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악몽 (18/50)

8. 악몽

헉, 헉…!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절박한 호흡 사이로 빠지지 않고 들려오는 것은, 살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짐승의 교미였다. 온몸이 털로 뒤덮인 마물이 칼리번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물은 전체적으로 늑대의 형상을 띄었는데, 체격이 좋은 칼리번보다 육중했다. 대가리에는 회오리처럼 굽이진 뿔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구불구불한 것은 뿔만이 아니었다.

칼리번은 네 발로 엎드린 채로 마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순순하지는 않았다. 칼리번의 두 팔은 다른 마물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배 속에 삽입할 기회를 놓친 다른 마물이 엎드린 칼리번의 머리를 붙잡고, 입 안으로 성기를 강제로 밀어 넣고 있었다.

밤처럼 까만 눈은 전에 없던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교미를 거부하기 위해 버티면 버틸수록 짙은 피부로는 땀이 배었다. 수많은 마물이 그를 노리고 주변에서 득실거렸다. 뱀과 같이 유연하고 긴 몸을 가진 마물은 칼리번의 허리를 벨트처럼 칭칭 감고는, 꼬리로 그의 성기를 말아 세게 움켜쥐었다.

<으음, 읍, 큽—!>

오메가는 아직 발정이 들지 않았다. 근육질의 몸은 바위처럼 딱딱했고 알파의 출입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칼리번의 허리를 붙잡은 발톱이 옆구리를 사정없이 할퀴어 댔다. 발정하지 않은 오메가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짙은 피부 위로 선이 그어지고, 붉은 피가 사타구니 쪽으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마물의 성기를 삼키지 않기 위해 버티던 칼리번의 목 안으로 결국 길고 굵은 성기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커흑—!>

벌어진 아래턱이 단단해지더니,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으득…!

울컥, 비릿한 정액과 피가 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잘린 성기가 목구멍에 그대로 걸렸다.

칼리번의 목구멍에 삽입하던 마물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자유를 얻은 칼리번은 잘린 성기를 목에서 뽑아냈다. 체액이 섞인 살덩어리가 어둠 속으로 던져졌고, 다른 마물들이 그 흔적을 지웠다.

<…아, 흐윽!>

칼리번의 몸이 뒤로 젖혀지며 허리가 뒤틀렸다. 목구멍을 농락하려는 마물을 상대하는 사이, 뿔 달린 늑대의 부푼 성기는 몇 번이고 몸 안을 오간 상태였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몸으로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이려니 당연히 몸 안이 찢어졌다. 다리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또한 마물이 환장하는 액체였다.

칼리번은 엎드린 상체를 비틀어 두 팔로 늑대 마물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물의 성기가 몸 안에서 반 바퀴 돌며, 내벽을 고루 자극했다. 오랫동안 대검을 휘둘러 발달한 팔근육이 뻣뻣하게 긴장했다. 목을 조이자 마물의 주둥이가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다. 이빨이 몸속에 박히기 전, 칼리번은 마물의 숨통을 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역설적이게도, 칼리번이 알파를 죽이기 위해 힘을 줄수록 내벽 또한 알파의 성기를 더욱 강하게 조였다. 그것은 칼리번의 팔을 부러뜨리려던 알파의 힘을 빠지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몸속에서 알파의 성기가 점차 부풀어 올랐다.

<흑, 으극…!>

배 속에 차오르는 부피감에 칼리번은 소름이 돋았다. 그 공포를 떨쳐 버리기 위해 팔뚝으로 더욱 힘이 들어갔다. 우두둑, 마침내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윽, 허억…!>

마물을 격렬하게 끌어안았던 칼리번의 상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입 안에 고인 마물의 피를 토해 냈다. 목을 자르지 못했으니, 곧 재생될 것이다. 칼리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나 금세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읏?! …아악!>

마물은 멋대로 노팅을 시도했는지, 몸속에 부풀어 오른 성기가 빠지질 않았다. 지금 이것을 뽑으면 배 속이 뒤집히고 말 것이다.

<아, 으윽….>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마물과 이어진 제 몸을 끌며 기었다. 그의 주위에는 마물의 시체가 즐비해 있었다. 대부분은 오메가의 냄새를 맡고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가 노팅조차 해 보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것들이었다.

마계에 던져진 오메가는 짐승들에게 던져 주는 고깃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이 몸이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았을 것이다. 갈기갈기 찢겨, 포식자의 배 속에 들어가면 끝이 날 테니. 그러나 칼리번이 마주한 현실은 그보다 더욱 끔찍했다.

접이 붙은 개처럼 마물과 엉덩이를 붙인 채 살점과 내장으로 된 땅을 긴다. 비참했다. 차라리 이제는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용병으로 살아왔다. 대검을 들고 쓰러뜨리던 적을, 이제는 수컷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납득하지 못했다. 현실에 순응하기 전까지 칼리번은 이렇듯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마물을 쓰러뜨릴 것이다.

칼리번의 몸에서 피와 땀이 피어올랐다. 그가 이 지옥에서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육욕과 살해 욕구가 섞인 향기는 더욱 강한 마물을 불러들인다.

땅이, 바다가, 하늘이 칼리번을 원했다. 칼리번이 도망치려 하면 마물로 이루어진 땅이 꿀렁거리며 지형을 변형시켰다. 그가 시체의 탑을 오르려 하면, 우르르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나며 거대한 산맥이 무너져 내린다. 피로 이루어진 강에 뛰어들면 강바닥에서 무수한 손이 튀어나와 그를 붙잡고 교미하려 들었다.

그 어느 곳에도 안식처는 없었다. 발이 닿는 곳, 등을 기댈 곳, 머리를 누일 곳 하나하나가 마물의 신체였다. 칼리번이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멈추면 가슴을 쥐어짜 오메가의 젖을 취하고, 범하려 들었다.

<아악, 으아아아악!>

그럴 때면 칼리번은 쉬어 터진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피의 강에서 빠져나온 몸은 시뻘겋게 피로 얼룩져 있었다.

뿔이 달린 늑대 마물과 연결된 채로 기어 다니던 칼리번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몸을 덮은 정도가 아닌, 일대를 뒤덮는 거대한 그늘이었다. 거대한 마물은 마물들이 쌓아 올린 탑과 산에 비견될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했다. 만약 평범한 인간이 그 마물을 보았다면 신이라 믿을 정도였다.

칼리번이 맨몸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급수였다. 그는 도망치려 했지만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붙잡혔다. 그것은 그물로 물고기를 건져 올리듯, 큼지막한 손으로 가뿐하게 칼리번을 들어 올렸다.

“허, 허억…!”

이성을 넘어선 존재와 마주친 칼리번은 눈조차 깜박이지 못한 채 굳고 말았다. 인간계에 있을 당시, 칼리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체격이 큰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 칼리번은 마물의 손바닥보다 작았다. 이 마물이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칼리번은 손안의 사과처럼 으깨지고 말 것이다.

마물의 손바닥에는 거대한 입이 달려 있었다. 굳건히 닫혀 있던 입에서 혀가 튀어나와 칼리번을 휘감았다. 그는 금세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흐아, 아아…!>

거대한 마물은 칼리번만 한 크기의 눈을 수십 개나 지니고 있었다. 칼리번이 비명을 지르자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던 눈동자가 일시에 한곳을 향했다. 신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이 마물 또한 알파다. 그리고 알파가 오메가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으…흐으으…….>

이 마물과 교미를 한다면 분명 전신이 찢겨 죽고 말 거다.

<아… 안… 안 돼…….>

칼리번은 도망쳐야 함을 알았다. 그러나 마계의 곳곳을 살피던 수십 개의 눈이 오직 자신만을 향하자, 공포에 전신이 마비되었다.

칼리번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아랫배가 당겨지며 몸속에 박힌 마물의 성기가 꽉 조였다. 원래 그는 길가의 돌멩이처럼 공포나 두려움을 크게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그는 오메가였고, 그를 오메가로 눈뜨게 해 준 이는 곁에 없었다. 지난 모든 오메가들이 겪었던 것처럼.

<흐으, 아, 아아….>

거대한 마물은 칼리번을 손에 움켜쥐고는 부드럽게 주물렀다. 칼리번에게는 당장에라도 으스러질 것처럼 강한 압박이었다. 배 속에 담긴 성기가 외압에 거세게 눌렸다. 칼리번은 공포와 압박감에 앞을 적시고 말았다. 정액이라기보다는 오줌에 가까운 비릿한 사정이었다.

<히, 히익…. 아으, 으…….>

이성이 마비되어 딱딱한 목각 인형이 되어 버린 오메가와 달리 마물은 공포 그 자체를 모른다. 한층 진해진 오메가의 냄새가 주변에 퍼졌고, 다른 알파들은 그 체취에 이끌려 감히 그 거대한 마물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손에 생긴 입으로 칼리번을 완전히 삼켜 내장에 오메가를 융합시키고는, 끝없이 교미를 즐기려던 거대한 마물에게는 거슬리는 벌레들이었다.

<—!>

그러던 중, 거대한 마물 주변에 솟은 마물의 탑이 그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붙들려 있던 칼리번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퍼억, 칼리번은 나무에 걸린 꽃이 시들어 떨어지듯 땅에 온몸을 부딪쳤다. 도망치려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몇 군데인가 부러진 것도 같았다. 칼리번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알파는 사정 봐주는 일 없이 쓰러진 오메가를 뒤덮었다.

<으…. 허억, 흐으…….>

다음으로 칼리번을 차지한 것은 두 발로 우뚝 선 마물이었다. 유달리 거대한 뒷다리는 염소와 같았다. 산처럼 거대한 마물보다는 작았으나 그럼에도 마물은 5m가 넘는 체구였다. 저런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노련한 용병이 적어도 셋은 필요했다.

마물은 한 손으로는 칼리번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단련된 칼리번의 몸이 어린아이처럼 쉽게 허공에 들렸다. 발굽으로 이루어진 뒷발과 달리 마물의 앞발은 뾰족한 발톱과 여섯 개의 발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칼리번의 몸을 한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체구에 비해 큰 편이었다.

마물의 다른 손이 칼리번의 아래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직도 연결된 뿔이 달린 늑대의 몸통을 움켜쥐었다.

<아, 아…?! 그, 만…둬!>

뒤늦게 눈치챈 칼리번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마물은 아무런 기교 없이 그저 우악스러운 힘만으로 노팅된 마물의 성기를 끌어당겼다.

<아악, 악—!>

칼리번은 몸부림을 쳤다. 마물의 팔을 떼어 내기 위해 발로 걷어차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배 속에서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회오리처럼 혹이 휘감긴 알파의 성기가 빠져나왔다. 늑대 마물이 죽은 후에도 노팅이 풀리지 않았으니, 저것이 뽑아내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원히 노팅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히, 끄윽……. 허억, 하아….>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몸 어딘가가 찢어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강제로 결합이 풀린 몸이 축 늘어졌다. 벌어진 입구에서 배 속에 남아 있던 정액이 흘러나왔다. 오메가는 아직 발정이 오지 않았으나 입구는 다양한 마물의 정액들로 흥건했다.

<……!>

간신히 숨만 헐떡이던 칼리번의 몸이 움찔 떨렸다. 두 발로 선 마물은 오메가에게 필요한 것은 하반신뿐이라는 듯 그의 허리와 골반을 두 앞발로 단단히 붙잡았다. 하반신이 붙들려 붕 뜬 반면, 칼리번은 상체는 여전히 땅에 닿은 채였다.

<윽, 크으……!>

그는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땅을 이루고 있던 마물들이 칼리번의 팔과 어깨를 붙잡는 통에 상체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오메가가 꼼짝도 하지 못하자 온갖 조잡한 마물들이 칼리번에게 다가왔다. 젖은 가슴과 입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불붙었다.

<흐, 아아…!>

버둥거릴수록 피가 거꾸로 쏠려 머리가 멍해진다. 붙잡는 손길을 두 팔로 떨치며, 가슴에 들러붙는 작은 마물들을 떼어 내던 칼리번은 엉덩이 사이로 닿는 뜨겁고 거대한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흡사 몽둥이나 다를 바 없는 살덩어리. 시선을 위로 향하자 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마물의 형상과 마주했다.

<그, 그만…! 으윽…. 아, 안…!>

칼리번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하반신을 버둥거렸다. 알파의 성기가 입구를 찾아 칼리번의 회음부와 엉덩이 위를 오갔다. 명치 아래까지 꿰뚫을 정도로 거대한 성기는 매끈하지 않고 여기저기 멋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몸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들었다. 피가 몰린 얼굴은 당혹감에 더욱 붉어지고, 이마 위로는 굵은 핏줄이 솟아올랐다. 마물은 칼리번의 마침내 찾아낸 입구에 성기를 맞췄다.

<하지, 크윽…. 윽, 으윽. 악!>

마물은 젖은 입구에 성기를 쑤셔 넣었다. 바로 삼키지 못하자 칼리번의 몸을 끌어당겨 박아 넣었다. 근육으로 단단하게 자리 잡은 배였건만, 거대한 성기가 삽입되자 그 모양을 따라 솟아올랐다.

<윽…. 헉……. 흐으, 허억….>

칼리번의 목이 뒤로 꺾였다. 순간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배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압박감에 숨조차 쉬기 버거워 꺽꺽거렸다. 사람이 감히 담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아, 아악…!>

중간에 부풀어 오른 혹이 입구에서 걸리자 마물은 그대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직 반도 채 들어가지 않은 성기가 아랫배를 퍽퍽 찔러 댔다. 그럴 때마다 불룩 솟아오른 혹들이 입구에 부딪혔다.

<그만, 둬, 아, 안 들어…. 못…!>

칼리번이 울부짖을 때마다 튀어나온 목젖이 꼴깍거리며 넘어갔다.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성기가 전부 들어갈 때까지 반복하겠다는 욕망만은 알 수 있었다.

<으으윽!>

수 번의 삽입 시도 끝에 두 번째 혹이 들어갔다. 막힌 부분이 풀리자 남은 굵은 기둥이 안으로 진입했다. 성기가 들어온 만큼 몸속의 내장이 밀려 올라갈 것만 같다. 칼리번에게는 몸 한구석을 가릴 수 있는 천 쪼가리조차 없었기에 삽입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짙은 색의 몸은 돌을 깎아 내린 것처럼 거칠었으며 근육으로 단단하게 짜여 있었다. 검붉은 피와 체액은 온몸에 흐르고 있어 곳곳에 마물의 털이 들러붙은 채였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로 뒤덮인 마물과 비교하자면 칼리번의 몸은 매끈했다. 근육질의 몸도 몇 배가 더 큰 마물 아래에 깔리니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 안 돼! 크흑, 그만, 찌, 찢어…. 크읏…!>

단련할 수 없는 내장을 쑤시는 고통에 눈가에 물이 고였다. 칼리번이 아무리 애원해도 통하지 않았다. 오메가를 차지한 마물은 제 성기를 몸 안에 꾸역꾸역 채워 넣기 바빴다.

<하악, 악!>

크고 딱딱한 고환이 멍이 든 엉덩이에 부딪혔다. 전신이 성기로 채워진 것만 같은 버거움이 들었다. 사람의 몸이 그렇게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칼리번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메가. 그는 오메가였다. 어쩌면 오메가의 몸은 다를지도 모른다….

칼리번의 다리가 흔들렸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물을 떼어 내기 위해서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러나 허공에 발길질할 뿐, 아무런 변화도 끌어내지 못했다.

<아윽, 커헉…. 윽…. 으윽…!>

마물은 칼리번의 골반을 붙잡고 허리짓을 했다. 이 행위만은 어떤 알파라 할지라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같았다. 거대한 성기가 몸속을 휘저을 때마다 윗배와 아랫배가 번갈아 가며 불룩 솟아올랐다.

꿀럭, 허리를 뒤로 뺄 때마다 빈틈없이 딱 붙어 있던 두 몸 사이에서 찐득하고 희뿌연 액체가 풀처럼 보풀을 일궈 냈다. 칼리번의 몸 안에 먼저 채워진, 다른 마물들의 정액이 귀두와 두 번째 혹으로 몸속을 긁을 때마다 밖으로 빠져나간 탓이었다.

다른 알파의 정액을 빼내는 행위는 오메가를 차지한 알파만의 특권이었다. 성기를 거세게 조이는 뜨거운 내벽은 마물에게 있어 몇 안 되는 극상의 쾌락이었다. 오메가를 잉태시켜야 할 씨는 새로운 노팅을 위한 윤활제로 전락했다.

울퉁불퉁한 성기로 긁어내린 다른 알파의 정액은 오메가의 몸 안을 기름칠하다 못해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칼리번의 몸 안에서 수많은 마물의 정액이 휘저어져 섞였다. 배 속에 들어찬 각기 다른 밀도의 정액들이 비슷한 묽기로 맞춰져 갔다.

칼리번의 몸은 마물의 성기에 꿰뚫려 더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억지로 허리를 쥐고 고정시킬 필요가 없었다. 마물은 칼리번의 양 허벅지를 쥐고 크게 벌렸다. 그에 따라 접합이 더욱 깊어졌다. 알파의 거친 허리짓에 칼리번의 성기는 배 위에 늘어진 채로 무력하게 흔들렸다.

<흐윽, 큭…. 으, 아악—!>

칼리번은 울부짖었다. 오메가를 빼앗긴 거대한 마물 또한 그를 둘러싼 수많은 마물을 학살하며 마찬가지로 울부짖고 있었다. 거대한 마물이 언제 자신의 몸을 차지한 알파를 죽이고 이 몸을 끌고 갈지 모를 일이다. 무엇을 해도 나아질 수 없고, 아래로 추락할 뿐인 지옥이다.

<으… 악, 아…! 흐으, 악, 아앗…!>

칼리번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교접의 고통에 칼리번의 저항이 미미해지자, 다른 마물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칼리번의 몸 안을 탐하지는 못하고, 대신 털 없는 피부를 뒤덮었다. 땅이 등 뒤에서 칼리번을 끌어안고, 흙이 반갑게 기어 나와 가슴과 배를 덮는 것만 같은 간지러움과 두려움. 마치 산 채로 매장당하는 것만 같다.

<시, 싫어— 살려 줘, 그만둬! 더는, 더는 배가— 아, 읍—?!>

칼리번이 입을 여는 순간, 운 좋은 녀석이 불쑥 입 안을 차지했다.

<흐읍…. 윽, 으— 그, 그만—!>

마물은 칼리번의 가슴을 쥐어짜고, 그들에게는 마약이나 다를 바 없는 젖이 나오길 바라며 세차게 빨았다. 그러나 발정이 오지 않은 오메가의 가슴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마물들은 유륜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젖 구멍을 탓했다. 마물들은 혀끝으로 살 아래 숨겨진 점을 짓누르고 굴렸다.

칼리번은 상체를 버둥거렸다. 단단한 근육에 감싸인 두 팔이 잠시나마 마물의 대지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붙잡히기를 반복했다. 칼리번을 범하는 마물은 그가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를수록 흥분했다. 내벽이 더욱 조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칼리번이 시체처럼 누워만 있어도 흥분했을 것이다. 그는 오메가였으니까. 오메가가 알파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노력도 필요 없었다. 설령 칼리번이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성기를 내밀고 달려들 것이다.

그렇기에 칼리번은 절대로 마물들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끔벅거릴 때마다 고인 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알파가 오메가로부터 갈구하지 않는 유일한 체액이었다. 의미 없는, 가치 없는 물에 불과할 뿐.

칼리번은 점점 더 많은 마물에 뒤덮여 이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칼… 리번!”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칼리번의 이름을 외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결에 과하게 힘을 준 탓인지 손이 경련을 일으킨다. 에레즈는 손안에 잡히는 감촉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마계가 아닌 인간의 세계. 성안, 숨겨진 방의 침대 곁, 칼리번의 손을 쥔 채.

“칼리번…. 칼리번…!”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에레즈는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전신은 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였다. 그것은 손도 마찬가지여서, 칼리번의 손 위에 얹은 하얀 손이 눅눅해진 지 오래였다.

“칼, 괜찮은 거야? …칼리번!”

에레즈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칼리번을 살폈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넘어지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칼리번은 에레즈가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가 본 것은 한낱 악몽에 불과하며,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설마, 꿈…인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에레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온몸에 쌓인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에레즈는 떨리는 왼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수선을 떨어 혹여나 칼리번이 놀라지 않았을까, 안색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꿈…….”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꿈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다. 바로 곁에서 칼리번의 고통을 지켜본 것처럼, 꿈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고 에레즈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에레즈는 넘어진 의자를 세워 그의 곁에 앉았다.

‘어쩌면 단순한 꿈이 아닐지도….’

그는 자신의 왼손을 칼리번의 손에 다시 겹쳤다. 선명했던 손목 위 흉터가 어느새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 * *

칼리번은 내장과 살점뿐인 세상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마계에서 고초를 겪은 그는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서 에어리얼이 열어 준 좁은 문을 빠져나왔다. 냉기가 서린 석재 바닥에 무릎과 팔뚝이 부딪쳤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성기가 수치를 모른 채 물을 떨구며 덜렁거렸다.

네발을 써도 쉽지 않은지, 그의 몸은 자꾸만 무너졌다. 턱이 바닥에 처박혀 골이 다 얼얼했다. 하지만 사소한 고통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칼리번은 인간의 걸음걸이마저 잊은 채 추잡하게, 허겁지겁 기는 데에만 열중했다.

밤처럼 새까맣던 머리카락은 마물의 체액에 탈색이 되었는지 다소 흐릿한 색이었다. 짙은 피부는 마물의 정액과 털로 뒤덮여 짐승처럼 보였다. 그는 태도조차도 오래전에 짐승이 된 듯 고개를 땅에 푹 박고는 차마 들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마물과 흘레를 붙었던 흔적이, 근육이 잡힌 등줄기에 남은 채였다. 묵직한 정액은 그의 등을 타고 느릿하게 흘러내려 엉덩이 바로 위의 움푹 팬 고랑에 고였다.

<흐읍, 헉, 커헉….>

내뱉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정액이 거미줄처럼 목구멍 안에 들러붙은 탓이다. 토악질하는 소리와 함께 날개뼈와 주변의 근육이 들썩이고, 등이 굽었다.

<욱, 우웩, 큽……!>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소리와 함께 입 밖으로 질은 정액이 후드득 쏟아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자, 배 속에 가득 찬 정액도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칼리번은 한참이나 컥컥거리며 몸에 담긴 정액을 위아래로 토해 냈다.

알파는 오메가의 몸 안쪽뿐만 아니라 피부 위로도 흔적을 남겼다. 마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교미를 시도했다. 길고 단단한 목에는 교살을 당한 것처럼 굵은 줄에 묶인 흔적이 뚜렷했다. 목 아래로는 온갖 짐승들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물어뜯기다 못해 꿰뚫린 구멍에서는 피가 흐르고, 주변으로 멍이 퍼졌다. 반항하는 오메가를 고정하기 위해 붙잡은 허리와 허벅지에도 혈심이 남아 있다. 탄탄했던 피부는 벗겨질 정도로 너덜너덜했다.

<허억, 컥, 커헉! 큽…!>

거대한 체구의 마물과 교미를 하는 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쉭쉭거리는 숨소리가 기괴했다. 숨을 쉬는 데에 여념이 없던 칼리번의 얼굴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대검을 휘두른 탓에 유독 근육이 발달한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탓이었다. 칼리번이 쓰러진 자리로 서서히 얕고 더러운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때, 어둠을 가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

칼리번의 몸이 움찔 튀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타박, 타박, 맨발로 다가오는 소리는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가벼웠다. 칼리번은 살아 있으면서도 무게가 없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윽고 하얀 발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것은 칼리번의 어깨를 밟더니, 반대 방향으로 걷어찼다.

<큭—!>

그 작은 힘만으로도 거대한 몸이 벌렁 뒤집혔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널 깨운 적이 있었는데 말이야. 어차피 기억도 안 나겠지만.>

에어리얼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키득거렸다.

<커헉! 크읏…. 하아, 하…….>

칼리번은 바닥에 등을 댄 채로 드러누웠다. 그가 걸친 것이라고는 알파의 체액밖에 없었다. 간신히 지옥에서 빠져나온 그에게 수치를 챙길 여유란 없었다.

마물에게 범해진 흔적은 등과 엉덩이뿐만 아니라 가슴과 배에도 여지없이 남아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깨물리고 젖을 빨린 가슴은 다른 신체 부위와 비교해서도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멍으로 얼룩덜룩한 가슴은 양쪽의 근육이 버티는 선에서 최대로 부푼 채였다. 마물들에게 끊임없는 미약을 선사했을 유륜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너덜너덜했고, 항상 숨어 있던 유두는 콩알만 해져 튀어나온 채였다.

쥐어짜인 것은 가슴뿐만이 아니라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성기도 마찬가지였다. 좁고 날카로운 촉수를 가진 마물에게 붙잡히면 여지없이 그곳으로 삽입을 당했다. 그 탓에 귀두 부분은 붉게 헐었고 요도는 전보다 굵게 확장되었다. 다행히 원래의 기능은 잃지 않았는지 찔끔거리며 아랫배 위로 묽은 액을 흘렸다.

오메가의 체액이란 어느 것이든 마물에게는 달콤한 미약에 가까웠다. 스스로 유희를 창조하고 즐기는 인간과 달리 마물은 항상 감각에 굶주려 있었다. 그런 알파에게 오메가의 체액이란 유일한 쾌락, 성욕을 증폭시키는 단물이었다. 오메가의 배 속이 마물의 정액에 가득 채워지고 반대로 젖과 피, 정액은 더는 나오지 못할 만큼 빨리는 이유였다.

수도 없이 노팅을 당한 탓에 배는 완만하게 솟아 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인 상황에서도 그는 한 손으로 배를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놓칠 에어리얼이 아니었다. 그림자가 칼리번의 아랫배 위에서 어른거리더니, 하얀 발이 제 그림자를 뭉개듯 아래로 떨어졌다.

<윽, 커헉…!>

칼리번이 신음을 내뱉었다. 무게가 거의 나가지 않는 에어리얼은 온 힘을 다해 그를 짓밟았다. 복부에 가해지는 격통에 입에서 헛구역질이 튀어나오고 절로 무릎이 세워졌다. 그와 동시에 정액이 흘러내리던 입구에서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은 부드러운 생크림으로 가득 찬 빵을 으깨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 으, 으윽…! 그… 그만……둬…!>

칼리번은 부러지지 않은 팔로 에어리얼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전성기 시절이 무색해질 정도로, 칼리번은 고작 에어리얼을 상대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어디 있지?>

<흐, 흐으으…! 그만…!>

<네가 이런 꼴이 되어서까지 지키려 했던 그 왕자님 말이야.>

<그…만둬, 큭…! 부, 부탁이다…. 제발…!>

불씨가 남은 재를 비벼끄듯이, 하얀 발로 칼리번의 배를 꾹, 꾹 눌렀다. 배 속이 부글거리며 정액이 흘러나오고 엉덩이 주변에 고이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가여워라. 지옥을 피할 수 있었으면서도 자진해서 수모를 당하다니.>

지옥을 선사한 당사자이면서, 에어리얼은 도리어 칼리번을 동정했다.

<이런다고 누가 널 구하러 와 줄 것 같아?>

흔들거리는 촛불처럼, 에어리얼의 목소리는 지하 감옥에서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 구원은 없어. 앞으로 몇 번을 더 마계에 떨어져도 아무도 널 구해 주지 않아. 아니, 네가 마물에게 범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걸?>

그 말은 뾰족한 바늘과도 같아 칼리번의 두 눈을 수도 없이 찔러 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할 수 없는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에 고였다.

<…하지만 너한테는 내가, 나한테는 네가 있지.>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배에서 발을 뗐다. 그러고는 칼리번의 곁에 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여태까지의 폭압이 무색하게, 칼리번의 뺨에 창백한 손을 얹었다.

에어리얼은 변덕스럽다. 잠시 친절을 베풀지만, 다음에는 이전보다 더한 악행을 벌이기도 한다. 칼리번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애써 부정하지만, 이제는 너도 인정하겠지.>

그러나 뜻밖에도, 칼리번의 입에 닿은 것은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오메가의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우리는 똑같아. 나는 오메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한때는 나도 너처럼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까.>

<…….>

<나만이 너의 유일한 이해자이고 친구이자… 형제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칼리번의 귓가를 간질인다. 미간에 가득 잡혀 있던 주름이 하나둘씩 지워지고, 굳게 닫힌 눈이 간신히 뜨였다.

<…….>

검은 두 눈에 에어리얼의 모습이 어렸다. 그는 더없이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지독한 압제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증오스럽고도 아름다운 동족은, 다시는 자신을 지옥에 처넣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네 운명을 받아들여. 내게 복종하는 거야. 마물과 ‘사랑’을 나눠서, 나를 위해 강한 알파를 계속해서 낳는 거지.>

그러나 잔혹한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크으….>

…싫다, 싫어. 그것만은 싫었다.

<응? 그래 줄 수 있지?>

<으…흐으….>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쉬이, 칼리번…. 진정해.>

에어리얼은 한쪽 팔을 칼리번의 목 아래에 밀어 넣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유황불처럼 타오르는 머리카락과 심장처럼 붉은 눈, 티 없이 새하얀 피부. 자그맣고 마른 체구. 칼리번과 비교하자면 그는 아직도 소년 같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나이가 많은 형제처럼 능숙하게 칼리번을 달랬다.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 범해지다가 간신히 얻은 짧은 휴식조차도 에어리얼의 변덕이었다. 에어리얼의 말과 행동이 가식 어린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몇 달, 아니 몇 년 만일지도 모르는 ‘인간을 닮은 형상’에 사로잡혔다. 아이처럼 그에게 매달리고 싶어졌다.

간절히 빌면 자신을 용서해 주고,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을까….

<내가 겪었던 고통은 앞으로 네가 겪을 고통…. 진통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지. 난 널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야. 어차피 오메가는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적어도 더는 아프지 않을 방법을 알려 주려는 거야.>

<…….>

<네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칼리번. 마물과 교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더 강한 알파에게 노팅 당해서 더욱 강한 마물을 낳는 것이 기쁨이라고 여기도록 해. 그러면 더는 괴롭지 않게 될 거야.>

검은 눈동자가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눈길 때문일까? 그 말에서 묘하게 설득력이 느껴졌다. 더구나 지금 에어리얼은 칼리번에게 신이나 다름없었다. 지옥도, 천국도 그의 손짓 하나에 결정된다.

그런 신이 명령한다. 쉬지 않고 교미하여 널리 번성하라고.

…아, 그런 건가. 그런 것 같다. 에어리얼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도리어 검은 두 눈의 초점은 점점 흐려져 갔다.

에어리얼의 말대로다. 어차피 자신은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괴로워하고 발버둥 쳐 보았자 괴로울 뿐이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즐기면 되는 거다. 에어리얼의 말은 그동안 칼리번이 저항하고 탈출하고자 한 모든 노력을 우스꽝스러운 광대질로 둔갑시켰다.

에어리얼의 말은 비단 알파와 오메가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명체에게 새겨진 절대적 명령이기도 했다. 인간의 세계에서 남자가 여자와 몸을 섞는 것처럼, 마물의 세계에서 오메가가 알파와 교미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런 마땅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교미와 번식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아니, 행복이니 고통이니, 인간의 감정으로 판단할 필요도 없다. 그저 쉼 없이 해야만 할 뿐.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에어리얼에게 복종하면… 편해진다.

<그런… 건가.>

칼리번은 뿌옇게 흐려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에어리얼이 다정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이번에는 가볍게 입술만 맞대는 것이 아닌 좀 더 대담한 접근이었다. 칼리번은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혀가 들어왔다. 에어리얼의 작고 가는 손이 그의 가슴을 매만졌다.

<읏….>

칼리번은 얕게 신음했다. 멍든 가슴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쓰라렸다. 그러나 손길도 입맞춤도, 알파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지난 세월 마물들에게 당한 교미가 지독히도 고통스러웠기에 애무에 가까운 그 행위가 치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알파는 다른 알파의 향기를 맡으면 긴장하고 불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메가와 오메가의 교류는 달랐다. 거부감이 느껴지기는커녕, 체온에 가까운 미온수에 몸을 담근 것처럼 편안했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 받아들여야지….>

에어리얼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착한 동생을 칭찬하면서, 칼리번의 몸 위에 올라탔다.

<마물들이 널 아프게 했어?>

<아….>

에어리얼의 손길이 아래로 향했다. 지금까지도 알파의 정액이 흘러내리는 입구를 쓰다듬으며 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여기, 다쳐 버렸네. 하지만 다행히도 부서지지는 않았어.>

에어리얼은 고개를 숙여, 어느샌가 다시 들어가 버린 부끄럼 많은 동생의 유두에 입을 맞췄다.

<그만….>

<다 알아. 혼자서 상대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만, 해….>

칼리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강제로 찌르고, 조르고, 쑤시는 것이 아닌 부드러운 손길에 목이 메고 눈물이 솟아올랐다. 어째서 원수이자 적인 에어리얼에게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대하고 단단한 몸을 지닌 자신이, 어째서 이토록 연약하고 작은 존재에게 패배하고는 마는 것인가? 칼리번은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와 몸을 맞대고 엎드렸다. 붉은 오메가는 속이 텅 빈 것처럼 가벼웠기에, 칼리번에게는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에어리얼이 다리를 까딱거릴 때마다 칼리번의 무릎에 발가락이 툭, 툭 부딪쳤다. 그는 고개를 숙여 칼리번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물을 흘리게 되었구나.>

동정 어린 목소리. 칼리번은 몰랐으나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생리적인 눈물과는 다른, 감정적인 눈물이….

에어리얼은 손가락으로 칼리번의 젖꼭지를 희롱하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가슴 위를 덮었다. 그 아래로는 심장이 있었다.

<…….>

칼리번이 새까만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관자놀이로 흘러갔다. 눈물로 인해 흐릿해진 시야로 에어리얼의 모습이 가득 채워졌다.

<울지 않았다면 오메가가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에어리얼은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 오메가가 되지 않았다면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돌멩이인 채로 살아갔겠지. 인간의 감정을 매번 아프게, 고통스럽게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고.

<네게 눈물을 가르쳐 준 사람을 증오해, 칼리번. 너를 오메가로 만들고서는, 찾아오지 않은 사람을….>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칼리번이 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은 에어리얼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의 말에 동조하는 자신이 있었다.

어째서 이토록 비참한 것일까?

어리고 약한 왕자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런 건 희생도 아니다. 당시에는 자신이 남는 것이 나머지의 생존 가능성이 크고, 적에게 타격이 크게 줄 수 있기에 남았을 뿐이었다.

분명 그랬으면서, 어째서….

차라리 마지막 방어전에서 죽었어야 했다. 수많은 마물에게 물어뜯겨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죽었더라면, 이런 감정을 알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칼리번, 오늘은 나와 교미하자.>

에어리얼의 붉은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아니지…. 인간들처럼 사랑을 나누자.>

가는 두 팔이 칼리번의 어깨에 감겨 왔다. 에어리얼의 가슴이 칼리번의 가슴과 가볍게 스쳤다. 칼리번은 고통에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넌 마물들에게 너무 혹사당했어. 기분 좋게 해 줄게. 그동안의 고생이 전부 잊혀질 정도로. 알파와 교미할 때 아프지 않게 되는 방법도 알려 줄 테니까….>

에어리얼은 다시금 입을 맞췄다. 칼리번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형제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싶어졌다. 자신의 몸, 자신의 의지, 자신의 영혼까지도….

으득.

<…?>

그때였다. 에어리얼의 입술에서 후드득, 피가 흘러내렸다. 그 피는 그대로 칼리번의 얼굴에 쏟아졌다.

<칼리번, 네가 감히……. 아아악!>

에어리얼의 입에서는 끝마치지 못한 말 대신 숨통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칼리번이 부서지지 않은 오른팔로 그의 목뼈를 으스러뜨릴 듯 움켜쥔 탓이었다.

<너, 어… .끅, 으윽…!>

에어리얼이 컥컥거리며 뻐끔거렸다. 그는 칼리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버둥거렸으나 용병의 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구해, 줄 거라고는 바란 적… 없다.>

<커, 헉…. 뭐…?>

<하지만 너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이마와 턱에 푸른 핏줄이 돋아난 칼리번의 얼굴은 마치 악귀와도 같았다.

<큭, 너, 아직…. 하, 으윽, 으히, 하하, 아하하하하…!>

에어리얼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임에도 몸을 떨며 웃었다. 목을 죄는 압박에 붉은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떠지고, 흰자위로 붉은 핏줄이 돋아났다. 칼리번의 오른 팔뚝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느 쪽의 외침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다. 다만,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웃는 쪽은 에어리얼이었고 한 팔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필사적인 쪽은 칼리번이었다.

<컥…. 커헉, 하아, 아…. 흐으, 흐흐흐….>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유혹이라도 하듯 왼쪽 눈을 감았다 뜨며 깜박였다. 칼리번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왼쪽을 살폈다.

그리고….

퍽!

머리와 어깨로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칼리번의 몸은 순식간에 날아가 지하 감옥의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에어리얼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직감한 마물이 곧장 칼리번을 들이받은 것이다.

<젠…장……. 으윽!>

칼리번이 간신히 몸을 일으킨 순간, 마물이 제 몸을 내던져 칼리번을 짓눌렀다. 마물에게 범해져 몸이 약해지지만 않았더라도 진작에 에어리얼을 죽였을 것이다. 그는 비통함에 신음했다. 그사이, 또 다른 마물이 칼리번을 붙잡았다.

<하악, 하아…. 어떻게 된 게 변하질 않아? 아직 고생을 덜 했나 봐.>

한편, 에어리얼은 간신히 풀려난 제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제기랄! 에어리얼, 으으……. 에어리얼…!>

에어리얼을 놓친 칼리번의 손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접혔다 펼쳐지기를 반복했다. 칼을 간 듯 날카로운 두 눈은 여전히 에어리얼을 도륙 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에어리얼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 모습이 흡족해서,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난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에어리얼은 입가에 흐른 피를 닦으며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검날로 팔뚝에 길쭉한 상흔을 남겼다.

<저 지옥에서 마물들과 사랑을 나누다 보면, 다음에 봤을 때는 좀 더 오메가다워지겠지.>

그와 동시에 칼리번의 등 뒤, 지하 감옥의 벽에서 에어리얼의 팔에 난 상처와 같은 형태의 좁고 긴 구멍이 생겼다.

<?!>

벽에 난 구멍에서 굵은 촉수가 튀어나와 칼리번의 한쪽 다리를 붙잡았다. 사방을 막은 벽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지하 감옥이었다. 칼리번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흡사 문어처럼 빨판이 달린 촉수를 따라가 보면, 벽 한구석에 좁은 틈이 상처 난 자국처럼 빼꼼히 벌어져 있다. 그 너머로는 공간 자체가 달랐다. 대지라고는 마물들의 시체뿐이며 피로 이루어진 바다가 전부인 마계가 넘실거렸다.

<으…. 크윽! 에어리얼…!>

이대로 잡혀가면 다시 마계로 떨어질 것이다. 칼리번은 질질 끌려가면서도 에어리얼을 노려보았다. 검은 눈에 안광이 서려 번뜩였다.

<에어리얼, 젠장…! 너는, 반드시 너는, 내 손으로 죽인다!>

칼리번은 목이 쉬어라 외쳤다. 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외침은 지하 감옥을 쩌렁쩌렁 울렸다.

<으윽!>

두 발이 허공에 뜨자 칼리번의 몸이 고꾸라지며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손톱이 부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뭉툭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을 박박 긁으며 버텼다. 그사이 앞서 내뱉었던 외침은 감옥 안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쳤다.

그러나 반항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입구에서 또 다른 촉수가 튀어나와 그의 몸통을 휘감은 것이다. 열 개의 손가락이 붉고 섬뜩한 선을 바닥에 그었다.

<하아…. 후, 흐흐…. 흐흐흐, 아하하! 마음에 들어! 좋아, 그 정도는 돼야지! 그래야 길들이는 맛이 있거든!!>

그 꼴이 우습기 그지없어서, 에어리얼은 눈물을 흘리며 광소했다.

<끄윽, 으아아아악! 에어리얼!>

증오스럽다. 당장 찢어발겨도 모자랄 만큼!

칼리번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부짖었다.

<한동안 얼굴 구경도 못 할 테니 떠나기 전에 한 가지 가르쳐 줄게!>

<제길…. 닥쳐!>

<지금이야 안간힘으로 버티지만, 그 같잖은 자존심도 수많은 알파의 좆질에 파괴되고 말 거야! 전부 부서지고 나서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겠지.>

<으, 으, 으아아아아…!>

에어리얼은 활짝 웃으며 예언했다. 가는 팔뚝에서는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국 넌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칼리번!>

그것이 마계로, 지옥으로 끌려가기 전 칼리번이 마지막으로 들은 인간의 언어였다.

* * *

곧 우기가 오려나 보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울상이었다. 시시때때로 먹구름이 꼈고, 낮도 밤처럼 종일 어둑했다. 돌로 쌓아 올린 성안에도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도 평소보다 크게 울려 퍼지곤 했다. 마치 지난 전쟁에 죽은 유령이 떠나지 않고 여전히 머무는 것 같았다.

왕국은 한 해의 허리에 해당하는 긴 기간이 우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풍부한 비는 수풀을 적시고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어 주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도리어 독이었다. 습한 공기에 부상은 고름이 차거나 덧나기 일쑤였다. 병사들의 회복을 지체시키는 원흉이다. 또한 수색대의 발을 묶어 놓으니, 붉은 오메가 탐색이 지지부진해질 것이다.

현재 수색대 중 진척도가 가장 높은 진영은 젠이 지휘관인 제3 수색대였다. 아스터는 일부러 그녀에게 붉은 오메가를 마지막으로 발견한 지역을 배당했다.

왕성을 탈환한 날, 왕성 서문 근처이자 검은 숲 초입에서 마물 몇 마리와 함께 약 서른 명의 인간이 살해되었다. 마물은 인간의 무기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단순히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그 잔인한 방식은 붉은 오메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는 붉은 오메가를 추적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 악마만은 풀어 둬서는 안 돼.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할 테니….’

에레즈는 왕좌에 한쪽 팔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전에는 알테르가 앉았던 바로 그 권좌였다. 고뇌에 침식당한 사내의 얼굴은 처연하고 초췌했다.

“왕자님. 저번 방어전 이후로 기력이 쇠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 성녀단에서 도울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때, 에레즈와 함께 성내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원로 성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레즈는 그 즉시 정신을 바로 잡았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제삼자가 보아도 병색이 느껴질 정도로, 에레즈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아니, 괜찮다. 잠시 수색대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했다. 마계에서 새로운 마물들이 소환된 직후이니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야 하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지.”

“그러시군요.”

적을 토벌하느냐, 왕성의 안정을 도모하느냐. 왕이라면 가질 법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에 남아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원로 성녀는 에레즈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에레즈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그는 왕성 정화 작업도, 백성들의 관리도, 인간과 용병 사이의 조율도, 어떠한 일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벌써 며칠째 에레즈는 칼리번의 꿈을 꾸고 있었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칼리번은 밤마다 수많은 마물들에게 범해졌고 에레즈는 그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처음에는 죄책감이 빚어낸 착각인 줄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경험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하고 생생했다. 에레즈는 마침내 그것이 칼리번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레즈는 적어도 업무를 처리하는 중에는 악몽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울부짖는 칼리번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정신이 악몽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일쑤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젠도 없는 현 상황에서 넋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는 과거의 쓸모없는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에레즈는 이를 악물고 업무를 처리했다. 대신 매일 밤 칼리번의 곁을 지키기로 맹세하면서. 그 악몽 속에 칼리번이 혼자 남겨 둘 수는 없으니…. 차라리 8년 전 그 지옥에 함께 떨어졌더라면, 차라리 서로 끌어안고 함께 죽었더라면….

그렇다면 홀로 고통받는 칼리번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칼리번의 비명과 울부짖음은 에레즈의 뼛속까지 새겨졌다.

어떻게 해야 악몽으로부터 당신을 구할 수 있을까?

“…원로 성녀여.”

“네, 왕자님.”

에레즈는 온몸에 들러붙은 검은 우울을 떨쳐 내고, 원로 성녀를 불렀다.

“탑에 유폐된 어머니를 뵙고자 한다. 자리를 마련해 주게.”

“…알겠습니다.”

원로 성녀는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깃펜을 내려놓았다.

* * *

지금에 와서는 농담 같지만, 한때는 알테르 프리드웬을 두고 ‘황금 피’라고 우러르며 추앙하기도 했었다. 그가 마물의 사악한 본성을 숨기고, 인간들을 위해 마물을 토벌하러 다니던 시기의 일이다. 지금은 아득할 정도로 멀게만 느껴지는 시절이다.

피의 날 이후 인간은 빠르게 쇠퇴했다. 그것은 마물 때문도 있었지만, 더는 믿고 의지할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줄 눈부신 자.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뛰어넘는 힘으로, 인간이 이기지 못하는 마물을 해치워 줄 영웅.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런 인간들의 염원 끝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르길 원했다.

하지만 구원을 바라는 것은 에레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에레즈는 왕성 탈환 후, 선대의 지혜와 경험에서 그 답을 찾고자 했다. 왕성 도서관과 보물을 보관하는 별관을 조사했으나 문명의 증거는 알테르에 의해 전부 파괴되고 불태워져 있었다. 마치 일부러 없애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정은 왕성뿐만 아니라 각 영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류의 눈부신 역사가 담긴 건축물과 서적도 모두 불태워졌고 마물의 분뇨에 더럽혀졌다. 명망 높은 학자와 신학자들, 예술가와 기술자들은 산 채로 땅에 묻혔다.

피의 날 당시, 알테르는 결혼식을 미끼 삼아 왕족과 귀족, 고위 관료를 모두 불러들였다. 그날 수도에 있던 귀족들과 성녀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그 후로도 그는 주변 영지를 압박하고 정복했으며, 구심점을 잃고 흩어져 구호 활동을 벌이는 명망 높은 성녀들을 차례차례 말살했다. 그로 인해 기술과 문명은 대거 퇴보하게 되었다. 그 악랄한 행위에서 인류를 향한 증오마저 느껴졌다.

에레즈에게 남은 보물은 성검뿐이었다. 왕국을 건국한 시조, 에인레드 프리드웬의 검은 오래전부터 깊은 호수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 덕에 더럽혀진 프리드웬의 손길을 피했으니 어찌 보면 전화위복이었다.

에레즈가 인간들 앞에 나서서, 자신이 ‘황금 피’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검 덕분이었다. 그러니 구원을 찾는다면 선대로부터 물려 내려온, 이 검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레즈는 성검이 자신에게 남겼던 예언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이 검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도착했으나 아직 오지 않은 자,

그대보다 성스럽지 못하나 그대보다 더 성스러운 자를 위한 것….

그대는 성스러움과 폭력이 뒤섞인 혼란한 존재….

그대 안에는 언제나 그 둘이 함께하니.

성스러움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지키고,

폭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벌할 것이다.

그대는 잇는 자. 전달하는 자이니….

성검의 주인에게 둘 중 어느 쪽을 물려줄지는,

전적으로 그대의 의지에 따를 것이다.

그대가 물려받은 것처럼.

여기까지가 에레즈가 들은 전부였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예언을 곱씹으며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폭력이라 함은 마물의 피일 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움이라 함은 프리드웬 왕실에 흐른다는 황금 피를 뜻하는 것이겠지. 예언이란 늘 그렇듯,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그것은 에레즈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영광을 성검으로 인해 얻은 것처럼, 최초의 의문 또한 성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째서 마물의 피가 섞인 알파가 성검을 다룰 수 있는 것인가?’

비록 화상을 입기는 하지만, 에레즈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성검을 쥘 수 있었다. 심지어 형제 중에서 가장 강한 알테르 프리드웬마저 머리카락이 성검이 닿자 금세 부스러져 내렸다. 그러나 예언은 자신이 성검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고 했다…. 성검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러나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어 없었다.

에레즈는 오랫동안 탑에 갇혀 마땅한 후계자 수업도 받지 못했다. ‘프리드웬’이라는 성씨는 마치 남처럼 거리감이 들었다. 칼리번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후에는 계속 성 밖에서 숨어 살며, 젠의 아래에서 힘을 기르는 데 급급했다.

그렇기에 왕성을 되찾으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알테르는 에레즈가 답을 찾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막아 버린 것이다. 왕성을 탈환했으나 손안에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다. 그런 에레즈에게 남은 희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에레즈는 원로 성녀와 함께 어머니를 구금한 탑에 당도했다. 공식적으로는 8년 만의 재회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모자간의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8년 전, 알테르 프리드웬은 그 여인을 왕비이자 성녀이기 때문에 가뒀다. 그리고 8년 후,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녀가 배신자이자 마녀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금을 해제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잊힌 여자를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너희는 이만 탑을 떠나도록 해라.”

에레즈는 원로 성녀와 휘하 성녀들에게 명령했다.

“하오나….”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 진상이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저분은 한 나라의 왕비셨다. 모든 일이 명명백백해질 때까지는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왕비님께서는 지난 세월 동안 이곳에 갇혀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알테르 프리드웬…. 혹은 붉은 오메가가 그분에게 사악한 술수를 심어 뒀을지도 모릅니다. 왕자님께서 혼자 계시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은 염려 마라.”

에레즈는 확실한 답을 보여 주었다. 성검의 손잡이를 쥔 것이다. 장갑에 가려져 성녀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칼리번의 신비한 치유력에 의해 회복된 손은 다시 은밀하게 타들어 갔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에레즈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성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탑 꼭대기, 황폐하고 쓸쓸한 방에는 단둘만 남게 되었다.

“어머니.”

에레즈는 그녀를 불렀다. 왕비의 이름은 베이가 이주드 프리드웬. 알테르와 에레즈를 비롯한 왕자들의 어머니였다.

“…….제가 ‘어머니’라고 부르길 원치 않으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들은 아직 저희를 모자 사이로 믿고 있습니다. 왕비님의 명예를 위해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 부르는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에레즈는 그녀가 허수아비 왕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파란 남자의 배를 찢고 태어나는 존재. 그녀는 그저 백성들에게 프리드웬 가문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거짓된 결혼 생활을 감수하고 왕비라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겠지.

왕비의 존재는 오랜 세월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때때로 ‘왕실에 왕비가 있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다였다. 에레즈는 그녀가 탑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듣기 전까지, 자신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

“…….”

에레즈는 자신을 보지 않는 왕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왕비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회색빛 드레스 한 벌에 검은 망토 하나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검고 긴 머리카락은 장식 하나 없는 끈으로 뒤로 묶은 뒤, 틀어 올렸다. 장신구라고는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오랜 구금 생활의 흔적이었다.

왕성 탈환 후, 왕비는 연합군에게 발견되기까지 일주일 정도를 탑에서 굶주리며 버텼다고 했다. 그 정도로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에 대화가 가능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왕비는 삶에 대한 의지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탑에 오기 전, 왕비를 돌보던 성녀들로부터 미리 그녀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성녀들은 그녀가 모진 투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정신을 놓은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왕비는 햇빛이 드는 작은 창문 곁에 앉아 쉼 없이 뜨개질을 할 뿐이다.

그런 괴상한 행적에 걸맞게 그녀의 주변에는 면과 실이 아닌, 풀떼기로 만들어진 괴상한 면직물이 쌓여 있었다.

“…….”

가시가 돋은 풀과 하얀 면직물일 뿐인데도, 에레즈는 본능적인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저것이 무엇이지? 어째서 어머니가 쐐기풀로 뜨개질을 하고 계신 것이냐.>

<왕국 전역에 피는 하얀 쐐기풀입니다. 흔한 풀이지요. 저것에 성력을 엮어 만들면 매끄러운 천이 됩니다. 성녀의 기본적인 의복과 두건으로 사용되나, 반대로 미약하나마 마물을 옭아매는 사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구조인가. 어째서 어머니께서는 이런 걸 만드는 것이지?>

<성녀라면 처음 성녀원에 입원할 때부터 자신의 옷을 스스로 지어 입곤 하지요. 또한 거친 쐐기풀을 다루다 보면 성력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기도 쉬워서 어린 성녀들이 수행을 위해 주로 쥐곤 합니다.>

<…….>

<아무래도 왕비님께서는… 알테르 프리드웬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과거에 갇혀 계신 것 같습니다.>

새하얀 천은 완성되지 못했고 만들다 만 하얀 쐐기풀 천만이 가득 쌓여 있었다. 가시가 돋은 쐐기풀을 종일 만진 그녀의 손은 단아한 얼굴과 달리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성녀로서의 힘을 잃었다는 증거였고, 리론 후작을 비롯한 몇몇 기사들이 그녀를 배신자이자 마녀로 모는 이유기도 했다.

<예전에… 왕비님께서는 성녀로서 남부 지역의 마물 퇴치와 구명 활동을 담당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단순한 뜨개질일 뿐이니 해를 끼치는 행위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그만두길 원한다면 당장 멈추게 하겠습니다.>

성녀들은 대부분의 사안에 중립을 표하는 편이었지만, 왕비의 일에 한해서는 한없이 방어적이었다. 지금 에레즈의 곁에 선 원로 성녀조차도 살아남은 자들 중에 추대된 이였으니 왕비를 우러를 만도 했다.

“…….”

그리고 에레즈는… 과거 자신처럼 탑에 갇힌 처지가 되어 버린 그녀를 보기가 괴로웠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거기다 그녀가 만지고 있는 하얀 쐐기풀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켰다.

‘칼….’

하지만 도망쳐서는 안 된다.

“왕비님. 알테르 프리드웬은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붉은 오메가가 남아 왕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에레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배신자인지, 고초를 당한 아군인지 알고 싶었다.

“…….”

그러나 왕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 전, 당신께서는 성녀로서 왕국 곳곳을 누비며 봉사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성녀들보다도 뛰어난 성력으로 흡사 기적과도 같은 일화를 만들어 내셨다고….”

“…….”

“저는 인간을 마물의 노예로 삼으려 했던 알테르 프리드웬과는 다릅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에레즈는 홀로 말을 이어 갔다.

“탑에 갇혀 계셨던 왕비님께서는 지난 8년간의 일을 모르실 겁니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인간을 가축처럼 가두고 도살했습니다. 유구한 왕국의 전통과 역사는 그로 인해 모두 소실되었고, 가치와 신념을 수호하고자 했던 많은 이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오랜 세월 성녀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던 성스러운 말씀 또한 사라졌고, 오랜 경험과 뛰어난 성력을 지녔던 성녀님들도 모두 그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

“그런 자가 왕비님만은 여태껏 살려 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봅니다.”

“…….”

“왕비님. 붉은 오메가를 없애고 왕국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도록,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저희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넘겨주십시오.”

“…….”

그러나 왕비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녀로서는 형제가 모두 똑같은 마물 혼혈이었으므로, 에레즈의 주장을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잡혀 계셨으니, 형제인 저를 믿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제 진심을 피력할 증거로, 이 성검을 보이겠습니다. 완벽한 주인…은 되지 못했지만, 이 검으로 백성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에레즈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성검을 내밀었다.

“하지만 부족한 저와 온전하지 못한 성검의 힘만으로는 왕국에서 마물을 원천적으로 쫓아내지 못합니다.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을 얻지 않으면….”

“…….”

“현재까지 살아남은 성녀 중에 왕비님만큼 프리드웬 왕실과 인연이 깊은 분은 없습니다.”

“…….”

“왕비님… 부디 도움을.”

에레즈는 성검의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

잔인하게도 왕비는 에레즈를 흘끗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오직 손안에 잡힌 하얀 쐐기풀뿐이었다. 그녀의 마른 손은 생채기투성이였다.

“왕비님.”

그녀는 정말로 정신을 놓은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성녀의 힘을 잃었음에도 하얀 쐐기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여전히 성녀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는 뜻일 텐데….

에레즈는 알테르처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왕비를 협박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레즈의 행보는 분명 인간을 위한 봉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가?

“왕비님을 아직도 이곳에 머무르게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에레즈는 뒤늦게 사과했다.

“하지만 전쟁 당시, 트리스트람 가문은 알테르 프리드웬의 편을 들었다가 이후 그에 의해 멸문당했습니다. 아직 왕비님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안락한 곳에서 모시지 못해 유감스러우나, 왕비님을 보호하기 위한 방도이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기에 쉽사리 풀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녀가 나서서 자신을 변호하고 무고를 주장했다면 당장 풀려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하면 죽는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 뿐이었다.

“…….”

지금만 해도 그렇다. 그 어떤 회유도, 증거도 그녀의 시선조차 사지 못한다. 알테르 프리드웬도 똑같았을까? 왕비를 협박하고 무시를 당했을까? 그래서 그녀에게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하고 쓸모없어진 물건처럼 탑에 잡아 가둬 둔 것일지도 모른다.

“…왕비님. 저는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에레즈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왕비님께서 보시기에 저는 인간 흉내를 내며, 모두를 속이고 있는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왕비는 가장 높은 탑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가장 낮은 감옥에 갇혀 고통받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만 갈래로 찢어져 내렸다. 꿈속에서 들었던 그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울린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저는 반드시, 마물을 이 세상에서 전멸시켜야만 합니다.”

그러니 지금 한 말은 그녀가 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암시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녀가 감동해 입을 열 것이라고는 기대치도 않았다.

“…….”

오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마치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것 같았다.

“…왕실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정보라도 좋습니다. 기력이 돌아오신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레즈는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에레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비의 검은 머리카락에 눈이 갔다.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는 어두운 바다. 같은 검은색이건만, 왕비와 칼리번의 머리카락은 느낌이 달랐다. 반면에 칼리번의 머리카락은 별이 묻은 여름밤처럼 따뜻했었다.

‘칼….’

밤을 함께 보내고 낮 동안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에레즈는 그가 미친 듯이 그리워졌다. 지난 8년은 도대체 어떻게 버텼던 것일까? 매일 곁에 있으면서도 더욱 애타는 것은 아마도… 악몽 속에 그를 혼자 두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 * *

“그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려 주기 위해서 지하에서 겪은 일을 보여 주는 거야?”

에레즈는 잠든 칼리번에게 낮에 왕비와 만난 일을 들려준 후, 살며시 물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칼리번의 손과 겹쳐진 왼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아니면 잠들어 있는 지금도, 그 악몽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거야?”

기껏 그 지옥에서 돌아왔는데, 이렇게 누운 채로 악몽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생각만 하면 숨도 쉴 수 없었다. 아무리 에레즈라도 꿈속으로 들어가 구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칼…. 당신이 매일 밤 보여 주는 꿈이 나에 대한 벌이었으면 좋겠어.”

나약한 자신을 향한 질책. 에레즈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악몽을 꾸지 않도록, 차라리 내 머릿속에서만 반복되는 것이었으면….”

자신이 악몽에 시달리는 대신 칼리번은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면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꿈까지는 볼 수 없기에 에레즈는 괴로웠다. 그의 기억 속 칼리번은 늘 강하고 멋있기만 했다.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숲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강인하게 맞서 싸우던 모습, 울거나 투정을 부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못난 자신을 불만 하나 없이 묵묵히 지켜 주던 모습….

그로 인해 에레즈의 기억 속의 칼리번은 날로 강건해져만 갔다. 그는 에레즈만의 거인이었으며 우상이었다. 언제나 강하던 그 사람이… 꿈속에서 칼리번은 울부짖고 절망한다. 도망치고 두려워한다. 구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소리친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위대한 전쟁의 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그저 더없이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자신 같은 쓸모없고 나약한 존재를 위해 희생했을 정도로….

“더는 울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에레즈는 고개를 젓고는 눈을 뜨지 못하는 칼리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얀 손이 칼리번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혈관의 울림, 온기. 그는 잠든 순간마저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며, 다친 몸을 치유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다시는 울지 않을 것이다. 나약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에레즈는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뺨을 부볐다. 언젠가 맡은 적 있는 향기는 분명 칼리번의 것이었다.

* * *

귀를 거슬리게 하는 쇳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긁는다. 쇠고랑을 벽에서 뜯어내려고 상체를 버둥거릴 때마다, 족쇄에 이어진 쇠사슬이 뱀처럼 바닥을 기며 내는 소리였다.

칼리번은 벽은 등을 맞댄 채였고, 두 팔은 양편으로 펼친 채 고정되어 있었다. 손목과 팔뚝을 짓누르는 쇳덩이는 특이한 조치가 취해졌는지 마물의 피가 섞인 그조차도 쉽게 뽑아낼 수 없었다. 쇠고랑에 고정된 것은 두 팔만이 아니었다. 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이 올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뒤통수를 벽에 기대야만 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신체 부위는 두 발이었는데, 족쇄에 긴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다리를 휘적이는 정도의 행위는 가능했다. 그러나 뒤꿈치를 세우고 발끝을 최대한 내려도 발가락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아무리 탄탄하게 근육으로 이루어진 사내라 해도 목과 팔근육만으로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이것은 지극히 의도된 자세와 위치였다. 이는 원래 전쟁 포로를 고문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된 구속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하가 에어리얼의 차지가 된 지금은, 알파와 오메가를 번식시키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칼리번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헐떡였다. 이런 취급은 이제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끙끙거리는 이유는 고통이 아닌, 발정으로 인해 몸이 달아오른 탓이었다.

발정기에 들어선 지 벌써 이틀은 지났다. 전신에는 은은하게 땀이 배어들었고, 딱딱하게 뭉쳐진 가슴에서는 젖이 고였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는 넘쳐흐르는 애액이 새어 나와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뚝, 뚝, 위에서 아래로 애액이 흘러내릴 때마다 발끝에 맺힌 물방울은 크기를 키워 가다 느릿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메가의 체액은 향기를 동반했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물의 피가 섞인 존재에게는 더없이 유혹적이고 달콤했다.

칼리번이 원치 않아도 오메가는 제 몸을 미끼 삼아 마물을 부른다. 알파는 저편,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수만 마리의 알파가 짓누르고 뭉갰던 마계와는 달리, 이번에는 한 마리뿐이었다.

그것은 에어리얼이 고르고 고른 알파였다. 이 지하 감옥은 천장이 높은 편이었으나 마물에게는 작은지 몸을 반쯤 접고, 두 발로 걷는 종임에도 네발로 기어서 다가왔다.

<…아….>

칼리번은 땅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반쯤 뜨인 검은 눈이 흐릿했다. 발정열에 취해 눈가와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상대는 온몸이 털로 뒤덮이고, 칼리번이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짐승의 형상이 뒤섞인 괴물이었다. 등 뒤로 솟은 거대한 날개는 지하에서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접혀 있었다. 그것이 괴물의 덩치를 더욱 거대하게 보이게 했다.

오메가의 향기에 이끌린 알파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대놓고 잡아먹으라는 듯 고깃덩어리처럼 걸려 있는 육체가 정말로 오메가일까?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칼리번의 가슴을 쿡 눌렀다. 입을 벌리는 것만으로, 칼리번의 가슴을 통째로 뜯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알파는 코를 벌름거리며 흥건한 체취를 힘껏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축축한 코로 칼리번의 가슴 이곳저곳을 눌러 본다.

<윽….>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원치 않았다. 마물과 교미하고 싶지도, 마물의 새끼를 잉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그마한 거절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알파는 혀를 내밀어 젖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가슴을 핥았다. 움찔, 칼리번의 몸이 뒤틀린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같은 반응이 알파를 더욱 흥분시켰다. 마물은 혀로 양 가슴을 오가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유백색의 샘물을 빨아 먹었다.

<그, 그만…. 싫…. 읏….>

마물이 자신의 젖을 탐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알파에게 젖을 빨리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계에서 수많은 알파가 칼리번의 몸을 취했다. 그러나 칼리번과 교미를 나눌 승리자는 빠르게, 자주 바뀌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에어리얼이 손수 고른 이 마물은 경쟁자 하나 없이 느긋하게 칼리번의 젖을 맛보고 있었다.

역겹다. 발정열에 늘어져 있던 칼리번의 몸이 두려움과 혐오로 딱딱하게 긴장했다. 자연스럽게 두 팔에도 힘이 들어가, 근육이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버둥거려도 팔과 팔목을 누르는 쇠고랑 모양의 멍만 생길 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메가는 향기만큼이나 젖도 달았다. 칼리번의 가슴은 마물의 유일한 설탕이자 러트에 들어서지 않은 알파조차 발정시키는 최음제였다.

<컥, 윽…!>

마물은 칼리번의 가슴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으며 젖을 더욱 짜냈다. 칼리번이 발정이 난 후 처음 마주한 알파였다. 쌓이다 못해 저절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젖은 마물이 엉성하게 빨 때마다 주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원 없이 내주었다. 뜨뜻미지근한 액체는 칼리번의 가슴과 배, 그리고 사타구니의 수풀을 축축하게 적셨다.

다리 사이에서 늘어져 있던 알파의 성기가 서서히 융기하기 시작했다. 꺼떡거리는 거대한 성기는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칼리번의 다리와 배에 부딪혔다.

<큭……!>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마물의 성기는 인간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큰 칼리번의 것보다도 훨씬 우람했다. 심지어 구불구불하기까지 했다. 이런 흉측한 것이 몸 안에 들어온다면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뻔했다. 칼리번의 배 속에 자리 잡은 좁고 비밀스러운 입구는 단번에 꿰뚫리고 말 것이다.

<흐, 흐아…….>

벽에 늘어져 있던 칼리번의 두 다리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마물은 칼리번의 젖을 빠는 데 정신이 팔려 사소한 반항은 제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칼리번의 다리가 최대한으로 접히고, 발바닥이 벽에 닿았다.

<흡—!>

칼리번은 발바닥으로 벽을 밀어내며 추진력을 짜냈다. 허공에 뜬 다리가 마물의 목을 겨냥했다. 충격은 목뼈와 얼굴 뼈로 전해졌고 마물은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물론 마물의 이빨이 박힌 칼리번의 가슴도 물어뜯기고 말았지만, 가슴이 너덜거릴 것이 두려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칼리번은 붙잡힌 두 팔로 몸의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하며, 양다리를 휘둘렀다. 비틀거리는 마물의 머리를 발로 가격하자, 차르륵, 사슬이 반 박자 늦게 뒤따라오며 쇳소리를 냈다.

칼리번은 족쇄에 이어진 긴 사슬을 이용해 마물의 목을 조르려 했다. 그러나 거대한 대검이 그의 주무기였기에 다리 기술은 비교적 섬세하지 못한 편이었다.

‘제길, 하필이면…!’

마물의 목을 사슬로 휘감으려던 순간, 사슬의 길이가 모자랐다. 칼리번은 즉시 전략을 변경했다. 그는 있는 대로 마물을 걷어찼다. 그러나 마물의 몸은 단단했고, 다리로 공격을 가할 때마다 아무런 방어구도 걸치지 않은 칼리번의 다리는 조금씩 부서져 갔다.

양팔을 쓸 수만 있다면! 헛된 바람이다. 다리를 아예 못 쓰게 되기 전에 최대한 머리를 공격해야만 했다. 머리통을 깨뜨려 죽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기절은 시켜야만 했다.

<크윽……. 젠장!>

그러나 행운은 칼리번과 끝까지 함께하지 않았다. 마물은 비틀거리며 칼리번의 공격 범위 밖으로 물러났다. 칼리번은 온갖 욕을 입에 담으며 이를 갈았다. 성공하지 못한 공격은 도리어 마물의 화를 돋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물은 신음한다. 수많은 이들의 피로 물들었을 지하 바닥에 알파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피는 모든 종류의 흥분을 돋운다. 그것은 몸을 부풀리며 씩씩거렸다.

칼리번은 이어질 알파의 반격에 대비했다. 아니, 사실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물어뜯긴 가슴에서는 젖과 피가 섞여 흐르고 있었고 한쪽 다리는 발목이 부서져 이미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다른 한쪽이 남아 있다…!’

칼리번의 몸을 어둠으로 뒤덮는 알파를 노려보며 칼리번의 의지를 가다듬었다. 그것이 하등 쓸모없는, 자기 위로에 불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무장을 완전히 해제한 상태로 다가왔던 알파는, 이번에는 같은 알파를 대하듯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한번 공격을 당해 보았기에, 저 괘씸한 오메가의 유일한 공격 수단이 무엇인지 파악한 상태였다.

<—!>

마물은 두 팔을 뻗어 너무나 쉽게 칼리번의 다리를 움켜쥐었다. 칼리번이 다리를 휘두르며 벗어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차르륵, 차르르륵…. 쇠사슬이 꼬리를 흔드는 뱀처럼 불안한 경고음을 냈다. 그 소리는 곧 으드득, 단단한 심이 부러지는 소리로 바뀌었다.

<윽, 으… 아아악!>

단전에서부터 비명이 솟아올랐다. 찢어지는 소음이 축축한 지하 감옥 안을 울렸다. 회복이 빠른 몸이라고는 하지만 고통이 쉽지는 않았다.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흘러내렸다. 물이 고인 것은 두 눈도 마찬가지였다.

칼리번의 두 다리를 부러뜨린 마물은 위로 훌쩍 들어 올렸다. 성기와 비부가 훤히 드러났다. 축 늘어진 성기와 달리 꽉 다물린 입구는 맑은 액을 흘리고 있었다. 마물은 그 입구를 제 몸에 맞춘 후, 구불구불한 성기를 들이밀었다.

<아…? 읏… 큿, 아, 안— 아악, 아아악!>

흉흉한 알파의 성기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오메가의 몸을 꿰뚫었다. 할 수 없다. 분명 입구가 찢어져서 피를 흘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발정이 든 오메가의 몸은 칼리번의 기대를 무참히 깨뜨리며 알파의 성기를 버겁게나마 삼켰다.

<후윽, 윽…. 아, 그만, 아, 아파…. 아악…!>

침입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 완벽하게 다물린 공간을 알파의 성기가 억지로 벌리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몸 안이 난생처음 보는, 인간의 형태도 아닌 마물에게 채워지는 것이 싫었다. 저것과 교미를 하는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양팔이 쇠고랑 아래에서 요동을 쳤다. 그러나 속박당한 상태기에 겉으로 보기에 오메가는 유순하게 알파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물은 기분이 좋은지 씩씩거리며 칼리번의 다리를 더욱 크게 벌렸다.

입구, 음모, 아랫배, 배꼽 아래, 배꼽 위…. 울룩불룩 휜 알파의 성기가 칼리번의 몸을 정복하며 안으로, 더욱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성기가 내벽을 벌리며 안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켜 밀어내려 하지만, 내벽으로 성기를 조이는 결과밖에 낳지 못했다.

발정이 났다고는 하나 아무런 준비 없이 부풀어 오른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인 탓에, 입구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체 대부분이 부서지거나 망가진 상태였기에 어디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칼리번은 하체가 허공에 뜬 상태로 마물의 성기를 품어야만 했다.

<힉, 윽, 으윽…. 읏….>

알파의 성기를 전부 삼킬 즈음, 칼리번은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검은 두 눈이 흐릿해진 채로 숨을 가쁘게 삼켰다. 명치 아래까지 알파의 성기로 채워진 것만 같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입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났다. 차라리 기절하거나 정신을 놓았다면 편했을까? 그러나 건강한 육체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삽입을 마친 마물은 칼리번의 얼굴과 머리 위로 뜨거운 숨을 훅훅 쏟아 냈다. 거대한 이빨 사이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에어리얼이 늘 하던 말버릇대로라면, 이 마물은 바로 지금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젖을 흘리며 헐떡거리는 가슴과 알파의 성기 모양대로 솟은 배는 분명 사랑스러울 테니까.

알파에게 오메가란 그런 존재였다. 끊임없이 단물이 솟아나는 샘물이었다. 제아무리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알파는 무슨 짓을 해서든 오메가를 발정시켜 물이 나오게 할 것이다.

칼리번의 부러진 발목을 쥐던 마물은 무릎 아래로 손을 옮겼다. 그러고는 양다리를 손잡이로 잡았다. 미묘한 변화에 마물 아래에서 신음하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으, 으……. 아, 흐악!>

퍽! 알파가 몸을 뒤로 물렀다 박아 넣자 칼리번의 몸 전체가 흔들렸다. 동시에 입에서는 절제되지 않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직은 쾌락보다 고통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알파는 제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삽질을 할 때마다 큼직한 칼리번의 성기가 배 위에서 덜렁거렸다. 차르륵, 사슬 또한 함께 흔들렸다. 어째서 에어리얼이 다리에만 부분적인 자유를 주었는지, 칼리번은 그제야 알았다.

* * *

칼리번은 며칠을 지하 감옥에서, 같은 자세로 매달려 있었기에 두 팔과 목은 상당한 부담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허공에 뜬 두 다리 대신 지지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알파의 좆이었다. 거대한 마물은 칼리번의 하체를 들어, 반으로 접다시피 들어 올린 상태였다. 사내의 팔뚝만 한 성기가 칼리번을 꿰뚫어 받쳐 주고 있었다.

두 다리는 마물의 어깨에 걸쳐졌으나 칼리번은 그리 편치 않았다. 그 상태로 며칠째 밤낮없이 알파의 성기를 쉬지 않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강제로 연결된 몸은 어느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흣…. 흐읏…!>

칼리번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결합이 더해지면 더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뻣뻣하고 거친 털로 뒤덮인 마물에 비하면 옷 한 벌 걸치지 못한 칼리번의 몸은 매끈하게 느껴졌다. 맨피부에 닿는 뾰족한 털의 감각이 기분 나빴다. 온몸에 흐르는 땀 때문에 자꾸만 들러붙기 때문이었다.

<아윽, 큭…>

배 속이 관통당하는 고통에 반항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사슬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두 팔은 벽에 들러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고, 상체를 숙여 가슴을 가릴 수도 없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칼리번에게 남은 선택은 제 몸을 훤히 드러내고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도저히 인간의 몸에 들어갈 수 없는 크기의 성기가 칼리번의 몸속을 오갔다. 몸이 접힌 채 삽입을 당하니 자꾸만 구역질이 나왔다. 어떨 때는 이러다 성기가 배꼽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가? 며칠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어쩌면 고작 몇 시간일지도 모른다. 에어리얼의 손에 떨어진 이후 시간 감각이 둔해졌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는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날짜와 시간에 따라 마물의 성기를 삼키지 않아도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고통뿐이었다. 아니, 고통뿐이기를 바랐다. 몸속을 꿰뚫는 성기로 인해 언젠가부터는 쾌감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칼리번의 아랫배와 배꼽에 들러붙은 마른 정액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이었다. 알파의 성기에 몸속이 골고루 자극을 받아도, 일정 이상의 쾌락이 지속되면 피로감만 쌓일 뿐이었다.

<하, 하아—아, 아……. 윽….>

칼리번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저를 벽에 몰아붙이고 씩씩거리는 마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발정이 든 자신이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계에 던져지지 않고 한 마리의 마물과 지속해서 관계를 맺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저것과 자신이 교미를 해서, 새로운 마물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제로 접을 당하는 가축이나 다를 바 없었다.

<흐, 으윽….>

괴롭다. 수많은 마물들에게 범해지는 것은 물리적인 고통이었다. 그와 달리 한 마리의 마물에게 끊임없이 노팅을 당하는 것은, 정신을 파괴하는 무언가였다. 그 결과,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다. 칼리번은 아둔할지라도 그의 몸의 반은 인간의 피가 흘렀다. 원치 않는 알파와 번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 흑…. 내 안에, 하지…마, 앗, 아앗…!>

칼리번은 간헐적으로,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러나 이성이 없는 마물에게 애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시, 싫어, 아읏, 안에, 아, 아읏, 노팅, 하면, 안, 아…!>

칼리번의 목소리가 마물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마물은 칼리번의 안에 성기를 묻은 채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칼리번의 내부에 자리 잡은 비밀스러운 입구는 울룩불룩한 알파의 성기에 가차 없이 꿰뚫려, 그 안에 정액이 고이게 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알파는 만족하지 못하고 몇 번째일지 모르는 노팅을 향해 거칠게 달렸다.

몸속의 주름이 펼쳐지다 못해 찢어질 정도로 끊임없이 마찰 당하자, 기나긴 성교에 지쳐 있던 성감이 다시 몰려왔다. 칼리번은 진저리를 치며 버둥거렸다. 벽에 고정된 두 팔은 쇠고랑에 몇 번이나 부딪쳐, 피부가 벗겨지고 피를 흘리게 된 지 오래였다.

마물은 벽에 머리를 박고는 한쪽 손으로 칼리번의 허리를 쥐었다. 거대한 팔은 칼리번의 굵은 허리를 가볍게 감쌌다. 마물은 다른 한쪽 팔로 벽에 누른 채, 몸을 더욱 바짝 붙이고는 추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샅과 샅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히, 히익, 으, 으악, 아악…!>

마물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칼리번은 언어를 잃고 신음했다. 끊임없이 칼리번의 몸을 두드리던 마물의 성기는 크기를 한층 더 키웠다. 굴곡진 성기는 짓무를 대로 짓무른 오메가의 또 다른 입구를 들쑤시며 오갔다.

<…흐, 흐아, 아, 안 돼…. 안 돼, 아… 아악! 흐극, 읏……!>

이대로 노팅을 당하면 임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미 수 번이나 노팅을 당했음에도 마치 이번이 처음인 양 두려웠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에 내벽은 도리어 마물의 성기를 강하게 조였다.

<히익, 아, 아아…!>

알파의 성기가 몸속에 못처럼 박혀 드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첫 번째 입구와 두 번째 입구, 각각에 알파의 혹에 고정되어 성기가 더는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되었다. 아랫배를 타격하는 듯한 격통에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시, 싫— 윽! 아, 아아— 아악! 그, 그만, 그만해!>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 혹이 부풀어 오르더니, 칼리번의 몸 안에 정액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알파의 성기를 빼내기 위해 칼리번의 몸통이 부질없이 흔들렸다. 그러자 알파는 벽을 짚었던 손으로 칼리번의 엉덩이를 받쳐 결합을 고정시켰다.

<아악, 악… 큭, 허억…!>

제 몸을 덮다시피 한 거대한 마물을 떨쳐 내기란 불가능했다. 정신을 놓을 정도로 격렬한 추삽질과 달리, 노팅은 몸이 연결된 채로 아주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이 칼리번을 더욱 비참하고 괴롭게 만들었다. 이 상태 그대로, 자신이 마물에게 정액을 주입 당한다는 사실을 몇 시간 동안이나 곱씹어야만 했으니까….

실제로 온몸의 신경은 몸속으로 쏟아지는 마물의 정액에만 반응했다. 제 아랫배가 불룩해질 정도로 차오르는 정액의 감각. 칼리번은 두 눈을 깜박거렸다. 눈앞이 어둠으로 깜박, 깜박거렸다. 그리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흐, 으윽…!>

뒤늦게 이를 악물어 보지만, 잇새로 새어 나오는 울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배 속이 차올라 수일째 굶주렸는데도 더부룩했다. 에어리얼은 그런 그에게 ‘눈물이 흔해졌다’라며 비웃곤 했다.

마물은 칼리번의 눈물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긴 혀가 닿은 곳은 칼리번의 뺨이 아닌 가슴이었다. 추삽질로 인해 자극을 받은 가슴은 젖이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물은 칼리번의 몸에 자신의 씨를 심으며, 당연한 대가를 받는다는 듯 젖을 빨았다.

마물은 날름거리며 길고 가는 혀로 칼리번이 내주는 젖을 맛보다가, 아예 가슴을 입에 물었다. 거칠게 깨물자 비명과 함께 입안에 젖이 차올랐다.

<윽…. 아악!>

오랜 용병 생활로 단련된 칼리번의 가슴은 단단한 동시에 부드러웠다. 마물은 쉬지 않고 칼리번의 가슴을 물어뜯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짙은 피부 위로 잇자국이 남고, 젖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아, 앗…!>

칼리번의 몸은 고통에 놀라 아래를 조였다. 마물은 그 점을 자연스럽게 학습했다. 그렇게 한 마리의 알파와 한 명의 오메가는 긴 시간, 공을 들여 교미했다. 물론 그 관계에 오메가의 의사는 조금도 개입되지 못했다. 노팅을 당한 오메가는 알파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끙끙거렸다. 허공에 뜬 오메가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파는 오메가의 몸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알파에게는 실로 만족스러운 교미였을 것이다.

<아……. 흐아….>

오메가는 노팅의 충격이 컸는지 낮은 신음을 토해 냈다. 허공에 떠 있던 하체가 축 늘어졌다. 두 팔과 목은 여전히 벽에 고정되어 있었고, 발목이 부러진 두 발은 아래로 쭉 뻗었다.

그 부위는 오랜 시간 부러진 채로 방치되어, 보기 흉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칼리번의 육체가 회복의 기미를 보일 때마다 알파가 다시 다리를 부러뜨린 탓이었다. 무력하게 사지가 늘어진 모습은 마치 죽은 인어를 잡아다 전시해 놓은 것만 같았다.

물어뜯긴 가슴은 아직도 지끈거렸다. 축 늘어진 성기는 조금도 활기가 돌지 못했다. 이번 마물은 끝내 그곳을 자극하는 법까지는 익히지 못한 모양이었다. 벌어진 양 다리 사이로 끊임없이 정액이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타고 발목까지 내려간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웅덩이를 이루었다.

<…….>

칼리번은 고개를 쇠고랑에 기댄 채 발밑에 생긴 하얀 그림자를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교미를 막 마친 탓에 온몸에 힘이 없고 한없이 피곤하기만 했다. 이대로 모든 것을 잊고 잠들고만 싶었다….

그때였다.

<칼리번, 저길 봐.>

부드러운 목소리가 칼리번의 잠을 깨웠다. 에어리얼이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다가온 것이다.

<…….>

칼리번은 축 늘어진 채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에어리얼에게 완전히 복속 당했다. 그 어떤 반항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몸으로 숙지한 지 오래였다.

<재미없게. 정말 이대로 잠들 거야? …네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도?>

지친 몸은 에어리얼의 모욕을 견딜 힘조차 없었다. 그저 잠들고만 싶은데 간지러운 목소리는 키득거리며 자꾸만 권한다. 어차피 눈앞에는 마물밖에 없을 텐데도….

<큰일을 치른 오메가를 위해 기껏 상을 준비했더니만. 섭섭한걸?>

지금은 퍽이나 다정하게 굴고 있으나, 언제 또 마음이 바뀌어 몸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에어리얼이 끊임없이 채근하자, 칼리번은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고 곯아떨어질 듯 가물거리는 눈동자가 간신히 굴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에레즈가 있었다.

<……!>

반쯤 감겨 있던 검은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이 굳고,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런 장소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맑은 소년. 에레즈는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금발과 푸른 보석안. 그 반짝임에 칼리번의 검은 눈에도 빛이 돌았다.

<카, 칼….>

에레즈는 다급하게 칼리번에게 다가왔다. 눈물을 가득 맺고서는 그의 몸에 매달린다.

<왕자님…?>

칼리번은 두려웠고 에어리얼이 아닌 눈앞의 에레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검붉게 변해 버린 두 다리는 움찔거리며, 알파가 쏟아 낸 정액을 흘리는 것 외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건….>

이것은 환각이다.

<구, 구하러 왔어…! 제, 젠과 함께…. 카, 칼…! 호, 혼자, 나, 남겨, 둬서, 미, 미안해….>

이건 꿈이다.

<그럴 리가….>

칼리번은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카, 칼…. 날, 모, 몰라, 보, 보는 거야?>

<……큭.>

칼리번은 헛된 환영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더는 에어리얼의 장난질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분명 거짓일 것이다. 광대가 되기에는, 강제로 교미를 마친 칼리번은 몹시도 지쳐 있었다.

<주, 죽지 않겠, 다고 해, 했잖아…. 나, 날 위해서…! 그, 그래서 나도 사, 살 수 있었어.>

에레즈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칼리번에게 매달렸다.

<너… 너를 구, 구하기 위해서, 나, 나도…. 나도! 저 지, 지옥에서 살아, 남았어….>

<…….>

<다, 다시, 마, 만나고, 시… 싶어서…!>

간신히 미망을 떨쳐 내던 칼리번은 그 한마디에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애초에 그는 체스 말에 불과했고, 타인의 손에 움직여지는 도구가 거대한 의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굳건히 닫았던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 환상이 달콤하면서도 더없이 두려워서.

<나, 나 때문에 이, 이런…. 이렇, 게나….>

에레즈는 칼리번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수치스러웠다. 아니, 기뻤다. 아니다…. 괴로웠다. 그것도 아니다, 그저 고마웠다. 온갖 상반된 감정이 뒤섞여 뇌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에어리얼의 고문도, 수많은 마물들에게 강제로 범해지는 것도 그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는 내리치는 망치질에 더욱 단련되는 대검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검을 녹슬게 하는 것은 눈물이었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자신을 잊지 않고 구하러 와 준다는…. 헛된 바람. 결코 이루어질 일이 없는 허튼 꿈. 심장이 원해서 꾸며 내는 착각. 언젠가 왕자님이 돌아와 자신을 이 구렁텅이에서 구해 주고 겉모습이 얼마나 끔찍하든, 흉측하게 변하든 자신을 알아봐 줄 것이라는….

<…….>

누군가 가슴에 손을 집어넣고 심장이 쥐어짜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자신이 이런 꿈을 꾸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는 미래를 꿈꿔 본 적이 없는 자였다. 그저 짐승처럼 고개를 숙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버텨 낼 뿐이었는데.

…지금도 그랬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에어리얼. 부탁이다…. 이제, 그만둬….>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애원했다. 알파가 거대한 성기로 그의 몸을 찢고 부술 때보다도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카, 칼…. 왜, 왜 우, 우는 거야?>

<…….>

<가, 간신, 히, 다, 다시, 만났, 는데….>

따스한 손길에 칼리번은 자신이 소리조차 내지 않고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쳤다. 설마 이 꿈을 선물로 받으면 기쁘게 마물의 씨를 품을 것이라고 믿는 걸까? 머릿속을 휘저어, 멋대로 끄집어낸 이런 꿈을 보여 줘 봤자 몸 안에 고인 정액이 에레즈의 것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꿈꾸되 한 번도 이루어지리라 상상도 못 했던, 무의식 깊숙이 숨겨 둔 꿈. 그것을 들춰내 이런 식으로 꾸며 봤자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악몽이다….

자그마한 악몽은 겉모습을 따라가는 것인지 칼리번을 성심껏 위로해 주고 싶어 했다. 동시에 자신이 칼리번을 진정으로 구하러 왔음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쉼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의 뺨에 입 맞추기 위해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고 뒤꿈치를 들었다.

<으…아앗!>

그때, 갑자기 에레즈가 비명을 질렀다. 새하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두려워하는 푸른 시선을 따라 칼리번은 고개를 숙였다. 흐읍, 칼리번의 숨이 덜컥 멎었다.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배 속에 품은 마물들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제 막 발정이 끝난 차였다. 알파가 뿌린 씨는 아직 배 속에 자리조차 잡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꿈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몸을 비틀며 힘을 주었다. 자그마한 괴물은 칼리번의 몸을 열고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 아아악!>

에레즈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칼리번의 몸에서 기어 나온 마물은 순식간에 거대해져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물은 제 모체를, 그리고 제 오메가를 빼앗아 가려 드는 연약한 알파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알파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무장한 채, 에레즈의 얼굴을 뒤덮었다.

<안 돼!>

칼리번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에레즈와 마물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칼리번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장에라도 에레즈에게 달려가고픈 칼리번의 몸이 마구 덜컹거렸다. 그러나 양팔의 속박은 그의 팔이 잘리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굳건하기만 했다.

<악, 아파, 아파! 사, 살려 줘…. 흐윽, 무, 무서워, 살려줘 카, 칼!>

어둠 속에서 에레즈의 비명이 들려온다. 연약하고 높은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마물의 울음소리와 뒤섞였다. 비명 사이로 연약한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진다.

알파는 교미를 위해 오메가의 몸을 부술지언정 절대로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같은 알파끼리는 사정이 달랐다. 동족을 없애야 오메가를 차지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본능에 새긴 채 태어나기 때문이다.

<멈춰라… 큭, 그만둬!>

칼리번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알고 있다. 연약한 에레즈에게 그와 같은 고통이 가해진다면….

<와… 왕자님을 풀어줘라, 어서!>

칼리번은 그토록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던 에어리얼에게 간절히 외쳤다.

<그만…. 나 하나만으로 족해! 저분을 놓아달라고, 당장 마물에게 명령해!>

<뭐라는 거야?>

에어리얼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로 고개를 까딱거릴 뿐이다. 칼리번은 자신이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처지임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습득했다.

<제발! 뭐, 뭐든지 할 테니, 어서…. 더 지체되다가는 저분이 죽고 만다…!>

<알파들이 오메가를 두고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야. 자연의 이치지.>

<저분은, 저분은 다르다…! 더는 반항하지 않을 테니 저분을 풀어 줘, 날 굴복시킬 생각이라면 이제 충분해!>

<내가 왜? 너는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해 주는 기사님이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네가 구해야지.>

<…!>

칼리번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다. 자신은 기사가 아니었고, 그는 공주가 아니다. 우리는 둘 다 버림받은 괴물에 불과했다. 그런 주제에,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이끌려 진흙탕에 뛰어들었을 뿐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 대가는… 이미 뼈가 부서지도록 치르고 있었다.

<헉, 허억….>

어느덧 에레즈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피와 살을 헤집는, 살육의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에어리얼을 보았다가 어둠을 보기를 반복했다.

서서히, 지하 바닥에 난 금을 따라 붉은 피가 퍼져 갔다.

<…아, 아.>

칼리번은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죽은 후에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다가오는 핏물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에레즈의 피는 최후에, 칼리번이 흘린 정액의 웅덩이에 고여 들었다. 마치 에레즈를 낳지 못하고 흘려보낸 것만 같다.

<…….>

칼리번은 그것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은 환상이다. 꿈에 불과하다.

칼리번은 잘못 박힌 인식을 되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옅은 분홍빛에서 점점 짙은 진홍빛으로 변해가는 웅덩이는 칼리번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넌 네가 대단한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어리얼은 키득거렸다. 칼리번의 같잖은 정의심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치 즐거웠다. 당장 그를 따라 발정이라도 할 것만 같을 정도로.

<오늘 네가 품은 마물은 인간들을 죽이게 될 거야.>

에어리얼이 선언했다. 그가 칼리번에게 보여 준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예언을, 정해진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검게 죽은 눈이 에어리얼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넌 네 손으로 귀여운 에레즈를 죽이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네가 더 잔인한 거야.>

<아, 아니야…. 나는….>

<이걸 전부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이건 곧 실현될 미래거든.>

<…!>

<칼리번, 전부 네 덕분이야. 네가 없었다면 나는 이 계획을 시도조차 못 했겠지.>

칼리번은 자신이 대단한 희생을 했다고, 그러므로 에레즈는 마땅히 자신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그저… 그저, 동료를…. 몇 번이고 포기하려 했지만 결국 버리지 못했던 존재를, 살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칼리번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윽, 크윽…….>

칼리번은 제 몸에 들어찬 마물의 정액을 빼내려 했다. 그것이 두 손은 결박되었고, 두 다리는 부러진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흐…으…!>

그는 고통을 삼키며 부서진 제 몸을 뒤틀었다. 아랫배를 꽉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하자 빠져나가는 정액의 양이 조금 늘었다.

<아깝게, 전부 흘리고 있잖아?>

그러나 에어리얼은 작은 반항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칼리번에게 다가가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그를 걷어차고 싶었다. 이렇게나 가까우니, 두 다리로 머리를 단번에 부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러진 두 다리는 늘어져 있기만 할 뿐,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기껏 강한 알파와 교미를 했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봐야 하지 않겠, 어?>

<흐, 으윽!>

에어리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리번의 다리 사이로 무엇인가가 쑤셔박혔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지지 않도록 여러 굴곡을 지닌, 알파의 성기 모양과 흡사한 마개였다. 마개는 꿀렁거리며 배 속으로 들어갔다.

<큭, 하, 하지 마…. 으, 아악!>

칼리번은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지만,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허벅지를 붙잡고는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좁은 몸속에 억지로 마개를 삽입하는 일이 쉽지 않았는지, 에어리얼은 중간중간 행동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뺨에 금세 땀이 맺혔다.

<후우, 알파 노릇도 보통 힘든 게 아니네?>

에어리얼은 그 정도 힘을 쓴 것만으로도 지쳤는지 제 팔을 연신 주물렀다. 하지만 마무리를 제대로 지어야만 했다. 그는 버둥거리는 칼리번의 허벅지를 벌리고는 마개를 제대로 삽입했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마개는 끝부분이 못의 머리처럼 평평하고 넓었는데, 몸 안으로 전부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기능 덕분에 다리 사이에서 줄줄 흐르던 정액은 더 이상 빠져나오지 않게 되었다.

마개의 기둥 부분은 칼리번의 입구에서 살짝 모습을 보였다가 다시 안으로 삼켜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칼리번이 배에 힘을 주어 밀어내려고 한 탓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스스로 몸속을 들쑤시는 결과를 낳았다.

<흐으….>

마지막으로 에어리얼은 신음하는 칼리번의 아랫배에 입을 맞췄다. 최악의, 근사한 아이가 태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

이마와 뺨에 부딪히는 물줄기에 에레즈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째서인지 밤하늘 아래 서 있었다. 아니, 무방비하게 내던져져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우두커니 비를 맞으며, 에레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빗줄기는 굵었고 에레즈는 밖에 오래 있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채였다. 보름달은 푸르렀다. 창백하고 동그란 빛은 어두운 무대에서 선 에레즈만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분명… 칼리번의 곁에서, 그 사람을 간호하고 있었는데.”

달빛에 흠뻑 젖은 에레즈는 서서히 기억을 되찾았다. 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지 아침부터 비가 내려 왕성 정화 작업에 많은 차질이 있었다. 에레즈는 부상병들을 수용하는 막사를 찾아가 상황을 살피고 담당 성녀들을 만났다.

<왕자님…. 저희는 구원받을 수 있나요?>

죽어 가는 병자는 에레즈의 손길을 받기를 간청했다. 성녀는 말렸지만, 에레즈는 기꺼이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병자의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무섭습니다, 이 지옥이…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 아서… 무서워요.>

그녀는 나이가 지긋한데도 아이처럼 울었다.

<…….>

죽어 가는 자들에게 현실을 알려 줄 수 없었다. 에레즈는 그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곳 병자 대부분은 북문으로 이동하던 피난민들입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죽었으니 왕자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죠.>

구급 물품은 턱없이 부족했고 성녀 개인의 성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로 인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성녀들이 쓰러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거기다 곧 우기였다. 인구가 밀집된 왕성 내에 전염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컸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수색대 일부의 노선을 선회시켜 검은 숲의 약초를 채집, 활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에레즈는 총력을 기울여 한시라도 빨리 붉은 오메가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열악한 상황과 죽어 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니, 병력을 한없이 외부로만 돌리기가 어려워졌다.

<칼….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레즈는 칼리번을 간호하며 그날의 일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잠든 칼리번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의도기도 했으나,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답을 찾으려는 시도기도 했다.

분명, 그랬는데….

“내가… 몽유병에라도 걸린 건가?”

붉은 오메가는 잠잠해졌으나 아직 전시였다. 그 때문에 에레즈는 잠들 때도 최소한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맨발이었고 차림새도 천 옷뿐으로, 가벼웠다.

‘…아니면 여전히 꿈속인가?’

에레즈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오메가가 과연 칼리번을 그냥 버리고 갔을까? 이걸 위해서일 수도 있어. 칼리번이 왕성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이상 오늘 같은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다고.>

<오늘 네가 품은 마물은 인간들을 죽이게 될 거야. 넌 네 손으로 귀여운 에레즈를 죽이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

<왕성 위로 검은 손자국이 생겼습니다! 마물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병사들이 대처할 틈도 없이 피난민들이 무차별하게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왕자님을 풀어 줘, 어서! 제발! 뭐, 뭐든지 할 테니, 어서…. 더 지체되다가는 저분이 죽고 만다…!>

깊고도 검은 밤….

비에 젖은 달은 에레즈처럼 위태롭게 홀로 떠 있다. 별은 보이지 않는다. 보초를 서는 최소한의 경비병 외에는 모두가 잠드는 시간이었다. 에레즈의 한쪽 눈동자에 커다란 보름달이 가득 담겼다.

“칼…. 나는 당신 덕분에 살아남았어.”

에레즈의 목소리는 빗물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나약한 에레즈에게는 세상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해 오직 칼리번만을 생각했다. 칼리번은 그의 의지이고 기둥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은….

“하지만 당신은… 나 때문에 죽지 못했던 거구나.”

그 약속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당신에게는 죽음이라는 선택이라도 남았을 텐데. 자신은 칼리번에게 안식조차 빼앗고 말았다.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는 굴레였다니.”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못했다.

매일 밤, 에레즈는 달을 보며, 별을 보며 칼리번을 떠올렸다. 생사조차 확실치 않은 그가 마찬가지로 달과 별을 보며 자신을 떠올려 줄 것이라고는 감히 바라지도 못 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담긴 달빛이 언젠가 칼리번의 뺨을 스치기를 바랐다. 별빛이 당신을 구하러 가고 있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속삭여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만나길 바랐던 그 마음이, 나약한 자신이… 오히려 칼리번을 더욱 큰 고통에 빠뜨린 것이다.

“당신은….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나의 몫이야. 에레즈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속죄를… 해야만 해.”

당신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에레즈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걷기를 택했다. 그는 맨발로 빗물에 물러진 진흙땅을 밟으며 나아갔다. 밤길을 걷는 걸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빗물과 어둠은 에레즈의 손과 발에 묻은 피를 숨기고 씻겨 주었다. 진창에는 피와 빗물이 섞여 들어 비린내가 한층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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