활로 쇠약해진 에레즈는 도중에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그때 그가 물었었다. 어째서 자신을 죽게 두지 않고 구해 주었냐고. 그 이유는 칼리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꽃을 주셨습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대가를 받으면 그만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용병의 방식뿐.
<왕자님께서… 제게, 꽃을 주셨기 때문에.>
칼리번의 벌레처럼 엎어진 채로 과거의 발목을 보고 있다. 이대로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과거나 그리며 나약하게 자빠져 있을 것인가?
‘웃기지 마….’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 짜냈다.
“아스터….”
피로 붉게 물든 입에서 꽃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평생을 투박하고 거칠게 살아온 칼리번은 미련하고 무식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왕국을 방랑하며 눈에 익은 들꽃의 이름 정도가 다였다.
<칼리번은 꽃을 좋아하거든.>
그때의 그 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으, 으윽, 아아—!”
칼리번은 한쪽 팔로 땅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오메가의 향기를 맡고 날아든 마물과 정신이 연결되었다. 등줄기로 수십 개의 바늘이 꽂힌 듯 주르르 소름이 돋았다. 칼리번은 새로운 눈을 얻었다. 칼리번의 눈을 한 새는 빠르게 도망친 전투 지역을 향해 날아갔다.
에레즈는 마물의 피로 물든 땅 위에 서 있다. 그의 왼손에는 성검이…. 그리고 성검의 끝에는 백금사가 쥐새끼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에레즈의 주변에는 그가 베어 낸 시체로 즐비했다. 성검을 회수한 직후, 도망친 아스터와 칼리번을 바로 쫓지 않고 남은 마물을 해치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은 하필이면 에어리얼의 기억 속,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면서까지 칼리번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과거와 겹쳐 보였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처럼 마물의 배 속을 뒤지던 에레즈는 처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몸이 마물의 체액에 녹아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으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에레즈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그 유명한 에레즈 프리드웬이군요.”
그때, 숲 안쪽에서 아스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절 처음 보겠지만, 저는 당신에 대해 질릴 만큼 들어 왔습니다. 역시 아버님께서 고전하실 만합니다.”
그제야 에레즈는 고개를 들었다.
“…….”
피로 뒤덮인 에레즈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차라리 갑옷에 전신을 가린 아스터에게서 감정이 더 느껴질 정도였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아스터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궁금해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정확히 같은 목소리를 가진 아스터를 마주하면….
“당신이 아버님의 목을 베었죠?”
적을 도륙하고 칼리번의 어깨에 성검을 꿰뚫으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던 사내가 처음으로 그 비슷한 것을 내보였다. 아스터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기울인 것이다. 흐릿한 푸른 눈이 아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공포를 느낄 법한 시선이었다.
“…마물에게는 부모 자식 간의 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칼리번은 전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에레즈의 목소리를 들었다.
“왜냐면 너희 마물은… 아비를 모르고 어미를 죽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늪에 빠진 것처럼 음울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저는 오메가에게서 태어났으니까요.”
아스터가 지지 않고 대답하자 에레즈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네 아비의 이름이 무엇이지?”
에레즈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치 작은 데다가 잔뜩 쉬어 있었다.
‘그만둬, 아스터!’
칼리번은 속으로 외쳤으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전해질 리가 없다.
“알테르 프리드웬. 당신의 형제입니다.”
아스터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
에레즈는 짧게 감탄하더니 이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의외의 반응에 아스터는 불쾌해졌는지 갑옷이 끼익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아스터겠군.”
칼리번은 아스터를 대하는 에레즈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한없이 처지고 우울하며, 동시에 위압적인 모습은… 칼리번이 알던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 이름을 알다니 신기한 일이군요.”
“…….”
에레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둡게 가라앉았던 푸른 눈에 빛이 돌았다. 칼리번은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광기였다.
‘그만 도발해라, 아스터…. 왕자님에게는 성검이…!’
아무리 보아도 아스터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외침은 전해지지 않았고 아스터는 곧바로 에레즈에게 달려들었다.
쿵—
검은 갑옷과 피로 물든 사내의 검이 부딪쳤다. 아스터는 그 자체로 칼이 될 수 있도록 오른팔을 백금사로 변형시켰다.
치이익…!
백금사로 만든 검은 성검과 부딪치자 강철같은 경도를 잃고 마른 꽃잎처럼 타들어 갔다. 성검은 인간이 아닌 모든 것을 태운다. 칼리번의 어깨에서 직접 성검을 뽑아낸 아스터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스터는 에레즈와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검을 맞댄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실루엣이 닮아 있었다. 에레즈가 착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갑옷처럼 느껴질 정도로.
짧은 대치 후, 검 모양이던 아스터의 백금사가 한순간에 흩어지더니 손가락처럼 다섯 갈래로 벌어졌다. 그물 같은 백금사는 에레즈의 얼굴을 덮쳤다. 부딪칠 상대를 잃은 성검은 그대로 아스터의 어깨로 떨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무력화되겠지. 아스터는 어깨를 내주고 상대의 눈을 뽑아내려 들었다. 그러나 아스터의 수를 꿰뚫은 성검이 방향을 틀어 백금사를 잘라 냈다. 수많은 마물이 끊어 내려 애써도 끄떡없던 백금사가 실오라기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혈관을 잃은 아스터는 뒤로 물러섰다. 얼굴 위로 쏟아진 백금사는 부서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로 인해 에레즈의 얼굴을 가리던 검은 천이 끊어져 흘러내렸다.
‘왕자님의 눈이…?’
비행형 마물의 눈을 빌려 전투를 지켜보던 칼리번이 그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스터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푸른 두 눈이었다. 얼굴을 크게 가르던 긴 상처는 오간 데 없이 사라졌으며 두 눈도 멀쩡했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에레즈는, 칼리번이 지하에서 8년간 상상했던 왕자님 그 자체였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왕성 지하에서 재회했던 에레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어리얼에게 몸을 뺏기고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존재. 그때의 에레즈는 예전의 아름다움을 모두 잃어,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에레즈를 알아볼 수 있었다. 푸른 보석안은 한쪽밖에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증오에 물들어 있었지만…. 선명하게 반짝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에레즈의 두 눈은 아름답기는 했으나 그저 유리알 같다. 특유의 빛을 잃고 흐릿했다.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것처럼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칼리번은 흠집투성이였던 이전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앞의 에레즈가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두려워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왕자님을?
그럴 리가 없다…. 칼리번은 자신의 알파에게 느끼는 낯선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비록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진실을 알리고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대신 그가 쌓아 온 업적을 에어리얼의 몸으로 보아 왔다. 에레즈는 자신을 잊지 않았으며 동시에 인간을 위해 싸우는 위대한 왕이 되어 있었다. 그런 에레즈가 두려운 것은 자신이 에어리얼의 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칼리번이 내부의 감정을 부정하는 사이에도, 에레즈와 아스터는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신을 철갑으로 무장하고 백금사로 어떤 무기도 만들 수 있는 아스터가 유리해 보였다. 그에 반해 왼팔밖에 남지 않은 왕자는 아스터의 공격을 성검으로 간신히 막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아스터에게 있어 최고의 무기이자 방패는 백금사였다. ‘육신이 없다’라는 아스터의 특성은 자칫 불리할 수 있는 이 전투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다. 에레즈가 성검으로 아스터를 꿰뚫으려 들 때마다, 그는 갑옷을 무너뜨리고 분리해 가며 기민하게 공격을 피했다. 반면 에레즈는 피와 뼈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아스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를 지켜보던 궁수 부대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들은 활을 겨누고 있었으나, 왕자와 적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 감히 원호 사격을 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전혀 아스터가 이기는 상황이 아니다. 한 번만 찔려도 녀석의 갑옷은….’
그러나 수많은 전투를 겪어 온 칼리번은 안절부절못했다. 소중한 에레즈 프리드웬이 질 것 같아서가 아니라, 아스터가 농락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왕자에게는 성검이 있었다. 순수하고 강한 마물일수록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만다.
그러한 본능적인 불안은, 당사자인 아스터 또한 느끼고 있었다.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왜 기분이….’
불쾌해. 아스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꼭 허공에 주먹질하는 것만 같다. 아스터의 처음 계획은, 빠르게 선공을 하여 에레즈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눈을 첫 시도에서 실패했고 그다음으로 노린 것은 왼팔이었다. 성검을 쥐지 못하게 된다면 굳이 죽일 것까지는 없을 테니까.
누군가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것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스터는 복수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저 에어리얼의 몸을 차지한 칼리번이 이러기를 원하니까….
그러나 곧, 아스터는 자신이 이 전투를 얕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나 팔이 아니라 곧장 심장을 노릴 것을!
검은 갑옷이 에레즈를 가격하고, 갑옷 안에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금사가 에레즈의 몸을 꿰뚫는다. 분명 공격은 먹혀들었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전혀 다치지 않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렇게 많은 공격이 먹혔는데… 어째서 아직도 쓰러지지 않는 거지?’
아스터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비록 에레즈가 성검을 쥐고 있다고 하나 원래 사용하는 오른팔을 잃어 검술이 불안정했다. 전투가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
기분 나빠. 아스터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허공에 칼질하는 것처럼 아무리 공격해도 통하지 않는다. 적들이 아스터를 상대했을 때 느꼈던 꺼림칙함을 아스터는 지금 에레즈를 통해 느꼈다.
‘어째서 관절을 부러뜨렸는데도 움직이는 거야?’
아스터의 내부에 혼란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머리가 나쁜 칼리번보다 자신 안의 혼란을 더 구체화시키지는 못했다. 에레즈에게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동시에 그를 열렬히 관찰할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며….
아름다운 외모였다. 확실히 형제인 알테르 프리드웬과 닮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선이 굵어 완고했다면, 에레즈 프리드웬은 갑옷과 정확히 동일한 체격임에도 섬세한 부분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스러질 것 같다는, 그런 위태로움이 도리어 시선을 끌게 한다. 아스터는 그간 에어리얼이 준 갑옷에 만족해 다른 껍질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뜯어다가 껍질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아스터는 처음으로 자신과 대등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 모르는 사내와 맞붙었다. 물론 아스터보다 강한 존재는 늘 근처에 있었다. 알테르 프리드웬. 그러나 알테르는 아스터에게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아스터의 곁에 있어 주는 존재는 에어리얼뿐이었다. 그의 좁은 세계에서는 에어리얼이 전부였다.
<오메가는 아이를 키우지 않아. 낳을 뿐이지.>
아스터는 언젠가 에어리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메가는 한 세대에 한 마리뿐. 그 수가 극단적으로 적어 출산 후에는 바로 새로운 알파와의 관계를 갖는다.
인간 사내의 경우에는 알파를 출산하면 죽고 만다. 그 때문에 알파는 인간과 같은 성가시고 지루한 성장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하지만 아스터는 달랐다. 그는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하게 태어났다. 약한 알파는 죽을 수밖에 없다.
<너는 달라. 줄곧 내 피를 먹여서 키웠으니까. 그저 낳기만 한 다른 마물과는 급이 다르지.>
그런데도 에어리얼은 자신을 지켜 주었다. 키워 주었다. 아스터가 에어리얼에게 충성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물 중에서 널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거야, 아스터.>
과연 그랬다. 갑옷 없이 생존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아스터는 그 어떤 마물보다도 강했다. 그러나 그때, 에어리얼이 다른 ‘인간’이나 ‘마물 혼혈’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스터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느끼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콱.
성검이 아스터의 왼쪽 견갑에 박혀 들었다. 일반적인 검이었다면 검날이 갑옷에 부딪혀 튕겨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성검은 그대로 갑옷을 꿰뚫었다.
“아….”
투둑!
견갑과 이어진 왼팔의 갑옷이 떨어져 내렸다. 견갑과 팔을 이어 주던 백금사가 한 박자 늦게 주르르 흘러내린다. 윤기가 돌던 검은 갑옷은 성검에 꿰뚫린 순간 빛을 잃고 하얗게 부식되어 가더니, 작게 부는 바람조차 견디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갑옷 일부를 잃은 아스터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떨어진 왼팔이 아스터 쪽으로 기어갔다. 그는 왼팔을 회수해 다시 연결했다. 그러나 팔과 어깨를 이어 줄 견갑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한쪽 팔이 짧아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아스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확신하지 못했던 불안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런 방식이었군.”
반면, 아스터가 수시로 갑옷을 무너뜨리며 형태를 멋대로 바꾸는 탓에 헛손질을 했던 에레즈는 드디어 감을 잡은 것 같았다.
<마물 중에서는.>
아스터는 혼란에 빠졌다. 에어리얼의 그 말은 어쩌면… 마물이 아닌 자중에서는 자신을 능가할 존재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스터는 불현듯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은 다름 아닌 자신이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밀리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
아스터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더니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에레즈는 그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일말의 조급함 없이 천천히 이동하는 그의 걸음은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궁수 부대는 갈등했으나 에레즈의 뒤를 따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따로 들은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터는… 일부러 유리한 지형으로 들어간 건가?’
칼리번은 단번에 아스터의 계획을 파악했다. 왜냐면 아스터가 젠을 상대했을 때 이와 비슷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스터는 숲과 같이 구조물이 복잡하게 깔린 장소를 선호한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갑주를 숨기고 백금사를 길게 늘어뜨려 거미줄을 만든다. 그 상태에서 적을 불시에 공격하는 것이다. 형체를 한없이 늘릴 수 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아스터에게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으나 하필이면 숲 깊숙이로 들어간 탓에, 비행형 마물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칼리번은 백금사, 혹은 에레즈에게 공격당할 각오를 하고 비행형 마물을 하강시켰다. 날개에 세 개의 눈이 달린 비행형 마물이 굵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았다.
‘왕자님!’
그리고 칼리번은, 어두운 숲속에서 희미한 반짝임을 발견했다. 아스터가 벌써 숲에 거미줄을 친 모양이었다.
백금사는 빠르게 에레즈의 왼팔에 감겨들었다. 아니, 에레즈가 저지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백금사는 금방이라도 에레즈의 팔을 뽑아낼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왼팔로 성검을 휘두를 수 없도록 저지하면서, 동시에 성검을 떨어뜨리려는 것 같았다.
마물의 눈을 빌려 보고 있음에도 엄청난 힘의 교류가 느껴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즉 버티지 못하고 팔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레즈의 표정은 더없이 고요했다.
“…….”
에레즈는 왼쪽 팔에 감긴 백금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에레즈의 금발보다 색이 빠진 백금빛을. 백금사는 마물의 독기를 머금고 거대하게 부푼 나무에 제 몸을 묶고 에레즈의 팔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에레즈의 팔이 눈에 띄게 떨렸다. 둘 사이의 팽팽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왕자님도 아스터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그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 마물의 몸을 조종했다. 칼리번은 아스터의 갑옷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나무는 거기서 거기로 비슷했기에 검은 갑옷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이 마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녀석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해. 길어질수록 아스터에게 불리해진다.’
아스터의 혈관은 인간계의 공기에 취약했기에, 필연적으로 갑옷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칼리번은 각오를 다졌다.
“이것으로 전부인가?”
그때, 에레즈가 물었다.
“네 아비보다 약하군.”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에레즈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처럼 신음 한 번 터뜨리지 않았다. 그 점이 더욱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
에레즈는 눈이 내리깔고는 자신의 팔을 압박하는 백금사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숲속이지만, 새벽녘에 고인 이슬처럼 희미하게 반짝인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 백금사가, 에레즈는 몹시도 역겹게 느껴졌다. 흐릿한 그의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기만의 숨결과 무지의 장작을 품고 증오는 활활 타올랐다.
투둑, 툭….
어디선가 기괴한 소리가 났다. 칼리번은 마물의 눈으로 소리의 정체를 파악했다. 백금사가 감긴 거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
칼리번은 눈을 의심했다. 거목이 뿌리째 에레즈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아스터가 에레즈의 왼팔을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선후 관계가 바뀌고 말았다. 아스터는 버티기 위해 거목의 몸통을 더욱 세게 옭아맸고, 나무의 허리가 백금사의 힘에 움푹 파여 나갔다.
쿠궁!
거목이 쓰러지며 땅이 한차례 울렸다. 비로 대지가 젖은 탓에 흙먼지가 일지는 않았다. 에레즈는 휘청이는 일 없이 팔을 끌어당겼고, 지지대를 잃은 백금사가 질질 끌려갔다. 에레즈는 이 상태로도 충분히 백금사를 잘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팔을 휘둘렀고, 왼팔을 휘감던 백금사는 땅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아스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백금사는 얼음처럼 갈가리 흩어졌다. 에레즈를 잡아당기던 밧줄은 어느새 수십, 수백 마리 갈래로 나뉘어 뱀이 된 것이다. 옭아매는 것으로는 에레즈의 팔을 자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좀 더 날카로운 것으로 잘라 내야만 한다. 제아무리 성검이라 해도 수백 번의 공격을 한 번에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칼리번은 아스터가 무슨 생각을 할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과연 예상대로 수백 마리의 뱀은 에레즈에게 향했다. 에레즈의 푸른 보석안이 백금사의 움직임을 좇는다.
‘아스터…. 안 돼!’
푸른 눈과 마주한 순간, 칼리번은 쭈뼛 소름이 솟아올랐다. 에레즈의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칼리번은 마물의 날개를 퍼덕여 재빠르게 아스터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한발 늦고 말았다. 성검이, 빗물에 질척해진 땅에 꽂힌다.
에레즈의 왼팔에 감돌던 푸른 전격이 검을 타고 흘렀다. 성검을 통해 극대화된 성력은 에레즈를 공격하기 위해 땅 위를 기던 수많은 백금사에게로 퍼져 나갔다. 칼리번이 조종하던 마물조차 그 순간 명령을 거부하고 본능적으로 날갯짓을 해 몸을 띄웠다. 만약 비가 내리고 있었다면, 칼리번과 정신이 연결된 이 마물 또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끽, 끼익—!
에레즈의 주변에 퍼진 백금사가 일시에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백금사는 희미한 금빛을 잃어버리고 새까맣게 타 버리고 말았다. 에레즈의 왼팔에서 옅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공기 중에 노출된 시간이 길어진 데다가, 성검으로 공격까지 당한 탓에 아스터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 도처에 쓰러진 백금사들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어디론가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
땅에서 성검을 뽑아낸 에레즈는 제 곁을 스치는 백금사 한 마리를 짓밟았다. 백금사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꿈틀거리다 에레즈의 발아래에서 파스스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에레즈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그 광경에 칼리번은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익, 직, 절대 녹슬지 않는 성검의 끝이 땅을 긁는다. 긴장감으로 공기는 뻣뻣하게 당겨졌다. 에레즈는 가벼운 걸음으로 진흙이 잔뜩 묻은 지렁이처럼 변해 버린 백금사의 뒤를 쫓는다. 때로는 움직임이 둔해진 백금사를 짓밟으며.
갑주의 위치가 노출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스터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으면 당장 존재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아스터는 에레즈에게 농락을 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땅을 기었다.
“우윽!”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칼리번은 피를 토해 냈다. 그 순간 마물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칼리번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다. 심한 멀미가 일었다. 성검에 의해 검게 타들어 간 어깨에서는 피가 쏟아져 내린다. 땅에 흡수된 피는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왕자님, 안 됩니다…! 아스터, 만은…….”
칼리번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너머로 마물의 시야가 보이고, 핏줄이 터진 눈을 뜨면 다시 흐릿한 현실로 돌아온다. 아스터는 멍청한 칼리번을 따라다니며 대신 싸우고, 때로는 붕대가 되어 주느라 백금사를 상당히 소모한 상태였다. 더구나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아스터와 성검을 통해 힘을 주변으로 퍼뜨릴 수 있는 에레즈는 상성이 최악이었다.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은, 아스터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칼리번은 이를 갈았다.
‘어떤 마물이라도 상관없다. 당장 내게 와라…! 이 몸이라면 어디든 줄 테니!’
칼리번은 피에 젖은 흙을 움켜쥐며 간절히 외쳤다. 왕성 북문 방어전 이후, ‘에어리얼’이 낳은 마물의 수는 나날이 줄고 있었다. 새롭게 소환된, ‘칼리번’이 낳은 마물들이 노쇠한 마물들을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칼리번의 부름에 응한 마물이 땅을 울린다. 빈사 상태의 칼리번은 마물에게 손을 뻗었다.
‘움직여.’
칼리번은 마물의 털을 거칠게 움켜쥐며 명령했다.
‘가서 막아라.’
마물은 의지를 잃고 오메가의 뜻에 따랐다. 그사이 칼리번의 또 다른 시선은 에레즈와 아스터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인가 칼리번의 두 마리 이상의 마물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스터는 다행히도 백금사가 전부 스러지기 전에 갑옷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바로 에레즈를 상대해야만 했다. 검은 갑옷은 전과 달리 연결이 느슨해진 인형처럼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
에레즈는 아스터를 진흙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하는 갑옷의 흉갑을 발로 짓밟았다. 아스터는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어린 그는 더는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아스터가 위로 팔을 뻗은 순간, 성검이 흉갑을 관통했다. 성검은 마물의 발톱에도 상처 하나 없던 갑옷을 뚫고, 텅 빈 갑옷 속을 지나, 땅까지 깊게 박혀 든다.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그림자는 살육의 연극이었다.
성검에 꿰뚫린 부위는 말라붙은 조개의 껍데기처럼 희게 변하더니, 파삭 부서지고 말았다. 아스터에게 육체는 없었기에 갑옷이 부서지는 데에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고통보다 더한 존재의 위기가 다가왔다. 몸통을 잃은 아스터의 팔과 다리, 머리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큭…!”
칼리번은 마물을 급히 조종했다. 머릿속 어딘가가 터져 버렸는지 에어리얼의 코와 입에서는 쉬지 않고 피가 흘러나왔다. 칼리번은 마물의 몸을 빌려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된다면 아스터는 갑옷을 잃고 백금사는 전부 재가 되어 스러지고 말 것이다.
쿵, 쿵, 이미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칼리번의 심장, 아니, 마물의 심장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감정….
칼리번은 에레즈를 위해서라면 아스터를 희생할 생각이었다. 아스터는 마물에 불과했다. 칼리번의 기억은 에어리얼에 의해 멋대로 주물러진 상태였고, 그는 너무 많은 마물을 낳았다. 원치 않는 자식들을.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칼리번과 정신이 연결된 마물은 네발로 정신없이 달렸다. 바위와 나무에 부딪혔지만, 도리어 나무가 꺾여 나갈 정도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물은 아스터와 에레즈가 있는 숲으로 향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물과 용병들의 시체로 즐비한 이전의 전투지로 향했다.
어째서 왕자님이 저토록 변해 버렸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에어리얼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토록 가혹한 살육자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8년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성정마저 단단하게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왕이다.
“끄르르…. 크아아아아!”
인간의 앞에 선 마물은 목을 뒤로 꺾고는 거대한 울음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주변을 울릴 정도로 컸다. 왕자의 귀환을 기다리던 궁수 부대는 갑작스럽게 마주한 기괴한 마물로 인해 공포에 질렸다.
인간을 죽이고 싶지 않다. 칼리번은 인간의 손에 키워졌고 용병이 되어 인간을 지켜 왔다. 비록 예전의 자신은 인간에게 큰 의미나 감정을 두지 않았으나, 그의 영혼은 결국 인간의 곁을 머무는 쪽을 선택했다.
<반인반마인 알파는 이성을 포기하고 마물이 되거나 인간을 습격하는 야적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도 굳이 이 힘들어 뒤질 것 같은 용병 질로 먹고살겠다는 건…. 뭐, 결국 인간 주변에 있고 싶다는 거지.>
언젠가 젠이 말했었다. 그랬다. 용병은 인간의 주위를 배회하는 떠돌이 개들이다. 인간이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지키고, 고기 한 점과 뼈를 얻어먹는다. 그래서 칼리번의 본능은 에어리얼의 몸을 뒤집어쓴 이후에도, 되도록 인간을 죽이지 않는 쪽을 택해 왔다.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왕자님의 백성을 죽이지는 않도록….
그러나… 더는.
마물은 일부러 거대한 소리를 내며 궁수 부대를 공격했다. 혼란에 빠진 궁수들은 뒤늦게 활을 쏘았지만, 마물의 딱딱한 피부는 날카로운 화살촉마저 튕겨 냈다. 곰을 닮은 마물이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자, 궁수 부대는 낙엽처럼 맥없이 쓰러져 버리고 만다. 연약한 인간들이 손안에서 짓뭉개지는 감각이 칼리번의 영혼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칼리번은 여태까지의 자신을 배신했다. 뒷덜미가 저릿했다.
먼 과거를 떠올렸다. 왕자님과 함께 검은 숲을 무작정 헤매던 그때, 은신처를 빼앗겨 새로운 장소를 구해야만 했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보호하기 위해 회색 곰이 머물던 동굴을 뺏었다. 회색 곰을 죽이고, 그것이 품고 있던 새끼들마저도 전부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 버렸다.
그때의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느끼지 않은 척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칼,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죽여야만 한단다.>
칼리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그때나 지금이나 착실히, 무언가를 죽이며 살아남고 있었다.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다. …더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을 뿐.
“…….”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간들의 비명에 갑옷을 파괴하던 검 끝이 멈췄다. 검은 갑옷과 백금사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가는, 황홀한 광경에 집착하던 푸른 눈에 드물게도 빛이 돌았다.
인간들이 마물에게 고통받고 있다.
* * *
그 후에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한다. 왕자가 아스터를 파괴한 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욱 잔인하게 그의 병사들을 공격했다는 것뿐.
에레즈는 인간의 비명을 들은 즉시 파괴된 아스터를 버리고 숲을 나왔다. 시체를 밟으며 걸어온 그는 발광하는 마물을 단칼에 쓰러뜨렸다. 그러나 한 마리의 마물을 쓰러뜨리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마물이 나오고, 또 다른 마물은 제 몸이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까지 인간을 물고 늘어졌다. 에어리얼의 치하에서 겪은 그 어떤 마물보다도 끔찍했다.
제아무리 에레즈 프리드웬이 강하다 해도 모든 부하를 상처 하나 없이 지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왕자는 결단을 내렸다. 이 이상의 사상자를 막기 위해 병사를 철수시킨 것이다.
칼리번의 예상대로였으나, 억지 승리를 만들기 위해 그가 감수해야 하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미 넝마가 된 몸이었으나 그 이상 마물을 조종하면 목숨이 끊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점점 사라져 가는 아스터와 그를 파괴하는 에레즈를 보는 순간, 목숨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칼리번은 제 영혼을 에어리얼의 육체에 부딪쳐 한계를 부숴 버렸다. 필사적인 발악이 아스터 때문인지, 아니면 에레즈 때문인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에레즈가 완전히 떠난 후에도 칼리번은 땅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납작한 등은 숨결이 오가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뼈밖에 남지 않은 들짐승의 사체 같았다.
뒤늦게 비가 내린다. 작은 몸 위로도 빗물이 떨어졌다. 늘어진 몸은 진흙에 파묻혔다. 이대로 빗물에 전부 녹아 땅에 흡수될 것만 같았다. 칼리번의 몸에서 붉은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서서히 퍼져 나갔다. 피와 에어리얼의 머리카락은 그 색이 같아서, 붉은 머리카락이 땅을 뒤덮을 정도로 자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인가 하는 순간….
콱!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한쪽 어깨를 일으키자 몸이 기우뚱거린다. 그는 다시 진흙 바닥에 얼굴이 처박혔다.
“욱…!”
칼리번은 쿨럭거리며 입 안에 고인 진흙은 뱉어 냈다. 피가 섞여 붉었다. 그렇게 칼리번은 일어났다. 어떠한 힘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두 발로 서다가 네발로 기기를 반복했다. 몸은 무게가 잃은 것처럼 가벼웠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귓가를 때렸다.
칼리번은 마물과 인간이 시체가 공평하게 뒤섞인 들판을 넘어 검은 숲으로 들어갔다. 빽빽하게 들어찬 수목 덕인지 빗소리가 한결 줄어들고 칼리번의 몸을 거친 빗줄기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하아….”
예전에는 비를 맞으며 이동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피를 잔뜩 흘린 데다가 흠뻑 젖은 몸은 금세 벌벌 떨기 시작했다. 부러진 거목이 보인다. 소리 하나 없지만 요란하게 느껴졌다. 칼리번은 제 반만 한 굵기의 나무를 간신히 넘었다.
“……터….”
독기에 물든 나뭇잎이 빗물을 막아 주기 때문인지 전투의 흔적은 빗물에 쓸려 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칼리번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여기저기에서 흙을 퍼냈다. 혹여나 백금사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피와 비에 절은 손은 어느새 노인처럼 쪼글쪼글해졌다. 피부는 더욱 약해져, 거친 흙을 뒤적이는 것만으로 살갗이 벗겨졌다.
“아…….”
아스터. 어째서 자신이 아스터의 흔적을 뒤지는지, 생존의 증거를 찾는지, 칼리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딴 나약한 몸에 갇혔기 때문일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풍랑에 휩쓸려 그 자신도 어찌할 바 몰랐다. 쫓아가야 하는 쪽은 이 방향이 아니지 않나? 지금도 왕자님은 멀어지고 있다.
오늘 일로 인해 그는 ‘에어리얼’을 더욱 증오하게 될 것이다. 설령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오늘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예전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것이다. 회색 곰의 새끼마저 모조리 죽여 버렸을 때, 겁을 먹고 두려워하던 것처럼. 그 시선은 여전히 그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약한 것을 죽이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멈칫하게 만드는 그 푸른 눈….
무릎으로 기며 아스터를 찾던 칼리번은 성검에 의해 부서지다 남은 갑옷의 조각을 발견했다. 왼손 장갑이었다. 칼리번은 그 안을 살폈다. 그 안에 조그마한 백금사가 몸을 웅크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텅 비어 있었다.
“…….”
기어이 장갑 안에 손을 밀어 넣던 칼리번은 그것을 땅에 떨궜다.
“…….”
그동안 모른 척했으면서 이제야 몰려드는, 이 거대한 상실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젠이 왕자님을 데리고 떠난 후, 마물은 자신의 몸을 부러뜨리고, 붙잡고, 범했다.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있었던….
내 아이. 아니, 새끼.
또다시 비가 내렸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과 달리 온기가 섞여 따뜻했다. 칼리번의 영혼은 멍청하고 둔탁해서, 이 버겁고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를 도저히 속으로만 삭일 수가 없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물의 피와 진흙으로 엉망인 손이었다. 그 손으로 세수를 하니, 새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린 얼굴은 금세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 위로 다시 눈물이 길을 낸다.
그 어떤 강한 마물도 내장을 단련할 수 없듯이, 감정에 한해 그는 한없이 무력하고 취약했다.
덜그럭….
그때, 나무와 돌이 부딪쳐서는 날 수 없는 쇳소리가 울렸다.
“—!”
칼리번은 혹여나 에레즈 프리드웬이 완전히 끝을 내기 위해 돌아온 것인가 싶어 급히 고개를 돌렸다. 8년간 성장한 에레즈는 강했다. 어째서 에어리얼이 육체를 버리고 도망쳤는지 느낄 정도로. 그런 그를 다시 마주한다면 힘을 과도하게 쓴 칼리번은 여기서 죽고 말 것이다.
“어째서 돌아왔습니까.”
칼리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는 분명 들리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환청인가?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농간으로 에레즈의 환청을 종종 듣곤 했다.
“어디…. 크흠, 어디 있는 거냐.”
목이 멘 칼리번은 헛기침을 하고는 간신히 물었다.
“도망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번은 고개를 숙였다.
“……아스터.”
저 멀리, 나무 뒤에 검은 투구가 하나 있었다. 아스터의 투구는 혼자서 덜그럭거리며 칼리번을 향해 기어 오고 있었다. 종종 바위나 나무뿌리 같은 거대한 장애물에 걸릴 때면, 투구 아래에서 백금사가 쑥 튀어나와 발발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도망치지 않아서, 에레즈 프리드웬을 끝까지 상대하느라고 이런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투구밖에 남지 않은 주제에 아스터는 도리어 칼리번을 힐난했다.
“에어리얼이 제게 준, 소중한 몸이었….”
칼리번은 근처까지 간신히 기어 온 에스터의 머리를 덥석 붙잡았다.
“?!”
예상치 못한 습격에 아스터가 버둥거렸다.
“이 망할 자식!”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번은 주먹으로 투구를 내리쳤다. 텅! 성검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던 갑옷이었으나, 이번에는 칼리번의 손이 얼얼할 뿐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투구를 내려쳤다. 텅, 텅! 빈 냄비를 두드리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어느새 칼리번의 주먹에는 피가 맺히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그만두라며 반항하던 아스터였으나, 손도 발도 없는 자신이 공격을 피하는 것이 여의치 않음을 깨달았다. 더구나 갑옷을 지탱해 줄 혈관을 너무 많이 잃어버리기도 했다.
“하…. 하아. 하아….”
칼리번은 아스터의 투구를 쥐어패면서도 힘에 겨운지 헉헉댔다. 8년 전, 왕자를 본 후로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 매일 나무를 부수고 땅에 구덩이를 팠다. 그때처럼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미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런 힘이 어디서 솟아오르나 신기할 정도였다.
“제기랄, 큭, 망할……!”
그러기를 한참이었다. 허탈함과 안도감이 뒤늦게 전신으로 퍼진다. 칼리번은 흡사 폐에 구멍이 난 듯한, 괴상한 한숨을 내뱉었다. 지친 몸은 투구를 두 팔로 감싸 안고는 몸을 웅크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반쯤 부서진 투구를 스르르 덮는다. 칼리번은 투구를 팔에 안고 무릎을 꿇은 그 자세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
더는 백금사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까맣게 탄 백금사가 투구의 눈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후들거리는 백금사는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꼭 움켜쥐었다.
<오메가는 아이를 키우지 않지만, 너는 달라. 내 피를 먹여서 키웠으니까. 낳기만 한 다른 마물과는 급이 다르지.>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흔적을 되새기듯, 붉은 머리카락을 제 투구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에어리얼은 죽어 가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길러 주었다. 그것은 버림받은 후에도 간절히 그를 찾아 헤매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에어리얼은, 나약한 자신을 살려 준 걸까?
이제야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칼리번에게 머리를 너무 많이 얻어맞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널 낳아 준 사람인데.>
아스터는 얻어맞은 복수라도 하듯 칼리번의 머리 가죽이 아플 정도로 머리카락을 세게, 쭉쭉 잡아당겼다.
<아…. 여기 계셨군요. 계속, 제 곁에….>
칼리번이 껍질 안의 자신을 보고 했던 말이 자꾸만 텅 빈 투구 속에서 울려 퍼진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