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연의 상태를 알아보러 갔던 재진이 돌아와서 권민혁의 말을 전한다
다음날 민혁의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그를 만나고 병원으로 간 강유는
혜연의 병실 벽에 붙어 있는 이름 세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정혜연]
손끝으로 그녀의 이름을 훑어내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아파온다
그녀의 이름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픈 존재가 되버린건지 모르겠다
미련한 혜연은 그를 원망하는 말도 그를 밀어내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목걸이를 채워주고 병실을 나오자 복도끝 쇼파에 앉아있던 그녀의 친구가 따라온다
얼굴가득 노기를 띄고 그를 보는 그녀의 친구는 이를 악물듯 말을 뱉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따귀라도 한대 날려주고 싶어요”
“.........”
“혜연이 목숨을 멋대로 쥐고 흔들려 하지 말아요”
“........”
“혜연이는 누구보다 행복해져야 하는 아이에요
그쪽이 그걸 줄수 없다면 깨끗이 놓아버려요
소유하는 것만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에요. 알아요?!”
강유는 그날 밤 오피스텔로 돌아와
양주 한병을 혼자 모두 마셔버리고 만취가 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본가로 들어간 강유는 방에 틀어박혀 꿈쩍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그는 마음을 정리하고 거듭 결심을 했음에도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게 될까 두려워
혜연이 퇴원을 한지 3일만에야 그녀의 원룸으로 갈수있었다
조용히 키를 돌려 들어간 그녀의 작은 공간에는 어둠이 내려앉는 침대위에
차분한 숨을 내쉬며 깊이 잠들어 있는 혜연이 있다
쟈켓을 벗어 걸은뒤 그녀의 옆에 누운 강유는 잠들어 있는 혜연의 얼굴을 보며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 눈을 꾹 감아버렸다
“누나.. 조금만 더 참아
누나 생일까지만 참으면 선물을 줄께
그때까지만 조금 더 힘들어해라..”
그녀의 머리 밑을 받쳐 팔베게를 해주는 데도 혜연은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다
그녀의 감은 눈.. 곧게 뻗은 귀여운 코.. 그를 중독시켜버린 그녀의 입술..
작은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지만 틀림없이 입맞춤으로 끝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가볍게 그녀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끓어오르는 욕정 때문에 온몸이 뻐근해온다
혜연을 안아버리게 되면 결코 그녀를 떠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의 단단한 결심이 무너져버려 결국 그녀를 망치고 자신을 망치는 관계를 밀어붙이다가
결국은 또 다시 그녀를 데리고 죽고 싶어질 것이다
모든걸 정리하고 준비해 두었던 편지를 가방에 넣은 강유는
공항으로 가서 혜연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흉터를 갖고 있겠다고 한다
수술을 하라는 확답을 제대로 받아내려던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하나쯤은... 그의 흔적을 하나쯤은 그녀에게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유학 마치고 돌아와서
좋은 소식 들리면 지울께”
<정혜연.>
“그러고 싶어..”
<은근히 고집 쎄다니까..>
“맞아”
<그만 갈께..>
“그래..”
“사랑해 누나..”
강유는 끊긴 핸드폰을 그대로 들고 그녀에게는 할수 없었던 말을 혼잣말처럼 했다
이걸로 그녀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의 여행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공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용산역에 내린 강유는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한 재진과 만났다
“대체 어딜 가려고 수업도 재끼고 오게 해?”
“등산”
“미친놈. 너야 휴학해서 할짓거리 없다지만
새학기라 열라 정신없는 내 생각은 안하지?”
“내 알바 아니다~”
“여행은 내일 떠난다구?”
“그래 임마. 몇 번이나 물어?
그렇게 띨빵해서야 졸업이나 하겠냐?”
“띨빠앙~?”
“기차에서 삶은 계란 사줄테니까 앙탈부리지 마”
“흐흐.. 삶은 계란 좋지~”
강유에게 맞춰 농담처럼 대화를 하고 있는 재진이지만
평소보다 쾌활하게 떠들어 대는 강유가 이상한지 조금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남원역에서 내린 그들은 산의 입구까지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내리는 재진의 눈이 동그래진다
“너 진짜 등산 하려구?”
“할 짓이 그렇게 없냐? 전에 누나랑 왔을때
등산로 나무 밑에 뭐 묻어놓은게 있어”
“애들처럼 별짓을 다 했구만”
“그거 가지고 올테니까 넌 저기 들어가서 커피나 마시고 있어라”
강유가 가리키는 곳은 잡다한 물건들과 간단한 식사
그리고 커피나 음료 따위를 팔고 있는 식당이다
강유가 내미는 가방을 받아든 재진이 불퉁한 얼굴로 말한다
“같이 갈까? 저기 들어가서 혼자 뭐하냐?”
“저기 알바누나 이뻐. 시간 남으면 꼬셔보던지”
“선애한테 맞아죽을 일 있냐?
그 녀석이 얼마나 질투쟁이인지 모르지?”
“비밀로 해줄게 걱정마”
“빨리와”
서울과 달리 추위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산 입구에 있던 재진은
작게 어깨를 움츠리며 식당안으로 들어간다
강유는 쉬지도 않고 단숨에 그의 모친을 뿌렸던 장소까지 산을 올랐다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찬바람이 싸늘히 식혀버린다
혜연과 함께 앉았던 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심호흡을 한 강유는
그녀에게 선물했던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의 팔목에 감아 채웠다
혜연은 모른다. 그는 결코 그녀를 잊거나 지울수 없음을...
그녀를 지울바에는 이렇게 그녀를 가슴에 품고 자신을 버리는게 낫다는 것을...
그는 혜연을 버리는게 아니다
그녀로 가득한 심장으로 비상(飛上)하는 이 순간부터 그는 영원히 그녀와 함께이다
그는 지금 추락하는게 아니다
그녀를 온전히 그의 마음에 품고 비상(飛上)하려 하고 있는거다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낸 강유는 핸드폰을 꺼내 재진에게 전화를 했다
<땅을 어디까지 파고 있냐!! 왜 안와?>
“재진아..”
<왜 불러! 이 웬수같은 놈아>
“웬수같은짓 딱 하나만 더 하자”
<하지마 짜샤!>
“내 가방에 보면 편지 두개하고 쪽지가 하나 있어
편지 하나는 네 이름이 써있고 다른 하나는
네 편지를 보면 누구껀지 써있을거야.
1년 후에.. 정확히 1년후 오늘 날짜에
다른 하나의 편지를 그 사람한테 전해줘.
그리고 쪽지는 우리 아버지한테 전해줘라”
<뭐.. 뭐라는.. 거야..>
“너한테 할 말은 편지에 다 적혀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날으면.... 니가 뒤처리 좀 해라
절대 누나가 알면 안되니까 기자들 붙지 않게만 해줘
네 편지에 적어놓은 아버지 번호로 연락하면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할거야”
<야... 이.. 미친놈아.. 대체.. 무..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끝까지 드러운 꼴만 보여서 미안하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디쯤에 내 몸이 내려앉을지 모르겠지만
엄마를 뿌렸던 곳이니까 엄마가 마중나올 거라고 믿어”
<자.. 잠깐만 강유야.. 서문강유.. 너 너..>
“끊는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핸드폰이 다시 울린다
핸드폰 배터리를 떼어낸 강유는 벼랑 끝 공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그의 등뒤로 수군거리며 내려가는 등산객이 지나가고 난후 강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몸이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질때 등산로를 내려오던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린듯하다
그의 팔에 감겨있는 백금의 목걸이가 짧은 순간 햇빛에 강렬한 반짝임을 뿌렸다
허공을 날고 있는 강유의 머릿속에 짧게 혜연의 밝은 미소가 떠올려졌다
마지막으로 품고 가는게 그녀의 눈물이나 어두운 모습이 아니라
티 없이 환하게 웃던 그녀의 미소라는 것에 감사를 마치기도 전에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던 그의 의식은 완벽한 암흑 속으로 꺼져들어갔다
1년전의 핸드폰 번호를 그대로 가지고 있던 권민혁이
재진의 전화를 받고 이른 아침부터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용산역으로 나왔다
새학기가 시작 되서 무척이나 바쁘다는 권민혁에게 무작정 학교를 빠지고
이른 시간에 용산역으로 나오라는 말만을 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을거다
기차 안에서도 재진은 나중에.. 라는 말만으로 아무 이야기도 하지않았고
정혜연이 얼마전쯤부터 겨우 권민혁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목적한 장소에 도착한 재진은 그제야 강유의 이야기를 했다
점점 얼굴이 굳어지던 권민혁은 나중엔 얼굴이 창백해지며 심호흡을 했다
“남원이 강유놈 어머니를 뿌렸던데 라는건 나도 몰랐어요
그냥 어머니 고향 산에 뿌렸다는 얘기밖에 못들었으니까..
알았다 해도 어떻게든 날 속이고 같은 짓을 했을테지만요”
“..........”
“편지... 지금 읽을래요?”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요”
강유가 죽은지 1년이나 지났다는 거에
상당히 쇼크를 받은 듯한 권민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참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재진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재진은 1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편지를 그제야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재진에게 이야기를 듣고 어이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받았다는건 정혜연이 권민혁씨의 사람이 되었던가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을 지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그때 놀이터에서 했던 말 지금도 기억합니까?
그대로 누나를 붙잡고 있으면 결국 돌이킬수 없는 짓을 하게 될거라던..
내 부친의 완강한 마음에 부딪혔을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소유할수 없다면 오토바이 사고를 냈을때 그냥 같이 죽어버릴걸.
그런 후회를 하는 내 자신이 너무 끔찍하고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정혜연을 놓지 못하고 있는한 나는 또 다시 같은 짓을 했을겁니다
결국... 도저히 정혜연의 육신을 품고 날을수는 없어서
정혜연을 가득담은 내 심장만을 품고 날기로 결정한거 뿐입니다
난 이걸로 내 사랑을 온전히 완성시켰다고 생각한다면 억지일까요?
내가 그렇게 떠나버린거... 누나는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합니다
쓸데없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괴롭히게 될테니까요
다만 권민혁씨 만큼은 내가 비상(飛上)을 하던 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건
아마도 누나의 생일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길 바라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혜연... 행복하게 해주고 있습니까?’
자신 없게 대답하면 안됩니다. 누나를 데리고 오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결국 이렇게 되버렸지만 정혜연을 만난거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마 같은짓을 반복해야 한다고 해도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또 정혜연을 사랑하게 될겁니다
권민혁씨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건 정혜연도 행복하다는 거니까
-서문강유-
강유의 편지를 모두 읽은 권민혁은 편지를 움켜쥐고
입고 있는 점퍼 속주머니로 손을 넣어 뒤적거리고 있다
재진은 그가 담배를 찾는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