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꿈 (2)
보통 사람들은 태어난 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칼리번은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칼리번은 짐승의 내장과 오물이 담긴 나무 들통 속에서 태어났다. 아니, 태어나자마자 그곳에 버려졌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아니면 두려웠는지, 칼리번을 버린 누군가는 아이의 배꼽에 붙은 탯줄조차 떼어 주지 못하고 도망쳤다. 갓 태어난 아기는 눈도 뜨지 못했기에 칼리번은 자신을 버린 존재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뜨끈한 피와 뭉클한 내장의 감각만은 지금도 생생했다.
늪에 빠진 것처럼 그는 내장과 오물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칼리번의 삶은 거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어미에게 버려진 새끼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게 칼리번은 울음소리 한 번 터뜨리지 못한 채 짐승의 피와 내장 더미 속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찌꺼기를 버리려던 푸줏간의 주인이 그를 발견했다. 매일 피비린내 속에서 사는 탓에 후각이 둔감해진 그였건만, 그날은 용케도 내장 덩어리 사이에서 검붉은 아기를 구별한 것이다.
갓 태어난 ‘마물 혼혈’은 추악한 괴물의 모습에 가깝다. 태어났을 적에는 제 본성을 감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려진 아기들은 발견되자마자 인간의 손에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운이 좋게도, 아기였던 칼리번은 짐승처럼 팔다리가 서너 개 더 붙어 있다거나, 피부가 비늘로 덮여 있지 않았다. 그저 피투성이였을 뿐.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지녔고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푸줏간의 웰미턴 부부는 출신 성분도 불분명한 칼리번을 거두기로 했다. 그 집에 자식이라고는 알리샤라는 이름의 딸 하나밖에 없었기에 장차 일을 도울 젊은 사내가 필요하던 차였다.
* * *
겉모습은 사람처럼 보였으나, 칼리번의 성장은 월등히 빨랐다. 고작 몇 달 만에 5날 살 난 알리샤보다 훌쩍 자랄 정도였다. 칼리번을 거두면서도 혹시나 희망을 품었던 양부모는 그가 마물 혼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마물의 피를 덜 받아 인간에 가까운 혼혈이라고, 생각을 정정했다.
칼리번은 감정이 드문 아기였다. 아니, 메말라 있었다. 웰미턴 씨가 핏물 속에서 그를 주웠을 때도 느낀 바였지만, 칼리번은 표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배가 고파도 화를 내지 않고, 졸려도 칭얼거리지 않았다. 호오好惡도 없었다. 어린 알리샤가 칼리번의 물건을 탐내도 전부 주었다.
아량이 넓다기보다는, 집착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검은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깊고 어두울 뿐이었다. 무표정인 어린아이란 괴물처럼 징그러울 뿐이었다. 그런 칼리번을 두려워하는 마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웰미턴 부부는 칼리번을 죽이거나 버리지 않았다.
3년이 지났을 때, 그는 이미 어른만큼이나 힘이 세졌다. 그 후로 칼리번은 양부모의 일을 도우며 자랐다. 가축을 도축하고 살과 내장, 뼈를 분리하는 일이었다. 그에게서는 단 하루도 피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양아버지가 칼리번에게 말했다.
“칼. 사람은 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일 수밖에 없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란다.”
그것은 어린 나이에 칼을 쥐게 된 칼리번을 위한 위로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리번은 아무렇지 않았다. 짐승을 죽이는 것도. 뼈와 살, 가죽을 해체하는 것도. 다 큰 사내도 기겁하는 일이었건만 칼리번은 감정이 애초에 제거된 것처럼 모든 일에 무던했다.
칼리번이 5살이 되었을 무렵, 한동안 잠잠했던 검은 손자국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마물의 번식기가 도래한 것이다.
* * *
인간은 여성과 남성으로, 마물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성별로 구분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사랑하여 번창할 수 있는 반면에, 마물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것들에게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깨우칠 지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알파의 씨를 품어 마물을 낳을 수 있는 ‘오메가’가 존재하지만, 한 세대에 오직 한 마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마물은 인간에게 기생하여 번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 여성은 포궁을 지녔음에도 마물의 번식 대상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메가와 흡사한 몸을 가진 인간 남성에게만 발정하고 번식했다. 마치 저주처럼….
그리하여 마물은 주기적으로 인간계로 밀려 들어와 번식하고 인간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마물의 번식기가 오면, 메뚜기떼에 습격당한 밀밭처럼 마을의 사내란 사내는 씨가 말라 버리곤 했다. 대신 사내들의 몸을 찢고 태어난 마물 혼혈들이 구더기처럼 들끓었다.
칼리번이 성장하는 동안 잠잠했던 마물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물의 침략으로 그는 양부모를 잃었다. 양아버지는 마물에게 끌려갔고 양어머니는 양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죽었다. 사내를 집에 둔 가정이라면 누구나 겪는 흔한 일이었다.
칼리번은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친부모를 잃은 알리샤를 돌볼 뿐이었다. 사람은 다양한 감정 표현을 통해 서로 교류한다. 그것이 마물과 인간의 또 다른 점이었다. 심지어 마물 혼혈도 인간의 피가 어느 정도 섞인지라 인간만큼 심오한 감정까지는 느끼지는 못해도 표현은 활발한 편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달랐다. 겉모습은 더없이 인간을 닮았으나, 도통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다르게 생긴 마물 혼혈보다 칼리번을 더 두려워했다.
* * *
칼리번은 웰미턴 부부의 친딸인 알리샤가 성년이 되어 푸줏간을 물려받고 일을 익힐 때까지 묵묵히 그곳을 지켰다. 누이지만 동생이기도 한 알리샤가 결혼을 했을 때, 그는 마침내 용병대에 자원했다. 새로운 가족을 이룰 알리샤의 곁에 마물 혼혈이 있어 봤자 소문만 무성해질 뿐이었으니까. 더구나 용병대는 칼리번과 같은 마물 혼혈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칼리번 웰미턴.
고향을 떠날 때, 그는 제 성을 버렸다.
칼리번.
이름마저도 버리려다가, 칼리번은 문 앞에서 자신이 버려졌던 나무 들통을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그때의 그 들통이 여태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매일 매일 쌓이는 가축의 살점과 찌꺼기를 버리기 위해 뒀을 뿐이다.
너는 발견되기 전까지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어린 시절 양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칼리번은 들통에 손을 넣고 되는대로 한 움큼을 쥐어 꺼냈다. 이렇게 한 줌이 칼리번이었다. 양부모가 그에게 이름이 붙이지 않았다면, 그는 이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칼. 사람은 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일 수밖에 없단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란다.>
…하지만 죽여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짐승도, 심지어 마물도 마찬가지였다. 칼리번은 줄곧 의문을 품어 왔다.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마물이 사람을 죽였을 때, 그 순리 또한 받아들여야만 하지 않는가?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양부모는 모두 죽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있을 적에도, 칼리번은 그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모른다.
* * *
“거기 너. 인간이냐, 마물 혼혈이냐?”
칼리번이 처음 용병대에 발을 들였을 때 들은 말이었다.
“마물 혼혈입니다.”
“어딜 어른을 속이려 들어? 알파 냄새가 전혀 안 나는데.”
덩치 큰 사내가 다가오더니, 대뜸 칼리번의 머리통에 얼굴을 묻고는 체취를 맡았다. 칼리번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상대는 남부 용병 연합의 관리장이었다. 12살 먹은 칼리번은 웬만한 성인 남성만 했지만, 관리장과 뒤에 선 용병들은 그보다도 훨씬 컸다.
“인마, 이실직고하는 게 좋을 거다. 본성도 못 드러내는 놈이 알파는 개뿔. 돈 벌려고 거짓말로 들어왔다가 발정 난 놈들한테 된통 당한다. 혼혈이어도 알파는 알파라고?”
“…….”
“왜? ‘나 키 좀 되고 한 덩치 하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 촌구석에서 힘 좀 썼다고 착각에 빠져선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너 같은 풋내나는 애송이가 여기 있는 놈들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너보다 덩치 큰 인간들도 거짓부렁 쳤다가 뒤 뚫려서 지금은 네발로 기어 다녀, 이 자식아!”
경고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혀가 닳아! 관리장은 단검으로 어린 칼리번의 뺨을 툭툭 치며 협박했다.
“전 알파입니다.”
칼리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물 혼혈은 알파밖에 없으니, 당연히 자신은 알파였다.
“제가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약할까 걱정이시면, 직접 싸워 보셔도 됩니다.”
“뭐? 크으, 하하하핫!”
칼리번의 진심 어린 말이 맹랑하게 느껴졌는지, 엄포를 놓던 관리장이 크게 웃었다. 그러곤 칼리번의 어깨를 퍽퍽 쳐 댔다.
“…….”
칼리번은 자신의 말이 어디가 그렇게 우스운지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알파인데 여자인 놈도 있지 않습니까? 변변치 못한 마물에게 당해서 이런 놈을 낳았나 보죠. 요즘은 알파 노릇도 못 하는 기형 알파가 흔하니까요.”
“크하하! 그건 참 명언이군! 뚫린 놈도 어지간한 약골이었나 본데!”
“가만 보자…. 한번 ‘검은 어금니’에 넣어 보는 건 어떨까요? 저번 방어전에서 절반이 쓸려 나간 거기 말입니다. 나중에 뒤가 뚫리든 입이 뚫리든 제 몸 간수 못 한 잘못이고…. 뭐, 박혀 보면 좋아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쥐처럼 생긴 서기가 문서 몇 개를 건네며 관리장에게 제안했다. 마물 혼혈은 분명 인간보다는 강했지만, 마물보다는 약하기 때문에 용병대는 늘 구인난이었다. 조롱을 당했음에도 칼리번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안녕하신가, 신입? 내 이름은 젠, 검은 어금니의 부대장이다. 참고로 대장 녀석은 얼마 전에 죽었어.”
칼리번은 가만히 자신을 젠이라 칭한 ‘여성’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에 밤색 눈. 붉은 머리는 전형적인 마물 혼혈의 특징이었다. 면접을 보았을 때도 자신이 배치될 용병대에 ‘여성 알파’가 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믿기지 않았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알파 몸에 가슴 달려 있어서 신기하냐?”
젠은 칼리번이 시선이 익숙한지 비아냥거렸다.
“네. 마물 혼혈 중에 여자는 처음 봅니다. 마물은 기본적으로 남자니까요.”
칼리번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말했고 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참. 솔직한 건 마음에 드네. 나도 살다 살다 알파 이름이 ‘칼리번’인 건 처음 들어 보는데 말이지. 신청서에 검 이름이 적혀 있길래 웬 미친놈인 줄 알았어.”
그것이 바로 남부 용병 연합에서 칼리번을 인간이라 의심한 또 다른 이유였다. 알파 냄새는 안 나고, 본성은 드러낼 줄도 모르고, 그런 데다가 이름은 휘황찬란하게 ‘칼리번’이라니!
“불편하시면 칼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됐어. 어차피 일주일 뒤에 시체로 나갈 텐데. 으음, 근육을 보니까 확실히 알파가 맞긴 맞는 것 같은데…. 근데 너 말이야, 혹시 백조 중에 검은 백조 본 적 있냐?”
젠이 칼리번의 단단한 몸을 여기저기 만져 보더니 물었다.
“검은 백조는 세상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검은 백조’란 ‘세상에 없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했다.
“아니, 세간의 상식 말고. 네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냐, 이거야.”
“제 눈으로도 본 적 없습니다.”
“어, 나도 그래.”
“…….”
칼리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어? 바로 여자이자 알파인 이 몸처럼!”
젠은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주장을 펼치는 학자처럼 두 팔을 크게 벌렸다.
“그렇군요.”
“…어흠.”
칼리번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젠은 다시 뒷짐을 지었다.
“이 몸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까지 여자 알파는 말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존재였지.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용병대에 ‘짠’ 하고 등장했고 이제는 말이 되는 소리가 된다, 이거야. …뭐, 여자라기보다는 일종의 기형에 가깝지만.”
젠은 크하하 웃더니 칼리번의 단단한 어깨를 퍽 내리쳤다.
“…칼리번이라고 했나? 이 몸의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걸 영광으로 여겨라. 그리고 혹여나 50년쯤 후에 세상 두 번째 여성 알파를 보게 된다면 내가 영광스러운 첫 번째니까 어디 가서 뻐길 생각 하지 말라고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칼리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촌구석에 살았기에 그는 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진지하게 살다 보면 여성 알파를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나 할 뿐이었다. 어쩌면 검은 백조도.
“농담이야. 멍청아. 얼굴 풀어. 나 같은 기형 알파가 또 나오겠냐?”
젠은 씩 웃으면서 칼리번을 두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아, 재미없어! 이번 신입도 만만찮게 이상한 녀석이구만.”
“…….”
“도대체 왜 그럴까 몰라? 쓸 만한 녀석 좀 달라고 해도 매번 기형에 가까울 정도로 덜떨어진 놈들만 처넣고 말이야…. 젠장!”
“…….”
앞서 걸어 나가던 젠이 칼리번을 휙 돌아보았다.
“아, 깜박하고 이걸 말 안 했네! 우리 용병대는 발톱 때라고도 불리거든? 어, 그러니까… 발톱에 낀 때가 된 걸 축하한다.”
“…….”
“빨리 안 오고 뭐 해? 난 약한 놈보다도 말귀 못 알아듣는 놈이 더 질색이야.”
칼리번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젠은 칼리번을 용병대로 끌고 가며 자질구레한 수다를 늘어놓았다.
“뭐? 12살? 어려 보이기는 했는데 진짜 어리구나. 저번 발정기 때 태어난 녀석들이 유입될 시기인가…? 세월 참 빠르네.”
“…….”
“내 나이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 보이는 것 같아 특별히 알려 주자면, 난 여든이다. 우리 같은 혼혈은 제대로만 살면 백오십까지는 산다는데, 나도 그때까지 살 수 있으려나.”
“…….”
“…너도 방금 겪어서 알겠지만, 용병대 가입은 허술하기 짝이 없어. 아무리 쪽수가 부족하다고 해도 너같이 어린애를…. 크로쉐, 그 자식은 힘만 있으면 일단 용병대에 넣고 본다니까? 그게 돈이 되니 이해를 못 할 것도 없긴 해. 어차피 쓸 만한 놈만 넣어도 사흘 뒤면 반이 썰리고, 열흘이면 다시 모집 공고를 올려야 되거든.”
“…….”
“그런 걸 보면 강한 게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강한 거지….”
두어 걸음 앞서 나가던 젠이 문득 멈췄다. 칼리번의 걸음도 함께 그쳤다.
“그러니까 앞으로 오래 보자구.”
젠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네.”
듣기만 하던 칼리번이 그녀의 등에 대답했다.
그렇게 칼리번은 용병대 ‘검은 어금니’를 집으로 삼게 되었다. 첫 만남부터 온갖 너스레를 떨던 젠이었지만, 칼리번에게 알려 주지 않은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들의 용병대는 발톱 때 말고도, 가끔은 충치라고도 불렸다.
* * *
마을에서는 5살 적부터 성인 취급을 받았던 칼리번이었다. 그러나 거친 용병들 사이에서는 아직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마물 혼혈은 인간보다 체격이나 키가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이었다. 여성 알파인 젠조차 키가 180cm에 육박했으니 말이다.
몇 년간 칼리번은 다른 용병대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채로 지냈다. 젠을 제외한 용병들은 칼리번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까무잡잡한 소년이 열흘 안에 죽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모두의 예상을 깨버리고 그곳에서 성년을 맞이했다.
* * *
“아직 귀가 안 잘렸으면 똑바로 들어, 이 새끼야!”
칼리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젠의 얼굴은 온통 시뻘겠다.
“네가 뭔데 함정에 기어들어 가? 난 분명히 무시하라고 명령했을 텐데! 내 말이 우습냐? 너 하나 때문에 몇 명이 뒤질 뻔한 줄 알아?!”
그때 칼리번은 떨어진 귀를 원래 자리에 붙이는 중이었다. 이제 막 방어전을 치른 탓에 몸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했다.
“너 이 자식, 앞으로도 이따위로 굴 거면 이젠 너 혼자 다녀! 좆같은 새끼가, 퉤! 다음에도 명령을 불복하면 그때는 마물한테 뒤지기 전에 내 손으로 네 발목을 끊어 버릴 거다!”
그러나 젠은 칼리번의 상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씩씩거렸다.
“…야! 귀 다 붙은 거 알거든? 대답해, 칼리번! 이 개새끼야!”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칼리번이 고개를 들었다.
“어린아이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습니다.”
젠이 명령했기에, 칼리번은 그렇게 답했다. 그녀의 어깨가 다시 들썩거렸다. 칼리번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것을 안다. 돈도 되지 않는 어린애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고향에 두고 온 알리샤가 떠올라서, 같은 감상은 덩치 큰 사내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랄하네, 내 눈알이 빠졌다고 그걸 못 본 줄 알아? 네 이름이 칼리번이라고 그딴 짓을 벌인 거냐? 감동적이네, 이 개새끼가, 네 눈엔 내가 공사도 구별 못 하는 머저리로 보여?!”
젠은 칼리번의 부러진 무릎을 걷어찼다. 비뚤게 서 있던 칼리번은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몸이 절로 앞으로 숙여졌다. 칼리번은 두 팔로 간신히 엎어지려는 몸을 지지했다. 간신히 붙었던 귀가 툭 떨어졌다.
“넌 우리가 자선 사업 하는 줄 알아?! 내가 아주 성녀로 보이나 봐? 아니다, 너 하는 짓거리를 보니까 나보단 네가 더 성녀단에 잘 어울리겠다, 그치, 응?”
“…….”
“여기 있는 놈들 죄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이야! 씨발, 나중에 걷지도 못하게 되면 빌어먹으면 될 줄 알지? 이 개새끼가…. 인간들이 지금이야 구해 줘서 고맙다, 고맙다, 눈물 바람이지, 빌빌 기어 다니는 반푼이 마물한테 적선이나 할 것 같아?!”
젠은 엎드린 칼리번의 어깨와 등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야, 야, 대답해! 그따위로 굴 거면 여기 왜 있냐? 가서 기사단이나 들어가!”
“…….”
“애비 애미 없는 새끼를 받아 줄 리도 없을 테지만!”
젠은 칼리번의 손등을 짓밟고는, 그의 귀도 함께 짓뭉갰다. 한참이나 더 욕을 하던 젠은 분이 덜 풀렸는지 곁에 있던 용병들을 끌고 주점으로 향했다.
“젠치고는 많이 봐준 거야.”
“너 버릇 고쳐 주려고 저러는 거다, 야.”
“신입 중에 꼭 설치다가 뒤지는 경우가 많아서 그래.”
남아 있던 용병들이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압니다.”
칼리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칼리번은 짓뭉개진 귀를 포기하고 붕대로 귀가 떨어진 부위를 둘둘 맸다.
‘이놈 봐라?’
‘아, 이 새끼…’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이 제 할 일만 하는 칼리번을 보며, 용병들은 깨달았다.
‘딱 봐도 지 꼴리는 대로만 구는… 돌대가리다.’
‘또 저지르겠구먼.’
어린 용병이 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 * *
칼리번이 막 남부 연합에 가입했을 때 비어 있던 ‘검은 어금니’의 대장의 자리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공석이었다.
“어째서 젠은 대장이 되지 않는 겁니까?”
칼리번은 젠에게 물었다.
“엉? 뭐라고?”
“왜, 대장 자리에 오르시지 않는 건지 물었습니다.”
“아…. 그거? 궁금해?”
젠은 심드렁했다. 칼리번은 ‘그렇다’는 대답 대신 젠의 앞을 막고, 그녀를 덮치려는 거대한 마물을 둘로 갈랐다.
한창 마물과 전투 중이었다. 매번 급박한 순간이었으나 이 정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칼리번은 성장했다. 젠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독수리의 날개를 단 괴물이 그녀를 향해 발톱을 들이 내리고 있었다.
“뭐,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고. 대장 자리는 나 같은 녀석한테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젠은 한 걸음 물러섰고 그 자리는 칼리번이 채웠다. 그는 제 몸집만 한 거대한 칼날을 휘둘렀다. 전신이 비늘로 덮인 거대한 새의 날개가 잘려 나갔다.
“내가 대단한 알파기는 해도 여자다 보니까 맨 앞에 서면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있거든. 다들 볼 때마다 물어보고 지랄이라— 야, 올 거면 말 좀 하고 들어오라고!”
그사이, 젠은 옆구리로 파고드는 개만 한 쥐 마물을 기막히게 으깨 버렸다. 이미 죽은 마물에게 욕지거리를 시원하게 쏘아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만큼 살아남는 녀석이 있으면…. 으샤, 그때 시키려고.”
“…….”
“근데 영 나타나질 않네. 괜찮다 싶으면 뒈지고, 또 괜찮다 싶으면 뒈져 버리고….”
“그렇군요.”
“읏샤!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 그럼 여기는 너한테 맡긴다?”
“네.”
“뭐 하냐, 휘두르지 않고!”
갑작스러운 젠의 외침에 칼리번은 거대한 검을 휘둘러 주변을 가로로 베어 냈다. 그 틈을 타 젠은 열세에 몰린 동료를 구하러 떠났다.
* * *
칼리번이 용병대에 들어왔을 때, 남부 용병 연합에는 총 스물여덟 개의 이빨이 있었다. 5년 정도가 지나자 그중 많은 이빨이 빠졌다. 그러나 그가 속한 ‘검은 어금니’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원래 충치가 마지막까지 남아 고통을 주는 법이지.”
젠은 그 사실을 두고 낄낄거렸다. 칼리번은 남 일을 듣듯 가만히 있었다.
“뭘 가만히 있어. 네 얘기기도 하거든, 이 돌머리야.”
“그렇습니까?”
“그래, 인마!”
젠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이런 속 터지는 대화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말았다.
“너 같은 놈이 여태껏 살아 있는 게 용하다, 용해.”
기가 막힌 녀석. 젠은 새삼 칼리번을 훑어보았다. 처음 입단한 해에 죽을 줄 알았던 칼리번은 어느새 젠 다음으로 오래 묵은 용병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사리 분별은 할 수 있게 된 것 같으니까…. 어때, 대장이 되어 보는 건?”
젠은 오늘 저녁 식사의 메뉴를 묻듯 갑작스럽게 제안했다.
“저보다는 젠이 대장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여든이 넘었다는 젠은 칼리번보다 까마득하게 어른이었으며 전투 경험과 실력 모두 뛰어났다.
“그건 정말 이치에 맞는 말이야. 신기하네. 너도 제대로 된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구나?”
“…….”
젠은 일말의 겸손도 없이 칼리번의 주장을 인정했다.
“근데 나한테는 대장 자리가 영 맞지 않아. 그렇다고 언제까지 비워 둘 수도 없고.”
“하지만… 저는 몇 차례 젠에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용병대의 기본 이념은 ‘돈’이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인간이 아닌 괴물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몇 차례나 용병대에서 이탈해 단독 행동을 저지르곤 했다.
기사단과 성녀단처럼 명예를 좇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러는지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일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해결하다 보니, 제 행동에 대한 설명 혹은 변명조차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제가 대장의 자리에 오르면, 검은 어금니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겁니다.”
“잘 아네. 아는 놈이 그러냐?”
“…….”
“그러니까 앞으로는 생각이라는 걸 좀 하면서 용병대를 꾸려 나가 봐. 아니면 맨날 나한테 처맞으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네 꼴리는 대로 질러 버리든가.”
“다른 대원들이 저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칼리번 자신은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러나 대장이라는 자리에 올라가면, 그 행동이 부하들에게 강제가 될 수도 있었다.
“타인의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돌머리에게 한 가지 알려 주자면, 뭐, 네 멋대로 굴어도 괜찮을 거야. 남들 보기에 좋은 일이긴 하니까. 결과적으로는 면도 살고…. 나야 돈이 제일 중요하니까 널 주기적으로 팼지만, 다른 놈들은 변태라서…. 실은 착한 일을 하게 되어서 좋은 데 싫은 척하고 있는 것뿐이거든.”
“…….”
“우리 애들이 사실 마음은 착한데 표현할 줄을 몰라서 그래.”
젠은 엄청난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응.”
“그랬군요. 몰랐습니다.”
칼리번은 젠의 말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더불어 엄청난 메리트가 있는데 말이야. 대장 자리에 오르면 나한테 반말 써도 돼.”
“…….”
“따지고 보면 우리 같은 혼혈에게 나이라는 건 무의미하지. 100살 넘게 이 모습으로 살 수 있는데 50살 차이야 친구지, 뭐. 그리고 칼리번보다는 대장이라고 불리는 게 훨씬 편하잖아?”
칼리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젠이 제시하는 엄청난 메리트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칼리번은 항상 젠의 뒤에 있었다. 젠은 유일한 여성 알파였고 칼리번은 본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점에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일반적인 알파보다 덜떨어진 개체만 모아 놓았다는 ‘검은 어금니’지만, 그중에서도 두 사람은 유독 비정상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용병들은 단 한 번도 마물로서의 본성을 보이지 않은 칼리번을 엄청나게 강한 나머지 전투 중에도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곤 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입단 초기에 몇 번 위기에 빠졌던 것을 제외하면, 성년이 된 칼리번은 손에 꼽힐 만큼이나 강했다.
그러나 오해로 인해 긍정적으로 해석되는 칼리번과 달리, 젠의 외관은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고 한들 명백한 여성이었다. 같은 용병에게도 시비를 당한 적도 많거니와 ‘여자’는 무조건 공격하는 마물의 특성상 큰 위험에 빠지는 일도 잦았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의견이 갈릴 때마다 얻어맞기는 했지만, 칼리번이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던 것에는 젠의 영향이 컸다. 그녀의 권유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 너에게 하대하겠다. 부대장.”
칼리번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좋아. 앞으로는 지켜 주지 않을 거다. 기사 놀이를 하는 건 상관없지만, 네 모가지 관리는 알아서 해.”
“…….”
“이제부터 너는 나와 대등한 동료이자… 나의 대장이야.”
젠은 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었다.
* * *
칼리번의 이름은 용병 연합의 명부에 떳떳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전설 속의 명검이자 성검이기도 한 그 이름은 여러모로 시선을 사는 탓에, 주로 ‘칼’이라고 불렸다. 연차가 차서 대장 자리에 오른 후로는 그 이름조차 쓰이지 않고 대장이라 불렸다. 게다가 용병대의 특성상 물갈이가 잦은 탓에 칼리번의 이름을 아는 이는 점점 적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부 용병 연합에서 소식을 전했다.
“그 뭐냐, 왕실에서 너희를 왕실 공인 용병대로 삼아 준다던데?”
남부 연합의 관리인 크로쉐는 이번 임무의 보수를 건네주며 툭 하니 말했다. 검은 어금니가 무려 왕실의 승인을 받은 정식 용병대가 된다는 것이다. 왕실의 인가를 받든 말든 떠돌이 용병 생활이 뭐 별다른 바 있겠으나, 처지가 쥐꼬리만큼 나아지기는 한다.
“어지간한 대형 용병대도 왕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데 검은 어금니에게 그런 기회가 가다니, 거참 신기한 일이네요.”
크로쉐의 곁에 붙어 다니는 서기도 재밌는지 한 마디를 덧붙었다.
“저번에 치른 카르네 항구 방어전을 왕실에서도 눈여겨본 거 아니겠습니까? 이야, 잘된 일이네. 역시 사람은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니까?”
젠이 과장되게 말했다. 반쯤은 비아냥이 담겨 있다. 카르네 항구 방어전— 전혀 돈이 되지 않는 일을 맡았다가, 용병대가 거의 몰살 직전까지 갔었기 때문이었다.
“싫으면 거절해도 되긴 합니다. 저희 쪽에서 전하지요. 괜히 왕실을 등에 업었다가 실수해서 눈 밖에라도 나면 우리 손해니까요.”
검은 어금니가 못 미더웠는지 서기가 제안했다.
“받을 수 있는 건 최대한 챙기겠습니다.”
그러나 칼리번은 수락했다. 마물 혼혈로 이루어진 용병대는 그 출신으로 인해 방어전을 치른 후에 사람들과 교섭에 어려움이 컸다. (젠은 대장의 말솜씨가 ‘절망적이어서 그런 거겠지’라고 하긴 했다) 왕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보여 주면 반감이 조금은 누그러질 것이다.
더구나 왕실에서 계절마다 방어전을 위한 무기와 식량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용병대 유지, 보수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만큼 간섭을 받고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는 귀찮은 면도 있었지만.
남부 연합에서 돌아온 젠과 칼리번은 다른 대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마물을 상대로 한 전투보다 방어전 종료 후 마을 주민들과 돈을 더 달라, 이 이상을 못 준다며 벌이는 실랑이가 곤혹인 용병은 칼리번 말고도 꽤 있었다.
“좋아, 그럼 승인을 받으러 가 보실까! …저기? 혹시 우리 중에 본성 내부의 명화라든가, 유물이라든가, 약해 빠진 기사님들이 뻐기는 모습이라든가, 성녀님들이 우리를 혐오에 찬 시선으로 보는 모습이라든가, 뭐든 보고 싶은 사람?”
젠은 혹시나 해 함께 본성으로 향할 지원자를 찾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늘 그랬듯 대원들은 주점에서 여독을 풀게 두고, 칼리번과 젠만 왕궁에 방문하기로 했다.
“대장. 왕궁은 예절이 중요한 장소잖아? 그래서 참석할 때는 반드시 흰 가발과 콧수염을 착용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이따 시장에 가서 미리 사 두든가 아니면 내일 아침에 머리카락에 계란 흰자와 밀가루를 발라서 준비해 둬. 알겠지?”
왕궁으로 떠나기 전 젠이 신신당부한 말이 떠올라 칼리번은 수염을 미리 준비했다. 수염을 붙이고 있던 칼리번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끝이 올라간 도톰한 수염이 참 어울리지도 않게 붙어 있었다. 아침 일찍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젠은 뒤집어지게 웃었다.
“흠, 장난인가.”
제 모습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칼리번이었다.
“크으……. 아하하, 하하하! 대장은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젠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됐다.”
칼리번이 수염을 떼며 걸음을 옮겼다. 젠은 낄낄거리며 칼리번의 곁에 바짝 붙었다.
* * *
처음 인간들은 마물 혼혈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마물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더는 기사단과 성녀단만으로는 막아 내기가 어려워졌다. 왕실은 하는 수 없이 왕국 전역에서 활동 중인 알파 용병대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병대의 취급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정오부터 순서대로 각 용병대의 보상과 지원을 논의할 예정이었습니다만, 기사단에 귀빈께서 방문하시게 되어 다소 지연될 것 같습니다.”
“뭐? 또 기다리라고?”
“최대 세 시간까지는….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대기해 주십시오.”
“이보슈, 귀빈인지 귀가 병신인지는 모르겠다마는, 우리는 뭐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
“장소를 준비해 드릴 테니 쉬셔도 좋습니다. 혹은 기물을 훼손하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기사단 주변을 자유로이 오가셔도 됩니다.”
타협책을 제시했으나 용병대들은 변경된 사항을 안내하러 온 견습 기사를 조각낼 기세였다.
“그… 그럼, 이만.”
견습 기사는 용병들이 몰려들기 전에 제 할 말만 하고는 후다닥 도망쳤다. 용병들은 견습 기사의 등 뒤로 온갖 신선하고 참신한 욕을 던졌다. 그러다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곧 의기투합하여 도박판이 펼쳐졌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곁에 있던 젠마저 군침을 삼키며 도박판에 끼어들었다.
“…….”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독할 정도로 운이 따르질 않았다. 처음 용병대에 들어갔을 땐 어쩔 수 없이 도박판에 몇 번 참여했는데, 내리 지기만 했던 것이다.
“돌대가리에다 바보라서 그래.”
매번 돈을 따는 젠은 그렇게 칼리번을 평하며 낄낄거렸다. 그녀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그 뒤로는 도박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피했다.
‘날씨가 나쁘지 않군.’
심심하면 구경이나 하라는 견습 기사의 말이 빈말도 아닌 것이, 주변 경관이 상당히 아름다웠다. 회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직선의 건축물들은 고결함을 추구하는 기사단의 이념처럼 고고하고 단단해 보였다. 멀리 보이는 수련장이나 연습장은 한 번쯤 사용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기사단은 마물 혼혈로 이루어진 용병대와 달리 인간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왕실 정예 군대였다. 전투력 자체는 용병대보다 부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훈련받은 군인이었고, 장교급은 왕족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만큼 가장 최신화된 무기와 효율적인 검술을 구사했다.
아낌없는 투자를 통해 발전시킨 전법과 전략, 검투술을 익힐 수 있다면 용병대들의 부상도 훨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부질 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흐아앗!”
머리 위에서 웬 비명이 들렸다.
“…?”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에 어린아이가 매달려 있다가… 지금 막 떨어지고 있었다.
“아…!”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양팔을 펼쳤다. 추락하는 빵 덩어리는 예닐곱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으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양팔에 꽤 큰 충격이 가해졌다.
“흐읍…!”
칼리번은 약간 휘청거리기는 했으나, 아이를 무사히 받아 냈다.
“괜…찮으십니까?”
칼리번은 살면서 손에 꼽을 만큼 당황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더 없이 침착하게 물었다.
“…….”
아무런 대답이 없다. 부상을 살피기 위해 칼리번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어린아이는 화들짝 놀라 두건에 달린 긴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은… 성녀단의 복식이었다.
‘아기 성녀님이 나무 열매를 따다가 떨어졌군.’
칼리번은 더없이 침착하게 판단했다. 젠이 있었다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했겠지만, 다행히도 여기에는 그녀가 없었다.
“성녀님.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성녀원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칼리번의 목소리에 아이는 몸을 다람쥐처럼 잔뜩 웅크렸다. 성녀단은 금남禁男의 집단. 성녀는 ‘예언의 소녀’가 언젠가 왕실에서 태어날 날만을 기다리며, 매일 고된 수행과 봉사를 견뎌 내고 있다고 들었다. 당연히 마물 혼혈이자 남성인 칼리번을 유쾌하게 생각할 리가 없다.
“제가 불편하신 것 같군요. 내려 드리겠습니다.”
칼리번은 지극히 객관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가 아기 성녀님을 바닥에 내려 주려던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이곳으로 제1 왕자님께서 방문하셨다는데?!”
제1 왕자라면 알테르 프리드웬일 것이다. 어느 전투에서건 선봉에 서며 불패의 신화를 이룩해 낸, 무적의 방패라 불리는 사내였다. 앞서 견습 기사가 말한 귀빈이 바로 그분인 모양이었다.
“히끅…!”
그 소리를 듣고는 어째서인지 아기 성녀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칼리번에게 떨어지기는커녕 덥석 매달린 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다리를 다치셨나요?”
“흐읍! 끅…… 히, 끅!”
아기 성녀는 고개를 숙인 채 절레절레 젓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칼리번을 세게 움켜쥐고는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혹시 걷기 싫으시다면 제가 이대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안내해 드릴까요?”
칼리번은 아는 장소 몇 곳을 대 보았으나 아기 성녀는 계속 고개를 돌렸다. 기사단 쪽으로 몸을 돌리자 아이는 칼리번의 한쪽 팔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기까지 했다. 적어도 용병들이 득실득실한 곳은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젠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칼리번은 결심을 내리고는 아기 성녀를 제 어깨에 매달리게 했다. 얼굴조차도 보이기 싫어하는 아기 성녀는 칼리번의 어깨를 두 팔로 감고는 얼굴을 가슴에 폭 묻었다.
칼리번이 아이를 다루는 태도나 자세는 마물 혼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더없이 능숙했다. 이게 다 알리샤 덕이었다.
“…….”
아이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청량한 향기도 느껴졌다. 그러나 칼리번은 안도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악력이 혹여나 작고 연약한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몹시 긴장되었다.
칼리번은 아기 성녀를 품에 안은 채로, 근처의 작은 정원으로 들어가 어슬렁거렸다.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아기 성녀는 칼리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숨결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흡! 힉! 끅…….”
…거기다 아직도 딸꾹질 중이었다. 칼리번은 천천히 주변을 걸어 다니다, 아기 성녀의 조그마한 등을 토닥였다.
“세, 세상에! 왕…! 아… 아니, 견습! 우, 우리 견습 성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멀리서 중년의 성녀 둘이 치맛자락을 든 채로 달려왔다. 그즈음에는 아기 성녀님의 딸꾹질도 멈췄고…. 아니, 멈추다 못해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칼리번은 마음만 먹는다면 아기 성녀의 얼굴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혹여나 깰까 싶어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웠으니까.
“용병…? 서… 설마, 용병님께서 여태까지 이 아이를 돌봐 주신 건가요?”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죠?”
성녀님들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전쟁터를 누비면서 수많은 성녀와 마주한 칼리번이었으나 이 정도로 절망에 찬 얼굴은 처음 볼 정도였다.
‘인간은 아기를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지.’
작은 아이가 우락부락한 마물 혼혈의 품에 안겨 있으니 두려워할 만도 했다. 칼리번은 성녀들에게 아기 성녀를 돌려주었다.
“하아….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딱히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다. 칼리번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민망해하는 두 여인을 두고 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갔다 온 거야, 나 혼자 일 다 시키고! 괜히 따라왔네!”
예상대로 젠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아기 성녀님을 도왔다.”
칼리번은 사실대로 말했다.
“뭐? 아기 성녀? 성녀님 중에 아기가 어딨어! 내가 여기를 몇십 년 전부터 오갔는데 거짓말을 해? 성녀님은 그렇다 치고, 애초에 대장이 아기를 왜 돌봐?”
“나무에서 떨어져서다.”
“…이상하다. 대장 같은 바보가 날 놀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젠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칼리번을 살폈다. 혹시나 다른 의미를 품은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성녀님은 나라의 큰 기둥이다. 그분들이 곤란에 처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도와야 한다.”
“그건 왕실에서 알아서 하겠지. 결론은 내가 뺑이 치는 동안 대장은 성녀인지 하녀인지 모를 애 보모 짓이나 하다 왔다는 거 아냐?”
“…그렇다.”
“하하,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우리를 보고 안 울 애가 어딨어?”
“울지는 않았다.”
딸꾹질은 좀 했지만…. 칼리번은 가만히 땅만 내려다보았다.
* * *
“티벨이라는 촌락이 하나 있지.”
“저희는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도착한 용병대 ‘검은 어금니’입니다. 이곳 티벨 마을은 여성들만 거주합니까?”
“대장, 대장은 우리가 기사라도 되는 줄 알아? …우린 마물 대가리 개수로 돈을 버는 천한 용병에 불과하다고.”
“어째서 부녀자를 전쟁터로 내보내신 겁니까?”
“하지만, 마물에게 끌려가 마물을 낳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다… 당신들은 알파라 우리와 다르게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장로님…! 용병을 마을 안으로 들이시면 안 돼요. 저, 저희, 봐, 봐 버렸어요……. 저 용병들, ‘사람’이 아니에요!”
“정 그러시면 북문으로 입장하시는 게….”
“야, 성문이 코 앞인데 이걸 두고 돌아가라고?!”
“북문으로 돌아간다.”
“확실히 휴식보다는 치료부터 받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녀님들을 부를 테니, 안뜰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이게 뭔 소리래?”
“뭐긴 뭐야, 여기 사람들이 좋아 죽는 소리라면 뻔하지.”
“대장, 다른 놈들이 치료받는 동안 저 안쪽에 들어가 있어. 거기라면 혼자 쉴 수 있으니까.”
“으아앗!”
“저… 괜찮으십니까? 무례를 보여 죄송합니다.”
“대장, 언제까지 퍼질러 자기만 할 거야!”
“뭐, 견습인지 정식인지는 몰라도 실력이 좋긴 한가 보네. 대장 완전히 반들반들해졌어.”
* * *
꿈결에 보았던 커다란 두 눈은 가을 하늘처럼 푸르렀고, 때때로 금빛으로 반짝였다. 무엇보다, 그 눈은 티 없이 맑았고… 보통 사람들이 칼리번을 보는 두려움이나 혐오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 * *
시간은 말없이 흘렀다. 칼리번은 스물넷이 되었다. ‘검은 어금니’의 용병대원들은 죽어서 갈아치워졌을지언정, 세월의 흐름에 따른 외관의 변화는 거의 없어 보였다.
젠은 여전히 짧고 붉은 머리에 밤색 눈을 지닌 20대 후반의 여성처럼 보였고, 칼리번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까무잡잡한 피부의 청년처럼 보였다.
마물 혼혈들은 인간 나이로 열여덟이 되는 데 고작 6년밖에 걸리지 않는다. 대신 청년기에 들어선 후에는 노화가 늦된 편이다. 젠의 말로는 운수 좋은 마물 혼혈은 150살이 넘도록 산다고 한다. 실제로 아직 스물넷에 불과한 칼리번과 달리 젠은 여든이 훌쩍 넘었던 것이다. 그녀는 매일 여든이었으니 어쩌면 실제로는 100살 이상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신의 농간으로 인해 시간이 멈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과도 같았다. 수많은 이들이 용병대에 들어왔고, 대부분이 5년 안에 죽었으며, 새로운 신입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칼리번은 젠과 함께 검은 어금니를 근근이 꾸려 나갔다. 그의 피비린내 나는 일상을 깨뜨린 것은 고작 한 통의 편지였다.
왕실의 황금 인장이 박힌 편지였다. 왕실의 인가를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 * *
“젠, 왕실에서 초대장이 왔다.”
칼리번은 젠에게 상담을 청했다. 나이가 많은 그녀라면 경험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웬 편지? 대장 혹시 죽은 아버지가 귀족이었어?”
젠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녀도 딱히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문맹이었기 때문에 젠과 함께 편지를 뜯어 보았다.
“흠….”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젠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용병대 해체 명령이라든가 왕실 인가를 취소한다든가 하는 불길한 편지는 아니었다.
“엥? 이게 뭐람?”
…아니, 오히려 행운의 편지에 가깝달까?
젠은 칼리번에게 편지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프리드웬 왕실의 막내 왕자이기도 한 여섯째 왕자, 에레즈 프리드웬의 성년식에 초대한다는 것이다.
편지에는 더없이 오만한 말투로, 왕족과 귀족만 초대하려 했으나 특별히 몇 명만은 더 초대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바로 그 영광된 자리에 바로 칼리번과 젠이 뽑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경비견이 되라는 내용이었다.
“오, 에레즈 프리드웬의 데뷔탕트구나.”
사실 ‘에레즈’와 ‘프리드웬’ 사이에는 엄청나게 많은 미들 네임이 있었으나 젠은 돌머리 대장을 위해 전부 생략해 주었다.
“젠이야말로 왕자님과 아는 사이인 건가?”
칼리번이 물었다.
“하, 내가 무슨 연줄이 있어서 왕자랑 사적으로 아는 사이겠어?”
어처구니가 없는지 젠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그렇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첫째 왕자가 성년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젠은 과거의 추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여든 살이 넘은 후에는 나이를 세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월이 훌쩍 지난 것을 느낄 때면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대장은 잘 모르려나? 높으신 분들의 소문들에는 통 관심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지금도 딱히 궁금하지는 않다.”
“대장이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건 어때? 옛날부터 유명한 예언이 하나 있잖아— 황금 피를 지닌 프리드웬 왕실에서 언젠가 예언의 여자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음…. 그건 알고 있다.”
남 일에 관심이 없는 칼리번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언급되는 ‘그 예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칼리번이 푸줏간 애송이일 때도 들었고, 지금까지도 듣고 있으니 얼마나 오래된 예언인지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근데 뭐, 사실상 유명무실한 예언이지. 이번 대에도 죄다 왕자뿐이잖아? 거기다 이 여섯째 왕자님은 말이야, 탄생 이래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 그래서 한때는 드디어 공주님이 태어나신 건가 하는 소문도 돌았어. 그리고 최근에는….”
칼리번의 까만 눈이 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국왕 전하께서 알파에게 범해지셔서 돌아가신 것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지.”
“…….”
“어쩌면 우리 같은 알파일지도 몰라. 이 왕자님은.”
* * *
까무잡잡한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 칼리번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곁에는 짧고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젠이 서 있었고 그녀 또한 이목을 끌었다. 본인은 붉은색이 아닌 주홍색 머리카락이라고 벅벅 우기고 있지만.
왜냐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 둘만이 훤칠하니 컸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나름 차려입기는 했지만, 귀족의 시선에서는 더없이 추레한 복식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흉을 보거나 말거나 그들은 당당히 서 있었다. 칼리번은 사람들이 자신을 꺼린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젠은 평소에 용병대에서는 절대 짓지 않는 느끼하고 멋진 미소를 지으며 왕궁의 시녀들에게 추파를 던지느라 바빴다.
“여긴 꽃밭이네, 꽃밭.”
젠은 귀족 영애나 시녀들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가슴 가득 숨을 채워 넣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못생기거나, 인간에서 약간 벗어난 상태거나, 팔다리가 잘려서 꽥꽥거리는 알파 놈들만 보다가, 어여쁜 아가씨들을 보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만으로 온 의미가 있다!”
젠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젠이 즐겁다니 다행이군.”
“대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아깝게끔.”
“당연하다. 우리는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 경호를 맡은 것이니까.”
“…아아, 그 말 다시 들으니 기분 잡치네.”
젠은 표정이 더러워졌다. 코를 킁킁거리며 아가씨들의 냄새를 맡는 자신의 모습이 꼭 경비견 같았기 때문이었다.
“흐아…. 살다 살다 왕족 나리의 가족 행사에까지 동원되다니. 술자리에서 풀기에도 뭐 한 끝내주는 경험이야.”
젠은 귀족이 모두 들어가서 더는 시녀도 남지 않은, 텅 빈 입구에 선 채로 불만을 토해 냈다.
“그건 그렇고 좀 부실하네, 그래 봬도 왕자님인데.”
젠이 연회장을 슬쩍 들여다보며 감상을 말했다. 생판 남인 그녀가 서운함을 느낄 정도로 방문한 귀족도 적었으며 시종의 수도 많지 않았다. 분위기도 떠들썩하다기보다는 의무적으로 치루는 행사에 가까워 보였다.
“인기가 없을 만도 해. 다른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전쟁터에 끌려다녔는데, 에레즈 프리드웬은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비친 적이 없으니까.”
“그렇군.”
“…본성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마물에 가까운 알파라서, 라는 소문이 괜히 도는 게 아니겠지.”
프리드웬 왕실의 후예들은 예로부터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힘을 지녔다. 마물에게 시달리는 인간들에게 있어 유일한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마치 검의 양날처럼, 프리드웬 왕실에는 찬양만큼이나 흉흉한 소문 또한 끊이질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마물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지켜 주는 왕실은 반대로 말하자면, 가장 전면에서 마물과 접촉하는 가문이기도 했다. 마물에게 전사했다고 알려진 왕 중에서, 마물을 낳은 자가 있다는 소문이 그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프리드웬 왕실과 그 일족이 물려받은 ‘황금 피’라 찬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면 마물에게 더럽혀진 피’라고 의심하곤 했다.
“곧 성년식이 시작됩니다. 고귀하신 분들의 보호를 위해 문을 닫을 예정이니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시종 하나가 칼리번에게 다가와 말했다. 연회가 시작되면 당연히 쫓겨날 줄 알았던 젠은 놀란 눈으로 시종을 따라갔다.
연회장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도,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뚝 끊긴 지 오래였다. 소문만 무성하고 아무런 권력도 없는 여섯째 왕자의 연회에 굳이 온 귀족이라면, 여태껏 공개되지 않은 왕자의 모습이 궁금해서였을 테니 당연하긴 했다.
정말로 막내 왕자는 괴물인 걸까? 왕실에서 결국 알파 왕자가 나올 것인가?
긴장 속에 여섯째 왕자, 에레즈 프리드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그저 감탄 만이 연회장에 감돌았다.
“와, 이건 엄청난 미인인데….”
젠은 칼리번의 옆구리를 툭 치더니 야트막하게 감상을 맡았다.
“저렇게 예쁜데 왜 여태 숨겨 놓고 아무도 안 보여 줬대? 괜한 소문만 돌게……. 대장, 대장?”
젠은 계속해서 떠들었으나 칼리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내보여진 다이아몬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왕자는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보석안을 가진 소년이었다. 머리카락은 황금을 녹여 쏟아부은 것처럼 눈부셨고 피부는 밀가루도 아니요, 계란 흰 자도 아닌, 갓 짜낸 우유처럼 부드럽게 희었다. 대신 뺨과 눈 아래는 살짝 붉었다.
왕족의 상징인 푸른 보석안은 샹들리에 아래에서 더욱 이채를 띄었다. 때때로 보랏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초록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일단 한 번 시선을 빼앗기면, 고개를 돌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직 완전하게 자라지 못한 몸은 귀부인이나 영애와 있을 때는 살짝 컸지만, 주변 어른들보다는 조금 작았다. 그리고 버드나무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지금은 아름다운 소년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흘러 조금 더 자라면 왕국 제일의 미남자가 될 것이 자명했다.
첫째 왕자인 알테르 프리드웬이 에레즈 프리드웬을 보호하듯 곁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비할 바 없이 아름다웠으나, 칼리번의 시선은 오직 에레즈에게만 붙잡혀 있었다.
여섯째 왕자는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주변 귀족들 하나하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살폈다. 그저 눈을 깜박이고 고개를 살짝 돌릴 뿐인데도 칼리번은 기품과 우아함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여섯째 왕자는 이날을 작정하기라도 한 듯 치장되어 있기까지 했다. 여태껏 숨겨져 있었던 만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그가 두른 붉은 망토에는 이곳에 온 어떤 귀족보다도 화려한 자수가 놓여 있었으며 흰 의복은 어떤 영애의 드레스보다도 섬세하고 귀한 옷감으로 만들어졌다. 자그마한 보석이 수도 없이 박혀 있었고 망토를 고정시키는 큼지막한 보석 브로치는 빛 아래에서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렸다.
그러나 그 모든 장식조차 여섯째 왕자 본연의 미모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밖에 되지 못했다. 화려한 금발과 보석안은 꼭 공작새 같았고 흰 피부와 우아한 분위기는 백조 같았다. 한 사람에게 정반대의 분위기가 동시에 존재한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
“…….”
이럴 수가!
칼리번은 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피와 오물뿐인 삶을 살아왔던 칼리번에게는 버거울 정도였다. 한 번도 어둠을 마주한 적 없는 것만 같은 반짝임에 칼리번의 검은 눈은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굶주린 개처럼 왕자를 바라보던 칼리번은 문득 보석안과 시선이 맞닿았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채워져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
“큭, 왕자 꼬맹이가 날 보는군. 역시 이 미모는 감출 수가 없나?”
그때, 곁에 있던 젠이 능청스럽게 장난을 걸었다.
“…역시 그런 건가. 젠은 미인이니.”
칼리번은 여전히 두 눈은 왕자님에게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자신을 볼 리가 없었다.
“엉?”
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지만, 칼리번은 그녀가 모난 데 없이 잘생겼다고 생각해 왔다. 시원시원한 체격에 불길처럼 짙은 머리와 눈은 누구라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젠이 스스로 그런 말을 꺼내다니, 칼리번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왕자는 젠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기, 대장…. 장난이야, 장난. 대장…. 좀….”
갑작스러운 칭찬에 젠은 마물에게 얻어터진 것보다 괴로워했다. 그녀의 얼굴이 소똥을 코앞에 둔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으, 이래서 대장이랑 오기 싫었다니까….”
칼리번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젠은 툴툴거리고는 짝다리로 섰다.
‘정말 아름답다.’
그러나 칼리번은 왕자에게 심취한 나머지 젠의 투덜거림마저 들리지 않았다. 칼리번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왕자에게 몰입했다. 그가 어쩌면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다. 어쩌면 보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이거나 인형일지도 모른다는….
“…….”
그 증거로, 여섯째 왕자는 여태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것이다. 보통 연회를 주최하는 사람이라면 가벼운 연설을 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오늘은 그의 데뷔탕트였다.
“…….”
여섯째 왕자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색이 옅지만 촘촘한 속눈썹과 눈두덩이마저도 매력적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무겁게 얹힌 망토가 사르르 대리석 바닥 위로 퍼져 나갔다. 여섯째 왕자의 행동에 사람들이 당혹했는지 고요 속에서 옷깃을 잡는 소리와 엇갈린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자는 백 마디의 말을 하는 대신, 이곳에 온 사람들 앞에서 공손히 절을 했다.
“…….”
연회장 안으로 침묵이 맴돌았다. 처음에는 왕자가 무슨 말을 이어서 할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몸을 일으킨 왕자는 생긋 미소를 짓기만 했다. 더없이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
적막한 연회장 안에 차츰 하나둘, 박수 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음악이 다시 흐르고,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여섯째 왕자는 알테르 프리드웬과 함께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얼떨떨해하던 귀족들은 여섯째 왕자가 얼마나 우아하고 고상한 방법으로 위용을 드러냈는지에 대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의미지?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그러나 용병 나부랭이인 젠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멋있다는 감상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젠처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기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굴었을 뿐이다.
“이봐, 대장. 대장이 보기에는 어때? 뭐라고 말 좀 해 봐…. 음?”
젠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칼리번을 보았다. 그는 왕자가 사라진 자리를 심각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라? 대장이 웬일로 이렇게 화가 났지?’
오래도록 칼리번을 지켜봐 왔지만 심각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용병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밤늦게까지 경비견이 되어야 하는데, 왕자가 얼굴만 예쁘지 영 변변찮은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라고 젠은 판단했다.
“일단 난 좀 먹고 있을게…. 대장도 화 좀 풀고. 왕자가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꽃 한 송이 줄 때까지는 안 끝난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좀만 더 버텨 보자고!”
젠은 칼리번을 툭 치고는 귀족들의 화를 사지 않을 구석 자리에 놓인 음식들을 노리러 떠났다.
‘…내가 화가 났다고?’
혼자 남은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갑자기 머리로 피가 쏠려 살짝 어지럽기까지 했다. 이것은 전투 직전 마물을 앞에 두고 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기는 했으나…. 달랐다. 무언가가 달랐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이마에 살짝 내려앉은 짧고 검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대로 자리를 벗어날까 싶었지만, 두 왕자와 귀족들을 보호하기 모든 문이 닫혀 있었다. 이곳은 수도에서도 가장 안전한 본성,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많은 경비와 성녀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왕자들을 보호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왕국민이라면 노예고 귀족이건 간에 누구나 들어 본 예언 하나가 있다. 언젠가 프리드웬 왕실에서 ‘예언의 소녀’가 태어나 마물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마물에게 당하고 당해 지긋지긋한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것은 그 예언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리드웬 왕실에서는 아직 공주님이 태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왕자들이 무수히 많은 위업을 달성해 왔다. 혼자 몸으로 수천에 달하는 마물을 상대해 나라를 위험에서 구해 냈다든가, 무너진 성을 다시 반듯이 세웠다든가…. 모두 프리드웬의 ‘왕자’가 이러한 기적을 일으켰다. 남자아이가 그 정도인데 예언대로 ‘공주’가 태어난다면?
…사람들은 최초의 여왕이 나타나 마물을 물리치고 혼란을 잠재워 주기를 늘 바랐다.
황금 피. 기적을 품은 왕실을 우러르며 부르는 말이었다. 프리드웬 가문 특유의 황금빛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보석안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온갖 마법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적격이었다.
“오, 왕자님께서 다시 등장하셨군요.”
“역시 꽃을 들고 계시네요.”
“어느 영애가 꽃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는지….”
칼리번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고개를 휘휘 젓는 사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는 연회장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늦게 장막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라졌던 왕자가 환영처럼 다시 나타나 있었다.
이럴 수가!
칼리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으니 평소라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았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처음 보았을 때 왕자는 장식이 치렁치렁 달린 망토와 흰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두 번째로 등장했을 때는 검은 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짙은 색의 옷감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차분해 보였다.
그는 감청색 망토를 둘렀으며 장식이라고는 목 아래에 단 루비 브로치와 은 단추 외에는 없었다. 부드럽게 이마를 덮고 있던 금빛 머리카락은 그사이에 새로 다듬어져 잘생긴 이마를 드러냈다. 절제는 희고 화사한 외모를 더욱 눈에 띄게 했다.
칼리번은 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만약 왕자가 처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등장했다면, 칼리번은 고개를 돌려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칼리번은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굴러먹은 칼리번으로서는, 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해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더없이 낯설고 생소했다.
‘왕족의 데뷔…탕트란 이런 것이란 말인가?’
충격적이었다. 왕자는 마치 자신의 시선을 잡아 두려는 것처럼 더욱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 모습에 간신히 익숙해질 즈음에는 자로 잰 듯한 몸짓과 백조의 날갯짓처럼 우아한 눈짓으로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 생각이 헛된 착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왕자가 자신을 위해 멋을 부리고 있다고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나치게 아름다웠을 뿐이었다.
칼리번은 환상적인 에레즈의 모습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길을 내주고, 왕자가 사뿐사뿐 바로 두 걸음 앞까지 왔을 때도, 칼리번은 그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왕자가 험악하고 위험한 알파의 입속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여섯째 왕자가 용병을 상대로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소년이 칼리번에게 꽃을 내미는 그 순간조차도….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그 한마디가, 왕자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았는지 깨끗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그 순간 칼리번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사람들은 무례한 용병이 주제도 모르고 화를 낸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실 칼리번은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사나운 칼리번의 눈빛에 겁을 먹고 도망쳤겠지만, 왕자는 한 송이 꽃을 살며시 내밀었다. 붉은 꽃잎이 겹겹이 쌓인 꽃은 점처럼 작고 붉은 열매가 맺힌 줄기 몇 개와 함께 비단 끈으로 묶여 있었다.
“어흠, 흠!”
헐레벌떡 달려온 시종이 불편한 기색을 담아 기침을 했다. 그제야 칼리번은 자신이 고귀한 분을 앞에 두고도 멍청하니 서 있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자신의 가슴께까지 밖에 오지 않는 왕자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
칼리번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덜컹! 가벼운 방어구를 낀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닿아 커다란 쇳소리가 날 정도였다.
“와… 왕자님께서는, 음, 그것이…… 왕국을 위해 백성을 보호해 주고 있는 용병대 전체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그러니까… 몹시도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 꽃을 드린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디선가 일부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지어낸, 쓸데없는 설명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
고개를 숙인 칼리번은 풋풋한 풀 냄새를 맡았다. 왕자는 칼리번에게 꽃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칼리번은 마물 여덟 마리를 쓰러뜨릴 때보다 더 큰 힘을 내서 손을 들었다. 하얀 손이 칼리번의 손끝에 닿았다. 굳은살로 뒤덮인 칼리번의 커다란 손에 비교하자면 어린 왕자의 손은 비단 같았다. 피가 식어 싸늘해진 칼리번과 달리 델 만큼 따뜻하기도 했다.
칼리번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왕자의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살짝 닿은 손이 너무나 신경 쓰여서,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눈동자를 굴려 왕자를 몰래 보는 꼼수조차 감히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칼리번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고착 몇 초가 흘렀을 뿐이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왕자는 그에게 다가왔던 것처럼 천천히 멀어졌다. 멀어지는 왕자를 두고 용병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칼리번은 화려한 꽃을 쥔 채로, 죄인처럼 연회장에서 홀로 무릎을 꿇을 뿐이다.
“…아, 역시 그런 의도로…. 하하하.”
“노고를 치하….”
처음에는 다들 아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벌어져서는 안 될 사건을 누군가 웃음으로 때워 넘기려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곧 하하하, 큰 웃음소리로 연회장 전체에 번져 갔다.
“아무래도 막내 왕자님께서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하셨나 봅니다. 저런 우락부락한 사내에게 그 귀한 꽃을 주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차라리 귀부인에게 주는 편이 나았겠어요.”
다들 비밀에 싸인 여섯째 왕자의 연회에 감시를 겸해서 온 경우가 많았다. 소문과 달리 멀쩡하다 못해 반짝거리는 외관에 잠시 혹했으나, 곧 어째서 왕자가 밖에 나오지 못했는지 답을 찾았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허수아비다.
사교계에 데뷔한 영식이 영애에게 꽃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꽃 한 송이를 주는 것으로 끝나는 의미가 아니다. 왕자에게 어떤 가문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 꽃 한 송이를 시작으로 혼맥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사람들은 여섯째 왕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는 ‘가문’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가문은커녕, 연고도 없는 마물 혼혈 따위에게 그 귀한 꽃을 낭비하다니! 겉모습이야 멀쩡할지 몰라도 머리는 텅 빈 모양이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아무런 뒷배도, 권력도 없었던 것이다.
“……응? 이게 뭐야.”
평소에는 먹지 못할 진귀한 음식에 빠진 젠은 갑자기 들려오는 안도의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돌아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대장?”
작은 소동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남은 연회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칼리번만이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뭐?! 대장이 꽃을 받았다고?!”
젠은 깜짝 놀랐다. 칼리번이 꽃을 쥐고 있을뿐더러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드물게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뿐일까? 아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아도 무섭게 생긴 얼굴인데, 지금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태세였다.
‘이런 젠장, 큰일이다! 대장이 단단히 화가 났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용병에게, 사내에게, 알파에게, 심지어 마물 혼혈에게 꽃이라니! 만약 젠에게 그 꽃을 주기라도 했다면, 비록 우락부락한 알파이긴 해도 외양은 여성이니… 왕자의 시력이 좋지 않다고, 변명거리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번이라니! 이는 오히려 전투 신청으로 보는 편이 옳지 않을까!
‘이대로 뒀다간 대장 놈이 평생 꺼내 본 적 없는 본성을 처음으로 드러낼지도 몰라. 세상에, 저 돌머리를 이 정도로 화나게 하다니…. 막내 왕자도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구만.’
과연, 젠의 추측대로 칼리번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검은 어금니의 용병들이 주먹질하기 전에 꼭 저랬다.
저 왕자는 무슨 원한이 있어서 가만 있는 용병의 코털을 뽑는단 말인가?
* * *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장, 우리 대장에게? 꽃을? 으하하하!”
“…인마, 마냥 웃긴 이야기가 아니야!”
젠은 심각한 표정으로 동료들에게 주의를 줬다.
“어떻게 웃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부대장?”
“설마 거짓말을 아니겠죠? 부대장님은 원체 뻥을 잘 치지 않습니까?”
“…이게 거짓말이면 하늘에 맹세코 다음 방어전에서 난 마물에게 잡혀 반으로 찢겨 죽을 거다….”
용병대는 너나 할 것 없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그 당시 칼리번의 얼굴을 직접 보았던 젠만 심각할 따름이었다.
“그래서요, 대장이 한 대 한 먹여 줬습니까?!”
“줄 거면 돈이나 주라지, 웬 꽃이래?”
“사실 막내 왕자가 공주인 거 아니겠어? 부대장님 말로는 엄청 이쁘다며!”
그 외에도 왕자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줄 꽃을 잘못 주었다든가, 귀족들 사이의 내기일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젠만 두 눈이 가늘어질 뿐이었다.
쨍그랑!
그때였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낄낄거리던 용병들이 단박에 조용해졌다.
“프리드웬 왕실은 우리 용병대를 지원하고 있다. 함부로 왕실을 입에 올리지 말아라.”
칼리번이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던진 것이다. 그의 얼굴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용병 모두가 입을 꽉 다물었다. 무뚝뚝하고 젊은 용병 대장은 그동안 저를 웃음거리로 삼아도 별말이 없었다…. 아니, 자기가 웃음거리가 된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과격한 반응이라니….
“식사는 따로 하겠다.”
분위기가 차갑게 식자 칼리번은 그 자리를 떠났다. 다들 어영부영 사과도 못 한 채 떠나가는 칼리번의 등을 보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쿵!
“이게 뭔 소리야?”
“대장이 떠난 쪽에서 들리는데…?”
쿵, 쿵! 괴상한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용병들은 괴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희생양을 보내기로 마음먹었고, 검은 어금니에서 가장 목숨 줄이 긴 젠이 당첨되고 말았다.
“젠장, 젠장…….”
젠은 발걸음을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칼리번이 들어간 숲속으로 따라갔다. 마물 혼혈은 하필이면 눈도 더럽게 밝아서 횃불 없이도 어두운 숲길이 훤히 보였다. 몸통이 굵고 커다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에서, 칼리번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지?’
젠은 굵직한 떡갈나무 뒤에 숨어 칼리번이 무엇을 하는지 살폈다.
“…….”
그리고 젠은 입을 떡 벌렸다. 도저히 다물 수가 없었다. 대장이… 맨주먹을 거대한 나무의 몸통에 쑤셔 박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단단한 나무에 주먹 모양의 구멍이 생겨나고 있었다. 꼭 사람 얼굴만 한 구멍이었다. 왕자의 조막만 한 얼굴은 그 주먹 한 방이면 끝장이 나 버릴 정도로….
주먹질을 한참 하다 보면 가엾은 나무는 몸통의 반 이상이 패여 천둥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요란한 소리가 가시고 나면, 칼리번은 숨을 씩씩거리고는 다시 그만한 나무 앞에 서서 다시 같은 짓을 반복했다. 끝없이, 끊임없이….
‘내… 내일 신입이 장작 팰 필요는 없겠네….’
젠은 벌벌 떨며 농담 따먹기나 할 수밖에 없었다.
* * *
방어전. 마물이 인간이 사는 도시나 마을을 습격했을 때 ‘방어’하는 전투. 그러나 전투만으로 방어전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는다. 때로는 ‘뒤처리’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찾았습니다!”
용병 하나가 손을 퍼덕였다. 그의 얼굴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흉측하게 변형되어 있었고 두 팔은 박쥐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으, 저 새끼 본성은 언제 봐도 못생겼다니까.”
“이제 찾았으니까 얼른 주둥이 좀 숨겨라, 야.”
다른 용병들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방어전을 마친 후, 용병들이 향한 곳은 근처의 산이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가파른 절벽, 그 아래에 존재하는 동굴은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용병대원들은 제 나름의 본성을 이용해 암벽을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가끔 누군가 실수를 해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런 놈들은 차라리 밑바닥에서 위로 기어오르는 편이 나았으므로, 아무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벽 안 동굴은 어둡고 습했다. 이런 곳을 박쥐 말고는 집으로 삼을 리가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지만….
‘피 냄새가 난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세한 피 냄새가 끼얹어졌다. 칼리번이 느꼈으니 다른 용병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거미줄과도 같은, 희고 끈끈한 점액이 동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다. 용병들은 차라리 앞으로 이어지는 참상이 시체에 그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는 사내들이 거미줄에 묶여 동굴 천장과 벽에 산 채로 붙어 있었다. 하나같이 배가 커다랗게 불러 있었고 환각 상태에 빠졌는지 용병대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한다.”
칼리번이 주변을 죽 둘러보고 명령을 내린 그때였다.
“살려…. 살려 주세요….”
한 사내의 희미한 애원이 동굴 안을 울렸다. 용케도 이 광기 속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끄으으…. 제발……. 살려 줘….”
젠은 제 손을 변형하려 했으나, 칼리번이 만류하고 대신 다가갔다.
“정신이 드십니까?”
묶여 있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게는 두 눈이 없었다.
“당신의 몸속에는 이미 마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물의 씨를 밴 이상, 어차피 죽습니다. …하지만, 지금 죽는다면 적어도 알파를 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리번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내에게 그가 처한 현실을 알려 주었다. 멍했던 사내의 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하, 하지만…! 싫어, 싫어어…. 아직 죽고 싶지 않아……!”
“…….”
“어, 어떻게, 어떻게 좀…. 제발…. 이걸 뗄 수는 없는 겁니까? 살려 주세요, 뭐든 드릴 테니 제발 좀, 살려 달라고…!”
“…….”
“성, 녀님…. 그래, 그들이라면 저희를…. 아아, 네! 그분들이라면, 가련한 저희를, 구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제발, 제발……!”
사내는 칼리번에게 간절히 애원하며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했다.
“이 상태로 며칠을 더 버티신다면, 원하시는 대로 그분들이 방문할 겁니다.”
“아, 아아…. 그러면…!”
“그분들 나름의 ‘도움’을 드리겠죠.”
잠자듯 조용히 죽을 수 있는 약으로써. 칼리번은 담담히 말했다.
“끄으으, 아, 아아…. 으아아……!”
사내는 누군가 구해 주길 바라며 가까스로 버텨 왔을 것이다. 그러나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사내는 제 운명을 체감하고는 속절없이 울부짖었다. 더없이 평범한 없는 사내였다. 운 나쁘게 마물에게 걸리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아악! 주, 죽이지 마, 싫어, 죽기 싫어……!”
“…….”
“아직은 싫어! 제발, 하루만, 하루만 더 살게 해 줘, 살고 싶어…. 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까, 더 살고 싶어, 싫어, 싫어…. 이렇게 죽는 건…!”
“…운이 좋다면, 당신이 낳은 괴물은 인간과 어울려 살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건 그저… 새로운 마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니면 마물의 먹잇감이 되는 기형 마물이거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칼리번을 재촉할 수 없었다.
“으, 으으…….”
“지금 죽는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닥쳐어! 결국은 나보고 죽으라는 거잖아! 으, 으아아악! 미친 새끼! 괴물, 괴물 주제에 네가 뭘 알아!”
괴물 주제에, 괴물 주제에…! 죽음밖에 남지 않은 사내는 악밖에 남지 않았다.
“…대장, 그만해. 그럴수록 저놈만 더 괴로워져.”
참다못해 젠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칼리번이 해야 할 일을 대신에 해 주려 했다.
“아악! 어디 계십니까! 도와주세요, 성녀님! 흐, 흐아아…. 화, 황금 피……. 우리의 왕이시여!”
“아니, 내가 처리하겠다.”
“히이, 이이익! 끄으아아, 아아악! 아버지! 어머니!”
칼리번은 대검을 쥐었다. 그는 푸줏간에서 일해 왔던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제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았다.
* * *
칼리번은 성녀원 안에 자리 잡은 하얀 조각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는 조각상을 보면서 에레즈 프리드웬을 떠올리고 있었다. 성년식에서 보았던 여섯째 왕자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 둘은 하얗다는 것 외에는 닮은 부분이 없었으나 이 세상에는 새하얀 것이 생각보다 드물다.
“…용병치고는 보기 드물게 신실하신 분이시군요.”
그때, 등 뒤에서 다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칼리번은 몸을 돌렸다. 부하들이 성녀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물러나겠습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마물 혼혈인 자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만히 계세요, 당신의 마음이 보입니다.”
성녀의 목소리가 칼리번의 발목을 붙잡았다. 칼리번은 자그마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성녀단은 그 이름에 걸맞게 모두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한여름에도 손등을 가리는 긴 소매와 발을 가리는 치마를 입으며, 피가 튀는 전장에서도 그들의 복식은 푸를 정도로 희었다. 베일이 달린 두건을 써서 머리카락을 전부 가리는데, 이목구비만 드러난 얼굴은 때로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성녀복은 어째서인지 시선을 붙잡는다. 칼리번 자신도 그 이유는 모르지만….
“이번에 치르신 방어전에 대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혹시 배 속에 들러붙은 마물만 떼어 내는 마법이 있을까 궁금하신가요, 용병대의 대장님?”
“그런 질문은… 한 적 없습니다.”
칼리번은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네, 사실 당신이 아닌 다른 성녀님께 하셨죠.”
그 말에 칼리번은 성녀님 너머에 서 있는, 하얀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배 속에 자리 잡은 마물만을 떼어 내다니…. 그런 기적이 가능할 리가 없다.
“묻지 않은 질문에 굳이 대답을 드리자면, 아무리 저희라 해도 그런 일은 하지 못합니다.”
성녀들은 성력을 사용하여 상대를 치유하거나 보호할 수 있다.
“배 속에 생겨난 생명을 거두는 일은 신께서 용서하시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모든 성녀님이 그렇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칼리번의 머릿속으로 사내의 간절한 외침이 맴돌았다. 제발 살려 달라고, 배 속의 마물을 지워 달라고…. 그녀는 여자다. 남자가 마물을 배기 이전에, 그들은 사내의 아이를 품어 왔다.
성녀의 온화한 미소에는 핏물이 고여 있었다. 마물을 베고 죽이는 기사단이나 용병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피였다.
* * *
칼리번의 거처는 청빈이 신조인 성녀의 방과 다를 바 없었다. 성녀의 방에 신의 말씀과 예언이 적힌 서적이 놓였다면, 칼리번의 방에는 무기가 추가된 정도였다. 다만, 칼리번의 방에는 방패가 없었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 하나 정도는 들고 다니는 다른 용병들과 다른 점이었다.
사실 칼리번은 용병 중에서 가장 방패가 필요한 이였다. 일반적인 알파와 달리 그의 몸은 마물로 변형되지 않는다. 그는 대신 사람만 한 대검을 두 손에 쥐고 휘두르며 적을 쓰러뜨리는 것을 최선의 방어로 삼았다.
어릴 적, 그의 양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칼리번’이란 전설 속 검을 이르는 말이란다. 사람에 따라서는 왕국을 세우신 에인레드 프리드웬 전하께서 쓰신 성검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 으음…. 어느 쪽의 검이든 간에 진정한 왕만이 그 검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단다. 그 이름을 붙여 주었으니, 칼, 너는 어딜 가든 푸줏간 아들이 아닌 대장간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거다.>
인생은 이름을 따라가는 것일까? 이름의 유례가 마물 혼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탓에, 어딜 가든 시선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칼리번은 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검으로 마물을 베어 살아가게 되었다.
칼리번은 피 웅덩이 속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에는 가축을 죽이며 자랐다. 마물을 죽이며 성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백정이었다. 양아버지는 사람은 결국 무언가를 죽이며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랬다. 사람은 가축의 살과 뼈를 먹고 살아간다.
예언을 지키기 위해 봉사하는 성녀단도, 명예를 위해 싸우는 기사단도, 돈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용병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가축이나 마물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는 마물과 인간은 다를 바가 조금도 없었다.
마물은 수십 년에 하나밖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오메가를 얻지 못해 인간 사내에게 달려들다가 살해당하고, 사내는 마물에게 끌려가 배가 찢어져 죽고 만다. 여인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둘리거나,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이 부지기수다.
마물 혼혈 또한 인간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붙어살아 보려다 마물 손에 뒈지든가, 본성을 억누르지 못하고 기사단이나 성녀단에게 추격당한 후 살해당하곤 한다.
<…그래서 난 아무도 동정하지 않아. 여자를 죽이든, 남자를 죽이든, 마물을 죽이든, 이 몸에게는 똑같다 이 말이지. 뭐, 반대로 내가 죽는다고 다른 놈이 슬퍼해 줄 것도 아니잖아?>
언젠가 젠은 칼리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되는 대로 살다가,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으면 그만이야. 그게 상이든 벌이든, 죽고 난 다음에 내 시체로 그 무게를 재지 않겠어? 그러니까 대장도 괜히 기사 놀이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다 부질없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말이 옳다. 마물의 머리를 베어 돈을 벌고, 술을 진탕 마시고 새벽에 잠이 들고…. 그렇게 살아가면 그만인 삶이다.
그런 칼리번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꽃 한 송이였다. 탐스럽고 붉은 꽃. 자그마한 열매 두 알이 붙은 줄기. 그리고 그들을 묶은 비단 끈…. 살풍경한 칼리번의 방에서 유독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젠이 선물로 준 술병에 꽃을 꽂아 두었다. 그 꽃은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이었다. 칼리번은 꽃이 오래 가도록 곱게 굳히는 법도, 책 사이의 책갈피로 쓰는 법도 몰랐다. 그저 머저리처럼 곁에 두고 바라볼 뿐이었다. 심지어 만지지도 못했다. 손가락 마디마디, 붕대가 감긴 거친 손으로는 닿기만 해도 부숴 버릴 것만 같아서.
그날, 여섯째 왕자가 무슨 변덕이 일어서 이 꽃을 선사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평생 알 기회는 없을 것이다. 감히 말을 걸 수도 없는 까마득히 먼 상대였으니까.
에레즈 프리드웬은 평생 벌레 한 마리도 죽여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칼리번은 달라도 한없이 달랐다. 칼리번은 꽂아 두기만 한 꽃에 드디어 손을 뻗어 보았다.
이대로 썩어 버리기 전에 그 작은 열매라도 입에 대 본다면, 그건 무례한 짓일까…?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손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대장! 들었어?”
그때, 젠이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심스러웠던 칼리번의 손길이 그 충격으로 술병을 쳤다.
“얼마 전에 여섯째 왕자의 성년식 경호를 했었잖아? 그 막내 왕자를 위해 무투회를 연다네?”
그녀의 한 손에는 편지 하나가 있었다.
“…….”
그리고 꽃은… 술병과 함께 바닥에 떨어져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근데 대장 뭘 또 부순 거야? 깨지는 소리가 나던데?”
“…….”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거니까 들어 봐! 다른 용병대도 아니고 우리 같은 발톱 때한테 초대장이 왔다니까? 이게 웬일이래. 무투회에 참여할 귀족이 어지간히도 없나? 음…. 그때 연회장이 비어 있던 걸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지만.”
칼리번의 손이 떨리는 것도 모른 채 젠은 낄낄 웃으며 부대장으로서 해야 할 보고를 이어 나갔다.
“에휴, 귀족 놈들은 무투회가 하고 싶나?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방어전이나 치를 것이지, 이런 힘 빼기나 하고 있다니…. 참나.”
퉤, 젠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매일 마물과 생사의 가르며 전투를 벌이는 그들에게 무투회란 어린애 장난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보자, 보상은 뭐냐……. 엥? 에레즈 프리드웬의 기원과 축복이 담긴 꽃이 전부? 금화를 산더미처럼 쌓아 줘도 나갈까 말까인데, 이렇게 시원찮아서야 누가 나가겠어!?”
무투회는 사실상 귀족들의 전쟁놀이였다. 귀부인과 귀빈, 영애와 영식을 잔뜩 불러 놓고 기사들이 공작새의 깃털을 뽐내듯 자랑하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귀족에게 금화나 보석은 그득히 넘쳐난다. 그러니 찬사나 명예를 상으로 내리는 것이다.
“우리가 가 봤자 저쪽도 달가워하지 않을걸. 내가 내일 서기한테 불참하겠다고, 편지 좀 써 달라고 부탁할게. 하여간에, 뭔 일 있을 때마다 머릿수 채우려고 불러내는 꼬락서니 하고는…. 왕실 인가를 받은 건 좋은데 가끔 이렇게 사적으로 불러내서 돈 값하려는 게 영 별로라니까. 용병대 중에서 누가 좋다고 무투회에 참가….”
“참가한다.”
“…그래, 우리 같은 놈들이 반드시 참가하게 되니까. …뭐?”
주절거리던 젠이 깜짝 놀라서 칼리번을 다시 보았다.
“반드시, 참가한다.”
칼리번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허억, 큰일 났다! 대장이 막내 왕자에게 지난 연회 때의 복수를 할 생각인가 봐!’
분노에 휩싸인 칼리번을 본 젠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무투회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젠의 말마따나, ‘돌머리 대장답지 않은 돌대가리 같은 짓’이었다. 물론 칼리번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자리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여섯째 왕자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그가 불러 주었을 때뿐이었으니까.
“뭐, 그렇게까지 가고 싶다면야 가야지. 대장이 고집을 부리면 밑도 끝도 없으니까.”
귀족들 사이에 홀로 참가할 칼리번이 걱정되었는지, 젠이 종자를 자처했다. 사실은 칼리번이 여섯째 왕자를 암살하려 들면 말리기 위해서였다.
* * *
무투회는 기사단이 소유한 원형의 시합장에서 열렸다. 참가한 기사가 많지 않았는지 규모는 썩 크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여섯째 왕자가 앉아 있어야 할,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는 의외의 인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1 왕자잖아?”
젠이 먼저 그 인물을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전쟁터에 있어야 할 왕자님이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알테르 프리드웬. 그의 위업을 설명하자면 혀가 아플 정도다. 마물이 나타나는 곳이면 언제나 선봉에 서서 싸우며, 연전연승을 거두는 영웅이었다. 백성들은 그를 우러러보며, 그야말로 진정한 황금 피라며 찬양하곤 했다.
칼리번은 차양이 드리워진 왕족의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알테르 프리드웬은 영향력이 부족한 여섯째 왕자를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한 듯싶었다.
왕국은 예로부터 마물이라 불리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지, 내부의 갈등은 유야무야 무마되는 편이었다. 그로 인해 왕위 쟁탈전이란 단어는 고대 역사서에서나 볼 법한 사어가 되어 버렸다.
첫째 왕자는 소싯적부터 왕의 재목으로서 꾸준히 두각을 드러냈고, 다른 왕자들도 그에게 충성할 뿐 감히 그의 자리를 넘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외부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무튼 왕자들은 꽤 우애가 두터웠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왕족의 상징인 짙은 금발은 어깨 위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벌어진 어깨와 무인다운 체격, 단단한 턱과 곧게 선 콧대. 그야말로 황금빛 갈기를 지닌 사자였다.
…여섯째 왕자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런 첫째 왕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성년이 지났다고는 하나 형님의 곁에서는 새끼 고양이처럼 작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승부도 되지 않는구만.”
두 왕자의 모습을 본 사람들도 다들 젠처럼 생각했을 것이다—칼리번을 제외하고.
알테르 프리드웬의 외모가 절대 뒤떨어지지 않음에도, 칼리번의 눈에는 하얗고 예쁘장한 에레즈 프리드웬만이 보였다.
‘처음 뵈었을 때는 샹들리에와 촛불인 줄 알았는데, 태양 아래에서도 완벽하다니…. 세상에 저런 미인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칼리번은 심각했다. 미인도 여러 번 보면 질린다는 말처럼, 두 번째로 마주하면 충격이 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섯째 왕자는 나날이 성장하고 아름다워질 뿐이었다. 여전히 칼리번의 넋을 빼놓았다.
‘제기랄. 큰일 났다! 대장이 원수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고 있잖아? 용병 출신이면서 이 대회에 우승해서, 여섯째 왕자에게 기어이 모욕을 줄 생각이야. 저번 연회에서 받았던 수치를 돌려줄 셈인 거지. 틀림없어.’
여섯째 왕자를 죽어라 노려보는 칼리번을 보며 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여섯째 왕자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기사들은 뜻밖의 기회를 얻었다. 이번 무투회에서 성과를 보이면, 첫째 왕자의 눈에 들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설렁설렁 시합을 치르려던 기사들도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다.
* * *
기사들이 기회라고 생각했던 무투회는 도리어 위기가 되고 말았다.
우승에 관심도 없었던 기사들과 달리, 처음부터 오직 우승만을 위해 무투회까지 달려온 자가 한 명 있었으니, 그는 선수 중 유일한 용병대 출신이었다.
귀족들의 검은 연신 바닥으로 떨어졌고, 기사들은 쓰러지다 못해 하늘을 휘휘 날기까지 했다—내던져져서.
“오….”
“오오…!”
“오오오…?!”
정정당당한 경기를 관람하러 온 귀족과 기사 모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이건 무투회가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크고 잔뜩 화가 난 검은 소가 난장을 부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으아아……. 젠장, 큰일 났네.”
관중석이 술렁이자 젠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칼리번의 무구 시중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관중석보다 더욱 가까이서 시합을 관전할 수 있었다.
자고로 무투회란, 기사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가감 없이 부딪치며 창술과 검술을 발전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전투력 자체보다도 기사도가 더 중시되었다. 시합 전에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시합이 끝난 후에는 서로를 칭송하며, 전투 중 상대가 무기를 놓치거나 넘어지면 기다려 주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이 상스럽고 막돼먹은 용병에게 기사도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평소 마물과 싸웠던 방식 그대로를 고수했다. 전쟁터에서야 방심하면 죽으니 그렇다 쳐도, 무투회에서 이래서야 무뢰한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대장이, 이렇게까지 막내 왕자에게 증오할 줄이야…!’
젠은 단 한 명의 기사도 봐주지 않는 칼리번을 전투를 보며 몸서리를 쳤다.
* * *
칼리번이라는 예상치 못한 존재로 인해 여섯째 왕자를 위한 무투회는 역사상 가장 짧고 심심하게 끝을 맺었다.
“……후우.”
칼리번은 크게 숨을 내쉬며 투구를 내던졌다. 그의 곁에는 마지막으로 결투를 한 기사가 남긴 검이 꽂혀 있었다.
주변은 온통 조용했다. 칼리번은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멀뚱하니 서 있기만 했다.
“…….”
일단 싸우라는 순번대로 싸우기는 했는데, 아직도 뭔가를 더 해야 하나? 귀족들이 뭘 하는지 칼리번이 알 리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어울리지 않는 놀음에 끼어들었을까.’
땀을 흘리고 나니 흥분감이 가라앉았다. 칼리번이 부질없는 짓을 벌였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저 위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모두가 앉아 있는 가운데, 여섯째 왕자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고 있었다.
칼리번을 향해서…….
“…….”
칼리번은 에레즈가 서 있는 방향으로 무릎을 꿇었다. 박수 소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진심이 담겨 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에레즈 프리드웬의 이름을 걸고 주최한 무투회인데, 이렇게 끝나서야 영 심심하지 않겠나.”
여섯째 왕자에게 꽃을 받을 일만 남은 칼리번의 앞에, 뜻밖의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차양이 달린 자리에서 경기장 안으로 내려온 것이다.
“시합이 끝난 상태에서 난입을 선언하다니, 미리 양해를 구하지.”
말과 달리 조금도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알테르는 바닥에 떨어진 패배자의 검을 집어 들었다. 왕족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다. 지금 알테르 프리드웬은, 칼리번에게 왕자의 제안을 거절하고 물러선다는 선택지를 아예 없애 버렸다.
“…….”
칼리번은 말없이 바닥에 꽂아 둔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칼리번은 급격히 기분이 나빠졌다. 알테르로 인해 여섯째 왕자의 박수 소리가 그쳤기 때문이었다.
장내는 다시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이 몸 또한 자네와 다를 바 없이 전쟁터를 누비는 몸, 다른 기사를 상대할 때처럼 봐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선언하고는, 알테르는 예고도 없이 칼리번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
일격을 받아 낸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여태껏 상대했던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묵직함이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공격에 칼리번은 속수무책으로 방어만 했다. 그는 점점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 아무리 돌대가리라고 불리는 칼리번이었으나, 상대는 귀족도 아닌 왕자였다! 함부로 칼을 휘두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깡, 깡!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어느덧 칼리번의 뒤꿈치가 땅에 그어 둔 선에 닿았다. 이 선을 넘으면 실격 처리가 되고 만다. 에레즈의 꽃은 받고 싶었지만, 분란은 싫었던 칼리번은 결투 때마다 기사들을 죄다 선 밖으로 집어 던지곤 했다. 그와 같은 꼴을 당하게 생긴 것이다.
‘젠장…!’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에레즈의 꽃을 어이없이 빼앗길 수는 없었다. 쾅! 칼리번은 처음으로 왕자에게 반격했다. 쇳덩어리가 맞물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큿…!”
칼리번은 인상을 썼다. 온 힘을 다했건만 알테르 프리드웬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칼리번은 마물 혼혈이었다. 아무리 인간 사내가 강하다고 할지라도, 힘으로 이 정도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힘겨루기를 하던 왕자의 칼이 먼저 물러섰고, 곧장 다시 휘둘러진다. 칼리번은 왕자의 검을 갑주를 덧댄 팔로 막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팔이 잘렸겠지만, 칼리번은 몸 자체를 방패처럼 사용했다.
칼리번은 대검이 아닌 평범한 한 손 검을 들고 있었다. 무투회의 모든 참가자에게 같은 검과 방패를 지급한 탓이었다. 그래서… 칼리번은 왕자의 칼을 막던 팔로, 아예 그의 검날을 움켜쥐었다.
“흠…?!”
알테르는 흥미롭다는 듯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으나 칼리번은 개의치 않았다.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칼날이 벌벌 떨리더니, 무쇠로 제련된 칼이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왕자를 감히 공격할 수 없는 칼리번이 보인 최선의 공격이었다.
“하하, 칼을 부러뜨리다니….”
알테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칼리번을 죽일 기세로 몰아세우던 모습과는 별개였다.
“헉, 허억….”
누구라도 반할 법한 미소였으나 칼리번에게는 조금도 매력적이지 못했다. 알테르와 칼을 맞댈 때마다 치고 들어오는 알파 특유의 체취는 오히려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래서야 계속할 수가 없겠군…. 하지만.”
“……?”
“여기가 전쟁터였다면 상황이 달랐겠지.”
알테르 프리드웬은 부러진 칼날을 망설임 없이 칼리번의 무릎에 박아 넣었다.
“으윽!”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것이 아니라, 정확히 관절이 맞닿는 부분을 재단하여 넣었다. 칼리번의 몸이 한쪽으로 휘청거렸다. 방금까지 보였던 검술과 달리, 어떠한 예법도 규칙도 없는 날것의 전투였다.
칼리번은 이 상황을 기회로 삼아 알테르의 다리에 칼을 휘두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왕자였다.
알테르 너머로 희미하게 에레즈 프리드웬의 인영이 보였다. 순간, 칼리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칼리번의 칼날을 움켜쥐었다. 칼리번은 왕족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풀었다. 그가 칼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칼리번이 그랬던 것처럼, 검을 그대로 우그러뜨려 버렸다.
“자네의 검도 부러지고 말았군.”
두 동강이 난 칼을 땅에 던지며 왕자가 말했다. 칼리번은 주저앉은 채로 첫째 왕자를 올려보았다. 알테르의 푸른 눈이 흥미롭다는 듯이 칼리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대가 왕족이라고 과도하게 봐주는 것 아닌가?”
알테르 프리드웬이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칼리번이 고개를 저었다.
“…대등하게 겨룰 수 없는 상황임은 이해한다. 유감이군.”
알테르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용병이 감히 왕족에게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우승자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네. 단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지.”
알테르는 에레즈 프리드웬이 있는 쪽으로 고개 살짝 까딱였다.
“…….”
그사이 무언가를 발견한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칼날을 쥐어 피가 흐르던 왕자의 손은 어느새 멀끔했다.
“…하나 마물 혼혈들은 회복이 빠르다 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칼리번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왕자는 손을 거두고는 나름의 위로를 건넸다. 경기장은 찬물을 끼얹듯 조용했다. 이런 건… 시합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도 머릿속에 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무투회는 끝났다. 알테르 프리드웬의 호위 기사들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젠도 그들 무리에 끼어 칼리번에게 향했다.
“괜찮아, 대장? …와, 제대로 박아 놨네.”
“…윽.”
젠은 혀를 차며 여태 뽑지도 않은 칼을 뽑아냈다.
“보통 실력이 아냐. 이 정도면 상처 자체는 금방 회복이 되도 걷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는데….”
허구한 날 마물을 상대해서 그런가? 대처법을 잘 아네…. 젠은 감탄하며 칼리번의 두툼한 팔을 제 어깨에 걸었다.
“별일 없었네. 그리 걱정할 필요 없어.”
한편, 알테르 프리드웬은 벌떼처럼 몰려온 신하들을 진정시켰다. 그가 여유를 보이자 귀족들은 안도했고, 대기 중이던 병사들은 나팔을 불었다. 관객들은 분위기에 맞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리번과 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채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저 엄청난 악력은 황금 피이기 때문에 보이는 ‘기적’일까?
그때, 여섯째 왕자가 뒤늦게 시종들을 이끌고 시합장으로 내려왔다. 그는 알테르 프리드웬을 무시하고는 곧장 칼리번과 젠에게 다가갔다. 첫째 왕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커졌고 젠과 칼리번은 급히 무릎을 꿇었다.
약간의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이번 무투회의 승자는 칼리번이었던 것이다.
“와… 왕자님께서는, 승자의 이름을 묻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이름을 밝혀라. 왕자님께 영원히 기억될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에레즈가 입을 열기 전, 시종이 대신 말했다.
“…….”
칼리번은 고민했다. 무투회에 참가할 때는 ‘칼’이라고만 적어 뒀었다.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칼리번’이라고 밝힌다면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질 수도 있었다.
“칼…입니다.”
한참 후에 그가 대답했다. 평소와 똑같이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속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왕자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니, 배 속에 성난 황소가 들었는지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귀족이 아닌 이상 일개 용병이 왕족을 마주할 일은 평생 없다. 그런 왕자를 두 번이나 마주하다니, 칼리번이 누리기에는 과할 정도의 영광이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에게서는 청량하고 다정한 향기가 났다. 불쾌하고 공격적으로 느껴지던 첫째 왕자와는 확연히 달랐다…. 칼리번이 에레즈의 향기에 취한 사이,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대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여섯째 왕자가 갑자기 주저앉더니, 칼리번의 무릎을 손으로 감싼 것이다!
“와, 왕자님…?! 어서 물러나십시오. 고… 고오, 고, 고귀한 손이 더러워집니다!”
당황한 시종이 외쳤으나 돌발적인 행동을 막기에는 한발 늦었다. 상처는 빠르게 아무는 중이었지만, 아직 피가 남아 있었다. 에레즈의 하얀 손에 붉은 피가 묻었다.
칼리번의 온몸에 짜릿한 전기가 돌았다. 여섯째 왕자가 손댄 부위가 불길에 지져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읏.”
칼리번이 낮게 신음하자, 놀란 에레즈의 손이 떨어졌다. 그의 손길이 멀어지자 칼리번은 살점이 뜯겨 나간 것만 같은 상실감이 들었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
눈앞에 에레즈 프리드웬이 있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년이. 예상했지만 그래도 당혹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 태양에도 뒤지지 않는 보석안에 칼리번은 홀린 듯 바라보기만 했다. 눈의 착각일까? 어린 왕자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도 같았다. 칼리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죽을죄를 진 것만 같았다.
“…….”
왕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무언가를 칼리번에게 말하려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그것이…. 그것이! 왕자님께서는! 그러니까, 왕자님께서는!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왕자님의 명예를 위해 열렬히 시합에 임해준, 그러니까, 괴물… 아니, 용병을 치하하려는 의미십니다! 그렇고 말지요!”
시종이 끼어들어 에레즈의 행동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했다. 왕자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의 하얀 손바닥에는 칼리번의 피가 묻어 있었다. 칼리번은 그것을 얼른 닦아 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못했다.
“무투회의 우승자에게는 차후 금화와 말을 지급하도록 하겠다.”
알테르 프리드웬에게 명을 들었는지 기사단장이 그들에게 다가와 선언했다. 이어서 기사단장은 에레즈 프리드웬의 귓가에 속삭였다.
“…첫째 왕자님께서 찾으십니다.”
칼리번은 그들 가까이에 있었을뿐더러, 마물 혼혈이라 감각이 예민했다. 본의 아니게 그 속삭임을 훔쳐 듣고 말았다.
그렇게 기사단장은 칼리번에게서 여섯째 왕자를 빼앗아 갔다. 두 왕자가 떠나자, 관람객들도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천한 용병에게 관심을 줄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대장, 우리도 슬슬 돌아가자. 지금은 걸을 수 없지? 어깨 빌려줄게.”
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쳤어? 고집부리기는…!”
젠이 혀를 찼다. 그러나 칼리번은 괜한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무릎을 연결하는 부위를 정확히 찢겼으니 한동안은 절뚝거려야 함이 마땅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걸을 수 있었다.
* * *
칼리번은 기껏 무투회에 참여했건만,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직접 꽃을 받지는 못했다. 대신 기사단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 용병대로 돌아오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제1 왕자님께서 용병의 부상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특별히 금화와 말을 하사하는 것이니, 영광으로 여기도록.”
기사단은 일장 연설을 하며 금화 주머니와 함께 여섯째 왕자의 축복을 담은 꽃을 건넸다. 칼리번은 꽃 한 송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젠에게 처분을 맡겼다.
“첫째 왕자님 만세! 우리들의 위대한 왕이시여! 알테르 프리드웬 님 만세!”
검은 어금니는 일주일 동안 내리 술판을 벌였다. 그러나 칼리번은 놀라울 정도로 첫째 왕자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무려 무릎을 찢어 놓았을 때도 말이다. 반면, 무릎을 살짝 어루만져 준 막내 왕자에 대한 생각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칼리번이 무투회에 참여한 까닭은, 자신의 내부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이상한 감정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젠이 꽃을 못 쓰게 만든 데 일조한 탓도 있었지만.
한 번 더 보면 해갈될 줄 알았건만, 칼리번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더욱 애가 탔다. 난생처음 느끼는 쓰라림에 칼리번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은 개운해졌으나 목 안쪽의 불꽃은 조금도 가라앉히지 못했다.
<왕자님께서는 이번 무투회의 승자의 이름을 묻기 위해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 이름을 밝혀라. 왕자님께 영원히 기억될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여섯째 왕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만일 왕실에서 우연히 마주한다면, 한 번쯤은 눈을 마주쳐 줄 것이다. …어쩌면 이름을 불러줄지도 모른다.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다시 그분을 만나고 싶어졌다.
…한 번 그런 생각이 피어오르자 그 뒤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칼리번은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흑용병이여, 이곳에 있는가? 무투회에서의 보여 준 놀라운 실력, 감격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대를 치하하기 위해 이 몸이 누추한 곳에 직접 행차하였도다.
낮은 작위의 귀족도 찾지 않았던 용병대의 거친 숙소에 막내 왕자가 직접 행차한다거나….
그대에게, 제6 왕자인 이 몸에게 검술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특별히 주겠노라.
개인 교습을 제안한다든가….
그대를 오늘부터 이 몸의 기사로 임명하겠다! 감동적인가? 당연히 그렇겠지. 울어도 좋다! 오늘에 한하여 세 방울까지만 허락하겠노라.
뜬금없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떨어진다든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환각을…!”
칼리번은 평생 눈앞의 현실 외에 망상이나 상상에 사로잡혀 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 몸을 지배할 때마다 칼리번은 결연히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눈에 보이는 굵은 나무로 무작정 다가가 머리를 세게 박았다. 칼리번의 머리는 무쇠처럼 단단했다. 쿵, 쿵! 큰 소리가 나며 나무가 흔들렸다.
그 짓을 사흘 정도 반복하니 마침내 백년 묵은 나무가 부러지고 말았다.
“마침내 우리 대장께서 돌아 버렸다….”
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젠은 신입을 모집하기 위해 남부 연합에 들렀을 정도다.
여섯째 왕자가 준 꽃에는 저주라도 걸려 있단 말인가?
그렇게 밤은 깊어 가고, 하루는 흘러가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어 가고 있었다.
* * *
그 뒤로 칼리번은 종종 에레즈 프리드웬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기에, 꿈에서조차 말 한 번 섞지 못했다. 대신 왕자의 하얀 손에 자신의 피가 묻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았다. 하얀색과 붉은색의 대비는 두 눈이 시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토록 하얀 손이 칼리번의 손목을 쥐었다. 짙은 색의 피부는 그의 곁에서 더욱더 어둡게 느껴졌다. 칼리번의 손에도 함께 피가 묻었다.
피라고 생각했으나… 달랐다. 여섯째 왕자의 손에서는 붉은색이었지만. 칼리번의 피부로 옮겨 가니 그것은 금색으로 변해 버렸다. 검은 피부 위로 흐르는 금빛 액체는 흰 피부 위의 붉은 피만큼이나 도드라져 보였다. 금빛 물줄기는 희고 가는 뱀이 되어 칼리번의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굵게 솟아오른 핏줄을 파고들더니, 몸의 안쪽 흘러 들어갔다.
이 손을 놓으면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번은 그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금빛 뱀은 점점 늘어나, 칼리번의 옷 안으로 밀고 들어 오더니….
“……헉!”
칼리번은 새벽 중에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금빛 뱀은 선연했다. 그 감각에 몸서리치며 칼리번은 몸 이곳저곳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평소와 같이 짙고, 단단하며 커다랄 뿐.
“내가 본 건… 도대체 뭐지?”
과거에 겪은 기억을 반복하는 것 외에는 늘 죽은 듯이 잠들었던 칼리번이었다. 그런 처음으로 겪은 괴상한 꿈이었다. 둔탁한 머리로는 이 현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
칼리번은 이마를 짚었다. 이마를 살짝 덮은 짧은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쓸렸다. 확실히, 겉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열병에 시달린 사람처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 * *
검은 어금니의 용병들은 모두 한곳을 보며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몇은 대놓고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그들은 식사 중이었다. 다들 쩝쩝거리며 먹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딱, 딱, 딱, 딱, 딱….
용병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칼리번이었다. 그는 오만 잡것이 담긴 수프 그릇을 노려보면서 나무 숟가락을 딱, 딱, 내리치고 있었다. 정작 그 자신은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는지, 그 짓을 종일이라도 할 것 같았다.
딱, 딱, 딱, 딱, 딱…….
다른 사람도 아닌 칼리번이 노골적인 음식 투정을 하다니, 식사 당번이 몹시도 초조해졌다. 당번은 불안한 시선으로 모두의 지지를 구했다. 그러나 다들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죽지 못해서 먹는, 전형적인 용병 요리였다.
더구나 칼리번은 미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맛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내였다. 자금 운용에 실패해 용병대의 식량 조달이 끊겼을 때, 그는 썩은 음식을 씹어 삼키고 흙탕물을 마시고도 배탈이 나기는커녕 쿨쿨 잘만 처잤던 이력이 있었다. 독초와 독버섯을 먹어도 그 자리에서 쿵, 쓰러지고는 하루 자면 다시 일어나는 것이 그였다.
…마물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강한 생명력과 끔찍하게 둔감한 미각의 소유자가, 어째서?
“…….”
곁에 있던 젠이 칼리번의 수프 그릇을 슬쩍 빼앗아 보았다.
딱, 딱, 딱, 딱….
칼리번은 제 그릇을 뺏긴 것도 모르는지 여전히 식탁을 향해 인상만 썼다. 젠은 칼리번의 눈치를 보며 칼리번의 수프를 한입에 들이켰다. 그래도 칼리번은 여전했다.
“…….”
이번에는 빈 그릇을 다시 칼리번의 앞에 두었다. 칼리번은 여전히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봐, 대장! 다 먹었으면서 뭐 하러 가만히 앉아만 있어?”
도둑질을 끝낸 젠이 칼리번을 퍽 치며 말했다.
“……!”
칼리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그렇군. 그럼 먼저 일어나겠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식사를 다 마쳤다고 여겼다.
“자, 잠깐, 대장!”
젠이 놀라 뒤따라갔다. 남은 대원들은 칼리번의 빈자리를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대장, 요즘에 무슨 일 있어? 하는 짓이 영 이상하단 말이야.”
젠이 칼리번을 쫓아가 잔소리를 해 댔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안 자는 것 같고, 불러도 무시하고…. 아, 이건 원래도 그렇긴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이 이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칼리번은 밤마다 숲에 들어가서 새벽이 될 때까지 나무에 머리를 들이박고, 주먹질을 해 댄다. 덕분에 숲속 빈터는 용병대 전원이 모여 회의를 해도 될 정도로 넓어져 가고 있었다.
“열 오른 사람처럼 들뜬 게 꼭…. 설마!”
주절거리던 젠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자리에 멈춰 섰다.
“대장, 이쪽으로 고개 좀 숙여 봐.”
젠이 손짓을 했다. 칼리번은 살짝 몸을 낮췄다.
“…역시! 이 망할 돌머리야! 완전 불덩어리잖아!”
칼리번의 이마를 짚어 보던 젠이 깜짝 놀라 외쳤다. 마물 혼혈이 칼에 찔려 죽는 일은 있어도 병에 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보통 일이 아니란 증거였다.
“병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
몸이 덜 자란 때라면 몰라도, 지금에 와서 병에 걸리다니…. 그런데도 칼리번은 순순히 인정했다. 최근 들어 이상해졌다는 건, 칼리번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
“병에 걸렸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칼리번은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그, 그건 그렇지….”
젠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다. 완치될 때까지 내 업무를 대신 부탁한다, 젠.”
“알겠어, 대장. 몸조심해야지……. 뭐, 뭐? 안 돼!”
갑작스레 일이 늘어난 젠이 소리쳤지만, 칼리번은 뚜벅뚜벅 숙소로 걸어갈 뿐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대장이 아프단다.”
“오, 대장이 웬일이래?”
“그 흔한 감기 한 번 안 걸리던 대장이…?”
젠의 뒤를 따라온 대원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
당황하는 것도 잠시, 젠은 심각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칼리번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 * *
무투회에 참가한 후로—아니,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여섯째 왕자와 두 번째로 마주한 후로, 칼리번은 원인 모를 열병에 시달렸다. 원인을 모르니 약도 없었다. 차가운 밤에도 홀로 열이 올라 몸이 뜨끈했고 자꾸만 머릿속이 멍해졌다.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상황을 머릿속에서 꾸며내거나 그와 비슷한 꿈을 꾸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언젠가 젠이 한 농담처럼 꽃에 독이라도 발린 것일까? 아니, 그건 그저 평범한 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열기는 도대체 무엇이지?’
둔감한 칼리번은 이런 울렁거림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마물 혼혈이 감각에 예민하다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여태껏 칼리번은 다른 알파들과 달리 ‘욕망’이란 것이 부족하다 못해 말라붙어 있었다. 인간과 공생하는 마물 혼혈들은 누구나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물만큼이나 강력한 번식 욕구를 느끼고, 마물과 같은 발정기를 겪는다. 결국 알파이기 때문이다.
마물 혼혈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용병이 되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들에게 인간 사내란 명백하고도 먹음직스러운 번식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을을 습격해 강간하는 알파 무리도 적잖이 있었다. 이런 마물 혼혈을 주기적으로 잡아다 불태우는 것이 기사단의 주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칼리번은 달랐다. 그 누구에게도 성욕을 느끼지 못했다. 칼리번은 자신이 기형 마물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예전에 양부모가 해 준 말처럼 인간의 피가 너무 많이 섞인 탓이라 여겼다.
‘설마 이것이… 알파의 번식 욕구인가?’
그동안의 소문과 달리 에레즈 프리드웬은 알파가 아닌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인간 남자를 본다면 없던 발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다르다…. 달라.’
칼리번은 부정했다. 마물들이 인간 사내를 어떻게 탐하고 범하는지를 안다. 동료들이 어떤 눈으로 사내들을 보는지도…. 그런 욕망과 에레즈 프리드웬을 향한 열기를 동급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그 둘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칼리번은 오른쪽 무릎을 손으로 짚었다. 무투회 때를 떠올리면, 아무런 일이 없는데도 절로 몸이 떨렸다. 그리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이런 것이 정말로 알파의 본능이라면…. 그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를 이 욕망으로 찢어 죽이고 싶다는 말인가?
“…….”
칼리번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마물 혼혈이 결국에는 품을 수밖에 없는 본능에, 생전 처음으로 불쾌해졌다.
결국, 그는 숨이 막혀 오는 답답함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내 숙소 앞에서 뭘 하는 거지?”
밖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들켜 버렸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젠이 칼리번에게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업무가 늘어나서 불만이 생긴 건가?”
“아니, 대장 업무는 하나도 안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예상대로군.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젠?”
칼리번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물었다.
“지키고 있었어.”
젠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지키다니….”
“대장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혹시나 정신 못 차리는 놈이 달려들까 봐서. 그놈이 대장한테 두 동강 나기 전에 지켜 주려고.”
칼리번은 이마를 짚었다. 열기로 머리가 무거웠다. 그러나 맨정신이었다고 해도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 대장한테 냄새가 나고 있어. 알아?”
그 말에 칼리번은 숨을 멈췄다. 역시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젠에게도 들킨 것이다.
“…드디어 젠도 알게 되었군.”
“응.”
젠은 쓸쓸하게 대답했다.
“그동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러트가 온 것 같다.”
“맞아, 대장도 발정기에…. 잠깐, 뭐?”
고개를 끄덕이던 젠이 경악한 표정으로 칼리번을 보았다.
“아니, 대장!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냐.”
“…….”
“일단은 내 체취로 가려 주고 있긴 한데 말이야, 슬슬 깨닫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알파는 후각이 민감하니까, 다들 눈치채기 전에….”
“…….”
“대장을 상대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하지만, 나도 알파다 보니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고… 언제까지 내가 개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녀야 해?”
젠의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젠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러트에 들어선 알파는 눈먼 개라고. 대장에게 썰리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들걸?”
수컷 사마귀나 거미가 잡아먹힐 걸 알면서도 교미를 하는 것처럼. 발정 난 알파는 그야말로 눈앞에 뵈는 것이 없게 되어 버린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젠.”
칼리번은 솔직하게 말했다.
“하하, 역시 돌머리라 말로는 통하질 않는군! …그렇다면 역시 이 방법밖에 없나?”
그러자 젠이 웃으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젠?”
칼리번이 물었다. 마물을 향했던 동료의 칼날이 처음으로 칼리번이 겨누고 있었다.
“칼…. 아니, 칼리번.”
젠이 칼리번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칼리번이 대장이 된 후로, 젠은 한참 연상임에도 그를 대우해 주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말투는 칼리번이 처음 용병대에 들어왔을 때보다도 위압적이었다.
“네가 ‘검은 어금니’에 입단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게 뭐였는지 기억나?”
젠이 물었다. 그녀는 칼리번과 달리 기억력이 좋았다. 칼리번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머릿속에서 뽑아내듯 쏙쏙 꺼내 보이곤 했었다.
“…오메가는 발견 즉시 살해 후 불태운다.”
그러나 이번 질문에 한해서는, 칼리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오메가는 알파를 조종하고 마물을 낳으니까.”
젠이 할 말을 칼리번이 대신 끝마쳐 주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
오메가.
이 희귀한 마물은 한 세대—대략 30년에서 50년 사이—에 단 한 마리밖에 태어나지 않는다. 마물 대부분을 차지하는 알파와 비교해 오메가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것이 마물이 인간계로 내려와 인간 사내를 범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인간이 보기에 오메가란 여왕벌이나 여왕개미 같은 존재로, 마물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발견 즉시 없애야만 했다.
“만약 네가… 여태껏 발현하지 않았을 뿐이고 뒤늦게 오메가가 된 것이라면?”
……처리하는 수밖에.
젠의 칼끝은 칼리번의 심장을 겨눈 채로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동료에게 살해 위협을 받는데도 칼리번은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메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발견된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래.”
“그런데 젠, 네가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젠이라면 단번에 자신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칼리번은 담담하게 물었다.
“이 멍청아. 내 나이가 얼마라고 생각해?”
어처구니가 없는지, 젠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오메가를 구별할 수 있냐고? 30년…. 아니, 40년? 언제였더라, 하하, 너무 옛날 일이라 이제는 기억도 거의 나질 않네. 내가 너만큼 애송이였을 때, 두 눈으로 직접 오메가를 봤거든.”
칼리번은 그녀의 두 눈을 보았다. 밤색 눈동자는 차갑게 말라붙은 피처럼 보였다.
“그 오메가는 말이야, 어린애 딱지를 뗐지만, 겉모습은 영락없는 꼬마애였지. 너와 달리 너무 일찍 발현해 버린 거야…….”
“…….”
“당시의 나는 그 꼬맹이를 살려서 보호할 수 없었어. 그 녀석은 오메가의 향기를 조절하지 못했고,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마물의 본성에 눈 뜰 뻔했으니까.”
밝은 목소리와 달리, 젠의 얼굴은 죽은 자의 얼굴에 띄우는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때는 나도 너만큼 어렸으니까…. 뭐, 나름 노력은 해 봤지. 하지만, 그 녀석을 뺏어 가려고 매일 엄청난 수의 마물이 우리를 덮쳤어.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어. 지금이라면 이겨 낼 수 있었을까? 아니…. 마찬가지야. 결과는 똑같았겠지.”
“…….”
“만약 마물에게 빼앗긴다면 그 녀석은 마계로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새끼를 치겠지. 그래서….”
내 손으로 죽였다— 그 뒷말을 굳이 그녀의 입으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난 아무것도 동정하지 않아. 여자를 죽이든, 남자를 죽이든, 마물을 죽이든, 내게는 다 똑같다고! …뭐, 내가 죽는다고 그놈들이 슬퍼해 줄 것도 아니잖아? 되는대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한 짓에 합당한 대가를 받겠지, 뭐. 그게 상이든 벌이든, 죽고 난 다음에 내 시체로 그 무게를 재지 않겠어? …그러니까 대장도 괜히 기사 놀이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다 부질없으니까.>
언젠가 젠이 칼리번의 무모한 행동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지금은 그 녀석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내 감각이 그때처럼 요동을 치고 있거든? 네 체취가, 그때의 구역질 나게 짜증 나던 기억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자꾸 자극해 대서 말이야.”
항상 말로는 현실적으로 살아야 한다 주장했던 젠이었지만, 칼리번이 미숙할 적에는 매번 목숨을 구해 주곤 했다. 대장이 된 칼리번이 융통성 없는 명령을 내려도, 길길이 날뛰다 결국에는 따라 주었던 그녀였다.
“…어때. 이 정도 경험이 있으면 오메가 감별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겠지?”
젠이 물었다.
“그렇군.”
칼리번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은 어금니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용병이다. 아마도 남부 연합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오메가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까지 했다. 거기다 최근 들어 칼리번 자신도 내부의 변화를 느끼고도 있었으니… 그녀의 말대로일 것이다.
알파들 사이에서 지내면서, 칼리번은 종종 자신에 대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변하지 않고, 인간 사내에게 흥분하지도 않는 몸. 그것이 만약 기형 알파가 아니라 발현하지 않은 오메가서라면….
오메가는 마물의 왕. 인간 사내와 달리 오메가는 아무리 마물의 새끼를 낳아도 죽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알파를 유혹하는 향기를 지니고 있어, 알파들은 성숙한 오메가에게 씨를 뿌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명령이든 충성하며, 목숨이라도 바친다.
<마왕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네.>
언젠가 용병들 사이에서 오메가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젠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오메가 한 마리가 수백, 수천 마리의 마물을 낳지. 그건 영원한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벌레에 지나지 않아. 그 결과로 우리 같은 망할 마물 혼혈들이 태어나잖아?>
그때, 젠은 쾌활한 성격과는 달리 드물게도 경멸하는 어투였다. 알파가 오메가를 싫어할 리가 없는데도….
“…….”
젠의 말대로라면, 칼리번은 이 자리에서 죽어야만 한다. 동료의 칼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그의 숙소에는 오랜 시간 함께한 대검이 있었고, 마지막 또한 확실하게 마무리해 줄 것이다. 피와 살육에 무던해진 칼리번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주겠어.>
…어째서 이 와중에 그 한마디가 떠오르는 걸까? 붓으로 그려 낸 듯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일까?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눠 본 적 없는 그 고귀한 존재가, 왜 자꾸….
정작 왕자님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뭐야, 대장. 진짜 돌머리였던 거야?”
칼리번이 침묵을 지키자, 젠의 목소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반박이라도 좀 해 봐. 순전히 내 오해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대장이 오메가가 아닐지도 모르잖아.”
“…….”
“아, 그래, 정말 그럴지도? 머리가 장식이 아니면 생각 좀 해 봐. 대장같이 우락부락한 알파가 오메가일 리가 없잖아?”
“…….”
“뭘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해? …뭐라고 말 좀 해 보라고!”
젠은 어째서인지 화가 나 있었다.
“오메가일 리가 없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한번 빌어 보라고! 동료에게 좀 숨겨 달라고 부탁할 줄도 몰라?”
“…….”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나이를 허투루 먹었냐고! 도와 달라고 해 봐, 이 돌대가리야!”
젠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칼리번의 향한 서운함과 분노, 억울함과 짜증…. 온갖 감정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
“미안하게 됐다, 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칼리번은, 결국 그녀에게 사과했다.
“뭐…? 뭐가 미안한데?”
젠이 되물었다.
“두 번이나 네 손을 더럽히게 해서.”
칼리번의 대답에 젠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젠은 칼을 내리고는 상체를 푹 숙였다. …설마 우는 것일까? 칼리번이 한 걸음 다가간 순간이었다.
“미련한 새끼…. 뭐야, 그런 심각한 표정은!”
예상과 달리, 젠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젠?”
칼리번은 그녀의 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래…. 그렇다고! 대장이 오메가일 리가 없지! 맞아! 대장 같은 놈이 오메가면 알파한테는 오히려 굴욕이거든? 이왕에 유혹당할 거면 미인이 좋으니까!”
“젠….”
“그리고 대장이 진짜 오메가라면, 진작에 나부터가 발을 핥고 싶어서 노예처럼 기어 다녔겠지.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
“지금도 난 대장에게 딱히 성욕이라기보다는…. 바윗덩어리를 보는 것 같거든,”
하하하, 젠은 어둠 속에서 웃음을 토해 냈다. 그녀는 속에서 무언가를 털어 낸 모양이었다.
“대장, 당분간은 이거 들고 다녀.”
휙, 젠이 칼리번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칼리번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받았다. 자그마한 주머니였다.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체취를 숨기는 법을 전수해 줄게. …대장은 처음부터 알파라기엔 좀 이상했으니까, 어쩌면 오메가더라도 좀 이상한, 어정쩡한 상태일지도 몰라. 시간이 지나면 냄새가 가라앉을지도 모르지.”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젠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준 주머니 때문이었다. 그저 들고만 있었을 뿐인데도,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이 안에 든 게 뭐지?”
칼리번이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딱히 대단한 물건이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 굳이 알고 싶어?”
젠이 망설였다.
“앞으로 계속 가지고 다녀야 한다면, 당연히 알아야 하지 않나. 스스로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을 테니.”
칼리번이 더없이 타당한 말을 했기에, 하는 수 없이 젠이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마물 똥을 모아다가 말렸어.”
“…….”
“어, 어어?! 그거 귀한 거야, 버리지 말라고?!”
칼리번이 수풀에 던지려고 하자, 젠이 한사코 말렸다.
“알파는 체취로 오메가의 냄새를 가릴 수 있어. 물론 오래 가는 건 아니지만…. 만약 이게 없으면, 급한 대로 마물을 죽여서 피를 발라. 하지만 절대로 대장의 피를 써서는 안 돼. 오메가의 피는 오히려 알파를 흥분시키거든.”
젠이 다가와 칼리번의 등을 툭 쳤다.
“전에 알았던 오메가는… 내 피로 냄새를 숨겼었거든.”
밤의 어둠이 그녀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알겠다. 참고하지.”
칼리번은 주머니를 혁대에 단단히 동여맸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그때도 지금도 왜 갑자기 오메가가 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걸 알면 발현하지 않게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대장은 혹시 마음에 짚이는 거라도 있어?”
오메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잖아. 젠이 슬쩍 물어보았다.
“…….”
칼리번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감겨 있던 초승달은 어느새 크게 눈을 뜨고 있었다.
* * *
둔감한 칼리번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마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몸은 나날이 깨어나고 있었다. 수백 년을 잠들었던 씨앗이 비 한 방울에 싹을 틔우는 것처럼, 한 방울의 감정으로 인해 그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 변화는 고단했다. 검고 딱딱한 씨앗의 껍질을 뚫고 나온 결과가 푸른 잎사귀인 것처럼, 이대로는 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대장의 체취는 아직 옅어. 이대로 성숙하지 않는다면, 다시 가라앉을 수도 있을지도 몰라. 지금은 알파의 발정기니까, 알파 놈들 냄새에 잠깐 영향을 받은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젠은 최대한 낙관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런 와중에도 머릿속에서 그분의 모습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여섯째 왕자의 모습이….
‘…만날 수 없는 관계여서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군.’
이대로 조용히 지나간다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젠이 했던 말을 위안으로 삼는다.
칼리번은 용병이었고 에레즈 프리드웬은 왕자였다. 칼리번이 모래사장의 무수한 모래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면, 왕자는 세상에서 여섯 번째로 귀한 진주알이었다. 제아무리 칼리번이 그분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왕자가 부르지 않는다면 그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다.
이제 칼리번이 왕자를 평생 볼 일이 없을 테니 이 변화도 곧 식어버릴 것이다. 잠잠해지고 전과같이 고요해질 것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돌처럼.
그렇게 다짐하는 주제에, 칼리번의 검은 눈은 왕자에게 받은 하얀 꽃에 고정되어 있었다.
멀리하고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칼리번은 그 꽃을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 또한 언젠가 시들겠지.
그러니 그때까지만….
꽃이 시들고 난 후에는 이 열기도 함께 사그라들 테니.
* * *
<왕실에서 언젠가 예언의 소녀가 태어날 거래.>
<대장, 그럼 이건 어때? 옛날부터 유명한 예언이 하나 있잖아. 언젠가 왕실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성녀단을 이끌며 종결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황금 피를 물려받은 공주님만 태어난다면, 마물들은 영원히 마계로 쫓겨날 텐데!>
<전쟁에서 연전연승이라던데, 과연 알테르 프리드웬 님은 황금 피를 가진 분답군요.>
<역대 왕 중에는 혼자 몸으로 수천에 달하는 마물을 상대해 나라를 위험에서 구해 낸 왕도 있었고, 무너진 성을 가장 찬란했던 때처럼 다시 반듯이 세운 왕도 있다더라고.>
<왕자님이 저 정도인데, 만약 공주님이 태어난다면….>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다. 그 예언의 주인은 프리드웬 왕실의 후예들이었다. 황금을 녹인 금발과 보석안을 지닌 이 사내들은 그야말로 ‘기적’같은 무용담을 쌓아 왔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마물이라는 재해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다.
칼리번은 꿈을 꾸었다. 여섯째 왕자에게 꽃을 받은 후로 그는 종종 과거의 반복이 아닌 환상을 보곤 했다.
꿈속의 에레즈 프리드웬은 성년식 때보다도 하얗고 화려했으며 세상과 유리된 듯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칼리번의 두 다리는 시체로 된 땅에 파묻혀 있었다. 피와 내장으로 된 늪에 붙잡혀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에레즈는 그런 칼리번의 뺨을 쓰다듬으며 가엽게 여겼다. 고요히 내려다보며 푸른 보석안에 그를 기꺼이 담아 주었다.
결국…. 자신도 은연중에 황금 피를 바랐던 것일까? 자연의 이치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런 기적을 말이다.
칼리번은 자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세상 모든 욕망에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갈 뿐. 부나 권력, 번식을 위한 사내를 딱히 원치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황금 피를 숭배하고 싶은 것이라면 알테르 프리드웬이 훨씬 유명했다. 구원을 바란다면 성녀들이 훨씬 헌신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번은 이제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어린 왕자에게 이끌렸다.
<그때도 지금도 왜 갑자기 오메가가 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만일 그것이 몸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원치 않는, 그러나 맞닥뜨려야 하는 운명의 윤곽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래서 칼리번이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면, 어느새 다가온 에레즈는 그에게 꽃을 내밀고 있었다.
* * *
“대장한테 구린내가 난다.”
용병이란 평생 피 냄새만 맡고 사는 자들이다. 다들 후각이 둔하다 못해 마비된 상태지만, 젠이 준 향주머니는 그마저도 뚫어 버렸다.
“아…. 미안하다. 사실 내가 요즘 설사병에 걸려서 말이야, 바지에 좀 지렸어. 너희도 옮지 않게 조심해라.”
젠이 엄숙하게 말했다. 동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욕을 하면서 젠과 칼리번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면 될 일인데, 젠이 바지에 실수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었다.”
칼리번이 이의를 제기했다.
“똥에 미친놈이 아닌 이상 굳이 소중하게 품고 다니지는 않거든. 그보다는 설사를 쉬지 않고 싼다고 고백하는 편이 나아.”
“…그렇군.”
칼리번은 금방 납득했다.
“냄새라….”
알파들처럼 체취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면 편할 텐데. 칼리번은 그렇게 생각했다. 방어전에서 간혹 지독하게 강한 마물이 나타날 때면, 용병들이 압박에 짓눌려 일시적으로 굳어 버릴 때가 있었다. 알파의 체취가 위압감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한 번도 그런 공포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오메가에게도 특유의 냄새가 있다고 했다, 젠.”
“응.”
“그렇다면, 나에게서는 무슨 냄새가 나지?”
칼리번이 물었다. 다행히 용병들이 두 사람을 극도로 멀리했기에 이런 대화를 쉽게 나눌 수 있었다. 칼리번은 피 웅덩이 속에서 태어났다. 평생 쇠 냄새밖에 맡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에게서 난다는 오메가의 냄새조차도 그런 비릿한 냄새이지 않을까?
“음…. 어차피 묻어 버릴 건데 알아서 뭐 하게. 괜히 궁금해하지 마.”
젠은 알려 줄 듯 말 듯 하다가 끝내 알려 주지 않았다.
“그건 그렇군.”
그녀의 의견을 따라 칼리번은 괜히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냄새, 그보다는 향기. 칼리번은 자연히 여섯째 왕자를 떠올릴 때면 절로 느꼈던 청량한 향기를 떠올렸다.
“저기… 대장.”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젠은 굉장히 망설이며 어떤 말을 꺼냈다.
“이거, 음…. 오늘, 남부 연합의 쥐새끼처럼 생긴 서기한테 받은 편지인데….”
젠이 꾸물거리며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그녀답지 않게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칼리번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와 같은 편지는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 선명한 황금 인장이 박힌.
“무슨 편지지?”
칼리번이 급히 물었다.
“어…. 별 대단한 건 아니고, 별거 아니니까 진정하고 화내지만 마, 알겠지?”
“알겠다.”
“그러니까… 그게… 여섯째 왕자가 조만간 혼인한다더라고…!”
간략히 추리자면, 에레즈 프리드웬의 혼인날, 본성을 경호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아무리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해도 또 일을 시키다니 참 모진 것들이네…. 뭐, 우리는 참여하지 않을 거니까! 아, 하하…….”
젠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으나, 칼리번은 이미 엄청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제기랄! 안 그래도 여섯째 왕자를 증오하는 대장인데, 또 경호 업무를 맡기다니?’
칼리번이 오메가가 될 듯 말 듯 아리송한 상태인 것은 더 이상 젠에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대장…. 대장? 으, 으아악!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진정해!”
젠이 비명을 질렀다. 칼리번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근처에 놓인 식탁을 부숴 버리고야 만 것이다.
* * *
‘예언의 소녀’와 ‘황금 피’는 마물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도, 백성을 한데 모을 수 있었던 정신적 지주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녀도, 확실하지 않은 기적도, 결국 한 가지 바람으로 인해 탄생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감히 해낼 수 없는 일을 누군가 이루어 주기를. 매일 압도적인 절망을 마주하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구원이다.
그러나 근래 프리드웬 왕실은 이렇다 할 기적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여섯째 왕자로 인해 왕실에 대한 불신만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알테르 프리드웬은 여섯째 왕자의 결혼을 발표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예로부터 왕실의 결혼은 백성들의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한 용도로 쓰여 왔다. 아름다운 성녀들은 왕비, 혹은 왕자비가 되어 백성들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다른 형제가 혼인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막내 왕자의 혼인을 추진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람들 앞에 여섯째 왕자가 괴물이 아닌 인간임을 증명하고, 운이 좋다면 딸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황금 피를 지닌 예언의 소녀를.
* * *
“과연 어느 성녀님이 여섯째 왕자의 비가 되려나? 분명 엄청난 미인이겠지…. 부럽구만!”
젠은 슬쩍 그 화제를 입에 올린 순간— 퍽! 낡은 도끼가 두꺼운 나무의 몸통을 두 동강 내버렸다.
‘윽…. 역시 에레즈 프리드웬을 싫어하는 건가? 대장이 정말 화가 났군.’
젠은 제 목이 잘린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망할 여섯째 왕자는 끝까지 속을 썩이고 있었다. 칼리번은 한밤중에 이유 없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최근 용병대 숙소 주변에 장작이 필요 이상으로 넘쳐났다. 칼리번이 그 뒷정리를 자원한 것이다. 무언가를 잊는 데에는 육체노동이 제격이었으니까.
퍽!
프리드웬 왕실의 왕비와 왕자비는 늘 성녀 중에서 골랐다. 마물이 왕국을 침략한 후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원칙이었다.
퍽!
성녀와 알파는 왕국에 산재한 여러 종족 중에 가장 먼 존재다. 칼리번에게는 전혀 가망이 없었다.
“아, 아아…. 뭐, 괴물 소리를 들었던 왕자님인데, 엄청난 미인이라든가, 성력이 펑펑 쏟아져 나오는 성녀님들이 짝이 될 리가 없겠지. 그래에, 별거 아닌 결혼일 거야.”
퍽—
젠은 칼리번의 눈치를 살피며 애써 흉을 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빠각!
나무가 아니라, 칼리번이 쥐고 있던 도끼의 손잡이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칼리번이 손잡이를 악력으로 으깨 버렸다.
“……어, 어, 대장.”
도끼의 손잡이가 부서진 순간 칼리번이 휘두르자, 날카로운 도끼의 날이 젠의 발 바로 앞에 꽂혔다.
“듣고 있다.”
낮게 깔린 칼리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좋지 못했다.
“아, 아아…. 듣고 있었구나? 그렇구나아? 그럼 있지, 이번 명령은 잽싸게 거절해 버리자. 그냥 편지를 못 받았다고 거짓말하고 다른 영지로 줄행랑이나 치자고.”
목숨의 위협을 당한 젠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째서 그래야 하지?”
젠은 그 질문에 ‘대장이 여섯째 왕자를 죽일 것 같기 때문이지.’라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음…. 글쎄? 경비견 노릇도 지겹고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거기다 대장의 상태가 상태니만큼 위험한 일은 되도록 멀리하자고.”
젠은 필사적으로 칼리번을 설득했다.
“우린 용병이다. 위험하다고 피하지 않아. 참석한다.”
“하, 쓸데없이 고지식해서는…. 우리가 기사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구. 왕실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굳이 가려고 드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안 가면 다른 용병대에 연락이 갈 텐데.”
젠은 칼리번이 결혼식을 난장판으로 만들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검은 어금니는 제명당하고 말 테니까!
“…그렇다면 나 혼자 다녀오겠다.”
그러나 처절한 젠의 만류가 들리지 않는지 칼리번은 굳건했다. 그녀의 말대로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칼리번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여섯째 왕자를 본다면 이 열기도 마침내 가실 것 같았다.
“으아악, 기어이! 이 돌머리가!”
젠은 치를 떨었다. 칼리번이 여섯째 왕자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모른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바보다. 그런데도 제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겠다니— 지긋지긋할 정도로, 여태껏 겪어 왔던 칼리번의 모습이다.
“하아…. 하는 수 없지. 그럼 나도 간다.”
그리고 그 고집에 매번 지는 것이 젠의 역할이었다. 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까지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대장 혼자 둘 순 없잖아. 뭔 짓을 할 줄 알고.”
그 말을 내뱉은 젠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러니까…. 별다른 의미는 아니고! 잘난 척하는 귀족 놈들 사이에 대장 혼자 둘 수는 없다는 뜻이야.”
젠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덧붙였다.
“…….”
칼리번은 대장 자리에 오른 후 젠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았다. 젠도 딱히 칼리번을 패면 팼지, 챙기지는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과보호하는 이유는….
<더는 난 그때의 애송이가 아니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나이를 허투루 먹었냐고! 도와 달라고 해 봐, 이 돌대가리야!>
아마도 같은 결말을 반복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불침번은 대개 신입이 선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 밤은 내가 보초를 설 테니 돌아가 쉬어도 좋다.”
용병대장이 직접 신입의 일을 대신해 주겠다니, 신입은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가 눈만 굴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칼리번이 다시 한번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들어가라.”
그렇게 말한 후, 칼리번은 등을 돌렸다. 신입은 한참이나 망설였다 걸음을 뗐다.
“…….”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정을 해소한다. 젠과 같은 용병은 대개 술을 진탕 마시고 잠들거나, 괜히 시비를 걸어 싸움박질을 벌인다. 칼리번은 홀로 동굴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잠을 자곤 했다. 최근에는 그도 다른 용병들처럼 무언가를 자꾸 부수게 되었지만….
‘그사이 많이 자라셨을까?’
칼리번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여섯째 왕자의 안부를 물었다. 무투회가 끝난 후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물 혼혈은 남들보다 세 배는 빠르게 자랐기에 감각이 달랐다.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벌써 결혼이라니….’
칼리번은 기억 속 에레즈 프리드웬은 그저 어리기만 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딱딱해져 갔다. 그랬다. 성년이 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어린애였다. 우락부락한 용병대원들과 달랐다. 뼈대가 덜 자란 몸과 섬세하고 앳된 생김새는 아직 소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귀족들은 성년이 되기도 전에 혼인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변명거리가 못 되었다.
“…….”
흔한 일이다.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왕족에게는 당연한 일이라고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도 가슴 속은 이상스레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그분과 결혼하고 싶었던 건가?’
왕자님의 결혼 소식을 듣고 줄곧 얽매여 있었기에, 칼리번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결혼 같은 건… 인간이 아닌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알파에게 한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는 풍습이 있을 리가 없다. 칼리번은 알리샤의 결혼식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터다.
‘나는 그저 그분이 지녔을지도 모를 황금 피에 이끌렸던 것뿐이다.’
칼리번은 그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몇 마디 말로 이성은 잠재울 수 있을지언정 육체는 진정시킬 수 없었다.
우습다. 여섯째 왕자와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그저 두 번 꽃을 받았을 뿐이다. 심지어 그 꽃은 구애의 의미도, 호감이라든가 애정을 담은 것도 아니었다.
첫 번째 꽃은 왕자의 실수였으며, 두 번째 꽃은 칼리번이 강탈했을 뿐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그분을 볼 기회가 결혼식이라는 점에서, 칼리번이 왕자에게 아무것도 아님이 이미 드러나지 않았던가.
“…….”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피곤하지도 않은데 어두컴컴한 밤이 어느덧 흐릿한 새벽녘으로 바뀌고 있었다. 은빛 달이 산 너머로 가라앉고 옅은 해가 조금씩 떠올랐다. 그 빛이 검은 눈을 멀게 했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 *
“이야, 성년식 때와는 규모가 전혀 다른걸.”
젠이 휘파람을 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결혼식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왕국의 귀족이란 귀족은 깡그리 모인 것 같았다. 데뷔탕트 때를 떠올리면 감동적일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동생의 결혼식으로 자기가 생색을 내다니 알테르 프리드웬도 고단수네. 무투회 때 여섯째 왕자 옆에 딱 붙어 있던 이유가 이거였나?”
젠은 성안으로 밀려드는 마차를 따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도 끊임없이 입을 열었다. 결혼식은 ‘글로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한 홀에서 치러졌다. 그 이름 그대로, 왕족의 대소사를 지낸 영광스러운 장소였다.
글로리아 홀은 귀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평소에는 잘 개방되지 않는 3층까지 모두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칼리번과 젠은 마물 혼혈이라 시력이 좋은 것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왕국의 제6 계승자이자 로도크 공작이신 에레즈 이브린 아들라이 프리드웬 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의를 표하십시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여섯째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여섯째 왕자는 첫 번째, 두 번째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더 눈부셨다. 순결한 흰색은 그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줄 백합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백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의 미모에 순수하게 감탄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의 손에는 꽃이 있었다. 겹꽃잎이 프릴처럼 풍성하게 부푼 꽃 한 송이가….
‘저 꽃은 남의 것이 되겠지.’
에레즈 프리드웬이 공식적으로 든 꽃은 그동안 모두 칼리번의 차지였다. 그의 꽃이 다른 이에게 가는 모습을 두 눈을 뜬 채로 지켜만 봐야 한다니…. 누군가 심장을 세게 움켜쥐는 것만 같다.
“…….”
여섯째 왕자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칼리번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나타나자 눈동자를 굴려 바닥을 보게 되었다. 만약 저 아름다운 보석안과 마주친다면.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왕자가 굳이 자신을 볼 리가 없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도무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근육이 단단히 붙은 두 팔로 귀족들을 마구잡이로 헤집고는 여섯째를 어깨에 들쳐 메고 도망칠 것만 같았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계획이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충분히 실행에 옮길 힘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무력으로 칼리번을 이길 수 없었다. 첫째 왕자가 거슬리기는 했으나 도망이 목적이라면 충분히 따돌릴 수 있으리라.
여섯째 왕자가 울고불고 내려 달라고 반항해도 아무도 모르는 곳까지 데려갈 것이다. 평생 검밖에 쥐어 보지 못한 까무잡잡한 손으로, 하얗고 보드라운 뺨을 한 번만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왕국의 제1 계승자이신, 하셀 공작이자 루드벨크 영지의 영주이시며 로델스 백작, 하렌스 섭정이신, 왕실 수호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32대 아델라이 성기사이신, 알테르 콘래드 미카일라 닐 프리드웬 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의를 표하십시오.”
이어지는 첫째 왕자의 등장에 다들 몸을 사렸다. 귀족들의 태도는 여섯째 왕자가 등장할 때와 확연히 달랐다. 마침내 등장한 알테르 프리드웬의 곁에는 누군가가 함께 서 있었다.
“그리고… 왕자비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두 왕자를 소개할 때와는 달리, 더없이 짧은 안내였다. 이름조차 꺼낼 수 없었기에 시종은 힘겹게 소개를 마쳤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왕자비의 정체는 결혼 당일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대개 프리드웬 왕실의 안주인은 귀족 가문 출신의 성녀 중에서 고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슨 일에서인지 왕자비에 대한 정보가 전혀 돌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괴물이란 소문이 돌던 왕자다 보니, 이번에는 평민 중에서 골랐으려니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알테르 프리드웬이 직접 고른 인물이다. 누가 감히 ‘황금 피’의 뜻에 반박하겠는가?
그런데 결혼식에서조차 이름이 불리지 않다니…. 귀족들은 저마다 눈빛을 교환했다. 설마 이번 왕자비는 천민이라도 된단 말인가?
의문과 호기심 속에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쉽게도 왕자비는 불투명한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남자…?”
칼리번은 주변 귀족들의 탄식을 들었다. 베일 속에 숨겨진 외모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는 인간 사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얀 피부는 진주와도 같고 마르고 긴 팔다리는 소녀의 것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자라 속일 수는 없었다.
신부는 베일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는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틀댔다. 알테르가 그의 한 손을 잡고 직접 인도해 주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 귀족도 있었다.
신부는 천천히 걸어 여섯째 왕자의 곁에 섰다. 막내 왕자가 덜 자란 감이 있어서 그런지 왕자비의 키가 조금 더 컸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막내 왕자가 더 자랄 것이 분명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예법대로 손에 든 꽃을 그녀…. 아니,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바로 앞까지 내밀어도 신부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
여섯째 왕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신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벗겨 주었다. 알테르도 그 행위를 허락했다.
마침내 얼굴이 공개되자 주변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남자였다. 어쩌면 미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에레즈가 부드러운 햇살 같다면 출신도, 신분도 알 수 없는 왕자비는 서늘하고 차가워서 칼날에 서린 달빛 같았다.
햇볕을 오랫동안 받지 못한 창백한 피부는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이마와 뒷덜미를 덮은 붉은 머리는 피처럼 붉고 선명했다. 마물의 피가 섞인 혼혈에게 보이는 전형적인 특성이었으나 사람들은 루비를 보듯 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장미처럼 붉은 두 눈, 염세적인 인상을 풍기는 날 선 이목구비까지.
마물 혼혈이, 왕자비라고…?
주변의 웅성거림은 쉽사리 끊기지 않았다. 고귀한 성녀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에 마물 혼혈이라니! 마치 왕비 자리를 모욕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그렇게 화를 내다가도 막상 왕자비를 마주하면, 홀릴 것만 같은 아름다움에 적의마저 누그러들었다.
인간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숭배의 대상이다. 크고 훤칠한 육체와 흠 없는 미모는 권력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권력의 장신구 정도는 되었다.
“…….”
그러나 칼리번이 보기에 그 아름다움은 박제된 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신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눈빛도 또렷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시체를 다시 살려 놓은 것만 같은….
“…에…… 얼….”
그때, 곁에서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어리얼….”
바로 젠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두 눈을 홉뜬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턱이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젠?”
칼리번이 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왕자비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젠…. 정신 차려라, 젠!”
조금이라도 더 에레즈를 두 눈에 담고 싶었던 칼리번이었지만, 동료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모른 척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 대장….”
한참 후에야 젠은 칼리번을 인지했는지 간신히 그를 불렀다.
“나가야 해, 여길…. 당장.”
젠이 칼리번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떨림이 옷 아래의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쨍그랑!
파멸을 예고하듯, 그 순간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소 웅성거린다고는 하나 예식으로 조용한 와중이었기에 그 소리는 더욱 날카롭게 사람들의 귀를 자극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잔을 건네주었는데 왕자비가 받지 못하고 떨어뜨린 것이다. 여전히 우아한 알테르와 달리 왕자비의 손가락이 떨렸다. 몹시 당황해하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아, 아아….”
신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하인이나 할 일을 하려는 듯 깨진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
여섯째 왕자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마물 혼혈로 보이는 왕자비의 겸손함에 놀랐는지, 아니면 단순히 만류할 생각이었는지 몸을 숙였다. 신부는 파편조차 제대로 줍지 못했다. 하얀 손끝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에레즈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왕자비는 멍하니 여섯째 왕자를 올려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는 해사한 미소였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는 인형 같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왕자님의 다정함에 감명을 받은 왕자비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날….
그러나 그는 에레즈의 손을 잡지 않았다. 여섯째 왕자의 호의가 무시당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신부는 상대의 손을 잡기 전에, 날카로운 파편으로 자신의 배를 찔렀을 뿐이다.
에레즈의 하얀 얼굴 위로 왕자비의 배에서 터져 나온 시뻘건 피가 튀었다.
“……하하.”
왕자비의 얼굴에 서린 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폭소의 불씨에 불과했다.
“아… 하하, 하, 하하하핫!”
신부가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그의 배에서 피가 울컥 흘러내렸다. 하얀 대리석 위로 피가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의 배에서 흘러나온 것은 핏물만이 아니었다.
그가 흘린 피는 입구가 되었다. 핏물 위로…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 마물이다!”
째지는 비명이 홀을 채웠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칼리번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젠…!”
칼리번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크, 으, 으으윽…….”
젠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최대한 몸을 우그러뜨린 모습은 버틸 만큼 버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녀의 안에 남아 있는 인간의 이성은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그 의문의 답은, 젠의 몸에서 드러났다. 핏줄 선 손등 위로 뾰족한 털이 솟아오르고, 손톱은 짐승의 발톱처럼 딱딱하고 두툼하게 크기를 키웠다. 알파의 내부에 자리 잡은 흉포한 본성은 피부를 뚫고 솟아올랐다.
“으, 으으— 으아아아악!”
젠이라는 인간은 찢어지고 마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격통을 참지 못한 젠은 목을 뒤로 꺾었다. 입 안의 송곳니가 턱을 뚫을 기세로 비죽비죽 튀어나오고 있었다. 젠이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변이할 리가 없었다. 누군가 강제로 명령하지 않는 이상….
칼리번의 시선이 저 멀리, 피로 물든 신부에게 향했다.
“아아, 하, 하하하! 하아….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는 범해!”
붉게 물든 신부는 피로 흥건한 바닥을 네발로 기고 있었다. 제 몸을 스스로 찢었으니 당연했다. 엄청난 양의 피였다. 기절하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귀족 나리들에게도 마물을 품을 영광을 드려야지….”
붉은 신부는 기절은커녕, 숨을 헐떡이면서도 붉은 두 눈을 번뜩이며 즐거워했다. 눈 앞에 펼쳐진 지옥을 명화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하나 담는 모습은 아름다운 외모가 무색할 정도로 끔찍했다.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썼는데도… 인간이 아니었다.
“꺄아아악! 사, 살려 줘!”
“모, 모두 도망쳐! 입구로 가자!”
“흐, 흐으으…. 마물! 마물이다! 살려…. 으아악!”
부와 명예를 자랑하던 영광의 홀은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도축장으로 변모했다. 왕자비가 불러낸 알파들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하객들은 홀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선 칼리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딪쳤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오른손이 버릇처럼 등 뒤의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젠장….”
평소 사용하는 대검이라면 젠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에레즈 프리드웬의 결혼식이었다. 경비를 맡겼으면서도, 인간들은 마물 혼혈인 그에게 일체의 무기도 허락하지 않았다.
‘젠이 이성을 잃기 전에 팔다리를 베어야 한다.’
칼리번은 침착하게 가장 먼저 할 일을 되뇌었다. 다소 잔인한 해결책 같아 보이지만, 머리가 잘리지 않은 이상 마물 혼혈의 육체는 재생이 된다. 시간이 없었다. 젠과 같은 이들은 반은 괴물이면서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로 정한 자들이었다. 이성을 잃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다시는 인간 곁에서 살 수 없게 된다.
칼리번은 급한 대로 테이블에 놓인 나이프를 최대한 쓸어 담았다. 젠의 등에서는 벌써 꼬리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독 전갈과 다를 바 없는 생김새였으나, 그보다 거대하고 강력한 꼬리였다.
“젠!”
칼리번은 테이블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평소보다 세 배는 더 커진 젠의 등에 올라탔다.
“끄으, 아아악—!”
잘 익은 고기를 썰어 낼 예정이었던 나이프가 그녀의 어깨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젠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 아아아— 끄, 흐으, 우아아아악!”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소름 끼치고 징그러운 괴물의 포효였다.
“그래, 좀 아플 거다…. 젠!”
칼리번은 나이프를 젠의 어깨에 꽂은 상태로 그어 내었다. 작은 칼날은 몸의 뼈와 근육에 걸려 쉽사리 내려가지 못했다. 칼리번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우득, 우드득, 칼날 때문이 아닌 악력으로 나이프가 다시 움직인다. 2/3 가량 벌어진 그녀의 팔이 덜렁거렸다.
“아아악! 끄어, 우어어억!”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칼리번은 반대쪽의 어깨와 팔이 이어지는 연골도 그어 냈다. 알파는 칼리번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칼리번은 용병이기 전에 백정이었다. 마물은 살을 발라낼 가치가 없기에 대검으로 짓뭉개 버리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살과 뼈를 분리하는 법을 꿰고 있었다. 뼈와 근육의 연결 지점을 정확히 베어 내어 상대를 행동 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그가 ‘검은 어금니’의 대장으로 만들어 준 이유이기도 했다.
그 어떤 방어전에서도 절대로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 알파‘였던’ 칼리번—그가 등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젠을 포함한 동료들은 안심했다. 설령 폭주하게 되어도 그가 수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으, 크르르…. 으워어어어!”
하필이면 손에 잡힌 것이 내구도가 떨어지는 나이프다 보니 정확하게 연골을 잘라 내지는 못했다. 칼리번은 마지막으로 젠의 척추뼈에 세 개의 나이프를 연이어 꼽았다. 네발로 기던 젠의 하반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깔아뭉갠 긴 식탁은 그대로 아작이 났다. 칼리번은 그녀와 함께 쓰러지기 전에 뛰어내렸다.
“하, 하아…!”
칼리번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젠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한동안은 회복에만 집중할 것이다. 잠깐 사이에 그의 얼굴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누가, 누가, 제발! 도와줘!”
“부탁이야! 여기를…! 살려 줘!”
“으으, 아아악!”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여기저기도 터져 나오는 비명으로 귀가 먹먹했다. 숨을 곳 하나 없었다. 영광의 홀은 그 명성만큼이나 높고, 좁고,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과밀할 정도로 많은 사람과 마물이 섞여 있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혹시 위로 대피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날개 달린 마물들이 샹들리에에 매달려 있었다. 몇몇은 홰를 치며 천장을 날아다녔다. 글로리아 홀은 천장의 반을 스테인드글라스를 덮어 상시 빛을 내리쬘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왕실을 상징하는 금빛 태양을 언제나 느낄 수 있도록…. 그러나 그 빛은 저주로 탈바꿈했다.
사람들은 울부짖고, 서로를 밀치고, 그러다 바닥에 쓰러지며 입구를 향해 도망쳤다. 왕족의 결혼식을 맞아 화려하게 꾸민 것이 오히려 독이었다. 그러나 가장 경사스러운 결혼식이 피로 물든 장례식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테니, 시종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히, 히이익! 제발! 제발…. 아아, 아! 끄으, 내보내 줘! 아악! 어서 꺼내 줘!”
“아악!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문이 열리질 않잖아!”
“어째서?!”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사람들이 거대한 입구에 몰려 마구 문을 두드리고 비명을 질렀다.
“밖이야, 바, 밖에서 누군가 문을 잠근 거다!”
“열어 줘, 열어 줘!”
누군가 밖에서 빗장을 걸어 두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의 얼굴 위로 절망이 내려앉았다. 이성을 잃은 귀족들은 문에 새겨진 왕실의 문양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섬세한 조각의 요철에 손이 찢어지고, 그 피가 문에 새겨진 조각을 붉게 물들였다. 수많은 사람의 피가 새하얀 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물의 위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이었다. 문에 가까운 귀족들은 서로에게 밝히고 짓눌려 죽고, 문에서 먼 귀족들은 마물에게 붙잡혀 죽어 갔다. 마치 홀로 안락을 누린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입구에서 흩어지십시오, 흩어져서…. 으아악!”
방어전을 경험한 기사와 시종들이 귀족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지옥 속에서 누가 누구를 지키겠는가? 기사조차 마물에게는 맛 좋은 번식 상대에 불과했다. 사내들의 용기 넘치는 외침이 마물들에게는 자신부터 강간해 달라는, 너무나 달콤한 애원처럼 들렸으리라.
마물들에게 이곳은 연회장이었다. 오메가가 차린 만찬에 그들은 기꺼이 응했다.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기사들이 가장 먼저 쓰러뜨리고, 교미를 위해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남편과 아버지, 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귀부인과 영애들이 매달렸다. 그들은 금세 시체가 되고 말았다. 겁을 먹은 귀족들은 싸우려 들지도 않고 한 곳에 몰려 큰 소리로 꽥꽥거린다. 하늘을 나는 마물들은 천장에서 맴을 돌다 앞발로 한 명씩 낚아챘다.
“으, 으?! 흐아아아!”
비행형 마물에게 잡혀 허공에 붕 뜬 사내가 발버둥을 쳤다. 차라리 이대로 추락해 죽는 편이 낫다는 듯, 사내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하, 흐아, 하지 마, 하지 마! 싫……. 으, 으아아악!”
샹들리에 위로 던져진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그의 몸은 마물의 거대한 날개에 가려졌다. 샹들리에가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휘청거린다. 사내가 마물의 거대한 성기에 꿰뚫릴 때마다 피로 물든 보석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살려, 살려 줘! 싫어! 아, 크아악…. 아, 아아…. 아파, 아파! 아, 윽, 아파! 흐읍…. 흐으윽!”
한편 지상에서는, 젊은 사내가 거대한 마물 아래에 깔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3m는 가뿐히 넘는 마물에게 짓눌려 갈비뼈가 부서졌는지 울음마저 쉬어 있었다.
“아… 아아! 안 돼, 내 아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도한 귀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어깨까지 내려오고, 드레스는 찢어지고 피로 물들었다.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그녀였으나, 추레한 자신의 모습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오직 사랑스러운 아들이 괴물에게 강제로 범해지고 있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아아악! 안 돼! 내 아들은 안 된다, 이 악마! 악마 자식아…!”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기사의 검을 주워 달려갔다. 그러고는 마구 내리쳤다. 그러나 칼은 물고기처럼 딱딱한 비늘로 감싸인 마물의 등에 꽂히기는커녕,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당장 멈추지 못해?! 그만둬! 이 끔찍한 악마야! 아…. 안돼! 안 돼에! 이 악마! 돌려줘! 그만, 그만해! 내 아들, 내 아들에게서 썩 물러나라고! 아, 흐아, 아악…. 돌려줘!”
귀부인은 두 손이 터져 나가라 칼을 휘둘렀다. 어미가 자식을 살려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도, 허리짓을 멈추지 않는 저 악마가 흉물스럽고 역겨웠다. 씩씩거리며 사내의 몸을 탐하던 마물은 등이 간지러웠는지 인간은 절대로 돌릴 수 없는 각도로 뒤를 돌아보았다. 죽은 생선과도 같은 눈이 무감정하게 귀부인을 바라보았다.
“흐, 억……!”
그 눈에 마주친 순간, 마물의 발톱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주름진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덴…버스….”
“어머니! 아, 아, 으윽, 어… 어머니!”
그것이 서로를 보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가슴이 피로 물든 귀부인은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녀가 쥐던 칼도 날 선 비명을 지르며 함께 추락했다.
“아, 아아! 어머니, 어머니, 안 돼, 안 돼, 안 돼! 아……. 안……. 흐으, 으으윽!”
청년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귀부인의 시체에는 닿지 못했다. 마물은 사내가 제 성기를 세게 조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깊숙이 사내의 몸을 꿰뚫었다. 젊은 사내는 마물의 아래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쉴 새 없이 울부짖었다.
어머니에게 다가가기 위해, 마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울퉁불퉁한 마물의 성기가 여린 내장을 긁어내리고 파고들 뿐이었다.
“…흐, 으흐…. 아…. 아아……!”
사내는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머니의 복수는커녕, 이대로 마물의 새끼를 낳고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총명하게 반짝이던 그의 두 눈이 점차 빛을 잃어 갔다.
그때, 누군가 귀부인이 떨어뜨린 검을 주웠다. 어머니의 원한이 담긴 검은 마물의 목을 생선 대가리를 잘라 내듯 단번에 쳐 냈다.
“으, 아… 하아……?”
마물을 받아들이던 청년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목은 잘렸다. 그러나 성기는 여전히 청년의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히, 히익! 으, 아, 아아아!”
잘린 마물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사내는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의 전신이 경련을 일으켰다.
“헉, 허억, 하아…….”
그렇게 또 한 마리의 마물을 베어 낸 칼리번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베어도 끝이 없었다. 마물을 낳고 조종하는 붉은 오메가를 죽이는 것이 가장 빠른 승리법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마물이 그를 지키고 있어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원래 쓰던 대검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칼리번은 그때그때 기사들의 검을 주워서 마물을 베고, 부서지면 다시 다른 검을 찾거나 맨손으로 상대하며 버티고 있었다.
“하아, 하아…….”
살아 있는 지옥. 이 지옥은, 대개 방어전에서 패배했을 때 벌어진다. 마물로부터 끝내 인간을 보호하지 못하면, 여자는 모두 살해당하고 남자는 강간당한다. 이런 생지옥을 칼리번은 그동안 수도 없이 경험해 왔다. 다수의 인간을 살리기 위해 소수의 사내를 버리고 무력하게 도망쳐야 할 때도 있었다.
이런 순간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그러나 아무리 매사에 담담한 그라고 할지라도 간담이 절로 서늘해진다.
‘어디…. 어디에…….’
칼리번이라면 젠을 무력화시킨 후 바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떠나지 않고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구하고 있었다. 정의감이 투철해서? 아니다. 실상은 인간 사이에 섞여 있을 누군가를 찾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가 이 지옥에 발을 디딘 이유이기도 한, 바로 그 소년을.
‘그분은, 도대체 어디에…….’
훈련받은 기사조차 버티지 못하는 지옥이었다.
“하아, 후우…. 하아…….”
만약 여섯째 왕자가 이미 죽어서, 무너진 잔해와 함께 뒤섞여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
그러나 다행히도 최악의 결말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칼리번은 시뻘건 피의 공간에서 한 줄기 금빛을 발견한 것이다. 첫째 왕자가 여섯째 왕자와 함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섯째 왕자에게는 ‘형제’라는 이름의 우군이 있었다. 모두가 칭송하지 않았던가? 든든하고 강력하며, 기적과 다를 바 없는 무용담을 펼치고, 차기 왕으로서 백성들을 지켜 주는… 왕의 재목.
알테르 프리드웬이….
“아… 아, 아으윽…!”
그러나 알테르는 동생을 전혀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여섯째 왕자는 그에게 목이 붙잡힌 채 허공에 떠 있었다.
“하… 으, 으…….”
하얀 소년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그 반작용으로 눈가와 뺨에 묻은 오메가의 피가 시커멓게 보였다.
“으으, 으……”
여섯째 왕자는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알테르의 팔을 쥐었다. 그러나 그는 실크로 재단된 장갑을 끼고 있어 알테르에게 아주 작은 반항도, 이를테면, 손톱을 세우는 일조차 불가능하게 했다.
“…….”
그 모습을 본 순간 칼리번의 머릿속이 팍! 소리를 내며 터져 버렸다. 검은 두 눈에 시뻘건 불꽃이 튄다.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소음은 차단되고, 살해당하고 강간당하는 비참한 광경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애초부터 칼리번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밖에 없었다.
단 하나.
칼리번은 짐승처럼 몸을 낮췄다. 바닥에는 주인을 잃은 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칼리번은 땅을 보지도 않고 그것을 쥐었다. 손잡이가 아닌 칼날이 그의 손에 잡혔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 어떤 고통도 칼리번의 걸음을 늦추게 할 수 없었다. 칼리번은 제 시선이 고정된 곳을 향해 단박에 튀어 나갔다. 그사이에 몇 명의 사람을, 마물을 뚫고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칼리번 자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 깜박할 새였다.
칼리번의 일격에 알테르 왕자의 팔이 두 동강이 났다. 그와 동시에 여섯째 왕자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억, 하아, 하아…!”
칼리번은 피가 뚝뚝 묻어나는 손으로 칼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알테르를 향해 겨누었다.
“…흐음.”
잘린 팔의 단면에서 시뻘건 피가 튀고 있었다. 그러나 알테르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여유로웠다.
“하윽, 으…!”
도리어 여섯째 왕자 쪽에서 신음이 들렸다.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잘린 팔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여섯째 왕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제 막 성년이 되었다고는 하나 에레즈 프리드웬도 남자였다. 죽은 팔을 떼지 못할 정도의 약골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상했다. 여섯째 왕자는 최선을 다해 팔을 떼어 내려 했으나 가는 목 주변은 붉게 변하고,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살이 움푹 팰 뿐이다.
인간의 팔이 아니다. 칼리번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저번 결투의 연장선인가?”
알테르는 난입한 칼리번을 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와 달리, 칼리번은 안부를 주고받을 여유 따윈 없었다. 이대로는 여섯째 왕자가 질식해 죽을 판이었다. 칼리번은 등을 돌리고는 서둘러 여섯째 왕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 크, 으윽…. 으으윽!”
그 순간, 묵직한 칼날이 칼리번의 몸으로 박혀 들었다. 왕국 제일의 대장장이가 수년을 다듬어 만들었다는 명검. 투박하고 거친 대검에 비교할 수 없는 금빛 칼날….
“으, 억….”
칼리번은 울컥, 피를 토했다. 칼날이 몸을 쑤시고 들어오는 와중에도, 칼리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여섯째 왕자의 목에서 잘린 팔을 떼어 냈다. 엄청난 악력이 필요했고, 배에 힘이 들어가 고통은 더욱 커졌다. 알테르는 그 틈조차 봐주지 않았다. 칼은 칼리번의 배를 뚫다 못해 배 밖으로 칼날이 튀어나왔다.
“크으…. 으, 윽…!”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적에게 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어 준 것이다.
단 하나를 위해.
알테르의 팔에서 풀려난 에레즈가 축 늘어졌다. 목뼈가 부러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목은 붉게 변해 있었다. 죽은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크윽……!”
칼리번은 즉시 알테르의 팔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다시는 움직일 수 없도록, 손목 아래의 핏줄과 살점을 이로 뜯어냈다. 첫째 왕자의 팔이 입 안에서 꿈틀거렸다. 칼리번은 그 팔을 최대한 멀리 던지고는 입 안의 살점을 씹어 삼켰다. 그에 대한 보복처럼, 칼리번의 몸에서 칼이 쑥 빠져나갔다.
“아, 흐읍……!”
칼리번은 입으로도, 뚫린 구멍으로도 피를 토했다. 눈앞이 어지럽다. 상처는 곧 아물 테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흐으…….”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두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저 멀리… 마물들 사이로, 웅크리고 있던 왕자비와 눈이 마주쳤다.
“…너, 알파가 아니구나…?”
눈이 마주친 짧은 순간, 왕자비가… 아니, 오메가가 중얼거리는 말이 난장판을 뚫고 전달되었다.
“……!”
칼리번의 검은 두 눈이 확장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마물 혼혈의 감각이 예민하다고는 하나 붉은 신부와 자신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소음과 광기 속에서도 똑똑히 들렸다.
“크, 크큭…. 으흐흐, 하하하하…!”
칼리번의 본성을 꿰뚫어 본 붉은 오메가는 입이 찢어질 듯 크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선이 가는 아름다운 외모였으나, 지독하게도 소름 끼쳤다.
“…유감은 없다만, 이 녀석을 선택한 네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붉은 오메가와 눈이 마주친 사이, 칼리번의 목에는 차가운 칼날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칼리번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느 기사 못지않은 충성심은 기억해 주마.”
인내심 깊고 자비로운 알테르 프리드웬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리번의 목을 베기 전 예고를 해 준 것이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섯째 왕자를 구하려 드는 모습에 나름의 예의를 표한 것 같았다. 비록 칼로 배를 쑤셨을지언정.
“하아, 흐읍……!”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에레즈를 품에 끌어안았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서 목이 베어 죽더라도, 제 시체에 가려져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여섯째 왕자의 하얀 예복이 칼리번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젠.”
칼리번이 첫째 왕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하듯,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흠?”
첫째 왕자는 기시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휘둘러라, 젠!”
칼리번이 외쳤다. 마물화가 된 젠이 자신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크흐윽, 키이이이—!”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앞발이 두 사람에게로 휘둘러졌다. 몸을 숙인 칼리번은 피했으나, 꼿꼿이 등을 펴고 선 알테르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칼리번을 베려던 칼로 방어했으나, 무지막지한 마물의 악력에 첫째 왕자의 몸이 벽으로 내던져졌다.
“젠…….”
그러나 젠은 없었다. 젠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마물이 있을 뿐. 독 전갈의 꼬리, 사자와 비슷하나 그보다 훨씬 거대한 몸통. 앞다리는 사자의 것이나 뒷다리는 유달리 길어 뒤로 솟아올라 있었고 긴 송곳니가 가슴께까지 자라 있었다. 방어전에서 종종 보아 왔던 젠의 또 다른 모습, 본성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조차도 완전히 마물로 변해 버린 젠은 처음이었다.
마물 혼혈은 전투력을 올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본성을 드러내야만 했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해 몸의 일부만 변이시켰으나, 오메가의 영향을 받았는지 지금 젠은 강제로 변화했다. 그 말인즉, 주변의 마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젠은… 마물은 씩씩거리며 왕자가 있던 자리에 대신 섰다. 그녀는 등이 너덜너덜한데도 앞발을 구르며 다음 희생자를 노렸다. 고통조차 잊은 괴물의 모습이었다. 젠은 마지막 이성을 짜내 칼리번을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칼리번과 알테르가 눈에 보였을 뿐이다.
“하아, 허억…….”
칼리번은 한 팔로 왕자를 추스렸다.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가 주변을 기민하게 살폈다. 잠긴 문…. 그 외에는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조금도 없었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외에는 창문조차 없었다.
‘…천장.’
스테인드글라스 속에 담긴 초대 왕, 에인레드 프리드웬이 죽어 가는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다니던 비행형 마물 한 마리가 맴을 도는 중이었다. 칼리번은 손가락을 입에 끼우고는 새를 부르듯 휘파람을 내질렀다.
휘이—!
그 소리를 듣고 젠이 달려드는 동시에, 도발에 응한 비행형 마물이 칼리번을 향해 수직 낙하했다. 젠이 들이받기 직전, 칼리번과 여섯째 왕자의 몸이 허공으로 쑥 올라갔다. 젠이 막판에 펄쩍 뛰었으나 간만의 차로 칼리번을 놓쳤다.
“크워어어어!”
젠은 허공을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귀여운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군.”
그때, 먹잇감을 놓친 젠을 불렀다.
“마저 상대해 주마, 이리 오거라.”
알테르 프리드웬이었다. 급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후 몸을 추스른 첫째 왕자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흐으…. 흐, 크르르…!”
젠은 독 전갈의 꼬리를 바짝 세우고는 첫째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울분을 그에게 풀 셈인 모양이었다.
“젠….”
한편, 비행형 마물에게 끌려간 칼리번의 몸은 지상과 점점 멀어져 갔다. 어지간한 상황이라면 본성을 드러낸 젠이 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큭!”
아니, 지금은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비행형 마물은 다른 마물의 방해 없이 번식과 식사를 하기 위해 높이 날아올랐다.
“아, 아윽…!”
배에 벌어진 상처 속으로 마물의 발톱이 파고들었다. 내장을 휘젓는 고통에 하마터면 칼리번은 품 안의 단 하나의 존재를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칼리번은 허리춤에 묶어 둔 줄을 풀러 여섯째 왕자와 제 상체를 한데 묶었다. 원래는 장막을 고정시키는 금줄이었다. 젠과 다시 싸우게 되면 목을 조르기 위해 챙겨 둔 것이었는데….
발아래로는 홀의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여섯째 왕자가 기절한 것이 다행일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
“후우, 하아….”
단단히 묶었으니, 두 손을 써도 왕자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준비를 마친 칼리번은 마물의 앞발을 움켜쥐었다.
“크윽……!”
으드득, 마물의 앞발이 꺾여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꺾였다. 칼리번의 배를 뚫던 발톱이 뽑혀 나갔다.
“끼이, 꾸웨에에엑!”
오금이 저릴 정도로 시린 비명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칼리번은 멈추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감수하며 마물의 다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등반을 하듯 마물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마물은 마구잡이로 날며 칼리번을 몸에서 떨어뜨리려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마물은 거대한 독수리를 닮아 있었다. 만약 꼬리에 뱀이라도 붙어 있었다면 한 번에 두 마리를 상대해야 하는 격이라 도중에 추락했을 것이다.
비행 중의 마물은 공격 수단이 없어 쉽사리 칼리번을 떼어 내지 못했다. 그 틈을 타 칼리번은 마물의 등 위로 올라탔다. 칼리번은 등에 매달았던 에레즈를 힘겹게 배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새의 털을 세게 움켜쥐고는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 몸을 낮췄다. 왕자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물의 푹신한 털에 등을 대고, 칼리번과 가슴과 배를 맞댄 자세가 되었다.
칼리번이 등 위에 안착하자 마물의 반항이 격해지며 흔들림이 더욱 심해졌다. 마물이 칼리번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리가 없었다. 이러다가는 여섯째 왕자를 떨어뜨릴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큼지막한 두 손으로 새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키이이잇—!”
털과 가죽을 뜯어 버릴 듯 강하게 잡아당기자, 비행형 마물은 시린 비명을 지르며 수직으로 상승했다.
챙그랑—!
마물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천장을 뚫고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색색들이 입혀진 유리 파편이 마물과 칼리번의 몸에 박혀 들었다. 칼리번은 유리 조각이 눈에 파고들지 않게 하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또한 왕자의 몸이 파편에 닿지 않도록 몸을 바짝 숙였다. 하얀 얼굴이 칼리번의 가슴에 푹 파묻혔다.
그렇게 칼리번은 에레즈와 함께 피로 가득 찬 성을 벗어났다. 비행형 마물은 칼리번에게 머리 가죽이 당겨질 때마다 꽥꽥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칼리번의 이마와 뺨을 사정없이 마구 때려댄다. 마물의 등에 매달려 있던 칼리번이 간신히 눈을 떴다.
발아래로 펼쳐진 광경은….
“……흡.”
칼리번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한낮이었으나 어두웠다. 아니,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눈앞이 깜깜한 정도로 시커멓다.
하늘에 동그랗게 뜬 것은 은빛 달.
달처럼 보이나,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계와 인간계를 이어 주는 입구였다. 그 입구로 무수한 마물이 쏟아져 내려온다. 칼리번은 숨을 몰아쉬며, 마물의 머리를 꾹 눌렀다. 마물은 고도를 조금 낮췄다.
본성을 지키던 성녀들이 모조리 나와 있었다. 귀족들을 버리고 도망치려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귀족을 먹어 치우고 밖으로 나오려는 마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어떠한 무기도 없는 빈손으로 서로의 손을 움켜쥘 뿐이다. 성녀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올렸다.
서서히, 무형의 방어막이 본성 전체를 덮었다. 그러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성녀가 만드는 방어막은 마물을 막을 수는 있으나 인간의 피가 섞인 마물 혼혈에게는 무용했다. 알테르 프리드웬이 아직 살아 있으니 그들을 끝장낼 것이다.
칼리번은 방어막이 완성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성을 빠져나왔다.
* * *
칼리번은 뜻밖에도, 귓가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여긴.”
눈을 뜨고 나서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그는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바람결에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흔들리고, 거대한 비행형 마물이 거대한 나무에 꼬치처럼 꽂힌 채 같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칼리번 또한 나무에 걸려 있었다.
왕성 근방의 숲이었다…. 아니, 숲인 것 같다.
칼리번은 목숨을 걸고 왕성 탈출을 감행했다. 왕성에는 네 곳의 성문이 있는데, 이곳에서 생성하는 보호막이 왕성 전체를 감싸 주어 마물의 접근을 막아 주곤 했다. 그러나 누군가 미리 손을 써 둔 것인지 비행형 마물과 함께 왕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칼리번은 아직 본성에서 벌어진 참극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두려움의 씨앗을 뿌리며 인근의 숲까지 날았다.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판단한 순간, 칼리번은 마물의 눈을 터뜨려 추락시켰다. 나무에 들이받힐 때의 충격으로 지면에 떨어지면서 잠시 기절했던 것 같다. 운이 나빴다면 다른 마물에게 발견되어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거대한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가 그를 가려 주었다.
“왕자님….”
정신이 든 칼리번은 제일 먼저 여섯째 왕자를 찾았다. 왕성에서 헤맨 것과 달리 이번에는 금방 찾았다. 에레즈는 칼리번의 근처에 있었는데, 금줄과 나뭇가지에 얽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았다.
“윽….”
칼리번은 신음을 삼켰다. 온몸의 감각이 되돌아오자 아랫배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첫째 왕자에게 꿰뚫리고, 마물의 발톱에 들쑤셔진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왕자에게로 기어갔다. 피로 젖은 손을 왕자의 가슴에 얹었다.
천천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가슴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후우.”
칼리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이 에레즈의 얼굴을 비췄다. 그림자와 빛의 대비가 뚜렷했다. 칼리번은 그 지옥을 겪고도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설마… 알테르 프리드웬이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건가?’
오메가를 왕자비로 삼아 본성으로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왕자비가 오메가인 줄 몰랐다고 하기에는, 피로 물든 결혼식장에서 알테르 프리드웬만이 유일하게 여유가 넘쳐흘렀다. 마물이 활개를 치는 중에도 알테르 프리드웬은 귀족들을 지키기는커녕 혼란을 틈타 여섯째 왕자를 죽이려 들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그는 죽은 선왕의 대리인이었다. 여섯째 왕자에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칼리번은 머리가 나쁜 탓인지 알테르 프리드웬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건 머리가 좋아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다. 피 냄새를 맡고 마물들이 기어 나올 테니….’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였다. 알테르 프리드웬과 마물로부터 최대한 도망쳐야 한다. 도망칠 수 없다면 적어도 여섯째 왕자를 안전한 곳으로 숨겨야 한다.
나무에서 내려온 칼리번은 에레즈를 한쪽 어깨에 들쳐 멨다. 왕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비틀거리며 숲으로 들어갔다.
* * *
최대한 마물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여섯째 왕자가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과연 실행 가능한 임무인가는 의문을 표하지 말자.
마물은 끔찍할 정도로 강했지만, 빛에 약했다. 마물이 소환될 때 ‘검은 손자국’이 생기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인간과는 정반대였다. 인간의 피가 섞인 마물 혼혈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칼리번이 속한 검은 어금니는 왕국 곳곳에서 방어전 치르고 수도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다행히 이곳은 용병대가 종종 오가던 길목이었다.
칼리번이 무리한 일정으로 다수의 방어전을 돌다 보니, 용병대는 제때 수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노숙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 탓에 젠을 비롯한 용병들은 쓸 만한 동굴이나 구덩이가 있으면 무조건 은신처로 개조하는, 미래 지향적인 활동을 자주 벌이곤 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료들과 함께 꾸려 둔 은신처가 있었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를 업고 그곳으로 이동했다.
칼리번이 추락한 숲 주변은 조용했다. 아직 알테르 프리드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첫째 왕자의 반란이 진압된 것이 아닐까? 확실치 못한 가능성만 믿고 왕성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 고귀한 짐을 업고 있었다.
짐승들이나 오가는, 길도 나지 않은 깊은 숲속, 넝쿨과 거미줄로 입구가 가려진 동굴이 칼리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칼리번은 위장용 넝쿨을 거두고 동굴 안으로 돌 하나를 던졌다.
퉁, 퉁, 통….
돌이 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칼리번은 주변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동굴이었다. 이 동굴은 칼리번이 기억하는 바로는 굉장히 깊고 길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졌다. 가장 안쪽은 천장이 지상과 맞닿아 있었는데, 천장의 작은 구멍으로 빗물과 지하수가 흘러들어 식용 가능한 작은 샘이 고여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버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칼리번은 팔을 휘둘러 박쥐를 쫓아내고, 여섯째 왕자를 내려놓았다. 동굴 안쪽에서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렸다.
‘그 뒤로도 샘이 마르지 않은 것 같군….’
동료들만 알아보게 표시해 둔 바위 뒤에 램프와 기름 등의 생필품을 숨겨 두었다. 칼리번은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찾아냈다.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둡기만 하던 주변이 한결 환해졌다.
치익, 기름을 머금은 불꽃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메가의 피와 칼리번 자신의 피로 아름다운 얼굴이 온통 엉망이었다. 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다. 그렇지만 흐릿한 불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가련할지언정 조금도 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면, 피는 되도록 흘리지 말아야 해.>
저도 모르게 여섯째 왕자에게 손을 뻗던 칼리번은 불현듯 젠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도 아닌 그분의 결혼식에 더러운 냄새를 풍길 수는 없었기에, 똥 주머니를 두고 왔다. 칼리번은 몸에서 부서진 잭 체인을 떼어 내고 피로 물든 상의를 벗었다. 평소 대검을 사용하는 탓에 그의 두 팔은 탄탄한 근육으로 짜여 있었고 어깨도 떡 벌어진 편이었다.
얼굴만 보면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사실 칼리번의 아랫배에는 주먹 하나 정도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숨을 크게 쉴 때마다 복근이 자리 잡은 판판한 배가 오르내리고, 피가 울컥 솟아 나온다.
“큭….”
칼리번은 이를 악물고 붕대로 배를 감았다. 그냥 두어도 하루 정도면 낫겠지만, 되도록 빨리 피 냄새를 숨길 필요가 있었다.
갑옷은 피를 닦아 내고, 옷은 땅에 묻거나 태워야 할 것 같다. 갑옷은 여분이 없었지만, 낡은 옷은 동굴에 남겨 둔 터였다. 칼리번은 옷을 갈아입기 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면서 흘린 피를 하나하나 지우기 위해서였다.
“으응….”
그때, 곁에서 얕은 숨소리가 들렸다.
“……!”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작은 알에서 새끼 새가 태어나는 것처럼, 여섯째 왕자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 순간이 조심스러웠다.
여섯째 왕자, 에레즈는 불안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램프의 빛은 어두웠건만 푸른 보석안은 어둠 속에서도 놀랍도록 반짝거렸다.
“아…….”
에레즈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더니….
“으으……!”
돌연 두 손으로 제 목을 쥐었다.
“으…. 으아……. 으아악!”
그러고는 누군가 목을 죄는 것처럼 온몸을 버둥거렸다.
“왕자님!”
칼리번은 제 할 일도 잊고, 신분도 잊고는 에레즈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하아, 윽, 으으…. 윽…!”
결혼식에서 겪었던 지옥이 머릿속에서 다시 반복되는 듯 에레즈는 숨을 쉬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정신 차리십시오! 더 이상 왕자님의 목을 조르는 자는 없습니다!”
칼리번이 여섯째 왕자의 손을 목에서 억지로 뗐다.
“하으, 하아, 윽…. 흐으으, 아…!”
그러나 에레즈의 두 눈은 칼리번을 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어둠을 노려보며 헤맸다. 제 목을 조르던 형제의 환영을 보는 것 같았다.
칼리번은 그의 양 손목을 움켜쥐었다. 실크 장갑이 벗겨진 맨손이 칼리번의 손등을 긁어내렸다.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는 가슴이 크게 떠올랐다가 푹 꺼졌다. 계속 뱉어 내기만 하는 숨소리가 거칠어, 이대로 질식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손목을 쥔 채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라기보다는 숨을 불어넣어 주는 구급 행위에 가까웠다.
“읍, 윽…!”
에레즈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자유를 얻은 에레즈의 두 손이 칼리번의 등을 타고 올라가, 그의 단단한 몸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하얀 손톱이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길고 붉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칼리번은 개의치 않았다.
과거의 환각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푸른 눈에 조금씩 빛이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는 존재를 인식했다. 에레즈의 반항이 멎어 갔다. 칼리번은 입술을 떼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아, 아…….”
에레즈는 푸른 눈을 크게 뜬 채로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드디어 스스로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지 에레즈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칼리번은 그가 혹여나 자해라도 할까 무작정 품에 끌어안았다. 에레즈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파묻혔다.
“으윽, 윽……!”
에레즈의 두 손이 칼리번의 등을 마구 내리쳤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고작해야 멍이 들 정도겠지만, 배에 구멍이 뚫린 탓에 작은 충격에도 피가 울컥울컥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왕자님.”
얻어맞기만 하던 칼리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금방 나을 몸보다는 눈앞의 소년이 더 중요했다. 맞닿은 몸 너머로 여섯째 왕자의 떨림이 온전히 느껴질 정도였다. 사냥꾼의 손에 잡힌 작은 새처럼 그의 심장은 쉴 새 없이 날뛰고 있었다.
“여긴 안전합니다. 왕자님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은 이제 없습니다.”
칼리번은 제 몸 안에 갇힌 왕자의 등을 살며시 두드렸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일정한 속도로.
“무사히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알리샤 이후로 어린애를 달래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칼리번은 여동생을 돌보던 때를 떠올리며 왕자를 조심조심 다루었다.
“…….”
에레즈의 호흡이 고르게 가라앉았다. 이제야 안정되었나 싶을 때였다.
“…힉!”
품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힉! ……흐읍, 윽……. 히끅! 읍….”
이상한 소리가 날 때마다 품 안의 작은 몸이 움찔 튀었다. 칼리번이 고개를 숙였다. 여섯째 왕자의 두 손이 쏙 칼리번의 품 안으로 들어가더니, 제 입을 가렸다.
“흡, 끅…. 흐읍…!”
그러나 딸꾹질은 쉽사리 멈추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흐읍….”
여섯째 왕자는 너무나 억울하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푸른 눈동자를 굴려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맹세컨대, 칼리번이 딸꾹질을 일부러 유도한 것이 아니었다.
* * *
여섯째 왕자의 딸꾹질은 한참 뒤에야 멈췄다. 그는 곧 자신이 어떤 추태를 보였는지를 깨달았다. 에레즈는 머뭇거리며 칼리번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칼리번에게서 휙 등을 돌렸다. 매정하게도.
“…….”
칼리번은 한참이나 그의 등을 바라만 보았다. 마치 주인에게 칭찬을 받기를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왕족인 그의 명령을, 아니, 그보다는 그의 목소리를 기다린 것에 가까웠다.
‘정말 어리석군.’
그러다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왕자가 눈물이라도 흘리며 감사의 인사라도 표하길 바란 것일까? 결혼식에 신부로 온 오메가가 마물을 소환하고, 그로 인해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더구나 형제에게 목을 졸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황금 피의 왕족이라 해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하겠지.’
칼리번은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그렇게 지키고 설 생각이었다. 마물이 혈기 왕성해지는 밤보다는 이른 새벽이 활동하기에 나았다. 그리고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칼리번에게도 상처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석양이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희미하게 빛이 들던 동굴 내부도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긴 시간 동안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여섯째 왕자는 믿을 수 없이 과묵했으나, 만만치 않게 말수가 적은 칼리번은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대단하군.’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정신력을 높이 샀다. 일국의 왕자가 어느 날 갑자기 동굴 속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당연히 불편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의연하다니.
예전에 칼리번은 기사들과 함께 방어전을 여러 차례 치렀었다. 그 과정에서 귀족들이 얼마나 불평불만이 많은 존재인지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왕자는 실수로라도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심지어 배가 고프다거나, 볼일이 급하다든가 같은 생리적인 언급도 일절 없었다.
‘이것이 바로 황금 피인가….’
확실히 왕족은 다르군.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신중한 성격임이 분명했다. 세 번의 만남 동안 보였던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그 모습처럼.
“…….”
그래도 칼리번은 종종 고개를 돌려 여섯째 왕자를 살폈다. 조그마한 등과 반짝거리는 금발이 보일 뿐이다.
‘젠이 있었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말솜씨가 뛰어나고 매사에 유들유들한 그녀라면 벌써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칼리번은 드물게도 젠이 부러워졌다.
* * *
밤늦게까지 불침번을 선 칼리번은 푹 숙인 고개를 들었다.
“……음?”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동굴 안에 흘러드는 빛이 희미하면서도 밝은 것을 보아, 이른 새벽인 것 같았다.
‘…이 내가 잠이 들었다고?’
배가 구멍이 나고 다소 지치긴 했지만, 하필 이런 때에 잠이 들다니. 그답지 않은 실수였다. 칼리번은 눈꺼풀에 남은 잠을 떨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으으응…….”
그러던 중, 등에 무언가가 묻어 있음을 깨달았다. 얕은 잠투정은 결코 칼리번에게서 나올 수 없는 목소리였다. 여섯째 왕자가 칼리번의 등에 몸을 기댄 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꿈인가?’
칼리번은 까만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믿기지는 않으나 여섯째 왕자가 그의 곁에 딱 붙어 잠들어 있었다. 칼리번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언제부터….’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이러다가는 폐까지 돌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여섯째 왕자로 인해 돌연 질식사라니…!
칼리번은 평범한 사내가 아니었다. 마물을 단칼에 썰어 내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십수 년 동안 누빈 용병이었다. 인간 남성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몸과 두 눈은 밤처럼 어둡고 깊었다. 단정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미남이라고 불릴 만했으나 체격이 원체 큼지막하고 근육질이다 보니 그 누구도 함부로 그의 외모를 화젯거리로 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소년 하나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하다니. 젠이 본다면 기절할 때까지 웃을 일이었다. 그런 젠에게 굳이 변명하자면, 에레즈 프리드웬은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 새하얀 대리석을 하나하나 깎아 만든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칼리번은 간신히, 몸을 살짝 틀었다. 그러자 깊이 잠든 여섯째 왕자의 몸이 스르륵 앞으로 고꾸라졌다.
“!”
칼리번은 당황했으나 신속하게 양팔을 뻗어 왕자의 몸을 받아 냈다. 왕자는 칼리번의 팔 안에 폭 안겼다.
“…….”
눈꺼풀이 흔들리는 일도 없이 잠든 여섯째 왕자의 얼굴을 보며,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 팔은 허공에 붕 뜬 채로 한참이나 왕자를 받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팔이 저릴 만도 했지만, 칼리번은 다른 곳이 더 고통스러웠다. 이를테면, 심장이.
칼리번은 근육을 있는 대로 짜내어 왕자를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물 흐르듯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대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 진땀을 흘렸다. 그 결과, 칼리번은 본의 아니게 여섯째 왕자의 몸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 그리고 왕자는 칼리번의 한 팔을 베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
칼리번은 손안에 촛불이라도 든 것처럼 조심스럽게 팔을 빼냈다. 잠든 에레즈를 눕히고 팔을 빼낸다는, 더없이 간단한 행동을 위해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었는지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
“하아…….”
마침내 왕자의 몸 위에서 물러난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으응….”
그 순간, 여섯째 왕자가 몸을 뒤척였다.
“……!”
설마 자신의 숨소리 때문에 깬 것일까? 칼리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깨지 않았다. 다만 잠든 채로 엄지손가락을 살짝 깨물 뿐이었다.
“…….”
비로소 칼리번은 왕자를 완벽하게 떼어 냈다. 고군분투를 한 탓에 칼리번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는 여섯째 왕자와 마주한 채로 늘어졌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외모였다. 피와 먼지를 닦아 내지도 못했건만 그는 청초하고 빛이 났다. 아니, 더럽혀질수록 더욱 고결하게 보였다. …손가락을 깨무는 모습은 다소 어린애 같았지만.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날이 더 밝기 전에, 칼리번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동굴 속에만 박혀 있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식수와 식량을 조달하고, 상황이 따라 준다면 호수에 왕자를 데려가 씻기고 일을 보게 할 생각이었다. 칼리번이야 구르고 구른 용병이어서 며칠을 씻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상대는 왕족이었으니까.
칼리번은 단검을 챙겨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동굴에 숨겨 둔 것으로,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다소 녹슬었으나 그럭저럭 쓸 만했다. 상황이 나아진다면 단검 말고도 다른 무기를 제작하거나 수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모든 일은 발걸음을 뗄 때가 가장 어려운 법이다. 지금은 특히나 더 그랬다. 떠나기 전에 왕자를 깨워 상황을 설명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으…으음.”
그러나 여섯째 왕자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왕자를 두고 동굴을 나왔다. 어차피 금방 돌아올 테니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 * *
고작 하루 만에 상황은 급변했다. 하늘에서 ‘검은 손자국’의 징조를 찾지 못했기에 혹여나 성녀단과 기사단이 마물을 몰아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동굴 주변을 수색하던 중 칼리번은 벌써 마물을 몇 마리나 발견했다.
만약 향기를 숨길 수 없다면 다른 존재의 피를 쓰라는 젠의 당부가 떠올랐다. 칼리번은 기회를 노려 마물 한 마리를 죽였다. 알파의 피를 얼굴에 바르니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숲처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전부터 기형 마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마주치는 마물도 그런 종류일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쉽사리 인간이 패배했다 간주하지 않았다. 허튼 희망은 금물이지만, 허튼 절망도 쓸데없기는 마찬가지다.
칼리번은 작은 시냇가를 발견했다, 그는 배에 감은 붕대를 풀고 상처에 난 피를 닦아 냈다.
“상처가 이렇게 빨리…?”
결혼식에서 마물에게 꿰뚫린 상처가 이미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마물 혼혈이 회복력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흉터조차 남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몰입할 때가 아니다. 칼리번은 물주머니에 여섯째 왕자에게 먹일 식수를 담고, 녹슨 칼의 표면을 갈고 닦아 냈다. 동굴에 고인 물은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다.
그리고 물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먹을 것도 존재한다. 칼리번은 단검을 써서 물고기를 두어 마리 잡았다. 허리에 물고기를 묶고, 근처에서 나무 열매도 채취했다.
‘이런 거친 음식을 그분께서 드실 수 있을까.’
동굴로 돌아가던 길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용병이야 주는 대로 잘 먹었다. 불에 익히지 않은 생고기는 물론이요, 마물을 씹어먹을 때도 있었다.
‘구울 수 있다면 그나마 먹을 만할지도….’
칼리번은 잠시 고민했다. 불을 피우면 필연적으로 마물에게 들킬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여섯째 왕자는 하루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
결국, 칼리번은 미친 짓을 했다. 일부러 동굴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구운 것이다. 기껏 목숨을 걸고 한다는 짓이 요리 대접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잡은 토끼 한 마리도 그 자리에서 털을 뽑아 구워 버렸다. 덕분에 마물 두 마리가 꼬였다. 다행히도 체격이 마물이었고, 비행형이 아니라 짐승의 형태였다. 칼리번은 마물이 도망치기 직전에 무사히 두 마리의 목을 땄다. 예상치 못한 전투 탓에 구운 물고기에 흙이 약간 묻었다.
“…….”
거기서 그친 것이 어디냐마는, 동굴로 향하는 칼리번의 걸음은 다소 거칠어졌다. 검은 어금니의 그 누구도 칼리번이 이런 무모한 짓을 하리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다. 은신처를 들킬 것을 우려해 멀리까지 나왔더니 돌아오는 길에 해가 졌다.
‘그래도 주머니는 채웠다.’
칼리번은 이 모든 멍청한 짓이 전부 전략적이며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했다.
이 몸을 위해 수고를 한 것인가? 오오, 하찮은 용병이여! 그대의 배려가 참으로 감동스럽도다!
어쩌면 상상만 하던 목소리를 들려주시지는 않을까?
동굴 안에 들어가기 전, 칼리번은 물주머니에서 물을 조금 덜어 내 얼굴을 닦아 냈다. 왕자에게 마물의 피로 얼룩진 모습을 더는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흐으으….
그때, 동굴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설마 마물이…?!’
자신이 없는 사이에 마물이 은신처를 발견하고 여섯째 왕자를 습격한 것일까? 그제야 칼리번은 멍청하고 멍청한 짓거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은 뿌듯했던 마음이 텅 비어 버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흐으…. 흐으으….
그러나 다행히도, 동굴을 안을 채우는 소리는 죽어 가는 사람 특유의 신음이 아니었다.
“흑, 흐윽… 으윽….”
그건 울음소리였다. 서러워 우는 소리…. 동굴 안에서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소리는 동굴 벽에 부딪히고 흩어져, 마치 유령이 흐느끼는 것만 같았다.
“왕자님….”
칼리번이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웅크리고 있던 여섯째 왕자가 칼리번의 목소리를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두 눈은 온통 붉었다.
첫 번째로는, 쉴새 없이 운 탓에 흰자위가 붉었으며, 두 번째로는 눈물을 흘리고 닦아 내기를 반복해서 눈가 주변의 피부가 짓물려 붉었다.
칼리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 어!”
그때, 입을 뻐끔거리던 여섯째 왕자가 괴상한 소리를 냈다.
‘…?’
칼리번이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너, 너, 너! 흐… 으으, 욱…. 어, 어디, 어디에 가, 갔던 거야! 으, 우으…. 왜…. 왜에…?! 아, 아무, 아무 말, 어… 하아, 어, 없이, 사, 사라진… 거야?! 너, 너도, 나… 날 브, 부으, 버어, 버리려고 하, 한 거지?! 흐, 흐으…. 그, 그, 런 거잖, 아? 나, 나, 혼자… 후으, 나, 남겨 둔 거, 잖아? 나, 날…… 버, 버리, 버리려고…!”
여섯째 왕자가 쉴 새 없이 외쳤다. 정작 에레즈 프리드웬이 하고자 하는 말은 너무나 간단하고 간절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땀과 눈물을 흘리고, 사시나무처럼 떨어 가며 힘겹게, 온몸으로 외쳤다.
“…….”
칼리번은 드물게도, 두 눈을 크게 떴다. 성년식 이후 처음으로 여섯째 왕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대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늘 말수가 적었지만…. 이번에는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왕자가 말을 심하게 더듬었을뿐더러, 그 목소리가 동굴 안에 번지면서 마구잡이로 뒤섞여 버리기까지 했다.
“아…. 으, 아아……!”
동굴 안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메아리가 가라앉고 나서야, 여섯째 왕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다.
“앗……. 아, 흐…….”
울면서 화를 내던 여섯째 왕자의 얼굴은 핏기가 전부 빠져 창백해지고 푸른 눈은 크게 확장되었다. 하얀 종이 위로 한 방울 검은 절망이 퍼져 나갔다.
“아, 아, 아니야……!”
여섯째 왕자는 한 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려 버렸다. 텅 비어 있던 그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왕자님, 저는….”
“읍, 으으읍!”
칼리번이 입을 여는 순간, 여섯째 왕자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비명은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꽉 막힌 두 손에 갇혀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으…… 흐읍!”
여섯째 왕자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무작정 고개를 숙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
퍽! 입구 쪽에 서 있던 칼리번의 몸과 부딪쳤다. 고작 여섯째 왕자와 부딪쳤다고 충격을 받을 리가 없지만,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왕자님…. 왕자님!”
칼리번은 뒤늦게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깨달았다. 그는 두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여섯째 왕자를 따라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루하고 거칠었지만, 그가 반나절을 꼬박 바친 음식들이었다.
* * *
산에서는 평지보다 해가 훨씬 빨리 지고, 밤은 더욱 깊고 어둡다. 해가 이제 막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별이 보일 정도로 캄캄해졌다. 인간계의 밤은 마계의 낮과 같아, 마물이 더욱 활개를 치고 다닌다. 칼리번은 마물 혼혈이라 어둠 속에서도 눈치껏 피해 다닐 수 있었다.
“왕자님, 돌아오십시오!”
그런 칼리번이 미아처럼 숲속을 헤맸다. 주변을 수색하고, 식량을 조달할 때보다도 더욱 힘을 낭비했다. 마물의 본거지나 잡혀간 인간이 아닌 길을 잃은 아이를 찾는 일은 서툴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왕자님의 목숨이 위험하다. 마물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하실지도….’
온갖 마물이 날뛰고, 제 형제가 목을 조르던 순간에도 제대로 된 반항도 못 하던 왕자 아니던가? 칼리번은 자꾸만 목이 탔다.
“왕자님!”
큰 소리로 여섯째 왕자를 부르며 찾는 행동은 사실상 자살 행위였다. 하지만 땅에 찍힌 발자국만으로 찾을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 그의 시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의 모습이 머릿속을 자꾸 어지럽혔기 때문이었다.
<아, 아무, 아무 말, 어…. 하아, 어, 없이, 사, 사라진… 거야?! 너, 너도, 나… 날 브, 부으, 버어, 버리려고 하, 한 거지?!>
그 외침은, 칼리번이 상상해 왔던 왕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첫 만남에서 딱 한 번 들었던 그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간 칼리번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한마디를 심장에 새겨 왔기에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여섯째 왕자는 조금도 더듬지 않았으며 더없이 우아하고 소년다웠다.
‘그런데 어째서?’
칼리번은 나름의 답을 떠올렸다.
‘…늦게 돌아온 것에 화가 나서? 어쩌면 결혼식에서의 충격 때문에 말을 더듬게 된 것인가?’
개처럼 바닥만 노려보며 걷던 칼리번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
작고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밤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와 흡사해서 하마터면 지나쳐 버릴 뻔했다. 그러나 한번 들은 여섯째 왕자의 울음소리를 잊을 리가 없었다.
칼리번은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수풀을 헤치니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얀 피부의 소년이 땅에 억지로 끌려 나온 두더지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왕…….”
그를 부르려던 칼리번은 입을 다물었다.
“흐윽! 윽… 흐으…. 우, 으으….”
가만 보니, 여섯째 왕자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그가 쉬지 않고 운 덕분에 칼리번이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칼리번 외의 마물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히도….
‘도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거냐.’
칼리번은 자기 자신을 탓했다. 여섯째 왕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것은 마물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버릇일 것이다. 칼리번이 버릇처럼 대검을 찾고, 젠이 버릇처럼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것처럼. 그만큼이나 익숙하고 잦다는 뜻이었다.
기껏 에레즈 프리드웬을 찾았건만, 정작 칼리번은 그에게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었다.
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라면 재치 있는 말솜씨로 그의 환심을 사고,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 주었을 텐데….
이대로 여섯째 왕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지만, 멋대로 데려갈 수도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칼리번은 그의 눈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약해졌다. 칼리번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오직 달빛만이 에레즈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빛은 서서히 먹혀들어 갔다….
“……!”
제자리에서 안달복달하던 칼리번은 허리춤에 찬 단검을 쥐었다.
달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월식은 아니었다. 거대한 곰이 달을 가린 것뿐이다. 차라리 진짜 곰이라면 나았을 텐데. 곰을 닮고, 훨씬 거대한 마물이었다. 종일 마시지도, 먹지도 못한 채 울기 바쁜 왕자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칼리번만이 정신없이 달려갈 뿐이었다. 칼리번의 발소리에 에레즈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흐윽, 으으……. 응? …으읍?!”
에레즈는 곰처럼 맹렬하게 달려오는 칼리번을 보고 기겁했다. 하지만 칼리번에게는 설명할 틈이 없었다. 그는 여섯째 왕자의 몸을 냅다 짓눌러, 바닥에 숙이게 했다. 그와 동시에 마물의 거대한 앞발이 아슬아슬하게 칼리번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대신 그들 뒤의 버드나무를 내리쳤다.
마물의 앞발에는 발톱이 길쭉하게 나 있었다. 발톱 하나하나가 흡사 레이피어처럼 뾰족하고 가늘었다. 그 날카로움에 칼리번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족히 몇십 년은 이곳에서 뿌리내렸을 거대한 나무의 몸통 위로 선명한 발톱 자국이 남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칼리번은 그렇게 외치면서, 왕자를 왼편으로 던졌다.
“아, 으? 으… 으아앗!”
에레즈는 제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입에서 손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가벼운 몸이 얕은 구릉 아래로 데굴데굴 굴렀다. 칼리번은 두 팔을 들어 마물의 앞발을 막았다. 그러나 툭 튀어나온 긴 발톱은 칼리번의 어깨와 목을 찔렀다.
“으윽…!”
양팔이 충격으로 징 울렸다. 만약 마물의 발톱을 두려워해 어설프게 피했다면 앞발에 목이 부러졌을…. 아니,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연이어 들어오는 공격에 칼리번은 몸을 낮게 숙이고 마물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평소처럼 대검으로 싸웠다면 물러나 사정거리를 넓게 잡고, 발톱을 부러뜨리거나 팔을 잘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칼리번의 손에는 단검 한 자루뿐이었다.
칼리번은 침착하게 마물의 무릎을 찔렀다. 앞발을 주로 사용하는 마물은 대개 하체가 약점이었다. 두 앞발에 달린 긴 발톱 때문에 넘어지면 제대로 걷지 못할 것이다.
“끄에에에엑—!”
예상대로 마물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칼리번은 엎드린 채로 버둥거리는 마물의 등 위에 올라타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칼리번도 마물에게 몇 차례 반격을 당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번만으로도 죽었을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마물 혼혈인 칼리번만이 쓸 수 있는 공략법이었다.
거대한 마물에게 가려진 달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칼리번은 단검을 겨눈 채로 마물의 몸 위에 섰다. 들썩거리던 마물의 몸이 잠잠해졌다.
“…….”
칼리번은 붉다 못해 검게 물든 두 손과 피가 고여 떨어지는 단검의 첨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전신에서 비린내가 났다. 굳이 보지 않아도 자신이 마물의 피와 내장으로 뒤덮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어째서인지 입 안이 썼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 굳이 얼굴을 닦아 낸 것이 무색했다. 칼리번은 단검을 허벅지에 대고 슥슥 닦았다. 검붉은 색이던 단검이 회색빛으로 돌아왔다. 칼날을 확인하기 위해 조금씩 흔드니, 둔탁한 표면 위로 흐릿하게 사람의 형상이 담겼다가, 사라졌다. 그 칼날 속에서 칼리번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았다.
“……왕자님.”
칼리번은 고개를 돌렸다. 여섯째 왕자가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두려움에 발이 묶인 것일지도 모른다. 에레즈는 겁에 질린 채로, 망설이며… 달 아래에 서 있었다.
에레즈의 눈이 붉고, 칼리번의 얼굴과 몸도 붉었다. 상대에게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이 원래의 모습이었다.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드러나고야 마는 추잡한 맨얼굴. 본성이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돌아가시죠.”
칼리번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끝까지 거부한다면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할 셈이었지만, 에레즈는 고개를 떨군 채로 순순히 칼리번의 말을 따랐다. 동굴 밖으로 뛰쳐나간 용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유순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땅만 보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은, 빈말로라도 황금 피답지 않았다. 칼리번은 죄수를 억지로 감옥으로 들이미는 간수라도 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나마 안전한 장소였다.
칼리번은 첫날처럼 불침번을 섰다. 어쩌면 여섯째 왕자에게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키고 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밤새 동굴 안쪽에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
칼리번은 처음으로 여섯째 왕자를 마주한 때를 떠올렸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된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어 오던 프리드웬 왕실의 핏줄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알파가 아니면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자들. 언젠가 사람들을 구원할 황금 피의 후계자들. 칼리번은 에레즈 프리드웬에게 본능처럼 이끌렸으며 열병처럼 시달렸다.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온 칼리번에게 그는 강렬한 충격이었으며 변화의 원인이었다.
“흑…. 흐윽, 윽….”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칼리번은 제 심장이 있는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차갑게 식어 있다. 당연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더 이상 붉은 융단 위에 놓인 귀한 보석이 아닌, 버려진 돌멩이에 불과하니 말이다. 칼리번이 첫눈에 반했던 아름다움도 지금은 때가 끼고 먼지가 묻었는지 전처럼 반짝거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동안 그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기적을 일으킨다는 글귀가 적힌, 황금색 인형? 칼리번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날…… 버, 버리, 버리려고…!>
말을 더듬고 울먹거리던 여섯째 왕자의 모습이 자꾸만 칼리번의 눈가에 어른거렸다.
‘그저, 혼자 남겨진 것이 두려워 벌벌 떠는 어린애였을 뿐인데….’
칼리번은 여름밤의 모기처럼 주변을 맴도는 심란함을 떨쳐 내지 못했다.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좋지 않았다. 불쾌하기까지 했다. 여섯째 왕자를 보고 멋대로 품어 왔던 환상을 검은색으로 덧칠해, 더는 아름답다고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상념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여섯째 왕자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저 자신이 착각했던 것뿐이다. 저토록 특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정말로 황금과도 같은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누구도 남을 구원해 줄 수 없다. 헛된 착각일 뿐….’
칼리번은 속으로 되뇌었다. 등 뒤에서 쉬지 않고 들려오던 울음은, 새벽이 와서야 간신히 잠잠해졌다.
* * *
칼리번은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될 때까지 한순간도 잠들지 않았다. 밤새 여섯째 왕자가 했던 말과 그의 연약한 모습을 되새길 뿐이었다. 그사이 그를 향한 열망과 동경은 차갑게 식어, 타 버린 석탄처럼 되어 버렸다.
칼리번은 인정하기로 했다. 여섯째 왕자는 이제 막 성년이 된 소년에 불과할 뿐, 첫째 왕자처럼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도 없고, 기적을 일으킬 만한 힘도 없다는 사실을.
도움은커녕,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동굴 안에도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자, 울다 잠든 에레즈도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고는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잠에 취한 탓인지, 칼리번이 근처에 선 채로 지켜보고 있는데도 멍한 상태였다.
두 눈만 깜박거리던 에레즈는 동굴 안쪽에 고인 샘물을 두 손으로 떠다가 얼굴부터 닦았다.
‘무방비하다.’
칼리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찰박찰박. 몸단장하는 고양이처럼 한참이나 정성을 들여 얼굴을 닦는 모습이, 칼리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주변에는 퀴퀴한 구린내나 나는 용병 놈들밖에 없었다.
어젯밤에 마물에게 죽을 뻔한 여섯째 왕자는 뒤늦게서야,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칼리번과 눈이 마주쳤다.
“흐, 읍!”
그제야 여섯째 왕자는 후다닥 칼리번에게 등을 돌렸다.
“……?”
순간, 칼리번은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렸다. 까맣게 탄 가슴 속에 여전히 불꽃이 남은 것처럼. 아무리 자신이 마물의 피로 얼룩져 있다고는 하나 보자마자 등을 돌리다니….
“식량을 구해 오겠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여태껏 에레즈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칼리번이었다. 어젯밤 같은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
여섯째 왕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동안은 이것들을 드십시오.”
칼리번은 밤새 골라 둔 열매와 물주머니를 평평한 돌 위에 올려두었다. 전날에 기껏 준비한 음식은 열매 몇 개 외에는 먹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물로 씻어 내면 괜찮겠지만, 억지로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꼭 드십시오.”
칼리번은 제 딴에는 나름 신신당부를 했다. 에레즈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
이 이상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밤새 고민해 보았지만, 무뚝뚝한 권유 외에는 딱히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 *
여섯째 왕자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그는 왕족이었고 자신은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으니.
더구나 칼리번은 첫째 왕자의 팔을 베면서까지 여섯째 왕자를 구했다. 이제 와 남 탓을 하며 미루거나 모른 척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기사단이나 성녀단, 혹은 다른 용병대와 합류할 때까지 여섯째 왕자를 모시고 돌볼 것이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먹이고, 추위를 막아 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면에서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비난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분과 같이 있는 것이 버거워, 식량을 조달한다는 핑계로 두고 나온 것은 아닌가?
칼리번은 숲을 조사했다. 이곳에 떨어진 지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변화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산속에 짐승이, 물 아래로는 물고기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대지는 황폐해지고 있었다. 마물이 어딘가로부터 계속 유입된다는 방증이었다.
이대로라면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숲은 말라붙을 것이다. 이는 기사단과 용병대가 성에 풀린 마물을 무찌르지 못했고, 성녀단이 마물을 정화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계획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군.’
칼리번은 왕실에 소환된 마물들이 퇴치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바깥 상황은 예상보다 더 심각하게 변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숲이 더 황폐해지기 전에, 마물들이 더욱 들어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나?
혼자서라면 진작에 숲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숲 바깥에 마물이 얼마나 깔렸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무기가 없는 칼리번이 여섯째 왕자까지 데리고 다니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목숨은 하나뿐이다. 칼리번의 작은 실수 하나에도 여섯째 왕자는 스러지는 꽃잎처럼 마물에게 죽고 말 것이다.
아니면, 우선 칼리번만 숲을 빠져나가, 다른 영지에서 지원군을 데려오는 방법도 있었다.
“…….”
하지만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왕자의 정신력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만약 칼리번이 숲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왕자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일단은 숨어야 한다. 만일을 대비해 최대한 식량을 비축하는 수밖에….
칼리번은 왕자가 먹을 만한 열매를 따고 짐승을 잡았다. 저번처럼 멀리서 훈제를 하면 좋겠지만… 되도록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불안해할 것이다.
“왔습니다.”
동굴로 돌아온 칼리번은 어설프게 말했다. 용병대에서는 딱히 그런 인사를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가장 먼저 평평한 돌판을 보았다. 아침에 나갈 때 칼리번이 두고 간 음식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
입 안이 썼다. 칼리번은 말없이 왕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플 텐데….’
그러나 왕자를 상대로 함부로 지적도 할 수 없었다.
“……왜, 왜에…!”
이번에도 등만 보게 되려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여섯째 왕자가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왜, 또… 나, 나간 거야?”
“네? 아…. 그건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침에 미리 말을 했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칼리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저번에, 마, 말했, 잖아! 나, 나… 나가지, 마, 말라, 고…!”
“그게 무슨….”
“으, 우으……. 하아…. 윽, 내, 내가, 두, 두 번, 마, 말하게, 하지 마!”
여섯째 왕자가 벌떡 일어나 칼리번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가가 이번에도 붉었다. 그는 억울하고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태도만 본다면, 칼리번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적은 없습니다.”
칼리번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이…! 내, 내… 내 입으로, 여, 여러 번, 마… 말하게 하지, 마!”
“…!”
여섯째 왕자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여섯째 왕자의 어깨가 떨렸다.
“…시, 시녀, 들은, 내, 내가… 하, 한번, 만, 마… 말해도, 하아, 다, 다시는, 그, 그러지, 아, 않았, 는데!”
“명령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칼리번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는 눈치 빠른 시녀가 아니었다.
“윽…! 그, 그 정도는, 아, 알… 알아, 알아서, 해, 해야지! …어, 어, 어, 어째서!”
“저는 머리가 나쁩니다.”
젠이나 다른 동료들은 그를 돌머리라고 부르곤 했다. 칼리번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돌머리가 왕자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무, 으, 뭐……?”
뜻밖의 대답에 처음 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곧 표정을 원래대로 일그러뜨렸다.
“으, 으으…! 노, 노, 놀리는, 거지!”
“아닙니다.”
“그, 그… 그럼! 너, 너는… 이, 이딴 말, 소리를 계, 계속 드, 듣고 싶어?”
칼리번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다.
“흥! 다, 다, 또, 똑같아…. 너, 너도 듣기 시, 싫잖아!”
그 미세한 변화를 여섯째 왕자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나는, 다… 아, 알고, 있어! 사, 사실은, 나, 나를, 버, 버리고 도, 도망치려고 해, 했던 거잖아?”
“…….”
“가, 갈 데가 없어서, 도, 돌아, 오, 오, 온 거겠지….”
“…아닙니다.”
“거, 거, 거지, 짓, 말!”
칼리번이 조금 늦게 대답하자 여섯째 왕자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상하게도 칼리번의 표정이나 말소리에 과민했다.
“정말입니다. 왕자님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해 왔습니다.”
칼리번은 두 손에 쥔 것을 펴 보였다. 궁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이곳에서는 누군가 부지런히 모아야만 한다.
“쓰, 쓰, 쓸, 데, 없는, 벼, 변명……!”
에레즈가 화를 내며 칼리번의 손을 세게 내리쳤다. 동그란 나무 열매들이 두 사람 사이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앗…!”
칼리번이 그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여섯째 왕자가 먼저 놀랐다.
“나, 나는…… 그, 그게….”
본인이 저질렀으면서, 어째서인지 본인이 제일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
칼리번은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하나하나 다시 줍는 게 다였다. 어린 왕자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가 이 정도에 화를 낼 성격도 못되었다.
“아, 으으……. 내, 내가, 이, 이래서, 이상하지? 시, 싫지? 그, 그… 그렇지?”
머리 위에서 칼리번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 마, 말도… 제, 제대, 로……. 윽, 흐윽…. 모, 못, 못 하… 못, 하고! …머, 멍청이 같지?”
에레즈의 울음 섞인 힐난을 고스란히 듣던 칼리번은 날카로운 것에 심장을 찔린 기분이었다. 에레즈의 목소리는 마물의 발톱과 가시보다도 아팠다.
“너, 너… 후, 후회하는 거지? 내, 내가 아니, 라, 혀, 혀, 형님을 구했어야 하는, 데…. 하, 하, 하고?”
후후, 허탈한 웃음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 그래…. 나, 나 같은 것보다, 혀, 형님이, 나, 나, 나았을 거야, 읏…. 이, 이런 취급, 바, 받느니….”
후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곳에 젠을 두고 왔다.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해서 구한 왕자는, 정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상했던 모습도 아니었고, 말도 더듬고, 종일 울기만 하고, 비협조적이다.
칼리번이 잠시나마 속에 품었던 생각을 여섯째 왕자는 고스란히 꿰뚫어 보고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분명 맞는 말인데… 어째서일까? 왕자의 말은 칼리번을 자꾸만 할퀴었다.
“나, 나 같은 거… 다, 당장, 주, 죽는 편이, 나, 낫잖아?”
“…….”
“너, 너도, 내, 내가, 그… 그러길, 바라지?”
주섬주섬 열매를 줍던 칼리번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고 말았다. 딱딱한 껍질로 감싸인 나무 열매가 손안에서 으직, 으깨졌다.
“흐, 읍!”
그 모습에 여섯째 왕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뭐, 뭐?! 가, 가, 감히…!”
용병 주제에 명령을 하다닛! 여섯째 왕자가 소리쳤다. 그러나 태도는 몹시도 위축되어 보였다.
“저는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서 전우를 포기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칼리번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제 선택을 더는 후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칼리번은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여섯째 왕자의 말대로다. 칼리번은 젠을 버리고 그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그동안 꿈꿔 왔던 완벽한 왕자님이 아니라서. 누군가를 구원해 주기는커녕,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는 나약한 소년이라서.
그래서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가 바라는 대로 속마음을 말했다. 그러니 에레즈는 이제 속이 시원해야 할 터였다.
“흑…….”
그런데 왕자가 울었다. 처음에는 푸른 눈동자가 녹아 눈물로 고인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화를 내던 모습이 무색하게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왕자님.”
아, 참으로 이상한 분이다. 칼리번은 도무지 여섯째 왕자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보석처럼 빛을 내며 아름다웠다. 다정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주었었다. 그러나 후광은 전부 사라졌다.
지금의 에레즈는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 칼리번을 무시하고, 꼬투리를 잡고, 화를 내고, 자기 멋대로 군다. 그러면서 궁지에 몰리면 울고 만다. 그렇게 칼리번에게 죄책감을 안겨 준다.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건 덤덤한 상태를 유지하는 칼리번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흐, 흑, 흐윽….”
여섯째 왕자는 더는 서지도 못하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껍질 안으로 몸을 숨기는 소라게나 거북이처럼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는 무릎에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혼자 우는 여섯째 왕자는 참으로 처량하고 가엾게 보였다. 그는 일국의 왕자였는데도 말이다.
그런 에레즈의 모습이 칼리번에게 벌써 익숙해졌다. 그는 이 동굴에 온 이후로 늘 그런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밤마다 혼자 울었으니까.
“…….”
문득, 칼리번은 자신의 등에 기대 잠들었던 소년을 떠올렸다. 그때, 에레즈가 이렇게 불안정한지 미처 몰랐던 칼리번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해 숨도 쉬지 못했었다. 그저 아름다운 겉모습과 동경해 왔던 자기만의 상상에 취해서….
칼리번은, 그를 두고 동굴을 나왔다. 사실은 이렇게 겁이 많은 사람인데, 혼자 두고….
그제야 칼리번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왕자님.”
칼리번은 왕자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여섯째 왕자가 도망갈 줄 알았다. 뜻밖에도 왕자는 여전히 고개를 무릎에 묻은 채로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왕자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칼리번이 말했다. 진즉 했어야 할 말이었다. 왕자가 상상대로 완벽한 존재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칼리번은 그럴 작정이었으니까.
“…….”
여섯째 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푸른 눈동자는 역설적이게도 칼리번이 보았던 것 중 가장 반짝였다.
“……으, 으응.”
조개처럼 단단할 것 같았던 왕자는 의외로 금방 해감 되었다. 필사적으로 소리치고 화를 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칼리번은 그에게 다가가길 꺼렸다.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자신이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그는 고귀한 왕자였으니까. 그러나 뜻밖에도, 지금 왕자의 모습은 고귀하기는커녕 어릴 때 어미와 떨어진 강아지 같았다. 세차게 짖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으, 으…!”
에레즈는 안절부절못하다 돌연 칼리번에게 매달렸다.
“왕자님….”
칼리번은 사나운 마물에게 공격을 당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에레즈 프리드웬은 더는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때보다 훨씬 떨고 있었고… 뜨거울 정도로 따뜻했다.
* * *
칼리번은 에레즈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가 계속 안겨 있다는 편이 맞았다. 여섯째 왕자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이대로 녹아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칼리번은 믿기지 않았다.
금빛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턱과 뺨을 스쳤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서 향기가 났다. 칼리번의 몸에는 피가 묻어 있었는데, 그런 악취를 덮어 버릴 정도였다. 그런 향기라면 대개는 독하기 마련인데, 유독 에레즈의 체취는 옅고 청량했다.
“…미, 미, 미안해.”
한참 후에야 여섯째 왕자는 상체를 뒤로 물리고는 사과했다. 칼리번이 고개를 기울였다.
“화, 화, 내서…… 미, 미, 안해, 머, 먼저… 고, 고맙다는, 마, 말을 해, 해야 했는, 데….”
“…….”
“…너, 너도…… 그, 그곳에, 도, 동료, 를 두, 두고 왔는데…. 거, 거, 걱정, 되, 될 텐데….”
울음이 멈추고 나서도 한참이나 품에서 꾸물거리더니,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에레즈의 얼굴은 붉었다. 오뚝한 코도, 주변의 뺨도, 숨을 쉬지 못해 불긋불긋하고 두 눈꺼풀은 축 처져 있었다. 그가 얼굴을 묻었던 칼리번의 가슴도 축축이 젖어 있었다. 칼리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초조한지 앞니로 입술을 깨물었다.
“화… 마, 마, 많이, 나, 났어…?”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말할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일국의 왕자에게 사과를 받다니, 살면서 이런 일을 얼마나 겪어 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응할 수 있는 건 젠뿐일 것이다.
“그, 그리고….”
“…….”
“저, 저, 저… 것도, 미, 미안….”
왕자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칼리번은 제 손을 들어 올렸다. 손안에서 으깨진 나무 열매가 손바닥에 들러붙고, 과즙은 말라붙어 있었다. 주변으로는 왕자가 쳐서 떨어진 열매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사, 사과… 해, 했으니까…. 나… 시, 싫, 싫어하지 마….”
칼리번은 왕자씩이나 되는 분이 과도하게 사과하는 이유를 마침내 깨달았다.
‘내가 무서운가 보군.’
칼리번의 얼굴을 따지자면, 예상과 다르게 잘생긴 편이었다. 다만 짙은 피부색과 검은 머리카락이 사람들의 두려움을 샀다. 무뚝뚝한 표정과 말 수 없는 성격도 한몫했다.
어른들도 위압감을 느끼는 마당에 어린애들은 십중팔구 칼리번을 보면 울음을 터뜨렸다. 칼리번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린애는, 어릴 적의 알리샤 정도였다. 칼리번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일은 진즉에 포기했다.
“이 정도로는 상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칼리번은 그의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줍기 시작했다. 그러자 왕자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께서는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에레즈가 손을 돕자 칼리번은 만류했다.
“…으, 응….”
여섯째 왕자는 말을 참 잘도 들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작고 편편한 바위에 앉았다.
“화, 화, 화난 거, 아, 아니지…?”
엉덩이는 편하지만, 마음은 영 불편한지 에레즈가 다시 물어본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지, 진짜지?”
“네. 한 번도 화내지 않았습니다.”
“…으, 으, 으깨, 버, 버렸잖아….”
“그건….”
“내, 내, 내가, 짜, 짜증 나, 서….”
“…….”
“그, 그런 거, 지…?”
“…아닙니다.”
“하, 하지만….”
칼리번은 몇 번이나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왕자는 말만 다를 뿐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칼리번이 자신도 모르게 진짜로 화난 모습을 보여 주기라도 해야 안심하려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시는 에레즈 프리드웬 앞에서 나무 열매를 으깨지 않으리라. 칼리번은 속으로 맹세했다.
“……미, 미안…….”
작은 중얼거림에 칼리번은 고개를 들었다. 에레즈가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무뚝뚝하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오도카니 앉아 있는 왕자의 곁에 열매를 쌓아 주었다. 그 나름의 노력이었다. 칼리번은 어릴 적부터 표정에 변화가 없어 감정을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반면, 젠은 곧잘 미소를 보이곤 했다. 웃어 보이기라도 한다면 안심할 텐데….
“…….”
둔감한 칼리번은 웃는 법을 몰랐다. 칼리번이 옮겨 둔 열매가 어느덧 여섯째 왕자의 주변을 빙 두를 정도가 되었다. 에레즈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제 주변에 놓인 과실들을 구경하더니, 제일 작은 것을 손에 쥐었다.
“…….”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봤자 어차피 끝없는 사과의 미궁에 빠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에레즈는 손안의 과실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과일은 그의 뺨처럼 붉고 반들반들했다.
“…그, 근데, 이, 있잖아….”
여섯째 왕자가 슬며시 물었다.
“…왜, 왜? 나, 나 까짓 걸, 왜, 왜 그렇게, 까지…?”
“네?”
“지, 지켜 주, 주는, 거야?”
말을 마친 에레즈가 꿀꺽 침을 삼키자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흔들렸다. 칼리번에 비하면 아직 소년 같았지만, 그 부분은 자신도 사내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그건.”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흔해 빠진 대답— 부귀영화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왕자님을 처음 본 순간 홀려서 여기까지 당신을 쫓아온 거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상상과 다른 왕자의 진실을 보고 칼리번은 더는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건… 결혼식 날 왕자님을 경호하기 위해 차출되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칼리번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나, 나, 나를, 위, 위해, 겨, 겨… 결혼, 식에, 오, 온 게… 아, 아니, 었, 어?”
뜻밖에도 왕자가 되물었다. 그의 두 눈이 토끼처럼 붉고 동그랬다.
“…….”
물론 그렇기는 했지만….
“첫 번째와 세 번째로 뵈었을 때는, 초대장을 통해 임무를 주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칼리번은 왕실의 문장이 찍힌 편지를 받았었다. 그로 인해 그는 여섯째 왕자가 자신을 일부러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튼 상상에 빠져 잠을 못 이루기도 했었다.
“…초, 초대, 장?”
그러나 에레즈는 처음 듣는다는 투였다.
“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나, 나, 나는… 그, 그런 거, 자, 잘… 모, 몰라….”
하지만 그 초대장이 아니었다면, 칼리번 같은 낮은 신분은 같은 장소에조차 설 수 없었을 것이다.
“…혀, 혀, 형님, 께서, 아, 알아서…… 하, 하셨을, 거, 야…. 아, 아마….”
여섯째 왕자는 힘없이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 날…. …려고…… 와, 와 준, 줄, 아, 알았는데….”
“네?”
칼리번이 되물었다. 여섯째 왕자가 워낙 심하게 말을 더듬는 데다가, 말 중간을 꿀꺽 삼켜 버려서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하, 하긴, 그, 그럴 리가… 없지.”
여섯째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카, 카, 칼….”
그가 칼리번을 불렀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칼리번의 심장이 별안간 벼락을 맞은 듯 찌르르 울렸다. 무투회에서 이름을 기억해 주겠다고는 했지만, 설마 진짜로 불러 줄 줄이야.
“왕자님. 사실 제 이름은….”
칼리번이 자신의 이름 전부를 알려 주려 할 때였다.
“…미, 미, 안해…. 나, 나, 난… 마, 말더듬이에… 와, 와, 왕자기는, 하, 하지만… 가, 진 게 어, 없어….”
왕자가 먼저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으, 와, 왕실, 에서도 어, 어, 없는, 조, 존재나, 마, 마찬, 가지야….”
여섯째 왕자는 어찌나 힘겹게 말하고 있는지, 나무 열매를 쥔 그의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 그, 그래, 도… 나, 나, 날, 버, 버리지, 아, 않아 주, 면… 그, 금화, 정도는, 마, 마련, 해 볼게….”
“…….”
“이, 이런 모습… 이, 이제, 드, 들켰, 으니까, 하, 하는, 수… 어, 없지만…. 아, 앞으로는, 마, 말, 아, 안 할게….”
칼리번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 안 할, 테니, 까…. 시, 시, 싫어하는, 해, 해, 행동, 아, 안 할게….”
에레즈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이렇게… 야, 야, 얌전히, 이, 있, 을게….”
그러고는 푸른 두 눈으로 칼리번의 눈치를 살폈다. 그동안 왕자는 버릇처럼 입이나 얼굴을 가리곤 했다.
“…말을 하면 호흡이 힘드신가요?”
칼리번은 차분하게 물었다. 말을 더듬다 보니, 보통 사람만큼 말하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힘들 수도 있었다.
“아, 아니….”
“호흡과는 상관없으시군요.”
“으, 응…. 그, 그치만, 드, 드, 듣기, 시, 싫, 잖아…. 내, 내, 내 모, 목소리….”
“저도 말은 잘 못 합니다.”
“너, 너, 너, 너랑은, 다, 달라!”
귀가 처진 강아지처럼 굴던 왕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벌컥 화를 낸다.
“마, 말을! 아, 안 하는 사, 사람과… 노, 노, 노력해도, 아, 안 되는, 사, 사람하고는 다, 달라, 다, 다르다구…!”
“저는 말을 더듬어 본 적이 없어서 다른 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물어봤을 뿐입니다.”
숨을 쉬기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군.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나 폐가 약하셔서 아프시다면, 굳이 말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
“아프지 않고, 말이 하고 싶으면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됩니다.”
“…….”
“제가 이끄는 용병대에서는 다들 마음대로 떠듭니다. 천한 용병도 그런데 왕자님께서 참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젠은 허구한 날 칼리번에게 잔소리를 하고 떠들어 댔다. 칼리번은 듣기만 했다. 그저 말하는 걸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지, 어느 쪽도 강제는 아니었다.
“내, 내가, 마, 말하면, 우, 우, 우습잖아!”
왕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한 번도 우습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물론 칼리번이 꿈꿔 왔던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습지는 않았다. 전쟁터를 구르다 보면 온갖 유형을 다 만나게 된다. 부상으로 인해 몸의 일부가 없는 사람이 태반이다. 한번 방어전을 치르고 나면 멀쩡한 꼴을 갖춘 자가 드물다. 그래도 다들 살아간다.
“저, 저, 정말, 이야…?”
여섯째 왕자는 끝내 의심하며 물었다.
“네.”
칼리번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에레즈는 연신 제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또다시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미궁에 빠질 것 같았다.
“어차피 이곳에는 저희 둘밖에 없습니다.”
“……!”
“그러니 왕자님께서만 괜찮으시면 됩니다.”
에레즈가 칼리번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눈빛에 오래 노출되면 천하의 칼리번이라 할지라도 이상하게 약해진다. 저 푸른 눈은 왜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는 걸까? 보석안은 원래 다 눈물로 반짝이는 걸까? 칼리번은 곤혹감을 느끼며 가만히 왕자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왕자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겁니까?”
칼리번이 당황해 물었다. 벌써 마음속으로 젠을 몇 번이나 찾는지 모르겠다.
“아, 아, 아니, 야….”
왕자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한 번 닦아 낸 것만으로 눈물을 전부 거뒀다. 아까처럼 억울하거나 서운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그, 그게, 아, 아니라….”
왕자는 훌쩍거리며 두 손으로 눈가를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이미 짓무른 눈가가 쓰라리지는 않을까?
“……드, 들키면.”
여섯째 왕자가 자신의 얼굴을 마구 주무르며 말했다.
“…시. 싫어, 할 줄 아, 알았는데…. …너, 너도… 나, 날…….”
에레즈의 목소리는 이제 칼리번이 귀 기울여 들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웃음 같은 피식거림이 섞인 탓이었다.
“이, 있잖아….”
“네?”
“…사, 사, 사실… 나, 나도, 머, 머리가 나, 나빠…….”
웃음 같은, 이 아니었다. 여섯째 왕자는 놀랍게도 울면서 웃고 있었다. 칼리번은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도 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후, 후후….”
에레즈도 자신이 괴상하게 느껴지는지 입술을 깨물고 눈가를 자꾸 쓸어내렸다. 그러나 울음과 섞이는 웃음을 완전히 거둬낼 수는 없었다. 그는 자꾸만 자신이 바보라면서, 머리가 나쁘다면서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눈물을 흘렸다. 이래서야 바보라서 다행인 건지, 아니면 슬픈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 * *
에레즈 프리드웬에게는 자그마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 비밀을 공유한 칼리번을, 조금이나마 신뢰하게 된 것 같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다소 예민해져 있었을 뿐, 여섯째 왕자는 천상이 선하고 유순했다. 칼리번이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온화함과 다정함은 여전했다.
“주무십시오, 왕자님.”
에레즈는 칼리번과 달리, 철과 용암으로 만들어진 괴물이 아니었다. 밤이 늦었으니 잠을 취해야만 했다. 앞으로를 버텨 내기 위해서라도.
칼리번은 가까스로 동굴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말을 할 때까지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가 만든 눈물의 호수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칼리번의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기껏 멀어졌는데 말이다.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 아니….”
“…….”
“여, 여, 옆에… 이, 있으면, 안 돼…?”
여섯째 왕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입구입니다. 불편하실 겁니다.”
“그, 그, 그럼…… 여, 여, 여기, 이, 있으면, 되, 되잖아…?”
왕자는 칼리번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저는 자지 않습니다. 불침번을 서는 겁니다.”
“부, 부, 불, 침, 번?”
“모두 잠들었을 때 적이 습격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한 명은 잠들지 않고 밤새워 지키는 겁니다.”
첫날에는 부상과 피로감으로 잠시 잠이 들었었지만, 그 후로 칼리번은 꼬박 밤을 새우고 있었다.
“나, 나, 나랑… 도, 돌아가, 면서, 해.”
에레즈는 용기를 내서 칼리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털썩, 곁에 앉았다.
“괜찮습니다.”
“하, 하지만…! 그, 그러면, 피… 피, 피곤, 하, 잖아….”
“…!”
에레즈의 반박에 칼리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생각이 깊으실 수가.’
사실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거기다 나 같은 용병에게 이토록 마음을 써 주다니….’
그런 걱정은 다른 동료들에게도 숱하게 들어 봤다. 칼리번이 왕자에게 감동 비슷한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종종 불침번 교대를 해 주었던 젠은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레즈의 행동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전혀 다른 신분이라서 그런 것이리라.
“저는 튼튼해서 상관없습니다. 마물 혼혈이니까요.”
칼리번과 같은 마물 혼혈은 며칠 밤 정도는 꼬박 새워도 피로한 정도에 그친다.
“아, 아으…….”
그 말에, 왕자는 떨리는 신음을 뱉었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마물 혼혈’이라는 단어를 괜히 입에 올렸나 싶었다. 결혼식에서 수많은 마물을 겪은 왕자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아, 아니야….”
에레즈의 얼굴은 창백하게 식어 있었다.
“그, 그래도, 이, 있을래……. 여, 여기.”
한번 입이 트인 여섯째 왕자는 더듬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말을 했는데, 오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칼리번의 곁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결연한 얼굴로 칼리번이 보는 방향—동굴 너머의 칠흑 같은 어둠—을 따라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과연 칼리번의 예상대로였다.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칼리번은 마지못해 한 번 조언을 했다.
“아, 아…. 안 잤어.”
꾸벅꾸벅 졸던 에레즈가 퍼뜩 고개를 들고는 투덜거렸다. 말만 그렇지, 얼굴엔 잠이 잔뜩 묻어 있었다.
“…….”
이 상태에서 더 권유해 봤자 괴롭히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칼리번은 에레즈가 다시 졸기 시작해도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고개가 까딱거렸고, 그대로 두자 어깨가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계추처럼 흔들리던 왕자의 머리가 칼리번의 팔에 툭, 닿았다.
“……!”
칼리번은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팔에 닿는 금빛 머리카락이 몹시도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뻣뻣하고 짧은 칼리번의 머리카락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으응….”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불침번을 서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에레즈는 곯아떨어졌다. 칼리번의 팔뚝에 제 머리를 열심히 비비적거렸다.
“…….”
그러고 보면, 여섯째 왕자는 첫날에도 칼리번에게 기대 잠들었었다. 칼리번은 그를 간신히 옮겼고, 그 과정에서 하마터면 질식사할 뻔했다. 한 번도 에레즈와 가까이한 적이 없었기에 접촉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해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칼리번은 차게 식은 제 마음을 확신했다. 약간 꼬질꼬질하지만 감춰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품은 소년일 뿐, 전과 같은 숨 막힐 듯한 두근거림은 더는 없었다. 더는….
“—!”
그 순간, 칼리번의 숨이 턱 막혔다. 여섯째 왕자의 머리가 주르륵, 칼리번의 몸 선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바위에 부딪혀 에레즈의 연약하고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에 혹이 생길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머리보다 몸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드는 순간 이미 몸이 대응을 마친 뒤였다. 그 결과 조막만 한 왕자의 머리가 칼리번의 무릎 위로 안착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흐트러졌다.
“으응…. 후우…….”
앉아서 조는 것보다는 불편해도 눕는 쪽이 편한지, 하얀 손이 칼리번의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흠…….”
칼리번은 그를 어떻게 편한 장소로 옮겨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답은 간단했다. 왕자를 깨우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또 불침번을 선다고 하겠지….
칼리번의 손이 허공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사이, 에레즈는 허벅지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곤히 잠들었다. 근육으로 이루어진 넓적다리의 감촉이 딱딱한 돌보다 훨씬 편한 모양이었다. 칼리번처럼 튼튼한 용병이야 자갈밭에서 누워 자도 별 탈이 없었지만, 평생을 깃털 침대에서 잠들었을 왕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흐음…….”
칼리번은 망설이다, 결국 한 팔로 왕자의 몸을 덮었다. 고작 그 정도로는 작은 왕자를 따뜻하게 하지 못했지만….
* * *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를 위해 큼지막한 나뭇잎과 부드러운 줄기를 잔뜩 모아왔다. 몇 시간 동안 고군분투한 끝에, 동굴 안쪽에 침대 비슷한 것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에레즈는 곁에서 신기한 눈으로 칼리번이 하는 일을 지켜만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푸른 보석안은 쉴 새 없이 반짝거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이었으나, 칼리번은 제 할 일만 묵묵히 해치웠다.
해가 뜨면 무조건 침대부터 만들겠다 결심한 터였다. 완성된 침대를 두고 칼리번은 채취해 온 나무 열매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 그가 식사를 들고 돌아왔을 때, 에레즈는 나뭇잎을 겹겹이 쌓아 만든 침대 곁에 처량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칼리번이 침대를 만들던 그 자리였다.
‘기껏 만들었는데 왜 쓰질 않는 거지?’
칼리번은 의아했다.
“왕자님.”
“으, 응…!”
에레즈는 칼리번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칼리번은 바닥에 앉고, 왕자는 편편한 돌 위에 앉았다. 천한 용병이 왕족을 내려다보지 않기 위한 위치 선정이었다. 칼리번은 나무 열매 중 가장 잘 익은 것 두 개를 골라 건네주었다.
“드십시오.”
“…지, 지, 지금, 은, 괘, 괜찮….”
“이곳에 오신 이후로 음식에 입을 대지 않으셨잖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물만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결혼식에서의 충격이 크다지만,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다면 이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는 훅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칼리번은 이번에야말로 왕자를 배부르게 먹일 작정이었다.
“…으…응!”
칼리번의 기백에 눌렸는지, 에레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
대답은 잘했으면서, 그는 한참이나 손안에서 나무 열매를 굴리기만 했다. 칼리번은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최대한 식량을 비축해 둘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까지고 왕자를 지켜볼 수만 없었다.
“제가 보는 게 부담되시면 일어나겠습니다. 다 먹은 흔적만 나중에 보여 주십시오.”
“아, 아냐…!”
칼리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섯째 왕자는 황급히 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칼리번은 다시 스르륵 주저앉았다.
“시, 시, 실은….”
여섯째 왕자의 손은 뼈대가 단단했지만, 칼리번보다는 가늘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마물보다도 거대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한 강력한 힘이 있었다. 칼리번은 속수무책으로 굴복한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머, 머, 먹는, 방, 법, 모, 모르겠어…!”
“…네?”
더불어 여섯째 왕자에게는, 칼리번의 고개를 1초 만에 들게 만드는 힘도 있었다.
“과, 과, 과일은… 이, 이만, 하거나, 스푼으로 떠, 떠서, 먹는 거잖아…?”
왕자는 검지와 엄지로 아주 작은 원을 만들면서 진정한 과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하, 하지만… 바, 봐…. 이, 이건… 너, 너무, 크고… 푸, 풋내가 나고…. 나, 나, 나무, 꺼, 껍질, 처럼, 따, 딱딱, 하잖아….”
“…….”
“이, 이, 이건, 머, 먹, 을, 수, 이, 있는 게, 아, 아냐….”
칼리번은 두 눈과 두 귀를 의심했다. 이럴 수가, 나무 열매를 먹는 법을 몰라서 여태껏 먹지 못했다니….
“으….”
칼리번이 바라만 보자, 에레즈는 이유도 모르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칼리번은 제대로 알려 주지 못한 제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리샤가 5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왕자는 성년을 지났다….
이건 정말이지….
‘…작은 사슴 같다.’
칼리번은 철없는 왕자를 앞에 두고도 그가 너무도 순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젠이나 다른 동료가 그런 말을 했다면 굶어 죽게 내버려 뒀을 것이다. 그러나 푸른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설명하니,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칼리번은 알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모습에, 오랜 세월 전장을 떠돌던 자신이 잠시 감화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왕자님에 대한 연심은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그저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뿐….
“도와드리겠습니다.”
칼리번은 가르쳐 준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물주머니에 담긴 물을 덜어 제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에 감싸인 나무 열매를 하나하나 벗겨 주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왕자는 두 눈에 새길 기세로 칼리번이 하는 모습에 집중했다.
두 번째 열매의 껍질을 벗기려고 하자, 왕자는 칼리번의 손이 아닌 칼리번을 바라보았다. 알리샤도 그런 눈으로 칼리번의 곁에서 어깨를 들썩일 때가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왕자님.”
칼리번은 두 번째 열매를 왕자에게 건넸다.
“응!”
에레즈는 덥석 받았다. 처음 해 보는 탓인지 그의 손길은 퍽 서둘렀다. 여섯 번째 서열이기는 하나 왕자님인데, 고작 이런 노동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조금만 더….’
하지만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를 응원하게 되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나무 열매 하나에 사내 둘이 매달려 한참이나 애를 썼다.
“내, 내가, 해, 해, 냈어!”
여섯째 왕자가 마침내 해냈다. 신속히 해체하지 못한 탓에 과즙이 손가락에 잔뜩 묻어났다. 그래도 기쁜지 활짝 웃었다.
“주, 줄게…!”
왕자는 곧바로 칼리번에게 과일을 내밀었다. 손안에 있던 과일은 쪼글쪼글하고 먹을 만한 부분은 제대로 남아 있지도 않았다.
“……!”
칼리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전에 마물에게 독을 주입 당해 돌처럼 굳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도 더욱 심한 마비 증상에 시달렸다.
‘동굴 안에 독 전갈이 있었던가? 아니면 독거미인가?’
아니, 물린 기억은 없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환한 웃음을 보았을 뿐이었다.
“소, 소, 손…!”
왕자가 깜짝 놀라 외치는 통에 칼리번도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
칼리번은 주먹 쥔 손을 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움켜쥐고 있던 돌이 그의 손안에서 으깨져 있었다. 그로 인해 손바닥에 피가 흐를 정도였다.
“화, 화, 화난, 거, 지…?”
“아, 아닙니다.”
“저… 저, 저번에도….”
칼리번은 손에 쥔 나무 열매를 으깨 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때 일이 아직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여, 여, 역시… 모, 모, 못났지….”
햇살처럼 웃어 보였던 순간이 무색하게, 에레즈는 금세 기가 죽었다.
“절대로 아닙니다.”
칼리번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나 왕자는 의심이 많았다. 칼리번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왕자가 깐 열매를 급하게 입에 물었다.
“앗…!”
칼리번이 입으로 덥석 받아먹자, 에레즈는 당황했다. 그러나 피 묻은 손으로 감히 왕자의 열매를 쥘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어, 어, 어때…?”
“맛있습니다.”
왕자가 깐 열매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껍질을 벗기는 것 외에 별다른 조리법이 가미된 것도 아니었지만, 칼리번은 진미를 먹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여, 여, 열심히, 하, 할, 게…! 가, 가져오면… 내, 내가, 다, 버, 벗겨, 둘게…!”
칼리번이 재빠르게 행동한 것이 왕자에게는 정답인 모양이었다. 왕자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는 의심과 불안을 거두고 새로운 포부를 밝혔다.
“나무 열매는… 필요할 때마다 벗겨 먹어야…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칼리번이 왕자가 준 열매를 오래오래 씹으며 대답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왕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랐다.
“미, 미안…. 모, 몰라서….”
“아닙니다.”
“…응.”
에레즈는 새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되새기는지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도 칼리번이 먼저 벗겨 준 나무 열매를 열심히 깨물어 먹었다.
“…….”
꼭 청설모가 도토리를 먹는 것 같다. 동료들과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산을 오를 때면 종종 그런 작은 생물과 마주치곤 했다. 배고픈 용병들은 때때로 청설모나 새를 잡아먹기도 했으며, 반대로 가끔은 그것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머리를 맞기도 했다.
“여, 열매….”
에레즈가 문득 중얼거렸다.
“네?”
칼리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꼬, 꼬, 꽃에… 이, 있던 여, 열매….”
“꽃에 있는… 꽃에 달린 열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레즈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 머, 먹, 먹어, 봤어…?”
칼리번은 주변에 놓인 열매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꽃이 붙어 있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다.
“그, 그거 마, 말고….”
“그렇다면…?”
“내, 내가… 주, 준… 꽃….”
에레즈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왕자님께서 내게 준 꽃…?’
칼리번은 그것이 성년식에 준, 바로 ‘그 꽃’이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내, 내가, 제, 제일… 조. 좋아하는 건데….”
“…….”
“그, 그, 급, 하게, 너, 넣은 건데…!”
“…….”
“어, 어, 엄청… 다, 달고… 마, 맛있는, 여, 열매인데….”
“…….”
“서, 성녀원, 에, 서만, 트, 특별히, 키, 키우는, 거라… 다, 다른, 데에, 서는, 모, 못, 구하는데….”
“…….”
“하, 한 번, 머, 먹으면… 누, 누구나, 이, 잊을, 수 어, 없다고도, 하, 하던, 데……!”
에레즈는 말을 끊을 듯하면서도 끝없이 이어 나갔다. 애처로울 정도로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 그는 얼굴뿐만 아니라 귀까지 새빨개졌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그 열매가 어떤 것인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꽃 아래에 같이 묶인, 새끼손톱만 하고 루비처럼 붉은 열매. 한 알 먹어 볼까, 라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쳐다만 보다가 잃고 말았다.
“……으, 응.”
에레즈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서운함이 묻어났다. 칼리번은 이유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받자마자 그 열매를 먹어야 했던 것일까? 설마 왕족들에게만 공유되는, 한 알에 보석 한 개와 비견되는 그런 귀한 과실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젠은 당장 보석과 바꾸자고 했겠지. 칼리번 같은 돌머리를 어차피 먹어 봐도 그 가치를 모를 것이라면서….
“아, 아, 알, 려 주고, 시, 싶었어….”
“…네?”
“나, 나는…… 기, 기… 기억, 하, 하고, 이, 있다고….”
“기억… 말입니까?”
여섯째 왕자는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응…. 어, 엄청, 마, 맛있으니까……. 하, 하, 한번, 머, 먹으면… 누, 누구도, 이, 잊지, 모, 못할 마, 만큼….”
* * *
한번 마음의 문을 열자, 여섯째 왕자는 한시도 칼리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리 넓지 않은 동굴 안에서도 칼리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 덕분에 왕자는 금세 온갖 나무 열매의 껍질을 벗길 줄 알게 되었다.
칼리번이 보기에 에레즈 프리드웬은 천재였다. 용병대 ‘검은 어금니’의 대장으로서, 그가 본 이들 중 이토록 성실하고 겸손한 제자는 없었다. 죄다 어디선가 굴러먹었다가 흘러들었기에 제멋대로 행동했다. 칼리번의 주 업무 중 하나는, 이 빌어먹을 망나니들을 주로 패면서 교정시키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에레즈 프리드웬은….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옆이나 뒤에서 자꾸 알짱거리니 칼리번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다.
“이, 이건… 뭐, 뭐, 야?”
칼리번은 평소와 달리 나무 열매가 아닌 길고 통통한 잎사귀를 잔뜩 챙겨 왔다.
“마물의 털과 고양이 꼬리풀입니다.”
“꼬, 꼬리…?”
칼리번은 설명 대신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직접 보여 주었다. 고양이 꼬리라는 이름처럼 꽃 부분이 길고 통통했다. 꽃 머리가 워낙 무거운 탓에 가만히 들고만 있어도 혼자서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자 보석 같은 눈동자가 풀을 따라 흔들리고 고개도 살랑거렸다.
‘새끼 고양이 같다.’
칼리번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양이 꼬리풀을 건네주었다. 에레즈는 그것을 두 손으로 쥐고는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런 나약한 손길로는 고양이 꼬리풀의 비밀을 영원히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긴 잎사귀는 뜯어낸 후, 꽃의 끝을 잡고 북 뜯었다. 껍질이 뜯어지면서 안에서 푹신한 솜이 한 움큼 튀어나왔다.
“우와…!”
왕자는 잎에서 터져 나온 복슬복슬한 솜을 직접 움켜쥐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만든 침대는 생각보다 쉽게 망가지고 보온 효과가 떨어졌다. 칼리번은 왕자의 침대를 더욱 푹신하고 따듯하게 만들기 위해 잎을 새로 뜯었을 뿐만 아니라 마물을 죽인 후 털을 죄다 뽑아 오기에 이르렀다.
“나, 나도….”
처음에는 칼리번의 행동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왕자였으나 곧 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왕자님께서는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치십니다.”
처음에는 만류하던 칼리번이었으나 곧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내, 내가… 마, 마, 망, 칠까 봐 그, 그러는 거, 거지?”
그런 식으로 반박을 하면, 말주변이 없는 칼리번으로서는 숨이 턱 막혔기 때문이었다.
‘왕자님께서 왜 이런 노동을….’
칼리번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에레즈는 재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고양이 꼬리 잎을 뜯어 그 안에 솜을 빼냈다. 그다음으로는 솜과 마물의 털을 잘 섞는다. 이 과정에서 나온 고양이 꼬리풀의 잎과 줄기는 두 개씩 꼬아 끈을 만들었다.
내용물을 만든 두 사람은 원래 침대에 있던 자리로 갔다. 원래 속을 채웠던 잎사귀를 전부 빼내고, 새로 만든 솜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위를 동굴 안에 남아 있던 낡은 옷으로 덮었다.
에레즈는 완성된 침대에 제법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단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하면.
“시, 싫은… 내, 냄새가….”
에레즈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가 이토록 강하게 불만을 표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긴, 마물 냄새가 좀 나긴 하지.’
칼리번은 납득했다. 하지만 보온을 위해서는 식물보다는 짐승의 털이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작은 산짐승 여러 마리보다는 한 마리의 마물에게서 나오는 털이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에레즈는 금세 적응하는 것 같았다.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작은 몸으로 당장에라도 누울 듯 비비적거렸다. 아직 할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칼리번은 끈을 만들기 위해 쓸 만한 줄기와 뿌리도 챙겨 왔다.
“…흐응….”
칼리번이 묵묵히 일을 하자 에레즈도 침대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그를 도왔다. 두 사람을 나란히 앉아 줄기를 꼬고 뿌리를 깨끗이 털어 낸 후, 모아 둔 열매나 생선을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두었다.
마지막으로 칼리번은 호숫가에서 채취한 기다란 잎을 가로, 세로로 늘어뜨린 다음에 얼기설기 엮었다. 이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에레즈도 어느 샌가부터 칼리번을 따라 잎사귀를 엮기 시작했다.
“손재주가 훌륭하십니다.”
왕자가 꼬물거리며 묶는 모습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아…!”
그러자 왕자의 뺨이 빨개졌다.
“함부로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자신의 무례함을 깨달은 칼리번이 급히 사과했다. 감히 왕족을 평가하다니, 목이 두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사소한 손재주가 좋아 봤자 일국의 왕자가 무엇에 쓰겠는가?
“아, 아… 아냐…! 그, 그럴 리가, 어, 없어. 나, 나 따위가 자, 잘하는 게, 이, 있, 을… 리가….”
“…?”
“나, 나 같은 건… 아, 아, 아무, 것, 도 모, 못 하는데…. 보, 보잘것없고….”
에레즈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왕자님께서는 잘하고 계십니다.”
여섯째 왕자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낮췄기 때문에, 칼리번은 명백한 사실을 다시 한번 말했다.
“나, 나… 다, 아, 알, 고 있어…. 시, 실은 모, 못 하는 거, 거잖아…?”
여섯째 왕자의 얼굴이 이제는 귀까지 붉어졌다.
“잘하시는 겁니다.”
“거, 거짓, 말…! 내, 내 기, 기분을 조, 좋게… 하, 려고 그, 그… 그런 거, 거잖아. 시, 시녀들도 매, 맨날 그, 그랬…어. 혀, 형님들에 비, 비하면 머, 멍청이, 인데, 조, 좋게만, 마, 말, 말해 줘서….”
“…….”
“나, 나중에 아, 알고 어, 어, 얼마나 부, 부끄러, 웠는데….”
“…왕자님.”
“아, 아냐! 그, 그렇다고 그, 그 사, 사람, 들, 을, 타, 탓하려는 건 아냐!”
에레즈는 황급히 자신이 뱉은 말을 고쳤다.
“나, 날 위해서 해, 해 준 마, 말인 건 아, 아, 아니, 까….”
“…….”
“…그, 그러니까 너, 너, 도 구, 굳이 어, 억, 지로, 치, 칭찬할 피, 필요는 어, 어, 없어….”
왕자가 두 손에 쥔 검은 줄기가 꾸깃꾸깃해졌다.
“정 그걸 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칼리번은 이럴 때면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손만 놀렸다.
“…….”
이딴 건 그저 사소한 손기술에 불과한데…. 칼리번은 잔뿌리에 붙은 흙을 털어 내며 의문에 빠졌다.
“…아…… 으……. 미, 미안…. 너, 너도… 내, 내 기, 기, 기분을… 조, 좋게, 해, 해 주려고…. 애, 애써서, 하, 한 말, 일 텐데….”
“…….”
“네, 네 노력을 모, 몰라, 준 게 되는, 건가…. 그, 그치만 그, 그, 그런 의, 의도로 하, 한 말은 아, 아닌, 데….”
칼리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여섯째 왕자가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네? …아닙니다.”
칼리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머리에 별생각이 없었다. 불안해하는 것은 에레즈뿐이었다.
“저, 정말…이, 이지?”
“네.”
“호, 호…혹시, 화, 화난 거… 아, 아니지?”
“네.”
에레즈가 푸른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았다.
“…….”
칼리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 그럼 돼, 됐어!”
한창이나 실랑이를 벌인 후에야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더 이상의 방해가 없자 칼리번은 특유의 체력과 힘을 발휘해 가히 놀라운 속력으로 일을 해치웠다. 여섯째 왕자도 덩달아 바빠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한참 후, 칼리번은 완성된 잎사귀 천을 들고 앞뒤로 살펴보았다. 그의 체격만큼이나 컸으나, 군데군데 허름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익혔을 뿐, 딱히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 나도, 와, 완성, 했어!”
칼리번이 바닥에 잎사귀 천을 펼치자 에레즈도 서둘러 곁에 내려놓았다. 여섯째 왕자가 엮어 낸 잎사귀 이불은 칼리번의 것보다는 작았지만, 쫀쫀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근처에 시장이 있다면 팔아도 좋을 정도였다.
“…….”
두 개의 완성본을 보고 나니, 칼리번은 다소 겸연쩍어졌다. 사실 칼리번은 왕자님의 이불을 만든 것이었다. 보온은 식수, 식량만큼이나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섯째 왕자는 상상 이상으로 잘 만들었다.
“이, 이렇게 하, 하는 게… 아, 아닌, 건가? 내, 내, 내가 뭐, 뭐, 뭔가… 잘못, 한, 거지…?”
칼리번의 것과 제 것을 비교하던 왕자는 단단하게 엮인 부분을 억지로 늘어뜨리려 했다.
“아… 아닙니다, 왕자님.”
칼리번은 급히 완벽한 완성품을 망치려 하는 손길을 막았다.
“왕자님께서 하신 게 맞습니다.”
“지… 진짜? 그, 그럴 리가 어, 없어. 나, 나는… 이, 이, 이제 배, 배웠을, 뿐인데….”
“제대로 잘하셨습니다.”
“저, 정말로?”
“네. 제가 본 것 중에 제일 잘 만들어졌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행군 중에 노숙을 하게 될 때, 젠이나 다른 녀석들에게 시키면 이보다 더 뭉텅뭉텅 비어 있곤 했다. 그런 걸 덮고 있으면 찬 바람이 구멍으로 숭숭 들어와서 이불의 의미가 없었다.
“…….”
왕자는 자신이 만든 잎사귀 천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아무리 말을 해 줘도 믿지 못하던 그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그럼, 이, 이거 주, 줄게…!”
여섯째 왕자는 자신이 만든 잎사귀 이불을 칼리번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네? 아닙니다. 저보다는 왕자님께서 쓰시는 편이….”
“…하, 항상 나만 치, 침대, 에서 자잖아…. 그, 그래서… 주, 주고 싶었어.”
“…….”
“여, 여, 열심히, 해, 했는데….”
칼리번은 그물에 걸린 짐승처럼 왕자가 짜낸 이불에 갇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설마 자신을 위해서 만들고 있었을 줄이야…. 이것은 신조차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칼리번은 잎사귀 이불이 덮인 제 무릎을 쓰다듬었다. 왕자가 직접 만들어 준 이불이라니, 과분할 정도였다.
“괘, 괜찮은… 거 마, 맞지…?”
“네.”
“……흐응.”
다시 한번 확답을 받은 에레즈는 배시시 웃었다. 그는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깨끗하지 못함에도….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꼬질꼬질한 상태였는데, 그 순간만은 칼리번의 두 눈에 새하얗게 보였다.
“……?”
칼리번은 눈의 착각인가 싶어 두 눈을 벅벅 닦았다. 여섯째 왕자도 그를 따라 간지럽지도 않으면서 눈가를 닦았다.
* * *
해가 뜬 아침임에도 밖이 유독 어두웠다. 혹여나 마물이 새로 소환되는 것일까? 칼리번은 하늘을 유심히 살폈다.
“…….”
다행히도 검은 손자국이 아니라, 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다만 비가 오고 난 후에는 발자국이 쉽게 남는다. 땅이 마를 때까지는 밖에 돌아다니기가 요원할 것이다.
“오늘은 늦을 수 있습니다. 먼저 주무십시오.”
칼리번이 나가기 전 예고했다. 비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 며칠간 먹을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나, 나도 데, 데려가!”
여섯째 왕자가 칼리번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아침에 동굴 밖에 나갈 때면 왕자는 이렇게 매달리곤 했다.
“아직은 위험합니다.”
칼리번에게는 왕자의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 그래도…. 그래도….”
그가 딱 잘라 거절할 때면, 왕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처럼 빤히 바라보곤 했다. 그런 왕자를 두고 밖에 나가는 것은 마물을 쓰러뜨리는 일보다도 어려웠다.
“조만간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그동안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만 양해해 주십시오.”
칼리번이 한참 고민한 끝에 말을 덧붙였다.
“…응.”
그제야 왕자는 칼리번의 옷을 놔주었다.
* * *
칼리번은 오전 내내 숲을 돌아다녔다. 여섯째 왕자의 망토를 찢어 등에 비스듬히 맬 수 있는 천 가방을 만들었고, 거기에 나무 열매를 담았다.
<그, 근처에서 나, 나무, 여, 열매를 따, 따는 건 나… 나도 하, 할 수 이, 있는, 데….>
불현듯 왕자의 주장이 떠올랐다. 에레즈는 밖에 몹시도 나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숲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식량 수급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를 다시 위험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수도는 결국 마물에게 빼앗기고 만 것인가….’
회복되기는커녕 점점 악화되는 숲을 보며,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목을 조르던 첫째 왕자를 떠올렸다. 알테르 프리드웬은 귀족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전적인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반란을 저지른단 말인가?
‘팔이 잘리고도 비명은커녕 곧바로 반격하려 들었다…. 황금 피라서 가능한 건가?’
그렇다면 여섯째 왕자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또한 칼리번이 쉽사리 숲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읏.”
칼리번은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끼고는 잡념에서 깨어났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달리 두 손은 착실히 새의 목을 비틀고 있었다. 칼리번은 피 묻은 손으로 제 가슴을 짚었다. …최근 들어 가슴이 꽉 조여드는 일이 종종 있다. 근육뿐인 탄탄한 가슴을 눌러 보면, 멍울이 잡힌 것처럼 딱딱했다.
전투의 후유증인가 싶었지만, 딱히 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가끔 아프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의 가슴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 * *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가 정말로 사슴이 아닐까 싶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근육과 몸 선이 그러했고 날렵하고 긴 팔다리도 그러했다. 사슴은 동물 중에 가장 우아하고 고상해 숲의 백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 열매만 드시면 힘이 나지 않습니다.”
기껏 새를 구워다가 주었는데도, 정작 왕자는 고기엔 눈길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왕궁을 탈출하고 숲에 정착하게 된 지 열흘. 에레즈의 식사는 대부분 나무 열매 몇 개에 물이 더해지는 정도에 그쳤다.
“하, 하지만… 나, 나는 워, 원래 이, 이렇게, 머, 먹었어.”
“네…?”
“나… 나, 나 같은 건, 이, 이 정도면 추, 충분하니까….”
에레즈는 달걀만 한 나무 열매 두 개를 쥐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는 어린애도 배를 채우지 못합니다.”
“나, 나, 나는… 마, 많이 머, 머, 먹으면 아, 안 돼….”
“네?”
“마, 만약에… 그, 그렇게 많이 먹으면….”
…많이 먹으면? 다음 말을 기다리던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여섯째 왕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 하여간에, 그, 그런, 거야.”
결국, 그는 말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다.
“…….”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니, 그것도 부와 명예를 누리는 왕실의 여섯째 왕자가…? 칼리번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비록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나무 열매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지만, 이걸로 충분하다는 말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칼리번이 왕자만 했을 적, 한 끼에 구운 닭 다섯 마리는 기본이었다. 마물 혼혈들이 큰돈을 벌고도 용병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그만큼 식비가 나가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연약하고 자그마하시니, 먹는 양도 적은 건가?’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동그란 머리통을 보면서 칼리번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 그러는 너, 너, 야말로, 왜…. 왜 아, 안 먹어?”
그사이, 왕자가 되물었다.
“그건…….”
이번에는 칼리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서, 설마, 나, 나 때문에 모, 못 먹은 건 아, 아, 아니지?”
여섯째 왕자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아… 아닙니다.”
“하, 하지만…!”
“그 부분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칼리번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말만 안 했다 뿐이지, 그는 양껏 배를 채우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정도 끼니를 나눠 먹지만, 칼리번과 같은 마물 혼혈들은 물 한 방울 없이 사나흘은 너끈히 버틸 수 있었다. 대신 한 번에 엄청난 양을 섭취한다. 칼리번만 해도 처음 동굴에 정착했을 때는 굶고 다녔지만, 왕자님이 안정된 이후로는 제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그러고, 보면… 나, 나는 네, 네가 제, 제대로 머, 먹는 걸 모… 못 봤어.”
그 사실을 모르는 에레즈는 칼리번을 염려했다.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심장에 털이라도 돋아난 듯 미친 듯이 가려웠다.
“마, 만약… 머, 먹을 게 어, 어, 없어서… 저, 전부 나한테, 야, 양보하고, 있, 는 거라면….”
“…….”
“아, 안, 돼…! 아, 알겠지?”
왕자는 제 손을 다른 손으로 쥐어뜯으며 말했다. 그는 불안해 보였다. 그럼에도 칼리번은 왕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칼리번의 식량은 왕자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우선 짐승을 잡으면 가장 좋은 살코기는 발라내고 그는 남은 내장을 먹었다.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해서 땅을 파서 지네와 같은 온갖 벌레와 뱀, 나무뿌리 등을 씹어먹고 있었다.
칼리번은 한 번도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다만 사실대로 말하면, 여섯째 왕자가 기절할 것 같았다.
* * *
칼리번의 예상대로 다음 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가 얼마나 내릴지는 몰랐다. 칼리번은 동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빠르게 번졌다.
“……오, 오늘은, 나 호, 혼자, 자, 잘 순 없어.”
그때, 등 뒤에서 결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침번은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칼리번은 비로 만든 커튼을 늘어뜨리곤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둘이서 불침번을 서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더구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이미 겪어 보았다. 에레즈는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칼리번의 심장을 부서뜨릴 것이다.
왕자는 밤마다 같은 소리를 했다. 칼리번과 둘이서 열심히 꼬고, 짜깁기한 천과 솜이 자신만의 침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더욱 심해졌다.
“그, 그럼… 여, 옆에서 자, 잘, 래.”
“맨바닥에서 주무시면 병에 걸립니다.”
에레즈는 마물의 피가 섞여 튼튼한 칼리번과는 달랐다. 칼리번이 보기에 그는 아직 꽃봉오리처럼 하얗고 연약해 보였다.
“그, 그러면, 너, 너도 침대에서 자….”
“입구 주변에 있어야 적의 침입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그, 그래도…!”
여섯째 왕자는 막무가내였다.
“나, 나, 나… 따위는, 아, 아무런, 도, 도움이 아, 안 되니까…. 이, 이런 것만이라도…….”
칼리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칼리번은 쉽사리 굴복했다. 에레즈의 얼굴이 확 펴졌다. 칼리번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뒀다. 왜냐면 이 주제로 쓸데없이 말씨름을 해 봤자, 시간 낭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결연한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으나 잠은 그를 능히 막아 낼 수 있었다. 결국, 버티고 또 버티던 에레즈는 칼리번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더는 이런 공격에 당황하지 않는다.’
등에 닿는 따뜻한 숨결을 느끼며, 칼리번은 확신했다. 더 이상 여섯째 왕자와의 접촉에 숨을 못 쉬는 정도로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에레즈가 고집을 부리게 놔둔 것이기도 했다.
‘좋아.’
칼리번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가 할 일을 마치기 위해 몸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그러고는 푹 잠든 왕자를 깨우지 않고 품에 안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왕자를 두 팔로 안은 후 동굴 안쪽에 마련된 침대로 옮기려던 차였다.
“으응….”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뱀처럼, 왕자는 본능적으로 칼리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엄지손가락을 깨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랬었지. 칼리번은 왕자를 보잘것없는 침대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떼 주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 여기저기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으…….”
그러자 왕자가 잠결에 고개를 저었다. 간신히 떨어진 다시 손가락을 깨물려 들었다. 칼리번은 왕자의 손을 살짝 쥐었다.
“……!”
그 순간 칼리번은 둔기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과 동일한 충격을 느꼈다. 왕자가 잠결에 칼리번의 손가락을 문 것이다. 살을 깨무는 감각에 칼리번이 두 눈을 번쩍 뜨였다. 손가락이 뭉텅 잘려 본 적도 있는 그에게는 이 정도 공격은 이빨도 나지 않은 강아지가 문 것처럼 부드러웠지만….
칼리번은 맥을 못 췄다. 에레즈는 말 그대로 칼리번의 검지를 우물우물 씹었다. 마침내 왕자의 저주에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칼리번은 또다시 갇혀 버렸다. 발이 굳어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놈의 저주는 에레즈 프리드웬이 무언가 새로운 행동을 할 때마다 걸렸다. 만약 그와 적이었다면 상성이 최악이었을 것이다.
“왕자님….”
칼리번은 그를 깨우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에레즈가 제 손을 다치게 하느니 이편이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자신은 재생력이 뛰어난 마물 혼혈이었으니까….
“…….”
에레즈의 눈가에는 눈물이 흠뻑 고여 있었다. 그는 아기처럼 칼리번의 손을 꽉 깨물었다.
‘…나 말고 이분을 지켜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건가.’
이름 모를 감정이 울컥 솟아오른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 * *
비가 그쳤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를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결혼식에서 도망쳐 온 후 처음이었다. 아무리 동굴 안이 안전하다고는 해도 그도 일단 사람이었다. 언제까지고 어둡고 습한 동굴에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쌓이고 쌓인 불안감에 어느덧 왕자의 하얀 손끝은 붉게 너덜거릴 정도로 엉망이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저, 저, 정말, 나, 나, 나가도, 괘, 괘, 괜찮은, 거, 거지?”
내내 동굴 안에만 있다가 아침 햇살을 받으니, 에레즈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불안한 듯 한 번씩 칼리번에게 확인을 받곤 했지만, 대체로 생글거렸다.
“네.”
칼리번은 귀찮아하지 않고 왕자가 물을 때마다 충실히 대답했다. 그동안은 생리 현상을 해결할 때만 잠시 동굴 밖으로 나왔었다. 칼리번은 그가 볼일을 다 볼 때까지 근처에서 보초를 섰다.
<으, 으으……. 시, 싫어….>
그때마다 에레즈는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칼리번은 의아했다. 왕자라면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할 때조차 시종이 붙지 않던가? 볼일 정도야 아무것도 아닐 텐데….
<하, 하지 마……. 저, 저, 저리, 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물은 후각에 예민합니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가 볼일을 본 자리를 흙으로 덮거나 미리 구해둔 짐승의 피를 뿌려 두었다.
<그, 그럼, 내, 내가 하, 하, 할래…!>
에레즈는 거의 울 기세였다. 당장의 생존이 더 중요한 칼리번으로서는 섬세한 왕자의 감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랬다. 모처럼 시냇가에 데리고 오니 에레즈는 눈에 띄게 기뻐했으나, 정작 칼리번 앞에서 나신이 되기를 꺼려했다.
“저, 저, 저쪽, 보, 보고 있어….”
“그러다 마물이 습격하기라도 하면….”
에레즈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 같았다.
“…그, 그, 그럼… 오, 옷 이, 입고 드, 들어갈래.”
“감기에 걸리실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옷은 좀 빨아야 했다.
“으, 으음….”
그는 칼리번과 자기 자신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또 울상이 되었다.
“아, 아, 알… 알, 았어.”
결국, 항복한 것은 더 절실한 쪽이었다. 여섯째 왕자는 머뭇거리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
칼리번은 꾸물꾸물 옷을 벗는 에레즈를 지켜보았다. 여섯째 왕자의 몸은 모난 곳 없이 희고 깨끗했다. 아직 미숙한 티가 났지만, 확실히 사내의 몸이었고 눈에 띄는 상처도 없었다. 오랜 용병 생활로 주점의 나무 도마나 다름없이 흉터투성이인 칼리번과는 달랐다.
“…….”
기껏 벗었으면서, 에레즈는 옷으로 앞을 가리고는 칼리번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는 칼리번과 달리, 그의 하얀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독촉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되도록 빨리 끝내셔야 위험이 덜합니다.”
도통 물에 들어가려 하지 않기에 칼리번이 말했다.
“아, 아, 알았…어.”
에레즈는 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제 옷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섯째 왕자의 관심은 곧 차갑고 시원한 물로 바뀌었다.
“와… 와!”
에레즈는 옷을 땅에 던져두고는 물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칼리번은 얼른 그의 옷을 주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깨끗한 물을 접한 여섯째 왕자는 물가를 이리저리 오가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그 탓에 물이 하늘 위로 쏟아지고, 반짝거렸다.
‘만족하시는 것 같군.’
그 모습을 보고는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굳이 호수를 택한 이유기도 했다. 첫날 동굴에 고인 물로 얼굴을 닦았던 것도 그렇고, 여섯째 왕자님은 물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물을 잔뜩 뒤집어쓴 왕자는 머리카락이 축 처진 것이 고양이 같기도 했고 강아지 같기도 했고— 하여간에 칼리번이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귀여운 것들과 비슷해 보였다.
“……너, 너, 너도…?”
에레즈가 뒤늦게 물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한 명은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더구나 동굴 밖으로 오갈 수 있는 칼리번에게는 그와 달리 기회가 많았다.
여섯째 왕자도 그 사실을 알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 왔던 일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얼굴을 마음껏 씻고, 두 손에 고이는 정도의 동굴 물로는 씻을 수 없었던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진흙이 묻은 머리카락도 씻어 냈다. 얼굴을 시냇물에 푹 넣었다가 숨이 다하면 고개를 들었다. 오랜 먼지가 쌓여 있던 보석처럼, 물을 만난 왕자는 한결 반짝거렸고 빛이 났다.
똑같이 반짝거리건만, 왕궁에서 보았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깎아 만든 얼음 조각상과도 같았다면 지금은 꼭 그 나이대의 소년 같았다. 고귀해 보이지는 않는 대신 생기가 넘쳐흘렀다.
칼리번은 뚜벅뚜벅 걸어가 흙과 자갈이 섞인 땅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짐을 주웠다. 그가 노는 동안 칼리번은 부지런히 세탁을 해야만 했다. 햇살은 수면에 부딪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자갈을 모아 빨래를 하던 칼리번은 훤히 드러난 그의 등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했다. 칼리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지, 저건…?’
칼리번은 왕자의 등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것은 흉터도 아니었으며, 누군가 의도적으로 낸 칼자국도 아니었다.
왕자의 등에 금이 가 있다. 찢어진 것을 억지로 붙여 두었을 때 남는 엉성한 연결선처럼…. 아니, 그와는 반대로, 뱀과 같은 동물이 허물을 벗기 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린 여린 피부의 자국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선 안과 선 바깥, 두 겹이 한 몸에 기워 있다는 것이다. 왕자의 몸에 새겨진 선은… 이것이 흉터도 새살이 돋았다면 연한 붉은빛일 것이다. 단순히 피부병의 후유증이라면 검게 죽어 있거나 희게 변했으리라.
그러나 그건 어느 것도 아니었다. 황금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뒷목을 덮는 머리카락보다도 짙은 황금이 용암처럼 몸 안에서 흐르고 있었다.
“왜…… 왜?”
칼리번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등을 지고 있던 왕자가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는 작은 새나 사슴처럼 칼리번의 눈빛이나 목소리가 사소하게 변화에도 예민했다.
“…….”
칼리번은 눈을 빠르게 감았다 떴다. 사람의 등에 정체 모를 선이 그어져 있다니….
“나, 나… 뭐, 뭐, 뭔가…… 이, 이상해?”
에레즈의 얼굴이 금세 사색이 되었다. 그는 우왕좌왕하며 제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아닙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여, 칼리번은 차마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칼리번은 몸을 숙여 빨래 더미를 들어 올렸다. 에레즈의 걱정이 착각에 불과하고, 단순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러고는 햇볕이 잘 드는 바위 위에 빨래를 척척 널어놓고, 겸사겸사 물주머니에 물도 채웠다. 칼리번이 시선을 두지 않으니 에레즈도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처음에는 왕자의 관심을 돌리려고 일부러 한 행동이었으나, 물을 채우다 보니 물 자체에 시선이 갔다.
‘……물고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군.’
시냇물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맑았고 막힘 없이 흘렀으나 언젠가부터 물고기가 줄어들었다. 칼리번과 왕자는 고작 둘이었다. 씨가 마를 때까지 둘이서 다 먹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왕자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흠….”
칼리번은 물주머니를 뭍에 내려놓았다. 대충 할 일은 끝냈다. 그는 가볍게 세수를 하고는 검은 웃옷을 벗었다. 탄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자리 잡은 옅은 색의 흉터는 보통 사람보다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칼리번은 왕자처럼 물에 전신을 담그지는 않았다. 미리 챙겨 온 천으로 제 몸을 닦는 것이 다였다. 지금 그에게는 보호구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 정도는 보초를 서면서도 할 수 있었다.
“윽….”
칼리번이 작게 신음을 뱉었다. 젖은 천이 가슴을 가볍게 스친 것만으로도 괴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는 지난번에 느꼈던 날카로운 고통과 비슷했으나, 더욱 심했다. 천으로 아픈 부위를 누르니 가슴이 평소보다 훨씬 딱딱했다. 안에 무언가가 가득 찬 것처럼….
그와 동시에 젖은 천에 무언가가 묻어났다.
“…….”
칼리번은 천을 살폈다. 이미 젖은 천이라 구별이 거의 되지 않지만, 확실히 피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맨손으로 제 가슴을 짚었다. 가슴 끝에서 희고 뿌연 액체가 묻어났다.
‘고름…?’
곯은 상처에서 나는 액이라기에는… 물이나 우유처럼 묽었다. 애초에 그 부위에는 상처가 없었다. 칼리번은 그것의 냄새를 맡아 보려다가, 문득 물장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퍼뜩 왕자가 즐겁게 물놀이를 하고 있어야 할 곳을 보았다. 여섯째 왕자가 멍하니 서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왕자님.”
칼리번이 불렀다. 멀리서 보아도 에레즈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어, 정상이 아니었다.
“아… 으…! 미, 미안…. 그, 그, 그…… 그런, 게 아, 아, 아니라…!”
그저 불렀을 뿐인데 여섯째 왕자는 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두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었다. 그 행동은 갓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서투르기 그지없어서….
“위험합니다!”
…뒤로 자빠지기 딱 좋았다.
“으, 으앗!”
첨벙! 온몸이 수면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났다. 무릎 정도에 오는 정도였건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왕자님!”
칼리번이 서둘러 달려갔다. 그 짧은 순간에 온갖 의심이 들었다. 혹여나 마물이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닐까? 냇가에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던 것은, 설마!
“흐, 읍!”
그러나 다행히도, 칼리번이 다가가자 왕자의 상체가 물 위로 쑥 올라왔다. 그저 물속에서 몸이 무거워져 헤어 나오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만큼 에레즈 프리드웬이 약해 빠졌다는 뜻이다.
“……하아.”
칼리번은 안도감에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짧은 사이에 마물에게 심장을 빼앗겨 잘근잘근 씹힌 것만 같았다.
“으…….”
에레즈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칼리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연약했다.
“자, 잘, 잘못했어….”
칼리번의 한숨을 듣고는 잔뜩 겁을 먹었는지, 에레즈가 사과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칼리번이 영문을 알 수 없어 물었다.
“…화, 화, 화내고 있는 거잖아….”
도대체 자신이 어떤 표정이기에 저렇게까지 두려워하는 걸까? 칼리번은 힐끗 수면을 보았다. 방금 전의 소동으로 수면이 흐트러져 있어, 얼굴이 제대로 비치지 않았다. 칼리번은 다시 시선을 에레즈에게 돌렸다.
“화난 게 아닙니다.”
“그, 그, 그런 게 아니라…. 내, 내가 머, 멋대로 쳐, 쳐, 쳐다, 봐서… 화, 화난 거잖, 아…. 미, 미안….”
“…….”
“아, 아, 아, 안, 그, 그럴, 게…. 나, 날…… 시, 싫, 싫어하지, 마….”
에레즈는 젖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칼리번은 또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에 그런 이유로 화를 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제 얼굴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칼리번이 물었다.
“그, 그, 그렇지 아, 않아…. 그, 그렇게 느, 느끼게 내, 내, 내가… 해, 행동했다면…. 미, 미안….”
“저는 항상 이런 얼굴입니다.”
몸을 웅크리던 에레즈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화난 게… 아닙니다.”
딱히 화를 내지 않았는데도 화났냐는 소리는 예전에도 종종 듣곤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대체로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아니, 이번에는 달랐다.
“혹여나 물에 빠지셨을까 그런 겁니다.”
칼리번은 잠시 눈을 감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도록 고민을 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붙였다.
“…걱정했습니다.”
여섯째 왕자가 두 손을 내렸다.
“거, 거, 걱…정?”
“네.”
걱정. 흔한 단어였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거의 쓰지 않아 낯선 단어였다.
“거, 걱정….”
하지만 여섯째 왕자에게도 그 단어가 놀랍고도 새로운 마법의 언어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무지개를 본 사람처럼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추, 추워….”
갑자기 에레즈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제야 추위를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물에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나가시죠.”
“으, 응….”
칼리번은 두 손을 내밀었다. 두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 줄 생각이었는데, 에레즈가 먼저 그의 두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혼자서 일어나려 애썼다.
“으…앗…!”
물속에 있어서 몸이 둔해졌는지, 그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한차례 휘청거렸다.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에레즈를 끌어안고 말았다.
“미… 미안….”
여섯째 왕자의 몸은 물처럼 차가웠다. 그가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넘어질 일이 없는데도 어느 쪽도 먼저 떨어지지 않았다.
“…….”
이러다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서로의 눈을 보기만 했다. 마치 먼저 손을 떼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칼리번은 이 기회에 햇살 아래에서 보았던 등의 상처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름다운 외모와 자신을 가련하게 올려다보는 저 파란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분은 사실 호수의 요정이 아닐까?’
칼리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물의 정령이라든가….’
영원처럼 느껴진 순간은 곧 끝을 맺었다. 칼리번의 피부로 그의 떨림이 느껴진 것이다.
“…왕자님, 잠시만 여기 계십시오.”
칼리번은 간신히 한 걸음 물러난 후, 그를 두고는 첨벙첨벙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바위에 널어 둔 에레즈의 망토를 털어 낸 후 돌아왔다.
‘혹시나 해서 빨지 않고 놔뒀는데 잘됐군.’
다시 돌아온 칼리번은 양팔을 감싸며 떠는 왕자의 몸을 망토로 감싸 주었다. 원래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망토였는데, 도망 중에 찢어지고, 또 나중에는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찢고 나니 무릎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짧아졌다. 칼리번은 한 팔은 어깨에, 다른 한 팔은 움푹 팬 오금에 넣고는 그를 번쩍 들어 옮겼다.
“으앗!”
에레즈가 가볍게 버둥거렸다. 그러나 크게 버둥거리면 알몸이 되기 십상이었기에 칼리번에게 몸을 딱 붙였다.
“…….”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체중으로 눌리니 다시금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무, 무… 무겁지? 내, 내려, 줘…!”
변한 표정을 읽혔는지, 에레즈가 말했다.
“무겁지 않습니다.”
“그, 그래도….”
“이대로 나가시면 발이 더러워집니다.”
칼리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천천히 호수를 빠져나온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를 망토로 둘둘 만 채로 편편한 돌 위에 앉혔다. 에레즈는 두 무릎을 모으고, 어떻게 해서든 망토 안에 제 몸을 쑤셔 넣으려 노력했다. 칼리번은 다른 빨래를 확인했으나 아직 햇살이 더 필요했다.
가까이 있는 김에 왕자의 등을 살피고 싶었지만, 망토로 가려진 상태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물에 푹 젖어 있었다.
…잠시나마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호수의 신이라기보다는 물에 빠진 고양이 꼴이었다. 칼리번은 선선히 불어오는 서풍을 막아주기 위해 그의 곁에 앉았다.
“…….”
에레즈는 꾸물거리며 다가오더니 칼리번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제 머리를 칼리번의 등에 부볐다. 덕분에 옷이 축축하게 젖었으나 칼리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미, 미안…네, 네… 오, 옷이….”
한참 뒤에야 깨달은 에레즈가 황급히 사과했다. 기가 죽은 여섯째 왕자는 칼리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뗐다. 어깨가 평소보다 더 움츠러든 것 같았다.
“상관없습니다.”
“그, 그치만….”
“아닙니다. 추우신 거죠?”
“…으, 응?”
“…….”
“…응. 응.”
멍하니 칼리번을 보던 에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번도 그의 상태를 이해하고는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슬슬 이동해도 되겠군.’
시냇가에서 동굴로 돌아오는 길에, 칼리번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여섯째 왕자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그간 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은신처를 바꾸는 편이 옳았다. 오늘 왕자를 데리고 외출한 결정적인 이유기도 했다. 시도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칼리번이 혼자 숲을 정찰할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마물도 짐승도 확연하게 줄은 상태였다.
‘봐 둔 곳이 몇 군데 있으니, 가장 안전한 곳으로 옮기자.’
아니면, 이 기회에 숲을 빠져나가 다른 영지에 편입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칼리번은 숲과 인접한 영지의 귀족이 어떤 성향이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주변 영지의 정세와 귀족들의 관계도는 평소 젠이 챙기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칼리번은 곧 골치가 아파졌다. 나이가 많은 젠은 귀족들의 알력 다툼을 상세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이는 변명에 불과했다. 단순히 칼리번이 멍청하고 인간관계에 둔감했을 뿐이다.
에레즈는 햇볕에 잘 마른 옷을 꿰입고, 그 위로 찢어진 망토를 둘둘 두른 채로 칼리번 곁에서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그는 석양에 물들어 가는 숲을 걸으며 칼리번을 열심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느라 바쁜 상태였다.
“후암….”
칼리번을 힐끗거리던 에레즈는 몰래 하품을 했다.
“피곤하신가요?”
칼리번은 골치가 아픈 와중에도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아, 아니야…!”
에레즈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느릿했다. 오랫동안 동굴 안에만 있다 밖에 나와 뛰어논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뒤척이지 않고 바로 주무시겠군.’
칼리번은 만족했다. 여섯째 왕자는 밤마다 같이 보초를 서겠다며, 남들은 시켜도 안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자진해서 하려 들었다. 한 시간도 못 버티고 잠이 들어 버리고는 했지만.
적어도 오늘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이다. 말솜씨가 전혀 없는 칼리번으로서는 매번 왕자님의 부탁을 좋게 넘기기가 어려웠다.
“…오, 오늘은… 나, 나… 때, 문에, 마, 많이… 피, 피곤할, 테니까…. 내, 내, 내가 가, 같이 보, 보초 서, 서, 설게…!”
“…?”
그러나 그것은 칼리번의 착각일 뿐, 동굴이 멀리서 보이자 에레즈는 결연하게 선언했다.
“주무십시오.”
“나, 나, 나… 호, 혼자 자, 잘, 수는 어, 없어!”
“아닙니다.”
“하, 하, 하지만…!”
고집을 보아하니, 오늘도 칼리번은 에레즈는 옆에 재우고 보초를 서게 생겼다.
‘이것 참….’
곤란하다고 생각하며, 칼리번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평소 그의 보폭을 생각하면 여섯째 왕자를 업고 걷는 편이 빠를 정도였다.
“헤헤….”
칼리번이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자 왕자는 실없이 미소 지었다. 칼리번은 잠시 눈이 멀었다가 다시 시력이 돌아왔다. 두 사람의 손은 서로 닿을 듯하면서도 헤어지길 반복하며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잠시만.”
그때, 칼리번이 갑자기 팔을 들어 에레즈를 제지했다.
“제 뒤로 물러서십시오.”
“왜… 왜?”
엉겁결에 칼리번의 등 뒤로 숨은 왕자가 물었다. 칼리번은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동굴 주변에 자리 잡은 수목이 평소 보다 시들다 못해 검게 죽어 있었다. 며칠이나 비가 내렸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은신처를 들킨 것 같습니다.”
칼리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괜히 숨겨 보았자 왕자의 불안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앗…! 그, 그… 그럼, 크… 크, 큰일, 이잖아…!”
왕자의 몸이 공포로 움찔거렸다. 걷는 내내 떨어져 있던 하얀 손이 덥석 칼리번의 손목을 붙잡았다. 불안과 떨림이 전염된 것일까, 그의 손길에 칼리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왕자님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칼리번은 주변을 살폈다. 수풀이 무성한 곳을 헤쳐 공간을 만들고는 그 속에 에레즈를 앉혔다. 그러고는 주변의 풀과 나무를 꺾어다 그에게 떠넘겨 주었다.
“아, 아… 아, 안 돼…! …도, 도, 도망쳐야, 해…!”
풀에 가려지면서도 에레즈는 칼리번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대로 떠나면 반드시 추적을 당할 겁니다.”
에레즈가 혼자 있을 때 습격을 당하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 하, 하지만… 너, 너, 너무… 위, 위험해!”
왕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칼리번의 말을 이토록 반대하는 일은 드물었다.
“저…… 저, 아, 안에 뭐, 뭐, 뭐가 이, 있는지… 모, 모르잖아. …그, 그냥 사, 산짐승일 수, 수도 이, 있고….”
“제가 들어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 안… 돼! 마, 만약에 저, 정말 마, 마, 마… 마물이면…!”
“운이 나쁘면 마물이 다른 마물을 더 데려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그으… 그게, 뭐, 뭐가 주, 중요해? 우, 우, 우리가 저, 저기로 도, 돌아가지만, 않으면 되, 되잖아….”
“동굴 안에는 왕자님의 체취가 남아 있습니다.”
“아……!”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처치해야 합니다.”
단호한 칼리번의 태도에 에레즈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 그, 그치만…. 네, 네가, 주, 주, 죽거나, 다… 다칠 수도 있어…….”
“저는 용병입니다. 이런 일은 자주 겪어 왔습니다.”
칼리번은 쏟아지는 걱정을 덤덤히 받아 내며 말했다.
“그, 그런 게 아냐!”
왕자는 양손으로 칼리번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동굴을 노려보던 칼리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네, 네가 없으면, 나… 나는, 호, 호, 혼자 남게 된단, 마, 말이야…!”
간신히 꺼낸 에레즈의 진심은, 원래 말을 더듬어서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두려움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
칼리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으, 으으…. 미, 미안…해, 바, 바보같, 이…….”
에레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적을 죽이러 가는 용병을 칭찬하기는커녕, 무섭다고 붙잡기나 하다니! 그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왕자님….”
그 유약한 모습을 보며 칼리번은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은 동료들과 함께 싸웠다. 다들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젠은커녕, 폐만 끼치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조차 없다. 그에게는 오직 지켜야 할 존재만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죽거나 행동 불능이 되면,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가련한 존재가….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칼리번은 왕자의 손을 떼 내면서 맹세했다.
“시, 싫어…! 아, 안, 안, 돼. 역시… 위, 위험해. 그… 그냥, 그, 냥, 도, 도망, 치자…. 다, 다, 다른, 곳으로…! 머, 멀리, 아, 아주, 머… 멀, 리, 떠, 떠나면 쪼, 쫓아오지 모, 못 할… 거야!”
에레즈는 심하게 불안해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칼리번밖에 없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칼리번이 떼어 내려 해도 하얀 손이 계속해서 매달렸다.
“…읍!”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그의 손을 억세게 떼서는, 여섯째 왕자의 입을 스스로 가리게 했다.
“가, 가, 가지…. 으읍.”
“이제부터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제가 동굴 안을 탐색하는 동안 다른 마물이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흐, 흐읍….”
칼리번이 겁을 주자, 에레즈는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보석을 떨어뜨릴 듯 푸른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이를 어쩐다.’
칼리번은 난감해졌다. 기껏 에레즈를 숨겼는데, 이러다가는 울음이 새어 나가 들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섯째 왕자는 원체 겁이 많고 나약했다. 그러나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에레즈는 너무나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저 보호받아야 할 소년일 뿐이었으니까.
“…….”
칼리번은 단검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던 오른손을 풀었다. 손 마디마디가 굵고 온갖 상처로 벼려진, 전형적인 용병의 손이었다. 그 손을 크게 펼치면 왕자의 자그마한 이목구비는 금세 가려질 정도였다.
“흐, 흐읍…!”
칼리번의 손이 얼굴 위로 내려오자 왕자는 새된 숨소리를 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를 위협할 생각도, 때릴 생각도 없었다.
“흡… 흡…?”
외람된 일이었으나,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레즈로서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려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물기가 어려 있는 머리카락이 칼리번의 손가락에 감겼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과 거칠고 까무잡잡한 손가락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생각이지만, 끙끙거리는 모습이 꼭 자그마한 강아지 같았다. 칼리번은 푸줏간에서 키워졌다. 모든 짐승이 피 냄새가 밴 칼리번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커다란 번견들도 그랬다.
그런 칼리번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갓 태어난 강아지들뿐이었다.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들은 어미가 없으면 종일 끙끙거렸는데, 칼리번이 서투른 솜씨나마 쓰다듬어 주면 신기하게도 울음이 가라앉곤 했다. 칼을 들고 짐승의 살과 뼈를 해체하는 손인데도….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비록 그 새끼들은 자라서 칼리번을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만약 이곳이 왕성이었다면, 칼리번은 중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완벽한 황금 피는 더 이상 없지 않던가? 눈에 보일 정도로 와들와들 떠는 소년만이 있을 뿐.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칼리번은 왕자가 진정될 때까지 그 행동을 반복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에레즈의 떨림이 멎자 칼리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 응.”
고개를 푹 숙인 왕자가 간신히 끄덕였다. 에레즈의 시선을 뒤통수로 느끼며, 칼리번은 동굴로 들어섰다. 동굴 안은 어두웠다. 등 뒤로 내리쬐던 노을빛도 어느 순간부터는 따라오지 못했다. 동굴 가장 안쪽에는 천장 위로 작은 구멍이 트여 있어 작게나마 빛이 새어 들어오곤 했었다. 그 틈으로 빗물이나 샘물도 흘러들었고 그 근처에는 두 손이 담길 만한 크기의 물이 고여 있곤 했다. 그래서 그 주변은 항상 에레즈의 자리였다.
그러나 지금, 동굴 안은 시커멓고 빛 한 점 들지 않는다. 평소에는 똑, 똑,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칼리번은 걸음을 늦췄다. 마물 혼혈인 만큼 적응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동굴 안은 빛과 물이 들지 않는 것 외에는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여섯째 왕자였다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용병 일을 했던 칼리번에게는 특유의 감이 있었다. 특히나 마물에게는 잘 듣는 예감이.
‘어쩌면 이 녀석이 그동안 숲을 황폐하게 했을지도 모르겠군….’
멀리 움직인 것도, 경사가 급한 길을 오르내린 것도 아닌데 칼리번의 호흡이 벌써부터 거칠어졌다. 가슴이 갑갑해져 오는 것은 단순히 동굴 안의 공기가 탁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아…….”
칼리번의 숨소리 외에는 돌바닥을 밟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칼리번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툭.
그때, 칼리번의 발에 무언가가 치였다. 칼리번이 그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에레즈가 그를 위해 잎사귀를 엮어 만들어 준 이불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동굴 밖으로 나가기 전, 에레즈가 제 침대에 함께 올려 둔 기억이 났다. 그것을 주우려는 찰나, 칼리번은 마침내 발견하고 말았다.
‘…박쥐?’
동굴 깊숙한 곳에 그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 두 날개를 몸을 갈무리하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마물이.
겉모습은 평범한 박쥐였다. 그러나 그 크기는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주먹에서 팔뚝만 한 정도를 훨씬 상회했다. 웬만한 사내보다 큰 칼리번보다도 거대했다. 거기다 날개가 달린 마물이니, 날개를 펴면 지금보다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칼리번은 단검을 고쳐 잡았다.
“…….”
그때, 칼리번의 손목에 무언가가 감겼다. 감긴 것의 길이나 두께가 꼭 머리카락을 연상시켰다.
얇고 가는 다발이 순식간에 칼리번의 한 팔을 묶었다. 얇은 실이 겹겹이 감싸이며 손목이 썰릴 것만 같은 예리한 고통이 급습했다. 칼리번은 단검으로 그 실을 자르려 했다. 그러나 칼날로는 얇은 실을 베어 내질 못했다.
뒤늦게 칼리번의 눈에 다른 것들이 보였다. 버려진 것은 왕자님이 만든 나뭇잎 천뿐만 아니었다. 마물도 섭취 가능한 음식도 모두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던 나뭇잎 천과 끈은 마치 박제되듯 투명한 줄에 감겨 천장에 걸리거나 벽에 붙어 있었다.
“이건….”
거미줄이었다.
그 정체를 파악한 칼리번은 자신의 팔을 끌어당기는 힘에 맞서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얌전히 두 팔을 모으고 있던 박쥐가 활짝 날개를 폈다. 벌어진 박쥐의 몸통 양옆에는 다섯 쌍의 거미 다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펼쳐진 날개 위로 열 개의 다리가 기지개를 켜듯 크게 펼쳐졌다. 그 모습이 마치 인간의 갈비뼈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쥐의 날개, 거미의 다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거미의 실도 상당한 탄력과 끈기를 지닌다. 그 거미가 인간과 비슷한 체격이 된다면…. 거미줄 또한 강화될 것이다. 거미줄은 칼리번의 왼팔을 완전히 봉인했다. 칼리번이 자신의 손목을 자르고 물러나려 할 때였다.
“끼이이익—!”
박쥐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동굴 벽에 부딪혀 더욱 증폭되어 울려 퍼졌다.
“큭…!”
퍽, 귓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뇌가 터지기라도 한 듯 머릿속이 멍해지고 귀에서 주룩 피가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외부의 소리가 차단되고 이명이 머릿속에 채웠다. 잃은 것은 청력뿐만 아닌지, 칼리번의 몸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귀가 망가지면 균형 감각도 잃게 되니까 조심해야 해, 대장! 특히 세이렌같이 목소리를 무기로 쓰는 마물 말이야….>
문득 젠의 조언이 머릿속을 스쳤다. 칼리번은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단단한 거미줄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동굴 안에 온통 거미줄을 쳐 놨군.’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끈끈하게 들러붙는 감각과 함께 팔과 다리가 서서히 자유를 잃어 간다. 칼리번은 기꺼이 속박당했다. 다만 여차할 때 단검을 든 팔을 뺄 수 있도록, 나뭇잎으로 만든 천을 말아 오른팔에 둘렀다. 거미줄이 그 위로 감겼다.
거미나 박쥐형 마물은 마물 중에서도 약해 빠진 존재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어전에서나 그렇다. 이런 종류의 마물에게 마을이나 도시는 적절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인즉, 제대로 자리를 잡게만 되면, 이만한 골칫거리가 또 없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이런 마물은 기본적으로 껍질이 약하다. 그래서 신중하고 계산적이며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는다. 이대로 거미줄로 온몸을 칭칭 묶어 질식시키거나 천장에 몇 날 며칠을 장식해 두고 서서히 살과 피를 빨아먹겠지.
“읏…!”
칼리번이 끌려가지 않고 힘으로 버티자 마물이 천장에서 줄을 감기 시작했다. 칼리번 정도 되는 몸이 가뿐하게 허공에 들렸다.
칼리번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녀석의 약점을 유심히 살폈다. 날개는 크지만, 동굴 안에서는 자유로이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두 눈을 계속 감는 것을 보니 퇴화된 모양이고, 옆구리에 난 거대한 다섯 쌍의 다리에 난 털이 시력을 대신할 가능성이 크다.
‘독, 독은 어디에….’
역시 입인가. 칼리번은 마물의 튀어나온 어금니를 유의했다. 무기가 조금만 더 길고 컸다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만회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칼리번의 손에는 단검 하나뿐이었다. 만약 단검을 던졌다가 숨통을 한 번에 뚫지 못한다면, 저놈은 말라 죽을 때까지 칼리번의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칼리번은 얌전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쪽은 청력을 잃었지만, 녀석은 시력이 없었다. 먹이가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알아서 올 것이다. 여기까지 침범한 것을 보면, 숲에 더는 먹을 것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굶주렸을….
“…….”
의외로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녀석은 지독하게 굶주렸는지, 칼리번의 몸에 거미줄을 더 둘러 고치 형태로 만들기 전에 성큼 다가왔다. 칼리번의 목에 감긴 거미줄이 세게 조여졌다. 그의 목이 뒤로 꺾였다. 숨을 쉬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동맥이 뛰는 소리가 거미줄을 타고 그대로 전해질 것 같았다.
퉁퉁하게 살이 오른 박쥐가, 아니, 거미가 칼리번에게 다가왔다. 대가리는 박쥐였으나 입에는 거미의 독니를 지녔다. 거대한 몸체가 칼리번의 몸 위로 올라탔다. 체격이 좋은 칼리번의 몸 위로 거대한 마물이 올라탔음에도 그 둘을 지탱하는 거미줄은 휘청일지언정 끊어지지 않았다.
“흐, 큿……!”
다만 무게로 인해 아래에 깔린 칼리번의 몸을 거미줄이 더욱 세게 조였고, 배와 가슴에 심한 압박을 받았다. 마물이 이렇게 알아서 다가와 주다니, 칼리번으로서는 일을 빠르게 처리할 기회였다. 거대한 앞다리가 칼리번에게 뻗어 왔다. 뾰족한 앞발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그것이 곧 칼리번의 어깨를 꿰뚫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번은 마물이 대가리를 내밀고 자신의 피를 빨아먹을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마물은 머리를 베거나 심장을 뚫어야 완벽하게 죽기 때문이었다. 한 번뿐인 기회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털이 잔뜩 돋은 거대한 앞발이 닿기 직전, 그는 숨을 참았다. 마물 혼혈의 재생력이 빠르다지만,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읏….”
칼리번은 칼에 꿰뚫리는 것에 비견될 만한 고통 대신—고통의 끄트머리도 되지 못하는 괴상한 감각을 맞이했다.
“…으, 음…?”
마물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뾰족한 앞발이 칼리번의 가슴 위를 거칠게 배회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흣….”
인간의 다섯 손가락과는 다른, 칼날 같은 앞발이 가슴 이곳저곳을 찌르자 칼리번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응어리가 져서,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뭉툭한 고통이 들던 부위였다. 그런 예민한 곳을 원을 그려 가며 긁어 대고 찌르니… 아무리 옷을 걸친 상태라고 해도 고통스러웠다.
“읏…….”
칼리번이 본능적으로 몸을 틀자 거미줄을 통해서 그것이 전해졌다. 얌전히 몸을 내주던 먹잇감이 살아서 꿈틀거리니, 마물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칼리번의 가슴을 향해 대가리를 쑥 내밀었다. 한 쌍의 독니가 번뜩였다. 칼리번은 이번에야말로 이빨에 목덜미가 물어뜯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윽…?! 으, 큭!”
그러나 이번에도 칼리번의 ‘상식적인’ 판단은 틀렸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물과는 달랐다. 한 쌍의 굵은 독니와 수십 개의 작은 돌기를 지닌 마물은 앞발로 더듬거리던 부위를 난데없이 깨물었다.
“—!”
이대로 가슴이 살덩이째로 뜯기려나 싶었는데, 마물은 고개를 마구 휘저어 댔다. 그 탓에 살점이 아닌 옷이 뜯겨 나갔다. 찢어진 옷 안쪽으로 어두운색의 피부가 드러났다. 유륜은 피부보다 색이 옅었고 그 안쪽에 자리 잡은 유두는 움푹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마물의 입에서 침이 뚝뚝 흘러, 칼리번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큭…?!”
칼리번은 경악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마물의 침에는 산이 섞였는지 피부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침이 움푹 들어간 유두 안으로 타고 들어가자 칼리번은 몸을 뒤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거미줄은 더욱 강하게 칼리번의 몸을 조였다.
“아! 으윽…!”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 마물이 이번에는 칼리번의 가슴을 제대로 깨물었다. 뾰족한 독니가 가슴 안으로 박혀 들었다. 다른 작은 이빨들도 다닥다닥 피부를 꿰뚫었다. 깨물린 가슴이 불에 타는 것처럼 시큰거렸다.
이빨로 단단히 고정하고 나자, 마물의 입 안에서 가늘고 기다란 혀가 튀어나왔다. 처음 그 혀는 칼리번의 유륜을 둥글게 핥았다.
“…흐으….”
이대로 옅은 살을 녹여서 뜯어먹을 줄 알았는데, 가는 혀가 안쪽으로 들어간 유두의 흔적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그곳을 혀로 계속해서 자극했다. 마치 빨아내려는 것 같았다.
“그, 그만….”
칼리번은 거칠게 반항했다. 그러나 이빨이 박혀 있는 탓에 떼어 내지 못했다. 가늘고 긴 혀가 유륜 안쪽에 숨겨져 있던 작은 유두를 콕, 콕 찌르며 꺼내려 들었다. 움푹 들어간 유두에 마물의 침이 가득 고여 혀가 하는 행동을 부드럽게 도왔다.
차마 고통이라 부를 수 없는 괴상한 감각이 칼리번을 괴롭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이런 짓을 당하기를 원치 않았다. 더는 참지 못하고 거미줄 밖으로 팔을 뽑아냈을 정도였다.
“윽—!”
그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칼리번의 등을 타고 척추로 파고들었다. 잘 휘는 얇은 검이 통째로 박힌 것만 같았다. 칼리번은 눈동자를 뒤로 굴렸다. 거대한 날개의 끝에 솟은 것이 방어용 발톱이 아닌 독니였을 줄이야, 예상치 못했다.
“크, 큿…. 흐, 으…….”
등을 통해서는 차가운 독이 파고드는 감각이, 그리고 가슴으로는 칼날 같은 혀가 옅은 살을 헤집고 빨아 대는 감각이 뜨거운 물과 찬물처럼 섞였다. 칼리번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퍽!
오른손에 쥔 단검으로 마물의 목을 쑤셨다. 칼리번의 팔뚝 위로 꿈틀거리며 핏줄이 섰다. 가슴살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것의 목을 썰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물은 제 목이 잘려 나가고 있음에도 이빨로 칼리번의 가슴살을 뜯어내지 않았다. 더욱 급하게 혀를 놀리며 칼리번의 가슴에서 무언가를 빨아내는 데만 집중했다. 그 모습이 본능적인 혐오와 역겨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단검으로 쑤컥거리며 마물의 대가리를 베어 내니 살점과 푸른 피가 아래에 깔린 칼리번의 얼굴과 가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부릅뜬 두 눈은 물론이고, 이를 악물고 있어도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몸통과 대가리가 완전히 분리되고 난 후에도 한동안 마물의 혀가 칼리번의 그곳을 핥아 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 마물은 칼리번이 상대했던 적 중 허무할 정도로 약했으며 동시에 가장 역겨운 놈이었다.
“하, 하아…….”
칼리번은 거미줄에 걸려 허공에 늘어진 채로 숨을 헐떡였다. 마물이 죽은 후에도 거미줄은 녹아 사라지지 않고 칼리번의 몸을 조였다.
‘…독이….’
척추에 박힌 독이 서서히 몸 안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괴상한 자세로 허공에 떠 있었지만, 허락된다면 잠시 이대로 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럴 수는 없지.
칼리번은 침착하게 단검의 손잡이를 입에 물었다. 가슴에 박힌 마물의 대가리를 떼어내자, 독니가 뽑혀 나간 상처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흠….”
칼리번은 마물의 대가리를 들고 마주 보았다. 썰린 목에서 푸른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상한 짓거리를 하다가 공격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얌전히 죽어 주다니.
‘혹시 본체가 따로 있는 건가?’
이런 멍청하고 약한 마물은 처음이라, 완전히 죽이고 난 다음에도 어딘가 꺼림칙했다.
“읏…?!”
순간, 칼리번의 몸이 휘청였다. 마물의 피가 닿은 거미줄이 뒤늦게 녹기 시작했다. 아마도 평소에는 거미줄로 먹이를 가둬 두었다가, 침이나 피로 녹여서 잡아먹었겠지. 칼리번은 한 손에 쥔 대가리를 왼팔 위로 올리고는 피가 떨어지도록 흔들었다. 두 팔이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그 후, 칼리번은 두 손에 마물의 피를 손에 바르고 다리에 묶인 거미줄을 움켜쥐었다. 칼로 잘라 내려 했을 때는 강철처럼 단단했던 거미줄이 눈 녹듯이 스러져갔다.
쿵! 이어서 칼리번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오래 묻어 있으면 피부도 녹이는군.’
칼리번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검을 쥐며 굳은살이 잔뜩 배긴 손바닥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칼리번의 가슴도 침이 닿은 부위만이 피부가 벗겨져 색이 달랐다. …그리고 하필이면, 마물의 목을 썰어 내면서 그 피가 동굴 이곳저곳에 흩뿌려졌다.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다.’
떠나려곤 했지만, 예정보다 빠른 퇴거였다. 칼리번은 거미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기었다. 아직 척추가 찔린 곳이 회복되지 않아 일어나 걷기가 힘들었다. 몸에 묻은 마물의 피를 닦아 내지도 못했다. 칼리번과 같은 마물 혼혈이야 독에 당해도 며칠만 쉬면 회복이 된다. 그러니 차라리 이곳에 쓰러져 있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동굴을 나온 무렵, 칼리번은 회복력 때문인지 의지력 때문인지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여섯째 왕자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는 에레즈를 숨긴 곳으로 향했다. 독성 때문에 떨리는 손으로 수풀을 거둬내자,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 ……, …. ……! ……! …. …….”
에레즈는 검푸른 액체를 뒤집어쓴 칼리번을 알아보지 못하고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로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칼리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여섯째 왕자는 한 손에는 시냇가에서 떠 온 물주머니를, 한 손에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수풀 바닥에서 나름 주운 모양이었다.
“왕자님….”
칼리번이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제야 에레즈는 용기를 내서 마물을, 아니,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칼리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칼리번은 흰자위를 빼면 온통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누구나 두려워할 만했다.
“……!”
그리고 칼리번은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하던 얼굴이, 상대가 칼리번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서서히 안도로 변해 가는 순간을.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칠흑의 밤이, 마침내 해가 뜨며 서서히 빛으로 물들어 가는 듯했다.
“…해, …, ……어!”
에레즈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보다 위에 있는 칼리번을 쓰다듬어 주려는 것처럼.
“…저한테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울먹이던 에레즈가 덥석 안기려는 순간, 칼리번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온몸에 독을 뒤집어쓴 채로 여섯째 왕자를 안을 뻔했다. 그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피부는 단번에 녹고 말 것이다.
“어디……, 괜…….”
에레즈가 상처받은 눈을 하고는 무어라 말을 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칼리번이 그 이유를 설명하려던 찰나,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대로는 왕자를 남겨 두고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칼리번은 제 목소리가 왕자에게 제대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일단 말했다. 그러고는 비척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칼리번은 다음 은신처로 사용할 장소를 몇 군데 물색해 두긴 했다. 쉽사리 이동하지 못했던 것은 연약한 에레즈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칼리번은 종종 뒤를 살폈다. 평소였다면 발소리로 짐작했겠지만, 찢어진 고막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카…, 나……! …면, 다……!”
칼리번이 돌아볼 때면, 에레즈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열심히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뭔가 계속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가던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마득한 암벽에 막혔다. 칼리번은 왕자에게 물주머니를 가져갔다. 물을 조금 덜어 한 팔을 씻어 낸 후, 대뜸 왕자의 허리에 감았다.
“—!”
갑자기 몸이 들리자 여섯째 왕자는 토끼 눈을 하고 칼리번을 보았다. 에레즈는 팔을 바둥거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칼리번에게는 찬찬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에레즈를 안은 채로 펄쩍 뛰어 암벽에 올라탔다.
품 안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칼리번은 묵묵히 두 다리와 한 팔만을 사용해서 암벽을 올랐다. 그래서 여섯째 왕자가 더욱 버둥거린 것일지도 모른다. 고도가 높아지자 기절했는지, 아니면 포기했는지 그는 얌전히 칼리번의 팔에 매달렸다. 위로, 더 위로 오를 때마다 에레즈의 발이 허공에 대롱대롱 흔들렸다.
칼리번이 다음 은신처로 정한 동굴은 절벽 한가운데 있었다. 그동안 여러 곳을 탐색했으나 이곳이 가장 안전하고 쓸 만했다. 암벽을 타야 올라갈 수 있는 정도로 지리가 험한 만큼 접근도가 낮고, 입구는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트여 있어 마물에게 들킬 염려가 적었다. 더구나 입구 근처에는 원래 벽이었을 돌이 널려 있어 여차하면 입구를 봉쇄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빠르게 이곳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는….
절벽을 타고 기어 올라온 칼리번은 얼마 안 되는 평지 위로 올라섰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 입구 주변에는 다소나마 평평한 바닥과 메마른 돌벽에 악착같이 들러붙어 자생한 수목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 충격을 받으면 바로 무너져 버릴, 약하고 협소한 지반이었다.
“여기 계십시오.”
칼리번은 에레즈를 커다란 돌무더기 사이에 밀어 넣고는 말했다. 여섯째 왕자가 일어나려고 하자 칼리번이 어깨를 눌렀다. 그는 풀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안…! …해! 이…, ……!”
“여기 계십시오.”
“……야? …번! …. …으, …! ……, 그…!”
“돌아오겠습니다.”
“…! 아…, 부……춰!”
“여기에… 계십시오.”
귀가 들리지 않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여섯째 왕자의 말을 죄다 무시하고 있었다. 에레즈는 아직 칼리번의 부상을 모르는지 마구 말을 쏟아 냈다.
“후우……윽.”
그러나 독이 온몸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반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칼리번은 무작정 주변의 수풀을 뜯어서 여섯째 왕자에게 안겨 주었다.
“…….”
에레즈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주 겪는 일이기도 했다. 칼리번은 떠나기 전, 수풀에 손을 푹 집어넣어 에레즈의 머리를 한 번 꾹 눌렀다. 그리고 나서야 등을 돌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귓속 이명 너머로 휘, 휘 바람 소리가 들렸다. 찢어진 고막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두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회복되겠지만 그에게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칼리번은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숨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몸에 퍼진 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칼리번은 자꾸만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바로잡고 동굴 안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똑같을 것만 같았던 어둠 속에서, 안광이 번쩍였다. 무례한 불청객의 침입에 동굴의 주인이 단단히 성이 난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칼리번을 향해 성큼성큼 기어 나왔다. 거대한 체격을 지닌 회색곰이었다.
“…….”
어둠에 익숙해진 검은 눈이 회색곰을 유심히 살폈다. 회색곰은 인간계에서는 손꼽히게 강한 육식 짐승이나, 마물에 비하면 약하다. 칼리번에게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회색곰은 잔뜩 독이 올라 눈 흰자위에는 벌건 핏줄이 서 있었다. 평소 칼리번이 보아 온 곰보다는 마르고 배가 홀쭉했다. 마물로 인해 숲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먹잇감이 줄고 있었다. 칼리번이 식량 수급에 곤란을 겪는 것처럼 녀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완벽한 상태가 아닌 것은 회색곰도, 칼리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할 만한 싸움이었다. 패한 자는 이긴 자를 위한 먹이가 되어 줄 것이다.
“……! —!”
회색곰은 콧김을 씩씩거리며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포효가 들리지 않지만, 칼리번은 피부로 동굴 안이 울리고 있음을 느꼈다.
“후…….”
칼리번은 단검을 허공에 가볍게 던졌다가 고쳐 잡았다. 이 단검 하나로 벌써 수 마리의 마물을 잡았다. 그러나 장인이 벼르고 다듬어 만든 검이 아닌 은신처에 둔 예비용 단검에 불과했다. 칼리번 나름대로 수리를 했으나 어느새 상당히 닳아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큭—!”
회색곰이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뛰어오더니, 칼리번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칼리번은 뒤로 훌쩍 물러나 공격을 피했다. 마물보다 약하다고는 하나, 평범한 사람의 머리가 뽑혀 나가고도 남을 정도의 힘이다. 목표물을 잃은 곰의 앞발이 동굴 벽을 내리쳤고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그어졌다.
숨돌릴 틈도 없이 공격이 이어졌다. 사람으로 치자면 악에 받칠 정도로 필사적인 공격에 칼리번은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만 했다. 칼리번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면서도, 공격에 신중했다. 저 거대한 몸 안에 짧은 칼날을 쑤셔 넣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치명상을 입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평소였다면 그 정도 부상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은 독에 절어 있었다. 더구나 굶주린 회색곰은 제 발로 동굴 안으로 들어온 먹잇감을 쫓아내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미 마물보다도 거세게 그를 몰아세웠다.
전쟁터에서, 드물게 약한 인간이 강한 마물을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보일 때가 있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쿵!
회색곰의 앞발이 칼리번 대신 부서진 돌무더기에 푹 박혀 들었다. 회색곰이 뽑아내려 했으나 돌무더기에 잘못 얽혔는지 수 초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칼리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칼리번은 곰의 앞발을 짓밟고, 몸 위로 펄쩍 뛰어들었다. 회색곰이 다른 팔로 칼리번을 쳐 내려 했으나 간만의 차로 허공만을 쓸어 냈다. 칼리번은 뛰어오른 몸의 무게를 사용해 단검을 회색곰의 뒷덜미에 박아 넣었다.
“—!”
회색곰의 울부짖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한 몸부림이 이어졌기에 급소에 제대로 먹혔음을 알 수 있었다. 칼리번은 단검을 박은 채로 곰의 몸에 매달려, 그대로 가죽으로 반으로 찢어 버리려 했다.
“크…윽!”
단검이 곰의 몸에 박힌 채로 손잡이가 부러졌다. 결국 칼리번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통에 예민해진 곰이 부정확하지만, 훨씬 빨라진 움직임으로 칼리번의 몸을 내던졌다.
순간, 칼리번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가 방어하기도 전에, 곰의 앞발이 그의 배를 꿰뚫었다. 칼리번은 동굴 입구까지 굴러갔다.
“우욱….”
후드득, 입에서 독에 물든 검은 피가 쏟아졌다. 다행히 배가 뚫리지는 않았지만, 갈비뼈가 반은 부러진 것 같다. 분노한 회색곰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쿵, 쿵, 대지를 울리며 다가왔다. 칼리번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두 주먹뿐이었다.
그런데… 다가오던 곰이 헛발을 짚고 비틀거렸다.
‘통했다!’
회색곰의 몸에 박아 넣은 칼은 독거미의 목을 벤 칼이었다. 독성이 조금씩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만약 칼리번이 여기서 죽더라도, 그의 온몸에는 독이 퍼져 있었다. 저 회색곰은 그를 먹든, 먹지 않든 반드시 죽을 것이다.
적어도 남은 왕자는 새 은신처를 구할 수 있겠지.
“…!”
회색곰은 두 발로 서서 포효했다. 거대한 울림이 대지를 통해 느껴졌다. 그것은 네 발로 달려 칼리번을 향해 뛰어들었다. 동굴 밖은 좁은 바닥과 나무 외에는 설 곳 없는 절벽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크, 윽…!”
회색곰은 칼리번의 오른 어깨를 물었다. 칼리번은 달려든 회색곰의 힘을 이용해 녀석을 절벽 너머로 내던질 작정이었다.
그는 곰에게 물어뜯기면서도 몸을 틀었다. 거대한 곰의 하중을 감당하는 척추가 부서졌는지 몸 안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회색곰의 몸이 땅에 착지하지 못하고 절벽 너머로 넘어가자, 칼리번의 몸도 붕 떴다.
“으윽!”
칼리번은 떨어지기 직전, 한 팔로 암벽을 움켜쥐었다. 칼리번의 몸에 이빨을 박아 넣은 회색곰이 버티려 했으나, 엄청난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칼리번의 한 팔이 뜯겨 나갔다.
회색곰은 칼리번의 팔 하나를 문 채로, 끝없는 암벽 아래로 추락했다. 비명은 칼리번에게 들리지 않았다. 귀 안쪽을 파고들다 못해 뇌마저 구멍을 낼 것 같은 바람 소리 외에는.
“허억, 허억……. 윽, 크으…….”
칼리번은 아래를 보지 않았다. 한 손으로 간신히 매달려 있는 절벽 위에 올라서려 할 때였다.
“…!”
칼리번은 절벽 위에 선 사람을 보고는 하마터면 손을 놓을 뻔했다.
“…왕자님.”
어느새 달려온 에레즈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두 손에 안은 짐을 모두 내던지고는, 칼리번의 팔을 잡았다.
“물러…나십시오.”
만약 에레즈가 버티지 못하면 절벽 아래로 함께 떨어질 수 있다. 그러자 에레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들고 다니던 나뭇가지를 칼리번에게 내밀었다.
“아…….”
아무래도 여섯째 왕자는 둘도 없는 천재인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그것을 입에 물었다. 비록 이빨이 뽑혀 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한 팔로만 올라가는 것보다는 확실히 수월했다. 에레즈는 나뭇가지를 두 손으로 잡아당겼고, 곧 칼리번의 상체가 평지로 끌어 올려졌다.
“위…, …터면, …카, ……! 저……. …로, …. 떨……!”
여섯째 왕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칼리번 앞에 주저앉아 무어라 말을 했다.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아직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아…….”
칼리번은 에레즈 너머의 동굴을 보았다. 시커멓고 커다란 구멍은 마치 위장으로 향하는 목구멍처럼 보이기도 했다. 칼리번은 홀린 사람처럼 그곳만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왕자…님. 아까 그 자리에…. 으윽…. 계십시오.”
칼리번이 말했다.
“그곳에 계십시오.”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했으면서도 칼리번은 다시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에레즈가 무어라 항의를, 질문을 하는 것도 같았다.
“숨어 계십시오.”
칼리번은 같은 말만을 반복하는 인형처럼 말했다. 에레즈가 따라오려 하자, 칼리번은 손을 내밀어 다가오는 그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걸음이었다. 귀도 성치 않은데 한 팔까지 잃으니 균형감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는 몇 번이나 무릎을 꿇고 넘어질 뻔했다. 지혈이 되지 않고 잘린 곳에서 검은 피가 계속 쏟아져 내렸다.
동굴 안은 회색곰이 오래전부터 터전으로 삼았는지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났다. 칼리번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동굴 가장 깊은 곳에는… 곰이 사용하는 커다란 둥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새끼 곰 두 마리가, 겁에 질려 몸을 딱 붙인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새끼라고는 해도 회색곰인데, 체격이 유독 작았다. 아마 제대로 먹지 못해서겠지.
전쟁터에서, 전력 차이가 크게 나는데도 드물게 인간이 엄청난 위력을 보일 때가 있다. 힘은 마물이 압도적으로 강했고, 생존 의지는 마물이나 인간이나 비슷하다. 그런데도….
그때는….
“…….”
칼리번에게는 더 이상 칼이 없었다.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새끼들을 품에 안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칼리번이 누누이 말했건만, 에레즈는 숨어 있지 않고 여전히 동굴 입구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칼리번은 품 안의 곰 두 마리를 들키고 말았다.
“…앗! 혼…, ……마!”
에레즈가 동그란 새끼 곰을 알아보고는 칼리번에게 다가왔다.
“숨어 계십시오.”
“이…, ……아! …!! …의, ……가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꾸만 말을 했다.
“숨… 어, 허억…….”
칼리번은 왕자에게 말하려던 순간, 정신이 끊겼다 다시 붙었다.
“큭…….”
눈앞이 어질거렸다.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왕자가 보는 눈앞에서 한 손으로 새끼 곰의 대가리를 으깼다. 그러고는 시체를 절벽 아래로 던졌다.
“…….”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여섯째 왕자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칼리번을 바라보기만 했다. 푸른 시선이 꼭 거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대로 비춰 주었다. 칼리번이 남은 새끼 곰의 대가리를 움켜쥐었다.
“…!”
에레즈가 화들짝 놀라 칼리번의 팔을 붙잡았다.
“아…! …! …직, ……, 굳…, …!”
여섯째 왕자가 마구 고개를 내저으며 칼리번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섯째 왕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둔감한 칼리번치고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에 잡힌 채로 그 일을 마저 끝냈다. 또 하나의 시체가 어미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
칼리번은 에레즈를 돌아보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용병이었다. 돈을 받고 마물을 죽이고, 인간을 지키는 용병이었다. 그전에는, 짐승에게서 고기를 취하는 백정이었다. 그에게 죽이는 것이란 일상이었다. 그리고 또…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는, 마물 혼혈이기도 했다. 사내의 배를 찢고 태어난.
칼리번이 베는 것은 ‘나쁜’ 마물만이 아니다. 전쟁은 흑과 백으로만 분리되는 체스판이 아니었다. 때로는 인간을 죽이기도 하며, 더욱 심할 때는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이 죽이거나 죽게 두어야만 할 때도 있었고 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다른 마을이 몰살되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래도 칼리번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한 번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자신은 왜 떳떳하게 에레즈 프리드웬을 돌아보지 못하는가?
더는 반짝이지도 않는 소년 앞에서, 칼리번은 자꾸만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마물을 죽이는 모습도, 구차하게 벌레나 짐승의 내장을 먹으며 버티는 모습도, 반격조차 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어린 것을 죽이는 모습도.
그의 가슴속에 이전에 없던 무언가가 생겨났다.
‘…기사 놀이라도 하고 싶었나.’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흘러내린 피가 검은 두 눈에 고였는지 눈가가 축축해졌다. 푸른 독이 결국 심장까지 스며든 모양이었다. 어느덧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황금 피라고 들어 봤냐?>
젠이 물었다.
‘…….’
칼리번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지금 에레즈 프리드웬과 숲에 떨어진 용병대 대장이 아니었다. 용병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었다. ‘검은 어금니’에 입단한 후, 그는 언제나 젠과 함께였다.
<네. 그래서 프리드웬 왕실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풋내 나는 칼리번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들 사이에는 잡나무를 쌓아 올려 만든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 기억난다. 칼리번은 신입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일,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그럴 때면 젠은 종종 밤에 찾아와 칼리번의 상대를 해 주곤 했다.
<혼자서 삼천 마리나 되는 마물을 상대했다는 거? 아니면 무너진 성벽을 혼자서 하룻밤 만에 다시 세워서 복구했다는 거?>
젠이 낄낄거리며 물었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웬 왕실의 무용담은 끝도 없었지만, 대체로 그런 허황된 이야기가 인기가 많았다.
<근데 말이야, 그런 건 사실 알파면 대충할 수 있지 않냐?>
젠이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불꽃의 그림자가 젠의 얼굴 위로 일렁였다.
<…….>
칼리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숲이고 다들 잠든 나머지 두 사람밖에 깨어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진즉 기만죄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런 굉장한 일을 해내면서도 정작 여자아이만 태어나지 않았지. …수백 년 동안 단 한 명도.>
젠은 다 들리는 혼잣말을 했다. 칼리번은 불을 뒤적거려 다 죽어 가는 불씨를 살렸다. 찬란한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의 이면은, 그들이 마물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불쾌한 뒷담이었다.
칼리번이 대화를 받아 주지 않자, 젠은 재미가 없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언젠가 여자애가 태어나면 우리 같은 마물 혼혈은 쓸모가 없어지려나?>
<…글쎄요.>
<아니면 우리도 마물처럼 깡그리 쓸려 나가려나….>
젠은 칼리번이 기껏 다듬은 불 안으로 땔감을 던져 넣었다.
<그것도 뭐, 나쁘지 않네.>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불길처럼 흔들렸다. 새로운 나무를 집어삼킨 불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
칼리번은 땅을 보았다. 자신의 것과 달리, 젠의 그림자는 사람이 아닌 거대한 짐승의 형태였다. 칼리번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보니 젠의 모습과 동일한 그림자였다. 역시 눈의 착시에 불과했다.
<…제가 양아버지께 들은 소문은, 죽음밖에 남지 않은 사람을 살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칼리번이 말했다. 젠의 웃음이 뚝 그쳤다.
<뭐어? 성녀 이야기를 잘못 들은 건 아니고?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성녀님들도 못 해. 애초에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거겠지.>
싸늘하게 대답한 젠은 대뜸 불더미를 발로 걷어찼다. 불꽃을 품에 안으며 타오르던 나무 탑이 무너지고 말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불똥이 칼리번 쪽으로 튀었다. 따끔한 열기가 얼굴에 뿌려진다. 칼리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칼리번.>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불길 사이로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칼리번은….
“…….”
뒤통수와 등이 돌바닥에 사정없이 갈리는 감각에 드문드문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한쪽 다리를 잡고는 어디론가로 끌고 가고 있었다. 아니, 끌고 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몸이 조금씩, 아주 느리게 이동하고 있었다. 의지를 잃은 몸뚱이는 덜컥거리며 긁히고 찢어졌다.
“후우, 으으……. 흐, 하아……. 하아아…….”
마음 같아서야 도살장에 끌려가는 고깃덩어리처럼 질질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몸은 시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간헐적인 고통에 반사적으로 정신을 차려 죽지 않았음을 증명할 뿐, 칼리번은 이내 고통에 눈을 감게 되었다.
“…으….”
칼리번의 얼굴에 무언가가 닿았다. 괴물의 혀인 줄 알았는데 다섯 개로 갈라졌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었다. 손은 축축이 젖어 있었는데, 칼리번의 얼굴에 묻은 것들을 닦아 냈다. 이어서 입 안으로 소량의 물이 흘러들어 왔다. 한 모금의 물이 들어온 것만으로 몸 안의 장기들이 꿈틀거렸다.
‘기껏, 챙겨 온 물을 전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서도 칼리번은 제 몸을 닦고 입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그에게는 오른손이 없었다. 가물거리던 칼리번의 눈이 다시 감겼다.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꺼풀 너머로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또 무엇인가?
불타 버린 마을이었다. 융성하지는 못했으나 사람과 가족이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박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았을 뿐, 온통 잿더미뿐이었다. 칼리번은 맨발로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잿더미 위를 걸었다. 발바닥이 벗겨지고, 검게 타들어 갔다. 지금의 그는 갓 용병대에 들어갔을 때보다 더 어리고, 더 미숙했다.
지금 칼리번은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흑……. 흐윽, 흑…….>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칼리번은 그것이 자신이 찾는 것이기를 바라며 등대를 쫓는 배처럼 따라갔다. 한 소녀가 무너진 집터에 숨어 울고 있었다. 칼리번은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칼, 엄마랑 아빠가 없어….>
소녀가 칭얼거렸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 칼리번이 말했지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물이… 아빠를 가져가 버렸어….>
아이의 작은 손이 저 멀리 가리켰다. 지금도 붉게 불타고 있는 숲 외에는 아무것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알리샤.’
칼리번은 손을 뻗었다.
알고 있다. 이것은 꿈이다. 과거가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진짜가 아니다. 고통 속에서 뇌가 들끓자 피어오르는 연기에 불과하다. 알리샤는 혼인하여 아이를 가졌을 정도로 자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손을 뻗었다. 어린 알리샤의 작고 손을 잡았다. 그러자 소녀의 모습이 불꽃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전부 사라졌는데… 손안에 잡힌 연약한 손만은 허상이 아니었다.
“…….”
칼리번의 눈앞이 또다시 깜깜해졌다. 시력이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주변이 어두운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 허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폐에 구멍이 뚫렸는지 피식거리는 숨밖에 내뱉지를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금, 칼리번은 누군가를 간절히 쥐고 있었다.
“카, 카…… 칼……?”
진공 상태던 칼리번의 귀가 드디어 소리를 받아들였다.
“아……! 깨… 깨, 깨어, 나, 난, 거…야?”
에레즈의 손가락이 굳은살로 뒤덮인 칼리번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칼리번은 그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떨어진 손은 다시 달려와 칼리번의 손등을 수없이 쓰다듬었다.
“카, 칼…… 칼…… 이, 이, 일어나……!”
다시 이어 붙은 고막으로 울음이 흘러들었다. 도대체 그는 얼마나 울고 있었던 것일까?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신기할 만큼 잔뜩 쉬어있었다.
“흐, 으으…… 어, 어서…. 이, 일어…나, 줘…….”
에레즈의 손이 칼리번을 가볍게 흔들었다. 칼리번의 숨소리에 미약한 신음이 섞였다.
“아, 아…! 미, 미, 미안, 해, 미, 미안해……. 내, 내가 잘못했어…. 아, 아직, 아, 아, 아픈 거야? 미, 미, 미안…….”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 누, 눈을, 떠……. 왜, 왜 아, 안 이, 이, 일어나는, 거야? 나, 나…… 무, 무, 무서워….”
칼리번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이거, 마, 마, 마셔, 다, 다, 다, 줄, 게…. 저, 전부 주, 주, 줄 테니까……. 하, 한 번만….”
덜덜 떨리는 손길과 함께 칼리번의 입가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괘, 괘, 괜찮, 다고, 마, 말, 말해 줘…….”
손가락으로 칼리번의 입술과 혀 안쪽을 적신 것이다. 칼리번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왕자가 줄곧 해 왔던 것처럼 물을 조금 흘려 넣었다.
“주, 죽으면 아, 아, 안 돼…. 흐, 흐윽…. 주, 주, 죽지, 마, 마아…. 제, 제, 제발…. 부, 부, 부탁이야…! 윽, 흐윽…. 이, 이렇게, 비, 빌 테니까…….”
칼리번은 이제 물 한 모금조차 삼키지 못했다. 입 밖으로 흘러나온 물이 썩어 들어가는 피부 위를 부질없이 적셨다.
“흑, 흐윽…. 어, 어째서…? 아… 아, 안 돼…! 주, 주, 죽으면……!”
왕자는 포기하지 않고 남은 물을 다시 흘려 넣었다. 이번에는 칼리번이 기침을 하며 물을 전부 토해 냈다.
“아, 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조차 해내지 못하자 에레즈는 아이처럼 울기만 했다. 차라리 다시 귀가 먹었으면 좋을 정도로 그 울음이 애처로웠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칼리번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에는 손가락과 다른, 축축하지만 훨씬 부드러운 무언가가 칼리번의 입에 닿았다. 그것은 좀 더 끈질겨서, 포기하지 않고 칼리번의 입을 문질러 벌렸다.
“으… 흐으….”
칼리번이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못하자, 물컹한 살이 물을 안고는 입 안으로 들어왔다. 미적지근할 정도로 온기를 품은 물이 칼리번의 혀 아래에 고였다. 가는 손이 칼리번의 턱을 감싸고는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침내 물이 뜨겁게 타오르는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 물은 전과 달리 조금 더 뜨겁고… 조금 더 짰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독이 유일한 무기인 마물은 그 몸체는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독까지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될 일이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닿는 순간 새까맣게 몸이 녹아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칼리번이 마물에게 무모하게 덤벼든 것은, 그가 가진 무기가 변변찮은 단검과 무식할 정도로 강한 육체뿐이었기 때문이다. 칼리번은 하루 정도면 정신을 차리고, 이틀이면 회복될 것이라 예상했다. 다른 용병들이 그만치 앓았었으니까.
연이은 전투로 팔이 잘리고 뼈가 으스러진 것이 회복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단순히 독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후폭풍이 컸다.
“하아…. 으, 으윽…….”
시꺼먼 숯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펄펄 끓는다. 그 열기가 온몸에 퍼져 뼈가 녹고 살과 잇몸이 흐물거렸다. 손톱과 발톱, 이가 당장 뽑힐 것처럼 흔들거렸다. 머리카락 한 올, 살점 하나까지 검게 타 버려 흔적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칼리번이 입은 부상은 독과 타박상이었지, 화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불타고 있었다. 이대로 껍데기만 남고 속은 전부 녹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칼리번은 열에 들뜬 숨소리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하아, 아……. 하아…….”
몇 날 며칠을 불타오르다니, 지옥도 감히 이름을 대지 못할 고통이었다. 이 불은 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야만 비로소 죽음과 함께 그칠 것 같았다. 비 오듯 흐르는 식은땀도 그를 식혀 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간신히 정신을 붙잡는 까닭은, 울고 또 우는 흐느낌과 간헐적으로 흘러들어 오는 물 한 모금, 그리고 향기였다.
‘꽃….’
꽃을 사랑하는 다정한 성미는 아니었다. 어린 누이가 부탁하면 꺾어 주는 정도였다. 칼리번은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할 줄은 알았지만, 사실 손재주는 없었다. 꽃도 그러했다. 알리샤는 칼리번이 만든 화관은 투박하고 예쁘지 않다며 투덜거렸지만, 항상 집에 돌아갈 때까지 쓰곤 했다.
칼리번의 고향은 봄과 여름이 되면 들꽃이 산 전역에 피어나곤 했다. 그러나 마물이 들이닥친 후로는 모든 것이 변했다. 산은 불타오르고 풀은 마물의 독기에 썩어 갔다. 10년이 지나서야 숲은 회복되어 간신히 풀이 자라고 꽃이 피었지만, 아무도 그 아름다움을 즐기지 않게 되었다. 알리샤조차도.
이제야 깨달았다. 여섯째 왕자에게서는 어린 시절의 그 향기가 났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기 전, 즐거워하고 사랑했던 순한 꽃의 향기가…. 고귀한 분을 들꽃에 비유하면 어울리지 않겠지만, 사람들 손에 소중히 키워진 향기가 짙고 귀한 꽃의 이름은 하나도 몰라서 어쩔 수가 없다.
칼리번은 알리샤를 꽃밭에서 놀게 두고 나무에 기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청명한 하늘. 그 하늘색을 묻혀 온 옅은 바람이 어린 칼리번을 잠재웠다.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라, 칼리번 자신조차도 잊고 있었다….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곧 죽게 생겼다. 칼리번은 확신했다.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어 보지는 못하지만, 분명 손끝부터 까맣게 썩어 가고 있을 것이다. 칼리번의 몸은 기본적인 생리 활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섯째 왕자에게 그런 추한 모습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만 걱정인 것은, 에레즈가 계속 곁에 달라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여섯째 왕자는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칼리번의 팔을 억지로 들어, 그 품 안에 쏙 들어갔다. 칼리번의 가슴과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울고 또 울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에레즈의 건강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죽고, 어리고 연약한 그가 이런 곳에 혼자 남게 되면…. 과연 죽은 자신의 몸을 뜯어먹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 * *
항상 칼리번의 곁에서 머물던 향기가 밖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흩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칼리번은 몸이 들끓고 정신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의 향기를 찾았다.
“…자……님….”
칼리번은 목구멍을 필사적으로 쥐어 짜냈다. 간신히 입에서 사람의 말과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크윽, 하아…. 하아…….”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칼리번은 낮게 신음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 안… 돼!”
그때, 칼리번의 귀로 왕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아주 미약해서 들리는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
그러나 칼리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허어, 윽…!”
칼리번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뒤집었다. 온몸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누군가 뼈를 전부 뽑아낸 후, 마구잡이로 재배치시킨 것 같았다.
두 눈을 떴으나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은 전처럼 허리를 세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기어갔다. 그 모습은 배를 깔고 기어 다니는 뱀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처참한 꼴이었다. 무릎으로 바닥을 딛고, 기고, 남아 있는 한 팔로 앞을 더듬거리며 두 눈 대신 장애물을 분간했다.
“드, 들어오면, 아, 안 돼!”
동굴 입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씩 강해졌다. 에레즈의 외침도 더욱 크게 들렸다. 칼리번의 두 눈에도 서서히 빛이 분간되었다.
칼리번은 바닥에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여섯째 왕자가 어째서인지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칼리번을 절벽에서 끌어 올렸던 그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칼리번이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엉성하고 우스운 꼴이었다.
“…….”
자세히 보니, 왕자 주변에 작은 생물들이 쉼 없이 날아다니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인간계의 새나 박쥐 정도의 크기에, 실제로 행동 양식이나 공격력도 그와 비슷한 소형 마물이었다. 특이할 점은 후각이 마물 중 가장 민감하며 흡혈을 한다는 점이다. 마계에서 마물이 소환되면 이것들은 가장 먼저 앞장서서 인간과 가축의 피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한다. 시체에 달라붙는 파리떼처럼 제일 먼저 꼬여 드는 것이다.
“아, 흐, 흐윽…. 아, 아파…!”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십수 마리가 왕자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마물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었다. 몇 마리는 나뭇가지에 맞아 땅으로 떨어지거나 물러났지만, 몇 마리는 기회를 틈타 여섯째 왕자의 팔과 목에 들러붙어 피를 빨아 댔다.
“…….”
불길에 타오르던 몸이 거짓말처럼 차갑게 식어 갔다. 칼리번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척추가 부서져 앉지조차 못했는데,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칼리번의 두 눈에는 오직 에레즈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리번은 휘청거리며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여섯째 왕자의 몸에 들러붙은 더러운 거머리를 한 손으로 쥐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것들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칼리번의 안에서 이미 머리통이 으깨졌다.
칼리번은 순식간에 그것들을 떼어 냈다. 눈물에 젖은 푸른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칼리번을 올려다보았다. 칼리번은 여섯째 왕자의 앞을 제 몸으로 가로막았다.
“들어가, 계십시오!”
칼리번이 포효하듯 외쳤다. 에레즈는 겁에 질렸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어서!”
칼리번이 모래가 낀 것처럼 서걱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에레즈는 몸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먹물을 끼얹은 것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밤과는 달랐다. 자연스러운 밤하늘이었다면 검회색의 구름이 끼고, 별이 알알이 박혀 다소나마 음영이 존재했을 것이다.
지금은 오직 은빛 달처럼 동그란 구멍 하나만이 뚫려 있었다. 달빛처럼 은은히 뿜어내는 빛이 아니었다. 그저 구멍 안과 밖의 세계가 달라, 색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체에서 구더기가 터져 나오듯 마물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었다.
‘검은 손자국이… 하필이면, 지금…!’
칼리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마물 몇 마리를 제외하고는 아직 이곳을 인지한 마물은 없어 보였다. 평소와 같이 번식과 살육을 위해 인간계에 온 것이라면, 이런 외진 곳까지 마물이 도달할 확률은 낮았다. 그러나 오메가가 인간계에 있었다. 만약 다른 이유로 소환된 것이라면….
‘이대로는 위험하다.’
오랜 세월 용병으로 지내 온 칼리번의 본능이 붉게 번뜩였다. 칼리번은 입구 주변에 쌓인 거대한 바위 몇 개를 노려보았다. 원래는 이 동굴의 입구였다가, 무언가의 힘에 의해 부서졌을 것이다. 일단 가장 큰 바위로 입구 대부분을 막고, 동굴 안쪽에 작은 돌로 남은 부분을 메꾸면….
“큭…!”
칼리번은 팔이 잘린 몸을 바위에 기대고, 한 팔로 바위를 밀기 시작했다. 겉보기와 달리 바위는 땅속에 깊숙이 박혔는지, 아무리 힘을 주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아문 상처가 다시 터져 잘린 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크으, 흐아아아—!”
칼리번은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온 힘을 쏟아부었다. 입 밖으로 거친 숨과 기합이 새어 나왔다. 그 기세에 응답한 것일까, 바위가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쿠웅,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바위가 먼지를 일으키며 입구로 굴러갔다. 더불어 칼리번의 몸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으, 욱….”
칼리번은 검은 피를 울컥 쏟아 냈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진 것만 같았다. 내장이 쏟아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입구를 완전히 닫지 못했다.
‘한 번 더….’
칼리번은 으스러진 몸을 최대한 쥐어짰다. 한 번 물꼬를 트고 나니, 두 번째 시도는 그나마 수월했다. 쿵, 땅이 울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입구의 반 이상이 바위에 가려졌다. 슬슬 칼리번도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벌어진 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칼리번은 방금까지 난투를 벌인 바위를 타기 시작했다.
한 팔로 바위를 타는 일은 여섯째 왕자를 데리고도 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난이도 자체가 달랐다. 올라갈 때는 간신히 매달렸으나, 동굴 안으로 내려올 때는 더는 기운이 남지 않아 그대로 구멍에 몸을 던졌다. 착지가 아닌 추락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몸 어딘가가 부러진 것 같았지만 그딴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
추락 후, 잠시 정신이 끊겼던 칼리번은 눈동자를 굴려 앞을 보았다.
“카, 칼…….”
여섯째 왕자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구가 닫혀 동굴 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의 얼굴을, 표정을 살필 수 있었다. 동굴 안에 야광 이끼가 껴 있어 주변이 희미하게 빛이 났기 때문이었다. 회색곰을 사냥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흑, 흐윽…….”
여섯째 왕자의 하얀 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다쳤다. 칼리번에게는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칼리번은 바닥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사과부터 했다.
* * *
칼리번이 눈을 떴다. 주변은 어두웠다. 그는 자신의 몸을 챙기기보다 여섯째 왕자를 먼저 찾았다. 분명 곁에 있을 텐데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설마 마물이 습격했다든가,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지….
“……아.”
…싶었는데, 여섯째 왕자는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칼리번의 뺨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닿았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오른팔이 없는 칼리번이 혹여나 자세를 잡지 못할까, 상체를 숙여 칼리번의 어깨를 감싸 안기까지 했다. 몸을 웅크린 에레즈의 모습은 토끼나 고양이, 강아지…. 하여간에 칼리번이 아는 모든 부드럽고 따뜻한 동물 같았다.
“…….”
믿기지 않았다. 꿈이라고 치기에는, 칼리번이 이런 꿈을 꿀 정도로 파렴치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것일까? 칼리번에게야 편했지만, 연약한 왕자에게는 더없이 불편한 자세였다.
“왕자님….”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뺨에 닿는 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니 앉은 채로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수많은 마물과 싸워 온 용병대장이 여섯째 왕자의 강력한 속박에 가로막혀 꼼짝도 하지 못할 때였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어 와, 칼리번의 뺨을 스쳤다. 그 바람이 칼리번이 기절하기 전의 기억을 깨웠다. 입구는 아직 완전히 봉쇄되지 않은 상태였다. 칼리번의 몸이 꿈틀거렸다.
‘마저 닫아야….’
사람 하나가 간신히 오갈 정도의 구멍에 불과했으나, 운이 나쁘면 마물이 기어들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입구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여섯째 왕자를 깨우는 수밖에 없었다.
“윽…!”
칼리번은 최대한 에레즈를 깨우지 않으려 했으나, 온몸을 뒤틀지 않고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릎에서 머리가 굴러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고작 그 정도 움직임에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젠장….”
마물들에게 공격당하는 에레즈를 보고 펄펄 날뛰었기에 어느 정도 회복된 줄 알았다. 아무래도 그때만 잠시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된 모양이었다.
“으음…. 응…?”
칼리번이 품 안에서 벗어나자, 에레즈는 자연스레 눈을 떴다.
“아…. 아, 안 돼!”
여섯째 왕자가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가는 칼리번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칼리번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 가, 가, 가면… 아, 안 돼!”
당황한 에레즈가 무작정 칼리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크, 윽…!”
칼리번의 몸이 앞으로 넘어지고, 에레즈는 그의 등 위로 엎어졌다. 엇나간 척추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 이러지 마십, 윽…. 왕자님….”
칼리번은 낮게 신음했다. 평소였다면 여섯째 왕자 정도는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무게를 견디는 것조차 버거웠다.
“시, 시… 싫어…. 아, 아, 안 돼! 아, 아프잖아…. 가, 가, 가지 마!”
에레즈는 칼리번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허억……. 나, 나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입구를… 막기 위해….”
칼리번이 간신히 말을 뱉었다. 에레즈가 고개를 들었다.
“하, 하지 마…. 저, 저, 저 정도로는… 아, 아무도, 모, 못 들어, 오, 올, 거야…!”
“하지만… 위험, 합니다.”
“더, 더는….”
에레즈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더, 더 이상… 다, 다, 다치지 않았으면, 조, 좋겠어…. 무, 무섭단 말이야….”
“…….”
“네, 네가, 주, 죽기라도 하, 하면…… 나, 난, 어, 어떡해……?”
“…….”
“…가, 가지 마…! 하, 하, 하지 마…. 그, 그냥…… 여, 여기에, 이, 있자……. 아, 아무것도, 하, 하지 말고……. 꼬, 꼼짝, 아, 않고…….”
여섯째 왕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칼리번은 엎드린 채로 동굴 입구를 노려보았다. 돌로 막혀 있지 않은데도 틈이 시커먼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직도 마물이 소환되는 중임이 틀림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막아야 하지만….
‘몸이 좀 더 회복된 후에 하자….’
칼리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안쪽에 숨으면… 들키지 않을 겁니다.”
“…아! 으, 응!”
칼리번은 에레즈의 애원을 받아들였다. 그는 여섯째 왕자의 도움을 받아 동굴 안쪽으로 이동했다.
에레즈는 최선을 다해 부축했지만,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처음이라고 했다. 칼리번은 수차례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에레즈는 자신을 자책하며 연신 사과를 했다. 칼리번은 믿기지 않았다. 아직 체격이 미숙한 그가 커다란 칼리번을 옮기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굴 가장 안쪽에는, 회색곰이 새끼를 보살피기 위해 만든 공간이 있었다. 동굴에 산재한 뾰족하고 거친 돌들을 모두 밖으로 밀어내어 땅이 고르고 평평했다. 회색곰은 이전에 칼리번이 여섯째 왕자에게 알려 주기도 했었던 고양이 꼬리 풀의 솜과 제 털과 섞어 바닥에 깔아 두었다. 에레즈는 칼리번을 그곳에 눕혔다.
“미, 미안….”
“네…?”
에레즈가 또 사과하기에 칼리번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 도, 동굴, 아, 안에… 이, 이, 이런 곳이 이, 있는 줄 아, 알았다면… 지, 진작에 오, 옮겼을 텐데…. 모, 몰랐, 어….”
“…….”
“미, 미안….”
여섯째 왕자는 입술을 깨물고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있었다. 물론 칼리번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에레즈에게는 모든 상황이 낯설 테니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왕자님.”
“으, 응…?”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알려 주십시오.”
칼리번의 부탁에 에레즈는 자책을 그치고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칼리번이 쓰러진 후, 여섯째 왕자가 그를 동굴 안으로 옮겼다는 것. 칼리번의 몸이 펄펄 끓기 시작해서 이대로 그가 죽을까 두려웠던 나머지 물을 전부 사용했다는 것. 그래서 더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는 것과 갑자기 하늘에 검은 손자국이 생기며 시커멓게 변했다는 것, 날개가 달린 소형 마물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까지….
그러는 사이, 벌써 나흘이 지났다고 한다. 아니, 나흘까지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고 가늠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하늘이 새까매서 더는 셀 수 없었다고 했다.
“…….”
최악의 상황이었다.
“내, 내가, 자, 잘못했지…? 미, 미, 미안해….”
에레즈는 하지도 않은 잘못을 빌었다. 칼리번이 푹 한숨을 내쉬자, 여섯째 왕자의 표정이 더욱 울상이 되었다.
“왕자님.”
칼리번은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왕자는 벌써부터 겁에 질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으, 응…?”
“저를 버리지 않고… 곁을 지켜 주셔서.”
“…아….”
에레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칼리번을 뚫어지게 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 뜨거운 시선을 받아들였다. 장난도, 농담도, 비아냥도 아니었다. 당연히 해야 할 감사를 표했을 뿐이다.
그는 용병으로 살아왔다. 전투 중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동료를 버리고 가야만 할 때도 있었다. 칼리번이 여섯째 왕자를 구하기 위해 젠을 두고 도망쳤던 것처럼.
그러나 에레즈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써서 칼리번을 살리려 애썼다. 칼리번은 고개를 숙일 수가 없기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그렇지, 아, 않아…!”
에레즈가 불쑥 외쳤다.
“그, 그저…… 네, 네가 어, 없으면…… 무, 무서워서…….”
칼리번이 화를 내거나 비난을 하지 않자, 왕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나, 나는… 그런… 대, 대단, 한, 이, 일을 하, 한 게… 아, 아니야….”
그러더니 결국 눈물을 보였다.
나의 오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