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전염 (1)
느닷없이 구속구가 풀렸다. 팔다리가 벽에 고정된 채 매달려 있던 칼리번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굴에 닿은 것은 딱딱하고 익숙한 석재가 아닌 물이었다. 얕은 잠에 빠져 있다 깨어난 칼리번은 입 안에 들어찬 물을 뱉었다.
감옥 안은 발목 높이만큼 물이 들어차 있었다. 칼리번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네발로 기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쇳자국이 짙게 남아 있었다.
칼리번은 관중을 웃기려고 일부러 넘어지는 광대처럼 자꾸만 물속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팔과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법을 잊은 탓이다. 중력에 익숙해진 그가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때였다.
본능적인 감각에 칼리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버둥거리며 일으킨 물결들이 석벽이 아닌 다른 물체에 부딪쳤다. 오메가로 발현한 후 칼리번의 감각은 평소보다 배로 예민해졌다. …특히나 알파를 감지하는 데에 있어서는.
칼리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감옥에 가득 들어찬 알파를 눈치채자 시력이 뒤늦게 본능을 따랐다. 그에게 감응하듯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두 개의 빛이 번뜩였다. 처음 칼리번은 그것이 샛노란 보석, 혹은 횃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로로 찢어진 붉은 동공은 마물의 눈이 틀림없었다.
뱀 형태의 마물이었다. 정확히는 거대하고 검은 물뱀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인간계의 뱀과는 비슷했으나 달랐다. 마물의 몸통은 용병의 허리보다 훨씬 굵었고 그 길이는 끝이 없어 좁은 감옥 안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도망칠 곳은… 없다.
<…!>
칼리번은 움찔 몸을 떨었다. 뱀의 똬리가 조금씩 조여들기 시작했다. 네 면의 벽이 좁혀드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뱀 마물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뱀의 몸을 밟고 올라가 천장에 매달리는 것. 그러나 물에 젖은 뱀은 평지에서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오랫동안 굶주린 칼리번은 쇠약해져 있었다.
반항할 틈도 없이 구속구가 풀린 칼리번의 맨살에 차가운 비늘이 감겨들었다. 허리가 감긴 칼리번은 마물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강하게 옭아맸다.
<으윽…. 큭!>
칼리번은 두 팔로 뱀의 몸통을 밀어내려 들었다. 그러자 뱀 마물은 그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 조였다. 두 팔도, 다리도 결국 뱀의 똬리에 꽁꽁 묶여 버리고 말았다. 물뱀은 거대한 늪과 비슷했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중심부로 끌려들어 갈 뿐이었다.
<커헉!>
검은 물뱀의 교미는 먹잇감을 질식시키는 방식과 유사했다. 호두를 손에 쥐고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마물은 칼리번을 똬리 안에 가두고는 강한 압박을 주었다. 단단한 뼈와 근육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형태가 으깨지고, 피를 즙처럼 흘렸을 것이다.
<크흣…. 윽, 큭…!>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몸이 으스러지지 않도록 버텼다.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맞닿은 아랫니가 내려앉아 입 밖으로 피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뱀 마물의 피부는 물에 젖어 매끄러웠다. 칼리번은 어깨를 비틀며 똬리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으나 뱀은 제 긴 몸뚱이로 칼리번을 겹겹이 휘감았다. 음각이 진 비늘들이 맞닿아 깍지를 낀 것처럼 강하게 결속되었다.
<으—아, 악…. 아아아악!>
두 팔과 두 다리가 결국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평소의 낮은 목소리와 달리 찢어지는 비명이 부딪쳐 울려 퍼지고 물 위로 새로운 파동을 일으켰다.
그 후로도 뱀은 칼리번의 뼈가 회복되어 붙으려 하면 다시 부러뜨리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차가운 벽돌 위로 각기 다른 비명이 울려 퍼졌다. 먹잇감의 힘이 빠질수록 뱀 마물은 더욱 강하게 옭아매었다. 칼리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똬리 밖으로 고개만을 뺀 채 숨을 헐떡이는 것뿐이었다.
찰박거리는 물과 습기를 머금은 벽돌, 그리고 뱀의 비늘은 칼리번의 온기를 빠르게 빼앗았다. 끝없는 고문과 교미로 쇠약해진 칼리번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떨림은 비늘을 통해 마물에게 전해졌다.
칼리번이 온몸의 뼈가 부러지며 비명을 지르는 동안에도 멀리서 지켜만 보던 뱀 마물의 머리가 그제야 다가왔다. 뱀의 머리는 주둥이를 쩍 벌리면 칼리번과 같은 체격이 좋은 사내도 너끈히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했다. 샛노란 눈은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생물의 시선. 그동안 겪었던 마물들과는 사뭇 달랐다.
<하아, 후, 후우….>
칼리번은 뱀에게 붙잡힌 채로 헐떡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물과 땀으로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물뱀은 주둥이를 쩍 벌렸다. 한 쌍의 독니가 칼리번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날름거리는 길고 푸른 혀가 칼리번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핥았다. 뱀의 혀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차갑고 불쾌한 감촉에 칼리번은 고개를 돌렸다. 뱀의 눈에 칼리번의 넓고 단단한 어깨가 훤히 드러났다.
<읏?! 크, 흐…. 으윽!>
그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가 칼리번의 살을 꿰뚫고 근육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뚫린 구멍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피가 흰 송곳니를 더럽히고 칼리번의 쇄골에 고여 들었다.
<그, 그만……. 윽! 아……. 아, 아아….>
칼리번은 목을 뒤로 꺾은 채로 몸을 벌벌 떨었다. 몸 밖으로 뜨거운 피가 빠져나가는 만큼, 몸 안으로 차가운 뱀의 독이 주입되었다. 뱀은 그 후로도 몇 차례나 더 칼리번의 몸에 구멍을 냈다.
혈관에 직접 주입되는 뱀독은 그 효과가 남달랐다. 독이 도는 부위가 뻣뻣하게 굳어 갔다. 신기한 점은 그와 함께 고통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칼리번은 더는 혀마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마물은 정신만이 온전한, 살아 있는 인형을 제 몸 위에서 굴렸다.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때와는 달리 피부가 짓눌리는 정도의 힘이었다. 부드럽고 온기를 지닌 피부에 차가운 비늘을 마찰시키며 뱀은 전희를 즐겼다.
<흐으, 으….>
칼리번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벌어진 입은 마비된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숨만 내쉬는 칼리번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흉통을 끌어안은 뱀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짙은 피부 위로 뱀과 같은 비늘이 자국으로 남았다.
<으…. 흐으, 하아….>
물에 젖은 몸에 달라붙는 뱀의 비늘은 소스라칠 정도로 차가웠다. 끊임없이 몸을 적시는 물과 몸 안을 도는 얼음 같은 독까지….
칼리번과 같은 온혈 생물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가슴과 성기를 짓누르는 감촉과 알파의 체취는 오메가가 열을 생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일깨웠다.
어느새 칼리번의 몸은 저절로 발정하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 열을 내기 위해서였다. 몸이 달아오르자 뱀의 비늘이 다르게 느껴졌다. 뱀의 몸통이 자신을 짓누르고 음각이 진 비늘이 가슴 양편의 여린 살을 비빌 때마다 아랫배가 절로 조여들었다. 뱀의 비늘은 훌륭한 체온계였고 오메가가 들뜨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읏…!>
뱀의 몸통이 다리 사이를 세로로 파고들었다. 허벅지 사이의 샅이 딱딱한 표피에 닿았다. 뱀의 비늘 탓에 고통스러울 것이라 여겼으나 예상과는 달랐다. 뱀의 배 부분은 비늘이 없고 반들반들했던 것이다.
손도, 발도 없는 뱀은 제 몸을 밧줄처럼 풀었다 감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다리 사이에서 뱀의 꼬리가 사악, 사악,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칼리번은 몸의 반 이상이 물에 잠긴 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두툼한 허벅지 사이로 뱀의 몸통이 철벅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어떨 때는 그것이 몸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뱀 마물이 움직일 때마다 물이 흔들려 칼리번의 가슴과 회음부를 가볍게 때렸다.
<흐읏….>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받기만 하는 자극은 고역이었다. 더구나 몸을 섞으며 온기가 나뉘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뱀의 피부는 차갑지 않고 미적지근해졌다. 그것이 마물에게 어떤 변화를 끌어낼지는 까맣게 모른 채로, 칼리번은 한시라도 빨리 마비를 풀기 위해서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오메가의 체취와 열에 자극을 받은 뱀의 배가 불룩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처덕, 처덕, 물소리를 내며 오메가를 흥분시키던 뱀은 칼리번의 사타구니에 제 배를 더욱 강하게 마찰시켰다. 두툼한 나무 통이 엉덩이골을 벌리는 것만 같았다.
<흐극…. 으읏…!>
뱀이 몸을 부딪쳐 오자 좁은 엉덩이가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씩 빨라지는 속도에 칼리번은 구토감이 치밀어올랐다.
<…!>
마물에게 흔들리던 칼리번의 두 눈이 어느 순간 크게 확장되었다. 칼리번의 둔부를 때려 대던 뱀의 배 위로 가늘게 선이 그어지더니, 붉은 성기 두 개를 뽑아낸 것이다. 한쪽의 성기는 이상할 정도로 굵었고 다른 한쪽의 성기는 다소 얇은 대신 훨씬 길었다. 뱀 마물의 몸을 감싼 검은 비늘과 달리 성기는 붉고 번들거렸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으극…!>
긴 성기가 칼리번의 배 위로 얹어지고, 굵은 성기는 붉어진 엉덩이 아래에 깔렸다. 칼리번은 충격에 혀를 깨물고 말았다.
<흐, 흐으, 시…. 으….>
마비된 혀에서는 망가진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 성기 중 굵은 쪽이 좁은 입구를 자꾸만 찔러 댔다. 그것은 지나치게 굵었다. 이미 몇 차례나 마물과 교미를 겪은 칼리번이었지만 겁이 날 정도였다. 자연히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면서 엉덩이의 양쪽이 움푹하게 패였다.
<커헉, 허억…!>
칼리번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마물은 오메가의 흉통을 세게 조였다. 칼리번은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호흡 부족으로 몸에 힘이 풀린 순간, 굵은 성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흐, 으, 아……!>
뱀 마물이 삽입하기 시작하자 물결이 요동쳤다. 한번 비집고 들어간 성기를 빼낼 방법은 없었다. 그저 힘을 주어 잠시 침입을 멈출 뿐. 그러나 몸체만큼이나 매끈한, 물에 젖은 성기는 다른 알파의 성기보다 훨씬 수월하게 안을 침입했다.
<아, 하앗, 아으, 아…. 그, 마….>
뱀 마물은 몸체를 처덕거리며 굵은 성기를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옆으로 기울어진 칼리번은 얼굴이 반쯤 잠긴 채로 애원했다. 몸이 마비된 탓에 제 얼굴을 위로 돌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뼈가 부러진 고통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좁은 내벽이 알파의 성기를 버겁게 받아들이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몸 안쪽이 칼리번의 호흡만큼이나 헐떡거렸다.
<히, 아…. 아, 흐아앗!>
뱀 마물은 기어이 제 것을 전부 욱여넣었다. 한계 이상으로 벌어진 입구는 결국 피를 흘렸다. 그러나 굵직한 뱀의 성기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오메가의 뱃속을 오갔다. 뱀이 몸을 부딪치며 추삽질을 할 때마다 칼리번의 전신이 흔들렸다. 뱀독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은 생물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도구 같았다. 끊임없이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만족시키는 용도의….
뱀의 정사는 인간보다 길고 지독한 편이다. 그 본성은 마물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안에 들어가지 못한 기다란 성기는 배 위에서 흔들거리는 칼리번의 성기와 부딪쳤다. 긴 성기는 또 다른 성기가 칼리번의 내벽을 꿰뚫을 때마다 탄탄한 복근 위에서 장어처럼 꿈틀거렸다.
그사이, 굵은 성기는 오메가의 내벽을 짓뭉개고 결장까지 가득 채웠다. 얼굴이 물에 잠긴 칼리번은 익사하지 않으려고 헐떡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흐, 흐윽…. 아, 아아!>
숨을 쉬려 할 때마다 입 안으로 물이 들어온다. 고작 한 뼘 높이의 물에 잠겨 죽을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칼리번의 곁에는 뱀 말고도 작은 형상이 하나 더 있었다.
<으, 아으…. 크윽…!>
언제부터 곁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서는, 칼리번이 마물과 나누는 교미를 유심히 지켜보기만 했다.
<으, 으으…. 흐아….>
칼리번은 뱀에게 범해지면서도 그것을 바라보았다.
저건… 유령이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의 유령. 한때는 세상에 존재했다. 그러나 사라졌고, 잊혔다. 그런 주제에 지하에서 기어 나와 존재하는 척을 하니 유령이라고밖에 부를 말이 없었다.
<읏, 으응…. 으읍!>
물뱀이 칼리번의 몸을 엎었다. 뱀의 성기를 삼킨 둔부가 천장을 향했고 반대로 칼리번의 얼굴은 완전히 물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마물이 성기를 깊숙이 파묻으며 굵은 흉통을 꽉 조이자 폐가 짓눌렸다. 칼리번의 입과 코에서 공기 방울이 빠져나갔다.
<읍! 흐읍…. 으그급…!>
질식의 위협 속에서 칼리번의 몸은 도리어 마물의 성기를 강하게 조였다. 알파는 오메가의 몸을 더욱 압박했다.
<컥…. 허억……!>
이대로 죽는 것인가 싶은 순간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하던 유령이 손을 뻗었다. 칼리번의 고개를 물 위로 꺼내 주었다. 흠뻑 젖은 칼리번은 눈이 반쯤 돌아간 채로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붉은 눈동자가 그 추한 모습을 바라보더니….
<…커헉!>
칼리번의 머리를 다시 물 아래로 처박았다. 뱀이 추삽질을 할 때마다 얼굴 위로 물이 덮였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작은 물결에 지나지 않았지만, 칼리번에게는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다. 그는 얼굴 위로 물이 덮이지 않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는 귀여운 짓을 벌였더군.>
붉은 유령은 칼리번에게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간신히 숨을 내쉬던 칼리번의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윽?! 흡! 으읍…! 크흡…!>
그로 인해 칼리번은 지금 자신이 에어리얼에게 벌을 받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어리얼이 직접 골라 준, 알파의 씨를 품지 않고 멋대로 없애 버린 벌을 말이다.
<얼마 안 있으면 쓸 만한 마물이 태어났을 텐데. 네가 전부 망친 거야.>
<커헉…. 허억! 크흡…!>
칼리번이 익사하기 직전, 물속에서 건져낸 에어리얼이 부드럽게 말했다. 칼리번은 꺽꺽거리며 물을 토해 냈다. 칼리번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물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번 마물을 낳은 뒤에도 원치 않은 교미는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칼리번은 마물의 씨를 잉태했다. 뱃속의 마물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칼리번의 의지와 상관없이 알파의 씨를 품은 배는 나날이 부풀어 갔다. 억지로 접이 붙여진 짐승처럼, 칼리번은 손발이 묶인 채로 밤낮없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에어리얼은, 같은 오메가로써 칼리번의 고통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괴로움을 덜기 위해서는 쾌락을 덧바르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에어리얼은 순수하게, 교미가 아닌 오메가를 위해 알파를 우리에 집어넣었다. 오메가의 향기에 취한 알파는 게걸스럽게 칼리번을 애무했다. 알파는 성기가 잘렸고, 오메가의 배 속에는 이미 다른 알파의 새끼가 들어차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성기가 잘린 알파는 번식욕에 괴로워하면서도 쉼 없이 칼리번의 가슴과 허벅지 사이를 물고 빨았다. 칼리번의 울부짖음은 곧 신음으로 변해 갔다.
그때, 칼리번은 아주 약간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래 봤자 팔을 구속하던 수갑의 사슬이 조금 느슨해진 정도였다. 하지만 칼리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늘 알파에게 반항하던 그 힘으로 자기 자신의 배를 가격한 것이다.
<네가 벌인 행동에 처음에는 정말이지, 정말… 걷잡을 수 없을 만치 화가 났어.>
<히, 윽, 큭….>
<하지만 삭였지. 왜냐면 우리는 형제잖아.>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은 에어리얼뿐이 아니었다. 칼리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헐떡이며 에어리얼을 노려보았다. 숨이 들어오지 않아 평소보다 크게 움직이는 흉통은 마치 화가 나서 쉭쉭거리는 뱀 같았다.
<오메가가 알파의 씨를 품고 마물은 낳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본능이라고. 아무리 너라고 해도 거부할 수 없어. …아니면 너라고 다를 것 같아?>
그렇게 태어난 마물은 몇 년 안에 성장하여 인간을 습격하겠지. 왕자님 또한. 그 연약한 존재를….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윽?!>
에어리얼이 따로 명령했는지, 물에 잠겨있던 칼리번의 몸이 대번에 일으켜졌다. 그는 온몸이 뱀에게 칭칭 감긴 채로 허공에 들리게 되었다. 몸에 젖은 칼리번의 몸이 주룩 아래로 미끄러졌다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뱀의 몸에 걸쳐졌다.
<아, 흐아…!>
뱀은 아래에서 위로 성기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뱀의 모습은 마치 굵은 꼬리를 단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사지를 떨었다. 뱀의 추삽질에 배 속까지 들어찼던 물이 정액과 섞여 묽어졌는지 오줌처럼 구멍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아악, 으… 흑…! 크윽!>
오메가가 고통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알파는 거침없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뱀의 성기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몸 안의 또 다른 입구에 막혀 부딪쳤다. 퍽, 그곳을 부수기 위해 성기가 내벽과 부딪칠 때면 그 충격에 칼리번의 몸이 흔들렸다. 가슴 근육 또한 함께 출렁였다. 원치 않는 충격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피가 섞인 물이 떨어져 내렸다. 툭, 물방울 하나가 에어리얼의 얼굴 위로 튀었다.
<배 속에 품은 새끼도 마물은 마물이라는 건가? 어떤 의미로는 여전히 용병다워, 칼리번.>
에어리얼은 뺨에 묻은 물을 닦아 내며 물었다.
<윽, 으윽…!>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것이 사지가 마비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설마… 그래서 첫 아이도 죽인 거야?>
아이. 에어리얼은 일부러 그 단어를 사용했다.
<…?!>
칼리번은 소스라치게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관자놀이 위로 굵은 핏줄이 올라섰다.
<윽, 흐으……. 무… 무스…….>
마비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굳은 혀로 뭉개진 대답을 했다. 에어리얼에게 또다시 말려들고 말았다. 하지만…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갇혀 수많은 마물을 낳았다. 몇 번째 자식이든, 그에게는 괴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까지 품던 마물을 제 손으로 죽였을 때도 한 점의 미련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에어리얼은 이제 와 ‘첫 번째’를 언급하는가?
<에레즈 프리드웬의 아이 말이야. 기억 안 나? 그것도 네가 죽였잖아.>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뇌에 직접 각인시키듯 또박또박 말했다.
<첫 아이를 죽인 것도 용병이라서 그런 건가… 싶었지. 오메가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 텐데 말이야.>
칼리번은 에어리얼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붉은 눈동자에 붙잡힌 후다. 두 눈을 감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욱 부릅뜨게 되었다. 에어리얼의 두 손이 칼리번의 얼굴을 감쌌다.
<그부……. 아이…라니, 무슨….>
칼리번은 넋을 놓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짧은 말조차 끝마치지 못했다.
<…….>
에어리얼이 눈짓으로 묻는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거야? 하고.
<아…….>
칼리번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기억하고 있다. 피처럼, 힘없이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리던….
<읏…. 으으….>
쩌걱, 뱀의 성기가 몸 안을 파고들자 동시에 자아에도 금이 갔다. 에어리얼은 손찌검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이 작은 존재에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렇게도 지키고 싶어 했으면서, 어째서 그 아이는 쉽게 흘려 버린 거야?>
안다. 칼리번은 알고 있다. 에어리얼이 자신의 머릿속을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으….>
에어리얼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칼리번은 입을 뻐끔거렸다. 목구멍이 틀어막힌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불쌍한 왕자님…. 분명 실망하겠지.>
에어리얼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난 네 기억을 전부 다 봤어.>
<아….>
<정말 기억나지 않아? 작고 어린 왕자님이 기특하게도 배를 쓰다듬어 줬었잖아. 밤마다… 소중하게….>
<…나… 나는….>
<안타까워라, 둘이서 함께 만든 아이였는데….>
칼리번은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갓 오메가로 발현한 칼리번은 아무런 지식 없이 서툴게 첫 교미를 마쳤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그때의 그는 에레즈 프리드웬의 씨를 품은 줄 몰랐다.
<…으….>
…아니. 돌이켜 보면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이 워낙 열악했기에 필사적으로 배 속에서 버티는 그것을, 모른 척한 것에 가까웠다. 당장 왕자님이 말라 가고 있었다. 배 속에 자리 잡은 살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 으으….>
지하로 끌려온 후로 칼리번은 수도 없이 범해졌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그것이 견디기에는 버거운 환경이었다. 그건… 왕자님만큼이나 작고 연약해서 시간이 지나도 배가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쉼 없이 오메가의 배 속을 찔러 대는 마물의 성기를 버티지 못하고 몸 밖으로 흘러내려… 죽고 말았다.
수많은 마물을 품고 낳았지만, 칼리번에게는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언젠가 인간을 습격할 어린 마물에게 애착이라고는 한 치도 없었다.
그러나 첫 번째인 그것은 달랐다.
왜냐면….
어딘지 에레즈 프리드웬을 닮은 그것은… 이 지하에서 며칠이나마 자신과 함께 있어 주었으니까.
<정말 에레즈 프리드웬을 지키고 싶었던 건 맞아? 거짓말하지 마. 넌 더 강한 알파와 교미하고 싶어서 제 발로 나한테 온 거야.>
<…….>
검게 죽은 눈이 에어리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알파와는 이렇게 새끼를 많이 쳤으면서 정작 왕자님의 아이는 죽게 내버려 뒀잖아. 어떤 알파가 그 변명을 믿겠어?>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대신해서 칼리번을 비난했다. 원흉이 에어리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을 지배당한 칼리번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에어리얼은 전처럼 칼리번에게 에레즈의 환영을 보여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수려하고 선량한 왕자님은, 수많은 알파와 교미하고 마물을 낳은 칼리번을 두려워하고 혐오했다. 혐오를 받는 것뿐이라면 칼리번은 괴로울지언정 버틸 수는 있었을 것이다.
<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주, 죽은 아이가, 가, 여워….>
그러나 에레즈는 울고 있었다.
<우, 우리, 아, 아기….>
하얀 두 손은 작은 피 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에레즈의 손안에는 핏물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안에는 꽃 한 송이가 피에 절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만난 날, 에레즈가 칼리번에게 주었던 바로 그 꽃이었다.
<으… 으, 아…아악…!>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물의 성기에 꿰뚫려 신음했다. 쾌락과 고통이 뒤섞여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왕자님이 준 꽃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왕자님조차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간 버틴 고생과 수고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 채, 시체가 되어 진창에 처박히고 말겠지.
<흐, 후으, 윽…….>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었던, 커다란 사내는 소년 앞에서 속절없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끊임없이 재생하는 몸과 달리 갓 태어난 아이 같은 내면은 매번, 너무나 쉽게 패배했다.
<하아, 칼리번….>
에어리얼의 뺨이 붉어졌다. 정신이 무너져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우는 칼리번의 모습은 꼭 아이 같았다. 그 모습이 에어리얼의 흥분을 돋웠다.
<울지마. 네 곁에는 내가 있잖아.>
위로와 달리 에어리얼의 얼굴은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눈물이 감로라도 되는 듯했다.
<이걸 좀 봐. 아이를 잃은 널 위해 특별히 찾아냈어. 이걸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
칼리번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타 버린 지 오래였다. 물과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그는 멍하니 에어리얼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굉장히 슬펐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얼마 전, 배 속에 품었던 새끼를 잃은 탓이었다. 거대하고 강한 알파에게 씨를 받아 소중히 여겼었는데 오메가이면서도 낳지 못했다. 낳았어야만 했는데….
그래야 다시 왕자님을 만나도, 다른 마물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이도 낳았다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에어리얼이 건넨 선물에 칼리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흔해 빠진 돌멩이였다.
<이게 뭔지 모르겠어? 이곳에 그렇게 오래 있었나….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바로 기억할 줄 알았는데.>
칼리번이 멍청하게 굴자 에어리얼은 혀를 찼다.
<봐, 네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겼던 그거야. 왕자님께서 주신 선물이잖아.>
검은 눈이 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어리얼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처음 품은 아이는 헛되이 잃어버렸지. 하지만 만회할 수 있어.>
<…어, 떻게….>
<아주 쉬운 일이야. 더 이상 죽이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에어리얼은 돌멩이를 보석처럼 만지작거렸다.
<도….>
<응?
<돌려줘….>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뱀에게 온몸이 감겨 폐까지 짓눌린 탓이었다.
<뭘? 내가 뭘 돌려줘야 하는데?>
에어리얼은 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그, 그거….>
<이거?>
칼리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내 것…야.>
칼리번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는, 어눌한 말투였다. 사실 에어리얼이 쥔 돌은 길가에서 주운 흔한 돌멩이였다. 그러나 뱀의 독에 굳어 버린 몸처럼 정신도 마비당한 칼리번은 그것이 에레즈가 준 선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응. 맞아. 네 거잖아.>
에어리얼은 살살 웃으며 칼리번의 비위를 맞췄다. 칼리번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턱에 고인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먹을 것조차 찾기 힘든 그 고된 상황에서 왕자님이 자신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다. 칼리번은 그 대가로 하얀 조약돌을 찾아 주었다.
그때는 돌멩이 하나가 이토록 귀한 것일 줄 몰랐다. 칼리번은 매번 헤어지고 나서야,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이것만 있으면 지옥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왕자님에게도 증표가 될 것이다. 칼리번은 제 코앞까지 다가온 돌멩이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근데 돌려주면 뭐 해? 또 죽일 거면서.>
에어리얼은 가장 중요한 순간, 소중한 돌멩이를 등 뒤로 숨겨 버렸다. 그의 힐난에 칼리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아….>
오메가의 몸으로 마물을 계속 낳으면 자신이 그동안 지키려 했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저것이 몹시도 갖고 싶었다. 에레즈의 흔적이 남은 물건을….
<…….>
그런데… 어째서 이 고통을 감내하고 의미 없는 삶을 지속해야 하는 걸까?
어째서였더라….
<그럼 어디, 이번에는 망치지 않고 잘 낳는지 봐야겠어.>
칼리번이 어물거리자 에어리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칼리번의 머리보다 위로 손을 들었다. 칼리번의 시선이 자연히 위로 향했다. 뱀의 머리가 다가와 에어리얼의 손을 덥석 물었다. 칼리번은 그의 손이 잘릴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마물은 에어리얼이 들고 있던 물건만을 깨끗하게 삼켰다.
보통의 뱀이라면 삼킨 돌을 따라 몸체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뱀 마물은 칼리번을 삼킨다고 해도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을 만큼 덩치가 컸기에 딱히 티가 나지 않았다.
<아…….>
가장 원하던 물건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칼리번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간절히 물뱀을 바라보았다. 저 기다란 몸속 어디쯤 에레즈가 있을까? 되찾아야만 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가 더없이 멍청해 보였다. 에어리얼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으흑…?!>
그때, 칼리번의 몸이 움찔 떨렸다. 끝없이 긴 뱀을 살펴보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자신의 배로 향했다. 그의 안으로 무엇인가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으, 아….>
그러고 보니, 칼리번은 어느 순간부터 마물이 성기를 추삽질을 멈추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에어리얼과의 대화에 열중한 탓이었다.
<히, 윽…. 시, 싫어….>
칼리번의 몸이 요동쳤다. 뒤늦게 오메가가 반항하자 뱀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그를 옭아맸다. 동시에 칼리번의 배 속에 주먹만 한 알을 토해 냈다. 하나, 둘…. 배 속에 들어찬 거대한 성기가 구역질하듯 꿈틀거리며 알을 심는다.
<아, 아악, 그만…!>
알이 쌓이자 칼리번의 배 위로 그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없이 교미를 해 왔지만 이런 식으로 마물의 알을 품어 본 적은 없었다. 칼리번은 배 속을 채우는 압박감에 공포와 역겨움을 동시에 느꼈다.
오메가의 반항은 생각보다 격렬했다. 그 정도 몸부림으로 뱀의 똬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대신 자칫 잘못하면 배 속에서 알이 깨질 수도 있었다. 알파가 독니를 드러낸 순간, 에어리얼이 입을 열었다.
<정말 싫어? 이 중에 왕자님의 선물이 있는데도?>
그 한마디에 칼리번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되찾고 싶으면 흘리지 말고 제대로 품어.>
지금도 쉬지 않고 알이 들어차는 아랫배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불룩거렸다.
<이제부터라도 죽이지 않고 낳으면 왕자님도 용서해 주실걸.>
에어리얼의 말은 엉터리이며 거짓말투성이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진실과 거짓이 뒤죽박죽으로 섞였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머릿속에서 에레즈 프리드웬을 향한 마음과 잃어버린 것을 향한 집착만을 교묘히 골라내어 합쳐 버렸다. …그리하여 배 속에 품은 것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칼리번의 내부에 깊이 새겨졌다.
에레즈의 아이를 잃었다. 칼리번은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뱀의 알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뱀은 최대한 많은 알을 심으려 했고 오메가의 배는 작았다. 알을 더는 삼키기가 버거워져 발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흐읏…!>
산란을 마친 뱀은 아쉬워하며 성기를 뽑아냈다. 굵은 성기가 빠져나가자 입구가 벌어지려 했다. 칼리번은 온몸에 힘을 주어 입구를 최대한 오므렸다.
<후우, 하아….>
배 속에 알이 들어차자 뱀이 몸을 압박하지 않아도 호흡이 버거웠다. 칼리번은 뱀의 몸에 등을 기댄 채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알을 전부 품었으니, 교미가 전부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윽?!>
물뱀은 칼리번의 성기와 부딪치던 두 번째 성기를 이제야 박아 넣었다.
<아, 안 돼…! 아윽…!>
칼리번은 당황했다. 알파의 성기는 오메가의 몸에 씨를 심기 위한 것. 지금 삽입하고 움직인다면 배 속에 든 알이 다칠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어째서 뱀 마물이 제 알을 품고 있는 오메가의 몸에 성기를 삽입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늘고 긴 성기는 알을 피하며 파고들었고 어느새 오메가의 몸속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입구에 당도했다.
<흐윽…!?>
기다란 성기가 오메가의 입구를 뚫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그간 다른 마물들은 그곳을 우악스럽게 벌리고 찢었다. 그러나 길고 좁은 성기는 달랐다. 좁은 입구를 상처입히는 일 없이 파고들었다.
<흣….>
흡사 나뭇가지에 몸을 푹 찔린 기분이었다. 성기가 자리를 잡자 길고 가는 기둥을 통해 정액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배 속이 정액으로 차오르는 감각에 칼리번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간 겪었던 노팅과는 달리 고통스럽지 않았으나 대신 몹시도 길었다. 엄청난 양을 한번 쏟아 내는 것과 달리 일정한 양을 끊임없이 흘려 넣었기 때문이었다. 몸속에 주입된 뱀의 정액은 사실 반쪽짜리 체액에 불과했다. 칼리번의 따뜻한 몸 안에서 섞이고 결합하여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만들 정액으로 완성되었다.
<으응…. 아, 으….>
노팅을 마친 알파는 굵은 성기를 사용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긴 성기를 놀렸다. 긴 성기가 천천히 몸속을 오갈 때마다 알들이 배 속에서 부딪치고 흔들려 내벽 전체를 자극했다. 추삽질이 조금만 거칠어져도 깨질 것만 같아서, 칼리번은 다리를 벌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나 알이 깨질 일은 없었다. 숨겨진 입구에서 완성된 정액이 흘러나오더니, 수정을 위해 알의 껍데기를 뒤덮은 것이다.
<으, 읏…….>
그와 동시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쾌락이 칼리번의 몸을 지배했다. 알들은 칼리번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구르며 내벽을 뭉근하게 짓눌렀다. 어느새 얕은 물이 찰박거리는 바닥에 눕혀진 칼리번은 성기와 알이 몸속을 천천히 오가는 감각을 오롯이 느끼게 되었다.
<흐, 아으…….>
그리고 이 중에 에레즈의 알도 있다. 어느새 돌멩이는 알로 치환되었다. 이번에는 잃지 않을 작정이었다.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부풀어 오른 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에어리얼 또한 이 광경이 만족스러웠다.
야트막한 물은 갑작스럽게 많은 알을 품게 된 칼리번의 몸을 한결 편하게 받쳐 주었다. 마물은 젖이 흐르는 가슴에 가볍게 이를 박아 넣었다. 얇은 혀가 가슴을 핥는 감촉이 느껴지자 칼리번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오메가의 체취가 강해지니 배 속의 알들도 따라서 웅웅 울렸다.
알을 낳는 형태의 마물은 노팅 후에도 오메가의 향기와 열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야 성숙하고 부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배 속에 든 알을 주기적으로 굴려야만 했다. 그 때문에 이들의 러트란 알이 성숙할 때까지 무한히 교미를 반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소중하게 품어야지. 앞으로도 계속.>
에어리얼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에어리얼이라 할지라도 같은 오메가인 칼리번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는 없었다. 암시가 풀리고 나면 칼리번은 몇 배는 더 절망하고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흔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 * *
늦은 밤. 멀리서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밤늦게까지 부상자들을 돌보던 성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왕성을 탈환하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함부로 소리를 내면 십중팔구 마물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었다.
‘벌써 자정이 지난 건가.’
성녀는 짧아진 촛불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밤은 고요했고 초의 심지가 타는 소리도 낮보다 크게 들렸다. 치료소는 북문과 서문에 설치되었다. 왕성 북문이 공격당한 이후 추가적인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병자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채워진 상태였다.
다들 지쳐 잠든 밤이라 비교적 조용할 뿐이지 해가 뜨면 이만한 지옥이 또 없었다. 고통을 호소는 비명과 신음, 성녀를 찾는 부름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부상자의 수에 비해 간호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오갈 수 있는 좁은 길로 지날 때마다 환자들은 마치 갈퀴처럼 손을 뻗어 성녀를 붙잡았다.
‘이대로는 성녀님들도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 어찌하면 좋을지….’
성녀가 어둠을 벗 삼아 고민할 때였다.
“세로덴드의 성녀님.”
어린 성녀가 치료소에 들어와 그녀를 찾았다. 시간을 낼 틈이 없었으나 어린 성녀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세로덴드의 성녀라 불린 그녀는 다른 성녀에게 일을 맡기고 막사를 나왔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가 추가로 발생한 것 같습니다.”
두 성녀는 몸을 딱 붙인 채로, 밤 비둘기조차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일전에 말씀하신 증상과 같습니다. 계속되는 고열과 발진, 무엇보다 성력을 불어 넣었는데도 상처가 전혀 낫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부상자들과 분리해 둔 상태겠지?”
“네.”
“그럼 그곳으로 가 보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마.”
세로덴드의 성녀는 어린 성녀와 함께 치료소 내의 다른 막사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곳의 환자들도 치료소의 환자들과 똑같았다. 침상을 마련하지 못한 탓에 깔개 위에 누워 있는 환자들까지도.
그러나….
“여기입니다.”
놀랍게도 깔개에 누워 있는 환자는 활발히 다른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어야 할 성녀였다. 세로덴드의 성녀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세로덴드의 성녀는 환자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병든 성녀는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고열임에도 얼굴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아 창백했다. 그녀는 후방 병력으로, 왕성 북문 방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단순한 과로라면 좋으련만….’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어린 성녀는 환자의 증상을 보여 주기 위해 병자의 소매를 걷었다. 오른팔에는 붉은 발진이 가득했다. 어린 성녀는 병든 이에게 손을 뻗어 직접 성력을 불어 넣어 보았다. 어느덧 어린 성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만. 됐다.”
세로덴드의 성녀는 어린 성녀의 손목을 쥐었다.
“제힘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이건 확실한 역병이다. 우리 같은 성녀라 해도 피해 갈 수 없어.”
어린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턱이 바르르 떨렸다.
“이들을 돌볼 때는 성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성녀들에게 전해라. 의미 없는 낭비일 뿐이니…. 사망자가 발생하면 다른 부상자들의 시체와 섞어 불에 태우도록 해.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왕자님을 제외한 외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단단히 하여라. 설령 왕실 재건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세로덴드의 성녀는 다시금 주의를 주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환자 대부분은 탈진하여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이곳은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 찬 치료소보다도 한결 짙게 죽음이 드리워진, 침묵의 땅이었다.
이 역병은 아직 이름조차 없었으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왔다. 그러나 여자가 전쟁과 생산, 양쪽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병자도 훨씬 많았다. 최초로 이 전염병이 발견된 것은 4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때는 발병자의 수가 적어 단순한 계절병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왕성에 사람들이 모이게 된 후 그 수가 늘고 있었다. 환자들을 간호하는 성녀들의 피해도 점점 느는 추세였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드는 거지?’
세로덴드의 성녀는 차가운 눈으로 막사를 훑었다. 치료소에 몸을 누인 환자 중에 마물 혼혈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알파와의 접촉 때문일까?’
하지만 마물 혼혈 중에 병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마물 혼혈의 경우 평범한 인간보다 재생력이 뛰어나 어지간해서는 성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설령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한들, 성녀보다는 그들의 동맹인 신용병 연합에 몸을 의탁한다.
‘아니야….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의심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발병자를 확인한 세로덴드의 성녀는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왕성을 탈환하고 나면 전대 성녀님들의 기록을 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의 손에 떨어진 것은 불타고 남은 잿더미뿐….’
그녀는 주름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성녀단은 대대로 왕성을 보호막으로 지켜 왔기에 관련된 기록물 또한 수도에 있는 성녀원에 보관했었다. 그것은 마물과 인간이 싸워 온 세월만큼이나 그 역사가 깊었다. 그러나 알테르 프리드웬은 집요할 정도로 인간이 피워 낸 문명을 파괴했다.
성녀단을 이끌던 고위급 성녀들은 ‘피의 날’에 전부 살해당했다. 외부 영지에 머물고 있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던 성녀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뛰어난 성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던 성녀들은 하나둘 제거되었다.
남은 희망은 왕비였다. 그러나 그녀는 알테르 프리드웬의 압제 아래에서 오랜 세월을 버틴 탓인지 정신을 놓은 지 오래였다.
‘신이시여.’
성녀는 두 손을 모은 채 걸었다.
‘저희에게 남은 미래는 성 밖으로 나가 마물에게 죽거나 아니면 성안에서 천천히 병들어 죽는 것뿐이란 말입니까?’
달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말없이 기도를 올리며 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툭, 무엇인가가 그녀의 발치에 걸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성녀는 비틀거리다 평형을 되찾았다.
“…흐읍!”
무엇이 앞길을 막았는지 확인한 순간,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덕에 밤의 고요를 깨뜨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마주한 것은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끈적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순수한 ‘인간’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뒤틀린 시체는 몸은 반 이상이 마물의 형태로 변이되어 있었던 것이다.
* * *
성 안팎에서 시체가 여러 구 발견되었다. 그러나 놀라 나자빠질 일은 아니었다. 왕성 탈환 후 피난민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좁은 공간과 밀집된 인구.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인간과 마물 혼혈 사이에서 갈등이 크리라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두 종족 사이의 충돌은 적었다. 오히려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때마침 용병들은 반절이 성 밖으로 수색을 떠난 차였다. 성내 질서 수립을 위해 왕성 재건 기사단이 나서서 경비를 섰다. 상황이 이렇기에 매일 아침, 경비병이 시체를 발견하는 것은 예삿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현재까지 발견된 시체는 전부 마물 혼혈이었습니다. 마치 고기를 부위별로 썰어 낸 것처럼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습니다, 왕자님.”
그날 열린 회의에서, 리론 후작은 연이어 발생한 살인 사건을 알렸다. 본성 회의장은 처음 성을 탈환했을 무렵과 달라진 바 없이 허름했다. 세 기둥이 둘러앉은 탁자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붉은 오메가를 죽이기 전까지 본성 복구 작업에 사람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에레즈의 명령 탓이었다. 평생을 성 밖에서 유랑하며 지낸 왕자에게 겉치레는 불편한 옷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도저히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방식입니다. 마물의 짓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리론 후작은 두말할 것 없이 결론을 내렸다. 왕성 재건 기사단에서 며칠 사이 수습한 시체만 해도 서른 구가 넘었다. 시체의 상태는 북문 방어전의 후유증으로 죽은 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왕성에 오기 전까지 마물에게 시달리던 사람들조차 기절하거나 구토할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후작님. 마물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저희가 관리하는 보호막은 성을 되찾은 이후 단 하루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원로 성녀는 리론 후작의 보고에 말을 덧붙였다.
“마물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마물의 피가 섞인 자의 짓 아니겠습니까?”
리론 후작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쐐기를 박았다.
“아마도 약탈을 벌이려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살육을 저지른 것이겠지. 알파는 천성이 잔인하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마물과 다름없는 것들을 왕성 내에 계속 주둔시켰다가는 머지않아 죄 없는 백성들이 희생될 것입니다, 왕자님!”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가 훤히 드러났다. 회의장 안의 시선들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후작님께서 보내 주신 시체의 신원을 면밀하게 확인했습니다.”
신용병 연합 측은 공격을 예상했다는 듯 항변을 시작했다. 우두머리인 데릴만은 며칠 전 직접 수색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선 상태였다. 그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오드론이라는 이름의 대리인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희생자들은 전원 모르는 얼굴입니다.”
“뭐라…?!”
“단 한 명도 저희 연합의 명부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건에 신용병 연합은 일절 관여되지 않았으니 의심을 풀어 주시지요.”
“하! 그 말을 지금 아무 의심 없이 믿으란 말인가?”
“이런. 후작님, 저희가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오드론이라는 자는 데릴만의 오른팔이자 신용병 연합의 이인자였다. 가는 눈매의 이 알파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데릴만과 달리 비교적 신사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의뭉스러운 자였다.
“진작에 그 명부라는 것을 왕자님께 바쳤다면 오늘 의심을 살 일도 없었겠지! 이것이 다 너희가 우리에게 신뢰의 증거를 바치지 못한 탓이다! 예전부터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다른 세상 사람처럼 굴어오더니만 결국…. 아니, 애초에 그 명부라는 것이 실재하는지부터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소!”
오드론이 데릴만보다 외모나 말투가 비교적 유한 탓인지, 리론 후작은 기세가 등등해져서 손가락질을 해 댔다.
“알테르의 반란 이전부터 저희들은 용병 간의 원활한 교류와 인간에게 해가 되는 과격한 알파를 구별하기 위해 명부를 작성해 왔습니다. 그건 후작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 눈앞에 없는 증거를 믿으라니, 그 말을 어떻게 신뢰하겠나? 그렇지 않습니까, 왕자님?”
리론 후작은 에레즈의 동의를 구했다.
“애석합니다, 후작님. 저희는 알테르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자님과 함께 수년을 싸워 왔습니다. 그 충성 또한 일종의 증거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드론은 에레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희 연합의 명부를 왕자님께 바치지 않은 점은…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땅도, 가족도 없는 미천한 저희에게 있어 그것은 뿌리도 없이 왕국 전역을 떠돌던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일한 기록이다 보니….”
“그렇게 신빙성 있는 내력이라면 우리에게 공개하는 편이 훨씬 떳떳하지 않겠소?”
“이것 참…. 유감스럽게도, 명부는 저희 중에서도 대장님을 비롯한 극소수만이 열람할 수 있습니다. 후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동족의 절반을 배신하고 왕자님과 여기 계신 여러분께 봉사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나중에 일이 잘못되어 승기가 적군에게 돌아간다면…. 저희는 그 명부를 기반으로 복수를 당하겠지요.”
“뭐, 뭐라?! 지금 그래서, 우리가 다시 성을 탈환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런 망발을 감히 입에 올리다니?!”
“당연히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만에 하나의 일입니다.”
오드론은 알파치고는 늘씬한 체격에 유달리 팔다리가 긴 인물로 데릴만보다는 풍채, 카리스마 모두 부족한 편이었다.
“저희 용병 연합에서는… 북문 방어전 이후로 유입된 알테르의 잔당들이 시체의 주인공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입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리론 후작의 고함에도 유들유들하게 굴며 잘 방어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유추할 수 있네!”
리론 후작은 고깃덩어리를 바라는 개처럼 에레즈를 향해 목을 길게 뺐다.
“왕자님! 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하 감옥에 가둔 기형 알파들이 탈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 현재 지하 감옥의 관리는 신용병 연합 측에서 맡고 있어 확인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리론 후작이 신용병 연합 측의 자존심을 긁자 오드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후작님, 말이 지나치십니다. 설마 제 부하들이 감옥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거기까지는 차마 언급하지 못했는데, 직접 말해 주셨군그래!”
후작은 도발에, 오드론은 미소 짓고 있었으나 가는 눈은 당장에라도 그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후작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 저희 용병 연합의 잘못으로 돌리고 싶은 것 같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억울합니다. 여태껏 지하 감옥을 탈출한 기형 알파는 한 마리도 없을뿐더러, 그것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후작님께서 그것들의 상태를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괴물들이 그새 활동적으로 변했을 수도 있지 않소? 마물의 피는 워낙 변화무쌍하니까 말이오.”
“그럴 리가요. 그것들은 저희의 구멍 난 장화나 찢어진 가죽 장갑처럼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드론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흥! 명부를 숨기는 것처럼 그것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지하 감옥의 기형 알파들이 몰래 탈출한 후 마물 혼혈만을 골라서 죽인단 말입니까? 참으로 뛰어난 상상력이시군요! 그렇게 착한 녀석들이라면 저희의 동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멍청한 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너희들이 지하 감옥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다! 명부를 공개 못 하는 것은 죽은 녀석들이 그곳의 간수여서 그런 것 아니겠나!”
리론 후작은 어찌나 성미가 뻗쳤는지, 리론 후작의 얼굴을 가리는 천이 당장에라도 흘러내릴 기세였다.
“질감은 인간 쪽이 훨씬 부드러울 텐데요.”
“뭐, 뭐라고?!”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후작님.”
오드론이 웃어넘겼다. 그러나 드러난 이는 마치 당장에라도 인간의 살을 씹을 것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원로 성녀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려는 리론 후작을 간신히 붙잡았다.
“왕자님이 계시는 자리인데 이 무슨 소란입니까? 이런 어려운 시기에 저희들끼리 싸워서는 안 됩니다. 모두 진정하세요.”
당장에라도 오드론에게 달려들 듯 굴던 리론 후작은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보통 인간이, 그것도 인간 여성이 먼저 희생당합니다. 그런데 알테르의 잔당들만 골라서 죽다니….”
원로 성녀는 두 손을 모은 채로 말하기를 망설였다.
“이런 상황에 드리기 어려운 말이나, 사실 저는… 마치 누군가가 저희를 지켜 주려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지켜 준다?”
뜻밖의 발언에 리론 후작이 되물었다.
“예, 어쩌면 신께서 저희를 굽어살피시는 것일지도….”
“성녀께서는 그 끔찍한 광경을, 백성들에게 신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이오?”
눈살을 찌푸리는 리론 후작과 달리 오드론은 흥미롭게 원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당장은 ‘알테르의 잔당’이 골라 죽었다고 하지만, 언제 그 원한이 우리를 향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마물 혼혈도 종이처럼 갈가리 찢어 죽이는 정체 모를 괴물을 인간이 어떻게 피할 수 있겠소?”
“맞는 말씀이십니다.”
원로 성녀는 자신의 의견을 더 개진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반드시 범인을 밝혀내야 합니다. 신의 뜻이라고 믿고 앞으로도 알테르의 잔당을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하 감옥을 백번 확인해 보는 것이 낫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왕자님! 저희 왕실 재건 기사단을 보내시는 것도 한번 고려를…. 왕자님?”
리론 후작은 여러 차례 에레즈에게 동의를 구했었다. 심지어 그는 몸을 완전히 왕자 쪽으로 돌리고 매달리고 있었다. 리론 후작에게 집중되어 있던 이목이 서서히 에레즈를 향했다.
“…….”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회의에서 단 한 번도 에레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왕자님.”
리론 후작은 조심스럽게 에레즈를 불렀다.
“…….”
회의장 안에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 우리가 이분의 존재감을 잊고 있었을까!
에레즈는 긴 탁자의 끝에서 회의에 참석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동시에 그렇지 않았다. 마물과의 끝없는 사투로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카락은 근래의 안정적인 생활 덕인지 보기 좋게 자라 이마를 덮은 채였다. 흰 피부는 파리했는데 그 탓에 얼굴을 뒤덮은 흉터가 희미해진 듯했다.
우기 특유의 냉기 탓일까? 아니면 눈의 착각일까? 그도 아니면 왕성 탈환 이후 전투가 현저히 줄어든 탓일까?
물론 얼굴을 크게 가로지른 왼쪽 눈의 흉터는 여전했다. 그러나 남은 한쪽의 보석안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보랏빛이 은은하게 섞인 푸른 보석안은 눈꺼풀이 깜박일 때마다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눈 부신 빛을 드러냈다.
이분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전체적으로 지치고 피로해 보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렇기에 더욱 고아하고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었다.
“왕자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원로 성녀는 내내 망설였던 말을 간신히 꺼냈다. 세상일에 무심한 조각상처럼 모든 것을 지켜보고만 있던 에레즈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 나는 괜찮다.”
에레즈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는 기절하거나 잠들지 않았고, 회의 내용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에레즈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오드론의 말대로라면 죽은 알파는 알테르의 잔당으로 보이는군. 하지만 리론 후작의 걱정도 일리가 있다. 리론 후작이 아닌 내가 직접 지하 감옥을 사찰하도록 하지. …오드론. 이 조건이라면 그대도 거부하지는 않겠지?”
에레즈는 오드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왕자님.”
오드론은 에레즈의 명령을 따랐다. 어차피 데릴만이 돌아올 때까지 되도록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드론은 에레즈에게 전과 다른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우두머리인 데릴만을 마주할 때와 엇비슷한 무게감이었다.
* * *
지하로 내려오자 항시 들리던 빗소리가 일시에 막혔다.
암울한 고요.
지하의 죄수에게는 낮과 밤, 그 어떤 시간의 흐름도 닿지 못하리라.
에레즈는 오드론과 함께 지하 감옥을 순회했다. 일전에 붉은 오메가를 잡기 위해 헤맸던 장소였다. 그때와는 달리 지하 수로에 고여 있던 핏물과 독 안개가 싹 빠져 있었다. 덕분에 이동이 훨씬 수월했다. 감옥은 빈방 없이 모두 기형 알파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신용병 연합에서 차출한 간수들이 관리 중이었다. 무방비한 용병들은 횃불 아래에서 도박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며 경비를 서다가 갑작스러운 에레즈와 오드론의 등장에 허겁지겁 자세를 바로잡곤 했다.
“이것 참…. 면목이 없습니다, 왕자님. 하지만 맹세컨대 지하 감옥에서 탈출한 알파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오드론이 수로를 걸으며 사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경계 태세를 마냥 탓할 수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이런 곳에 있다 보면 노련한 전사도 게으름뱅이가 되고 말 테니까.
왜냐면….
“…여전히 시체 같은 모습이군.”
에레즈는 지나가듯 말했다. 횃불이 너울거릴 때마다 감옥 안의 괴물들의 모습이 잠깐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것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네, 여전합니다. 긴장감이 없다시피 하니 병사들도 다소 나태해졌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죄수는 전부 왕성 탈환 이후 성안에서 발견된 기형 알파였다. 일단 반은 인간, 반은 마물의 모습을 띤 마물 혼혈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것들에게는 본성을 숨기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의지뿐만 아니라 시체처럼 움직임도 없었다. 아니, 극단적으로 적었다. 종일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 음식을 섭취하거나 공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다. 한 감옥당 두 마리에서 다섯 마리까지 수감되어 있는데, 힘을 모아 탈출할 결심조차 없다.
“알테르 프리드웬과 붉은 오메가가 부하를 만들려다 실패한 흔적이겠지요. …가엾게도.”
오드론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일견 동정을 담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저 덜떨어지고 도태된 버림치에 지나지 않았다. 저들은 동족이라 부르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
그와 달리 에레즈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왕성을 되찾은 후, 알테르의 잔당은 보이는 족족 처형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처리하지 못하고 지하 감옥에 가둬 놓기만 했다. 극단적으로 움직임이 적으나 피부가 마치 돌처럼 단단하고 질겨서 그 어떤 검이나 도끼로도 목이 잘리지 않은 탓이었다.
에레즈의 명령하에 신용병 연합에서 손수 처리해 보려고도 했으나 본성을 드러낸 용병조차 저것을 찢지 못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시체, 숨 쉬는 돌멩이에 불과했다.
“리론 후작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지 못하셨으니 회의에서 그렇게 발언하신 거겠지요. 이것들은 저희 신용병 연합에서도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자연히 마물의 먹이가 되었을 텐데….”
오드론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과 마물의 모습이 뒤섞인 기괴한 괴물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에레즈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
한쪽밖에 남지 않은 보석안이 크게 확장되었다.
“…왕자님?”
에레즈가 멈춘 줄 모르고 몇 걸음 앞서 걸어가던 오드론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에레즈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번?”
에레즈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짙은 색의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커다란 기형 알파가 서 있었다. 다른 마물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언제나 칼리번을 찾아 헤매는 에레즈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목 아래까지 검은 털로 뒤덮인 그 마물은 하반신이 염소처럼 꺾인 발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달리 인간의 윤곽을 지닌 얼굴은, 영락없는 칼리번의 생김새였다.
‘그럴 리가 없어.’
에레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안전한 곳에 숨겨 두었는데?’
8년의 세월을 지하에 갇혀있던 칼리번이 다시 감옥에 갇혀 있다니, 손끝이 떨렸다. 그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에레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왕자님, 혹시 저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워낙 단단해 처리가 어렵겠지만…. 처리하겠습니다.”
오드론이 횃불을 직접 집어 들더니 에레즈가 바라보는 감옥 쪽으로 기울였다.
“멈춰라!”
당황한 에레즈가 벌컥 큰소리를 쳤다. 절박한 외침이 지하 감옥 안에 부딪혀 여러 번 울려 퍼졌다. 에레즈는 서둘러 감옥에 등을 져, 오드론에게서 칼리번을 숨겼다.
“왕자님….”
에레즈보다 더욱 당황한 것은 오드론이었다. 그러나 이미 에레즈의 눈에는 그가 비치지 않았다. 에레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시 한번 그 마물을 보자….
“—!”
그곳에는 칼리번이 아닌 염소를 닮은 마물이 서 있었다.
“으음…. 딱히 움직이는 녀석은 없군요. 이 중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물이 있으신 겁니까?”
오드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에레즈는 눈을 떼지 못하며 감옥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오드론은 에레즈를 위해 횃불을 감옥 창살에 가까이 대 주었다.
‘그 사람…. 그 사람은 어디로 갔지?’
창살 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에레즈의 등이 불빛에 물들었다. 횃불에 붉게 타 버린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선을 따라 감옥 안에 남아 있는 세 마리의 마물을 차근차근 살펴보았지만, 앞서 보았던 것들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
착각…인가. 에레즈는 자신이 잘못 보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오드론의 뚫어질 듯한 시선은 에레즈를 향했다. 회의장에서 느꼈던 압박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도리어 횃불 아래에 비치는 에레즈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병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왕자님, 오늘은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시는 편이….”
에레즈는 걸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그가 다시 걸어 나가자 오드론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를 따랐다. 에레즈의 내부에 휘몰아치는 혼란은 그의 창백해진 얼굴에서 여실히 드러난 채였다.
마물 혼혈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원인을 추적해야 한다…. 리론 후작의 주장처럼 기형 알파가 그와 관련이 있는지, 혹은 성녀단에서 비밀리에 알린, 전염병과 관련이 있는지도….
에레즈의 어깨에는 왕국을 이끄는 왕족으로서 책임져야 할 짐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이 중에 칼리번이 낳은 마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들 모두가…. 그런 생각이 들면, 에레즈는 피가 거꾸로 도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어서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 때문일까? 최근에는 낮에도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둑에는 빗물이 얼마나 찼지?”
에레즈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물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에레즈의 사정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지금 성 밖에 있었고, 그 혼자서 모두를 지켜야만 했다.
“아…. 네, 둑의 수위는 순조롭게 상승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수를 제외한 빗물을 모조리 투입해도 아직 무릎을 넘지 못할 겁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오드론은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물로 지하 감옥을 끝까지 채운다면 껍질이 단단한 괴물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하 감옥이 수로의 형태를 띠는 이유였다.
‘저 괴물이 전염병의 원인인지, 살육의 원흉인진 모른다. 하지만… 칼리번을 위해 전부 없애 버려야 해.’
칼리번이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 무엇도 그를 괴롭힐 수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에레즈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나의 오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