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 그의 사랑은 광기(狂氣)를 품고 있다
#... 8
강유는 부친과의 약속이 잡혀있는 한정식 집으로 가는 길에
대리점에 들러 쓰던 번호 그대로 핸드폰을 개통했다
넓은 부지에 자리 잡힌 한정식 집의 널따란 마당에
바이크를 세워둔 강유는 성큼 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색이 고운 개량 한복을 입은 여자가
나무 결이 살아있는 카운터에 서서 공손한 인사를 하며 강유를 맞는다
강실장이 예약을 해놓았다는 ‘난초룸’ 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와 앉는다
“마당에 오토바이 네꺼냐?”
“예”
“위험하게 계속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게야?”
“천천히 다니고 있어요”
“배고프구나. 일단 먹자”
조심스런 움직임의 여종업원이 내려놓은 음식을 조금씩 먹고 있는 부친은
맞은편에 앉아 묵묵히 먹기만 하고 있는 강유를 주시하고 있다
“나한테 할말 없냐?”
“하실 말씀은 아버지가 있는거 아니에요?”
“네가 나한테 할말이 있나 묻고 있잖냐”
“아버지 말씀 먼저 듣구요”
“섣불리 먼저 말을 떼지 않는건 잘하는 거다
상대방이 쥐고 있는 패를 알기 전에
성급히 내가 가진 패를 내보일 필요는 없지”
“........”
“올 후반기에 유학준비 할테니 그리 알아라”
“안갑니다”
“왜”
“석, 박사 다 여기서 마칠거에요
유학갈 생각 전혀 없으니 더 이상 권유하지 마세요”
“그 아가씨 때문인게냐?”
“뭐가요”
“둘이 다시 만나는거 알고 있다”
“..........”
“대체 생각이 있는게냐?”
“..........”
“도무지 입에 담기도 창피스런 여자를
계속 만나서 어쩌겠다는 게야”
“그만 하시죠”
“유학가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정리해라”
“유학은 안간다 했잖아요”
“그만하지 못해?!”
부친의 음성이 한 옥타브 올라가며 눈에 노기를 띄고 있는걸 보며
강유는 부글거리고 끓어오르려는 마음을 누르느라 애쓰고 있다
여종업원이 조용히 들어와 음식을 내려놓으며
룸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게 느껴지는 듯 조심스레 일어선다
“더 들이지 말아요. 아가씨”
“예?”
“얘기 끊기니까 음식 더 들이지 말라는 말이요”
“예.. 알겠습니다”
강유는 부친의 눈을 마주하며 감정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담담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꼭 가야한다면 같이 갈거에요”
“미친소리.”
“혼자는 안갑니다”
“미련한 놈. 생각보다 더 심각하구나
그렇게 앞가림을 못하겠는 게야?”
“..........”
“네놈이 그렇게 나오면 내가 그 아가씨를 그냥 둘것 같으냐?”
“건들기만 해보세요”
“메야?!”
“정혜연 건들면. 저도 아버지가 결코
알고 싶지 않을 사실을 말할 거에요”
부친은 강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눈 속에 답이 있는 듯
그의 눈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다
“아버지가 평생 죄책감 속에 살게 될 사실을 말할거에요”
“제대로 말해봐”
“지금은 안합니다”
“그래서. 대체 네 생각이 무에야
그 아가씨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게야?”
“그래요. 군대도 결혼 하고 갈겁니다”
“허..”
고개를 돌리며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 소리를 낸 부친은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들어 육회를 조금 집어 먹으며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가 없는 부친의 모습은 이미 익숙하다
강유도 다시 젓가락을 집으려 할때 부친의 음성이 들린다
“그 아가씨는 너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더구나”
강유는 갑자기 누군가에게 머리통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부친의 말뜻은 이미 혜연을 만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난겁니까?”
“두번이나 만났지”
“........”
“다시 널 받아주는 일 없을 거라더니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 찾아 와서는 그러더구나
네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만날테니 허락해달라고”
“무슨 말을 한거에요”
“너 유학가기 전에 정리하라고 했더니
그 아가씨는 제대로 알아듣더구나”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잖아요.”
“맹랑한 아가씨이긴 해도 터무니없이
우리 집안에 발들이려는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지”
“상처 주는 말 했어요?”
“사실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연상에. 이혼녀에. 그것도 모자라 불임.
온갖 궁상은 다 안고 있는 여자를...”
“그만 하세요!”
“큰소리 내지마라. 내가 아니라 그 아가씨가 먼저 꺼낸 말이야
너와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분명히 말하더구나
강유 넌 유학중에 김한식 국회의원 막내와 결혼시킬 생각이다
결혼한 뒤에 한국에 들어와서 은밀히 만나는건 관여안하마”
“미쳤군요”
“버르장머리 없이 어디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강유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보고 있던 부친이
젓가락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는다
“앉아.”
“알아요?”
“앉으라고 했다!”
“엄마를 죽인건 아버지에요”
“또 그 말을 하는게냐”
“아니요. 내가 말하고 싶은건.
엄마를 그랬던 것처럼 나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지 말라는 겁니다. 먼저 나갈께요”
한정식 집 마당에 커다란 엔진소리를 남기며 그곳을 나온 강유는
혜연이 부친에게 했다는 말 때문에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와 다시 만난후 카페로 갔을때 어딘가로 찾아간다는 통화를 하던 그녀의 모습과
그에게 말도 없이 카페를 일찍 끝내던 날
어설픈 핑계를 대던게 부친을 만난 이유였던가 보다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대했다는 생각을 하자 배신감을 넘어선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녀는 여전히 언제든 그를 놓을수 있는 여자인 것이다
또다시 그녀에게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속도를 높여 혜연이 있는 카페로 빠르게 질주했다
카페 쪽으로 좌회전 하기전 사거리에서 신호가 걸렸을때
뒷주머니에서 진동을 타고 있는 핸드폰의 울림이 느껴졌다
저장되어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핸드폰에 뜨는 번호는
낯설지만 무언가 기억에 남아있는 번호이다
카페에서 나온 민혁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차로 걸어가며
다시 한번 서문강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권민혁 입니다”
<........>
“몇번 전화 했는데 받지 않더군요”
<왜요>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
“서문강유씨”
<그쪽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할말 있으면 전화로 해요>
“좋아요. 지금 통화 할수 있어요?”
<내가 금방 다시 하죠>
다시 전화를 한다는 말로 전화가 끊긴 그에게서 금새 전화가 온다
자신의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간 민혁은 차에 올라타 전화를 받았다
“금방 했네요?”
<할말 해요>
“.........”
서문강유에게 하고 싶던 말이 많았던 민혁임에도
그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순서가 잡히지 않는다
권민혁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신호가 바뀐다
강유는 바이크를 움직여 좌회전을 한후 보도 옆쪽에 멈추었다
혜연을 먼저 만나야 할지 통화를 먼저해야 할지
생각하던 강유는 민혁에게 왔던 번호를 다시 눌렀다
“할말 해요”
권민혁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할말이 있다더니 말이 없는 그에게 강유는 짜증스런 마음이 들었다
“할말 없으면 전화 끊을게요”
<어제밤 혜연씨와 통화하는데 목소리가 안좋더군요
혹시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이번에는 강유가 아무 말도 할수없었다
어제 경찰서에서 합의서를 작성하고 있을때
울려대는 핸드폰을 가지고 나가던 혜연이 떠오른다
순간적으로 화가 뻗쳐올랐지만 그는 마음을 억누르며 내뱉듯이
그에게 반드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 여자에요”
<........>
“정혜연. 내 여자에요
그쪽이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고 통화하는거
난 절대 용납도. 용서도 못하겠어요”
<어째서 가벼운 마음이라고 생각하죠?>
“진지한 마음이라면 그쪽이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테니까요”
<협박이라도 하는 걸로 들리는 군요>
“협박 맞아요”
<..........>
“자꾸 내 여자를 뺏으려 하면..
내가 당신을 죽일지도 몰라요”
서슴없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내뱉는
강유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하다
민혁에게서 작게 한숨 소리가 비어져 나오는 것 같다
<서문강유씨 사랑은 여전히 자신뿐이군요>
민혁의 담담한 말 뒤에 이어질 대화가 짐작되어진다
강유의 눈빛이 달라지고 얼굴이 굳어져 버린다
<강유씨의 모든걸 쏟아 붓듯이 사랑을 한다는거 알아요>
“.........”
<그런데 강유씨의 사랑에는
제일 중요한게 빠진거 같아요>
“빠진거 없어요”
<정혜연>
“됐어요.”
<강유씨의 그런 감정이 혜연씨를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됐다고 했잖아!”
바이크 위에 앉은채 핸드폰에 대고 고함을 치는 그를
길 가던 사람 몇이 흘끔거리고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 줄거야”
<.........>
“행복하게 해줄거란 말야”
<혜연씨 주변 남자들을 무조건 적으로 돌리고
되는대로 폭력을 써가면서 말입니까?>
“당신이 상관할바 아냐”
<상관있어요. 간절히 혜연씨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니까>
“날 화나게 하지 말아요”
<어린나이에 힘든 일을 겪은 여자에요
강유씨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도 시골에서는
혜연씨의 박복함을 수다삼아 이야기 하곤해요
어서 빨리 보란 듯 행복해져서 마을 사람들이
혜연씨를 불쌍한 눈으로 보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생각 따위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
분명한건 정혜연은 내 여자이고.
당신이 계속 주변에 기웃거리면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할수도 있다는거.
더 심하면 당신 때문에 정혜연까지 내가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거.”
<.........>
“끊습니다”
민혁이 주고간 퀘사딜라를 한 조각 더 먹고 있던 중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전에 서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그 커플은
가끔씩 ‘아테나’에 와서 항상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곤 한다
언제 봐도 사이가 좋아 보이는 커플에게 음료와 차를 내고 돌아온 혜연이
카운터 안쪽에서 퀘사딜라 포장 박스들을 치우고 있을때 여주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여주인과 함께 온것처럼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강유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강유야..”
“나와”
“뭐?”
“오늘 그만 일 끝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거야”
“할말 있어”
“원룸으로 가있어. 일 끝나는 대로 갈테니까”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이 무언가
화를 잔뜩 품은 것처럼 보이고 있다
그들을 쳐다보던 여주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려 할때
강유의 뱉어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솔직히 말해봐. 권민혁 좋아해?”
“뭐?”
“권민혁에 대한 누나의 감정 말야”
“왜 또 이래”
“대답해. 누나는 권민혁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거야”
“아무 생각 안해”
“그게 끝이야?”
“좋은 사람이야.. 자꾸 나쁘게만 보고
남자로서 나랑 연결시키지 말았으면 해”
“누나 나랑 있어서 불행해?”
“쓸데없는 소리”
“똑바로 대답해!!”
언성이 높아지는 강유를 보며 혜연은 여주인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카페 앞으로 그를 데리고 나갔다
“아무리 단기라지만 저기 내 직장이야
내 입장도 생각해야지 왜 그렇게..”
“내가 누나 불행하게 하고 있냐 말야!!”
어째서 행복하냐고 묻는게 아니라 불행하냐고 묻는지 모르겠다
그녀 앞에 바짝 마주 서있는 강유는 혜연의 팔을 쥐고
카페 앞에 세워놓은 그의 바이크 쪽으로 가려한다
“놔봐.. 아직 일 안끝났어”
“저까짓 카페 그만둬!”
“서문강유. 그만하지 않으면..”
“왜!? 또 버리려구? 우리 아버지한테 무슨 말했어!
적당히 받아주다가 내가 결혼하기 전에 버린댔어?!!”
눈빛이 흉폭해지며 혜연의 팔을 잡아 쥔 강유는
큰 발짝을 떼어 바이크 앞으로 가고 있다
자신의 바이크 앞에서 혜연을 번쩍 들어 뒷자리에 올려놓고
빠르게 앞자리에 오른 강유는 꽂혀있던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한가한 낮 시간대의 뒷길에는 그리 많은 차량이 다니지 않지만
바이크가 차량의 뒤에 바짝 붙거나 중앙선을 비껴 갈때마다
강유의 허리를 잡은 혜연은 무서움 때문에 팔에 더욱 힘을 준다
“세워봐 강유야!”
“........”
“서문강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거리의 신호에서 걸렸을때
다시 한번 큰소리로 강유를 불렀지만 그는 고집스레 뒷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큰 사거리를 지나자 강유의 바이크는 작은 신호들은
무시해 버리며 바이크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의 허리를 움켜쥔 팔이 저려올 만큼 힘을 주고 눈을 꽉 감고있는 혜연은
강유의 바이크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너무 무서워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강유야!! 그만 내려줘!!!”
그녀를 태운 바이크는 외곽도로 쪽으로 빠지는 듯 하더니
갑자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가끔씩 코너를 돌때마다 순식간에 떨어져 버릴까봐
그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있는대로 힘을 주게된다
겨울 찬바람이 조금도 춥게 느껴지지 않을만큼
그녀는 초긴장 상태로 강유의 허리만을 꽉 움켜쥐고 있다
기다란 직선 코스를 곧게 움직이던 바이크는
조금씩 속도를 떨어뜨리고 갓길로 들어서 정지했다
먼저 바이크에서 내린 강유가 혜연을 들어 내려놓는다
갓길 난간대에 붙어선 혜연에게 강유가 자신의 점퍼를 벗어 그녀에게 입혀준다
“돌아가자 강유야”
“정말 그러려고 했어?”
“뭐를”
“우리 아버지한테 말한 것처럼 정말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만나겠다 생각했던 거야?”
“..........”
“그때까지 어르고 달래가며 받아주다가
다른 여자한테 나 떠넘기고 끝내려 했던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난간대 앞에 나란히 서서 도로 쪽을 등 돌리고 있는 그들의 뒤로
가끔씩 빠른 바람소리를 내며 차들이 지나쳐 가고 있다
“내가 그렇게 아파했던걸 알면서
또 나를 그런 식으로 버리려 했던거야?”
“쏟아내게 하고 싶었어”
“.........”
“나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모두 쏟아내고
자유로워지게 하고 싶었어
나한테서도... 강유 스스로의 집착에서도..”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했어?”
“.........”
“나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한거야?”
“힘들어..”
“내가?”
“네 주변이”
“.........”
“상처받는 거라면 지겨울 만큼 받아왔어
더 큰 상처를 감당해 내기엔 내가 너무 나약해
이제 싫어.. 내 결함들을 싸고 있는 막은 너무 얇아서
누구든 자꾸 그것들을 건드리며 상처받으면
결국 터져서 곪아버리고 말거야”
“내가 그렇게 못미더워?”
“네가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그건 강유가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야”
“다 끊어버리면 돼?!”
“뭐?”
“내가 혈연을 모두 끊어버리고
어디든 다른 곳으로 가자면 갈래?”
“못해”
“왜.”
“우리 엄마는?! 내가 박복한게 전부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우리엄마는?
그 뒷감당은 모두 엄마가 하라는 거야?”
“같이 숨어버리면 돼”
“거기서 태어나서 평생을 그 시골에서 살아왔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로 데려다 놓으면
외로움 때문에 일찍 돌아가실거야”
“.........”
“솔직히 나도 너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너를 점점 더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도
망가뜨리고 있는 것도 나라는 생각이 들어”
“..........”
“모르겠어 정말.. 어떡하면 좋을지”
“...........”
“그만 돌아가자”
“죽자..”
난간대에 팔을 걸쳐 놓은채 초점없이 앞을 보고 있는 강유가
담담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그를 향한다
“같이 죽자 그럼”
“어리석은 소리 하지마”
“이대로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는건 끔찍해”
“..........”
“난 죽었다 깨나도 누나를 놓을순 없을거야”
“강유야..”
“그렇다고 누나만 남겨두고 죽고 싶지 않아”
“..........”
“죽자...”
“..........”
“같이 죽어버리자”
혜연의 심장이 또 다시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
그가 이렇게 무서운 말까지 내뱉게 만든게 결국은 그녀 자신이라는 생각이든다
강유는 매우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린다
“내가 눈을 뜰 때까지 아무 말도 없으면
누나도 동의 하는걸로 생각할게
속으로 열까지만 셀테니까 싫으면 그 안에 대답해”
여전히 앞쪽으로만 시선을 던지고 있던 강유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그의 긴 속눈썹이 햇빛을 받아 눈 아래에 작은 음영을 만들며 희미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가는 세찬 바람 때문인지 그의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 강유는 무표정한 얼굴로 혜연을 본다
혜연의 복잡하고 심난한 얼굴과 달리
강유의 눈동자와 얼굴은 너무나도 덤덤하고 표정이 없다
“지금은 네가 너무 감정적인거 같아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강유야”
“나중은 없어”
“..........”
“세상에서 가장 애매한 말이 나중에라고 했잖아”
“돌아가자”
“이해할 수가 없어...
어째서 바로 싫다는 말을 안하는거야?”
“넌 나를 죽이지 못해”
“같이 죽자고 한거야”
“그건 네가 나를 죽이는 거잖아”
“..........”
“그만 돌아가자”
“틀렸어..”
“뭐가”
“또 다시 누나한테 버림을 받을바엔 할 수 있어
얼마든지 누나를 데리고 죽을 수 있어”
“.........”
“나야말로 어떡하면 좋을까?
나를 갖을 생각도 없는 누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만난다는 거
지금도 같은 생각이야?”
“.........”
어떤 대답도 못하고 있는 혜연을 보는 강유의 눈빛은
표현하기 힘든 일렁임을 담고 있다
그녀의 입장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 이라는걸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다
“알았어”
강유는 알았다는 말을 하며 먼저 바이크에 올라타 혜연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등 뒤에 올라타 허리를 꼭 붙들었다
또다시 속도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바이크를 타야한다는 것에 긴장감으로 몸이 굳는다
강유는 바이크를 출발시켜 금새 속도를 높였다
“천천히 가! 무서워 강유야!!”
그의 넓은 등이 혜연의 몸을 가리고 있음에도
세찬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흩날리게 하고 있다
그녀의 말이 들린 건지 바이크의 속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그의 허리를 잡고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혜연의 손에
믿을수 없게도 강유의 두손이 감싸듯 포개진다
한손이 아니라 두손 모두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에
무엇이 어떻게 된건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녀의 두손을 꽉 감싸진 강유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강유는 혜연의 손을 잡아당겨 그의 얼굴로 가져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려 버린다
그 순간 혜연은 그가 무얼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가 혜연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게
몇초쯤이 지난건지 몇분이 지난건지 전혀 시간관념이 없지만
속도를 내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두렵던 그녀의 마음이
급작스레 아무생각이 없어져 버리고 있다
이제 곧 어딘가 부딪히거나 앞에 차라도 있으면 끔찍한 꼴을
당할 텐데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느낌 속에 결국 강유는 그녀를 삼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로 그는 만족할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날때
바이크가 코너링 할때처럼 옆으로 기울어지며 미끄러지고 있다
그녀의 왼쪽 다리가 땅바닥에 닫겠구나 생각되질 때야
혜연은 죽음이 현실로 느껴졌다
그 순간 도저히 뭐라 말할수 없을정도의 공포에 묻힌
혜연은 잔뜩 몸을 웅크린채 손을 빼내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었다