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미줄의 성 下
에레즈는 꿈을 꾸었다.
…아니, 아니다. 따지고 보자면 그는 늘 꿈을 꾸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꿈이란 바람이었다. 이룰 수 없는 희망, 닿을 수 없는 그 사람.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래서… 꿈의 끝에는 언제나 그 사람이 있었다. 칼리번은 8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검은 눈동자. 그 눈은 한없이 에레즈를 바라볼 뿐이다. 어둠은 늘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사람의 눈동자는 달랐다. 겉보기에는 무감한 듯하지만 닿으면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사람이다.
칼….
칼리번.
에레즈는 8년 전, 한없이 작고 연약했던 소년으로 돌아가 그에게 달려갔다. 설령 그의 모습이 환상이어도 상관없었다. 붉은 오메가가 마물을 변신시켜 놓은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에레즈는 지난 세월 동안 수도 없이 속았으나, 앞으로도 계속 속아 줄 용의가 있었다.
진짜는 아니지만 이렇게 꾸며진 모습이나마 다시 볼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의 모습을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조차 감사할 정도로 그와 헤어진 세월은 너무나 괴롭고 길었다.
<칼…!>
무슨 용기가 샘솟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에레즈는 칼리번을 품에 안았다. 현실이었다면 감히 손끝조차 대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에레즈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 칼리번을 속박하듯 끌어안고는, 끝없이, 끝없이 그에게 매달렸다.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다시는 당신을 빼앗기지 않을게.
에레즈는 기도를 올리듯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본 적도 없으면서, 그는 인간의 아이처럼 간절했다.
<왕자님….>
칼리번의 부름이 뚝, 뚝, 핏물이 되어 떨어진다. 에레즈는 젖은 눈으로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흰 얼굴 위로 핏물이 떨어졌다.
에레즈는 그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에레즈를 지켜 주고 있었다. 칼리번의 등을 쓰다듬던 에레즈의 손이 길고 날카로운 검신에 닿았다. 그의 등 뒤로, 검이 꽂혀 있었다. 에레즈가 어찌할 새도 없이, 칼리번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을 끌어안으며 함께 주저앉았다.
등에 꽂힌 것은 검 하나뿐이 아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검과 화살, 창이 박혀 있었다. 온통 피투성이였다. 수없이 많은 상처가, 마물 혼혈인 그의 회복을 뛰어넘을 정도로 수도 없이 새겨져 있다.
<아, 아냐!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에레즈는 죽어 가는 칼리번을 끌어안고는 오열했다. 재회가 마지막이길 원치 않았다.
<내가 바랐던 건…!>
절망에 빠져 더듬거리는 에레즈의 얼굴 위로 손이 닿았다. 따스한 손길은 에레즈의 얼굴에 묻은 피와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에레즈가 아무리 불러도 칼리번은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시신 위로 울음을 토해 내며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오랜 통곡의 시간이 흘러 에레즈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짓물러 붉어진 눈 위로 수많은 마물이, 마물 혼혈이, 인간이 비쳤다.
칼리번을 이렇게 만든 자들….
그런데도 이들을 위해 왕이 될 것인가?
누군가가 에레즈에게 물었다.
* * *
“……음.”
에레즈는 잠에서 깨어났다. 젠이 찾아와 무지막지하게 깨워 대지 않은 것을 보니 다행히도 긴 잠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깊은 잠을 잔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 지난 8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함마저 느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몸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에 도리어 불길함을 느낀 에레즈는 몸을 일으켰다.
“…….”
제 몸을 살피던 에레즈의 시선이 왼손에서 멈췄다. 벼락을 맞은 나무처럼, 혈관을 따라 타들어 간 왼팔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손바닥과 손목 부분이 상처 없이 깨끗했다. 사라진 것은 외상뿐만이 아니었다. 늘 함께였던 왼손의 피로와 고통 또한 물에 씻은 듯 없어진 채였다.
잠들기 전, 젠이 주고 간 약초를 씹기는 했다. 마약성의 약초는 고통을 잠시 버티게 해 줄 뿐 상처를 낫게 하지는 않는다. 그 외의 특이한 점이라면, 칼리번의 손에 손끝을 닿은 채로 잠시 눈을 붙였다는 것뿐인데….
“설마….”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가설에, 에레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칼리번…?”
젠은 늘 ‘희망 따위를 갖지 말라’고 했다. ‘기적은 없다’라고도 했다. 에레즈 또한 지난 8년간 그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 순간, 에레즈는 희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적이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 혹시 깨어난 거야?”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칼리번의 손을 붙잡고는 간절하게 물었다. 그것 외에는 이 현상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에레즈가 잠들기 전처럼 굳게 눈을 감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답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칼리번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이라고….
* * *
왕성 북문 방어전은 알테르를 무찌르고 평화를 얻었다고 믿었던 인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왕성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방주는 붉은 오메가에 대한 증오로 들끓었다. 왕성 정화 작업을 마치고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수성을 주장하던 리론 후작의 입지가 좁아졌다.
“왕자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붉은 오메가를 빠르게 토벌하기 위해, 저희 왕실 재건 기사단에서도 병사 일부를 차출하겠습니다.”
수색대의 징집을 위해 리론 후작을 설득해야 했던 에레즈로서는, 결과적으로 좋게 흘렀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수색대는 신용병 연합에서 차출한 용병들로만 구성하고 싶습니다. 그 조건이 아니라면 저희는 수색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신용병 연합에서 전에 없던 조건을 걸었다. 에레즈는 인간 병사와 알파 용병을 혼합시킨 연합군을 바랐다. 그러나 데릴만은 이 점에 대해서는 완고했다.
“검은 숲에는 붉은 오메가가 소환한 마물로 가득합니다. 인간 남자보다도 훨씬 힘이 떨어지는 여자들로 채워진 군대…. 마물에게 식사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붉은 오메가의 수색과 토벌은 저희 알파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데릴만의 오른팔인 오드론이 거들었다.
“감히 기사단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냐!”
“제 부하는 현실을 짚었을 뿐입니다, 후작님. 후작님도 성에서 안전하게 숨어 있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숨어 있어? 어찌 그런 허튼소리를 한단 말인가!”
큰 전투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데릴만과 리론 후작은 기력 넘치게 으르렁거렸다. 에레즈는 잠시 고민했다.
“좋다. 다만 수색대를 이끌 지휘관은 내가 직접 선별하겠다. 신용병 연합과 기사단에서 고르게 배정하도록 하지. 이 점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겠지?”
“흠…. 알겠습니다, 왕자님. 따르겠습니다.”
에레즈는 일정 제약을 거는 조건으로 데릴만의 제안을 허락했다. 사실 에레즈로서도 위험한 숲의 수색은 신체적 특징이 우월한 신용병 연합에서 맡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에레즈가 앉은 의자 뒤에 선 젠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왕자님. 수색을 조금 늦추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때였다. 성녀단에서 반대의 의견을 꺼냈다.
“연이은 전투로 왕성은 사상자와 부상자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전쟁의 뒤처리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발생한 방어전으로 인해 저희 성녀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성녀들은 밤낮을 교대하며 봉사하고 있으나 인력도, 자원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수색대를 파견하면 성안의 병력이 줄 테고,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다시 습격을 당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로 성녀는 드물게도 반대 의견을 냈다.
“하지만 왕성은 자네들이 관리하는 보호막으로 공고하지 않나. 덕분에 이번 방어전에서도 피해는 외부에서 이동 중이던 피난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왕성 내부는 안전했지.”
“그렇긴 합니다만, 검은 손자국은….”
“검은 손자국이 발생하기 전에 붉은 오메가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다음에 발생할 검은 손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준비할 것인가.”
에레즈는 원로 성녀가 하려던 말을 이어받았다.
“공격이 먼저인가, 방어가 먼저인가는 우리가 알테르를 상대하면서 항상 다퉈 왔던 주제였지.”
“…그렇습니다. 예전의 저희는 성을 빼앗긴 저항군이었기에, 공격적인 선택을 우위에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왕자님께서는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더는 다친 병사를 이끌고 싸우는 방식이 아닌, 왕성에 자리 잡은 백성들을 포용하는 쪽으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대의 의견도 일리가 있군. 백성을 위한 길…. 하지만 나는, 검은 손자국이 다시 발생하기 전에 붉은 오메가를 잡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 희생자의 수를 줄이는 길이라 보고 있네. 알테르의 잔당과 붉은 오메가는 전 국토에서 왕성으로 향하고 있는 피난민들에게 큰 위협으로 될 것이야. 성안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성에 들어오지 못한 백성들을 먹잇감으로 넘겨준다면…. 그 또한 왕이 해서는 안 될 일이겠지.”
“…….”
“물론, 밤낮없이 부상자를 돌보는 그대들의 노고에는 우리 모두 감사하고 있어.”
원로 성녀는 고개를 숙여 에레즈의 감사를 받아들였다.
“네, 저도 왕자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성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화의 가능성입니다.”
“지하 감옥에 수용 중인 전쟁 포로들 때문인가?”
전쟁 포로들. 마물 혼혈이라기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마물이라기에는 어설프게 인간의 형태를 띤… 기형 알파가 그것이었다.
알테르가 패배한 후, 그의 잔당은 대부분 검은 숲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성에 남은 마물과 마물 혼혈들도 있었다. 적은 보이는 족족 죽였다. 그러나 전쟁 포로가 된 기형 마물들은 달랐다. 이것들만의 기묘한 ‘특수성’ 때문에 처형하지 못하고 지하 감옥에 몰아넣은 상태였다.
에레즈와 세 기둥은 이것들의 처분을 논의한 끝에 한꺼번에 수장시키기로 정했다. 우기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비가 충분히 내릴 때까지 신용병 연합 측에서 관리 중이었다.
“지금은 얌전하지만, 만일 저것들이 탈출한다면 성내에서 큰 혼선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끝난 일이라고 여긴 지점을 성녀단에서 짚고 넘어가자, 리론 후작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기형 알파는 인간 병사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특히나 남자 병사를 본 알파는 번식욕이 들끓어 힘이 강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용병의 수가 준다면 포로 관리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형 알파를 죽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붉은 오메가를 영영 놓칠 수도 있다.”
에레즈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자님. 그리고 기사님과 성녀님.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희 용병 길드에서 충분한 전력을 남겨 두겠습니다.”
신용병 연합은 웬일인지 힘든 역할을 자처했다. 보상을 바라던 그들이 이토록 이타적으로, 그것도 종이 다른 인간들에게 선뜻 힘을 나눠 줄 리가 없었다. 리론 후작마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놀랍군. 이번에 바라는 것은 무엇이지? 원하는 것을 먼저 언급하지 않으니 리론 후작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나? 아니면 일을 마무리한 이후에 청구할 셈인가.”
에레즈는 일부러 데릴만을 떠보았다. 리론 후작은 불만스러운지 어으흠, 목을 울리며 헛기침을 했다.
“이룰 수 없는 소망 외에 저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저번 회의에서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책임을 어깨에 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데릴만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희도 이제 떠돌이 용병이 아닌, 왕자님의 충실한 신하이지 않습니까? 성녀단이나 왕실 재건 기사단만큼은 못하겠지만, 저희 나름으로 보이는 충의입니다. 왕자님. 저번 회의에서 언급했던 제안을 다시 들이밀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래서야 일방적인 강요인 것 같아 유감이군.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자네들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네. 대신 붉은 오메가의 목을 베면, 정당한 작위와 더 넓은 영지를 약속하도록 하지.”
“그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왕자님께서 하사하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데릴만은 리론 후작의 흉내를 내며 절을 했다. 알파가 에레즈의 신의를 얻자, 리론 후작은 분하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그 후로 리론 후작의 모습이 볼만했지. 수색대에 인간 병사를 반 이상 파견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말이야. 로위나 녀석이 제 아비를 진정시키느라 고생 좀 하더만. 남자 몸으로 난리를 피우면 피울수록 알파의 흥미를 자극한다는 걸 그 사람은 알려나 몰라?”
젠은 부러진 나무판자를 지팡이처럼 쥐고는 마구 휘두르며 리론 후작을 흉내 냈다.
“이름뿐인 후작이라고 해도 인간들이 따르는 자입니다. 이곳에 저희 둘뿐이지만 너무 놀리지는 마십시오.”
“아차.”
젠은 겸연쩍게 웃고는 나무판자를 부서진 의자 위에 올려두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서진 의자가 원상 복구되지 않았다. 젠은 슬쩍 제 몸으로 의자를 가렸다.
“알파가 자신과 같은 귀족 작위를 받고 왕성을 누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그런 거겠죠. 그는 알파에게 장남을 잃었으니까요.”
“하! 여태까지 살아남은 놈들 중에 그런 사연 없는 녀석이 또 있겠어? 얼굴에 천 좀 둘렀다고 혼자 유세 떨기는….”
젠은 으하하 웃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뒤로 뻗어 의자를 짚었는데, 다리가 부러진 녀석이라 함께 휘청였다. 사색이 된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다시 잡았다. 이토록 표정이 자유분방한데, 회의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느라 그녀도 참 고생이었을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장소는 본성 안쪽에 자리 잡은 집무실이었다. 에레즈는 그곳에서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옷 갈아입는 데 평생 걸리겠네. 팔 들어 봐.”
“……네.”
에레즈가 겉옷을 이로 물고 벗으려 들자, 보다 못한 젠이 손을 빌려주었다. 넝마 같은 겉옷을 벗겨 내자 우견 아래로 빈 소매가 흔들거렸다.
“눈 한쪽이 비었는데 이제는 팔도 한 짝 없고….”
젠이 중얼거렸다. 익숙한 광경이지만 봐도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에레즈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흘려 넘겼다.
프리드웬 왕실의 제6 왕자이자 황금 피라 불리는 인류의 구원자. 그의 신분이라면 성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넓은 침실에서 수많은 하인의 옷시중을 받아도 모자랐다.
그러나 시절이 좋지 못했다. 오랜 세월 마물의 피와 배설물로 더럽혀진 성은 오물과 악취로 가득해, 성을 복구하는 것보다 무너뜨리고 새로 짓는 편이 차라리 나을 정도였다. 온전한 방은 몇 군데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기사와 성녀를 수용하기에는 모자랐다.
지금 에레즈가 사용하는 방은 원래는 알테르 프리드웬이 쓰던 곳이 아닌가 추정되는 장소였다. 마지막 전쟁의 후유증으로 그마저도 곳곳이 무너지고 어지러웠다. 곳곳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알테르가 쓰던 방이라니, 에레즈는 차라리 본성 밖에서 병사들과 함께 자고 싶었다. 그러나 젠이 이 방을 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장차 왕이 될 녀석이 이 정도도 못 버티냐!’라는, 잔소리를 들은 것은 덤이다.
“…이번 회의로 확신이 들었어. 데릴만 측에서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야. 틀림없어.”
젠은 에레즈의 왼쪽 소매에 달린 단추를 풀어 주며 말했다.
“네,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그들 없이 붉은 오메가를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건 그렇지.”
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 또한 신용병 연합 소속의 알파이기는 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에레즈의 부하로 낙인이 찍힌 지 오래였다. 그렇다 보니 신용병 연합 측의 정보를 빼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야, 데릴만의 주장은 마물 혼혈이라면 할 만한 생각이기는 해. 우리 같은 알파 입장에서 인간 병사들은 뭐랄까, 너무 쉽게 죽어서 거추장스럽거든.”
젠은 양팔을 뒤통수로 넘기고 기지개를 켰다. 이번 회의에서 데릴만은 대놓고 여자 병사는 약해 빠져서 쓸모가 없다는 만언을 저지른 것이다.
“나야, 뭐. 알파인데 여자로 태어난 ‘썩은 이빨’이니까 별 거리낌은 없지만 말이야. 평범한 알파는 여자를 자신과 완전 다른 존재라고 느끼더라고.”
“하지만 인간 병사의 수는 용병의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약하다고 해서 덜 싸웠다는 뜻이 아니죠. 용병만으로는 알테르를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오, 제법인데. 이번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가 죽었는지…. 잘 알지. 하하, 설마 내가 그걸 모르겠어?”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에레즈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젠은 에레즈의 어깨를 툭 치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에레즈는 한 손으로 가슴팍에 달린 단추를 천천히 풀어 나갔다. 원래 오른손잡이였던 터라, 손길이 빠르지 못했다.
“에레즈.”
“네.”
“검은 숲 수색은 내가 가겠어. 그러니 다음 회의에서 나를 지휘관으로 지명해라.”
“스승님께서 말입니까?”
에레즈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왜? 설마 네가 직접 출정할 작정이었어?”
“그야, 위험한 일이니까요.”
에레즈의 염려에 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낄낄 웃었다.
“위험?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아냐?”
“…….”
“용병 놈들을 감시하는 데는 너보다 내가 훨씬 나을 거다.”
“그렇다면 젠과 제가 각기 다른 구역의 지휘관을 맡는 편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단추를 풀어 나가던 에레즈의 손길이 끊겼다.
“뭐, 좋아. 칼리번을 구하고 싶다고, 내게 울면서 매달리던 울보 꼬맹이라면 지휘관으로 참여해. 나쁘지 않겠지. 목숨 하나 들고 가서 날려 봐. 유익한 경험이 될 거다.”
“…….”
“…하지만 왕이라면 여기에 남아라.”
에레즈는 낡은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네가 멋대로 굴 수 있는 건 알테르의 목을 베기 전까지였어. 만약 왕성에 검은 손자국이 다시 발생하면 그때는 어떡할 거지? 그때 성에 남아 있던 게 네가 아니라 나라면? …나는 이 한 몸 불살라 적을 쓰러뜨리는, 그런 기막힌 능력은 없거든. 끽해야 칼리번 녀석 하나밖에 지키지 못해. 골치 아프다 싶으면 저놈마저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고.”
“스승님께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야 모를 일이지. 덜미를 잡혀서 눌러앉기는 했지만, 난 태생이 떠돌이 용병이라고?”
“…….”
“하지만 너는 달라. 너라면 저번처럼 방어할 수 있어. 아! 그 망할 힘은 되도록 안 썼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붉은 오메가를 향한 분노는 에레즈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오른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으나, 왼쪽 눈꺼풀은 텅 비어 있어 움직이지 않았다.
“스승님. 만약 용병들이 붉은 오메가의 향기에 넘어가 이용당한다면요?”
“내가 있잖아?”
젠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내가 붉은 오메가와 한통속이 될 거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따지고 보면 너도 마물의 피가 흐르니까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 이 망할 자식아.”
“……너무 위험합니다.”
에레즈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젠은 각오를 다지듯 숨을 깊이 들이 삼켰다.
“너만큼은 아닐 수도 있지만…. 나도 붉은 오메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은 커. 이왕이면 다른 용병 놈들보다 내 손으로 죽이고 싶고.”
“…….”
“…그리고 왠지 붉은 오메가는, 너보다는 내가 발견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거든.”
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레즈는 그 말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럴 리가요. 붉은 오메가는 신중한 책략가입니다. 전쟁 중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잖습니까?”
“아마 날 보면 견디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지.”
어째서? 에레즈는 말없이 의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정말로 알고 싶어?”
젠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에레즈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숨긴 짐승의 얼굴. 이럴 때면 젠은 수십 년을 살아온, 아니, 살아남은 알파로 보였다.
“그야, 이 몸은….”
젠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수십 년 동안 마물을 상대로 살아남은 최고의 용병 조직 ‘검은 어금니’의 부대장이자, 전쟁을 누비며 아군에 승리를 가져다준 전설적인 왕실 재건 기사단의 단장인데다, 왕실 직속 호위 기사이고, 연합군의 지휘관인 것으로도 모자라 8년 전에는 칼리번의 부하였고 지금은 왕의 오른팔’이기 때문이지!”
“…!”
“네가 붉은 오메가라도 날 제일 먼저 죽이고 싶지 않겠어?”
젠은 이를 드러내며 씩 미소 지었다.
“과연 그렇겠군요.”
에레즈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좀 있고……. 그러니 이번 수색은 나에게 맡겨.”
이미 답은 정해졌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고민했다. 붉은 오메가에게 복수를 하느냐, 이곳에 남아 백성들과 칼리번을 지키느냐. 당연히 후자가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그러나… 붉은 오메가를 쫓는 일은 필연적으로 전투가 따른다. 반면, 성에 남으면 아무 일도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므로 에레즈는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붉은 오메가가 다시 침략할 경우를 대비해 방비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에레즈는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좋아! 나만 믿으라고. 거기다 너, 저번 방어전 때문에 몸 상태도 엉망진창이잖아? 이참에 회복해 두도록 해.”
젠은 에레즈의 오른팔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에레즈는 그제야 배려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승님, 그건…. 부상이 심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허세 부리기는. 아파 죽으려 그랬으면서. 눈도 잃고, 손도 잃고, 이번에는 양손을 잃고 싶은가 보지?”
젠은 커다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 보아도 의지하고 싶어지는, 시원한 미소였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예전에 그녀와 함께 용병 생활을 지냈을 때도 이런 신뢰감을 느꼈는지 궁금했다.
칼리번.
칼리번….
“저… 스승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칼리번이라는 존재. 에레즈는 결심을 굳혔다.
“뭐야, 인제 와서 무르겠다는 건 아니지? 안 돼, 인마! 검은 숲 수색은 내가 할 거야.”
젠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부서진 의자가 그녀의 발에 치여 데굴 굴렀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곧 왕성을 떠나실 테니….”
역시 스승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에레즈는 그렇게 말하며 왼쪽 소매를 걷어 보였다.
“으엑! 네 몸 보고 싶지 않은데? 가지각색의 역겨운 상처 자랑은 그만둬!”
흉터로 가득한 몸을 예상한 젠은 벌써부터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고개를 돌리며 헛구역질하는 척을 하던 젠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잠깐, 상처가…?”
젠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왕성 북문 방어전 이후, 에레즈의 왼팔과 좌견은 핏줄을 따라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전신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으나, 왼손과 팔뚝까지의 상처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기묘한 존재였다. 그의 몸에는 마물의 피가 흐르면서, 동시에 성검을 사용할 수 있는 성력 또한 존재했다.
문제는 그 두 힘이 부딪친다는 데에 있었다. 성력은 본래 회복시키는 힘, 보호하는 힘이다. 그러나 마물의 피에 오염되었는지, 에레즈의 성력은 마물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반대로, 성력 또한 마물의 경이적인 회복력을 약화시킨 듯했다. 그래서 일반적인 알파와 달리 에레즈의 몸에는 영구적인 장애와 흉터가 남게 되었다. 회복력 또한 전쟁 내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에레즈의 상처가 며칠 사이에 이토록 빠르게 회복되다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에레즈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
“상처가 회복되었을 때, 제가 그 사람과 조금… 아주 조금, 닿아 있었다는 겁니다.”
에레즈는 칼리번과 닿았던 손가락을 서로 만지작거렸다. 젠은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제게 반응을 보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
“그 사람이 저를 치유해 준 것… 아닐까요?”
“…말이 되겠냐?”
“분명해요. 그 사람이….”
“그보다 너, 내 말 들리긴 하냐?”
에레즈가 그의 이름조차 소중하다는 듯, 함부로 입에 담지 않고 속닥거렸다. 젠은 썩은 표정으로 에레즈를 보았다. 그러나 에레즈는 칼리번을 떠올리느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스승님.”
“왜?”
에레즈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젠을 불렀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대답하기를 망설였으나, 에레즈가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고 있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 사람이 저와 숲에서 지냈을 때, 저를 구하려다 오른팔을 잃게 된 일, 혹시 알고 계시나요?”
“어, 알지. 벌써 오백 번째 듣는 이야기잖냐.”
젠은 에레즈가 지겨운 얘기를 그만해 주길 바라며 대답했다. 그러나 에레즈의 푸른 눈은 젠이 아닌, 왕성 깊은 곳에 잠든 칼리번을 담고 있어 그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저도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은 오른팔입니다. 우연인지, 아니면 제게 내려진 합당한 벌인지….”
그 말에 젠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아래로 향했다.
“8년 전의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 때문에 팔까지 잃었는데도… 나약한 저는 한없이 무력했죠. 그를 도와줄 수도 없고, 그를 대신해서 싸워 줄 수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데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는 거?”
당연히 젠은 이어질 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오백 번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 사람은 한 번도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당시의 저는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울기만 했는데…. 그래서, 저는 막연히 칼리번 같은 용병은 누구나 그렇게 강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만이 강했을 뿐입니다.”
“어……. 그래.”
“이 부상을 통해 그가 겪었던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게 된 것 같다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제 부상은 그 사람의 반의반도 안 되는 데 말이죠.”
에레즈는 잘린 오른팔의 단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젠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야.”
그녀가 참다못해 한 소리 했지만, 에레즈에게는 당연히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잘린 팔을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른팔은 마땅히 잘릴 만했다. 왼쪽 눈도, 수많은 상처와 흉터들도. 그 모든 것이 칼리번을 구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이자 칼리번을 버리고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당연한 벌이었다. 에레즈는 일말의 의심 없이 그렇게 여겼다.
‘미친놈.’
그런 에레즈를 보며 젠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에 한해서는 제정신이 아닌 편이었다. …도대체 8년 전, 칼리번이 뭘 해 줬길래 저렇게 미친놈이 되었을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칼리번보다 오히려 젠이 에레즈를 가르친 기간이 더 길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젠에게 저렇게까지 공경하지는 않는다. 막상 에레즈가 들려주는 그 시절 얘기는 별것 없었는데 말이다.
설마 그때 머리를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
“……아.”
한참이나 말을 늘어놓던 에레즈가 한쪽 눈을 깜박였다.
“드디어 정신 차린 거냐?”
젠은 희망을 품었다.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서없이 말하다 보니 이야기가 딴 데로 흘렀군요.”
“그래, 눈치챘다니 다행이다.”
“…하여간 그때, 그 사람의 잘린 팔이 하루 만에 회복되었습니다. 분명 그에게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
“그래서 어쩌면, 이번에는 저를 치료해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저 같은 것을 치유해 줄 리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
“제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그 사람에게 이런 굉장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 나간 결론을 내리는 에레즈의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기쁨이 서려져 있었다. 칼리번이 어쩌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야트막한 기대. 그런 에레즈의 모습은 지난 몇 년간 거의 보지 못했다. 오랜 세월 마물을 상대하며 우울한 성정이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을 되찾은 후로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조금씩 늘어났다. 젠이 보기에, 그 모습은 분명 보기 좋았으나….
“에레즈.”
“네, 스승님.”
“웬만하면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그건 아니지.”
젠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칼리번에게 그런 치유 능력은 일절 없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과거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보다는 차라리 네가 스스로 치유했다는 편이 더 신빙성 있지 않냐?”
“…네?”
에레즈가 되물었다.
“그 정도 회복력은 우리 같은 알파한테는 흔해 빠졌어. 그동안 억눌려 있던 마물의 피가 힘을 좀 썼는지도 모르지. 네 생각에도 그편이 더 말이 되지 않겠냐?!”
“…….”
논리적인 반박이었다. 에레즈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대신 푸른 눈으로 젠을 쏘아보았다.
“너, 이 자식. 허튼 희망을 품을 것 같아서 기껏 알려 줬더니 노려봐?”
“…스승님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르긴 뭘 몰라! 적어도 너보다는 잘 안다. 아…. 헛소리를 듣다 보니 나까지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 같네. 내가 쓸데없는 희망은 품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칼리번을 되찾은 후로 해이해진 것도 정도껏이지. 다시는 그런 개소리는 하지도 마라.”
“그런 걸까요?”
“그래, 인마!”
“…….”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젠은 더는 못 견디겠는지 팔짱을 단단히 꼈고, 에레즈는….
“…하지만 역시 그 사람밖에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
“적당히 해!”
젠이 결국 일갈했다.
“…….”
에레즈는 침울해져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나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에는 여전히 미련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게 되면 그 자식이 성녀지, 용병이겠냐!? 성녀복 입은 칼리번? 생각만 해도 역겹다!”
웩!
젠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에레즈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강하고, 의지가 깊고, 저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강직하며 듬직한데….”
“내가 8년 전에 그 녀석을 돌대가리라고 불렀다는 얘기는 기억도 나지 않지?”
“…하아.”
“하아?”
젠이 못마땅해하자 에레즈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다고 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스승님은 역시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그 어떤 용병보다도 강하고, 그 어떤 기사보다도 기사도가 넘치는… 왕국 최고의 전사 그 자체입니다.”
“저 녀석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훨씬 잘 알거든?!”
젠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답답하다, 답답해…. 칼리번 녀석은 널 싫어한단 말이다! 얼마나 싫어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넌 진짜… 저놈이 깨어나면 두들겨 맞아서 장작이 될 운명인 줄도 모르면서….’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수색대에 자신이 아닌 에레즈를 지휘관으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뒤늦게 후회했다.
에레즈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잠든 칼리번의 정조를 위해서!
* * *
세 기둥의 의견이 가까스로 통일된 덕분에 붉은 오메가를 토벌하기 위한 수색대는 빠르게 꾸려졌다. 대부분의 병사는 신용병 연합에서 차출했으며 왕실 재건 기사단에서는 젠을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스승님. 무사하십시오.”
수색대가 왕성을 떠나기 전, 에레즈는 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젠은 에레즈의 직속 부하였으나 알파이기도 했기에 단독으로 지휘관을 맡았다.
“이런 시기에 무사할 수가 있겠냐. 다소의 희생이 생기더라도 붉은 오메가를 잡을 수 있길 바라야지.”
“저는 스승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정말?”
“…….”
“내가 전부터 말했지. 넌 거짓말을 못 하니까 아예 말을 말라고.”
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에레즈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숲에서 데릴만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지도 확인해 보마.”
젠은 절을 올리는 척하면서 낮게 소곤거렸다.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데릴만을 중심으로 꾸려진 부대로 향했다. 알파로 구성된 병사들은 인간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데릴만은 그런 무리 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내다. 그의 곁에는 왕실 재건 기사단에서 파견한 기사가 함께 서 있었는데, 그녀의 체격이 그를 더욱 강대해 보이게 했다.
“여우라면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왕성 어딘가에 숨겨 놨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경비에 소홀하지 말도록.”
데릴만은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용병들을 다스릴 대리인에게 명령했다. 신용병 연합의 부대장 오드론은 고개를 깊게 숙여 복종의 의사를 비쳤다.
“…….”
곁에서 말을 탄 기사가 귀를 기울여 들었지만, 그녀로서는 데릴만이 하는 말의 저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준비는 그럭저럭 되었고, 에레즈의 허락만 떨어지면 바로 출병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으윽!”
그때였다. 붉은 오메가는 아직 머리카락 한 올도 비추지 않았는데, 벌써 낮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에레즈를 비롯한 지휘관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은혜도 모르는 녀석, 네가 감히 알버트의 갑옷을 망가뜨려?!”
소란의 주인공은 리론 후작이었다. 그는 제 여식인 로위나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마, 망가뜨린 것이 아닙니다. 오라버니의 갑옷은 제 몸에 맞지 않아,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개량했을 뿐입니다.”
“네가 지금 무슨 지껄이는지 알고 혀를 놀리는 것이냐? 그건 네 오라비의 유품이다!”
로위나의 얼굴 위로 시퍼렇게 멍이 올랐고 입가에는 피가 흘렀다. 그리고 리론 후작의 손에는 로위나의 것이었을 투구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 주는 흔적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실정으로는 검을 만들 쇠붙이조차 부족합니다. 쓸 수 있는 무기를 묵혀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리론 후작은 제 딸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는커녕 반박한다는 사실에 더욱 눈이 돌아갔다.
“감히…!”
그는 역성을 내며 피가 묻은 투구를 다시 들어 올렸다.
“큭….”
그런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은,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무수한 시선 때문이었다. 수십, 수백 개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네가 저지른 잘못은 귀환 후 처분을 내리도록 하겠다.”
리론 후작은 한발 물러섰지만, 부지휘관의 명예는 이미 땅에 떨어진 후였다. 그렇다고 출정을 무를 수는 없었다.
“……. 모두에게 무운이 따르기를 기원하겠다.”
에레즈가 관여하기 전에 다툼이 끝나 버렸기에, 그는 예정대로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병사들을 왕성 밖으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리론 후작은 떠나는 자식에게 축복의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다.
* * *
“칼.”
에레즈는 깨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 작고 폐쇄된 방은 마치 시체를 보관하는 거대한 관처럼 느껴졌다. 설령 칼리번이 죽어 시체가 되었다고 한들, 그의 곁을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동안은 조금 바빠질 것 같아. 붉은 오메가를 잡기 위해서 스승님…. 당신 앞에서는 젠이라고 이름을 말하는 편이 나을까? 하여간 그분께서 왕성을 비우셨거든. 오래 성을 비우는 건 아니고, 열흘 정도 검은 숲을 수색하고 보고를 위해 돌아오게 될 거야. 만약 그 안에 붉은 오메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같은 일정이 반복되겠지만….”
에레즈는 오랜 시간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승님이 아니라 내가 숲으로 떠났어야 했는데.”
그것이 본심이었다.
“…당신한테도, 나 같은 것보다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스승님이 더 편하겠지? 거기다 난…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이니까.”
에레즈는 차마 칼리번을 바라보지 못하고 왼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젠이 없었다면 그는 용병 연합과 기사단, 성녀단 그 누가 만류해도 직접 부대를 꾸려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왕이라면 여기에 남아라.>
젠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
에레즈는 눈을 감고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왕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이 자리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을 뿐이다. 붉은 오메가를 죽이고, 정세가 안정되면 다른 이에게 직위를 넘길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칼리번만 무사하다면 다음 왕이 누가 되든 상관없다. 리론 후작이든, 데릴만이든. 심지어 젠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 전하 만세!>
<만세!>
<앞으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날 들었던 인간들의 환호가 어째서인지 귓가에 환청으로 맴돈다.
“난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데….”
백성들의 경외가 버겁고 부담스럽다. 그는 성녀들처럼 이타심이 깊지도 않으며 데릴만처럼 제 무리를 책임지는 배포도, 리론 후작 같은 명분도 없었던 것이다. 에레즈의 내부에는 오직 칼리번 한 사람뿐.
에레즈는 의도적으로 칼리번과 같은 무게를 지닌 존재를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이를테면, 때때로 그는 발작 같은 발정에 시달리기도 했다. 칼리번으로 인해 알파로서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에레즈는 괴물 같은 자신이 너무나 끔찍해 자해를 했다. 칼리번은 지금도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그를 그리워하며 발정을 하는 자신이 역겨웠다.
젠은 알파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 시기만 버티면 된다고 했지만,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았다. 자신은 칼리번을 잃었으니 당연히 그를 되찾을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만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마물의 본능은 마음과는 반대로 날뛰었다. 징그러웠다.
<알아서 버티지 왜 굳이 매를 벌까? 다른 녀석은 이번만 봐주겠다고 하면 좋아 죽던데…. 넌 뭐가 불만이라 애먼 허벅지에 조각을 하냐고.>
계속되는 에레즈의 자해를 보다 못한 젠이 그를 묶었고, 묵직하고 거대한 몽둥이를 만들었다. 용병대 부대장이었던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뭐, 알파로 태어난 게 죄라면 죄지. 원래 용병들은 다 이렇게 러트를 보내니까 날 너무 원망하지는 마라.>
<…….>
<왜? 이 몸에게 맞으려니까 갑자기 정신이 들기라도 했어? 봐, 봐! 이래서 예로부터 광증에는 매가 약이란 말이 나오는 거라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무, 슨….>
<넌 아직 어려서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러트가 오면 미쳐서 남자한테 달려드는 녀석도 있단 말이지. 용병대에 입적하지 않은 녀석 중에는 그런 식으로 멋대로 인간을 습격하다가 기사단에게 잡혀 죽은 녀석도 있어. …이것도 다 옛날 일이지만.>
얌전히 나무에 묶여 있던 에레즈는 어느 순간부터 젠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카, 칼은… 그, 그런 말, 하지 않았는데…….>
숲에서 숨어 지내던 당시, 에레즈가 러트에 시달리자 칼리번은 별것 아닌 일이라며 직접 열기를 풀어 주었다. 알파로 구성된 용병대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라며 달래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뭘?>
에레즈는 막연히, 알파들끼리 서로 성욕을 풀어 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에게는 칼리번이 모든 경험의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가 서툴러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익숙해 덤덤한 것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에레즈는 젠을 비롯한 다른 얼굴 모를 용병들에게 감히, 질투라는 감정을 품기도 했던 것이다.
<카…. 칼, 리번! 칼! 카, 칼리번…!>
몇 년 뒤에야 진실을 깨달은 에레즈는 허우적거리며 칼리번을 찾았다.
<뭐야?>
젠은 의아해했다. 그 순간, 단단히 매 두었다고 생각한 끈이 풀어지고 에레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유를 얻었다.
…어떻게?
<이 자식이, 큭…. 정신 차려…! 얌전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왜 이러는 거야?! 칼리번은 없다고 몇 번을 말하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젠이 발버둥을 치는 에레즈를 제압했다. 그동안 자주 이런 식으로 에레즈의 자해를 막아 오곤 했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 젠을 걷어차고는 냅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큭…. 젠장! 야, 거기서!>
등 뒤로 젠의 욕설이 쏟아졌으나 에레즈는 미친 사람처럼 밤중의 산을 뛰어다녔다.
<칼… 카, 리번! 카, 칼, 리번…! 미안… 해, 미, 미안해! 내, 가. 내가…!>
깊은 밤. 주변은 온통 어두웠다. 검은 잎사귀가 에레즈의 뺨을 때리고 온몸에 생채기를 남겼다. 에레즈는 황량한 벌판을 달려 인근의 숲을 뒤졌지만, 칼리번을 찾지 못했다.
<내, 내가 잘못했어…! 도, 돌아와…. 내, 내가 잘, 잘못했으니까, 그, 그러니까, 도, 돌아와 줘!>
뒤늦게 빌어 보았으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숲에서 자신 대신 목숨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약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왜, 왜…? 나, 나 따위한테…. 왜 그, 그렇게… 대해, 준 거야?>
에레즈는 울부짖었다.
<어째서…?!>
<거기 서, 이 망할 자식아!>
젠이 쏜살같이 쫓아와 그를 억지로 끌고 갔다.
<으, 우윽, 으…아, 아아아…!>
에레즈는 몸을 웅크린 채 오열했다. 답은 알고 있었다. 칼리번은 꽃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그 대가는 다름 아닌 칼리번의 목숨이었다. 에레즈는 꽃이란 것이 그렇게 귀하고 비싼 줄 미처 몰랐다. 며칠이 지나면 시들어 버리고 말 풀떼기에 비하면 칼리번이라는 존재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비쌌다.
꽃을 주는 게 아니었다.
꽃을 주지 않았다면, 칼리번이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을 텐데!
모두 자신의 잘못이다. 모든 것이… 나약한 자신의 탓이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칼리번의 손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 칼리번.”
그는 뒤늦게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나 한번 쥔 손을 놓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놓고 싶지 않았다.
거친 손.
에레즈는 단 한 번, 칼리번과 하나가 되었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러트에 시달려 어쩔 줄 몰라 하던 자신을 조심스럽게 다독여 주던 손길.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조금씩 색을 잃어 가던 칼리번과의 기억이 그 감촉으로 인해 되살아났다.
굳은살이 박인, 검을 오래 잡은 자 특유의 손이었으나 에레즈는 한 번도 그의 손길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소중히 대해 줬는지를….
“나는… 당신이 내 상처를 치유해 줬다고 믿고 있어.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야.”
…심지어 지금까지도. 에레즈는 칼리번과 연결된, 깨끗해진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스승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셨어. 내 안에도 마물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그 힘이 내 몸을 회복시켰다는 편이 맞을 거라고. …확실히, 스승님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겠지. 하지만 그런데도 자꾸만 가져서는 안 되는 희망이 들어. 당신이 날 치유해 주고 있다는, 그런 희망….”
죄책감의 반대편에는, 이런 부족한 나라도 용서해 줄지 모른다는 헛된 소망이 늘 달라붙어 있었다. 에레즈는 엄지로 칼리번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어서 당신이 눈을 떴으면 좋겠어. 그것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할 거야. 그리고 눈을 뜨면… 이번에는 반드시 당신을 지킬게.”
에레즈는 고개를 저어 수많은 백성을, 수색대를, 기사와 병사를, 용병을, 성녀를 잊으려 했다. 지금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오직 칼리번뿐이었다. 그런 에레즈의 간절한 바람에 답하듯, 칼리번은 그날부터 끝없는 악몽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