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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물거품 下 (22/50)

12. 물거품 下

평소와 시야가 다르다. 세상이 거대한 괴물의 배 속 같다. 칼리번은 허리가 아닌 얼굴에 닿는 수풀과 유독 커 보이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자신이 말라깽이 소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꿈을 꾼다고 해도, 원래의 자신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이것은 기억이다.

칼리번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아마도… 원래 이 몸의 주인인, 에어리얼의 기억일 것이다. 에어리얼의 기억을 엿보고, 그 몸에 익숙해질수록 칼리번은 그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칼리번은 어차피 거부할 방법도 없었지만, 순순히 그 꿈에 자신을 맡겼다.

칼리번이 용병이었을 적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니던 숲은 붉은 머리의 소년에게 거대한 장벽이자 덫이었다. 그래, 그는 꼭 작은 짐승 같았다. 지금보다 훨씬 작고 약한 에어리얼은 온몸이 생채기투성이였다. 어디서 주워 입은 옷은 품에 맞지 않아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는 앙상한 몸을 드러냈다. 그마저도 오래 입었는지 해지고 더러웠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은 한 번도 자르지 않았는지, 덥수룩하게 얼굴을 가렸다.

소년은 몸을 납작 숙이고 연신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때로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네발로 기기도 했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수풀이 흔들거렸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주변 지리에 밝은 것 같았다. 한밤중에 길을 잃어 헤매는 중이 아니었다. 소년의 걸음에는 확실한 목적성이 있었다.

어두운 밤, 달빛을 의지하며 소년이 향한 곳은 숲이라면 한둘쯤 품고 있을 흔한 동굴이었다. 그는 바로 동굴에 들어가지 않고 수풀에 숨어 한참이나 주변을 탐색했다. 털이라도 비죽 세울 것 같은 경계 어린 태도는 전형적인 짐승의 방식이었다. 진흙 바닥에 찍힌 발자국과 냄새를 살피던 소년은 한참 뒤에서야 동굴 안에 들어갈 용기를 냈다.

동굴 안은 숲보다도 한층 더 어두웠다. 그리고 기괴한 신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동굴은 마물들의 은신처였다. 그리고 은신처에는, 마물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손으로 동굴 벽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종종 시체를 밟는 일도 있었다. 그건 차라리 나았다. 사지가 꽁꽁 묶여 마물의 씨를 품은 채 꼼짝도 못 하는 제물이 더 끔찍했으니까.

마물과 인간의 기괴한 결합은, 숙주인 사내의 내장과 생기를 빼앗으며 자란다. 새로운 생명을 품은 사내들의 얼굴은 해골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 우, 후우….>

소년은 손으로 입을 가려,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몇 달 전, 하늘에서 검은 손자국이 찍히더니 마물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마물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습격했다. 그것들은 번식기에 들어섰는지 습격하는 마을마다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는 잡아다 강간했다. 지금 동굴에 마물이 없는 것도, 그들이 다른 마을을 습격하여 배를 채우고 번식 대상을 잡아 오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년이 마물의 동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새빨간 머리는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마물 혼혈임을 증명했고, 마물에게는 번식의 가치가 없는 돌멩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

붉은 머리의 소년은 붙잡힌 제물들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마물의 새끼를 품지 않은 사내들을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찾았다. 마물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범해질 제물들이었다. 서너 명의 사내들이 초록빛이 도는 딱딱한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는데, 마물이 뱉어 놓은 점액질인 것 같았다.

<누, 누구냐…?!>

붉은 머리 소년의 등장에 제물 중 한 사내가 외쳤다. 언제 마물이 돌아올까 노심초사한 탓에 깊은 밤임에도 잠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가 더 큰 소리를 내기 전에, 재빨리 제 모습을 드러냈다.

<히익…! 제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으응?>

사내들은 마물이 돌아왔나 싶어 기겁하다가, 그 정체가 조그마한 아이인 것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물이 아니라, 마물 혼혈 꼬맹이잖아…? 네, 네가 어떻게 여기를…?>

그러자 붉은 머리의 소년은 묶인 사내들에게 단검을 꺼내 보였다. 숲에 버려져 있는 것을 주웠는지 날이 녹슬어 있었다.

<꼬, 꼬맹아! 그걸로 우리를 좀 풀어다오!>

소년을 못 미더워하던 사내들의 눈빛이 단번에 바뀌었다. 오랫동안 날을 갈지 않아 뭉툭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마물에게 잡혀 온 후,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꼬마는 그들의 생존 욕구를 자극했다. 지금으로서는 눈앞의 소년이 목숨줄을 틀어쥔 신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제발! 어서 그 칼로 이걸 잘라 줘! 여, 여기서 풀어만 준다면 무엇이든 해 주마. 이렇게 부탁한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마을에 가면 가족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덩치가 산만 한 사내들이 어린애를 앞에 두고 애걸복걸했다. 소년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짐승의 얼굴과도 같아 제물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간절히 매달렸다.

<어서!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조금 있으면 마물들이 돌아올 거라고! 제발, 제발…!>

<마…을….>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이든 뭐든 줄 테니까…. 뭐?>

<나, 나……. 마, 을, 마…을…!>

소년이 입을 연 순간, 사내들의 애원이 뚝 그쳤다.

<마, 을, 나…. 마을!>

나. 마을. 붉은 머리의 소년은 두 단어만을 반복하며 손으로 제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 어눌하기 그지없는 말투였고, 짐승이 사람의 말을 따라 하는 듯한 목소리는 기괴하게까지 느껴졌다. 사내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앞의 작은 신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고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원래 다급한 쪽이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법이었으니까.

<어, 뭐…. 뭐? 마을…. 마을? 아하! 그래! 마을에 가고 싶다는 거지…?!>

묶여 있는 사내 중 한 명이 마침내 해석을 완료했는지 감탄하며 외쳤다.

<…….>

불결한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드러난 한쪽 눈이 번들거렸다. 머리카락 색보다도 더욱 짙은 붉은 눈. 평범한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기괴한 피의 색. 사내는 질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아! 그래! 데려다주다마다! 살려만 준다면 뭐든 못 해 주겠냐! 그러니까 얼른 이것 좀 풀어 줘, 마물들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는 바로 배웠는지, 소년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작은 행동마저도 인간을 따라 하는 짐승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사내들의 지시대로 녹슨 단검으로 마물의 뱉은 점액질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는 이미 마물의 새끼를 품은 사내들의 비통한 신음으로 가득했기에, 사각거리는 칼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지는 않았다.

<으으……. 젠장, 이 멍청아! 빨리! 좀 서두르라고!>

소년은 최선을 다했으나 워낙 작고 약했기에 시간이 걸렸다. 사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이대로는 구속을 풀기 전에 마물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창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간신히 사내의 한쪽 팔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점액질을 긁어냈다.

<이… 이리 줘! 내가 할 테니 이리 내놔!>

<아…!>

사내는 감질이 나는지 소년에게서 단검을 빼앗았다. 억지로 밀려난 소년이 벌렁 뒤로 넘어졌다. 솟아난 돌에 등을 부딪쳤는지 붉은 머리의 소년이 아래에서 끙끙댔다.

사내들은 소년보다 훨씬 힘이 좋은 만큼, 작업이 한결 빠르게 진행되었다. 거기다 그들은 필사적이기까지 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자유를 찾은 사내들은 이제는 맨손으로 점액질을 뜯어내기에 이르렀다.

<헉, 허억…. 다 됐다! 풀려났다고!>

마침내 구속을 풀어냈다.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넋 놓고 기뻐할 때가 아니야, 마물이 오기 전에 어서 마을로 돌아가자!>

언제 마물이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기껏 풀려났는데 다시 붙잡힌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은 또 없을 것이다. 사내들은 결의를 다졌다.

이 사내들은 다른 제물과 달리 숲을 지나는 길에 납치되었다. 그들의 마을은 아직 습격을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얼른 돌아가서 마물이 침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 고향 마을은 이미 늦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돌아가야만 한다.

소년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가져온 녹슨 단검을 돌려주지도 않은 채.

<아? 아…. 으….>

소년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행여나 놓칠세라 서둘러 그들의 뒤를 쫓았다. 사내 중 누구도 뒤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 * *

칼리번이 깨어나지 않는다.

“칼리번.”

아스터는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칼리번의 곁에 서 있었다. 숲에서의 전투 이후 센어르의 태도가 바뀌었다. 수색대를 상대로 여유로운 승리를 거뒀으나, 아무래도 칼리번과 아스터를 의심하는 듯했다.

<붉은 오메가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센어르는 아스터에게 그를 빼앗아 가려 했다.

<오메가님께서는 피곤하시면 종종 긴 휴식을 취하십니다. 그럴 때 곁에 ‘교미한 적 없는 알파’가 있으면 상당히 불쾌해합니다. 심할 때는 마물을 불러 죽여 버리기도 하시죠.>

<…….>

<오메가님께서 깨어나시면 부르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아스터는 쓰러진 칼리번을 끌어안고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센어르는 이를 갈았지만, 오메가를 모신 적이 없으니 아스터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지난 전투에서 붉은 오메가가 부른 마물이 젠을 습격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오메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센어르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러나 센어르가 순순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문밖에서부터는 전보다 더 엄중한 경계 태세가 갖추어졌다. 그리고 아스터는… 센어르 따위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에어리얼의 몸이 깨어나지 않은 이상,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었으니.

“칼리번, 일어나십시오.”

아스터는 칼리번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비쩍 마른 몸은 강한 힘에 속절없이 흔들릴 뿐이다.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 겁니까.”

아스터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칼리번의 다리에는 천이 감겨 있었다. 젠의 독에 당했으나, 센어르가 내준 해독제 덕에 지금은 회복된 상태였다. 독 때문에 여태껏 깨어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신은 에어리얼의 몸을 지켜야 합니다. 저와 그러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칼리번을 쥔 아스터의 건틀릿에서 금빛 실 가락이 새어 나왔다.

“이런 모습으로는… 당신이 에어리얼의 몸에 담겨 있으나, 없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금사는 붉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볼을 세게 꼬집었다. 칼리번을 깨우기 위함이었으나 약간의 복수심도 담긴 듯했다. 혹여나 짧은 수면 중에 그를 빼앗길까, 아스터는 이 시간까지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

진짜 에어리얼에게는 감히 시도조차 못 한 일이었다. 아니, 그럴 일이 애초에 없었다. 에어리얼은 언제나 아스터에게 다정했다. 껍질이 없어 죽어 가던 아스터를 살려 주고 살아갈 수 있게 갑옷을 만들어 주었다. 칼리번과는 달랐다. 아스터에게 그는 지하 감옥 한구석에 걸려 있던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으면 당신은 에레즈 프리드웬을 되찾지 못하게 될 겁니다. 물론 저도, 에어리얼에게 돌아갈 수 없고요. 그래도 상관없습니까?”

칼리번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엄포를 놓았다. 아스터 자신이 에어리얼에게 집착하는 만큼이나 칼리번에게는 에레즈 프리드웬뿐이었다. 잠결에도 그가 왕자님, 왕자님, 거리며 잠꼬대를 하는 모습을 아스터는 몇 번 보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에레즈의 이름을 언급했으니 깨어나리라 생각했다.

“…….”

그러나 이번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흥….”

아스터는 기분이 나빴다. 일전에도 칼리번이 깨어나지 않은 적은 있었다. 그때는 큰 부상을 입었기에, 고목 나무에 처박아 두었다. 그때와 지금이 비슷한 상황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 당시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몸이 죽지만 않는다면 그가 정신을 차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도망가지 않으니 편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칼리번이 깨어나 봤자, 에어리얼의 몸을 멋대로 굴릴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면 일어날 겁니까?”

무언가 생각이 난 아스터는 칼리번의 몸에서 손을 뗐다. 제 머리를 쥐더니 투구를 떼었다. 목이 없어진 아스터는 투구를 칼리번의 배 위에 올렸다. 그가 쓰러지기 전, 자신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싶어 했던 기억이 뒤늦게 나서였다. 두 번 당할 필요는 없기에 막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여자를 죽여서 이러는 겁니까?”

한참 뒤에야 아스터가 물었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 * *

자유를 얻은 사내들은 숲을 걸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괴물도 있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작고 말랐기에 도망치는 사내들의 다급한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점차 뒤처지게 되었다. 소년은 손을 흔들며 사내들을 불러 보기도 했다.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닌 괴상한 소리였고 사내들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물에게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라, 사내들은 뒤따라오는 소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약간은 고맙기까지 했다. 비리비리한 것이 딱 봐도 기형 알파였지만, 목숨을 구해 주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들이 점차 소년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숲에서 벗어나 마을로 향하는 길목 즈음에서였다. 마을은 저 멀리 윤곽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아직 침략당하지는 않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지는 않았다.

‘…저걸 정말로 마을까지 데리고 가야 하나?’

비탈진 산길을 오르내리면서도, 아무도 쉬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모두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붉은 머리는 알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나올 수 있으나, 막상 실제로 보면 마물 혼혈이 지닌 붉은색은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피처럼 짙은 빨강은 무의식에 가라앉은 불쾌한 감각을 건드린다. 마물 혼혈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떠올려 보면, 자연스럽게 두려움과 혐오감이 드는 것이다. 특히나 마물의 동굴에서 갓 빠져나온 생존자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것’이 마물 혼혈 중에서도 가장 덜떨어진 개체라는 것이었다. 자연의 순리대로라면 진작 굶어 죽었어야 할 텐데 어쩌다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겠지.

<…….>

사내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헉, 허억……. 후아, 하아….>

주변의 분위기가 바뀐 것도 모른 채 붉은 머리의 소년은 두 팔을 크게 휘적거리며 씩씩하게 걸음을 이어 나갔다. 명랑한 겉모습과 달리 사실은 많이 지친 상태였다. 입 안은 이미 바짝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붉은 두 눈은 단 한 번도 사내들의 등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대로 놓치면, 마을에 들어갈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소년은 대부분의 마물 혼혈이 그렇듯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다. 숲에서 나무뿌리를 파먹고 벌레를 주워 먹으며 살았다. 밤에는 구덩이를 파서 잠들고 마물을 피해 숨곤 했다. 겉모습은 인간이었으나, 속은 이성도 자아도 없이 짐승에 가까웠다.

붉은 머리 소년은 매일 숨어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존재들이 숲을 오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마을’이라는 곳에서 모여 사는 것 같다. 숲에서 눈을 번뜩이는 짐승이나 마물과는 다르게….

소년의 반은 마물이었으나, 인간의 마을을 본 순간부터는 어째서인지 혼자가 싫어졌다. 인간의 무리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소년을 받아 주지 않았다. 마물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금지된 존재는 땅에 뿌리를 두지 못하고 평생을 방랑해야만 했다. 소년만이 그 사실을 몰랐기에 들개처럼 매번 마을 입구에서 돌을 맞고 쫓겨났다.

<웬일로 사내놈이 숲에 혼자 있나 했더니만…. 동족입니다, 대장. 어떡할까요?>

숲에서 ‘동족’을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들은 인간을 지켜 주는 대신에 음식을 얻거나 며칠 정도 마을에 머물곤 했다.

<비리비리한 것이 곧 죽을상이군. 내버려 둬라.>

<큼, 큼, 어디 보자…. 알파 냄새도 거의 안 나는데, 데리고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요?>

용병은 소년의 머리채를 쥐고는 냄새를 맡더니 이리저리 생김새를 살폈다. 태어나 한 번도 씻지 못해 더러웠고 머리카락도 멋대로 자라 몸을 덮었지만, 자세히 보면 묘하게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동족은 건드리지 않는다. 용병대 들어왔을 때 했던 맹세는 벌써 까먹은 거냐? 끽해야 서너 개밖에 안 되는 그걸?>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좋고, 저놈도 목숨 부지하고, 서로 즐기자는 의미로…. 으악!>

<닥치고 원래 있던 곳에 던져 놔! 용병도 아닌 놈을 데리고 다니면 용병대 꼴이 참 잘도 돌아가겠군그래. 조만간 다른 용병대에서 네 구멍도 곧 쑤시려 들 거다.>

<거참…. 알겠습니다. 훠이, 얼른 꺼져!>

이처럼 붉은 머리 소년은 동족에게도 번번이 내쫓길 뿐이었다. 용병들은 저 소년처럼 운 좋게 여태 살아남은 기형 알파들을 보아 왔다. 결국, 시간 차이일 뿐이지, 마물의 먹이가 되고 말 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직접 죽여 주는 편이 아량을 베푸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용병들도 있었다. 동족에게 죽을 뻔한 소년은 다시는 용병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자신도 ‘마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용병들처럼 도움을 주었으니까.

소년은 제 몸보다 훨씬 커다란 사내들의 뒤를 따르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그가 일찍 용병대에 거둬졌다면, 비교적 인간다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짐승처럼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했다.

<미, 미안하다….>

갑자기 한 사내가 소년을 향해 영문 모를 말을 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배신자 놈, 혼자서만 착한 척하지 마!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다른 사내가 사과를 한 사내에게 윽박질렀다. 세 사내는 붉은 털로 뒤덮인 작은 짐승을 한번 보더니, 이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동시에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흐으? 아…. 아?>

붉은 머리의 소년은 홀로 남아 사람들이 사라진 숲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 * *

“…윽.”

익숙지 않은 감정은 심장을 쥐어짰다. 칼리번은 가슴을 움켜쥐며 잠에서 깨어났다. 짓눌린 폐에서 나오는 것은 쉬어 버린 숨소리뿐이다. 눈을 깜박거리자 눈가에 고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기는….”

주변에는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온갖 선물이 쌓여 있다. 센어르가 내준 방이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건가.”

칼리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까무잡잡하고 큼지막하던 원래의 손은 온데간데없고 하얗고 가는 손이 보인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매번 자신이 에어리얼의 몸에 갇혔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그 더러운 꼬맹이가 에어리얼이라고?’

칼리번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사람의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버려진 나뭇가지와 같던 소년. 잔인하고 영악한 지금의 에어리얼과는 전혀 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마치, 왕자님과도 비슷하지 않던가. 칼리번의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아파졌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과 에어리얼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에어리얼은 자신의 육체를 빼앗고 왕자님을 죽이려 하는 적일 뿐이다. 칼리번은 자신을 다잡았다.

그동안 엿본 에어리얼의 과거는 ‘기억’이라기보다는 ‘단편적인 정보’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 본 기억은 기존보다 훨씬 더 과거의 것으로 보였다.

‘젠을 만난 탓일까?’

젠과 재회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육체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칼리번’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에어리얼의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이처럼 에어리얼의 몸은 때로는 칼리번 영혼을 압도하고, 에어리얼의 기억은 파도처럼 밀려와 칼리번의 영혼마저 뒤덮어 버리곤 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두컴컴한 숲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은 어두운 숲속이 아니고, 자신도 말을 할 줄 모르는 붉은 머리 짐승이 아니다.

칼리번은 주변을 살폈다. 아스터가 곁에 있다. 정확히는, 침대 위에 널브러진 갑옷 조각들이다. 전신에 고양이가 여덟 마리는 올라온 것처럼 묵직했다.

“…….”

철갑옷 그 자체인 아스터지만, 녀석도 생명이기에 한두 시간 정도 수면을 취한다. 그가 짧은 잠을 취할 때는 스르륵 무너진 채로 칼리번의 몸을 뒤덮는다. 칼리번이 멋대로 도망가거나, 혹은 누군가가 칼리번에게 손을 대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육체가 없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거야 알고 있지만…. 어째서 배 위에 투구가 있지?’

칼리번은 뒤늦게 신경이 쓰였다. 숨을 쉴 때마다 아스터의 머리가 함께 오르락내리락했다.

“아스터.”

칼리번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체를 일으키지도 못한 채 아스터의 투구에 손을 얹었다. 손에 닿는 감각은 차가웠다. 속이 빈 갑옷 조각일 뿐, 그 안에는 무엇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칼리번은 조용히 밀어내려다가….

“…….”

퍽, 주먹으로 투구를 내리쳤다. 주먹질을 한다고 해서 벼랑 아래로 떨어진 젠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 * *

가까스로 정신은 차렸으나 칼리번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욱신거리는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젠의 독이 스친 탓인지 푸르게 변해 있었다. 해독제가 없었다면 전신이 썩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잘라 내는 편이 더 빠를지도….’

이전의 자신이라면 미련 없이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은 회복이 더뎠다. 어쩌면 잘린 다리가 다시는 재생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저번 전투에서 적군 일부가 도망쳤다고 합니다. 센어르는 에레즈 프리드웬이 새로 병사를 보내기 전에 본거지를 처분하고 이동하려는 것 같습니다.”

아스터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회담장으로 가겠지. 사내를 모은 것도 그곳의 알파들에게 바치기 위함이었으니까.”

“아뇨. 센어르는 남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뭐?”

고개를 끄덕거리던 칼리번이 움직임을 멈췄다.

“정확히는 강간한 후, 겠지만요. 그는 이미 분류 작업을 마쳤습니다. 나머지는 본거지와 함께 태워 버리려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 이유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기껏 모은 재산이었다. 그것을 스스로 줄이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는 이곳에서 나와 함께 갇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스터는 대답 대신 갑옷 위로 금사를 내밀어 살랑거렸다. 아스터의 일부가 문틈으로 기어 나가 탐색을 하고, 갑옷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 모양이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아스터가 물었다. 깨어난 후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대놓고 손발이 묶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센어르에게 완벽하게 붙잡힌 꼴이나 다름없다.

“센어르는 당신이 깨어난 것을 알면 교미하려 들 겁니다.”

“그건… 음, 그렇겠지.”

“이대로 그를 따를 겁니까?”

‘교미’에 대해 아스터는 칼리번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마도 에어리얼의 몸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뜩이나 칼리번은 그의 몸을 험하게 쓰는 편이었으니까. 칼리번은 푸르딩딩한 제 다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머리를 굴려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참 좋을 텐데, 이런 위급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안타깝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 잘못으로 상황이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으니,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겠지.”

지난번 전투에서 센어르를 제압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칼리번의 실책이었다. 젠이라는 변수가 그를 뒤흔든 탓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젠을 만나고, 에어리얼의 몸이 이토록 강하게 반응할 줄 누가 예상했을까? 그나마 얻은 수확은 젠으로 인해 에어리얼의 기억이 조금씩 열린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에어리얼의 몸을 멋대로 쓰려고 하신다면, 저는 차라리—”

“이곳에서 탈출하자.”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두 사람의 말이 실타래처럼 얽혀 버렸다.

“…….”

어조는 달랐으나 하고자 하는 말은 같았다. 칼리번은 입을 다물었다. 아스터에게는 얼굴이 없어 모르겠으나, 그도 조금은 놀란 것 같았다.

“…탈출 계획은 있습니까?”

아스터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동안 보아 왔던 에어리얼의 기억을 더듬었다. 두 사람이 대치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설마, 아무 계획도 없는 겁니까?”

기다리다 못한 아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칼리번은 그답지 않게 말을 질질 끌었다. 아스터는 영문을 모르겠는지, 투구가 끼익거리며 쇠붙이를 긁는 소리를 냈다.

“…아스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칼리번이 각오를 다졌다.

“하십시오.”

“네 금사는 갑옷에서 어디까지 분리가 가능하지?”

“…….”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아스터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칼리번은 그런 그에게 상세한 계획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 혼자서라면 어렵겠지만 아스터, 네가 있다면 센어르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다.”

칼리번은 그 말로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센어르를 상대하는 것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는 제게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 계획에 인간을 풀어 주는 것도 포함된 겁니까?”

“그렇다.”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뭐?”

칼리번이 인상을 썼다.

“어째서 저희가 인간까지 구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마물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울 텐데요.”

“이대로 센어르가 전부 죽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노예를 풀어 주는 동안 저는 당신을 보호할 수 없고, 그사이에 센어르의 부하들에게 저희의 움직임을 들킬 수도 있습니다.”

아스터는 슬그머니 넘어가는 일 없이, 그가 생각하기에 쓸모없는 부분을 지적했다.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한 잔인함이었다.

“…….”

하지만 그의 말이 옳다. 손을 대 봤자 노예 전부를 구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러나 적어도, 풀어만 준다면. 이곳으로 향하는 에레즈의 군대화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말재주가 없기도 해서지만….

<미, 미안하다….>

누군가를 도왔다가 배신당했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공명하기 때문이다.

“…아스터, 너는 저번 계획에서 멋대로 내 곁을 이탈하고 젠을 공격해서 계획을 망쳐 버렸지. 한번에는 한 번이야. 그러니 이번에는 잠자코 내 말을 따라라.”

칼리번은 단호하게 말했다. 설득이 아닌 강요였다. 왜냐면 노예를 풀어 주는 일이 번거롭고,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칼리번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 칼…. 너, 너는… 어, 어째서 나, 나를 구, 구, 구해 준 거야?>

하지만… 모르겠다.

<나, 나는……. 난, 아, 아무 데도 쓰, 쓸데없고……. 마, 말이나 더, 더듬고…… 보, 보잘것없는데….>

칼리번은 어째서 붙잡힌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는지, 자신을 붙잡는 족쇄가 무엇인지 몰랐다.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답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싶다’라는 마음은 알고 있다. 젠처럼 머리가 좋거나 에어리얼처럼 영악하다면 진작 답을 깨닫고 아스터를 설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번은 그렇게 할 줄 몰랐다. 그저 밀어붙일 뿐이다.

“당신은 틀렸습니다. 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젠이라는 여자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내용은 우리의 거래에 없었습니다. 거기다 제가 한 모든 행동은, 에어리얼을 위해서였습니다.”

아스터는 어째서인지 열렬히 자신을 변호했다.

“에어리얼을 위해서?”

칼리번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당신 말을 따르는 건, 에어리얼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스터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니, 에어리얼은 원치 않았을 거다.”

칼리번의 입에서 저절로 그 말이 나왔다. 칼리번의 통찰력에서 나올 만한 발언이 아니었기에 그 자신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에어리얼은 당연히 기뻐할 겁니다. 에어리얼은 그 여자 때문에 울었으니까.”

아스터는 여전히 거대한 갑옷이었으나, 그 말을 듣고는 어딘지 쪼그라든 것 같았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멋대로 명령한다고 해서 에어리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말 중에서 괜찮을 것을 골라 따르는 것뿐이죠. 나는 에어리얼을, 당신은 에레즈 프리드웬을 만나기 위해 동맹을 맺은 것뿐이란 말입니다.”

평소의 그보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변명투성이인 것은 아마도 본인도 느끼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스터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여태까지 그는 여러 번 칼리번을 힘으로 압도했었다. 여차하면 아스터는 당장에라도 금사를 뻗어, 칼리번의 두 팔과 다리를 자른 후 품에 안고라도 다닐 기세였다.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에어리얼의 몸을 향한 그의 집착을 느꼈다.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중요시하는 ‘에어리얼의 몸’이 그 순간,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알려 줬을 뿐이다.”

그에 반해, 칼리번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에만 빠졌던 탓인지 온몸에 힘이 없었다. 아스터에게 맞설 힘조차도.

“그래서 따를 거냐, 따르지 않을 거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칼리번은 아스터를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메가의 힘인지 뭔지 모를, 요상한 것을 써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를 대하듯.

‘아이….’

칼리번은 그 단어를 애써 외면했다. 그저 에어리얼의 육체에 적응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아스터를 조종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 * *

<아! 아…?! 으, 우우…!>

소년은 발을 동동 굴렀다. 붉은 눈동자가 속절없이 세 명의 사내들이 떠난 길을 헤맸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누구를 쫓아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이대로는 모두 놓치고 만다. 소년은 눈에 보이는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약했지만, 며칠 동안 동굴에 갇힌 사내들 또한 만만치 않게 쇠약해진 상태였다. 더구나 붉은 머리 소년에게는 그들보다 더한 절박함이 있었다. 소년은 네 발로 뛰다시피 달리며 거친 숲을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떠난 사내의 발을 붙잡았다.

<으악! 벌써 쫓아왔잖아!>

<우, 우우…!>

소년은 다짜고짜 남자에게 매달렸다.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내리막길을 굴렀다.

<젠장! 저리 가, 떨어지라고! 으윽…. 이 자식, 손톱을 세워…?! 악, 아파!>

사내는 붉은 머리 소년을 구타하면서까지 떼어 내려 했으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절박함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붉은 머리 소년은 걸귀처럼 매달렸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손톱은 사내의 살을 파고들었다.

<누가 좀 도와! 마물 새끼가 들러붙었어! 와서 좀 떼어 줘!>

사내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무작정 쥐어뜯고 때리며 외쳤다. 셋은 원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소년을 떼어 내고 나면 다시 모이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사내의 절박한 외침이 전해졌는지 다른 곳으로 도망쳤던 사내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붉은 머리 소년이 친우를 당장 잡아먹기라도 할 듯 덮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 악귀 같은 녀석!>

너 나 할 것 없이 돌덩이나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는 붉은 머리 소년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제 머리카락 색처럼 붉은 피로 물들어 감에도 소년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날카로운 어금니로 사내의 어깨를 물기까지 했다.

<헉, 헉…. 마물의 피가 섞인 게 아니랄까 봐…. 끔찍하군!>

소년이 성인 사내 셋을 힘으로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오랜 사투 후, 세 명의 사내는 마침내 소년을 떼어 내는 데 성공했다.

<…….>

소년은 이마가 깨져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붉은 눈을 치켜뜬다. 그 모습이 이제는 두렵기까지 했다.

<윽! 아아, 내 다리가…. 저놈이 물어뜯었어….>

<쉬이,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도와준 건 고맙다만…. 여기까지야.>

<다음에는 정말로 죽일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저리 꺼지라고!>

한 사내는 붉은 머리 소년에게 물어뜯긴 동료를 부축했다. 다른 사내는 굵은 나뭇가지를 휘휘 저으며 위협했다.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되도록 소년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마을, 마, 마을….>

그러나 번들거리는 소년의 두 눈은 헛된 약속으로 비롯된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은 굶주린 들개 같았다.

<저 눈 좀 봐. 절대 포기하지 않을걸?>

<이대로는 마을까지 쫓아올 기세야….>

<…어쩌지?>

사내들은 짐승을 상대로 해서는 안 될 약속을 맺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소년이 정말로 마을에 들어오게 된다면,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공포가 들었다. 길들지 않은 들개가 종종 아이를 잡아먹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조차도 그들의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잖아?>

누군가 말했다. 숲은 어둠에 묻혀 있어, 세 명 중 누가 한 말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세 명 모두가 한 말 같기도 하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악마가 속삭이는 말 같기도 했다.

<…….>

사내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이제 마물의 씨앗을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정의감을 공유했다. 반면 붉은 머리의 소년은 이제 인간을 도와준 구원자에서 물리쳐야만 하는 마물 찌꺼기가 되고 말았다. 선을 긋고 타자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마물의 본성과 반대되는 인간의 이성이었다.

사내는 굵직한 나뭇가지를 꽉 움켜쥐었다. 어떤 사내는 정체 모를, 아직도 살점이 붙어 있는 짐승의 뼈다귀를 들었다. 다친 사내도 비틀거리면서도 돌을 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붉은 소년의 몸 위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덮쳐졌다. 본능적인 공포에 소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앙상하고 작은 그림자가 커다란 그림자 셋에게 둘러싸여, 거대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으아…. 우, 아우!>

손목과 팔에 공격이 가해질 때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깨갱,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반격을 하려던 소년이 무력화되자 이제 그들은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다리가 부러지고 피멍이 들었다. 물어뜯으면서까지 매달리던 소년은 이제 몸을 웅크리고는 공격을 최소한으로 피하려 애썼다.

동굴에서 막 나온 때였다면 그들은 소년을 불쌍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이나 유감은 들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면서, 감히 인간에게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전설과 신화에서 인간이 아닌 것은 인간의 조력자이거나 인간을 드높이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인간에 의해 살해되는 괴물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길 수 있으니까, 다시는 이 녀석이 마을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해야 해.>

<맞아.>

그들은 한마음이 된 것처럼 부연 설명 없이도 뜻이 통했다. 사내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더는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소년을 번쩍 들었다. 그들은 세 갈래로 도망치면서 발견한 절벽으로 향했다.

낭떠러지는 몹시도 높고 표면이 거칠었으며 아래로는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떨어진다면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뼈도 추리지 못하리라. 세 사람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붉은 머리의 소년을 아래로 던져 버렸다.

* * *

붉은 오메가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센어르는 곧바로 달려갔다. 독으로 인해 수척해졌지만, 그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붉은 오메가님이 원하시는 대로 왕성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일전에 말했던 상은 언제쯤….”

센어르는 침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약속의 대가를 요구했다. 붉은 오메가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인내는커녕 지난 사흘을 기다리며 어떻게 하면 의식을 잃은 오메가를 검은 갑옷에게서 뺏어 올까 고민했던 그였다.

“…….”

붉은 오메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센어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제 방으로 가실까요? 아니면 여기서….”

무려 오메가께서 교미를 허락해 주다니, 센어르는 흙바닥에서 구르며 교미를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센어르가 비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유하자 붉은 오메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그라도 검은 갑옷이 있는 곳에서 교미를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붉은 오메가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탓이었다. 그가 넘어지려는 것을 센어르가 한쪽 팔로 낚아챘다.

“오메가님께서 아직 걸음이 불편하시니,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붉은 오메가를 부축하던 센어르는 속으로 내심 놀랐다. 붉은 오메가는 너무도 가벼웠다. 겉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는 무게보다 더욱. 마치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

붉은 오메가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고, 센어르는 그 즉시 그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오메가님을 제 것처럼 감싸더니 어떠냐, 꼴 좋군.’

그는 오메가를 안고 나가면서 보란 듯이 검은 갑옷을 노려보았다. 센어르가 붉은 오메가의 독을 치유해 줄 때면, 검은 갑옷은 그를 제 품에 안고는 품에서 놓지 않았었다. 생각해 보면 검은 갑옷은 처음부터 센어르를 경계하며 오메가의 신임을 받는다는 점을 티 냈고, 은연중에 자신이 우위임을 드러내려 했다. 그랬던 주제에, 지금은 장식용 갑옷처럼 침상 옆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메가를 다른 알파를 뺏기다니 자존심이 상하겠지.’

센어르는 얼굴 위로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지난번 전투에는 젠을 상대해 준 덕분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었다. 부하로 삼으면 쓸 만할지도? 센어르는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왜냐면 그에게는 붉은 오메가를 만족시킬 자신이 있었으니까.

“…….”

붉은 오메가는 복도를 이동하는 중에도 얌전히 센어르의 품에 안겨만 있었다. 몸이 가까워지니 오메가의 향기가 느껴졌다.

“크흠….”

센어르의 아래가 벌써부터 꿈틀거렸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벼운 몸도 이제는 성욕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어 버렸다. 오메가가 이토록 가벼운 것은 어쩌면 텅 빈 내부를 알파의 성기로 가득 채우기 위함이 아닐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 너희는 경비를 설 필요가 없다. 물러나 있어라.”

방 안에 들어서기 전, 센어르는 부하들을 쫓아냈다. 그들은 명령을 따라 떠나면서도 품에 안긴 붉은 오메가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주한 것만으로 미련을 버리지 못할 정도니, 교미 중에 오메가의 신음이나 향기에 취해 멋대로 난입할 수도 있었다.

“하하, 이곳이 제 처소입니다. 누추하지만 오메가님을 오늘 밤 모실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센어르의 방은 붉은 오메가에게 제공한 훨씬 크고 화려했다. 사치품과 전리품으로 가득 채운 방은 그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붉은 오메가 또한 그런 전리품 중 하나처럼 보일 정도였다.

센어르는 붉은 오메가를 마물의 털가죽이 깔린 침대에 올렸다. 붉은 오메가는 제 몸조차 잘 가누지 못했다. 그러니 도망치지도 못하리라. 그가 다리를 다친 것은 센어르에게는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오메가님. 혹시 그것 아십니까? 오메가님께서 잠드신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센어르는 곧장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않고, 되지도 않는 멋을 부리며 슬쩍 운을 뗐다.

“저희는 이곳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쓸 만한 노예와 필요 없는 것들을 나눴으니, 조만간 처분하고 떠날 겁니다.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붉은 오메가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차가운 무표정이 센어르를 더욱 자극했다. 어서 저 얼굴을 붉은 쾌락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그곳은….”

센어르는 말끝을 늘리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오메가를 부드럽게 눕혔다. 거대한 체격의 센어르를 상대하기에 붉은 오메가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런 주제에 이보다도 덩치가 더 큰 마물도 상대했다니, 센어르는 그 몸에 흥분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 작은 몸에 삽입하면 부서지지 않을까? 한 번으로는 감질난다. 센어르는 되도록 이 오메가를 오래 사용하고 싶었다.

“…….”

센어르는 붉은 오메가의 다리를 벌리고 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는 센어르가 선물한 얇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옷을 벗기기란 식은 수프를 먹는 것보다도 쉬웠다. 센어르가 붉은 오메가의 위에서 헐떡이는 와중에도, 그는 붉은 눈동자를 굴려 센어르를 도발적으로 올려다볼 뿐이었다.

“허억, 오메가님….”

매도하는 듯한 눈빛에 센어르는 더욱 흥분했다. 자신의 체취로 가득 찬 공간에 오메가가 있으니, 마치 그가 자신의 향기에 뒤덮인 것 같다. 센어르는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확실히 인간 남자와 오메가는 달랐다. 평범한 사내를 범했을 때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향기의 영역까지 착실히 자극을 받았다.

“…….”

숨이 거칠어진 센어르와 달리 어찌 된 일인지 붉은 오메가는 입을 여는 일조차 없었다. 저 완고함을 어서 무너뜨리고 싶다. 만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오메가의 체취가 제 피부에 옮겨붙자 센어르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은 가늘었지만, 붉은 오메가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쥐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센어르는 그 커다란 손을 붉은 오메가의 목 아래로 밀어 넣어 뒤통수를 움켜쥐고는, 제게로 끌어당겼다.

“…….”

센어르는 붉은 오메가와 입을 맞췄다. 오메가의 향기에 취한 알파는 오메가의 타액이 절실해졌다.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는 타액은 침이었다. 목소리 한번 들려주지 않은 채, 꾹 다문 입을 억지로 벌리고픈 욕망도 적지 않았다. 숨이 부족해지자 마침내 붉은 오메가의 입술이 벌어졌다. 센어르는 혀를 밀어 넣어 그의 좁은 입 안을 탐했다.

그리고….

“윽…. 우, 우으윽?!”

센어르의 입에서 구역질이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붉은 오메가를 침대에 버려두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은 풀어지지 않은 채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내는 백금사가 이어져 있었다.

“…….”

칼리번은 그제야 입을 크게 벌렸다. 축축하고 좁은 입 안에는 백금사가 목구멍 안쪽까지 빠듯하게 채워져 있었다.

“큭, 으어억!”

백금사는 금세 센어르의 얼굴을 뒤덮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긁으며 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칼리번의 입안에 숨어있던 백금사는 눈 깜짝할 새에 전부 센어르에게로 넘어갔다.

<아스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네 금사는 어디까지 분리할 수 있지?>

그때,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물었었다.

<그걸 제가 왜 알려 줘야 합니까?>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네 혈관을 반으로 나눈다면, 너는 두 마리가 되는 건가?>

<……제 몸의 일부를 떼어 내면, 그건 제 뜻에 따라 움직이기는 하지만 본체만큼의 이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신을 본체만큼 분리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정확히 반으로 분리하면 서로를 잡아먹으려 해서, 결국 다시 하나로 합쳐지니까요.>

<그런가….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묻겠다. 젠과 싸웠을 때, 너는 백금사로 나를 구속했었지. 하지만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네 혈관은 갑옷 바깥으로 나오면 살아남지 못하는 건가?>

에어리얼의 기억을 보았기에, 갑옷 밖으로 나가면 아스터의 혈관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다시금 물었다.

<……그건.>

아스터가 그다음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칼리번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화려한 보석 장식이 붙은 단검이 대담하게도 침상 옆에 놓여 있었다. 칼리번은 옷을 껴입을 새도 없이 단검을 쥐고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윽, 으으윽…. 이, 이게 무슨 짓거리야…. 아, 아아아악!”

센어르는 허리에 찬 단검으로 백금사를 떼어 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가는 실은 센어르의 피부 착 달라붙었고, 사실상 센어르는 제 몸을 스스로 찌르는 꼴이었다. 백금사는 센어르의 피부 속으로, 혈관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비명이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쫓겨난 부하들이 그의 비명을 듣고 쫓아오는 일은 없었다.

<굳이 이 갑옷이 아니더라도, ‘껍질’이 있으면 어느 정도는 더 버틸 수는 있습니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바로 백금사가 센어르의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이유였다. 칼리번은 센어르가 공격을 할 것을 대비해 단검을 쥐고 섰다. 광인처럼 카펫이 깔린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센어르의 움직임이 점차 줄어들었다. 칼리번은 단검을 앞으로 내민 채로 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오, 오메가…니임…. 어, 째서… 이런 짓을…!”

센어르는 온몸을 경련하며 칼리번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번들거리는 두 눈은 당장에라도 칼리번을 찢어 죽일 것 같았다. 칼리번은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센어르, 이제 넌 네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칼리번은 센어르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순간, 센어르의 몸이 펄쩍 튀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칼리번의 말대로 그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몸 안으로 파고든 백금사가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혀는 자르지 않았으니 순순히 대답해라.”

칼리번의 그의 뺨에 단검을 기댔다.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에 센어르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크윽, 뭐… 뭘 말하라는 겁니까!”

“저번에 있었던 전투에서 연합군의 절반 이상이 우리 쪽으로 돌아섰더군.”

“그, 그게 뭐 어쨌다는….”

“그들이 전부인 건가? 아니면 에레즈 프리드웬의 편에 있는 마물 혼혈들이 이미 대부분 돌아선 거냐.”

센어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붉은 오메가는 에레즈 프리드웬과는 철천지원수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부하들이 이쪽 편이라는 것은 좋은 일 아니던가? 그러나 칼리번의 얼굴은 더없이 심각했다.

“예? 우리가, 에, 에레즈 프리드웬의 편을 들 리가… 없잖습니까, 켁, 커헉…!”

“…왕성에 있는 알파들은 신뢰할 수 없다는 거군.”

“으, 이제 됐습니까? 푸, 풀어 주십시오….”

센어르는 아직도 붉은 오메가에 대한 욕망을 놓지 못했다. 붉은 머리카락은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다음은 회담에 대해서다.”

칼리번은 가볍게 칼을 휘두르고는 센어르의 바로 옆에 꽂았다. 그의 뺨에 칼날을 따라 긴 상처가 났다. 아무래도 원래 몸이 아니라서인지, 칼을 다루는 솜씨가 다소 둔해졌다.

“알테르의 부하들이 모인다는 건 알고 있다. 그곳에 날 데려갈 셈이었지?”

“억, 허억! 오, 오메가님…?!”

“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어디지? 때는 언제냐. 어서 불어라.”

센어르는 칼리번을 붙잡고 싶어 꿈틀거렸다. 어설프게 협박을 해서는 야비한 센어르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다. 허풍을 떠는 데는 별 자신이 없지만.

“네게 기회를 주는 거다. 내게 온전하게 복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이것은 칼리번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에어리얼이 할 법한 말이었다. 칼리번은 두 손으로 센어르의 목을 감싸고는 타는 듯한 붉은 눈은 센어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칼리번이 몸을 숙이자 붉은 머리카락이 센어르의 얼굴과 가슴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에어리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에어리얼 그 자체처럼 보였다. 칼리번의 절박한 의지를 에어리얼의 육신이 받쳐 준 덕이었다.

“그, 그건….”

센어르는 조그마한 오메가에게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완벽하게 지배당했다. 지난 전투에서, 센어르는 이미 칼리번에게 압도된 차였다. 그는 속절없이, 입을 달싹여 붉은 오메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 ……. …….”

수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 이 순간에 담긴 정보를 얻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에어리얼의 흉내를 냈던 거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처럼 사람의 정신을 읽지 않았으나, 센어르의 정보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엉덩이에 닿는 센어르의 성기가 발기해 있었다. 육체가 백금사에게 꿰뚫린 와중에도 알파의 본능은 칼리번을 향하고 있었다.

“…좋아.”

칼리번은 센어르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쪽 발을 비틀거리면서도 센어르의 옆에 꽂힌 단검을 뽑아 들었다.

“오, 오… 오메가, 니임…!”

센어르가 간절하게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

아스터의 백금사는 이성이 부족해 처음 분리되었을 때 받은 명령 외에 새로운 명령은 따르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센어르의 가슴을 단검으로 내리찍었다. 에어리얼의 악력으로 목을 자르지는 못할 테니, 심장을 노렸다.

* * *

단검 하나를 챙긴 채로, 칼리번은 절룩거리며 센어르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의 팔에는 피 묻은 백금사가 감겨 있었다. 복도를 지키던 병사들은 싹 사라진 상태였다. 전부 센어르가 자초한 일이었다. 칼리번으로서는 도주가 편했으니 이득이었다.

문제는 센어르의 숙소를 빠져나온 뒤였다. 밖에는 센어르의 부하들이 즐비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스터가 풀어 준 노예들로 인해 아수라장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조심스럽게 막사를 나왔다.

어두운 밤, 드문드문 횃불이 걸렸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칼리번이 센어르를 죽이고 아스터가 일을 저지르는 중임에도 병사들은 허둥지둥하기는커녕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칼리번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아스터는 강했지만, 많은 수의 적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불리했으니 말이다.

‘아스터는 노예를 풀어 주는 중인가? 조용하군.’

아스터가 배신하고 혼자 도망칠 것이라는 가능성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칼리번은 몸을 최대한 숙이고 조심하며 움직였다. 에어리얼의 작은 체구는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왼발을 디딜 때마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어둠 속에 숨어들었다. 이렇게 있으니, 마치 어두운 숲속을 홀로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어렴풋하게 스며든 에어리얼의 기억에,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센어르가 본거지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을 한 덕에, 칼리번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노예를 보관하는 막사로 향하자 슬슬 병사들의 시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스터가 한 짓이리라. 아스터의 능력은 이런 은신과 암살에는 특히 효력을 발휘했다.

그즈음, 칼리번의 팔에 감긴 백금사가 멋대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칼리번은 백금사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아스터를 찾을 수 있었다.

“아스터. 아직 다 하지 못한 건가? 그럼 내가 돕지.”

칼리번은 아스터를 향해 말했다. 어찌 된 일인지 아스터는 막사 앞에 서 있었다. 뱀처럼 기어 가던 백금사가 어둠 속에 먹혀 버렸다. 새까만 갑옷 안으로 돌아간 탓이리라.

“그게 아닙니다.”

“그럼?”

“노예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스터가 뜻밖의 말을 했다. 칼리번은 그제야 자신과 아스터를 둘러싼 수많은 눈을 보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들은 센어르의 병사도 막사 안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풀어 주면 알아서 도망칠 줄 알았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더군요.”

아스터가 고자질하듯 덧붙였다.

“나에게 맡겨라.”

칼리번은 아스터를 옆으로 밀어냈다. 사람들은 아마도 알파가 무서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입니다. 어서 여기서 떠나십시오.”

어찌나 주변이 고요한지, 칼리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서쪽. 그쪽으로 계속 전진하다 보면 왕성 연합군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칼리번은 손가락으로 방향까지 알려 주었다. 센어르가 자진해서 노예를 처분하고 있을 정도라면 왕성에서 군대가 더 파견될 것은 거의 확정된 바나 다름없다.

“하, 하지만… 숲에는 마물이 득실거리고 있는데….”

어둠 속, 누군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왕성 근처까지 저와 아스터가 함께 가겠습니다.”

아스터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갑옷을 삐걱거렸다. 칼리번은 무시했다. 지금 그에게는 아스터보다 센어르의 자백이 더 신경 쓰였다.

“거짓말! 어차피… 여기서 도망쳐도 금방 붙잡히고 말 겁니다.”

“마물 혼혈들이 당신을 오메가님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요, 저희를 마물의 먹이로 주려는 것 아닙니까?!”

“마, 맞아…. 나도 들었던 것 같아.”

한번 말이 터지자 여기저기서 칼리번에게 분노나 의문을 우수수 쏟아 냈다.

“…….”

그런 태도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더군다나 칼리번의 겉모습은 다름 아닌 ‘붉은 오메가’다. 오메가가 인간을 도와줄 리가 없었다. 함정이라고 여길 만도 했다.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면 알다시피, 저와 이 갑옷은 당신들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가 두렵다면 바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알아서 목숨을 부지하십시오. 그러나 여기에 계속 남아 있으면… 죽거나 알파의 노예로 끌려갈 겁니다.”

다행히도 칼리번은 이런 대우에 익숙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립기까지 했다.

“도… 도망가다가 알파들에게 잡히면 어떡합니까?! 그럼 바로 죽지 않습니까! 하지만, 대장님의 말씀을 따르면… 적어도 살 수는 있단 말입니다.”

누군가가 외쳤다.

“선택은 당신들의 몫입니다.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칼리번은 그들이 ‘감히’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접고 대답했다. 궁지에 몰릴수록, 사람들이 매달릴수록, 칼리번은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차가워지고 차분해지는 습성이 있었다. 젠은 그 점을 높이 사 멍청한 칼리번에게 대장직을 맡기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도무지, 저 마물의 말을 믿을 수가….”

“…무, 무서워….”

사내들이 수군거리며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센어르가 갑자기 노예들을 처분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그들도 두 눈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센어르나 칼리번이나, 그들이 보기에는 똑같이 마물 혼혈이며 악당이었다.

“저는…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습니다.”

과연 어떤 차악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던 때였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칼리번이 있는 쪽으로 한 걸음 걸어왔다.

“…….”

칼리번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칼리번만 혼자서만 상대를 알고 있었다. 전에 보았을 때는 얼굴에 천을 둘둘 감고 있었으나 노예에게 얼굴을 가리는 일은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레그의 것’이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적힌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였다.

“미, 미친 거 아냐?! 저놈은 오메가라고! 저 악마를 따라갔다가는 마물의 먹이가 되고 말 거야!”

누군가 두려움에 소리쳤다.

“하지만…! 저는 왕성에 가야 합니다. 그곳에 가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차피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똑같이 죽는다면…. 좀 더 살 가능성이 있는 쪽에 걸 겁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누가 왕성에 안 가고 싶겠어! 그치만 여기에 남아서 알파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 적어도 목숨 부지는 할 수 있다고!”

의견은 팽팽하게 갈렸다. 그러나 얼굴에 흉터를 지닌 사내는 그들에게 등을 지고 칼리번 쪽으로 섰다. 한 사람이 용기를 내자, 슬금슬금 파가 갈리기 시작했다. 반 정도는 칼리번 쪽으로 모였고 나머지 반은 여전히 막사 안에 남아 있기를 택했다. 흰 반달에 구름이 꼈다. 순간 어둠이 그들을 뒤덮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슬슬 다른 녀석들이 눈치를 챌 겁니다.”

아스터가 채근했다.

“…그래, 이동하자.”

이 정도 시간을 주었으면 다들 마음을 정한 것이겠지. 칼리번도 동의했다. 그는 도움의 손을 내밀기는 했으나, 움직이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갈 정도의 성인은 아니었다.

“구름이 걷히면 움직이겠습니다. 저를 따라오면 됩니다.”

칼리번은 자신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스터, 네가 먼저 가서 병사들을 처리하고 길을 터라.”

그다음으로 아스터에게 명령했다. 아스터는 떨떠름해했지만, 일이 여기까지 흐른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먼저 막사를 떠났다.

“…….”

혼자 남은 칼리번은 자꾸만 기시감을 느꼈다. 홀로 어둠을 걸을 때는 ‘에어리얼’이 느끼는 기시감이었다면 지금은 ‘칼리번’일 때의 감각이다. 용병일 적 그는 마물에게 붙잡힌 인간들을 구출하는 방어전도 치른 적이 있었다. 젠을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 길을 트고 칼리번은 인간들을 보호하며 탈출시켰다….

‘전부 살아서 나가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리번은 어둠 속에서 언뜻 보이는 윤곽으로 머릿수를 대충 파악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뜻을 따르듯 달을 가린 구름이 바람에 밀려 조금씩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윽!”

칼리번은 등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운 감촉을 느꼈다.

“으, 아… 아….”

처음에는 이상할 정도로 서늘했으며, 그다음으로는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칼리번이 앞으로 쓰러지자 단검이 쫓아와 그의 등을 깊게 꿰뚫었다.

“허억…!”

칼리번은 짧게 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범인은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모두 네 녀석 때문이야. 네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들끓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그는 쓰러지려 하는 칼리번의 몸을 한쪽 팔로 끌어안고는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하…하하! 잘도 알파를 홀리더니만, 그게 우리한테도 통할 것 같아?”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눈만은 또렷했다.

“으윽, 흐….”

칼리번은 그가 누군지 알아챘다. 연어 떼처럼 왕성으로 향하는 사내들을 잡아다 알파에게 팔아넘기는 포주였다. 그는 동족을 팔아넘김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칼리번이 온 후, 센어르는 더 이상 그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본거지를 처분하게 되면서, 다른 사내와 다를 바 없는 노예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크윽….”

털썩, 그가 손을 놓자 칼리번의 몸은 너무나 쉽게 땅 위로 추락했다. 칼리번은 상처 부위를 손으로 막았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새어 나왔다. 흙 위로 끈적한 피가 번졌다.

“약해 빠진 꼴 좀 보라지! 그런데도 이 오메가를 믿고 도망을 치겠다? 하!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머리가 어떻게 된 거지!”

포주였던 사내가 주변을 향해 보란 듯이 외쳤다. 그는 쓰러진 칼리번이 기어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로 짓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앞은 센어르 님의 부하들로 가득해! 우리가 들키지 않고 왕성까지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그 불똥은 어디로 튀겠어?!”

“그, 그건….”

“얌전히 남은 우리까지 깡그리 없애 버리시겠지. 결국, 이 오메가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녀석에게 선동당해서, 다 같이 죽게 되는 거야!”

포주가 하는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고, 사람들의 동요가 공기를 통해 느껴졌다. 가장 먼저 칼리번을 따라나섰던 흉터 입은 사내도 머뭇거렸다.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다들 꼼짝 말고 있어!”

인간이면서도 같은 인간 위에 군림했던 사내답게, 그의 말은 교묘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다. 포주였던 사내는 마치 이곳에 남은 노예를 위한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은밀한 속셈이 숨어 있었다. 이대로 센어르에게 오메가를 넘기고 도망치려 했던 노예들을 고발해서, 다시 신임을 얻고자 한 것이다.

“아스, 터….”

칼리번은 아스터를 찾았으나, 그는 아직 피 냄새를 맡지 못한 것 같았다. 몸에 피가 대량으로 빠져나가자 시야가 좁아지고 흐릿해졌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안 돼, 지금 이 상태에서 에어리얼의 피 냄새가 주변으로 퍼지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마물이 몰려오면, 무차별적인 살육이 일어날 것이다. 칼리번은 피가 흐르는 배를 최대한 세게 틀어막았다. 상처 부위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왔다.

발버둥 쳐 봤자 한번 흐르기 시작한 피를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오메가의 피는 식물의 뿌리처럼 흙을 파고들어 뻗어 나갔다. 마찬가지로 피 냄새는 바람을 타고 본거지와 근처의 숲으로, 곳곳에 숨은 마물에게까지 전해졌다.

“뭔가 이상한데….”

“느낌이 좋지 않아.”

변화를 느낀 것은 둔감한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유독 스산하게 느껴진 것이다. 인간은 알파나 오메가만큼 감각이 발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생존 본능이 있었다. 그 본능이 ‘이곳에서 도망쳐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오래 노예로 지낸 탓이었다.

그때, 오메가의 부하인 검은 갑옷과는 다른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시간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센어르의 부하밖에 없었다.

“제길…. 다들 조용히 해! 알파님이 오고 계신다!”

누군가의 발소리에 포주였던 사내가 주변을 향해 윽박질렀다. 그러면 그렇지, 포주는 속으로 안도했다. 오메가와 그의 부하가 벌인 작은 반란은 금세 제압된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납작 숙이고는 아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알파에게 달려갔다.

“주인님, 이것 좀 보십시오! 오메가가 멋대로 노예들을 꼬여내려 하기에 제가 잡아 두었습니다.”

포주는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 손으로 쓰러진 칼리번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갔다. 칼리번과 노예들에게 연설할 때와는 전혀 다른 비굴한 태도였다.

“이… 이 오메가가 센어르 님을 배신하고는 멋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으니, 잘 좀 살펴봐 주십……. 으, 아악!”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끄럽던 그의 목소리는 짧은 비명으로 마무리되었다.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큭!”

칼리번의 얼굴이 다시 땅으로 처박혔다. 그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순간, 어찌할 새도 없이 뜨거운 피가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칼리번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으, 으아아악!”

노예들을 휘어잡던 포주가 죽자, 사내 노예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횃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흔들렸다. 알파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몸은 마치 거대한 수목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 나무껍질처럼 변해 버린 피부는 가뭄이 난 땅처럼 갈라진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체는 뱀처럼 다리가 없이 배로 기는 형태였으며, 대신 두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몸이 반 이상 변형되어, 이제는 마물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오메가님을 위해 무엇이든 해 드렸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할 줄이야.”

“…센어르.”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가 센어르인 줄 알아채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칼리번은 마물을 부르기 위해 땅으로 손을 뻗었으나 센어르가 한발 앞섰다. 그의 긴 팔이 칼리번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으…아악! 이것… 놔!”

센어르가 있는 방향으로 끌려가면서도, 칼리번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커다란 손 안쪽에 박힌 빨판은 칼리번의 피부를 아플 정도로 세게 빨아 들었다. 상처 부위가 박동하며 피를 쏟아 낸다.

“아아…. 이 모습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요.”

“…….”

“이런 약해 빠진 모습을 초야에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센어르는 혀를 찼다.

“센, 어르…!”

“아직 상을 주시지 않았는데, 벌써 다른 마물을 불러서야 쓰겠습니까? 그건 안 될 일이지요.”

“…아악!”

센어르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칼리번의 몸이 피를 흘리며 쥐어 짜였다.

“기껏 융숭한 대접을 해 드렸더니만…. 아무래도 오메가님께서는 저를 단단히 우습게 여기신 것 같습니다? 설마 교미 상대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일 줄이야…. 하는 수 없지요, 이참에 제 능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뭐…. 큭, 뭐라고…?”

센어르의 말과 함께, 갈라진 피부 사이에서 나무 열매 정도 크기의 딱딱한 물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포탄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나가더니 노예들의 몸에 들러붙었다.

“히익, 이, 이게 뭐야….”

다른 마물의 공격처럼 그것이 인간의 몸을 꿰뚫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부에 달라붙기만 했다.

“윽…. 으, 으아아악!”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인간들이었으나 곧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무 열매만 한 크기의 물체는 살아 있는 씨앗이었다. 씨앗은 손가락만 한 굵기의 가시를 세우더니, 인간의 몸 안에 박아 넣고는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몸에서 피가…. 으아악!”

충격에 빠진 사내들이 난동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서든 몸에 들러붙은 씨앗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씨앗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의 피를 빨며 더욱 덩치를 키워 갔다.

“이, 이것 좀 떼 줘!”

“으아아, 그아악!”

곳곳에서 신음과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성장한 것은 크기뿐만 아니라 무게이기도 했다. 씨앗은 점점 무거워졌고 인간들은 그 무게에 짓눌려 쓰러지고 말았다.

“히익…. 으아, 윽!”

피를 양분으로 삼아 씨앗은 두 개의 싹을 틔워 냈다. 흡사 식물의 잎사귀처럼 보이는 혀와 촉수는 씨앗을 뽑아내려는 인간의 두 팔을 옭아매고 몸 이곳저곳을 핥기 시작했다. 혀에서 토해 내는 타액은 점성이 짙어서 인간의 반항은 점차 둔해져 갔다.

“우욱, 으웨엑…. 그, 그만…….”

성장을 마친 씨앗에게 피를 빠는 가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어느새 사람의 머리통만큼 자라난 씨앗이 몸을 뒤틀며 새로운 가시를 생성해 냈다. 센어르에게 붙잡힌 채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칼리번의 두 눈이 충격으로 확대되었다.

저건 가시가 아니다. 성기였다. 센어르의 분신은 마치 마물의 일생을 아주 빠른 속도로 수행하는 것 같았다. 씨앗은 본능적으로 사내의 입구를 찾아내 솟아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히익! 아, 안 돼! 아아아악!”

“크…흡, 흐으읍!”

씨앗이 여러 개 붙은 사람은 입 안으로 성기가 들어가기도 했다. 사람은 각기 다른 목소리를 지녔으나, 같은 종류의 비명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곳의 모든 사내들이 동시에 센어르에게 삽입을 당한 것이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흐, 흐으으, 으읏…!”

“아아, 아파, 그, 그만…. 아아앗!”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하던 비명은 어느새 신음으로 채워졌다. 사내들은 끈적한 체액에 갇혀 자신보다 훨씬 작은 마물의 성기에 꿰뚫려 허우적댔다. 그것들은 사내의 몸속에 성기를 넣고 빼기를 반복하며 몸을 크게 부풀렸다. 부푼 몸통 위로 선이 그어지더니, 씨앗은 마지막으로….

“…꽃?”

칼리번의 입에서 절로 그 소리가 나왔다. 흐릿한 시선으로도 그것은 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잎이 다섯 갈래로 벌어진, 화려하고 흉측한 꽃. 인간들이 삽입의 고통에 발버둥을 칠 때마다 꽃 속에 자리 잡은 두툼한 수술이 흔들렸다. 입자가 굵은 포자가 꽃가루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그 가루를 삼키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으나 한계가 있었다.

“제가 뿌린 이 가루에는 마물의 체취를 가리고 시야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읍… 흡….”

“오메가라고 해도 마물인 이상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센어르의 속삭임에 칼리번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마치 속내를 읽힌 것만 같았다. 피 냄새를 맡고 마물이 오면, 센어르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계획을.

처음 칼리번은 다른 알파들처럼 센어르도 오메가를 욕망하고 경외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것은 가증스러운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메가를 견제할 힘이 숨겨 두고 있었다. 무려 오메가를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크윽! 놔! 그만…둬!”

칼리번이 뒤늦게 발버둥을 쳤으나 늦었다. 헐렁한 옷 사이로 센어르의 손이 파고들었다. 몸을 움직이자 허리에 난 구멍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런, 다치셨군요. 곧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상을 받고 난 후에!”

“으, 아악…!”

센어르는 일부러 손끝으로 상처를 후벼팠다. 고통으로 칼리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틈을 타고 센어르는 한참 전부터 발기한 성기를 꺼내어 칼리번의 몸 안을 쑤셨다.

“으윽— 아악!”

칼리번은 주먹질을 하며 저항했으나 단단한 껍질로 뒤덮인 알파에게는 신선한 자극밖에 되지 않았다. 마물을 부리기 전까지는 아무런 힘도 없는 오메가. 그것이 바로 붉은 오메가가 수많은 마물을 부리면서도 알테르의 곁에 있었던 이유다. 마물을 갑옷처럼 두르지 않은 에어리얼은 그저 달콤한 몸을 지닌 나약한 오메가에 지나지 않았다.

“오메가님께서 어떻게 회담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으윽…. 닥쳐, 큭….”

벌어진 상처에서 흐른 피가 땅으로 뚝, 뚝 떨어졌다.

“하지만 오메가님께서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디홀 영지로 가게 될 테니까요.”

“아, 아아…!”

“거기서…. 흐, 죽을 때까지 알파를 받는 겁니다!”

센어르는 마침내 자신의 손아귀로 떨어진 오메가를 농락하며 환희에 빠졌다. 디홀 영지는 가파른 산악 지대로,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는 불모의 땅이었다. 그곳에 갇혀 센어르를 비롯한 알파와 평생 교미를 해야만 한다. 칼리번에게는 저주와도 같았다.

“흐, 으…아악!”

센어르는 칼리번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센어르의 성기는 그의 체격만큼이나 길었으며 구슬 같은 혹들이 마구 돋아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속으로 크기가 다른 구슬이 끊임없이 들어갔다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흐윽, 큭…!”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칼리번은 센어르에게 짓눌린 채 그가 박아 넣는 대로 흔들렸다.

“…흐으….”

아…. 그래. 지금 자신을 꿰뚫리고 있다.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것에게….

칼리번은 순간적으로 에어리얼의 능력을 체득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죽어 가던 여인이 자신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을 때, 그녀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었다. 에어리얼의 능력은 정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떻게 강화해야 하는지조차 모호했다.

지금도 그렇다. 칼리번은 여전히 에어리얼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매번 찢어지고 상처를 입어야지만 간신히 하나를 취할 수 있었다.

‘에어리얼. 너는 내 몸을 뺏고, 죽어 가는 몸을 던져 줬지….’

칼리번은 두 손을 뻗어 센어르의 긴 손가락 중 하나를 움켜쥐었다. 오메가의 몸은 약해 빠졌기에, 그는 칼리번의 반항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인간 사내보다도 약한 오메가가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그런 과신. 사소한 반항을 신경 쓰기에는 드디어 맛보게 된 오메가의 몸은 너무나 조이고 달콤했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그걸 위해 네 몸을 찢어발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로 인해 자기 자신까지 죽게 될지라도. 센어르의 손을 움켜쥔 칼리번의 두 팔은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감정. 더 정확히는, 고통과 공포. 에어리얼이 가진 힘의 근원이다. 근원에 닿을수록 에어리얼과 같은 힘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컸다.

“……흐, 으윽!”

칼리번은 벌어진 상처에 센어르의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간신히 아물기 시작한 상처에 다시 구멍이 났다. 고통으로 인해 반사적으로 내벽이 알파의 성기를 강하게 조였다. 솟구쳐오르는 쾌감에 센어르가 칼리번의 몸 안에 사정했다. 칼리번은 벌벌 떨면서도 피 묻은 손으로 센어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날… 똑바로 봐라, 센어르.”

오메가의 몸 안에 파고든 센어르는 감히 그 말을 피할 수 없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칼리번은 짐승과도 같이 이를 드러냈다. 피처럼 붉은 눈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 * *

<으아—아, 아으!>

붉은 머리 소년은 짐승처럼 깨갱거렸다. 그러나 그의 비명을 들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 사람은 떠난 지 오래였다. 조그마한 몸이 수도 없이 절벽에 부딪혔다. 몸이 잘리고 깎여 나가는 것만 같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돌과 부러진 나뭇가지에 몸 어딘가가 찔렸다. 흠씬 얻어맞은 몸은 마지막으로 거친 물결 속으로 떨어졌다.

<우… 후하, 하우!>

헤엄을 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급류는 자꾸만 소년을 쓰러뜨렸다. 구멍이란 구멍에는 전부 물이 들어왔다. 숨을 쉬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소년은 결국 급류에 휘말려 깊이 가라앉게 되었다.

물 아래의 흐름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험했다. 소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두 팔을 우스울 정도로 힘차게 허우적거리지만,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저 멀리 달빛이 물의 표면에 부딪혀, 이리로 오라는 듯 부표를 띄웠다. 그러나 부러진 두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더욱 아래로 추락할 뿐이었다.

마침내 바닥에 등이 닿았다. 마지막 숨마저 물거품으로 토해 내고 말았다. 점차 눈앞이 흐릿했다. 움직이지 않은 두 다리는 마치 물고기의 꼬리처럼 흐느적거렸다.

가장 밑바닥에서 올려다본 물의 표면은….

이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닿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 * *

바람이 불자 매캐하게 덮인 포자 흩어져 갔다. 그러나 사내 노예에게 추삽질 중인 꽃은 여전히 가루를 뿜어 댔기에 여전히 허공에 희뿌연 막이 씌워진 것만 같다. 칼리번은 시체들 위에 드러누운 채로 숨만 꼴깍거렸다.

밤의 눈동자, 달도 포자 가려 흐릿했다. 손을 뻗어 보고 싶었으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임에 달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실패하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태인데도 말이다. 칼리번 자체가 위기일 때 더욱 둔해지는 성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상황이 이 정도로 최악이면 도리어 별 생각이 안 드는 경지에 이르고 만다.

“센어르는 제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제가 돌아오기도 전에 다 끝내 버리셨군요.”

어디선가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칼리번은 눈동자를 굴려 쇳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형체를 응시했다.

“본거지에… 불을 지른 건가.”

칼리번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스터의 등 뒤로 연기와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또한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었으나 시체를 기름으로 삼은 탓인지 불길하기만 했다.

“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상대하다 보니…. 센어르의 부하를 전부 죽이지 못했습니다. 일부가 도망친 상태입니다. 녀석들이 눈치를 채고 여기로 오기 전에 저희도 피해야 합니다.”

길을 트고 돌아오겠다던 아스터가 이제 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한 센어르가 자신의 부하들을 그쪽으로 몰아 준 모양이었다. 검은 갑옷이었으나 지금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짙은 어둠조차 그 붉은 색을 감춰 주지는 못했다. 그 모습이 어째서 칼리번에게 빨리 돌아오지 못했는지를, 혼자서 얼마나 분투했는지를 증명해 주었다.

일전에도 검은 갑옷이 그렇게 새빨간 피로 뒤덮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갑옷을 덮은 피는 금세 흡수되어서, 원래의 검은 빛으로 돌아왔었다. 지금 그렇지 않다는 것은, 흡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피를 뒤집어썼다는 뜻이겠지.

“미안하게 됐군. 마물을 보냈다면 나았을 텐데…. 그럴 상황이…. 욱, 허억….”

“칼리번…! 가만히 있으십시오.”

칼리번의 기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아스터는 서둘러 다가와 칼리번의 몸을 안아 들었다. 칼리번은 아스터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부자연스럽게 삐거덕거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칼리번의 계획과 전투로 인해 백금사를 상당수 잃은 탓이었다. 그런데도 아스터는 백금사로 칼리번의 상처를 틀어막았다.

“센어르를 자살하게 만들었군요.”

아스터는 주변을 살피더니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노예들의 거처에는 마물에게 반쯤 잡아먹힌 사내들과 센어르와 그리고 마물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그리고… 센어르의 긴 손은 다름 아닌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센어르가 뿌린 연막에 헤매다 뒤늦게 몰려온 마물들 또한 똑같은 자세로 죽어 있었다.

“…….”

칼리번은 대답할 힘도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칼리번은 센어르의 정신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몸이 바뀌기 전에도, 칼리번은 마물 혼혈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멈추게 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그들을 에어리얼처럼 자유롭게 조종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생존자는….”

“네, 없습니다.”

칼리번이 말을 잇지 못했으나 아스터는 알아서 이해하고 대답했다. 아스터의 몸에서 나온 백금사가 칼리번의 얼굴을 스쳤다. 피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가리자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 눈이…….”

아스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검게 변해 있었다. 흡사 타 버린 것만 같다. 그러나 칼리번은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아스터…. 부탁이 있다.”

“싫습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에어리얼의 몸을 서둘러 치료해야 합니다.”

칼리번은 노예들이 원한다면 왕성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터무니없는 약속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생존자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아스터에게는 흔해 빠진 인간들보다는 에어리얼의 몸이 가장 중요했다.

칼리번의 상태는 위험했다. 피가 모조리 빠져나갔는지 안색은 창백했으며 다리 사이는 피와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아스터는 시체에서 옷을 뺏어 입히려 했다. 그러나 그들도 죄다 피로 물든 탓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얼마 안 걸린다…. 도와줘….”

칼리번은 거의 들릴락 말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해야 합니까.”

얼굴에 칼로 새긴 흉터가 있는 사내를 찾아 줘. 칼리번은 숨소리나 다름없을 정도로 힘없이 속삭였다. 아스터는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을 두 팔로 안고는 시체 사이를 돌아다녀야만 했다. 아스터는 성의 없이 발로 시체들을 휘휘 저었다. 대퇴갑과 정강이받이 사이의 틈에서 백금사가 새어 나와 얼굴을 살폈다.

“이겁니까?”

아스터는 그 사람을 생각보다 빠르게 찾았다.

“확인해 볼 테니… 이제 내려 줘.”

“싫습니다.”

아스터는 대신 본인이 무릎을 꿇었다. 칼리번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결국 도망치지 못했군.’

칼리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흉터가 남은 사내는 예전에 에레즈가 목숨을 구해 준 자였다. 될 수 있으면 살아남길 바랐다. 이런 몸으로는 에레즈에게 다가갈 수 없었기에 그가 남긴 흔적이라도 쥐고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으…… 으으….”

그때, 시체가 입을 열었다.

“…아스터.”

“그래 봤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곧 죽을 겁니다.”

칼리번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사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마물에게 피를 빨렸다. 칼리번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스터의 몸에서 내려왔다.

“허억, 허억….”

얼굴이 흉터로 덮인 사내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두려운 법이다. 그는 상대가 오메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순간 혼자라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이 두려웠다.

“아…직, 주, 죽고 싶지 않….”

사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이제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성안으로 들어가면…. 칼리번은 얼굴이 무너진 사내를 무릎에 눕히고 그의 얼굴은 한 손으로 덮었다.

“…….”

천천히, 이번에는 꿰뚫리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용암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처럼 느릿하게… 타인의 기억과 감정이 칼리번의 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역사에도 남지 않을 보잘것없고 흔해 빠진 존재다. 그런데도 그의 일생은 질기고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내의 기억은 조각난 칼날을 흩뿌리는 것처럼 칼리번의 영혼에 생채기를 냈다. 칼리번은 생살이 베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의 기억 하나를 손에 쥐었다.

기억 속 사내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물에게 붙잡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알에 갇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쿵!

그때, 거친 충격과 함께 사내를 억압하는 껍데기가 부서졌다. 그는 오랫동안 팔다리를 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두 발로 서지 못하고 네발로 기며 비틀거렸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빛이 눈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그와 같은 처지의 사내들이 누군가 오크 통을 부숴 줄 때마다 네발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주변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목조 건물과 짚이 불에 타며 연기를 뿜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이, 살과 털을 가진 생명이 타는 불쾌한 냄새…. 비명과 쇳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종종 땅이 지진이 일어나듯 크게 울리기도 했다.

<욱, 우욱….>

구역질하던 사내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차피 도망쳐 보았자, 또다시 붙잡혀 버릴 텐데. 몸속 깊이 박힌 굴종과 패배감은 기껏 자유를 얻고도 꼼짝도 못 하게 했다.

<뭣들 하는 거야? 다리가 달려 있으면 달려! 어디로든 도망치라고!>

다들 어영부영하고 있자 누군가가 사내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달려라! 왕자님께서 너희를 구하러 오셨다!>

사내는 그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구하러 오다니? 왕자라고 하면 알테르 프리드웬과 그의 형제들 아니던가? 그 배신자들 중 누가 인간 농장에 가득한 알파를 쓰러뜨리고 쓸모없는 인간을 구하러 온단 말인가.

<기껏 목숨을 걸고 구하러 왔는데 뭣들 하는 거야?! 제길, 역시 알파 전용 남창들이라 그런가… 빠져 가지고는!>

그러나 소리를 치는 자는 알파가 아닌 인간이었다.

마물을 능가하는 인간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또 다른 알파 집단이 사내들을 약탈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다들 귀가 먹기라도 한 거야?! 어서 병사들을 따라가! 서둘러!>

사내 노예들이 겁을 먹고 꿈쩍도 하지 않자, 병사는 하는 수 없이 칼로 위협을 했다. 그들로서는 한시가 급했다. 말씨름하는 와중에도 동료들이 마물과 싸우다 죽어 가고 있었다. 인간 농장을 습격한 이유이기도 한 노예들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전투는 더욱 불리해질 것이다. 커다란 사내들을 업고 달릴 수도 없지 않은가?

<다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이곳에 불을 붙일 거다. 어서 대피해라.>

그때, 저장고 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계획보다 이동이 늦어진 탓이었다.

<왕자님! 노예들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마물에게 세뇌라도 당한 것 같습니다.>

사내 노예들에게 핏대를 높여 가며 소리를 지르던 병사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노예들이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왕자님?

사내 노예들에게 ‘왕자’란, 프리드웬 왕실의 다섯 형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마물의 편에 섰다. 당장 이 인간 농장을 세운 것만 해도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그러나 노예들 앞에 선 그 남자는 달랐다. 알테르 프리드웬을 연상시키는 금발을 지니기는 했으나 길게 늘어뜨리지 않고 이마에 간신히 닿을 정도로 짧았다. 얼굴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고 제대로 된 갑옷을 걸치지도 못했으며 그마저도 마물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내 노예들은 그가 왕족임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이 왕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에레즈 프리드웬. 망국의 제6 왕자다.>

사내 노예들은 당황했다.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첫인상과 달리, 목소리는 상당히 어렸던 것이다.

<여, 여섯째 왕자라면… 그, 괴물이라는 소문이 돌던…?!>

노예 중 한 명이 흐릿한 기억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아, 그랬다! 과거는 까마득하게 느껴졌으나, 따지고 보면 고작 몇 년 전 일이었다. 괴물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모습도 보이지 않고 성에 숨어 산다는 막내 왕자. ‘피의 날’에 치러진 결혼식의 주인공. 바로 그… 괴물 왕자였다.

<다, 당신과 형제들이 왕국에 오메가를 불러들인 것 아닙니까…?!>

노예 중 하나가 벌벌 떨면서도 외쳤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주선한 괴물 왕자의 결혼식은 모두가 알다시피 속임수였다. 왕자들은 오메가로부터 권세를 얻기 위해 백성들을 팔아치웠다. 그로 인해 왕족과 귀족, 성녀들이 몰살당하고 수도는 오메가와 마물에게 점거당하고 말았다. 인간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행방이 묘연해진 신랑을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모든 사건의 발단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알테르 프리드웬과 다르다.>

에레즈는 푸른 보석안을 빛내며 선언했다. 그 기백에 노예들이 몸을 움츠렸다.

<너희는 여태껏 그에게 속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정통성을 따질 때가 아니다.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

사내 노예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에레즈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바, 밖에는 마물이 가득합니다. 거기다 저희는 아무런 무기도 없습니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꼼짝없이 죽고 말 겁니다!>

사내 노예 한 명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사실상 노예 모두의 심정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랫동안 오크 통에 저장되어 있어 신체도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대로 밖으로 나섰다가는 단칼에 베이는 풀처럼 속절없이 머리가 잘리고 말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지켜 주겠다.>

왕자가 확신을 담아 말했음에도 노예들은 뒷걸음질을 쳤다. 이곳은 아늑한 저장고였다. 처음에는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한번 인간 농장에 들어온 사내는 죽어야지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죽어서도 마물의 번식 상대가 될 뿐. 결코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느새 그들은 운명을 수용하고 미래를 포기하고 말았다.

<저, 저희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어차피 바깥 상황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왕자님께서 구해 주셔도 언제 또 잡혀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러니 저희를 내버려 두고 돌아가십시오.>

이 좁은 공간에 적응하다 보니 이제는 밖이 두려워질 정도로 익숙해지고 말했다. 압도적인 죽음의 공포보다는 천천히 질식사하는 쪽이 안락했으니까.

<…….>

푸른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노예들은 빛에 닿은 벌레처럼 몸을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이었다. 설령 저 왕자가 정말로 알테르 프리드웬과는 다르고 기적 같은 능력이 있어 구해 준다 한들, 다시 알파에게 붙잡히고 말 것이다. 인간 사내는 알파를 이길 수 없으니까….

<…이 중에 밖에 가족을 두고 온 자는 없나?>

에레즈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은 소음과 비명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여니, 이곳이 고요해졌다. 그런 착각이 든 것이다.

<연인이나 친구는? 그것도 아니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여섯째 왕자의 질문에 노예 중 몇몇은 낯선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곳에 끌려오면서 잊은 이름이었다.

<저, 전부 죽었습니다…!>

누군가 외쳤다.

<제 아내는 못난 저를 구하려다 그만, 흑…. 죽고 말았습니다…! 이곳에서 탈출한다 해도 이제는, 살아갈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노예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실 대부분의 처지가 그와 같았다. 살고 싶다는 본능으로 인해 탈출을 망설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살아가야 할 의미조차 없었다. 마물의 교미 상대인 사내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손을 타는 물건에 불과했다.

<큭, 이런 꼴로는 부인을 만날 수 없어….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제, 제 고향은 마물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입니다. 더는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반기지 않을 겁니다.>

에레즈는 사내 노예들의 고백을 들으며 그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이제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왕자님! 이들을 버리고서라도 탈출해야…!>

병사가 다급히 에레즈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노예들 앞에 선 에레즈는 어떤 공격도 막아 줄 방패처럼 굳건했다.

<이 자리에서 나와 약속해라.>

그는 맹세도, 명령도 아닌 ‘약속’이라 말했다.

<나는 오늘, 너희 모두를 이곳에서 구출하겠다. 앞으로 너희는 내게 목숨을 빚지게 되는 것이지. 하지만… 그에 대한 값을 치를 필요는 없다.>

노예들의 시선이 에레즈를 향했다.

<만일 오메가가 부리는 마물이, 알테르 프리드웬이 소유한 마물 혼혈들이 너희를 다시 잡으려 든다면, 내가 막아 주겠다.>

무너진 막사의 천장에서 빛이 새어 들었다. 그늘진 에레즈의 얼굴 위로 한 줄기 빛이 내려앉는다.

<고향이 없어졌다면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주겠다. 가족과 친구를 잃어 혼자라면, 내가 그대들의 가족이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지. 아마도 모두가 내 말을 의심할 것이다. 여태껏 지키고자 한 자들은 죽었고, 알파들에게 빼앗기기만 했을 테니….>

푸른 보석안은 옅은 하늘빛이 되었다. 하늘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하지만 너희가 살아남겠다고, 이 자리에서 약속해 준다면…. 맹세하지. 나 또한 그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절대로 죽지 않겠다.>

몰락의 시대였다. 확고한 진리는 부정당하고 믿음은 흔들린다. 옳다고 여긴 것이 짓밟히고 잿더미가 되고 만다. 법은커녕 목숨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이 야만의 시기에, 그가 내민 약속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그 대신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 과거의 영광을 잃고, 추악하고 비참해진다 해도…. 계속 살아남아야만 해.>

약속이란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의미를 잃고 마니까. 노예와의 약속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세뇌인지 모를 맹세를 하며 그는 칼을 뽑아 들었다. 누더기 왕자의 행색은 허름했지만, 그 검만은 누가 보아도 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성검이 인간을 가호하니, 너희는 두려워 말고 나를 따라라!>

에레즈는 검을 들어 보였다. 새하얀 성검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을 냈다. 부서진 틈 사이로 흘러드는 빛마저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나, 에레즈 프리드웬은 너희 모두가 이곳에서 벗어날 때까지 맞서 싸우겠다!>

에레즈는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느새 이곳까지 들이닥친 마물을 향해 칼을 돌렸다. 칼리번은 어느새 자신에게…. 아니, 사내 노예에게 등을 돌린 에레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 아닌 타인의 기억이었다. 칼리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 농장을 탈출했다.

마물을 홀로 상대하는 에레즈와 점점 멀어져 갔다….

“칼리번.”

붉게 물든 시야를 검은 회오리가 뒤덮는다. 기억 속에서 보았던 에레즈와 똑같은 목소리가 칼리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스터…. 너인가.”

검은 갑옷의 부름에 칼리번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무릎에 눕힌 사내 노예를 살폈다.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아스터의 말대로 칼리번이 기억을 읽은 노예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래….”

칼리번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내 노예의 감정이 전도된 것인지, 아니면…. 그 눈물이 얼굴을 뒤덮은 핏자국을 녹여 길을 냈다.

‘왕자님…. 에어리얼의 몸으로 만났을 때와는 달랐다.’

감옥에서 보았던 에레즈는 한쪽 눈과 팔을 잃고, 얼굴은 흉터투성이였다. 그에 반해 기억 속의 에레즈는 지금보다 어렸고 흉터나 부상도 적었다. 상당히 먼 과거인 듯싶었다.

‘그 후로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변하신 건가.’

지난 8년간 왕자님은 얼마나 많은 전쟁을 겪어 왔던 것일까? 자신 없이….

좌절한 노예들을 이끄는 에레즈 프리드웬은 작은 새처럼 한없이 떨고 연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수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이었다. 칼리번 그동안 에레즈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에어리얼의 검은 계획을 알리고, 자신이 사실은 칼리번임을 밝혀야 한다고….

“…….”

칼리번은 기억을 나눠 준 시체의 눈을 감겨 주었다.

<…칼리번, 에레즈 프리드웬이 오고 있다.>

그러고는 에어리얼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묵묵히 되새겼다.

<장장 8년이라. 지킬 법도 한데 그 꼬맹이도 지독하네. 부러워. 잊지 않고 구하러 와 주는 사람이 있어서.>

누군가를 구한다. 그런 선한 의지는 인간의 것이었다. 에레즈와 달리 칼리번 자신은 태어날 적부터 그러한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 사내의 기억을 읽고 나서야 칼리번은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내 노예를 구하려 했던 이유만 해도, 오직 그가 에레즈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물의 피를 이어받은 칼리번은 그저 눈앞의 욕망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 감정은 뭐지?’

그런데… 가슴이 아프다. 그것은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었다. 심장을 꽉 옥죄고 짓뭉개는 듯한 고통. 마치 심장에 가시가 돋은 것만 같았다.

‘그분은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어. 그러니 기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괴롭다.’

눈물은 시체 위로 떨어졌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지난 8년간 사람들을 구하며 훌륭하게 싸워 왔다. 그야말로 왕자님답게 성장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눈물을 흘리는가? 눈물이라는 단어는 하나인데, 어째서 그것이 솟아오르는 이유는 이리도 다르고 다양하단 말인가?

칼리번은 북문에서 벌어진 방어전을 떠올렸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백성들을 마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그가 든 성검으로 인해 칼리번은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왕자님…. 왕이 되셨군요.’

에레즈 프리드웬은 더는 지켜 줘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말을 심하게 더듬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형제에게도 버림받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금세 죽고 마는…. 그런 위태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 말고도 지켜야만 하는 존재가, 수많은 백성이 생긴 것이다.

“…….”

칼리번은 깨달았다. 은연중에 그가 자신만을 찾아 헤매길 바랐다고. 그러니까 칼리번은, 수년 전에 에레즈에 의해 구원받은 이를 질투한 것이다. 함께였던 시간은 짧았고, 그 후로 몇 배는 더 긴 세월이 흘렀다. 멈춰 버린 것은 자신뿐. 어느새 에레즈 프리드웬은 자신이 모르는 모습으로 변했다. 왕이 된 것이다. 자신과 그 사이의 간극이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센어르를 부하로 삼기는커녕 저희 손으로 몰살시켜 버렸군요. 그에게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회담에도 가지 못하는 겁니까?”

내부에서 몰아치는 폭풍을 알 바 없는 아스터는 칼리번의 등에 대고는 비수를 꽂았다.

“에어리얼이었다면 달랐을 겁니다. 센어르가 당신을 범하려 들기 전에 이미 정신을 지배했을 것이고, 쓸모없는 인간을 구하려 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습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칼리번은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대지에 손을 댔다. 흙을 움켜쥐자, 피에 젖어 축축해진 진흙이 손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게 무슨 의미죠?”

“네가 그렇게 찾아 헤매는 에어리얼이라고 해서, 늘 철두철미했던 건 아니라는 뜻이다.”

칼리번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이미 붉었기에 눈물을 흘려도 눈이 붉어진 줄 몰랐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그리고 정보라면 이미 파악했다. 센어르를 죽이기 전에 머릿속을 읽어 뒀어.”

칼리번이 아스터의 투정을 단칼에 잘라 냈다.

“기어이 회담에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 몸으로?”

“그래, 갈 거다.”

“센어르를 상대로도 이런 결과인데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에어리얼을 조금도 흉내 내지 못합니다.”

힘이 빠진 칼리번은 검은 갑옷에 몸을 기댔다. 연기가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야만 한다.

처음에는 왕성 어딘가에 숨어 있을 에어리얼로부터 왕자님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칼리번은 전전긍긍하며 에레즈의 목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왕자님은 보호받는 것이 아닌, 모두를 보호하는 왕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에어리얼의 몸으로, 에레즈 프리드웬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한 번 실패했으니 두 번째는 먹혀들겠지.”

“…….”

아스터는 불만이 많아 보였다.

“일단 회복을 위해 기존의 은신처로 이동한다.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생각해 뒀나?”

“…없습니다.”

“그러면… 내 말을….”

그러나 칼리번은 말을 잇기 힘들 정도로 지쳐 버렸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스터의 몸에 스르륵 몸을 기댔다.

“이리저리 부려 대니 불쾌하다는 겁니다.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스터는 칼리번을 안아 들었다.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말을 따르는 건 그 몸이 에어리얼의 것이라서 그런 겁니다. 당신 따위가 아니라. 저를 부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말란 말입니다.”

칼리번은 이미 기절해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한참이나 더 투덜거렸다. 그들의 걸음 뒤로는 마물과 마물 혼혈, 인간의 시체가 뒤섞여 있었다. 그들 중에 무엇이 인간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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