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 늪. 그리고...
#... 4[완결편]
어느새 개강을 며칠 앞두고 2월이 끝나가고 있다
2월과 3월은 한달차이임에도 그 느낌의 차이가 매우 크다
무언가 정리하는 달처럼 느껴지는 2월과 달리
3월은 모든걸 새로이 시작하는 느낌이 나는 달이다
모처럼 카페에 들러 여주인과 차를 마신 혜연이 원룸으로 들어서자
오늘 온다는 전화를 했던 강유가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4시쯤 온다더니 벌써왔어?”
“카페에서 오는 거지?”
“봤어?”
“택시타고 지나가는데 보이더라?”
“뭐 만들어?”
“떡볶이”
“그런 것도 할줄 알아?”
“그냥 고추장 넣고 볶으면 되는거 아냐?”
혜연은 며칠 만에야 보는 강유의 얼굴이 밝아보이는게 먼저 마음이 놓였다
그의 손목에 감겨있던 깁스는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딱지가 떨어진 이마 옆에는 희미한 흉이 져있다
그의 옆으로 가서 오목한 프라이팬을 들여다보니 강유는 정말로
물기도 얼마 없는 떡에 고추장을 범벅으로 비벼대고 있다
“못살아.. 내가 할테니까 비켜봐”
“설명해봐. 내가 만들어 줄테니까”
혜연이 시키는 대로 어렵사리 떡볶이를 만들어낸 강유는
커다란 접시에 담아 식탁에 앉으며 그녀에게 턱짓을 한다
“앉아”
“갑자기 무슨 떡볶이야?”
“누나가 좋아하는 꽃게탕은 너무 고난이도라
도저히 엄두가 안나서 못하겠거든”
기다란 포크로 떡볶이를 뒤적거리던 강유는
가만히 앉아만 있는 혜연에게 떡을 하나 찍은 포크를 건네준다
엉겹결에 받아 쥔 떡볶이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맛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별로 였는지 강유가 피식 웃어버리고 있다
“마지막 선물로 누나가 좋아하는
매운 떡볶이 해주려던 건데 망쳤다”
“마지막 선물?”
“난 이번학기 등록도 안한거 모르지?”
“등록 안했어?”
“여행 다녀오려고 휴학 했어”
“무슨 여행을 얼마나 가는데 휴학까지 해?”
“일단 6개월 정도는 가보고 싶었던 나라들 돌아보려고..
제일 처음엔 일단 로마에 가볼까 해
그 다음부터는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거구”
“........”
“6개월이 될지 더 걸릴지 모르겠지만
갔다 오면 곧바로 유학준비 해서 영국으로 가야해”
“내가 너... 보내게 만드는 거야?”
“유학이야 원래 정해져 있던 거지만
여행은 누나 때문에 가는거 맞아”
“.........”
“정혜연... 이제 놔줄게..
그게 내가 주는 생일선물이야”
가벼운 말투로 그녀를 놓겠다는 말을 하는 강유는
말투만큼 가벼운 표정은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누나가 아니라.. 내가 겁이 나서 그래
계속 놓지 못하고 있으면 언젠간 또 다시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될거 같아서..”
“..........”
“누나를 죽이고 나를 죽이는 짓만큼은...
그것만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누나도 그러기를 원하고 있잖아”
“나 보다... 너를 위해서 그러길 바랬어
점점 더 너를 조여가고 있는 나를 털어내기를”
“알아”
“너 보다 내가 더 너를 망가뜨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놔버리는거야”
“정말... 놓을수 있겠어?”
“가까이 있으면 흔들릴까봐 여행 가는거야
여행 다니면서 털어내고 또 털어낼거야”
“.........”
“혹시 모르지... 누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여행 중에 만나게 된 여자 하나한테 퍽 꽂혀서 돌아올지”
“나같이 용기 없는 여자만 아니면 좋겠다”
“.........”
“강유를 모른채 외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모든걸 감수하며 받아줄 용기도 없는
비겁하고 미련한 여자만 아니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아파”
“.........”
“누나가 날 외면하지 못한건 연민 때문이고
모든걸 버리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한 건...
그건.. 날 사랑하는 마음이 작아서야”
“........”
“날 사랑하는 마음이 아예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하지 않을래”
강유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건 분명 아니었지만
그녀는 강유의 말에 어떠한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비우고 있는 지금에 와서 희망고문 이라도 하듯
그에게 미련을 남기는 말을 하는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런 얼굴 하지마.. 다음에 만날 여자한테는
집착 같은거 하지 않을 거야. 그냥 가볍게 만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낼수 있게 만날거야”
“그래..”
“다른 여자한테는 그게 될 것 같은데
누나한테 만큼은 그게 안되니까...”
“.........”
“잘들어 누나.. 반 정도 털어내면 첫 번째 엽서를 보낼게”
“엽서?”
“누나를 반 정도 털어내면 첫 번째 엽서를..
그리고 누나를 온전히 털어냈다 생각되지면
두 번째 엽서를 보낼테니까...”
강유는 담담하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모습은 이 말을 하기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차분한 모습이다
“두번째 엽서를 받으면... 그땐 다른 남자를 만나”
“........”
“그 자식.. 권민혁 정도면... 인정할게”
“됐어..”
“어설프게 나쁜 놈한테 걸려들 바에는
그 자식이 나아.. 진심이야 이건”
“너 서문강유 맞아?”
“뭐?”
“다른 사람 같아.. 마치 껍데기만 서문강유 같잖아”
“마음을 비우니까 편해져서 그런가보다”
혜연의 말에 작게 웃어버리며 대답을 하는 강유는
앞에 놓여진 물을 몇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는다
앉은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강유는 그녀의 목으로 손을 뻗어와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풀러내고 있다
“뭐하는 거야?”
“이 목걸이.. 내가 갖을께”
“........”
“너무 큰 의미를 담아서 준 목걸이라
누나한테 남겨놓고 싶지 않아”
강유의 말대로 혜연이 걸고 있던 목걸이에는
그의 알파부터 오메가가 모두 담겨 있다는 무거운 의미의 목걸이이다
그 목걸이마저 돌려받으려는 걸 보니
그는 정말로 혜연을 온전하게 놓아버리려 결심한 듯 하다
“정말.. 나를 놓을수 있겠어?”
“내가 했던말 생각나? 누나를 삼키다
심장이 터져 죽는한이 있어도 안놔줄 거라던..”
“...생각나..”
“막상 누나를 삼키려니까 정말로 내가 죽을거 같아
그래서.. 송아지를 삼켰던 아나콘다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정혜연을 토해내 버리고 있는거야..”
“.........”
“엽서에 내용은 누나 원룸의 주소 말고는 한글자도 없을거야
아무 내용도 없는 엽서라도 많은 의미가 담겼다 생각해”
“언제.. 가려구?”
“3월 6일”
“6일?”
“그래.. 누나 생일 선물이니까
누나 생일날 출국하려고”
“........”
“어설픈 멜로 같은거 찍을 생각은 없으니까
공항은 재진이 놈하고 둘이만 가던지 혼자 갈거야
인천공항에서 전화할 테니까... 그걸로 끝내자 우리”
그걸로 끝내자 우리..
그 말이 혜연의 가슴에 들어와 메아리처럼 울려대고 있다
강유는 물컵을 들어 남은 물을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내가 먹어본 떡볶이 중에 최악의 맛이야
미련하게 다 먹지 말고 버려”
“응..”
“출국하기 전에 또 볼일 없을거야
공항에서 전화 할테니까 그렇게 알아”
“강유야..”
“왜”
문 앞까지 걸어간 강유는 혜연의 부름에도
얼굴을 들지 않고 대답을 하며 신발을 신고 있다
해야할 말은 잔뜩 쌓인 듯한데 해줄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그를 불러 놓기만 한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혜연을
강유는 눈도 맞추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갈게”
“강유야..”
“말해..”
“조금만.. 조금만 아파가면서 털어내..”
그렇게 결심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는 혜연이기에
미안하다는 말도 행복하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강유는 마치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작게 웃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후 혜연은 남아있는 떡볶이를 억지스레 모두 먹었다
속까지 제대로 익지도 않은 떡볶이는 이도저도 아닌 난감한 맛이지만
그녀는 묵묵히 떡볶이를 모두 먹어치우고 접시를 닦아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제자인 박윤정에게 보낸 메일의 답멜을 확인한 민혁은
어느새 차게 식어버린 커피를 털어 마시며 끝내기를 누르고 나왔다
박윤정은 그의 거짓 발령에 대한 이야기를 혜연에게 적당히 대답했다고 한다
한창 호기심 많은 나이인지라 메일 가득 궁금한것 투성인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어느것 하나 대답해줄수 없는 질문들 뿐이다
다 마신 커피 잔을 씽크대에 담가 놓으러 가던 중 서문강유의 전화가 왔다
그가 말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놀이터로 내려간 민혁은 갑작스런
서문강유의 전화에 궁금함보다 걱정이 앞섰다
품에서 꺼내든 담배 한개피를 피우고 있을때 놀이터로 걸어오는 서문강유가 보인다
벤치 끝에 걸터앉는 서문강유에게 민혁은 담배 갑을 꺼내들어 내밀었다
“담배?”
“됐어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정혜연.. 그쪽 집에서는 허락 받을수 있습니까?”
“무슨..”
“누나한테 상처주지 않게 결혼허락 받을수 있는지 묻는겁니다”
서문강유가 하는 말이 너무 뜬금없어 민혁은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질문 그대로의 의미로 하는 말이라면
민혁은 그 문제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
혜연과 결혼까지 생각했던 민혁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까지 모두 생각해 놓았지만
서문강유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정혜연 사랑하잖아요”
“나는..”
“난 이제 그만 정혜연 놓을겁니다”
“나를 시험하려는 거라면..”
“누나 옆에서는 누나를 정리하지 못하니까
꽤 멀리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올거에요
여행 다녀오면 유학도 가야 하구요”
“.......”
“권민혁씨를 위한게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누나를 위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오랫동안 알아온 것도 아니고 많이 만난 것도 아니지만
그는 혜연을 놓을수 있는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얼굴의 민혁을 돌아보는 서문강유의 얼굴은
더 없이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이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믿어지지가 않아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된건지..”
“꼭 권민혁씨가 아니어도 누나를 잡고 있는한
나는 또 무서운 짓을 할거에요”
“.........”
“어떻게 안건지 모르겠지만 그쪽이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 사고는 내가 만들어낸 사고에요”
“.........”
“이대로 정혜연을 붙잡고 있으면...
결국 난 돌이킬수 없는 짓을 하게 될겁니다”
시선을 앞으로 두고 있던 서문강유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민혁에게 시선을 돌린다
민혁은 할말이 정리가 되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6개월만 기다려줘요
그전에 지워버릴지 그 이상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6개월 동안은 누나가 나를 지우는 시간으로 두고 싶어요”
“정말.. 진심인가 보네요”
“워낙 감정표현을 잘 안하는 여자라
누나가 권민혁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혜연 마음에 그쪽이 ‘좋은 사람’으로 자리잡은건 알아요”
“..........”
“끝내 내가 해줄수 없었던거... 입양을 해서라도..
누나한테 가족과 가정을 만들어 주는거..
그거... 그쪽이 해줘도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말끝을 흐리며 점점 목소리가 잠기던 서문강유가 갑자기 벤치에서 벌떡 일어선다
담담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서문강유가 걸음을 뗄때까지도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뒷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새학기가 시작된 학교는 조금씩 따듯해지는 계절과 생기발랄한
신입생들의 모습으로 활기차기만 하다
미분기하학 수업이 끝나고 이수정과 음료수를 뽑으러
가고 있을때 강유의 전화가 왔다
<생일 축하해 누나>
“응.. 어디야?”
<안들려? 공항이야>
강유의 핸드폰 너머로 공항내의 탑승을 알리는
안내멘트의 음성이 들려온다
혜연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수정을 먼저 보내는 손짓을 했다
“혼자 간거야?”
<재진이 놈하고 같이 왔어>
“재진씨 학교 빠졌겠네?”
<둘도 없는 친구가 떠난다는데 학교가 문제야?>
강유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밝고 힘이 있었다
어둡고 풀죽은 목소리가 아니라는 거에 혜연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고 있다
“강유야.. 건강해야 해..”
<누나도..>
“응..”
<나 궁금해 하지도 말고 그냥 잊어버려
나도 누나 잊기 전엔 여행에서 안돌아 올거니까..>
“강유가 말했던 거... 들어줄께”
<내가 뭐?>
“내 다리 흉터 말야
지우지 말아달라고 했었잖아”
<뭐? 그건 술 취해서 한소리지!
그 흉한걸 왜 남겨둬. 여름 되기 전에 수술해>
“나중에... 니가 잘 지내는거 확인하면”
<안돼 지워. 그냥 수술해>
“네가 유학 마치고 돌아와서
좋은 소식 들리면 지울께”
<정혜연.>
“그러고 싶어..”
<은근히 고집 쎄다니까..>
“맞아”
<그만 갈께..>
“그래..”
공항내의 소음들과 맑은 음성의 탑승 안내멘트들을 흘리며 강유의 전화는 끊겼다
끊긴 전화를 들고도 혜연은 한참이나 그대로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혜연은 진심으로 그가 그녀를 털어낼수 있기를 바란다
지독했던 소유욕과 집착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 출발하듯 다른 사랑을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 사랑의 대상은 그의 환경과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자이기를 바란다
음료수 몇 개를 들고 오던 이수정이 멍하니 서있는 혜연의 모습이
우스운지 환하게 웃으며 캔 하나를 건넨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마음으로 혜연은 이수정과 함께 강의실로 돌아갔다
강유에게서 첫 번째 엽서가 온건 2개월쯤이 지나서였다
로마의 두오모 성당이 찍힌 관광 엽서에는 그의 말처럼 내용은 단 한줄도 없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더운 여름에 그에게서 두 번째 엽서가 왔다
파리의 에펠탑이 찍혀있는 관광엽서에는 이번에도 역시 아무 내용도 없지만
강유가 했던 말처럼 그가 이제는 그녀를 온전히 털어낸 것이기를 바랐다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려 했던 것 이상으로 온전히 털어낸 것이기를....
이제 막 8개월이 넘어가는 아기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혜연은
거실 쇼파에 앉아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다
2층에서 쿠당대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리더니 그녀의 둘째이자 장남인
4살배기 꼬마가 먼저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오고
그 뒤를 따르는 민혁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혜연씨! 짱구놈 좀 잡아!”
“짱구 잡을 손이 없어요”
“권짱구!! 너 거기 안서?!”
“바부 바부”
“응? 그런 말 하면 못쓴다고 엄마가 그랬지?”
영락없는 개구쟁이 얼굴을 한 꼬마는 윗옷만을 입은채
아랫도리를 그대로 내놓고 뛰어다니다가 아기를 안고 있는 혜연의 앞으로 달려온다
뒤따라온 민혁에게 팔뚝을 잡힌 아이는 상체를 있는대로 뻗대가며
까르르 웃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어휴~ 요 쥐방울만한 녀석이 잘도 도망다니네”
“시져! 안 입어!”
“야 임마. 그렇게 꼬추 다 내놓고 다니면 절봉이가 물어가아”
“안 무어가!”
“물어가!”
뒷통수가 조금 튀어나온 데다 하는 짓이 말썽쟁이 짱구를 닮아
애칭으로 짱구라고 부르는 4살배기 아들은
도무지 팬티를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식구들끼리야 어쩔수 없다지만 짱구와 동갑인 딸을 데리고 온다는
유정이 올 시간이라 민혁은 진땀을 흘려가며 억지스레
팬티와 바지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혜연의 옆에 털푸덕 앉는 민혁이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며 그녀를 본다
“저 혼자 쥐고 먹을줄 아는데
뭘 그렇게 꼬옥 끌어안고 우유를 줘”
“우유 만큼은 품에 안고 주고 싶어요”
“왜?”
“난 주고 싶어도 모유를 줄수 없잖아요
모유를 먹는 아기들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느낄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꼭 끌어안고 우유를 먹으면 조금이나마 느껴질까 하구요..”
“우리 혜연씨는 생각하는 것도 이쁘다니까”
“짱구는 금새 또 어디 갔어요?”
“큰 공주님 자는 방에 들어간거 같은데?”
“자다 깨면 짜증내는데..”
“조용한거 보니까 제 누나 옆에서 잠든거 아냐?”
“그럼 다행이구요”
“내일이면 나도 새학기 시작이고
혜연씨 생일도 다가오네”
“이번에도 어디가요?”
“그래”
“대체 내 생일마다 어디를 가는거에요?”
“비밀이라니까”
“새학기 때라 바쁜데 무리하게 학교까지 빠져가면서..”
“어쭈? 잔소리야 바가지야?”
“잔소리를 담은 바가지에요”
혜연의 말에 민혁이 큭큭대며 웃고 있을때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어코 짱구 녀석이 제 누나를 깨웠는가 보다
그녀의 품에서 우유를 먹던 막내는
입을 벌린채 작게 코까지 골며 잠이 들어 버렸다
“우리 큰 공주님 울음소리에 작은 공주님까지 깨버리겠다
아주아주 짜증난 울음 소린거 보니까 적어도 10분짜리야”
10분 동안 달래고 올테니까 유정씨 오면 나 불러
내가 오늘은 제대로된 마레 스파게티를 해줄테니까”
민혁이 2층으로 올라간 뒤에 혜연은 거실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았다
어제 뜯어낸 2월의 달력 뒤로 드러난 3월은 그녀의 생일이 있는 달이다
강유가 그녀를 놓아주고 여행을 떠난 뒤로 어느새 7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강유는 파리에서의 관광엽서 뒤로 더는 엽서도 연락도 없었다
민혁과 혜연은 강유가 떠난지 1년 가까이 되어갈 때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해서
그녀가 졸업을 하기 얼마전 결혼을 했다
강유가 떠난후 6개월이 조금 넘었을때 불쑥 찾아온 민혁이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무던히도 애를 쓴 시간이 지난후였다
민혁은 결혼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게
미리 준비를 해놓았던 듯 깐깐한 그의 모친조차 별 다른 말없이 결혼을 허락했다
혜연은 민혁과 교제를 결정하기 전 강유의 소식을 듣기위해 따로 재진을 만났었다
영국으로 유학을 간 강유가 적당히 놀아가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던 재진은 그녀가 졸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한번쯤은 꿈에서라도 만날 듯한 강유는 꿈에서 만나는 것조차 꺼려지는지
단 한번도 그녀의 꿈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기를 안은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혜연은
커다란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라 아기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큰딸과 짱구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오던 민혁이 인터폰을 보고 웃으며 문을 열어준다
이제 곧 그들의 거실이 아이들의 소란스러움 속에
아수라장이 될 것을 생각하며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린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들어온 민혁이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에 걸터앉는다
마른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털어내는 그녀의 허리를 민혁이 꼭 끌어안는다
“선물 봤어?”
“예뻐요.. 난 심플한 디자인 좋아하니까”
“손목이 가늘어서 잘 어울릴 것 같더라구”
“고마워요”
그녀의 생일날이면 그는 항상 화장대위에 곱게 선물을 놓고
이른 아침부터 나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돌아온다
이번 생일에 민혁은 선이 가늘고 심플한 팔지 시계를 선물해주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민혁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침대위로 돌려 눕힌다
혜연에게 몸을 실은 그의 키스가 짙어지면서 그녀의 잠옷을 벗겨내고 있다
보통은 부드럽고 소중하게 그녀를 안는 민혁이지만
그녀의 생일에는 평소보다 거칠고 집요하게 그녀에게 파고 들어온다
한참후 혜연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민혁이 옆으로 누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는다
“난 정혜연이 있어서 행복한데..”
“........”
“혜연씨는?”
“이상해요..”
“혜연씨 지금 행복한거지?”
“민혁씨는 꼭 내 생일마다 그걸 묻는거 알아요?”
민혁은 항상 그녀의 생일마다 행복하냐는 질문을 하곤한다
그녀의 생일이면 그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알수가 없다
혜연을 안고 있는 그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며 끌어안는다
“특별한 날이니까”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이 뭐가 특별해요”
“내 마누라 생일인데 특별하지”
“안 씻어요?”
“우리 큰 공주님 말야
벌써부터 걱정되 죽겠는데 어쩌지?”
“뭐가요?”
“너무 이뻐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쁘게 키웠는데 언젠간 늑대한마리가
채갈거 생각하면 억울해 죽겠단 말야..”
보통은 결혼한지 3년 이상이 된 부부여야만 입양이 가능하지만
불임진단서를 제출한 혜연과 민혁은 결혼을 한뒤 곧바로
2개월 된 여자아기를 입양해 왔고 금새 그 아기에게 푹 빠져버렸다
인형처럼 예쁘고 너무나도 귀엽게 생긴 큰 딸을
유난히 예뻐하는 민혁이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너무 큰 공주만 예뻐하지 말아요”
“막냉이도 예뻐”
“짱구는요?”
“짱구놈은 쪼금만 이뻐
어지간히 말썽꾸러기라야 말이지”
“우리 막내는 재밌게도 민혁씨랑 많이 닮았어요”
“그래?”
“특히 눈매랑 입이요”
“혜연씨 어머님이 좀더 살아주셨으면
우리 막냉이도 보셨을텐데..”
혜연의 모친은 3개월된 막내를 입양해오기 얼마전인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
걸핏하면 모시고 올라오는 민혁 때문에 그녀의 모친은 1년의 절반이상을
그들의 집에 살면서 혜연이 아이들을 키우는걸 도와주었다
그녀의 결혼식날 주변사람들이 당황할 정도로 많이 울던 그녀의 모친은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유정이가 나더러 대단하대요”
“뭐가?”
“저는 하나 키우기도 벅찬데
셋씩이나 어떻게 키우는지 모른다나요?”
“나한테는 불쌍한 애들을 셋이나 거둬 키우는
우리가 사정없이 훌륭해 보인다고 하던데”
“이제 불쌍한 애들이 아니에요
피는 안 섞였어도 부모도 형제도 있는
소중한 가정을 갖게 됐으니까”
“거봐.. 나 받아주길 잘했지?
그렇게 맘을 못열고 내 속을 태우더니..”
“........”
“내가 혜연씨 마음 얻으려 애쓴걸 글로 쓰면
아마 책 한권 분량은 나올걸?”
강유에 대한 감정들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그녀에게 남아있었고
여전히 결혼에 대해서는 움츠러 있던 그녀이기에
좀처럼 그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었다
하지만 민혁은 모든 문젯거리들을 시원스레 해결하며
큰 상처도 없이 결혼까지 가게 만들었다
“어?! 막냉이 깼나보다”
“배고픈가 보네요”
아기방과 연결되어 있는 스피커 기구에서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혜연이 일어나려 하자 민혁이 먼저 몸을 일으킨다
“내가 갈게 혜연씨는 자”
“애기 우유주는거. 나한테는
행복한 시간이니까 뺏지말아요”
혜연은 잠옷과 카디건을 걸치고 아기방으로 갔다
앙증맞은 두 주먹을 꾹 쥐고 있는 막내는 다리를 바둥대며
금방이라도 크게 울음을 터뜨릴 듯 칭얼대고 있다
능숙하게 우유를 만들어 아기를 품에 안은 혜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금새 다시 잠이 드는 아기를 자그마한 침대에 눕힌 혜연은 거실로 나와 큰창으로 갔다
창밖의 하늘은 짙은 어둠속에 여린 달빛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달빛을 보며 그녀는 잠시동안 강유의 생각을 했다
단지 1년의 시간동안에 그녀의 삶을 마치 폭풍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게 만들었던 강유..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지독히 앓았던 강유..
광기어린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를 망가뜨렸던 강유..
결국 결실을 맺지는 못했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의 완성처럼 그녀를 놓아버리고 훌쩍 떠났던 강유..
그녀의 다리에는 아직도 강유가 남겨놓은 흉터가 그대로 있다
강유의 흔적임을 알고 있는 민혁에게 죄스런 마음이 들지만
7년이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흐트러진 발음으로 그가 했던말을 그대로 기억한다
“그 흉터.. 평생 나 대신 간직하고 살아줄래?
만약에.. 만약에 놔주면 말야”
강유가 그녀를 놓기 위해 힘겨워 했을 시간을 생각하면
그녀의 다리 흉터를 지워버리는게 쉽게 결정되어지지가 않아
지금껏 지우지 못하고 남겨두고 있다
창밖에 떠 있는 달은 몇 시간 후면 밝은 태양빛에 밀려 가려질것이다
그녀가 있는 하늘아래 어딘가에 있을 강유에게 그녀는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난 행복한데...
........너는?...”
소리 없이 떠있는 달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소중한 가족이 있는 공간에 조용한 달빛이 스며든다
혜연의 입가에 담긴 자그마한 미소를 부드럽게 감싸는 달빛이 스며든다
늪...
[ 비상(飛上) ]
사고후 강유가 눈을 떴을때 처음 보인건 그의 부친의 얼굴 이었다
화를 품은건지 짜증을 담고 있는건지 알수가 없는 부친은
잠시후 강유 앞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있다
“강호냐? 애비다.. 지금 어디 있냐.....
그거 나중에 하고 S병원으로 와서 네 형하고 좀 있어라
교통사고 나서 입원시켜야 할 것 같아.... 오냐..”
지끈거리고 아픈 머리가 상처 때문인지 그의 부친 때문인지 알수가 없다
자신의 몸을 여기 저기 살펴보아도 손목에 감긴 깁스 말고는 다친 데가 없는 듯 하다
“강호 부르지 마요”
“왜”
“내 친구 부를테니 강호 부르지 마요”
“대체 어쩌다 사고가 난게야?
내가 그놈에 오토바이 좀 타지 말라고 했잖냐”
“누나는요”
“어느 누나! 네 누나는 시집가서 잘 살고 있어!”
“정혜연은 어떻게 됐냐 말에요!”
부친이 강유만을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부친에게 그녀의 상태를 묻는건 의미 없는 짓이다
강유에게 건네는 지갑과 핸드폰을 받아 그는 재진을 불렀다
그의 부친은 병실을 나가기 전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여기 병원에서 검사 제대로 다시 받고 나중에 얘기 좀 더하자”
“할말 없어요”
“내가 할말이 있어. 쉬어라”
강유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재진은 호들갑스럽게 사고가 난 이유를 물어대고 있다
혜연의 사고 정도를 알아봐 달라는 말을 들은 재진은 얼마후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돌아와 말을 전한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거 같아.. 어깨랑 다리를 좀 다쳤다는데
자세한건 와서 물으라고 짜증내더라”
혜연은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빼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게 그와 함께 죽어도 좋았던 의미인지 그건 알수가 없지만
그녀가 몸부림을 치며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면
그는 그대로 속력을 높여 정말로 그녀와 함께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바이크를 타게 되면서 수도 없이 넘어지며 익숙해진 그와는 달리 혜연은 많이 다쳤을지 모른다
그는 사고 직후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다
도로 복판에 누워있는 혜연에게 가려했지만 머리 울리는 소리가 귓등을 치며
그도 정신을 놓아버렸던 것 같다
정신을 놓아버리기 전 그의 눈에 들어왔던 혜연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호흡이 엉키듯 숨을 쉬기가 힘들어 강유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했다
그대로 그녀만 죽은줄 알았다
도저히 그녀를 죽일수가 없어 속도를 줄였음에도 자신이 그녀만을 죽게한줄 알았다
손목에 깁스를 한채 이틀만에 퇴원을 하게 된 강유는
재진을 혜연이 있는 병원으로 보내 그녀의 상태를 자세히 알아봐 달라고 했다
오피스텔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에서 찬물을 받아 단숨에 마셔버리는 재진은
쇼파에 앉아 그를 보고 있는 강유에게로 와서 말을 전한다
“오늘 제대로 의식이 돌아왔대
중간에 한번 깨어났다가 바로 다시 잠이 든거 같은데
어깨뼈가 탈골되고.... 왼쪽 다리 상처가 좀 심한가봐”
“어느만큼..”
“17센티나 꿰멨대.. 흉이 꽤 크게 질거 같다던데?”
“누나 전화는... 받지 마라”
“왜?”
“.........”
“알수 없는 놈이라니까..”
“누나 옆에.. 남자가 돌봐주고 있지?”
“어떤 남자 하나랑 여자가 교대로 돌봐준다는거 같아”
“.........”
“말해봐. 사고 맞아?”
“시끄러”
“너 오토바이라면 귀신이잖아
누나까지 태우고 무리해서 운전했을리도 없고
대체 어쩌다가 사고가 난거냐?”
“.........”
“난 사고라고 생각할란다
니가 달리 끔찍한 생각까지 했다는 생각은 안할래”
그를 너무나도 잘 아는 재진이다
친구하나 잘못 둔 죄로 여러모로 속앓이를 하고 있는 재진을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는 궁시렁 대면서도 강유의 불편한 손을 대신해 자잘한 것들을 챙겨주고 있다
제법 얼큰하게 끓인 김치찌개와 계란프라이를 해놓고
억지스레 강유를 식탁에 앉힌 재진은 성의없이 밥을 먹고 있는 그를 불만스레 쳐다본다
“제대로 안 처먹어?!”
“재진아..”
“왜 임마”
“난... 비뚤어졌어”
“알면”
“심하게 비뚤어지다 못해
이제 조금씩 미쳐가는거 같다..”
“........”
“가엽은 여자지? 어쩌다 내 눈에 걸려들어 가지고..”
“놔 버려..”
“........”
“그 누나를 놓아야만 니가..”
“그만하자”
“니네 아버지 모르냐? 죽었다 깨나도 누나 받아주지 않을걸?
진짜 힘든건 니가 아니라 그 누나 라는걸 왜 몰라”
모르는게 아니다
알면서도 그녀를 붙잡고 있는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그녀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했으면서도
그는 지금 혜연의 병실에 와있는게 틀림없는 민혁이 그녀를 돌보느라
만지고 눈에 담을걸 생각하면 피가 끓어오른다
그걸 보면 그는 또 사고가 끊기듯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녀를 마주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의 마음이 답답하게 죄어온다
“제대로 병신을 만들어주랴?”
오피스텔로 찾아온 부친이 꿈쩍도 안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그에게 내뱉은 말이다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대며 부친을 매섭게 쳐다본다
“그깟 여자하나 병신 만드는건 일도 아니지..”
“.......”
“사고로 위장해서 팔다리를 아예 못쓰게 만들거나
그 여자 주변 사람들을 모두 망가뜨려 버리는 방법도 있어”
“........”
“더 말해주랴? 죽지 않을 만큼만 육체적 고통을 줄수도 있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약물중독이 되게 만들수도있다
데리고 숨어버린다는 어리석은 생각 따위는 하지 말아라
돈 써서 사람 풀면 국내가 아니라 해외로 뜬다 해도 찾아내”
“엄마가...”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살한거 알아요?”
부친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조차 없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강유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려한다
잠시동안 말없이 그를 응시하던 부친은 마치 뱉어내듯 말을 한다
“어떻게 알은 게냐”
“하.. 아버지도 알고 있었나보네요”
“.........”
“알고 있었던 겁니까?”
“난 짐작일 뿐이었지만 너한테는
무언가 남기기라도 한 모양이구나”
“왜 자살했는지도 알아요?”
“내 탓이라는 게야?”
“아버지는 사람을 숨막히게 해요”
“네 형제들은 아무도 불만없어”
“아버지랑 똑같은 녀석들이니까요”
“.........”
“난 아무래도 엄마 피만 받았나 봅니다”
“말 돌리지 말아라. 그 계집애 어떻게 할게냐”
“죽어도 허락 못합니까?”
“못한다”
“그 여자랑 같이 죽어버린대도 말입니까?”
느닷없이 손을 휘두르는 부친에게 세차게 뺨을 맞은 강유는
담담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려 부친을 보았다
노기를 띈 부친의 손이 다시 강유의 뺨을 후려친다
“더는 안맞습니다. 손 올리지 말아요”
“동의하더냐?”
“뭐를요”
“그 계집도 같이 죽겠다고 하더냐?!”
“.........”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타입이던데
네놈하고 같이 죽겠다고 동의하더냐 말이다!”
“알게 뭡니까..”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해
결혼하고 은밀히 만나라 하지 않았느냐
죽어버리면 다 소용없는걸 모르는건 아니겠지”
부친은 이제 회유책을 쓰며 강유를 달래고 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의 부친은 강하고 무자비하게 그녀를 거부하고 있다
부친이 저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결코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말을 달리하는 법이 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아무 의미도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내가 아까 한말 그냥 지껄인 말이 아니다
니가 진짜 그 여자를 생각한다면 더 깊이 생각해봐
그래도 계속 만나겠다면 제일 먼저 그 계집의
주변 사람들부터 제대로 망가뜨려 주마
너 때문에 그 계집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치는데도
계속 네놈을 붙들고 있을지 어디 한번 해보자”
할말을 다 했다는 듯 방문 앞으로 가는 부친을 그가 낮게 불렀다
방문 손잡이를 잡고 그를 보는 부친의 인간미 없는 얼굴이 보기 싫어
혜연이 선물해준 고릴라 인형에게로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는 강유이다
“시간을 좀 줘요”
“뭐를”
“정혜연.. 다시 생각해볼께요”
그가 말하는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부친을 외면하고 있는
강유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부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린다
“정리라는건 빠를수록 좋은게다”
부친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 쇼파에 있던 재진이 벌떡 일어선다
현관 쪽으로 걸음을 걷던 부친이 우뚝 멈추어 서더니 강유를 돌아본다
“오피스텔 처분할테니 집으로 들어올 준비해라”
부친이 나가고 난뒤 그는 재진을 돌려보냈다
온갖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재진이 나가고 난후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들어앉아 그녀를 생각했다
지독히 냉정하고 고집스런 부친은 그가 했던 말대로
그녀의 주변을 망치고 그녀를 망치는 한이 있어도 결코 혜연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소유할수 없다면.. 오토바이 사고를 낼때 그대로 죽어버릴걸 그랬다
그녀를 소유할수 없다면.... 어떻게든 함께 죽어버릴걸 그랬다
자신의 머릿속을 휘집고 다니는 그 생각에 그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가 혜연을 데리고 사고를 낸지 5일째이다
그동안 그는 지겨울 정도로 생각을 거듭했음에도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저녁에 오피스텔로 강유를 찾아온 재진은 그의 눈치를 보듯 말을 꺼낸다
“이슬이 말야..”
“........”
“니가 그렇게 험하게 굴었는데도
아직도 너 좋아하는거 같더라..”
“........”
“솔직히 나라면 상종도 하기 싫을 것 같은데
너 보고 싶다고 전해달라는거 있지”
“재밌네..”
“어?”
“재밌어.. 그 기집애도 나만큼이나 미쳐가나보다”
재진이 쇼파에 누워 영화 한편을 다 보지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고난 후에도
강유는 잠들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요 며칠 그는 불면증이 생겨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다가 아침쯤에야 겨우 잠이들곤 한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또 보던 강유는 조용히 오피스텔을 나와
혜연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아갔다
선머슴 같은 그녀의 친구가 쇼파에 누워 삐져나온 다리끝을 걸치고 자고 있고
불이 꺼진 병실에는 벽에 붙어있는 희미한 조명이 혜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치고 있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조용히 얼굴만 보고 가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강유는 그녀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입맞춤을 했다
제대로 입술이 닿아버리면 그의 입맞춤은 짙은 키스가 되버리고 말 것이다
조심스레 다시 혜연의 뺨을 쓸어내릴때 그만 그녀를 깨우고 말았다
“...강유?,,”
잠이 덜깬 얼굴로 꿈인 듯 싶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혜연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를 죽일뻔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묵직하게 고통으로 내려앉는다
흉터가 남게 될거라는 다리를 보기위해 거즈를 떼어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며 외면해버렸다
그가 그녀의 몸에 남긴 흉측하기 짝이 없는 상처는
그대로 그의 심장을 가르고 들어와 더 깊은 상처를 내고 있다
더 이상 혜연을 마주하고 있으면 죄책감에 그녀 앞에서 자해라도 하고 싶어질 것 같아
그는 그녀의 부름에 대답도 없이 그대로 도망치듯 병실을 나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