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물거품 上 (19/50)

9. 물거품 上

다음 목표는 정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뿐이라고, 칼리번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인간을 습격은 할 거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

“왜 죽이면 안 됩니까? 그편이 훨씬 간편합니다.”

“우리의 계획은 왕자님을 이곳까지 나오게 하는 거다. 전부 죽여 버리면 우리에 대한 소문을 퍼뜨릴 사람이 없어진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한두 명만 남기고 전부 죽이겠습니다.”

“방금 ‘죽이지 말라’고 했다.”

“소문을 낼 사람만 남겨 두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나머지는 죽여도 되지 않습니까.”

“안 된다면 안 된다는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살려만 두면 되는 거겠죠?”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널 상대로는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 건지 한번 들어 봐야겠군.”

“……심장과 머리만 붙여 두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인간은 우리 같은 마물 혼혈과는 다르다. 피를 많이 흘리거나 뼈가 잘못 부러져 튀어나오면 충격으로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은 정말 쉽게 죽는군요. 팔다리를 좀 뗀다고 죽어 버리다니. 여태껏 이 땅에서 번성한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제가 인간의 사정을 봐줘야 합니까? 당신도 마물이나 마물 혼혈을 그렇게 봐줘 가며 싸우지는 않잖습니까?”

“그들이 우리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약한 마물이라고 딱히 살려 주는 건 아니잖습니까?”

“…….”

“그보다는 저희 상황부터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들이 당신을 알아보면, 반드시 공격할 텐데요? 그에 대한 대책은 있습니까? 방심했다가는 오히려 당신이 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에어리얼의 몸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고요.”

“…안다. 하지만 네 실력이라면 죽이지 않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네가 걱정해 마지않는 에어리얼의 육체는 조금 다쳐도 바로 회복되니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저는 인간을 살려 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에 했던 대로 멋대로 죽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그렇다면 에어리얼의 몸이 다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될 거다.”

“…….”

“에어리얼이 너를 어떻게 훈련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참에 연습이라 생각하고 해 봐라. 무작정 많이 죽인다고 훌륭한 용병인 것은 아니니까.”

“저는 용병이 아닙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이 거는 제약이 불만인 듯 갑옷의 연결 부위를 삐걱거렸다. 칼리번은 순간 그가 흥, 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더 이상의 불만은 없겠지?”

“…….”

“그럼 계속 함정이나 파라.”

칼리번은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아스터는 굉장히 불만이 많은 듯한 모습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전신을 가린 커다란 갑옷에게서 감정이 느껴지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착각이겠지.’

어쩌면 에어리얼의 몸에 적응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간에 불필요한 감정이다.’

칼리번은 최대한 털어 내려고 애썼다. 8년 전에는 딱히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나 감상이 들 때마다 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버텨 내려 했다.

‘그보다는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하자.’

칼리번은 마음을 다잡고 아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은신처 주변에 함정을 설치하는 중이었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한 후에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할 생각이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왕성을 수복했다는 소식에 피난민들은 왕국 전역에서 왕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칼리번은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늪이 산재해 있어 많은 인원이 오가기 힘든 서쪽 늪지대를 은신처로 정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곳을 지나가는 피난민을 몇 차례 습격해서, 왕자님에게 도망친 에어리얼과 부하가 이곳에 있음을 알리는 거다. 칼리번이 돌머리를 굴려 짜낸 계획이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와 8년 만에 재회했을 때, 에어리얼을 향한 증오를 몸소 느꼈다. 분명 혈혈단신으로라도 서쪽 늪지대에 나타날 것이다. 만약 진짜 에어리얼이 칼리번인 척 성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함께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에는 크나큰 흠이 있다. 피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는 점이다.

“당신의 계획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제 감상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하지 마라.”

“죽이지 않고 유인만 하겠다니, 이런 방식을 고수해 봤자 헛수고입니다. 에어리얼을 다시 만나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고 말 겁니다. 물론 제가 있으니 에어리얼의 육체는 무사하겠지만요.”

아스터는 칼리번이 죽으면 죽었지, 자신이 죽는다는 가정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이 맞다. 칼리번은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다. 타인의 사정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몸과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이전처럼 행동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오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하 생활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그는 그였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이 칼리번이라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정 그렇게 불만이면 네가 계획을 세워라. 쓸 만하면 얼마든지 따라 주지.”

칼리번은 툭 하니 말했다. 아침부터 계속되는 아스터의 불만과 항의에 칼리번은 지친 상태였다. 그는 엄청나게 말이 많았고 대부분은 잔소리였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저 끽끽거리는 원숭이 같은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다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게 최선이다.”

안 그래도 부족한 지능을 최대한 짜내어 앞길을 정한 것이었다. 아스터에게 이 위기를 타파할 만한 기가 막힌 전략이 있다면 따르지 못할 것도 없다.

“감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칼리번의 예상과 달리 검은 갑옷의 말수가 갑자기 팍 줄었다. 그는 그리브에 걸리는 돌을 괜히 차 댔다.

“그럼 더는 투덜거리지 마라.”

저 녀석도 딱히 머리를 쓰는 부류는 아닌가 보군. 투구 속에 머리가 있지도 않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할 테지만.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시켜 은신처에 날카로운 나뭇가지나 돌 등도 비축하게 했다. 아스터는 걸을 때마다 갑옷을 유달리 크게 삐걱거리며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는 것으로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몸으로는 칼리번의 계획을 충실히 따랐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무기가 될 것 같습니까? 번거롭습니다. 차라리 저를 시키거나 당신이 마물을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더불어 여차하면 검은 갑옷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했다.

“잠자코 따라라. 혹시 모를 일이다. 대비를 해 둬서 나쁠 필요가 없지.”

“그러니 애초에 인간을 죽이는 것으로 통일하면 이런 것을 준비할 필요도—”

“다른 전략을 제시하지 않을 거라면 그만하라고 했다.”

칼리번은 어지럼을 느끼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어리얼의 몸이 원체 약해서 그런지 금세 피로해졌다.

“혹시 에어리얼의 몸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러니까 에어리얼의 몸을 소중히 대하라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그분은 원래 몸이 약합니다. 함부로 움직이면 당신만 피곤해질 뿐입니다.”

아스터가 다가와 칼리번을 탓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더욱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이 감정은…?’

칼리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이 기분은….’

손끝이 살짝 떨리며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8년 전, 성년식에서 왕자님을 본 후에도 이와 비슷했다. 자신 안에서 엄청난 공격성이 솟아났었다. 굵다란 나무를 맨주먹으로 부러뜨리고, 장작이 될 때까지 쪼개고 으깨고, 땅에 구덩이가 생길 정도로 주먹질을 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었었다. 공격성이 강화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전혀 다른 이 감정은….

짜증.

짜증이다.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 자신이 피곤한 것은 몸을 함부로 다뤄서가 아니라 바로 너 때문이라고.

칼리번은 검은 어금니에서도 손에 꼽게 재미없는 상대였다. 젠이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그는 듣기만 했었다. 그녀는 오래 산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달변가였다. 때문에 칼리번은 남의 말을 들으면서 힘들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 한 마을을 지나쳤을 때, 자식 셋에게 둘러싸여 죽어 가는 여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고 험한 노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설마 이 근처에 검은 손자국이 생겼던 건가?>

흡사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에 칼리번은 심각하게 경계했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저 여자는 그냥 놔둬. 인간의 어린애들은 부모의 정신을 말려 죽일 때가 있거든.>

젠은 전투 태세를 취하는 칼리번을 막으며 여인이 왜 죽어 가는지를 알려 주었다.

<저 작은 아이들이 여인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그때 칼리번은 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알파는 인간과 달리 성장 기간이 짧다. 빨리 자라고 천천히 노화한다. 그들이 태어난 순간, 숙주는 죽기 때문에 인간처럼 성년이 될 때까지 보호를 받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물 혼혈은 태어나자마자 인간에게 살해당하거나 마물의 먹이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운 좋게 살아남은 것들은 숲에서 짐승처럼 생활하는데, 대부분은 용병에게 거두어지곤 했다. 간혹 몇몇은 이성을 잃고 숲에서 인간을 습격하거나 잡아먹기 시작하는데, 기사단에게 마물로 몰려 토벌당하기도 했다.

칼리번처럼 인간에게 길러진 경우는 극히 드문 예외였다. 그러나 그런 칼리번조차도 오랜 시간 정과 시간을 쏟으며 함께하는 부모 자식의 관계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소중한 에어리얼의 몸을 위하고 싶다면, 그 입 좀 다물어라.”

칼리번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검은 갑옷의 덜그럭거림이 줄어들었다. 예상보다 일이 쉽게 흘러간다, 싶은 순간….

“에어리얼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잠자코 있는 듯하더니, 아스터는 뒷말을 붙여 온다.

“에어리얼도 저한테 입을 다물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불쾌합니다.”

툭! 아스터의 투구가 안쪽의 힘에 밀려 올라가는지 허공에 살짝 떴다가, 다시 갑옷으로 떨어져 부딪쳤다. 철컥, 철컥 쇳소리를 낸다.

“…….”

시끄러워 죽겠다. 이러다가는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다. 결국, 칼리번이 먼저 입을 다물었다. 무시가 답이다. 안 그래도 말수가 적은 칼리번이 아스터를 상대하다 보니 목도 따끔거리던 차였다.

‘종일 떠들어 대니 시끄럽군. 왕자님과 비슷한 목소리인데도 이렇게나 다르다니.’

제 목을 주무르던 칼리번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왕자님이 재잘거려도 한 번도 머리가 아프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왕자님….’

아스터의 목소리 탓일까, 불쑥불쑥 왕자님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칼리번의 사고방식은 온전히 그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칼리번은 주먹 쥔 손을 폈다. 손안에는 작고 하얀 조약돌 하나가 있다. ‘칼리번’의 손에 있을 때는 작기만 했는데, 에어리얼의 손으로 쥐니 묵직했다.

왕성을 탈출한 후, 동굴에서 발견한 돌무덤의 일부였다. 커다랗고 까만 돌멩이를 지키던 작고 하얀 기사들. 왕성 북문에 검은 손자국이 생겨 떠나기 직전, 칼리번은 기사 몇 명을 챙겨 갔었다.

‘왕자님. 당장 에어리얼에게서 구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하얀 조약돌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에레즈처럼 대했다.

‘하지만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제발 무사하십시오.’

왕자님을 다시 만나면, 변해 버린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너무나 달라져 버린 이 모습을 전처럼 받아 줄까?

칼리번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워 둬야만 했다. 지하 감옥에서 재회했을 때, 그는 말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조약돌을 챙긴 것도 과거에 공유한 기억을 언급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왕자님이 알아봐 줄까 싶지만…. 그래도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은 이것밖에 없었다.

“윽!?”

그때였다. 칼리번은 조약돌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그의 팔에 강하게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적인가?!’

칼리번은 적의 습격인 줄 알고 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스터가 제 할 일을 하는 것 외에는….

“왜 그러십니까?”

칼리번의 시선에 아스터가 물었다.

“방금 날… 일부러 친 건가?”

칼리번은 확신했다. 검은 갑옷의 짓임에 틀림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스터라면 가능했다. 검은 갑옷 안에서 백금사가 끝없이 흘러나오니까.

“글쎄요. 저는 모릅니다.”

아스터는 시치미를 뚝 뗐다. 칼리번은 또다시 감정이 솟아올랐다. 내부의 폭력성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듯한…!

“…됐다.”

칼리번은 참고 무시하기로 했다. 증거가 없었다. 괜히 이런 일로 끝없는 대화를 재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에레즈를 닮은 조약돌을 주우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돌멩이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금사에 둘둘 감긴 조약돌은 휙 허공을 날더니 수풀 저편으로 던져졌다.

“…….”

왕자님과 관련된 물건을 놓치다니. 칼리번은 굉장히, 심각하게 짜증이 났다. 그는 곧장 돌이 떨어진 수풀로 뛰어 들어갔다. 하얗기는 하지만 흔한 돌이기 때문에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도 하얀 조약돌은 칼리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무뿌리 사이에 누워 있었다. 칼리번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뭐 하는 짓이냐.”

이제는 칼리번의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굴러떨어져 버렸다. 칼리번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과 분노에 상체를 들었다. 외부의 개입이 훤히 보이는 상황. 이쯤 되니 아스터도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돌을 보는 표정이 에어리얼 같지 않아서 기분 나쁩니다.”

“뭐라고?”

칼리번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지만, 딱히 표정 따위는 짓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에어리얼의 얼굴로 그런 기분 나쁜 표정 짓지 마십시오. 아까보다 더 싫은 표정입니다.”

에어리얼다운 표정, 에어리얼다운 행동, 에어리얼다운 말투…. 그 말을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른다. 왕자님을 떠올릴 때면 아스터는 어떻게 알고 기가 막히게 칼리번의 집중을 방해했다.

도대체 표정이 어떻단 말인가? 어느 날 칼리번은 시냇물에 얼굴을 비춰 보았지만 증오스러운 에어리얼의 얼굴만이 떡하니 있을 뿐이었다.

“몹시 불쾌하고, 기분 나쁘고, 몸 내부로부터 거부감이 치솟는 아주 역겨운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표정이 뭐냐고 물으면, 아스터는 그렇게 설명할 뿐이었다.

“그런가?”

“네.”

그동안은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잠깐 나한테 와 봐라.”

“싫습니다.”

“어째서지.”

“느낌이 불길합니다.”

“그래?”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군. 오지 않는다면 직접 가는 수밖에. 칼리번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스터는 도망치면 지는 기분이 들었는지 물러서지는 않았다.

“네가 늘 말하는 그 에어리얼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지?”

가까이 다가간 칼리번이 물었다. 매일 에어리얼, 에어리얼 노래를 부르는 녀석이니 단번에 말하리라 여겼다.

“그는…….”

그러나 뜻밖에도, 아스터는 한참이나 말하지 못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냐.”

칼리번은 인상을 쓴 채로 아스터를 추궁했다.

“…당신한테는 알려 주기 싫습니다.”

그렇게 말이 많았으면서 이럴 때는 발을 뺀다. 칼리번은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숨이 턱 막히고 뒷골이 당겨왔다.

“그럼… 좋다. 이제 고개 좀 숙여 봐라.”

“왜 갑자기 그러시죠?”

“잔말 말고.”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명령에 아스터는 의아해하면서도, 사소하다 싶어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퍽!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주먹을 갈겼다. 에어리얼의 몸인 탓에 힘은 부족했으나 자세는 훌륭했다. 아스터의 투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땅에 떨어졌다. 주먹을 날린 칼리번의 몸 또한 크게 휘청였다. 순식간에 머리가 없어져 버린 아스터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칼리번은 씩씩거리며 투구로 걷어찼다. 투구가 턱, 턱 땅에 부딪히며 저 멀리 굴러갔다.

“지금… 에어리얼의 몸으로 저를 때린 겁니까?”

아스터의 목소리는 드물게도 떨리고 있었다.

“거기서 목소리가 나오는군.”

칼리번은 뒤를 돌아보았다. 투구 쪽에서 말할 줄 알았는데 몸통 쪽이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에어리얼이 직접 만들어 준 몸인데…. 어떻게 감히….”

아스터는 정신적인 충격이 컸는지 어깨 위를 두 손을 휘적거리며 머리를 찾는다. 그러나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에어리얼의 손으로….”

그동안 수많은 인간과 마물을 죽였으면서 고작 에어리얼의 주먹 한 방에 당황하다니. 굳어 버린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도대체 에어리얼은 널 어떻게 가르친 거냐. 온갖 마물을 다 보고 살았지만, 너처럼 버릇없게 구는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칼리번은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털어 내며 말했다. 전신이 쇠붙이다 보니, 때린 손이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말을 안 들으면 팬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면 더욱 팬다. 칼리번이 젠에게 전수받고 평생을 지켜 온 용병계의 규칙이었다.

버릇없는 신입은 주먹질. 러트는 매타작. 분란은 결투. 검은 어금니의 용병 대장으로서, 대부분의 내부 갈등은 이 방식으로 해결을 보았다. 칼리번은 머리가 나빴지만, 다른 녀석들도 똑같이 머리가 나빴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그가 한없이 약해지는 것은 에레즈 한정으로, 에레즈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졌다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제가… 버릇이란 것이 없단 말입니까? 에어리얼은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 난 에어리얼이 아니니까.”

“…….”

“네가 날 에어리얼의 육체를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도구로 보는 건 상관없다. 나 또한 널 무기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날 에어리얼처럼 만들 거라면 포기해라. 버릇없게 구는 건 못 참는다.”

끝없는 질문도, 시끄러운 잔소리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과했다. 왕자님이 남겨 준 조약돌이었다. 물론 칼리번은 자그마한 기사 돌을 몇 개 더 챙겨 두었지만, 이런 식으로 아스터가 자꾸 시비를 걸면 왕자님을 만나기 전에 전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사이 아스터의 투구가 데굴데굴 구르며 몸으로 돌아오려 했다. 칼리번은 아스터의 투구를 발로 꾹 눌렀다. 투구는 발아래에서 흔들리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에어리얼의 몸에게 이런 일을 당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탓이리라.

“돌려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스터의 갑옷에서 백금사 한 줄기가 빠져나왔다. 그것은 뱀처럼 수풀로 기어가더니 작고 하얀 조약돌 하나를 들고 왔다. 칼리번이 잃어버린 것이었다. 뱀 금사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약돌을 칼리번의 발에 휙 던져 버렸다.

“그렇게 군단 말이지.”

조약돌을 돌려받은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똑같이 돌려주었다. 아스터의 투구를 갑옷이 있는 쪽으로 뻥 찬 것이다. 퉁! 아스터의 투구가 몸통에 부딪힌 후 바닥에 떨어졌다. 아스터는 두 손으로 투구를 들어 머리에 썼다.

칼리번은 쇳덩이를 맨발로 찬 탓에 발이 얼얼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똑같이 성질이 난 두 사람은 비가 내려 은신처로 철수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 * *

먹구름이 낀 것도 잠시,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우기라니. 왕성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이 줄어들게 될 거다. 습격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은신처 곳곳에 함정을 마저 설치한 아스터는 피난민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홀로 밖으로 나섰다.

칼리번은 은신처에서 휴식을 취했다. 칼리번, 아니, 에어리얼의 몸은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도 나가떨어졌다. 마음 같아서야 아스터를 따라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능력을 쓰지 못하는 오메가의 몸으로 마물로 가득 찬 숲속을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숨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칼리번은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누운 채였다. 동굴 특유의 텁텁한 공기는 날씨와 더해져 한결 습해졌다.

‘이 약해 빠진 몸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는… 에어리얼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엿보는 수밖에 없다.’

에어리얼의 기억은 칼리번이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에어리얼의 계획을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오메가의 힘을 다루는 법을 무의식중에 익히게 된다.

그래서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기억을 보기 위해 그동안 애를 썼다. 일부러 잠을 청하기도 했고, 머리를 동굴 벽에 쿵쿵 찧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왕성을 탈출했을 때 에어리얼의 기억이 밀려들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한 번도 그의 기억을 보지 못했다.

“하아….”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칼리번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두 눈을 감았다. 몸이 피로했기에 선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에레즈를 보았다. 원했던 것은 에어리얼의 기억이었지만, 마음은 솔직해서 저도 모르게 반가웠다. 그러나 에레즈는 칼리번을 바라보지 않았다. 칼리번은 여전히 에어리얼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자님, 가지 마십시오! 그건 제가 아닙니다.>

‘에어리얼’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칼리번’에게로 갔다.

<그리로 가시면 안 됩니다!>

칼리번은 쉬지 않고 외쳤지만, 그에게 닿지 못했다. 에어리얼은 자신의 얼굴을 한 채로, 에레즈를 칼로 찔러 죽여 버렸다. 칼리번의 외침은 비명으로 변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칼리번?”

에레즈를 꼭 닮은 목소리에, 칼리번은 잠에서 깼다.

“헉…. 허억…!”

숨을 무의식중에 참았는지 칼리번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스터는 한쪽 팔로 그의 몸을 감싸 안고는,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칼리번은 잠시 현실과 꿈을 구별하지 못하고 아스터의 팔 안에서 숨을 헐떡였다.

“무슨 짓이냐.”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칼리번은 아스터의 몸을 밀어냈다.

“에어리얼의 몸에 온기가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

“…에어리얼의 몸은 섬세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아스터는 인간들에게서 뺏어 온 옷가지를 칼리번의 몸 위에 마구 얹었다. 칼리번은 피가 묻은 천을 한구석으로 몰아냈다.

“왕성에 분란은 없었나?”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에레즈 프리드웬의 목이 아버님 곁에 걸려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칼리번은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서둘러야 해….’

불길한 꿈을 반복하니 자꾸만 초조해진다.

“그리고 한 무리를 찾았습니다. 왕성으로 향하는 피난민들 같더군요.”

아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칼리번이 원하는 소식을 물어 왔다. 첫 기회는 칼리번의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지금 당장 가지.”

칼리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상관없다.”

“저는 상관있습니다.”

“걱정 마라. 나도, 에어리얼의 몸도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칼리번은 두 팔을 크게 펼치며 에어리얼의 몸이 건재함을 증명해 보였다. 그제야 아스터는 칼리번을 품에 안았다.

아스터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피난민들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막 피운 차였다. 칼리번은 빗물을 먹고 껑충 키가 자란 수풀에 몸을 숨겼다. 아스터는 제 몸을 와르르 무너뜨려 진흙 바닥에 떨궜다.

“남자가 둘…. 여자가 다섯. 그중 성녀님이 둘이라.”

칼리번은 인간의 수를 헤아렸다. 아무도 죽지 않게 해야 하는데, 성녀가 섞여 있다면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들은 다친 청년이 한 명,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어 나이를 판가름할 수 없는 사내가 또 한 명이었다. 여자들은 중년이 둘, 어린 소녀가 하나…. 그리고 30대로 추정되는 성녀가 두 명이었다.

피난길이 고단했는지 다들 먼지투성이에 온몸에 때가 껴 꼬질꼬질했다. 체격으로 나누지 않으면 남녀가 구별되지 않았을 정도로 다들 이고 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왕성으로 향하는 피난민 무리였다.

“이곳은 위험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마물이 가득한 숲 한가운데인데….”

“지친 몸으로 밤에 숲을 걸어 다니는 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몸을 묶은 다음 나무 위에서 자는 게 어떨까요?”

모닥불 터가 불안한지 누군가 의견을 꺼냈다.

“아시다시피 셰안이 다친 상태라 어려울 것 같습니다. 꼬맹이도 많이 어리고.”

얼굴을 가린 사내가 다친 사내를 보며 말했다.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왕성이 근처라 마물의 기세도 약해졌을 테니까요.”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만을 제기한 사람 쪽이 옳았다. 칼리번과 아스터가 그들을 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공격할까요?”

아스터가 칼리번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온몸을 조각낸 녀석이 어디 있는지 돌아보니, 아스터의 오른쪽 건틀릿이 칼리번의 어깨에 찰싹 붙어 있었다.

“잠시만…. 대기해라.”

칼리번을 아스터를 저지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한참이나 인간 무리를 향했다. 그들은 물과 감자, 말라비틀어진 검은 빵을 서로 나눠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사람들은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커다란 돌로 불 주변을 둘렀고 성녀는 얼굴을 가린 사내가 업고 온 셰안의 상처를 살폈다.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해 왔던 칼리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고된 여정 후 간신히 맛보는 휴식. 침묵 사이로 흐르는 녹진함과 피로감…. 하지만 마냥 피곤한 것은 아니다.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 누구도 짜증을 내거나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정도만 더 걸어도 왕성이 직접 눈에 보이기 시작할 거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헤헤, 마물로부터 안전한 땅이 있다니 믿기지 않아요.”

타닥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를 반주 삼아 소녀가 입을 열었다. 피난민 중 가장 연소자였다.

“…왕자님께서 우리 같은 떠돌이도 받아 줄까요? 왕성에서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던데. 그 안에서 살려면 더 많은 금화가 필요하겠죠?”

소녀는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나뭇가지를 휘적거렸다. 불씨가 죽지 않도록 모닥불을 간혹 들쑤시는 것이 아이의 직무였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왕자님께서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온전한 사람이면 무조건 받아 주신다고 했으니까.”

딱딱하다 못해 돌덩이 같은 빵을 물에 불리던 중년의 여인이 대답했다.

“그럼 더 큰 일 아니에요? 금화를 내지 않아도 되면 다들 왕성에 들어갈 거 아니에요! 이미 늦었으면 어떡해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성안이 사람들로 가득 차서 들어가지 못하면요?”

“그건….”

꽤 가능성 있는 질문이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곧 빈자리가 나겠지.”

이번에는 성녀가 차례를 이어받았다. 어딘지 쓸쓸한 말이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사람은 계속 죽을 것이다.

“저는요, 왕성에 들어가면 바로 기사단에 지원할 거예요. 병사가 되겠다고 하면 좀 더 빨리 받아 주겠죠?”

히히, 소녀는 웃으며 끝이 검게 탄 나뭇가지로 젖은 흙바닥을 뒤적거렸다.

“슬슬 움직이죠.”

아스터의 오른쪽 건틀릿은 수시로 칼리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만 더….”

그렇게, 자꾸만 미룰 뿐이었다.

…어째서일까. 지하에 8년을 갇혀 있다 간신히 지상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가장 먼저 마주한 존재는 에레즈 프리드웬이었다. 그 후에 자신을 습격하는 인간들의 무리를 만났으나 순식간에 살육으로 끝을 맺었다.

급살에 휘둘리고 파묻혀 사건의 흐름에 휩쓸리다, 사실상 처음으로 보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8년 전이었다면 굳이 시선을 주지 않았을 흔하고 소박한 풍경. 지금의 칼리번은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의 붉은 눈에 따스한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기사단이라니, 너 같은 꼬맹이한테는 어림도 없다.”

다들 종일 걸어 지쳐 있었다. 입술조차 달싹이기 힘들 텐데도 중년의 여인은 소녀의 말을 자주 받아 주었다. 그 태도가 썩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왜요! 저는 왕자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젠 대장님도요. 멋있잖아요! 그분 밑에서 최고의 검사가 될 거라고요!”

소녀는 무시당하는 것이 익숙한지 굽히지 않고 미래를 떠벌렸다. 모두가 소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칼리번을 제외하고.

‘젠!’

설마 그녀의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다니!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

‘젠, 그 후로도 계속 왕자님의 곁에 있어 준 건가….’

동료의 소식에 칼리번의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칼리번의 목덜미에 매달려 그에게 사소한 어깨 통증을 선사하던 아스터의 건틀릿도 그 변화를 눈치챈 듯했다. 칼리번은 진정하기 위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나 오래 굶주린 사람처럼 손끝이 떨렸다.

<내가 마물들을 막을 테니 젠은 왕자님을 데리고 북부로 도망치면 된다.>

<미쳤다고 그 명령을 따를 것 같아? …저 애새끼를 데려가라고, 나보고?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젠에게는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한 채 무작정 왕자님을 떠맡기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약속을 지켜 주었던 것이다. 고맙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에레즈만을 신경 쓴 나머지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솟아올랐다.

둘 다…. 칼리번에게는 낯선 감정이었다.

“아서라. 너같이 비리비리한 여자애는 첫 전투에서 동료들 뒷걸음질에 짓밟혀 죽을 거다.”

“왕성에만 들어가면 저도 젠 대장님처럼 커다래질 거에요!”

“같은 여자라도 그 괴물은 우리와 달라. 머리카락만 봐도 인간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잖아? 말이 통하는 기형 알파에 불과해!”

“그분은 전쟁 영웅입니다. 말을 조심하세요.”

여인이 거칠게 내뱉은 말에 성녀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도, 마물도 되지 못한 기형 알파는 마물 혼혈에게 있어 상당한 모욕이었다.

“아, 압니다. 하지만 그분이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중년의 여인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전 마물 혼혈이 아니니까 젠 대장님만큼은 못 되겠죠. 알아요. 그래도 인간 중에서는 최고의 검사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중년의 여인이 찬물을 끼얹었으나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꿈을 키워 나갔다. 말실수를 한 것도 있고 해서 여인도 더 이상 장난을 걸지 않았다.

“제가 엄청나게 강해지면 거기 아저씨들도 지켜 줄게요.”

소녀는 한구석에 모인 남자들에게도 아량을 베풀었다. 상처를 입은 남자는 지쳐 잠든 지 오래였다. 얼굴을 천으로 가린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미래의 검사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

말없이 대화를 듣던 칼리번은 여자들을 자세히 살폈다. 성녀를 제외한 여성들에게서는 무기를 다룬 태가 났으며 무엇보다 상처가 굉장히 많았다.

‘지난 8년 동안 여자들이 앞장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건가.’

칼리번은 어렴풋이 유추할 뿐이다.

“거기 꼬맹이. 왕자님과 젠 대장님을 보고 싶다고 했지?”

그때, 얼굴을 가린 사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나이를 유추하지 못했는데 목소리가 꽤 젊었다.

“네! 혹시 아저씨는 본 적 있어요?”

소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왕자님이라면 직접 본 적이 있지.”

“와, 정말요?! 같이 싸우셨나요?”

소녀는 지치지도 않고 두 눈을 빛냈다. 사내가 들려줄 전쟁담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한걸.”

사내는 대답 대신 얼굴에 감긴 때 묻은 천을 풀었다.

“그래도 네가 궁금할 만한 이야깃거리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니?”

“아…. 그 얼굴….”

사내가 얼굴을 드러내자 싱글싱글 웃던 소녀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다른 사람들도 사내의 맨얼굴을 처음 보는지 얕은 한탄을 내뱉거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칼리번도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20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갈색 머리에 초록 눈. 거친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준수한 미모였다. 그러나 단정한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른쪽 뺨 전체를 뒤덮은 문신이었다.

아니, 그것은 낙인이었다. 마물에게는 언어가 없었으니 그것은 명백한 인간의 짓이다. 그래서 누구나 해석할 수 있었다. ‘일레그의 것’이라고 적혀 있는 문신을.

“…보다시피 난 인간 농장 출신이고 그곳에 1년 동안 잡혀 있었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몸에 꽉 차는 오크 통 속에 갇혀 버려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얼굴에 새겨진 흉터를 만져 볼 시간은 엄청나게 많았지.”

남자는 버릇처럼 제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전장에서 공을 세운 알파에게 배당될 예정이었어. 웃기게도 난 이 이름의 주인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말이야. 내가 이 알파에게 배당되기 전, 왕자님께서 그곳을 기습하셨거든. 왕자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거야. 아마도 알파의 러트를 처리해 주다가 그의 아들을 낳고 죽었겠지.”

남자는 대화가 모닥불처럼 활활 탈 수 있도록 흥미로운 기름을 얹어 주었다.

“…그날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 그분은 부하들과 함께 오크 통을 하나하나 깨뜨려서 우리를 직접 꺼내 주셨지. 그때 나는 내 발로 땅을 걸은 것이 거의 반년만이라 두세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였어. 지금이야 네발로 기어서라도 도망쳤겠지만, 당시에는 공포로 가득 차 있어서…. 다리가 도통 움직이질 않았지. 나는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포기하고 말았단다.”

사내는 뺨에 손을 올리고는 양각이 드러나는 문신을 쓰다듬었다. 낯선 이름은 감각이 되어 손끝에 전해졌다.

“그럼… 어떻게 살아남으셨는데요?”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나같이 겁많은 머저리들이 대부분이었던 그곳에서… 왕자님과 약속을 했지. 그 약속 덕분에 지금까지 용케 버텼어.”

“약속이요? 무슨 약속인데요?”

“미안하지만 그것까지는 비밀이야. …약속이니까.”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내용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니! 소녀는 불만을 담아 나뭇가지로 바닥을 툭툭 쳤다.

“하여간, 나처럼 뺨에 알파의 이름이 새겨지고도 살아남은 자들은 대부분 왕자님께 도움을 받았단다. …나는 신이 오래전에 인간의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곤 했어.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 그들의 시체 위에 서 있던 왕자님을 보고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

“…….”

“신께서 떠나시면서 저분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구나… 싶었지.”

사내는 부드럽게 웃었다. 소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예전에는 도망치느라고 바빠서 왕자님에게 감사를 전하지 못했어. 그분의 군대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뭐, 이런 얼굴이니 병사가 되기는 글렀지만. 그래도 성에 들어가게 된다면 잡역이라도 맡을 수 있겠지? 병사 자리는 꼬마 아가씨가 맡을 테니 말이야.”

“물론이죠. 아저씨 정도면 벽돌 정도는 옮길 수 있을 거예요.”

“그것참 고맙다. …대충 이런 사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과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소녀에게 이야기해 주던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주변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진 것을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이야기를 전부 풀어낸 사내는 천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 후로는 평범한 대화와 휴식이 이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아스터는 쉬지 않고 칼리번을 닦달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칼리번?”

아스터는 칼리번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아 죽 잡아당겼다. 그러나 칼리번의 묵묵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붉은 눈이 아스터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붉은 눈동자 위로는 불길이 일렁거렸다. 빗물에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닥불의 빛이다. 그 빛은 지하에서 어둡게 솟아오르지 않고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에어리얼의 얼굴을 한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저 무리로 뛰어 들어가 사내를 협박할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나눈 약속은 무엇인지, 아니, 정확히는 에레즈 프리드웬이 어떤 말을 했는지를….

“…….”

싫은 표정. 아스터는 또 기분이 나빠졌다. 툭, 건드려서라도 깨뜨려 버리고 싶은 얼굴. 그러나 주먹으로 투구를 얻어맞은 전적이 있어 가만히 있었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타격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아스터의 건틀릿이 칼리번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며 채근했다.

“…아. 아니, 예정대로. 움직일 거다.”

칼리번은 머리가 뒤로 꺾이고 나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당신은 그러지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영문 모를 소리에 그제야 칼리번이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의 대화에 집중했을 때 눈 속에서 반짝이던 빛은 어느새 사라졌다.

“습격 대상은 저들 말고도 숲에 넘쳐납니다. 오늘은 동태를 살핀 것으로 치고, 물러나죠.”

“너는… 한시라도 빨리 에어리얼을 만나길 원치 않았나?”

“이러다가는 밤새 이대로 있을 것 같아서요.”

“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비가 다시 내립니다. 곧 에어리얼의 몸이 차가워질 겁니다.”

“…….”

칼리번은 아스터가 어째서 인간을 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스터 없이 홀로 인간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확실히 몸에 닿는 빗물이 굵어지기도 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피난민들을 살폈다. 얼굴을 천으로 가린 남자를 바라보는 붉은 시선에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그때였다.

“…저기, 혹시 여기 계신 분들도 왕성으로 가십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합류해도 괜찮을까요?”

칼리번과 아스터가 있는 곳의 반대쪽 수풀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난입했다.

“남자 둘이서만 숲을 건너는 건 아무래도 겁이 나서…….”

그들의 행색 또한 못지 않게 추레한 것이, 멀리서 왕성까지 온 피난민인 듯싶었다.

“아, 동행이군요. 이리로 오세요.”

다들 이런 식으로 모이게 되었는지, 무리는 새로운 사람을 거부감 없이 받아 주었다. 아무래도 마물에게 쫓겨 왕성으로 향하는 처지라 동병상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오래도록 모닥불에 시선을 주다가 아스터에게 질질 끌려 돌아갔다.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을 때, 칼리번은 피난민을 습격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저희보다 먼저 손댄 자들이 있군요.”

눈앞의 풍경을 본 아스터가 칼리번의 혼란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하룻밤을 보냈을 모닥불 터는, 시신으로 어지럽혀 있었다. 모두 여자였고 사내는 한 명도 없었다.

“…….”

칼리번은 붉은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구역질을 하거나 겁을 먹기에는, 이런 광경은 너무나 익숙했다.

왕성을 향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은 번식철의 연어 떼와 다를 바가 없었다. 왕성을 둘러싼 검은 숲은 지난 8년간 마물이 깃들어 활개를 치는 상황이다. 더구나 알테르가 전쟁에 패하면서, 그의 휘하에 있던 마물 혼혈 무리가 더해지기까지 했다. 인간들은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뛰어오르다 알파들의 입속으로 차례차례 먹혀 갔다.

왕국 전역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었으나, 왕성이 쉽게 포화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쿨럭! 큭, 커흑….”

그때, 어디선가 거친 기침 소리가 났다. 칼리번의 시선이 곧장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전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 명의 숨이 붙어 있었다. 칼리번은 그에게 다가갔다.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복부는 날카로운 발톱에 꿰뚫려 구멍이 나 있었다.

‘이 상처는… 마물에게 습격당한 것이 아니다.’

여인의 상태를 확인한 칼리번은 얼굴을 찌푸렸다. 마물에게 공격을 당했다면 이렇게 어설프게 살아남을 리가 없었다. 상처의 깊이나 크기로 보았을 때, 습격자는 아마도….

“마물 혼혈이 습격한 겁니까?”

칼리번은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헉, 허억…. 누, 누구…. 왕국……군? 어흐윽!”

피로 물든 여인은 헐떡이며 간신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칼리번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한 듯 눈의 초점이 흐릿했다.

“마, 마물……? 윽!”

새빨간 머리와 눈을 알아본 중년의 여인은 핏발선 두 눈을 부릅떴다. 몸에 힘이 들어간 탓에 상처 부위에서 울컥 피가 올라왔다.

“큭…. 더러운… 마물 놈……. 우리를 속였겠다!”

“아니, 나는….”

“전부…… 헉, 빼앗아, 갔으면서…. 시체까지 남기지 않을 셈이냐…! 크윽…!”

중년의 여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 칼리번을 공격하려 했으나 오른팔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날 선 눈빛으로 칼리번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

칼리번은 침묵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라 설명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리고 또, 그녀에게 납득할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칼리번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독이었다. 평안해야 할 그녀를 마지막마저 악화시키고 있었다.

<저 말고, 저 아이를…… 도와주세요…! 저는 어차피 죽을 겁니다…. 한 명이라도….>

8년 전. 에레즈와 함께 숨어 지낼 무렵, 숲에서 눈이 먼 성녀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닌 소년을 도와달라고 했던…. 정작 그 소년은 인간이 아닌 마물 혼혈이었고, 그 성녀를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미끼가 되었다가 죽고 말았다.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세상. 약한 존재는 강한 존재에게 죽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의 칼리번은 그 당시의 건장한 사내가 아니었다. 죽어 가는 이 여자가 예전의 성녀처럼 도움을 청한다고 한들 도와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으니까…. 그나마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지막을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것뿐.

“허억, 헉…. 저, 저리 꺼지지 못, 해…?! 윽, 아아…….”

칼리번은 그녀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손은 가늘어서, 그녀의 얼굴 전부를 덮지 못했다. 중년의 여인이 반항하려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다 죽어 가는 판국에 할 수 있는 저항이란 미미했다.

‘왕성이 코앞인데, 이대로, 마물 녀석들의 손에 전멸당할 수는 없어…!’

칼리번의 의도를 알 리 없는 여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적어도, 한 놈에게라도… 복수를…!’

붉게 충혈된 여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에게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은 것이 있다. 숨겨 놓은 마지막 일격이 그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더러운 마물 혼혈들이 다가올 때부터 왼손으로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오른손이 뜯겨 버렸고 왼손도 다른 시체에 가려져 있어 적은 방심한 상태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 칼리번의 허벅지를 칼날로 찔렀다.

“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칼리번의 손이 여인의 얼굴을 세게 움켜쥐었다. 피 묻은 칼날이 허벅지를 파고든다.

“헉…!”

그와 동시에 칼리번의 머릿속으로 그녀의 기억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모습. 칼리번은 중년의 여인이 오래전에 마물에게 자식을 잃었다는 사실을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나뭇가지를 휘적이는 소녀를 거둔 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자식처럼 여긴다는 사실 또한.

뒤늦게 합류한 피난민 두 사람이 보인다. 나뭇가지를 모아 그날의 불침번을 뽑은 후, 모닥불을 맡기고 잠드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배신.

새로이 유입된 피난민들이 불침번을 공격했다. 소리 없이 불침번을 죽인 그들은 신호를 보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마물 혼혈 무리가 나타나 일행을 급습했다.

그다음에는…….

<다행히 시간에 맞췄군. 회담에 바칠 노예는 이걸로 충분해. 나머지는 죽여라.>

남자를 생포한 알파들은 여자들을 죽였다. 칼리번을 칼날로 찌른 여인은, 마지막 순간 소녀를 품에 안았다. 그로 인해 그녀의 팔은 잘리고 몸에 구멍은 났지만, 소녀의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

알파와 배신자들이 떠난 후,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 기절한 소녀를 시체 사이에 숨겼다. 그 소녀는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

“아… 아아악!”

그때, 칼리번의 귓가로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칼리번이 밀려 들어오는 그녀의 기억을 흡수한 사이, 아스터가 에어리얼의 몸을 공격한 여자를 죽인 것이다.

“윽…. 아, 스터…!”

외부의 충격으로 정신 간의 연결이 끊기면서 여인이 느낀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칼리번은 가슴을 움켜쥔 채 헐떡였다. 뒤늦게 여인의 상태를 살폈지만 아스터가 여인의 가슴에 구멍을 낸 후였다.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마치 자신의 심장이 꿰뚫린 것처럼 고통스럽다. 칼리번은 진땀을 뚝뚝 흘리며 소리쳤다. 머릿속에서는 하룻밤 사이의 일이 지나갔지만, 실제로는 수 초밖에 흐르지 않았다.

“계약을 따르지 않은 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어리얼의 몸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아스터는 두 팔로 칼리번의 몸을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칼리번은 밀쳐 내려 했지만 약해 빠진 에어리얼의 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더구나 칼날이 박힌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친 다리를 치료해야 합니다. 더 확인할 것도 없으니 은신처로 돌아가죠.”

“…가장 나중에 합류한 자들은 미끼였다.”

“네?”

“미끼들이 동료를 불러들여 여자들을 죽이고 남자들을 끌고 갔다.”

여인이 남긴 기억의 잔향을 따라, 칼리번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타인의 기억을 훔친 붉은 눈은 광인처럼 번들거렸다. 칼리번을 안은 채 덜컥덜컥 걷던 아스터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래서요? 구하기라도 할 겁니까?”

“만약 그러겠다면?”

칼리번은 아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아스터의 갑옷 위로 흘러내렸다.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낭비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멍청한 대답이군요.”

“…….”

“마물의 짓이 아니라면 숲 곳곳에 퍼진 마물 혼혈들이 사냥한 거겠죠. 인간도 식사를 하기 위해 짐승을 사냥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인간은 짐승을 잡아먹고, 마물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 부산물이 마물 혼혈들이다. 더구나 전쟁 중이었다. 이 세계에서 살육과 약탈이란 흔한 일이었다.

“안다. 하지만 나는 약탈자들을 추격하고 싶다. 가서… 확인할 것이 있다.”

칼리번은 넋은 놓은 채 중얼거렸다.

“저희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겁니까? 아니면 알량한 정의감입니까? 이길 가망이 없는 전투에서 인간들이 그것 때문에 죽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스터가 물었다. 칼리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는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해 주는 기사님이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네가 구해야지.>

…아니. 기사가 아니다. 용사도 아니며, 영웅도 아니었다. 8년 전, 죽어 가는 성녀의 부탁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헤쳐 나갈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였다.

<나는 신이 오래전에 인간의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곤 했어.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 그들의 시체 위에 서 있던 왕자님을 보고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

그때의 칼리번에게는 ‘힘’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스터가 따라 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신께서 떠나시면서 저분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구나… 싶었지.>

모든 것을 잃은 자신은 지금, 무엇을 갈구하며 이 숲에 떨어진 하얀 조약돌을 주워 모으고 있는가?

“…네가 따르지 않겠다면 나 혼자서라도 간다.”

칼리번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정 그렇다면 좋습니다. 지금 당신의 상태를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아스터는 칼리번을 일부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칼리번은 제대로 서는 일조차 불가능해 비틀거리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젠장!’

칼리번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런데도 칼리번이 일어서려 하자 검은 갑옷에서 백금사가 기어 나와 칼리번의 몸을 지탱해 주었다.

“몸 상태가 이런데, 그곳에 혼자 가도록 제가 순순히 둘 것 같습니까?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잊지 않았겠죠? 계획을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당신입니다.”

“…….”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다시 말하겠습니다. 에어리얼을 만나는 일 외에는 일절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스터가 누차 강조했다. 그의 말이 옳다. 어쩌면 왕자님은 자신의 몸을 한 에어리얼과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한시 바삐 구해 내야만 했다. 하지만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반대의 방향에 자꾸만 이끌렸다.

저들은… 왕자님이 구한 사람들이니까. 칼리번은 혼자서 북쪽 성문을 지키던 에레즈를 떠올렸다. 왕자님은 강하다. 그리고 곁에 젠도 있다. 에어리얼의 술수에 쉽사리 속아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같잖은 정의감으로 그곳에 가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몸이 되기 전, 나는 용병이었다. 인간이 아닌…. 그러니 내게 그런 것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칼리번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다만, 여자를 죽이고 남자를 끌고 간 약탈자들은… 그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혹시 방금 죽은 여자에게서 무언가를 본 겁니까?”

“…그래.”

아스터는 늘 에어리얼의 곁에 있었다. 칼리번이 오메가의 능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듯싶었다.

“그렇다면 말해 보시죠. 에어리얼의 몸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윽….”

칼리번은 한쪽 팔을 내미는 아스터에게 몸을 기댔다. 이대로 아스터를 두고 뛰쳐나간다면, 그는 자신을 속박해서라도 은신처로 끌고 갈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못 하는 것을 시도해 보았다.

바로 설득이었다.

“하아…. 알파들이 사내들을 산채로 끌고 가며 ‘회담’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 살육도 그 회담에 바칠 제물을 모으기 위해 벌인 일이라더군. 분명 알테르의 잔당들이 모여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알테르의 잔당들이 벌써 새로운 세력을 형성한 거다. 왕성에서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 이대로는 우리가 계획대로 왕자님과 에어리얼을 성 밖으로 이끌기 전에, 저들에게 방해받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왕자님을 밖으로 이끌어도 저것들이 습격한다면? 혹은 우리가 계획을 실행하는 중에 저들과 부딪치게 된다면….”

“…….”

“너 혼자 검은 숲에 숨어 있는 마물 혼혈을 전부 상대할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아무리 저라도 그건 어려울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확인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들을 흡수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흡수?”

“알테르의 밑에 있던 알파들이니 ‘붉은 오메가’에게는 복종할 거다.”

뭉치면 뭉칠수록 힘이 커지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피를 이어받은 마물 혼혈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왕자님께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칼리번은 그 세력이 눈에 띄게 커지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약화시키고 싶었다.

“저희의 세력이 생긴다면 앞으로 에레즈 프리드웬을 상대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지겠군요. 하지만, 자신 있습니까? 얕보이면 도리어 알파에게 붙잡힐 수도 있습니다.”

“…….”

“저는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스터는 제 의견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당신도 알다시피 마물 혼혈과 마물은 같은 알파라도 다릅니다. 이성이 존재하는 마물 혼혈은 오메가에 대한 저항력이 약간이나마 있습니다. 진짜 에어리얼이라면 몰라도 당신은 조금… 엉성해 보입니다. 껍데기는 같다고 하나 진짜 에어리얼은 당신보다 훨씬 여유롭고, 우월하고, 아름다우니까요.”

지금 겉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능력의 면에서는 아스터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진짜 에어리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분명 곤경에 빠질 겁니다.”

역시나 설득에는 재능이 없었다. 아스터는 이곳에 남기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과연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칼리번은 대답 대신 허벅지에 꽂힌 칼날을 뽑아냈다.

“…어차피 검은 숲 안에 있는 이상 늦든, 빠르든 저들과는 부딪치게 될 거다. 도망치는 것이 네 본성이라면 그렇게 굴어도 좋다. 구축한 은신처를 포기하고 다른 경로를 또 찾아야만 하겠지.”

에어리얼의 피로 흠뻑 젖은 칼날을 땅에 떨구고 흙으로 덮었다.

“하지만 예전의 나도, 내 동료들도 먼저 싸웠으면 싸웠지, 싸우기 전에 도망친 적은 없었다.”

“제가 겁쟁이란 말입니까?”

그 말이 아스터의 성미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입으로 그 말을 하지 않게 도와줬군. 에어리얼, 에어리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 뻔하다. 줄곧 그 자식의 품에 숨어 있었겠지. 소라게처럼.”

칼리번은 아스터의 투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득 대신 도발이 통할 것인가? 칼리번은 설마 하면서도 아스터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분명, 다섯 명 정도라고 했지요?”

“음?”

“흥, 그 정도는 제 선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보다 더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번쩍 안아 들었다.

“당신의 뻣뻣한 혀로 얼마나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차하면 바로 죽이면 되겠죠.”

“…….”

칼리번은 떨떠름하면서도, 원활한 이동을 위해 갑옷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에어리얼을 만나고 싶지만, 이번만은 당신 명령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에어리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는 소라게 따위가 아니니까요.”

“……음.”

“소라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말하는 걸 보니 결코 좋은 녀석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칼리번은 원하는 대로 아스터를 이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자꾸만, 어린애를 속였다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 * *

“아악! 윽, 으윽! 흐읏…!”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는지 어설프게 지은 오두막이었다. 빠져나갈 곳 없는 밀폐된 공간, 그 안에서는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알파들은 한데 모여 약탈의 결실을 맛보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오두막 안은 눅눅하고 어두웠고, 괴로운 신음과 숨소리만이 간혹 새어 나왔다.

알파들은 저마다 사내를 하나씩 끼고 있었다. 환기되지 않는 오두막 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제, 제발 목숨만은….”

끌려온 지 얼마 안 된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떨었다.

“하라는 대로만 따르면 죽을 일은 없어. ”

알파는 더는 필요 없을 옷을 벗기며 속삭였다.

“하, 하지만….”

젊은 사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알파와 관계를 맺으면 죽고 만다고….

한 번도 범해지지 않아 뻣뻣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알파는 사내를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판판한 가슴을 버릇처럼 주물러 댔다.

“윽, 으윽….”

손길이 우악스럽고 거칠었다. 젊은 사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노팅만 안 하면 돼. 아니면 너도 저렇게 되고 싶은 거냐?”

그 말에 사내는 알파가 고갯짓을 하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알파들은 여기저기에서 제 몫의 사내를 배 아래에 깔아뭉개고 허리를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알파의 성기를 받는 사내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반항하는 사내도 있었고, 교미의 충격에 기절한 사내도 있었고, 반복되는 고통과 쾌락에 아예 정신을 놓아 버린 사내도 있었다.

“으응…. 흐, 앗, 앗! 아아앙!”

대부분의 노예는 두 다리가 허벅지에 묶여 사타구니를 훤히 드러내고 목과 두 팔은 묶인 채였다. 그러나 탈출을 포기하고 운명에 순응한 자들에게는 약간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래서 사내들은 두 팔과 다리가 자유로움에도 도망치기는커녕 알파에게 매달려 성기를 조르고 있었다.

“너도 묶인 채로 돌려지면서 정액을 받을래? 아니면….”

알파가 저기 좀 보라며 턱짓을 했다. 다른 알파가 허리로 강하게 쳐 댈 때마다 팔다리가 묶인 사내 노예는 개구리처럼 억지로 벌어진 채 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따,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저렇게만은…!”

비굴한 사내는 시작도 하기 전에 겁을 먹고 말았다. 저런 가혹한 처사에 비하면 은근하게 속삭이는 이 알파…. 아니, 주인은 얼마나 다정한가!

전의를 잃어버린 사내는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손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다리를 벌렸다.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그러나 알파에게 가족을 잃고 자신은 이렇듯 붙잡히고 말았다. 죽은 가족을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 원수와 싸워야만 했다.

“아, 아앗…!”

그러나 가족에 대한 죄책감은 알파의 굵직한 손가락이 몸 안쪽을 멋대로 휘젓는 순간 함께 뭉개지고 말았다. 이제 그는 알파의 노예였다. 뜨거운 눈물이 사내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억…. 허억!”

한편, 또 다른 알파는 굵은 흉통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막사 안은 정액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비린내 사이로 느껴지는 다른 알파의 체취가 서로의 성욕과 경쟁심을 부추긴다. 그는 몸 아래에 짓눌리고 있던 사내를 훌쩍 들어 배 위에 올렸다.

“흐아악!”

사내 노예는 거대한 성기에 몸이 꿰뚫리는 것만 같은 감각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잔뜩 긴장한 내벽이 알파의 성기를 기분 좋게 조였다. 사내의 허리를 감싸 쥔 알파의 두 팔이 불끈 부풀어 오르더니, 성기를 품은 몸을 들어 올렸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똑같이 앞에 성기가 달린 사내의 몸이었지만, 알파 쪽이 인간보다 훨씬 체격이 좋았고 힘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흐아, 아아! 찌, 찢어져, 흐익, 흐, 더 하면, 배, 배가…!”

사내 노예는 울부짖었다. 자위를 위한 도구처럼 위아래로 흔들리자, 알파의 성기가 전보다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흉물스러운 알파의 성기 모양대로 뱃가죽이 불쑥 솟아올랐다. 어느 순간 배가 뚫릴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쾌락을 부추겼다. 사내의 성기에서 정액이 줄줄 흘렀다.

“찢어지긴…. 좋아서, 흐억, 질질, 싸네…. 씨발, 헉, 헉…!”

알파는 일부러 사내 노예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알파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노예의 성기가 배 위에서 갈대처럼 휘며 퉁, 퉁 튕겨 댔다. 고통스러운 자극에 노예는 알파의 몸 위에서 자지러졌다. 알파는 이를 세워 노예의 가슴을 물어뜯었다. 힘껏 빨아 봤지만 원하는 젖은 나오지 않았다.

“사, 사내 젖이 나오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히익, 아악…!”

사내 노예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헐떡이며 외쳤다.

“으응, 힉, 히잇…. 배, 배 속을 조, 좆으로, 잇, 채워 주시는데 아무것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아앗…!”

평평한, 전형적인 사내의 가슴은 이미 잇자국과 멍으로 너덜너덜했다.

밤은 깊어졌지만, 교미는 끝이 없었다. 러트 시기가 오면 알파는 자연히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성기도 함께 비대해진다. 발정이 오면 알파는 열흘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않은 채 다른 알파와 경쟁하고 오메가와 번식한다. 살육과 교미, 정액과 피로 점철되는 번식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오메가의 향기를 맡아 본 적조차 없는 알파가 대다수였다. 그들은 오메가의 대체재로 인간 남자를 찾았다. 예전에는 인간 남자를 강간해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의식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제 이 검은 숲에서 알파를 지배하는 것은 본능밖에 없었다.

“으, 으아악! 싫어, 놔줘! 윽, 아악!”

다른 곳에서는 알파에게 깔린 사내가 울부짖고 있었다. 처음 노팅을 당하는 탓에 유독 저항이 셌다. 알파도 그 사실을 아는지 노예가 버릇없게 굴어도 용서하는 것 같았다.

“허억, 헉, 하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봐! 곧 끝난다…. 허억…!”

말로는 노예를 달래는 듯하지만 부풀어 오른 알파의 성기는 봐주는 일 없이 노예의 몸속을 짓이겼다. 알파가 오갈 때마다 사내의 뒷구멍에서 피와 정액이 섞여 옅은 분홍빛의 거품이 피어올랐다. 사내는 난생처음 겪는 교미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흐으, 흐윽…. 으응, 으…. 아, 아파요…. 이 이상 하면, 흐아앙…!”

또 어떤 사내는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쉬지 않고 훌쩍였다. 가슴은 여러 번 물어뜯겨 불그스름했고, 알파의 성기를 품은 입구에서는 교미의 상징이 흠뻑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너 하기에 달렸어. 입으로도 받아 주면 노팅만은 안 해 주마.”

한차례 사정을 마친 알파는 노예의 뺨을 툭툭 치며 빈정거렸다.

“흐윽, 으으…. 네에…. 네…….”

달래는 듯한 말투에, 울고 있던 사내는 안도감에 웃었다. 그러나 입가는 벌벌 떨렸다. 곧 사내의 벌어진 입으로 흠뻑 젖은 알파의 좆이 처박혔다.

“흐응, 으음……. 우, 우응…!”

알파의 성기가 쭙, 쭙 소리를 내며 사내의 목구멍을 오갔다. 사내는 입으로 더욱 잘 받아 내기 위해 알파의 허벅지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오직 노팅을 당하지 않기 위해….

노팅을 하지 않는 이상 임신은 되지 않는다. 마물의 번식이란 사내의 내장을 찢고 그 안에 씨를 심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인간 사내들은 임신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했기에 알파들은 노팅을 무기로 삼아 겁을 주기도 했고, 살살 달래기도 했다. 물론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알파들은 사내 노예들이 교미에 지쳐 기절할 즈음에 노팅을 할 계획이었지만 말이다.

알파들은 단체로 난교를 벌이고 있었으나 수치심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보다는 강했지만, 알파 중에서는 하급인 그들이 사내 맛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 걸신이 들릴 만도 했다.

이런 난교의 현장에도 알파에게 박히지 않는 인간 사내들이 있었다. 두 명의 남성은 다른 노예들과는 달리 알파의 마수에 한 발 벗어나,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금화를 세고 있었다. 막사는 어두웠으나 번뜩이는 금화의 빛에 종종 그들의 얼굴이 비쳤다. 그럴 때마다 원망스러운 시선이 그들에게 빗발친다.

“허억, 배, 신자……. 흐윽, 헉, 어억!”

누군가 그들을 비난했다. 얼굴 반이 문신으로 채워진 사내였다. 그는 가축처럼 팔다리가 묶인 채로 사내의 욕망을 받아 내고 있었다. 문신이 얼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요즘 같은 때에는 보기 드문 단정한 외모였다. 그것이 이들 무리의 대장인 센어르의 눈에 들었고 지금 그는 이곳에서 가장 강한 알파의 아래에 있었다.

“흐윽, 아, 아악…!”

총기가 돌던 눈은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텅 빈 눈은 흔들리면서도 배신자들을 향해 있었다. 모닥불 앞에서, 소녀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 농장의 작물이었을 무렵, 그는 오크 통에 담겨 있다가도 알파 병사들에게 끌려 나와 수도 없이 폭행과 강간을 당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내에게 비역질을 당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감정을 압도하는 것은 ‘공포’였다. 평범한 사내인 그는 알파의 번식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몰랐다. 알파에게 범해질 때마다, 몸속 깊숙이 심어진 알파의 씨가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매일매일을 극한의 공포에 시달리던 사내는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말았다. 평생 이런 짓만 당하다가 결국은 원치 않는 알파의 씨를 잉태하고 죽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살아남기를, 생각하기를 포기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에 의해 자유를 얻었을 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두려워 몇 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지하에 숨어 살았다. 그런 그가 용기를 내서 왕성으로 향한 것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준 왕자에게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사실은 땅굴을 파며 사는 두더지 같은 삶에서 벗어나 조금만 더 인간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처럼….

그런데 다시 나락이다. 평생을 땅굴 속에 사는 편이 나았으려나. 아니면,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건가….

“하… 하하… 히히히… 흐흐….”

알파에게 쉼 없이 범해지던 사내는 넋을 놓더니 웃기 시작했다. 하하, 흐아, 하하하, 텅 빈 웃음소리가 숨소리와 섞여 쾌락에 굴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 밑에서 좋다고 웃어 대니 알파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 하… .하아…. 아아, 아! 으윽, 아!”

알파는 기세 좋게 아래를 꿰뚫었고 허망한 웃음소리는 곧 신음으로 바뀌었다. 사내의 얼굴 위로 뚝, 뚝, 땀과 눈물이 섞여 흘렀다. 물기에 젖은 흉터는 유달리 번들거렸다. 알파는 노예의 문신이 거슬렸다. 자신의 것인데 다른 알파의 이름을 새기다니. 전부 과거의 잔재다. 이제 알테르가 죽었으니 새로운 이름을 새겨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삐걱….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옅은 달빛이 흘러들었다. 정체된 막사 안으로, 밖에서부터 바람이 밀려들었다. 그 바람에는 평범한 인간은 감지하지 못하는 미묘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

온몸이 정액투성이가 되어도 신경 쓰지 않던 알파들이었다. 그러나 그 희미한 향기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모두가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사내의 몸에 깊이 묻은 성기를 뿌드득 뽑아내는 자도 있었다.

오두막의 입구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등 뒤로 뜬 달 역광이 드리워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큼지막한 그림자와 유독 작은 그림자….

“적, 입니다, 대장…님…. 어억…!”

털썩, 뜻밖에도 커다란 그림자가 유언을 남기며 쓰러졌다. 이런 날에 보초를 서게 된 운이 나쁜 알파였다. 알파가 쓰러진 자리 위로 새로운 그림자가 생겨났다. 몸이 조각조각 맞춰진 끝에 완성된 형상은, 어둡고 커다란 갑옷이었다.

문 너머에서 바람이 불었다. 어깨를 넘는 긴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달빛 아래, 피를 머금은 붉은 색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해 모두의 눈동자에 각인되었다.

“설마… 붉은 오메가님이십니까?”

막사 안의 알파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호명에 작은 그림자가 대답했다. 막사 안은 일순 조용해졌다. 그러나 고요 속에는 혼란이 숨겨져 있었다.

붉은 오메가. 알테르 프리드웬의 뒤에서 마물을 부리던 또 다른 지배자.

왕성을 빼앗긴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인간들을 약탈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야적들 앞에 말이다.

“너희를 이끄는 대장은 없는 건가?”

칼리번은 얼빠진 알파들에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에어리얼처럼 보이길 바라며.

<그래서, 계획은 있습니까?>

오두막에 도착하기 전, 아스터는 인간 사내들을 끌고 간 발자취를 좇으며 그런 질문을 했었다.

<최대한 에어리얼의 흉내를 내 보는 수밖에 없겠지.>

칼리번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사실 모든 일이 급작스러워서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이, 그저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나아가서, 끝낼 뿐이다.

“그럴 리가, 붉은 오메가님께서 이런 곳에?”

“하지만 이 향기는 틀림없이 오메가인데….”

“그럼 저자가 정말 오메가란 말이야?!”

알파들은 붉은 오메가를 눈앞에 두고도 확신하지 못했다. 지난 8년간, 알파들을 직접적으로 지배한 것은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에어리얼은 몇 차례 전장에 나타난 것이 외부 활동의 전부였다. 비밀스럽게 굴수록 더욱 오메가를 갈구하는 알파의 습성을 꿰뚫어 본 것이다. 에어리얼을 독대하는 것은 서열이 높거나 공을 세웠다는 의미였으며 그중에서도 선택받은 알파만이 교미를 할 수 있었다.

‘오메가….’

‘눈앞에 오메가가 있다니….’

야릇한 향기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처음 맡아 보는 오메가의 향기에 알파들의 눈이 벌게졌다. 인간 사내와 달리 오메가는 알파의 아이를 가져도 죽지 않으며 가슴에서 달콤한 체액이 나온다. 교미할 때는 수십, 아니, 수백 배의 쾌락이 더해져 사내의 뒷구멍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라고도 했다.

알파들의 성기가 자극을 받아 더욱 크기를 키웠다. 알파의 아래에 깔린 사내들은 배가 차오르는 감각에 신음했다.

“오메가님!”

그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찔꺽, 사내의 몸에서 성기를 빼내는 소리가 고요 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 이런 누추한 곳에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저는… 오메가님께서 전쟁 중에 목숨을 잃으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들의 대장인 센어르였다. 그는 재빠르게 바지를 꿰어 입어 덜렁거리는 성기를 가렸다.

“에레즈 놈들이 숲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이렇게 무사하셨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오메가님께서 기껏 이곳에 행차해 주셨는데 저희는 추태를 보이고 말았군요. 이것 참, 면목이 없습니다. …뭣들 하고 있느냐, 더러운 인간 놈들을 치우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마물이 득실거리는 숲이다. ‘진짜 오메가’라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이곳은 묵사발이 될 것이다. 오메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센오르가 저자세로 굴자, 밑의 부하들은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파들은 한창 취하던 사내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이 기회를 틈타 버둥거리는 인간들을 각자 잘 묶어 둔 후, 대열을 이루었다.

“…뭐야, 말라 빠진 사내새끼 하나 가지고 이 난리라니.”

“저게 오메가라고? 말도 안 돼.”

이런 와중에도 칼리번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리가 있었다. 미끼가 되어 동족을 팔아넘기던 인간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메가의 향기에 취한 알파들과 달리 경계를 늦추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아니, 인간 사내를 대신할 존재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듯했다.

칼리번의 시선이 사내들에게 닿았다. 그들의 반응에 칼리번은 혹여나 정체를 들킬까 저절로 표정이 굳어 버렸다.

“사내새끼들이 입만 살아서는, 닥치지 못해!”

“으윽!”

오메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읽은 알파가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얼굴이 으깨진 사내들은 금세 잠잠해졌다. 오히려 그 대응이 칼리번을 더욱 긴장시킨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음.”

어쨌든 알파들은 속아 넘어간 것 같다. 칼리번은 다른 방해 요인이 있는지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이 알파들에게는 에어리얼이 마땅찮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메가님?”

붉은 오메가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센어르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칼리번의 붉은 시선이 센어르에게 꽂힌다. …에어리얼과 이곳의 우두머리는 알고 있는 사이인가, 아니면 아예 모르는 사이인가?

“이름은?”

“센어르, 센어르입니다.”

“…센어르.”

칼리번은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님. 혹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

설마, 서로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칼리번의 눈동자가 데굴 굴려 센어르를 노려보았다.

“오네민이 제 이름을 한 번이라도 언급하지 않던가요? 인간 농장에 뿌릴 사내들을 바치던 충실한 부하라고….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민망하지만, 할당량을 초과해서 바치는 달도 제법 많았습니다.”

센어르는 붉은 머리에 검은 눈, 정돈된 턱수염을 지닌 사내였다. 번드르르한 얼굴만 보자면 술집 주인처럼 보였으나 몸은 우락부락했다.

“…….”

“이분께서 약해 빠진 알파를 기억할 이유가 있습니까?”

칼리번이 대답을 망설이던 그때, 검은 갑옷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오메가님? 저자는 누구입니까?”

센어르는 불쾌해하면서도 칼리번에게 대답을 구했다.

“저는 오메가님을 모시는 기사입니다.”

“기사? 오메가님에게 호위 기사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하, 센어르는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칼리번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렇겠죠. 저를 모른다는 것은 오메가님을 독대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의 곁에 바짝 붙어서더니 보란 듯이 말했다.

“뭣…! 크읏….”

아스터의 어린 목소리를 우습게 여기던 센어르가 쓰라린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스터의 말의 진위가 궁금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메가님께서는 검은 숲에서 마물을 모아 왕성을 공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계획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당신의 영역을 근거지로 삼길 원하십니다.”

“여, 역시나…! 그러셨군요. 과연 오메가님다우십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대신해서 헛소리했고, 센어르는 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칼리번은 그런 계획을 세운 적이 없지만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광경은… 나의 아버님께서 추구하던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오메가님의 말수도 줄어드신 겁니다.”

멋대로 가짜 계획을 말하던 아스터는 이번에는 센어르를 힐난했다.

‘뭐?’

칼리번은 아스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아…. 죄송합니다, 오메가님! 번식할 가치가 있는 알파만이 교미를 할 수 있다는 규율을 잊지 않았습니다만…. 때가 때인지라,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센어르는 한없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아스터와 칼리번에게 굽실거렸다.

‘…그런가. 알테르와 에어리얼은 알파의 번식욕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거군.’

칼리번이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알테르의 부하라면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칼리번은 슬쩍 아스터를 보았다.

8년 만에 밖으로 나와 세상일을 모르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가르쳐 준 것일까? 그러나 아스터는 칼리번을 보지 않고 오히려 센어르에게 성큼 다가갔다. 아스터의 등 뒤에 가려진 칼리번이 옆으로 몸을 튼 순간이었다.

“크윽!”

아스터의 갑옷에서 백금사가 튀어나오더니 센어르의 손을 억압했다. 그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척 등 뒤로 한쪽 손을 가리고 있었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제가 전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오메가님을 보호하기 위함이니까.”

“크으…아아악!”

날카로운 금사는 센어르의 팔을 깔끔하게 절단했다. 찢어지는 비명이 막사를 채웠다.

“어차피 재생될 텐데 아픈 척을 하고 난리입니까? 이분에게 감히 더러운 발톱을 들이대려 하다니, 그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윽, 으으윽! 끄윽…!”

“…여기까지가 오메가님께서 하고자 하셨던 말씀입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에게 센어르의 팔을 공손히 건넸다.

“음…. 그렇다.”

칼리번은 잠시 인상을 쓰다가 동의의 의미로 팔을 받았다. 센어르의 팔은 날카롭게 변형되어 있었다. …의외였다. 미리 생각해 둔 대사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칼리번과 달리 아스터는 노련한 배우처럼 술술 움직였다. 아니, 다소 신나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곳이 마물의 숲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알고 계시겠지요? 이 이상 오메가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십시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쯤에서 목소리를 한번은 내야 할 것 같아, 칼리번은 에어리얼답게 말해 보았다.

“오메가님께서는 여기 있는 사내들을 다른 공간에 보관하길 원하십니다. 지금은 러트를 챙길 때가 아니니까요.”

“음…. 내 생각대로다.”

“보십시오, 오메가님께서도 제 말이 맞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뭘 하고 있습니까? 어서 움직이지 않고.”

“……그래! 서둘러라.”

칼리번은 큼지막한 팔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발톱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손가락이 허수아비처럼 까딱거렸다.

“아, 알겠습니다! 크윽…. 다들 뭐, 하는 거냐! 오메가님께서 시키는 대로 움직여!”

센어르는 잘린 팔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조아렸고 알파들은 손발이 묶인 사내들을 거대한 포대에 넣기 시작했다.

“흐음……!”

칼리번은 에어리얼답게 굴기 위해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려 노력하면서도 자꾸만 아스터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스터는 내내 이 계획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놀라운 적응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오메가님? 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칼리번의 시선을 눈치챈 아스터가 물었다.

“넌 사람들 앞에서는 달라지는 편인가 보군.”

“그럴 리가요.”

“…아니, 그렇다.”

잘린 팔뚝이 동의하듯 꺼떡거렸다.

* * *

젠이 통솔하는 수색대는 검은 숲 서쪽을 샅샅이 살폈다. 수색대가 본격적으로 파견되기 전, 에레즈의 군대가 몇 차례 더 되짚은 영역이었기에 전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녀는 에레즈에게 명령받은 대로 붉은 오메가가 이동했을 법한 경로를 추적하고 주변 마물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북문 방어전에서 소환된 마물들이 언제 또 왕성을 공격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대장님. 알파들에게 습격당한 현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전투의 흔적은 있었나?”

“아닙니다. 일방적인 학살입니다. 아무래도 마물이 왕성으로 이동하는 피난민을 덮친 것 같습니다.”

젠은 보고를 듣기도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도처에 피 냄새가 워낙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약탈자인가….”

젠은 혀를 찼다. 알테르가 죽은 후, 그가 다스리던 마물 혼혈들은 대부분 야적으로 변했다. 북문 방어전 이후로는 녀석들도 붉은 오메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에레즈가 수색대를 파견한 것은 붉은 오메가의 토벌뿐만 아니라, 멋대로 날뛰는 알테르의 잔당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밟아 주기 위함도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생존자가 있습니다.”

“…생존자가? 지금 어디 있지?”

젠은 말에서 훌쩍 내려 조사병에게 다가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함께 가시죠.”

젠은 병사를 이끌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한 병사들이 모닥불 터에서 시체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부패가 시작된 시체를 거두고 나니, 그 안에 10살 정도 된 소녀가 보였다. 동료들의 시체 사이에 숨어 버틴 모양이다.

“으….”

아마도 일행이었을 시체 밑에서 살아남은 탓인지 소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뒤덮여 있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을 입진 않았으나 육체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커 보였다.

“꼬마야.”

젠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소녀를 훌쩍 들어 올렸다. 피가 말라붙은 얼굴은 보기에 처참했다. 이대로 정신을 놓았다고 해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초점을 잃은 두 눈은 젠을 바라보더니 조금씩 빛이 돌아왔다.

“젠 대장님……?”

이곳까지 용케도 목숨을 부지한 아이답게, 소녀는 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날 알아?”

“…알아요.”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 처음 보는데. 이 몸이 이 정도로 유명인이었나?”

젠은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건넸다. 그녀는 섣불리 소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꼬마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니 설명할 수 있겠어? …힘들면 그냥 있어도 상관없지만.”

어찌 보면 가혹한 부탁이었다. 막이 덮인 듯 흐릿했던 소녀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물줄기를 따라 얼굴을 덮은 핏자국이 지워졌다.

“저희는 젠틀린 영지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왕성에 거의 다 왔는데…… 습격을 당했어요.”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으나 소녀는 용기를 내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에 새로운 피난민을 만났다…. 그들은 인간 남자였는데 알고 보니 알파의 앞잡이였다…. 모두가 잠들자 배신자들이 알파들을 불렀고 여자들은 죽고 남자들은 끌려가고 말았다…….

젠은 덤덤히 소녀의 설명을 들었다. 슬픔에 공감해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흔해 빠진 수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침이 되니까, 빠, 빨간 머리… 소년이…… 갑옷을 입은 남자와 함께…….”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에, 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젠이 반응을 보이자 소녀는 최대한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전했다. 작은 체구에 붉은 머리, 새하얀 피부와 붉은 눈을 가진 소년으로, 살면서 본 적 없는 미인이었으나 어딘지 눈매가 무서워 보였다. 곁에는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와 함께였는데, 그가 자신을 지켜 준 중년의 여인을 죽인 후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소녀의 묘사는 젠이 알고 있는 어떤 소년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 녀석들이 떠난 곳, 어느 방향이었어?”

하필이면 비가 내리지 않아 발자국이 남질 않았다. 물론 젠 정도로 감각이 발달한 알파는 남은 흔적만으로 충분히 추적할 수 있었지만 굳이 소녀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붉은 오메가일 수 있으니 성으로 지원을 요청할까요?”

부하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젠은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이나 허탕이었잖냐. 우리 선에서 확인한 후에 요청해도 늦지 않아.”

왕성에는 칼리번이 잠들어 있었으므로, 젠은 확실하지 않으면 에레즈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 잡아먹는 들개 새끼들은 이참에 족칠 필요가 있어.”

젠은 차가운 눈으로 시체들을 훑어보았다. 개들은 주인을 잃으면 들개가 되어 인간을 해치곤 한다. 검은 숲은 그 자체가 거대한 들개의 아가리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왕성으로 보내야지. 살아 있는 인간은 반드시 왕성으로 데려오라고…. 왕자님께서 명령했던 건 기억 안 나냐?”

“…….”

젠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알면서 내 입으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면상에 주먹 갈겨 버리기 전에.”

오늘같이 수색 과정에서 피난민을 발견하는 일은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대처는 천태만상이었다. 로위나가 지휘관으로 파견된 부대처럼 구호 위주로 활동하는 부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번거로움을 이유로 피난민들을 무시하는 부대도 있었다.

“아. 마침 잘됐다. 당연한 걸 물은 김에, 네가 책임지고 데리고 가라. 왕성에 도착할 때 죽기라도 하면 너는 내 손에 두 번 죽는다.”

“하지만, 대장님….”

“뭐?”

“커헉! 따, 따르겠습니다.”

젠에게 얻어맞고 나서야 부하는 소녀를 어깨에 들쳐멨다. 그 뒤 젠은 등을 돌렸으나 소녀는 알파에게 업혀 이동하는 내내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알파란 족속들은 적이나 아군이나 다를 게 없다니까….’

젠은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생존자가 인간 남자였으면 구해 준 것을 핑계 삼아 잠자리라도 따 내려 껄떡였겠지만, 어떤 성욕도 들지 않는 여자면 취급이 개만도 못했다.

“우리 부대에서 관리 중인 피난민의 수가 일정 수준을 넘은 상황이던데, 이참에 병사 일부를 떼어 내서 피난민을 왕성으로 귀환시키도록 해. 피난민의 명부는 내 손에 있으니, 중간에 딴짓했다가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알아서 잘해?”

젠은 자신의 부대지만, 사실상 데릴만의 부대나 다름없는 적대적인 알파들을 노려보며 선언했다.

“나머지는 예정대로 계속 수색한다. 다들 만반의 준비를 해 둬라. 이곳을 습격한 야적 무리에 붉은 오메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네, 알겠습니다!”

젠이 명령하자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다들 일사불란했고 그녀는 잠시 혼자 남게 되었다. 젠은 피난민의 피가 스며든 흙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가 바닥에 내던졌다.

‘…에어리얼, 정말 너인 거냐.’

그러고는 속으로 붉은 오메가의 이름을 읊조렸다.

‘정말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 주마.’

그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일 테니까. 에어리얼과의 악연이라면야 에레즈만큼이나 그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될 수 있으면 그 끝은 자신의 손으로 맺고 싶었다.

* * *

칼리번 일행은 센어르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본거지에 진입했으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여차하면 피를 볼 각오를 했던 칼리번으로서는 맥이 탁 풀리는 결말이었다. 이것이 다 ‘붉은 오메가’가 지난 8년 동안 쌓아 온 악명 덕분이었다.

그리고….

“고맙다.”

아스터에게 받은, 아주 약간의 도움 덕분이기도 했다. 비록 휴전 상태의 적이지만 칼리번은 검은 갑옷에게 감사를 표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아스터는 어떤 의미에서 칼리번보다 더 눈치가 없는 자였다. 어쩌면 몸이 살과 뼈가 아닌 갑옷과 금사로 이루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에어리얼’의 정보가 부족하다. 하지만 네 덕분에 얼추 그의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전 그저 에어리얼의 몸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을 뿐입니다.”

아스터는 퍽 냉담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애초에 그와 따스한 덕담이 오갈 것이라고 예상치도 않았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아스터는 빠르게 다음 계획을 물었다. 기존의 계획을 철폐하고 제 발로 적의 입 안에 들어온 칼리번에게는 세 가지가 목표가 있었다. 첫 번째는 붙잡힌 사내들을 풀어주는 것, 두 번째는 알테르의 잔당들로 구성된 센어르의 부대를 없애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센어르에게서 ‘회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

칼리번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은 채 두 손을 모았다. 아스터가 함께하는 이 방도 센어르가 제공한 것이었다. 장장 8년 만에 앉아 본 침대의 감촉은 놀랍도록 푹신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져 잠들지 않는 인내심이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잘 때가 아니다. 또다시 머리를 써야 할 때다. 삶의 고난을 압도적인 근육과 힘으로 해결해 오던 칼리번으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잡아 둔 사내를 모두 풀어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붉은 오메가’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아스터와 자신의 힘만으로 센어르와 부하들을 모두 죽일 수도 없었다. 칼리번의 부족한 화술과 전략으로는 센어르에게서 회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빼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더구나 센어르는 칼리번이 ‘칼리번’이었을 시절 가장 상대하기 싫어하는 부류였다. 상대의 비위를 맞추고 혀를 써서 해결하는 협잡꾼. 힘으로 승부하는 알파의 세계에서 처세술로 살아남는 부류. 칼리번과는 여러모로 상극이었다. 센어르의 본거지에 들어온 이후 되도록 그와 대화하기를 피했을 정도였다.

‘젠이 있었다면….’

칼리번은 오랜만에 젠을 찾았다. 작은 용병대의 대장이었던 시절, 칼리번은 발이었고 젠은 머리였다. 그녀가 어떤 제안을 하면 그는 원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그 방향조차도 대부분은 그녀의 의견을 따르는 쪽이었다.

“센어르와 교미하실 겁니까?”

칼리번이 인상을 쓴 채로 한참이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아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뜻밖의 말에 칼리번이 고개를 들었다.

“센어르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센어르 하나만으로 부족하다면 측근 몇과 더 교미해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의외로, 아스터는 칼리번의 세 가지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

문제는 칼리번이 그럴 능력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눈을 껌뻑거리기만 했다. 마물과 달리 인간의 피가 섞인 마물 혼혈들에게는 이성이 존재한다. 정신력이 약한 녀석들이야 마물처럼 향기만으로도 쉽게 조종당하지만, 어느 정도 급이 되면 버티기도 한다. 에어리얼처럼 정신 조작에 능한 오메가가 상대거나, 왕자님의 결혼식 때처럼 갑작스러운 습격일 때는 강한 알파도 부지불식으로 이성을 잃어버리기는 한다. 그러나 지금 센어르는 순순히 당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이 본성을 누르고 있다고 해서 오메가를 향한 갈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진짜 에어리얼은 그 욕망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알파와 알파 간에 서열과 끝없는 경쟁이 존재하는 것처럼, 알파와 오메가 간에도 힘의 줄다리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칼리번은 고통스러운 지하 생활 중에 어렴풋이 배웠다.

오메가와 알파의 싸움은 알파와 알파처럼 힘으로 붙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싸움이다. 오메가가 알파의 정신을 정복한다면 그를 지배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다면 그저 범해질 뿐이다.

정신, 영혼, 무형…. 칼리번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취약한 영역이었다. 만약 지금 칼리번이 센어르와 교미를 한다면, 그저 센어르의 욕망에 채워 주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아니, 나는 다른 방법을 쓸 거다.”

아스터의 말대로 에어리얼의 몸은 좋은 무기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오메가라는 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무력해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리번은 교미를 원치 않았다. 8년간의 지하 생활은 그의 영혼을 닳게 했다.

“…그렇습니까? 정 그렇다면 다른 방도를 찾는 수밖에 없겠군요.”

당연하게 교미를 권했던 아스터였다. 칼리번은 당연히 그가 반박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아스터는 의외로 순응했다. 그는 센어르가 방 안으로 들여보낸 선물을 만지작거리기까지 했다. 칼리번은 인상을 썼다.

“왜 그러십니까?”

칼리번의 뜨거운 시선에 아스터가 물었다. 검은 갑옷에서 기어 나온 백금사는 어느새 센어르의 선물을, 칼리번이 입기를 바라며 보낸 옷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어떤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하늘거리는 옷감의 감촉을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넌 예상외로….”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칼리번은 자신의 안에서 솟아오르는 어떤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 * *

“처음 계획했던 유인 작전을 변형하고자 한다.”

칼리번은 안 되는 머리를 학대하여 나름의 계책을 세웠다.

“아스터. 센어르는 회담이라는 모임에 바칠 사내를 다 모았으니 더는 습격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러니 회담일까지 이곳에 숨은 채 움직이지 않을 거다. 이대로는 왕자님께서는 영영 센어르의 본거지를 찾지 못할 거다.”

칼리번은 방 안을 훑으며 말했다. 처음 칼리번은, 사내들을 구하기 위해 쳐들어갔던 오두막이 센어르의 본거지일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센어르의 진짜 본거지까지 이동하는 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는 꽤나 많은 함정과 가짜로 만들어 낸 길이 있었다.

용병들은 전 국토를 방랑하기 때문에 왕성 주변의 숲에도 정통했다. 그러나 지난 8년간 숲의 생태는 크게 변했고 확장되었다. 그에 따라 숨겨진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도 센어르는 마물들이 차지했던 그 공간을 정리하고 지금의 본거지를 만들어 냈겠지. 공들여 만든 본거지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그는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에 막사를 설치하고 소수의 인원으로만 인간을 습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본거지 밖으로 나가 피난민을 습격해라. 다만, 평소의 네 방식대로 인간을 토막 내는 것이 아니라 센어르의 흉내를 내는 거다. 처음에는 센어르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점차 이곳으로 인도하는 방식으로. 센어르가 습격한 광경을 직접 보았으니,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물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죽여서는 안 되고. 칼리번은 혹시나 싶어 덧붙였다. 그런 식으로 서서히 센어르의 본거지를 노출시키고자 하는 것이 칼리번의 계획이었다.

“제가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사실상 우리가 원래 세웠던 계획을 그대로 이용하려고 그러는 거다. 바로, 왕자님을 우리가 있는 곳으로 불러들이려는 거지.”

칼리번은 머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쓴 작전을 또 써먹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있어야 통하는 겁니다. 피난민들이 ‘붉은 오메가’를 보았다고 증언을 해야 그자가 달려올 것 아닙니까.”

센어르가 칼리번이 본거지 안팎을 오가며 피난민을 습격하게 둘 리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 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계속해서 피난민이 습격을 받는다면, 왕자님께서도 잠자코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럴 분이니까. 칼리번은 북문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더욱 확신했다. 아스터는 어이가 없는지 투구를 삐거덕거렸다.

“그래도 네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습격할 때마다 이 머리카락을 가져가라. 그리고 눈에 띄는 곳에 뿌려 놔라. 도움이 될 거다.”

칼리번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계획을 보충했다.

“그것만은 싫습니다. 에어리얼의 몸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아스터가 그답지 않게 질색했다.

‘이까짓 털이 뭐가 중요하다고….’

칼리번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이 계획에도 취약점은 있었다.

첫 번째로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에어리얼은 왕자님을 죽이고 왕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피난민들이나 센어르의 노예들을 왕성으로 인도하는 계획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죽음을 자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피난민을 죽이지는 않는 방향으로 조절해 볼 뿐…. 그리고 에어리얼은, 북문에 마물을 소환한 것 외에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에어리얼이 왕자님을 죽이기 전에, 그리고 알테르의 잔당들이 일을 벌이기 전에 자신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칼리번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납득시켰다.

“하지만 제 보호가 없으면 혼자 남은 당신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아스터가 불쑥 말했다. 칼리번은 두 눈을 껌벅거렸다.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그 부분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 나는 이곳에서 최대한 센어르의 정보를 빼내 보겠다.”

“당신이? 정말로 제가 없어도 괜찮겠습니까?”

아스터의 갑옷이 비웃듯 끼익거렸다. 오두막에서 에어리얼의 연기를 해내지 못해 아스터의 도움을 샀던 것이 이틀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칼리번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에어리얼의 몸은 반드시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라.”

칼리번은 허리에 찬 단검을 쥐었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마물을 조종해서라도 스스로를 지킬 생각이었다.

“제가 만약 따르기 싫다고 하면 어떡할 겁니까?”

아스터가 불쑥 물었다.

“넌 늘 싫다고 했다.”

“이번에는 진짜라면요? 당신이 에어리얼의 흉내를 내겠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역시… 당신과 떨어져 있으면 에어리얼의 몸이 위험에 빠질 것 같습니다.”

“…….”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스터는 칼리번이 지닌 유일한 무기이자 체스 말이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 그렇다면 네가 권유했던 그 방법을 고려하는 수밖에 없겠지.”

교미. 원하지도 않고 자신도 없지만, 왕자님을 위해서라면….

“……. 하는 수 없죠. 당신 말대로 따르겠습니다.”

칼리번이 각오를 다지기도 전에, 아스터는 쉽게 항복했다.

“음?”

칼리번은 믿기지 않아 인상을 썼다. 아스터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 뒤로도 한참은 더 투덜거렸다.

“…그건 그렇고, 에어리얼의 흉내를 낼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단은 좀 웃으십시오.”

갑작스러운 지적에 칼리번은 아스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당신과 에어리얼의 가장 다른 점입니다. 에어리얼은 늘 웃습니다.”

웃음. 이를 드러내거나 입꼬리를 최대한 밀어 올리는 표정. 인간만이 가진 것…. 인간의 주변을 배회하는 짐승들이 애써 따라 하는 것.

<우, 웃는 거, 보, 본 적이 없어서….>

언제였던가? 누군가가 자신이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해서, 칼리번은 인간의 흉내를 내 본 적이 있다.

<…우, 웃으면 안 되는데….>

그런 자신을 보고 까르르 웃던 누군가의 모습이 자연히 떠올랐다. 그 미소가 가슴에 남아서 칼리번은 헤어지기 직전 한 번 더 그 우스꽝스러운 흉내를 냈었다.

“그건… 자신이 없다.”

칼리번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면 에어리얼은 자신과 같은 오메가이면서도 웃음을 능숙하게 사용했었다. 무표정은 부족한 인간이자 미완성 오메가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 * *

칼리번의 명령을 받은 아스터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센어르는 그것을 기회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칼리번에게 본거지를 소개하면서 혼란을 틈타 쌓은 권력을 과시했다. 칼리번은 센어르가 알테르의 목이 잘린 후 왕성에서 어떻게 도망쳤는지, 기존에 자리 잡은 마물을 물리치고 산채를 구축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약탈을 진행했는지에 대해 들어야만 했다.

“알테르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것치고는 규모가 상당히 갖춰진 상태군.”

칼리번이 무심히 감상을 말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느낀 바지만, 센어르의 본거지는 예상보다 정교하고 규모가 컸다. 용병대가 임시로 막사를 지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완벽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용병들이 힘이 좋다지만 이토록 정교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알테르의 몰락 이후부터라고 셈하기에는 다소 급했다.

“으…하하! 네, 그런 감이 없잖아 있지요. 알테르 프리드웬 님께서 허무하게 떠나신 후 다친 병사들이 숨을 장소가 워낙 간절했던지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이게 다 오메가님께 바치기 위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센어르는 능글맞게 웃으며 칼리번의 질문을 교묘하게 얼버무렸다. 원래의 칼리번은 타인의 심리를 잘 읽지 못한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에 익숙해진 탓일까….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오메가님께서 이곳을 기반으로 삼아 저희를 지휘해 주신다면 숲 전역에 퍼진 동료들도 결집될 겁니다. 병사가 더 모이면 왕성 습격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고 아니면…. 저희만의 새로운 왕국을 세울 수도 있겠죠.”

센어르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말했다. 입으로는 칼리번을 추켜세우고 있었지만, 혀는 기묘한 욕망으로 꿈틀거렸다. 센어르는 머리가 굵은 용병답지 않게 들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알테르의 잔당들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아닌 숲 도처에 깔린 마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물을 다룰 수 있는 오메가가 나타났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치하에서는 쓰다 버리는 용병에 불과한 센어르였다. 그러나 오메가만 있다면 다른 알파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위였다.

“생존을 위해서라기에는…. 인간 사내를 상당히 모은 것 같군. 식량을 축낼 텐데.”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를 보며 칼리번은 일부러 말했다. 인간 사내들은 낮에는 노역에 동원되고 밤에는 알파의 밤 시중을 들어야만 했다. 밤낮으로 시달린 탓인지 다들 뼈밖에 없었다. 이런 사내 노예의 수는 알파보다도 많았다. 칼리번이 수시로 노예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나 아직도 모르는 구역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것은…. 으음, 너무 쉽다 보니 과욕을 부린 감은 있습니다. 확실히.”

센어르가 어중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쉽다?”

칼리번이 되물었다.

“인간 놈들도 마물 혼혈보다는 마물을 더 피하고 싶다 보니, 검은 숲을 지나는 경로는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습니다. 사냥감이 연합군을 먼저 만나면 공치게 되는 거지만, 그전에 저희가 먼저 습격하면 전부 저희 것이 되지요. 눈앞에서 펄떡이는 물고기를 잡지 않는 것도 못 할 짓이라…. 하지만 한동안은 인간 사냥은 자제할 생각입니다. 오메가님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센어르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칼리번을 훑었다. 창백한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리고 가는 몸.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저 가는 몸은 알파가 함부로 쥐면 부서질 것 같지만 실상은 마물과도 교미할 수 있는 오메가였다. 저 낭창한 몸으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알파를 상대해 왔을지 센어르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희미하여 오히려 음심을 자극하는, 그런 향기를 흘리는 오메가가 눈앞에 있다. 능숙한 오메가일 테니 혼자서 이곳의 모든 알파를 상대해 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열 명의 젊은 사내가 눈앞에서 헐벗고 있다 한들 눈에 찰까.

‘역겹군.’

잡아먹을 듯한 시선에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겨운 걸로도 모자라, 센어르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중년 여인의 기억에서 분명 알파들은 ‘회담’에 보낼 사내를 다 모았다고 했는데….

“…오메가님? 혹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음?”

“아니면 노예 중에 신경을 거스르는 자라도 있습니까? 표정이 꼭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센어르가 칼리번의 눈치를 살피며 아양을 떨었다. 칼리번은 기분이 잡친 건 순전히 눈앞의 역겨운 알파 새끼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을 풀어주라고 하고 싶었으나 ‘에어리얼’은 그럴 수 없다. 설령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센어르는 풀어주느니 죽이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아무래도 저 추한 노예 탓에 기분이 상하신 것 같군요.”

센어르가 부하를 시켜 칼리번의 시선 끝에 있던 노예들을 불러들였다.

“뭐…? 지금 뭘 하는 거냐.”

센어르는 칼리번의 앞에 노예들을 무릎 꿇렸다. 칼리번은 오만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하하, 실은 오늘 밤에 바치려고 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지금 실행해야겠습니다.”

“무엇을?”

“오메가님께서 젊은 사내의 피를 즐기신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피를 흘리게 해야 기뻐하신다는 것도…. 저희가 미리 많은 물고기를 잡아 둔 보람이 있군요.”

“아니, 나는….”

칼리번은 두 눈을 껌벅거렸다. 아무리 피에 익숙하다지만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곳으로 모신 후 한 번도 오메가님께서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메가님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이들에게도 영광일 것입니다.”

표정이 환해진 센어르와 달리 노예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젠장, 이러다가는 애먼 인간들이 죽게 생겼군.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에어리얼이라면 유혹적인 말로 센어르의 정신을 쏙 빼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머리가 나빠서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나쁘니 어쩔 수 없다고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센어르는 멋을 부리며 칼을 뽑아 보였다. 무릎을 꿇은 사내들은 손발이 자유로움에도 도망치지 못하고 오줌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젠…. 왕자님…. 젠! 왕자님!’

왜 갑자기 상황이 이따위로 흘러가는 거지? 칼리번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피를 짜낼까요, 오메가님?”

돼지 통구이의 어느 부위를 먼저 먹을 것인지 권하는 것처럼 센어르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살아 있는 자는 누구나 포식을 원한다. 따라서 센어르는 붉은 오메가님이 이 순간을 기뻐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

그러나 이 식탁의 주인공인 붉은 오메가님께서는 어째서인지 묵묵부답이다.

“…오메가님?”

이상함을 느낀 센어르는 고개를 숙여 칼리번을 살폈다.

“…….”

칼리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눈으로 뚫어져라 센어르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에어리얼처럼 웃을 수 없다면 차라리 쳐다보기만 하십시오.>

수도 없이 젠과 왕자님을 찾던 칼리번의 머릿속으로 아스터가 한 말이 번개처럼 떠올렸다.

<당신은 말을 하면 할수록 에어리얼답지 않으니까요.>

소중한 에어리얼의 곁에 있지 못하게 된 아스터 나름의 조언이었다.

‘눈싸움을 하라는 건가.’

남은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칼리번은 온몸에 힘을 꽉 준 채로 센어르를 노려보았다. 붉은 눈은 핏물에 빠진 루비처럼 덧없이 붉기만 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 두려워할 만한 생김새였으나 이상하게도 이 오메가의 외모에는 시선을 뗄 수 없는 마력이 서려 있었다.

“오, 오메가님….”

센어르는 영문도 모른 채 칼리번과 한참을 마주 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오메가의 체취를 듬뿍 들이마시게 되었다. 신 과실을 본 사람처럼 센어르의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고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한참이나 체격이 큰 센어르가 먼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

칼리번은 속으로 놀라워하며 그제야 간신히 한번 눈을 깜박였다.

“흠, 흠, 크흠……. 하, 하하….”

센어르는 헛기침하며 등을 돌렸다. 입 안의 혀처럼 굴던 그의 태도가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칼리번은 손으로 눈가를 벅벅 닦아 냈다. 한참이나 부릅뜨고 있던 탓에 두 눈이 뻑뻑했다.

그래도 눈싸움을 한 덕분에 노예들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센어르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알파들은 노예와 함께 사라졌다. 둘만 남게 되자 센어르는 칼리번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오메가님. 제가 보내 드린 선물은 혹시 마음에 드셨습니까?”

“음?”

센어르는 극비사항을 알려 주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안 그래도 느끼한 목소리가 한층 더 기름져졌다. 둔감하기 짝이 없는 칼리번조차 팔뚝에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이전에 누리셨던 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전쟁 중에 이 정도로 질 좋은 옷감을 구하는 것이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옷 핑계를 대며, 센어르는 칼리번의 전신을 핥듯이 훑어보았다. 그는 여전히 센어르의 본거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입었던 넝마 그대로였다.

“…….”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센어르가 보낸 옷은 아스터가 하룻밤 만에 전부 찢어 버렸다.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 칼리번은 이번에도 센어르를 쳐다보기만 했다. 칼리번의 시선만으로 센어르는 화상을 입은 것처럼 움찔, 움찔 몸을 떨었다. 아니, 화상을 입으면 저런 표정을 짓진 않지…. 칼리번은 자꾸만 들썩거리는 센어르의 코와 눈썹이 불쾌했다.

“크하, 하, 하하! 제가 뭐라고 감히 추궁을…. 하아…. 오메가님께서 지금 이 모습이신 건 당연히… 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일 텐데 말입니다.”

거기다 센어르의 입은 혀로 입술을 적시거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뭉개며 가만있지를 못했다.

“좀 더 질이 좋은 것으로 구해 보겠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만족하실 수 있도록….”

센어르는 기어이 칼리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머리카락을 만지는 척하며 어깨와 목을 건드렸다.

“…….”

칼리번이 원하는 것은 하늘거리는 옷감 따위가 아니다. 그건 자신보다 아스터가 훨씬 더 좋아할 거다. 그가 원하는 것은 센어르의 머릿속에 든 정보뿐이었다.

“그보다는 물고기를 어디서 잡는지가 더 궁금하군.”

그건 그렇고, 왜 이 넓은 본거지에서 이 망할 알파와 몸을 딱 붙인 채 있어야 하는 거지? 칼리번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물고기… 말입니까?”

센어르의 손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빠져나갔다. 그는 아쉬워하며 손을 쥐락펴락했다.

“그래. 이런 좁은 장소는 시시하다. 좀 더 넓은 숲을 돌아다니고 싶군.”

“그건 안 됩니다!”

센어르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벌컥 소리쳤다. 오메가를 다른 알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귀가 아파 인상을 썼다.

“어…. 크흠! 제가 감히 오메가님 앞에서 큰 소리를…. 죄, 죄송합니다. 그… 오메가님은 저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러니 그보다는, 하아…. 제가 부하를 시켜 제작한 숲의 지도가 있으니 그것으로 무료함을 달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지휘실…. 거기에 보관되어 있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단둘이서….”

센어르는 자신의 반절 정도 되는 소년에게 안절부절못했다. 홀로 태양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과도하게 숨을 헐떡이고 땀을 흘렸다. 비처럼 흐르는 땀은 알파 특유의 체취를 짙게 만들었다. 알파가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그 사실을 가리기 위해 센어르는 연신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피난민들의 이동 경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라니. 칼리번으로서는 횡재였다.

* * *

“왕성에서 붉은 오메가를 찾기 위한 수색대를 파견한 모양입니다. 그중 일부가 제가 습격한 장소를 따라 이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예상한 대로군요.”

칼리번이 고군분투하는 사이, 아스터는 종종 바깥소식을 물고 왔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에레즈가 병사를 보냈고 그중 일부가 착실하게 따라오고 있다는 내용이었으나 칼리번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칼리번은 센어르에게 빼낸 정보를 아스터에게 그대로 알려 주었다. 아스터는 칼리번에게 배운 본거지 근방의 지리와 피난민들의 이동 경로를 빠르게 습득했고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수색대는 미끼를 따라 조금씩 본거지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유인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반면, 회담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일은 영 진전이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칼리번의 탓이었다. 에어리얼의 모습을 지녔고 그의 기억 일부를 엿봤다고 해서, 그와 같은 오만함과 말솜씨를 하루아침에 흉내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잠들기 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내일은 센어르를 어떻게 상대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칼리번의 일과가 되었다. 임무에서 돌아온 아스터는 장식용 갑옷처럼 벽에 붙어 칼리번을 지켜보았다.

“설마 그것마저도 제가 도와드려야 합니까?”

물론 진짜 장식용 갑옷은 아니었기에, 얄미운 말도 툭툭 내뱉었다.

“큭….”

꽉 쥔 칼리번의 두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라리 아스터와 역할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칼리번은 유인 작전을 적절하게 수행하기는커녕, 피난민에게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의 약골이었다.

“…내가 확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을 함부로 죽이지나 마라.”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칼리번은 한숨이나 푹 내쉴 뿐이다. 이제는 자야 할 시간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봤자 칼리번의 지능이 기적적으로 향상되지는 않기에 고민은 그 정도에서 그치곤 했다.

칼리번은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 근처에 놓인 탁자에는 대야와 물병이 놓여 있었다. 은으로 만든 대야에는 꽃잎을 띄운 물이 담긴 채였다. 그것으로 세안을 하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 냈다. 지난 전투에서 입은 상처들은 거의 아물어 가고 있었다. 센어르의 보호 덕분이었다. 입 안이 썼다. 몸 상태를 확인한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기분 나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음….”

왜 기분 나쁜 옷이냐 하면, 피부를 스치는 감촉이 꼭 혀로 핥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이런 옷은 보기에나 좋지, 활동성은 최악이다. 평생 부드러운 천을 걸쳐 본 적 없는 칼리번으로서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소매를 찢거나 끈으로 이곳저곳을 동여매 편리하게 개조하고 싶었다. 하지만 ‘에어리얼’은 그러지 않겠지. 그러니 입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센어르가 제공하는 옷과 보석, 음식 등이 침대 주변에 쌓여 있었으나 칼리번은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아스터가 곧잘 보석이나 비단에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칼리번에게는 금은보화보다 보잘것없는 조약돌이 더 소중했다.

‘왕자님.’

물이 담긴 대야 위로 창 너머의 달이 언뜻 비친다. 유독 어두운 밤인 탓일까? 검은 물 위로 별도 총총히 담긴다. 칼리번은 손톱만 한 달과 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8년 만의 해방은 그에게 모든 것을 감사히 여기도록 했다.

‘부디 무사하십시오.’

칼리번은 달과 별에게 기도했다. 부디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에어리얼이 그분을 해치지 않기를.

짧은 기도를 마친 칼리번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였다. 잠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쉬지 않으면 이 연약한 몸은 버티지 못할 테니까.

“…….”

알면서도 칼리번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때로는… 이 몸을 부수고 싶다. 이 갈망은 나의 영혼이 부추기는 것인가, 아니면 에어리얼의 육체가 충동질하는 것인가?

거울뿐만 아니라 물길, 다른 이의 눈동자에서 에어리얼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칼리번은 두려움과 경외, 그리고 살의를 느꼈다. 의미 없고 사소한 복수라 해도 좋다. 에어리얼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 수 있다면….

하지만 칼리번은 안다. 에어리얼이 버린 몸을 죽여 봤자 아무런 해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완전히 자신의 몸을 빼앗은 에어리얼은 기뻐하며 왕자님을 죽이겠지.

칼리번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고 아스터는 그런 그의 곁을 지켰다. 동틀 녘이 가까워진 새벽이 되어서야 아스터는 칼리번의 곁에서 조각난 채 잠들었다.

* * *

피난민을 가짜로 습격한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수색대가 그 흔적을 따라 센어르의 본거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대장님. 최근 외부인들이 저희 영역에 침입하고 있습니다.”

아스터의 행적은 센어르와 그의 부하들에게도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른 영역의 알파들이 들어온 건가?”

“그렇다면 저희에게 먼저 허락을 구했을 텐데, 주기적으로 오가는 연락병들에게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누가 감히 저희의 영역을 어지럽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로 인해 왕성에서 파견한 수색대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병사들이 상당히 근처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대응할까요?”

“…지금 우리가 그 녀석들을 공격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모르는 거냐. 지나가게 내버려 둬라.”

센어르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그에게는 잃을 것이 많았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에레즈 프리드웬이 이미 저희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아닐까요? 침입의 흔적도, 저희를 밖으로 유인해 내기 위한 계책이라면….”

“하, 그럴 리가! 본거지는 이중, 삼중으로 철저히 위장해 놨다. 에레즈 프리드웬 따위가 이곳을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굳이 가능성을 따지자면 내부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지 않겠나?”

센어르는 부하의 말을 잘라 내고는 코웃음을 쳤다. ‘내부 소행’이라는 말에 칼리번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그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우리의 규율을 따르지 않고 몰래 인간 사냥에 나서는 멍청한 부하 녀석들이 있을지 모른다. 한동안은 산채의 경비를 강화하고 부하들을 엄격하게 관리해라. 만일 밤에 몰래 숲으로 빠져나가는 녀석이 있다면 당장 내게로 압송해라. 수색대는 놔두면 알아서 지나갈 거다.”

칼리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려와 달리 센어르는 성욕이 강한 아군이 날뛴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침묵만 유지할 수는 없다. 칼리번은 일부러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잠자코 상황을 파악하던 칼리번이 센어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 오메가님?”

알파들의 시선이 동시에 칼리번에게 향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복종하고 있는 녀석들이다. 순순히 보낼 수는 없지.”

칼리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비극의 오메가를 연기해 냈다.

“…오메가님. 우연히 근처를 지나는, 피난민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의 군대일 수도 있습니다. 일전에도 왕국에서 보낸 수색대가 저희의 본거지를 찾지 못하고 지나친 전적이 있었습니다. 보고를 들은 바로는 수도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괜히 벌통을 건드릴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을 한 명이라도 놓쳐 본거지의 위치가 노출되는 쪽이 더 위험하니까요. 저희는 무엇보다도 오메가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

“복수의 때는 곧 돌아올 겁니다. 그때 오메가님께서 겪으신 치욕을 갚아 드리겠습니다.”

센어르는 한껏 꾸며 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칼리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칼리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을 싸우게 만들어야 했다.

“내가 있는데 어째서 겁을 먹는 거지? 마물로써 너희를 비호하겠다.”

“아, 그것은…! 이루 비할 데 없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센어르는 난처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칼리번은 아스터의 조언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센어르.”

“윽…. 네, 오메가님.”

“승기는 시시각각 에레즈 프리드웬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내가 북문을 습격했기에 적의 기세가 그나마 약화된 거다.”

“무, 물론입니다! 그날, 오메가님의 활약은 저도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겨 두었습니다. 무수한 마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인간들을 거리낌 없이 학살하셨지요…!”

“에레즈 프리드웬이 전세를 가다듬은 후 전투에 나선다면 그때는 늦을 수 있다. 그전에 눈에 보이는 대로 타격을 입혀 아예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칼리번의 행동과 말투는 여전히 에어리얼과 달랐다. 이곳에 있는 알파 중 아무도 에어리얼과 독대하지 못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무뚝뚝한 어조와 딱딱한 말투에 위화감을 느끼는 알파도 종종 있었으나,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향기가 의심을 잊게 했다.

“하지만, 저에게는 오메가님의 안전이….”

안전이 중요하다는 말은 순 변명이다. 칼리번은 센어르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그의 모습은 창고에 금은보화를 그득그득 채워 넣고 전전긍긍하는 부자 같았다. 전사도, 용병도 아닌….

“언제까지 좀도둑질에 만족할 거냐!”

칼리번이 으름장을 놓자 센어르의 얼굴이 가면을 쓴 것처럼 굳어 버렸다.

“…나는 지금, 너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떠올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난 8년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칼리번이 옛날에 몸담았던 용병의 세계, 마물 혼혈의 세계는 힘으로 서열이 결정되었다. 강한 알파는 대장의 자리에 오르고, 더 큰 용병대를 소유하고, 더 많은 알파의 위에 섰다.

그동안 센어르는 한 번도 본성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칼리번은 오랜 경험으로 그가 강한 부류의 알파가 아니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하지 못한 알파는, 높은 확률로….

<남자를 위에다 가져다 바치지. 뭐, 요즘은 용병 연합에서 사내 거래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내가 젊을 적만 해도 완전 무법이었거든. 지금도 아예 없다고는 장담 못 해.>

칼리번이 용병으로 일하던 시절, 젠이 언젠가 했던 말이었다.

<자기 힘으로는 위로 올라설 수 없으니 강한 자들이 원하는 것을 바쳐서 근처까지 오르려 하는 거야.>

예전의 칼리번은 어째서 굳이 위로 올라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젠은 알파를 도발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긁어내리는 온갖 방법을 알고 있었고….

“설마 에레즈 프리드웬이 보낸 알파가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칼리번에게도 일부를 전수해 주었다. 오메가의 눈동자 위로 당황한 센어르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새빨간 눈동자는 알파의 반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또렷했다. 교미의 상대로 적합한지를 평가하는 시선 앞에서 알파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크윽…. 알겠습니다. 오메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회피할 생각이 만만이던 센어르의 심장에 불길이 당겨졌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굴욕을 겪으신…. 오메가님의 분노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사내들의 피를 맛보지 않으신 것도, 적의 피를 먼저 마시기 위함이셨던 거군요.”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센어르를 자극하는 방법은 사실상 양날의 검이었다. 에레즈를 지키기 위한 검이었지만, 동시에 에레즈를 향해 찌르는 검….

만약 이번 전투에서 칼리번이 센어르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는 졸지에 적의 구심점이 될지도 모른다.

“오직 오메가님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제 용맹함을 지켜봐 주십시오.”

센어르는 어쭙잖게 기사 흉내를 내며, 무릎을 꿇고는 칼리번의 손에 입을 맞췄다. 손등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순간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다. 칼리번은 미묘하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좋다. 수색대…는 지금 어디쯤까지 왔지?”

“그리 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수가 훨씬 많으니 오메가님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와 아스터도 너희와 함께 갈 것이다.”

“오메가님께서는 저희가 가져오는 승리만 맛보시면 됩니다.”

“너희가 위험에 빠졌을 때 내가 마물을 부려 힘을 보태 주겠다. 아스터도 너희에게 도움이 될 거다.”

칼리번은 밤마다 아스터의 도움을 받아 준비했던 대사를 무리 없이 소화해 냈다. 센어르는 감동을 받은 듯 칼리번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 * *

아직까지는 크게 틀어지는 일 없이 칼리번의 계획대로 흐르고 있었다. 회담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 외에는 말이다.

‘아스터에게 센어르만은 반드시 생포하라 당부해야겠군.’

왕국 수색대를 습격하기로 한 밤. 칼리번은 아스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터는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오메가님. 센어르입니다.”

칼리번이 쥐 죽은 듯 있자 상대가 먼저 정체를 밝혔다.

“센어르?”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는 이유라….

‘설마 싸우지 않겠다고 발을 빼려는 건가.’

알파의 본성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칼리번은 그렇게 착각했다. 칼리번은 센어르의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었으나 눈앞에 문이 또 있었다.

“…….”

센어르는 그야말로 문짝만 했다. 칼리번이 유독 그를 크게 느끼는 것은 에어리얼의 몸에 갇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어리얼의 눈으로는 모든 세상이 크고 어둡게 보였다.

“아스터 님은 안에 계십니까?”

“잠시 자리를 비웠다.”

칼리번은 딱히 떠오르는 변명이 없어 그대로 상황 설명만 했다.

“그렇군요…. 오메가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최근 아스터 님께서 오메가님의 곁을 비우는 일이 잦아서 말입니다. 혹시… 따로 시키신 임무라도 있으신지요.”

“아…. 그것 때문인가.”

칼리번은 수색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래, 그렇다.”

“그 임무에 관해서 묻는다면 실례일는지요?”

“음…….”

물론 변명도 나름대로 고민해 보았다. 아스터에게 주변 경비를 시켰다,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보냈다, 등등….

“그건….”

칼리번이 둘 중 어느 변명을 쓸지 잠시 말을 고르던 때였다.

“…혹시 제게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뭐?”

뜻밖의 발언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하, 하아, 하하…! 처음에는 설마 싶었습니다. 오메가님께서 다른 깊은 뜻이 있으실 거라고…. 하지만…. 하아, 며칠이나 오메가님의 기사는 곁에 없지 않습니까?”

“…….”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자리를 비우라 한 것 아닙니까?”

센어르의 목소리는 환희로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혜?’

칼리번의 머리가 굳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센어르는 침묵을 긍정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그는 허락도 없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벌써 열흘 가까이 흘렀습니다. 이 정도면 오메가님께서도 그동안 충분히 파악하셨으리라 봅니다. 제가 오메가님께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음…. 그래. 네 노고는 알고 있다.”

칼리번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문이 끼이, 소리를 내며 닫힐 듯 완전히 닫히지는 못했다.

“오메가님께서 헌신하는 알파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소문은, 후우…. 익히 들어 왔습니다. 가슴에서 나오는 달콤한 젖을 알파에게….”

알파의 두 눈은 기이할 정도로 번들거렸다. 칼리번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센어르가 덥석 팔을 붙잡았다. 원래 몸이었다면 당장 주먹이 날아갔겠지만, 에어리얼의 몸으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센어르는 장작처럼 마르고 가는 몸을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하반신을 바짝 붙여 왔다. 그는 본거지의 그 어떤 알파보다도 오메가의 향기에 자주 노출되어 왔다. 굶주린 자에게 열흘 동안 음식을 보여 주기만 하고 한 것과 다름없었다. 고행자의 대단한 이성이라도 닳아 없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

큼지막한 손이 어느새 옷을 헤치고 겨드랑이 아래로 쑤시고 들어왔다. 워낙 마른 몸이라 살 거죽 아래의 뼈가 세게 눌려 아팠다. 칼리번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굵은 엄지손가락이 가슴 위를 급하게 헤집었다.

“흣…!”

가슴에 자리 잡은 돌기를 세게 누르는 손길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천 아래에 감춰진 유두를 찾아낸 센어르의 눈에 불이 튀었다. 그는 유두를 꾹 누른 채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천의 촉감과 반대되는 과격한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센어르와 교미하실 겁니까?>

아스터의 질문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여러 가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방법. 에어리얼의 몸이 알파에게 열리면…. 어쩌면 답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알파를 다루는 법을….

“…….”

무반응을 허락이라고 해석한 알파는 더욱 과감하게 몸을 주물러 댔다.

쉽게 갈 수 있다. 칼리번은 자신의 ‘원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저 연명만 하면 마물을 생산하던 몸…. 도구.

그 고통에 비하면 이 교미는 얼마나 쉬운가? 왕자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칼리번은 그동안 부상도, 죽음도 감수했다. 그러니 이 정도 고난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몸 안쪽에… 약간의 상처를 입을 뿐이다. 오랜만이라 조금 겁을 먹었으나 아픔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교미를 하다 보면 곧 쾌감이 더해질 테니….

‘나는 오메가니까.’

에어리얼이 지난 8년간 칼리번의 머리에 쑤셔 넣은 암시가 다시금 활개를 쳤다. 그사이 센어르는 작고 가벼운 몸을 번쩍 들어, 쇄골과 목을 미친 듯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싫다…. 싫어.’

더러운 숨결이 피부를 적시는 와중에도 칼리번의 가슴 속에 다른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오메가가 다수의 알파와 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오메가이지만… 이걸 원치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센어르를 올려다보던 칼리번의 눈동자가 살짝 구르더니 문가를 본다. 조금 벌어진 틈 사이에는 전에 없던 손님이 서 있었다.

‘아스터….’

잠시나마 에레즈 프리드웬으로 착각했던 목소리의 주인이….

아스터가 지켜보고 있다. 칼리번의 시선이 문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아스터는 줄곧 에어리얼의 곁에 있었다고 했다. 에어리얼이 다른 마물들과 교미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 왔을 것이다. 그 탓일까?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한사코 반대했지만, 교미는 지배의 수단으로 권하기도 할 정도로 관대했다. 그러니 ‘에어리얼’의 몸으로 교미를 하는 것 정도는 계약에 위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칼리번은 속으로 아스터에게 물었다. 순간 칼리번은 그가 우는 줄로만 알았다. 아스터의 검은 투구, 텅 빈 눈가의 구멍에서 백금사가 기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백금사는 갑옷 위로 혈관처럼 퍼졌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담쟁이넝쿨처럼 문과 벽을 타며 방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벽면이 아스터의 혈관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대로 두면 센어르가 죽는다.’

칼리번의 부족한 힘으로는 아스터를 막을 수 없었다. 센어르가 죽으면, 그의 부하들이 어떻게 날뛸지 예측이 불가능하거니와 이후 회담의 행방을 추적하기도 어려워진다. 칼리번은 자신의 목에 이를 박아 넣는 센어르를 두 팔로 밀어냈다.

“허억, 하아…. 오메가님?”

센어르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상은 일을 끝낸 후에 받는 거다.”

그 말에 흐릿하던 센어르의 눈빛이 점차 또렷해졌다.

“벌을 받고 싶지 않으면 네가 할 일을 완수한 후에 와라. 에레즈 프리드웬의 병사를 해치우고 나면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칼리번은 센어르를 향해 덤덤히 말했다.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던 아스터의 혈관이 조금씩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센어르는 다 잡은 오메가를 놓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곧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네, 네에…. 아무렴요, 오메가님.”

그는 다 잡은 물고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오메가님께 ‘상’을 받는 그때를 고대하겠습니다.”

* * *

야옹.

어디선가 묘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 고양이가 죽은 쥐를 한 마리, 한 마리씩 풀어 놓으며 이리 오라고 부르는 것만 같다.

보통 수색대는 열흘 정도 숲을 탐색한 후 성으로 돌아간다. 식량 보급 문제도 있거니와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해서였다. 그러나 젠은 독단으로 이동을 강행하고 있었다.

“슬슬 물자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왕성으로 귀환해야 합니다, 대장님.”

“아니, 붉은 오메가는 분명… 이 근처에 있다.”

젠은 확신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잖아.’

야옹. 젠은 어째서인지 그런 착각마저도 들었다. 젠의 부대는 그렇게 숲의 심장부로, 더욱 숲 깊숙이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장님. 이런 건 대장님답지 않으십니다.”

참다못한 알파 부하가 말했다. 젠은 날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답지 않다고?”

젠이 되물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실감하고 있다. 그녀는 그 무엇보다 ‘생존’을 가장 우위에 두었다. 남성 알파들 사이에서는 이질적인 여성 알파임에도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하, 씨발.”

젠은 이를 악물었다. 감히 대장에게 대드냐며 저 자식의 면상에 주먹을 갈길 수도 있었으나 맞는 말이라 욕만 뱉고 말았다. 이번은 일반적인 수색과는 양상이 달랐다. 야적들에게 피해를 본 인간들을 연이어 만나고 있었다. 벌써 다섯 번. 구출한 부상자는 이십여 명이 넘는다. 신기하게도 죽은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알겠다. 대신 하루만. 하루만 더 확인하고 돌아가자.”

젠은 이를 갈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혼자였다면 몰라도, 그녀의 어깨에는 짐이 많았다.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업으며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젠의 명령은 빠르게 수색대 전역에 전해졌고 병사들은 벌써부터 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결정은 내린 젠은 수통을 술처럼 들이켰다. 짧은 휴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모닥불을 끄면 바로 다음 장소로 향할 것이다. 이번 수색의 마지막 조사였다.

“대장…님.”

그때, 부하 중 하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젠을 찾는다.

“…….”

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짓을 했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육포를 뜯어 먹던 부하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척이 그들 주위를 빙 두르고 있었다. 젠과 병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움켜쥐었다.

파스스, 바람이 불었다. 숲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비릿한 알파의 냄새를 실어다 날랐다. 아직까지도 적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감각이 둔한 피난민들뿐이었다. 젠과 병사들은 신속하게 피난민들을 안쪽으로 몰았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등을 진 채로 두고 빙 둘렀다.

“…피 냄새를 맡고 온 마물일까요?”

“야적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여태껏 그 녀석들을 추적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장님?”

“글쎄, 어느 쪽이 더 최악인 것 같아?”

부하들은 숲 너머의 적이 마물과 야적 중 누구인지 내기까지 했다. 붉은 오메가가 있을 것이라 믿고 있던 젠으로서는 그저 둘 다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수풀이 흔들렸다. 이번에도 바람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그림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어딘지 익숙했다.

“역시, 군대를 수준의 규모였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야적을 둘러보며 젠이 혀를 찼다. 비린 긴장감이 고요를 가득 채웠다. 밖은 숨소리조차 고를 정도로 조용한데 몸속은 난리다. 근육이 들끓고 피가 팽팽 돌아간다. 온몸의 비정상적으로 상승하여 알파, 동족을 향한 본능적인 경쟁심과 거부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대장! 위를 보십시오!”

병사 중 한 명이 다급히 외쳤다. 젠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시선도 우거진 나무 위를 향했다.

유령이다.

젠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나무 위에서 어른거리는 새하얀 형상은 흡사 목이 매달린 시체가 흔들거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아니었다. 붉은 머리에 앙상한 체격의 소년이 굵은 나뭇가지에 서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붉은 머리의 소년 한 명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소년의 곁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닌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였다. 검은 갑옷은 소년의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안고는 그가 추락하지 않도록 지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젠과 붉은 머리 소년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에 각기 다른 종류의 경악을 물들이며.

“에어리얼….”

과거의 망령. 그것의 이름을 입 안으로 중얼거린다. 수십 년 전 젠은, 앞으로 그 이름을 다시 올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 * *

늘 그랬듯 센어르는 오메가를 외부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메가를 거역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칼리번과 아스터를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센어르가 고뇌 끝에 내린 타협안이 바로 지금, 칼리번과 아스터의 위치였다. 그들은 전선 최후방에 배치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칼리번이 무슨 금화 상자라도 되는 것처럼 호위를 겹겹이 둘러싸기까지 했다.

“이 상태로는… 전황을 확인하기 어렵겠군.”

칼리번은 혀를 찼다. 용병이었던 그는 한 번도 후열에 선 적이 없었다. 나무처럼 앞을 빽빽이 가린 알파들 때문에 아무리 고개를 치켜들어도 센어르의 동선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끊임없이 감시하는 알파들의 시선은 덤이었다.

‘곤란하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방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앞선 병사들이 가로막은 탓에 칼리번의 걸음이 멈췄다.

“왜 앞으로 가지 않는 거지?”

칼리번이 물었다.

“여기서 잠시 대기하시라는 센어르 대장님의 명령입니다.”

그 말에 칼리번은 나무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알파들의 틈을 노려보았다. 한 줄로 길게 걸어가던 병사들은 둘로 나뉜 듯했다. …이대로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 봐라.”

칼리번은 아스터를 보지 않은 채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스터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발목과 발을 연결하는 틈에서 백금사가 조용히 빠져나갔다.

“왕성에서 보낸 수색대를 빙 둘러 덮치기 위해서인지, 일부러 대열을 흩트려 숲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백금사가 칼리번의 귓가에 매달려 속삭였다. 눈동자만 굴린 칼리번은 순간 당황했다. 갑옷 밖에 오래 노출된 탓인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금사가 바스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엾게도, 널 낳아 준 오메가가 껍질을 만들어 주지 못했구나.>

칼리번의 목울대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스터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로 인한 부수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사이 제 할 일을 마친 백금사는 칼리번의 어깨에서 훌쩍 뛰어내려 검은 갑옷 속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아스터. 나를 위로 옮겨라.”

칼리번은 재가 되기 직전에 무사히 귀환한 백금사를 지켜보다가 부탁했다.

“…….”

아스터가 한쪽 팔로 칼리번을 감싸 안더니 훌쩍 뛰어올랐다. 남은 팔로 굵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두 다리로 도약하며 다른 알파의 손에 닿지 않을 높이까지 올라섰다.

“오메가님?! 이러시면 위험합니다!”

“돌아오십시오, 오메가님!”

칼리번과 아스터가 보인 돌발 행동에 알파들이 대응 준비를 했다.

“난 센어르에게 갈 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뒤따라오면 용서하지 않겠다!”

칼리번은 발아래에 있는 알파들에게 경고했다. 센어르의 부하들이 순간 망설였다. 최우선으로 따라야 하는 우두머리는 당연히 센어르였지만, 내부에 잠재된 본능은 오메가를 거부할 수 없었다.

센어르가 칼리번의 주위에 알파를 다수 배치한 이유는 오메가가 도망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오메가는 스스로 말한 대로 센어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알파들은 우왕좌왕하다 결국 한발 늦게 칼리번을 쫓았다.

지상에서 멀어지자 아스터는 칼리번을 두 팔로 안고, 나무 사이를 도약하는 것만으로 이동했다. 칼리번은 추락하지 않기 위해 두 팔로 아스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검은 갑옷에는 쇠붙이 특유의 차가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칼리번의 온기가 흡수되어 조금씩 미적지근해졌다.

“아스터, 멈춰.”

칼리번과 아스터가 접전 지역에 도착했을 즈음, 센어르가 왕성 수색군을 둘러싸 압박하는 형세가 갖춰져 있었다. 아스터는 부러질 염려가 없는 단단한 나뭇가지 위에 칼리번을 내려놓았다. 다행히도,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칼리번은 숨을 가다듬고 에레즈가 보낸 수색군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센어르의 병사들에게 포위된 수색군은 피난민을 가운데에 몰아넣고 그들을 원형으로 둘러싼 채였다. 그 방식은 어딘지 익숙한 면모가 있었다.

‘이건 용병의 방식이다.’

물론 그럴 것이다. 에레즈의 편이든, 알테르의 편이든, 대부분의 마물 혼혈들은 전쟁 전에는 용병이었으니까. 적이나 아군이나 모두 정수리는 붉거나 검다.

상황을 빠르게 훑던 칼리번이 허리 뒤에 찬 단검으로 손을 옮기던 때였다.

“대장! 위를 보십시오!”

적이 오메가를 발견하고 외쳤다. 수십 개의 시선이 화살처럼 칼리번에게 꽂혔다. 우락부락한 용병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붉은 머리의 미인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특히나 센어르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안타깝게도 그 면상을 두 눈에 새기지 못했다.

왜냐면….

“젠…?”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수많은 알파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칼리번뿐만이 아니었다.

설마 그녀가 수색대의 수장일 줄이야.

서로 살아 있다면 언젠가 마주치리라.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빠를 줄이야….

8년 만의 재회.

반가움과 곤란함이 동시에 머리를 뒤덮는다. 노련한 젠이라면 이런 모습일지라도 진짜 자신을 알아봐 줄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에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칼리번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팔과 다리가 멋대로 경련한다. 높은 나무 위에 선 공포를 이제야 느낄 리는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이유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거대한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젠을 향한 감정은, 어느새 ‘칼리번’으로서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으윽, 아…. 아, 아아악!”

칼리번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 가죽을 단단히 고정하는 열 개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면 그대로 머리가 깨져서 안에 든 것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엄청난 두통에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어째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지?’

칼리번은 추락하지 않기 위해 간신히 몸을 나무 기둥에 기댔다. 머릿속에서 짐승이 날뛰었다. 고통은 머리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용암처럼 뜨겁고 번개처럼 잔인한 무언가가… 칼리번을 안에서부터 밖으로 밀어내어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려 들었다.

“크… 으윽, 윽…!”

머리 다음은 가슴이었다. 가슴이…. 아니, 정확히는 심장이 칼에 꿰뚫린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나 칼리번의 손은 두 개뿐이었다. 칼리번은 간신히 한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심장이 쑤셔 오니 이제는 주변의 폐가 저려 왔다.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는 짧은 숨을 급히 헐떡였다.

“헉, 허억…!”

칼리번의 내부에서 그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치고, 내리꽂고, 무너진다. 붉은 물을 품고 있던 의식의 둑은 파괴적인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았다. 칼리번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덮쳤다.

“하…아, 아악…!”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흔들거렸다. 그동안 끄집어내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던 에어리얼의 기억과 경험이 이번에는 반대로, 칼리번을 부지불식간에 덮쳤다. 에어리얼의 능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칼날처럼 온몸을 스치는 기억과 소금물처럼 상처를 쓰라리게 하는 감정이 그를 산 채로 물 아래에 매장했다.

‘그만…. 멈춰…!’

칼리번의 영혼이 에어리얼의 육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붉은 정신의 바다는 무엇이든 녹이는 산화액이다. 이대로 칼리번의 영혼은 익사하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거대한 수프 속에서 칼리번과 함께 뒤섞이는 재료는 에어리얼의 무수한 기억들이었다. 거대한 의식의 바닷속에서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기억의 판자를 붙잡을 때마다 칼리번의 영혼은 상처를 남겼다. 에어리얼의 기억들은 부서진 배의 잔해가 아닌 칼날이었다. 쥐는 쪽도 베는 쪽도 모두 상처를 입고 마는. 그의 바다가 이토록 붉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칼리번의 몸을 베는 기억의 칼날 중에서, 그가 간신히 움켜쥔 것은….

<젠.>

부름이었다.

에어리얼이, 그녀를 부른다. 지금이나 이 기억 속에서나, 에어리얼은 변함없이 비쩍 마르고 작은 존재였다. 그런 소년은 젠에게 업힌 채로 이동 중이었다.

때는 아마도 여름…. 석양이 아슬아슬하게 산 너머에 걸려 있다. 지친 여행자들을 안심시켜 주는 저 빛은 곧 사라지겠지. 그러면 숲은 어둠으로 뒤덮일 것이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 퍼질 것이다.

<젠….>

에어리얼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입 안은 바싹 마른 지 오래라 부르는 목소리도 나약했다. 넓고 강한 어깨는 여전히 답이 없다. 노을빛으로 물든 머리카락은 그녀가 늘 말하곤 하던 빨간색이 아닌 정말로 주홍빛 같았다.

에어리얼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험준한 산을, 그것도 짐과 동료를 전부 짊어진 채 이동하는 그녀의 숨소리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거칠었다. 쿵, 쿵, 거친 심장 소리가 기댄 뺨에 전해질 정도다.

<왜 나를 버리지 않는 거야?>

에어리얼이 묻는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그녀가 꿋꿋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힘없이 흔들렸다.

<나는 쓸모도 없고, 약해 빠졌는데…. 재주도 없어서 돈도 되지 않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약한 존재는 죽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자연의 순리였고 동시에 생명의 역사였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윽!”

후드득, 붉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불시에 떨어져 내렸다. 칼리번은 두 팔로 얼굴을 가렸으나 한발 늦었다. 단단한 나뭇가지 위로 물 자국이 남았다.

“그… 그만.”

칼리번을 두 손으로 자신을 감싸 안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에어리얼의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감히 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불안정한 몸이 나무 아래로 기울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단단한 팔이 칼리번을 감싸 안았다. 아스터였다.

“역시… 저게 바로 젠이군요.”

아스터는 제 몸으로 칼리번을 가려 주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멈…추게, 해.”

“네?”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칼리번이 더듬거리며 아스터를 붙잡았다.

“아스터…. 더는, 묻지 말고…. 윽, 당장 퇴각, 해라….”

그렇게 말하고는, 칼리번은 자신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칼리번의 영혼과 에어리얼의 몸이 서로 반목했다. ‘칼리번’에게 젠과의 재회는 좋은 기회였다. 전투를 하는 척 젠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그녀를 설득해 운이 좋으면 왕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은 젠을 거부했다. 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칼리번은 순식간에 무력한 아이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장, 윽, 돌아가야….”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런 상태로는 전투는커녕 젠을 설득할 수 없었다.

“싫습니다.”

칼리번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아스터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뭐…?”

칼리번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저자는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지켜보고 있으면 됩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안 돼!”

불길한 예감에 칼리번은 아스터를 밀쳐 냈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길, 그만둬라! 아스터…. 아스터!”

이번에는 에어리얼의 몸이 칼리번의 영혼을 붙잡은 것이 아니었다. 검은 갑옷에서 새어 나온 백금사가 칼리번의 몸을 나무 기둥과 한데 묶은 것이다.

“왜죠? 저것의 처분까지는 당신과 계약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스터는 칼리번의 입에 손을 얹었다.

“무슨 소리를…. 읍?! 으읍!”

다섯 개의 손가락과 손바닥을 연결하는 갑옷의 틈에서 백금사가 흘러나왔다. 칼리번은 입을 다물었지만, 가느다란 실은 부드러운 입술을 파고들어 입 안을 차지했다.

“우욱, 이 개 자, 으윽, 식…!”

칼리번은 혀마저 묶여 버렸다. 그 자리에서 버둥거렸지만,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실은 몸을 더욱 세게 옥죌 뿐이다. 새빨간 두 눈만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

차가운 금속성의 손가락이 칼리번의 뺨을 스쳤다. 그렇게 오메가를 무력화시킨 아스터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아스……. 으, 흑…!”

그를 따라 뛰어내리려던 칼리번의 몸이 백금사에 붙잡혀 크게 휘청였다. 칼리번은 혀를 붙잡은 백금사를 끊어 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실은 도통 끊어질 줄을 몰랐다.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 망할, 자식……!”

칼리번은 나무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잠시간 동맹을 맺었을 뿐, 아스터는 결국 적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를 믿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던 칼리번은 눈 앞에 펼쳐진 수라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스터는 벌처럼 젠에게 뛰어들고 있었다.

“윽, 뭐야?!”

젠은 갑작스러운 습격을 두 팔로 막았다. 거대한 두 힘이 부딪치며 젠의 두 팔을 감싼 그리브에 금이 갔다. 잦은 비로 지반이 물러진 탓일까, 그녀의 두 발 또한 땅속으로 움푹 꺼졌다.

두 진영이 대치하며 팽팽하게 당겨졌던 실이 대번에 끊겼다. 아스터의 일격을 시작으로 야적들은 왕성 수색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으으윽…!”

칼리번은 허리춤에 매어 놓은 단검으로 손을 뻗으려 애썼다. 그러나 전신을 팽팽하게 묶은 백금사는 사소한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았다. 몸부림을 칠수록 도리어 얇은 실이 피부를 파고들 뿐이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스며드는 햇빛. 백금사는 그 옅은 빛을 받을 때마다 섬뜩하게 번뜩였다.

“하, 후으, 하아….”

칼리번은 입을 벌리고 헐떡였다. 혀가 묶인 탓에 타액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눈가는 눈물로 짓무른 지 오래였다. 도살당하는 개가 있다면 딱 이 모양일 것이다.

‘에어리얼의 몸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녀석이 날 버려두고 갔다고?’

칼리번은 아스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이 모르는 8년 동안, 젠과 아스터 사이에 해묵은 앙금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역시… 저게 바로 젠이군요.>

그러나 젠을 처음 본 아스터의 반응은, 안면을 튼 사이에서 보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 보아도 고통스럽기만 할 뿐, 아스터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 망할 백금사는 언젠가 풀린다…. 젠, 그때까지만 버텨라.’

결국, 칼리번은 무의미한 반항을 포기했다. 그는 심호흡하며 펄펄 뛰는 심장과 지끈거리는 두뇌, 쉬지 않고 눈물을 쏟아 내는 두 눈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후우….”

속박이 풀리면 곧바로 전투에 뛰어들 작정이었다. 만약 그사이에 아스터가 젠을 죽이고 돌아온다면 모든 일이 수포가 되겠지만… 그러나 칼리번은 믿고 있다. 젠이 애송이에게 당할 정도로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아…. 하아….”

정신을 가다듬은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발밑의 수라장을 내려다보았다.

“큭! 넌 뭐야? 에어리얼의 부하인가?”

때마침 젠은 목을 꿰뚫으려 하는 백금사를 팔로 막으며 묻고 있었다.

“…….”

아스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격이 제지당하자 목과 투구의 연결구에서 백금사가 튀어나와 젠의 어깨를 찔렀다.

‘이건…?!’

젠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녀는 어깨를 뚫리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뒤로 물러났다. 백금사는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더니 갑옷 안으로 미끄러지듯 돌아갔다. 발톱이나 이빨이 무기인 기존의 알파와는 전혀 다른 공격 방식… 젠은 본인이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아, 아스터를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이봐. 초면인 것 같은데….”

“…….”

“싸우는 방식이 익숙해서 말이야. 어디서 배웠는지 알려 줄래?”

젠은 적의 일격을 막은 탓에 아직도 뼈가 울리는 두 팔을 털며 물었다.

“…….”

그러나 아스터는 이번에도 젠의 도발을 무시하며 두 팔을 땅에 뻗었다. 갑옷의 틈새로 수십 마리의 실뱀이 뻗어 나왔다. 젠은 아스터에게 붙잡히기 전에 근처의 나무로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그녀가 뛰어오를 것을 예측한 아스터는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예상치 못한 적의 습격에 정신이 없는 젠과 달리, 그녀의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뭔가 이상하군.’

칼리번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적도, 아군도 어째서인지 그녀만큼 긴박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끼어든 아스터는 예외라 쳐도……. 칼리번은 해답을 찾아 센어르를 노려보았다.

“아군은 이쪽으로 칼을 돌려라. 계속 수색대인 척 굴면 상관없이 벨 거니까.”

젠과 아스터의 전투를 지켜보던 센어르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칼리번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기를 기다린 것만 같은 타이밍이었다.

“!”

머리보다 몸이 먼저 깨닫는다. 칼리번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센어르의 호령에 전세가 일순 뒤바뀌었다. 피난민을 등 뒤에 숨기던 병사 중 반절이 몸을 반대편으로 돌린 것이다.

센어르의 말 한마디에 전력 차가 압도적으로 벌어졌다. 이제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젠의 병사들이 적과 아군을 둘러보며 주춤거렸다. 아스터를 상대하던 젠도 달라진 상황을 깨닫고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충격을 받은 것은 젠뿐만이 아니었다. 나무 위에서 상황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칼리번 또한 당혹감에 휩싸였다.

<왕국 수색대는 놔두면 알아서 지나갈 거다.>

<일전에도 왕국에서 보낸 수색대가 저희의 본거지를 찾지 못하고 지나친 전적이 있었습니다.>

칼리번의 머릿속으로 센어르가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 자식들…. 크, 으윽….”

오직 자신들만의 힘으로 이 정도 규모의 본거지를 구성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하, 씨발….”

돌처럼 굳어 버린 칼리번과 달리 젠은 전멸을 앞둔 상황에 웃고 말았다.

“본성을 드러내도 상관없다! 목숨이 아깝다면 당장 도망쳐라!”

젠은 아스터의 공격을 받아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양측의 전략이 동시에 바뀌는 결정적인 기로였다. 그전까지는 전투였다면, 이제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것이다.

대장부터 전투를 포기했으니 병사들이 나서서 싸울 리가 없었다. 젠의 병사들은 하나둘씩 진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정신머리가 남아 있는 녀석은 피난민이라도 한 명씩 들고 갔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무기마저 버리고 신체를 마물로 변형시키면서까지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했다.

“하하, 이번에도 거저먹기군! 좋아, 쓸 만한 사내는 생포하고 여자는 모두 죽여라! 마음대로 해도 좋으나 쥐새끼가 단 한 마리도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적군을 지켜보던 센어르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버려진 피난민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들은 각기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온갖 방향으로 벼룩처럼 튀어 나갔다.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젠은 대장 된 도리로서 아군이 도망칠 경로를 터 주려 했으나 그마저도 좌절되었다. 그녀에게만 달려드는 웬 미친 철 덩어리 때문이었다. 아스터는 집요하게 젠만을 공격했다. 그 탓에 젠의 전투는 센어르의 학살과는 철저하게 분리된 상태였다. 아스터는 젠을 건드는 이에 한해서 센어르의 부하마저 썰어 버린 탓이다.

센어르의 부대는 젠의 부대를 크게 둘러싸고 있었기에, 빠르게 본성을 드러낸 병사 외에는 대부분은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망친 병사들도 센어르의 본성에 의해 곧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 달리 젠은 아스터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전쟁터를 이탈해, 길도 나지 않은 숲으로 떨어져 나갔다. 나무가 가득한 숲은 신체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아스터에게는 호재였으나, 본성이 거대한 마물 형태인 젠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제, 제기…랄…!”

칼리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사를 보다 못해 제 머리를 커다란 나무에 들이박았다. 가뜩이나 에어리얼의 육체가 날뛰며 괴로워하는데 외부적인 고통이 더해졌다.

결국, 자신이 멍청한 탓이었다. 설마 센어르가 수색대와 내통했을 줄이야! 도대체 왕국 내 알파들은 어디까지 알테르의 잔당들과 관련된 걸까? 설마 ‘회담’과도 연관이 있는 건가?

“큭…!”

쿵, 쿵, 칼리번은 머리를 거세게 들이박았다. 이마에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묶인 몸은 아직도 꼼짝하지 않는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순간에 무력하다니 이 약해 빠진 육체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흐으…….”

에어리얼도 그랬을까? 육체의 나약함에 치를 떨었을까? 피가 묻은 나무에 이마를 기댄 채로 묻는다.

“…으아아아!”

칼리번은 고개를 뒤로 치켜든 채로 울부짖었다. 센어르의 병사 대부분은 피와 사내에 미쳐 있었으나, 그중 몇몇은 칼리번의 외침에 움찔 몸이 떨며 반응했다.

“하아, 하아….”

왜 나는 자꾸만 적에게 답을 구하는가? 설령 답을 듣는다고 한들 에어리얼과 자신은 다른 존재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정신 차리자. 젠만이라도 구해야 한다.’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골랐다. 울분을 토해 내고 나자 조금은 진정되었다.

“사, 살려 줘! 뭐든지 할 테니 목숨만은 제발…!”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

“언제부터 저쪽 편을 들었던 거냐, 이 배신자 놈!”

값비싼 금붙이로도, 비단이나 보석으로도, 심지어 다른 이의 목숨으로도 한번 잃은 목숨을 되찾을 수 없다.

“아, 으, 흐윽…. 아이만이라도 살려 주세요!”

그것은 인간이든, 마물 혼혈이든, 마물이든 모두가 공평하며 동일하다.

칼날이 부딪치고 부러지는 소리. 몸을 변형한 마물이 사람의 몸을 산 채로 찢는 소리. 언어는 사라져가고, 남는 것은 비명과 외침뿐. 얼마 남지 않은 젠의 부하들과 피난민들은 속속들이 붙잡혀 처참하게 살해당하거나 알파의 어깨에 실려 갔다.

칼리번은 그 모든 소리를,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칼리번은 제 몸을 압박하던 백금사가 조금씩 공기에 스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칼리번은 몸을 뒤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완벽한 자유는 아니었다. 입 안의 백금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우욱…!”

그는 입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백금사를 뱉어 냈다. 그 후, 허리춤에 맨 단검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드디어.

칼리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양손으로 단검을 쥐고는 곧바로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아스터 없이, 보호해 줄 마물 하나 없이 추락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용병으로서 살아온 경험이 있었다.

그는 나무 기둥에 단검을 꽂았다. 기긱, 긱, 단단한 나무 위로 칼리번이 추락하는 길을 따라 선이 그려졌다. 단검을 이용해 추락 속도를 늦췄으나 안타깝게도 에어리얼의 두 팔은 그 정도 충격조차 버틸 근육이 없었다. 착지에서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칼리번의 몸이 나무에서 튕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윽…!”

칼리번은 끙끙거리면서도 곧장 일어섰다. 단검은 다행히도 나무에 박힌 채였다. 온 힘을 다해 단검을 뽑아낸 칼리번은 망설임 없이 그것은 자신의 왼팔에 찔렀다.

“아…. 흐…으으윽!”

이를 악물어도 신음은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왔다. 칼리번은 몸을 떨면서도 기어이 칼날을 뽑아냈다. 뚫린 상처에서 솟아오른 붉은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린다.

칼리번은 피 묻은 단검을 든 채로 젠과 아스터가 사라진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뚝, 뚝, 피가 떨어져 길을 만들었다. 알파 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붉은 길이었다.

숲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센어르의 부대를 넘어야만 했다. 나무에서 뛰어내리면서 잘못 부딪친 탓에 그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렸다. 이런 나약한 육체로는 겹겹이 둘러싸인 살육의 현장을 뚫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나아갔다. 이곳에 있는 알파 중 그 누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는, 이상한 믿음이 칼리번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아, 윽….”

왜냐면 그는 오메가였다. 그것도 피를 흘리고 있는…. 그 어떤 알파도 오메가를 죽이지는 못한다.

“오메가님?! 이곳은 위험합니다! 제게로 오십시오,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센어르가 전장의 한가운데 선 칼리번을 발견하고는 붙잡으려 했다. 거대한 체격의 알파들이 몸을 변형시켜 가며 싸우는 전쟁터. 그 틈새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소년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

센어르의 부름을 들은 칼리번이 까딱 고개를 돌렸다. 센어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두 팔로 소중한 오메가를 안아 들기 위해 다가왔다.

그리고….

“다가오지 마라.”

그 한마디와 함께 칼리번의 손이 센어르의 얼굴을 밀어냈다. 시뻘건 피가 센어르의 얼굴에 덧발라졌다.

“헉…. 허억, 어어…!”

센어르가 괴상한 신음을 토해 냈다. 칼리번의 손길에는 그 어떤 힘도 없었으나 그는 속박을 당한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아….”

칼리번은 피를 흘리며 걸어갔다. 적도 아군도 알파였기에 칼리번만은 비껴갔다. 유유히 전쟁터를 빠져나가는 붉은 오메가의 모습은 눈의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그러나 더 큰 ‘비정상’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대장님! 마, 마물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칼리번이 지나간 직후, 오메가의 피 냄새를 맡은 검은 숲의 마물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뭐라고?! 오, 오메가님! 어디 가십니까…!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일방적으로 학살을 자행하던 센어르의 부하들이 이번에는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비명이 검은 숲을 채웠다. 그러나 칼리번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아스터를 저지하고 젠을 구해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

처음에는 느린 걸음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가속도가 붙었다. 어느샌가 그는 달리고 있었다.

“으윽! 헉, 하아, 하아….”

약해 빠진 몸은 조금만 달려도 금세 숨이 벅차올랐다. 더구나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아닌 야생의 숲 그 자체였다. 땅은 거칠었고 온갖 나무와 수풀의 가지가 칼리번을 막아섰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쿵, 나무의 허리가 부러졌는지 땅이 무너지는 듯한 울림도 느껴졌다. 칼리번은 그 소리를 지표 삼아 달려갔다.

숲의 끝에 다다르자 고목과 수풀로 가려진 시야가 확 트였다.

낭떠러지와 태양.

“크윽…!”

갑작스럽게 드러난 광경에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탓에 빛을 받은 두 눈이 시렸다. 낭떠러지 아래로부터 불어오는 돌풍이 붉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뒤흔들었다. 연약한 몸은 불어오는 바람만으로도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칼리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멈춰라, 아스터!”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젠장!”

이제 와서 아스터가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칼리번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짓씹으며 이를 갈았다. 백금사는 숲과 낭떠러지의 경계선에 자리를 잡은 나무를 무참히 베어 쓰러뜨렸으며 변형된 젠의 앞발은 주변의 바위를 가루로 만들었다.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서는 ‘힘’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힘’을 쓰기 위해서는….

칼리번은 피가 묻은 단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제 손등을 칼로 찍어 눌렀다.

“으…으윽!”

단검은 반쯤 박혀 들었다. 그러나 뼈와 근육을 완전히 꿰뚫지는 못했다.

“크으…….”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단검을 뽑아냈다. 손등에 흘러나온 피가 메마른 암석 대지를 타고 흐른다. 손바닥에서부터 뻗어 나온 붉은 뿌리는 빠르게 제물을 찾았다.

센어르의 병사들과 싸우던 마물 하나가 칼리번과 연결되었다. 마물은 나무를 부러뜨리며 칼리번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주둥이에 거대한 이빨이 솟아오른, 멧돼지와 유사한 형상으로 전형적인 하급 마물이었다.

칼리번은 마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물의 주둥이에서 뱀처럼 끝이 갈라진 기다란 혀가 쭉 뻗어 나왔다. 가는 혀는 날름거리며 칼리번의 피를 핥았다. 혀가 상처 구멍을 파고들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흘러들었다.

“아스터를 죽여.”

칼리번은 지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일시적 동맹 상태인 아스터보다는 오랜 동료이자 에레즈를 지켜 온 젠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칼리번의 피를 먹은 마물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몸을 크게 부풀렸다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의 본능이 오메가를 탐하라고 닦달하나 오메가의 명령이 그것을 막는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마물은 결국 방향을 틀어 젠과 아스터가 격전을 버리고 있는 격전지로 몸을 밀어 넣었다.

“크흐, 크…. 크르르, 크어어어어!”

마물은 끔찍한 숨소리를 내며 아스터의 몸을 들이박았다. 거대한 몸집은 검은 갑옷을 짓눌러 부수기에 충분했다. 백금사가 마물을 휘감았다. 그러나 멧돼지 형태의 마물은 걸음마다 땅을 울릴 정도로 체격이 컸다. 아스터는 이미 칼리번을 속박하고 젠을 상대하는 데 상당한 양의 백금사를 소모한 상태였다.

“헉, 허억…. 뭐야….”

아스터의 행동이 봉쇄되자 젠의 시선이 드디어 칼리번을 향했다. 백금사를 버티기 위해서는 피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탓에 피로 물든 그녀는 신체의 절반 이상이 마물화 된 상태였다. 왼팔은 변형되어 원래의 몸과는 균형이 맞지 않아 바닥에 늘어진 채였다. 비늘이 덮인 한쪽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고, 아직 인간의 형태인 왼쪽 눈만이 빛을 띠고 있었다. 이성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젠, 나는…….”

칼리번이 입을 뗀 순간이었다.

“끄으, 으웨에엑!”

숨통이 끊어지는 마물의 끔찍한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팍! 터지는 소리가 났다. 거대한 마물이 터지면서 튀어나온 피와 내장이 젠과 칼리번의 몸에도 끼얹어졌다. 피로 된 비가 내리는 가운데 검은 갑옷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갑옷의 잔재만이 곳곳에 흩어져 있을 뿐. 이제는 붉은 갑옷이 된 아스터는 발부터 시작해서 무너진 몸을 천천히 재조립해 갔다.

“제길!”

하지만 칼리번이 부릴 수 있는 마물 또한 한 마리가 아니었다. 칼리번은 숲 쪽으로 손을 뻗었다. 오메가에게 세뇌된 또 다른 마물이 부름에 응했다. 이번에 칼리번은 마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물의 등에 직접 올라탔다. 네발로 기는 흉흉한 마물은 칼리번을 태운 채로 아스터에게 달려들었다.

“!”

제아무리 아스터라 할지라도 에어리얼의 몸과 한데 엉킨 마물을 백금사로 조각낼 수는 없었다. 오메가에게 조종당하는 마물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스터에게 전신을 부딪쳤다.

“윽!”

칼리번은 그 충격으로 마물의 등에서 떨어져 피로 얼룩진 땅을 굴렀다. 땅 위를 두세 바퀴 구른 후에야 칼리번은 간신히 손으로 땅을 짚을 수 있었다.

낭떠러지 주변은 바위가 산재해 있었고 그 위를 구른 칼리번은 매타작을 당한 듯 온몸에 멍이 들었다. 칼리번이 고통스러울수록 숲속에서 안광만 빛내던 다른 마물들은 그에게 홀렸다. 덕분에 그가 직접 지휘하지 않아도 여러 마물이 나타나 연이어 아스터에게 달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갑옷이 마물들과 함께 절벽 아래로 넘어갔다.

“젠!”

잠시나마 시간을 번 칼리번은 무작정 젠을 향해 기어갔다. 적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던 젠은 칼리번이 다가오자 자세를 다시 잡았다.

“젠, 제발…!”

칼리번은 피로 얼룩진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하늘을 활강하던 마물이 피 냄새를 맡고 하강했다. 커다란 날개로 치장된 마물은 젠의 반응을 지체시켰다. 그러나 칼리번은 젠을 공격할 의사가 없었기에 마물은 곧 젠의 발톱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그 틈으로, 체구가 작은 칼리번이 달려들었다.

“윽…!”

젠은 순간적으로 뒤로 휘청였다. 두 사람의 몸이 한데 엉켜 들었다.

“젠, 내 말을 들어라! 나, 나는 칼리번이다! 에어리얼이 아니야!”

칼리번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이해를 도울 배경 설명은 배제하고는 본론부터 외쳤다.

“크윽…. 뭐?! 무슨 개소리야!”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 젠은 발톱으로 칼리번의 심장을 꿰뚫으려 했다. 칼리번은 이를 까득 깨물고는 제 몸을 다른 방향으로 내던졌다. 마물과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진 아스터가 돌아오기 전에 설득해야만 한다. 칼리번은 아스터와 최대한 떨어질 수 있게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달렸다.

“거기서!”

젠이 그를 빠르게 뒤쫓았다. 칼리번의 속도로 거리를 벌리기란 불가능했고 가까스로 젠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다였다. 오랜 세월 용병으로 생활하며 쌓은 육감과 필사적인 의지로 버티는 것이지 그의 몸은 이미 손상을 입고 있었다.

“으윽!”

그 와중에 젠의 발톱이 다리를 스쳤다. 종아리가 타들어 가듯 뜨겁다. 칼리번은 젠의 발톱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제길! 이대로는 설명하지도 못한 채 젠의 손에 죽고 만다.’

젠에게 쫓기던 칼리번은 어느덧 낭떠러지의 끝으로 몰렸다.

“젠!”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목소리로 외쳤다. 목소리가 쉬어 괴상망측했다.

“젠, 제발! 내 말을… 한 번만 들어라! 지금 왕자님의 곁에 있는 칼리번은 진짜 칼리번이 아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에어리얼에게 몸을 빼앗겼다!”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에어리얼! 그… 그 오메가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거다! 내 말을… 제발… 믿어라. 나는…. 윽, 이 자리에서 네 손에 죽어서라도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

칼리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아무 말을 두서없이 쏟아 낼 뿐이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더듬거리고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 이 말만은 제발, 왕자님께….”

유인 작전을 계획하며, 칼리번은 밤마다 왕자님을 만나게 되면 할 말을 정리했었다.

“전해 줘….”

그러나 막상 젠을 마주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크윽.”

자꾸만 목이 메어 왔다. 턱이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무릎을 꿇고 울고만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자신은 이러지 않았다. 왕자님을 젠에게 맡기면서 해야 할 말을 정확히 전했다. 그러나 지금의 칼리번은 아이처럼 울먹일 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누가 이 모습을 ‘칼리번’이라고 믿겠는가?

“그… 그분과,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왕자님이시라면 분명, 분명… 어느 쪽이 진짜인지를 구분하실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자해의 흔적이 가득한 하얀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눈앞에 그녀가 있어서….

…이것은 칼리번의 감정이 아니었다. ‘에어리얼의 몸’이 멋대로 젠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젠, 제발……!”

상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칼리번은 애원하듯 두 손을 쥐어짰다. 한쪽 손은 단검에 관통당해 제대로 주먹조차 쥐지 못했다. 오므린 손에서 피가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이제 그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오랜 동료의 판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칼리번은 젠의 발톱이 몸을 꿰뚫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숨을 멈춘 채 앞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혹시나, 하고 고개를 든 희망은….

“에어리얼, 너… 이 순간마저 거짓말을 하는 거냐?”

무참히 짓밟혔다.

칼리번이 마주한 것은, ‘칼리번’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증오와 경멸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칼리번은 젠이 자신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부상이 심했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전 숨을 골랐을 뿐이다.

“윽, 흐으….”

칼리번은 다시 숨이 막혀오는 감각에 피가 묻은 손으로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나 심장은 돌이 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눈에서는….

젠의 모습이 흐릿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가린 탓이었다. 싸늘한 시선에 에어리얼의 몸은 마치 죽음을 선고받은 것 같았다.

“…역시 그때, 내 손으로 끝장을 봤어야 했어.”

뿌연 안개 너머로 잔혹한 말이 들려왔다.

“이런 괴물이 되어서 돌아올 줄 알았다면… 널 살리려고 애쓰지 않았을 거다.”

잔혹하지만, 목소리의 끝은 떨리고 있었다.

“후회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에어리얼’에게 하는 말이다. 알고 있다.

“후회한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니 칼리번은 마치 자신이 매도당하는 것만 같았다.

“젠…….”

하지만 이해한다. 자신이 젠의 입장이었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피난민마저 모두 잃은 상황이었다. 본인도 큰 부상을 입었다. 적의 수장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해 봤자 기만으로 보이겠지.

“알겠다, 젠…. 날 믿지 않아도 좋다. 나도 강요하지 않으마. 하지만… 마지막 부탁이다. 혹시 왕성에 내 몸이 있나?”

칼리번은 바보같이 물었다. 그러나 젠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에어리얼이 왕성에 있는지 판가름할 수가 없다.

젠은 일을 쉴 때면 동료들을 모아 도박판을 벌이곤 했다. 게임을 할 때 그녀는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즉, 지금 젠은 자신을 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 몸이 왕자님의 가까이에 있다면, 당장… 윽, 목을 베거나 심장을 뽑아서 없애라. 그러면 진실을 알게 될 거다.”

칼리번은 눈물을 흘렸다. 다른 이의 감정이 그의 영혼을 지배한 탓이었다. 칼리번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는 젠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나약해졌다. 발밑이 무너지고 끝없이 추락만 하고 있다.

“닥쳐. 네 눈물에 더는 속지 않아.”

젠은 에어리얼의 간계를 단호하게 잘라 냈다.

“…….”

칼리번의 손이 힘없이 가슴에서 떨어져 내렸다. 젠이 아무런 장해물 없이 제 심장을 꿰뚫을 수 있도록. 젠의 발톱에 긁힌 다리는 벌써 푸른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진짜 에어리얼’이라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왕자의 반응이 궁금해서라도 널 죽이지 않고 살려 두고 싶어져. 지금의 널 보면, 알아보기나 할까?>

그러니 죽음으로써 젠에게 증명하자.

<살아서 에레즈 프리드웬을 만날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지. 네가 스스로 정해.>

저항 없이 죽어 준다면 자신이 한 말을 조금은 의심해 보겠지. 그것으로 족하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왕자님에게 돌아간 젠이 자신이 했던 말을 전해 주는 것만으로….

“큭!”

칼리번이 눈을 감은 순간, 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절벽을 기어오른 백금사가 그물처럼 퍼져 그녀를 덮친 것이다. 젠은 백금사에게 토막 나기 전에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아스터!”

칼리번이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허공에 뜬 젠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대응을 예상한 듯 백금사가 방향을 틀어 젠의 몸을 휘감았다.

“제기랄…!”

젠의 얼굴이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칼리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한편, 백금사의 주인은 칼리번을 향해 표표하게 걸어왔다. 그가 보낸 마물을 전부 처리했는지 전신이 역한 피 냄새로 진동을 했다. 그러나 아스터 또한 백금사를 지나치게 사용했는지 갑옷 간의 연결이 긴밀하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아스터…!”

칼리번이 이를 바드득 악물었다. 젠이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백금사는 몸을 세게 조였다. 그녀의 피부가 딱딱하게 굳어 갔지만 피는 여전히 배어 나왔다.

“아스터…. 그만둬라! 멈춰!”

이제 와 그가 명령을 들을 리가 없었다. 이대로는 젠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젠이 죽으면 왕자님에게 진실을 전할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종아리에서부터 독이 퍼지기 시작한 칼리번은 더는 마물을 부릴 여력이 없었다. 지금 마물을 부른다면 도리어 몸을 잡아먹힐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

칼리번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조금씩, 낭떠러지를 향해서.

“…!”

칼리번의 행동에 아스터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의 발끝에서부터 실타래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한 가는 백금사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기 전에 낭떠러지를 향해 뛰어내렸다.

“안 돼!”

여태껏 소리 내지 않고 참았던, 어린 목소리가 갑옷 안에서 울려 퍼졌다. 아스터는 쥐어짜던 젠을 집어 던진 후 곧장 제 몸을 칼리번을 향해 내던졌다. 반 이상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젠의 몸이 마른 암석 바닥을 구르더니,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젠!”

칼리번은 추락하는 젠의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죽는 것은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녀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한참 거리가 벌어져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부질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손을 잡은 것은 젠이 아닌 피 묻은 백금사였다.

젠과 달리 칼리번의 몸은 절벽 아래, 급류가 흐르는 강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허공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에어리얼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했습니다.”

머리 위로 이제는 외울 정도로 익숙한 대사가 들려온다.

“이것 놔라.”

칼리번은 모든 일을 망친 주범을 노려보며 말했다.

“싫습니다.”

“…놓으라고 했다.”

“저보고 에어리얼의 몸을 버리란 말입니까?”

아스터는 칼리번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칼리번은 몸을 뒤틀어 스스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 했으나, 이미 온몸이 백금사에 칭칭 감겨 버렸다. 햇빛에 닿아 희미하게 빛나는 백금사에는 젠과 마물의 피가 덕지덕지 묻은 채였다.

“큭….”

칼리번은 아래를 보았다. 절벽에 수차례나 부딪치며 추락한 젠은 급류에 휩싸였는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젠이라면 살아남을 거다.’

반드시…. 칼리번은 쉼 없이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사이 칼리번의 몸은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져 다시 낭떠러지 위로 올라왔다.

“에어리얼의 몸이니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칼리번의 다리를 본 아스터가 말했다. 그 후로도 아스터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칼리번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상태를 살폈다.

“…….”

퍽! 예고도 없이 칼리번의 주먹이 투구를 갈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투구가 저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그때와는 달리 아스터가 칼리번을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칼리번은 쉬지 않고 주먹질을 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어느 순간 아스터의 손이 칼리번의 손을 막았다. 계속 얻어맞는 것이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소중한 에어리얼의 몸이 다칠까 봐였다.

“어째서냐…! 왜 갑자기 젠을 공격한 거지?”

칼리번은 분노에 차 으르렁거렸다. 온 힘을 다해 주먹질한 탓에 하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커다란 갑옷의 장갑이 가는 에어리얼의 손을 덮듯이 감쌌다.

“당신과 달리 에어리얼은 항상 웃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

“…하지만 에어리얼은, 그 이름을 부르며 울었습니다.”

“뭐…?”

칼리번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스터는 전처럼 비아냥거리지 않고 순순히 덧붙였다.

“그자는 에어리얼을 울게 하니까 제가 없애야 합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무한 대답이었다. 아스터의 행동은, 부모를 괴롭히는 어른을 향한 어린아이의 발길질이나 다름없었다. 마물 혼혈인 칼리번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분명히, 그래야 하는데.

“…으 으윽!”

칼리번은 한 손으로 이마를 움켜쥐었다. 칼리번, 아니, 에어리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젠을 마주쳤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통증이었다.

…에어리얼의 몸이 칼리번의 사고를 잠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칼리번? 괜찮습니까?”

칼리번이 구역질을 하자 아스터가 그의 몸을 안아 들었다.

“욱, 우욱…!”

젠과 만난 탓일까? 그전까지는 알아내려고 애를 써도 꽁꽁 갇혀 있던 에어리얼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칼리번은 고통을 분리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으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칼리번, 정신 차리십시오…. 칼…….”

아스터의 부름이, 간절한 외침이… 점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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