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피와 꽃 (1) (16/50)

6. 피와 꽃 (1)

<네가 찾는 것은 아마도 성역에 잠들어 있을 거다.>

에레즈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칼리번은 그 둘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눈치챈 순간,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그러나 칼리번은 지나간 기억의 흔적을 쫓는 관객에 불과했으며 이 순간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다.

<좋아. 그럼… 그 성역이라는 곳에는 어떻게 가야 하지?>

이번에는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고 마른 에어리얼이 보통 사람보다 큰 알테르의 앞에 서니, 체격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곳에는 아무도 가지 못한다.>

욕망이 득실거리는 붉은 눈길에 알테르는 낮게 웃었다.

<…뭐라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언젠가 너 같은 녀석이 나타날 것을 대비해서 선조께서도 나름의 봉인을 해 둔 것이지.>

<그 봉인이라는 건 뭐지?>

에어리얼은 짜증을 감추지 못한 채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찌 보면 그건 봉인이 아니라 자격의 증명일지도 모르겠군.>

<도대체 무슨 의미야? 알아들을 수 있게 똑바로 말해.>

알테르에게는 안달복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성역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찬 장소다. 성녀 중에서는 오래전 성검이 태어난 장소라 말하는 이도 있더군. 보통 성녀가 세운 보호막은 마물만 막을 뿐, 마물 혼혈은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다르다. 마물의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섞인 자는 출입하지 못한다.>

<…….>

<정확히는 몸이 타들어 가지.>

에어리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알테르는 팔짱을 끼며 분노를 소리 없이 발산하는 작은 오메가를 내려다보았다.

<동료가 곤란에 빠졌는데 즐거워 보이는군, 알테르.>

잠시 후, 에어리얼이 음산한 목소리로 시비를 걸었다.

<그렇게 보이나?>

알테르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성스러운 땅이라. 그러면 성스러운 자들을 시켜서 보내면 되잖아? 성녀라면 그 여자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잡아들일 수 있어.>

짜증이 난 에어리얼은 일부러 알테르를 자극했다. 그러자 그의 유려한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네 잔꾀가 통할 것 같으냐? 그곳은 또한 프리드웬의 피를 이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성녀라도 발을 들이지 못해. 하지만 너도 알고 있겠지? 프리드웬의 피는 오래전에 더럽혀졌다는 사실을….>

<그럼 뭐야? 결국…!>

<그래.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전설의 장소일 뿐이지.>

<…칫.>

에어리얼은 초조해졌는지 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자격을 가진 자가 존재하지 않기에 영원히 봉인되어 버린 땅. 에어리얼의 탐욕은 그 땅마저 더럽히길 원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난 그곳을 가야만 해.>

<포기해라.>

알테르의 단언에 에어리얼은 약이 바짝 오르고 말았다.

<당신! 당신은 프리드웬 왕실 출신 중에서도 가장 특출난 알파잖아? 사실 날 놀리는 거지? 성역 정도는 손쉽게 오갈 수 있으면서…! 기껏 실마리를 얻었는데 들어가지를 못한다니…. 말도 안 돼!>

에어리얼은 한쪽 발을 구르며 성을 냈다. 그러나 알테르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성역을 여는 방법을 모른다. 왕비가 허락할 리가 없지.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성역에 한 걸음을 디딘 순간 이 몸은 재가 되고 말 거다. …예언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또 모를까.>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프리드웬의 피를 이은 여자아이….>

그러나 에어리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프리드웬의 피는 이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졌다. …여자아이는 절대로 태어나지 못해.>

알테르는 에어리얼의 미련을 떨쳐 주려 말했지만….

<하지만 그와 비슷한 아이는 있지. 안 그래?>

<…….>

에어리얼은 광인처럼 흰 눈자위를 가득 드러내며 웃었다. 알테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니면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도 있지. 우리가 여자아이를 만드는 거야. 우리에게는 프리드웬의 피도 있고, 오메가도 있어. …그것도 둘이나.>

묘수를 떠올린 에어리얼은 붉은 눈을 빛내며 알테르를 게걸스럽게 바라보았다.

<…어울려 주는 것도 거기까지다.>

알테르는 등을 돌렸다. 더는 못 봐주겠는지 그는 끔찍한 것들로 가득한 에어리얼의 방을 떠나려 했다.

<알테르.>

그 순간,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알테르를 붙잡았다.

<당신은 이상한 알파야. 오메가가 있는데도 발정하지 않는다니.>

<…….>

<마물의 피가 섞인 것들은 누구나 오메가를 욕망해. 그걸 참아 내다니, 엄청난 인내력이거나… 혹은 마물보다 인간의 부분이 더 강한 건가?>

알테르는 무시하며 걸어 나갔다.

<…아니면 인간들처럼 여자에게 발정하는 건가?>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에어리얼의 도발에 결국 알테르의 발걸음이 멈췄다.

<윽…!>

끊임없이 지껄이던 에어리얼의 목에서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알테르의 금사가 순식간에 에어리얼의 목을 움켜쥔 것이다.

<기어오르는 것을 가만히 놔뒀더니….>

<아악! 흐……. 하악, 아파, 그만, 둬…!>

<정말이지, 한도 끝도 없군.>

목이 묶인 채 에어리얼의 발이 허공에 붕 떴다. 에어리얼은 어떻게 해서든 숨을 쉬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사이, 성난 발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기억해 둬라, 붉은 오메가. 마물들에게 짓눌려 신음하던 너를 마계에서 꺼내 준 건 다름 아닌 나다.>

<크, 커헉…!>

<주도권은 내게 있다는 뜻이지. 벌써부터 이겨 먹으려 들면 곤란하군.>

<흐, 흐흣…. 알아, 알고, 있다고…. 허억!>

알테르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금사는 하얀 목을 당장에라도 부러뜨릴 기세였다. 에어리얼은 순식간에 태세를 바꿔 그에게 설설 기었다.

<내가 너를 데리고 있는 건 인간을 말살시키겠다는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가 주인에게 덤비려 든다면…. 하는 수 없이 처분하는 수밖에 없지.>

주변에는 에어리얼을 따르는 마물들이 득실거렸다. 그러나 알테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마물들도 감히 알테르를 건드리지 못했다.

<놔, 놔줘…. 제발….>

에어리얼이 서글피 울며 애원했다. 그의 육체는 정신력과 달리 한없이 약했다.

<…….>

<아악!>

알테르는 그가 눈을 까뒤집고 질식사하기 직전, 작은 몸뚱이를 차가운 돌바닥에 내쳤다.

<저 용병으로 새끼를 치고 싶다면 다른 녀석을 써라. 감히 나를 교배에 이용할 생각 말고.>

경멸로 가득 찬 푸른 눈이 에어리얼을 흘끗 훑어보았다. 에어리얼은 헐떡거리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에 여념이 없었다. 추하기 그지없었다. 알테르는 인상을 한번 쓰더니 그 방에서 떠났다.

<흐흣…. 하아, 후우…. 후, 후흐…. 하지만 결국, 당신도… 그 오메가를 품게 될 거야…….>

어둠 속에 잠긴 에어리얼은 반쯤 풀린 눈으로 웃었다.

<오메가를 거부할 수 있는 알파란, 이 세상에 없거든…….>

허탈하고도 비참한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성역, 성역…?’

한편,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찾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속으로 반복했다. 힉힉대던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칼리번이 있는 쪽으로 빙글, 굴렀다.

기억에 불과한 에어리얼의 시선이 칼리번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일는지?

<미안하지만, 칼리번…. 너는 아직 여기까지 오면 안 돼.>

에어리얼이 칼리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칼리번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에어리얼의 기억이었다. 기억의 불청객은 주인에게 날벌레나 다름없었다. 에어리얼은 손가락을 땅에 비벼 칼리번의 의식을 꺼뜨렸다. 그와 동시에 칼리번의 정신도 끊기고 말았다.

* * *

아스터.

영혼에 똑똑히 새겨진 그 이름.

<그래도 너를 낳아 준 사람이잖아?>

칼리번이 아직 ‘칼리번’이었을 때,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이었다. ‘아스터’라는 알파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에어리얼에게 몸을 빼앗긴 그날, 마주한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아마도 자신이 낳은 수많은 마물 중 한 마리일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마물 혼혈과의 교미에서 태어난 듯했다. 그러나 인간도, 같은 마물 혼혈도 가리지 않고 살육하는 모습은 기실 마물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에게 길러져 그들을 지키며 살아왔던 칼리번과 인간이 가축처럼 취급되는 시대에서 살았던 아스터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또한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측근이며, 그를 열렬히 추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피에 문제가 있어 검은 갑옷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 갑옷에서 나와 공격을 하지만, 인간계의 공기가 백금사를 태우기 전에 갑옷 안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것이 저 녀석의 유일한 약점이겠지.

칼리번은 언젠가 이 약점을 이용할 기회가 오길 바랄 뿐이었다. 에어리얼의 기억을 좀 더 읽게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칼리번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에어리얼의 기억을 엿본 이후, 칼리번은 새로운 꿈을 꾸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

칼리번은 손가락에 감겨드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새삼 일전의 결심을 떠올렸다. 전부 잘라 버리기로 했었지. 그러나 상황이 요원치 않았다.

왜냐면….

“뭘 하고 있습니까? 안 드시면 억지로 쑤셔 넣는 수밖에 없습니다.”

곁에 있던 검은 갑옷에서 반짝이는 백금사가 튀어나와 칼리번의 붉은 머리카락을 죽 잡아당겼다.

“…그만둬. 협박하지 않아도 알아서 먹을 거다.”

에어리얼의 신체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히면 그에 준하는 속박으로 대응하는 저 녀석 때문이었다. 잠을 잘 때 외에,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보란 듯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몸이 강제로 바뀌고 난 후 안 그래도 고민할 거리가 많은 칼리번을 옆에서 수시로 괴롭히고 있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칼리번은 주름이 잡힌 미간을 꾹,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딱히 아스터가 칼리번에게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에어리얼의 육체’가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 저러는 것이다.

“이리 줘.”

칼리번은 손을 내밀었다. 저 녀석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영양 섭취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아스터는 용케도 다 죽은 숲에서 산딸기와 나무 열매를 찾아왔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지, 절반 이상이 썩어 있었다.

‘이런 것도 가르쳐 줘야 하나?’

…뭐, 지금 형편에 이보다 더 나은 식사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리번은 군말 없이 나무 열매의 썩지 않은 부분을 입에 물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처음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바닷물을 마신 사람처럼 먹을수록 도리어 허기가 몰려온다.

씹는 감각,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는 감각, 이 모든 것이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 보는 것만 같다. 칼리번은 ‘칼리번’이었을 때처럼 음식을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탈이 나지 않도록 제대로 씹어 드십시오. 에어리얼의 섬세한 몸은 예전의 당신과는 다릅니다.”

먹는다는 행위에 취한 칼리번은 아스터의 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배탈이 났다.

“윽….”

칼리번은 나무 열매를 다 먹자마자 곧바로 배 속에 든 것을 전부 게워 냈다.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에어리얼은 원래 한 끼에 사과 한 알 정도밖에 먹지 않았다고.”

에어리얼의 육체가 고생하는 것이 못마땅한지, 아스터가 불만을 표했다.

“…….”

고작 그것밖에?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가공할 만한 소화 능력이 믿기지 않았다. 타인으로 접했던 붉은 오메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마물을 부렸고, 정신을 조종했으며, 둔갑하기도 했다. 칼리번은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지하로 끌려갔다.

지난 8년, 칼리번의 정신에 에어리얼은 범접할 수 없을 만치 강한 존재로 낙인이 찍혔었다. 그러나 막상 에어리얼의 몸이 되어 보니 더없이 불편하고 나약했다.

거기다….

“……!”

구역질하던 칼리번은 토사물에 피가 섞인 것을 발견했다. 등을 지고 있어 아스터는 보지 못한 듯싶었다.

‘일전의 싸움으로 부상을 입은 탓인가? 아니면….’

설마….

칼리번은 일단 발을 저어, 토사물을 흙으로 덮었다.

* * *

‘저 녀석과 동맹을 맺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

칼리번은 사과를 시간을 들여 씹으며 생각했다. 지금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함께하고 있지만, 아스터는 명백한 적이었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에레즈를 죽이기 전에 몸이 바뀌었다는 진실을 그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아스터는 분명 거대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

‘차라리 지금 죽여 없애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는 지금 자신은 에어리얼의 몸을 완벽히 다루지 못한다. 그리고 아스터는 에어리얼의 육체를 가진 자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추적할 것이다. 전례도 있었다. 더구나 검은 숲에 깔린 마물들은 ‘에어리얼’을 발견하면 번식을 하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지금 그가 바위에 앉아서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스터가 주변을 정리하고 밤마다 마물을 쫓아낸 덕분이었다.

<서로가 목적을 취할 때까지, 일시적인 동맹을 맺자는 의미입니다. 어떤가요?>

‘일시적인 동맹…이라.’

등을 맡길 만한 오랜 동료.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나 다름없었던, 하지만 지켜야만 했던 고귀한 분. …여기까지는 칼리번이 감당 가능 했다. 그러나 적과의 동맹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칼리번은 불신에 찬 눈으로 아스터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진작 제 팔에 안겨 이동했으면 피곤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칼리번의 시선을 아스터는 다르게 해석했는지 툭 하니 말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지금 그들은 진지, 혹은 은신처를 구축하기 위해 숲을 배회하며 적절한 부지를 찾는 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은 허약하기 그지없어서 주기적으로 휴식이 필요했고, 지금이 바로 그 휴식 시간이었다. 아스터는 빠른 이동을 위해 에어리얼의 몸을 안고 다닐 것을 제안했으나 칼리번은 강력하게 거절했다.

“말은 그렇게 하고 팔다리를 묶을 작정 아닌가?”

“그럴 작정이었으면 벌써 부러뜨려 놨을 겁니다.”

“…….”

“에어리얼의 몸입니다. 그렇게까지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검은 투구에 얼굴이 가려진 탓에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얼굴 자체가 없을지도 모르지. 농담이나 진담이라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짓인 건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몸의 체력을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어. 그래서 스스로 움직여 본 것뿐이다.”

“저한테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

칼리번은 무시했다. 사실 변명이었고, 에레즈를 만날 때까지 어느 정도 체력을 키워 둘 작정이었다.

“그래서요. 직접 사용해 본 소감은? 에어리얼의 몸은 어떻습니까?”

혹시나 여기서 더 다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스터가 물었다.

“그건….”

칼리번은 문득 자신이 토해 낸 피를 떠올렸다.

“…끔찍하게 약해 빠졌더군.”

칼리번은 땅을 보며 대답했다.

“그게 다입니까?”

“너를 탈 것으로 써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자꾸만 채근하기에, 칼리번은 한마디를 덧붙여 주었다. 고작 십여 분을 걸은 것만으로도 온몸에 땀이 차오르고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숲이 비록 거칠고 살펴야 할 것이 많다지만, 이 몸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사흘 밤낮을 무거운 짐을 들고 이동해도 끄떡없었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허약했다면 모를까, 갑자기 최약체로 추락해 버린 괴리감이 칼리번을 더욱 괴롭게 했다.

“그 사실을 몸을 직접 써야 깨닫다니, 에어리얼과는 다르게 어리석군요.”

“그래.”

멍청하다는 소리는 평생 들어왔다. 그래서 칼리번은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어쩌면 이 몸은 단련해 봤자 영원히 이 상태일지도 모르겠군.’

속으로 막연한 회의감이 들었다. 칼리번은 며칠째 직접 몸을 사용하며 시험해 보고 있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몸은 칼리번 자신처럼 마물에게 시달리고 고문을 당해서 쇠약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사용할 대로 사용해, 생기가 전부 바래 버린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생명력에 있어서는 껍데기만 남은 고목과도 같았다.

“힘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저를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아스터가 따라붙으며 물었다.

‘내가 왜 도움을 받아야 하지?’

칼리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평생 이렇게 살아왔다.

“에어리얼의 몸을 혹사시키지 마십시오. 이러다 또 쓰러질 작정입니까?”

“…….”

“설마 일부러 이러는 겁니까? 저희는 분명 동맹을 맺기로 했습니다. 에어리얼의 몸을 이런 식으로 괴롭혀 죽일 생각이라면 약속 위반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

“분명 오늘 안에 은신처를 구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속도로는 오늘도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할 겁니다. 에어리얼의 몸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제게 업혀야 만족하실 겁니까?”

“…….”

“제 말 듣고 있습니까?”

터벅터벅 걷는 칼리번의 걸음에 맞추며 아스터가 무수히 물었다. 칼리번은 제법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아스터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결국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만.”

“네?”

“조용히 좀 해라.”

수많은 물음표에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젠의 수다에 단련된 칼리번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에레즈를 닮은 목소리였으나 이 순간만큼은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응어리가 피어올랐다.

‘뭐지, 이 감정은?’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오르고….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어졌다. 몸의 피로와는 다른….

“…!”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던 칼리번은 주변을 사삭거리는 소리를 눈치챘다.

“당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뱀이나 쥐일 겁니다.”

칼리번이 움직임을 멈추자, 먼저 정체를 파악한 아스터가 앞장섰다. 하지만 칼리번은 바닥에서 돌을 찾아 움켜쥐었다. 검은 갑옷이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힘이 약해졌어도 이 정도도 못 하지는 않겠지.’

칼리번은 소리가 난 곳을 정확히 겨누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돌멩이는 매가리 없는 포물선을 그리고는 칼리번의 근처에 툭 하니 떨어졌다.

“…….”

…뭐지, 이 약해 빠진 팔은? 칼리번은 어처구니가 없어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까지 약하다고?’

에어리얼은 인간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마왕이었다. 이게 마왕이라고?

“저걸 원하십니까?”

“…….”

충격에 빠진 칼리번은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잡아 드리죠.”

아스터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그가 놓친 사냥감을 잡아 왔다. 뱀이었다. 검은 갑옷은 뱀의 목을 잘라 내어 에어리얼의 섬세한 육체가 독에 물릴 위험을 차단한 후 칼리번에게 건넸다.

“흠.”

칼리번은 길쭉한 뱀 고기를 보며 여러 심정이 들었다.

‘이런 사소한 사냥조차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하는 수 없나.”

묵묵히 뱀 껍질을 내려다보던 칼리번은 뱀고기를 덥석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스터의 갑옷에서 끼익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났다.

“뭐 하는 겁니까? 이리 주십시오.”

생고기를 우적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던 아스터는 그것을 빼앗았다.

“뭘 하긴. 식사 중이다.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지?”

“…먹을 거면 적어도 예고는 하십시오. 한 번 더 토해야 정신을 차리실 겁니까?”

아스터는 주변에 불을 피웠다.

“제가 있습니다. 에어리얼의 몸으로 그런 천박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불에는 구워 먹으란 말입니다.”

아스터의 얼굴은 투구에 가려졌지만, 분명 뚫어지게 칼리번을 응시하고 있었다. 칼리번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 바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다리를 쩍 벌려 앉지 마십시오. 에어리얼은 그렇게 앉지 않습니다. 머리도 헝클어뜨리지 마십시오. 꼬입니다. 그러다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면 어쩌려고요.”

높낮이의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아스터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짜증이 단단히 났군.’

녀석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에어리얼의 몸을 쓰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 자신도 저 녀석에게 똑같이 짜증이 나기 때문이다. 서로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원래 몸과 달리 에어리얼의 몸은 섬세하고 약합니다. 그러니 그의 몸을 함부로 쓰지 말란 말입니다. 당신은 에어리얼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으니까요.”

“…….”

“한 번 더 에어리얼의 몸에 해가 될 법한 추잡한 행동을 보이면 아무리 당신이 있어야 에어리얼의 몸이 유지된다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어쩔 셈이냐.”

칼리번은 툭 하니 물었다.

“원하시는 대로 손발을 묶어 버릴 겁니다.”

“…….”

“뭡니까, 그 에어리얼답지 않은 시선은.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아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젓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말이 많군. 목소리가 비슷할 뿐이지 전부 다르다, 그분과는….’

갑옷 안에서 울리는 흐릿한 목소리. 칼리번은 자꾸만 에레즈를 떠올렸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둘은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후후……. 카, 칼리번…. 카… 칼….>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난 뒤,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천진한 모습과는 전혀 다르단 말이다.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나중에는 작은 새처럼 끊임없이 곁에서 조잘거리던 에레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

칼리번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아득히 먼 기억을 떠올리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저려 오더니, 그 고통이 물이 되어 눈 밖으로 밀려 나올 것만 같았다.

‘어째서?’

칼리번 황급히 두 눈을 깜박거렸다. 눈물을 참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것은 살을 찢고 몸 안이 찢기는 것과는 다른 고통이었다.

에레즈와의 기억은, 8년의 세월 동안 겪은 고통으로 인해 전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원치 않는 교미가 반복되면서 어느샌가 에레즈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손쉽게 에레즈의 순수한 모습이 칼리번의 의식 위로 떠 올랐다.

눈앞의 검은 갑옷 때문에?

“…….”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카, 칼리, 번…….>

애초에 칼리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은 백조는, 아스터처럼 말을 유려하게 하지 못했다.

‘다르다. 전혀 달라. 그분과 저 녀석은 아무 관계도 아냐. 그저, 목소리만 조금 닮았을 뿐인….’

칼리번은 마음 쓸 곳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곁에 놓인 인간들의 짐을 보았다. 아스터가 오늘 아침 갑자기 가져온 것이다. 아마도 지난밤, 에어리얼의 몸을 위해 인간 무리를 습격했던 것 같았다. 가방 안에는 큼지막한 빵 덩어리와 말린 고기, 그리고 익숙한 작은 열매가 보였다. 피난민들은 검은 숲을 이동하면서 먹을 만한 것은 뭐든 틈틈이 주워 모은 듯했다.

칼리번은 주먹만 한 나무 열매를 꺼내 쥐었다. 8년 전, 숲에서 표류했던 날들.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나무 열매를 비롯한 먹을 것을 부지런히 가져다줬지만, 그는 거의 먹지 못했다.

<나, 나…… 이, 이런 거, 머, 먹을 줄, 몰라….>

그러나 에레즈의 잘못은 아니었다. 칼리번이 부족한 탓에 그가 나무 열매를 깔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두 손으로 나무 열매를 꾹 움켜쥐었다. ‘칼리번’일 때에는 한 손으로도 여유롭게 쥐었던 크기다.

‘왕자님께도 이렇게 컸겠구나.’

살면서 만난 사람 중 에레즈처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충분히 짜증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칼리번은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던 자그마한 몸과 하얀 얼굴, 커다란 푸른 눈이 가련해 보이기만 했다. 겁을 먹었구나, 라는 생각만이 들 뿐. 어째서인지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지금은….

“허튼 생각 하지 마십시오.”

“…윽?!”

그 순간, 칼리번은 아스터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예전의 그였다면 끌려가지도 않았겠지만, 에어리얼의 몸은 금세 틀어져 손에 쥔 나무 열매들을 빼앗겼다.

“윽…. 뭐 하는 짓이냐.”

칼리번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때, 아스터의 갑옷에서 비죽, 금사가 튀어나왔다. 금빛이었으나, 다소 색이 바랜 백금사였다. 그것은 능숙하게 나무 열매의 껍질을 굴리며 벗겼다.

“도저히 당신을 못 믿겠습니다.”

“…뭐라고?”

“당신은 제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숨만 잘 쉬면 됩니다. 천박한 짓도 용서하지 않지만, 에어리얼의 몸에 해가 가는 짓을 하려고 든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이깟 나무 열매 정도는 인간 아이라도 손쉽게 벗기니 괜찮겠다 싶지만, 뱀도 산 채로 뜯어 먹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것으로도 무슨 짓을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단단한 껍질에 싸인 나무 열매를 그대로 입에 넣어 에어리얼의 귀한 이를 부숴 버리는 자해를 할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

짜증은 짜증을 만나 더욱 큰 짜증으로 불어났다. 아스터의 짜증에 칼리번은 굉장히 짜증이 났다. 자신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무식한 몸을 지녔다는 말을 들어서도 아니었다.

“나무 열매를 벗기는 데는 고도의 손기술이 필요하다.”

아스터가 마치 왕자님을 모욕하는 것 같아서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정말 껍질째 먹으려 했던 겁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다.”

“입이나 벌리십시오.”

칼리번은 심히 기분이 상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스터에게 붙잡힌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러다가는 또 어디서 백금사가 튀어나와 강제로 입을 벌릴지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그러나 속으로는 저 녀석과는 뭘 해도 안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굳힐 뿐이다.

“…….”

칼리번은 아스터가 내미는 나무 열매를 이에서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씹었다. 아스터는 불만스러워했지만, 칼리번은 보란 듯이 나무 열매를 야성적으로 씹어 삼켰다. 열매의 즙이 입 밖으로 줄줄 흘렀다.

“나무 열매의 껍질을 벗기는 기술을 깎아내릴 거라면, 다음부터는 제대로 벗겨라.”

칼리번은 입 안에 남은 씨를 바닥에 퉤, 뱉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터는 어째서 칼리번이 이토록 나무 열매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칼리번은 붙잡힌 팔을 뿌리쳤다. 아스터는 이번에는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이 약해 빠진 몸은 또다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칼리번이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세상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자, 혼자 남은 아스터는 남은 열매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날름날름 집어먹었다. 아니, ‘먹는다’기보다는 투구 속으로 쑥 집어넣는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아스터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잘못 태어난 탓에 형체가 없는 괴물…….>

뒤죽박죽 섞인 에어리얼의 기억이 흘러들어 온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 * *

검은 숲은, 이전에는 그러한 이름이 아니었다. 예전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되었던 숲은, 8년의 세월 동안 마물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숲은 무한히 확장되었고, 지형 또한 인간계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우거졌다.

“…….”

칼리번은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하늘을 가렸다. 나무는 기괴할 정도로 굵고 커다랗게 자랐고 외피는 까맣게 탔다. 8년 동안 이 정도 크기로 자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식물이라기보다는 마물의 일종에 가까워 보였다.

아니, 어쩌면 숲이 달라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몸이 바뀌었기에, 더욱 위협적으로 느끼는 것일지도.

“위험합니다!”

“읏?!”

아스터가 칼리번을 멋대로 끌어안더니 훌쩍 나무 위로 올라갔다. 처음 칼리번은 발버둥을 쳤으나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습격한 마물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에어리얼이 소환한 마물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당신이 낳은 마물이지만, 에어리얼의 육체인 당신을 구별하지는 못하겠죠. 그러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혹여나 에어리얼의 몸을 빼앗길까, 아스터는 칼리번을 두 팔로 소중히 끌어안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에 등줄기로 주뼛주뼛 소름이 돋았다.

“…알겠다.”

그러나 칼리번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확실히 느껴진다. 숲의 분위기는 험악해져 있었다. 원래는 에어리얼에게 버림받은, 노쇠한 마물들이 몸을 숨기는 장소였었다. 그러나 왕성 북문 하늘에 발생한 검은 손자국으로 인해 마계에서 자란, 젊고 강한 마물이 대거 유입되었다. 아스터가 아니었다면 이미 마물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마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이런 곳은 어떻습니까?”

아스터는 은신처 후보 중 한 곳을 칼리번에게 소개했다. 밤마다 숲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장소라고 한다.

“나쁘지는 않다만, 이미 다른 마물이 사용한 흔적이 있군. 밤이 되면 돌아올 거다.”

“죽이면 되지 않습니까?”

“밤마다 그럴 자신이 있다면.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면 은신처를 찾을 필요가 있나.”

아스터는 신체 반응이 빠르고 강했지만, 은신처를 찾는 데는 한 조각의 재능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8년 전 봐 두었던 은신처들을 돌아보았다.

예전에는 수도와 왕국 전역을 떠도는 용병들이 곳곳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식량을 비치해 두곤 했다. 그러나 8년의 세월이 길기는 한 모양이다. 칼리번의 기억 속 은신처들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보급품은 털린 채였고, 그나마 쓸 만한 곳도 마물이 자리를 잡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 갈 곳이 없으면 밤에는 제 갑옷 안에서 자면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에어리얼은 언제 만나러 갈 겁니까? 당신도 되도록 빨리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아스터는 칼리번의 신중함이 지루해졌는지 쓸데없는 질문을 쏟아 냈다. 칼리번은 징징거리는 어린애를 업고 다니는 심정으로 이동했다. 사실 남은 은신처가 한 곳 있기는 했다. 절벽 아래에 있어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고, 마물도 찾지 않을 곳. 그러나 그곳은 왕자님과 보냈던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 아스터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쓸 만한 은신처를 구했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동굴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다음으로 괜찮은 곳이었다. 원래는 폭포가 쏟아지던 곳이었는데, 물은 마른 지 오래였고 정체 모를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칼리번은 아스터를 시켜 넝쿨 일부를 거둬 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야광 이끼 한 점 없어 어두웠으나 다행히도 다른 생물이 점거했던 흔적은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바람이 제대로 오가지 않아 매캐한 냄새가 났다.

“하아….”

칼리번은 커다란 바위에 몸을 누였다. 고작 반나절 이동했을 뿐인데 손발이 후들후들 떨렸다.

“에어리얼의 몸이 먹을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칼리번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터가 떠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온몸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왕자님도 이만큼 힘드셨겠지.’

이 말도 안 되는 체력은, 굳이 비교하자면 8년 전의 에레즈와 비슷할 것이다. 칼리번은 점점 말라 가던 에레즈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약하고, 아름답고, 가엾은 소년. 그러나 칼리번은 곧 고개를 저어 그 모습을 지우려 했다.

칼리번은 이미 에레즈를 만났다. 그는 칼리번이 기억하던 모습과는 달라져 있었다. 하얗고 아름다웠던 소년은 더는 없었다. 칼리번이 숲에 떨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던 유약하고 겁많은 모습 또한.

체격은 자랐으며 얼굴도 거칠어졌다. 칼리번의 시선을 빼앗았던 눈부신 금발은, 마치 그 자체를 증오라도 하는 것처럼 짧게 잘려져 있었으며 얼굴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흉터는 왼쪽 눈을 앗아 갔다. 마물의 입 안에서 씹힌 것처럼 흉터로 가득했던 얼굴…. 흡사 8년 전의 칼리번 같기도 했다. 푸른 보석안이 아니었더라면,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사내로 자랐고, 전사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칼리번의 세계는 8년 전에 중단되었기에, 계속 같은 구간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왕자님을 다시 만나 오해를 풀겠다는 것 자체가… 그분에게 누가 되는 일일지도 모르겠군.’

칼리번은 불쑥 떠오른 생각에 괴로워졌다. 에어리얼은 에레즈를 죽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이라면 에어리얼의 계략 따위는 진작에 간파해 ‘칼리번’의 육체를 도륙 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 몸을 안고 죽는 편이 그분에게 마지막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에어리얼의 껍데기는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실제로, 에레즈는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번은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입장이 반대로 바뀌어, 자신이 에레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분명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칼리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차피 시커먼 동굴 안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살아서 에레즈 프리드웬을 만날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지. 네가 스스로 정해.>

칼리번은 몸을 빼앗겼다. 그러나 강제로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칼리번은 아직 에어리얼만큼 오메가의 능력을 발현하지 못했지만, 그 사실 하나만큼은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정당한 계약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계약이었다.

칼리번은 북문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낳은 마물로 인해 죽어 가는 수많은 인간과 알파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던 그분의 모습. 자신의 선택이 낳은 뾰족한 죄책감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온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하지만….

‘…괴물이 되어서라도,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나의 오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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