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떤 기억
에레즈는 왕족이었지만 홀로 탑에서 지냈다. 형제들과 달리 그는 마물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한 번도 불만을 품어 본 적은 없었다.
프리드웬 가문의 왕자들은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을 토벌한다. 그런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만이 괴물이었다. 하지만 에레즈는 형제들을 질투하기보다는 자신을 죽이지 않아 준 형님의 관대한 처사에 감사해하며 지냈다.
탑 가장 위층에 자리 잡은 동그란 방은 춥고 건조했다. 딱딱한 침대와 털 이불이 전부였다. 에레즈는 하루에 한 번, 문 아래에 달린 작은 배식구를 통해 들어오는 식사를 받아먹으며 살아왔다.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는 바람이 오가는 창문이 있었다. 그곳에서 낮에는 햇빛이, 밤에는 달빛이 내려왔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장난감이었다.
어릴 때는 손끝도 닿지 못했지만, 그의 몸이 조금 자란 후에는 침대 위로 올라가 까치발을 들면 쇠창살에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쇠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매달려 몸을 위로 끌어 올리면, 탑 아래를 내려다볼 수도 있었다. 힘이 부족해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위로 풀썩 떨어지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성을 구경할 수 있어서 기뻤다.
형님이 수많은 병사를 이끌고 원정을 떠날 때는 좀 더 오래 탑 아래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많이 움직이는 일은 금방 허기가 지기 마련이었다. 종일 힘없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에레즈의 일상이었다.
그런 그도 종종 탑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있었다. 괴물인 자신을 성녀님들이 치료해 줄 때였다. 그것이 바로 에레즈가 평소에도 성녀복을 입는 이유이기도 했다. 성녀복을 입고 있으면 몸에 힘이 빠지고 어떨 때는 아프기도 했다. 부끄러운 탓이었다. 하지만 에레즈는 꾹 참았다. 언젠가 형님들처럼 멋진 예복을 선물 받으리라 믿으며….
감사하게도, 성녀님들은 에레즈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흉포한 괴물의 본성을 잠재우는 법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이 연구가 완성되면, 에레즈처럼 괴물이 몸 안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처럼 얌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약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험을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피를 내놓아야 했다. 에레즈는 성녀원에 내려갈 때마다 피를 뽑혔다. 고통스러웠지만, 대신 약이 완성되면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에레즈는 언젠가 완벽한 사람이 되어 형님들의 곁에 서 있는 날을 꿈꿨다. 그래서 아파도 꿋꿋이 참아 낼 수 있었다.
피를 뽑고 난 후에 성녀님은 약을 주었다. 에레즈는 약을 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걸 먹으면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감에 잠을 못 이루거나,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증상에 대해 말하면, 성녀님들은 참고하여 다음 약을 준비했다.
아픈 일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에레즈는 성녀원에 있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괴물인 자신이 유일하게 바깥세상에 나올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일이 끝나면 성녀님께서 아주 달콤한 음료를 주었다!
성녀님들이 관리하는 귀한 꽃의 열매로 만든 음료라고 했다. 에레즈는 그것을 아주 좋아했다. 탑에서는 음식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단 음식이었다.
성녀님들은 엄격했지만 공평했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주고,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준다. 그것은 괴물도 인간도 가리지 않았다. 에레즈는 그들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연구와 실험은 짧으면 하루였고, 길 때는 일주일이 지속될 때도 있었다. 성녀복을 입고 성녀들 사이에 섞인 에레즈는 마치 꼬마 성녀님 같았다. 머리카락을 가리는 두건은 에레즈의 화려한 금발을 가려주었고, 손등까지 가리는 소매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치마는 몸을 가려 주었다.
에레즈는 때로는 자신이 여자아이였다면 하고 상상해 보기도 했다. ‘예언의 여자아이’였다면 탑에 갇힐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물 토벌을 위해 깃발을 휘날리며 떠나는 형님들과 기사단을 볼 때면 기사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 에레즈는 자신이 아주 변덕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침묵이 미덕인 성녀원도 종종 부산스러워지곤 했는데, 왕국 각지에서 마물과 싸우고 온 용병들을 도울 때 특히 그랬다. 더구나 이번에는 용병들의 대거 임명이 있어 기사단과 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병들은 모두 마물 혼혈이라던데. 나 같은 괴물이랬어.’
에레즈는 탑을 지키는 경비병과 성녀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곤 했다.
‘마물과 싸울 때는 몸이 괴물로 변한다고….’
에레즈는 손을 휘휘 저으며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용병들은 분명 엄청 무섭게 생겼을 거야.’
용병들이 성녀원에 우르르 들렀다 떠난 후, 성녀님들이 질색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궁금해!’
하지만 에레즈는 그 용병이라는 자들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자신과 같은 마물 혼혈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너무나 궁금해, 성녀원을 나와 안뜰을 기웃거렸다.
‘저 너머로 소리가 들리는데….’
감히 용병과 접촉하고 대화를 나눌 엄두까지는 내지도 못했다. 너무 무서웠으니까. 다만, 눈이 두 개고, 입이 하나고, 팔다리가 두 개씩 달렸는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에레즈는 용감하게 나무 위에 올랐다. 저 멀리 우글거리는 무리가 보였다….
‘와아, 괴물이다.’
용병들은 덩치가 하나같이 컸고, 성녀님들은 고작해야 그들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커다란 체격만큼 목소리도 하나같이 커서, 멀리 떨어진 에레즈의 귀에도 그들의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어린 에레즈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험한 말도 종종 들려왔다.
하지만 멀리서 힐끗 보아도 그들은 몹시도 생명력이 넘쳤으며 또한 자유로워 보였다. 이목구비 외에는 엄격한 의복에 가려져, 개인이 구별이 되지 않는 성녀님들이나 딱딱한 기사들과는 달랐다.
커다란 나무줄기에 매달려 용병들을 훔쳐보다 보니 어느새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어떻게 내려가지?’
나무 위로 오르기는 했는데, 나무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 어쩌면 조… 좋아.’
에레즈는 덜컥 겁이 났다. 그의 몸이 가벼워 오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막상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무 높았다.
‘무서워….’
그때, 누군가 지나갔다. 에레즈는 온몸으로 나뭇가지를 안은 채로 뒤로 물러나 나뭇잎 속에 숨으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나무를 흔드는 결과만 나았다.
<흐아앗!>
결국, 에레즈는 흔들림을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땅과 쿵, 부딪치면 분명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아플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의 작은 몸이 땅과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일은 없었다. 대신 단단한 두 팔이, 에레즈의 몸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낮고 단단한 목소리. 처음 들어 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
에레즈는 누군지도 모르는, 생판 남의 품에 안겨 버리고 말았다.
‘내, 내 모습을 들키면 안 돼…!’
에레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보이지 않게 가리는 행동이었다.
<…….>
무서웠다. 만약 몰래 성녀원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형님이 크게 화를 낼 거다.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에레즈는 감히 성녀원 바깥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다.
<불편하신 것 같군요. 내려 드리겠습니다.>
에레즈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그 사람이 말했다. 듣던 중 다행이었다. 에레즈는 그가 자신을 놓아주면 재빨리 도망칠 생각이었다.
<이봐, 들었어? 기사단에 제1 왕자님이 방문했다는데!>
하필이면 그때,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면.
<히끅…!>
형님? 형님께서 이곳에 오시다니! 에레즈는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다리를 다치셨나요?>
<흐읍! 끅 ……히, 끅!>
에레즈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성녀복을 입고 있으나 사실 자신은 제6 왕자 에레즈 프리드웬이고, 몰래 성녀원을 빠져나왔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디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 사람은 왕성에 위치한 장소 몇 곳을 말했다. 하지만 에레즈는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에레즈가 대답을 못 하자, 그가 멋대로 기사단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 같았다. 에레즈는 당혹감에 그 사람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기고 말았다. 절대로 형님께서 있는 장소로 가서는 안 됐다!
에레즈는 그를 세게 움켜쥐고 꼼짝도 못 하게 하려 했다. 에레즈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그는 더 이상 무리하게 이동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사람은 기사와 용병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떨어진, 근처의 작은 정원으로 들어가 어슬렁거렸다.
<…히, 끅….>
에레즈는 그 사람의 가슴에 얼굴을 푹 묻었다.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해서, 그가 고개를 돌린 사이 몰래 훔쳐보았다. 그 사람의 피부가 짙은 갈색이고, 언뜻 보이는 머리카락이 검은색이고, 커다란 체격이라는 것밖에 못 봤지만.
<흡! 힉! 끅…….>
제대로 얼굴을 보고 싶은데 딸꾹질이 도무지 멎질 않는다. 천천히 주변을 걸어 다니던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에레즈의 등을 가볍게 도닥였다.
<힉!>
처음에는 자신을 때리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커다란 손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이상해….’
에레즈는 그 사람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오히려 반복되는 토닥임이 몹시나 기분이 좋았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잠이 들어 버릴 정도로.
‘자, 자면 안 되는데….’
에레즈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긴장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각오와는 다르게….
‘으응, 안 되는데….’
결국,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 * *
에레즈가 사라진 동안 성녀님들은 난리가 났다. 한 번도 그러한 탈출을 벌인 적이 없었기에, 논의 끝에 ‘없는 일’로 묻어 두기로 했다.
에레즈는 겁을 먹었다. 만약 그 사람이 형님의 기사여서, 모든 사실을 알렸다면 어떡하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형님은 아무런 체벌도 내리지 않았다. 잠도 못 이룰 정도로 와들와들 떨며 보냈던 날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열 손가락을 다 채우고 나서야 에레즈는 비로소 안도했다. 다시는 성녀원을 벗어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탑으로 돌아온 에레즈는 오래도록 그 사람의 온기를 잊지 못했다.
‘나를… 꼭 안아 줬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폭 안기고 말았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형님들도, 탑을 지키는 병사들도, 하물며 공평한 성녀님마저도 괴물에게 손을 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품은, 눈물이 날 정도로 편안하고 따스했다. 아예 온기를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한번 알게 되니, 혼자밖에 없는 탑 안은 더욱 춥고 삭막하게 느껴졌다. 에레즈는 털 이불을 둘둘 감아 보았지만, 그 순간의 감각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에레즈는 별빛과 달빛이 떨어지는 바닥 위에 오도카니 서서, 저 높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까?’
에레즈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애틋함을 느꼈다.
‘…고맙다고 말할걸.’
감히 입을 뗄 수 없었다. 괴물이라는 것을 들켜 버릴까 봐…. 하지만 왠지 그 사람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도 들었다. 왜냐면… 갑자기 뚝 떨어진 자신을 버리지 않고 계속 안아 주었으니까.
이 가슴 아래에 존재하는, 이름 모를 감정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속삭여 주고 있었다.
<하, 하지만….>
에레즈는 왠지 눈물이 났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도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뿐일 것이다. 그 누구도 달을 보며, 별을 보며… 자신을 떠올려 주지 않을 것이다.
* * *
그날의 짧은 만남은 에레즈의 가슴 속에 강렬한 흔적으로 남았다. 그의 세계는 작았고, 좁았고, 접촉하는 사람 또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 사람’은 형님들은 모르는, 오직 에레즈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에레즈는 앞으로도 자신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탑이 무섭고 추워서, 피를 뽑는 일이 아프고 괴로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애원하고 매달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경비병도, 성녀님도 에레즈를 구해 주지 않았다. 에레즈는 체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난 이후, 에레즈는 꿈을 꾸었다! 그 사람은 에레즈만이 알고 있는 존재였기에, 멋대로 배역을 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탑을 올라와 자신을 훌쩍 들고 갔다. 사실 그 사람은 문밖의 경비병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성녀원에 있을 때, 그 사람이 성녀복을 입고 성녀님으로 위장해서 와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헤헤….>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 따위 기억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뭐, 왕자님이라고 해도 가끔은 왕자님도 꿈은 꾸는 법이니까.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달콤한 꿈이지만….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고 나면 조금은 행복해졌다. 아픔도, 추위도, 굶주림도 상상 속의 친구와 함께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에레즈는 하루하루를 버텨 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성녀원에서 실험을 받던 에레즈는 우연히도 그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때 에레즈는, 피를 많이 흘려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지쳐 있었다. 성녀님은 그런 에레즈를 쉬게 하고, 그녀 또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 다른 성녀님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설마 제1 왕자님께서 벌써 찾아오신 건 아니겠지? 지금 왕자님께서는 지친 상태시니 데려가실 수는 없다고 전해 주렴.>
<아닙니다. 용병대가 치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이런, 하필이면…. 지원 인력이 부족할 때라니….>
두 성녀님은 에레즈를 두고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말소리에 에레즈는 잠이 깨고 말았다.
<내일 오라고는 부탁할 수 없을까?>
<그건 조금 어렵겠어요. 다들 피투성이에 엉망진창이더라고요. 뭐, 용병들이야 언제나 그렇지만요. 검은 용병이 대장으로 있는 ‘검은 어금니’예요. 아시죠? 그, 여자 용병이 있는 그곳 말이에요.>
<…여자 용병.>
에레즈를 잠든 척 성녀님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그 여자라면… 그냥 돌려보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구나. 하는 수 없지.>
<네…. 바쁘신 줄은 알지만 도움을 부탁드려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검은 어금니가 이번 계절에는 마지막으로 지원할 용병대인 것 같네요.>
<그래.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겠구나.>
그 후로도 두 성녀님은 에레즈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친 성녀님은 에레즈를 살폈다. 에레즈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꼼짝하지 않고 잠든 척을 했다.
에레즈의 위장은 성공적이었다! 두 성녀님은 에레즈를 두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걸음 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에레즈는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용병….’
두 성녀님은 여자 용병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지만, 에레즈는 검은 용병이라는 단어가 더욱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에레즈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주변에는 에레즈의 피를 담아 놓은 병들이 즐비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제대로 걷지 못할 양이었다. 실제로 어지러움에 주저앉기도 했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나약한 육체보다도 훨씬 강렬한 욕망이, 에레즈를 강제로 움직이게 했다. 평소였다면 에레즈는 복도를 빠져나오다가 다른 성녀님에게 들켰을 것이다. 그러나 두 성녀님이 나눈 대화처럼, 어쩐 일인지 대부분의 성녀님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에레즈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에레즈가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와 옷자락이 흔들리는 소리 외에는 조용한 성녀원이 드물게도 왁자지껄했기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에레즈는 수풀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과연, 용병들이 성녀님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몸이 아프다, 어서 성수를 뿌려 달라, 죽을 것 같다….
성녀님의 수는 적은데 서로 자기부터 고쳐 달라고 아우성을 쳐 대니, 당연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
그때, 에레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섭게 생긴 용병들 사이로 ‘그 사람’이 보였다.
‘저 사람이다!’
앉아 있거나 널브러진 용병들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사람. 물론 피부가 까무잡잡한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었다. 머리가 검은 사람도 그렇다. 그러나 에레즈는 바로 알아보았다.
처음 만난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으…. 사, 사람이, 너, 너무 마, 많아….>
에레즈는 건물 뒤에 숨은 채로 발을 동동 굴리기만 했다.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나선다면 치료 중인 성녀님들께 들킬 것이 분명했다.
<대장은 눈치가 없어도 더럽게 없어. 우리는 우리끼리 쉬게 해 주시지. 높은 사람 있으면 쉬기도 여간 힘들다고?>
<그런가? 그렇다면… 알겠다.>
그때였다. 마치 하늘이 에레즈를 돕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용병 무리에서 혼자서 떨어져나온 것이다.
‘기회다!’
에레즈는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가려다,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다시 복도로 들어가 성녀님들이 용병들의 상처를 닦아 줄 때 사용하는 성수와 은 대야를 날름 챙겼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치료를 받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돌아온 에레즈는 조금 헤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근처 나무 아래에 누워 있는 그를 발견했다.
‘…앗, 잠들었다.’
벌써 잠들다니, 굉장하다!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는 에레즈로서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에레즈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다가갔다. 피로 더러워진 갑옷을 닦아 주고, 그의 얼굴도 자세히 보고 싶어서였다. 에레즈는 모든 일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냐!>
잠든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칠 줄은 미처 몰랐다.
<흐아앗!>
예상치 못한 습격에 에레즈는 깜짝 놀라 우당탕 자빠지고 말았다. 두 손으로 조심조심 옮기던 은 대야가 허공 위로 날더니, 에레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온몸에 차가운 물이 끼얹어졌다. 에레즈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녀님?>
그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화, 화를 낼 거야….’
에레즈는 덜컥 겁부터 들었다. 멋대로 다가간 자신의 잘못이었다. 역시나, 그 사람이 다가온다. 화를 내기 위해서겠지. 형님들은 늘 그랬으니까…. 에레즈는 머리에 쓴 은 대야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괜찮으신가요?>
‘……!’
잔뜩 움츠려 있던 에레즈는 너무 놀란 나머지 딱딱하게 굳었다.
<무례를 보여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일단… 곤란하신 것 같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매일 꿈에서 떠올리고 반복했던 그 목소리로.
에레즈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그 사람이 에레즈가 머리에 쓴 은 대야를 들어 올렸다.
‘내 모습을 들켜선 안 돼!’
에레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후, 등을 돌렸다.
<싫으십니까? 원래대로 돌려드릴까요?>
에레즈가 무서워하자 그 사람은 은 대야를 머리 위에 도로 올려 주었다.
‘으, 으…. 그게 아닌데….’
머리에 은 대야를 쓰는 취미는 없다. 에레즈는 자신이 그런 별난 사람이 아님을 알려 주고 싶었지만, 마음을 전할 수단이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몸을 붕붕 저을 수밖에….
<…더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마음이 조금은 통한 걸까? 그 사람은 에레즈의 머리에 올라간 은 대야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나무로 돌아가 몸을 기대고 드러누워 버렸다.
그 사람이 떠나는 발소리와 털썩 누워 버리는 소리를 들은 에레즈는 손가락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커다란 눈으로 그를 염탐했다.
‘다시… 잠들었어?’
에레즈는 경계하며 은 대야를 간신히 주웠다. 그리고 물을 다시 담아 왔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몸을 닦아 주고, 저번의 일에 감사를 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에레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갑옷이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끄응…!>
에레즈는 그 사람의 발을 감싼 부츠를 끌어안고는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겼다. 한참 후에야 부츠가 벗겨졌다. 에레즈는 롱부츠를 끌어안은 채로 땅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후, 후아……!>
에레즈는 힘겨움에 숨을 몰아쉬었다. 작고 연약한 그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더구나 부츠에서 냄새도 났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어?’
에레즈가 전의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스스로 남은 부츠를 벗는 것이었다!
‘앗, 나 때문에 또 깬 건가?!’
에레즈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눈가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아, 잠버릇이구나!’
에레즈는 덕분에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두 눈을 가린 채로 몸에 걸친 갑옷을 더듬더듬 벗어 냈다. 철컥, 철컹, 쇳덩어리들이 땅 위로 떨어졌다. 그는 투박하게 움직이고는, 다시 벌러덩 누워 버렸다.
<…….>
에레즈는 살금살금 그에게 무릎으로 기어갔다. 그 사람이 얼굴을 가린 수건은 에레즈가 은대야와 함께 가져온 것이었다.
‘저걸 다시 가져가면, 눈을 뜨려나?’
에레즈는 잠시 고민했지만, 저걸 가져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레즈는 살짝 수건을 들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가릴 작정이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에레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에레즈는 성수를 적셔 그 사람의 얼굴과 몸을 닦아 주었다. 성수를 만지니 손이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하지만 꾹 참았다. 이런 노동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에레즈는 실험을 마친 자신의 몸을 닦아 주던 성녀님들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했다.
에레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에만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자 성수에 닿아 움찔거리던 그 사람의 몸이 조금씩 이완되고, 주름이 잔뜩 잡혀 있던 미간이 풀어졌다. 은 대야에 담긴 물이 핏빛을 띠고 나서야, 에레즈는 그가 깊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아, 하아….>
임무를 마친 에레즈는 손등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부드러운 서풍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에레즈는 살며시 그 사람의 곁에 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그 사람의 얼굴 위에서 춤을 췄다.
<…….>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에레즈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에게로 향했다. 작은 손이 허공 위에서 나아가고, 멈추고,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간신히 도착한 지점은 까무잡잡한 손등 위였다.
<와, 와……. 어, 엄청, 크, 크다아…!>
에레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감탄하고 말았다. 자그마한 손을 그의 커다란 손에 대 보았다. 무모한 용기를 내어 조물조물 만져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쿨쿨 자기만 했다. 에레즈는 그가 자신의 서툰 말소리를 듣지 못해 기뻤다.
<이, 이거 내, 내가 좋아하는 과, 과실주인데….>
에레즈는 은 대야와 함께 챙겨왔던 물건을 슬쩍 꺼냈다. 과실주. 에레즈가 힘든 실험을 마치고 받은 것이다.
<…나, 나도… 이, 일 년에, 딱 하, 한 번만, 머, 먹을 수 있는 건데…! 어, 엄청… 귀, 귀한 건데….>
사실 1년에 두세 번 정도는 먹는다. 그러나 에레즈는 일부러 뻐겨 보았다. 에레즈는 작은 병에 담긴 음료를 그에게 먹이기 전, 잠시 고민했다. 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에레즈는 가진 것이 적어, 하나라도 잃으면 그 빈자리가 더없이 컸다. 분명 이걸 나눠 주면, 몇 달 동안이나 아쉬워하고 밤마다 먹고 싶어서 울지도 모른다….
<…….>
그래도 주고 싶었다. 에레즈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결심을 굳힌 에레즈는 그 사람의 입술을 손으로 눌렀다. 일자로 다문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에레즈는 마른 입술에 달콤한 음료를 적셔 주었다. 혹여나 목에 잘못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에레즈는 아주 천천히 그에게 과실주를 먹였다.
<흐, 흥…. 트, 특별히… 주, 준 건데…. 자, 자 버리다니…!>
그 사람에게 과실주를 전부 먹인 에레즈는 툴툴거렸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곁에 있으면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을 나눠 주는데, 전부 줘 버리는데… 기분이 좋다니.
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 줄 수 있었을 텐데…. 에레즈는 못내 아쉽기까지 했다.
‘왜일까?’
에레즈는 빈 병을 쥐고는 그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잘생겨서 그런가?’
커다란 체격과 낮은 목소리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어려 보이는 얼굴…. 우락부락하고 무섭다고만 생각했는데, 깊이 잠든 모습은 놀랍게도… 본 사람 중에서 손꼽히게 잘생겼다!
에레즈의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은 알테르 형님이었다. 오팔처럼 화려한 외모를 지닌 형제와 비교하자면 그 사람은 새까만 돌멩이 같았다.
‘진짜 돌멩이면, 탑에 몰래 가져갈 수 있을 텐데….’
곧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에레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다시 마, 만나면… 이, 있잖아….>
떠나기 전, 에레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나, 나를 보고….>
에레즈는 그 말을 꺼내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우, 웃어 주지 아, 않을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오늘처럼, 기적 같은 일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 몇 년, 아니, 몇십 년 후라도 좋다. 우연히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설령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에레즈는 그와 말 한마디 섞지 못할 것이다. 괴물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니까.
그러니까,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에 한 번, 단 한 번만 웃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에레즈는 그가 오늘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로 멋대로 믿을 참이다.
그것만으로도 에레즈는 남은 평생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었다.
* * *
에레즈는 서둘러 성녀원으로 돌아왔다. 성녀님들이 용병들의 치료를 마치기 전에 돌아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헉, 허억…!>
에레즈는 한시도 쉬지 않고 뛰었다. 어느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안간힘을 쓰며 뛰어 본 적이 없었다. 이래서야 잠든 척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간 에레즈가 본 것은….
<…….>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딛자, 철퍽, 물소리와 함께 에레즈의 발을 적셨다. 에레즈는 이상한 감촉에 고개를 숙였다.
…피.
피가….
자연히, 피가 흐르는 방향으로 시선이 갔다.
<…와, 왕자…님…….>
에레즈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에레즈를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성녀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에레즈가 밟은 것은 그녀의 피였다. 아직 용병들의 치료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성녀님들이 와 계신 거지?
답을 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에레즈가 잠에서 깼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잠시 들른 것이리라.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세상이 멈췄다. 에레즈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춥지도 않았는데 몸이 벌벌 떨렸다.
<아, 아아……. 혀, 형님….>
에레즈는 겁에 질려 중얼거렸다.
알테르 프리드웬.
왕궁에 있어야 할 첫째 왕자가 어째서인지 성녀원에, 그것도 에레즈가 누워 있던 침대 앞에 서 있었다.
<…….>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에레즈와 달리, 알테르는 오래전에 성년을 지났다. 그는 왕실의 의복을 갖춰 입고 있었고, 어깨 너머까지 자란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알테르는 쓰러진 성녀의 한 팔을 쥐고 끌어당겼다. 그래서 그녀는 쓰러졌으나 몸 일부는 허공에 뜬,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딜 멋대로 다녀온 거지.>
알테르는 나긋하게 물었다. 그러나 목소리와 달리 아름다운 얼굴은 조각상처럼 변화가 없었다.
<그, 그… 그, 그게…….>
겁을 잔뜩 먹은 에레즈는 제대로 된 말을 끝마치지조차 못했다. 알테르는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칼을 들고 있지도 않았고, 에레즈를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곳의 공기는 한겨울만큼이나 얼어붙어 있었다.
<옷이 더럽혀진 걸 보니, 잔뜩 놀고 온 모양이구나.>
에레즈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알테르가 대신 말했다. 에레즈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설마 내 동생에게 잡일이라도 시킨 건가?>
알테르의 눈동자가 아래로 굴렸다.
<아, 아…… 아, 아니, 아니에요…….>
에레즈는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어찌나 떠는지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무서웠으나,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잡혀 있는 성녀님이 죽을 것 같았다.
<흠, 그럼 무엇 때문일까….>
알테르는 눈을 반쯤 내리깐 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뱉은 말과 달리 그는 조금도 궁금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에레즈가 이 자리에 없었다는 것. 그에게는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흐, 으으….>
두려움에 에레즈의 심장이 급하게 뛰고 눈앞은 핑 돌았다.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왕자님. 이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에레즈의 구두가 붉게 젖어 갈 즈음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여러 발소리와 함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오는 건가? 성녀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경비가 느슨하군. 이래서야 왕국을 지키는 기둥이라 할 수 있겠나.>
에레즈는 빙글 몸을 돌렸다. 열 명이 넘는 성녀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중년 이상의 성녀들이었다. 사건이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뒤처리에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보다는, 우선 그 아이를 놓아주십시오.>
무리의 가운데에 선 성녀가 알테르에게 대답했다. 그녀는 유달리 작고 말랐으며 굽은 등을 지지하기 위해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성녀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원로 성녀였다.
<…이런. 잊고 있었군.>
알테르는 손에 쥔 것을 들어 올렸다. 늘어져 있던 성녀의 몸이 위로 끌려갔다. 원로 성녀의 뒤에 선 여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당장에라도 두 무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에레즈는 한가운데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밖에 나간 탓에… 형님이, 성녀님을….
<자…… 자, 잘못….>
에레즈가 나서서 잘못을 빌려는 순간이었다. 눈꺼풀조차 깜박이기 힘든 그때, 툭, 원로 성녀가 지팡이를 바닥에 던졌다.
<이 늙은이가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그 아이를 돌려주십시오. 치료가 시급합니다.>
원로 성녀는 그 자리에서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뒤에 선 성녀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몇몇은 세게 주먹을 쥐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들 원로 성녀의 행동을 따랐다.
<이래서야 내가 악인이 된 것 같군. 나는 왕국에 봉사하는 자네들에게 절이나 받으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테르는 그들의 복종을 오만하게 거두어들였다.
<저희의 관리 소홀로 인해 여섯째 왕자님의 행방을 잠시 잃어버린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에 합당한 벌은… 왕자님께 따로 보고드린 후 직접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친 성녀님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다른 성녀가 말했다.
<하하, 내가 금남의 구역에 너무 오래 머무른 모양이군. 그래. 그래야지….>
알테르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알테르는 안심하라는 듯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 앗…!>
에레즈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알테르가 에레즈의 앞에 성녀를 내던진 것이다. 마치 책이나 옷가지라도 되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으, 으으…….>
끔찍한 광경에 에레즈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에레즈는 쓰러진 성녀와 더욱 가까워졌다. 에레즈는 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두 눈 가득 담았다.
그 성녀는 지난 몇 년간, 실험을 마친 에레즈의 휴식과 건강을 관리해 주었다. 에레즈가 주기적으로 마주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녀는 딱히 에레즈를 예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끔찍한 결말을 맞아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우, 으……. 아, 아으….>
애초에 죽일 작정은 아니었는지, 쓰러진 성녀의 입가에는 아직 짧고 가느다란 숨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죽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으, 흐으…….>
에레즈는 피가 솟아오르는 성녀의 목을 손으로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애처로운 시선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에레즈의 몸이 점점 붉게 젖어 갔다.
<도, 도와, 도와 주세, 으, 으흐……. 읏….>
에레즈는 목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죽어 가는 성녀를 살리려 노력했다. 소년이 애를 쓰는데도 다들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죽어 가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할 줄 아는 게 없고, 괴물일 뿐인데? 어째서 형님은,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잘못한 자신을 때리고 죽이면 될 일이었다. 만일 이것이 벌이라면… 가혹하다. 너무나 가혹하다.
<…다들 뭣들 하고 있느냐! 죽기 전에 어서 데려가거라!>
결국, 보다 못한 성녀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멈추거라!>
원로 성녀가 앞으로 나선 성녀를 다그쳤다.
<하지만 이대로는 이유 없이 죽을 뿐입니다! 다른 곳도 아닌 성녀원 안에서 이런 의미 없는 죽음이 생기다니,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이송해라!>
봇물이 터지는 것처럼, 한번 선언한 이상 더는 무를 수 없었다. 다른 성녀들도 함께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수수 자리에서 일어나, 에레즈에게서 의미 없이 죽어 가는 성녀를 빼앗았다. 응급 처치를 하고, 옮기고, 자리를 떠나고…. 에레즈의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게 네 잘못이다, 에레즈.>
<우… 으….>
<네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발생한 거다.>
에레즈의 머리 위에서 느긋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내가 데려가겠다. 이런 상황으로는 너희들이 감당하지 못할 테니.>
<…아윽!>
그와 동시에, 에레즈의 머리카락이 세게 당겨졌다. 알테르가 한 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탓이었다. 에레즈는 강제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들리는 에레즈를 바라보며 알테르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제 동생을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왕자님. 이런 식으로 에레즈 프리드웬 님을 다뤄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래서야 무의미한 고통만 반복될 뿐…. 어찌하여… 저희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포기하려 하십니까? 이 늙은이는 도무지 왕자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홀로 남은 원로 성녀님은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아버님은 그 희망이라는 말을 믿고 너희에게 과도한 권력을 쥐여 주었다마는, 그래 봤자 너희는 계집이다. 조금 더 쓸모 있는 계집에 불과하지. 너희가 기도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
<…….>
<잠자코 지켜보기나 하거라.>
알테르는 자신보다 한참은 나이가 많은 원로 성녀를 어린아이 대하듯 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거라, 에레즈. 앞으로 외출은 없을 테니.>
에레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왕자님….>
주름이 깊게 자리 잡은 노인은 알테르를 올려다보았다. 제 동생의 머리를 쥐고 선 알테르의 모습은 마치 인간을 잡아먹기 직전의 마물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