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1. 전염(2)
12. 물거품 下
13. 꽃점
14. 함정
에필로그. 악몽의 끝
11. 전염(2)
날이 기울어 어느덧 밤이 되었다. 아침부터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치고 덕분에 오늘은 살짝 날씬해진 보름달이 떴다. 검은 하늘을 뻥 뚫은 하얀 달은 마치 외눈박이 거인의 눈동자 같았다.
“발견된 시체가 서른 구를 훌쩍 넘는다더군. 이야, 성안에 알테르의 잔당이 그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지.”
“정말 모든 시체가 적일까요?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죽이는 걸까요?”
“당연히 용병들이 수를 쓴 것 아니겠어.”
“그런 것치고는 신용병 연합 녀석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죠…. 애먼 저희만 성을 돌고, 또 돌고….”
병사들은 조를 이뤄 왕성을 순찰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마물 혼혈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늘어났다. 희생자가 인간이 아니니 우리는 손 놓고 있어도 괜찮지 않나? 싶지만, 리론 후작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사건을 이용해 왕실 재건 기사단이야말로 진정한 왕국의 수호자임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로 인해 비교적 여유로웠던 야간 경비 업무가 몇 배로 늘었지만 말이다.
왕실 재건 기사단에 속한 하찮은 병사들 처지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성 밖에는 붉은 오메가가 풀어 놓은 마물이 득시글거리니 사냥을 할 수도 없고, 최근 배급도 시원찮았다. 위급할 때 싸워야 하는 병사들조차도 배를 곯는 일이 다반사였다.
“신께서 천벌을 내린다고 생각하자고. 성녀님께서 저번 기도회 때 신의 가호라 그러시더만.”
“신이라…. 그분이 정말 계신다면 왜 진작 도움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가족이 모두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후임 병사는 애먼 달을 흘겨보았다.
병사들은 어둠에 물든 거리를 걸으며 잠을 깨기 위해 사소한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빗물이 고인 진흙에서 유독 질은 소리가 났다.
최근에서야 복구 작업이 시작된 도시는 부서진 그릇 같았다. 금이 좀 가거나 이가 빠진 정도가 아니라, 산산조각이 나서 원래의 모습으로는 도무지 돌아갈 수 없는 수준의.
지붕이 남은 가옥이 거의 없어 백성 대부분은 마물의 가죽을 뜯어 만든 천막을 짓고 그 아래에서 잠들었다. 이런 와중에 우기까지 시작되니 복구 작업은 더욱 더뎌지고 사람들만 속이 탈 뿐이다.
“그건 그렇고…. 이봐, 괜찮아?”
선임 병사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후임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보름달이 떴군. 자네는 쉬는 게 좋겠어.”
선임이 달을 보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딱히 신경 써 주는 건 아니야. 마물이고 마물 혼혈이고 피 냄새에 예민하니, 잘못하면 우리가 다음 표적이 될 수 있어서 그래.”
“하지만….”
“다음에는 내가 농땡이를 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선임 병사는 후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쟁터에서 주운 투구를 쓰고, 한쪽밖에 없는 건틀릿을 끼고, 가죽으로 갑주를 걸친 그들의 행색은 왕국 재건 기사단 소속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오늘까지는 함께 순찰하겠습니다. 조장님 혼자서는 위험하시니….”
“…잠깐만.”
“네?”
“뭔가 소리가 들렸는데?”
선임 병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후임은 곧바로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다.
“저쪽으로 가 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들은 날이 빠진 검이나마 단단히 쥐고는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처음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마물 혼혈이 죽은 현장을 드디어 발견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헐떡이는 소리가… 어딘지 이상했다.
“……으, 으응, 앗!”
소리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병사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인가 싶어 심장이 벌렁거렸는데 맥이 빠지고 말았다.
“하하, 아무래도 저희가 뭔가 다른 걸… 발견한 듯싶습니다.”
후임 병사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기도 힘든 좁은 골목길에서 두 놈이 달라붙은 채 들썩이고 있었다. 아니,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알파다. 전형적인 매춘의 현장이었다.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무리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다고는 해도….”
쯧, 선임 병사가 혀를 찼다. 남자가 알파에게 몸을 파는 일은 리론 후작이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행위였다. 걸리면 며칠은 기어 다녀야 할 정도로 모진 매질을 당한다. 알파는 용병 연합 소속이니 리론 후작의 처분에 벗어나게 된다. 그러니 죽어나는 건 남자뿐인 것이다.
얼마나 먹고살기가 힘들면 몸을 다 팔겠나 싶어 병사들은 되도록 이런 현장을 발견해도 눈감아 주었으나, 솔직히 저런 꼴을 보고 있자면 허탈해지기도 했다.
“흐앙, 아…앗, 좀 더, 아아…!”
사내의 천박한 신음이 좁은 골목 안에 부딪힌다. 병사들은 저 결합을 끊어 내야 할지 모르는 척해 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왕성을 감싼 보호막 덕에 당장 마물의 위협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인간들은 평화를 되찾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낙관이었다. 성안에서는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그중 하나가 남자와 알파 간의 매춘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마물 혼혈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지냈다. 인간들은 마물 혼혈을 마물과 다를 바 없이 두려워했고 배척했다. 마계에 갈 수 없는 마물 혼혈들은 왕국 곳곳을 떠돌았으나 그들에게는 용병일 외에는 그 어떤 직업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수년간 공동의 적을 두고 함께 싸우고 왕성 안에서 섞여 지내며 많은 부분에서 협력하는 일이 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고 수가 적다는 것을 이용하여 여러 여자를 아래에 두었다. 그런데 모든 종족이 한 공간에 공존하게 되면서 인간 남자의 처지가 미묘해졌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존재만으로 알파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알파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 사내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파를 피해 숨어 있다가 여자를 습격해 식량을 뺏어 가기에 이르렀다. 에레즈는 내부 약탈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그는 전장의 선두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실무를 맡은 리론 후작은 알파가 인간을 얕보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분노했지만, 인류의 번영을 위해 남자가 여자를 때리거나 취하는 행위는 퍽 용인하는 편이었다.
그런 인간 사내의 생존 방식도 여자의 수가 남자의 배를 넘으면서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소수의 사내는 마물 혼혈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여자를 대할 때와는 달리, 힘으로 이길 수 없었기에 공손하게.
신용병 연합에 속한 마물 혼혈들은 리론 후작이 아닌 데릴만의 지배를 받았고 배급도 따로 받았다. 여차하면 성 밖에 나가 사냥이 가능한 그들은 인간보다는 식량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리고 알파는 남자에게 오직 한 가지만을 원했다.
알파에게 운 나쁘게 노팅을 당하면 죽을 텐데도, 사내들은 당장 배가 고프게 되니 몸을 팔고 말았다. 궁지에 몰리고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밖에 없다. 마물 혼혈이 배척받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남자의 공포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세지만 말이다.
“으응…. 윽, 큭! 히익, 힉… 사, 살려 줘…!”
“뭔가 조금… 소리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사내의 신음을 듣던 후임이 눈살을 찌푸리며 어둠을 뚫어지게 살폈다. 사내와 알파는 무너진 벽 아래에 가려져 있어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광경을 처음 목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에 들었던 것과 달리 지금 헐떡이는 신음은 어딘지 절박했다. 결합을 깊게 하기 위한 허리짓은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후임이 한 걸음을 옮긴 순간….
사내를 붙잡은 채 쉴새 없이 성기를 처박고 있던 알파가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구멍에서 흐르는 정액과 피 냄새에 취해, 새로운 인간 냄새가 나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알파가 몸을 꿈틀거리자 한 줌의 달빛이 희미하게 그를 비췄다. 반 이상이 변형된 몸. 길게 늘어진 혀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땅에 닿을 정도였다.
“저… 적입니다!”
후임 병사는 허겁지겁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컥, 허억!”
그녀의 외침이 울려 퍼진 순간, 마물은 한쪽 팔로 사내를 움켜쥐어 제 성기를 몸 안으로 푹 찔러 넣었다. 마물의 성기를 전부 품게 된 사내가 몸을 경련했다. 마물은 사내를 한쪽 팔로 끌어안고는 제 가슴과 배를 가리며 세 발로 기어 오기 시작했다.
“흐, 흐억, 살려 줘! 살려 줘어!”
알파에게 꿰뚫려 벗어날 수 없게 된 사내가 울부짖었다. 알파에게 몸을 팔기 위해 밤늦게까지 어두운 골목을 배회한 벌이라기에는 다소 과했다.
“으윽…. 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상대는 일단 마물 혼혈이었으나 마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병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더구나 인질까지…. 이래서야 검으로 심장을 찌를 수가 없었다.
“젠장…. 하는 수 없지! 일단 되는대로 찔러 넣어!”
병사들은 원초적인 공포에 한걸음 물러났다가 이를 악물며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인질을 피해 마물의 목을 자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사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동귀어진이라도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병사들은 검날을 마물을 향해 세웠다.
“이, 이 괴물 자식…!”
“와! 젠장! 와라!”
병사들은 이를 악물며 대치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엄청난 기세로 기어 오던 마물이 골목 밖으로 단 한 걸음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뭐야? 왜 안 와?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와야 할 순간이 오지 않으니 병사들도 당황했다. 그렇다고 해서 적이 증발한 것도 아니었다. 전신 대부분이 마물화 된 적은 지금도 눈앞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투명한 벽에 막힌 것처럼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조장님! 저기를 좀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이 멈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달빛이 닿자 무엇이 마물을 붙잡았는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실…?”
선임 병사가 의아해하며 중얼거렸다. 적의 전신에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가는 실이 감겨 있었다. 그것은 작은 달빛에도 반응을 보이며 반짝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어둠 속에서도 실 가닥들은 마치 금을 녹인 것처럼 눈부셨다.
“으, 으어, 아아아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적의 외침과 함께, 마물과 인질은 동시에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심장이 내려앉을 듯한 끔찍한 비명이 골목 안에서 울려 퍼졌다.
“헉…. 허억….”
“윽…….”
극도의 공포에 굳어 버린 병사들은 감히 어둠으로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생각조차 엄두를 못 냈다. 몸이 산 채로 찢겨 죽어 가는 마물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처참한 시체는 전쟁터에서 질릴 정도로 보아 왔으니까….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였다. 신체 대부분이 마물화 된 알파가 반항조차 못 할 정도라니…. 저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
길게만 느껴졌던 마물의 비명이 멎었다. 골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밤의 고요가 지금처럼 두려운 적은 처음이었다. 다음 차례는 우리일까? 병사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턱까지 고인 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으, 으…….”
그때,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기어 나온다.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칼을 어둠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나 날이 비뚤배뚤한 낡은 검 끝은 형편없이 흔들렸다.
“흐, 크……. 흐으으….”
달빛에 드러난 형상은 괴물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뒤덮인 사내였다. 알파에게 몸을 파느라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채였기에 더욱 처참한 몰골이었다. 병사들은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무, 무사하십니까?”
“도대체 저 안에 누가 있었던 겁니까?”
병사들은 운 좋게 살아남은 사내에게 물었다.
“흐, 으흐흐…. 몰라…. 모르겠어…. 거, 거… 거미줄…밖에는….”
그는 흐느끼며 영문 모를 소리만 지껄였다. 자세히 물을 여유가 없었다. 언제 또 어둠 속에서 적을 해치운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병사들은 급히 사내를 업고 치료소로 향했다.
* * *
마물 혼혈의 시체가 알테르의 잔당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 그간 사람들은 의문의 강간이나 살해 사건이 일어나면 ‘알테르의 잔당이 벌인 일’이라 묻곤 했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체가 여럿 발견된 후로 그런 사건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살인 사건이 내부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이 놀랍고도 기괴한 살육에 대하여, 대부분은 신용병 연합 내의 알력 다툼이 원인이라고 했다. 밀린 녀석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린 것이라고….
최근 들어 인간 사내들이 알파에게 몸을 파는 일이 늘었는데, 거기서 치정 문제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알테르 프리드웬의 유령이 밤마다 돌아다닌다고도 했다. 전쟁에서 도망치고 성으로 숨어든 부하를 찾아 죽인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더없이 잔인했던 알테르가 마물 혼혈부터 도륙할 정도라니 그 얼마나 깊은 복수심이란 말인가!
백성들 사이에서는 천막이나 벽에 알테르 프리드웬의 초상을 그리는 행위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왕성 내에 들끓는 쥐의 피로 알테르를 그렸다. 어설픈 벽화는 왼쪽 눈을 잃지 않고, 흉터가 없는 에레즈 프리드웬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녀단에서는 우려할 만한 현상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신께서 인간을 돕고 있다고 가르쳤다. 알테르의 망령보다는 그편이 왕실 친화적이며 건전했으니까. 신용병 연합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우두머리인 데릴만을 기다리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그보다는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모두가 피로써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 * *
모체를 죽이고 태어나는 생명체는 예상외로 많다. 심지어 모체를 먹어 치우기도 한다. 기껏 낳아 준 입장으로서는 배은망덕하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번식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한 셈이니, 억울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 않으려 한다. 알파로 인해 인간 사내는 드디어 번식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암컷에게 구차하게 구애할 필요 없이 자식을 볼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 사내들은 죽지 않고 번식하고 싶다며 투정을 부린다.
…어처구니없는 점은, 그 투정이 통한다는 것이다.
‘알파와 인간 사내가 관계를 맺으면 남자 쪽이 죽게 되니, 이들은 절대로 함께해서는 안 된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왕국을 장악하기 이전에는 알파 중에서도 인간의 주장을 따르는 이들이 꽤 있었다. 인간에게 배척당하면서도 주변을 맴돌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들의 사고방식을 흡수한 탓이다.
그러나 후트벨은 달랐다. 겁많은 인간 사내들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영악함과 마물의 힘을 동시에 지닌 현명한 알파였다. 인간만 평화로웠던 그 시절, 그는 동부 용병 연합에 소속되어 있었다. 방어전을 치르며 평범하게 돈을 벌다가 러트에 들어서면 사내를 납치해 강간하고 여자는 죽였다. ‘마물이 습격했다’고 하면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후트벨은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무리를 지어 다녔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사실 자신과 같은 마물 혼혈이고 왕국이 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더없이 기뻐했다. 앞으로 사내를 더욱 쉽게 안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후트벨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알테르는 인간 사내를 따로 모아 관리했다. 번식할 가치가 있는 알파만이 사내와 잠자리를 할 수 있었는데, 선택받은 알파의 수는 몹시 적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니, 후트벨과 같은 불한당은 오히려 알테르가 집권하기 이전보다 더 사내 맛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것이 바로 후트벨이 알테르의 권역에서 벗어나 데릴만을 따르게 된 이유기도 했다.
때마침 동부 용병 연합의 우두머리기도 했던 데릴만은 알테르의 방식에 크게 반발하며 마찰을 빚는 중이었다. 그는 뜻이 맞는 알파들과 함께 알테르의 진영을 이탈하여 에레즈 프리드웬과 손을 잡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으로서는 데릴만이 꺼림칙했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붉은 오메가를 곁에 둔 알테르를 인간의 힘만으로 쓰러뜨릴 수 없었을 테니.
데릴만의 아래에 있던 후트벨도 자연스럽게 에레즈 프리드웬의 병사가 되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오메가가 있다면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성검이 있었다. 사람이고 마물 혼혈이고 그의 광휘에 이끌렸다.
에레즈는 자신이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며, 마물 혼혈이 아닌 인간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후트벨이 보기에 알테르와 에레즈는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서로 부정할지 몰라도 말이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인간을 싸고돌았다. 알테르는 인간을 알파를 관리하는 미끼로써, 에레즈는 보호해 주지 않으면 죽고 마는 애완 짐승으로써 말이다.
그건 그렇고, 후트벨은 슬슬 러트를 앞두고 있었다. 젊은 사내를 보면 범하고 싶어지는 것은 알파의 당연한 욕구다. 욕구를 억지로 참는 것은 조금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살려 달라며, 배가 찢어져 죽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는 사내를 억지로 벌리는 쾌감이란! 한 번 그 맛을 보면 다시는 인간 사내를 동료로 볼 수 없게 된다.
후트벨은 이번 러트 때도 반드시 교미하고 싶었다. 그즈음, 그가 에레즈와 알테르의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판 것도 그래서였다. 후트벨의 활약 덕분에, 알테르 프리드웬은 루다이벤강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후트벨의 배신으로 연합군은 인간 병사뿐만 아니라 마물 혼혈 또한 많이 잃었다. 후트벨 본인조차 전투 중에는 에레즈의 편이었기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와 뜻을 함께했던 동료 중에서도 죽은 이가 있었다. 그동안 교미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 온 후트벨이었으나 잠시나마 이 짓을 그만둘까, 하는 허무함이 밀려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후회도 잠시였다. 허무와 후회를 상쇄할 정도로 큰 포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을 인정받은 후트벨은 무려 붉은 오메가를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후트벨과 동료들은 인도를 따라 성 지하 감옥까지 내려갔다.
<설마 이제 이중 첩자는 쓸모없다며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후트벨과 동료들은 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어 보려 했다. 강한 척은 했지만 뻣뻣한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왕성의 지하 감옥은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아주 먼 옛날, 용병 연합이 세워지기 전, 인간들은 갓 태어난 마물 혼혈은 목을 베어 죽이고 어린 것들은 발견하는 족족 이곳에 잡아넣었다. 우기가 오면 물을 천장까지 채워 단번에 수백 명의 알파를 죽였던 것이다. 그 탓에 지하 감옥은 항상 눅눅했고 피를 머금은 이끼가 껴 있었다.
후트벨과 부하들은 자신도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붉은 오메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가장 낮고 깊은 감옥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나마 지상에 가까운 감옥은 인간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최하층에 자리 잡은 이 감옥은 층 전체가 텅 빈 채다. 중간중간 꽂힌 횃불이 아니었다면 새까만 어둠 속에 순장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복도의 끝, 가장 안쪽의 방. 불빛으로 가득 찬 방은 철창이 드리워진 창 너머로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후트벨은 홀린 듯 그 빛을 따라갔다. 감옥의 문을 열자 방 안에서 따스한 바람이 훅 불었다. 후트벨과 동료들은 본능적으로 그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헉…!>
그리고 몸이 굳어 버렸다. 후트벨뿐만 아니라 뒤에 선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후트벨 무리는 하나같이 2m가 넘는 장신에 근육질의 장정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힘은 더 강한 알파의 압박감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호흡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와, 가득 채운 오메가의 향기였다. 이토록 짙고… 달콤한 향기는 처음이었다. 알테르가 집권하기 전, 인간 귀족들이 애용했다는 향수도 이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후트벨과 동료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메가의 향기를 맡기 위해 숨을 크게 헐떡일 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것만 같았다.
<아, 거기.>
그때, 그들의 귓가에 나른한 목소리가 닿았다. 마치 오메가의 향기가 목소리로 구현된 것만 같았다.
<네가 후트벨이고…. 나머지는 부하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후트벨은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지하 최하층에 위치하는 만큼, 이곳은 감금을 위한 방이 아닌 각 감옥에서 죄인을 끌고 와 고문하는 용도의 방이었다. 끔찍한 기구가 늘어진 풍경은 여타 고문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감옥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화로가 놓여 있었다. 방 안을 환하게 비추는 거대한 불꽃이 잠시 그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감옥 안을 채운 이 향기는…. 설마 화로에 향유를 넣어 태운 것인가? 의심할 때였다.
<수고했어. 너희 덕분에 이번 전투를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어.>
거대한 불길 너머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길과 그을음 때문에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불꽃이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와도 돼.>
살벌한 감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오만한 목소리였다. 불길은 마치 후트벨이 제 노예라도 되는 양 부른다. 구를 대로 구른 용병으로서 굴욕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은 목소리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후트벨과 동료들은 홀린 듯 화로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것은….
<…큿…. 흐으….>
적나라한 교미 장면이었다. 아니, 교미라기에는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이것은 알파를 부르는 의식이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눈앞에는 두 사내가 나신인 채로 기묘하게 얽혀 있었다. 기묘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작고 가는 체구의 사내가 위에, 커다랗고 근육으로 감싸인 체격의 사내가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내는 피부색도, 체모의 색도 완연히 달랐다. 그 점이 알파들의 시선을 더욱 자극했다.
아래에 깔린 사내는 타오르는 불길에 그슬린 듯 짙었으며, 위에 선 사내는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했다. 거구의 사내를 깔아뭉갠 소년의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붉었다. 필시 저 하얀 사내가 ‘붉은 오메가’일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증오하고, 이 세상 모든 알파가 원해 마지않는 오메가.
<흐읍, 큽….>
한편, 붉은 오메가의 아래에 깔린 사내는 연신 신음만 흘렸다. 그것은 신음이 아니라 필사적인 호흡에 가까웠다.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마물이 그의 얼굴을 뒤덮은 채 제 성기를 박아 넣고 있었다. 그 탓에 후트벨과 동료들은 짙은 피부를 지닌 사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전신이 털로 뒤덮인, 멀리서 보면 귀가 없는 토끼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한 마물은 들썩거리며 사내의 얼굴에 제 몸을 세게 부딪쳤다. 사내는 조금이라도 숨을 쉬기 위해 목을 젖히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울대뼈가 울리고 성기가 지나가는 굴곡이 목선을 따라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털북숭이 마물은 까무잡잡한 사내보다 작았는데도 그는 도통 알파를 떼어 내지 못했다. 마물이 뒷다리로 사내의 목을 조른 탓이기도 했고, 사내의 팔과 다리가 모두 족쇄에 묶인 탓이기도 했다.
<아, 하아….>
한편, 커다란 사내의 위에 올라탄 붉은 오메가는 신음을 내뱉었다. 후트벨의 시선이 그들의 결합부를 향했다. 붉은 오메가가 제 몸집보다 커다란 사내의 무릎을 잡아 벌리고는, 허리짓을 하고 있었다.
오메가가 삽입을 한다?
마물은 기본적으로 남성형이다. 그래서 오메가도 좆을 가지고는 있었다. 그러나 알파처럼 사용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정확히는 알파처럼 사용해서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맞다.
후트벨과 동료들은 오메가가 사내를 범하고 있는, 이 진귀한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트벨은 오메가의 성기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님을 눈치챘다.
두 마리의 뱀이, 붉은 오메가의 몸에 감겨 있었다. 검은 뱀은 붉은 오메가의 성기를 통째로 삼킨 채였다. 오메가는 뱀에게 먹혀 두껍고 무거워진 성기로 사내의 뒤를 쑤시고 있던 것이다.
또 다른 뱀은 붉은 오메가의 허벅지에 감겨 있었는데, 긴 문신처럼 새겨진 뱀은 자연스럽게 뒷구멍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가 허리짓을 할 때마다 뒷구멍에 쑤셔진 뱀이 진동을 느끼고 같은 속도로 삽입 운동을 했다. 두 마리의 뱀은 모두 붉은 오메가의 몸속에 깊숙이 박힌 채로, 둘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해 주고 있었다.
<아읏…!>
붉은 오메가는 허리짓을 하며 앓는 소리를 했다. 허리를 깊숙이 밀어 넣을수록 검은 뱀이 붉은 오메가의 성기를 세게 깨물고, 뒷구멍에 박힌 뱀도 안을 파고들었다. 붉은 오메가에게 박히는 사내는 거대한 뱀에게 꿰뚫릴 때마다 몸을 뜰썩였다.
<아, 하아…! 흐응….>
<흐, 큽…. 헉, 커헉!>
둘은 함께 흔들리고 함께 신음했다. 붉은 오메가는 불 옆에 있음에도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아래에 깔린 사내는 뜨거운 불길과 쉬지 않고 계속되는 추삽질에 전신이 물에 빠진 듯 푹 젖어 있었다.
<커, 흑…. 욱……!>
붉은 오메가가 주는 쾌감에 사내의 탄탄한 근육이 비틀렸고, 활짝 벌어진 허벅지는 흔들거렸다. 두 사내가 엉킬 때마다 향기의 농도가 짙어졌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붉은 오메가쪽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후트벨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시선 또한 짙은 피부의 사내에게로 옮겨져 갔다.
‘제길,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잖아!’
감옥 안을 가득 채운 밀도 높은 향기에 후트벨은 절로 정신이 흐릿해졌다.
‘도대체 뭐냐, 이 강력한 향기는…?!’
후트벨은 뒤늦게 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몇몇은 자아를 잃어 두 눈이 어둡게 침전된 상태였다. 후트벨은 최대한 숨을 죽이려 했지만, 그 어떤 생물도 호흡을 안 할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매 순간 숨을 삼키고 내뱉어야만 했다. 후트벨 또한 점차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흐려지고, 마물처럼 멍청해짐을 느꼈다.
<하아, 아… 아아!>
<흐…으음, 읍! 으읍!>
절정에 이르자, 붉은 오메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허리짓을 빨리했다. 뱀이 내장을 찌르자, 그에 대한 반작용처럼 아래에 깔린 사내는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오메가는 털가죽이 깔린 바닥 대신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커다란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유독 번들거리는 사내의 가슴을 가득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로 하얀 액체가 흘러나왔다. 후트벨이 그 액체에 대한 의문을 품을 즈음, 붉은 오메가는 허리를 뒤로 빼고는 퍽, 퍽 소리가 나도록 박아 넣기 시작했다.
<어디서, 앙탈이야…. 너도 기분 좋으면서…! 아아, 흐읏…!>
붉은 오메가는 고운 얼굴을 찡그리며 동시에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쾌감에 익숙한 것 같았다. 몸을 거칠게 움직이자, 뒷구멍에 박힌 뱀도 따라서 빨라졌다. 뱀의 몸을 타고 붉은 오메가의 체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눈을 뗄 수 없는 외모와 결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흰 피부, 낭창한 몸…. 누구나 원하는 오메가였다. 그런 연약한 오메가가 알파와 다를 바 없는 체격의 사내를 힘껏 범하는 모습이, 이상한 성감을 자극했다. 아래에 깔린 사내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또한 성욕을 돋우는 요소였다.
꿀꺽, 후트벨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것은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화로의 불길 탓일까? 목이 탔다.
<하아…. 흣, 질질 쌀 줄밖에 모르는 돼지 새끼가….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 어서 알파에게 줄 상을, 만들어… 으응, 내야지…!>
붉은 오메가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웃음을 치더니 아래에 깔린 사내의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철썩, 살 때리는 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가슴이 하얀 액체에 젖은 탓에 소리가 더욱 컸다.
<흐응, 아아…!>
커다란 사내의 다리 사이에 허리를 깊이 밀어 넣은 채로, 붉은 오메가의 움직임이 멎었다. 화롯불이 오메가의 붉은 머리카락과 하나가 된 것처럼 일렁였다. 그 모습은 그대로 불꽃에서 태어난 악마 같았다.
<큽, 읍…. 우윽…!>
아래에 깔린 사내는 목구멍에 추삽질을 해 대는 다른 마물을 견디며 괴롭게 신음했다. 붉은 오메가가 그의 유두를 세게 꼬집었다. 연약한 오메가라도 그 정도 악력은 발휘할 수 있었다. 유두가 뜯길 것만 같은 고통에 사내의 허리가 휘었다. 붉은 오메가의 허리보다 굵은 허벅지가 양쪽으로 크게 벌어진 채 후들후들 떨렸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허벅지와 엉덩이의 근육을 보며 후트벨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저 정도 근육이라면… 분명 성기도 끊어질 만큼 강하게 조이겠지.
<으, 우으, 윽….>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오메가의 아래에 깔린 사내의 몸이 경련하더니 급작스럽게 사정했다. 팟, 묽은 정액이 보기 좋게 벌어진 배와 가슴 위로 퍼져 나갔다.
<하아, 하, 하하하…!>
그 광경이 붉은 오메가를 만족시킨 모양이었다. 오메가는 지친 얼굴로 웃었다. 쩌업, 그제야 두 사람의 결합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후우….>
붉은 오메가는 흐느끼는 사내의 몸 위에서 무릎으로 일어섰다. 뱀에게 잡아먹혀 거대해진 성기가 비로소 후트벨과 동료들에게 그 위용을 드러냈다. 뱀의 비늘은 오메가의 내벽을 자극할 수 있도록 솟아올라 있었고, 역겨울 정도로 컸다.
<후후….>
붉은 오메가는 하얀 손으로 뱀을 쓰다듬었다. 사내의 몸 안에 파정한 뱀은 부드러운 손길에 마지막 정액을 쭉 토해 냈다. 짙은 피부 위에 뱀의 정액이 흩뿌려졌다.
<……아, 으응….>
그러더니 붉은 오메가는 신음을 흘리며 제 성기를 집어삼킨 뱀을 서서히 뽑아냈다. 뱀은 오메가의 성기를 놓지 않으려는지 진흙처럼 질퍽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오메가가 두 손으로 잡아당기자 곧 찔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위로 밀려 올라갔다.
툭, 마침내 뱀이 떨어져 나가자 매끈하고 보기 좋은 오메가의 성기가 드러났다. 뱀의 길고 얇은 혀가 삽입되어 있었는지 요도는 퉁퉁 부어 있었다. 붉은 오메가는 제 성기를 사내에게 겨누고는 오줌을 누듯 긴 사정을 했다. 붉은 오메가가 쏟아 낸 묽은 정액은 쓰러진 사내의 배 위로 떨어져 뱀 마물의 정액과 엉망으로 섞였다.
<흣…….>
이어서 붉은 오메가는 뒷구멍에 박힌 뱀도 뽑아냈다. 뒷구멍에서 굵은 뱀이 빠져나가는 소리에 알파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사내의 얼굴에 들러붙은 마물을 떼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떨어뜨려 놓으니 눈도, 손도, 발도 없이 입과 성기만 달린 마물이었다. 탐욕을 위해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빨과 혀가 다시 그에게 박고 싶어 날름거렸다.
<커헉…. 허억! 하아, 하아….>
마침내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질식과 쾌감에 절여져 있었다. 눈물로 젖은 눈가는 짓물렸고 마물에게 짓눌린 얼굴은 붉게 물든 채 풀어져 있었다. 그는 화로의 불길과 붉은 오메가에게, 두 배로 사랑받고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눈앞의 광경에 이성을 잃었던 후트벨은 그의 얼굴을 보고 순간 정신을 차렸다. 붉은 오메가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미모는 아니었으나, 돌을 깎은 것처럼 단단하고 훤칠한 미남자였다. 만약 그들이 밖에서 만났다면 후트벨은 금방 그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후트벨이 처음 보는 눈빛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아악! 아, 아…!>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몰아쉬기에 여념이 없던 사내가 갑자기 앓는 소리를 냈다. 붉은 오메가가 가슴을 움켜쥔 탓이었다. 그는 짐승의 젖을 짜듯 자꾸만 커다란 사내의 가슴을 희롱했다.
자세히 보니, 사내의 양쪽 가슴은 모양이 조금 달랐다. 오른쪽 유두는 유륜 안쪽에 숨겨져 있는 반면, 왼쪽 유두는 퉁퉁 부어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날카로운 가시에 꿰뚫려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붉은 오메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유두에 걸린 가시를 뽑아냈다. 부푼 유두를 손끝으로 잡아당기자 흰 액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오메가다….’
후트벨과 동료들은 그제야 가슴에 얼룩진 액체가 정액이 아닌 젖임을 알았다. 그렇다는 말은, 이 커다랗고 까무잡잡한 사내가 붉은 오메가와 같은 오메가라는 뜻이었다.
감옥 안을 가득 채운, 지독할 정도로 짙은 향기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트벨을 비롯한 알파들이 속절없이 사로잡힌 것도 오메가의 향기가 눈앞의 그들처럼 뒤엉킨 탓이었다.
‘오메가가 둘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후트벨은 당황했다. 오메가는 대략 30년에서 50년 주기로 한 마리밖에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주기가 겹치다니. 오메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한 시대에 두 오메가가 함께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리 와.>
붉은 오메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트벨을 불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이 알아서 오메가에게 향했다. 오메가들은 냉기가 올라오는 지하 감옥의 바닥 위에 고작 짐승의 가죽 한 벌을 깔고 누워 있었다.
붉은 오메가의 하얀 피부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와 달리, 검은 오메가는 상처투성이었다. 몸에 자리 잡은 그 흉터는 원래의 피부색보다 한층 옅었다. 유두 또한 흉터만큼이나 색이 옅은 편이었다. 부풀어 오른 유두와 유륜은 그가 얼마나 붉은 오메가에게 시달렸는지를 여실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포상으로 이걸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보다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있나 보네?>
붉은 오메가는 눈웃음을 치며 후트벨에게 출렁거리는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검은 오메가를 바라보던 후트벨은 물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특정한 형태 없이 손안에서 출렁거리는 모양새는 용병들이 흔히 물주머니로 사용하는 것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맛을 봐.>
붉은 오메가가 명령했다. 후트벨은 곧바로 가죽 주머니에 입을 댔다. 첫입에는 살짝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다시 맛을 보고 싶어졌다. 한 모금을 더 마시자, 그것은 알파를 자극하는 더없이 미약이 되었다. 어느샌가 후트벨은 혼자서 게걸스럽게 가죽 주머니 하나를 다 비우고는, 손바닥에 남은 액체를 탈탈 털어 핥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후트벨은 갈증을 느꼈다.
<오… 오메가님….>
후트벨의 간절한 시선이 다시 붉은 오메가를 향했다. 그는 가죽 주머니를 하나 더 들고 있었다.
<안 돼. 네 부하에게도 나눠줘야지.>
후트벨이 눈이 벌게져 달려들자 붉은 오메가는 즉시 저지했다. 오메가가 자신을 거부하자, 거대한 체격의 후트벨은 숨을 쉬지 못할 만치 괴로워졌다. 후트벨의 몸은 이미 지하 감옥에 들어왔을 적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다.
<크윽….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후트벨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가죽 주머니를 동료들에게 건넸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메가의 향기에 파묻혀 의지를 잃은 동료들은 오메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바닷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셨고 그들은 곧 후트벨과 같은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직 러트에 들어서지 않았는데도 열이 돌기 시작했다. 오감이 예민해지며 근육과 뼈에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힘이 솟아올랐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최상의 상태였다. 이런 힘을 아무런 대가 없이, 오메가의 젖을 먹은 것만으로 얻은 것이다.
실제로 동료 중에는 근육이 부풀어 올라 옷이 찢어진 녀석도 있었다. 오메가의 향기와 젖을 맛본 그들은 오메가에게 복속된 노예에 불과했다.
화롯불이 일렁인다. 불을 담은 알파의 눈은 욕망으로 득실거렸다. 눈앞에 가림막 하나 없이 오메가들이 있다. 알파와 오메가의 향기는 서로를 자극했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창때의 알파들이 헐떡이며 러트에 들어서자 붉은 오메가는 나른하게 웃고 말았다.
<평생 오메가의 발끝에도 닿지 못할 너희들에게 기회를 줘 볼까. 어느 쪽을 원해?>
붉은 오메가는 물었으나 딱히 답변을 기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성기를 뻣뻣하게 세운 알파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도 당황하지 않은 것을 보면.
<……!>
반대로 검은 오메가는 또다시 교미를 해야 한다는 공포에 누운 채로 버둥거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족쇄에 이어진 긴 사슬이 잘그락거리며 소리를 냈다. 검은 오메가는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꼼짝도 할 수 없게 벽에 결박하지는 않았다. 몸부림을 칠 수 있게 풀어두는 편이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보기에도 훨씬 좋았다.
<하…. 아프게 만지지 말고, 천천히…. 으응…!>
알파들은 오메가들을 멋대로 움켜쥐었다. 붉은 오메가는 열기가 묻은 신음을 흘렸다.
<앗, 아앗…!>
붉은 오메가는 손가락으로 속을 휘젓는 알파의 품에 안겨 신음을 흘렸다. 그의 몸에서 뱀 마물의 정액이 주룩 흘러나왔다. 오메가들의 입구는 알파의 정액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창백한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정액과 어두운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정액은 정반대였으나, 똑같이 알파를 자극했다. 다른 알파의 정액을 빼내고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어야 한다는 본능만이 알파들의 전신을 지배했다. 후트벨과 일당들은 향기에 이끌리는 대로, 두 무리로 갈라졌다.
<급할 필요, 없잖…. 흐으음, 응…!>
붉은 오메가는 능숙하게 알파가 내미는 성기를 입에 물고 다리를 벌렸다. 무릎 사이로 알파가 자리 잡자, 가는 다리로 허리를 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기 차례가 오지 않은 알파는 붉은 오메가의 가슴을 입에 물거나 그의 손을 끌어당겨 제 성기를 흔들게 했다.
붉은 오메가는 기껍게 그들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하얗고 작은 손에는 우악스러운 크기였다. 벌써 혹이 부풀기 시작하는 성기는 위아래로 쓰다듬을 때마다 굴곡이 졌다. 붉은 오메가는 눈웃음을 치며 알파들의 성기를 정성껏 애무했다.
<하으, 아, 아앗…!>
붉은 오메가는 엎드린 자세로 성난 성기를 받아 냈다. 그전에 이미 뱀 마물의 성기를 삼키고 있었기에 삽입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쿨쩍, 쿨쩍, 성기가 몸속을 꿰뚫으려고 앞뒤로 오갈 때마다 접합부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동시에 붉은 오메가는 목 안쪽까지 밀고 들어오는 또 다른 성기를 흡입하듯 빨아들였다. 알파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메가에게 닿고 싶어, 그를 짓누르다시피 들러붙었다. 가녀린 몸은 거친 욕망을 받아들이기에는 부서질 듯 연약해 보였다. 실제로 알파의 성기가 배 속을 파고들자 성기의 모양대로 배 위로 불룩하게 음영이 졌다. 그럼에도 붉은 오메가는 허리를 흔들며 알파의 삽입을 도왔다.
알파 중 하나는 참다못해 붉은 머리카락에 성기를 감았다. 그의 귓가로 알파의 귀두가 부딪치더니, 정액이 귓바퀴에 고일 지경이 됐다. 몸속에 성난 성기를 쳐 댈수록 오메가의 몸은 열꽃이 피어오르듯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흐, 으으…….>
모든 과정이 순조로운 붉은 오메가와 달리 검은 오메가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오메가는 두 팔로 기어서라도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려 들었다. 그러나 욕망에 지배당한 알파가 눈앞의 오메가를 놓칠 리가 없었다. 더구나 검은 오메가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붉은 오메가보다도 짙었다. 그가 반항하며 향기를 퍼뜨릴수록 알파를 흥분시키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아, 아아…. 으아악!>
두 팔로 바닥을 기던 검은 오메가가 비명을 질렀다. 알파들에게 부러진 발목과 연결된 사슬이 붙잡힌 탓이었다. 차륵, 사슬의 소리와 함께 오메가의 몸은 다시 털가죽 위로 끌려갔다.
검은 오메가가 계속해서 반항하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뒤통수가 거세게 바닥에 부딪혔다. 검은 오메가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를 깔아 눕힌 알파들은 마구잡이로 몸 위에 올라탔다. 무게감에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검은 오메가는 수월하지 않은 상대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알파만큼이나 두 팔의 근육이 발달해 있었다. 알파들은 합심하며 검은 오메가의 양 팔을 무릎으로 짓눌렀다. 여기서 더 반항하면 그대로 부러뜨릴 용의도 있었다.
<하, 하지 마…!>
알파의 무게에 굵직한 흉통이 들썩거리고, 긴장한 근육이 도드라졌다. 검은 오메가는 허벅지에 힘을 주며 다리를 벌리지 않으려고 버텼다. 알파들은 각자 한 쪽씩 다리를 붙잡고는 억지로 벌렸다. 붙잡힌 발은 가슴 위까지 눌려, 몸이 반으로 접혔다.
<크윽…!>
검은 오메가는 알파들에게 입구를 훤히 보이게 되었다. 뱀을 받아 냈던 입구는 붉은 오메가의 뒤처럼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핥는 듯한 시선에 입구가 움찔거렸다. 거친 반항과 달리 둔부의 근육은 두려움에 바짝 긴장했는지 몸속에 담긴 정액이 밀려 나왔다.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정액이 입구 주변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 그만, 둬, 제발…! 으윽!>
검은 오메가가 외치자 다른 알파가 그의 입으로 성기를 밀어 넣으려 들었다. 검은 오메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입술 위로 핏줄이 솟은 성기가 비벼졌다. 그가 질색하며 아예 고개를 뒤로 젖히자, 알파는 튀어나온 목젖과 쇄골에 성기를 문질렀다. 오메가의 몸 어느 곳 하나 온전히 존재할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가 알파를 흥분시키는 흥분제일 뿐이었다.
<크읏…!>
검은 오메가의 잇새로 까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미 수도 없이 마물에게 범해진 몸이었다. 수치심은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검은 눈동자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알파들의 얼굴이 보인다. 욕망에 찌들어 자아를 잃어버린 눈동자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뇌에 각인하는 일은 마치 제 손으로 몸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
검은 눈동자가 한 사람에게 고정되더니, 번쩍 뜨였다.
<…후…트벨!>
검은 오메가, 아니, 칼리번이 외쳤다.
<후트벨…. 그래, 후트벨! 나, 나는… 네 이름을 알고 있다!>
칼리번의 외침에 후트벨뿐만 아니라, 다른 알파들과 얽혀 있던 오메가의 붉은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으, 흐으…. 나, 나를 정말… 모르겠나?!>
칼리번이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붉은 오메가 외에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었기에 그동안 칼리번은 말을 하지 않는 전략을 택했었다. 세상과 유리된 칼리번에게 붉은 오메가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했다. 붉은 오메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정신을 지배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을까? 칼리번은 자신이 ‘살려 줘’와 ‘그만둬’ 외의 언어는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분명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어휘를 구사하지 못해 어눌한 말투였지만 말이다.
<와… 왕자님……. 왕자님은, 무사한가…? 윽! 으읏! 크…. 제발, 내 말을……! 아악!>
칼리번은 더듬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말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후트벨은 바지를 내리고는 칼리번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끄윽, 흐읏…! 아, 아……. 큭, 아앗…!>
굵직한 성기가 몸을 가르자 칼리번의 허리가 휘었다. 후트벨이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 아아…. 그……만…!>
칼리번이 애원했다. 다른 알파들은 초면이었으나 후트벨만큼은 알았다. 활동하는 구역이 달라 함께 일한 적은 없었으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몇 년 전, 용병 연합에 보고를 올리러 갔다가 어깨가 부딪친 것을 계기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었다. 후트벨은 자신이 동부 연합 출신이라고 소개했었다. 젠은 그를 어떻게 아는지 질이 나쁜 녀석이니 굳이 상대하지 말라 했었다. 그 후로 실질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고 칼리번은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때는 발가벗은 채로 동료의 성기를 받아 낼 것이라고는 후트벨도, 자신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 제발…. 악…!>
칼리번은 동료의 성기가 어떤 모양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후트벨의 성기가 몸속을 꿰뚫고 올라올수록 구역질이 치밀었다. 마물과 교미를 했을 때와는 다른 고통이었다. 겉모습만 보자면 차라리 인간의 형태를 지닌 이들이 나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시 마물들로 득실거리는 방으로 던져 달라고 붉은 오메가에게 애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애원하면, 그는 기뻐하며 칼리번이 아는 사람을 더욱 불러들일 것이다.
<후우…. 하아….>
후트벨은 성기를 더욱 깊숙이 박아 넣기 위해 몸을 숙였다. 꿀럭, 몸속에 가득 찬 정액 탓에 칼리번의 배 속에서 우스운 소리가 났다.
<으, 윽…. 아악!>
후트벨은 혹이 난 알파의 성기로 칼리번의 몸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퍽, 퍽, 한 번씩 몸이 부딪칠 때마다, 한 번씩 칼에 찔리는 것만 같다. 칼리번은 알파의 몸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제발…. 제발 부탁이다, 내 말을…. 큿…! 으, 으윽…. 아, 하윽……!>
칼리번은 제 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는 알파의 손길에 진저리를 쳤다. 우악스럽고 커다란 손은 붉은 오메가의 손길과는 전혀 달라, 가슴을 터뜨릴 듯 세게 쥐어짰다.
금세 칼리번의 가슴 위로 붉은 멍이 피어올랐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거침없이 스치니 가슴이 화끈거리고 얼얼했다. 압박감에 젖이 가슴 위에서 줄줄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젖 줄기가 허공 위로 솟아올랐다. 유백색의 액체는 칼리번의 갈색 피부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알파들은 가슴 사이의 골과 오목한 배꼽에 고인 젖을 얼굴을 박고 빨아먹었다. 후트벨 또한 칼리번의 젖을 탐내며 빨아들였다.
<그, 분에게… 전해…. 으윽, 큭…!>
칼리번이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알파가 성기를 들이밀었다.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오메가가 자꾸만 성기를 거부하자, 성이 난 알파는 무릎을 대고 짓눌렀던 한쪽 팔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
칼리번의 팔이 멋대로 접혔다. 손은 아래로 떨어져 목에 닿고 팔꿈치는 허공에 들렸다. 전체적으로 탄탄한 몸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나 발달한 팔 근육이 드러났다. 알파들은 칼리번의 접힌 팔과 겨드랑이 사이로 성기를 들이밀었다. 칼리번의 팔은 허벅지처럼 알파의 성기를 압박하고도 남았다.
알파가 칼리번의 팔에 대고 추삽질을 할 때마다, 거대한 성기가 칼리번의 뺨을 찌를 듯 위협적으로 오갔다. 그의 몸에서는 알파의 풋내가 진동했다. 성기의 방향이 모두 칼리번을 향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에게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마… 마물은, 내가 낳은 마물이….>
전신이 범해지는 와중, 칼리번의 목소리만이 알파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도 만들지 못하고 맴돈다.
<만약…… 왕자님…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건…. 흐, 흐윽…!>
칼리번의 후트벨의 어깨 위에 두 발이 걸쳐진 채로, 그가 원하는 대로 흔들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칼리번의 목소리도 떨리며 흔들렸다. 성기에 마찰 당하는 피부가 벗겨질 듯 아팠다. 한쪽의 고통에 집중하면, 그사이 다른 곳으로 고통이 파고든다.
칼리번의 배 속을 오가던 후트벨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아래를 자극당하자 고통 사이로 피어오르는 쾌감에 칼리번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렇게 해서라도 오메가의 쾌감을 잊고 싶었다.
<내 의지가, 아니라고…. 아, 아…. 아앗…!>
그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읏……. 큭…!>
칼리번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이상 말을 했다가는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궁지에 몰리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원망. 구원을 바라는 구걸….
정욕에 물든 알파가, 붉은 오메가의 부하가, 말을 온전히 전해 줄 리가 없다. 차라리 자신의 바닥까지 닥닥 긁어내며 울부짖으면 잠시나마 편해질지도 모른다.
<…크, 윽….>
하지만 칼리번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두 눈을 감았다. 하체로 가해지는 열기가 배 속을 홧홧하게 했다. 오른쪽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콧대를 넘어, 다른 편의 눈물과 더해져 차가운 지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칼리번은 자신의 몸을 포기한 채 두 눈을 감았다.
화로의 불길은 크게 흔들리고 타닥, 소리를 내며 불씨를 지하 바닥으로 튕겨 냈다. 떨어진 불씨는 빠르게 식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때, 하얀 손이 체념한 칼리번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가는 손은 알파들의 손길과는 달랐다. 고난을 겪는 칼리번을 가엾게 여긴 신이 에레즈를 곁으로 데려다주기라도 한 것처럼….
칼리번이 눈을 뜨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저 입술이 맞닿을 뿐인… 가벼운 입맞춤.
<욱—!>
그리고 칼리번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비가 내려앉는 것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은 날카로운 칼로 변해, 그의 입술이 뜯어낸 것이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눈앞을 가득 채운 것은 피. …아니, 붉은 오메가였다. 그의 얼굴은 정욕에 물들어 있었다. 칼리번은 붉은 오메가의 너머를 보았다. 칼리번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몸에도 알파의 성기가 쉬지 않고 드나들고 있었다. 붉은 오메가는 알파에게 박히면서 두 팔로 칼리번에게 기어 온 것이다.
<후후…. 흐, 흐흐….>
칼리번이 바라보자 붉은 오메가는 두 눈이 풀린 얼굴로 히죽 웃어 보였다. 두 오메가는 알파에게 쉼 없이 박히면서도 두 눈으로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과 검은 눈, 그 너머로 비치는 자기 자신….
그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모든 것이 다름에도 이 순간만큼은 덧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점에서 완벽히 똑같았다.
<그동안 혀는 남겨 뒀는데, 읏, 으응, 잘 생각해 보니…. 하아….>
붉은 오메가는 제 입술에 묻은 칼리번의 피를 혀로 핥으며 속삭였다. 그의 몸 위로 화로의 불꽃이 끼얹어져 더욱 붉게 타올랐다. 마치 그 자체로 끊임없이 불타는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만 같았다.
<오메가가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 불길은 칼리번에게로 옮겨붙는다.
<그렇지…. 칼리번?>
칼리번의 얼굴 위로 에어리얼의 검은 그림자가 겹쳤다. 다시 입맞춤을 나눌 것처럼.
* * *
늦은 밤, 후트벨은 동료들과 근무를 교대했다. 기형 알파로 가득 찬 지하 감옥은 용병 길드에서 전적으로 관리 중이었다. 마물로 득실거리는 지하 감옥에 인간 간수를 두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던져 주는 격이었으니까.
후트벨은 오늘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동료들과 구역을 나눠 감옥을 순찰했다. 기형 알파라는 죄수의 특성상 탈출은 불가능했기에 형식상의 업무였으나, 최근 성안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사정이 바뀌었다. 게으름 피지 말고 관리를 엄격하게 하라는 오드론의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후트벨은 오늘도 건성으로 감옥 안을 살피고 죄수들을 훑어보는 정도로 일을 마무리했다. 뭘 굳이 세어 볼까? 어차피 매일 같은 얼굴, 같은 수인데.
“큭! 하나도 안 무섭다, 이 자식들아!”
후트벨은 괜히 창살 너머의 괴물들에게 주먹을 갈기는 시늉을 했다. 감옥 안 괴물들은 바위처럼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양 진영을 오가며 약탈을 일삼았던 후트벨은 자신이 머물 곳을 완전히 정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은 성미에 맞지 않았으나 그래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신용병 연합의 대장인 데릴만은 마물 혼혈 중에서는 처음으로 영지를 하사받았다. 인간 사내와의 혼인은 허락받지 못했지만 시간문제였다. 이 땅에 마물이 남아 있는 이상, 인간은 마물 혼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후트벨은 밤마다 자유로이 남자를 사고 있었다. 이런 흐름이라면 10년 후에는, 그도 사내를 양팔에 끼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순찰을 마친 후트벨은 간수들이 휴식을 취하는 방으로 이동했다. 이제부터는 시간마다 동료들끼리 돌아가면서 감옥을 한 바퀴 빙 돌면 된다. 그곳에는 먼저 순찰을 마친 동료들이 쉬고 있었다. 후트벨도 그들과 합류해 긴 밤을 새우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그들은 배급받은 빵을 물에 적셔 불렸다.
“이거 먹고 힘이 나겠냐고….”
“한동안은 어쩔 수 없다잖냐.”
“성안이 벌레 통처럼 인간으로 득실거리니 먹을 게 있어도 남는 게 없지! 그나마 우린 용병 소속이라 빵이라도 씹는 거 아니겠어?”
후트벨과 무리는 여전히 딱딱한 빵을 뜯어 먹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어둠 너머에서는 괴물들이 숨 쉬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들은 카드놀이를 하거나 돌아가면서 얕은 잠을 청했다. 탁자 한가운데에 놓인 램프의 빛이 불길하게 흔들리고, 그때마다 벽에 드리운 그들의 그림자도 흔들렸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와 실수로 술 대신 물이 들어찬 오크 통을 걷어찬 가죽화의 둔탁한 부딪침. 직, 직, 거리며 빵을 뜯어 먹는 소리.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한 야간 근무였다. 그들은 시간도 죽이고 내기도 할 겸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알테르의 망령이 부하들을 죽이고 다니는 걸까?”
한창 카드를 던지는 소리만 들리던 그때, 누군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 인마, 지금 몰렸다고 말 돌리는 거냐? 겁쟁이 새끼.”
“씨발, 그런 거 아니거든?”
알파 하나를 두고 비웃는 소리가 주변에 웅웅 울려 퍼졌다.
“글쎄다. 일단 높으신 분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알아야지.”
“알테르의 잔당이라고 해도, 결국 우리한테는 그놈이 그놈 아니냐.”
“그건 그래. 다 아는 얼굴이기는 하지.”
“그러니까 줄을 잘 타야 하는 거야. 진즉에 데릴만 님을 따랐어야지.”
용병들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알테르의 망령 때문이든, 동족 간에 알력 싸움이든, 결국 약해 빠졌으니 죽은 거 아니겠어?”
동족이 처참하게 살해되었음에도 평생 목숨으로 장사를 했던 이들이라 그런지 남 일처럼 심드렁해했다. 오직 후트벨만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카드만 노려보았다. 램프 안에 든 초가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오크 통에 둘러앉은 알파들의 그림자도 촛불을 따라 함께 흔들렸다.
“…….”
후트벨은 괜스레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는 그 이유가 손에 쥔 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판단했다. 고개를 까딱거리던 그는 동료의 등 너머로 쥐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멍청한 쥐새끼.”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고양이 소굴에 들어오다니. 후트벨이 낄낄거렸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동료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명해 봤자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후트벨은 생각 나름이라며 웃어넘겼다. 그사이 쥐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험한 말이 오갔지만, 그것도 잠시, 다들 눈앞의 카드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예민한 후트벨이었지만, 그들의 사이로 살며시 기어들어 오는 가는 뱀의 움직임은 미처 보지 못했다.
지하 감옥의 벽돌들은 서로 어긋나게 맞춰져, 벽에는 비뚤배뚤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금사는 그 선을 타고 들어왔다. 작은 빛을 받아도 쉬이 눈에 띄기에 그것은 집요할 정도로 그림자 밑에 머물렀다. 탁자 아래까지 도달한 금사는 다섯 갈래로 찢어지더니, 담쟁이넝쿨처럼 용병들의 다리를 감고 올라갔다. 알파들은 아무도 금사가 제 몸을 타고 오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야! 이 판 던질 거면 빨리 포기해! 괜히 한 판 더 할 시간만 까먹지 말고.”
“다음 순찰이 너라서 안달이 났나 본데…. 닥치고 기다리기나 해.”
후트벨은 고민이 컸다. 지금 쥔 패는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았다. 1에서 10으로 치자면 6 정도의 가치랄까? 상대가 저보다 높은 카드를 가지고 있다면 꼼짝없이 내일 식사를 빼앗기고 만다. 후트벨은 상대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탁자 밑에 붙여 둔 다른 카드로 바꿔치기할 생각이 만만했다.
“…음?”
눈동자를 굴려 탁자 아래를 힐끔거리던 후트벨은 씩씩거리는 동료의 다리를 보았다. …정확히는 다리에 감긴 실뭉치가 램프의 약한 불길을 받고 번뜩이는 광경을.
“저게 뭐지?”
“이봐! 시간 벌려고 딴소리하기냐.”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로….”
이상함을 깨달은 순간은 이미 늦은 뒤였다.
“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동료의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후트벨뿐만 아니라 잠에 취해 늘어져 있던 다른 동료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모두 동시에 다리가 잘렸다. 알파들은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해 나무 인형처럼 엉망진창으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히에엑?! 뭐, 뭐야…. 크아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다들 곁에 둔 무기를 잡거나, 본성을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그전에 양팔이 잘리고 말았다. 그들의 몸은 금사가 감긴 모양대로 여러 조각이 나 버렸다. 뼈와 근육이 깔끔하게 잘린 팔과 다리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어느 것이 누구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구별되지 않았다. 보통 인간들이라면 이미 충격으로 정신을 잃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용병 출신의 알파들은 몸을 회복시키려 노력하며 버둥거렸다.
“크윽…. 누, 누구냐!? 어떤 놈의 짓이야?!”
“설마 괴물 새끼들이…?”
그들은 기형 마물의 탈옥을 가장 먼저 의심했다. 그러나 죄수들이 득시글한 복도 쪽은 너무나 고요했다. 서너 마리의 죄수를 한꺼번에 가두고 있기에 어느 한 마리가 탈출을 감행했다면 소음이 발생해야 정상이었다.
후트벨의 눈동자가 팽팽 돌아갔다. 그의 눈은 파충류처럼 시야가 넓어 사각지대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적을 찾을 수가 없다.
“히, 히익…. 으아악! 사… 살려 줘!”
그사이 한 명이 금사에 온몸이 감긴 채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어둠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생살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동료들이 차례차례 어둠으로 끌려들어 갔다. 알파가 이토록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트벨은 바닥에 자빠진 채로 동료를 끌고 들어간 어둠을 주시했다. 램프의 빛도 닿지 않는 어둠 속,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 바닥의 틈은 피로 채워져 선을 그었고, 후트벨의 뺨과 옷깃을 적셨다.
순식간에, 후트벨 한 사람만이 남았다. 처음 그는 당하기 전에 적을 찾아 죽이겠다는 독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트벨은 알파의 본능으로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이 이미 도망칠 수조차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는 것도. 공포에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으… 흐…… 으아아악!”
두려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후트벨의 차례가 다가왔다. 예상했음에도 비명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후트벨의 몸이 어둠 속으로 질질 끌려갔다. 그의 몸이 부딪치면서 탁자와 의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챙그랑, 램프가 깨져 불씨가 퍼졌으나 주변이 핏물뿐이라 금세 진화되었다.
어둠을 향해 끌려갈수록 후트벨의 몸을 휘감는 금사는 더욱 늘어났다. 후트벨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나 거미줄에 잡힌 벌레처럼 온몸이 금사에 뒤덮여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히…이이! 커, 커헉!”
후트벨의 비명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질긴 살점이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만이 몇 번 더 들렸다. 바닥으로 피의 궤적이 퍼져 나갔다. 기형 알파들은 잠들지도 않은 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간혹 지상에서 분 바람이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오다 흐트러질 뿐, 더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 * *
신용병 연합의 명부에 기재된 알파가 조각난 시체로 발견되었다. 누가 보아도 사고가 아닌 살해였다. 더구나 한 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평소였다면 데릴만이 직접 나설 정도의 사건이었으나 지금 그는 성 밖에 있었다. 대리를 맡은 오드론이 현장에 방문했다.
“호오…. 이것 봐라? 제법이군.”
시체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으나 오드론은 동시에 감탄했다. 회색빛 눈동자는 시체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부하의 시체를 보면서도 적이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두다니,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었다.
희생자는 만만치 않은 실력의 용병이었다. 그런데도 시체에서는 어떠한 반항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반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살해당했다는 편이 맞다.
“…용병 연합에 이런 종류의 기술을 구사하는 자가 있던가?”
오드론은 영문 모를 기시감을 느끼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시체는 마치 고기를 잘라 놓은 것같이 깨끗하게 조각나 있었다. 어지간한 인간의 힘으로는 알파의 손가락 하나 자르지 못한다. 그러니 필시 마물, 혹은 같은 마물 혼혈의 소행이다. 그러나 마물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모두 지하 감옥에 갇힌 채였고 탈출의 흔적은 없다.
“마물의 피부는 약해 빠진 인간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이 좋은 녀석일지라도 짓이기면 짓이겼지, 이렇게 날카롭게 조각낼 수는 없을 겁니다.”
오드론의 부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가 있었다면 진작에 범인이 누구인지 다들 추론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가장 가능성이 커 보였던, 동료 간의 불화설은 빛을 잃고 말았다.
마물의 피가 섞인 용병들은 성미가 과격했으므로 종종 상해 사건이 발생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비슷한 힘을 지닌 녀석들이 싸울 때는 아무래도 자잘한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살해 현장에는 동강 난 시체만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다섯 명이 동시에 죽기도 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개체가, 반항할 틈도 없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는 뜻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힌 기형 알파들이 탈출했을 가능성은? 가장 처음에 죽었던 후트벨이 간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에 기사단에서 난리를 친 건도 있고 해서 가장 먼저 파악했습니다만…. 변동은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음….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오드론은 시체 곁에 몸을 숙였다. 우기인지라 하루걸러 하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건 현장은 금세 피가 빗물에 녹아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번 건은 후트벨이 죽었던 지하 감옥 이후, 빗물이 닿지 않는 몇 안 되는 현장이었다.
“부대장님?”
오드론이 시체 더미로 손을 뻗었다. 시체를 이리저리 주물럭거린 끝에 그가 거두어 낸 것은 고작 실오라기였다.
“흐음….”
오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로 물들어 시뻘겋게 보였으나, 그것을 횃불에 가져다 대니 숨겨진 반짝임이 드러났다.
“죽은 알테르 프리드웬이 배신자를 처단했을 가능성은?”
오드론이 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건 인간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헛소문에 불과합니다. 거기다 알테르의 목은 아직도 성벽에 걸려 있지 않습니까?”
부하가 꺼림칙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 알테르 왕자님께서는 위에 계시지.”
오드론은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부하의 시선이 그를 뒤따랐다. 저 멀리 성벽에 걸린 작은 세 개의 점.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별되었다. 죽은 알테르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깃발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럼, 다른 왕자님은 어때?”
“네?”
“최근에 그분을 자세히 본 일이 있나?”
오드론이 물었다.
“아, 에레즈 프리드웬 말입니까? 뭐, 저 같은 놈이야 왕자님을 자주 뵙지 못하지요. 늘 바쁘시지 않습니까?”
왕성 안의 알파들은 표면적으로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따랐으나 실제로는 왕자를 개나 닭 보듯이 대했다. 그들에게는 왕국 전체를 다스리는 에레즈보다 신용병 연합의 장인 데릴만이 더 우위였다.
“나는 회의가 열릴 때마다 그분을 뵙고 있지.”
오드론은 높이 들었던 고개를 숙여 벽을 보았다. 사건 현장의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인간들이 알테르의 원한을 피하고자 그려 둔 미신이었다.
“음…. 그러십니까.”
대장님께서 자랑이 하고 싶으신 건가? 부하는 오드론의 말뜻을 헤아릴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 알고 있나? 최근 그분께서는 놀랄 만큼 아름다워졌어.”
“네?”
“위화감이 들 정도로 말이야.”
얼굴을 뒤덮었던 흉터는 날이 갈수록 옅어지고 피부는 깨끗해졌다. 조금씩 자라는 금발은 우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윤이 돌고 빛이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오드론은 벽에 그려진 낙서에 손을 얹었다. 알테르의 왼쪽 눈을 덮은 오드론의 손이 아래로 죽 그어진다. 시체를 만지며 묻은 피가 그의 손길을 따라 길을 냈다.
* * *
에레즈는 평생을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둔한 자였다. 어릴 적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만났던 그 사람이 자신을 구해 주길 바라는 꿈.
꿈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에레즈는 그와 함께 이상하고 깊은 숲을 헤매게 되었다. 몹시 고된 여정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그를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 나약했기 때문이다.
다시 혼자가 된 에레즈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그 사람을 되찾는 꿈. 그 꿈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었다. 눈이든, 팔이든, 목소리든…. 무엇이든 바치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 에레즈는 해가 떠도 깨지 않는 영원히 이어지는 악몽에 갇혔다. 그곳에서 그 사람은 보호받지 못하고 온몸이 망가진 채 범해질 뿐이다.
어째서 꿈을 꿀 때마다, 희망을 바랄 때마다 더욱 잔인하고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일까?
에레즈는 그 이유를 안다. 자신이 눈을 감은 채,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높디높은 탑 위에서 줄곧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헛된 망상이나 하면서.
그럴 바에는 차가운 바닥에서 분연히 일어나 탑 아래로 추락했어야 했다. 칼리번을 괴롭힌 알테르 프리드웬을 죽이고, 붉은 오메가를 죽이고, 마물을 모두 없애 버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죽였어야 했는데.
결혼식에서 그 사람에게 구출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 사람에게 꽃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나무 아래에서 선잠에 빠진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 그의 품으로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강하고 단단한 품에 안기기 전에 땅으로 추락해서, 산산조각이 났어야 했는데….
에레즈는 눈을 떴다.
“칼리번…. 칼리번?”
에레즈는 악몽에서 깨자마자 버릇처럼 칼리번을 찾았다. 머릿속은 누군가 억지로 헤집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몸은 바닷물을 머금은 해면체처럼 축축 늘어졌다. 밤새 칼리번의 곁을 지키다 살짝 잠이 든 것이 수면의 전부였다.
<어쩔 수 없어. 너는 이 왕국의 구원자야. 원하는 대로 칼리번을 되찾았으니까 더는 자신의 살을 파먹는 행동은 자제해. 한 가지 일에만 빠져드는 거야 편하지…. 하지만 그걸 자제해야 하는 게 우두머리의 의무라고, 알겠어? 내가 돌아왔을 때 네 몰골을 보고 주먹을 쓸지 안 쓸지 정하겠어. 내 주먹이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겠지?>
젠은 자신이 없는 동안 밤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누누이 조언했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한 번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하지만 만약 칼리번이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곁에 자신이 없고 혼자뿐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에레즈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칼…. 지난 밤은 푹 쉬었어? 당신에게는 지난밤이 평안했다면 좋을 텐데….”
눈을 떴으니 다시 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할 일은 쌓여 있고 곧 수많은 사람이 ‘왕자님’을 찾을 것이다. 에레즈는 눈가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피로를 가라앉히고 칼리번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칼리번에게는 최대한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음…?”
칼리번의 손을 쥐려던 에레즈는 당황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단단하지만 따뜻한 칼리번의 손이 아니었다. 부드럽기는 했으나 어딘지 서걱거렸다.
에레즈가 쥔 것은 실뭉치였다. 에레즈는 그것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한쪽뿐인 눈을 매일 혹사한 탓에 잠에서 일어난 직후에는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실뭉치 정도는 구별할 수는 있었다. 그것은… 흡사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금사였다.
에레즈는 손에 쥔 것을 놓았다. 사르륵, 금사는 부드럽게 침대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에레즈는 이마를 짚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서….”
당황한 에레즈는 얕은 숨을 삼켰다. 칼리번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방은, 흡사 거미줄이 깔린 것처럼 온통 금사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금사의 진원지는 바로 에레즈 자신이었다. 하룻밤 새에 치렁치렁할 정도로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 버린 것이다.
“……윽.”
에레즈는 미간을 찌푸렸다. 깊게 생각하려 들자 다시금 머리가 아파졌다.
금사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마물이라는 증거였다. 에레즈는 금사를 제대로 조종하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탓인지, 그는 마물 혼혈이면서도 젠이나 데릴만과 달리 본성을 드러내면 자신을 잃어버리곤 했다. 8년 전, 그로 인해 칼리번을 여러 번 상처 입히기도 했었다.
에레즈는 나약한 인간인 자신도 싫었지만, 충동적인 마물로서의 자신도 싫었다. 또한, 백성들에게 알테르와는 다른 ‘인간’으로 보여야 했기에 이 힘을 최대한 봉인해 왔다. 일전에 겪은 알테르와의 전투처럼,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멋대로 본성이 튀어나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최근 들어 본성을 조절하는 기능이 망가진 것만 같다. 에레즈는 전투 중도 아니었으며 목숨이 위험하지도 않았는데, 잠이 들고 나면 금사가 멋대로 자라나 버리는 것이다.
“설마, 칼리번…?”
혹여나 금사가 칼리번을 해쳤을까 덜컥 겁이 난다. 에레즈는 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칼리번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에레즈가 잠들기 전 보았던 모습과 마찬가지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다만, 금사가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는 점만 빼고는.
“…다행이다.”
에레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왼손을 더듬거리며 칼리번의 몸에서 금사를 떼어 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금사는 주인의 의사를 따르지 않고 칼리번의 손목이며 발목에 넝쿨처럼 들러붙은 채였다.
“큭, 떨어져….”
에레즈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또 다른 본능이자 자아가 수치스럽다. 칼리번을 되찾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자제력을 잃어 가는 자기 자신이 한없이 더럽게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에레즈는 성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스스로 잘라 냈다. 일반적인 칼로는 금사가 잘리기는커녕 도리어 칼이 부러져 버린다.
치이익. 성검이 닿자 금사는 불에 타는 것처럼 연기가 피어올랐다. 잘라 낸 금사는 처음에는 여전히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지만, 사흘 정도가 지나면 평범한 머리카락이 된다.
에레즈는 근원과의 연결이 끊어져 꿈틀거리는 금사를 침대 밖으로 던졌다. 잘린 머리카락은 마력이 빠지면 한데 모아 태우고는 했는데, 요즘은 이런 일이 늘어 처치 곤란이었다.
“응…?”
손바닥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금사를 잘라 내던 에레즈는 길고 긴 머리카락의 끝에 무언가 묻어 있음을 깨달았다. 에레즈는 충동적으로 자른 머리카락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금사는 목이 잘린 뱀처럼 꿈틀거리면서도 속절없이 끌려왔다.
피였다.
금빛 뱀에게 묻은 피는 노골적이어서 지워지지 않았다.
“…….”
피를 보자, 뺨을 설핏 붉혔던 에레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에레즈는 가만히 자신이 벌인 살육의 증거이자 도구를 바라보기만 했다. 예전의 그는 금사를 역겹게 여겨 조금이라도 길어지지 않도록 짧게 깎아 내곤 했었다.
“속죄.”
그러나 그때와 달리, 지금의 에레즈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칼리번…을 지키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지금 이 순간에도 칼리번은 끔찍한 악몽을 반복하고 있다. 에레즈는 알테르를 무찌르고 왕성에 보호막을 생성했는데도 그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염치도 없이 왕성을 돌아다니는 쥐 때문이다. 자신과 알테르 사이를 오가며 이득만을 취한 쥐새끼들….
한 마리의 마물이 되어 아군을 찢어발겼으나 일말의 후회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만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렇지, 칼리번?”
에레즈는 잠든 칼리번을 보며 미소 지었다. 대답은 없다. 하지만 에레즈의 흐릿한 눈에 비치는 칼리번은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분명 칼리번은 그렇게 말했다.
그 증거로, 에레즈의 몸에 남은 흉터가 날이 갈수록 지워지고 있었다. 치유. 회복. 그것은 살해와 파괴와는 정반대의 속성이다. 가장 직접적인 예시로, 방어와 회복은 성녀들의 영역이며 공격과 살육은 마물의 영역이 아니던가?
그러니 분명… 악몽 속에 갇힌 칼리번이 이런 식으로나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속죄하라고.
* * *
로드덴은 이름에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듯 마물 혼혈이다. 사내의 배를 찢고 태어나는 마물 혼혈은 짐승처럼 떠돌다가 용병대에 주워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용병대의 규모가 작은 경우 대장이, 수가 많은 경우는 동료들이 붙여 주다 보니 명부에 오르는 이름은 대개 세 글자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때로는 죽은 선임의 이름을 가져다 쓰기도 했다.
신용병 연합의 인원 대부분이 성 밖으로 차출되고 영문 모를 살해 사건이 발생하는 지금, 그는 얼마 안 되는 귀중한 병력이었다. 데릴만을 대신에 신용병 연합을 이끄는 오드론은 성 내에 주둔한 알파의 인구가 적기에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로드덴은 그런 오드론의 방식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알테르의 망령이 무서워서 숨어 있으라고? 하! 돌아온 대장이 이 꼴을 보면 고개도 못 드시겠군. 오드론 녀석, 겁쟁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멍청한 놈, 우리가 아니면 누가 망령을 막겠어!’
벌레처럼 쪽수만 많을 뿐인 인간들이? 괜히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픽 쓰러져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래서 로드덴은 일부러 거들먹거리며 밤늦게까지 거리를 쏘다녔다. 소문 때문인지 성안은 빗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로드덴은 마치 밤의 주인이 된 것 같았다.
“순찰병은 아직인가…. 통 보이질 않는군.”
비가 거센 탓인지 평소에는 자주 마주치던 인간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 벽에는 짐승의 피로 그린 알테르 프리드웬이 로드덴을 노려보고 있다. 빗물에 그림 일부가 녹아 더욱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불길하게시리.
“밤새 돌아다녀도 아무 일도 없잖아. 다들 엄살만 떨기는…. 쯧.”
로드덴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벌어진 입으로 빗물이 우다다 쏟아졌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알파라고 해도 한두 시간은 잠을 자야 한다. 게다가 술을 먹고 비를 맞으며 쏘다닌 탓인지 더욱 나른했다. 그가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는 숙소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흠?”
로드덴이 빗물에 젖은 얼굴을 벅벅 닦았다. 횃불 하나 걸리지 않은 어둠 속에서도 금빛 반짝임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여태껏 수많은 마물과 싸워 온 로드덴이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어째서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으…. 알테르!”
로드덴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함을 질렀다. 순간적인 마비가 풀렸다.
“이 약해 빠진 자식! 네 놈이 진짜 알테르인지 알테르의 찌꺼기인지는 몰라도,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비겁하게 그러고 있는 거냐! 알테르 흉내가 내게 통할 것 같냐! 썩 꺼지지 못해!”
로드덴은 휘청거리는 금빛 유령을 향해 일갈했다. 인간들이 알테르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흔드는 건 아닐까 의심한 것이다. 만에 하나 죽은 알테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로드덴으로서는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겉보기와 달리 제법 성실한 용병이었다. 인간을 다소 우습게 여기기는 했으나 그들이 성벽 보수 작업을 할 때면 투덜거리면서도 무거운 목재를 옮겨 주거나 잔해를 치워 주곤 했다.
“제기랄…. 꺼지지 않겠다면 내가 꺼지게 해 주지!”
술이 거나하게 취한 로드덴은 어둠 속으로 무식하게 달려들었다. 멀리서 보기에 흐물거리는 실뭉치는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동족인지 인간인지 모르나, 묵사발로 만들어 무너진 광장에 걸어 두리라! 그러면 모두가 망령의 정체를 알게 되겠지.
철퍽, 철퍽, 두 걸음쯤 옮겼을까? 길 끝에 서 있는 상대는 아직 멀었다. 그러나 로드덴은 움직일 수 없었다.
“으, 뭐, 뭐야…?!”
로드덴은 제 몸을 훑었다. 손과 발에 가는 실이 엮여 있다. 바뀐 것은 고작 그뿐인데도 로드덴은 굵은 쇠사슬에 전신이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 으, 어어어?!”
쿵! 두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당겨지고 거구의 사내는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뒤통수가 깨질 듯 아파 왔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로드덴의 몸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착지는, 그가 허수아비라고 여겼던 망령….
‘젠장! 진짜 알테르의 망령일 줄이야! 이대로 가다간 나도 당하겠군!’
비로소 정신을 차린 로드덴은 속박을 끊어 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철갑옷처럼 단단한 피부는 그의 자랑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무리 피부를 강화해도 금사가 끊기기는커녕, 도리어 근육을 파고들었다.
“윽…. 아아악!”
로드덴이 끌려가는 흔적은 진흙 길 위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리고 지금, 그 흔적에 피가 더해졌다. 한번 피 맛을 본 금사는 꿈틀거리며 알파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악! 으어어어!”
선명한 고통이 그어지는 와중에도 로드덴은 시시각각 알테르의 망령에게 가까워졌다. 유독 창백한 발이 눈에 띈다. 유령은 폭우가 쏟아지는 중인데도 맨발로 서 있었다.
“크으…!”
로드덴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알테르의 망령이 방심하는 순간 달려들기로 결심했다. 그에게는 아직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이 남아 있었다. 망령인 척하는 알테르의 잔당 새끼가 달려드는 순간, 단번에…!
“어헉?!”
그러나 예상과 달리, 로드덴의 몸이 번쩍 들렸다. 이토록 가는 금사에게 거구의 사내를 들어 올릴 힘이 있다니 로드덴조차 놀랐다. 질질 끌려온 탓에 몸에서 뒤통수와 등, 다리에 묻은 진흙이 뚝뚝 떨어졌다.
빗방울처럼 허공에 뜬 로드덴은 두 눈을 부릅떴다. 위험을 감지한 그의 몸이 변형되며 송곳니와 발톱이 빠르게 자라났다. 날카롭게 벼린 금사가 저 멀리서 그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날아왔다.
“으악!”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털썩! 금속성의 번쩍임과 함께 금사에 감긴 로드덴의 몸이 순식간에 자유를 얻었다. 로드덴은 몸을 뒤틀어 날렵하게 착륙했다.
“대장님께서 해가 진 이후에는 외출을 금지했을 텐데. 하여간, 생긴 것처럼 더럽게 말을 안 듣는군.”
로드덴에게는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동족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허억…. 뭐야, 구해 주는 건가? 오드론도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군.”
로드덴은 몸에 박힌 금사를 뽑아내며 주변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실루엣들이었다. 분명 신용병 연합의 실력자들이다. 그들은 너저분한 로드덴과 달리 마물을 상대할 때처럼 철저하게 무장한 상태였다.
“저건….”
“그렇군요. 역시 오드론 님의 예상대로인 것 같습니다.”
알테르의 망령을 보게 된 알파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무리 중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눈짓을 했다. 그 차이를 읽어 낸 것일까, 말없이 일렁이던 금사가 뻗어 와 그들을 덮쳤다.
“으허억!”
하울링을 통해 다른 동료들을 불러내려던 알파가 가장 먼저 쓰러졌다.
“으윽…. 칫, 그럼 이거라도!”
불시에 공격을 당한 알파는 뚫린 배를 지혈하기 전에 서둘러 제 팔을 잘랐다. 땅에 떨어진 팔은 마치 별개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금사가 끝도 없이 뻗어 나가 잘린 팔을 쫓았다.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전략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예상보다도 훨씬 다채로운 금사의 움직임에 누군가가 급하게 외쳤다. 여럿이 되어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여전히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로드덴은 혀를 찼다. 도망도 칠 수 없는 상황이니, 싸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일시에 알테르의 망령에게 달려들었다.
* * *
최근 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눈을 감았을 때와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날도 그랬다. 에레즈는 비에 푹 젖은 채로 무너진 건물 사이에 서 있었다. 쏴아아…. 거센 빗소리에 다른 소리는 묻혀 들리지 않는다. 비가 거세지면 왕성 재건 기사단도 순찰을 잠시 미룬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마물 혼혈로 ‘오해’받을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착각하는 일은 결코 없으니까.
에레즈는 고개를 숙였다. 발아래에는 시체가 있다.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처럼 조각난 시체를 휘감은 것은 금빛 넝쿨이었다. 금사는 희미한 달빛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빛을 냈다. 지금 이곳에 누군가가 있다면, 멀리서도 에레즈임을 알아볼 것이다. 어둠에서도 찬란한 금발과 보석안은 프리드웬 왕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에 피의 점성은 빠르게 묽어졌다. 핏물이 땅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가 내려도, 주변에 남은 핏자국은 모조리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지?’
에레즈는 시체에게 물었다. 죄가 있으니 이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
속죄.
속죄를….
“…!”
흐릿하던 에레즈의 눈에 순간, 초점이 돌아왔다.
“아윽…! 머… 머리가…. 읏!”
이지를 되찾자 머리가 깨질 듯 울렸다. 에레즈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질질 끌리는 긴 금발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기 딱 좋았다.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몰골…. 에레즈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알테르 프리드웬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에레즈는 떠났으나 그 자리에는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굵은 비가 아무리 내려도 금사는 진흙에 고인 채 반짝거렸다. 그때, 쥐라고 하기에는 큼지막한 것들이 끽끽 소리를 내며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먹이도 아닌데 금사를 냉큼 집어삼켰다.
* * *
방 안은 고요하다. 칼리번은 아무런 변화 없이, 처음 이 방 안으로 옮겼을 때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젠은 말했었다.
“칼. 요즘에 나는…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곁에 앉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그는 잠든 칼리번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헤어진 기간 동안 겪은 일, 지금 성안에서 벌어지는 일,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 되도록 좋은 소식만을 고르려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에레즈의 얼굴은 유독 지쳐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고단해하고 고통받을수록, 도리어 그의 미모는 파리한 아름다움을 더해 갔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마지막으로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목숨이 끊어질 듯한, 그런 아름다움이.
“최근 들어 기억이 끊기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 보면 갈 일이 없는 장소에 있기도 해. 단순히 피곤한 탓이거나 몽유병인 줄 알았는데….”
뒷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반드시 보게 되는 것은 시체였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몇 차례나 반복되었고 무엇보다, 꿈을 꾼 후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죽었다는 보고를 듣게 된다. 처음 보고는 알테르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마물 혼혈이었다. 에레즈는 안심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꿈속에서 본 듯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
모든 일이, 칼리번의 꿈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칼.”
에레즈는 그의 손을 쥐었다. 은은한 온기가 손안에 감돌았다. 이걸 되찾기 위해 8년을 헤맸다. 간신히 쥔 것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킬 거야.”
에레즈는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한 맹세를 되뇌었다.
<붉은 오메가가 칼리번을 그냥 버리고 갔을 리가 없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젠이 던진 비수는 가슴 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처음 들은 이후로, 가시처럼 심장에 박혀 빠지지 않던 그 말.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계속 남아 곪아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칼리번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몰라. 겉모습만 멀쩡하고 속은 텅 비었을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나 확실하게… 칼리번 그 자체인걸요.
에레즈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면…. 에레즈는 칼리번과 한 번 맺어진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일까? 젠에게는 말하기 힘들었지만,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여기 잠들어 있는 칼리번이 붉은 오메가가 만든 가짜 형상이 아닌, 진짜라고.
실제로 붉은 오메가는 왕성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칼리번을 빼앗기 위해서임이 틀림없었다.
“지난 8년을, 당신을 찾기 위해 살아왔어. 그러니 반드시… 당신을….”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을 세게 쥐었다. 평소에는 깨질 듯 약하게 쥐었으나 오늘만은 절박했다. 놓치면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라도 할 것처럼….
지난 세월, 생사조차 확인 불가능한 칼리번을 찾아 헤매며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다. 에레즈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왕자님!>
칼리번만을 떠올려도 부족한 지금,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작고 비쩍 마른 여자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뒤늦게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저, 왕자님께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요!>
아이가 내민 것은 반쯤 썩은 사과였다. 데릴만과 동맹을 맺기 전, 성검 하나만을 들고 알테르에게 점령당한 영지를 급습하던 시절이었다. 구해 낸 백성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마물과 야적들에게서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주먹만 한 땅 하나 없는 에레즈와 백성들은 고된 행군에 지쳐 흙바닥에 주저앉거나 나무에 기대며 쉬고 있었다. 열악한 상황이니만큼 물자 하나도 귀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한사코 제 몫의 음식을 에레즈에게 주고 싶어 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아직 소년에 가까웠던 에레즈는 망설였다. 눈짓으로 젠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그녀는 좋은 시험이라고 생각했는지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왕자님! 아직 어린아이다 보니 뭘 몰라서….>
아이의 어미가 대신 사죄했다.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고 지금이고 왕 노릇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두 사람은 물러나질 않았다. 아이의 어미도 은근히 받아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
당황한 에레즈는, 뛰어난 언변으로 꼬마 아이를 설득하지 못했다. 입을 잘못 열면 오히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고맙구나.>
에레즈는 망설이다 결국 아이의 선물을 받아 들었다. 아이는 기뻐했다. 아이의 어미도 기뻐했다. 어른이고 아이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상황이었는데도.
에레즈는 과실을 반으로 쪼개, 멀쩡한 부분을 돌려주고 썩은 부분을 자기가 가졌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이는 만족한 듯 어미와 함께 돌아갔다.
…저 반 조각의 과실을, 둘이서 나눠 먹겠지.
둘이서…. 에레즈의 시선이 한참을 그곳에 고정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에레즈가 마치, 마물 혼혈에게는 불가능한 개념인 고아처럼 보였다.
<오, 멋진데? 더듬거릴 줄 알았더니만 그럴듯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대하면 되는 거야. 최대한 멋있어 보이게. 젠이 다가와 에레즈의 행동을 평했다. 에레즈는 썩은 과일을 바라만 보다가, 한입 깨물었다.
<그걸 굳이 먹을 필요는…?>
에레즈를 칭찬하던 젠이 기겁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껍질까지 모조리 씹어 삼켰다. 맛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에레즈는 멈출 수 없었다.
검은 숲에서 숨어 지내던 당시, 칼리번이 자신과 함께 무엇을 먹었던가?
칼리번이 무언가를… 먹었던가.
나약하고 어리석은 에레즈는 그의 입장이 되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데리고 방황하면서, 에레즈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먹여 살리는 것이 더없이 힘들다는 사실을 배웠다. 마물이 우글거리는 숲에서 칼리번은 어떻게 자신을 먹여 살렸던 것일까? 에레즈는 울지 않기 위해서라도 썩은 과실을 씹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그는 언제나 칼리번만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과일을 나눠 주었던 작은 아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마음에 두면 죄를 짓기라도 하는 것처럼.
<왕자님. 알테르의 압제로부터 저희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흩어져 있겠으나 필요할 때 저희를 찾아 주십시오. 왕자님의 부름이라면 언제든 응하겠습니다.>
각지에 고립되어 있던 성녀들을 구출하자, 그들은 성검의 전설을 널리 퍼뜨렸다.
<인간 농장 기습이 성공한 후, 많은 사람이 왕자님과 함께 싸우고 싶어 합니다. 땅굴을 파고 숨어 있던 그들을 지상으로 불러내다니, 왕자님께서 이끄신 기적입니다! 신께서 아직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지요, 왕자님을 저희에게 보내 주셨으니까요.>
에레즈가 상처를 입을수록 더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인간들은 에레즈를 숭배하고 우러러보았다.
<왕자님! 저는 리론 가문의 가주인 니콜라스 리론이라 합니다. 왕국이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빼앗기기 전에는 후작의 지위였던 지라, 다들 저를 리론 후작이라 부르옵니다. 이쪽은 왕실 재건 기사단의 기사 단장이자 제 아들인 알버트 리론입니다. 저희는 왕자님의 깃발 아래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수가 늘어나니 병사와 무기를 갖춘 저항 세력들이 소문을 듣고 몸을 의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레즈 프리드웬은 연합군의 중심이 되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번드르르한 말에 속아 칼날을 들이민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 이제는 어느 쪽이 옳은지 깨달았습니다, 왕자님! 저희도 예전에는 인간들을 지키는 용병이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알테르와 틀어진 알파들도 에레즈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년을 버티자 알테르의 군대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전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이 모였다.
그러나 에레즈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병력이 갖춰질 때마다 부나방처럼 뛰어들었다. 알테르와 비교해 경험도, 실력도 부족했기에 승리보다 패배할 때가 더 많았다. 에레즈의 잘못된 판단, 부족함 때문에 수많은 사람과 마물 혼혈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도 그가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이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자님. 부디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선포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왕자님의 업적입니다. 왕자님께서 앞장서서 저희를 이끌어 주셨기에, 더러운 마물을 몰아내고 성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에레즈 전하 만세!>
<만세!>
<앞으로도 계속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에레즈는 알테르의 목을 베고 성문을 열었다. 마물에게 시달리고,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이 마침내 편히 쉴 집을 되찾은 것이다.
<밖에 나가면 그런 일 외에도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왕자님께도 맞는 일이 있을 겁니다.>
언젠가 칼리번이 했던 말대로였다. 탑에서 나온 이후 에레즈는 작게는 생존을 위한 집안일부터 크게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정책까지, 수많은 일을 겪었다. 해 보았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잃었다. 수많은 관계를 맺고, 풀기도 했다.
“칼…. 당신 말대로, 무엇이든 해 보았어. 당신을 지키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다 해 봤지.”
자유롭지는 않았고 딱히 나한테 잘 어울리는 일도 없었지만. 에레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당신 덕분이야. 그날 당신이 목숨을 걸고 나를 숲에서 탈출시켜 준 덕분에…. 그 덕분에….”
간절한 고백이 이어질수록 에레즈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이 뭉개져 갔다.
<…하지만 에레즈, 넌 왕이 될 거야. 네 삶은 칼리번을 구출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에레즈는 칼리번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성검의 날이 에레즈의 얼굴 일부를 비추었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 붉게 충혈된 눈과 마주 보게 되었다.
“……윽…. 큭….”
에레즈는 이를 악물었다. 성검의 날이 칼리번의, 정확히는 칼리번의 심장을 향한 채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오메가를 죽여라.>
이 순간, 어째서인지 알테르 프리드웬의 저주가 에레즈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것은 경고였을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에레즈는 머릿속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칼리번의 곁에서 간호 중이었는데, 정신을 차리면 평소에 발길이 닿지도 않는 장소에 멍하니 서 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칼리번의 악몽이 아닌,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복수하는 꿈을 꿀 뿐이라고. 그러나 환상 속 존재를 죽였더니 현실에서도 시체가 나왔다. 시체의 수는 나날이 늘어갔다. 희생자는 악인이었다. 그러니 괜찮겠지. 백성들을 위협하는 알테르의 잔당, 혹은 칼리번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군이 죽었으니까….
문제는 더는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느샌가 에레즈는 칼리번과 전혀 관계없는, 알파들마저 죽이고 말았다. 피가 번지는 방향은 순식간에 인간에게도 향할 것이 분명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오메가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알테르의 목을 베기 전에 마지막 말까지 들었어야 했을까?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분명 원인은… 여기에 있다. 성검이 바로 목 아래에 닿았는데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편히 잠들어 있는 이 사내에게 말이다.
에레즈는 수백 가지의 이유를 들어 칼리번의 무고함을 설파했지만, 성검은 결국 그를 심판대에 올렸다. 이대로 묵인한다면, 그다음으로 성검은 자신의 목으로 향할 것이다. 실제로 성검은 에레즈의 마물화가 가속화 때마다 그를 태움으로써 벌했다.
<성스러움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지키고, 폭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벌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검을 쥔 대가로 듣게 된 예언과도 관련이 있겠지.
마치 자기 자신이 금사에 묶인 것처럼 에레즈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성검을 들고 있을 뿐이었지만 실상은 온 힘을 쏟아 검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흐, 으으…. 윽….”
속죄, 속죄해야만 한다. …성검을 내리꽂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명령은 에레즈의 머릿속을 지배한 지 오래였다. 에레즈는 오직 칼리번을 위해 살아왔다. 그런데… 눈앞의 칼리번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한다.
“……으윽!”
챙그랑!
알테르의 목을 베었던, 에레즈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귀한 무기가 아무런 예우 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못 해.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당신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을…. 내 손으로….”
에레즈는 성검의 곁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죄인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는 흐느끼지 않기 위해 한참이나 숨을 참아야만 했다.
“미안…. 미안, 해……. 칼, 당신은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 주었는데,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하다니….”
에레즈는 무릎으로 기어 칼리번의 손에 매달렸다. 한 손을 잃은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을 잡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칼리번의 손등 위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도 믿고 싶다. 일련의 사건은 칼리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그저 자신이 미쳐 버린 것이라고….
“…스승님이 돌아오면 이곳을 떠나자.”
에레즈는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그를 위해서라면 왕의 의무도, 백성들도, 성검마저도 버릴 것이다. 칼리번이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포기한 것처럼.
“단둘이서…. 누구도 찾지 못할 장소로 가자. 마물도, 마물의 피가 섞인 자들도 더는 당신에게 손댈 수 없게. 만일 그런 장소가 없다면…. 평생을 헤매도 상관없어.”
당신과 함께라면 그것마저도 행복할 테니까. 그는 잠든 칼리번이 혹여나 두려워할까, 최대한 부드럽게 속삭였다.
* * *
식도와도 같은 긴 어둠이었다. 산채로 짐승에게 집어삼켜진 것처럼 눈앞이 좁고 까마득하다. 헤어 나오려 할수록 소화액에 몸이 젖어 서서히 녹아 갔다.
<나마저 이용하려 들다니, 우스울 지경이군.>
누군가의 헛웃음이 들렸다. 그 목소리는 에레즈와 비슷했으나, 에레즈보다 일찍 세월의 흐름을 맞이한 탓인지 더욱 낮게 울려 퍼졌다.
<아, 읏, 으응…!>
그리고 칼리번의 곁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붉은 오메가가 있었다. 붉은 오메가의 얼굴은 열기에 물들어 붉었고 정사의 여운으로 전신에는 미혹이 감돌았다. 칼리번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네 발로 엎드린 그는 알파를 뒤로 받고 있었다.
그런 붉은 오메가의 허리를 감은 것은 마물의 커다란 앞발이 아닌 금사였다. 그 탓에 붉은 오메가는 마치 스스로 허리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메가의 뒤를 범하는 결합은 깊어지다가 얕아지기를 반복했다. 붉은 오메가는 신음을 칼리번의 몸 위에 뱉어 내며 끝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래를 범하는 추삽질은 점차 빨라졌다.
<흐읏, 하, 아앙, 더, 더…!>
절정을 앞둔 오메가는 알파를 재촉하며 교성을 내뱉었다. 배 속을 가득 채운 알파의 성기는 작고 마른 몸에는 버거울 정도로 컸다. 그 때문인지 알파의 성기는 붉은 오메가의 몸을 전부 꿰뚫지 못하고 기둥이 드러난 채였다. 금사를 이용해 추삽질을 하다가도, 알파는 붉은 오메가의 허벅지를 쥐고는 성기를 일부러 밀어 넣었다. 내장을 짓누를수록 쾌감은 고통만큼 깊어졌다.
알파에 의해 부서질수록 기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오메가의 본능이었다. 높이 쌓아 올린 쾌감이 무너지는 그 순간이,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코앞이었다. 그러나 붉은 오메가의 몸속을 맛보던 성기는 끝을 보지 않고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아! 흐으읏…!>
마치 검집에서 검을 뽑는 것처럼 알파의 성기가 천천히 오메가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러자 연결이 풀어진 충격에 오메가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굵은 혹이 입구를 빠져나올 때는 성교에 능숙한 붉은 오메가조차도 허리를 뒤틀며 괴로워했다. 애액이 덧발라진 성기는 횃불의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에서 유독 번들거렸다. 오메가의 몸속에서 사정하지 않은 탓에 혹과 핏줄이 흉측하게 솟아올라 흉측한 모습이었다.
<하아아….>
칼리번의 가슴에 뺨을 기댄 붉은 오메가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붉은 오메가는 다리를 벌린 채 칼리번의 몸 위에 쓰러졌다. 마르고 가는 몸이었기에 힘없이 늘어져도 칼리번에게는 큰 무리를 주지 않았다. 근육으로 단단하게 차오른 가슴이 간질거리는 숨결에 금세 축축해졌다.
<…흐응….>
쾌감으로 흐릿해진 붉은 눈이 한 지점을 빤히 바라보았다. 칼리번의 가슴 가운데에 툭 튀어나온 유두였다. 유륜 안쪽에 숨어 있던 그것은 이제는 빨아 주지 않아도 밖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마물에게 가슴을 내어 주었는지를 알려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붉은 오메가는 아무렇지 않게 칼리번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붉은 오메가의 머리 위에서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이어지던 숨이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설령 지금 당장 에레즈 프리드웬이 칼리번을 구출한다 한들, 온갖 알파에게 노팅을 당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붉은 오메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더니 탄탄한 가슴을 덥석 입에 물었다. 칼리번은 같은 오메가에게도 아낌없이 젖을 내주었다. 달큼한 액체는 붉은 오메가의 입 밖으로 넘쳐흘러, 짙은 피부 위로 흰 선을 그었다.
<…….>
흉흉한 하체 외에는 어둠에 모습이 가리어진 알파는 얽힌 두 오메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두 마리의 오메가와 독대하는 일은 어지간한 알파는 상상도 못 할 영광이었다. 설사 마계의 핏물 속에 잠긴 고대의 마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오메가는 한 세대에 단 한 명뿐. 두 마리의 오메가가 같은 시간대에 공존하는 것은 여태껏 존재한 적 없는 기적이었다. 그렇게 기적처럼 얽히고설킨 오메가들의 향기는 가히 파괴적이었다. 둘이 합쳐져 둘이 되는 것이 아닌, 열 배의 효력을 발휘했다.
붉은 오메가는 칼리번 덕에 이성을 지닌 마물 혼혈조차도 마물처럼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오메가를 혐오하는 저 알파조차도 패배하여 속수무책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당신, 아직 해결을 보지 못했잖아.>
붉은 오메가는 혀끝으로 칼리번의 유두를 건드렸다.
<어느 쪽이든 마음껏 사용해. 당신은 우리를 지켜 주는 왕이니까.>
붉은 오메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칼리번의 배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방향을 반대로 틀어 알파를 마주 보았다. 그는 자신이 아닌 칼리번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칼리번의 다리가 접히고 비부가 알파의 앞에 훤히 드러났다. 이 모든 행위에 칼리번의 의사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거 알아? 칼리번은 당신한테만은 저항하지 않아.>
붉은 오메가는 어느새 자신의 몸에 감겨 들어온 금사를 살피며 미소 지었다.
<당신과 하는 걸 좋아하나 봐.>
금사는 붉은 오메가를 대신해 칼리번의 두 다리에 감겼다. 그 덕에 붉은 오메가는 편하게 칼리번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퇴장이 아니었다. 붉은 오메가는 칼리번의 몸 아래로 내려가 쓰러져 있던 칼리번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붉은 오메가 자체의 힘은 처참할 정도로 약했으나, 칼리번의 목에도 이미 금사가 감겨 있어 수월하게 자세를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칼리번의 겨드랑이 아래에 양팔을 밀어 넣고, 뒤에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다른 누군가가 떠올라서겠지.>
금사로 붉은 오메가를 돕던 알파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런가? 반짝거리는 건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이렇게 달아 줬잖아. 붉은 오메가는 잔인하게 웃으며 칼리번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안쪽으로 숨어든 한쪽의 유두와 달리, 반대편의 유두는 튀어나와 있었다. 언제든 잡아당길 수 있도록 고리를 달고는 푸른 보석으로 장식해 둔 것이다. 하얀 손가락에 눌려 튀어나온 가슴에서 젖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물을 자극해 힘을 비정상적으로 증진시키는 강화제이자, 인간 사내와 교접을 할 때보다 몇 배는 더 흥분시키는 발정제였다.
<칼리번은 말이야, 겉모습과 다르게 굉장히 어린애 같거든…. 얼마 전에 칼리번이 어느 왕자님의 연회에 갔을 때의 기억을 꺼내 봤어. 한시도 눈을 떼지를 못하더라고.>
<…….>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기억이라는 건 영혼의 영역이라 마음가짐에 따라 실제와 달라질 때가 있어. 눈여겨본 부분이 더욱 강조되거나, 잊고 싶은 부분이 아예 없었던 일처럼 사라지기도 하지. 어떨 때는 원래 있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로 바꿔치기도 하고 말이야.>
붉은 오메가는 칼리번의 목에 입술을 문댔다.
<칼리번의 기억 속에 담긴 왕자님은 황금으로 만든 백조 새끼 같더군. 나 또한 당신의 동생을 직접 본 적은 있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참 이상한 일이지. 혹시 까마귀라도 되나?>
칼리번의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물에게 범해지고, 붉은 오메가에게 길들여질 때보다 몸 상태가 더 좋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겉모습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눈앞의 알파는 성미가 까다롭고 마물 혼혈답지 않게 미감이 뛰어나서, 흉측한 모습의 오메가와는 교접할 기분이 들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데 매번 못난 것만 품으면 가엾잖아? 가끔은 예쁜 것도 낳게 해 줘야지.>
칼리번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붉은 오메가는, 본인이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알파에게 부탁했다.
<어차피 당신은 지금 러트 중이니 피차 이득 아니겠어? 무엇보다 칼리번을 범할수록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좋은 복수가 될 테니까. 당신은 그저 당신의 아버지가 했던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알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말하면 당신이 화내지 않을 만큼만. …하지만 다른 비밀도 알고 있어.>
<…….>
<예를 들면… 이제 당신은 나와 칼리번의 향기에 중독되어서 더는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정도?>
붉은 오메가의 입매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여태껏 간신히 참아 온 웃음을 마구 쏟아 냈다.
<큭……큭큭, 아하하, 하하하하핫!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본인도 몰랐겠지! 큭, 하하하!>
<…….>
<당신의 유일한 실책은 날 소환했다는 거야…. 크큭, 하지만 그 누가 이 땅에 오메가가 두 마리가 있을 거라 예상했겠어? 운 좋게도 내 쪽으로 상황이 수월하게 흘러갔을 뿐! 나로서는… 칼리번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당신을 지배할 수 있어서 편하지만.>
알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목숨이 다해가는 오메가를 얕봤다. 새로 나타난 오메가는 예상 밖의 존재였다. 8년 전, 알테르는 검은 오메가가 어떤 결과를 부를지 모른 채 붉은 오메가에게 처분을 맡겼다.
그는 오메가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설마 그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붉은 오메가에게 저항하지 못할 상황이 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결과는 어쩌면 그가 마계에 파묻혀 있던 붉은 오메가를 소환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일 수도 있다. 언젠가 붉은 오메가가 말한 대로, 그 어떤 알파도 결국에는 오메가를 이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안심해. 나는 적이 아니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의 목적은 대부분 일치하잖아? 그저 오늘은… 당신에게 작은 부탁을 하고 싶은 것뿐이야.>
<부탁?>
알테르의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당신을 위해 내가 오래도록 준비한 오메가를 안든지…. 아니면 그 여자의 목을 내게 주든지.>
<…감히.>
<어느 쪽이 더 어려울지 감도 못 잡겠네?>
붉은 오메가의 목소리는 늘 살랑거리던 것과 달리 전에 없이 차가웠다. 붉은 눈 안쪽의 검은자위가 마치 뱀처럼 세로로 찢어졌다.
<이게 다 당신 잘못이야, 내게 협조하지 않아서 그래! 그 계집이 성역의 위치를 말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전부 당신이 물러 터졌기 때문이지. 어떨 때 보면 인간보다도 무르다니까? 그 여자는 출신답게 당신이 아닌 에레즈의 편을 들고 있는데도 말이야.>
<…….>
<참 대단해. 나라면….>
<닥쳐라.>
어둠 속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붉은 오메가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성역에는 그 검이 봉인되어 있다고… 당신이 내게 말해 줬었지.>
<그 검이 정확히 어떤 힘을 지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도 했을 텐데.>
<그 힘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그것만 얻으면 성검 하나만 믿고 설치는 애송이는 금세 해결돼. 그 검만 진작 손에 넣었다면…. 에레즈에게 살해당한 형제들도 아직 살아 있을 텐데.>
붉은 오메가는 알테르의 형제들이 죽었을 때는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가증스럽게 말했다.
<나에게 형제애를 강요하는 건가?>
<아하하, 그럴 리가!>
하아, 붉은 오메가는 텅 빈 웃음 뒤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을 조종할 수 있어. 그런데 왜 명령하지 않고 이런 거래를 하는지 알아?>
<…….>
알테르는 그를 노려보았다. 에레즈보다 짙은 보석안은 깊은 바다처럼 일렁였다.
<이편이 훨씬 재밌거든!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평소와 다르게 두려워하고 겁을 먹고 있는 것이 느껴져. …그러니까 ‘거래를 할 수 있을 때’ 따르는 편이 좋을 거야.>
그렇지, 칼리번? 붉은 오메가는 마치 친구의 동조를 원하듯, 칼리번의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
<…….>
알테르는 눈앞의 오메가들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을 내는 보석안에는 알파라면 가질 법한 어떤 욕망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다리를 벌린 오메가를 앞에 두고 그런 눈을 하지 못했다.
칼리번의 목을 감던 금사가 스르르 풀려났다. 금사는 칼리번의 턱을 받치고는 고개를 들게 했다. 알테르의 보석안이 검은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칼리번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침잠한 지 오래였다. 그 모습은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피차일반이군.>
알테르는 낮게 중얼거렸다. 반란을 일으키고 왕성을 점령하기 전, 그는 칼리번과 세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성년식과 마상 대회, 그리고 결혼식. 알테르는 누구라도 시선을 던지지 않고서는 못 배길 미남자였다. 어깨 너머까지 기른 긴 금발은 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빛을 냈고, 조각 같은 외모와 푸른 보석안은 마물과는 다른 의미에서 인 외 존재 같았다.
그런 알테르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자는 칼리번이 처음이었다. 까만 눈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로지 에레즈 프리드웬만을 향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에 이력이 났던 당시의 알테르는 신기한 용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정도 감상에 불과했던 용병이 설마 결혼식 중간에 동생을 가로채서 도망칠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메가일 줄은, 더더욱….
금사는 칼리번의 턱을 쓰다듬듯 천천히 움직였다.
<동생의 것을 이런 식으로 빼앗는 취미는 없다만…. 미리 유감을 표하지.>
알테르는 조용히 말을 건네고는, 칼리번 너머의 붉은 오메가를 노려보았다.
<이 몸으로 너희 오메가들을 기쁘게 해 주마. …단, 이번 한 번뿐이다.>
붉은 오메가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알테르는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금사가 칼리번과 붉은 오메가의 몸을 휘감자 몸이 조여 왔다. 그러나 평소 알테르가 적을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는 달랐다. 금사는 두 갈래로 뻗어 나와 칼리번의 가슴 위와 아래를 휘감았다. 압박감에 단단한 가슴이 튀어나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 위로 또 다른 금사가 부드럽게 다가왔다. 손쉽게 마물의 몸을 조각내고, 찢던 그것은 마치 깃털처럼 살랑거리며 칼리번의 유륜과 유두를 희롱했다.
<아, 으읏…!>
줄이 끊긴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칼리번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간지럽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감각에 칼리번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정욕에 휩싸인 마물들과는 다른 움직임, 명백한 애무였다. 마물은 오직 노팅을 위해 칼리번의 몸에 성기를 쑤셔 넣었고 젖을 탐하기 위해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런 부드러운 애무는 붉은 오메가가 간섭하지 않는 이상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폭력적인 교미에 익숙해진 칼리번의 몸은 간질거리는 감각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금사는 넝쿨처럼 칼리번의 몸을 감싸고 다정한 손길처럼 피부를 타고 올라갔다. 칼리번의 귀를 주무르고 파고들자, 늘 이를 악물며 버티던 입이 어째서인지 저절로 벌어졌다.
<아, 하아…. 흐으….>
금사가 입 안을 휘젓자 칼리번이 앓는 소리를 냈다. 입 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알테르는 입을 여는 것도 지겨운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아아…. 혀는, 보이지 않을 줄 알고 내버려 뒀는데….>
붉은 오메가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헐떡였다. 칼리번뿐만 아니라 붉은 오메가의 몸에도 금사가 감겨, 녹아날 듯한 봉사를 퍼붓고 있었다.
<…….>
알테르는 칼리번의 혀가 잘렸든 잘리지 않았든 더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그의 몸에 애무를 더해 갈 뿐이었다.
얇고 가는 금사는 아무런 장식도 달리지 않은 유륜 주변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고는 가로로 길게 그어진 선을 쉼 없이 쓸어내렸다. 동시에 흉통을 조이자 칼리번은 자꾸만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폐에 숨을 밀어 넣을수록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마치 알파에게 추삽질을 당해 헐떡일 때와 같았다. 숨을 편히 쉴 수 없도록 압박을 주었을 뿐인데, 칼리번의 몸은 그것을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더는 간지럽히지 않아도 유두가 알아서 솟아올랐다.
금사는 칼리번의 몸 곳곳을 두드리고 쓸어내렸다. 그러다 어느 한곳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으, 하앗……. 읏…. 아, 흐으…!>
온몸에 가해지는 감각에 칼리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간지럽다. 온몸이 간지러워 피부를 긁어내고 싶었다. 그대로 두면 닿는 부위가 녹아 버릴 것만 같다. 칼리번은 몸을 뒤틀었으나 겉으로만 얼기설기 붙여 놓은 손과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물에 비해 부드러운 애무라고는 하나, 칼리번의 몸은 다른 때와 달리 곱절로 자극을 받았다. 익숙한 감촉. 금사는 수백 마리의 뱀이 되어 배꼽 안쪽을 파고들고, 이어서 수풀을 헤집고 들어왔다.
<으으, 읏…!>
그 순간, 칼리번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금사가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 정도 접촉은 다른 마물들과 교미를 했을 때도 흔했다. 그러나 알테르는, 칼리번이 정말로 기뻐하는 부분이 어딘지 알고 있다는 듯 귀두 안쪽의 좁은 구멍에 금사를 밀어 넣었다.
<흐앗, 흐, 아, 아아…!>
푸욱, 성기를 쪼갤 듯 파고는 감각에 칼리번은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몸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성기 바깥쪽과 안쪽이 각기 다른 속도로 흔들렸다.
칼리번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임에도 다리 사이를 좁히려 들었다. 그럴수록 무릎에 감긴 금사로 인해 팽팽하게 당겨질 뿐이다. 허벅지와 아랫배의 근육이 무엇이든 끊어 낼 듯 단단히 조여드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쾌감에 칼리번의 가슴이 들썩였다.
<흐, 으으, 읏…!>
투둑, 귀두가 부풀 정도로 안쪽을 오가던 금사가 요도를 빠져나오자 이어서 정액이 밀려 올라왔다. 정액이라기에는 묽은 액이 칼리번의 배와 가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알테르와 붉은 오메가는 칼리번을 쉴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가슴과 성기에 가해지는 자극에, 칼리번은 요도 끝에서 마지막 한 방울이 나올 때까지 경련했다.
배 위로 떨어진 묽은 액이 근육 사이사이를 타고 흘러 내려갔다. 한차례 사정을 마치자 과도한 긴장의 반작용으로 칼리번의 몸이 늘어졌다. 붉은 오메가의 옆으로 흐느적거리며 늘어지려는 팔과 다리를 금사가 단단히 잡아 들어 올렸다.
<아…. 하으, 아…….>
칼리번은 목 안쪽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굵게 뭉쳐진 금사가 칼리번의 입구를 오가고 있었다. 움찔거리는 구멍은 몸 안쪽에서 생성한 애액을 흘리며 알파를 반겼다.
<하아, 아…. 칼리번, 그렇게 좋아?>
칼리번의 반응은 다른 알파를 상대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붉은 오메가는 칼리번의 가슴에 번진 정액을 덧발라 주며, 알파에게 기꺼이 안기길 원하는 형제의 모습을 관찰했다. 하얀 손이 짙은 색의 가슴이 당연하다는 듯 주물럭거렸다. 알파의 애무로 성감이 오를 대로 오른 몸은 마냥 짙을 뿐만 아니라 불긋해지기까지 했다. 열기를 품은 피부는 하얀 손길과 금빛 속박 아래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아… 아앗!>
칼리번의 몸 안쪽을 길들이던 금사가 불시에 빠져나왔다. 벌어진 입구가 어서 알파의 성기를 물기를 기다리며 조이고 풀기를 반복했다. 칼리번의 몸은 붉은 오메가에 의해 해체되고 조립되기를 반복했으나, 전성기 시절 실전으로 단련한 몸통만은 여전했다. 근육으로 빠듯하게 들어찬 아랫배는 성기를 품으면 더욱 강하게 조여 올 것이 분명했다.
<음…. 으읏….>
알테르의 성기가 금사 대신 입구에 닿았다. 붉은 오메가의 몸속에서도 사정하지 않았던 성기는 여전히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귀두와 맞닿자, 입구가 꽉 오므려졌다. 알테르는 그대로 밀어붙여 입구를 벌리려 들었다.
<후후….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붉은 오메가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부끄러워한다는 말에 칼리번이 반응하고는 움찔거렸다.
<아, 으윽!>
몸이 풀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알테르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귀두 아래로 부풀어 오른 혹이 입구 안으로 들어서지 쉽사리 못 하고 부딪치며 두드렸다.
<흐, 흐읏…. 아, 으…!>
칼리번의 몸은 평소보다 훨씬 예민했으며 동시에 소극적이었다. 붉은 오메가는 초야를 치르는 사람처럼 겁을 내는 칼리번의 가슴을 주무르며 애써 달랬다. 버겁게 혹을 삼키고 나니 중간까지는 기둥이 막힘 없이 들어갔다. 물론 칼리번 입장에서는, 꾸역꾸역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지만.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내벽을 벌리며 배 속을 채우는 성기를 쥐고, 세게 쥐어짰다.
<…후우.>
칼리번을 안으며 여태껏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알테르도 그 순간만큼은 긴 숨을 내뱉었다. 그는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이마 너머로 넘겼다. 알테르는 칼리번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몸 위로 흘러내렸다.
<흣, 흐읏….>
부드럽고 긴 머리카락이 배 위로 사르륵 떨어지는 감촉에 칼리번은 알테르의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알테르의 움직임이 멈췄다. 칼리번은 알테르의 성기를 반쯤 삼킨 채로 흐느꼈다.
<역시…. 다른 마물과 교미할 때와는 전혀 달라.>
과민한 반응의 원인을 찾던 붉은 오메가는 칼리번의 앞을 쓰다듬어 주었다. 요도에 삽입을 당하지도 않았는데 칼리번의 성기는 또다시 발기한 상태였다. 오메가로서의 본능과 부드러운 애무 외의 다른 요소가 작용한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렇지? ‘왕자님’이 좋은 거지?>
붉은 오메가는 일부러 칼리번이 헷갈릴 말을 속삭였다.
<장난은 적당히 해라.>
알테르의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어서 금사가 붉은 오메가의 얼굴을 감아 입을 막았다. 후후, 붉은 오메가는 입안을 헤집는 금사를 핥으며 웃어 보였다. 알테르는 칼리번의 허리를 쥐고는 힘을 주어 자신을 밀어 넣었다.
<윽, 으흣…!>
흉측할 정도로 굵은 성기가 몸을 반으로 가르자, 아랫배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발기한 성기 끝에서는 정액이 흘러내렸다. 사정의 쾌락과 삽입의 고통이 뒤섞여, 어느 쪽을 기뻐하고 있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알파의 성기로 들어찬 입구가 빠끔거리며 피를 흘렸다. 이제는 수월하게 받아 낼 법도 하건만, 칼리번의 몸은 그렇지 못하고 매번 고통을 느꼈다. 칼리번은 목을 뒤로 꺾은 채 고개를 저었다. 붉은 오메가는 제 안으로도 밀고 들어오는 금사에 헐떡이면서도, 칼리번을 등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가슴을 움켜쥐고 꼬집자, 솟아오른 유두에서 하얀 액체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다른 쪽의 유두는 고리 끝에 달린 보석이 희게 물들 정도로 이미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알테르는 칼리번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아래가 찢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움직이기에만 바빴다. 피와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아래는 젖은 소리를 내며 알파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알테르는 몸을 숙이고 본격적으로 칼리번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붉은 오메가는 알파와 오메가가 교미를 나눌 수 있도록, 기꺼이 칼리번의 몸을 받쳐 주었다.
<아, 아앗…! 으긋, 흣, 흐으…!>
칼리번은 의미가 불분명한, 무너진 신음을 내뱉었다. 뱃속을 들쑤시는 알파의 성기가 버거운지 아랫배가 긴장으로 푹 꺼졌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알테르가 얕은 한숨을 내쉬자 금사에 감긴 칼리번의 두 다리가 허공에 들렸다. 알테르는 상체를 숙여 칼리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알테르의 긴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건강한 갈색의 피부는 흰 액체로 어지러웠고, 금빛 머리카락의 끝을 희게 적셨다.
붉은 오메가의 손이 칼리번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뻗어 나왔다. 그러고는 알테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하얗고 가는 손은 윤기가 도는 금빛 머리카락을 뜯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끌어당겼다.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알테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해? 먹지 않고. 기껏 준비해 놨잖아?>
<…취향이 고약하군.>
알테르는 불쾌감을 표했으나 이 방에서 왕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붉은 혀를 내밀고는 푸른 보석에 입을 맞췄다. 유두 주변에 젖이 고여 있었으나 그는 젖은 보석만을 성의 없이 핥았다.
대개의 알파는 칼리번의 가슴에 한 번 입을 대기 시작하면 유두가 부어오를 때까지 게걸스럽게 빨아먹곤 했다. 그에 비하면 알테르의 행동은 신사적이기까지 했다. 자극이 덜할 텐데도, 알테르의 혀가 닿을 때마다 칼리번은 전보다 더욱 강하게 알파의 성기를 조였다.
<하, 흐읏…. 큭!>
정중한 혀와 달리 맞붙은 하체는 가차 없이 칼리번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알테르의 성기는 날카롭지는 않으나 가시가 솟아 있었다. 성기가 몸속을 오갈 때마다 오메가의 내벽 전체를 긁어내렸다. 고통이 큰 쾌락이었다. 칼리번은 두 사람 사이에 갇혀 도망치지도 못하고 울부짖었다.
<저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
괴로워하는 칼리번의 뺨을 쓰다듬으며 붉은 오메가가 입을 열었다. 알테르의 눈동자가 위로 굴렀다.
<이번 교미로 칼리번이 새끼를 배게 되면 정말… ‘예언의 아이’가 태어날지도?>
붉은 오메가의 손이 어느새 칼리번의 배 위를 훑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텐데….>
<아, 당연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그런데도 잘도 그런 농담이 나오는군.>
알테르와 마주친 붉은 눈이 가늘게 휘었다.
<칼리번에게는 빚이 남아 있어서 말이야. 첫 아이를 죽게 했거든. 이번 교미로 태어날 아이가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형제 사이이니 비슷하기는 할 거 아냐?>
<흐, 으….>
<…그렇지, 칼리번? 너도 왕자님의 아이가 가지고 싶지?>
<으…윽…!>
붉은 오메가는 속삭이며 칼리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원래도 무뚝뚝한 인상이었으나, 예전에는 적어도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쾌락과 고통으로 흐려진 얼굴에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수도 없이 반복된 교미로 인해 지능마저 그 수준으로 떨어진 것처럼.
<…….>
알테르는 입을 닫고는 알파로서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이용당하는 것은 불쾌했으나 알파의 욕망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그도 멈출 수 없었다. 칼리번의 몸은 그를 기분 좋게 받아 주었다. 알파에게 이 정도의 쾌락을 주는 인간 남자는 없었다.
알테르는 어째서 압도적으로 강한 마물이 오메가에게 속절없이 조종당하는지, 마물 혼혈조차도 때로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지, 칼리번의 내벽을 통해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왕국을 공포로 지배한 그조차 이 압도적인 향기를 내뿜는 오메가들에게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의 외양이 어떤지는 상관없었다. 실제로 붉은 오메가와 칼리번은 정반대라고 좋을 정도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마물을 흥분시키는 향기와 젖, 그리고 태만이 오메가를 오메가로 만드는 요소였다. 그 요소만 충족이 된다면 아무리 겉모습이 끔찍하고 흉측한 괴물이라고 할지라도 알파들은 달려들 것이다.
알테르는 8년 전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한낱 용병의 몸속을 헤집으며 교미를 이어 나갔다. 칼리번은 알테르의 성기를 품을 때마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버거워했다. 가시 돋친 성기는 끊임없이 오메가의 결장을 짓누르고 내벽을 자극하며 문을 열라며 재촉했다. 매번 이를 악물며 버티던 칼리번이었으나,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파의 무두질에 몸속에 숨겨져 있던 좁은 입구를 열었다.
<흐, 흐아…! 아, 아악, 윽…!>
간신히 열린 입구에 성기가 부딪치자 칼리번은 눈에 띄게 괴로워했다. 몸이 다시 버둥거리자 붉은 오메가는 칼리번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괴로워하는 형제를 달랬다.
애초에 알테르는 칼리번에게 노팅하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수일에 걸쳐 칼리번의 몸을 두드리고 매달릴 리가 없었다. 붉은 오메가는 한 번의 교미로도 입구를 열기 위해 칼리번에게 다수를 마물을 먼저 상대하게 했다. 그 탓에 칼리번은 지쳐 있었다. 아무리 강한 육체를 가졌다고 해도 밤낮으로 마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버거웠을 것이다.
다른 마물들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들이부은 노력을 수월하게 낚아채며, 알테르는 칼리번의 몸을 깨뜨릴 듯 파고들었다. 마침내 귀두 아래의 혹까지 좁은 입구를 파고들었다. 오메가의 가장 깊은 공간에 안착하고 나자 알테르의 성기는 순조롭게 부풀어 올랐다.
<히, 아, 윽—!>
교미의 마무리는 오메가의 고통으로 장식되었다. 더 깊은 결합을 위해 알테르가 체중을 실으며 누르자 칼리번의 허벅지 안쪽이 경련하듯 떨렸다. 칼리번은 더는 원치 않는지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미 몸은 이어진 상태였다.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성기는 그제야 정액을 쏟아 냈다. 꿀렁꿀렁 배 속이 차오르는 감각. 일부러 굶주리게 한 이유는, 안을 채우는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
칼리번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달싹거렸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진땀을 흘리며 헐떡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물은 이미 오래전에 얼굴을 덮어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건가.>
칼리번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알테르가 한마디 했다. 붉은 오메가는 낮게 웃었다.
<눈이 필요하겠어?>
어차피 여기는 어둠뿐인데. 붉은 오메가가 칼리번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테르는 무언으로 동의했다.
<하아, 칼리번….>
축하해. 붉은 오메가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칼리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이름은 이미 정해 놨어.>
하얀 손이 칼리번의 배를 연신 쓰다듬었다. 알파의 정액이 채워진 탓인지 아랫배가 평소보다 조금 부풀어 올라 있었다.
<프리드웬 왕실의 새로운 괴물을, 나는 ‘아스터’라고 부를 거야.>
<…아스터?>
순간, 알테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응. 칼리번은 꽃을 좋아하거든.>
붉은 오메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과거가 비참한 이유는, 그것이 이미 오래전에 끝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와 에레즈가 칼리번의 과거를 끌어안고는 비명을 지르고 화를 낸다 한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과거는 결국 묻히고, 희미해지고, 퇴색될 뿐. 그저 남겨진 자만이 광인처럼 떠돌며 허공을 향해 삿대질할 수밖에….
슬픔으로 끓어오른 심장에서는 이제 붉은색이 아닌 검은 피가 흐를 지경이다. 검게 타 버린 피는 혈관을 따라 전신을 뒤덮었다.
“하아…. 하아….”
에레즈는 온몸이 땀에 젖은 채로 헐떡였다. 질식할 정도로 깊은 의식 속에 잠겨 있던 탓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이 푹 젖은 탓에 묻은 것이 빗물인지 땀인지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하아……. 아, 윽—!”
에레즈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신음을 삼켰다. 눈 안쪽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아니, 불씨가 텅 빈 왼쪽 눈에 던져진 모양이다. 에레즈는 오래전에 제 형제에게 뽑혀 텅 비어 버린 왼쪽 눈가를 손톱을 세워 긁어내듯 쓸었다. 얼굴을 덮은 피부 탓에, 눈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고, 도리어 갈증만이 더 커졌다.
“크읏, 아아…!”
복수와 속죄를 이어 나가지 않고, 함께 죽으려 했던 자신에게 칼리번이 벌을 내리는 것일까? 눈을 도통 뜨지 못하는 에레즈의 몸이 의자에 부딪혀 비틀거렸다. 에레즈는 작은 접촉도 견디지 못하고 의자를 제 손으로 밀어냈다. 아니, 밀어냈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손에 힘을 준 순간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에레즈는 고통이 너무나 큰 나머지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읏……. 칼…!”
에레즈는 침대에 머리를 묻은 채로, 한 손으로 더듬거리며 칼리번을 찾았다. 잠든 칼리번의 손을 끌어당겨 제 눈가를 덮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뒤덮은 불길이 사그라질 때까지 칼리번의 곁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윽…. 하아….”
작은 방 안에는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불규칙하게 이어졌다.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매달리면서도, 단단한 그의 몸을 감히 끌어안지도 못하고 오직 손 하나만 쥔 채였다.
폭풍이 가라앉은 바다는 다시 잔잔해졌지만, 에레즈가 고통에 몸부림친 흔적은 침대 위에 고스란히 주름으로 남았다. 에레즈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밤새 악몽에 쫓긴 아이처럼 음울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
그는 한 손으로 흡사 불구덩이에 파묻힌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이상하게도 눈앞이 어지럽고 시야가 엇갈렸다.
“이건….”
눈가를 어루만지던 에레즈는 무언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 * *
오드론은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알현을 청했다. 사흘에 한 번씩 열리는 회의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그치고는 의외의 행보였다.
수색대가 성을 떠나기 전, 오드론이 데릴만에게 받은 명령은 간단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분란을 만들지 말고, 검은 오메가가 성안에 숨어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 그렇기에 오드론은 방어적으로 신용병 연합을 운영했다.
그러나 대장이 없는 사이, 왕성에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명부에 오른 알파들이 죽기 시작했을 적부터 그는 고민에 빠졌다. 에레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해야 할지, 데릴만이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할지를 말이다.
에레즈를 기다리는 오드론은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언뜻 보면 검은 토끼나 고양이 같았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팔이었다. 부하 아쿠스의 것이었다. 아쿠스에게는 특이한 본성이 한 가지 있는데, 도마뱀의 꼬리처럼 몸 일부가 절단되어도 일정 시간 동안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아쿠스의 팔을 제외한 부하들은 모두 알테르의 망령에게 살해당했다. 이 팔이 오드론에게 돌아온 것도, 범인을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팔은 말을 할 수 없다. 더구나 생전의 아쿠스는 글을 몰라 적의 이름을 적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본성으로 감지는 가능할 것이다. 만약 아쿠스의 팔이 에레즈에게 반응한다면….
‘만일 왕자님께서 인간이 아니라 동족이라면… 오히려 일이 쉬워질지도 모르겠군.’
같은 알파라면 서열에 복속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인간의 피가 섞인 마물 혼혈 사이에서는 인간의 계급과 비슷한 형태이면서, 마물처럼 본능으로 작용하는 날것의 속박이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서열이었다.
알파 간의 서열은 향기로 마물들을 조종할 수 있는 오메가와는 또 다른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오메가에게 압도적인 향기가 있는 것처럼 알파에게도 특유의 향기가 존재한다. 이 향기는 오메가를 흥분시키고 발정을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오메가는 극히 드물다. 그러다 보니 알파의 향기는 같은 알파에게 더 자주 노출되곤 했다.
알파의 향기를 맡고 상대의 힘을 가늠하는 것은 마물의 방식이다. 마물 혼혈은 거기서 더 나아가 우열을 정해 무리를 이룬다. 마물보다 약한 그들에게는 이성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계급과 달리 오로지 ‘힘’으로 정해진다.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한 기준이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알파인데 에레즈 프리드웬이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납득이 안 되는 변명이긴 했지.’
오드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왕자님께서는 발현이 늦은 기형 알파일 수도 있겠어.’
어두운 밤을 배회하는 알테르의 망령보다는 기형 알파의 기행 쪽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은가.
기형 알파란 비단 지하 감옥에 수감된 괴물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알파의 전형적인 특성에서 빗겨 나면 기형이라 불렀다. 항상 에레즈의 곁에 있던 젠과 그녀가 예전에 이끌던 용병 부대 ‘검은 어금니’의 구성원 또한 기형 알파들이었다.
실제로 오드론은 발현이 늦은 알파를 본 적도 있었다. 늦된 알파의 특징으로는 겉모습이 더없이 인간에 닮았다는 점이 있다. 알파 자신도 자기가 평범한 인간인 줄 알다가 어느 날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변인을 공격해 마을에서 쫓겨난 경우가 많았다.
‘설령 내가 왕자님보다 약해서 복속에 실패할지라도, 대장님께서 돌아오시면….’
데릴만은 8년 전엔 용병 연합, 현재는 용병 길드의 장으로서, 수많은 알파를 정점에 설 정도로 강력한 알파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여태껏 인간이었기에 감히 데릴만의 탄원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파로 발현이 되었다면, 앞으로의 정치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그동안 에레즈는 인간에게 과도하게 친화적이었다. 이번 기회에 왕자를 포섭하게 된다면, 인간의 결혼제도를 알파에게도 그대로 적용하길 원하던 데릴만의 꿈이 한걸음 빠르게 성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셨습니까, 왕자님.”
에레즈는 오래되어 덜그럭거리는, 허름한 문을 열고 회의실로 입장했다. 오드론은 몸을 숙여 예의를 표했다. 그리고 아쿠스의 팔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음? 왕자님께서 안대를?’
에레즈와 마주한 오드론은 조금 당황했다. 어째서인지 오늘 에레즈는 검고 긴 천으로 왼쪽 눈을 가린 채였다. 검은 천과의 대비되는 하얀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평소에는 얼굴을 크게 가른 커다란 흉터를 가감 없이 드러내던 그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숨길 것이 있는지….
“왕자님? 안대는…. 윽?!”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오드론의 입에서 컥, 컥 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드론의 숨통이 막혔다. 그러나 에레즈는 고요했다.
“커헉…!”
오드론의 목을 조른 것은 다름 아닌 아쿠스의 팔이었다. 달라진 에레즈의 외양에 의문을 품은 나머지, 미처 동료의 팔이 움직이는 방향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 말을 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오드론이 숨통이 막혀 죽어 가는데도, 에레즈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억…. 허억…!”
그러나 오드론은 대답할 수 없었다. 두 팔로 아쿠스의 팔을 떼려 했지만, 그것은 조각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점점 숨이 부족해진다. 삶과 죽음 사이의 간격이 좁혀 들자 오드론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와, 아, 왕자님…!”
부, 부디, 목숨만은…! 오드론이 목이 조여 오는 와중에도 간신히 애원했다. 에레즈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아쿠스의 팔이 거짓말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헉! 허억, 허억…!”
오드론은 아쿠스의 팔을 최대한 자신에게서 멀리 내동댕이친 후,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영문을 모르겠군. 기괴한 팔로 갑자기 자살을 하려 들다니.”
에레즈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에 더욱 이상했다. 오드론이 눈앞에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상황에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컥, 허억…!”
헛구역질하던 오드론은 무릎을 꿇은 채로 에레즈를 올려다보았다. 에레즈는 창을 등지고 있었고, 그의 등 뒤로 역광이 드리워졌다. 그림자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보석안이….
‘보석안이… 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오드론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럴 리가…. 몰려드는 현기증에 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눈을 뜨자, 에레즈의 왼쪽 눈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검은 천에 감싸여 있었다.
“하, 하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 애완 팔이 다소 버릇이 없었나 봅니다.”
오드론은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오드론은 아쿠스의 팔이 에레즈가 아닌, 자신을 공격했는지 알 것 같았다. 본체가 이미 저자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본체의 일부인 팔 또한 본능적으로 에레즈에게 굴복한 것이다.
아쿠스와 부하들을 죽인 것은 에레즈 프리드웬이다. 오드론은 확신했다. 아쿠스의 배신은 도리어 명백한 증거였다.
“…….”
평소였다면 손을 내밀었을 에레즈였으나, 지금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오드론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몸은 이곳에 남아 있지만, 정신은 저 멀리 빼앗긴 사람처럼 어딘지 붕 떠 있었다.
오드론에게 흥미를 잃은 에레즈는 한쪽 팔로 뒷짐을 지고는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모습이 오드론의 눈에 들어왔다. 전보다 훨씬 길어진 금발은 이제 뒷덜미를 덮을 정도였고, 전에 없던 윤기가 돌았다. 턱선은 날렵했고 코는 정면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선이 보기 좋았다. 눈가를 가리는 검은 천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한마디로, 회의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졌다. 마치 죽은 부하들의 피를 빨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알파다. 어째서 여태 깨닫지 못했지?’
오드론은 몸을 짓누르는 압박을 느끼며 자조했다. 그는 하룻밤 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오드론은 에레즈에게 완벽하게 굴복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님께서 돌아오신다고 해도… 감당하실 수 있을는지.’
오드론이 감히 자신이 따르던 무리의 대장과 에레즈 프리드웬의 위력을 비교하던 때였다.
“왕자님! 젠 대장님의 부대에서 방금 막 병사가 도착했습니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가 침묵을 깨뜨렸다. 회의에 끼어들 정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 성 밖을 나간 수색대는 주기적으로 숲에서 구출한 백성과 일부 병사를 수도로 돌려보낸다. 그런데도 병사의 말투나 표정은 더없이 다급했다.
“야적의 습격으로 수색대가 전부 격파당했다고 합니다!”
망설이던 병사가 급히 덧붙였다.
“…젠의 수색대가?”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오드론이었다.
“지휘관의 행방은?”
에레즈는 조용히 물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레즈의 뒤에 서 있는 오드론은 그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젠은 에레즈 프리드웬과는 막역한 사이다. 그러나 이 위치에서는 왕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심정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목소리만 듣자면… 흔한 알파 병사 하나가 죽은 것처럼 덤덤했다.
“그, 귀환병의 말로는… 알테르의 잔당들과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붉은 오메가도 있었다고…. 자세한 일을 묻기 전에 쓰러진 탓에 지휘관의 생존 여부까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젠은 기형 알파이기는 했어도 실력은 확실했다. 그런 그녀가 생사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니. 오드론은 놀라워하면서도 에레즈의 판단을 기다렸다. 이번만큼은 왕자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왕이라면 성에 남을 거다.’
붉은 오메가를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는 리론 후작보다도 처단하고 싶어 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수색대를 이끌지 않고 젠을 보낸 것은, 왕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출진하겠다.”
에레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아…. 그래. 알파라면 그럴 테지.’
왕자의 결정에 바짝 긴장하던 오드론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물 혼혈인 그가 처음으로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느낀 동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