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거미줄의 성 上 (13/50)

3. 거미줄의 성 上

알테르 프리드웬을 비롯한 다섯 왕자의 목은 서쪽 성문에 걸렸다. 장장 8년 만에 맛본 인간의 승리였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목을 걸지 못했으니 절반의 승리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왕성을 되찾은 것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뻐했다.

에레즈는 본성의 문루에 서 있었다. 그는 성의 그림자에 숨어 사람들을 몰래 지켜보았다. 알테르의 잔당을 몰아낸 후, 무사히 왕성으로 이주한 백성들은 연일 성으로 몰려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영웅의 얼굴을 직접 알현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는 그들의 앞에 서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다.

벌써 기뻐하기에는 때가 일렀다. 언제 또 에어리얼이 쳐들어올지 모를 상황이었다. 이렇게 모인 것 자체가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백성뿐만 아니라 기사단과 성녀단, 신용병 연합까지도 모두에게 왕의 위엄을 보여 줄 것을 원했다. 세 기둥이 입을 모아 같은 의견을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도.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축배를 들 필요가 있을까요?”

에레즈는 밖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직전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부정적인 견해였다. 그런 그의 심경과는 반대로, 백성들의 환호성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인간들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괴로운 일을 서둘러 잊고 싶은 거겠지. 전쟁이 너무 길었으니까.”

에레즈의 곁에 있던 젠은 그가 부정적으로 굴 때마다 되도록 좋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 또한 왕이 해야 일이고.”

“…….”

“뭐 해, 나가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느려 터져서 말이야, 다들 널 기다리고 있잖아?”

젠은 껄껄 웃으며 스스럼없이 에레즈의 어깨를 툭 쳤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도망칠 곳 없이 목에 밧줄이 묶인 것만 같았다.

“젠. 막역한 사이인 것은 알고 있으나 행동을 주의하십시오. 더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이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왕자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엑.”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젠은 깜짝 놀라 목에서 기괴한 소리를 냈다.

“무슨 반응입니까, 그건.”

그 정체는 목소리만큼이나 무뚝뚝한 인상의 성녀님이었다. 기척 없이 다가오는 솜씨가 그 어떤 마물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아…. 성녀님! 이런, 제기랄! 제가 감히 높으신 분 앞에서 무례를 범했군요. 예, 예.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자님 앞에서 그런 욕설을!”

“이런, 제길… 세상에나!”

젠은 두 손을 펼쳐 보이고는 일부러 공손하게 절을 했다. 젠이 먼저 발을 빼 버리니 에레즈는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가시죠, 왕자님. 많은 이들이 왕자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다.”

성의 그늘에 숨어 있던 에레즈는 성녀를 따라 햇빛 아래로 나섰다. 잘린 오른팔을 가리기 위해 두른 붉은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잘해. 무섭다고 더듬지 말고.”

젠은 에레즈가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농담을 던졌다. 그녀는 두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그늘에 남아 에레즈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에레즈가 지나친 회랑은 곳곳이 피로 얼룩졌으며 시체도 여전히 쌓여 있었다. 알테르를 죽인 후 고작 며칠. 긴박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아 아직 성 복구 작업까지 손이 닿지 못했다. 백성들이 이주하고 있는 성채 도시 내부의 시체 처리를 우선시하고 있으나, 그것조차 작업이 더딘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쁜 나머지 시체 위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건가….’

한쪽 눈으로는 시체가 보이고, 두 귀로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웅웅거리며 들린다. 에레즈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젠이 해 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표정을 다듬으려 노력했다.

“아, 기사단장님께서 마중을 나왔군요.”

곁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성녀가 드물게도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에레즈의 주의를 끌었다. 바닥 깔린 시체를 보며 걷던 에레즈는 시선을 돌렸다. 회랑의 끝에 소녀로 보일 정도로 유독 체구가 작고 마른 여인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위나였다. 왕실 재건 기사단의 단장이었건만 갑옷이 아닌 드레스 차림이었다. 낡은 드레스는 밑단이 너덜거리고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과거의 유물인 귀족 영애의 복식이 그녀 자신도 어색한 모양이었다.

“여, 영광된 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로위나는 어휘력이 부족한지, 아니면 지나치게 긴장했는지 ‘영광’이라는 단어를 거듭해서 사용했다. 평소에는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땋아 올리고는 했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길게 늘어뜨린 채였다.

“아직 즉위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벌써부터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다.”

에레즈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로위나에게 유감은 없었다. 다만 왕실 재건 기사단이 어떤 의도로 그녀를 이 자리에 세워 두었는지가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나란히 서길 바라는 거겠지.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그녀를 차기 왕비로 인지할 것이다.

“네, 시정할 수 있도록… 시정…하겠습니다!”

로위나는 씩씩거리며 사과했다. 시뻘게진 얼굴은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지나친 긴장과 코르셋에서 비롯된 질식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서서 죽을 것 같았다. 에레즈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해 낸 일이다.”

“네, 네…!”

“그러니 평소에 입던 갑옷과 검을 갖추도록 하거라.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그대의 희생과 무공을 자랑하지 못한다면 아쉬울 것 같으니까.”

“아…!”

“이는 나의 명령이자 강요이니 리론 후작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서둘러 갈아입고 따라오도록. 에레즈는 로위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네, 왕자님!”

로위나는 크게 감동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성녀님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며 후다닥 돌아갔다.

“…….”

에레즈는 벌써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래서 젠도 동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물 혼혈 출신이 과도하게 나설 필요가 없다며 거절했다. 에레즈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발을 빼는 스승이 치사하게 느껴졌다.

성녀를 따라 도달한 장소는 본성의 성문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전쟁의 주역들이 모여 에레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위나와 성미가 차가운 성녀는 에레즈에게서 떨어져 그 무리에 합류했다.

왕실 재건 기사단의 단장들, 로위나의 아버지이자 기사단의 후원자인 리론 후작, 신용병 연합의 대장 데릴만과 부대장 오드론, 성녀단의 원장 수녀가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그들은 지난 8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기둥이 되어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자님. 부디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선포해 주십시오.”

그들은 에레즈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앞으로 내몰았다.

와아아—

마침내 에레즈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성 전체에 울려 퍼지던 환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거대한 함성이 쏟아져 내렸다.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에레즈는 수많은 인간을 보아 왔다. 알테르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대를 최대한 끌어모았을 때도 이와 만만치 않게 많은 사람을 모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커다란 함성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인간이… 이렇게나 많이 살아남은 건가?’

에레즈는 내심 놀랐다.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에레즈의 가슴에 그들의 함성이 가득 차올랐다.

에레즈의 한쪽 눈에 성 아래에서 두 팔을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새겨졌다. 이 중 깨끗한 옷을 입은 이는 아무도 없다. 다들 전쟁의 최전선에서, 각자의 몫을 다하고 난 후였다. 진흙과 피, 오물로 엉망이었으나 그들은 더없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왕자님의 업적입니다.”

리론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레즈와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왕자님께서 앞장서서 저희를 이끌어 주셨기에, 더러운 마물을 몰아내고 성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예법이었다면, 왕족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감히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공고했던 법이나 체계도 많이 흐트러졌다. 더구나 그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우였다. 재해나 다름없는 마물과 싸우며, 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전략을 논하며, 때로는 치열하게 다투며 어린 왕을 비호했다.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웃어 주시길 청합니다. 분명 더 기뻐할 겁니다.”

“…그러지.”

에레즈는 그 의견을 반만 반영하여 왼팔을 들었다. 높은 곳에 선 에레즈가 움직이자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높아졌다.

‘에레즈 녀석….’

반면, 성안의 그림자 속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젠의 표정은 차갑게 식었다. 잘린 신체마저 회복시키는 경이로운 생명력. 마물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면 누구나 갖는 본성이었다. 제아무리 허약한 마물 혼혈이라 할지라도 회복력만큼은 보통 인간 이상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레즈의 몸에 입은 상처는 보통 사람들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형벌인 것처럼.

사람들은 바로 그 점에 환호했다. 인간의 몸으로 마물들을 쓰러뜨리고, 이겨 낸 진정한 ‘인간’의 구원자라며….

“에레즈 전하 만세!”

“만세!”

“앞으로도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사람들의 외침은 처음에는 저마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잘 들리지 않았으나, 곧 하나로 합쳐져 크게 울려 퍼졌다.

만세, 만세! 에레즈 프리드웬 전하 만세! 새로운 왕에게 영광을! 만세!

하나같이 에레즈를 찬양하고 있었다.

“…….”

압도적인 광경을 내려다보던 에레즈는 수천, 수만 개의 눈동자가 오직 자신만을 우러러보며, 자신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축배를 드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그로서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가 없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곧….

<네 진정한 목적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당연한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날뛰겠지. 너를 칭송하던…… 그 손으로 너를 찌를 것이다….>

알테르가 죽기 전 남긴 저주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에레즈에게 인간 한 명 한 명은 너무나 멀고, 또 너무나 작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들은 마치 거대한 개미 무리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발아래에 있다가, 어느덧 정신을 차려 보면 온몸을 뒤덮을 것만 같았다.

* * *

왕의 목을 벤 자는 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에레즈 프리드웬은 인간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더구나 그 비밀이라는 것은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우선, 에레즈 프리드웬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프리드웬 왕실에는 마물의 피가 섞였고, 그 또한 마물 혼혈이었다.

그다음으로, 에레즈는 인간의 구세주는커녕 왕의 재목도 아니었다. 에레즈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한 사람, 칼리번뿐.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은 수많은 백성이 아니었다. 에레즈는 에어리얼과 알테르에게 빼앗긴 칼리번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인간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에레즈는 인간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아니, 좋아할 기회조차 없었다. 어린 시절 그는 어떤 사람과도 깊은 접촉을 하지 못한 채 탑에 갇혀 지냈다. 갇히게 된 이유도, 죄명도 모른 채….

에레즈의 심장에 새겨진 이름은 오직 칼리번뿐이었다. 운명과도 같았던 다섯 번의 만남. 에레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새길 수 있었던 횟수.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하기 그지없어서, 기억조차 하지 못할 흔해 빠진 만남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레즈에게는 더없이 소중해서 매일매일 꿈을 꾸었다.

언젠가 탑에 나가서 자유로워지면, 그 사람을 찾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그의 곁에 있고 싶다고….

그 바람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버렸지만, 에레즈는 칼리번과 성 밖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 고작 두세 달. 그가 살아온 삶에 비하면 더없이 짧은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에레즈의 전부가 되었다.

그렇기에 에레즈는 탑에서도, 도망친 숲에서도, 그리고 그 사람을 희생시켜 비참하게 살아남은 후에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었다.

<이 숲을 나가게 되면, 꿈속의 그분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꿈을….

“칼.”

에레즈는 그 사람의 이름을 입술로 그려 보았다.

“…….”

어두운 밤, 하늘에는 하얀 달이 떴다. 그러나 칼리번이 잠든 장소는 빛 한점 들지 않는 창문 없는 방이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에레즈는 그에게 이것밖에 해 주지 못해 괴로웠다.

“칼리번….”

8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하 수로에서 에레즈가 붉은 오메가의 뒤를 쫓는 사이, 젠은 그자가 버리고 간 칼리번을 발견했다. 붉은 오메가는 결국 놓쳤지만, 오메가의 냄새를 맡을 줄 아는 마물 혼혈 병사보다 빠르게 칼리번을 수습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하여 에레즈는 전쟁 직후의 혼란을 틈타 왕성에서 가장 안전하고 깊은 장소에 칼리번을 숨길 수 있었다. 이 방의 존재와 오갈 수 있는 자는 오직 에레즈와 젠뿐이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누워 있는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더는 가볍지 않은 에레즈의 무게로 인해 침대가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칼…리번.”

에레즈가 몇 번이나 칼리번을 불렀지만,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사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내를 넘는 체격과 단단한 바위 같은 몸. 까무잡잡한 피부, 검은 머리카락. 항상 ‘무섭다’라는 인상을 주던 얼굴은, 깊이 잠들어 있어서인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에레즈는 그에게 닿고 싶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 닿지 못했다.

“…아.”

더는 오른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몸이 익히지 못한 탓이었다. 손을 뻗어 닿을 수조차 없다. 비록 왼손은 남아 있지만, 에레즈에게는 칼리번이 영영 닿을 수 없을 만치 멀게만 느껴졌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어째서….”

어째서, 눈을 뜨지 못하는 거야. 에레즈는 목이 메어 쥐어 짜내듯 중얼거렸다.

하루, 이틀, 사흘….

칼리번을 구조한 후 시간이 흘렀으나 그는 결국 눈을 뜨지 않았다. 젠은 조금 더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으나 에레즈는 애가 탔다. 마음 같아서는 가장 치유력이 뛰어난 성녀를 불러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존재는 극비 사항, 오직 에레즈와 젠만이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 지옥에서 간신히 칼리번을 구해 냈는데,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당신을 만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헤어질 줄 모르고 헤어졌던 그때, 미처 전하지 못했던 그 말을….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제는….”

에레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감히 꺼낼 자격조차 없다. 칼리번의 가슴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고 입가에는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다. 에레즈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만 보았다.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전에는 칼리번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살아 있을 뿐인 칼리번을 마주하게 되니 더욱 많은 것을 바라게 되었다.

칼리번이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소망이라는 것을 안다. 비록 자신은 예전과는 너무나 달라졌고, 어쩌면 칼리번은 그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겁쟁이는 이제 수많은 사람의 기대를 등에 업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 되어 있었으니까.

만약 칼리번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처음 보는 사이인 척 다시 시작하면 된다. 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다고, 당신과 좀 더 친해지고 싶었다고. 마음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한번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만약.

“두려워. 달라져 버린 내 모습을 보고 당신이 실망할까 봐.”

더는 나약해지고 싶지 않았기에 에레즈는 변했다. 그 대신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때로는 칼리번이 알게 된다면 자신에게 실망할 행동도 했다. 성을 차지하기 위해, 끔찍한 선택을 내린 적도 많았다.

칼리번이 이런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심지어 그가 변해 버린 이 모습을 보고는, 8년 전에 했던 선택마저 후회하게 된다면 어떡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에레즈는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칼리번과 헤어진 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내내 사로잡혀 있던 공포였다.

한쪽 눈을 잃고, 보기 흉터가 가득 새겨진 얼굴은 더는 아름답다고 하기엔 어려운 외모였다. 이제는 팔마저 잃었다. 잘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당신을 지킬 거야. 설령 깨어난 당신이 날 알아보지 못해도, 이런 날 혐오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평생… 곁에서 속죄하겠어.”

밤의 장막 아래에서, 에레즈는 달을 걸고 맹세했다. 그로 인해 인간을 마물의 먹잇감으로 죽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고 희생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죄는 오롯이 자신만의 것. 칼리번만은 가장 안전하고 깊은 곳에 서 보호받으면 된다.

이런 진심을 인간들에게 들키게 되면, 그들은 바로 왕의 자격을 박탈하고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성문에 목을 내걸겠지.

새로운 왕을 향한 환호와 함성은 밤이 되어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 * *

며칠이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곳에 몰아 둔 시체에서 피가 배어 나와 땅을 적셨다. 그 핏물은 작은 물줄기를 이뤄 왕성 주변의 숲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렇듯 구름이 해를 가리게 되면 마물의 힘은 강대해지고 비가 내리면 피 냄새가 널리 퍼져 더욱 날뛰게 된다. 여러모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비라니….”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버려진 성채 도시 안으로 피난민들을 들이고 그들이 정착할 수 있게 복구 작업이 시작되던 차였다.

전쟁은 일단락 지은 상태였지만, 전쟁이 할퀸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잠을 자고 배급으로 끼니를 때웠다. 정상적인 삶이 정착하기까지는 꽤나 시일이 걸릴 것이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백성들은 행복해했다. 주거지가 불안정하고 언제 전염병이 창궐할지 모를 일이었으나 예전과 비교하자면 천국 같았다. 성 전체를 둘러싼 보호막 덕분에 적어도 마물에게 찢겨 죽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들은 감히 미래를 꿈꿨다.

그리고 왕성 안에 자리 잡은 본성, 그곳에서는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왕성 탈환의 주역인 세 기둥의 우두머리가 총집합한 회의였다. 사람들은 왕실 재건 기사단, 성녀단, 그리고 신용병 연합이 기둥의 구성원이었다.

“지금은 한가롭게 논공행상을 논할 때가 아니다. 붉은 오메가의 목을 알테르의 곁에 걸어 두지 않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지.”

에레즈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성을 수복한 후 처음으로 여는 회의였다. 중요한 사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긴 탁자 위에 오른 화제는 뜻밖의 것이었다.

“붉은 오메가의 토벌을 돕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자님. 다만 저희는 확인을 받고 싶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세계에서는 전투 한복판에서도 중간 정산을 치르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방식이 허다합니다. 그러니 부디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에레즈의 앞에 당당히 나선 것은 신용병 연합의 대표인 데릴만이었다. 눈썹은 짙고 굵었으며 특유의 뻣뻣한 수염은 턱에서부터 구레나룻까지 빽빽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였다. 마물 혼혈 출신인 용병은 인간보다 훨씬 체구가 커서, 그 존재만으로 주변에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그 탓에 회의장은 긴장감으로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번 전쟁에서 너희 용병들이 보인 공로와 희생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에 대한 대가는 분명 치를 것이네. 일찍이 너희가 인간군의 편에 서는 조건으로 영지를 하사하기로 약속하였지. 그 영지는 인간이 아닌, 너희와 같은 마물 혼혈 출신을 영주로 임명할 예정이다. 그런데도 부족하단 말이냐.”

에레즈는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기존에 맺었던 맹약을 언급했다.

“그 계약은 전쟁이 종식되는 때까지입니다. 왕자님께서 알테르의 목을 베고 성문에 높이 걸어 두셨지요. 전쟁은 끝났습니다. 계약을 갱신하지 않으시겠다면 저희는 여기서 받을 것을 받고 물러날 것입니다.”

“아니! 아직 붉은 오메가가 남아 있다.”

에레즈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실질적으로 마물군을 이끌었던 것은 알테르 프리드웬입니다. 알테르와 그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응집된 마물군은 왕자님께서 이끄시는 연합군의 손에 괴멸되었고, 남은 건 붉은 오메가가 부리는 마물 몇 마리가 고작입니다. 그 정도야, 전쟁 이전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8년 전에도 마물이 인간을 습격하는 일은 잦았다. 용병의 손으로 거기까지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데릴만의 주장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말을 바꾸려 드는 것인가. 언제부터 이곳이 시장 바닥이 되었지? 우리가 처음 맹약을 맺었을 때 논했던 목표는 붉은 오메가와 알테르, 이 두 사람의 완벽한 죽음이다.”

농담거리도 안 되는 말장난이었다. 에레즈는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었다. 인내심은 금세 한계에 다다랐다.

“왕자님! 이제 붉은 오메가는 의지할 곳을 잃고 도망이나 치는 신세입니다! 왕자님께서 지니신 고귀한 성검 한방에 스러지고 말 겁니다.”

“끝까지 흥정하고 싶단 말인가?”

“…….”

“좋아, 어디 한번 새로운 조건을 들어 보지. 원하는 게 무엇이냐. 더 넓은 영지?”

에레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푸른 눈이 이글거렸다. 프리드웬 왕가의 상징인 보석안.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데릴만은 인간을 상대로 기묘한 압박감과 불쾌함을 느꼈다.

“부디 저희의 진심을 오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희가 원하는 것은 더 넓거나, 기름진 영지가 아닙니다. 용병들이 돈에 환장한다고는 하나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 질 나쁜 장사치처럼 군다는 것은… 크흠! 예, 저희도 안 될 일임을 압니다.”

“…….”

“저희가 원하는 것은 몹시도 사소해서 어찌 보면 무상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왕자님의 깃털 같은 고갯짓 한 번이면 이루어질 수 있어 금전적 대가가 필요치 않은 ‘허락’이기 때문입니다.”

에레즈는 어디까지 말하려는지 들어 보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들어 올릴 뿐이었다.

“왕자님, 저희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성씨’입니다.”

데릴만의 한 마디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저희에게 성씨를 허락하신다면 기존 맹약에서 약속하신 영지를 반납할 수도 있습니다. 떠돌이들에게 뿌리를 주십시오. 애초에 그것이 저희가 알테르 프리드웬이 아닌 왕자님의 편에 선 이유였습니다.”

“…자네는 내가 그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는 머저리 같나?”

에레즈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우악스러운 체구의 용병 대장을 노려보았다. 말이야 쉽다. 데릴만의 말을 듣다 보면 용병들은 그저 이름 뒤에 몇 글자를 더 붙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 함축된 의미는,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성씨란 대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으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왕자님! 저희 마물 혼혈들은 알테르의 반역 이전, 훨씬 옛날부터 인간의 방패로 살아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희는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땅과 집을… 가족을, 그리고 역사를 가질 수 있도록 인정해 주십시오.”

“당치도 않습니다!”

신용병 연합의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는 얼굴 대부분이 천으로 감겨 있었는데, 그런데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다는 감상이 들 정도로 잔뜩 분노에 차 있었다.

그는 왕실 재건 기사단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리론 후작이었다. 그는 ‘피의 날’을 버틴 얼마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정치 체계가 붕괴하다시피 한 지금, 후작이란 작위는 과거의 영광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후작이라고 불렀다.

“왕자님! 부디 뱀의 혀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저들은 인간의 배를 찢고 태어나는 괴물입니다! 저 말의 저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농장을 재현해 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리론 후작은 발작에 가까울 정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마물에게 후계자였던 장남을 잃은 후로, 리론 후작은 지난 8년간 무수한 전투에 광인처럼 뛰어들었다. 사내의 몸으로 마물에게 잡히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면서도, 복수심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리론 후작은 숨을 쉬듯 마물을 증오했으며, 아군인 마물 혼혈조차도 결벽적일 정도로 혐오했다.

“절대로, 결단코! 성씨만은 안 됩니다. 마물의 피를 이은 자는 절대로 대를 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더러운 피가 흐르게 될 겁니다.”

모욕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을 듣던 데릴만의 얼굴이 사나운 늑대처럼 일그러졌다.

“이보시오, 후작! 당신이 계집에게서 아들과 딸을 보는 것과 우리의 바람이 뭐가 다릅니까?”

“뭣이라? 남자가 여자와 결합하여 널리 자손을 퍼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연을 다스리는 것은 태초에 신께서 사내에게 내린 당연한 임무다. 마물의 후손 주제에 어딜 감히, 그 고귀한 임무를 감히 동급이라고 입에 올리는 것이냐?!”

“자식을 갖고 싶은 건 수컷이라면 누구나 갖는 당연한 욕구다!”

참다 못한 데릴만이 소리쳤다. 커다란 흉통에서 올라오는 고함은 회장을 쩌렁쩌렁 울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뭣이라…? 수… 수컷?!”

그 기세에 한걸음 물러섰던 리론 후작이 질 수 없다는 듯 외쳤다.

“큭…! 여,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천한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냐!”

그러나 말과 달리 리론 후작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선봉을 서는 그라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생명체로서 갖는 본능적인 공포였다. 기사단장인 로위나가 후작을 비호 하듯 곁에 바짝 붙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 아니지! 하다못해 곤충이나 식물조차도 번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후손을 볼 수 없는 신체적 결함이 있다면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욕망이 있고 자식을 갖는 일도 가능합니다! 가능하다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소?! 우리가 진정 잘못됐다면 그 잘난 신께서는 어째서 번식을 가능케 하셨겠습니까?!”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에 감히 신을 가져다 댈 셈이냐! 도대체 어디까지 인간을 모독하고 능멸하려는 것이냐!”

“능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암, 저는 후작님을 존중합니다. 그 작고 연약한 몸으로 더 작은 여인들을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어찌나 감동스러운지!”

“뭐, 뭐라… 작고 약해?!”

“저뿐만 아니라, 제 부하들 모두가 인간을 사랑합니다. 어찌나 사랑하는지, 알테르의 반란 이전에도 저희는 용병 연합을 구성하여 서로를 감시하고 잘 관리했습니다. 후작님과 같은 인간님께 인정받기 위해 사내라면 응당 품을만한 욕망을 포기했단 말입니다. 지난 세월 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희와 우리는 같은 사내가 아니다!”

“왕자님!”

리론 후작과 말싸움을 벌이던 데릴만은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손을 펼쳐 보이며, 간절하게 애원했다.

“저희는 자체적으로 씨를 말린 겁니다. 발정 난 수퇘지가 된 녀석들이야 언제든 튀어나오니 완벽하게 관리했다고는 자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용병 연합에 등록된 녀석들에 한해서는 그럭저럭 잘 처리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생명체가 이렇게 살아가겠습니까?!”

에레즈는 차가운 눈빛으로 데릴만과 리론 후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후작! 당신 같은 인간 사내들이야 알테르의 부하가 무서운 괴물이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돈? 단순히 금화를 원했다면 다른 알파들처럼 저희도 알테르 밑에 들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인간을 지키기 위해 한때의 동료마저 베었습니다. 크…. 쥐뿔 받은 것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마물을 막아 냈단 말입니다! 이렇게까지 희생하며 버텨 온 이유는 오직 하나,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인간적인’ 바람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봉사했으면…… 그 망할 신도 불쌍히 여겨서 받아 주고도 남을 겁니다!”

데릴만의 목소리는 성안 회의실 전체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는 숨을 헉헉거리기까지 했다. 태초에 신께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짝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낙원에 홀로 있는 남자를 보고 가엾게 여겨 여자를 빚어 주실 정도로 자비로우셨다. 그러나 데릴만을 비롯한 마물 혼혈은 성스러운 책에 적히지 않은 유일한 생명체였다. 그것을 근거로 삼아 인간 사내들은 마물 혼혈은 번식할 수 없다 주장했다.

“이렇게 간곡히 애원합니다, 왕자님! 저희와 계약해 주십시오. 성씨를 가지고, 가족을 만들고, 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데릴만이 의자를 걷어차더니 대뜸 무릎을 꿇었다. 그 행위가 어찌나 거칠었는지 쿵, 무릎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였다.

“…그렇지 않다면 저희 ‘신용병 연합’에서는 이후의 전투는 물론 알테르 밑에 있던 잔당들과의 전투에서도 손을 뗄 겁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백성들의 목숨을 쥐고 흔들려는 속셈이냐!”

알파에게 덤벼드는 용맹함을 지닌 후작일지라도 그 순간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이것 참! 자식을 못 갖는다면 동료라도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이어지는 데릴만의 선언에 리론 후작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8년 전까지만 해도 용병 연합은 남부 연합과 동부 연합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이들 대부분은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에레즈가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알테르 프리드웬 밑에 있던 용병들이 이탈하여 아군으로 흡수된 것이다. 그리하여 에레즈의 편에 선 용병을 신용병 연합으로, 알테르 밑에 남은 잔당은 구 용병 연합이라 구분하게 되었다. 이들 ‘신용병 연합’은 연합군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이들이 빠진다면, 여자가 대다수인 인간군만으로 마물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왕자님! 절대로 저 알파의 말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저희가 군사를 더 모집하여 싸우겠습니다! 더는 사내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마십시오…!”

리론 후작은 뒤늦게 데릴만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를 보필하던 로위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으나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격렬하게 부딪친 두 진영 가운데에는, 세 번째 진영이 있었다. 바로 성녀단이었다. 성녀단의 대표는 의자를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은 채 얌전히 앉아 격론을 듣고만 있었다. 마치 그곳의 시간만 멈춘 것 같았다.

“어디, 남은 그대들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는 건 어떤가?”

에레즈는 성녀단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감히 인간과 똑같이 씨를 뿌리고 번성하기를 주장한다니, 신에 대한 모욕입니다. 성스러운 책 어느 곳에도 저들을 위한 글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원로 성녀가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용병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승리는 거머쥘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감사할 일임은 틀림없으나, 원론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그 또한 원죄에 대한 속죄… 아니겠습니까?”

데릴만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원로 성녀를 노려보았다.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는 허락할 땅도, 성도 없습니다.”

그 형형한 눈빛을 마주 보며, 원로 성녀는 무감정하게 제 의견을 비쳤다.

“하! 하하…. 쓸모가 다하니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군. 하지만 왕자님, 아직은 저희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협박 아닌 협박을 내뱉은 데릴만은 분을 삭이며 씩씩거렸다.

“…….”

세 갈래의 시선이 답을 갈구하며 에레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용병 연합이 이런 요구를 할 것은 충분히 예상했다. 전쟁 초기에는 알테르 측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힘의 논리’에 따라 대부분의 마물 혼혈들이 알테르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데릴만을 비롯한 알파들은 점점 에레즈에게 힘을 보탰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줄 수 없는 것을 원해서였을 것이다. 알파의 본심이 오늘에서야 드러난 것이다.

“붉은 오메가를 잡을 때까지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 벌써부터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니…. 그래, 앞으로의 논공행상이 그리도 궁금하다면 미리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리던 에레즈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데릴만을 내려다보았다.

“데릴만, 너희에게 성씨는 줄 수 없다. 하지만 예정대로 약속된 영지를 하사할 것이다.”

“왕자님…!”

데릴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내 말을 끝까지 듣거라. 너희를 배척하고자 함이 아니니.”

“…….”

“붉은 오메가의 목을 베어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면, 이후로는 가문의 장녀가 그 가문의 성씨를 잇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말에 데릴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이번 차례에 경악한 것은 성녀단과 왕실 재건 기사단의 수장들이었다.

“와… 왕자님? 그것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왕국의 전통을 송두리째 흔드시려는 겁니까? 모두가 불안해하는 지금,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예전과 같은 평화이지 그런 혼돈이 아닙니다!”

“혼돈?”

에레즈는 고개를 까딱였다.

“현재 인간 중 남자의 수는 여자의 1/5수준밖에 되지 못하지. 그 탓에 대부분의 전투와 노동은 여자가 주도하고 있다. 그들이 이전의 남자들이 해 왔던 일을 고스란히 맡고 있지. 그러니 남자에서 남자로 이어지는 성씨를 여자가 잇게 하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결정의 어디가 이상하단 말인가?”

“그…것은, 여자가 남자만큼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남자가 여자들을 적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다스린 덕분입니다. 머릿수가 중요하다면 인간은 개미보다 그 수가 적으니 그들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한단 말입니까? 자고로 손과 발보다 심장이 중요한 법입니다.”

“즉, 그대가 심장이다?”

“큽!”

리론 후작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내 결정은 그대의 권리를 빼앗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대, 남자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데릴만.”

“네, 왕자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알파와 사내의 결합을 인정하고 대를 잇게 한다면, 인간의 수가 줄게 된다. 결과적으로 사내에게서 태어나는 너희 알파의 수도 줄게 되겠지. 결과적으로 순수한 마물을 제외한 모두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진정 인간과 공존하겠다는 그대들의 바람인가?”

“…….”

“그리고 리론 후작.”

“여기… 있습니다, 왕자님.”

“내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정세가 안정되면 공표하려 했으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용병은 또 용병 나름대로. 어떻게 그 누구도 원치 않는 결단을 골라 내린 것일까? 마지막으로 에레즈는 원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결정을… 반기는 여인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신께서는 모든 곳에 머물지 못하기에 가정에 아버지를, 왕국에 왕을 내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어머니는 아들을 받들어야만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감히 그 반대는 일어날 수 없는 법이죠.”

“성검에게 선택받은 자가 내리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말인가?”

성녀단은 회의에서 의견을 내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왕실 재건 기사단과 신용병 연합에게 쉽게 순응하는 편이었다.

“왜냐면 지금 왕자님께서 하신 말씀은, 당장 왕자님에게도 통용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 막중함을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드물게도, 원로 성녀는 에레즈의 말에 반론했다.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는 바로 ‘왕’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왕자. 에레즈 프리드웬이야말로 모든 권력을 물려받은 ‘남자’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제 입으로 자신의 입지와 정반대의 주장을 한 것이다.

“…왕실에서는 그간 사내아이만 태어났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원로 성녀가 이어서 말했다. 그 말의 무게는 장녀 상속을 제안한 에레즈의 말보다도 훨씬 무거웠다.

“…….”

에레즈는 탑에서 지낸 세월을 떠올렸다. 그 어린 시절, 에레즈를 감시하고 관리하던 것은 성녀단의 성녀들이었다.

“내 말을 내가 어길 일은 없을 것이다. 내게서 태어날 자식은 당연히 여자아이일 테니까. 정세가 안정되고 이후 왕비를 들이게 되면, 첫 번째로 태어나는 여자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에레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간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이 건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가 회의장에 모인 이유였던, 피난민들의 거처 배분과 병사들의 배치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지.”

* * *

회의는 세 기둥 중 모두 만족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평화가 도래하면 후작의 지위를 잃게 될 리론 후작 가장 먼저 회의장을 나왔고, 그 뒤를 따라 성녀단이 빠져나왔다.

“왕자님께서는 모두를 적으로 삼으시려는 것인가?”

리론 후작은 분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 이는 전쟁 후에도 용병을 계속 이용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보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인간처럼 살게 해 달라고 협박을 해 댔을 겁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방식을 논한단 말이더냐!”

“왕자님께서 다 계획이 있으실 겁니다. 저희를 버리실 분이 아니시니 부디 진정하십시오.”

로위나는 리론 후작을 열심히 위로했다.

“알버트…. 알버트만 있었다면,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리론 후작은 로위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로위나라는 ‘딸’이 있으므로, 장녀 상속이 기정사실이 된다 해도 성씨는 무사히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죽은 아들을 찾으며 한탄했다.

“…….”

로위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보다는 리론 후작을 부축하여 최대한 빨리 회의장을 벗어나려 노력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버지가 흥분한 나머지 분란을 만들까 그것이 더 두려웠다. 주변을 살피는 로위나의 눈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성녀단과 용병대가 보였다.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마물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로위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반면, 그랬기에 용병대는 마음 놓고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역시 에레즈 프리드웬은 우리를 전쟁에만 이용할 생각이었군.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대로 살길을 찾아야겠지. …부대장.”

“예, 대장님.”

“계획은 변경 없이 진행한다. 왕성에서 검은 오메가를 찾으면 저들에게 알리지 마라. 바로 하사받은 영지로 이동할 거다.”

“알겠습니다.”

인간을 못 내주겠다면 무력화된 오메가를 가져가는 수밖에. 데릴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흉터가 남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 * *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으나 에레즈는 곧바로 정치적, 경제적 문제와 마주해야만 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늘어놓자면 끝이 없었다. 마물로 인해 오염된 왕성과 토지의 정화 작업, 피난민의 이주 및 거주 해결, 보호막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적군의 침입 방지, 인간과 마물 혼혈 간의 갈등 중재, 인간 농장 출신의 인간 노예의 관리 등. 식량 배급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지난 8년, 알테르 프리드웬의 통치로 인해 인간의 수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레즈가 피난민 모두를 포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당장은 그들을 왕성 안으로 들여도 상관없었지만, 이후로는 성 주변을 둘러싼 숲을 정화하고, 마물에게 점령당한 주변 영지를 수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붉은 오메가 찾아 죽이면 대부분 해결된다. 알테르가 죽고 붉은 오메가가 도망친 지금, 마물은 통제 불가능한 혼돈이 되었다. 강력한 알파와 오메가의 힘으로 유지되던 그들만의 미묘한 질서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숲은 마물이 응집하면서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정작 마물의 독기로 인해 인간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전 소식을 듣고 왕성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피난민 중 많은 수가 숲에 숨어든 마물과 마물 혼혈들에게 붙잡혀 겁탈당하고 살해당했다.

그 때문에 연합군은 성 내부를 정비하는 한편, 전력 일부를 피난민의 보호와 붉은 오메가 수색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성 외부의 전투와 피난민 보호는 신용병 연합에서, 성 내부의 경비는 왕실 재건 기사단이 맡았다. 성녀단에서는 보호막의 관리, 성내 정화 작업과 부상자 치료를 담당하게 되었다.

성을 되찾은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기에 모든 분야에서 일손이 부족했다. 노인이 죽은 세상. 체계와 규율은 무너진 지 오래여서, 일이 터질 때마다 급급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에레즈는 성을 되찾은 후 거의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그를 찾았다. 연달아 열리는 회의는 하룻밤을 꼬박 넘길 때도 있었다.

“본성을 정화하던 중, 탑에 감금된 왕비님을 발견했습니다.”

하루하루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때, 한 성녀단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렸다.

“왕비? 설마 베이가 프리드웬 왕비 전하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왕자님.”

왕성 탈환이 이루어진 후로 일주일 가까이 흘렀다. 그간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살아남았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알테르 측에서 마지막으로 넣어 준 식량과 빗물로 여태껏 간신히 연명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탓에 영양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명색이 왕비였던 여인이 썩은 빵을 뜯어 먹으며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버텼다는 것이다.

“…….”

왕비 베이가. 그녀는 에레즈를 비롯한 프리드웬 형제들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에레즈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머니라고는 하나 에레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왕실은 이미 오래전에 마물의 피에 물들었고, 왕비라는 존재는 인간들에게 프리드웬 왕가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장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피의 날 이후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아 알테르의 손에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무사하셨군.”

왕비가 된 여자들은 대대로 두문불출했으므로 에레즈 또한 한 번도 어머니라는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어머니였다.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서라도 에레즈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다는 감격에 젖어야만 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왕비님께서는 쇠약해지셨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원하신다면 당장에라도 만나실….”

“아니.”

에레즈는 성녀의 말을 단번에 잘라 냈다.

“그분이 여태껏 살아 계셨다면 그건 알테르 프리드웬과 공모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트리스트람 가문이 그러했지. 그분이 ‘피의 날’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심문을 거친 후에 모자간의 회포를 풀어도 늦지 않겠지. 붉은 오메가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니 경계를 늦출 수는 없다.”

피의 날, 수많은 귀족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리론 후작처럼 간신히 탈출한 인물이 있는가 하면, 극히 드물게도 알테르의 환심을 사 목숨을 부지한 인간들도 있긴 했다. 그중 왕비의 친정인 트리스트람 공작 가문이 그러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선택은 잘못되었다. 귀족에게서 무기와 자금을 얻어 낸 알테르는 망설임 없이 인간을 처단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왕비를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왕자님. 그분은 왕국의 마지막 왕비님이시며, 전성기 때는 나라를 위해 봉사한 성녀셨습니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편을 드셨을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탑에 감금된 것도 분명 고난을 버티셨기에….”

“그분이 알테르 프리드웬의 편에 서서 정보를 팔았을 수도 있지. 첩자가 고초를 당한 아군으로 위장하는 경우는 흔하다.”

에레즈는 드물게도 사견을 드러낸 성녀의 조언을 잘라 냈다.

“…그렇다면 어떤 처분을 내리시겠습니까?”

성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니는 탑에 그대로 유폐시켜라. 심문은 긴급한 사안을 처리한 후에, 내가 직접 진행하겠다.”

* * *

젠은 벽에 몸을 붙이다시피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현재 젠의 공식 직급은 ‘왕실 직속 호위 기사 겸 왕실 재건 기사단 내 13 기사단의 단장 겸 연합 부대의 지휘관 겸 소규모 용병대 검고 썩은 어금니의 부대장’이었다.

8년 전이었다면 놀라 자빠질 승진이었다. 그녀는 평생 용병질로 먹고 살았다. 어쩌다 잡은 연줄로 인해 온갖 명부에 이름을 올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나, 실제로는 ‘에레즈 프리드웬의 졸개 겸 보모 겸 뒤처리 담당’에 불과했다.

하여간, 호위 기사이자 기사 단장이자 용병대의 부대장이자 연대장인 젠은 밀려드는 업무의 파도를 피해 적당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피해 어둠에 숨어들었다.

걸음은 신중하게 성안 숨겨진 장소로 향한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혹여나 따라붙는 시선이 있는지 살피고, 중간중간 일부러 다른 길에 들러 동선을 흩트려 놓는 공작 또한 잊지 않았다.

젠이 기가 막히게 본성 내부로 진입함에 따라 인적은 점점 드물어졌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물로 인해 오염되었으나 아직 정화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구역이 상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략 30년 전, 에레즈가 태어나기도 전에 큰 화재가 일어난 탓에 오래전부터 폐쇄된 구역이 꽤 있었다. 그런 위험 지대까지 건너며 젠이 향한 곳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초라한 문에는 방에는 잠금장치가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젠은 장치들을 익숙하게 해제해 나갔다.

간신히 들어가게 된 방 내부는 소박하고 단출했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린 왕족을 피난시키는 용도로 만들어진 방이었다. …실제 ‘재난’이 발생했을 때는 쓰이지 못했지만.

방 안에는 작은 침대와 협탁, 의자가 전부였다. 침대 위에는 한 사내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는 그 사내를 간호하기 위한 도구들, 물이 담긴 대야와 천, 붕대와 물약 등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주변에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젠보다 먼저 온 손님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역시 여기에 있었군. 나만 지옥에 빠뜨려 넣고 여기서 희희낙락 쉬는 거냐.”

“…스승님?”

젠이 들어올 때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내는, 타박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인마! 사람들이 온통 너만 찾고 있던데? 하하, 난리도 아니더라. …정말 난리던데. 가서 상대 좀 해 주지 그래?”

젠은 몸을 문가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녀의 호들갑에 에레즈는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모습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 줬던 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나도 여기 있어도 되지?”

“그럴 리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승님인걸요. 이 사람에게도 저보다 더 반가울 겁니다. 혹시 감시는 붙지 않았나요?”

에레즈는 의자에서 일어나 제 자리를 권했다. 프리드웬 왕실의 유일한 계승자가, 한낱 마물 혼혈 출신의 용병에게 몸을 낮춘 것이다.

“그건 걱정 마. 내가 얼마나 조심하면서 왔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젠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녀가 확인 끝에 문을 닫자 잠금장치가 쇳소리를 내며 분주하게 돌아갔다.

“흐음, 이 녀석은 여전하군.”

젠은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칼리번을 살펴보며 말했다.

“별다른 변화 같은 건 없고? 내가 없을 때 잠에서 깬 적이 있다든가….”

“지하 감옥에서 처음 발견한 이후로 같습니다.”

“…그래?”

젠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협탁에 놓인 대야와 천은 사용감이 다분했다. 에레즈는 잠든 칼리번의 곁에서 틈틈이 간호를 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수면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말이다.

젠은 전과 다를 바 없는 칼리번 대신 에레즈를 살폈다. 단단한 체격과 곧은 자세. 무수한 흉터를 대가로 얻은 힘은 몸 구석구석 뼈와 근육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말라 빠진 애송이라고 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예전의 미모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흉터와 화상으로 엉망이 된 지금의 얼굴은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유일하게 예전과 같은 것이라면, 칼리번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 정도였다.

“너, 잠은 제대로 자고 있어?”

“네.”

“거짓말 마! 야, 아무리 알파라도 그렇게 버티다가는 쓰러진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죽을 정도로 일하고 있으면서 무슨. 젠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저놈은 때려서 기절시키지 않은 이상은 잠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주먹으로 에레즈를 제압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지 오래다.

‘젠장, 진작에 더 때려 둘걸.’

젠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도통 깨어나지 않네요. 이러다 증발해 버리는 건 아닐까 두렵습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그럴 덩치가 아냐.”

“…한번 그런 생각에 빠지면, 도무지 잠이 들 수가 없습니다. 아침이 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말 듣고 있냐?”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서 그런지, 조금 야윈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에레즈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마물 혼혈이라고 해도 오랜 시간 잠들어 있으면 역시 생명에 위험이 있겠죠?”

“…….”

“다시 잠들어도 좋으니까, 잠시라도 일어나서 식사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칼리번을 바라보는 푸른 눈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젠은 흰 눈을 뜨고 에레즈를 노려보았다.

‘정말 가관이군. 설마 이 정도로 좋아 죽을 줄은 몰랐는데….’

겉보기에는 바깥에서 보아 온 ‘에레즈 프리드웬’과 별다른 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을 함께해 보면 깨닫게 된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주변을 짧은 걸음으로 오가다가, 얼굴로 손을 덮다가 다시 턱을 쥐다가….

한마디로, 소리만 없었지 부산스러웠다.

“설마 나 없는 동안에도 계속 이러고 있었냐? 가만히 좀 있어라. 이 좁은 곳에 덩치 큰 놈이 부산스럽게 굴면 완전 정신 사납다고.”

참다못한 젠이 한소리를 했다.

“…….”

그 말이 저주라도 되는지, 순식간에 에레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예 움직이지 말란 소리가 아니잖아.”

그제야 에레즈의 몸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저 멍청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하는데.’

젠은 에레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는 거죠?”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한 에레즈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설마… 나 없을 때 칼리번한테 뭔 짓이라도 한 거 아니지?”

젠은 대뜸 에레즈를 추궁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겉보기에 에레즈는 평소와 같이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젠은 눈치챘다. 그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 갈라져 있다는 것을.

“그동안 뭔 짓을 해도 안 깨어났잖아, 이 녀석. 그래서 ‘마지막 수단’을 써 본 거 아니냐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너 내가 저번에 이 방을 나오기 전에 말했지. 칼리번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나한테 죽을 줄 알라고.”

“스승님? 도대체 무슨 의미로….”

“나 몰래 칼리번한테 끝내주는 키스를 한 거 아니냐고!”

쾅! 젠이 주먹으로 협탁을 내리쳤다. 주먹질보다 더 강력한 충격 발언에 대야 안에 담긴 물마저 놀라 흔들렸다.

“…네?”

한쪽밖에 남지 않은 에레즈의 눈도 확장되었다.

“예로부터 잠든 공주님…. 어, 저 녀석을 공주님이라고 하기에는 좀 토할 것 같지만…. 하여간, 잠든 뭐시기를 깨우는 방법은 끝내주는 키스란 말이지.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시도하지 않은 건 그거 하나뿐이고.”

“…….”

“그리고 저 커다란 칼리번한테 키스를 갈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아니, 제대로 돌아 버린 놈은 우리 둘 중 너뿐이다! 그러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냐!”

“…….”

젠이 뻔뻔하게 말을 이어 갈수록, 에레즈의 얼굴이 점점 붉게 변해 갔다.

“칼리번은 내가 새끼 때부터 키운 용병이야! 정신을 잃은 저 녀석의 보호자는 나라고 볼 수 있지. 그리고 너도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잖아? 그러니 뭘 하려면 이 어르신 허락을 받아야지. 23만 골드의 지참금 없이 멋대로 붙어먹는 건 절대로 용서치….”

“……그….”

젠은 더욱 파렴치해졌다. 숨을 멈춘 에레즈는 젠의 머리카락보다도 더욱더 시뻘겋게 변해, 얼굴이고 목이고 손이고 가릴 것 없이 붉어졌다.

“그, 그… 그런 일, 을! 가, 감히, 할 리가 없잖습니까! 저, 적당히, 노, 놀리, 십시오!”

에레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 좁은 방이었기에 에레즈의 등은 금세 벽에 닿았다. 옳다구나. 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푸른 눈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10골드.”

젠은 만면에 악마의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

에레즈는 즉시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빨리 내놔.”

“시, 심하잖습, 니까…. 하, 하필이면, 이, 이런 곳에서….”

“이게 다 제자를 위한 눈물겨운 훈련이니라.”

젠은 완고했고 에레즈는 이를 악물고는 허리춤에 채워 둔 금화 주머니를 던졌다.

“이걸로 돈을 버는 건 오랜만이군. 이야, 옛날 생각나네?”

“…윽.”

“그러니까 어느 때고 방심하지 말랬지.”

이는 8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훈련으로, 말을 심하게 더듬는 어린애에게서 정당하게 돈까지 착취할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이 훈련법을 도입하고 몇 년간 젠은 꽤 짭짤한 수입을 올렸었다.

“뭐야, 화났냐?”

젠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불렀다. 에레즈는 그녀에게서 아예 등을 돌려 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뒷덜미와 귀가 여전히 불긋불긋했다.

“…이,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아… 않았는데.”

에레즈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노, 노력, 했는데….”

하지만 귀가 밝은 젠에게는 충분히 들렸다.

“누구한테 그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

“역시… 나?”

젠은 왠지 더 놀리고 싶어져 자꾸만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흐응.”

에레즈는 그녀를 한번 흘겨보더니,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에레즈가 완벽한 왕자님이 되지 못한 점은 젠도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를 왕자님처럼 보이게 하려고 같이 ‘노력’이란 걸 한 동료로서.

8년 전의 에레즈 프리드웬은 허약할 뿐만 아니라 심한 겁쟁이에다 말더듬이였다. 몇 년에 걸친 ‘노력’으로 그 버릇은 대부분 고쳐졌지만, 심하게 당황하거나 놀라면 여전히 말을 더듬는다.

그래서 젠은 에레즈에게 ‘놀랄 만한’ 모든 상황을 재연해 주었다. 시도 때도 없이 에레즈를 놀라게 해서 심장을 단련시켰다는 뜻이다. 잠든 에레즈를 벌레 구덩이에 빠뜨려서 기절시키거나 물에 빠뜨리거나, 대체로 이런 방식이었다.

‘갈 길이 멀구만.’

하지만 ‘칼리번을 되찾았다’는 상황은 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재연할 수 없었다. 즉, 에레즈에게 칼리번에 대한 면역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칼리번도 익숙한 모습을 더 좋아하지 않겠어?”

시름이 워낙 깊어 보이기에, 젠은 병 주고 약 주는 심정으로 위로의 말을 던졌다.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잘하면 되지. 안심해, 잠든 상태니까 지금 네 모습은 못 봤을 거야.”

깨어나지 않은 걸 안심해야 한다니 뭔가 이상하지만, 젠은 그럴듯하게 변명했다.

“…….”

에레즈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좀 해! 왜 벽에 얼굴을 처박고 있냐…. 이리 와! 칼리번 손 정도는 잡아도 돼. 닳겠냐? 이 스승님이 특별히 허락해 주마.”

움찔, 에레즈의 귀가 더욱더 새빨갛게 익었다.

“이, 이제 그, 그, 그런 농담은 그… 그만 마십시오. 버, 벌금은 드, 드렸잖습니까…!”

에레즈의 뒤통수가 항의했다. 젠은 그 모습이 웃겨서 낄낄 웃었다.

‘아무리 숨기려 노력해도, 결국 이게 내 모습인 건가….’

에레즈는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칼리번 때문인지 흉터투성이의 얼굴에 작게나마 부끄러움이 서렸다. 그것은 왕이 될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숫기 없고 나약한 에레즈 프리드웬. 원래의 자신.

아무리 노력해도 칼리번처럼 강한 사람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철과도 같은 강인함과 모두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없다면, 전의를 잃은 사람들을 북돋워 전장으로 이끌 수 없다.

<너 자신을 강하게 만들지 못할 것 같으면, 누군가의 흉내라도 내 봐. 적어도 말을 더듬는 버릇이 나아질지도 모르지.>

어느 날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은 에레즈는 열심히 가면을 만들었다. ‘모두가 의지하고 싶어 하는 강한 왕자’의 가면을. 그리고 그 가면의 대부분은… 에레즈가 유일하게 존경하고 믿는 존재인 칼리번의 의지와 굳건함에서 따 왔다.

처음에는 아무리 칼리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져도, 그처럼 멋있고 강하게 행동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하면서 버텼다. 칼리번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따르면, 그들이 칼리번을 기억해 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

‘원래대로라면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일 텐데….’

가면이 벗겨질 때면, 에레즈는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칼리번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에레즈는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성검을 바라보았다. 칼리번과 같은 이름을 지닌 검. 이 검이 칼리번 본인보다 더 많은 찬양을 받았겠지.

수치스럽다. 승리의 영광과 기쁨을 누려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칼리번이었다. 그런데 이런 누추한 곳에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다니….

에레즈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힐끔거리며 칼리번을 살폈다.

“참 나….”

한편, 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얼굴은 엉망진창에 팔은 어디다 잘라 두고 와서는… 이딴 몰골인 주제에 어릴 때처럼 새침하게 굴고 있다니.’

어릴 때야 조그마해서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만, 다 커서 지금은 징그럽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8년이 흘렀다. 이제는 어엿한 왕자님이 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어릴 적 모습이 드러날 줄이야. 정말로 드문 일이다.

그 덕분에 그녀는 오랜만에, 원치 않게 맡게 되었던 자그맣고 예쁘장하던 소년을 떠올렸다. 에레즈에게서 돈을 뜯는 일이 줄면서 서서히 잊힌 모습이었다.

<카, 칼리번… 구, 구하고 싶어…. 뭐, 무… 뭐든 하, 할 테니까… 아, 알려 줘 . 어…… 어, 어떻게, 하아… 해야, 하는, 지를.>

세상 모든 것을 두려워하던 겁쟁이. 그 꼬맹이가 눈앞의 흉터투성이 사내가 되리라고 누가 믿을까? 과거의 젠조차 믿지 않을 것이다.

<…일단 존댓말부터 하지 그래. 꼬맹이 주제에 어디서 맞먹으려 들어. 누가 아직도 왕자 노릇 해도 된다고 가르쳐 줬냐. 칼리번이?>

수년간의 훈련 끝에 에레즈는 어지간한 일에는 당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에레즈는 그때의 그 꼬맹이였다.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고백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소년처럼….

현실도 마냥 달콤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실상은 고백을 받아야 하는 그 소녀는 ‘싫어’ 하고 뻥 차 버리기는커녕 깨어나지도 못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

깊이 잠든 칼리번의 모습은 어찌 보면 시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아직도 저게 칼리번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젠은 툭 하니 내뱉었다. 에레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칼리번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이지 난리도 아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붉게 보일 정도로 그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실제로 상당한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옮긴 후로는 자연적으로 회복되었다.

마물 혼혈이라면 누구나 가진 회복력이었다. 그 말인즉, 지하 감옥에서는 상처가 회복되지도 못할 정도로 지속적인 고문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저건 칼리번이 아닐 수도 있어.>

초반부터 젠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에레즈가 차마 하지 못할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기도 했다. 젠의 의심은 타당했다. 붉은 오메가가 그렇게 쉽게 동족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확인해 보아도, 잠든 사내는 ‘살아 있는 칼리번’이었다.

<아니면 칼리번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몰라. 겉모습만 멀쩡하고 속은 텅 비었을지도 모르지.>

젠은 그런 가설도 내세워 보았다.

그리고 에레즈는….

“이 사람이 칼리번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해도… 저는 지킬 겁니다.”

처음도 그렇고 지금도 한결같다. 젠의 장난에 떨리던 에레즈의 목소리는 차분해져 있었다.

“…그러냐. 뭐, 넌 저 녀석의 머리카락이라도 갖고 싶어 했으니까.”

겉모습도, 성격도 바뀌었지만, 칼리번을 향한 집념만은 여전했다. 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좀 더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에레즈와 젠은 치료 마법에는 재능이 없었다. 두 사람만으로는 칼리번이 눈을 뜨지 않는 원인과 해결법을 밝히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오메가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성녀단과 왕실 재건 기사단 측에서는 당연히 그를 죽이려 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현재 이 성에서 칼리번의 존재를 아는 이는 에레즈와 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했어. 이 녀석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칼리번 녀석의 명줄이 짧은 탓이지, 네 탓도, 내 탓도 아니라고.”

더구나 에레즈와 젠은 연합군의 주축이었다. 그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매일을 보냈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들르고는 있었지만, 워낙 보는 눈이 많아 혼자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는 시간마저 줄이며 이곳에 머무는 녀석이 있기는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이럴 때도 침착하시군요. 전 여기 누워 있는 이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데….”

칼리번에게서 등을 돌렸던 에레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와서, 다시 잠든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칼리번에게 보여도 괜찮은, 왕자님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기억 안 나냐? 이 녀석의 뼛조각이라도 회수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기적이라고. 우리는 그 이상을 얻었어. 너야말로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기적.”

에레즈는 한 단어를 곱씹었다.

기적을 바라지 말 것. 모든 사람이 에레즈에게 바라고, 가져가고, 또 바라는 그것이었으나 정작 에레즈는 박탈당했다.

정확히는—

‘칼리번이 살아 있다는 기적을 바라지 말 것.’

에레즈는 젠의 밑에서 8년을 보내며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중 ‘포기’는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자주 배운 가르침이었다. 젠이 세뇌에 가깝게 인식시켰던 것은 바로 그런 현실주의였다.

<멍청한 새끼. 우리의 목표가 칼리번을 되찾는 것이라면 착각이야. 난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네 편을 든 게 아니거든. 그 녀석은 이미 죽은 거다. 그렇게 생각해.>

<살아 있을 거라고 믿지 마! 그딴 바람은 기적이 아니라 정신을 좀먹는 병이야. 뼛조각이라도 얻어서, 무덤이나 만들 수 있으면 그게 바로 기적이겠지. 그렇게 여기면서 싸우라고! 알겠어?!>

전쟁 내내 젠은 에레즈가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품을 때면 여지없이 부수곤 했다. 그것은 그녀의 생활신조이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에레즈를 신경 썼기에 한 말이기도 했다. 물론 그 사실을 에레즈도 잘 알고 있다.

“네, 그렇죠. 그를 되찾은 것만으로 분에 넘치는 기적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네요. 저 혼자서는 이 사람을 되찾지 못했을 겁니다. 스승님에게도, 연합군의 모두에게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이상의 기적은 제게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알아요, 그래도….”

에레즈는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간신히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제가 아닌 그에게…… 단지 그런 마음뿐이에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람을 위해서….”

그의 왼손이 침대에 닿을 듯하면서도 결국 닿지 못했다. 에레즈의 목소리가 점점 잠겨 갔다. 오직 칼리번만을 향하는 그의 심장이 더욱더 깊은 심연으로 빠지려는 그때였다.

“하아…. 내가 졌다, 에레즈. 넌 옛날부터 징징거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젠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애가 왜 그렇게 시종일관 부정적이기만 해? 기적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인내심이라도 키우지 그래.”

“…….”

“생각해 봐. 8년이야. 붉은 오메가가 저 녀석을 가만히 뒀을 것 같아? 하루아침에 눈을 뜰 거라고 믿는 거야말로 미친 생각인 거지.”

“스승님….”

“그동안 난 저 녀석이 이미 죽었을 거라고, 포기하자고 주장했었지. 근데 망할, 넌 살아 있을 거라고 밀어붙여서 여기까지 오게 했잖냐. 따지고 보면, 네 말도 안 되는 고집 덕분에 지금 우리는 칼리번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번에도 좀 더 뻔뻔하게 밀어붙여 봐. 어차피 네 장점이라고는 그거 하나뿐이니까.”

젠은 손가락으로 잠들어 있는 칼리번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 마물 혼혈의 생명력을 우습게 보는 거냐? 특히나 칼리번, 저 자식은 대장일 때도 회복력 하나는 괴물 같았어. 다들 팔다리가 덜렁거렸을 때도 저 녀석은 하룻밤만 자고 나면 뚝딱 나았다고?”

에레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비쳤다.

“두고 봐. 정 눈을 안 뜨면 키스…는 말고,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 버리자고. 내 주먹에 한 대만 맞아도 벌떡 일어날걸? 칼리번 놈은 옛날부터 그랬어. 둔해 터져서 좀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곤 했다니까.”

젠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농담을 던졌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에레즈는 깊은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이대로 가다간 다음 날엔 너도 칼리번 옆에 쓰러져 있겠다.”

젠은 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간만에 스승다운 행동 좀 했군.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려니 입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에레즈는 그녀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몇 날 며칠이고 자책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에레즈는 아직 본인의 상처도 낫지 않은 상태였다. 젠은 몇 번이나 휴식을 권유했으나 망할 녀석은 기어이 이 자리에 남기를 고집했다.

“솔직히 겉모습만 보면 칼리번이 아니라 네가 오늘내일하게 생겼거든?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왕국 꼴이….”

“그런데 스승님….”

“응?”

에레즈는 수줍어하면서 말을 꺼냈다.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댄다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뭐?”

뜻밖의 말에 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맞춤도, 때리는 것도 절대로 안 됩니다.”

“야, 그건 그냥 해 본 말….”

“스승님도 알파니 혹시 모를 일이죠. 하지만 이건 칼리번이 오메가여서만은 아닐 겁니다. 칼리번처럼 크고 잘생기고 멋진 사내라면 누구라도 끌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에레즈는 홀로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상대가 스승님이 된다 해도 저는 전력을 다해 싸울 겁니다. …전 모든 걸 바쳐 그를 지키겠다고 맹세했으니까요.”

참으로 지랄 맞고 아름다운 소리에 젠은 순식간에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요즘 밤낮으로 정사에 매달리더니 진짜 맛이 갔나?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네? 이게 진심이 아니면 무엇이 진심이어야 하는 거죠?”

에레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질문의 의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젠은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지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아무래도 좁은 방에 덩치 큰 놈 셋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아아……. 아니다. 말을 말자.”

젠은 인상을 썼다. 뭐지 이 기시감은? 이 답답함은…. 분명 대화를 하고 있는데 대화가 전혀 되지 않는 느낌이다. 먼 옛날, 한 8년쯤에도 이런 속 터짐을 느껴 봤는데….

‘번리칼…?’

문득 떠오르는 답답함의 대명사에 젠은 등이 서늘해졌다. 만약 칼리번까지 깨어나면, 이들 사이에 낀 자신은 돌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미래가 그려졌다.

사실 젠은 여태껏 에레즈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칼리번이 처음에는 에레즈를 꽤 싫어했다는 점이다.

피로 물든 결혼식에서 젠과 칼리번은 얼마간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칼리번은 태도를 정반대로 바꿔 에레즈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앙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둔감하기로 유명한 칼리번이 밤마다 복수를 다짐하며 어린 에레즈만 한 장작을 부수고 나무의 허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던가.

지난 8년간 젠이 들어왔던 것은 에레즈의 일방적인 증언뿐이었다. 칼리번이 깨어나면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를 일이다.

‘카, 칼리번…. 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당신을 구, 구하러 왔어. 당신은 내 모, 목숨의 은인이야. 평생… 겨, 곁에서 은혜를 갚고 싶어…!’

‘8년 전에는 어쩔 수 없이 구해 드리기는 했지만, 저에게 꽃을 준 원한은 잊지 않았습니다.’

‘으, 은혜를 갚게 해 줘.’

‘돈이 전부인 용병에게 또 꽃을 주시다니….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은혜를…!’

어쩌면 이럴지도?

‘완벽한 바보들의 영원히 반복되는 대화라….’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을 조율할 자신을 생각하니, 젠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건 그렇고, 에레즈.”

잠시 속 터지는 상상을 하던 젠은 정신을 바로 잡았다. 창 하나 나지 않은 좁고 작은 방.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세 명이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신용병 연합에서 네 명령대로 따른다고 했지?”

“네.”

“저번 회의에서 알파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 당장 병사를 빼고 버틸 수도 있는데, 순순히 네 명령을 따르다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에레즈도 칼리번을 두고 쩔쩔매던 모습에서 벗어나, 연합군을 이끄는 왕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성 밖 수색과 피난민 인도는 그들로서는 병사의 손실이 날 수밖에 없는 임무입니다. 그럼에도 순순히 따르는 척하는 것은, 아마도 저에 대한 충성보다는 그들 나름의 이득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게 뭐라고 생각해?”

“글쎄요. 몇 가지 가설은 세워 보고 있습니다. 알테르의 잔당을 포섭하여 향후 인간 측을 압박하려는 전략일 수도 있고, 어쩌면 붉은 오메가를 사로잡으려는 계획일 수도 있겠군요. 당장 면전에서 번식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으니까요.”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그리고 피난민 보호를 가장한 약탈은 부수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길일 겁니다. 리론 후작에게 요청해 인간 병사를 수색군에 혼합해 볼까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영리하게 대답하던 에레즈는 말끝을 흐렸다.

“왜. 인간을 희생시키려니까 미안해서?”

젠은 그가 끝내지 못한 말을 대신 이어 주었다.

“…….”

에레즈는 별다른 변명거리를 떠올릴 수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에레즈. 넌 너무 후회가 많고… 물러 터졌어.”

“그게 무슨 의미죠?”

“멍청아, 의미를 뭘 따져. 내가 언제 꼬아 말한 적 있냐? 말 그대로지.”

“…네.”

“우리가 칼리번을 성안에 숨기는 것 자체가 인간들에게는 기만일지도 몰라.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인간과 마물 혼혈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창설해 알테르에게 맞서는 건 반대했었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게 됐어. 알테르를 죽이고, 성을 되찾고, 인간들은 마물의 습격에서 피할 방패를 되찾게 된 거야. 비록 그 과정에서 많은 아군이 죽었지만…. 전쟁에서 희생이란 어쩔 수 없어.”

“…….”

“넌 인간들에게 과도하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비록 네 의도는 불순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 싸운 것이기도 해. 어린아이를 대하듯 보호하려고만 들면, 너 자신이 버틸 수 없게 될 거야.”

에레즈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네가 버티다 못해 죽게 된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멸망하고 말겠지. 그건 꽤 멋진 영웅일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직한 왕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해.”

“…….”

“웬만해선 신용병 연합과 부딪치지 마. 인간들이 아니라 네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 이건 그들과 동족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알파는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칼이니까. 그리고 네 정체가 들켰을 때, 그나마 네 편을 들어 줄 가능성이 높잖아?”

젠은 그날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에레즈의 무릎을 걷어찼을 것이다.

“마물의 피를 이은 동족들…. 그들에게도 미안한 감정은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저희보다 훨씬 약한 존재다 보니 조금 더 죄책감이 큰 것 같습니다. 저는… 모두를 속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칼리번을 되찾기 위해 너무 많은 이들을 죽게 했죠. 이제 될 수 있으면 그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

“그것뿐이에요. 역시, 저는 왕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왕위를 딸한테 물려준다고 했냐?”

“…갈등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리고 주장에는 통일성이 있어야 하니까요. 저라고 예외일 수는 없잖습니까.”

“갈등을 막기는 개뿔. 모두를 화나게 하는 선택이었겠지.”

에레즈는 씁쓸하게 웃었다. 죄책감의 근원은 칼리번이었다. 아니, 그의 사고방식과 감정, 판단은 전부 칼리번이라는 존재를 신으로 둔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 봤자 에레즈, 넌 왕이 될 거야. 그러니까 그다음을 생각해야 해. 기껏 탈환한 왕성이 내부 분열로 다시 불바다가 되지 않게 하려면….”

“…….”

“네 삶은 칼리번을 구출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젠은 이를 악물었다. 칼리번. 그는 에레즈가 눈을 잃어도, 팔이 잘려도 계속해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면 칼리번을 되찾은 이후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주제는 지난 8년간 지켜보기만 할 뿐 들쑤시지 않은 벌집과도 같았다.

“너….”

젠이 칼을 뽑으려던 그때였다.

“…잠깐.”

“…….”

두 사람은 동시에 흔들림을 느꼈다.

“뭐지, 이건?”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젠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에레즈도 마찬가지였다.

“가자.”

“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으로 향했다.

‘……칼.’

에레즈는 칼리번의 곁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눈길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를 건네며 칼리번을 두고 나왔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인간의 세계로 귀환할수록, 진공에 가까웠던 정적은 사라지고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자아내는 소리가 채워진다.

며칠 동안 계속되는 비로 인한 눅눅한 습기. 스산한 한기와 불안한 흔들림. 땅 위에 떨어진 작은 돌조각들이 흔들리는 것은 눈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왕자님!”

성녀가 훤칠한 에레즈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달려왔다. 에레즈를 찾아 헤맸는지 온통 비에 젖어 있었다.

“소란스럽군.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소상히 말해라.”

“왕성 위로 검은 손자국이 생겼습니다!”

“검은 손자국?”

뚝, 에레즈의 걸음이 멈췄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말이냐? 정확한 발생 위치는?”

“피난민의 유입을 받고 있던 북문입니다! 마물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병사들이 대처할 틈도 없이 백성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하고 있습니다!”

“성 전체를 보호하는 보호막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건가?”

“네, 보호막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성안의 백성들은 안전합니다. 다만, 유입되고 있던 피난민들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에레즈는 이를 꽉 깨물었다.

“당장 병사를 준비시켜라. 내가 직접 나서겠다.”

에레즈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를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고, 각기 다른 전략과 해결책을 제안했다.

“왕자님, 위험합니다! 도망친 오메가가 마물을 불러들여 성을 공격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북문을 폐쇄하고 성안의 백성들을 보호하십시오!”

스치는 사람 중에는 리론 후작도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이 내가 나서야겠지.”

에레즈는 리론 후작의 충언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리고 왼손으로 성검의 칼집을 세게 쥐었다. 피부를 검게 태우는 뜨거움.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에레즈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가면을 쓰고 있었다.

“좋은 기회다. 필시 붉은 오메가가 근처에 있겠지. 그 목은 반드시 내 손으로 베겠다.”

칼리번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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