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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 (1)

좆같다.

헐떡거리며 산을 오르고 있는 용병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보급이 끊긴 지도 벌써 나흘. 다음 보급지까지 산 하나만 넘으면 된다는 말만 믿고 그들은 무작정 걷고만 있었다. 진짜 뒤질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산만 버티면 된다. 이 산만 넘으면…. 눈 밑이 퀭해진 채로 중얼거리던 중이었다.

“다들 저기 좀 봐!”

용병대원 한 명이 하늘을 가리켰다. 터벅터벅 걷던 걸음들이 하나둘씩 멈췄다. 마냥 푸르기만 하던 하늘 위로 전에 없던 ‘검은 손자국’이 생겼다.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는 소식은 주먹과 발길질을 담아 앞으로, 앞으로 전해졌다. 으윽! 억! 같은 비명과 함께.

마지막으로 부대장 젠이 가장 앞에서 걷던 용병대장 칼리번의 엉덩이를 걷어참으로써 모두가 알게 되었다.

“흠, 이 근처는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지 않을 텐데.”

묵묵히 앞만 보며 걷던 칼리번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아니, 그렇지만도 않아. ‘티벨’이라는 촌락이 하나 있지.”

젠이 욱신거리는 제 발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때린 놈은 눈물이 찔끔 나는데 얻어맞은 놈은 멀쩡했다.

…티벨은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작디작은 마을이었다. 거주민도 고작 50명 안팎이라 영주마저도 종종 그 존재를 깜박할 정도였다.

“그런가. 어째서 저런 작은 마을에 검은 손자국이….”

“뭐, 잘못 찍힌 모양이지. 아차차, 여기가 아닌데…. 옆 옆 산에 찍었어야지…. 이런 거 있잖아? 이번에는 마물 놈들도 포식은커녕 허탕 치겠는데? 오히려 도시가 아니니 잘됐지, 뭐! 가던 길이나 가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젠.”

젠이 너스레를 떨었으나 칼리번은 검은 징조를 험악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젠은 초조해졌다.

“우리도 가끔은 무시 좀 하자! 마물 놈들도 티벨같이 코딱지만 한 마을은 못 찾아! 한 시간쯤 지나면 마물 침입 없이 표식만 싹 사라진다는 데 내 오른팔을 건다.”

젠은 칼리번의 관심을 돌리려 애썼다. 이런 외진 마을은 돈이 되지 않는다.

“젠, 네 오른팔은 저번 전투에서 잘려서 이미 덜렁덜렁하다. 그러니 걸어도 쓸모가 없다.”

“…욱.”

필사적으로 욕을 참는 젠의 표정이 순간 험악해졌다가 다시 유들유들하게 변했다.

“제발, 대장! 벌써 며칠째 노숙이야? 구린 여관이어도 상관없으니까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아이고, 다 늙은 용병이라 그런지 이제는 몸이 뻣뻣하고 회복도 잘 안 되네! 대장 말대로 팔도 덜렁덜렁하고…. 죽기 전에 수프랑 빵은 먹고 싶은데….”

눈 가리고 아웅 작전이 통하지 않으니 이번에는 동정심 유발 작전이었다. 그러나 젠이 아무리 수를 써 봤자 하늘로 고정된 칼리번의 고개는 바위처럼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물에게 침략당하기 직전인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칼리번의 태도에 젠은 진땀을 흘렸다.

“기사단이든 성녀단이든 오겠지!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지키자. 그게 걔네 신조잖아. 괜히 인간님들 기분 망치지 말고 알아서 피해 주자!”

“정 그렇다면 일단 티벨 마을에 가서 병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안전하다면 지체 없이 떠나도록 하지.”

“제기랄! 결국 뒤질 때까지 싸움만 처하라는 거냐고요?”

참다못한 젠은 결국 침을 바닥에 뱉었다.

“간다.”

사이가 험악해졌음에도 칼리번은 번복하지 않았다. 이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먼저 발길을 돌렸다.

“이 망할 돌머리 새끼야—! 나 아직 오른팔 덜 붙었다고!”

뒤통수로 젠의 욕설이 박혀 들었다.

“여든 살이면 그럴 만도 하지. 기력이 달려서 싸우지 못하겠다면 이번 방어전에서는 쉬게 해 주지. 노인 우대다.”

“나이 얘기는 하지 말랬지, 죽인다!”

젠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번은 지쳐 죽으려 하는 용병들 사이를 헤치며 가던 길을 되돌아갈 뿐이었다.

“제길, 고집불통 같으니……!”

결국, 먼저 의지가 꺾인 쪽은 젠이었다. 젠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칼리번을 뒤따랐다.

“뭐 하냐, 띨빡 새끼들아! 하나같이 빠져서는…. 대장 가잖아! 따라와!”

젠은 어정쩡하게 선 용병들을 걷어차면서 화풀이를 했다. 용병들도 그 덕에 슬슬 현실을 깨달았다. 분노는 빠르게 전염되었다. 곧 모든 대원이 젠만큼이나 걸쭉하게 욕을 토해 냈다. 칼리번의 뒤통수로 온갖 욕설과 비아냥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다들 기운이 넘치는군.’

그러나 칼리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용병대 ‘검은 어금니’의 대장, 칼리번. 그는 검은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석탄처럼 검은 눈을 지닌 사내였다.

오랜 용병 생활로 다져진 근육질의 몸은 연속해서 전투를 치르고, 일주일 가까이 굶주린 상황이었음에도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심지어 등에는 제 덩치만 한 거대한 양손 검까지 멨는데도 말이다.

“들려, 대장? 애들이 좋아 죽는데, 아주.”

“잘 들린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뭐.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은화를 벌 기회라 좋아하는 것 아닌가?”

“…….”

비아냥거리던 젠은 칼리번의 대답을 듣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석남한테는 비꼼조차 통하지 않는다. 칼리번이 이런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번 겪을 때마다 놀랍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 우리 대장이지만 한 번만 찌르고 싶다….”

이따 티벨에서 한번 시도해 볼까. 젠은 앞서 걷는 칼리번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건 사람이 아니라 바윗덩어리라 피는커녕 칼이 먼저 부서지고 말 거다.

* * *

마물이 인간계를 침략할 때는 반드시 징조가 나타난다. 마물이 소환되는 장소의 하늘에 흡사 손자국과도 같은 검은 경계가 생기는 것이다.

‘검은 손자국’이 발생하면, 근방에 있는 기사단, 성녀단, 용병대 중 하나가 그곳의 백성을 보호하고 마물과의 전투에 나선다. 이런 과정을 간략히 줄여서 ‘방어전’이라 부른다.

마물의 습격을 받은 마을이 함락될 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대장! 저기를 좀 봐주십쇼!”

욕할 기력도 없을 정도로 지친 용병대가 터덜터덜 티벨 마을에 거의 다다를 무렵이었다. 대원 하나가 외쳤다.

“푸른색 연기군.”

칼리번이 담담히 말했다. 성벽조차 두르지 못한 작은 마을. 봉화조차 없어 집마다 장작을 끌어모아 피워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녀단도, 기사단도 오지 않았나 보군. 봐라, 젠. 네 예상은 틀렸다.”

“윽…. 예, 예, 제가 틀렸습니다요. 정의로운 용병 나으리.”

“우리라도 발견해서 다행이군. 푸른 연기라면 저쪽도 어느 정도 사내가 있다는 뜻. 저들과 힘을 합치면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치를 수 있을 거다.”

마을에서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색의 연기를 피운다. 노란 연기는 방어전에 참여할 수 있는 젊은이가 아예 없다는 뜻, 푸른 연기는 방어전에 참여할 수 있는 젊은 사내들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어…. 확실히 사람이 있긴 한데. 근데 뭐가 좀 이상하지 않아?”

젠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티벨 마을에서 모집한 민병대를 살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먼 거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광장이 근처에 있는 것처럼 훤히 꿰뚫어 보았다.

“이거… 상당히 오합지졸인데, 대장?”

젠이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민병대가 젊은이치고는 변변찮아 보였던 것이다.

“산속 농부들에게 뭘 바라겠나.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거다.”

칼리번은 쉽게 답을 내렸다. 그러나 젠이 한눈에 파악한 것을 그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말야. 영 비실비실해 보이고…. 좀 많이… 작은데…?”

“사람을 체격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 체격이 왜소한 사내도 있을 수 있다.”

“대장은 차별을 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잠깐만, 대장은 여기 있어 봐. …야, 너희도 대기해!”

긴가민가하던 젠은 결국 용병대를 내버려 두고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팔이 덜 붙었네, 힘들어 죽을 것 같네, 엄살을 부렸지만 역시 알파는 알파였다.

젠이 먼저 가서 티벨 민병대를 살피는 사이, 용병대도 마을 사람들과 마주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대장.”

용병대가 도착하자 먼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젠이 돌아보았다. 평소 성격과는 맞지 않게 심각한 얼굴이었다.

“…….”

칼리번도 광장에 선 열댓 명의 민병대를 죽 둘러보았다. 나름대로 무장을 하겠다고 철 쪼가리를 두르고 옷이란 옷은 겹겹이 입었다. 문을 떼다가 쪼개 만든 나무 방패를 세우고, 농기구를 무기로 삼았다. 외진 마을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였다. 그 노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들통과 냄비를 뒤집어쓴 엉성한 무장 사이, 숨겨진 눈을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전원 여자인가.”

칼리번이 낮게 중얼거렸다.

“남자가 한두 명은 섞여 있을지도…?”

젠은 비꼬았다.

“저희는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도착한 용병대 ‘검은 어금니’입니다. 이곳 티벨 마을은 여성들만 거주합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칼리번은 잔뜩 긴장한 민병대에게 다가가 물었다.

“…….”

당연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씨부랄! 이곳 사내새끼들은 겁쟁이들밖에 없나? 숨을 거면 같이 숨지, 뭐가 두려워서 너희 같은 부녀자를 들이밀어?”

칼리번이 너무 정중하게 물었다고 생각했는지, 젠이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다그쳤다. 젠의 두 눈은 이미 불꽃이 일렁거렸다. 체격이 큰 용병이 화를 내자, 민병대는 크게 겁을 먹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오합지졸 중에는 소녀도 있었다.

“진정해라, 젠.”

칼리번이 한 손으로 들썩거리는 젠의 어깨를 눌렀다.

“…여러분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는 마물입니다.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자는… 반드시 죽게 될 겁니다.”

“…….”

“마을 사내들을 불러 주십시오. 그래야 간신히 버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군사 훈련을 받은 여성이라면 또 모른다. 하다못해 성벽이라도 있었다면…. 그러나 근접전에 참여하는 ‘마을 사람’ 수준에서라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나았다. 첫 번째는 선천적인 힘이 남성이 좀 더 강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마물들은 어지간해서는 남성을 생포하려 들기 때문이었다.

마물에게는 인간과 같은 양심이나 도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짐승보다도 못하다. 번식 상대의 가치마저 없다면 바로 심장을 꿰뚫어 죽여 버린다.

“나, 남자들은 전부 산으로 보냈습니다.”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칼리번의 음색이 젠이 비하면 퍽 친절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민병대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용기를 내서 대답했다.

“저… 저희의 결심은 확고합니다. 여자도 충분히 싸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소중한 아들이 마물에게 끌려가 강간당하느니, 저희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참다못한 젠이 발로 땅을 쿵 내리쳤다. 그 울림이 민병대를 기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만둬라, 젠!”

칼리번이 맞받아쳤다. 무덤덤한 성격인 칼리번이 이토록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젠은 세상 억울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좋습니다. 마물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칼리번은 마을 민병대의 대장에게 맹세했다. 젠에게 역정을 내던 것과는 달리 덤덤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돈이 없으면 목숨이라도 내놓으라고…. 이런 개 같은 술수만 쓰고, 젠장!”

젠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새빨갛게 익었다. 용병대가 방어전을 치르고 받는 값은 푸른 연기일 때와 노란 연기일 때가 각각 달랐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일단 사내들이 숨었다는 산으로 가십시오. 나머지는 저희가…….”

칼리번이 권유하던 중이었다. 쿵! 땅 아래가 흔들렸다. 젠이 또다시 발을 굴렀나 싶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으아악!”

용병대는 비틀거리는 정도에서 끝났으나 민병대 중에는 쓰러진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러나 지진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건….

칼리번과 젠뿐만 아니라, 이곳에 남은 모든 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묻은 검은 손자국이 주먹 모양으로 하나 더 생겼다. 하늘을 깨부수려는 것처럼 또 한 번 하늘에 자국이 남고, 땅이 흔들렸다.

“전원 방패를 버려라!”

칼리번이 급히 외쳤다. 용병들은 일제히 대장의 말을 따랐다. 철컹, 철커덩! 땅 위로 쏟아지는 철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하늘에 검은 손자국이 늘어 갈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나무가 기울었다. 쿵, 쿠궁! 마을을 감싸 안은 산이 괴로운 울음소리를 낸다. 한낮임에도 태양이 검게 가려지고, 주변은 빠르게 밤으로 변해 갔다.

“여러분들은 저희가 내려놓은 방패를 하나씩 드십시오.”

상황이 급변하자, 마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칼리번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원형으로 몸을 서로 맞대고, 방패로 전방을 막으십시오. 절대로 움직이거나 방패 바깥으로 몸을 내밀면 안 됩니다.”

티벨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방패를 들고 몸을 맞댔다. 여러 개의 방패가 겹쳐지자 민병대는 몸을 웅크린 아르마딜로 같아졌다. 워낙 상황이 급박한지라 대형을 짤 틈도 없었다. 용병대는 몸을 가린 티벨 마을 사람들 앞에 섰다. 그사이 하늘은 온통 새까맣게 변했고, 땅의 흔들림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검은 하늘에 흰 달이 떴다.

그러나 그것은 달이 아니었다. 입구였다. 동그랗고 하얀 입구로 하나둘,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점은 이쪽으로 다가오는지 점차 커지고 형태가 뚜렷해졌다. 날개가 달린 마물들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지상에 내려오고 있었다.

곧 마물이 우박처럼 쏟아질 것이다.

“방패를 버렸으니 각자 준비해라!”

칼리번이 외쳤다. 다음으로 그는 등 뒤에 매어 놓은 대검을 뽑아 들었다. 웬만한 보통 사내만 한 거대한 양손 검이었다. 수많은 마물을 베어 낸 탓에 그 검은 조금도 날카롭지 않았다. 칼리번은 오직 힘으로, 마물의 딱딱한 피부를 짓뭉갰다.

칼리번과 달리 다른 용병들은 별다른 무기를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이 내던진 방패조차도,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였다.

용병들의 무기이자 방패는… 자기 자신의 몸이었다.

“대장, 대장은 우리가 기사라도 되는 줄 알아?”

젠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아니.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

칼리번이 답했다.

“…알고 있다면 그것참 다행이네! 우린 마물 대가리 개수로 돈을 버는 천한 용병에 불과하다고.”

봉사 따위 해 봤자 아무도 감사해 주지 않아. 젠의 중얼거림이 마지막 말이었다. 그 후로는 오직 귀가 찢어지는 것만 같은 괴성뿐이었다.

* * *

태피스트리의 실이 한 올, 한 올 풀려 나가는 것처럼 느리게 검은 하늘이 조금씩 푸른색으로 변해 갔다. 그러한 변화를,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있는 자는… 칼리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로 붉게 얼룩진 땅 위에 두 발로 선 존재라고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 모습은 붉은 바다에 홀로 서 있는 검은 등대와도 같았다.

칼리번은 가장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방패로 몸을 가린 민병대 바로 앞에 선 그는 그 자신으로 땅에 선을 그어 놓았다. 칼리번이 선 자리의 앞과 뒤의 땅은 색이 달랐다.

방어전이 끝났음에도 칼리번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쿵! 남은 마물이 없는지 수없이 살핀 후에서야 비로소 대검을 땅에 박았다.

“방어전을 종료한다.”

훅,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칼리번의 몸에 붙은 갑옷이 덜그럭거렸다. 피를 뒤집어쓴 그는 흰자 외에는 온통 시커멓고 벌겠다.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칼리번을 넘어서지 못했다. 썰리고 으깨진 마물의 신체가 그의 발치에 쌓여 있었다.

“일어날 수 있는 녀석은 아무도 없나.”

칼리번이 물었다. 낮은 목소리는 크지는 않았지만,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쓰러진 용병들은 손을 들 거나 앓는 소리를 내며 칼리번에게 응했다. 마물의 시체와 뒤섞여 어느 쪽이 아군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젠?”

칼리번이 다시 물었다.

“어…. 나도 당장은 못 일어나. 덜렁거리던 팔이 기어이 잘리고 말았거든.”

저 멀리서 젠의 맥아리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흠, 알겠다.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 다들 쉬고 있어라.”

칼리번은 대원들의 엄살을 용납했다. 그렇지 않아도 칼리번의 등 뒤로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발걸음 소리가 들리던 차였다. 하늘의 변화를 보고 도망친 사내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칼리번은 티벨 마을 사람들과 협상을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사내들보다 먼저, 방패 사이사이로 불길하게 번쩍이는 수십 개의 눈을 마주했다. 모든 전투가 끝났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방패 속에 숨어 있었다.

“…….”

…그 틈새로 전투를 전부 지켜본 걸까?

그렇다면 두려워할 만도 하다. 칼리번은 손을 들어 피가 묻은 얼굴을 닦았다. 손에도 마찬가지로 피가 묻어있어 그리 깨끗해지지는 못했다.

“설마 기사단에서 여기까지 행차를……?”

그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을의 장로였다. 그의 뒤로는 멀끔한 사내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을이 잠잠해지자 함께 산에서 내려온 모양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용병대이신 모양이군요.”

칼리번을 보는 장로의 두 눈에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당혹감도 서려 있었다.

“이것 참…. 이를 어쩌지요. 용병대의 무용에 충분한 보상을 하기에는 저희 마을이 영세하고 가난한지라….”

노인은 연신 굽실거렸다.

“시, 실은…. 저희가 가진 은화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보답을 두둑이 하고 싶습니다만, 그러면 이 작은 마을은 겨울을 날 채비조차 어려울 텐데, 어찌 안 될는지…?”

장로는 감사의 말을 전하기 전에 대금부터 깎으려 들었다.

“젠장, 우릴 두 번이나 속이는군, 약아 빠진 늙은이 같으니….”

돈도 없고 싸울 사내도 없으면, 푸른 연기를 왜 피운 거야……. 칼리번의 등 뒤로 앓는 소리가 또 들렸다.

“쉬어라, 젠.”

“눈앞에서 돈 떼먹히는 꼴을 보고 어떻게 쉬어……. 제기랄, 두 다리가 다 부러지지만 않았어도……!”

젠은 한탄하긴 했지만, 지친 것은 사실인지 불만을 토하는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비용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몇 년 전에 왕실의 정식 인가를 받은 용병대입니다. 몇 가지 문서에 서명해 주신다면 왕실에서 보수를 대신 치러 줄 겁니다.”

칼리번은 장로를 진정시켰다. 방금까지 전투를 치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 대장!”

“그 얘기를 왜 꺼내!”

“쥐꼬리만 한 왕실 보수로 어떻게 먹고살아!”

등 뒤로 격렬한 항의가 들어왔으나 칼리번은 싹 무시했다. 왕실 인가를 받은 용병대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숨기고 양쪽에서 두 배의 돈을 받는 일은 흔했다.

“오…. 오오…! 이렇게 반가울 때가…! 그, 그러면, 왕국의 기사님들처럼 공짜로, 아, 아니, 그러니까…. 마을을 지켜 준 대가로 아무것도 받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의 얼굴에 잡힌 모든 주름이 펴지다시피 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로는 칼리번을 앞에 두고는 신에게 감사를 표했다.

“저희가 가진 돈은 적으나 푹 쉬실 수 있도록 잠자리와 음식을 충분히 베풀겠습니다. 어서 마을 안으로 모셔야….”

장로가 편의와 휴식을 제안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급변하여 등 뒤에서 휘파람과 환호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하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호오…. 그게 무엇인지요?”

“어째서 부녀자를 전쟁터로 내보내신 겁니까?”

모든 일이 좋게 흘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기어이 산통을 깼다.

“그, 그것이…….”

장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물은 여성을 전부 살해하기 때문에 방어전에 부녀자는 참여할 수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굳이 그런 속임수를 쓰지 않더라도 저희는 도움을 드렸을 겁니다. 이번 일은 왕실에도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아아…….”

장로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어쩌면 티벨 마을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내들이 마물에게 끌려가 마물을 낳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장로가 곤란해하는 사이, 뒤에서 얼쩡거리던 사내 중 하나가 분연히 끼어들었다.

“한 마을에 사내는 한 두 명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여자가 없으면 인간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칼리번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반박했다. 수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방어전을 치러 왔기에 저 사내의 말은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자주 들었다.

“하…. 사람 목숨이 그렇게 우습습니까? 그러다 우리가 잡혀 가기라도 하면요? 끔찍한 괴물의 수를 늘리느니 다 같이 죽는 게 낫습니다! 만약 기사단과 성녀단, 어느 쪽도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마을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모두 죽었다면…. 저희도 따라서 자살할 생각이었습니다!”

“자살? 하하, 개도 안 믿을 소리를….”

“…다 들린다. 조용히 해라, 젠.”

젠이 불쑥 끼어들자, 칼리번은 입단속을 시켰다. 격렬하게 울분을 토하던 사내는 수치스러운지 입을 다물었다.

“나, 나으리…. 부탁이오니 이들을 과하게 비난하지 말아 주십시오. 앞날이 창창한 이 젊은이들은 저희 마을을 이끌어 줄 희망입니다.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장로는 고개를 떨구고는 힘없이 애원했다.

“자살은 전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가족을 위해 싸우다가 같이 죽으십시오.”

“…….”

“자살할 용기가 있다면 마물에게 끌려가기 전에 충분히 목숨을 끊을 수 있을 겁니다.”

칼리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장로와 대화에 끼어든 젊은이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내들의 표정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소리 없는 비난의 화살의 과녁이 되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 당신들은 알파라 우리와 다르게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그때, 한 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

칼리번은 고개를 숙였다. 방패 아래 꽁꽁 뭉쳐 있었던 민병대는 방패를 모두 버리고 돌아온 가족들의 곁에 서 있었다.

“장로님…! 용병을 마을 안으로 들이시면 안 돼요. 저, 저희, 봐, 봐 버렸어요……. 저 용병들, ‘사람’이 아니에요!”

한 소녀가 장로에게 다가가 애원했다. 그녀의 얼굴은 괴물을 본 듯한 공포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낮이 밤으로 변하고, 은빛 달이 뜨자… 저, 저, 저기 있는, 저 사람들, 마물들과 또…… 똑같이! 마물과 다를 바 없이 변해 버렸어요. 저기 서 있는 대장 빼고는 전부 다, 갑자기… 팔이 세 개, 네 개가 되고 머리가 두 개가 되고요……. 흐, 흐으윽…. 거대한 박쥐 날개 같은 게 옆구리에서 돋아나서…….”

소녀는 지옥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저, 전 아직도 마물이 전부 죽은 건지, 아니면 그것들이 용병을 죽이고 사람 모습으로 둔갑한 건지도 구별되지 않아요……. 무, 무서워요, 장로님…….”

마물, 그리고 마물과 싸우는 자. 그 둘은 서로 적이었으나 근본적으로는 같았다. 똑같이 마물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소녀가 울음을 터뜨리자 가족으로 추정되는 어른들이 다가와 그녀를 안고 달래 주었다. 그중에는 민병대를 버리고 도망친 사내도 있었다. 당연히도, 소녀는 처음 본 칼리번보다 제 아버지가 더 소중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매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으리….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용병대를 대접하기에는…….”

장로는 칼리번에게서 등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방어전을 마쳤으니 곧장 떠나겠습니다.”

늘 같은 이유로 마을에서 쫓겨나듯 떠났기에, 칼리번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성별은 여성과 남성으로, 마물의 성별은 알파와 오메가로 분류된다. 마물은 오메가가 아닌 인간 남자를 통해서도 번식이 가능했다. 다만, 인간 남성은 신체 구조상 출산을 할 수 없기에 마물을 낳으면 죽고 만다. 즉, ‘검은 어금니’의 구성원 모두는 강간당한 사내의 배를 찢고 태어난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마물 혼혈이라고 불렀다. 마물 혼혈은 대부분이 알파였다. 점차 ‘알파’는 마물의 성별이 아닌 마물이나 마물의 피가 섞인 이들을 총칭하는 단어로 굳어 갔다.

“알파 주제에 설교를 하다니….”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제는 마을 사내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를 악물며 칼리번을 노려보았다.

“…….”

그러나 칼리번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같은 알파인 젠조차도 돌머리라고 부르는 그였다.

* * *

연이어 방어전을 치른 데다가,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도망치듯 티벨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제대로 된 휴식도, 보급도 받지 못한 채 산속에서 노숙을 하며 버텼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환 자체가 기적이었다. 몸이 고되어서가 아니라 대원들에게 용케도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관에서 쉬는 정도로는 회복될 부상이 아닌 것 같군. 바로 다음 임무를 떠날 수 있도록, 전원 본성으로 가서 성녀님의 치료를 받도록 하지.”

거지 용병대가 터덜터덜 왕성에 진입했을 즈음, 칼리번은 결단을 내렸다. 원래는 대장과 부대장만 본성에 방문하나 이번만은 추가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여관에 가기 전에 저 본성에 들러야 한다고?”

“아니요! 그 고문을 받느니 그냥 앓다 뒤지겠습니다!”

대원들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칼리번은 엄살 심한 말을 채찍질하듯, 용병대를 끌고 본성으로 향했다.

“곧 알테르 프리드웬 님께서 이끄시는 제1 기사단이 귀환할 예정입니다. 그분들이 무사히 들어가실 때까지 대기하십시오.”

용병대가 서문에 다다를 때, 수문장들이 검은 어금니의 앞길을 막았다.

“뭐라고?! 언제 성문을 예약해서 들어갔냐? 쟤네랑 우리랑 다를 게 뭐야, 똑같이 마물 토벌을 했으니 똑같이 들여보내 줘!”

젠은 거의 수문장을 죽일 기세였다. 아니, 굶주린 눈빛은 이미 도륙을 내고도 남았다.

“정 그러시면 북문으로 입장하시는 게….”

“야, 성문이 코 앞인데 이걸 두고 돌아가라고?!”

“저희한테 뭐라고 해 봤자 뭘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시든지, 기다리시든지!”

젠이 으르렁거리자 경비병도 따라서 이를 드러냈다.

“북문으로 돌아간다.”

개와 여우 사이에서 가만히 있던 칼리번은 결정을 내렸다.

“그건 죽어도 싫거든? 난 다리 아파서 더는 못 걸어! 대장이 업고 가든가!”

“그래, 업혀라. 세 명까지는 가능하다.”

“…….”

악을 써서라도 엄살을 부리던 젠은 허탈해졌다. 두 팔을 벌린 칼리번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하아…. 쓸데없이 기력 낭비를 하느니 한 걸음이라도 더 걷는 편이 낫긴 하지.”

모든 전의를 상실한 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일어나! 북문으로 돌아간다!”

젠은 잠시 쉬고 있던 단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에엥? 뭡니까? 왜 왕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거죠?”

“잘난 왕자님께서 행차하신다는데 어쩌냐, 천한 것들이 알아서 피해야지!”

“왕자? …설마, 제1 왕자님 말입니까?”

“그래, 인마!”

“아…. 이제는 진짜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 또 움직여야 합니까?!”

“그럼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다가 재수 없는 면상들이랑 인사라도 할래?!”

“젠장! 이럴 거면 차라리 전에 들른 여관 마구간에 숨어 있을 걸 그랬어!”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움직여라. 이 멍청한 게으름뱅이들아!”

용병들은 욕을 씨불이면서도 덜그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더없이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들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척을 하지만, 사실 재수 없는 면상들을 피하려는 심산이 더 컸다.

“넌 왜 멍청하게 서 있냐? 못 걷겠어?”

젠은 걸음이 느린 대원들의 엉덩이를 뻥뻥 차 댔다.

“다들 지쳐서 그런 거니 재촉하지는 마라, 젠.”

“대장은 푸줏간 출신이던가?”

“그래.”

“그럼 양치기 일은 안 해 봤지? 이런 거 일일이 봐주면 집에 가기 전에 해 떨어져.”

“음, 젠은 역시 아는 게 많군.”

“…….”

고된 행군은 북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진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끝을 보았다. 다들 거대한 성문을 저녁 식사처럼 올려다보았다. 무사히 입장 허가를 받았을 때는 경비병에게 입을 맞춘 미친놈도 있었다. 물론 그 미친놈은 경비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렸고, 돌연 입맞춤을 당한 경비병은 입에 개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말았다.

“수도 남자들이 얼마나 예민한데 그런 짓을 해? 뒤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용병들은 동료가 피를 철철 흘리는데도 낄낄거리기 바빴다. 성문을 지나면 곧바로 후줄근한 건물이 보이는데, 이는 용병을 위한 휴식 시설이었다. 방어전을 치른 후 귀환하는 용병들에게 쉴 곳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과 분리하여 수용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지원을 왕실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만큼 절차가 복잡하지만, 왕실의 인가를 받은 검은 어금니 용병대는 별다른 인증 절차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바로 그곳으로 들어갔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용병대는 본성까지 나아갔다.

그들의 최종 도착지는 본성 안에 자리 잡은 성녀원이었다.

“확실히 휴식보다는 치료부터 받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녀님들을 부를 테니, 안뜰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용병들의 묵은 악취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성녀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다만 숨을 참은 채 말했다.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경비병에게 입을 맞췄던 대원이 성녀의 신발에 입을 맞추려다 젠에게 뻥 차였다.

“하, 하. 죄송합니다, 성녀님. 아시다시피 저희가 좀 못 배워 먹어서!”

젠이 어색하게 사과했다.

“…안뜰은 여러 번 들르셨으니, 안내 없이도 알아서 가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젠의 변명에도 성녀는 쌩하니 등을 돌리고는 떠났다.

“너 인마, 성녀님들한테는 잘 보여야 한댔지?! 이러다 지원 끊기면 네가 우리 먹여 살릴 거냐?!”

“죄, 죄송합니다! 부대장!”

젠은 거의 한 걸음에 한 번씩 쓸데없는 짓을 한 대원을 걷어차며 걸었다. 왕족과 귀족이 후원하고, 성녀들이 관리하는 성녀원은 우락부락한 용병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고 우아했다.

성녀의 조각상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안뜰은 햇볕이 가득 들고, 꽃나무가 보기 좋게 피워 올라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평안해졌다. 그러나 굶주리고 상처 입은 용병대에게 그런 것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갑옷과 무기를 벗어 던지고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대장도 좀 앉아서 쉬지 그래.”

흙탕물에 드러누운 돼지들을 보던 젠이 칼리번에게도 권유했다.

“대기지, 휴식이 아니다.”

“아휴, 잘나셨어.”

그러는 젠도 칼리번의 옆에 건들거리며 서 있었다. 그때였다. 와아, 멀리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게 뭔 소리래?”

“뭐긴 뭐야, 여기 사람들이 좋아 죽는 소리라면 뻔하지.”

용병대원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함성에 별다른 반응 없이 심드렁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절대로 받지 못할 환호. 마물 토벌 후 귀환하는 기사단에게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함성을 내지르는 소리였다. 그것만큼이나 용병대를 기죽이게 하는 소리가 없었다.

“저 새끼들은 눈꼴셔. 눈에 보이는 큰 전투만 참가하고 좆같은 건 다 우리한테 맡기면서….”

“저딴 거 다 소용없다, 제일 중요한 건 보석이랑 돈이야. 쟤넨 마물을 아무리 죽여도 돈은 못 받잖아?”

“돈을 못 받는 게 아니라 돈이 필요 없는 거겠죠. 귀족 나으리들이니까.”

“쳇. 개불알 같은….”

“검은 어금니 용병대 여러분,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때마침 중년의 성녀가 널브러진 용병들에게 방문했다.

“새— 끼아아! 아! 영광스러운 기사단이여!”아! 영광스러운 기사단이여!”

누워 있던 용병은 급히 욕을 찬양으로 순회했다.

“회복력에 관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용병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힘없이 누워 계시다니… 듣던 대로 정말 심하게 다치신 모양이군요.”

성녀의 새하얀 복식은 거무죽죽한 용병들 사이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발을 가리는 긴 치마와 손등을 덮는 긴 소매, 머리카락을 전부 가리는 두건. 맨얼굴만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럴 줄 알고 최상급의 성수를 준비했습니다. 조금 아프실 수 있겠지만…. 그럼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중년의 성녀의 뒤에는 다섯 명의 젊은 성녀들이 서 있었는데, 각자 물병을 들고 있었다. 성수의 용도는 다양한데, 주로 마물을 퇴치하거나 사람을 치료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마물과 인간 사이의 혼혈에게는 어떻게 작용할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주세요.”

그 의문에 답해 주기 위해, 성녀들은 예의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용병들의 전신에 아낌없이 성수를 퍼부었다.

“으악! 아파, 젠장!”

“제발, 제발 살살!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성녀님!”

치료를 시작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물 혼혈에게 성녀님이 하사하는 성수는, 상처를 아물게 함과 동시에 그들을 퇴치(?)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휴우, 감각이 남아 있다니 다행이네요.”

“조금만 더 힘내 보세요.”

성녀들은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더욱 치료에 매진했다. 그러나 용병이 보기에는 끓는 용암을 쏟아붓는 것처럼 보였다. 뜨거운 물에 데쳐져 꿈틀거리는 벌레들 사이로, 그나마 멀쩡히 서 있는 것은 대장과 부대장뿐이었다.

“대장, 다른 놈들이 치료받는 동안 저 안쪽에 들어가 있어. 거기라면 혼자 쉴 수 있으니까.”

부대장 젠이 옆구리를 툭 치더니 툭 하니 말했다.

“난 괜찮으니 젠부터 쉬어라.”

칼리번이 툭 치자, 젠은 옆으로 두세 발자국 밀려났다.

“진짜, 대장은 눈치가 없어도 더럽게 없어. 우리는 우리끼리 쉬게 해 줘. 높은 사람 있으면 쉬기도 힘들다고!”

“…아, 그런 거였나?”

그 말을 듣고서야 칼리번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알겠다.”

칼리번은 부하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기로 결심했다. 석상처럼 서 있던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가끔 누워 있는 부하를 밟으며.

“…으아, 이제야 좀 살겠네.”

칼리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간신히 버티던 부대장이 그제야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먼저 자빠진 주제에 웃고 지랄이야!”

젠은 팔다리를 쭉 뻗은 채로 성질을 부렸다.

“그 심정 이해합니다, 부대장님!”

“역시 대장 앞에서는 좀 뻐기고 싶지!”

용병대원들은 성수에 고통받으면서도 낄낄거렸다.

“…….”

한편, 칼리번은 멀리서 부하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젠 말대로 대장이 없으니 부하들이 마음 편히 농담을 주고받는군.’

돌머리를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성녀원 뒤에는 거대한 나무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두툼한 몸통만큼이나 가지가 길고 단단했으며, 넓고 푸르른 잎사귀가 가득 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락거리며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 소리가 가슴 한쪽을 고요하게 쓸어내린다.

‘과연 젠이 추천할 만하군.’

칼리번은 나무 그늘 아래 섰다. 나뭇잎 사이에서 춤을 추던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뺨에도 스쳤다. 칼리번은 커다란 손으로 거대한 나무의 줄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윽.”

그러던 중, 칼리번의 다리가 꺾이고 몸은 쓰러지다시피 했다. 오랜 행군으로 쌓인 피로가 불시에 그를 덮쳤다. 하는 수 없이 칼리번은 대검을 바로 쥘 수 있는 자리에 내려놓고 몸을 뉘었다.

그늘과 바람만 한 강력한 수면제는 없었다. 저도 모르게 칼리번의 눈이 감겼다. 서 있을 때는 암석처럼 단단하고 노병처럼 연륜이 묻어났지만, 인상이 풀어지니 짧은 머리의 사내는 그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 그는 이제 겨우 열여덟이었다. 그사이 칼리번의 숨결도 정돈되어 가슴이 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대로 잠들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바스락—

낙엽이 섞인 바람 사이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성녀단에 기사단까지, 겹겹이 보호받는 왕성 안에서 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칼리번은 본능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구냐!”

칼리번은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흐아앗!”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랐는지, 높고 어린 비명이 들렸다. 이어서 우당탕거리며 자빠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칼리번 또한 제 앞에 벌어진 자그마한 소동에 당황하고 말았다.

“…성녀님?”

그의 앞에는 자그마한 아이가 주저앉은 채로, 아마도 성수가 담겼을 대야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린애….’

침입자의 정체에 칼리번은 당황했다. 용병 일을 하다 보면 급습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자연히 몸이 앞선 것이다. 아이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또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마물 혼혈은 오감이 예민한 편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느끼지 못할 기척도 미리 알아채곤 했다. 이러한 본능은 대개 목숨을 살리는 방향으로 작용을 하지만, 드물게는 곤란한 사고를 초래하기도 했다.

칼리번은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이는 여전히 은 대야를 머리에 뒤집어서 쓴 채였다.

“흠…….”

체격을 보면 고작해야 10살일까? 신발까지 가리는 긴 치마와 손등을 덮는 긴 소매, 그리고 머리카락을 가리는 두건까지. 수습 성녀이 다른 성녀의 부탁으로 자신을 치료해 주러 온 모양이었다.

“저… 괜찮으십니까?”

칼리번의 물음에 아이가 몸을 떨었다. 놀란 모양이었다. 머리를 덮은 대야가 덜그럭거렸다.

“무례를 보여 죄송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섭다는 소리를 곧잘 듣는 칼리번이었으나 상대가 상대여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누그러진 태도였다.

“일단… 곤란하신 것 같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칼리번은 양해를 구하고 견습 성녀의 머리를 덮은 대야를 들었다.

“앗…!”

그러자 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후다닥 가렸다. 그러고는 칼리번에게 등을 보였다.

“…….”

인간은 대부분 마물 혼혈을 두려워한다. 어린애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컸다.

“함부로 손을 대서 죄송합니다. …원래대로 돌려드릴까요?”

칼리번은 조심스럽게 은대야를 견습 성녀의 머리 위에 도로 올려 두었다.

“…….”

아무래도 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견습 성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몸을 붕붕 저었다.

‘말을 못 하는 건가?’

칼리번은 은 대야를 다시 들어다 바닥에 내려놓았다. 견습 성녀를 유심히 살폈으나 천으로 가려져 있어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아니면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

흔한 일이었다. 그는 용병으로 지내며 무수히 많은 이들과 접촉했다. 그중 칼리번의 큰 키와 탄탄한 몸, 짙은 피부와 무뚝뚝한 인상에 압도당해 겁을 먹는 이가 반이었고, 그가 마물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이가 반이었다. 어린아이라면 둘 다일 수도.

가만 보니 아이의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눈동자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순간, 방패 사이로 보였던 수많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공포에 질린, 수십 개의 눈동자들.

“더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칼리번은 은 대야를 아이의 바로 앞에 옮겨 두었다. 그러고는 앞서 선언한 대로 나무로 돌아가 누웠다. 칼리번은 얼른 눈을 감았다. 원한다면 이 기회를 틈타서 견습 성녀가 도망칠 수 있도록.

짧은 시간이 흘렀다. 경계심 많은 아이가 은 대야를 줍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발소리가 잠시 어른거리더니, 탁, 탁, 탁, 빠르게 뛰는 소리로 바뀌었다.

“……하아.”

칼리번은 눈을 감은 채로 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상처야 혼자 회복해도 되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나중에 성녀를 직접 찾아가 천천히 받아도 늦지 않았다.

이대로 선잠에 빠져들려던 차였다. 타닥, 탁, 탁, 탁! 멀어졌던 발소리가 돌아왔다. 떠날 때보다 더욱 부주의하고 빠르게. 지이익, 대야가 흙바닥에 놓였다. 은 대야 안에서 물이 찰랑거리는 시린 소리가 칼리번의 귀를 자극했다.

칼리번이 왜 돌아왔는지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철퍽!

물에 젖은 수건이 칼리번의 두 눈을 덮었다.

“?!”

갑자기 끼얹어지는 차가운 성수는 곧 따끔거리는 고통으로 바뀌었다. 아이의 행동은 ‘아무것도 보지 말라’는, 무언의 명령처럼 느껴졌다.

“흐……으음.”

칼리번은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리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도움을 주시려는 건지, 괴롭히려는 건지 통 모르겠군…….’

하여간에, 칼리번은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뒀다. 굳이 반항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칼리번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이는 제멋대로 칼리번의 몸에 붙은 갑옷을 끙끙거리며 떼기 시작했다.

‘기회를 틈타 갑옷을 훔쳐 가려는 건가?’

칼리번은 순간 고민했다.

‘…그럴 리가.’

그러나 금세 생각을 고쳐 먹었다. 기사단은 철판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하나, 규모가 작고 자금력이 부족한 용병대는 대부분 누비 갑옷이었다. 취약한 부위에 가죽이나 플레이트를 일부 덧대는 정도에 그쳤다.

‘이딴 걸 팔아 봤자 얼마 건지지도 못한다.’

특히나 회복력이 비상한 마물 혼혈인 경우에는 몸 자체가 갑옷이나 다름없어서 무장이 더욱 빈약한 편이었다. 칼리번만 해도 손에만 잭 체인을 장착하고, 발목에 플레이트를 일부 덧댄 정도가 다였다.

칼리번이 묵인하는 사이 견습 성녀는 그런 그의 발 한쪽을 잡고 온 힘을 다해 뽑아내는 중이었다. 피와 진흙이 엉긴 탓에 여간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

이렇게 노골적으로 굴고 있으면서, 견습 성녀는 자신이 자고 있다고 굳건히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믿음이 깊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역시 종교를 운명으로 삼은 분은 다르군.’

차라리 벗어 달라고 부탁한다면 칼리번은 따라 줄 용의가 만만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쏙, 발이 빠져나가고, 바닥으로 철 덩어리가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

견습 성녀와 그 갑주가 함께 구르고 있을 것은 눈을 뜨지 않아도 뻔했다. 이래서야 갑옷을 벗기는 데 하루가 다 갈 것 같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칼리번은 눈가에 수건을 두른 채로 남은 신발을 벗겨 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기에 보지 않아도 대충은 할 수 있었다. 양팔의 잭 체인도 더듬거리며 풀어냈다. 철컥, 철컹, 쇳덩어리들이 땅 위로 떨어졌다.

제 할 일을 끝낸 칼리번은 서커스 단원에게 열쇠를 던져 주고 제 발로 우리에 들어가는 사자처럼 다시 나무에 몸을 누웠다.

“…….”

견습 성녀가 곁으로 살그머니 다가온다. 몸이 가벼운 탓인지 발걸음도 가벼워서 꼭 강아지나 고양이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수에 젖은 천이 칼리번의 눈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칼리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이가 그러기를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참방, 참방. 무언가 적시는 소리가 나더니 차가운 천이 뺨에 닿았다. 칼리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부위가 부위인지라 성수에 닿으니 따끔거렸다. 지금은 거의 다 회복됐지만, 원래는 마물의 발톱에 얼굴이 반 이상 벗겨졌던 부위다.

“…! ……!”

아이의 손길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칼리번은 하는 수 없이 미간의 주름을 폈다. 그제야 다시 젖은 천이 몸에 닿았다. 견습 성녀는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칼리번의 몸에 묻은 오물과 피를 닦아 내고, 성수를 발라 상처를 아물게 해 주었다. 보통 성녀가 치료해 줄 때는 10분 정도면 끝이 났다. 그러나 견습이고 작고 어린 탓인지 열심히 해도 느리고 시간이 걸렸다.

칼리번은 인내심 있게 버티다 어렴풋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칼리번은 숲에서 동료들과 돌아가며 노숙을 할 때도, 여관에서 모처럼 여독을 풀 때도 깊이 잠들지 않았다. 애초에 마물 혼혈이었기 때문에 잠을 적게 자도 큰 무리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애 옆에서 푹 잠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일어났다.

“…큽….”

잠든 칼리번의 입가를 부드러운 손길이 꾹꾹 눌렀다. 칼리번은 잠결에 입을 벌렸다. 그러자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 안으로 달콤한 물이 흘러들었다. 아무런 향기도, 맛도 나지 않는 성수와는 달랐다.

“으, 음…….”

칼리번은 잠결에도 먹이를 주면 씹는 개처럼,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액체를 본능적으로 거부감 없이 조금 더 삼켰다. 와인 같기도 하고, 산딸기즙 같기도 하고….

“…….”

…너무 달다. 반쯤은 잠에 취한 채로,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눈앞으로 어린아이의 모습이 흐릿하게 들어온다. 칼리번은 더 없는 평안함 속에서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이 순간만이 한없이 늘어져 버린 것처럼, 한 장 한 장이 그림처럼 남으며 천천히 흘러갔다.

볼살이 통통한, 하얀 피부의 아이가 물끄러미 칼리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두 눈은 가을 하늘처럼 푸르렀고, 때때로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 눈은 티 없이 맑았고… 무엇보다, 보통 사람들이 칼리번을 보는 두려움이나 혐오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아이의 눈에 담긴 감정은 칼리번이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작은 손이 칼리번의 두 눈을 감겼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우습게도, 칼리번은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 *

“대장, 언제까지 퍼질러 자기만 할 거야!”

칼리번은 젠의 외침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음.”

칼리번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돌아보니, 자신과 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여기에 온종일 머무를 수는 없잖아?”

“…….”

“근데 대장, 머리 웃기다. 왜 머리에 둥지를 쳐 놓은 거야?”

“…….”

젠이 멍하니 앉아 있는 칼리번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젠…. 혹시 견습 성녀님을 보지 못했나?”

“응? 견습?”

“10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였다.”

“어…. 아니. 꼬맹이는 전혀 못 봤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견습 성녀님이 날 치료해 줬다.”

“지금 같은 때에 그렇게 어린 견습 성녀님은 없을 텐데….”

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견습인지 정식인지는 몰라도 실력이 좋긴 한가 보네. 대장 완전히 반들반들해졌어.”

그 말에 칼리번은 제 팔을 살폈다. 방금 목욕을 한 사람처럼 깨끗했다.

“견습 성녀님이 닦아 주더군.”

“그래? 우리한테는 성수를 팍팍 들이붓던데. 그렇게 착한 성녀님이 있단 말이야?”

“뭔가 음료를 준 것도 같았다.”

“헉, 설마… 술? 성녀원의 축복받은 포도주가 그렇게 일품이라던데…!”

젠의 두 눈이 번뜩였다.

“술은 아니었다.”

술이라기에는 그저 달콤하기만 했다.

“아, 뭐야! 왜 대장만 특별 대접이냐고. 나도 그 견습 성녀님한테 치료받고 싶다!”

젠은 몸서리를 치며 아쉬워했다. 칼리번은 왜 자신만이 맛 좋은 음료까지 얻어먹었을까 고민하다가, 나름의 답을 내렸다.

“…다들 지친 나머지 치료를 받던 중에 본성이 튀어나온 건 아닌가?”

연속 행군에 다들 지쳐 있었으니 뿔 하나가 삐져나왔다든가, 꼬리가 나왔을 수도 있다. 그런 모습은 인간들의 두려움을 살 만했으니까.

“뭔 개소리야. 그거 농담 맞지? 웃으면 돼?”

젠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마물 혼혈들은 자신의 본성을 인간에게 보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구속구나 다름없음에도, 죽기 직전까지는 반드시 그 모습을 고수했다.

“아닌가?”

“당연하지.”

“그럼 좀 더 고민해 봐야겠군.”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그딴 게 고민 끝에 내린 답이었냐….”

이런 돌머리 같으니! 젠은 혀를 찼다. 칼리번은 갑주를 다시 착용했다.

“세상에, 갑옷까지 깨끗하다니…! 관대하신 성녀님들은 절대 공짜로 갑옷 수리를 해 주지 않는데? 어떤 꼬맹이야! 어딨어, 그 꼬맹이?! 나도 치료받고 싶다!”

젠은 칼리번의 잭 체인을 만지작거리며 열렬한 질투에 사로잡혔다.

“쓸데없는 데 힘 낭비하지 말고 어서 가지.”

칼리번은 뚜벅뚜벅 앞서 걸었다.

“꼬맹이, 꼬맹이라….”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도, 여관에 도착하고 나서도, 젠은 도움을 받은 칼리번보다도 견습 성녀에 대해 집착했다. 두말없이 몸도 닦아 주고, 치료도 해 주고, 무기도 수리해 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 맞다. 대장, 혹시 기억 안 나?”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내내 침묵을 지키던 젠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바야흐로 검은 어금니의 전원이 여관에서 술과 음식을 한창 먹던 중이었다.

“예전에 말이야, 우리 쪽이랑 몇몇 용병대가 정식으로 인가를 받으러 왕실까지 간 적이 한 번 있잖아?”

“흠…. 그랬나.”

“그때, 하늘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어?”

휘웅, 젠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

칼리번이 젠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위로 올렸다. 눈에 보이는 건 술집의 낡은 지붕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칼리번은 천장을 본 채로 중얼거렸다.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젠의 말에 파문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벌써 2, 3년은 된 일이다. 칼리번과 젠은 왕실의 공인을 받아 보급과 지원을 얻고자 왕궁을 방문했었다. 기사단 근처의 정원을 거닐며 인가를 기다리던 칼리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기 성녀를 받아 냈었다. 실상은 높은 나무 위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것이겠지만.

젠이 말하는 고양이는 그 당시의 그 어린아이를 의미했다.

“이제야 좀 기억이 나? 그 애가 자라서 은혜라도 갚은 거 아니겠어?”

젠이 나이프를 휘두르며 낄낄거렸다. 칼리번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없군.”

“내가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대장이 심각하게 둔한 거지. 이 늙은이보다 기억력이 달려서 어쩔 생각이야?”

젠의 기억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제 나이는 매번 여든 살 정도라고 얼버무리면서 이런 일만은 귀신같이 떠올리다니.

“…딱히. 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칼리번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날의 일을 잊은 것처럼, 오늘 일어난 일도 곧 머릿속에서 지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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