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꿈 (4) (6/50)

| 목 차 |

5. 꿈 (4)

6. 어떤 기억

7. 꿈의 끝

에필로그. 벽에 매달린 사내

5. 꿈 (4)

저 멀리서 바람이 불어온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모르는 바람이….

<가지 마….>

차갑고 건조한 바람은 고향의 기억을 함께 실어 왔다.

<떠나지 마, 칼!>

그 바람은 칼리번의 뒤를 쫓다가, 기어이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던 칼리번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알리샤.>

쉬지 않고 칼리번을 부르며 달려오는 이는 누이이자 여동생이었다. 피는 통하지 않았지만, 칼리번은 그녀의 가족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칼리번 또한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자로 지내면서 은혜를 갚았다.

<칼…!>

마침내 칼리번의 앞에 당도한 알리샤는 숨을 헐떡였다. 혹여나 칼리번이 떠날까, 그의 옷깃을 한 손으로 꽉 붙잡은 채.

<…….>

칼리번은 그 정도 손길은 충분히 쳐 낼 수 있었지만, 묵묵히 기다렸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을 가다듬은 알리샤는 숙인 상체를 일으키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성장한 알리샤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재주를, 어머니에게는 외모를 물려받았다. 더는 칼리번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랐다.

<이 멍청아!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렸는데! 왜 누나 말을 안 듣는 거야!>

뜻밖에도 알리샤가 입을 열자마자 호통을 쳤다. 칼리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뭘 잘했다고 고개를 저어! 네가 돈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는 건 다 알고 있어. …그동안 우리가 배를 굶주린 일은 없었으니까.>

<…….>

<…설명해. 날 납득시키지 못하면 절대 보내 주지 않을 거야. 아니, 납득해도 안 보낼 거지만!>

<…….>

<왜 그래….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도망치려 하는 지옥을 왜 자진해서 뛰어드는 거야?>

알리샤는 한참이나 칼리번에게 화를 냈다. 알리샤가 어릴 적에는 칼리번에게 멍청이라든가, 바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저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며 의지하고 따랐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녀는 누이처럼 칼리번을 타박하곤 했다.

<으, 정말!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칼리번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화가 치미는지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내 입으로 이 말을 하게 하는구나?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칼리번, 너… 내가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떠나는 거잖아?>

<…알리샤.>

<그런 동정은 사양이야! 도대체 날 언제까지 어린애로 볼 셈이야?>

알리샤는 한 손을 들고는 칼리번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네 출신에 대해서는 그이에게도 다 설명해 뒀어. 그이는… 네가 마물 혼혈이라도 상관없다고, 가족으로 있어도 괜찮다고 했어. 그러니까….>

<…….>

<이제야 간신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칼리번의 옷깃을 붙잡은 알리샤의 손이 떨렸다.

<칼, 나는… 가족을 꾸릴 거야, 전처럼 행복한 가족을. 하지만 네가 없으면 전과 같지 않잖아.>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알리샤가 알고 있던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알리샤는 이제 나이를 먹었고, 예전처럼 ‘사랑받는 막내딸’이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청년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어….

그렇게 다시… 돌아가는 거다.

<이미 결정된 일이다.>

하지만 칼리번의 결심은 굳건했다.

<그딴 건 무르면 되지! 게다가 넌 다른 마물 혼혈과는 달라. 여태껏 한 번도 괴물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아버지의 착각일지도 몰라. 마물 혼혈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저 단순히 힘이 세고 덩치가 큰 것뿐일지도…. 실제로 마물과 싸우기에는 넌 약해 빠졌을지도 몰라! 그때 와서 도망치려고 해도 늦어, 늦는다고!>

알리샤는 칼리번의 옷깃을 자꾸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우겨서라도 칼리번을 막고 싶었다.

<나는 5살 때 이미 성인에 가까웠다. 돌아가신 양부모님의 푸줏간을 맡고, 수십 마리의 짐승을 혼자 도축할 수 있었지. 아무리 네가 그때 어렸다고 해도, 그 사실을 잊지는 않았을 거다.>

<…….>

<그런 괴물을 인간이라고 부르지는 않아, 알리샤.>

칼리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도, 괴로움도 없었다.

<…칼, 너는 네가 성장이 빠르고 강하다고 생각하지?>

오히려 알리샤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지만 넌 몸만 커다랄 뿐이야. 속은… 여전히 어린애 같다고.>

<날 그렇게 보는 건 너뿐일 거다.>

칼리번은 커다란 손으로 알리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알리샤가 고개를 저어 손길을 피했다. 더는 동생 취급 받을 나이가 아니었다.

<마물과 싸우는 일은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랬어. 마을 밖은 말이야, 성녀님들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이 망가지는 생지옥이랬어. 평생을 검을 잡아 온 기사님들도 미쳐 버리고 만다고….>

<…….>

<너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

<그러니 오히려 나 같은 마물 혼혈에게 더 잘 맞을 거다. 나는 양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다. …너와 달리.>

<이 바보야! 그래서 더 걱정되는 거라고!>

칼리번은 알리샤를 곱게 보내기 위해 강함을 피력했다. 알리샤는 칼리번의 단단한 가슴에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고통을 느끼면 도망치지만, 칼, 넌 그렇지 않잖아!>

<…….>

<너는 이런 감정을 몰라, 그래서 더 걱정돼! 그러다 결국 발을 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를까 봐!>

<…….>

<하지만 그때는, 그곳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도 없잖아!>

한 번, 두 번…. 알리샤의 주먹이 연신 내리쳤지만, 칼리번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얻어맞기만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 찬 응어리가 해소될 때까지.

마물 혼혈을 받아 주는 마을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마물의 침략을 겪고 나면, 마물 혼혈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알파를 산 채로 불태워 버린다거나, 잠든 사이에 목을 자른다거나….

이대로 모르는 척 계속 마을에 머문다면, 알리샤마저 위험할 수 있었다. 특히나 양부모가 죽은 이후, 딱히 다른 친척도 없었기에 그녀의 입지는 좁았다. 칼리번은 스스로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 짓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알리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더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매달림과 애원, 회유가 반복되었지만, 칼리번은 굳건했다. 마물 혼혈은 평범한 사람보다 월등히 체력이 좋았기에, 결국 지쳐 나가떨어진 것은 알리샤였다.

헤어짐의 시간은 결국 다가왔다.

<칼!>

마을을 다 떠날 즈음, 언덕 위에 선 알리샤가 멀리서 그를 불렀다. 칼리번은 뒤를 돌아보았다. 까마득히 멀어진 그녀는 손가락만 하게 보였다.

<내 말 잊지 마, 우리는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테니까!>

칼리번은 시력이 좋았지만, 언덕에 선 알리샤는 해를 등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해를 올려다보는 칼리번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더는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

북으로….

고향으로.

* * *

칼리번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눈가에 고여 있던 물이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것이 아니었다. 에레즈의 눈물이었다.

얼마나 잠든 것일까? 칼리번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이건.”

눈길이 닿는 곳에 익숙한 금사가 있다. 칼리번은 버릇처럼 금빛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칼리번의 몸을 덮듯이 감겨 있었다.

에레즈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밤사이 숲에는 희미한 안개가 깔렸다. 그 탓인지 동굴 안도 어렴풋했다.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이 살아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전설에서나 나온다는 요정이나 천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음….”

칼리번의 시선이 깨우기라도 했는지, 애초에 깊이 잠들어 있지 않은 것인지 에레즈는 조용히 눈을 떴다. 반쯤 감겨 있던 눈꺼풀이 깜박, 깜박 움직이다가 숨겨 두었던 푸른 보석을 드러냈다. 칼리번은 숨마저 죽이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에레즈는 침침한 두 눈을 손으로 부비적거리더니 한 박자 늦게 칼리번을 발견했다.

“다, 다행이다….”

멍했던 에레즈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칼리번은 그 미소가 어딘지 간지러워,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제가 혹시 며칠이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칼리번이 묻자 에레즈는 고작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미처 숨기지 못한 하품을 작게 했다. 칼리번의 검은 두 눈은 그 순간마저 놓치지 않았다. 자그마한 부리를 가진 새가 하품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피로했다고는 하나 이런 상황에서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이 잠들다니….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칼리번은 기시감을 느꼈다.

‘언제였지.’

처음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팔이 잘리고, 몸이 열병에 들끓었을 때였다. 그쯤에서 칼리번은 몸을 일으켰다. 에레즈가 만류했지만 어리고 약한 그의 무릎을 계속 빌릴 수는 없었다.

“오, 옮기지 못해서…. 아, 안쪽으로 가, 갔으면 해. 오, 오늘은, 아, 아무 새, 생각도 하, 하지 말고… 쉬, 쉬어.”

에레즈가 두 팔로 땅을 짚으며 제안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다리가 저린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그제야 에레즈가 그 자그맣고 마른 몸으로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밤새 막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안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도, 도와줄게…!”

“아닙니다. 스스로 할 수 있……. 큭.”

그러나 칼리번은 제 말을 지키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칼!”

에레즈가 재빨리 다가와 칼리번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는 낑낑대며 칼리번을 일으켰다. 아쉽게도 그는 아직 칼리번을 번쩍 안아 들거나 단숨에 업을 정도로 체격이 좋지는 않았다. 칼리번이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갔다는 편이 맞았다.

“피… 다, 닦아 내는 편이, 나, 낫지 않을까…?”

칼리번을 눕힌 후, 에레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굳이… 왕자님께서 손대지 않아도, 저는 마물 혼혈이라 금방 회복될 겁니다.”

칼리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밤새 숙면을 취한 탓에 상태가 호전되기는 했지만,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그치만……. 이, 이대로는….”

에레즈는 굴하지 않고 넝마가 된 천을 물로 적셨다.

“왕자님, 그만….”

에레즈가 성큼 다가오자, 칼리번은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상처를 드러내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약해서 또 울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흣.”

그러나 어째서인지, 막상 에레즈의 손길이 닿자 칼리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칼리번은 혹시 금사가 다시 자신을 옭아맨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그러나 에레즈의 긴 머리카락은 칼리번이 묶어준 대로 얌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저 칼리번이 움직이지 못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리번이 에레즈보다 힘이 더 세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에레즈는 아무 말 없이 칼리번의 몸에 묻은 마물의 피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주었다. 그의 손길은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만큼이나 더 없이 조심스러웠고 부드러웠다.

칼리번은 결국 옷을 벗은 채로 어느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나신에 수치를 느낄 상황도, 성격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자에게 시중을 받다니, 젠이 듣는다면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툭, 짙은 허벅지 위로 무언가 투명한 것이 떨어졌다.

“……?”

칼리번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아 냈다. 물방울이었다. 칼리번은 시선을 옮겨 그 물방울을 흘린 주인을 보았다.

‘결국, 또….’

울리고 말았다. 칼리번은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칼리번의 몸 곳곳을 닦아 주던 에레즈의 손길이 어느덧 다리 사이로 향했다. 찢어진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어 있었지만,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

에레즈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목 끝까지 차오른 감정을 삼키려 애를 썼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는 한쪽 팔로 칼리번을 허리를 감싸고는 그곳마저 닦아 주었다. 칼리번을 닦아 주는 젖은 천에는 물 말고도 에레즈의 눈물도 섞여 있었다.

“……탑에는 얼마나 오래 지내셨습니까?”

칼리번은 문득 입을 열었다.

“얼마나 오래….”

딱딱하게 굳어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던 에레즈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모, 모르겠어……. 그, 그냥, 기, 기억이, 이, 있을 때부터 계, 계속…. 거, 거기에, 있었, 어….”

에레즈는 칼리번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리번은 원 없이 불행한 왕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평생을 탑에 갇혀 지내다 단 세 번, 밖으로 끌려 나온 뒤 죽을 운명이었던 존재를. 어릴 적, 칼리번이 도살했던 가축과도 같았던 에레즈 프리드웬을.

고립되고 닫힌 공간. 훨씬 넓기는 했으나, 이 은신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에레즈가 갇혀 지냈던 탑과도 같았다. 더 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럼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티셨습니까.”

칼리번이 물었다.

“그, 그건……. 그, 그게…….”

칼리번의 몸을 닦아 주던 에레즈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애초에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

칼리번은 그런 에레즈를 보며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생각해 보면, 처음 칼리번은 에레즈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와 그의 황금 피만 보고 빠져들었다. 그 후, 에레즈가 무능력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줄곧 연약하고 나약하다고 여겨 왔다. 한 번도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하거나 스스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과거를 묻지 않고, 헤어질 때도 별말 하지 않는 것이 용병의 특성이라고는 하나 ‘한때나마’ 동경했던 상대에게는 지나치게 무감했다.

“꾸, 꿈을… 꿨어.”

한참 후에야 에레즈가 입을 열었다.

“꿈… 말입니까?”

칼리번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칼리번에게 꿈이란, 과거의 반복일 뿐이었다.

“꾸, 꿈은… 그, 누구한테도…… 바, 방해받거나, 빼, 빼앗기지 않으니까….”

에레즈는 대답하면서도 쑥스러운지 눈가가 붉어졌다.

“……다, 다시, 마, 만나고 싶은… 사, 사람이 있는데, 나, 나는… 마, 만날 수 없으니까…. 그, 그래서… 계, 계속, 생각하고, 떠, 떠올렸어. 그, 그 사람의 꾸, 꿈을… 꿨어.”

“…….”

“…그, 그러면, 꿈에서… 그, 그 사람을 다, 다시 만나는 거니까. 으음…. 무, 물론… 그, 그 사람은, 모, 모를 테지만….”

에레즈가 더듬더듬 말을 했다. 그의 뺨과 귓가가 붉어졌다.

“그렇군요….”

칼리번은 설마 에레즈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평범한 청년 같았다. 칼리번이 용병으로 떠나기 전, 마을에서 흔하게 보았던 그 나이 또래의 청년. 그 모습이 칼리번의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은 어둠을 잠시나마, 일부나마 덜어 주었다.

“으음…. 이, 이런 이, 이야기는 아, 아무에게도, 마, 말한 적 없는데….”

“…….”

“비, 비웃을 테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애 같은 이야기라며, 에레즈는 스스로를 타박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 세월을 오직 한 사람에 대한 갈망으로 버티다니, 분명 소중한 사람이겠지.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칼리번이었지만 이번만은 알 수 있었다.

꿈이란 바람이나 이상을 뜻하기도 하는구나. 평생 흙바닥만 내려다보며 살아왔던 칼리번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다. 작고 연약한 에레즈는 꿈마저도 칼리번과 다르게 아름답고 세밀했다.

“이 숲을 나가게 되면, 꿈속의 그분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칼리번마저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에레즈가 만나길 원하는 그 사람이 반드시 살아있기를.

“…….”

에레즈는 대답 대신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 이제 나한테는… 네, 네가, 나, 낫는 게 더… 중요해.”

* * *

눈을 감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를 꿈에서나마 만날 수 있기를.

눈을 떴을 때, 꿈에서 보아도 그리운 그 사람을 가장 먼저 볼 수 있기를.

그런 기적을 바랐다.

* * *

차갑던 밤공기에 어슴푸레한 새벽안개가 섞여 들었다. 칼리번은 아침이 머지않았음을 느끼고는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칼리번의 몸에는 금빛 머리카락이 아닌… 하얀 팔다리가 감겨 있었다.

“…….”

금사에 묶여 있을 때, 칼리번은 전신의 근육이 경련하고 쥐가 올 정도로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이 하얀 속박은 얼마나 허술하고 연약한가?

러트를 보낸 후로 몸을 맞대며 잠드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전에도 종종 몸 일부가 닿기는 했었다. 에레즈가 워낙 겁이 많아 칼리번에게 의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손발이 얽히면서까지 몸을 맞대지는 않았는데….

현재 칼리번은 나신이었다. 타인센과의 결투 이후 그는 회복에 집중하고 있었다. 에레즈는 벌거벗은 칼리번이 추울까 걱정이 들었는지,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넣고는 꼭 끌어안은 채였다. 그 자신이 옷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후우….”

칼리번은 새로 입게 된 옷이 어딘지 버거워서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코앞에 있는 에레즈에게서 풀냄새와 희미한 꽃향기가 났다. 벌써 수십 일을 어두침침한 동굴에서 지내고 있는데도, 그에게서는 항상 그런 청량한 향기가 났다.

그동안은 귀하게 자란 왕족이라 그런 것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알파의 향기라는 것을 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뀌지 않는, 체향인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소박하고 흔해 빠진 풀냄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확실히 코가 쑤실 정도로 화려한 향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을 피와 살, 내장에 뒤덮여 살아왔던 칼리번에게는 푸릇한 향기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칼리번의 몸에서도 그와 비슷한 향기가 났다. 이렇게 딱 붙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칼리번이 부상으로 기진맥진하는 동안 에레즈는 마치 수족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돌봤다.

에레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칼리번의 몸에 눌어붙은 마물의 점액과 소화액, 피와 진흙을 일일이 닦아 주었다. 식량 수급조차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급 물품이 없었기에, 에레즈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온전히 칼리번의 회복력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으응….”

에레즈는 잠투정을 부리며 동그란 이마를 칼리번의 가슴에 부빗거렸다.

“……!”

칼리번은 혹여나 그가 깰까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했다. 칼리번은 자신을 돌보고 지키느라 그가 편히 잠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숨을 편하게 쉬지 못하니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분의 꿈을 꾸는 걸까?’

잠든 에레즈를 바라보던 칼리번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다, 다시, 마, 만나고 싶은… 사, 사람이 있는데, 나, 나는… 마, 만날 수 없으니까…. 그, 그래서… 계, 계속, 생각하고, 떠, 떠올렸어. 그, 그 사람의 꾸, 꿈을… 꿨어.>

꿈속의 그분.

에레즈에게 마음 깊이 품은 상대가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왜냐면 그는 성년을 지났어도, 심지어 숲에서 한 번 더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어리고 연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뜨거운 사랑을 겪을 법한 사내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은 어린아이 같은데….

‘……이 감정은 무엇이지.’

칼리번은 가슴 한구석이 주먹질을 당한 듯 멍든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모르는 감정’이 칼리번을 지배했다. 에레즈에게 막연히 품었던 기대와 동경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를 짐처럼 여기고 불편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다른 사람을 열렬히,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화가 나는 것인가?’

에레즈에게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 주겠다는 칼리번의 맹세는 변하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더구나 그에게서 다른 방식으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마저 배웠다.

‘그런데 어째서….’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의 한마디에 따스하고 다정한 감정과 무겁고 질척이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간 칼리번의 삶은 단순했다. 싸우고, 살아남고, 또다시 전쟁터에 투입되고, 살아남고…. 간단하고 명료한 감정 체계는 칼리번을 기민하게 반응하게 했고, 생존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에레즈를 대할 때면 달랐다. 아니, 달라졌다.

“…흠.”

칼리번은 한숨을 내쉬고는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오른손으로 꽃을 든 채로 왼손으로 칼을 휘둘러야 하는 것처럼 헷갈리고 어려웠다. 특히나 칼리번은 머리가 나빠서 더는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읏?!”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어지러웠던 칼리번은 갑작스러운 자극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으음….”

눈앞에는 천사처럼 잠든 에레즈가 있다. 칼리번은 잠든 에레즈가 그 사람의 꿈을 꾸는지 의문을 품었었다. 뜻밖에도 그 답이 지금 나왔다.

절대 아닐 것이라고.

지금 그는 결코 꿈속에서 만난다는 그 사람을 만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와… 왕자님.”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고 말았다. 뒷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에레즈가 잠결에 칼리번의 가슴을 물기 시작한 것이다. 칼리번의 유두는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가슴에 이마를 비비던 에레즈의 콧대가 그 부위를 쿡, 쿡 문질렀다. 오뚝하게 솟은 코끝이 가로로 길게 접힌, 유두가 숨겨진 선에 파고들었다. 냄새를 맡으려는 것인지, 코끝으로 그곳을 깊숙이 쓰다듬었다.

“아……흣.”

칼리번은 벌린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혹시나 에레즈가 깨어났나 싶어 눈동자를 굴렸지만, 굳건히 닫혀 있었다.

“으응….”

에레즈는 배가 고픈 아이처럼 입을 우물거렸다. 칼리번의 가슴에 코를 묻고는 한참이나 젖 냄새를 맡던 그가 입을 벌렸다. 가지런한 이와 붉은 혀가 당연하게도 침으로 젖어 있었다.

“……!”

칼리번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망설이는 그에게 젖을 먹였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때 일이 에레즈의 무의식중에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오지 않을 텐데…….’

칼리번의 가슴에서 젖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러트가 끝난 후에는 말라붙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러트에 자신이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넘겼다. 생존이 더 우선인 상황이었다.

“흐읏…….”

칼리번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콧대로 지분거리던 에레즈가 결국 유륜에 입술을 댔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의 감촉에 칼리번은 잇새로 얕은 신음을 흘렸다.

“흡…. 으, 읏….”

뼈가 없는 뭉클한 혀가 오돌토돌한 유륜을 부드럽게 빨았다. 숨겨진 것이 나오기를 재촉하며 가슴을 적시는 감각에, 칼리번은 점점 입을 다물고 있기가 어려웠다.

오메가의 젖을 무는 건 알파의 본능이었다. 오메가에게 젖이 나오기 시작하면 알파들은 앞다퉈 오메가의 젖을 빨기 시작한다. 알파에게는 미약이자 마약과도 같았다. 그러나 오메가는 단 한 마리뿐이었고, 그 때문에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마물은 그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알파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칼리번은 아직 알지 못했다.

유두 대신 자리 잡은 가로로 긴 선을 혀가 몇 번이나 덧그리고 선 안으로 혀끝을 밀어 넣었다. 달콤한 설탕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이미 젖은 살을 몇 번이고 다시 핥아대는 통에 유륜의 살결이 축축해지고 물렁물렁해졌다. 그러자 안쪽에 숨겨져 있던 유두가 결국 볼록 솟아올랐다. 희롱당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하, 아…. 흐으….”

에레즈의 가지런한 앞니가 이제 막 솟아오른 유두를 살짝 깨물었다. 빼꼼 고개를 내민 유두가 억지로 당겨졌다. 앞니에 붙잡혀 팽팽해질 정도로 끝까지 당겨지자 저릿한 전기가 가슴을 타고 아랫배까지 흘렀다.

이번에는 금사가 칼리번을 속박한 상황이 아니었다. 칼리번은 언제고 에레즈를 밀어내거나 저 멀리 던져 버릴 수도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왕자님은 연약해서 죽을 것이다.’

칼리번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런 잘못된 인식이 박혀 있었다. 그것이 가슴을 얌전히 내주는 일을 정당화하지는 못할 텐데도, 그렇게 생각했다. 무감하고 머리가 나빠서 논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대로 몸을 움직이면 그가 깰 것 같았고, 모른 척 눈을 감고 다시 잠이 들자니 끊이지 않는 자극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온전한 정신으로 어린 사내가 제 가슴을 빠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유두를 빼서 입에 넣고 나니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을 한 움큼씩 입에 물며 빈 젖을 삼키기만 했다. 가는 목울대가 일렁일 때마다 칼리번의 가슴이 입 안으로 쭉 당겨졌다. 솟아오른 유두가 에레즈의 좁은 입천장이나 물컹한 볼 안쪽에 닿았다.

“흐, 읏…….”

칼리번은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가슴 일부를 빨리는 것뿐인데 온몸이 자극으로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흐릿해진 검은 눈 위로 희뿌연 한 공기 사이로 금발이 반짝거렸다. 금발이라고 해 봤자 그저 머리카락 색이 밝은 것뿐인데 이토록 빛을 내다니,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칼리번은 손끝으로 앞을 가린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가슴 주변에 자꾸만 스쳐 간지러웠다. 그러자 눈을 감고 얌전히 젖을 무는 에레즈의 얼굴이 더욱 잘 드러났다. 제 젖꼭지를 삼키고는 오물거리는 입매에 특히 시선이 갔다.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칼리번은 검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젖을 물리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긴장이 풀리고 몸은 힘을 잃고 늘어졌다.

“아…. 하아…. 으….”

한쪽만 계속해서 빨리니, 다른 쪽 가슴이 비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는, 제 손등에 감았다. 만져지지 않은, 그러나 자극만으로 조금씩 유두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다른 쪽 가슴이 간지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대로는 연약한 에레즈를 움켜쥐고, 부숴 버릴 것 같았다.

칼리번은 금사가 감긴 손을 다른 쪽 가슴에 대고는 스스로 문질렀다. 금사가 스치는 감각이 예민해진 몸을 자극했다. 손가락을 써서 금사를 숨겨진 유두 속으로 밀어 넣기까지 했다. 차라리 에레즈의 일부가, 더 강하게 자신을 옭아매 주길 바라면서….

“……허억!”

자신도 모르게 든 생각에 칼리번은 급히 숨을 삼켰다. 평소의 자신이 할 법한 생각이 아니었다.

‘이것도 오메가라서 그런 것인가?’

칼리번은 애먼 금사를 찢어 버릴 듯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고 보면….’

칼리번은 지난 전투를 떠올렸다.

<이봐, 칼레토. 너 설마….>

자신을 압박하던 타인센의 반응이 미묘했다.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듣기도 전에, 죽어 버렸지만….

타인센은 부하였던 마물에게 갑자기 머리를 뜯어먹혔다. 마물은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라 하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그 후 마물이 곧바로 자신을 강간했던 것이다.

필시 자신이 오메가인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그 마물은 제 본능대로 행동한 것이다. 알파는 오메가에게 발정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도, 알파에게 만져져서 흥분하는 것이다.

오메가이기 때문에….

‘아니, 왕자님은 마물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때, 칼리번은 그 알파를 받아들이길 원치 않았다. 알파를 원하는 것은 분명 오메가의 본능일 텐데도.

오메가는 마물과 관계를 맺어 또 다른 마물을 낳는 존재. 인간 사내와 마물이 결합하면 마물 혼혈이 태어나는 것과 달리, 오메가에게는 순수한 마물이 태어나게 된다. 수천, 수만 마리의 마물들에게 보호받으며 그것들의 새끼를 낳는 것이 오메가다. 그러므로 오메가는 알파라면 누구든 상관이 없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더 강한 알파를 원할 것이다.

“…….”

그러니 강한 알파가 아니라 에레즈에게 젖을 먹이길 원하는 마음은, 만져지길 바라는 감정은, 자신이 제대로 된 오메가가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저 이건…….

‘…더 이상 내게 이분 외에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는 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동료도, 가족도 행방을 모른다. 왕국 전체가 마물에게 침략을 당했고, 인간들은 잡혀가거나 죽었다고 들었다. 이 숲을 나가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곁에 남은 유일한 타인이었다. 제아무리 칼리번이라 할지라도, 인류의 멸망 앞에서 의연해지기는 어려웠다. 에레즈는 아직 바깥의 상황을 몰랐다. 지옥의 파편을 맛보고 온 것은 칼리번뿐이었다.

“…….”

빠르게 현실로 돌아온 칼리번은 에레즈의 긴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에레즈가 젖을 물어도 그저 나른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일전에 느꼈던 두려움과는 달랐다. 두 발이 돌에 묶인 채로 바다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절망과 좌절. 파멸 앞에 선 무력감이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포기하지 않고, 지키겠다 결심했기에 알게 된 또 다른 감정이었다.

* * *

칼리번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묶어 주거나 땋아 주면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냈다. 에레즈는 어미 새처럼 칼리번에게 동굴에 비축해 둔 식량과 식수를 부지런히 가져다주고 먹여 주었다.

드물게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어쩌면 폭풍 전야의 적막, 혹은 평화를 가장한 불안일지도 모르겠다.

에레즈는 제 나름대로 칼리번을 돌보려 했다. 지난번 전투에서 칼리번이 크게 다쳤을뿐더러 평소와 달리 약한 소리를 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랬다. 에레즈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다. 칼리번이 구해 온 음식을 알뜰살뜰하게도 정리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동굴 안에 산재한 돌멩이와 벌레 등을 모두 치워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언제, 어떻게 이런 힘든 일을 끝내신 겁니까…?”

칼리번은 놀라워했다. 에레즈는 왕족이었으며 너무나 연약하고 작아서 이런 사소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이렇게, 해, 했어….”

그러자 에레즈는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칼리번이 땋아 준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품에 안고는 빗자루처럼 바닥을 쓸어 댔다. 벽을 톡톡 건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한 벌레와 싸우고, 작은 돌을 한데 모아 동굴 밖으로 밀어낸 모양이었다. 말이야 쉽지, 벌레나 돌멩이가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이분은… 못 하는 것이 없구나.’

칼리번은 침착하게 감탄했다. 매번 느끼는 바지만 에레즈는 금사를 창의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동굴 안의 풍경은 에레즈는 칼리번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무료하고 외로웠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에레즈는 커다란 바위 뒤에 숨겨 놨던 돌무더기를 가져왔다. 독특한 모양의 돌은 버리지 않고 한구석에 모아 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이건… 벼, 별을 닮, 아서… 그리고 또, 이, 이거는….”

에레즈는 더듬거리면서도 돌멩이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손으로 항상 입을 가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변화였다.

“음, 으음…. 그, 그리고 말이야……. 이, 이건, 카리… 칼, 너, 널 닮은 것, 같아서….”

에레즈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칼리번에게 돌멩이 하나를 보여 주었다. 까무잡잡하고 동그란 돌멩이였다. 크기는 칼리번이 한 손에 쥐기에 딱 좋은 정도였다.

‘도대체 이게 어디가 닮았다는 거지?’

칼리번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가 굳이 손에 쥐여 줘서 만져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잘 모르겠다. 에레즈는 칼리번 돌멩이를 칼리번의 곁에 자랑스레 세워두고는 다른 돌멩이에 대해 마저 설명했다.

“…….”

가만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말하는 솜씨도 확실히 나아진 것 같았다. 예전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격하게 흥분한 때가 아니면 말이 느리고 간혹 더듬는 정도였던 것이다. 물론, 칼리번이 그의 말에 과도하게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익숙해진 탓도 있었다.

“바, 바보, 같지…?”

칼리번에 눈이 마주치자 에레즈는 쑥스러운지 생긋 웃었다.

“…….”

칼리번은 고개를 휘휘 젓기만 했다.

“흥…. 후후.”

에레즈는 비죽 입을 내밀다가, 돌연 표정을 바꾸어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잔망스럽게도 제가 모은 돌멩이를 칼리번에게 전부 안겨 주었다. 칼리번의 두 손이 묵직해졌다.

‘아…. 그래서 설명했던 건가?’

전부 자신에게 주려고…. 한발 늦은 깨달음이었다. 머리가 나빠서인지 늘 에레즈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에레즈는 칼리번에게서 칼리번 돌멩이만 챙겨 갔다.

“……윽….”

칼리번이 감사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배 속이 꽉 조이더니 내장이 들쑤시듯 고통스러웠다. 두 손에 담긴 돌멩이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카, 칼…? 또, 또… 아, 아픈 거야?”

에레즈가 다가와 칼리번의 배에 거리낌 없이 손을 댔다.

“아, 아닙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 와 숨기기에는 늦었다. 타인센과의 전투 이후, 칼리번의 외상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늘 그랬듯 놀라울 정도의 속도였다.

문제는 내장이었다. 칼리번이 동굴 안에서 쉬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종종 아랫배가 부글거리듯 고통스러웠다. 수시로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라서 칼리번 자신도 어디가, 얼마나 다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에레즈는 헌신적으로 칼리번을 돌봐주었으나, 몸속 깊은 곳에 입은 내상까지는 그의 손길이 닿을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 그래도….”

에레즈는 칼리번의 아랫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칼리번은 여전히 동굴 안에서 나신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맨살에 거리낌 없이 닿았다. 신기하게도, 내장이 피를 흘리는 것인데 에레즈의 손길이 닿으면 다소나마 고통이 완화되었다. 그 뒤로 에레즈는 수시로 칼리번의 배에 손을 댔다.

하지만 칼리번으로서는 곤혹스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러트를 겪을 때, 그의 성기를 품어 불룩 솟아올랐던 부분이기도 했다. 에레즈가 어루만져줄 때면 칼리번은 그때 일이 반복되듯 떠오르곤 했다.

“…아, 아무런 도, 도움이… 못 되어서, 미, 미안해….”

적막해진 동굴 안에 에레즈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나, 나만, 펴, 편하게 보내고…. 너, 너는, 하, 항상, 다, 다치고…….”

에레즈는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을 드러냈다. 그가 고개를 떨궜다. 칼리번이 늘 들어왔던 에레즈의 자책과 한탄이었다. 칼리번이 위로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은 그의 슬픈 천성이었다.

“나, 나는… 어, 어떻게 해야 네,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뜻밖의 말에 칼리번이 고개를 들었다.

“무, 무엇을 해, 해야…!”

이번에는 평소처럼 자책으로 끝나지 않았다.

“타, 탑에 있을 때, 는…… 나는 그냥, 이, 이렇게, 살 줄 아, 알았어…. 탑에서, 나, 나가지 못하고, 펴, 평생을….”

“…왕자님.”

“……무, 무언가, 해, 해 볼걸. 나, 나를, 시, 싫어하고, 미, 미워해도… 와, 왕족이니까, 다, 달라질 수도 이, 있었을 텐데……. 그, 그 탑이랑, 여, 여기랑… 또, 똑같은데……. 그, 그때 나는, 아, 아무것도, 아, 안 했었어….”

에레즈는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가, 갇혀 있었지만……. 너, 너처럼 피, 피를, 흐, 흘린 적은 거의, 없, 었어. 아, 아주, 어, 어릴 적에는, 타, 탑 아래에, 나갈 기회도, 간혹, 있었고. 나, 나를…… 하, 함부로, 대, 대하지는 못했던 거야. 그, 그때, 가, 강해졌더라면… 그, 그럼, 조, 조금이라도, 도, 도움이 돼, 되지 않았을까?”

“…….”

“조, 조금…. 아, 아니, 마, 많이…… 후, 후회돼.”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그것이 왕자님의 최선이었을 겁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또 모르는 일이다. 만약 에레즈가 탑에서 탈출하려 했다든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면… 알테르 프리드웬이 그대로 두지 않았을지도.

“그리고… 원래 혼자서는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 정말?”

“네.”

그러니 굳이 에레즈가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예를 들면, 칼리번은 인간 마을에 버려진 마물 혼혈이었다. 다행히도 좋은 양부모님을 만나 성년이 될 때까지 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칼리번이 성장이 월등히 빠르고 힘이 좋은 것 외에는 별다른 마물의 특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칼은 다른 마물 혼혈과는 달라! 여태껏 한 번도 괴물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아버지의 착각일지도 몰라. 마물 혼혈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저 단순히 힘이 세고 덩치가 큰 것뿐일지도…. 실제로 마물과 싸우면 넌 약해 빠졌을 거야!>

알리샤의 말이 옳았다. 칼리번은 용병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약한’ 마물 혼혈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마물 혼혈이면서 마물처럼 신체를 변형할 수 없다는 점은, 위기 시에 버틸 수단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칼리번의 강함은 마물의 피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훈련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치열할 수 있었던 것은 더 강한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더 많이 알게 되실 겁니다. …이 숲을 무사히 탈출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응.”

칼리번은 통증이 어느새 가라앉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에레즈의 손길을 받았다. 에레즈가 열심이었기에,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칼리번은 바닥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들을 한 손에 그러모았다. 돌멩이는 그가 다리 사이로 흘렸던 피와 정액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 * *

그동안의 기대와 희망은 수포가 되고, 남은 것은 천천히 굶어 죽거나 마물에게 발각당해 살해당하는 결말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다시 동굴 밖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인간이 패배하고 마물에게 점령당한 이상, 살길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수색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칼리번은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행할 뿐이었다.

지난 사흘간,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간호를 받으며 몸을 추슬렀다. 몸뿐만 아니라 어그러진 정신을 바로 잡기에도 안성맞춤인 시간이었다. 바깥의 진실을 알게 된 칼리번은 잠시 흔들렸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에레즈에게서 불안과 나약함까지 배울 필요는 없었다.

“몸도 회복했으니, 다시 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에레즈는 칼리번이 나가는 것을 말릴 것이라 예상했다.

“……응.”

하지만 에레즈는 쓸쓸한 표정으로 칼리번을 올려다보기만 할 뿐, 말리지 않았다. 아무리 에레즈가 동굴 안에만 있다고 해도, 간간이 절벽 너머를 바라보고는 했을 것이다. 검게 죽어 가는 숲의 변화를. 그리고 칼리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와서는,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모습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

어느새 에레즈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입을 열면, 애원도 눈물도 마구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칼리번은 매달리고 화를 내는 평소보다 그 모습이 더욱 불편해 오히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전에 갔던 호수에는, 흰 조약돌이 많았습니다.”

칼리번이 무거운 입을 뗐다.

“으, 응…?”

“그러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왕자님을 닮은 것도.”

“……!”

에레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칼리번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젠처럼 재치 있는 언행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후후.”

그러나 무뚝뚝한 칼리번의 말에도 에레즈는 웃어 주었다. 그는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그에게 슬픔이 거두어지고, 옅은 미소가 드리우자 칼리번은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내 걱정은, 하, 하지 않아도 돼.”

에레즈는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딱히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칼리번은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도… 돌아올 거라고, 미, 믿어. 이, 이제, 더, 더는… 의, 의심하지… 않아.”

“…….”

“그, 그저… 너, 넌… 하, 항상, 희, 희생하는데…. 나, 난… 내 생각, 만, 하, 하고… 시, 신경 쓰게, 마, 만든 것 같아서….”

그러더니 에레즈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얀 손이 가만있질 못하고 당장에라도 칼리번을 붙잡고 싶어 들썩거렸다.

“나, 난 괜찮아…. 그, 그리고, 네, 네가, 없는 동안, 여, 여기는… 내가, 지, 지킬 테니까!”

에레즈는 일부러 어깨를 활짝 펴고는 칼리번에게 웃어 보였다.

‘…괜찮을 리가.’

칼리번은 에레즈가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는 것을 안다. 평소에는 머리카락이 가려 줬지만, 식량 공급이 몸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해 그는 매일매일 말라 가는 중이었다.

“네, 이곳은 왕자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칼리번은 모른 척해 주었다. 에레즈가 자신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과 비교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의젓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칼리번 또한 이전의 그였다면 에레즈의 사소한 변화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변화라면 변화였다.

* * *

기묘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멸망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더는 갈 곳이 없음을 실감한다. 타인센과의 전투에서 유일한 무기였던 단검마저도 파손되어 버렸다. 그러나 칼리번과 에레즈의 관계는 날로 안정되어 갔다. 그 어떤 발버둥도 결과를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되니, 얻게 된 것은 평화였다.

칼리번은 용병으로 활동했을 적, 마물을 쫓다 늪에 빠진 적이 있었다. 늪은 한번 빠지면 홀로 빠져나오기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하다. 당시에는 젠과 동료의 도움으로 별 무리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칼리번은 뜻밖에 깨달음을 한 가지 얻었다.

늪은, 생각보다 따뜻했다는 것.

그때와 같이 천천히, 손 쓸 수 없이 가라앉아 가는 것일까?

‘북으로….’

칼리번은 최근 들어 자주 떠오르는 장소를 속으로 되뇌었다. 에레즈가 곁을 지켜 준 덕분인지 칼리번은 불과 피로 얼룩진 전장이 아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의 꿈을 꾸었다. 여동생의 꿈이었다. 남부는 이미 마물에게 점령당했다고 하니, 북부로 향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북부로 향하는 데에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일단, 북부는 황량한 땅이다. 땅의 면적은 넓었으나 사계절 대부분이 마른 겨울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환경과 날씨 탓에 왕국에서 인구가 적은 지역이었다.

거기다 약 20여 년 전—그러니까 칼리번이 태어났을 적, 북부는 마물의 대대적인 습격을 당했다. 그 피해는 여태껏 회복되지 못했고, 대부분은 남부나 동부로 이주했다. 남은 것은 어찌할 수 없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뿐….

<우리는 여기 남아 있을 테니까, 돌아와야 해!>

꿈속에서 들었던 여동생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것만 같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알리샤는 남아 있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용병으로 지내며 왕국을 속속들이 돌아다녔으나 다행히도 마물의 북부 침략 소식은 없었다. 그러나 북부는 나날이 황폐해져 갔으므로 그들 가족도 이미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숲을 벗어나려면 그곳밖에는 갈 데가 없다.’

마물조차 침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땅, 오래전에 쇠락한 쉘레그 영지와 맞닿은 림번밖에는 답이 없다. 다만, 북부로 가는 길은 말만큼 쉽지 않다. 북부로 가는 길에는 수도를 지나쳐야 하고, 그사이에는 황량한 겨울 사막도 지나야 한다. 길고 먼 순례길이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마물을 마주할 가능성도 컸다.

무기 하나 없는 칼리번이 과연 나약한 에레즈를 데리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림번에 도착한들, 이미 마을이 함락된 상태라면….

하지만 여기 계속 머문다면 절멸뿐이다. 어디든 상황은 나쁜 것은 매한가지였다. 쇠락해 가는 숲이었을뿐더러…. 이제는 마물이 저들끼리 잡아먹고 있었다.

칼리번은 썩어 가는 수풀에 숨어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인간과 짐승을 잡아먹던 마물들이 더는 먹을 것이 없으니, 저들끼리 살을 물어뜯는다. 오랜 세월 용병으로 지낸 칼리번에게조차 구역질이 나는 광경이었다.

“……우, 윽.”

칼리번은 배를 움켜쥐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칼리번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몸속에 남아 있는 위액을 토해 냈다.

“헉, 허억…….”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급격한 허기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칼리번은 쓰라릴 만큼 배가 고팠다. 칼리번과 같은 마물 혼혈은 일주일 가까이 먹지 않아도 버틸 수 있다. 튼튼하고 질긴 육체는 칼리번의 유일한 벌이 수단이었다. 평소였다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하는 수 없이 흙 아래 묻혀 있어 썩지 않은 나무뿌리나 두꺼운 껍질에 둘러싸인 벌레를 먹으려 했으나 입에 들어가질 않았다.

굶주린 위장과 거부하는 입.

감히 음식을 가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칼리번은 의아해하면서도 억지로 벌레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벌레는 딱딱한 껍질로 쌓여 있어 이로 일일이 끊어 내야 했다. 턱이 아릴 정도로 힘을 주자 으득으득 씹히며 벌레가 입 안에서 터졌다.

“욱…!”

간신히 벌레를 씹어 삼키자, 어째서인지 칼리번의 몸이 멋대로 구역질을 하려 들었다. 칼리번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타인센과 전투를 치르기 전, 딱 한 번 먹었던 열매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아직 배가 덜 고픈 모양이군.’

아무래도 아직 회복이 덜 된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시냇가로 갔다. 입 안에 물을 가득 넣고는 벌레의 잔해를 털어 냈다. 마침 시냇가의 주변에는 흰 자갈이 깔려 있었다. 숲은 나날이 탁해졌으나 자갈에는 검은 물이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

조금 전까지 역겨운 광경을 연속으로 목격했으나, 자잘한 돌멩이들을 보니 자연히 에레즈가 떠올랐다.

<이, 이건, 카, 칼, 너, 널 닮은 것, 같아서….>

자신을 닮은 돌이라니, 에레즈의 무수한 감정 중에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다. 그러나 칼리번은 약속한 대로, 많은 자갈 중에서 에레즈를 닮은 것을 찾으려 노력했다.

고작해야 돌이었다. 에레즈의 말을 듣기 전에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따라 유심히 관찰하다 보니… 나름 돌 분석에 진지해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집중을 하는 것은 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구역질을 잊기에도,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음….”

그러다 티가 묻지 않은, 하얀 자갈을 용케도 찾았다. 칼리번은 제 손보다 한참은 작은 조각을 심각한 표정으로 오래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동글동글한 감촉이 쥐기에 나쁘지 않았다. 칼리번은 선물을 받고 기뻐할 에레즈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잠들기 전, 칼리번은 자신을 닮았다고 하던 돌멩이를 머리카락 뭉치 안에 넣어 두는 에레즈를 우연히 보고 말았던 것이다. 일국의 왕자 신분이면서, 하찮은 돌을 그렇게나 아낄 줄은 미처 몰랐는데….

“…흐음.”

칼리번은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주먹 안에 든 조약돌을 으스러뜨릴 뻔했다. 아직 에레즈에게 보여 주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칼리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차였다.

“……!”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대지의 미세한 흔들림이 무릎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아직은 가까이에 있지 않지만, 거대한 마물이 곧 당도할 것이다.

칼리번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지금 그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거기다 타인센의 일도 있었다. 마물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떠나려는 칼리번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독기….

칼리번은 걸음을 멈추고, 수풀로 숨어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칼리번은 제 의심이 틀리기를 기원하며 부러진 나무 아래에 파인 구덩이에 몸을 밀어 넣었다. 흙이 묻은 나무뿌리가 그의 몸을 간지럽혔다. 칼리번의 예상대로 체격이 큰 마물인지 가까워질 때마다 땅이 점점 크게 울렸다. 주변 나무가 으스스, 가지를 흔들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 한 마리가 호숫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칼리번은 두 눈을 의심했다.

“젠……?”

시냇가에 도착한 마물은… 젠이었다. 그러나 젠은 칼리번이 알고 있던, 유쾌하고 능글맞은 여성 알파의 모습이 아니었다. 왕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마물의 형상이었다.

그날 이후로, 여전히 마물인 채로….

“젠……. 큭, 제길!”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달려가려던 칼리번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거대한 사자의 몸체. 얼굴은 사람이었지만, 평소 젠의 얼굴은 아니었다. 양편으로 찢어진 주둥이에는 세 겹에 다다르는 이빨이 날카롭게 솟아 있었고, 특히나 양 어금니는 턱 아래까지 자라났다. 분노한 얼굴 가죽은 불그스레했다. 그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는 이미 시들 대로 시든 식물들을 썩게 하고, 숲에 먼저 자리 잡은 마물조차 감히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뭇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사고도 남을 마물의 모습. 그러나 지금은 위세가 상당히 꺾인 채였다. 거대한 마물의 등 위에는 몇 마리의 마물이 마치 말을 타는 사람처럼 올라탄 상태였다.

‘아롭….’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젠의 몸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는 ‘아롭’이다. 마물에게 따로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롭은 칼리번도 용병 생활을 하며 자주 보아 왔다. 모기와 파리의 형태가 뒤섞인 흡혈 마물인데, 크기는 사내 팔뚝만 했다.

이 비행 마물은 하나의 알주머니에서 다섯에서 여덟 마리가 나온다. 개별로는 체격이 작고 힘이 약하기 때문에 함께 몰려다니며 다른 마물의 피를 빤다. 아니면 다른 강한 마물에게 기생해 그 마물이 잡아먹는 인간의 피를 얻어먹고는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젠과 공생 관계는 아닌 듯싶었다. 그녀의 네 다리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울릴 정도로 크게 쇳소리가 났다. 거기다 등에는 척추뼈를 따라 사내 팔뚝만 한 못이 여러 개가 박혀 있었다.

“젠….”

채찍처럼 휘두를 수 있는 전갈 독 꼬리는 잘렸고, 재생할 수 없도록 작은 고블린이 들러붙어 끊임없이 새로 올라오는 살을 뜯어 먹었다. 그리고 잘린 꼬리는… 그녀의 머리에 올라탄 붉은 마물의 손에 쥐어져, 일종의 두꺼운 지팡이 겸 무기가 되어 있었다.

붉은 거죽을 머리에 뒤집어쓴 마물은 잘린 꼬리를 휘두르며 아롭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롭들은, 젠의 몸에 들러붙어 이곳저곳의 피를 빨며 그녀의 걸음을 조절하거나 방향을 틀게 했다.

“끄으…. 크어어, 어, 어억…….”

젠은 목 안에서 끓는 듯한 울음을 연신 내뱉었다. 허리에 길게 난 상처는 전혀 회복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언제 내장이 흘러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물의 회복력을 막을 정도로 상처가 깊어지려면, 보통 저주로는 불가능한데도.

그러니까 이건… 끔찍할 정도로 정성을 쏟아부은 고문이다. 차라리 당장 목을 베어 죽여 버리는 것이 인도적일 정도로.

<국왕 전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마물의 본성을 모두 지닌 마물 혼혈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영토 정화 작업이 순조롭게 끝나면, 귀족들에게서 몰수한 영지를 우리 마물 혼혈에게 우선으로 배분할 예정이지.>

타인센이 칼리번을 영입하기 위해 떠벌리던 말이 떠올랐다. 젠 또한 마물 혼혈 출신용병 중에는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그런데도 이런 처참한 취급이라니….

‘…알테르 프리드웬을 공격한 보복?’

이성을 잃은 젠이 의도하고 알테르에게 덤벼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칼리번이 에레즈를 데리고 탈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마물이 따르지 않은 건… 다행인 건가.’

만약 주변에 마물이나 마물 혼혈이 더 있었다면 칼리번은 젠을 포기했을 것이다. 냉정히 판단했을 때, 승산이 없기 때문이었다.

“…탈취한다.”

칼리번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설령 자신의 손으로 젠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저런 처참한 몰골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형제이자 스승, 동료를 위해서라도.

칼리번은 손으로 땅을 훑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변변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주먹만 한 천 주머니뿐이었다. 그 안에는 에레즈가 떠나기 전 주었던 돌멩이 몇 개가 담겼다.

칼리번은 굳이 그것을 챙겨 왔다. 혹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날까, 걸을 때는 손에 쥐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왜 가지고 왔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지도.

‘죄송합니다, 왕자님.’

칼리번은 속으로 사죄한 후, 그중에서 가장 큼직한 것을 손에 쥐었다. 평소 칼리번의 전투 방식은, 대검으로 수많은 마물을 한 번에 쓸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숲에 떨어진 이후, 상황은 한 번도 그에게 유리한 적이 없었다.

‘과연…?’

돌팔매질이라. 썩 자신은 없었다. 활이나 투석기는 마물 혼혈보다 힘이 약한 인간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시력이나 근력은 인간보다 우월했으나, 과연 익숙지 않은 방식의 공격이 적중력이 높을지는… 의문이었다.

구덩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칼리번은 땅 위에 섰다. 일단,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나무 그늘 아래 숨었다.

“후우….”

칼리번은 근육을 풀기 위해 천천히, 돌을 쥔 팔을 돌렸다. 그저 서서 던지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칼리번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두 다리가 어깨보다 넓게 벌려 몸을 살짝 내려갔다.

힘이 들어가자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칼리번은 제 팔을 가속기 삼아 서너 바퀴 정도 돌린 후, 돌을 던졌다.

“하앗!”

파삭, 퍽! 던져진 돌멩이는 앞을 막는 가지를 부러뜨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갔다. 돌이 작았기에 범위는 줄었지만, 속도에는 힘이 실려 그 위력이 커졌다.

퍽! 돌멩이가 아롭 한 마리의 대가리를 뚫었다.

“끼, 끼익!”

아롭이 찍찍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젠의 몸에서 떨어졌다. 길고 두툼한, 장대 같은 주둥이가 몸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사체가 젠의 등에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끼긱, 끽!”

“끼이익!”

남은 아롭들이 저들끼리 소리를 내며 의견을 교환했다. 머리의 반을 차지하는 튀어나온 눈알이 앞, 뒤, 옆을 가릴 것 없이 굴렀다. 돌이 날아온 방향을 찾는 듯했다. 칼리번은 상체를 숙이고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남은 돌이 담긴 천 주머니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첫 시도는 운이 좋았다. 칼리번의 돌팔매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방심하고 있었고, 가장 눈에 띄는 녀석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도 지금과 같은 운이 따를 것인지….

칼리번이 달리자 바스락거리며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롭들은 얇고 투명한 날개를 위협적으로 윙윙거렸다. 인간이든, 마물이든 불쾌감이 가중되는 소리였다. 웅, 웅— 기분 나쁜 날갯짓 소리를 내며 그것들은 일제히 칼리번을 향해 달려들었다.

“큭!”

아롭 한 마리가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기에, 달리던 칼리번은 몸을 그대로 앞으로 굴렀다. 아롭이 근처 나무에 처박혔다. 칼리번은 멈추지 않았다.

날개가 달린 마물이니 방금과 같은 요행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아롭은 약하나 속도만은 발군이었다. 고문과 속박으로 움직임 둔해졌다고는 하지만, 젠이 고작 아롭 몇 마리에게 벗어나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칼리번은 달려드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도망쳤다. 그러자 아롭은 한 반향으로 몰려오지 않고 어느새 앞과 뒤, 양편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아롭이 가까이 올 때마다 돌이 담은 천 주머니를 휘둘렀다. 달리는 중이었기에 제대로 명중하기는 글렀고, 사실상 위협용이었다. 날쌘 아롭들은 돌 주머니를 요리조리 피하며 시시각각 칼리번의 피를 빨기 위해 달려들었다.

“허억, 헉…. 크읏…!”

아롭 한 마리가 칼리번의 팔뚝에 철썩 들러붙었다. 젠은 거대한 마물이 된 상태였기에 끊임없이 피를 빨려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칼리번과 같은 인간급 체격은 아롭 몇 마리가 붙으면 금세 전신의 피를 다 뽑히게 된다.

“제길!”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아롭이 들러붙은 제 어깨를 바닥에 처박았다. 아롭은 겉으로 보기에는 털이 뒤덮여 있어 부드러워 보이지만, 실제로 상당히 단단한 편이었다. 체중을 실어 빠르게 짓눌러야 간신히 터뜨릴 수 있었다.

“끼이이!”

여차하면 주먹으로 몸을 뚫어 버릴 작정이었으나, 위기를 직감한 아롭이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아롭에게 물린 한쪽 팔은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흘렀다. 칼리번은 땅 위에서 몸을 두세 바퀴 굴러 아롭의 공격을 피한 후, 다시 달렸다.

흡혈까지 감수한 칼리번의 목표는 바로 젠이었다. 칼리번은 족쇄가 채워진 젠의 허벅다리에 뛰어올라 등까지 훌쩍 올라갔다. 뒤따라온 아롭들이 무방비가 된 칼리번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크……흐윽!”

순식간에 칼리번의 등에 아롭 두 마리가 들러붙었다. 뾰족한 이빨이 단단한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몸에 상처를 낸 후, 머리 위의 말린 장대 같은 주둥이를 몸속에 꽂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젠의 털을 쥐어뜯으며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젠의 대가리까지 향하는 여정에서, 짤막해진 젠의 꼬리를 뜯어 먹는 고블린을 놓칠 수는 없었다. 탐욕스러운 마물은 칼리번이 다가왔음에도 재생되고 있는 꼬리를 게걸스레 뜯어 먹고 있었다.

“이 자식!”

“끄아악!”

칼리번은 한 손에 쥔 돌 주머니를 휘둘러 고블린의 대가리를 깼다. 휘청거리는 녀석의 대가리를 한 손에 움켜쥐고 터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아롭 한 마리가 더 칼리번의 뒷덜미에 들러붙었다.

칼리번은 피를 빨려 정신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에도 젠의 대가리에 올라탄 붉은 마물에게로 기어갔다. 고블린의 일종으로 보이는 붉은 마물은 곤봉 대신 독전갈의 꼬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칼리번을 발견한 붉은 마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꼬리를 휘둘렀다. 붉은 마물의 체격은 인간보다 작았지만, 순수한 마물인 탓에 힘은 훨씬 좋았다. 그러나 젠이 몸을 흔들자 순간 휘청였다.

“—!”

칼리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초록빛 피로 흠뻑 젖은 돌 주머니를 휘둘렀다. 마물의 대가리에 적중한 그 순간 천 주머니가 터졌다. 돌은 젠의 등 위로 흩뿌려졌다.

“아, 윽— 크으!”

그와 동시에 척추로 장대 같은 굵기의 바늘이 꽂히는 감각이 두 번 이어졌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 붉은 마물에게 맨주먹을 갈겼다. 그것은 젠의 굵은 꼬리를 끝내 두 팔로 품에 안고 있는데, 아롭들을 조종할 때는 편했으나 일대일 싸움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끄극, 끼엑!”

주먹을 몇 대 더 갈기자, 안 그래도 쭈글쭈글한 마물의 얼굴이 곤죽으로 변했다. 녀석은 별다른 반격도 하지 못하고 젠의 몸 위에서 떨어졌다. 칼리번은 함께 떨어지려는 꼬리를 한쪽 팔로 낚아챘다.

붉은 마물이 바닥에 떨어지자, 젠은 한 발을 들어 그대로 녀석을 짓밟았다. 제 몸 위에서 일어난 전투에 흥분했는지, 발길질이 수차례 이어졌다. 곧 붉은 마물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묵사발이 되었다. 칼리번도 땅에 떨어진다면,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흐으……. 하아, 하아….”

칼리번은 두 팔로 젠의 몸을 잡지 않아도 버틸 수 있도록 두꺼운 허벅지로 버티고 있었다.

“하아, 으윽….”

말을 타듯 젠의 등에 탄 상태에서, 허벅지를 밀어 올려 일어섰다. 몸이 위로 올라가자 허벅지가 아닌 정강이와 종아리로 버티는 격이었다. 다리 사이에 남은 공간이 생기자 칼리번은 젠의 꼬리를 사타구니 사이에 밀어 넣었다. 본의 아니게 세모 난 목마를 탄 듯한 불편한 자세가 되었다. 꼬리 끝 독침이 칼리번의 얼굴을 향했다.

“흐으, 으……!”

칼리번은 순간 휘청였다. 벌써 상당량의 피를 빨렸다. 눈앞이 핑 돌았다. 칼리번은 손을 등 뒤로 뻗어 아롭을 움켜쥐었다. 아롭을 당기자, 피부가 함께 뜯겼다. 끼긱거리며 버둥거리는 아롭을 칼리번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뜯어내 독침에 쑤셔 박았다.

“키이, 끼에에엑!”

아롭 세 마리를 독침 위에 겹치고 억지로 힘을 주자, 그것들의 몸체가 뚫려 꼬리에 꽂혔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무 장대에 고깃덩어리를 꿰어 꼬치를 만드는 것과도 비슷했다.

“윽…!”

아롭에게서 터져 나오는 짙은 초록빛의 점액이 칼리번의 얼굴에 마구잡이로 튀었다. 땅을 파서 꺼내 먹었던 벌레의 감촉이 입 안에서 다시 감도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젠의 등 위에는 칼리번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은 구토감과 멀미를 느끼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젠은 높이 솟아난 거목들과 어깨를 겨눌 만큼 컸다. 평소보다 고도가 높아지자 나무를 거치지 않은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어왔다. 차가운 공기에 등 전체가 쓰라렸다.

“하, 흐으……윽?!”

숨을 고르던 칼리번은 헛숨을 들이쉬었다. 갑작스레 칼리번의 몸이 흔들렸다. 칼리번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인지, 남은 아롭 한 마리가 젠의 다리에 들러붙어 피를 빨고 있었다. 젠이 고통에 반응하여 한쪽으로만 움직이자, 칼리번의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칼리번은 상체를 숙여 팔을 넓게 뻗었다. 젠의 꼬리를 끌어안고, 그 아래의 몸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독 전갈과 흡사하게 생긴 젠의 꼬리는 끝에는 독침이 붙어 있었고, 그 외의 부분은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인 채였다. 칼리번은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힘을 빠듯하게 주며 올라타 있었기에, 딱딱한 표면이 사타구니를 강하게 압박했다.

“으, 하아…. 큭…!”

에레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칼리번은 마물의 거대한 성기에 몇 번이나 강제로 쑤셔졌다. 그 영향인지 겉은 금방 회복했으나 내장은 계속 피를 흘렸다. 이번에도 그 때문일까? 이 정도의 압박감만으로도 사타구니와 아랫배가 아려 왔다.

칼리번은 다리 사이에서 젠의 꼬리를 빼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땅으로 던졌다. 훌륭한 무기이기는 했으나, 한 품에 안고 다리 아래까지 내려가기는 어려웠다.

두 팔이 자유로워진 칼리번은 젠의 털을 쥐고 차근차근 아래로 내려갔다. 칼리번이 다가오자 아롭은 날아갈 준비를 했다.

“어딜!”

칼리번은 손을 길게 뻗어 아롭을 덥석 쥐었다. 그다음은 쉬웠다. 팔에 힘을 주어 땅으로 던지고 나면, 어떻게 알았는지 젠이 발로 짓밟아 으깼다.

남은 아롭까지 모두 처리한 칼리번은 다시 등 위로 올라갔다. 그의 의도를 이해하기라도 했는지 젠의 걸음이 뚝 멈췄다. 칼리번은 젠의 등허리에 박힌 쇠심을 뽑아냈다.

철컹, 철컹—

땅 위로 무거운 쇠심이 처박히거나 떨어졌다.

“후우…….하압!”

칼리번은 목뼈에 박힌 마지막 쇠심을 혼신의 힘으로 뽑아냈다.

“크, 크아아아악—!”

쇠못과 마물이 모두 사라지자 거대한 마물이 크게 울부짖었다.

“큭…! 정신 차려라, 젠!”

젠이 몸부림을 친 탓에 칼리번은 땅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비틀거리며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젠!”

칼리번은 큰 소리로 젠을 불렀다.

“크으—! 크어어어!”

그러나 젠은 도와준 은혜도 모른 채 씩씩거리며 앞발로 땅을 팠다. 적에게 달려들기 전에 하는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아롭들을 상대하며 잠시 협동을 했지만, 그것은 본능에 따른 행동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후, 역시. 그렇단 말이군.”

칼리번은 사실 마물이 된 젠이 자신을 알아보리라는 기대조차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족쇄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번에 걷어차거나 단번에 짓밟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칼리번은 바닥에 떨어뜨린 쇠심을 노려보았다. 크기만 크지, 그 모양은 쇠못이나 다름이 없어서 칼로 쓰기에는 부적절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감지덕지했다.

칼리번은 발밑에 떨어진 쇠못을 다시 그녀의 몸에 꽂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좋아.”

칼리번은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쇠심을 발로 걷어찼다. 퉁, 굴러가다 돌에 부딪힌 쇠심의 쇳소리가 마치 항복하는 병사의 칼처럼 덧없었다.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는 짓을 했지만, 칼리번은 항복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젠에게 찢겨 죽을 생각도 없다.

“하아….”

칼리번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와라, 젠.”

그리고는 두 다리를 벌려 땅을 단단히 디뎠다.

“내가 누군지 알아볼 때까지 상대해 주마.”

동료가 탈주하거나, 러트에 오거나, 인간을 공격하거나… 혹은 지금처럼 이성을 잃었을 때 책임을 지는 것은 용병 대장인 칼리번의 몫이었다. 비록 지금 칼리번이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 * *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욱, 크흑…!”

칼리번은 구역질을 했다. 입 안에서 부러진 이 몇 개와 피가 섞여서 땅에 떨어졌다.

칼리번은 마물이 젠과 말 그대로 ‘주먹다짐’을 했다. 제아무리 칼리번이 마물 혼혈이라고 해도, 마물을 맨손으로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다. 차라리 죽이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 평소였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칼리번은 해냈다. 젠의 치명적인 공격 수단인 독침이 뽑혔고 네 다리가 묶여 있기에 간신히 가능했다.

물론, 그 대가로 칼리번은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아 성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두 눈을 분명 뜨고 있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도 같다. 이대로는 그저 서서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이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더 공격을 당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지쳐 있었다.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자꾸만 숲의 형상이 두 개, 세 개로 엇갈려 보였다. 그는 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을 끔뻑거렸다. 거대한 마물의 형상은… 더는 보이지 않는다.

“…….”

칼리번은 시선을 아래로 속였다. 젠의 다리를 압박하던 족쇄가 저 멀리 처박혔고 주변 나무들은 전부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체격의 여성이 양팔과 다리를 크게 펼친 채, 나신으로 벌러덩 드러누워 있다.

“흐, 허억, 허어….”

젠은 상체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이 걸어갔다. 그러고는 젠의 곁에 묵묵히 섰다.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마물에서 인간으로 돌아왔지만, 온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다시 싸우는 일도 불사할 것이다. 칼리번은 손등이 다 터져 나갔음에도 간신이 주먹을 쥐었다.

“…….”

“…….”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다.

“어……. 뭐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젠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장.”

“…….”

“누가 이렇게 대장을… 쥐어 패 놓은 거야? 누군지는 몰라도, 보통 녀석이 아닌데?”

젠이 칼리번을 올려다보며 말하고는 흐흐, 찢어진 입으로 비웃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맨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번은 부어오르기 시작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바로 앞의 젠을 응시했다. 무표정일 때는 더없이 차가워 보이는 젠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고였다.

“적당히 했어야지, 이 자식아!”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거세게 몸을 부딪쳤다. 포옹이라고 하기에는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억세서, 어깨를 부딪치는 것처럼 보였다.

“으악! 아…. 아아야! 나, 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아, 대장, 대장…? 괜찮아?”

“…….”

“이봐, 죽지 말라고!”

둘 다 멀쩡한 몸 상태가 아니었기에 짧게 끝나 버린 몸 인사였다.

젠.

어둠 속을 헤매다 한 줄기 빛을 마주한 것처럼, 두 눈이 적응하지 못하고 따끔거렸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면 술통 한 동이로는 부족했다. 주점 전부를 들이마셔야 할 것이다. 그러나 회포를 푸는 것은 다음 일이었다. 백일 가까이 가까이 숲에서만 보냈던 칼리번에게는 바깥 정보가 절실했다. 피로 물든 결혼식 이후, 왕성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수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건……. 젠장,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러나 젠은 칼리번보다도 현실 파악이 덜 된 상태였다. 결혼식을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머리가 깨질 듯 아파져 온다고 했다. 몸 일부를 변형시키는 정도가 아닌, 완전한 마물로 지낸 후유증인 것 같았다.

“미안하다.”

젠은 머리통을 깨뜨리는 듯한 고통을 식히며 간신히 사과했다. 마물 혼혈은 반이 사람이고 반이 마물이다. 마물로 지내면 지낼수록, 점점 자신 안의 인간성을 잊게 된다. 종국에는 순수한 마물과 다를 바 없게 되어, 본능만 좇게 되는 것이다.

“으아아, 제기랄!”

젠은 자신도 짜증이 치미는지 그 자리에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여전히 나신이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망할……. 기억나는 건…. 음…. 그때, 결혼식에서… 내 의지가 아니라 강제로 마물로 변했다는 것밖에는…. 젠장, 내 입으로 씨불이는 거지만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되네.”

젠은 고민하다가 제 성미를 못 이기고는 제 머리카락을 죄다 쥐어뜯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젠이 대머리가 될 것 같았다.

“…….”

칼리번은 묵묵히 제 웃옷을 벗어 던져 주었다. 아롭의 흡혈 공격으로 등판이 죄 뜯겨 썩 입을 만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젠은 칼이 준 옷을 하반신에 두르면서도 끊임없이 기억하지 못하는 제 몸뚱이를 학대했다.

“그만해라, 젠. 그럴수록 지칠 뿐이다.”

칼리번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지만, 덤덤히 대답했다. 일단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뭐야, 그걸로 끝? 난 대장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때, 젠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건 무슨 의미지?”

칼리번이 의문을 표했다. 젠은 더 이상 나신이 아니었지만, 상반신은 칼리번처럼 훤히 드러낸 채였다. 근육이 단단히 잡힌 등 위로는 쇠 심이 박혔던 핏자국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날 좀 더 추궁해야 되지 않겠어? 여섯째 왕자의 결혼식에서 마주했던 그 오메가에 대해서.”

젠은 칼리번이 말없이 넘기려 했던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날, 지옥으로 변해 버린 결혼식.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녔던 오메가.

여섯째 왕자인 에레즈 프리드웬의 신부이자, 마물의 왕이자, 알테르 프리드웬과 모종의 관계인 것이 분명한….

<…에어리얼.>

마물로 변하기 전, 젠이 중얼거렸던 어떤 이름.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모르는 오메가의 이름일 것이다.

“내가 그 오메가가 보낸 미끼 같은 거면 어쩌려고?”

젠은 칼리번이 진즉 해야 했을 말을 대신 꺼내 주었다.

“…….”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에 감돌았다. 등을 맡길 수 있는 아군으로 느껴졌던 젠이 한순간에 멀게 느껴졌다.

“그 오메가가 젠을 미끼로 삼아 날 불러내야 할 이유가 없다.”

칼리번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쿵, 쿵, 덤덤한 표정과 달리 가슴이 날뛰었다. 왜 그런 증상을 겪는지 칼리번은 알 것도 같았다.

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메가가 두 명이 있을 순 없으니까, 그쪽 오메가가 대장을 죽이려는 것일지도 모를 텐데.”

“나는 그날 그 오메가를 처음 보았다. 혹시 내게 오메가의 냄새가 났었나?”

“…거의 안 났지.”

“그때 잠시 마주친 것 외에 그 오메가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 네가 오메가인 줄은 모르겠네.”

“…….”

그러나 칼리번은 선연히 기억하고 있다.

<너, 오메가였구나?>

젠과 달리 마물화 되지 않은 칼리번을 보며 중얼거리던 그 오메가의 눈빛을. 하지만 자신이 오메가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젠을 미끼로 써서까지 칼리번을 밖으로 끌어내야 할 ‘확실한’ 이유는… 다른 곳에 존재했으니까.

에레즈 프리드웬….

칼리번은 결혼식에서 그를 챙겨 도망쳤다. 만약 마물들이 칼리번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에레즈를 데려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

칼리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 칼리번은 전과 다를 바 없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치 빠른 젠이 자신의 속내까지 꿰뚫어 보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흐음…. 나야, 그 오메가와 인연이 있지만, 대장은 뭐… 그냥 내 옆에 있어서 말려든 돌대가리 용병일 뿐이니까. 그럼 정말 우연인가 보군.”

잠시간의 정적 후, 젠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동의했다.

‘…젠은 내가 왕자님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현재 수도가 어떤 상황인지, 알테르와 그 오메가가 어떤 동맹 관계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자신과 에레즈에게 현상금을 건 상황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유가 ‘완전히’ 없는 건 아냐. 대장은 내 동료니까.”

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자신이 능숙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오메가를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장이 돌대가리라도 지금쯤은 알겠지. 그때 보았던 그 빨간 머리 녀석이 내가 예전에 언급했던 바로 그 오메가다. 내 손으로….”

“…죽였다고 했다.”

젠이 차마 끝마치지 못한 말을 칼리번이 끝내 주었다. 젠의 눈빛이 일순 흐트러졌다.

“그래. 30년은 훌쩍 넘었어. 대장이 태어나기 한참 전의 일이라고. 아무리 우리 같은 마물 혼혈이 어지간해서는 늙지 않는다고 해도, 마계에서 수십 년을 보냈다면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어. 아니, 저건 멀쩡한 정도가 아냐.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보다 더….”

칼리번은 그녀가 이어서 할 말을 자연스레 떠올렸고, 자신도 모르게 입 안에서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아름다워졌어. …솔직히 좀 소름 돋을 정도로.”

젠은 그 어떠한 방어전이나 전투에서도, 심지어 목숨 줄이 간당간당할 때조차도 여유를 보이곤 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연륜이 젠의 강점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심각한 젠의 모습은 이번에 두 번째로 보게 되었다.

“어쩌면 날 죽이고 싶어서 기어 올라온 것일지도 모르지….”

처음 보았던 것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그녀가 눈치챘을 때였다.

“쳇, 여태 그 녀석 손에 개처럼 질질 끌려다녔는데도 도통 기억이 안 나네…. 젠장할. 확실히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리하지 마라, 젠. 본성을 자극할 뿐이다.”

“괜찮아…. 아직은.”

젠은 눈가를 덮은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아…. 설마 그래서 날 이 꼬락서니 만들어서 돌아다니게 한 걸지도? 적을 산 채로 끌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야.”

이 정도면 죗값은 다 치렀으려나? 젠은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지 시답잖은 농담을 내뱉었다. 칼리번은 늘 그랬듯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말과는 달리 그녀는 그다지 속이 시원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풀려났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어떡할지나 얘기해 보자고. 그게 중요한 거지. 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알려 줘. 난 그런 꼴로 지내서 하나도 모르겠거든.”

젠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알겠다.”

칼리번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수도 아래의 남부는 모두 점령당했으며, 갈 곳은 거친 들판뿐인 북부밖에 없다는 점. 그러나 북부로 가려면 수도를 지나야 해서 빙 돌아야 한다는 점. 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

그 이야기 속에서 에레즈 프리드웬의 존재는 싹 지워 버렸다.

“보아하니 계획이 다 있는 것 같은데. 왜 굳이 여기서 버티고 있었던 거야?”

혹시 우리 용병대 애들을 구출할 생각이라도 있었어? 젠이 물었다.

“…….”

거짓말을 하려면 역시 머리가 좋아야 한다. 칼리번은 속으로 당황했다.

“…설마 상황이 이 정도로 악화될 줄은 몰랐다.”

그러고는 그저 쓸 만한 무기가 없고 혼자였기 때문에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젠은 칼리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만 했다.

“힘들었을 텐데 용케 버텼네. 돌머리 대장 주제에 말이야!”

다행히 젠은 칼리번의 서투른 거짓말을 믿어 주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리번은 다른 알파처럼 본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따라서 대검이 없는 그는 맷집이 무진장 좋은 오메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있잖아? 당장 이 숲을 떠나자고.”

“아직 준비가…. 아니.”

칼리번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거짓말이 익숙지 않다 보니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준비? 아, 내 부상 때문에?”

젠이 제 등 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성미가 급했다.

“상처를 좀 부담되기는 하지만…. 대장이 있으면 북부까지 충분히 이동할 수 있을 거야. 식사는 그때그때 사냥하면 되고…. 전에도 늘 그래 왔잖아?”

젠은 제 몸을 이곳저곳 만지며 말했다.

“…아니다, 젠. 네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후에 움직이기 시작해도 늦지 않다.”

아직 그녀는 에레즈의 존재를 모른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엥? 방어전 한번 치르면 팔다리가 잘리는 게 부지기수인데 새삼스레 걱정을?”

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재 상황은 방어전과는 다르다. 마물은 왕국 전역에 뿌리내렸다. 장기전을 고려해야 한다.”

칼리번은 젠이 점점 의아함을 느낀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녀를 붙들기에 급급했다.

“대장이 틀렸어. 알파가 이미 남부까지 이미 점령당했다며? 사실상 왕국 전체가 마물 천지인 거잖아. 그렇다면 이건 더는 장기전도, 방어전도 아니야. 그냥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

“방어전을 치를 때처럼 마물과 마주칠 때마다 전투를 벌인다면 우리 둘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숨어다니면서 이동하면 괜찮아. 정 안되면 내가 마물인 채로 대장을 데리고 이동하면 되잖아?”

“…마물의 모습으로 이동하겠다고? 다시 이성을 잃으면 어쩔 셈이지?”

젠은 당장에라도 숲을 떠날 기세였다. 칼리번은 그녀가 지나치게 경솔하고 성급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칼리번을 평소와 다르게 보수적이고 방어적이라 느끼는 것처럼.

“아니, 인간인 부분은 최소한으로 남겨 둘 거야. 결혼식 때의 마물화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진 거였지…. 하지만 대장이 곁에 있어 준다면 내 전부를 잃지는 않을 거야.”

젠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얼굴은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 갔다.

“지금은 이 숲을 떠날 수 없다.”

칼리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째서?”

젠은 인상을 썼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다.

“젠. 네가 나보다 경험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네 전투력은 분명 뛰어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존 가능성이 떨어진다.”

칼리번은 마지막 말을 뱉으며 에레즈를 떠올렸다.

“마물로 변형이 가능한 젠과 달리, 나는 무기가 없으면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인간보다는 회복이 빠르기는 하지만, 나보다 압도적인 회복력을 지닌 적이 주변에 산재해 있으니 그조차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더구나 젠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칼리번은 여러 번의 전투를 홀로 치르면서 내장이 망가진 상태기도 했다.

“뭐야. 그럼… 대장은 어쩌고 싶은 거야?”

“…….”

“여기에 처박혀 있자고? 아니면 뭔가 다른 계획이라도 세운 거야?”

칼리번은 잠시 말하기를 망설였다. 심기 불편해하는 젠의 태도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 둘만으로는 부족하다.”

“아, 그건 알아! 안다니까! 그러니까 뭘 어쩌자는…!”

“무기와 동료가 필요하다.”

“……뭐?”

칼리번의 대답에 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기는 칼리번뿐만 아니라 에레즈에게도 필요했다.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검은 물론이고, 연약한 피부를 보호할 수 있는 갑옷과 투구 또한. 그리고 젠과 자신이 마물과 어쩔 수 없이 전투를 치를 때, 그를 보호해 줄 다른 동료도.

“…무기와 동료? 하! 그야 물론 대장한테는 필요하겠지. 근데 그걸 어디서 충당하려고? 남부 용병 연합이 아직도 건재하시려나?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비아냥거리지 마라, 젠.”

“우리 무기는 이미 수도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거고, 마물들이 똥오줌이나 싸 갈기고 있을 텐데.”

“…수도.”

“하, 하하! 그럼 수도에라도 몰래 기어들어 가 볼까? 가서 우리 무기도 찾아오고 제정신인 동료도 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거야, 어때?”

“…….”

칼리번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젠에게 긍정의 의미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야. 야.”

젠은 당장에라도 칼리번에게 욕설을 날릴 것 같았다.

“네 입으로 직접 명령해 봐, 이 개새끼야.”

아니, 이미 날리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칼리번은 무거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 이게, 시발, 그동안 좀 봐줬더니…. 그게 말이라고, 지금.”

젠은 당장에라도 칼리번을 씹어 먹을 듯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그녀는 대체로 칼리번에게 ‘관대’했다. 칼리번이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렸을 때— 이를테면 티벨 마을 방어전 같은— 그를 욕하고 또 욕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살벌하지는 않았다.

젠이 진심으로 화를 낼 때는 오직, 이쪽의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불가능한 희생을 하려 들 때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일관적이었다. 그 오메가를 죽였던 것도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으니.

“…마물 혼혈 중에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동료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 편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젠이 버럭 소리를 쳤다.

“젠장, 나라도 이미 마물 편이야! 이 상황에 누가 ‘마음은 인간 편이지만 어쩔 수 없이 저쪽에 의탁한’ 상태겠어?! 숲에서 혼자 지내더니 돌아 버렸나?”

“…….”

“어린애도 그따위 생각은 안 할걸? 근데 말이야, 우린 돈 한 푼에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용병이라고! 어?”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젠의 분노가 커질수록 칼리번은 오히려 더욱 덤덤해져 갔다.

“아, 젠장! 같은 얘기 반복하지 말고!”

그러나 젠의 외침은 예언이 되었다. 그 후로도 몇 차례나 두 사람 사이에서 같은 이야기로 설전을 벌였다. 동료와 무기를 얻기 위해서라도 수도 주변을 수색해야 한다는 칼리번과 바로 숲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젠은 영영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과도 같았다.

“…좋아! 말도 안 되는 개뼈다귀 같은 소리지만 한 가지는 인정한다. 지금 상태로는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거!”

칼리번에 비하자면 융통성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젠이 결국 먼저 휴전을 제안했다.

“일단… 하아, 좀 쉬자. 쉬고 생각하자고. 내 생각에는 대장이 잠깐 돌은 것 같으니까.”

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좀 더 건설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그사이에 대장이 생각을 바꾼다면 금상첨화고.”

“…….”

“날 은신처로 데려가 줘. 이 근처에 예전에 마련해 둔 은신처가 있을 것 같은데…. 맞나?”

젠이 특유의 성미로 상황을 무르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녀가 말하는 장소는 칼리번이 처음에 머물렀던 동굴일 것이다.

“그곳은… 마물에게 침입을 받아 오염되었다. 다른 곳으로 옮겼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아, 그렇단 말이지…. 확실히 마물이 들끓기는 하는가 보네. 그럼 대장이 찾은 새로운 장소로 가자. 여태껏 혼자 버텼다니 잘 마련해 뒀겠지. 그래서 어디야?”

젠이 자연스럽게 권유했다. 지금이야 젠이 마물화 되었을 때 내뱉은 위협적인 독기에 숲속 마물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지만, 밤이 오면 다시 마물이 들끓기 시작할 것이다. 마물을 맨손으로 상대하느라 크게 다친 것은 칼리번이었지만, 젠도 만만치 않게 기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새로 마련한 절벽 아래의 은신처로 젠을 데려가자. 그곳에서 잠들어 있을 에레즈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거다.

젠은 믿을 만한 인물이니까.

“…….”

그러나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피가 섞인 침을 삼키자 튀어나온 목울대가 한 차례 흔들렸다.

“뭐 해? 해가 지면 마물이 더 난리 피우는 거 알잖아. 여기서 다 같이 죽을 셈이야? 어서 가자고.”

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다. 칼리번도 알고 있다. 그런데 칼리번은… 어느새 그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고작 한 발자국이었지만, 젠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씨발, 설마… 지금 나보고 곧장 수도로 가라는 뜻이냐?”

젠이 욕을 바닥에 탁 내뱉었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녀는 능글맞은 미소마저 지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칼리번은 부정했다. 그도 자신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젠은 믿을 만한 인물이다. 천천히, 죽어 가는 것만 기다리던 칼리번이 일말의 희망을 가늠해 볼 정도였다.

그녀는 우리의 편이다. 에레즈와 합쳐도 나쁘지 않았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를 자신의 은신처로 들이는 것이….

‘두려운 건가?’

두려움. 그것은 겁많은 에레즈에게 배운 감정.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조금 달랐다. 그런 것이 아니라….

‘더는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젠을?

‘그럴 리가….’

칼리번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는데, 이제는 타인센과 다를 바 없이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젠에게서도 타인센과 같은 알파의 향기가 났다. 전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체취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고작 체취 때문에 칼리번은 그녀가 새롭게 보였다.

‘왕자님의 사정을 알고 나면, 젠은 반드시 그분을 버릴 거다.’

여전히 알테르 프리드웬이 에레즈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에레즈를 요구한다면, 젠은 분명 미련 없이 넘겨줄 것이다. 동료들의 목숨을 우선시하느라 평범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은 어느 정도 눈을 감아 왔던 것처럼.

설령 셋이서 함께 이동한다 해도, 젠은 칼리번과는 매번 틀어질 것이다. 연약한 왕자가 죽지 않을 안전한 길을 찾기 위해 한 달을 숲에서 허비한 칼리번과 달리, 그녀는 에레즈가 이동 중 죽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조차도 그렇게 대할 테니….

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칼리번은 겪지 않아도 결말을 그려 볼 수 있었다.

“뭐야, 그 얼굴? 용병 대장이 아니라 촌뜨기 같아.”

젠이 이를 드러내며 칼리번에게 으르렁거렸다.

“……젠.”

칼리번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쥐새끼처럼 겁에 질려서는!”

젠의 밤색 눈이 칼리번을 당장에라도 공격할 것처럼 번들거렸다.

“죽이고 베이면서, 먹히고 씹어먹으면서 나아간다. 씨이발, 그게 우리 같은 용병 새끼들이다. 근데 지금 그 꼬락서니가 뭐냐? 뭘 그렇게 준비하고 대비하려 드는 거야, 자꾸? 딸린 식구라도 있는 인간처럼!”

“…….”

“돌대가리기는 했지만, 겁대가리는 없는 줄 알았는데. 용병대에 들어오고 싶다고 설치던 애송이였을 때보다도 못한 얼굴이라고, 지금 대장은.”

그 도발에 칼리번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쿵, 쿵, 작게 뛰었다. 불안해하며, 겁에 질려, 두려워하면서.

칼리번은 변형조차 되지 않는 몸 하나만을 가지고도 여태껏 알파들 사이에 살아남았다. 지옥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무감하고 단단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젠의 말대로 지금의 그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무언가가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

칼리번은 두서없이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다가, 그 심장이 가슴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보다, 좀 더 아래에….

“칼리번.”

칼리번의 손이 배로 향하려던 순간, 어느새 다가온 젠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칼리번은 뒤로 물러나 젠에게서 멀어졌다.

“……큭.”

그 덕에 칼리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휘휘 저어 자신을 붙잡는 쓸데없는 감상을 털어 내려 애썼다.

젠은 유독 붉은 눈으로 그런 칼리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의견이 갈릴 때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지?”

젠이 건들거리며 물었다. 칼리번이 젠의 밑에서 용병 일을 배웠기에, 기본적으로 사상이나 가치가 크게 상충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 있을 때, 대체로 젠이 칼리번의 의견에 맞춰 주곤 했다. 젠은 겉으로는 무조건 돈이 최고라고 하지만, 동료에게 피해가 없다면 되도록 인간을 도울 수 있다면 돕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남이었고, 크게 의견이 갈리는 때는 오기 마련이었다.

“진심인 건가?”

칼리번이 되물었다. 그랬다. 갈등에 첨단에서, 그들 같은 무식쟁이들이 해결을 보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뭐 해? 시간 없어.”

젠은 하늘을 힐끗 보며 말했다. 석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어, 곧 밤이 올 기세였다.

“내가 지면, 대장 명령대로 수도로 자살이라도 하러 가 줄게.”

“…….”

“근데 말이야. 지금은 대장을 충분히 줘 팰 수 있을 것 같아서. 절대 질 것 같지 않거든?”

젠이 덤비라는 듯이, 한 손을 칼리번에게 까딱거리며 말했다.

“대신 내가 이기면, 대장에게서 대장 자리를 뺏겠어. 북부로 이동할 때까지는 무조건 내 명령대로 움직이는 거다, 칼리번.”

칼리번을 대답 대신 두 주먹을 가슴 위까지 들어 올렸다.

* * *

부상의 정도를 따지자면, 척추에 쇠심이 박혔던 젠이 마물에게 피를 빨린 칼리번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러나 젠은 그녀가 입은 상처에 비해 멀쩡해 보였고, 도리어 칼리번이 서 있기도 버거워 보였다.

“간다.”

젠이 선전포고를 했다. 동료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실제 전투였다면 그녀는 진즉 모래를 뿌려 상대의 눈을 멀게 했을 것이다.

“하압!”

젠은 내뱉은 말이 끝나자마자 칼리번의 코앞까지 달려와 주먹을 내질렀다.

“…흡!”

칼리번은 한쪽 팔을 방패처럼 들어 그녀의 주먹을 막았다. 뼈에 금이 가지는 않았으나 뼛속이 지잉, 울릴 정도로 저렸다. 칼리번은 젠이 공격을 읽을 수 없도록 노려본 채,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를 걷어찼다.

“칫!”

젠은 예상했다는 듯이 공격이 먹히기 전에 뒤로 펄쩍 물러났다. 칼리번은 젠에게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그답지 않게 연이어 공격을 넣었다.

마물 혼혈의 특성이란 거기서 거기이나 굳이 따지자면, 젠은 공격형이었고 칼리번은 방어형이었다. 칼리번은 비교적 느리지만 휘두르는 한 방이 무거웠고, 젠은 빠른 공격을 연속으로 가해 상대를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랬기에 칼리번은 평소 제 몸을 아끼지 않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어째서인지 본능이 칼리번과 어울리지 않는 공격 방식을 써서라도 싸움을 빠르게 종결지으라 명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더 합을 주고받았다. 비록 여성형인 젠은 칼리번에 비해 체격이 작았지만, 대신 무시 못 할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칼리번이 우려했던 대로, 싸움의 주도권은 그녀에게로 넘어갔다.

젠의 주먹은 한 방, 한 방이 곤봉으로 내리치는 것 같았다. 칼리번의 대응은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젠의 공격을 막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느려 터졌어!”

젠은 칼리번을 도발하는 여유마저 보였다. 그녀의 주먹이 칼리번의 급소를 향하다, 칼리번의 굳건한 팔에 막히기를 반복했다.

“—큭!”

젠이 진심으로 주먹질을 하면 나무 방패는 부서지고 쇠 방패는 움푹 패곤 했다. 그런 공격이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어가면, 칼리번은 기절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패배하게 될 것이다.

‘제길, 뼈가….’

칼리번은 혀를 찼다. 칼리번이 방어적으로 굴자, 젠은 일부러 칼리번의 팔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아예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윽!”

젠은 쉴 새 없이 몰아붙였고, 두 팔에 무리가 가는 걸 알면서도 칼리번은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그의 걸음이 점점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것은 칼리번만은 아니었다. 젠 또한 이를 악물며 주먹질을 했다. 등에 구멍이 뚫린 상태였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라면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주먹질할 때마다 상당히 무리가 갈 것이다.

“거기까지다, 젠!”

칼리번은 젠이 비틀거린 순간을 틈타, 턱을 노리며 날아오는 주먹을 통째로 움켜쥐었다. 그녀의 공격을 읽어 낸 것이다.

“큭……. 이 새끼가!”

칼리번이 젠의 팔을 잡아 꺾었다. 젠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리번은 젠의 다리를 걷어차 무게 중심을 잃게 했다. 젠은 손목이 부러지는 것과 주도권을 뺏기는 것 중 후자를 선택했다. 제 몸을 팔이 꺾인 방향에 맞춰 돌렸다. 칼리번은 젠의 팔을 어깨에 메고는 바닥에 내리꽂았다.

“크으…. 아악, 씨, 바알!”

아직도 피가 새어 나오는 등이 땅에 찍히자 젠이 포효했다. 칼리번은 멈추지 않았다. 젠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두 팔로 그녀의 어깨와 한쪽 허벅지를 쥐었다.

“이, 이 자식… 내려놔, 새끼야, 미친 새끼가…. 아악!”

칼리번은 두 팔로 젠을 자신의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 젠이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이걸로 끝이다!”

그러고는 머리 위에서 버둥거리는 젠을 집어 던졌다.

“—크헉!”

젠의 몸이 허공을 붕 날더니 퍽, 육중한 소리와 함께 근처의 나무에 부딪혔다. 젠을 받아 준 나무 한 그루가 그 대가로 우두둑 부러졌다. 풍성한 나뭇잎과 가지가 땅으로 쓰러지자,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악…. 허억, 억…. 제기랄…. 연장자라고 봐주는 게 하나 없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젠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카악, 퉤! 젠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피를 뱉어 냈다. 흙이 섞인 피가 바닥에 뿌려졌다. 젠은 제 피로 물든 흙을 맨발로 짓이겼다.

“후우…….”

칼리번은 젠을 기다리며 흐트러진 숨을 바로 잡았다. 두 팔을 다시 얼굴까지 끌어 올렸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포에서 오는 떨림이 아닌 경련이었다.

마물이 된 젠에게, 그리고 다시 젠에게. 두 번 얻어맞은 얼굴은 시간이 지나자 부풀어 올라 한쪽 눈을 뜨기 어려울 지경까지 이르렀다. 코는 비뚤어지고 피부 위로 멍이 올라와 얼룩덜룩해졌다.

“…하하.”

젠은 그런 칼리번을 보며 비웃었다. 흙먼지를 헤치고 나온 젠은 당장에라도 다시 달려들 것처럼 두 팔을 쩍 벌렸다.

“재밌네……. 미치도록.”

다시 맨손 결투가 벌어졌다. 어느 쪽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만약 젠이 이긴다면, 그녀는 칼리번의 머리채를 쥐고서라도 북부로 끌고 갈 것이 분명했다. 마물의 왕이라 불리는 빨간 머리 오메가와 좋지 않은 관계인 그녀로서는 북부에서 쥐 죽은 듯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칼리번으로서는 여태껏 싸워 온 그 어떤 마물보다도, 마물 혼혈보다도 어려운 상대였다. 갓 용병대에 들어왔을 때, 힘만 쓸 줄 알고 칼질밖에 할 줄 모르던 그에게 마물을 상대하는 전투와 맨손 격투를 가르쳐 준 것이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마물이 젠보다 더 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젠만큼 칼리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마물은 또 없었다.

<음, 넌 굼뜬 편이라 내 방식은 안 어울릴 것 같다. 대신 맷집이 무지막지하게 좋으니까, 그쪽을 강화해 보자고.>

<검을 검이 아니라 방패처럼 쓴다고 생각해. 공격은 최고의 방어라고도 하잖냐. 아닌가?>

<칼리번. 전투는 우리에게 맡기고 최후방에서 검을 들어라. 너 다음으로는 단 한 마리의 마물도 지나가게 해서는 안 돼. 네가 우리의 마지막 보루다.>

<네가 막지 못하면, 네 뒤 서 있을 인간들은 바로 도륙당한다. 알겠어?>

젠은 남부 용병 연합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전사 중 하나다. 노장에게 두들겨 맞은 두 팔이 터질 듯 부어오르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러나 당장 칼리번을 채우는 감각은 고통이 아닌 당혹이었다. 어째서인지, 젠의 공격이 시간이 지날수록 흐트러져 가기 때문이었다.

“큭…. 포기해라, 젠!”

보다 못한 칼리번이 외쳤다. 칼리번의 어깨를 노렸으나 빗겨 나간 젠의 주먹이 나무의 몸통을 뚫었다.

“칫!”

젠이 팔을 빼려는 순간, 칼리번은 젠의 등 뒤로 빠져나왔다. 한 손으로는 나무에 박히지 않은 젠의 팔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젠의 목을 졸랐다.

“억…. 개, 새끼가…!”

젠의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녀가 욕을 토해 내며 칼리번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항복해라.”

젠만큼이나 칼리번도 숨을 씨근거리며 말했다. 칼리번은 진심이었다. 젠의 목에 걸린 칼리번의 팔은 시퍼렇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대장이라면, 컥, 허억…. 하겠냐?!”

수도 가서 뒤지나, 지금 여기서 뒤지나! 젠은 으르렁거리고는 뒤통수로 칼리번의 얼굴에 박치기를 했다.

“윽…!”

칼리번은 젠의 목을 더욱 세게 꺾었다. 각오한 바였다. 그렇다고 팔을 풀 수는 없었다. 얼굴이 박살이 나기 전에 질식 직전까지 몰아넣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젠은 몇 번은 더 뒤통수를 칼리번에게 세게 받았다. 그의 코가 깨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아악, 아파! 이 돌대가리 새끼!”

뒤통수에 피가 묻어 축축해질 지경이 되어도 칼리번의 팔이 풀리지 않자 젠이 으르렁거렸다. 우두둑, 이어서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나무에 박힌 젠의 팔을 노려보았다. 젠의 팔이 울룩, 불룩 솟아오르며 변형되고 있었다.

“—젠!”

칼리번은 그녀를 놓아주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변형된 젠의 팔이 나무를 통째로 뽑고 있었다. 젠이 팔을 휘두르자, 나무가 칼리번을 향해 날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쪽 팔만 변형된 탓에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았고, 휘두르는 속도가 느렸다. 칼리번은 몸을 숙여 거대한 나무를 피했다.

젠은 나무를 다른 주먹으로 부숴 제 팔을 꺼냈다. 어느새 두 팔 모두 마물로 변형되어 있었다. 젠은 솟아오르려는 이를 악물며 바닥에 널브러진 나무의 잔해를 칼리번을 향해 던졌다. 칼리번은 몸을 굴려 그것을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젠이 노린 것은 칼리번의 빈틈이었다. 젠이 짐승처럼 네 발로 뛰어와 칼리번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으, 아…. 윽!”

칼리번의 등 위로 젠의 무게만큼 위력이 더해진 무릎이 박혀 들었다. 딱,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배가 바닥에 짓눌렸다. 몸속 내장이 납작해지다 못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다. 칼리번은 두 팔과 다리로 땅을 디뎌 젠을 밀어내려 했다. 두 다리를 내지른 젠의 몸이 붕 뜨더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너야말로 좀… 포기해!”

“큭!”

퍽!

머리가 강제로 들어 올려지더니 바닥에 처박혔다. 순간 머릿속이 흔들리고,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것은 거대한 마물의 앞발이었다. 발톱 중 하나가 변형 중 자라나 칼리번의 목에 박혔다.

“끄으, 흐…!”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 냈다.

‘배가….’

배 속이… 내장이 마치 다른 생명처럼 살려 달라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난동을 부리는 통에 칼리번은 폐가 짓눌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젠에게 벗어나기 위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허억, 헉!”

어째서인지 젠이 칼리번의 등 위에서 일어났다. 목에 박혔던 굵은 발톱도 뽑혀 나갔다. 칼리번은 흙바닥에 얼굴이 파묻힌 채로, 질끈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아……. 아, 허억, 흐….”

칼리번은 네발로 기었다. 아니, 세 발이었다. 한 손은 배를 움켜쥔 채였다. 그러나 젠은 칼리번을 놓아주지 않았다. 칼리번의 뒤통수를 낚아채 허공에 들어 올렸다. 칼리번은 그 힘에 강제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어느새 턱까지 솟아난 이빨을 벌리며 으르렁거렸다.

“칼리번!”

젠이 일갈했다.

“어, 흐으, 허억……!”

억지로 꺾인 칼리번의 목젖이 꼴깍거리며 흔들렸다. 마물의 포효는 등골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초식동물이 들었다면 몸에 마비가 올 정도의 위력이었다. 갈색의 피부 위로 그보다 짙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끈적한 피는 꿀렁거리는 목젖을 타고 내려가 칼리번의 쇄골에 고였다.

“칼리번…. 본성을 숨기라고 했을 텐데!”

칼리번은 억지로 끌려갈 줄 알았다. 그러나 젠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제길! 대장, 아니…. 칼리번! 너, 너……. 윽, 도대체 나 없는 동안 뭔 일을 겪은 거냐?!”

“제… 젠….”

“숲에서 혼자서 버티고 있었다면서!”

“…….”

“그런데 어째서, 왜?! 오메가 냄새가 더 심해진 거야!?”

“……으윽.”

“도대체 그동안 뭔 짓을 당했길래 이 정도까지 발현된 거냐고!”

젠의 위협에 칼리번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의 말투는 점점 어눌해지고, 마물의 으르렁거림이 심해져 갔다. 더불어 얼굴도 변형되어 갔다. 당장에라도 이전처럼, 마물로 돌아갈 것처럼.

그러나 칼리번은 그 모습이 두려워서 굳은 것이 아니었다.

“마물이냐? 숲에서 마물이랑 접이라도 붙은 거냐고!?”

흡, 칼리번의 숨이 멎었다. 젠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칼리번을 씹어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젠에게서 본 적 없는 눈길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런 눈을 다른 이에게 본 적이 있었다. 타인센에게서.

“그리고… 그건 네 의지였나?!”

“…젠……!”

“뭐 하냐, 당장 설명해! 어서! 이 새끼야!”

“큭…!”

칼리번의 머리통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앞발이 목을 졸랐다. 젠이 방출하는 감정이 분노라는 것은 명확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칼리번으로서는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동료로서의 분노인지, 아니면… 알파로서의 분노인지.

“젠…. 헉, 흐읏……. 진정해라.”

칼리번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마물이 되어 가는 젠에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여섯째 왕자와 관계를 맺은 것? 아니면 마물에게 습격당하고 강간당한 것?

그중 무엇이 그를 오메가로 발현시켰는지 알지 못하기에, 칼리번은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젠은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다. 타인센의 태도가 어느 순간 바뀌었던 것처럼.

“흐으…. 하아…. 윽…!”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수치를 몰랐다. 필요에 의해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나신으로 거리를 활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칼리번이 한 번도 수치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갈망하지 않았다.

지금의 젠은 무수하게 마주쳤던 마물들과 비슷해 보였다. 칼리번의 본능이 ‘위험하다’라고 느낄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정을 내리기 위한 동료 간의 격투였다면, 지금은…. 목으로 이어지는 혈관이 유독 급하게 뛰었다.

젠의 눈동자가 온갖 방향으로 휙, 휙, 돌았다. 어떨 때는 흰자만 보이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사람의 눈이 아닌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괴물의 눈으로 변했다.

“크흐, 크윽…. 으으윽! 아악! 젠장, 젠장, 젠장!”

결국 젠은 칼리번을 버리고는 멀리 뛰쳐나갔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가 불규칙하게 불룩거리며 튀어 올랐다. 안에서 무언가가 찢고 나오려는 것처럼. 젠은 본성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한 나머지, 더는 칼리번을 신경 쓸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는 괴물에게 짓눌려 목뼈가 부서지기 전까지 짓눌린 자국이 선명했고, 얼굴은 코가 깨져 피범벅이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꼴깍거리며 숨을 삼키면, 코와 목에서 피가 함께 타고 내려왔다.

“켁, 씨, 발, 으윽….”

괴로운 것은 칼리번뿐만이 아니었다. 젠은 입에서 울컥 피를 토했다.

“…….”

칼리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상태가 온전치 않았으나… 등을 보인 젠을 공격하기란 더없이 쉬웠다. 그러나 그의 손은 주먹을 제대로 쥘 수 없을 만큼 퉁퉁 부어 버렸다.

젠의 등에서는 구멍 난 부위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꼬리가 다시 나려는지 등허리의 뼈가 뾰족하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아악! 제기랄…. 죽겠네, 제기랄…!”

젠은 제 몸을 양팔로 끌어안고는 웅크렸다. 땅 위를 구르기도 하고, 제 이마를 바닥에 세게 쿵쿵 박았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젠에게 칼리번과의 결투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다가오지 마!”

칼리번의 발걸음 소리에 젠이 비명을 질렀다. 그 명령에 칼리번은 숨조차 멈췄다.

“흐으, 씨…. 대장, 냄새, 씨발, 풀풀 난다고…. 으윽…….”

젠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낮고 음산해서, 잔뜩 쉰 목소리였다. 칼리번이 준 옷 위로 새로운 핏자국이 점점이 피어올랐다.

“…마물이라면 환장하고 달려, 들, 흐으, 정도로.”

젠의 말에, 칼리번의 심장에 미묘한 균열이 갔다.

“씨발……. 대장……. 대장.”

“…….”

“날……. 흐으, 두고 가. 내가…… 다시 정신을 잃기 전에….”

젠은 마지막 남은 이성을 짜내어 간신히 경고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도망치지 않았다. 젠의 뒤에 선 채로 피로 물든 제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젠은 마물의 피가 희미한 오메가 냄새를 숨겨 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칼리번의 얼굴에도, 몸에도 자신이 아닌 다른 마물의 피가 덮여 있었다.

‘…더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석양이 그의 얼굴에 새로운 피를 쏟아붓듯 비추었다. 칼리번은 두 손을 떨구고는 눈을 감았다.

“야! 씨발…. 내 말 안 듣냐, 돌대가리 새끼야?”

뒤에서 꽥꽥거리는 젠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무시했다.

“고맙다, 젠.”

대신 칼리번은 중얼거렸다. 젠이 왜 그렇게도 급하게 떠날 것을 주장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물론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도 있겠지만….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오메가 냄새를 풍기는 자신을 위해서였다.

칼리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 위로 석양이 닿아 붉게 물들었다. 앞일을 결정할 싸움은 결국 누구도 이기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아니, 따지고 보자면 칼리번이 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젠은 자신의 본성에게 졌다.

앞으로도 수도 없이 맛볼 비참함이었다. 칼리번은 이제 제 손에 남아 있는 카드는 패배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 * *

“수도 일대 탐색은 나 혼자 간다.”

젠이 선언했다. 간신히 마물화를 막기는 했지만, 그녀의 몸은 아직 엉망진창이었다. 칼리번과 대화를 하는 도중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형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칼리번에게는 전처럼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둘 다 반쯤 나신인 채로 이 끝, 저 끝에 앉아 있는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아니, 혼자 보낼 수는 없다. 함께 가겠다.”

칼리번은 반대했다. 주장한 것도 그였으니,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하하, 그 꼴로?”

젠이 고개를 까딱였다. 칼리번은 피부보다 피가 묻은 부위가 더 많을 정도로 피범벅이었다.

“다친 건 젠도, 나도 마찬가지다. 분명 마물의 모습으로 돌아다녀야 할 텐데, 지금은 이성이 약해진 상태다. 협업이 필요할 거다.”

“안 돼, 대장은 절대 못 가.”

젠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내 입으로 죽으러 가는 길이라고 하지만, 지금 대장이 가면 그건 진짜… 자살이다.”

“…….”

“둔한 것도 정도껏 해. 아까 말했지? 대장한테 오메가 냄새가 풀풀 난다고.”

“……다른 마물의 피로 숨기면 되지 않나.”

젠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대장의 본성이 더 강해졌어. 아무리 마물의 피로 덮어도, 그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땀이나 피를 흘리면 다들 눈치채게 될 거야. 바람을 타고 퍼지기라도 하면….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젠은 진저리를 쳤다.

“…왕성 일대에는 나보다도 더 강한 마물과 마물 혼혈들이 대거 포진해 있을 텐데 어쩌려 그래? 그땐 나도 못 도와줘. 차라리 나 혼자 가는 게 속이 편하지.”

“하지만, 젠이 혼자 갔다가 붉은 머리 오메가를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칼리번이 침착하게 말하자, 젠의 표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젠장, 그럼 안 가면 되잖아!”

“…….”

“이대로 북부로 가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근데 왜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야?!”

젠이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칼리번은 굳건했다. 그녀는 답답한지 욕을 내뱉었지만, 차마 칼리번은 모든 진실을 알려 줄 수 없었다.

“아,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이참에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딴 놈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긴 해. 오메가 냄새에 해롱대고 있을 놈들 대가리 깨서 데려오고 대장 검도 찾아와야겠다!”

“…….”

“대신, 본성에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거야!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칠 거라고!”

침묵이 이어지자 젠은 평소보다 과장된 말투로 분위기를 돋웠다.

“…그 오메가가 수도를 차지했으니, 그 일대는 온통 그 녀석 향기로 도배되어 있을 거야. 내가 계속 마물인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도 그 영향권 아래에 있어서일 테니.”

“역시 내가 함께 가야 한다.”

“아, 진짜…. 안 된다니까?”

젠은 칼리번에게 손을 휘휘 젓더니, 잠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음…. 아예 도와줄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젠을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칼리번에게 다가왔다. 일부러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서 말이다. 칼리번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래 살고 경험이 많은 알파다 보니 나름의 수가 있으리라 믿었다. 자신에게 오메가 냄새를 가리는 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대장, 가만있어. …내가 뭔 짓을 해도. 알겠지?”

“흠.”

그 방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땐 안 된다고 해야지.”

북부로 가자고 하면 어쩌려고? 젠은 낮은 목소리로 농담을 던지고는 씩 웃었다. 입술 너머로 드러난 이는 평범하게 뭉툭했다. 그러나 끝이 뾰족한 어금니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

이대로 마물로 변하는 것인가? 그러나 변형된 것은 이빨뿐이었다. 젠은 칼리번의 목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 손이 당기는 대로 칼리번은 고개를 한쪽으로 꺾였다. 그러자 젠의 발톱에 찔린 상처가 훤히 드러났다. 젠은 고개를 숙였다.

“젠…. 큭!”

피로 물든 짙은 색의 피부에 뾰족한 어금니가 박혀 들었다. 상처를 덮고 있던 피막이 찢어지고,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흐으….”

젠은 칼리번의 피를 게걸스럽게 빨았다. 그 모습은 앞서 칼리번에게 덤벼들었던 아롭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젠이 미처 먹지 못한 피가 가슴을 타고 몸 위로 흘러내렸다.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버텼다.

한참 후, 젠은 포식한 사자처럼 숙인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아…….”

젠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칼리번을 쳐다보았다. 번들거리는 붉은 두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알파의 본능을 느꼈다. 그런 눈을 할 때마다, 칼리번은 젠이 낯설게 느껴졌다.

“…젠장.”

젠은 칼리번을 놓아주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젠….”

“대장.”

“…….”

“진짜, 대장은 내가 여든 넘은 알파라서 다행인 줄 알아라. …아니, 나이는 중요하지 않지. 그냥 내가 대단한 거야.”

젠의 시선은 여전히 칼리번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대장이랑 내가 못 볼 거 다 보고 산 사이라서 버티는 거지, 아니었으면 진짜…. 하.”

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칼리번은 손으로 목에 난 상처를 억누르며 물었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는 기분. 대장은 평생 모를걸.”

“…….”

“끔찍해. 오른손은 원하지 않는 걸 왼손은 원하거든. 어느 순간, 왼손이 멋대로 저질러 버려. 근데 조절할 수 없는 그 부분마저 결국 ‘나’라는 거지.”

젠은 왼손으로 제 뺨을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낄낄거렸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어 보지만, 그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우습지도 않은 광대 짓이었다.

“…….”

하지만 젠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칼리번 또한 젠이 느꼈던 그런 감정을 느껴 본 것이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고, 결코 조절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음, 하여간에. 이 정도면 그 오메가에게는 홀리진 않을 거야…. 아마? 그래 봤자 잠시겠지만.”

“…….”

“다녀오는데 하루 이틀이면 충분할 테니…. 뭐, 괜찮겠지.”

젠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손바닥에도 입을 댔다. 날카롭게 변형된 이빨이 그녀의 손바닥을 찢었다. 젠은 칼리번에게 그 손바닥을 내보였다.

“대장, 이리 와.”

칼리번은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자 젠은 피 묻은 손바닥으로 칼리번의 얼굴에 벅벅 문질렀다.

“크, 읏…. 젠?!”

“똑바로 들어. 그동안 숲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최대한 행동을 주의해.”

“…윽….”

“피는 물론이고… 땀도 되도록 흘리지 마. 볼일 볼 때는 아무 데나 싸 갈기지 말고 물에 흘리고.”

잔소리를 퍼붓는 것은 덤이었다. 젠의 목적은 칼리번의 부어오른 눈덩이와 꺾인 코 위로 제 손을 사정없이 짓누르며 피를 펴 바르는 데 있었다. 어느덧 칼리번의 얼굴 위로 젠의 피가 가면처럼 덧씌워졌다.

“…젠…. 큭…!”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버텼다. 젠의 피는 칼리번에게 불쾌감을 심어 주었다. 다른 마물도 아닌, 젠이었는데도. 작은 마물의 피를 덮을 때와는 달랐다. 상대가 강하면 강한 마물일수록, 칼리번에게는 오히려 거부감과 구토감이 심해졌다.

잠시 후, 칼리번의 얼굴에서 손을 뗀 젠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이틀. 그 후부터 여기서 날 기다려. 시간은 지금으로 하자. 해가 저 산 끝에 걸려 있는 동안에만. 알겠지?”

젠은 빠르게 지시했다. 칼리번을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가 대장에 가까워 보였다.

“만약 내가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한다면…. 간단하잖아? 실패한 거지.”

죽었거나, 다시 마물로 돌아갔거나. 젠은 석양의 잔재 아래에서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나 석양이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깔리는 순간,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곧장 이곳을 떠나.”

* * *

평소의 칼리번이었다면 젠을 따랐을 것이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의 생사를 확인했으니, 바로 북부로 넘어가는 것. 이성적이며 생존 가능성이 가장 큰 판단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희박한 가정과 가능성을 앞세워 젠을 사지에 내몰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절벽 동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젠이 올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싶었다. 설령 마물의 표적이 될지라도. 하지만 칼리번이 그런 짓을 벌인다고 해서 성치 않은 몸으로 수도로 돌아간 젠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같잖은 짓거리에 불과했다.

더구나 이른 새벽에 떠나기 전, 에레즈에게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약속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버렸다. 칼리번은 그가 동굴 안에서 오매불망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칼리번은….

“…….”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화가 났다. 아무래도 젠에게 하도 얻어맞아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젠을 희생시켰는데, 에레즈가 무서워하고 불안해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어진 것이다. 마치 여섯째 왕자에게 벌을 내리는 것처럼.

칼리번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정신적인 갈등 외에도, 육체적인 의미에서도 돌아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온몸이 멍으로 부어오른 탓인지 무거웠다. 절벽 위를 기어오르는 일이 평소보다 몇 배는 버거웠다. 마치, 수많은 손이 발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칼리번을 붙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헉, 허억…. 하아…….”

절벽을 오른 칼리번은 개처럼 엎드린 채로 한참이나 숨을 토했다. 동굴이 코앞인데도,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카, 칼…!”

그런데 멀리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윽, 왕자님.”

칼리번은 땅에 박은 고개를 들었다. 어리석게도, 에레즈는 동굴 밖에 서서 칼리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달빛에 희미하게 그의 머리카락이 빛났다. 칼리번에게서 괴상한 힘이 솟아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에레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칼리번이 다가올수록, 에레즈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과 기쁨이 피어났다. 그러나….

“위험하니 밖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칼리번이 으르렁거리듯 타박하자, 에레즈의 얼굴이 놀람과 당혹으로 바뀌었다.

“어째서 나와 계신 겁니까….”

에레즈와 달리 칼리번은 반가움보다도 먼저 분노가 앞섰다. 에레즈는 너무나 연약하고 작아서, 만약 자신보다 마물의 눈에 띄었다면 분명 큰일이 생겼을 터였다. 어째서 이렇게 나약하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걸까?

“으, 으응…. 하, 하지만, 느, 늦는 것, 가, 같아서… 거, 걱정이 도, 돼서, 어, 얼굴만, 내, 내밀고, 이, 있었……. 아앗!”

칼리번은 에레즈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한쪽 팔로 챙겼다. 동굴 안으로 에레즈를 끌고 들어가자, 긴 머리카락이 한 박자 느리게 질질 끌렸다.

“카, 칼—! 나, 낮에는, 아, 안에 있었어…. 해, 해가, 져서, 어, 어두우니까 자, 잠깐, 만, 나, 나온 거였어….”

에레즈가 그의 팔에 매달린 채 더듬더듬 변명했다.

“호, 혹시, 모, 못 올라오는 거면! 머, 머리카락으로 줄을……. 여, 역시 아, 안 될 건 아, 알고 있지만….”

“왕자님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칼리번은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머리카락을 밧줄처럼 쓴다면 에레즈의 하얗고 긴 목은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 그래도… 조, 조금이라도, 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

“그……. 아, 아……? 카, 칼…. 어, 얼굴이…….”

에레즈의 손길이 칼리번의 부어오른 얼굴에 닿았다.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별것도 아닌 상처였으나, 피로가 누적되니 작은 손길에도 유달리 쓰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 다쳤어…?”

에레즈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칼리번을 매만졌다.

“큿….”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젠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보다 그 간지러운 손길이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칼리번은 더는 에레즈에게 만져지고 싶지 않아 그를 동굴 안쪽에 풀썩 내려놓았다. 투박한 손길에 에레즈가 뒤로 데굴 굴렀다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아…….”

에레즈는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칼리번이 한 번도 자신을 험하게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치거나 부상을 입어 어쩔 수 없었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 미안….”

칼리번에게 거부당했다고 생각한 에레즈는 금빛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었다.

“하, 함부로, 마, 만져서 미, 미안해….”

혹여나 자신이 상처를 건드려 칼리번을 아프게 한 것일까. 그런 에레즈의 마음이 듣지 않아도 훤히 보였다. 곤란해하는 에레즈를 보고 있자니, 칼리번은 모래를 씹어 삼킨 것처럼 목 안이 따끔거리고 불편해졌다.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아…….”

“몸이 좋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예민해진 것 같습니다.”

칼리번은 순순히 사과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에레즈가 살짝 머리카락을 거뒀다. 에레즈는 한참이나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내, 내가… 머, 멋대로, 마, 만져서……. 미, 미안해.”

“…….”

“내, 내 주제에… 뭐, 뭐라도 되, 되는 것처럼…….”

“상관없습니다.”

칼리번이 무거운 입을 뗐다.

“마음대로 하셔도… 괜찮습니다.”

칼리번이 정정했으나 에레즈는 이미 잔뜩 겁을 먹은 뒤였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스스로 그의 손을 쥐었다. 아직은 가냘픈 손목이었다. 최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더욱 야위었다. 마른 팔뚝을 보니 칼리번은 가슴이 꽉 막혀 왔다. 칼리번은 그의 손을 제 뺨에 대도록 했다.

“아, 으, 으으….”

에레즈가 칼리번의 얼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으려 쫙 펼쳤다. 그러나 곧 칼리번의 뺨 위에 안착했다. 피부가 벗겨진 살에 닿은 것처럼, 에레즈의 손바닥이 상처에 닿자 욱신거리고 화끈거렸다.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어둠 속에 묻힌 것이 다행이었다.

머뭇거리던 손이 칼리번의 얼굴 윤곽을 더듬었다. 손길이 칼리번의 얼굴을 쓸었다. 아팠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칼리번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눈이 아닌 손으로 만지고 있으니, 얼굴이 이상하다는 것을 그도 곧 알아챌 것이다.

칼리번은 말없이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을 받기만 하다가, 결국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었다.

“…….”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자신은 젠을 버리고, 에레즈를 선택했다. 그것은 스스로 정한 일이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판단에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괜히 그를 탓하고 있는 것이다.

미숙하고 비이성적인 태도…. 조금도 칼리번답지 않았다. 용병대장이었던 그는 무수한 결정을 내려 왔다. 어떨 때는 판단이 잘못되어, 용병대에 손실을 불러올 때도 있었다. 칼리번은 자신의 잘못과 비난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랬기에 그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감이 투철하고 묵직하다는 평을 들어 왔다. 칼리번은 뒤돌아보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

칼리번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어리석고 멍청한 짓거리처럼 느껴졌다. 기존까지 잘 알고 있던 칼리번이 아닌, 다른 칼리번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 같았다. 변하고 있는 자신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으며 원치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왕자님.”

칼리번은 조용히 에레즈를 불렀다. 이 사람에게 사소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동료를 사지로 내몰아서까지.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해 온 젠보다 이 사람을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끔찍해. 오른손은 원하지 않는 걸 왼손은 원하거든. 어느 순간, 왼손이 멋대로 저질러 버려. 근데 조절할 수 없는 그 부분마저 결국 ‘나’라는 거지.>

젠이 말했던 그 끔찍함을, 칼리번도 느낀다.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는다. 이전의 자신으로는 결코 조절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있다.

“으, 응….”

에레즈는 칼리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소심하게 그의 부름에 답했다. 사과를 받았어도 에레즈는 우울하고 시무룩해 보였다.

그런 모습은 원치 않았다. 환하게 자신을 반기는 모습에 화가 났다가, 미안해하고 슬퍼하자 그 모습이 또 마음에 들지 않다니. 무엇이 진짜 제 마음인 것일까? 칼리번은 현기증마저 일었다.

“왕자님께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그때, 칼리번의 뇌리에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드릴 것이….”

칼리번은 너덜너덜한 바지를 뒤져 작은 돌을 꺼냈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 가장 깨끗하고 하얀 자갈로 골랐는데, 막상 꺼내 보니 피로 얼룩져 있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주기 전, 핏자국을 지워 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피도 피가 말라붙어있어 부질없는 짓이었다.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텐데도, 칼리번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듯 계속 자갈을 매만지기만 했다.

“……!”

에레즈의 하얀 손이 그의 갈색 손 위로 올라왔다. 엄지손가락의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움직이던 칼리번의 손이 뚝 멈췄다. 칼리번의 손은 멍이 들고 부어올라 흉물스럽고 공포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너무나 쉽게 흰 조약돌을 빼냈다. 손가락이 바위 위에서 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고, 칼리번은 생각했다.

“…나, 나, 주는 거야?”

에레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왕자님을 닮은 것으로 찾아보려 했습니다만….”

칼리번은 어설프게 변명했다.

“고, 고마워…!”

한결 밝아진 목소리가 칼리번의 쓸쓸한 음성을 덮었다. 에레즈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저, 정말… 고… 고마, 워.”

에레즈가 칼리번을 마주 보고는 예쁘게 웃었다. 칼리번은 그의 미소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다, 닦으면… 그, 금방, 깨, 깨끗해질, 거, 거 같아….”

에레즈는 자신의 말을 잊지 않고 애써 조약돌을 찾아와 준 칼리번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에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흰 조약돌 위로 짙게 말라붙어 있던 핏자국이 점차 묽어지기 시작했다.

“……!”

곧 칼리번의 손 위로 비가 내렸다. 칼리번은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고, 고마워….”

에레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웃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준 돌을 제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는 그는 조금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웃으면서 울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에레즈는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나, 나도… 머리가 나빠.>

분명 그때도 에레즈는 웃으면서 울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느낌이 달랐다. 어째서일까? 무슨 차이인 걸까?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울면서 웃고 있는데…. 달랐다.

“왕자님.”

칼리번은 에레즈의 뺨에 손을 댔다. 경련이 일어나 눈에 띄게 떨리는 손가락에 투명한 눈물이 엉겨들었다.

“아, 아앗…. 우, 울지 아, 않으려고 했는데……!”

칼리번이 에레즈의 눈물을 훔쳐 주자, 그제야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나, 나는… 아, 아무것도 하, 할 줄 아는 게, 어, 없으니까…. 저, 적어도… 걱정, 거, 걱정만은 아, 안 끼치려고 해, 했는데….”

“…….”

“미, 미안해…. 미, 미안…….”

에레즈는 더듬더듬 사과했다.

‘괴롭다.’

그런 그를 보며 칼리번의 머리가 말했다.

‘괴로워….’

심장도 가시덤불에 감싸인 것처럼 몸부림쳤다.

‘이분은 날 항상 어리석은 선택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번이 가장 최악일 것으로 생각하면, 그다음에는 한 단계 더 아랫바닥이 있었다. 칼리번은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에레즈만 없었다면.

그러나 그는 제 발로, 아래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두 발을 디딘 대지보다도 더욱 아래로… 지하로.

지옥으로?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칼리번이 느끼는 막막함은 어둠이라기보다는 질식에 가까웠다.

바닥이 없는 호수.

끝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막막함.

다리를 붙잡고 있었던 건, 닻인가….

“……아…!”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고개를 들게 했다. 칼리번의 품 안에서 에레즈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곰이나 사자를 두려워하는 작은 토끼처럼.

에레즈의 푸른 보석안은 눈물에 젖을수록 더욱 반짝였다. 칼리번은 그의 눈 바로 아래에 입술이 댔다. 그가 눈을 깜박이면, 얇은 눈꺼풀과 긴 속눈썹이 칼리번의 입술 위에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으….”

에레즈가 칼리번의 팔 안에서 움찔거리고 바르작거렸다. 칼리번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있는지도 몰랐다.

“억지로 웃게 해서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귓가에 속삭였다. 낮고 음울한 목소리였다.

“카, 칼은… 자, 잘못한 거 어, 없어……. 내, 내 탓이야….”

에레즈는 훌쩍거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칼리번을 제 품에 안듯 두 팔로 꼭 감쌌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문득 제 손을 향했다. 에레즈의 눈물이 닿은 손이 재생되고 있었다.

“…….”

칼리번은 눈앞에 명백히 보이는 변화를 무시했다. 그저 에레즈의 체취를 맡는 것에만 집중했다. 깨끗한 바람처럼 그제야 숨쉬기가 편해졌다. 투명한 보석 같아 보였던 눈물은 뜨겁다기보다는 미적지근하고, 달다기보다는 소금기가 돌고, 끝마무리로는 썼다.

눈물의 맛은 바다와 호수를 뒤섞은 것만 같았다.

* * *

에레즈가 고른 커다란 돌멩이와 칼리번이 가져온 하얀 조약돌은 지푸라기와 잡초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침상 옆에 나란히 놓였다. 서로가 서로를 받쳐 주며, 의지하듯이 몸을 맞댄 채로.

젠을 기다리는 이틀을 칼리번은 잠으로 보냈다. 연이은 전투에서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칼리번은 동굴로 돌아온 이후 바로 쓰러졌다. 평소의 그는 잠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에레즈와 함께한 뒤로는 종종 정신을 잃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곤 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아마도.

“카, 칼….”

칼리번 본인보다 에레즈가 더욱 걱정에 빠졌다. 상의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온몸은 멍이 들었고, 얼굴은 코가 깨져 피로 범벅이 되었고…. 죽은 듯 잠만 자니 정말 죽는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조금만 쉬면…. 곧…… 일어날 겁니다….”

에레즈의 성화에 간신히 눈을 뜬 칼리번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 그치만…! 저, 저번에도, 그, 그렇게 말했, 마, 말했잖아….”

에레즈가 울먹이며 말했다. 칼리번은 팔이 잘려도 괜찮다고 하고, 하혈을 해도 괜찮다고 하니, 도통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괜찮….”

“으앗!”

칼리번은 졸음을 버티다 못해 그만 에레즈가 있는 방향으로 푹 쓰러졌다.

“…으, 카, 칼….”

칼리번의 아래에 깔린 에레즈는 빠져나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새빨개졌다. 결국 그는 칼리번의 좋은 베개가 되어 주었다.

에레즈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잠에만 빠져든 칼리번을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지킨다’라고 하기에는 그는 여전히 모자랐지만, ‘돌본다’에는 잘 어울렸다. 에레즈는 밤에는 칼리번의 품 안에 쏙 들어가 잠을 잤고, 낮에는 돌덩이처럼 누워 있는 칼리번을 끌어다 제 무릎에 기대게 했다.

“카, 칼…….”

몸에 묻은 피를 닦아 주고 멍든 곳을 매만져 주었다. 칼리번은 잠결에 에레즈의 희미한 말소리와 손길을 느꼈으나 깊은 잠에 짓눌려 곧 잊혀졌다. 칼리번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다시 잠들었다.

* * *

몸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 가벼운 것은 땅 위에 붕 떠 있었기 때문이었고, 무거운 것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가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발을 헤집어도 땅이 닿지 않는다. 마법에 걸려 허공에 뜨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물.

물이다.

호수에 빠졌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칼리번은 숨이 턱 막혔다. 숨을 쉬고 싶다. 헐떡거림은 생물의 본능이었다. 칼리번은 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호숫물은 칼리번의 예상보다 훨씬 묵직했고, 끈적했고… 뜨거웠다. 이건 물이 아니다. 칼리번은 착각했을 뿐이었다. 그의 손이 주변을 휘적거렸다.

피…. 뼛조각…. 짐승의 내장. 그 외에도 손에 걸리는 덩어리들…. 이것은… 피와 내장이 뒤섞인 붉은 수프였다.

칼리번에게는 가야 할 길은 물론 발을 디딜 바닥조차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로 기댈 곳을 찾아 헤매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붉은 늪은 그가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가라앉게 할 뿐이었다.

비명을 지르면, 살려 달라고 외치면, 누군가 그 소리를 듣고 구해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붉은 늪에 빠진 이가 ‘마물 혼혈’이라는 것을 알고 죽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아니, ‘칼리번’이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죽임을 당할 것인지.

그래서 그는 선택했다.

그 선택은….

“……헉, 허억!”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하아, 하……. 헉, 허억…….”

크게 숨을 들이켜자 그의 폐로 신선한 공기가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호수에 빠진 줄로만 알았다.

“흡…!”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이 다름 아닌 에레즈의 푸른 눈동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칼리번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 짙은 피부 위로 늘어질 정도로 길고 반짝이는 머리카락. 그가 알고 있는 왕자님이 분명했으나, 어딘가 현실성이 떨어졌다.

‘왕자님을 올려다보는 일은 가능하지 않은데….’

그러다 칼리번은 자신이 누워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 위에 올라탄 채였다. 그렇다면야 지금의 시야도 가능하다. 가능하기는 한데….

“…….”

어째서 왕자님이?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도리어 칼리번은 숨도 쉬기가 어려웠다. 에레즈 또한 칼리번이 갑자기 눈을 뜨리라고는 믿지 않았는지, 지금은 깜짝 놀란 지금은 깜짝 놀라 굳어 버린 생쥐처럼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을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해답이었으나 칼리번은 에레즈에게서 도통 눈을 뗄 수 없었다. 에레즈의 손이 어깨를 쥐고 있었다. 그 부분은 꿀이라도 발라진 것처럼, 끈끈하게 붙어 있었다. 평소였으면 훌쩍거리며 영문 모를 사과를 하거나 더듬더듬 변명했을 에레즈건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에레즈의 향기는 머리카락처럼 칼리번의 몸 위로 사르르 떨어졌다.

“…….”

그 향기에 온몸에 쥐가 날 정도로 긴장했던 근육이 천천히 이완되었다. 대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 에레즈는 이성을 잃었던 당시의 알파처럼 보이기도 했고, 여전히 평소의 그 같기도 했다. 연이은 전투로 잊고 있었던, 러트 때의 일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금실 같은 얇고 긴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전과같이 강제로 몸을 속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칼리번을 옭아맸다.

칼리번이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에레즈가 살짝 눈을 감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로 인해 금사가 칼리번의 몸 위에서 뱀처럼 움직였다.

“…….”

칼리번은 그가 이대로 계속 다가온다면, 머지않아 얼굴이 맞닿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니, 얼굴이 아닌 입술이….

에레즈의 러트는 끝났다. 더 이상 무의미한 입맞춤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아앗!”

땅을 딛던 손이 머리카락을 짚었는지, 주룩 미끄러졌다. 에레즈의 몸이 그대로 칼리번의 몸 위로 떨어졌다.

퍽!

칼리번의 얼굴에 에레즈의 얼굴이 부딪쳤다. 동굴 안에 뼈가 부딪치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윽…. 왕자님!”

칼리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한번 부러진 그의 코에서 다시 피가 철철 흘렀다. 하지만 그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칼리번 같은 튼튼한 용병에게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레즈는 달랐다. 그의 연약한 피부와 아직 미숙한 뼈는 칼리번에게 부딪치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칼리번은 제 몸 위에서 끙끙거리는 에레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우, 윽……. 으, 응….”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처가…!”

칼리번이 버럭 화를 냈다. 에레즈의 입술이 찢어졌는지 피가 비친 것이다. 그는 과연 너무나 연약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쥔 채로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다른 곳이 아프시진 않습니까? 눈이 갑자기 안 보인다거나? 숨기지 말고 말해 주십시오.”

“괘, 괜찮아…. 이, 이 정도는… 그, 그보다, 카, 칼, 코, 코에서…… 피, 피가…!”

“저는 괜찮습니다. 혹시 입 안이 찢어지지는 않았습니까?”

“아, 아…! 이, 이건… 아, 아무래도… 내, 내 피가 아닌 것 같은데….”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제 몸은 단단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멍이 드셨을 수도 있습니다.”

칼리번이 에레즈의 완벽한 얼굴을 샅샅이 수색하는 동안,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려지는 에레즈의 얼굴은 점점 새빨개져 갔다.

“지, 진짜… 괘, 괜찮다니까……!”

결국,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에서 쏙 빠져나가더니 고개를 훽 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세게 잡아서….”

“아, 아니야….”

아파서라기보다는 부끄러워서인 것 같았다.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숨긴 에레즈는 두 손으로 얼굴을 열심히 닦았다. 그 모습을 보며 칼리번은 코에서 뚝뚝 떨어지는 제 피를 대충 닦아 냈다.

“미, 미, 미안…. 쉬, 쉬는데… 깨, 깨워 버려서….”

에레즈가 칼리번의 몸 위에서 엉성하게 내려와 사과했다. 그는 옆으로 내려와 칼리번의 팔뚝에 제 팔을 붙이며 앉았다. 칼리번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를 물었다. 이틀이 지난 밤이었다. 곧 아침이 오면, 젠과 만날 준비를 해야 했다.

‘이틀이나 기절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군.’

칼리번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숲에 떨어진 이후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미 너무 많이 일어났다.

“…혹시 제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칼리번은 마른세수를 하면서 에레즈에게 물었다. 에레즈가 이유 없이 사람 몸 위에 올라탈 리는 없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겨, 잠에서 깨울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마물이 침입했다든가….

“벼, 별것, 아, 아니야….”

에레즈는 한참 후에야 작은 목소리로 이실직고했다.

“그, 그게…. 그, 그냥…… 하, 한 번만, 보, 보고 싶어서….”

영문 모를 말을 하더니, 에레즈는 두 손가락으로 입가의 양 끝을 꾹 눌러 보였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무엇을 하는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에레즈가 손가락을 죽 늘리자, 웃는 모양새가 되었다.

“……!”

예상치 못한 에레즈의 행동에 칼리번의 코에서 더욱 많은 피가 흘렀다. 갑자기 온몸이 쑤셨다. 회복되지 않은 근육이 멋대로 날뛰었다. 만약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먹으로 구멍을 여럿 냈을 것이다.

“우, 웃는 거, 보, 본 적이 없어서….”

칼리번이 자신 안에서 날뛰는 흉포한 본성을 잠재우려 노력하는 사이, 에레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지, 지금 같은 상황에, 나, 나 같은 거랑 이, 있으면…… 다, 당연한 이, 일이겠지만….”

칼리번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이해가 가지 않아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이 에레즈에게는 추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 나만의 이, 이기적인, 새, 생각인 거, 아, 알아…! 그, 그래서… 피, 피해가 아, 안 되게! 자, 잠들, 잠들었을 때… 모, 몰래, 하, 한 번만 보, 보고 싶어서 그, 그런 건데….”

“…….”

“지, 지금이 아, 아니면 다, 다시, 기, 기회가, 어, 없을 것, 가, 같아서…! 으, 으—아, 아니 이건…. 그, 그런 게 아니라! 그, 그게…. 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되었는지 에레즈는 이말 저말을 번갈아 가며 해 댔다.

“…다, 다쳤는데, 내, 내가, 나, 나쁜 생각을 해서, 미, 미안해….”

그러나 결론은 늘 그랬듯 같았다. 사과. 그리고 또 사과. 왕자님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미안한 것일까?

“그렇습니까.”

칼리번은 뚝뚝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잠시 고민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칼리번이 피를 뚝뚝 흘리자 에레즈가 천 쪼가리를 건네주었다. 그걸로 훔치니 곧 피가 멎었다.

칼리번은 어떤 의미에서는 왕자님의 박치기 덕분에, 축 눌어져 있던 정신이 맑아진 것도 같았다. 시원하기까지 했다.

“왕자님.”

칼리번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제 몸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시든 저는 별 상관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셔도 된다고 했잖습니까.”

칼리번은 아무렇지 않았다. 딱히 아무런 일도 당하지 않았다. 에레즈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오래 잠든 나머지,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흠.”

칼리번은 손으로 어설프게 에레즈를 따라 했다. 입만 죽 늘어났을 뿐이지, 눈이나 코, 뺨은 그대로라 그냥 얼굴 거죽이 늘어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족하십니까?”

칼리번이 입을 길게 찢은 채로 덤덤하게 물었다.

“……후.”

에레즈는 억지로 참는 듯 입술을 비죽이다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후후…우, 웃으면 안 되는데….”

에레즈는 황급히 입가를 머리카락으로 가리면서 중얼거렸다.

“…….”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가 가슴에 남았다. 순수한 미소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억지로 울면서 웃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보기 좋았다.

“왕자님 때문에 웃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원래 웃지 않습니다.”

“왜, 왜…?”

칼리번은 에레즈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그러나 에레즈에게는 또 다른 궁금증이 하나 더 생겨날 뿐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칼리번은 태어날 때부터 감정이 둔했다. 처음에는 마물 혼혈이라 그런 것인가 싶었는데, 용병대에 들어간 후에도 늘 지적을 받아 왔다. 다른 마물 혼혈들을 관찰해 보면, 감정적인 면에서 보통 사람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변형을 하지 못하는 몸처럼, 정신적으로도 무언가 모자라게 태어난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썼으나 표정이 없는 짐승 같은 칼리번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감정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 중에는 분노하기도 했고, 동료들이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면 그도 편했다. 젠은 ‘얼굴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 나랑은 다, 다르구나.”

칼리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비하자면 에레즈는 너무 자주 울었다. 그리고 훨씬 다양하게 웃을 줄 알았다.

“……에잇.”

에레즈는 용기를 내서 칼리번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칼리번은 눈썹을 까딱거리기는 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

어지럽다. 고작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다시 잠이 밀려왔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품에 안은 채로 몸을 웅크렸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품 안에서도 그의 얼굴에 손을 떼지 않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웃음을 만들어 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칼리번은 소처럼 검은 눈을 끔뻑거리며 졸다가 마지막 잠에 빠졌다.

* * *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석양이 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칼리번은 아침부터 동굴 입구에 서서 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잠에 빠져 지내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카, 칼! 아, 안에, 드, 들어와 있어….”

간간이 등 뒤에서 에레즈의 애타는 부름이 들렸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 자리를 고수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다시금 터무니없는 잠에 빠질 것 같았다. 물론 지난 이틀 내내 잠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에레즈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칼리번은 바로 그 점을 경계했다.

절벽을 스치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칼리번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손은 배에 얹어 보았다. 젠과 전투를 벌였을 때, 칼리번은 무언가 꿈틀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무덤덤한 성격의 칼리번이 가져 본 적 없는 예민하고 연약한 박동을….

“…….”

칼리번은 아랫배를 꾹 눌러 보았다. 단단한 근육의 감촉 외에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이틀간도 그랬다. 배 속에서 다시 꿈틀거렸다면, 잠든 와중에도 눈치챘을 것이다.

‘…착각이겠지.’

전투 중 흥분과 긴장이 극단에 다다르면 환각을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칼리번의 손은 배 주변을 한참이나 더 배회했다.

“지, 진짜, 아, 안 들어올 거야…?”

“네. 말씀드렸다시피 석양이 질 즈음에 숲을 탐색하려 합니다.”

“아, 아직, 시, 시간이 머, 멀었는데……. 드, 들어와 있어도, 아, 알 수 이, 있는데…!”

“저는 이편이 낫습니다.”

“……그, 그래도.”

칼리번은 보이지도 않는 내장에 대해서 그리 깊게 생각지 않았다. 마물 혼혈이다 보니 몸이 뒤죽박죽되는 일은 흔했다.

“…저, 정말로, 거, 거기에만 이, 있을 거야? 그, 그럴 거야?”

“네. 왕자님께서는 위험하니 안에 계십시오.”

“아, 알아! ……아, 알지만, 흐음….”

그보다는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에레즈의 부름을 받아넘기는 데 집중했다. 에레즈의 목소리는 흡사 세이렌의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그가 부를 때면 칼리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잠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동료를 먼 곳으로 내몰고서 마음 편히 쉴 수야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절벽의 끝,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인 경계에 걸터앉아 있던 칼리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칼리번은 떠날 채비를 하고는 동굴 안쪽을 향해 외쳤다. 에레즈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했다. 헛된 희망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흐, 흥….”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답 대신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

그동안 수도 없이 불렀으면서, 정작 떠나려 하니 왜 인사를 받아 주지 않는 것일까?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심경 변화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칼리번은 굳이 한 번 더 말하고는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확실히 이틀간 휴식에 집중해서 그런지, 몸이 비교적 가볍게 느껴졌다.

* * *

석양의 그림자가 칼리번을 붉게 덧칠했다. 숲은 온통 불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칼리번은 가끔 눈이 부셨다. 칼리번은 작은 마물을 맨손으로 잡아 온몸에 피를 바르고, 몸뚱이는 씹어먹었다.

“…흠.”

마물이나 곤충을 먹으려고 할 때면 종종 느끼곤 했던 구역질도 더는 들지 않았다. 어쩌면, 젠을 만나기 전까지 잠시 마물의 독에 중독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자잘한 뼈를 잘근잘근 씹으며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젠…. 무사해라.’

칼리번은 속으로 젠의 무사 귀환을 바랐다. 그녀가 믿을 만한 동료 몇을 포섭하고, 무기도 되찾아 온다면 더할 나위 없다. 만약 별다른 성과가 없다고 해도, 칼리번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젠은 경험이 많은 알파였다. 가망이 없다 싶으면 무모한 기습이나 탐색 없이 바로 돌아올 것이다.

<만약 내가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한다면 바로 이곳을 떠나.>

부디 젠이 언급한 최악만은 아니길 바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칼리번은 복잡한 심경을 안고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젠이 먼저 도착한 모양인지,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

그러나 그 그림자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젠!”

칼리번은 주변에 마물이 있는지 살피며 빠르게 젠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다른 마물의 흔적은 없었다. 젠 홀로 피를 흘리며 여기까지 기어 온 것이다.

“대, 대장….”

젠은 저번 전투로 부러진 나무에 몸을 기댄 채로, 숨을 헐떡였다. 옆구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지 한쪽 팔로 감싸 안았고, 상체는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괜찮은 건가, 젠!”

“하… 하하…. 이제 와…?”

위급 상황임을 눈치챈 칼리번이 젠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지독한 피 냄새가 칼리번의 얼굴로 훅 끼쳤다.

“미안…. 일이 잘, 안 풀려서….”

“더는 말하지 마라.”

칼리번은 젠을 옮기기 위해 한쪽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한쪽 팔은 그녀의 무릎 아래에 넣었다.

“그보다… 왕자님은?”

젠이 물었다.

“…….”

칼리번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왕자님은 좀 어때… 괜찮대?”

“…….”

젠에게 왕자님에 대해 말한 적이 있던가? 칼리번은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며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니… 그런 적은 없었다.

“…윽, 젠장, 상처, 가… 크윽……!”

칼리번이 입을 열지 않자 젠은 갑자기 고통에 몸부림쳤다. 손으로 틀어막은 상처 부위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칼리번의 팔뚝으로 튀었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는 젠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으로….

“아, 허억, 큭…! 이러다, 죽을 것……. 도와줘, 대장….”

그러나 젠이 한 발을 비틀거리며 칼리번의 몸에 매달렸다.

“젠…….”

칼리번은 충격을 받았다. 어깨에 얹은 두 팔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사지가 다 부서진 젠을 등에 업고 산을 넘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젠의 몸이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이 가지는 최소한의 무게조차 되지 않았다.

“대장…?”

젠은 헐떡거리며 칼리번의 몸을 기어 올라갔다.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이 뼈가 없는 연체동물 같았다.

“왜 날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야? 내가… 이상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더니 코앞까지 끌려온 칼리번에게 입을 맞췄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칼리번의 검은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젠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자랑하곤 하던 다갈색의 두 눈이, 피보다도 짙은 적색으로 바뀌었다.

독을 머금은 것처럼 차가운 입맞춤.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젠의 모습은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지닌 청년으로 바뀌었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고였다. 그와 동시에 칼리번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이 갈퀴처럼 피부를 파고들었다.

“큭!”

날카로운 고통이 박혀 들었다. 칼리번이 몸을 뒤로 물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발아래에서 나무뿌리가 솟아올랐다.

“허억, 으윽!”

흙투성이인 촉수가 칼리번의 발목을 옭아매더니 빠르게 몸을 타고 올라왔다.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 또한 엄청났다. 촉수가 튀어나오면서 파인 땅 아래로 칼리번의 발이 움푹 꺼졌다. 그가 반항도 하기 전에 촉수가 무릎을 꺾었다. 커다란 몸이 휘청거리더니 강제로 무릎이 땅으로 처박혔다.

“윽…!”

칼리번은 양손으로 땅을 딛고 벗어나려 들었다. 그러나 마물의 본체는 땅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새로운 촉수가 솟아올라 두 팔마저 휘감았다.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칼리번의 주변에서 촉수가 몇 개나 더 튀어나왔다. 칼리번의 두 팔이 등 뒤로 꺾였고, 엎드린 상체가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으극……. 크, 으…!”

나무뿌리 형태의 촉수는 칼리번의 몸을 조각낼 것처럼 붉은 자국을 남기며 꽉 졸라맸다. 칼리번은 한계치까지 당겨진 활처럼 부러지지 않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어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거친 나무뿌리가 감긴 피부는 자국이 남다 못해 벗겨지기에 이르렀다.

“…….”

젠의 모습을 흉내 냈던 사내는 그런 칼리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는 촉수가 칼리번의 목과 머리를 옭아매, 그를 향해 고개를 들게 했다. 마치 경외하라는 것처럼.

“허억, 하아……. 큭….”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침을 삼키자 칼리번의 목젖이 흔들렸다. 그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소년인지 청년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이 가늘었다. 붉은 눈과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창백한 피부. 분명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과한 나머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숨이 불어넣어지지 않은 회화나 조각 같았다.

에레즈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감탄한 적 없는 칼리번에게 아름답다는 인상을 심어 줄 정도였다. 만약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마물 혼혈에게 흔해 빠진 붉은색이 아니었다면, 명화 속 성녀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이야.”

앳된 티가 묻어나는, 가는 목소리.

“두 번째로 만나네.”

그는 칼리번의 무릎에 오만하게 발을 올렸다.

<…너, 알파가 아니구나…?>

결혼식장의 비명과 울부짖음 사이에서 단 한 번 들었던 그 목소리가 겹쳐진다. 여섯째 왕자의 결혼식에서 보았던 오메가였다.

젠은 ‘그 오메가’라고 부르고, 사람들은 마물의 왕이라고도 부르는…. 칼리번은 그 오메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에어리얼.”

젠이 일부러 입에 담지 않았던 그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자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하하.”

붉은 오메가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화사한 미소였지만, 의도적이었기에 눈은 웃지 않는다.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칼리번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젠이 알려 줬나 보지?”

“…….”

“설마, 그런 것까지 알려 줬을 줄은 몰랐는데….”

에어리얼은 계단을 오르듯 칼리번의 양 무릎 위에 두 발로 섰다. 에어리얼은 가늘고 마른 편이었으나, 남성체인 만큼 어느 정도 무게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무릎이 부서지기는커녕 아무런 압박감도 느끼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만한 체구의 사내가 나뭇가지 하나만큼의 무게도 되지 않는다니….

그러나 그딴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검은 점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에어리얼 너머로, 수많은 마물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굉음과 함께, 비행이 가능한 마물들이 에어리얼의 주변으로 안착했다.

즉, 완벽한 패배였다.

“…젠을 어떻게 한 거지.”

마물 특유의 압박감을 느끼며, 칼리번이 물었다.

“내게 질문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에어리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부탁, 해야지?”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이 칼리번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칼리번은 시체에 닿은 것처럼 불쾌해졌다.

‘하필이면 마물의 우두머리가 직접 나서다니….’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에어리얼이 직접 움직인 데에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여섯째 왕자가 있다는 확신.

젠과 만났을 때부터, 이미 정보가 노출되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젠이… 자신을 속였거나.

최악의 가정. 부디 그것만은 아니리라 믿고 싶었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이 아니었기에 정답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붙잡혔으니 자신은 죽는다는 점이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속으로 그를 찾았다. 칼리번이 죽은 후 마물의 추적을 피해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혼자 남게 된 그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데.”

“……!”

“그 여자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아니면, 숨겨 둔 왕자가 걱정돼?”

“날 도발하지 마라.”

에어리얼은 짐짓 다정하게 칼리번에게 말을 걸었다. 칼리번은 이를 갈았다.

“젠은 어제 수도에 도착했어. 바쁘더라고…. 날 만나러 올 틈도 없을 정도였다니까. 내 휘하의 마물 혼혈들을 감시하고, 인간들의 쓸데없는 무기를 쌓아 둔 창고에 잠입했더군.”

“……큭.”

“아마 내일이면 네 무기를 들고 이곳에 무사히 도착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젠의 행동반경을 일일이 읊어 주다니, 자신을 두고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다.

“젠은 자기가 전염병을 옮기는 쥐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뜻이지.”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뺨을 감쌌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차가웠다. 칼리번은 인상을 썼다. 에어리얼의 말대로라면 젠은 무사하며, 동시에 그의 편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과연 그 말을 순순히 믿어야 할 것인가?

“아하하,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말라니까. 알테르를 피해서 널 따로 만나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는데…. 알면 깜짝 놀랄걸?”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무릎 위에서 가뿐히 내려왔다.

“너와 여섯째 왕자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그는 칼리번에게 등을 진 채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야.”

“……거래?”

뜻밖의 말이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래, 젠과 에레즈 프리드웬을 맞바꾸는 거야. 음…. 좀 더 정확히 제안하자면, 네가 젠과 함께 도망쳐 줬으면 좋겠어.”

뜻밖에도 에어리얼은 꽁꽁 묶인 칼리번에게 부탁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나는 여섯째 왕자의 행방 따위 모른다.”

칼리번은 딱 잡아뗐다. 물론 통하지 않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몸을 사려서 나쁠 것은 없다. 에어리얼의 애원하는 말투와 달리 이 거래는 칼리번에게 조금도 공평하지 못했다. 만약 에어리얼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칼리번은 자신을 둘러싼 마물들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말 테니까.

“아, 하하….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둬. 같잖아서 웃기니까. 그런 몸이 되었는데 여섯째 왕자의 행방을 모른다고?”

그러자 에어리얼은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피로 얼룩진 칼리번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얽매인 칼리번의 몸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알테르는 그 왕자님을 원해. 그래서 막내 왕자님까지 풀어 줄 수는 없어. 하지만 왕자님만 나에게 넘겨준다면, 너와 젠은 건들지 않도록 막아 줄 수 있지.”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알파들 사이에서 피로 만든 붉은 가면이 지워지고 맨살이 드러나는 것이, 피부가 벗겨지는 것처럼 두려웠다.

에어리얼은 세상 모든 이치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젠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에레즈에 대해서. 그래서 한 마디라도 어설프게 꺼내면, 속에 숨겨 둔 것을 전부 탈탈 털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한 번쯤은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봐, 용병.”

칼리번이 말을 아끼자, 에어리얼은 커다란 개를 대하듯 그의 코를 툭툭 쳤다.

“그동안 널 본성으로 불러들였던 게 누구라고 생각해? 에레즈? 알테르?”

“…….”

“아니, 나야.”

칼리번은 굳은 얼굴로 두 눈만 천천히 깜박일 뿐이었다. 그러나 몸속에서는 쿵,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흔들렸다. 심장이 끊어져 발치까지 떨어졌다.

<초, 초대, 장? 나, 나, 나는, 그, 그런 거, 자, 잘 모, 몰라….>

칼리번과 젠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아니었다. 앞서 에레즈가 고백한 바가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운명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도구적으로 이용한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무언가가… 둔감하고 멍청한 칼리번으로서는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낯선 무언가가 부서져 버린 것만 같았다.

“대장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부대장만 부르면 이상하잖아?”

에어리얼은 그런 칼리번이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을 뿐인데…. 흐응, 그 여자는 전과 다를 바 없더군.”

에어리얼은 한숨을 내쉬고는 촉수에 꽁꽁 묶여 있는 칼리번에게 떨어져 주변의 마물들에게 다가갔다.

“더럽고, 추접스럽고, 입이 걸걸하고…. 내가 없는데도 여전했어.”

마물들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 매인 사냥개이자 병사였다. 에어리얼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당장 칼리번을 찢어 버릴 것이다.

“……근데 말이야. 젠이 어디까지 알려 주었지? 내가 그녀와 아는 사이라는 것?”

에어리얼이 불현듯 물었다.

“젠은 네가 죽었다고 했다.”

칼리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만을 말했다.

“그래…? 맞아, 난 유령이야.”

에어리얼은 그 말이 반갑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쓸쓸함은 가짜로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

젠은 에어리얼을 자신이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에어리얼의 태도를 보고 있자면… 그다지 살해당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알겠어? 너는 그저 내가 벌인 연극의 들러리에 불과해. 젠을 데려온 것으로 네 역할은 끝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젠에게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칼리번이 물었다. 왜냐면 젠과 숲에서 재회한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둔감한 칼리번이 보아도, 아니… 객관적으로 보아도, 등허리에 쇠말뚝이 박힌 젠의 모습은 ‘재회’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날 두고 다른 오메가와 함께 있었잖아. 그걸 어떻게 참겠어?”

에어리얼은 당연한 권리라는 듯 대답했다.

“그 정도는 가벼운 심술이지. 젠도 이해할 거야. 우리 사이는 그랬으니까.”

“…….”

“…너 따위는 모르겠지만.”

그 당당함에 칼리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에어리얼의 입술은 항상 웃고 있었으나 붉은 두 눈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몸에서 흘러내려 식어 버린 피처럼.

칼리번은 그와는 어떤 대화를 나눠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결혼식에서 네가 멋대로 에레즈를 데려간 탓에 약간 일이 틀어졌어.”

“…….”

“알테르가 젠에게 팔이 잘려서 말이지. 내가 벌을 준 걸로도 모자란가 봐. 기어이 목을 베고 싶어 해.”

복수는 핑계고 마물이 된 젠의 목을 성에 장식하고 싶은 거겠지만. 에어리얼은 코웃음을 치며 마물의 품에 안겼다. 여러 가지 짐승의 현상이 결합한 마물은 인간의 체격인 에어리얼보다 곱절은 더 컸다. 마물들은 에어리얼이 다가오자 그의 몸에 코를 대고 숨을 쉬고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도 번들거리는 눈길만은 칼리번을 향하고 있었다.

“네가 젠을 데리고 떠나면, 나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데려가서 알테르를 진정시킬 거야. 어때, 완벽하지?”

에어리얼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계획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신을 위해서 위험천만한 수도로 향한 동료의 목숨. 연약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허울뿐인 왕자님의 목숨. 그중에 무엇이 귀한지는 누구라도 쉽게 답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멍청한 칼리번이라도 답을 아는, 간단한 숫자 놀음이다. 자신과 젠의 목숨 두 개와 하나의 목숨을 교환하는 거다.

“…….”

그러나 칼리번은 순순히 에레즈를 바치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조개처럼 입을 다물기만 했다.

“넌 누구보다도 내 제안에 대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거야, 칼리번.”

에어리얼이 손을 까딱이자, 칼리번의 온몸을 묶은 촉수가 그를 강제로 일으켰다.

“으윽…!”

발목을 겹겹이 감싼 촉수가 뒤로 당겨지고,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몸이 일으켜졌다. 심지어 발이 땅에 한 뼘 정도 뜨기까지 했다.

“아무리 멍청한 용병이라고 해도 이젠 깨달았겠지? 네 몸에서 오메가 냄새가 풀풀 난다는 걸.”

“그게…… 무슨 소리냐.”

“젠에게 내 얘기를 들었으면 다 알 텐데.”

칼리번은 두 팔을 등 뒤로 묶인 채, 에어리얼을 향해 가슴을 드러내고 목을 뻣뻣이 들게 되었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품 안에 들어가 가슴에 뺨을 기댔다.

“아, 이것 좀 봐…. 알파가 환장하는 젖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에어리얼은 칼리번보다 까마득히 나이가 많은데도, 어리광이 많은 동생처럼 고개를 부빗거렸다.

“이렇게 완전하게 발현한 오메가는 말이야, 더 이상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

“흣!”

“알파들에게는 몇 없는 귀중한 오메가니까….”

에어리얼은 조용히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칼리번의 가슴 위를 동그랗게 그렸다. 칼리번의 몸이 순간 흔들렸으나 촉수는 목을 흔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설령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도, 땅속으로 숨을 수 있다고 해도, 바닷속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결국 마물이 널 찾게 될 거야.”

“으, 으윽….”

“사냥개가 냄새로 먹잇감을 추격하는 것처럼, 알파는 네 체취를 따를 테니까. 마물에게는 오직 오메가를 향한 본능밖에 없거든….”

에어리얼의 손길은 노골적으로 칼리번의 가슴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은 드물게도 표정이 없었다.

<그 녀석을 뺏어 가려고 매일 엄청난 수의 마물이 우리를 덮쳤다.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어. 지금이라면 이겨 낼 수 있었을까? 아니…. 마찬가지야. 지켜 줄 수 없겠지. 만약 그대로 빼앗긴다면 그 녀석은 마계로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새끼를 치겠지. 그래서….>

칼리번은 깃털로 몸을 간지럽히는 듯한 자극을 참아 내며, 젠의 말을 떠올렸다.

결국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고백했었다. 그러나 그 오메가는 죽지 않았고, 젠의 우려대로 결국 마물을 낳는 괴물이 되었다. 그것이 오메가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래이다.

“…하지만 나는 마물을 다룰 수 있어.”

“큭!”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가슴을 한 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칼리번이 이를 악물었다.

“네가 협력해 준다면, 너의 존재를 가려 줄게. 찾지 못했다고 거짓말도 해 줄게. 국왕 전하께서도 전하의 동생을 되찾고 나면 너희에게는 관심이 없을 거야. 그 후로는 어디로든 도망치면 되잖아?”

“흐, 크읏…. 그, 그만둬….”

“거기다 나는 오메가니까, 마물이 너와 젠을 쫓거나 공격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어. 약속할게.”

에어리얼은 붉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칼리번을 응시했다. 에레즈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에레즈의 눈빛이 보석의 반짝임이라면, 에어리얼의 눈빛은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번뜩임이었다. 고결한 말밖에 하지 못할 것 같은 아름다운 입술과 달리, 그의 손은 칼리번의 가슴에서 흡사 젖이라도 짜내려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움직였다.

“아, 읏!”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에어리얼의 손가락이 칼리번의 유두를 세게 짓누르면서, 동시에 그의 얄쌍한 다리가 칼리번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칼리번의 검은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에어리얼은 오메가였고, 자신도… 어찌 되었든 간에 오메가였다. 본능적으로 체취에 성욕을 느끼는 알파들과는 달랐다.

‘그런데 어째서….’

문득 칼리번은 눈동자를 굴려 에어리얼 너머를 훑었다.

“!”

칼리번을 감시하던 마물들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급하게 숨을 삼켰다. 칼리번이 용병 대장이었을 때, 마물은 그를 돌멩이 보듯 했다. 그것도 아니면 죽여야 하는 알파 경쟁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물의 근육과 털이 부풀어 오르고,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당장에라도 에어리얼과 칼리번에게 달려들어 몸 위로 올라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에어리얼은 마물들의 흥분을 일부러 돋우고 있었다.

그제야 에어리얼의 의도를 파악했다. 범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

“크윽…. 그만둬….”

“마물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 매번 얼마나 즐겁고… 죽고 싶은지.”

에어리얼의 손이 칼리번의 이마를 짚었다.

“조금만, 보여 줄게.”

* * *

에어리얼의 말과 함께 속박이 풀렸다. 허공 위에서 버둥거리던 칼리번의 몸이 아래로 쑤욱 내려갔다. 그러나 발은 한참이 지나도 땅에 닿지 않았다. 그가 예측했던 깊이 이상으로 추락할 뿐이었다. 나무뿌리라도 쥐어 보려 했지만,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첨벙!

추락의 끝은 단단한 대지가 아닌 물이었다. 칼리번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헉…. 허억…!”

처음에는 수심이 가늠되지 않아 허우적거렸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도 가슴 아래까지 오는 깊이에 불과했다.

“하아…. 하아….”

흠뻑 젖은 칼리번은 손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정체불명의 물. 그 액체가 눈꺼풀 안까지 스며들었는지 두 눈이 따끔거렸다. 칼리번은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변이 어두워 물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물’이라고 하기에는… 밀도가 짙었다. 마셔 보면 확실히 구별할 수 있겠지만, 물컹하고 건더기가 있어 찝찝했다.

칼리번은 손으로 그 물을 떠 보았다.

“……?”

‘물을 손으로 뜨겠다’는 칼리번의 생각보다 행동이 두세 배는 느렸다. 칼리번은 배를 탄 사람처럼 심한 멀미를 느꼈다. 자신의 몸인데도, 마치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칼리번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부는 하얗고 손가락은 가늘었다.

“윽….”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사람의 손을 떼어다 붙인 것처럼 낯설었으나, 다시 눈을 뜨니 본래의 커다랗고 짙은 색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칼리번은 무의미한 눈싸움을 그만두고 주변을 살폈다.

“여긴….”

방금까지만 해도 그는 에어리얼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었으며 주변은 어둠뿐이었다.

아래에는 영문 모를 액체의 호수였고 위는… 밤하늘이었다. 칼리번의 머릿속에서 떠올릴 만한 단어가 ‘밤’뿐이라서 그렇게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이곳이 그보다 훨씬 더 시꺼멓다. 달도, 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름에 가려져서가 아니라, 애초에 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였다.

‘아무도 없는 건가….’

물도 하늘도 똑같이 검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판가름할 수 없는 검은 땅. 심약한 자였다면 공포에 휩싸여 꼼짝도 하지 못했을 어둠이었다.

칼리번은 횃불 하나 없으면서도 몸으로 물을 헤집으며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가슴까지 차오른 걸쭉한 액체는 칼리번을 붙잡기에 바빴다. 몸의 반 이상이 물에 잠긴 채 걷는 일은, 푹 젖은 펄이나 모래사장을 걷는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이 무거웠다.

“후우…. 하아, 하아…….”

더구나 어두운 물은 빠르게 체온을 빼앗았다. 피로가 빠르게 몰려왔다. 결국 그는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조금은 이동한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인가. 그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칼리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처음 이곳에 떨어질 때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앞뒤, 좌우가 분간되지 않는 공간은 시간마저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 오래도록 버려져 있으면 누구라도 미쳐 버린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굶어 죽거나 지쳐 주겠지만…….

“……윽.”

칼리번은 비틀거렸다. 시간이 지나자 처음 느꼈던 멀미가 다시 몰려왔다. 영혼이 억지로 다른 이의 몸에 묶여 있는 것처럼, 존재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칼리번은 두려움에 두 팔로 제 몸을 끌어안았다. 이것은 칼리번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시선을 이곳저곳에 던졌다.

“도와줘…….”

칼리번이 중얼거렸다.

“…….”

칼리번은 다른 사람이 말을 건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의지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누구냐.”

칼리번이 인상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고 자기 자신에게 위협을 했다. 칼리번은 제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으나, 검은 물 위로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는 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퍽…!

“—?!”

퍽……!

귀가 먹을 정도의 정적 속에서, 칼리번은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칼리번은 다시 물을 헤쳤다. 혹여 주변에 다른 사람이나 마물이 있는 것인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한참을 물 위를 헤매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소리만이 계속해서 들려올 뿐.

“…….”

주변을, 아래를 살펴보던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최대한 시력을 활용하기 위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칼리번은 흰 점 하나를 발견했다. 드넓은 어둠 속에서 티끌에 지나지 않는 그 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유일한 빛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흰 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은 칼리번이 온 이후로 조금씩이나마 확장되고 있었다. 마치 하얀 잉크를 깃펜으로 찍어, 한 점을 계속 찍어 나가는 것처럼…. 미약하고 느리지만, 계속해서.

하얀 양피지 위에 점을 찍는 것이 뾰족한 깃펜이라면, 그저 어둠뿐인 허공에는 무엇이 점을 찍고 있단 말인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타격음은, 흡사 벽에 부딪히는 소리와도 같았다.

“아….”

그것은 마물이었다.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하늘에 제 몸을, 손을, 머리를 부딪치고 있었다. 칼리번은 두 눈을 의심했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마물들이 달려들어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지면서도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벽에 부딪혀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마물은 그대로 검은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구멍을 넓혀 갔던 것이다. 흰 점이라 생각했던 구멍은 인간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이게… ‘검은 손자국’이라고…?”

칼리번은 무수히 겪었던 마물들의 침입을 떠올렸다. 갑자기 하늘을 뒤덮는 검은 자국들. 쏟아지는 마물들…. 그러나 마물이 인간계로 침입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저들은 왜 이렇게까지….”

칼리번은 굵고 낮은 제 목소리가 아니라, 소년의 목소리로 물었다. 마물은 본능뿐인 괴물이었다. 그들에게 명예라든가, 정의라든가… 논리나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남고 씨를 뿌려 번식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까지 불사하면서 인간계의 문을 열려고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오메가.”

칼리번은 중얼거렸다.

“오메가를 찾으러 가는 거야.”

그리고 그 순간, 그저 걸쭉한 액체라고만 생각했던 물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것은 다짜고짜 칼리번의 팔을 붙잡았다.

“큭!”

칼리번을 붙잡는 것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칼리번은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것들을 떼어 내려 했으나 수적으로 역부족이었다. 그것들은 칼리번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윽—!”

평소의 그였다면 충분히 떼어 낼 힘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속수무책으로 물속으로 빠졌다. 진득한 액체가 칼리번의 눈과 코, 입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입이라도 다물어 봤지만 한발 늦었다. 서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비릿한 쇠 맛이 혀로 느껴졌다.

익숙한 맛이었다. 피와 살, 그리고 내장…. 몇 가지 추측이 저절로 떠올랐다. 구역감이 치밀었다. 칼리번이 물 위로 고개를 들려고 하자 밧줄처럼 길고 가는 촉수가 목을 졸랐다. 칼리번의 입에서 부글거리며 공기가 빠져나갔다.

“읍, 흐읍…!”

검은 물의 바닥까지 끌려들어 간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마물의 정체를 파악해야지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맑은 물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눈앞에 자그마한 핏덩어리들이 부유했다.

그리고….

“크윽— 커헉!”

칼리번의 목 안에 남아 있던 공기가 물방울이 되어 빠져나갔다.

‘이, 이건…….’

칼리번은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충격으로 인해 물속에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차피 남은 숨도 없었다. 검은 물 아래에 마물들이 틈 하나 없이 빼곡히 깔려 있었다. 그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마물의 수를 일일이 따지는 일은 바다에서 모래의 개수를 세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여태껏 칼리번이 서 있고, 허우적거리고, 걸어 다녔던 바닥은 전부 잠든 마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마계의 땅은 마물의 살과 내장, 뼈이며 그 위를 덮은 물은 그들의 피였다.

그들은 마치 바닷속에 잠긴 괴물의 조각상들 같았다. 칼리번이 보아 왔던 마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인간계를 침입하는 마물들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대했으며, 경외를 자아낼 정도로 끔찍한 생김새였다.

“……읏…!”

억지로 바닥까지 끌어당겨진 칼리번은 어느 마물의 몸 위에 안착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둥그런 살덩어리였는데, 팔이나 얼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어느 마물의 배나 엉덩이라고 생각했다.

칼리번이 닿자, 마물의 피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래에 위로, 피부가 밀려 올라갔다.

“—!”

곧 칼리번의 덩치보다 커다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처음 칼리번이 부딪친 피부는 거대한 마물의 눈꺼풀이었던 것이다.

괴물의 눈은 칼리번을 기괴하게 바라보았다. 칼리번은 괴물의 눈에 비치는 희미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마르고 가는 소년처럼 보이다가, 마물이 눈을 한번 깜박이니 커다란 체구의 사내의 모습으로 보였다. 괴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잠든 마물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검은 물속이 갑자기 눈알들로 가득해졌다.

“읏, 큭…!”

수천 개의 눈동자가 일시에 칼리번을 향했다. 그는 죽음의 호수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살아 있는 미끼였다. 땅이 더는 땅이 아니었다. 대지가, 아니, 마물들이 뒤틀리고 움직이며 칼리번을 더욱 아래로 끌어 내리려 들었다. 점차 숨이 부족해져 눈앞이 흐릿했다. 폐로 공기 대신 걸쭉한 핏물이 차올랐다.

“으윽— 흡, 크읍……!”

어서 물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눈알을 발로 걷어차 추진력을 얻었다. 괴물들이 팔을 뻗어 칼리번을 붙잡았다. 칼리번은 괴물의 눈알을 짓밟으며, 손으로 짓뭉개며 간신히 얼굴을 물 위로 들어 올렸다.

“허억! 헉, 헉…!”

목 끝까지 차오른 피를 토해 내자,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왔다. 호흡의 쾌감은 잠시였다. 칼리번은 갈 곳도 없으면서 무작정 도망쳤다. 그러나 발을 딛는 모든 땅이 마물이었고, 몸을 덮는 것은 그들의 피였다.

잠든 마물들이 깨어나기 시작하자 더는 평범하게 걸어 다닐 수 없었다. 그는 반은 걷고, 반은 헤엄을 쳤다. 피로 흠뻑 젖은 몇 번이나 넘어지고 물 아래로 끌려갔다. 칼리번은 마물에 비하면 체구가 작았고 훨씬 필사적이었다.

그는 하인들에게 쫓기는 생쥐처럼 붙잡힐 때마다 목숨을 걸고 발버둥 쳤다. 칼리번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마물의 끔찍한 외양이나 끝없는 어둠이 아니었다. 바로 끝이 없다는 데 있었다.

방어전은 마물의 습격이 끝난 후까지 버티는 데 있었다. 마물은 마계에서 넘어오기 때문에 그 수는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동료도, 지켜야만 하는 인간도, 버틸 수 있는 목표도 없었다. 오직 마물들뿐이었다. 칼리번은 거대한 짐승들 사이에 던져진 먹잇감에 불과했다. 칼리번의 결말은 오직 마물에게 붙잡혀야만 끝이 나는 것이다.

“젠, 도와줘…. 젠!”

칼리번은 출구 없는 미궁을 헤매며 자신을 구해 줄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인지 소년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았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칼리번은 제 목을 움켜쥐었다.

“커헉, 윽, 큭…!”

기침을 몇 번 내뱉자 제 목소리로 돌아왔다.

“하아, 허억…….”

그러나 칼리번은 부를 이름이 없었다. 자신을 낳고 죽었을 친아버지, 이미 죽은 양부모님, 두고 온 여동생, 수도에 남겨진 동료들, 적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젠, 그 무엇도 칼리번을 구해 줄 수 없었다….

“……, ….”

칼리번의 입이 누군가의 이름을 뻐끔거렸으나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낚싯바늘에 꽂힌 미끼가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지르며 물속에서 꿈틀거리자 핏물 속에 잠겨 있던 마물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땅은 수도 없이 지진이 일어났고, 솟아올랐다가 물속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높은 지대를 찾아다녔다.

“읏, 윽…!”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친 칼리번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 허리를 끌어안거나 다리를 끌어당기는 마물들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어느새 개처럼 네 발로 엎드린 채였다.

‘이젠 끝이다.’

칼리번은 포기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끈질기게 들러붙는 마물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대신 산이 생기는 것처럼 마물의 내장과 살덩어리로 만들어진 탑이 눈앞에서 솟아올랐다. 주변의 땅이 솟아오르면서 칼리번의 움직임을 억누르던 수심도 점차 얕아졌다. 땅이 기울어지고, 경사가 지자 칼리번의 몸이 위로 쑥 올라갔다.

“…!”

어느샌가 칼리번은 분간도 되지 않는 살덩어리를 움켜쥔 채로 탑에 매달려 있었다. 탑의 재료가 되어 버린 마물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돌처럼 굳은 채였다. 갑자기 되살아나 자신을 위협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칼리번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마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탑에 융화될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해 감히 칼리번을 잡으러 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마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탑은 높고 높아서, 그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칼리번은 마물들의 습격을 피해 탑 위로 필사적으로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탑 일부가 되어 굳어 버린 마물들은 제각기 흉측하고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 모습은 지옥을 묘사한 조각상 같았다.

목표도 없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암벽이나 다를 바 없는 탑을 기어오르던 칼리번은 탑 꼭대기에 익숙한 형체를 발견했다.

“저건…?”

칼리번은 눈을 의심하면서도, 그곳을 목표로 삼아 빠르게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어둠과 살덩어리뿐으로, 인간의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탑의 정상에는 인간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어쩌면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마물들에게 동화되어, 미쳐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기어 올라갔다.

칼리번은 평소보다 훨씬 더 헐떡이고, 움직임이 둔했다. 몸이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지고 매가리가 없었다. 피로와 공포는 칼리번을 수시로 아래로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꼭대기까지 올랐다. 그즈음, 칼리번은 온몸은 자신의 것이 아닌 마물의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힘을 다 소진한 탓일까. 정상에서 쓰러진 칼리번은 몸을 똑바로 일으켜 두 발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하아, 하아….”

그래서 칼리번은 네발로 기었다. 탑의 정상, 그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의자였다. 저 아래에서 ‘의자’라고 생각했던 물체는 착각이 아니었다. 마치 마계의 재료로 만든 것처럼 살과 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형태는 명백히 의자였다.

의자의 등받이와 좌판 부분은 대퇴골이 부챗살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면을 이루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가죽과 살로 여며져 있었다. 팔걸이는 두툼하고 거대한 뼈다귀가 두 대 놓였다. 확실히 인간의 의자와 비슷했다. 다만, 기본은 뼈로, 나머지는 살과 내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의자는 사람이 앉을 수 없는 구조였다. 왜냐면 의자의 등받이 부분에는 마물의 몸에서 통째로 뽑아낸 듯한 갈비뼈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짐승의 이빨처럼 쩍 벌어진 채였다. 만약 인간계의 의자처럼 등을 기댄다면, 그대로 몸이 관통될 것이다.

“그럼 이건, 무슨….”

고민하던 칼리번은 의자가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마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만약 여기에 앉는다면, 밤하늘을 훤히 바라보게 될 것이다. 조금씩 넓어져 가는 흰 점을, 인간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말이다.

‘여기에 앉아 있다가, 마계의 문이 열리면 나가는 건가…?’

앉을 수 있는 구조는 아니지만…. 그것은 칼리번이 스스로 한 생각이 아니었다. 칼리번의 내부에서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만약 그 가정이 옳다면… 지친 칼리번은 그 의자를 좀 더 살피기 위해 네발로 기어갔다. 그리고 막 팔걸이에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

의자는 뜻밖에도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생물에게만 존재하는 맥박 또한 지니고 있었다.

“…윽?!”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팔걸이에서 검붉은 촉수가 튀어나와 칼리번의 손목을 휘감았다. 칼리번은 서둘러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날붙이 하나 없는 지금, 악력만으로 겹겹이 감기는 촉수를 끊어 낼 수는 없었다. 아니, ‘칼리번’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곳에 있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흣, 크으…!”

칼리번은 한쪽 팔로 다른 팔을 붙잡으며 강제로 빼내야 했다. 팔을 잘라서라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반대로 몸은 점점 의자 쪽으로 끌려갔다. 이대로라면 의자에 붙은 마물의 뼈에 찔려 죽게 된다.

“헉!”

그런 칼리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등받이에 박혀 있던 갈비뼈가 가닥, 가닥 끼긱거리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활짝 벌어졌다. 의자가 삐걱거리며 웃는 것만 같았다.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아, 크으윽!”

질질 끌려들어 가던 칼리번은 결국 강제로 의자에 앉혀졌다. 등이 등받이에 닿는 순간, 활짝 벌어진 갈비뼈가 칼리번의 가슴 아래, 인간의 늑골이 자리 잡은 부분을 감싸 안았다.

“윽— 으으윽!”

까드득, 마물의 뼈가 칼리번의 흉통을 조였다. 칼리번은 몸통을 버둥거렸으나 가슴 아래로 무수한 상처만 입힐 뿐이었다. 마물의 뼈에는 잔가시가 돋아 있었고 칼리번의 피부를 깊게 파고들었다.

“흐으, 허억….”

뼈로 만들어진 코르셋이 몸통을 조이자 허리가 저절로 휘었다.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칼리번이 조금이라도 숨을 편히 쉬기 위해 목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등받이를 이루던 뼈다귀 중 하나가 구부러지더니, 칼리번의 목을 조였다. 목젖을 눌린 칼리번은 기침을 했다.

“흐, 헉, 허억…. 윽….”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이, 그저 허공만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칼리번의 두 팔과 다리는 밧줄에 묶인 것처럼 팔걸이와 의자 다리에 묶인 지 오래였다.

“읏……. 후우….”

시야를 아래로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공포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더욱이.

칼리번은 검은 눈동자를 최대한 아래로 굴렸다. 그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려 할 때마다 목줄이 된 뼈가 턱에 덜컥 걸렸다.

“……으, 음…?!”

굵은 촉수가 뱀처럼 땅을 기며 다가오더니, 칼리번의 발목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축축한 감촉은 마치 촉수의 전신이 혀로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촉수는 칼리번의 피부를 쓸며 진액을 남겼는데, 피에 젖은 옷이 녹아 가는 것이 느껴졌다. 촉수가 체액으로 녹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가죽이나 천은 가는 촉수들이 뒤덮어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만둬,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팔과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뼈로 된 코르셋이 더욱 세게 흉통을 조일 뿐이었다.

“……큭, 젠장….”

몸을 가려 주는 옷이 전부 사라졌다. 칼리번의 몸 위에는 이제 가슴 아래를 조이는 흰 뼈밖에 남지 않았다. 굵은 촉수는 거침없이 칼리번의 맨몸을 훑었다. 평생을 대검을 휘두르며 지내 온 그의 몸은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탄탄한 바위와도 같았다. 촉수는 옷을 녹일 때와는 다른, 훨씬 끈적거리는 액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읏…!”

처음에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으나, 촉수가 체액이 묻은 부분을 문지를 때마다 피부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촉수가 문지르지 않는 피부는 괴상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그 차이가 극심해졌다. 피와 체액이 듬뿍 묻은 짙은 갈색의 피부는 숨을 크게 가슴이 흔들릴 때마다 번들거렸다.

또 다른 촉수가 이번에는 칼리번의 머리 옆에서 자라났다. 수컷의 성기를 빼닮은 촉수가 꿈틀거리며 다가오더니, 칼리번의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으윽…?!”

칼리번은 뒤늦게 고개를 저었으나 목이 고정된 상태에서는 가벼운 흔들림에 불과했다. 눈이 없는 촉수는 칼리번의 얼굴에 자리 잡은 구멍에 모조리 들이대 보았다. 움푹 들어간 눈가, 좁은 코, 울퉁불퉁한 귀, 그리고….

“흐읍, 읏…….”

마지막은 입이었다. 두툼한 촉수를 품을 수 있는 구멍은 거기가 적당했다.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거대한 귀두가 그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칼리번은 입술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힘을 주었다. 만약 촉수가 입안으로 들어온다면, 숨이 막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촉수는 칼리번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두툼한 몸통으로 얼굴 전체를 덮어, 일부러 숨을 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흐… 으읏, 읍… !”

호흡이 부족해진 칼리번은 결국 입을 벌리고 말았다. 억지로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앞니를 꾹, 꾹 누르던 촉수가 입 안으로 쑥 들어왔다.

“흐응, 읏……!”

엉덩이를 대고 앉은 의자의 좌판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더니, 거대한 혀가 돋아난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그 혀가 칼리번의 아래를 핥기 시작했다. 의자의 혀는 칼리번의 다리 사이를 전부 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길이와 크기였다. 축축이 젖은 혀가 성기와 구멍 사이의 예민한 살결을 살살 쓸어 댔다. 아래를 자극하는 생소한 감촉에 칼리번은 입을 벌리며 몸을 뒤틀었다.

“흐, 으응, 그, 흐으, 그만…!”

이제는 반항의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칼리번의 입 안을 차지한 촉수가 더 깊은 구멍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헤집었던 것이다. 촉수가 내벽을 문지를 때마다 볼이 귀두 모양으로 불룩거리며 튀어나왔다. 칼리번은 혀를 뒤로 물려 촉수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 촉수는 드러난 혀 아래의 물컹한 살을 쓸어 댔다.

그사이, 아래에서는 또 다른 혀가 칼리번의 입구를 적시고 있었다. 긴 혀는 엉덩이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전체를 적시다가, 칼리번의 입구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집중했다. 혀는 단순히 핥는 것이 아니라, 입구 안쪽으로 파고들기까지 했다. 칼리번은 가슴을 들썩이며 몸을 떨었다. 칼리번을 고정시키기 위해 피부에 파고드는 뼈와 가시 아래로 그의 피가 줄줄 흘렀다.

“흐으, 으, 큿…!”

혀는 칼리번의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살이었다. 고작 혀로는 마물의 촉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칼리번은 목구멍을 찌르려 드는 촉수를 혀로 밀어냈으나 도리어 그것의 크기를 키울 뿐이었다. 성기 모양의 촉수는 귀두를 칼리번의 목구멍에 맞추고는 제 것을 찔러 넣었다.

“응, 으읏—!”

칼리번은 애써 목구멍을 조이며 거부했지만, 촉수는 억지로 밀고 들어갔다. 큽, 큿, 칼리번의 입에서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났다.

“읏, 흐, 흐으, 으….”

목구멍보다 커다란 성기가 목구멍을 채우자, 칼리번의 목이 겉으로 보기에도 불룩 부풀어 올랐다. 촉수가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칼리번은 몸에 힘을 줄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가는 목구멍이 찢어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몸 어느 한 곳에 힘을 주고, 어느 한 곳에는 힘을 푸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흐, 아, 하아…….”

근육이 부풀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팔과 다리도 점점 긴장이 풀려 갔다. 이제 칼리번은 목구멍을 차지한 부푼 성기를 잘 받아들이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칼리번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부푼 촉수가 쑤걱거리며 목구멍을 오갔다. 촉수는 체액을 조금씩 토해 냈고, 오가기가 수월해지자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응, 으응, 읏……. 흣….”

촉수가 목구멍을 오가는 감촉이 이상했다. 체액과 침이 섞인 액체가 밀려 나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칼리번이 비교적 얌전해지자, 칼리번의 옷을 찢었던 작은 촉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는 촉수 다발은 칼리번의 몸 구석구석을 건드렸는데, 특히나 그의 가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칼리번의 살냄새를 맡고는 그곳에서 알파를 위한 젖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읏…!”

촉수를 삼키던 칼리번의 목구멍이 순간 꽉 조였다. 가는 촉수가 젖꼭지를 건드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튀어나오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간 유두를 작은 구멍으로 인식했는지 가는 촉수는 뭉툭한 그곳을 쿡, 쿡, 찌르며 파고들 생각을 했다.

“흐으으….”

칼리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그마한 촉수들이 그의 양 가슴에 머리를 묻고는 문질렀다. 일자로 다물린 살이 벌어지고, 촉수가 안쪽에 자리 잡은 유두와 맞닿았다. 온몸에 가해지는 자극에 칼리번은 아랫배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고 목도 뻣뻣하게 굳었다. 꼴깍거리며 간신히 숨과 침을 삼켰다.

“하, 흐으, 읏….”

칼리번의 비부를 축축해질 정도로 훑던 혀가 엉덩이 사이를 깊게 파고들었다. 혀끝이 입구를 파고들었다.

“읍, 흐으!”

숨이 턱 막혀 왔다. 마물은 마치 칼리번의 몸에 존재하는 모든 구멍을 제 성기로 채우고 싶은 것 같았다. 다행히도 마물의 아래 혀는 촉수나 성기보다는 뭉툭하고 딱딱하지 못했다. 다만 뾰족하게 세우고는 칼리번의 입구를 계속해서 핥아 댈 뿐이었다. 매끄러운 감촉이 내벽을 파고는 감각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칼리번의 등이 휠 때마다 흉통을 붙잡은 코르셋이 그를 도망치지 못하게 꽉 조였다.

쏟아지는 자극으로 인해 검은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머릿속이 점점 희뿌옇게 변했다. 성기 자체는 만져지지도 않았는데 다리 사이에서 곧추서는 것이 느껴졌다.

“흐읍……. 으읏….”

의지나 이성과는 상관없는 생리적 반응이, 칼리번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의 온몸이 마물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었으나 멀리서 보기에 칼리번은 그저 의자 위에서 앉아 있는 것에 불과했다. 허리를 펴고 꼿꼿이 앉아 있는 그는 왕과도 같아 보였다.

“하, 흡…….”

또 다른 촉수가 다리 사이로 다가왔다. 칼리번의 성기 끝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는 정액을 빨아먹었다. 촉수가 핥을 때마다 칼리번의 성기가 다리 사이에서 꺼떡거렸다. 그 또한 뭉툭한 자극이었다.

“으, 으읏…!”

칼리번의 정액을 핥던 촉수는 칼리번의 귀두에 난 좁은 구멍을 발견했다. 그곳에도 머리를 들이밀었으나 에레즈의 금사만큼이나 가늘지 못했다. 칼리번은 요도구를 짓누르는 자극에 목구멍을 차지한 성기를 꽉 조였다. 그곳만은, 그곳만은 불가능할 것이다.

칼리번은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막연히 낙관했다. 만약 에레즈와 관계를 가졌던 때처럼 그곳마저 박혀 든다면 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눈물과 호흡 부족으로 뿌옇게 변한 칼리번의 눈앞에 촉수 하나가 보였다.

칼리번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촉수가 다가와 그 액체를 먹었다.

“으응, 후으…….”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촉수는 흉측하게 뻐끔거리며 그의 눈물을 마셨다. 눈물 속에 담긴 칼리번의 기억이라도 먹은 것일까? 촉수가 괴롭게 꿈틀거리더니 네 갈래로 쩍 갈라졌다. 그러고는, 벌어진 네 갈래 속에서 꽃의 수술처럼 가는 촉수가 솟아올랐다.

“……흐으, 으읍…. 으으읍…!”

칼리번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 촉수가 무엇을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읍, 으급, 흐으…!”

칼리번이 격렬하게 반항했다. 그러나 촉수는 아래로 내려갔다. 칼리번은 목이 고정되어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더 두려웠다.

“으, 그, 으으, 아, 흐읍, 안……!”

활짝 핀 꽃이 고개를 숙였다. 가는 촉수는 칼리번의 요도구 위로 안착했다. 네 갈래로 벌어진 살은 칼리번의 귀두를 감쌌다.

“흐읍!”

그러고는 단번에 칼리번의 성기를 삼켰다. 그것이 아래로 쑥 내려가자, 요도구에 자리 잡은 가는 촉수가 그대로 파고들었다.

“흐, 흐으……. 응, 크읏!”

칼리번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겉으로는 성기를 쭙, 쭙 빨아 대고, 속으로는 요도구를 따라 안을 긁어 댔다.

“…!”

엄청난 자극에 칼리번의 두 눈이 흐려지더니, 눈 아래로 흰자가 훤히 드러났다. 아래 입구와 목구멍이 동시에 움찔움찔 떨렸다. 구멍을 전부 차지한 촉수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조임이었다.

“흐응, 아……. 아읏, 안… 안 돼…. 으응….”

칼리번의 압도적인 성감대를 발견한 마물은 그 뒤로 기계처럼 움직였다. 사지가 묶인 칼리번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떨며 그 고통스러운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온몸에 힘을 과도하게 준 탓에 허벅지에서 잘은 경련이 일어났다.

“흐, 하, 아으…….”

아팠다. 바늘로 성기 안쪽이 쑤셔지는 것만 같았다. 목도 쓰라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번의 성기에서는 정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성기의 겉과 속, 모두를 삼킨 촉수는 게걸스럽게 정액을 빨아먹었다.

어느 순간에 이르자 더는 사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정액을 빨리게 되었다. 칼리번의 허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렸다. 더는 나올 것이 없었다. 어느새 칼리번의 신음에 울음이 섞였다.

“큽, 흣…….”

그러자 이번에는 마물의 좆이 목 안에서 크게 부풀어 올렸다. 체액을 교환하기라도 하듯 칼리번의 목구멍으로 곧바로 마물의 정액이 쏟아졌다.

“읍, 으읏, 으응……!”

강제로 목구멍이 열려 있는 탓에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목젖이 크게 흔들리며 끈적한 체액을 전부 삼켰다. 엄청난 양의 정액으로 배 속이 강제로 불러 오는 감각이 불쾌했다.

칼리번의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그와 함께 달큰한 체취가 짙어졌다. 사정을 마친 촉수는 목구멍에서 빠져나왔으나 칼리번의 입 안에 머무르며 예민한 살결을 자극했다. 칼리번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흐으, 으으…….”

쉬지 않고 이어지는 자극이 괴로웠다. 힘이 풀린 다리 사이를 긴 혀가 꼼꼼히 핥았다. 요도구에도 여전히 촉수가 박힌 채였다. 그런가 하면 돌기가 다발로 난 촉수는 유두를 간지럽히고 문질렀다. 칼리번의 검은 눈에서 눈물이 툭, 툭 떨어져 허벅지를 적셨다.

그러나 곧 그의 눈물은 뒤로 넘어가 귓가를 적시게 되었다. 의자가 뒤로 기울어지고, 칼리번의 몸도 뒤로 젖혀졌다. 칼리번의 두 눈에 제 무릎이 보일 정도였다.

“읏……. 그, 흐으……. 그만, 으음…….”

칼리번의 애원은 마물의 촉수에 감싸여 묻혔다. 그는 눈을 감고 마물의 성기와 진득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쾌락으로 흐릿해진 눈은 더 이상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촉수가 입천장을 핥자 칼리번은 고개를 더욱 뒤로 꺾었다.

“아….”

그러자 집요하게 뒤를 핥던 거대한 혀가 사라졌다. 칼리번은 밧줄처럼 길고 끈끈한 촉수가 제 아랫배를 휘감는 것을 느꼈다. 하나, 둘……. 촉수가 겹겹이 묶였으나 그것으로는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았다. 칼리번이 한숨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아……. 으윽!”

칼리번은 다리 사이로 뭉툭한 고통을 느꼈다. 혀가 사라진 곳에서 다른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칼리번의 비부를 짓누르는 모양은 수컷의 성기였다.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 시……. 싫……. 아, 아악……. 으, 우욱……!”

칼리번의 몸은 그런 것을 품기를 원치 않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축축이 젖은 엉덩이 사이로 고개를 들이미는 그것은 보통 크기가 아니었다. 칼리번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것은 의자의 성기가 아니었다. 탑 자체의 성기였다.

마물들이 뭉치고 쌓여 하나의 탑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우글거리는 마물들은 외부를 뒤덮은 껍질에 불과했다. 그 안에는… 거대한 마물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분명 몸이 찢어져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이미 배 위로 촉수가 몇 겹이고 휘감은 터였다. 그의 몸은 사실상 반 이상이 마물의 의자와 결합된 채였다.

“흐으, 아—으윽……!”

입구가 성기에 맞춰 벌려지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거대한 귀두가 칼리번의 입구에 입을 맞췄다. 더는 의자에 앉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애무로 인해 아래가 젖어 있었지만 그런 거대한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경험이 적었고 몸속은 좁았다.

“크읏, 윽, 안, 돼, 더는……. 큭, 아파…… .그만…!”

칼리번은 입 안에 든 촉수를 잘근잘근 씹었다. 마물마저 그 행위는 용납하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성기가 칼리번의 좁은 입구를 쑤걱거렸다.

의자는 평범한 마물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마물이 성급하고 공격적이었다면, 이 의자는 벌레를 유인해 천천히 녹여 먹는 식충 식물에 가까웠다. 더구나 지금 이것은 먹잇감을 완전히 독점한 상태였다. 다른 경쟁자가 없는데 급하게 부숴 버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오메가의 몸은 회복되겠지만, 더 빠른 번식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보호해가며 관계를 가지는 편이 나았다. 그것이 칼리번의 몸에 굳이 공을 들여 가며 준비시킨 이유기도 했다.

“…아……. 흐, 윽…!”

칼리번이 성기를 받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마물은 잠시 물러났다. 칼리번의 입안에 든 촉수가 다시 한번 체액을 토해 냈다. 칼리번은 이제는 익숙하게 체액을 받아먹었다. 힘이 빠진 탓인지 턱까지 체액이 흘러내렸다. 의자의 체액은 몸뿐만 아니라 머릿속의 감각도 마비시키는 기능을 했다. 탑의 구성물이 된 마물들도 이 체액을 주입 당하고 있었다.

“으, 으응……. 흐으…….”

감각이 뭉툭해지고 생각이 흐려지자, 비교적 마물을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졌다. 입구를 맴돌며 벌리기만 하던 마물의 성기가 다시 칼리번의 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칼리번은 다리를 훤히 벌린 채 제 몸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느꼈다. 이성과 고통이 모두 무뎌졌는데도, 배 속을 차지하는 그 압박감만은 여전히 선명했다. 거대한 성기는 보통 수컷과는 달리 기둥 위로 돌기가 울룩불룩 솟아 있었다. 때문에 귀두를 삼킨 후에도 몇 번이나 고비가 찾아왔다.

“아, 으읏…….”

입구가 한계까지 벌어져 간신히 삼키고 나면 다시 불룩 솟아오른 혹이 들어온다. 내벽의 주름이 모두 벌어지다 못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마물의 혀가 아래를 부드럽게 풀어 놓지 않았다면 이미 피를 보았을 것이다.

“하, 하아, 하아……. 흣…….”

칼리번이 짧게 숨을 끊어 쉬었다. 몸은 뒤로 눕혀져 있어, 거대한 성기가 삼켜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숨을 삼키고 내쉴 때마다 마물의 성기가 들어왔다. 촉수는 칼리번의 벌어진 입 속의 혀를 휘감고는 빨았다. 다른 촉수는 함몰된 유두를 짓누르고, 심지어는 배꼽까지 파고들어 간질였다. 오메가가 알파를 최대한 받아들이기 수월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마물에게 감정이 있을 리가 없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이것은 오랜만에 마주한 오메가를 제 의자 위에 앉히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전부 삽입하지는 못했지만 벌써부터 성기가 쑤걱거리며 몸속을 넓히기 시작했다.

“하, 으으…….”

칼리번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작해야 삽입이 끝났을 뿐이었다. 제 몸을 쑤시는 성기가 깊게 파고들 때마다 절망 어린 신음을 흘렸다.

“……아, 아앗!”

마물의 성기가 칼리번의 몸을 넓히고, 반 이상 파고들자 슬슬 움직이는 속도에 붙었다. 거대한 성기는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칼리번의 몸속을 반복해서 오갔다.

“히, 으읏……. 아, 아아! 앗….”

처음에는 고통뿐이었다. 복근으로 갈라진 배 위로 마물의 성기가 불룩 솟아올랐다가 빠지기를 반복했다. 배가 찢길 것만 같았다. 몸이 두 동강 날지도 모른다. 허황된 상상이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아, 으읏…. 흐….”

거대한 성기는 칼리번의 몸 구석구석을 쑤시며 억지로 자극했다. 그것이 몸 안을 쑤시고 나갈 때마다 몸살을 앓는 것처럼 버겁고 열이 났다. 아랫배로 그것이 오가는 길이 훤히 보였다. 칼리번의 몸 곳곳을 차지한 촉수들은 그의 새로운 성감이 피어나기를 돕듯이 부지런히 함께 움직였다.

“읏— 으응…!”

어느 순간, 촉수가 목구멍이나 요도구를 쑤실 때보다 더한 쾌감이 칼리번을 덮쳤다.

“앗, 아아, 흐응…. 읏, 아, 아…!”

결국, 칼리번이 원하지 않았던 오메가의 본능이 눈을 떴다. 마물의 성기는 집요하게 칼리번이 반응한 지점만을 찔러 댔다. 워낙 커다란 성기라서 그런지, 점차 자극을 받는 부분이 넓어져 갔다.

어느새 유두도 위로 불룩 튀어나왔다. 그러자 가슴을 지분대던 촉수는 요도구를 파고들 때처럼 몇 갈래로 벌어지더니, 가슴에 흡착했다. 촉수 안쪽에는 무수한 빨판이 달려 있었고 유륜과 유두를 자극하며 세차게 빨기 시작했다. 만약 젖이 나왔다면 그대로 촉수 안으로 빨려들어 갔을 것이다.

“아, 응, 아앗…!”

마물의 성기가 오가는 배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느덧 쾌감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것은 성기나 유두를 자극해서 얻는 쾌감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더니, 칼리번의 성기에서 갑작스레 정액이 터져 나왔다. 정액은 성기를 삼키고 있는 촉수에게 모조리 빼앗겼다.

“크, 흐으…….”

칼리번은 몸을 떨며 온몸에 퍼지는 쾌감에 치를 떨었다. 벌어진 입 위로 침이 흘렀다. 칼리번이 쾌감에 몸을 떠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칼리번의 몸 안을 쑤셔 댔다.

“으응, 그, 그만…. 아!”

칼리번은 두 눈을 감으며 애원했다. 그러나 마물의 성기는 기계적인 움직임만 반복했다. 아직도 뻣뻣한 성기는 사정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마물에게 박히던 칼리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끝은 언제쯤인 걸까? 마물의 성기가 배 속을 차지하고 나면, 추삽질을 반복해 사정하고 나면, 풀려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의자 위에는 칼리번뿐이었다. 알파가 붙잡은 오메가를 순순히 풀어 줄 리가 없었다. 이대로 쉬지 않고 영원히 의자에 앉아 있게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쉬지 않고 이 짓을 반복하다 보면….

“하아, 아으, 흐….”

그즈음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 있는 걸까?

“아!”

그러나 쾌감은 얼마 남지 않은 의심을 지워 버렸다. 고작 그딴 의문에 매달리기에는, 흉흉한 마물의 성기가 여전히 칼리번의 배 속에 있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칼리번은 마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단 하나,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뿐이었다. 칼리번은 처음 마계에 떨어진 후로 지금까지 의자에만 앉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마물의 성기를 품고 있었다.

칼리번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정액을 토해 내야만 했다. 의자에 앉은 채로 기절하듯 잠들고, 자극에 깨기를 반복했다. 칼리번이 땀과 눈물을 흘리고 정액을 토해 낼 때마다 오메가의 체취는 더욱 짙어졌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마물은 시각보다 후각이 뛰어났다. 피 냄새로 흥건한 마계에 오메가의 체취는 봄바람처럼 퍼졌다. 수많은 마물들이 칼리번의 냄새를 맡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으르렁거리며 하나뿐인 오메가를 찾기 시작했다.

“으… 으응…!”

그사이, 의자는 칼리번의 몸 안에 노팅 중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노팅. 거대한 성기가 칼리번의 몸속에서 불룩 부풀어 오르자, 마치 새끼를 밴 것처럼 보였다. 정액의 양은 칼리번의 몸 전체를 써도 전부 받지 못할 정도였다. 배가 부를 만큼 부르자 넘치는 정액이 맞물린 입구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히, 아윽, 으윽…….”

배 속이 정액으로 차오르자 더부룩함이 심해지고 내장이 짓눌렸다. 다리 사이로 줄줄 흐르는 정액이 마치 실금을 한 것처럼 버겁고 괴로웠다.

“욱, 하, 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팔걸이에 두 팔을 얹고, 허리를 펴고,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칼리번은 벌벌 떨며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두 눈에 힘이 풀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의자 한가운데에 솟아오른 성기는 찔걱찔걱 소리를 내며 추삽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늘이란 원래 끝이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칼리번이 태어난 인간계는 그랬다. 그러나 마계는 달랐다. 어둠뿐인 마계의 하늘에는 벽이 존재했다. 마물들이 몸을 박아가며 찍어 놓은 흰 점. 칼리번은 그것만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기에, 얼마나 오래 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루?

한 달?

…1년?

“아아….”

칼리번이 낮게 신음했다. 이번에는 배 속에 품은 성기 탓이 아니었다. 마물들이 탑을 기어오르는 움직임을 느껴서였다.

비록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지는 못하지만, 오랜 시간 의자와 몸이 연결된 탓인지 굳어 버린 벽을 타고 오르는 마물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탑에게 흡수당해 구성물이 되는 불상사를 감수하면서까지 마물들은 오메가를 찾아 헤맸다.

아직은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지만, 마물이 하나둘 탑을 오르고 나면 이제 더 많은 알파를 상대해야 할 터였다.

이 권좌에서.

“아…….”

칼리번은 검은 하늘에 찍힌 흰 점을 다시 노려보았다. 흰 점을 바라보니, 초점을 잃은 눈에도 흰 빛이 찍힌다. 저 작은 점이 더… 좀 더 찢어지기를 바랐다.

찢어져서, 저 마물들이 밖으로 나갔으면….

그러면…….

“……?”

칼리번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용병으로 마물들을 상대할 때와는 상반되는 감정이었다. 열리지 마라. 마물이 내려오지 마라. 검은 손자국이 생기는 하늘을 보며 칼리번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물이 인간계로 내려가 인간들을 습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으읏, 흣…….”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성기를 받아들이면서, 칼리번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어느새 마물 한 마리가, 탑 위까지 올라왔다.

* * *

“내려놔.”

에어리얼이 명령했다. 칼리번을 옥죄던 촉수가 그를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비스듬히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속박에 묶인 사람처럼, 이마에는 진땀을 맺혔고, 입가에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숨을 쉬는 것이 버거운지 상체가 크게 들썩였다. 힘겨루기하는 것처럼 팔뚝 위로는 굵은 핏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칼리번은 지금 어둠과 피뿐인 마계가 아닌 오염된 숲에 있었다. 그러나 검은 두 눈은 에어리얼이 보여 준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에어리얼은 그의 몸 위에 가뿐히 앉았다. 아무리 그의 무게가 깃발처럼 가볍다고는 해도, 칼리번은 부러진 통나무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에어리얼이 보여 준 환각은 실제로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의 영혼은 에어리얼이 마계에서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오메가의 왕좌는 시작에 불과했다. 단 한 마리의 오메가가 상대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알파는 대화도 애원도 통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에어리얼은 뱀처럼 다리를 꼬고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안 돼.”

에어리얼은 주변에 늘어선 마물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달래듯이 말했다. 수십 개의 눈이 칼리번을 벌써 범하고 있었다. 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칼리번보다는 에어리얼이 훨씬 아름다웠다. 겉으로 보았을 때 칼리번은 오메가를 두고 겨루는 또 다른 수컷에 가까웠지, 수컷들의 환심을 살 만한 요소가 한 치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풀풀 났다. 칼리번을 깔고 앉은 에어리얼이 없었다면 무력화된 그는 진즉에 수십 마리의 마물들에게 범해졌을 것이다.

“안 돼.”

그 욕망을 모를 리 없는 에어리얼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는 살짝 웃었다. 칼리번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어떻게 보면 추위를 느끼고 벌벌 떠는 것도 같았다. 에어리얼은 손등으로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자 떨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

다정하게 굴던 그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갑자기 샐쭉해졌다.

“재미없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걸리잖아.”

기다리다 못한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어깨에 발을 걸쳤다.

“일어나.”

그리고는 체중을 실어 걷어찼다. 옆으로 웅크린 칼리번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허억!”

머리가 땅에 부딪힘과 동시에, 칼리번이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순식간에 차원을 이동한 사람처럼 몸부림을 쳤다.

“윽, 허억, 컥…!”

칼리번이 발작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더 이상 촉수에 묶여 있지 않았다. 그 반동으로 두 팔이 멋대로 허공에 휘저어졌다.

꼴사나운 모습에 에어리얼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일어나. 기껏 풀어 줬는데 도망이라도 쳐야지.”

에어리얼이 칼리번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에어리얼이 한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낄낄댔다.

그의 말대로, 칼리번은 도망칠 기회가 생겼다.

“허, 허억…! 으, 으으……!”

그러나 생전 처음 겪는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계의 환상이 칼리번의 기억이 아니듯, 그가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기억도 감정도 전부 에어리얼의 것이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어 볼 수 없다. 그래서 두 사람 중 누구의 감정이 더욱 강력한지 비교해 볼 수 없다. 그러나 칼리번은 다른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있을 수 없는 체험을 했다. 어리고 나약한 에어리얼이 느꼈던 공포는 그의 힘과 반비례하여 거대한 무게를 지녔다. 마물과 싸워 온 칼리번이 막연히 품었던 공포와는 차원이 달랐다.

“튼튼해서 다행이야. 인간 사내들은 금방 미쳐 버리던데.”

에어리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칼리번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처럼 되지 않을 기회마저 줬는데, 왕자 따위 모른다고 계속 잡아뗄 거야?”

“흐억, 허억….”

“이런, 가엾게도. 떨고 있잖아? 정말 오메가가 다 됐구나.”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넋을 놓고 있는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물이 인간계에 뿌리를 내린 이상, 네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어. 이제 너에게는 밤도, 낮도 없겠지. 네가 그 어떤 요새에 숨더라도 마물이 널 데려가기 위해 끝도 없이 쫓고 침략할 거야.”

에어리얼의 칼리번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허공을 보고 있던 칼리번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보았던 기억과 같은 일을 겪게 된다.

“…그뿐이겠어? 이제 너와 마주쳤다는 이유로 말 몇 마디를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들은 죽게 될 거야. 그들은 널 저주하겠지. 네가 밟는 땅은 잡초조차 시들고, 사람들은 살해당하거나 굶주려 죽게 될 테니까.”

칼리번의 동요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뱀처럼 번들거렸다.

“같은 오메가인 나의 비호가 없다면, 말이야.”

칼리번을 까마득한 절망 속에 빠뜨린 에어리얼이 한 줄기 희망을 늘어뜨렸다. 그 한마디에 칼리번이 빛을 찾은 것처럼 에어리얼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마물들을 만족시켜 주면 굳이 새로운 오메가를 찾을 필요가 없거든.”

“으… 으으….”

“내 기억을 봤으니까, 머리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윽…….”

“난 익숙해서 여럿과도 잘 지내.”

칼리번의 이마를 두드리던 에어리얼의 손이 그의 배로 내려갔다.

“…아니면 앞으로는 나랑 같이 낳을래?”

에어리얼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칼리번의 아랫배를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외로워서, 슬슬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거든.”

평소였다면 칼리번은 에어리얼을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만, 지금 그는 정신을 추스르기조차 버거웠다.

“거봐. 역시 그런 꼴이 되기는 싫지?”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반응이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뿌듯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럴 법도 했다. 에어리얼에게 그는 인간과 마물을 통틀어 유일한 동류였다.

에어리얼은 굳어 있는 칼리번에게 몸을 치댔다. 당장에라도 덩치 큰 사내를 데려다 애완동물로 삼을 것 같았다.

“자, 에레즈 프리드웬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윽!”

그때였다. 칼리번을 장난감처럼 만지던 에어리얼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극도로 가까워진 순간, 칼리번의 주먹이 에어리얼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칼리번은 방심한 틈을 타 조막만 한 머리를 주먹으로 으깨 버리려 했으나, 등 뒤에서 대기하던 촉수가 팔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 탓에 머리뼈를 부수려던 주먹의 각도가 미묘하게 빗나갔다.

“아, 아악…!”

에어리얼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마물이었다면 기별도 가지 않았겠지만, 마르고 약한 그에게는 충분했다. 솜털처럼 가벼운 몸은 칼리번의 빗나간 일격에도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에어리얼이 쓰러지자, 마물들이 들끓으며 일제히 칼리번에게 달려들었다.

“크, 읏!”

칼리번은 한쪽 팔을 붙잡힌 채로 몸을 훌쩍 일으켰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자신에게 달려든 마물을 발로 걷어찼다.

“칫…!”

한 팔을 붙잡은 촉수가 칼리번을 거세게 끌어당겼다. 칼리번의 몸이 붕 뜨더니 뒤통수가 바닥에 처박혔다. 칼리번은 포기하지 않고 제 몸을 노리고 달려드는 마물들에게 반항했다. 그러나 에어리얼을 감싸는 수많은 마물을 무기는커녕 한 손이 묶인 채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큭……!”

마물에게 번식 상대란, 팔다리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없는 편을 선호할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발톱이 칼리번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하늘을 날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행동반경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오지 않았다. 다만, 괴상한 비명이 숲에 울려 퍼졌다.

“—?!”

뜨끈한 마물의 피가 칼리번의 온몸에 끼얹어졌다. 자신을 조금도 보호하고 있지 않았던 칼리번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그리고 그는 두 눈을 의심했다. 에어리얼의 휘하에 있던 마물 중 몇 마리가 칼리번 대신 공격을 받아 낸 것이다. 그 결과로 그것들은 몸이 찢겼다.

‘어째서…?’

당장 목숨을 구했다는 안도감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사소한 감정이 아니었다. 칼리번은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인지 마물들은 두 편으로 갈려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분명 그들은 한패였다. 그러나 지금은 칼날과도 같은 발톱과 이빨을 서로에게 박아 넣고, 갑옷처럼 단단한 몸뚱이를 거칠게 부딪치며 죽고 죽여 댔다.

그러나 양편이 비등하지는 않았다. 한 무리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온 것처럼 수적인 차이가 확연했다. 어쨌거나 칼리번에게 잠시라도 시간을 벌어 주기에는 충분했다. 칼리번은 혼란을 틈타 팔을 붙잡은 촉수를 떼어 내려 했다.

‘찢어.’

칼리번은 팔을 휘감은 촉수를 이로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렸다. 촉수 마물은 나무처럼 딱딱한 껍질로 뒤덮여 있어 쉽게 뜯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찢어… 발긴다.’

그때, 마물 한 마리가 칼리번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큭….”

칼리번은 요행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물은 칼리번을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아닌 촉수 마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칼리번은 촉수에게서 이를 뗐다.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다음에도 마물은 칼리번이 아닌 촉수를 끊어 냈다. 마물과 몇 차례 공격을 주고받던 촉수 마물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기회였다. 칼리번은 그 즉시 에어리얼이 쓰러진 곳을 노려보았다.

“아……. 으으!”

에어리얼은 빗나간 주먹 한 대를 맞은 것만으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웅크린 채였다. 칼리번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죽여.’

지금 당장 저걸 죽여 버려야 한다고, 칼리번의 본능이 외쳤다. 칼리번이 그를 향해 뛰어들려는 순간이었다. 주변에 있던 마물 한 마리가 칼리번보다 먼저 쓰러진 에어리얼에게 달려들었다. 뜻밖의 상황에 칼리번의 움직임이 굳었다. 마물의 덩치는 비교적 작았으나, 연약한 사내의 목을 물어뜯기에는 충분했다.

“아아….”

에어리얼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만할 정도로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마물은 이미 근처까지 온 후였다. 에어리얼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마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보다 더욱 붉은 눈이 번뜩였다.

이제 둘 사이는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괴한 마물의 생김새에 겁을 먹고는 몸이 굳거나 머리를 숨기는 것이 정상이었다.

‘찢어 죽여!’

칼리번이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작은 마물의 심장에 그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에어리얼과 마주 본 순간, 마물은 칼리번의 외침을 잊었는지 그의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추고 말았다.

“……아하하!”

에어리얼은 마물을 마주 보며 웃었다. 칼리번의 손에 맞은 탓인지 하얀 얼굴의 반절 이상이 붉게 변해 있었고 가는 입술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직은 내 쪽이 한 수 위지.”

에어리얼은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마물은 에어리얼과 마주 본 후부터는 돌이라도 된 듯 움직이질 못했다. 곧바로 다른 마물이 난입해 감히 에어리얼에게 덤벼든 그것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뜯기고 목이 잘리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생존 본능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아아……. 아파라….”

에어리얼은 마물 한 마리가 도륙당하는 광경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은 마물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어 흙먼지가 잔뜩 일었다. 신기하게도 마물들은 죽고 죽이고 있으면서도, 실수로라도 에어리얼의 근처에 오지 않았다.

얻어맞은 충격이 컸는지 에어리얼은 비틀거렸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었다가는 다시 쓰러질 것만 같은 가련함마저 들었다. 거대하고 기괴한 마물들에게 가려지기는커녕 더욱 눈에 띄었다.

“같은 오메가라서 잘해 주려고 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너무하잖아.”

그는 칼리번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그의 미소에서는 진득한 광기가 배어 있었다.

“…….”

칼리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땅속에 숨어 있던 촉수가 그의 발목을 강제로 붙잡고 있었다. 에어리얼이 정신을 차리자 혼란스러웠던 주변은 빠르게 평정되었다. 칼리번의 의지를 따라 날뛰던 마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동을 멈추고 다른 마물들에게 물어뜯겼다.

‘어째서 마물이 나를….’

행운은 끝났다. 수많은 전투를 치러 온 칼리번은 끝을 예감했다. 그러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잠시였지만 마물이 자신을 지켜 주었다. 에어리얼을 공격한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하나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물은 전부 에어리얼의 부하였다.

그런데 왜 자신을 지키고 주인을 공격한 것인가? 심지어 마물은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무기라도 된 것처럼 생각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어째서… 에어리얼 앞에서는 다시 무력화되는 것인가?

턱에 맺힌 땀이 피와 섞여 땅으로 뚝, 뚝 떨어졌다. 앞으로 숙인 칼리번의 몸이 무거운 조각상을 세우는 것처럼 촉수에 의해 강제로 끌어당겨졌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에어리얼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의 오메가를.

“하……. 하아….”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 보았자,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 패배. 중간에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칼리번은 결국, 에어리얼을 죽이지 못했다.

“눕혀.”

에어리얼이 차갑게 명령했다. 잠시나마 칼리번에게 살갑게 굴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앞의 그는 수많은 마물을 다루는 오만한 오메가 왕이었다.

그러자 칼리번의 팔과 다리가 각각 다른 촉수로 묶였다. 그것들이 몸을 잡아당기자,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코앞에 팔다리가 펼쳐진 채 눕혀졌다. 급소를 훤히 내보인 채 꼼짝도 할 수 없는, 용병으로서는 굴욕적인 자세였다.

“흐음…….”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몸이 짐승 가죽으로 만든 융단이라도 되는 양,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옮겼다. 그의 체중은 어린아이보다도 가벼웠기 때문에 뼈가 부서지거나 내장이 터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짓밟히는 굴욕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큭….”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칼리번의 두 팔이 팽팽하게 당겨졌으나 부질없는 반항이었다. 퍽! 에어리얼은 대번에 칼리번의 머리를 발로 짓밟았다.

“동족한테 너무한 거 아냐?”

에어리얼이 발을 떼지 않은 채로 칼리번에게 물었다. 칼리번이 감았던 두 눈을 부릅떴다.

“단 한 번도… 너와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칼리번은 입 안에 굴러다니는 흙을 짓씹었다. 같은 오메가였으나, 그와 자신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성별이 같다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뭐.”

얼굴이 짓밟힌 채라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에어리얼은 그 대답에 굉장히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아니, 넌 나와 같아.”

에어리얼은 발을 들더니, 칼리번의 얼굴을 다시 찍어 눌렀다.

“우린 똑같아!”

“……큭…!”

“앞으로는 더욱 닮아질 거야! 너도 나처럼, 인간과 마물 모두에게 쫓겨 다니며 비참하게 떠돌게 될 거야! 내가 널 대신해 주지 않는다면!”

칼리번의 얼굴이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수도 없이 짓밟으며, 에어리얼은 어린애처럼 격렬히 화를 냈다. 팔을 쓸 수 없는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 그의 발길질을 버텼다. 에어리얼의 몸이 가벼워 고통은 덜했으나 어느샌가 뺨에는 멍이 들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하아, 하아…….”

에어리얼은 체력이 떨어졌는지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리며 칼리번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두 다리 사이에 칼리번의 머리를 두고 섰다.

“기껏 잘해 줬더니만…. 왜 자꾸 화를 돋우는 거지?”

에어리얼은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칼리번에게 얻어맞은 뺨에는 시뻘겋게 멍이 올라 있었고, 입술에는 피가 말라붙었다. 붉은색은 에어리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

칼리번은 흙과 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입 안이 찢어져 목구멍으로 피가 흘러들었다.

칼리번과 에어리얼의 시선이 마주쳤다. 칼리번은 눈이 충혈되었을지언정, 적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붙잡힌 칼리번이 명백하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에어리얼은 조금도 침착하지 못했다.

에어리얼이라는 오메가는 칼리번의 예상보다 훨씬 어렸으며 다혈질이었다. 제 감정이 칼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룰 줄을 몰랐다. 모든 감정이 덜 발달한 것처럼 둔감한 칼리번과는 달랐다.

그랬다. 조금도 닮지 않았다. 칼리번은 확신했다.

“…죽어 가고 있군.”

그때, 에어리얼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발이 칼리번의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크윽…!”

칼리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반응이 재밌는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이리 와.”

에어리얼은 한 팔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시선은 여전히 칼리번에게 고정된 채였다. 칼리번의 검은 눈동자가 대신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살폈다. 그의 두 눈이 예상치 못한 광경에 크게 뜨였다.

마물들이 다른 마물의 시체를 끌고 오고 있었다. 에어리얼을 공격하려던 바로 그 마물의 시체였다.

“윽…?!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칼리번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영문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칼리번이 묻거나 말거나, 에어리얼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칼리번의 편을 들었던 마물은 시체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서 보니 아직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에어리얼의 손이 무언가를 원하듯 흔들렸다. 그러자 마물들이 잡혀 온 마물에게서 심장을 뽑아냈다. 그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마물들이, 기꺼이 에어리얼에게 심장을 바쳤다.

“읏—!”

심장을 든 손이 칼리번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심장이 느릿하게 펄떡였다. 어째서 자신의 심장이 아닌, 마물의 심장을 뽑아낸 것인가?

칼리번이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돌리려 하자, 촉수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벌려.”

에어리얼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촉수가 칼리번의 입 안으로 기어들어 가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크헉, 설마……?!”

입이 강제로 벌어진 칼리번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에어리얼은 마물의 심장을 칼리번의 얼굴 위에서 쥐어짰다.

“커, 허윽!”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입은 다물 수는 없었다. 진득한 피가 칼리번의 얼굴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휘젓고 기침을 하며 뱉어 내려 했지만, 무작위로 쏟아지는 피를 전부 피할 수는 없었다.

“악, 크흑, 크흐……. 으윽…!”

“뱉지 마.”

“커헉!”

“삼키라고, 전부.”

심장을 두 손으로 쥐어짠 에어리얼은 발을 들어 칼리번의 입을 밟았다. 그가 마물의 피를 전부 삼키게 할 셈이었다. 가뜩이나 끈적거리는 피가 목구멍을 채우고 코를 막아 숨을 쉬기가 어려웠는데 짐을 하나 더 얹은 셈이었다.

“으, 음…. 큭…!”

칼리번은 신음을 흘리며 억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비릿하고 역겨운 감촉이 목구멍을 억지로 타고 넘어갔다.

“이 정도로 네 몸을 챙겨 주는 친구는 나 말고 없을걸? 배신당했는데도 도움을 주는 친구라…. 세상에 또 없지.”

“……하아, 흐으…….”

“젠도, 네가 숨기고 있는 왕자도, 오메가인 나만큼 잘해 주진 못할 거야.”

여태까지 널 죽이지 않은 것만 봐도 말이야. 에어리얼의 붉은 눈이 번들거렸다. 칼리번은 그의 말이 전부 헛소리임을 알고 있다. 실상은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배신한 마물에 대한 잔인한 보복에 불과했다.

“……읏….”

칼리번은 피로 얼룩진 붉은 얼굴로 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에어리얼은 그 모습이 우스운지 피식 웃었다.

“내가 너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

“그깟 왕자, 진작에 목을 잘라 왔을 거라고?”

칼리번을 바라보는 에어리얼의 시선에는 이유 모를 따스함마저 느껴졌다.

“…….”

칼리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에레즈에 대해 조금이라도 호응한다면, 저 뱀 같은 사내는 모든 것을 파악해 버릴 테니까.

“개처럼 눈만 끔뻑거리고….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에어리얼은 미간을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혼자서만 답을 알고 있는, 심술궂은 어린아이와도 같아 보였다.

“그래서 너를 보면 그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해. 나도 옛날에는 그랬거든.”

“…….”

“…말했잖아, 우린 같다고.”

아니, 조금도 같지 않다. 칼리번은 목을 길게 빼고 그의 말을 듣기를 거부했다.

“아마도 너는, 태어났을 땐 감정이 거의 제거되다시피 메말랐을 거야.”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과거를 끄집어내듯 말했다.

“……!”

그 말에 칼리번의 호흡이 멈췄다.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남들은 열 가지의 감정을 느끼는데, 자신은 한두 개도 이해할까 말까 하니까.”

에어리얼은 마치 칼리번의 기억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여태껏 혼자서만 품고 있던 의문. 에어리얼은 그의 약점을 속속들이 말로 꺼내고 있었다.

“그만…! 윽!”

“가만있어.”

칼리번이 반항하자, 에어리얼은 다시 칼리번의 입을 발로 짓밟았다. 이번에는 무릎까지 굽혀 그 나름대로 무게감을 주려 했다.

“그건 일종의 생존법이야.”

에어리얼이 말했다.

“오메가는 한 마리뿐이고, 알파는 개미나 벌만큼이나 무수히 많으니까….”

짓밟힌 칼리번의 머릿속이 웅, 웅 울렸다. 칼리번은 자신이 오메가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저 덜떨어진 알파라고 여겨 왔다. 어딘가 한두 군데가 모자라게 태어났을 뿐인, 개인적인 문제일 거라고.

“생각을 해 봐, 알파처럼 몸이 다 자랐다고 무작정 발현해 버리면 곤란하거든. 근처에 있는 알파와 무조건 번식을 하게 되겠지.”

“큭….”

“알파 입장에서야 횡재를 보는 거지만, 오메가로서는 위험 부담이 크잖아?”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입을 발로 잘근잘근 비볐다.

“그래서 오메가는 몸이 성장했다고 쉽게 성체가 되지 않아. 겉보기에는 평범한 알파와 다를 바 없지. 어떤 오메가는 평생 그런 미발현 상태로 살다가 자기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죽기도 한다던데.”

“후으, 윽….”

“그렇게 인간과 마물 사이에서 섞여 지내다가…. 어느 순간, 발현하는 거야.”

에어리얼은 일부러 말끝을 길게 늘였다. 마치 칼리번이 매달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칼리번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결코 열고 싶지 않은 상자였다.

“무수하게 많은 알파 중 단 하나에게, 강렬한 교미의 욕구를 느낄 때 말이지.”

칼리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처음 듣는 말인데도, 심장은 이미 그가 꺼내지 않은 답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알파가 원할 때가 아니야. 우리는 ‘왕’이니까. 네가 그 알파를 원하게 될 때, 비로소 오메가가 되는 거지.”

칼리번은 눈조차 감을 수 없었다. 얼굴에 고인 핏물이 그의 눈으로 흘렀다. 눈 아래로 붉은 피가 눈물처럼 고였다.

“큭….”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칼리번은 이를 꽉 깨물었다. 어찌나 턱에 힘을 주었는지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에어리얼은 그런 칼리번을 내려다보며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로지 이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여태껏 살아남은 사람과도 같았다.

“내 얘기를 들으니 생각이 달라지지 않아?”

“…….”

“누가 진정한 친구이고, 누가 널 평생 마물들에게 쫓기게 하는 적인지. 고민해 봐.”

에어리얼은 허리 주변을 뒤적이더니, 화려한 검집을 꺼내 보였다. 왕실의 물건이 틀림없었다. 스릉,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뽑혀 나왔다.

에어리얼은 당장에라도 칼리번의 목을 꿰뚫을 것처럼, 칼리번의 뺨에서 한 치 떨어진 곳에 단검을 박았다. 콱! 칼리번의 귓가에 그 잔향이 이어졌다.

“…왕자가 우리 손에 넘어온 후 처분이 걱정된다면, 직접 처리하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지.”

“……!”

“에레즈 프리드웬의 목을 잘라 이 자리에 두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조건으로 너와 젠을 자유롭게 해 줄게. 약속해. 알테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 자비는 베풀 수 있어.”

“…….”

“칼리번.”

“…….”

“내가 왜 너한테 이렇게까지 무르게 구는지…. 그 멍청한 머리로 한번 잘 생각해 봐.”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귓가에도 칼을 남겼다.

“…마물에게는 언어가 없어서 우리가 오메가가 되는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지 못해.”

“…….”

“인간의 언어 중에서 그나마 비슷한 단어가 있더군.”

에어리얼이 더없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걸….”

그건 말이야, 바로….

에어리얼이 속삭였다. 칼리번의 귀에서 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귀가 먹은 것처럼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 * *

칼리번은 어떻게 은신처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파른 암벽마저도 기어오른 채였다. 누군가 체스 말을 다루듯 자신을 번쩍 들어 이곳에 내려놓은 것만 같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설령 에어리얼이 괴상한 능력으로 이동시켰다 해도, 모처럼 발견한 은신처를 그냥 둘 리가 없다. 우직한 귀환 본능이 발휘되었을 뿐이었다.

칼리번은 동굴 주변을 서성였다. 노을이 더는 닿지 않는 동굴 안쪽, 빼꼼히 튀어나온 발가락이 눈에 띄었다. 가만 보니, 에레즈는 마물에게 들키지 않도록 동굴 속 음영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위험하니 밖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칼리번이 앞서 한번 쓴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동굴 안쪽에서 편하게 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묶인 개처럼 빛이 닿지 않는 경계선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양에 그을려 검붉어진 칼리번의 그림자가 동굴 입구를 어른거렸다.

“카, 칼….”

칼리번의 그림자를 발견한 에레즈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긴 머리를 팔에 칭칭 감고는 단번에 칼리번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급한 마음과는 달리,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다가가지 않고 반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왕자님.”

칼리번은 자신의 별것 아닌 말을 충실히 지키는 에레즈를 보며 허탈해했다.

“…….”

칼리번은 말없이 동굴 속 어둠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에레즈를 붙잡는 일은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칼리번은 그를 저물어 가는 태양 아래로 끌어당겼다.

석양 아래에 드러난 에레즈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혼날 각오를 하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섰다. 하얀 피부와 금빛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었다. 칼리번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눈부신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와 비교하자면 그는 더러웠고 엉망이었으며… 위로만 자라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목이 쓰라려 왔다.

“피, 피가….”

에레즈의 하얀 손가락이 칼리번의 짙은 피부 위를 스쳤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약속을 지켜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울거나 두려움에 떨지도 않았다. 오로지 칼리번의 안위만을 살폈다. 두 팔이 멀쩡한지, 혹여 다리를 절지 않는지, 몸에서 찢어지거나 독을 입은 부분이 존재하는지….

칼리번의 몸에는 마물의 피가 껍질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온몸이 더러워 구분이 어려웠고 부상을 숨겨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있지…. 내, 내가…. 미…… 미안해….”

에레즈는 칼리번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힘겹게 말했다. 오랫동안 그 한마디를 참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꽉 짓눌려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칼리번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번의 머릿속은 버거울 정도로 자극적인 지식과 깨달음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어, 약간은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도 보였다. 에레즈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아침에 말이야…….”

에레즈가 간신히 운을 뗐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 네가, 나, 나랑 가, 같이 안 있어 줘서…. 서, 서운해서, 이, 인사도… 마, 마중도 나가지 아, 않았어….”

“…….”

“네, 네가, 히, 힘들게, 다, 다녀오는데… 나, 나는 고작 기, 기분이 사, 상했다고 그, 그래서… 조, 종일, 미,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에레즈는 더듬더듬 사과했다. 온종일 동굴 속에서 그 생각 하나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칼리번은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멍청하게 선 채로 머릿속을 헤집었다.

“…괜찮습니다.”

칼리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그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푹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도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저, 정말?”

“네.”

에레즈는 쉽게 용서받자 머뭇거렸다. 숲에 온 후로 매번 비슷한 과정을 반복했으면서도, 그는 용서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왕자님.”

“…으, 응.”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했었던 것… 기억나십니까?”

칼리번은 제 몸에 닿은 에레즈의 손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성미가 예민한 에레즈라면 자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감정을 눈치챌 것 같았다.

“…….”

그리고 칼리번은 새삼 놀랐다. 뼈와 가죽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앙상한 손목이었다. 길고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종종 잊곤 했는데, 갑작스럽게 성장을 한 데다, 숲이 오염되면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그는 너무나 야위었다.

“음…. 아, 아아……! 으, 응. 아, 아침, 아침에… 마, 말했었지…!”

칼리번과 달리 에레즈는 칼리번의 한 말 한마디도 쉽게 떠올렸다.

“조, 좋지 아, 않게 되었어도, 나, 나는 신경 쓰, 쓰지 마…. 나, 난 괘, 괜찮으니까.”

에레즈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칼리번을 위로하려는 것도 같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말을 듣기도 전에 ‘좋은 일’은 실패했다고 단정 지었다. 죽어 가는 숲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으리라 미리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칼리번이 가라앉은 이유를 거기서 찾는 것 같았다.

“내일 떠날 겁니다.”

칼리번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

“지금부터 떠날 준비를 할 겁니다.”

“뭐, 뭐…?! 이, 이렇게, 가, 갑자기…?”

갑작스레 바뀐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에레즈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모습이 갓 피어난 꽃송이처럼 동그랗고 고왔지만,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헛된 생각을 곧바로 털어 내려 애썼다.

“아, 아, 그, 그럴 수가…….”

에레즈는 믿기지 않는지, 불안하게 양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싫으십니까?”

칼리번이 물었다. 숲을 나가기 싫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아, 아니, 그, 그냥….”

에레즈는 얼버무렸다. 그는 칼리번에게 무언가 말을 걸어 보려고 하다가, 머뭇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럼 마물에게 들키기 전에 들어가십시오.”

칼리번은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레즈의 그의 옆에 붙어 일부러 발걸음을 맞췄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칼리번에게서 떨어지질 못했다.

“…….”

에레즈는 ‘좋은 일’을 앞두고도 웃지 못했다. 칼리번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탓인지, 석양에 물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부시도록 짙은 석양이 절벽을 붉게 적셨다. 본래 태양은 가장 마지막에 가장 짙은 빛을 내기 마련이었다.

* * *

이상할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석양이 산 아래로 잠기고 검은 비단이 대신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비단 위로 보석 가루를 흩뿌렸는지 반짝이는 별이 총총히 떠 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시간을 잘라내 버리는 것일지도.

석상처럼 굳어 있던 칼리번은 그제야 에레즈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굴 밖을 나가게 되면 한동안은 제대로 쉬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일찍 주무시죠.”

칼리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자리를 정돈했다.

“버, 벌써?”

아무것도 모르는 에레즈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애원하는 듯한 눈빛은, 칼리번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네.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칼리번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그렇다면…….”

에레즈는 주춤거리다 칼리번의 곁으로 다가왔다. 말린 잡초를 깔아 둔 잠자리는 금방 숨이 죽어, 잠들기 전 주변을 두드리며 부풀리곤 했다. 에레즈는 칼리번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 토닥였다.

말없이 바닥을 두드리다가도, 에레즈는 틈만 나면 칼리번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말을 먼저 걸 용기는 없으니 그저 칼리번이 헤아려 주기를, 관심을 둬 주기를 바랄 뿐.

“…….”

칼리번은 그 시선에 움직임을 멈췄다. 에레즈가 고개를 돌리고는 후다닥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새삼스럽게도, 칼리번은 에레즈의 태도가 몹시도 심약하게 느껴졌다. 타인을 끊임없이 신경 쓰고 맞춰 주려는 행동은 전형적인 약자의 태도였다.

무수한 전투를 겪어 온 칼리번은 그런 나약한 존재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밖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기형적인 존재. 칼리번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제 형제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칼리번은 할 만큼 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이득만을 위해 살육을 일삼는 용병인 그가.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살린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끝낸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

“…….”

칼리번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그저 생각에 불과한데도,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무십시오.”

칼리번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칼리번의 기세에 눌려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답만 잘했을 뿐, 밤이 깊어져도 통 잠들지 못하고 칼리번의 옆에서 뒤척였다.

칼리번은 그런 에레즈를 눈을 감고 모른 척했다. 마물 혼혈은 보통 사람보다 오감이 예민했다. 그가 뒤척이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는 파도 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칼리번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두 눈을 떴다. 밤처럼 검은 눈이었기에 에레즈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칼리번은 얕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왕자님.”

“힉!”

멀리서 칼리번이 부르자 에레즈는 후다닥 몸을 뒤집었다. 그러나 이미 다 들킨 후였다. 작은 등이 꾸물거리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였다.

“왕자님.”

“…….”

“잠이 안 오십니까?”

“……으, 응.”

아예 포기했는지, 에레즈는 칼리번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칼리번은 제 품 안으로 들어오는 에레즈에게 팔을 베개로 내어 주었다.

“이, 이렇게 가, 갑자기… 수, 숲을 떠나게 되다니……. 미, 믿기지가 않아서….”

에레즈는 칼리번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종류의 걱정이 어려있었다.

“…….”

칼리번은 그의 걱정을 충분히 납득했다. 오십 여일 넘게 숲 안에서 헤매었는데, 하루아침에 탈출하게 되다니. 여태껏 아무것도 묻지 않은 에레즈의 인내심이 대단할 정도였다.

“그동안 숲을 수색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마물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북부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빨리 잠들 수 있게끔 적당하게 말을 꾸며 냈다. 거짓말은 금방 들키곤 하는 칼리번이었지만, 이번에는 제법 했다. 왜냐면 이것은 완벽한 거짓말도, 완벽한 진실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부, 북부…?”

다행히도 에레즈의 관심은 금세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네. 사람이 적고 황량한 땅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곳이 제일 안전합니다.”

“아, 아아…. 그, 그렇구나….”

에레즈는 북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북부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을 살아온 탑 외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갑자기 말씀드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 난 괜찮아.”

“하지만 언제든 숲의 상황이 바뀔 수 있어서… 기회가 될 때 당장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으…응.”

에레즈의 대답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안심시켜 주었으니 칼리번은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이, 있잖아….”

칼리번이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에레즈가 살며시 말을 걸었다.

“무, 무언가, 조, 조금, 이, 이상해….”

“…….”

“기… 기, 기뻐해야 하는데……. 그, 그게…… 새, 생각, 보다 기… 기쁘지가 아, 않아.”

에레즈는 뜻밖의 말을 했다. 마물로 둘러싸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숲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다. 누구나 바라는 결말일 것이다. 그런데 탈출을 목전에 두고도, 에레즈는 기뻐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칼리번은 그런 에레즈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떠나는 것을 의심할지언정 당연히 기뻐할 것이라 믿었는데.

“어, 어느새, 이, 익숙, 익숙해져 버렸, 나 봐….”

“…이런 생활에 말입니까?”

에레즈 프리드웬은 왕족이었다. 설령 탑에 갇혀 지냈다고 한들 그것은 새장에 갇힌 극락조와도 같은 삶. 생활 자체에는 구김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구차하고 더럽게 살아가지는 않았을 텐데.

“……응.”

그런데도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칼리번의 두 눈은 에레즈의 작은 근육의 움직임마저 전부 담았다.

“그, 그러니까…… 나, 나는 그동안 계, 계속… 타, 탑에 있었으니까….”

“…….”

“호, 혼자서는, 아, 아무것도 하, 할 줄 모르니까…. 바, 바깥에 나, 나가게 되면…….”

“…….”

“무, 무서워…. 이, 이곳에 나, 남는 것보다도 더…. 내, 내가, 지, 짐 덩이가 되면, 어, 어떡하지….”

기껏 새장 밖으로 나왔는데, 날개가 잘려 날지 못하고 땅을 기어야 한다면. 그때 새는 어떻게 해야 하지? 에레즈가 물었다.

“나, 나는… 하, 한곳에 머, 머무, 머무는 게, 더, 이, 익숙, 해서… 바, 바깥은, 모, 모르겠어….”

에레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탈출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원래 알테르의 손에서 얌전히 길러지다, 결혼식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새장이 엎어져 우연히 밖으로 나오게 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 나 같은 건…… 부, 분명… 제, 제 몫을 못 하고, 굶어, 죽거나 마, 마물에게 자, 잡혀서… 죽거나… 하, 할 거야.”

주인의 손에 자란, 아름다운 털을 지닌 애완조는 설령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한들 결국 굶어 죽을 뿐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삶의 방식이 된 것이다. 숲을 헤매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탈출할 방법을 찾던 칼리번과 달리, 동굴 속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체념과 포기. 탑과 동굴 속에서는 장점이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변하는 외부에서는 달랐다.

“나, 나는, 쓰, 쓸모 어, 없으니까…….”

에레즈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그새 눈물이 고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 그치만, 나, 나는, 부, 불도 피, 피울 줄도 모, 모르고…. 사, 사냥도 할 줄 모르고….”

물론 에레즈의 말대로다. 성년이 되었으나 능력 자체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 말은 어린애에게 실례다. 성 밖의 어린애들보다도 못했다. 그 아이들은 적어도 먹고살기 위해 부모에게 잡일을 배우니 말이다.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일 뿐입니다. 익숙해지면 다 하시게 될 겁니다.”

“저, 정말로, 그, 그럴까…….”

“네.”

그러나 불을 피우거나, 세탁하거나, 사냥하거나….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가 대단치도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만큼 그도 금방 익힐 것이다. 더구나 에레즈에게는 왕족 출신이면서도 잡일도 거리낌 없이 하려 드는 눈부신 장점이 있었다.

“밖에 나가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왕자님께도 맞는 일이 있을 겁니다.”

“…어, 없으면, 어, 어떡해?”

그럴 리가 없었다. 에레즈는 제법 손재주가 좋았다. 칼리번 자신보다 꼼꼼하게 직물을 짜냈던 것이다.

“고, 고작 그, 그 정도로는……. 지, 진짜, 는, 다, 다른 거잖아…. 나, 나는, 내, 내 손으로 머, 먹고 살아, 보, 본 적이 어, 없어.”

칼리번이 일전에 에레즈가 만들었던 직물에 관해 얘기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 어, 어쩌지. 나, 나…… 이, 이미 느, 늦은 거, 걸지도 모, 몰라….”

“네…?”

“카, 칼……. 너, 너만 해도… 이, 이렇게 대단, 대, 대단한데… 나, 나는 아, 아기나 다, 다를 바가 어, 없고…. 쓰, 쓸 만, 해, 해졌을, 때는 이, 이미, 이미, 하, 할아버지가 돼, 되었을, 지, 지도…. 그, 그 전에 주, 죽거나.”

언제 들어도 지독히도 비관적인 말투였다. 그 점에서 그는 한결같았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남습니다.”

칼리번이 피 웅덩이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처럼. 그 후로도 수많은 전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처럼.

‘머리가 너무 좋으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인가?’

칼리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뭘 제대로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벌써부터 그렇게 고민부터 하는지, 매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령 에레즈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해도, 일단 마을에든 들어서면 누구든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 보석안과 그 누구와 비교해도 빛이 바래지 않는 금빛 머리카락. 그는 존재감만으로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칼리번은 굳이 그 생각까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확고한 진실’이었으니까.

“…….”

그러나 에레즈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칼리번의 팔에 얼굴을 홱 묻었다.

“주무십시오.”

칼리번은 그가 이제야 잠들려나 싶었다.

“…뭐, 뭐가, 하, 하고 싶은지.”

에레즈가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불쑥 물었다.

“……마, 말하면… 비, 비웃을, 거, 거지…?”

칼리번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요.”

뭔가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지, 진짜?”

“네.”

“저, 정말, 이지…….”

“…비웃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을 받고서야 에레즈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걱정이 든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나, 나… 사, 사실은… 기, 기사가 되고 시, 싶었어….”

그러나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굳이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

기사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래 희망에 칼리번은 드물게도 놀랐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타, 탑에서, 하, 항상 내려다봤어. 사, 사람들을, 지, 지키기 위해, 떠, 떠나는 기, 기, 기사를….”

쇠창살로 막힌 창문. 모두에게 평등한 햇빛마저도 직사각형으로 잘려 들어오는 탑 위의 독방. 에레즈는 침대 위에 올라가서도 까치발을 들어야 간신히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금실로 수놓아진 휘장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떠나는 기사들의 행진을….

“혀, 형님들처럼….”

행렬의 선두에 선 인물은 당연히도 알테르 프리드웬을 비롯한 왕자들이었다.

“…하, 하지만, 기… 기사단, 에는… 수, 순수한 나, 남자밖에 모, 못 들어, 가, 가니까…. 나, 나 같은 건, 아, 안 돼….”

칼리번은 여자아이가 수백 년째 태어나지 않는 프리드웬 가문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을 알고 있다. 어쩌면 저 가문에는 마물의 피가 섞였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오로지 에레즈만 모르고 있었다.

“…우, 우습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거, 거짓말….”

가장 원하는 대답을 들은 에레즈는 뺨을 붉혔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칼리번은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에레즈의 말이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에레즈가 기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마물 혼혈이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의 허약한 체력과 힘 때문이었다. 연약한 에레즈는 기사가 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만약 칼리번이 그의 형이었다 할지라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근데….”

에레즈가 슬쩍 운을 뗐다.

“…요, 용병 일을, 하, 하는 것도… 그, 그리… 나, 나쁘지 아, 않을, 지도…?”

그는 칼리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칼리번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 요, 용병들도 사람을 구해 주잖아…. 나, 나도, 치, 치료해…. 아, 아니…. 서, 성녀님들에게 치, 치료받는 거, 봐, 봤어….”

칼리번이 속한 ‘검은 어금니’처럼, 왕실의 인가를 받은 용병대는 성녀님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에레즈는 아마도 그것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내, 내 몸에는 마, 마물의 피가, 서, 섞였으니까……. 그, 그쪽이 나, 나한테는, 더, 자, 잘… 마, 맞을지도…?”

전혀 그렇지 않다.

“…하, 하지만… 나, 나 같은 건, 아, 아무도, 요, 용병대에… 너, 넣어 주지 아, 않겠지…?”

당연한 말이었다.

“……너, 넣어 주지 않겠지……?”

에레즈가 새침하게 물어보았다. 파란 눈동자가 유독 반짝거렸다. 칼리번은….

“네.”

사실대로 대답했다.

“용병대에도 나름의 입대 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당연히 왕자님은 안 됩니다.”

칼리번은 검은 어금니 외에도 다른 용병대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변변찮은 곳이어도 에레즈를 받아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평소에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했던 용병대조차도, 에레즈가 들어갈 곳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에 차지 않고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아, 아……윽.”

에레즈가 신음을 흘렸다.

“그, 그렇구나……. 그, 그렇지……. 여, 역시….”

칼리번의 대답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에레즈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지금은 부족하시지만, 좀 더 자라시면 어디든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부족한 신체 능력을 깨닫고 침울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 나름대로 에레즈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 노력했다.

“으, 응…. 고, 고… 고마워….”

대답은 했으나, 어딘지 불만족스러운 목소리였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무십시오.”

칼리번이 정리하려던 차였다.

“카, 칼…!”

봉선화의 씨앗이 터지는 것처럼, 에레즈의 말 주머니가 확 쏟아졌다.

“바, 밖에 나가도— 계, 계속, 겨, 곁에 있어 줄 거지?”

에레즈의 손이 필사적으로 칼리번을 붙잡았다.

“나, 나가고 나서도…!”

에레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흔들리고, 높낮이가 제멋대로 튀었다.

“하, 할 줄 아는 건, 어, 없지만……. 노, 노력할게! 그, 그러니까…….”

“…….”

“버, 버리지 마….”

버리지 마. 버리지 말아 줘.

에레즈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더듬거렸다. 그것이, 에레즈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

칼리번은 이 순간까지 그의 진심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뻑뻑해진 두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네.”

한참 뒤에서야 칼리번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몸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던 에레즈의 손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에레즈는 부끄러운지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러고는 그의 말대로 눈을 꾹 감고 뜨지 않았다.

* * *

칼리번은 자리에 앉아 잠든 에레즈를 내려다보았다. 이런저런 고민에 뒤척이더니 결국에는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늘 그랬듯이 무해하고 무력해 보였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만 있다가, 돌 아래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쇳소리와 함께 뽑힌 칼날은 어둠 속에서도 불길하게 번뜩였다. 에어리얼에게서 받은 칼이었다. 동굴 앞에 섰을 때, 자신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이라고 불러.>

그 오메가의 말은 거짓말이다. 속임수다. 처음 에레즈의 겉모습에 취해 막연한 동경을 품은 적은 있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황금색 피에서 무언가를 기대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나약했다. 그가 흘리는 피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붉은색이었다. 알파가 되다만 자신처럼 덜떨어진 존재였다. 열등한 존재를 사랑한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보다 강하고 우월한 존재와 번식하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다.

경험이 많고 능수능란한 에어리얼이 자신을 뒤흔들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던진 것이다. 칼리번은 유독 둔하고 서툴러 사랑은커녕 기쁨이나 즐거움조차도 부족한 편이었다. 기묘한 통찰력으로 그 사실을 꿰뚫고, 일부러 세 치 혀로 함정을 판 것이겠지.

칼리번은 단검을 에레즈에게 가까이 댔다. 칼날 자체에서 뿜어내는 어스름한 빛이 에레즈의 뺨에 비쳤다. 칼날에 비치는 것만으로도, 에레즈의 하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용병이자 마물 혼혈인 칼리번이 세상에게 버림받은 왕자를 죽이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 누구도 이 살해를 두고 칼리번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세상은 언제나 나약한 존재에게는 외면으로 일관했다. 더구나 모두가 이 나약한 자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 에어리얼도, 알테르도. 아마 젠도 에레즈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죽이려고 들겠지.

에레즈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은 마지막 배려다. 알테르의 손에 넘어간 그가 어떤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살려서 에어리얼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이 칼을 가늘고 흰 목에 좀 더 가까이 두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더는 마물에게 쫓길 일도 없을 것이고, 유일한 동료를 배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지. 한낱 용병에 지나지 않는 마물 혼혈이 한 나라의 왕자와 이토록 오래 접촉하다니, 애초에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꿈은 끝이다. 대신 에어리얼이 보여 준 마계의 환영이 칼리번을 협박하고 있었다. 에레즈를 버리지 않는다면, 죽는 것보다도 끔찍한 억겁의 시간이 칼리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어느새 칼리번의 숨이 거칠어졌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거대한 마물과 싸운 것처럼 몸이 떨렸다. 칼끝이 처음 검을 잡는 사람보다도 형편없이 흔들렸다.

이래서야 마치 겁쟁이 같지 않은가?

겁. 두려움. 필요 없는 감정들…. 칼리번이 숲에 추락한 이후 에레즈에게 받은 것이었다. 에레즈와 함께한 후, 칼리번은 변화했다. 공포. 슬픔. 절망. 아픔…. 나약한 감정의 파편 따위는 원치 않았다. 마물과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용병에게는 단 하나도 필요 없는 것뿐이었다.

이런 감정은 약자의 것이다. 마물에게 쫓기고, 원치 않게 강간당하고, 죽어 가던 인간이 칼리번에게 보였던 감정이었다.

“…….”

칼리번은 칼자루를 움켜쥔 손이 감각을 잃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짐승을 도축하고, 인간과 마물을 베어 왔다. 무언가를 죽이는 일에는 전문가였다. 에레즈는 아무것도 모른 채 편안히 칼리번의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칼리번의 온몸에 진땀이 맺혔다.

처음으로 죽여 본 생명체는 작은 송아지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신에게 바칠 제물이라고 했다. 마물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는 온갖 신이 난립해 있었다.

그때 단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

* * *

새벽이 지났으나 어스름한 아침이었다. 에레즈는 둥지 속에서 홀로 깨어났다.

“카, 칼…….”

반쯤 감긴 두 눈에는 잠이 가득했다. 에레즈는 눈가를 닦아 내면서도 무작정 칼리번을 불렀다.

“버, 벌써 이, 일어, 일어, 난 거야…?”

이제 막 일어난 탓인지 앞머리가 부스스했다. 에레즈는 두 손으로 정돈하며 그를 찾았다. 이쯤 되면 묵직한 대답이 들려와야 했다. 그러나 동굴 안을 울리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칼…?”

불안감이 퍼뜩 몰려들었다. 잠이 단번에 달아났다. 혹여나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은 아닐까?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잠들지 말걸! 에레즈가 매번 하던 후회였다.

“카, 칼…. 수, 숲에 나, 나가기로 했었나…?”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터무니없는, 허황된 희망이 아니라, 누적된 경험에서 나오는 설득력 있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내린 답과 달리 에레즈는 허둥지둥 칼리번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카, 칼!”

동굴 끄트머리까지 걸어 나온 에레즈는 깜짝 놀라 외쳤다. 동굴 입구에 칼리번이 경비병처럼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림자가 동굴 안쪽에 들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네, 왕자님.”

칼리번이 무표정으로 답했다.

“…….”

이번에도 떠나지 않아 주었다! 칼리번을 보고 몹시도 반가웠지만, 에레즈는 머뭇거렸다.

“서, 설마…. 잠들지 않은 거야?”

칼리번은 몸을 돌렸다.

“그럴 리가요.”

해를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에레즈는 눈이 부셨다.

“……아.”

에레즈는 급히 숨을 삼키고 말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희게 세 있었다.

* * *

칼리번과 에레즈는 함께 추락했다. 깊은 굴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숲으로….

그 이후로는 빙빙 돌기만 했다. 마물과 숲의 주민을 죽이고, 마물 혼혈과 싸우고, 죽어가는 인간의 눈을 감기고… 마물의 왕을 만났다. 초반에는 동료들과 구축해 놓은 은신처가 있어서 생활하기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습격을 당해 은신처를 옮겨야만 했다.

높다란 절벽 한가운데 뚫린 동굴은 천연 요새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질긴 잡초와 동굴 틈에 간신히 고이는 물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 식량 수급에는 치명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인지 오십 여일에 가깝게 머물렀음에도 막상 떠날 때는 챙길 만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칼리번은 몇 번이나 검수했지만, 두 손은 가벼웠고 찢어진 옷을 엮어 만든 천 꾸러미는 단출했다.

마찬가지로 식량도 거의 비축하지 못했다. 숲이 오염되면서 에레즈가 먹을 만한 과실이나 고기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비축해 둔 것도 동굴 안에서 버티면서 소진되었다. 아마도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채집과 사냥을 해야 할 것이다.

에레즈와 둘이 있을 때는 곤궁했다. 칼리번 혼자서 두 사람의 몫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젠과 함께 움직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쪽이 사냥을, 다른 한쪽이 방어를 맡으면 되니 그렇게까지 버겁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단 하나, 에레즈의 머리카락이었다. 저 치렁치렁한 모습으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제가 괜찮다고 하기 전까지는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다칠 수 있습니다.”

“으, 응….”

“고개도 지금처럼 끄덕이시면 안 됩니다.”

“가, 가만히, 있을게!”

에레즈는 칼리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그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 자세로 꾸물거리며 칼리번에게서 등을 돌렸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평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묶어 놓은 머리카락 뭉치를 한 손에 쥐었다. 워낙 머리카락이 긴 탓에, 묶어 놓은 끈조차도 금빛 머리카락이었다. 칼리번이 단검으로 끈을 끊어 내자, 에레즈의 긴 머리카락이 황금 비단처럼 사르르 퍼졌다. 그동안 동굴 속에 박혀 제대로 씻지 못했는데도 그의 머리카락은 조금도 더럽지 않았다.

“다, 단검은…… 이,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차, 찾은 거야?”

“숲을 수색하던 중 되찾았습니다.”

칼리번은 억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여나 에레즈가 단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싶어 검집과 손잡이에 금사를 둘러 두었다.

“차, 찾아서, 다, 다행이다….”

에레즈는 저를 죽이라고 준 단검인지도 모르고 마냥 기뻐했다.

“…네.”

칼리번은 잘린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었다. 에레즈의 머리카락은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에레즈에게 러트가 찾아와 마력이 충만하던 때는 주인의 의사마저 무시한 채 멋대로 주변을 공격하고 속박하기까지 했다.

러트가 끝난 후에는 얌전해졌지만, 대신 잘라 내면 다시 자라났다. 잘라 낸 머리카락이 한동안 스스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본체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를 대비해 힘을 비축하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머리카락에 마력이 남아 있을까? 칼리번은 조심스럽게 손에 쥔 머리카락 한 움큼을 잘라보았다.

“자, 잘려…?”

사각거리는 소리에 에레즈가 물었다.

“네.”

칼리번은 짧게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며 비축한 마력도 전부 빠져나갔는지, 이번에는 평범하게 잘렸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부터는 지루한 노동이었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일일이 잘라 내는 것도 꽤 큰일이었다. 그는 푸줏간을 하는 집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추수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에레즈의 금빛 머리카락은 마물이 침략하지 않았던 시절, 가을마다 마을을 수놓던 황금빛 벌판 같았다.

칼리번은 말없이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날카로운 단검이 몇 번이나 에레즈의 뒷덜미를 스쳤다. 칼리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 됐습니다.”

칼리번은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어느새 그들 주변에는 금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 주자, 에레즈가 돌아보았다. 숲에 오기 전 에레즈의 머리카락은 단정하고 짧았다. 그러나 칼리번의 손길은 투박해 그 모양새를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에레즈는 어깨에 닿을 정도의 단발이 되었다.

“고, 고마워….”

에레즈는 바뀐 머리 모양이 익숙하지 않은지, 머리카락의 끝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에레즈의 양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의 길이가 비죽배죽했다.

“…….”

칼리번은 제 작품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에레즈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굳은살이 박인 칼리번의 손가락이 희고 동그란 이마를 스쳤다. 스르륵, 이마를 드러내며 넘어간 금발은 다시 부드럽게 내려왔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에레즈에게 사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많이 오가는 마법의 주문이기도 했다.

“……흐응.”

그러나 에레즈는 조금도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뒷덜미에 닿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거울을 못 봐서 그런 걸까? 아직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 * *

칼리번은 에레즈를 등에 업고 절벽을 내려왔다. 에레즈가 등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는 추락이 염려되어, 잘라 둔 금사를 밧줄처럼 사용해 몸에 칭칭 감았다.

“저를 꽉 잡으셔야 합니다.”

“으, 응!”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칼리번은 그를 등에 매달리게 두는 게 탐탁지 않았다. 한쪽 팔로 꽉 붙잡고 내려가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그러나 에레즈가 고집을 피웠다. 칼리번이 한쪽 팔로만 절벽에 타면 둘 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과연 옳은 말이었다.

에레즈는 두 팔로 칼리번의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숨결이 절벽을 내려오는 내내 칼리번의 목에 닿았다. 숨결 대신 짧아진 머리카락이 간지럽히기도 했다.

절벽을 다 내려온 후, 칼리번은 허리에 감긴 금사를 단검으로 끊어 냈다. 에레즈는 가장 마지막에 풀썩 땅으로 내려왔다.

“아…….”

그리고 에레즈는 감탄했다. 두 발로 땅에 서 본 것이 얼마 만인지!

“…….”

에레즈의 기쁨은 곁에 선 칼리번에게도 와닿을 정도였다. 어두운 동굴에 밤낮으로 숨어 있다가, 실로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당연했다. 그 감동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지 못했다.

“수, 숲이…… 주, 죽어 있어.”

주변을 둘러본 에레즈가 느낀 바를 한마디로 내뱉었다. 에레즈의 마지막 외출은 칼리번이 호숫가에 데려다줬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도 동굴을 비울 때마다 틈틈이 바깥을 구경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와 보니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실감했다.

분명 이른 아침이었다. 하늘은 옅었고 햇살은 시리도록 밝았다. 그러나 그 빛이 닿는 대지는 검은 사체였다. 죽은 후에 쏟아지는 금은보화처럼 아름다운 햇볕이 쓸모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땅은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짙었다. 산천초목은 시든 채로 말라붙거나 썩었다. 숲의 입술은 더는 숨을 쉬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새소리, 벌레 우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짐승의 발자국이나 심지어는 마물의 기척조차도…….

<에레즈 프리드웬의 목을 잘라 이 자리에 두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조건으로 너와 젠을 자유롭게 해 줄게.>

잊고 있었던 에어리얼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일부러 칼리번에게 여유 시간을 주었다. 숲에 거주하던 마물도 그가 전부 퇴거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에어리얼은 이 거래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는 몸에 강제로 새겨진 문신처럼 칼리번을 항시 따라다녔다.

“…왕자님.”

칼리번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에레즈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땅에 닿은 발을 천천히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죽은 풀을 밟는 감촉이 불편한 것 같았다.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 그렇지…….”

에레즈는 애써 웃었지만, 커다란 눈은 확연히 겁에 질려 있었다.

“으, 응!”

잠시 후, 에레즈는 용기를 내어 칼리번의 팔을 꽉 붙잡았다.

“가시죠.”

칼리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도 척척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호숫가로 데려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숲은 죽었지만, 물은 숲 밖에서 흘러드는 탓인지 아직은 식용이 가능했다. 떠나기 전, 수통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제대로 씻을 참이었다. 바깥 상황도 숲과 비슷하다면, 비를 만나기 전까지 물 구경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 아!”

비교적 맑은 물을 보자, 에레즈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씨, 씻어도 되, 될까?”

“네, 괜찮습니다. 전에 확인했을 때, 마물은 없었습니다.”

“고… 고마워!”

칼리번의 허락을 받은 에레즈는 물가로 다가갔다. 전과 달리 칼리번은 그와 함께 씻지 않았다. 수통에 물을 채우고 에레즈를 감시하기만 했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도 연약한 에레즈는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것이다. 칼리번은 한시도 그를 놓칠 수 없었다.

에레즈는 너덜너덜한 옷과 바지를 팔뚝과 종아리까지 걷어 올렸다. 물가에는 발목까지만 잠길 정도로 들어간 채, 세수를 하고 드러난 피부를 닦았다. 먼 길을 가야 하기에 목욕을 할 수는 없었다.

“…왕자님?”

첨벙첨벙 물소리를 내며 씻던 에레즈가 갑자기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꽂아 둔 나뭇가지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설마 물속에 마물이 숨어들었나…?’

칼리번은 뚝 그친 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마물이 튀어나와 에레즈를 납치하는 일은 없었다. 에레즈는 그저 물속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

칼리번은 그가 잔잔해진 수면을 거울처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큭…. 결국 머리카락을 보게 되셨군.’

압도적으로 부족한 미적 감각을 들키게 된 것이다. 칼리번은 이를 갈았다.

“어……. 어어.”

그러나 이번에도 멍청한 칼리번의 추측은 틀렸다. 에레즈는 수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제 얼굴을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수면에 비치는 손의 움직임과 손이 얼굴 위를 돌아다니는 움직임이 정확히 일치했다.

“이, 이게, 나…라고…?”

이 얼굴이… 자신의 것이다. 에레즈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레즈는 처음 숲을 들어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행동은 여전히 아이 같았지만, 겉모습은 어엿한 청년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 이게, 나…….”

에레즈는 야위고 지친 얼굴과 마주했다. 그 얼굴은 슬퍼 보였다. 딱히 자신을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훨씬 더 못생겨 보였다. 에레즈는 수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흐릿하게 보이던 제 모습이 흩어져 물속으로 사라졌다.

“…….”

에레즈는 물에서 나와 칼리번에게 다가갔다.

“가, 갈래….”

그렇게 말하면서,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매달렸다. 그가 받은 충격은 떨리는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네.”

칼리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바뀐 머리 형태에 정말로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길을 아는 칼리번이 앞장서고, 에레즈는 그의 뒤를 열심히 따랐다. 칼리번은 칼 소리가 나지 않도록 허리춤에 손을 댔다. 금사가 감긴 단검이 손안에서 흔들렸다.

“…….”

만약 이 단검으로 왕자를 죽이려고 든다면…. 타인센의 팔을 잘라 버린 것처럼, 자신의 손을 잘라 버릴까? 아니면 마력이 전부 빠졌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칼리번은 이 단검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레즈에게 최소한의 공격 수단이 있기를 바랐다.

“…왕자님!”

칼리번은 비틀거리는 에레즈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쌌다. 그가 붙잡지 않았다면, 에레즈는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미, 미안….”

에레즈는 칼리번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지쳤다. 생각해 보면 탑에서 나와 오래 움직여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 체력이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하지 못한 것은 칼리번의 실수였다.

“괘, 괜찮아! 호, 혼자 거, 걸을 수 있어….”

에레즈가 만류했지만, 칼리번은 그를 단번에 등에 업었다.

“이편이 훨씬 빠릅니다.”

칼리번의 말에 들썩거리던 등 위가 금방 얌전해졌다. 물론 칼리번도 언제까지고 에레즈를 업고 갈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젠을 만나기 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에레즈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마침 지나가는 길목에 나무로 채워지지 않은 공터가 있었다. 원래는 야생화 군락이 있던 곳이었으나, 가장 먼저 오염되어 지금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조금 쉬었다 가겠습니다.”

칼리번은 평평한 바위에 에레즈를 앉혔다.

“나, 나 때문에….”

“아닙니다.”

칼리번도 바위 옆 땅바닥에 풀썩 앉았다. 칼리번이 아예 놔 버리자, 에레즈도 거친 숨을 내쉬며 휴식을 취했다.

“…….”

어쩌면 오염된 숲 자체가 에레즈에게서 마력을 뺏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숲을 노려보며 막연하게 추측했다.

“왕자님.”

그때였다. 한창 숨을 돌리던 에레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칼리번이 그를 불렀지만, 강한 어조는 아니었다. 주변에 마물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에레즈는 검게 죽은 야생화의 군락 한가운데에 섰다. 그는 칼리번을 등진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잿더미 위에 선 백조처럼, 에레즈의 뒷모습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멀리서 바람이 불자 뒷덜미를 덮은 금발이 흔들리고 가는 목이 드러났다.

“…….”

만약 이곳에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면 좋았을까? 어두운 얼굴이 조금이라도 폈을지….

칼리번은 용병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야생화 따위는 질리도록 봐 왔다. 이곳에 어떤 꽃이 피었는지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곧 젠과 약속한 시각이 다가온다. 그전까지 칼리번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젠을 버리고 서둘러 에레즈와 이곳을 떠날 것인지, 아니면 젠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에레즈를 죽일 것인지를.

“…….”

칼리번은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단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 있잖아.”

그와 동시에, 에레즈가 입을 열었다. 설마 눈치챈 것일까? 칼리번의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았다.

“카, 칼…. 너, 너는… 어, 어째서 나, 나를 구, 구, 구해 준 거야?”

그러나 에레즈는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질문을 했다.

“…….”

그 말을 꺼내기가 무척 어려웠는지, 에레즈는 차마 칼리번을 돌아보지 못했다.

“왜, 왜…. 나, 나 같은 걸 살려 주고, 계, 계속 돌, 봐 주고…. 버, 버리지 아, 않는 거야?”

“…….”

“나, 나는……. 난, 아, 아무 데도 쓰, 쓸데없고……. 마, 말이나 더, 더듬고……. 보, 보잘것없는데….”

칼리번의 숨이 덜컥 멎었다. 에레즈는 멈추지 않고 공격했다.

“아… 아무도 나, 날 조, 좋아, 하, 하지 아, 않았, 않았어. 아, 아버지도, 혀, 형님, 들도. 나… 나, 나는 괴, 괴물이니까…. 쓰, 쓸모없는, 존재니까.”

“…….”

“바, 바깥세상은 모, 모르지만……. 그, 그래도… 나, 나는…. 그, 그때… 주, 죽었어야 한다는 거, 것 정도는 아, 알고 있어.”

“…….”

“…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그래야 했던 것 같아.”

그의 뒷모습이 마치 도축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보였다.

“…그, 그런데 어째서…. 너, 너는……. 나, 나를…. 겨, 결혼식 전까지 우, 우, 우리는, 하, 한 번도 대, 대화도 해 본 적 없는데…. 어, 어째서?”

에레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말을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명백히 떨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 나 때문에, 도, 동료도 버, 버리고……. 다, 다치기도 하고, 그, 그리고 모, 몸도…. 아, 아프게 되고….”

에레즈가 두 손을 세게 주먹을 쥐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왜……. 왜 그랬던, 거, 거야?”

에레즈는 대답을 듣기 위해 간신히 칼리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찌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붉게 변해 있었다. 그 입술에는 수백 마디의 말을 품고 있었지만, 반의 반절도 꺼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푸른 눈은, 별처럼 무수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칼리번은 헤아리지도 못할 정도로 섬세하고 다양하고 무수한 별 무리. 기대에 차서 반짝이다가, 또 반대로 눈물에 젖어 반짝이기도 하는.

“…….”

칼리번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동생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왕자를 도왔다고? 젠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칼리번은 수많은 어린아이를 전쟁터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 그가 고귀한 왕족이라, 언젠가 받게 될 포상을 노리고? 그러나 칼리번은 그보다 더 고귀한 알테르 프리드웬의 팔을 잘랐다.

막연히 품었던 동경이라기에는, 첫눈에 반했던 모습은 진짜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상 칼리번은 저 반짝거리는 외모에 속은 것이나 다름없다. 실상은 내실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사랑이라고 불러.>

필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칼리번은 마지막 남은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 증거로, 칼리번은 줄곧 그에게 실망했고, 그를 버리거나 죽여야 한다고 수도 없이 마음을 먹기도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한 손에는 그를 죽일 단검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꽃을 주셨습니다.”

칼리번은 목이 조인 것처럼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제게, 꽃을 주셨기 때문에.”

칼리번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당장의 이득만 보고 움직이는 용병이었다. 마물 혼혈이 제아무리 인간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마계에서 호흡하는 마물보다는 약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더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금화를 받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운다.

그것뿐이다. 그 값어치를 하기 위해서….

“……!”

에레즈의 푸른 두 눈이 커졌다.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리고 어떤 대답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다만, 칼리번의 대답만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그렇, 구나…. 그, 그렇구나.”

에레즈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납득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칼리번도 그도 마찬가지였다.

“…….”

칼리번은 그에게서 두 송이의 꽃을 받았다. 정확히는 한 송이는 받았고, 한 송이는 쟁취한 것이다. 그 꽃은 이미 오래전에 져 버렸겠지. 세 번째 꽃은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꽃은 비극을 알리는 신호가 되어 마물들에게 짓밟혔다.

“……그, 그런 거, 구나.”

에레즈는 갑자기 쿡쿡 웃었다. 눈썹이 축 처진 것이, 웃고 있는데도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갑자기 에레즈가 연극을 하듯이 그 말을 입에 올렸다. 평소에 말을 더듬는 것과 달리 그 한마디는 목소리도, 어투도 완벽했다.

“…….”

그 한마디로,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성년이 된 여섯째 왕자를 세상에 선보였던 그 날. 왕족의 성년식이라기에는 어딘지 조촐한 연회. 축하를 위해 방문한 귀족도 많이 없었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왕자가 괴물이라는 소문뿐.

그날 칼리번과 젠은 가장 구석 자리에서 경비를 섰다. 그리고 에레즈는, 자신을 모함하는 무성한 소문을 존재감만으로 종식시켰다. 모두가 감탄을 터뜨렸다. 눈에 띄는 매끄러운 금발과 화사한 외모. 샹들리에의 빛 아래, 그보다 반짝이는 푸른 보석안.

그런 아름다움에 걸맞게 의복은 보석으로 치장되었고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아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였다. 피 웅덩이에서 구르던 칼리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에 취했다. 용병, 그중에서도 가장 천하다는 마물 혼혈 출신의 용병이었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에게 이끌렸다.

성년식에서 에레즈는 단 한마디만을 꺼냈고, 조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래서… 칼리번뿐만 아니라 모두가 깜빡 속고 만 것이다.

“사, 사실은… 그, 그날……. 저, 정해진, 상대가 있었어. 내, 내 꽃을 바, 받을 사… 사람이.”

꽃무덤에 서 있던 에레즈가 천천히 다가왔다.

“…혀, 형님께서 저, 정해 주셨어. 리, 리론, 후…작 가문의 여, 영애…. 그, 그게… 내, 내게 주, 주, 주어진 이, 임무, 였어.”

“…….”

“여, 연습… 마, 많이 했어. 지, 지금도 그, 그 말만은 더, 더듬지 아, 아… 않을, 정도로. 혀, 형님을 시, 실망, 시, 시키고 시, 싶지 아… 아, 않았으니까.”

운명이라는 말을 감히 사용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날을 위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름다운 왕자님이 구석 자리에서 경비를 선 용병에게 단 한 송이뿐인, 소중한 꽃을 주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래서…… 그, 그날은, 마, 마, 많이 혼났지만…. 네, 네게 준 걸. 후, 후회하지는 않아.”

“……!”

“러, 러트가 왔을 때, 는 네, 네게 미, 미안해서, 그, 그런 말을 했지만…. 사, 사실은, 조, 조금도… 후, 후회하지 않아.”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에레즈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그때, 주, 주지 말았어야 했어! 나, 나랑 어, 얽히지만 아, 않았어도… 나, 나 같은 걸 채, 책임, 질 피, 필요도… 없고, 다, 다칠 일도 없고, 이, 이런 일도…. 그, 그럼 너는… 나, 날 기억조차 하, 하지 않았을 텐데.>

칼리번은 러트에 괴로워하며 외치던 에레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말은 칼리번을 비참하게 했고 또 분노하게 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상대가 정해져 있었다면, 어째서…….”

칼리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번이 유일하게 에레즈에게 호감을 품었던 그 날의 실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산산조각이 났다. 그 만남을 계획한 것은 에어리얼이었으며…. 그 꽃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모, 몰라……. 모르, 겠어.”

에레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했으나, 그의 표정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칼리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온갖 감정을 잔뜩 담고 있었다. 그 감정은 너무나 복잡하고 연약해서, 입 밖으로 꺼내면 별 가루처럼 사르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 나는 말이야…. 나, 나는, 아, 아무것도 되, 되고 싶지, 아, 않았어…. 아, 아무것도 아, 아니었어. 계, 계속… 버, 버려져 이, 있기만, 해, 했던 거야.”

저 죽어 버린 꽃이나 나무, 돌처럼. 에레즈의 시선이 죽어 버린 것들을 안쓰럽게 스쳤다.

“그, 그저, 주, 죽는 것이 무, 무서워서…… 사, 살고만 싶었, 을 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생물처럼 가만히 있으면,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바라지 않으면, 현재의 자신을 인식하지 않아도 된다. 괴물인 자신, 모두가 미워하는 자신…. 쓸모없고 바보 같은 자신.

왜냐면 현실을 깨닫고, 맞서고, 이겨 내는 용기는 몸을 웅크린 비겁함보다 훨씬 괴롭고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 고통 끝에 행복한 결말을 얻을 가능성조차 희박했다.

그럴 바에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편했다.

“그, 그런데… 너, 너랑 있으면 그 이상을… 워, 원하게 돼.”

그렇게 말하고는, 에레즈는 손등으로 제 눈가를 슥슥 닦았다.

“네, 네 곁에서 나, 나는… 마치…… 사, 사람이 된 것 가, 같아.”

에레즈는 속삭이듯 고백했다.

“…….”

사람.

칼리번이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비, 비록, 너, 너는… 저, 전부 이, 잊을 정도로 벼, 별것 아… 아니겠지만, 나, 나한테는….”

“…….”

“그, 하, 하나, 하나가… 내, 내게는 너무나…….”

말과 울음소리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에레즈의 목소리는 엉망진창이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등 뒤에 가린 손이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그대로 멈췄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손으로 그를 만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사이, 에레즈는 눈물을 닦아 내고는 씩씩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 어, 언젠가 너, 너한테 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미, 미안하다는 말…. 고, 고맙다는 말, 말고도… 하, 한 가지 더.”

그가 활짝 미소 지었다.

“하, 하지만, 아직, 요, 용기가 안 나서… 내, 내가 좀 더 자, 자라서 강해지면, 요, 용병이 되, 될 수 있을 정도로…! 그, 그때가 되면……. 아, 아무리 부, 부끄, 러워도, 무… 무서워도 꼭… 저, 전하고 싶어.”

멍청한 칼리번으로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감사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상을 주겠다는 말 정도밖에는 떠올리지 못했다.

에레즈는 어미 개를 찾는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칼리번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꽃…….”

이곳에서 자라는 야생화는 아니었다. 아마도 물가에 고여 있던 꽃 한 송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꺾어 둔 것 같았다.

에레즈가 그 꽃을 칼리번에게 내밀었다. 에레즈의 엄지손톱만큼이나 작은 꽃이었다. 어떻게 찾아낸 걸까? 자그마한 꽃은 젖어 있었고, 반쯤은 썩어 있었다.

칼리번은 쥐고 있던 칼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홀린 듯이 그 꽃을 받았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에레즈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말을 반복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뿐이어서, 더욱 귀중하고 희귀하게 느껴졌다. 에레즈는 옅게 미소 지었다.

* * *

어느덧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에레즈는 한차례 휴식을 취했으나 여전히 지친 상태였다. 체력 고갈은 평소 움직임이 부족해서 근육 상실로 인한 후유증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란 몸에 비해 너무 오래 굶었다. 즉, 영양 부족이기도 했다.

약속 장소에 다다를 즈음 칼리번은 짐을 앞으로 메고, 에레즈를 등에 업고 있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등에 기대 잠시 쉬다, 잠이 들었다. 칼리번은 도착한 후에도 굳이 그를 깨우지 않았다. 대신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 숨어들었다. 업힌 에레즈를 돌려 품에 안아도 그는 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겨 놓겠다는 듯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은 눈을 떴을 때와 달리 두려움도, 걱정도 없어 아직도 소년 같았다. 칼리번은 같은 얼굴을 한없이 바라볼 뿐이었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든 에레즈를 죽이는 일은 너무나 쉬웠다. 칼을 쓸 필요도 없이 손으로 목을 부러뜨리기만 해도 될 것이다.

칼리번이 망설이는 사이 어느 능숙한 사냥꾼이 먼저 활시위를 당긴 모양이다. 하늘을 낮게 날던 태양이 어느새 침몰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 덩치 큰 용병은 솜씨가 형편없었다. 그가 목을 쳐내야 할 어린 양은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살아 있었다.

“…….”

그는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백정이었는데도 말이다. 태양이 흘리는 피가 칼리번의 얼굴을 붉게 적셨다.

“음…. 으음…….”

슬슬 체력이 채워졌는지 에레즈가 잠에서 깨어났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반짝 뜨였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칼리번의 얼굴이었다.

“……아, 아….”

자신이 칼리번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레즈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칼리번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으, 응…. 그, 근데… 왜, 아직도 여기에…….”

에레즈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설프게 물었다. 누운 몸을 엉거주춤 일으키다 보니, 칼리번의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앉게 되었다. 에레즈는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얌전히 칼리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왕자님.”

“으, 응?”

“받으십시오.”

평소였다면 그의 행동에 참지 못하고 나무를 부러뜨리거나 바닥에 주먹만 한 구멍을 냈을 칼리번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착했다.

“이, 이건…? 이, 이걸 왜… 나, 나한테?”

칼리번이 에레즈에게 건넨 물건은 손잡이 부분이 금사로 칭칭 묶인 단검이었다. 두 사람이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더불어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에레즈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왕자님께서 가지고 계십시오. 혹시 모르니까요.”

“하, 하지만….”

“저는 신체가 단련되어 있으니 괜찮습니다.”

“……으, 으음.”

에레즈는 망설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칼리번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고, 고마워….”

하는 수 없이, 에레즈는 작게 감사의 말을 속삭이고는 두 손으로 받았다.

“앞으로는 길이 험난하니, 제가 없을 때도 혼자서 몸을 지키실 수 있어야 합니다.”

“……으, 응.”

숲 밖을 나가는 건 난생처음이다. 그 앞에는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 에레즈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처럼 한없이 겁을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전보다 훨씬 단단해지셨군.’

칼리번은 그런 에레즈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도 더 크고, 강해지면 칼리번에게 ‘어떤 말’을 하겠다고 그는 당당하게 선언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전보다 훨씬 의욕적이었다.

“어, 언제 떠날, 거야?”

에레즈는 의지를 다시며 물었다. 두 손으로는 금사가 감긴 단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무기가 생기니 약간은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곧.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대답하고는, 칼리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서부터 기척이 느껴졌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나무 그늘 속에 숨겨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희미한 바람 소리에 불과했다. 오감이 예민한 칼리번조차도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곧 시든 나무들이 사각거리며 흔들리고, 땅이 울렸다. 도망치는 자 특유의 다급한 발걸음과 거친 헐떡임, 무거운 몸.

“…….”

칼리번은 에레즈를 숨기기 위해 그가 있는 방향에 등을 지고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그림자가 석양을 뚫고 달려왔다.

“대장!”

젠이었다. 반가운 목소리였음에도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에어리얼에게 한 번 속은 전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칼리번은 주먹을 세게 쥐고는 척척 걸어 나갔다. 에어리얼이 분했던 젠은 피를 흘린 채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젠은 달랐다. 온몸이 피범벅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재가 묻어 좀 더 더럽고, 머리카락이 탔고, 얼굴과 몸에는 화상으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젠.”

“설명할 틈이 없어. 일단 받아!”

젠은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짐을 다짜고짜 칼리번에게 던졌다. 조악한 천과 넝쿨로 둘둘 말려 있는 그것은 불에 그슬렸는지 반쯤 탔다. 찢어진 천 틈으로 보이는… 쇳덩어리는.

칼리번은 거친 포장을 단번에 풀었다. 그러자 낡고 익숙한 대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

칼리번은 대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오랫동안 숲을 표류하며 검을 잡지 못해 무뎌졌을 거로 생각했는데, 쇳덩어리의 싸한 감각이 뼛속을 징, 울렸다. 마치 결혼식 전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대검에 집중하는 칼리번을 보면서, 젠이 숯검정이 묻은 얼굴로 씩 웃었다.

“대장의 검은 다행히 찾았어. 이거 하나면 대장이야 일당백이지.”

“…동료는? 다들 살아 있나?”

“그 녀석들은… 살아는 있지만, 더는 우리 편이 아니더군.”

젠은 수도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는지 잠시 인상을 썼다.

“그놈들은… 다음에 만나면 말 섞을 생각 말고 바로 죽여.”

젠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도 에어리얼의 향기에 넘어가거나, 아니면 알테르를 따르는 개가 된 거겠지. 젠에게서 별다른 설명은 없었으나 일련의 사건을 겪은 칼리번은 유추가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해!”

안부를 주고받는 것도 잠시였다. 젠이 다짜고짜 칼리번의 팔을 덥석 잡았다.

“대장! 놈들이 오고 있어.”

젠이 헐떡이며 말했다. 이제 막 도착한 젠은 미처 숨도 고르지 못한 상태였다.

“…미안, 잠입은 내 특기가 아니잖아? 동료였던 새끼들이랑 접촉하다가 들켜서, 도망치다가 그만…… 화약고를 터뜨려 버렸어.”

즉, 젠은 동료였던 자들을 불태우고 온 것이다.

“이것저것 도움이 될 만한 걸 좀 훔치고 싶었는데…. 두들겨 패면 정신 들 것 같은 녀석도 잡아 오고. 근데 역시 혼자서는 무리였어.”

<젠은 어제 수도에 도착했어. 바쁘더라고…. 날 만나러 올 틈도 없을 정도였다니까. 내 휘하의 마물 혼혈들과 접촉하고, 인간들의 쓸데없는 무기를 쌓아 둔 창고에 잠입했더군.>

“대장의 검이랑 목숨만 간신히 건졌지. 미안해.”

<아마 내일이면 네 무기를 들고 이곳에 무사히 도착할 거야.>

그 대가로 한쪽 팔이 시커멓게 탔음에도 젠은 사과했다. 젠의 목소리와 에어리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한데 엉켜 뒤섞였다.

에어리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칼리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로는 수도는 완벽하게 마물의 것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젠이 온전히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어리얼이 ‘놓아준’ 것에 가까웠다.

‘우리를 얼마나 가지고 놀 셈이냐, 에어리얼.’

칼리번은 빠득 이를 갈았다. 모든 일이 에어리얼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에레즈와의 첫 만남도, 두 번째, 세 번째 만남도. 그 이후의 흐름도 전부.

그것이 어째서인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분했다. 칼리번은 이토록 깊은 증오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마물을 증오한다고는 하나 그것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도 같은 분노였다. 그는 전쟁터를 오가며 온갖 군상을 보았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투명한 벽이 하나 놓인 것처럼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칼, 엄마랑 아빠가 없어…. 마물이… 아빠를 가져가 버렸어….>

심지어 제 여동생이 부모를 잃고 잿더미 속에서 떠돌 때마저. 자신은 마물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칼리번은 이런 자신을 키워 준 양부모를 잃고도 슬퍼하지 않았다. 부모를 잃은 알리샤를 온전히 동정하지도 못했다.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달랐다. 인간에 대한 호오가 없었던 칼리번은 생전 처음, 누군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역겹다고 느꼈다. 그리고 젠은… 그런 에어리얼의 비호를 받고 있다.

<그래서 젠은 네가 데리고 떠나고, 나는 왕자를 데려가서 알테르를 진정시킬 거야. 완벽하지?>

에어리얼의 혀는 독을 품은 뱀이었다. 되새길수록 칼리번을 중독되게 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여기서 만약 젠을 죽이고 에레즈와 떠난다면, 에어리얼의 계획에 조금이나마 흠집이 가게 할 수 있을까?

“…….”

칼리번은 대검의 끝을 젠에게 겨누었다.

“…대장?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야. 마물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고! 검 실력이 무뎌졌는지 시험하고 싶으면 대련이 아니라 마물을 베면서 확인해.”

젠은 처음에는 의아해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젠을 향해 겨눈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뭐야…. 대장…. 지금…?”

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칼리번을 쳐다보았다. 먼 길을 쉬지 않고 쫓겨 온 그녀는 몹시도 지쳐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젠. 이건 명령이다.”

칼리번은 따르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벨 듯, 단호하게 말했다.

“…….”

젠은 뻣뻣하게 굳어 칼리번을 노려보기만 했다. 배신당한 자만이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왕자님! 이리로,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십시오.”

칼리번은 원한이 맺힌 그 눈을 보고도 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여전히 젠과 대치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뭐…? 뭐라고…?”

이 이상 충격을 받을 수는 없으리라 믿었는데, 밑바닥에는 또 다른 바닥이 있었던 모양이다. 젠의 얼굴이 경악으로 더욱 일그러졌다.

“왕자님, 어서!”

에레즈는 굼뜨고 겁이 많았다. 칼리번이 한 차례 더 부르고 나서야 그의 등 뒤에 섰다. 칼리번의 뒤에 숨은 채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왕자…? 젠장, 뭐야…. 저건, 진짜… 여섯째 왕자…?”

“…….”

“에레즈 프리드웬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살아 있었던 거야? 그것도 대장과 함께?”

젠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조금의 접점도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 등장했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젠은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대로 입 밖에 꺼내며 칼리번과 에레즈를 번갈아 가며 노려보았다.

“카, 칼…. 도, 동료가, 이, 있다고는…… 마, 말하지 않았잖아.”

에레즈가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겁을 먹고 물었다. 갑자기 성장한 그는 이제 겉으로 보았을 때는 젠과 비슷한 키였으나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그의 나약하고 겁많은 태도는 작게 보이게 했다.

“뭐야, 제기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뒤에서 뭔 짓을 하고 있었던 거냐, 너.”

“…….”

“말 좀 해 보라고, 이 개새끼야!”

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칼리번은 그녀의 질문을 몽땅 무시하고는, 다짜고짜 에레즈를 끌어당겼다.

“으아앗!”

그러고는 에레즈를 젠에게 내던졌다.

“윽— 뭐야, 씨발?!”

갑작스러운 공격에 젠은 욕을 내뱉으며 에레즈를 몸으로 받아 냈다.

“아, 아….”

젠도 에레즈도,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사이에서 갑작스레 달라붙기까지 하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에레즈는 사자 앞에 선 토끼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젠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에레즈를 평했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어도, 젠은 기세만으로 상대가 쓸 만한 녀석인지 쭉정이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 수도가 마물 소굴이 된 지금, 젠은 에레즈를 왕자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분을 데리고 북부로 떠나라, 젠.”

“뭐…. 큭!”

젠이 에레즈를 옆으로 밀쳐 내려는 순간, 대검의 끝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하… 하하, 이 망할 자식…. 결국 사고를 치는군.”

젠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왜 안 어울리게 숲에 숨어 있나 싶었지. 뒤로는 이딴 걸 꿍쳐 놓고 날 수도에 보내?”

“…….”

“…날 속인 주제에 어, 그게, 씨발!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냐!?”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주먹을 날릴 것만 같았다. 에레즈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막연히 칼리번의 편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젠의 한 팔을 붙잡았다.

“따르지 않을 건가.”

“미쳤냐?”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싸울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저번처럼.”

“……뭐?”

칼리번은 단호하게 받아쳤다. ‘저번처럼’. 즉, 석양이 질 때까지 치고받는 거다. 바로 뒤에서 마물이 들이닥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새끼가….”

시간이 촉박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젠은 이를 악물었다. 사정을 다 알면서도 칼리번은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명령을 거부하고 싶다면, 애초에 내게 대장 자리를 맡기지 말았어야 했다.”

빵 덩어리를 건네듯 쉽게 넘겨서는 안 됐다. 칼리번은 여전히 젠에게 대검을 똑바로 겨눈 채 단호히 말했다.

“하… 하하하, 젠장! 젠장 할! 수도고 숲이고 여기저기서 날 가만두질 않는구먼그래?! 그래서, 내 판단이 잘못됐다는 거냐?”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마도 젠은 대장 자리를 휙 던져 주었던 자기 자신부터 패 버릴 것이다.

“부하는 누구든 막론하고 대장의 명령을 따를 것. 그것이 우리 용병대의 규칙이다. 설령 단둘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분노하여 날뛰던 젠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검은 어금니는 젠과 칼리번밖에 남지 않았다. 젠은 단 한 번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용병대를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있었다. 팔팔하고 쓸 만한 알파는 죄다 다른 용병대로 갔다. 하자 있는 떨거지들이나 모이는 곳, 인간과 마물 사이에서 태어난 마물 혼혈 중에서도 기형 알파들로 구성된 유일한 용병대였다.

“…이야, 대장이 이렇게까지 뒈지고 싶어 환장한 줄은 미처 몰랐네?”

젠은 이를 꽉 악물며 일부러 도발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라도 끌고 가야 그나마 살 것 같으니까 이 똥개 노릇도 해 준 거지, 감히 나한테 소속감을 운운해? 용병대? 검은 어금니? 그딴 건 이미 사라졌다. 너와 나를 제외하고는 동료 전부가 마물이 되어 버렸거든.”

“…젠.”

“심지어 넌 저 애새끼를 보호하느라 부하를 찾으러 가지도 않았지.”

칼리번의 미간에 깊이 주름이 잡혔다.

“넌 자격 미달이다, 칼리번.”

“……!”

“부하가 없으면 대장도 없는 거야.”

젠이 차가운 눈으로 칼리번을 힐난했다. 에레즈를 꺼내 보이기 전까지는 그나마 남아 있던 동료애가 완전히 증발되어,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대지처럼 황폐해졌다.

“대검은 작별 선물로 알아라. 난 혼자 북부로 갈 거니까.”

“안 된다, 젠…!”

젠은 칼리번의 대검을 쥐고는 일부러 흔들어 댔다. 칼리번의 검 끝이 방향을 잃은 배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카, 칼…!”

그 순간, 에레즈가 대뜸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칼리번의 대검이 순간 휘청였다.

“…야! 위험하잖아!”

젠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렀다. 그 덕분에 에레즈는 대검에 잘못 스치는 일 없이 두 사람의 사이에 설 수 있었다.

“왕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칼리번은 젠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아래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젠이 도망가 버릴 것이다…! 칼리번이 다급하게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에레즈는 무작정 칼리번의 팔에 매달렸다.

“카, 칼…. 사, 상황이, 어, 어떻게 흘러가는 지는 모, 모르겠지만……. 너, 너도 같이 가는 거지? 마, 맞지? 세, 셋…이서?”

에레즈는 젠을 힐끗 보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동안 에레즈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꺼렸다. 칼리번과도 숲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말문을 튼 것이지, 그전까지는 그 비밀을 철저히 숨겨 왔다. 그런 그가 불문율을 깰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

칼리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 저… 사, 사람에 대해서는 자, 자세히, 아, 안 물을게…. 하, 하지만, 어, 어째서 이런 위험한 걸 이쪽에 겨누고…. 혀, 협박하는 것처럼…. 왜, 왜 그러는지 모, 모르겠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칼리번은 칼끝을 에레즈에게 겨누었다. 그의 뒤에 젠이 서 있었으니 방향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왕자님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어…. 어…?”

에레즈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칼리번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양쪽에서 골고루 지랄하네.”

한발 물러선 젠이 비아냥거렸다.

“왕자님, 왕자님은 젠과 함께 이곳을 떠나십시오. 저는 마물이 뒤쫓아오지 못하도록 남겠습니다.”

칼리번은 에레즈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레즈의 뒤에 선 젠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어, 어째서…?”

“…….”

“저, 저 사람과 따, 따로 얘기해 둔 거라도 이, 있는 거야?”

“…….”

“미, 미안…. 나, 나… 저, 전술 같은 건, 잘 몰라서…. 우, 우리가 어딘가에 숨어, 있으면…… 네, 네가 막고 있다가…… 하, 함께 가는, 거, 거지…?”

“…….”

“그, 그렇지? 그런… 거, 지?”

에레즈의 목소리가 점차 불안으로 떨렸다. 칼리번은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거짓말을 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희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 아, 안 가. 아, 안 갈래.”

칼리번이 묵묵부답을 일관하자 에레즈가 덜덜 떨면서 선언했다.

“너, 너랑 가, 같이… 싸울게.”

“안 됩니다.”

“시, 싫어! 나, 나도 여, 여… 여기 이, 있을래!”

“가셔야 합니다.”

“하, 하지만! 하, 함께 가, 가… 가지 아, 않으면! 아, 아무런 의, 의미가 어, 어, 없어!”

말이 생각대로 잘 나오지 않자, 에레즈는 칼리번의 팔을 붙잡았다. 언제나 생각대로 따라 주지 않는 몸. 무슨 말을 해도 답답하고 우스울 뿐인 말투. 그런 자기 자신이 밉고 원망스러운지, 그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가, 같이 가겠다고, 하, 하지 않으면, 저, 절대로… 여, 여기서 떠, 떠나지 않을, 거야…!”

에레즈는 칼리번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이를 꽉 다물고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후우.”

칼리번은 그를 무시하고 밀어붙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에레즈와 젠을 겨누고 있던 대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왕자님…. 왕자님!”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깨를 붙잡고는 제 앞에 세웠다. 그러나 에레즈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을 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여 버린 것이다.

“왕자님.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시, 싫어….”

“저를 똑바로 보십시오…. 왕자님.”

칼리번이 조심스럽게 에레즈의 손을 귀에서 떼고, 그의 턱을 붙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그러나 한 가지를 해내면 다른 한 가지가 원상복구 된다.

“왕자님, 제발….”

칼리번이 아무리 불러도 에레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마물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이야 젠이 이 촌극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언제 떠날지 모를 일이었다. 젠이 없으면 모든 일이 수포가 된다.

“왕자!”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고함을 쳤다.

“히, 히익…!”

에레즈의 몸이 순간 흔들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는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기까지 했다.

“……님. 왕자님.”

칼리번은 순간 넋을 놓은 에레즈를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부터는 젠을 따라 북부로 가십시오. 림번에는 제 여동생이 살고 있습니다. 이름은 알리샤, 알리샤 웰미턴입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가서 제 이름을 대세요. 칼리번이라고, 알려 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두말없이 받아 줄 겁니다.”

“…으윽, 으….”

에레즈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커다란 두 손이 얼굴을 움켜쥐고 있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젠은 저보다 강하고 경험이 많은 용병입니다. 북부로 향하는 길도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따라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시, 싫…. 아, 윽…!”

“그곳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겠지만…. 일단 도착만 하면, 큰 위협은 당하지 않을 겁니다.”

에레즈가 거부하려 하면, 칼리번은 그의 뺨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픔 때문인지, 아니면 이별 때문인지 에레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칼리번의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북부는 왕성보다 거칠고 조악할 겁니다.”

북부에서는 왕궁의 탑과는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물조차 침입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적고 황량한 북부에서는 당장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해야만 할 것이다. 갇힌 채로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삶과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가야만 하는 삶— 이 둘은 정반대였으니, 연약한 에레즈에게는 버거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숲보다는 나을 테니 잘 버티실 수 있을 겁니다.”

칼리번의 엄지손가락이 에레즈의 눈가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시, 싫어, 그, 그런 건 싫어….”

“가셔야 합니다.”

“계, 계속… 하, 함께 이,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

“버, 버리지 않겠, 다고… 해, 했잖아!”

에레즈가 두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뜨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내, 내가… 야, 약하고 느, 느려서 누, 누군가 남아야 하는 거라면…. 여, 열심히 쫓아, 가, 갈게! 히, 힘들어도, 아, 아무 말도 아, 안 할게……. 주, 중간에 버리고 가, 가도 돼! 그, 그러니까…!”

“…….”

“그, 그러니까, 제, 제발…!”

“…….”

“카, 칼…!”

하지만 이미 방향은 정해졌다. 그리고 에레즈에게는 무엇도 바꿀 힘이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마저도.

평생을 느껴 왔던 무력함은 가장 절실한 순간, 에레즈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것이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결과였다. 자신조차 구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남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러니 에레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는 것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린애로 남아서.

“아, 아무런 도, 도움조차 되지 못한다면, 제, 제발… 대, 대신 죽게라도 해 줘….”

에레즈는 두 눈을 감고 떨면서 말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목숨뿐이었다.

“왕자님께서 남아 봤자, 개죽음밖에 되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에레즈가 두려워하고 눈물을 보일수록 칼리번의 머릿속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 갔다.

“저나 젠이 남으면 조금이라도 마물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윽…. 흐윽….”

“하지만 왕자님은… 싸우기에는 터무니없이 약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으…….”

“지금도 방해하고 계십니다.”

칼리번은 마음 약한 에레즈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동시에 몇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두 번째로 꽃을 받았던 무투회에서 에레즈의 손길이 닿았던 상처 부위가 나았던 일. 잘린 팔이 하룻밤 만에 회복하고, 그의 눈물이 닿은 자리가 빠르게 회복되어 갔던 일.

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칼리번의 머릿속에서 퍼져 나갔다.

“흑, 으으…. 으윽…….”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붙잡힌 채로 꾸역꾸역 울기 시작했다. 칼리번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나약한 자신 때문이었다.

“왕자님.”

“으응, 읏…….”

“그러니 도망치십시오.”

“…시, 싫….”

“북부로 가서 숨어 지내세요.”

“……으윽.”

“평생 밖으로 나올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마십시오. 그곳에서, 이름도 없는 평민으로 지내시는 겁니다.”

“그만, 흐윽, 그, 그만해….”

“왕자님께서 자립하실 수 있을 때까지 젠이 도와줄 겁니다.”

칼리번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그러면 그가 겁을 먹고 자신에서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에레즈는 칼리번 정말로 화난 표정을 알고 있었다. 에레즈의 두 손은 칼리번에게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왕자님….”

칼리번이 그의 손을 떼기 위해 가는 팔목을 세게 쥐었다. 분명 아플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는 고개를 저어 가며 버텼다.

“…….”

더는 시간이 없었다. 젠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인내심은 그리 깊지 않다. 어서 에레즈를 보내고, 젠을 설득해야만 했다. 거센 분노도, 협박도 통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에레즈를 포기하게 할 수 있을까?

“왕자님.”

칼리번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전과는 달리, 안정된 목소리였다. 동굴에서 함께 지냈던 때처럼.

손톱을 세워서까지 칼리번의 팔을 붙잡던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그동안 함께 지내며 칼리번에게 길들여진 습관이었다.

“아…….”

에레즈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고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살아남으십시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럼 저도 죽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시간이 멈췄다면 좋았을 텐데.

“…….”

에레즈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방비해졌다. 이를 악물고 있어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아무런 방해 없이 떨어져 내렸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칼리번이 그의 손목을 놓자,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칼리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아니, 웃어 보려 노력했다.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미소 비슷한 것도 지어 본 적이 없었다. 늘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별다른 차이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전부터 만나고 싶은 분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칼리번은 너무나 쉽게 무력해진 에레즈를 품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이 숲을 나가게 되면, 꿈속의 그분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나눴던 약속이 있었다.

“…카, 칼, 나… 사, 사실.”

에레즈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에게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애를 썼다.

“너, 너를….”

하얗고 가는 손이 칼리번을 향했다.

“나, 나……. 윽!”

그러나 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에레즈의 몸이 칼리번 쪽으로 쓰러졌다.

“…….”

칼리번은 쓰러지는 에레즈를 한 팔로 받아 냈다. 그가 주먹을 제대로 썼다면 에레즈는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절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명치를 가볍게 치는 정도에 그쳤다.

칼리번은 축 늘어진 에레즈를 다시 품에 안았다. 에레즈의 온전한 무게는 너무나….

‘가볍다.’

숲에 있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한 탓이다. 칼리번은 두 팔로 에레즈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젠에게 다가갔다.

“…….”

젠도 적잖은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더는 이죽거리거나 비아냥거리지 않고 굳어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둘이서 북부로 떠날 줄 알았는데 낯선 사람을 데려오지 않나, 그 사람은 여섯째 왕자이질 않나, 심지어 말도 안 맞춰 놨는지 죽네 사네 난리를 치지 않나…. 저 돌대가리가 웃고 자빠지질 않나.

“대충 파악했겠지. 다음을 부탁한다.”

“……뭘.”

“내가 마물들을 막을 테니 젠은 왕자님을 데리고 북부로 도망치면 된다.”

울며 매달리는 에레즈를 달래고 어르던 것과는 무색하게, 젠에게는 몇 마디에 그치지 않았다.

“이… 씨발, 진작에 마물한테 찢겨 죽었어야 할 새끼.”

“…….”

“미쳤다고 그 명령을 따를 것 같아? 저 애새끼를 데려가라고? 나보고?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젠은 마물이라도 된 듯 으르렁거렸다.

“이대로는 모두가 죽을 뿐이다.”

“웃기지 마! 뭐? 혼자 저 미친 마물 새끼들 상대를 하겠다고? 이거 뭐… 돌대가리가 정도껏이어야지, 자살이라도 할 셈이냐! 거기다 애 보는 건 딱 질색이거든?!”

칼리번은 젠이 난리를 치든 말든 고개를 숙여 에레즈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보았다. 솜씨가 서툴러 비죽비죽한 금빛 머리카락이 눈가를 덮고 있었다. 손수 넘겨 주면 좋으련만, 두 손으로 그를 안고 있어 불가능했다.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라 알파였다면, 원래 모습이 손이 세 개 달린 마물이었다면 가능했겠지. 하지만 오메가가 아니라 알파였다면, 여섯째 왕자를 처음 본 순간 이끌렸을까?

아마도… 그랬겠지.

“젠. 왕자님께서는 알파다.”

칼리번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젠에게 말했다.

“…그러니 일단 멀리 도망치기만 하면, 냄새로 추적을 당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내가 함께 간다면, 저 마물들은 내 체취를 맡고 죽을 때까지 쫓아올 거다.”

“…….”

“결국 셋 다 죽게 되겠지.”

에레즈 프리드웬을 두고 가면 젠과 자신을 살려 주겠다는 에어리얼의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피로 뒤덮인 마물에게 배려나 아량 따위는 없었다. 오랜 세월 마물을 죽이는 용병으로 살아오며 배운 진실 중 하나였다.

여섯째 왕자를 두고 간다면 아마도 냄새로 추적해서, 자신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젠을 끌고 갈 것이다.

“…그리고 젠은, 생각보다 애를 잘 보니 괜찮을 거다.”

칼리번은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용병이 되겠다며 고향을 떠났지만, 알파 특유의 위협적인 체취가 나지 않아서인지 여러 곳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런 자신을 데려가 준 것은 젠뿐이었다.

“젠은 살아남고 싶어서 나와 함께 떠나려 했지. 그렇다면 이 방법이 가장 생존 가능성이 크다.”

“너…. 이… 돌대가리 새끼가….”

칼리번은 이 말로 젠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젠은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뭐냐? 너네 일부러 그러는 거냐? 아니면 오메가는 정해진 대사라도 있는 건가? 하, 씨발….”

“…….”

“그때 그 새끼랑 똑같이 말하지 말라고!”

젠의 외침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반쯤 타 버린 젠의 얼굴이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

붉어진 젠의 눈을 보고, 마찬가지로 붉은 눈을 지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칼리번은 언젠가 들었던,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알파와 어린 오메가가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가, 결국 알파가 오메가를 죽였다는 이야기. 알파는 오메가를 제 손으로 죽였다고 했다.

“내게도 나름의 계획은 있다, 젠.”

칼리번은 그 이야기를 제삼자로서 듣기만 했다. 그때 그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의 말을 헤아릴 수 있는 감정이 없었기에, 하나의 이야기로써만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이야기 속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날, 그곳에서, 그 일을 겪은 당사자만 알 수 있는….

“계획?! 그게 뭔데!”

젠이 외쳤으나 칼리번은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목숨은 하나뿐이라, 죽을 생각은 없다.”

답을 알려 주지 않자, 젠이 칼리번에게 욕을 토해 냈다. 칼리번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대검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나 칼리번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덤덤함에 제 성질을 참지 못한 젠의 포효가 뒤에서 들려왔다. 칼리번은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다만 대검을 쥐고는 힘을 주었다. 젠의 발길질에 기울어진 대검이 단번에 뽑혔다.

놀랍게도 칼리번은, 젠의 폭력에 화가 나거나 아프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한 대검이 곁에 있어 자만심이라도 샘솟는 모양이었다.

“젠, 너는 숲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겠지…. 내가 더는 함께 갈 수 없다는 걸.”

칼리번이 담담히 털어놓자 폭풍 같던 젠의 외침이 뚝 끊겼다.

“고맙다. …아니지.”

그는 잔뜩 억눌려 쉰 목소리로,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다.”

* * *

석양이 산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이 숲에서 고개를 들 때면 유독 석양이 낮과 밤의 경계선에 서 있곤 했다. 그러나 석양을 보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이윽고 밤이 될 것이다. 새벽으로 이어지지 않을 영원한 밤이.

모두가 떠났다. 혼자 남은 칼리번은 대검을 옆에 꽂았다.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타인센의 옷은 품이 작은 편이었으나 군말 없이 챙겨 입었다. 그마저도 몇 차례 전투를 거치며 넝마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가려야 할 곳은 그럭저럭 가려 주었다.

칼리번은 금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저물어 가는 석양을 흡수하듯 짙은 갈색의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입지 않는 편이 차라리 그에게는 어울렸다.

피부 위로 닿는 공기가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마물이 몰려오고 있다. 그들이 내뿜는 독기가 점점 진해진 탓이었다. 긴장감으로 근육이 평소보다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아……. 후우.”

칼리번은 깊게 숨을 내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묵직한 침묵이 그의 주위를 감돌았다.

혼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제아무리 방어전에 자신 있는 용병이라 해도, 수많은 마물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젠이 쉬지 않고 쏟아 내던 욕설 중 하나를 인용하자면,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만약 자신이 쉽게 쓰러진다면, 마물은 다음으로 젠과 에레즈를 추격하여 죽일 것이다. 그러니 최소 몇 시간은 버텨야만 했다. 단 한 마리도 이 숲을 떠나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병 수십 명이 달려들어 방어전을 펼쳐도, 방어선은 종종 뚫리곤 했다. 마물을 한 마리만 놓치기만 해도 그 방어전은 패배한다. 인간들의 은신처에 도달한 마물 하나가 마을 인원 전체를 도륙한 일도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는 일은, 그저 싸우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렵다. 그리고 칼리번은 터무니없는 가능성을 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칼리번은 기적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직은 내 쪽이 한 수 위지.>

그때.

에어리얼이 끌고 온 마물은 어째서인지 자신을 보호하고 주인을 공격했다. 일시적인 혼란에 불과했는지 금방 제압되었지만, 분명히 지휘 체계가 일그러진 순간이 존재했다. 칼리번은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숲에서 벌인 전투를 되짚어 보았다. 자신의 단검에 목이 베이면서도 반항 한번 하지 않던 거미형 마물.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던 타인센. 타인센의 부하면서도 갑자기 타인센을 잡아먹은 마물. 자신의 손에 죽어 가면서도 삽입을 반복하던 마물.

<흐으, 대장, 냄새…. 씨발, 풀풀 난다고…. 으윽……. 마물이라면 환장하고 달려, 들, 흐으……. 정도로.>

그리고 젠의 반응. 칼리번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처음 숲에 떨어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품어 온 ‘어떤 가정’을 지우려야 지울 수 없었다.

알파는 오메가를 공격하지 않는다. 짐승조차 수컷은 암컷을 죽이지 않는다. 자손을 생산할 수 있는 오메가가 극소수로 적은 마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마물의 왕은 소년이나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흉포한 마물을 개처럼 부릴 수 있는 이유도 오직 오메가여서였다.

그러니까….

‘오메가인 내가 남으면 알파들도 이 숲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물은 본능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메가가 내린 명령도, 다른 오메가를 앞에 두면 당장 잊을 정도다. 에어리얼이 부리던 마물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니 번식을 할 수 있는 오메가가 눈앞에 있는데, 고작 도망친 알파 두 마리를 쫓는 충직한 마물은 없을 것이다. 타인센의 경우처럼 마물 혼혈이 지휘관으로 있다면 다소 곤란해지겠지만, 흥분한 마물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하지만….’

칼리번은 아직 불완전한 오메가였다. 에어리얼처럼 수족 다루듯 마물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그랬기에, 마물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마물을 자극해야만 했다.

“…….”

칼리번은 대검의 칼날에 제 팔뚝을 가볍게 스쳤다. 의도한 대로 팔에서 피가 흘렀다. 칼리번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그 피를 손바닥에 묻혔다.

<땀도, 배설물도 안 되지만 피는 절대로 흘려서는 안 돼. 되도록 짐승이나 마물의 피로 위장하라고.>

칼리번은 붉고 뜨끈한 피를 군말 없이 제 몸에 발랐다. 피를 몸에 바르니 서늘한 바람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제 체향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칼리번의 몸은 석양과 피로 붉게 치장되어 갔다. 가볍게 스친 팔뚝의 상처로부터, 심장 박동이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팔뚝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쿵, 쿵 울렸다.

“…후우.”

칼리번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숨결에서는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그는 피가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운 건가, 나는?’

혼자서 다수의 마물과 싸운 적은 없었지만, 전투는 익숙했다. 그러나 그는 전과 달리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여섯째 왕자에게 배운 나약한 감정은 그를 끝까지 방해했다. 그가 없어지면 이 감정도 함께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

떨림을 무시하고 다리에도 피를 바르던 칼리번은 발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이건….’

언제부터였을까, 칼리번의 발목에는 금사가 가느다랗게 묶여 있었다. 칼리번은 발목을 빙 둘러싼 얇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걸었다. 금사가 마력이 남아 있을 때 스스로 움직인 것인지, 아니면 에레즈가 몰래 감아 놓은 것인지는 칼리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

칼리번은 제 몸에 남은 에레즈의 흔적을 주저 없이 뜯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이 피어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후에 이곳에 도착할 에어리얼이 금사를 매개로 삼아 에레즈를 추적할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땅을 파서 금사를 묻었다. 그는 주먹으로 땅을 단단하게 눌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흙이 단단하게 뭉칠 때까지.

“…….”

…그러다 칼리번은, 기껏 금사를 묻어 놓은 땅을 다시 파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눌린 땅은 부드럽게 패치지 않았다. 칼리번은 손끝을 세워, 바닥을 갈퀴처럼 긁어 댔다. 거친 흙과 돌가루가 손톱 아래의 살에 파고들었다.

그는 기어이 금사를 다시 꺼냈다. 금사는 금세 흙이 잔뜩 묻어 더러워졌다. 그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칼리번은 스스럼없이, 곧바로 흙이 묻은 머리카락을 제 입에 가져다 댔다. 그것을 몇 번이나 입에 댔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마치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에레즈의 옅은 체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변은 온통 칼리번의 비린 피 냄새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사를 주먹으로 쥐고는, 이마에 몇 번이고 스치고 문질렀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칼리번은 늘 그에게 발목이 잡혀 왔다. 평온하고 변함없었던 칼리번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그래서 다시 혼자가 되면, 칼리번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에레즈의 흔적이 자신에게서 모두 사라지고 나니, 그가 있을 때보다 더욱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는 그가 없다. 더는….

“…왕자님.”

칼리번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다. 잘린 팔은 다시 재생되었지만, 떠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겨울이 온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렸다. 갑자기 열병에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어릴 때조차 병에 걸려 본 적이 없었는데….

칼리번은 살면서 이 정도로 불안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바로 그 불안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 강함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병에 걸려 본 적 없었기에, 도리어 병에 가장 취약했다.

<…여섯째 에레즈 프리드웬 왕자의 데뷔탕트구나.>

젠의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인기가 없을 만도 해. 다른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전쟁터에 그렇게들 쏘다녔는데,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친 적이 없으니까. 들은 소문으로는 본성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마물에 가까워서라고 하던데. 우리랑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그것은 덫이었다. 에어리얼이 젠을 잡아들이기 위한 쥐덫. 자신은 어쩌다 꼬인 벌레에 불과했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그 꽃도, 원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장식에 불과했다. 여섯째 왕자는 겉모습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평생을 진흙탕에서 굴러온 칼리번에게는 진주처럼 고귀하게 느껴졌다. 세상 모든 일에 둔감했던 그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나, 나, 나… 난! 나, 혼자… 나, 남겨 둔 거, 잖아? 나, 날…… 버, 버리다니!>

그러나 단정한 한마디조차 힘겹게 꾸며 낸 것에 불과했다. 진짜 에레즈 프리드웬은 말을 더듬는 겁쟁이였다.

<너, 너는… 이, 이딴 말, 소리를 드, 듣고 싶어? 다, 다, 또, 똑같아…. 너, 너도 듣기 싫잖아!>

<아, 으으……. 내, 내가, 이, 이래서, 이상하지? 시, 싫지? 그, 그… 그렇지?>

<머, 먹는, 방, 법… 모, 모르겠어….>

<화… 마, 많이… 났어…?>

기적을 일으킨다는 황금 피. 예언을 물려받은 왕족. 그러나 그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아무런 힘도 없고, 명석하지도 않았다. 유약했다. 겁도 많았다. 신분이 낮은 용병의 눈치를 살필 정도로 비굴하기까지 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 또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칼리번은 그에게 실망했다. 그것이 그에게 느꼈던 두 번째 감정이었다. 막연히 품었던 동경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 샌가부터는 생존에 방해되는 짐처럼 느껴졌다. 속은 기분마저 들었다.

<내, 내, 내가, 해, 해, 냈어! 주, 줄게…!>

<…하, 항상 나만 치, 침대, 에서 자잖아…. 그, 그래서… 주, 주고 싶었어.>

에레즈 프리드웬은 남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는 주제에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고 싶어 했다. 칼리번은 그 모습이 약한 것 특유의 비굴함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칼리번은 그를 지키다가 팔이 잘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입에서 스스로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화가 났다. 분노. 본능에 가장 가까운 감정. 알파가 제 몸을 변형시킬 때 가장 애용하는 도구라 했다. 칼리번의 신체도 전장에서는 분노하고 피를 토해 낸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일상에서 화를 내 본 적은 없었다. 타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에게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숲에서, 단둘뿐이었으니까….

<…나, 나는… 괴… 괴물이야.>

<나는… 저, 전쟁에서 태어난 마… 마, 마물의 자, 자식, 이랬어.>

<타, 탑에 호, 혼자 있는 건, 무, 무섭고… 외로웠, 지만, 그, 그래도… 주, 죽는 것보다는 나, 나았어….>

에레즈 프리드웬을 버리거나 죽이지 않고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은, 그가 왕족임에도 그 특권을 조금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오랜 시간 탑에 갇혀 몸도 마음도 성장이 멈춰 버린 소년. 칼리번은 그만 에레즈 프리드웬을 방치하고 학대한 그의 형제들을, 다른 황금 피를 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팔이 잘려 죽어 가는 자신을 그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저 작은 왕자를 향한 감정은 희미한 동정이 전부였다.

<모, 몸이 이상해……. 나, 나, 또… 괴, 괴물이, 되, 되는 거야…?>

갑작스럽게 성장한 그의 몸에 발정이 찾아왔을 때도….

<…그, 그때, 주, 주지 말았어야 했어. 꽃, 을….>

<나, 나랑 어, 얽히지만 아, 않았어도…. 나 같은 걸 책임질 필요도 없고, 다칠 일도 없고, 이, 이런 일도 겨, 겪지 않아도….>

두려움, 공포, 슬픔, 불안과 초조. 칼리번이 그러한 나약한 감정을 알게 된 것은 전부 에레즈 프리드웬의 탓이었다. 분명 그때, 몸이 이어진 탓이었다. 그가 자신의 몸 안에 감정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땅은 마물 천지다. 그리고 이 위험한 짐승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우리 같은 마물 혼혈이야!>

<내가 지면 대장 명령대로 수도로 자살하러 가 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대장에게서 대장 자리를 뺏겠어. 북부로 이동할 때까지는 무조건 내 명령대로 움직이는 거다.>

<에레즈의 목을 잘라 이 자리에 두면 같은 조건으로 너와 젠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아마도 그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멍청한 칼리번이 평소보다도 더욱 아둔하고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선택을 할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어째서인지, 에레즈 프리드웬과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그리고 같은 실수가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었다.

<오메가가 되는 과정을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

에어리얼의 말은 현혹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칼리번은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마물이나 마물 혼혈이 아닌, 인간을 위한 변명이니까.

<칼. 사람은 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일 수밖에 없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란다.>

언젠가 양아버지가 들려주신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한 위로처럼.

마물과 인간 사이에 선 칼리번이 보았을 때, 인간과 마물은 다를 바가 없었다. 칼리번이 용병으로 살면서 수없이 보아 온 광경은 번식을 위한 육체의 결합이었다. 피와 살뿐이었다. 마물이 남자를 습격해 강간하고,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인간 남자는 여자를 강간한다.

<인간들이 짐승을 기르고 때가 되면 잡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인간을 사육하는 거다.>

타인센의 말을 부정했지만, 마물이 마물 혼혈의 명령을 따를 리가 없다는 부분에 한해서였다. 칼리번이 보기에도 마물과 인간, 짐승은 서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유린할 뿐이다. 인간이 짐승을 그렇게 지배하고, 남자가 여자를 그 논리로 가축처럼 대했던 것처럼, 이제는 마물이 그 우위를 점할 뿐.

<기사님… 약속해 주세요…. 약속을, 제발…. 부탁이에요…! 그 아이를, 무사히, 데려다주시겠다고….>

물 한 방울이 흙 위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그이를, 그 무서운 곳에 혼자 둘 수는 없잖니.>

한 방울, 또 한 방울. 이제는 땅 위로 얹은 칼리번의 손등마저 적셨다.

비라도 내리는 것인가?

칼리번은 두 눈을 껌벅거렸다. 무언가… 응어리가 져서 땅으로 떨어진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

주먹을 펴자 흙과 먼지로 엉망이 된 금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번의 손안에 땀이 배어, 이제는 피까지 묻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알고 있다. 이것은 에레즈 프리드웬의 흔적이다. 설령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더럽혀졌을지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 사, 사실… 나, 나도, 머, 머리가 나, 나빠…….>

칼리번은 이름 없는 호수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오, 옷… 마, 만들어, 봐, 봤어…. 추, 추워, 보, 보여서…….>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닌, 자신과는 전혀 다른 소년의 모습이었다.

<음, 으음…. 그, 그리고 말이야……. 이, 이건, 카, 칼, 너, 널 닮은 것, 같아서…. 가, 가져.>

<나, 나는… 어, 어떻게 해야 네,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호수 위로 물결이 퍼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가는, 하지만 같은 사람의 흔적. 여섯째 왕자는 울고, 또 울고, 울면서도 웃고, 웃으면서도 울곤 했다.

왜 항상 우는 것일까?

칼리번은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물은 언제나 가려지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어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왕자님….”

칼리번은 쉬지 않고 떨어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물은 언제나 에레즈의 몫이었다. 칼리번은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지금, 반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눈물을 닦아 줄 사람은 곁에 없었다.

“가… 가지 마십시오.”

칼리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비처럼 막연히 눈물을 흘렸다.

“저를… 이곳에 혼자 두지 마세요.”

칼리번은 나약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윽……. 크, 흣….”

칼리번은 가슴에 끌어안고는 고개를 땅에 묻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눈물이 무수히 흘러내렸다. 웅크린 그의 등이 벌벌 떨렸다. 칼리번은 멍청해서 사람의 말귀나 의도를 깊게 파악하지 못하고 항상 나중에 가서야 깨닫고는 했다. 운이 좋으면 몇 시간 만에, 운이 나쁘면 한참이 흘러서야… 그리고.

이제야.

“왕자님….”

무섭다.

에어리얼을 통해 본 기억이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것을 안다. 평생 그 지옥 속에서 마물에게 붙잡힌 채로…. 그렇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에어리얼은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은 적을 평범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지.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머리는 인간이고 다리는 물고기인 괴물이 있었다. 밤에는 인간으로, 낮에는 백조로 살아야만 하는 괴물도 있었다. 그들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괴물이었는데, 괴물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문제도 없이 평범하게 여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파멸했다. 사랑이라는 시련을 이겨 내지 못하고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마지막에 떠오르는 모습은, 의아하게도 웃는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던 때와 같은 말이었지만, 모습은 달랐다. 다시 한번 꽃을 준 그는 훨씬 자랐고, 말랐고, 야위었다. 아름답게 꾸며지지도 않았고 더러워진 채였다.

그래서 사랑인 줄도 몰랐다. 앞서 파멸한 괴물들도 마지막에서야 깨달았을 것이다. 분노와 동정, 충동과 부정, 공포와 두려움, 동경과 실망. 사랑이라는 것은 한 가지 강렬한 충동이 아니라 그로 인해 느끼는 모든 감정의 다발이라는 사실을.

“……큭…!”

칼리번은 금사를 움켜쥔 채로 땅을 내리쳤다. 그리고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머리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마물들이 가까이에 도달했다. 그에게는 웅크리고 울 시간조차 없었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 남은 손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가 눈물을 지우고 얼굴을 가렸다.

검붉은 몸과 머리카락은 어두워진 숲에 동화되었다. 칼리번은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묵중해진 것만 같은 몸을 일으켰다.

숲이 흔들린다. 이 숲에 살아가는 짐승이고 수풀이고 모두, 오래전에 죽었다. 숲이 흔들리는 것은 침입자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발바닥을 통해 땅이 울리는 진동을 느꼈다. 진동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칼리번은 대검을 바로 잡았다.

<다… 당신들은 우리와 다르게 강간당할 일이 없고, 살해당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적을 앞두고 문득,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사람의 외침이 떠올랐다.

“…….”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시선 너머는 원래 어둠뿐이었다. 말라죽은 나무들이 그늘은 만들어 해가 떠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눈알들이 번뜩이고 있다. 오메가의 피 냄새를 맡은 마물들이 마침내 칼리번을 찾아낸 것이다.

“이 뒤로는 단 한 마리도 지나가지 못한다.”

칼리번은 무수한 눈알들을 노려보며 대검을 들었다. 익숙한 감촉과 무게감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검의 칼집은… 네놈들의 몸뚱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석양이 졌다. 검은 등대가 파도처럼 몰아치는 마물을 홀로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방어전이었다.

* * *

사람은 태어난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칼리번은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한 여자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갓 태어나 앞도 보이지 않는 칼리번은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는 존재가 여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 희미하게 젖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몸이 무거웠을 텐데도 여인은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곳으로 칼리번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칼리번을 바닥에 눕혔다. 여인과 칼리번을 낳은 사내는 무슨 관계인 것일까? 어머니? 아내? 누이?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일어났다.

울음을 참는 듯 그녀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금속성의 칼을 칼리번의 주변에 내리찍다가, 끅끅거리며 칼리번의 목을 조르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결국 칼리번을 짐승과 내장과 오물이 담긴 나무 들통 속에 던졌다.

칼리번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니, 태어나자마자 그곳에 버려졌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아니면 두려웠는지, 칼리번을 버린 누군가는 아이의 배꼽에 붙은 탯줄조차 끊어 주지 못하고 도망쳤다.

갓난아기는 눈도 뜨지 못했다. 칼리번은 자신을 버린 존재는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뜨끈한 피와 뭉클한 내장의 감각만은 지금도 생생했다. 늪에 빠진 것처럼 내장과 오물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칼리번은 울음을 터뜨려 주변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있었다. 아니, 알려야만 했다. 그것이 생명체의 본능이었으니까. 그러나 들통에 버려지기 전, 칼리번의 이마 위로 세례와도 같은 눈물이 세 방울 떨어졌다. 그것은 생존 본능마저 잠재울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 갓난아기는 소리 없이 피 웅덩이에 가라앉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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