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왕성 북문 방어전 (14/50)

4. 왕성 북문 방어전

칼리번은 괴조에 붙잡힌 채 창공을 비행했다. 목숨을 담보로 삼아 괴조를 얻어 탔으니 섬세한 조종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상공의 가르는 거친 바람에 가느다란 팔다리는 부러질 것 같았고 숨을 쉬기조차 버거웠다. 붉은 머리카락은 거추장스럽게 휘날리며 얼굴을 뒤덮었다.

‘이 망할 빨강 머리는 전부 밀어 버리겠다.’

만약 오늘 이후로도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면, 말이다. 칼리번은 그런 결심을 하며 전황을 살폈다. 칼에 베인 듯 찢어진 하늘에서 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지점은 수복된 왕성의 북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북문으로 이동하던 피난민의 위였다. 하늘 위에서 아래를 살피니, 가늘지만 길게 늘어진 피난민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들 위로 떨어지는 마물은 최악의 귀환 선물이었으리라.

북문 주변은 피와 비명으로 가득했다. 지난 8년간 마물과 알테르를 피해 정처 없이 떠돌거나 땅굴을 파서 살던 피난민들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겠구나, 기뻐하며 이동하던 그들은 이제 마물에게 습격을 당해 죽거나 하나둘씩 잡혀가고 있었다.

“으아악! 사, 살려 줘! 마물이 우리를, 죽…. 크아악!”

“아,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안 돼! 나도 들어가게 해 줘어!”

“문을 닫지 마! 제발!”

피난민들은 어떻게 해서든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갑자기 성문을 확장시켜 모든 인원을 한꺼번에 들일 수는 없었다. 혼란에 빠진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는 먼저 들어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저들끼리 눌리고 밀치며 사상자가 더 늘어나고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마물 혼혈들이 이 기회를 틈타 전투에 끼어든 것이다. 그들은 마물과 한 편을 먹고 인간들을 사냥하거나, 반대로 인간들의 행렬을 틈타 성안으로 진입하려 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칼리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기억은 대부분 8년 전에 수렴해 있었으므로, ‘마물 혼혈’이라는 동족에게 갖는 특징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인간을 공격하는 마물 혼혈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마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사령관님! 적이 너무 강합니다. 심지어 알테르와 싸울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필사적으로 피난민들을 성안으로 인도하던 사령관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대로는 알테르의 잔당을 대거 안으로 들이게 된다. 성안 백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 난리 통이라 적을 일일이 분류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이미 적들은 인간 사이에 숨어 병사를 살해하고 있었다.

더구나 사내들은 공포에 눈이 뒤집혀 자신들이 먼저 성에 들어가겠다며 아이와 노인을 강에 빠뜨리거나, 여자를 마물들에게 집어 던지고 있었다. 힘이 부족한 약자들은 점점 뒤로 밀려나, 사람들에게 짓밟혀 죽거나 마물에게 처참히 살해당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윽, 허억….”

칼리번은 인근 숲에 당도했다. 아니, 떨어졌다. 놓지 않으려 하는 괴조에게서 억지로 벗어난 것에 가까웠다. 칼리번의 몸이 땅을 몇 바퀴나 굴렀다.

“윽…. 젠장….”

고작 바위에 부딪히고 땅을 구른 정도로 온몸이 쑤셔 왔다. 칼리번은 신음을 삼키며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높은 지대로 걸음을 옮겼다.

네발로 기다시피 해서 향한 곳은 벼랑 위였다. 무릎을 꿇었던 그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이 그를 흔들고,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칼리번은 고개를 들어 ‘검은 손자국’을 올려다보았다.

“안 돼….”

칼리번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찢어진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마물들.

그건….

‘전부 내가 낳은 마물들이다.’

지금의 몸이 아닌, ‘칼리번’의 몸으로 낳은 아들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과거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비참한 절망이 몸속을 가득 채웠다. 인간과 알파는 모를 테지만, 칼리번은 제가 낳은 것을 똑똑히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어리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을 뺏은 이유인 거냐, 에어리얼!”

칼리번은 가는 목에 핏줄을 세우며, 에어리얼에게까지 닿지 않을 외침을 질렀다. 그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절망 다음으로 그를 차지했다.

에어리얼에 의해 강제로 교미를 해야 했던 지난 8년. 끝이 보이지 않았던 나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칼리번 개인에게 쏟아졌던 고문이었다. 칼리번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쉬지 않고 선사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에어리얼은 그들을 무기로 이용해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원해서 낳지 않았다. 그 과정에 칼리번의 의사는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것은 분명 자신의 분신이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분신이… 인간을 공격한다. 죽이고, 범한다. 칼리번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에어리얼…. 에어리얼!”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원수를 부르짖었다. 용병으로 살면서, 그리고 오메가로 살면서 참혹한 광경은 수없이 보고 겪어 왔다. 그러나 이토록 강력한 증오심을 느껴 본 대상은 에어리얼 외에는 없었다. 에어리얼은 도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릴 셈인가?

“젠장…. 윽, 크으…. 으아아아아!”

칼리번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주먹을 땅에 내리쳤다. 흡사 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주먹이 징, 하고 울렸다. 그 고통이 칼리번의 주먹질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칼리번은 몇 번이고 땅을 주먹으로 힘껏 쳤다. 그의 몸이 강건했을 적, 그것은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힘은 보잘것없었고, 결과적으로 자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마물들이 꿈틀거렸다. 그들의 미묘한 변화는 인간들에게는 또 다른 지옥을 선사할 것이다. 하늘에서는 칼리번의 마물이 쏟아져 내리고, 숲에서는 에어리얼의 마물이 기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숲의 마물들에게 갑옷처럼 둘러싸인 칼리번은 그로서는 드물게도, 어떤 사실을 가르침 없이도 깨달았다. 검은 손자국에서 소환된 마물들은 절대로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구해야만 한다. 왕자님을, 에어리얼이 죽이기 전에….’

거친 흙은 양손으로 움켜쥐며, 칼리번은 단 하나의 명제를 속으로 반복했다. 하지만 왕자님도, 에어리얼도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장은, 소환된 마물들을 막아야만 했다. 칼리번의 온몸에서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피가 빠르게 흘렀다. 손바닥 안에 고인 피가 검은 흙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몸뚱이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칼리번은 자신에게 물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지금 자신의 모습은, 마물과 함께 인간들이 습격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왕에 불과했다.

‘어쩌면 에어리얼이 이렇게 되기를 유도한 것은 아닐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발을 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자코 왕자님과 인간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답이 없었다. 도망치든, 남아 있든, 칼리번은 에어리얼에게 완전히 놀아날 뿐이었다. 칼리번은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머리로는 도무지 에어리얼을 이길 수가 없었다. 목 끝까지 울분이 차올랐다.

칼리번이 절망과 분노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숲의 마물들은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땅 위에 고인 돌이 으르르, 떨린다. 칼리번은 문득 주먹을 내리치던 땅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요소로 인해 흔들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주저앉은 채로 등과 뒷덜미를 훤히 드러내고 있던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에어리얼의 아이들….

하나같이 혐오스럽고 역겹기 그지없었다.

“움직여.”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젠장, 뭐 하는 거야! 움직여라!”

참다못한 칼리번이 소리쳤다. 그러나 노쇠하고 둔해 빠진 마물들은 칼리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에어리얼은 더는 마물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잡아 왔던 것이었다.

“네 주인의 명령이다! 어서 가서 싸워라!”

그것들은 에어리얼이 버린 무기였다. 버린 덴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칼리번은 자신의 몸을 노리기만 할 뿐, 명령을 따르지 않는 흉측스러운 것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이런 와중에도 마계에서 소환된 칼리번의 마물들은 성 전체를 둘러싼 보호막에 태우면서까지 성에 진입하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성녀들이 관리하는 보호막이 강하다고 한들, 이러다간 마물이 성안까지 진입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왕자님이 마물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큭…. 제길, 제기랄…!”

칼리번은 애가 탔다. 그러나 마물은 거친 숨을 헐떡이기만 할 뿐,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도 바치던 충성이 무색했다.

이대로 북문 앞까지 달려가,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어야 이것들은 비로소 움직일 참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들은 마물에게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자신이 낳은 마물들은 자신을 ‘에어리얼’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칼리번은 아직 마물을 조종할 줄 몰랐다.

‘왕자님을 도와야 한다. 방법이 없을까?’

칼리번은 답을 찾기 위해 애쓰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물을 둘러보았다. 큰일이다. 이대로는 북문 앞까지 달려가기도 전에 숲의 마물들에게 붙잡힐 것이다.

“……윽.”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다. 칼리번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무분별한 주먹질에 깨진 손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머릿속으로, 언젠가 들었던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것은 에어리얼의 기억이 아니었다. 칼리번, 자신의 기억이었다.

<인간에게 우리 같은 마물 혼혈이란 갈아 끼우는 도구에 불과해. 부서진 방패를 누가 신경을 쓰겠어? 불쌍한 칼리번…. 넌 절대 못 벗어나. 앞으로도 여기서, 나와 함께 평생을 보낼 거야. 나 대신 마물을 낳으면서 말이야.>

기억마저 전부 뽑혀 텅 빈 칼리번의 머릿속으로 에어리얼의 환청이 어른거렸다. 지난 8년간 그는 에어리얼의 명령대로 숨을 쉬고, 먹이를 받아먹고, 알파를 받아들이기만 했다. 스스로 사고할 권한조차 없었기에 지하 생활조차 전부 잊은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비어 있었기에 에어리얼의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랬다. 그랬었다. 에어리얼은 마물에게 범해지는 칼리번을 비웃고 비난했다. 그의 속삭임은 마물의 씨와 함께 칼리번의 몸 안으로 섞여 들어 괴물을 잉태시켰다.

“크…윽, 그만, 닥쳐….”

숨이 가빠졌다. 조금만 방심하면, 에어리얼은 자신을 지배하려 들었다.

“내, 머릿속에서… 꺼져!”

범해진다. 잡히면, 다시 그곳에 끌려가 범해진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온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의지로 이겨 내려 노력해도 공포는 피처럼 칼리번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칼리번은 마물들이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범할 지마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인간은 어차피 자신을 돕지 않는다. 에어리얼의 말대로다. 아무도 칼리번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지옥 속에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상.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죽여야만 한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란다.>

그런 핑계로, 그동안 인간들은 수도 없는 생명을 죽이고 그 위에 군림했다. 칼리번은 수많은 짐승의 목숨을 앗아 가고, 그들의 고기를 썰었다. 이제는 그 반대가 상식이 되었을 뿐이다.

<인간이란 어떨 땐 우습고 어떨 때는 혐오스러워. 본인들이 사냥할 때는 당연하다 여기면서, 반대로 사냥감이 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괴로워하잖아? 손에 묻은 피는 닦지도 않았으면서….>

동물과 식물, 같은 인간들이 인간의 손에 피를 흘리며 죽은 것처럼, 앞으로는 마물에게 시달리고 도축 당하는 거다.

<어째서 인간만이 특별해야 하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 단 한 번도 의심치 않은 건가? 그 자만심이란…. 마물이 인간을 사냥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런 의미에서 칼리번, 네가 마물을 낳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그러니까 그렇게 죽으려고 애쓰지 마. …난 널 아끼고 있어.>

그런 칼리번의 생각에 동조하듯,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 인간이 어떻게 당하는 지 두 눈으로 지켜봐.

“헉, 허억….”

에어리얼은 더 이상 곁에 없는데도 칼리번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성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힘의 앞에서 더는 마물을 상대하기가 벅찼는지,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미처 성으로 들어가지 못한 인간들은 울부짖는다. 마물은 그들의 비명을 환희로 여기며 즐거이 사냥하고 사내들을 잡아갔다.

그러나 비명은 마물이 인간을 해칠 때가 아닌, 인간이 인간을 해칠 때 더욱 크게 들려왔다. 힘의 논리는 같은 인간 내에서도 적용된다. 땅에 내던져진 아이의 울음. 밀쳐진 여인의 비명.

그렇게 인간은 같은 인간마저도 배신한다.

“멈춰라!”

그때, 성난 목소리가 성 밖으로 울려 퍼졌다.

“지금 성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

칼리번은 눈과 귀를 의심했다. 지금 위치에서 그 목소리를 듣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건… 내 감각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칼리번은 마물과 감각이 연결되었다. 성 주변의 마물을 견제하며 맴을 돌던 괴조 한 마리가 날렵하게 북문을 향해 가까이 날아든다.

“아직 피난민 전부 성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방어해라. 단 한 명도 빼앗기지 마라!”

알파로 구성된 병사를 이끌고 온 에레즈가 단호하게 외쳤다.

“위험합니다, 왕자님! 지금도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마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알테르의 잔당이 피난민 사이에 숨어들어 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저들을 받아들이면 성안 백성들도 위험에 빠질 겁니다!”

칼리번은 먼 곳에 떨어진 광경을 마치 제 눈으로 본 것처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칼리번이, 아니, 에어리얼의 육체가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왕성 주변을 맴도는 괴조의 눈과 귀가 칼리번의 감각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은 지금 논할 문제가 아니다. 전투를 끝낸 후 처리한다. 나를 믿고 따라라!”

에레즈가 왼손으로 성검을 뽑아 들자, 마물들이 순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인간보다 강한 신체를 가진 용병들이 전투에 가세하자 전세는 약간 호전되었다. 그러나 검은 손자국에서 소환된 마물은 알테르와의 전투 때 상대했던 마물보다 훨씬 젊고 강했다.

“…왕자님! 서북쪽 절벽을 확인해 주십시오. 망루의 감시병들이 에어리얼과 그의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전세가 밀리면 마물을 새로 투입할지도 모릅니다.”

하늘과 땅, 양쪽에서 마물이 벌떼처럼 들끓는다. 그 보고를 듣자마자, 에레즈는 즉시 시선을 돌렸다.

“…!”

예상치 못한 순간, 시선이 닿았다. 아니,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눈이 마주칠 리가 없었다.

“…비겁한 놈. 화살도 닿지 않는 곳에서 이 광경을 비웃고 있는 건가.”

에레즈는 멀리서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증오를 짓씹었다. 그리고 칼리번은, 자신을 증오에 차서 바라보는 시퍼런 시선조차….

“…….”

눈조차 깜박일 수 없었다. 심장이 굳어 버렸다. 다행히 에레즈는 무사했다. 도리어 칼리번이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장장 8년이라. 지칠 법도 한데 그 꼬맹이도 지독하네. 부러워, 칼리번. 잊지 않고 구하러 와 주는 사람이 있어서.>

잊힌 세월 속에서, 자신을 잊지 않은 단 한 사람….

그 사람은… 인간의 왕이었다. 인간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무릎을 꿇은 채로 흙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돌대가리라고 불릴 정도로 머리가 나빴지만, 지금은 그 부족한 지능이라도 최대한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해야 마물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나?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마물에게 명령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한두 마디의 명령뿐만 아니라 그저 생각만으로도 마물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었다.

<아직은 내가 한 수 위지.>

언젠가 들었던 그 말대로다. 칼리번은 무슨 짓을 해도 그런 식으로는 마물을 조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어리얼처럼’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칼리번은 마물들이 자신의 의지를 따랐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가장 최근은 절벽 위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즉, 목숨이 위험한 때.

마물들은 기본적으로 에어리얼의 몸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지키려 들었다. 단 하나뿐인 오메가이기에.

하지만 그 방법은 무모했다. 주변에는 마물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도 전에 마물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당할 것이다.

칼리번은 다른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답은 있을 것이다. 에어리얼이 했으니까. 자신은 그와 같은 오메가다. 하지 못할 리가 없다….

“…….”

칼리번은 마물들이 명령을 따른 순간들을 돌이켜 보았다. 에어리얼과 몸이 갓 바뀌고 난 후, 에레즈에게 붙잡혀 목이 졸린 때. 성에서 도망친 후, 숲에서 인간 병사를 만나 죽을 뻔했을 때. 아스터를 만나 그에게 목을 붙잡힌 때.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에어리얼이 데려온 마물과 전투를 벌였을 때, 타인센과 그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거미형 마물에게 붙잡혀 목과 온몸이 조여 질식하기 직전…….

그 공통점은 무엇이지? 정말로 답은 죽음뿐인가?

칼리번이 진땀을 흘리며 고민하는 순간에도, 성문 앞의 방어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물들은 에레즈와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가 위험에 처할수록, 에레즈의 위험을 마물의 눈을 통해 지켜보아야만 하는 칼리번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어딘가 터져 버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

팍, 그 순간 무엇인가가 칼리번의 머릿속에서 터졌다. 마물이 자신의 명령을 따른 마지막 순간은, 벼랑에 뛰어내렸을 때가 아니다. 지금 칼리번은 뇌조의 감각을 공유해 왕자님의 모습을 보고 듣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난 무엇을 했지?

칼리번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에어리얼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질을 한 탓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설마….”

칼리번은 그 즉시 주변을 살폈다. 어둠의 숲은 마물의 독기에 물든 나무와 바위로 가득했다. 칼리번은 사람 한 명이 넉넉하게 앉을 법한 바위로 향했다. 그러고는, 즉시 단단한 바위에 제 얼굴을 들이박았다.

퍽!

흡사 두개골이 깨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뇌가 흔들리는 감각과 함께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바위를 붙잡은 창백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칼리번은 두세 번을 더 반복한 후에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이마 오른쪽이 충격으로 찢어져 피가 이마를 적셨다. 날렵한 코도 깨졌는지 코피가 입술을 지나 턱까지 흘러내렸다.

“가….”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했다. 칼리번은 넋을 놓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붉은 눈 속 동공은 고통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가라.”

붉은 피가 칼리번의 눈가를 적시고, 뺨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혀로 비릿한 피의 맛이 느껴졌다. 칼리번은 인상을 쓰더니, 입 안에 고인 피를 땅에 뱉었다.

“당장 가지 못해!”

칼리번은 쇳소리가 섞인 쉰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을 맴돌며 오메가를 노리기만 하던 노쇠한 마물들이 꿈틀거리더니, 그를 따라 거대하게 포효했다. 날개가 달린 것들은 하늘로 날아올랐고, 다리가 있는 것들은 땅을 울리며 서문을 향해 달려갔다.

“윽…!”

칼리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만 비틀거렸다. 바위에는 자해의 흔적이 붉게 남아 있었다. 원래의 몸이라면 몰라도, 에어리얼의 몸으로는 이 정도 고통도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 에어리얼의 육체 자체가 굉장히 민감했다. 태생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일까? 고통도, 공포도 남들보다 몇 배는 증폭해서 느낀다. 그리고 그 울림은 칼리번의 영혼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 하아……. 윽….”

눈앞이 어지럽다. 턱에 고인 피가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마물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법은 사실 너무나 간단했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과 거의 흡사해서 구분이 어려웠을 뿐이다.

고통.

생각으로 명령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라는 감각을 매개체로 해서 마물들에게 퍼뜨리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에어리얼이라는 인물은 아무렇지 않게 마물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로 고통과 공포에 물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흣…!”

칼리번은 현기증을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해를 시도한 바위에 팔을 포개 상체를 기댔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어지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마물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기껏 명령을 내린 마물들은 피 냄새에 홀려 도리어 인간들을 습격하게 될 것이다.

“하아….”

자꾸만 눈가에 피가 스며들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였다. 붉은 눈동자 위로는 검은 숲이 아닌, 인간과 마물이 얽혀 비명을 지르는 전투가 비쳤다. 칼리번의 시력과 청력을 대신해 주던 괴조도 고통을 통해 칼리번의 명령을 전달받고는,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크윽…….”

에레즈가 에어리얼의 계략에 죽도록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만약 칼리번이 방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8년 전 그 숲에서 에레즈를 버리고 젠과 함께 도망쳤을 것이다. 아니, 젠과 왕자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겠지.

아무래도 에어리얼은 간과한 것 같다. 방어전은 칼리번에게 더없이 익숙했다.

* * *

‘검은 손자국’에서 소환된 마물은 그동안 싸워 온 마물보다 강했다. 갑작스럽게 방어전에 돌입한 연합군은 방어막 안에서 피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뜻밖의 원군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검은 숲에 기생하던 마물들이 전투에 끼어들면서 미묘하게 기세가 트인 것이다. 연합군은 마물들이 먹잇감을 탐내다 서로 맞붙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과거의 전투에서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 우연이라 할지라도 피난민을 보호해야 하는 연합군에게는 더없는 기회였다.

‘이것이 마물을 조종한다는 감각인가…!’

한편, 칼리번은 몸이 수십 갈래로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손가락에서부터 갈기갈기 찢긴 몸이 실이 되어, 마물과 묶이는 감각. 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마저 바늘처럼 따끔거릴 정도다. 하지만 비를 피하기 위해 나무 그늘로 숨어들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지면 살로 만들어진 실은 손쉽게 끊어질 것이다.

“큭….”

에어리얼이 부리는 마물은 칼리번이 조종하는 마물보다 훨씬 젊었다. 초반에는 검은 숲의 마물이 그럭저럭 버텨 냈다. 그러나 결국에는 칼리번이 낳은 마물로 인해 짓이겨 뭉개지고 심장이 파열되었다. 그리고 패배의 고통은 고스란히 주인인 칼리번에게로 이전되었다.

“어헉, 큭— 우윽…!”

심장이 쥐어짜이는 고통에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가 바위와 땅 위로 흩뿌려졌다.

“조금만 더…!”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칼리번의 붉은 눈 위로 피난민들의 행렬이 비쳤다. 피해를 보긴 했지만, 피난민들의 이동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그러기를… 왕자님께서 원하시니까.’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은 바위에 기대고는, 거친 표면 위로 손가락을 뿌득 긁어내렸다. 새하얗게 질려 버린 얼굴 위로 번진 붉은 핏자국이 더욱 선명해졌다.

“흡—!”

칼리번은 격통과 함께 두 눈을 부릅떴다. 다음 순간, 괴조의 눈이 에레즈의 모습을 담았다. 에레즈는 북문으로 이동하는 피난민과 부하를 등 뒤에 둔 채, 홀로 마물과 맞서고 있었다. 마계의 독기를 먹고 자란 마물들은 한낱 인간에, 아니, 마물 혼혈에 비하면 까마득하게 컸다.

마물은 에레즈 바로 뒤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탐냈다. 실제로 손만 뻗으면 인간 하나는 우습게 움켜쥘 수 있는 상태였다. 위협적인 공격이 가해질 때마다 에레즈는 성검으로 그것들을 베어 냈다. 에레즈는 마물화되지 않은 용병들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마물과 일대일로 맞설 수 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물러나면 인간들이 곧바로 공격을 당할 것이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마물을 상대하는 사이, 다른 한편에서 또 다른 마물이 그의 머리를 뜯어먹기 위해 다가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막아라!’

칼리번은 속으로 외치며 바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으윽—!”

칼리번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미 뼈가 드러날 정도로 헤진 손등이 덜덜 떨렸다. 그 대가로, 검은 숲의 마물이 에레즈를 향한 어금니를 대신 받아 냈다. 적의 어금니에 몸이 꿰뚫리자, 신체가 잘리는 듯한 격통이 칼리번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윽, 흐으…. 으으윽!”

이걸로 끝내서는 안 된다.

칼리번은 마물에게 물린 상태 그대로 성으로 질주했다. 쿵! 북문에 거대한 마물 두 마리가 동시에 부딪히자, 성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칼리번은 마물의 발톱으로 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쿵, 쿠궁.

성벽이 무너지자 마물이 쓰러지자 칼리번이 있는 곳까지 땅이 울렸다.

“성문을 닫아라!”

마침내 모든 피난민이 성안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에레즈의 외침이,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왕자님, 어서 피하십시오!”

“먼저 병사들을 들여보내라! 그때까지 내가 엄호하겠다.”

에레즈는 그 이상의 대답을 듣지 않고 북문을 등졌다. 그의 앞은 온통 마물로 가득한 지옥이었다. 검게 찢어진 하늘에서는 마물이 쏟아지고, 땅에는 에어리얼이 새로 보낸 마물이 창궐했다.

‘왕자님…. 어째서, 피하지 않는 겁니까!’

칼리번은 에레즈가 고립을 자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간절히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에레즈에게 닿지 않았다.

“…….”

에레즈는 더 이상 공격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서늘한 눈빛으로 마물들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에 전투를 포기하는 것인가? 하지만 왕성 전체는 보호막이 설치된 상태다. 병사들과 함께 성으로 향하면 될 일이었다. 칼리번이 초조해할 때였다.

푹! 에레즈는 왼손에 든 검을 비로 인해 질척해진 땅에 꽂았다. 당장 눈앞의 적을 베어도 모자란 차에, 그는 마물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마저 땅에 내려놓은 것이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마물은 망설임 없이 에레즈의 목을 치려 들었다.

‘왕자님…!’

그리고 칼리번은 보았다. 에레즈의 왼손에서 어떠한 힘이 과도하게 넘쳐흐른 나머지 전격과도 같은 흰 빛이 파직거리는 모습을….

성력, 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거대한 힘….

칼리번의 붉은 두 눈이 부릅떠졌다.

“물러나!”

칼리번은 버럭 외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에레즈는 성검을 통해 성력을 증폭시켰다. 그 힘은 흙을 타고 뿌리처럼 흘러, 대지에 발을 딛는 마물을 뒤덮었다. 그뿐만 아니라 빗물을 타고 올라가 하늘을 나는 마물들에게까지 폭격처럼 가해졌다.

“으…아, 아아아아악!”

흡사 벼락을 맞은 듯한 고통이 칼리번을 꿰뚫었다. 불에 몸을 집어넣은 것도 아닌데, 전신의 혈관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빛에 의해 수많은 마물의 몸이 터져 나가고, 비행형 마물은 땅으로 추락했다.

“윽, 으윽…. 커헉—!”

그리고 칼리번은 단번에 수십 마리의 마물을 잃었다. 그 결과는 그대로 칼리번에게 돌아왔다. 검붉은 핏덩어리가 입과 코, 귀를 통해 몸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들의 고통 전부를 합산한 것과 마찬가지의 강도였다.

“허억, 으….”

칼리번은 바위에 쓰러진 채로 경련했다. 창백한 피부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물거리는 붉은 눈 위로, 에레즈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괴조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한 탓이리라. 하지만 칼리번은 에레즈가 어떤 모습일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일순에 처단된 마물들을 살피겠지.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들을 베고는, 가장 마지막으로 성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칼리번은 정신을 잃었다.

* * *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파스스, 빗물이 가득 고인 수풀이 흔들린다. 쓰러진 오메가의 몸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검은 숲에 숨어 있던 마물들이 피 냄새가 섞인 오메가의 체취를 맡고 슬금슬금 모여든 것이다.

마물의 본능은 오직 포식과 번식뿐이었다. 인간을 잡아먹고, 사내를 번식의 대용품으로 쓰던 마물들은 마침내 ‘진짜’를 찾아냈다. 옷은 대부분 찢기거나 녹아 사라진 상태였다. 그 대신 붉은 머리카락과 피가 창백한 몸을 가려 주었다.

붉은색은 마물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그것은 살육과 색욕의 색이었다. 마물 혼혈 중에서 붉은 머리가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무방비하게 쓰러진 오메가의 육체는 마물의 본능에 더욱 불을 지폈다.

칼리번은 몸을 꿈틀거리며 힘겹게 헐떡였다. 그런 그의 몸을 흉측한 마물들이 뒤덮었다. 탐욕을 상징하듯 거대한 입을 지닌, 두꺼비처럼 생긴 마물은 그 커다란 입을 쩍 벌려 칼리번을 물었다. 그러나 사냥할 때와는 달리, 이를 세우지 않았다.

마물의 혀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으며 입 안은 넓고 축축했다. 칼리번은 두 팔과 머리를 제외하고 마물의 입속으로 꿀꺽 삼켜졌다. 마물은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갈라진 혀를 내밀어 칼리번의 둔부를 핥았다. 창백한 피부 위로 흐르는 피를 핥아 먹고, 야들야들한 피부를 맛보았다.

두툼한 혀는 어느새 가슴에 자리 잡은 오돌토돌한 부위를 중점적으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지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곳에서 달콤한 젖이 나온다는 사실은 태어날 적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아……윽….”

정신을 잃은 칼리번은 고통에 찬 숨만 헐떡였다. 마물에게 삼켜진 하체는 물컹한 여덟 개의 혀로 쉬지 않고 빨리고 주물러지고 있었다. 물갈퀴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진 혀는 몸 이곳저곳을 자극하며 집요하게 입구를 찾았다.

“흣…. 아, 으….”

그중 가는 혀는 요도구를 짓누르고 굵은 혀는 회음부를 연신 쓸어내렸다. 유독 긴 혀는 가슴을 한 바퀴 감고는 옅은 색의 유두를 자극했다. 칼리번의 숨결에 점차 신음이 섞여 들었다. 벗어나고 싶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구를 찾아냈는지, 얇으면서도 긴 혀가 엉덩이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조금씩 강해지는 오메가의 체취에 머뭇거리며 기회를 노리던 다른 마물들도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칼리번의 명령에도 전투에 나서지 못할 정도로 뒤틀리고 노쇠한 개체들이었다. 마계였다면 오지 않았을 번식의 기회에 몸을 잔뜩 부풀어 키웠다. 그러고는 혼자 오메가를 독식하고 있는 마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두꺼비 형태의 마물은 등 위로 돋아난 구멍에서 독액을 뿜어내 대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등이 울룩불룩한 마물은 입 안에 담은 오메가를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두꺼비 마물의 성기는 입 안에 존재했다. 혀 아래에 부풀어 오른 성기가 불룩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진득한 점액에 의해 풀어진 칼리번의 입구에 그것을 가져다 댔다.

“윽!”

마물의 성기가 박혀 들자 칼리번의 몸이 들썩였다. 두꺼비 마물은 성욕에 지배된 다른 마물들에게 몸이 뜯겨 나가면서도, 칼리번의 내부에 성기를 들썩거리며 오가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것이 초록빛 피를 흘릴수록, 성기가 몸속을 꿰뚫는 속도도 한층 빨라졌다. 의식을 잃은 칼리번이었으나 반복되는 고통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며 피하고자 했다. 그러자 긴 혀가 리본처럼 온몸을 묶었다. 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 아윽! 크윽, 흐….”

창백한 얼굴이 땀과 점액에 젖어 들고 벌어진 입에서는 끊어 낸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칼리번이 흔들릴 때마다, 힘없이 땅 위에 늘어져 있던 손이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흔들렸다.

그때, 다른 마물이 다가와 칼리번의 흔들리는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 손은 두꺼비 마물의 입을 비집고 들어가 칼리번을 뽑아내려 했다.

“아, 아…!”

칼리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몸 안에는 이미 마물의 성기가 박혀 한창 노팅 중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몸속에 부풀어 오른 거대한 혹을 억지로 빼내려 하니, 가는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했다.

그러자 다른 마물은 성기의 밑동을 발톱으로 잘라 냈다. 그즈음 두꺼비 마물은 마물들에게 온몸이 뜯겨 죽어 있었다. 칼리번은 성기가 박힌 채로 점액과 함께 주르륵 빠져나왔다. 정액으로 뒤덮인 창백한 신체가 드러나자 마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피를 토해 내는 입 안에 성기를 처넣는 마물도 있었고, 쉼 없이 빈 젖을 빠는 마물도 있었다. 앞발을 능수능란하게 쓸 줄 아는 마물은 칼리번의 몸에서 피가 흐르는 성기를 뽑아냈다.

정욕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들이 향기를 흘리는 하얀 나신을 샅샅이 핥았다. 그중 가장 강해 보이는 마물이 칼리번의 두 다리를 벌리고는 정액을 흘리며 움찔거리는 입구에 바로 삽입했다.

“큭! 윽! 으읏, 아, 으윽…!”

칼리번의 몸은 무력하게 흔들렸다. 감긴 눈꺼풀은 당장에라도 깨어날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사이 오메가의 몸 위에 올라타는 마물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칼리번의 몸은 수많은 마물들의 손아귀를 오갔다.

어느새 그는 땅에 누운 것이 아닌, 거대한 마물의 몸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거대한 마물의 성기는 칼리번의 몸 안에 한 번에 들어가지 못하고 애먼 입구를 찌르며 벌려 댔다. 약삭빠른 마물은 비교적 경쟁이 덜한 목 안쪽, 오메가의 또 다른 자극 지점에 성기로 밀어붙였다.

통제권을 잃은 오메가가 알파들에게 쉼 없이 범해지고 있을 때였다. 마물의 교미 장면을 숨기듯, 오랫동안 먹구름에 가려진 해가 그제야 드러났다. 마물들의 몸에 감긴 얇은 실이 옅은 빛을 받고는 반짝였다. 그리고 마물들이 그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그들은 몸에 그어진 실선을 따라 조각이 났다.

우지직, 조각난 마물의 살점과 피가 대지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오직 칼리번만이 훼손되지 않은 채였다. 지지할 곳 하나 없이 땅으로 추락하는 작은 몸을 받아 낸 것은 검은 금속으로 뒤덮인 손이었다. 손뿐만 아니라, 전신을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그는 칼리번의 몸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분명 다음은 당신 차례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잃은 칼리번을 내려다보며, 그는 정교한 갑옷과 어울리지 않는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갑옷은 칼리번의 목을 움켜쥐었다. 피와 정액, 비로 젖은 칼리번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대로 내버려 둬도 얼마 가지 않아 죽을 정도로.

“…님…?”

하얗게 질린 입술이 반응하듯 달싹거렸으나, 완성된 단어를 만들지 못했다. 불안하게 떨리던 눈꺼풀이 잠잠해지고 칼리번은 기절하듯 검은 갑옷의 품에서 잠들었다.

* * *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인간들은 새로운 왕의 이름을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 외쳤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은 곧 비명으로 탈바꿈했다. 간신히 얻은, 짧은 행복은 고작 며칠 만에 깨지고 말았다.

‘검은 손자국’에서 마물이 소환된 후, 성안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북문의 입장과 관리는 왕실 재건 기사단이 맡고 있었다. 더럽혀진 왕성의 정화는 이제 막 시작이었기에 피난민은 나중에 순차적으로 받아들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마물의 습격이 발생했다. 다급히 밀려 들어온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왕성 전체를 둘러싼 보호막은 여전히 견고했고, 다행히도 마물은 한 마리도 진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호막은 성 밖과 안을 완벽하게 차단시켜 주는 마법의 커튼이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물은 병아리를 발견한 매처럼 포효하며 하강하더니 제 몸을 보호막에 불태우고 짓뭉갰다. 마물의 피와 내장이 하늘 위에서 폭죽처럼 퍼졌다. 성 밖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전투 소리는 가감 없이 성안으로 울려 퍼졌다. 가족, 친구, 동료가 밖에서 마물들의 먹이가 되어 갈기갈기 찢기는 소리가….

방어전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속속들이 시체가 되어 성안으로 실려 오고, 팔과 다리를 잃은 부상자들이 기어들어 왔다. 공포는 극에 달했다. 좁은 상자 속에 갇혀 버린 쥐가 된 것만 같이, 저것들이 보호막을 뚫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떨 수밖에 없었다.

“성문! 성문을 당장 닫아!”

“이대로는 성까지 점령당하겠어! 북문을 어서 닫으라고!”

“백성은 이제 충분하잖아! 안에 있는 사람을 지켜야지! 전부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잖아!”

성안 백성 중 일부는 피난민과 섞여 들어오는 알테르의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 달려가 울부짖었다.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인간성이란 민들레 홀씨보다도 쉽게 부스러졌다.

“더는 다가오지 마! 왕자님의 명령이다, 썩 물러서지 못할까!”

병사들은 백성들을 떼어 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졸지에 새로운 적이 생긴 셈이었다. 심지어는 성문을 여닫는 도르래를 부수기 위해 도끼를 들고 달려드는 자도 있었다.

“뭐, 뭣 하는 짓이냐! 젠장, 아직 전투 중이라고! 지금 문을 내리면 왕자님께서도 들어오시지 못한다, 물러나!”

“히익, 그분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나실 거야! 그분은 황금 피니까! 하지만 이러다가는 우리는 모두 죽고 만다고! 이 망할 년아, 저리 꺼져!”

“큭…. 그만둬!”

공포로 인해 광기에 물든 사내의 눈에는 뵈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단련된 병사라고 한들 도끼를 든 채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이를 제압하긴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병사는 칼을 뽑아 아군에게 들이대는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성 밖에서 마물에게 공격을 당하던 피난민은 끊이지 않고 유입되었다.

“으아, 으아악! 나, 나도, 들여보내 줘, 아직 밖에 사람이 남아 있어요!”

“문을 닫지 말아요! 제발 부탁이야! 아, 안 돼!”

바깥은 바깥대로, 안은 안대로 지옥이었다. 피난민들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 채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피난민의 행렬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피에 절어 갔다. 바로 곁에 있던 사람은 마물에게 잡혀가고, 뒤에서 따라오던 가족은 마물에게 살해당한다. 무사히 성안에 들어온 사람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직 우연이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공포였다.

그 뒤를 따라 병사들이 다친 동료와 피난민들은 몸에 이고 지며 성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어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체격이 좋은 알파 용병들은 네댓 명도 등에 지고 왔고, 밧줄을 서로의 몸에 묶어 질질 끌고서라도 어떻게든 데려오려는 이도 있었다.

“전황은? 왕자님은!”

“북문 폐쇄는 아직인가!?”

북문 밖에서 속속들이 들어오는 병사들에게 물었지만, 대답할 여력을 지닌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행렬에 더는 피난민이 섞이지 않고, 병사들만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땅이 미미하게 울리더니, 평범한 사람들도 따끔함을 느낄 정도의 전류가 흘렀다.

“뭐, 뭐지…?”

“설마 새로운 마물이…?!”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순간, 갑자기 성 안팎으로 마물들의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동시에 울부짖는 소리는 고막이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비행형 마물들이 동시에 터지면서 보호막이 피로 뒤덮었다. 세상이 붉게 변한다. 노을의 색과는 확연히 다른, 검붉은 하늘. 그로 인해 잠시 해가 가리어졌고, 어둡게 그늘진 왕성은 마치 역병이 퍼진 것만 같았다.

산 채로 타 죽는 마물의 비명은 순간적으로 사람의 몸을 시리게 하고, 굳게 만들었다. 오줌을 지리거나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이도 있었다. 성 밖의 소란은 거대한 힘에 압사되어 일시에 멈췄다.

“성문을 닫아라!”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수 명의 병사들이 북문의 양편의 도르래에 매달려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돌렸다.

쿠웅!

묵중한 소리와 함께 마침내 성문이 닫혔다.

“욱, 우웩…!”

“사… 살려 줘…. 으아, 아아….”

“힉…. 히기, 개, 괴물이……. 익!”

마물의 비명에 마비된 사람들은 구토를 하며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성녀들이 무릎을 꿇고 서둘러 그들을 돌봤지만, 손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는 수였다. 반면, 마물 혼혈들은 대부분은 방어전에 참여했기에 피에 절은 채로 길바닥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두 발로 선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광장. 가장 마지막으로 귀환했기에,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마지막 병사가 천천히 그곳을 걸어갔다. 성안을 가득 메운 피난민들의 시선이 자연히 그에게 향한다. 머리카락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그는 마물의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지막 병사에게는 한쪽 팔이 없었다. 왼팔에는 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의 주인은 피를 뒤집어쓴 반면 검은 눈부시도록 새하얀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칼을 검집에 꽂는 것조차 버거운지 칼끝이 바닥에 쓸린다. 즈윽, 지지지직, 돌로 이루어진 길을 걷는 칼의 소리. 그 뒤를 피에 젖은 망토가 붉은 자국을 남기며 따른다.

왕자가 때가 되어 왕위에 오르면,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왕성 행차를 벌인다. 온종일 왕성을 순회하며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것이다. 사방에는 꽃이 날리고 햇볕마저 따스하게 지상 위를 내리쬔다. 그날만은 모든 백성은 노동에서 해방되고 귀족과 한데 어울려 새로운 왕의 탄생을 축하한다.

그러나 이토록 가난한 왕의 행차가 또 있을까?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신음조차도 삼킨 채 역사상 가장 초라한 왕의 행차를 지켜본다. 망루에 버려진 병사의 시체조차 땅 위에 섰을 뿐인 왕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올려다본다.

왕은 오물과 피로 가득한 길을 걷는다. 왕의 걸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꽃잎이 아닌 핏자국이 남았다. 간신히 성안으로 진입한 피난민조차 왕에게 환호하지 못했다. 어서 성문을 닫아야 한다며, 이러다간 모두가 죽는다며 역정을 내던 성안 백성조차 왕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그것은 불쌍한 왕에 대한 동정이 아니었다. 강한 왕을 향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무엇이라 표현하면 옳을까? 옳음과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는 그 쓰라림을.

생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 서글프고 진절머리 날 뿐.

* * *

가야 할 곳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마물이 다시금 습격했으니 대책 회의를 열어야 한다. 성녀단과 신용병 연합, 왕실 재건 기사단의 우두머리를 모아서…. 상처를 입은 병사들의 충원, 백성들의 치료, 추가적인 마물 습격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데….

머릿속 수많은 계획을 무시하고 에레즈가 도착한 곳은 칼리번이 잠든 장소였다.

에레즈는 언제나 칼리번의 앞에서는 가장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 비록 칼리번은 잠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에레즈는 그에게 가장 좋고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본능이 그를 칼리번의 곁으로 데려갔을 뿐이다.

자신이 돌아왔을 때, 칼리번이 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적은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혼란을 틈타 알테르의 잔당이 칼리번을 훔쳐 갔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칼…….”

칼리번은 떠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

에레즈는 그것이 기쁜지, 슬픈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는 칼리번이 잠든 침대까지 다가갔다. 간신히 유지되던 몸이 제 주인을 만나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차마 그에게는 더러워진 손을 대지 못하고,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기댔다. 에레즈가 몸을 웅크린 자리에 작은 피 웅덩이가 생겼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젠장, 여기 있을 줄 알았지!”

멀리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에레즈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를 굴렸다.

“스승님…?”

에레즈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녀도 만만치 않게 전신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성녀님들이 널 얼마나 찾고 있는지 알아? 치료부터 해야지, 뭐 하는 거야! 또 맞아야 정신 차리겠냐?”

젠은 성큼 다가오더니 에레즈를 어깨에 쥐려 들었다. 에레즈가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거부했다.

“스승님…. 안 됩니다. 지금은….”

“안 되긴 뭐가 안 돼! 지금 물불 가릴 때야? 빨리 나가서 얼굴 좀 보여! 왕이 살아 있다는 것도 확인시키고!”

“그게, 아니라…. 윽….”

에레즈는 간신히 젠을 밀어냈다. 젠은 무언가 눈치챈 듯싶었다.

“…야. 당장 그 옷 벗어.”

젠은 다짜고짜 에레즈의 망토를 벗겼다. 기절하기 직전인 에레즈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망토와 겉옷이 벗겨졌다. 아니, 찢어졌다.

에레즈의 상체가 금세 드러났다. 처음 에레즈가 알테르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그의 편은 극히 적었다. 그 때문에 에레즈는 젠과 함께 용병이나 다를 바 없이 지냈다. 거친 생활로 인해 에레즈의 몸은 예전과 같은 부드럽고 날씬하던 소년이 아니게 되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상체는 완성된 사내의 몸이었다. 보통 때였다면 몇 년에 걸쳐 온몸에 새겨진 흉터와 거칠게 잘린 오른팔의 단면이 눈에 띄었겠지만, 지금은….

“하…. 제기랄……. 남 목숨 말고 네 목숨 좀 아끼라고 말하자마자… 이 꼴이 된 건 뭐야….”

젠은 허탈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성흔은 성검을 쥔 왼손부터 시작되었다. 팔을 지나, 어깨, 그리고 왼편의 빗장뼈와 목, 가슴까지. 성검을 통해 증폭된 성력은 에레즈의 핏줄을 타고 흐르며 지나간 길을 그대로 태워 버렸다. 에레즈의 몸은 벼락을 맞은 사람 같았다.

“이 망할, 개자식…. 칼리번이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뒤지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그 녀석이 이 꼴을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하지만….”

“뭐.”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젠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목소리.

“왕으로서 의무를…. 모두를, 지켰으니까….”

에레즈는 나름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젠의 두 눈은 한층 더 이글거렸다.

“앞으로 또 마물이 습격할지도 모르는데, 매번 이 힘을 쓸 거냐? 성검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네가 괴상망측한 알파니까 상처가 이 정도에 그쳤지, 나같이 모범적이고 준수한 알파였으면 진작에 타 죽었을걸? 아니지, 그 팔을 보니까 알겠다. 만약 한 끗발이라도 잘못됐다면 너도 전부 탔겠는데?! 그랬어 봐, 누군가를 지키기는커녕 더 큰 혼란이 일어났을 거라고!”

성력이란 본디 회복과 보호의 힘이다. 그래서 성력을 다루는 성녀들이 보호막으로 공격을 막거나, 상처를 회복하는 류의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치유하는 마음. 그것이 성력의 근원이다. 오직 성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건만, 마물의 피를 물려받은 에레즈는 어째서인지 그 힘을 운용할 수 있었다.

대대로 성녀와 혼인했던 프리드웬 왕실 출신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왕비는 장식일 뿐. 알파는 여자와 후손을 보지 못한다. 지금 같은 때에,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힘이 있다는 것이다. 성력은 에레즈가 알테르에게 맞설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에레즈가 ‘기적’을 보일 때마다 그를 추앙했다. 에레즈를 ‘진정한 황금 피’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 일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언의 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에레즈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다. 젠은 사기꾼의 몸에 남은 끔찍한 상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말했잖냐. 칼리번을 구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훤히 드러난 에레즈의 뒷덜미는 마치 껍질이 벗겨지려는 것처럼 피부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왼팔과 등을 뒤덮은 성흔과 겹쳐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상처였다. 껍질 안쪽으로는 근육이 아닌, 금빛의 무언가가 피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

평생을 유랑하며 온갖 마물을 접한 그녀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는 상처. 쯧, 젠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발생한 습격의 파장은 꽤 클 거다. 성녀단이고 기사단이고 용병 연합이고 가만 있지 않겠지. 대비책을 생각해 둬.”

“…….”

“…그리고 하나 더. 일부러 나한테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는 것 같은데 너 설마, 마물의 습격이 붉은 오메가 때문이라고 우기려는 건 아니겠지?”

젠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에레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사실 오늘 일은 충분히 예상 가능 했어. 그래서 너도 왕성 내부 정비보다 바로 오메가를 찾는 수색대를 편성하려고 했던 거잖아.”

“스승님….”

“성문 주변에 미리 배치해둔 용병들 덕분에 쫓기던 피난민을 대거 유입시킬 수도 있었고.”

“젠, 그만…!”

“병사를 모두 대피시킨 후 마지막에 남은 것도 한참 전부터 생각해 둔 부분이겠지. 힘을 쓰면 용병들까지 영향을 받을 테니까!”

“그만하세요, 이 사람이 듣고 있지 않습니까…!”

에레즈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젠은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떠올렸을 리가 없어. 임기응변이라기에는 너무 완벽해. 그 망할 말버릇 안 나오게 하려고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경우를 시험해 봤냐? 그런데 내가 널 모를 것 같아?!”

“칼리번이, 듣고 있단 말입니다!”

성난 음성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제기랄, 그새 많이 컸군! 나한테 성질을 다 부리고!”

젠은 입꼬리는 씰룩이며 에레즈를 노려보았다. 이 방 안에서 고요한 것은 오직 칼리번뿐이었다.

“오늘 일은, 전부 붉은 오메가의 짓입니다. 북문 너머에서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 증오스러운 빨간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죽고, 병사들이 마물과 사투를 벌이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칼리번이 그럴 수 있겠어요?”

에레즈는 침대보를 세게 움켜쥐었다. 하얀 침대보에 핏자국이 묻어났다.

“어떻게? 그야 본능대로지. 마물은 오메가를 찾아왔을 테니까.”

“그래요, 붉은 오메가를—!”

“알파는 오메가에게 집착한다. 그건 마물뿐만 아니라 너나 나 같은 마물 혼혈조차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야. 그 대상이 붉은 오메가든, 칼리번이든 구별할 필요가 있겠어?”

“…스승님께서도 알잖습니까? 칼리번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겼습니다. 왕성에 있는 용병들 중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오메가를 향한 직감은 혼혈보다 마물이 훨씬 강해. 그 녀석들이라면 칼리번을 땅속에 묻어 놔도 찾을 수 있어. 아니, 붉은 오메가가 칼리번의 몸에 무슨 수를 썼을 수도 있…!”

“제발 그만!”

잔혹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말은 비수나 다름없었다. 에레즈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은 오메가가 과연 칼리번을 그냥 버리고 갔을까? 이걸 위해서일 수도 있어.”

“……아뇨.”

“칼리번을 왕성에 숨긴 이상, 오늘 같은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다고.”

에레즈는 더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스승님! 절대로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제가 지킬 거예요! 인간도, 제 편을 든 알파들도, 당신도……. 칼리번도! 이 손으로 붉은 오메가를 죽일 겁니다. 그러면 다 끝날 거예요. 설령 그 후에도 또 계속 마물이 쳐들어온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죽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 하하! 뭐? 넌 전쟁이 어린애 장난 같아?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저한테는 성검이 있어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여태까지 아무도 안 죽었어? 안 죽었냐고!”

에레즈는 입을 크게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피와 오물로 얼룩진 더러운 얼굴. 그는 여태껏 쌓아 온 모든 것이 허물어진 사람처럼, 울분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애새끼에 불과했던 네가 칼리번을 구하겠다며 설칠 때부터 이런 미래는 예견되어 있었어. 그래서 난 처음부터 안 하겠다고 했다. 어차피 죽었을 거라고 했지. 살아 있어도 좋은 꼴은 아닐 테고.”

“…….”

“지금까지는 모든 잘못이 알테르 프리드웬과 붉은 오메가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릴 수 있었어.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칼리번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된다면, 어떻게 감당할 거야? 마물은 끊임없이 오메가를 찾아올 거다. 인간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오메가를 지키다 개죽음당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게 될 텐데.”

차분하다 못해 가라앉은 목소리가 에레즈를 몰아붙인다. 지금의 젠은 평소의 유쾌하고 천박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

그리고, 에레즈에게는 더는 버틸 기력이 없었다.

“스승님….”

“왜. 아까부터 사람을 왜 자꾸 부르기만 하냐. 아련하게 부른다고 불쌍하게 여길 것 같아?”

“여기를 떠나 주세요.”

“…뭐?”

에레즈는 억눌린 목소리로 부탁했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젠은 에레즈를 살폈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감정 때문이 아니라, 과다출혈로 인한 떨림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찔리기라도 한 것인지 숨소리도 온전치 않았다. 척 봐도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한 상태였다. 그는 남은 정신력을 짜내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마물의 당한 상처라면 성녀에게 도움을 구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검에 의해 증폭된 성력과 에레즈의 몸에 내재된 마물의 본성이 부딪친 흔적이었다. 자연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아아, 칼리번과 단둘이 있고 싶다는 거? 질질 짜게? 뺨 위에 눈물이라도 몇 방울 흘리면 뭐, 저놈이 기적처럼 깨어날 것 같냐? 빨리 좀 깨워 봐라, 쟤가 나 대신 싸워 줬으면 좋겠으니까!”

젠은 일부러 비아냥거렸다. 에레즈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젠을 뚫어지게 노려보기만 했다. 모든 것이 변했어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푸른 보석안. 혈관이 터져 흰자위가 붉어진 눈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제길, 하는 수 없지. 난 옛날부터 네가 약한 척할 때가 제일 싫더라.”

에레즈의 눈에 붙잡힌 젠은 괜히 짜증을 내며 등을 돌렸다.

“오늘만 특별히 봐줄 테니까 네 마음대로 해! 다들 너만 찾고 있으니까 나 혼자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만…. 같잖은 자기 위로는 적당히 하고 나와라.”

젠은 마지막까지 에레즈를 공격하고 싶어서, 괜히 그의 머리에 물약 하나를 던졌다. 에레즈는 작게 ‘고맙습니다’라고 속삭였다.

“윽…!”

젠이 떠난 후에야 에레즈는 간신히 참고 있던 신음을 내뱉었다. 한쪽 팔은 잘렸고, 다른 팔은 검게 타 버려 몸을 흔들지 않고 지탱하기가 버거웠다. 그는 헐떡이며 칼리번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안, 칼. 계속 젠과 싸우는 모습만 보이고…. 당신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에레즈는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조심스럽게 칼리번에게 사과했다.

“젠과 다툰 건, 음…. 방금… 밖에 작은 전투가 있었어. 그것 때문에 조금 말이 나왔을 뿐이야. 금방 해결될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몸을 낮춘 모습은 주인에게 충직한 사냥개 같았다.

“음…. 이런 창문도 없는 답답한 곳에 혼자 있으려니 힘들지? 이곳이 제일 안전한 장소라지만, 당신은 오랜 시간을 지하에 갇혀 있었으니 갑갑할 텐데….”

잠든 칼리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고통이 조금은 희석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안쪽으로는 또 다른 고통이 피어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바람도 쐬게 해 주고 햇살도 느끼게 해 주고 싶은데, 바깥 상황이 아직 좋지 못해서…. 통 그럴 기회가 생기질 않아. 미안해. 예전에 당신은 호숫가로 날 데려가서 쉬게 했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마물의 습격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 당시의 에레즈는 칼리번의 행동이 얼마나 큰 용기를 수반하는지 알지 못했다. 칼리번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챙겨 주었다. 먹을 것을 줄 때는 가장 좋은 부분을 주고, 잠자리는 가장 푹신한 곳을 양보했다.

“나는 정말, 아무 쓸모도 없었지….”

과거를 반추한 에레즈는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전과는 달라. 이제 나에게는 당신을 지킬 힘이 있으니까.”

그의 시선이 성검을 향했다가, 다시 칼리번에게로 돌아갔다.

“그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든, 몇십 번이든, 오늘 같은 전투를 반복할 수 있어. ……. 싸울 거야.”

에레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칼리번에게 손을 뻗었다. 오랜 세월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감히 닿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무덤가의 괴물 석상처럼, 에레즈는 평생 그를 지키는 하인이 되려 했다. 하지만….

“잠시만….”

에레즈의 손끝이 칼리번의 손가락에 살짝 닿았다.

“아주 조금만…. 이대로.”

깨어나지도 못한 칼리번에게 멋대로 의지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너무나 큰 고통을 홀로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 * *

피아조차 구별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하얀 형체가 나타났다.

다섯 개의 손가락을 지닌 손이었다. 그것은 마치 유령처럼,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심해처럼 깊은 어둠 속, 산호처럼 흰 손은 서로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하얀 팔에서부터 손목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붉은 길은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손가락 끝까지 흘러갔다. 날렵한 손끝에 맺힌 피는 굵은 방울이 되어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피와는 정반대의 흐름이 있었다. 가느다란 실 줄기가 하얀 손을 가도로, 피를 이정표로 삼으며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모습이 처음에는 뱀처럼 보였다. 붉은 피를 마시는 모습은 마치 장미의 넝쿨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없이 연약해서, 호흡할 때마다 자꾸만 부스러졌다. 백금사는 어둠 속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담장을 오르며, 하얀 피부에 피의 궤적을 그렸다.

<가여워라.>

칼리번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에어리얼의 음성이다.

<널 낳아 준 오메가는 껍데기조차 만들어 주지 않았구나. 그런데 이를 어쩌면 좋지? 그는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바빠서 말이야, 널 돌봐 줄 시간이 없대.>

나쁜 부모네. 에어리얼을 키득거렸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실패작일 줄은 나도 미처 예상치 못했지. 프리드웬의 피가 섞였으니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올 줄 알았거든. ‘예언의 아이’라든가…. 그랬다면 훨씬 재밌었을 텐데.>

에어리얼은 금빛 넝쿨이 감긴 제 손을 기울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백금사를 살폈다. 그것에게 장난을 거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백금사는 기운이 없었다. 지금 모습으로 봐서는 마물이라기보다는 그저 길고 가는 실뭉치에 불과했다.

<멍청한 몸에 허약한 혼의 결합이라 그런가? 설마 인간계와 마계 어느 쪽의 대기도 버티지 못할 줄이야…. 살려 둬 봤자 쓸모가 없을 거라는 알테르의 말대로군. 그가 날 비웃겠어.>

어둠 속에서 에어리얼의 오른손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자상이 난 손바닥에서 붉은 피는 쉬지 않고 흘렀다. 백금사가 감긴 팔에 흐른 피의 출처다.

<피를 아무리 줘 봤자 이대로는 죽고 말겠지.>

에어리얼은 금사가 감긴 팔 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피가 금사의 반짝이는 표피 위로 떨어졌다. 핏물을 받은 백금사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파르르 몸체를 떨었다. 백금사는 도망치지도 않고 에어리얼의 피를 야금야금 받아먹었다.

<응?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

에어리얼은 웃었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이 조그만 마물 앞에서, 에어리얼은 하나의 생명을 온전히 제 손에 틀어쥔 신이었다.

<살아 봤자 그다지 즐겁지 않을 거야.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너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은 아닌 것 같군.>

에어리얼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 연약한 것을 살려 줄지 죽게 내버려 둘지를 가늠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마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에어리얼의 피부 위에 몸을 누일 뿐이다.

<그래…. 태어나자마자 죽기를 바라는 존재는 없으니까.>

그렇게 한참이나 죽어 가는 백금사를 희롱하던 에어리얼은 묘한 미소를 띠었다.

<나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줄까?>

붉은 눈동자는 혼탁한 어둠을 담고 있었다.

<연약한 내장이 버틸 수 있도록 조만간 쓸 만한 껍질을 마련해 줄게. 그때까지는 내 안에서 머물러도 좋아.>

에어리얼의 허락을 받은 백금사는 그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어깨와 쇄골을 지나, 그의 목을 감았다. 에어리얼은 입을 벌렸다. 백금사는 마치 샘물을 마시듯 혀 안쪽으로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거기가 아닌데.>

에어리얼이 입 안에 백금사를 머금은 채로 웃었다. 성대가 울리자 혀 안에 머문 실뭉치에도 그 울림이 전해졌다. 말을 잘 듣는 개처럼, 그것은 에어리얼의 입 안에서 빠져나왔다. 백금사는 에어리얼의 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알아냈다.

<아… 하아….>

허벅지 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에, 에어리얼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칼리번은 꿈에서 깨어났다.

…아니, 그것은 꿈이 아니라 에어리얼의 기억이었다. 칼리번의 의식은 에어리얼이라는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어리얼의 육체에 동조할수록, 에어리얼의 기억이 흘러들었다. 적의 기억이 앞길을 헤쳐 나갈 답이 될지, 영혼을 좀먹는 독이 될는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윽….”

칼리번은 신음을 뱉었다. 의식이 회복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뻑뻑한 눈을 떠 보니 주변이 온통 컴컴했다. 순간, 칼리번은 자신이 여전히 그 꿈속에 있는 줄 알고,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하지만 아니었다. 꿈에 있을 때와는 느끼는 감각이 달랐다. 이곳은 좀 더 습하고, 끈적했다….

지금 자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정신을 잃기 전 칼리번이 보았던 마지막 광경은, 성안으로 피신하는 에레즈의 뒷모습이었다.

“하아, 뭐지….”

뚝. 끈적하고 기분 나쁜 액체가 얼굴을 위로 떨어진다. 칼리번은 불쾌감에 고개를 들었다. 옅은 빛이 막힌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칼리번이 몸을 웅크린 장소는 거대한 너도밤나무의 속이었다. 마물의 독기로 인해 크기는 몇 배나 커졌으나, 동시에 속이 썩어 문드러진 고목이 되었다. 텅 빈 그곳에는 마물의 점액이 목 아래까지 고여 있었다. 칼리번은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욱…!”

그 사실을 인지하자, 낯선 마물의 체취가 훅 코로 들어왔다. 물컹한 액체의 질감이 불쾌했다. 그러나 온몸이 섬광에 달궈져 타 버린 그에게, 마물의 체액은 바르는 약초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몸 일부가 부러진 상태에서 몸 전체를 받쳐 주는 체액은 중력을 거둬 내 주었다. 한마디로 치료인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가 이런 짓을?’

칼리번은 그 사실에 안도하기보다는 의심이 앞섰다. 지금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칼리번은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기 위해 고목의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예전의 몸이었다면 주먹으로 너도밤나무를 부숴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가는 팔다리로는 묵직한 체액을 빠져나오는 데만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제길, 지독하게도 불편한 몸이군.’

마물 혼혈인데도 회복이 이 정도로 느리다면, 그것은 육체가 상당히 망가진 상태란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에어리얼 자체가 약해 빠진 탓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헉… 헉, 하아, 젠장, 하아…….”

헐떡거리며 간신히 고목을 기어 나오니, 검은 숲이었다. 여전히….

이 숲에는 좋은 기억이 그리 없었다. 에어리얼에게 붙잡히기 전, 몇 달을 숨어 지내던 장소. 하지만 그때 그의 곁에는 새끼 사슴처럼 작고, 가늘고, 하얀 누군가가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그러나 지금은….

“…….”

칼리번은 고목을 지키고 선 검은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숲속에 빽빽이 들어찬 나무 중 한 그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쇳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

아니, 기사일 리가 없다. 저것은 검은 갑옷의 마물이다. 가장 인간적인 보호구를 뒤집어쓴, 마물.

칼리번은 저것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다. 저것은 이미 한차례 칼리번을 살해하려 시도했었다. 본능이 온몸을 딱딱하게 긴장시킨다. 사실 칼리번이 저것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검은 갑옷이 적대적인 마물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생명의 위협 이전에,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고 싶지 않다.

칼리번은 뒷걸음질을 쳤다. 에어리얼의 몸은 나약하기 그지없어서 도망은 불가능했다. 칼리번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너도밤나무의 근처에 벗겨진 나무 껍데기와 나뭇가지가 널브러져 있다. 칼리번은 그중 그나마 날카로운 것을 손에 쥐었다.

“이 이상 다가오지 마라!”

칼리번은 미리 경고했다. 그러나 검은 갑옷은 묵묵부답이었다.

‘제길, 하는 수 없나….’

에어리얼처럼 마물에게 자유자재로 명령을 내릴 수 없다면, 이제 막 깨달은 수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허약해 빠진 몸이니,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 최대한 육체를 보존하고 싶었는데….

칼리번이 제 팔을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

검은 갑옷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제 팔로 칼리번의 몸을 감쌌다. 나무껍질은 갑옷의 표면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크윽…!”

그것은 칼리번을 지켜 주기 위한 낭만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검은 갑옷은 곧장 칼리번의 손을 등 뒤로 꺾어 넘어뜨렸다.

“머, 멈춰…!”

검은 갑옷은 낙엽이 깔린 땅에 쓰러진 칼리번의 몸 위에 올라탔다. 갑옷의 무게가 상당했다. 칼리번이 버둥거리자, 그것은 남은 손으로 칼리번의 목을 움켜쥐었다.

“더는, 에어리얼의 몸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헉, 으윽…!”

그것이 고개를 바짝 숙이고는, 칼리번의 코앞에서 위협했다. 칼리번은 갑옷에 눌린 고통과 무게감에 씨근거렸다. 머리가 땅에 부딪혀 어지러웠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저도 당신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

검은 갑옷은 뜻밖에도 협상을 시도했다. 물론 칼리번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아니, 힘의 차이가 컸기에 일방적이었다. 칼리번을 무력화시키기는 했지만, 그뿐. 검은 갑옷은 다른 마물들처럼 칼리번의 몸을 범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하아, 윽…. 이것 놔라!”

아스터는 칼리번의 두 팔을 한 손으로 어렵지 않게 붙잡았다. 그것은 칼리번의 삶에서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칼리번은 상대방의 보이지 않은 얼굴을 노려보았다.

“못 믿으시겠다면 하는 수 없지만, 지금 당신 상태로는 마물들에게 붙잡혀 범해질 뿐입니다. …아니면 그러기를 원하는 겁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당신이 도망친 후 기억났습니다. 지하 감옥에 있던 그 오메가, 맞죠? 제가 떠난 후 에어리얼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남김없이. 그렇게 해 준다면 마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겠습니다.”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검은 갑옷은 에어리얼의 수하였다. 칼리번이 지하에서 고초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글쎄요. 그건 당신이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요?”

“윽….”

아스터는 칼리번의 양손을 지긋이 짓누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숲에 깔린 마물들도, 인간들도, 에어리얼의 껍질을 뒤집어쓴 당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것. 제가 지켜본 결과, 당신은 에어리얼만큼 마물을 다루지 못합니다. 아닙니까?”

“…….”

“저로서는 에어리얼의 몸이 이따위로 손상되는 광경을 두고 볼 수가 없군요.”

칼리번은 목을 짓누르던 차가운 손이 흙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쥐었다.

“저는 에어리얼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닮은, 그래서 더욱 거부감이 드는 목소리는 감정 없이 울려 퍼지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어떤 절박감을 띄었다.

어째서인지… 그 절박함이 칼리번의 심장을 아플 정도로 강하게 두들겼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목적이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을 그냥 둘 수 없고, 당신은 제가 없으면 꽤 불리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서로의 목적을 취할 때까지, 일시적인 동맹을 맺자는 의미입니다. 어떤가요?”

“…….”

“당신이 저의 제안을 수락할지, 거절할지는 모릅니다. 그것까지 제가 정할 순 없겠죠. 하지만 만약 이 자리에서 거절한다면……. 저는 다음 수단을 쓰려 합니다.”

검은 투구의 틈새에서 가느다란 백금사가 흘러나왔다. 반짝거리는 실은 칼리번의 눈앞까지 흘러내렸다.

“……눈을 안 보이게 하는 것 정도는, 에어리얼도 그리 혼내지는 않을 겁니다. 그라면 자기 몸 정도는 다시 고칠 수 있을 테니까.”

칼리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붉은 눈동자 위로는 날카로운 백금사가 화살처럼 사위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크…흐으…!”

칼리번은 아스터가 인간을 조각냈던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마물을 베고, 인간을 보호하며 살아왔던 칼리번은 정반대의 광경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젠장….”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물을 부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에너지의 소모가 필요했다. 그것은 명을 깎아 먹는 일이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비록 적의 손일지라도.

헐떡이며 검은 갑옷의 아래에서 버둥대던 칼리번의 움직임이 점차 가라앉았다.

“좋습니다.”

순순해진 칼리번의 태도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검은 갑옷은 몸 위에서 벗어났다. 칼리번은 떨떠름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저번처럼 마물을 부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같은 일을 반복하며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으니까요.”

칼리번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검은 갑옷이 말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네가 이 몸을 저 나무 속에 담가 놓은 건가?”

대신 칼리번은 다른 질문을 했다.

“네. 오메가를 숨기는 데는 다른 마물의 체취가 제일이니까요.”

칼리번은 그와 비슷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도 들었었다.

“젠….”

칼리번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동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지금에서야 에레즈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은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여태까지 그녀를 떠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기적이지만, 숲에서 헤어진 그대로 여전히 에레즈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상황이 훨씬 쉽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상, 에레즈와 진작에 헤어져 자신만의 길을 갔을 확률도 높았다.

그때였다.

“에어리얼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부르지 마시죠. 불쾌합니다.”

누군가를 닮은 목소리가 불쑥 들어와,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리번을 불시에 깨웠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친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더구나 그런 주장을 하는 목소리가 더없이 익숙해서 칼리번이야말로 불쾌했다.

“너야말로 그런 목소리로 말하지 마라.”

칼리번은 인상을 쓰며 검은 갑옷에게 맞받아쳤다.

“제 목소리가 어떻다는 거죠?”

“그건….”

칼리번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8년 전, 에레즈의 목소리와 거의 흡사해서 들을 때마다 혼란이 든다. 저 갑옷에게 달려들어 투구 속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릴 정도로.

하지만… 잠시 마음을 어지럽혔던 저것이, 에레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후우….”

칼리번은 눈을 감고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좋아, 네 말대로 한동안은 너와 함께하겠다.”

그리고 마침내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많은 것들을.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대답을 무시한 것 같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현명하시군요.”

검은 갑옷은 칼리번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앞으로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십시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에어리얼은 에레즈 프리드웬의 가까이에 있을 테니까요.”

“…….”

“항상 복종하겠다고 맹세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대체로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에어리얼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용병들끼리 동업을 할 때, 계약이 성사되면 가볍게 악수를 나누곤 했었다.

‘제길, 하필이면 이런 때 옛날 버릇이 나와 버렸군.’

칼리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이 몸은 에어리얼의 것일 텐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

검은 갑옷이 칼리번을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투구에 가려져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인상을 주었다. 그는 칼리번이 손을 내민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칼리번이 손을 물리려던 때였다.

아스터의 갑옷에서 가는 백금사가 흘러나왔다. 햇빛 아래에서 흐리게 반짝이는 실은 하얀 손끝을 건드리더니, 검지의 첫 번째 마디에 살짝 감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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