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왕성 탈출
몸이 물에 빠지듯 창공에 내던져졌다. 심해로 가라앉아 익사하는 사람처럼, 태양 가까이 날아오를수록 숨이 막혀 간다. 현실과 환각이 뒤섞여 눈꺼풀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오른쪽 눈에는 먹구름이 낀 하늘이, 왼쪽 눈에는 검게 불타는 숲이 비친다. 그 둘이 마치 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처럼 번갈아 가며 눈앞을 오갔다. 흔들림. 몰아치는 바람에 숨을 쉬기조차 버거웠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기억. 물과 기름 같았던 그 둘이 뒤섞이며 머릿속을 갈기갈기 찢었다.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물에 젖어 가라앉는 풀잎처럼 그는 지상으로 침몰했다. 자꾸만 어디론가로 끌려가는 몸. 귀를 가득 채우는 굉음. 매캐한 전쟁의 냄새. 피의 냄새….
현실의 감각이 한꺼번에 오감을 대신하고, 오랜 시간 반복되었던 기억을 투명하게 휘발시킨다. 이대로는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리고,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움켜쥐어야만 한다.
무엇을?
머리를 어지럽히는 주변의 풍경 속에서도 칼리번은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분명히 보았다. 제 목을 조르던 커다란 손. 그 흔적은 여전히 목에 붉게 남아 있었다.
포탄을 맞은 마물의 날개가 꺾였다. 마물과 뒤엉킨 몸은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다.
까마득한 어둠으로.
숲으로.
에어리얼을… 아니,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던 자는 누구인가?
아…….
그 답은 이미 알고 있다.
* * *
에레즈 프리드웬의 추격을 피해 도망쳤으나,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마물이 추락한 장소는 왕성 인근의 숲이었다. 칼리번은 마물과 뒤엉킨 채로 땅으로 추락했다.
처음 칼리번을 보호하며 추락한 마물은 여섯 마리였다. 그러나 성을 둘러싼 연합군의 화살을 피하며 숲 안으로 이동하니, 대부분 시체가 되었다. 이제 칼리번을 끌어안은 마물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커흑! 크윽, 그, 그만…. 놔…!”
칼리번은 허리를 감싸 쥔 마물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생 햇빛을 못 본 것 같은 가늘고 창백한 팔만이 부질없이 허우적거렸다.
“…젠장, 젠장…!”
이런 약해 빠진 몸으로 탈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칼리번은 마물에게 붙잡힌 채로 땅 위를 질질 끌려갔다. 마물은 어둡고 습한 장소를 선호한다. 공격을 피해 은신처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비행형 마물이었기에 다리가 부실했고, 땅 위에서는 거의 기다시피 했다.
“윽, 제길….”
치렁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온 시야를 가렸다. 걸리적거린다. 머리를 저어 간신히 위를 쳐다보니, 마물의 한쪽 날개가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추락한 것도, 땅을 기는 것도 그래서였다.
칼리번은 자신을 빠르게 스치는 나무줄기나 풀을 등을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으나 번번이 마물에게 끌려가며 실패했다. 앙상한 두 다리가 거친 땅에 끌리며 수많은 생채기를 남겼다.
칼리번이 온 힘을 다한 것과는 별개로, 그의 발악은 곧 무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이 기력을 다해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쿠웅!
육중한 몸이 고꾸라지자 주변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칼리번에게 자유는 오지 않았다. 그의 하체가 마물의 육중한 몸뚱이에 묻힌 탓이었다.
“으읏…. 하, 으….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젠장.”
칼리번은 두 팔로 땅을 짚어 빠져나오려 했다. 예전의 그였다면 순수한 악력만으로 마물의 시체를 밀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몸이 벗어나질 못했다.
그때였다.
“쿠에에엑!”
머리 위에서 마물의 비명이 들렸다. 거대한 지렁이처럼 퉁퉁 부어오른 몸이 마구 꿈틀거렸다. 그 틈을 타고 칼리번은 제 몸을 빼냈다. 계속되는 비명에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윽…!”
머릿속이 이명이 웅웅 울려 현기증이 났다. 칼리번은 두 손으로 귀를 움켜쥐고 몸을 납작 엎드려 포복했다.
“!”
그러나 칼리번은 나아갈 수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붉은 머리카락에 박혀 든 것이다. 칼리번은 고개를 돌렸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쭉 당겨졌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마물의 최후가 보였다. 매끄럽고 퉁퉁 부은 몸에 무수히 많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체액으로 가득 찬 몸이 여태껏 터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화살들이 박히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물은 몸이 끊어질 듯한 비명을 질러 댄 것이었다.
다음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화살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한 마리뿐인 것 같군! 다른 마물들이 몰려오기 전에 얼른 저 소녀를 구하자고!”
한 사내가 그렇게 외치며, 마물에게 다시 화살을 쐈다. 커다란 고함에 칼리번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왔다. 마물은 육중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것의 덩치는 더욱 커졌고, 더욱 큰 과녁이 되기에 충분했다. 마물은 칼리번의 앞까지 꾸물꾸물 기어 오더니 궁수들과 싸움을 시작했다.
평생 전투를 업으로 살아온 칼리번은 알 수 있었다. 비록 생긴 것은 거대하고 위협적이지만, 저것은 단단한 껍질이 아닌 즙으로 가득 찬 벌레 형태의 마물이었다. 마물 자체의 살상력은 낮은 편인 데다가 칼리번을 안고 적진을 뚫고 나오며 상당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비록 상대가 전투의 외곽부에서 대기 중인 오합지졸의 군대라 할지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도망친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물은 그 자리에서 버티기를 고수했다. 칼리번은 눈앞에서 마물 한 마리가 수많은 인간의 손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도살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윽…!”
마물의 희생에 감동할 겨를은 없었다. 도망쳐야만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몰아치는 격통에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 아윽…….”
마물이 학살당하고 있는 광경을 보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파져 왔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의 몸을 찢고 태어난 새끼들은 모두 없애. 겉모습이 어린애라고 방심하지 마라, 일이 년만 지나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알파가 되어 버리니까!>
어두운 밤, 불길. 불빛에 그을려 검고 붉은 사내들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아니, 에어리얼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
‘뭐지, 이건…? 제기랄,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정체 모를 기억에 압도당한 칼리번의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몸을 도리어 앞으로 고꾸라졌다. 칼리번을 지켜 주던 마물의 체액이 어느새 땅을 흥건히 적셨다. 그 끈적한 액체는 칼리번의 무릎까지 적셨다. 그리고… 마물 한 마리를 난도질한 수십 개의 눈이 이제는 칼리번을 향하고 있었다.
“이봐……. 저거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 분명 소녀가 마물에게 잡혀갔다고!”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일까? 활을 든 사내들은 칼리번에게 쉬이 다가오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아마도 마물에게 붙잡힌 ‘인간’인 줄 알고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건… 저런 머리카락 색은 인간한테는 나타나지 않아.”
칼리번을 내려다보는 인간들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오메가…. 설마! 저거 붉은 오메가 아냐?”
한 남자가 칼리번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 그럴 리가 있나! 지금 저 성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인데, 왜 이런 외진 곳에 오메가가 있겠어?”
“하지만 저렇게 새빨간 머리를 지닌 건 붉은 오메가밖에 없다고!”
사내들은 의아해하면서도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칼리번에게 조금씩 다가왔다. 하지만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은 평범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거기 누구… 오메가를 직접 본 사람 없나?”
“실물을 본 사람은 모두 죽고 말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은 바는 있어…. 피처럼 붉은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악마 같은 소년이라고….”
그러니 아름다운 외관에 속아 방심하지 말라고, 인간들은 서로에게 신신당부했었다. 인간들은 믿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신상 명세와 칼리번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을 만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설령 오메가가 아니더라도 최소 인간 농장에서 태어난 마물 혼혈이겠지. 죽여서 나쁠 건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인간들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궁수들은 활시위를 당겼다. 칼리번은 언덕 위의 인간들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한 무수한 눈에서 살기를 느꼈다. 칼리번은 원래의 자신일 때보다 지금, 인간들이 더욱 크고 무섭게 느껴졌다.
죽는다. 이대로는 죽고 만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럴수록 더욱더 꼿꼿하게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 나는….”
에어리얼이 아니다.
“나는…….”
나는 칼리번, 성은 없으며 용병대 검은 어금니의 대장.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저들이 이해할까? 설령 지금의 칼리번이 마왕이 아닌, 그저 운 나쁘게 새빨간 머리와 눈을 가지고 태어난 어린 마물 혼혈이었다 해도 결과는 똑같다. 전쟁으로 인해 흥분 상태인 인간들 손에 도륙이 날 것이다.
“…….”
칼리번은 마물의 체액으로 물든 흙을 움켜쥐었다. ‘칼리번’은 대외적으로 죽은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기억될 정도로 역사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에어리얼이었다. 가는 손발과 길고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얼굴조차 마물의 피로 뒤덮인 오메가. 대신 싸워 줄 마물이 없는, 보잘것없는 오메가….
수많은 눈동자만큼이나 날카로운 화살촉이 칼리번을 향했다. 지하 감옥 아래에서 보낸 검은 시간, 칼리번은 이런 삶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팔다리가 떨어져도, 이목구비가 사라져도 어떻게 해서든 목숨을 부지시켰다. 기껏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정작 죽음의 순간은 예측하지도 못하는 순간과 장소에 들이닥쳤다.
에어리얼의 손도, 마물의 손도 아닌… 인간들에게 죽는 것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으, 윽?! 으아악!”
누군가 칼리번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때, 칼리번과 대치한 인간 무리의 가장 먼 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크, 흐으윽!”
“으읏…!”
인간들에게 공격당한 마물이 화살받이가 되며 지르던 비명과는 달랐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높고 낮은, 굵고 얇은, 온갖 인간의 비명이 딱 한 번씩만 났다. 칼리번을 둘러싸던 사람들은 그 소리가 점점 다가오며 커지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여…… 역시! 이놈은 붉은 오메가인가 봐!”
“마물들이 쫓아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사람들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 마왕이 마물을 새로 불렀다! 물러서지 마! 모두 태세를 단단히 갖춰라!”
사내들은 서로의 사기를 북돋듯 너나 할 것 없이 외쳤다. 그들은 앞서 마물을 상대로 한 번 승리했다. 마물을 형태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짓이겨 본 것이다. 승리에 도취한 사람들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만약 이번처럼 한 마리뿐이라면, 다 같이 덤비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그러나 인간들은 곧 의문에 휩싸이고 말았다.
“저게… 마물인가?”
마왕이 불러낸 마물이라 생각했던, 그 존재가 너무나도 사람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왕자님께서 보내신 기사님 아닌가? 아주 예전에, 저렇게 생긴 분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심지어 인간 중 몇몇은 그것을 적이 아닌 ‘동료’라 착각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무방비에 당한 것도 그 탓이 컸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그것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그것은 8년 전, 인간이 패배하지 않았을 무렵의 귀족이나 걸칠 법한 기품 있는 검은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쇳소리는 갑옷의 이음매에서 발생했다. 진흙으로 가득한 숲임에도 검은 갑옷은 먼지 하나 없이 빛났고, 갑옷 곳곳에 새겨진 백합 무늬의 장식은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그 갑옷이 전투용이 아니라 의식용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감히.”
그러나 갑옷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소년의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이질감은 그 자리에 선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인간 주제에 에어리얼을 위협하다니….”
저건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궁수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뜻 모를 용기가 생겼다. 이미 한 마리를 도륙해 보았기에, 그들의 피는 과다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이번에도 모두 함께 덤비면 가능성이 있어, 뭐 해! 어서 공격하자고!”
인간들은 일제히 활을 재고는 갑옷을 입은 정체 모를 마물을 향해 쏘았다. 화살 대부분은 매끈한 검은 갑옷에 튕겨 나갔다. 그러나 일부는 성공적으로 갑옷 사이사이의 틈에 박혀 들었다. 마왕이 불러온 마물이니 빈틈을 주면 무슨 술수를 쓸지 모른다.
인간들은 서둘러 화살을 재장전하고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화살들이 바람을 가르며 하나의 적을 향해 부딪치고 꽂히는 소리가 겹쳐져, 거대한 굉음이 되었다. 순식간에 갑옷은 화살받이가 되었다. 그러자 검은 갑옷은 별다른 공격이랄 것을 보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격 중지! 멈춰라! 적이 쓰러졌다!”
“활을 내려!”
“벌써? 그럼 아까 들렸던 비명은 뭐야?”
“뭐, 뭐야…. 하, 하……. 별것 아니잖아….”
손쉬운 승리에, 기쁨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갑옷 하나를 둘러싼 인간들은 곧 의아해했다. 승리는 둘째 치고, 무언가 석연찮다. 갑옷 안은 마치 처음부터 텅 비어 있던 것처럼 피나 내장이 하나도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다. 갑옷은 각 부위의 연결이 끊어진 것처럼 팔과 다리, 가슴 등의 부위가 각각 따로 떨어져 땅을 굴렀다. 갑옷 안에 있던 마물이 증발이라도 해 버린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의심 많은 사내들은 긴 장대로 갑옷을 툭, 툭 건드렸다.
“윽….”
사람들이 텅 빈 갑옷에게 정신이 팔린 지금이야말로 칼리번에게는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은 칼리번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다시 한번, 머리를 부수는 듯한 충격이 칼리번에게 엄습했다.
“으윽?! 큭…. 아, 아…!”
칼리번은 고통에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는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아스터. 나의 아스터.>
칼로 쑤시듯 들어오는 ‘목소리’는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아무 곳에도 쓸데없는 실패작….>
칼리번은 이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숲에서 왕자를 데리고 헤맬 무렵, 이런 식으로 에어리얼의 기억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씨가 문제일까, 태가 문제일까……. 후후, 인간계와 마계. 어느 쪽의 대기도 네게는 치명적이라 어느 곳에서도 맨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니…. 처지가 우습지 않아?>
자신의 손, 아니, 에어리얼의 창백한 손이 검은 투구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검은 갑옷의 일부였다.
<네 본체는 이런 보호구 따위로 가려질 정도가 아닌데 말이지….>
에어리얼의 음산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깜깜하던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칼리번은 미혹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윽…. 쳐….”
에어리얼의 기억을 엿본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크윽, 도망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칼리번은 기침을 내뱉으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당장 여기서 도망쳐!”
가는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위압적인 외침이었다. 검은 갑옷의 등장으로 칼리번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던 사람들이 뒤돌아보았다.
“저 녀석,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앞서 쓰러진 마물이나 검은 갑옷보다 허약한 소년은 무슨 베짱인지 감히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인간들이 비웃었다. 붉은 머리의 소년이 마왕이든, 마왕을 닮은 마물 혼혈이든 간에 이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네 목숨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텐데? 알테르 밑에 있던 마물 주제에…. 너희들은 전부 왕자님 손에 죽게 될 거다.”
“윽…!”
한 사내가 다가와 칼리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니지. 이 정도로 약해 빠진 녀석이라면 알파여도 좀 더 쓸데가 있을지도….”
칼리번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골적인 시선이 칼리번의 몸을 훑었다. 그제야 칼리번은 마물의 체액으로 인해 자신의 벌거벗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임을 깨달았다.
“이럴 때가 아냐, 어서 도망쳐라! 윽, 흐으…. 죽고 싶지 않으면…!”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리고는 사내에게 붙잡힌 제 머리카락을 빼냈다. 사내의 손에 붉은 머리카락이 부질없이 흔들거렸다.
“제법 앙칼진데?”
사내들은 칼리번의 꼬락서니를 보고 와르르 웃어 댔다. 그들은 알테르의 목이 베인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은 이미 에레즈 쪽으로 기울었다. 사내들의 마음가짐을 허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물 혼혈 중에도 간혹 이런 녀석이 있지. 인간이나 다를 바 없으면서 입만 산 녀석 말이야.”
“윽!”
커다란 손이 칼리번의 뺨을 내리쳤다. 자그마한 몸은 그 정도의 충격에도 쉽게 땅 위로 쓰러졌다.
“이봐, 바로 죽이기에는 아까운데 어때? 이 녀석이 정말로 마물들이 환장하는 ‘오메가’라면 어떤 맛일지……. 응?”
칼리번의 팔을 억지로 쥐어 몸을 들어 올리던 사내의 동작이 갑자기 그쳤다.
“……!”
칼리번은 똑똑히 보았다. 햇살 아래 드러난 사내의 굵은 팔이 순간 반짝이는 모습을. 그 반짝임이 기괴하게 느껴진 것은 사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반짝임의 원인을 찾았다.
백금색의 실이었다. 아니. 실이라기보다는, 긴 머리카락과도 같은….
“히, 히익?! 으악! 내, 내 팔이…!”
휘감긴 백금사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사내의 팔이 잘렸다. 그것은 눈앞에서 보고도 비현실적이어서, 잘린 사내의 팔은 여전히 칼리번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
칼리번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잘린 단면은 마치 재단한 것처럼 깨끗하게 썰린 채였다. 피가 허공에 흩뿌려지더니, 칼리번의 얼굴에 뿌려졌다.
“으, 으아, 흐어억! 사, 살려 줘…!”
사내는 뒷걸음질 치며 제 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 발자국을 옮기기도 전에, 그의 온몸이 잘려 나갔다. 궁사들의 공격에 산산조각으로 땅에 떨어졌던, 검은 갑옷처럼.
“으아아악!”
비극은 연이어 일어났다. 칼리번의 앞에 있던 사내는 시작에 불과했다.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비명과 피가 솟구쳤다. 사내들은 하나둘씩 몸이 조각나 쓰러졌다. 놀라운 것은 적의 모습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로 인해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이 학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하… 하아….”
수많은 사람들이 고깃덩어리가 되고, 어느새 칼리번은 홀로 남았다. 스륵, 조각난 시체 위에서 뱀과도 같은 움직임이 언뜻 비춰 보였다. 흩어져 있던 백금사는 땅 위에 나뒹굴고 있던 검은 갑옷으로 빨려 들어갔다. 금빛 뱀이 갑옷에 들어찰 때마다, 갑옷은 삐걱거리며 다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검은 갑옷은 원래의 사람 형태가 되었다. 칼리번을 비롯한 모두가 바닥에 쓰러진 가운데, 검은 갑옷은 홀로 우뚝 섰다. 그러더니 갑옷의 이음새에서 피가 포도주처럼 흘러내렸다. 검은 갑옷의 곳곳에서 솟아나는 피는 땅을 시커멓게 적셨다.
“…….”
그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있을까? 칼리번은 검은 갑옷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도망친다고 해서 ‘저것’의 사정 범위 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다.
“에어리얼.”
검은 갑옷은 천진한 목소리로 덜그럭거리며 칼리번에게로 걸어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어째서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은 겁니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칼리번은 귀가 아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는 칼리번의 기억 속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세가 좋지 않습니다. 아버님은 아무래도 인간 연합군의 손에 죽은 것 같습니다. 믿기지는 않지만……. 저희 쪽이 불리하군요.”
칼리번은 그가 에레즈가 아닌, ‘아스터’라는 이름의 마물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스터.
에어리얼이…… 이 몸의 진짜 주인이, 그를 그렇게 불렀었다.
“저희는 이대로 마계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또한, 저것은 알테르 프리드웬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랬던 것 같다.
“무슨 의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위험합니다. 전쟁과는 멀리 떨어진 장소이지만 이곳 병사들이 전멸한 것을 알면 적들이 추가 병력을 보낼 겁니다. 자리를 피해 다음을 도모하시죠.”
그리고….
<그래도 널…, ……사람인데.>
“에어리얼.”
그리고….
<그래도 널…, 낳아 준 사람인데.>
“…에어리얼? 다쳤습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아스터는 칼리번의 몸 위로 쓰러진 시체를 치웠다. 어깨를 붙잡힌 순간 칼리번의 두 눈이 흔들리고 몸은 딱딱하게 굳었다. 지난 8년간 사고를 하지 않던 머리로 피가 급히 돌았다. 몇 가지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라 머릿속을 갈랐고, 그 후유증으로 이마가 지끈거렸다.
“아….”
자신이… 그 지하에서 몇 명의 ‘아들’을 낳았던가?
예전의 칼리번이 지닌 무심함과 평정심은 강한 육체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에레즈를 살려 보낸 대가로 그 모든 것을 빼앗겼다. 힘. 자유. 의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에어리얼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햇빛 한 점 볼 수 없었던 8년은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에레즈가 칼리번에게 준 것은 감정이었다. 갓 피어나기 시작한 감정의 싹은 어둠 속에서 피를 먹고 고통을 양분 삼아 자라났다. 그가 지하에서 배운 것은 공포와 후회였다.
“당신은 에어리얼이 아니군요.”
그때, 머리 위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갑옷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칼리번은 소름이 돋았다.
“크, 허억……!”
차가운 감촉이 목을 조른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지만, 칼리번의 앙상한 두 다리는 허공에 뜬 채로 버둥거리게 되었다. 붕 뜬 칼리번은 마침내 아스터와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신이 갑옷에 가려져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목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칼리번의 숨구멍을 틀어쥐었다.
이 숲에 떨어지기 전, 다른 이에게 당했던 행위였다. 붉게 물든 목에 다시 한번 고통이 가해졌다.
“넌 누구지?”
처음 그것은 ‘검은’ 갑옷이 아니었다. 인간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전신 갑주는 온통 붉었다. 그러나 잠시 후, 갑옷은 마치 호흡을 하듯 붉은 피를 빨아들였다. 그러자 다시 원래의 검정으로 돌아갔다.
아스터를 처음 보면 누구나가 사람이 갑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저 모습 자체가 마물의 형태였던 것이다.
그런 기괴한 괴물에게 붙잡힌 칼리번은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당신은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어째서 에어리얼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그를 흉내 내고 있는 겁니까?”
칼리번의 목을 움켜쥔 손은 사람도, 마물도 아니었다. 그것들에게는 최소한의 온기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연약한 피부를 짓누르는 손은 차가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불쾌하군요. 에어리얼은 그런 겁먹은 눈으로 나를 보지 않습니다. 넋을 놓지도 않습니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자식을 잃지도 않고, 휘둘리지도 않죠. 아니, 애초에 에어리얼은 내가 아닌 인간을 구하려 들 리가…….”
한쪽 팔만의 힘으로 칼리번을 여유롭게 들어 올린 아스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사이 칼리번은 순조롭게 죽어 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터는 이런 상태로는 칼리번이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팔을 휘둘러 칼리번을 땅에 내던졌다.
“아악!”
칼리번이 기어 도망칠세라, 아스터는 쓰러진 칼리번의 등을 발로 짓밟았다. 에어리얼을 그토록 찾아 헤매면서도, 겉모습이 동일한 칼리번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큭, 커헉…!”
속이 텅 빈 갑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짓밟힌 순간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얹어진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몸을 일으킬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온몸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몸에 힘을 풀면 이대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가 터질지도 모른다.
“가짜라고 하기에는 에어리얼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향기…. 설마, 그가 보낸 겁니까?”
검은 갑옷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악스러운 힘과 달리, 아스터의 목소리는 소년처럼 어렸고 말씨는 귀족 자제처럼 우아했다. 그리고 자꾸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칼리번을 괴롭혔다.
“뭐라도 말해 보시죠. 죽기 전에 변명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윽…. 큭…….”
칼리번은 고개를 틀어 아스터를 간신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제 얼굴 위로 무수히 쏟아지는 붉은 머리카락 탓에, 검은 투구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검은 갑옷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칼리번 또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 그자가…… 나를….”
칼리번이 간신히 입을 열자, 등을 압박하는 힘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제야 칼리번의 숨통이 트였다.
“나, 를, 이 몸에… 가뒀……. 헉, 허억…. 내, 몸을, 빼앗고…….”
칼리번은 두 팔로 땅을 짚고는 몸을 일으켜 애를 쓰며 말했다.
“몸을 빼앗겼다? 즉, 지금 이 몸은 에어리얼이지만 영혼은 다른 사람이란 뜻입니까?”
검은 갑옷은 칼리번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보통 사람이라면 믿지 못할 이야기겠지만 검은 갑옷은 달랐다.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헉, 허억….”
붉은 머리카락 사이에 숨겨져 있던 칼리번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검은 갑옷은 에어리얼이 낸 기묘한 수수께끼에 집중했다. 그 탓인지 잠시 칼리번을 향한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것은 강자의 방만함 같기도 했고,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하나를 잊고 마는 어린아이의 천진함 같기도 했다. 앞서 보였던 흉악함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너무나 쉽게 방심해 버리는 것이다.
‘저것에게서 벗어나야만 한다.’
칼리번에게는 기회였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위기감에 몸이 긴장해서 뛰는 것인지, 아니면 저 검은 갑옷 때문인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다…. 벗어나야 해.’
오랜 세월 용병으로 지낸 칼리번은 그 시기가 바로 지금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칼리번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군가 그의 바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숲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어와 나무를 흔드는 탓이 아니었다. 검은 숲에 몸을 숨기고 포진해 있던 마물들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에어리얼이 낳고 쓸모가 없다고 판단해 버린 마물, 그리고 오메가의 향기를 맡은 마물이 몰려든 것이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아스터는 주변을 둘러보며 명령했다. 하지만 오메가에게 조종되지 않는 마물들은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오메가를 찾고, 오메가를 범하고, 오메가에게 제 씨를 심는 본능.
칼리번에게는 저를 범하고 잡아먹기 위해 모여드는 마물이나 아스터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악마의 손이라도 잡아야 할 때였다.
“성가시군요.”
하아, 아스터가 한탄했다. 마물들은 그 말을 신호 삼아 검은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힘으로 밀릴 상대가 아니었지만, 방심했기 때문일까? 검은 기사는 칼리번의 몸 위에서 물러났다. 칼리번은 비로소 아스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헉, 허억…!”
칼리번은 두 발로, 어떨 때는 네발로 기며 빠르게 수풀 안에 제 몸을 던져 넣었다. 그러나 검은 갑옷은 만만치 않았다. 아스터는 마물을 서슴없이 베어, 주변의 시체 위에 새로운 피를 흩뿌렸다.
“제게서 도망치는 겁니까? …놓치지 않습니다.”
아스터는 화가 난 소년의 목소리로 칼리번을 위협했다.
“큿, 닥쳐…!”
칼리번은 숲으로 도망치면서,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스터의 목소리는 자꾸만 칼리번을 자극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칼리번.”
마물의 비명 사이에 섞인 작은 부름. 칼리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돌아보고 말았다. 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검은 갑옷이 마치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것들을 처리하고 난 다음은… 당신 차례입니다.”
아스터는 손가락은 정확히 칼리번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욱, 크윽…. 헉, 헉…!”
한참 뒤에야 칼리번은 간신히 기침을 토해 냈다. 그는 후들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칼리번의 육체는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이 작은 몸으로 달려서는 금방 아스터에게 붙잡히고 말 것이다.
칼리번은 손을 뻗었다. 그것은 칼리번의 의지가 아닌, 에어리얼의 몸이 본능에 새겨진 대로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칼리번의 부름에 응하듯, 거대한 마물이 쿵, 쿵 뛰어와 칼리번의 작은 몸을 그 자리에서 집어삼켰다. 그러나 먹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마물에게 몸을 의지한 칼리번은 아스터에게서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다.
“하, 하하….”
아스터는 뚝뚝 끊어지는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사이 더 늘어난 숲의 마물들은 검은 갑옷의 시야를 가리고 점점 멀어지는 칼리번을 숨겼다.
“그 몸으로, 나를 죽이라고 명령한 겁니까?”
아스터는 에어리얼이 칼리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전의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는지 마물을 향한 공격마저 멈추고 말았다.
“에어리얼…. 당신에게는 나조차 버리는 말이었던 겁니까?”
홀로 남은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기본적으로 아스터의 목소리란 검은 갑옷 안에서 여러 번 부딪쳐 나오는, 흩어지는 소리에 가까웠다.
<날 믿고 기다리고 있어. 착하지, 아스터?>
아스터는 자신이 전투 중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에어리얼에게 들은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것이 정말로 마지막이 될 줄이야. 마물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아스터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 * *
도망쳐야만 한다.
검은 갑옷에게 붙잡히지 않을, 안전한 곳으로.
칼리번은 아무런 명령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물들은 마치 그의 생각을 읽는 것만 같았다. 마물들은 어느 절벽에 숨겨진 동굴로 칼리번을 옮겼다.
주르륵, 마물의 미끄덩한 체액에 뒤덮인 칼리번의 몸이 마물의 커다란 입에서 흘러나왔다. 끈적한 초록빛 액체에 감싸인 칼리번은 찌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 몸은 너무도 나약해 마물의 체액을 떼어 내는 일조차 버거워했다. 칼리번의 심정으로는, 이대로 액체가 되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욱, 우윽…. 으웩! 큭, 하아, 하아….”
칼리번은 한참이나 속을 게워 냈다. 그러나 그가 토해 낸 것은 억지로 삼킨 마물의 체액뿐이었다. 에어리얼의 육체는 빠듯하게 좁은 공간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을 구기고 있어도 옥좨서, 뼈가 부러지고 살이 옥쇄에 파묻히기 직전인.
8년 전,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된 지금은 그 무엇보다 무겁고 버겁다. 한참이나 구역질을 한 칼리번은 힘이 쭉 빠진 몸으로 헐떡이기만 했다. 이대로 정신을 놓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나는 누구지?’
궁사들이 그에게 했던 질문이, 검은 갑옷이 했던 그 질문이, 다시금 칼리번의 안에서 울려 퍼졌다.
“…….”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나는, 용병이었던 칼리번도, 마왕이라고 불리는 에어리얼도 아니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나는…… 오메가.
끊임없이 마물을 낳아야만 했던, 오메가다.
지하 감옥에서 보낸 8년의 세월 동안 칼리번에게 남은 정체성은 그것뿐이었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몸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전부 파내고 긁어냈다. 안에 남은 것을 한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떼어 갔다. 말라붙을 대로 말라 버린 기억마저 박박 긁어냈다. 피부가 벗겨지면 붉게 일어나는 것처럼, 기억 또한 그랬다. 그의 정신은 껍질이 벗겨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크윽…!”
칼리번은 밀려드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벌어진 상처를 다시 칼로 찌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결국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지난 8년의 기억이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어리얼은 칼리번에게 저주를 걸어 놓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백치가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을 만치 고통스러운 삶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나? 무엇을 위해 죽지 않고 여태껏 살아남은 것인가?
<그야, 오메가라서 그런 거지.>
자신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오메가가 알파를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야, 그것이 오메가의 본능이지. 어때, 기쁘지 않아? 그래…. 좋아서 웃고 있네.>
더는 에어리얼이 곁에 없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세뇌될 정도로 반복해서 들어 온 말이었다.
“아…….”
……맞아. 그랬다. 끝없는 교미는 즐거웠다. 배가 불렀다. 충족되었다. 쾌락으로 인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고 지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쉬지 않고 마물을 받아들이며, 그것들의 씨로 새로운 괴물을 낳았던 그 행위가… 행복해서 여태껏 살아남았던 거다.
<그것이 오메가의 본능이지.>
“그게… 오메가의 본능이니까.”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으, 큭…. 으읏….”
그럼에도 다음 순간, 그는 머리를 움켜쥔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가는 목에는 붉은 낙인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떠올린다. 차가운 금속성의 날붙이가 아닌, 뜨겁고 단단했던 한 남자의 손을….
<그날,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널 죽이러 여기까지 쫓아왔다.>
자신을, 에어리얼을, 아니, 자신을… 증오하며 목뼈를 부러뜨리려 하던 그 남자.
낯선 얼굴이었다. 끔찍한 형상이었다. 한쪽 팔은 잘려 나갔고, 피에 물든 머리카락은 본래의 색을 잃은 채 붉은색이라고 좋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는 왼쪽 눈도 없었다. 짐승의 입 안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인지 얼굴은 온갖 흉터로 흉측했다. 그에게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푸른 눈동자뿐. 그나마 남은 한쪽의 눈마저도, 칼리번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해 악귀와도 같았다.
“아, 아…….”
칼리번은 누군가 자신을 붙잡고 갈기갈기 찢은 것 같았다. 온갖 방향으로 갈라져 버려서 더는 자신이 누군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어째서인지,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왕자….”
칼리번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알테르. 당신이 처음부터 에레즈의 목을 벨 작정으로 상대했다면 모든 일이 쉽게 풀렸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동생들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했지. 실제로 내가 본 건 당신의 형제들이 하나둘씩 지옥에 간 모습이지만 말이야. 그 덕분에 에레즈가 성 앞까지 오게 되었어! 하하, 이래서야 당신이 에레즈 프리드웬을 성장시킨 것 같잖아?>
칼리번은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것은 칼리번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이야기를 반복하는 인형처럼,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에레즈를 물리칠 방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아, 이것은 꿈이 아니다. 다만 에어리얼의 기억이다. 칼리번의 영혼은 에어리얼의 과거를 연기하는 배우이자 관람하는 관객이었다.
<…설마 에레즈 프리드웬을 키워서 나를 압박하려고 했던 거야?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렇게까지 나를 싫어했다니 안타깝네. 이래 봬도 우리는 같은 목표를 둔 동지라고 생각했는데….>
에어리얼은 생글생글 웃으며 알테르의 등을 끌어안았다. 더는 마물을 생산하지 못하는 오메가였지만, 그에게서는 여전히 알파라면 버티기 힘든 향기가 났다.
<허튼소리 마라. 8년 전 에레즈 프리드웬 대신 검은 오메가를 선택했던 건 너다. 내가 그 어린애를 성장시켰다면, 그 기회를 준 것도 너겠지.>
그러나 알테르는 한 손으로 에어리얼을 밀쳐냈다.
<…그런가? 그래. 당신의 말을 믿겠어. …일단은.>
에어리얼은 일부러 상대를 약 올리듯 눈웃음을 지었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따라 알테르 프리드웬을 올려다보았다. 에어리얼에게 붙잡히기 전에도 한 번 검을 마주한 적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으로 지켜보기 때문일까, 알테르의 체격은 더욱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에레즈 프리드웬은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야?>
에어리얼이 물었다.
<형제들을 상대하며 육체가 손상됐을 테니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거다.>
<과연 그럴까…. 그러다 전쟁의 선두에 서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인간들이 그 녀석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방증이겠지.>
<아하하, 언제까지 인간만 탓할 셈이야? 그 녀석은 당신과 상황이 달라. 우리에게 검은 오메가가 있으니까 늘 안달이 나 있지. 이번 전쟁도, 인간들을 억지로 끌고 오는 것에 가까울걸?>
알테르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에레즈가 성에서 도망치기까지 누가 관리했다고 생각하지? 그 녀석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겁쟁이에 불과하다.>
<8년. 무려 8년이야. 물론 내가 마계에 있던 세월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 정도 시간이라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한다고? 당신은 그 녀석이 성장한 후로는 직접 상대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몇 번 찾아가서 지켜봤거든. 그 녀석은 날 보면 더욱 발광하니까.>
<여전한 성격이군. 네 덕분이라는 건가? 좋다. 직접 찾아다녀야 하는 수고를 덜게 해 준 점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지. 비록 쥐새끼를 놔준 덕분에 몇 년을 낭비했지만 말이다.>
<영광일 따름이옵니다, 전하.>
꿈속의 에어리얼은 알테르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초라했다. 그런데도 알테르의 주변을 알랑거리며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당신도 슬슬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에레즈는 ‘성검’을 가지고 있지. 당신은 손끝조차 대지도 못하는 그거 말이야. 아니, 당신뿐만이 아니던가? 마물이 활개를 치고 인간을 약탈해도, 프리드웬 사람 중 그 누구도 나서서 뽑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 검.>
<…….>
<세상에서 제일 겁이 많은 멍청이라도 그만한 검을 들고 있으면 무시 못 해.>
에어리얼은 알테르에게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인지 인간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더군. 알테르…. 당신의 계획대로 이번 전투에서 에레즈를 쓰러뜨린다면 나까지 나설 일은 없겠지. 하지만 당신이 불운하게도 졌을 경우를 대비해야겠어.>
<그것이 무슨 의미지?>
알테르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번의 몸은 준비를 마쳤어. 본격적으로 공성전이 시작된 후에는 나는 모습을 감추고 예정대로 그 몸을 탈취할 거야. 그러고 나서… 당신이 죽게 되면 나는 칼리번인 척 인간들 사이에 섞여들 거고. 칼리번의 모습으로 변한 나라면 에레즈는 분명 방심하겠지. 성을 되찾은 인간들은 이 성을 본거지로 삼고 왕국 각지에 흩어진 인간들을 긁어모으지 않겠어? 이곳은 성녀님들의 성력을 사용해 보호막을 칠 수 있으니까.>
<…….>
에어리얼은 알테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흡사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태도에 알테르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목을 쳐버려도 이상하지 않으나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예전에…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나…. 그즈음에 당신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거든. 인간들이 죄를 지어 세상이 물로 가득 찼었다고 했나? 그쯤 되면 신이 인간을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일 텐데, 인간들은 감히 신의 의지에 순응하지 않고 배를 만들었다지. 추잡하게, 아득바득 살아남으려고….>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알테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신이란 작자를 동정하게 됐어. 불쌍하지 않아? 인간을 없애려고 다른 생명들마저 모두 물에 가라앉혀 버렸는데, 인간들만 살아남았으니까.>
<그딴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뿐일 거다.>
<칭찬으로 듣겠어. 아, 그리고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지. 패배한 병사들이 버리고 간 목마에 대한 이야기….>
알테르의 행동이 멈췄다. 그의 눈은 마치 뱀처럼 눈앞의 쥐새끼를 잡아먹을지 내버려 둘지는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숨어 있던 인간들이 성에 모이고 나면, 난 모두가 방심한 틈을 타 새로운 왕을 죽일 거야. 당신은 내 칼 솜씨를 의심하겠지만, 칼리번의 몸이라면 그리 어렵진 않겠지. 에레즈 프리드웬은 절대 칼리번을 죽이지 못할 테니까. 성검을 사용할 수 있는 에레즈만 처리한다면 그 후로는 성에 마물을 불러들여서 인간들을 절멸시키면 돼.>
그 말대로라면 프리드웬의 성은 그 자체로 거대한 덫이 되는 셈이었다. 포부를 밝힌 에어리얼은 활짝 웃었다.
<어때, 내 계획이? 당신은 최악의 상황으로 죽게 되어도 원하는 대로 인간을 쓸어 버릴 수 있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오메가의 몸을 손에 넣는 거야. 이 계획의 유일한 단점은 당신이 죽어야 시작된다는 거지만.>
<마치 내가 죽길 바라는 것 같은 말투로군.>
<…그럴 리가. 우리는 한편이잖아? 죽지 마. 무사 귀환을 기도해 줄게.>
<저주가 아니길 바라지.>
* * *
며칠이나 지난 것일까?
칼리번은 귓가를 간지럽히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동굴, 그 입구에서 쓰러졌던 칼리번은 어느새 동굴 깊숙이로 옮겨져 있었다. 온몸을 뒤덮던 체액 또한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말라붙은 것일까, 아니면 녹은 것일까?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으읏….”
칼리번은 가슴을 빨고 있는 작고 통통한 마물을 떼어 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마물은 다리가 여럿 달린 애벌레와 비슷했다. 그러나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은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칼리번이 기절한 사이에, 어느새인가 마물들이 다가와 그의 몸을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리, 꺼져…. 아, 읏…!”
칼리번이 팔을 휘저을 때마다 다른 마물이 잡혔다. 그는 거의 짓눌리다시피 했다. 온몸을 뒤덮었던 체액은 아마도 마물들이 전부 몸을 핥아 먹어 사라진 것이리라.
칼리번은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목을 움켜쥐었다. 목구멍이 부어 아픈 것을 보니 그사이에 체액을 제공한 녀석도 있었던 것 같다.
“큿….”
칼리번은 끙끙거리며 하반신을 뒤척였다. 몸 안에 마물의 성기가 삽입되어 있었다. 배 속을 가득 채우는 감각이 불쾌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으나 그가 기절한 사이, 통제되지 않는 마물들이 멋대로 에어리얼의 몸을 범했다. 칼리번은 한참 후에서야 간신히 마물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 으으…….”
칼리번은 네발로 기어 나왔다. 대체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정액이 채워진 것인지 마른 몸과 어울리지 않게 배가 불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칼리번은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벌렸다.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두 손으로 아랫배를 눌렀다.
“아… 히, 읏….”
그러자 다리 사이로 정액이 꿀렁 밀려 나왔다. 정액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감각은 오줌을 누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작은 몸을 떨게 했다. 앉은 자리에 작은 웅덩이가 고인 후에서야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이곳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아….”
이곳은, 8년 전, 에레즈와 함께했던 은신처였다. 칼리번의 무의식을 읽은 마물들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그 사실을 칼리번이 곧바로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체격이 달라지면서 동굴을 바라보는 시선도 전과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동굴은 칼리번이 기억하고 있는 그때, 그 모습보다 훨씬 크고 스산해 보였다. 아마도 이 육체가 더없이 연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적이 드문 장소여서인지 시간의 흐름은 거의 스치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서 빗소리가 들려온다. 칼리번은 과거에 홀린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동굴 밖으로 나서자마자 가파른 절벽이 그를 맞이했다. 자칫 잘못하면 아래로 추락할 정도로, 내디딜 땅이 거의 없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정도는 가능했다. 칼리번의 몸에 들러붙은 체액과 마물의 정액이 굵은 장대비에 쓸려 함께 아래로 흘러내렸다.
“…….”
비.
비다….
비를 맞고 있다. 칼리번은 멍청하니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이나 비를 맞기만 했다. 피부 위로 닿는 감촉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모든 감정도 기억도 빠져나간 듯한, 무채색의 얼굴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울고 있는 것인지, 칼리번은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이름 없는 그의 눈물은 비와 함께 섞여 사라졌다.
절벽 밖 풍경을 보는 것이 몇 년 만인가? 칼리번은 회한에 빠졌다. 몸이 바뀌어서일까, 온 세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비에 푹 젖은 붉고 긴 머리카락은 칼리번의 얼굴을 가리다 못해 어깨마저도 덮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손에 죽어라.>
자신의 몸을 빼앗은 에어리얼은 그렇게 말하고는 떠났다. 그 후의 일은 엉망진창이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물 혼혈은 마물보다는 느리지만, 몸 일부가 잘리면 재생된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 재생이 멈출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 팔다리가 없었다. 그는 땅 위에 펄떡거리며 죽어 가는 물고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서 두 발과 다리가 다시 솟아나자, 천근처럼 무거워 네발로 길 수밖에 없었다. 길고 붉은 머리카락조차 더없이 무거워, 칼이 있다면 전부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칼리번은 무거워진 머리카락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발밑에 고인 물웅덩이 위로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에어리얼의 얼굴이.
“헉…!”
칼리번은 겁을 먹고는 자기 자신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동굴의 어둠이 그를 삼켰다. 뒷걸음질을 쳤기에 제대로 걷지 못했고, 그는 결국 돌에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헉, 허억…….”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검 하나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몸이 여기 있다. 그러나 나약해진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정신 또한 그러했다. 원래 칼리번은 감정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덤덤한 사내였다. 수없이 치렀던 방어전. 어떤 부상을 입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연약한 소년이 두려워 벌벌 떨 것이라고 누가 알았을까? 이런 모습으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칼리번이라고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평생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원래의 몸은 영영 빼앗긴 채로….
칼리번은 무릎으로 기어, 동굴 안에 고인 물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지나치게 눈에 띄었기에 생존에는 도리어 독이 되는 외모. 물속에 비친 에어리얼이 두려워하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칼리번은 물웅덩이로 손을 뻗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에어리얼의 얼굴이 흩어진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든다. 일렁이는 물속, 에어리얼의 얼굴이 더없이 초라해 보인다.
이런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도 무엇보다 칼리번을 당황하게 한 것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었다. 두려움 다음에 드는 감정은 기쁨과 감사. 간신히 얻어 낸 자유가 너무나 고마워서, 자신을 풀어 준 에어리얼의 발에 입이라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어째서.”
칼리번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자는 나를 이렇게 만든 원흉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정반대로 에어리얼을 추앙하고 있다. 칼리번은 적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다가… 어느새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감정이 두렵다. 모든 감각을 잘린 채 어둠 속에서 지냈기에, 화상에 소금물을 뿌리는 것처럼 작은 감정 하나에도 숨이 조이고 괴로웠다.
‘이대로… 에어리얼과 검은 갑옷에게서 도망쳐서, 평생 이곳에서 사는 건 어떨까.’
칼리번은 에어리얼에게서 도망쳐 동굴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아직은 어떻게 자신이 에어리얼처럼 마물을 부리는지, 원리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 숨어서 단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물을 의지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수월해질 것이다. 마물을 시켜 생존에 필요한 음식 등을 조달하고, 자신은 숨어 사는 거다. 그 누구도 찾을 수 없게. 더는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도록.
다시는, 그 누구와도 얽히고 싶지 않다.
희생이 두렵다. 차라리 죽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을, 희생의 대가로 배우게 되었다. 나약함, 비겁함, 비열함, 졸렬과 비굴함. 검붉은 감정은 칼리번이 에레즈에게 배웠던 어떠한 감정의 씨를 말라 버리게 했다.
<숨어 있던 인간들이 성에 모이고 나면, 난 모두가 방심한 틈을 타 새로운 왕을 죽일 거야.>
그러나, 꿈속에서 들었던 에어리얼과 알테르 프리드웬의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칼리번의 몸이라면 그리 어렵진 않겠지. 에레즈 프리드웬은 절대 칼리번을 죽이지 못할 테니까.>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머릿속을 헤집고, 모든 기억을 읽었다. 몸이 바뀌기 직전, 그뿐만 아니라 지난 8년간 계속해서.
칼리번의 기억은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했다. 그는 오메가였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마물 혼혈 출신용병이었다. 용병의 삶이라면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왜 에어리얼이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고문하는지, 자신에게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리고 난, 나는… 전부를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더는 나서지 않아도 될 거다.’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이곳에 숨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에어리얼이 나를 다시 잡아갈 거야…. 마… 마물들이 나를 지켜 주겠지.’
칼리번은 동굴 안쪽에 모인 마물들을 쳐다보았다. 에어리얼의 육체를 마음껏 범한 그것들은 지쳐 잠들어 있었다. 강력한 마물을 피해 숲에 숨어 지내던 급이 낮은 마물들이었다. 이런 돌발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생 오메가와 교미는커녕 닿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마.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망가져 버리고 마니까. 칼리번은 끝없이 이어지는 사고를 멈추기 위해 마물을 향해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덜그럭, 더듬거리며 나아가던 칼리번의 손에 단단한 물건이 닿았다. 동굴 속 바위와 돌은 하나같이 거칠고 뾰족했다. 그러나 이건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
칼리번은 움직임을 멈추고, 손에 닿은 것을 만지작거렸다.
“아….”
자갈은 손에 쥐기 좋게 동글동글했다. 칼리번이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작은 돌무덤.
칼리번이 에레즈를 젠에게 보내기로 결심했을 때, 자갈도 함께 두고 갔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 굳이 가져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버려진 후에도, 하찮은 돌멩이는 계속 이 장소에 남아 있었나 보다.
“아니야….”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칼리번은 자갈을 버리고 갔을 뿐이지, 돌무덤을 만들지는 않았다.
“아니, 아니야…. 이건….”
칼리번은 자신이 부순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돌무덤이 아니다. 까맣고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하얗고 작은 자갈들. 마치 자그마한 것이 커다란 것을 지켜 주는 모양새였다. 시간이 지나 말라비틀어지기는 했으나 주변에는 정성스럽게 꽃도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칼리번에게는 무언가를 꾸미는 재능 따위는 없었다.
<음, 으음…. 그, 그리고 말이야……. 이, 이건, 카, 칼… 너, 널 닮은 것, 같아서…. 가, 가져!>
아무도 모르는 이 장소에 누가 돌아와서 정성스레 주변을 정리하고 꽃을 쌓아 놓고 갔을까?
“…….”
칼리번은 커다란 칼리번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칼리번이었을 때는 가벼웠었는데, 에어리얼의 손으로 쥐니 손목이 아프고 묵직했다.
무거워서… 눈물이 났다. 고작 돌멩이일 뿐인데. 칼리번은 어딘가가 망가진 사람처럼, 표정을 잃은 얼굴로 울었다. 지옥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 몸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만 같았다.
“윽! 뭐지…?!”
그때였다. 쿵! 벼락이 내리쳤다. 땅에서 높이 떨어진 이 동굴마저 순간 흔들릴 정도였다.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진인가?”
발아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여전히 동굴 입구 너머로는 굵은 비가 무섭게 내리고 있었으나, 천둥이 아닌 것 같았다.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동굴 밖까지 뛰쳐나갔다.
“저건…!”
칼리번은 검은 숲 너머로 언뜻 보이는 성의 윤곽을 노려보았다. 눈물로 젖어 있던 얼굴은 비에 씻겨 나갔다. 칼리번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 너머, 먹구름이 낀 하늘 위로는 검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이제야 간신히 승리를 맛본 인간들 위로 마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에어리얼!”
누구의 계략인지 파악한 칼리번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손 위로는 굵은 장대비가 쉴새 없이 쏟아진다. 마치 물줄기 하나하나가 바늘이 된 것처럼 시리고 아팠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설마 나를 부르는 건가?”
…도망치지 말라고?
함정이라는 것을 안다. 칼리번은 지난 8년간 에어리얼을 향한 공포를 온몸에 문신을 새기듯 각인 당했다. 추위가 아닌 공포로 몸이 떨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돌아가야만 했다. 8년을 갇혀 있었던 그곳으로….
설령 그 대가로, 왕자님에게 붙잡혀 목이 잘리게 될지라도.
“성으로 가야 해, 당장!”
칼리번은 급히 고개를 돌려 동굴 안쪽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그 안에 담긴 어둠이었다. 8년 전, 에레즈와의 추억이 남은 장소였지만 지금은 마물들이 똬리를 틀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큭….”
칼리번은 인상을 썼다. 이 몸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마물이 어째서인지 목숨을 구해 주기는 했으나, 그것은 위급함에서 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칼리번은 당장 저것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그는 두 주먹을 쥐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성으로 옮기라는, 단 하나의 명령만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그러나 작고 연약한 마물 한 마리조차 칼리번에게 복종하러 나오지 않았다.
“제길….”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원래 자신의 몸이었다면 이 정도 절벽은 그냥 뛰어내려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몸은 연약했다. 비를 맞은 것 정도로 벌써 지쳐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마물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이곳을 떠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후우, 하아….”
칼리번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조차 빗물이 섞인 것만 같다. 그의 가슴이 얄팍하게 움직였다. 심호흡을 마친 칼리번은 뒷걸음질을 쳤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 찰박거리며 물소리가 났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가벼운 소리가 아닌, 철벅거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몸 일부가 동굴 안의 어둠에 잠길 정도로 뒤로 물러난 칼리번은 빗물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을 이마 너머로 넘겼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척! 첫걸음을 내딛는 것을 시작으로 칼리번은 곧장 앞으로 달렸다. 물을 밟는 소리가 조금 전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몇 걸음 앞은 까마득한 절벽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멈출 줄 모르는 말처럼 무작정 앞을 향해서만 달렸다.
이윽고 그의 몸이 절벽 너머로 내던져졌다. 순간, 검은 숲의 전경이 칼리번의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찰나의 해방감 너머로 끝없는 추락이 이어졌다.
“크으윽—!”
이대로라면 절벽에 부딪혀 뼈가 부러지고, 나뭇가지에 몸이 꿰뚫려 찢기겠지. 그러나 칼리번은 두 팔과 다리를 활짝 펼친 채로 눈을 감지 않았다.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자, 엄청난 바람과 압력이 칼리번의 작고 여린 몸을 짓눌렀다.
곧 이어질 죽음이 두려운가? 칼리번과 맞선 바람은 마치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아니.’
칼리번은 단언할 수 있었다. 고작 여기서 부서져 죽을 운명이라면, 에어리얼의 계획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끝없이 추락하던 칼리번의 몸이 바위에 부딪혀 몸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괴조가 나타나 칼리번의 몸을 낚아챘다. 거대한 몸을 지지하는 거대한 날개. 인간계의 새가 아닌 만큼, 낮은 활강은 거대한 몸에 부담이 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몸이 부딪쳐 날개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 칼리번을 구출해 냈다. 오메가의 향기를 맡은 괴조는 제 몸이 부서지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됐다!’
칼리번은 속으로 외쳤다. 마물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해서든 마물을 움직이게 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에레즈와 아스터, 인간들과의 연이은 대치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당장 날 데려가라! 저 검은 손자국이 있는 곳으로!”
칼리번은 가는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거칠게 외쳤다. 당장에라도 칼리번의 몸을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발톱에 붙잡힌 채로, 칼리번은 괴조와 함께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