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부
프롤로그. 벽에 매달린 사내
1. 꿈 (1)
2. 벽에 매달린 사내
3. 꿈 (2)
프롤로그. 벽에 매달린 사내
인간이 마물에게 패한 지 벌써 8년이 흘렀다.
융성했던 왕국은 철저히 유린당했다.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수도, 마물과 죄수를 가두던 지하 감옥. 이 둘은 완전히 뒤집혔다. 마물이 땅 위를 거닐고 인간이 지하에 갇혔다.
인간의 역사를 새긴 조각은 부서졌다. 문화를 그려 낸 벽화에는 곰팡이와 이끼가 꼈다. 성 꼭대기에 나부끼던 황금 휘장은 찢겨, 바람이 불 때마다 기괴한 울음을 터뜨렸다.
왕국을 점거한 마물에게 인간과 같은 예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대소변을 보았고 피와 고름을 묻혔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던 수도는 빛을 잃고 말았다. 불은 꺼졌다.
이러한 왕성의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에… 한 사내가 고깃덩어리처럼 벽에 매달려 있다.
산 채로.
* * *
그 고깃덩어리의 이름은 한때 ‘칼리번’이라 불렸다.
고통. 지금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감각이었다. 고통. 선명한 고통. 버틸 만한 고통. 흐린 고통. 차라리 죽고 싶은 고통. 오로지 고통뿐.
그는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해방을 위해서라면 인간이길 포기할 수 있을 만치 간절하게.
물론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안다.
죽으면 된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방증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살아서 도망쳐 보려 했다.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도 쳐 보았다. 제발 그만둬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미치기 직전까지 몰려 어린애처럼 울었다. 믿지도 않던 신을 찾았다. 구원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칼리번은 여전히 이곳에 갇힌 채였다. 그의 처절한 비명은 성 밖까지 흘러나가지 못했다. 아무도 칼리번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신조차도 그를 외면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칼리번은 체념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라고는 침묵뿐이었다. 그는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칼리번에게는 손과 발이 없었다. 뼈는 으스러지고 부러졌다. 가시가 되어 버린 뼛조각은 몸 안에서 제멋대로 엉겨 붙어 폐를 찔렀다. 피부의 반은 멍이 들고 반은 벗겨졌다. 두 눈은 뽑혀 그 무엇도 볼 수 없었으며 혀가 잘려 신조차 부를 수 없었다. 귀는 잘렸으나 그나마 파이지는 않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는 있었다.
칼리번에게 청각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를 이 꼴로 만든 자가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또 다른 고통을 주기 위해서였다. 산 채로 지하 감옥에 끌려온 다른 인간들의 비명을 들려주기 위해서.
지난 세월 동안, 칼리번은 고문 끝에 터져 나오는 다른 이들의 고백과 비탄에 찬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끝은 단말마였다. 대개 일주일 버티지 못하고 미치거나 죽었다. 오직 칼리번만이 이곳에서, 이렇게, 8년을 버텼다. 육체 대부분을 잃었고 과거의 영광은 걸레짝만도 못하게 되었지만, 질긴 목숨 줄 하나만은 아직 팽팽했다.
이제 와 탈출한다 한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 비루한 삶을 유지하는가?
의문이었다.
무엇을… 위해서였더라.
대답할 수 없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나름의 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고문 탓인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기억은 흐리멍덩했고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부서지고 잘려 나가는 것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이기도 했으니까.
어느 쪽이 답이든, 칼리번이 한층 더 멍청해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곳에 끌려오고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칼리번과 함께 감옥에 끌려온 포로들은 지금쯤 해골이 되어 황폐해진 대지 위를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해골이 된다면, 그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할는지.
죽을 수만 있다면!
두 손의 힘줄이 이어져 있을 때…. 혹은, 입 안에 이가 남아 있을 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살했어야만 했다. 셀 수 없는 날들을 이러한 생각으로 의미 없이 보냈다.
벽에 걸린 채, 자살을 하지 않은 이유에 관해 생각하던 칼리번은 어떤 ‘냄새’를 맡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감각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마비되었다고 생각했을 뿐.
바로 후각이었다. 칼리번은 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냄새를…. 아니, 이것은 냄새 따위가 아니다. ‘향기’를 맡고야 말았다.
그 향기는 어째서인지 그리웠다. 8년 만에 맡아 보는, 시큼한 쇳내가 아닌 진짜 향기였다. 향기는 강력한 기억의 촉매다. 오래전에 잊어버린, 아니, 그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어떤 기억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칼리번의 기억 속에서 피어오른 향기는, 지금 맡은 향기보다 훨씬 깨끗하고 청량했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피가 눈물처럼 말라붙은 눈구멍이 과거를 쳐다본다.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리는 금발. 코스모스가 흩날리는 가을날의 하늘 같던 푸른 눈동자.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한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던… 바로 그 꽃.
칼리번은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지독하고 가혹한 꿈으로 현실을 깨우는 것이라고. 왜냐면 꿈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거나 빼앗기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꿈속의 그 사람조차 자신을 잊었을지라도, 이렇듯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8년 만에 본 그 꿈은 덧없고 달콤해서, 칼리번은 쉽사리 깨어날 수가 없었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모든 고난과 굴레에서 벗어나 그날, 그 자리에 다시 선 것만 같다.
그때 그 꽃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다. 희뿌옇게 안개가 낀 채였다. 칼리번은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혀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은 똑같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꿈결에 숨이 막혀 왔다. 이대로 영영 놓쳐 버릴 것만 같아 손을 뻗어 찰나의 영원을 붙잡고 싶었다.
내가 여기 있다고.
그러나 꽃을 향해 뻗은 손이 사라졌다. 잘린 손가락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더는 꽃을 만질 수 없다.
더는… 검도 쥘 수 없다.
“…저에게 이 고깃덩어리를 보여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째서인지, 꿈속의 목소리가 현실에서 들렸다.
“…허, 으….”
칼리번은 신음했다. 꿈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 속의 목소리와 지독하게도 흡사한, 그러나 낯선 목소리는 칼날처럼 선연했다. 칼리번을 꿈에서 가혹한 현실로 되돌려 놓을 정도로.
“왜겠어? 한 번쯤은 제대로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지. 너에게는 나름 중요한 사람이니까. 뭐…. 지금 꼴을 보면 사람이라기보다는 기형 마물에 가깝지만.”
이어서 다른 누군가가 비웃음이 섞인 대답을 건넨다.
‘에어리얼.’
익숙한 목소리에 칼리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에어리얼, 에어리얼…. 에어리얼!’
철컥, 철컥! 극심한 고문으로 기억이 손상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칼리번의 몸이 꿈틀거렸다. 온몸의 뼈가 부러진 개가 죽어 가면서도 원수를 향해 짖어 대는 것처럼.
“으응,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널 위해 오늘은 특별히 둘이서 왔다고?”
에어리얼은 칼리번의 울음에 살갑게 대했다. 마치 오랜 친우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에어리얼은 칼리번을 이렇게 추락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네가 고깃덩어리라고 한 저 녀석, 다시 한번 잘 봐 봐.”
“…….”
“저 꼴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
“…….”
“…슬프지도, 기쁘지도?”
칼리번이 묶인 사슬이 쉼 없이 철컹거렸다. 에어리얼은 그를 완벽하게 무시하며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감상을 들려줘.”
당장 저리 꺼져! 칼리번은 혀가 없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기억 속 꽃의 향기와 에어리얼의 체취가 섞여 갔다. 마치 꽃에 피가 묻은 것만 같아 역겨웠다. 꽃과 피는 절대로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 어째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울분은 이성과 본능조차도 앞질렀다.
“먹으면 되는 겁니까?”
그때, 칼리번의 꽃이 대답했다.
“상한 고기는 먹고 싶지 않은데요.”
기억 속 소년의 목소리로….
“푸, 푸흡…. 하하, 아하하하!”
에어리얼이 그 말을 듣고는 박장대소를 했다.
“먹는다고? 아하하핫!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하잖아! 저건 네 먹이가 아니야. 뭐…. 지금 꼴이야 푸줏간 바늘에 걸린 고깃덩어리만도 못하지만!”
에어리얼의 웃음은 지하 감옥 안에서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널 이곳까지 데려왔겠어?”
“…….”
“그래도 널….”
“…….”
“…사람인데.”
잘린 귀 안으로 피가 고여 굳은 탓에 칼리번은 두 사람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글쎄요. 그렇게 말해 봤자… 몇 번을 봐도 저에게는 썩은 고기나 다를 바 없습니다.”
<나의 첫 꽃은 그대에게 바치겠어.>
기억을 그대로 꺼낸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 꽃은 칼리번을 몇 번이나 부정했다.
“후훗…. 매정하기는.”
입으로는 힐난했지만, 에어리얼은 어딘지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보다는, 에어리얼.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는 편이….”
“굳이 널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건 말이야.”
상대가 웃든 말든 적당히 맞춰 주던 꽃은 에어리얼을 보챘다. 그러나 에어리얼이 그의 말을 뚝 잘랐다.
“내게는 형제나 다름없는, 오랜 친구인 칼리번과 마지막으로 재밌게 놀아 볼 참이거든.”
‘놀이’라는 말에 칼리번의 사슬이 흔들렸다.
“그동안 너는 다른 녀석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지켜 줘. 할 수 있겠지?”
에어리얼은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
철컹, 이번에는 사슬이 아닌 꽃에게서 묵직한 쇳소리가 났다. 에어리얼이 원하는 대로 보초를 서는 것 같았다.
“너도 기쁘지, 칼리번?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몸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헤집어 주다니, 이 정도로 사랑을 쏟아부어 주는 친구가 또 어디 있겠어?”
가는 손길이 칼리번의 머리에 닿았다. 칼리번은 에어리얼의 손길을 떼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칼리번의 몸은 미미하게 흔들릴 뿐, 에어리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너의 전부를 보여 줘. 네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과거를.”
악마가 칼리번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