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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꿈 (3)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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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꿈 (3)

4. 꿈 (3)

생사의 고비는 간신히 넘겼다. 그러나 칼리번은 여전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부러진 뼈가 붙지 않았고, 잘린 팔도 재생되지 않았다. 몸에 가득 찬 열은 식지 않고 이어져 칼리번을 성가시게 했다. 전처럼 펄펄 끓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머릿속이 푹 익어 어지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은 전에도 겪어 보았다. 며칠 휴식을 취하면 회복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칼리번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입구를 봉쇄해야 하고, 밖에 나가 상황을 살피고 식량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새로운 마물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몸으로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혼자였다면 위험을 감수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옆을 보았다.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왼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감게 하고는, 꼭 안겨 잠들어 있었다. 칼리번은 마물 혼혈이라 얼마 간은 버틸 수 있었다. 여섯째 왕자가 걱정이었다. 그는 칼리번이 정신을 잃었던 기간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바, 바, 바깥에… 마, 마, 마물이…! 하… 하늘이, 어, 어두워… 나, 나가면, 주, 죽게 될, 거야…!>

<…나, 나는 괘, 괜찮아… 그, 그러니까, 나, 나가지 마….>

<아, 아, 아직, 다, 다… 나, 나은 게 아, 니잖아? 시, 싫어…. 나, 나를 호, 혼자, 두, 두지 마….>

<이, 정도는… 버, 버틸 수 이, 있어……. 나, 나는 워, 워… 원래, 저, 적게, 머, 먹으니까…!>

칼리번이 보다 못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면, 에레즈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말렸다. 한 번 칼리번을 잃을 뻔한 일이 그에게는 엄청난 공포였던 모양이었다.

굶주리고 지친 여섯째 왕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칼리번은 잠든 에레즈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탁하고 살이 빠져 초췌했다. 조용히 말라죽어 가는 꽃처럼…. 이대로는 몸이 회복되기 전에 그가 먼저 굶어 죽을 것이다. 아무리 적게 먹는 편이라고 해도, 아예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큭.”

칼리번은 말라비틀어져 가는 소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잠잠했던 열이 다시 확 치솟아 올랐다. 이토록, 무력하다니….

“……응….”

칼리번이 저도 모르게 왼팔에 힘을 준 모양이었다. 칼리번의 품속에서 잠들어 있던 에레즈가 반쯤 눈을 떴다. 굶주림으로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진 탓에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눈꺼풀 아래로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햇빛에 닿은 수면처럼 반짝였다.

“…….”

칼리번과 눈이 마주친 에레즈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잠에 취한 것 같았다. 칼리번은 그 모습에 어쩐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피로와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왕자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에게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있잖…아….”

칼리번을 확인한 왕자는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잠꼬대를 하듯,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칼리번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 같은 걸 데리고 다니느라고, 실은 싫었지…?”

그러나 여섯째 왕자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다감했으며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먼저 죽으면, 그때는… 날 먹어….”

말조차 더듬지 않을 정도로….

“…….”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으, 으응…? 왜, 왜…? 왜, 그, 그래…?”

칼리번의 품에서 데굴 굴러버린 에레즈가 부스스 일어났다.

“무, 무…슨, 이, 일, 이, 있어…?”

강제로 잠에서 깬 여섯째 왕자는 눈을 깜박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 칼… 쉬, 쉬… 쉬어야, 해.”

에레즈는 억지로 상체를 일으킨 칼리번을 눕히기 위해 팔을 끌어당겼다.

“구해 오겠습니다.”

칼리번은 그 손길을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잠시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 팔로 땅을 짚고,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으…?! 뭐, 뭐… 뭐, 하, 하는 거야!”

갑자기 성치도 않는 몸으로 밖으로 나가겠다니, 에레즈가 놀라 외쳤다. 그러나 칼리번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이, 이런 몸으로는 아, 아… 안 돼!”

“아닙니다….”

“그, 그러다 마, 마물에게, 주, 죽게… 되, 된다고!”

“으… 흐으, 죽지 않으면 됩니다.”

“마, 마, 말도 아, 안 되는 소리를……!”

에레즈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러나 칼리번은 속도가 느려질지언정 앞으로 향하는 걸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혹여나 그를 혼자 두게 될까, 밖으로 나서길 망설였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물을 죽이고 먹을 것을 구해서 돌아오면 되는 거다.

“흐, 으으……. 내, 내가, 내가 자, 잘못했어, 나, 나 때문이라면 나, 나가지 마! 내, 내가, 시, 싫어. 그, 그러니까, 나, 나갈 피, 필요, 없잖아……!”

에레즈는 울먹이며 필사적으로 칼리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랜 굶주림으로 힘이 빠진 것은 칼리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고꾸라졌다.

“가, 가지 마…. 가지 마! 제, 제발…. 제발…!”

여섯째 왕자가 칼리번의 몸에 매달리며 절절하게 부탁했다. 팔에 힘이 없는지 칼리번의 몸을 자꾸만 다시 붙잡았다.

“하아, 허억…. 이대로 있으면, 왕자님은 죽습니다.”

칼리번은 엎드린 채로 그를 보지 않았다.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레즈 같은 약골은 눈을 감고도 제압할 수 있었다. 그가 뭉개진 토끼 같은 에레즈를 떼어 내려고 할 때였다.

“나, 나 따위는 주, 죽어도 상관없어!”

에레즈가 다급히 외쳤다.

“그게 무슨….”

그 말에 칼리번의 심장이 덜컥 흔들렸다.

“나… 나, 나 같은 건 주, 죽어 봤자…… 아무도, 거, 걱정하지 않고…. 어, 어, 어차피 찾지도 아, 않을 거야….”

에레즈는 울먹거리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여, 여태껏… 아, 아무도 오, 오지 않았어……. 와, 왕실에서, 아, 아무도… 구, 구하러 오, 오지 않았어……!”

에레즈의 손가락은 칼리번에게 떨어질까 자꾸만 허리에, 배에 감겨들었다. 칼리번은 혹여나 자신의 근육이 그의 가는 손을 으깨지는 않을까, 저도 모르게 허리를 띄웠다.

“미, 미안해, 미안해…. 나, 나 같은 거… 때문에 마, 말려들어서….”

그것도 모르고 에레즈는 칼리번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로 우물거렸다.

“…하, 하지만, 사, 사실 나, 나는 저, 정말로… 아, 아무것도 아니야…. 네, 네가 그, 그렇게까지, 구, 구해 줄 만한, 가, 가치가 어, 어, 없단, 마, 말이야….”

에레즈가 자신을 잡초나 돌멩이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말할수록, 칼리번은 힘을 잃었다. 반면에 에레즈는 기묘한 각오를 다졌다.

“…내, 내가…… 주, 죽으면 너, 넌 자, 자유롭게 해… 행동할 수, 있잖아…!”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에레즈였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칼리번에게는 손해일 뿐이다. 자신만 없으면… 칼리번은 더욱 편해질 것이다.

“그, 그럼 저, 적어도… 내, 내가 주, 죽기 전까지는 내…… 내가, 하… 하고 시, 싶은 대로 하, 하, 하게, 해 줘…!”

그래서 에레즈는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자신이 죽어 주는 것이 구해 준 대가라는, 전혀 새로운 논리였다.

“마, 마물에게 무, 물어뜯겨서 죽느니, 이, 이대로가, 조, 좋아…. 너, 너랑 하, 함께… 있, 다가, 이, 이대로…… 주, 주, 죽으면… 아, 아프지도 않고……. 고, 고통스럽지도 않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전까지 칼리번과 오래 있고 싶었다. 에레즈는 필사적으로 요구했다.

“…나, 난…! 어차피 아, 안 돼…. 아, 안 될 거야. 나, 같은 건… 겨, 결국 주, 죽게 될 거야. 흐읍…. 이, 이대로는, 나 때문에 너, 너도 죽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나, 나 때문에 그, 그런 일 하지 마…….”

자신 때문에 칼리번이 다쳐서는 안 된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칼리번의 도움으로 생명을 이어 나가서도 안 된다….

“…미, 미안해…. 미안해, 빠, 빨리, 마, 말했어야 했는데…. 나, 나를 버리고 가라고……. 매, 매일, 새, 생각, 해, 했는데……. 마, 말하려고 해, 했는데……. 무, 무서워서…….”

칼리번이 돌처럼 굳어 있자 에레즈에게는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그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등으로 슥슥 닦아 내며 고백했다.

“너, 너는…… 나, 나 때문에… 다, 다, 다치기만 하고….”

에레즈는 붉어진 코를 훌쩍였다. 칼리번이 입은 상처를 생각하니 다시금 설움이 몰려왔다.

“…하, 하지만 호, 혼자는…… 무, 무서워…….”

“…….”

“주, 죽을…때도… 호, 혼자인 건 무, 무서우니까…….”

“…….”

당당하게 외치려고 했는데, 자꾸만 솟아오르는 눈물이 뺨 위를 타고 흘렀다.

“흐윽…. 읏, 미, 미안해……. 내, 내가 주, 죽을 때까지만, 겨, 곁에 있어 줘……. 그, 그때까지만…….”

에레즈가 구구절절 말하는 동안, 칼리번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부, 부탁하, 할게……. 아.”

속마음을 있는 대로 쏟아 내고 나니 다소 진정이 된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칼리번의 얼굴과 마주하고는 놀라 흠칫 굳어 버렸다. 그는 어느샌가 눈앞에 있었다.

“죽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짓씹듯 말했다.

“…화, 화, 화났어…?”

고함을 친 것도 아니고, 험한 욕설을 내뱉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기백에 에레즈는 마주 보지도 못하고 눈에 띄게 떨기 시작했다. 매사에 덤덤한 칼리번은 크게 화를 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젠이 바위 같다고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네.”

칼리번은 짧게 대답했다. 겁이 많은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무뚝뚝한 태도에 매번 화가 났는지 물어보곤 했다. 이제 그는 완벽하게 칼리번의 표정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정말로 화가 난 칼리번을 이번에 보게 되었으니까.

“으, 흐으……. 미, 미, 미안해….”

에레즈는 덜덜 떨면서 사과했다.

“미, 미안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일국의 왕자이면서, 마물 혼혈에 불과한 칼리번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작해야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화가 났다. 속이 뒤틀렸다. 그가 유약해서가 아니었다. 온몸이 갈려 나가도록 구해 주었는데 저딴 소리나 지껄여서도 아니었다.

왜냐면 에레즈 프리드웬이 마구 떠벌리던 말은 사실, 칼리번 자신도 잠시나마 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그가 완벽한 황금 피가 아닌 것에 실망했고,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 여겼으며, 부담스러워했다. 칼리번이 아무리 돌처럼 무감하고 딱딱한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참 주제 파악을 잘하는 왕자였다. 여기서 죽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이었다. 몸속에서 내내 꺼지지 않던 불이 메케한 연기를 피워 냈다. 그 탓에 머릿속이 어둡고 어지러웠다.

“죽지 않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칼리번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자, 몸을 웅크리고 사과만을 반복하던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왕자님께서 죽을 일은 결코 없으실 겁니다.”

육체는 죽어 가고 정신은 혼란스럽다. 그런 와중에도 그 말만은 단단하고 확고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는 듯이. 수많은 고난에 부서지고 더는 살고 싶지 않더라도, 죽을 권리가 없다는 것처럼.

“아, 아….”

에레즈는 더는 죽겠다 말하지 못했다. 대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평생 그 말만을 기다려 온 존재처럼 울었다.

* * *

제6 왕자 에레즈 프리드웬.

계승 순위가 한참 밀린다고는 하나, 엄연한 왕실의 혈통이었다. 그러나 마물과의 방어전에 참전해온 다른 형제들과 달리, 에레즈는 성년이 될 때까지 두문불출했다. 그의 공석에 무성한 소문이 대신했다.

<…들은 말로는 본성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마물에 가까워서라고 하던데.>

언젠가 젠이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마물에 가까운 상태라는 소문….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데뷔탕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레즈 프리드웬은 눈부시게 싱그럽고 아름다워 칼리번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었다. 나이에 비해 다소 어려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인이나 노예보다도 자신을 비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겸양의 영역이 아니었다. 설령 비참한 삶을 사는 노예라 할지라도, 자신이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칼리번은 마물 토벌을 위해 왕국령 곳곳을 누비며 수많은 사람을 보아 왔다. 그 누구도… 배척받는 마물의 혼혈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마물의 아이를 가져 곧 죽게 될 사내라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모두가 살고 싶어 했다.

“사, 사실… 나, 나는… 괴… 괴물이야.”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만 하던 왕자가 고개를 떨구더니, 뜻밖의 고백을 했다.

“…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혀, 형님이 그랬어. 다, 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 나… 나는… 그, 그 어떤, 마, 마물보다도… 끄, 끔찍한 괴, 괴물…이라고….”

칼리번은 그의 말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그, 그, 금기, 사항이라 마, 말할 수는 어, 없었지만…. 하, 하지만… 여, 여긴, 네, 네… 네 말, 대로… 여, 여기는… 우, 우리 둘,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레즈는 평생을 함구해 온 기억이 몸에 새겨졌는지,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 그리고 어쩌면….”

…곧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왕자는 그 말을 하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리번의 얼굴을 보고는 기가 죽어 말을 그쳤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마, 마물의 피, 피가… 흐, 흐르니까……. 예, 옛날에, 주, 죽었어야 했는데…. 주… 죽고 싶지, 않았어. 무, 무서워서…. 아, 아무도 해치지 않도록, 하, 항상, 수, 숨어 있을 테니까… 제, 제발 사, 살려 달라고… 비, 빌었어. 혀, 형님한테… 부, 부탁했어….”

에레즈는 훌쩍거리며 손등으로 제 눈가를 닦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칼리번의 몸에 열기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아, 알테르 혀, 형님은 조… 좋은 분이셔서, 나, 나를 가, 엾게… 여, 여겨서, 사, 살려, 주, 주셨어…. 부, 북쪽 타, 탑에서… 호, 혼자 지, 지내게 해 주었어. 트, 특별히 나, 나를… 도, 돌봐 줄… 하, 시녀도 붙여, 주셨어….”

이 작고 연약한 왕자는 형제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형제들은 그를 가둬 놓고 밖에서는 당당하게 인간인 척을 했다.

“…조, 좋은 사, 사람 같았어…. 대, 대화, 해, 해 보고 싶었는데…. 나, 나는… 괴, 괴물이니까… 나, 나 때문에 주,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마, 말… 모, 못 해 봤어….”

“…….”

“타, 탑에 호, 혼자 있는 건, 무, 무섭고… 외로웠, 지만, 그, 그래도… 주, 죽는 것보다는 나, 나았어…. 혀, 형님께서 가, 가끔 차, 찾아와서 위, 위…로도… 해 주셨으니까….”

“그건….”

“…으, 응?”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감금입니다, 왕자님.”

듣다 못한 칼리번이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 그렇지 않아…! 내, 내 자, 잘못인, 걸!”

에레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만… 나, 나 때문에 사, 사람이 다, 다치는 거, 것보다는 나, 나아…! 그, 그리고…… 고, 고작… 나, 나 같은 것 때문에… 와, 왕실의 궈, 권위가 추, 추락하면 어, 어떡해?”

“…하지만.”

칼리번은 이를 갈았다.

“마, 말로, 서, 설명 하, 하니까… 그, 그렇게 느, 느껴지는 거야. 조… 조금 외, 외… 외로웠지만… 히, 힘들지 않아, 나, 나쁘지 않았어. 나, 나는…! 워, 원할 때는, 하, 하고 싶은 일도 했어…!”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에게 자신의 가족을 필사적으로 변호했다.

“가, 감금은… 마, 마악…! 겨, 경비병이, 가, 감옥을, 지, 지키는 거잖아? 가, 감시 같은 것도 저, 전혀… 어, 없었어…! 나, 나…… 가, 가끔은… 기, 기도했어…. 내, 내게도 화, 황금 피가 흐른다면…. 혀, 혀… 형님들처럼, 되… 되게… 해, 해 달라고…….”

그 자신을 깨닫지 못했지만, 에레즈는 버릇처럼 두 손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 신께서는, 바… 바쁘셔서 내, 내 목소리를 드… 듣지, 모, 못 했나 봐.”

그 말을 하는 에레즈는 다른 때보다 더욱 늘어져 보였다.

“시, 신께서… 나, 나 같은 것의 소, 소원을… 들어, 줄 리가 어, 없지…. 그, 그래서…… 혀, 형님 말을 자, 잘 따르려 했어…. 또…… 차, 착한 일도… 해, 해 보려고 노력, 했어. 하, 하… 하지만, 내, 내가 가, 갑자기… 괴물이, 되,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나, 나와 비, 비슷한… 나, 나와 비슷, 하지만, 차,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한테… 도, 도움을 주면…….”

에레즈는 말을 그치고, 젖은 눈으로 칼리번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 도움을…….”

눈물에 젖은 보석안은 그 눈빛만으로도 도움을 바라며 매달리는 것 같았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그를 안아서 달래 주어야 한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가 간신히 그 욕망을 억누르자, 에레즈는 기가 죽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노, 노력은 해, 했지만… 겨, 결국 내, 내가 부, 부족했어…. 어, 어… 어느 날, 혀, 형…님이, 마, 말했어. 내, 내가…… 너, 너무 빨리, 자, 자라고 있다고….”

빨리 자라? 칼리번은 순간 그 말을 의심했다. 에레즈는 성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작고 마르고 연약했다.

“이, 이… 이러다가는 모, 몸이 마… 마물로 벼, 벼… 변하고, 이, 이, 이성도, 가… 감정도, 저, 전부… 이, 잃고, 사, 사람을 죽이는 괴, 괴… 괴물이 되, 될 거라고…. 혀, 형님은…… 그, 그동안 저, 전장에서 마, 마… 마물을, 수, 수도 없이, 봐, 와서, 나… 나 같은, 끄, 끔찍한… 마, 마… 마물, 호, 혼혈이… 그, 그렇게… 변해, 버린다는 걸, 아, 알고… 계, 계셨거든.”

“…그럴 리가….”

그 누가 에레즈 프리드웬을 보고 괴물이라 말하겠는가? 두 눈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머리카락은 황금을 녹인 것만 같은데. 이를테면, 그는 살아 있는 보석 상자였다. …물론 지금은 다소 꼬질꼬질해졌지만 말이다.

“…혀… 형님은, 나, 날 모, 몹시도… 아, 아끼, 지만……. 내, 내가, 괴, 괴물이 되면… 어, 어쩔 수 없이…… 나, 나… 나를… 나를… 주,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해, 했어.”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첫째 왕자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가고 의문과 불신만이 늘어 갔다. 여섯째 왕자와 짧은 시간이나마 보낸 칼리번의 판단은 이러했다. 이 어리고 연약하고 겁 많은 왕자는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하면 당했지, 누구 하나 죽일 수 없다. 절대로.

“그, 그때… 주, 죽었다면… 나았을, 텐데…. 나, 나는…… 여, 여전히… 주, 죽고 싶지 않았어…. 주… 죽는 건, 무, 무… 무서우니까…. 그, 그래서… 아, 앞으로는 조, 조… 조금만, 아, 아주 조금만, 머, 먹을 테니까… 사, 살려 달라고, 애, 애원했어……. 그, 그러면 빠, 빨리… 자, 자라지 않을 테니까…. 괴, 괴물이… 되, 되지 아, 않을 거니까…….”

“왕자님….”

칼리번은 몇 번이나 권해도 작은 과일 한두 개면 충분하다며 고개를 젓던 여섯째 왕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나… 괴, 괴물이 되지, 아, 않으려고 노, 노력했어…! 바, 밤마다, 배, 배가… 너무 고팠지만…. 모, 몸이… 커, 커져서… 괴, 괴물이 되어서… 혀, 혀… 형님에게 주, 죽는 것보다는…. 그, 그편이 나, 나, 나았어.”

왕성을 떠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그 약속을 지켜 온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는 고기나 생선을 먹을 수 없는 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그런 눈, 하, 하지 마…. 그, 그래도… 그, 그 덕분에, 괴, 괴물이 되, 되지 않고, 서, 성년이, 됐으니까…!”

여섯째 왕자는 잠시나마 ‘자신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의지에 찬 모습을 보였으나, 다시 슬픔으로 차올랐다.

“……서, 성년이 되, 되니까…. 혀, 형님이 추, 축하도 해 줬어…. 다, 다른 사, 사람들은 나, 나 같은 건, 괴, 괴물이 되, 될 테니까…. 사, 사람들 아, 앞에 나, 나서면…. 저, 절대, 아, 안 된다고 해, 했지만……. 혀, 형님만은 다, 달랐어. 트, 특별히, 세, 세 번이나…! 바, 밖에 내, 내 모습을… 드, 드러내게 해, 해 준다고… 했어. 그, 그동안 노, 노력했으니까……. 사, 사람들 아, 앞에 머, 멋진, 와, 왕자님으로 보, 보이게 해, 해 주겠다고…….”

이를테면, 여섯째 왕자에게는 초가 세 개뿐이었던 거다.

“꾸, 꿈만, 가, 같았어……. 마, 많은, 사, 사람들을 보, 볼 수 있어서……. 그리고….”

눈앞의 소년을 처음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던 성년식,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 무작정 뛰어들었던 무투회… 칼리번이 그 만남을 하나씩 늘려 간다고 생각하는 동안, 여섯째 왕자는 하나씩 불을 꺼 갔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평생을 고독한 탑에 지낼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그리고……!”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하얗고 긴 목에 자리 잡은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칼리번은 그의 푸른 눈빛에 사로잡혀 버렸다. 어두운 동굴 속 반짝이는 에레즈의 눈은 마치 별과도 같았다.

“…그, 그런데.”

에레즈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세, 세 번째는 내, 내 결혼식이 되, 되었어……. 혀, 형님은… 이, 이 혼인으로 다, 다, 잘, 잘될, 거라고….”

“…….”

확실히…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갔던 것 같다.

“시, 신부가 되, 될 사람은… 누, 누군지조차, 모, 몰라서… 무, 무, 무서웠어…. 하, 하지만… 혀, 형님의 마, 말을… 거, 거역할 수는…….”

“…….”

“그, 그런데…….”

이야기의 결말은 칼리번도 잘 알고 있다.

“……나, 나, 나 때문에, 사람들이…. 그, 그리고 너, 너까지…….”

종이를 구겨 버리는 것처럼, 에레즈의 목소리가 후회로 일그러졌다. 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양손으로 금빛 머리를 움켜쥐었다.

“수… 숨겨서 미, 미… 미안해! 미… 미, 안해…. 차, 차라리 주, 주, 죽었어야… 해, 했는데…. 내, 내가, 괴, 괴물이라는 것을 아, 알았을 때부터… 주, 죽었어야…….”

“…….”

“…나, 나, 나 같은 것 때문에, 너, 너까지… 말려들어서, 이렇게…… 다, 다치고, 주, 죽게 될지도… 모, 모른다니….”

“…….”

“자, 잘, 못했어…. 미, 미안해…. 처, 처… 처음부터, 마, 말했어야 했는데…. 그, 그때는! 이, 이렇게… 되, 될 줄, 저, 전혀… 모, 몰랐어…! ……무, 무서웠어…! 그, 그저…… 네, 네가 나, 날 버리면……. 다, 당장, 주, 죽게 되는 게, 무, 무서워서…….”

에레즈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는 끅끅 눈물을 삼키려 애썼다.

“…그, 그러니까…. 이, 이제 나, 나 같은 걸 사, 살, 살리려… 그, 그렇게… 애, 애쓰지 않아도… 돼.”

마침내 비밀을 고백한 에레즈는 몸을 웅크렸다. 조개처럼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모습은 숲으로 불시착하고 난 후, 칼리번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그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주, 죽지 아, 않을게…. 하, 하지마안… 마, 만약, 내, 내가 죽으면… 나, 나를 먹고, 떠, 떠나…….”

궁색하고 안쓰러운 변명이었다. 얼굴을 가린 팔이 뼈만 남아 앙상했다. 여섯째 왕자는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마시지도 못해 온몸이 비쩍 말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감옥에 갇힌 죄인처럼 벌벌 떨었다. 이런 하얗고 마른 손으로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기적을 보일 수도 없을 것이다.

“진짜 괴물은 왕자님이 아니라 알테르 프리드웬입니다.”

칼리번은 온몸으로 퍼져 가는 열기를 의지력으로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그, 그럴 리가 어, 없어…! 혀, 혀… 형님은 나, 나 같은 것과는 와, 완전히 다, 달라…! 그, 그분은… 화, 황금 피를 이, 이어받은… 지, 진짜 와, 왕자님이야…. 나, 나 같은 괴, 괴물이라 아니라…… 대, 대단한 분, 이야….”

에레즈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반박했다. 눈가와 코끝이 온통 붉었다.

“아닙니다.”

에레즈의 고백을 듣고 나니, 칼리번은 이 숲에 떨어진 후 가졌던 몇 가지 의문 중 하나를 해소하게 되었다.

“…뭐, 뭐…?”

칼로 썰어 내듯 단호하게 대답하자 에레즈가 당황했다.

“그날의 결혼식에서 오메가를 데려온 것은 알테르 프리드웬, 그자입니다. 왕자님께서는 충격으로 제대로 기억하시지 못하시는 것 같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아….”

“그런 짓을 벌인 자가 제대로 된 왕족일 리가 없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황금 피일 리가 없다.

“……그, 그건… 내, 내가 괴, 괴물이라…….”

에레즈는 망설이면서도 제 형제를 위해 변명했다.

“거기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팔이 잘렸으면서도 멀쩡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본성을 드러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황금 피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알파의 특성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왕국의 후계자인 그가 왜 그런 반역을 벌인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아꼈습니다.”

“…….”

“하지만… 왕자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자가 바로 알파입니다. 그 사실을 숨기려, 하아…. 전부 왕자님께 덮어씌운 겁니다.”

칼리번의 몸은 이름 모를 열기에 지배당했지만, 그보다 더한 분노가 버티게 했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 뺨 위로 흘렀던 한줄기 눈물조차 증발되어 버렸다. 칼리번은 더 이상 첫째 왕자를 왕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칼리번에게도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동생이 있었다. 너무나 작고 연약했던 알리샤. 설령 그 아이가 마물 혼혈이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한들 그렇게 대했을까? 고독한 탑에 가두고, 먹을 것이 풍족함에도 일부러 굶기고, 속이고, 협박을 했을까?

칼리번은 젠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이 어린 오메가를 죽인 그녀가 과거를 고백하며 지었던 표정을…. 금화만을 추구하며 전쟁터를 구르는 알파 용병이라 할지라도 그러한데….

“…감히 제 신분으로 높으신 분을, 왕자님의 형제를 모욕해서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내뱉고는 뒤늦게 사과했다. 고작 고개를 까딱였을 뿐인데 눈앞이 핑 돌며 어지러웠다. 그는 더운 숨을 헐떡였다.

“마, 만약에…! 저, 정말 괴물, 이면 어… 어떡해?”

여섯째 왕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혀, 형님 말처럼, 내, 내가, 언젠가 괴, 괴물이… 되, 되어, 버리면?”

칼리번은 폐 속까지 차오른 열기를 깊은숨으로 내뱉었다. 그러고는 한 팔로 땅을 짚었다.

“왕자님은 괴물이 아니시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 그렇더라, 도?”

에레즈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물 혼혈 중에도 결국 이성을 잃고, 마물 그 자체가 되어 버리는 녀석이 종종 있습니다.”

“그, 그러면…?”

“제 손으로 추격해 죽였습니다.”

“…!”

칼리번의 대답에 에레즈에게서 흡,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용병으로 일할 때부터 당연히 따르는 의무이자 규칙입니다. 인간을 죽이게 되면 안 되니까요.”

그것이 용병대장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변해 버린 녀석들도 사람을 죽이길 원치 않을 겁니다. …아마도.”

마물 혼혈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본능을 따라 마물로 살아가는 길. 그리고 인간과 섞여 살아가는 길. 후자를 선택했으니 당연히 따라야 할 규칙이다.

“그, 그럼…… 괴, 괴물이 되면… 네, 네가… 나… 날… 죽일, 거야…?”

에레즈는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번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힘들 정도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고개를 저었다.

“하아…. 왕자님께서… 그런 건… 하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 왜?”

“…왕자님께서는… 너무 작고, 약해 빠져서… 괴물이 되어도…… 약할 테니까요.”

열기를 버티는 것만으로 급급한 나머지, 칼리번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본심을 꺼내 버리고 말았다.

“……뭐?”

여섯째 왕자는 젖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명백한 말실수였다. 하지만 칼리번은 정정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후우……. 왕자님은 약하시니까… 마물이 되어 봤자…… 마을 어린애한테도 질 겁니다.”

“뭐, 뭐라고…….”

“분명… 아무도 해치지 못하실 겁니다.”

그 말을 잠자코 듣던 에레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손으로 열심히 얼굴을 닦아 냈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자신이 심한 말로 그를 울려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리번은 일부러 꾸며 낸 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경험에서 유추한 신뢰성 높은 의견이었다.

약한 놈은 마물이 되어도 약하다. 심약한 놈은 마물이 되어도 다른 마물에게 잡아먹힌다. 그리고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은 열에 들뜬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나….

“너, 너는… 참 이상해.”

여리고, 가엾고….

“마, 마치… 내, 소, 속마음을, 보, 본 것처럼…… 내, 내가 드, 듣고 싶은 말만 해 줘….”

나약하고, 불쌍하고….

“……내, 내가… 내, 내가 나, 나빠…. 네, 네가……나, 나도 모르게… 드, 듣고 시, 싶은 마, 말만… 유, 유도하게 말한, 거, 것일지도….”

겁도 많고, 자그마하고…….

그리고 또….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 감정을. 칼리번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감정 중에서 고르고 또 골라 보았다.

“…….”

어느새 여섯째 왕자는 눈물을 또록또록 흘리고 있었다. 또 눈물이었다. 그러나 짜증은 치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칠 듯이 안타깝고 슬픈 것도 아니었다. 다만 칼리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를 품에 안고 싶었다. 그저 만족할 때까지.

‘이 감정은 뭐지….’

아, 마침내 칼리번은 깨달았다. 털로 뒤덮인 자그마한 젖먹이 새끼를 한 손으로 감싸 쥐고, 한없이 바라볼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작고 따뜻했던 강아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것은 칼리번의 손가락을 어미의 젖인 줄 알고 핥곤 했다. 그 순수한 것에게 있어 칼리번은 수많은 짐승을 도살한 백정이 아니었다.

“읏….”

칼리번의 눈앞이 어그러졌다. 울고 있는 에레즈가 여러 개로 늘어났다. 결국, 그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

칼리번의 머리가 여섯째 왕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에레즈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카, 카… 칼!”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몸을 두 팔로 껴안았다. 칼리번은 그의 어깨에 기대 더운 숨을 내뱉었다.

“왜, 왜 그래…. 괘, 괘, 괜찮은 거야?”

분명 바로 곁에서 말하고 있는데도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거미의 독이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줄 리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무엇이, 식지 않는 열기와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일까?

숲에 온 이후, 무엇이 칼리번을 몰아세우는지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지만…. 도통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동안 싸웠던 마물 중 하나에게 이름 모를 전염병이라도 옮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자에게는 아무런 증세가 없었다. 마물과 싸워 오며 익숙해진 몸보다는 그쪽이 훨씬 전염병에 취약할 텐데도.

칼리번의 생활은 용병으로 지내 왔던 평소와 동일했다. 오직 다른 점이라고는….

“왕자, 님, 전 괜찮으니… 진정하십시오…….”

지켜야 할 사람이 한 명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칼리번의 몸은 너덜너덜했다. 그런 몸을 두고 몸 안의 장기들은 무엇부터 해야 할지 격렬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잘린 팔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최우선인 과제가 무엇인지, 칼리번 자신조차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큭….”

칼리번은 왕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참아 왔던 신음을 결국 내뱉었다. 뼈가 녹을 것처럼 불타오르더니, 이제는 내장이 뒤틀렸다. 특히나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들쑤셔졌다. 신음을 참을 정도의 상황이 아니었다.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 아아…!”

칼리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에레즈 프리드웬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열병이라니…. 지독하게도 잔혹하다. 칼리번은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신의 저주는 종종 느낀다. 마치 신조차도 그들이 여기서 메말라 죽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다.

“모, 몸이… 부, 불덩이 같아……. 어, 어쩌면 좋지…?!”

에레즈는 칼리번의 얼굴을 손등으로 연신 쓰다듬었다. 뺨에 닿는 그의 피부가 차가워 시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쉬면…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 그보다는….”

칼리번도 처음 겪는 일이라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불안해하는 에레즈는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말하는 편이 나았다.

“죄송합니다…. 금방, 회복해서…… 구하러….”

칼리번은 열에 시달리면서도 왕자에게 사과했다.

“더, 더는…… 그, 그럴 필요, 없다고 해, 했잖아….”

푸른 눈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이 칼리번의 가슴 위로 툭 떨어졌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고작 그 정도 자극만으로, 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뜯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칼리번은 제 몸이 푹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이 흠뻑 젖어 있어 몸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그리고… 더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달큰한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다. 누가 보아도 단순히 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왕자님…. 제 겉옷을 벗겨 주십시오.”

결국, 칼리번이 부탁했다.

“…마, 많이, 더, 더워…?”

에레즈는 칼리번의 열을 식혀 주기 위해 손수 옷을 벗겨 주었다. 어린 손길은 무척이나 서툴렀다. 칼리번은 옷 사이에 숨겨져 있던 제 몸이 드러나는 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하얀 왕자의 피부와 달리 그의 피부는 안쪽도 짙은 색이었다. 전신이 흙과 피로 더러운 와중에, 가슴 부분만이 무언가에 씻겨 내려간 것처럼 깨끗했다. 땀에 젖은 옷에 닦인 탓이면… 좋겠지만.

“…하아, 아….”

칼리번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는 문득 여섯째 왕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내가 주, 죽으면… 나, 나를 먹어….>

칼리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왕자님.”

목 안이 열기로 바짝 말라 있었다. 그래서 다음 말을 꺼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칼리번이 망설이는 사이, 드러난 가슴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칼리번은 그 감각에 몸서리를 치며 다음 말을 내뱉었다.

“저를… 먹으십시오.”

지끈거리는 고통과 함께, 가슴 양편의 움푹 팬 곳에 흰 액체가 고였다. 옷을 푹 적실 정도였으니 이대로 계속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번의 몸 여기저기에 웅덩이처럼 고이게 될 것이다.

“여, 여기… 왜… 왜 그, 그런 거야…? 아, 아픈 거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아, 알파는…… 다, 다들, 이, 이런 거야……?”

“…….”

“나, 나는…… 아, 안 그런… 데…?”

당황할 만도 했다. 보통 젖이 나오는 것은 아이를 가진 여성이었으니까. 설령 마물의 아이를 갖게 된 인간 사내라 할지라도 젖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마물은 젖을 먹고 자라지 않는다. 인간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거의 완벽한 육체를 갖기 때문이다.

“…제… 몸은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릅니다.”

에레즈가 그랬던 것처럼, 칼리번에게도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는 알파가 아닌 오메가였다. 하지만 칼리번은 왕자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더럽지만…. 그래도 당장 목은 축일 수 있을 테니…….”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칼리번은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조차 몰랐다. 여섯째 왕자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절박함, 몸을 전처럼 움직일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계속 타오르는 이름 없는 열기. 그 모든 것들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자신이 아직은 어린 왕자의 앞에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젖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알파인 줄 알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그를 둔감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단검 한 자루 없지만, 원래 칼리번은 자신의 몸집만 한 거대한 검을 주무기로 휘둘렀다. 그의 어깨는 누구라도 기대고 싶게 벌어졌고, 팔과 가슴은 대검을 빠르게 휘두르기 위해 눈에 띄게 발달했다.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가슴이 지금은 평소보다 조금 더 부풀어 있었다. 가슴에 가득 찬 젖을 짜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다른 사람과 다른 가슴의 특징이 그를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옅은 색의 유륜 가운데 자리 잡은 젖꼭지는 튀어나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 점이 칼리번의 젖을 자꾸 안으로만 고이게 했다.

살면서 자신의 가슴에 딱히 이상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유두가 튀어나와 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그와 같은 사내들에게는 가슴 양편에 자리 잡은 젖꼭지는 장식이나 다름없으니까. 다른 동료들은 유두가 거친 옷감에 긁혀 피가 나거나, 마물의 발톱에 뜯겨 나가기가 부지기수였다. 칼리번은 은연중 자신의 몸이 용병의 거친 생활에 잘 맞는다고 여기기까지 했다.

“후우…….”

칼리번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젖이 고인 것마저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곳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런 곳에 딱딱한 이가 닿는다면 꽤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지간한 고통에는 익숙하다고는 해도, 항상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왕자의 허기를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다면….

“…….”

칼리번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가 한 가지를 고려하지 않은 사항이 있었다. 바로 여섯째 왕자의 반응이었다.

“아…. 으, 으…….”

검은 눈이 예고 없이 올려다보자, 에레즈는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열이 오른 칼리번보다도 새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네, 네가, 아, 아픈데…… 그, 그런 짓을, 하, 할 수는 없어…!”

여섯째 왕자는 양손과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저항했다. 사내의 몸에서 나오는 젖이니 당연히 못 미더울 것이다. 칼리번은 부정적인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 읏…….”

제 가슴을 내려다보며 말하던 중, 결국 고여 있던 젖이 가슴 위로 하얀 길을 만들었다. 벌써 주변에 젖내가 진동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면 감히 이런 것을 먹으라 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소한 우유 냄새보다는 달큰한 편이었지만, 먹지 못할 냄새는 아니었다.

“흐… 읏….”

에레즈가 여전히 망설이자, 칼리번은 손으로 제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예리한 고통과 함께 울컥 젖이 흘러나와 칼리번의 손등을 적셨다. 칼리번은 냄새를 다시금 맡고 직접 맛을 보았다.

“지금 제 상태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아서 확신은 못 하지만….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열기로 미각마저 둔감해졌는지, 혀에서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미리 사과했다. 어쩌면 왕자에게는 먹기 거북할 정도로 비릿한 맛이 날지도 모른다.

“그, 그렇지, 아, 않아…!”

에레즈는 입으로 대답하면서도 동시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니, 까….”

여섯째 왕자는 고개를 한 곳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 가며, 도무지 가만있지를 못했다.

“내, 내가…… 네, 네 걸, 머, 먹으면, 바, 밖에… 나… 나가지 아, 않을 거야?”

“…….”

“나, 나 때문에 나, 나가려고 하는 거니까……. 아, 안 그, 그럴 거지…?”

칼리번은 더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조, 좋아…. 그, 그러면……. 아, 알겠어….”

마침내 결심했는지, 에레즈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금빛 머리카락의 끝이 칼리번의 가슴에 닿아, 젖어 들었다. 칼리번의 피부는 그런 사소한 감각마저 느꼈다.

“…….”

그래서 더욱… 간지럽다. 여섯째 왕자의 입에서 나오는 떨리는 숨결이 칼리번의 가슴 위에 쏟아졌다. 수유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기에 칼리번을 긴장시켰다. 에레즈는 한참 후에서야 혀를 내밀어 유륜에 고인 젖을 핥았다.

“…읏…!”

옅은 살결에 닿는 물컹한 감촉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칼리번의 몸과는 그 어느 곳도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부드러운 혀였다. 그런 혀가 칼리번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핥았다.

“…다, 달아….”

눈이 마주치자, 에레즈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칼리번을 위해서 한 말이었다.

“…네….”

고작 그 한마디에, 기묘한 안도감이 칼리번의 몸에 감돌았다. 에레즈는 그릇에 담긴 우유를 핥아먹는 고양이처럼, 칼리번의 유륜에 고인 젖을 핥았다. 민감한 피부 위로 혀가 지나갈 때마다 칼리번의 몸 안에서 얕고 저릿한 자극이 퍼져 나갔다.

배고픈 자가 만족하기에는 차려진 것이 적었다. 서너 번 핥아 내자 움푹한 유륜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함몰된 유두의 흔적만이 바닥에 보였다. 이대로 다시 젖이 고이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은 양일 것이다.

부드러운 입술이 칼리번의 유룬에 닿았다. 꼭 다문 입술이 유륜 주변을 위아래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본래 유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유두가 없이 움푹 들어간 그곳을 윗입술이 간지럽혔다.

“흐, 으…….”

칼리번은 그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나눠서 내쉬었다. 눈으로 보지 않는데도 그 감촉이 훤히 느껴진다니, 이상한 경험이었다.

“……윽!”

천천히 숨을 뱉던 칼리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레즈의 입술이 벌어지더니, 칼리번의 여린 살을 덥석 물었다. 칼리번의 유륜은 그리 큰 편은 아니어서, 입 안으로 전부 삼켜졌다 칼리번의 몸에 힘이 들어가자, 잠시 말라붙었던 젖이 밖으로 샘솟았다. 고양이의 꼬리처럼 가슴 위를 살랑이던 혀가 그것을 허투루 흘리지 않고 빨아먹었다.

“아… 읏…….”

에레즈가 젖을 빨 때마다 가슴이 입술에 눌리고 유륜이 세게 당겨졌다. 그 작은 자극은 빠르게 가슴 주변으로 퍼졌다. 그에게 빨리는 부분이 아프고 화끈거렸다.

여섯째 왕자는 처음으로 젖을 먹는 법을 배우는 아이 같았다. 그는 이제 막, 젖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르고 매달려야 나온다는 사실을 배웠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묻은 것’을 먹기 위해 핥았다면, 이제는 혀로 유륜 주변을 꾹 누르고는 느릿하게 짜냈다.

혀가 유륜 전체를 누르고,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혀끝이 안쪽에 숨겨진 유두를 끄집어내려 들었다. 칼리번의 몸이 과도하게 느낄 뿐이지, 실제로는 손가락으로 가슴을 튕기는 것보다도 약한 힘이었다. 그럼에도 칼리번의 몸은 누군가 빨아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 정도 자극만으로도 젖을 흘렸다.

“후… 하, 하아…!”

칼리번의 가슴을 핥던 왕자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그동안 숨을 쉬기가 어려웠는지 푸른 눈이 조금 젖어 있었다.

“하아……. 읏…….”

그리고 그만큼이나 칼리번의 숨도 거칠어졌다. 왕자에게 먹힌 그 부분만이 타액으로 젖어 있었다. 그 부분만이 더 춥고, 더 안타까웠다.

“미… 미안, 해….”

에레즈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칼리번의 젖을 먹기 전보다 훨씬 불안해 보였다.

“아, 아픈데……. 나, 나만… 머, 먹어서….”

그가 또 사과했다. 젖을 빨릴 때마다 칼리번이 떠는 이유가 아파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먹은 양은 감질날 정도로 적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한 짝밖에 남지 않은 팔로 그를 끌어당겼다. 왕자는 머뭇거리며 칼리번의 몸 위에 올라탔다. 왕자의 청량한 체향에, 전에는 맡을 수 없었던 젖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자신의 냄새였다. 칼리번은 이상한 고양감을 애써 눌러 넣었다.

“좀 더….”

칼리번은 그에게 빨린 가슴을 보여 주었다. 유륜 안쪽에 숨겨졌던 유두가 자극을 받아서인지 어느새 솟아 있었다. 유두 끝에서 방울방울 피어오른 젖이 유룬 주변을 희게 번져 나갔다.

“…….”

에레즈는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유두에 처음으로 혀가 닿았다.

“윽…!”

칼리번은 이상한 신음을 새어 나오지 않게 이를 세게 물었다. 고인 것을 핥는 것에 불과했던 처음과 달리 유두를 바로 물고 빨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몸 안에서 젖이 쭉 빨려 나갔다. 마물에게 흡혈을 당할 때와 비슷했지만, 빨리는 부위는 팔뚝이나 어깨가 아닌 가장 예민한 부분이었다. 유두가 혀 안에서 툭, 툭 굴려졌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 위에서 자세를 여러 번 고쳤다. 가장 편안한,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싶은 것 같았다. 배와 배가 부딪치고 무릎이 칼리번의 안쪽을 눌렀다. 그럴 때면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후우….”

칼리번의 눈에 하얗고 가는 뒷덜미가 보였다. 사슴처럼 예뻤다. 불룩 튀어나온 목울대는 칼리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의 젖을 삼키며 크게 움직였다.

“하아…. 하, 읏…….”

어느새 칼리번은 그가 젖을 빨아들이는 방식에 맞춰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반대편의 가슴에서는 손길이 젖혀 닿지 않는데도 젖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가슴을 적실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양이었다. 칼리번이 에레즈처럼 하얀 피부였다면 그리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햇볕에 그을린 피부 위로는 가릴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을 만큼 선명하게 흰 자국이 그려졌다.

칼리번은 열기와 자극에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반쯤 뜬 눈으로 그 흰 자국을 보고 또 보았다. 자신에게 젖이 나오는 장소가 한 군데 더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에레즈에게 남김없이 핥아질 때까지.

* * *

“음…….”

칼리번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한 손을 움직였다. 손안에 온기가 닿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처음으로 젖을 먹인 이후, 칼리번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 것처럼….

칼리번은 며칠 동안 식지 않는 열기에 시달렸다. 눈을 뜨면 에레즈의 상태를 확인하며 젖을 먹이고 눈을 감으면 기절 같은 잠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카, 칼…….>

그가 잠든 사이, 간혹 여섯째 왕자가 말을 걸거나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 소리가 들리기는 했으나, 젖을 먹이고 난 후에는 온몸에 힘이 빠져 도저히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깊은 잠이 들면 그 사실조차 곧 잊고 말았다.

처음에는 주는 쪽도, 받는 쪽도 모두가 서툴렀다. 서서히 몸을 맞춰 가며 익숙해져 갔다.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칼리번은 항상 상의를 벌리고 가슴을 드러냈다. 주로 바위나 벽에 기대 느슨하게 앉아 있거나 상체를 뒤로 젖힌 채 반쯤 누워 있으며, 에레즈는 몸 위에 올라타거나 칼리번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젖을 물었다.

그렇게나 빠져나갔는데도, 칼리번의 젖은 의외로 쉽게 마르지 않았다. 가슴 안에 근육이 아닌 젖으로만 꽉 차 있다는 듯이, 끊임없이 에레즈에게 먹일 것이 나왔다.

“……후우…….”

칼리번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슴 주변이 간지러웠다. 가만히 살펴보니, 여섯째 왕자는 그냥 잠든 것이 아니라, 칼리번의 가슴을 문 채로 잠들어 있었다.

칼리번의 유두는 안쪽에 들어가 있어 젖을 빨기가 힘들었다. 유두를 나오게 하려면 칼리번의 입에서 아파하는 신음이 나올 때까지 혀로 찌르고 간지럽혀야만 했다. 에레즈는 순했고 그를 매번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잠들 때면 이렇듯 칼리번의 유두를 입에 물고 있었다. 언제든 다시 먹을 수 있도록.

“흐음…….”

칼리번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문득, 여섯째 왕자가 손가락을 잘근잘근 물며 잠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행위를 말리려다가 칼리번의 손가락을 깨물기도 했었다. 단순히, 뭐든 물고 자는 것이 버릇일지도…….

“……깨어나셨습니까.”

칼리번이 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언제부터인가 어둠 속에서도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칼리번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응…….”

에레즈는 칼리번의 유두를 입에 문 채로 대답을 오물거렸다. 동시에 그의 입술이 칼리번의 옅은 살을 가볍게 매만졌다. 칼리번의 호흡이 잠시 흐트러졌다.

“이, 있지……. 음……. 자… 잠깐, 만…….”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에게 말을 걸기 위해 가슴에서 입을 뗐다. 그러고는 말을 하기 전, 툭 튀어나온 유두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혀로 두어 번 핥아 세웠다.

“…이, 있잖아….”

“흣…. 네….”

별 뜻 없는 순수한 행동이었으나 밤새 빨리고 깨물려 예민해진 칼리번에게는 약간의 괴롭힘처럼 느껴졌다.

“…유, 유모가 없었, 어. ……나, 나 같은… 마, 마물 혼혈은… 그런 게 피, 필요 없대서…….”

“아…. 그러셨나요.”

“응…….”

마물은 인간보다 다섯 배, 마물 혼혈은 세 배 더 빠르게 성장한다. 마물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걷고 뛸 수 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본능에 새겨진 행동을 전부 할 수 있으며, 사람 또한 해칠 수 있었다.

마물 혼혈도 태어나자마자 기어 다니거나 건강한 개체면 뛰기도 한다. 인간의 아기처럼 젖을 먹이고 달래며 키우는 기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다.

“세, 셋째 형님은 여, 열세 살이 되, 될 때까지… 유, 유모의 저… 젖을 먹었, 대.”

“……저런.”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13살이면 그의 기준으로는 다 큰 사내였다.

“…지, 진짜로 먹은 건 아, 아니고……. 그, 그런 척을 하면… 푸, 품에 아, 안겨서 자, 잘 수, 이, 이… 있으니까…….”

에레즈는 서둘러 형제의 변론을 했다. 아이를 전담으로 돌봐 주는 시녀라니, 칼리번이 마물 혼혈이 아니더라도 먼 이야기였다.

“나, 나도…….”

에레즈가 칼리번의 품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누, 누군가… 나, 나… 나를 바, 밤마다 꼭…… 끄, 끌어안아 줬으면, 했어….”

“…….”

“트…… 특히나 아, 악몽을 꾸는, 바, 밤에는….”

칼리번은 가만히 에레즈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작 그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준다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레즈는 곧 부끄러워하며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숨겼다. 칼리번의 눈에 동그란 정수리만이 보였다.

“너, 너는…… 꼭… 어, 어머니 같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에레즈가 속삭였다.

“나는…… 괴, 괴물이라… 어, 어머, 니는… 없지만, 와, 왕비님은, 하, 한 번도 나… 나를 봐, 봐주지 않으셨, 어. 그, 그건 다, 당연한 거야…. 나, 나는 그, 그… 그분의 아, 아이가 아니, 니까…. 아, 아버지조차 나, 나… 나를 하, 한 번도 아, 안아 주지 아, 않으, 셨는걸…….”

“…….”

“그, 그래도….”

칼리번의 가슴이 축축해졌다. 이번에는 젖 때문이 아니었다. 가슴 아래에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13살이 될 때까지 아무도 젖을 먹여 주지 않고 안아 주지 않아서 우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는 둔감한 칼리번이라 할지라도 알 수 있었다.

“…….”

칼리번은 에레즈를 감싸 안던 왼팔로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냇가에서 보았던, 기워 낸 것만 같은 등의 흉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작고 마른 등은 날개가 달리지 않았음에도 작은 새와도 같았다. 이어서 칼리번은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에레즈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이러면 그칠 줄 알았는데… 에레즈는 도리어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호수 위로 퍼지는 물방울의 파동처럼, 가슴 위로 퍼지는 낯선 감정.

“…….”

칼리번은 태어날 적부터 울지 않는 아이였다. 짐승의 피와 내장이 담긴 들통에 버려졌을 때도 그랬다. 피 냄새를 구별할 줄 알았던 양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대로 피로 이루어진 늪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칼리번은 굳이 달래지 않아도 되는 아이였고, 애초에 아이였던 기간도 극히 짧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유년기보다 더욱 길게 지켜본 것은, 알리샤의 어린 시절이었다. 양어머니는 아기였던 알리샤가 칭얼거리며 울 때면, 품에 안아 들어 젖을 물리곤 했다.

“왕자님.”

“…으, 응…?”

“…먹을 시간입니다.”

칼리번은 우는 아이를 달랠 말솜씨가 없었기에 대신 가슴을 내주었다.

“응….”

에레즈는 훌쩍거리며 그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울면서 무언가를 먹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칼리번은 어느덧 울음을 그친 에레즈의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 * *

불길이 타오른다. 사람들이 모여,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룬 모든 것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타오른다.

가축들이 울부짖었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마을을 지키던 수호목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부러지고 정오마다 시간을 알리던 종탑이 무너져 내렸다. 불타오르는 피처럼 불꽃이 모든 것을 태우고, 사람들의 피는 불꽃처럼 피어오르며 땅을 적셨다.

마물은 거대한 파도처럼 휩쓸었다. 우뚝 선 것은 모조리 쓸려 내려갔다. 사람들은 죽어 쓰러지거나, 끌려가거나, 몸을 낮춰 숨었다. 이것이 바로, 칼리번을 태어나게 한 불꽃이었다.

그러나 정작 칼리번은 5살이 될 때까지 이런 지옥을 겪지 못했다. 이제야 검은 눈동자에 똑똑이 새긴다. 자신은 이러한 폭력과 파괴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칼리번은 알리샤와 함께 숨어 있었다. 마물의 습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가까운 재앙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가족은 미리 약속을 해 두었다. 만약 마물이 들이닥치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창고 안에 마련해 둔 비밀 장소에서 만나기로.

칼리번은 기절한 알리샤를 비밀 공간에 숨겨 두고, 그 자신은 창고에 쌓아 둔 짚 안에 숨어 있었다.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그렇게 다른 가족이 돌아오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칼리번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아직 어렸고, 맨손이었다. 마물이 습격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알리샤와 들판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과연 마물 성체를 홀로 상대해서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칼!>

벌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멈추고 상대를 살피던 칼리번이 짚 더미 밖으로 뛰쳐나왔다. 푸줏간의 웰미턴 부인. 칼리번의 양어머니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포옹도 잠시였다. 양어머니는 칼리번을 떼어 냈다.

<시간이 없구나, 아버지가 잡혀갔단다.>

<나는 가야 해. 알리샤는 어디 있지? 너희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가 될 거야.>

양어머니의 손에는 짐승의 뼈와 살을 해체할 때 사용하는 도축용 칼이 있었다. 칼리번은 양어머니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위를.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밖은 위험해요. …제가 가겠습니다.>

마물 혼혈인 칼리번이 분노한 인간들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들 부부 덕분이었다. 드디어 그 빚을 갚을 때가 온 것이다.

<안 돼, 아가야. 넌 고작 5살이잖니.>

양어머니는 칼리번의 팔을 꽉 쥐며 말렸다.

<하지만, 전….>

태어난 지 고작 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겉모습은 열다섯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남들보다 훨씬 체격이 좋은 열다섯 살.

<알리샤를 부탁한다. 비록 태어난 햇수로 따지면 네가 동생이지만, 그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 잘 돌봐 주렴….>

양어머니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단호하게 돌아섰다. 알고 있었다. 양어머니도, 심지어 어린 칼리번도 양아버지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마물에게 끌려간 사내 중 살아서 돌아온 이는 여태껏 없었다. 둘 중 누가 간다고 한들 가망은….

웰미턴 부인은 웰미턴 씨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를 찾는 와중에 마물에게 살해당할 것이다. 양아버지는 결국 마물에게 끔찍하게 강간당하고 원치 않는 괴물을 낳다 죽게 될 것이다.

한 사람만 죽어서 끝날 일이 두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이다. 목숨을 위로로 삼아 무엇에 쓰겠는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저 비웃음을 살 개죽음이다.

그런데도 양어머니는….

<그렇다고 그이를, 그 무서운 곳에 혼자 둘 수는 없잖니.>

칼리번에게 걱정 말라며 웃어 보였다.

* * *

피만큼이나 뜨겁게 젖은 열기를 빼내고 또 빼내도, 몸 안에 갇힌 열병은 도무지 가시지 않는다. 칼리번은 어두운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는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대고 느슨히 앉아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바위에 가려져 일그러진 입구 너머는 막막한 어둠뿐이다. 벌써 며칠째 해가 뜨지 않는 밤이 지속되었다.

쿠궁, 쿵!

종종 땅이 울렸다. 불안전하게 막아 놓은 입구가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면 동굴 여기저기에 쌓인 갈린 돌가루와 돌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섯째 왕자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서, 손톱만 한 돌 조각 하나만 떨어져도 벌떡 몸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런 소동도 없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탄탄한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칼리번의 젖으로 목을 축인 에레즈의 숨결은 골랐다.

당장 며칠 간은 젖으로 어찌 저찌 연명하고 있었으나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칼리번이 보기에는 어려 보여도, 어찌 되었든 에레즈는 성년이었다.

‘과연 이 정도로 배가 부를까?’

칼리번은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왕자의 눈가를 가린 금빛 머리카락을 거두어 주었다.

“큭!”

그때였다. 칼리번은 갑작스러운 격통을 느끼곤 급히 에레즈에게서 손을 뗐다. 고통을 참기 위해 움켜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후, 으…. 하아……. 윽…!”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부릅떴다. 예고 없이 닥쳐온 고통을 중화시키기 위해 천천히 숨을 내쉬었으나, 어느덧 전신의 근육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칼리번은 자신으로 인해 혹여나 여섯째 왕자가 눈을 뜰까 걱정이 되었다. 마음이 약한 그는 당사자보다도 더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칼리번은 벌써 수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마물 혼혈에게 그 정도는 종종 있는 일이었으나 배설 활동의 징조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치지 않는 열에 시달리며 젖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제 칼리번은 일정 시간을 두고 반복되는 격통에 잠조차 제때 이룰 수 없었다. 아픔은 주로 내장이 담긴 아랫배에 집중되었다. 누군가 배에 손을 넣고 휘젓는 것만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다리 사이에서 미묘한 이물감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배변을 본 것으로 생각했으나 악취가 나지 않았다. 칼리번은 왕자가 잠든 사이 그곳에 손을 대 보았다.

피였다.

아니, 완전한 피라고 볼 수는 없었다. 피라고 하기에는 무언가가 섞인 옅은 색이었고, 오줌이라기에는 점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정액이라고 하기에는… 앞이 아닌 엉덩이 사이에서 자꾸만 새어 나왔다.

정체 모를 끈적한 액체는 항문과 회음부를 적셨다. 그 감촉이 불쾌했다. 칼리번은 옷을 전부 벗어 확실하게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여섯째 왕자가 한시도 그의 곁을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크, 윽…….”

칼에 베이는 것도, 불에 달궈지는 것도 아니다. 주먹이나 발로 얻어맞지도 않았고, 둔기나 돌이 몸에 박힌 것도 아니며, 마물에게 씹혀 먹히거나 발톱에 찔린 것도 아니다. 그저 왕자와 단둘이 숨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것일까….

내장이 갈려 나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눈가를 적셨다.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그는 긴장한 상태였다.

여섯째 왕자를 처음 본 칼리번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에 사로잡혔고, 자꾸만 낯선 고통과 맞닥뜨리게 된다. 아마도 그를 몰랐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감각들이었다.

“……흣, 흐으….”

칼리번은 숨을 얕게 뱉으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 와중에 젖이 차올랐는지 양 가슴이 지끈거렸다. 칼리번은 가슴을 크게 잡고는 짙은 피부 위로 붉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쥐었다. 막혀 있던 젖이 주룩 터져 나왔다. 에레즈가 먹지 않을 때는 이렇게 혼자 젖을 짜내곤 했다.

칼리번은 최대한 상체를 돌리고 젖을 짰다. 그사이 그를 괴롭히던 격통은 주기가 지났는지 점차 가라앉았다.

“으응….”

칼리번은 최대한 조심했으나, 어쩔 수 없이 한두 방울이 튀었는지, 아래에 있던 에레즈가 칭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반짝 눈을 떴다.

“…주무십시오, 왕자님.”

칼리번은 동굴 속 그림자에 얼굴을 가린 채로 말했다. 그러나 한번 잠이 깬 왕자는 칼리번의 무릎에서 머리를 들었다. 자유를 얻은 칼리번이 에레즈에게서 몸을 돌렸다.

“왜, 왜 그래…. 무… 무슨 일 이, 있어?”

에레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칼리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무엇을 숨길 수 있을까?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에게 제 모습을 보였다. 땀으로 엉킨 얼굴과 몸, 그리고 손자국이 붉게 남은 가슴을.

“앗……!”

에레즈는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칼리번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젖이 흘러내려, 배 위로 자리 잡은 근육까지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가슴이 뭉친 것 같아서 잠시 푸는 중이었습니다.”

“그, 그렇구나….”

다행히 눈에 훤히 보이는 젖 덕분에 칼리번은 변명거리를 지어낼 수 있었다. 에레즈는 순순히 납득했다. 대신….

“도, 도와…줄게!”

여섯째 왕자가 제안했다. 새하얀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진 채였다.

“벌써… 배가 고프신가요?”

“응? …으, 응….”

그렇다면야. 칼리번은 지친 상태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미하게 버리는 것보다 굶주린 왕자의 배를 채우는 편이 이득이었다. 칼리번은 바위에 등을 대고 몸을 편히 누웠다. 에레즈가 편히 젖을 물 수 있도록 다리를 벌리자, 그 틈으로 그가 들어왔다.

여섯째 왕자는 자리를 잡으며 칼리번의 무릎을 꼭 쥐었다. 그 손이 어딘지 뜨겁다고 생각했다. 칼리번의 상의는 언제나 젖을 먹일 수 있도록 벗겨져 있었다.

유두와 그 주변의 살은 붉게 부풀어 있었다. 젖을 물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다른 사내들과 다를 바 없는 둔탁하고 평범한 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핥아지고 빨리면서 예민해졌다. 평소에는 진작에 안쪽으로 들어갔을 유두도 두꺼워져서 유륜 사이에 걸렸다. 에레즈는 입술로 그곳을 가볍게 물었다.

“흣…….”

부드러운 입술이 유두를 잡고 오물거리는 감각에 칼리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입술에 물린 유두가 살짝 끌려 나왔다. 여섯째 왕자는 그 부위를 몇 번이나 혀로 핥아 끝을 세웠다.

전처럼 바로 젖을 물지 않았다. 대신 푸른 눈으로 툭 튀어나온 유두와 손자국이 남은 가슴 주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두 끝에서 젖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에레즈는 가슴에 코를 가까이 대고는 가만히 숨을 쉬었다.

배가 고프다면서 왜 빨리 젖을 빨지 않는 것일까? 칼리번은 의문을 품었다. 이름 모를 고통에 아랫배가 들쑤셔지는 와중에도 피부에 닿는 그의 숨결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괴로웠다.

“좋은 냄새….”

본의 아니게 칼리번을 간지럽히던 에레즈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 아……!”

속으로만 품어 온 생각이 입 밖으로 고스란히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에레즈는 화들짝 놀라 버렸다.

“…….”

칼리번은 두 눈을 껌벅거리며 에레즈를 바라만 보았다.

“아… 으…! 그, 그런, 게 아, 아니라……. 아, 아……. 그, 그런 의, 미로… 그, 그런 게, 아, 아니라….”

에레즈는 두 손과 얼굴을 동시에 흔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냄새?’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서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땀을 많이 흘리는 용병이었다.

“그, 그러니까…… 거, 거짓말을 하, 한 건, 아니고……. 배, 배가 안, 고픈 건, 아닌데…! 계, 계속… 구, 궁금했, 어서……. 자, 잠깐만…… 화, 확인, 하려고… 그, 그랬던 건데…….”

“…무엇을 말입니까?”

“내… 냄새…가 이, 익숙해서….”

어찌 된 것이 왕자의 변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수렁에 빠지는 것만 같다. 에레즈는 안 그래도 말주변이 좋지 못한데, 바짝 긴장하자 더욱 횡설수설했다.

“하, 항상… 너, 너한테서 나던, 햐, 향기가…… 이, 이것, 가, 같아서…….”

“제게 향기가 난단 말인가요?”

“아…! 으, 응…….”

칼리번이 말을 정리해 주자, 에레즈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 처음 마, 마… 만났을 때, 부터… 네, 네게…… 이런, 향기가 나, 났었어….”

“…….”

“나, 나는, 유, 유모가 없으니까, 무, 무슨 냄새인지는 모… 몰랐지만…. 조, 좋은…… 햐, 향기라고 새, 생각해서….”

“…….”

“미, 미안….”

칼리번은 부끄러워하는 왕자의 말을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코를 박았다. 킁킁거리자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그러고는 칼리번은 에레즈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피 냄새가 아니라요?”

“아, 아니…! 아, 아니야!”

여섯째 왕자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 너한테… 그, 그런 무, 무서운… 내, 냄새는, 아, 안 나……. 하, 하나도…!”

어째서인지 그렇게 말하며 에레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칼리번의 무릎에 얼굴을 묻어 자신을 숨겼다.

“…….”

칼리번은 에레즈의 후각을 의심했다. 탑에 갇혀 전쟁을 겪어 본 적 없다고는 하지만, 숲에 숨어든 이후 피 냄새는 질릴 만큼 맡았을 것이다. 칼리번은 항상 자신에게 피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탄생에서부터 피와 밀접한 연관이 있거니와, 실제로도 그는 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정말… 그렇습니까?”

칼리번은 중얼거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비록 잠시라고는 하나 몸 안의 고통을 잊게 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오메가에게도 특유의 냄새가 있다고 했다, 젠.>

<응.>

<그렇다면, 나에게서는 무슨 냄새가 나지?>

문득, 칼리번은 젠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음…. 어차피 묻어 버릴 건데 알아서 뭐 하게. 괜히 궁금해하지 마.>

그때, 젠은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했었다. 칼리번은 자신이 오메가여 봤자 당연히 피 냄새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여러 번 묻지 않았었다.

“…왕자님?”

죽은 동료를 떠올리니 저절로 표정이 무섭게 변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자,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기, 기다리고… 있었, 어.”

목덜미까지 빨개진 에레즈가 고개를 떨궜다.

“아….”

그의 대답에 칼리번은 본연의 임무를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식사 직전에 훼방을 놓아 버린 격이었다. 칼리번은 제대로 먹지 못하면 들개처럼 짖어 대는 부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몹쓸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칼리번은 한 손을 등 뒤로 돌리고, 그가 먹기 쉽도록 어깨를 벌려 가슴을 내밀었다. 흙처럼 짙은 색의 가슴과 배가 훤히 드러났다. 전에는 안에 숨어 있던 유두가 빼꼼히 머리를 빼고 나와 있어 눈에 띄었다.

“……미, 미안.”

에레즈는 입을 대기 전, 칼리번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사과했다. 칼리번은 떨리는 숨을 간신히 삼켰다. 피부색이 짙은 탓에 왕자가 젖을 물며 남긴 자잘한 상처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피부는 상당히 민감해졌다. 그 사실을 그가 몰랐으면 했다.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분명히 자책할 테니까.

“후… 하아…….”

여섯째 왕자는 익숙하게 칼리번의 젖을 빨았다. 칼리번은 깊이 숨을 내쉬며, 제 안에 고여 있던 젖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에레즈가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젖을 빨 때면, 칼리번은 이상하게도 심장 주변이 간지러웠다. 여섯째 왕자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취하거나 그의 위기에 놀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와 비슷했다. 젖이 흘러나오는 길이 심장과 연결된 것일까, 그의 입술이 닿지도 않는 그곳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아…윽, 하아….”

칼리번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한쪽 가슴이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자 입이 닿지 않는 반대편 가슴에서도 젖이 뚝뚝 흘러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칼리번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젖을 빠는 움직임에 맞춰 세게 눌렀다. 가슴 안에 뭉쳐 있던 젖이 주룩 흘러나왔다.

“…흐, 으….”

칼리번은 신음을 삼키며 그 손짓을 반복했다. 커다란 손등 위로 하얀 줄이 그어졌다. 유두 끝에서 흰 물줄기가 그려졌다. 그렇게 짜낸 젖은 허벅지뿐만 아니라 땅 위로도 떨어졌다.

“……내, 내가, 하… 할게.”

갑자기 칼리번의 젖은 손등 위로 하얀 손이 겹쳐졌다. 칼리번이 괴로워 보였는지, 여섯째 왕자가 고개를 든 것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흰 젖이 잔뜩 묻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 아!”

칼리번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괴로운 숨을 토해 냈다. 여섯째 왕자가 가슴을 꾹 누른 탓이었다. 칼리번이 직접 만졌을 때보다는 약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흐읏…….”

한쪽 가슴은 입으로 빨리고 다른 한쪽 가슴은 손으로 짜였다. 칼리번의 손이 할 일을 잃고 방황하다가, 자꾸만 신음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는 데 쓰였다.

마음이 약한 에레즈는 처음에는 세게 쥐지 못하고 유륜 주변을 꾹, 꾹 누르기만 했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져서, 젖으로 딱딱하게 채워진 칼리번의 가슴을 한 손 가득 쥐고 정성껏 짜냈다.

손가락 사이에 갇힌 유두에서 젖이 줄줄 흘렀다. 양 가슴을 골고루 자극하니 응어리가 풀어진 탓이었다. 같은 곳을 계속 물던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만 젖을 짜내던 반대편 가슴을 바라보다가, 욕심을 부려 그곳에도 입을 댔다.

“……아…. 큿…!”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가슴을 쥔 채로, 젖이 묻은 제 손가락과 칼리번의 유두를 동시에 핥았다.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와 강제로 고정되었던 유두가 피할 수도 없이 매끄러운 혀 위로 덧발라졌다.

“윽……!”

칼리번의 몸이 굳었다. 왕자는 칼리번의 가슴을 주물러 젖을 짜내고는, 흘러나오는 그것을 핥았다. 단순히 빨리는 것보다 훨씬 자극이 컸다. 그동안 따뜻한 입 안에 담겨 있던 다른 쪽 유두는 차가운 공기에 닿아 뻣뻣하게 세워졌다. 계속 빨리던 곳이 방치되자 어째서인지 아랫배가 조여졌다. 칼리번은 자신도 모르게 에레즈가 한 명이 더 생겨, 양쪽을 빨아 주기를 바라게 되어 버렸다.

“……!”

그것은 이전까지의 그였다면 결코 떠올릴 수 없는, 오메가의 소망이었다. 불쑥 솟아오른 욕망이 너무나 날 것이고 낯설어서, 지금의 칼리번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깨를 쥐었다. 그는 회색곰을 번쩍 뜰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물 혼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온몸에 힘이 빠져 연약한 왕자 하나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니, 그의 안에 존재하는 본성이 ‘밀어내지 말라’고 엇갈린 명령을 내리는 탓이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어깨를 살며시 쥐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마치 그를 응원하는 것처럼. 에레즈는 너무나 욕심이 많았다. 평소에는 한쪽만 먹어도 충분히 배를 채웠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왕자는 깨기 전에도 이미 충분한 양을 먹은 상태였다.

“……아….”

아니, 어쩌면 욕심이 많은 게 아니라…….

순간, 머릿속에 든 ‘어떤 생각’은 칼리번의 얼굴에 주먹질을 한 것처럼 강렬했다.

“왕자님…!”

칼리번은 급히 에레즈의 어깨를 잡고 떼어 냈다. 몸은 뒤로 밀려나도 그의 얼굴은 계속 가슴에 박혀 있었다. 칼리번이 진심으로 밀어내자, 그제야 간신히 떨어졌다.

“왜, 왜…? 하… 하아….”

여섯째 왕자는 빨개진 얼굴로 숨을 심하게 헐떡였다.

“진정…하십시오.”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 주며 말했다.

“나, 나……?”

여섯째 왕자는 멍한 표정으로 칼리번의 시중을 받았다. 푸른 눈동자가 칼리번의 가슴에 닿았다. 칼리번의 피부는 색이 짙어 어지간한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양쪽 가슴에 자리 잡은 유두는 유독 붉게 부풀어 있었다.

“…이, 이상하다……. 나, 왜, 왜 이렇게……. 그, 급하게……. 미, 미안…….”

에레즈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자기 자신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배가 고프셔서 그런 겁니다.”

칼리번은 제 가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착잡했다.

“배, 배……? 아, 아냐…. 나, 나, 마, 많이, 머, 먹었는데…….”

“젖으로 당장의 허기는 면할 수 있지만….”

칼리번은 어릴 적, 푸줏간에서 키우던 강아지들에게 먹이를 주곤 했다. 어미의 젖을 떼고 난 후에는 한동안 물에 불린 부드러운 음식을 먹였는데, 성장이 빠른 탓인지 접시에 얼굴을 박고는 쉬지 않고 먹어 치웠다. 뒷다리가 들릴 정도로 급하게 먹다가 나뒹굴기까지 했던 것이다. 턱에 젖이 고여 뚝 뚝 떨어질 정도로 급히 먹어 치우는 왕자의 모습이 꼭 그때의 강아지 같았다.

‘역시 부족한 건가….’

검은 눈동자가 입구 너머를 바라보았다. 몸 상태만 호전되었다면 진작에 밖으로 나가 보았을 텐데…. 몸이 나아지기는커녕 주기적으로 배 속이 뒤집히고 있었다.

“나, 나!”

에레즈가 급히 칼리번의 시선을 끌었다.

“나…… 계, 계속 이, 이렇게… 이, 있고 싶어!”

“…네?”

칼리번은 그를 응시했다.

“바, 밖은, 아, 안, 돼…. 나, 나가지 마….”

“…….”

“무, 무서워… 네, 네가 또… 다, 다치기라도, 하면 나, 나는….”

“왕자님….”

“나, 나랑…… 계, 계속… 여, 여기… 이, 있자…….”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당장은 칼리번의 젖으로 식량과 식수를 대신한다고 해도, 금세 바닥날 것이 자명했다. 칼리번과 같은 마물 혼혈에게도 한계는 존재한다. 결국 밖으로 나가기는 해야 한다.

그 사실을, 칼리번만큼이나 여섯째 왕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칼리번의 무릎을 쥔 에레즈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혀, 형님의 마, 말이 맞아. 나, 나 같은 건, 바, 밖에, 나, 나가면… 아, 아, 안 되는, 거였어….”

에레즈가 울먹거렸다.

“…왕자님.”

“나, 나한테는 여, 역시… 그, 그… 타… 탑이 어, 어울려. 나, 나 같은 건, 펴, 평생… 그곳에 있었다면, 조, 좋았을 텐데….”

그는 고개를 숙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바, 밖에 나, 나갈 기, 기회가…… 세, 세 번이나, 새, 생겨서… 기, 기뻤는데…. 그, 그건 해, 해… 행운이 아, 아니었, 어. 너, 너까지 말려들게 하고….”

“왕자님…”

두려움에서 시작된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에레즈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왕자님, 저는….”

무언가를 말하려던 칼리번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칼리번은, 싫지 않았다. 칼리번이 태어나 처음 품었던 기대는 식어 버렸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만…. 하지만, 몸서리치게 싫지는 않았다.

물론 이상과 달리 진짜 에레즈 프리드웬은 아주 형편없고 나약하고 눈물이 많은 겁쟁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새끼 짐승처럼 가여워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종일 울다가 어쩌다 한번 웃으면 잠결에 떠오를 정도로 그 모습이 선명했다. 거기다 예상외로 손재주도 있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하고…. 무엇보다 죽어 가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가진 물을 전부 써 버리지 않았던가. 물론 저 연약한 왕자가 딱히 도망칠 곳도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고작 자신은 괜찮다는 말이, 여섯째 왕자에게 어떤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바깥 생활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칼리번은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지금 상황이 평소와 달라서 그렇지, 왕자님께서 계셨던 탑보다는 밖이 나을 겁니다.”

“……화, 확, 확신하는, 거, 거야?”

“네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던 에레즈가 입을 오물거렸다.

“……어, 어째서, 인데?”

“네?”

“저, 적어도… 서, 성, 안, 에서는… 펴, 편하게, 이, 있을, 수… 있어. 이, 이런… 위, 위험은, 어, 없다고…….”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잖습니까.”

“그, 그래도…… 나, 남한테 피, 피해… 아, 안 끼칠, 수 있어….”

여섯째 왕자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이 칼리번에게는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왕자님께서는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없으십니까?”

칼리번의 질문에 왕자가 크게 눈을 떴다.

“……그, 그건, 왜……?”

“밖에서라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윽—!”

칼리번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격통에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카, 칼…!”

바닥에 얼굴을 처박기 전에, 에레즈가 칼리번의 몸을 안았다.

“허… 어어…….”

칼리번은 입을 벌렸으나 말소리를 내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아랫배에 손을 쑤셔 넣고는, 그 안에 자리 잡은 내장을 하나하나 으깨는 것만 같았다.

“어, 어디가…… 아, 아, 아픈 거야?”

칼리번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오히려 에레즈의 불안을 샀다. 에레즈는 칼리번을 제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눕게 했다. 칼리번의 시야가 깜박거렸다. 잠에서 깬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격통이 엄습하다니.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나, 나 때문에….”

“…….”

“내, 내가… 널, 머, 먹어서 그, 그런 거지…?”

에레즈가 울먹거렸다.

“미, 미안해….”

하얀 손이 칼리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손이 무기나 다를 바 없는 칼리번과는 달리,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아닙, 니다. 조금만 쉬면…. 곧….”

에레즈의 손길이 닿자 깃털만큼이나마 고통이 가시는 것 같다. 칼리번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배 속에 마물이 날뛰기라도 하는 것일까, 얌전히 있어야 할 내장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내장이 뒤틀릴 때마다 내장이 움푹, 움푹, 뱃가죽을 늘리며 위로 올라갈 것만 같았다.

“하, 하지만…. 조, 조금도, 나, 나아지지 않아…. 계, 계속… 아프기만, 하, 하잖아….”

면목이 없었다. 칼리번은 왕자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리고 약해 빠진 에레즈보다도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살면서 이토록 짐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칼리번은 빠르게 성장하여 어린 시절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용병대에서도 제 몫을 했다. 잔병치레를 치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럴 때 영문 모를 병을 앓다니….

“죄송합니다……. 윽…….”

칼리번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 그때도 마, 말했지, 미안하다고….”

에레즈가 힘겹게 말했다. 그때라 함은, 아마도, 거대한 바위로 간신히 입구를 막고 동굴 안까지 기어들어 왔을 때를 말하는 것이겠지.

“이, 이상해. 넌…… 나, 나한테 미, 미안할 게 아, 아무, 것도… 어, 없잖아….”

칼리번의 사과가 틀렸다는 듯 에레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 너는… 날, 위, 위해서, 저, 전부… 해, 해 줬, 는데, 도, 도리어… 나, 나는… 널, 속이고, 네, 네가 주는 것도… 제, 제대로 먹지 않고…. 화, 화도 냈고, 하, 하는 일 없이, 의, 의지하기만, 하, 하고….”

“……왕자님….”

“오, 오히려 사, 사과해야 할 사, 사람은 나…… 나인데….”

에레즈는 칼리번의 얼굴에 고이는 땀을 닦아 냈다. 칼리번은 더는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배가 찢어지는 것 같다며 비명을 지르고 나뒹굴었어도 모자랄 고통이다. 그것을 목 안으로 삼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내력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칼리번은 악을 쓰며 고통을 호소하는 대신, 마지막 힘을 짜내 에레즈의 손을 잡았다.

“아…….”

여섯째 왕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카, 칼….”

“쉬면…… 괜찮아, 지니까….”

“……흑….”

“괜찮, 습니다.”

“…….”

“다 괜찮….”

칼리번은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눈을 감았다. 기절하는 것인지, 단순히 잠이 드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지쳐 있었다.

“칼……?”

“…….”

“카, 칼….”

“…….”

“아, 아아……. 으…윽, 흑….”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에레즈는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나, 나 때문에…! 네, 네가… 주, 죽게 되, 면…….”

입을 꽉 다물었는지 발음이 불분명했다.

“그, 그런데… 나, 나는… 이, 이런 사, 상황에서도… 너,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하, 하나도 없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에레즈의 흐느낌만 들렸다.

“미, 미안해……. 미안, 미안해……. 내, 내가 도대체, 무, 무슨… 무, 무슨 짓을…….”

“…….”

“나, 나가면…… 너, 너 혼자만이라도, 나, 나갔으면, 이, 이렇게… 주, 죽지는 아, 않았을 텐데……. 내, 내가, 어, 어째서 마, 말린 거지……?”

“…….”

“……끄. 끝, 까지, 나, 나 때문에…….”

죽은 듯 잠든 칼리번의 얼굴을 위로 무언가가 뚝, 뚝 떨어졌다.

“…….”

칼리번은 그 액체가 무엇인지, 눈을 뜨고 확인하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나, 나는….”

“…….”

“…우, 우는 것조차, 내, 내가 부, 불쌍해서였어…….”

“…….”

“그, 그렇구나…. 나, 나는 저, 정말…….”

“…….”

“아……. 단…… 하, 한 번도…… 나, 남을 위해서…… 울어, 본 적이…….”

“…….”

“…없었구나.”

이제는 청각마저 서서히 닫혀 갔다.

“……서, 성녀님, 제, 제발……. 거, 거기 계신다면, 제, 제…… 소원을, 드, 들어주세요….”

천천히, 모든 감각이 세상과 멀어지는 내내….

“이, 이제 아, 알았어요…. 왜, 왜…. 제, 제 소원만…… 이, 이뤄 주지 아… 않으셨는지. 제, 제가… 이, 이기적이라서, 그, 그랬던 거죠? 차, 착한 일 하, 한 번 하, 한 적 없는데……. 저, 저 자신을, 위한, 소, 소원을 비, 빌어서…… 그, 그랬던 거죠?”

칼리번은 끝내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한줄기의 실에 얽혔다.

“다, 다시는, 그, 그러지 아, 않을게요…. 펴, 평생, 그, 그 타… 탑에서, 지, 지낼게요…. 사, 사람이 되게 해, 해 달라고……. 이, 이 사, 사람이 저, 저를, 아, 알아보게 해, 해 달라고, 하, 하지 않을, 게요….”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는 그를 어떻게든 끌어 올리려고….

“제, 제발…. 이, 이 사람을 살려, 주세요. 서, 성녀님……. 성녀님, 어, 언젠가, 태, 태어나셔서, 저, 저희를 구, 구원해 주신다는 성녀님…. 누, 누구라도……. 제, 제발….”

누군가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 살려만 주신다면… 괴, 괴물이, 되, 되어도, 사, 상관없어요….”

* * *

칼리번은 깊은 잠이 든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보호받았던 시절도, 5년이 고작이었다. 그 후로는 알리샤를 지켰고, 용병대에서 마물을 상대하며 뜬눈으로 지내 왔다.

그런 그에게도 한 번,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칼리번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 누운 채였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칼리번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와, 와……. 어, 엄청, 크, 크다아….>

곁에서 들려오는 작은 감탄사. 자그마한 손이 칼리번의 커다란 손을 조물조물 만졌다. 평소였다면 벌떡 몸을 일으켰을 칼리번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호수에 빠져든 것처럼 무거웠고 팔다리는 아래로만 가라앉았다.

<…내, 내가 좋아하는 과, 과실주인데….>

어린아이가 칼리번의 곁에서 중얼거렸다.

…알리샤?

칼리번은 잠결에도 누구인지를 헤아렸다. 마물 혼혈인 그는 태어나 버려졌을 때마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한번 기억한 일에 대해서는 잊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누이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 그는 어린 여동생을 꽃밭에서 놀게 두고, 커다란 나무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나 양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나, 나도오… 이, 일 년에, 따, 딱… 하, 한 번만, 머, 먹을 수 있는 건데…. 저, 정말… 귀, 귀한 건데….>

그렇다면 자신은, 어린 시절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트, 특별히… 주, 준 건데…! 자, 자 버리다니….>

따뜻한 숨결이 볼에 닿았다. 그러나 닿은 것은 숨결뿐만이 아니었다.

<다, 다시 마, 만나면… 이, 있잖아……. 나를….>

알리샤는 이런 낯간지러운 표현은 거의 하지 않는다.

<나를 보고….>

* * *

“흐음…….”

칼리번은 죽음처럼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거대한 바위로 어설프게 막힌 입구. 그 틈에서 흘러드는 빛이 그의 눈가를 자꾸만 간지럽힌 탓이었다.

“…….”

잠에서 깨고도 칼리번은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어붙은 호수에 던져졌다가 다시 주워 온 돌멩이가 된 기분이었다.

호수의 표면은 돌로 인해 깨졌지만, 다시 딱딱한 얼음으로 뒤덮인다. 돌은 꺼내 왔지만, 칼리번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호수 밑바닥에 두고 온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놓쳤다고 해서, 힘들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숙면을 취한 상태에 가까웠다. 이토록 편안하게, 오래도록 잠들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칼리번은 눈가로 쏟아지는 햇빛이 따가워서, 오른손으로 가렸다.

‘…오른손?’

칼리번은 검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얼굴을 가린 채로 오른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손이….’

재생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칼리번은 제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뜯겨 나갔던 오른팔이 손톱 하나까지 완벽하게 재생되었다. 부러졌던 척추도 엇나가는 일 없이 제대로 붙었고, 그 밖의 상처도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그리고 가슴은… 칼리번은 재생된 오른손으로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꽉 차올라 괴로웠을 정도로 흘러넘치던 젖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지금의 이 모습이 칼리번의 평소 상태였으나, 죽음이 목전에서 어른거렸던 탓일까? 몇 배는 더 가뿐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물 혼혈의 아무리 생명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팔이 하룻밤 만에 재생되고 상처가 흉터 하나 없이 낫지는 않는다.

‘하룻밤 만에 재생되지 않는다….’

칼리번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룻밤….’

설마 기절한 채로 며칠이나 흘렀단 말인가?

“왕자님?”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에레즈를 찾았다. 항상 곁에 찰싹 붙어 있던 왕자의 모습이 통 보이지 않았다. 있던 것이 없게 되자, 칼리번은 그답지 않게 예민해졌다.

“왕자님!”

칼리번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메아리로 퍼졌다. 동굴 벽에 부딪히고 또 부딪혀 돌아온 목소리는 칼리번 자신이 듣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절실했다.

‘밖으로 나갔을 리는 없는데, 설마….’

꽉 막힌 입구를 노려보던 칼리번의 머릿속으로 최악의 가정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왕자님께서, 굶어 죽…….

“카, 칼….”

동굴 안쪽에서 자그마한 대답이 들렸다.

“왕자님!”

칼리번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동굴 안의 어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굴 전체에 핀 야광 이끼도 하필이면 그곳에만 자라지 않아 어두침침했다. 칼리번은 안도하며 안쪽으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다, 다가오지, 마!”

그러자 안쪽에서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칼리번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뚝 그쳤다.

“오, 오면 안 돼…….”

종일 울기라도 한 것일까? 여섯째 왕자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쇳소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그건.”

“제가 두려우신가요?”

칼리번이 멀리서 물었다.

육체가 회복되는 과정, 특히나 팔이 재생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다소 징그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 모습을 전부 보았다면 심약한 왕자가 겁을 먹었을 법도 하다.

“아, 아냐…! 그, 그런 게 아니라…. 나…….”

“…왕자님?”

“흐, 흐윽…. 이, 이를 어쩌면, 조, 좋아…?”

에레즈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가엾고 서러운 울음소리가 동굴 이곳저곳에 부딪혀 칼리번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왕자님…?”

설마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왕자에게 끔찍한 짓을 벌였나? 아니면 용병대원들을 대하듯 욕설을 마구 내질렀나? 칼리번은 긴장했다.

“나, 나…….”

“…….”

“괴, 괴물이… 되, 되어 버렸, 나, 봐….”

한참을 울기만 하던 왕자는, 간신히 이유를 말했다.

“괴물… 말입니까?”

괴물이라니. 뜻밖의 대답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으, 응…. 모, 모르겠어……. 모, 몸이……가, 갑자기… 벼, 변해 버려서…….”

몸이… 변했다?

“어, 어쩌지…. 내, 내가 끄, 끔찍한, 괴, 괴물이… 되, 되어 버렸으면, 어, 어떡하지…. 너, 너를… 해, 해치게 되, 되어, 버릴지도…….”

검은 눈이 동굴 속 어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조금만 더 어둠에 익숙해지면 여섯째 왕자가 어떤 윤곽을 가졌는지 정도는 구분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 보고 상황을 판단한 후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왕자님.”

생각이 뇌를 거치지 않고 대답했다.

“무, 무슨 소리야…! 조, 조금도, 아, 아, 안, 괘, 괜찮아…. 나, 나 때문에, 네, 네가, 다, 다치게 되면….”

“저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뭐, 뭐…?”

“왕자님께서는 괴물이 되어도 연약하실 거라고.”

“아…….”

정말로 에레즈 프리드웬이 괴물이 되었다면, 기절한 자신부터 공격했을 것이다. 칼리번이 보아 온 마물은 피아 구별 없이 오직 본능만으로 움직이곤 했다. 원하는 것은 약탈하고 약하고 필요 없는 것은 죽였다.

“…그, 그치만… 내, 내 모습이, 이, 이상해, 졌으면, 어, 어떡하지…?”

“…….”

“거, 거울이, 어, 없어서… 화, 확인, 은 모, 못 해 봤는데에…. 이, 이상해… 마, 만져도 봤는, 데……. 어, 얼굴이, 벼, 변한 것, 가, 같아….”

“…….”

“모, 몸도….”

에레즈는 또다시 칼리번을 시험에 빠뜨렸다. 단박에 대답했던 칼리번 답지 않게, 이번에는 망설였다. 외모는 여섯째 왕자가 가진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무기였다. 칼리번만 해도 보석처럼 완벽하고 요정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겉모습마저 사라진다면… 남은 것은 그저 내면뿐이다. 쓸모없고, 겁 많고, 자괴감으로 가득 찬….

“어차피 여기에는 저희 둘밖에 없습니다.”

칼리번은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을 했다.

“내, 내 모습이, 이, 이상해져도… 너, 너한테는… 괘, 괜찮아?”

“…….”

“보, 보기 어, 어려울 마, 만큼… 지, 징그, 러워, 졌으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목소리는, 칼리번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비슷했다.

“…저는….”

그래서 칼리번은 불쾌해졌다. 어째서 여섯째 왕자는 그런 잔인한 질문을 굳이 하는 것일까? 어차피 왕자님에게 자신은 별다른 가치도 없을 텐데….

“내, 내가 추, 추한, 모, 모습이 되어도… 시, 싫어, 하, 하지 아, 않을 거야…?”

“…….”

“너, 너만은…… 나, 날 두고, 떠, 떠나지… 아, 않을, 거야…?”

에레즈는 간절히 물었다. 칼리번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저는 마물 혼혈로 이루어진 용병대의 대장입니다. 마물화 된 부하들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 왔습니다.”

“…….”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한테는… 조금도 상관없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에레즈를 달래기 위해 아무 말이나 꾸며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차라리 아무런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첨을 늘어놓는 성격은 아니었다. 말 한마디를 꺼내기가 심장을 토해 내는 것처럼 힘들기는 했지만, 진심이었다.

상관없다. 그의 외모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왜냐면….

더는 그에게 바라지 않으니까.

…칼리번은 그 한마디에 어째서인지,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몸속에 가라앉아 있던 무거운 돌을 뱉어 낸 것처럼. 호수 아래로 떨어졌던 그 돌은, 한때는 붉게 타오르는 숯이었다. 칼리번의 심장을 들뜨게 하고 온몸을 열기로 끓어오르게 했던 서툴고 낯선 감정이었다.

동경이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나니,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이끌렸던 모든 것들. 기적을 일으킨다는 황금 피에 대한 동경도, 왕족의 위엄도, 아름다운 외모조차도.

이제 남은 것은 그저 지켜 주겠다는 약속뿐. 이 연약하고 겁많은 왕자를 이 숲에서 데리고 나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고 싶은, 보호해 주고 싶은 의지뿐. 하지만 그것은 왕성 경비를 부탁받은 용병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한 계약이 되었어도 말이다.

“왕자님께서 괴물이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이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 드리고 원하시는 만큼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칼리번은 완벽하게 회복된 몸만큼이나 가슴 속도 개운해졌다.

“그, 그래도 무, 무서워….”

…약해 빠진 왕자 같으니.

“소, 손, 자, 잡아 줘….”

칼리번의 결단을 알 리 없는 에레즈는 철없이 부탁했다. 어려울 것 없었다. 칼리번은 재생된 손까지 더하여, 두 손을 어둠 속으로 제물처럼 바쳤다.

어둠 속에서, 긴 손가락이 거미처럼 칼리번의 손등을 더듬거리며 쓰다듬었다.

“…….”

분명 에레즈의 손가락일 텐데도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졌다. 칼리번은 그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여섯째 왕자가 마침내 칼리번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가까이 오자 살랑, 가볍게 바람이 불었다. 칼리번은 꽃밭이라도 온 것처럼 청량하고 달콤한 향기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 다 며칠이나 동굴 속에서 갇혀 있었다. 물이라고는 구경조차 못 했다. 그런데 악취는커녕, 땀 냄새도 나지 않는다니…. 후각이 이상해진 것이 아닌 이상에야.

“카, 칼….”

에레즈는 쇳소리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칼리번을 불렀다.

“왕자님…?”

칼리번은 코앞에 선 금발의 사내를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칼리번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여섯째 왕자는, 오랜 동굴 생활로 때가 묻어 더러워지고 꼬질꼬질했었다. 여기저기 가벼운 상처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갓 목욕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희고 깨끗했다.

그저 깨끗해진 것뿐이라면, 칼리번이 몸이 하룻밤 만에 나은 것처럼 괴상스러운 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몇몇 부분에서는 여전히 전과 같기도 했다. 반짝이는 금발이나 벌벌 떠는 태도 같은. 그런 부분이 없었다면,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키가 자랐다. 칼리번의 가슴 정도에 왔던 에레즈의 머리가 어느새 칼리번의 어깨를 불쑥 넘어 있었다. 착각이 아니다. 발목을 덮던 바지가 종아리 위로 올라와 있는 게 그 방증이었다. 몸에 딱 맞게 재단되었던 조끼와 겉옷은 더는 맞지 않았는지 흰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는데, 손등을 덮던 소매는 어정쩡한 길이가 되어 팔뚝까지 밀려났다. 셔츠와 바지의 옷의 품이 큰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 옷이… 가, 갑, 자기…… 찌, 찢어졌어…….”

칼리번이 말없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만 보자, 왕자가 이르듯 말했다. 홀로 겪은 일들이 서럽고 무서웠던 모양이다.

“…….”

그러나 칼리번은 멋대로 짧아져 버린 옷을 혼내 주지 못했다.

자란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원래 왕자의 머리카락은 이마와 뒷덜미를 덮는 정도의 평범한 길이였다. 그랬던 금발이, 발에 밟힐 정도로 길게 자라 있었다. 에레즈의 얼굴을 커튼처럼 덥수룩하게 가린 채였다.

칼리번은 다시 생겨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아직 재생된 몸에 적응되지 않았는지, 칼리번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이 머리카락 너머에 만약 모르는 얼굴이 있다면? 왕자의 말처럼, 괴물의 얼굴이 있다면?

“…이, 이상하지…?”

얼굴이 드러난 여섯째 왕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눈물로 윤을 낸 보석안은 푸른 빛을 냈고, 그 안에는 당황한 칼리번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여, 역시… 괴, 괴물이… 되, 된 거지?”

칼리번의 반응에 푸른 눈에 눈물이 다시 고였다. 왕자는 치렁치렁하게 자란 머리카락을 쥐어 보였다. 아이처럼 하얗고 가늘던 손도 전과는 달랐다.

“…왕자님.”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이 모습은, 괴물이 되었다기보다는….

“자라셨군요.”

갑자기 나이를 먹은 것에 가까웠다. 칼리번은 자신이 느낀 바를 순순히 말했다.

“……뭐, 뭐…?”

여섯째 왕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칼리번은 긴 머리카락을 정성껏 넘겨 주었다.

…괴물이 되지 않은 거야? 나 이상하지 않아? 에레즈는 연신 물어보았다. 칼리번은 그의 손가락이 열 개고, 발가락 역시 열 개이며, 눈, 코, 입이 있을 곳에 있고, 뿔이나 긴 송곳니가 자라지 않았음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그저, 조금 더 아름다워지고 어른스러워졌을 뿐….

“다, 다행이다……. 아….”

연신 의심하고 되묻던 에레즈는 한참 후에야 칼리번의 말을 믿었다.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던 왕자는 긴장감이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왕자님!”

칼리번은 단번에 그를 받아 주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품 안에 쏙 들어오지는 않았다. 칼리번은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가, 고개를 흔들어 그 감정을 지워 냈다.

“카, 칼…….”

갓 자라난 에레즈는 근육으로 꽉 짜인 팔에 걸쳐져 있었다. 그러나 푸른 보석안은 시종일관 칼리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 나… 배가 고파.”

에레즈는 그 말을 간신히 꺼내고는 어느새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배, 배가… 너, 너무… 고파.”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 * *

“안에 계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칼리번은 동굴 입구를 막은 바위에 양손을 올렸다. 하, 칼리번은 짧은 숨을 삼켰다. 바위와 맞닿은 손바닥에서부터 온 근육으로 힘이 실렸다. 그가 본격적으로 힘을 주자,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미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흐읍…. 하아!”

쿠웅, 거대한 바위가 동굴 밖으로 굴러나가자 땅이 크게 울리고 주변에 먼지가 너풀너풀 피어올랐다. 칼리번은 먼지를 들이 삼키며 동굴 밖으로 나섰다. 커튼처럼 늘어져 있던 넝쿨은 굴러나간 바위와 함께 뜯겨 나갔다.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텁텁했던 동굴 안 공기를 환기시켜 주었다. 햇빛 또한 쏟아졌다. 동굴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입구에 흰 그림자를 남겼다. 칼리번은 주변에 널브러진 바위 잔해를 발로 차거나 손으로 던져 내며 마무리 작업을 했다.

“음….”

칼리번은 오른팔을 가볍게 움직이며 몸 상태를 살폈다. 입구를 막았을 당시에는 팔 하나가 없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안간힘을 써서 간신히 바위를 움직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뿐했다.

‘몸이….’

회복되다 못해, 숲에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도 같았다.

“와, 와아…!”

칼리번 자신도 놀라워하던 그때,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위험하니 안에 계시라고 했는데….”

칼리번은 한숨을 내쉬며 에레즈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느새 칼리번의 근처에 있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불쑥 나온 두 손은 여전히 박수를 치는 중이었다.

“대, 대단해…!”

여섯째 왕자는 털북숭이 강아지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을 쥐고 있지 않으면 얼굴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되곤 했다. 꼭 지금처럼. 머리카락은 발에 밟힐 정도로 길어졌는데, 수염이 그만큼 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입구를 열었으니, 숲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칼리번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며칠이나 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마물이 소환되었을 것이다. 칼리번은 직접 숲으로 내려가 마물의 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식량도 조달할 계획이었다.

“아… 아, 안 가면 아, 안 돼…?”

여섯째 왕자가 칼리번의 팔을 움켜쥐었다. 핏줄이 불룩 올라선 팔뚝을 감싸 쥐는 하얀 손가락은 마치 은빛 쇠사슬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은신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지만, 그뿐이었다.

“너, 너 혼자…? 아, 안 돼…. 시… 싫, 어…. 나, 나도 같이 가…!”

에레즈는 두 손으로 칼리번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째서인지 그는 평소보다도 더욱 응석을 부렸다.

“안 됩니다. 왕자님께는 위험합니다.”

“그, 그건… 너, 너한, 테도 위, 위험, 하잖아…. 그, 그리고, 나, 나도 커, 커졌으니까, 가, 같이, 싸, 싸울 수 이, 있지… 아, 않을까…?”

에레즈는 칼리번의 팔을 흔들어 대며 말했다.

“…….”

확실히 여섯째 왕자는 자랐다. 그동안 소년의 모습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청년 정도의 키와 체격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보다 체격이 좋은 칼리번에게는 여전히 너무도 작고 연약해 보였다. 거기다….

“이 상태로는 금방 들킬 겁니다.”

칼리번의 시선이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에 닿았다. 길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왕자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황금이었다. 황금 실로 짜낸 비단 같다고나 할까….

“…….”

햇빛 아래에서 더욱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에 칼리번은 잠시 홀릴 정도였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어 잡념을 떨쳐 냈다. 하여간에, 절벽 아래로 내려가 회색곰과 함께 잃어버린 단검도 회수할 생각이었다. 아직도 칼의 형체로 남아 있다면.

“하, 하지만, 그건… 나, 나만, 그, 그런 게 아, 아냐….”

“네?”

칼리번은 하얀 손에 붙잡힌 제 팔을 보고만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카, 칼…. 너, 너, 지, 지금… 어, 엄청나게 냄새가 난단 말이야. 부, 분명 다, 다들 눈치챌 거야….”

여섯째 왕자가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

냄새, 냄새라….

“젖 냄새 말입니까?”

칼리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으, 응……. 응? 어, 어어……?!”

머리카락에 가려졌는데도, 숨겨진 얼굴이 새빨개진 것이 보였다.

“…어, 떻게, 그, 그런 말을 입에….”

여섯째 왕자가 용병의 천박한 언어 사용에 믿기지 않아 하는 사이, 칼리번은 팔에 얼굴을 묻고 몸 냄새를 맡았다. 냄새가 난다— 이전에도 왕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 더구나 더는 젖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오메가의 체취인 것일까?

“냄새를 숨기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냄새가 나든 말든, 숨기면 그만이었다. 칼리번은 담담히 말했다. 사실 왕자만 모를 뿐이지, 칼리번은 은신처를 나온 후에는 항상 짐승이나 마물의 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수, 숨기다니, 어떻…….”

끈질기게 매달리던 여섯째 왕자가 돌연 말을 그쳤다. 그의 배에서 꼬르륵, 굶주림의 신호가 온 탓이었다.

“…아 …아, 그….”

에레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배가 고플 때 나는 소리는 왕족이나 천민이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왕자님께서 드실 음식도 구해 오겠습니다.”

다만, 칼리번에게는 그 소리마저 작은 새소리처럼 들렸다.

“그, 그래도… 너, 너… 이, 이런 모, 모습, 으로는… 위, 위험해….”

그 말에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에레즈는 기본적으로 칼리번이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 이유는 쉬웠다. 왕자님은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섭고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아, 아아…! 왜, 왜 이러지…. 저, 전에는 아, 안 그랬는데… 지, 지금은… 네, 네가 나가는 게, 부, 불안해서…. 윽, 괴, 괴로워….”

여섯째 왕자는 벌벌 떨리는 손을 머리카락 사이로 넣고는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부, 분명… 저, 전이랑… 또, 똑같은데…. 이, 이상해……. 네, 네가… 아,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것 같아…. 너, 너무, 위, 위험해…. 거, 걱정돼…….”

여섯째 왕자는 뜻밖의 말을 했다.

“…네?”

칼리번은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젖을 먹이기 위해 벌려 놓았던 옷도 전부 추스른 상태였다. 옷이 찢어져 못 쓰게 되어 버린 것은 오히려 왕자였다.

“시력에 이상이 생기신 건가요.”

칼리번은 진심으로 걱정해서 물었다.

“…아, 아니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에레즈는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고는 제 두 눈을 마구 비벼 댔다. 갑작스럽게 성장을 하면 몸 일부가 따라오지 못해 덜그럭거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마물 혼혈은 성년이 되기까지 급하게 자라기 때문에, 칼리번도 뼈가 욱신거린다거나 양다리의 길이가 맞지 않는 등의 일을 겪어봤다.

“아마 배가 고프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아니라니까…!”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가락이라는 거대한 속박에 억눌려 있었다. 이대로는 여섯째 왕자가 팔에 매달려서 함께 절벽을 내려올 것 같았다. 그래서 칼리번은 이전에도 통했던 방법이 지금도 유용할지 시험해 보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예전에는 동그란 머리통이 한 번에 보였는데, 이제는 손이 훨씬 위로 올라가야 했다.

“…아, 앗! 하, 하지 마…!”

그러나 얌전히 손길을 받던 전과 달리, 에레즈는 급히 칼리번에게서 떨어졌다.

“그, 그렇게, 가, 갑자기… 마, 만지면, 아, 안 돼……!”

여섯째 왕자는 양팔로 제 몸을 끌어안으며 방어했다. 예전과는 달리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죄송합니다.”

어찌 되었건 상대는 왕족이었다. 이제는 어엿하게 자라셨으니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칼리번은 바로 사과했다.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아, 아…! …아, 아니…. 나, 나는… 그,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에레즈는 제 머리카락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화, 화낸 거 아, 아니야…. 그, 그저… 조, 조금, 노, 놀라서…….”

확실히 얼굴이 빨갛기는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왕자가 떨어졌으니 칼리번으로서는 목표를 이룬 셈이었다.

“카, 칼!”

칼리번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절벽 너머로 훌쩍 뛰어내리자, 뒤에서 가련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 위험해…! 위, 위험, 하단 마, 말이야!”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칼리번의 뒤로 애절한 외침이 내내 이어졌다.

* * *

토끼 통구이 두 마리와 물고기 두 마리, 나무 열매 여덟 개. 죽어 가는 숲에서 용케도 구해 왔다. 그리고 여섯째 왕자는 일용할 양식들을…… 한 끼 식사로 남김없이 먹어 치우고 있었다.

‘적어도 이틀 치라고 생각했는데….’

칼리번은 변화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섯째 왕자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식성까지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미, 미안…….”

정신없이 먹던 왕자가 우물거리며 사과했다. 한쪽 불이 불룩해진 채였다. 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워, 원래, 이, 이렇지 않은데… 배, 배가 너무 고파서… 겨, 견딜 수가 없어서….”

“괜찮습니다.”

“내, 내 모습… 보, 보기 휴, 흉하지….”

에레즈는 푸른 눈동자를 굴리며 칼리번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드시든 상관없습니다.”

“그, 그래도….”

“늘 말씀드리지만, 저희 둘뿐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먹는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거기다 그동안 겪은 일로 ‘아름다운 왕자님’에 대한 동경이나 환상은 모두 깨진 상태였다. 양손으로 음식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는 모습 정도는 딱히 흉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잘 먹는 모습이, 나무 열매 하나 두 개만 간신히 먹었던 예전보다 좋아 보였다.

“네, 네가, 보, 보기에는…?”

여섯째 왕자가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스르륵 내려와 얼굴을 가렸다.

“저야 당연히 괜찮습니다. 전부 왕자님 드시라고 가져온 겁니다.”

“지, 진짜…?”

에레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반동에 머리카락이 거둬지고 전보다 훨씬 반듯해진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네. 그러니 천천히 드십시오.”

사실 구운 토끼 두 마리 중 한 마리와 구운 물고기는 칼리번의 몫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여섯째 왕자는, 언제나 나무 열매 몇 개만으로 만족하는 소식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먹성이 좋은 데 전부 못 줄 것도 없었다.

“물도 챙겨 왔으니 다 드신 후 닦으면 됩니다.”

“으, 응, 응….”

여섯째 왕자는 자신의 모습이 추하다고 했지만, 칼리번이 보기에는 아직도 황금빛 귀가 아래로 늘어진, 작고 연약한 토끼 같았다. 육식 토끼….

칼리번은 가시가 목에 걸리지 않도록 물고기를 쥐고는 살과 내장을 발라 주었다. 생선을 먹는 방법을 모르는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방금 막 보았기 때문이었다.

“왕자님.”

흰 생선 살을 손바닥에 얹어 주려고 불렀다.

“응….”

에레즈는 고개를 들이밀고 입으로 날름 받아먹었다.

“…!”

칼리번의 눈동자가 순간 경련했다. 하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제 할 일을 이어 나갔다. 여섯째 왕자는 왕족다운 당당한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마구 떼를 쓴다든가,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받아먹는다든가….

그럴 때면 칼리번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다가 간신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바깥 상황이… 생각보다 좋습니다.”

칼리번은 열렬히 먹는 여섯째 왕자를 보며 말했다.

“으, 음…. 지, 진짜?”

“네. 숲에 가 보니 마물이 싹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 덕에 떠난 짐승들도 돌아오고 열매도 상하지 않았더군요.”

“다, 다해, 이다….”

에레즈는 입 안 가득 음식을 넣은 채로 어리숙하게 대답했다.

“듣기만 하셔도 됩니다.”

칼리번이 말하자, 먹느라 바쁜 에레즈는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처음에는 바깥이 마물로 득시글거릴 것이라 예상했다. 숲이 죽어 가고 있었고 최근에 검은 손자국까지 생겼으니까. 그러나 숲은 더없이 평범했고 마물은커녕 그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숲에 번식용 인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이곳은 다른 영지로 지나가는 통로 정도로 사용하는 데 그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칼리번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곧 숲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중을 기해야 했다. 칼리번은 며칠간 식량을 비축하고 숲 여기저기에 남은 마물의 흔적을 추적할 작정이었다. 마물이 떠난 방향을 파악한 후, 여섯째 왕자를 데리고 안전하게 피신할 것이다.

“응, 응….”

에레즈는 칼리번의 계획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칼리번의 몸도 회복되었고 여섯째 왕자도 전보다 자랐으니 성공 가능성도 컸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쓸 만한 무기가 없어 마물이 여럿일 때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과….

‘젠….’

죽은 것이 분명한 젠과 수도에서 여독을 풀던 용병대의 부하들의 행방 정도일까. 칼리번은 그 생각을 삼켜 뱃속 깊은 곳에 쑤셔 넣었다. 칼리번은 평생을 용병으로 살아왔다. 기사가 아닌 것이다. 생사불명의 동료를 찾겠다는 마음으로 적진 한복판에 기어들어 가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는 가만히 왕자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금장식처럼 반짝였다. 지금 그가 지켜야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에레즈의 머리카락에 손이 갔다. 왕자의 시선이 닿지 않는, 끄트머리를 손가락에 감았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의 가닥은 금실 같았고, 한 묶음을 쥐면 금줄이나 금목걸이 같았다.

“왕자님.”

“…응?”

“왕자님께서….”

오늘 칼리번은 숲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우선 절벽 아래로 떨어진 회색곰의 사체에서 단검을 회수했다. 칼날이 독에 부식된 상태였기 때문에 독기를 빼기 위해 약초로 묶어 두었다. 손잡이가 부러지고 칼날도 상했지만, 적어도 왕자님의 머리카락 정도는 잘라 줄 수 있을 것이다.

“저를 버리지 않고 지켜 주신 덕분에… 무사히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칼리번은 덤덤히 말했다. 그는 하룻밤 만에 팔이 재생되고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는, 믿기지 않는 경험을 했다. 거기다 여섯째 왕자는 갑자기 자라나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보아도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기적.

어쩌면 황금 피의 기적 아닐까? 에레즈 프리드웬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칼리번은 감히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여섯째 왕자는 기적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아, 아니야…!”

먹기만 하던 에레즈는 입 안의 음식을 꿀꺽 삼켰다.

“나, 나는, 아, 아무것도, 아, 아냐…. 네, 네가, 나, 날 지켜 줬어…. 저, 전부… 네, 네 덕분이라고, 새, 생각해…. 이, 이렇게, 커, 커 버린 것도…!”

식사를 마친 에레즈는 칼리번이 따라 주는 물로 손을 씻으면서도 당당히 말했다.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 그렇지 않아…! 그, 그게, 아, 아니었으면… 네, 네가 아니었으면, 나, 난 그때, 굶어 죽었을 거야….”

“…….”

“네, 네가… 나, 날… 살렸어….”

에레즈는 긴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넘겼다.

“나, 나야말로, 고, 고마워….”

머리카락에 반은 가려졌지만, 말간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고여 있었다.

“…….”

그 모습을 직격으로 마주한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야…!”

그와 동시에, 왕자의 고개가 옆으로 쭉 당겨졌다.

“왕자님!?”

칼리번은 갑자기 왕자에게 고통을 주는 무엄한 존재를 찾아 찢어발길 기세로 주변을 살폈다. 아마도 벌레가 아닐까 싶었는데….

“아아….”

여섯째 왕자의 푸른 시선은 금빛 머리카락이 감긴 칼리번의 손가락에 고정되었다.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당긴 것은… 다름 아닌 칼리번 자신이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얼른 손가락을 풀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오늘 아침,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던 에레즈의 모습이 떠올랐다.

“……흐, 흐응.”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뿐, 별다른 항의는 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갈대 같아서, 바위 같은 칼리번으로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 * *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칼리번은 식량 조달에 집중했다. 빠른 탈출을 위해서는 마물이 보이지 않는 지금 최대한 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사실 의외라고 하기에는 늘 그래 왔던 여섯째 왕자였다. 그는 언제나 칼리번의 발목을 잡았다. 동굴 밖을 나설 때마다 에레즈의 반대는 점점 거세어져 갔다. 칼리번은 몇 번이나 자신은 안전하다고 설명했지만, 그는 더욱 집착했고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시, 싫어…. 아, 아무 데도, 가, 가지 마…. 네, 네가 나, 나가지, 아, 않고… 여, 여기, 이, 있었으면, 조, 좋겠어. 제, 제발….>

하지만 칼리번이 밖에 나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여섯째 왕자를 먹이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납득 가능하고 타당한 이유를 말해 줘도 왕자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네, 네가 없으면, 괴, 괴로워……. 네, 네가 마, 만약에 또, 다, 다치기라도 하, 하면…. 그, 그런, 새, 생각에… 아, 아마… 무, 무서워서, 그, 그런 것, 가, 같아….>

여섯째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제 엄지손가락을 이로 깨물었다. 실제로 에레즈의 불안 증상은 전보다도 훨씬 심해졌다. 손가락에 잇자국이 붉게 나다 못해 피가 날 정도였다. 칼리번은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

<…나, 나갈 거면… 차, 차라리… 가, 같이, 나, 나가. 너, 너 혼자… 가, 가지 마….>

여섯째 왕자는 간절히 부탁했다. 밖에 마물이 없으니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가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것이 싫었다. 지금 칼리번에게는 제대로 된 칼 한 자루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바로 에레즈가 잠에서 깨기 전에 밖에 나가는 것이었다. 분명 화를 내겠지만, 전보다는 신뢰가 쌓였다고 믿었다.

믿었는데….

칼리번의 품 안에 잠든 여섯째 왕자를 간신히 떼어 내고 일어나려던 순간, 칼리번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다.

“…?!”

발목이 금빛 실에, 아니, 머리카락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으응…. 가, 가지 마….”

여섯째 왕자는 눈도 뜨지 못했으면서 잠결에 중얼거렸다.

‘…언제 이런 걸?’

칼리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감탄이 들었다. 짙은 피부 위로 감긴 머리카락이 유난히 반짝이고 도드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소한 공방전이 몇 차례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수색은 수월했다. 마물의 흔적은 대부분 수도를 향해 있었다. 일부는 남쪽은 향해 있었는데….

‘남쪽은 트리스트람 영지다.’

그곳은 왕비의 가문 소유였다. 더불어 첫째 왕자의 우방이기도 했다. 칼리번은 귀족 정치에는 어두운 편이었지만, 방어전에서 첫째 왕자의 기사단과 트리스트람 가문의 깃발이 함께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트리스트람 가문과 힘을 합치려는 것인가? 아니면….’

트리스트람 영지를 공격하려는 것인가? 마물의 발자취만으로는 복잡한 정세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알파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 그는 알파다. 그렇다면 왕비의 소생이 아닐 테니, 그들에 대한 존경이 있을 리가 없다.

‘왕비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대한 트리스트람 영지와 수도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사를 마친 칼리번은 평소처럼 절벽을 타고 동굴까지 올라갔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여섯째 왕자의 성화가 대단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노을이 지기 전에는 돌아가려 애썼다. 마물을 대검으로 짓뭉개고 다녔던 칼리번이었으나 정작 자그마한 왕자님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에레즈가 화를 내도, 울어도 괴로웠지만, 무엇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버거웠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조용히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에 어떨 때는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의 마음을 풀어 줄 화술이 칼리번에게는 전혀 없었다.

“…….”

동굴로 돌아온 칼리번은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동굴 안의 공기가 바뀐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변화는 그리 좋은 방향은 아닌 것 같았다.

“…왕자님.”

칼리번은 숲에서 구해 온 식량을 주변에 내려놓고 조용히 여섯째 왕자를 찾았다. 걸음은 안쪽으로, 더욱 안쪽으로 향했다. 적의 습격을 예상했으나 종종 발견되는 길고 긴 머리카락만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칼리번을 안심시켰고 의심 없이 안으로 이끌었다.

에레즈는 동굴 가장 깊은 곳에 몸을 웅크린 채였다. 그의 주변으로 긴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왕자님?”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칼리번은 조심스럽게 여섯째 왕자를 불렀다. 에레즈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무언가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얼굴을 묻고 있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칼리번의 겉옷이었다. 새벽에 떠나기 전, 긴 머리카락을 칭칭 두르고 잠든 그가 추워하는 것 같아 두고 나온 것인데….

“윽…?!”

그때였다. 칼리번의 몸이 갑자기 휘청였다. 양 발목에 무언가 실 같은 감기더니 그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쿵!

칼리번은 크고 작은 돌이 깔린 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그러고는 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실은 넝쿨처럼 타고 올라오더니 엄청난 힘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무, 무슨…. 큭…!”

속수무책이었다. 칼리번의 얼굴이 땅에 긁혀 붉은 생채기가 났다. 거대한 체격을 지닌 사내가 압도적인 힘에 어린아이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여섯째 왕자에게로….

칼리번은 손으로 땅을 긁어내리다 튀어나온 바위를 움켜잡았다. 손등 위로 핏줄이 굵게 올라섰다. 그러나 바위가 버티는 힘보다 칼리번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했는지 바위가 뿌리째 뽑혔다. 몇 번 더 같은 반항을 시도했으나 잠시 속도를 늦추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동굴 이곳저곳에 몸을 부딪쳐 시선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칼리번은 거미 마물이 다시 동굴을 차지했는지 살폈다. 물론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다리를 휘감은 그 실이, 거미줄이 아니라 누군가의 머리카락이라고는 끝내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실은 칼리번의 옷 위를 넝쿨처럼 칭칭 감으며 올라오고, 옷 안으로는 뱀처럼 기어들어 왔다.

“으으윽!”

마침내 그것은 칼리번의 양팔에 감겨들더니, 그의 두 팔을 등 뒤로 꺾어 버렸다. 동시에 칼리번의 몸이 뒤집혔다. 동굴 천장에는 반짝거리는 황금빛 실이 걸려 있었다. 그 실은 그의 얼굴과 목마저 칭칭 감았다.

양팔이 꺾인 채로 뒤로 당겨지자, 자연스레 칼리번의 상체가 활짝 벌어졌다. 만약 이 실뭉치가 마물이었다면, 그다음으로는 심장이 뽑혀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이는 금사는 오직 칼리번의 자유만을 빼앗을 뿐이었다.

칼리번은 실의 빛깔을 보고 싶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뒤틀었다. 힘으로 끊어 내 보려 했지만, 다소 늦은 대응이었다. 짙은 피부 위로 감겨든 실은 더욱 세게 파고들 뿐이었다. 마치 늪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감겨들어 육체를 구속했다.

순식간에 사지가 묶인 칼리번은 흡사 거미의 먹잇감과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몸 어느 곳도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칼리번이 더는 반항할 수 없게 되자, 그의 몸은 짐 덩어리처럼 동굴 안쪽으로 천천히 끌려갔다. 몸 곳곳이 가는 실에 짓눌리자, 피부 아래로 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어느새 칼리번이라는 거대한 짐은 여섯째 왕자가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는 여전히 버려진 아이처럼 칼리번이 남겨 둔 겉옷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쉴 뿐이었다.

“…왕자, 님.”

칼리번이 그를 부르자, 입술 위로 감겼던 실이, 아니… 머리카락이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금사 몇 가닥이 혀를 잘라 낼 듯 감았다.

“흐, 우윽….”

그 탓에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지만,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었다. 여섯째 왕자가 비로소 고개를 든 것이다. 성장하기 전보다 갸름해진 뺨과 턱, 더욱 우아하고 어른스러워진 이목구비. 동굴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잠든 모습과 별다른 바가 없다.

단 한 가지, 눈동자가 달랐다. 전과 같은 별빛이 더는 비치지 않았다. 먹구름에 가리어진 밤하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열에 덧씌워진 듯, 몽롱해진 눈빛은 인상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로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두 손으로 소중히 끌어안던 칼리번의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진짜가 여기 있으니, 더는 남겨진 향기로 외로움을 달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으, 읏….”

처연히 앉아 있는 에레즈의 모습은 마치 하얀 조각상처럼 고아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사정은 달랐다. 두 팔과 다리는 활시위가 매겨지듯 더욱 세게 당겨졌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오래전에 사지가 찢겨 나갔을 것이다. 오직 힘만으로 버티고 있는 칼리번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흡!”

그때, 칼리번의 몸이 꿈틀거렸다. 긴 손가락이 칼리번의 배에 닿은 탓이었다. 흰 손가락이 춤을 추듯 칼리번의 몸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배, 가슴, 쇄골, 목, 턱… 그리고 뺨으로.

땀으로 인해 피부가 식은 탓일까, 뺨에 닿는 손길이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의 체온이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용암처럼, 불꽃처럼 뜨거웠다. 그 연약한 몸이 타 버릴까 걱정될 정도로.

“흐으, 큭…!”

칼리번의 몸이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렸다. 에레즈의 손길이 그에게는 칼을 부식시키는 마물의 위액보다도 위협적인 독이었다. 부드러운 손길은 이를 악물며 금사를 밀어내는 몸을 누그러뜨리고, 녹여 버린다.

“흣…. 후우….”

칼리번은 힘겹게 여섯째 왕자를 마주 보았다. 긴 머리카락은 에레즈의 흰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울음도, 웃음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장 같은 얼굴. 그의 맨 얼굴은 칼리번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로 인해 칼리번은 평소 에레즈가 얼마나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눈썹 한 올, 속눈썹 한 가닥마저….

“…칼….”

넋을 놓고 있던 에레즈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려 칼리번을 끌어안았다. 소중한 것을 되돌려 받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에레즈가 칼리번에게 안기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얼추 칼리번을 품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읍…. 후, 흐으….”

정신, 차리십시오, 왕자님….

하고 외치고 싶었으나, 혀가 묶여 움직여지질 않았다. 일전에 에레즈는 자신이 괴물이라고 고백한 바가 있었다. 칼리번이 물가에서 우연히 보았던, 벗겨지지 않은 등 뒤의 허물은 그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동안 억눌러 왔던 육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라면?

하얀 얼굴은 얼음 조각처럼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으나, 감정을 담기지 않아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존재는… 죽여야만 한다. 칼리번이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분명 이전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실행했을 것이다.

<만약 칼리번, 네가… 여태껏 발현하지 않았을 뿐이고 뒤늦게 오메가가 된 것이라면?>

그러나 그 순간, 어떤 기억 하나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이 알파 이상의 괴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날의 기억이었다.

<오메가일 리가 없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한번 빌어 보라고! 그럼 내가 숨겨 줄지도 모르잖아?!>

그 당시에 칼리번은 자신이 오메가라면, 젠의 손에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이제야 떠오르는 것일까? 그 기억이 칼리번의 모자란 감정을 대신해, 에레즈를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라도 되어 주는 것처럼….

“…….”

칼리번이 망설이는 사이, 가슴과 가슴이 닿고, 배와 배가 닿았다. 그간 칼리번이 어린 에레즈를 지키기 위해 안거나 업은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안겨 본 적은 없었다. 맞닿은 에레즈의 몸이 몹시도 뜨거웠다. 칼리번은 이전의 그는 완전히 녹아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싶었다.

체격이 훌쩍 큰 사내끼리 몸을 맞대고 있는 상황은…. 칼리번의 몇 안 되는 기억으로는, 상대의 목을 부러뜨리기 위해 매달릴 때를 제외하고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선공을 해야 유리하다. 하지만… 상대는 마물이 아니라 에레즈 프리드웬이었다.

“하, 하아…….”

칼리번은 연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 탓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 사이 에레즈는 칼리번의 목에 얼굴을 묻고는 뺨과 이마를 문질렀다. 꼭 강아지나 고양이가 제 체취를 묻히려는 행동 같았다.

“……?”

칼리번은 영문을 몰라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목덜미에 부드러운 살이, 입술이 닿았다. 아무리 칼리번일지라도 그 감촉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입술은 천천히 그의 몸을 만졌다. 평소에는 그 존재를 잊는 귓불까지도, 입술과 숨결이 살며시 어루만졌다.

“와, 왕자님….”

역시 갑작스러운 성장으로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아니면 무언가… 무언가에, 조종을 당하고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흣….”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팔다리는 물론이고 몸통마저 두 팔에 감겨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맞닿은 몸에 자극을 줄 뿐이었다. 에레즈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칼리번의 몸 위에 제 흔적을 남겼다.

“…하아….”

칼리번은 눈앞이 핑 돌았다. 에레즈의 입술이고 피부고 머리카락이고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특유의 체취가 났다. 평소에는 바람결처럼 청량하다 생각했던 그의 향기가 이제는…. 온몸을 꽁꽁 감싸 매는 천이나 끈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는 자신을 전부 덮어 버려, 끝내는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

열 개의 손가락이 칼리번의 뺨을 감쌌다. 숨을 쉬면 서로의 입술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토록 가까이서 마주 본 적은 처음이라, 칼리번은 감히 숨을 내쉴 수조차 없었다.

“가지 마.”

에레즈가 속삭였다. 숨소리나 다름없는 작은 소리여서,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눈을 떴다.

“…아무 데도, 가지 마.”

그는 평소와 달랐다. 어두운 눈빛도, 더듬지 않는 목소리도….

“흐, 왕자님…. 그건…!”

칼리번은 대답하려고 했다. 그를 떠난 것이 아니며 함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나 혀가 움직이지 못했다.

“…헉!”

칼리번의 입에서는 대신 거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한쪽 다리가 유독 세게 당겨졌다. 그러더니 칼리번의 무릎 아래가 바깥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다리를 꺾으려는 힘에 근육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으, 크, 으윽…!”

칼리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릎뼈가 한계 이상으로 틀어졌다. 사람이 유연하게 틀 수 있는 정도에서 벗어나, 인간의 한계로는 벌어질 수 없는 방향으로 비틀렸다.

“우, 윽!”

으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칼리번의 입에서 고통이 응축된 신음이 흘렀다. 만약 혀가 붙잡히지 않았다면, 칼리번은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종아리가 꺾여서는 안 되는 바깥쪽으로 반 바퀴 돌려졌다.

“욱, 으윽—!”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은 발목이었다. 다시 한번, 몸 안에서 뼈가 부서졌다. 발목이 빙글 돌았다. 칼리번의 다리를 아작 낸 금사가 잠시 풀어졌다. 다리가 칼리번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덜렁거린다. 속박이 풀린다고 해도 왼쪽 다리는 더는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반항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금사는 다리를 감아 바로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고통까지 갈무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흐, 흐으, 크, 윽…!”

칼리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통하지 않고, 감긴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진동할 뿐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에레즈는 비명을 삼키며 진땀을 흘리는 칼리번의 뺨과 목덜미에 열렬히 입을 맞췄다. 꼬리를 잘라 낸 개를 칭찬하는 주인처럼, 칼리번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칼리번에게서 땀과 열기를 훔치고, 그 몸을 제 향기로 가렸다.

“으……. 흐으…….”

칼리번의 두 다리가 허벅지와 함께 묶여 반으로 접히고, 왕자를 향해 멋대로 벌어졌다. 어떤 행동에도 그의 의지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왕자는 하반신을 맞대고는 칼리번의 몸을 제 몸으로 덮었다.

“흐, 흐읏…. 후, 으….”

칼리번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두 눈을 깜박였다. 무릎뼈가 부서지고 발목뼈가 으스러진 고통으로 인해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아무리 고통에 익숙하다고는 둔감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에레즈는 고통에 씩씩거리는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니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가는 머리카락이 그의 옷깃을 풀어 헤쳤다. 드러난 가슴 위로도 마찬가지로 입술이 닿았다.

“읍…! 흐읏….”

칼리번의 몸이 움찔 떨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이를 드러내지 않고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칼리번의 가슴을 실없이 깨물었다. 몇 번이나 헤매던 입술은 더는 젖이 나오지 않는 유륜을 가득 물었다.

“—!”

칼리번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는 빈 젖을 버릇처럼 빨았다. 유륜 주변의 살이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매끄러운 혀가 움푹 들어간 유륜의 안쪽을 핥았다. 그럴 때마다 바늘로 찌른 것처럼 짧고 예리한 자극이 아랫배에 콕, 콕 박혀 들었다.

“흐, 하아…….”

칼리번은 괴로운 숨을 내쉬며 두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가슴을 빨리는 행위는 이상할 따름이었다. 옅은 피부에 닿는 입술이, 혀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혀가 닿는 그곳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과 정체 모를 자극을 간신히 참아 냈다. 꽁꽁 싸매어진 머리카락에서 풀려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뽑아낼 수는 있었다. 아니면 에레즈가 입을 맞추려 들 때 코를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작은 틈을 얻어 낸다면, 칼리번은 설령 맨손이라 할지라도 여섯째 왕자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가슴을 무는 왕자는 체격은 자랐지만, 여전히 아이 같았다. 칼리번은 동굴 안에서 속절없이 끌려들어 가는 시점부터 그러했다. 온몸을 속박하고 제약하는 에레즈의 일부를 과감히 뜯어 버리거나 자르지 못했다.

만약 이 머리카락이 여섯째 왕자의 신경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칼리번의 몸은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뽑히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재생된다. 하지만 에레즈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는 너무 작고 약하다. 아무리 어린애가 때린다고 한들 어른이 똑같이 때릴 수 없는 것처럼, 어쩔 수가 없다.

멀쩡한 다리 쪽으로 꽉 조이는 통증이 밀려왔다. 이러다가는 부러진 다리처럼 남은 다리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칼리번의 반대로 몸에 힘을 풀렸다. 포기한 것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섯째 왕자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반항하기를.

아예 잘리는 것보다는 뼈가 부서지는 편이 회복이 빠르다. 칼리번은 두 눈을 감았다. 원하는 만큼 몸을 부러뜨리고 나면, 여섯째 왕자는 예전으로 돌아오게 될까? 그렇게만 된다면, 칼리번으로서는 남는 장사였다.

“……흐, 으음…?”

그때, 칼리번의 혀를 감싸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남은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 조여들던 고통도 순식간에 멎었다. 칼리번의 몸에서 금사가 풀려 나갔다.

“왕자님…?”

압박이 풀리자, 피가 온몸을 부지런히 돌며 부러진 고통을 함께 날랐다. 그러나 칼리번은 제 몸을 돌보기 전에 여섯째 왕자를 찾았다.

“아, 아……!”

에레즈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벌벌 떨었다. 창백해진 얼굴은 얼음장 같았고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웠던 푸른 두 눈에는 다시 빛이 돌았으나, 그만치 혼란으로 가득 찬 채였다.

“이, 일, 일부러, 그, 그런 게….”

“압니다.”

“나, 나, 나는……!”

“괜찮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왕자가 변해 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다. 그러니 심각하게 따질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걸로 된 거다.

그러나 여섯째 왕자에게는 조금도 해결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왕자님!”

칼리번의 검은 눈이 크게 뜨이고,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칼리번의 몸에서 빠져나간 머리카락이, 어느샌가 왕자의 목에 감겨 있었다.

“…내, 내가… 도, 도대체…… 무, 무슨 짓을…”

“왕자님, 진정하시고….”

“미, 미아… 미, 미안, 해…. 나, 난……그, 그저….”

울먹이며 사과하던 에레즈의 목소리가 뚝 끊겨 버렸다. 금빛 머리카락은 죄인을 목을 매는 굵은 밧줄처럼 바뀌어 에레즈의 목을 거세게 조였다.

“왕자님, 안 됩니다!”

당황한 칼리번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억지로 목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왕자님! 왕자님! 젠장, 힘을 푸세요!”

칼리번은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자기 자신이 속박당했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놀라운 힘이 칼리번의 양손에 응집되었다. 목을 조이는 머리카락을 억지로 벌려 내자, 또 다른 머리카락이 에레즈의 목을 새로이 휘감았다.

“으, 으윽…. 자, 자, 잘못, 잘못, 했….”

에레즈는 고개를 저으며 사과했다.

“왕자님!”

칼리번은 생각이란 것을 할 틈이 없었다.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로 뜯어냈다. 투두둑, 금빛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두 손 사이에서 뜯어져 내렸다. 금사 위로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마찰하자, 칼리번의 손바닥에 피가 고였다.

“왕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아, 으…….”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잠시…. 잠시, 헷갈리신 것뿐입니다!”

“나, 나는…. 흐, 흐윽….”

“정신 차려!”

칼리번이 외쳤지만, 에레즈의 귓가에는 의미 없는 울림일 뿐이었다. 창백한 흰 얼굴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칼리번은 눈동자를 굴려 뒤를 보았다. 금사가 뱀의 꼬리처럼 흔들거리며 일어서더니, 화살촉처럼 변해 에레즈 자신을 겨누기 시작했다.

“크윽—!”

정확히 왕자의 어깨로 향하는 금빛 화살을, 칼리번은 맨손으로 막았다. 이미 피로 얼룩인 칼리번의 손등을 꿰뚫었다.

‘씨발, 고작해야 머리카락일 뿐인데…. 어째서!’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화살은 한 발로 끝나지 않았다. 여섯째 왕자의 죄를 추궁하겠다는 듯이, 연이어 쏟아져 내렸다.

“왕자님!”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에레즈를 세게 끌어안았다. 곧이어 날카로운 금사가 칼리번의 등을 파고들었다. 실처럼 가벼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강도는 뾰족하게 벼려진 칼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흐, 크으윽…!”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등이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그러나 칼리번은 안도했다. 다행히도 화살이 제 몸을 뚫고, 에레즈한테까지 박히지는 않은 것이다. 급한 나머지 일단 왕자를 품에 숨겼으나, 자칫 잘못했으면 함께 꿰뚫릴 뻔했다.

“카, 카, 칼…? 카, 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레즈의 두 손이 칼리번의 등 위를 허우적거렸다.

“모, 모, 모… 몸이…. 아, 아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가 또다시 자해할까 두려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 나, 나… 때문에, 내, 내가…! 아, 아냐, 내, 내가… 내가 그런 게, 이, 이러려던 게 아, 아니었는데……. 아, 흐, 흐윽…….”

칼리번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으로 혼란에 빠진 여섯째 왕자의 뒤통수를 감쌌다. 그러고는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겼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 칼리번의 어깨에 묻혔다. 더듬거리는 그의 외침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진정…하십시오, 왕자님. 당황할수록… 더욱 제멋대로 굴 겁니다.”

칼리번은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는 동그란 뒤통수를 연신 쓰다듬었다. 이 오른손은, 그가 재생시켜 준 손이었다. 칼리번이 흘린 피가 여섯째 왕자의 몸과 머리카락에 흠뻑 스며들었다.

“……흐, 흐윽…. 미, 미안해…. 미안해….”

“…….”

“내, 내 잘, 못이야…. 나, 나 때문에……. 흑, 흐읍…….”

칼날처럼 변해 버린 제 머리카락을 뽑아내지도 못하고, 다루지도 못하던 에레즈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칼리번의 피로 뒤덮여도, 눈물로 그 피를 씻어 내도, 에레즈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이러다 품 안에서 녹아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칼리번은 그가 진정될 때까지 그 상태로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에레즈의 울음은 누그러졌다. 대신 그의 눈물로 어깨 한쪽이 흠뻑 젖었다. 에레즈의 눈물에 녹아 버린 것일까? 칼날이나 화살촉처럼 부러지지 않고 딱딱하던 머리카락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흐물흐물하게 늘어졌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 안에 박힌 머리카락을 일일이 뽑아냈다.

“윽…!”

가는 실뭉치가 몸 안의 핏줄과 섞여 있다가 쑥 뽑혀 나가는 감각에 치가 떨렸다. 금빛 머리카락은 피로 푹 젖어 붉게 변해 있었다. 모든 처리를 끝냈을 때, 칼리번의 얼굴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었다.

“…….”

칼리번의 몸에 박혀 있던 머리카락은 주인에게로 스르르 돌아갔다. 칼리번이 고개를 드니, 에레즈는 몸을 웅크린 채로 머리카락으로 자기 자신을 둘둘 감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고치 같았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가 질식할까 우려되어 몸에 감긴 머리카락을 풀어 주었다. 칼리번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자해를 하려던 그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금사는 힘없이 벗겨져 내렸다.

“흐, 흑, 흐윽…….”

금사를 전부 거두고 나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에레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왕자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을, 칼리번은 어디선가 본듯했다. 물론 숲에 떨어진 이후 그렇게 우는 광경을 종종 보아 왔기는 했지만, 그 전보다도 전에….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희미한 기억을 헤아리는 것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칼리번은 너덜너덜해진 상의를 벗었다.

“저를 보십시오, 왕자님.”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제 가슴에 올렸다.

“흐, 흐윽…!”

에레즈는 울음을 꿀꺽 삼켰다. 칼리번의 몸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뚫리고 피가 고여 있었다.

“저는 마물 혼혈입니다. 팔이 잘렸을 때는 독 때문에 회복이 더뎠을 뿐이고…. 다시 나을 겁니다.”

칼리번은 벗은 옷으로 일부러 피를 닦아 냈다. 그러자 상처가 더욱 자세히 보였다. 구멍이 뚫려 구멍 너머가 훤히 보이던 살이 서서히 메꿔지고 있었다.

“미, 미안해….”

“…왕자님?”

“나, 나 때문에 이, 이렇게 다, 다치다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별것 아닌 상처임을 보여 주면,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레즈의 두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네, 네가, 호, 혼자, 나, 나가는 게, 시, 싫었어….”

에레즈는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다.

“저, 전보다 더… 이, 이상하게, 괴, 괴롭고… 스, 슬프고…… 자, 자꾸만 모, 몸이 아, 아파져서….”

“…….”

“하, 하지만, 네, 네가 다, 다치길 원한 건, 겨, 결코 아닌데…. 어, 어째서 이렇게….”

칼리번은 요 며칠간 제게 강박적으로 매달리던 에레즈의 모습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서였다면, 최근에는 자신이 나가는 것 자체를 질색했던 기억이 났다. 칼리번은 그 둘이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의 판단은 틀렸다.

“…마, 말도, 안, 돼……. 제, 제발, 너, 너를 사, 살려 달라고 그렇게 가, 간절히…… 서, 성녀님께 기도했는데……. 다, 다름 아닌, 내, 내 손으로… 너를…….”

에레즈는 칼리번의 상처를 보고 더는 견딜 수가 없는지 고개를 땅에 박았다.

“…나, 나는, 역시, 괴, 괴물이야….”

훌쩍이는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혀, 형님의 마, 말이 맞아……. 나, 나는… 끄, 끔찍한 괴, 괴물인 게, 트, 틀림없어…. 네, 네가 나, 나한테 어, 얼마나 자, 잘해 줬는데……. 나, 나는, 고, 고작, 네, 네가 나, 나가는 게, 시, 싫어서, 네, 다리를……. 그, 그런 짓을….”

아무래도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을 꿰뚫은 것뿐만 아니라 그전의 일, 다리를 부러뜨린 것마저 전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와 같은 마물 혼혈 중에는 불안정한 개체도 종종 있습니다. 왕자님께서 최근에 급하게 성장을 하셔서 그런 겁니다.”

칼리번의 말을 듣고도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깊은 절망의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카, 칼….”

“네.”

“너, 너는… 내, 내가 괴, 괴물이 되어도… 야, 약할 거라고 했지….”

여섯째 왕자가 물었다.

“…네.”

칼리번은 대답했다.

“하, 하지만, 그, 그렇, 지 아, 않잖아…….”

에레즈의 머리카락이 다시 감기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억지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으나 전부를 두 손에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 나는 괴, 괴물이 되, 될 운명인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혀, 형님, 같은 위, 위대한 분이… 자, 잘못 파, 판단할 리가 어, 없어…. 마, 맞아…!”

“아닙니다.”

“나, 나 같은 건… 여, 역시, 그, 그 탑에, 여, 영원히 이, 있었어야 해, 했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칼리번은 더욱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의 변명이 어째서인지 화가 나고 거슬렸다.

“다, 다쳤잖아!”

“……!”

“네, 네가… 다, 다쳤어!”

에레즈는 참지 못하고 칼리번에게 울컥 화를 냈다.

“나, 나는…… 가, 가장 먼저, 다, 다른 사람도 아, 아닌, 마, 마물도, 아, 아닌…… 너, 너를! 너를, 다, 다치게 했다고!”

그러나 실상은, 자기 자신에게 주먹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너, 너는, 너는… 나, 나한테……!”

에레즈는 큰소리로 외쳤다.

“나, 나한, 테, 유, 유일한……!”

그 모습은 칼리번을 탓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흐윽…….”

격렬하게 화를 내더니,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눈물이 에레즈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 만일 내가, 또, 또다시… 너, 널 다치게 한다면……. 나는….”

“…….”

“나, 나는….”

에레즈는 고개를 홱 돌렸다. 머리카락이 그의 목을 감쌌다. 금빛 머리카락은 그의 자책감과도 닮아있었다. 아무리 떼어 내려고 애를 써도, 자꾸만 뱀처럼 기어오르고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왕자는 제 눈물을 칼리번에게 보이기 싫어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눈물을 계속해서 흘렀고 그의 얼굴은 이곳저곳에 피가 묻었다. 연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보기 흉하게 되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눈물을 닦는 일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얼간이었다.

그 사실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여섯째 왕자는 자기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워져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통곡했다. 손바닥 안으로 울음이 잔뜩 고였다.

기껏 자랐는데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신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으니까….

데뷔탕트 전의 여섯째 왕자를 본 적은 없었지만, 칼리번은 그가 평생을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차갑고 외로운 탑 안에서도 이렇게 웅크리고 울었을 것이다. 그 누구하고도 교류하지 못하고, 부딪쳐 보지도 못한 채.

그러니 감정은 내부로 고이기만 하고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 거겠지.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처럼 힘든 전투를 겪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번처럼 가족과 동료를 가져 본 적도, 잃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

칼리번은 두 팔로 기어가 금빛 머리카락 속에 꽁꽁 갇힌 여섯째 왕자를 통째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양어머니를 떠올렸다.

칼리번은 너무 일찍 자랐다. 태어난 지 고작 삼, 사 년 만에 길러 준 빚을 갚을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양어머니는 알리샤를 대하듯 가끔 칼리번을 품에 안고는 자장가를 불러 주고 달래 주었다.

칼리번은 자신처럼 커다란 사내가 작고 마른 양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커다란 송아지나 개처럼 그녀가 놓아줄 때까지 안겨 있었다.

칼리번은 그가 받았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방패와도 같았던 머리카락이 흐물흐물해지고, 일부는 피가 흐르는 칼리번의 상처 위로 감겼다.

“…….”

칼리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픈 곳을 건드리니 당연히 상처를 헤집으리라 생각했다. 여섯째 왕자가 혹여 다시 이성을 잃은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금빛 머리카락은 상처 위로 단단하게 감겨, 피를 지혈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덜렁거리는 칼리번의 다리도 지지대처럼 단단하게 받쳐 주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여섯째 왕자는, 말없이 칼리번의 품에 안겼다.

* * *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며칠 내로 준비를 마치고 숲을 나오겠다는 칼리번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제 몸이 재생된 것도, 왕자님이 성장하신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이참에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를 하도록 하죠.”

그러나 칼리번은 실망하지 않았다. 굳이 부상을 감수해 가며 모험할 필요는 없었다.

“으, 응….”

여섯째 왕자는 시무룩해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다른 방식으로 칼리번에게 사과하려 했다. 그것은 일전에도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 방식이기도 했다. 바로, 칼리번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이었다.

에레즈의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몸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이 ‘금사’는 칼리번의 한쪽 다리를 으스러뜨리고 왼쪽 손바닥을 포함한 몸에 여섯 개의 구멍을 뚫기는 했지만, 동시에 유용한 붕대이자 지지대이기도 했다.

“…….”

칼리번은 붕대를 새로 감듯 머리카락이 몸에 감겨드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금빛 머리카락은 깨끗하다 못해 윤기가 돌았다. 피가 묻어 굳거나 더러워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부 흡수하는 모양이었다.

“음?”

금사가 평소와 달리 배와 가슴에도 감겼다. 칼리번은 이번에도 왕자가 이성을 잃은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건.”

완성된 모습에, 칼리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 옷… 마, 만들어, 봐, 봤어….”

“…….”

“추, 추워, 보, 보여서…….”

에레즈는 수줍게 말했다.

‘이럴 수가….’

칼리번은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나 사실은 정말 놀란 표정으로 제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칼리번은 상의는 에레즈의 공격에 걸레짝이 되었기에 상반신을 노출한 채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몸에 금사가 꼼꼼히 감겨, 마치 금빛 가운을 걸친 것처럼 화려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무려… 왼쪽 가슴에는 큼지막한 꽃 장식도 달려 있었다.

“시, 싫어…?”

“…….”

“여, 역시, 시, 싫겠지…. 이, 이것 때, 때문에…… 너, 너를 다, 다치게 해, 했는데….”

“…….”

“고, 고작해야 이, 이런 걸, 떠, 떠올리다니, 내, 내가 바, 바보 같았어….”

여섯째 왕자가 자책하는 동안, 칼리번은 그의 미적 감각과 섬세한 머리카락에 조종 능력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금사는 칼리번의 몸을 넝마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무기였다. 그가 마음만 달리 먹으면 마물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는 왕자는 그러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도 붕대로, 천으로 사용했다.

‘정말이지….’

완벽하다. 세상 사람 누구나 왕자의 이 재주를 본다면 펄쩍 뛰고 놀라워할 것이다. 칼리번은 하마터면 몸을 감싼 왕자의 머리카락을 흉포하게 잡아 뜯어 버릴 뻔했다.

“……저, 정말 시, 싫어?”

칼리번이 머리카락 한 뭉치를 움켜쥔 채로 노려만 보고 있자 에레즈는 몸을 배배 꼬며 물었다. 칼리번이 ‘정말로 화난 얼굴’을 봤던 왕자는, 지금과 같은 표정이 화난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딱딱하게 굳은 칼리번의 표정이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전자이길 바랄 뿐.

“…….”

그제야 칼리번이 고개를 들어 왕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섯째 왕자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감사합니다.”

칼리번은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

“비, 빈말, 이, 인 거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었기에, 칼리번의 목소리는 더없이 덤덤하고 무뚝뚝했다.

“……흐, 흐흥.”

여섯째 왕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머리카락으로 제 얼굴을 둘둘 감쌌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더 잘할 수 있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 * *

“음….”

잠이 든 칼리번은 몸을 뒤척였다. 무언가가… 자꾸만, 그의 몸을 간지럽혔다. 아무래도 벌레인 모양이다. 그는 잠결에 가슴 주변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유륜 주변의 옅은 살은 두어 번 쓸어내리고 나니 금방 가려움이 가셨다.

다시 깊은 잠에 빠지려는 차….

“…….”

또다시 무언가가 칼리번의 그곳을 간지럽혔다. 이번에는 잠을 방해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가신 정도이지 벌떡 일어나 반격을 할 정도로 강한 자극은 아니었다.

깃털…. 아니, 그보다 훨씬 가느다란 털이나 실과도 같은 것이, 칼리번의 예민한 살결을 모호하게 쓰다듬었다. 뱀의 혀보다도 가늘고 좁은… 무언가가… 칼리번의 유륜을 간지럽히고 일자로 다물린 안쪽을 파고들었다.

“으, 음….”

미세한 자극에 칼리번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참다못해 깨어나려고 하면 그 자극은 멈추고, 다시 잠에 빠져들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천천히, 칼리번의 몸은 길들어졌다. 유륜 안쪽의 점을 어쩌다 건드려지면, 칼리번의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계속되는 자극에 유륜 안쪽에 숨어 있던 유두가 조금씩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새끼손톱만큼이나 자그마한 유두를 툭, 툭 건드렸다. 유두에 손톱자국처럼 남은 일자 선을 따라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더니 그것은 가느다랗고 긴 실이 되어 유두를 동그랗게 말아 위로 끌어당기기를 반복했다.

“흐….”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간지럽혀진 유두가 쭉 당겨졌다. 유륜이 함께 위로 끌려갔다.

“흐… 으읏….”

깃털로 살랑살랑 간지럽혀지는 것보다 조금 더 강한 자극이었다. 칼리번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이제는 얇은 실이 유두가 아닌 유륜과 주변의 살을 감고는 세게 감겼다. 실에 감긴 유륜과 살결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조여지는 압박감에 피부가 불긋해졌다. 꼿꼿하게 선 유두 끝에서는 당장에라도 무언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 하아, 음…?”

결국, 칼리번은 눈을 떴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숨을 몰아쉬며, 느릿하게 졸린 눈을 깜박였다. 금빛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어야 할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고, 어지간히 춥지 않은 이상 튀어나오지 않는 유두가 봉긋 솟아 있다.

“……?”

칼리번은 피로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 떴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슴이 전과 같이 머리카락으로 따뜻하게 감싸인 채였다.

‘꿈인가….’

아니면 눈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검은 눈동자를 굴렸다. 여섯째 왕자는 그의 곁에서 몸을 웅크리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매일 보는 자신의 몸 따위는 금방 잊히고, 곤히 잠든 에레즈의 얼굴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잠든 얼굴은 똑같이 무표정이었지만,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릴 때 보았던 차가운 얼굴과는 달랐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다음 날 아침에 활짝 피기 위해 꽃잎을 다물고 잠든 요정처럼….

칼리번은 스르르 잠에 빠졌다.

* * *

방심하다 보니 다소, 행복한 고치가 되었다는 감상은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감히 왕과 같은 호사를 누렸다. 한쪽 다리를 못 쓰고 몸에 구멍이 좀 나긴 했지만, 마물 혼혈이기에 거동이 조금 불편할 뿐 꼼짝도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자신이 칼리번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칼리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에레즈의 무릎에 머리를 누인 채로 보냈다. 여섯째 왕자는 몇 시간마다 한 번씩 상처 부위에 머리카락을 새로 감아 주고, 동굴에 남은 음식을 손수 입에 넣어 먹여 주기까지 했다. 물론 칼리번이 준비해 둔 음식들이긴 했다.

그리고 잠들 때가 되면, 에레즈는 최대한 칼리번을 품에 끌어안아 꼼짝도 못 하게 했다. 칼리번은 그가 자신의 상처가 덧날까 두려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과를 반복하는 내내, 칼리번은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처럼 금빛 머리카락에 꽁꽁 묶인 채였다.

‘죄책감 때문이겠지.’

칼리번은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납득했다. 여섯째 왕자가 자신을 어찌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칼리번이 꼼짝도 하지 않으니 더는 그가 울지 않았다. 칼리번은 자신을 무릎에 눕힌 채로 앉아 있는 에레즈를 올려다보았다. 신분에 맞지 않게 칼리번의 시중을 드느라 힘들 텐데도, 그는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되고 편안해 보였다.

칼리번은 이토록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 본 적이 없어 낯설기는 했으나, 싫지는 않았다. 칼리번의 온몸을 휘감는 것은 왕자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향기도 그랬다. 여섯째 왕자의 품 안에서 그의 향기만을 맡고 있다 보면, 이대로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왜, 왜…?”

칼리번이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에레즈의 뺨이 불긋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리번은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들어 바닥에 몇 차례 쿵, 쿵 박았다.

“앗…?! 왜, 왜 그래…!”

당황한 에레즈가 칼리번의 머리를 붙잡더니, 제 무릎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하얀 손가락으로 피가 비치는 이마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 그러면, 아, 안 돼….”

칼리번은 자신의 머리는 돌처럼 단단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젠이나 다른 동료들과는 다른, 다정한 반응이었다. 에레즈가 이토록 다감하게 굴 때면,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순간적으로 공격력이 상승했다.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사냥을 해야겠군.’

칼리번은 무언가를 터뜨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어느샌가 동굴은 칼리번과 여섯째 왕자가 꾸린 작은 둥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

무언가가 바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칼리번은 잠결에 아랫배를 더듬었다. 지네인 줄 알았는데, 익숙한 감촉이었다.

‘금사…?’

칼리번이 당기자 실뭉치는 고양이의 꼬리처럼 손안에 감기며 애교를 부렸다.

“…으음….”

칼리번의 손에서 힘이 서서히 풀렸다. 그는 그렇게 방심해 버리고 말았다. 최근에야 몸을 감싸고 도와주고 있다지만, 애초에 그것은 다리를 부러뜨리고 몸에 구멍을 낸 것이었는데도….

“……음….”

칼리번이 다시 잠에 빠져들자, 그것은 더욱 아래로 침투했다. 옷과 피부 사이를 파고들고, 수풀을 헤치고, 사타구니에 자리 잡은 살 몽둥이를 휘감았다. 눈이 없어도 칼리번의 성기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아….”

칼리번이 얕게 숨을 내쉬었다. 부드러운 금사가 그의 성기를 온전히 감싸고는,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칼리번은 깨지 않았는지, 가슴이 위아래로 천천히 오르내렸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칼리번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관계는커녕 자위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젠에게 들켰을 때, 돌머리다 못해 그곳도 돌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인간 남성은 1년 내내 번식기이다. 반면 알파는 러트라고 불리는 특정 시기에만 발정을 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마물 혼혈의 사정은… 다소 복잡했다.

일단 마물 혼혈들도 마물처럼 러트라고 불리는 시기에 지독한 발정을 겪는다. 발정기의 쾌락은 상상 이상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만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서, 한번 러트에 빠진 알파는 광견처럼 발작했다. 그런 동료를 묶어서 둔기로 흠씬 패는 것이 칼리번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절반은 또 인간이라서, 발정기가 아니어도 육체적인 자극을 받으면 일단 서긴 서는 것이다. 칼리번은 그런 발정을 한 번도 겪지 못했다. 알파치고는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본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더 이상하게 여겼으니까.

칼리번은 자신이 그저 미숙하거나 덜떨어진 기형 알파라고 믿었다. 오메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칼리번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내던져지듯이, 오메가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무수히 많은 알파와 달리, 오메가는 극히 드물었다. 오메가란 미지의 존재였다.

오메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특성이 있는지, 왜 오메가가 되는지…. 가르쳐 줄 부모도, 형제도, 동료도 없다. 젠은 그나마 경험이 있었지만, 지식이 부족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우악스럽게 칼리번의 형질을 잠재우는 데에만 주력했다.

“…음, 후우….”

고자 취급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칼리번도 남들처럼 자위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분명 앞에는 어느 남성과 비교해도 훌륭한 남성기가 달려 있었으나, 아무리 만지고 쓰다듬어 보아도 발기하는 일은 없었다. 젠의 말대로 이건 좆이 아니라 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오메가라고 하니, 정말 장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칼리번은 자신이 사내 노릇을 못 한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 번이라도 성적인 쾌감을 맛보았다면 아쉬워했을지도 모르나, 제대로 된 감각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처럼 감긴 머리카락이 그의 성기를 빠듯하게 조이며 쓰다듬었지만, 칼리번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뿐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했다. 그저 간지럽고, 계속 피부가 마찰하여 따가울 뿐이었다. 칼리번의 성기는 여전히 늘어진 채였다.

그래서 그것은 전략을 바꿨다.

“……아….”

칼리번의 입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아……. 흣…!”

바늘로 성기를 찌르는 듯한 자극에 칼리번의 목이 젖혀지며 목젖이 훤히 드러났다. 평온했던 칼리번의 어깨가 흔들렸다. 원치 않는 자극을 피하고자 본능적으로 몸이 피하려 드는 것이다.

“으… 흐, 읏…….”

성기에 감싸인 금사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칼리번의 성기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을 뿐이었다. 대신 금사 몇 가닥이 귀두의 가운데, 아주 좁고 가느다란 관을 파고들었다.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할 때나 사용하는 요도였다. 그곳은 나오는 곳이었지, 무언가가 들어갈 곳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성기 안쪽,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그것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 하아…. 아, 앗……!”

고작 가는 실 몇 가닥이 움직이는 것만으로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한 번도 그곳을 이런 식으로 사용해 본 적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몸을 크게 뒤척이면 자극이 고통으로 변할 것임을.

“으응, 읏…. 크읏…!”

칼리번이 악령에 짓눌린 사람처럼 끙끙거리기만 하자, 다른 금사가 이번에는 뒤로 파고들었다. 일전에는 칼리번의 손을 꿰뚫을 정도로 날 선 무기였으나, 이제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살덩어리나 촉수처럼 매끄럽게 젖어 있었다.

“흐읏……!”

칼리번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손가락보다 가늘었고 매끄러웠다. 좁은 입구를 연신 핥다가, 칼리번의 몸에 긴장이 조금 풀리자 바로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 아앗…. 읏……!”

차가운 것이 몸 안에 들어오자 반대로 몸은 열이 올랐다. 그런 와중에, 온몸을 감싼 머리카락이 칼리번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위와 아래가 동시에 추삽질을 당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앞에서 가느다란 실이 빠져나가면 뒤에서 굵고 미끄덩한 덩어리가 파고들었다. 허리를 어떻게 틀어야 할지 무의식중에도 헷갈릴 정도였다.

결국, 칼리번은 앞뒤로 박히는 일 외에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몸 안의 점막을 자꾸 찔리니 칼리번의 성기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멈추지 않고 칼리번의 앞뒤로 자리 잡은 문을 전부 열어 내려는 듯 자꾸만 파고들었다.

“흐, 흐으….”

칼리번의 입이 벌어지고 턱이 바르르 떨렸다. 성기가 딱딱해지다 못해 아랫배 위로 뻣뻣하게 섰다. 핏줄이 꿈틀거리는 성기가 당장에라도 정액을 토해 낼 것 같았다. 그러자 실 가닥이 더해져 귀두의 구멍을 막았다.

“아…. 하앗, 앗…. 아…!”

금사는 요도 안을 슥슥 문지르며, 분수처럼 솟아오르려 하는 정액을 성기 안으로 짓눌렀다. 동시에 성기를 감싼 머리카락이 세게 조여졌다. 이대로는 성기가 안쪽에서 터지거나 찢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자극에 칼리번의 숨이 당장에라도 넘어갈 듯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흐으, 으, 읏…….”

한참을 그렇게 괴롭혀지다, 마침내 귀두에서 금사와 함께 끈적한 액체가 터져 나왔다.

“……! 흐읏…!”

처음 겪는 사정이었다. 앞에서 정액을 짜내자 자연스레 아랫배가 조여졌다. 내벽이 뒤로 파고든 금사를 꽉 깨물었다.

마물 혼혈인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배출하지 못했던 정액이 쌓였던 탓인지 엄청난 양이 성기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칼리번의 평평한 아랫배가 흠뻑 적셔지고, 가슴 위로도 몇 방울이 희게 번졌다.

“흐으, 아, 으…….”

금사는 젖은 숨을 토해 내는 입 안으로도 들어가, 칼리번의 혀에 감겨들었다.

“으음…. 읏, 으…. 하아….”

마치 진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처럼 천천히 쓸어내리고는, 본격적으로 혀를 감아 세게 쓰다듬었다.

“…하, 흐으…. 와, 왕자, 님……. 으, 음…!”

당연하게도 칼리번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흐트러진 발음으로 여섯째 왕자를 불렀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는 것인지, 아니면 이 행위를 나누는 상대를 부르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흐으……. 하아아…….”

사정 후 낯선 쾌감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피로감이 온몸에 퍼졌다. 금사가 칼리번의 눈가를 휘감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칼리번은 새벽까지 이어지는 후희에 지쳐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 * *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새벽이 마침내 찾아왔다. 짙은 피부 위를 제멋대로 차지한 황금빛 실은 칼리번을 잘 포장된 보물처럼 보이게 했다.

금사는 칼리번의 눈을 가렸고, 숨쉬기 버거울 만큼의 실뭉치를 입에 물렸다. 그의 아래에는 아직도 그것이 황금빛 꼬리처럼 박힌 채였다. 칼리번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칼리번의 양 손목에도 금사가 팽팽하게 묶여 있었다.

밤새 칼리번을 차지한 금사는 아침이 되자 아무런 의지도 없는, 머리카락처럼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밤새 근육에 쥐가 날 정도로 힘을 준 칼리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모른다. 십수 년을 마물과 상대하며 부상에는 이골이 날 대로 난 그였건만, 이토록 참혹하게 내장을 휘젓는 공격은 처음이었다. 끈적한 정액이 옅은 물이 될 때까지 토해 낸 칼리번은 동굴 안이 천천히 밝아져 오는데도 다리를 훤히 벌린 채로 늘어져 있었다.

자위조차 실패했던 칼리번에게는 가혹한 첫 경험이었다. 거대한 짐승을 죽기 직전까지 매질해서 길들이듯, 그는 처음부터 봐주는 일 없이 거칠게 다뤄졌다.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움직이지 못하던 칼리번은 한참 후에서야 상체를 일으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온종일 기절했을 자극이었다. 그러나 여섯째 왕자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밤새 잠들지 못한 칼리번을 벌떡 일으키게 한 동력원이었다.

칼리번이 반항의 기색을 보이면 몇 배로 더 감아 올려 단단히 속박하던 금사였다. 이번에도 그만치의 속박이 따라올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밤새 원하는 것을 전부 얻었는지 칼리번의 몸 위에서 힘없이 흘러내렸다.

“읍….”

칼리번은 헛구역질을 하며 목 안쪽까지 박힌 머리카락을 게워 냈다. 두 손을 털어 손목에 감긴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 얼굴에 칭칭 감긴 것들도 풀어냈다. 아침이었어도 캄캄했던 눈앞이 그제야 훤해졌다. 칼리번은 인상을 쓰며 제 몸을 살폈다.

“…?”

놀랍게도, 칼리번의 몸은 깨끗했다. 금사가 남긴 자국을 제외하고는 흔적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번은 자신이 토해 낸 정액이 몸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감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정액으로 범벅된 모습을 왕자에게 보이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아래에 손을 뻗었다.

“윽……. 흣….”

한 뭉텅이나 되는 금사를 쥐고 당기자, 그것이 몸 안에서 주룩 빠져나갔다. 몸 안을 넓히려는 듯 크기를 늘려 가며 쑤셔 대던 것이 단번에 나오니, 배 속에 공간이 생긴 것처럼 괴상한 허탈감이 들었다.

“…….”

사타구니를 게걸스럽게 차지하던 금사를 모두 거두어 내고 나니, 칼리번은 알몸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왕자의 머리카락을 상의로 삼긴 했다. 그러나 바지는 입고 있었는데…. 칼리번은 딱히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용병대에서는 다들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곤 했었다.

옷가지를 찾던 칼리번은 동굴 안에 울리기 시작하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왕자님?”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칼리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여나 무고한 왕자도 자신처럼 밤새 이런 짓을 당한 것은 아닐까? 최근 들어 왕자는 제 의지대로 머리카락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 은연중에 믿었다. 그러나 왕자의 머리카락은, 자해를 시도한 전적이 있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옷을 차려입기를 포기하고 여섯째 왕자에게 향했다. 금빛 머리카락은 마치 융단처럼, 칼리번을 안내하기라도 하듯 깔려 있었다. 그의 다리는 이제 막 뼈가 붙는 중이어서, 걸음이 비틀거렸다.

“카, 칼…….”

울음소리가 자신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왕자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사냥꾼은 땅에 그물을 펼친 후, 길목을 지나다니는 산짐승을 낚아채곤 한다. 에레즈의 모습이 딱 붙잡힌 토끼 꼴이었다. 금사는 거미줄처럼 동굴 안에 퍼져 있었고, 여섯째 왕자는 두 손과 발이 모두 묶인 채 허공에 동동 매달린 채였다. 가엾은 그는 꼼짝도 못 한 채로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

칼리번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밟고 있는 금사는 마치 선물에 묶인 리본 줄처럼 한 줄로 늘어져 있었다. 칼리번은 설마 하는 마음에 금사를 쥐고 끌어당겼다. 금세 멈출 것 같던 금사는 밑도 끝도 없이 끌어당겨졌다.

“카, 칼…. 으, 으앗!”

겹겹이 묶여 있던 여섯째 왕자의 몸이 흔들리더니, 칼리번에게로 쏟아졌다. 칼리번은 그 받아 냈다. 그러나 한쪽 다리가 성치 않아 왕자를 안은 채로 바닥에 엎어졌다.

‘…뜨겁다.’

칼리번은 불덩이를 끌어안은 것만 같았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칼리번은 왕자를 일으켜 주며 물었다.

“으, 으으…….”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아, 으…….”

몇 번을 물어도 여섯째 왕자는 몸을 웅크린 채로 벌벌 떨기만 했다. 처음 칼리번은 여린 성정의 그가 두렵고 무서워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숨이 고르지 못하고 거칠었다.

“…모, 몸이…. 하아…. 이, 이상해….”

“…!”

그 말을 간과할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감히 한 손으로 에레즈의 얼굴을 쥐었다.

“윽, 아, 아파…….”

칼리번은 깃털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손을 댔으나 여섯째 왕자는 투정을 부렸다. 상태를 보니 투덜거릴 법도 했다. 뭉게구름처럼 하얗던 그의 얼굴은 석양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가는 하도 울어서 붉어졌고, 콧대와 뺨은 열이 올라서 열꽃이 핀 것처럼 울긋불긋했다.

그 모습은….

“내, 내 몸, 인데…. 내 것이, 아, 아닌 것 같아….”

꼭 열병에 걸린 환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뺨을 쥔 칼리번의 손도 금세 뜨끈뜨끈해질 정도였다.

“왕자님,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오르신…. 큿!”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보다 부드러운 손등으로 왕자의 뺨을 쓰다듬던 중이었다. 칼리번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낮게 신음했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금사가, 어느새 칼리번의 몸을 밧줄처럼 휘감은 것이다.

“떨어지십시오, 왕자님!”

칼리번이 눈치챈 것보다 빨리, 금사는 두 사람의 몸을 한데 묶었다. 그러자 동굴 여기저기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것들이 잽싸게 합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했다. 더구나 금사의 주인은 열병으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두 팔로 에레즈를 둘렀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에게 공간을 남겨 주고자 했다. 그러나 끝없이 감겨드는 금사로 인해 결국 에레즈를 열렬히 끌어안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칼리번은 한 손으로는 왕자의 자그마한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쌌다. 금사가 조여지자 칼리번의 피부 위로 무수한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으, 읏…!”

몸이 빠듯하게 맞닿자,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에 탄식을 내뱉었다. 칼리번은 혹여나 자신의 단단한 몸으로 인해 연약한 그가 부서질까 전전긍긍했다. 칼리번이야 지금 상태에서 몸이 두 동강이 나도 회복할 수 있다지만, 에레즈 프리드웬은….

“……!”

잠시 뒤, 칼리번은 검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여섯째 왕자를 내려다보았다.

“아, 윽……. 카, 칼…. 나, 너, 너무… 아, 아파….”

에레즈가 울먹거렸다. 금사나 칼리번의 품에 갇혀서가 아니었다. 칼리번은 자신의 배 위에서 흉흉하게 꿈틀대는 마물을 뚜렷이 느꼈다.

“모, 몸이 이상해……. 나, 나, 또… 괴, 괴물이, 되, 되는 거야…?”

“…….”

“이, 이제는 조, 조절할 수, 이, 있다고…… 생각, 해, 했는데……. 저, 전부, 자, 잘라 버렸어야, 해, 했나 봐…….”

여섯째 왕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 나 때문에, 네, 네가 또 다, 다치면…….”

붉어진 뺨 위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이 어찌나 뜨거운지 눈물은 금세 말라 버리고 자국만 남았다.

“그게 아닙니다, 왕자님…….”

그 모습을 보며 칼리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드물게도 해야 할 말을 망설였다.

“……왕자님…께서는.”

에레즈 프리드웬은 이제 갓 성년을 지났다. 그간 주장한 대로 그가 정말로 괴물이라면… 알파라면, ‘그 시기’가 올 법도 한 것이다.

“러트가… 오신 겁니다.”

“러, 러트…? 그, 그게, 뭐, 뭐야…?”

칼리번의 말을 듣고도 에레즈는 되물었다. 그는 아예 그 단어를 몰랐다.

“…….”

칼리번은 속이 답답해져 이를 으득 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째 왕자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조차도.

마물 혼혈에게 러트란 가장 마물에 가까운 때였다. 때에 따라서는 마물의 피에 굴복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버려 둔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혹은 죽게 되니까.

알테르 프리드웬은 제 동생이 러트가 오고 괴물로 죽게 되길 바랐던 것인가? 아니면, 러트가 오기 전에 죽을 것이니 굳이 알려 줄 필요도 없었던 말인가?

“미, 미안해….”

칼리번의 얼굴이 사나워지자, 에레즈는 우선 사과부터 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

“아…!”

“…읏.”

금사가 두 사람의 몸을 더욱 세게 옭아매었다. 숨을 크게 쉬거나, 살짝 움직일 때마다 전혀 다른 두 몸이 다시 짜 맞춰졌다. 칼리번의 단단한 몸이 본의 아니게 아래를 스칠 때마다, 여섯째 왕자는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렇지… 않습, 니다. 음…. 설명하자면….”

여섯째 왕자를 자극할수록, 몸이 더욱 세게 묶였다. 칼리번은 숨을 크게 삼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러트라는 것은… 마물과, 마물 혼혈인 알파에게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발정기입니다.”

그 말을 꺼냄과 동시에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는 금사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벌였는지 감이 잡혔다.

“바, 바, 발……?”

에레즈는 말을 더듬거렸다. 바로 코앞에 순진무구한 얼굴이 놓여 있다. 칼리번만큼이나 모든 것이 처음인 그는 성욕과 고통을 구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다. 지금만 해도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며 두려워하고 있지 않던가?

“러트는… 마물이 인간을 습격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마물의 왕인 오메가가 아예 없거나, 혹은 오메가가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번식을 위해 인간 남성을 습격하니까요.”

“버, 버, 번……!”

“알파의 러트는… 인간 남성의 성욕보다 훨씬 지독합니다. 아마도 최근에 성장하셔서, 바로 그 시기에 들어서신 것 같습니다.”

“서, 서, 성…….”

칼리번은 아는 그대로를 여과 없이 설명했다.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말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버벅거렸다.

“…왕자님의 아래가 아프신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칼리번은 시시각각 맨살 위로 눌리는 성기의 윤곽을 느끼며 대답했다.

“어……. 어, 어…?”

여섯째 왕자는 고장 난 인형 같았다. 얼굴은 새빨갛고, 숨결은 뜨겁고, 눈동자는 흔들거렸다.

“나, 나는…… 그, 그런 거, 하, 하고, 시, 싶지, 아, 않은데…….”

여섯째 왕자는 자기 자신을 부정했다.

“…무, 무, 무서워…. 괴, 괴물, 이, 되, 되어 버릴, 거, 거야….”

러트란 남성이 죽고 알파가 태어나는 시기이다. 알파는 인간 남자를 강간하고 몸 안에 씨를 심어 죽게 만든다. 그런 끔찍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니…. 인정하지 못할 만도 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자님. 저는 알파 무리를 이끌던 용병대장입니다. 그동안 수없는 알파와 함께 지냈습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 말했다.

“뭐, 뭔가… 바, 방법이, 이, 있는, 거, 야?”

순간, 여섯째 왕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칼리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러트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없다. 여자와 교미를 하면 되지 않으냐는 주장도 있지만,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알파의 번식욕은 오직 남성에게만 향하는 데다가, 여자라고 해서 알파의 성기를 버틸 수 있는 건 아니다.

알파 입장에서 가장 나은 해결법은 인간 남자와 교미를 하는 것이지만…. 희생자가 생기고 만다. 최대한 인간과 공생하려고 하는 용병에게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야인이나 도적으로 지내는 알파들은 이 시기가 오면 마을을 습격하고 사내를 납치해 강간하곤 했다.

러트 중 피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알파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특단의 조치가 취해진다. 우선, 러트가 온 알파의 손발을 묶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다. 그다음, 짚이나 잎을 꼬아 만든 거친 천으로 온몸을 둘둘 만다. 칼리번이 왕자에게 알려 준 그 방법으로 만든 천이다.

마지막으로, 러트가 온 알파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 죽지 않을 정도로 팬다. 알파는 머리가 잘리거나 심장이 뽑혀야 죽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그 말인즉 온몸의 뼈가 부서질 때까지 얻어맞는다는 소리다.

그렇게 걷지도 못하고 손을 쓰지도 못하게 되면, 몸이 회복될 즈음에는 러트기가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용병식 러트 해소법이다.

참고로 칼리번은 젠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모든 알파를 한 번 이상 패 본 적이 있다. 그의 팔근육이 유독 발달한 이유기도 했다. 아마 칼리번이 알파였다면, 러트가 왔을 때 그들에게 확실한 도움이란 이름의 보복을 되받았을 것이다.

“나, 나도… 그, 그 바, 방법으로, 해, 해결, 해 줘….”

칼리번이 한참이나 말이 없자, 여섯째 왕자는 그의 가슴에 어쩔 수 없이 턱을 괸 채로 간절히 애원했다.

“……그건.”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매질만큼이나 효과적인 방법이 또 없다지만, 그 고통을 견디기에 여섯째 왕자는 너무나 나약했다. 최근 성장해서 사내다워졌다고는 하나, 칼리번에 비하자면 아직도 한참 부족했다. 분명 한 대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어, 어서… 해, 해 줘…!”

여섯째 왕자가 매달려 온다. 칼리번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칼리번은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했다. 짐승을 도살하고 마물을 살해하고 인간을 죽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여섯째 왕자가 나약하다고 봐주는 것이라면, 칼리번은 진즉 용병대에 입대하지 않고 알리샤의 곁에 남았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차마 그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적이었다. 더는 여섯째 왕자에게 환상을 품지 않는다. 유혹당하지도 않는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고결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고… 자신과 같은 마물 혼혈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자꾸만 망설이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답을 찾던 칼리번은 온몸에 붉은 자국을 남기는 금사를 보았다.

“…….”

아, 그랬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엄청난 무기를 두르고 있었다. 칼리번은 답을 찾았다. 강력한 무기가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만약 여섯째 왕자가 평범한 알파였다면, 두 손과 두 발을 묶어 놓는 정도로 타협을 보았을 것이다.

설령 칼리번이 저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전부 잘라 내는 데 성공한다 쳐도, 문제였다. 그 전에 금사는 에레즈를 두고 자해할 것이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죽는다면 그간의 노력이 수포가 된다. 용병의 시선으로 봤을 때 손해 보는 일이었다. 더구나, 칼리번이 몸을 가눌 수 없었을 때 정성껏 돌봐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기사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빚을 갚는 것 정도는 이쪽 세계에서도 통용된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리번은 마음을 다잡았다. 죽기 직전까지 패는 것이 아니라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다만….

“왕자님.”

“으, 응…?”

“앞으로 제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 그게, 무, 무슨 마, 말이야…?”

“저는 아무렇지 않지만, 왕자님께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뭐, 뭐가…?”

여섯째 왕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형제들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에레즈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저, 칼리번 혼자서만 그에게 신경 쓸 뿐이었다.

“당장의 러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자님께서는 순결을 잃으셔야 합니다.”

칼리번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해 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말을 꾸미는 일이 능숙하지 않다 보니 잘되지 않았다. 젠이었다면 좀 더 낫게 말해 주었을 텐데— 매번 드는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

여섯째 왕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끔뻑거렸다. 금사가 뼈를 으스러뜨릴 듯 몸을 조이고 있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순결…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칼리번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여섯째 왕자가 경악에 찬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 그 정도는… 나, 나도, 아, 알아…! 호, 혼인을 하, 할 뻔도 해, 했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어린애 취급한 것을 사과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섯째 왕자가 정말로 그 의미를 알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차마 두 번 물을 수는 없었지만.

“흐, 흥…….”

여섯째 왕자는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칼리번은 술집 앞을 지키는 커다란 맹견처럼 진득하게 기다렸다.

“그, 그, 그… 방법, 밖에, 어, 없는, 거, 거야…?”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째 왕자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 그러면… 아, 읏……!”

잠시 가라앉았던 발정이 다시금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여섯째 왕자가 힘겹게 신음했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푸른 두 눈이 평소와는 달리 열기로 흐려져 갔다. 그는 젖은 눈으로 칼리번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그, 그럼… 너, 너는…….”

어딘지 애달프게….

“다, 다른 사, 사람도, 히, 힘들어하면, 해, 해 주는 거야…?”

“…네?”

“도, 동료, 부, 부하, 하, 한테도…?”

죽기 직전까지 몽둥이로 패는 것이라면 한 놈도 빠짐없이 해 줬다. 대검을 휘두르며 단련된 그의 팔근육은 그럴 때일수록 더욱 빛을 발했다. 심지어 칼리번의 몽둥이질에 중독되는 녀석도 생겼다.

그러나 몸을 주지는 않았다. 칼리번은 최근까지 자신을 알파로 알고 있었다. 러트에 들어서면 체취가 더욱 강해져 알파끼리는 구역질마저 느낀다고 들었다. 칼리번에게서는 알파 특유의 향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우락부락한 용병 대장을 원하는 놈은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금만 해도, 순진하고 어린 사내의 순결을 취하기 위해 눈을 번뜩이는 파렴치한 용병으로 보이는 차다. 다른 방법이 있는데 굳이 왕자에게만 이 방법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면….

“…….”

칼리번은 변명도, 거짓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속으로 젠을 마흔여덟 번쯤 찾은 것도 같았다.

“…괘, 괜히, 무, 물어서, 미, 미안…….”

칼리번이 한참이나 노려만 보고 있자, 여섯째 왕자가 고개를 숙였다.

“너, 넌, 나, 나를, 위, 위해서… 도, 도움을, 주, 주는 건데… 나, 나는, 고, 고작, 그, 그런 걸, 무, 묻기나, 하, 하고…….”

“…왕자님.”

“나, 나는, 저, 정말… 어, 어쩔, 수, 수가 어, 없나 봐……. 주, 주제도 모, 모르고, 바, 바보 같고….”

의지가 약한 에레즈가 알아서 수그려 준 덕분에 칼리번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냥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속인다는 인상을 미처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까? 칼리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일 때였다.

“……해.”

그렇다면, 해.

여섯째 왕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순탄히 합의를 봤건만, 칼리번은 마음이 무거웠다. 다소 우울하기까지 했다. 싱숭생숭한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상대방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거울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그리 밝지 않았다. 여섯째 왕자가 울적하고 처연한 얼굴로 올려다보니, 칼리번은 그를 위해서임에도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응.”

칼리번은 그와 어설프게 마주 보았다. 햇볕을 지붕으로 삼은 탓에 그을리고 거친 칼리번과 달리, 에레즈는 그늘 속에서만 살아가 희고 유려한 얼굴이었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바라보니, 여섯째 왕자는 속눈썹이 길고 옅었다. 푸른 눈은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 아직 단단하지 못하고 갸름한 뺨과 턱선이 아직도 소년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런 말을 드리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응?”

칼리번이 고심 끝에 입을 열자 에레즈가 올려다보았다.

“사실 제 이름은 칼리번입니다.”

“카, 칼…리번?”

에레즈는 놀라운지 푸른 눈을 깜박거렸다.

“네. 원래 이름은 잘 쓰지 않다 보니 줄여 부르는 쪽이 이름과 다를 바 없기는 합니다.”

하필이면 왜 이 순간에 고백하게 되었을까? 모르겠다. 처음에는 말할 기회를 놓쳤고 그 후로는 칼리번 자신도 소개를 잊고 말았다. 그래도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다. 흔해 빠진 용병의 이름이 왕족의 순결과 맞바꿀 만한 가치의 비밀이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이름을 반복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입이 우물거렸다.

“…….”

칼리번은 그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아름다움에 홀려서가 아니었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 또한 정확히 몰라서였다. 용병 생활을 하며 동료들에게 들은 것은 있었다. 그러나 실전은 달랐다.

다만, 본능적으로 느끼는 무언가가 있었다. 짐승이 배우지 않고도 때가 되면 짝을 지어 번식하듯이.

“…….”

서로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리는 시간은 하루처럼 길었다. 조금만 다가가면 입술이 닿을 거리인데도, 닿을 듯 말듯 멈칫거렸다. 과도하게 의식한 탓이었다.

칼리번은 혼란에 빠진 왕자의 숨을 잡아 주기 위해 억지로 입을 맞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해서든 진정시켜야겠다는 절박함뿐이었지, 그 외에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는 아직 미숙하지만, 첫 러트를 맞이한 알파였다. 그리고 칼리번은….

마침내 입술이 닿았을 때, 너무 오래 망설인 나머지 누가 먼저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커다란 몸 중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이 닿았을 뿐인데, 온몸이 꿰뚫린 것처럼 전율했다. 그것은 에레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입술을 뗐다.

“…….”

두 사람 다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서로를 탓하는 것 같기도 했고, 서로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짧은 순간 닿았을 뿐인데도, 열기에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검고 푸른 눈동자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에레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적셨다.

에레즈의 입술은 불 속에서 꺼내 올린 숯처럼 뜨거웠다. 이렇게 표면에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데, 몸 안으로 넣는다면…. 한 번도 누군가를 받아들여 본 적 없는 몸은 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칼리번은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그러나 검은 눈도, 머리카락도, 피부도, 이미 삶에 데이고 그슬려 잿더미였다. 살아남는 일에 닳고 닳은 몸으로 열기를 식힐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오랫동안 마음을 다잡은 후, 다시 마주 보았다. 목울대가 흔들렸다. 칼리번은 세상 경험이 많고 연상인 자신이 어린 에레즈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리번이 망설이는 사이에, 먼저 다가온 것은 오히려 그였다.

“…….”

입술을 꾹 맞댄 채로 두 사람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드리는 일조차 하지 않고 문 앞에 서 있기만 했다. 어느 쪽도 다정하고 능숙하게 문을 여는 법을 몰랐다.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살짝 움직이자, 상대방이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삼았다. 싹이 트듯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을 마시기 위해 입술이 점차 벌어졌다. 서로의 입술이 붙고,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뭉근히 차올랐다.

입술이 벌어진 입 안으로 살짝 들어갔다.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을 상대가 혀로 핥았다. 타인의 혀로 덧발라지는 감각은 어딘지 동질감과 안도감을 주었다. 짐승이 상처를 핥아 주듯 서로를 위해 주다가, 그만 혀가 부딪쳐 버렸다.

“흐, 음…!”

혀끝에 닿는, 마찬가지로 젖고 부드러운 혀. 등줄기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낯선 자극이었다. 칼리번은 상대방의 입 안을 능숙하게 헤집고, 녹아 버릴 것만 같은 쾌락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대신 낯설고 두려운 장소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처럼, 한 걸음씩 서로를 들이고, 들어가기도 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혀, 타액…. 모든 것이 거부감이 느껴질 것 같은데, 오히려 갈증이 났다.

두 사람을 얽매는 금사는 어느새 풀어져 바닥에 늘어진 채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에게 깊숙이 빠져 있었다.

* * *

망설이며, 머뭇거리며 닿았던 입술이 그제야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져도 떨어진 것 같지가 않았다. 코가 닿은 채였고 숨결이 입술 대신 입술에 닿았다.

몸을 억지로 묶어 놓던 금사는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에레즈를 품 안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한쪽이 거부한다면, 언제든 떨어질 수 있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입 안에 남은 그의 흔적을 머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에레즈의 타액을 삼켰다. 목울대가 한번, 크게 울렸다. 독보다도, 술보다도 뜨거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취한 것 같기도 했다. 녹아 버리는 것도 같기도 했고…. 솥단지에 담겨 푹 삶아져 버린 당근과 감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상황을 굳이 스튜로 비유하자면, 에레즈는 그중에서도 가장 귀하고 향기로운 향신료라고 칼리번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으, 음…….”

칼리번이 열에 취해 괴상망측한 생각을 하는 동안, 에레즈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눈에 띄게 떨렸다. 무엇이 그리 초조한지, 그는 부어오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 이제, 머, 머리카락이, 푸, 풀어진, 거, 것 같아….”

“……아.”

“거, 거기… 너, 너무, 누, 누르면…….”

“…….”

“아, 아파….”

기다리다 못한 에레즈가 입을 열었다. 아래가 칼리번의 다리에 지나치게 세게 짓눌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어색하게 그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어딘지 아쉬운 손길이었다.

“흐, 흐음…….”

마침내 자유를 얻은 에레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더니, 손가락을 깨물기 시작했다. 그는 풀려나고도 어딘지 괴로워 보였다.

처음으로 깊은 입맞춤을 나눠 보았다. 그것은 칼리번도, 에레즈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이 없기에, 제대로 된 입맞춤이라 논하기 힘들 정도로 엉성하고 서툴렀다. 그러나 지나치게 달콤했다. 칼리번은 음식을 물어뜯거나 삼키는 용도로 사용하는 입과 혀가 이토록 달콤하게 쓰이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살면서 처음 설탕을 맛본 사람처럼 에레즈를 바라보기만 했다. 착각일까? 어딘지 그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왕자님!”

에레즈의 몸이 휘청거렸다. 칼리번은 그를 가볍게 받아 냈다.

“괘, 괜찮…….”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지만, 몸은 전혀 안 괜찮았다. 몸은 뜨거운데, 반면에 피부는 열기에 바짝 메말라 있었다. 그의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더욱 열이 올라 버린 것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칼리번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입맞춤에 넋이 나간 자신을 탓했다. 그는 몸을 낮춰 에레즈를 두 팔로 번쩍 들었다.

“아….”

열기에 시달리는 에레즈는 놀라워하거나 반항할 틈도 없었다. 칼리번은 동굴 안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장소로 그를 옮겼다. 평소 에레즈가 잠을 자는 곳이었다. 에레즈는 반쯤 누운 채로 거친 숨을 색색 내쉬었다. 칼리번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려 주었다. 시원한 손길에 에레즈가 눈을 떴다.

“그… 그…….”

푸른 눈에는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칼리번은 차분히 기다렸다.

“…오, 옷….”

에레즈가 마침내 말했다.

“…….”

칼리번은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라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다. 아니, ‘실오라기 하나도’는 아니었다. 에레즈의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휘감겨 있었으니.

벌어진 어깨와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두 팔, 통나무처럼 두꺼운 흉통. 큰 키만큼이나 긴 허벅지와 다리는 그 자체로 육식 짐승 같았다. 짙은 색의 피부는 여기저기 희게 남은 흉터를 제외하면 매끄럽다는 감촉을 눈으로 느끼게 할 정도였다.

대부분 사람은 차려입고 꾸밀수록 보기 좋은 법이었으나 그에게는 정반대였다. 거친 옷과 녹슨 갑옷을 걸치고 있을 때는 ‘체격이 크다’는 감상이 다였다면, 나신일 때는 전쟁의 신처럼 보였다.

“…나, 나도… 버, 벗어야, 해?”

거대한 검은 벽에 가로막힌 에레즈는 시선을 여기저기로 피했으나 칼리번의 몸 구석구석을 보게 될 뿐이었다. 칼리번에게 수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찌할 줄 몰라 하니 덩달아 어색해졌다.

“원하신다면, 굳이 벗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래는….”

“으, 응….”

칼리번의 대답에 에레즈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레즈는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더니, 제 눈가를 스스로 가렸다. 그리고 나서야 아래에 손을 뻗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더듬더듬, 느리게도 움직였다. 칼리번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기다렸다.

“저, 전부, 내, 내릴까…. 아, 아니면….”

“일단은, 무릎까지만 내려 보시면….”

“으응….”

에레즈는 머뭇거리며 바지와 속옷을 아래로 내렸다. 천에 눌려 있던 성기와 흰 허벅지가 드러났다.

“하, 아….”

에레즈는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

한편, 칼리번은 두 눈을 의심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에레즈의 얼굴을 보고 상상할 수 있는 모양이나 크기가 아니었다.

“…….”

왜 이렇게 큰 거지? 칼리번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딱히 타인의 성기를 유심히 보며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집단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서로 보고 보여 주게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는 알파 무리와 함께 생활했다. 알파의 성기는 일반 남성보다 월등히 크다. 즉, 칼리번이 보아 온 것은 죄다 그 정도 크기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건….

‘설마 부은 건가?’

아무리 에레즈 프리드웬이 알파라지만…. 이쯤에서 칼리번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에레즈 왕자에 대한 환상을 모두 털어내지 못했다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성기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어린애의 팔뚝만 했다. 완벽한 알파의 성기였다. 인간 남성의 성기는 귀두 아래로 미끈한 기둥이 이어지는 반면에, 러트에 들어선 알파의 성기는 귀두 아래로 혹이 불룩하게 솟는다. 몸이 맞닿았을 때 윤곽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지만, 실제로 두 눈으로 보니….

‘러트라서 그런 거다. 러트라서….’

러트가 가라앉으면 이 정도는 아니겠지. 이 정도 크기는… 아니겠지. 분명 발가락 끝까지도 희고 곱상했었는데.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은밀한 부위는 그동안 숱하게 보아 오던 알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그들 중에서도 유독 흉측하고 큰 편인 것 같았다.

“이, 이상해…?”

칼리번이 한참이나 말이 없자, 에레즈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버, 벌써… 괴, 괴물, 이, 되, 된 건가…?”

두 손으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움켜쥔 채였다.

“펴, 평소에는, 아, 안 그랬, 는데… 가, 갑자기, 이, 이렇게, 되, 되어서… 아, 아파서….”

에레즈는 겁이 났는지 칼리번에게 투정을 부렸다.

“…….”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거부감이 사르르 풀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동정에 불과했다. 그동안 보아 온 알파들과는 달리 에레즈가 너무나 연약하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괴로우시겠군요.”

칼리번은 오랫동안 발기한다는 감각을 알지 못했다. 하나, 이렇게 부풀어 오른 채로 뻣뻣하게 서 있으면 확실히 힘들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정액을 빼면 가라앉을 겁니다.”

“어, 어떻게, 빼, 빼야…. 힉!”

에레즈는 새된 신음을 뱉었다. 대뜸 칼리번의 손이 그의 성기를 쥔 탓이었다.

“카, 칼… 흐읏…!”

“잠시만….”

“아, 아…!”

칼리번의 손은 큰 편이었는데, 그 손에도 빠듯하게 잡힐 정도의 크기였다. 칼리번은 다시금 놀라워하며 손안에 쥔 것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처음 에레즈의 성기를 마주하고 느꼈던 거부감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러트를 ‘이런 방식’으로 달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액을 계속 빼는 것으로 러트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손장난에서 끝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성기에 불거진 핏줄이 꿈틀거린다. 칼리번은 특히나 힘 조절에 주의했다. 섬세한 작업은 젬병이었으나 이번만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흐, 으으…. 아, 아파…. 쓰, 쓰라려…. 흑, 카, 칼….”

에레즈는 고개를 저으며 칼리번의 팔을 붙잡았다. 어느새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오랫동안 발기한 성기는 가볍게 스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에레즈가 아파하자 칼리번은 즉시 손을 뗐다. 솟아오른 성기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지만 뜨겁기만 할 뿐 젖지는 않았다.

“음….”

칼리번은 원인을 알기 위해 자신의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굳은살이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바닥 전체에 박여 있었다. 이런 손이 여리고 은밀한 살결에 닿으면….

‘아플 만도 하군.’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손바닥을 입에 댔다. 그러고는 사자처럼 제 손바닥을 몇 번이고 핥았다.

“으, 흐으…. 카, 칼… 뭐, 뭐 하는 거야…?”

괴로워하던 에레즈가 물었다. 칼리번은 대답을 하는 대신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제 손바닥이 축축해질 때까지 핥았다. 칼리번의 무심하고 진득한 시선에 에레즈는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칼리번은 축축이 젖은 손바닥으로 다시 성기를 감쌌다.

“아, 으음…….”

젖은 손이 닿자 에레즈의 어깨가 좁아지고,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칼리번은 서서히 손을 움직였다.

“하아…. 아….”

에레즈의 태도는 유해졌고, 칼리번이 손을 움직여도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다만 간간이 무릎이 모이며 칼리번의 움직임을 막기는 했다.

“음, 흐읏… .이, 이상해….”

그러나 끝내 사정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칼리번의 손길은 투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손짓을 반복하자, 젖었던 손이 어느새 다시 말라붙었다.

“하아…. 아, 으으….”

결과적으로 여섯째 왕자는 더욱 괴로워졌다. 오히려 그의 내부에 타오르는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든 것도 같았다. 푸른 보석안에 눈물이 고였다.

‘왜 나오지 않는 거지?’

칼리번은 초조함에 이를 악물었다. 손안에 가득한 성기는 혼자 꿈틀거림이 느껴질 정도로 격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칼리번은 젠에게 들었던 음담패설을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손을 어쩌고, 입을 저쩌고…. 성적인 쾌감을 모르는 당시의 칼리번은 이해가 가지 않아 전부 흘려들었다. 좀 더 귀 기울여 들을 걸, 뒤늦은 후회였다.

‘알파는 역시 삽입을 해야 사정할 수 있는 건가?’

칼리번은 에레즈의 성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러나 몸 안에 넣으면 어지간한 인간 사내는 속이 찢어져 죽을 크기였다. 부상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러트가 끝난 후에도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를 지켜야만 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내장을 잃을 수는 없었다.

“…….”

칼리번은 아무도 이끌어 주지 않는, 모르는 길을 혼자서 걷는 듯 했다. 그는 마지막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무릎을 양손으로 짚고, 다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카, 칼…?!”

숨을 헐떡이던 에레즈는 갑작스러운 칼리번의 행동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에레즈의 턱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으, 앗…!”

에레즈의 입에서 끝이 말라붙는, 어딘지 야릇함이 묻어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흡, 으음….”

칼리번은 에레즈의 성기를 입에 넣고 혀로 감쌌다. 젠의 음담패설 중에서, 입으로 대신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 것이다.

‘…입에 넣어서 뭘 어떻게 하는 거지.’

손으로 했을 때처럼, 움직이면 되겠지.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물린 귀두와 성기가 목젖에 닿기 직전까지 쑥 들어왔다. 그랬는데도 성기를 전부 삼키지 못했다.

칼리번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성기의 반 정도만이 그의 입 안에 들어갈 영광을 얻었고, 타액으로 맨들맨들 하게 젖어 갔다.

“하아, 하…아, 아, 으…. 카, 칼….”

에레즈의 신음이 점점 다급해져 갔다. 처음이라는 죄로 성기에 온갖 자극을 시험당하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칼리번의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들바들 떨렸다.

“음, 후우….”

성기를 입 안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던 칼리번은 그것을 완전히 뱉어냈다. 침으로 적셔 놓은 귀두와 기둥이 번들거렸다.

‘정액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칼리번은 전날 밤에 금사에게 겪은 수모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더 숙였다. 귀와 뺨에 옅은 색의 음모가 닿았다. 칼리번은 그동안 입과 혀가 닿지 않은 기둥 아래쪽을 입술로 물었다.

“아, 흣…!”

에레즈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떨림마저 칼리번의 뺨을 통해 느껴졌다. 성기 전부를 입 안에 넣기란 불가능했기에, 칼리번은 한입씩 깨물어 먹는 것처럼 기둥 아래쪽을 입술로 물었다가 핥기를 반복했다. 성기 곳곳에 칼리번의 숨결과 혀가 닿았다.

“아앗, 아…! 하아, 흐으읏….”

칼리번이 가볍게 물 때마다 에레즈는 다리를 모았다. 뺨과 귀가 허벅지와 성기에 짓눌렸다.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커다란 성기가 콧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턱에 닿는 고환이 열기를 품으며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칼리번은 별생각 없이 혀를 내밀어 둥근 그곳을 핥았다.

“으, 아…. 시, 싫어! 거, 거, 거기는…!”

그러자 에레즈의 몸이 거의 펄쩍 뛰다시피 했다.

“이, 이상해져…. 하, 하지 마….”

칼리번이 우연히 건든 곳이 예민했는지, 에레즈는 거의 울다시피 애원했다. 숨이 모자랄 정도로 에레즈의 성기를 핥던 칼리번은 행위를 멈췄다.

“흑, 으으….”

어느새 에레즈는 울고 있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카, 칼……. 어, 어떡해… 주, 죽을 것, 같아….”

칼리번의 타액으로 젖어 있을 뿐이지, 에레즈의 성기는 여전히 꽉 막힌 것처럼, 정액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왕자님….”

자신이 부족해서 그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칼리번은 숨을 거칠게 몰아쉴 정도로 최선을 다했으나, 죄책감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다시 한번 해 보면….’

칼리번이 입을 벌리고 에레즈의 성기를 삼키려던 차였다.

“음…?!”

금사가 갑작스레 칼리번의 목에 감겨들었다. 칼리번이 떼어내는 것보다도 빨리, 금사가 그를 제압했다.

“흡, 읍?!”

강력한 힘에 의해 칼리번의 고개가 아래로 처박혔다. 동시에 굵은 성기가 입 안을 찢을 듯 밀고 들어왔다. 그 탓에 칼리번의 오른쪽 뺨이 귀두 모양으로 불룩 튀어나왔다.

“으, 읍…. 흡, 흐, 읍!”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귀두가 입 안 이곳저곳을 쑤시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금사가 칼리번의 목을 조르며, 목뼈를 부러뜨릴 듯 턱을 억지로 돌렸다. 입 안을 휘젓던 성기가 목젖에 닿았다. 귀두가 그의 목구멍에 맞춰졌다. 그 정도에 이르니 다음에 이어지는 일이 무엇일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칼리번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크윽…!”

예상대로, 칼리번의 머리가 아래로 당겨졌다. 칼리번은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다. 마치 목줄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는 두 팔로 간신히 버텼으나, 목을 조르는 힘에 팔꿈치가 점점 굽혀져 갔다.

“그, 윽……?!”

그때, 손목에 금사가 부드럽게 감기더니 뒤로 끌려간다. 칼리번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혔다.

“큽, 흐읍!”

칼리번은 마물의 날카로운 발톱이 목구멍에 박혀 들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숨 대신 피를 삼키던 고통스러운 순간을. 부푼 성기가 목구멍을 밀고 쑤셔 들어왔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자면 체중에 눌린 칼리번이 스스로 삼킨 것이 옳았다.

화살촉 모양의 귀두가 한번 목구멍을 쑤시고, 이어지는 혹이 목구멍을 벌린다. 기괴하게 핏줄이 솟은 기둥이 목구멍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젖은 목구멍이 한계치까지 벌어져 빠듯하게 성기를 감쌌다.

“크읍…. 흡, 흐……!”

턱이 빠질 정도로 벌어진 입에서 캑캑거리는 소리가 났다. 만약 성기가 목구멍이 아닌 숨구멍 쪽으로 박혔다면 질식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흐으, 음…! 읍…!”

칼리번은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반응해야 할 두 팔은 등 뒤로 꺾인 채 질긴 금사에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금사는 지금도 감겨드는 중이었다. 칼리번은 묶인 짐승처럼 어깨로 땅을 짚고 허벅지에 힘을 실어 상체를 위로 들어 올리려 노력했다. 그러자 목에 메인 금사가 올가미처럼 거세게 조여졌다.

“크, 흡…!”

목줄이 조여지니 목 안쪽의 여린 살이 성기를 더욱 뻑뻑하게 품게 되었다. 몇 차례 마른기침을 토해 내고 나자, 더는 뱉을 숨도 없어졌다. 칼리번은 사냥꾼에게 잡힌 짐승처럼,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했다.

“흐…. 흐으, 읍….”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자유라고는 코를 통해 간신히 숨을 쉬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목구멍이 짓눌려 버거웠다. 숨을 쉬지 못하자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때, 목줄이 위로 당겨졌다. 칼리번은 고통을 통해 금사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따라 고개를 천천히 위로, 아래로 움직였다. 목구멍에 꽉 낀 성기가 내벽을 스치며 그 맛을 보았다. 평범한 사내의 성기와 달리 혹이 부풀어 울퉁불퉁한 성기는 칼리번의 목 안을 골고루 자극했다.

“읍…. 흣…….”

목 안 깊은 곳이 귀두에 찔리고, 굵은 혹이 목젖에 걸릴 때마다 칼리번은 신음했다. 숨을 쉬기 위해 본능적으로 내벽이 꿈틀거렸고, 성기 전체를 주무르는 결과를 낳았다.

“으, 읏…….”

굵은 성기가 쉬지 않고 목 안쪽을 긁어내라자, 목이 아닌 몸 안을 파고드는 것처럼 칼리번의 다리 사이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갔다. 거대한 뱀은 목 안을 파고들며, 칼리번의 입천장을 기둥으로 슥슥 쓸어내렸다. 거대한 성기를 받치는 칼리번의 혀는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울룩불룩한 기둥이 목젖을 짓누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명치 부분이 발작적으로 떨리고, 동시에 이상한 감각이 배 속을 채웠다.

억지로 움직여지는 머리를 제외하고는 칼리번의 신체는 바닥에 엎어진 채였다. 뱀이 버려진 먹잇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손목만을 구속하던 금사는 빠르게 그의 몸을 점령했다.

“흐, 으음…!”

금사는 손쉽게 칼리번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칼리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지난밤, 입구가 처음 열리자마자 수도 없이 농락당한 곳이었다. 칼리번은 뒤늦게 몸을 비틀었으나 부질없는 반항이었다.

“흡, 으흣…!”

금사가 요도구와 뒷구멍에 파고들자, 칼리번의 목구멍이 꿀렁거렸다. 굵은 금사가 칼리번의 배에 두껍게 감겼다. 감겨드는 머리카락을 차 내던 다리는 허벅지와 한데 묶였다. 반항을 해 봤자 하체가 고정된 채로 금사에 의해 속절없이 쑤셔질 뿐이었다.

“흐으…….”

처음에는 입구를 간지럽히던 금사가 점차 깊은 곳으로 파고들 때마다 괴로움에 목구멍이 꽉 조였다. 칼리번은 자신의 그런 행위가 금사를 자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생리적인 눈물로 눈앞이 흐려졌다. 칼리번은 쏟아지는 자극에 정신을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다.

칼리번의 몸 안을 차지한 것들은 각기 다른 생물체인 것처럼 달리 움직였다. 굵은 금사는 뒷구멍에 박혀 짐승의 꼬리처럼 흔들거렸고, 얇은 금사는 좁고 가는 요도구를 바늘처럼 찔러 댔다. 그리고 목구멍에 처박힌 성기는….

“으, 으읍……!”

퍽, 목구멍을 천천히 오가던 성기가 깊숙이 박혀 들었다.

“읍…! 흐읍…!”

평소에는 자극을 받을 리 없는 어떤 곳을 찍히자 칼리번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동시에 목구멍이 성기를 더욱 세게 조였다. 칼리번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성기가 반복해서 그 부분을 찍어 댔다.

“……크, 읍! 으으읍!”

칼리번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 순간만큼은, 본능적으로 목이 날카로운 금사에 동강 나는 한이 있어도 그 자극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곳을 계속 찔리면 머릿속이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하아, 커, 허억—!”

그런 칼리번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서인지, 귀두 아래에 자리 잡은 혹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버티기 어려울 만큼 굵은 성기가 목 안에서 부풀자, 숨구멍마저 짓눌렸다.

“읏…?!”

칼리번이 고개를 저으며 성기를 빼내려 하자 두 개의 손, 열 개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칼리번의 머리를 면사포 덮듯이 감쌌다. 물 밖으로 간신히 고개를 드는 순간, 다시 물속으로 처박혔다. 칼리번의 머리를 누르던 손가락이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고, 엄지손가락이 칼리번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흐… 읍…!”

칼리번은 간지러움과 부드러운 손길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끙끙거리며 괴로운 신음만 내뱉었다. 그러나 그런 반항조차도 잠시였다. 칼리번의 목울대 아래로, 혹이 하나 더 난 것처럼 튀어나왔다. 알파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오메가가 쉽게 성기를 빼낼 수 없도록 두 번째 혹을 부풀렸다.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것을 억지로 빼내면 목구멍이 전부 찢어질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흐으……. 으, 흐…….”

숨구멍마저 눌려 머릿속이 점점 흐리멍덩해졌다. 검은 두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용케도 기절하지 않은 것은 굳건한 육체나 정신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아래를 쑤시는 자극 때문이었다. 금사는 몸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한 번도 만져지지 않은 곳을 건드렸고, 고통을 쾌락으로 흐트러뜨렸다. 칼리번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땀처럼 뚝, 뚝 떨어졌다.

“우, 으, 크흐……!”

목 안에 빠듯하게 감싸인 성기가 꿈틀거리고, 불룩하게 솟은 핏줄이 무언가를 밀어내는 감각이 전해졌다. 성기와 맞닿은 목구멍은 그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는 꿀렁거렸다.

“흐, 으…? 으읍……!”

목구멍 안쪽으로 뜨끈한 액이 쏟아졌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정액이 급하게 쏟아졌다. 부푼 혹 때문에 목이 억지로 벌어져, 삼키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크, 으, 읍…. 흐음…. 으….”

칼리번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액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삼키고 있었다. 마찰로 내벽이 열상을 입은 모양인지, 끈적한 액체가 유독 쓰라렸다. 성기가 목 끝까지 박혀 있어 혀로 정액의 맛을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도 특유의 비릿한 맛이 코 너머로 올라왔다.

숨을 쉬는 것마저도 내쉬고 들이쉬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정액이 쉬지 않고 쏟아지는 통에 칼리번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구토감에 칼리번의 가슴이 두어 번 크게 헐떡였다. 눈앞이 희게 번쩍거린다. 억지로 넘어오는 끈적한 액체에 배 속이 묵직하게 차올랐다.

“흐…. 음…. 으읏…….”

칼리번의 배가 부를 만큼 정액을 토해 내는데도, 부푼 성기는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았다. 눈앞이 점점 아득해지고 발끝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그러나 질식에서 오는 발작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래가 알파를 따라 덩달아 사정하고 있었다. 뒷구멍은 축축이 젖어 갔다. 머리카락 탓이 아니었다. 몸 안에서 만들어진 애액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칼리번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용병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은 달랐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그래서 서툴렀다.

“아, 아아…. 으…….”

칼리번은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의 공포로 갑작스레 사정하는 경우는 종종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의 전신을 떨리게 하는 것은 공포가 아닌 쾌감이었다. 칼리번은 성기가 노팅을 위해 목 안에 깊숙이 박혀 든 순간 사정했다.

“음…. 흣….”

그사이, 긴 손가락이 오랜 노팅을 버텨 낸 칼리번을 달래듯 귀 안쪽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두 마디뿐인 엄지손가락이 안쪽으로 굽어지고, 귀 안쪽을 먹먹해질 정도로 가득 채웠다. 귀와 목 사이를 오가는 핏줄이 불룩 올라섰다.

“흐읏…. 흐, 으…….”

이어지는 후희에 칼리번은 흐느끼듯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금사에 묶여 그 손길을 피할 수조차 없었다.

한참 후에서야 노팅이 풀렸다. 목 안을 채우던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하, 하아….”

전부 빠져나간 줄 알았는데, 성기가 혀 위에서 멈췄다. 칼리번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굳은 혀 위에서 일부러 느긋하게 움직이는 귀두를 느꼈다. 칼리번은 입을 벌린 채로 성기가 혀를 문지르게 두었다. 아니, 말리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가득 채우던 성기가 사라지자 목구멍으로 탁한 공기가 들어왔다. 분명 전과 같은데도, 공기가 지나치게 차갑게 느껴졌다. 입 안에 자리 잡은 좁은 두 개의 구멍을 거대한 몽둥이가 짓이겨 경계를 없애 버리고, 커다란 구멍 하나만이 뚫려 버린 것만 같았다.

“헤, 헤엑…. 우윽…!”

칼리번은 엎드린 채였고, 성기가 빠져나가자 입 안에 남아 있던 정액이 중력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칼리번은 그제야 구역질을 했다. 기침과 함께 토해 낸 정액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흐으, 아…….”

목 안쪽이 찢어졌는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윽….”

기침하는 것조차 괴로워서,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마른침을 삼켰다. 검은 두 눈은 압력에 의해 붉게 충혈된 채였다. 칼리번은 폐가 뚫린 사람처럼 쉰 숨소리를 내며 씩씩거렸다.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몸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바닥에 전신을 대고 있던 칼리번은 이제 개처럼 네발로 기게 되었다.

“아…….”

칼리번은 뺨에 닿는 손길을 느꼈다. 그 손은 칼리번 턱을 받쳐 주었다. 칼리번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으나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공기가 부족한 탓에 눈앞이 가물거렸다. 그래서, 앞에 놓인 것이 인간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

칼리번이 알고 있던 에레즈 프리드웬은 유약한 소년이었다. 칼리번에게 이런 일을 종용할 정도로 모진 성미가 못되었다. 그리고 칼리번은, 러트가 오면 동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별한 방법이 있다기보단 그저 뼈를 부서뜨릴 정도로 패면 된다. 발정기의 알파는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려 들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얄팍한 이성도 잃어버리고, 그저 수컷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다리 한쪽을 덜 부러뜨렸는지, 나무에 매달려 있던 알파가 탈출했다. 칼리번이 새벽에 쫓아가니, 산짐승을 잡아다 수간을 하고 있었다. 그 짐승은 당연히 죽고 말았다.

알파의 본성은 그랬다. 설령 그것이, 말을 더듬는 유약한 소년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칼리번은 이미 다리가 한번 부러져 보기도 했다.

“읏….”

칼리번은 낮게 신음했다. 배 속에 찬 정액이 몸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에레즈가 젖을 먹고 열이 오른 것처럼, 칼리번의 안에서도 열기가 피어올랐다.

칼리번의 몸은 금사에게 끌려가, 앞서 에레즈가 누웠던 곳에 눕혀졌다. 칼리번의 팔은 위로 올라가 짚 더미처럼 한데 묶였고 다리는 누군가를 들이기 편하게끔 훤히 벌어졌다.

“허억, 하아….”

칼리번은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거칠게 내쉬며 산짐승을 붙잡고 교미하던 알파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음으로 이어질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몸이 잘리거나 뼈가 부러진 적은 있었으나 내장이 성기로 찢어져 본 적은 없었다. 삽입을 앞두고 칼리번의 몸이 뻣뻣하게 굳자 금사가 달래듯 감겨들었다.

갑작스러운 성장. 그와 함께 자라난 머리카락은 괴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지한 왕자님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알파의 정욕이었다.

왕실은 괴물이 자라지 않도록 탑에 가둬 두었다. 잠든 본성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칼리번, 자신이었다. 그리고 칼리번은 어리석게도 스스로 괴물의 입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여섯째 왕자를 올려다보았다.

“…님….”

지금 그는 칼리번이 알고 있던 에레즈 프리드웬이 아니었다. 성스럽고도 난잡한 짐승에 불과했다. 혹여나 정신을 차리면,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포식자 앞에서도 칼리번은 그 생각부터 들었다.

그렇게 칼리번은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윽…!”

가지런한 이가 짙은 피부 위로 자국을 남겼다. 사람이 아닌, 짐승의 이빨 자국이었다. 몸 이곳저곳이 깨물릴 때마다 따끔따끔한 자극이 온몸에 퍼졌다. 옷으로 가려지는,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부분을 물릴 때마다 그는 갓 잡힌 물고기처럼 펄쩍 뛰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지 않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으읏!”

가슴을 커다랗게 물리자 칼리번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고통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이미 닳아 빠질 정도로 아픔에 익숙했다. 뾰족한 송곳니가 칼리번의 피부 속으로 박혀 들었다. 살이 더운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금니 사이로 내려온 물컹한 혀가 그 살을 핥았다.

“아…. 윽, 크윽…!”

목구멍이 찢어진 탓에 거친 숨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혀와 이가 주는 자극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혼을 내다가도 부드럽게 달랜다. 서투른 재촉에 유륜 안쪽에 숨어 있던 유두가 서서히 올라섰다. 뻣뻣하게 일어선 유두가 젖어 말랑해질 때까지 혀 안에서 굴려졌다.

쯥, 츕, 흡사 젖을 빠는 소리가 칼리번의 귓가까지 들렸다. 자극적이다 못해 아팠다. 같은 부분을 계속해서 핥아 대니 피부가 벗겨질 것만 같았다.

“흐, 으읏….”

얕은 숨만 내쉬던 칼리번이 고개를 들었다. 에레즈의 입이 하나뿐이라고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하얀 손이 반대편 가슴 위로 올라가더니, 유륜과 주변의 살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에 잡혀 솟아오른 유륜 사이로 엄지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일자로 그어진 유륜 안을 손톱으로 벌리며 숨겨진 것을 끄집어내려 들었다. 혀로 빨리는 것보다 몇 배는 자극적이어서 칼리번의 고개가 절로 왼쪽으로 치우쳐졌다. 견디다 못해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목에 감긴 금사가 개의 목줄을 당기듯 그의 목을 위로 끌어당겼다.

“헉, 크, 흐으…!”

칼리번은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훤히 드러난 그의 목에는 굵은 밧줄과도 같은 자국이 벌써 여러 줄 그어져 있었다. 손장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붉게 상처가 난 유두가 유륜 위로 밀려 올라왔다.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을 즈음에는 칼리번의 양 가슴에는 각자 다른 흔적이 남았다. 한쪽에는 선명한 잇자국과 함께 타액으로 번들거렸고, 다른 한쪽에는 붉은 손자국과 손톱자국이 남았다.

에레즈의 손이 가슴 아래에 자리 잡은 흉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짙은 갈색 피부 위를 감싸는 흰 손은 마치 코르셋을 덧대는 것 같았다. 그는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칼리번의 배 위로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는 칼리번이 목에 박히는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 낸 정액이 흰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

붉은 혀가 그것을 달콤한 크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핥기 시작했다. 혀는 하얀 자국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칼리번의 가슴과 배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도 수십 마리의 금빛 뱀이 되어 주인을 따라갔다.

“흣…….”

칼리번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몸 위를, 곤두선 유두와 유륜 위를 스르륵 오가는 자극마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견디기 힘든 일들은 아직도 수도 없이 남아 있었다. 오목한 배꼽에 고인 정액을 에레즈가 서슴없이 핥은 것처럼.

“으, 흐으…. 읏…….”

강제로 동굴 천장만을 보고 있던 칼리번은 예상치 못한 자극에 몸을 뒤틀었다. 양팔에 묶인 금사가 그를 바깥쪽으로 당겼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배꼽 안을 파고들자 주변에 자리 잡은 복근이 눈에 띄게 꽉 조여졌다. 그로 인해 배가 아플 정도였다. 배꼽 아래에 자리 잡은 편편한 아랫배와 골반 주위를 금사 칭칭 감아 묶더니, 칼리번의 미약한 반항마저 막았다.

칼리번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에레즈는 그곳에 고인 정액을 전부 핥아 먹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곳을 혀로 쑤셨다.

“윽, 으…. 으읏…!”

이미 한번 사정한 칼리번의 성기가 조금씩 딱딱해졌다. 배꼽 안으로 젖은 혀가 파고드는 것이 마치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배 속이 쑤셔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누군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흩트려 놓은 모양이었다.

“흐…….”

구멍 난 목에서는 자꾸만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칼리번은 숨이 부족해 헐떡거리면서도 이를 꽉 깨물었다. 금사가 목을 계속 조이자, 입 안에 남은 정액과 피가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때, 칼리번의 한쪽 발목이 허공으로 들렸다. 근육으로 감싸인 두꺼운 허벅지가 함께 올라갔다. 푸줏간에 걸린 고기처럼 한쪽 다리가 위로 들리자, 반쯤 선 성기와 아랫구멍도 훤히 내보여졌다.

“…하아, 크으….”

칼리번의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으나 허벅지 위로 경련만 일어날 뿐이었다. 자랑스레 벌려 놓은 꼴이 꼭 통구이 되기 직전의 짐승 꼴이었다.

칼리번이 몸에 힘을 너무 준 나머지 바들바들 떠는 동안, 아랫구멍으로 무언가 뭉툭한 끝이 닿았다. 낯선 감각에 칼리번은 검은 눈을 깜박였다. 처음에는, 앞서 당한 것처럼 손가락이나 혀인 줄 알았다. 그것이 입구 주변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러나 그 두께나 단단함은 손이나 혀, 금사와는 완전히 달랐다.

“—!”

입 안에서 이미 한 번 긴 사정을 마쳤음에도 알파의 성기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성기의 끝이 맛을 보듯 구멍 안으로 움푹 파고들었다. 금사가 부지런히 오가던 입구였으나, 칼리번이 몸에서 힘을 풀지 않은 탓에 꽉 다물린 상태였다.

“흐, 후으….”

이미 입으로 한번 받아 낸 성기였다. 곧 같은 일이, 아니, 그보다 더욱 심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칼리번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칼리번 본인이 여태껏 성적으로 둔하고 경험이 없었다고는 하나, 아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언제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살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러트에 들어선 알파가 눈이 벌게져서 수간 등의 괴상망측한 자위를 저지르는 모습, 발정기에 들어선 짐승들이 헐떡이며 번식하는 모습, 인간 사내들이 마물에게 끌려가 강간을 당하는 일도 마주해야만 했다.

설마 자신이 ‘당하는’ 처지에 놓일 줄은 상상조차 못 해 보았으나…. 적어도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칼리번은 자신이 열리지 못할 것이라는, 허튼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알파의 성기가 오메가의 입구를 지분거리자, 꽉 닫혀 있던 안쪽에서 애액이 흘러나와 귀두를 적셨다. 칼리번은 입구가 조금씩 열리는 과정을 두 눈이 아닌 피부로 느꼈다. 이상한 초조감에 칼리번은 입술을 깨물었다. 딱딱하고 메마른 자신의 몸은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응, 으읏!”

아랫구멍은 전혀 다른 부위인 것처럼 두툼한 귀두를 삼켰다. 칼리번은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성기를 잊기 위해 차라리 혀를 깨물었다. 칼이나 화살, 마물의 이빨에 몸을 찔리는 것과 비슷했으나, 전혀 다른 고통이었다. 몸 안에 잠들어 있던 감각이 강제로 열리는 것만 같았다.

“아……. 흐, 아……!”

칼리번의 숨소리가 비명처럼 높이 올라갔다. 귀두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간 후, 불룩 솟아오른 혹이 입구를 세게 짓누른 탓이었다. 기둥을 두른 혹은 화살촉 모양의 귀두보다도 훨씬 두껍고 컸다. 그대로 밀고 들어간다면 입구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아악…. 하아….”

칼리번의 몸 안에 박혀 들었던 성기가 뒤로 빠져나왔다. 여기서 물러나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희망을 자신도 모르게 품었다. 그러나 성기는 전부 빠져나오지 않고 귀두의 갓 부분에서 멈췄다. 정말 화살이 박힌 것처럼 몸 안에 걸리는 이물감에 칼리번이 낮은 신음을 흘릴 때였다.

“흡……!”

성기가 퍽, 소리를 내며 칼리번의 안으로 세게 박혀 들었다. 두 번째 혹이 좁은 안으로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 주변을 때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성기의 앞부분만 넣고 빼는 추삽질이 이어졌다.

“흐, 아! 아읏…! 그, 그마…….”

알파의 성기가 걸리고, 부딪치자 마찰열로 입구가 화끈거렸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안에 고여 있던 애액이 추삽질에 빠져나와, 입구와 성기를 적셨다. 그러나 처음 알파를 받아 보는 입구는 좁고 뻑뻑하기만 할 뿐 유연하지 못했다.

“아악, 아…. 크윽…! 으…. 아, 아흐, 파…!”

성기가 부딪칠 때마다 칼리번이 뱉어 내는 숨도 함께 떨렸다. 성기가 전부 들어갈 때까지 이 무의미한 씹질이 반복될 것 같았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상대는 지능이 낮아진 짐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리번도 마찬가지였다. 알파의 성기가 입구를 치덕거리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성기가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칼리번의 양팔을 속박하던 금사 중 일부가 느슨해졌다. 여전히 금사가 딸려 오기는 했지만, 칼리번은 한쪽 팔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손목은 피가 통하지 않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저릿저릿했다.

칼리번은 그 손을 아래로 뻗었다. 그러고는 에레즈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시선을 아래로 둘 수 없어 더듬거리고 서툰 손길이었다.

“윽…….”

꽤 많은 부위를 삽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반 이상이 남아 있었다. 칼리번은 그의 성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두 번째 혹 이후로도 기둥에는 가시처럼 핏줄이 울퉁불퉁 솟아나 있었다. 성기를 감싸 쥔 손안에서 빠른 박동이 느껴졌다.

‘이걸, 전부, 삼켜야….’

칼리번은 성기를 몸에서 빼낸다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처럼 생각했다. 반쯤 뜨인 그의 검은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칼리번은 천천히 손을 움직이며 성기와 입구가 이어진 곳을 찾았다. 관계를 해 본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흐, 하으….”

칼리번은 손가락으로 입구를 스스로 벌렸다. 검지와 중지 사이로 밀고 들어온 혹이 닿았다. 부푼 알파의 혹은 입구보다 훨씬 두꺼워서, 이대로는 구멍을 찢을 것 같았다.

칼리번이 입구를 벌리고 있자, 성기도 무작정 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꾸라지가 진흙탕에 파고드는 것처럼 방향을 바꿔 안으로 들어오려 나름대로 애를 썼다. 칼리번은 두 눈을 찡그렸다. 몸 안을 찔리는 감각이, 방향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성기가 더 안쪽으로 파고든다면….

“……후, 읏….”

입구에서 찔꺽대는 살 소리가 이어지더니, 칼리번은 마침내 알파의 혹을 삼켰다.

“아, 아…?”

처음 삽입에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과 달리, 가장 힘겨운 부분이 들어가자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기둥은 손가락 사이를 긁으며 단숨에 파고들었다.

“허억—!”

칼리번은 알파의 성기가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감각을 손과 배로 고스란히 느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입구를 벌리던 손으로 에레즈의 성기를 쥐었다.

“커, 윽, 흐으……!”

그러나 금사가 칼리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칼리번의 손이 빠져나가자 남은 한 치마저 전부 박혀 들었다.

“아, 아악…!”

옅은 음모가 칼리번의 입구 주변에 닿았다. 하얗고 소년 같은 몸 아래에 깔린 짙고 두툼한 몸은 서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른 육체였다.

“흐으, 후, 으…….”

칼리번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배 속이 더부룩했다. 알파의 정액이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성기가 꿰뚫기까지 하니 몸 안에 공간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가장 원하는 것을 얻게 되자, 더는 반항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금사의 속박이 느슨해졌다. 옳은 판단이었다. 실제로 칼리번은 꼼짝도 할 수 없었으니.

교수형에 처한 사람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칼리번은 그나마 머리를 숙일 수 있었다. 목이 아프고 배 속이 버거워서, 그는 몇 번이나 마른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뱃속에 품은 성기를 몸 안쪽으로 느꼈다.

에레즈는 허공에 들린 칼리번의 한쪽 다리를 품에 안았다. 칼리번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다는 에레즈의 어깨 위로 걸쳐졌다. 칼리번은 혹시나 그가 정신이 들었을까 싶어, 그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그러나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허벅지에 에레즈의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읏…!?”

철썩, 맞붙어 있던 몸이 다시 부딪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언제까지고 몸 안에 머물러 있을 것 같던 성기가 움직였다. 혹이 나고 가시가 돋은 성기가 칼리번의 내벽을 긁어 댔다. 한번 앞뒤로 오가는 것만으로도 내벽 전체가 자극을 받았다. 추삽질이 계속되자 쾌감은 내성이 생기기는커녕 더욱 예민해지고 증폭되었다.

“아, 아악…. 아…!”

칼리번은 입을 벌린 채 가장 본능적인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울부짖는 소리였지만 고통뿐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칼리번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제 신음을 듣고는 수컷의 아래에 짓눌려 박히던 암컷의 소리를 떠올렸다.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높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들뜬 신음은커녕, 자위조차 해 본 적 없는….

“흐, 아앗…!”

러트에 들어선 알파에게 몸을 내주었다.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괴물처럼 울룩불룩한 성기에 배 속을 찔릴 때마다 허리가 서고 내벽이 꽉 조여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소리가 칼리번의 입 밖으로 솟구쳤고 정액이나 피가 아닌 애액이 알파의 성기를 적셨다.

에레즈는, 아니, 그 알파는 칼리번의 한쪽 다리를 끌어안은 채로 허리만을 거칠게 움직였다. 그가 추삽질을 반복할수록 칼리번의 상태는 더욱 심해졌다.

철썩, 살을 때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부딪칠 때마다 살이 접히고 가슴이 흔들렸다. 배 속에 가득 찬 정액은 마치 기름처럼, 입구를 오가는 마찰로 인해 불을 얻었다. 칼리번의 몸에 점점 불이 올랐다. 이어진 입구로 애액이 흘러내리고 짙은 피부 위로 땀이 맺혔다. 그걸로도 모자라 눈물이 고였다.

“흐, 아아…. 아, 아앗…. 으읏……!”

지금 칼리번의 배 속은 알파의 정액과 좆으로 가득했다. 흉측하게 생긴 성기는 칼리번조차 모르는 곳까지 쑤셔 댔다. 유두가 유륜 속에 감춰져 있던 것처럼, 몸 안에 숨겨진 감각을 끄집어냈다.

“아, 응…. 하, 으읏…! 흐으, 아…. 윽!”

칼리번의 몸은 이미 여러 차례 에레즈가 드나들었다. 목구멍으로 한 번 받았고, 그전에는 금사가 그의 몸 이곳저곳을 파고들며 넓혀 주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무지한 착각이었다. 이제 와 되돌리기란 불가능했다. 러트가 끝날 때까지 버티는 것뿐…. 몸으로, 버티는….

“그, 그마…. 아, 으읏…. 아, 아파…!”

알파에게 쉴 새 없이 박히던 칼리번이 돌연 앓는 소리를 내며 급하게 몸을 틀었다. 창에 꿰뚫린 짐승처럼 성기를 빼내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그럴수록 몸에 박힌 좆이 얼마나 단단하고 열이 올랐는지를 깨달을 뿐이었다. 대답으로 돌아오는 것은 매질이나 다를 바 없는 허리짓이었다. 어리고 경험 없는 알파는 쉴 줄을 몰랐다. 철썩, 철썩, 알파의 아랫배와 고환이 입구 주변의 엉덩이를 때렸다.

“아, 안… 돼, 아, 안, 흐으…!”

알파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벗어나려 드는 칼리번의 신음이 더욱 절박해졌다.

“아, 아……!”

그러더니 금사조차 만져 주지 않았는데, 배 위에서 흔들리던 칼리번의 성기가 정액을 울컥 쏟아 냈다.

“흐으, 크으……. 으응, 으으……!”

앞으로 사정하는 와중에도 알파의 성기는 배 속을 퍽퍽 때려 댔다. 앞뒤, 어느 쪽도 쉬지 않는 자극에 칼리번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벌어진 턱이 벌벌 떨리며 침을 흘렸다.

“흐아, 아, 아…!”

칼리번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가 흘리는 것은 정액이나 침뿐만이 아니었다. 솟아오른 유두 끝이 간지러웠다. 쾌락에 온몸을 지배당한 칼리번은 금사가 닿아서라고 판단했지만, 실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유두 위로 정액만큼이나 흰 액체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동그랗게 맺힌 젖은 더는 뭉치지 못하고 가슴 위로 주룩 흘러내렸다. 짙은 피부 위로 쏟아진 액체들은 숨길 수 없이 확연히 드러났다. 달큼한 냄새에 알파는 칼리번의 허벅지를 끌어안은 채로 그의 몸을 짓눌렀다.

“아, 아—!”

그만큼이나 연결이 깊어졌고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알파는 입술에 닿는 대로 전부 핥았다. 피부 위로 번진 땀을 핥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젖을 빨았다.

짐승은 엎드려 뒤로 관계를 가진다. 마주 본 자세로 관계를 맺는 것은 에레즈가 아직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오메가가 흘리는 정액과 젖을 남김없이 먹어 치우기 위해서였다.

* * *

길고 지독한 애욕이 이어졌다.

혹으로 울퉁불퉁한 살 몽둥이가 좁은 통로를 짓누르며 오갔다. 한번 박히면 길이 새로 나 버려, 인간 사내는커녕 마물의 좆으로도 다시는 자극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배 속이 홧홧했다. 칼리번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흐으, 아, 아아…! 그, 그만…!”

칼리번의 손은 거칠고 컸다. 핏줄이 솟은 팔뚝과 두꺼운 허벅지는 쇠붙이처럼 단단했고 넓은 어깨, 배는 굵은 나무처럼 부러질 일 없이 두툼했다. 평범한 사내보다 큰 체격도, 사나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번도 약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 안쪽이 이토록 나약한지 알지 못했다. 내장이 강하다든가, 내벽이 강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 파아, 아으, 흣…!”

퍽, 퍽 얻어맞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박혔다. 배를 감싼 금사가 칼리번을 당겼고 허리가 바닥에서 떴다. 배 위로 뻣뻣하게 선 성기에서 정액보다는 옅고 멀건 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칼리번의 몸 위는 몇 번이나 사정한 흔적이 희게 남아 있었다. 더는 앞을 만지거나 요도구를 쑤실 필요가 없었다. 안쪽에 알파의 좆이 박히는 것만으로도 사정에 이르렀다.

지독할 정도로 긴 정사였다. 칼리번의 몸 안은 바깥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해서, 알파의 정액과 오메가의 애액으로 가득했다. 성기가 오갈 때마다 입구 너머로 흘러나올 정도로 젖었지만, 모두가 원하는 끝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노팅.

목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부풀어 오르던 감각은 아직도 생생했다. 앞서 경험한 육체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품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알파의 성기가 안쪽을 쉬지 않고 쑤셔 대니, 이제는 차라리 몸 안이 찢어져도 좋으니 어서 끝을 맺길 바랐다.

“하, 으…! 큿!”

가장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온 성기가 그대로 머물렀다. 칼리번은 배 속이 뚫리는 듯한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하아…. 하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 위에 거친 숨을 내뱉었다. 잠시 추삽질을 멈춘 그는 칼리번의 안에 머무른 채로 젖을 빨기 시작했다. 강렬한 쾌감을 느낄 때마다 칼리번의 가슴이 젖을 흘리는 탓이었다. 가슴의 위와 아래를 칭칭 감은 금사는 칼리번의 가슴을 짓누르며 속박하는 동시에 도드라지게도 했다. 금사에 짓눌려 튀어나온 짙은 색의 가슴은 알파의 눈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읏…. 흐으…!”

고인 젖이 세게 짜일 때마다 칼리번이 치를 떨었다. 그가 팔을 빼내려 들자, 금사는 단단히 그를 고정시켰다. 몸에 힘을 주니, 결과적으로는 젖이 더 많이 흘러내리게 되었다. 한동안은 꼼짝없이 젖을 빨리게 될 것이다. 흉흉한 알파의 성기에 쉬지 않고 쑤셔지던 칼리번에게도 잠시간의 휴식이었다.

“…하, 하아….”

칼리번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찢어진 목은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러나 목 안쪽은 여전히 뻑뻑했다. 칼리번은 고개를 최대한 숙여 에레즈를 보았다.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몸 위로 길게 흘러내렸다. 지금은 금빛 실뭉치처럼 의지가 없지만, 칼리번이 본격적으로 반항한다면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위협할 것이다.

동료들에게 들은 바로는 알파의 러트는 3일에서 일주일 정도 긴 기간 동안 이어진다고 했다. 이제 고작 하룻밤이 지났다. 이렇게 이어진 채로 며칠은 더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중노동을 며칠이나 더 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허리가 뻐근해져 왔다.

“…….”

휘이, 칼리번은 에레즈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그는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칼리번의 젖을 빨고 있었다.

“…….”

칼리번이 휘파람으로 다시 한번 부르자, 그제야 젖을 빨던 짐승이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에레즈의 얼굴을 반 이상 가린 채였다.

“…….”

칼리번이 내는 소리가 이상한지 그는 뚫어져라 입만 바라만 보았다. 감정이 일절 담기지 않은 얼굴이 낯설다. 칼리번은 에레즈 프리드웬이 아닌 처음 보는 마물과 교미를 하는 것만 같아, 괴로워졌다.

이성을 잃었을 때의 에레즈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알파의 본성 때문인지, 원래의 그에게는 없는 과격한 폭력성과 잔인함이 만연했다. 그러나 결국 같은 사람이다. 이 또한 에레즈 프리드웬이다.

“하아….”

칼리번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힘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알파는 궁금한지 칼리번의 반으로 몸을 접으면서까지 상체를 칼리번에게 숙였다.

“으극….”

성기를 품은 배가 짓눌리자 내벽이 더욱 자극을 받았다. 휘파람이 멎었다.

“……음.”

칼리번이 다시 휘파람을 불기 전, 입술이 닿았다. 심리적 억압이 사라진 알파는 입맞춤의 방식조차 달랐다. 에레즈는 소리를 내는 입술이 신기한지 세게 빨았다. 이빨로 입술을 깨물어 벌리더니, 입 안을 서슴없이 핥기도 했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 망설이고 망설이다, 간신히 입안으로 들어오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알파는 휘파람을 찾겠다는 듯, 혀로 입천장과 혀 아래, 치열을 마음껏 훑었다. 칼리번은 그의 혀를 정신없이 받아 냈다.

“흐읍…!”

칼리번이 방심한 사이, 혀가 목구멍까지 닿았다. 목젖과 주변의 말캉한 살을 핥자 따끔거리는 고통과 구토감이 올라왔다. 칼리번의 눈이 감길 듯 가늘어졌다. 아래로는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외부의 자극에 성기를 품은 내벽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칼리번이 알파의 성기를 주무르듯 수축을 반복하자, 못처럼 깊이 박힌 허리가 서서히 몸 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다시… 긴 정사가 시작됨을 알았다.

“…흐음, 앗…. 아, 읏…!”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으나 당장에라도 다시 붙을 듯한 거리였다. 아래가 다시 쑤셔지는 통에 칼리번의 입이 쉬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이 추삽질에 흔들릴 때마다 입술이 에레즈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밤새 박히는 통에 아래가 헐 정도로 고통스럽다가도, 에레즈가 움직이기만 하면 어째서인지 평소에 나오지 않던 신음이 나오게 된다. 입술을 두드리는 입맞춤을 반복한 칼리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에레즈의 숨결이 뺨에 닿았다. 그가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칼리번의 허벅지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읏, 큭!”

입술을 멀리한 대가일까? 훤히 드러난 칼리번의 목덜미로 송곳니가 박혀 들었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검은 눈동자가 알파를 보았다. 칼리번의 시선이 돌아오자, 에레즈는 목에서 입을 뗐다. 구멍을 오가는 성기가 배 속을 빠르게 찍어 눌렀다.

“흐, 하아, 아…!”

칼리번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에레즈는 안을 파고들 때마다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윽…. 아, 아앗…!”

짐승의 맨 얼굴에 드러나는 찰나의 욕정에, 칼리번의 성기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칼리번은 성녀님들처럼 투철한 봉사 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무장되지도 않았고, 기사들처럼 충성심과 기사도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병치고는 예의를 차리는 편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그는 돈을 보고 이익을 좇는 용병이었다. 표정이 바뀌지 않는 둔감한 자였지만, 득실거리는 마물의 본성이 그의 안에도 있었다. 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의롭고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칼리번 자신은.

러트로 괴로워하는 알파를 위해서 자진해서 몸을 내줄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매일 밤 부하들의 성기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레즈 프리드웬이 갑작스러운 러트로 괴로워할 때, 칼리번은 망설임 없이 몸을 바쳤다. 철저히 고민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 그것은 전부 핑계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 자체로 유혹이었다. 칼리번은, 그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알파를 원하는 오메가의 본능을….

“으, 큭…. 아…앗…!”

부푼 성기가 내부를 깊숙이 찌를 때마다, 칼리번의 가슴에서 젖이 왈칵 새어 나왔다. 에레즈에게 갑작스레 러트가 온 것처럼, 어쩌면 자신에게도 발정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오메가도 발정기라는 것이 있나? …모른다. 모르니까, 오메가의 본능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죄를 오메가에게만 몰아주기에는 어딘지 꺼림칙했다. 그래서 칼리번은 금사에게 손발이 전부 구속되었을 때 반항하면서도 못내 안도했다. 이해 불가능한 이 감정을,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끝낼 수 있게 되어서. 알파의 발정이 식으면 이 영문 모를 감정도 함께 증발하여 묻힐 것이다.

칼리번의 안은 젖었고, 뜨겁고, 부드러웠다.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자신조차 몰랐을 연약함이었다. 그런 곳이 억지로 벌려지고 마찰 당한다. 찔리고 쑤셔져서 평생 알지 못했던 쾌락이 끄집어 올려졌다.

<…오, 여섯째 에레즈 프리드웬 왕자의 데뷔탕트구나.>

칼리번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순간, 과거가 겹쳐졌다.

에레즈 프리드웬.

에레즈….

성과 이름 중간에 붙은 이름은 더 많았지만, 대표적으로 불리는 그 이름이 너무 쉬웠다. 발음이 부드럽고, 흐르듯 이어졌다. 칼리번은 처음 그를 만난 이후, 혼자서 몇 번이나 그 이름을 되뇌었다.

“…….”

칼리번은 휘파람 대신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왕실의 위광이 닿지 않는 어두운 숲, 동굴 속에서조차 감히 소리 내 부르지 못했다. 칼리번 자신만이 눈을 뜬 이 상황에서 중얼거린 단 한마디는, 에레즈가 눈을 뜨면 사라질 것이다.

“…….”

칼리번은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렀다.

에레즈….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 그러한 추잡한 소리에 성스러운 이름은 금세 묻혀 버렸다.

에레즈, 에레즈….

칼리번의 허리를 쥐고 굶주린 것처럼 허리 짓을 하던 알파가 문득 멈췄다. 칼리번의 몸이 이제는 버릇처럼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열기뿐이던, 초점이 없던 푸른 눈에 조금씩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칼리번은 그 변화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아….”

푸른 눈이 칼리번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 * *

“나, 나…….”

에레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느끼는 혼란이 칼리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끊겼던 기억이 돌아오고 처음 본 것은 엉망진창으로 범해진 칼리번의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몸이 연결된 이 상황을 처음인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레즈가 겁을 먹고 빠져나가려 들었다.

“흐읏….”

성기가 뽑히는 감각에 칼리번은 낮게 신음하며, 자신도 모르게 내벽을 꽉 조였다.

“아, 앗…!”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에레즈는 행동을 멈추고 파르르 떨렸다.

“윽…. 이, 이상해…. 아, 아래가… 너, 너무, 아, 아파….”

에레즈가 발기한 성기를 빼지도, 그렇다고 사정하지도 못하고 울먹였다. 그제야 에레즈는 불룩 솟아오른 성기와 입구가 연결된 아래를 보았다.

“이… 이, 이게… 뭐, 뭐야…?”

에레즈는 푸른 두 눈을 크게 뜨고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갑자기 ‘러트’라는 것이 와서, 성기가 괴물처럼 흉측하게 변해 버린 것은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칼리번의 몸 안에 전부 들어가 있는 것일까?

“아, 안 빠져….”

에레즈는 칼리번의 어깨를 쥐고는 몸을 뒤로 빼려 들었다.

“아…! 으, 지, 진…정하십, 시… 으읏…!”

칼리번은 잔뜩 쉰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몸 안이 따끔거리며 쓰라렸다.

“자, 잠시만…. 일단은…. 윽…. 우, 움직이지 마시고….”

무작정 빼려고만 하는 움직임에 칼리번이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칼리번의 반응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에레즈는 영문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아…. 미, 미안…!”

에레즈는 돌이 된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멈춘 채로 사과했다. 심지어 질끈 감은 두 눈을 뜨지도 못하고, 허공에 뜬 두 손마저도 아래로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멈 있었다.

에레즈가 이성을 잃은 사이, 그와의 성교로 몇 번이나 사정한 칼리번의 몸은 평소보다도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상대방의 긴장감까지도, 허벅지에 닿은 피부를 통해져 느껴질 정도였다.

“…눈은, 뜨셔도….”

허공에 뜬 두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꼼짝하지 않자, 칼리번이 보다 못해 말했다.

“응….”

허락을 받고 나서야 에레즈의 한쪽 눈이 간신히 떠졌다. 일시적인 공황 상태에서 벗어났는지,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짙은 피부 위로 남은 흰 자국들을….

에레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카, 칼…? 네, 네 손이….”

에레즈의 시선이 금사로 묶인 칼리번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서둘러 묶인 손목을 풀려 들었다.

“자, 잠시만…. 우, 움직이면….”

칼리번이 억눌린 목소리로 만류했다. 에레즈가 요란하게 움직이는 통에 칼리번의 몸 안에서 성기가 얕게 휘저어졌다.

“아, 앗….”

그리고 칼리번이 괴로워하는 만큼 에레즈도 몸을 움츠렸다.

“…미, 미안, 해….”

결국,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바닥에 제 손을 겹치는데 그쳤다. 가슴이 맞닿고, 깊이가 더 깊어지는지도 모르는 채.

칼리번은 이를 악물어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그의 손가락이 하얀 손 아래에서 꿈틀댔다. 손가락이 얽히는 것만으로 심장 소리가 귀 안쪽을 세게 때릴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결혼 후, 하는 일… 아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숨을 고른 후, 칼리번이 물었다. 분명 그는 순결을 잃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고 대답했었다.

“그, 그건…. 내, 내 몸에서, 아, 아기 씨가 나오면… 부, 부인 모, 몸 안에 들어가서…. 아, 아기가, 새, 생긴다고….”

“그… 아기 씨가,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

“…….”

“……아!”

실전에 대해서는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서, 설마…?”

에레즈는 연신 아래를 보았다.

“…마, 말도 아, 안 돼…! 이, 이렇게, 아, 아기 씨를, 너, 넣어야 하, 하는, 거, 라고…?”

“…….”

“……으, 으으….”

믿기지 않는지 에레즈는 금사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칼리번의 몸 안에 들어간 채로 꼼짝도 못 하고 떨고만 있었다.

“…후우….”

칼리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절로 묵직해졌다.

“…미, 미안….”

머리 위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가… 또, 나, 나도 모, 모르는 사이에, 너, 너를…… 아, 아프게 하, 한 거지…?”

“…….”

“이, 이런, 일을, 해, 해 버리다니….”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우선은 러트를….”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 일의 잘잘못을 따져 보았자 지금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일단은 러트를 끝내는 것이 중요했다.

“나, 나 때문에….”

에레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 잘못이, 아닙니다.”

칼리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묶인 금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또 절망에 빠져있다. 이러다 혹여나 금사가 자기 자신을 공격할까 두려웠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끝까지 추궁하지 않은 칼리번의 탓이었다. 탑에서 갇혀 지낸 그로서는 짐승의 짝짓기조차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성교를 할 수 있는지, 자세히 알려 줄 사람도 없었을 테니….

“…그, 그때, 주, 주지 말았어야 했어.”

그때, 에레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네?”

금사에만 신경을 쓰던 칼리번이 뒤늦게 눈치챘다.

“꽃, 을….”

그 말에 칼리번의 가슴이 칼로 쑤셔진 듯 아파졌다.

“나, 나랑 어, 얽히지만 아, 않았어도…. 나 같은 걸, 채, 책임질 필요도 없고…. 다, 다칠… 일도 어, 없고, 이, 이런 일도….”

“…….”

“…그, 그럼 너는… 날… 기, 기억조차 하지 않았, 을 테, 텐데.”

그 한마디에 칼리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묶인 팔 사이로 언뜻 보이는 입매로 쓰라린 웃음이 걸려 있다. 웃는 입매였지만, 그보다는 숨기려 드는 비겁함에 가까웠다.

“…….”

어떻게… 그런 말을.

그에게 들인 모든 수고와 노력을, 고뇌와 선택을 통째로 부정당했다. 칼리번은 묶인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금사가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알면서도 부질없는 반항을 했다. 팔이 꽉 죄는 고통으로 다른 감정을 희석시키고 싶어서였다.

“너, 너는… 나, 나한테 잘, 해, 해 줬는데…. 나, 나는 널, 계, 계속 아, 아프게만 하, 하고….”

에레즈 프리드웬은 마치 파내도 파내도 끝없는 우물 같았다. 그의 눈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아니라,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이라 도무지 마르질 않는다. 설령 칼리번이 젠과 같이 말재간이 뛰어난다 한들, 그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칼리번이 나이가 많다고 해도 어렸을 때는 그와 같지 않았다. 나름대로 사고를 쳤고 젠에게 무진 얻어맞으며 교정 당하고는 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일희일비하는 에레즈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나약함은 천성일까? 프리드웬 왕실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

에레즈 프리드웬처럼 겉이나 속 모두 섬세한 사람은 처음 대하는지라, 칼리번은 그를 하염없이 조심스럽게만 대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금방 부서질 것처럼….

“하아….”

칼리번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정말로 각오를 다져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이 상태로는 에레즈 프리드웬을 지켜 줄 수 없으니 말이다.

“…왕자님.”

칼리번은 쉬어 버린 목에 힘을 주고는 단호하게 불렀다.

“왕자님.”

그러나 에레즈는 자기 안의 슬픔에 빠져 칼리번의 부름에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왕자!”

칼리번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어?”

눈물을 쏟아 내던 여섯째 왕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칼리번이 배에 힘을 준 탓에 내벽을 조이게 되어, 에레즈가 입술을 깨물었다.

“…님. 팔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다시 이전의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뭐……? 그, 그건….”

화를 내는 듯하면서도 유한 칼리번을 태도에 에레즈는 얼떨떨해했다. 한 번도 부드럽게 혼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풀어주십시오.”

“…나, 나는, 푸, 풀어줄 수가, 어, 없어….”

“압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 숲에서 함께한 지가 벌써 며칠이던가? 칼리번은 에레즈가 스스로 뭘 할 줄 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막상 해 보면, 잘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열매의 껍질을 벗길 때라든가, 잎사귀를 엮어 이불을 만들 때처럼….

“응…?! 으, 응…. 미, 미안해….”

칼리번이 당장에라도 씹어먹을 듯 노려보자, 에레즈가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알면서 왜 부탁을 한 것일까? 당혹에 찬 얼굴에는 한점의 의문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왕자님께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칼리번은 그동안 에레즈를 보며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토해 냈다. 그 말을 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찢어진 목에 피가 고이는 고통조차 이겨 낼 정도였다.

“!”

에레즈는 칼리번의 폭언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박거렸다. 평생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라고 자학해 왔으나, 면전에서 그런 말은 들어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 그럼… 우, 왜, 부, 부탁한 거, 거야…?”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기세에 기가 죽어 물었다. 이 순간, 칼리번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하얀 얼굴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데, 그 아래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가르쳐 드리면 곧잘 하셨잖습니까.”

칼리번은 앞서 외친 것보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에레즈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저보다도 훨씬 잘하셨죠.”

“그, 그건….”

에레즈의 뺨이 붉어졌다.

“그러니까…. 제가 왕자님의 머리카락 때문에, 움직일… 수 없으니… 왕자님께서, 제게 입 맞춰 주십시오.”

칼리번은 대검을 달라는 듯이 요구했다.

“으, 응…? 그, 그게… 무, 무슨….”

에레즈는 그의 논리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자님. 아마 왕자님의 머리카락은… 왕자님과 분리된 괴물도, 남을 무조건 상처를 입히기만 하는 무기도… 아닐 겁니다.”

칼리번은 각양각색의 마물과 상대해온 용병이었다. 물론 에레즈와 같이 머리카락을 무기로 쓰는 알파는 처음이지만, 어떤 종류의 알파든 공통된 부분이 있었다.

“…결국 왕자님의 일부입니다.”

결국 알파 자신의 의지를 따른다는 점이다. 칼리번의 다리를 부러뜨린 후, 금사는 마치 책망하듯이 에레즈 자신의 몸을 꿰뚫었다. 그 후에는 칼리번의 옷이 되어 주거나 부러진 다리를 지지해 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 일부….”

“그러니까… 왕자님께서 하고 싶으실 때까지 하셔야… 이 머리카락도 풀릴 겁니다. 겉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하고 싶으신 대로, 말입니다.”

칼리번은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 모르겠어.”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칼리번은 자신이 에레즈의 성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왜냐면 알파는, 씨물을, 전부, 싸야… 발정이, 멎기 때문입니다.”

칼리번은 협박이라도 하듯 으르렁거렸다. 처음부터 묶어 놓고 팼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칼리번의 잘못이기도 했다.

“아, 앗…!”

에레즈는 당황했는지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나 여리고 순진했으나… 그의 아래는 여전히 칼리번의 내부를 쑤시고 있었다.

“…….”

사실 칼리번도 에레즈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칼리번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젠의 밑에서 교육을 받은 이상 온갖 종류의 욕은 다 알고 있었다. 그가 굳이 욕을 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젠이 해야 할 말과 욕을 다 뱉었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천박한 말을 입에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은연중에 에레즈의 앞에서 말씨를 다듬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내가 되어 가지고 언제까지 애새……. 아니, 어린애처럼 우실 겁니까!”

에레즈가 본격적으로 울 것 같자, 칼리번이 호통을 쳤다. 힉, 위에서 작은 새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어, 어떻게… 그, 그런 말을…!”

“…….”

“어, 어린애라니….”

그렁그렁 고인 에레즈의 눈물이 칼리번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칼리번의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원래는 애새끼라고 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그는 소리 내서 울고 말 것이다.

“왕자님….”

칼리번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에레즈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칼리번의 에레즈 또래의 부하도 여럿 데리고 있었다. 만약 부하가 이토록 나약하게 굴었다면 주먹부터 날아갔을 것이다.

“왕자님께서…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시 정신을 잃으실 겁니다.”

“……윽….”

“정신을 잃으시면… 머리카락이 멋대로, 공격적으로… 굴 겁니다.”

그러나 단호한 결심과 달리, 칼리번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었다.

“제 손으로 러트를 끝내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흑, 윽…….”

칼리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깨질 듯 연약한 탓에, 어느샌가 자신도 과도하게 물러져 버렸다는 사실을.

“…나, 나는, 네, 네가 다, 다치는 게 시, 싫어서…! 그, 그런 내가 시, 싫어서 사과한, 것뿐인데….”

“…….”

“왜, 왜 화, 화를….”

“…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화, 화내지 마, 말아….”

“화내는 게 아닙니다.”

“거, 거짓말……. 지, 지금도, 화, 화내고 이, 있잖아….”

여섯째 왕자는 바들바들 떨면서 칼리번을 탓했다. 확실히 화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서운 표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대체로 그런 표정이었다.

“화낸 게 아니라 큰 소리를 말한 겁니다.”

“그, 그래도….”

“그만 우십시오.”

칼리번이 달랠수록 그는 더욱 울었다.

“우셔도 지금은 달래 드릴 손이 없습니다. 묶여 버려서….”

“그, 그건… 미, 미안해…. 미, 미안하다고, 계, 계속, 사, 사과했, 는데….”

칼리번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건 사과가 아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자기방어에 불과했다. 남을 공격할 수 없는 사람이, 한 조각밖에 남지 않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는 방어.

어린애 주먹질보다도 못할 정도로 나약하고, 남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상처입히는 바보 같은 공격이었다. 아무도 에레즈의 말에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아팠다. 그 이유는 칼리번 자신도 몰랐다.

에레즈가 평생을 탑에 갇혀 지내고 괴물 취급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왕자님은 왕자님이었다. 설령 그가 식사를 거의 먹지 못했다고 한들, 흙을 파서 벌레와 나무뿌리를 먹지는 않았을 테니까. 에레즈 프리드웬과 칼리번이 겪은 고통은 종류가 달랐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키워 주지 않았을 것이다. 혼날 만한 일을 시키지도 않고, 혼을 내지도 않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규범도, 예절도 몰라 헤매는 아이를 그저 어둠 속에 던져 두었을 것이다.

칼리번이 비록 잃었다고 한들 양부모에게 배운 것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했다. 그럴 기회조차…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박탈당했다.

“…못 하는 일을 해내라는 게 아닙니다.”

칼리번의 검은 눈동자가 금사를 힐끗 보았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눈동자는 다시 굴러, 에레즈에게 향했다.

“모, 못 해, 나, 나는… 아, 아무것도…. 어, 어떻게, 하, 하는지도 모, 모르겠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나, 나는… 머, 멍청해서 모, 못 알아듣는단 말이야!”

“천천히 해 보면… 될 겁니다.”

“그, 그래도, 아, 안 되면?!”

짐승조차 당연히 하는 일을 못 할 리가…. 칼리번은 깊이 숨을 내쉬었다. 에레즈의 성기는 여전히 칼리번의 배 속에서 흉흉하게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때는, 처음부터… 다시 하면…….”

“…그, 그래도, 그, 그래도 또, 겨, 결국… 아, 안 되면!?”

에레즈는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울먹거리며 물었다.

“계속 이대로….”

“…이, 이대로…?”

“…이어져 있을 겁니다.”

칼리번은 그를 품은 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게… 전부입니다.”

몸속이 꿰뚫리고 쑤셔지는 행위가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

차갑게 식은 에레즈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두려워하고 울기만 하던 여섯째 왕자가 칼리번을, 칼리번을 감싼 금사를, 그리고 주변을 보았다. 동굴 전체에 금사가 덮여 있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마치 거미줄과도 같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둘뿐이었다.

칼리번의 손가락 사이로 흰 손가락이 다가와 파고들었다. 금사가 칼리번과 그의 약지를 함께 묶었다. 칼리번은 오랜 시간 묶여 있었고, 팔에는 감각을 잃을 정도였다. 고작 금사 몇 가닥이 감겨드는 것은 느끼지조차 못했다.

* * *

성교에 있어 칼리번은 결코 선생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한 번도 경험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다니, 젠이 웃다 기절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보다도 더 무지한 자가 있었다. 눈앞이 다른 의미로 막막해졌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에레즈는 발기통이 상당했다. 칼리번의 몸 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했다. 간신히 눈물을 그치게 했는데, 이래서야 다시 울 것 같았다. 하루 넘게 발기한 상태로 좁고 뜨거운 내벽에 감싸였으니, 배출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은…. 하아…. 움직이셔야….”

칼리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 어떻게…?”

에레즈가 물었다. 이성을 잃은 알파는 본능대로 움직였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에레즈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음……. 허리를 뒤로, 천천히… 빼시고….”

“이, 이렇게…?”

“…아….”

칼리번의 지시대로 에레즈의 허리가 점점 더 뒤로 물러났다.

“자, 잠시만….”

“으, 응?!”

“…전부, 빼시면, 안 됩니다…. 왕자님.”

칼리번은 급히 에레즈를 말렸다. 알파의 성기에 난 혹이 좁은 입구에 걸린 탓이었다.

“미, 미안….”

“어차피 뺀다고 해서 빠지지도 않으니… 여기까지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으, 으응…! 그, 그럼… 이, 이제 어쩌, 지?”

“…그다음에는. 다시… 아… 안으로, 들어오시면….”

에레즈는 칼리번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움직이는 일이 에레즈 본인에게도 버거울 것임에도, 좁고 빠듯한 몸속을 힘겹게 파고들어 왔다.

“으음…. 흣…!”

알파의 성기가 다시 배 속을 빠듯하게 채웠다. 칼리번은 상기된 얼굴로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 이제, 다, 된 거야?”

“하… 아….”

“근데, 여, 여전히… 아, 아래가 아, 파….”

“아…. 아닙니다…. 그걸 계, 계속 반복해야….”

“아, 아…! 그, 그렇구나….”

몸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칼리번은 차라리 에레즈의 위에 올라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금사에 꽁꽁 묶인 채였다.

“아, 알겠어…. 아, 알 것도, 같고….”

에레즈는 결심한 듯 칼리번의 허리를 쥐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그러고는 배운 대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 윽….”

처음 러트를 겪는 에레즈의 움직임은 지독하게 서툴렀다. 이성을 잃기 전과는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달랐다.

‘알파’는 내장이 충격으로 저릿할 정도로 칼리번의 몸 안에 거칠게 박았지만, 에레즈는 길을 몰라 헤맸고 칼리번을 상처입힐까 두려워했기에 느렸다.

“앗, 아…!”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서투름이 칼리번에게는 전과 다른 쾌감을 주었다. 예상치 못한 곳을 찔릴 때마다 칼리번은 금세 함락되었다.

“카, 칼…? 마, 많이, 아, 아파? 이, 이렇게, 우, 움직여도 돼…?”

“괘… 괜찮습니다.”

“저, 정말…?”

“…네…. 읏, 네…….”

무엇보다 다른 점은, 바로 대화였다. 에레즈는 가장 본능적인 행위에서도 망설이며 칼리번의 도움을 구했다. 칼리번은 알파의 성기가 몸을 한 차례 쑤실 때마다 그것이 괜찮다는 허락을 내려야만 했다. 그것은 더는 강제가 아니라, 합의였다.

“…큿….”

칼리번은 입술을 깨물며 무한한 인내를 발휘했다. 혹여나 에레즈가 여기서 더 겁을 먹을까, 그가 아프게 들어올 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툴고 엉성한 관계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감정으로 얼룩진 에레즈의 얼굴을, 바로 아래에서 볼 수 있었다.

“흐, 읏…. 카, 칼…. 조, 좁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안에 들어올 때마다 신음했다. 벌써 몇 번이나 성기로 내부를 가르고 넓혔는데, 아직도 좁고 버거운 것일까? 눈가가 붉어진 푸른 눈, 찡그리는 얼굴이 어딘지 평소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칼리번은 아픔을 삼키면서도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하아…. 아, 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 위로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결합이 깊어질 때마다, 살이 맞닿을 때마다, 알파의 체취가 칼리번의 피부 위로 덧발라졌다. 칼리번의 내벽은 무의식적으로 에레즈의 성기를 붙잡았다.

“아…! 하, 아…. 칼….”

사정욕에 시달리는지, 에레즈는 두 눈을 꾹 감고는 칼리번을 찾았다. 그는 칼리번의 몸 안에 제 것을 깊숙이 심고는 몸을 떨었다. 아파했으나, 소년의 얼굴에는 은밀한 쾌락이 붉게 피어났다. 칼리번의 허리를 잡은 손이 떨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윽…. …님….”

칼리번은 가슴 끝이 간지러웠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이상해졌다. 에레즈가 자신을 놓지 않을 듯 붙잡고, 제 몸을 사용하는 것은 이성을 잃기 전에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알파가 아니라,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사실이 그를 고조시켰다. 비록 러트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가 칼리번을 상대로 허리 짓을 하는 것은 본인의 결정이고 의지였기 때문이었다.

“아, 읏…. 카, 칼…!”

서툰 허리 짓을 반복하던 에레즈는 결국 참지 못하고 칼리번의 몸 위로 쓰러졌다.

“왕자님…!”

칼리번은 당장에라도 두 손으로 에레즈를 받아 들고 싶었다. 몸을 틀었으나 금사는 제 주인이 쓰러지든 말든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 위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두 팔이 칼리번의 목을 끌어안았다.

“…뭐, 뭔가, 기분이 이상해…. 근데, 도, 도무지…… 해결되지….”

“…….”

“우, 움직여도… 괴, 괴롭기만 하고…. 아, 아래가…… 아, 아파….”

에레즈는 칼리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훌쩍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레즈는 오직 칼리번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왕자님….”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본다면 안타까워하겠지만, 칼리번은 그의 눈물조차 닦아 줄 수 없었다.

“머, 머리, 카락도, 푸, 풀리지 않고…. 나, 나 때문에… 이, 이대로 네가 괴, 괴로우면….”

우는 소리를 내던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보석안이 눈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위로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

칼리번은 순간적으로 그 눈을 먹고 싶었다. 보석처럼 귀한 것이라서, 삼키면 마법이라도 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에레즈가 고개를 숙였다. 칼리번은 그의 하얀 뺨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 눈물이 닿았다. 에레즈는 어리광을 부리듯 더욱 칼리번에게 다가갔다. 칼리번은 어설프고 조심스럽게 눈물을 핥아 주었다. 이래서야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것밖에 해 줄 수 없었다. 눈물이 맺힌 에레즈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알파의 성기는 몸 안에서 흉흉하게 꿈틀거렸다. 칼리번의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조금… 더… 빠르게… 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의 눈물을 전부 먹고 나서야 칼리번이 조언했다.

“어, 얼마나 빠, 빠르게…?”

“…하고, 싶으신 만큼…?”

“그, 그걸… 내, 내가, 어, 어떻게, 아, 알아…?”

에레즈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왕자님, 잠시만 이리로….”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에레즈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방금이 이 정도였으면….”

칼리번은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쓰며 에레즈의 코에 제 코를 톡, 한번 맞댔다.

“아마도, 이 정도로…?”

그다음으로 칼리번은 새의 부리가 부딪치는 것처럼 빠르게 코를 부딪쳤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

에레즈는 뚫어져라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 아니야….”

에레즈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끝이 오뚝하게 솟은 코를 만지작거렸다.

“…?”

칼리번은 에레즈의 태도에 의아했다. 코끝이 부딪쳤다고는 하나 닿은 정도이니,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리번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에레즈를 가르쳤을 뿐이었다.

“아프십니까?”

“아, 아니….”

“그럼 왜….”

“또… 하, 하는 줄 아, 알았어….”

“무엇을…?”

“…….”

에레즈는 입술을 깨물며 칼리번의 눈치를 살폈다. 자꾸 깨물어서인지 그의 입술이 붉게 느껴졌다. 아래가 아파서 말을 못 하는 건가, 싶었는데 에레즈의 표정은 그리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보다는, 샐쭉하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

칼리번은 뒤늦게 깨달았다.

“입을 맞출까요?”

구강을 통해 성감을 자극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칼리번이 물었다.

“아, 아니, 야….”

에레즈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또 그런 일을 겪을까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자 에레즈는 새파란 눈동자를 굴리며 괜히 칼리번의 눈치를 살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기분을 도통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흥….”

에레즈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래 보았자 칼리번의 가슴 위였지만. 칼리번의 탄탄한 가슴 위에 뺨을 기댄 에레즈는 한참이나 그 상태 그대로 머물렀다. 심장의 박동마저 느껴질 정도로 맞닿아있었다. 칼리번은 온몸을 통해 에레즈를 느꼈다.

부드러운 피부와 온기, 그 몸에 서린 향기가 칼리번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에레즈의 하얀 피부는 오랫동안 숲에서 은거하고 있어도 깨끗했다. 특히나 껍질을 벗기기라도 한 것처럼, 성장한 이후에는 한결 혈색이 좋아졌다. 그에 반하면 칼리번은 녹슨 광물처럼 전신이 흉터투성이였다.

한참이나 꾸물거리던 에레즈는 다시 기력을 찾았는지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떨어져 나간 피부가 유달리 싸늘하게 느껴졌다.

“읏, 응…!”

내벽에 자국을 남길 만치 푹 감싸였던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다시 시작된 자극에 칼리번은 고개를 꺾었다. 전과 달리 에레즈의 행동으로 움직임이 예상 가능 했지만, 예상할 수 있었기에 더욱 자극되기도 했다.

이전에는 천천히, 성기를 혹에 걸리기 전까지만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칼리번에게 조언을 들은 대로, 치덕거리며 빠르게 쑤셔 넣고 빼기 시작했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빨라지고, 격렬한 마찰에 충분히 젖은 안쪽이 부어올랐다.

“아, 아아, 읏…!”

칼리번은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숨을 내쉴 때도, 들이마실 때도 몇 번이나 두툼한 성기가 몸속을 오갔다. 몸이 흔들리는 통에 숨소리조차 떨렸다.

“흐, 으읏…!”

허리를 낮추고 빠르게 치대는 탓에 성기의 두꺼운 기둥 중간이 입구를 오갔다. 최대로 벌어진 입구가 버겁게 받아들였다. 귀두가 전처럼 깊숙이 박히지 못하고, 배속의 얕은 부분을 두드렸다. 쿨쩍, 쿨쩍, 안에서 긁혀 나온 애액이 맞물려 소리를 냈다. 애초에 알파의 성기에 박혀 본 적도 없었으면서, 칼리번은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허공에 들려 있던 발끝이 절로 꿈틀거렸다.

“아, 아!”

퍽! 간절히 원했던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박히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가슴에 이마를 묻고는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아, 흐으으…. 윽…. 으, 거, 거긴, 앗…! 아! 하아, 읏…!”

자극을 받은 내벽이 성기를 꽉 조였다. 칼리번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수도 없이 짓눌렀다. 에레즈의 성기는 칼리번의 몸 안에 전부 삼켜져 뿌리 부분만이 보였다 사라졌다. 팽팽하게 부푼 고환이 몇 번이고 입구 주변에 부딪혔다.

“하, 하아…. 아, 아파…?”

에레즈는 추삽질을 하면서도,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질문을 또다시 했다.

“아…. 아, 으응…. 그, 그렇지…. 아, 아아, 아…!”

칼리번의 목소리는 에레즈에게 박힐 때마다 이상하게 떨렸다.

“그, 그치만…. 하아….”

“흐으…. 읏, 으, 아…….”

“카, 칼…. 네가… 자, 자꾸만…. 읏… 이, 이상한 소리를 내서….”

칼리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굳은 의지와 달리, 매서웠던 눈매는 풀렸고 입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타액이 흘러내렸다.

“…나, 나도…… 이, 이상해질 것, 가… 아, 으… 같, 아….”

붕 뜬 목소리였다. 칼리번에게는 그 말이 에레즈가 다시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들렸다.

“큭…! 차, 참아… 보겠… 흐읏… 습니다…!”

평생 경험해본 적 없던 쾌감에 허우적거리던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교미는 즐거워서는 안 된다. 자신은 그의 욕망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몸을 내주는 것뿐이었다.

“…그, 그런 게, 아, 아니라….”

“네…?”

“내, 내가…… 널, 너, 너무… 아, 아프게 하는 거, 걸까 봐….”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자신의 몸 위에서 헐떡이는 에레즈의 두 눈은 축축했고 뺨은 유달리 붉었다.

“…네, 네가… 아, 아픈 거, 시, 싫어….”

칼리번은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가시 돋은 성기가 안을 쑤실 때마다 아팠다. 그러나 마냥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정반대의 감각이 한순간에 머무른다. 짐승의 교미에는 고통과 쾌락이 섞여, 분리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러니까… 아, 아픈 게 아니라면….”

에레즈의 손등이 칼리번의 입가를 가렸다. 칼리번이 내뱉는 젖은 숨이 손등에 닿았다. 칼리번은 그가 신음을 흘리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칼리번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래서, 마치 칼리번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손등으로 거친 입술을 만지던 에레즈의 엄지가 칼리번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칼리번의 입을 벌리고, 입 안을 천천히 헤집었다.

“으, 으음……. 하아, 으….”

칼리번의 눈앞이 다시 흐릿해졌다. 그 손길이 아찔했다. 칼리번은 주인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사냥개처럼, 그의 연약하고 예쁜 손가락이 입 안을 휘저어도 혀를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몸이 이어졌으면서도, 실수로라도 그의 손을 핥는 것이 어렵고 두려웠다. 대신 칼리번의 내벽이 그를 놓지 않고 싶어서, 세게 깨물었다.

“아, 아…!”

에레즈는 칼리번을 남은 팔로 끌어안았다. 이어진 채로 그가 몸을 숙이니, 칼리번의 몸이 반으로 접히다시피 했다. 앞뒤로 오가던 추삽질이 상하로 바뀌었다.

“미, 미안…. 카, 칼….”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숨소리마저 피부에 닿을 듯 생생했다. 금빛 머리카락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와 칼리번의 얼굴을 덮었다. 칼리번은 그의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아, 아으…. 네, 안, 너, 너무….”

에레즈가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나 작고 연약해서 칼리번에게만 들리는 신음이었다. 칼리번이 벼락을 받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칼리번의 두 다리가 금사의 속박에서 풀렸다. 그러나 아래로 떨어진 칼리번은 걷어차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좁아, 으, 흐으…. 조, 좋아….”

“아, 아앗…. 윽, 아아…!”

“칼….”

긴 머리카락이 장막을 두른 듯 주변의 빛을 완전히 차단했다. 그 속에서 에레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칼리번의 귓가에 몇 번이고 속삭였다. 입술이 칼리번의 몇 번이나 귓가에 닿았다. 좁고, 축축하고, 어두운 밀실이었다. 둘뿐인 밀실을 칼리번은 피할 수 없었다.

“카, 칼…. 읏, 흣, 조, 좋아, 해…. 여, 여기… 너, 너무, 조, 좁아…! 아, 하윽, 아, 파…. 조, 좁아서….”

어린 알파의 신음이 칼리번의 배 속을 쑤셔 댔다. 칼리번은 자유를 얻은 두 다리로 에레즈의 허리를 감쌌다. 발꿈치가 고리를 걸듯 다른 쪽 발목과 겹쳐졌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에레즈를 제 몸 안으로 꾹 눌렀다. 길고 단단한 두 다리에 갇힌 에레즈는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 아으, 와, 왕자님…. 읏…!”

두 팔의 속박은 풀리지 않았는데도 칼리번은 묶인 두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칼리번은 몸을 발작적으로 떨며 사정했다. 묽은 정액이 접힌 배 안쪽으로 고였다. 그와 동시에 가슴에서 젖이 흘러나왔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칼리번의 턱과 입가까지 적셨다.

“읏, 흐으…. 아아….”

칼리번은 나른하게 신음했다. 자신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은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짙은 색의 몸이 희게 젖어가고 있었다. 알파의 성기는 칼리번의 변화에 맞춰 천천히 몸속을 오가고 있었다.

“카, 칼…!”

그것은 칼리번과 달리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으며, 여전히 흉흉한 채였다. 칼리번이 사정하며 내벽을 조인 탓에 더욱 괴로운 것 같았다. 미안함에 칼리번의 심장이 저릿거리며 아파 왔다.

“왕자, 님….”

칼리번은 발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에레즈를 불렀다. 코앞에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그가 있었다. 에레즈는 머뭇거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네 몸 안이, 너, 너무…. 그, 그러니까….”

“…?”

“조, 좁아서, 그, 그랬던 거야….”

“…….”

“……흥.”

그렇게 말하고는, 에레즈는 칼리번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칼리번은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몸 안을 휘젓는 딱딱한 성기를 동시에 느꼈다. 느리지만 깊은 연결은 칼리번의 몸 안에 피어오른 열기를 오래도록 이어지게 했다.

“으음….”

칼리번은 미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알파에게는 몸이 좁아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칼리번의 두 다리는 자유를 얻었으나 그의 허리를 안은 채 놓지 않았다.

* * *

알파의 러트는 일주일가량이다. 그러나 긴 기간에 비해 노팅과 사정에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대부분은 오메가의 몸을 함락하는 데 쓰인다. 마치 뱀처럼. 번식기에 이른 뱀은 한 마리의 암컷에게 수십 마리의 수컷이 달라붙어 번식공을 만든다. 암컷의 몸에 열을 올려 번식 준비를 하는 것이다.

칼리번도, 에레즈도, 그 누구도 몰랐으나 그들은 전형적인 마물의 교미 중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오메가에게 매달리는 알파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것 정도였다. 이곳이 인간계가 아니라 마계였다면, 에레즈처럼 미숙하고 연약한 알파는 오메가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행위가 혼인한 인간 남녀가 나누는 초야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내이고 그 또한 마찬가지로 사내였으니.

그럼 이 행위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런 단상은 의식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깊숙이 가라앉았다. 짐승이 되는 기간이었다. 둔하고 굼뜬 이성이 난입하기에는 당장의 욕망이 허기지고 급했다. 어둡고 축축한 동굴 안에서 이끼처럼 젖은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과 몸이 연결되어 마찰하는 난잡한 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인간이든 마물이든 간에, 처음인 경우에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듯이, 칼리번과 에레즈는 본능을 횃불 삼아 어설프게나마 수순을 밟아 갔다.

“하아…….”

칼리번은 에레즈의 아래에서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처음 몸이 연결된 후로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호했다.

‘사흘… 닷새…?’

헤아리다가, 그는 결국 세기를 포기했다. 검은 두 눈의 초점이 쾌락으로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불덩이가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몸 안을 오갔다. 그는 지쳤다. 두 팔을 가둔 구속에 반항할 힘조차 더는 없었다.

아직도 노팅 한번 하지 못한 알파와 달리, 사흘이 넘도록 자극을 받은 오메가는 벌써 수십 번이나 사정했다. 칼리번은 제 몸 안에 피가 남아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었다.

과한 자극은 버거운 교미 중 오메가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일종의 방지책이자 보상이었다. 수거미가 암거미에게 먹이를 주고, 암거미가 그 먹이를 먹는 사이 교미를 하는 것과 비슷했다. 어린 에레즈도 의도한 바가 아니었고 칼리번도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마물의 방식대로였다.

“아…….”

며칠째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두 눈을 뜬 채로 잠시 의식을 잃었던 칼리번은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에레즈가 젖을 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종의 휴식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몽글몽글 피어나는 젖은 칼리번의 가슴 위로 흰 길을 만들었다.

인간과 달리, 오메가의 젖은 새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미 내내 굶주리는 알파를 위한 먹이였다. 교미 중에 지친 알파는 가슴에 매달려 오메가의 젖을 빨아 먹곤 했다. 그것은 동시에 자극제이기도 했다. 칼리번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결코 에레즈에게 제 젖을 먹이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쪽, 젖으로 배를 채운 에레즈가 가슴에서 입을 떼고는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칼리번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카, 칼…. 이, 일어났어…?”

“네…? 네….”

“미, 미… 미안….”

처음 칼리번은 어째서 에레즈가 사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배 속에서 굵은 성기가 꿈틀거렸다.

“…네.”

아마도 다시 시작될 것이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을 반으로 쪼갤 것처럼 깊숙이 박힌 성기가 숨을 쉴 때마다 느껴져 버거운 참이었다.

“아……앗.”

몸속에서 알파의 성기가 서서히 움직였다. 한번 오가는 것만으로 칼리번의 입에서 저절로 소리가 났다. 한 번도 알파를 들여 본 적 없는 칼리번의 배 속은 에레즈의 성기 모양대로 길이 트였다. 질릴 정도로 긴 정사는 그의 내부를 흐물흐물하게 녹였다.

이 흉기가 사흘이나 배 속에 있었으니 이제는 몸이 어느 정도 벌어졌으리라고, 섣부른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몸속은 여전히 좁았고 그곳을 오가는 성기는 과도하게 컸다. 성기와 마찰하는 내벽의 감각만이 활짝 열렸을 뿐이었다.

“아, 흐… 으, 으응….”

성기와 부푼 혹이 몸속을 찌르며 상처를 남겼다. 고통에 가까운 자극에 칼리번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카, 칼…. 읏….”

“와, 왕자님, 앗…. 아, 앙…. 흐읏!”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낸 칼리번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 귀가 화끈거렸다.

‘어, 어째서….’

점점 변해 간다. 성기가 몸속을 오갈 때면 평생 내 본 적 없는 괴상하고 들뜬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들이 몸속에서 요동쳤다.

‘…오메가라서?’

혼란스럽다. 그러나 정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알파의 성기가 휘젓는다. 이러다가는 자신이 원래는 어떤 형태였는지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흐, 아, 아앗…. 아, 으응……!”

젠으로부터 자신이 오메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후에도 칼리번은 다른 알파와 자신이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고작 본능에, 발정에 무너지는 것인가?

칼리번은 입 안에 고인 액체를 꿀꺽 삼켰다. 하도 이를 악문 탓에 입 안 어디선가 피가 난 모양이었다.

‘이런 행위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그렇다면 칼리번은 오메가를 얕봐도 한참을 얕본 것이다. 인간과 달리 마물은 기본이 남성체였다. 자식을 품을 수 있는 오메가가 일종의 돌연변이라는 의미였다. 오메가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것도 그래서였다. 대신 오메가는 마물이었기에, 몸이 찢어져도 죽지 않는 강한 회복력을 지녔다— 인간 남성과 달리.

알파의 성기가 몸속을 계속해서 자극하면 오메가의 몸에서는 애액이 나온다. 삽입을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몸속을 한 차례 정돈하기 위해. 그리고 그전까지는 굳건히 닫혀 있던 자궁을 열기 위해.

지쳐 늘어진 칼리번의 몸을 지탱하는 것은 금사였다. 그런 금사가 칼리번의 두 팔을 끌어당겼다.

“아, 흐읏…!”

칼리번은 에레즈의 성기를 품은 채로 몸을 뒤틀었다. 그는 하체를 알파에게 내주고는 두 팔로 바위를 끌어안았다. 칼리번은 헐떡이며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배 아래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입구와 옅은 음모로 덮인 사타구니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 있었다. 흰 피부와 짙은 갈색의 피부는 서로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에레즈가 몸을 세게 짓누르면 칼리번의 배 속이 울룩불룩해지다가, 물러나면 붉어진 성기가 한 마디 정도 드러나곤 했다.

사내의 몸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크기였으나, 이제는 피를 보는 일도 없이 부드럽게 삼키고 있었다. 칼리번이 몸 안에서 만들어 내는 애액이 덧발라진 성기는 쩍, 쩍,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흣…!”

혹여 에레즈가 크게 허리를 움직일 때면, 귀두 아래에 난 울퉁불퉁한 혹이 입구에 부딪혀 막혔다. 칼리번의 입구보다도 크게 부푼 혹은 이제 와 무리해서 빼려고 들면 몸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간신히 삽입한 후부터 에레즈의 성기는 한 번도 빠져나가지 않고, 칼리번의 몸 안에 계속 남아 있었다.

“아, 앗, 아아…!”

에레즈는 칼리번의 골반을 움켜쥔 채로 긁어내듯 쑤셨다. 몸과 몸이 부딪치고 몇 번이나 잡혀서, 칼리번의 움푹한 옆구리와 골반은 이미 멍 자국이 즐비했다. 귀두와 혹, 그리고 기둥에 솟은 요철이 칼리번의 내부를 자극했다. 배꼽 아래까지 퍽, 퍽, 박히는 감각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틀었다.

“힉, 아아…!”

칼리번이 숨을 삼켰다. 그의 목이 크게 꺾였다. 안쪽을 긁고 쑤셔 대던 성기가 몸속 어느 부분에 생채기를 냈다. 껍질이 한 겹 벗겨지는 것처럼, 계속되는 자극으로 인해 성기를 품고 조이기만 하던 내벽이 허물어지고 입구가 드러나고 말았다.

“카, 칼…. 윽!”

칼리번이 내벽을 세게 조이자, 에레즈가 괴로운 신음을 토해 냈다. 뿐만 아니라 에레즈의 허리를 감싼 두꺼운 허벅지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에레즈의 행동을 멈추고 싶기라도 한 것인지, 꽉 조인 허벅지가 그의 몸통을 세게 조였다.

“카, 칼…. 아, 아파아…. 아, 하아….”

칼리번이 어찌나 긴장했는지, 에레즈는 뒤로 물러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에레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끙끙거렸다.

“허억, 아, 아…. 아악….”

에레즈의 성기가 ‘그곳’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자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몸에 힘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안 돼. 몸에, 힘을…… 빼야… 이대로는, 왕자님이… 부서져….’

칼리번과 달리 에레즈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칼리번의 허벅지에 한 번 끼이면 어지간한 짐승의 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이대로는 에레즈의 희고 유연한 허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윽, 크흑…….”

그러나 칼리번의 몸은 생전 처음 겪는 낯선 고통에 이성을 조금도 따르지 않았다. 에레즈의 등 너머로 튀어나온 칼리번의 두 발은 허덕이며 바닥을 긁을 뿐이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멍청한 몸이었다.

“윽!”

간신히 숨만 씨근거리던 칼리번이 어느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아, 으, 아…. 자, 잠깐… 아, 안돼…!”

금사 몇 가닥이 칼리번의 성기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칼리번의 입에서 저절로 안 된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몇 번이나 사정을 한 덕에 그의 귀두는 묽은 정액으로 매끈했다. 금사가 그의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히, 흐으…!”

칼리번의 눈앞이 번쩍거렸다. 오줌이라도 누는 것처럼 두 다리에는 힘이 풀렸다.

“흐, 으응…. 아, 안, 아으, 응…!”

금사가 요도구를 쑤실 때마다 그에 맞춰 내벽이 에레즈의 성기를 꽉 꽉 조여 댔다. 덕분에 성기를 안쪽으로 빨아들이는 꼴이 되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몸 안으로 들어가다 못해 상체를 숙였다.

“카, 칼… 읏… 아, 아앗…!”

옅은 체모가 회음부에 닿았다. 에레즈의 허리는 분홍빛으로 멍이 들어 있었다.

“와, 왕자님, 푸, 풀어주…. 흐, 아, 아아…!”

“그, 그런 거…. 모, 모르…. 모, 몰라… 읏…!”

칼리번은 에레즈가 이루어 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팔을 휘젓고, 당기며 애원했다. 칼리번의 목소리는 잔뜩 쉬고 들떠서 듣기에 형편없었다. 그러나 두 팔에 사흘이나 감겨 있던 금사가 풀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칼리번이 반항할 때마다 더욱 사납게 요도를 쑤시는 것만 같아 단단한 몸이 움찔, 움찔 떨렸다. 둘 다 꼼짝도 할 수 없는 탓에 에레즈의 귀두가 몸속에 난 상처를 짓누르며 머물렀다.

“흑, 읏…! 아, 으, 미, 미안…해…! 그, 금방, 빼, 빼 볼…!”

에레즈는 온몸을 떨며 간신히 숨을 내쉬는 데 급급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에레즈는 간신히 손을 성기를 쥐었다. 귀두 끝에서 흔들거리는 금사를 뽑아낼 참이었다.

“아, 아악…! 아…!”

칼리번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도에 박힌 가느다란 금사에 꼼짝도 하지 못하는데, 그것들을 단번에 뽑아낸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 아…!”

칼리번이 눈에 띄게 거부하자, 에레즈는 칼리번의 성기를 쥐고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성기 안쪽을 꿰뚫은 금사를 뽑아낼 수 없다면, 겉에서 자극을 주어 밀어낼 생각인 것 같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처음 사정을 시키기 위해 손을 쓰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했다— 칼리번의 움푹한 배 위에 고인 정액을 손바닥에 묻혔다.

“으, 으응…! 아, 아, 흐, 흐읏…!”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더한 괴로움이었다. 칼리번의 신음에 울음이 섞여 갔다.

“흐아, 아, 아앗…. 제, 제발, 앗, 왕자님, 왕자님…! 그, 그만, 그만…! 아, 으…!”

금사가 요도를 쑤시고, 희고 유려한 손가락이 성기를 쓰다듬는 감각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에 가까울 정도로 괴로웠다. 검은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아파…! 아, 끄윽…. 아파, 아파요…. 와, 왕자님….”

“칼….”

에레즈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서서히 허리를 움직였다. 어찌할 수 없는 알파의 본능이었다. 문을 열기 전에 손가락으로 두드리듯, 귀두가 좁은 입구에 맞춰지며 꾹, 꾹 안쪽으로 파고들듯 두드렸다.

“아, 으…. 아악, 아, 아파…. 더, 더는…. 아, 아…!”

앞뒤로 존재하는 모든 구멍이 쑤셔지자, 그 순간만큼은 에레즈의 러트를 해결해 주겠다는 결심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어지간한 고통에는 이골이 난 용병이 아프다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더는 싫다고 말하려 했다. 부탁하면 에레즈는 당장 멈출 것이다. 이대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걷어찰 것 같았다.

“…읍! 흐, 흡!”

신음을 간신히 언어로 다듬을 때였다. 칼리번의 벌어진 입 안으로 금사가 들어와 그의 혀를 묶고, 찢어져 간신히 아물기 시작하는 목구멍을 파고들어 갔다.

“흐, 으으, 으응…!”

금사는 입맞춤을 나누듯 혀 아래에 똬리를 틀고 혀를 주물렀다. 칼리번은 신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검은 두 눈에 고인 눈물이 흐르고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흘렀다. 칼리번의 전신으로 금사가 가시넝쿨처럼 타고 올라왔다. 온몸을 뒤덮는 반짝이는 실 가닥은 동시에 핏줄 같았다. 칼리번은 쿵, 쿵, 떨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존재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흐음, 으응, 흣……. 읏…!”

아래로 몰리는 자극에 신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속에 꽉 찬 알파의 성기가 이제는 몸 안을 뚫을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리의 성기도 몸 안과 사정이 비슷해, 안팎으로 쑤셔지기에 바빴다. 짙은 피부는 정액과 젖이 흩뿌려져 엉망이었다.

칼리번은 어느샌가 알파의 삽입을 수월히 받기 위해 허리를 들고 있었다. 아무리 칼리번이 단련된 용병이라고는 하나, 허리의 반 이상이 허공에 뜬 비정상적인 자세였다. 그의 허리에 감긴 금사가 어둠 속에서도 드문드문 반짝였다.

“흐읍— 큭!”

그사이, 몸 안쪽의 입구를 두드리기만 하던 귀두가 마침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화살촉 같은 귀두 전부가 들어가지는 못했다.

“으음…. 으, 으응….”

칼리번은 괴로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닿을 대로 맞닿은 회음부가 몇 번이고 에레즈의 판판한 사타구니에 비벼졌다. 몇 번을 맞대도 바뀌는 것이 없자, 칼리번의 몸 위에서 헐떡이던 알파가 자세를 고쳤다.

“읏…!”

바위에 간신히 기대고 있던 칼리번의 등이 바닥으로 완전히 눕혀졌다. 몸이 반으로 접히고, 두 다리가 에레즈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칼리번의 의지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 칼리번은 흐릿해진 눈으로 허공에 붕 뜬 제 발을 보았다.

“으—흐읏!”

퍽, 에레즈가 체중을 싣고는 몸을 아래로 쑤셨다. 순식간에 좁은 구멍으로 귀두가 박혀 들었다. 칼리번의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러나 에레즈는 멈추지 않고 제 전부를 거세게 내던졌다.

“아, 아! 아응, 아, 아악, 그, 그만……!”

귀두를 삼킨 것도 모자라서 어느덧 혹까지 몸속에 난 좁은 상처에 부딪혔다. 그 커다란 것이 상처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기세가 엄청났다. 칼리번의 내벽이 성기를 붙잡으려 할 때면, 금사가 요도구를 쑤셨다.

“허, 어, 으윽…!”

허공에 반 이상이 뜬 칼리번의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반으로 접힌 배에 주름이 더해졌다. 미숙하다고는 하나 사내의 몸이, 칼리번을 꾸욱 짓눌렀다. 그곳으로, 혹마저 들어갔다.

“……!”

몸 안에 난 좁은 구멍에 두 번째 혹을 밀어 넣고 나니, 더는 에레즈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혹이 줄어들 때까지는….

“…흐윽, 으…?!”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잔뜩 긴장한 칼리번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생생하게 느꼈다. 혹이… 상처라고 생각했던 좁은 구멍 안쪽에서 부풀어 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간신히 안으로 들어왔는데, 거기서 더 부풀다니.

“아, 아아……! 시, 싫….”

무엇보다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반으로 접힌 배가 불룩불룩 솟아올랐다. 이대로는 배 속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두 팔의 자유를 원하며 정신없이 휘둘렀다. 그러나 금사는 칼리번이 간절한 만큼 강하게 붙잡으며 가슴을 훤히 드러나게 했다.

“와, 아, 으…. 와, 왕자, 님…….”

칼리번은 입 안으로 들어온 금사를 핥고 빨며, 제 몸 위에 올라탄 그를 불렀다. 혹여나 그가 또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닐까…?

“…카, 칼….”

“……!”

“칼… 번…. 아, 으….”

그러나 아니었다. 칼리번의 부름에 에레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리번만큼이나 두려워하고, 떠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만난 유일한 빛처럼 반가웠다.

“흣, 읏…. 아, 아… 아프게, 해, 해서… 미, 미안해….”

칼리번의 뺨 위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

칼리번은 마찬가지로 젖은 두 눈을 깜박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칼리번의 내부에서 들끓던 일말의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나, 나도, 모, 모르게…… 왜, 왜, 이렇지…? 모, 몸이…… 머, 멋, 대로….”

에레즈도 자신의 변화를 느낀 모양이었다. 칼리번만큼이나 두려워하며 떨었다.

“…무, 무서워….”

에레즈는 제 어깨에 올린 칼리번의 다리에 제 뺨을 맞댔다. 그의 피부는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고, 땀으로 축축했다. 노팅은 알파에게도 고통인 모양이었다.

“괘, 괜찮습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첫 노팅을 겪는 그를 달랬다.

“응…….”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이는지 칼리번의 다리에 제 뺨을 천천히 비볐다. 긴 속눈썹이 피부에 스쳤다. 그 감촉이 꼭… 자그맣고 하얀 고양이 같았다.

“읏…!”

갑자기 에레즈가 신음을 흘렸다. 힉, 하는 비명에 당황한 칼리번이었으나 그도 곧 그 이유를 몸으로 느꼈다.

“아… 아래가…. 윽…. 가, 간지러워, 또, 또… 부, 부풀어….”

“크으…. 으, 괜찮아요, 괘… 괜찮을 겁니다.”

“모, 몸 안에서, 으윽…!”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메가의 몸 밖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혹이 부풀었던 것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성기 전체가. 마치, 무언가를 토해 내려는 것처럼….

“아, 아윽…!”

에레즈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괴롭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젓자 어느샌가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왕자님! …왕자님!”

“흐으, 아, 아앗….”

“아, 아…. 와, 왕자님…!”

에레즈는 몇 번이나 입술을 짓씹었다. 뾰족한 송곳니에 입술이 찢어져 피가 턱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칼리번이 괴로워하는 그를 불렀다. 이대로는 혀를 깨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아…. 제 몸을… 무세요.”

칼리번이 단번에 말했다.

“아, 안 돼….”

에레즈는 버둥거리다 칼리번의 다리 안쪽에 제 이마를 마구 쓸었다.

“윽, 그러다… 다칩니다.”

“그, 그치마…안…. 네, 네가…!”

“다시… 정신을 잃으시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습니다.”

“흐, 윽…!”

에레즈는 어떻게든 혼자서 참아 보려는 듯, 몇 번이나 칼리번의 다리 사이에서 바르작거렸다. 질끈 감은 두 눈이 마침내 떠졌을 때, 칼리번은 흐려져 어두워진 푸른색을 보았다.

“미, 미안….”

“윽!”

에레즈는 칼리번의 허벅지를 크게 깨물었다. 날카로운 통증과 쾌감이 칼리번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흐으, 미, 미…. 으, 미안, 하, 으으….”

에레즈는 불분명한 사과를 하며 칼리번의 허벅지 안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타구니와도 가까운 부위여서, 칼리번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피부를 뚫고 박힌 송곳니는 몇 번이나 짓씹으며 칼리번의 몸을 먹기 좋게 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 사이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뜨겁게 젖은 혀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핥아먹었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칼리번에게는 또 다른 애무였다. 번개같이 번쩍이는 자극에, 칼리번의 두 눈이 불안정하게 깜박였다.

“흣….”

부푼 성기가 칼리번의 몸 안에 완연히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아.”

그와 동시에, 정액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른 땅에 비가 쏟아지듯 그것이 반갑고 두려웠다. 배 속이 뜨거웠다. 오랜 정사로 예민해진 몸은 알파의 정액이 안에 뿌려지는 감각마저 선명하게 느꼈다.

“윽, 아아……!”

온몸을 뒤틀고 싶을 만치 간지럽고, 괴롭고… 이상했다. 다른 어떠한 표현 대신, 칼리번은 스스로 사정했다. 묽은 정액과 함께 요도에 박힌 금사가 배 위로 흘러나왔다.

칼리번은 사정했지만, 알파는 멈추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참은 만큼 엄청난 양의 정액이 칼리번의 배 속으로 들이부어졌다.

“흐으, 읏….”

칼리번은 버거움에 앓는 소리를 냈다. 알파의 정액이 몸 안을 채우고 있었다. 목 안에 노팅을 당해서, 위장이 정액으로 채워졌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번에 채워지는 그곳은 자기 자신조차 몰랐던 공간이었다. 배 속이 차오르는 감각이 낯설었다.

“아, 아…….”

칼리번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묽은 정액과 유두 위로 한 방울씩 맺힌 젖이 근육과 가슴의 굴곡을 타고 서서히 흘러내렸다. 쾌락의 흔적은 숨길 수도 없이 짙은 피부 위로 희게 그려졌다.

“카, 칼…. 하아, 하….”

에레즈는 깊은숨을 칼리번의 몸 위로 내쉬었다. 그가 불안하게 눈을 깜박였다. 칼리번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칼리번을 찾았다. 노팅의 충격으로 사정한 칼리번의 성기를 쓰다듬고는,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에레즈의 순진하고 서툰 손길이 결과적으로는 둘 다 자극했다— 편편해야 할 아랫배를 쓰다듬는 손길이 미묘한 굴곡을 그렸다.

“하, 하아…. 윽…. 흐으….”

알파의 혹이 배 위로 작은 둔덕을 만들 정도로 부풀어 오른 것이다.

“미, 미안…해…. 아, 아파…?”

에레즈의 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칼리번의 아랫배를 만지고, 또 쓰다듬었다.

“여, 여기가……. 여, 영원히 아, 안 풀리면 어, 어떡하지…?”

에레즈가 겁을 먹고 물었다.

“그렇다면… 계, 계속… 이, 이렇게….”

칼리번은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이어진 것이 풀어지지 않는다면….

“그저 계속 이어져 있을 뿐……이니까….”

칼리번은 반쯤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유두 끝에 맺혀있던 젖이 떨어져 내렸다. …알파의 노팅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모른다. 칼리번이 숨을 쉴 때마다 부푼 배가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연결 자체가 하나의 자극이자 고통이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흘러내린 젖으로 엉망이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숨을 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칼리번은 평상시에 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그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알았다. 그런 표정을 유지하는 데에도 나름의 힘이 든다는 사실을….

“…?”

칼리번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박였다. 어째서인지 두 팔이 한결 가벼워졌다. 너무 오래 묶인 나머지 감각이 사라진 것일까? 아니었다. 이제 칼리번이 도망칠 수 없게 되었으니, 굳이 묶여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금사도 알고 있었고… 칼리번도 알고 있었다. 대검을 휘두르던 탄탄한 두 팔 위로는 날카로운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붉은 선이 수도 없이 남았다. 마비된 두 팔에 피가 돌자 쇳가루가 피와 함께 도는 것처럼 저릿거렸다.

칼리번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자신의 신체 일부였음에도,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왕자님….”

칼리번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허공에 들려 있던 허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칼리번을 전적으로 받쳐 주던 어떤 힘이 사라지자 에레즈의 몸도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아….”

“…읏!”

자세를 고치는 그 짧은 순간, 몸이 이어져 있어 두 사람 다 신음을 흘린 것은 덤이었다. 칼리번은 가까워진 에레즈의 어깨를 감쌌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금빛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팔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잠시 긴장했지만, 금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긴 목을 덮고, 턱을 매만졌다. 두 손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떨렸다.

“왕자….”

오래 묶여 있어서 그런지, 자신의 손이었음에도 고목의 껍질같이 뻣뻣하고 딱딱했다. 칼리번은 서툰 손길로 에레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님.”

칼리번은 짐승처럼 가려진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거두어 주었다. 칼리번에게 혼이 날까,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에레즈가 서서히 눈을 떴다.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칼리번이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카, 칼….”

“네.”

“소, 손이… 푸, 풀렸구나….”

에레즈는 푸른 눈동자를 굴려 칼리번을 살폈다. 칼리번의 손도, 발도, 목을 조르던 금사도 모두 풀어졌다.

“…미, 미안해…. 겨, 결국, 나, 나는… 아, 아무것도….”

에레즈가 본성을 이긴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알파의 본성이 에레즈에게 합쳐진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에 뺨을 기댔다. 그의 눈가가 다시금 축축해졌다.

“왕자님 혼자서, 하셨잖아요.”

“아, 아니…. 나, 나는….”

에레즈는 칼리번의 손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에레즈는 고개를 숙였다. 칼리번의 손바닥에 그의 입술이 스쳤다. 두 손이 뻣뻣한 상태였음에도, 부드러운 감촉이 놀랍도록 생생했다. 알파는 노팅을 통해 다른 알파가 오메가를 머무르는 시간을 늘리고, 제 아이를 임신시킨다고 들었다.

칼리번이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어 알파를 얕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보다 에레즈의 러트를 해결해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 얕은 불안. 아니, 자신은 제대로 된 오메가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칼리번은 혼란스러웠다. 그것을 바라는지, 아니면 두려워하는지조차 헷갈렸다.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고 배 속이 꽉 조여져 왔다.

어째서….

“……!”

그때, 에레즈가 그에게 기대 왔다. 칼리번은 덩달아 두 팔로 에레즈를 감싸 안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두 팔로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칼리번은 정액과 젖으로 더러워진 몸에 에레즈가 닿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통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서로가 달랐던 숨이 부딪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같은 호흡으로 움직였다.

칼리번의 몸속에서 몰아치던, 폭풍 같은 감정의 부딪침이 사라졌다.

“…하아….”

칼리번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상했다. 달리지 않았는데도 숨이 벅찼다. 그러나 괴롭지는 않았다. 온몸이 나른하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칼리번은 에레즈로 인해 평생 느껴 보지 못했던 여러 감정을 맛보았다. 이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낯설고 처음인 감정이었다. 그래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름을 몰랐다.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은 결코 칼리번 혼자서는 다시 느낄 수 없으리라는 것뿐이었다.

“…….”

멍하니 허공을 보던 칼리번은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착각인가 싶었다. 아니면 꿈을 꾸는 지도.

칼리번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꽃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두 송이가 되어 있었다. 칼리번은 홀렸나 싶어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주변을 덮은 금사가 보였다. 더는 칼리번을 묶지도 않고, 평범한 머리카락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이… 부풀어 오를 듯 동그랗게 말리더니, 피어올랐다. 그래, 피어오른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르더니, 금빛 꽃으로 펼쳐졌다.

동굴 전체에 펼쳐진 금사는 그 가닥가닥이 거대한 금빛 줄기로, 식물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동굴 곳곳에 가지를 뻗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양분을 잔뜩 얻은 줄기에서 꽃이 핀다. 수도 없이, 많은 꽃이….

칼리번은 에레즈의 품에 안긴 채, 꽃이 피어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꿈?

아니면….

“보…보, 보지 마….”

에레즈가 칼리번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 부끄러워….”

칼리번 혼자만의 환각이 아니었는지, 에레즈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칼리번이 영문을 몰라 검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칼리번의 품속에 숨은 에레즈였다. 보이는 것은 그의 머리카락과 귓가뿐이었다. 그의 귀와 목덜미가 온통 붉었다.

“…아….”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몸 안의 에레즈를 꽉 조였다. 부푼 성기가 칼리번을 고통스럽게 하는데도,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칼리번의 심장이 펄펄 뛰었다. 그리고 맞닿은 심장은, 서로 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 * *

멀리서 빗소리가 들렸다. 쿵, 쿠궁, 멀찍이서 울리는 천둥소리가 둔탁하게 심장을 울렸다.

“…….”

칼리번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뺨으로 흙과 이끼가 묻은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가물가물한 검은 눈동자가 먼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줄기 번개가 어스름하게 깔린 어둠 속에서 번쩍거린다.

‘언제부터 비가 온 거지….’

칼리번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에서 날씨가 변한 줄도 모르고 잠들다니, 자신답지 않았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나른하고 무거웠다. 특히나 한쪽 팔이.

에레즈가 바로 곁에서 칼리번의 한쪽 팔을 베고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칼리번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나신으로 엉켜 있었다. 긴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금 이불이라도 되듯 덮은 채였다. 칼리번은 에레즈를 안고 있었지만, 금사에 덮인 탓인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만 같았다.

“…….”

칼리번은 에레즈를 팔에서 떼어 머리카락 뭉치 위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그 과정에서 잠을 깨우지 않으려 팔근육이 떨릴 정도로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소리 없이’, ‘조용히’ 움직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읏…….”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몸이 연결된 채였다. 정신을 차리고 긴장을 하면 할수록, 저도 모르게 몸 안에 남아 있는 성기를 주무르고 말았다.

“으응….”

자극을 받은 탓인지, 에레즈는 잠결에 들뜬 숨소리를 냈다. 막 러트를 보낸 알파의 성기를 자극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현명치 못했다. 설령 잠을 깨우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뽑아내는 편이 나았다.

“흐읏….”

칼리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둥을 반 이상 삼키고 있어 입구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귀두 갓에 걸려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나마 러트가 지나 혹들이 가라앉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칼리번은 내벽을 천천히 조였다 풀며 품고 있던 귀두를 밀어냈다.

칼리번의 눅눅한 몸에 땀이 새로 고였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마개처럼 입구를 막던 것이 뽑혀 나갔다. 그러자 몸 안에 고인 정액이 다리 사이로 왈칵 흘러나왔다.

“큿…!”

이질적인 감각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힘을 세게 주었다. 입구가 꽉 오므려졌다. 열흘 가까이나 알파의 성기를 한 번도 빼지 않고 품은 탓에 입구는 안쪽의 살이 붉게 부풀어 있었다.

“……후우.”

어째서인지 속이 일렁였다. 본능적인 반응이라고는 하지만, 저도 모르게 알파의 정액을 뱃속에 품으려 애를 쓰는 꼴이 되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깼는지를 살폈다. 혹여나 그가 깰까 걱정한 일은 무의미했다. 열흘 가까이 발정에 시달린 탓인지 에레즈는 누가 들쳐 메고 뛰어도 깨지 않을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군.’

칼리번은 꽃 속에서 잠이 든다는 요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추삽질을 하다 지쳐 잠든 알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얕은 한숨을 내쉰 칼리번은 몸에 들러붙은 금사를 거두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밧줄처럼 칼리번의 몸을 꽁꽁 옭아매던 금사는 평범한 머리카락처럼 스르르 매끄러져 내려갔다.

“…윽!”

순간, 몸이 휘청였다. 칼리번은 또다시 금사에게 붙잡힌 줄 알고는 땅을 보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였다.

넘어지지 않고 간신히 다음 걸음을 내디디니, 몸속에 남아 있던 무언가가 허벅지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상하게도, 고작 걷는 것뿐인데도 버거웠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 사이가 화끈거리고 쓰라렸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동굴 입구로 향했다. 어째서인지는 그도 몰랐다. 알 수 없는 내부의 열이 아직 식지 못해서일까, 강렬하게 저 빗물을 원하고 있었다.

귀에 천을 씌운 듯 먹먹하게 들리던 빗소리가 점차 생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쏴아아, 비가 내리는 소리 사이로 틈틈이 천둥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는 나신으로 동굴 입구에 섰다. 한 발만 나아가면 완전 다른 세계였다.

칼리번은 앞으로 나아갔다. 조각상처럼 근육이 새겨진 몸이 순식간에 물을 뒤집어썼다. 굵은 장대비는 가차 없고 차별 없이 칼리번에게도 쏟아져 내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칼리번은 휘청거리면서도 계속 걸어갔다. 몇 걸음 앞은 바로 절벽이었다. 거리를 재지 못해 추락하는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열흘 만에 나온 동굴.

숲은… 시꺼멓다. 검은 지옥처럼. 불이 난 것인지, 아니면 마물이 내뿜는 독기 탓인지는… 비가 그친 후에 확실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리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온통 먹구름이 껴서 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손자국이 나타났을 때보다는 어둡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칼리번은 폭우를 고스란히 맞았다. 평소에는 이마를 간신히 덮는 짧은 머리카락이 물을 먹고는 눈썹 위까지 내려앉았다. 눈을 천천히 끔뻑이고 있으면, 눈동자에도 빗물이 고였다. 그가 입을 벌렸다. 비릿한 빗물이 혀 아래의 움푹한 곳에 고이고, 또 목구멍까지 흘러 들어갔다. 빗물은 그의 몸 위로 떨어져, 몸에 묻은 것들을 안고 내려갔다. 온몸의 털이 빠지고 껍질이 벗겨지는 것만 같다.

칼리번에게 ‘비’란 그리 깊게 고려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식물과 짐승을 키우고, 인간을 먹고살게 하고, 때로는 홍수를 일으키기도 하는 자연적 현상. 그 외에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용병인 그에게 비를 맞으며 이동하거나 비를 피해 동굴이나 나무에 숨어 잠드는 일은 흔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빗물이 아팠다. 아플 정도로 달게 느껴졌다. 마물에게 찢기고 베일 때의 고통과는 전혀 달랐다. 평생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감각이 열린 것만 같았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그중에 하나가 없다가 생기게 되면 세상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듯이.

그러나 칼리번은 새로이 느끼는 감각의 이름을 몰랐다. 다만, 며칠 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은 알았다.

“…….”

간신히 첫 노팅을 맺은 후, 에레즈의 러트는 사나흘 더 이어졌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한번 트이자 그다음은 훨씬 수월해졌다.

그 후 칼리번은 에레즈와 두 차례 더 노팅을 맺었다. 사지의 자유를 얻었기에, 칼리번은 에레즈의 몸 위로 스스로 올라탔다. 알파가 원할 때까지 원 없이 노팅을 하고 나면 몸의 연결이 풀릴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해결을 보면 러트가 빨리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몸속에 난 좁은 입구로 알파의 성기를 몇 번이고 스스로 찔러 넣었다. 고통과 자극은 쾌감을 넘어서서, 사실상 자해 행위에 가까웠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금사에 묶여 있을 때처럼, 아래에서 꼼짝도 못 하고 신음만 흘렸다. 칼리번이 서투르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몸속에 먼저 담긴 정액이 성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액이 찐득한 탓에 몸이 부딪칠 때마다 진흙이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미숙한 에레즈보다는 체격이 큰 편이었기에, 칼리번은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두 다리로 버텼다. 두 팔로 벽을 짚고 최대한 버텼던 칼리번이었지만 몸 안에서 알파의 성기가 부풀기 시작했을 때는 그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에레즈의 성기가 부풀수록 칼리번의 배도 불룩하게 솟아 갔다. 그 모습이 에레즈의 두 눈에 바로 보일 정도였다. 에레즈는 상체를 일으키고는, 연결된 채로 칼리번을 끌어안았다. 에레즈의 손이 다가와 불룩 솟은 배를 쓰다듬자 칼리번은 속절없이 떨었다.

에레즈는 가슴에 맺힌 젖을 핥더니, 익숙하게 입에 물었다. 가슴에 쌓인 젖이 빨리고 몸 안에 정액이 채워지는 감각이 견딜 수 없을 만치 간지러웠다. 칼리번은 자극에 움찔거리며 정액을 토해 냈다.

몇 번이고 그런,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먹이고, 먹고, 흘리고, 핥아 내리고….

<더, 더 이상은….>

세 번째로 노팅을 맺기 직전, 칼리번은 다리를 벌리고는 제 아래를 보여 주었다. 일주일 가까이 잠들지 못해 정신이 흐릿해진 상태였다. 알파의 성기가 노팅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랫배가 부풀어 있었다.

다만, 모양새가 조금 달랐다. 노팅 시에는 성기의 모양대로 배 위로 솟아올랐다면, 지금은 그 부분만 살이 찐 것처럼 완만한 둔덕을 이루고 있었다. 알파의 성기를 품기 위해 빠듯할 정도로 벌어진 입구에서는 뻐끔거리며 흡사 고체처럼 끈적한 정액을 흘렸다.

정액에 배가 불렀다. 잦은 사정 끝에 묽어진 칼리번과 달리 두 번밖에 사정하지 않은 에레즈의 정액은 여전히 무겁고 농도가 짙었다. 알파의 사정은 느린 대신 한번 할 때마다 그 양이 엄청났다. 칼리번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배 속이 버거울 정도로 불러 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충분해…. 칼리번은 무엇이 충분한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으응, 흑…! 흐으읏….>

그때, 금사가 아랫배에 감기더니 배를 꾹 쥐어짰다. 가물거리던 칼리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소담하게 부른 배 위를 밧줄처럼 질기게 감긴 금사가 조여 댔다. 그럴 때마다 안에 담긴 정액이 꿀렁거리며 흘러나왔다.

<히, 으읏…!>

그와 동시에 에레즈가 허리를 뒤로 크게 물렸다. 칼리번의 배를 꽉 채운 성기가 물러나면서 정액이 함께 빠져나왔다. 입구로 정액이 덧발라져 매끄러워지는 촉감이 이상했다.

알파의 혹은 노팅을 할 때도 쓰이지만, 오메가의 몸속에 남은 다른 알파의 정액을 긁어낼 때 사용하기도 했다. 마물은 알파와 오메가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대일로 관계를 갖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에레즈는 피에 흐르는 알파의 본능에 따라 행동이었지만, 오메가를 자극하는 데에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흐으, 으응…!>

귀두 갓과 부푼 혹들이 내벽을 긁어내리며 오가자, 칼리번의 몸에 다시 열이 올랐다.

<흐윽…!>

오메가를 달래 준 알파는 다시 성기를 밀어 넣고는 제 흔적을 새겨 넣었다. 자신의 정액을 빼내고 다시 자신의 것으로 채우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분한 호사라고 볼 수 있었다. 칼리번은 두 다리를 에레즈의 어깨에 얹은 채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정액을 받아들였다.

에레즈의 땀이 젖을 흘리는 가슴 위로 떨어졌다. 그는 칼리번의 양팔을 양손으로 각각 붙잡고는 제 체중을 실어 세게 짓눌렀다.

<하아, 아, 아윽……!>

에레즈가 칼리번의 안에 노팅을 맺고 사정을 할 때면, 그의 푸른 눈이 종종 금빛으로 번뜩였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간헐적으로 바뀌는 눈빛이 마치 보석 같았다. 칼리번은 정액이 주입되는 내내 반짝임에 홀린 까마귀처럼 지친 에레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금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아서.

“이 감각은… 오메가의 것인가?”

칼리번은 낯선 감각에 도무지 정의를 내릴 수 없었기에, 미지의 영역에 떠넘겨 버렸다.

“하아…….”

칼리번은 두 눈을 감은 채로 깊이 숨을 내쉬었다. 빗물이 차가워서인지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눈을 감으면 피어오르는 꽃을 본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몸이 이어지고, 노팅이 되었을 때 피어났던 금빛 꽃. 아직도 그 순간이 믿기지 않아, 환각처럼 느껴졌다.

그래,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 열흘 밤낮을 발정에 시달렸으니, 열에 들떠 본 환각에 불과할지도….

“…….”

칼리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빗물이 따가워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쥐었다.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빗물과 함께 아래로 내려간 손은 아랫배를 짚었다. 단단하고 판판한, 평범한 사내의 배였다. 그리고… 다리 사이로, 정액이 배 속을 채우다 못해 아래로 느릿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짙은 피부 위로 흐르는 하얀 선이 이질적이었다.

빗물은 차갑고 가벼웠다. 정액은 금을 녹인 것처럼 뜨거웠다. 차가운 비를 오래 맞은 탓인지, 칼리번의 귓가가 화끈거렸다. 칼리번은 빗물로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다.

“…!”

한 손으로 얼굴을 휘적휘적 닦아 내던 칼리번은, 귀를 꽉 채운 빗줄기 사이로 달그락, 돌소리를 들었다. 그가 번개같이 고개를 돌렸다.

“…아, 앗!”

그리고 익숙한 비명이 들렸다.

“왕자님.”

어느새 깨어난 에레즈가 긴 머리를 끌고는 동굴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설마 들킬 줄은 몰랐는지, 에레즈는 검은 눈과 마주치자 몹시도 놀란 것 같았다.

쏴아아—

잠시간의 정적을 참지 못하고 거센 빗소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혹여나 에레즈가 검게 죽은 숲을 살펴볼까, 칼리번은 몸을 완전히 돌려 등을 졌다. 가슴이나 배는 물론이고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성기까지, 제 몸을 그에게 훤히 보였다. 그러나 칼리번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몸이었다.

칼리번은 두 눈을 껌벅거렸다. 무채색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오직 에레즈 프리드웬만이 하얗고, 금빛으로 반짝일 뿐이었다. 칼리번은 동굴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체격에서 오는 위압감이란 굉장해서, 에레즈는 어깨를 웅크리고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미, 미안, 미안해….”

에레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는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는 그의 버릇이었다.

“모, 몰래, 보, 보려던 건… 아, 아닌데…!”

칼리번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여태껏 알몸으로 엉켰던 사이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드러난 맨어깨가 금세 불긋해졌다.

‘저런 곳까지 붉어지는구나.’

칼리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노팅을 할 때도 그랬다. 새빨개진 채로…. 칼리번은 말없이 불룩 튀어나온 어깨를 바라보기만 했다.

“…비를 맞으면 열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들어가 계십시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칼리번이 말했다.

“그, 그러면…… 너, 너는… 여, 여기서, 뭐, 뭘 하고 이, 있는 거야?”

에레즈는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 사실 칼리번이 할 만한 조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빗물에 흠뻑 젖은 채였다. 갈색의 피부 위로 빗물이 수도 없이 흘러내렸다.

“저는….”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칼리번 자신도 영문을 몰랐으니.

“미, 미안….”

그때, 에레즈가 뜬금없이 사과했다.

“ 무엇이 미안하십니까?”

칼리번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 그건…. 그…건….”

에레즈는 가린 두 손을 내리고는, 두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한 주먹씩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머리카락 속으로 얼굴을 쏙 숨겼다. 쑥스럼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

한참이나 머리카락 사이에서 흔들거리던 에레즈의 시선이 칼리번의 몸으로 향했다. 백번의 말이 필요 없었다. 물어뜯기고 부딪쳐 멍이 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칼리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연약한 에레즈를 두들겨 패는 일 없이 무사히 러트를 마쳤다. 그것은 그가 순순히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칼리번은 그에게 미안했다. 성적인 경험이 풍부했다면, 빠르게 노팅까지 해결해 줬을 테니 말이다.

“이, 있지….”

“네.”

“다, 다른, 아, 알파들도 그, 그랬어…?”

에레즈의 질문에 칼리번은 눈동자를 굴렸다. 다른 사람과 해 본 적이 없으니 모른다.

“네, 다들 이 정도는 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칼리번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대답했다. 알파의 러트가 얼마나 흉악한지는 대충 들은 바가 있었다.

“……그, 그래.”

“…….”

“그, 그렇구나….”

그러나 대답과 달리 에레즈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발바닥으로 땅에 굴러다니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굴렸다.

“나, 나는… 이, 있지…….”

“네.”

“내, 내가, 시, 싫어진 줄 아, 알았어….”

“…….”

“아, 아프게 해, 했으니까…. 나, 나를, 버, 버리고, 떠, 떠나 버린 줄 아, 알고…….”

이제는 익숙할 정도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칼리번은 심장이 욱신거리며 쑤셔 왔다.

“목이 말라서 나왔습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목이 말라서….”

돌머리를 간신히 쥐어 짜내 나온 대답이었다. 칼리번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그런데, 칼리번의 대답에 그가 살며시 웃었다. 아스러질 듯 연약한 미소였다. 코스모스처럼 청초하고 맑았으나 어딘지 슬퍼 보였다.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몸이 뜨거웠다. 오래 비를 맞으면 열병에 걸린다고, 자기 자신이 했던 말을 곧바로 돌려받는 중이었다.

“나, 나도… 모, 목이 말라.”

에레즈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칼리번은 그가 동굴 밖으로 하얀 손을 뻗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오목하게 오므리자 금세 물이 고였다. 칼리번은 남은 한 손으로 물이 고인 손을 받치고는 그에게 내밀었다.

에레즈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곧 용기를 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넘겼다. 하얀 귀와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에레즈는 작은 사슴처럼 칼리번의 손바닥에 고인 물을 받아먹었다. 종종 그의 입술이 칼리번의 손바닥에 스치듯 닿았다.

빗소리에 묻혀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멀리서 빗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전보다는 조금 잦아든 듯했다. 러트를 보낸 이후, 에레즈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힘을 잃은 것 같았다. 물론 전처럼 갑자기 붙잡힌 전적도 있으니,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두고 보기로 했다. 두고 보기로 했으나….

“카, 카, 카리…번…! 사, 살려, 줘…….”

그러나 역시, 머리카락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머리카락에 걸려 넘어지고, 머리카락이 무거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에레즈를 보고 있자니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런 에레즈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제 손으로 제 얼굴을 때리고 있달까,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달까…. 무엇이든 차마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그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동굴 전체에 뻗은 머리를 한데 모았다. 더러운 동굴 속에서 흙과 함께 널브러져 있었는데도 금빛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고 매끄러웠다.

“카, 칼…?”

“…아, 죄송합니다.”

에레즈의 부름에 칼리번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매만지고만 있었던 것이다. 금사는 미묘하게 칼리번의 피부에 달라붙는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머리카락이 완전히 마력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칼리번을 이토록 매혹하는 것을 보면.

“이제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고, 고마워…!”

“대신, 무게가 한곳으로 모였으니 멀리 움직이지는 못하실 겁니다.”

“응….”

칼리번은 에레즈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고개를 까딱거리는 모습이 꼭 금줄에 묶인 강아지 같았다. 머리카락의 무게를 분산시키려 튀어나온 바위 여러 곳에 매달아 두었으나 여전히 무겁게 느끼는 것 같았다.

“…….”

언제까지나 이런 불편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금사는 위험하기도 했고…. 칼리번은 새로운 도전을 마음먹었다. 은신처를 옮긴 지도 십수 일이 지나, 칼리번은 거미 마물의 독이 어느 정도 빠진 상태였다.

“혹시 아픔을 느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으, 응….”

에레즈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칼리번은 손잡이가 없는 칼날을 쥐고, 시험 삼아 머리카락 끄트머리만을 잘랐다. 거미의 독이 남아 있다면 머리카락이 검게 변할 것이다.

“……!”

그리고 두 사람은 머리카락 색이 변하는 것보다 더한 것을 보았다. 자른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도로 자라난 것이다.

칼리번은 칼날을 내려놓았다.

“당장 자르는 것보다는… 좀 더 두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추수를 하듯 마력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잘라 낼 수도 있었으나 칼리번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어, 어째서…? 오, 오히려, 자, 잘라 내지 않으면 위, 위험해질지도… 모, 몰라….”

그렇다고 마력이 모두 빠질 때까지 머리카락을 잘라 낸다면, 대신 동굴은 금사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금사는 또다시 칼리번을 붙잡고 사지를 결박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에레즈라는 본체가 위험에 처하면 보호해 줄 테니.

“아, 아니, 위, 위험한 건, 내, 내가 아니라…!”

“대신 이렇게 하죠.”

“으, 응?”

칼리번은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세 갈래로 나눴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에 정신이 쏠린 나머지 에레즈의 말을 끊었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어…. 어? 어어…….”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에레즈는 푸른 눈을 빛내며 칼리번이 무엇을 할지를 지켜보았다.

“나, 날… 무, 묶으려는, 거, 거야…?”

에레즈가 물었다. 예전에 함께 끈을 만들던 때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 생각은 미처 못 했군.’

어쩌면 그편이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르는 알파의 본성을 가라앉히는 데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칼리번이 하려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 와아….”

칼리번은 금빛 머리를 한 갈래 땋아 주었다.

“동생이 있어서 종종 머리를 묶어 줬습니다.”

“도, 동생…?”

“네.”

“아, 아아……. 그, 그렇구나.”

에레즈가 감탄했다. 그가 푸른 눈동자를 굴리며 오직 머리카락을 땋는 데만 집중하는 칼리번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렇구나…. 카, 칼…리번도, 동생이, 이, 있구나….”

“…네.”

비록 피는 이어져 있지 않았으나 동생은 동생이었다. 칼리번은 단순노동을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마물의 피를 지닌 그였으나 인간 무리에 속에서 소박하게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도, 동생…이, 이, 있으면, 뭐, 뭔가, 다, 다른가…?”

“큰 차이는 없습니다.”

누이가 있던 덕에 칼리번은 평생 짧은 머리로 살아왔지만, 머리를 땋거나 묶어 주는 일은 능숙했다. 다만, 그 기술이 이렇게 다시 쓰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흐, 흐응…. 나, 나는, 자, 잘 모르, 겠는데….”

“왕자님께서 굳이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그래도….”

알리샤는 어릴 적부터 칼리번의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조그만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마물 혼혈 앞에서 겁도 먹지 않고….

“게다가 함께한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더 깁니다.”

“흠…. 흐응….”

그건 그렇고, 에레즈의 머리도 칼리번의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고 갸름했다. 알리샤에 비하면 뒤통수가 동그란 편이었다. 칼리번은 문득 한번 쥐어 보고 싶어졌다….

“나, 나한테는… 네, 네, 가, 가족을…… 아, 알려 줄, 가, 가치도… 없는, 거, 건가…?”

에레즈의 머리카락을 땋는 데 열중이던 칼리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칼리번은 뒤늦게서야 에레즈가 예전 가족에 대해 듣고 싶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그, 그런 의, 의미로 하, 한 말이, 아, 아니라…! 사, 사과, 하, 할 피, 필요는…!”

도리어 에레즈가 허둥지둥하며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칼리번은 딱히 별 감정이 없었다. 가족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면 좋을 것을, 이라는 생각 정도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알리샤입니다.”

“아…! 아, 알…리샤….”

알리샤, 알리샤…. 에레즈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여동생의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카, 카리…번이고, 아, 아리… 샤.”

에레즈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살포시 웃었다.

“…?”

칼? 알? …아마도 그편이 발음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 같았다. 칼리번은 그의 감정을 따라가지 못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리샤는 저보다 다섯 살 많지만, 마물의 피가 섞인 혼혈은 성장이 빠르다 보니 그 아이가 성년이 되기까지는 제가 오라버니 노릇을 했습니다.”

“빠, 빨라…?”

“네, 마물 혼혈은 태어나고 5년이 지나면 인간의 15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것은 항상 눈에 잘 띄기 마련이었다. 인간들은 마물 혼혈의 태생만큼이나 그들의 비정상적인 성장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마물 혼혈은 인간이 감히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성장하기 전에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근데… 나, 나는… 아, 안 그런데….”

칼리번의 설명을 들은 에레즈는 시무룩해졌다. 그는 성년이 지났음에도 한참은 어려 보였던 것이다.

“앞으로 많이 드시면 더 자라실 겁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으, 응…. 더, 이, 이야기, 해, 해 줘….”

에레즈가 칼리번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미소인데도 아까 홀로 짓던 미소와는 어딘지 다르게 느껴졌다. 무엇이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헛기침을 했다.

“…제가 용병대에 들어가기 전에 결혼했으니, 어엿한 가족을 꾸렸을 겁니다. 아이도 몇 명 더 낳았을 테고…. 그러니 이제는 저보다 어른일 겁니다.”

칼리번은 짧게 말을 마쳤다. 딱히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더 듣고 싶은 것 같았다.

“아, 아, 리… 알리, 샤는… 지, 지금은, 어, 어떻게, 지, 지내…?”

“모릅니다.”

“왜, 왜…?”

“저는 그 마을을 떠났으니까요.”

“펴, 편지라든가…. 차, 찾아, 가, 본다든가, 가, 같이 안 지내…? 가, 가족, 인데….”

에레즈가 푸른 눈을 굴리며 물었다.

“…네? 저희는 피가 섞인 가족이 아닙니다.”

“응? 하, 하지만… 가, 가족이라고, 해, 했잖아….”

칼리번과 에레즈 둘 다 궁금증이 일었다.

“아시다시피 저와 같은 마물 혼혈은 용병일 외에는 인간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 으….”

“어릴 적 저는 그 아이를 돌보는 용도로 충분했지만, 이후로도 눌러앉았다면 폐만 끼쳤을 겁니다.”

칼리번은 남 일을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용도에 대해 설명했다. 마물 혼혈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좋지 못했다. 마물 혼혈은 인간을 죽이고 태어났으면서, 마물과 같은 방식으로 번식한다. 언제든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물 혼혈이 인간과 함께 살 방법이라고는 용병일 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마물이 침입했을 때 대적하는 고기 방패 정도였다.

“…….”

에레즈는 말없이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는 아쉬움과 슬픔 등 온갖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으로써는 너무나 다채로운 감정을 전부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슬퍼 보이기만 할 뿐.

“하, 하지만… 아, 아리는, 그, 그렇게, 새, 생각하지 아, 않을 거야!”

에레즈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네?”

“……그, 그랬을 거라고, 새, 생각해.”

동굴을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부끄러운지, 에레즈는 머리카락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카, 카리, 아, 아니…. 칼, 리번이, 떠, 떠나지, 아, 않았으면… 해, 했을 거라고….”

“…….”

“나, 나도… 도, 동생이니까…….”

에레즈는 어째서인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동생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칼리번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기까지 했다. 에레즈의 형제는 그저 그를 이용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다. 에레즈의 태도는 마치 첫째 왕자를 용서하는 것처럼 들렸다.

칼리번은 괜히 커다란 손을 뻗어 에레즈의 이마를 쓸었다.

“앗…!”

에레즈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얼굴을 가리던 금빛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맨얼굴이 드러났다. 에레즈의 머리를 대충이나마 갈무리한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에레즈의 얼굴을 가리는 앞머리까지 땋아 주려 했다. 그 탓에 마주 보는 거리가 더욱 가까웠다. 칼리번은 제 할 일만을 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에레즈의 얼굴을 자꾸만 훔쳐보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에레즈 프리드웬은 늘 아름다웠으나 시선이 닿을 때면 더욱 화사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칼…?”

칼리번을 올려다보는 에레즈의 볼이 발그레했다. 속눈썹이 길어, 눈을 천천히 깜박일 때마다 깃털이 눈가에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여섯째 왕자가 푸른 보석안으로 빤히 바라볼 때면, 반대로 칼리번은 약간 고장이 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리번은 급히 손을 떼어 냈다. 금사에 여전히 마력이 도는지 손끝이 저릿했다. 그 탓에 뒷머리를 땋을 때보다 훨씬 서투르게 앞머리를 땋을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치면, 다시 숲을 탐색하겠습니다.”

* * *

누군가의 눈물처럼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쳤다. 칼리번은 앞서 말했던 대로 동굴 밖을 나섰고 오후 내내 숲을 탐색했다.

비가 내린 후에는 수풀이 한결 싱그러워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계절의 한창인 여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숲 주변은 여름의 녹음은 빗물과 함께 쓸려 내려간 지 오래였다. 그저 어두컴컴할 뿐이었다.

불에 탄 숲은 시꺼먼 잿더미가 되곤 하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칼리번은 말라붙은 잎사귀를 움켜쥐었다. 파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스러져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물이 더러워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한동안 비가 온 덕분일 것이다.

‘우기라서 다행이군….’

열매와 잎은 모조리 상했지만, 다행히도 나무뿌리 정도는 캘 수 있었다. 다만 벌레가 보이지 않았다. 벌레조차 없다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새소리도,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짐승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작은 체격의 마물들이 채워 갔다. 숲에 깔린 마물은 평소 칼리번이 상대하던 마물보다는 하급이었다. 그 지능이나 힘이 훨씬 부족해서 사실상 늑대나 곰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물이 숲에 거주하며 내뿜는 독기를 인간이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숲은 점차 황폐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치… 마계가 된 것 같았다. 한 번도 마계에 가 본 적 없는 칼리번이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칼리번은 무의식적인 압박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식량을 최대한 비축하기 위해 숲과 동굴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갔다. 동굴은 절벽 한가운데에 있기에 칼리번은 수도 없이 암벽을 타고 올라야 했다. 에레즈는 동굴 입구에서 칼리번을 기다리며 안달복달했다.

“머, 머리카락을 무, 묶어서… 바, 밧줄로 쓰면 안 될까?”

에레즈가 가히 천재적인 제안을 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밧줄로 만들면 이동이 한결 편해지므로 칼리번이 불편하게 몇 번이나 오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왕자님의 머리카락은 들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에레즈의 금발은 햇빛 아래에서 과도하게 반짝였다. 마치 이곳에 누군가 숨어 산다고 자랑하는 꼴과 다름없었다.

“미, 미안…. 머, 머리 색이 바, 밝아서….”

에레즈는 자신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침울해했다. 대신 그는 칼리번이 가져온 것들을 동굴 안에 하나하나 정리했다. 제 딴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라도 해 보려는 것 같았다.

“…….”

칼리번은 어릴 적, 개미를 구경하던 때가 떠올랐다. 제 몸만 한 짐을 옮기는 작고 부지런한 벌레들. 칼리번은 개미 몇 마리를 제 손가락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다가 다시 땅에 내려 주곤 했다.

에레즈는 칼리번이 이 숲을 바로 떠나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쉽게 눈에 띄는데, 그런 주제에 약해도 너무 약했다.

그래서, 칼리번은….

“왕자님.”

“…으, 응?”

“이 단검은 왕자님께서 가지고 계십시오.”

칼리번은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단검을 건네주었다. 독은 확실히 빠졌으니 손에 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검의 마땅한 손잡이가 없어 뭉툭한 칼날에 포슬포슬한 손이 베일지도 모르겠다.

“…손잡이는 조만간 만들어 보겠습니다.”

칼리번은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의 손바닥은 딱딱한 굳은살로 감겨 있어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 나보다는…!”

“저는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손을 다칠 수 있으니 평소에는 만지지 마십시오. 만약 제가 없을 때 마물이 습격한다면 그때….”

에레즈가 순순히 받지 않자, 칼리번은 단검을 돌 아래에 숨겨 두었다. 그러고는 에레즈의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은신처의 위치가 워낙 험악해 마물이 침입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칼리번이 신신당부를 하는 동안 에레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가, 가지 마…! 네, 네가, 가, 가져가야, 해…!”

에레즈는 어울리지 않게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칼리번이 무시하고 훌쩍 떠나자 결국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칼리번이 땋아 준 긴 앞머리를 단검으로 단숨에 잘라 낸 것이다.

“왕자님!”

칼리번은 갔던 길을 단숨에 되돌아왔다. 묶인 머리카락과 그 잔해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에레즈의 머리카락은 잘린 만큼 순식간에 다시 자라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

칼리번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에레즈가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을 때, 혹여나 금사에 조종되어 자해하려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아직도 금사가 에레즈를 공격하려던 순간이 두 눈에 선명했다.

“미, 미안해….”

“왕자님….”

“기, 기껏, 따, 땋아 줬는데, 마, 망쳐서, 미, 미안….”

에레즈는 몇 번이나 사과하면서도 더듬거리며 바닥을 헤맸다.

“…….”

칼리번은 콱 숨이 막혀 왔다. 고작 그런 이유로 큰 소리를 낼 리가 없지 않은가….

“미, 미안…. 하, 하지만….”

에레즈는 땋아진 머리카락을 풀어 칼날에 감았다. 일종의 손잡이를 만들어 준 것이다. 쇠붙이임에도 둘둘 감긴 머리카락은 잘리지 않았다. 칼날 중 손잡이가 되어야 할 부분이니 뭉툭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칼날의 일부인데….

“가, 가져가….”

“왕자님.”

“나, 나는, 아, 아무것도, 해, 해 줄 수, 있는 게, 어, 없으니까…….”

“…….”

“조, 조…… 조심, 해, 야해.”

에레즈가 혹여나 혼날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칼리번은 그가 필사적으로 내미는 단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만이라고는 속으로 되뇌지만, 실상은 늘 그랬던 것처럼.

* * *

며칠간 주변의 정황과 마물의 출현 경로를 파악한 칼리번은 활동 영역을 좀 더 넓혔다. 더는 숲에 짐승이 없었기에 대신 작은 체격의 마물을 습격했다. 그 피를 바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안전한 탈출 경로를 찾던 칼리번은 번번이 마물만 발견하고 탈출로를 찾는 데엔 실패했다.

어느덧 하늘 위로 붉게 석양이 지고 있었다. 혼자서라면 몰라도 여섯째 왕자를 데리고 무사히 숲을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에레즈는 성장했어도 여전히 다른 알파에 비하면 작고, 연약하고, 겁이 많았다. 그와 함께 이동하면서 생길 돌발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칼리번은 최악의 결말을 떠올릴 때마다 심란해졌다. 그로 인해 자신마저 죽는 것이 두려운지, 아니면 에레즈가 죽는 것이 두려운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칼리번은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용병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동료가 죽었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에레즈로 인해 그동안 느낄 필요가 없었던 불편한 감정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

마음속이 어지러울 때면, 칼리번은 한 손에 쥔 단검을 몰래 살펴보았다. 손잡이 부분이 금사에 감겨 있었다. 반짝거리니 마물의 눈에 띄기 쉬웠다. 그래서 평소에는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어 가렸다.

‘반드시 왕자님과 함께 숲을 탈출한다. 그렇게 결심했으니까… 여기까지 버틴 거다.’

칼리번은 한때나마 그에게 멋대로 동경을 품고, 멋대로 실망했다. 나약한 그가 거치적거리고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칼리번이 상처를 입고 쓰러졌을 때, 에레즈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간호해 주었다. 칼리번 또한 그가 러트가 왔을 때 도와주었다. 비록 무감한 성격이라고 하나, 칼리번도 에레즈의 노고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에레즈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와도 같았다.

‘그분은 동료다. 버릴 수는 없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새로운 혼란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칼리번은 젠을 본성에 버리고 부하들은 왕성에 두고 도망쳤다.

‘다들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의 용병대, 즉, ‘검은 어금니’는 남부 용병 연합 소속이다. 여섯째 왕자의 결혼식 때, 불행히도 용병대는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현재 전원의 생사는 불명이다.

‘남부 용병 연합은 대응하고 있을까?’

마물이 쏟아지는 지금, 다른 용병대들은 빠르게 연합 본부로 향했을 것이다. 칼리번도 남부 용병 연합을 찾아가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다. 아니, 에레즈 프리드웬의 인기나 처지는 썩 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왕족의 혈통이었다. 기사단이나 성녀단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 곳으로 가든 간에, 일단 수도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알테르 프리드웬에게서 멀어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칼리번은 석양이 지기 전에 절벽 동굴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동굴에서 열매 개수를 세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여섯째 왕자는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벌써부터 그의 순진하고 보드라운 얼굴이 두 눈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칼리번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운 좋게 멀쩡한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칼리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열매 몇 개를 채취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이미 독이 들었을 수 있으므로, 칼리번은 가장 작고 못생긴 열매를 미리 먹어 보았다.

“음…?”

그리고 그는 드물게도 얼굴을 찡그렸다. 작은 열매가 유달리 시큼하게 느껴졌다. 열매가 썩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과도하게 신맛이 느껴질 뿐….

“…….”

그는 미각도 둔감한 편이었다. 그것은 선천적이기도 했고, 후천적이기도 했는데, 용병대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미각을 포기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먹어 보는 나무 열매라서 그런 것일까? 최근 칼리번은 모든 열매를 에레즈에게 양보하고, 쓴맛이 나는 뿌리만 먹고 있었다. 아니면 벌써 마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고작 맛으로 식량을 포기할 수 없었다.

“……!”

나무 열매를 챙기던 칼리번은 낯선 기척을 느끼고 몸을 낮췄다.

칼리번은 숨조차 쉬지 않았다. 근처에 마물이 있는지, 멀리서 자신의 것이 아닌 발걸음 소리가 났다.

‘아니, 이건….’

마물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점을 포착한 칼리번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칼리번은 동료들에게 용병이 천직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했는데, 그의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짙은 피부색이 일종의 보호색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깔리는 숲에서 칼리번을 찾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자면 에레즈는 아름답기는 하나 흰 털을 가지고 태어난 연약한 소동물처럼 스스로 살아남기 힘든 개체였다.

하여간에, 칼리번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 숲을 살폈다.

“……!”

그리고 그의 검은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랍게도, 칼리번이 발견한 것은 마물이 아닌 한 무리의 인간이었다.

이 숲에 자신과 여섯째 왕자 외의 인간이라니.

무리는 총 네 명이었다. 가장 앞에는 성녀와 소년이 있었다. 성녀는 두 눈을 다쳤는지 피 묻은 천으로 눈가를 가린 채였다. 앞을 볼 수 없는 탓에 소년이 성녀를 부축하며 걷고 있었다. 두어 명의 사내는 그들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고 있었다.

칼리번처럼 나무나 수풀에 숨어 조심히 이동하고 있었으나, 여간 불안한 행색이 아닐 수 없었다. 칼리번은 의심을 놓지 않은 채 그들이 있는 쪽으로 몰래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의 숨소리나 움직임이 더욱 잘 들려왔다.

“젠장, 숲을 빠져나가기는 글렀나…….”

“하아….”

“헉, 헉….”

“……조금만 더 가면, 수도에….”

그들은 지친 탓인지, 아니면 불필요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것인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마물이 득실거리는 숲이었으니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성녀는 영 상태가 좋지 않은지 곧잘 비틀거렸다. 함께 움직이는 소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성녀님, 조금만 더 힘내세요.”

소년은 변성기도 지나지 않았는지 높은 목소리로 그녀를 응원했다. 하지만 어린 얼굴과 목소리와 달리 힘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성녀의 한쪽 팔을 둘러메고 몸을 거의 받쳐 주다시피 하고 있었다.

“…….”

이 얼마 만에 보는 평범한 사람들인가? 그러나 칼리번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지 고민했다. 지친 그들을 자신의 은신처로 옮겨 쉬게 할 수도 있었다. 외부에서 온 자들이니 바깥 상황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전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이득이 될 것인가, 아니면 손해가 될 것인가?

칼리번이 오랜 용병 생활을 하면서 뼈저리게 익힌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자신은 타인을 보호할 수 있는 기사나 성녀가 아니라, 그저 마물의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는 그저 용병에 불과하다는 것을.

“허, 허어억!”

칼리번이 망설이던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한 사내가 기겁했다. 일행의 시선이 모두 한곳을 향했다. 칼리번도 그들과 같은 곳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눈. 먹잇감을 발견한 마물이었다. 쿵, 쿵, 발소리를 울리며 그것이 인간 무리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마리의 동물이 멋대로 뒤섞인 듯한, 야수 형태의 마물이었다.

“히, 히익…!”

“마, 마물……. 흐, 으으, 서… 성녀님, 성녀님!”

“성녀님, 저쪽입니다! 제기랄, 저쪽이라고…!”

뒤따르던 사내들이 난리를 피웠다. 황급히 성녀의 어깨를 붙잡더니, 마물이 있는 방향으로 그녀의 몸을 빙 돌렸다.

“그만둬요, 아저씨! 성녀님은 더 이상 버티지 못…. 읍! 흐읍!”

소년이 성녀를 끌어당기려 하자, 사내 중 한 명이 재빨리 끌어안고는 입을 막았다.

“이, 입 닥쳐, 이 멍청아! 우, 우, 우리가, 뒤에서 노는 줄만 아냐! …그보다 성녀님, 우선 앞을 막아 주십시오!”

“아…. 아….”

지팡이를 잃은 성녀가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며칠 전 비가 내려 아직 굳지 않은 땅이었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진흙 범벅이 되었다. 눈앞에 나타난 인간 중 누구부터 잡아먹을지 고민하던 마물이, 그것을 시작으로 달려들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성녀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두 손을 맞잡았다. 용병인 칼리번이 보기에는 무방비하고 나약한 자세였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거대한 마물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다.

“……, …….”

성녀는 마물이 달려오고 있음에도 쉬지 않고 복잡한 기도를 중얼거렸다. 마물이 앞발로 그녀의 머리를 날려 버리기 직전, 그녀의 앞으로 무형의 방패가 나타났다.

“성녀님!”

사내들에게 붙잡혀 있던 소년이 간신히 풀려났다. 소년은 겁도 없이 성녀에게로 곧장 달려가,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끄으으—! 키에에에엑!”

마물은 당장이라도 방어막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허공을 난도질했다. 성녀는 필사적으로 마물을 붙잡았다.

“이, 이 틈에…….”

그사이, 사내들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더니 숲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 돼요, 아저씨! 가지 마요! 이리 와서 같이 싸우자고요! 한 마리 정도는 우리가 어떻게든…!”

성녀를 부둥켜안은 소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러나 한번 외면한 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안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제길.”

부상을 입고 앞을 보지 못하는 성녀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칼리번도 더는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단검을 고쳐 잡았다.

“윽….”

그리고 그 순간, 칼리번은 낮게 신음했다. 단검을 쥔 손이 영문도 모른 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손을 들었다.

“큭, 이건…!”

단검에 감긴 금사 중 몇 가닥이 풀려, 칼리번의 손가락과 손등 위에 도드라진 핏줄에 파고든 것이다. 가느다란 금사가 한 겹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피가 빨아 먹히는 감각과 함께, 오른손이 실에 꿰매어지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칼리번은 검을 쥐던 오른손을 쫙 펼쳤다.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져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단검은 금사에 의해 오른손에 꿰매진 채였다. 게걸스럽고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떠나지 말라는 듯 붙잡는 것도 같았다.

“크윽…!”

칼리번은 금사가 더는 타고 올라갈 수 없도록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붙잡았다. 동시에 다시 단검을 움켜쥐었다. 금사가 놔주지 않겠다면, 이대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으… 으아아악!”

그때, 사내들이 도망친 곳에서 커다란 비명이 들렸다. 검게 말라붙은 나무들이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비명과 마물의 포효가 뒤섞이더니, 거대한 조류형 마물들이 사내를 하나씩 물고는 하늘을 날아올랐다. 칼리번의 몸 위로도 조류형 마물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다 잡혀 가서 씨가 마른 줄 알았는데, 새끼를 밸 수 있는 사내가 둘이나? 요즘 같은 때에 드문 수확이야.”

숲 안쪽에서 마물의 으르렁거림이 아니라, 뚜렷한 말소리가 들렸다.

“……!”

칼리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검은 눈이 목소리가 들린 곳에 고정되었다.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유독 짙어지더니,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께서도 기뻐하시겠군. …이 멍청한 마물은 말뜻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마물로 득실거리는 이 숲에서 간만에 마주하는 마물 혼혈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체격이 좋은 사내로 보였지만, 칼리번은 그가 마물 혼혈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타인센.”

왜냐면 그 또한 칼리번과 같은 용병이었기 때문이었다. 타인센은 칼리번과는 다른 용병대에 소속된 자였다. 그쪽 용병대와 교류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얼굴이 서로 익은 정도로, 연합에 보고하러 갈 때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 다였다. 칼리번보다는 젠과 더 친분이 있다고 봐야 옳았다.

아는 얼굴이었기에 칼리번은 두 눈을 의심했다. 마물에 대항하는 용병이 마물과 함께 무리를 이루다니….

“…거기, 꼬마!”

“힉…!”

“내 말이 들리겠지? 남자 대 남자로 하는 말이다. 더 이상 무의미한 살상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물 사이에 선 사내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역시나, 타인센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너 같은 사내 녀석뿐이다. 순순히 따라오면 이 계집은 더 괴롭히지 않으마. 아니면 먼저 끌려간 놈들처럼 질질 짜면서 가고 싶으냐? 남자라면 제대로 판단하는 게 좋을 거다.”

“…….”

“넌 아직 어리니 바로 새끼를 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 다른 알파에게 끌려간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 다른 놈들은 나이를 구별하지 않으니 말이다. 내게 와라. 아무리 나라도 이 이상의 보장은 못 해.”

타인센은 성녀님을 등 뒤에서 꼭 끌어안은 소년을 향해 말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루인, 저자의 말을 듣지 마세요, 귀 기울일 필요 없습니다!”

성녀가 헐떡이며 반박했다. 땀으로 축축해진 그녀의 뺨 위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가를 가린 천이 더는 피를 흡수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성녀님, 저는…!”

“……막을 수 있어요. 도망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여기까지… 함께해 온 것처럼….”

그러나 단단한 말과는 달리, 성녀는 소년의 부축이 없으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 이것 참! 사람 하나를 아주 악마로 만드는군. 나름 아량을 베푼 건데 말이야.”

타인센은 일부러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방어막을 친 성녀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소년은 잔뜩 긴장해 성녀의 등 뒤에 숨었다.

“다, 당신은, 사람의 말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니야….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마물……!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죠?”

성녀가 외쳤다.

“음? 많이 봐 왔는데.”

타인센이 손을 뻗었다. 그 자체로는 방어막까지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톱이 검처럼 길어졌다. 웬만한 검보다 강도가 단단하고 뾰족한 손톱이 그대로 뚫었다.

“…으, 윽!”

“사람이 사람 죽이는 거.”

“성녀님!”

“너희 계집들의 같잖은 성력은 마물만 막을 수 있지. 그렇다면 이게 바로… 내가 사람이라는 증거이지 않나?”

“우, 우윽….”

반은 인간, 반은 마물. 그로 인해 성녀의 마법에 영향을 받아 약화되지만, 마물처럼 완전하게 통하지는 않는다.

“마, 마물 혼혈…. 어째서, 우리를 배신, 하는….”

성녀는 피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타인센의 손톱이 성녀의 몸을 꿰뚫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마법을 풀지 않았다.

“그, 그만둬! 성녀님에게 손대지 마!”

소년이 성녀의 몸에서 타인센의 손톱을 뽑아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이나 다를 바 없었고 소년의 두 손에 피가 맺힐 뿐이었다.

‘제길….’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칼리번의 왼손이 피부를 움푹 파고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가 흘렀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좌절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성녀에게서 살금살금 멀어지더니, 마침내 방어막 안에서 나왔다.

“아… 안 돼, 루인! 윽…. 아, 윽…. 안 돼, 가지 말렴!”

소년이 곁에서 멀어지자, 붙잡을 수 없는 성녀가 외쳤다.

“옳지, 착한 아이군.”

타인센이 이리로 오라며 손을 까딱였다. 그러나 소년은 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마물이 없는 숲 안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잡아 와!”

“으윽!”

타인센이 성녀의 몸에서 길게 뻗은 손톱을 뽑으며 명령했다.

“크와아아아—!”

마물의 포효에 소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나 두려움도 잠시였다. 소년은 오히려 따라오라는 듯, 숲속으로 더욱 빠르게 뛰어갔다.

“뭐야! 어서 가지 못해?! 멍청한 놈들!”

어째서인지 마물 몇 마리는 타인센의 명령을 듣고도 굼뜨게 굴었다. 타인센이 호통을 치자 그제야 숲 안으로 들어갔다.

‘마물이… 명령을 따른다고?’

칼리번은 충격을 받았다. 마물이란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괴물. 젠조차 이성을 잃고 본성을 완전히 드러낼 때는, 칼리번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런 괴물들이 마물 혼혈의 말을 따르다니.

그건 마치… 인간의 군대와도 같지 않은가?

“약속대로, 죽이지는 않도록 하지.”

타인센은 쓰러진 성녀에게 비웃음을 띄우고는 소년이 도망친 곳으로 향했다. 타인센의 손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곧 죽게 될 것이다. 잔혹한 말장난이었다.

칼리번은 타인센의 기척이 사라진 후,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 누구시죠…?”

칼리번의 등장에 앞이 보이지 않는 성녀는 불안한 듯 물었다. 칼리번은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마물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수풀 안쪽에 그녀의 몸을 숨겼다.

“…도, 도와주시는 건가요…?”

“…….”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숨겨 줄 뿐. 치유는 성녀단의 전문 분야였다. 마물 혼혈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탓에 제대로 된 구급 물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상처를 막을 도구도 마땅히 없었다.

칼리번이 수풀로 그녀의 몸을 가릴 무렵이었다. 새하얀 손이 칼리번의 팔을 더듬거리며 붙잡았다.

“으윽! 그, 그럼 저 말고, 저 아이를…… 도와주세요…!”

“…….”

“저는 어차피 죽을 겁니다…. 그러니 한 명이라도….”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이 여자는 어차피 죽는다. 저 소년도 결국 마물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젠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기사도, 성녀도 아니다. 그저 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용병에 지나지 않았다. 죽어 가면서도 다른 사람을 살리기를 바라는 그녀와 칼리번은 근본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돌아올 테니 정신을 잃지 마십시오.”

“알겠, 어요…. 으윽!”

칼리번은 마음이 편해질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하고는, 그녀의 입에 천을 뜯어 물려 주었다. 칼리번은 성녀를 숨겨 놓은 수풀에서 빠져나왔다. 이대로 절벽 동굴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이성과는 달리 칼리번의 걸음은 소년이 도망쳤던 방향으로 향했다. 그 뒤를 마물들이 쫓으면서 흔적을 남겨 놓았기에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금사가 칼리번을 계속 붙잡았다. 그의 핏줄 속에서 불안해하듯 꿈틀거렸다. 칼리번은 손등 위가 불룩거리는 감각을 억누르며 몸을 낮췄다. 어차피 가 보았자, 소년은 이미 잡혔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 소년이 마물에게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시간 낭비일 뿐이다. 금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

도리어 그럴수록 칼리번의 걸음은 더욱 빨라져, 뜀박질로 변했다. 그는 나뭇가지와 수풀을 헤치며 달렸다. 검은 나뭇잎과 가지는 부딪치면 곧바로 부스러지거나 부러졌다. 그것들이 머금고 있던 빗물과 이슬이 칼리번에게 떨어졌다. 피로 물든 얼굴 위로 투명한 물이 선을 긋고, 그의 맨얼굴을 드러냈다.

칼리번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서너 마리의 마물이 보였다.

“…뭐야, 일행이 더 있었나?”

타인센이 칼리번의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수풀 사이에서 칼리번을 발견한 타인센의 회색 눈이 잠시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자리에 모여 있던 마물들이 우르르 타인센을 따랐다. 그 탓에 그들이 원래 서 있던 자리가 비었다. 칼리번의 시선이 자연히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소년이 있었다. 아니, 으스러진 털 뭉치가 웅크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소년은. 소년이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개라고 하기에는 거칠고, 늑대라고 하기에는 얄쌍한 짐승의 머리를 지니고, 온몸에는 머리와 같이 회색빛의 털이 돋아 있었다. 두툼한 꼬리도 달려 있어 멀리서 보면 점박이 가죽을 지닌 털 짐승 같았다.

체격으로 보아 고작해야 서너 살이었을 것이다. 미성숙한 개체가 감히 거대한 마물들에게 대항한 것이다. 그 대가로 소년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기고 물어뜯겨 조각나 버렸다.

“…….”

그 소년은 칼리번과 타인센 같은 마물 혼혈…. 즉, 동족이었다

“쯧, 감쪽같이 속았지 뭐야. 어린 녀석은 냄새가 약해서, 본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인간이랑 구별하기가 힘드니 말이지.”

칼리번의 시선이 소년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자, 타인센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말하면 이해하려나? 이 괴물 새끼들 같으니…. 오랜만에 어린 사내 맛을 볼 수 있을 줄 알고 평소보다 흥분해서는.”

타인센은 마물을 퍽, 발로 차는 시늉을 했다. 크르르…. 마물들은 위협적인 소리를 냈지만 타인센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풀이라도 시켜 주지 않으면 도통 얌전해지지 않아서 말이야, 다루기가 힘들어지거든.”

“…….”

“그건 그렇고 오랜만이군, 칼. 칼리혼…. 아니, 칼젠토였던가? 하여간 어째서 이런 숲에 혼자 있는 거지?”

넉살 좋은 타인센은 데면데면한 칼리번을 보고도 어제 본 친구처럼 대했다.

“…….”

칼리번은 묵묵히 그들에게 걸어갔다. 어째서인지, 타인센도 마물들도 자신을 갑자기 공격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상대로였다.

“쉬이, 저 녀석은 내 동료니 내버려 둬! 같은 알파를 죽이는 걸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마물들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려 하자 타인센이 멈추게 했다. 그는 망가져 버린 입질용 장난감을 칼리번에게 순순히 내어 주었다.

“설마 칼로젠, 너도 ‘임무’를 받고 숲을 탐색하러 온 건가? 그렇다면 소집됐을 때 널 못 봤을 리가 없는데….”

타인센이 칼리번에게 캐물었다. 칼리번은 왼손을 뻗어 소년의 눈을 감겨 주었다. 구할 도리도 없이, 목숨이 끊어진 채였다.

모른 척 도망치려 했으나 결국 이렇게 마물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난입했다면 좋았을 것을. 칼리번은 멍청하고 둔해서, 젠 없이는 옳은 판단을 잘 내리지 못했다.

후회. 밀물처럼 뒤늦게 밀려오는 낯선 감정이었다. 칼리번은 겨우 발목을 잠길 정도의 물길에 쓰러질 것 같았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죽은 소년에게서 동굴에 숨겨 놓은 왕자의 일면을 보아서일까?

“…우리는 마물을 막고 인간을 지키는 용병이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된 거냐, 타인센.”

칼리번의 묵직한 음성이 주변을 울렸다. 그러자 타인센이 헛웃음을 지었다.

“뭔 말을 하려나 기다려 봤더니…. 뭐? 누굴 지켜? 하, 하하하! 이봐, 칼! 어디 동굴 속에서 겨울잠이라도 들고 왔나?”

“…….”

“이 알파야, 세상이 바뀐 지가 오래야. 정말 한결같이 돌머리군그래. 설마 최북단에 방어전을 치르고 이제야 느긋하게 수도에 돌아오는 길은 아니겠지? 그 정도는 돼야 그 태도가 이해가 갈락 말락 하는데.”

“…….”

“전부터 어지간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소식이 느려서야….”

타인센이 칼리번을 철없는 동생 보듯 하며 핀잔을 주었다. 젠만큼은 아니었지만, 타인센도 제법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칼리번과는 대략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이 데면데면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자잘한 흉터로 얼룩진 타인센의 얼굴이 드물게 활짝 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거친 용병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뭣도 모르는 것 같으니 이번 한 번은 봐주마. 하지만 그전에, 이것 하나는 확실히 하고 가야 싶다. 칼리번, 네가 뭔가를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용병’에 대한 개념부터가 틀렸거든.”

칼리번이 말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지키기는 누굴 지켜? 권력을 독차지하고 생색만 내는 기사도, 희생정신 가득한 성녀도 아닌데 말이야. ‘용병’이란 그저 금화를 약간 받고 하루를 버텨 주는 고기 방패에 불과하지 않던가?”

이득만을 보며 살아가는 존재. 항상 칼리번이 들어왔던 말이다. 칼리번의 검은 눈이 어둡게 침잠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어!”

타인센은 칼리번의 침묵을 동의로 인정한 것 같았다. 그가 칼리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칼라인. 신체 변형도 할 줄 모르는 반푼이 알파라고는 하지만, 관리해야 할 마물도, 인간도 워낙 많아 지휘관이 필요한 차다. 내가 잘만 말하면 네게도 작위를 줄 거다.”

“…작위?”

칼리번은 낮게 중얼거렸다. 용병인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래, 작위! 믿기지 않겠지. 하지만 이제 길이 뚫렸다. 앞으로는 하기에 따라서 우리 같은 마물 혼혈들도 귀족이 될 수 있게 됐다고! 얼마 전 전하께서는 공적을 올리는 이에게는 마공작의 지위까지도 하사하겠다고 약속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마공작…?”

왕실 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칼리번이었지만, 높으신 분을 백작님이라든가, 공작님이라고 부르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칼리번의 생경한 반응에 그는 더욱 크게 말했다.

“크하핫! 슬슬 입질이 오는군. 솔깃하겠지!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린가 얼떨떨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전하의 말씀이라면 믿을 수 있다. 위대하신 국왕 전하께서 몸소 실천에 보여 주셨거든. 탐욕스러운 저 귀족 놈들을 깡그리 잡아다 마물의 처로 삼으신 거다.”

“국왕….”

“이렇게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놈이라면 지금 왕위에 오른 분이 누군지도 모르겠군그래?”

“…….”

“알테르 프리드웬 전하시라고!”

칼리번의 두 눈이 커졌다. 예상해 본다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제삼자에게 그 말을 들으니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전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마물의 본성을 모두 지닌 마물 혼혈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지. 영토 정화 작업이 끝나면, 귀족에게서 몰수한 영지를 우리 마물 혼혈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해 주실 거다.”

칼리번의 속이 어떻든 간에 그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타인센은 칼리번이 넘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술술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러트가 올 때마다 인간 사내를 공급해 준다고 하셨다! 구미가 당기지 않나?”

간간이 보아 왔던 타인센은 투박하고 거친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마치 혁명가처럼 보였다. 두 눈에는 생기와 희망이 어리고, 전에 없는 기력과 혈기로 들끓었다. 마치 10년은 더 젊어진 것 같았다.

“크하하핫! 그간 인간 비위나 맞추며 이리저리 쫓겨 다녔지. 집도 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활…. 이제 너도, 나도 모두 청산하는 거다! 이제 이 땅은 마물 천지다. 그리고 이 위험한 짐승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우리 같은 마물 혼혈이야!”

“…….”

“인간들이 짐승을 기르고 때가 되면 잡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인간을 사육하게 될 거다. 굳이 인간 사내를 많이 남겨 둘 필요는 없어. 1할만 남겨 두고 나머지 사내는 모두 우리의 러트 시중을 들게 될 거다.”

세상이 뒤집혀 밑바닥에 있던 용병이 가장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러나 칼리번은 타인센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바위처럼 단단하고 무감정했다.

“…마물은 그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다.”

칼리번은 쉽사리 현혹되지 않았다. 타인센의 말대로, 그리고 젠의 말대로, 용병은 철저히 이익만을 추구한다. ‘이익’을 추구하기에 인간계에 남은 것이다.

마물 혼혈은 인간보다는 강하나 마물에 비하면 약하다. 본성에 완전히 눈을 뜬 마물 혼혈이 마계로 흘러드는 경우도 많지만, 그 경우는 마물의 피가 월등히 강하게 발현한 경우였다.

대부분은 마물과의 경쟁에서 치여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남았다. 인간과 상생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였다. 마물에게는 이성이 없고, 마음이 없다. 무의식과 무질서이며, 혼돈 그 자체다. 그렇기에 짐승보다도 소통이 불가능하며, 길들여 부하로 삼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지. 그렇다면 칼, 내가 어떻게 이 녀석들을 부리고 있는 거지?”

타인센의 질문에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마물들이 마치 잘 길든 개나 소처럼 타인센의 명령을 따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칼리번이 대답하지 못하자, 타인센은 보란 듯이 웃었다.

“하하, 봐라! 국왕 전하께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이시라니까!”

“…….”

“마지막 기회다. 나와 함께 가자!”

그러나 칼리번은 두 손을 눈가까지 끌어 올렸다. 전투 자세였다.

“…하, 이 엄청난 연설을 듣고도 여전히 그런 반응인 거냐? 뭐 때문에 그렇게 멍청하게 구는 거지? 고작 어린애 하나가 죽어서?”

타인센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하, 이것 참…. 이렇게까지 동족에게 깊은 유대감을 지닌 놈일 줄은 몰랐군.”

그가 보기에 칼리번은 별종일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타인센을 따를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알테르 프리드웬이 즉위했다면, 분명 결혼식에서 죽이지 못한 에레즈를 끝장내려 들 것이다. 자진해서 처형대로 올라갈 이유는 없었다.

“굳이 널 죽이지는 않겠다, 칼호소.”

타인센은 혀를 차고는 등을 돌렸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오늘은 더 이상 동족을 죽이고 싶지 않거든. 아는 얼굴이기도 하고. 이번만은 보내 주마. 가라.”

아직도 그는 칼리번을 멍청하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기형 알파로 보는 모양이었다. 죽은 소년을 인간으로 오해한 그다웠다.

“…….”

이대로 물러설 수도 있었지만, 칼리번은 타인센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다면, 알테르 프리드웬의 귀까지 들어간다면, 주변의 마물은 몰라도 타인센만은 반드시 처리해야 했다.

“멍청한 놈. 기회를 줘도 걷어차다니!”

칼리번이 습격할 것을 예상했는지, 타인센은 곧바로 팔을 들었다. 낡아 빠진 단검이 타인센의 팔뚝과 맞부딪쳤다.

깡—

피부에 단검이 박히는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계속해서 칼질을 했다.

“흐음?!”

대치가 길어지자, 단검을 휘감은 금사가 맞닿은 타인센의 피부에까지 파고들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타인센이 곧바로 칼리번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단검을 꽂아도 멀쩡하던 그의 팔에서 피가 흘렀다.

“꽤 재밌는 무기를 들고 다니는군. 내 몸에 흠집을 내다니, 드문 일인데….”

타인센의 눈에 기묘한 빛이 돌았다. 칼리번은 다시 한번 공격하려던 순간이었다.

“상대해!”

타인센이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그의 빈자리를 차지한 세 마리의 마물이 칼리번의 앞을 막았다.

‘순순히 물러나게 놔둘 수는 없지!’

그 직전, 칼리번은 타인센의 머리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칼리번의 피부 들러붙어 있던 금사가 투둑, 피부를 찢으며 뽑혀 나갔다.

“제길…!”

칼리번이 던진 단검은 아쉽게도 타인센의 이마를 꿰뚫지 못했다. 그의 자랑이자 무기인 두 팔이 재빠르게 방패 역할을 한 것이다. 타인센의 두 팔은 강철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단단해서 웬만한 마물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칫!”

칼리번은 혀를 찼다. 그러나 달려가 타인센을 쓰러뜨릴 여유가 없었다. 마물 한 마리가 칼리번에게로 냉큼 뛰어올랐다. 몸체는 사자와도 같은 네발짐승의 형태였으나 머리는 독수리였고 강철만큼 단단한 부리가 달려 있었다. 휙, 휙 흔들리는 꼬리가 채찍처럼 위협적이었다.

마물의 부리가 칼리번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달려들었다. 칼리번은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 간만의 차로 몸을 오른쪽으로 굴렸다. 칼리번이 조금 전까지 머물던 자리에 마물의 부리가 꽂혔다. 마물이 부리를 땅에서 뽑아내기까지 잠깐의 틈을 칼리번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훌쩍 마물의 등에 올라타고는 마물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다시피 했다. 그대로 질식시키기 위해 양팔에 힘을 주자,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칼리번은 그대로 마물의 목뼈를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쉬이이익—!”

다음 순간, 칼리번의 등으로 번개 같은 고통이 새겨졌다. 목이 조인 마물이 긴 꼬리로 칼리번의 등을 후려갈긴 것이다.

“큭!”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수 개나 달린 꼬리는 마치 소뼈 조각을 붙인 채찍 다발 같았고, 휘두를 때마다 바람 소리가 날 정도였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다.

“큭, 으윽, 흐… 젠장!”

다른 두 마리의 마물이 언제 덤벼들지 모를 상황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칼리번은 마물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두 다리를 들어 올렸다.

“흐읍—!”

근육으로 꽉 조인 다리로, 마물의 목을 팔 대신 감쌌다. 깍지를 끼듯 복사뼈가 서로 맞물렸다. 오랜 세월 대검을 휘둘러 왔기에 팔근육이 발달한 편이었지만, 그런 두 팔을 지탱해 온 것은 근육으로 두툼하게 짜인 두 다리였다. 마물을 다리로 안은 채 허리를 옆으로 돌리자 마물의 목뼈가 부러져 나갔다.

하늘을 보고 눕게 된 칼리번은 다리와 허리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펄쩍 일어났다. 칼리번은 쉴 수 없었다. 아직 두 마리의 마물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근처의 나무를 뽑아 들었다. 수십 년을 비와 바람을 맞고 자라 온 고목은 두 팔에 간신히 안길 정도로 두껍고 길었다.

“덤벼라!”

칼리번이 외쳤다. 남은 두 마리의 각기 뱀과 사자를 닮아 있었다. 그것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하압, 칼리번의 배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품에 안은 거목은 칼리번보다 한 박자 느리게, 붕 휘둘러졌다.

퍽! 주먹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거목을 통해 타격감이 느껴졌다. 야수형 마물이 붕 날아가 저 멀리 처박혔다. 그러나 뱀은 아니었다.

‘남은 한 마리는 어디에 있지…?’

칼리번의 검은 두 눈이 뱀 마물을 찾았다. 사삭, 사삭…. 뱀 마물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으윽…. 큭!”

소리의 정체를 파악한 칼리번은 거목을 곧바로 내던졌다. 뱀 마물은 땅이 아니라 칼리번이 들어 올린 거목에 긴 몸체를 휘감아 가며 접근했던 것이다. 나무줄기와 풍성한 잎사귀 탓에 보이지 않은 것이 실책이었다.

“키익, 키이익!”

칼리번이 거목을 버린 순간, 뱀 마물이 몸을 날렸다. 그것의 움직임은 밧줄과도 같았다. 중심을 잘 잡아 던지면, 밧줄은 그 힘을 원동력 삼아 단번에 휘감긴다. 그와 같은 원리로 뱀 마물은 칼리번의 몸을 옭아매 버렸다.

“으, 욱…!”

칼리번의 전신을 휘감은 뱀이 똬리를 틀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쉬이이…. 쉬익—!”

뱀이 위협적으로 입을 쩍 벌리자 독니 한 쌍이 드러났다. 이대로 칼리번의 머리를 집어삼키고는 전신을 배 속에 집어넣어도 부담이 없을 정도로 뱀 마물은 거대했다.

“큭, 제기랄…!”

전신의 뼈가 부서지기 직전인데도, 칼리번은 몸을 뒤틀며 벗어나려 들었다. 앞과 뒤에 달린 두 개의 뱀 대가리가 칼리번의 발과 머리를 동시에 삼켰다.

“흐, 큽—!”

칼리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시에 뱀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그는 엄습하는 어둠을 느끼며 그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입술도 꽉 닫았다. 뱀은 꾸역꾸역 칼리번의 몸을 배 속에 쑤셔 넣었다. 미끈거리고 끈적이는 소화액이 칼리번의 얼굴에 뒤덮였다.

“…읍, 흐읍….”

모든 생명체가 그렇겠지만, 겉보다 속이 더 연하고 약한 법이다. 뱀 마물은 칼리번을 삼키기 전에 전신을 으스러뜨리거나, 독을 써서 죽였어야만 했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마물은 다짜고짜 칼리번을 집어삼켰다. 바로 알파의 욕망 때문이었다. 그간 칼리번을 곤란에 빠뜨린 오메가라는 형질이, 지금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대가리가 양 끝에 달린 뱀 마물은 칼리번을 반씩 삼키고는, 서로 반대편을 더 먹으려 했다. 멀리서 보면 뱀 마물이 혼자서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후으, 윽…!”

칼리번으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기회였다. 칼리번은 뱀 마물을 내장에 무수히 주먹질을 했다. 매끄러운 껍질로 뒤덮인 뱀의 표면이 칼리번의 움직임을 따라 울룩불룩 솟아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 흣, 흐으, 흡…!”

그러나 사냥감을 통째로 삼키는 뱀의 뼈는 유연하면서도 탄력이 있었다. 잔뼈로 뒤덮인 마물의 몸 안쪽은 갑옷을 두른 것처럼 철통같았다. 도리어 칼리번의 주먹에서 피가 나고,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두 대가리는 제가 더 집어 먹으려고 칼리번을 위아래로 쭉쭉 빨아 댔다. 양쪽의 입에서 흥건하게 분비되는 소화액이 칼리번을 반쯤 잠기게 했다. 은폐를 위해 온몸에 발라 둔 마물의 피가 뱀의 소화액에 지워지는 것은 물론, 그가 걸친 옷이 녹기 시작했다.

‘……제길.’

칼리번의 피부에 축축이 눌어붙던 천과 가죽은 점점 사라지고, 뱀의 점액이 그의 피부를 뒤덮었다. 마물 혼혈이 아니었다면, 칼리번의 살은 천과 함께 녹아 진즉에 뼈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물 혼혈의 껍데기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칼리번은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내장을 찢고 긁었다. 손등 위로 뱀의 점액이 스며들었다. 마치 용암을 들이붓는 것처럼 살점이 부글거렸다.

‘어서, 벗어나지 않으면….’

이대로 녹아서 뱀의 먹이가 되겠지.

슬슬 정신이 없었다. 숨은 점점 부족해져 갔다.

“……음?!”

그때였다. 얇은 밧줄 같은 것이 칼리번의 한쪽 허벅다리를 휘감았다. 가죽 바지마저 녹이는 위장 속에 밧줄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사타구니를 더듬으며 배회하기까지 했다.

“헉……!”

고통과 질식 사이에 끼어드는 낯선 감각에 칼리번의 몸이 일순 굳었다. 그러자 또 하나가 이번에는 칼리번의 가슴을 감았다. 끝이 두 갈래로 갈려 예민한 피부 위를 날름거리는 그것은… 뱀의 혀였다. 양 끝에서부터 칼리번을 잡아먹던 뱀은, 이제는 서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크윽…!”

칼리번은 치를 떨며 한 곳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주먹으로 갈겼다. 힘이 한곳에 집중되자 질기고 단단한 뱀의 거죽도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칼리번의 팔이 뱀의 몸을 뚫고 튀어나왔다.

칼리번의 탈출은, 제삼자가 보기에는 기괴한 탄생이었다. 튀어나온 팔이 허공을 더듬거리더니, 뱀의 몸체를 짚었다. 이어서 그의 검은 머리가 튀어나왔다.

“흐, 흐으, 으아아…!”

칼리번은 낮은 함성을 토해 내며 뱀의 몸을 더욱 넓게 찢었다. 어느새 그의 상반신이 반 정도 튀어나왔다. 칼리번은 입 안에 가득 찬 뱀의 점액을 토해 냈다. 찐득하고 덩어리진 점액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큭, 우윽……. 헉, 허억…!”

점액이 안구의 점막에까지 들러붙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칼리번은 기를 쓰고 뱀의 몸 안에서 기어 나왔다. 그의 몸과 함께 뱀의 점액과 피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두 팔로 간신히 바닥을 짚었으나, 점액 탓인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커헉!”

칼리번이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엄청난 충격이 복부에 가해졌다. 몸집이 집채만 한 사자 마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칼리번을 걷어찬 것이다. 칼리번의 몸이 허공에 붕 뜨더니, 십수 년을 묵었을 거대한 나무에 부딪혔다. 우지끈,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뒤늦게 이어지고, 그 뒤로 몇 그루가 더 바닥으로 쓰러졌다.

“헉, 허억…….”

칼리번은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에서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피가 섞인 침을 뱉고는 얼굴을 한 손으로 슥 닦아 냈다. 점액과 피가 닦이자, 검은 두 눈과 흰자위가 번뜩였다.

“……후우.”

칼리번은 두 손을 얼굴까지 들어 올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신이 된 그의 몸 위로 마물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아직 할 만하다, 라고 판단한 순간.

다섯 개의 검고 긴 칼날이 칼리번에게 날아들었다.

“허억— 윽!”

예상치 못한 기습에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다섯 개의 칼 전부를 피하지는 못했다.

“큭—!”

간발의 차로 네 개를 피했으나, 마지막 하나가 칼리번의 아랫배를 관통했다.

“…아, 하윽…!”

칼리번은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렸다. 한 손으로 칼날을 쥐고 뽑아내려 했다. 그러나 칼날의 강도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보통 칼이 아니었다. 타인센의 강화된 손톱이 분명했다.

이물감.

살과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

평소였다면, 그리 견디지 못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칼리번은 눈앞이 흔들렸다. 결국, 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주저앉았다.

‘어째서……. 고작, 이 정도 공격에….’

칼리번은 의문을 짓씹었다. 심장을 뚫린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아랫배였다. 그런데도 평소와 다르게 속수무책이었다. 마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리번에게 달려들었다.

“흑, 크으윽….”

칼리번은 악문 어금니가 내려앉도록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레이피어의 칼날처럼 얇은 끝과 달리 칼리번의 배 속에 박힌 중간 부분은 어린애 팔뚝만 한 굵기였다. 칼리번은 간신히 그것을 뽑아냈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젠…장…!”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칼리번은 입안은 이미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크워어어어어—!”

마물 두 마리가 동시에 칼리번을 짓뭉개기 위해 뛰어들었다. 달려드는 마물까지 대응하기에는 한발 늦은 차였다. 결국, 칼리번은 야수형 마물에게 뒷덜미를 물린 채로 바닥에 완전하게 엎드렸다. 굴종의 자세였다.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될 것이다.

“하아……. 흣….”

마물의 날카로운 어금니가 피부를 파고들 때마다 뜨거운 숨이 함께 깃들었다. 등줄기가 섬뜩했다.

“…한창 즐기는 중에 미안하군. 하지만 널 죽이기 전에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마물들이 칼리번의 몸 위에서 거친 숨을 씨근거리던 때였다. 타인센이 다가왔다. 칼리번은 얼굴을 완전히 바닥에 처박힌 채였다.

“물러나.”

타인센이 명령했다. 그러나 마물은 칼리번의 목을 놓지 않으려 했다.

“물러나라고!”

타인센이 다시금 명령하고 나서야 마물이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앞발로 칼리번의 등과 하체를 짓누른 채였다. 마물의 무게만큼 압박을 받는 탓에 복부의 상처에서 피가 더욱 빠르게 빠져나갔다.

“고개 들어.”

타인센은 발로 칼리번의 머리를 툭툭 쳤다.

“…….”

칼리번이 고개를 들었다.

“…좋아.”

타인센의 발이 칼리번의 턱을 받치더니, 고개를 꺾어서까지 올려다보게 했다.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리며 타인센을 노려보았다.

“멱을 따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자. 이 단검에 무슨 짓을 한 거지?”

타인센은 칼리번의 눈앞에서 단검을 까딱, 까딱, 흔들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시선은 단검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

칼리번이 단검을 던졌을 때, 머리를 꿰뚫은 대신 막은 그의 오른팔에 부딪혔다. 그걸로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오른팔이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단번에 베인 것처럼, 깔끔하게 절단된 채였다. 대신 잘린 단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아, 말은 바로 해야겠지. 내 팔을 자른 건 단검이 아니라, 손잡이였다.”

“…….”

“고작해야 실뭉치에 불과하던데, 그게 어떻게 내 팔을 이 꼴로 만든 거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대답과 달리 칼리번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양아버지는 숙성육을 날카로운 실에 감아 잘라 내곤 했었다. 칼로 써는 것보다 그편이 깔끔하게 잘린다는 이야기를, 양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조, 조…… 조심, 해, 야해.>

설마….

“어디서 얻은 무기냐. 성녀가 새로 마법이라도 걸어 준 건가? 하지만 이런 건 수도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건데….”

“…….”

“대답해. 순순히 대답한다면 이번만은 놓아줄 용의도 있다.”

칼리번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타인센이 회유했다.

“어차피 회복하면 될 일 아닌가. 고작해야 실뭉치인데.”

칼리번은 타인센이 썼던 말을 인용해 가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제기랄,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큭…!”

칼리번의 턱을 받치던 타인센의 발이 그를 짓눌렀다. 칼리번의 머리가 흙바닥에 처박혔다. 타인센은 멈추지 않고 몇 번 더 발길질했다. 칼리번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 뒤로 팔이 회복되지 않고 있어! 도대체 그 단검에 뭔 짓을 한 거냐고!”

타인센이 잘린 팔의 단면을 칼리번의 얼굴 위로 들이대며 윽박질렀다. 칼리번이 마물을 상대하는 동안 충분히 아물 상처였으나, 아직도 갓 베인 것처럼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른다.”

칼리번은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삼키며 대답했다. 에레즈의 러트 기간 내내 칼리번의 몸을 가두고, 속박했던 금사였다. 그런데 타인센의 몸을 당근 조각처럼 절단했다. 온 힘을 다해 던진 단검이 튕겨 나갈 정도로, 타인센의 피부는 강화된 상태였다. 그런 몸을 어떻게…?

만약 에레즈가 힘을 끝내 조절하지 못했다면, 칼리번의 두 팔도 수십 조각이 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핫, 망할 자식…! 그렇게 뺄 줄은 알았다마는.”

칼리번이 바위처럼 굳건하자 타인센은 예상했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실 가닥에 팔이 썰린 것 정도야, 뭐……. 젠장, 그래. 다른 마물의 가시라도 뽑아 온 걸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치자고.”

“…….”

“하지만 재생이 안 된다니. 이것만은 그냥 두고 볼 수 없겠군. 빨리 뭔 짓을 한 건지 불어. 나름 동족이라고 배려해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냐?”

“……큭.”

타인센은 징이 박힌 구두 바닥으로 칼리번의 뺨을 지그시 눌렀다. 칼리번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두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아니지, 그렇게 꼬셨는데 넘어오지 않은 것도… 이걸 믿고 그런 건가?”

“…읏….”

“네가 무슨 수로 이런 무기를 얻었는지는 모르겠다마는…. 수도로 데려가면 뭐든 해결되겠지. 내 팔도, 이 무기의 출처도.”

타인센이 칼리번의 단검을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가느다란 금사가 한두 가닥이 남아 있었는지, 칼리번의 시선이 닿자 순간 반짝였다.

“……!”

타인센의 입장에서야 당장 칼리번을 죽이든, 살리든 크게 아쉬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달랐다. 처음 마주했을 때, 타인센은 칼리번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마물의 편을 들 것을 회유하기까지 했다. 타인센은 알테르 프리드웬의 밑에 있었지만, 아직 칼리번과 에레즈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 끌려간다면, 높은 확률로 여섯째 왕자의 위치를 들키게 된다.

“큭, 안 돼…!”

칼리번은 마물에게 벗어나기 위해 뒤늦게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가 움직일수록, 뚫린 배에서 피가 울컥 흘러나올 뿐이었다.

“추잡하게 이제 와서 반항이냐, 칼.”

타인센이 칼리번의 반응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죽여라.”

“…뭐?”

“차라리, 죽이라고… 했다.”

칼리번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하핫, 네가 이렇게까지 웃기는 놈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갑자기 칼리번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자, 타인센은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칼리번의 검은 머리를 타인센이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하아, 하….”

칼리번의 검은 눈이 똑바로 노려보았다. 코에서 흐르는 피는 칼리번의 입가를 흥건히 적셨다. 타인센이 일부러 킁킁거리며 칼리번의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구린내가 나.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군.”

“죽이라고 했다!”

칼리번은 벌컥 외쳤다.

“좆도 안 서는 늙은이처럼 굴더니, 이제야 어린애답구만. 젠의 꼭두각시 인형인 줄 알았더니….”

타인센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칼리번이 타인센에 대한 인상이 희미했던 것처럼, 타인센 또한 칼리번을 멀리서만 지켜봐 왔다. 그보다는 젠과 더 친한 편이었다. 젠은 여자 알파라는 특성 탓인지 경험이 많고 강한 용병이었지만, 대장 자리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공석으로 두었다가 대리로 내세운 것이 바로 칼제폰, 눈앞의 이 어린 알파였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용병 사이에서 칼리번은 감정 표현이 거의 없었고 젠이 하라는 대로 따르곤 했다. 타인센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용병대에서 굴러먹은 늙은 알파들은 칼리번을 대장이라기보다는 젠의 부하나 새로운 인형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번 공격하면 회복되지 않는 저주 마법이라도 알고 있는 거냐.”

“…….”

“나도 좀 알려 줘 봐. 씨발, 같이 좀 쓰자고!”

타인센은 여유를 부리며 칼리번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마주 보기까지 했다. 그가 가까워져 오자, 칼리번의 얼굴 위로 어떤 냄새가 훅 끼얹어졌다.

“…읏….”

칼리번은 얼굴을 찌푸렸다. 용병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세다 보니 제때 씻지 못해 악취가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이 거부반응을 보인 것은 그 탓이 아니었다. 마물의 피도 매일 뒤집어쓰던 그였다.

“…?”

이상함을 느낀 것은 타인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칼리번을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던 타인센의 두 눈이 흐려졌다.

“…타인센…? …큭!”

타인센은 칼리번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로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이미 마물에게 짓밟혀 꼼짝도 할 수 없었기에, 목과 턱이 길게 당겨졌다.

“뭐야….”

놀리기 위해 킁킁거리기도 했던 타인센이 이번에는 작정하고 칼리번의 냄새를 맡았다. 칼리번은 혀로 핥듯이 뺨과 코, 턱에 닿는 알파의 숨결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칼리번의 상태는 썩 깨끗하지 못했다. 뱀 마물의 소화액과 점액이 말라붙어 있었고, 그 위로는 코피가 입가까지 번진 채였다.

<급할 때는 일단 마물을 죽여서 피를 발라. 하지만 절대로 대장의 피를 써서는 안 돼. 오메가의 피는 오히려 알파를 흥분시키거든.>

불현듯 젠의 말이 떠올랐다. 칼리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번들거리는 타인센의 두 눈이었다. 그는 바로 코앞에서 칼리번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전과는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칼리번은 그 즉시 숨을 멈췄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숨결조차 내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

칼리번이 고개를 돌려 피하려 하자, 머리채를 움켜쥐던 그의 손이 칼리번의 턱을 잡았다.

“이봐, 칼레토. 너 설마….”

타인센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칼리번을 짓누르고 있던 마물이, 칼리번에게 다가간 타인센의 머리를 물어뜯은 탓이었다.

“으, 으아, 크아아악!”

타인센의 몸이 위로 끌려 올라갔다. 동시에 칼리번의 머리 위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칼리번의 턱을 쥐던 타인센의 왼손에서 불쑥 다섯 개의 칼날이 솟아났다. 칼리번은 그것이 자신의 목을 꿰뚫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다섯 개의 칼날은 칼리번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위를 향했다.

“윽……!”

칼리번의 머리로 뜨끈한 핏덩어리가 투둑, 투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타인센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몸에는 머리가 없었다. 그 즉시, 칼리번은 몸을 옆으로 굴렸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헉, 허억….”

칼리번이 흘린 피로 흥건히 젖은 자리에는 이제는 타인센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칼리번을 짓누르던 야수형 마물은 타인센의 마지막 공격을 당했으나, 치명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 녀석이 살아 있었다.

“후우…….”

칼리번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양이 산 너머로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어둠과 붉은빛이 뒤섞여 눈앞이 먹먹했다. 마물이 칼리번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쏴아아, 차가운 바람이 등 뒤에서 몰려왔다. 칼리번의 몸을 훑듯이 지나간 바람은 마물에게도 향했다. 둘 사이를 내달린 바람은 숲 안쪽으로 도망쳤다.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거렸다.

“하아…. 하아, 윽….”

칼리번은 아랫배를 손으로 짚었다. 피를 과다하게 흘린 탓에 눈앞이 흐렸다. 칼리번은 자세를 잡았다. 마물을 앞에 두고 도망칠 수 없었다. 등을 보인 순간, 저것이 마지막 사력을 다해 자신의 목도 뽑아 버릴 테니까.

그나마 무기가 있어야 승산이 생길 것이다. 칼리번의 시선이 사자 마물에게 향했다. 그것의 아래에 놓인 타인센의 시체…. 그의 허리에 단검이 채워져 있다.

“흡—!”

칼리번은 타인센에게서 무기를 취하기 위해 한발 먼저 움직였다. 그러자 사자 마물은 타인센의 머리를 뱉고는 칼리번에게 달려들었다.

“크, 흐윽!”

사자 마물을 펄쩍 뛰어들어 앞발로 칼리번의 어깨를 짓눌렀다. 마물의 무게에 칼리번은 뒤로 넘어졌다. 피가 부족한 탓인지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지더니, 칼리번의 목을 물었다.

“으윽…. 아아악!”

피부로 곧바로 파고드는 이빨의 감각에 칼리번이 몸부림을 쳤다. 간신히 아문 복부의 상처가 마물의 발톱에 긁혀 다시 터졌다.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칼리번은 뱀 마물의 소화액 탓에 옷을 잃어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짙은 피부 위로 피가 대신 옷이 되어 주었고, 흙바닥을 구른 탓에 먼지와 흙이 피부에 덕지덕지 묻었다.

타인센의 명령을 받던 마물이 어째서 갑자기 주인을 공격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마물을 길들인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했지만….

칼리번은 온 힘을 다해 마물의 배를 두 발로 걷어찼다.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지는 못했지만 잠시 주춤거리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칼리번은 네발로 기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타인센의 시체가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칼리번이 타인센의 시체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의 몸이 앞이 아닌 뒤로 끌려갔다.

“크윽, 제길…!”

칼리번이 타인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다, 다리 사이에 불룩 서 있는 그의 좆을 움켜쥐었다. 타인센은 죽었지만, 그의 좆은 발기한 채로 벌떡 서 있었다.

한쪽 발을 물린 칼리번은 그의 시체와 함께 질질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칼리번은 필사적으로 타인센의 좆을 으깨며 붙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허리춤을 뒤적였다. 타인센의 잘린 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칼리번의 손이 기적적으로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칼리번의 몸이 붕 떴다. 그러고는 근처의 나무에 내던져졌다. 타인센의 시체는 그제야 칼리번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하아, 윽—!”

등이 나무에 부딪힌 칼리번은 순간적인 충격에 손에 쥔 단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마물이 칼리번의 가슴을 앞발로 짓눌렀다.

“헉, 크헉…!”

폐가 짓눌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칼리번이 쥐어짜이는 가슴으로 간신히 숨을 내뱉는 동안, 마물의 침과 피가 칼리번의 가슴 위로 뚝뚝 떨어졌다.

“……!”

칼리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사람 팔뚝만 한 성기가 마물의 다리 사이에서 꺼떡이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그가 놓친 단검이 있었다.

“윽……!”

칼리번이 손을 있는 대로 뻗었다. 그러나 가슴을 짓밟힌 탓에 몸을 오른쪽으로 더 뻗기가 어려웠다. 그가 진땀을 흘리며 단검을 잡기 위해 씨름을 하는 사이, 마물의 거대한 성기가 칼리번의 다리 사이를 스쳤다.

칼리번의 입구를 찾아 성기를 비벼 대는 마물에게 반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검을 잡는 쪽을 택했다. 마물의 성기는 몇 번이나 허탕을 치며 엉덩이 사이에 부딪혔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사내 주먹만 한 크기의 귀두가 엉덩이 안쪽의 움푹한 입구에 닿았다.

“아, 으윽……!”

입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마물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성기를 쑤셔 박혔다. 그와 동시에 칼리번은 단검을 움켜쥐었다. 단검의 손잡이가 되어 주었던 금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쪽이 손잡이인지, 칼날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칼리번은 손에 닿는 대로 무작정 단검을 쥐었다. 결코 놓칠 수 없었다.

“크, 흐으, 그으윽……!”

좁은 입구가 억지로 벌어지다 못해 결국 찢어지고 말았다. 그 충격에 칼리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칼리번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손이 으스러질 듯 세게 움켜쥐었다. 칼리번의 입구뿐만 아니라 손에서도 피가 흘렀다. 손목의 움푹한 부분을 타고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읍—흐, 으윽!”

칼리번은 마물을 발로 걷어차며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칼리번은 팔을 크게 휘둘렀다. 피가 묻은 단검이 마물의 몸을 찔렀다. 단검에 찔렸으니 물러서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마물은 칼리번의 어깨를 잘근잘근 씹은 채로 그의 좁은 몸 안에 제 성기를 욱여넣는 데에만 집중했다.

마물은 원래 이성이 없다지만, 그보다도 더 본능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단검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칼리번은 몇 번이나 단검을 휘둘렀다. 마물의 몸은 넝마가 될 정도로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아래의 성기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 아, 아악! 크윽, 그, 그으, 흐……!”

마물의 성기는 입구뿐만 아니라 몸 안의 내장마저도 벌리다 못해 찢었다. 일말의 배려도, 이해도 없었다. 그렇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번의 몸 안이 마물의 흉포한 성기로 꽉 들어찼다.

“아……아악……!”

내장이 거대한 성기에 짓눌렸다. 칼리번은 입을 떡 벌린 채로 숨조차 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섞인 침이 흘러내렸다.

“헉, 허억…!”

눈앞이 순간 캄캄해졌다. 마물의 온몸에 구멍을 내던 칼리번은 제 단검이 어디 있는지조차 잃을 뻔했다. 쩍, 허공을 더듬거리던 칼리번의 손이 간신히, 마물의 몸 안 깊숙이 파묻힌 단검을 두 손으로 뽑아냈다. 찔걱, 찔걱, 마물의 성기가 칼리번의 몸속에서 움직였다.

“아, 앗……. 하, 아! 흐으, 아악…!”

칼리번의 단검이 마물의 목을 꿰뚫었다. 칼리번은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마물의 성기는 귀두와 기둥으로 되어 있었으나, 기둥 부분이 울퉁불퉁 제멋대로 솟아 있어 가시가 몇 개나 돋아 있는 것 같았다. 좁은 입구는 마물의 성기가 움직이면 혹 부분에서 뻐끔거리며 피를 흘렸다.

성기가 내장을 밀어내고 배 속에 제 좆을 위한 구멍을 내는 것만 같았다. 성기가 빠져나갈 때면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텅 비었다. 그렇게 단검과 좆이 몇 차례를 더 서로의 몸 안을 오갔다.

칼리번의 두 팔은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단검을 쥔 손바닥에 옆으로 긴 자상이 생겼고, 그 상처는 단검의 손잡이가 되었다.

“으으, 아, 아아아…!”

칼리번은 마물의 목을 계속해서 난도질했다. 마물의 딱딱한 피부는 마물의 칼리번의 몸속을 오간 만큼이나 칼질을 당해 크게 벌어졌다. 목을 잘라 낸 칼리번은 마물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난도질했다. 머리였던 것이 조각조각 나 칼리번의 몸과 얼굴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마물이 오메가의 몸 안에 씨를 심어야 한다는 본능밖에 남지 않았다면, 칼리번에게는 제 몸을 강제로 쑤시는 저것을 죽여 없애야만 한다는 본능밖에 없었다. 그것은 알파의 씨를 품고자 하는 오메가의 본능보다 더욱 강력하고 근원적인 본능이었다.

마물이 움직임을 멈췄을 때, 그것의 머리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아래 깔린 칼리번은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였다.

“허억, 헉, 흐으, 윽…….”

제 몸을 덮은 마물의 사체를 밀어낸 칼리번은 숨이 넘어가듯 한참이나 헐떡였다. 아무리 폐에 숨을 넣어도 부족했다.

“욱, 우웩…!”

결국, 그는 구토하고 말았다. 바닥으로 누런 액이 떨어졌다. 평소와 다르게 시큼하다고 느꼈던 열매의 잔해였다.

“큭…….”

기절할 새도 없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다. 숲속의 마물이 움직이기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네발로 기어가려던 찰나, 칼리번은 어떤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의 몸에 여전히 마물의 성기가 박혀 있다는 사실을.

“흐으…….”

칼리번은 바닥에 머리를 대고 엎드린 채로 두 손을 뒤로 뻗었다. 양손으로 쥐어야 할 정도로 컸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며 마물의 성기를 뽑아냈다. 뱃가죽이 꿀럭거리며 성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홀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진 칼리번은 몸을 웅크렸다. 벌어진 채 닫히지 않는 입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물의 성기도 빼냈는데, 어째서인지 여전히 배 속이 요동을 치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아랫배를 두 팔로 끌어안고는 낮게 신음했다.

* * *

칼리번은 죽은 타인센의 시체를 뒤졌다. 원래 입었던 옷은 뱀 마물의 체액으로 녹아 버렸기 때문에, 대신 그의 옷을 챙겼다. 간신히 타인센의 옷을 걸친 칼리번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느새 어둠이 깊이 내려앉았다. 어기적거리며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칼리번은 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물과 전투를 벌이기 전, 다친 성녀를 숨겨 둔 곳을 되짚었다. 다행히도 성녀는 다른 마물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았는지, 간신히 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막연히 성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것으로 생각했던 칼리번은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도,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도 칼리번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피…… 피 냄새가….”

칼리번에게서 피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본인도 죽어 가고 있으면서, 성녀는 그를 걱정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다치셨나요…?”

성녀는 하얗게 질린 손을 허공에 들었다.

“자…. 상처를, 이 손에… 맞대세요….”

“지금 상태에서 힘을 쓰시면 안 됩니다.”

칼리번이 잔뜩 쉬어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윽….”

성녀는 울컥 검은 피를 토해 냈다. 누가 보아도 그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팔을 내밀었다. 성녀는 칼리번의 단단한 팔에 가는 손을 얹었다. 그녀가 닿은 부위로부터 따끔거림과 함께 따뜻한 기운이 번졌다.

성력으로 치료받을 때마다, 마물 혼혈은 상반된 감각을 느낀다. 미묘한 고통은 마물의 피가 거부하는 것이고, 따스함은 인간의 피가 반응하는 것이었다. 칼리번은 자신이 아파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기사님, 그 아이는….”

“…….”

“그 아이는… 무사한가요…?”

성녀는 칼리번의 상처를 치유해 주며 간절히 물었다.

“…….”

칼리번은 잠시 망설였다. 그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네. 다만… 부상, 을 입어서… 우선 안전한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칼리번은 거의 들리지 않을 법한, 목멘 소리로 답했다.

“아,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그러나 성녀는 서툰 거짓말을 믿어 주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칼리번의 얼굴을 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이제……. 윽…. 허억, 아윽…!”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는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칼리번의 몸을 감싸던 희미한 빛도 함께 사라졌다.

“성녀님.”

칼리번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성녀를 품에 안았다. 칼리번에 비하면 그녀는 너무나 작고 말랐다.

“기사님… 그 아이는, 흣…. 수도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만난 아이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그 아이가 저를 구했을 수도 있겠군요.”

“이 이상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하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갑자기, 수많은 마물이 하늘에서……. 저는 두려움에,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

“혼자만 간신히… 살아남았어요…. 하, 으윽…! 두렵고 무서워서…… 원래 저는 후방에서 치유와 보호를 담당하던 견습이라… 마물들과 싸울 힘이 없었어요……. 그사이 동료들이, 마물에게, 모두….”

칼리번은 말없이 성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저는, 제 본분을 망각했지만…. 단 한 명만이라도 좋으니, 구하고 싶어서…….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주고 싶었어요….”

얼굴이 반 이상 가려져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성녀는 아직 소녀에 가까웠다.

“그 아이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착하고, 인내심이 깊은 아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 아이를… 수도로 함께 데려가 주시, 겠어요…?”

“…….”

“그 애는 영민해요…. 분명 기사님께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흐, 으윽!”

성녀는 아직까지도 칼리번을 왕성을 지키는 기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칼리번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한 가지만 알려 주십시오.”

칼리번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뗐다.

“하아, 윽…! 네, 무엇이든….”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수도까지 올라온 겁니까?”

칼리번의 질문에 성녀는 과거를 더듬는지, 깊고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왕국의 끝이라 불리는 카르네 항구에서, 여기까지 가까스로 왔습니다. 제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 여기까지 오면서, 본 것이라고는 불타 버린 마을과 시체뿐….”

“……!”

칼리번의 숨이 일순 멎었다.

“비록 전부 함락되었다 해도…. 기사단과 성녀단이 밀집한 수도만은… 버티고 있을 거라고, 다들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도로 향하는 것이, 저희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도는, 그중에서도 왕성은, 가장 먼저 함락된 곳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말을 죽어 가는 여인에게 할 수 있을까?

“아!”

간신히 숨을 헐떡이던 성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이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허공을 더듬거렸다. 칼리번은 자그마한 손을 덮다시피 붙잡았다.

“기사님, 제발! 아, 아악!… 약속해 주세요…. 약속, 어서! 부탁이에요…!”

끝이 다가오자 성녀는 아이처럼 울며 부탁했다. 두 눈을 잃었으니 눈물을 흘릴 리가 없는데도, 칼리번은 그렇게 느꼈다. 성녀에게조차 죽음이란 이토록 두려운 것이었다.

“무사히… 그 소년을, 수도로….”

칼리번이 성녀의 자그마한 손을 으스러질 듯 세게 움켜쥐며 대답했다.

“…데려다주겠습니다. 반드시….”

“아, 아아…….”

성녀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 유언도 남기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

홀로 남은 칼리번은 성녀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칼. 사람은 살기 위해 무언가를 반드시 죽일 수밖에 없단다.>

언젠가 양아버지가 칼리번에게 해 주었던 말이다. 처음으로 짐승을 도축하기 위해 칼을 든 들었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살아가기 위해서 죽여야만 하는 삶에 대한 위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죽여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짐승도, 심지어 마물도 마찬가지였다. 칼리번은 반은 인간이었으며 반은 마물이었기에, 한 가지 의문을 품어 왔다.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마물이 사람을 죽였을 때, 사람은 그 반대 또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지배하고, 착취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순리다.

칼리번은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똑똑히 보았다. 그 논리로 인간이 자연을 이용했고, 높은 계급이 아래 계급을 지배했고, 남자가 여자를 소유했다.

이 세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위에 선 자들은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약속이 적힌 책을 든다. 곤경이 닥쳤을 때 신께서, 왕께서,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고 속삭이며….

하지만 칼리번이 보아 온바, 위가 아래를 지배하기 위해 그 힘을 쓴 적은 있어도 아래를 지켜 주기 위해 쓰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칼도, 책도, 전부 달콤한 거짓말이다.

마물이 인간을 습격한 이래로, 인간들은 아등바등 버텨 왔다. 위에 선 자들은 아래에 깔린 자들을 먹이로 던져 가며 살아남으려 애를 썼다. 칼리번은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과 배신을 똑똑히 보아 왔다. 더 약한 자들을 사지로 밀어 넣은 더 강한 자들을.

그러나 이젠 끝났다.

<인간들이 짐승을 기르고 때가 되면 잡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인간을 사육하는 거다.>

타인센이 했던 말이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인간을 배신했다. 그와 오메가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마물과 마물 혼혈은 결탁했다.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났으니, 인간은 여태껏 주장해 왔던 말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왕국의 끝이라 불리는 카르네 항구에서, 여기까지 가까스로 왔습니다. 제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 여기까지 오면서, 본 것이라고는 불타 버린 마을과 시체뿐….>

결국. 인간은 패배한 것이다. 인간이 짐승을 먹이로 삼았듯이, 이제 마물은 인간을 먹이로 삼다 못해 기르게 될 것이다.

* * *

칼리번은 눈앞이 어두웠다. 그러나 그의 몸에 흐르는 마물의 피는, 무궁무진한 생명력은 끈질겼다. 어떻게든 그를 절벽 아래에 자리 잡은 동굴까지 도착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안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우윽…….”

배에 구멍이 났을 뿐인데,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배 속에 벌레라도 박힌 것처럼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요동을 쳤다. 흡사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칼리번은 피를 토했다.

‘피가….’

칼리번은 배를 움켜쥐었다. 다리 사이도 축축했다. 다행히 마물이 사정하기 전에 멱을 딴 탓인지 피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카, 칼……!”

저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커다란 실뭉치가, 칼리번의 기척을 듣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칼리번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가까워져 오던 그림자가 멈칫, 굳었다. 필시 겁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칼리번은 그가 어째서 다쳤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무렇지 않게 꾸며 낼 자신이 없었다.

“칼…….”

에레즈의 목소리가 잠겼다. 조금 전의 기뻐하던 음색과는 딴판이었다. 모습은 어둠에 가려도 피 냄새는 숨길 수 없었다. 칼리번은 감감한 눈으로 어둠을, 검은 장막에 가려진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으윽……!”

그의 그림자를 보니, 어떤 이름 모를 감정이 목 끝까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적에게 팔면 된다.’

목 안에서 그 말이 맴돌았다.

‘아니면 왕자님을 이곳에 버리고 도망치면 된다.’

칼리번의 사정을 모르는 타인센은 그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려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른 알파들 사이에 자연스레 끼어들면 될 것이다.

‘에레즈 프리드웬을… 죽이면 끝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더 약한 존재를 버리고 죽이는 것. 칼리번의 몸 안에 흐르는 절반, 인간의 피가 내린 답이었다.

“…왕자님께서는, 제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싫으십니까.”

칼리번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스로 입을 연 것은 분명했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으, 응….”

에레즈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언제나 나가지 말아 달라며 칼리번에게 매달리곤 했었다. 그러나 막상 묻자, 대답이 어설프고 부정확했다. 아니, 칼리번 자체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럴 법도 했다. 칼리번의 몸에는 온갖 마물의 체취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니.

“그럼… 앞으로는 계속 이곳에 있을까요?”

칼리번이 내뱉는 말은, 그가 조금 전까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인간다운’ 결정과는 전혀 달랐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다.

“떠, 떠나야 한다고, 마, 말해, 왔잖아…?”

“…….”

“수, 숲을, 나, 나가야 한다고……. 그, 그래서, 맨날 나, 날 두고 나, 나갔던 거잖아….”

에레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까… 마물의 침략이 잠잠해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칼리번은 어둠 속에서 더욱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어둠에 섞여 사라질 것처럼.

“앞으로는 필요할 때 외에는 나가지 않고 항상 곁에 있겠습니다.”

“항, 항상…?”

“네.”

이렇게 말하면, 순진하고 무지한 에레즈는 철석같이 믿을 것이다. 은신처를 안전히 옮긴 덕에 아직은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앞으로도 위치를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그저 이렇게 살면 된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날 먹을 음식을 구하고, 맞닥뜨린 마물을 처리하고… 마치 세상을 등진 은둔자처럼. 마물이든, 인간이든, 둘 중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아니, 둘 중 한쪽으로 정해진다는 말은 기만이다. 인간이 모두 정복당하고 남은 우리도 죽을 때까지, 겠지.

그러나 에레즈에게 죽음밖에 남지 않은 결말을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낫다. 이 숲에서, 마물의 침략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가 어쩔 수 없이 죽는 편이….

“왕자님…?”

어둠만큼이나 깊은 절망에 잠겨 있던 칼리번은, 뺨에 손바닥이 닿는 감각에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칼리번은 멍하니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거, 걱, 걱정, 했어. 아, 아무리 기, 기다려도… 오, 오지, 아, 않아서….”

에레즈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네, 네가…… 나, 나를, 두, 두고 갔다고, 새, 생각하지는 아, 않았어……. 그, 그렇게, 새, 생각하지 마, 말라고…. 네, 네가, 그, 그랬으니까….”

어느새 그가 이토록 가까이 다가왔지? 칼리번은 혼란스러웠다.

“바, 밤이, 와, 와서… 무, 무서웠지만…. 무, 무서웠던 건, 그, 그건… 호, 혹시나, 네, 네가, 다, 다쳐서… 도, 돌아오지, 모, 못 하는 건, 아, 아닐까… 해, 해서…. 그, 그럴까 봐…. 무서웠어….”

“…….”

“하, 하지만… 너, 너는… 항상, 야, 약속을, 지, 지켰으니까…!”

에레즈의 가늘고 따뜻한 손이 다가와 칼리번의 손등을 덮었다. 칼리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저 닿았을 뿐인데, 마치 화상을 입은 것만 같았다.

“차, 찾아보려고 해, 했는데…. 겨, 결국, 아, 아무것도… 못, 했어. 저, 절벽이, 노, 높아서, 내, 내려갈 수, 수가 어, 없어서……. 미, 미안해…. 기, 기다리는 것밖에, 하, 할, 줄 몰라서…….”

그는 눈이 없는 사람처럼 손을 더듬거리며 칼리번의 팔을 타고 올라와, 뺨을 덮었다.

“나, 나는…… 쓰, 쓸데없고, 도, 도움도 안 되는… 지, 짐 덩어리야. 나, 나는, 하, 항상, 도, 도움만 바, 받는데……. 아, 아, 무것도, 해, 해 줄 수 있는 게, 어, 없어…….”

“…….”

“지, 지금도… 이, 이렇게….”

에레즈가 두 손으로 칼리번의 얼굴을 감쌌다.

“……이렇, 게… 다쳐서….”

푸른 눈이 칼리번을 마주 보았다. 왕족들만 물려받는다는 보석안. 별이 수놓아진 듯 반짝이는 눈이 마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칼리번의 내면의 혼란까지도 꿰뚫어 볼 것 같아서.

“으, 응…. 그래. 이, 이곳에, 있자.”

에레즈가 웃으면서 말했다.

“네, 네가, 더, 더는… 다, 다치지 아, 않았으면… 좋겠어.”

“왕자님….”

칼리번은 술에 취해 본 적이 없었다. 한번 취하면 정신이 어지럽고 심하면 기억을 잃기까지 한다는데, 칼리번은 바로 그 술에 취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깨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뒤늦게서야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자님,”

한 번 쏟아진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이제 와 변명을 하면 오히려 바깥 상황을 들킬 가능성이 컸다.

“왕자님.”

어린아이에게 해서는 말을 해 버렸다. 성년이 지났고 얼마 전 러트까지 치르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 갇혀 살았으니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죄송…합니다. 방금 그 말은, 잊어 주십시오. …실언입니다.”

칼리번은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거두어 주었다.

“…….”

예상대로 그는 고운 얼굴을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칼리번은 잠시나마,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가능성마저 지워 버리려 했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저희는 반드시 이 숲을 나갈 겁니다.”

“아, 아….”

“탈출할 겁니다.”

칼리번은 그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맹세했다.

“……카, 칼.”

“그 후에는 지금보다 더 안전할 곳으로… 이동할 겁니다.”

칼리번은 표현만 조금 다를 뿐이지 결국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떠나야 한다.

떠나야만 한다.

하지만, 이 숲을 나가서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어디로?

왕국의 영토 대부분이 마물에게 넘어간 상태라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

마물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기는 했으나, 이번같이 전복된 적은 없었다. 마을과 도시는 습격을 받은 후에 회복되었고, 인간은 계속해서 버텨 나갔다.

하지만, 모든 영토가 마물에게 점령당했다고 했다.

갈 곳이 없다.

도망칠 것이… 더는.

“아, 안전한 곳… 어, 어딘지, 모, 모르겠지만……. 거, 거기까지, 가, 가려고, 네, 네가 아… 아픈 거라면…. 더, 더는 아, 아무 데도… 가, 가지 않을래.”

에레즈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프지 않습니다.”

“하,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이 정도 부상은 당연한 겁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그, 그치만… 아, 아프잖아…!”

“……네?”

평소면 얌전해졌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칼리번의 말에 지지 않고 반박했다.

“아, 아프니까…. 무, 무서우니까. 펴, 평소와, 다, 다른 말을… 하는 거잖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칼리번은 그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너, 너는, 무, 무슨 말인지, 모, 모를 테지만……. 나, 나는 아, 알아……. 느, 늘 그래 왔으니까….”

아프고 두려우면 자기 자신을 잃게 돼. 왕성의 성벽처럼 쌓아 올린 결심도 무너지고, 고목처럼 오래된 버릇도 잊게 되고, 꽃이나 나뭇잎처럼 싱그러웠던 감각도 썩어 문드러지게 돼. 그리고 난 언제나 그래 왔어.

에레즈가 말했다. 더듬거렸기에 칼리번으로서는 온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칼리번에게 고통이란 익숙했다. 전에는 팔이 잘린 적도 있었다. 강간을 당한 적은 처음이지만…. ‘회복력이 뛰어난’ 마물 혼혈이니까, 괜찮아야만 한다. 이 정도 부상으로 징징거리지 말아라. 다칠지라도, 어차피 죽지는 않으니까. 칼리번은 평생 그런 식으로 고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

에레즈는 참으로 신 같았다. 그가 아프다고 말하니 칼리번은 아픈 것이 되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부위부터 욱신거리며 아파졌다. 절벽을 기어오를 때는 그저 살아서 귀환해야 한다는 본능뿐이었다. 뒤늦게서야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용병은 부상과 상처가 필연이며 다친 이후의 회복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아무도 살펴 주지 않는다. 어차피 회복될 상처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심한 부상을 입은 동료는 버리고 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다들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둔탁해지고 별것 아닌 것이 되었다.

그런데 두려움이라니. 아픔이라니.

이런 나약하고 약해 빠진 감정은 나의 것이 아니다. 칼리번은 부정했다. 에레즈 프리드웬과 오래 얽힌 탓에 옮은 것이 틀림없었다.

“윽….”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주제도 모르고 남의 상처를 위로하는 손길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그 정도의 거절만으로도 미안해하며 물러났다.

“……아!”

그랬던 주제에, 칼리번은 그를 붙잡았다. 평소와 달리 힘 조절을 하지 못해 붙잡힌 에레즈가 약한 신음을 흘렸다.

“…….”

붙잡힌 에레즈의 손목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손목을 지나는 핏줄에서 불안하게 쿵, 쿵 울렸다. 칼리번은 가여운 왕자가 겁을 먹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붙잡은 손목이 떨리는 것은 칼리번이 떨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다니….

“카, 칼…!”

칼리번은 온 힘을 다해 에레즈를 붙잡았다. 뼈를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거세게 끌어안았다. 숨을 쉬기 괴로운지 에레즈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잠시만….”

칼리번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잠시만, 이대로….”

그러자 두 손이 칼리번의 등을 감싸 안았다. 에레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밤늦게서야 오게 되었는지, 어째서 다른 이의 옷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었는지도.

칼리번은 그의 품에 안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의 품 안에 안기려 애썼다.

이 세상 어느 곳도 인간의 땅이 없다면, 남은 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홍수로 가라앉은 세상 위를 헤매는 까마귀와 비둘기가 된 것만 같았다.

나의 오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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