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7. 피와 꽃 (2)
8. 악몽
9. 물거품 上
10. 전염 (1)
7. 피와 꽃 (2)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진지도 구축했겠다, 아스터는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물었다.
“계획에 관해서 묻는 건가.”
“네.”
마침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칼리번이 최대 약점, 그것은 바로 지능이었다. 그리고 에어리얼의 약점은 아마도 체력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칼리번은 무려, 멍청한 머리와 약해빠진 몸을 가진 셈이다.
칼리번은 대답을 미루고 오래도록 고민했다. 은신처를 찾으면서도 나름 머리를 굴려 봤으나, 이렇다 할 전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나는 자유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판단을 위해 네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 줬으면 한다.”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순서를 넘겼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아스터는 칼리번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어리얼이 정말로 당신의 몸을 차지한 것이라면, 그는 지금 왕성에 있을 겁니다. 아마도 에레즈 프리드웬의 곁이겠죠. 그러니 저희도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아스터는 칼리번과 달리 곧바로 내뱉었다.
“…왕성? 하지만 에어리얼은 내 몸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수도 있다. 원래 몸은 이 약해 빠진 몸과 다르게 건강하고 강하다. 내가 낳은 마물을 수거한 후, 다른 곳에서 후일을 도모하려는 작전일 수도 있지 않나.”
에어리얼의 기억을 엿봤던 칼리번은 아스터의 추측이 생각보다 정확해 뜨끔했다. 하지만 일부러 아스터에게는 다른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에어리얼은 분명 에레즈 프리드웬의 곁에 있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에레즈 프리드웬이 ‘칼리번’과 떨어질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스터는 머리를 써서 추측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닌 자신감은 거의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듯 예언하는 수준이었다.
“왕자님을 우습게 보지 마라. 나는 지난 8년간 에어리얼에게 붙잡혀 있었다. 즉, ‘칼리번의 생존’ 자체가 당연히 의심을 살 만한 부분이다. 왕자님께서는 날 곁에 두지 않으실 거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내 육신은 죽었을지도 모르지. 적에게 잡힌 포로는 처리하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이니 말이야. 그분은 절대 어리석지 않다.”
칼리번은 진중하게 말했다. 동시에 그것은 그의 바람이기도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전쟁 포로를 숨겨 둘 리가 없다. 설령 상황이 반대라서, 칼리번이 젠을 구출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최소 한 달은 멀리서 경과를 지켜봤을 것이다.
“아하, 그러고 보니 당신은… 계속 지하 감옥에서 지냈었죠.”
칼리번의 추측에 검은 갑옷이 삐걱거리며 소리를 냈다. 어딘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끼익하는 소리가 그 나름의 비웃음임을 알게 되었다. 칼리번은 어린애에게 놀림을 당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에레즈 프리드웬에 대해서 저보다도 아는 게 없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허튼 생각으로 기력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제 예측을 믿고 다음 행보를 정하시는 편이 골치가 덜 아플 겁니다.”
“…….”
“…그리고 빈말로라도 에어리얼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저도 모르게 당신의 목을 조를 뻔했으니까.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에레즈가 말을 이었다.
“당신과 달리 저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영리한 에어리얼이라면 에레즈 프리드웬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에레즈라면 반드시 칼리번을 곁에 둘 것이라는 확언.
“그랬기에 당신과 동맹을 맺고 에어리얼에게 누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에레즈를 찾고자 하는 당신을 돕겠다고 한 겁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면 언젠가 에어리얼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인즉, 에레즈 프리드웬의 목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
그가 자신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칼리번은 이상하게 가슴이 간지러웠다. 하필이면 아스터의 목소리는 예전의 에레즈와 비슷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름을 모르는 감정…. 칼리번은 이 감정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평생 모르고 싶었다. 지금 느끼는 심장의 고통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싶을 뿐.
그저 평소보다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는 것인데, 어째서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것일까?
…모른다. 모른다. 칼리번은 젠에게 돌머리라고 불릴 정도로 멍청했기에, 끈질기고 깊게 사유하지 못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지난 8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왕자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똑바로 말해라. 그래야 다음 계획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칼리번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8년간 지켜본 에레즈 프리드웬에 대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물론 당신이 제 말을 믿는다는 전제하에서겠지만요.”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는 칼리번을 마주 보고 앉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역겨운 기만자이고, 잔혹한 살인자이며 마물 백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동족의 배신자입니다.”
아스터는 덤덤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늘어놓았다.
“5년 전, 그자는 갑자기 성검이라는 비겁한 무기를 들고 나타나 인간들의 구원자 행세를 했습니다. 싸우는 방식은 버러지와도 같았습니다. 땅속을 숨어다니며 아버님을 여러 차례 곤란하게 만들었죠. 몇 차례의 기습을 성공한 후에는 감히 아버님의 농장을 습격했고, 숙부님들을 인간들 앞에서 산채로 불태웠습니다. 에레즈 프리드웬만 아니었다면 아버지와 숙부님들은 순조롭게 인간을 멸종시키고 마물을 위한 세상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에어리얼도 한결 편해졌겠죠.”
<……나, 나… 사, 사실은… 기, 기사가 되고 시, 싶었어….>
“저로서는 그자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그토록 무르면서, 어째서 동족만은 가차 없이 베어 넘기는지. 인간들에게 정체를 숨기고 있으면서….”
<…요, 용병 일을, 하, 하는 것도… 그, 그리… 나, 나쁘지 아, 않을, 지도…? 그, 요, 용병들도 사람을 구해 주잖아….>
“그자의 힘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버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성검의 힘 때문이죠. 알파가 어떻게 그 검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저도, 에어리얼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설마 왕성까지 빼앗기고, 에어리얼마저 쫓겨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미처 예상치 못하셨겠죠.”
검은 갑옷의 목소리는 유달리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
“…….”
칼리번은 목 끝까지 치솟아 오르는, 이름 모를 감정을 삼키려 애썼다.
“…아버님이란 자는 누구지?”
대신 그는 다른 질문을 했다. 아스터의 말에서 자꾸만 언급되는 그 호칭이 거슬렸다.
“알테르 프리드웬.”
아스터는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칼리번은 붉은 눈으로 알테르를 노려보았다.
“에어리얼을 만나기 위해 날 돕겠다고 했지만,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군.”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스터는 갑자기 사나워진 칼리번의 태도에 의아해했다.
“그분은 네가 존경에 마지않는 ‘아버님’이란 자를 죽였을 테니 말이다. 날 이용해서 에레즈 프리드웬을 찾아 죽일 작정이었겠군. 에어리얼이 그런 식으로 나를 속이라고 했나?”
아스터는 치밀하고 냉철한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린애 같았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칼리번처럼 멍청한 자라도 당연히 복수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깨닫게 될 텐데 말이다.
만약 아스터가 뒤로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면, 칼리번은 지금 남은 힘을 다해 아스터를 제재할 작정이었다. 설령 그로 인해 자신이 죽거나 아스터에게 팔다리가 잘린 채 끌려다녀, 에레즈를 이대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군요. 제가 왜 아버님의 복수를 해야 하는 거죠?”
그러나 의외로, 아스터는 산뜻하게 받아쳤다.
“…물론 아버님께서 당신에게 씨를 심어 제가 태어났고, 저에게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제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에어리얼 덕분입니다.”
“뭐…?”
칼리번은 당혹스러웠다. 아스터는 에어리얼을 언급할 때에 비하면, 알테르 프리드웬에 대한 감정은 지극히 마물다웠다. 하지만 알테르 프리드웬을 향한 무관심 또한 에어리얼의 명령일 수도 있다. 칼리번이 다시 한번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설마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당신이 낳은 아들은 전부, 에어리얼이 직접 씨를 골라 주었잖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칼리번의 숨이 그쳤다.
“…….”
어… 어어.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눈을 깜박여 보았지만, 앞이 캄캄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 있어서가 아니다. 시야가 차단된 것이다. 마치 시력을 잃은 것처럼.
“으, 윽….”
삼키려 해도, 숨기려 해도 과거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솟아올라 목을 조인다. 칼리번은 제 손으로 목을 감쌌다. 백금사가 감긴 것도 아닌데,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에어리얼의 은혜를 입은 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에레즈 프리드웬이 에어리얼을 죽였다면 지금 당신은 팔다리와 이목구비가 없는 ‘원래의 모습’이었을 테니까.”
칼리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스터는 평소처럼 줄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만….”
“저희 모두가 에어리얼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만, 해.”
칼리번은 목에 감긴 밧줄을 풀려고 손톱을 세웠다. 그러나 감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손톱이 목을 긁어, 핏자국을 남길 뿐이다.
손. 손으로, 목을, 긁어…서.
‘내게 손이 어디 있지?’
칼리번은 문득 이질감이 들었다. 원래 그에게는 손이 없었다. 발도 없었다. 눈도, 코도, 혀도 없었다. 그래서 숨을 쉬는 것조차 에어리얼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숨을 쉬고, 손을 움직이고 있단 말인가?
“그러니 에어리얼은….”
“…….”
“…칼리번?”
칼리번이 돌처럼 굳은 채 아무런 반응도 없자, 아스터도 곧 이상함을 느꼈다.
“헉…. 하아…. 하….”
칼리번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가 뒤집어쓴 에어리얼의 껍질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연약한 몸은 당장에라도 숨을 멈추고 기절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칼리번.”
아스터는 즉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칼리번은 밭은 숨만 내쉴 뿐 폐로는 조금도 공기가 들어가지 못했다.
“윽… 흐, 허억….”
칼리번이 괴상한 숨소리를 내자 아스터가 턱을 쥐었다. 평소라면 마주 보았을 붉은 눈동자가 까뒤집혀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은 팔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칼리번, 정신 차리십시오!”
아무리 칼리번에게 무감정할지라도, 에어리얼의 껍질마저 위험할 지경에 이르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겁니까?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뭐라고, 아무 말이라도 해 보십시오. 칼리번……. 칼리번?”
아스터는 가는 몸을 끌어안았다. 금속에 감기는 피부가 시체처럼 차갑다. 아스터는 드물게 당황했다.
칼리번은 몸이 바뀌자마자 성을 탈출하고, 마물과의 연이은 전투도 버텨 냈던 자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에 와서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맨단 말인가?
“설마… 에어리얼의 몸을 가지고 절 협박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런 장난질에는 속지 않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십시오, 숨을 쉬세요. 자꾸 이러면 정말로, 당신을 묶어서 데리고 다닐 겁니다?”
아스터는 칼리번의 어깨를 흔들며 협박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의 까만 투구가 칼리번의 얼굴에 부딪힐 것처럼 가까워졌다. 아스터는 투구의 앞부분을 들어 올렸다. 투구 속 텅 빈 어둠이 드러났다.
아스터는 칼리번의 얼굴을 그대로 투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만일 제삼자가 있었다면 갑옷이 칼리번의 머리를 그대로 삼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스터는 칼리번의 입술을 벌려 숨을 불어넣었다.
“칼리번, 육신을 붙잡으세요. …에어리얼의 몸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아스터는 놀란 아이처럼 다급하게 칼리번을 불렀다. 빈 갑옷의 안쪽에서, 칼리번의 거친 호흡만이 울려 퍼졌다. 아스터의 두 팔에 안겨 늘어진 칼리번의 모습은 머리를 잃고 몸만 깨끗하게 남겨진 조각상 같았다.
“으…윽! 허, 허억…. 허억!”
힘없이 늘어져 있던 칼리번의 몸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버둥거렸다. 하얀 손이 검은 갑옷을 마구 내리쳤다. 지극히 약한 힘이었으나 갑옷 안쪽이 쿵, 쿵, 천둥 치듯 울렸다.
“와, 왕자님!”
그 순간, 칼리번이 발작하듯 외쳤다.
“왕자님! 도와주세요…. 살려 줘, 살려 줘…!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싫어, 싫어, 그만둬…. 하고 싶지 않아, 더는… 더는. 흐, 흐아…! 몰라, 모른다고…. 위치 따위 몰라, 살려 줘!”
유령을 마주친 사람이 내뱉는 의미 없는 소음이었다.
“후회…. 후, 회, 후회해…. 남지 말았어야 했어, 후회하니까, 제발, 살려 줘! 그만, 둬…!”
칼리번은 어둠 속에서 한참이나 울부짖고, 비명을 질러 댔다. 그가 토해 내는 절규는 아이러니하게도 에어리얼의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칼리번의 목소리는 갑옷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칼리번, 정신 차리십시오.”
맞지 않는 영혼과 몸을 간신히 연결하는 실이, 이대로는 맥없이 끊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스터는 칼리번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온기가 없었기에, 차갑게 식은 몸을 더욱 차갑게 만들 뿐이었다. 몸의 떨림이 금속을 타고 전해졌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겁니까? 에어리얼의 몸속에서?”
“시, 싫어…! 그, 그만해! 으, 아아, 아아악!”
“물론 저야 당신 따위, 당장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정상적인 영혼과 몸의 결합이 아니었다. 강제로 바뀐 영혼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사소한 충격만으로도….
“…하지만 당신도 저처럼, 놓을 수 없어서 지금까지 버틴 것 아닙니까?”
“으, 으으…. 아, 아파, 으아, 아아…!”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 몸을 썩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일어나십시오.”
에어리얼이라면 무언가 수를 썼겠지만, 아스터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칼리번.”
이름을 속삭이는 것밖에는.
“칼리번….”
아스터는 칼리번의 귀에 제 입을 대고는 끊임없이 그를 불렀다. 영혼을 부르는 것처럼. 아스터의 품 안에서 쥐가 난 하얀 다리와 손은 덜거덕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하아…….”
목에 걸린 사과 한 조각이 튀어나온 것처럼, 한참 뒤에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가느다란 손이 허공을 휘적였다.
“여기 계셨군요.”
산 채로 살점이 뜯어먹히는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던 것과 달리, 더없이 평안한 한마디.
“계속, 제 곁에….”
비정상적으로 붕 떠서, 도리어 정신을 놓은 듯한 목소리였다. 칼리번의 손이 허공을 휘젓더니, 아스터의 갑옷을 움켜쥐었다.
“곁에…….”
그것을 마지막으로 칼리번에게서 더는 반응이 없었다. 몸의 떨림도, 불안정하던 숨도 이내 잠잠해졌다. 숨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덜그럭, 아스터는 칼리번의 머리를 뱉어 내고는 투구를 닫았다. 칼리번은 진정했는지 어느새 깊이 잠들어 있었다.
“…….”
아스터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최대한 가리는 편이 좋겠어.>
아스터가 늘 들었던 에어리얼의 목소리는 이러했다.
<음, 이 모습은… 두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추하네. 네 몸은 인간계의 공기가 닿으면 무너져 버리니 어차피 가려야 하겠지만….>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슨한 말투였다.
<제가 그렇게 추합니까?>
그때, 아스터는 감정 없이 물었다.
<응, 내가 본 인간과 마물을 통틀어서 가장. 네 얼굴을 보면 마물도 구역질을 하고 말걸? …그런 널 사랑해 주는 건 이 세상에서 오직 나뿐이지.>
에어리얼은 아무렇지 않게 아스터를 모욕했다. 그러나 아스터에게는 미와 추에 대한 감각이 없었으므로 기분 나쁠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해 가리겠습니다.>
그래서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거울이나, 심지어는 물가에 비친 모습조차 보지 않았다. 검은 투구로 가려져 있어서 우연히라도 볼 일은 없었지만, 본모습이 궁금하다는 욕망마저 스스로 차단해 버렸다.
아스터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에어리얼 이상으로 치밀하게 사고하는 일은 한낱 알파인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에어리얼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한 번 했으면 족했다.
* * *
칼리번이 눈을 떴을 때는 하루가 지난 뒤였다. 동굴 밖으로는 황혼이 지고 있었다. 동굴 입구를 뒤덮은 넝쿨에 갈기갈기 찢긴 노을빛은 칼리번의 몸 위로 떨어졌다.
“음….”
칼리번은 낮게 신음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에어리얼의 몸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근처에서 칼리번이 깨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아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갑옷도 황혼 녘의 빛을 받아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칼리번이 물었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더군요.”
“그런가….”
“혹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십니까?”
“…아무것도.”
칼리번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럼 됐습니다. 에어리얼의 몸입니다. 앞으로는 좀 아끼십시오.”
아스터는 팔짱을 낀 채로 오만하게 말했다.
“몸 자체가 워낙 약해 빠진 탓에 일어난 일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지.”
칼리번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대답했다. 아스터는 빛을 싫어하는 벌레처럼 동굴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당신….”
어둠 속에서, 작은 부름이 들린다.
“당신의 영혼은 부서지고 있군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칼리번은 지금 들은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가장 에레즈를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지하에 있던 당신의 몸은 에어리얼이 아니었다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죠. 몸이 그 정도로 부서졌으니 영혼 또한 산산조각이 난 것을 억지로 이어 붙인 상태일 겁니다.”
“…….”
“에레즈 프리드웬을 만나는 것이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털을 곧추세운 짐승처럼, 약간은 겁을 먹은 듯이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너는… 에어리얼을 다시 만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나. 날 이용하겠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로.”
칼리번이 경계하며 물었다. 잠시 기절했다 일어났더니, 아스터의 태도가 상당히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누구나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8년을 버텼던 것 아닙니까?”
“…….”
“하지만 당신의 원래 몸은 이미 수명을 다했습니다. 영혼도…. 에어리얼에게 대항한다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뿐이니, 차라리 에어리얼의 몸을 가지고 어딘가에 숨는 편이 나을 겁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적어도 계속 살 수는 있을 테니까요.”
아스터가 제안했다. 에레즈의 목소리로 물었기에 더욱 잔인한 질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최대한 도망쳐,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소중히 여기며 몸을 편안하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넌 날 놓아주지 않을 테지.”
칼리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날 시험할 생각이었다면 쓸데없는 짓이다. 잠깐 기절 좀 했다고 내 목표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
“난 그분을 다시 만날 거다. 그리고 에어리얼 없이, 그분의 안전이 보장되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할 거다.”
검은 갑옷이 어둠 속에서 끼익거렸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진실을 알게 되면, 당신의 몸을 차지한 에어리얼이 다치게 될지 모르니까요.”
아스터도 지지 않고 말했다. 칼리번은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거대한 갑옷을 두르고 있지만 오기를 부리는 어린애에 불과한 마물을.
“…그리고 에어리얼을 죽일 거다.”
처음 동맹을 맺었을 때는 미처 꺼내지 못했던 본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런 말을 해서 아스터를 자극해 봤자 좋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이 말을 꼭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점도 같군요. 저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일 겁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적이겠군. 서로 봐줄 일 없이.”
감히 그분을 죽이겠다 선언했지만, 어째서인지 아스터에게 화는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기묘한 안도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와 자신은 이상하게도 닮은 점이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칼리번은 넝쿨에 조각난 황혼을 바라보았다. 가라앉는 태양은 점점 검게,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 * *
칼리번은 아스터가 없는 틈을 타 은신처를 나왔다. 에어리얼의 신체가 약해 빠졌고,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행동 불능이 된다는 사실은 몸소 깨달았다. 이제 확인해야 할 것은 에어리얼의 능력을 어디까지 다룰 수 있는지였다.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 매 전투가 생사를 오가는 용병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일단, 에어리얼의 능력이란 정신이다. 크게는 영혼 교환을 기반으로 한 육체 전이를 성공시킬 정도이며 다른 사람인 척 모습을 꾸미는 일도 곧잘 하곤 한다. 마물을 자유로이 부리고, 마물 혼혈을 혼란에 빠뜨리고, 더 나아가 이성을 잃게 해 조종하기도 한다.
어쩌면 육체가 극단적으로 발달하는 알파와 달리, 오메가는 정신과 감정을 조종하는 능력이 주무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같은 오메가는 나는 못 하는 거지?’
애초에 재능도 없었을뿐더러, 오메가로서 발현하자마자 에어리얼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능력을 꽃피울 틈도 없이 짓밟히기만 했다.
예전에 젠이 했던 말로 유추해 보자면, 에어리얼과 자신은 대략 30살 정도의 차이가 있다. 노련한 오메가를 당장에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어리얼처럼 되기를 포기하고 ‘마물 조종’으로 한정 짓는다면, 칼리번도 조금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자아와 확고한 마물 혼혈은 어렵지만, 비교적 순수한 마물이라면 전투에 이용해 보기도 했다.
“…….”
칼리번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손톱을 세워 다른 쪽의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연약한 피부는 조금만 힘을 주어도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른다. 작은 상처인데도 칼리번의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그는 미련 없이 피가 흐르는 한 손을 땅에 가져다 댔다. 상처가 난 부위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손바닥이 쿵, 쿵, 울렸다.
“후우….”
칼리번은 눈을 감았다. 손바닥을 뒤덮은 혈관이 마치 뿌리처럼 땅 아래로 뻗어 나간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주변을 배회하는 마물 몇 마리를 발견했다. 바람에 묻어나는 오메가의 향기를 알파들이 찾아오는 것처럼, 오메가 또한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알파의 움직임과 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붙잡을 수 있을까?’
칼리번은 자신이 뻗은 뿌리를 움직여 마물에게 닿게 했다. 칼리번의 계획대로 붙잡을 수 있다면, 마물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윽…!”
그러나 실패했다.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충격과 함께 칼리번의 손이 땅에서 떨어졌다.
“하아, 하아….”
정신을 집중한 지 몇 분밖에 흐르지 않았음에도, 칼리번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아직은… 내가 한 수 위지.>
8년 전 에어리얼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을 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알 것 같다.
“이대로 에어리얼을 만난다면… 반드시 진다.”
턱에 맺힌 땀이 흙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용병으로 지내며 버틴 수많은 방어전. 그 경험은 칼리번에게 달콤한 착각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에어리얼은 경험이 많은 오메가다. 그런 그가 젊은 오메가의 몸까지 차지하고, 그가 낳은 마물마저 소유했다. 이런 죽어 가는 몸과 패잔병밖에 남지 않은 군대로는, 결코 정면 승부로 이길 수 없다.
“…되도록 빨리 왕성으로 가야 하는데.”
칼리번은 이를 갈며 고민했다. 언제 에어리얼이 에레즈를 죽일지 몰라 초조했다. 그가 용병 대장이었을 당시 대부분의 계획이나 추론은 젠이 도맡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혼자뿐이었고, 혼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전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지금 성으로 가면 개죽음만 당할 뿐….’
아스터의 말대로, 자신의 몸을 탈취한 에어리얼은 성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레즈를 성 밖으로 끌어내야만 한다. 밖으로 불러내서, 자신의 모습을 한 에어리얼이 언제든 살해 시도를 할 수 있음을 알려야 했다. 진실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크다.
…문제는 어떻게 성 밖으로 빼낼지이다. 되도록이면 에레즈만.
“으으음…….”
돌머리를 나름 쥐어짜 봤지만, 획기적인 전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은 결국, 한 가지뿐인가….’
칼리번이 치열하게 고민을 하는 사이, 마물들은 어느새 칼리번이 있는 장소까지 기어 왔다. 오메가의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온 것이다. 마물은 덩치만으로 나무를 흔들었다. 거대한 그림자로 앙상한 몸이 뒤덮었다. 칼리번의 주변만 밤이 된 듯했다. 그러나 정신력을 소모한 칼리번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마물이 칼리번을 덮칠 것 같은 그때.
“깨어 있었습니까?”
숲 주변을 순찰하던 아스터가 돌아왔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수풀과 어둠이 지던 나무들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벌써 돌아온 건가.”
칼리번은 그를 돌아보며 팔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얌전히 동굴 안에 있으라 했습니다. 설마 마물을 조종해서 저를 죽일 생각이었습니까?”
칼리번은 다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들은 동맹이었지만 동시에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적이기도 했다.
“…역시 예상대로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죠?”
“에어리얼이 낳은 마물은 대부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남은 녀석들도 노쇠하거나 전쟁에 동원되어 쇠약해진 상태더군.”
“…그렇다는 말은 당장 성으로 쳐들어가, 인간들을 학살하고 에어리얼을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군요.”
아스터는 칼리번보다 더욱 잔혹하게 아군의 병력을 평가했다. 그러고는….
“당신이 손조차 쓸 수 없게끔 병력을 정리해 두다니, 역시 에어리얼답습니다.”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아스터는 이런 상황에서도 에어리얼을 찬양했다. 에어리얼이 철저하고 영악하게 굴수록, 이쪽은 불리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그럼 앞으로는 어쩔 겁니까?”
아스터가 물었다. 이번에는 답을 피할 수 없었다. 피할 생각도 없었고.
“왕자님을 성 밖으로 유인할 거다.”
칼리번의 대답에 검은 갑옷이 삐걱거렸다.
“당신이 당장 성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에레즈 프리드웬은 곧장 뛰쳐나올 겁니다. 대신 그 몸은 성검에 썰려 산산조각이 나겠죠. 인간이 쏘는 화살에 벌집이 될 수도 있겠고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안전하게 숲으로 유인할 수 있을까…. 칼리번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을 뿐. 하지만… 결국에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돌아보았다.
“왕성으로 피난민들이 유입되고 있으니… 숲을 오가는 인간들을 습격한다.”
“당신, 에어리얼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짓는군요?”
힘겹게 결정을 내렸건만, 아스터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그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인간 약탈은 지금도 종종 하는 일입니다. 저 혼자서 처리하고 있지만요.”
하지만 칼리번은 아스터처럼 쉽게 약탈에 뛰어들 수 없었다. 그는 원래 인간을 지키고 보호하던 용병이었다. 돈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인간이란 알파에 비하면, 나무줄기처럼 연약하고 쉽게 바스러지는 존재였다. 칼리번은 그런 인간들에게 도움을 받아 성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약탈단에 들어가거나 마계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과 공존하는 길을 택했다. 그런 칼리번은 지금, 마물과 같은 짓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오직 에레즈 프리드웬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입 안이 썼다.
“그런데, 그 사실을 파악하는 것과 에어리얼의 몸에 난 상처는 무슨 상관이 있죠?”
아스터가 그에게 바짝 다가와 물었다. 칼리번이 숨기려 하자 손을 잡고는 힘을 주었다.
“이건….”
칼리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에어리얼의 몸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무엇보다 귓가에 달라붙는 아스터의 목소리가 버거웠다.
“실수…였다. 어차피 금방 나을 거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에어리얼의 몸은 당신과는 다르니까.”
“뭐… 하는 거지.”
그때, 아스터의 갑옷에서 반짝거리는 백금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손바닥에 난 상처에 감기더니 흐르는 피를 빨아먹었다.
“…….”
언젠가 보았던 에어리얼의 기억이 겹쳐진다. 피를 먹고 간신히 연명하던, 가는 실뭉치….
“어째서 자꾸 상처를 입히는 겁니까?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의 몸이라서?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겠다면 당신의 손발을 묶는 수밖에 없습니다.”
칼리번은 순순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상처 입지 않고서는 에어리얼의 힘을 쓸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아스터가 알게 되면, 정말로 꽁꽁 묶인 채 동굴에 갇혀 있게 될 거다.
“이 몸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내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좋을 거다.”
칼리번은 대뜸 아스터에게 큰소리를 쳤다. 그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식으로 말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를 협박하는 겁니까?”
“…….”
“당신을 돕고 있는데도 말입니까?”
“…….”
칼리번은 침묵을 택했다. 그러나 고집불통으로 굴수록 더욱 아스터를 자극한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에어리얼의 몸은 회복이 느립니다. 자칫 잘못하면 에어리얼의 육체뿐만 아니라, 당신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다시 기절하고 싶지 않겠지요. 그러니 자해는 자제하십….”
“……아.”
인상을 찌푸리며 아스터를 노려보던 칼리번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스터도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떨어져, 땅에 검은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비가 오는 건가.”
칼리번이 중얼거렸다.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빗줄기는 점차 굵어졌고, 양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비가 아니었다.
우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