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성 탈환
에레즈 프리드웬은 8년 만에 왕성으로 돌아왔다. 8년. 흠집 하나 없는 진주 같던 소년이 부서지고 깎여 나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막내 왕자의 귀환에 황금 융단을 깔고 꽃을 뿌리는 개선식은 없었다. 에레즈 또한 한 손에는 은빛 성검을 쥐고, 등 뒤로는 병사들을 두른 채였다.
성문을 파괴하고 본성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에레즈는 부하들에게 뒤를 맡긴 채 홀로 긴 복도를 걸었다. 인간과 마물 혼혈로 구성된 연합군의 수장으로서, 적군의 우두머리를 치기 위해서였다.
공성전으로 어지러운 왕성과 달리, 본성 내부는 마물은커녕 알테르를 추종하는 마물 혼혈들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의 고요다.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그리 배치된 것에 가까웠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에레즈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에레즈는 항상 다른 형제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맏이인 알테르 프리드웬은 형제 중에서도 가장 멀면서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를 향한 근원적인 공포…. 혹은 증오. 그것은 어쩌면 태어난 순간부터 각인된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째서인지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만 한없이 가혹했다. 어릴 적에는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떨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드시 이 손으로 그를 죽여야만 했다.
에레즈는 자꾸만 흐트러지는 자신의 숨결을 다잡았다. 횃불 하나 올리지 않은 길고 좁은 복도는 영원한 밤 속에 갇힌 것 같았지만, 끝은 있었다. 막다른 길에 선 에레즈는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문을 두 팔로 열어젖혔다.
“윽……!”
곧 눈 부신 빛이 에레즈를 덮쳤다. 어둠에 익숙해진 에레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빛에 삼켜져 존재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에레즈는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빛을 떨쳐 내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홀이 그토록 눈부셨던 이유는 천장을 가득 메운 샹들리에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보석을 품은 샹들리에는 알알이 반짝였다. 계단과 벽면에 장식된 수많은 촛대에도 마찬가지로 불이 붙어 있었다. 빛은 서로의 빛을 받아 더욱 찬란히 반짝였다. 밖은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이곳만은 당장에라도 연회가 열릴 것처럼 화려했다.
그리고….
“아, 아앗…! 으응, 흐앙…!”
거대한 새장과도 같은 감옥이 에레즈의 양옆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몇 개나 놓여 있었다.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진귀한 짐승을 구경거리를 세워 둔 모습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새장 안에는 새가 아닌 인간이 들어있었다.
“더는 안 돼, 아읏, 배가, 아, 찢어질 것 같아…!”
새장 안에는 인간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마물의 모습을 한, 기괴한 생김새의 알파도 함께였다. 그들은 새장 안에서 교미 중이었다. 사내들은 거대한 성기에 뒤를 꿰뚫리며 울어 댔다. 살이 천박하게 부딪치는 소리, 쾌락이 섞인 울음소리. 기이하게 꺾인 사내의 헐떡임과 신음이 홀 안에 천박하게 울려 퍼졌다.
“악기들이 연주하는 곡은 마음에 드느냐.”
무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에레즈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연회장의 가장 후열, 높은 계단 위에 자리 잡은 왕좌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알테르 프리드웬.
그는 교미에 열중한 알파들과 달리 그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에레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왕이 신하를 기다리는 것처럼 자못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알테르.”
숨을 가다듬은 에레즈는 홀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처음으로 사교계에 들어선 영애와도 같이.
그는 제 형제를 올려다보았다.
8년.
같은 나무에서 난 가지였건만, ‘피의 날’ 이후 두 형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한 명은 붉은 오메가의 도움을 받아 마물과 마물 혼혈 모두를 부리는 강력한 군주로 군림하였다. 반면에 다른 한 명은 땅을 기어 다니며 비참하게 버텨야만 했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에레즈가 어린 시절 두려워하던 그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눈부신 금발은 어깨 위로 길게 늘어졌고 푸른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귀기 어린 미모도 여전했다. 푸른 망토를 걸친 넓은 어깨와 위협적인 체격은 조금도 노쇠하지 않았다.
왕자였던 시절, 그가 마물을 토벌하고 성으로 귀환할 때마다 수많은 백성이 자발적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에레즈는 달랐다. 지난 세월은 겁쟁이 소년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벼려냈다. 다른 금발을 여럿 늘어뜨려도 눈에 띄는 뚜렷한 금발은 프리드웬 가문의 상징이었고 때문에 왕실의 후예들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곤 했다. 그러나 에레즈의 머리카락은 잘려 나갔고, 눈썹을 간신히 덮는 정도였다.
뿐만 아니었다. 에레즈의 얼굴과 몸 곳곳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보석이 시장 바닥에 버려져 무수하게 발로 차이고 부딪친다면 이렇게 탁해질 것 같았다. 한 송이 꽃과도 같았던 미모는 수많은 상처로 인해 가려졌다.
이렇듯 세월이 낳은 무수한 변화가 그들을 구분 지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닮은 부분도 아직 남아 있어 그 누구도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
“오랜만이구나. 이제는 유일한… 나의 동생.”
가만히 에레즈를 내려다보던 알테르는 미소를 지었다. 피와 오물로 물든 권좌에 앉아 있음에도 그는 마치 신이 내려보낸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그 눈은 어찌 된 거지? 전에 보았을 때는 흠 하나 없이 온전했었는데.”
그러나 푸른 눈은 파충류의 그것처럼 차가웠다.
“…….”
에레즈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훑었다. 그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흉터는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자상으로, 그로 인해 한쪽 눈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지나가던 개에게 줬다. 당신을 상대하는 데 가져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에레즈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알테르의 웃음이 얼굴 위로 퍼졌다.
“형제를 개 취급하다니…. 그새 천박한 인간의 버릇이 옮았구나. 죽은 동생들이 지옥에서 슬퍼하고 있겠어.”
알테르는 왕좌에서 일어섰다. 돌발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에레즈는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에레즈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재생시켜라, 에레즈.”
알테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에레즈에게 명령했다.
“아무리 멍청한 너라도 그 정도 본성은 깨울 수 있겠지. 설마 그런 약점을 진 채로 이 나를 상대할 셈이냐?”
알테르의 길고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은 아무런 치장 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헛소리. 한번 잃은 눈을 어떻게 되찾지?”
“가능할 테지. 너는 우리의 형제니까.”
에레즈의 몸이 일순 떨렸다.
“마물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자는 인간과는 다른 시간을 살고, 다른 힘을 지닌다. 설사 신체가 절단됐다 하더라도 재생된다. 설마 이런 사소한 지식을 배우기 위해 이 형에게 온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는 당신과 같은 괴물이 아니라.”
에레즈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
연합군을 여기까지 이끈 일등 공신을 처음으로 마주한 알테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에레즈는 성검의 끝을 정확히 제 형제 쪽으로 겨눴다.
한눈에 보아도 여타 검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철로 주조하는 일반적인 장검과 달리 성검은 전체적으로 백색에 가까운 은빛이 돌았다. 검신은 날렵하여 양손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한 손으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검을 가로로 가르는 날 밑은 두 갈래로 나뉜 백조의 날개처럼 보였다.
성검은 때때로 다가올 재앙을 예언하듯 주변의 공기와 공명하며 웅, 우웅, 울리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평범한 사람조차 검에서 특별한 기운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성검인가…. 용케도 구해 왔군.”
알테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살육과 정욕이 들끓는 이 연회장에서 오직 성검만이 홀로 고결했다.
“선조께서 왕국을 멸망시키는 후대를 더는 지켜만 볼 수 없다더군.”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알테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고아한 왕을 흉내 내던 알테르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에레즈는 글로리아 홀에 당도하기 전, 역대 왕들을 빚은 조각상이 전시된 복도를 지나왔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장식된 것은 왕국을 세운 시조이기도 한 에인레드 프리드웬이었다. 성검은 바로 그의 검이었다.
여러 나라로 분열된 인간들을 한데 모아 통일된 왕국을 세우고, 인간계로 침입한 마물과 싸운 위대한 왕이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이 성스러운 검이 함께했었다. 에인레드 프리드웬이 전사한 후, 검은 그의 유언을 따라 왕국에서 가장 깊은 호수에 던져졌다.
호수는 인간의 호흡으로는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으며, 어느 알파도 건드릴 수 없는 성스러운 힘으로 감싸여 있었다. 하지만 에레즈는 그 검을 회수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서….
“후, 후후….”
알테르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에레즈, 너란 존재는 언제나 나를 웃게 만드는구나.”
그제야 상대할 기분이 들었는지 알테르가 왕좌에서 일어섰다. 긴 머리카락은 알테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많은 뱀이 따르듯 함께 흔들렸다.
“그래,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지. 꼭 두 눈을 뽑아 버린 채 물에 빠뜨린 쥐새끼를 보는 것 같았어.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버둥거리는 꼴이 제법 우스웠거든.”
에레즈의 존재보다 더한 농담이 없다는 듯, 알테르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다.”
알테르는 급작스럽게 정곡을 찔렀다.
“그리고 그건 내 너머에 있지.”
“……!”
에레즈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 같으냐? 아니, 그렇지 않다. 이건 멍청하고 성실한 부하에게 내리는 포상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이래 봬도 나는 상벌은 정확히 나누는 편이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의 동생은 지난 8년간 굴하지 않고 인간들을 설득해 헛된 희망을 안겨 주었지. 그렇게 매번 우리의 입 속까지 친히 인간들을 끌어다 바쳤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형제들보다도 충실히 나를 따랐다고 볼 수 있지 않나?”
덕분에 내 부하들이 포식했으니. 알테르가 덧붙인 말에 에레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하지만 피리를 부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제 네게 남은 일은 우리의 식량이 되고 교미할 가축들을 두고 얌전히 떠나는 것뿐이야.”
“닥쳐…!”
알테르의 모욕에 성검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 어쩌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들을 절벽 아래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에레즈의 귀로는 쉬지 않고 알파에게 범해지는 사내들의 교성만이 가득 들려오고 있었다. 에레즈는 고개를 숙였다.
“…….”
설령 자신이 인간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의 목을 베겠어.”
간신히 ‘그 사람’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에레즈에게 남은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방해물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고 나아가는 것뿐.
“의지는 가상하다만, 내가 다른 동생들처럼 쉽게 당해 줄 것 같나?”
이어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알테르가 칼을 뽑았다.
* * *
글로리아.
지금 에레즈가 선 홀의 이름이었다. 말 그대로, 이곳에 선다는 것은 커다란 영광을 누린다는 의미였다. 대관식부터 시작해서 기사 작위 수여식까지, 왕국에서 기념할 만한 행사는 반드시 이곳에서 열리곤 했다.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옛날, 다섯 왕자와 기사들이 마물을 토벌한 후에는 항상 연회가 열리고는 했다.
보석으로 만든 샹들리에, 은으로 세운 촛대와 상아를 깎아 만든 조각상….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성의 전성기가 이곳에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고독한 왕좌가 내려다보고 있다. 귀족과 기사는 각자의 자리에서 왕을 우러러보았으리라.
그러나 에레즈는 한 번도 글로리아 홀에서 영광을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이곳과 관련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은 ‘피의 날’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거지처럼, 에레즈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심지어는 공간마저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영광의 홀이 누구보다도 익숙하며 어울리는 자는 단연코 알테르 프리드웬일 것이다. 그가 인간을 배신하고 마물의 편에 섰든, 인간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기든 간에 말이다.
“성녀를 비밀 통로로 들여 왕성의 보호막을 재개시켰더군.”
알테르는 검을 맞대는 도중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예로부터 성녀원에서는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을 관리해 왔다. 네 곳 중 한 곳이라도 보호막을 다시 생성해 낼 수 있다면, 붉은 오메가가 부리는 마물의 이동을 차단할 수 있게 된다.
“바깥과 왕성을 분리하면… 수적으로 열세인 너에게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했나?”
“큿….”
에레즈는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발에 밟히는 것은 카펫이 아닌 금빛의 실이었다. 아니, 거미줄이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계획이다. 우리에게 항복할 작정으로 인간을 선물로 보낸 것이라면 또 몰라도.”
홀은 알테르의 금사가 짜 놓은 거대한 거미줄에 뒤덮여 있었다. 인간 행세를 할 적에도 눈에 띄게 긴 머리카락이었으나, 이제는 끝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 온 바닥뿐만 아니라 벽과 천장에도 늘어진 채였다. 마물과 결탁한 알테르는 더 이상 본성을 숨기고 인간인 척할 필요가 없었다.
보통 그 정도로 머리카락이 길면 행동거지에 제약이 생기지만, 거미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에레즈 쪽이었다.
“승산은…. 큭, 당신의 목을 베면 그때부터 생기겠지.”
에레즈는 발목을 붙잡는 금사를 쳐 내며 대거리를 했다. 보호막을 재개한다 해도 그것을 지키는 성녀가 살해당하면 의미가 없어진다. 실제로 8년 전, 그 맹점을 이용한 알테르 프리드웬으로 인해 인간은 무력하게 굴복하고 말았다.
지금 이 얘기를 꺼낸 것을 보면 알테르는 이미 성문으로 알파를 보냈을 것이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연합군이 무너지기 전에 저자의 목을 베어야만 했다.
“…윽!”
금사는 성가신 방해물 정도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피부 속을 파고들어 핏줄을 타고 들어왔다. 그 때문에 에레즈는 알테르를 상대하면서 동시에 시시때때로 몸에 감겨드는 금사를 잘라 내야 했다.
‘성가셔…!’
알테르에게 공격을 퍼붓기는커녕, 금사 때문에 다가가기조차 어렵다. 형세는 흡사 거미줄에 걸린 나비와도 같았다. 그러나 거대한 거미에게 무력하게 잡아먹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에레즈의 손에는 마물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성검이 있었으니까.
성검은 마물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태운다.
“성검만 믿고 달려드는 꼴이 불길에 휘말린 부나비 같구나.”
실제로 알테르는 몇 번이나 에레즈의 목을 자르려 들다가도 성검을 피하는 몸짓을 보였다. 힘의 차이가 확연함에도 에레즈가 알테르에게 덤비는 이유기도 했다.
“아, 으응, 아앗! 하아, 거기는, 아아…. 흐읏!”
형제가 서로를 죽이려 드는 동족상잔의 현장. 그 결투를 지척에 두고도 홀을 둘러싼 알파들은 정신없이 사내들과 교미 중이었다. 양 진영의 우두머리가 나서서 싸우는 이 전투가 천박한 교미와 다를 바가 없다는 듯이. 피가 강처럼 흐르는 성 밖의 전쟁이, 다리 사이로 정액이 흘러내리는 성교와 같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그들의 몸에도 알테르의 금사가 감겨 있었다.
“아아…! 좋아, 아, 아앗, 흐응, 너무, 좋아…!”
살이 부딪치는 음탕한 소리가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얽힌다. 사내는 알파에게 깔린 채로 신음했다. 원래라면 수컷을 받아들일 수 없는 뒷구멍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파의 성기에 길들어지고 익숙해져 오직 교미를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흐, 하으! 으응…! 더, 좀 더…!”
신음하는 사내의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인간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성기가 배 속을 휘저을 때마다 그는 침을 흘리며 쾌락에 몸부림쳤다.
알파는 교미 중에 오메가의 가슴에서 젖을 취한다. 그것은 교미 자체가 오랜 시간이 걸리는 행위이기도 했고, 교미 중에도 끊임없이 다른 알파와 경쟁하기에 금세 체력이 고갈되는 탓이기도 했다. 그래서 알파는 아무리 짜내도 나오지 않는 젖을 계속해서 빨았다. 그 본능에 시달린 사내들의 가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네가 왕성으로 끌고 들어온 인간들도 곧 저 꼴이 될 거다.”
알테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알파의 육중한 몸뚱이 아래에 깔린 인간은 애초에 도망칠 수 없었고 마물은 사내를 범하는 본능에만 치우쳐져 있었다. 그래서 알테르의 금사를 통해 생명력이 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를 챈다고 해도 그들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당장 죽는 것보다 눈앞의 사내를 범해 ‘종족 번식’의 본능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으니까.
“닥쳐!”
에레즈가 성검으로 금사를 베어 내며 외쳤다. 그렇게 알테르는 전투 중에도 끊임없이 힘을 보충하고 있었다. 반면, 에레즈는 지쳐 갔다. 전투가 오래 지속될수록 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거미줄에 갇힌 나비가 애달픈 날갯짓을 퍼덕였다.
“벌써 말할 기력도 없는 건가?”
헐떡이는 에레즈의 몸을 금사로 묶으며, 알테르가 물었다. 수도 없이 합을 주고받았으나 알테르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하아…. 다른 형제들도 똑같이 물어보던데, 도발하는 법도 공유하나 보지?”
에레즈는 이를 악물며 받아쳤다.
“그 말을 한 다음에 다들 이 검에 죽었지만, 큭! 하아, 하아….”
에레즈는 사지를 압박하는 금사를 버티며 자신의 가슴을 노린 알테르의 공격을 간신히 방어했다. 몸을 짓뭉개는 압력에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에레즈는 옅은 눈꺼풀을 찡그리며 깜박였다.
알테르를 상대하기 이전, 그는 네 명의 형제를 더 베었다. 그들은 에레즈의 손에 쓰러졌지만, 죽기 전 에레즈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하나씩 남겼다. 잃어버린 왼쪽 눈은 둘째 왕자의 짓이었다. 오른쪽 귀도 잘렸으며 한쪽 허벅다리에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걷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이 남아 있었다.
형제들은 제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에레즈를 할퀸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전투였다. 알테르는 전투에서 우아함을 유지할 정도로 우세했다.
“나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반년은 더 전세를 가다듬고 왔어야지. 무엇이 그리 급했지? …아,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검을 주고받는 사이로 알테르는 일부러 에레즈를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에레즈는 분노를 숨기지 않고 한쪽 눈을 번뜩이고는 곧장 알테르를 향해 성검을 밀어 넣었다. 그런 에레즈의 공격을 예측하는 것은 눈을 감고 싸우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알테르는 여유롭게 한발 물러났다.
“네가 약한 것은 알파로서의 본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테르가 빠진 틈으로, 바닥에 늘어진 금사가 에레즈의 발목을 붙잡았다.
“으윽!”
에레즈는 급히 발목을 부러뜨리려 하는 금사를 잘라 냈다. 성검이 닿자마자, 금사는 베이지 않고 검게 타들어 갔다.
“아니, 나는 당신들과 달라! 특히 당신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아.”
에레즈는 목을 꿰뚫으려 하는 알테르의 검을 막았다. 두 사람의 검이 맞닿았다. 에레즈는 그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한쪽 눈으로 맹렬히 그를 노려보았다. 똑같이 푸른 보석안이었다.
“성안에 숨어서, 그물을 쳐 놓고 먹잇감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주제에…!”
에레즈는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랬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거미에 불과했다. 만신창이가 된 대적자를 상대하는 그보다, 성검에 목숨을 잃었던 다른 형제들이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다른 형제들은 비겁하게 숨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분노하는 건가? 제법 인간 흉내를 낼 줄 알게 되었구나.”
알테르는 에레즈의 귓가에 속삭이더니, 맞부딪치던 검을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물렸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에레즈의 걸음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방심은 잠시, 에레즈는 다시 알테르에게 돌진했다.
그때였다. 샹들리에 위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알테르의 금사가 꿈틀거리더니,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에레즈를 향해 급하강했다.
“윽?!”
에레즈의 목이 불시에 두꺼운 금사에 감겼다. 그러고는 성검을 사용하기도 전에 몸이 위로 끌려 올라갔다. 동시에 바닥에 깔려 있던 금사 또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에레즈의 다리를 감고는 덩굴처럼 타고 올라가, 성검을 쥔 오른손을 통째로 봉쇄했다.
“기억나게 해 줄까, 에레즈?”
“큭, 흐…….”
알테르는 교수형에라도 처한 모습의 에레즈에게 다가와 달콤하게 속삭였다.
“너는 우리 형제 중에서 가장 멍청하고 나약한 개체였다. 몇 해가 지나도록 인간의 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지. 간신히 입이 트인 후로도 그저 겁먹은 개처럼 밤낮으로 낑낑거리기만 했단다. 씨는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허억, 윽…. 큭…….”
에레즈는 대답하지 못하고 헐떡였다. 이대로 질식하여 죽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아래로 당기는 금사에 팔이 찢기는 것이 먼저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도 약해 빠진 인간의 태에서 태어난 탓이겠지. 그것이 바로 네 죄다.”
알테르는 동생에게 일말의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숨이 점차 부족해지자 에레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아, 아, 으윽…….”
죽음을 감지한 탓일까?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이 불어닥쳤다. 어린 시절, 자신이 벌였던 일탈. 탈출. 그로 인해 죽은 성녀. 성녀가 흘린 피 웅덩이에 서 있던 잔혹한 알테르의 모습….
그보다 훨씬 이전,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던 사람들의 시선들. 두렵고 무서워서, 이 세상에 자신의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낙엽처럼 떨었던 나약한 자신.
그래,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이제 고통받는 인간들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알테르의 앞에 서니, 8년 전의 멍청하고 나약한 자신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알테르는 에레즈의 나약함을 알아보고는 검을 휘둘렀다. 동생이 기절하는 행운을 누리지 않길 바랐던 것이다.
“—!”
검이 에레즈의 배를 스쳤으나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에레즈의 피가 금사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형제들과 겨루며 힘의 차이를 깨달았을 거다. 성검이 아니었다면 너는 이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었으리라는 것도.”
“허억, 헉……. 윽…!”
“지금도 그렇지 않으냐? 성검을 손에 쥐고도 네 능력은 하찮기 그지없구나. 그러니 마물이 아닌 인간의 편에 선 것이겠지. 위광에 중독되어서.”
“아니…야….”
에레즈는 간신히 대답했다.
“벌레보다 못한 인간들에게 추앙받는 기분은 어떻지? 정말로 왕이라도 된 기분이더냐?”
“닥쳐…!”
에레즈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런 그의 분노를 대변이라도 하듯, 에레즈의 오른팔을, 정확히는 성검을 붙잡은 금사가 검게 타들어 갔다. 오른손의 자유를 얻은 에레즈는 머리 위로 길게 솟아오른 줄을 잘라 냈다.
쿵!
금사에 묶였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레즈는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부터 움직였다. 에레즈의 처형대였던 샹들리에가 끊어져 그의 몸을 향해 추락했다. 떨어진 샹들리에의 잔해에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샹들리에를 꾸민 보석과 불길은 합쳐져 거대한 루비처럼 불타올랐다.
“그렇다면 증명해라, 요행만을 바라지 말고!”
알테르는 궁지에 몰린 에레즈를 마음껏 농락했다. 일부러 금사에 불을 붙여 에레즈에게 채찍처럼 휘두르기도 했다. 에레즈는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필사적인 저항. 제삼자가 보기에는 에레즈가 쉴 새 없이 알테르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에 눈이 밝은 자가 보기에 그는 알테르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과하게 체력을 소모하는 것으로 보였다. 거기다 에레즈는 한쪽 눈이 없어 거리감을 조절하는 능력이 전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에레즈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알테르의 공격은 더욱 빨라졌다. 에레즈는 원형의 홀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불길을 피하며, 형제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흐트러뜨리면 순식간에 금사가 파고들어 에레즈의 팔과 발을 감쌌고 몸을 알테르에게 꿰뚫리도록 억지로 이끌었다.
마치 ‘알테르 프리드웬’이라는 한 명의 적이 아닌, 수십 개의 손과 발을 지닌 ‘형제들’을 상대하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알테르는 형제들의 능력을 모두 흡수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형제들이 알테르의 분신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들 만큼 그는 강했다. 자신보다 훨씬 서열이 높은 알파에게 칼을 들이민다는 것은 인간과 마물의 피가 섞인 마물 혼혈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대한 압박감이 에레즈를 짓눌렀다.
“큿…!”
알테르의 칼에 찔린 에레즈는 재빨리 물러섰다. 그러나 한발 늦었는지, 한 차례 베인 복부에서 다시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에레즈는 왼손으로 배를 감쌌다.
“너는.”
알테르의 숨은 왕좌에서 내려온 후로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와 달리, 부상을 입은 에레즈는 선공이 바뀐 알테르의 공격을 피하느라 쉼 없이 헐떡였다. 날카로운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회장을 찢듯이 울려 퍼졌다.
“네가 세상을 구한다고 생각하겠지?”
사실 에레즈는 자신의 실력이 알테르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첫 합이 오간 순간 이미 깨달았다. 마물 혼혈은 성장 후에 노화가 극단적으로 멈춘다. 그렇기에 나이로 인한 체력 차이는 없다. 반면에 알테르는 불세출의 천재이자 에레즈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터를 오가며 마물을 토벌했던 왕국의 기둥 중 하나였다. 실력 면에서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다, 에레즈.”
압도적으로 쌓인 전투 경험과 힘. 애송이인 에레즈가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지금의 전투는 연습 시합도, 무도회도 아니었다. 전쟁에서는 기권이 없었다.
서로를 베기 위해 부딪친 칼날이 날카로운 각을 이루며 부딪쳤다. 검에 힘을 실으며 맞붙는다. 서로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한쪽이 부서져 버린 눈과 파충류와도 같은 푸른 눈도 부딪쳤다.
“모든 일을 망치는 건, 항상 너 같은 멍청이였으니까.”
“큭, 뭐라고…?”
“네 존재 자체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에레즈는 제 형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인간을 죽이고, 마물을 불러들인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자신을 비난하고 탓한단 말인가?
“아니…. 잘못된 건 당신이야. 하아, 윽…. 당신이 그날,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에레즈가 지지 않고 대답하자, 유리알 같은 푸른 눈이 에레즈가 쥔 성검을 응시했다.
에레즈에게 힘이 붙게 된 계기이자, 마물 앞에서 노예로 전락한 인간들이 집결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끼긱, 끽, 검과 검이 부딪치며 순수한 경도의 대결이 되자, 알테르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알테르의 눈에 증오와 번뇌가 번들거렸다.
결국, 알테르가 먼저 물러섰다.
“다음에는 검을 부러뜨리고 당신의 목을 베겠어.”
에레즈는 검을 가볍게 휘젓고는, 목이 메어 쉰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 말에 알테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하하….”
알테르가 웃었다. 적막한 그의 웃음소리가 신음으로 가득 찬 홀 안을 울렸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알테르의 길고 화려한 머리카락이 전부 잘린 것이다.
“고작 이런 술수를 쓰려고 시간을 끈 건가? 그 시간에 인질을 죽이는 편이 쉬웠을 텐데. 어리석은 것인지, 오만한 것인지 모르겠군.”
알테르는 처음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고는,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죽은 뱀처럼 바닥에 늘어져 있던 금사들이 꿈틀거리더니, 날카로운 단검이 되었다. 수십, 수백 개의 단검은 곧장 에레즈에게 달려들었다.
“!”
한쪽뿐인 에레즈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흰자 안에 담긴 푸른 눈동자가 빠르게 구르며 날아오는 칼날들의 움직임을 일사불란하게 파악했다. 인간이 투척하는 단검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칼 하나하나가 생명을 지닌 것처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에레즈는 단검을 피하며 때로는 성검으로 그것들을 받아 쳐 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알테르의 공격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읏…!”
에레즈는 성검으로 알테르의 일격을 방어했다. 그 순간, 알테르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 머리카락은 좀 더 짧게 자르는 편이 좋았겠구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알테르의 머리카락은 송곳처럼 굵고 날카롭게 벼려지더니 에레즈의 허벅지를 뚫었다.
“크…으아악!”
폐가 찌그러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에레즈의 한쪽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던 금사는 덩치가 육중하고 무거운 뱀이었다면, 한차례 잘려 나간 금사는 단검이었다. 개개의 위력은 약할지라도 속도에 있어서는 전보다 더 빨라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에레즈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하, 흐윽…!”
에레즈는 휘청거리면서도 다시 일어서려 들었다.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일 텐데, 쉽게 죽으면 아깝지.”
“으…윽. 아악!”
알테르가 중얼거리자 주변에 떨어져 있던 단검들이 부유하여 에레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금빛 깃털처럼 보이는 단검들은 에레즈의 팔과 다리, 어깨와 관절에 일제히 박혀 들었다. 알테르는 더는 공격하지 않고, 고슴도치가 된 에레즈를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하아, 윽…. 흐….”
에레즈는 그 자리에서 두 무릎을 꿇었다. 알테르의 잘린 머리카락이 그 피를 빨아먹어 금빛에서 붉은빛으로 변해 갔다.
알테르는 천천히 걸어갔다. 승자는 성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다섯 개의 단검이 박힌 에레즈의 오른팔을 들었다. 손목을 부러뜨릴 듯 꺾자, 온몸이 피로 물든 순간까지도 쥐고 있던 성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턱!
성검이 알테르의 긴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금사가 검붉게 변하며 타들어 갔다.
“…….”
그 광경을 예상했다는 듯 바라본 알테르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에레즈의 손바닥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으윽!”
에레즈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알테르는 동생의 오른손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에레즈가 끼고 있는 검은 장갑은 검을 쥔 자세를 따라 자연스레 닳아 있었다. 알테르는 괴상하게 팔이 꺾인 에레즈의 손목을 쥔 채로 그 장갑을 벗겼다.
“큭, 그만둬…!”
에레즈가 반항하며 꿈틀거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툭, 장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레즈의 맨손이 드러났다. 그가 낀 장갑은 멀쩡했으나, 정작 장갑 아래의 손은 불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처럼 화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화상은 오래된 것조차 아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피부가 붉게 짓물러 있었다.
“성검을 쥐는 것만으로 이렇게 된 거겠지. 이 성스러움이 오히려 네 본성을 억누르고, 너를 더욱 나약하게 만드는 거다.”
새까맣게 변한 손을 확인한 알테르는 혀를 차며 웃었다. 한쪽뿐인 푸른 눈이 알테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 * *
<그대 안에는 폭력과 성스러움이 공존하니, 성스러움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지키고 폭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그대를 벌할 것이다.>
5년 전 성검이 속삭였던 말이 마치 당장 들리는 것처럼 귓가를 스친다.
그 검은 에드란느 호수 바닥 깊숙이 잠겨 있었다. 성검은 평범한 인간이 쥐면 그 사람의 힘보다 무조건 무거워지므로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제대로 들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마물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마물의 손에 닿으면, 그 순수성에 따라 심하면 육체가 훼손되기까지 했다.
마물. 적의 편을 선 마물 혼혈들. 알테르와 형제들…. 그리고 붉은 오메가. 무수한 적들. 그 모두를 베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더 크고 많은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에레즈는 인간들을 끌어모았고, 목숨을 불사하고 에드란느 호수에 뛰어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레즈는 성검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마물의 피가 섞였기에 성검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 인간들을 꾀어냈지? 아, 그래. 우리 형제들은 모두 마물의 꼬임에 넘어가 알파가 되었다고 했던가.”
알테르는 금사를 사용해 성검을 멀리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피투성이가 된 에레즈의 목을 움켜쥐고 단번에 들어 올렸다.
“네 출신을 변명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구나. 인간들에게 우리의 본성마저도 숨겨 주었으니….”
“큭….”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알테르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전설 속의 검을 사용하니 네가 인간이라는 착각이라도 들더냐? 하긴, 그러니 다들 그 거짓말을 믿고 있겠지. 하지만 너나 나나 결국 마물의 후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 우리는 모두 같은 아버지의 자식이니까.”
“윽…. 흐윽, 쿨럭, 헉, 허억…….”
알테르의 금사가 에레즈의 오른팔을 휘감았다. 그가 힘을 줄 때마다, 에레즈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널 약하게 만드는 이런 장난감이 아닌, 네 피에 잠든 ‘진짜 힘’을 사용해라. 나를 상대로 이런 장난질만 계속한다면 남은 것은 의미 없는 죽음뿐이다.”
“읏…….”
“아니면 인간들이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건가? 그렇다면 저 노예들의 눈을 당장 파내 주지.”
“그만……. 크, 허억…!”
에레즈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벌린 입에서는 핏덩어리만 튀어나왔다. 알테르의 두 눈이 이채로 빛났다.
“이래도?”
“아……. 아아악!”
대답이 들리지 않자 알테르는 에레즈의 오른팔을 압박했다. 팔뚝에 얇게 감긴 금사는 좁은 면적만 집중해서 조이고 있었다. 금사는 점점 피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근육이 절단되는 감각에 에레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리석은 나의 동생. 네가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인간들은 널 버릴 거다. 탑 위의 애송이였을 때는 무지했다 해도, 그동안 인간과 마물들 사이에서 굴렀을 터. 이제는 잘 알 거다. 인간이 얼마나 역겨운 존재인지….”
알테르의 조롱이 귓가에 감돈다. 에레즈는 이를 악물었다. 시시각각 조여드는 압박감을 버티기 위해 오른팔의 근육이 절로 부풀어 올랐다. 오른쪽 손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오고, 피부가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한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가락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뿌득거리며 절로 펴졌다. 금사 안쪽에서, 우직거리며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진실을 보여 주지.”
에레즈의 팔을 완전히 부러뜨리기 직전, 알테르는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에레즈는 고통 어린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보다 귀가 더 빨리 답을 찾았다. 홀 외곽을 둘러싼 모든 새장에서 일제히 철컥거리는 쇳소리가 난 것이다.
뜻밖에도, 알테르는 마물과 인간을 가둔 감옥의 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읏……. 커헉….”
에레즈가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알테르가 그의 목을 붙잡아 높이 들어 올린 탓이었다. 에레즈의 발이 허공에 떴다.
“멈춰라.”
알테르가 명했다. 그러자 본능에 미쳐 교미에 빠져 있던 알파들이 움직임을 일시에 멈췄다. 우악스러운 손길에서 사내들이 차례로 풀려났다.
“자, 누구라도 좋다. 너희들을 구하러 온 왕을 도와라.”
알테르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명령했다.
“으, 으윽….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만, 둬…!”
에레즈는 숨을 쉬는 것이 고작이면서도 힘겹게 외쳤다. 그러나 알테르는 동생을 철저히 무시했다.
“아니면 이대로 도망쳐도 좋다. 문은 이미 열려 있으니…. 맹세하건대 이 홀에 있는 알파들은 절대로 너희를 공격하지 않겠다.”
그리고 나 또한. 알테르가 선언했다. 홀 안에 침묵이 흘렀다.
“아, 아….”
자유와 복종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 풀려난 사내들은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것은 또 어떤 시험일는지? 다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평소였다면 참지 못하고 사내를 범했을 마물들은 여전히 길든 가축처럼 얌전히 서 있기만 했다.
정말로 우리를 풀어 주는 것일까? 알파들의 태도는 사내들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전과는 달라진 분위기에 사내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 우우우…. 아, 우우…….”
사내 중 몇 명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그들을 도망치는 대신 짐승처럼 우는 소리를 내며 자신을 범하던 알파에게 매달리는 쪽을 선택했다. 검붉은 성기를 내놓은 털북숭이 마물에게 팔을 감으며, 하던 짓을 계속하자는 듯 몸을 비벼 댔다.
반면, 용기 있는 몇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긴장감에 털이 곤두선 짐승처럼, 그들은 발끝을 세우며 감옥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감히 알테르를 바라보지는 못했다.
“으, 으……. 흐, 허억…….”
고작 몇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사내들의 몸은 새롭게 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맹수 사이를 거니는 초식 짐승의 심정이 이러할까? 혹여나 왕의 심기를 거스를까, 가시밭 위를 걷던 사내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로운 숨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알테르에게 붙잡힌 에레즈와 눈이 마주쳤다.
“허억!”
사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바닥에 묻었다. 에레즈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그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원망도, 애원도 하지 않는 그저 텅 빈 푸른 눈동자…. 도리어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에레즈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멀어져 갔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알파 밑에서 신음하다 배가 찢어져 죽고 말 거야. 사내들에게 있어 탄생은 곧 죽음이다. 그리고 그들을 살고 싶었다. 그 외에도 몇 명의 사내들이 탈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에레즈를 돕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크, 윽……. 하아……. 나가면, 안 돼….”
에레즈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번 각인된 알테르의 목소리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밖은 한창 전쟁 중이었다. 그런 허약한 상태로 도망친다면, 기껏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전쟁통에 휘말려 죽고 말 것이다.
에레즈의 얼굴은 피를 과도하게 쏟은 탓인지 창백했다. 온몸에 난 상처뿐만 아니라, 복부에 연이어 입은 깊은 자상에서 흐른 피가 바지를 적시다 못해, 발아래에 작은 웅덩이를 이룰 정도였다.
뚝, 뚝, 에레즈의 발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는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알려 줬다. 도망치지 않은 사내는 마물과 다시 관계를 이어 나갔고, 홀 안에는 신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열린 문을 통해 도망친 나머지는….
“히, 히익?! 부, 분명 죽이지 않겠다고……. 흐, 시, 싫어! 으아아아악!”
현실은 에레즈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잔인했다. 도망친 사내들은 홀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 포진해 있던 마물에게 급습을 당했다. 문밖으로 사내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보았나, 에레즈?”
“윽—! 약속, 을 지켜……. 저들을… 놔줘, 알테르!”
에레즈는 처참한 비명을 외면하지 못하고, 알테르를 향해 외쳤다. 에레즈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알테르의 팔을 왼팔로 붙잡았다. 에레즈의 목은 그 짧은 사이에 푸르게 변해 있었다. 금사에 묶인 오른팔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이 바로 인간의 저열하고 나약한 본성이다. 그들이 목놓아 외치던 신념이란 그저 생존을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지. 기사도와 정의, 선…. 그딴 감언이설에 속은 자들을 희생양 삼고는 정작 자신들은 도망치는 것이다. 바로 저렇게…. 그리하여 인간은 짐승과 달리 가장 비겁한 자들만이 살아남고 번성하게 된 거다.”
“으, 큭…!”
마물 혼혈이라 생명력이 질기다는 점이, 오히려 고통을 오래 버티게 한다는 데에서는 저주였다.
“일찍이 인간들은 신께서 자연을 부릴 권리를 자신들에게 부여했다 주장했지. 하지만 인간은 너무 오래 군림했다. 저것들은 벌레나 다름없다. 아니, 벌레는 다른 짐승들의 먹이라도 되지. 인간이란 세상을 더럽히는 독밖에 되지 않아.”
목숨을 부지한 인간들은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안도하며 감옥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에도 마물과의 관계를 이어 갔다.
“아, 아아, 거기, 더…! 흐읏…!”
“히익, 으, 으으…. 살려 줘!”
피로 젖은 비명과 정액에 물든 신음. 귀에 끈적한 액체를 퍼부은 것처럼 절로 질퍽질퍽했다.
“이런 결과에도 너는 다른 이들을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구나. 마치 저들이 이럴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알테르는 주변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에레즈를 노려볼 뿐이었다.
“…하긴, 인간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이번만이 아니겠지. 익숙해진 건가?”
마치 칭찬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는 어디 한번 반박해 보라는 듯, 에레즈의 숨구멍을 조금 트여 주었다.
“큭, 허억….”
에레즈는 푸른 눈으로 알테르를 똑바로 노려볼 뿐이었다.
“아니면 아직 인간에게 덜 실망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랬다. 에레즈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인간의 몸으로 알테르에게 덤벼 봤자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비록 자신들을 구하러 온 자가 죽어 갈지라도.
“하, 하아….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비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것으로 본성을 판단하는 건….”
에레즈가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함께 흘러나왔다.
“그것은 자기변명인가?”
알테르의 대답에 에레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째서 너만이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인간들에게 노예처럼 비굴하게 봉사하는 것일까 싶었더니…. 그렇군, 그래서 인간의 왕인 것이군.”
“크윽, 닥쳐…!”
에레즈는 붙잡은 알테르의 팔을 부러뜨리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의 손등 위로, 핏줄이 피부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꿈틀거렸다. 비록 순간이었지만, 알테르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보아라, 에레즈.”
“큭!”
알테르는 에레즈의 목을 쥔 채로 방향을 틀었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푸른 눈동자에 알파와 인간이 교미하는 장면이 가득 들어찼다. 에레즈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자 똑똑히 보라는 듯 알테르가 목을 옥죄었다.
“둘 중 누가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지?”
알테르가 물었다. 알파가 인간을 범하고 있다. 거대한 마물의 성기가 사내의 구멍에 쑤셔박혀 있었다. 울퉁불퉁한 가시가 돋은 성기는 쉬지 않고 아래위로 오가며 사내를 괴롭혔다. 살이 부딪칠 때마다 사내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이미 수 번이나 몸속에 사정을 마친 탓에, 성기로 배속을 휘저을 때마다 정액이 밀려 나와 거품이 일었다.
“마물은 죄 그 자체를 모르지.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면서도 선을 저버리고 죄를 짓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죄라는 걸 알기에 더욱 추구하기도 하지.”
알테르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에레즈는 출혈로 인해 앞이 가물거리는 눈으로 마물과 인간의 결합을 보고 또 보았다.
죄….
선과 악….
알테르의 말대로다. 마물은 모르고 인간은 안다. 그러므로 인간이 더 더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레즈에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 하하……. 당신처럼?”
왜냐면 선악은 마물 혼혈도 알고 있는 것이니까.
“내가 인간과 같다고?”
에레즈의 물음을 들은 순간, 알테르의 눈에 핏줄이 섰다.
“윽…?! 아, 아악!”
에레즈의 입에서 날 것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툭, 바닥에 에레즈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금사에 감긴 그의 오른팔이 깨끗하게 잘려 나간 것이다. 알테르는 팔이 잘린 에레즈를 인형 버리듯 바닥에 내던졌다.
“아, 아, 아악! 으극, 으……. 으아, 큭, 흐……!”
에레즈는 엎드린 채로 괴로운 숨을 토해 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잘린 팔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에레즈의 온몸에 박혀 있던 금사는 칼의 형태에서 날카로운 실로 변해 너덜너덜해진 몸을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에레즈!”
“아…. 흐으, 크……아, 아…!”
에레즈는 잘려 나간 오른팔의 단면을 왼손으로 간신히 붙잡고는, 바닥을 기었다. 전쟁을 8년간 지속해 오며, 온갖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팔이 잘리는 고통은 익숙해질 수 없었다. 엄청난 고통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 또한 한때는 인간들의 거짓말에 속아 그들의 방패로 살았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으로 키워졌기에, 종이 되었다.”
“윽……. 큭….”
알테르의 목소리는, 그의 언어는, 고통에 빠진 에레즈에게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뒤늦게서야 깨달았지.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을…. 네가 아무리 그들의 편을 들어 봤자 이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알테르의 보석안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총기가 돌았다. 피투성이가 된 에레즈에 비하면 그는 순결한 선지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인간들이 마물에게 범해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실제로는 인간으로 인해 마물이 더럽혀지고 있지….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곧 죄악이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마물은 계속해서 그들을 범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우리와 같은 마물 혼혈 또한 늘어 가겠지.”
에레즈는 이마를 바닥에 묻었다. 바닥에는 이미 피가 흥건했고, 그의 이마와 짧은 머리카락을 적셨다. 이제 금사는 그의 벌어진 입과 눈마저 바느질하려 들었다. 이대로 당한다면, 온몸의 구멍이 전부 막히고 숨이 끊어져 죽겠지.
“…그전에 한시라도 바삐 인간과 마물을 분리해야 한다. 분리할 수 없다면, 어느 한쪽을 멸해서라도 순수성을 보존하는 수밖에 없지. 더 이상 마물은 인간에게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에레즈는 자꾸만 흐릿해지는 제 눈을 깜박였다. 이제는 알테르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만 같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세계와 자신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에레즈는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잘린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것.
제 형제들을 죽이며 나아갈수록, 에레즈는 마치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육체 일부를 잃어 갔다.
사실 알고 있다. 이 전쟁이, 이길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지난 네 명의 형제를 상대할 때도, 무언가를 잃어야지만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알테르는 그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자였다. 힘을 더 키울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젠은 몇 번이나 조언했었다. 그런데도 에레즈는 전쟁을 앞당겼다.
그 이유는….
그래, 그 이유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편에 들어선 마물 혼혈을 지키기 위해서도, 마물을 박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왕자님.>
이제는 모습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흐려지는 그 날의 미소.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기억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휘발되고 흐릿해진다. 감각은 둔해진다. 점점 현실에 안주하게 되어, 그 사람을 포기하라고 스스로에게 종용하게 된다. 힘든 길은 누구나 걷기 싫기 마련이니까.
그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그 사람을 완전히 잃기 전에, 잊기 전에 다시 붙잡고 싶어서 추하게 발버둥을 쳤다.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 그러면 저도 죽지 않겠습니다.>
설령 모습도, 목소리도, 체취도, 모든 것이 희미해질지라도…. 약속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마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한없이 불안정한 몸. 전략에도 검술에도 재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 지옥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죽는 것보다 끔찍했다. 하지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죽으면 그 사람도 더는 살지 못할 테니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약속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알테르와 붉은 오메가의 목을 베어 버리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다.
에레즈는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진창에서 허우적거렸다. 알테르의 금사는 에레즈의 전신, 팔과 다리의 각 부위를 잇는 관절 부분이 정확하게 꿰뚫었다. 알테르야말로 에레즈와 가장 비슷한 알파였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장 효율적인 공격을 한 것이다.
‘아직…. 아직이야.’
에레즈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자신의 형제를 붉어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오른팔 대신, 피로 물든 왼팔을 뻗었다. 고깃덩어리가 될 에레즈가 더는 적수로도 보이지 않는지, 알테르는 등을 돌린 채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분하고 치욕스러웠다.
‘제발….’
에레즈는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성검에게 애원했다.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임에도 이 손으로 돌아와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왕국의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을 살아온, 한결같이 성스럽기만 한 그 검은 에레즈의 애원을 무시하고 빗자루보다 쓸모없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네가 약한 것은 마물의 본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성스러움이 오히려 네 본성을 억누르고 널 더욱 나약하게 하는 거다.>
지난 전투를 겪으며, 알테르와 그의 형제들이 악마처럼 속삭이던 유혹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데, 성스러움은 한 번도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때로는 성스러움이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윽…. 우윽….”
목 끝까지 순식간에 차오르는 감정은 슬픔도, 고통도 아니었다. 끔찍한 자기혐오였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통이 눈앞에 흐리게 퍼졌다. 눈앞이 흐릿해진 가운데, 에레즈는 먼 과거에 자신과 똑같이 팔이 잘린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당시 그 사람의 모습과 지금 자신의 모습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달랐다. 그는, 그 사람은… 팔이 잘린 채로도 자신을 지키려 했다.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린애 하나를 위해….
그런데 지금, 자신은….
“아, 그러고 보니… 네게 미처 소개하지 못한 우리의 형제가 하나 더 있군.”
그때, 알테르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
에레즈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면서도 의문을 금치 못했다. 이런 순간에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네가 성에 늦게 도착한 탓에 미처 소개하지 못했구나. 나의 유일한 아들. 네게는 조카인 아이가 있지.”
어째서…?
에레즈는 모자란 숨을 헐떡이면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 자식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말은 번드레하게 하지만, 결국 본성에 휘둘려 인간을 배신한 마물 혼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레즈에게 알테르는 ‘본능’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저열한 욕망조차 얼어붙어 버린 듯 알테르 프리드웬은 언제나 차갑고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낳았을 것 같나?”
그 말을 들은 에레즈는 넋을 놓고 고개를 쳐들었다. 온몸을 바느질하는 고통조차 사라졌다.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설마.
설마…….
쿵, 에레즈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숨이 멎었다. 알테르는 얼음장처럼 싸늘한 미소를 띠고 계단 위에서 에레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에레즈에게는 더없이 비열한 웃음으로 보였다.
“하아, 하아, 하아……. 윽, 아윽…. 헉…!”
에레즈는 피를 토해 내듯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숨이 멎었던 짧은 순간 이후, 에레즈의 심장은 이전과 다른 박동으로 뛰었다.
잘린 팔의 단면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숨을 몰아쉬니 가뜩이나 버거운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어 댔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왼쪽 눈의 흉터 위로 핏줄이 솟아오르더니, 터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아…. 윽, 하아……. 으, 흐으, 으극, 으아아아아!”
목이 찢어지는 듯한 에레즈의 외침이 홀을 울렸다. 이건 저열한 도발이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이미 눈앞은 새까맣게 암전되어 버렸다.
눈가를 덮을 정도였던 에레즈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얼굴을 가릴 정도로 자라났다. 피에 젖은 금사는 가시넝쿨처럼 뻗어나더니, 성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흠.”
알테르는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에레즈의 금사가 퍼진 성벽에 금이 가더니, 무너져 내렸다. 부서진 성의 잔해 위로 새로운 금사가 늘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테르만큼이나 눈부신 금발이었으나, 살아 있는 뱀처럼 땅 위를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곧 무너진 홀의 파편이 알테르를 향해 날아갔다. 알테르는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했다. 한없이 부드러울 것처럼 보이는 금사는 홀이 아닌 에레즈의 몸 위로도 퍼졌다. 에레즈의 금사는 살을 꿰매던 알테르의 금사를 산 채로 뜯어냈다. 뿐만 아니라 잘린 오른팔을 감싸고, 곳곳의 관절이 부러져 회복되지 않은 몸을 휘감아 지지대 역할을 했다.
“윽, 크윽, 으, 아…!”
그러나 금사가 고통까지 감싸지는 못했다. 에레즈는 눈이 뒤집힌 채로 부러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금빛 뱀에 온몸이 감긴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웠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을 잃은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에레즈의 변화를 지켜보던 알테르는 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 아악, 으…. 크으, 아아아악—!”
에레즈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마물의 비명을 지르며 알테르에게 달려갔다. 전과 달리 에레즈의 손에는 검 한 자루 없었다. 한쪽뿐인 눈동자는 뱀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채 금빛으로 번뜩였다.
챙!
알테르는 근처에 장식된 갑옷에서 검을 빼내더니, 에레즈의 공격을 막았다. 에레즈의 금사는 검에 닿자마자 금속을 씹어먹듯 집어삼켰다. 검은 단숨에 모래처럼 으스러뜨려 버렸다.
“후….”
알테르는 손잡이만 남은 칼을 바닥에 내던졌다. 에레즈에게 잘린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꿈틀거리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 괴물이고, 어느 쪽이 괴물을 무찌르러 온 왕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에레즈와 알테르는 형제였고,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사한 형태의 본성을 지녔다. 때문에 두 사람의 전투는 거울을 보고 싸우는 것처럼 유사했다.
에레즈는 이성을 잃은 채 끊임없이 공격을 가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공격에 부러진 기둥이 창살 위로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기둥에 깔린 마물과 인간의 피가 바닥에 튀었다.
알테르는 사체에서 피를 흡수하며 에레즈의 폭주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때문에 이번에도 전투는 다른 생명체의 힘을 빨아먹는 알테르가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레즈는 계단에 올라섰고, 알테르는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전세는 바뀌어 갔다.
쿵!
알테르의 공격에 떨어져 나간 에레즈가 무릎을 꿇고는 한쪽 팔로 바닥을 디뎠다. 숙인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
고개를 든 에레즈의 얼굴에는 전과 달리 슬픔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감정이 없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번뜩이는 에레즈의 시선 끝에는 알테르가 서 있었다. 금사에 심장을 꿰뚫린 알테르가.
“큭…!”
알테르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흘렀다. 곧, 그의 사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알테르의 몸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에레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알테르를 덮쳤다.
“흐읍, 흣, 후후……. 하아, 하하….”
알테르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피를 토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그는 헛웃음마저 터뜨렸다. 알테르의 사지는 순식간에 에레즈의 금사에 묶였다. 그가 에레즈에게 가했던 공격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이었다. 그리고 알테르의 몸 위로 무정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후후…. 이렇게 동족을 죽이며 헌신해 봤자, 인간들이 너에게 무엇을 해 줄 것 같나?”
알테르는 에레즈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네 정체를 알면… 그들은 손바닥 뒤집듯 널 버릴 거다.”
“…….”
“그리고… 네 진정한 목적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당연한 것을, 빼앗긴 것처럼 날뛰겠지.”
“…….”
“너를 칭송하던…… 그 손으로, 너를 찌를 것이다…. 윽, 커흑….”
인간은 모든 걸 더럽히는 존재니까. 알테르는 피를 머금은 입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
에레즈는 무표정으로 알테르를 내려다보았다.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그에게서는 해묵은 원한도, 솟구치는 분노도, 그리고 일말의 동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 후후…….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증오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약하고, 어리석고, 인간의 모든 부분을 빼닮은 너를.”
에레즈의 금사가 알테르의 온몸을 단단히 조였다.
“그날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사지를 조여 오는 압박감에 알테르는 자신의 죽음이 순순하지는 못하리라 직감했다. 그런 것을 바란 적도 없었지만.
“……에레즈.”
최후의 순간. 인간을 배신하고 마물의 편에 섰던 왕은 목숨을 구걸하지도, 빌지도 않았다. 다만 에레즈의 이름을 불렀을 뿐. 수많은 인간을 나락에 빠뜨린 악마라고는 믿기지 않는 투명하고 푸른 눈. 그 위로 에레즈의 모습이 비쳐 보일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오메가를 죽여라.”
괴물의 모습이….
“그렇지 않으면, 너도….”
알테르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목마저 금사에 묶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순간, 한쪽밖에 남지 않은 에레즈의 푸른 눈동자 위로는 알테르의 미소가 새겨졌다.
말해 봤자 들리지도 않겠군….
마지막 순간조차 에레즈의 우위에 선 푸른 눈은,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곧 알테르의 사지가 찢어졌다. 길고 탐스러운 금발이 피에 젖었다. 칼이 검집에 꽂히는 소리와는 다른, 좀 더 뭉툭한 소리가 났다. 알테르의 머리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더는 신음도, 비명도 들려오지 않는 영광의 홀. 부서진 벽의 틈새로 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 빛은 먼지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홀 안에서 뿌옇게 흩어졌다.
“—!”
자신 외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나서야, 에레즈는 이성을 되찾았다. 한쪽 눈의 안광도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레즈는 자신이 저지른 광경을 목도했다. 짐승에게 뜯어먹힌 것처럼 조각조각 난 알테르의 시신. 무너진 벽에 깔려 죽은 마물과 인간들….
“…으윽….”
이것은 구원도 아니고 정의의 구현도 아니었다. 그저 짐승이 본능대로 피를 보았을 뿐….
“하아…. 하아, 하아….”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은 사람처럼, 에레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욱, 우욱…!”
에레즈는 힘을 잃고는 알테르의 시신 곁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폐에 가득 찬 피를 쏟아 냈다. 괴물을 본 목격자는 전부 죽어 없다. 결과만이 있을 뿐. 드디어, 인류의 앞길을 막는 적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형제마저 제거한 것이다.
이제 알테르의 편을 들었던 마물 혼혈들의 기세도 한풀 꺾일 것이다. 그들이 마물의 편에 선 것은, 알테르가 붉은 오메가와 결탁하여 권력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연결 다리가 사라졌으니, 마물을 조종할 수 있는 권력도 불안정해지게 되었다.
인간이 이긴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는 어째서인지, 그에게 진 것만 같았다.
“…….”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사람들은 알테르의 죽음을 모른다. 에레즈는 성검을 찾아 쥐었다. 그러고는 길게 늘어진 자신의 금사를 잘라 냈다. 긴 머리카락으로는 이동이 거치적거릴 테니.
에레즈의 금사는 성검의 날에 닿자마자 잘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검게 타 버렸다. 에레즈의 머리는 전과 같이 비죽배죽해졌다.
“…….”
성검은 할 일을 마쳤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여전히 에레즈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심장이 있는, 왼편 가슴을.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어렵지 않게 제 심장을 꿰뚫고도 남을 것이다.
“…….”
자신의 손으로 한 행위였지만, 맹세컨대 그것은 에레즈의 의지가 아니었다. 성검의 의지였다. 성검을 버텨 내는 에레즈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레즈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왕자님.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 그러면 저도….>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되면, 가슴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칼….”
에레즈의 입술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힘없이 되뇌었다.
‘미안하지만 이 심장은 나의 것이 아니야. 그 사람의 것…,’
그러니 아직은, 죽을 수 없어. 에레즈는 성검을 간신히 떨쳐 냈다. 그는 다리를 다친 짐승이 절룩이듯 위태롭게 몸을 움직였다. 비틀거리는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으나 매번 바람에 흔들리는 나비처럼 일어섰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에레즈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은 나약한 자신을 비난하며.
알테르 말고도 최후의 적이 남아 있었다. 에레즈는 성검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성검은 그의 결의에 반응하듯, 에레즈의 손바닥을 태워 살을 들러붙게 하며, 연기를 피웠다.
단 한 번, ‘피의 날’에 보았던….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괴물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나의 증오스런 신부.
붉은 오메가는 반드시 이 손으로 죽여야만 한다.
* * *
“알테르 프리드웬이 죽었다!”
성 꼭대기에 올라선 병사가 잘린 머리를 흔들며 외쳤다. 처음에 그의 목소리는 전투에 묻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듯싶었다. 그러나 피를 머금은 금발은 햇빛 아래에서 더욱 반짝였고, 점차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알테르의 머리를 알아본 사람들은 처음 들었던 외침을 반복했다. 적의 죽음은 빠르게 퍼졌다.
“제길…. 다 끝난 건가.”
고작 인간 따위에 지다니. 알테르의 편을 들었던 마물 혼혈들이 동요했다. 머리로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물의 피를 이어받은 그들은 가히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몇몇은 혼란을 틈타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편, 젠의 부대는 서문 잠입 작전에 투입되었던 성녀들을 회수 후 순조롭게 본대와 합세한 상태였다. 마물 군단을 이끌던 알테르 프리드웬이 죽자, 적의 기세가 확연히 약해졌다. 젠은 승패를 몸으로 느꼈다.
‘죽은 건 알테르인데 마물들의 상태가 영 이상해. …뭐지?’
전투 중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 용병으로 활동한 젠은 적군뿐만 아니라 마물의 움직임 또한 미묘하게 변했음을 감지했다.
물론, 여전히 마물은 아군의 가장 거대한 적이었다. 오메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마물들은 알테르의 부하들이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다소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마치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처럼….
“왕자는 어디 있지?”
젠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고 성벽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알테르의 머리를 흔드는 병사는 있었으나, 정작 머리를 벤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야, 이곳은 너희에게 맡긴다!”
젠의 부대가 상대하고 있는 적은 대부분이 마물 혼혈군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위계는 무너지고 있었으므로, 굳이 그녀까지 싸울 필요는 없었다.
“대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병사를 데리고 가십시오!”
아니, 사실은 변명이다. 대장이 빠지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젠은 부대장에게 전투 지휘를 일임했다.
‘나라고 혼자 들어가고 싶겠냐…. 죽고 싶어 환장한 것도 아니고!’
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용병이면서도 기사직을 겸한 그녀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하는 일에 비해서는 권력이 적었으나 대신 자유행동이 비교적 허용되는 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맡은 가장 오래되고 끝나지 않는 임무의 특성 탓이기도 했는데, 바로 ‘에레즈 프리드웬이 뒤지지 않도록 보필하기’였다. 왕의 목숨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된다. 때문에 그녀는 병사를 내팽개치고 홀로 성내로 진입했다.
“젠장, 망할 녀석! 설마 혼자 싸우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붉은 오메가는 혼자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개자식! 씹어 먹어도 모자랄 놈! 만나기만 해 봐라!”
젠은 모두가 존경하는 왕자를 신나게 욕하며 적진으로 들어섰다. 수백 년 동안 마물과 싸워 왔기에, 왕성은 자연히 거대한 성채 도시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마물의 공격을 받아도 성안에서 자급자족하며 버틸 수 있도록 말이다. 때문에 파성추로 성문을 부순 후에 바로 본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까지 향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생길이 남아 있었다.
성내는 인간과 마물 혼혈, 마물이 한데 엉켜 살아 있는 지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랫동안 버려졌던 건물들은 이제야 다시 주인을 만나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물에게 지배될 때보다 더욱 부서지고 피로 더럽혀질 따름이었다.
젠은 예전에는 시장이었던 대로에서 마물을 상대로 고군분투 중인 성녀 무리를 발견했다.
“성녀님, 어디로 가십니까?”
“본성입니다. 현재 본성으로 진입한 병사들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그분들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입니다.”
“도와드리죠! 동행인데 저도 좀 도와주십쇼!”
젠은 성녀들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그들의 이동을 도와주며 본성까지 나아갔다. 보통 전쟁에서는 깃발이나 갑옷을 통일하여 피아를 구분한다. 그러나 전투가 지속되며 온몸이 피로 뒤덮이고 나면 사실상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별이 되지 않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성녀복을 입은 여성 무리와 갑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사실상 유일한 여성 알파는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공격할 적이 나밖에 없냐?!”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강한 이유였다. 본성에 진입할 즈음, 젠은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그즈음에서 성녀 무리와는 길이 갈라졌다.
예전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인 성. 전투는 한차례 끝난 뒤인지 곳곳에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시체의 길은 에레즈가 움직인 방향이기도 했다. 젠은 압도적으로 인간으로만 채워진 시체의 길을 밟으며 나아갔다. 마치 시체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일반적으로 마물 혼혈 하나를 상대하려면 무기를 제대로 갖춘 열 명의 사내가 필요하다. 마물 하나를 상대하려면 다섯 명의 마물 혼혈이 필요하다. 그것은 8년 전부터 통용되던 상식. 그리고 사내의 수가 압도적으로 줄어든 지금은….
젠은 피의 복도에 이르렀다. 붉은 바닥은 전부 인간의 피였고 밟히는 것은 인간의 잔해였다. 이를 악물며 나아가던 젠은 간신히 목숨은 붙어 있는 아군을 발견했다. 젠은 생존자를 기둥 안쪽으로 옮겼다.
“너, 왕자님의 호위 부대 맞지?”
생존자의 투구를 벗기고 물었다. 앳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갓 성년이 지났을까.
“그, 그렇습니다…. 함께 진군하려 했으나, 적의 군대를 만나… 왕자님께서는… 홀로…….”
젠을 알아본 부대원이 최선을 다해 정보를 전했다. 더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비열한 알테르 놈은 에레즈만 안으로 들이라고 했을 테고, 남은 병사들은 여기서 서로 피 터지게 싸웠겠지.
“알겠다. 뒷일은 걱정하지 마. 알테르 프리드웬이 죽은 건 알고 있지? 다 너희들의 업적이다. 곧 성녀님들이 올 거니까 참아.”
“드, 드디어…! 욱…!”
고통을 간신히 참고 있던 병사의 얼굴에 순간 활기가 돌았다.
“진정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후속 부대가 올 때까지는 여기서 얌전히 있도록 해.”
젠은 상처 부위를 거세게 눌러 지혈했다. 병사는 이를 악물며 비명을 참았다. 응급 처치를 마친 젠은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망할 자식, 많이 컸네. 진짜로 날 떼어 놓고 혼자 가?”
젠은 이를 갈며 글로리아 홀로 향했다.
* * *
알테르의 피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권좌 너머로는 죽기 전 그가 말했던 대로, 작은 문이 나 있었다. 문을 열자, 끝없이 아래로만 내려가는 좁고 긴 계단이 있었다. 이곳을 지나면 성안의 숨겨진 장소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에레즈는 평생을 작고 높은 탑에 갇혀 지냈다. 그 탓에 왕성의 지리에 무지했다. 그리고 왕성의 구조를 잘 아는 자들은 지난 8년 동안 대부분 죽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지독한 악취가 나는 곳으로 향하기만 하면 될 테니.
에레즈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장 본능적이고 빠르게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지하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는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 평생을 마물에게 시달린 사람도 어지간해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푸른 눈은 이런 상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붉은 오메가를 좇으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는 다른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다. 그 둘은 동전의 앞 뒷면처럼 딱 달라붙어 있어, 에레즈에게 있어서는 둘 다 삶의 목적이자 전부였다.
지하의 최하층에 들어서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아래에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하 감옥은 종아리를 적실 정도로 물이 들어차 있었다. 지하 감옥은 설계부터가 지하 수로를 겸한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마물의 침입은 끝이 없었기에, 죄인과 마물을 감옥에 가둔 후 물을 채워 한 번에 처형시키곤 했다고 한다.
“큭…!”
지하에 고인 물에서는 엄청난 악취가 났다. 검붉은 물은 평생 그 자리에 고여 있었는지 끈끈하고 걸쭉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점과 뼛조각이 발을 스치고, 찐득해진 진흙이 붙잡았다. 삭은 물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런 더러운 곳에, 그 사람이….’
이제 막 발을 디딘 에레즈조차 벅찬 환경이었으니, 이곳에 갇힌 죄수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에레즈는 탁한 연기가 자욱하게 낀 어둠을 노려보았다. 슬슬 젠이 눈치챘을 것이다. 에레즈는 알테르 프리드웬과 붉은 오메가를 상대할 때는 그녀와 함께하거나, 적어도 군대와 함께하기로 약속했었다. …알테르와의 전투를 치르며 그 약속은 절반이나 깨져 버렸지만.
계획대로라면 에레즈는 젠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녀와 합류해 지하 감옥을 탐색하는 편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푸른 보석안 위로 불꽃이 튀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입에서 그 사람이 ‘이곳’에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안 이상 한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말을 믿을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계략에 놀아난 적이 한두 번이던가? 이미 그 사람은 이곳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해서 속을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단서라면.
헤어진 이후, 머리카락 한 올조차 되찾지 못했던 그 사람. 그의 흔적은 오직 적이 뿌리는 조롱과 도발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평생을 놀아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무력감과 자괴감조차 이제는 친구다.
에레즈는 그저 나아갈 뿐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힘의 원천이 붉은 오메가를 죽이겠다는 살의인지, 그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는 의지인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아, 하아…….”
적의 심장으로 깊숙이 들어설수록 숨이 부족해진다. 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독처럼 메케하고 오래 묵은 공기뿐이다. 에레즈는 뜨거운 독 연기를 삼키며 지하 수로를 걸었다. 길을 안내하는 횃불 하나 없이 온통 어두웠기에, 어느덧 시간 감각마저 둔해졌다. 끔찍한 악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돌고 또 돌다가, 에레즈는 여러 갈래로 나뉜 지하 수로의 중간 지점에 섰다. 벌써 두 번을 같은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 와중에 시체를 여럿 보았지만, 다행히도 그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은 없었다.
‘이러다간 모든 수로를 한 번씩 다 돌게 생겼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에레즈는 안달이 났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러나 더 큰 두려움은 그것이 아니었다. 알테르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붉은 오메가가, 그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
“칼…….”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구하러 온 내가 원망스럽겠지만, 이곳에 있다면 날 한 번만 불러 줘. 내가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나약한 애원. 잘린 팔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뚝, 뚝, 썩은 물 위로 떨어졌다. 좀먹어 가는 것은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부상을 입은 몸도, 점차 안개에 스민 독에 중독되어 갔다.
‘제발….’
간절한 응답에 반응한 것일까? 매캐한 독 안개에 시력마저 흐릿해질 즈음, 어둠에 익숙해진 푸른 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
사람 형태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적인가? 에레즈는 왼팔에 든 성검을 바로 잡았다. 안개 너머의 상대는 끈적한 물길조차 버티기 힘든지, 몸을 조금씩 비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그 사람이?’
에레즈는 홀린 듯 안개 너머의 상대에게 걸어갔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첨벙, 물소리가 났다. 그림자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언어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가 벽을 부딪치며 뿌옇게 울려 퍼진다.
“……님….”
착각일까? 하지만 안개 너머의 상대는 마치 에레즈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왕자……님….”
처음에는 울음으로 들렸다. 그러나 에레즈의 귀에는 명백한 부름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환청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간절히 바란 나머지, 그렇게 들리고야 마는 뇌의 착각.
하지만….
“왕자님…….”
어쩌면, 붉은 오메가는 마계로 도망쳐 버렸고……. 감옥에서 풀려난 그 사람이 여기까지 힘겹게 도망쳐 나온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칼…리번?”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대답했다. 독에 중독되어 지친 탓인지, 아니면 헛된 기대 탓인지 에레즈의 검이 아래로 내려가 썩은 핏물에 닿았다.
에레즈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직 그 사람을 되찾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온몸에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을 뿐. 쉼 없이 혹사당하는 두 다리보다 상체가 더 앞으로 기울어져, 당장에라도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금빛 머리카락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진흙과 핏물에 젖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는 마치 괴물의 위장 속에서 천천히 녹아가는 음식 찌꺼기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내, 내가 왔어……. 당신을 구하러……!”
에레즈는 점점 묵직하게 차오르는 오물을 헤집으며 상대방에게 다가갔다. 지독한 안개와 어둠을 넘어, 마침내 그림자와 가까워졌다. 그리고….
“…왕……자님….”
인간과 비슷한 체격을 지녔으나 온몸이 검은 털에 뒤덮인 마물이 에레즈의 앞에 서 있었다. 낯익은 갑옷과 찢어진 옷…. 8년 전, 칼리번의 옷을 입힌 채였다. 일부러 마물 중 칼리번과 비슷한 가짜를 이곳에 세워 둔 것이다.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괴물에게 억지로 훈련을 시켜서.
“…….”
어린아이처럼 간절하던 에레즈의 얼굴이 핏물 속에 가라앉은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오랜 시간 동안 차갑게 담금질 당한 이성은 이것이 에어리얼의 농간이며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심장은 여전히 겁쟁이라, 매번 죽음을 맞이하고 싸늘하게 식는다.
에레즈는 자신이 칼리번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망설임 없이 그를 닮은 괴물을 베어 버렸다. 지난 8년을 그래 왔던 것처럼.
첨벙!
에레즈의 성검에 두 동강 난, 칼리번을 닮은 마물이 물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내지른 마물의 비명은 마치 칼리번의 것처럼 들렸다. 에레즈의 얼굴 위로 마물의 퍼뜨린 핏물이 끼얹어졌다.
“…….”
바닥에 가라앉은 마물의 머리를 짓밟으며 에레즈는 다시 나아갔다. 벼린 검처럼 싸늘해진 에레즈의 표정은 붉은 오메가의 계략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단호했다. 푸른 눈동자는 그 자체로 푸른 불꽃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속임수가 몇 차례 더 등장했다. 그 누구도 속지 않을, 어린애 장난보다도 못한 함정이었다. 그러나 속임수는 칼리번을 흉내 냈기에 에레즈에게는 더없이 치명적이었다. 자신이 베어 버린, 칼리번을 닮은 마물의 핏물을 짓밟으며 걷는다.
‘마치… 시간을 벌려고 일부러 붙잡고 있는 것만 같군.’
어쩌면 함정은 칼리번으로 분장한 마물이 아니라, 지하 수로 그 자체가 아닐까? 분노로 까맣게 타 버린 머리로 에레즈는 그런 추측을 했다.
또한… 붉은 오메가가 치명적인 마법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베어 버린 마물 중에 ‘진짜 칼리번’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자꾸만 들었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시체는 몇 개나 있을까?
성검을 쥔 에레즈의 손이 겁먹은 아이처럼 떨렸으나 필사적으로 감췄다. 지금은 나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다.
걸음 소리가 벽에 부딪히며, 끝없는 이명을 일으킨다. 물속에서 수많은 시체의 손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에 질식해 쓰러져, 이미 희생된 시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어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에레즈의 이름이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 불리고 있다지만, 한쪽 팔이 잘린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정말 그 단어가 어울렸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필사적인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성스러움도, 정의로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한 집착에 가까웠다. 오직 끝을 보겠다는 미련과 집착.
다섯 길의 지하 통로를 순회 후, 에레즈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곳은 하나. 에레즈는 벽에 마지막 낙인을 새겼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 통로. 수로의 양편에는 좁은 감옥들이 즐비해 있었다. 웬만한 경우는 횃불이 없으면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어둠 속에도 기이하게 번뜩이는 보석안은 칠흑 속에서도 내부를 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여섯 번째 수로는 다른 수로와 조금 구조가 달랐다. 감옥을 지나자 비교적 복도라고 불릴 법한 지하 통로로 이어진 것이다. 무릎까지 차오르던 수위도 낮아져, 더는 물을 밟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복도 드문드문 방이 있었고, 감옥과는 창살이 없는 문이 달려 있었다. 에레즈는 문을 일일이 열어 보거나, 부수며 내부를 확인했다.
그런데 저 멀리, 이상하게 에레즈의 시선을 사는 방이 하나 있었다. 마치 이리로 들어오라는 듯 문이 반쯤 열려 있던 것이다.
‘저기다.’
에레즈는 직감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문을 부숴 버릴 듯 밀어젖혔다. 문이 밀리는 탓에 발생한 바람을 타고, 새로운 종류의 피 냄새가 얼굴에 훅 끼얹어졌다. 문 너머로는 또 다른 길이 있었다.
에레즈가 그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쿵, 어디선가 커다란 소리가 났다. 에레즈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있다.
…이번에는 칼리번으로 분장한 가짜가 아니었다. 왜냐면 전과 달리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말라비틀어진 인영이 보였으니까.
그것은 네발로 기는 종류의 괴물인지, 몸을 일으키지를 못하고 웅크린 채였다. 그러나 가장 먼저 보이는 하얗고 가는 발은 분명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원래는 지느러미였다가 인간의 발로 바뀌어 서지 못하는, 저주받은 마물 같았다.
에레즈는 숨을 깊이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마물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연약한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잡혀 온 포로? 노예?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머리카락은 피에 물들어서가 아닌, 날 때부터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불렸다.
“붉은 오메가.”
에레즈는 그것의 정체를 밝혔다. 지난 8년간 누적되어 온 분노와 달리,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하고 차가웠다. 삶의 원동력 중 하나였던 증오심마저 억누를 정도로 그는 온 신경을 다해 그것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 손으로 죽일 것이다.
* * *
참으로 비겁하다. 대지를 피로 적시게 된 원흉,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악마는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형제들을 희생한 알테르 프리드웬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목숨을 걸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비열하고 추악했다.
에레즈는 이를 악물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벽을 뚫고 또 부숴, 마침내 여기까지 도달했다. 붉은 오메가를 처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놓칠 수는 없었다. 에레즈는 오메가로 추정되는 괴물에게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에레즈가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자, 오메가의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한순간, 푸른 눈동자와 붉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눈이 깜박일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건만, 숙적을 앞에 둔 에레즈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늘어졌다. 붉은 눈동자에 담긴 에레즈의 모습은 경멸과 증오를 가득 담고 있었다.
“……!”
붉은 오메가는 간발의 차로 에레즈의 공격을 피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윽…. 큭, 하아…!”
아니, 한쪽 팔이 잘린 것으로도 모자라 독에 중독된 에레즈가 한발 먼저 주저앉은 탓이었다.
“우, 윽…. 하아…. 제길.”
에레즈는 성검으로 땅을 짚었다. 숨을 내뱉는 에레즈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붉은 오메가는 이 모든 상황을 계산한 것일까? 정말이지 지독했다. 결국, 에레즈는 바닥에 검붉은 피를 토했다.
“하아, 하아…….”
에레즈는 피를 머금은 채 앞을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잃은 붉은 오메가도 마냥 여유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평소 구름떼처럼 몰고 다니던 제 수족들을 전쟁으로 잃었는지, 나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땅을 짚은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물이 없다면 오메가 자체는 어린애만큼이나 약하다. 지금만 해도,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네발로 기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약한 존재이면 가느다란 제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엉망으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은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었다. 그 틈으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한순간도 에레즈에게 떨어지지 않고 역겹게 번들거렸다.
에레즈는 자신의 몸을 갉아 먹는 성검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 이 정도 상대라면 성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붉은 오메가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
붉은 오메가는 돌처럼 굳어만 있다가, 덫에 걸린 쥐새끼처럼 뒤늦게 에레즈의 커다란 손안에서 버둥거렸다.
“붉은, 오메가…!”
아직 가시지 않은 고통을 토해 내며, 에레즈는 그를 불렀다. 이름이 있다면 형태도 남지 않을 정도로 짓씹었을 텐데! 그러나 진창에서 살아가는 악마에게 이름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귀 안쪽으로 혈관을 도는 피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인 에레즈의 손이 떨렸다. 그런 손에 붙잡힌 가느다란 목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다.
어쩌면 지하 수로에서 쓰러뜨린 괴물들처럼, 이 또한 붉은 오메가가 만든 또 다른 괴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큭, 하아…. 하아,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널 내 손으로 죽이는 날만을…!”
설령 당장 그가 칼리번의 모습으로 변한다고 할지라도, 에레즈는 망설임 없이 붉은 오메가를 죽일 것이다.
“난 더 이상… 그때의 어린애가 아니야.”
에레즈는 붉은 오메가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피로 물들었던, 그날의 결혼식에서.
붉은 오메가의 아름다움은 그것의 잔혹함만큼이나 선명하고 날이 서 있었다. 그래서 에레즈는 ‘피의 날’에 보았던 그 모습을 결코 잊지 못했다.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을 지하 수로에서 배회하던 칼리번의 망령처럼 엉성하게 꾸며 낼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속지 않는다.
“그날,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널 죽이러 여기까지 쫓아왔다. 어때,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울기만 하던 애새끼를 이런 식으로 다시 보는 기분이?”
붉은 오메가는 어떤 술수를 부리려는 속셈인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에레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때처럼 비웃을 건가? 아니면 화를 내고 싶나? 설마…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제 와 애원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러나 에레즈는 그것이 혀를 사용할 틈을 주지 않았다. 붉은 오메가는 에레즈에게 붙잡혀 숨을 꺽꺽거리기에 바빴다.
“하, 하아…. 편하게 죽지는 못할 거다. 네 목을 잘라 알테르의 곁에 꽂아 주지. 사지도, 온전하지는 못할 거다. 심장을 꺼내 짓밟고, 까마귀에게 두 눈이 파먹히고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는 모습을 종일 지켜보겠어….”
“으, 흐으…!”
“네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그것도 모자라겠지만!”
에레즈는 그것의 목을 쥔 채로 끌어당겼다. 붉은 오메가의 몸은 작고 말라서, 완연하게 성장한 에레즈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코앞까지 질질 끌려왔다. 에레즈는 그것을 한쪽 벽면에 처박았다.
“허억, 윽!”
벽에 등을 부딪친 붉은 오메가는 고통에 어깨를 움츠렸다. 수많은 사람을 비탄에 빠뜨렸으면서 본인은 작은 고통에 아파하다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에레즈는 붉은 오메가의 몸을 압박했다. 두 사람의 체격 차이는 압도적이었고 붉은 오메가는 질식보다도 압사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할 것처럼 보였다.
“…으…윽….”
마왕이라는 악명과 달리, 붉은 오메가의 반항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에 손톱을 세워 에레즈의 팔을 힘겹게 긁어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질식의 고통 탓인지,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가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숙원의 달성이 코앞에 있었다.
“너로 인해 난 전부를 잃어버렸어. 내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을…. 너는 그걸 이용할 뿐이었지.”
“…….”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해. 너만은 반드시… 이 손으로 죽여 주마.”
오른팔이 잘리지만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검을 들어 목을 조르는 동시에 심장을 꿰뚫었을 것이다. 에레즈는 붉은 오메가가 더는 고개를 젓지 못하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손안에서 그것의 맥박이 빠르게 뛴다.
지난 8년.
악연은 반복되고 반복되어, 에레즈는 전쟁터에서 붉은 오메가를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무수한 마물들에게 사랑받으며, 뒤덮일 정도로 겹겹이 보호를 받는 오메가에게는 결국 손끝도 댈 수 없었다. 에레즈는 지난 8년을 그를 감싸는 보호막을 없애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마침내 손에 넣게 된 붉은 오메가는 너무나 연약해서 도리어 비현실적이다.
아마 저 오메가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알테르와 마물, 모든 지지 기반을 잃은 붉은 오메가는 자신의 몰락이 믿기지 않는지 멍청하게도 에레즈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붉은 눈동자에는 살인을 단계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에레즈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8년간의 원한을 모르는 자가 본다면 가엾게 여겨질 정도로, 에레즈의 손에 잡힌 붉은 오메가는 나약해 보였다.
“…….”
조금이라도 숨을 쉬기 위해 에레즈의 팔을 붙잡고 있던, 붉은 오메가의 손이 허공 위를 허우적거렸다. 에레즈는 그가 자신의 남은 눈을 찔러, 이 위기를 모면하려 든다고 파악했다. 에레즈는 제 몸이 아깝지 않았다. 실명하게 된다고 한들, 손에 힘을 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에레즈의 예상과는 달랐다. 붉은 오메가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깃털처럼 가볍게 닿은 손길은 에레즈의 왼쪽 눈에 닿자마자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붉은 오메가는 아무래도 숨이 부족해 잘못한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쪽 눈은 이미 잃은 지 오래였다. 그것도 붉은 오메가의 명령으로 인해.
수라장을 거치며 온몸이 피에 젖은 에레즈였으나 오메가의 손길이 그보다 더욱더 더럽게 느껴졌다.
“쓸데없는 수작을…. 윽!”
더는 시간을 지체할 필요도 없었다. 에레즈가 끝을 내려던 차였다. 공고한 벽 한 편이 무너져 내리더니, 마물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마물은 에레즈의 팔을 공격했다.
“아직도 남아 있었나!”
에레즈는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무너진 벽을 타고 몰려온 마물은 붉은 오메가를 갑옷처럼 둘러쌌다. 에레즈는 성검을 움켜쥐었다. 하긴, 잔당이 남아 있지 않을 리가….
에레즈의 입가에 쓰라린 미소가 걸렸다. 상대는 붉은 오메가다. 이 구석에 숨어 있으면서 호위 하나 남겨 두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마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인의 위기를 직감했는지, 핏물 속에 잠겨 있던 마물들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에레즈가 등지고 있던 지하 수로로부터 새로운 마물들이 꿈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에레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살아 있으면 대답 좀 해 봐라, 왕자!”
그러나 지원군이 도착한 것은 붉은 오메가뿐만이 아니었다. 익숙한 외침이 지하 통로 안을 울려 퍼졌다. 어느새 젠이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다.
젠이 있다면 등 뒤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에레즈는 곧장 앞으로 달려들었다. 다시 성검을 쥐자 왼팔을 타고 익숙한 고통이 흐른다.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채였다. 하지만 인간과 마물 간의 전쟁에서 핵심은 오메가다. 붉은 오메가를 죽여야 마물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살려서 성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마물도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는지 무리가 반으로 나뉘었다. 반은 벽이 되어 에레즈를 막아섰으며, 나머지 반은 간신히 숨만 쉬는 붉은 오메가를 쥐고는 재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겁한 놈…. 거기서!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
에레즈는 당장이라도 붉은 오메가를 찢어발길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더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의 분노에 잘린 팔에서 피가 후드득 쏟아졌다.
지하에 남은 마물은 지상에서 상대했던 적들보다 훨씬 약했다. 그러나 그 수가 워낙 많아, 지하 수로의 좁은 공감을 꽉 채울 정도였다. 고기로 된 방패에 불과한 그것들을 하나둘씩 베어 쓰러뜨리는 사이 점점 붉은 오메가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붉은 오메가!”
에레즈는 마물을 베어 넘기며 그를 불렀다. 지하 감옥은 개미굴처럼 지하 수로가 수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죄수의 탈옥을 막고, 만약의 경우 비밀 탈출 통로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지난 8년 동안은 인간이 아닌 마물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우스운 것은, 그로 인해 왕족의 혈통인 에레즈보다 붉은 오메가와 마물들이 지하 수로에 대해 해박해졌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붉은 오메가는 에레즈를 농락하기라도 하듯,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에레즈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마물은 생존 본능조차 차단당한, 오직 붉은 오메가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 같았다. 그것들은 붉은 오메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온몸을 부숴 길을 만들고, 체액으로 철을 녹여 문을 열었다. 그들의 보호 안에서 붉은 오메가는 마치 꽃처럼 에레즈를 현혹하며 흔들렸다.
붉은 오메가의 뒤를 쫓다 보니 에레즈는 자연스럽게 지하 수로의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밖에서부터 습하고 더운 연기로 가득 차 있던 지하 통로 쪽으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이상할 정도로 상쾌한 공기.
불길한 징조였다.
“큭…!”
갑작스러운 돌풍은 어느 순간 빛을 동반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에레즈는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동공이 넓어진 눈동자 위로 빛이 쓰라리게 쏟아졌다.
“젠…장…! 거기 서!”
에레즈는 한 끗 차이로 닿지 않는 붉은 오메가를 향해 성검을 던졌다. 그 순간, 붉은 오메가를 호위하던 마물 중 한 마리가 제 몸을 에레즈에게 내던졌다. 그 몸체를 활짝 펼쳐, 성검을 몸으로 막았다. 성검이 닿은 살점이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으나, 그 어느 쪽으로도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저리 꺼져라, 거슬린다!”
에레즈는 마물의 몸에 박힌 성검을 단번에 뽑아내고는, 그것의 몸을 베었다. 마물의 체액이 에레즈의 온몸에 끼얹어졌다. 금빛 머리카락과 흰 피부가 산성으로 이루어진 체액으로 인해 붉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거리끼지 않고 마물을 반으로 벤 후, 빛이 가득한 출구를 향해 뛰어갔다.
빛, 그 너머로 이어지는 것은… 까마득한 절벽.
발아래로 거친 암벽과 숲이 깔려 있었다. 죽은 적군과 병사의 시체를 처리하고 물을 빼내는, 지하 수로의 배수구였던 것이다.
“설마…!”
에레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마물이라 해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살아남을 가능성은 작았다. 더구나 지하 수로를 탈출로로 사용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절벽 아래에는 솟대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에레즈는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물들이 기괴한 생김새로 한데 뭉쳐, 하늘을 날고 있었다. 붉은 오메가를 감싼 마물 중 비행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마물은 박쥐와도 같은 거대한 날개를 펼쳐, 바람을 타고 점점 성에서 멀어져 갔다.
“붉은 오메가!”
에레즈는 절벽 끝에 선 채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하늘로 사라진 마물이 다시 돌아올 리가 없었다.
“큭…. 젠장!”
에레즈는 성검을 마물의 시체로 더럽혀진 수로에 내던졌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연신 땅에 내리쳤다. 알테르를 죽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붉은 오메가만은 처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놓치고 말았다. 에레즈는 이가 부서질 것처럼 악물었다.
“이런 망할, 죽일 놈! 헉, 허억…….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냐!”
남은 마물을 처리하고 뒤따라온 젠의 외침이 등 뒤에서 울려 퍼질 뿐이었다.
“……스승님….”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녀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놓쳐 버렸다고…. 에레즈는 파괴된 수로의 잔해를 주먹으로 세게 쥐었다. 그 틈으로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에레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실을 말하려는 순간, 젠이 먼저 그의 호흡을 빼앗았다.
“찾았어, 찾았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레즈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레즈는 실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이었다. 젠은 에레즈만큼이나 온몸이 마물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망할 자식! 찾았어! 칼리번을 찾았다고!”
그 한마디가 복수에 눈이 멀었던 에레즈를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