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제 6 장 : 늪. 그리고...
#... 1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서문강유와의 통화 후
민혁은 시동을 걸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서자마자 쇼파에 털푸덕 앉아
심난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그에게서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온다
“음악이라도 들어?.... 말자.. 다 귀찮다..”
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금 혜연을 생각했다
박윤정의 깜찍한 발상으로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때의 혜연은
지금처럼 어둡고 지친 모습은 아니었다
민혁의 말을 늘 재치있게 받아치며 무방비하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눈썹을 찌푸리며 언짢은 표정도 서슴없이 표현하는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민혁은 보일러를 온수로 돌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적당히 뜨거운 물로 한참동안 샤워를 하고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 하다
쇼파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에서 부재중 전화의 신호음이 들린다
쇼파에 깊이 들어앉으며 액정에 뜬 부재중 전화 표시가
4통이나 찍혀있는걸 확인할 때 서문강유의 핸드폰 번호가 뜨며 벨이 울렸다
“예..”
<서문강유씨 라고 아세요?>
전화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서문강유가 아니라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민혁은 늘어져있던 자세를 바로 하며 곧바로 대답했다
“예. 무슨 일..”
핸드폰 액정이 깨져서 무작정 재발신한게 이 번호거든요>
“오토바이 사고요?!”
“응급실로 와주세요. 의식이 없어서
보호자가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몇시간전 통화한 사람이 의식이 없을 정도로 다쳤다는 거에
민혁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많이 다쳤습니까?”
<별로 많이 다친건 아닌듯한데
자세한건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지금 가겠습니다”
민혁은 혜연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일단 그의 상태를 보고 전화를 하자 마음먹었다
병원에 도착한 민혁이 응급실로 들어가 두리번거리고 있을때
구둣발 소리를 울리며 뛰어 들어오는 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어! 유정씨?”
“어..”
민혁과 유정은 지금 사고를 목격하고 구급차를 불러 함께 왔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20대 후반쯤의 남자는 뭔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쉼 없이 말을 한다
“오토바이가 갑자기 속도를 확 줄여서 가니까 뒤에서 짜증 나잖아요
재낄까 말까 하다가 1차선으로 재끼면서 오토바이를 보니까!
남자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거에요”
“예?”
“그러니까! 뒤에 탄 여자 손이 땡겨져서
운전하는 남자 손이랑 포개져있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남자가 여자 손을 잡고 자기눈을 가리고 있더라는 말이죠!
내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속도를 팍 줄이고 보는데
순식간에 오토바이가 기울어지면서 미끄러지더군요”
“말도 안돼..”
유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오고 있다
민혁은 걱정스레 유정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여자가 먼저 오토바이에서 몸을 확 웅크리고 떨어지는데!
그대로 끌려가듯 조금 가더니 꿈쩍도 안하구요
남자가 떨어지면서 오토바이는 난간대에 박혀 버리더라구요
잽싸게 2차선으로 들어가서 차를 멈췄어요
바로 눈앞에서 오토바이 사고 나는거는 처음 보거든요!”
마치 그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기라도 하는 듯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유정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근데 오토바이 옆쪽에 뻗어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거에요”
“...........”
“이마 옆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 도로 복판에 누워있는
여자 쪽으로 걸어오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버리는데... 어휴...”
“여자는 중간에 일어나거나 하지 않았어요?”
“여자는 떨어지면서 바로 정신을 잃은거 같던데요
거기가 차가 많이 다니는 데가 아니고
내가 내차로 막아놔서 그렇지.. 그대로 뒀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한거 있죠
곧바로 119 불렀는데 걱정 되서 따라온거에요”
의협심이 강해보이는 남자는 걱정스런 말을 조금 더 한후 돌아갔다
그리고 상당히 쇼크를 받은 듯한 유정을 민혁이 토닥이고 있을때
유정이 어렵게 연결해서 연락한 서문강유의 부친이 왔다
조금전 이야기하던 유정의 말대로 서문강유의 부친은 이코노미 월간지에서
가끔씩 사진을 본 기억이 있는 진영그룹의 회장이다
서문회장은 응급실로 들어서 담당의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정을 옆에 둔 민혁과도 잠깐 이야기를 나눈 서문회장은
혜연의 병실만을 1인실로 잡아주고 서문강유를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 버렸다
눈을 떠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한 혜연이
눈꺼풀에 힘을 주었지만 쉽사리 눈이 떠지지를 않는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눈을 뜨고도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옆에서 벌떡 일어서는 민혁의 모습이 보인다
병원이 틀림없는 병실 내부를 보며
혜연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괜찮아?”
“...아파요..”
“당연히 아프겠지”
혜연은 말라있는 입술을 혀끝으로 훑어냈다
그녀의 몸 어딘가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오고 있다
“난 도대체.. 어디를 다친거에요?”
민혁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혜연을 내려다보다가
작은 수건에 물을 적셔오더니 그녀의 입술에 대어준다
“어깨뼈 탈골. 그리고... 왼쪽 다리..
뒷머리도 부딪힌거 같은데 MRI 결과는
다행히 출혈이 있거나 한데는 없대”
“다리?”
“길게 찢어져서 아주 많이 꿰맸어
오토바이 어딘가에 찢겼던가봐”
“그럼 지금 이렇게 아픈게 다리에요?”
“무통주사 들어가고 있을텐데.. 많이 아파?”
“모르겠어요.. 쑤시고 뻐근해요”
“오토바이 사고치고 그 정도면 기적이야
내상하나 없다고 하는게 기적이라구
그나마 뒤따르던 차가 사고 나는거 보고
곧바로 119 불러준 것도 다행이고”
바이크의 속도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넘어간 이유일 것이다
처음처럼 그렇게 높은 속도일때 전복된 거라면 둘다 살아남지 못했을지 모른다
강유의 두툼한 점퍼까지 입고 있었는데 어깨뼈까지
빠져버렸다니 강유의 상태가 걱정스러워진다
“강유는요?”
“........”
“얼만큼 다친거에요?”
“이마가 좀 긁힌거하고
팔목 뼈 골절 말고는 없는거 같아”
고개를 숙여 들여다본 병원복 상의 안쪽으로
그녀의 가슴부터 왼쪽 어깨를 감싸 넓게 감겨있는 붕대가 보인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난건지 모르겠지만 살아있다는걸 확인시키려는 듯
그녀는 심한 공복감 때문에 속이 쓰려오며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픈걸로 자신이 살아있는걸 확인한다는 거에 시니컬한 웃음이 나려한다
“어디 불편한데 없어?”
“배고파요”
“이틀이나 굶었으니 배가 고프겠지”
“내가 이틀이나 잤어요?”
“중간에 한번 눈 떴다가는 다시 잠들더군”
중간에 깨어났던건 그녀의 기억에 없다
사고가 난지 이틀이나 지났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강유는 만났어요?”
“의식 없을때 얼굴만 봤어”
“강유도 의식이 없었어요?”
“그래”
“지금은 깨어났어요?”
“서문강유 부친이 우리한테 혜연씨 부탁하면서
그 친구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
“혜연씨는 지갑도 없이 핸드폰 뿐이라 병원에서 시골집으로
전화해도 안받으니까 곧바로 유정씨한테 전화했던가봐..
계속 같이 있다가 오늘아침에 여기서 출근 했어”
그녀의 저장번호 1번은 강유이다
0번 저장이 안되는 그녀의 핸드폰에 강유는
시골집과 유정을 한칸씩 밀어내고 자신의 번호를 1번에 저장시키는
수고스런 작업을 했었더랬다
어쨌든 모친이 아니라 유정과 연결된건 너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친이 왔었다구요?”
“경제지에서 본적이 있는 얼굴이더군”
“어디로 옮긴다는 말... 하던가요?”
“병원 구급차로 옮겼으니까
물어보면 알아볼수 있을거야”
“....목말라요..”
“기다려봐.. 깨어났다는 얘기도 하고
물 줘도 되나 물어보고 올테니까”
병실에서 나가는 민혁을 보며 혜연은 금새 피곤해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두손을 붙잡고 자신의 눈을 가려버리던 강유가 다시 생각난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데리고 죽으려 했던것일까..
그렇다면 속도는 왜 떨어뜨렸던 것일까..
금새 돌아오는 민혁의 손에는 물이 절반정도 담겨있는 종이컵이 들려있다
“조금씩 천천히 마시래”
“침대 좀 조금만 세워줄래요?”
“어깨 때문에 그래도 되나 모르겠네..
기다려봐. 얼른 물어보고 올테니까”
민혁은 종이컵을 침대 옆 수납장위에 놓더니 빠르게 병실을
나갔다 와서 침대 발치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매우 천천히 돌려주었다
“한번 빠진 어깨뼈는 무리하면 쉽게 또 빠진다니까
되도록이면 왼쪽 어깨는 쓰지말아
일단 지금은 물 먹을 정도만 세워줄께”
“..........”
“물은 천천히 씹듯이 마시라는데
내가 먹여준다고 하면 너무 오바인거 같고
조심해서 천천히 마셔봐”
민혁이 말을 마치자마자 간호사가 들어와 그녀의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고
몇가지를 물어보며 차트에 적고는 주의사항을 전달한후 나간다
“내 핸드폰 어디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어”
“쭉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
“강유한테... 전화 안왔어요?”
“아직까지는 그 친구한테 전화온거 없어”
민혁은 혜연에게 종이컵을 건네주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다
혜연은 조심스레 물을 입에 머금고 있다가 삼키었다
물이 조금 들어가자 공복감이 더해진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돌리며 병실을 둘러보았다
한칸짜리 옷장과 자그마한 냉장고가 있고 벽에는 작은 TV도 걸려있다
침대와 같은 방향의 기다란 쇼파가 벽에 붙어있고 문 옆의 작은 세면대와
개인화장실까지 있는 1인실은 넓지는 않지만 갖출건 다 갖추고 있는 듯 하다
“유정씨? 혜연씨 깨났어요 ...... 아프고 배고프대..
... 10년? ..... 너무 박한거 아닌가? ... 기다려요..”
민혁이 조그맣게 웃으며 그녀에게 핸드폰을 내밀고 있다
혜연이 핸드폰을 받아들어
말소리를 내자마자 유정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프고 배고파?! 그럼 그렇게 다쳐놓고.
등 따시고 배 부를줄 알었냐?>
“놀랐지..”
<그래! 너 땜에 수명이 10년은 단축된거 같다고 하니까
민혁씨가 너무 박한거 아니냔다.. 10년이 얼마친데..>
“바쁠텐데 일해”
<회사 끝나는 대로 갈테니까 그때까지는
필요한거 있으면 민혁씨 부려먹어>
유정의 걸걸한 목소리는 여전하다
혜연에게로 손을 내밀어 핸드폰을 다시 건네받은 민혁은
침대 옆 수납장 위에 가만히 내려놓는다
“등 따시고 배부를줄 알았냐고 막 화내지?”
“그러네요”
“선머슴 같은줄만 알았는데
유정씨가 보기보다 눈물이 많더군”
“울었어요?”
“사고 나던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소리없이 울더라구요”
“유정이도 잘 안우는 편인데..”
“혜연씨 다리 상처 때문에..”
“대체 얼마나 다쳤기에 그래요?”
“나중에 보고 놀라지 말아.. 요즘은 성형이 발달해서
감쪽같이 예쁜 다리로 수술하면 되니까”
“그렇게 흉해요?”
“조금..”
“카페는 어떻게 됐어요?”
“어제 오전에 전화가 왔기에 사고 얘기했어
여주인이 많이 걱정하더군...”
“갑자기 사람 없어서 사장님 혼자 고생하게 생겼네요”
“카페 걱정말고 몸 조심이나 시키라는 말도 했습니다”
민혁은 그녀의 식사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아보고 오겠다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혜연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채로 고개를 돌려 수납장위에 놓여진 핸드폰을 보았다
강유에게서는 아직까지 전화가 없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한 이유인지 일부러 안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강유가 정말로 죽겠다는 마음 이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지만
그녀는 강유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의 상처들이 가엽서서 안아주고 싶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게 아님에도 빈집 같아서 채워주고 싶었다
마음에 가진게 없이 가난해 보여서 보태주고 싶고
조마조마 위태해 보이는 지독한 사랑을 하는 그를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 감정들은 사랑 이라기보다는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 되었다는걸 알겠다
처음에는 분명 사랑의 감정이 더 컸겠지만 그의 소유욕과 집착에 휘둘리면서
그녀를 밀어붙이는 그의 사랑을 받아주는 감정은 점점 연민의 감정이 커진것이다
“오늘은 죽으로 나올거라는데?
5시 30분 이라니까 2시간이나 남았네”
“민혁씨..”
“배고파? 근처에서 죽 사와서 먼저 먹을까?”
“강유... 어느 병원으로 갔는지 알아봐줄래요?”
잠시 대답 없이 혜연을 보는 민혁은 무언가 많이 복잡한 표정이다
그런 민혁을 보는 그녀의 마음 또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알았어.. 알아보기만 하면 돼?”
“예.. 부탁할게요”
민혁이 나가고 난뒤 혜연은 왼쪽 어깨를 살짝 움직여 보았다
저릿한 통증이 깊이 파고들어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상태로 왼쪽다리를 들어보려 했지만
묵직한 통증 때문에 그냥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한참후에 돌아온 민혁의 손에는 작은 오렌지주스가 들어있는 박스가 들려있다
“간호사한테 물어보니까 오렌지주스 정도는 먹어도 된대”
민혁은 박스를 열고 냉장고에 주스들을 집어 넣은뒤
병뚜껑을 돌려 혜연에게 한개를 건네주었다
“그 친구는 S병원으로 옮겨갔대”
“..........”
“왜 안마시고 들고만 있어..”
혜연은 오렌지주스를 조금 마시고 민혁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얼마후 저녁으로 들어온 죽을 먹은 그녀는
유정이 올때까지 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어 한참이나 잤다
“유정씨. 내일 모레는 내가 학교에 가야하는데”
“내가 월차 내볼께요”
“그렇게 해봐요. 하루만 간병인을 쓰기도 좀 그렇고”
“혼자있어도 돼”
혜연의 말에 두 사람이 같이 혜연을 돌아다보고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그들끼리만 대화를 하고 있다
“밤에는 계속 내가 있을거니까 걱정말구요
민혁씨는 오전 중에 와서 내가 퇴근할때 까지만 있어줘요”
“개학하기 전에 혜연씨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때까지는 시간 괜찮은거죠?
선생님도 괜찮은 직업이란 말야”
“이번엔 연수가 없어서 그나마 시간이 많은 거지
보통은 방학 내내 연수받는 경우가 많아요”
“혼자 있어도 된다니까”
“애가 비실거려 보여도 엄청 딴딴해요
그전에는 많이 괜찮아질 거에요”
“뭐 그렇게 비실거려 보이지도 않는다구”
“혼자 있어도..”
“넌 가만히 쫌 있어”
“혜연씨는 가만 좀 있어”
두 사람이 동시에 혜연을 보며 같은 말을 해버리는게 어이없어
혜연은 그냥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민혁이 돌아간 후에 혜연의 양치와 세수를 도와주고 있는 유정은
그녀에게 잔소리에 가까운 투덜거림을 쏟아내고 있다
“니가 지금 오토바이 폭주 뛸 나이냐?”
“폭주는 무슨..”
“그 머스마는 운전도 똑바로 못하면서
왜 그렇게 위험한 장난감을 갖고 놀아?”
“........”
“전화 통화는 했어?”
“아니”
“너 이렇게 만들어놓고 전화도 없어?”
“의식... 아직 안돌아온거 아닐까?
의식 없는 채로 옮겼다고 했지?”
“그래. 그 꼰대아저씨 인상 벅벅 쓰면서 하는말이 뭐라는지 아냐?
‘병원비는 우리 쪽에 청구토록 얘기해 두었소
중환자실로 옮길 정도는 아니라기에
1인실 잡아놨으니까 병실로 옮기도록 해요’
말투가 어찌나 밥맛을 상실케 하는지 짜증나 죽는줄 알았다”
목소리를 굵게 만들어 강유의 부친
흉내를 내며 말하는 유정의 얼굴이 잔뜩 찌푸러져 있다
혜연은 아까부터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던 핸드폰으로
강유의 번호를 꾹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전화는 꺼져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혜연은 재진의 번호를 찾아 눌렀지만 받지 않는다
혜연이 병원에 입원한지 5일째가 되고 있다
과외를 받는 학생들 집에서는 다행히 2~3주 수업을 할수없다는
그녀의 말에 크게 짜증을 내거나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강유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있고 재진은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민혁은 오전 중에 병실로 와서 보통은 쇼파에 앉아
잔뜩 가지고온 읽을거리들을 보며 그녀를 돌보고 있다
뼈가 탈골되거나 부러진데 좋다는 홍화씨를 구해온 민혁이
환으로 된 홍화씨와 물을 그녀에게 건넨다
“홍화씨 먹을 시간입니다”
혜연은 민혁이 건네는 환을 물과 함께 삼키고 그를 보았다
더 없이 자상하게 그녀를 챙기고 있는 민혁에게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이제 혼자 움직일만 해요”
“화장실 한번 갔다오면 진땀을 흘리면서 말이지”
“..........”
“나중에 보답할 날이 올지 모르니까
너무 부담스레 생각지 말아”
“민혁씨..”
“음?”
“부탁하나만 할께요”
“뭐든 오케이”
“강유.. 어떤 상태인지 좀 알아봐줄래요?
연락이 안되요. 친한 친구도 전화를 안받고..”
냉장고에서 꺼낸 귤껍질을 벗기는 민혁은 잠시 말이없다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고 귤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민혁이 혜연의 손에 귤을 건네준다
“퇴원 했어”
“예?”
“알아봤는데 혜연씨 깨어난 날 퇴원 했더라구
그쪽에서 정밀검사를 다시했나 본데
팔목 뼈 말고는 다친 데가 없으니까
간단한 깁스만 한채로 퇴원 시킨거 같아”
혜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퇴원을 했는데 지금까지 전화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는다는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알수가없다
무언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민혁이 병실 밖으로 나간다
그날 저녁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하고 병원으로 온 유정은
진땀을 흘려가며 그녀의 머리를 감겨주고 따듯한 수건으로 구석구석 몸을 닦아내 주었다
“힘들지?”
“직업으로 삼고있는 간병인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고마워 유정아”
“그 머스마는 아직도 통화 못했어?”
“응”
“죽자고 한짓이 미안..”
“뭐?”
갑자기 당황한 얼굴로 하던 말을 멈추는 유정은
혜연의 반문에 공연히 병실 여기저기를 정리하며 딴짓을 하고 있다
“무슨 뜻이야?”
“뭐가. 잘못했으면 죽게 만들뻔한게
미안한가보다는 얘기지”
유정은 화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리고 있다
무언가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지만 혜연은 머리를 감느라
지친 몸 때문인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만지고 있는 느낌에 잠에서 어설프게 깨어난
혜연의 옆으로 어둑한 병실에 서있는 강유의 모습이 보인다
벽에 붙은 스텐드 기능을 하고 있는 조명 외에 병실의 불은 꺼져있다
고개를 돌려본 쇼파에는 유정이 길게 누워 간호사에게 얻어놓은 담요를 덮고 자고 있다
혜연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강유..?”
그는 말없이 혜연의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 있더니
담요를 치우고 그녀의 다친 다리 쪽의 바지 끈을 한손으로 풀고 있다
혜연이 입은 병원복 바지 한쪽은 옆쪽이 길게 트여 몇 개의 끈으로 묶여있다
다리 상처에 얇게 붙여놓은 기다란 거즈의 반창고를 하나하나 천천히 떼어낸 강유는
상처를 치료할 때 처음 보고는 그후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는 흉한 상처를 들여다본다
무릎 옆에서부터 복숭아뼈 위쪽까지 20cm 가까이
굵다란 바늘자국이 지나는 그녀의 다리는 커다란 흉이 지게 될 것이다
“강유야..”
그녀의 상처를 본 강유는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침대 옆 벽에 붙어있는 작은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02:15를 나타내고 있고
강유는 혜연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조용히 병실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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